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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마민주항쟁’ 10월16일 40년 만에 국가기념일 지정

    ‘부마민주항쟁’ 10월16일 40년 만에 국가기념일 지정

    1979년 10월 부산과 창원 일대 시민들이 박정희 정권의 유신체제에 반대하며 거리로 나섰던 부마 민주항쟁 발생일이 40년 만에 국가기념일로 지정됐다. 행정안전부는 17일 국무회의에서 부마 민주항쟁이 시작된 1979년 10월16일을 기리고자 10월16일을 국가기념일로 지정하는 내용의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 일부개정안’을 심의·의결됐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10·16 민주항쟁 기념일은 51번째 국가기념일이 됐다. 행안부는 “부마민주항쟁의 역사적 가치와 의미를 재조명하고 그 정신을 기념하고자 최초 발생일인 10월16일을 국가기념일로 지정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이에 따라 40주년을 맞은 올해부터 정부 주관으로 기념행사를 진행하게 됐다. 이전까지는 부산과 창원 지역의 부마항쟁 기념사업 관련 단체들이 따로 기념식을 열었다. 국가기념일로 처음 치르는 올해 기념식은 10월16일 경남 창원시에서 ‘부마1979, 위대한 민주여정의 시작’을 주제로 열린다. 구체적인 장소는 이달 안으로 확정된다. 부마민주항쟁은 박정희 정권의 유신독재 체제에 저항해 1979년 10월 16일부터 닷새간 부산과 마산(현 창원시 마산합포구·회원구)에서 일어난 민주화운동을 말한다. 10월16일 부산에서 5000여명의 학생들이 시위를 주도하고 시민들이 합세해 유신헌법과 긴급 발동 등에 반대하는 대규모 반정부 시위를 시작했다.10월18일에는 마산, 창원, 진주 지역으로 반정부 시위가 확산했다. 당시 정부는 계엄령과 위수령을 내려 1천560여명을 연행하고 120여명을 군사재판에 회부했다. 이후 부마항쟁 발생 열흘 만인 10월26일 당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부마사태의 수습책을 둘러싸고 차지철 대통령경호실장과 심한 언쟁을 벌이다 박정희 대통령과 차 실장을 총으로 숨지게 함으로써 유신체제는 막을 내리게 됐다. 시위 기간은 짧았지만 군사정권 철권통치 18년을 끝내는 계기를 만들어냈다는 평가를 받으며 4·19혁명, 5·18민주화운동, 6·10민주항쟁과 함께 대한민국 현대사를 대표하는 민주화운동 가운데 하나로 불리고 있다. 강주리 기자 jurik@seoul.co.kr
  • ‘조국 사태’ 뒤 소모적 정쟁… 그 뒤엔 바뀌지 않은 친일파 세상

