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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儒林(707)-제6부 理氣互發說 제2장 四端七情論 (53)

    儒林(707)-제6부 理氣互發說 제2장 四端七情論 (53)

    제6부 理氣互發說 제2장 四端七情論(53) 그러므로 퇴계의 ‘이기이원론’은 바로 주자의 ‘이기이원론’에서 파생되었지만 주자의 이기론과는 다른 특징, 즉 말을 타고 가는 사람은 목적지로 가는데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으므로 이러한 이발(理發)은 선(善)이고, 그러나 말의 의지인 기는 사람의 의지에 따르지 않으면 길을 잘 못 들기 때문에 이러한 기발(氣發)은 악(惡)이므로 마땅히 귀한 이로써 천한 기를 수양으로 다스려야 한다는 사상을 담고 있어 주자의 ‘이기이원론’보다 분명하게 이와 기를 이원화시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훗날 이러한 퇴계의 ‘이기이원론’에 대해서 율곡은 ‘퇴계의 병통은 오로지 이기호발(理氣互發)에 있으니, 참으로 애석하도다.’라고 평가하고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을 주장하였다. 율곡이 주장한 ‘이기일원론’의 요지 역시 퇴계의 ‘사람과 말’의 비유에서 비롯되고 있으니, 퇴계가 제기한 ‘사람과 말’의 유니크한 비유는 우리나라 철학사상 가장 중요한 화두가 된 셈인 것이다. 율곡은 퇴계의 비유를 다음과 같이 비평하고 있다. “…그리고 또 사람이 말을 탄 것에 비유하면 사람은 곧 성(性)이요, 말은 곧 기질이니, 말의 성질이 양순하기도 하고 난폭하기도 한 것은 기품의 성질로 인한 차이인 것이다. 문을 나설 때에는 혹 말이 사람의 뜻에 따라 가는 경우도 있고, 혹 사람이 말의 다리만 믿고 그대로 나서는 경우도 있다. 말이 사람의 뜻에 따라 나가는 경우에는 사람이 주(主)가 되는 곧 도심(道心)이요, 사람이 말의 다리만 믿고 그대로 나아가는 경우에는 말이 주(主)가 되니, 곧 인심(人心)이다. 문 앞의 길은 사물이 마땅히 가야 할 길이니, 사람이 말을 타고 문을 나서지 않았을 때에는 사람이 말의 다리를 믿을 것인지, 말이 사람의 뜻을 따를지 양쪽 다 그 단서를 볼 수 없으니, 이것은 도심과 인심이 본래에는 아무런 상대적인 묘맥(苗脈)이 없는 것과 같다.…” 율곡의 비난은 퇴계가 주장하였던 말의 몸은 문제의 대상에서 제외되고 오직 사람과 말의 의지만을 집약시킨 수양론에 대한 비판이었다. 어쨌든 문밖의 목적지로 달리는 것은 사람의 의지도 아니고 말의 의지도 아닌 말의 몸, 그 자체이므로 사람의 의지인 이와 말의 의지인 기로 이분화시키는 것은 ‘명칭과 이치를 모두 잃어버려 학설이 될 수 없음(名理俱失 不成說話矣).’이라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퇴계로부터 ‘사람과 말’의 비유로써 답장을 받았던 고봉 자신도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비유로써 반론을 제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또 한 가지 저도 말로써 비유하겠습니다. 두 사람이 각자의 있는 짐을 한 마리의 말에 함께 실어 몰고 가고 있었습니다. 그 짐이 쏠리지 않기가 어려우니 길을 가다 흔들려서 왼쪽 짐은 처지고 오른쪽 짐은 올라갈 것입니다. 동쪽 사람이 자기 짐이 떨어질까 하여 밑에서 떠받쳐 올리면 도리어 서쪽으로 기울어지게 될 것입니다. 서쪽 사람은 자기 짐을 처지게 했다고 화를 내며 다시 힘을 다해 자기 짐을 떠받치면 또 동쪽으로 처지게 될 것입니다. 계속 이와 같이 하면 그 짐은 끝내 평형을 이루지 못하고 한쪽으로 기울어져 마침내 말은 뒤집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두 사람은 마음과 힘을 합쳐 동시에 짐을 떠받쳐 올리거나 혹은 실은 짐이 한쪽으로 쏠렸으면 적당히 옮겨 싣는 것이 낫습니다.…”
  • 儒林(706)-제6부 理氣互發說 제2장 四端七情論 (52)

    儒林(706)-제6부 理氣互發說 제2장 四端七情論 (52)

    제6부 理氣互發說 제2장 四端七情論(52) 퇴계가 자신의 ‘이기이원론’을 말을 탄 사람은 이(理)로, 말을 기(氣)로 비유한 것은 어디까지나 이(理)는 귀하고 기(氣)는 천하게 보는 ‘이우위설’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즉 사람이 말을 타고 달릴 때 말이 순조롭게 의지에 순응하여 달리는 경우는 이에 기가 순응하는 것이며, 사람의 의지를 무시하며 말 스스로의 의지로 달릴 때에는 기가 이에 불응하는 것이니, 사람은 마땅히 이로써 칠정, 즉 인간의 감정을 다스려야 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음인 것이다. 이러한 퇴계의 독특한 철학은 박택지(朴澤之)에 보낸 서한에서 ‘사람의 한 몸에는 이와 기가 겸비하고 있으나 이는 귀하고 기는 천하다.(人之一身 理氣兼備 理貴氣賤)’라고 표현한 내용에서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이는 퇴계가 이기론을 인성론 계열로 수용하고 이와 기를 각각 공아(公我)와 사아(私我)에 적용하여 ‘천아무간(天我無間)’을 실현하기 위해 수양의 재료로 삼았기 때문인 것이다. 이 점이 퇴계의 이기론이 비록 주자의 이기론에서 파생된 것이지만 주자의 이기론을 한층 더 심화시킨 퇴계만의 독특한 철학사상인 것이다. 주자는 이를 만물이 갖고 있는 ‘소이연의 이(理)’, 즉 만물이 갖고 있는 원리(原理:principal)로 보고 있지만 퇴계는 이(理)는 인간이면 마땅히 갖고 있어야 할 ‘소당연의 이’ 즉, 이성(理性:reason)으로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퇴계의 이기론은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고 선언한 데카르트의 이성론을 연상시킨다. 데카르트는 모든 사람들이 태어날 때부터 평등하게 갖고 있는 이성능력을 ‘양식’, 또는 ‘자연의 빛’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이성이야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하여 예측 불가능한 혼돈의 카오스로부터 조화적인 우주의 코스모스로 전환시키는 빛이라고 선언하고 있었던 것이다. 밝은 빛인 이성에 견주어보면 칠정의 감정적 욕망이나 욕정은 어둡고 맹목적인 광기이다. 기쁨, 슬픔, 분노, 욕망, 두려움의 감정은 어둡고 비합리적인 힘으로 내부에서 폭발한 광기인 것이다. 이것을 이성적 의지로 통제하는 것이 불가능하면, 정신의 자유성을 지킬 수 없다. 여기에서 이성에 의한 감정지배에는 도덕적 문제가 발생하는데, 이것이 바로 ‘실천이성(實踐理性)’인 것이다. 퇴계의 이기론은 바로 이러한 데카르트의 실천이성론과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퇴계에 있어서 이기론은 주자가 말하였던 ‘만물이 갖고 있던 원리’이기보다는 칠정을 극복하고 사단을 확충하면 하늘과 내가 다름이 없는 ‘천아무간(天我無間)’의 성인으로 들어갈 수 있는 수양론과 일치하고 있음인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퇴계가 ‘퇴계문집´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데서 명확하게 드러나고 있다. “…그러므로 군자가 학문을 하는 것은 기질의 편법됨을 바로잡고 물욕을 막고 덕성을 높여서 대중지정(大中至正)의 도(道)로 들어가는 것이다.(君子爲學 矯氣質之偏 禦物欲 而尊德性而 歸於大中至正之道)”
  • 儒林(705)-제6부 理氣互發說 제2장 四端七情論 (51)

    儒林(705)-제6부 理氣互發說 제2장 四端七情論 (51)

    제6부 理氣互發說 제2장 四端七情論(51) 고봉의 의견을 받아들여 ‘이기겸발설(理氣兼發說)’을 수용하면서 퇴계가 예시하였던 ‘사람과 말’의 비유는 퇴계의 천재성과 유니크한 해학정신이 번득이는 명장면인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옛사람이 사람이 말을 타고 드나드는 것으로써 이가 기를 타고 움직이는 것을 비유한 것은 참으로 좋습니다. 무릇 사람은 말이 아니면 문밖을 드나들지 못하고, 말은 사람이 아니면 길을 잃게 되니, 사람과 말은 서로 따라야 하며 떨어질 수는 없습니다. 이 비유를 가리켜 어떤 이는 넓게 보아 ‘간다.’는 사실만을 말하니, 사람과 말이 모두 그 말 안에 있습니다. 사단과 칠정을 섞어서 말하는 바로 그것입니다. 또 어떤 이는 ‘사람이 간다.’는 것만 가리켜 말하니, 이 경우 말까지 아울러 말하지 않더라도 말이 같이 가는 것이니,‘사단’이 바로 그것입니다. 또 어떤 이는 ‘말이 간다.’는 것만 가리켜 말하니, 이 경우 사람까지 아울러 말하지 않더라도 사람이 같이 가는 것이니,‘칠정’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대는 제가 사단과 칠정을 나누어 말하는 것을 보고 매번 섞어서 말한 것을 인용하여 공격합니다. 이는 어떤 이가 ‘사람이 가고 말이 간다.’고 말하는 것을 보고서 사람과 말은 하나이니 나누어 말할 수 없다고 우기는 것과 같습니다. 또 제가 칠정을 기의 발현이라고 말하는 것을 보고는 이의 발현이라고 우깁니다. 이는 어떤 이가 ‘말이 간다.’하는 말을 듣고서 반드시 사람도 가야 한다고 우기는 것과 같습니다. 또 제가 사단을 이의 발현이라고 말하는 것을 보고는 기의 발현이라고 우기니, 이는 어떤 이가 ‘사람이 간다.’하는 말을 듣고서 반드시 말도 간다고 해야 한다고 우기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바로 주자가 숨바꼭질이라고 말한 것과 비슷합니다. 그렇다면 그대는 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고봉의 비판에 관한 퇴계의 비유는 절묘하다. 자신은 ‘이(理)’를 말 탄 사람,‘기(氣)’를 말로 보고 있어, 이와 기는 따로 나누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하나의 말을 함께 타고 있는 ‘뒤섞이지도 떨어지지도 않은 존재’(不雜不離)의 관계인데, 그대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말이 간다.’고 표현함으로써 칠정, 즉 기가 따로 움직인다는 것만 비난하고, 때로는 ‘사람이 간다.’고 표현함으로써 사단, 즉 이만이 홀로 움직이는 것처럼 비난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 ‘말 탄 사람이 간다.’고 표현하면 사람과 말은 하나이니,‘나눌 수 없는 존재’라고 비난하고, 넓은 의미로 그냥 ‘간다.’라고 표현하면 ‘사람과 말’은 그 말 위에 함께 있는 존재이니, 이는 주자가 일찍이 말하였던 숨바꼭질과 같은 말장난에 불과하다, 이에 대해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고 묻는 일종의 힐문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비유를 통하여 퇴계는 마침내 ‘사단은 말을 부리는 사람이고, 칠정은 말이므로 사단인 이가 드러나면 자연 칠정인 기는 사람인 이를 따를 것이요(隨), 또한 사람인 이는 칠정의 말 위에 올라 탄 것이다(乘).’라는 내용으로 된 제3의 명제를 정립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 儒林(704)-제6부 理氣互發說 제2장 四端七情論 (50)

