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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反FTA 또 도로점거 교통마비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저지 범국민운동본부(범국본)가 경찰의 집회 불허 방침에도 불구하고 6일 ‘FTA반대 제3차 총궐기 대회’를 강행했다. 큰 충돌이나 폭력사태는 빚어지지 않았지만 도로를 점거한 시위대들로 이날 서울 도심 퇴근길은 극심한 교통체증에 시달렸다. 범국본의 집회는 이날 오후 3시30분부터 50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대학로 마로니에공원 앞에서 열렸다. 앞서 열린 민주노동당의 ‘비정규직법 통과 규탄대회’가 끝나자 곧바로 이어졌다. 민노당의 집회는 경찰의 허가를 받았기 때문에 민노당원은 물론 범국본 시위 참가자들도 경찰의 아무런 제지를 받지 않았다. 참가자들은 마로니에 공원 앞 4차선 도로를 점거하고 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FTA협상이 망국적이고 굴욕적인 양상을 보이고 있다.”면서 “미국의 협박이 상식을 넘어선 지금 협상을 진행할 이유가 없다.”고 주장했다. 참가자들은 오후 4시20분쯤 대학로 집회를 마치고 지하철 등을 이용해 각각 흩어졌다. 개별적으로 해산한 시위대는 오후 5시가 지나 을지로와 충무로, 퇴계로 등에 각각 1000여명씩 모여들었다. 이들은 모두 명동성당 방면으로 행진하면서 진행방향 도로를 완전 점거했다. 도로 점거는 퇴근 시간대까지 이어지면서 서울 도심의 교통은 극심한 정체현상을 보였다. 시위대는 명동역 앞에서 경찰과 20∼30분 대치한 뒤 모두 명동성당으로 이동해 오후 7시부터 10시까지 촛불 시위를 벌였다. 경찰은 명동역 앞 대치과정에서 경찰에게 폭행을 가한 28명을 연행했다. 경찰 관계자는 “퇴근 시간 도심 도로를 불법 점거하도록 한 범국본 지도부에 대해 법적 책임을 반드시 물을 것”이라고 밝혔다. 한편 경찰은 농민들의 상경 집회 등을 막기 위해 전국 고속도로 13곳과 주요 간선도로 등 1070곳에 경찰 177개 중대 2만여명을 배치했다. 이 과정에 불법시위용품 13종 316점을 회수했고,2100여명의 상경을 저지했다고 밝혔다.김기용기자 kiyong@seoul.co.kr
  • 儒林(745)-제6부 理氣互發說 제4장 儒林(2)

    儒林(745)-제6부 理氣互發說 제4장 儒林(2)

    제6부 理氣互發說 제4장 儒林(2) 나는 지친 발길을 터덜거리며 북부에서 뻗어 내린 공로(公路)를 따라 걸었다. 이 공로는 원래 곡부성 안으로 통하는 주작대로였고, 옛날부터 신도(神道)라고 불렸듯 신성한 통로였다. 길 양편에는 수백년이 되었을 법한 고백(古柏)들이 열병식을 올리듯 늘어서 있었다. 신도 중간에는 여섯 개의 기둥으로 이루어진 석비방(石碑坊)이 세워져 있었다. 기둥 아래로는 용과 봉황, 기린, 사자들이 정교하게 여러 가지 형태로 조각되어 있는 오문비방(五門碑坊)이었는데, 그 중간에는 ‘만고장춘(萬古長春)’이란 네 글자의 액자가 걸려 있었다. 그 액자의 문자를 따 ‘장춘방(長春坊)’이라고도 부르는 그 석비를 본 순간 나는 지친 걸음을 멈추고 잠시 새삼스러운 감회에 젖어 들었다. 만고장춘(萬古長春). 편액에 걸린 내용대로 ‘세상에 유례가 없을 만큼 긴 꿈’. 만고에 영원히 이어갈 만한 길고 긴 꿈. 2500여년 전, 바로 이곳에서 태어난 공자가 이루어낸 동양철학의 골수 유교는 어쩌면 한바탕의 길고 긴 꿈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공자가 이뤄낸 한바탕의 꿈, 유교는 여전히 사라지지 아니하고 동양정신의 위대한 유산이 되었으며, 마침내 우리나라에 이르러 조광조를 비롯한 경세가들에게는 왕도정치의 근본이 되었고, 이퇴계를 비롯한 사상가들에게는 서양철학과 맞설 수 있는 유일무이의 동양적 가치관으로 정립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편액을 본 순간 나는 물먹은 솜처럼 무거운 무게로 짓눌러 오는 피로감의 정체를 밝혀낼 수 있었다. 그렇다. 공자의 무덤인 공림으로 가기 위해서 터덜거리며 걷고 있던 내가 지친 것은 어제부터 공묘와 공부를 들러 최종 목적지인 공림으로 가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짧은 공간이동에 지나지 않는다. 지난 3년간 나는 공자에 의해서 창시된 유교가 어떻게 맹자와 주자를 거쳐 형이상학적으로 발전되었는가, 그 2000년의 궤적을 추적하였으며, 마침내 그 유가사상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조광조를 비롯한 정치가들에게는 통치이념으로, 또한 해동공자 이퇴계에 이르러서는 메타피직(metaphysics)화 되어 어떻게 논리적으로 완성될 수 있었는가 하는 그 과정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던 것이다. 이제 3년여에 걸친 그 추적은 마침내 공자의 무덤인 공림을 참배하는 것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되는 것이다. 공림은 내게 있어 공간이동의 종착점일 뿐 아니라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을 역주행하였던 2500년에 걸친 시간이동의 꼭짓점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므로 공자의 무덤이 있는 공림에 들러 공자를 참배하는 것은 내게 있어 한없는 세월(萬古)의 오랜 과거로부터 시작되어 온 유가의 긴 꿈(長春)에서 벗어나 현실로의 눈을 뜨는 공양미 300석과 같은 순례행위인 것이다.
  • 儒林(743)-제6부 理氣互發說 제3장 君子有終(24)

    儒林(743)-제6부 理氣互發說 제3장 君子有終(24)

    제6부 理氣互發說 제3장 君子有終(24) 꺼져가던 불길은 두향이가 저고리 깃을 집어넣자 한순간 다시 불꽃이 일고 이내 모든 것이 타올라 한줌의 재가 되었다. 두향은 타고 남은 재를 남한강의 푸른 물속에 집어넣었다. 노을이 비낀 강물은 핏빛으로 물들고 한줌의 재는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강물 속으로 어지러이 흩어졌다. 이제는 모든 것을 정리하였으므로 더 이상의 미련이 남아있지 않았다. 두향은 궤연 옆에 놓여있던 치마를 펼쳐 입었다. 그 치마에는 퇴계가 생전에 써주었던 전별시가 적혀 있음이었다. “죽어 이별은 소리조차 나오지 않고 살아 이별은 슬프기 그지없더라. 서로 보고 한번 웃은 것 하늘이 허락한 것이었네. 기다려도 오지 않으니 봄날은 다 가려하는구나.” 20여 년 만에야 완성된 나으리의 전별시. 두향은 강선대 위에서 잠시 서편 하늘에서 타오르는 석양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나으리의 시를 소리내어 읊어보았다. 오래지 않아 두향은 치마폭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리고 천천히 발을 굴러 바위 아래로 떨어졌다. 흩날리는 낙화처럼 포물선을 그리며 두향의 몸이 강물 속으로 내리꽂혔다. 전해오는 소문에 의하면 이틀 후에야 두향의 시신이 강물 위로 떠올랐다고 한다. 나룻배를 젓는 뱃사공이 두향의 시신을 발견하였고, 마을 사람들은 그제서야 초당으로 달려가 보았는데, 방안에는 짧은 유서 한 장만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남한강이 내려다보이는 강선대 위에 묻어주십시오.” 다음날인 3월21일. 마침내 퇴계의 유해는 건지산( 芝山)에 묻혔다. 이때의 기록이 퇴계선생연보에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3월21일. 예안현(禮安縣) 건지산( 芝山) 남쪽 줄기 자좌(子坐) 오향(午向) 언덕에 장사지냈다. 장례에는 원근의 사대부와 유생 300여 명이 참석하였다. 그리고 국장의 감역관(監役官)으로는 귀후서(歸厚署) 별좌(別坐) 김호수(金虎秀)가, 그리고 가정관(加定官)으로는 빙고(氷庫) 별좌 김취려(金就礪)와 예빈사(禮賓寺) 별좌 최덕수(崔德秀)가 명령을 받고 내려와서 장례의 제반사를 맡아서 처리하였다.” 퇴계의 장례를 치르던 날. 퇴계가 그토록 애지중지하던 매형에서 눈부신 매화가 피어났다. 원래 매화꽃은 동지로부터 날짜를 세기 시작하여 81일째에 해당되는 대충 3월12일 무렵에 피어나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이상하게도 퇴계의 장례가 끝나는, 그보다 열흘이 지난 계춘(季春)에야 뒤늦게 꽃이 피어난 것이었다. 그것도 어느 순간 한꺼번에 극채색의 아름다움을 폭발하여 단숨에 피어난 것이었다. 흰 매화꽃에서는 천진한 옥설의 방향(芳香)이 뿜어 나와 주인이 사라진 도산서당 안을 가득 채웠다고 전해지고 있다.
  • 우리 선조들의 생활건강비결

