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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열린세상] 새로운 국회를 기다리며/이공현 법무법인 지평 대표 변호사

    [열린세상] 새로운 국회를 기다리며/이공현 법무법인 지평 대표 변호사

    영국 정치인이자 역사가인 액턴경은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말을 남겼다. 동서양의 역사를 보면 국가의 권력이 왕이나 군주에게 집중됐을 때 통치자의 의사에 따라 권력이 자주 남용됐다. 그리고 이러한 권력의 남용은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억압하고 결국 국가의 분열과 멸망을 가져왔다. 그런데 국가권력을 제한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왕이나 군주에게 독점된 국가권력을 나누어 다른 사람이나 조직에 넘기는 것이었다. 현대에 와서도 히틀러나 동유럽의 구 공산주의 국가들에서 통합된 권력의 위험성은 명확히 드러났다. 결국 인간의 지성과 이성이 아니라 ‘힘의 분할’과 ‘힘에 대한 힘의 견제’만이 바람직한 길인 셈이다. 오늘날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모든 국가에서는 국가권력을 기능에 따라 나누고, 이를 각각 다른 기관에 맡기는 권력 분립을 채택하고 있다. 5월 말이면 제20대 국회가 출범한다. 4·13 총선에서 우리 국민은 어느 당에도 과반을 주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새누리당이나 더불어민주당도 국민의당과 힘을 합치는 것만으로는 국회선진화법이 정한 단독 법안 통과 정족수인 5분의3을 채울 수 없게 됐다. 국민의 뜻은 이제는 다른 방식으로 국회가 운영되는 것을 보고 싶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자기 당만이 옳다는 주장은 적어도 입법 과정에서는 더는 통하지 않게 된 것이다. 앞으로 국회답게 운영되려면 깊이 생각하고 충분히 논의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대통령중심제에서는 여소야대가 되면 대통령과 국회의 대립이 극한으로 치달을 가능성이 농후한 것이 사실이다. 그렇기에 우리 국민은 새로운 국회의 출발을 바라보면서 앞으로 국회 운영에서 발생할 문제점에 대해 우려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헌법은 권력 분립을 채택하고 있어 대통령이나 행정부에 대해서는 국회의 견제가 당연히 예정돼 있다. 즉 국가 권력기관 간의 통제는 권력 분립의 본질적 요소이기에 일사불란한 입법 과정이란 어설픈 욕심이거나 헛된 꿈일 뿐이다. 우리 사회에서 이해관계가 대립하는 것은 당연하다. 국민의 자유와 권리보장, 사회질서와 공공이익이라는 입법 목적은 각자의 의견이 조화를 이루고 접점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찾아질 수 있는 것이다. 또한 그러한 과정에서 어떠한 결정이 이루어졌을 때에는 비록 그 결정을 지지하지 않았던 사람이라도 그 결정이 입법 목적에 부합하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왜냐하면 4·13 총선에서 보듯이 다음 선거에서 국민을 설득할 기회가 보장돼 있기 때문이다. 수 세기 동안 권력 분립의 이론과 제도를 발전시켜 온 서구 민주국가들과는 달리 해방 이후 짧은 기간 권력 분립에 따라 국가를 운영해 온 우리나라는 성숙도에서 아직 많은 차이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경제에서는 선진국들과 어깨를 견줄 정도로 발전했지만, 정치·사회 분야에서는 우리가 더 노력해야 할 여지가 많다. 성숙한 민주국가로 발전하는 데 부족한 점은 상대방이 나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고, 다수의 의견에 승복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자신의 정책을 관철하려고 여당 의원과 야당 의원을 가리지 않고 만나 설득하기도 하고 타협점을 찾기도 한다. 필요하면 마을 간담회에서 지역 주민이나 이해관계자를 만나 정책을 설명하고 자유롭게 의사를 교환한다. 정말 부럽다. 4·13 총선 결과는 먼저 우리나라에서 어느 당이나 국가기관에 권력이 집중되기보다 권력이 서로 통제되고 입법부와 행정부가 견제와 균형을 이루어 나갈 수밖에 없는 구조를 만들었다. 그리고 국회에서도 대화와 설득, 타협을 거쳐 국회의 의사가 결정될 수밖에 없는 구도가 생겼다. 제20대 국회의 운영에 대한 우리 국민의 우려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새로운 국회의 구도가 아니면 성숙한 민주국가를 만들어 갈 소중한 기회가 언제 우리에게 올 것인가. 인내심을 가지고 힘든 과정을 거쳐야 할 것이다. 한층 무르익은 민주주의로 나가기 위한 단련의 때로 삼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모든 국민이 깨어서 지켜보아야겠다.
  • [World 특파원 블로그] ‘공안 통치’에 폭발하는 中 민심

    지난해 5월 중국 헤이룽장성 칭안현 열차역에서 한 남성이 공안(경찰)이 쏜 총에 맞아 사망했다. 경찰관은 대합실에서 어린 딸에게 손찌검하고 노모를 괴롭히던 이 남성이 자신의 곤봉까지 빼앗으려고 하자 발포했다. 노모는 진상 규명을 요구했다. 그러나 당국은 “적법한 총기 사용이었다”고 결론 내렸다. 중국중앙텔레비전(CCTV)은 이 남성의 행패 장면을 집중 보도했다. 정확히 1년 뒤인 지난 7일 베이징 공안국은 “마사지 업소 성매매 단속 현장에서 체포한 레이양(雷洋·29)이 조사를 받던 중 심장마비로 사망했다”고 짧게 발표했다. 유족들은 머리에 난 상처, 입가의 혈흔 등을 근거로 공안의 가혹행위로 사망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공안은 성매매 사실만 부각시키려고 했다. 레이의 아내는 “내가 알고 싶은 것은 남편이 성매매를 했다는 사실이 아니라 왜 남편이 죽었느냐는 것”이라고 외쳤다. 민심이 들끓었다. 웨이보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는 “인권과 생명이 지푸라기처럼 가벼운 사회에서는 모두 다 레이양이 될 수 있다”는 글이 폭주했다. CCTV도 1년 전과 달리 유족의 입장을 적극 보도했다. 이 와중에 한 대학생이 공안에게 맞아 시퍼렇게 멍든 허벅지를 인터넷에 올렸다. 폭력 혐의로 끌려온 이 청년은 공안에게 대들다가 폭행을 당했다. 해당 공안국은 공무집행 방해를 부각시켰으나, 민심은 “공안이 함부로 사람을 때릴 권리는 없다”는 쪽으로 돌아섰다. 지난 12일에는 허난성 정저우시에서 철거민이 철거 담당 공무원 3명을 흉기로 살해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현장에 출동한 공안은 철거민을 총으로 쏴 죽였다. 지난해 열차역 사건보다 훨씬 흉악한 범인을 사살했지만, 여론은 “그래도 죽이지는 말아야 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공안에 대한 불신이 극에 달하자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은 지난 20일 “자의적으로 법을 집행하지 말라”며 공안을 질책했다. 화들짝 놀란 궈성쿤(郭聲琨) 공안부장은 “법 집행 시 주석과 인민의 요구를 충실히 따를 것”이라고 밝혔다. 공안은 그동안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렸다. 형사사건 처리는 물론 내국인 거주 관리, 외국인 출입국 관리, 도·감청 등으로 모든 내외국인을 감시·통제해 왔다. 중국 정부가 발표한 2016년 공안 예산만 1668억 위안(약 30조 3000억원)이다. 일각에서는 국방예산(9543억 위안)보다 많을 것으로 짐작하기도 한다. 숨막히는 ‘공안 통치’에 대한 분노가 폭발하기 시작했다. 베이징 이창구 특파원 window2@seoul.co.kr
  • 20년 이상 독재 타지크 대통령 ‘종신 집권’ 국민투표 실시

    20년 이상 독재 타지크 대통령 ‘종신 집권’ 국민투표 실시

     중앙아시아 국가 타지키스탄(지도)을 20년 이상 통치해오고 있는 에모말리 라흐몬 대통령(63)이 종신 집권을 위한 법적 기반 마련에 나섰다.  대통령의 임기 제한을 없애는 개헌을 위해 국민투표를 실시한 것이다. 상황이 여의치 않을 경우 자기 아들에게 권력을 넘겨주려는 구상도 하고 있다.  타스 통신 등에 따르면 타지키스탄에서 22일(현지시간) 개헌 지지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가 실시됐다. 이날 투표는 오전 6시에서 저녁 8시까지 실시될 예정이다. 투표용지에는 ‘개헌을 수용하는가’란 한가지 질문이 담겼다.  타지크 의회는 지난 1월 대통령의 임기 제한을 없애고 대선 후보의 연령 제한을 35세에서 30세로 낮추는 등 41개 항의 개정 내용을 담은 개헌안을 승인했다. 국민투표에서 지지를 얻으면 개헌안이 채택된다.  기존 헌법은 임기 7년인 대통령이 3연임을 할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개헌안이 통과되면 오는 2020년 네 번째 임기가 끝나는 라흐몬 대통령이 또다시 입후보할 수 있는 자격을 얻는다.  대선 후보자 연령 제한을 낮춘 것은 만일의 경우 현재 29세인 라흐몬의 큰아들 루스탐을 2020년 대선에 출마시켜 권력을 이어갈 수 있도록 하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지난 1992년 옛 소련에서 독립한 타지키스탄의 최고회의 의장이 되면서 권력을 잡은 라흐몬은 2년 뒤 실시된 첫 대선에서 대통령이 됐으며 이후 1999년, 2006년, 2013년 대선에서 잇따라 승리하며 네 번째 임기를 이어오고 있다.  2003년에는 대통령의 임기를 5년에서 7년으로 늘리고 자신의 임기를 2006년 집권 이후부터 산정하도록 하는 개헌을 성공시켜 장기집권의 발판을 마련했다.  기존 헌법상의 3연임 금지 규정에 따르면 오는 2020년에 물러나야 하지만 이번에 다시 임기 제한을 없애는 개헌을 통해 종신 집권을 꾀하고 있는 것이다. 개헌안은 이번에도 국민투표에서 지지를 얻을 것으로 예상된다.  라흐몬은 폐쇄정치와 인권탄압으로 2011년 시사 주간 ‘타임’이 선정한 10대 독재자에 북한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과 함께 이름을 올렸으며 공공연한 친인척 비리 탓에 국제사회로부터 비난을 받아왔다. 이런 가운데 인구 800만 명의 타지크는 1인당 국내총생산(GDP) 720 달러(올해 초 기준)로 세계 160위권의 최빈국에 머물러 있다.  지난해부터는 타지크 경제의 40% 이상을 차지해온 러시아 이주 노동자들의 송금액이 크게 줄면서 경제난이 더욱 가중됐다. 서방제재와 저유가로 위기를 겪고 있는 러시아 경제위기의 여파다.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 ‘중앙아시아판 김정은’ 타지크 대통령 종신 집권 추진

