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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여 합당론’ JP가 물꼬트나

    공동여당간의 합당론이 정가의 화두로 급부상하고 있다.16일 밤 김종필(金鍾泌·JP)총리의 발언이 결정적 계기였다.“국가와 국민에게 무엇이 도움이되는지를 판단해 (합당문제를)결정하겠다”는 언급은 결국 합당으로 가는 수순 시사가 아니냐는 분석이다.내각제 유보 결심 당시의 발언과 유사하다는지적도 나온다. 김총리는 17일 우수 경찰관들을 표창하는 자리에서 “정치인이 할 일이 무엇인지,사명이 무엇인지,정치의 당위가 무엇인지를 자각하지 못해 정치가 안정을 찾지 못하고 있다”고 무엇인가 암시하는 듯한 발언을 했다. 그러나 이덕주(李德周)공보수석비서관으로부터 ‘합당론’관련 언론보도를보고받고 “또 시작하는군.그런 식으로 멋대로 하라고 그래”라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JP 발언이 나온 뒤 자민련의 분위기는 의외로 차분했다.합당에 반대해온 충청권 의원들도 공개적으로 비난하는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시간을 갖고두고보겠다는 의견이 주류였다. 내년 총선을 앞두고 ‘변화’를 갈망해온 영남권과 수도권 의원들은 대부분 ‘합당’에 기대를 걸었다. 박철언(朴哲彦)부총재측은 “총리의 발언은 여권통합의 길을 열어 놓은 것으로 긍정적으로 평가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당지도부에서는 JP의 발언에 대한 확대해석을 경계했다.김현욱(金顯煜)사무총장,이양희(李良熙)대변인 등은 “천신만고 끝에 당을 만들어 여기까지 왔는데 자민련 간판을 내릴 수는 없다”고 합당론을 일축했다. 국민회의는 반색하면서도 민감한 사안이라 공식적인 언급을 삼갔다.이영일(李榮一)대변인은 “논평을 낼 정도로 분위기가 성숙되지 않았지만 합당불가입장을 고수하던 JP의 입장이 서서히 바뀌고 있는 것 아니냐”며 기대감을나타냈다. 당내에서는 ‘합당 당위론’이 대세였다.자민련이 참여하는 통합신당이 탄생하면 내년 총선에서 승리할 수 있고 개혁완수에도 탄력이 붙을 것이라는논지다.설훈(薛勳)의원은 “통합 신당이 출현할 경우 최대 수혜자는 국민이며 JP와 자민련에도 득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강동형 김성수기자 yunbin@
  • 여권 신당창당 본궤도에

    여권의 신당 창당이 본 궤도에 오른다.그동안 논란이 됐던 창당 절차와 방식,지분 원칙 등이 가시화되고 있다. ‘개혁적 국민정당’을 표방하는 신당이 국민회의와는 별도로 탄생한 뒤 국민회의와 당 대 당 통합을 하는 방향으로 가닥이 잡혔다. 종전까지는 국민회의가 구성하는 발기인 모임과 창당준비위원회에 신진인사(α)가 대등한 조건으로 참여하는 방식이 유력했다.그러나 명실상부한 신당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선(先) 별도 신당 창당,후(後) 합당’의 수순을밟기로 방향이 바뀌었다. 한화갑(韓和甲)사무총장은 22일 기자들과 만나 “신당은 국민회의와는 별도로 만들어지며 창당대회에 맞춰 국민회의가 신당에 합류하게 될 것”이라고말했다. 이는 기득권 포기와도 맥이 닿아 있다.창당 과정에 일정한 간격을 둠으로써 신당 창당 과정의 객관성을 높이고 국민회의가 주도하는 인상을 최대한 희석시킨다는 복안이다. 국민회의와 신진인사가 1 대 1의 대등한 조건으로 참여하는 신당 창당기구(발기인 모임,창당준비위원회)에서 창당의 모든 작업을 추진하게 된다. 따라서 오는 30일 중앙위원회에서 추진할 예정이었던 창당준비위원회 구성을 백지화하는 문제를 적극 검토하고 있다.신당 창당이 국민회의와 별도로추진되면 창당준비위의 역할은 발기인에 들어갈 당내 인사를 선출하는 수준에 그칠 것이라는 판단에서다. 이와 함께 창당시점도 탄력적으로 조정할 방침이다.12월 또는 1월 중 창당준비위원회에서 결정토록 한다는 방침이다.그러나 발기인 모임은 10월 중에,신당 창당준비위원회는 10월 또는 11월에 발족할 것으로 알려졌다.창당준비위원회가 구성돼 중앙선관위에 등록을 마치면 정당으로서 법적인 보호와 지위를 갖게 된다.따라서 신당과 국민회의와 당 대 당 통합이 가능해진다는 설명이다. 지분에 대한 원칙에도 암묵적 합의가 이뤄지고 있다.국민회의 소속원과 신당에 참여하는 신진인사의 지분은 1 대 1을 원칙으로 하되 영입인사들의 비율은 재야 및 시민사회단체 40%,전문가그룹 60%선으로 한다는 것. 특히 전문가그룹은 국민회의와 재야그룹에서 개별적으로 영입,α의 범주(60%)에 포함시킨다는방침이다.영입인사의 40%를 30·40대의 젊은층에,여성에게는 비례대표의 30% 할당원칙을 적용할 방침이다. 그러나 통합신당이 국민회의의 법통을 승계할지 여부는 미지수다.신당 결성을 주도하는 국민정치연구회 이재정(李在禎)이사장은 “50년 만의 정권교체라는 역사적 의미를 살리기 위해 법통을 이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하고있다.그러나 국민회의는 가타부타 언급을 삼가고 있다. 강동형기자 yunbin@
  • “옐친 집권연장” 의구심 증폭

