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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혁신당’에 국민회의 합류

    여권이 추진하는 ‘개혁적 국민정당’은 신진인사가 주축이 된 신당(준비위)과 국민회의가 당(黨)대 당(黨) 통합을 이루는 형태를 띨 것으로 알려졌다. 국민회의 한화갑(韓和甲)사무총장는 22일 “신당은 국민회의와는 별도로 창당 절차를 밟아 나가고 창당대회 때 국민회의가 합류하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강동형기자 yunbin@
  • 李在禎 국민정치硏 이사장 창당입장

    신당 창당의 한 축을 맡게 될 국민정치연구회 이재정(李在禎) 이사장은 20일 낮 여의도호텔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앞으로의 활동방향과 국민정당 창당에 대한 입장’을 발표했다. 이이사장은 “기득권 포기를 선언한 국민회의의 창당 원칙과 방향은 정치변혁을 이루어낼 발상의 일대전환”이라고 평가한 뒤 “과거의 정치관행대로정치적 지분을 요구하기보다는 새로운 정치문화를 만드는데 앞장서겠다”고밝혔다.다음은 일문일답. ■구상중인 신당의 성격은. 지역연합이나 정파간 연합이 아닌,국민우위·국민참여·국민통합적인 개혁적 국민정당이 목표이다.그렇다고 개혁인사만 참여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생각은 달라도 올바른 목표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 연대를 이루고 이 통합체가 합리적인 시스템에 의해 운영되는 당을 구상중이다. ■일정은. 국민회의측과 구체적인 일정을 논의한 적은 없다.물리적으로 정해진 일정을 추진하기보다는 탄력적으로 운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우선 국민의 의견을모으겠다.10월 말까지 전국 15개 광역시·도 단위에 지역본부를 결성,지역별·부문별 순회강연과 토론회를 열 계획이다.여기서 도출된 안을 가지고 일정을 협의하겠다. ■참여 범위는. 연구회가 추천한 인사들은 신당에 참여할 수 있을 것이다.그러나 참여 숫자에 연연하지는 않겠다.그보다는 새 정당을 운영할 시스템을 짜는데 힘을 쏟겠다.연구회는 정치적 목적으로 결성된 것이 아닌 만큼 그대로 존속,신당을지원하고 정책 대안을 제시하는 역할을 맡게 될 것이다. ■참여 방식은. 신당 발기인단이나 창당준비위원회에 조직적인 집단으로 참여하지는 않을것이다.크게는 (국민회의) 당내 집단과 당외 집단이 느슨하게 결합을 하는스타일이 될 것이다.연구회를 포함한 당외 집단의 결합 역시 마찬가지다. ■정치적 목표는. 국민 누구나 정당에 참여해 의사를 표출하는 ‘국민적 정치’를 실현하는것이 최종목표이다. 이지운기자 jj@
  • 국민정치연구회 신당참여 선언

    국민정치연구회(국정연·이사장 李在禎 성공회대 총장)는 20일 서울 여의도호텔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국민회의가 추진하는 ‘개혁적 국민정당’에 지분에 연연하지 않고 참여하겠다고 공식 선언했다. 이 이사장은 ‘개혁적 국민정당 창당에 대한 입장’이라는 회견문에서 이같이 밝히고 “신당은 국민우위 국민참여 국민통합의 개혁적 국민정당이어야하며 새천년을 대비하는 정치구조의 혁신과 정치권의 전면적인 쇄신을 목표로 추진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국정연은 10월 말까지 15개 광역 시·도에 지역본부를 결성하고 순회강연과토론회를 개최, 정치개혁과 새 정치 문화에 대한 의견을 수렴해 신당 창당에반영하기로 했다. 지난 3월 발족한 국민연은 문동환(文東煥) 전 평민당 부총재와 이돈명(李敦明)변호사 등 7명의 고문단,김상근(金祥根)목사,지선(知詵)스님,함세웅(咸世雄)신부 등 12명의 자문위원,황태연(黃台淵) 동국대 교수등 50여명의 운영위원,소설가 유시춘씨 등 7명의 집행위원과 200여명의 이사그룹으로 구성돼 있다. 강동형 이지운기자 yunbin@
  • [金대통령 ‘새 천년’의 비전] 8·15 경축사 요지

    존경하고 사랑하는 국민 여러분. 오늘은 광복 54주년을 맞는 날이자 새 천년을 앞둔 20세기의 마지막 8·15경축일입니다. 우리는 오늘 한 시대를 마감하고 새로운 시대를 여는 전환점에 서 있습니다.이 역사적인 시점에서 저는 지난 세기에 걸친 우리 역사를 돌아보며 아울러 새 천년의 미래에 대해서 여러분과 함께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대한민국의지난 100년은 한마디로 좌절과 불굴의 헌신이 교차한 시기였습니다.반세기에 걸친 독재체제 아래서도 민주주의를 위한 우리 국민의 희생과 헌신은 계속됐습니다.그 희생은 헛되지 않았습니다.마침내 1997년 12월 18일,아시아에서는 드물게 국민의 투표로 여야간의 정권교체를 이루어냈습니다. 그러나 정권교체의 그 순간부터 우리는 IMF의 경제위기에 봉착했습니다.하지만 우리는 다시 일어섰습니다.정부와 국민이 하나가 되어 6·25 이후 국난인 외환위기를 극복해냈습니다. 오늘 20세기의 마지막 광복절을 보내며,우리는 굳게 다짐해야겠습니다.다가오는 21세기에는 조선왕조 말엽과 같이 역사의 흐름을 외면하거나 또다시 내부 갈등과 대립으로 도약의 기회를 놓쳐서는 안되겠습니다. 저는 국민과 역사앞에 반드시 이 땅에 민주화를 이룩하겠다고 약속드린 바있습니다.이를 위해 저는 지난 40여년동안 온갖 박해와 죽음의 공포 속에서도 국민 여러분과 함께 싸웠습니다.마침내 정권교체를 실현함으로써 이 약속을 지켰다고 생각합니다. IMF위기 상황 아래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1년반 안에 외환위기를 이겨내겠다고 약속할 수 있었고,이 약속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대북정책에 있어서도 안보를 바탕으로 한 포용정책을 일관되게 추진해서 한반도의 전쟁위기를 감소시키겠다고 한 약속을 지켜가고 있습니다. 남북교류에 있어서도 상당한 진전을 이룩했습니다.북한의 전통적인 우방인 러시아와중국까지를 포함해서 우리의 포용정책에 대한 전 세계의 지지를 얻는 데 성공했습니다. ■정치분야 그러나 지키지 못한 약속도 있습니다.바로 내각 책임제 문제입니다.이 약속을 할 당시에는 IMF위기를 예측하지 못한 상태였으며 지금도 경제불안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게다가 국회는내각제를 수용할 만한 태세를 갖추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모든 여론조사 결과를 봐도 국민의 다수가 지금 내각제를 원하지 않고 있습니다.그래서 내각제를 합의했던 자민련과 상의 끝에 이를 연기하기로 합의한 것입니다.이유야 어찌됐건,국민 여러분에게심려를 끼쳐드린 점에 대해서는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 정치는 스스로 개혁해나갈 조짐이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정치개혁은 우리에게 가장 시급한 일이 되었습니다.지역당 구도를 벗어나 전국정당화를 위한 선거제도가 필요하며 선거공영제를 강화해야 합니다.정당법을 고쳐 정당의 조직과 운영체계를 간소화하고 비용을 최소화해야 합니다. 또 정치자금법을 개정해 정치자금을 투명하게 걷고 쓰도록 해야 합니다. 저의 대선자금에 대해 역대정권 아래서 권력기관들이 수없이 뒤졌지만 불법적인 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저도 물론 정치자금을 받아 썼습니다.그러나 결코 부정하거나 불법적인 정치자금을 받아 쓴 적이 없습니다. 민주화와 인권보장은 제 일생의 변함없는 소신입니다.자랑스러운 인권국가를 만든다는 결의로 ‘인권법’을 제정하고 ‘인권위원회’를 설치할 것입니다.‘국가보안법’도 개정할 것입니다.‘부패방지법’의 제정도 차질없이 추진될 것이며 법제정에 앞서 우선 대통령 직속으로 ‘반부패 특별위원회’를구성하겠습니다. ‘통합방송법’ ‘민주유공자 보상법’ ‘의문사 진상규명특별법’ ‘비영리 민간단체지원법’ 등을 개정 또는 제정하겠습니다. 우리 정치가 제 역할을 못하는 데 대해서는 집권당으로서 먼저 그 책임을통감하고 있습니다.여당인 국민회의부터 새로 태어나겠습니다.신당은 중산층과 서민 중심의 개혁적 국민정당으로 등장할 것입니다.인권과 복지를 중시하는 정당이 되겠으며 지역구도를 타파하는 전국정당이 될 것입니다.개혁적 보수세력과 건전한 혁신세력까지 맞아들이며 여성지도자를 적극 영입하고 여성에게 비례대표 의석의 30%를 배정하겠습니다. ■경제분야 우리경제 최대의 문제점인 재벌의 구조개혁 없이는 경제개혁을완성시킬 수 없습니다.재벌개혁을 위해 그동안 추진해온 투명성 제고,상호지급보증의해소,재무구조의 개선,업종 전문화,경영진의 책임강화 등 5대원칙이 금년말까지 반드시 마무리돼야 하겠습니다. 저는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재벌을 개혁하고 중산층 중심으로 경제를 바로잡은 대통령이 될 것입니다. 지식경제 시대에는 중소·벤처기업과 문화·관광산업과 같은 지식 서비스산업의 발전이 필요합니다. 작년에 1인당 6,800달러 수준으로 떨어졌던 국민소득을 내년에는 1만달러수준으로 끌어올리고,2002년까지는 1만2,000달러 수준으로 향상시켜 나가겠습니다.또한 내년에는 실업자를 100만명 이하로 줄이고 2002년까지는 200만개의 일자리를 창출하여 사실상의 완전고용을 실현하겠습니다. 저는 대통령으로서 인재등용에 있어서나 예산배정에 있어 어떠한 지역차별도 하지 않았고,앞으로도 그런 일은 결단코 없을 것입니다. 세정개혁이 기본이 되는 금융소득종합과세 실시를 추진하겠습니다.변칙적인상속과 증여를 통한 부의 부당한 대물림이 없도록 세제를 고치겠습니다. 음성 탈루 소득에 대해서는 엄중한 책임을 물을 것이며 봉급생활자의 세부담을줄이고 고소득계층의 소득원을 양성화하겠습니다. ■사회분야 모든 국민에게는 직업훈련과 평생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고 그에맞는 일자리를 찾을 수 있도록 돕겠으며 노인,병약자,소년소녀 가장 등에 대한 관심과 지원을 큰폭으로 늘리고 장애인의 고용과 재활을 촉진하기 위한법과 제도를 정비하겠습니다. 의료보험·고용보험·국민연금·산재보험 등 4대 보험제도를 내실화하여 국민들이 평생동안 안심하고 생활해 나아갈 수 있도록 하는 사회보장제도를 확립하겠습니다. 주택보급률을 임기 안에 100%로 높이겠으며 중산층과 서민의 주택 마련을돕기 위해 주택구입자금과 전세자금에 대한 융자지원을 크게 늘리겠습니다. 농어민의 소득을 높이고 생산자가 제 값을 받을 수 있도록 농수산물 유통부문을 가장 먼저 개선하며 농어민의 연대 보증을 ‘농림수산업자 신용보증기금’의 보증으로 바꾸겠습니다. 21세기 지식기반 시대의 세계 일류국가 대열에 설 수 있도록 교육개혁을 철저하게 실시하겠습니다.내년부터 가정이 어려운 중고교생 40만명에게는 학비를 무상지원해주고 대학생 30만명에게는 장기 저리융자의 혜택이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대학 입학제도를 고쳐 2002학년도부터는 과도한 입시경쟁에서 벗어나 무시험을 원칙으로 하는 다양한 입학선발제도를 반드시 실시해 나가겠습니다. ■안보분야 한반도의 평화실현을 위해서는 안보와 화해가 같이 정착돼야 합니다.전쟁억지를 위해서 안보를 무엇보다 철저히 하겠으며 남북간의 평화와협력을 위한 포용정책을 계속 추진하겠습니다. ‘국민의 정부’는 남북간 정부차원의 교류가 이루어질 것을 희망합니다.북한은 동족끼리의 대화는 거부하면서 미국과의 협상만 고집하는 불합리한 태도를 버려야 하며 한반도 문제는 남북당사자간에 해결돼야 합니다.우리는 언제든지 남북 당국자간의 대화에 응할 용의가 있고 북한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할 용의가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지금 성공과 위기의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저는 단임제 대통령으로서 국민의 기대에 부응하는 대통령이 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겠으며 일시적인 인기에 연연하지 않겠습니다. 국민을 하늘같이 받들고 역사의 심판을 두렵게 생각하면서 신념과 소신을 가지고 국정을 운영해 나갈 것입니다.
  • [金대통령 ‘새 천년’의 비전] 8·15경축사 분석 전문가 좌담

