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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데스크 시각] 주민이 경찰의 주인이다/김승훈 사회2부 차장

    [데스크 시각] 주민이 경찰의 주인이다/김승훈 사회2부 차장

    자치경찰제가 올해 시행된다. 주민 위에 군림하는 ‘칼 든 순사’에 종지부를 찍고, 주민이 경찰의 주인이 되는 시대를 맞게 됐다. 지난 14일 정부·여당은 경찰을 국가경찰과 자치경찰로 이원화하는 자치경찰제 시행안을 발표했다. 올해 서울·세종·제주 등 5개 시도에서 시범 실시하고, 2021년 전국으로 확대할 계획이다. 자치경찰관은 전체 경찰관의 36%에 해당하는 4만 3000여명이고, 단계적으로 시도지사 관할의 자치경찰관으로 신분이 바뀐다. 자치경찰제는 주민이 선거를 통해 구성한 지방정부에 경찰권을 행사하고 치안 서비스를 제공할 의무나 권한을 부여하는 게 골자다. 한마디로 지방정부에 경찰 조직이 신설되고, 지방정부가 주민 안전을 담당한다. 시행안에 따르면 자치경찰은 여성·아동·청소년·장애인 보호와 교통법규 위반 단속, 지역 경비 활동 등을 맡는다. 성폭력, 가정폭력, 학교폭력, 교통사고 조사 등 일부 사건에 대한 수사권도 갖는다. 어린이·여성·노인 등 사회적 약자 보호가 자치경찰의 핵심 역할이다. 이는 지방정부의 존재 이유와 맥을 같이한다. 지방정부는 사회적 약자를 위한 행정을 펼쳐야 지속발전 가능한 사회를 만들 수 있다. 자치경찰제 성공은 지방정부가 주민 신뢰를 얻느냐, 못 얻느냐에 달렸다. 신뢰는 민주성과 효율성, 두 측면을 모두 갖추고 있어야 얻을 수 있다. 민주성은 ‘열린 정부’로 대변된다. 지방정부는 주민들이 언제든 감시·통제할 수 있도록 열려 있어야 한다. 효율성은 쉽게 말해 업무 능력이다. 국가경찰 때보다 일을 더 잘해야 한다는 것으로, 주민 의견에 귀 기울여 주민들이 최우선적으로 요구하는 치안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 현재 지방정부는 열린 정부를 지향하고, 주민 치안 핵심인 어린이·여성·노인 등 사회적 약자 보호를 위한 생활밀착형 정책들을 다양하게 펼치고 있다. 서울 성동구는 여성·청소년을 위한 ‘안심 귀가 앱’, 초등학교 통학로 안전을 책임지는 ‘빅데이터 활용 위치 기반 스마트 지도’, 전담 주치의가 75세 이상 노인 가정을 직접 찾아 건강관리를 하는 ‘효사랑 주치의’ 등 어린이·여성·노인을 위한 정책들을 전국 최초로 도입해 지방자치단체의 벤치마킹 대상이 되고 있다. 성동구 사례에서 보듯 서울은 민주성과 효율성 측면에서 자치경찰제 성공 기반을 다졌다고 할 수 있다. 중앙정부 역할도 작지 않다. 문재인 정부는 자치경찰제 공약을 내건 만큼 성공 여부에 공동 책임을 져야 한다. 중앙정부는 제주자치경찰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제주자치경찰은 2006년 10월 시범 운영을 거쳐 2007년 정식 시행됐다. 하지만 협소한 기능과 사무 부여, 인력 규모 축소, 재정지원 약속 불이행 등으로 자치경찰제 취지를 살리지 못했다. 중앙정부는 이런 실패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재정, 인력 등을 전향적으로 지원해야 한다. 지방정부 목소리도 귀담아듣고, 미비점을 수정·보완해 진정한 의미의 자치경찰제가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주민 인식 전환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경찰은 통치자가 만든 게 아니다. 주민들이 필요해서 만든 조직이다. 주민은 과거처럼 경찰의 단속 대상이 아니라 경찰을 감시·통제하는 자치경찰의 주인이다. 일각에선 자치경찰제 관련 시도지사와 경찰의 유착, 경찰과 지역 유지 결탁 등 비리 우려를 제기한다. 주민들이 자치경찰의 주체이자 주인이라는 의식을 가져야 이 같은 유착 비리를 막고, 자치경찰제 시행 본연의 이유인 안전한 지역 사회를 만들 수 있다. 자치경찰제 도입 근본 취지 중 하나는 국가경찰 권한 분산이다. 국가경찰의 조직 보전 논리에 휩쓸리지 말고, 자치경찰제 취지가 제대로 구현될 수 있도록 정착 과정을 상시 모니터링해야 한다. hunnam@seoul.co.kr
  •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 임정 군사작전 5일 앞두고 日 패망…물거품 된 ‘자주독립의 꿈’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 임정 군사작전 5일 앞두고 日 패망…물거품 된 ‘자주독립의 꿈’

    4부 광복의 여명 : 충칭 시기 ③ 미완의 ‘대한민국’ <끝>1940년 9월 한국광복군을 창설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45년 8월 7일 미국 첩보기관 전략사무국(OSS)과 한미 연합 군사작전을 최종 합의했다. 20일까지 한반도에 침투하기로 하고 출동 명령을 기다렸다. 하지만 15일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임정으로서는 허탈할 수밖에 없었다. 자주독립을 위해 쏟아부은 노력이 물거품이 돼 버렸다. ●임정에 너무나도 아쉬운 해방 김구(1876~1949)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광복군을 국내에 진입시키려고 했다. 영국에서 망명정부를 이끌던 프랑스 샤를 드골(1890~1970)이 레지스탕스 부대를 이끌고 파리에 입성했듯 임정도 광복군을 모아 서울로 들어가려고 했다. 미국 OSS와 한반도 진공을 추진하는 동시에 중국 산시성 옌안에 있던 김두봉(1889~1961)의 조선의용군, 소련 연해주 지역에서 활동하던 김일성(1912~1994)의 항일유격대 등과 손잡고 압록강을 넘어가려고도 했다. 임정이 실제로 미국, 중·소 한인부대와 연계해 대일전쟁을 수행했다면 대한민국의 역사는 지금과는 달라졌을 수도 있다. 해방 뒤인 1948년 3월 김구가 안창호(1878~1938) 10주기 추도식 때 한 말이다.“선생이여, 우리 조국이 해방된 것을 10분(100%)으로 보면 7분(70%)은 우리 애국 선열들의 피와 땀입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최후의 3분(30%)이 우리 힘으로 되지 못한 까닭에 해방에 기괴한 내용이 담기게 됐습니다.” ●대만, 국제사회 미아 임정 도운 유일한 우방 2차 세계대전이 연합군의 승리로 굳어져 가던 1943년 7월. 임정 수뇌부가 중국 국민당 정부 총통 장제스(1887~1975)를 만났다. 김구 등이 “국제사회에 한국의 독립을 주장해 달라”고 호소했고, 장제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같은 해 11월 이집트 카이로에서 열린 회담에서 그는 프랭클린 루스벨트(1882~1945) 미국 대통령과 윈스턴 처칠(1874~1965) 영국 총리의 반대를 물리치고 한국의 독립을 명문화했다. 당시 인도의 독립운동가로 훗날 총리가 되는 자와할랄 네루(1889~1964)는 한국을 “아시아 식민지 국가 가운데 열강에게 독립을 보장받은 유일한 나라”라고 부러워했다. 카이로 회담은 1914년 이후 일본이 점령한 영토를 제자리로 돌려놓으려고 모인 자리였다. 1910년 일본의 식민지가 된 한국은 논의 대상이 아니었지만 장제스가 예외 조항까지 만들어 도왔다. 1932년 4월 윤봉길(1908~1932)의 상하이 훙커우공원 의거를 보고 우리 민족의 항일 의지를 높이 샀기 때문이다. 국민당 정부(현 대만)는 국제사회에서 ‘미아’가 될 뻔한 임정을 마지막까지 지켜준 유일한 친구였다. 하지만 중국의 노력에도 미국과 영국, 소련 등 열강의 반응은 차가웠다. 여러가지 이유를 들어 임정을 한반도의 정식 정부로 승인하지 않았다. 루스벨트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한국의 독립과 임정의 승인은 별개다. 한국 독립운동 단체들이 분열돼 임정의 대표성을 인정할 수 없다. 임정은 한반도와 연계가 없다. 중국이 임정을 승인하면 소련도 친소단체를 승인할텐데 이렇게 되면 연합국 내에서 마찰이 생겨날 수 있다.” 처칠도 임정을 인정하면 인도 등 영국 식민지들이 동요할 수 있다고 보고 반대했다. 실망스럽지만 임정 요인들은 모두 개인 자격으로 한국에 돌아와야 했다. 1945년 11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임정 직원과 가족들이 차례로 귀국했다.●임정, 국제정세 못 읽고 선거불참…한독당 소멸 임정 인사들이 귀국하자 시민들은 환영의 뜻을 나타냈다. 김구의 거처이자 임정 청사 역할을 한 경교장(현 강북삼성병원)은 인파로 붐볐다. 1945년 12월 임정 인사들은 서울운동장(현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열린 환국 행사에 참석했다. 15만명이 몰려와 이들을 축하했다. 하지만 미 군정은 자신 이외의 어떠한 정부 활동도 인정하지 않았다. 이는 임정에도 마찬가지였다. 이때부터 김구는 미 군정 규정을 어기고 임정을 사실상의 정부로 간주하려고 해 갈등을 빚었다. 직접적 도화선은 신탁통치 문제였다. 1945년 12월 소련 모스크바에서 미·영·소 3개국 외상이 만나 한국에 대한 신탁통치를 결의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임정은 즉각 국무회의를 열고 반탁운동에 나섰다.앞서 임정은 1943년 영국과 미국이 한국을 국제 공동관리하는 방안을 논의했다는 뉴스가 나오자 중국 충칭에서 ‘재중자유한인대회’를 열어 반대운동을 펼쳤다. 임정 연구의 권위자인 한시준(65) 단국대 사학과 교수는 “해방 뒤 임정의 반탁운동은 충칭에서 국제 공동관리에 반대했던 연장선상에 있던 것”이라며 “일제가 패망하면 한국은 곧바로 독립해야 한다는 것이 임정의 확고부동한 믿음이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김용옥(71) 한신대 석좌교수는 “당시 모스크바 삼상회의가 논의한 신탁통치안은 (임정이) 반대할 성격의 것이 아니었다. 미소 공동위원회는 합리적이고 바람직한 방안을 내놨다”며 “당시 전 국민이 일치단결해 신탁통치를 찬성했어야 했다. 그러면 분단도 일어나지 않았고 1948년 제주 4·3사건과 여순 민중항쟁도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했다.●美군정, 비밀리에 임정 해체공작까지 임정은 1945년 12월 31일 ‘국자 1·2호’라는 포고문을 발표했다. 신탁통치를 강행하려는 미 군정 대신 자신들이 정부 역할을 맡겠다는 것이었다. 1946년 1월 1일 미군정 사령관 존 리드 하지(1893~1963)가 김구와 언성을 높여 싸운 끝에 상황을 수습했다. 이때부터 미 군정은 임정을 위험한 존재로 보고 협력 대상에서 배제했다. 비밀리에 임정 해체 공작도 개시했다.이후 김구의 여러 정치적 시도는 번번이 무산됐다. 1948년 5월 10일 총선거가 실시돼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세워졌다. 9월 9일 북한에서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됐다. 38선을 경계로 국토와 민족이 둘로 나뉘었다. 임정 세력이 주축이던 한국독립당은 “남한만의 정부 수립에 반대한다”며 총선 참여를 거부했다. 제헌의회에서 정치권력을 얻지못한 한독당은 결국 세를 잃고 와해됐다. 당시 국제 정세와 한국사회 분위기를 제대로 읽지 못한 ‘패착’이었다는 평가가 많다.●주요 임정 지도자들 어두운 말로 주요 임정 지도자들의 말로도 불행했다. 1947년 7월 여운형(1886~1947)은 좌우 합작운동을 펼치다가 살해됐다. 김원봉(1898~1958)은 친일경찰 노덕술(1899~1968)에게 고문을 받은 뒤 월북했다. 그가 자신의 비서였던 중국인 학자 쓰마로(100·미국 거주)에게 보낸 편지에는 “북조선은 그리 가고 싶은 곳은 아니다. 하지만 남한 정세가 너무 나쁘고 (일부 우익들이) 나를 (죽이려고) 위협해 살 수가 없다”고 적혀 있었다. 한국전쟁을 1년 앞둔 1949년 6월 김구도 안두희(1917~1996)의 총탄에 스러졌다. 그의 나이 73세였다. ‘못생긴 나무가 선산을 지킨다’고 했던가. 몰락한 양반 가문에서 태어나 과거시험에 번번히 떨어져 이른바 ‘과거 낭인’으로 살았다. 1919년 마흔이 넘은 나이에 “임정 문지기라도 하겠다”고 상하이로 찾아가 명망가들이 떠난 이름 뿐인 정부를 끝까지 지켰다. 임정을 독립운동의 구심체로 되살리는 데 누구보다 큰 공헌을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가 꿈꾸던 민족단일국가의 염원은 이뤄지지 않았다. 이렇게 대한민국은 ‘미완의 건국’으로 남았다.●‘1919년 임정이 대한민국의 시작’ 분명히 그렇다고 임정이 우리 역사에서 사라진 것은 아니다. 1948년 7월 초대 대통령이 된 이승만(1875~1965)은 취임 직후 ‘대한민국 30년’이라는 연호를 썼다. 독립운동가들이 상하이에 임정을 세운 1919년을 대한민국의 시작으로 보고 이를 계승했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뉴라이트 등은 “대한민국이 1948년 건국됐다”고 주장한다. 여기에는 ‘대한민국은 (독립운동가들의 노력이 아니라) 미국의 힘으로 세워진 나라’라는 속내가 있다. 하지만 이들이 ‘건국의 아버지’로 여기는 이승만조차 그렇게 생각하진 않았던 것 같다. 이승만은 대한민국 정부 초대 내각 16명 가운데 자신을 포함한 5명을 임정 요인으로 채웠다. 대통령 이승만, 부통령 이시영(1868~1953), 국회의장 신익희(1892~1956), 국무총리·국방부장관 이범석(1900~1972), 무임소장관 이청천(1888~1957) 등이다. 당시 정부도 한국 독립을 위한 임정의 공로를 높이 평가했음을 알 수 있다. 1987년 국회는 ‘6월 항쟁’으로 얻어낸 9차 개헌을 통해 대한민국의 법통이 임시정부에 있다는 사실을 재차 천명했다. 어떤 이들은 연합국이 해방을 가져다 줬다고 말한다. 한국이 독자적으로 일제를 이기지 못했고 국제사회도 임정의 노력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계 제패를 꿈꾸며 전 세계로 세를 넓혀가던 강대국 일본을 우리 혼자 막지 못했다고 해서 독립을 위한 피나는 노력을 폄하할 이유는 없다. 또 연합국이 임정을 승인하지 않았던 배경에는 일본 항복 뒤 전리품을 더 많이 차지하려는 정치적 의도가 숨어 있다. 그들의 시각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해방은 거져 얻어진 것이 아니다. 우리는 전 세계에서 어느 나라보다도 오래 그리고 치열하게 일제와 맞서 싸웠다. 대한민국은 임정이 중심이 된 독립운동 세력의 길고 긴 투쟁의 산물임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 “진실 말하면 막말이고 극우냐”…반성없는 김준교