    ‘중앙아시아판 김정은’ 타지크 대통령 종신 집권 추진

    1992년 구소련에서 독립한 중앙아시아 국가 타지키스탄을 20년 이상 통치해오고 있는 에모말리 라흐몬 대통령(63)이 종신 집권하기 위한 법적 기반을 마련하고 나섰다. 대통령의 임기 제한을 없애는 개헌을 위해 국민투표를 실시한 것이다. 상황이 여의치 않을 경우 자기 아들에게 권력을 넘겨주려는 구상도 하고 있다. 타스 통신 등에 따르면 타지키스탄에서 22일(현지시간) 개헌 지지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가 실시됐다. 이날 투표는 오전 6시에서 저녁 8시까지 실시될 예정이다. 투표용지에는 ‘개헌을 수용하는가’란 한가지 질문이 담겼다. 타지크 의회는 지난 1월 대통령의 임기 제한을 없애고 대선 후보의 연령 제한을 35세에서 30세로 낮추는 등 41개 항의 개정 내용을 담은 개헌안을 승인했다. 국민투표에서 지지를 얻으면 개헌안이 채택된다. 기존 헌법은 임기 7년인 대통령이 3연임을 할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개헌안이 통과되면 오는 2020년 네 번째 임기가 끝나는 라흐몬 대통령이 또다시 입후보할 수 있는 자격을 얻는다. 대선 후보자 연령 제한을 낮춘 것은 만일의 경우 현재 29세인 라흐몬의 큰아들 루스탐을 2020년 대선에 출마시켜 권력을 이어갈 수 있도록 하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지난 1992년 옛 소련에서 독립한 타지키스탄의 최고회의 의장이 되면서 권력을 잡은 라흐몬은 2년 뒤 실시된 첫 대선에서 대통령이 됐으며 이후 1999년, 2006년, 2013년 대선에서 잇따라 승리하며 네 번째 임기를 이어오고 있다. 2003년에는 대통령의 임기를 5년에서 7년으로 늘리고 자신의 임기를 2006년 집권 이후부터 산정하도록 하는 개헌을 성공시켜 장기집권의 발판을 마련했다. 그는 기존 헌법상의 3연임 금지 규정에 따르면 오는 2020년에 물러나야 하지만 이번에 다시 임기 제한을 없애는 개헌을 통해 종신 집권을 꾀하고 있는 것이다. 개헌안은 이번에도 국민투표에서 지지를 얻을 것으로 예상된다. 라흐몬은 폐쇄정치와 인권탄압으로 2011년 시사 주간 ‘타임’이 선정한 10대 독재자에 북한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과 함께 이름을 올렸으며 공공연한 친인척 비리 탓에 국제사회로부터 비난을 받아왔다. 이런 가운데 인구 800만 명의 타지크는 1인당 국내총생산(GDP) 720 달러(올해 초 기준)로 세계 160위권의 최빈국에 머물러 있다. 지난해부터는 타지크 경제의 40% 이상을 차지해온 러시아 이주 노동자들의 송금액이 크게 줄면서 경제난이 더욱 가중됐다. 서방제재와 저유가로 위기를 겪고 있는 러시아 경제위기의 여파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열린세상] 사회 세력 혁신으로 협치 넘어 ‘거버넌스 국가’로/이형용 거버넌스센터 이사장

    [열린세상] 사회 세력 혁신으로 협치 넘어 ‘거버넌스 국가’로/이형용 거버넌스센터 이사장

    거버넌스가 대세입니다. 총선 후 폭증한(?) ‘협치’를 비롯해 연정, 협업, 소통, 융화…. 모두 거버넌스 용어들입니다. 1년 전 서울신문에 기고한 글에서 ‘이러다 거버넌스가 공동체 문제 해결의 만병통치약이 되지 않을까 싶다’고 썼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어떤 학자는 부정적 의미로 거버넌스 신드롬을 이야기하고, 본말이 전도됐다고도 하고, 정치가 중요하지 뭔 협치냐, 시비하기도 하지만 좋은 일입니다, ‘새로운 흐름’이 형성되는 것이고, 사회적으로 새로운 패러다임이 본격 확산되는 시점에는 대개 비슷한 풍경이 펼쳐지곤 합니다. 이제는 한 단계 높은 국가 발전 전략이자 비전으로서 ‘거버넌스 국가’를 설정해도 좋겠습니다. 국가 사회 공동체의 제 부문 영역에서 거버넌스 패러다임이 주도적인 운영 원리가 되는 사회, 그것은 궁극에는 ‘차이를 다만 차이로 인정하면서 저마다 자아실현과 향상을 좇는 휴머니즘’이 꽃피는 다원적 문명 국가의 지향이기도 합니다. 거버넌스 국가는 정권 교체로 집약되는 20세기식의 ‘세력 교체론’으로는 성취할 수 없습니다. 세력 교체론은 그 자체가 구식의 반거버넌스 패러다임의 유물입니다. 21세기에 들어선 한국 사회, 특히 정치 사회가 골병들고 시대를 헤쳐 나아가는 역할을 하기는커녕 오히려 타락, 퇴락하며 거꾸로 가는 핵심 원인 가운데 하나가 그 같은 인식과 관점입니다. 이념 대립을 빙자한 적대적 공생 구조가 공고화한 속에서 상대가 망가지면 내게 득이 되고, 권력을 잡은 저들 세력이 실패해야 우리 세력에게 기회가 온다는 ‘대결과 대체’ 프레임은 거버넌스 패러다임과는 섞일 수 없습니다. 대결과 대체 프레임은 현실에서 선택의 지점들, 특히 국정 운영과 공동체 경영을 책임질 정치적 선택, 선거 프로그램에서 ‘누가 누가 잘하나’가 아니라 ‘누가 누가 망가졌나’, ‘누가 누가 덜 나쁜가’를 선택권자, 즉 국민 대중에게 강요하는 고약하고 질 나쁜 정치를 퇴행적으로 재생산해 왔습니다. 자신의 비전 역량을 키우고 더 나은 정책과 대안을 내놓는 것은 쉽지 않은 고민과 노고가 따르나, 상대를 망가뜨리는 것은 잔머리와 몇 번의 패턴 학습을 통해, 거기에다 후안무치에 익숙해지면-이것이 소위 ‘정치적 근육’이라고 논객이라는 이들이 공공연하게 설파하는가? 민망하고 서글픈 일입니다-너무나도 쉬운 일입니다. 그것이 국가 발전의 지체와 선량한 다수 공동체 구성원들의 삶의 질의 쇠락, 때로 참담함을 담보로 함은 물론입니다. 서민들을 괴롭히는 조폭 조무래기들이 나대는 말이 있지 않던가요? ‘누군가를 잘되게 하는 것은 어려워도 망가뜨리는 것은 식은 죽 먹기’라고. 거버넌스 패러다임은 종내에 ‘경쟁과 협력’의 파트너십을 통한 상호 향상과 전체의 시너지, 그를 통해 공동체 잠재 역량의 통합적 발현의 극대화를 기약하는 패러다임입니다. 거버넌스 국가는 그 결과이자 그 길목으로서 광범위한 ‘사회 세력의 21세기형 혁신’을 요구합니다. 사회 세력 혁신을 통한 거버넌스 국가 추동을 위해 거버넌스 문화의 확산을 주요한 전략 방침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크고 작은 공동체 속에 기초단체, 광역단체 차원의, 그리고 전 국가 사회적으로 ‘자율과 책임’, ‘참여와 합의’, ‘실천과 협력’, ‘조정과 통합’의 거버넌스 문화를 두루두루 전파, 확산, 정착시켜 패거리 문화나 다름없는 세력 교체론에 젖은 세력들이 스스로 열패감을 느끼고 새로운 거버넌스 문화의 자장(磁場)으로 들어오도록 해야 합니다. 이 과정에 거버넌스 패러다임 적용을 통한 공동체 혁신과 변화의 경험과 사례들을 만들고 축적하는 일이 매우 주효합니다. 그리고 혁신의 네트워크, 네트워크의 네트워크를 중첩적으로 조직하고 확산하는 것도 주효합니다. 제 부문 영역에서 실제 사례를 통해 거버넌스 패러다임의 혜택을 받고, 거버넌스 패러다임이 갖는 새로운 공동체, 새로운 역사 창출의 힘을 체험·체화한 다양한 개인들, 그룹들, 조직들이 성숙한 거버넌스의 주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주체들이 파트너십과 성찰성이 역동하는 거버넌스 시대를 열어 가는 저변의 역량, 거버넌스 국가 캠페인의 돌이킬 수 없는 대중적인 동력이 될 것입니다.
  • 北 숨통 틔워주던 러시아도 금융거래 전면 중단

    北 개인·기관이 보유한 채권 즉시 동결… 김정은 통치자금 막혀 타격 상당할 듯 통일부 “세계 각국의 제재 적극 환영” 스위스가 북한 당국의 계좌 동결을 포함한 고강도 대북 제재에 동참한 데 이어 러시아도 대북 금융 제재 조치에 나섰다. 북한과 연결고리가 있던 국가들이 잇달아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을 비롯한 북한 집권층의 ‘돈줄 죄기’에 나선 것이라 북한이 받을 타격은 상당할 것으로 예상된다. 20일 미국 자유아시아방송(RFA) 등에 따르면 러시아 중앙은행은 19일(현지시간) 자국 금융기관들에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 2270호 이행 조치’ 통지문을 보내 “북한과의 금융거래를 전면 중단하라”고 통보했다. 또 유엔 제재 대상에 오른 북한의 개인과 기관 등이 보유한 채권은 즉시 동결하고,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과 관련된 금융 계좌를 폐쇄해야 한다고 지시했다. 다만 유엔이 승인한 경우 거래가 가능하다고 명시했다. 이는 안보리가 금융 제재의 예외로 정한 재외공관 운영 및 인도적 활동 관련 거래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는 지난 6일(현지시간) 안보리 결의 2270호 이행 방안이 담긴 대통령령 초안을 공개한 바 있다. 이날 러시아가 북한과의 금융거래 등을 전면 동결한 것은 그에 따른 후속 조치로 볼 수 있다. 러시아는 안보리 결의 2270호 채택 과정에서 막판에 ‘딴지’를 걸어 일부 예외 조항 등을 삽입했지만 이후 대북 제재를 적극 이행하겠다는 의지를 거듭 표명해 왔다. 최근 북한과의 교류를 확대해 온 러시아마저 제재를 본격화하면서 북한의 고립은 더욱 심화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러시아는 2013년 북한의 3차 핵실험 이후부터 북·중 관계가 냉랭해지자 그 틈을 치고 들어가 ‘신동방정책’의 일환으로 나진·하산 프로젝트, 북한 철도 현대화 사업 등 북한과의 각종 경제협력 사업을 벌였다. ‘혈맹’ 중국마저 등을 돌린 북한의 숨통을 틔워 주는 역할을 해 왔던 것이다. 그러나 이번 조치로 러시아가 북한과의 금융거래 등을 모두 차단하면서 북한은 러시아에 예치해 뒀던 자금을 잃은 것은 물론 러시아와의 경제협력 및 관련 교역망의 축소도 불가피하게 됐다. 북한 체제 유지 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주요한 돈줄이 또 하나 끊긴 셈이다. 정준희 통일부 대변인은 이날 정례브리핑에서 “중국도 그렇고 러시아도 그렇고 세계 각국이 강력한 제재에 동참하고 있는 것을 적극 환영한다”며 “이런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는 아마 상당한 타격을 북한에 입힐 것으로 추정한다”고 밝혔다. 러시아를 포함해 최근 각국이 대북 제재를 위해 국내법 등을 정비하는 것은 유엔 안보리가 규정한 제재 이행보고서 제출 시한이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다. 안보리는 지난 3월 3일 결의 2270호를 채택하며 회원국들이 90일 이내로 이행보고서를 제출토록 했다. 앞서 스위스는 북한 관련 자산 동결 등의 내용을 담은 고강도 대북 제재를 18일(현지시간) 오후 6시를 기해 전면 시행했다. 유럽연합(EU)도 북한의 개인 18명과 단체 1명을 제재 대상으로 추가했다. 강병철 기자 bckang@seoul.co.kr
  • ‘수십억弗 추정’ 北 집권층 비자금 회수 길 막혀