    우리 조상들은 약재보다는 자연 치유력을 더 믿었다. 또 병이 생기기 전에 미리미리 예방하는 방법도 중요시했다.하지만 지금 이런 방법들이 모두 비과학적이라는 핀잔을 듣는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꼭 비과학적이랄 것도 없다.어찌보면 수백, 수천년 동안 임상시험을 거쳐 온 동양의 이런 사고방식은 서구의학보다 더 과학적일 수 있다. 역사 전문 채널 히스토리채널이 이를 들춰본 자체제작 다큐 ‘역사탐험, 한민족 생활건강사’ 4부작을 준비했다. 1부 ‘자연의 원리를 찾다’는 민간의학을 다뤘다. 독일에서는 민간의학을 최첨단 의학과 접목하려 들지만, 우리의 경우 이런 데 대한 저항감이 아직 강하다. 우리 조상들은 주변에 흔히 널린 물·흙·풀·나무를 어떻게 다뤘을까. 제2부 ‘자연을 생활 속으로’는 집과 옷을 다룬다.‘우리 옷’과 ‘우리 집’의 재료와 구조, 그리고 역사를 되돌아본다. 아토피나 환경호르몬 문제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진 요즘 우리 옷과 집은 어떤 해답을 줄 수 있는지 물어본다. 조선 중기 양반 가문의 전형적 주택양식인 ‘구례 운조루’를 살펴보고, 한복 디자이너 이효재씨의 설명에 따라 천연 염색과 옷감이 건강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알아본다. 제3부 ‘몸과 마음을 우주로 열다’는 심신수련법을 다룬다. 일상생활 속에서 우리 조상들은 어떻게 몸과 마음을 다스렸을까. 조선시대 퇴계 이황이 보급시킨 선비들의 심신수련법인 ‘활인심방’, 강철 같은 몸을 만들어 몸의 모든 기맥을 뚫으면 내면세계까지 열린다는 민족 고유의 산중무예 ‘기천문’, 자연과 소통하는 고궁의 매력을 만난다. 또 시대에 따른 심신수련법의 변천과정도 따라가본다. 제4부 ‘음식이 보약이다’는 ‘밥상이 곧 약상’이라는 우리 전통식단의 건강법에 대해 알아본다. 최근 들어 급속하게 고평가되고 있는 우리 음식은 수천년 역사가 낳은 지혜의 산물이자 미래의 건강법임을 보여준다. 김치와 각종 장류는 물론, 나물의 조리법을 과학의 눈으로 접근한다. 또 늘 먹는 밥을 영양학적으로 분석했다. 이 프로그램은 30일까지 오전 8시, 오후 4시 두 차례씩 방송된다.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儒林(742)-제6부 理氣互發說 제3장 君子有終(23)

    儒林(742)-제6부 理氣互發說 제3장 君子有終(23)

    제6부 理氣互發說 제3장 君子有終(23) 해가 바뀌어 이듬해 봄 3월 20일. 마침내 나으리를 위한 백일기도가 끝난 후 두향은 마지막으로 궤연 앞에서 거문고를 타며 노래 불렀다. “즐겁도다, 언덕에 숨어사는 삶은 큰 사람의 한가로운 마음일러라. 홀로 잠자고 홀로 노래하니, 그 기쁨 이에서 지나침이 없으리.” 그러고 나서 두향은 퇴계의 신주와 거문고를 들고 강선대로 나아가 불을 질렀다. 어느덧 다사로운 봄이 찾아와 겨우내 꽁꽁 얼어붙었던 강물은 해빙이 되어 와랑와랑 소리를 내며 흘러내리고 있었다. 타오르는 불꽃 속에 두향은 나으리의 신주를 태우고 거문고마저 집어넣었다. 이제 이승에서는 다시 노래 부를 기회가 없었으므로 두향은 망설이지 않았다. 맹렬하게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거문고와 신주는 참따랗게 타버리고 재만 남았다. 두향은 다시 집으로 들어가 장롱 깊이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었던 세모꼴의 옷섶을 꺼내들었다. 그것은 두향이가 입고 다니던 갑사저고리에서 베어 잘라낸 깃이었다. 이십여 년 전. 헤어지기 전날 밤, 두향은 상원사의 동종을 얘기하면서 나으리께 할급휴서(割給休書)를 요구하지 않았던가. 안동호부의 남문루에 있던 동종이 세조의 명으로 왕가의 원찰이었던 상원사로 운반될 당시 죽령고개에 이르러 꼼짝도 하지 않았던 고사를 통해 두향은 자신을 그 동종에 비유하면서 자신의 젖꼭지를 베어 달라고 나으리께 청원하지 않았던가. 500여명의 호송요원과 100필의 말이 동원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죽령고개에 이르러 꼼짝도 하지 않던 동종.36개의 유( )로 불리는 유두에서 운종도감이 젖꼭지 하나를 베어내자 그제서야 움직이기 시작하였던 고사의 예를 들어 두향이도 나으리께 하늘과 땅이 갈라지기 전에 이어진 천겁의 인연을 끊기 위해서는 젖가슴 하나를 베어달라고 청하지 않았던가. 그때 나으리는 은장도로 두향이가 평소에 입고 다니던 갑사저고리의 깃을 베어내었다. 두향은 울면서 ‘나비’라고 불리던 세모꼴의 접어진 깃을 두 손으로 받으며 이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나으리께오서 저고리의 깃을 자르시면 이것으로 인연이 다된 것을 알겠나이다. 상원사 동종에서 잘라낸 젖꼭지를 남문루에 파묻고 제사지냈듯 소첩도 이 저고리 깃을 나으리와 함께 지내던 강선대 바위 밑에 파묻으오리다. 그리하여 마침내 다북쑥 우거진 무덤에 함께 묻힐 것이나이다.” 이제야말로 나으리께 약조하였던 내용을 지킬 때가 되었다. 다북쑥 우거진 무덤에 함께 묻힐 그때가 다가온 것이다. 다북쑥 마을이 의미하는 대로 이 지상의 황촌(荒村)에서는 나으리와 영원히 만날 수 없을 것이므로. 두향은 타오르는 불빛 속에 그 저고리 깃마저 집어넣었다.
  • 儒林(741)-제6부 理氣互發說 제3장 君子有終(22)

    儒林(741)-제6부 理氣互發說 제3장 君子有終(22)