    스테파신총리가 경질될 것이란 루머는 최근 몇주 사이 크렘린 일각에서 공공연히 나돌았다.루머의 진원지는 소위 옐친대통령의 ‘측근 5인방’.아나톨리 추바이스 전총리,억만장자인 보리스 베레조프스키,니콜라이 악쇼넨코 제1부총리,옐친대통령의 딸 다치아나 디아첸코,알렉산더 볼로신 대통령행정실장등이 바로 그 주인공들이다. 지난 18개월동안 4명의 총리가 물러난 것도 대부분 이 비선조직과의 알력때문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옐친대통령은 건강이 악화되면서 내각등 정상적인 통치경 로 대신 점점 더 이 비선조직의 보고에 의존해 이에 대한 문제점이 그동안 꾸준히 제기돼왔다.이 측근 조직의 최대목표는 오는 12월 총선과 내년 6월로 예정된 대통령선거의 승리를 통해 정권을 재창출하는 것.헌법상 옐친대통령은 내년 대선 출마가 금지돼있다.따라서 이들은 대선취소,연기나 측근중에서 후계자를 내기 위해 총력을 쏟고 있다. 스테파신 총리가 이들의 신임을 잃게된 결정적 계기는 유력한 차기 대권후보인 유리 루슈코프 모스크바시장이 주도한 신당조국당과 지방정부 지도자들로 구성된 ‘모든 러시아당’이 지난 4일 전격합당을 한 것.옐친진영은 스테파신을 앞세워 이 통합신당을 친옐친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막후노력을 벌였으나 실패했고 이들이 차기 대선의 최대 위협세력으로 등장한 것이다.예브게니 프리마코프 전총리도 최근 옐친진영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루슈코프측과의 연합을 모색중이다. 총리서리로 임명된 블라디미르 푸틴은안보위 서기 겸 KGB 후신인 연방보안국 국장으로 강경파에 옐친의 충복으로 알려져있다.따라서 공산당이 다수를차지하고 있는 의회(두마)에서 그의 임명동의안 처리를 놓고 충돌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러시아헌법에는 의회에서 총리인준안이 세번 거부당할 경우 대통령은 의회를 해산할 수 있게 돼있다.따라서 옐친 진영이 노리는 게 종국에는 의회해산을 통한 선거연기등 일련의 비상상황이 아니냐는 조심스런 분석도 나오고 있다.이와 함께 다게스탄 사태가 악화될 경우 이를 이용해 국가 비상사태 선포등 비상상황으로 사태를 몰고갈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옐친대통령은지난94년 겨울 체첸공화국을 침공한 뒤이듬해 무력을 동원해 의회를 강제해산한전력이 있다. 연말 총선,내년 대선이 예정대로 치러질지 여부도 일차적으로는 다게스탄사태의 추이와 의회의 총리 임명동의안 처리 결과에 따라 영향을 받을 전망이다. 이기동기자 yeekd@
  • 2與 진로와 정계개편 전망

    21일 여권 수뇌부가 공동여당을 주축으로 한 신당 창당 추진을 부인하고 나섬에 따라 앞으로의 정계개편 추이와 향배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김대중(金大中)대통령과 김종필(金鍾泌)총리,자민련 박태준(朴泰俊)총재는이날 3자 조찬회동에서 “국민회의와 자민련은 합당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일단 두 여당간의 통합신당설을 잠재웠다. 여권수뇌부는 아울러 공동여당의 최대난제였던 연내 내각제개헌 유보입장을전격 공표함으로써 공동여당간 현안을 일시에 마무리하는 모양새를 보였다. 그러나 정계개편 문제는 조금 다른 분위기다.신당창당을 포함한 일련의 가능성이 차단된 것은 아니라는게 정치권 일반적 시각이다. ‘파열음’의 진원지였던 김총리와 자민련의 박총재도 정치구도의 재편에대한 논의 가능성은 열어둔 것으로 해석된다.김총리는 정계개편 논의 전망에대해 “양당 8인위원회에서 진지하게 검토하고 논의할 것”이라고 했다. 박총재도 “두 분(DJP)이 결론을 못내린 상태”라며 그 가능성 만큼은 열어뒀다. 눈여겨볼 대목은 DJT 3자가 이날 ‘정치발전문제를 포함한 모든 정치현안을8인협의회가 협의할 것’이며 ‘양당의 공조를 더욱 강화해나갈 것’이라고합의한 부분. 공동여당간 공조가 무르익는다면‘적절한 때’기존세력의 재편이 거론되지 않겠느냐는 관측이다. 여권 관계자들은 ‘논의 가능성’수준을 넘어 기존세력의 재편에 여전히 커다란 관심을 보인다.여권 고위관계자는 “불신을 받는 현재의 정치구도로는안된다는 것이 확고한 대통령의 인식”이라며 정계개편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이 관계자는 자민련과의 통합신당이 여의치 않을 경우,현재의 국민회의를창당수준에 가깝게 확대·개편하는 방안을 예로 들었다.국민회의의 전국정당화 구상을 정계개편의 한 줄기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실제로 국민회의는이미 창당수준의 전당대회를 위해 8월31일자로 올림픽 체조경기장을 잡아뒀다. 청와대와 국민회의 내부에는 정치발전을 위해 독자적으로 새로운 정치세력화를 꾀해야 한다는 인사도 적지않은 게 사실이다. 국민의 신뢰를 받는 정당의 탄생이 시급하다는 인식의 일단이다. 이 구도는기존정당에 ‘새 피’를 본격적으로 수혈받자는 것이다.현재의 여권세력에재야·사회단체의 개혁 명망가,신진세력을 대거 포함시키는 ‘범국민정당’도 한 방식일 수 있다. 공동여당 핵심부는 16대 총선에서 승리,내각제 개헌을 위해서는 ‘합당수준이상의 공조’가 관건임을 잘 인식하고 있다. 정치판을 다시 짜야 한다는 김대통령의 의지와,‘합당수준 이상의 공조’가 필요할 것이라는 여권 수뇌부의 인식을 보면 정계개편은 언제라도 새로운 화두로 떠오를 휴화산이다. 유민기자 rm0609@
  • 막오른 정치권 빅뱅-드러난 윤곽

    ‘2+α’의 정계개편 논의가 숨가쁘다.‘DJP간 합의설’까지로 확대 발전됐다. 구상단계를 넘어 실행단계로 접어든 분위기다.‘8월중 내각제 해결’에 바로 이어지도록 조기 매듭으로 가닥을 잡았다. 청와대나 총리실은 합의설을 부인했다.김종필(金鍾泌)총리는 17일 김대중(金大中)대통령과의 부부동반 만찬회동 사실만 인정했다.정치논의는 없었다고 공식 부정했다.청와대측도 박준영(朴晙瑩)대변인을 통해 입을 맞췄다. 그럼에도 불구,깊숙이 논의한 흔적은 한둘이 아니다.자민련 박태준(朴泰俊)총재는 합의설에 대해 “전날 저녁 얘기를 들었다”고 분명히 했다.이날 김총리를 만난 한 인사는 “서로 의중을 깊이 확인한 것같다”고 말했다.10일청남대에서도 DJP는 자리를 함께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여권의 한 고위 관계자는 “김대통령의 정계개편 의지가 워낙 강하다”고 전했다. 주목할 대목은 김총리 움직임이다.김총리는 정계개편 자체에 대해 반대의사를 분명히 하지 않았다. 응하지 않는다면 직접 해명해야 할 중대 사안이다.청와대나 국민회의측은 이를 ‘긍정’으로 해석하고 있다.이를 기점으로 정계개편 논의는 ‘터진 봇물’이 됐다. 청와대나 국민회의측은 내친 김에 조기 매듭 방침을 세웠다.늦어도 9월 정기국회 전에 창당을 선언한다는 계획을 갖고 있다.이는 여권 핵심부의 절박한 정국인식과 맥을 같이 한다. 전체 구도는 ‘2+α’로 그려지고 있다.국민회의와 자민련이 두 축이다.또 한나라당 내 이탈세력과 재야·신진인사들을 동참시킨다는 계산이다.새로운 신당 형태를 생각하고 있지만 여의치 않으면 국민회의를 전국정당화하는 방안도 검토대상이다. 그림은 서로 간판을 내리고 신당을 만드는 ‘헤쳐모여식’인 것으로 전해졌다.김총리는 ‘당 대 당 합당’형식은 원치 않는 것으로 알려진다.지난 90년 3당합당후 총선에서 참패했기 때문이다.자민련 박총재는 ‘0+∞’라는 무한대 정계개편으로 표현했다. 넘어야 할 산은 안팎에 있다.한나라당은 강력히 반발하고 있다.이회창(李會昌)총재는 ‘장외투쟁 불사’를 선언했다.여야 대치정국은 점점 더 꼬이고있다.공동여당 내부에서조차 정계개편을하면 내년 총선에서 오히려 불리하다는 회의론이 일고 있다. 또 자민련은 강경파를 합류시켜야 한다.‘김총리 몫’이 중요한 변수가 될전망이다.‘통합신당 총재설’이 그 몫으로 거론된다. 김대통령은 명예총재로 물러앉거나 당적을 떠나는 방안도 검토되고 있다.내각제적 운영이라는 총리 권한 강화방안 역시 유효하다. 박대출기자 dcpark@
  • [제2공화국과 張勉](16)혁신계의 浮沈/4·19이전의 상황