    ‘조국 사태’ 뒤 소모적 정쟁… 그 뒤엔 바뀌지 않은 친일파 세상

    조국으로 시작해서 조국으로 끝난 한 달여 시간을 보냈다. 전 국민이 조국 사태에 매달렸다. 그 상황의 중심에 정부 여당과 자유한국당의 적대적 대결이 존재했고 그 가운데 조국 사태가 있었다. 특이하고 낯선 광경이지만 비슷한 상황을 2년 내내 겪었다. 그러나 그 전인들 달랐으랴. 정치권의 후진적인 광경을 언제까지 봐주어야 할지 의문이다. 인류사회의 가장 오래된 질문은 싸움에 관한 것인데 한반도는 지난 200년 동안 원치 않는 싸움을 겪었다. 조선 후기의 농민반란과 동학혁명, 망국에 저항한 의병운동, 식민통치하에서의 독립운동과 전시동원 등 형극의 길을 걸었다. 동학혁명 후 자행된 대량 살육과 식민지 말기에 군국주의가 강요한 징병과 징용, 정신대와 위안부 등 전방위적인 수탈은 가혹한 고통이었다. 이 모든 상황이 독립으로 보상될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해방된 조선은 역사로부터 배신당하고 강대국에게서 배신당했다. 조선이 좌파도 우파도 아닌 친일파에게 점거되면서 해방의 꿈은 사라졌다. 해방된 조선에서 친일파의 부활은 모든 환란의 원인이었고 또 다른 고통의 시작이었다. 구약 말씀을 빌리면 ‘태초에 친일파가 있었다’. 해방으로 일본군은 물러갔지만 친일파로 인해 일본의 흔적은 지워지지 않았다. 제1공화국에서 지금의 제6공화국에 이르기까지 대통령은 거듭 바뀌었지만 친일파의 세상은 바뀌지 않았다. 4월혁명으로 들어선 제2공화국이 군사쿠데타로 무너졌을 때 그 자리는 일본 육사를 나온 박정희가 차지했다. 일본군 장교가 정권을 장악하면서 음지의 친일 권력은 양지로 확장됐다. 이 상황은 1960~70년대의 박정희 시대를 관통했고 박정희가 사라진 1980년대로 연장됐다. 1990년대에도 무늬만 바뀌었다. 그러므로 친일파 문제는 1945년 이전의 과거사가 아니라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는 현재진행형이며 반일종족주의로 드러난 식민지근대화론은 그 하나의 병증에 불과하다. 과거를 잊은 민족에게 역사는 되풀이되는 경향이 있다고 했다. 그것도 비극적으로 되풀이된다. 그래서 역사청산에 거듭 실패했다. 1940년대에는 해방에도 불구하고 친일파를 청산하지 못했다. 반민특위는 해산됐고 애국자가 학살되고 배제된 자리를 친일파가 채웠다. 1960년대에는 4월혁명에도 불구하고 제1공화국을 청산하지 못했다. 1980년대에는 전두환의 광주학살로 박정희를 청산하지 못했다. 1990년대에는 6월항쟁에도 불구하고 전두환 시대를 청산하지 못했다. 그래도 역사는 발전했고 그 정점에 6월항쟁이 있다. 해방 후 정치는 6월항쟁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특히 정치변동의 경우 1987년 이전의 정변이 6월항쟁 후에는 대통령선거 방식으로 바뀌었다. 이승만 정권은 4월혁명으로, 장면 정권은 군사쿠데타로, 박정희 정권은 부마항쟁 직후 암살로, 전두환 정권은 6월항쟁으로 무너졌다. 모두가 정변이었다. 그러다가 6월항쟁으로 대통령직선제가 부활하면서 선거가 정치변동의 제도적 계기로 작동했다. 한 단계 질적 도약을 이룬 것이다. 1987년 6월항쟁은 1980년 광주항쟁의 좌절을 7년 만에 성공으로 복원해 낸 희망의 횃불이었고 한국 현대사의 거듭된 실패를 바로잡을 수 있는 황금 같은 기회였다. 그러나 6월항쟁으로 쟁취한 대통령직선제의 첫 번째 결과는 노태우 집권이었고, 두 번째 결과는 3당 합당이었다. 기대에 반하는 두 번의 실패로 전두환 독재는 사실상 살아남았다. 전두환뿐만 아니라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으로 이어진 굴절된 현대사가 살아남았고, 부패 기득권 세력은 반성도 처벌도 없이 민주사회에 정착해 민주화의 혜택을 누렸다. 오늘날의 모순적인 정당체제, 언론체제, 재벌체제, 신앙체제, 교육체제가 그 미완성의 산물이며 소모적인 정치적 대결도 여기서 시작됐다. 돌이켜보면 정치적 민주화의 진전과 역사청산의 실패, 이 두 가지 언어의 모순적인 조합이 6월항쟁 이후 한국 정치의 갈등 구조를 만들었다. 민주주의 제도는 작동하지만 청산되지 못한 역사가 민주주의를 껍데기로 만드는 상황, 새로운 대한민국을 향한 열망은 간절하지만 친일파와 부패 기득권 세력이 압도하는 상황, 정의와 도덕을 향한 의지는 강하지만 불의와 부도덕이 판치는 세상, 이 둘 사이에서 벌어지는 끝없이 소모적인 대결, 이것이 민주화된 대한민국의 현주소다. 한국 정치는 이렇게 구조화된 역사사회적 대결 구조를 여의도 방식으로 지루하게 반복적으로 표출한다. 이것이 여의도 현실 정치의 민낯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다시 이명박·박근혜 시대를 청산하는 과제와 맞닥뜨려 있다. 이 과제는 지난 9년간의 국정 파탄을 정리하는 일이지만 그 속에 청산되지 못한 현대사가 오롯이 녹아 있다. 두 전직 대통령과 몇몇 측근이 구속됐지만, 중요한 것은 인신 구속이 아니라 나라를 바로 세우는 일이다. 그러나 쉽지 않다. 정부와 정치권의 한계도 있지만, 역사청산에 반대하는 기득권의 저항이 만만치 않다. 탄핵 이전의 헌정 질서 문란과 탄핵 이후의 정치적 갈등 역시 그 저항의 일환이다. 대통령 탄핵 이후의 국회는 소란한 동물국회와 무능한 식물국회를 합친 동식물 합동국회로 전락해 버렸다. 삼권의 한 축인 국회에서는 모든 안건이 논란으로 비화하고, 논란은 저급하기 짝이 없고, 어떤 형태의 시시비비조차 가리지 못하고, 어떤 결정도 내리지 못하는 상태가 돼 버렸다. 국회는 가장 나쁜 사람들의 집합소인 양 타락해 버렸다. 국회가 실종되고 삼권분립체제가 무너진 상황이다. 그 근저에 친일파가 있고 친일파에서 변신을 거듭해 오늘에 이른 부패 기득권 세력이 있다. 친일파는 해방 정국에서는 반공주의자로, 군사쿠데타 후에는 경제역군으로, 6월항쟁 후에는 자칭 산업화 주역으로 변신을 거듭했다. 그러나 그 뿌리가 친일파이고 근본 속성이 부패 기득권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민주화 과정에서 친일 전력과 부패 문제가 불거지자 이들은 반공안보 논리에 기대어 격렬하게 저항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민주화가 부패 기득권을 위협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싸움은 추상적 이념 대결이나 단순한 정책 대결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미래상을 만들어 가는 본질적인 과정이다. 결국 현대사의 누적된 이 갈등 구조를 해결해야 하는데, 그 방식이 역사적 대결일지 역사적 타협일지를 결정해야 할 양자택일의 임계점에 도달했다. 지금까지는 묵인과 지연이 용납됐지만, 더이상은 어려운 상황이다. 지금과 같이 소모적인 정파적 대결이 계속되면 민주주의를 유지할 수도 없고 장차 나라의 미래가 위협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국민들도 저급한 정파적 대결을 더이상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이 국면에서 역사적 대결론은 확실한 역사청산을 통해서 현대사를 바로잡고 그것으로 새로운 대한민국을 건설하자는 것이다. 역사적 타협론은 부패 기득권 세력이 역사적 과오를 시인하고 우리 사회가 그 반성을 수용하는 방식으로 공존을 모색하자는 것이다. 어느 경로를 선택하든 내년 국회의원 총선거와 그 후의 대통령선거가 역사청산의 마지막 계기가 될 것이다. 바로 이 역사의 전환기 국면에서 촛불이 혁명으로 발전했고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촛불은 과거를 태워 미래를 밝힌다. 촛불혁명은 30년 전 거세게 타올랐던 6월항쟁의 횃불을 계승해 6월항쟁의 미완성 의지를 복원하기 위한 혁명으로 자리잡았다. 촛불혁명은 부패 권력의 국정농단에 대한 저항이라는 1단계 현재시제를 표상하지만 아울러 6월항쟁이 이루지 못한 역사청산의 최종적인 종결을 지향하는 과거완료형인 동시에 조만간 다가올 통일된 대한민국의 미래 비전을 제시하는 미래완료형으로서 과거와 미래까지 함축한다. 새로운 대한민국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그 2단계와 3단계를 기대한다. 상지대 총장
  • ‘조선 지방통치행정기구’ 전라감영, 내년 3월 옛 모습 되찾는다