    백경남(白京男)동국대 사회과학대학장,안석교(安錫敎)한양대 경제학과교수,서경석(徐敬錫)한국시민단체협의회 사무총장이 15일 오전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의 8·15경축사와 관련,대한매일신보사 편집국에서 좌담을 갖고 경축사내용을 분석,평가했다.좌담 내용을 주제별로 간추린다. ■ 총론?백교수 이번 경축사에서는 지난 100년을 회고하고 새천년을 국민과 함께모색하는 방향이 제시됐습니다.특히 줄기찬 민주화투쟁으로 50년 만에 정권교체를 이뤘고 국민의 저력으로 IMF 위기를 극복한 의미가 포함돼 있습니다. 국민의 힘으로 경제위기를 극복했기 때문에 역사의 교훈을 되새기면서 앞으로 나아가면 일류국가로 진입할 수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집니다. 특이한 것은 지금까지 내각제 연기의 명확한 내용을 국민에게 말하지 않았는데 이번 경축사에서 개헌을 연기한 불가피한 이유를 짚었다는 점입니다. ?안교수 경축사는 역사적으로 두가지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하나는 취임후 1년반이 지나면 IMF를 극복하겠다고 밝힌 대통령이 1년반이 지난 지금 대차대조표를 밝힌 것입니다.두번째로는 다가올 밀레니엄에 나라를 어떤 방향으로 끌고 갈지,대통령의 철학과 비전,리더십을 보인 점입니다. ?서총장 다양한 분야에서 개혁 의지를 천명했다는 점에 의의를 둡니다.다만 국민에게 현실을 깨우치게 하고 나아갈 방향을 제시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최근 ‘장밋빛 미래’의 환상이 빠르게 확산되고 있습니다.졸라맸던 허리띠도 이완돼 있습니다.집단이기주의는 사방에서 분출되고 있습니다. 대통령이 국민에게 “아직은 샴페인을 터뜨릴 때가 아니다.허리띠를 더 졸라매고 인내를 해달라”고 강조하길 바랐습니다. ■ 생산적 복지?안교수 지난 1년반동안의 구조조정에서 볼때 대규모의 중산층이 ‘한계집단’으로 전락하고 서민은 더욱 어려워지는 계층의 양극화 현상이 두드러졌습니다.고통분담을 강조했지만 고통이 특정계층에 가중된 탓입니다.계층의양극화 현상을 두고는 시민계층의 지지와 정치·사회 안정을 얻을 수 없습니다.때문에 대통령도 생산적 복지와 고용문제를 강조한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나 복지정책이 차질없이 추진될 수 있을지,회의적인 시각도 있습니다. 하나는 재원조달 문제입니다.그동안 경제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재정적자가 누적 증대됐습니다.재벌개혁과 관련,막대한 공적자금이 투입됐습니다.앞으로도 적지않은 공적자금이 들어갈 것입니다.이런 상황에서 복지부문에 필요한 세수,자금 확보는 어떻게 할 것인지가 관건입니다. 또 생산적 복지의 기본핵심은 ‘인간 요인’입니다.인간개발을 통해 그것을 고용과 연결시켜 복지부분을 해결해야 합니다.인간교육이든 직업교육이?고용을 확대한다는 게 기본 핵심인데 아무리 정부가 투자해도 이것이 시장에서 흡수되지 않으면 사회적 갈등 요인이 됩니다.때문에 2002년에 완전고용을 실현하겠다는 말씀은 자칫 선언적 내용에 그칠 수 있습니다. ?백교수 과거 권위주의 체제에서 이뤄진 불평등한 사회자원배분 구조는 IMF체제 이후의 구조조정과정에서 어려움으로 작용했습니다.계층간 갈등의 심화는 사회불안을 야기하고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정상화를 위협하는 요소가됩니다.생산적 복지의 국정철학은사회의 갈등 관리와 통합정책의 필요성에서 나온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IMF 이후 중장기 비전을 설정하고 사회 양극화 현상과 실업,빈곤 등만성적인 사회문제를 치유하기 위한 적극적인 통합정책이 바로 생산적 복지의 배경입니다.구체적으로 내년부터 가정이 어려운 중고생의 학비를 무상지원하는 등 국민 전체를 새로운 성장과정에 동참시키고 사회연대를 창출하는계기를 만들자는 취지입니다. 여기에는 시혜적 복지가 아니라 사회통합을 위한 적극적·참여적 복지와 사회연대적 인프라 구축의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구체적 키워드는 모든 국민의 삶의 질 향상입니다.제대로 실현만 되면 복지국가의 기본틀이 짜여지고 복지국가 단계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서총장 경축사에서 언급한 국민기초생활보장법 등은 시민·사회단체가 오랫동안 추구했던 것입니다.복지정책의 방향을 중산층 약화방지와 서민생활보호에 초점을 맞춘 것도 옳았습니다.그러나 시민의 참여나 동참을 호소하는 부분이 빈약합니다.정부 혼자 복지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복지확대에는 민간의 역할이 중요합니다.우리도 시민사회를 지탱하는 자발주의를 키워나가야 합니다.직능·봉사·사회단체 등 민간부문이 상부상조할 수 있는 방향을 제시했어야 합니다. 개혁도 마찬가지입니다.개혁정책의 입안에서부터 집행,평가까지 모든 과정에서 시민참여가 이뤄지도록 해야 합니다.정부가 하고 있는 많은 일 가운데민간이 잘할 수 있는 것은 민간에게 이양을 해야 합니다.시민과 손을 잡으려는 참여민주주의와 시민사회 부분을 언급하지 않아 아쉽습니다. ■ 경제개혁?백교수 새천년을 향한 경제구상에서 재벌개혁을 다시 한번 천명했습니다. 경제구조를 재벌중심에서 중산층 중심으로 바꾸기 위해 개혁을 추진하겠다는 의지를 밝힌 것입니다.분배정의를 실현하고 조세형평을 지향하려는 의지도주목됩니다. ?서총장 경제구조 전반을 효율적으로 바꾸려는 정부의 노력은 인정합니다. 노력의 요체는 재벌개혁이며 지금은 재벌개혁의 호기입니다.그러나 정부는지금 선단식 경영을 해결하는 데 관심이 있을뿐 자본과 경영세습에는 손을대지 못하고 있습니다.분명한 철학과 기준으로 접근하길 바랍니다. ?안교수 경축사에서 지적한 것처럼 지금까지는 IMF 경제위기에서 벗어나야한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과제였습니다.그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금융,공기업,공공부분,노동분야 등 4대부문의 개혁을 추진했는데 분야에 따라서 성과가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절반의 성과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외국의 신용평가기관이 내리는 신용등급의 상향조정이라든지 동아시아의 외환위기를 겪은 국가나 브라질,러시아 등과는 달리 최근 경제성장률,실업률,국제수지,인플레 등 거시 경제지표로 볼때 상당한 성과가 있었다는 데 인색할 필요가 없습니다. ■ 정치개혁?안교수 현 정부출범시 화두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였습니다.경제부문에는성과가 있었다 해도 과연 민주주의의 제도적 정착에 가시적 효과가 있었느냐는 판단에는 유보적입니다. 그런 시각에서 보면 대통령이 강조한 것처럼 민주주의를 제대로 정착하기위해 일련의 제도개혁이 필요합니다.부정부패 방지법을 제정한다든지 정당법,선거관련법을 개정해서 투명한 정치·돈 안드는 정치를 실현하겠다든지 하는 것이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요구되는 개혁과제입니다. ?백교수 지역정당의 한계를 벗어난 전국정당화,선거공영제,고비용 저효율의 정치 청산을 주요 과제로 꼽았습니다.국회를 본회의 중심으로 운영하자는것은 토론정치를 중시하는 생각에서 나온 것 같습니다.이제는 대립과 분열,갈등,이기주의에서 화합과 통합,평화,개방주의로 나아가고 법과 상식이 지배하는 법치국가를 실현해야 한다는 비전을 담고 있습니다.개혁성과 참신성을가진 전문가 그룹을 신당에 영입하겠다고 밝힘으로써 21세기에 적응하는 정당의 모습도 제시했습니다.중요한 것은 여성의 정치참여를 위해 노력하겠다는 대목입니다. ?서총장 시민단체는 한결같이 내각제를 하지 않게 된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합니다.시민단체는 온 나라가 내각제 논란에 휩쓸려 우왕좌왕하는 사이 개혁이 물 건너가지 않을까 걱정했습니다.소모적인 논란이 일찍 끝나 다행입니다.공동여당이 내각제를 단행했다면 국민적인 반대운동에 직면했을 것입니다. 사실 내각제 약속은국민의 의사와 상관없는 것이었습니다. 정치개혁에 우선 순위를 둔 대통령의 인식도 올바르다고 봅니다.지역당 구도를 벗어나 전국당을 만들 수 있는 제도,즉 중선거구제 도입의 필요성을 역설한 것은 바람직했습니다.대통령이 남은 임기에서 가장 역점을 두어야 할것은 지역주의 정당구도를 타파하는 일입니다.김대통령이 나서지 않으면 안됩니다.호남,영남,충청당을 다음세대에 넘겨주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경축사에 개혁세력 대연합 제안이나 정책이념에 따른 정계 대개편선언 등이 빠져있는 것이 아쉬운 점으로 남습니다. ?백교수 개혁이 성공하려면 광범위한 시민단체의 힘을 이끌어 낼 수 있는동기를 부여해야 하는데 그 부분이 미흡합니다.한편 대통령으로선 브랜드가인권·민주대통령인데 그런 맥락에서 인권위 설치를 강조하고 부정부패척결의지를 재천명한 것을 평가합니다. ■ 통일,남북문제?안교수 대북 포용정책을 선언한 뒤 가시적 성과가 나타난 것이 사실이지만 동시에 어느 때보다 지난 1년반 동안 대북정책이 안팎의 도전에 부딪혔습니다.대통령이 안보를 바탕으로 대북 포용정책의 기조는 변함이 없다고 밝힌것은 의미가 있습니다.남북관계에서는 통일을 지향한다기보다 관계 정상화가 중요합니다.독일의 경험이 중요합니다.서독이 통독(統獨)이 아니라 동서독관계의 정상화와 동독 주민의 기본권 신장에 주안점을 둔 것을 눈여겨 봐야합니다.대통령이 흡수통합을 하지 않겠다는 정책방향을 천명한 것은 이런 점에서 의의가 있습니다. 남북관계에서는 단기적으로 조급한 기대를 해서는 안됩니다.남북한 관계에독일의 ‘작은 걸음의 정치’를 원용해볼 수 있습니다. ?백교수 대북문제에서는 큰 효과를 노리고 세계에 터뜨리는 전시적인 행태가 아니라 벽돌을 쌓는 자세로 정책을 추진하는 모습이 필요합니다.지난 1년 동안 경제와 통일은 엄청난 도전과 시련에 직면했는데 대통령이 탁월한 위기극복 능력을 보여준 것이 사실입니다.바깥에서 우리의 포용정책을 지지하는데도 국민적 지지가 없다면 대북정책은 어려움을 겪을 것입니다. 통합적인 통일정책이 필요합니다. ?서총장 대북관계도 정부·민간간 협력이 중요합니다.인도적 차원에서 대북 민간지원의 의미는 중요합니다.지난 정권에서는 민간 지원의 규제가 심했지만 지금은 폭넓은 자유가 있습니다.오히려 문제는 우리 국민의 열기가 식었다는 것입니다.북의 냉담함이나 IMF체제 때문입니다.정부도 민간의 일이라고 방임만 할 것이 아니라 열기를 이어가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백교수 시민단체가 인도적 지원을 반대하는 사람을 설득해야 합니다.그래야 대북포용정책이 궁극적인 목적을 달성할 수 있습니다.분명한 것은 한반도의 평화정책에 대한 당위성은 누구나 인식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정리 박찬구 김성수 이지운기자 ckpark@
  • [金대통령 ‘새 천년’의 비전] 8·15경축사에 담긴 뜻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의 8·15 광복절 경축사는 21세기를 맞아 우리가 나아갈 ‘개혁선언’이자 발전 청사진의 제시라고 할 수 있다.김대통령 스스로도 경축사에 대해 “새천년 선진한국의 기틀을 마련하자는 취지로 앞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 것인지에 대한 비전제시”라며 “우리 모두 새천년을 선진국으로 만들어 나가자는 뜻”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번 광복절을 ‘20세기 마지막 8·15 경축일’로 규정,지난 100년을 좌절과 불굴의 헌신이 교차한 시기로 정리하면서 새 천년의 청사진을 제시한 경축사 곳곳에서도 이를 읽을 수 있다. 김한길 정책기획수석 역시 “앞으로 남은 임기 3년반 동안의 청사진이자,21세기 한국의 모습을 담은 비전 제시”라고 강조했다. 특히 그동안 ‘개혁의 실종’을 우려했던 국민들에게 국민의 정부의 정체성을 분명히 밝힘으로써 ‘제2의 취임사’의 성격을 갖고 있다.김대통령이 “개혁정부의 정체성을 더욱 분명히 할 것”이라고 역설했듯이,개혁의 강도와속도에 대한 강한 의지의 피력인 셈이다.내각제개헌 유보에 대해공식 사과하고 대선자금 문제를 언급한 것도 이를 위한 정지작업의 성격을 함축하고있다. 김대통령은 구체적인 방향으로 정치개혁과 인권법 등 각종 개혁입법,부정부패 척결,재벌개혁,교육개혁,생산적 복지 등 경제·사회 개혁정책을 제시했다.핵심은 중산층과 서민을 위한 제도와 정책을 만들어 깨끗하고 정의롭고,환경·문화·레저면에서 풍요로운 사회를 구축하겠다는 내용이다.또 약자에게도 공평한 사회가 되도록 하고,바르고 유능한 사람이 성공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겠다는 의지로 요약된다. 김대통령의 신당 구상은 바로 이러한 정책방향에서 출발하고 있다.신당은새로운 ‘개혁주체세력’의 결집으로 총체적 개혁을 포괄적으로 실천할 수있는 역량을 갖춰야 한다는 점을 주문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또 오는 2002년까지 국민소득 1만2,000달러 달성,완전고용 등 경제발전의 중기목표를 구체적으로 제시한 것도 이들을 아우르기 위한 국정지표 제시라고 할 수 있다.이는 지역통합의 차원을 넘어 중산층과 서민이 중심이 되는 계층간의 화해와통합을 의미한다. 박준영(朴晙瑩) 청와대대변인은 “김대통령은 재벌 위주의 경제 및 사회의부정부패구조 해체 등 중산층과 서민들에게 실질적인 혜택을 주는 정책전환의 구상을 경축사에 담았다고 할 수 있다”며 “이는 김대통령 집권 2기의의지”라고 말했다. 양승현기자 yangbak@
  • 이긍규 자민련 새 총무

