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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인에 길을 묻다? …노대통령 ‘유림’ 탐독

    선인에 길을 묻다? …노대통령 ‘유림’ 탐독

    노무현 대통령이 여름 휴가 전 최근 소설 ‘유림’을 읽었다. 이번 휴가 동안에는 김병준 교육부총리의 사의표명 파문으로 국정에서 손을 뗄 수 없었던 탓에 계획했던 책을 제대로 잡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평소에는 주로 주말 시간을 할애해 독서를 한다. 유림은 서울신문에 연재중인 최인호 소설을 책으로 엮은 것이다. 공자와 맹자를 비롯, 개혁주의자 조광조·이퇴계·이율곡의 사상과 생애 등을 통해 본 유교 역사 소설이다. 노 대통령이 집권 후반기 들어 꼬여 가는 현실 정치를 푸는 과정에서 ‘선인들과 대화’로 지혜를 구하려는 듯하다는 게 청와대 관계자의 조심스러운 전언이다. 노 대통령은 2003년 취임 이후 굵직한 국내외의 현안에 대한 생각을 책을 매개로 전달했다. 이 때문에 흔히 ‘책 속에 노 대통령의 생각이 있다.’는 말도 나온다. 노 대통령이 읽은 책의 큰 주제는 ‘역사’와 ‘혁신’으로 요약된다. 굳이 세분하면 전반기(2003∼2004년)는 경제와 혁신, 후반기(지난해 이후∼)는 혁신과 양극화다. 전반기에 읽은 ‘정부개혁의 비전과 전략’‘정부가 변하고 있다’는 책은 노 대통령이 지방분권의 필요성과 혁신 의지를 한층 다지는 계기로 작용했다.‘체인지 몬스터’와 ‘블루오션 전략’,‘괘도난마 한국경제’는 조직과 경제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꾀하는 데 적잖은 영향을 끼쳤을 법하다. 특히 ‘적이 사라진 민주주의’는 지난해 여름을 달궜던 ‘대연정’과 관계가 있다. 노 대통령의 역사적 인식을 제고시킨 책으로는 ‘정도전을 위한 변명’과 ‘칼의 노래’,‘우리의 눈으로 본 일본제국 흥망사’를 꼽을 수 있다. 노 대통령의 후반기 독서목록 중 ‘코리아, 다시 생존의 기로에 서다’는 단연 눈에 띈다. 노 대통령은 올들어 3차례나 공식석상에서 “우리나라의 미래를 위한 생존전략과 관련한 영감을 얻을 수 있는 좋은 책(2월·재외공관장 초청만찬)”이라며 일독을 권했을 정도다. 노 대통령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과 북핵 문제 등 현안에 대한 해법을 찾는 데 이 책을 참고했다는 말도 나오고 있다. 노 대통령은 역사에 관심이 많다.“‘유림’이나 신영복 교수의 저서 ‘강의’ 내용과 같이 미래로 가는 길을 오래된 과거에서 찾는 것 같다. 후반기 국정의 안정적 ‘항해’를 위한 준비로 해석된다. 박홍기기자 hkpark@seoul.co.kr
  • [Book Review] 이땅 풍류주인들 전기적 초상

    16세기 조선의 문인 농암 이현보의 집은 도산서원 앞으로 흐르는 분천(汾川) 강가에 있었다. 그곳에서는 퇴계 이황이 우리집 산이라고 한 청량산이 바라다 보였다. 그런데 집 앞에 소나무가 하나 있어 시야를 가렸다. 주위 사람들은 소나무를 베라고 했지만 농암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대신 소나무가 있는 곳에 작은 집을 짓고 그곳에서 청량산을 바라봤다. 인간의 망령된 생각을 막는다는 뜻으로 두망대(杜妄臺)라는 근사한 이름까지 지어 붙였다. 이처럼 아름다운 산과 물이 한데 어우러진 조선시대 집이나 누정, 사찰 같은 문화공간에는 하나같이 문학과 예술, 풍류정신이 살아 숨쉰다. 서울대 국문과 이종묵 교수가 10여년에 걸쳐 쓴 ‘조선의 문화공간’(전4권, 휴머니스트 펴냄)은 조선시대 문인들의 문화공간과 삶에 대한 이야기다.‘태평성세와 그 균열’‘귀거래와 안분’‘나아감과 물러남’‘내가 좋아 사는 삶´ 등 각각의 부제가 암시하듯 조선 문인들의 다양한 삶의 모습을 한 편의 생생한 서사시 혹은 격조있는 풍경화로 그려낸다. 태평을 구가하던 시절, 도성 안이나 근기(近畿)지방의 명가들은 원림(園林)과 가산(假山)을 경영하며 집안에 산수를 끌어들였다. 태평성세를 누린 대부분의 유명 문인들은 사산 아래 아름다운 집을 짓고 살았다. 인왕산 앞뒤에 산 안평대군과 성임은 자신과 벗들의 글로 인왕산을 아름답게 꾸몄고, 백악은 맑은 선비 성수침이 있어 세상에 그 이름을 드리웠다. 또 낙산에는 신광한, 남산에는 김안로가 살면서 글을 지어 그 주인이 됐다. 조선 초기부터 풍광이 아름다운 한강에는 이름난 문인들의 정자가 들어섰다. 한명회의 압구정과 월산대군의 망원정은 시회(詩會) 공간으로 널리 알려졌다. 조선 초기 한강에서 가장 유명한 시회 공간은 단연 박은과 이행이 시를 즐긴 잠두봉. 부귀영화를 맛본 뒤 한강이 좋아 아예 강가에 집을 짓고 산 사람들도 있었다. 양성지와 강희맹이 그들이다. 강호로 물러난 사대부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해서 그들이 그저 농사를 짓고 산 것은 아니다. 호미와 쟁기 대신 붓을 잡고 고향에서의 안분자적하는 삶을 그려냈다. 조선의 문화공간은 아름다운 사람과 글이 있어 더욱 아름답다. 조선 후기 위항시인 장혼은 “미불자미(美不自美) 인인이창(因人而彰)”이라고 읊었다. 아름다움은 절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인해 드러난다는 뜻이다. 아무리 아름다운 산과 물도 그 자체로는 의미가 없다. 뛰어난 인물을 만나고 또 그들이 남긴 글이 있어야 한다. 예컨대 인왕산 자락의 옥류동은 지금은 주택가로 변해 흔적조차 사라졌지만, 장혼이 남긴 아름다운 글이 있기에 당시 눈에 띌 수 있었고 지금도 상상 속에서나마 옥같이 맑은 개울을 그려볼 수 있다. 옛 사람들은 이렇듯 빛나는 글로 아름다운 땅의 주인이 됐다. 풍월주인(風月主人)인 셈이다. 진정한 선비라면 세상을 구하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조선후기 실학자들이 바로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다. 홍대용은 목천에 자신의 과학정신을 담은 농수각을 세워 새로운 학문을 열고자 했다. 또 박지원은 현감으로 나간 안의에 ‘실학의 집’을 세우고 중국여행에서 깨달은 실학정신을 구현하려 애썼다. 책은 이들을 ‘내가 좋아 사는 삶’이라는 항목에 묶어 다룬다. 우리 옛 조상들은 와유(臥遊), 즉 누워서 유람하며 노니는 것을 즐겼다. 옛 글을 읽으면서 산수유람을 대신한 것이다. 저자는 옛 사람들의 와유처럼 이 책을 읽으며 마음 속에 상상의 정원을 꾸며보라고 권한다.‘그림의 떡’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저자는 조선 후기 대학자 성호 이익의 말을 답으로 들려준다.“마음은 불빛처럼 순식간에 만리를 가므로 사물에 기대지 않아도 될 것 같지만 기억의 단서가 없으면 이것이 불가능하다.” 아무 것도 본 것이 없는 선천적 맹인은 꿈을 꾸지 않는다는 것과 같은 이치다. 권당 2만∼2만 3000원. 김종면기자 jmkim@seoul.co.kr
  • 태평로등 도심 가로수 내년부터 소나무 교체

    서울 중구(구청장 정동일)는 4일 내년부터 퇴계로와 을지로, 태평로 등 서울 도심의 가로수를 소나무로 교체해 나가기로 했다. 구는 올해 필요한 예산을 확보하고 대상 가로를 선정한 뒤 내년 봄부터 연차적으로 은행나무, 플라타너스 등 기존 가로수를 소나무로 바꿔 나갈 계획이다. 구 관계자는 “예전에는 생장이 빠른 나무 위주로 심었지만 이제는 경관의 아름다움을 더욱 중요시하는 추세”라면서 “남산과 중구의 이미지와 걸맞고 사시사철 푸르른 소나무 가로수를 보면 새로운 멋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구는 이와 함께 여러 수종이 뒤섞여 무질서하게 조성된 가로는 같은 수종끼리 옮겨 심을 예정이다. 조현석기자 hyun68@seoul.co.kr
  • 儒林(662)-제6부 理氣互發說 제2장 四端七情論(8)

    儒林(662)-제6부 理氣互發說 제2장 四端七情論(8)