    ‘조선 지방통치행정기구’ 전라감영, 내년 3월 옛 모습 되찾는다

    현 공정률 85%… 국내산 자재만 사용조선시대 호남을 관할했던 전라감영 복원 사업이 내년 3월 마무리될 전망이다. 전북 전주시는 현재 공정률이 85%라고 16일 밝혔다. 104억원이 투입되는 이 사업은 현재 감사가 집무를 보던 정청인 선화당, 누각인 관풍각, 감사 가족의 처소 내아, 내아행랑, 감사의 처소인 연신당 등 5개 건물이 수장공사(한옥의 마지막 공정)를 마치고 담장과 마당 정비공사만 남겨놨다. 전라감영 복원 공사는 모두 국내산 자재만 사용해 전통 제작기법으로 추진됐다. 건축물은 철저하게 고증에 따라 복원됐다. 모든 나무에는 갈라짐을 막기 위해 들기름을 듬뿍 칠했다. 그러나 이번에 복원된 전라감영은 애초 25개의 시설이 있었지만 부지와 예산을 확보하지 못해 3분의1 규모에 머물렀다. 글 사진 전주 임송학 기자 shlim@seoul.co.kr
  • 가장 성공한 정당서 막장 정당으로… ‘300년 英보수당’의 몰락

    가장 성공한 정당서 막장 정당으로… ‘300년 英보수당’의 몰락

    영국 보수당 의원의 이미지를 떠올리라고 하면 어떤 인물이 머릿속에 그려질까. 영국 주간 이코노미스트는 9월 첫째주 호에서 이 같은 질문에 유머 감각과 해박한 재정 지식을 갖춘 큰 키(190㎝)의 필립 해먼드 전 재무장관이나 멋들어지게 시가를 입에 문 재즈 애호가인 켄 클라크 전 재무장관, 윈스턴 처칠의 외손자 니컬러스 솜스 경(卿) 등을 떠올릴 수 있다고 답했다. 하지만 이들은 더이상 보수당 소속이 아니다. 여의도 정치에서나 볼 법한 초유의 대규모 출당·탈당 사태가 의회 민주주의의 본고장에서 일어났기 때문이다. 이들을 비롯한 보수당 소속 하원 21명은 영국이 합의 없이 유럽연합(EU)에서 탈퇴하는 ‘노딜 브렉시트’를 강행하는 보리스 존슨 총리에게 반기를 들었다는 이유로 지난 4일 제명됐다. 그 뒤로 탈당 사태가 이어지는 등 브렉시트 논란으로 세계 최장수 정당인 보수당의 미래가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안갯속으로 빠져들고 있다.●1670년대 토리당 전신… 1830년대 현재 당명 1670년대 토리당을 전신으로 하는 보수당은 1830년대 지금의 이름을 쓰기 시작하며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변화보다 옛 질서의 보존을 이념으로 하는 정당이 인류 역사가 가장 급변한 근현대기를 관통하며 지속돼 왔다는 것은 세계 정당사의 역설이다. ‘영국은 가끔 노동당에 투표하는 보수주의 국가’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 보수당이 오랫동안 집권했다는 의미다. 영국에서 성인을 대상으로 보통선거가 처음 실시된 1929년부터 현재까지 90년 동안 배출된 20명의 총리(재임 포함) 가운데 13명이 보수당 소속이었다. 1970년을 기준으로 보수당은 에드워드 히스 총리를 비롯해 마거릿 대처, 존 메이저, 데이비드 캐머런, 테리사 메이 등을 거치며 총 32년간 집권당 자리를 지켰다. 경쟁자 노동당보다 약 14년을 더 집권한 것이다. 기존 체제를 지키는 ‘보수’를 표방하는 정당이지만 사실 영국 역사 속 보수당의 모습은 오히려 이념에 함몰되지 않고 변화에 기민하게 반응했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박지향 서울대 서양사학과 명예교수는 저서 ‘정당의 생명력’에서 보수당 역사의 핵심 단어는 ‘생존과 성공’이라며 ▲당내 결속력 ▲유연성 ▲통치에 적합한 정당이라는 이미지 등을 보수당의 성공 요인으로 분석했다. 강원택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도 저서 ‘보수 정치는 어떻게 살아남았나’에서 보수당의 특징으로 ▲강한 권력 의지 ▲변화를 고집스럽게 거부하지 않는 유연함 ▲외연 확대 등을 꼽았다. 현실의 변화를 수용하는 실용적 노선과 산업혁명 시대 상공업자 계층을 끌어들이는 개방성을 내세워 집권을 이어 갈 수 있었다는 의미다. 보수당의 실용주의적 노선 이면에는 ‘피 튀기는’ 당내 갈등의 역사도 있다. 작가 겸 언론인인 막스 해스팅은 최근 영국 일간 파이낸셜타임스에 쓴 ‘(보리스) 존슨과 처칠, 그리고 토리당의 파열음’이라는 제목의 기고문에서 1940년 5월 노동당이 제출한 체임벌린 내각 불신임 결의안 표결 과정에서 있었던 보수당 의원들의 ‘반란’을 소개했다. 당시 전시내각에 대한 불신임 결의안은 보수당 의원 33명이 동조하고, 다른 65명은 기권했음에도 가결되지는 못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당 안팎의 낮은 지지를 확인한 체임벌린은 스스로 퇴임을 결정했고, 이후 처칠이 총리에 오른다. 