    자민련 이긍규(李肯珪)신임 원내총무는 9일 “당내 화합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취임 일성(一聲)을 밝혔다.그러면서 “자식이 아버지를 짓밟고 가서는 안되며,그런 일도 없을 것”이라며 ‘충청권 신당설’을 일축했다.다음은 일문일답. ?앞으로 원내 대책은. 야당이 금명간 제출할 것으로 예상되는 ‘총리 해임건의안’을 비롯,‘조폐공사관련 국정조사특위’,‘옷로비의혹조사’와 국민의 여망인 ‘정치개혁완성’등 많은 과제들이 놓여 있다.대화와 타협의 기조를 바탕으로 지도부와 동료 의원,총무단이 함께 고민하며 해결해 나가도록 힘쓰겠다. ?한나라당이 김종필(金鍾泌)총리 불신임안을 내려고 하는데. 야당 당수는 몸통을 상대해야지 곁가지를 갖고 해서는 안된다.수해,경제 문제 해결에 힘쓰고 있는 총리를 뒤흔드는 게 야당 총재의 도리냐.한나라당 이부영(李富榮)총무를 만나 강력히 얘기하겠다. ?김총리 계보인가,박태준(朴泰俊)총재 계보인가. 3당 통합 때 신민주공화당은 없어졌다.지금은 자민련만 있다. ?김총리와 김용환(金龍煥)수석부총재와 갈라서는 게 아니냐. 신당 창당이라는 게 그렇게 쉽지 않다.은혜를 원수로 갚아서는 안된다.충청권 인구도 적은데 JP가 존재하는 한 아버지를 짓밟고 가서는 안된다.그런 일도 없을 것이다. 박대출기자 dcpark@
  • 金대통령, 국민회의지도부 오찬서 밝힌 국정현안 인식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이 9일 국민회의 지도부와 청와대 오찬에서 정국상황에 관한 인식을 비롯해 신당창당과 세풍(稅風),내각제개헌 유보,자민련과의공조,정치개혁,개혁입법 등 정국현안에 대한 스스로의 생각을 밝혔다.김대통령의 이날 오찬은 정국이 어수선한 상황에서 당에 힘을 싣고 지도부의 의견을 수렴함으로써 여권의 총체적 역량을 다잡기 위한 행보로 풀이된다.참석자들도 모처럼 자유롭게 의견을 개진했고,김대통령도 그동안 느낀 바를 비껴가지 않고 털어놨다.오찬은 2시간 가까이 계속됐다고 박준영(朴晙瑩)청와대대변인이 전했다. ■정치현실 김대통령은 자성(自省)으로부터 출발했다.“국민들은 정부에 대한 높은 도덕적 기대를 갖고 있다”고 전제한 뒤 “일부 인사들의 잘못된 일로 국민들로부터 비판을 받는 것은 정부의 책임”이라고 말했다.그러면서 정치가 국민의 신뢰를 상실하고 있는 현 상황에 대해 여야 모두 겸허히 반성해야 할 일이라고 지적했다.특히 “TV를 보면 국회가 텅텅 비어있다.국민들이국회를 어떻게 보겠는가”라며 정치 현주소를 간접 질타했다. 김대통령은 “정치는 대통령보다 앞으로 당이 책임지고 해야 할 것”이라며“대통령이 모든 것을 해서는 안되며, 지도위와 당직자들이 국회와 당을 책임져달라”고 주문했다. ■신당창당 김대통령의 신당론은 현실정치에 대한 우려에서 비롯됐다.“현행대로 선거가 치러진다면 모두 지방중심당으로 전락할 것”이라고 지적한 김대통령은 “세계화시대에 지역적 분열과 갈등이 계속된다면 나라가 어떻게되겠는가”라며 ‘전국정당화’의 당위성을 찾았다.정당명부제와 중선거구제를 원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고 했다. 김대통령은 먼저 “처음에는 자민련과 당을 같이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으나자민련의 상황이 달라 더이상 추진하지 않았다”며 “이제 국민회의 중심으로 추진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이어 영입 인사의 중요성을 강조했다.김대통령은 “신당은 21세기 우리나라를 걸머질 새로운 젊은 세대와 능력있는 전문인사들을 영입해야 한다.과감히 새출발을 하자”고 촉구했다.즉 젊은 인력과 새로운 세대의 영입을 통한 노·장·청의조화와 남녀의 균형을 새로운모델로 제시했다. 신당의 이념과 정책으로는 건전보수와 개혁세력의 통합으로 규정하고 중산층과 서민이 중심이 되는 정치기틀을 마련해야 한다고 역설했다.김대통령은창당준비위에서 이에 대한 준비를 철저히 하도록 지시했다. ■내각제 유보와 자민련과의 공조 김대통령은 김종필(金鍾泌)국무총리와 자민련 박태준(朴泰俊)총재가 내각제개헌을 유보하게 된 이유를 설명했다.첫째,경제위기 상황에서 체제를 바꾸기 어렵고, 둘째는 국정개혁이 무엇보다 우선되어야 한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으며, 셋째,대통령중심제를 지지하는 야당이다수라는 현실을 감안해서 스스로 결정한 것이라고 털어놨다. 그러면서 자민련과의 공조의 중요성을 역설했다.“임기내내 자민련과 확고한 공조를 유지하고 협력해야 할 것”이라며“이것은 국민 앞에 약속이었고,정국안정은 물론 정치신의를 지키는 일”이라고 못박았다. 특히 여성·노동·햇볕정책 등에서 자민련의 지지에 감사를 표시한 뒤 “두당간에는 정책적차이가 줄고 조화를 이루게 됐다”고 평가했다. ■세풍문제 “세풍으로 야당이 어려움에 처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고 운을 뗀 김대통령은 “세풍사건은 정치자금 문제가 아닌,기업들이 낸 세금을선거자금으로 가져다 쓴 국기를 흔든 사건”이라고 규정,‘야당죽이기’로정치쟁점화하고 있는 데 불만을 토로했다.이어 “무엇보다 솔직히 고백하고청산하는 것이 필요한데,야당이 문제해결을 막고 있다”며 “정부권력으로야당을 탄압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고 거듭 강조했다. 김대통령은 “한때의 인기에 연연하지 않고 역사와 국민의 마음 속에서 심판받는 자세로 일하겠다”면서 “모든 정성과 노력을 다 해 국가를 재건하고나라를 바로 세운뒤 바른 대통령으로 임기를 마칠 생각”이라고 말했다. ■당지도부 건의 대부분 참석자들은 자주 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기회를 갖고 정책결정에 중진들의 참여가 활발히 이뤄지길 바랐다.정대철(鄭大哲)부총재와 황명수(黃明秀)지도위원은 “자유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얘기를 하게 돼매우 유익하다”며 당중진들과 국정을 논의하는 시간이 많았으면 좋겠다는희망을 피력했다. 김근태(金槿泰)부총재는 개혁초기 대통령의 중심적 역할의 불가피성을 인정하면서 앞으로는 당의 역할이 확대되길 기대했다.특히 신당창당과 관련,당내의견을 적극 수렴해 줄 것을 건의했으며, 노무현(盧武鉉)부총재는 개혁지지세력의 결집과 당내 토론활성화 및 의견개진 확대방안을 제시했다. 조순형(趙舜衡)의원은 김현철(金賢哲)씨의 사과 표시가 없고,형기를 4분의1만 마쳤으며,대선잔여금 70억원의 헌납 얘기가 없으므로 사면을 유보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양승현기자 yangbak@
  • “옐친 집권연장” 의구심 증폭

