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기있는 「어른」들/이성호 연세대 교수(일요일 아침에)
엊그제 집안일로 대구에 잠시 다녀오던 길에서였다.대구공항엔 서울행 마지막편을 타려는 사람들로 꽤 붐볐다.보안수속을 마친 사람들은 저마다 더위를 이겨내며 탑승을 기다리고 있었다.그때 60세쯤 되어 보이는 아주머니 한분께서 갑자기 소리를 쳤다.
『여기가 수영장이냐.도대체 그것이 옷을 입은거냐,다 큰것들이 그냥 있는대로 모두 내 놓고! 그게 뭐냐?…』
아주머니의 일방적인 훈계는 계속 이어졌다.갑작스런 꾸중에 놀란 20대 초의 두 젊은 여성은 이내 저쪽편으로 휑하니 가버렸다.자세히 보니,두사람 모두가 소매가 없는 티셔츠에다 긴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문제는 아마 티셔츠에 있었던 것 같다.소매가 없는것까지는 그런대로 괜찮은데,겨드랑이 쪽이 너무 안으로 패었고,또 목 아랫부분이 가슴 윗부분을 내보일만큼 깊게 파졌고,또 그나마도 통풍(?)을 위해서인지 곳곳에 여러개의 구멍이 뚫린 뭐 그런 티셔츠를 입고 있었던 것이다.
『나도 딸을 둘이나 길렀지만,우리 집 딸들은 집안에서도 어른이 계시면 꼭 양말을 신고 있었다』고 하면서,곁에서 있던 우리에게 요즈음 젊은 사람들의 못마땅함에 대한 불만을 계속하였다.
물론,보기에 따라서는 좀 민망스러울 만큼의 차림이었다.그러나 또한 그러한 부류의 차림새만을 놓고 보면,그래도 그 정도는 양반에 속할만큼의 차림새였다.그럼에도,그날 그 아주머니의 꾸중은 그동안 쉽게 잊어버리고 있었던 한가지를 내게 다시금 일깨워주었다는 데서 신선함을 느꼈다.
그것은 우리 사회에 그 아주머니만큼 젊은 사람들에게 자신있게 용기를 갖고 꾸중하고 가르칠 수 있는 어른들이 얼마나 되겠느냐 하는 점이었다.젊은 사람들,특히 자라나고 있는 우리네 신세대들에 대해서 우리 어른들은 그들에게 무엇을 행동으로 자신있게 본보였는가.그래서 그들이 바람직하지 못한 사고와 행동을 하였을 때 우리 어른들은 얼마만큼 용기있게 나서서 그들에게 이야기하였는가 하는 점이었다.
때로는 자신의 모습이 그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해줄 수 있을만큼 본이 되지를 못해서,때로는 이야기해 보았자 괜스레 내 입만 아프고 귀찮을 뿐이어서,또는 어설프게 말했다가는 젊은 사람들에게 오히려 봉변이나 당하지 않을까 두려워서 우리 어른들은 그저 입을 다물고,귀막고,시선을 피하면서 지나쳐 버렸던 것은 아닌가.
집안에서고,학교에서고,길거리에서고,또는 직장에서고,그 어디에서고간에,지금 우리 사회의 한가지 심각한 문제는 「어른」들이 자꾸만 줄어들고 있다는 것이다.어른들이 있어도,어른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어른들이 어른으로서의 역할을 스스로 책임있게 떠맡으려 하지 않는데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가 한번쯤 깊이 생각해보아야 할 것 같다.
흔히들 말하기를,부모 중 어느 한 쪽이나 또는 양쪽 모두가 안계시면 결손가정이라고 한다.그러나,사실 진짜 문제스러운 결손가정은 부모가 모두 있음에도 부모가 각각 아버지로서,어머니로서의 마땅한 역할을 자녀들에게 다해주지 못한 경우임을 우리는 간과해선 안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회에서도 어른들이 실제로는 많으면서도,그들이 어른으로서의 역할을 젊은이들에게 제대로 해주지 못한다면,그 사회는 결손 사회 내지는 건강하지 못한 사회가 될 것임이 자명하다.우리 사회의 모든 부문에서 우선은 많은 어른들이 어른으로서의 지위를 지키고,어른으로서의 역할을 책임있게 해내려는 노력이 있어야할 것이다.신세대니,X세대니 하면서 그들을 그저 버르장머리 없는 젊은이들로만 치부할 것이 아니라,그들에게 어른의 모습으로,어른의 역할로 우리네 어른들이 좀더 따뜻하게 다가서서,그들을 이해하고,인도할 수 있어야만 그만큼 우리 사회는 밝고 건강한 사회가 되리라 믿는다.그 옷차림새의 정도에 비하면 아주머니의 꾸중은 좀 심했다 싶었고,또 꾸중 방법이 조금은 마음에 안들었지만,나는 그 아주머니의 자신있는 태도와 용기,그리고 애정어린 꾸중에 신선한 기쁨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