국가 전체가 뭉쳐야 하는 전시 상황 속에서도 오히려 보수당은 당내 반란도 서슴지 않을 만큼 냉철하면서도 기민하게 움직였다. 이 같은 모습은 출당·탈당 러시가 이어진 현 보수당의 모습과 오버랩되기도 한다. ●대형 이슈 뒤엔 집권당이 바뀐다 브렉시트가 낳은 ‘영국 정치의 이단아’ 존슨 총리의 등장과 최근 영국 의회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태는 보수당이 과연 제대로 명맥을 이어 갈 수 있을지 의문이 들게 한다. 정치분석가들은 이번 사태를 바라보며 보수당 내 갈등의 역사와 함께 과거 대형 이슈로 집권당이 바뀌었던 전례를 떠올린다. 유명 칼럼니스트 파리드 자카리아는 최근 칼럼에서 이번 사태를 1846년 보수당의 로버트 필 총리가 곡물법 폐지 등 자유무역 의제를 무리하게 추진하다가 당이 쪼개졌던 전례에 비유하는 일각의 견해를 소개했다. 당시 필 총리는 값싼 곡물을 수입하기 위해 곡물법을 폐지했지만 이는 토지소유계급의 반발과 극심한 당내 분열을 초래했다. 결국 보수당은 1874년까지 30년 가까이 야당으로 전락하는 패배의 역사를 기록하게 됐다.1906년 총선을 전후로 보수당은 관세개혁 이슈로 다시 분열했다. 당시 보호무역이냐, 자유무역이냐를 놓고 싸운 내분은 곡물법 폐지를 둘러싼 갈등의 재연이었다. 결국 보수당은 총선에서 자유당에 대패하며 의석수가 402석에서 157석으로 크게 줄어들었다. 역사학자 로버트 톰스는 뉴욕타임스에 쓴 칼럼에서 1846년 곡물법 폐지 사건과 더불어 1885년 아일랜드 자치법안으로 자유당이 분열하며 이후 보수당에 주도권을 뺏긴 사례를 소개했다. 그는 “이러한 (정당의) 역사는 예상치 못한 난맥상에서 정치적 분노와 사회경제적 긴장이 고조되고, 정치인과 국민 모두가 자신들의 이익과 정체성에 위협을 느끼게 된다는 것을 공통적으로 보여 준다”고 진단했다. ●브렉시트가 만든 ‘막장 드라마’ 현 보수당에서 과거 위기 때마다 발휘됐던 유연함이나 실용주의적 모습을 기대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지난 5일에는 존슨 총리의 친동생인 조 존슨 기업부 부장관이 사임하며 브렉시트 혼란 앞에는 핏줄도 소용없는 ‘막장 드라마’를 연출했다. 2016년 EU 잔류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로 브렉시트가 결정된 뒤 사임했던 캐머런 전 총리는 자서전 출간을 앞두고 가진 타임스와의 13일 인터뷰에서 옥스퍼드대 동문이자 오랜 친구였던 존슨 총리를 향해 “진실을 집에 놔두고 EU 탈퇴를 선동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브렉시트 사태로 이들의 우정은 완전히 깨졌다. 더불어 ‘보수의 품격’과는 거리가 먼 존슨 총리의 막말과 돌출 행동은 이 같은 난맥상을 더욱 해결 불능 상황으로 만들고 있다. 노딜 브렉시트 방지 법안이 상·하원을 통과하고 조기총선 카드는 번번이 무산되는 등 전방위적인 제동에도 존슨 총리는 ‘10월 31일 브렉시트’ 의지를 꺾지 않고 있다. 특히 노딜 브렉시트가 현실화될 경우 식품값과 주유비 상승, 의약품 공급 차질, 대규모 폭등 등이 일어날 수 있다는 내용의 정부 보고서가 지난 11일 언론에 공개되기도 했지만, 존슨 총리가 이를 귀담아들을 가능성은 작아 보인다. 일각에서는 그가 불법을 저지르더라도 브렉시트를 감행할 수 있다는 관측까지 나온다. 의회 민주주의 등 근대적 제도가 가장 먼저 발달한 국가에서 후진국에서나 있을 법한 ‘초법적 발상’이 가능할 수 있다는 암울한 전망이 나오는 것이다. 대형 사건 이후 집권당이 바뀌었던 전례가 브렉시트 이후 다시 반복될지는 알 수 없지만, 정치지형의 중대한 변화 가능성은 조금씩 감지되고 있다. 얼마 전에는 EU 탈출을 위해 창당한 브렉시트당 나이젤 패라지 대표가 차기 총선에서 손을 잡자고 존슨 총리에게 선거 연대를 제안하기까지 했다. 노딜 브렉시트를 완수한다면 다음 총선에서 브렉시트당이 일부 후보를 내지 않는 방식으로 보수당에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의미다. 올해 2월 창당된 신생정당이 ‘정치적 흥정’을 걸어올 만큼 300년 역사를 자랑하는 보수당의 입지가 좁아졌음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사례다. 우파성향 정치블로그 ‘컨서버티브 홈’은 “우리가 알던 보수당은 이제 더이상 없다”고 일갈했다. 안석 기자 sartori@seoul.co.kr
  • 사우디 vs 이란 지난 15년 동안 사이가 더 나빠진 이유는