    스테파신총리가 경질될 것이란 루머는 최근 몇주 사이 크렘린 일각에서 공공연히 나돌았다.루머의 진원지는 소위 옐친대통령의 ‘측근 5인방’.아나톨리 추바이스 전총리,억만장자인 보리스 베레조프스키,니콜라이 악쇼넨코 제1부총리,옐친대통령의 딸 다치아나 디아첸코,알렉산더 볼로신 대통령행정실장등이 바로 그 주인공들이다. 지난 18개월동안 4명의 총리가 물러난 것도 대부분 이 비선조직과의 알력때문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옐친대통령은 건강이 악화되면서 내각등 정상적인 통치경 로 대신 점점 더 이 비선조직의 보고에 의존해 이에 대한 문제점이 그동안 꾸준히 제기돼왔다.이 측근 조직의 최대목표는 오는 12월 총선과 내년 6월로 예정된 대통령선거의 승리를 통해 정권을 재창출하는 것.헌법상 옐친대통령은 내년 대선 출마가 금지돼있다.따라서 이들은 대선취소,연기나 측근중에서 후계자를 내기 위해 총력을 쏟고 있다. 스테파신 총리가 이들의 신임을 잃게된 결정적 계기는 유력한 차기 대권후보인 유리 루슈코프 모스크바시장이 주도한 신당조국당과 지방정부 지도자들로 구성된 ‘모든 러시아당’이 지난 4일 전격합당을 한 것.옐친진영은 스테파신을 앞세워 이 통합신당을 친옐친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막후노력을 벌였으나 실패했고 이들이 차기 대선의 최대 위협세력으로 등장한 것이다.예브게니 프리마코프 전총리도 최근 옐친진영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루슈코프측과의 연합을 모색중이다. 총리서리로 임명된 블라디미르 푸틴은안보위 서기 겸 KGB 후신인 연방보안국 국장으로 강경파에 옐친의 충복으로 알려져있다.따라서 공산당이 다수를차지하고 있는 의회(두마)에서 그의 임명동의안 처리를 놓고 충돌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러시아헌법에는 의회에서 총리인준안이 세번 거부당할 경우 대통령은 의회를 해산할 수 있게 돼있다.따라서 옐친 진영이 노리는 게 종국에는 의회해산을 통한 선거연기등 일련의 비상상황이 아니냐는 조심스런 분석도 나오고 있다.이와 함께 다게스탄 사태가 악화될 경우 이를 이용해 국가 비상사태 선포등 비상상황으로 사태를 몰고갈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옐친대통령은지난94년 겨울 체첸공화국을 침공한 뒤이듬해 무력을 동원해 의회를 강제해산한전력이 있다. 연말 총선,내년 대선이 예정대로 치러질지 여부도 일차적으로는 다게스탄사태의 추이와 의회의 총리 임명동의안 처리 결과에 따라 영향을 받을 전망이다. 이기동기자 yeekd@
  • [대한시론] 새 천년을 향한 創黨

    수년전 선진국에서는 탈냉전과 21세기 현상에 직면하여 당 개혁과 정당파괴를 통해 신당이 창당되거나 노선혁신이 벌어졌다.소련·동유럽의 사회주의권이 붕괴하자 자본주의 선진국들의 국제관계만 아니라 냉전수행에 맞춰졌던국내 정치관계도 변화가 불가피했고 전통적인 계급관계와 가치관이 지식기반 산업화 과정에서 급변하면서 정당들도 소멸·변화·재건이 불가피했던 것이다.우리나라에서도 바야흐로 21세기와 새천년의 16대 총선을 앞두고 신당과정계혁신의 흐름이 나타나고 있다. 1990년 초에 이탈리아에서는 공산당이 당 노선을 공산주의에서 사회민주주의로 전면 혁신하여 ‘민주좌익당’으로 재창당되었다.이후 반공주의의 보루였던 중도 보수적 기독교민주당이 분열되어 ‘전진이탈리아’당으로 재집결하였다.그러나 이 정당은 정경·정언 유착의 구악(舊惡)이 들통나 다시 사분오열되었다. 그러다 1996년 중북부의 민주좌익당과 남부 소외지역의 지역·계급 동맹체인 ‘올리브동맹’이 총선에서 승리,71년 만의 정권교체를 달성하자 잔여 기독교민주주의 세력이 좌익과 남부 소외지역의 연합정권에 저항하는 ‘북부리가’라는 패권적 지역주의 세력에 의해 괴멸당하는 정치격변이 일어났다.유사한 변화는 일본에서도 진행되어 자민련과 사회당이 분열·재창당을 거쳐일본의 정당관계가 50년 만에 처음으로 일신되었다. 영국,미국,독일 등에서도 보수세력은 신자유주의를 기치로 이른바 ‘신우익’ 노선으로 당을 혁신하였다.진보세력들은 이에 맞서 21세기 지향의 ‘제3의 길’ 또는 ‘신중도’ 노선에 따라 ‘새 정치’를 표방하며 당개혁을 단행,전통적 중산층과 화이트칼라 신(新)중산층의 이익을 표방하는 ‘신노동당’,‘신민주당’,‘신중도 사민당’으로 재탄생했다. 이런 정당변화의 근본 원인들은 탈냉전,세계화,지식기반 산업화,이에 따른노동자·농민의 급감과 신중산층의 급성장,탈(脫)물질적 가치관과 지식·정보·문화 등 무형(無形)의 신(新)국부 개념의 주도현상,노령화,여성·환경문제 등 21세기 현상이다. 우리나라 정당들은 그간 산업화와 민주화 등 ‘근대화’ 문제에만 전념하느라 미처 이런 21세기적 변화에 적응하는 자기혁신을 이루지 못하였다.중산층의 21세기 ‘새정치’를 표방한 중도통합 이념의 ‘새정치국민회의’가 4년전 창당되긴 했으나 당시 야당으로서의 입지,지역주의,북풍음해 등 신(新)냉전 기류에 막혀 뜻을 펴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제 한국정당들이 변신에 실패하면 정치권 전체가 공망(共亡)할 지경에까지 왔다.새 천년의 격변에도 불구하고 그 면면에 구태의연한 정쟁,새천년 비전과 개혁권력의 부재로 국민의 정치불신은 극에 달해 신문의 정치면 구독률이 급감했다.국민은 ‘식물국회’와 더딘 개혁에 대해 격분하고 있다. 이제 여야가 제각기 새 천년을 향한 대혁신을 단행해야 할 때이다.여당이먼저 신진세력 영입과 구 인물의 대폭교체,자당해체를 통한 신당(新黨)창당을 선언하여 이런 방향으로 변화의 물꼬를 텄고 야당도 ‘양심세력’ 영입을 통해 당을 일신할 것으로 선언하였다. 국민회의가 모색하는 신당은 새 천년 국정개혁을 수행할 초지역적인 중도통합(中道統合)의 개혁신당이다.신당의 정체성(正體性)은 중산층을 중심으로서민과 개혁적 보수집단을 양측으로 포용하는 계층연합적 국민정당,전(全)지역세력이 통합된 전국정당,극좌·극우노선을 배제한 전(全)방향의 정치노선(온건진보노선,민주화노선,자유주의 중도노선,개혁적·민주적 보수노선,시민운동노선,21세기 신지식인적 전문역량 등)이 중도통합된 ‘무지개’ 정당,노장청(老壯靑) 연합정당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신당 시도의 성취정도는 미지수지만 아무튼 야당은 여당의 새 천년 도전에 대해 응답해야 할 차례이다.야당은 이념적 정책지향이 불분명한 상태에서 대선을 위해 결합한 ‘한지붕 세가족’식 임시 결사체이기 때문이다. 黃 台 淵 동국대 교수·정치학
  • 2與 진로와 정계개편 전망

    21일 여권 수뇌부가 공동여당을 주축으로 한 신당 창당 추진을 부인하고 나섬에 따라 앞으로의 정계개편 추이와 향배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김대중(金大中)대통령과 김종필(金鍾泌)총리,자민련 박태준(朴泰俊)총재는이날 3자 조찬회동에서 “국민회의와 자민련은 합당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일단 두 여당간의 통합신당설을 잠재웠다. 여권수뇌부는 아울러 공동여당의 최대난제였던 연내 내각제개헌 유보입장을전격 공표함으로써 공동여당간 현안을 일시에 마무리하는 모양새를 보였다. 그러나 정계개편 문제는 조금 다른 분위기다.신당창당을 포함한 일련의 가능성이 차단된 것은 아니라는게 정치권 일반적 시각이다. ‘파열음’의 진원지였던 김총리와 자민련의 박총재도 정치구도의 재편에대한 논의 가능성은 열어둔 것으로 해석된다.김총리는 정계개편 논의 전망에대해 “양당 8인위원회에서 진지하게 검토하고 논의할 것”이라고 했다. 박총재도 “두 분(DJP)이 결론을 못내린 상태”라며 그 가능성 만큼은 열어뒀다. 눈여겨볼 대목은 DJT 3자가 이날 ‘정치발전문제를 포함한 모든 정치현안을8인협의회가 협의할 것’이며 ‘양당의 공조를 더욱 강화해나갈 것’이라고합의한 부분. 공동여당간 공조가 무르익는다면‘적절한 때’기존세력의 재편이 거론되지 않겠느냐는 관측이다. 여권 관계자들은 ‘논의 가능성’수준을 넘어 기존세력의 재편에 여전히 커다란 관심을 보인다.여권 고위관계자는 “불신을 받는 현재의 정치구도로는안된다는 것이 확고한 대통령의 인식”이라며 정계개편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이 관계자는 자민련과의 통합신당이 여의치 않을 경우,현재의 국민회의를창당수준에 가깝게 확대·개편하는 방안을 예로 들었다.국민회의의 전국정당화 구상을 정계개편의 한 줄기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실제로 국민회의는이미 창당수준의 전당대회를 위해 8월31일자로 올림픽 체조경기장을 잡아뒀다. 청와대와 국민회의 내부에는 정치발전을 위해 독자적으로 새로운 정치세력화를 꾀해야 한다는 인사도 적지않은 게 사실이다. 국민의 신뢰를 받는 정당의 탄생이 시급하다는 인식의 일단이다. 이 구도는기존정당에 ‘새 피’를 본격적으로 수혈받자는 것이다.현재의 여권세력에재야·사회단체의 개혁 명망가,신진세력을 대거 포함시키는 ‘범국민정당’도 한 방식일 수 있다. 공동여당 핵심부는 16대 총선에서 승리,내각제 개헌을 위해서는 ‘합당수준이상의 공조’가 관건임을 잘 인식하고 있다. 정치판을 다시 짜야 한다는 김대통령의 의지와,‘합당수준 이상의 공조’가 필요할 것이라는 여권 수뇌부의 인식을 보면 정계개편은 언제라도 새로운 화두로 떠오를 휴화산이다. 유민기자 rm0609@
  • 막오른 정치권 빅뱅-드러난 윤곽