    4월혁명후 새 세상이 열렸다고 믿은 정치세력 가운데 하나가 혁신계다.이승만(李承晩)정권 12년 동안 철저히 탄압받은 혁신계 인사들은 ‘4월혁명이 완수해야 할 과업이야말로 혁신세력이 책임진 역사적 과업의 주요한 일부’라고 판단했다.그리고 4월혁명이 열어놓은 정치적 공간에 그들의 활동무대도포함된다고 확신했다. 이 무렵 혁신계는 여러 갈래로 나뉘어 있었다.‘혁신계’로 규정된 제(諸)정치세력의 노선·뿌리가 다양한데다,사회적으로 공인받은 정당으로서 맥을이어온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조봉암(曺奉岩)이라는,카리스마와 전국적인 지명도를 갖춘 인물을 잃은 점도 크게 작용했다. 따라서 4월혁명 후 혁신정당 창당은 명망가들의 이합집산에 좌우됐다.첫 단계로 이들은 4월30일 부산에 모여 ‘한국혁신세력집결촉진회’를 구성한다. 이어 통합신당인 ‘사회대중당’을 결성키로 하고 5월17일 창당준비위원회를 갖춘다.민주혁신당의 서상일(徐相日)이 대표를 맡고 진보당계의 김달호(金達鎬) 윤길중(尹吉重)과 혁신계 원로인 장건상(張建相) 이동화(李東華) 정화암(鄭華岩) 등이 참여한다. 그러나 통합을 주장하던 혁신세력은 곧 핵분열을 한다.사회대중당이 창당도 하지 못한 상태에서 장건상이 혁신동지총연맹을 만들어 갈라서는가 하면 전진한(錢鎭漢) 김철(金哲)의 한국사회당,고정훈(高貞勳)의 사회혁신당 등 군소 혁신계 정당들이 줄지어 등장했다. 이같은 분열이 이념이나 정강정책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다.장건상 스스로 회고록에서 밝힌 것처럼 “혁신계가 통일되지 못하고 분산된 근본적인 원인은 이론의 차이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인물 중심의 파벌에 의한 것”이었다. 4월혁명을 맞아 혁신계가 창당을 서두른 까닭은 그해 7월29일로 예정된 총선에서 다수의석을 확보해 제도권에서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였다.그런데도혁신계는 통합하지 못하고 사분오열된 채 후보를 내는 바람에 후보자가 233개 선거구에서 156명에 달했다.혁신정당 후보가 2명 이상 출마해 서로 다툰선거구도 24곳에 이르렀다. 혁신정당에 지식인들이 활발하게 참여한 점도 각 당이 나름대로 자신을 가진 요인이 됐다.예컨대 사회대중당은 창당준비 단계인데도 대구 5개 선거구모두에 ‘반(反)이승만독재 투쟁’으로 유명한 인사들을 공천했다. 제헌의원을 지낸 혁신계의 대표주자 서상일을 비롯해 독립운동가이자 혁신계 원로인 이동화,대구매일신문사 주필 최석채(崔錫采),월간 ‘사상계’ 편집위원 출신인 양호민(梁好民),훗날 국회의장을 지내는 김수한(金守漢) 등이 그들이다.부산에서도 역시 독립운동가에 혁신계 원로인 장건상이 혁신동지총연맹 공천으로 출마해 바람을 일으켰다. 그러나 결과는 참담했다.사회대중당 공천자 121명 중에서 서상일·윤길중(강원도 원성)·박권희(朴權熙,경남 밀양)·박환생(朴煥生,전북 남원) 등 4명이,한국사회당 공천자 18명 가운데 김성숙(金成淑,남제주)만이 원내에 진출했다.이 5명을 제외한 나머지 혁신계 후보는 전멸한다. 함께 치른 참의원 선거에도 58명이 나서 사회대중당의 이훈구(李勳求,충남)와 혁신동지회의 정상구(鄭相九,경남) 2명만 당선됐다. 혁신계는 이처럼 선거에서 참패한 까닭을 ▲유권자들이 아직도 금력·권력에 영향받는 상태였고(申相楚 주장) ▲혁신계를 공산주의자와 동일시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반면 한승주(韓昇洲) 고려대 교수는 저서에서 “국민이 이승만 정권을 무너뜨린 것은 독재적인 지배를 거부한 것이지 반공·보수주의를 거부한 것은 아니었다”고 분석했다. 어쨌든 지도부 거의 전원이 원내 진출에 실패함에 따라 혁신계는 원외 세력으로 남아 장외투쟁에 집중할 수밖에 없게 됐다.그 와중에서 혁신계는 민주당의 신·구파 싸움과 다름없는 주도권다툼 끝에 갈라서게 된다. 먼저 혁신정당 통합을 목표로 창당을 준비하던 사회대중당은 김달호를 중심으로 한 진보당계만으로 축소 형성됐다.총선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지방조직을 선점(先占)하는 데 성공한 진보당계는 사회대중당 창당을 진보당의 재건으로 여겼다. 이에 반발해 서상일·윤길중·이동화·정화암 등 비(非)진보당계는 김성숙·고정훈과 손잡고 통일사회당을 형성한다.사회대중당은 60년 11월24일,통일사회당은 61년 1월20일 정식 출범한다. 사회대중당과 통일사회당은 혁신정당의 두 기둥으로 떠오르지만 그 성격에는 차이가 있었다.사회대중당이 급진적인 반면 통일사회당은 온건한 서구의민주사회주의에 가까웠다. 사회대중당은 61년 들어 일선조직인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民自統)’을 만든 뒤 통일과 한·미관계를 이슈로 대대적인 실력행사를 벌인다.‘민자통’의 통일론은 ‘자결의 원칙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이며 북한과의 무조건적인 협력을 주장했다. 이에 견줘 통일사회당은 민자통의 경쟁세력인 ‘중립화통일연맹(中立統聯)’을 지지했다.중립통련은 남북한 전역에서 민주적인 선거를 해 통일을 이루고,통일된 한국에는 중립을 보장해야 한다는 원칙을 견지했다. 장면(張勉)정부가 반공임시특례법과 데모규제법을 제정하려고 하자 혁신계는 61년 3월22일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2대 악법 반대 궐기대회’를 연다. 오후 2시에 시작된 시위는 날이 어두워지면서 난동으로 변했고 횃불을 든 시위행렬이 중앙청에서 혜화동까지 서울시가를 누볐다. 횃불시위는 제2공화국 최후의 대규모 시위였다.장면 정부는 곧바로 김달호·고정훈 등 주요 혁신계인사들을 체포한다. 장면 정부하에서 혁신계는 국회 진출에 실패해 장외 세력으로 남게 된다.그들은 급진적인 학생들과 일부 소외계층의 지원을 받아 거리투쟁에 나서지만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5·16쿠데타를 맞아 다시 기나긴 잠에 빠져든다. - 4·19이전의 상황-曺奉岩 중심 진보당 두각 대한민국 출범후 국내 정치무대에서 ‘혁신계’는 항상 소수파 또는 이단이었다.남북에 분단정부가 각기 들어서 ‘6·25전쟁’까지 치른 뒤 이 땅에는‘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하는 보수우익 정당 아니고는 발붙이기 힘든 것이현실이었다.따라서 이에 속하지 않는 사회주의자,민주사회주의자,무정부주의자,조합주의를 따르는 노동운동가 들을 구분짓지 않고 통틀어 혁신계라고 불렀다. 4월혁명 이전 혁신계를 대표한 지도자는 죽산 조봉암(竹山 曺奉岩)이다.조선공산당 창당멤버인 조봉암은 1946년 박헌영(朴憲永)을 비판한 서신 ‘존경하는 박헌영 동무에게’를 신문에 발표하고 공산당과 결별한다. 48년 제헌의회 선거에 무소속으로 나와 당선되며 이승만(李承晩)정권에는초대 농림장관으로 참여한다.이어 2대 국회에서 부의장이 된 조봉암은 52년대통령선거에 진보적인 강령을 내걸고 출마해 79만표를 얻는다.비록 이승만의 523만표에는 크게 못미쳤지만 그로서는 정치적 입지를 굳힌 계기가 됐다. 55년 통합야당(민주당) 결성 움직임이 일자 조봉암은 참여를 강력하게 희망하지만 신익희(申翼熙) 장면(張勉) 등으로부터 거부당한다.이에 서상일(徐相日)계와 합쳐 혁신정당인 진보당 창당에 나선다.55년 12월22일의 창당준비위원회에는 조봉암·서상일 말고도 이동화(李東華) 박기출(朴己出) 윤길중(尹吉重) 등이 동참한다. 진보당은 창당에 앞선 56년 3월 대통령 후보에 조봉암,부통령 후보에 박기출을 선출한다.이들은 민주당 정·부통령 후보인 신익희·장면과 야당후보 단일화 협상을 벌이지만 두차례 만에 결렬된다.조봉암이 대통령 후보를 사퇴하는 조건으로 ▲부통령 후보를 진보당에 양보하고 ▲집권시 조병옥(趙炳玉)김준연(金俊淵)을 중용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며 ▲진보당 강령 일부를 수용하라고 요구한 것이다.민주당으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조건들이었다. 56년 3대 대통령선거는 신익희가 급서한 가운데 이승만과 조봉암의 싸움으로 진행됐다.결과는 이승만 504만표,조봉암 216만표로 나타났다.이후 조봉암은 이승만 정권에게 실재(實在)하는 위협이 된다. 한편 정·부통령 선거가 끝난 뒤 서상일계가 진보당에서 이탈한다.노선상의차이보다는 대통령후보 선출 당시의 주도권싸움 탓이었다.서상일이 후보로추대받기를 원한 반면 조봉암은 투표로 뽑을 것을 주장했고 선출 결과 부통령후보로 지명된 서상일이 고사해 박기출이 대신 후보가 된 것이었다. 진보당은 56년 11월10일 창당대회를 열어 조봉암을 위원장으로,박기출 김달호(金達鎬)를 부위원장으로,윤길중을 간사장으로 각각 선출했다.정치강령으로 ▲책임있는 혁신정치 ▲수탈없는 계획경제 ▲민주적 평화통일을 내세웠고 특히 ‘공산독재를 배격한다’고 강조했다.서상일계도 57년 10월15일 민주혁신당을 창당해 독립한다.58년 5월의 국회의원 총선을 앞둔 그해 1월13일경찰은 조봉암을 비롯한 진보당 간부 전원을 간첩죄 등의혐의로 검거했다. 아울러 자유당 정권은 2월25일 진보당을 등록취소한다. 조봉암은 1심에서 징역 5년을,2·3심에서 사형을 선고받는다.‘북한 지령에 호응해 진보당을 결성하고 10여차례 자금을 받은 사실이 인정된다’는 판결이었다.대법원이 재심청구를 기각한 다음날인 59년 7월31일 조봉암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진보당과 비슷한 정강정책을 내건 서상일계의 민주혁신당이 어떤 규제도 받지 않았다는 사실은 ‘진보당 사건’의 성격과 관련해 시사하는 바가 적지않다.조봉암의 죽음으로 혁신계는 치명타를 입어 4월혁명까지 별다른 활동을 벌이지 못한다. 이용원기자
  • ‘한나라당’ 공식 출범/신한국­민주 통합전대