    “진실 말하면 막말이고 극우냐”…반성없는 김준교

    자유한국당 청년최고위원 선거에 출마한 김준교씨가 자신의 막말이 빚은 파문에 아랑곳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앞서 김준교씨는 지난 18일 대구에서 열린 대구·경북(TK) 합동연설회에서 “이대로라면 자유대한민국은 사라지고 김정은이 통치하는 남조선 인민공화국이 탄생한다”면서 문재인 대통령을 가리켜 “저딴 게 무슨 대통령인가”라고 발언했다. 지난 15일 대전에서 열린 호남·충청권 합동연설회에서는 “주사파 문재인 정권을 탄핵시키지 않으면 자유대한민국이 멸망하고 통일돼 북한 김정은의 노예가 될 것”이라면서 막말을 퍼부었다. 이런 과격 발언에 비판이 쏟아졌지만 김준교씨는 잘못이 없다는 입장이다. 그는 지난 19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진실을 말하면 막말이 되고, 극우가 되는 세상”이라면서 “대한민국에도 의로운 젊은이가 한 명쯤은 있어야 되지 않겠나”라고 밝혔다. 또 “언론에서 아무리 막말·극우 프레임으로 엮어도 진실은 가려지지 않는다”면서 “자유대한민국을 수호하기 위해 얼마든지 이 한 몸 던져서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다”고 맞섰다. 그러나 자유한국당 전신인 새누리당 출신의 이완구 전 국무총리조차 김씨의 막말을 비판했다. 그는 CBS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와의 인터뷰에서 “진정한 의미에서 국민 화합 아래 국가를 발전시키자는 게 정당의 존립 이유인데, 이런 식으로 극단적인 표현을 사용하는 하는 것은 정말 경계해야 하고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없어져야 할 일”이라고 비판했다. 김준교씨는 서울과학고와 카이스트 산업공학과를 졸업한 뒤 서울 강남구 대치동 학원에서 수학 강사로 일했다. 2007년 12대 대선에서 이회창 무소속 후보의 사이버 보좌를 맡았으며 이듬해 18대 국회의원 선거에 자유선진당 후보로 서울 광진구 갑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오세진 기자 5sjin@seoul.co.kr
  • [단독] “독립운동가 ‘베이징 3걸’ 중 단재만 기념관 없어 초라해”

    [단독] “독립운동가 ‘베이징 3걸’ 중 단재만 기념관 없어 초라해”

    1936년 한줌의 재로 돌아온 시아버지 호적 없어 사망 신고·묘소 허가 못 받아 1991년 남편 죽은 후 ‘가짜 아들’과 소송 10년여간 재판 과정서 단재 호적 되찾아 마지막 꿈은 표지석 세우고 기념관 건립“일제강점기 중국 베이징에서 민족 항쟁의 구심점으로 활동해 ‘베이징 3걸’로 불렸던 독립운동가 우당 이회영, 심산 김창숙, 단재 신채호 선생 세 분 중 단재만 기념관이 없는 초라한 신세입니다.” 독립운동가, 사학자, 언론인으로 활동하다 순국한 단재 선생의 며느리 이덕남(76)씨는 19일 서울신문과 인터뷰에서 시아버지가 여전히 홀대받는 것에 대해 이렇게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중국에 거주하는 이씨는 21일 서울 용산구 효창동 백범기념관에서 열리는 단재 선생의 83주기 추도식을 앞두고 서울을 찾았다. 이씨는 단재의 장남 고 신수범씨의 부인으로, 1992년 한중 수교 이전부터 중국에서 단재를 알리는데 앞장 서 왔다. 그는 “시아버지는 1936년 중국 뤼순 감옥에서 순국한 뒤 한줌의 재로 고향에 돌아왔는데 호적이 없어 사망 신고도, 묘소 허가도 받을 수 없는 처지였다. 친척인 면장 덕분에 몰래 매장했는데, 그 친척은 나중에 파면됐다”고 말했다. 단재를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은 일제가 식민통치를 위해 도입한 호적에 이름 올리기를 거부했고, 광복 후에도 호적에 등재된 생존자들에게만 국적이 부여돼 그동안 호적 없는 무적자 신세였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시아버지가 무국적자로 조국에서 홀대당하는 것을 바로 잡은 것도 이씨다. 단재의 호적을 되찾는 과정은 한편의 드라마였다. 이씨는 “1991년 남편이 죽고 난 뒤 자신이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가짜 아들’을 상대로 10여년간 소송을 하는 과정에서 단재의 호적을 되찾게 됐다”고 설명했다. 남편은 사생아로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단재 선생의 호적이 없으니 시어머니 박자혜 여사는 혼인 신고를 할 수 없었다. 부득이 아들을 공부시키기 위해 자신의 호적에 올렸다”고 말했다. 시어머니 박씨 역시 간호사 출신 독립운동가다. 그는 재판 과정에서 정부에 수차례 탄원을 한 끝에 2009년 비로소 단재의 호적을 만들었다. 이때 단재와 함께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이상룡 선생을 포함해 모두 62명이 국적을 되찾았다. 그는 “남편은 13세 때까지 아버지의 이름도 몰랐다고 해요. 독립운동가 아들이라는 것이 탄로날까봐 시어머니가 아들한테도 아버지를 숨긴 거죠. 남편이 하도 아버지가 누구냐고 묻자 시어머니는 칼을 옆에 갖다두고 ‘앞으로 입밖으로 내면 혀를 잘라버릴 것’이라는 다짐을 받은 후에야 아버지 단재의 이름을 알려줬다는 얘기를 남편한테 들었다”고 털어놨다. 이씨는 “독립운동을 한 시어버지로 인해 가족들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며 “저의 마지막 꿈은 단재가 살던 종로구 삼청동 터에 표지석을 세우고 나아가 단재의 얼을 되살릴 수 있는 기념관을 짓는 것”이라고 말했다. 최광숙 선임기자 bori@seoul.co.kr
  • “문재인 탄핵” 한국당 김준교, 8년 전 대국민사과문 낸 이유

    “문재인 탄핵” 한국당 김준교, 8년 전 대국민사과문 낸 이유

    2011년 SBS ‘짝’ 모태솔로 특집 출연‘연애 회의론’으로 질타받자 사과문 게시18대 총선에 자유선진당으로 출마·낙선“저런 게 무슨 대통령이냐”, “문재인을 탄핵하자” 등의 발언으로 도마에 오른 김준교(37) 자유한국당 청년 최고위원 후보가 8년 전 대국민사과문을 낸 사연이 눈길을 끌고 있다. 김 후보는 당 대표와 최고위원을 뽑는 자유한국당 전당대회를 앞두고 지난 18일 대구 엑스코 행사장에서 열린 대구·경북 합동연설회에서 현 정부를 강도 높게 비난하며 ‘태극기 표심’을 공략했다. 김 후보는 “저는 문재인 탄핵 국민운동본부 대표”라며 “(문 대통령이) 나라를 팔아먹고 있다. 이대로라면 자유 대한민국은 사라지고 김정은이 통치하는 남조선 인민공화국이 탄생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김 후보는 “90% 이상 표를 몰아주시면 문재인은 반드시 탄핵될 것”이라고 부르짖었다. 김 후보는 지난 14일 대전 연설회에서는 “주사파 정권을 탄핵시키지 못하면 자유한국당이 멸망하고 김정은의 노예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김 후보는 지난 2011년 11월 일반인 대상 리얼리티 예능프로그램 ‘짝’(SBS)에 출연한 이력으로 화제가 되기도 했다. 김 후보는 17기 모태솔로 특집에 ‘남자3호’로 출연했다. 당시 김 후보는 ‘도시락 데이트’를 신청한 ‘여자 6호’에게 “돈을 벌어 미술학원을 차려주겠다”, “우리집에서 전세로 살지 않겠는가”라고 말하는 등 적극적으로 마음을 표현했다. 상대방이 김 후보에게 부담을 느끼자, 김 후보는 “여자한테 시간 쓰는 게 아깝다”, “여자가 오히려 자꾸 부담을 줘서 싫다”며 돌변한 태도를 보였다. 이어 그는 사람을 사귀며 서로를 알아가는 시간이 아깝고 그 시간에 차라리 일을 하는 게 낫다고 하는 등 연애에 회의적인 발언으로 시청자들의 질타를 받았다. 방송 후 논란이 일자 김 후보는 짝 인터넷 카페에 ‘대국민 사과문’이란 제목의 글을 올렸다.그는 “방송을 보고 기분이 상했거나 충격을 받으셨을지도 모르는 전국의 선남선녀 여러분, 열애중인 커플, 여성 시청자분께 진심으로 사죄드린다”고 적었다. 김 후보는 “연애지상주의에 빠져 연애를 못하면 무능력하고 이상한 사람으로 여기는 세태에 모태솔로로서 반기를 들고 싶었다”며 “단순히 여자친구가 없다는 이유만으로 사람을 바보 취급해도 되는 것인지 이 사회에 묻고 싶었다”고 밝혔다. 그는 “RC(무선조종) 헬기와 다스베이더 코스프레를 통해 혼자서도 얼마든지 재미있고 즐겁게 놀 수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었다”며 “대한민국 모태솔로의 선두주자로서 권익 보호와 홍보에 앞장 서고 싶었다”고 주장을 이어갔다.시청자들의 부정적인 반응에 대해 김 후보는 “직설적이고 강한 표현 방식이 주위 사람과 시청자를 기분 나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차마 깨닫지 못했다”며 “다만 저처럼 표준정규분포를 상당히 벗어나 오차범위에 존재하는 사람도 있으며 이런 다양성을 존중해주는 것도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한다”라고 밝혔다. 김 후보는 서울과학고와 카이스트 산업공학과를 졸업한 뒤 서울 강남구 대치동 사교육 시장에서 수학 강사로 일했다. 2007년 12대 대선에서 이회창 무소속 후보의 사이버 보좌를 맡았으며 이듬해 18대 국회의원 선거에 자유선진당 후보로 서울 광진구 갑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오달란 기자 dallan@seoul.co.kr
  • 유림 137人의 평화투쟁… 산청군서 ‘파리장서’ 기린다

    유림 137人의 평화투쟁… 산청군서 ‘파리장서’ 기린다

    곽종석 선생 주도 유교계 대표 독립운동 전국 유림 대표, 파리강화회의에 청원서지역 독립유공자 후손 등 500여명 초청 파리장서 서문 독창 판소리 공연도 열려 ‘한국은 삼천리 강토와 2000만 인구와 4000년 역사를 지닌 문명의 나라이며 우리 자신의 정치원리와 능력이 있으므로 일본의 간섭은 배제되어야 한다. 일본은 한국의 자주독립을 약속했지만 사기와 포악한 수법으로 독립을 보호로, 보호를 병합으로 바꾸었고 교활한 술책으로 한국 사람이 일본에 붙어살기를 원한다는 허위선전을 일삼고 있다. 일본의 포악무도한 통치에 참을 수 없어 한국인들은 독립운동을 벌이고 있으며, 만국평화회의와 폴란드 등의 독립 소식을 듣고 만국평화회의에서 죽음으로 투쟁하는 우리 2000만의 처지를 통찰해 줄 것으로 믿는다.’ 일제강점기 지식인인 유림이 평화적인 방법으로 만국공법(현 국제법)에 호소한 특별한 독립운동으로 불리는 ‘파리장서운동’ 100돌 기념식이 3·1운동 100주년을 맞는 다음달 1일 오전 10시 유림의 고장 경남 산청군 단성면 남사예담촌 유림독립운동기념관에서 열린다. 지역 독립운동 유공자 후손 등 500여명을 초청한다. 행사에선 독립운동의 결연함을 표현하는 취타대 공연, 파리장서 서문을 독창하는 판소리 명창 행사도 열린다. 18일 산청군에 따르면 파리장서운동은 면우 곽종석 선생(1841∼1919) 주도로 전국 137인의 유림 대표가 1919년 전문 2674자(長書)에 이르는 장문의 한국독립청원서를 편지로 작성해 파리강화회의에 보낸 유교계 대표적인 독립운동이다. 김창숙 등 10명은 중국 상하이에서 편지를 3개 국어로 번역해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파리평화회의장으로 보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민족자결주의를 주창한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의 움직임에 따른 것이다. 파리장서운동 당시 곽종석 선생은 영남 유림 대표로서 파리장서 전문을 완성하고 김복한, 고석진, 류필영, 이만규, 하용제, 김황 등 전국의 유림과 연합해 파리장서운동을 이끌었다. 곽 선생은 이 운동으로 투옥돼 2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겪은 뒤 병보석으로 풀려났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74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1963년 곽 선생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남사담 예담촌에는 곽 선생의 후학들이 면우 선생을 기리기 위해 1920년 지은 이동서당 등 ‘면우 곽종석 유적’(경남 문화재자료 제196호)이 자리했다. 군은 2013년 10월 남사예담촌에 유림독립운동기념관을 지었다. 아울러 2018년 파리장서 기념탑도 남사예담촌에 건립됐다. 파리장서비는 1972년 10월 서울 장충단공원에 처음 세워져 1977년 경남 거창, 1997년 대구, 2006년 충남 홍성, 2007년 경남 합천, 2014년 경북 봉화, 2017년 3월 경남 김해 등의 지역에 건립됐다. 산청 강원식 기자 kws@seoul.co.kr
  • 佛경찰 독립운동가 서영해 사찰 보고서 첫 확인