    ‘2+α’의 정계개편 논의가 숨가쁘다.‘DJP간 합의설’까지로 확대 발전됐다. 구상단계를 넘어 실행단계로 접어든 분위기다.‘8월중 내각제 해결’에 바로 이어지도록 조기 매듭으로 가닥을 잡았다. 청와대나 총리실은 합의설을 부인했다.김종필(金鍾泌)총리는 17일 김대중(金大中)대통령과의 부부동반 만찬회동 사실만 인정했다.정치논의는 없었다고 공식 부정했다.청와대측도 박준영(朴晙瑩)대변인을 통해 입을 맞췄다. 그럼에도 불구,깊숙이 논의한 흔적은 한둘이 아니다.자민련 박태준(朴泰俊)총재는 합의설에 대해 “전날 저녁 얘기를 들었다”고 분명히 했다.이날 김총리를 만난 한 인사는 “서로 의중을 깊이 확인한 것같다”고 말했다.10일청남대에서도 DJP는 자리를 함께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여권의 한 고위 관계자는 “김대통령의 정계개편 의지가 워낙 강하다”고 전했다. 주목할 대목은 김총리 움직임이다.김총리는 정계개편 자체에 대해 반대의사를 분명히 하지 않았다. 응하지 않는다면 직접 해명해야 할 중대 사안이다.청와대나 국민회의측은 이를 ‘긍정’으로 해석하고 있다.이를 기점으로 정계개편 논의는 ‘터진 봇물’이 됐다. 청와대나 국민회의측은 내친 김에 조기 매듭 방침을 세웠다.늦어도 9월 정기국회 전에 창당을 선언한다는 계획을 갖고 있다.이는 여권 핵심부의 절박한 정국인식과 맥을 같이 한다. 전체 구도는 ‘2+α’로 그려지고 있다.국민회의와 자민련이 두 축이다.또 한나라당 내 이탈세력과 재야·신진인사들을 동참시킨다는 계산이다.새로운 신당 형태를 생각하고 있지만 여의치 않으면 국민회의를 전국정당화하는 방안도 검토대상이다. 그림은 서로 간판을 내리고 신당을 만드는 ‘헤쳐모여식’인 것으로 전해졌다.김총리는 ‘당 대 당 합당’형식은 원치 않는 것으로 알려진다.지난 90년 3당합당후 총선에서 참패했기 때문이다.자민련 박총재는 ‘0+∞’라는 무한대 정계개편으로 표현했다. 넘어야 할 산은 안팎에 있다.한나라당은 강력히 반발하고 있다.이회창(李會昌)총재는 ‘장외투쟁 불사’를 선언했다.여야 대치정국은 점점 더 꼬이고있다.공동여당 내부에서조차 정계개편을하면 내년 총선에서 오히려 불리하다는 회의론이 일고 있다. 또 자민련은 강경파를 합류시켜야 한다.‘김총리 몫’이 중요한 변수가 될전망이다.‘통합신당 총재설’이 그 몫으로 거론된다. 김대통령은 명예총재로 물러앉거나 당적을 떠나는 방안도 검토되고 있다.내각제적 운영이라는 총리 권한 강화방안 역시 유효하다. 박대출기자 dcpark@
  • 정계개편 물밑서 다시 ‘술렁’

    최근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의 ‘전국 정당화’ 구상과 ‘맥(脈)’을 같이하는 움직임들이 가시화돼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정계 개편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가능성’ 때문이다. 그 중심에는 국민회의 영입파인 ‘국민통합 21’과 이인제(李仁濟)당무위원,한나라당 김윤환(金潤煥)·이한동(李漢東)전부총재가 자리잡고 있다. 권정달(權正達)·이규정(李圭正)·김인영(金仁泳)의원 등 국민회의 영입파18명으로 구성된 ‘국민통합 21’이 여기에 발벗고 나섰다.이들은 지난 9일저녁 서울 여의도 한 음식점에서 회동을 갖고 정치개혁과 국민대통합을 위한 정계개편과 전국 정당화 추진을 강력히 촉구했다. 이들이 이처럼 정계 개편에 불을 지피고 나선 것은 현재와 같은 당 지도체제와 정국운영으로는 내년 총선에서 자신들의 입지가 보장되지 않는다는 위기의식 때문으로 보인다.영입파들은 주로 영남과 경기·인천지역 출신이다. 이보다 앞서 이인제 당무위원은 8일 오전 상도동을 방문,김영삼(金泳三)전대통령과 1시간여 동안 대화를 나눠 눈길을 끌었다.이위원은 지난 4월 29일상도동을 방문해 김대통령과의 화해를 제의했다가 문전박대를 당했었다.그러나 이번 방문에서는 양측이 가졌던 ‘오해’을 씻은 것으로 알려졌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김대통령이 광범위한 정국수습책을 마련하는 과정에서이위원에게 ‘모종의 역할’을 맡겼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관측하고 있다. 이번 회동이 청와대와 교감에 따른 것이라는 분석이다. 49일간의 장기 외유를 마치고 지난 10일 귀국한 허주(虛舟·김윤환 전부총재) 역시 관심의 대상이다. 그는 “외유가 끝나면 정치개혁 문제 등이 어느 정도 가닥이 잡혀 있을 것으로 예상했으나 전혀 상황이 달라진 게 없어 당분간 국내 정치상황을 정리해 보는 시간을 갖겠다”고 신중한 자세를 취했다. 허주는 내각제 문제와 관련,“공동여당이 어떤 식으로든 국민과의 약속인내각제에 대해 해법을 내놓지 않겠느냐”고 내다봤다. 그러나 허주는 때가 되면 독자적으로 움직일 공산이 크다.그도 내심 전국정당화를 염두에 두면서 ‘TK맹주’로서의 위상 강화에 골몰하고 있다는 측근들의전언이다. 허주는 올 초 ‘영남+보수 신당론’을 제기했으나 당시에는 별다른 호응을얻지 못했었다. 평소 국민통합을 최우선으로 꼽는 이한동 전부총재도 ‘보폭’을 넓힐 기세다.이전부총재는 지난 6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냉전종식 한민족결의대회’ 기조연설을 통해 “특정인물 중심의 정치와 지역 볼모 정치에서탈피해 미래에 대한 밝은 비전을 제시할 수 있는 건전한 지도세력이 정치의중심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전부총재가 큰 틀의 정계 개편을 앞두고 ‘화두(話頭)’를 던진 것이 아니냐는 관측이다. 오풍연기자 poongynn@
  • [제2공화국과 張勉](17)-봇물터진 통일론:上

    제2공화국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분단 이후 통일논의가 가장 활발한 시대였다는 점이다.‘반공으로 동이 트고 해가 저무는’이승만(李承晩)정권 때나 5·16후 한세대 동안 지속된 군부권위주의 정권 때는 물론이고,그후에도 2공(共)시기처럼 남북통일이 국가사회 전체가 참여하는 활기찬 이슈로 떠오른 적은 없었다. 이승만정권이 무너지면서 ‘북진통일’로 대표되는 무력통일론은 자연히 도태된다.허정(許政)과도정부가 1960년 5월3일 국가의 근본방침을 밝히면서 “과거보다 더 견실하게 반공정책을 펴 나가겠지만 허장성세하는 물질적·정신적 낭비를 없애는 대신 유효하고 구체적인 대공(對共)방위태세를 확립하겠다”고 공표한 것이다. 이로써 집단이건,개인이건 통일방안을 자유롭게 발표하는 분위기가 형성됐다.특히 내각책임제 개헌에 따라 민·참의원을 새로 뽑는 ‘7·29총선’이다가오자 통일론은 주요한 선거 이슈가 되었다. 통일론을 먼저 제기해 이를 사회 전반으로 확산시킨 정치세력은 혁신계였다.하지만 혁신계의 분열을 반영하듯 그 무렵의 주장은 다양했다.한국사회당(대표 錢鎭漢)은 “유엔 감시 아래 총선거를 실시하되 통일조국은 민주주의를 견지해야 한다”고 했고,혁신동지연맹(張建相)은 “민주적인 모든 정당·사회단체가 통일위원회를 구성해 민주주의가 승리하는 정치적 통일을 달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사회혁신당(高貞勳)은 “김일성(金日成)괴뢰가 타도돼 자유로운 정권으로 바뀌면 남북교류를 허용하고 그 다음에 남북 총선거로 평화통일을 기한다”는 일정을 발표했다.혁신계라고는 하지만 통일정책은 이처럼 ‘반공’의큰 틀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보수·혁신 양 진영을 대표하는 민주당과 사회대중당도 총선 직전 통일정책 공약을 내놓는다.사회대중당(徐相日)은 7월22일 성명에서 ▲정당·학계를망라한 협의기구를 설립하고 ▲유엔이 선정해 우리가 승인한 국가로 감시단을 구성,자유총선거를 치러야 하며 ▲경제건설 및 대외정책이 국토통일의 성취를 뒷받침해야 한다는 원칙을 공개했다. 민주당도 나흘뒤 ▲유엔 감시하의 남북 자유선거 ▲선거감시단은 자유선거를 실시하는 회원국으로 구성할 것을 제의하면서 일부에서 주장하는 ‘선거전 남북연합위원회 구성’과 ‘통일 전 남북교류’는 반대함을 분명히 했다. 총선이 민주당 압승으로 끝난 뒤 윤보선(尹潽善)대통령은 8월13일 취임사에서 ‘유엔 감시하 남북한 총선거를 통한 통일’원칙을 다시 한번 천명하면서 “이보다 앞서 이루어야 할 근본문제는 남한이 혼란에서 벗어나 국력을 부강케 하는 일”이라고 강조했다.장면(張勉)총리도 민의원에서의 첫 시정연설에서 같은 통일방안을 밝힌다.‘선(先)건설,후(後)통일’이 장면정부의 기본정책으로 확립된 것이다. 장면정부가 ‘선건설 후통일’을 내세운 데는 불가피한 이유가 있었다.4월혁명 뒤처리를 맡은 정부로서 당면과제가 산적한 마당에 어차피 단기간에 해결하지 못하는 통일문제를 우선순위에 두기는 어려웠다.따라서 장면정부는통일논의에서 소극적·방어적일 수밖에 없었다. 장면 내각에서 내무부 정무차관을 지낸 김영구(金永求·고려대 법학과교수출신)는 “그때 시급한 과제는 헐벗고 굶주린 백성을 어떻게 먹여살리느냐와,4·19이후 쏟아진 각계의 욕구를 어떻게 수용하느냐였다”면서 “솔직히 통일에 신경 쓸 겨를이 있었겠느냐”고 반문했다.김 전차관은 “통일문제는 형식상 외무부에서 관장했지만 사실은 주무부처가 따로 없었던 셈”이라면서중요한 일이 발생하면 장총리가 그때그때 처리했다고 증언했다. 한편 ‘7·29 총선’에서 참패해 원외 세력으로 남은 혁신계는 돌파구를 통일논의에서 찾는다.총선 당시의 애매모호하던 통일논리를 강화해 ‘선통일후건설’을 내세웠다.장면정부의 ‘선건설 후통일’이란 결국 통일을 하지않겠다는 뜻이라고 비판하면서 통일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통일지상주의를 강조했다. 혁신계 정당·단체들은 통일에 관한 이념과 행동을 통합하고자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民自統)’를 구성한다.9월15일 준비위원회를 발족한 민자통은 사회대중당·사회당 등 혁신정당,천도교·유도회 등 종교단체,민주민족청년동맹·4월학생혁명연합회 등 청년단체가 참여했다고 발표했다. 이 무렵 혁신계가 새로 가다듬은 ‘무기’가 남북교류운동,그리고중립화통일운동이었다.남북교류운동이란 사람·편지·문화예술·체육 교류를 가져민족의 동질성을 살리자는 것과,남는 경제재(經濟財)를 주고 필요한 것을 받아오는 물물교환을 하자는 두가지였다.이는 국민의 감성과 경제난에 호소하는 바가 커 큰 호응을 얻었다. 중립화운동은 더욱 관심을 끌었다.민자통은 9월 말 발표한 ‘통일문제에 관한 견해’에서 ▲즉각적인 남북협상 ▲남북대표들의 ‘민족통일 전국최고위원회’구성 ▲외세 배격 ▲통일을 협의하는 남북대표자 회담 개최를 주장했다.그리고는 “통일 후 오스트리아식 중립 또는 영세중립을 택할 것이냐,아니면 다른 형태를 택할 것이냐를 결정해야 한다”고 덧붙였다.중립화론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이다. 한달쯤 뒤인 10월22일 미국에서 중립화론이 터져나왔다.마이크 맨스필드 상원의원이 ‘극동보고서’에서 “오스트리아를 중립화한 것처럼 미국이 여러강대국들과 협의,한국을 중립화해 통일시켜야 한다”고 밝힌 것이다. 맨스필드의 제안이 알려지자 혁신계는 크게 고무돼 혁신동지연맹·사회대중당·사회당 등이 잇따라 지지성명을 발표한다.이어 부산대 학생들이 11월5일 ‘통한(統韓)궐기대회’에서 ‘외세의존적인 통일을 배격한 중립적인 무혈(無血)통일’을 제의하고 나섰다.학생들은 또 “현 정부와 국회는 실천 가능성이 없는 통일방안을 주장하지 말고 국민투표로써 통일방안을 결정하라”고 촉구했다. ‘중립화 바람’은 통일논쟁이란 불씨를 거대한 들불처럼 번지게 했다.그불길은,남북대치의 냉전구조에 토대를 둔 장면정부의 통일정책을 뿌리까지태울 기세로 밀려왔다. 이용원기자 ywyi@*북한의 대남정책 제2공화국 시절 통일논의의 세 축은 장면(張勉)정부,혁신계와 일부 학생 등 급진주의자들,그리고 북한이었다.이 가운데 가장 유리한 위치에 있던 쪽은당연히 북한이다. ‘3·15부정선거’로 마산에서 대규모 시위가 두차례 발생하자 북한 당국은 이를 ‘인민봉기’로 규정했다.지난 97년 모 주간지가 공개한 푸자노프(당시 평양주재 소련대사)비망록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비망록에 따르면 1960년 4월11일 김주열(金朱烈)의 시신이 발견돼 제2차 마산시위가 일어나자 조선노동당은 이를 ‘인민대중의 진정한 민주화운동’으로 평가한 데 이어 “시위가 인민봉기 유형을 띠고 서울 부산 대구 마산 등대도시를 휩쓸고 있다”고 판단했다. ‘4·19’이틀 뒤 노동당은 “파국에 처한 남조선의 현사태를 수습할 대책을 토의하기 위해 남북조선 정당·사회단체 대표들의 연합회의를 긴급 소집하자”고 제의한다.아울러 “평화적 통일은 어떠한 외국의 간섭도 없이 전체 조선인민의 자유로운 의사에 의한 남북조선 총선거를 통해 실현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남한이 ‘7·29총선’국면에 들어가자 북한은 혁신계 정당·단체의 창설을적극 지지하고 나선다.6월13일 푸자노프를 만난 김일성(金日成)은 “우리는단 하나의 (혁신계)대중정당이 아니라 여러 당을 지지하며 현재 그런 당으로는 한국사회당·대중사회당과 기타 정당이 있다”고 말한다. 북한은 ‘7·29총선’결과에 큰 기대를 걸어 “혁신계에서 35명 가량이 당선될 것같다“고 전망하지만 실제로 당선자는 민·참의원 합해 7명에 그쳤다.게다가 그들은 북한이 보수파로 분류한 인사들이었다. 이에 충격을 받은 듯 북한은 전략을 바꿔 ‘남북연방제’를 제안한다.김일성은 8월14일 열린 ‘해방 15주년 경축대회’에서 “남조선 당국이 아직 자유로운 북남(北南)총선거를 받아들일 수 없다면 먼저 민족의 긴급한 문제를해결하는 과도적인 대책이라도 세워야 한다”면서 남북연방제를 처음 내놓는다. 김일성은 “우리가 말하는 연방제는 남북조선의 현 정치제도를 당분간 그대로 두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와 대한민국 정부의 독자적인 활동을보존하면서,두 정부 대표들로 최고민족위원회를 조직해 남북조선의 경제·문화 발전을 통일적으로 조절하는 방법을 실시하자는 것”이라고 밝혔다. 북한의 ‘남북연방제’제의는 과도적이자 단기적인 성격을 가졌다.연방을형성하면 곧바로 남북한 총선거로 넘어가는 수순이었다.북한이 연방제를 제의하며 통일공세를 적극 강화한 이유는,혁신계의 평화통일 주장에 발맞춰 전략적으로 유연한 통일방안을 내놓기 위해서였다. 북한의 남북연방제 안은 50년대후반 북한학계가 전체적으로 동원돼 벌인‘과도기논쟁’을 이론적으로 수렴한 것이기도 했다. 북한은 유엔 감시하의 총선거를 반대하고 김일성의 남북연방제를 재확인하는 내용의 각서를 11월11일 유엔에 제출한다. 남북 총선거의 전단계 또는 대안으로 북한이 마련한 ‘과도적 연방제’안은70년대 중반까지 지속된다. 이용원기자
  • [제2공화국과 張勉](16)혁신계의 浮沈/4·19이전의 상황