    사우디 vs 이란 지난 15년 동안 사이가 더 나빠진 이유는

    사우디아라비아 유전 시설 두 곳을 예멘 반군이 드론으로 공격해 국제유가가 출렁이고 있는데 예멘 반군의 배후 조종자로 이란이 지목되고 있다. 이란은 심지어 순항미사일도 사우디 쪽으로 발사했다고 미국은 의심하고 있다. 두 나라는 이라크를 중간에 두고 있어 국경을 마주하지 않지만 매우 가까운 이웃이다. 하지만 수천년을 이어 철천지 원수처럼 지내고 있다. 널리 알려진 대로 사우디아라비아는 수니파, 이란은 시아파의 맹주로 믿음의 대립을 근본적으로 갖고 있다. 하지만 최근 들어 두 나라는 더욱더 첨예한 갈등과 충돌에로 이끌리고 있다고 영국 BBC는 16일(현지시간) 지적하며 그 배경을 분석해 눈길을 끈다.역사적으로 사우디는 왕조이며 이슬람의 성지로 자신을 무슬림 세계의 지도자로 여기는 경향이 강하다. 이에 반기를 든 것이 1979년 혁명으로 샤 왕조를 무너뜨린 이란이다. 혁명 신학을 앞세워 이전에 중동 지역에 없던 새로운 정치체제를 실험하는 이란은 혁명을 국경 너머로 확산시키겠다는 강한 의지를 표출한다. 그런데 최근 15년 동안 이런 갈등을 더 첨예하게 부채질하는 사건들이 있었다.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 이후 소수 수니파를 대표하는 사담 후세인 정권이 붕괴되면서 다수 시아파 정부가 들어섰다. 이란의 입김이 강해질 수 밖에 없었다. 여기에 2011년 아랍의 봄이 지역 내 정세의 불안정성을 높였다. 두 나라 모두 영향력 확대에 골몰할 수 밖에 없었으며 특히 시리아, 바레인, 예멘을 둘러싸고 서로 의심하는 눈초리가 매서워졌다. 이란이 지중해로 뻗어나갈 회랑을 건설하려 한다는 의심까지 나온다. 이란은 지역 정치에서 최근 여러 차례 승리를 맛봤다. 시리아에서 이란은 (러시아와 힘을 합쳐) 바샤르 알아사드 대통령을 지원해 사우디가 뒷배를 봐주는 반군을 거의 격퇴해냈다. 사우디는 비교적 젊은 무함마드 빈살만 왕세자가 통치자 지위를 굳히자 군사적 모험주의를 내세워 이란의 영향력을 제한하고자 해 지역 갈등을 부추기고 있다. 이에 따라 후티 반군을 제압하려는 예멘 정부군을 지원하고 있는데 4년 뒤 값비싼 대가를 치르는 도박이었다는 점을 깨닫고 있다. 유엔 보고서는 이란이 무기를 후티에 대주고 있으며 기술과 군사적 측면 모두에서 테헤란 정부가 뒷배가 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레바논에서는 이란의 동맹인 시아파 무장집단 헤즈볼라가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다. 사우디는 사드 하리리 총리를 물러나도록 영향력을 행사했지만 그 뒤 하리리는 돌아와 사임을 없던 일로 했다. 해서 사우디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정부를 끌어들였고, 이스라엘은 친이란 무장집단이 시리아에서 발호해 국경 근처까지 이르자 이란을 견제하려는 사우디를 지원하는 야릇한 상황이 벌어졌다. 물론 2015년 이란 핵합의 때 사우디와 이스라엘은 이란의 핵 탑재 능력을 둘러싸고 심각한 의견 대립을 겪긴 했다.중동 지역의 패권 구도는 기본적으로 수니냐 시아냐에 따라 구분된다. 걸프 지역의 아랍에미리트(UAE)와 바레인, 이집트와 요르단까지가 친사우디 진영으로 분류된다. 친이란 캠프에는 알아사드 시리아 정부, 레바논 거점의 헤즈볼라, 이라크의 시아파 정부가 있다. 물론 역설적이게도 이슬람 국가(IS) 격퇴가 다급한 미국 정부는 이라크 의 시아파 정부의 협조가 절실해 좋은 관계를 만들려 애쓰고 있다. 냉전시대에는 미국과 소련이 군사적으로 이 지역에서도 대치해 힘의 균형을 취했지만 이제 이란과 사우디는 다양한 형태의 대리전으로 영향력 확대에 부심하고 있다. 시리아가 대표적인 예이고, 예멘 역시 그렇다. 이란은 또 걸프 해역 운송로를 장악하는 방식으로 근육질을 키우고 있다. 널리 알려진 대로 이곳은 사우디 원유가 수출되는 길목이다. 미국은 최근 들어 이란이 다른 나라 유조선들을 억류하는 일의 배후로 이란을 지목하고 있다.그렇다면 두 나라가 전면전으로 맞붙을 것인가? 아직까지는 대리전에 그치고 있다. 양쪽 모두 전면전을 공언하지 않지만 후티 반군이 사우디 수도나 경제적 타깃을 겨냥한다면 얘기가 달라진다고 방송은 전망했다. 후티 반군이 사우디의 인프라를 계속해서 파괴한다면 두 나라의 반목은 첨예해질 수 밖에 없다. 걸프에서의 해상 충돌뿐만 아니라 더 넓은 국경들에서의 긴장도 높아질 수 있다. 아울러 미국과 서구 열강들은 국제 교역과 원유 수송을 위해서도 걸프의 안정 확보가 긴요해 물길을 막는 이들이 생긴다면 미국 해군과 공군이 개입할 여지가 커질 수 있다고 방송은 결론 내렸다. 임병선 평화연구소 사무국장 bsnim@seoul.co.kr
  • “댓글에 화 났냐고요? 알라가 날 낱낱이 알아 웃음이 나왔어요”