    佛경찰 독립운동가 서영해 사찰 보고서 첫 확인

    1920∼1940년대 프랑스에서 유럽 열강들을 상대로 일제 식민통치의 부당함을 알린 독립운동가 서영해(1902∼1956년 실종)에 대한 프랑스 경찰의 사찰 보고서가 처음으로 확인됐다. 재불 독립운동사학자 이장규씨(파리7대학 한국학 박사과정)와 파리 7대 마리오랑주 리베라산 교수는 최근 프랑스 경찰문서보관소에서 1936년 11월 23일 작성된 경찰의 서영해 사찰 문건을 찾았다고 17일(현지시간) 연합뉴스에 밝혔다.이 문서에는 서영해의 출생 사항(1904년 부산 출신의 독신 한국인), 프랑스 입국 시점(1920년 12월 13일), 파리에서의 언론·정치활동 등이 상세히 기술돼 있다. 특히 서영해가 1928∼1929년 잡지 ‘유럽’(L‘Europe)과 문학잡지 ‘세계’(Monde)와 협력했다고 언급한 것과 ‘반(反)파쇼반전투쟁위원회’의 일원으로 활동했던 점이 눈에 띈다. 반파쇼반전투쟁위원회는 프랑스 작가 앙리 바르뷔스가 설립해 1933∼1939년 활동한 진보성향 지식인들의 단체로 추정된다. 경찰은 보고서에서 “(서영해의) 정치적 관점에서 주목할만한 다른 것은 없었고, 프랑스에 대한 태도도 괜찮다”고 평가했다. 파리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통신원으로 활약했던 서영해에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됐다. 하종훈 기자 artg@seoul.co.kr
  • 무분별한 항생제 남용… ‘슈퍼박테리아’로 돌아옵니다

    무분별한 항생제 남용… ‘슈퍼박테리아’로 돌아옵니다

    “항생제 내성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면 2050년에는 1000만명이 항생제 내성균으로 사망할 것이다.” 영국 정부가 2016년에 발간한 ‘항균 내성에 대한 고찰’이란 보고서는 인류가 항생제를 계속 남용하면 어떤 항생제로도 치료할 수 없는 ‘슈퍼박테리아’가 대거 출현해 3초당 1명꼴로 목숨을 잃을 것이라고 경고한다. 매년 전 세계에서 암으로 사망하는 사람(820만명)보다 많다.정부는 2016년 항생제 내성 관리 대책을 내놓으며 항생제 처방률을 20%가량 줄이기로 했지만 항생제 사용이 좀처럼 줄지 않고 있다. 감기나 급성 기관지염 등 항생제가 필요 없는 질환에도 항생제를 처방하는 일이 여전하기 때문이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의 ‘2017년 약제급여 적정성 평가 결과 보고서’를 보면 감기 등 급성상기도감염 항생제 처방률은 2016년 42.9%에서 2017년 39.7%로 3.2% 포인트 감소했으나 여전히 40%에 가깝다. 네덜란드(14.0%), 호주(32.4%) 등 다른 국가보다 훨씬 높다. 이는 2017년 전국 성인 1000명을 대상으로 시행한 ‘항생제 내성 인식도 조사’에서 56.4%가 ‘항생제 복용이 감기 치료에 도움이 된다’고 답할 정도로 항생제를 만병통치약으로 여기는 경향이 강해서다. 정부의 대국민 홍보에도 이런 인식은 2010년 51.1%, 2012년 52.4%로 오히려 늘고 있다. 감기의 원인은 여러 종류의 바이러스인데, 아직 효과적으로 이런 바이러스를 억제하거나 죽이는 약은 없다. 항생제를 복용한다고 감기가 낫진 않는다. 최근에는 미세먼지를 비롯해 대기오염으로 급성기관지염 환자가 8% 증가하면서 해당 질환 환자들에 대한 항생제 처방률이 58.6%나 됐다. 10명 중 6명가량은 불필요한 항생제 처방을 받았다는 의미다. 2014년 우리나라의 인체 항생제 사용량은 31.7DDD(의약품 규정 일일 사용량)다. 하루에 1000명 중 31.7명이 항생제 처방을 받고 있다는 얘기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우리와 항생제 사용량 산출 기준이 비슷한 프랑스를 포함해 12개국의 평균 사용량은 23.7DDD로, 우리나라의 항생제 사용량이 OECD 평균보다 33.8% 많다.항생제 사용을 줄여야 하는 이유는 내성 때문이다. 내성은 세균이 항생제에 대응해 살아남고자 장착한 일종의 ‘무기’다. 항생제 공격에서 운 좋게 살아남은 세균은 이미 약의 뜨거운 맛을 본 터라 아주 낮은 확률이지만 돌연변이를 일으켜 항생제의 특정 성분에 대응할 내성을 만들어 낸다. 항생제를 지속적으로 사용하면 이런 내성을 가진 세균만 살아남아 내성균이 만연하게 된다. 내성균을 죽이려면 다른 성분의 항생제를 써야 하고, 내성균이 이 항생제에 대해서도 내성을 가지면 또 다른 성분의 항생제를 찾아야 하는 악순환에 빠지게 된다. 이렇게 여러 항생제에 내성을 가진 세균을 ‘다제(多劑)내성균’이라고 하는데, 지금도 우리 주변에 빠르게 퍼지고 있다. 예컨대 결핵 환자가 의사의 지시를 따르지 않고 약을 복용하다 마음대로 중단하면 살아남은 결핵균이 내성균으로 진화해 다제내성균이 된다. 국내에서 다제내성 결핵균에 감염된 환자는 매년 800~900명 나오고 있다. OECD 회원국 중 가장 많다. 보통 결핵 치료에는 6개월이 걸리지만, 다제내성 결핵 치료 기간은 무려 2년이다. 치료 성공률도 50~60%에 그친다. 항생제 내성이 발생하면 치료 가능한 항생제가 줄고, 소위 ‘슈퍼박테리아’에 감염되면 치료할 항생제가 없게 된다. 항생제 내성균도 전염성이 있어 항생제를 함부로 쓰면 자신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피해를 줄 수 있다. 2017년 국내 중환자실에 입원했던 신생아들이 항생제 다제내성균 감염으로 사망해 사회적 문제로 떠오르기도 했다. 항생제를 아무리 투여해도 죽지 않는 슈퍼박테리아 때문에 무력하게 죽음을 맞을 수 있음을 보여 줬다. 항생제 내성균이 만연하면 단순한 상처만으로도 생명이 위태로워질 수 있으며 수술 등 각종 의료행위 때마다 ‘슈퍼박테리아’ 감염을 걱정해야 한다. 1928년 영국 미생물학자 알렉산더 플레밍이 ‘기적의 약’으로 불리는 최초의 항생제 페니실린을 발견하기 전까지 인류는 각종 세균의 공습에 속수무책이었다. 14세기 유럽 인구의 3분의1이 페스트로 사망하는 등 세균이 한 국가의 운명과 인류 역사를 송두리째 바꾸기도 했다. 항생제가 더는 듣지 않는다는 것은 인류가 세균의 공포에 짓눌려 살았던 ‘암흑시대’로 회귀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미래학자나 세균 전문가들은 “인류가 멸망한다면 이는 핵전쟁 때문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세균 때문일 것”이라고 예측한다. 영국의 경제학자이자 재무부 차관인 짐 오닐은 ‘항균 내성에 대한 고찰’ 보고서에서 “항생제 내성에 대한 대응 실패는 세계 경제를 2~3.5% 후퇴시킬 것”이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항생제 내성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지만 막상 진료 현장에선 감염성 질환이 잘 낫지 않을 때 의사나 환자 모두 항생제에 의존하는 게 현실이다. 질병관리본부 이형민 의료감염관리과장은 17일 “학회와 의사단체를 상대로 설문조사를 진행한 결과 진료 시간이 짧아 항생제 처방 필요 여부를 판단하는 데 물리적으로 제약이 있고, 환자는 즉각적인 증상 개선을 원하는 데 항생제를 처방하지 않으면 이를 충족시켜 주지 못하는 데 따른 현장의 어려움이 있다”고 말했다. 2017년 대한의사협회 종합학술대회 때 의사 864명을 대상으로 항생제에 대한 인식도를 1~10점 척도로 조사한 결과 ‘감기처럼 항생제가 필요하지 않은 질환에도 항생제를 처방하는 일이 얼마나 자주 있었느냐’는 물음에 응답자들은 평균 4.36점을 줬다. 10점으로 갈수록 처방 경험이 잦은 것이다. 일반인 대상 설문에서도 ‘감기로 진료받을 때 항생제 처방을 요구한 적이 있다’는 응답이 3.5%로 나타났다. 18.5%는 ‘열이 날 때 의사에게 진료받지 않고 집에 보관해 둔 항생제를 임의로 복용한 적이 있다’고 답했다. 항생제 내성균이 퍼지지 않게 하려면 예를 들어 A병원에 있던 환자가 B병원으로 옮길 때 내성균 보균자 정보를 병원이 공유하도록 해야 하지만 아직 의무화되지 않았다. 질병관리본부 관계자는 “2016년 항생제 내성 관리대책 발표 때 병원 간 내성균 보균자의 정보 공유 체계를 만들려고 했지만 시스템이 아직 갖춰지지 못한 데다 환자의 개인정보 등 법적인 검토가 필요해 아직 추진 중에 있다”고 밝혔다. 이현정 기자 hjlee@seoul.co.kr
  • ‘유관순 서훈 격상’ 딜레마에 빠진 정부 정책