    儒林(704)-제6부 理氣互發說 제2장 四端七情論 (50)

    제6부 理氣互發說 제2장 四端七情論(50) 주자에게 있어 이와 기는 존재를 이루는 기본구조였다. 개별적인 존재 그 자체로 볼 때 이와 기는 나누어 생각할 수 없다. 따라서 ‘이(理)라는 원리 없이 기(氣)가 있을 수 없으며, 기(氣)없이 또한 이(理)도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天下未有無理之氣 亦未有無氣之理)’라는 명제가 성립되는 것이다. 주자는 자신의 어류(語類)에서 이를 보다 구체적으로 결정짓고 있다. “이(理)가 있으면 반드시 기(氣)가 있으니, 분리해서 논할 수 없다. 모든 것이 이(理)이고, 모든 것이 기이다. 어떤 것이 이가 아닌 것이 없으며, 기가 아닌 것이 있겠는가.(在是理 必有是氣 不可分說 都是理 是氣 那箇不是理 那箇不是氣)” 그리고 주자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다. “이와 기는 분리된 적이 없다.(理未嘗離乎氣)” 고봉은 주자의 이러한 학설을 통해 퇴계의 ‘이는 기의 장수가 되고, 기는 이의 졸도가 된다.’는 퇴계의 ‘이기이원론’에 대해 통렬하게 비판을 가했던 것이다. 물론 퇴계는 고봉의 문제제기를 가볍게 여기지 않고 심각하게 받아들여 심사숙고한다. 퇴계가 얼마만큼 노심초사하였던가는 고봉에게 보낸 제2답서에서 두 사람 의견의 차이를 다섯 항목으로 나눠 그에 따른 변론을 조목조목 상세하게 해설하는 것을 통해 잘 알 수 있다. 퇴계가 설정한 다섯 항목은 다음과 같다. “첫째, 그대의 말에 본래 잘못이 없는데, 내가 착각하여 엉뚱하게 논한 것. 둘째, 그대의 편지를 받고서 내 말이 마땅치 않았음을 깨달은 것. 셋째, 그대의 편지내용이 내가 들은 것과 근본이 같아서 다름이 없는 것. 넷째, 근본이 같지만 다르게 나아간 것. 다섯째, 의견이 달라서 끝내 따를 수 없는 것.” 이 다섯 항목에 관한 퇴계의 조목별 설명은 매우 전문적이고 난해하여 일일이 전재할 수 없지만 놀라운 것은 퇴계가 고봉의 의견을 받아들여 자신이 수정하였던 ‘사단은 이에 드러남이요, 칠정은 기의 드러남이다.(四端理之發 七情氣之發)’란 명제를 또다시 다음과 같이 재수정하였다는 점이다. “사단은 이(理)가 드러나자 기(氣)가 그것을 따르는 것이고, 칠정은 기(氣)가 드러나자 이가 그 위에 올라타는 것이다.(四端理發而氣隨之 七情氣發而理乘之)” 마침내 제3의 명제를 결정지은 퇴계의 ‘이기론’을 보면 고봉의 의견을 받아들여 이와 기를 전과 같이 둘로 확실하게 나눈 것이 아니라 ‘서로 따르고(隨)’,‘올라탔음(乘)’이라는 비유를 통하여 이와 기가 동시동소(同時同所)임을 수용하였던 것이다. 즉 자신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에 고봉의 ‘이기겸발설(理氣兼發說)’을 포함하여 수용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전에는 ‘이(理)’를 장수로 ‘기(氣)’를 졸병으로 비유하여 자신의 ’이기이원론‘을 설명하였다면 이번에는 이와 기를 ‘말을 타고 가는 사람’으로 비유하여 이(理)를 말을 부리는 사람으로, 기(氣)는 말로 비유하고 있다는 점인 것이다.
  • 儒林(703)-제6부 理氣互發說 제2장 四端七情論 (49)

    儒林(703)-제6부 理氣互發說 제2장 四端七情論 (49)

    제6부 理氣互發說 제2장 四端七情論(49) 그리하여 주자는 마음이 사물에 감촉되지 않은 상태, 즉 마음의 미발(未發)을 성(性)이라 하고, 마음이 사물에 이미 감촉된 상태, 즉 마음의 이발(已發)을 정(情)이라고 규정하면서 ‘사단은 이의 발현이요, 칠정은 기의 발현이다.(四端是理之發 七情是氣之發)’라고 정의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주자가 성선설을 강조하기 위해서 맹자의 사단과 ‘예기(禮記)’의 ‘예운편(禮運篇)’에 나오는 칠정을 끌어들여 소위 ‘사단칠정(四端七情)’의 이론적 설명을 ‘이기론’으로 풀어 설명한 것은 유교를 수양의 도리로까지 확대하고 인간의 심성문제에 대해서 이론적으로 설명하기 위함이었으니, 주자는 이처럼 수평적으로 송대의 성리학을 총정리하였을 뿐 아니라 공자의 인(仁)사상과 맹자의 성선설을 수용함으로써 수직적으로도 유가사상을 총망라하였으니, 주자야말로 유교에 있어 직선, 평면, 공간에 있어서의 기준이 되는 점, 즉 좌표(座標)를 설정한 최고의 집대성자인 것이다. 그러나 막상 주자는 ‘사단칠정론’에 있어서는 구체적인 이론을 제시하지 않고 깊이 있게 다루지 않고 있었는데 ‘사단칠정론’이 특히 우리나라 성리학에 있어 최대의 쟁점으로 부각하게 된 것은 이처럼 퇴계와 고봉 간에 오간 4년간의 치열한 논쟁 때문이었던 것이다. 즉 정지운이 ‘천명구도’에서 썼던 ‘사단은 이에서 나오고 칠정은 기에서 나온다.(四端發於理 七情發於氣)’라는 구절을 퇴계가 ‘사단은 이의 드러남이요, 칠정은 기의 드러남이다.(四端理之發 七情氣之發)’라고 고쳐 쓴 내용에서 발단이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퇴계의 수정은 ‘사단은 이의 발현이요, 칠정은 기의 발현이다.(四端是理之發 七情是氣之發)’라는 주자의 명제에서 ‘시(是)’자만을 삭제한 문장이었으니, 그 문장만으로 보면 오류라고 말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고봉은 퇴계가 부연 설명하였던 ‘이(理)는 기(氣)의 장수(帥)가 되고, 기(氣)는 이(理)의 졸도(卒)가 되어 천지에 공을 이룬다.’는 문장에서 강한 의문점을 느껴 이에 대해 집중적으로 성토하였던 것이다. 고봉은 주자의 다음과 같은 말에 특히 주목하고 있었다. 일찍이 주자는 ‘주희집(朱熹集)’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었다. “이와 기는 결단코 두개의 물(物)이다. 다만 사물위에서 보면 그 둘은 나누어지지 않은 채 각각 한 곳에 있다.(所謂理與氣 決是二物 但在物上看 則二物渾淪 不可分開各在一處)” 주자의 이 말은 이와 기의 관계를 규정한 최고의 구경(究竟)이었다. 즉 이(理)와 기(氣)는 완전히 다른 두 개의 ‘결시이물(決是二物)’이지만 또한 구체적인 사물에서 보면 나누어지지 않는 ‘불가분개(不可分開)’의 관계인 것이다. 여기에서 ‘이기론’에 관한 주자의 그 유명한 명제가 성립된다. 즉 이와 기는 ‘뒤섞이는 동질의 것도 아니고, 서로 떨어져 존재하는 것’도 아닌 ‘부잡불리(不雜不離)’의 존재라는 것이었다.
  • 儒林(701)-제6부 理氣互發說 제2장 四端七情論 (47)

    儒林(701)-제6부 理氣互發說 제2장 四端七情論 (47)