    “댓글에 화 났냐고요? 알라가 날 낱낱이 알아 웃음이 나왔어요”

    “(나에 관한 댓글들을 읽고) 화가 난 것이 아니었어요. 그게 아니라 알라가 날 낱낱이 알고 계시다는 것을 알고 웃음이 나왔어요.” 이 왕비님, 개념 좀 있으신 것 같다. 말레이시아 제6대 파항 술탄(국왕)인 알술탄 압둘라 리아야투딘 알무스타파 빌라 샤 이브니 술탄 아마드 샤 알무스타의 부인인 라자 페르마이수리 아공 왕비 얘기다. 경찰이 지난 11일(이하 현지시간) 라자 페르마이수리 아공(이 긴 이름을 다 써야 하는 모양이다) 왕비를 소셜미디어에서 비하한 이들을 체포했는데 왕비는 국민들의 오해가 많다며 트위터 계정을 다시 살렸다. 왕비는 일간 스트레이트 타임스에 보낸 기고를 통해 “경찰이 이들을 구금했다는 소식에 정말로 당황했다. 오랜 세월 남편이나 나나 우리에게 좋지 않은 얘기를 했다고 누군가를 경찰에 고발해본 적이 없다. 이 나라는 자유 국가“라고 밝혔다. 이어 화가 나고 당황했기 때문에 체포 소식을 듣고는 다시 트위터 계정을 살렸다고 설명했다. 그녀가 트위터 계정을 삭제하는 바람에 비난 댓글에 화가 나서 그런 것이라고 추측들 했는데 순전히 개인적 사정이 있어서였다고 밝혔다. 라자 페르마이수리 아공 왕비는 남편과 자신은 경찰에 자신을 비하한 이들을 체포하라고 요청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수많은 말레이시아 국민들이 그녀에게 이들을 풀어줄 것을 요청했고 게시물을 계속 업뎃했다. 지난 13일 늦은 저녁에도 서부 클랑 시에서 왕비를 공격하는 게시물을 올린 혐의로 파르티 소시알리스 말레이시아(PSM) 당원인 칼리드 이스마스가 체포됐다. 툰쿠 아지자 아미나 마이무나 이스칸다리아 술탄 이스칸다르란 긴 본명을 갖고 있는 그녀는 현재 국가 수반의 아내다. 이 나라는 특이한 입헌군주제를 갖고 있는데 아홉 명의 주정부 통치자가 5년마다 돌아가면서 국왕 직위를 누린다. 왕비는 “내 스스로 경찰이 어떤 조치도 취하지 말도록 알리게 했다. 다시 되풀이하는데 난 그들 때문에 계정을 죽인 것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이스마스를 체포한 것은 1948년 치안법에 따른 것으로 많은 야당, 인권단체 등의 거센 항의를 들었다. 그는 경찰서에서 하룻밤을 보낸 뒤 다음날 보석으로 석방됐다. 라자 페르마이수리 아공 왕비에게 비난 댓글이 쏟아진 것은 지난달 31일 독립 기념일 행사 때 너무 많은 사진을 찍는 데 집착했다는 것이었다. 일간 말레이시아 스타에 따르면 어떤 이는 “어린 아이처럼 굴었다”고 비난했다. 하지만 왕비는 국왕이 자신에게 사진을 찍자고 해 벌어진 일이라고 해명했다. 임병선 기자 bsnim@seoul.co.kr
  • ‘해도 고민 안 해도 고민’…홍콩 무력개입 두고 고민 커진 시진핑