    유엔 안보리 결의 이행 본격화 金 선호 시계·치즈 北수출 금지 스위스가 18일(현지시간) 북한 계좌의 동결을 포함한 고강도 대북제재 시행령을 발표한 것은 지난 3월 채택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 2270호의 이행을 본격화한다는 의미다. 특히 그간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 등 집권층의 ‘비자금 은닉처’라는 의혹을 받아온 스위스가 본격 제재에 나선 만큼 추후 북한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관심이 집중된다. 스위스는 과거 유엔 안보리 대북 제재 결의 1718호, 1874호, 2087호, 2094호 등에 모두 동참했다. 2013년 안보리 결의 2094호 채택 직후까지 스위스가 자산을 동결한 북한 인물은 12명, 단체는 20곳에 이른다. 그럼에도 국제사회에서는 여전히 스위스가 북한 집권 핵심층의 눈치를 보며 대규모 통치자금은 동결하지 않고 있다는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정부 안팎에서는 스위스 등 유럽에 은닉된 김 위원장의 비자금은 수십억 달러에 이를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2005년 미국의 방코델타아시아(BDA) 은행에 대한 제재 이후 북한이 자금을 유럽으로 분산했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영국 매체인 텔레그래프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사망하기 전인 지난 2010년 김 위원장이 유럽에 40억 달러에 달하는 비자금을 예치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에 스위스가 대북 금융제재 조치를 취하면서 김 위원장 등 북한 집권층은 비자금을 대부분 회수할 방법이 없게 됐다. 이 비자금이 핵무기 등 대량살상무기(WMD) 개발이나 체제 유지, 집권층 호화생활 등에 활용됐을 것으로 짐작되는 만큼 상당한 타격을 받게 된 것이다. 파비앙 마엔피슈 스위스 국가경제사무국 대변인은 “이번 조치의 목적은 일단 북한이 핵무기를 만들지 못하게 하는 것”이라고 배경을 설명했다. 아울러 김 위원장이 유학하며 젊은 시절을 보낸 스위스가 대북 사치품 수출을 전면 금지하는 것도 북한에 적지 않은 충격을 줄 것으로 보인다. 김 위원장은 그간 북한 고위층에 스위스산 고급 시계를 선물하는 ‘선물 정치’를 해 왔다. 또 그가 ‘중독’ 수준으로 좋아해 비만의 원인으로 지목된 에멘탈 치즈도 스위스산이다. 장용석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책임연구원은 “스위스는 북한의 자금 은닉은 물론 물자, 사치품 거래에도 중요한 거점이었는데 이번 조치로 북한은 중요한 거래 거점을 상실하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강병철 기자 bckang@seoul.co.kr
  • 美 미얀마 제재 일부 해제...민주화 위협하는 군부는 압박

    미국이 반세기 만에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룬 미얀마에 대해 경제제재의 일부를 해제했다. 아웅산 수치가 주도하는 새 정부의 경제발전을 촉진하기 위해 국영기업과 은행에 대한 제재를 푼 것으로 풀이된다. 미국 재무부는 17일(현지시간) 미얀마 국영기업 7곳과 국영은행 3곳을 제재 대상에서 제외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재무부는 또 미얀마 금융기관과 자국 기업 또는 민간인의 금융거래도 일반제재 목록에서 해제하기로 했다. 이는 미국 기업의 현지 투자와 대(對) 미얀마 무역을 촉진해 경제발전을 유도하려는 조치다. 이번 조치로 업무나 관광 목적으로 미얀마에 거주하는 미국인의 금전 거래도 훨씬 쉬워졌다. 미국은 약 30년간 미얀마에 대한 경제제재를 유지해왔다. 다만 2011년 출범한 군부 출신 테인 세인 전 대통령 정부가 개혁·개방에 나서자 이듬해 일부 제재를 완화했다. 벤 로즈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부보좌관은 “제재 완화를 통해 독재에서 민주주의로 전환하면 보상이 있다는 점을 보여주려 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애덤 수빈 미국 재무부 테러·금융정보담당 차관대행도 “이번 조치는 제재 대상 이외의 업종에서 미얀마와의 교역을 촉진하고, 미얀마인과 미얀마 정부가 더 포용적이고 번영하는 미래를 맞도록 돕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미국은 상하원 의석의 4분의 1과 내무, 국방, 국경경비 등 주요부처를 장악한 채 미얀마 민주화의 잠재적 위협 요인이 되고 있는 군부에 대한 압박 수위는 오히려 높였다. 미 재무부는 미얀마 군부와 연계된 것으로 알려진 인물인 스티븐 로와 그가 운영하는 ‘아시아 월드’가 50% 이상 지분을 보유한 6개 기업을 특별지정제재대상(SDN)에 추가했다. 미국인은 제재 대상 기업이나 개인과 금융거래를 할 수 없다. 스티븐 로는 미얀마 독재자 네 윈의 묵인하에 아편과 헤로인 밀매로 부를 축적한 로 싱 한(2013년 사망)의 아들이다. 로 싱 한과 스티븐 로가 1992년 설립한 아시아 월드는 군부 통치 시절 항만, 건설 등 주요 관급 인프라 공사를 따내면서 미얀마 최대 재벌로 성장했다. 이런 아시아 월드 관련 기업에 대한 추가 제재에 대해 미 재무부는 “(미얀마의) 추가적인 민주개혁을 촉진하고 군부와 일부 개인 또는 단체에 대한 압력을 유지하기 위한 일”이라고 설명했다. 미얀마에서의 정치개혁을 가로막거나 인권을 침해하는 행위뿐 아니라 ‘북한과의 군사적 거래 촉진’ 역시 미얀마에 대한 제재를 유지하는 근거라고 미국 재무부는 강조했다. 재무부는 “미국 정부는 필요한 제재를 유지하면서도, 미얀마에서의 정치개혁과 광범위한 경제 성장에 대해서는 계속 지지할 방침”이라고 덧붙였다. 한편 미국의 이번 경제제재 일부 해제에 대해 미얀마 정부는 아직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다. 군부 통치 시절 미국을 비롯한 서방의 경제제재 조치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해온 것으로 알려진 수치는 이번 조치 이전에도 제재 해제에 대한 언급을 피해왔다. 일각에서는 미얀마 문민정부의 최고 실권자지만 군부의 견제를 받는 수치가 의도적으로 미국의 제재를 군부 압박 수단으로 활용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열린세상] 다시 ‘행정 민주화’를 생각한다/이창길 세종대 행정학과 교수

    [열린세상] 다시 ‘행정 민주화’를 생각한다/이창길 세종대 행정학과 교수

    최근 우리 사회는 ‘행정 민주화’라는 말을 잊어버린 듯하다. 행정을 담당하는 공무원들은 물론 행정을 연구하는 학자들의 기억에서도 사라진 것처럼 보인다. 1980년대와 1990년대 정치 민주화와 함께 행정 민주화는 모든 행정기관들이 수시로 사용하는 행정용어였음에도 이제는 한 세대의 유행어처럼 흔적만 남아 있다는 느낌이다. 이렇듯 기억하지 않아도 될 만큼 행정 민주화가 충분히 이루어진 것일까. 우리의 지난 역사를 돌이켜보면 작은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해방 후 행정 민주화는 이른바 ‘신민’(臣民)에 대한 수탈과 억압의 주체였던 일제강점기의 행정 악습에서 벗어나기 위한 시대적 과제였다. 이는 공무원들에게 자기편이 돼 달라는 힘없고 굶주린 백성들의 작은 소망이기도 했다. 이에 따라 1948년 경찰들을 총괄하는 경무부장은 ‘고마운 경찰, 미더운 경찰, 반가운 경찰’을 표방하며 주민에 대한 친절과 봉공의 자세를 강조했고, 1960년대 초 내무장관은 새해 첫 기자회견에서 행정 민주화를 첫 번째 행정 목표로 제시하기도 했다. 이러한 행정 민주화 노력들은 대부분 선언적 구호나 표어에 그쳤지만, 위민행정(爲民行政)의 씨앗을 뿌린 공로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1980년대 들어 행정 민주화는 국민의 행정 참여에서 출발했다. 그동안 경제발전과 산업화로 가려진 그늘이 하나씩 드러나면서 행정 민주화에 대한 요구가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결과만 좋으면 모든 것이 합리화되는 행정은 더이상 가능하지도 효과적이지도 않게 됐다. 절차적 정당성과 민주성이 행정의 중요한 가치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이다. 지방자치제를 실시해 지방 행정의 민주화를 실현하고, 행정절차법과 정보공개법을 제정한 것도 바로 이 시기였다. 2000년 이후에도 행정 민주화를 위한 노력은 계속됐다. 정보화와 세계화로 인해 지식과 정보의 공유가 확산되면서 행정은 급격하게 수평적 구조로 전환됐고, ‘위원회 공화국’이라고 불릴 만큼 전문가와 시민들의 다양한 의견들을 수렴하기 시작했다. 권력자의 일방적인 통치가 아닌 개방과 공존의 협치 행정으로 변모한 것이다. 과거에 누리던 권력과 권위를 내려놓고 행정 내부의 분권과 자율을 실천한 것 또한 행정 민주화를 향한 발걸음이었다. 하지만 최근 몇 년간 우리는 어떤가. 국민들의 다양한 의견은 수렴되지 못하고 좌절되는 경우가 많았고, 여전히 침묵하는 다수는 ‘대나무숲’을 찾고 있다. 지난 역사가 보여 준 행정 민주화의 궤적은 지나친 성과주의와 실용주의에 매몰돼 희미해지고 있다. ‘피로사회’의 저자 한병철에 따르면 “규율사회는 광인과 범죄자를 낳는 반면 성과사회는 우울증 환자와 낙오자를 만들어 낸다”고 한다. 이제부터라도 우리 뇌리에서 잊혀 가는 행정 민주화를 다시 깨워야 한다. 국민 중심, 인간 중심의 행정 민주화를 시작해 보자. 첫째, 정부는 국민들의 다양한 의견을 수렴해야 한다. ‘권력의 종말’의 저자 모이제스 나임이 지적했듯이 현대 사회는 정부와 군대 같은 거시적 권력들이 개인을 중심으로 하는 미시적 권력으로 대체되고 있다. 특히 우리 국민들은 미시적 권력을 발휘할 만한 능력을 충분히 갖추고 있다. 국민들이 정책 과정에 참여해 충분한 토론과 논의의 기회를 갖도록 해 주어야 한다. 공무원들도 정책의 동반자로 인식하고 그들의 의견을 존중하고 수렴하는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 둘째, 따뜻하고 인간적인 과정의 가치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 눈에 보이는 목표와 성과만을 강조하느라 눈에 보이지 않는 공공성과 인간성이 무너지는 모습을 우리는 너무나 자주 목격했다. 가습기 살균제 사태만 보더라도 오랫동안 말없이 피눈물만 흘려야 했던 국민들을 보듬지 못한 행정 시스템에 분노와 함께 자괴감이 느껴진다. 행정이 왜 존재하는지를 깊이 숙고해야 한다. 최근 논의되고 있는 경제 민주화도 행정 민주화 없이는 성공할 수 없다.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지 않는 권위적인 행정 운영이 경제적인 불평등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행정 민주화를 통해 정부와 국민이 함께한다면 어떤 문제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다 함께 ‘행정 민주화’를 소리 높여 불러 보자.
  • 하루 지나… 문혁 50년 논평 낸 인민일보