    제6부 理氣互發說 제2장 四端七情論(47) 주자가 특히 정호, 정이 두형제의 ‘성리론’에서 크게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은 주자 자신이 쓴 그 유명한 ‘중화구설서(中和舊說序)’의 내용을 보면 정확히 알 수 있다. “…다시 정호와 정이, 두 정자의 책을 잡고 마음을 비우고 기운을 안정시키며 읽었는데 몇줄 읽지 않아도 마음이 얼음 녹듯 풀어지며 감정과 본성의 본래 모습과 성현의 오묘한 가르침이 이와 같이 평이하고 명백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주자는 자신의 고백처럼 정호와 정이 두형제의 ‘이기론’에서 마침내 ‘마음이 얼음 녹듯 풀어지는’ 깨달음의 경지를 얻었던 것이다. 주자는 우선 이학의 핵심적인 이(理)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원초적인 규정을 내린다. “천하의 모든 사물은 반드시 그것이 그렇게 된 원인과 그렇게 해야 하는 법칙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이 이른바 이(理)인 것이다.(至于天下之物 則必各有其所 以然之故與所堂然之則所謂理也)” 주자가 말하였던 ‘소이연(所以然)’이란 사물이 어떤 사물이 되도록 하는 내재적인 본질, 또는 원리를 가리키는 것이며,‘소당연(所當然)’은 사람의 행동 규범으로 작용하는 일종의 도덕적 규칙을 가리키는 것이다. 따라서 주자가 말하였던 ‘소이연의 이’는 만물이 갖고 있는 원리(原理:principal)를 가리키는 것이며,‘소당연의 이(理)’는 인간이면 마땅히 갖고 있어야할 이성(理性:reason)을 의미하는 것이다. 주자의 이러한 깨달음은 놀랍게도 열두 살의 소년 퇴계가 숙부 송재공에게 ‘이(理)란 무슨 뜻입니까.’하고 물었던 질문을 연상시킨다. 이때 송재공은 이 난해한 질문에 대답하기 곤란하여 ‘조용히 생각해 보라.’고만 충고하였다고 한다. 몇날 며칠을 심사숙고한 퇴계가 마침내 ‘아직 정확하게는 잘 모르겠사오나 모든 사물에서 마땅히 그래야할 시(是)를 이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라고 대답하자 ‘너의 학문은 이로서 문리(文理)를 얻을 것’이라고 크게 평가하였는데, 결과적으로 퇴계는 송재공의 예언대로 이로서 사물을 깨닫는 힘, 즉 문리가 트이게 되었던 것이다. 퇴계의 위대함은 43세 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깨달음을 얻은 주자의 이를 열두 살의 소년시절에 이미 직관적으로 감지했다는 사실이다. 즉 ‘천하의 모든 사물은 반드시 그렇게 될 원인과 그렇게 해야 하는 법칙을 갖고 있는데, 그런 것이 이른바 이라는 것이다.’라는 주자의 제일성은 결국 ‘모든 사물에서 반드시 그래야할 시, 즉 마땅한 법칙이야말로 아마도 이일 것이다.’라고 추정한 퇴계의 대답과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음인 것이다. 주자의 이에 대한 깨달음은 특히 동생 정이가 주장하였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심화 발전시킨다. 즉 ‘천지가 생겨나지 않았을 때에도 이미 존재하고 있었던 이는 산천과 대지가 사라진다 하더라도 끝까지 거기에 있을 것이며, 이 이야말로 사물을 낳는 근본이며,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실체로서의 형이상자(形而上者)인 것이다.’
  • 36.5℃의 사랑, 400㎖의 기적

    36.5℃의 사랑, 400㎖의 기적

    ”생명의 나눔, 헌혈” 간호사 김혜란 씨(22세)는 한시도 긴장을 늦출 수가 없다. 교통사고, 화상 등의 사고로 출혈이 심한 환자가 수시로 발생하는 중환자실. 수술을 해야 하는데 피가 모자라면 속수무책으로 기다려야 한다. “헌혈은 보험이에요. 언제, 어디서 저에게 무슨 일이 발생할지 모르잖아요. 제가 헌혈한 피가 누군가의 생명을 살리고 있다고 믿어요. 또 저도 언젠가 도움을 받을 수 있고요.” 이것이 그가 정기적으로 헌혈을 하는 이유다. 일단 해보는 게 중요하죠… 헌혈 “가족이 수혈을 받는다 생각하시고 솔직하게 말씀해주세요. 환자의 입장에서는 얼굴도 모르는 사람의 혈액을 받는 거니까요. 최근에 병을 앓았거나 해외여행을 한 적이 있으세요?” 회기 헌혈의 집에서 근무하는 정미옥 씨(39세)는 건강한 혈액을 공급하기 위해 문진問診을 한다. 오전 내내 한적하던 ‘회기 헌혈의 집’엔 오후가 되어서야 헌혈자들이 하나 둘 모여든다. 헌혈등록카드를 작성하고 문진을 마친 헌혈자들 사이에 유독 눈에 띄는 사람이 있다. 선글라스와 콧수염, 범상치 않은 용모의 이정완 씨(29세). 록밴드 ‘링크’에서 베이스를 치는 뮤지션이란다. 스튜디오에서 연습을 하다가 달력을 보고 헌혈할 때가 지난 것 같아 이곳을 찾았다. “예전엔 이유 없이 나 자신을 나쁜 놈이라고 생각했어요. 조금이나마 다른 사람에게 보탬이 되는 게 뭐가 있을까 고민하다 헌혈을 시작한 거죠. 지금은 습관이 돼서 안 하면 오히려 답답해요.” 대학생 이현웅 씨(25세)는 오늘이 50번째 헌혈을 하는 날이다. 만 16세 생일이 지나자마자 헌혈의 집을 찾았다가 현재까지 등록헌혈자로 활동하고 있다. 그에게 헌혈은 일석삼조의 일이다. 채혈을 통해 건강 상태를 확인하고, 다른 이에게 도움을 주며, 여가를 활용한다. 요즘엔 헌혈의 집의 시설이 개선되어 헌혈을 하면서 만화책도 보고 음료수를 마시며 쾌적한 시간을 보낼 수 있다. “처음에 왔을 땐 주사 바늘도 두꺼워 보이고, 이거 뭐 호스를 꼽나, 하는 생각에 덜컥 겁도 났어요. 근데 지금은 아주 편해서 놀러 오듯 헌혈하러 와요. 이래서 헌혈은 일단 해보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믿고 맡겨주시면 좋겠어요… 검사, 제제, 공급 회기 헌혈의 집에서 채혈된 피는 혈액 박스에 보관되어 8시간 안에 동부혈액원으로 옮겨진다. 오후 무렵 동부혈액원 검사실은 혈액 샘플 검사가 한창이다. 혈액형 검사, 매독, 에이즈, B형 간염 등 다양한 검사가 이뤄지는데, 혈액의 수명을 고려할 때 늦어도 다음날엔 결과가 나와야 한다. 몇 해 전 수혈사고가 터진 후로는 주위의 곱지 않은 시선에, 검사실의 최경진 씨(37세)는 마음고생이 많았다. “잘못한 경우에 처벌을 받기는 하지만 모든 혈액이 그런 것은 아니에요. 잠복기 혈액 검사를 보완하기 위해 핵산증폭검사NAT를 새로 도입했는데, 현행 제도에서는 가장 선진화된 방법이죠. 저희도 안전을 위해 노력하고 있으니까 믿고 맡겨주시면 좋겠어요.” 혈액 검사와 동시에 오후 4시 반부터 수혈을 위한 적혈구, 백혈병 치료를 위한 혈소판, 혈우병 환자를 위한 신선동결혈장 등으로 혈액을 분리하는 제제製劑 작업이 시작된다. 원심분리기를 통해 분리된 혈액은 공급실 냉장고에서 보관되었다가 다음날 검사 결과가 정상으로 판명되면 병원으로 나간다. 신청한 순서대로 공급되는 것이 원칙이지만 예외도 있다. 공급실의 송창면 씨(35세)는 먼저 신청한 병원에 양해를 구해 위급한 환자가 발생한 병원에 먼저 보내기도 했다. “혈액이 부족할 땐 참 곤란해요. 한번은 환자의 보호자가 여기까지 찾아와 울며불며 부탁을 하시는 바람에 여기저기서 혈액을 구해드려야 했어요. 그때 내가 하는 일이 사람의 생명과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죠.” 이것이 생명의 온기구나… 수혈 “큰 교통사고가 나서 응급 수술을 할 경우엔 많게는 20~30개(1개 400㎖) 혈액을 써요. 그땐 보호자들이 헌혈자를 찾느라 발을 동동 구르기도 하죠.” 가톨릭대학교 여의도성모병원의 한 관계자는 혈액원으로부터 필요한 혈액의 70% 정도만 제공받는 수준이라 항상 혈액이 부족하다고 말한다. 특히 혈액암 환자의 경우 조혈모세포이식을 하더라도 수술 후 2~3일에 한 번씩 혈소판을 맞아야 하는데 환자와 보호자에게는 엄청난 부담이다. 힘겨운 투병 과정, 엄청난 치료비와 더불어 혈소판을 구하는 일은 그들이 겪는 공통적인 어려움이다. 김지숙 씨(39세, 가명)는 얼마 전 골수이식을 받은 초등학생 아들의 병실을 지키고 있다. 아이의 생명줄인 혈액을 구하는 고생은 여전하다. “친구들도 두 번은 못 부르겠더라고. 한번은 아픈 아이가 자기 입으로 혈소판 구해달라고 얘기하는데 어찌나 안타깝던지….” 2개월 전 급성백혈병 진단을 받은 딸을 둔 이미숙 씨(43세)의 사정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소용없어요. 피는 공장에서 만들 수 있는 공산품이 아니잖아요. 사람이 움직여 나눌 수밖에 없어요.” 그들은 보호자 대기실에서 시름으로 누워 있다가도 낯선 사람이 찾아오거나 혈소판 얘기만 나오면 벌떡 일어나 애간장을 태운다. 이런 환자들과 보호자들의 초조한 마음을 이성원 씨(37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골수이식 수술을 받아 이제는 거의 완치된 상태지만 투병 기간의 고통을 떠올리며 백혈병 환자들을 위해 일하고 있다. 다른 사람의 골수를 받아 새 생명을 얻은 그는 사람을 바라보는 눈빛이 누구보다 진해졌다. “다른 사람의 피가 몸속으로 들어올 때의 기분은 뭐라고 표현할까요…. 몸이 화해져요. 생명이 들어오고 있구나, 느낄 때면 몸이 찌릿찌릿 놀라 움직이죠. 이것이 생명의 온기구나. 내가 다시 살아나고 있구나!” 우리나라 헌혈자 수는 최근 3년간 2003년 253만 명에서 2005년 227만 명으로 약 10.3%가 줄어들었다. 2005년 기준으로 19만 명의 등록헌혈자들이 활동하고 있으나 3만 1천여 명만이 4회 이상 헌혈에 참여했다. 2006년 8월 6일 하루, 전국 2,332명이 헌혈에 참여했다. 적혈구 농축액의 적정 재고량은 약 3만 3천여 개인데, 현재 1만 4천여 개의 재고량을 유지하고 있다. 적십자에서는 전국 16개의 혈액원과 99곳의 헌혈의 집, 107대의 헌혈 차량을 운영하며 헌혈자들을 기다리고 있다. 혈액관리본부 02-3705-3705 서울 중구 남산동 3가 32 | 서울 중앙혈액원 02-6711-0114 서울 강서구 염창동 280-17 | 남부혈액원 02-570-0600 서울 강남구 포이동 267 | 동부혈액원 02-952-0322~8 서울 노원구 상계6동 764 | 서부혈액원 02-2600-5400 서울 양천구 신월2동 472-1 | 부산혈액원 051-810-9000 부산 부산진구 전포3동 362-5 | 대구 경북혈액원 053-605-5610~18 대구 중구 달성동 147-2 | 인천혈액원 032-815-0631~4 인천 연수구 연수3동 581 | 울산혈액원 052-245-2982~4 울산 중구 성안동 872-5 | 경기혈액원 031-220-8500~7 경기 수원시 권선구 권선1동 1015-6 | 강원혈액원 033-269-1000 강원 춘천시 퇴계동 862-3 | 충북혈액원 043-253-2654~5 충북 청주시 상당구 문화동 15 | 대전 충남혈액원 042-623-2166~8 대전 대덕구 송촌동 294-6 | 전북혈액원 063-270-5800 전북 전주시 완산구 태평동 209-18 | 광주 전남혈액원 062-600-0600 광주 남구 송하동 127-4 | 경남혈액원 055-262-5161~4 경남 창원시 용호동 4-4 | 제주혈액원 064-758-3504~5 제주도 제주시 용담1동 266-1 수혈에 관한 오해와 진실 1. 혈소판, 혈장만 뽑아서 채혈할 수 있다? Yes. ‘헌혈’하면 일반적으로 일정량의 피를 뽑아내는 ‘전혈全血’만 생각하기 쉬운데 그 외에도 ‘성분채혈’이라는 것이 있다. 이는 혈장 또는 혈소판 성분을 채혈하는 헌혈을 말한다. 회복이 늦은 적혈구를 되돌려받으므로, 남성에 비해 철분 보유량이 적은 여성도 부담이 없다. 전혈보다 회복이 빨라 2주에 1번 정도 참여할 수 있다. 2. 혈액도 수입한다? Yes. 수혈용 혈액은 국내에서 헌혈을 통해 충당하고 있다. 수입하는 혈액은 의약품 제조용으로 쓰이는 ‘분획分劃용 혈장’이다. 이는 미국, 중국, 스페인 등지에서 수입하며, 화상이나 환자 회복에 사용되는 알부민, B형 감염, 혈우병 치료 등의 의약품 원료로 쓰인다. 3. 헌혈증으로 수혈 비용을 보상받을 수 있다? Yes. 병원에서 수혈받은 환자가 진료비를 계산할 때 헌혈증을 제출하면 일정한 한도 내에서 진료비를 공제받을 수 있다. 전혈 400㎖를 수혈받아 51,891원(수혈 수수료:주사료 외 3개 검사료 포함)을 내야 할 경우, 헌혈증 1매에 대한 보상 한도는 건강보험 적용을 제외한 본인 부담금 20%이므로 10,378원이 된다. 4. 수혈 1순위는 사고로 인한 대량 출혈이다? No. 헌혈 혈액제제 사용량 상위 10개의 질병을 알아보면, ‘급성 백혈병’이 42%로 전체 사용의 절반 가까이 차지한다. 이어 림프 및 비非급성 백혈병 15%, 각종 암 13.5%, 간 질환 9.5%, 외과 수술 7.5%, 적혈구 질환 6.9%, 기타 질병 3.6%, 위장관 출혈 2% 순이다. 내가 헌혈 부적격자라고? 누구나 한 번쯤 헌혈을 하러 갔다가 미처 생각지도 못한 이유로 허탕치고 돌아온 경험이 있을 것이다. 아쉬움이 채 가시기 전에 드는 당황스러움. ‘내가 헌혈 부적격이라니. 이렇게 건강한데?’ 헌혈을 할 수 없는 몇 가지 사례를 뽑아보았다. 1. 한약을 복용 중인데 이것도 헌혈할 때는 제약사항입니다. 치료를 목적으로 복용한다면 치료 중인 질환이 완치되어야 헌혈이 가능하고요, 단순히 보약 목적이라면 복용 중단 후 1주일 정도 지나 헌혈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윤주 _ 대전 유성구 신성동 2. 치과 치료 중에는 헌혈을 못 한대요. 발치, 스케일링, 치주염, 신경치료 등 구강 내 출혈이 있는 경우 병원균이 피를 타고 들어가 몸의 다른 부위에 염증을 일으킬 수 있다는군요. 진료 후 3일 이상 지나거나 완치될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정인숙 _ 서울 관악구 봉천동 3. 대학생이 되고 기분이 좋아 귀를 뚫었거든요. 착한 일까지 하고 싶어 태어나 처음으로 헌혈의 집을 찾았는데 한 달간 헌혈 보류래요. 혈액으로 인한 감염 예방을 위해서라는데. 얼른 상처가 아물었으면 좋겠어요. 장원미 _ 경기 여주시 여주읍 4. 올 1월에 한 달간 인도로 배낭여행을 다녀왔거든요. 전혈 헌혈은 1년 후에야 할 수 있대요. 인도가 말라리아 감염 지역이라는 우려 때문이죠. 만약 감염 예상지에서 한 달 이상 숙박했다면 귀국 후 3년이 지나야 헌혈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두세요. 이종환 _ 서울 강북구 수유동 믿음의 헌혈, 편리한 수혈 1. 안전성 확보 - 믿음을 줘야 헌혈하러 가지! 우리나라의 헌혈과 수혈 체계는 질적인 개선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나 여전히 미흡한 편이다. 일부 부적격 혈액의 출고로 인한 감염사고 반복으로 혈액사업에 대한 국민의 불신과 불안감은 계속되고 있다. 수혈 사고로 인해 헌혈 참여자까지 줄어들어 자발적인 개인 헌혈보다는 군인, 학생 등의 단체 헌혈이 많은 후진적인 채혈 관행을 유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2005년엔 헌혈자 227만 명 중 절반이 넘는 120만 명이 단체 헌혈자였는데, 단체 헌혈의 경우 문진이 형식화되어 감염 위험자의 사전배제가 어렵다. 현재 적십자에서는 등록 헌혈제를 권장하고 헌혈의 집 시설을 개선하며 자구책을 모색하고 있다. 여기에 덧붙여 잠복기 혈액의 유입을 사전 방지하는 철저하고 체계적인 문진이 시행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질병관리본부와 적십자사가 함께 혈액유보군을 관리하는 시스템이 정착되어야 하는 것도 시급한 문제다. 2. 혈소판 논쟁 - 환자가 직접 피를 구하라고요? 지난 7월 26일, 국회에서는 ‘혈소판 성분제제 공급부족 해소를 위한 토론회’가 열렸다. 백혈병 환자의 치료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혈소판 수혈을 위해 환자 및 보호자가 직접 헌혈자를 구하는 어려움이 반복되고 있기 대문이다. 혈소판이 부족한 것은 근본적으로 헌혈자가 부족하다는 문제 외에도 적십자사와 병원의 문제이기도 하다. 적십자사는 혈액수가가 낮다는 이유로 적극적인 혈소판 공급을 꺼리고 있다. 병원도 적십자사의 공급이 부족하고, 보존기간이 짧아 미리 확보해놓기 어렵다며 환자에게 직접 혈소판을 구해오라고 요구하고 있다. 한국백혈병환우회 안기종 사무국장은 “피값을 내는 환자와 보호자가 직접 피까지 구해야 하는 것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보기 힘든 일이다”라며 환자와 보호자가 투병과 간병에 전념할 수 있도록 적십자사와 병원이 적극적인 대책을 내놓을 것을 요구했다. 월간<샘터>2006.09
  • [부고]