    ◎후보 이회창·총재 조순 선출 신한국당과 민주당의 통합신당인 한나라당이 21일 공식 출범했다. 양당은 이날 하오 대전 충무체육관에서 대의원 1만3천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합당전당대회에서 합당을 의결,신한국당 이회창 총재를 한나라당 대통령후보 겸 명예총재로 추대하고 민주당 조순 총재를 초대 총재로 선출했다. 신임 조총재는 신한국당 이한동 대표를 한나라당 초대 대표로 지명했다. 한나라당은 이날 의결한 9개항의 강령과 62개항의 기본정책에서 국민대통합정치의 실현,대통령제 등을 명시했다.특히 신한국당 정강정책 전문에 들어있던 ‘역사바로세우기’ 조항을 삭제하고 기본정책에 금융실명제와 부동산실명제의 보완을 명시,김영삼 대통령과의 차별화를 적극 추진할 뜻을 밝혔다. 한나라당은 합당선언문에서 “이땅의 정치를 40여년이나 지배한 낡고 부패한 3김정치를 청산하고 국민과 시대가 요구하는 깨끗한 정치,튼튼한 경제를 실현하기 위한 일념으로 한나라당의 기치를 힘차게 올린다”고 밝혔다. 이후보는 ‘대통령후보연설’에서 “이번 대선을 통해 우리는 간첩단사건에서 드러난 안보허점과 경제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체제를 갖춰야 한다”며 “특히 집권하면 물가를 잡고 가능한 모든 정책을 강구해 금융과외환시장을 안정시키며 금융실명제를 대폭 보완하겠다”고 강조했다.
  • ‘역사 바로세우기’ 삭제키로/신한국·민주 통합협상