    ‘유관순 서훈 격상’ 딜레마에 빠진 정부 정책

    “유 열사는 대표 여성독립 운동가… 저평가 우려”“이름 없는 유관순 수없이 많은데… 형평성 훼손”3·1운동 100주년을 앞두고 유관순(1902~1920) 열사에 대한 논쟁이 뜨겁다. 지난달 말 문재인 대통령과 이낙연 총리가 ‘이번 3·1절을 맞아 유 열사의 서훈을 상향 조정하면 국민께 좋은 선물이 될 것‘’라는 취지의 대화를 나눴다는 보도(서울신문 2019년 1월 28일자 1면)가 나오면서부터다. 유 열사의 고향인 충남지역을 중심으로 “1919년 3·1운동 당시 천안 아우내장터 만세 시위를 주도하며 일제의 억압 통치에 저항했던 그의 업적을 재평가해야 한다”는 주장이 거세다. 하지만 학계의 반응은 매우 신중하다. 유관순이 우리나라 독립운동계를 대표할 인물이라는 점은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서훈을 높여야 할 이유는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최근 이 문제를 두고 국회에서 토론회까지 열렸지만 만족할 만한 해법이 나오지 않았다. 정부는 ‘여성 독립운동가로서 유 열사가 갖는 상징성을 인정해야 한다’는 당위와 ‘국가 상훈제도의 엄밀성과 공정성을 지켜야 한다’는 현실 사이에서 갈 길을 찾지 못한 채 헤매고 있다.●“빅데이터 인지도 4위… 안중근 수준 돼야” 그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 3·1운동의 상징적 존재임에도 서훈은 건국훈장 5단계 가운데 3등급에 그쳐 꾸준히 저평가 논란이 제기됐다. 지난 13일 홍문표 자유한국당 의원실 주최로 국회도서관에서 열린 ‘유관순 열사 서훈등급 격상을 위한 국회 대토론회’에서 시민들은 유 열사에 대한 서훈 격상 요구를 쏟아냈다. 토론장을 가득 메운 청중은 “삼월 하늘 가만히 우러러보며 유관순 누나를 생각합니다”로 시작하는 유관순 노래(강소천 작사, 나운영 작곡)를 제창했다. 유 열사의 서훈 격상을 강력하게 촉구하는 홍 의원의 개회사에 환호와 박수가 터져 나왔다. 자신을 ‘유 열사의 이화학당 36년 후배’라고 소개한 박인숙 유관순정신계승사업회장은 “유 열사의 희생정신은 인권 존엄의 영웅 정신”이라고 눈물을 흘렸다. 이들은 한목소리로 유 열사의 서훈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등급)으로 높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가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갖는 상징성에 비해 등급이 너무 낮아 건국훈장 1·2등급만 받는 대통령 헌화도 받지 못한다고 토로했다. 이들의 주장대로 유 열사의 인기는 매우 높다. 지난해 국가보훈처가 최근 5년간 뉴스·블로그·트위터 등 빅데이터 139억건을 분석한 결과 유관순은 모두 38만 6844번 언급돼 안중근(1879~1910·106만 5844번)과 김구(1876~1949·64만 8084번), 윤동주(1917~1945·56만 1228번)에 이어 4위를 차지했다. 여성 독립운동가 중에서는 압도적인 1위다. 유 열사가 서훈된 1962년은 박정희(1917~1979) 전 대통령이 5·16 쿠데타(1961) 뒤 정권 정당화 기틀을 마련하고자 독립유공자를 발굴해 건국훈장을 수여하기 시작한 때다. 당시 문교부 산하 공적조서위원회는 저명한 독립운동가 204명에게 건국훈장을 수여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을 지낸 김구와 만주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1841~1909)를 저격한 안중근, 상하이 홍커우공원에 폭탄을 던진 윤봉길(1908~1932) 등이 1등급 훈장을 받았다. ●“독립운동 평가 여성에겐 유독 박해” 유관순은 1902년 충남 천안에서 태어나 감리교 선교사 엘리스 샤프(1871~1972)의 소개로 1915년 서울 이화학당에 입학했다. 1919년 발발한 3·1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해 천안 아우내장터 만세 시위를 주도하다가 서대문 형무소에 투옥됐다. 그는 모진 고문에 방광이 터지는 중상을 입고 고통받다가 1920년 9월 서대문 형무소에서 18세의 나이로 순국했다. 공적 조서를 보면 그가 옥중에서도 만세를 부르는 등 애국정신이 남달랐던 것으로 기록돼 있다. 그러나 독립운동 서훈 공적 심사는 수형 기간과 독립운동 성격 등 다양한 측면을 종합적으로 살펴본다. 유 열사가 너무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나 활동 기간이 짧았고 당시 그와 비슷한 처지에 있던 이들이 많았다는 점을 감안해 인지도에 비해 다소 낮은 평가를 받았다. 이날 토론회 발제를 맡은 심옥주 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소장도 이 점을 지적했다. 유 열사를 비롯한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역사적 공훈이 대체로 낮게 평가됐다는 것이다. 당시 여성이 독립운동 지도자로 부각되기 어려웠던 사회적 분위기를 고려하지 않고 독립운동 리더급 인물 중심으로 서훈 대상자를 발굴한 탓에 여성 운동가들의 공적이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지금껏 1등급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은 여성은 중국인 쑹메이링(1897~2003)이 유일하다. 대만 총통 장제스(1887~1975)의 부인으로 한국광복군에 자금을 지원하는 등 독립운동 공로를 인정받아 1966년 서훈됐다. 아직까지 국내 여성 독립운동가 중 1등급 서훈을 받은 이는 없다. 남자현(1872~1933)이 건국훈장 대통령장(2등급)을 받아 가장 높다. 그는 3·1운동 당시 중국 둥베이(만주) 지역으로 건너가 무장단체 서로군정서에서 활동했다. 일본군 장교를 암살하려다 체포돼 옥고를 치렀다. 영화 ‘암살’(2015)에서 전지현이 맡았던 ‘안옥윤’이 그를 모델로 한 것이다. 지난해 말까지 독립유공 서훈을 받은 여성은 모두 357명이다. 이 가운데 쑹메이링과 남자현을 뺀 나머지는 3등급 이하다. 심 소장은 “유 열사의 훈격 상향을 신중하게 검토하는 동시에 다른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역사적 공로도 재평가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현행 상훈법에 따르면 일단 정해진 서훈은 조정될 수 없다. 기존에 알려지지 않은 역사적 공적이 추가로 발굴돼 새로 추천을 받지 않는 한 유 열사의 서훈 격상은 불가능하다. 이에 대해 정치권은 두 가지 해법을 내놨다. 하나는 상훈법을 개정해 후대에 역사적 평가가 달라졌다면 서훈을 다시 조정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이날 토론회를 주최한 홍 의원을 비롯해 이혜훈 바른미래당 의원, 이용득 더불어민주당 의원 등이 이런 내용을 담은 법안을 각각 발의했다. 또 하나는 기존 상훈법을 바꾸지 않고 유 열사의 서훈만 올리는 특별법을 제정하는 것이다. 지난달 박완주 민주당 의원이 이런 내용을 담은 법안을 발의했다.●학계 “당시 ‘제 2의 유관순’ 수없이 많다” 하지만 학계에서는 그의 서훈을 높이는 것에 대해 회의적 반응을 보이고 있다. 그저 국민들이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정확한 근거 없이 훈장 등급을 높이겠다는 것은 ‘포퓰리즘’(인기영합주의)이라는 것이다. 이날 토론회가 유 열사의 서훈을 높여야 한다는 쪽으로 치우치자 역사학자인 윤경로 전 한성대 총장은 “토론회가 ‘기울어진 운동장’이 된 것 같다”고 일침을 가했다. 윤 전 총장은 “정치인들은 (유 열사의 서훈을 올려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지만 학자는 아니다. 학계에선 우려가 크다”고 비판했다. 그러자 객석에서 “방금 한 말에 대해 사과하라”는 야유가 쏟아졌다. 반대로 일부 시민은 “찬반양론이 팽팽하게 이어질 것으로 기대하고 왔더니 토론회 주최 측이 사실상 답을 정해놨더라. 이것이 무슨 토론회냐”며 실망스러운 표정으로 자리를 떴다. 독립운동사를 연구한 김주용 원광대 한중관계연구원 교수는 이 문제를 냉철한 관점에서 객관적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김 교수는 17일 “1919년 3월 1일 당시 일제에 항거하다가 사라져 간 ‘유관순’ 같은 학생이 한두 명이 아니었다”면서 “한국 최초의 여성 의병지도자로서 25년 넘게 항일활동에 전념한 윤희순(1860~1935)도 5등급인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는 데 그쳤다. 상징성 차원에서 유 열사의 서훈만 상향하겠다는 것은 오히려 3·1운동 정신의 본질을 흐리는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김 교수는 유관순이 ‘한국의 잔다르크’로 불릴 만큼 독립운동의 대표적 인물이 된 데에는 이화여대의 대대적 홍보가 결정적이었다고 지적했다. 그가 대한민국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것은 3·1운동 직후가 아니다. 해방 뒤 친일파 척결 논의가 시작된 1948년 9월부터다. 이때 제헌의회가 친일파 처벌을 위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를 가동해 이화여자전문학교(현 이화여대) 교장 김활란(1899~1970)을 조사 대상에 포함시켰다. 그는 제자들에게 위안부 지원을 독려할 정도로 일제의 충실한 ‘나팔수’였다. 반민특위가 그를 처벌하려고 하자 이대 측은 ‘친일학교’ 오명을 쓰게 될까 봐 걱정이 컸다. 학교 이미지를 쇄신할 무언가가 필요했고 수소문 끝에 학교 동문 유관순의 사례를 발굴했다. 이대가 그를 통해 학교의 친일’ 이미지를 세탁하려고 했다는 설명이다. 김 교수는 “만약 유 열사가 이화학당을 나오지 않았다면 아마도 그는 지금까지도 무명의 독립운동가로 남아 있을 것이다. 그에 대한 서훈 논의에는 이런 정치적·역사적 배경도 함께 고려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형목 독립기념관 선임연구위원도 “유 열사를 선열로서 기리겠다는 것은 얼마든지 반길 일이지만 훈격을 바꾸겠다는 것은 형평성을 근본적으로 흔드는 일”이라면서 “독립운동에 전 재산을 쏟아부은 석주 이상룡(1858~1932)도 3등급이다. 유관순을 높이면 이런 분들도 높여야 한다는 의견이 나올 것이다. 모든 체계가 뒤집히게 된다”고 우려했다. 이 때문에 유관순 서훈 승격 논란을 계기로 모든 독립유공자에 대한 전수조사를 벌여 전면적 재검토에 나서야 주장도 나온다. 서훈 승격을 높이는 것뿐 아니라 부풀려진 공적에 대한 강등도 함께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정부는 명확한 입장을 밝히지 않은 채 원론적 이야기만 되풀이하고 있다. ●정부 “반대 입장은 아니지만 신중해야” 이날 토론회에 정부 측 참석자로 나온 황후연 국가보훈처 공훈발굴과장은 정부가 독립유공자 포상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 설명했을 뿐 유 열사의 서훈 상향 조정에 대한 입장을 내놓지 않았다. 변석영 행정안전부 상훈담당 사무관은 “정부가 마치 유 열사 상훈 승격을 반대하는 것처럼 비춰지지만 공무원 역시 유관순을 배우고 자랐다. 신중하자는 것이지 반대하는 입장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오경진 기자 oh3@seoul.co.kr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 1919년 3월 ‘독립만세운동’ 주도적으로 외친 수원 기생들

    1919년 3월 ‘독립만세운동’ 주도적으로 외친 수원 기생들

    술과 웃음을 파는 여성으로 잘못 인식돼온 기생들이 독립만세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주권 침탈과 치욕적 건강검진에 분노한 수원기생 33명은 김향화(당시 23세) 주도로 기생으로서는 처음 1919년 3월 29일 화성행궁 봉수당에서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다. 일제는 조선 왕조 별궁인 화성행궁을 식민지 통치를 위한 행정기구와 병원으로 사용하는 방식으로 민족의 자존심을 짓밟았다. 사진은 독립운동에 참여한 수원 기생으로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경성일보가 1918년 발간한 ‘조선미인보감’에 소개한 프로필이다. 일제는 잔치나 술자리에 나가 노래와 춤 등으로 흥을 돕던 기생을 매음녀인 창기(娼妓)와 동일하게 취급하면서 폄훼했다. 원래 기생은 ‘해어화’(解語花·말을 알아듣는 꽃)로 불렸다. 예술적 능력뿐 아니라 학문, 사회적 이슈에도 밝았다. 김향화도 가곡, 가사, 시조, 경성잡가, 서관소리, 검무와 승무, 정재(궁중무용)에 능한 데다 서양악기였던 양금도 잘 쳤던 것으로 알려졌다. 연합뉴스
  • 10주기 추모도 낮게…약자의 손잡던 바보가 그립습니다