    ●정병학(전 한중우호협회회장)씨 별세 황(세븐일레븐코리아 대표)형(단국대 교수)훈(치과원장·대한턱관절협회 회장)씨 부친상 황선희 오미선(경희대 교수)이주영 신해경(에버텍 대리)씨 시부상 20일 서울아산병원, 발인 22일 오전 8시 (02)3010-2230●손진환(사업)충환(정보통신부 사무관)범상(사업)현주(경향신문 섹션편집부 차장)씨 부친상 20일 충남 태안군 보건의료원, 발인 22일 오전 10시 (041)671-5203●이유근(서울우유유통 이사)씨 상배 20일 고대안암병원, 발인 22일 오전 8시 (02)921-2899●이원규(쌍용건설 상무)씨 모친상 김애란(서울동천학교 교사)씨 시모상 고부정(영남목재 대표)한학희(매트릭스2B 〃)임순규(삼성전기 부장)씨 빙모상 20일 서울아산병원, 발인 22일 오전 9시 (02)3010-2631●이인한(비앤엘바이오텍 대표)씨 부친상 유기열(효성에바라엔지니어링 자원순한사업팀 차장)김동진(부산대 교수)씨 빙부상 20일 삼성서울병원, 발인 22일 오전 6시30분 (02)3410-6902●원대재(천호펌프 부장)덕재(남양주시 퇴계원초등학교 교사)씨 모친상 안중균(삼승전기 대표)황성규(우미건설 현장소장)씨 빙모상 20일 서울아산병원, 발인 22일 오전 6시 (02)3010-2294●변기업(CJ케이블넷 대리)씨 모친상 20일 삼성서울병원, 발인 22일 오전 6시30분 (02)3410-6903●윤의웅(KN네트웍 고문)의국(고려신용정보 회장·신용정보협회 회장)의권(한나라당 청주상당지구당 위원장)씨 모친상 최기용(대신증권 부전동지점장)김송규(대신증권 총무부장)씨 빙모상 19일 삼성서울병원, 발인 21일 오전 9시 (02)3410-6920●김대원(국민은행 부동산금융부 차장)성관(금강G&P 대표)효정(한울태권도 관장)씨 부친상 19일 서울아산병원, 발인 21일 오전 10시 (02)3010-2292●김창한(코리아RB증권 대표)광한(사업)원한(대한광학 대표)씨 부친상 20일 부산 동아대병원, 발인 22일 오전 6시 (051)256-7011●전용하(전 한국대한도검사업장 대표)씨 별세 대경(아이앤오커퓨니케이션 CEO)씨 부친상 20일 삼성서울병원, 발인 22일 오전 8시30분 (02)3410-6918
  • 儒林(694)-제6부 理氣互發說 제2장 四端七情論(40)