    중국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가 문화대혁명(문혁) 개시 50주년을 하루 넘긴 17일 새벽 0시에 “문혁과 같은 역사적 과오가 절대로 다시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논평을 냈다. 인민일보의 자매지 환구시보도 20분 뒤에 총편집인 칼럼을 통해 “문혁은 이미 철저하게 부정됐다”고 선언했다. 인민일보 4면에도 게재된 평론의 제목은 ‘역사를 거울 삼아 더욱 전진하자’였다. 인민일보는 평론을 통해 “문혁은 중대한 굴곡이었다”면서 “공산당은 1981년 ‘제11기 6중전회’에서 채택한 ‘건국 이후 발생한 당의 일부 역사적 문제에 관한 결의’를 통해 문혁을 철저히 부정했다”고 밝혔다. 덩샤오핑(鄧小平) 주도로 채택된 이 결의는 “(문혁은) 지도자(마오쩌둥)의 착오로 일어났으며, 반혁명 집단(4인방 등)에 이용돼 엄중한 재난을 가져온 내란”이라고 규정했다. 당시 덩샤오핑은 “마오쩌둥 개인과 중국공산당 지도이념으로서의 마오쩌둥 사상은 구별해야 하며, 마오의 공은 70%, 과오가 30%이다”라고 결론 내렸다. 인민일보는 이어 “역사는 이미 문혁이 이론과 실천에서 완전히 잘못됐다는 점을 증명했다”면서 “문혁이 재연되는 것을 절대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문혁 50주년에 즈음해 계속 침묵을 유지하던 당 기관지가 뒤늦게 입장을 표명한 것은 중국 공산당의 문혁에 대한 고민이 그만큼 깊다는 것을 의미한다. 외국 매체는 물론 금지령에도 중국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공간에서도 문혁 논쟁이 쇄도해 끝까지 침묵했다가는 자칫 현 지도부가 문혁을 긍정하는 것 아니냐는 오해를 살 수 있었다. 다만, 시진핑(習近平) 지도부는 ‘1981년 평가’를 절대 넘어서지 않았다. 뉴욕타임스는 “문혁 평가는 필연적으로 마오쩌둥에 대한 재평가를 불러 공산당의 통치 기반을 약화시킨다”면서 “공산당은 시간이 흘러 문혁이 잊히기만을 기다리고 있다”고 분석했다. 베이징 이창구 특파원 window2@seoul.co.kr
  • IT 기업 외면하던 워런 버핏, 야후 인수전에 나선다

    IT 기업 외면하던 워런 버핏, 야후 인수전에 나선다

    ‘투자의 귀재’라고 불리지만 그동안 IT 기업 투자에는 소극적이었던 워런 버핏이 야후 인수전에 뛰어들었다.  버핏 버크셔해서웨이 회장은 댄 길버트 퀴큰론스 회장과 함께 컨소시엄을 구성해 야후 인터넷 사업부문 2차 입찰에 참여했다고 뉴욕타임스(NYT) 등이 관계자를 인용해 15일(현지시간) 보도했다.  길버트 회장이 인수 작업을 주도하고 있으며 버핏은 버크셔 해서웨이를 통해 자금을 대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길버트 회장은 온라인 모기지 대출업체인 퀴큰론스를 창업해 억만장자의 자리에 오른 인물로, 이전에도 온라인 스타트업 여러 곳에 지분 투자를 해왔다.  현재까지 야후의 인터넷 사업 인수전에 참여한 기업은 미국 최대 통신업체 버라이즌, 사모펀드 TPG, 베인캐피털, 비스타의 컨소시엄 등이다. 이 가운데서는 버라이즌이 가장 유력한 인수 후보로 꼽힌다.  버핏 회장이 인터넷 기업에 관심을 보인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그동안 버크셔해서웨이가 주로 투자해 온 분야는 월마트,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웰스파고 등으로 IT 기업 투자는 두드러지지 않았다.  버크셔해서웨이는 지난해 미국 증시를 견인했던 페이스북, 아마존, 넷플릭스, 알파벳(구글 모회사) 등 이른바 ‘FANG’ 주식에도 전혀 투자하지 않아 신통치 못한 실적을 내놓기도 했다. 박기석 기자 kisukpark@seoul.co.kr
  • 빗나간 풍습…중국, ‘여자시체’ 3000만원에 팔리는 이유?

    빗나간 풍습…중국, ‘여자시체’ 3000만원에 팔리는 이유?

    중국 산시(山西)성 등지에서는 미혼 남성이 세상을 떠나면, 부모가 죽은 여성의 시체를 찾느라 여념이 없다. 사후세계에서라도 아들에게 맞는 배우자를 찾아 결혼을 시키기 위해서다. ‘명혼(冥婚)’이라 불리는 이 풍습으로 인해 미혼여성의 시체가 고가의 ‘인기 상품’이 되고 있다. 산시성 린펀시(临汾市) 홍동현(洪洞县)의 한 병원직원은 “여자시체를 화장하는 것은 가장 큰 낭비”라고 말한다. 젊은 여성의 시체는 흔치 않아서 가장 비싼 가격에 팔리고 있기 때문이다. 일단 병원에 중병이 걸린 여성이 있다는 소식이 알려지면 수십 명의 인파가 몰린다. 결혼을 하지 못하고 숨진 아들의 부모들은 병든 여자의 부모를 찾아 시체 가격을 놓고 흥정을 벌인다. 정작 그 여성환자는 아직 치료 중인데도 말이다. 한 달 전 산시성의 후칭화(胡青花) 씨는 3년 전 세상을 떠난 아들을 위해 18만 위안(한화 3200만원)을 주고 여자시체를 사들여 명혼식을 올렸다. 후씨는 이 거금이 한푼도 아깝지 않다고 말한다. ‘며느리’ 삼은 여성은 젊고, 아름다우며, 아들과 동갑으로 아주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이후 시체를 두고 가격흥정을 벌였던 여자집안과는 사돈지간이 된다. 중국 경제가 발전하면서 명혼시장도 활황을 맞고 있다. 1990년대 초에는 명혼을 위한 시체 가격이 5000위안(약 90만원) 정도였으나, 2000년대로 접어들면서 5만 위안(약 900만원)으로 뛰더니, 2010년에는 10만 위안(약 1800만원)까지 올랐다. 급기야 올해는 15만 위안(한화 2700만원)이면 ‘뼈 한 조각’도 살 수 없을 정도로 가격이 치솟았다. 후씨는 현재 주변인들의 질투와 부러움을 한 몸에 받고 있다. 이웃주민은 “이렇게 훌륭한 여자시체는 흔치 않고, 18만 위안에는 도저히 살 수 없다”고 말한다. 여자시체 가격은 나이, ‘신선도’, 시체훼손 정도, 용모, 집안 배경 등에 따라 결정된다. 병으로 죽은 시체는 교통사고를 당해 죽은 시체에 비해 비싸다. 또 죽은 지 얼마 안 된 시체가격이 ‘신선도’가 높아 비싸게 팔린다. 따라서 젊고, 아름다우며, 병사했고, 여기에 집안 환경이 좋은 여자시체의 가격은 10만~수십만 위안에 달하는 ‘최고 명품’으로 꼽힌다. 후씨 부부는 둘 다 도시에서 일하고 있어, 농촌에서 일하는 농민들과 달리 집안 환경이 좋은 편이다. 이에 여자집안도 선뜻 ‘저렴한’ 가격에 딸을 주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처럼 ‘명혼’을 위해서는 집안에 돈이 많을수록 며느리 찾는데 돈이 적게 들고, 집안에 돈이 적을수록 며느리 찾는데 돈이 많이 드는 현상이 나타난다. 그러나 아들에게 훌륭한 명혼식을 치뤄준 후씨의 고민은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왜냐하면 여자시체가 귀한 만큼 시체 도굴꾼들이 극성을 부리기 때문이다. 후씨는 매일 아들과 며느리를 합장한 묘지를 순찰한다. 매체의 보도에 따르면 홍동현에서는 지난 3년간 27구의 여자시체를 도둑맞았다. 후씨 말로는 보도 내용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며, 여자시체를 묻고 철저히 지키지 않으면 반드시 도둑을 당하고, 이는 수년간 예외가 없었다고 밝혔다. 그래서 최근에는 남녀 합장을 할 경우 묘를 깊숙이 파고 시멘트를 부어 막는다. 이런 과정에도 수천 위안의 비용이 든다. 그러고도 신랑측 집안은 하루가 멀다 하고 수시로 합장묘 주위를 감시해야 한다. 그렇다면 명혼이 이렇게 성행하는 이유는 뭘까? 이 지역 풍습에 따르면, 죽은 미혼 여성은 조상묘에 들일 수 없어 논밭에 방치해 둘 수 밖에 없다. 이에 죽을 딸을 서둘러 명혼 시키면 남편측 조상묘에 합장할 수 있고, 꽤 많은 수입도 올릴 수 있다. 한편 남자 집안에서는 대를 이을 수 있다고 믿는다. 또한 현지의 신귀학(神鬼学)에 따르면, 짝을 이룬 남녀가 세상을 떠나면 그 영혼이 일가를 지켜준다고 믿는다. 그러나 가족 중 혼인을 하지 않은 영혼은 외로움과 증오에 악령으로 변해 가족에게 저주를 내리며, 불행을 가져 온다고 믿는다. 명혼 풍습은 산시성 외 광동성(广东省)과 저장(江浙) 일부 지역에서도 여전히 성행한다. 명혼의 기원은 과거 은상(殷商)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상대(商代)의 통치자는 죽은 은왕을 위해 명혼을 올리고, 순장했다. 이것이 현대 명혼의 기원이다. 이후 무왕(武王)이 상나라 주왕을 멸망시키면서 명혼은 차츰 사라져갔다. 그러나 한말(汉末) 천하가 어지러운 틈을 타 명혼이 다시 성행했다. 조조(曹操) 역시 아들 조충(曹冲)의 죽음을 기려 견씨(甄氏) 집안의 여자와 명혼을 올린 고사가 유명하다. 이후 수당(隋唐) 시기 불교의 성행으로 극락세계에 대한 믿음이 강해지면서 명혼이 성행했고, 송대(宋代) 이후에 이르러 본격적인 ‘명혼시장’이 형성됐다. 사실상 죽은 영혼을 달래는 영혼결혼식은 고대 그리스, 수단, 일본 등지에서도 성행했다. 그러나 이들 국가 중 지금까지 명혼 풍습이 남아있는 나라는 없다. 그러나 중국은 오히려 경제가 발전할수록 명혼풍습이 새로운 변화를 거치며 성행하고 있다. 이에 중국정부는 지난 3월22일 “명혼으로 인한 시체도굴, 유골훼손 등의 범죄행위를 엄격히 다스린다”는 통지문을 발표했다. 시체도굴 뿐 아니라, 시체매매, 시체 매매알선도 단속 대상이다. 이를 어길 시 ‘시체모독죄’로 최고 유기징역 3년형에 처한다. 사진=중국주간신문(中国新闻周刊) 이종실 상하이(중국)통신원 jongsil74@naver.com
  • [기고] 北 ‘노동당 위원장’의 의미는/안희창 통일연구원 객원연구위원