    신한국당과 민주당은 14일 통합신당의 정강·정책은 신한국당의 정강·정책을 근간으로 개정하되 전문의 ‘역사바로세우기’나 ‘신한국 건설’과 같이 김영삼 대통령 정권의 흔적이 강하게 남아있는 표현은 삭제하기로 합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양당은 이날 서울 한 호텔에서 합당협상 김태호 신한국·이규정 민주당 사무총장 등 10인 실무대표단으로 구성한 ▲정강·정책 ▲당헌·당규 ▲전당대회 소위원회 첫 회의를 열고 이같이 의견을 모았다.
  • 신한국­민주 대선비상기구 체제로/이­조 통합당 어떻게 운영될까

    ◎주요당직 신한국 현체제 유지/집단지도제로 양당수뇌 중용/지분 등 민감사안 대선후 논의 신한국당과 민주당의 통합당은 12월 대선을 위한 비상기구의 성격을 띠게 된다.현재 당 조직이나 구조가 선대위 형태로 짜여져 있는데다 선거일이 얼마 남지않아 평시체제의 정당 모습을 갖추기에는 실무적인 어려움이 많기 때문이다.지구당 위원장이나 주요당직자,당무위원 등의 진용을 새로 짜게 되면 양당간의 지분문제가 떠오르게 되고 ‘이회창­조순연대’가 자칫 ‘권력 나눠먹기식’이라는 비판을 받을수 있다는 점도 한 이유다. 따라서 지구당 위원장 배분문제는 대선 이후 처리될 가능성이 높다.선거법상 통합당의 지구당 개편절차는 선관위 등록 이후 3개월이내에 마치면 된다.지구당 위원장 배분에 대한 구체적인 협상은 대선이후에 착수하더라도 문제가 없는 셈이다. 대신 지구당별로 대선때까지 한시적으로 통합당의 공동위원장 형태가 될 전망이다.지역별 선거운동도 마찬가지로 공동 선대위 체제로 움직일 전망이다.신한국당 이총재쪽의 한 핵심인사는 10일 “선거를 코앞에 둔 시점에서 굳이 지구당을 합칠 필요는 없다”면서 “지구당 배분문제도 선거전 논란거리로 삼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민주당의 현 체제를 신한국당 선대기구에 흡수하는 체제가 될 것이란 설명이다.통합당의 지도체제는 현행 집단지도체제를 유지하되 양쪽의 지도부 인사들을 아우르는 체제를 구축할 계획이다.주요 당직자나 당무위원 등은 신한국당의 현 체제가 거의 유지될 것으로 보인다. 양당은 통합당의 운영체계와 방향을 오는 12일 이총재와 조총재의 공동기자회견 직후 정강정책과 당헌당규 제정 작업에서 구체화시킬 방침이다.양당의 협상 실무팀은 통합전당대회 일정과 통합신당의 당명,정강정책 개정방향,선대위 구성문제 등을 집중 논의하게 된다.이와관련 신한국당 김태호 사무총장은 이날 기자들과 만나 “통합협상이 마무리되는대로 오는 20일부터 25일 사이에 통합전당대회를 열고 개정된 당명에 의해 후보를 등록할 계획”이라고 밝혔다.그러나 대선전 지구당 위원장 등의 지분을 미리 챙겨 두려는 민주당과 ‘분란’의 소지를 대선 이후로 미루려는 신한국당의 견해가 팽팽히 맞설 가능성도 있어 협상결과가 주목된다.
  • “특별법 회기내에 꼭 처리해야”/민주 김원기·장을병 대표 문답

    민주당의 김원기·장을병 공동대표는 11일 국회에서 취임후 첫 기자간담회를 갖고 현 정국에 대한 통합 민주당의 입장과 앞으로의 당 운영일정 등을 밝혔다. ­5·18특별법에 대한 당의 입장은. ▲김대표=잘못된 과거 청산과 역사 재정립을 위해 반드시 이번 회기안에 처리돼야 하며 이를 위해 우리 당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겠다.특히 특별검사제 문제로 법 제정이 무산되는 일은 막아야 한다.다만 비자금 문제는 대통령도 의혹을 받고 있으므로 특별검사가 수사해야 한다. ­주도적인 역할이란. ▲김대표=특별법은 위원회 차원에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다.총무접촉을 통해 여야 간에 합의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이미 이철 총무가 각당 총무들과 접촉하고 있다. ­자민련 김종필 총재가 제안한 정치지도자 회담에 대한 견해는. ▲김·장대표=정치지도자들이 의혹을 받는 상태에서 회담은 바람직하지 않다.(김대표)다만 5·18특별법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각당 총무나 사무총장,정책위의장 등의 대화는 적극 추진돼야 한다. ­정계개편에 대한 생각은. ▲김대표=권력에 의한 인위적인 개편은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다만 내년 총선을 통해 정치권의 물갈이가 이뤄지고 1인 중심의 정치행태가 청산된다면 새로운 정치질서 형성을 위한 질적 개편은 필요하다고 본다. ­정치자금법 개정에 관한 당의 입장은. ▲김대표=국고지원금 축소는 바람직하지 않다.최소한 현행수준을 유지해야 한다. ­향후 당의 일정은. ▲김대표=이번 주 안에 중앙선관위에 통합신당을 정식 등록한 뒤 곧바로 최고위원과 당3역등 주요당직자 인선을 매듭짓겠다.또 1월 중순까지 외부인사 영입을 적극 추진,조직책 선정을 마무리하겠다.
  • 통합신당/「한지붕 3가장」 잘 될까