    儒林(694)-제6부 理氣互發說 제2장 四端七情論(40)

    제6부 理氣互發說 제2장 四端七情論(40) 스승 이연평에 대한 주자의 첫인상은 다음과 같이 이어지고 있다. “…나는 도리어 연평선생이 아직 이것(禪)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의심을 품고 재삼 질문을 드렸다. 연평선생은 사람됨이 간명하고 중후하였으나 말씀은 그다지 잘 하지 못하셨고 단지 성현의 말씀을 보라고만 하셨다. 나는 마침내 저 선을 잠시 놓아두고자 하였다. 마음 속으로 선을 또한 그대로 있다고 생각하면서 성인들의 책을 읽어나갔다. 읽고 또 읽기를 하루하루 더해가면서 성현들의 말이 점점 맛이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문득 머리를 돌려 석씨(釋氏:석가)의 설을 살펴보니 점점 파탄이 일어나고 갖가지 결함이 드러났다.” 주자의 이러한 고백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주자가 이연평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아마도 사상적 방황에서 쉽사리 헤어 나오지 못하였을 것이며, 또한 주자철학이 잉태되었던 시점이 바로 이연평을 만난 순간과 일치되고 있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24세 때 젊은 주자가 직접 찾아가서 이연평을 만났을 때와는 달리 이후부터 두 사람은 주로 서신을 통해 대화를 나누게 된다. 1557년 주자의 나이 28세 때 시작된 이 문답은 1162년 주자의 나이 33세, 이연평의 나이 71세 때까지 계속된다. 7년 동안 계속된 서신과 만남 끝에 주자는 마침내 근무하고 있는 무이(武夷)를 찾아온 스승 이연평을 본 순간 스승의 임종이 임박했음을 직감적으로 꿰뚫어 보게 된다. 그 순간 주자는 스승이 숨을 거두기 전에 함께 나누었던 대화와 서신들을 한데 묶어 책으로 저술할 결심을 하고 서둘러 집필하였는데, 이 책의 이름은 ‘연평답문(延平答問)’. 7년간에 걸쳐 지속된 청년 주자와 노년의 이연평 간의 대화와 편지는 신유학의 역사상 가장 중요한 대사건으로 불리며 주자가 저술한 ‘연평답문’은 신유학에 있어 중요한 고전으로 일컬어지게 된다. 이 7년의 시간은 청년 주자가 이연평을 통하여 자신 이전의 신유학자들이 펼친 치열한 사유의 핵심을 접하는 한편 그것을 자신의 체계 속에 편입시키기 위해서 암중모색하던 정신적 할례기였던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27세의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젊은 제자 주자에게 보낸 스승의 애정이 너무나 절절하고 주자와의 대화 역시 치밀한 사유에서 우러나온 것임을 느끼게 하는데, 이는 정호와 정이 형제로부터 양시, 나종언 그리고 이연평 자신에게 이어지는 신유학의 전통, 즉 도남학의 전통이 끊어질까 노심초사하고 있던 상황에서 비로소 그 전통을 이어줄 큰 그릇인 주자를 만났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연평답문’에는 바로 그런 이연평의 초인적인 노력이 깃들어 있다. 퇴계와 고봉 두 사람이 13년 동안 백여 통이 넘는 편지를 주고받은 후 특히 4년 동안이나 ‘사단칠정’에 관해서 치열한 논변을 벌인 것 역시 공교롭게도 27살의 나이 차이가 나는 청년 주자와 이연평 사이에 오고간 대화를 기록한 ‘연평답문’의 전례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닮은 꼴 행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 儒林(693)-제6부 理氣互發說 제2장 四端七情論(39)

    儒林(693)-제6부 理氣互發說 제2장 四端七情論(39)

    제6부 理氣互發說 제2장 四端七情論(39) 그 당시 과거에 급제하면 대체로 일생동안 편히 먹고살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주자는 학문에 전념한다.19세에 진사시에 합격하여 71세에 생애를 마칠 때까지 여러 관직을 거치기는 했지만 약 9년 동안만 현직에 근무하였을 뿐 그 밖의 관직은 학자에 대한 일종의 예우로서 반드시 현지에 부임할 필요가 없는 명목상의 한직이었기 때문에 학문에 전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학문에 대한 집념이 주자를 대학자로 만들었다. 그는 주로 도교사원을 관리하는 사록(祠祿)을 선호하였다. 이 자리는 명예직이기 때문에 자기 시간을 학문에 할애할 수 있었으며, 따라서 정신을 딴 데 팔지 아니하고 학문에 전념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주자가 학문에 눈을 뜬 계기는 좋은 스승을 만난 것. 주자는 평생 동안 학문적 완성을 이루는 여건으로 좋은 스승과 친구, 그리고 제자들을 만났었던 행운아로 알려져 있는데, 그중에서도 24세 때 이연평(李延平)을 만난 것은 결정적인 계기였다. 아버지의 유언으로 호적계, 유백수 그리고 유병산의 스승을 만나서 가르침을 받았으나 그 가르침은 불교와 노자에 관한 내용에 불과하였었다. 따라서 주자는 15세의 어린나이 때부터 불교의 선학에 심취하여 당대 최고의 선벌이었던 도겸(道謙)스님으로부터 선문답을 주고받은 후 ‘주자의 선은 소소영명(昭昭靈明)하다.’라고 인증을 받을 만큼 선의 천재였던 것이다. 이러한 주자의 선학에 대한 관심은 24세 때 이연평을 만나 가르침을 받을 때까지 거의 10년이 넘게 계속되고 있었다. 이연평은 이통(李)이라고 불리는 당대의 노유학자로 주자보다 27년이나 연상이었다. 아이로니컬한 것은 격렬한 사단칠정 논변을 벌인 퇴계와 고봉의 나이차이도 26년이었으니, 이통과 주자의 만남은 이퇴계와 고봉의 만남을 연상시킬 정도로 쌍둥이처럼 닮아 있다는 점일 것이다. 이연평은 송대 유학의 시조라고 할 수 있는 정호(程顥)의 제자 양시(楊時)로부터 유학을 배운 나종언(羅從彦)에게서 양시계열의 도남학(道南學) 학풍을 이어받은 거유였다. 주자와 이연평의 만남이 중요한 이유로는 바로 그가 북송시대 이래 도학이란 이름으로만 전해오던 신유학의 내밀한 전통이 깃든 깊은 고뇌와 에센스를 청년주자에게 그대로 이식시켜 주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24세 때 이연평을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주자는 ‘인간이 아집으로부터 벗어난다면 모든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운 완성자로서 부처가 될 수 있고, 인간이 아집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잠재성이 오직 불성(佛性)뿐’이라는 불교철학에 깊이 빠져있었으며, 이 불성을 깨닫는 법은 오직 선이라는 불교적 방법에 집착하고 있었던 불자였다. 주자는 자신의 참스승이었던 이연평과 처음 만났을 때의 장면을 ‘주자어류(朱子語類)’를 통해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그 뒤에 동안(同安)에 부임했을 때 내 나이 24.5살이었다. 처음 연평선생을 뵙고 선(禪)에 대해서 말씀드렸다. 그러나 연평선생은 다만 그것이 옳지 않다고 말했을 뿐이었다.…”
  • 儒林(692)-제6부 理氣互發說 제2장 四端七情論(38)

    儒林(692)-제6부 理氣互發說 제2장 四端七情論(38)

    제6부 理氣互發說 제2장 四端七情論(38) 그러나 송재공은 퇴계의 밝은 얼굴에서 뭔가 한소식 하였음을 꿰뚫어 보았다. 그래서 다시 묻는다. “그래도 뭔가 얻은 것이 있을 터인데.” 그러자 퇴계는 대답하였다. “아직 정확하게는 잘 모르겠사오나 모든 사물에서 마땅히 그래야할 시(是)를 이(理)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퇴계의 이 대답에 평소엔 조금도 칭찬하거나 기뻐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던 엄격한 송재공도 크게 기뻐하면서 ‘너의 학문은 이로서 문리(文理)를 얻은 것’이라고 크게 평가하였다고 ‘퇴계언행록’은 기록하고 있는데, 어쨌든 12살의 퇴계가 ‘이를 모든 사물이 마땅히 그려야 할 시’로 깨달은 것은 성리학에 대해 초견성을 한 것이며, 평생을 두고 거경궁리해야 할 화두를 점지받은 것이었다. 주자가 죽은 것은 1200년, 그로부터 정확히 300년 후인 1501년 12월, 퇴계가 태어났으니, 두 사람은 비록 300년의 시간과 공간의 차이는 있지만 ‘저 높은 하늘 위에는 무엇이 있습니까.’라는 질문에서부터 깨달은 주자의 ‘이’와 ‘마땅히 그래야할 시를 이’로 초견성한 퇴계의 ‘이’라는 공통된 바톤(baton)을 들고 수천 년의 유가적 계주에서 뜀박질을 하였던 위대한 사상가들이었던 것이다. 퇴계가 그 릴레이 계주에서 돋보이는 것은 그가 주자로부터 바톤 터치하여 유림의 숲이 끝나는 골인지점인 종착점까지 뛰었다는 점 때문일 것이며, 퇴계가 유림의 완성자라고 불린 것은 결승점을 통과하여 테이프를 끊은 실질적인 유가의 마지막 주자였기 때문일 것이다. 어쨌든 주자는 1546년, 아버지의 친구였던 유면지(劉勉之)의 딸과 16살의 어린 나이로 결혼을 한다. 주자는 부인과의 사이에 세 명의 아들과 다섯 명의 딸을 두었다고 한다. 이처럼 많은 자식들을 둘만큼 부부의 가정생활은 화목했지만 그의 부인은 주자보다 일찍 죽는다. 주자는 부인이 병들자 매우 비통해 하였다고 한다. 아내가 죽자 그는 손수 묘자리를 쓴다. 흔히 주자를 신안(新安) 주씨라고 하는데, 신안은 주자의 조상이 살던 무원( 源:지금의 안후이성)의 옛 지명이다. 우리나라의 신안 주씨는 주자의 증손 잠(潛)이 고려 때 건너와서 성씨를 이룬 것에서부터 비롯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주자의 나이 14살 되던 해 아버지 주송은 세상을 떠난다. 주송은 세상을 떠나면서 호적계(胡籍溪), 유백수(劉白水), 유병산(劉屛山) 등 세 사람의 스승을 찾아가 학문을 배우라는 유언을 남긴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주자는 어머니를 모시고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스승 유병산이 머무르고 있는 오부리(五夫里)에 집을 마련하고 그곳에서 50년간 머물렀는데 그곳에서 주자는 유백수의 딸을 아내로 삼아 가정을 이루는 한편 학문에 몰두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19세의 나이로 주자는 과거에 급제한다. 278등으로 그리 좋은 성적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상당히 이른 나이에 과거에 급제하였던 조숙한 수재였다.
  • 儒林(691)-제6부 理氣互發說 제2장 四端七情論(37)