    제6부 理氣互發說 제3장 君子有終(22) 이튿날 아침. 두향과 여삼은 다시 안동을 출발하였다. 어차피 장례에는 참여할 형편이 못 되었으므로 서둘러 집으로 돌아와 제사를 지낼 심산이었다. 다행인 것은 선조가 특별히 영의정의 벼슬을 추증하고 국장으로 거행할 것을 어명으로 내렸으므로 퇴계의 장례는 의정예법에 따라 이듬해 3월 임오(壬午)일에야 거행되는 것이었다. 임오일이라면 이듬해 3월25일. 정확히 퇴계가 숨을 거둔 날로부터 100일째 되는 날이었다. 기록에 의하면 맏아들 준은 돌아가신 아버지의 유명을 따라서 임금에게 두 번이나 상소를 올려 국장을 사양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선조는 단호히 이를 윤허하지 않았다. 선조는 봉명사신(奉命使臣)으로 승정원의 유홍(兪泓)을 직접 보내어 치제(致祭)케 함으로써 자신이 직접 회장(會葬)하지는 못하였지만 퇴계의 넋을 극진히 모셨던 것이다. 두향은 집으로 돌아오자 곧 초당에 궤연(筵)을 꾸몄다. 퇴계의 영위를 차리고 그 곁에 생전에 퇴계가 두향에게 정표로 써준 치마폭을 개어 놓았다. 두향은 그 신주 앞에 아침저녁으로 상식(上食)을 올리고 머리를 풀고 곡을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두향은 거문고를 들고 궤연 앞에서 연주를 하면서 노래를 불렀다. 퇴계와 헤어진 후 단 한번도 손에 들지 않았던 거문고였다. 지금도 남아 있는 묘비에 새겨져 있듯 두향은 거문고의 명인. 그러나 퇴계와 헤어진 후 두향은 의식적으로 거문고를 멀리하지 않았던가. “즐겁도다. 산 속에 숨어사는 삶은 큰 사람의 너그러운 모습일러라. 홀로 잠자고 홀로 말하니, 그 깊은 뜻 길이 잊지 말거라.” 두향이가 궤연 앞에서 거문고를 뜯으며 불렀던 노래는 공자가 편찬한 시경에 나오는 ‘고반(考槃)이란 시. 생전에 퇴계가 각별히 좋아하던 노래였다. 철저하게 산과 언덕, 그리고 물가에 숨어 사는 군자의 은둔생활을 찬미하고 있는 이 노래는 퇴계가 단양의 군수로 있을 무렵 강선대에서 함께 노래하고 듣던 애창곡이었으며, 실제로 퇴계는 단양 군수를 끝으로 고향으로 돌아가 서당을 짓고 자신의 손으로 ‘고반’을 완성하였던 것이다. “즐겁도다. 물가에 숨어 사는 삶은 큰 사람의 유연한 모습일러라. 홀로 잠자고 홀로 밤을 새우니, 그 즐거움 남에게 알려 무엇하리.” 어느덧 세월이 흘러 두향의 얼굴은 잔나비처럼 중늙은이의 모습으로 변하였으나 사랑하는 사람을 부르는 두향의 만가(輓歌)는 여전히 맑고 청아하였다. 퇴계를 위한 두향의 진혼곡은 이듬해 봄까지 계속되어 단 하루도 그침이 없었다고 한다.
  • 儒林(740)-제6부 理氣互發說 제3장 君子有終(21)

    儒林(740)-제6부 理氣互發說 제3장 君子有終(21)

    제6부 理氣互發說 제3장 君子有終(21) 그러한 모습을 본 여삼은 동네 사람들에게 물어 돌아가신 사람이 누구인가를 확인해 보았다. 물어보나 마나 틀림없는 퇴계였다. 퇴계의 죽음을 알리는 흰옷들이 온 동네의 지붕 위에 펄럭이고 있었던 것이다. 두향은 여삼에게 나으리께서 언제 돌아가셨는가를 알아봐 달라고 부탁하였다. 여삼은 다시 동네 사람들에게 물어보았는데, 신기하게도 경오년 12월8일, 돌아가신 시각은 유시초였다. 12월8일이라면 닷새 전. 두향이가 낮잠 속에서 밤하늘에서 떨어지는 유성을 치마폭으로 받았던 바로 그날이 아닐 것인가. 그뿐인가. 돌아가신 시각이 유시라면 동이 속에 들어 있던 정화수가 핏빛으로 변한 사실을 발견했던 바로 그 순간이 아닐 것인가. 두향과 여삼은 곧 도산서당에 도착하였다. 빈소가 마련된 서당 주위에는 울긋불긋한 만장(輓章)들이 깃발처럼 나부끼고 있었다. 제자들의 기록에 의하면 이때 나부낀 만장에는 ‘나를 낳은 사람은 부모이지만 나를 가르친 사람은 선생이셨다.(生我父母 敎我先生)’,‘선생으로부터 입은 은혜는 천지간에 망극하다.(欲報之恩 天地罔極)’라는 내용의 제문(祭文)들이 쓰여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는 관포지교(管鮑之交)로 유명한 관중(管仲)이 훗날 자신과 우정을 나눴던 포숙아(鮑叔牙)를 다음과 같이 기렸던 문장을 인용한 것이다. “나를 낳은 사람은 부모이지만 나를 알아준 사람은 포숙아이다.(生我者父母 知我者鮑叔牙)” 육신으로서의 나를 낳은 사람은 부모이지만 가르침을 통해 정신을 깨운 사람은 스승 이퇴계. 제자들은 이처럼 스승 퇴계를 영혼의 아버지로 숭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만장에 쓰인 만시를 읽은 순간 두향은 마음속으로 생각하였다. 그렇다. 나를 낳은 사람은 부모이지만 나를 사랑하여 인간으로서의 깨달음을 얻게 한 사람은 바로 나으리인 것이다. 그러므로 나를 낳은 사람은 부모이지만 나를 알아주고 나를 가르친 사람은 바로 나으리인 것이다. 여삼은 사당 안으로 들어가 조의를 표하였으나 두향은 차마 서당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지체 낮은 자신의 신분으로 서당 안에 들어선다면 고인의 체통을 더럽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야사에 의하면 두향은 문상을 드리지 못하고 눈 덮인 산 속으로 들어가 준비했던 소복으로 갈아입고 머리를 풀었다고 전해오고 있다. 그리고 유해가 안치된 도산서당을 향하여 밤을 새워 가며 망곡하였다고 한다. 망곡(望哭). 먼 곳에서 부모가 죽거나 국장을 당하면 대궐 쪽을 향해 제배를 올리고 통곡을 하는 행위. 미천한 기생 신분의 두향이었으므로 두향은 살아서도 생이별로 만날 수 없었고, 죽어서도 이렇듯 자신의 신분으로 만날 수 없는 떠도는 유령이었던 것이다.
  • 儒林(739)-제6부 理氣互發說 제3장 君子有終(20)

    儒林(739)-제6부 理氣互發說 제3장 君子有終(20)

    제6부 理氣互發說 제3장 君子有終(20) 다음날. 두향은 안동을 향해 먼 길을 떠났다. 밤하늘에서 별이 치마폭으로 떨어지는 흉몽을 꾸고 또한 나으리께서 보내주신 정화수의 물이 핏빛으로 변한 흉사를 보고 그냥 그대로 지나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으리의 신상에 무슨 변고라도 일어난 것일까. 다음날 아침 두향은 목욕재계를 한 후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소복까지 준비해 가지고 안동을 향해 떠났다. 단양에서 안동까지는 200여리의 험난한 산길. 중도에는 반드시 죽령을 넘어야 했다. 죽령의 높이는 689m로 영남과 호서를 갈라놓는 대재이자 오르막 30리, 내리막 30리의 가파른 고갯길. 아흔아홉 굽이의 고갯길은 각종 곡물과 상품을 수송하는 중요한 통로였으나 그 무렵 산적들이 들끓어 한낮에도 행인들을 괴롭히고 밤이면 맹수들이 사람을 해치는 험악한 태산준령이었다. 아녀자 혼자의 몸으로는 도저히 가고 올 수 없는 심산유곡이었다. 생각 끝에 두향은 2년 전 자신의 부탁으로 나으리께 분매를 전해주었던 여삼과 동행하기로 결심하였다. 여삼은 그 사이 한층 더 늙어 노쇠하였으나 두향으로부터 전후 사정을 전해 듣고는 흔쾌히 이를 수락하였다.20여년 전 퇴계가 단양의 군수로 재임하고 있을 무렵 바로 곁에서 수발을 들었던 여삼이었으므로 나으리께서 돌아가셨다면 빈소에서 분향이라도 드려야 하는 것이 올바른 도리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안동까지의 먼 길을 함께 떠났다. 두향은 전모를 써 얼굴을 가리고 장옷을 입었다. 장옷은 부녀자들이 나들이를 할 때 얼굴을 가리기 위해서 머리에서부터 길게 내려 쓰던 두루마기 모양의 옷이었다. 쓰개치마를 써도 무방하였으나 때는 엄동설한의 동지섣달. 매서운 삭풍을 막기 위해서는 두꺼운 솜으로 누빈 장옷이 제격이었던 것이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두향이와 여삼은 나흘 만에 안동 고을을 거쳐 도산서당이 있는 토계리(土溪里)에 도착하였다고 한다. 토계리에 도착한 순간. 두향은 집집마다의 지붕 위에서 흰옷들이 펄럭이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것을 본 순간 두향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집집마다의 지붕에 한결같이 흰옷을 널어 놓는다는 것은 죽은 사람의 혼령을 기꺼이 받아들여 달라고 저승사자들이 잘 볼 수 있도록 동리에 초상이 났음을 알리는 풍속. 집집마다의 지붕 위에 흰 옷을 널어놓는다는 것은 마을의 중요한 사람이 죽었음을 알리는 일종의 풍장(風葬) 행위였던 것이다. -돌아가셨다. 두향은 맥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으면서 혀를 깨물며 중얼거렸다. -나으리께서는 분명히 연세하신 것이다.
  • 儒林(735)-제6부 理氣互發說 제3장 君子有終(16)