    [기고] 北 ‘노동당 위원장’의 의미는/안희창 통일연구원 객원연구위원

    북한 제7차 당 대회에서 김정은이 받은 ‘노동당 위원장’이라는 직책에 대해 언론과 전문가들 사이에 상반된 분석이 이어지고 있다. 한쪽은 김정은의 이번 직책이 67년 전인 1949년 북조선노동당과 남조선노동당이 합당해 조선노동당을 만들 때 김일성이 받은 ‘노동당 위원장’이라는 것이다. 일부 언론은 김일성은 당시 ‘당 중앙위원회 위원장’ 자격으로 북한을 통치했지만 줄여서 ‘당 위원장’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다른 쪽은 김정은의 이번 직책은 김일성 때와는 성격이 완전히 다른 새로운 직책이라는 것이다. 일부 언론은 북한이 1981년 발간한 ‘조선전사’를 인용해 김일성이 받은 직책은 ‘노동당 중앙위원회 위원장’이지 ‘노동당 위원장’이 아니며, 따라서 김정은의 이번 직책은 ‘새 의자’라고 보도했다. 언뜻 보면 ‘노동당 중앙위원회 위원장’이나 ‘노동당 위원장’이나 별 차이가 없다. 그러나 북한의 당규 개정 과정을 보면 이번 직책은 새로 신설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북한은 1966년 제2차 당대표자회에서 기존의 ‘당 중앙위원회 위원장과 부위원장’직을 폐지하고 ‘비서국’과 함께 ‘총비서’직을 신설하면서 김일성을 ‘총비서’로 선출했다. 그러나 총비서와 비서는 어디까지나 ‘당 중앙위원회 내’의 직책이었다. 이 제도는 1980년 6차 당대회에까지 무리 없이 가동됐다. 그러나 그 이후 노동당 내에서는 중요한 직제 개편이 잇따랐다. 우선 1960년대 초반 쿠바 사태를 계기로 군사부문을 강화하기 위한 차원에서 당 중앙위원회 산하에 ‘군사위원회’가 설치됐다. 즉 ‘당 중앙위원회 군사위원회’였다. 그러나 1982년부터는 ‘당 중앙위원회 군사위원회’가 아니라 ‘당 중앙군사위원회’로 불려 독립성 여부가 주목을 끌어 왔다. 지금까지도 어느 정도 독립적으로 기능을 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1997년 김정일을 총비서로 추대할 때 북한 언론이 당 중앙군사위원회를 당 중앙위원회와 병렬로 보도한 이후부터는 확실하게 독립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2010년 제4차 당대표자회에선 총비서의 권한이 강화됐다. 즉 ▲당의 수반이며 ▲당을 대표하고 전당을 영도하며 ▲당 중앙군사위원회 위원장으로 규정됐다. 한마디로 당 중앙위원회와는 별도의 기구인 당 중앙군사위원회가 생겨나고, 당의 최고책임자의 권한이 확대돼 온 것이다. 이는 당의 한 부분인 ‘중앙위원회’의 ‘위원장’에게는 감당할 수 없는 임무가 위임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결국 북한 지도부로서는 어떤 식으로든지 ‘당 중앙위원장 위원장’의 명칭을 변경해야 할 수요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북한은 2011년 12월 김정일이 갑자기 사망하자 김정일은 ‘영원한 총비서’, 김정은은 ‘제1비서’로 했다. 그러나 김정은 체제를 선포하는 마당에 김정은의 직책을 ‘당 제1비서’라고 하는 것은 어색했을 것이다. 그래서 나온 것이 당 중앙위원회를 초월하는, ‘당 전체의 위원장’이라는 차원에서 ‘노동당 위원장’이라는 호칭을 쓴 것으로 보인다.
  • [글로벌 시대] 다양성 속의 통합/김영선 한·아세안센터 사무총장·전 주인도네시아 대사

    [글로벌 시대] 다양성 속의 통합/김영선 한·아세안센터 사무총장·전 주인도네시아 대사

    인도네시아의 국장(國章) 가루다는 힌두교의 비시누 신을 태우고 다니는 신화 속 상상의 새다. 세계 최대 이슬람 국가인 인도네시아 국장에 이슬람이 아닌 힌두교의 상징이 그려져 있는 것이다. 이는 인도네시아를 포함한 동남아시아에 끼친 인도 문화의 영향을 나타내는 한 예이기도 하지만 다름을 인정하는 포용과 화합의 정신이 동남아 문화의 특성임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인도네시아 국장 하단에는 ‘비네카 퉁갈 이카’(Bhinneka Tunggal Ika)라는 문구가 쓰여 있는데 ‘다양성 속의 통합’(Unity in Diversity)이라는 의미로, 인도네시아 통치 이념이자 동남아 10개국 국가 연합인 아세안의 통합 비전이다. 수많은 종교, 인종, 언어를 가진 동남아 국가들이 어떻게 이질성을 극복하고 하나의 아세안 공동체를 출범시킬 수 있었을까. 다양성을 인정하는 가운데 통합을 추구하는 포용과 화합의 정신이 뿌리 깊게 깔려 있기에 가능했다. 아세안은 통합의 장애로 여겨졌던 문화적 다양성을 오히려 창의성과 시너지 효과의 원동력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때때로 격한 반목과 대결을 드러내는 우리 사회가 주목하고 배워야 할 점이다. 세계화 시대에 많은 우리 국민들이 외국을 여행하고 해외에서 비즈니스를 하고 있다. 우리가 해외에서 높이 평가받고 비즈니스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그 나라의 문화와 관습을 이해하고 현지 실정에 맞게 행동해야 한다. 특히 동남아 국가들의 경우 같은 아시아권이라는 생각에 우리 방식으로 이해하고 행동함으로써 낭패를 보기 쉽다. 한 예로 아세안 국가들은 천천히 가더라도 협의와 화해를 통해 합의를 이끌어 내는 과정을 매우 중시한다. 반면 빨리빨리 문화에 젖어 있는 한국인들은 상대방의 입장을 잘 경청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그저 밀어붙임으로써 일을 그르치는 경우가 많다. 외국에 있다 보면 우리의 한류가 어떻게 전 세계적으로 선풍을 일으키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곧잘 받는다. 어느 전문가는 우리 문화가 기(氣), 흥(興), 정(情)의 특별한 에너지를 내재하고 있어 다른 문화에서는 접하기 어려운 매력과 강렬함을 발산하기 때문에 지구촌 사람들의 공감과 반향을 불러일으킨다고 설명한다. 또 다른 이는 한류의 성공 요인으로 한국인, 특히 젊은 세대의 창의성을 꼽기도 한다. 조금 다르지만 독특한, 창의적인 젊은 세대가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는 원동력이 됐다는 것이다. 우리 젊은이들이 과거 유교주의적인 전통 속에 갇혀 단지 부모님 말씀 잘 듣고 학교 공부만 잘하는 모범 학생으로 성장했다면 정형화되고 획일화된 사회 분위기 속에서 싸이 같은 세계적인 스타는 탄생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다양한 문화의 공존과 조화 속에서 우리 사회는 역동적이며 지속 가능한 사회를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이다. 세계화 추세 속에 50년, 100년 후의 한국의 모습이 어떨지 궁금하다. 단일 언어, 단일 민족의 우리 사회는 200만명에 육박하는 국내 거주 외국인과 함께 급격히 변모해 가고 있다. 정치·경제·사회의 급성장 과정에서 이념 갈등과 소득 격차의 양극화 현상도 심화돼 가고 있다. 또 다문화가정, 장애인, 동성애자 등에 대해 다름을 이해하지 않고 배척하고 차별하는 현상이 나타나기도 한다. 이와 같은 사회의 이질적 요소와 다양성을 어떤 식으로 포용하고 융합해 나가야 할 것인지는 우리에게 가장 어렵고도 중요한 과제다. 아세안이 ‘다양성 속의 통합’을 통해 아세안 공동체를 출범시켰듯 우리도 포용과 화합의 정신으로 우리 식의 ‘다양성 속의 통합’ 문화를 고민하고 발전시켜 나가야 할 때다.
  • [함혜리 기자의 미술관 기행]르네상스 회화 걸작, 다 빈치 ‘최후의 만찬’ 을 만나다