    제6부 理氣互發說 제2장 四端七情論(8) 그뿐인가. 이번에는 퇴계 자신이 매화가 되어 의인화된 매화의 입장에서 다음과 같이 이별을 슬퍼하고 있음인 것이다. “듣건대 도선과 나 서늘하다 하셨으니(聞設陶仙我輩凉) 임이 돌아간 뒤에 천향을 피우리라.(待公歸去發天香) 원컨대 임이시여, 마주 앉아 생각할 때(願公相對相思處) 청진한 옥설 그대로 함께 고이 간직해주오.(玉雪淸眞共善藏)” 한 그루의 매화꽃을 두고 한번은 주인으로, 한번은 매화꽃이 되어 1인 2역의 증답가를 부른 퇴계. 고봉의 표현처럼 ‘매화를 보러 가신 선생님’이 되어 스스로 ‘매처학자(梅妻鶴子)’가 된 이퇴계. 그렇다면 죽음을 앞둔 퇴계가 그토록 애완하여 때로는 매선이라 부르고 때로는 그대라고 부르고 심지어 임이라고 까지 부른 그 수수께끼의 매화는 도대체 어디서부터 온 것일까. 그렇다. 그 매분은 바로 두향이가 보내주었던 그 황매였던 것이다. 퇴계는 이처럼 인생의 마지막 여생에서 언제나 어디서나 두향이가 보내준 황매를 곁에 두고 상사하고 애중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고봉도 자신의 그런 거친 성정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일찍이 퇴계에게 보낸 편지 속에서 고봉이 자신의 괴팍한 성정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는데서 드러나고 있다. “…대체로 저는 바탕이 허약하지만 기세는 강하고 거칩니다. 실행은 비록 완성되지 못했지만 이름은 먼저 퍼졌습니다. 무릇 허약한 바탕에 충실한 실행이 없다면 자신을 보존함에 반드시 허술한 구석이 있을 것이며 강하고 거친 기세로 헛된 이름만 붙들고 있다면 다른 사람을 응대함에 반드시 미진한 구석이 있을 것입니다. 게다가 품성이 강직하고 악을 미워하며 가벼이 입바른 소리를 해대니 혜숙야 같은 사람도 견디지 못할 것입니다. 이러고도 어찌 세상에서 쓰일 만 하겠습니까…(중략)…만약 처음부터 뭇사람들에게 괴팍하게 여겨지고 노여움을 사서 배척된다면 시골로 물러나서 미련 없이 늙어 죽었을 것입니다. 다만 두려운 점은 바로 배척되지 않고 세월만 가게 되면 반드시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아져서 재앙은 빈 틈이 있을 때마다 쌓이고 화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불어나 앞수레가 뒤집혀진 길을 따라가지 않을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잘못된 계책을 걱정하며 잠을 이루지 못하고 두려워하는 일입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편지에 나오는 혜숙야( 叔夜)는 진나라 사람 혜강( 康)을 가리키는 말.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한 사람으로 노장에 심취하였던 도량이 넓고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던 현인인데 고봉은 감히 혜숙야 같은 사람이라도 자신의 강직하고 악을 미워하고 가벼이 입바른 소리를 해대는 모습에는 견디지 못할 것이라고 자신의 괴팍한 성정을 일찍부터 퇴계에게 고백하고 있었던 것이다.
  • 儒林(661)-제6부 理氣互發說 제2장 四端七情論(7)

    儒林(661)-제6부 理氣互發說 제2장 四端七情論(7)

    제6부 理氣互發說 제2장 四端七情論(7) 퇴계 역시 이번의 귀향길이 살아생전 자신의 마지막 여정이라는 것을 느꼈던 것일까. 고봉과 더불어 배를 타고 한강을 건너면서 다음과 같이 시를 짓는다. “함께 배 타고 강을 건너니(列坐方舟盡勝流) 가려던 이 맘 온종일 머뭇머뭇.(歸心終日爲牽留) 마음 같아선 한강물로 벼룻물 하여(願將漢水添行硯) 무한 수심 떠나면서 다 쓰고 싶네.(寫出臨分無限愁)” 이때 퇴계는 고봉에게 자신이 임금에게 고봉을 천거하였음을 귀띔하고 부디 수렴하여 근신할 것을 관곡(款曲)하게 충고하였던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사실은 귀향길에 오른 스승 퇴계가 자주 꿈에 나타나자 고봉이 다음과 같은 시를 읊어 퇴계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전날 밤은 메투리에 지팡이 짚고 나들이 하는 선생님을 뫼셨고,(前夜依 杖陪) 오늘밤은 관곡하고 뜻 깊은 말씀을 들었습니다.(今宵款曲笑談開) 담소 가운데 분명한 것은 한결같은 나라근심.(分明一念猶憂世) 매화 보러 가신 선생님이 아님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可識先生不著梅)” 시 속에 나오는 ‘관곡하고 뜻 깊은 말씀(款曲笑談)’, 그것은 바로 거친 성정을 지닌 고봉에게 준 스승 퇴계의 마지막 친절하고 정다운 충고가 아니었을까. 그러나 고봉의 이 다정한 시를 통해 또한 알 수 있는 것은 이 무렵 퇴계는 ‘매화 보러 가신 선생님’으로 불릴 만큼 매화 한 그루에 심취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 수수께끼의 매화는 8개월간의 한성객사 생활에서도 퇴계의 곁을 줄곧 지키고 있었다. 누가 이 분매를 기증하였는지 혹은 퇴계가 이 분매를 직접 구했는지 알려진 바는 없지만 이 분매는 퇴계의 객지생활을 달래줄 유일한 분신이었던 것이다. 심지어 퇴계는 이 매화를 ‘임’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때로는 매화의 신선, 즉 ‘매선(梅仙)’으로 부르고 있었던 것이다. 급하게 한양을 떠나게 된 퇴계는 그러나 이 분매를 고향으로 가져가지 못한다. 이때 퇴계는 이별하는 매화를 위해 ‘한성우사 분매증답(漢城寓舍 盆梅贈答)’이란 시까지 남기고 있다. 증답가(贈答歌)란 ‘서로 한마디씩 마음의 선물을 주고받는 노래’를 가리키는 것으로 퇴계는 한번은 자신이 매화의 입장에서 한번은 매화와 이별하는 주인의 입장에서 노래하였던 것이다. 먼저 주인의 입장에서 퇴계는 이별하는 매화를 향해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다행히 이 매선이 나와 함께 서늘하여(頓荷梅仙伴我凉) 객창이 소쇄하여 꿈마저 향기로워라.(客窓蕭灑夢魂香) 동으로 돌아갈 제 그대와 함께하지 못하니,(東歸恨未携君去) 서울 티끌 이 속에서 고이 간직하여다오.(京洛塵中好艶藏)” 퇴계가 쓴 이 영매시(梅詩)를 통해 정확히 알 수 있는 것은 8개월간의 객지생활에서 유일하게 객창을 상쾌하게 달래준 것은 오직 매화의 신선인 그대뿐임을 명백하게 밝히고 있다는 사실이다.
  • 儒林(660)-제6부 理氣互發說 제2장 四端七情論(6)

    儒林(660)-제6부 理氣互發說 제2장 四端七情論(6)

    제6부 理氣互發說 제2장 四端七情論(6) 퇴계가 말하였던 정자(程子)는 북송의 뛰어난 유학자였던 정호(程顥)와 정이(程 )형제를 높여 부르는 말. 유학사상 최초로 이기의 철학을 내세우고 유교 도덕의 철학적 기초를 마련한 두 형제였으나 그들에게는 윤순(尹淳)이나 양시(楊時)와 같은 뛰어난 제자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문인 중에서 누구를 취할 만한가.’하고 왕이 물었을 때도 ‘취할 만한 사람이라면 쉽게 말할 수 없다.’고 대답하였던 고사를 인용하였던 것이다. 그러고 나서 퇴계는 대답한다. “그런데 신이 어찌 감히 전하를 속이고 누가 특별하다고 취할 만하다고 여쭈오리까.” 그러나 선조 역시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선조는 어떻게 해서든 마지막으로 독대(獨對)를 하는 퇴계로부터 인물 하나를 반드시 천거받고 싶어했던 것이었다. “그래도 학문을 착실히 한 사람이 있을 것 아니겠소.” 그러자 퇴계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고 실록은 기록하고 있다. “굳이 말씀드린다면 기대승 같은 사람은 글을 많이 읽었고 성리학을 깊이 연구해서 그 견해가 유학에 정통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퇴계는 기대승을 추천하면서 한 가지 단서를 덧붙였다고 한다. “…다만 수렴공부는 아직 적은 듯싶사옵니다.” 수렴(收斂). 이 말은 ‘몸을 잘 단속하여 근신하는 태도’를 가리키는 것으로 유학자로서의 정신수양을 이르는 말인 것이다. 이를 통해 퇴계 역시 고봉의 거친 성정과 반골기질을 이미 꿰뚫어보고 있었음을 잘 알 수 있는 것이다. 선조와의 독대를 끝으로 퇴계는 마침내 8개월간의 마지막 한성체류를 끝내고 우사를 떠난다. 도성을 나온 퇴계는 강변에 있는 목뢰정에서 하룻밤을 보낸 후 이튿날 한강을 건넌다. 이때 고봉은 사방에 수소문하여 스승 퇴계가 있는 목뢰정을 방문하게 되었고 새벽녘에 함께 배를 타고 한강을 건너 봉은사에서 작별인사를 고했다고 전한다. 이것이 퇴계와 고봉이 이승에서 함께 보낸 마지막 상봉. 고봉은 한강을 건너는 배 안에서 스승 퇴계에게 다음과 같은 이별시를 읊었던 것이다. “밤낮으로 도도히 흐르는 한강수야.(江漢滔滔日夜流) 선생님 행차를 네가 좀 말려다오.(先生此去若爲留) 강가에 매인 닻줄 풀기 싫어 일부러 어정대며 시간을 끌었다.(沙邊 纜遲徊處) 애끓는 이별의 정 엄청난 이 슬픔 그칠 줄을 모르네.(不盡離腸萬斛愁)” 퇴계가 떠난다는 소문을 듣고 많은 관리들은 관청을 비웠고 장안의 선비들과 백성들이 한강변에 몰려와서 떠나는 퇴계를 전송했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배를 타고 따라왔고 강변에서 눈물을 흘리며 떠나는 퇴계를 향해 손을 흔들어 작별을 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태권V’ 낳아 30년 기른 한국 애니 대부 김청기 씨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태권V’ 낳아 30년 기른 한국 애니 대부 김청기 씨