    儒林(691)-제6부 理氣互發說 제2장 四端七情論(37)

    제6부 理氣互發說 제2장 四端七情論(37) 따라서 주자에게 있어 ‘이(理)’는 만물이 생겨나기 전부터 있었으며, 또한 만물이 사라진 후에도 홀로 살아남아 있는 형이상자(形而上者)였으며,‘이(理)’는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을 뿐 아니라 일체의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사물을 낳는 근본을 이루는 형이상자였던 것이다. 주자는 ‘만약 산천과 대지가 사라진다 하더라도 이(理)는 끝까지 거기에 있는 것이다.’라고 말함으로써 이(理)야말로 시작도 끝도 없는 무시무종(無始無終)의 영원한 초월적 존재임을 주창하였던 것이다. 주자의 이러한 태도는 마치 예수의 제자 요한이 자신의 복음서의 첫머리를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하느님과 똑같은 분이셨다.…모든 것은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고, 이 말씀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생겨난 모든 것이 그에게서 생명을 얻었으며,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라고 표현한 사실을 연상시킨다. 예수의 제자 요한이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말씀이 계셨다.’고 기록하였다면 공자의 제자 주자는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이(理)가 있었다.’고 기록하였던 것이다. 또한 요한복음이 ‘…모든 것은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고 이 말씀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처럼 주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천지 사이에는 이(理)가 있고 기(氣)가 있다. 이라는 것은 형이상의 도이며, 사물을 낳는 근본이다. 기라는 것은 형이하의 기(器)이며, 사물을 낳는 바탕이다. 그러므로 사람과 사물이 생겨남은 반드시 이(理)를 품부(稟賦) 받은 후에 성(性)이 있게 된다. 그리고 반드시 이 기를 품부 받은 후에 형체가 있게 된다.” 요한이 ‘모든 우주만물이 말씀으로 생겨났다.’고 기록하고 있다면 주자는 ‘이는 형이상의 형상(形相)을 제공하고 기는 형이하의 질료(質料), 즉 육체를 제공함으로써 생겨난다.’고 기록하고 있음인 것이다. 그러므로 훗날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이전부터 이가 있었다.’는 진리를 깨달은 주자가 어린나이 때 아버지 주송에게 ‘그렇다면 하늘 위에는 무엇이 있습니까.’라고 근원적인 존재론적 질문을 던졌던 것은 주자를 미화시키려는 후세의 조작이 아니라 엄연한 사실이었을 것이다. 이는 퇴계의 경우에도 마찬가지가 아니었던가. 아버지 주송에게 질문을 던졌던 주자의 나이와 거의 비슷하였던 12살 무렵, 어느 날 퇴계는 숙부 송재공 이우(李隅)로부터 글을 배우다 마침내 큰 의혹에 사로잡혀 다음과 같이 묻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이(理)’자의 뜻이 무엇입니까.” 이때 송재공은 당황하여 이 난해한 화두를 어린 퇴계에게 일일이 설명할 것인가, 말 것인가 하고 고민하다가 ‘조용히 생각해 보라. 생각을 조용히 해 보아라.’고만 대답하지 않았던가. 몇날 며칠을 골똘히 궁리하는 퇴계의 모습을 지켜본 송재공은 며칠 후 찾아온 퇴계에게 다음과 같이 묻는다. “그래 무엇을 깨달았느냐.” 이에 퇴계는 대답한다. “너무 어려워 아직 아무것도 깨닫지는 못하였습니다.”
  • 儒林(689)-제6부 理氣互發說 제2장 四端七情論(35)

    儒林(689)-제6부 理氣互發說 제2장 四端七情論(35)

    제6부 理氣互發說 제2장 四端七情論(35) 고봉이 ‘천명도설’을 구해보고 크게 의문점을 가졌던 것은 정지운의 학설을 수정하여 강조한 퇴계의 ‘사단은 이의 드러남이고 칠정은 기의 드러남이다.(四端理之發 七情氣之發)’란 열자의 문장이었다. 특히 ‘이(理)는 장수요, 기(氣)는 졸병’이니, 어디까지나 경(敬)을 중심으로 하는 수양으로 ‘이로써 기를 선하게 다루어야 한다.’는 퇴계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에 대한 강력한 의문점을 제기하였던 것이다. 우선 고봉은 ‘모든 현상은 이와 기로 이루어져 있다.(理氣不相離)’는 성리학의 기본 전제에 퇴계의 명제가 어긋나고 있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퇴계는 이와 기를 이분화함으로써 이와 기를 병립관계로 대치시키고 있다고 고봉은 본 것이었다. 고봉은 ‘모든 현상은 이와 기로 이루어져 있는데, 어찌 형이상학적인 이가 형이하학적인 기의 현상세계에 스스로 드러낼 수 있겠는가.’라고 반문하면서 이와 기는 퇴계가 생각하듯 장수와 졸병의 종속관계나 혹은 병행관계가 아니라 포함관계(因說)이므로 이분화될 수 없음을 문제제기하였던 것이다. 또한 만약 퇴계의 ‘사단은 이의 드러남이요, 칠정은 기의 드러남이다.’라는 명제가 옳다면 사단은 ‘기 없는 이’가 되어 ‘이는 죽은 물건(死物)’이 될 것이며, 칠정 역시 ‘이 없는 기’가 되어 ‘죽은 물건’이 될 수밖에 없다는 모순점을 지적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퇴계와 고봉 사이에 벌어진 이른바 ‘사칠논변’은 명종14년(1559년)부터 시작되어 명종17년(1562년)까지 치열하게 계속되었다. 퇴계의 나이 59세 때부터 시작되어 62세 때에 이르기까지 두 사람의 논쟁은 고봉으로부터 3회의 편지와 퇴계로부터 3회, 도합 6회의 논쟁으로 꼬박 4년간이나 전개되었던 것이다. 주자를 신봉하는 같은 성리학자이면서도 퇴계와 고봉, 두 사람 사이에 4년간이나 전개된 논변은 후세의 이른바 ‘주리론(主理論)’과 ‘주기론(主氣論)’의 사상적 대립을 이끌어낸 발단이 되었고, 퇴계의 ‘이기이원론’과 율곡의 ‘이기일원론’을 탄생시킨 분수령이 됨으로써 한국철학의 발전에 주춧돌을 놓는 커다란 발자취를 남기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퇴계와 고봉 두 사람 사이에 오간 ‘사단칠정론’의 실체는 과연 무엇인가. ‘사단칠정론’은 성리학의 기본명제인 ‘이기론(理氣論)’에서부터 비롯된 것. 그렇다면 ‘본성이 곧 이(性卽理)’를 주장함으로써 유학에 있어 새로운 사상체계였던 주자학 최대의 성과인 ‘이기론’을 제창하였던 주자, 그는 도대체 어떤 사람이었던가. 기존의 유학에서 주장하였던 ‘무극(無極)’과 ’태허(太虛)’를 곧 이(理)로, 음양과 오행(五行) 그리고 만물을 곧 기(氣)로 해석함으로써 우주론에서 인성론으로 회귀를 제창하여 ‘이기이원론’을 완성하였던 주자는 도대체 어떤 사람이었던 것일까. 또한 주자를 모든 학자가 ‘도(道)로 들어가는 문’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어디까지나 주자에, 주자에 의한, 주자학의 적자였던 퇴계를 낳은 주자는 도대체 어떤 인물이었던 것일까.
  • 儒林(688)-제6부 理氣互發說 제2장 四端七情論(34)

    儒林(688)-제6부 理氣互發說 제2장 四端七情論(34)

    제6부 理氣互發說 제2장 四端七情論 (34) 물론 퇴계 자신도 후서에서 ‘비록 그것이 오류가 있는지 없는지는 알 수가 없으나 우리의 소견이 미칠 수 있는 데까지는 온 힘을 다하였다.’라고 어느 정도 자신의 미비한 점을 인정하고는 있었다. 따라서 고봉이 발견한 오류는 오류(誤謬)라기보다는 일종의 의문점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처음에 정지운은 ‘천명구도’에서 ‘사단은 이(理)에서 나오고, 칠정은 기(氣)에서 나온다.’라고 표현함으로써 ‘四端發於理 七情發於氣’라고 결론을 내렸다. 이처럼 ‘천명도설’에 있어서 ‘이기론(理氣論)’은 매우 중요한 명제였다. 총 10절로 구성되어 있는 ‘천명도설’은 결국 ‘천즉리야(天卽理也)’라는 주자의 철학을 도형으로 형상화시킨 것이다. 그러므로 ‘하늘이 곧 이치’라는 주자철학의 근본을 주제로 삼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퇴계가 수정한 ‘이기론’에 관한 다음과 같은 구절이었다. “천지간에 이가 있고 기가 따른다. 이가 있으면 곧 기가 조짐하고 기가 있으면 곧 이가 따른다.( 有理便有氣朕焉 有氣便有理從焉)” 그리고 나서 퇴계는 이 난해한 명제를 다음과 같은 쉬운 비유로 설명하고 있었다. “이는 기의 장수(帥)가 되고, 기는 이의 졸도(卒)가 되어 천지에 공을 이룬다.” 퇴계의 이 비유는 ‘이는 곧 기를 부리는 장수요, 기는 이를 따르는 졸병’이기 때문에 ‘이가 기를 주재하고 기는 이에 순종한다.’는 뜻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는 그 자체로는 선할 수밖에 없으며, 기는 이의 부림을 받음으로써 이의 주재(主宰)에 따라 선할 수도 있고 악할 수 있으니, 사람은 마땅히 경(敬)을 중심으로 하는 수양으로 기(氣)를 다스리고 이(理)를 궁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퇴계는 ‘하늘이 사람에게 천명을 내릴 때 기(氣)가 아니면 이(理)를 붙어있게 할 곳이 없고, 이 마음(心)이 아니면 이와 기를 붙어 있게 할 곳이 없다. 그러므로 마음은 허리(虛理)하고 영기(靈氣)하여 이·기의 집(寓居)이 되는 것이다.’라고 주장하고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주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퇴계가 볼 때에는 정지운이 주장하였던 ‘사단은 이에서 나오고 칠정은 기에서 나온다.’라는 규정은 지나치게 단순명료하여 잘못하면 큰 오류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명제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퇴계는 이 부분을 다음과 같이 정정하여 발표하였다. “사단은 이에 드러남이요, 칠정은 기의 드러남이다.(四端理之發 七情氣之發)” 문구의 표현은 다를지 모르나 이와 기가 서로 호발(互發)하는 근원이 된다는 내용상의 의미는 같다. 그러나 퇴계는 도덕적 이상이 드러나서 이발(理發)이 되고, 욕망이나 감정이 드러나서 기발(氣發)이 된다는 사실을 강조하여 규정하였던 것이다.
  • 儒林(687)-제6부 理氣互發說 제2장 四端七情論(33)