    儒林(735)-제6부 理氣互發說 제3장 君子有終(16)

    제6부 理氣互發說 제3장 君子有終(16) 참으로 편안한 죽음이었다. 평생 동안 갖은 질병과 병고에 시달리던 퇴계에게 있어서 마지막의 임종 순간은 믿어지지 않을 만큼 평온하고 평화스러운 죽음이었던 것이다. 주역에 나와 있는 ‘겸사’의 점괘 그대로 ‘군자유종(君子有終)’의 최후였다. 퇴계의 죽음과 더불어 어느덧 한 치 정도 쌓이던 눈이 그치고 곧바로 구름이 걷혔다. 이에 대한 기록이 임종을 지킨 이덕홍의 ‘간재문집’에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12월8일. 아침에 분매에게 물을 주라고 지시하셨다. 유시 초에 누운 자리를 정돈하게 하고는 부축을 받고 일어나 앉아 편안하게 서거하셨다. 이날 날씨가 맑았는데, 유시 초에 갑자기 흰 구름이 집주위로 몰려들더니 눈이 한 치가량 내렸다. 퇴계 선생이 서거하자 곧바로 구름이 걷히고 눈이 그쳤다. (酉時 靑天忽白雲集 宅上雪下寸許 須臾先生命整臥席 扶起而坐逝 卽雲散雪霽)” 퇴계의 서거 소식은 뒤늦게 선조에게 전해진다. 퇴계가 죽은 지 3일후 선조는 뒤늦게 퇴계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내의(內醫)에게 약을 가지고 역마를 타고 급히 가서 구하도록 지시하였으나 전의가 채 도착하기 전에 퇴계가 숨을 거뒀다는 비보를 전해 듣자 12월18일 선조는 퇴계에게 영의정을 추증(追贈)하고는 그에 맞추어 치제(致祭) 장례 등의 제반사를 조치토록 하였다. 이때 선조가 내린 시호는 다음과 같다. “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 弘文館 藝文館 春秋館 觀象監事” 물론 퇴계는 죽기 사흘 전 조카 영에게 절대로 ‘국장을 쓰지 마라. 해당 관청에서 규례에 따라 국장을 정하면 반듯이 유명이라고 말하여 상소하여 고사토록 하라.’라는 유계를 내렸으나 선조가 친히 내린 어명이었으므로 이를 물리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선조는 2일간 조회를 폐하게 한 뒤에 의정에 합당한 일 등 국장으로 장례를 치르게 하고 이에 필요한 각종 제물을 부의(賻儀)로 보내도록 친히 지시하였다. 선조는 직접 퇴계의 빈소를 찾아가 거애(擧哀)하고 싶어 하였으나 거리가 멀었으므로 대신 승지를 보내어 조제(弔祭)토록 하였다. 이때 율곡은 스승 퇴계의 슬픔을 애도하여 ‘퇴계 선생을 곡하다(哭退溪先生)’란 만시를 짓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좋은 옥 정한 금처럼 순수한 정기타고 나시어 참된 근원은 관민(關:장재와 주희를 가리킴)에서 갈려나왔다. 백성들은 위아래로 혜택입기를 바랐건만 자신의 행적은 산림에서 홀로 몸을 닦으셨네. 호랑이 떠나고 용도 사라져 사람의 일 변했건만 물결 돌리고 길 여신 저서가 새롭구나. 남쪽 하늘 아득히 저승과 이승이 갈리니 서해 물가에서 눈물 마르고 창자 끊어집니다. (良玉精金稟氣純 眞源分派自關 民希上下同流澤 迹作山林獨善身 虎逝龍亡人事變 瀾回路闢簡編新 南天渺渺幽明隔 淚盡腸西海濱)”
  • 儒林(734)-제6부 理氣互發說 제3장 君子有終(15)

    儒林(734)-제6부 理氣互發說 제3장 君子有終(15)

    제6부 理氣互發說 제3장 君子有終(15) 오직 이덕홍의 ‘간재문집’에만 기록되어 있는 퇴계의 마지막 말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실제로 퇴계가 숨을 거둔 그날은 하루종일 청명한 날로 알려져 있다. 그러므로 퇴계가 물었던 ‘내 머리맡에서 바람이 불고 비 소리가 들린다. 너도 그런 소리가 들리지 않느냐.’라는 말은 생사가 갈라지는 순간에 남긴 이승에서의 마지막 시대적 예언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퇴계가 숨을 거둔 지 10여년 뒤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조선의 전 국토는 바람이 불고, 폭우가 쏟아지는 격변이 일어나는 것이다. 혈풍혈우(血風血雨). 피의 바람과 피의 비가 쏟아지는 대란이 일어나게 되었으니, 퇴계의 이 말은 퇴계가 그토록 사랑하였던 조국에 불길한 미래를 예감하였던 선지자의 묵시(默示)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덕홍은 이 말을 듣는 순간 스승의 임종이 임박하였음을 직감하였다. 이덕홍의 예감은 정확하였다. 유시(酉時)가 가까워오자 퇴계는 어디에서 그런 힘이 나올까 싶게도 자신이 누웠던 자리를 정돈하도록 하였다. 유시는 12시 중에 10번째 시에 해당하는 것으로 하오 5시에서 7시의 시간. 이때 청명하던 날씨가 돌변하여 흰 구름이 집주위에 몰려들더니 갑자기 흰눈이 쏟아지기 시작하였다. 상서로운 백설이었다. 어지러이 쏟아지는 눈발은 속세를 정화시키듯 순백의 세례로 온 산야를 흰빛으로 표백시켰다. 그때 퇴계는 좌우에 부탁하여 자신을 부축하여 일으키도록 몸짓하였다. 이덕홍과 조카 영이 계속 누워계시도록 만류하였으나 퇴계는 막무가내였다. 할 수 없이 부축하여 일어나 앉히자 퇴계는 방문을 열어주도록 손짓하였다. 몹시 추운 겨울날씨였으므로 조카 영은 멈칫거렸으나 스승의 임종을 직감한 이덕홍이 방문을 열도록 눈짓하였다. 방문을 열자 펄펄 내리는 눈발이 뒤덮인 도산서당의 뜰이 한눈에 드러났다. 부축을 받고 일어나 앉은 퇴계는 물끄러미 그 뜰을 내려다보았다. 기록에 의하면 이때가 유시 초. 그러므로 퇴계가 숨을 거둔 것은 오후 5시에서 5시30분 사이의 일이었을 것이다. 어느 순간 앉아있던 퇴계의 몸이 스르르 무너져 내렸다. 놀란 이덕홍이 다시 부축하려고 손을 내민 순간 이덕홍은 스승이 숨을 거둔 것을 깨달았다. 스승의 몸에서 아직 온기는 남아 있었으나 숨은 어느새 끊겨져 있었던 것이다. “돌아가셨습니다.” 이덕홍은 떨리는 소리로 중얼거렸다. 스승의 곁을 지키고 있던 제자들은 눈이 내리는 뜰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 마지막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마침내 이덕홍의 입에서 부음을 알리는 기별이 전해지자 제자들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일제히 눈을 맞으며 통곡을 하기 시작하였다.
  • 儒林(733)-제6부 理氣互發說 제3장 君子有終(14)

    儒林(733)-제6부 理氣互發說 제3장 君子有終(14)