    10주기 추모도 낮게…약자의 손잡던 바보가 그립습니다

    노동 인권·민주화 등 현대사 질곡 관통 ‘세상 속 교회’ 기치로 민주적 가치 실현 분열된 사회, 자비·사랑으로 포용 실천 선종 후 ‘바보 정신’ 재단 통해 유지 이어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둘러싼 자유한국당 일부 의원들의 발언이 온 나라를 뒤흔들고 있다. 여야 4당이 문제 발언을 한 의원 제명을 요구하는 등 강력 반발하는 가운데 역사전쟁으로까지 치닫는 분위기다. 그 와중에 5·18 민주화운동 유족들과 광주 시민들의 분노가 하늘을 찌른다. 정치적 입장을 앞세운 발언이라지만 민주화운동 폄훼와 왜곡은 많은 국민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있다. 그 5·18 민주화운동을 놓고 김수환 추기경은 이런 입장을 밝힌 적이 있다. “진실을 밝히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기에는 무슨 보복이나 원수를 갚는다는 차원이 아니라 역사 바로 세우기를 위해섭니다. 책임자는 분명히 나타나야 하고 법에 의해 공정한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어디 5·18 민주화운동뿐인가. 김 추기경은 생전 약자 편에 선 채 불의에 강하게 맞선 쓴소리와 행동을 주저하지 않았다. “위정자도, 국민도, 여당도, 야당도, 부모도, 교사도, 종교인도 모두 이 한 젊은이의 참혹한 죽음 앞에서 무릎을 꿇고 가슴을 치며 통곡하고 반성해야 합니다.” 1987년 1월 26일 박종철군 추모 및 고문 추방을 위한 미사 강론 중 일부다. 그래서 우리 사회의 어두운 일들이 생길 때마다 많은 이들은 김 추기경을 떠올린다. ‘김 추기경이 계셨다면 무슨 말씀을 하실까.’ 16일은 김 추기경이 선종한 지 10주기가 되는 날. 그날을 중심으로 추기경의 사랑과 배려 정신을 되새겨 실천으로 옮기자는 행사들이 이어질 전망이다. 추모 미사(16일 오후 2시 명동성당), 추모 사진전(23일까지 명동성당 지하 1898광장), 유품 전시회(16일~6월 20일 한국천주교순교자박물관), 기념 음악회(18일 오후 8시 명동성당), ‘내 기억 속의 김수환 추기경’ 토크콘서트(17일 오후 5시 명동대성당 꼬스트홀)…. 그런데 이어지는 그 추모의 몸짓들이 요란하지 않다. 천주교의 최대 지도자, 시대의 사표, 민족의 양심…. 그 막중한 수식어들만 보더라도 성대한 행사가 있을 법한데 영 딴판이다. 그 조용하고 잔잔한 추모 열기를 놓고 천주교 서울대교구 신부들은 귀띔한다. “일회성 행사가 아닙니다. 그분의 가르침을 본받아 우리 삶 안에서 하루하루 살아 내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그분의 가르침’은 무엇일까. 김 추기경이 서울대교구장을 맡은 30여년간 서울대교구는 48개 본당 신자 14만여명에서 197개 본당 신자 121만여명으로 무려 8배 넘게 교세가 불어났다. 그 종교적 위업에서 비롯된 존경과 추모만일까. 김 추기경의 어록을 다시 뒤져 보았다. “교회가 모든 것을 바쳐서 사회에 봉사하는 ‘세상 속 교회’가 되어야 한다”(1968년 서울대교구장 취임 미사), “항상 가난한 사람들 속에 들어가 살고 싶은 열망을 갖고 살았지만 그러지 못해 답답했다. 추기경이란 직책 때문이 아니라 용기가 없어서 그러지 못했다.”(1998년 서울대교구장 퇴임 소견)김 추기경은 그랬다. 인류 구원을 위해 존재하는 교회는 가난하고 고통받는 약자들 편에 기꺼이 서야 한다고 믿었다. 단순히 종교지도자에 머물지 않고 현대 시민사회의 민주적 가치를 실현하는 데 앞장섰으며 각 개인의 양심을 일깨워 주고 성숙한 시민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 시대의 아이콘이었다. 그 인권과 노동, 생명 사랑의 족적은 너무 혁혁하다. 경제성장이 지상의 과제였던 1960, 1970년대 추기경은 산업화 과정에서 희생된 노동자들에게 관심을 쏟았다. 1967년 5월 강화도 심도직물의 노조원 해고 사태 당시 김 추기경의 건의에 따라 주교회의는 사회 정의와 노동자 권익 옹호를 위한 교단 공동 성명서을 발표했다. 이 사건은 김 추기경이 처음으로 대사회 메시지를 던진 사건이다. 이것 말고도 유사한 노동 탄압 사건이 있을 때마다 추기경은 노동자 인권을 지키는 데 앞장섰다. ‘교회가 가난한 사람에게 더 적극적인 사목을 펼쳐야 한다.’ 서울 상계동 철거 사태 등 정부 주도의 반강제적 철거로 하루아침에 삶의 터전을 잃고 빈민으로 전락하던 무렵 추기경은 스스로 빈민들의 삶의 현장을 수시로 방문했다. 직접 도시 빈민 문제 해결을 위한 공청회에 참가해 당시 정부의 정책이 빈민을 양산하고 있음을 지적하기도 했다. 1987년 4월 28일 도시빈민사목위원회라는 이름으로 출발한 지금의 서울대교구 빈민사목위원회는 바로 그 추기경의 의지를 담아 탄생한 단체다. 그렇게 현대 한국 천주교회를 이끈 주역이었지만 그는 교회 안에만 머물지 않았다. 유신독재, 5·18 광주민주화운동, 6월 민주항쟁 등 한국 현대사의 질곡을 외면하지 않고 한가운데서 뚫고 나갔다. 1987년 6월 13일 밤 경찰력 투입을 통보하러 명당성당에 들어온 경찰 고위 관계자에게 던진 말은 아직도 쩌렁쩌렁하다. “경찰이 성당에 들어오면 제일 먼저 나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다음 시한부 농성 중인 신부들을 보게 될 것입니다. 당신들이 연행하려는 학생들은 수녀들 뒤에 있습니다. 학생들을 체포하려거든 나를 밟고 그다음 신부와 수녀들을 밟고 지나가십시오.”그런가 하면 1971년 12월 24일 전국에 TV로 생중계된 성탄 자정 미사에선 이렇게 소리쳤다. “비상 대권을 대통령에게 주는 것이 나라를 위해서 유익한 일입니까. 그렇지 않아도 대통령한테 막강한 권력이 가 있는데, 이런 법을 또 만들면 오히려 국민과의 일치를 깨고 그렇게 되면 국가안보에 위협을 주고 평화에 해를 줄 것입니다.” 또 1972년 10월 유신 개헌 소식을 로마에서 접하곤 큰소리로 외쳤다. “10월 유신 같은 초헌법적 철권통치는 우리나라를 큰 불행에 빠뜨릴 것이라고 단언합니다.” 그랬던 추기경은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의 장례식장에서 이런 기도를 남겼다. “이제 대통령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주님 앞에서 박정희를 불쌍히 여기소서.”스스로를 ‘바보’라 부르면서 ‘밥이 되고 싶다’고 외쳤던 김 추기경의 아호는 옹기다. “옹기는 먹는 것도 담지만 더러운 것도 담는다. 우리 자신도 여러 가지를 담을 수 있는 그릇이 되지 않을까.” 그렇게 웃었던 추기경의 유지와 정신을 이은 사랑과 봉사의 물결은 추기경 선종 이후 도도히 흐르고 있다. 박신언 몬시뇰이 설립을 건의해 김 추기경이 사재를 털어 2002년 설립된 옹기장학회와 김 추기경의 바보 정신을 이어받아 2010년 설립된 (재)바보의나눔은 대표적인 단체들이다. 갈라지고 분열된 세상을 사랑과 자비로 포용하려는 김 추기경의 정신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옹기장학회는 통일 이후 북녘 동포들에게 복음을 전할 사제 양성 목적으로 설립됐지만 현재 북한과 중국은 물론 아시아 선교에 뜻을 둔 신학생까지 지원 대상을 확대해 놓고 있다. (재)바보의나눔은 종교와 지역, 계층을 초월해 국내외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지원한다. 형편이 어려운 아동과 청소년 돌봄이 필요한 노인, 편견에 휘청이는 장애인과 다문화가정 등을 돕고 있다. ‘웃음과 유머를 잃지 않는 한편 신자와 국민을 위해 눈물 흘리는 따뜻하고 인간적인 지도자.’ 많은 이들이 기억하는 김 추기경이다. 물신주의 팽배와 경쟁 심화, 고통을 호소하는 가난한 사람들…. 그 어두운 모습 탓에 김 추기경이 더 그리워지는 게 아닐까. ‘고맙습니다. 서로 사랑하세요.’ 김 추기경의 마지막 유언이다.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 임정, 中 국민당 도움받아 충칭 정착…中 공산당, 조선의용대 탈영 부추겨 팔로군 편입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 임정, 中 국민당 도움받아 충칭 정착…中 공산당, 조선의용대 탈영 부추겨 팔로군 편입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19년 출범해 1945년 해방 때까지 중국에서 활동했다. 1932년 윤봉길 의거 뒤 일본의 추격을 피해 상하이에서 항저우로 옮겼다. 1937년 중일전쟁 이후로 중국 국민당 정부의 도움을 받아 각지를 떠돌았다. 임정이 마지막으로 찾아간 곳은 서남부 쓰촨성의 작은 도시 충칭이었다. 임정은 1945년 11월 한국에 돌아올 때까지 여기서 5년 넘게 독립을 준비했다. ●임정, 충칭서 5년 넘게 한국 독립 준비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 취재의 최종 목적지 충칭. 1937년 11월 중국이 일본에 수도 난징을 빼앗기자 임시 수도로 정한 곳이다. 주민 수가 3100만명에 달해 중국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도시이자 유비와 제갈량이 천하를 제패하기 위해 세력을 길렀던 촉(蜀)의 옛 땅이다. ‘안개 도시’라는 별명답게 한겨울에도 뿌연 안개가 도시 전체를 휘감고 있었다. 서울신문 취재에 동행한 김주용(53) 원광대 교수는 “예전에 이곳은 안개와 매연이 결합해 공기 질이 나빴다고 한다. 김구(1876~1949)의 맏아들 인(1917~1945)도 여기서 폐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다”고 말했다. 임정은 중일전쟁으로 난징이 함락되자 후난성 창사로 피신했다가 1838년 7월 광둥성 광저우로 내려갔다. 국민당 정부가 충징으로 간다는 소식을 듣고 동행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이곳은 인구 20만명 정도의 소도시였지만 국민당 정부가 오자 100만명이 넘는 대도시로 탈바꿈했다. 주택과 학교, 도로 등 인프라가 턱없이 부족해 임정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다. 결국 중국의 도움으로 류저우(1938년 10월~1939년 3월)와 치장(1939년 3월~1940년 9월)을 거쳐 2년 뒤인 1940년 9월에야 입성할 수 있었다. 김 교수는 “임시정부에 있어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은 절대적이었다. 이 사실을 외면하고 독립운동 성과를 우리만의 노력인 것처럼 포장하는 것은 ‘국뽕 사관’일 수 있다”고 지적했다.●임정의 리더십 회복과 좌우합작 성사 일본은 지상군 병력이 닿지 않는 이곳을 파괴하려고 5년여간 200여 차례에 걸쳐 공습을 감행했다. 영화로도 제작돼 잘 알려진 충칭 대폭격(1938~1943)이다. 독립운동가 양우조(1897~1964)·최선화(1911~2003) 부부의 임정 기록을 외손녀 김현주(47)씨가 정리한 ‘제시의 일기’(1999)를 보면 당시의 공포가 잘 묘사돼 있다. “(공습경보를 듣고 대피소인 동굴에 들어가자마자) 일본 비행기가 폭탄을 수없이 떨어뜨렸다. 석굴이 심히 흔들리며 당장 무너지는 듯했다. 동굴 안에서는 천둥·번개 치듯 불빛이 번쩍였고 천장이 내려앉는 듯 작은 돌 부스러기가 떨어졌다. (폭격이 끝나고) 굴 밖으로 나왔더니 처참한 광경이 펼쳐졌다. 우리가 있었던 집의 앞과 뒤, 오른쪽, 왼쪽이 불바다였다. 참혹한 시신도 많았다.”(1938년 12월 5일) 역설적이지만 임정은 공습에 시달리던 충칭 시기에 리더십을 회복했다. 중국이 모든 독립운동 세력을 임정 중심으로 합작해 나설 것을 촉구했고, 한인 내부에서도 일본의 패망이 머지않았다고 느껴 단결에 나섰기 때문이다. 임정은 처음으로 청사에 ‘대한민국 림시정부’ 간판도 내걸었다. 독립운동 중심체로서 자신감을 갖게 됐다는 의미다. 1940년 5월 김구의 한국국민당과 조소앙(1887~1958), 홍면희(1877~1946)가 주도한 한국독립당, 이청천(1888~1957)이 이끈 조선혁명당은 충칭에서 우파 통합정당을 만들었다. 임 정 여당인 한국국민당의 지분이 가장 컸지만 당명은 ‘한국독립당’을 계승했다. 한독당은 해방 뒤 한국에서도 민족주의 정당으로 활동했다. 임정에 비판적이던 사회주의 계열도 태도를 바꿔 1941년부터 하나둘 합류했다. 임정이 설립 20여년 만에 제대로 된 위상과 권위를 갖추게 됐다. 승려 출신의 사회주의자로 1942년 임정 내무차장이 된 김성숙(1898~1969)의 증언이다. “우리나라 독립운동 단체 가운데 권위로 보나 영향력으로 보나 임시정부만한 것이 없었거든. 임정이 계속해서 일본하고 대립하고 싸웠기 때문에 ‘(진정성을 인정해) 임정을 중심으로 모여야겠다’ 이렇게 생각했지.”●조선의용대, 팔로군 주둔 화베이 이동 1939년 말 중국 후베이성 라오허커우. 중국의 지원을 받아 사회주의 단체들이 조직한 조선의용대의 부대장 김학무(1912~1944)가 동료들에게 언성을 높였다. “우리 손으로 적(일본군)들을 쓰러뜨려야 하는데 지금 우리는 여기서 뭐하고 있는 겁니까. 이런 ‘가짜 항일’ 전선에 계속 머무르는 것이 너무도 수치스럽소이다.”조선의용대는 임정이 만든 한국광복군보다 2년 앞선 1938년 10월 결성됐다. 대원 상당수가 중국 군관학교나 일본의 유명 대학을 나온 엘리트였다. 이들은 일본군과 직접 싸우기를 원했지만 중국은 인원이 많지 않은 의용대에 전투 대신 정보 수집과 선전 공작 등 보조 업무를 맡겼다. 이들은 후방에서 선전전이나 하는 현실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결국 전체 대원 300여명 가운데 대다수가 1941년 3~5월 중국 공산당 팔로군이 있던 화베이 지역으로 떠났다. 우리 역사학계에서는 이들이 한반도와 가까운 지역에서 세력을 키워 국내에 진격하려고 북상한 것으로 본다. 하지만 충칭에서 만난 이선자(55) 전 충칭임시정부기념관 부관장은 “중국 공산당의 치밀한 계획이 숨어 있었다”고 전했다. 공산당이 조선의용대를 팔로군에 편입시키고자 의용대에 밀정을 심어 탈영 분위기를 부추겼다는 것이다. 이 내용은 중국 공산당 출신 역사학자 쓰마로(100·미국 거주)가 홍콩에서 출간한 회고록(2004) 등에 수록돼 있다. 취재에 동행한 이원규(72) 작가는 “한국에 전혀 알려져 있지 않은 내용”이라고 놀라워했다.조선의용대 주요 전력이 화베이로 올라가자 최고 책임자였던 김원봉(1898~1958)은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를 따르는 대원이 100명도 남지 않았다. 이 관장은 쓰마로의 회고록을 토대로 “당시 김원봉도 남은 부대와 함께 화베이로 가려고 했지만 중국 공산당 저우언라이(1898~1976)가 이를 막았다. 화베이 부대의 새 리더로 김무정(1904~1951) 등을 세운 뒤여서 더는 김원봉이 필요없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갈 곳을 잃은 그는 한국광복군 합류를 고심했다. 임정과 김원봉 간 통합 협상이 길어지자 중국군사위원회가 직접 나섰다. 1942년 5월 광복군에 부사령관 직제를 신설하고 그를 임명했다. 조선의용대는 광복군 제1지대에 편제됐다. 군사 분야에서도 좌우합작이 성사됐다. 늘 대원이 부족했던 광복군으로서는 이들이 그야말로 단비 같은 존재였다. 임시정부 좌우통합 과정에서 반드시 짚고 가야 할 이슈가 있다. 바로 김구의 ‘백색 테러’(우익에 의한 테러) 논란이다. 그가 일본군이나 친일파를 상대로 ‘의열 투쟁’을 벌인 것은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가 이념이나 성향이 다른 일부 독립운동가에게도 같은 방식의 폭력을 행사했다는 주장이 있다. 김구가 ‘대한민국의 국부’로 추앙받고 있어 언급이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래도 언젠가는 공론화가 이뤄져야 할 부분이다. 김구는 상하이 임정에서 초대 경무국장(경찰청장)을 맡아 반민족주의자에 대한 처형을 주도했다. 1922년 2월 사회주의자 김립(1880~1922) 살해 사건이 대표적이다. 백범 자신이 “김립이 (소련이 준) 임시정부 공금을 사사로이 사용해 처단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최근 공개된 러시아 문서 등에 따르면 당시 소련은 임정이 아닌 한인 사회주의 진영에 자금을 제공했다. 김구가 주장하듯 김립이 이 돈을 사적으로 썼다는 증거도 없었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는 “김립 암살 사건은 임정이 잘못된 정보와 판단에 근거해 단행한 국가 폭력”이라며 “같은 독립운동가라도 정견과 조직이 다르면 목숨을 잃을 수 있다는 의심을 갖게 해 독립운동계에 큰 해를 끼쳤다”고 비판했다. 해방 뒤인 1945년 12월 말 동아일보 주필이자 한국민주당 초대 당수 송진우(1890~1945)는 김구가 살던 경교장에서 한반도 신탁통치 문제를 두고 얼굴을 붉히며 논쟁을 벌였다. 그는 우파진영이 미국을 적으로 돌리면 공산당이 어부지리를 본다는 생각이 컸다. 그래서 반탁을 고수하던 김구를 비판했다. 송진우는 밤샘 토론을 마치고 자택에 돌아가자마자 살해됐다. 브루스 커밍스(76) 시카고대 석좌교수는 의심할 여지 없이 이 사건의 배후를 김구로 본다. 김구는 안중근의 동생 안공근(1889~1939)과 안창호(1878~1938)의 후견인 옥관빈(1887~1933)의 암살에도 간여했다는 의혹을 받는다. 미 군정은 친일파 출신으로 한국민주당 정치부장이던 장덕수(1894~1947)가 살해되자 김구가 개입했다고 보고 재판정에 세웠다. 좀더 객관적인 연구가 필요한 대목이다.
  • [공무원 대나무숲] “법치 무력화 과거 정부 답습하나… 예타 면제 신중해야”