    30년 만에 생일상을 받았다. 이제 잔치는 시작됐다. 키 56m, 몸무게 1400t, 주행속도 시속 300㎞,895㎾의 초강력 파워엔진, 태권도 100단의 무술실력 소유자, 주소 대한민국 태권브이 기지…. “달려라 달려 로보트야 날아라 날아 태권V∼.” 동요도 아닌 것이 동요처럼 신나게 불려졌다. 전국의 태권도장에는 어린이들로 붐볐다. 그랬다. 지금의 30∼40대에겐 어린 시절의 꿈과 희망이요, 우상이었다. 1976년 7월, 이순신 장군의 정기를 받고 태어난 정의의 사도 ‘로보트 태권V’는 이렇게 우리곁으로 처음 다가왔다. 태권V는 그동안 7편의 영화에 출연하면서 변신과 진화를 거듭했다. 한 차원 높은 2단 옆차기와 벽돌깨기 기술 등도 깔끔하게 연마했다. ●로봇팔·로켓주먹 과학적 검증 심포지엄 태권V는 최근 서른 생일을 맞아 아주 특별한 선물을 받았다. 우선 산업자원부로부터 주민등록증과 같은 대한민국 제 1호 로봇 등록증(760724-RO60724)이 수여됐다. 이른바 토종 애니메이션 배우 1호이자 ‘국민로봇’으로 공인된 셈이다. 또 유명 연예인처럼 매니지먼트 회사와 부활 프로젝트 계약을 맺고 다양한 콘텐츠로 거듭난다. 문근영 김주혁 등 스타 연예인들이 이를 축하해 줬다. 아울러 이달에는 로봇팔과 로켓주먹 등 태권V의 능력을 과학적으로 검증하는 심포지엄에도 참가하는 등 무척 바빠진다. 계획대로라면 2008년 하반기에는 확 달라진, 최소한 마징가Z를 능가하는 늠름한 모습을 볼 수 있게 된다. 애니메이션 감독 김청기(65)씨. 태권V를 낳고 길러 태권V의 아버지로 부른다.76년 처음 개봉 당시 3주 만에 28만여명의 관객을 불러들여 애니메이션뿐만 아니라 방화사상 공전의 기록을 세웠다. 이후 서른살 청년으로 키우기까지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지난 24일 서울 서초구 예술의 전당에서 열린 태권V의 생일행사에도 남다른 감회에 젖기도 했다. 김씨는 올해로 애니메이션 외길인생 40년째를 맞는다. 우리나라 애니메이션의 대부로 일컬어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지난 주 경기 부천시에 위치한 ‘토토엔터테인먼트’ 사무실에서 김씨를 만났다. 김씨는 인터뷰를 하는 동안 태권V 모형을 손자 끌어안듯 자주 어루만지며 각별한 애정을 표시했다. 먼저 한국의 태권V와 일본의 마징가Z가 싸우면 누가 이기는지 불쑥 물었다.“그야 태권V이죠. 국기원에서 태권도 3단증을 공인받았거든요. 하지만 순간적인 강력파워를 계산하면 100단 실력은 충분합니다.”하며 웃는다. 태권도 유단자들을 불러다 실제 대련을 시킨 뒤, 이를 16㎜ 필름에 담아 태권동작을 연출했기에 최소 3단증을 받았다는 설명이다. 아울러 이순신 장군 동상을 참고해 태권V에게 투구를 씌워 민족의 태권도를 연마시켰다고 부연했다. 김씨 자신은 태권도의 기본 품새도 못한다며 부끄러워한다. 태권V는 어떻게 태어났을까.“서울 광화문 뒷골목에 방 2개를 얻어 50명이 밤낮없이 3∼4개월 동안 숙식을 하면서 그렸지요. 우리는 한국의 디즈니가 되고 싶다는 꿈을 가졌어요. 의욕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나중에 보니 3만 8000장이나 그렸더군요.”라고 회고했다. 앞서 김씨는 애니메이션을 하기 전에 만화작가로 6년 동안 일하다가 서울 퇴계로 대한극장에서 ‘백설공주’와 ‘피터팬’을 보고 찡한 감동을 받는다. 그동안 해왔던 인쇄만화를 접고 애니메이션으로 뛰어들었다.66년 세기영화사에 들어가 ‘홍길동’‘보물섬’‘황금철인’ 등의 제작에 참여했다. 하지만 70년대 초까지 극장용 애니메이션이 전무할 만큼 암흑기였다. 그러던 75년 마징가Z가 흥행하자 번뜩 영감을 얻었다. 인간형 로봇에다 태권도를 도입하면 아주 멋있겠다는 아이디어를 생각해 냈다. 주위의 많은 격려 속에 어렵게 제1탄을 만들었다. 외형적으로 성공을 거두었지만 자신의 수중에는 돈 한푼 남지 않았다. 오히려 서울 사당동의 1800만원짜리 단독주택을 팔아야 했다. 요즘에야 지방 흥행사들한테 판권료를 받아 제작비로 쓰면 되지만 당시에는 만화영화가 흥행한다는 보증이 없다는 이유로 판권 자체를 미리 팔았기 때문이다. 주위에서는 낙담한 김씨에게 “김청기라는 이름 석자를 널리 알렸잖아.”하는 위로에 다시 용기를 얻어 제작에 들어갔다. “당시 제작비가 4200만원정도 들었지요. 사채까지 끌어다 썼습니다. 나중에 ‘똘이장군’으로 집을 되찾았고 ‘황금날개1,2,3’으로 돈을 좀 벌었습니다. 아무튼 태권V 1탄의 28만 관객은 지금으로치면 500만명은 족히 될 것입니다.” 또 자금 압박을 견디다 못한 김씨는 원판을 미국에 팔았다. 처음에는 다시 찾아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나중에 미국회사가 망했고 더 이상 찾을 길 없어 포기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극장에서 돌렸던 필름이 2003년 영화진흥위원회 창고에서 발견됐다. 세월이 지나 훼손된 부분이 많았지만 적잖은 비용을 들여 겨우 복원했다. 이 필름으로 지난 부산영화제때 상영됐다. 당시 초등학생이던 관객들이 이젠 부모가 돼 아이들과 함께 보면서 눈물을 글썽이는 사람도 있었다. ●한국적 개성 살리려 이순신 장군 투구 씌워 태권V가 일본만화의 영향을 어느 정도 받았는지 조심스럽게 물었다.“당시 애니메이션 초기여서 일본의 영향이 컸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하면 우리식으로 만들까 하는 것이 숙제였지요.”라고 전제했다. 이어 “마징가로 했으면 더 히트할 수도 있었는데 우리식으로 하기 위해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태권V에게 이순신 장군의 투구를 씌운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입니다.”라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태권V의 적군이 붉은왕국이었던 점을 잠시 상기시킨다. 서울 중구 주교동의 방산초등학교에 다닐 때였다. 사는 집이 적산가옥이었는데 틈만 나면 벽에다 연필로 그림을 그리는 습관이 있었다. 야단을 칠 줄 알았던 아버지는 “칭찬은 낙타도 춤을 추게 한다.”면서 꾸지람 대신 칭찬을 자주했다. 6·25가 나자 아버지는 장성한 두 아들을 숨겼다는 이유로 북한군에 의해 납치되고 말았다. 이후 생사기별조차 한번도 없었다. 어린 김청기에겐 북한은 늘 증오의 대상이었고 결국 태권V에서 붉은왕국으로 설정하기에 이르렀다. 또 돈을 벌게 해준 ‘똘이장군’은 아버지를 모델로 그렸다. “어릴 때부터 만화를 많이 봤어요. 특히 두 발로 걸어가는 로봇우체통이 끊어진 한강다리에서 엎드려 피란민들을 건너게 하는 장면은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김씨는 64년 서라벌예대 서양화과를 졸업하면서 본격적인 출판용 만화를 그렸다.‘삼총사’‘쾌걸조로’‘강강술래’ 등이 당시 작품이다. 이후 극장용 애니메이션은 태권V를 비롯해 ‘썬더에이’‘우뢰매1∼4’ 등 28편을 만들었다.90년 이후에는 ‘우뢰매7∼10’ ‘닌자 꼴뚜기’ 등 비디오 30여편을 제작했다. ●“징기스칸 뛰어넘는 광개토대왕 애니 제작” “만화세대들이 지금은 기성세대가 됐습니다. 애니메이션은 어린이뿐만 아니라 어른들도 거부감 없이 봅니다. 또 만화는 전세계적인 트렌드이고 이해가 빠른 매체이지요. 좀더 많은 기회와 투자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우리나라는 기술부분에는 어느 정도 앞서 나갔지만 창의적인 면에서는 선진국에 비해 많이 뒤져 있습니다. 세계적인 디즈니도 한번 실패한 뒤 다시 일어섰거든요.” 김씨는 태권V 박물관과 공원조성 등도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귀띔한다. 아울러 ‘국민로봇’이라는 캐릭터를 활용,2010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때에는 붉은악마와 함께 국민적 응원에 동참했으면 좋겠다고 소망했다. 앞으로의 계획을 묻자 벽에 걸린 애니메이션 ‘광개토대왕’의 포스터를 가리킨다. 총 제작비가 180억원이 넘는 대작으로 미국 회사로부터 투자 약속까지 받았다.2년 후에는 칭기즈칸과 알렉산더 이상의 이미지가 새로 탄생될 것이라며 자신있게 미소 짓는다. ■ 그가 걸어온 길 ▲1941년 서울 출생. ▲64년 서라벌예술대 서양화과 졸업. ▲61∼66년 만화작가 생활.‘삼총사’‘쾌걸조로’ 등 발표. ▲66년 애니메이션 입문.‘보물섬’‘황금철인’‘홍길동’ 등 작품참여. ▲76년 ‘로보트태권V’ 감독(이후 태권V 7편 발표). ▲91년 김청기필름대표 ▲99년 청강산업대 겸임교수 ▲2004년 문화콘텐츠 엠버서더 대표. 제8회 서울국제만화 애니메이션페스티벌 공로상. ●주요 작품 ▲78년 ‘황금날개’‘똘이장군’ ▲79년 ‘간첩잡는 똘이장군’ ▲80년 ‘삼국지’ ▲86년 ‘외계에서 온 우뢰매’ ▲89년 ‘슈퍼 홍길동’‘우뢰매6’ ▲96년 ‘왕후 에스더’ ▲97년 ‘의적 임꺽정’ 등 52편. km@seoul.co.kr
  • 儒林(659)-제6부 理氣互發說 제2장 四端七情論(5)