    [함혜리 기자의 미술관 기행]르네상스 회화 걸작, 다 빈치 ‘최후의 만찬’ 을 만나다

     밀라노 산타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수도원( Chiesa di Santa Maria delle Grazie) 르네상스 회화, 아니 서양 회화 가운데 가장 유명한 그림을 꼽으라면 아마도 이 그림이 아닐까. 레오나르도 다 빈치( Leonardo da Vinci : 1452~1519)의 ‘최후의 만찬’.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매달리기 전날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식사를 나누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외에도 최후의 만찬을 그린 화가들은 많지만 이 작품만큼 중요한 의미를 지니지는 못한다. 르네상스의 전성기는 이 작품과 함께 시작됐다는 평가를 받을 만큼 중요한 작품이다. 작품은 500년 전 탄생 순간부터 보는 이들의 감탄을 자아내며 수많은 모사의 대상이 됐다. 20세기 들어서도 앤디워홀을 비롯해 많은 팝아티스트들이 이미지를 차용해 패러디해 쓰기도 했다.  책이나 프린트물 등을 통해 숱하게 보아 와서 마치 실제를 본 듯 착각할 정도로 낯익은 이미지이지만 실상 이 그림이 어디에 있는지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안다고 해도 시간이 빠듯한 여행자의 입장에서는 이 작품을 보기가 간단치 않다. 수개월 전에 인터넷으로 예약을 해야 하고, 만약에 운이 좋아서 당일 현장에서 입장권을 구하더라도 작품 앞에 머물 수 있는 시간은 15분으로 정해져 있다. 그래도 이런 어려움을 감내하고 찾을만한 가치는 차고도 넘친다. 500년 전 천재 거장이 심혈을 기울여 남긴 걸작이 주는 감동은 평생을 두고도 잊을 수 없을 것이니 이만하면 충분한 보상이 아니겠나.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은 밀라노 대성당에서 걸어서 20분 정도 거리에 위치한 산타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성당( Chiesa di Santa Maria delle Grazie)의 부속 건물 벽에 그려져 있다. 도미니코회 수도회에 속하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성당 옆으로 ‘체나콜로(Cenacolo)’라고 쓰여진 곳이 입구다. 체나콜로는 수도원의 식당, 최후의 만찬을 그린 그림, 예수 그리스도가 최후의 만찬을 한 식당을 가리킨다. 15세기 말 이탈리아에서 그리스도의 최후의 만찬이라는 주제는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특히 수도원 식당을 장식하는 단골 소재로 등장했다. 수도원 식당에 걸린 ‘최후의 만찬’ 그림은 식사를 묵상의 연장으로 만든다는 기대에서 벽에 실물크기로 거대하게 그리곤 했다. 다빈치가 그의 후원자였던 밀라노 공국의 로도비코 스포르차의 요청으로 1494년부터 1498년까지 그린 최후의 만찬은 지금까지 총 일곱 차례에 걸친 복원 작업을 거쳐 원래의 색을 되찾아 전 세계의 예술 애호가들을 맞이하고 있다. 유네스코는 1980년 이 작품이 소장된 산타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성당과 함께 이 작품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이곳을 찾았던 날은 운이 무척 좋아던지 당일 입장 티켓을 구할 수 있었다. 성당을 찬찬히 둘러본 뒤 티켓에 적힌 시간에 맞춰 전시실 입구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신호에 따라 전시장 안으로 들어갔다. 뒤의 문이 자동으로 닫히고 드디어 식당 안으로 들어섰다.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높이 벽 위에 은은한 조명을 받으며 예수님과 열두 제자가 앉은 프레스코화가 눈에 들어왔다. 걸작의 아우라에 심장이 쿵 멎는 것 같았다.  작은 프린트 물에 익숙해서인지 회벽에 유채와 템페라로 그린 작품(세로 460cm, 가로 910㎝)은 생각했던 것보다 무척 큰 것이 인상적이었다. 숭고한 주제를 다루는 방식, 면밀하게 연구된 원근법의 표현, 해부학과 골상학에 입각한 인물의 묘사, 색조의 조화, 풍부한 상징성과 생생한 서사, 우아한 선과 동작의 표현 등 어느 하나 나무랄 데 없다. 복원 작업 이전의 상태를 가늠할 수 없지만 고미술품 복원 분야에서 최고 수준을 자랑하는 이탈리아에서도 최고의 전문가들이 심혈을 기울인 결과는 대단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 하시니 / 그들이 몹시 근심하여 각각 여쭈되 주여 나는 아니지요 /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나를 팔리라” (마태복음 26장 21~23절)  다 빈치는 바로 이 순간을 표현하고자 했다.   안드레아 델 카스타뇨(1419~1457)는 다빈치보다 50년 전에 피렌체의 산타 아폴로니아 수도원 식당에 프레스코화 ‘최후의 만찬’을 남겼다. 원근법 효과나 인물들의 극적인 표적이 인상적인 이 그림은 많은 프레스코화들이 그랬듯이 회벽으로 덮였다가 1860년 수도회가 해산된 뒤 흰색 도료를 제거하면서 재발견됐다. 카스타뇨의 그림에서 예수와 제자들은 식탁 한편에 일렬로 앉아있고 유다 한 사람만이 건너편에 앉았다. 이는 예수가 말한 배신자가 유다라는 것을 알려주는 장치로 당시 화가들이 채택하던 전형적인 구도였다. 피렌체에서 화가활동을 시작한 다빈치도 분명 이 프레스코화를 보고 많은 영감을 얻었을 것이다. 그러나 카스타뇨와는 다른 방식으로 주제를 표현했다.  다 빈치는 과감하게 유다를 다른 제자들과 나란히 앉혔다. 그가 표현하고 했던 것은 제자들이 일으킨 마음의 동요였고 전체 화면의 조형성이었다. 다 빈치는 열두제자 무리에 유다를 포함시켜 3명씩 4개의 무리로 인물을 배치시킨 뒤 제자들의 동요를 놀라움, 두려움, 사랑, 고뇌, 분노로 표현했다. 유다는 멈칫하며 겁을 먹은 듯한 표정으로 오른 손은 예수를 팔아넘기고 받은 돈주머니를 쥔채 오른 손으로 빵을 집으려 하고 있다. 곧 배신할 유다를 비롯해 의심이 많은 베드로가 손에 칼을 쥐고 있는 것은 예수가 체포될 때 로마 병사의 귀를 자를 것임을 암시하고 있으며 테이블 위의 물건들도 많은 일들을 상징한다. 3개의 창문, 4개의 무리를 이룬 12제자 등은 그리스도교의 삼위일체, 4 복음서, 예루살렘의 12문을 상징한다는 해석도 있다. 이전의 최후의 만찬은 평면성이 강조되지만 다빈치는 수도원 식당이 확장되게 보이도록 중앙 투시도법을 정확하게 사용하고 있다. 화면 안쪽으로 후퇴하는 천장과 측벽의 선들이 모두 중앙에 앉아있는 그리스도의 머리로 집중하면서 강조했다. 천장의 바둑판 무늬는 관람자의 시선으로부터 멀어질수록 축소되어 화면의 공간감과 입체감을 생생하게 부각시킨다.  다빈치는 이 그림을 그리는데 총 4년의 세월을 꼬박 바쳤다. 밀라노의 거리와 시장을 돌아다니며 모델이 될 만한 사람들을 찾았고 그림 속 인물의 동작과 손의 표현을 연구했다. 그는 작품의 수정이 가능하고 색상이 선명하게 드러나도록 템페라와 기름을 섞어 쓰는 실험적인 방식을 채택했다. 그림은 생동감이 넘치고 인간적인 표현이 가능해 졌지만 식당의 습기 때문에 안료가 쉽게 벗져지는 치명적인 결함을 낳았다. 완성된 당시부터 이 주제에서는 단연 최고의 걸작으로 소문이 자자했던 작품은 세월과 숱한 전쟁을 견디면서 심하게 손상됐다. 마지막 복원은 1978년부터 1999년까지 21년간 이뤄졌다. 워낙 손상이 심해서 원래 색깔을 알아보기도 힘들었던 것을 화가가 완성 직후에 베껴 그린 그림이 온전히 남아있어 이를 기준으로 복원할 수 있었다. 이런 연유로 일부 학자들은 복원화가들이 80%,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20% 그린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발상지 피렌체 근처 빈치에서 테어나 피렌체에서 활동했다. 그런데 왜 그는 밀라노에 이 걸작을 남기게 됐을까? 밀라노는 14세기 말 비스콘티 공작 하에서 막대한 번영을 누려 15세기엔 이탈리아에서 가장 크고 중요한 도시가 됐다. 비스콘티 가문의 마지막 후계자였던 필리포 마리아의 후계권을 둘러싼 전투에서 용병 대장 프란체스코 스포르차(1401~1466)가 승리해 권좌에 올랐다. 그의 대를 이은 로도비코 스포르차(1451~1508)는 피렌체와 베네치아에서 실력 있는 장인과 예술가들을 고용해 도시를 건설하고 궁정을 장식하도록 했다. 인체의 구성과 구조를 이해하기 위해 해부학적 구조와 근육조직을 분석하고 인체 기관의 이상적인 비례에 관해 연구했으며 천체와 우주를 연구하고, 건축을 설계하고, 악기를 연주하는데도 뛰어났던 만능 천재 다빈치는 1492년 스포르차에게 편지를 보냈다. 피렌체에서 밀라노로 이주해 스포르차를 위해 자신의 재능을 바치고 싶다며 건물을 설계할 수 있으며 조각가이자 화가로 훈련받았고 공병학에도 재능이 있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로도비코는 레오나르도를 밀라노로 불러 아버지인 프란체스코의 청동 기마상을 만들어 달라고 주문했다. 기마상을 위해 주문했던 청동이 대포 만드는 데 쓰이게 되는 바람에 레오나르도는 결국 청동 주물을 완성하지 못했다. 하지만 궁정 미술가로 궁정에서 열리는 가면극의 의상과 무대 장치를 설계하고 조신들의 초상화를 그리며 로도비코의 신임을 얻었다.  로도비코는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수도원을 확장해 스포르차 가문의 영묘를 만들면서 레오나르도에게 수도원 식당에 전통적으로 수도원 식당을 장식하는 단골 주제였던 ‘최후의 만찬’을 그리도록 주문했다. 로도비코의 통치는 ‘최후의 만찬’이 완성된 이듬 해(1499년) 프랑스의 밀라노 침공으로 막을 내리고 궁정은 해산됐다. 화려한 삶을 살았고 너무나 많은 호기심과 재능을 지녔던 레오나르도의 말년은 어땠을까. 피렌체로 돌아가 있던 그에게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가 중부 프랑스의 루아르지역에 아름다운 성과 많은 연금을 제공했다. 그는 프랑스로 가 3년간 클로뤼세 성에서 조용한 여생을 보내고 1519년 생을 마감했다. 왕의 호의에 보답하기 위해 항상 지니고 다니던 그림 ‘모나리자’를 왕에게 기증했다.  함혜리 선임기자 lotus@seoul.co.kr
  •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이 벽에 그려져 있는 곳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이 벽에 그려져 있는 곳