    요즘 공무원 동기 카톡방에서 “문재인 정부가 이상해졌다”고 말하는 이들이 늘었다. ‘적폐 청산’을 기치로 내건 정부가 적폐 정부에서 하던 일을 서슴지 않고 하기 시작해서다. 박근혜 정부만큼은 아니지만 청와대의 권위적 태도가 되살아나고 있어 우려스럽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요즘 공직 사회에서 가장 크게 이슈가 된 것은 지난달 말 발표한 ‘사회간접자본(SOC) 부양 카드’다. 정부는 24조원 규모의 지역 숙원사업에 대한 예비타당성조사(예타)를 면제해 줬다. 이 정도의 대규모 일괄 면제는 2008년 9월 이명박 정부의 ‘30대 선도 프로젝트’ 이후 10년 만이다. 내년에 있을 총선을 염두에 둔 포석이라는 건 굳이 말하지 않아도 다 안다. ●日 SOC 카드 남발… 일부 ‘다람쥐 도로’ 오명 정부가 선거에 이기기 위해 선심성 사업을 펼치는 것 자체를 나쁘다고 할 수는 없다. 진짜 문제는 이 정부도 과거 정부처럼 ‘법에 의한 통치’를 우습게 여기기 시작한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예타는 정부가 시행하는 각종 대형사업의 경제성 등을 종합적으로 평가해 국민 혈세가 낭비되는 것을 막으려고 만든 제도다. 총사업비가 500억원이 넘고 국가 재정 지원 규모가 300억원 이상인 사업이 대상이다. 2009년 4대강 사업이나 2010년 전남 영암 포뮬러원(F1) 경기장 건설사업 등은 예타 없이 진행했다가 ‘돈 먹는 하마’로 전락했다. 예타는 세금을 아끼기 위해 정부가 지켜야 할 가장 기본적인 절차다. 극히 일부 사업에 국한해 특별하게 적용해야 할 예외 조항을 이렇게 남발하는 것은 법치를 무력화한 것이나 다름없다. ●국가채무의 덫에 안 빠지게 대비해야 과거 문재인 대통령을 비롯한 더불어민주당은 “4대강 사업이 22조원의 혈세만 강바닥에 쏟아붓고 아무런 경제적 이득도 내지 못했다”며 강하게 비판해 왔다. 그랬던 이 정부가 똑같은 일을 반복하니 공무원들로서는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다. 한 선배 공무원은 “모든 정권이 다 그런 거 아니겠냐. 이 정부에 너무 큰 기대는 하지 마라”고 시니컬한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일본에 가면 ‘다람쥐 도로’라는 게 있다. 거액을 들여 도로를 만들었지만 사람은 안 다니고 다람쥐만 다닌다고 해서 붙은 별명이다. 또 지역 규모에 맞지 않는 매머드급 미술관이 시골마을에 버젓이 자리잡고 있어 놀랄 때가 있다. 이것은 일본 정부가 선거를 위해 경기 부양용 SOC 카드를 남발한 결과물이다. 이런 것들이 쌓이고 쌓여 일본은 국가채무의 덫에 빠졌고 성장에도 발목이 잡혔다. 혈세를 투입하는 사업이라면 예타 면제에 신중해야 한다. 이것은 공직 사회가 한목소리로 바라는 것이다. 정부세종청사 한 사무관
  • 혁명 40주년 이란 “미국에 죽음을” VS 트럼프 “실패한 40년”

    혁명 40주년 이란 “미국에 죽음을” VS 트럼프 “실패한 40년”

    이슬람혁명 40주년을 맞은 이란 곳곳에서 반(反)미, 반이스라엘, 반사우디아라비아 구호가 울렸다. 이란 지도부와 시민들은 미국의 제재에 맞서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이란에 뜻깊은 이날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이란 혁명 40년은 실패한 40년이라며 초를 쳤다. CNN 등에 따르면 혁명 40주년인 11일(현지시간) 수도 테헤란을 비롯한 이란 전역에서는 혁명의 정신을 되새기는 대규모 집회가 열렸다. 하산 로하니 이란 대통령은 “이렇게 엄청난 이란 국민이 모였다는 것은 악마(미국, 이스라엘)가 사악한 그들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는 뜻이다”며 “미국의 승리를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연설했다. 광장에 설치한 스피커에서는 “미국에 죽음을, 이스라엘에 죽음을, 알사우드(사우디아라비아)에게 죽음을”이라는 구호가 계속 울려 퍼졌고 집회 참여자들은 같은 구호를 외쳤다.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의 트위터에 “이란 정권은 40년간 실패만 양산했다. 40년의 부패, 40년의 억압, 40년의 테러”라고 적었다. 그는 또 “오래 고통받은 이란인들은 훨씬 더 밝은 미래를 가질 자격이 있다”며 한 번 더 이란 지도층의 속을 긁었다. 존 볼턴 미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도 트위터에 “40년간 이란은 시민의 권리를 보호하고 유지하겠다는 약속을 지키는 데 실패했다”면서 “이란 정권의 40주년 기념일은 40년간의 실패와 부서진 약속을 강조할 뿐”이라고 공격했다. 볼턴 보좌관은 또 “이제 행동을 바꾸는 것은 이란 정권에 달렸다. 그리고 나라의 방향을 결정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이란인들에 달렸다. 미국은 이란인들의 의지를 지지할 것이며 그들의 목소리가 (세계에) 들리도록 후원할 것”이라고 썼다. 이란은 1979년 이슬람혁명으로 팔레비 왕정을 전복하고 이슬람 법학자가 통치하는 이슬람 공화국을 세웠다. 강신 기자 xin@seoul.co.kr
  • “크래커총이 진짜라면”… 금지의 시대 꼬집다

    “크래커총이 진짜라면”… 금지의 시대 꼬집다

    1960~1990년 주제… 13개국 100명 참가 탈식민지·독재·산업화 등 사회변화 유사“박정희 군사독재 시대였기에 (예술가들이) 하고 싶은 작업을 하지 못하는 시대였지만, 언제나 새로운 걸 하고 싶어하는 욕망이 있었어요.”(한국 전위 미술의 대가 김구림) “(수하르토) 군사정권에 반대하는 제 입장을 대놓고 얘기할 수 없어서 총 모양 크래커로 작품을 만들었습니다.”(인도네시아 ‘신미술운동’ 주요 멤버 FX 하르소노) 금지의 시대에 무엇이라도 했던 예술가들. 외부로부터 이식한 게 아니라 철저히 자생적으로,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겠다는 열망이 그들을 들끓게 했다.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지난달 31일부터 시작한 ‘세상에 눈뜨다: 아시아 미술과 사회 1960s-1990s’ 얘기다. 전시를 열고자 국립현대미술관을 비롯해 도쿄국립근대미술관, 싱가포르국립미술관, 일본국제교류기금 아시아센터가 4년여 동안 조사·연구했다. 한국, 일본, 중국, 대만, 홍콩,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필리핀, 태국, 인도, 미얀마, 캄보디아의 아시아 13개국 주요 작가 100명의 작품 170여점이 이렇게 모였다.196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아시아는 탈식민, 이념 대립, 베트남전쟁, 민족주의 대두, 근대화, 민주화운동 등 급진적인 사회 변화를 경험했다. 전시를 기획한 배명지 학예연구사는 “(국가들 사이에) 직접적인 상호 작용은 없었지만, 그들 간 예기치 않은 공명을 발견하는 데 중점을 뒀다”며 “국가별 전시가 아닌 초국가적인, 비교문화적인 방식으로서의 전시를 기획했다”고 말했다. 전시는 ‘구조를 의심하다’, ‘예술가와 도시’, ‘새로운 연대’의 3부로 구성했다. 동시기 각국의 작가들이 비슷한 문제의식을 느끼고 유사한 표현 방식을 차용한 것을 보면 소름이 돋는다. 전시장 입구에서 한 무더기 핑크빛 총과 맞닥뜨린다. 인도네시아 작가 FX 하르소노의 ‘만약 이 크래커가 진짜 총이라면 당신은 무엇을 하겠습니까?’다. 1965년 수하르토 통치 이후 1966년을 기점으로 표방한 이른바 ‘신질서’에 따라 인도네시아에서는 정치적 성격의 예술과 미디어는 늘 검열 대상이었다. 엄혹한 시대를 살았던 작가는 부지불식 간 일상에 잠입한 폭력성을 크래커 총으로 은유했다. 독재정권이라는 정치상과 더불어 소비 자본주의 침투라는 달라진 경제상에 대한 두려움도 엿보인다. 전시장 한쪽에는 ‘0엔’짜리 모형 지폐가 자리한다. 1000엔짜리 모형 지폐를 제작했다가 통화 사기로 유죄 판결을 받은 일본 작가 아카세가와 겐페이. 그는 이후 지폐에 ‘0’이라는 숫자를 의도적으로 삽입했다. 한국의 오윤 작가는 조선시대 불화를 차용해 물신주의를 ‘지옥’에 비유했다.(‘마케팅Ⅰ: 지옥도’) 군데군데 인간 군상을 살펴보는 재미가 있는 이 그림에서 펄펄 끓는 물에 내던져지는 화탕 지옥은 휘발유 제품명 ‘CX3’, 거대한 나무 판에 짓이겨지는 석개 지옥은 코카콜라와 연계된다. 소비사회를 상징하는 코카콜라의 메타포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지옥도 옆에는 콘돔을 씌운 콜라 유리병이 자리한다.미술관의 큐레이팅을 따라가지 않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해석해 보는 것도 전시를 즐기는 방법 가운데 하나다. 가령 관객이 무대 위에 앉은 오노 요코의 옷을 자르는 영상 ‘컷 피스’는 당대에는 폭력과 전쟁(특히 베트남전쟁)에 대한 항의로 여겨졌다. 그러나 요즘엔 페미니즘 작업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전시 말미 ‘젠더와 사회’에서 만나는 ‘생각하는 누드’에서는 필리핀 여성미술연대 ‘카시블란’ 창시자인 줄리 루크가 제왕절개수술의 상처가 역력한, 모성 경험으로서의 자기 신체를 드러낸다. ‘폭력’과 ‘모성’이라는, 여성의 신체에 각인된 제각기 다른 키워드를 떠올리게 한다. 전시를 보면 “아시아 현대미술의 새로운 경향이 외부나 서구에서 영향을 받은 게 아니라 내부의 정치적 자각, 이전과 다른 예술 태도, 새로운 주체 등장을 따라 자발적으로 이루어졌다”는 미술관 측의 설명을 이해할 수 있다. 제1·2전시실, 중앙홀을 아우르는 방대한 규모에 각 나라 역사를 되새기느라 작품들 앞에서 걸음을 떼기가 쉽지 않다. 오랜 시간을 가지고 충분히 음미할 것을 추천한다. 오는 5월 6일까지. 글 사진 이슬기 기자 seulgi@seoul.co.kr
  • [황성기의 시시콜콜]‘지식인 성명’ 일본에서 홀대받은 이유