    儒林(659)-제6부 理氣互發說 제2장 四端七情論(5)

    제6부 理氣互發說 제2장 四端七情論 (5) 따라서 고봉이 퇴계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에서 ‘호남과 영남이 막히고 멀어 찾아뵈올 길이 없으니 몸소 경계의 말씀을 받들거나 의심나고 애매한 것을 여쭤보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습니다. 종이를 펴놓고 앉아 있으니, 슬픈 생각이 일어 동쪽을 보며 눈물을 흘립니다.’라고 표현하였던 것은 바로 자신이 ‘일반적인 기준에 맞지 않는 처신’을 하고 고향인 광주로 낙향해 있는 자신의 신세를 빗대어 표현하고 있음인 것이다. 더구나 고봉은 이 무렵 선조로부터 중국 가는 사신인 부경사로 임명되었으나 상소하여 면직 받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고봉이 보낸 마지막 편지 직전의 서한에서 퇴계에게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음을 통해 잘 알 수 있다. “…지난날 중국 가는 사신에 임명되었으나 의리로 보아 억지로 나아가기 어렵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면직을 청하였습니다. 마음 속에 품은 뜻을 다 숨길 수 없기에 그저 몇 가지 말로 임금께서 굽어 살피시길 바랐던 것인데, 바깥의 헐뜯음과 나무람이 사방에서 일어나니 두려워 떨면서 스스로를 책망할 뿐입니다.” 물론 퇴계는 이러한 고봉의 거친 성정을 잘 알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1569년 3월4일 아침. 퇴계가 자신의 마지막 벼슬인 우천성을 사직하기 위해서 대궐로 들어와 선조를 만나 걸해골을 하는 장면에서 명백하게 드러나고 있다. 먼저 퇴계가 여섯 가지 이유를 들어 자신이 물러가야 하는 까닭을 진언하자 이를 묵묵히 듣고 있던 선조는 ‘금세에 경과 같은 사람이 또 있겠는가. 지금 경이 돌아가면 늙은 사람은 아무도 남으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도 떠나려 하십니까.’라고 한탄하였다고 실록은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나서 선조는 퇴계에게 다음과 같이 묻는다. “꼭 가야 한다면 경이 조정 신하 중에서 추천해 줄 만한 사람은 없습니까.” 퇴계는 대답한다. “오늘날 대신의 자리에 앉은 사람들은 다 청렴하고 신절(愼節)이 있는 분들이며, 육경(六卿)은 사특하지 않고 감출 줄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영의정으로 말할 것 같으면 위험과 어려움을 당하여도 흔들리지 않으며 나라를 편안케 하며 지극한 정성으로 국사를 처리하고 있습니다. 주석지신(柱石之臣)을 중히 여겨 의지하시면 됩니다. 이 사람들 이외에는 별로 사람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선조는 만족지 않았다. 선조는 퇴계를 대신할 수 있는 왕의 스승으로 왕사(王師)를 생각하고 있었던 듯 다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고 실록은 기록하고 있다. “신하 중에 추천하고 싶은 사람은 없습니까. 학문을 착실히 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짐에게 경계하고 싶은 말을 해주면 날마다 힘쓸 터이니, 솔직히 가르쳐 주십시오.” 그러자 퇴계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이것은 참으로 말하기 어렵습니다. 옛날 중국에서 임금이 정자(程子)에게 ‘문인 중에서 누구를 취할 만한가.’하고 물었을 때 정자는 대답하여 말하기를 ‘취할 만한 사람이라면 쉽게 말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 儒林(658)-제6부 理氣互發說 제2장 四端七情論(4)

    儒林(658)-제6부 理氣互發說 제2장 四端七情論(4)

    제6부 理氣互發說 제2장 四端七情論(4) 그러나 퇴계의 강력한 추천으로 시독관(侍讀官)에서 오늘날 국립대 총장격인 성균관의 대사성으로 임명되었으나 고봉은 사사건건 당시 복잡하게 얽힌 정치상황 속에서 실권을 잡은 대신들과 충돌하는 일이 빈번했다. 고봉은 이른바 트러블메이커였던 것이다. 이러한 고봉의 반골(反骨)정신은 그의 집안내력이기도 하였다. 고봉의 집안은 대대로 절개를 지켜왔던 기골(氣骨)의 가문이었다. 전라남도 광주에서 태어난 고봉의 고조부인 건(虔)은 대사헌을 역임하였으나 단종이 폐위되자 관직을 버리고 야인생활을 하던 절의파였다. 그는 세조가 다섯 번 찾았으나 끝내 절개를 버리지 않았다. 또한 숙부 기준(奇遵)은 기묘사화 때 조광조와 함께 죽임을 당한 사림파의 거두였던 것이다. 그의 부친 진(進)은 아우가 죽자 집을 광주로 옮기고 벼슬도 사양한 채 학문에만 힘을 썼던 은둔거사였다. 고봉이 어려서부터 학문에 열중하여 약관에 이미 성리학에 일가를 이루었다는 평가를 받는 것은 이러한 가문의 기질 때문이었던 것이다. 고봉은 비교적 늦은 나이인 32살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에 올랐으나 항상 자신의 정치이념을 사림파의 거두였던 숙부 준의 정신을 본받아 부패하고 낡은 정치를 개혁하려 하였다. 그는 병조좌랑, 이조정랑의 요직을 거쳐 마침내 퇴계의 추천으로 성균관 대사성에까지 이르렀으나 그의 관직생활은 파란의 연속이었다. 신진사류의 영수로 지목되어 훈구파에서 쫓겨나기도 하고, 당대 최고의 권신이었던 영의정 이준경과의 충돌 때문에 해직당하기도 했었는데, 이는 고봉이 강직한 성품과 불의와 타협하지 않으려는 강골정신의 결과였던 것이다. 고봉은 임금 앞에서도 당당하였다. 경연 등을 통해 국가 기강쇄신과 민생보호를 역설하였으며, 특히 훈구파를 중심으로 한 간신들의 횡포를 비판하였다. 왕도정치의 확립을 도모하는 선봉장으로 언로를 넓게 열 것과 민심에 따를 것을 직언하였다. 특히 고봉이 부르짖었던 왕도정치는 기묘사화로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조광조와 숙부 기준의 개혁정신을 이어받은 것이었다. 따라서 고봉이 퇴계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에서 자신의 ‘거친 성정’ 때문에 자신의 ‘지난날 처신이 일반적인 기준에 맞지 않고’ 자신의 의견이 (임금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자 미련 없이 벼슬에서 떠나버린 사실에 대해서 ‘제가 비록 못났지만 마음속으로 늘 이것을 걱정했던 까닭에 벼슬에 나온 이후로는 감히 제 몸을 보존하겠다는 생각을 접은 지가 오래입니다.’라고 변명하고 있었던 것이다. 고봉 스스로가 변명하고 있는 ‘일반적인 기준에 맞지 않는 처신’ 바로 그것은 이른바 김개(金鎧)에 대한 탄핵사건이었다. 고봉이 퇴계로부터 강력한 추천을 받아 성균관 대사성으로 오를 무렵 그는 오래 전부터의 숙원이었던 기묘사화로 억울하게 죽은 조광조와 숙부였던 기준 등을 추증(追贈)하고 그들을 성인군자로 복권시킬 것을 선조에게 건의한다. 그러나 이때 김개는 이를 정면에 나서서 반대하였던 것이다. 그러자 고봉은 이에 대해 상소문을 올리고 홀연히 낙향하여 고향인 광주에서 낭인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 儒林(657)-제6부 理氣互發說 제2장 四端七情論(3)