    르네상스 회화, 아니 서양 회화 가운데 가장 유명한 그림을 꼽으라면 아마도 이 그림이 아닐까. 레오나르도 다 빈치( Leonardo da Vinci : 1452~1519)의 ‘최후의 만찬’.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매달리기 전날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식사를 나누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외에도 최후의 만찬을 그린 화가들은 많지만 이 작품만큼 중요한 의미를 지니지는 못한다. 르네상스의 전성기는 이 작품과 함께 시작됐다는 평가를 받을 만큼 중요한 작품이다. 작품은 500년 전 탄생 순간부터 보는 이들의 감탄을 자아내며 수많은 모사의 대상이 됐다. 20세기 들어서도 앤디워홀을 비롯해 많은 팝아티스트들이 이미지를 차용해 패러디해 쓰기도 했다.  책이나 프린트물 등을 통해 숱하게 보아 와서 마치 실제를 본 듯 착각할 정도로 낯익은 이미지이지만 실상 이 그림이 어디에 있는지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안다고 해도 시간이 빠듯한 여행자의 입장에서는 이 작품을 보기가 간단치 않다. 수개월 전에 인터넷으로 예약을 해야 하고, 만약에 운이 좋아서 당일 현장에서 입장권을 구하더라도 작품 앞에 머물 수 있는 시간은 15분으로 정해져 있다. 그래도 이런 어려움을 감내하고 찾을만한 가치는 차고도 넘친다. 500년 전 천재 거장이 심혈을 기울여 남긴 걸작이 주는 감동은 평생을 두고도 잊을 수 없을 것이니 이만하면 충분한 보상이 아니겠나.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은 밀라노 대성당에서 걸어서 20분 정도 거리에 위치한 산타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성당( Chiesa di Santa Maria delle Grazie)의 부속 건물 벽에 그려져 있다. 도미니코회 수도회에 속하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성당 옆으로 ‘체나콜로(Cenacolo)’라고 쓰여진 곳이 입구다. 체나콜로는 수도원의 식당, 최후의 만찬을 그린 그림, 예수 그리스도가 최후의 만찬을 한 식당을 가리킨다. 15세기 말 이탈리아에서 그리스도의 최후의 만찬이라는 주제는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특히 수도원 식당을 장식하는 단골 소재로 등장했다. 수도원 식당에 걸린 ‘최후의 만찬’ 그림은 식사를 묵상의 연장으로 만든다는 기대에서 벽에 실물크기로 거대하게 그리곤 했다.  다빈치가 그의 후원자였던 밀라노 공국의 로도비코 스포르차의 요청으로 1494년부터 1498년까지 그린 최후의 만찬은 지금까지 총 일곱 차례에 걸친 복원 작업을 거쳐 원래의 색을 되찾아 전 세계의 예술 애호가들을 맞이하고 있다. 유네스코는 1980년 이 작품이 소장된 산타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성당과 함께 이 작품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이곳을 찾았던 날은 운이 무척 좋아던지 당일 입장 티켓을 구할 수 있었다. 성당을 찬찬히 둘러본 뒤 티켓에 적힌 시간에 맞춰 전시실 입구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신호에 따라 전시장 안으로 들어갔다. 뒤의 문이 자동으로 닫히고 드디어 식당 안으로 들어섰다.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높이 벽 위에 은은한 조명을 받으며 예수님과 열두 제자가 앉은 프레스코화가 눈에 들어왔다. 걸작의 아우라에 심장이 쿵 멎는 것 같았다.  작은 프린트 물에 익숙해서인지 회벽에 유채와 템페라로 그린 작품(세로 460cm, 가로 910㎝)은 생각했던 것보다 무척 큰 것이 인상적이었다. 숭고한 주제를 다루는 방식, 면밀하게 연구된 원근법의 표현, 해부학과 골상학에 입각한 인물의 묘사, 색조의 조화, 풍부한 상징성과 생생한 서사, 우아한 선과 동작의 표현 등 어느 하나 나무랄 데 없다. 복원 작업 이전의 상태를 가늠할 수 없지만 고미술품 복원 분야에서 최고 수준을 자랑하는 이탈리아에서도 최고의 전문가들이 심혈을 기울인 결과는 대단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 하시니 / 그들이 몹시 근심하여 각각 여쭈되 주여 나는 아니지요 /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나를 팔리라” (마태복음 26장 21~23절) 다 빈치는 바로 이 순간을 표현하고자 했다.  안드레아 델 카스타뇨(1419~1457)는 다빈치보다 50년 전에 피렌체의 산타 아폴로니아 수도원 식당에 프레스코화 ‘최후의 만찬’을 남겼다. 원근법 효과나 인물들의 극적인 표적이 인상적인 이 그림은 많은 프레스코화들이 그랬듯이 회벽으로 덮였다가 1860년 수도회가 해산된 뒤 흰색 도료를 제거하면서 재발견됐다. 카스타뇨의 그림에서 예수와 제자들은 식탁 한편에 일렬로 앉아있고 유다 한 사람만이 건너편에 앉았다. 이는 예수가 말한 배신자가 유다라는 것을 알려주는 장치로 당시 화가들이 채택하던 전형적인 구도였다. 피렌체에서 화가활동을 시작한 다빈치도 분명 이 프레스코화를 보고 많은 영감을 얻었을 것이다. 그러나 카스타뇨와는 다른 방식으로 주제를 표현했다.    다 빈치는 과감하게 유다를 다른 제자들과 나란히 앉혔다. 그가 표현하고 했던 것은 제자들이 일으킨 마음의 동요였고 전체 화면의 조형성이었다. 다 빈치는 열두제자 무리에 유다를 포함시켜 3명씩 4개의 무리로 인물을 배치시킨 뒤 제자들의 동요를 놀라움, 두려움, 사랑, 고뇌, 분노로 표현했다. 유다는 멈칫하며 겁을 먹은 듯한 표정으로 오른 손은 예수를 팔아넘기고 받은 돈주머니를 쥔채 오른 손으로 빵을 집으려 하고 있다. 곧 배신할 유다를 비롯해 의심이 많은 베드로가 손에 칼을 쥐고 있는 것은 예수가 체포될 때 로마 병사의 귀를 자를 것임을 암시하고 있으며 테이블 위의 물건들도 많은 일들을 상징한다. 3개의 창문, 4개의 무리를 이룬 12제자 등은 그리스도교의 삼위일체, 4 복음서, 예루살렘의 12문을 상징한다는 해석도 있다.  이전의 최후의 만찬은 평면성이 강조되지만 다빈치는 수도원 식당이 확장되게 보이도록 중앙 투시도법을 정확하게 사용하고 있다. 화면 안쪽으로 후퇴하는 천장과 측벽의 선들이 모두 중앙에 앉아있는 그리스도의 머리로 집중하면서 강조했다. 천장의 바둑판 무늬는 관람자의 시선으로부터 멀어질수록 축소되어 화면의 공간감과 입체감을 생생하게 부각시킨다.  다빈치는 이 그림을 그리는데 총 4년의 세월을 꼬박 바쳤다. 밀라노의 거리와 시장을 돌아다니며 모델이 될 만한 사람들을 찾았고 그림 속 인물의 동작과 손의 표현을 연구했다. 그는 작품의 수정이 가능하고 색상이 선명하게 드러나도록 템페라와 기름을 섞어 쓰는 실험적인 방식을 채택했다. 그림은 생동감이 넘치고 인간적인 표현이 가능해 졌지만 식당의 습기 때문에 안료가 쉽게 벗져지는 치명적인 결함을 낳았다. 완성된 당시부터 이 주제에서는 단연 최고의 걸작으로 소문이 자자했던 작품은 세월과 숱한 전쟁을 견디면서 심하게 손상됐다. 마지막 복원은 1978년부터 1999년까지 21년간 이뤄졌다. 워낙 손상이 심해서 원래 색깔을 알아보기도 힘들었던 것을 화가가 완성 직후에 베껴 그린 그림이 온전히 남아있어 이를 기준으로 복원할 수 있었다. 이런 연유로 일부 학자들은 복원화가들이 80%,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20% 그린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발상지 피렌체 근처 빈치에서 테어나 피렌체에서 활동했다. 그런데 왜 그는 밀라노에 이 걸작을 남기게 됐을까? 밀라노는 14세기 말 비스콘티 공작 하에서 막대한 번영을 누려 15세기엔 이탈리아에서 가장 크고 중요한 도시가 됐다. 비스콘티 가문의 마지막 후계자였던 필리포 마리아의 후계권을 둘러싼 전투에서 용병 대장 프란체스코 스포르차(1401~1466)가 승리해 권좌에 올랐다. 그의 대를 이은 로도비코 스포르차(1451~1508)는 피렌체와 베네치아에서 실력 있는 장인과 예술가들을 고용해 도시를 건설하고 궁정을 장식하도록 했다. 인체의 구성과 구조를 이해하기 위해 해부학적 구조와 근육조직을 분석하고 인체 기관의 이상적인 비례에 관해 연구했으며 천체와 우주를 연구하고, 건축을 설계하고, 악기를 연주하는데도 뛰어났던 만능 천재 다빈치는 1492년 스포르차에게 편지를 보냈다. 피렌체에서 밀라노로 이주해 스포르차를 위해 자신의 재능을 바치고 싶다며 건물을 설계할 수 있으며 조각가이자 화가로 훈련받았고 공병학에도 재능이 있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로도비코는 레오나르도를 밀라노로 불러 아버지인 프란체스코의 청동 기마상을 만들어 달라고 주문했다. 기마상을 위해 주문했던 청동이 대포 만드는 데 쓰이게 되는 바람에 레오나르도는 결국 청동 주물을 완성하지 못했다. 하지만 궁정 미술가로 궁정에서 열리는 가면극의 의상과 무대 장치를 설계하고 조신들의 초상화를 그리며 로도비코의 신임을 얻었다.  로도비코는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수도원을 확장해 스포르차 가문의 영묘를 만들면서 레오나르도에게 수도원 식당에 전통적으로 수도원 식당을 장식하는 단골 주제였던 ‘최후의 만찬’을 그리도록 주문했다. 로도비코의 통치는 ‘최후의 만찬’이 완성된 이듬 해(1499년) 프랑스의 밀라노 침공으로 막을 내리고 궁정은 해산됐다. 화려한 삶을 살았고 너무나 많은 호기심과 재능을 지녔던 레오나르도의 말년은 어땠을까. 피렌체로 돌아가 있던 그에게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가 중부 프랑스의 루아르지역에 아름다운 성과 많은 연금을 제공했다. 그는 프랑스로 가 3년간 클로뤼세 성에서 조용한 여생을 보내고 1519년 생을 마감했다. 왕의 호의에 보답하기 위해 항상 지니고 다니던 그림 ‘모나리자’를 왕에게 기증했다.  함혜리 선임기자 lotus@seoul.co.kr
  • [사설] 세습 완결하고 67년 전으로 돌아간 김정은