    [황성기의 시시콜콜]‘지식인 성명’ 일본에서 홀대받은 이유

    지난 6일 일본 시민·지식인들이 식민지배에 대한 사죄와 반성을 촉구한 성명의 보도를 놓고 한·일 간 극명한 온도차를 보이고 있다. 한국 언론에는 7일자에 이어 8일자에도 보도됐지만 일본 언론에는 아사히신문 단 1개 신문 만이 두 문장 짜리의 짧은 기사로 7일자에 처리했을 뿐 다른 전국지나 방송, 통신사는 아예 언급조차 없었다. 한국 언론들은 성명 내용을 6일 연합뉴스에 이어 7일자 조간에 일제히 보도했다. 심지어는 사설로까지 언급돼 `한일관계 악화 더 이상 방치 말라는 日 지식인들의 호소’(동아일보 7일자), ‘아베 내각에 식민지배 사죄 촉구한 일본 지식인들’(한겨레신문 8일자), ‘日 지식인들 식민지배 반성 성명, 아베 총리는 새겨듣기를’(한국일보 8일자) 등으로 성명의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극심한 한·일 보도의 온도차 성명을 들여다 보자. ‘무라야마 담화, 간 총리담화에 바탕을 두고 식민지지배를 반성·사죄하는 것이야말로 일·한, 일·북 관계를 계속해서 발전시키는 열쇠이다’라는 긴 제목에 말하고자 하는 바가 함축돼 있다.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 우쓰미 아이코 게이센여학원대 명예교수, 다나카 히로시 히토쓰바시대 명예교수 등은 이날 도쿄 시내의 중의원회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성명을 발표했다. 이 자리에는 참가하지 않았지만 이종원 와세다대학 교수 등 총 226명이 발기인으로 혹은 서명을 통해 동참 의사를 표시했다. 성명은 “일본과 한국, 일본과 북한 사이에 남은 모든 문제를 무라야마 담화와 간 담화를 바탕 삼아 새로운 마음으로 성실히 협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북한의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해서는 지금부터 대처해 나가야 한다”면서 “일·한 간의 이른바 ‘징용공’ 문제인 전시 노무 동원 피해자 문제에 대해서도 진지한 대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호의적인 對韓 보도 어려운 분위기 일본의 반성과 사죄를 촉구하는 지식인 성명이 일본 입장에서는 달갑지 않을 것은 자명하지만 이렇게 일본 언론에서 무관심과 홀대를 받는 것은 드문 일이다. 지난해 10월까지 서울특파원을 지낸 도쿄신문 정치부의 우에노 미키히코 기자는 “한국 신문을 7일에 읽고 성명이 나온 사실을 알게 됐다”면서 “지금 일본에 통계부정 논란, 아동학대 문제가 있어서 기자들이 관심을 안 가졌을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우에노 기자는 “그러나 그런 이유보다는 일본 여론이 지식인들의 이런 주장을 받아들일 여지가 없는 상태”라고 분석한다. 그는 “이 분들 주장을 역지사지 해보자. 한국 지식인들이 최악인 지금의 한·일관계 타개를 위해 ‘위안부 합의도 잘 지키고 강제 징용문제도 65년 청구권 협정에 따라 해결하자. 일본과 한 약속을 잘 지켜야 미래지향적인 양국관계를 만들 수 있다’는 식으로 주장하면 한국에서 수용될 수 있겠는가. 게다가 비교적 진보적인 도쿄신문 독자까지 레이더 사건에 대해 ‘한국은 말도 안되는 주장을 자꾸 하는 나라다. 어떻게 하라’라는 의견을 보내오고 있다. 한국, 특히 문재인 정권에 대해 호의적인 주장을 받아들이는 분위기가 예전보다 훨씬 없어졌다”고 말했다. 오쿠조노 히데키 시즈오카현립대학 교수(한국정치)는 보다 신랄하다. 그는 “성명에 이름을 올린 학자, 언론인들은 항상 한·일관계에서 그런 운동을 하시는 분들인데다 새로운 내용도 없다”면서 “일본 사회 분위기가 새로운 것이 없는 이야기를 뉴스로 다룰 상황은 아닌 것 같다”고 지적했다. 오쿠조노 교수는 “일본에서는 위안부, 징용피해자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면 좋은지를 고민하는 게 아니라 ‘한국은 도대체 왜 이럴까. 이웃나라여서 이사갈 수도 없는데 앞으로 어떻게 함께 살아가야 하나’ 하는 단계로 넘어갔다”고 전했다. 韓 ‘조속한 입장 발표’ 日 ‘냉정한 대처’ 주문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20년간 한국을 취재하고 있는 한 일본인 저널리스트는 “진보적 일본 매체조차 보도를 하지 않은 것은 그만큼 일본 여론이 한국에 대한 불신감을 증폭시키고 있다는 방증”이라고 강조한다. 그는 “역으로 한국에서 비슷한 기자회견이 열렸다고 하면 결과가 어떨지 생각해 보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라면서 “한국 정부가 하루라도 빨리 강제징용 대법원 판결에 대한 입장을 분명히 해야 하고, 일본도 역정만 내지말고 냉정히 대처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2010년 한·일 병합 100주년 때에도 양국 관계 개선을 촉구하는 성명을 냈던 일본 지식인들의 ‘2019년 성명’을 둘러싼 한·일의 보도 격차는 갈수록 깊어지는 양국의 골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는 점에서 우려를 금하지 않을 수 없다. 논설위원 marry04@seoul.co.kr 다음은 성명 전문 일본과 한국은 이웃나라로, 협력하지 않으면 양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인간답게 살아 갈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이러한 양국 사이에 1904년 이후 41년간 군사 점령, 1910년 이후 35년간 식민지 지배가 일본 제국에 의해 한반도에 가해졌다. 이것이 양국 역사의 암부(闇部)를 만들었다. 한국·조선인의 역사 기억에서 이것을 지울 수는 없으며, 일본인은 이것에 대해 인간적으로 대처하는 길에서 벗어날 수 없다. 조선 식민지지배는 1945년 8월 15일로 끝났지만 일본인은 국가, 국민으로서 한국 병합과 식민지 지배에 대해 반성하고 사죄하는 모습을 오랫동안 보이지 않았다. 일본은 독립한 조선의 한 쪽 나라인 대한민국과 국교를 정상화하는 한일조약을 1965년 체결했다. 그러나 1910년의 병합조약이 처음부터 무효였다는 한국 측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합의에 의한 병합이었고 식민지 지배는 없었다는 주장으로 일관했다. 쌍방의 청구권에 관한 문제가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되었다는 점을 확인한다’라고 명기된 청구권협정이 체결되었지만 근본적 인식의 분열은 극복되지 못한 채 방치됐다.  이런 한·일조약에 근거하여 일본은 대한민국과의 국교를 유지하고 경제적인 관계를 맺으면서 다면적 협력을 발전시켜 왔다. 20여 년이 지난 1987년 한국에서는 군부 독재정권 시대에 종지부를 찍는 민주혁명이 일어났다. 그리고 나서야 1995년 자민당, 사회당, 신당 사키가케의 3당 연립내각의 무라야마 도미이치 총리가 각의결정을 통해 패전 50년 총리담화를 발표하여 처음으로 식민지 지배에 대해 반성하고 사죄했다. 일본은 “아시아 제국(諸國) 사람들”에게 “식민지 지배와 침략”으로 인해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주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통절한 반성의 뜻을 표하며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사죄의 마음을 표명”한 것이다. 이 반성과 사죄는 1998년 김대중 대통령과 오부치 게이조 총리의 한·일 파트너십 선언에서 “한국 사람들”을 향해 표명되었고, 2002년에는 김정일 위원장과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의 북·일 평양선언에서 “조선 사람들”을 향해 표명되었다.  식민지 지배에 대한 이러한 반성과 사죄표명은 획기적이었다. 그러나 반성과 사죄 표명의 완성을 위해서는 병합 그 자체에 대한 역사 인식이 추가되어야 한다.  한국병합 100년을 맞은 2010년, 우리 일본의 지식인 500명은 한국의 지식인 500명과 함께 병합의 과정과 병합조약을 비판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하였다. 우리들은 “한국병합은 대한제국의 황제로부터 민중에 이르기까지 격렬한 항의를 군대의 힘으로 짓누르고 실현시킨 문자 그대로 제국주의 행위이며, 불의부정(不義不正)한 행위였다”라고 지적한 다음 병합조약에 대해서는 “힘으로 민족의 의지를 짓밟은 병합의 역사적 진실”을 “평등한 양자의 자발적 합의로, 한국 황제가 일본에 국권 양여를 신청하여 일본 천황이 그것을 받아들이고 한국병합에 동의했다는 신화”에 의해 덮어 숨기는 것이고, 조약의 전문(前文)도 본문도 거짓임을 명백히 밝혔다. “이리하여 한국병합에 이르는 과정이 불의부당한 것처럼 한국병합조약도 불의부당하다”, 이것이 우리들의 결론이었다.  이 성명은 2010년 5월 10일 발표된 이후 제2차 서명자가 추가되어 7월 28일에 다시 발표됐다. 그리고 이 성명에 답이라도 하듯 일본 정부와 간 나오토 총리는 8월 10일 각의결정을 통해 한국병합 100년 총리담화를 발표했다. 그 담화에는 다음과 같은 일본정부의 인식이 담겨 있는데 반성과 사죄가 재차 표명됐다.  “정확히 100년 전 8월,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되어 이후 36년에 걸친 식민지 지배가 시작되었습니다. 3·1 독립운동 등의 격렬한 저항에서도 나타났듯, 정치적·군사적 배경 하에 당시 한국인들은 그 뜻에 반하여 행해진 식민지 지배에 의해 나라와 문화를 빼앗기고, 민족의 자긍심에 깊은 상처를 받았습니다. 저는 역사에 대해 성실히 임하고자 합니다. 역사의 사실을 직시하는 용기와 이를 인정하는 겸허함을 갖고, 스스로의 과오를 되돌아보는 것에 솔직해지고자 합니다. 아픔을 준 쪽은 잊기 쉽고, 아픔을 받은 쪽은 쉽게 잊지 못하는 법입니다. 이러한 식민지 지배가 초래한 다대한 손해와 아픔에 대해, 재차 통절한 반성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사죄의 마음을 표명합니다”(간 나오토 총리 담화)  이것이 일본이 ‘한국병합’으로부터 100년, 식민지 지배 종식으로부터 55년이 지나서야 도달한 역사인식이다. 한국 국민의 비판에 스스로의 노력이 더해져 이루어진 반성과 사죄의 새로운 지평이다. 이 총리담화의 성과로 일본 통치 하에서 조선총독부가 빼앗아 일본의 황실 재산으로 삼은 ‘조선왕조의궤’가 담화가 발표된 그 해에 한국 정부로 반환되었다.  그렇다면 이제는 일본과 대한민국, 일본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 사이에 남은 모든 문제를 무라야마 담화와 간 담화를 바탕 삼아 새로운 마음으로 성실히 협의하여 해결해야 한다. 일본 정부와 국민은 위안부 문제에 대해 과거 25년간 여러 노력을 해 왔지만 이 문제는 현재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다. 무엇보다 북한의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해서는 지금부터 대처해 나가야 할 것이다. 오늘날 한국과 일본 사이에는 이른바 ‘징용공’ 문제, 전시 노무동원 피해자 문제가 큰 문제로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한·일조약 당시의 협의와 2000년대 한국 정부의 적극적 노력이 있었지만 20만명 정도로 일컬어지는 전시 노무동원 피해자와 그 유족들의 불만의 목소리가 다시금 한·일관계를 흔들고 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위안부 문제와 마찬가지로 한층 더 진지한 대처가 필요하다. 북한의 전시 노무동원 피해자 문제에 대해서도 같은 대처를 고려해야 한다. 이 외에도 ‘한국인 BC급 전범’ 문제도 존재한다. 전범으로 사형판결을 받은 92세의 이학래 노인은 지금껏 일본 정부에 사죄와 보상을 요구하고 있다. 일본은 북한과의 국교정상화를 신속히 실현해야 한다. 일본 정부와 국민은 무라야마 담화, 간 담화를 바탕 삼아 남북한 정부와 국민들의 협력을 얻어 남아 있는 모든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올해는3·1 독립선언이 발표된 지 100년이 되는 기념비적 해이다. 일본에 병합되어 10년 간의 고통을 겪으면서도 조선 민족은 이날 일본인들에게 일본을 위해서라도 조선은 독립해야 한다고 설득하고자 했다. 이제 우리들은 조선 민족의 이 위대한 설득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동양 평화를 위해 동북아시아 평화를 위해 식민지 지배에 대한 반성과 사죄를 바탕으로 한·일, 북·일 간의 상호 이해, 상호 부조(扶助)의 길로 나아가야 할 때이다.   2019년 2월 6일
  • 희생자가 된 가해자 ‘기억’들로 고발하다