    儒林(687)-제6부 理氣互發說 제2장 四端七情論(33)

    제6부 理氣互發說 제2장 四端七情論(33) 퇴계의 우려는 사실이었다. 정지운의 스승 모재(慕齋:김안국)와 사재(思齋:김정국) 두 사람은 모두 퇴계 자신도 존경하고 있었던 당대의 성리학자들이었다. 두 사람은 모두 조광조가 주장하였던 지치주의(至治主義)를 바탕으로 ‘정치의 도는 경천(敬天)과 근민(勤民)에 있다.’고 강조함으로서 정치개혁에 힘썼던 대학자들이었는데, 두 사람 모두 정지운이 퇴계를 만나 ‘천명도설’의 수정을 부탁하였을 무렵에는 죽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살아생전 두 스승의 질정을 받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천명도설’이 크게 사우들에게 잘못 전해지고 있는 것은 퇴계의 걱정대로 사문(師門)에 큰 누를 끼치는 불미스러운 일이었던 것이다. 퇴계가 이런 우려를 표시하자 정지운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였다. 이에 대한 기록이 ‘천명도설’ 후서에 다음과 같이 이어지고 있다. “그러자 지운은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제 자신도 오래 전부터 근심해온 일입니다. 가르쳐 주시면 허심탄회하게 받아들이겠습니다.’ 이리하여 나는 드디어 ‘태극도’ 및 제자의 설을 인증하면서 어떤 것은 잘못이니 고쳐야 하겠고, 어떤 것은 불필요하니 버려야 하겠고, 어떤 것은 모자라니 보태야할 것 같은데 어떠냐고 지적해 물었다. 지운이 즉석에서 좋다 하고 조금도 꺼리는 기색이 없었다. 다만 나의 말이 온당치 못한 것이 있을 때에는 반드시 극력 변난(辯難)하여 지당한 결론에 이르고야 마는 것이었다.…” 퇴계 자신이 쓴 후서의 내용을 보면 ‘천명도설’이 비록 정지운이 초고를 썼으나 나중에는 퇴계의 자문을 받고 퇴계의 고친 의견을 적극 수렴하여 완성된 합작품임이 명백하게 드러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후서의 결말에 퇴계가 다음과 같이 마무리를 지음으로써 명백히 드러나고 있다. “…수개월이 되더니 지운이 고친 그림과 그 부설(附設)을 가지고와서 나에게 보이므로 우리는 다시 서로 의견을 교환하여 조정하면서 그림을 완성시켰다. 비록 그것이 과연 오류가 있는지 없는지는 알 수 없으나 우리의 소견이 미칠 수 있는데까지는 온 힘을 다하였다.…” 퇴계의 자술을 통해 ‘천명도설’은 퇴계와 정지운, 두 사람이 ‘서로의 의견을 교환하여 조정하면서 그것을 완성’시킨 합작품이며,‘우리의 소견이 미칠 수 있을 때까지는 온 힘을 다하였던’ 공동명의의 저작품임이 분명히 드러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비록 정지운의 저술이긴 하지만 당대 최고의 거유 퇴계의 인증을 받은 ‘천명도설’은 그 무렵 유생들에게는 센세이셔널한 최고의 화제작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화제작을 전남 나주에 살고 있던 기고봉이 비록 촌생원이라 할지라도 놓칠 리가 없었던 것이다. 전해오는 기록에 의하면 고봉이 ‘천명도설’을 처음으로 접한 것은 과거를 보기 위해서 한양으로 향하다가 도중에 김인후와 이항과 같은 대학자들을 만나서 태극도설을 비롯한 여러 성리학에 관한 주제에 관해서 토론을 나누다가 우연히 ‘천명도설’을 얻어 보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결론적인 것이지만 열혈청년 고봉은 이 ‘천명도설’을 본 순간 대학자 퇴계의 오류를 직관하게 되는 것이다.
  • 儒林(686)-제6부 理氣互發說 제2장 四端七情論(32)

    儒林(686)-제6부 理氣互發說 제2장 四端七情論(32)

    제6부 理氣互發說 제2장 四端七情論(32) 그러나 정지운이 지은 ‘천명도설’과 퇴계의 의견을 따라 수정한 ‘천명신도’에 관한 내용은 그 무렵 유학자 사이에 지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당대의 유학자들은 거의 모두 이 책을 구해 통독하는 한편 이에 대해 치열한 논쟁을 벌이고 있었던 것이다. 퇴계 자신도 ‘천명신도’가 나오기까지의 경위를 후서(後序)에 다음과 같이 상세하게 자술하고 있다. “…나는 벼슬하면서부터 한양 서성문(西城門) 안에 우거한 지 전후 20년이 되어도 이웃에 사는 정지운과 면식도 내왕도 없었다. 하루는 질자(姪子) 교가 ‘천명도’라는 것을 구해 와서 나에게 보이는데, 그 그림과 학설이 자못 틀린 데가 있었다. 그래서 교에게 ‘이것은 누가 그린 것이냐.’하고 물으니, 모르겠다 하였다. 그 뒤 수소문하여 비로소 그것이 정지운에게서 나온 것임을 알게 되었다. 이에 사람을 시켜 정지운에게서 본도(本圖)를 구해보고 다시 지운을 만나보려고 몇 차례 왕복걸음을 한 뒤에야 만나게 되었다.” 그러고 나서 퇴계는 자신과 정지운 두 사람 간에 오간 주요한 내용에 대해 다시 다음과 같이 부연 설명하고 있다. “…나는 지운에게 물었다. ‘지금 이 그림이 교가 전한 것과 다른 것은 무슨 까닭인가.’ 지운은 대답하였다. ‘전에 모재(慕齋:김안국), 사재(思齋:김정국) 두 선생 문하에서 공부할 때 그 서론을 듣고 물러나와 사제(舍弟)와 더불어 종지를 강구하였으나 성리가 미묘한 까닭에 정확히 알 수 없어서 시(試)하여 주자의 설을 취하고 제가의 설을 참고로 하여 하나의 그림을 그려 보았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모재 선생께 가서 질의하였더니, 선생께서는 잘못이라고 꾸지람하시지 않고 그것을 책상머리에 놓아두시고 여러 날을 골몰히 생각하셨습니다. 착오된 곳이 없는가 물으니 오래 더 연구해 보지 않고 함부로 이야기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간혹 배우려고 찾아오는 사람이 있으면 이것을 내보이고 이야기를 해 주는 일도 있었습니다. 이윽고 다시 사재 선생께 질의해 보았으나 역시 책망하시는 일이 없었습니다. 이것은 양 선생께서 후진을 달래어 나아가게 하는 뜻이요, 그 그림이 잘 되어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때 동문생들이 이것을 베껴 가지고 사우(士友)들 간에 전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 뒤에 잘못된 것을 깨닫고 고쳐 놓은 곳도 많았습니다. 이것이 전후가 달라진 이유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초고를 확정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부끄러움을 금치 못하지만 원컨대 정정하여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지운의 말을 듣고 나는 대답하였다. ‘양 선생이 함부로 시비를 논하지 않음은 물론 깊은 뜻이 있어서 그런 것이겠지만 오늘날에 있어서 우리들이 학문을 강구하면서 타당치 못하다고 생각되는 점이 있으면 어찌 그대로 두고 남을 따르거나 잘못을 그대로 변명만 하고 시비를 가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물며 사후 간에 전해진 것이 이미 양 선생의 시정을 받은 것임에도 여전히 착오가 있음을 면치 못했다면 사문에 누됨이 또한 크지 아니한가.’”
  • [Seoul in] 퇴계로 등에 태극기·구기 24시 게양

    중구(구청장 정동일) 활기차고 생동감있는 특화거리 조성을 위해 퇴계로와 을지로 등 4곳에 태극기와 구기를 24시간 상시 게양한다. 태극기와 구기는 도로 가로등 양면에 가로 배너걸이 형태로 설치된다. 설치 지역은 퇴계로(광희문∼매일경제), 다산로(청계8가∼버티고개), 배오개길(을지로4가∼퇴계로4가), 을지로(을지로 5가∼한양공고) 등 4곳이다.
  • 儒林(685)-제6부 理氣互發說 제2장 四端七情論(31)

    儒林(685)-제6부 理氣互發說 제2장 四端七情論(31)