    제6부 理氣互發說 제3장 君子有終(14) 죽어가는 소크라테스는 이승에서의 삶은 고통스러운 병이었으나 죽음으로써 병으로부터 치유되어 영원의 자유와 해방을 얻었으니, 자신이 직접 가서 아스클레오피스의 신전에 감사의 제물을 바치지 못하는 대신 친구인 크리톤에게 닭 한 마리의 제물을 바쳐달라는 내용이었던 것이다. 이는 죽기 직전 ‘매분에게 물을 주라.’는 이퇴계의 유언과 상통하고 있다. 이퇴계는 사람이 낳고, 병들고, 늙고, 죽어가는 일생이 매화에게 물을 주는 일상사와 다르지 않음을 보여준 후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마시듯 죽음을 편안하고 조용하게 맞아들일 준비를 끝냈던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것뿐이었을까. 임종의 순간에까지 물을 주라며 명관(命灌)하였던 퇴계의 유언은 다만 생명이 있는 모든 삼라만상을 사랑하는 퇴계의 철학적인 사유 때문이었을 뿐일까. 아마도 그것만은 아닐 것이다. 퇴계의 임종을 지켜보고 있었던 그 매분. 퇴계가 말년에 극진히 사랑하여 ‘매형(梅兄)’이라고까지 의인화하여 부르면서 직접 열정에서 길어 올린 정화수를 주었던 매분. 잠시 한성에 두고 이별하였을 때 ‘잊혀지지 않는구나. 지난해 봄 서울에서 분매 두고 돌아오는 소매 신선바람에 스쳤더니’하고 노래하며, 오매불망 그리워하였던 그 매분. 심지어 죽기 닷새 전 침석에서 설사를 하자 매형에게 불결한 모습을 보여서 미안하니, 다른 곳으로 옮기도록 하였던 그 매분. 그 매분이야말로 2년 전 두향이가 보내주었던 바로 그 매분이 아닐 것인가. 그러므로 퇴계는 비록 만나지는 못하였지만 어딘가에서 자신을 기다리며 기원을 올리고 있을 두향에게 이승에서의 마지막 작별인사를 고하기 위해서 그러한 유언을 남긴 것이 아니었을까. 그 정확한 사연은 알 수 없지만 퇴계의 고종기(考終記)를 남기고 있는 책들은 이 장면을 한결같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12월8일. 아침에 분매에게 물을 주라고 지시하셨다.(初八日 命灌盆梅)” 그러나 퇴계의 임종을 다루고 있는 수많은 책들 중에서 오직 이덕홍만은 퇴계에게 마지막 유언이 따로 더 있음을 기록하고 있다. 아마도 이덕홍은 조카 영을 비롯한 친족들과 마지막까지 스승의 곁을 지키고 있었으므로 이덕홍의 증언은 신빙성이 높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덕홍의 행적을 기록하고 있는 ‘간재문집’에는 다른 책에서는 전혀 볼 수 없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와 있다. “오시(午時:상오11시부터 하오1시까지의 시간) 스승께서는 조카 영을 불러 말씀하셨다. ‘내 머리 맡에서 바람이 불고 비 소리가 들린다. 너도 역시 그런 소리가 들리지 않느냐.(吾頭上有風雨聲 汝亦聞否)’ 이에 조카 영은 대답하였다. ‘들리지 않습니다.’”
  • 儒林(732)-제6부 理氣互發說 제3장 君子有終(13)

    儒林(732)-제6부 理氣互發說 제3장 君子有終(13)

    제6부 理氣互發說 제3장 君子有終(13) 마침내 주역을 통해 ‘군자유종(君子有終)’의 천기를 점지 받았으므로 제자들은 누구나 스승 퇴계가 곧 종언하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고 있었다. 실제로 이튿날인 12월8일. 퇴계의 병은 한층 더 위독해졌다. 이날 아침 퇴계는 이덕홍과 조카 영을 불러들였다. 두 사람이 퇴계의 침상 곁에 앉자 퇴계는 간신히 손을 들어 무엇인가를 가리키려 하였다. 그러나 온몸에서 힘이 모두 빠져나간 듯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보다 못한 조카 영이 퇴계의 얼굴에 바짝 귀를 들이대자 퇴계는 띄엄띄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저…매형에게…물을…주어라.” 퇴계의 임종을 기록하고 있는 수십 권의 책들은 퇴계의 이 말이 그가 생전에 남긴 최후의 유언으로 명기하고 있다. 그러므로 ‘매분에게 물을 주라.’는 말은 공식적인 퇴계의 마지막 유언인 것이다. 죽기 직전 자신의 머리맡을 지키던 매분에게 물을 주라는 퇴계의 유언은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생전에 그토록 상사하던 매분이었으므로 살아있는 모든 생명에게 물을 주라는 퇴계의 유언은 이 세상에 모든 삼라만상이 너와 나의 대립관계가 아니라 둘이 아닌 하나라는 상생(相生)의 철학을 의미하고 있는 심오한 최후설인 것이다. 이러한 참군자 최후설은 세기의 철인이었던 소크라테스의 마지막 유언을 떠올리게 한다. 비록 시대와 공간은 달라도 소크라테스와 퇴계는 궤변론이 팽배하던 어지러운 난세에 올바른 진리로 청년들을 일깨우던 세기적인 사상가. ‘아테네 청년을 부패시키고 새로운 신을 섬긴다.’는 죄명으로 독배를 마시고 죽게 된 소크라테스는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의 편안한 여행을 기원하는 기도’를 드린 다음 태연히 독약을 마신다. 이를 지켜보던 제자들이 모두 얼굴을 감싸고 통곡하기 시작하자 소크라테스는 묻는다. “웬 통곡 소리들인가. 이런 창피한 꼴을 보게 될까봐 아낙네들을 먼저 보냈거늘,‘사람은 마땅히 평화롭게 죽어야 한다.’고 나는 들었네. 그러니 부디 조용히 하고 꿋꿋하게 행동하게.” 감각이 사라지고 온몸이 뻣뻣해지며 죽어가던 소크라테스는 온몸을 덮었던 천을 벗기고 혼신의 힘을 다하여 역사상 유래가 없는 그 유명한 유언을 남긴다. “이보게 크리톤. 아스클레오피스에게 닭 한 마리를 빚졌다네. 자네가 잊지 말고 기억했다가 내 대신 갚아주시게나.” 진리의 철인이었던 소크라테스의 마지막 유언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아스클레오피스는 그리스인들의 의신(醫神). 뱀이 기어오르는 지팡이를 짚고 다녀서 오늘날에도 병원이나 약국에서 뱀의 지팡이로 상징되고 있는 문장은 바로 아스클레오피스를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 [책꽂이]

    ●대당서역기(현장 지음, 권덕녀 옮김, 서해문집 펴냄) 당나라 승려 현장이 1500년 전에 쓴 인도여행기. 서기 627년 스물 여섯의 청년 현장은 국법을 어기고 몰래 취경(取經)여행을 떠났지만 18년 뒤 인도에서 견문을 넓히고 수많은 불경을 구해 돌아오는 길엔 장안이 들썩일 만큼 뜨거운 환영을 받았다. 서기 645년 현장은 640질의 불경과 불상 등 귀중한 자료를 가지고 당으로 돌아왔다. 트로이전쟁에 참가해 활약한 뒤 긴 세월 동안 온갖 위기를 이겨낸 끝에 집으로 돌아온 오디세우스와 닮은꼴. 당나라 때 불경은 오역이 많아 승려들 사이에 논쟁이 끊이지 않았다.1만 1900원.●노블레스 오블리주(예종석 지음, 살림 펴냄)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인 이야기’에서 로마제국의 2000년 역사를 지탱해준 힘은 바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철학이라고 지적했다. 로마의 귀족은 전쟁이 일어나면 자신의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고 스스로 전장의 선봉에 서서 용감하게 적과 싸웠다고 한다. 한니발의 카르타고와 벌인 16년간의 제2차 포에니전쟁 중 최고 지도자인 콘술(집정관)의 전사자 수만 해도 13명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높은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의 역사를 다룬 책.3300원.●남명 조식의 학문과 선비정신(김충열 지음, 예문서원 펴냄) 조선 중기의 유학자 남명 조식은 퇴계 이황과 더불어 당대의 사상계를 이끈 영남유림의 종장이다. 그러나 정권과 타협하기보다는 현실개혁에 관심을 둔 남명학파는 정치적으로 소외됐다. 남명학의 권위자인 저자는 남명이 문묘배향을 불허한 점, 북인정권의 영수인 내암 정인홍의 실각, 곽재우 등 남명 문하에서 의병장이 많이 나와 일제강점기 때 역사가 왜곡된 점 등을 그 원인으로 꼽는다. 자득과 실천을 중시한 남명의 학문세계와 강의직절(剛毅直切)한 선비정신을 살폈다.2만 6000원.●공자와 논어(요시카와 고지로 지음, 조영렬 옮김, 뿌리와 이파리 펴냄) 공자는 조국 노나라를 떠나 56세부터 69세까지 14년간 제자들을 이끌고 산동 하남의 여러 제후국을 방문했다. 그것은 “외뿔소도 아니고 범도 아닌데 저 광야에 떠돈다.”라고 공자 자신도 말한 것처럼 황량한 방랑이었다. 정나라 성문 밖에서 제자들과 떨어져 혼자 서 있을 때의 공자는 상갓집 개와 같았다고 ‘공자세가’는 전한다. 공자는 학자이자 동시에 정치가였다. 공자의 정치 중시, 그것은 ‘논어’에서 가장 잘 알 수 있다. 공자 평전이라 할 만한 글과 논어에 대한 설명이 실렸다.1만 8000원.●거울 속의 원숭이(이언 태터솔 지음, 정은영 옮김, 해나무 펴냄) 우리는 인류가 오랜 세월에 걸쳐 오스트랄로피테쿠스에서 호모 에렉투스로, 다시 호모 사피엔스로 진화했다는 이야기에 익숙하다. 그러나 인류학자인 저자는 이같은 자연선택론의 아성에 반기를 든다. 그런 식의 단선적 이야기는 진화과정에서 발생하는 진실을 심각하게 오도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진화의 세계에는 적응의 증거도 있지만 비행을 위해 생겼던 펭귄의 날개가 지금은 나는 데 사용되지 못하고 수영에 이용되는 ‘탈응’의 증거가 있는 것처럼, 인간도 진화할 때가 있었지만 가끔은 숨을 고르기 위해 한 박자 정지하는 과정을 거쳤다는 것이다.1만 1000원.
  • [사설] 폭력·뺑소니 부른 차도점거 시위