    희생자가 된 가해자 ‘기억’들로 고발하다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이주한 독일 태생의 유대인 철학사상가 한나 아렌트(1906~1975). 그는 단지 독일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유대인 홀로코스트에 대한 책임을 묻는 이른바 ‘집합적 유죄’에 단호히 반대했다. 대신 개개인의 죄의 유무는 속한 집단이 아니라 인간 개인이 저지른 일의 내용과 결과에 따라 판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식민주의 집단학살, 홀로코스트, 인종청소, 조직적 성폭력 같은 반인륜적 범죄의 단죄와 처벌은 가해자들에게만 해당될까. 그 후손인 전후 세대는 책임에서 자유로울까. 반인륜적 범죄와 관련해 가장 큰 모순은 가해자와 희생자의 뒤바뀜, 혹은 뒤섞임이다. 특히 가해자와 공범자가 피해자로 둔갑하기 일쑤다. 역사의 영역에서 그런 모순은 문서 기록을 근거로 산 자가 죽은 자를 심문하고 재단하는 실증주의 탓에 발생한다. 그 방법론에 대한 회의와 개선의 목소리가 부쩍 높아지고 있다. 이른바 ‘기억 연구’다. 과거에 벌어진 복잡한 양상을 추적하려면 기억에 귀 기울여야 한다는 대안이다. 임지현 서강대 사학과 교수도 ‘기억 연구’ 쪽을 택하고 있다. 그 지론은 이렇다. ‘전후 세대들은 과거사에 대한 직접적 책임은 없다. 하지만 과거사를 끄집어내 성찰하고 또 그 성찰의 기억을 지키고 끊임없이 재고해야 할 책임은 전후 세대에게 있다.’과거사 단죄 차원에서 가장 두드러진 가해자, 희생자의 전복 사례는 오스트리아에서 찾을 수 있다. 오스트리아인들은 스스로를 히틀러의 첫 번째 희생자로 여긴다. 그러면서도 히틀러 군대에 복무한 자국 병사들은 의무를 다했다거나 심지어 영웅적이었다고 말한다. 반면 히틀러 군대에서 탈영한 병사들은 전우를 버린 배반자로 몰아 댄다. 하지만 각종 통계는 인구 비율상 오스트리아인들이 독일인들보다 더 적극적인 히틀러 협력자였음을 증거한다. 폴란드도 마찬가지다. 나치 점령기 폴란드에선 숨어 있는 유대인을 밀고하거나 사냥하듯 잡으러 다니는 사람들까지 있었다. 그런데도 폴란드인이 홀로코스트 공범자였다는 사실은 ‘희생자 민족’이라는 역사적 이미지에 철저히 가려진다. 저자가 특히 강조하는 점은 민족, 국가에 한정된 ‘민족주의 기억’을 탈영토화하고 유대해야 한다는 점이다. 실제로 개별적인 과거사 반성은 이제 기억의 공유와 연대 쪽으로 번지고 있다. 과거사의 단죄와 해결에서 실증적 사실보다 기억과 증언을 중시하게 된 첫 사례는 1961년 나치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1906~1962) 재판이다. 유대인 학살을 지휘했던 아이히만 재판을 지켜본 연구자들은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의 증언에 주목했고, 이를 계기로 홀로코스트 연구는 문서 자료에서 생존자 증언으로 중심이 서서히 이동하기 시작했다.기억 공유와 연대의 대표적 사례는 2013년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북쪽 작은 도시 글렌데일의 ‘평화의 소녀상’ 건립이다. 가주한미포럼은 그해 7월 글렌데일 중앙도서관 앞에 동상을 세우고 일본 정부의 진정성 있는 사과와 반성을 촉구했다. 한국과는 전혀 상관없는 소도시에 일본군 위안부 피해를 상징하는 ‘평화의 소녀상’이 들어선 까닭은 무엇일까. 사정은 이렇다. 주민의 40%가 아르메니아계로 알려진 글렌데일에는 해외에서 가장 큰 아르메니아인 공동체가 있다. 그 아르메니아인은 19세기 후반, 20세기 초반 오스만제국으로부터 집단학살을 당한 ‘기억’이 있다. 저자는 이를 놓고 “아르메니아 집단학살의 기억이 글렌데일 아르메니아인들로 하여금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고통에 예민하게 반응하도록 만들었을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 사례에 얹은 저자의 질문이 의미심장하다. ‘베트남 전쟁에서 벌어진 한국군의 잔학 행위엔 책임이 없다면서 왜 1945년 이후 태어난 일본의 전후 세대에게는 그들이 태어나기도 전 끝난 일본 제국주의의 잔학한 통치에 대한 책임을 묻는가.’ 그렇다면 어떻게 책임을 져야 할까. 저자 자신도 밝혔듯이 딱부러진 건 없다. 하지만 ‘곤혹스러운 과거 앞에 당당한 사람보다 부끄러워할 줄 아는 사람이 많은 사회가 더 건강한게 아닌가’라는 답을 던진다. “기억은 산 자와 죽은 자의 대화이다.”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 북한 당국자들 “남측은 미국 눈치만 보니, 개성공단 재개도 못해” 불만

    북한 당국자들 “남측은 미국 눈치만 보니, 개성공단 재개도 못해” 불만

    북한이 기대했던 국제사회의 대북제재가 해소되지 않자 남측을 향해 여러 가지로 불만을 드러내는 것으로 4일 전해졌다. 그간 경색됐던 남북관계가 지난해를 기점으로 개선되면서 세 차례의 남북정상회담, 한 차례의 북미정상회담 등의 결실을 맺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북한이 줄기차게 요구한 것은 대북 경제제재 해제와 남북경협을 통한 금강산 관광 재개, 개성공단 재가동 등이다. 그러나 북미 간 비핵화 진전이 지지부진하면서 남북 간 경협 역시 제자리걸음이다. 한 정부 소식통은 이날 “북한 당국자들이 남측을 향해 불만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며 “자신들은 남북 관계 진전을 위해 모든 것을 다 하고 있는데 남측은 미국의 눈치만 보면서 개성공단 재개조차도 못하는 상황이라고 말한다”고 했다. 실제 북한 관영매체들은 남측을 향해 남북 간 협력은 민족의 문제라는 논리를 앞세워 경협 재개를 지속적으로 요구해 왔다. 앞서 북한 대외선전 매체 메아리는 지난달 7일 “우리 공화국은 과분할 만큼 미국에 선의와 아량을 베풀었다”면서 “이제는 미국이 행동할 차례로, 공화국의 성의 있는 노력에 상응 조치로 화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리민족끼리도 지난달 5일 “이제 미국이 행동할 차례이고 우리에게 진 빚을 갚을 때”라고 밝힌 바 있다. 이 소식통은 “북한의 조급함을 모른 것은 아니지만, 미국과의 핵협상이 진전이 없는 상황에서 남측만 나설 수 도 없고, 또 나섰다고 해도 대북제재에 위반되는 상황”이라며 “매우 난감한 상황이다”라고 말했다. 미국 측은 남한이 동맹보다 북한에 경도됐다는 의심을 내비치며 한미워킹그룹을 통해 남북 협력의 속도 조절에 들어갔다. 이 때문에 지난달 25일 개성공단기업협회에 방북 승인도 유보된 것으로 전해졌다. 이번까지 합해 개성공단 기업인들의 방북은 7차례 불허 또는 유보된 것으로 파악된다. 이는 북미 간 진전 없이는 남북 간 경협이 먼저 갈수 없다는 미국 측의 의지가 반영된 결과란 해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북한은 내부적으로 남북, 북미 관계가 진전되면 현재의 경제적 어려움이 해소되고 이에 대한 보상이 남한과 한반도 주변국들로부터 올 것이라고 주민들을 다독여 왔다. 그러나 기대했던 남측으로 부터의 경협과 지원이 늦어지면서 그에 대한 불만이 고스란히 노출되고 있다는 설명이다. 이는 리선권 북한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의 ‘냉면 목구멍’ 발언으로 함축돼 있다는 것이 안팎의 해석이다. 리선권은 지난해 9월 평양에서 진행된 남북정상회담 당시 남측 기업인들을 향해 ‘냉면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느냐’고 말해 논란이 된 바 있다. 상황이 개선될 기미를 보이지 않자 북한 주민들도 서서히 당국에 대한 기대를 접는 다고 대북 소식통들은 귀띔하고 있다. 특히 설과 추석 등 명절 기간 중 대규모 선물 정치를 통해 민심을 다잡아 온 북한 체제 특성상, 대북제재로 인해 외화 고갈 등 통치자금이 바닥난 상황에서 남측의 경협과 지원은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한 대북 소식통은 “평양을 제외한 지방에서는 이번 설 선물을 구경도 못했다고 한다”면서 “평양 주민도 예전만큼 당국에서 주는 설 선물에 큰 기대는 하지 않지만 그래도 남북 관계가 해소되면 다 해결될 것이란 선전이 먹히지 않은 셈”이라고 설명했다. 문경근 기자 mk5227@seoul.co.kr
  • 황교안 “최순실 불법 몰랐다고 공무원 잘못은 아니다”

    황교안 “최순실 불법 몰랐다고 공무원 잘못은 아니다”

    자유한국당 당권에 도전하는 황교안 전 국무총리가 “최순실의 불법 행위를 공무원이 몰랐던 것을 잘못이라 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황교안 전 총리는 29일 전당대회 출마 선언 뒤 연합뉴스와 가진 인터뷰에서 “최순실이란 사람을 언론을 통해 들었지만, 근거가 없거나 부족한 지라시(정보지) 내용에 관심을 갖고 쫓아다니면 국정을 다 할 수가 없다”고 일축했다. 황교안 전 총리는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당할 당시 국정 2인자로서 정치권에 뛰어드는 게 온당하냐는 질문에 “망가진 나라를 바로잡고자 하는 사명이 생겼다”면서 “탄핵으로 국민께 심려를 끼쳐 송구스럽고 책임감도 느끼지만 아무것도 안 하면서 국민에 대한 송구함과 미안함이 갚아지는 것은 아니다”라고 답했다. 선거 사무실 호수가 박 전 대통령의 수인번호 ‘503’과 같다는 지적에는 “박 전 대통령 수인번호까진 모른다”고 말했다. 가장 존경하는 대통령을 묻는 질문엔 “우리나라가 오늘에 이르기까지 모든 대통령이 기여하신 게 있기 때문에 어느 분을 제일 존경한다고 말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말했다. 박근혜 정부 시절 양승태 대법원장이 사법권을 남용했다는 의혹으로 구속돼 수사를 받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사법농단이냐, 불법이 있었느냐, 어느 정도 처벌됐느냐는 지금 이야기할 단계가 아니다. 구속된 상태로 이제 수사가 시작됐다는 것이지 유죄는 아니다”라면서 “아직 실체가 무엇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고 구체적 언급을 피했다. 현행 대통령제가 제왕적 대통령제라는 견해에 대해 묻자 “대통령에게 권한이 많이 집중된 것은 맞다”면서 “현행 헌법에서 법원이 대통령 권한을 견제할 범위는 넓지 않다. 여당이 다수당이면 국회가 견제하는 것도 쉽지 않다”고 말했다. 그러나 개헌에 대해서는 “(개헌을) 검토할 필요가 있지만 문제는 때와 상황”이라면서 “국민은 먹고 살기 힘든데 개헌 얘기를 하다가 나라의 힘이 빠져버리는 것 또한 옳지 않다”고 말했다. 또 “개헌은 이미 늦었다고 볼 수도 있다. 제일 관심사가 되는 것이 통치구조에 관한 것인데, 사회적 논란이 많이 되겠지만 시도를 해야 한다”면서도 “연동형 비례대표제의 이론은 다 나왔지만 여론 수렴이 더 필요하다”는 입장을 나타냈다. 외교·안보·경제 분야에서 내공이 부족하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국무총리로 이미 국정의 모든 영역에 관여했기 때문에 경험이 있고 검증됐다”며 자신했고, 보수적 색채가 강해 외연 확장에 한계가 있다는 지적엔 “자유민주적 기본 질서와 시장경제를 근간으로 하는 헌법 가치 아래 무엇을 해야 할지 방향만 잡히면 확장성 문제를 넘어설 수 있다”고 답했다. 차기 총선에 출마할 것이냐는 질문에는 “우선 당 대표가 되고 당의 사명인 총선 승리에 집중해야 한다”고 답했다. 한편 안보·경제 등 역량 중심의 인재 등용을 통해 한국당 계파 갈등을 해소하겠다고 말했다. 신진호 기자 sayho@seoul.co.kr
  • [박상익의 사진으로 세상읽기] 빨강의 역사

    [박상익의 사진으로 세상읽기] 빨강의 역사

    19세기에 인공 염료가 발명되기 전까지는 붉은 색깔을 내는 염료를 쉽게 구할 수 없었다. 고대 지중해 세계 동쪽 해안 레반트에 거점을 둔 페니키아인들은 페니키아 근해의 뿔고동에서 채취한 값비싼 자줏빛 염료를 지중해 각지에 수출해 큰 재미를 보았다. 색을 내기 어렵고 값이 비쌌기 때문에 붉은 옷감은 부유한 기득권층의 전유물이 됐다. 로마 공화정 시대에는 집정관이나 전쟁에 이기고 개선하는 장군들만이 자주색 망토를 착용할 수 있었다. 로마 제정 이후 자주색은 황제 전용이 된다. 이 전통은 로마 멸망 이후 중세에도 이어져 자주색은 왕이나 귀족의 색으로 간주됐다. 빨간색은 고대로부터 귀한 염료였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귀한 색은 임페리얼 퍼플(imperial purple)이었다. ‘황제의 자주색’이라는 뜻의 이 색상은 범위가 넓어서 자주색뿐만 아니라 진한 주홍(scarlet)과 선홍색(crimson)까지도 포함한다.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그 색에 대한 열망이 강했다. 염색업자가 옷 한 벌을 염색하는 데 필요한 임페리얼 퍼플을 추출하려면 뿔고동 수천 마리를 으깨야만 했기 때문에 임페리얼 퍼플은 대단히 비싼 염료였다. 로마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284~305)가 통치하던 시기에 임페리얼 퍼플로 염색한 최상품 옷감 1파운드(0.45㎏)는 로마 은화 5만 데나리온의 가치가 있었다. 당시 석공의 하루 임금이 50데나리온이었으니 1000일치 임금을 합산한 것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비싼 가격 때문에 임페리얼 퍼플은 고대 그리스, 로마 세계에서 권력과 위신의 탁월한 상징이 됐다. 칼리굴라와 네로, 그리고 4세기 황제 통치하에서는 황실 사람들만 임페리얼 퍼플로 염색한 옷을 입을 수 있었다. 이런 전통은 그리스도교가 수용된 중세 유럽으로도 이어졌다. 1295년 교황은 추기경들에게 임페리얼 퍼플 색상의 옷을 입을 것을 선포했다. 이때부터 시작된 ‘추기경의 자주색’ 전통은 가톨릭교회에서 오늘날에도 이어지고 있다. 흰 눈을 뒤집어쓴 빨간 장미가 한겨울의 추위에도 고고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고귀한 빨강의 전통을 지키려는 ‘꽃의 제왕’다운 기백이다. 우석대 역사교육과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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