    儒林(657)-제6부 理氣互發說 제2장 四端七情論(3)

    제6부 理氣互發說 제2장 四端七情論(3) 거친 성정(性情). 우선 고봉 스스로가 스승 퇴계에게 자신의 ‘거친 성정’으로 인해 ‘저를 알아주신 선생님의 은혜에 보답하지 못할까 걱정되니, 두려운 생각으로 밤낮 편히 지내기가 어렵습니다.’라고 고백하고 있는 데에는 다음과 같은 깊은 사연이 있다. 지난해 3월, 퇴계는 선조에게 벼슬에서 물러갈 것을 결심하고 ‘걸치사(乞致辭)’하였다. ‘걸치사’란 말은 문자 그대로 ‘물러갈 것을 구걸한다.’는 의미로 ‘걸해골(乞骸骨)’에서 비롯된 말이었다.‘걸해골’은 늙은 신하가 임금에게 사직을 청원하는 것을 이르는 말로 이 말의 뜻은 신하란 본디 심신을 모두 군주에게 바친 것이니, 사퇴를 원하고 나올 때에는 오직 썩어 버릴 해골만이 남으므로 그것을 돌려달라고 하는 것이다. 이 말은 항우가 유방의 이간책에 속아 충신이었던 범증(范增)을 의심하자 ‘이미 천하의 대세는 정하여졌습니다. 신은 내려주시는 해골을 받아 옛날처럼 이름 없는 병졸로 되돌아갈까 하나이다.’라고 물러가는 데서 비롯된 성어. 여기서 퇴계가 선조에게 걸치사를 통해서 썩어빠진 해골을 돌려달라고 애원하는 모습은 퇴계의 의지를 알아볼 수 있는 장면일 것이다. 이때 퇴계는 선조를 위해 그의 대표작 중의 하나인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완성한다. 성학십도는 유학사상을 체계화하여 이것을 정치실현에 도움이 되게 하려는 의도에서 쓰여진 퇴계 최후의 유작이었다. ‘성학(聖學)’이란 것은 성왕이 되는 학문이란 뜻이요, 곧 ‘철인의 왕자’란 의미인 것이다. 성왕이 되기 위해서는 도에 관한 올바른 인식을 가지고 그것을 체득하고 실천하는 데 힘써야 한다고 생각한 퇴계는 도의 올바른 인식과 실천을 위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도학의 문헌을 그림으로 일목요연하게 나타내 보인 것이다. 선조는 그것을 열 폭의 병풍으로 꾸며 정원(政院)에 두고 작은 장첩으로 만들어 밤낮으로 성람(聖覽)하였다고 전해지는데, 선조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퇴계에게 ‘그렇다면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인재 하나를 추천해 달라.’고 어명을 내린 것이다. 이때 퇴계가 서슴없이 추천한 사람이 바로 고봉. 퇴계가 자신을 따르는 수많은 제자들을 일절 배제하고 고봉을 천거하였던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인 것이다. 그뿐인가. 고향으로 돌아온 퇴계는 고봉에게 편지를 보내어 돌아가신 아버지의 묘갈문(墓碣文)을 써달라고 부탁까지 하였던 것이다. 기라성같이 뛰어난 당대의 수많은 제자들을 제쳐두고 하필이면 고봉에게 아버지의 무덤 앞에 세우는 묘표에 새기는 갈문을 부탁한 퇴계의 행장은 퇴계가 얼마만큼 고봉을 아끼고 고봉을 단순히 사제지간이 아닌 도반(道伴)으로 생각하고 있는지를 드러내는 산증거인 것이다. 고봉은 퇴계의 이러한 천거로 인해 선조로부터 마침내 한때 퇴계가 역임하였던 성균관 대사성에까지 제수받게 되는 것이다.
  • 儒林(656)-제6부 理氣互發說 제2장 四端七情論(2)

    儒林(656)-제6부 理氣互發說 제2장 四端七情論(2)

    제6부 理氣互發說 제2장 四端七情論(2) 고봉의 편지는 다음과 같이 이어지고 있다. “…저의 지난날 처신이 일반적인 기준에 맞지 않았다는 것은 잘 압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하건대 임금과 신하의 의리는 천성(天性)에 뿌리를 두고 있으니, 비록 받아들여지지 않아 떠났다 하더라도 모른 척하기만 하는 것은 옳지 않은 듯합니다. 그러므로 감히 세상이 꺼리는 것을 무릅쓰고 절실한 걱정을 대략 아뢰었던 것일 뿐입니다. 화복이 오는 것은 하늘에 달린 것이니, 미리 그 후환을 걱정해서 지나치게 나약하게 행동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요즈음의 사대부들은 화란을 너무 두려워하여 그 마음가짐이나 행동이 자못 한쪽으로 쏠려 있으니, 장차 이러한 풍조가 남긴 폐단을 구제할 수 없을까 두렵습니다. 제가 비록 못났지만 마음속으로 늘 이것을 걱정했던 까닭에, 벼슬에 나온 이후로는 감히 구차하게 제 몸을 보전하겠다는 생각을 접은 지가 이미 오래인데, 오늘에 와서 어찌 다른 꾀를 내겠습니까. 상소하는 즈음에도 일찍이 되풀이하여 생각하고 헤아려 격한 감정을 만 분의 일이나마 눌렀습니다. 만약 제 마음속의 견해를 다 토로했다면, 모르겠습니다만 세상 사람들의 노여움이 또한 어떠했겠습니까. 그 일의 곡절이 이와 같은 데 지나지 않으니 살펴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비록 그렇지만 선생님의 자상하신 가르침을 받았으니 감히 거친 성정을 바로잡아 중도(中道)에 부합하기를 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다만 마음속의 의지가 굳지 못하고 배움이 보잘 것 없어 저를 알아주신 선생님의 은혜에 보답하지 못할까 걱정되니, 두려운 생각으로 밤낮 편히 지내기 어렵습니다. ‘사물의 이치에 이른다(物格).’ 또 ‘무극(無極)’ 같은 것에 대한 해석은 선생님께서 굽어 살펴 주심에 힘입어 평소 어지럽게 오가던 것이 끝내 한 가지로 매듭지어졌습니다. 한평생 이보다 큰 행복이 있겠습니까. 춤을 추며 뜀을 뛰어도 그 즐거움을 다 드러내지 못할 것입니다. 호남과 영남이 막히고 멀어 찾아뵈올 길이 없으니, 몸소 경계의 말씀을 받들거나 의심나고 애매한 것을 여쭤 보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습니다. 종이를 펴 놓고 앞에 앉으니 슬픈 생각이 일어, 동쪽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립니다. 섣달 그믐이 가까워 추운 날씨가 더욱 사나워지는 이때에 몸을 더욱 돌보시기 천만 번 비오며 이만 줄입니다. 아울러 살펴 주시기 바랍니다. 삼가 절하고 답장을 올립니다. 경오 11월 15일, 후학 대승이 절하며 올립니다.” 고봉의 편지는 두 가지의 내용을 함축하고 있었다. 하나는 퇴계로부터 ‘자세하신 가르침’을 받고 또한 ‘사물의 이치에 이른다.’ 또는 ‘무극(無極)’에 대한 자세한 해석을 열어 주시어 학문에 대한 혼돈을 없애고 한 가지로 매듭질 수 있었으니, 춤을 추며 뜀을 뛰어도 그 기쁨을 이루 다 말할 수 없다는 후학으로서의 사은(師恩)을 표현한 것이고, 또 하나는 선생님의 자상하신 가르침을 통해 자신의 ‘거친 심성’을 바로잡아 중도(中道)에 부합되는 처신을 해야 할 터인데, 선생님의 은혜에 보답하지 못하고 있는 자신의 처세를 변명하고 있는 것이다.
  • [인사]