    ◎KT­김 대표 총장 인선 놓고 벌써 신경전/KT­장 대표 보수­진보 「색깔 융합」도 과제 28개 의석의 민주당은 김원기·장을병 공동대표와 이기택 상임고문의 삼두마차가 이끈다.이 삼두마차로 내년 4월의 총선까지 달려야 한다.강력한 리더 한사람이 일사분란하게 통솔해도 결과를 낙관하기 어려운 것이 선거다.그런데 개성이 다른 이들 세명이 매사를 합의해 결정해야 하니 당이 원활하게 굴러갈지 당내에서는 걱정이 적지 않다. 세사람 모두 적극적인 협력을 다짐하고 있지만,이들이 마찰을 빚을 만한 요소는 곳곳에 산재해 있다.우선 당직자 인선이나 조직책 선정을 둘러싸고 대립이 불가피하다.당론 결정에 있어서도 불협화음을 낼 소지도 많다.이고문의 보수적 색채와 장대표의 진보적 성향이 얼룩져 당의 색채를 흐리게 할 가능성도 크다.그리고 이런 상황적 요인 이전에 성격이나 경력·정견등 개인적 성향부터가 이질적이어서 화학적 융합을 이뤄내기에는 적지 않은 어려움이 따를 것으로 보인다. 우선 당직자 인선과 관련,이들 3인 지도부는 최고위원각 2명씩,사무총장과 원내총무 정책위의장등 당3역은 각 1명씩 차지한다는 묵계를 세워두고는 있다.그러나 선거대책본부장의 중책을 맡게 될 사무총장 인선을 놓고 이고문측과 김대표측이 일찌감치 팽팽한 신경전에 들어갔다. 계파 구성원들간의 알력을 얼마나 매끄럽게 조정하느냐도 이들 지도부의 과제다.그러나 이들 세명 모두 자파에 대한 통솔력이 강하다고는 할 수 없다.통합과정에서 나타났듯이,계파를 이끌기 보다는 자파 움직임에 이들이 편승해 왔다는 점에서 언제 어디서 이들의 뜻과 관계없이 계파간 마찰음이 튀어 나올지 모르는 것이다.이고문과 김대표가 당론결정과정에서 진보성향의 장대표와 얼마나 매끄럽게 접점을 찾아내느냐의 문제도 관심사항이다. 삼두마차의 전도에 이런 암초들만 도사리고 있는 것은 아니다.특히 이들의 지역분담은 총선체제에서 조화를 이루며 적지 않은 위력을 발휘할 전망이다.즉 이고문은 영남권을,김대표는 호남권을,장대표는 강원·경기등 중부권을 맡아 세대교체와 지역할거구도 청산의 기치를 높인다는 복안이다. 3인 지도부가 전국을 삼분해 누빈다면 민주당의 지역적 한계도 일정부분 극복될 수 있다는게 자체 분석이다.
  • 통합 신당 정계개편 「작은 핵」 될수도

    ◎하순부터 조직책 선정·외부인사영입 본격화 계획/「이합집산」 회오리 일어날땐 적잖은 역할 해낼듯 민주당과 개혁신당이 4일 통합을 선언함으로써 정치권 세대교체와 지역할거주의 청산을 요구하는 정치세력의 구심점이 공식으로 마련됐다.양당의 통합은 29개 의석의 제3당과 신생 정치집단의 물리적 결합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요동치는 정국에 묻혀 당장 이목을 끌지는 못하고 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정계개편의 단초가 될 수도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그동안의 협상속도를 볼 때 양당의 통합은 다소 전격적이라고 할 수 있다.비록 예정된 것이라 해도 통합이 이처럼 전격 성사된 데는 이기택고문의 결심이 크게 작용했다.최대 쟁점이었던 통합신당의 대표직을 놓고 줄다리기를 벌이던 그가 4일 아침 김원기 고문·홍성우 신당대표와의 회동에서 대표직 포기의 뜻을 밝힌 것이다.통합의 걸림돌로 지목되는 부담과 상임고문의 자격으로도 당론 결정에 주도적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전제가 딸린 선택이지만 협상의 물꼬를 튼 것만은 분명하다. 최대난제를 극복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이제 통합신당은 당직자 인선과 조직책 선정등 당체제 정비작업을 서두를 전망이다.당 일각에서는 총선을 앞둔 시점이어서 조직책 선정등을 둘러싼 지분싸움을 우려하는 시각도 있으나 대하의 잔 파도에 불과하다는 게 대체적 시각이다.따라서 통합신당은 다음 주안에 주요당직자 인선을 마무리짓고 하순부터 조직책 선정에 들어가 외부인사 영입에 나선다는 계획이다.명망가와 신진기예들을 대거 영입,수도권을 중심으로 내년 총선에서 신당바람을 일으킨다는 각오를 다지고 있다.김원기 대표는 『통합후 입당하겠다는 뜻을 밝힌 인사가 상당수에 이른다』고 영입에 자신감을 나타냈다. 그러나 영입작업과 조직책 선정이 기대만큼의 성과를 거둔다 하더라도 통합신당이 내년 총선에서 여하히 지역할거주의 정치풍토를 극복해 낼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다.이기택고문이 영남권을,김원기 대표가 전북을,장을병 대표가 수도권과 강원지역을 맡아 진두지휘하겠다는 각오지만 김대중·김종필씨를 상대하기가 쉽지 않은것이 현실이다. 또 신·구 정치세력간에,그리고 여야 정당간에 수직적·수평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최근의 대립정국 또한 통합신당의 부담이다.각 정치세력간의 전방위 대치상황에서 세대교체나 지역할거주의 극복이라는 주장이 빛을 잃고 있는 것도 어려움이다. 그러나 노태우 전대통령의 비자금을 처음 폭로한 야당,특정 지역당이 아닌 야당이라는 이미지가 앞으로 대대적 정계개편이 이뤄질 경우 각 정파간 이합집산의 회오리속에 적지 않은 역할을 하게 만들 것이라는 평가다.
  • 민주·개혁신당 통합선언/당명 민주당 김원기·장을병씨 공동대표로

    ◎이기택씨 상임고문직 추대 민주당과 개혁신당이 4일 통합을 전격 선언했다. 양당은 이날 밤 국회에서 통합수임기구 합동회의를 열고 당대당 통합에 전격 합의하고 공동대표에 민주당의 김원기 고문과 개혁신당의 장을병 공동대표를 통합신당의 공동대표로 선출했다.또 상임고문에 이기택 민주당고문을 추대하고 당의 모든 의사결정은 두 공동대표와 이고문이 합의로 정하기로 했다. 양당은 이들 지도부외에 6명의 부대표를 두기로 하고 민주당의 통합모임측과 이고문계,개혁신당측이 각각 2명씩 추천,선출하기로 했다.통합신당의 당명은 「민주당」과 「개혁민주당」을 놓고 논란끝에 다음 회의에서 결정하기로 했다. 양당의 전격적인 통합선언은 그동안 지도체제 문제로 통합모임측과 갈등을 빚어 온 이고문이 이날 대표직을 고사,상임고문직을 수락한다는 뜻을 통합모임측에 전달함에 따라 이뤄졌다. 양당은 금명간 통합수임기구 합동회의를 통해 당헌·당규를 마련하는 대로 중앙선관위에 정식 등록할 예정이다.이날 통합선언으로 오는 14일로 예정됐던 민주당 전당대회는 자동 취소됐으며 통합민주당 당헌·당규 제정과 부대표·사무총장·원내총무 등 당직자 인선이 마무리되는 대로 통합대회를 열 예정이다.
  • 민주당­개혁신당 공동대표제 합의

    민주당과 개혁신당은 27일 통합실무협상을 갖고 통합신당의 대표체제를 2인 공동대표제로 하고 양측이 각각 1인씩의 대표를 추대하기로 했다. 또 계파를 떠나 인물위주로 조직책을 선정하고 지분은 일체 인정하지 않기로 했다.양측은 29일까지 공동대표를 선임,30일 통합협상을 마무리짓는다는 방침이나,민주당몫 대표 1석을 놓고 이기택 고문계와 통합모임측이 여전히 마찰을 빚고 있어 진통이 따를 전망이다.
  • 민주­신당 통합협상