    서울 도심에서 시도 때도 없이 차도를 점령해 벌이는 시위로 시민들의 불만 수위가 높아지더니, 드디어는 자가운전자와 시위대 사이에 폭력이 발생한 데 이어 운전자가 시위대원 4명을 치고 달아나다 붙잡히는 사건이 일어났다. 사건의 경위야 수사를 통해 밝혀질 테고, 운전자의 ‘뺑소니’ 여부도 아울러 확인되겠지만 사건이 발생한 원인에 관해서는 우리가 함께 생각해야 할 부분이 있다. 사건이 일어난 곳은 서울 회현사거리, 시각은 오후4시를 갓 넘긴 때였다. 자가운전자 김모씨는 출근 길이었다고 한다. 차가 30분이상 꼼짝하지 못하자 차에서 내렸고 바로 시위대원과 시비가 붙게 되었다는 것이다. 당시 현장에는 전국노점상연합 회원들이 2개 차로를 막고 행진 중이었다. 그 대열이 1㎞가 넘어 서울역·퇴계로 일대 교통이 2시간 가까이 큰 혼잡을 빚었다고 한다. 이 시위는 물론 경찰의 집회 허가를 받아 진행되었다. 하지만 오후4시 무렵의 서울 도심에서 2개 차로를 점거한 채 벌이는 시위 행진이 과연 정당한가 묻지 않을 수 없다. 실제 그날 발생한 것처럼, 그 일대는 물론 서울 도심 곳곳이 연쇄적으로 장시간 교통체증에 시달리리라는 사실은 누구라도 익히 예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시민들에게 큰 피해를 주면서까지 시위를 벌이면 누구라도 시위대의 주장에 공감하기 힘들 것이다. 이제 시위도 법의 테두리 안에서,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도 내에서 진행되어야 한다. 일반시민과 시위대의 마찰로 폭력이 발생하는 일은 다시는 없어야 한다.
  • 儒林(731)-제6부 理氣互發說 제3장 君子有終(12)

    儒林(731)-제6부 理氣互發說 제3장 君子有終(12)

    제6부 理氣互發說 제3장 君子有終(12) 그러므로 주역에 실려 있는 64괘의 대성괘 중 퇴계의 운명을 암시하는 ‘지산겸’ 괘야말로 군자가 지향해야 할 최고의 덕목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주자를 비롯한 정이천과 같은 송 대의 초기 유학자들이 이 ‘겸괘’에 대해서 나름대로 해설을 가하고 있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던 것이다. 먼저 이 괘에 대해 주자는 이렇게 풀이하였다. “겸(謙)이란 가지고 있으면서 가진 체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안으로 그치고 밖으로 순한 것이 겸의 뜻이다. 산은 지극히 높고 땅은 지극히 낮은 것인데 이제 높은 것이 굴하여 그 낮은 것 아래에 그쳤으니, 겸의 상(象)이다. 점치는 자가 이러하면 형통하여 끝이 있으리라. 끝이 있다는 말은 먼저 굴했다 다시 펴진다는 뜻이다.” 그뿐인가. 정이천 역시 이 괘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풀이하고 있다. “겸은 형(亨)이 있는 도이다. 덕이 있으면서도 있는 체 아니 하니, 겸이라 이르는 것이다. 사람이 겸손으로 자처하면 어디에 간들 형통하지 않겠는가.‘군자는 유종하리라.(君子有終)’라는 것은 바로 이런 뜻이다. 즉 군자는 겸손에 뜻을 두고 이치에 통달하므로 천(天)을 즐기어 경쟁을 아니 하고, 안으로 충실하므로 퇴양(退讓)하여 자랑을 하지 아니하며, 겸손함을 편하게 지키어 종신토록 변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스스로 낮추면 남이 더욱 존경하고 스스로 낮추면 덕이 더욱 빛나게 드러나니, 이것이 이른바 군자가 ‘끝(終)’을 가진다는 뜻인 것이다.” 정이천의 표현대로 퇴양하고 퇴양하여 스스로의 호를 퇴계로 지었던 이황. 주역의 팔괘는 고대중국의 복희(伏羲)라는 어진 임금이 황하에서 나온 용마(龍馬)의 등에 있는 도형을 보고 계시를 얻고, 다시 하늘의 천문과 지리를 살펴서 만물에 각자 마땅한 바를 관찰하여 만든 것으로 그렇다면 퇴계가 ‘군자유종’의 최후를 맞게 될 것이라는 겸괘는 하늘이 점지한 천기가 아닐 것인가. ―돌아가신다. 스승께서는 군자유종의 미를 거두신다. 마침내 주역을 통해 하늘의 천기를 알아낸 제자들은 숙연한 마음으로 옷깃을 여미며 모두 숨죽여 울기 시작하였다. 행여 병석에 누운 퇴계가 들을까 곡성은 터져 흐르지 아니하였으나 일순 도산서당은 침통한 슬픔으로 가라앉기 시작하였다. 이에 대한 기록이 ‘간재문집’ 속에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12월7일. 스승께서 이덕홍을 불러 서적을 맡으라고 지시하셨다. 퇴계선생의 병세가 너무 위독해서 제자들이 점을 쳤는데, 겸괘의 ‘군자유종(君子有終)’이란 점사(占辭)를 얻고 모두 아연실색하였다. 스승 퇴계의 종언(終焉)이 다가왔음을 암시하는 내용이었기 때문이었다.”
  • 儒林(730)-제6부 理氣互發說 제3장 君子有終(11)

    儒林(730)-제6부 理氣互發說 제3장 君子有終(11)