    제6부 理氣互發說 제2장 四端七情論(31) 퇴계의 편지는 다음과 같이 이어지고 있다. “…그래서 그것을 다음과 같이 고쳐 보았습니다. ‘사단(四端)의 발현은 순수한 이(理)인 까닭에 선하지 않음이 없고, 칠정(七情)의 발현은 기(氣)와 겸하기 때문에 선악이 있다.’ 이처럼 고치면 괜찮을지 모르겠습니다.…(중략)… 처음 만나면서부터 견문이 좁은 제가 박식한 그대에게서 도움을 받은 것이 많았습니다. 하물며 서로 친하게 지낸다면 도움됨이 어찌 이루 말할 수 있겠습니까. 헤아리기 어려운 것은 한 사람은 남쪽에 있고, 한 사람은 북쪽에 있어 이것이 더러는 제비와 기러기가 오고 가는 것처럼 어긋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달력 한 부를 보내 드립니다. 이웃들의 요구에 따를 수 있을 것입니다. 드리고 싶은 말씀이 참 많습니다만 멀리 보낼 글이기에 줄이겠습니다. 오직 이 시대를 위해 더욱 자신을 소중히 여기십시오. 삼가 안부를 묻습니다. 기미년(1559년) 정월 5일, 황은 머리를 숙입니다.” 퇴계의 편지는 이처럼 고봉의 논박을 듣고 나서 ‘사단칠정’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수정한 내용이 골자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사단칠정론. 그렇다면 고봉은 퇴계의 ‘사단칠정론’에 대해서 어떻게, 무엇을 공격하였음일까. 퇴계와 고봉사이에 벌어졌던 우리나라 철학사상사에 있어 최고의 논쟁인 ‘사칠논변(四七論辯)’은 어떻게 시작되었음일까. 이 논변의 시작은 정지운(鄭之雲)이 지은 ‘천명도설(天命圖說)’에서부터 비롯된다. 정지운은 중종4년(1509년)에 태어나 명종16년(1561년)에 죽은 조선중기의 학자로 퇴계보다 10년 가까운 연하의 후학이었다. 자는 정이(靜而), 호는 추만(秋巒)이었다. 일찍이 김정국(金正國) 밑에서 수학하다가 김안국(金安國)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연구하였던 유학자였다. 그는 1537년 주희의 ‘성리대전’에 나와 있는 천명(天命)과 인성(人性)의 관계를 도표로 표시하고 거기에 문답을 더하여 ‘천명도설’이란 책을 저술하였다. 두 스승에게 질정(質正)을 구하였으나 인가를 받지 못하게 되자 정지운은 1543년 서문까지 써 두었음에도 미완성이라 생각하고 이를 집에 보관해 두면서 계속 수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후 명종8년(1553년) 퇴계를 만나게 되자 정지운은 ‘천명도설’을 퇴계에게 보여준 후 틀린 부분이 있으면 이를 가차없이 수정해 줄 것을 청원하였다. 이때 퇴계는 정지운의 청을 받아들여 그가 쓴 내용을 수정하였는데, 수정한 중요한 부분이 바로 ‘사단칠정’에 관한 내용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정지운이 처음 지었던 ‘천명도설’은 ‘천명구도(天命舊圖)’라고 불리게 되었고 퇴계의 의견을 좇아 수정한 내용은 ‘천명신도(天命新圖)’라고 부르며 비로소 목판본으로 간행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후 정지운은 천마산에 유람갔다가 돌아오는 도중에 숨을 거뒀는데, 이로써 그가 남긴 ‘천명도설’은 그의 대표적인 유작이 되었다.
  • 儒林(684)-제6부 理氣互發說 제2장 四端七情論(30)

    儒林(684)-제6부 理氣互發說 제2장 四端七情論(30)

    제6부 理氣互發說 제2장 四端七情論(30) 퇴계가 고봉에게 쓴 첫 번째 편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병든 몸이라 문밖을 나가지 못하다가 덕분에 어제는 마침내 뵙고 싶었던 바람을 이룰 수 있어 얼마나 다행이었는지요. 감사하고 부끄러운 마음이 아울러 깊어져 비할 데가 없습니다. 내일 남쪽으로 가신다니 추위와 먼 길에 먼저 몸조심하십시오. 덕을 높이고 생각을 깊이 하여 학업을 추구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만 줄이며 이황이 삼가 말씀드렸습니다.” 퇴계와 고봉사이에 오간 100여 통이 넘는 편지 중 첫 번째인 퇴계의 편지는 이처럼 단순히 문안 인사만을 나눈 엽서(葉書)형식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에 격렬한 ‘사단칠정논변’의 발단은 해가 바뀐 기미년(1559년) 정월 5일, 퇴계가 고봉에게 두 번째의 편지를 쓴 것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아마도 퇴계는 직접 찾아온 고봉으로부터 이의를 제기받고 해가 바뀌는 세밑에 두문불출하며 이 문제에 대해 골똘하여 심사숙고하였던 것처럼 보인다. 두 번째의 편지 내용은 다음과 같다.“기정자(正子:교서관, 홍문관, 승문원 등의 하급 관리인 정9품의 벼슬을 가리킨다. 이 용어로 보아 고봉은 최초로 권지승문원부정자란 벼슬의 길에 들어선 것처럼 보인다.)의 안부를 묻습니다. 헤어진 뒤로 한동안 소식을 듣지 못했는데, 어느덧 해가 바뀌었습니다. 어제 박화숙(朴和叔)을 만나 다행히 그대가 부탁한 편지를 전해 받았습니다. 애타게 기다리던 마음에 매우 위안이 되었습니다. 영예롭게 돌아온 뒤로(과거에 급제한 뒤 부모를 만나러 다녀온 사실) 몸가짐과 마음가짐이 나날이 더욱 귀하고 풍성해졌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겉으로 처지가 바뀔수록 안으로 더욱 반성하고 보존함은 모두가 덕에 나아가고 어짐(仁)을 익히는 경지이니 그 즐거움에 끝이 있겠습니까. 저는 언제나 갈 곳을 몰라서 부딪치는 일마다 잘못되고 병은 깊어져 고질이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임금의 은혜는 거듭 더해졌습니다. 정성을 다해 벼슬에서 벗어나기를 빌었습니다만 모두 쓸데없었습니다. 공조(工曹)가 비록 일이 없다고는 하지만 어찌 병을 다스리는 곳이겠습니까(퇴계는 1558년 12월에 공조참판이 되었다.) 그래서 물러갈 것을 꾀하지 않을 수 없으나 이처럼 소득이 없습니다. 게다가 주변에서는 오히려 물러나지 않는 것이 옳다고 여깁니다. 처세의 어려움이 이에 이르렀으니 어찌하겠습니까.” 이처럼 일상적인 다정한 안부와 올바른 처신에 대한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은 퇴계는 마침내 편지를 보낸 중요한 이유인 ‘사단칠정론’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해명하기 시작한다. “…지난번에 비록 만나고 싶었던 바람을 이루기는 했어도 한순간의 꿈과 같이 짧아서 의견을 깊이 물을 겨를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오히려 기쁘게 들어맞는 것이 있었습니다. 또 선비들 사이에서 그대가 논한 ‘사단칠정’의 설을 전해 들었습니다. 저는 이에 대해 스스로 전에 말한 것이 온당하지 못함을 근심하고 있었습니다만, 그대의 논박을 듣고 나서 더욱 잘못되었음을 알았습니다.…”
  • 儒林(683)-제6부 理氣互發說 제2장 四端七情論(29)

    儒林(683)-제6부 理氣互發說 제2장 四端七情論(29)

    제6부 理氣互發說 제2장 四端七情論(29) 퇴계가 임금 선조에게 고봉을 ‘성리학을 깊이 연구해서 그 견해가 유학에 정통하다.’라고 서슴없이 추천하였던 것은 일찍이 두 사람 사이에 오간 격렬한 논쟁에 따른 결과 때문이었다. 우리나라 유학이론의 발전에 있어서 하나의 분수령이 된 퇴계와 고봉간의 논쟁은 이른바 ‘사단칠정논변’이라고 불린다. 이는 유학이론의 발전에 있어 분수령이 된 논쟁이었을 뿐 아니라 우리나라 역사상 일찍이 볼 수 없었던 철학적인 대격돌이었던 것이다. ‘사단칠정논쟁’을 줄여서 ‘사칠논변(四七論辯)’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 논쟁 역시 고봉이 퇴계에게 먼저 강력한 의문점을 제기함으로써 점화되었던 대사건이었다. 만약 고봉의 이러한 이의제기가 없고 강력한 도전이 없었더라면 퇴계는 그의 대표적 사상인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정립하지 못했을 만큼 퇴계에 있어서 고봉과의 만남은 운명적인 해후였던 것이다. 두 사람의 격렬한 ‘사칠논변’의 발단은 고봉이 32세 때인 명종13년 가을, 과거를 보기 위해 서울로 올라왔다가 마침 서울에 와있던 퇴계를 찾아가 대뜸 논쟁을 던진 것으로 시작되었다. 이미 고봉은 서울로 올라가는 길에 큰 학자로 이름이 높았던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와 이항(李恒)을 잇따라 만나 ‘태극도설’을 비롯한 성리학의 중요한 주제들을 놓고 격론을 벌일 만큼 열혈청년이었는데, 퇴계는 그해 겨울 식년 문과 을과에 장원급제하였으나 아직 서생에 불과하였던 고봉이 나이가 26살 차이가 났으나 물리치지 않고 하나의 대학자로서 존중해 주었던 것이다. 고봉은 편지에 자신이 고백하였던 대로 ‘거친 성정’을 가진 사람이었으므로 퇴계를 만나자마자 퇴계가 주장하였던 ‘사단칠정론’에 대해 직격탄을 날린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퇴계는 손자 제자뻘에 해당되는 고봉의 직격탄에 대해서 열린 자세로 받아들였다. 이러한 사실은 고봉이 다녀간 다음날 퇴계가 고봉에게 쓴 편지에 자상하게 나타나고 있다. 두 사람 사이에 오고간 100여 통이 넘는 편지 중의 제일 먼저 시작된 편지가 고봉이 아니라 퇴계로부터 비롯된 사실은 ‘만약 배울 것이 있으면 세 살 난 어린아이에게도 배울 것이다.’라는 참된 유자로서의 태도를 엿보게 하는 명장면이며,‘세 사람이 길을 가면 그중에는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 그들에게서 좋은 점은 가려서 따르고 옳지 못한 점은 거울삼아 고치기 때문이다.’라는 공자의 가르침을 따른 감동적인 장면인 것이다. 두 사람 사이에 오간 최초의 편지는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기선달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편지를 씁니다.” 퇴계가 쓴 선달(先達)이란 용어는 문무과에 급제하였으나 아직 벼슬하지 아니한 사람을 가리키는 명칭으로 이를 보아 알 수 있듯이 그 무렵 고봉은 과거에는 장원급제하였으나 아직 벼슬에 오르지 않은 백면서생에 불과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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