    민주당과 개혁신당은 10일 통합실무대표협상을 갖고 지도체제와 조직책 선정기준 등을 논의했다. 이날 회동에서 양측은 통합신당의 당명을 「민주당」이나 「개혁민주당」으로 하기로 했다. 또 지도체제는 단독대표체제를 원칙으로 하되 공동대표제도 검토해 나가기로 의견을 모았다.
  • 민주­개혁신당 통합 “박차”/협상 실무대표 회동 의미

    ◎비자금 정국·정계 개편설 맞물려 가속/원칙엔 합의… 지분문제 이견조정 관건 정치권의 세대교체를 주창하고 있는 민주당과 「개혁신당」이 통합을 향해 시동을 걸었다.양측은 7일 낮 국회에서 통합협상실무대표 상견례를 갖고 본격적인 통합논의에 들어갔다.민주당에서 강수림·하근수·양문희·김원웅·제정구·유인태 의원이,개혁신당에서 장기표 통합추진위원장과 서경석 사무총장·장두환 기조실장·양재헌 통추위간사·김홍신 홍보위원장·박인제 대변인 등이 모임에 참석했다. 양측은 이 자리에서 통합의 필요성에 대해 입을 모았다.『반드시 통합을 이뤄 개혁세력이 총집결하는 계기가 돼야 한다』(서경석)『서로 소아적 자세를 버리자』(하근수)『이미 한식구라는 생각이다』(장기표)라며 짙은 동류의식과 통합의지를 내비쳤다.서로 『자리가 많이 비어있다』(강수림·박인제)고 분위기를 북돋우기도 했다.합치자고 모인 자리이니 만큼 화기애애한 모습이 당연한 것이기도 하지만 실제로 최근의 비자금정국과 이에 따른 양측 내부의 분위기는 통합가능성을 한층 높여놓고 있다. 우선 정치권의 개혁을 재촉하고 있는 비자금정국은 양측에 통합에 대한 자신감과 절박감을 함께 안겨주고 있다.특히 정계재편설에 시달리고 있는 민주당으로서는 개혁신당과의 조기통합을 이뤄 이같은 의혹을 불식해야 할 처지이다.민주당 이기택 고문의 거취문제에 대해서도 양측이 물밑접촉을 통해 교감을 이룬 상태이다.이와 관련,이고문은 지난 4일까지 서경석 총장등 신당측 인사들과 3∼4차례 회동,12월 전당대회에서 당권경쟁에 나서지 않을 뜻임을 강력히 시사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다만 지분문제에 대해서는 양측이 이견을 보이고 있어 절충여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그동안의 탐색전에서 이고문측은 조직책과 당직자 인선등에 있어서 절반을 지분으로 요구해 왔다.이에 맞서 민주당 통합모임측과 신당측은 각각 30%씩의 지분을 주장하고 있다.이고문의 몫을 40%로 하자는 주장이다.이에 따라 앞으로의 통합협상은 사실상 지분조정문제에 논점이 모아질 전망이다.다만 정국상황과 양측 내부사정등을 볼 때 지분문제 역시 큰 걸림돌이 되지는 않으리라는 게 양측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통합협상이 순조롭게 진행된다면 이달 중순 양측의 통합선언에 이어 다음달 14일 민주당 전당대회를 통해 통합신당이 출범하게 된다.
  • 야통과 정치철새/진경호 정치부기자(오늘의 눈)

    군소야당인 자민련과 신민당이 통합을 선언한 것과 관련,「제3당」으로 등장할 수 있을지 시선이 모아지고 있다. 그러나 통합신당의 등장을 흔쾌히 반기는 마음보다 씁쓸하게 느껴지는 대목이 많은 것은 왜일까.무엇보다 소속의원 대부분이 한두차례 이상 당을 옮긴 「철새」들인데다 불과 한달도 안되는 사이에 합당대상이 당색과 관계없이 극단적으로 오락가락 한점이 눈에 거슬린다. 이들이 뿌리깊은 지역할거주의를 정치적 토양으로 삼고 있다는 점도 과히 예뻐보이지 않는 구석이다.자민련은 대전과 충·남북,신민당은 대구·경북을 그들 세력의 거점으로 하고있어 뭐라 포장하던 「충청인의 자존심」과 「TK정서의 대변자」를 자임하는 정치집단의 성격이 강함을 부인하기 어렵다. 소속의원들의 이당경력은 어지러울 정도다.박규식 의원(자민련)은 4차례에 걸쳐 5개 당을 「섭렵」해 14대 국회에서 이 부문 최다기록을 보유하고 있다.이학원 의원(〃)은 국민­민자­무소속을 거쳐 자민련에 입당했다.김용환·유수호 의원(〃)은 민자당과 신민당에,정태영 의원(〃)은 국민당과 민자당에 몸을 담았었다.임춘원 의원(신민당)은 민주당과 민자당을 거쳤다.이밖에 자민련의 김종필 총재와 구자춘·이종근·이긍긍·조부영·강우혁·김진영 의원과 신민당의 김복동 대표,박구일·한영수 의원도 한차례 당적을 옮겼다.22명 가운데 16명이 「정치적 소신」을 이유로 짐을 꾸린 것이다. 민주당과 「약혼」한지 20여일만에 등을 돌리고 나가 자민련과 손잡은 신민당의 행동은 이해하기 어렵다.신민당의 김복동 대표는 지난달 21일 국회에서 민주당의 이기택 총재와 손을 마주잡고 『동서화합과 정권교체를 이루겠다』며 통합을 선언했다.그러나 이 다짐은 이틀만에 공동대표 등록문제로 깨졌고 스무닷새가 지난 16일 그는 『의원내각제 추진세력이 새 정치를 시작한다』고 선언하는 자민련 김종필 총재의 곁에 섰다.민주당의 정강이 대통령제를 택하고 있는지 몰랐기 때문인지,그사이 대통령제보다 내각제가 낫다고 생각이 바뀌었기 때문인지 도무지 모르겠다.민주당보다 소수인 자민련과 통합해야 1백20여억원으로 4배 가까이 늘어나는 중앙선관위의 정당보조금 맛이 더 달콤한 것도 사실이다.여하튼 변화무쌍한 이들의 변신에 그저 어리둥절할 뿐이다.
  • 이달의 독립운동가 김학규장군/서울신문사·보훈처·독립기념관 선정