    4월혁명후 새 세상이 열렸다고 믿은 정치세력 가운데 하나가 혁신계다.이승만(李承晩)정권 12년 동안 철저히 탄압받은 혁신계 인사들은 ‘4월혁명이 완수해야 할 과업이야말로 혁신세력이 책임진 역사적 과업의 주요한 일부’라고 판단했다.그리고 4월혁명이 열어놓은 정치적 공간에 그들의 활동무대도포함된다고 확신했다. 이 무렵 혁신계는 여러 갈래로 나뉘어 있었다.‘혁신계’로 규정된 제(諸)정치세력의 노선·뿌리가 다양한데다,사회적으로 공인받은 정당으로서 맥을이어온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조봉암(曺奉岩)이라는,카리스마와 전국적인 지명도를 갖춘 인물을 잃은 점도 크게 작용했다. 따라서 4월혁명 후 혁신정당 창당은 명망가들의 이합집산에 좌우됐다.첫 단계로 이들은 4월30일 부산에 모여 ‘한국혁신세력집결촉진회’를 구성한다. 이어 통합신당인 ‘사회대중당’을 결성키로 하고 5월17일 창당준비위원회를 갖춘다.민주혁신당의 서상일(徐相日)이 대표를 맡고 진보당계의 김달호(金達鎬) 윤길중(尹吉重)과 혁신계 원로인 장건상(張建相) 이동화(李東華) 정화암(鄭華岩) 등이 참여한다. 그러나 통합을 주장하던 혁신세력은 곧 핵분열을 한다.사회대중당이 창당도 하지 못한 상태에서 장건상이 혁신동지총연맹을 만들어 갈라서는가 하면 전진한(錢鎭漢) 김철(金哲)의 한국사회당,고정훈(高貞勳)의 사회혁신당 등 군소 혁신계 정당들이 줄지어 등장했다. 이같은 분열이 이념이나 정강정책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다.장건상 스스로 회고록에서 밝힌 것처럼 “혁신계가 통일되지 못하고 분산된 근본적인 원인은 이론의 차이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인물 중심의 파벌에 의한 것”이었다. 4월혁명을 맞아 혁신계가 창당을 서두른 까닭은 그해 7월29일로 예정된 총선에서 다수의석을 확보해 제도권에서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였다.그런데도혁신계는 통합하지 못하고 사분오열된 채 후보를 내는 바람에 후보자가 233개 선거구에서 156명에 달했다.혁신정당 후보가 2명 이상 출마해 서로 다툰선거구도 24곳에 이르렀다. 혁신정당에 지식인들이 활발하게 참여한 점도 각 당이 나름대로 자신을 가진 요인이 됐다.예컨대 사회대중당은 창당준비 단계인데도 대구 5개 선거구모두에 ‘반(反)이승만독재 투쟁’으로 유명한 인사들을 공천했다. 제헌의원을 지낸 혁신계의 대표주자 서상일을 비롯해 독립운동가이자 혁신계 원로인 이동화,대구매일신문사 주필 최석채(崔錫采),월간 ‘사상계’ 편집위원 출신인 양호민(梁好民),훗날 국회의장을 지내는 김수한(金守漢) 등이 그들이다.부산에서도 역시 독립운동가에 혁신계 원로인 장건상이 혁신동지총연맹 공천으로 출마해 바람을 일으켰다. 그러나 결과는 참담했다.사회대중당 공천자 121명 중에서 서상일·윤길중(강원도 원성)·박권희(朴權熙,경남 밀양)·박환생(朴煥生,전북 남원) 등 4명이,한국사회당 공천자 18명 가운데 김성숙(金成淑,남제주)만이 원내에 진출했다.이 5명을 제외한 나머지 혁신계 후보는 전멸한다. 함께 치른 참의원 선거에도 58명이 나서 사회대중당의 이훈구(李勳求,충남)와 혁신동지회의 정상구(鄭相九,경남) 2명만 당선됐다. 혁신계는 이처럼 선거에서 참패한 까닭을 ▲유권자들이 아직도 금력·권력에 영향받는 상태였고(申相楚 주장) ▲혁신계를 공산주의자와 동일시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반면 한승주(韓昇洲) 고려대 교수는 저서에서 “국민이 이승만 정권을 무너뜨린 것은 독재적인 지배를 거부한 것이지 반공·보수주의를 거부한 것은 아니었다”고 분석했다. 어쨌든 지도부 거의 전원이 원내 진출에 실패함에 따라 혁신계는 원외 세력으로 남아 장외투쟁에 집중할 수밖에 없게 됐다.그 와중에서 혁신계는 민주당의 신·구파 싸움과 다름없는 주도권다툼 끝에 갈라서게 된다. 먼저 혁신정당 통합을 목표로 창당을 준비하던 사회대중당은 김달호를 중심으로 한 진보당계만으로 축소 형성됐다.총선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지방조직을 선점(先占)하는 데 성공한 진보당계는 사회대중당 창당을 진보당의 재건으로 여겼다. 이에 반발해 서상일·윤길중·이동화·정화암 등 비(非)진보당계는 김성숙·고정훈과 손잡고 통일사회당을 형성한다.사회대중당은 60년 11월24일,통일사회당은 61년 1월20일 정식 출범한다. 사회대중당과 통일사회당은 혁신정당의 두 기둥으로 떠오르지만 그 성격에는 차이가 있었다.사회대중당이 급진적인 반면 통일사회당은 온건한 서구의민주사회주의에 가까웠다. 사회대중당은 61년 들어 일선조직인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民自統)’을 만든 뒤 통일과 한·미관계를 이슈로 대대적인 실력행사를 벌인다.‘민자통’의 통일론은 ‘자결의 원칙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이며 북한과의 무조건적인 협력을 주장했다. 이에 견줘 통일사회당은 민자통의 경쟁세력인 ‘중립화통일연맹(中立統聯)’을 지지했다.중립통련은 남북한 전역에서 민주적인 선거를 해 통일을 이루고,통일된 한국에는 중립을 보장해야 한다는 원칙을 견지했다. 장면(張勉)정부가 반공임시특례법과 데모규제법을 제정하려고 하자 혁신계는 61년 3월22일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2대 악법 반대 궐기대회’를 연다. 오후 2시에 시작된 시위는 날이 어두워지면서 난동으로 변했고 횃불을 든 시위행렬이 중앙청에서 혜화동까지 서울시가를 누볐다. 횃불시위는 제2공화국 최후의 대규모 시위였다.장면 정부는 곧바로 김달호·고정훈 등 주요 혁신계인사들을 체포한다. 장면 정부하에서 혁신계는 국회 진출에 실패해 장외 세력으로 남게 된다.그들은 급진적인 학생들과 일부 소외계층의 지원을 받아 거리투쟁에 나서지만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5·16쿠데타를 맞아 다시 기나긴 잠에 빠져든다. - 4·19이전의 상황-曺奉岩 중심 진보당 두각 대한민국 출범후 국내 정치무대에서 ‘혁신계’는 항상 소수파 또는 이단이었다.남북에 분단정부가 각기 들어서 ‘6·25전쟁’까지 치른 뒤 이 땅에는‘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하는 보수우익 정당 아니고는 발붙이기 힘든 것이현실이었다.따라서 이에 속하지 않는 사회주의자,민주사회주의자,무정부주의자,조합주의를 따르는 노동운동가 들을 구분짓지 않고 통틀어 혁신계라고 불렀다. 4월혁명 이전 혁신계를 대표한 지도자는 죽산 조봉암(竹山 曺奉岩)이다.조선공산당 창당멤버인 조봉암은 1946년 박헌영(朴憲永)을 비판한 서신 ‘존경하는 박헌영 동무에게’를 신문에 발표하고 공산당과 결별한다. 48년 제헌의회 선거에 무소속으로 나와 당선되며 이승만(李承晩)정권에는초대 농림장관으로 참여한다.이어 2대 국회에서 부의장이 된 조봉암은 52년대통령선거에 진보적인 강령을 내걸고 출마해 79만표를 얻는다.비록 이승만의 523만표에는 크게 못미쳤지만 그로서는 정치적 입지를 굳힌 계기가 됐다. 55년 통합야당(민주당) 결성 움직임이 일자 조봉암은 참여를 강력하게 희망하지만 신익희(申翼熙) 장면(張勉) 등으로부터 거부당한다.이에 서상일(徐相日)계와 합쳐 혁신정당인 진보당 창당에 나선다.55년 12월22일의 창당준비위원회에는 조봉암·서상일 말고도 이동화(李東華) 박기출(朴己出) 윤길중(尹吉重) 등이 동참한다. 진보당은 창당에 앞선 56년 3월 대통령 후보에 조봉암,부통령 후보에 박기출을 선출한다.이들은 민주당 정·부통령 후보인 신익희·장면과 야당후보 단일화 협상을 벌이지만 두차례 만에 결렬된다.조봉암이 대통령 후보를 사퇴하는 조건으로 ▲부통령 후보를 진보당에 양보하고 ▲집권시 조병옥(趙炳玉)김준연(金俊淵)을 중용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며 ▲진보당 강령 일부를 수용하라고 요구한 것이다.민주당으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조건들이었다. 56년 3대 대통령선거는 신익희가 급서한 가운데 이승만과 조봉암의 싸움으로 진행됐다.결과는 이승만 504만표,조봉암 216만표로 나타났다.이후 조봉암은 이승만 정권에게 실재(實在)하는 위협이 된다. 한편 정·부통령 선거가 끝난 뒤 서상일계가 진보당에서 이탈한다.노선상의차이보다는 대통령후보 선출 당시의 주도권싸움 탓이었다.서상일이 후보로추대받기를 원한 반면 조봉암은 투표로 뽑을 것을 주장했고 선출 결과 부통령후보로 지명된 서상일이 고사해 박기출이 대신 후보가 된 것이었다. 진보당은 56년 11월10일 창당대회를 열어 조봉암을 위원장으로,박기출 김달호(金達鎬)를 부위원장으로,윤길중을 간사장으로 각각 선출했다.정치강령으로 ▲책임있는 혁신정치 ▲수탈없는 계획경제 ▲민주적 평화통일을 내세웠고 특히 ‘공산독재를 배격한다’고 강조했다.서상일계도 57년 10월15일 민주혁신당을 창당해 독립한다.58년 5월의 국회의원 총선을 앞둔 그해 1월13일경찰은 조봉암을 비롯한 진보당 간부 전원을 간첩죄 등의혐의로 검거했다. 아울러 자유당 정권은 2월25일 진보당을 등록취소한다. 조봉암은 1심에서 징역 5년을,2·3심에서 사형을 선고받는다.‘북한 지령에 호응해 진보당을 결성하고 10여차례 자금을 받은 사실이 인정된다’는 판결이었다.대법원이 재심청구를 기각한 다음날인 59년 7월31일 조봉암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진보당과 비슷한 정강정책을 내건 서상일계의 민주혁신당이 어떤 규제도 받지 않았다는 사실은 ‘진보당 사건’의 성격과 관련해 시사하는 바가 적지않다.조봉암의 죽음으로 혁신계는 치명타를 입어 4월혁명까지 별다른 활동을 벌이지 못한다. 이용원기자
  • [제2공화국과 張勉]- (9) 신구파 대립과 分黨(상)/비교