    ■ 행정자치부 ◇일반직 고위공무원 파견 △주민서비스혁신추진단 부단장 黃俊基△한국지방행정연구원 李仁禾◇팀장 전보△인사혁신팀장 鄭寅煥△균형발전지원팀장 權永洙△지식행정팀장 安星珍◇팀장급 파견△동북아의 평화를 위한 바른역사정립기획단 鄭鐘珍△사회서비스향상기획단 高光完◇팀장급 전출△국가청소년위원회 金明錫 ■ 노동부 △사람입국·일자리위원회 파견 李載甲△기획예산처(사회서비스향상기획단) 파견 朴鍾泌■ 국회사무처 ◇관리관 전출 △국회 예산정책처 鞠慶福◇이사관 승진△통일외교통상위원회 전문위원 許泰秀△행정자치위원회 〃 白煥基△환경노동위원회 〃 尹鎭勳△국회사무처 吳仁燮 鄭在龍◇이사관 전보△법제실장 金仁喆△기획조정〃 李秉吉△의사국장 奇老珍△국제〃 金聲遠△정무위원회 전문위원 孫俊哲△재정경제위원회 〃 權奇律△특별위원회 〃 朴大成△국회사무처 李漢吉 李悍圭 洪淳寬 金鍾煥◇이사관 파견복귀△국방위원회 전문위원 孫忠悳△예산결산특별위원회 〃 柳煥旻◇부이사관 전보△법제실 법제심의관 李龍遠△의사국 기록〃 李圭健△국회운영위원회 입법〃 賓成林△농림해양수산위원회 〃 具秉會△건설교통위원회 〃 鄭求福△연수국 교수 孫石昌△총무과장 趙容福■ MBC △건설기획단 신사옥추진팀장 李如椿△〃 개발기획〃 吳政祐△〃 제작센터건설〃 金起華■ 아리랑국제방송 △보도제작팀장 趙炫軫■ 연세대 △법무대학원장 겸 법과대학장 洪復基△정보대학원장 李鍾敏△학부대학장 申義淳△치과병원장 蔡重奎△원주교무처장 李仁誠△평생교육원장 鄭甲泳■ 굿모닝신한증권 (본부장)△강서영업본부 秋炅浩△강북〃 李秉國△영남〃 朴一濟■ 신한은행 △기업고객지원부 팀장 우상태△FSB연구소장겸 인사부 〃 이재영△IT운영1실장 이태준(지점장)△가양동 백왈경△개롱역 장준현△고척동 신동성△공항동 황영숙△관악 김호중△광장동 안상호△구의현대아파트 신동은△군자역 김영성△금천 민영숙△길동역 김재혁△대림동 차순모△대림중앙 이송이△대치동 우종률△독산동 박한조△동교동 원복희△동부이촌동 이종철 △동소문동 이동일△명동중앙 김복수△무역센터 조영준△미아동 송병학△반포터미널 이종택 △방이동 최성조△번동 반종영△봉천동 송영수△사당역 문남엽△삼성동아이파크 박희성△상봉역 김완섭△서교중앙 윤태섭△성수동 홍성수△소공동 이상운△쌍문동 이용희△양재스포타임 이상원△염창동 탁승훈△용산 진광희△은마아파트 이병도△잠원역 이상호△종로광장시장 김한진△창동 한동성△창동아이파크 이광철△청계 조성호△청담동 김신섭△코엑스 김승동△혜화로 이형근△홍제역 안승완△화곡역 김학중△김포 허춘도△동수원 김영수△만수동 이병철△박달동 손성식△백궁 윤상규△부평 이석진△분당시범단지 이상룡△서현동 임수△석남동 이상원△수원역 최길상△수원정자동 윤현호△신곡동 조상열△안성 권영국△안중 겸 해군2함대출장소장 김병민△연수중앙 최용준△인천 김권회△일산역 홍종관△일산중앙 이시우△퇴계원 박우식△평촌남 권수도△하안동 이병훈△하안중앙 이부헌△호평 이상룡△광산중앙 박경수△구미 노근석△김해중앙 이문상△노은 김호용△대곡 신성화△동래중앙 김웅조△사천동 박종철△상무 이동주△서성로 김명원△순천 윤태웅△신평 한순금△양산 김청곤△양양 진병돈△울산중앙 김영모△원주 김승오△인동 유재정△청주 신광철△한양대학교 민경규△수원대학교 김홍욱△강릉 이익성△강원대학교 이상봉△군산 신태웅△대구법원 이현대△사북 김원일△제천 김동찬△충북영업부 박재환△동래 김재겸 (지점 개설준비위원장)△진해 박일남△강남 SOHO금융센터 정상용△구로디지털 SOHO금융센터 정민호△강남역 기업금융센터 권순섭△강남역 기업금융센터 박수근△진영 기업금융지점 하승규 (기업금융지점장(SRM))△광교 기업영업부 서대원△강남중앙 김성윤△광화문 정중종△광화문중앙 이태희△수원중앙 이동섭△구로동 고영준△논현동 신영근△마포중앙 안양수△명동 임재훈△무교 윤종준△무역센터 문상흠△서여의도 최계동△서초남 임진영△선릉중앙 신현근△소공동 정성태△신사동 나규찬△영동 조성배△을지로 안성규△역삼남 이세익△장한평 신선범△코엑스 권석춘△학동 최흥연△반월 김대수△반월 박한호△반월 이상열△분당 김수일△수원중앙 이동섭△안산에스버드 장병찬△인천 이영근△인천남동 남기무△인천남동 이의목△인천남동 이장희△평촌 유정호△평촌역 김평곤△평촌역 이광재△평촌역 이병일△평촌역 장기래△평택중앙 이필수△대구 이환승△마산 김이현△부산서면 한윤△울산 김옥기△창원 박철규△청주 김종필△당산동 이민이△등촌동 김대식△등촌중앙 이익수△디지털산업단지 조창국△마포중앙 손영화△번동 서희철△선릉 이동준△신촌중앙 신순철△충무로 강대홍△남동공단 전정렬△남동중앙 윤채현△반월 박석조△성남 최용진△성남공단 이명철△안산 최기한△의정부 문부용△이천 홍종수△호계동 박시진△화성병점 김순호△대전중앙 고재윤△부산서면 박희조△연산중앙 길관석△전주 윤보한
  • 儒林(655)-제6부 理氣互發說 제2장 四端七情論(1)

    儒林(655)-제6부 理氣互發說 제2장 四端七情論(1)

    제6부 理氣互發說 제2장 四端七情論(1) 1570년 선조 3년 11월. 도산 서당의 퇴계 앞으로 편지 한 통이 전해졌다. 퇴계에게 편지를 전해준 사람은 아직까지 밝혀진 바 없다. 다만 퇴계가 보낸 답장에서 ‘먼 길을 애써 달려온 사람으로부터 부치신 귀한 편지와 별지를 함께 받아보았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아마도 편지를 보낸 사람이 사사로이 사람을 고용하여 인편으로 퇴계에게 편지와 별지를 황급히 보내온 것처럼 보여진다. 편지를 보내온 사람의 이름은 기대승(奇大升). 흔히 고봉(高峯)이라고 불리는 바로 그 사람이다. 이 무렵은 퇴계가 숨을 거두기 한 달 전이었으므로 퇴계가 고봉으로부터 받은 마지막 편지였다. 두 사람은 26살의 나이 차이가 나고 있었지만 나이와 직위를 초월하여 13년 동안이나 서로 100여 통이 넘는 편지를 교환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100여 통이 넘는 편지 중 퇴계에게 전해진 최후의 편지가 이제 막 도착한 것이었다. 퇴계는 의관을 정제하고 고봉으로부터 온 서한을 뜯었다. 두 사람은 퇴계의 나이 58세 때, 고봉의 나이 32살 때 한양에서 처음으로 만났다. 1558년 명종 13년 10월. 두 사람이 처음으로 만났을 때 퇴계는 지금의 국립대 총장급인 성균관의 대사성으로 재직하고 있었고 고봉은 이제 막 과거에 급제한 백면서생이었다. 따라서 퇴계와 고봉이 나누었던 100여 통이 넘는 편지에서 퇴계가 고봉을 가리키는 대명사는 처음에는 ‘기선달(奇先達)’이라는 이름으로 지칭되었다. 선달은 문무과에 급제하였으나 아직 벼슬을 하지 못한 사람을 가리키는 것으로 처음 만났을 때 고봉은 32살의 나이로 문과 을과에 1등으로 합격하였으나 아직 관직에 오르지 않았으므로 ‘기선달’이라는 통칭으로 불린 것이었다. 그러다가 차츰 고봉의 대명사는 ‘기정자(奇正字)’로, 나중에는 ‘기정자명언(奇正字明彦)’이라는 정식호칭으로 불러 고봉에 대한 예우를 들어올리고 있었다. 그러나 고봉은 한결같이 ‘퇴계 선생님께 올립니다’라는 극존칭으로 13년 동안 퇴계를 스승으로 섬기고 있었던 것이다. 퇴계 또한 세월이 흘러갈수록 고봉을 마음속으로 존경하여 나중에는 ‘명언에게 절을 하며 아룁니다’혹은 ‘절하며 답해 올리는 글’이라는 식으로 서두를 장식하였던 것이다. 퇴계는 고봉으로부터 받은 마지막 편지를 천천히 읽기 시작하였다. “선생님께 올리는 글 얼마 전 잘 지내시는지 안부를 여쭙는 편지 한 통을 올린 뒤 갑자기 무안(務安)사람이 와서 전해 주는 10월15일의 선생님 편지를 받았습니다. 삼가 건강히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되어 기쁘고 위로되는 마음 한량없었는데 하물며 자세하신 가르침을 받았으니 기쁨이 어떠하겠습니까. 지극한 감명이 한층 더하였습니다.”
  • 문화상품권 100만장 위조