    ‘해도 고민 안 해도 고민’…홍콩 무력개입 두고 고민 커진 시진핑

    홍콩 시위대가 주말마다 중국 국기인 오성홍기를 불태우는 등 반중 성격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자 중국 본토 무력 투입 여부를 두고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고민이 커지고 있다. 홍콩에서 10분 거리인 광둥성 선전에 수천명의 중국 인민해방군 소속 경찰이 대기 중이지만, 미국 등 서구 국가들이 “홍콩에 본토 무장경찰을 투입하지 마라”며 경고해 진퇴양난에 빠졌다. 중국 본토 인력을 투입해 시위를 진압한다면 중국이 홍콩에 약속한 ‘일국양제’(한 나라 두 체제)를 스스로 깨는 것이 돼 자칫 ‘제2의 톈안먼 민주화 운동’으로 번질 수 있다. 그렇다고 홍콩 시위를 이대로 방치한다면 중국 내 소수민족 독립의 도화선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중국 지도부가 고려해야 할 변수가 많아지고 있다. ●무력개입 나서면…홍콩 위상 악화·대만 강한 반발 불가피 13일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 등에 따르면 중국 정부는 지난달 초부터 중순까지 열린 베이다이허 회의(중국의 전·현직 수뇌부 모임) 기간에 수천명의 무장 경찰을 선전에 배치하고 진압 훈련 모습을 공개했다. 이때만 해도 홍콩에 본토 무장병력 진압이 임박한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회의가 끝난 지난달 18일 170여만명이 참가한 홍콩 대규모 주말 시위 뒤 홍콩 특구 정부가 대대적인 체포 작전에 나서면서 홍콩 사태는 본토 개입 없이 마무리됐다. 지난달 24일에는 홍콩 경찰이 물대포 차를 투입하고 실탄 경고 사격을 했다. 지난 1일 시위에는 특공대 ‘랩터스’를 지하철에 투입해 시위자를 체포했다. 주말 시위에 중국을 상징하는 오성홍기가 불태워지는 등 중국의 주권과 자존심을 건드리는 행동이 되풀이돼 중국 지도부로서는 이를 방관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다음달 1일 열릴 신중국 건립 70주년 행사 때까지도 홍콩인들이 중국의 통치를 거부하는 시위를 하도록 내버려 둔다는 것은 정치적으로 부담이 클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해서 중국 본토 무력을 투입해 홍콩 사태를 진압하기에는 잃는 게 너무도 많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홍콩 문제를 미중 무역전쟁과 연계시켰고 영국 등 서구 국가들도 ‘범죄인인도법안’(송환법)에 반대하는 홍콩인들의 시위를 지지하고 있어서다. 중국 정부가 이를 무시하고 본토의 무장병력을 투입해 홍콩 사태를 마무리한다면 중국과 홍콩의 대외 신뢰도는 급전직하할 것으로 보인다. 아시아 금융 중심지로서 홍콩의 기능도 약해질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는 미중 무역전쟁으로 어려움이 큰 중국 경제에 큰 타격을 줄 수도 있다. 여기에 중국 본토 무력 개입으로 유혈 사태라도 벌어지면 30여년 전 톈안먼 사태로 번질 우려도 생겨난다. 중국 지도부는 10월 신중국 건립 70주년 행사 전에 홍콩 문제를 매듭짓고 싶어 하지만, 본토 무력 개입이 자칫 중국 지도부에 엄청난 타격을 줄 수 있다는 점 역시 잘 알고 있다. 홍콩 사태가 진전되지 않는다면 중국은 ‘덩샤오핑 어록’과 ‘홍콩 기본법’ 등 명분을 내세워 무력 진압에 나서겠지만 국제사회의 비난과 상당기간 경제 후퇴를 각오해야 한다. 특히 중국이 홍콩 문제에 무력으로 개입한다면 대만과의 관계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된다. 홍콩 시민들의 거센 저항의 배경에는 마땅히 보장받아야 할 고도의 자치권이 중국 정부의 부당한 간섭으로 서서히 잠식당하고 있다는 반감이 자리 잡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홍콩에 본토 병력이 들어가게 된다면 대만은 중국이 ‘일국양제’ 약속을 사실상 포기했다고 보고 중국과의 통일 논의 자체를 공식 거부할 공산이 크다. 언젠가는 대만에도 중국 본토 군대가 들어올 수 있다고 판단할 것이기 때문이다. 홍콩 무력개입을 고리삼아 홍콩과 대만, 마카오가 반중전선으로 연대해 중국 정부에 맞서게 되는 최악의 시나리오도 생각할 수 있다. ●무력개입 안 하면…소수민족들 자치권 확대 움직임 생겨날 수도 그렇다고 중국이 홍콩에 대한 무력개입을 무조건 포기할 수도 없는 상황이다. 시 주석의 입장에서는 “우리는 중국인이 아니다”라는 이들의 주장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일국양제는 덩샤오핑 시대에 정립됐다. ‘한 개의 국가, 두 개의 제도’를 뜻하는 ‘일개국가양개제도’(一個國家兩個制度)의 줄임말이다. 홍콩과 마카오, 대만에 대한 중국 중앙정부의 기본 방침이기도 하다. 중국의 일부인 특별행정구로 편입하되 본토의 사회주의와 달리 기존 자본주의 제도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등 고도의 자치권을 부여하는 것을 핵심으로 한다. 1979년 1월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명의로 발표된 ‘대만 동포에게 고함’에서부터 시작됐다. 중국은 여기서 대만과 군사적 대립을 종결하고 대화에 나서자고 촉구하면서 대만의 현 상태를 존중해 합리적 통일 방안을 찾자고 제안했다. 1981년 예젠잉 전인대 상무위원장은 담화를 발표해 “통일이 이뤄지면 대만은 특별행정구가 되고 고도의 자치권을 누리 수 있다”고 언급했다. 이듬해인 1982년 최고 지도자인 덩샤오핑도 직접 ‘일개국가양개제도’라는 표현을 쓰면서 일국양제 개념을 완성했다. 애초 일국양제는 대만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개념이지만 실제 적용은 각각 1997년과 1999년 영국과 포르투갈로부터 반환받은 홍콩과 마카오에서 먼저 시작됐다. 만약 홍콩 시위에서 홍콩인들이 승리한다면 중국 본토의 위구르, 티벳, 몽골 등 자치구 지역에서도 이에 자극받아 “우리에게도 보다 많은 자치권을 달라”고 요구할 수 있다. 그간 힘으로 눌러놓은 이들의 목소리가 봇물 터지듯 분출되면 홍콩뿐 아니라 중국 내 수많은 민족의 독립요구에 모두 대응해야 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 아랍국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에 왜 침묵하나