    제6부 理氣互發說 제3장 君子有終(11) 퇴계의 운명을 점쳐보는 괘상으로 ‘겸괘(謙卦)’가 나왔다는 사실에 많은 제자들은 경악을 금치 못하였다. 너무나 정확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덕홍은 잠시 멈췄다가 다시 읽기 시작하였다. “…그러므로 시종일관 겸손의 도를 지키는 군자는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다.” 유종의 미. 시종일관 겸손의 도를 지켜나간 군자는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다. 결국 이 말은 결국 스승 퇴계가 ‘군자유종(君子有終)’의 최후를 맞게 된다는 것을 암시하는 점괘가 아닐 것인가. 그러므로 주역은 퇴계가 겸손으로써 유종의 미를 거두고 운명할 것임을 분명하게 점지하고 있는 것이다. 순간 제자들은 모골이 송연하였다. 이덕홍은 다시 떨리는 목소리로 효사(爻辭) 중 대상(大象)을 풀이하여 읽어 내려갔다. “높은 산이 낮은 땅 아래에 있다. 이것이 겸(謙)의 괘상이다. 군자는 이 괘상을 보고 많은 것을 덜어서 적은 것에 보탬으로써 사물의 균형을 살피고 시책을 공평하게 한다.” ‘지산겸’괘의 두 번째 초음(初陰)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스스로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겸손하며 공경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수양을 쌓으니, 참으로 군자로구나. 대하를 건너는 것과 같은 위험하고 어려운 일을 수행하여도 길하리라.” ‘지산겸’괘의 이음(二陰)의 풀이는 다음과 같다. “명성이 이미 세상에 울리고 있건만 스스로 몸을 낮추고 겸손하다. 자신의 마음에 자신을 가졌기 때문에 남에게 잘난 체해 보이려 하지 않는다. 이러한 태도를 한결같이 가지면 길하리라.” ‘지산겸’괘의 효사 중 삼양(三陽)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천하를 위하여 헌신한 공로가 있건만 자랑하지 않고 겸손하니 진정 군자로구나. 만민이 심복한다. 유종의 미를 이루어 길하리라.” ‘지산겸’괘의 사음(四陰)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남을 높이고 자신을 낮추어 겸손하니 모든 일이 도리에 어긋남이 없다. 만사 순조롭지 않은 것이 있을 수 없다.” ‘지산겸’괘의 효사 중 오음(五陰)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고귀한 분이면서도 교만하지 않고 유화한 태도로 남에게 겸손하니 많은 사람들이 심복하여 주변에 모인다. 불복하는 자가 있으면 정벌(征伐)함이 좋다. 순조롭지 않은 것이 없으리라.” ‘지산겸’괘의 효사 중 마지막 부분인 상음(上陰)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미 군주의 지위는 물려주고 난 위치에 있으나 아직 명성은 세상에 울리고 있다. 그러나 겸손하다. 군사를 동원하면 작은 읍국(邑國)을 정복하는 일쯤은 능히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상은 ‘지산겸’ 괘의 총 해설이었다. 일찍이 공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부자가 되어서 교만 없기가 가난하여서 원망 없기보다도 어렵다.” 공자의 이 말은 예수가 말하였던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라는 가르침을 연상시키는데, 이렇듯 퇴계의 운명을 암시하는 ‘겸’괘는 퇴계야말로 ‘어진 이를 존경하고 선비에게 몸을 낮춰야 한다.’는 ‘존현하사(尊賢下士)’의 도를 완성한 ‘겸손의 군자’임을 드러내는 괘상이었던 것이다.
  • 儒林(729)-제6부 理氣互發說 제3장 君子有終(10)

    儒林(729)-제6부 理氣互發說 제3장 君子有終(10)

    제6부 理氣互發說 제3장 君子有終(10) 이덕홍은 서죽을 양손으로 나눈 후 왼손에 든 서죽에서 한 개를 뽑아 무명지와 새끼손가락 사이에 끼웠다. 이는 천수(天數)에 해당되는 것으로 이른바 점을 칠 때 제일 먼저 시작하는 중요한 행위였던 것이다. 그러고 나서 왼손에 들어있는 서죽을 네 개씩 네 개씩 차례로 덜어내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나머지 네개 미만의 서죽이 남자 다시 무명지와 새끼손가락 사이에 끼웠다. 이것은 늑이라 불리는 두 번째 과정이었다. 이덕홍은 몇 차례씩 이런 작업을 되풀이하면서 괘를 얻고 있었는데, 이러한 작업은 초효(初爻)라 불리는 제일변(變)을 얻기 위함이었다. 이와 같이 한 효(爻)를 정하는데, 세 번의 절차를 밟고 무릇 18변에 해당되는 육효(六爻)를 얻어야만 비로소 점괘가 완성되는 것이었다. 이덕홍은 그러한 작업을 순서에 따라서 차례차례 진행해 나갔다. 나오는 점괘마다 이를 종이 위에 적어 팔괘로 나누고, 다시 팔괘를 세분하여 대성괘(大成卦)로 나누어 점괘를 완성하고 있었다. 오랜 시간이 흐른 후 이덕홍은 마침내 스승의 점괘를 얻을 수 있었다. 그 점괘는 다음과 같았다. “-- -- -----” -- -- -- -- -- -- -- -- 이는 주역에 나와 있는 64괘의 괘상(卦象) 중 ‘간하곤상(艮下坤上)’에 해당하는 이른바 겸괘(謙卦)였다. ‘간하곤상’이라 하면 땅인 간(艮) 밑에 산(坤)이 있는 괘상인데, 이에 대해 주역은 다음과 같이 풀이하고 있었다. 이덕홍은 초조하게 지켜보고 있는 제자들 앞에서 주역을 펼쳐 ‘간하곤상’의 괘사를 천천히 낭독하기 시작하였다. “겸손하면 형통한다. 하늘의 도리는 높은 데서 그 작용이 아래로 내려와 땅 위의 만물을 건져 줌으로 해서 빛이 나고, 땅의 도리는 스스로 낮은 위치를 지킴으로 해서 그 작용이 위로 올라가 하늘의 하는 일을 도울 수 있는 것이다. 하늘의 법칙은 보름달은 기울듯이, 찬(盈) 것은 덜고 차지 않은 것(謙)은 보탠다. 땅의 법칙은, 웅덩이에 물이 가득 차면 둑을 끊고 나와 낮은 데로 흐르듯이 찬 것은 변경하여 차지 않은 데로 흐른다. 귀신은 가득 차 있는 자에게는 화(禍)를 주고 겸손한 자에게는 복(福)을 준다. 사람의 도리는 교만한 것을 미워하고 겸손한 것을 좋아한다. 겸손하면 높은 지위에 있는 이는 빛이 나고, 낮은 자리에 있는 자는 남이 업신여기지 못한다.” 주역에 나와 있는 64괘의 괘 중 퇴계에 해당하는 괘는 이른바 15번째의 지산겸(地山謙)괘였다.‘간하곤상’, 즉 ‘땅 밑에 산이 솟아 있다.’라는 괘상이 의미하듯 이 괘의 특성은 마땅히 산이라면 땅 위에 솟아 있어야 하는데, 땅 밑에 산이 우뚝 솟아있다는 뜻처럼 겸괘(謙卦)를 의미하는 것이다. 겸괘. 이는 문자 그대로 주역의 ‘겸손하면 형통한다.’라는 괘사처럼 겸손을 상징하는 것으로 퇴계에게 가장 적합한 점괘였던 것이다.
  • 儒林(728)-제6부 理氣互發說 제3장 君子有終(9)

    儒林(728)-제6부 理氣互發說 제3장 君子有終(9)

    제6부 理氣互發說 제3장 君子有終(9) 이덕홍의 울음에 분위기는 숙연해졌다. 누구보다 스승의 몸과 마음을 잘 헤아리고 있었던 이덕홍이었으므로 이덕홍의 갑작스러운 울음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제자들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덕홍의 슬픔이 가라앉기를 기다려 제자들은 모두 농운정사에 모였다. 농운정사는 제자들이 평소에 머물고 잠을 자던 집인 지숙료(止宿寮). 그들이 약속이나 한 듯 함께 모인 것은 스승 퇴계의 운명에 대해 주역을 통해 점을 치기 위함이었다. 제자들은 이따금 서당에서 주역을 통해 점괘를 얻곤 하였다. 주역은 두 가지의 의미가 있는 책이었다. 일찍이 공자는 ‘책을 엮은 죽간의 끈이 세 번이나 끊어질(韋編三絶)’ 정도로 주역을 탐독하였으며,‘내게 몇 년의 수명이 더해져 주역을 공부해 나가면 흉허물이 없을 것이다.’라고 소중히 여겼는데, 이는 공자가 주역을 점치는 책으로 보기보다는 우주원리를 꿰뚫는 철학과 수양의 책으로 보았기 때문이었다. 퇴계도 젊은 시절 공자처럼 몸이 상할 만큼 주역에 심취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주역은 이처럼 심오한 철학서이기도 하지만 엄연한 점서(占筮). 따라서 도산서당에서는 이따금 퇴계를 필두로 주역을 통해 점괘를 얻곤 하였던 것이다. 특히 이덕홍은 주역에 밝아서 생전에 ‘주역질의(周易質疑)’란 역학 책을 저술하였던 문인. 그러므로 이덕홍을 비롯한 많은 제자들이 한데 모여 스승의 운명을 주역을 통해 점을 쳐보았던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던 것이다. 당연히 이 의식은 역학에 밝은 이덕홍이 집전하였다. 이덕홍은 산통(算筒)을 꺼내왔다. 산통은 점칠 때 쓰는 기구로서 그 안에 대나무로 만든 산가지(算本)를 넣어두는 통이었는데, 서당에 항상 비치하고 있었던 물건이었다. 이덕홍은 산통 속에서 서죽(筮竹)이라고 불리는 점치는 산가지를 꺼내었다. 산가지의 숫자는 50개가 정량. 그 중 한 개는 태극을 상징하는 것이라 하여 제쳐놓고 49가지만 사용하는 것이 상례였다. 왜냐하면 유학에 있어 태극은 천지만물의 가장 근원으로 영원히 변하지 않는 존재였으므로 제외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덕홍은 서죽을 꺼낸 후 잠시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달래었다. 이는 이덕홍의 행동을 지켜보는 모든 제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원래 주역을 통해 점을 칠 때에는 경건하고 엄숙한 마음을 유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몸가짐이었다. 조금이라도 의심하는 마음을 갖거나 부정한 일을 위해서 점을 치는 것은 신성을 모독하는 것으로 바른 계시를 얻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주역은 천지신명의 바른 법칙을 본받아 그 이치에 순응함으로써 계시를 얻는 것이므로 부정한 일을 위한 점은 주역의 원리를 반역하는 일이며 또한 같은 일로 두 번, 세 번 점을 치거나 주역의 결과를 의심하는 것은 상천(上天), 즉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일로 금기시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儒林(727)-제6부 理氣互發說 제3장 君子有終(8)