    서울 용산경찰서는 24일 문화상품권 100만장을 위조한 박모(54)씨 등 3명을 유가증권 위조 및 행사 등의 혐의로 구속하고 지모(45)씨 등 3명을 불구속 입건했다.또 이모(43)·전모(44)씨를 수배했다. 주범인 이씨와 전씨는 지난달 11일 인쇄물 유통업자 박씨에게 4500만원을 주고 5000원짜리 문화상품권 100만장(50억원) 위조를 주문했다. 박씨로부터 가짜 상품권을 넘겨받은 이들은 지난 11일 2만장을 광주시 북구 두암동 J성인오락실에 팔아 넘기려다 오락실 업주가 가짜임을 눈치채자 달아났다.위조 상품권은 뒷면에 찍힌 일련번호가 8자리인 진품과 달리 9자리이고 홀로그램의 색깔이 진품보다 진하며 상품권 종이에 형광물질이 들어 있지 않다. 경찰은 박씨가 서울 중구 퇴계로 자기 사무실에 보관 중인 위조상품권 82만장을 압수했으나 달아난 이씨 등이 18만장을 갖고 있어 유통될 수 있다고 보고 성인오락실 업주 등에게 주의를 당부했다.윤설영기자 snow0@seoul.co.kr
  • 儒林(654)-제6부 理氣互發說 제1장 相思別曲(37)

    儒林(654)-제6부 理氣互發說 제1장 相思別曲(37)

    제6부 理氣互發說 제1장 相思別曲(37) 그러므로. 두향은 보름달 속에 들어 있는 월궁을 쳐다보며 생각하였다. 그 월궁 속에 들어 있는 달의 여신을 보며 생각하였다. 그 월궁 앞의 계수나무 밑에서 불로약을 찧고 있는 옥토끼를 쳐다보며 생각하였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두향은 두 손을 모아 합장한 채 달을 쳐다보며 치성을 드리기 시작하였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천지신명께 비나이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월궁항아께 비나이다. 불로불사의 영약을 나으리께 내리소서. 계수나무 아래에서 찧고 있는 옥토끼가 만든 불사약을 나으리께 내리소서. 비나이다, 비나이다.” 원래 정화수를 떠놓고 비는 치성은 부엌의 조왕신에게 드리는 것이 보통이었다. 조왕신은 민속에서 부엌을 맡은 신으로 부엌의 모든 길흉을 관장한다고 알려진 민간신인 것이다. 주방의 살강 위에 가지런히 지푸라기를 깔아 사기주발에 정한수 한 그릇을 올려놓고 치성을 드리는 것이 관례였는데 두향은 이와는 달리 장독대 위에 정한수 받쳐 놓고 치성을 드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달님에게 치성하여 나으리의 건강과 장수를 기원하기 위함이었으니. “비나이다, 비나이다.” 두 손을 모아 손바닥을 비비며 두향은 쉴 새 없이 달을 향해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였다. 그리고 소리를 내어 중얼거렸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천지신명께 비나이다. 나으리의 무사안녕을 진정소발(眞情所發)하나이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월궁월신 항아선녀께 비나이다. 여신께서 가져오신 불로장생 천도복숭아를 나으리께 내리도록 달님께 비나이다. 소첩의 기도를 들어주시어 나으리께서 무병장수하시기를 운예지망(雲霓之望)하나이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천지신명께 비나이다. 행여 나으리께서 연세종명(捐世終命)하시거들랑 이 소첩도 한날한시에 숨을 거둘 수 있도록 사원무위(使願無違)하나이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소첩이 드리옵는 이 소원소망을 가엾이 여기시어 서기지망(庶幾之望)이 될 수 있도록 천지신명은 도우소서. 월궁항아는 이 소첩을 불쌍히 여기시어 소원성취하도록 도우소서. 비나이다, 비나이다. 천신지기(天神地祇)께 비나이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일월성신께 비나이다.” 그날부터 시작된 정화수의 치성은 전해오는 전설에 의하면 퇴계가 죽는 그날까지 2년여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그대로 계속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선조3년,1570년 12월8일. 오후 5시에서 7시 사이인 유시(酉時) 초에 이퇴계가 마침내 숨을 거둔 바로 그 순간에는 두향의 부엌 한구석에 보관된 정화수가 갑자기 붉은 핏빛으로 변해버렸다고 전해오고 있다.
  • 儒林(653)-제6부 理氣互發說 제1장 相思別曲(36)

    儒林(653)-제6부 理氣互發說 제1장 相思別曲(36)

    제6부 理氣互發說 제1장 相思別曲(36) 보름달은 점점 더 떠올라 온 강물은 월광으로 찬란하게 부서지고 있었으며, 온 누리는 월색으로 충만하였다. 두향은 정성들여 머리를 풀어 감고 온몸을 깨끗이 씻었다. 그리고 방안으로 들어와 불을 밝히고 오랜만에 거울을 들여다보며 참빗으로 꼼꼼히 머리 빗어 쪽을 지었다. 뒤통수를 땋아 틀어 올린 후 비녀를 꽂고 나서 두향은 문밖으로 나아갔다. 촛불을 밝혀들고 행여 불어오는 바람에 촛불이 꺼질까 등롱에 담아서 장독대로 나아갔다. 장독대위에 조그만 소반을 하나 받쳐놓고 그 위에 등롱을 놓은 후 두향은 퇴계로부터 받은 정화수를 한 사발 떠서 올려놓았다. 이제 공중으로 치솟은 달은 두향의 정수리를 찌르고 있었다. 두향은 물끄러미 만월의 보름달을 쳐다보며 생각하였다. 보름달 속에는 전설 속에 나오는 대로 계수나무가 한 그루 서 있었고, 그 밑에서는 옥토끼가 먹으면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불사약을 찧고 있었다. 그 곁에는 달의 여신이 살고 있다는 선궁이 보였다. 항아(姮娥). 선궁 속에 살고 있다는 항아. 중국의 신화에 나오는 달의 여신으로 원래는 천계의 선녀였다. 그녀는 고대에 있어서 활의 명인이었던 예( )의 아내로 어느 날 남편에게 서왕모(西王母)를 찾아가 불사약을 구해오라고 재촉한다. 곤륜산 서쪽에 살고 있던 서왕모라는 여신은 불로불사약을 갖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예는 아내 항아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 서왕모를 찾아가 불로불사약인 복숭아를 얻어온다. 서왕모는 평소 용맹스러웠던 예를 좋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선뜻 복숭아 두개를 내주며 두 사람이 하나씩 나누어 먹으면 함께 불로불사할 것이며, 한사람이 욕심을 내어 두개를 먹으면 천신이 될 수 있다고 가르쳐 준다. 예는 굳이 다시 천신이 되고 싶다는 생각도 없었고, 지상에서의 생활에서도 만족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내와 더불어 하나씩 나누어 먹어 지상에서 행복하게 살아가고 싶어 하였다. 그러나 항아의 생각은 달랐다. 그래서 남편이 잠시 집을 비운 틈을 타서 천도(天桃) 두개를 한꺼번에 먹어버린다. 그리고 달 속에 있는 광한궁으로 도망쳐 버린 것이다. 이러한 신화 때문에 달의 여신 항아는 수많은 시나 소설 속에서 아름다운 여인의 상징으로 표현되고 있으며 ‘월궁항아(月宮姮娥)’란 고사성어는 절세미인을 비유해서 이르는 말로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당나라 최고의 시인 이상은(李商隱)이 지은 시속에도 다음과 같이 등장하고 있다. “운모 병풍 앞 촛불 그림자 깊어만 가고(雲母屛風燭影深) 은하수 너머 새벽별 기울어 갈 때(長河漸落曉星沈) 항아는 영약 훔친 일 후회하고 있으리(嫦娥應悔偸靈藥) 푸른 하늘 밤마다 홀로 지새우는 마음(碧海靑天夜夜心)”
  • [책꽂이]