    ◎광복군 대일후방공작 지휘/조선혁명 이끌고 일군과 2백회 전투/중국거주 동포 3만명 무사귀국도 도와 백파 김학규장군(1900년11월24일∼1967년9월20일)은 평남 평원군 서해면 선산리에서 출생,소년기에 고향을 떠나 만주에서 자라면서 자연스레 독립사상을 몸에 익히게 됐다. 당시 만주에는 이시영·이회영·이상룡등 많은 애국지사가 일찍부터 자리를 잡고 독립운동을 벌이고 있어 항일의식이 넓게 퍼져 있었다.이들은 만주에서 경학사·신흥강습소·부민단 등 교포교육기관을 세우고 독립운동가를 양성하고 있었다. 선생은 신흥강습소의 후신으로 설치된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만주에 조직돼 있던 조선의용대 소대장으로 근무를 시작,항일무장활동에 투신했다.선생은 그러나 1920년 일제가 만주일대 독립운동세력을 말살하기 위해 펼친 경신대학살을 피해 봉천으로 탈출,교포가 운영하는 동명중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후배들에게 민족정신과 항일의식을 심어주는 데 힘을 쏟았다.선생은 1929년 학교를 그만두고 흥경현 왕청문에 자리잡은 독립운동단체 국민부예하부대인 조선혁명군에서 총사령 양세봉장군의 참모장으로 일했다. 조선혁명군은 1931년 일제가 일으킨 만주사변에 대항해 반일투쟁의 기치를 든 당취오등 중국 의용군과 서로 연계,공동전선을 펼쳐 큰 전공을 쌓았다. 한·중 양국연합군은 1932년4월부터 같은 해 10월까지 일제와 2백여차례의 전투를 치렀다.그러나 11월들어 당취오가 일본의 공세에 밀려 군벌 장학량에게로 피신하고 다른 의용군지도자들도 잇따라 잠적함에 따라 조선혁명군도 약세로 돌아서게 됐다. 조선혁명군은 이같이 곤궁한 처지를 타개하기 위해 남경에서 장개석정부의 지원을 받고 있는 김구선생과 의열단장 김원봉등의 도움을 얻기로 하고 선생을 대표로 파견했다. 선생은 이에 따라 1934년5월 부인과 함께 농부로 변장하고 남경에 도착,김규식·유동열·김원봉등 독립운동단체의 지도급인사들을 만나 인적·물적 지원문제를 논의했다.이들은 비밀리에 회의를 가진 결과 효율적인 독립운동 수행을 위해서는 이념·노선등에서 제각각인 독립운동단체들의 통합이 선결과제라는 데 합의,우선 각 단체를 통합키로 결정했다. 선생은 이같은 남경 현지의 분위기를 조선혁명군본부에 전달,1935년 조선혁명당 대표로 임명돼 남경통일대회에 참가했다.남경통일대회에는 선생의 조선혁명당·의열단·신한독립당·대한독립당등 5개 단체가 참여했다.그러나 1937년7월 일제가 북경 교외 노구교에서 중국에 대해 전면전쟁을 일으키고 이 전쟁에서 중국군이 일제에 밀리면서 중국정부마저 중경으로 위치를 옮기게 되자 선생등 많은 독립운동가들도 한구·장사등지로 이동하게 됐다. 이곳저곳을 옮겨다니던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은 1940년에 이르러 마침내 통합신당인 한국독립당을 건설,대한민국임시정부 예하에 한국광복군 총사령부를 설치했다.선생은 광복군에서 총사령 겸 참모장인 이범석장군의 참모장대리로 임명돼 적후방공작을 담당하게 됐다. 광복군은 총사령부 예하에 5개지대를 편성,1지대장에 이준식,2지대장에 선생,3지대장에 공진원등을 임명했다.선생은 1941년 다시 3지대장으로 임명돼 1945년 해방까지 대일선전·초모공작·정보수집등의 일을 수행했다. 선생의 지휘 아래 있던 지하공작원들은 중국군과 미첩보기구 OSS에서 교육을 받았다. 선생은 업무수행과정에서 미 14항공대 소속 버치대위와 밀접한 친분관계를 형성,해방직전인 1945년5월에는 14항공대사령관 센 노트장군을 만나 한·미연합작전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동의를 얻어내기도 했다.선생은 또 한국내 미군의 상륙작전을 돕기 위해 한국인을 후방침투요원으로 양성,국내진입작전을 펼치는 것이 중요하다고 설득했다. 이에 따라 선생은 독립군 20명을 결사대로 선발,미 OSS에서 1개월동안 훈련을 실시하던중 일제의 무조건항복으로 아깝게 참전기회를 잃었다. 선생은 광복이후 중국땅에 살고 있던 3만여명의 동포가 한국에 무사히 돌아갈 수 있도록 도운뒤 1948년 느즈막히 귀국,1967년 67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정부는 선생의 공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 “3천명 전장학살 괜찮다”/일 아베의원/남경학살 관련 또 망언

    【도쿄 연합】 일본 야당의 단일교섭단체인 「개혁」의 아베 모토오 의원(민사당)이 남경대학살과 관련해 『전쟁터에서 2천∼3천명의 학살이라면 용서될 수 있다』고 또다시 망언을 늘어놓았다. 아베 의원은 7일 중의원 세제개혁특별위 심의에서 질의를 통해 『세금사용과 관련한 문제』라고 전제한 뒤 하시모토 류타로 통산상에게 『(남경학살에서)30만명을 학살한 것이 사실인가 아닌가』라고 묻고 보다 확실하게 조사해볼 용의가 없느냐고 추궁했다. 아베 의원의 이같은 발언이 계속되자 여당측으로부터 야유가 계속 쏟아지는 등 소란이 벌어지면서 나중에 아베 의원은 『표현이 적절하지 못했다』며 발언을 철회했으나 통합신당 구성을 추진하고 있는 야당진영의 역사인식도 적지 않은 비난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 일 야권 대통합 합의/조속한 시일내 신당 창당

    ◎하타 등 전총리 셋 주축/9월까지 강령마련 【도쿄 연합】 호소카와 모리히로(세천호희),가이후 도시키(해부준수),하타 쓰토무(우전자)의원등 일본의 전직총리 3명과 공명당및 민사당위원장은 5일 야당 대표회담을 갖고 현재 연립여당인 자민·사회·사키가케에 대항하는 통합야당 창당을 서두르기로 의견을 같이 했다. 야당 지도자들은 오는 8일 다시 회담을 갖고 구체적인 일정을 마련할 계획이다. 범야 지도자들이 회합을 가진 것은 이번이 처음으로 『현 연립정권은 야합한 내각』이라고 규정하고 이에 대항해 책임있는 정권을 수립하기 위한 통합정당을 창당키로 했다. 새 통합정당은 구체적인 목표로 ▲건전한 의회민주주의 추진과 ▲국제협조주의 ▲풍요로운 국민생활을 실현하기 위한 규제완화등 각종 개혁등을 내걸었다. 지금까지 야당 일각에서는 비자민 연립정권의 배후 실력자였던 오자와 이치로(소택일낭)신생당대표간사가 통합신당 창당을 주도하려는데 경계하는 분위기가 강했으나 이날 주요 지도자들이 신당 창당에 합의함으로써 새로운 국면을맞게 됐다. 이에 앞서 가이후·하타·호소카와 전총리는 회동을 갖고 각당 정책책임자가 정책검토준비회(가칭)를 발족시키고 9개 당파가 결성하는 「개혁추진협의회」대표자회의및 정책간사 회의등에서 기본정책 마련에 나서기로 합의했으며 9월 임시국회가 열릴 때까지 기본 강령 작성작업을 마치기로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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