    李承晩독재체제에 맞선 통합야당 민주당은 1955년 9월19일 탄생한다.이날서울 태평로 시공관은 하루종일 민주주의를 희구하는 열기로 들끓었다.전국에서 모여든 민주당 대의원 2,000여명이 오전에는 발기인대회를,오후에는 창당대회를 잇달아 열었다.오전 대회에서 鄭一亨의 경과보고에 이어 張勉의 인사말이 장내에 울려퍼졌다. “대한민국을 구하고 우리의 민주주의를 구하기 위해 우리는 일체의 독재를 배격한다고 정강의 서두에 내걸었습니다.우리는 진실한 민주주의를 살려나가기 위해 공정한 선거와 내각책임제를 주장하는 것입니다.” 오후의 창당대회에서는 申翼熙가 민주당 출범의 의의를 밝히는 인사말을 했고 朴順天이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우리는 민주세력의 집결 강화만이 국정쇄신의 방도임을 확신한다”고 선언문을 읽어내려갔다. 창당대회 다음날 민주당 중앙상무위원회는 최고위원 선거에 들어갔다.대표최고위원 투표에서 申翼熙는 234표를 얻어 49표에 그친 張勉을 누르고 선출됐다.이어 연기명으로 실시한 최고위원 투표 결과 趙炳玉(282표)·張勉(278표)·郭尙勳(262표)·白南薰(111표)이 뽑혔다. 이들 가운데 제헌의회 의장을 지낸 申翼熙,내무장관을 역임한 趙炳玉,민국당 최고위원 출신인 白南薰은 구파였고 총리를 지낸 張勉,국회부의장인 郭尙勳은 신파였다.이밖에 중앙상무위 의장은 成元慶(신파)이 맡았다. 집행기구 16부 부장은 尹潽善(원내총무격인 의원부장)·柳珍山(노동부장)·鄭一亨(섭외부장)·玄錫虎(조직부장) 등으로 구성됐다.구파는 대표최고위원을 포함한 최고위원 세 자리와 부장 7석,신파는 최고위원 두 자리에 상무위의장과 부장 9석을 차지해 신·구파는 처음부터 팽팽한 균형을 이루며 출발했다. 민주당 창당후 처음 맞은 큰 이슈는 다음해 치르는 제3대 정·부통령 후보를 뽑는 일이었다.당시 민주당에서 대통령후보로 거론될 만한 인물은 申翼熙·趙炳玉·張勉 세 사람 정도였지만 대세는 申翼熙에게 기울어 있었다.초점은 부통령후보였다.신파는 張勉을 대통령후보로 민다고 공표했으나 내심은부통령후보를 노리고 있었다.구파는 구파대로 ‘대통령후보 申翼熙’를 기정사실로하는 한편 趙炳玉을 부통령후보로 세우려고 물밑작업을 벌였다. 이 문제는 郭尙勳이 적극 나서 해결됐다.郭尙勳은 趙炳玉을 찾아가 “이번에는 당신이 양보합시다.이번에는 누가 보아도 해공(申翼熙)이 적격이니 그를 시켜야 할 것이 아니오? 차후에 입후보하면 내가 적극 지원하겠오”라고설득한다(郭尙勳 회고록에서). 이에 趙炳玉은 “운석(張勉)이 대통령후보 경쟁에 나서지 않도록 책임져라”라는 조건으로 받아들인다.전당대회에서 申翼熙·張勉을 정·부통령 후보로 뽑은 민주당은 신·구파 구분없이 힘을 합쳐 선거운동에 매진한다. 56년 정·부통령 선거는 민주당이 李承晩정권을 누르고 평화적인 정권교체를 이룩할 절호의 기회였다.52년의 ‘발췌 개헌’과 56년의 ‘사사오입 개헌’으로 이어진 李承晩의 영구집권 음모와 자유당의 폭정(暴政)에 이미 많은국민이 염증을 느끼는 상태였다.게다가 申翼熙·張勉팀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고 민주당이 내건 선거구호 ‘못살겠다 갈아보자’도 돌풍을 몰고 왔다. 56년 5월2일 한강백사장에서 열린 유세에는 당시로서는 짐작도 못할 30만∼40만 인파가 몰려들었다.그러나 민주당의 손에 들어온 듯하던 대통령 자리는한강백사장 유세 3일 후에 그만 손아귀를 빠져나간다.호남 유세에 나선 申翼熙가 5월5일 열차칸에서 급서한 것이다. 대통령후보 부재에도 불구하고 張勉은 李起鵬을 누르고 부통령에 당선된다. 이로써 민주당은 창당 9개월 만에 수권 능력을 가진 야당으로서 당당히 자리잡는다.이같은 자리매김은 58년의 제4대 국회의원 선거로 연결돼 민주당은 78석을 확보한다.창당 때의 33석에 비하면 2배 이상 늘어난 것이다. 민주당 위상 강화와 비례해 신·구파 대립도 점차 심해져 갔다.첫 충돌은정·부통령선거 직후에 찾아왔다.56년 7월 金度演·金俊淵·蘇宣奎 등 구파중앙위원 60여명이 연명(連名)해 최고위원 불신임안을 제출한다.이에 최고위원 전원이 사표를 내고 후임자 선출을 논의하게 된다. 신파는 “국민에게서 압도적 지지를 받은 張勉부통령이 당연히 대표최고위원을 맡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구파는 표대결을 요구한다.투표 결과 대표최고위원에는 趙炳玉이,최고위원에는 郭尙勳·張勉·金俊淵·金度演이 뽑힌다. 일부에서 분당을 거론할 정도로 사태가 악화된 끝에 신·구 양파는 다음해부터 대표 및 최고위원을 중앙상무위가 아닌 전당대회에서 선출한다는 등 몇 가지에 타협하고 수습한다.이후 구파는 부통령인 張勉에게 당의 주도권을빼앗길지 모른다는 위기감에서 그를 더욱 견제하게 됐고,신파는 張勉을 중심으로 더욱 똘똘 뭉치게 됐다. 59년 11월 전당대회에서 신·구파는 다시 한번 격돌한다.60년 정·부통령선거에 나갈 대통령후보 지명전에서 趙炳玉은 483대480 단 3표차로 張勉에게 신승한다.다음날 대표최고위원 투표에서는 거꾸로 張勉이 趙炳玉을 70여표차로 물리친다.최고위원에는 郭尙勳·白南薰·尹潽善·朴順天이 올랐다. 이 전당대회는 신·구파 사이에 메우기 힘든 골을 파놓았다.대회를 몇달 앞두고부터 양쪽의 경쟁은 한계를 넘어서 각종 추태가 난무했다. 趙炳玉이 대통령이 돼서는 안된다고 인신공격한 ‘결격사유 10개조’라는 괴문서가 전국 지구당에 배포되는가 하면,경남도당대회가신·구파 당원 간의난투극으로 중단되기도 했다. 신·구파의 격한 대립 속에서도 민주당은 趙炳玉대통령후보,張勉부통령후보 겸 당 대표최고위원 체제로 1960년을 맞는다.56년 申翼熙의 급서로 이루지못한 정권교체의 꿈을 이번에는 꼭 이룬다는 각오와 함께였다. 李容遠 - 신구파 내력과 특징 비교 민주당(民主黨)창당은 자유당의 ‘사사오입’개헌이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자유당(自由黨)은 ‘초대 대통령에 한해 중임(重任)제한을 철폐’하는 내용의 제5차 개헌안을 마련한다. 李承晩에게 영구집권의 길을 터주려는 이 개헌안은 1954년 11월27일 국회에서 찬성 135,반대 60표로 부결된다.그러나 이틀뒤 자유당은 수학의 ‘사사오입’규정을 적용하면 개헌 정족수를 통과한 것이라는 궤변으로 헌법개정을공포한다. 이후 열달동안 반(反)李承晩세력은 통합야당 결성에 노력한다.한민당(韓民黨)의 후신인 민주국민당(민국당,民國黨)과 무소속 의원들은 호헌동지회를 결성해 원내교섭단체로 등록한다.여기에는 자유당을 뛰쳐나온 ‘탈당파’의원12명도 가세한다. 당시야당으로서는 민국당이 가장 컸지만 원내의석이 15석에 불과해 다른 야당 세력을 흡수,통합하지는 못했다.따라서 민국당의 발전적 해체를 전제로 55년 12월 신당촉진위원회가 구성된다. 그러나 신당추진 세력은 곧 의견대립에 부딪친다.민국당의 申翼熙 趙炳玉과재야의 張勉 등 ‘자유민주파’는 좌익에서 전향한 자,독재 또는 부패혐의가 짙은 자 등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명분으로 혁신계인 曺奉岩과 족청계 李範奭을 배제하려고 한다.반면 張澤相 徐相日 등 ‘민주대동파’는 범야세력의총결집을 주장하며 맞선다. 결국 민주당은 ‘자유민주파’만으로 출발하는데 당시 원내 의석은 33명이었다.이에 비해 자유당은 120여명,무소속은 40여명이었다.‘통합야당’을 표방했는데도 무소속으로 남은 의원이 40여명이나 된 사실은 야당의 분열상을 보여주는 증거이자,민주당의 포용력이 부족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창당후 민주당은 다시 신·구파로 갈린다.구파는 한민당에 뿌리를 둔 申翼熙 趙炳玉이 중심인물이었다.한민당을 실질적으로 이끈 金性洙가 55년 2월별세한 뒤여서 구파의 대표성은 申翼熙가 갖고 있었다. 반면 신파는 張勉을 지도자로 鄭一亨 朱耀翰 등의 흥사단계(張勉은 흥사단계로 알려졌지만 흥사단에 가입한 일이 없다),吳緯泳 金永善 李相喆 등의 원내자유당계,玄錫虎 李泰鎔의 자유당 탈당파 등으로 다양하게 구성됐다. 한마디로 구파는 한민당에 뿌리를 둔 ‘구세력’이고 신파는 이를 제외한,새로 야당에 가입한 ‘신세력’이었다.하지만 더욱 중요한 차이점은 신·구파가 출신 배경,사회활동,이념적 지향에서 어느정도 구분지어진다는 점이다. 구파는 대부분 지주집안 출신에 독립운동가나 지사형이었고 상당히 보수적이었다.이에 견줘 신파는 관료·법관·금융계 출신의 전문인이 주류였다.韓昇洲 고려대교수의 분석에 따르면 구파 지도자 가운데 80%는 처음부터 정계에나섰으나 신파 지도자는 오히려 60%가 행정·관료직으로 출발했다.韓교수는또 “연령을 보아도 구파 지도층은 평균 51세,신파는 48세로 차이가 없는 듯하지만 신파의 지도력이 사실상 명확히 젊었다”고 평가했다. 정치행태에서도 달라구파는 비조직적이고 점잖아 “하나하나가 모두 장성같았지만”,신파는 조직적이고 투쟁적이어서 상부의 명령에 일거수일투족이 움직였다.(구파 출신 閔寬植 회고록에서)민주당 신·구파는 이처럼 이질적인 요소가 강한데도 ‘李承晩정권 타도’라는 공동목표아래 힘을 모았다.초기에는 그래도 단합하는 모습을 보였으나 59년 정·부통령 후보 선출을 놓고 대립이 심해졌다.4월혁명이후 정권장악이분명해지자 그때부터는 치열한 정권쟁탈전에 들어간다. 李容遠
  • ■韓和甲총무 ‘TK연합론’ 이후