    儒林(727)-제6부 理氣互發說 제3장 君子有終(8)

    제6부 理氣互發說 제3장 君子有終(8) 퇴계가 얼마나 서적을 사랑하고 독서하는 즐거움을 맛보았던가는 61세 때 도산정사에서 읊은 ‘산당야기(山堂夜起)’란 시를 통해서도 잘 알 수 있다. “산은 텅 비고 온 집이 고요하고 밤이 차갑더니 서리 기운 높으니라.(山空一室靜 夜寒霜氣高) 외로운 베개 위에 잠 못 이루니 일어나 정좌하고 옷깃을 바루노라.(孤枕不能寐 起坐整襟袍) 늙은 눈 부벼 뜨고 가는 글자 보려 하니 짧은 등경 촛불 켜고 여러 차례 돋우네.(老眼看細字 短煩屢挑) 글이라 그 가운데에 참된 맛 심어 있어 살찌고 배부름이 고기보다 낫더구나.(書中有眞味 沃勝珍)” 살찌고 배부르니 고기보다 더 나았던 글. 그 가운데 참된 맛이 심어 있던 서적. 마침내 퇴계는 자신의 분신과도 같았던 서적들을 애 제자 이덕홍이 맡아 주도록 당부하였던 것이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선생님. 제가 잘 보관하겠습니다.” 침통한 얼굴로 이덕홍이 말을 하자 퇴계는 손을 들어 벽 한 구석을 가리켰다. 뭔가 말을 하려 하였으나 기진하여 목소리가 흘러나오지 않았다. 이덕홍은 스승이 가리킨 방향을 쳐다보았다. 그곳에는 지팡이가 놓여 있었다. 청려장(靑藜杖). 퇴계가 평소에 사용하던 명아주로 만든 지팡이. 평소 산책을 즐겨하였던 퇴계는 책을 읽다 지치면 청려장을 끌고 서당의 이곳저곳을 소요하였던 것이다. 지금도 유물각에 남아 전시되고 있던 지팡이는 명아주 풀의 줄기들을 잘라낸 옹이가 울퉁불퉁하게 매듭지어져 있어 품격을 더하고 손에 들어도 거의 무게가 느껴지지 않을 만큼 가볍고 단단한 지팡이였다. 순간 이덕홍은 스승의 심중을 헤아릴 수 있었다. 이제 다시는 일어서서 지팡이를 짚고 산책할 수 없는 퇴계로서는 이승에서 마지막으로 그 지팡이를 만져보고 싶었던 것이다. 스승의 심사를 알아챈 이덕홍은 청려장을 끌어다가 퇴계의 손에 쥐어 주었다. 어디에서 그런 힘이 나올까 싶게도 퇴계의 손이 지팡이를 힘껏 감아쥐었다. “빨리 쾌차하십시오, 선생님.”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이덕홍이 말하였다. “청려장을 드시고 절우사 뜰에서 백설처럼 피어난 봄 매화꽃을 보시옵소서.” 순간 퇴계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미 살아 있는 사람의 모습이라고는 형언할 수 없는 깡마르고 수척한 얼굴이었지만 그 얼굴에 황홀한 미소가 떠오르고 있었다. 실제로 찬란한 봄이 찾아와서 절우사(節友社) 뜨락 앞에 백설처럼 피어난 매화꽃을 바라보는 듯한 환희의 얼굴이었다. 꿈이라도 꾸고 계시는 것일까, 하고 이덕홍은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때 퇴계의 손에서 지팡이가 스르르 굴러 떨어졌다. 이덕홍은 지팡이를 다시 벽 구석에 세워 놓으며 뒷걸음으로 완락재를 물러나왔다. 방 앞에는 많은 제자들이 이덕홍을 기다리고 있었다. “무슨 말씀을 하시던가. 병세는 좀 어떠하신가.” 그 순간 이덕홍은 이를 악물고 숨죽여 울기 시작하였다.
  • 儒林(726)-제6부 理氣互發說 제3장 君子有終(7)

    儒林(726)-제6부 理氣互發說 제3장 君子有終(7)

    제6부 理氣互發說 제3장 君子有終(7) 자신이 죽은 후에 들어갈 관에 대해 언급하면서도 을사위훈의 삭탈 결과에 대해 물었던 퇴계. 이러한 사실은 퇴계의 우국충정이 얼마나 강렬했던가를 알려주는 감동적인 일화일 것이다. 자신이 죽기 사흘 전 제자들에게 3,4일이나 더 지탱하면 다행일 것이라고 예고하면서도 나라 걱정을 하면서 탄식하였던 퇴계. 그러나 그 이튿날을 고비로 퇴계의 병은 더욱 위독해진다. 퇴계의 연보는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12월7일. 선생의 병세가 너무 위중해지셨다.(先生病勢已革)” 그동안 간간이 사람들을 쳐다보고 작은 목소리로나마 띄엄띄엄 얘기할 수 있었던 퇴계는 이날 이후로 눈동자가 풀려 사람들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날 아침 퇴계는 이덕홍을 자신의 침상으로 불러들였다. 이덕홍이 방안으로 들어서자 퇴계는 자신의 곁으로 다가오도록 손짓하였다. 이덕홍은 스승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서당으로 온 지 벌써 닷새가 지났고, 그동안 줄곧 곁을 지키고 있었으나 이날 아침 스승의 모습을 본 순간 뭔가 심상치 않다는 불길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스승의 생명은 거의 다 스러져 꺼지기 직전의 등불이었다. 가물가물한 의식으로 퇴계는 뭔가 말을 하려는 듯 입을 모았으나 헛바람만 새어나올 뿐 소리가 되어 나오지는 못하였다. “천천히 말씀하십시오, 선생님.” 이덕홍은 바짝 얼굴을 기울여 스승의 입가에 귀를 갖다 대었다. 그러나 퇴계의 입에서 바람과 같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내가…갖고 있던…서적들을…좀, 맡아주시게나.” 이른바 최후의 유언이었다. 차례차례 주변을 정리한 후 마지막으로 자신이 갖고 있던 서적에 대해 애제자 이덕홍에게 맡아주기를 부탁하는 퇴계의 간절한 유언이었던 것이다. 생전에 퇴계처럼 책을 사랑하던 사람이 있었던가. 퇴계는 노년에 들어서도 독서에 열중하였다. 오죽하면 퇴계는 자신을 책을 파먹는 좀벌레()에 비유하고 있었음일까. 노년에 지은 ‘동재감사(東齋感事)’란 시를 보면 늙어갈수록 독서에 침잠하였던 퇴계의 심정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다. “병 깊고 하염없는 백발된 이 늙은이 이 몸이 길이길이 좀벌레와 벗하여라. 좀이 글자 먹는단들 그 맛이야 어이 알리. 하늘이 글을 내시니 그 중에 기쁨 있어라.(多病無能白髮翁 一身長伴書蟲 魚食字那知味 天賦群書樂在中)” 좀벌레가 글자를 먹는다 한들 하늘이 내신 글을 먹는 그 기쁨보다 더 맛이 있겠는가 하고 노래하였던 퇴계. 퇴계의 고전의 진수를 자신의 마음속 깊이 체득하여 얻는 독서열은 곧 논어 첫머리에 나오는 ‘배우며, 또한 익히니, 기쁘지 아니한가.’라는 공자의 말씀을 가장 맛있게 실천하고 있었던 구도행위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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