    북한 노동당 제7차 당대회가 3대 세습과 김정은 1인 유일 체제를 확립하면서 막을 내렸다. 36년 만에 열린 7차 당대회는 노동당 위원장이 당의 최고 직책으로 당을 대표하고 영도한다는 점을 당 규약에 추가 명시한 뒤 김정은 노동당 제1국방위원장을 노동당 위원장으로 추대했다. 김 제1위원장은 당 위원장을 포함해 중앙군사위원장 등 무려 9개의 감투를 쓰면서 당·정·군 권력을 장악하며 최고 통치자로 등극했다. ‘당 위원장’이란 이름은 67년 전인 1949년 할아버지인 김일성이 사용했던 직책으로 굳이 이를 끄집어낸 것은 김정은이 김일성 향수를 이용해 권력을 공고화하겠다는 의미다. 이번 당대회가 ‘김정은 대관식’이라고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1인 독재 체제를 공식화한 7차 당대회는 여러 가지 의미가 담겨 있다. 눈에 띄는 것은 북한 권력 구도의 변화다. 북한은 원래 당이 국가보다 우위에 자리하고 있으며 당 규약은 헌법을 뛰어넘는 최고 규범이다. 김정은이 노동당 위원장으로 추대된 것은 부친 김정일의 선군(先軍) 정치와 차별화해 당을 중심으로 통치하겠다는 의지를 공표한 것이다. 2011년 12월 김정일 사망 이후 장성택 등 핵심 간부들을 대규모 숙청한 김정은이 이제 자신의 말 한마디로 국가 전체를 움직일 수 있는 친정체제를 구축한 것이다. 당 인사에서 대대적인 세대 교체는 없었지만 상당 규모의 승진을 통해 노·장·청 조화를 꾀한 것도 특징이다. 당 핵심인 상무위원을 5명으로 늘린 것이나 정치국 위원과 정치국 후보위원의 수를 늘린 것도 이런 맥락이다. 선군 정치로 권력을 지탱해 온 아버지의 그늘에서도 확실히 벗어나겠다는 의도로 보인다. 우려스러운 것은 김정은 정권이 이번 당대회를 통해 ‘경제·핵 병진노선’을 공식 채택하면서 핵무기의 소형화·다종화 실현 의지를 밝힌 점이다. 유엔의 대북 제재에도 불구하고 핵실험 및 미사일 개발을 계속하겠다는 뜻을 밝히면서 국제사회에서의 대결 구도를 한층 강화한 것이다. 북한의 핵보유국 선언은 전통적 우방인 중국과 러시아마저 혀를 찰 정도로 국제적 고립을 자초한 것이다. 한반도와 동북아 정세는 한층 격화될 것이고 북한 주민들의 고통이 가중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김정은 개인 우상화도 심상치 않다. 뚜렷한 치적도 없이 권력을 잡은 그로서 김일성·김정일 수준으로 권위를 끌어올리기 위해 비상식적인 우상화 작업을 지속적으로 할 수밖에 없다. 어제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열린 노동당 제7차 대회 경축 군중대회가 이를 반증한다. 검은색 인민복 차림의 김정은 제1위원장을 향해 10만여명의 평양 시민들이 열광적인 찬사를 보내는 모습은 섬뜩할 정도였다. 북한의 고립이 심화되고 김정은에 대한 우상화가 광기를 더해 가겠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가 상대해야 하는 것은 한층 권력 기반이 공고화된 김정은 정권이라는 점이다. 현재로선 북한의 무모한 핵 도발을 막기 위해 국제사회와의 세밀한 공조로 대북 제재를 강화해야 하지만, 종잡을 수 없는 북한의 평화공세나 체제 급변에도 언제든지 신속하게 대처할 수 있도록 면밀한 대응책을 수립해야 한다.
  • ‘韓 독립 주창’ 조지 노리스 건국훈장

    조지 윌리엄 노리스(1861~1944) 전 미국 연방 상원의원이 1919년 3·1 독립운동 이후 미국 의회에서 한국 독립을 주창한 공로로 한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안호영 주미 대사는 9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DC 대사관저에서 한국 정부를 대신해 노리스 전 의원의 외증손자인 데이비드 노리스 래스(49) 박사에게 훈장을 수여했다. 노리스 전 의원은 1919년 7월 1일 미국 상원에서 일제에 한국 침략을 중단하라고 비난하는 연설을 하고 일제의 식민통치 실상을 기록한 증거물을 의회에 제출하는 등 한국의 독립 열망과 일제 식민통치의 부당성을 미국 의회의 주요 의제로 부각시키는 데 이바지했다. 워싱턴 김미경 특파원 chaplin7@seoul.co.kr
  • ‘김정은식 북한’ 청사진 없고… 김일성·김정일 유훈통치 되풀이

    ‘김정은식 북한’ 청사진 없고… 김일성·김정일 유훈통치 되풀이

    36년만에 열린 북한의 제7차 노동당 대회가 3박 4일 일정으로 지난 9일 폐막했다.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이 이번 당대회에서 ‘김정은식 북한’의 청사진을 보여줄 것이란 전망이 높았지만 정작 뚜껑을 열어보니 새로울 것 없는 김일성·김정일의 ‘유훈통치’만 답습한 모습이다. 이번 당대회에서는 국제사회의 비핵화 요구에 대해 ‘세계 비핵화’라는 표현을 사용해 핵 포기의 뜻이 없음을 분명히 했고, 당 규약을 개정해 핵보유국 명시를 확정했다. 또 김정은 노동장 위원장 직위 추대 등 변화 없는 말 잔치 수준으로 대회를 진행하며 남북관계, 대외정책, 경제정책에서도 기존 정책을 유지하겠다는 뜻을 재확인했다. 노년층으로 구성된 지도부에 대한 대대적인 인사를 단행할 것이란 관측도 있었지만 큰 폭의 세대교체도 없었다. 반면 노세대를 앞세워 ‘찬양’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한편 평양에서 수만명이 참가하는 대규모 군중집회를 통해 주민들에게 또 한번의 충성맹세를 받아냈다. 통일부 당국자는 10일 “김정은을 위한, 김정은 유일체제 강화 차원의 대회”라며 “새로운 전략과 비전을 제시하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장용석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책임연구원도 “이번 당대회는 전반적으로 김일성·김정일 시대의 통치구조를 그대로 이어 가며 정책 면에서도 변화를 주기보다는 현상유지를 택한 것으로 보인다”고 진단했다. 이 때문에 북한의 당대회가 커다란 변화의 기점이라기보다는 전반적인 정책 점검 대회의 의미로 정례화되는 거 아니냐는 관측도 제기되고 있다. 일각에서는 ‘5개년 경제발전전략’이 끝나는 2021년에 제8차 당 대회가 열릴 것이란 주장도 나온다. 이번에 김 위원장이 67년 전 김일성 주석이 맡았던 노동당 위원장에 오르면서 ‘김일성 코스프레’의 화룡점정을 찍었다는 분석도 나온다. 김 위원장은 2012년 아버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사망 이후 할아버지인 김일성을 모방해 북한을 통치하기 시작했다. 김일성을 연상케 하는 헤어스타일과 쯔메리(목닫이 모양의 양복)에 밀짚모자를 쓰고 돌아다녔다. 특히 이번 당 대회에서는 김정일은 한번도 입지 않은 서양식 양복과 넥타이를 매고 나와 할아버지 흉내 내기를 ‘완성’시켰다. 겉모습뿐 아니라 김 주석이 한때 올랐다가 1966년에 폐지된 노동당 위원장 자리를 부활시켜 자신이 백두혈통임을 과시했다. 문경근 기자 mk5227@seoul.co.kr
  • [사설] 망상 벗어나지 못한 김정은의 핵보유국 선언

    36년 만의 당대회를 개최한 북한은 변화 대신 고립을 선택했다. 북한은 핵무력을 중추로 하는 핵·경제 병진노선을 공식화하면서 김일성·김정일·김정은 3대 세습 체제를 공식 출범시킨 것이다. 김정은 국방위 제1위원장은 노동당 7차 중앙위원회 사업총화 보고를 통해 “경제 건설과 핵무력 건설을 병진하는 노선은 사회주의 강국을 건설하기 위한 가장 정당하고 혁명적인 노선”이라며 핵·경제 병진 정책을 재차 선언했고 “책임 있는 핵보유국으로서 세계 비핵화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며 상호 모순적인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통일과 관련해서는 제6차 노동당 대회 때 김일성 당시 주석이 제시한 ‘고려민주연방공화국창립방안’을 재차 주장했다. 의례적인 주한 미군 철수를 또 주장하면서 남북 군사회담도 제안했다. 북한의 최대 정치행사이자 최고 결정기구인 당대회에서 대남 평화공세를 펴면서 주한 미군 철수를 주장하는 것은 북한이 통남봉미(通南封美) 전략을 구사하며 한·미 동맹의 균열을 노리고 있다는 관측이다. 핵보유국을 선언하면서 비핵화를 운운한 것은 국제사회의 제재와 비난을 완화하자는 전형적인 선동 선전에 불과하다. 남북 문제와 북·중, 북·미 관계에서 개선의 여지는 내비쳤지만 수사적인 의미에 불과하다. 국제사회의 요구를 진정으로 고민한 흔적조차 없다. 북한은 당대회 기간 중 김정은 제1위원장을 김일성·김정일 수준으로 우상화하는 데에만 열중하고 있다. 관영 언론들은 그를 ‘21세기의 위대한 태양’ 등으로 치켜세우면서 핵실험, 장거리 로켓과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시험발사 등 ‘핵강국’ 과시를 치적으로 선전하고 있다. 이는 국제사회가 비웃을 정도로 시대착오적인 유일 영도체제의 경직성을 보여 줄 뿐이다. 북한의 국제적 고립은 이제 되돌릴 수 없는 수준이 됐다. 1980년 열린 6차 당대회 때는 118개 나라에서 177개 대표단이 참석했고 중국과 러시아에서는 정상급 외빈이 왔지만 이번 대회의 경우 외빈들을 찾아 볼 수 없다. 김 제1위원장이 자신의 안방에서 화려한 대관식을 열었지만 국제사회에서 아무도 박수를 쳐 주지 않는 냉엄한 현실을 극명하게 드러낸 것이다. 변화를 거부하고 기존 노선을 고수한 북한에서 희망은 찾아보기 힘들다. 핵무기를 앞세워 국제사회를 위협하는 국가 통치 전략으로 북한의 미래는 열리지 않는다. 그럼에도 북한을 둘러싼 강대국들의 이해관계는 변화무쌍하다. 최근 방한한 제임스 클래퍼 미 국가정보국(DNI) 국장이 북·미 간 평화협정 논의 중 한국의 양보 의사를 타진했다는 보도가 이를 반증한다. 북핵 문제 자체가 복잡한 국제정세를 반영하는 사안인 만큼 한반도 정세와 관련해 국제 흐름을 예의 주시할 필요가 있다. 북한은 체제유지를 최우선 정책으로 삼지만 북의 변화에 대한 기대를 버리기는 이르다. 당분간 북한의 변화를 겨냥한 대북 제재가 성과를 내기 위해 한층 세밀한 국제사회의 공조는 불가피하지만 평화공세 전환, 체제 급변에 대비한 다각적인 대책 마련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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