    ●유림 4·5권(최인호 지음, 열림원 펴냄) 2500년 동양사상의 원류를 집대성한 대하소설로 지난해 1부(전 3권) 출간에 이어 2부가 나왔다.4권은 유교의 아성(亞聖) 맹자를 중심으로 순자, 묵자, 양자 등 백화제방을 다뤘고,5권은 해동공자로 불리는 이율곡의 생애를 뒤쫓는다. 집필 중인 마지막 6권은 유교의 완성자인 퇴계에 관한 이야기다. 각권 6500원. ●귀신의 시대(손홍규 지음, 랜덤하우스중앙 펴냄) 2001년 ‘작가세계’신인상을 수상하며 등단한 저자의 첫 장편소설.1인칭 서술자인 소년의 구술을 통해 노령산맥 자락 농촌마을에 얽힌 사람들과 귀신들의 개인사가 역사의 수레바퀴와 맞물려 펼쳐진다. 삶과 죽음, 신과 귀신, 욕망과 금기 등을 아우르는 저자의 독특한 상상력이 빛난다.9800원. ●창궁의 묘성(아사다 지로 지음, 이선희 옮김, 창해 펴냄) ‘철도원’‘파이란’의 일본 작가 아사다 지로가 12년간 집필한 역사소설.19세기 중국 청나라 말기를 무대로 운명에 순응하는 남자와 운명을 개척하는 남자의 엇갈린 인생행로를 보여준다. 서태후, 원세개 등 실제 인물들을 등장시켜 생생한 현실감을 살렸다. 전 4권, 각권 9000원. ●스키피오의 꿈(이언 피어스 지음, 김흥숙 옮김, 서해문집 펴냄) 로마제국 갈리아의 귀족, 중세의 시인,20세기 프랑스 고전학자 등 문명과 야만이 대립하던 시대를 살아낸 세 사람의 비극적 운명이 씨줄과 날줄처럼 엮인다.‘핑커포스트,1663’으로 역사 추리소설의 새 장을 연 저자의 방대한 스케일과 심오한 사상이 독서열을 자극한다.1만 2900원. ●마커(로빈 쿡 지음, 김청환 옮김, 열림원 펴냄) 거대 의료기업이 운영하는 병원에서 심장발작으로 사망한 청년의 시신이 검시소로 이송된다. 법의학자 로리는 시신을 부검하지만 어떤 단서도 찾아내지 못한다. 그러나 환자의 사망이 계속되자 로리는 연쇄살인의 의혹을 품는데…. 의학 추리소설의 거장 로빈 쿡의 스물다섯번째 시리즈. 전 2권, 각권 1만원.
  • 통도사 아미타여래 설법도 보물로

    통도사 아미타여래 설법도 보물로

    문화재청은 ‘통도사 아미타여래 설법도’‘여주이씨 옥산문중 소장 고문서’‘경주이씨 양월문중 소장 고문서 및 향안’ 등 3건의 문화재를 보물로 지정했다고 18일 밝혔다. ‘통도사 아미타여래 설법도’(보물1472호)는 필치가 섬세하고 유연함이 돋보이며, 통도사를 비롯한 경상도 지역의 불화제작을 주도한 화사 임한(任閑)이 제작한 이른 시기의 불화로 이른바 ‘임한파’ 화풍을 선도적으로 이끌고 있다는 점에서 자료적 가치가 큰 것으로 평가됐다. ‘여주이씨 옥산문중 소장 고문서’(보물1473호)는 회재 이언적(1491∼1553)과 관련된 고문서로, 이언적의 학문적 위상을 시사하는 유지(有旨)를 비롯, 납속(納贖)을 통해 신분적 제약에서 벗어나는 허통급첩(許通給牒) 등 문서가 사료적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됐다. 이밖에 ‘경주이씨 양월문중 소장 고문서 및 향안’에서 17세기 경주 향안은 조선시대 향촌사회의 운영질서와 체계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로 평가됐다. 문화재청은 또 국립경주박물관과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안압지 출토 금동판불상 일괄’(10점)과 옥산문중 소장 ‘퇴계 이황의 유묵 원조오잠·사산오대’를 보물로 지정예고했다. 김미경기자 chaplin7@seoul.co.kr
  • 儒林(650)-제6부 理氣互發說 제1장 相思別曲(33)

    儒林(650)-제6부 理氣互發說 제1장 相思別曲(33)

    제6부 理氣互發說 제1장 相思別曲(33) 치마폭에는 예 그대로 낯익은 나으리의 시 한수가 적혀 있었다. “死別已呑聲 生別常惻惻” 그 시는 두 사람이 헤어지기 전날 밤 하룻밤을 지새울 때 정표로 퇴계가 써준 정표였다. 그 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죽어 이별은 소리조차 나오지 않고 살아 이별은 슬프기 그지없더라.” 20여년 동안 두향은 얼마나 그 별시를 들여다보고 어루만졌던가. 마치 살아있는 나으리의 육신을 대하듯 두향이는 열자에 불과한 그 문장을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곤 하였던 것이다. 그 시는 날이 샐 무렵 두향이가 전별시를 썼을 때 그 답장으로 나으리가 치마폭에 써 주었던 두보의 시였다. 두향이가 지은 즉흥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찬 자리 팔베개에 어느 잠 하마 오리. 무심히 거울 드니 얼굴만 야위었고야. 백 년을 못 사는 우리 인생 이별만이 더욱 설워라. (轉輾寒衾夜眠 鏡中憔悴只堪憐 何須相別何須苦 從古人生未百年)” 방 안으로 스며든 월색은 더욱 교교해졌다. 그래서 굳이 촛불에 불을 밝힐 필요가 없음이었다. 두향은 자신이 보낸 치마폭 다른 여백에 새로운 시 한수가 적혀 있음을 발견하였다. 두향은 순간 가슴이 뛰었다. 나으리께서 또 다른 시 한수를 적어 주셨다. 나으리께서는 친히 운필(運筆)하시어 20여년 만에 문안인사를 보내주신 것이다. 두향은 치마폭을 펼쳐 그 내용을 읽어보았다. “서로 보고 한번 웃은 것 하늘이 허락한 것이었네. 기다려도 오지 않으니 봄날은 다 가려고 하는 구나.(相看一笑天應許 有待不來春欲去)” 예전 그대로의 필체였다. 다소 기력이 떨어지신 듯 붓은 흔들려 필체는 예전보다 가늘어지고 떨린 듯 보였으나 붓놀림은 여전하였다. 그 힘찬 붓놀림을 보자 두향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 피어올랐다. 나으리께서 무사하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으리께서는 무사하시다. 어두운 하늘에서 큰 별이 떨어지는 계속된 흉몽에도 불구하고 나으리께서는 여전하시다. 나으리께서 이승에 무사히 살아계신 것으로 보아 아직까지는 다북쑥 우거진 무덤에 함께 묻힐 때는 아닌 것이다. 그보다도. 두향의 얼굴에 가득 미소가 떠오른 것은 퇴계가 보내온 다음과 같은 시의 내용 때문이었다. “서로 한번 웃은 것 하늘이 허락한 것이었네.”
  • [’서울신문 102년-서울신문과 한국문학] 서울신문 신춘문예 56년… ‘비옥한 문단’의 밑거름으로

    [’서울신문 102년-서울신문과 한국문학] 서울신문 신춘문예 56년… ‘비옥한 문단’의 밑거름으로

    1950년 첫 당선자를 배출한 서울신문 신춘문예는 지난 56년간 한국 문단의 토양을 기름지게 한 역량있는 작가들의 산실 노릇을 톡톡히 해왔다.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유명 작가의 상당수가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문단에 발을 디뎠다. 첫해 소설 부문 당선자는 김성한(87). 단편 ‘무명로’로 등단한 그는 ‘오분간’‘암야행’‘바비도’등으로 50년대를 대표하는 소설가로 주목받았다. 역사소설에 관심이 많아 ‘소설 이성계’‘고려 태조 왕건’등을 펴냈고, 지난해에도 ‘소설 퇴계 이황’을 출간하는 등 왕성한 집필 활동을 벌이고 있다. 드라마 ‘신돈’‘명성황후’로 유명한 방송 작가 정하연(1968),‘절반의 실패’의 여성 작가 이경자(1973),‘봄날’‘그 곳에 가고 싶다’를 펴낸 임철우(1981)등도 서울신문 신춘문예 출신들이다. 90년대 이후에는 여성 작가들의 약진이 두드러졌다. 한 강(94)하성란(96)강영숙(98)편혜영(00)임정연(03)등은 근래 가장 촉망받는 여성 작가 그룹으로 손꼽힌다. 하성란은 동인문학상과 이수문학상을, 한강은 2005년 이상문학상을 수상했다. 한편 소설가 한승원의 딸인 한 강에 이어 이듬해 아들 한동림이 소설 부문에 당선돼 문단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시 부문에는 이제하(1956)장윤우(1963)문효치(1966)나태주(1971)김명수(1977), 시조 부문에는 이근배(1961)한분순(1970)등이 한국 시단의 버팀목 역할을 하고 있다. 문효치는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이사장을, 한분순은 한국문인협회 시조분과 회장을 맡고 있다. 평론 분야에서도 재능있는 인재들을 대거 배출했다. 변인식(영화·1968)김문환(연극·1969)김방옥(연극·1971)권성우(문학·1987)한기(문학·1988)하응백(문학·1991)유성호(문학·1999)등이 각 분야에서 활발한 평론 활동을 펼치고 있다. 이밖에 희곡작가 노경식(1965), 동화작가 조대현(1966)등이 원로 문인으로 활약하고 있다.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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