    국민회의의 영남세 아우르기가 관심을 끌고 있다.국민회의 韓和甲총무는 28일 ‘TK(대구·경북)세력과의 정치적 연합론’을 공개적으로 제기했다.전국정당화의 큰 그림작업이 상당 부분 구체화됐다는 자신감의 표현으로 비쳐진다. 대구·경북(TK)실세격인 한나라당 金潤煥전부총재도 28일 당내 영남·보수세력의 재편을 주장했다.韓총무의 ‘TK지역과의 정치연합론’에 ‘화답’하고 나선듯한 모습이다.정계개편 움직임은 더욱 탄력을 받을 전망이다. 지금까지 여권에서나온 국민회의·자민련 통합론과 ‘韓和甲-金潤煥’의 TK와의 정치연합론을 종합하면 여권의 구상은 윤곽이 드러난다. 즉 여권의 구상은 1단계로 국민회의·자민련을 통합,거대여당의 주춧돌을놓은 뒤,2단계로 새로 출현할 TK·보수신당과의 정치적연합을 성사시키고 3단계로 이들을 한데묶는 거대 전국정당의 출현을 구상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 국민회의,신당 출신 인사 ‘예우’

    ◎이만섭 상임고문·이인제 당무위원 접근/부총재 1∼2명 협상… 사무처 요원이 난제 국민회의에 입당한 국민신당 출신 인사들에 대한 대우가 윤곽을 드러내고 있다.양당은 지난 8월 당 통합을 전후해 국민신당 당직자와 사무처요원에 대해 상응하는 예우와 함께 가급적 전원을 활용한다는데 의견을 모았었다. 양당 협상팀은 현재 李萬燮 전 국민신당총재에 대해서는 국민회의 상임고문직을,李仁濟 전 고문에 대해서는 국민회의 당무위원을 맡기기로 의견접근을 본 것으로 알려졌다. 국민회의에는 李東元 李遇貞 金相賢 金元基 고문 등 4명의 고문이 있으나 李전총재가 상임고문을 맡으면 처음으로 국민회의에 상임고문직이 생기는 셈이다.그만큼 국민회의측에서 예우를 생각했다는 것이다. 李仁濟 전 고문의 경우,본인이 모든 당직을 극구 사양하고 백의종군하겠다는 의사를 밝히고 있다.양당 실무 관계자들은 “당무위원을 제의,李전고문이 수긍하고 있는 상태”라고 밝혔다. 문제는 이들외에 비중있는 인사로 지목받는 張乙炳·朴範珍·徐錫宰·김운환 의원 등의 당직부여 문제.양당 협상팀은 “확정된 것은 없으나 별다른 문제는 없을 것”이라는 입장이다.이들 인사들이 그다지 ‘욕심’을 내지않고 있다는 전언이다.신당측 관계자들은 “당대당 통합정신을 살려 부총재가 1∼2명 나와야 되지 않겠느냐”는 입장이다.당무위원도 국민회의 전체 당무위원 수의 규모를 감안,일정비율을 국민신당인사들에 할애하는 쪽으로 협상을 진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양당 ‘조직통합’협상에 큰 부담이 되고 있는 것은 사무처 요원들의 처리.朴範珍 전 사무총장은 “상층부 인사문제의 큰 가닥은 잡혔으나 사무처 실무자들의 처리문제가 난제”라고 어려움을 밝혔다.여의도 국민신당 당사는 4억원을 내고 국민회의가 계속 쓰기로 합의한 상태다.
  • 영남지역 찾은 DJ의 감회(청와대 취재수첩)

    아무리 애를 써도 표가 나오지 않던 영남지역을 찾은 金大中 대통령의 감회는 어떠한 것일까.‘초도순시’의 성격이지만,이번의 발걸음은 남다를 것 같다.부산을 근거지로 지난 대선때 500만표를 얻었던 국민신당과 통합을 이룬 뒤끝이다. 金대통령의 영남 나들이는 처음부터 여의치 않았다.수도권 집중호우로 지난달 6,7일 잡았던 첫 일정이 연기됐었다.다시 같은달 20,21일로 날짜를 잡았으나 이 때도 낙동강 범람위기로 지방나들이에 따른 인력 동원은 무리라고 판단,뒤로 미루었다.당시 청와대안에서는 ‘IMF 속 당선축하연 취소’‘수재로 인한 제2의 건국행사 축소’등을 빗대어 “뭘 한번 하려고 하면 왜 이렇게 어려운 지 모르겠다”는 푸념섞인 하소연이 나왔었다. 의도한 모양새는 아닐테지만,“IMF위기를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자”는 金대통령의 말처럼 두차례 연기가 오히려 새옹지마(塞翁之馬)가 된 듯 싶다.특히 울산의 분위기는 확연히 달랐다.도시 곳곳에 ‘金大中 대통령 방문 환영’이라고 쓰인 플래카드가 내걸렸다.지난달말 목포나 광주 방문때보다도 많았다.동서화합을 위한 자신의 호소를 주민들이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를 알고 싶었던 차에 좋은 전조로 생각했을 것 같다.부산 선물거래소와 울산 신항만건설 지원 등 굵직한 ‘선물’을 준비한 것도 같은 차원이다.
  • 여권의 정치권 새판짜기 윤곽/민주대통합·동서화합 兩날개로

    ◎TK의원 수혈통해 망국적 지역갈등 청산/밑바닥 지역정서와의 연결여부 성공 관건 ‘동서화합’이라는 정치권의 새 틀짜기가 차츰 색깔을 드러내고 있다. 여권의 주도하에서다. 국민회의는 국민신당과의 통합으로 1차로 ‘민주대통합’의 물꼬를 텄다. 1일에는 5공화국 신군부세력의 핵심인사였던 대구·경북출신 權正達 의원이 여권에 가세했다. 여권은 이를 국민통합의 전단계인 ‘지역연합’의 서막으로 간주한다. ‘민주대통합’과 ‘지역연합’을 병행추진,국민통합으로 엮어내겠다는 것이 여권 핵심부의 구상이다. ‘TK의원’의 국민회의 입당은 ‘과거를 넘겠다’의 여권 핵심부의 의중이 드러난 것으로 보인다. ‘쿠데타의 희생자’가 ‘과거’를 용서함으로써 화해의 정치를 열겠다는 것이다. 또 하나. TK의원의 ‘수혈’은 망국적인 지역갈등 구조를 청산,동서화합 구도를 심겠다는 강력한 의지로 보여진다. 權의원 이외에도 대구·경북의 P·K의원,崔炯佑 의원을 비롯한 3∼4명의 부산·경남(PK)의원 등 적지않은 한나라당 영남권 의원들이 여권의 ‘지역구도 타파’에 공감을 표시하고 있다. 여권은 영입 TK·PK의원을 전진배치시켜 ‘민주대통합’과 ‘지역연합’의 두 축을 견고하게 유지해나갈 참이다. 權의원도 입당회견에서 우공이산(愚公移山) 고사를 들어 “지역갈등 해소라는 ‘이산’(移山)을 위해 ‘우공’(愚公)이 되겠다”고 말했다. 權의원과 앞서 입당한 徐錫宰 의원은 각각 해당지역의 의원영입 특명을 받아 활동중인 것으로 포착되고 있다. 영입원칙이 없는 것은 아니다. 우선 국민회의는 재판에 계류중이거나 사법처리대상에 오르내리는 인물은 배제한다는 방침이다. 또 ‘과거세력의 포용’과 ‘반(反)개혁성 인물의 수용’은 궤를 달리하고 있다. 문제는 한나라당 영입대상 의원들 상당수가 이런 원칙에 걸린다는 점이다. 여권의 고위관계자는 “과반의석을 넘기가 힘들더라도 ‘문제의원’들은 철저히 배제시킬 방침”이라고 강조했다. 여권과 접촉중인 인사 가운데 한나라당의 P·N·H·J·L의원 등은 선거법등 각종 사건으로 재판에 계류돼 있다. 국민회의는 또 지역민의 눈총에도 불구,‘결단’을 내려준 영남권 의원들은 적어도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의원으로 자리를 보장하는 방안을 강구중이다. 하지만 여권의 국민통합방안이 구도대로 이어질지는 미지수다. ‘지역구도 타파’를 내세운 영입의원들의 영향력이 그다지 크지 않을 것이라는 지적도 있다. 영남과 호남의 바닥정서는 정치권의 움직임과는 거리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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