    아랍국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에 왜 침묵하나

    아랍의 봄·IS와의 전쟁에 골몰이스라엘과 대(對)이란 전선 구축트럼프-네타냐후 밀월 가속화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가 총선을 일주일 앞둔 10일(현지시간) 요르단 계곡에 대한 이스라엘의 통치권을 확대하겠다고 맹세했다. 과거였다면 아랍 세계가 분노했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태도의 변화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네타냐후 총리가 극우파의 표를 결집하려는 목적으로 강경한 발언을 이어나갔지만 이미 너무 늦었다는 판단에서다. 게다가 이스라엘은 이미 요르단 계곡 지역을 사실상 장악하고 있다. 팔레스타인이 이 지역에 대해 과거보다 열정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도 또 다른 이유로 꼽힌다. 팔레스타인 기자인 다우드 쿠탑은 알자지라와의 인터뷰에서 “물론 아랍 국가들이 신경을 쓰긴 한다”면서도 “그렇다고 그들이 병력을 배치할 것인가 하면 그렇지 않다. (이스라엘의 우방인) 미국 은행에 예치된 그들의 현금을 찾아가지도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네타냐후 총리의 발언은 이미 많은 아랍국가가 팔레스타인 관련 정책들을 우선순위에서 밀어낸 후에 나왔다. 이집트와 시리아, 예맨, 이라크 등 아랍 국가들은 민주화 운동인 ‘아랍의 봄’ 이후 후폭풍을 겪고 있거나 수니파 무장단체인 ‘이슬람국가’(IS)와의 싸움에 골몰하고 있다. 한때 팔레스타인을 강력히 지지했던 사우디아라비아 등 페르시아만에 있는 국가들도 이스라엘과 함께 이란에 대해 더 걱정하는 입장이다. 브루킹스 연구소의 칼레드 엘긴디 연구원은 “팔레스타인 문제는 이미 아젠다에서 멀어졌다”고 알자지라와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한편으로는 아랍 국가의 정상들이 네타냐후 총리에게 대적할 수 없어서 그의 발언을 비난하는 걸 피한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엘긴디는 “아랍 국가가 정부 차원에서 네타냐후의 발언에 대해 ‘우리는 이에 반대한다. 이것은 끔찍하다’라고 말하는 순간 국민들의 기대감이 높아진다”고 설명했다. 아랍 국가의 사람들이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여전히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해 공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예외도 있다. 이스라엘과 평화 조약을 맺긴 했으나 네타냐후 총리가 언급한 지역에서 멀지 않은 곳에 영토를 가진 요르단이다. 네타냐후 총리의 강경 발언 직후 아이마 사파디 요르단 외무장관은 트위터를 통해 “평화를 위한 모든 노력을 저해하는 심각한 일”이라면서 “더 많은 폭력과 갈등을 불러일으킬 것”이라고 말했다.이런 상황의 가장 큰 역할을 한 건 무엇보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다. 역대 미국 대통령들은 이스라엘을 지지하면서도 팔레스타인 정상과 만나는 등 분쟁지역에서의 공정성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은 팔레스타인 지도자들과 단 한 차례의 만남도 갖지 않았으며 오히려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의 워싱턴 사무소 폐쇄를 명령하기까지 했다. 이스라엘의 네타냐후 총리와는 그 어떤 국가의 정상보다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인정하며 미국 대사관도 그곳으로 옮겼다. 네타냐후 총리가 언급한 요르단 계곡은 1967년 이스라엘이 점령한 요르단 강 서쪽에 있는 영토다. 이스라엘 권리 단체인 베첼렘(B’Tselem)에 따르면 이 지역은 현재 1만 1000명의 이스라엘인과 6만 5000명의 팔레스타인인이 살고 있다. 90%의 영토가 이미 이스라엘의 행정·군사 통제를 받고 있으며 팔레스타인인들은 85%의 영토에 들어가는 것이 금지돼 있다. 민나리 기자 mnin1082@seoul.co.kr
  • 합참 “北 미상의 발사체 두 발” 최선희 “하순에 실무협상 용의” 다음날

    합참 “北 미상의 발사체 두 발” 최선희 “하순에 실무협상 용의” 다음날

    합동참모본부는 10일 “북한이 오늘 오전 평안남도 내륙에서 동쪽 방향으로 미상 발사체를 2회 발사했다”고 밝혔다.  합참은 “우리 군은 추가발사에 대비하여 관련 동향을 추적 감시하면서 대비태세를 유지하고 있다”고 전했다.  북한이 발사체를 쏜 건 지난달 24일 함경남도에서 동해상으로 ‘초대형 방사포’(다연장 로켓)를 발사한 지 17일 만으로, 올해 들어서는 벌써 10번째다. 아직 이번 발사체의 탄종은 확인되지 않았지만, 북한이 지난 7월 이후 잇따라 선보인 대구경 방사포이거나 ‘북한판 에이태킴스’로 불리는 신형 단거리 탄도미사일일 가능성이 거론된다.  ‘북한판 이스칸데르‘로 불리는 ‘KN-23’ 단거리 탄도미사일은 내륙을 가로지르는 시험발사를 마쳤다. 북한은 그동안 KN-23을 최소 다섯 차례 발사했고, 지난 7월 31일과 지난달 2일에는 ‘신형 대구경조종방사포’(다연장 로켓)라고 규정한 발사체를 발사했다. 이어 지난달 10일과 16일에는 ‘북한판 에이태킴스’로 불리는 신형 단거리 탄도미사일을 발사한 데 이어 같은 달 24일 ‘초대형 방사포‘라고 명명한 신형무기를 시험 발사했다.  그런데 10일 미상의 발사체 발사는 최선희 외무성 제1 부상이 미국과 비핵화 실무협상을 이달 하순에 할 의향이 있다며 미국에 ‘새로운 계산법’을 들고 나올 것을 요구한 바로 다음날이어서 더욱 주목된다. 최 부상은 전날 발표한 담화를 통해 “우리는 9월 하순경 합의되는 시간과 장소에서 미국측과 마주 앉아 지금까지 우리가 논의해온 문제들을 포괄적으로 토의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고 조선중앙통신이 보도했다.  최 부상은 “나는 미국측이 조미(북미) 쌍방의 이해관계에 다 같이 부응하며 우리에게 접수 가능한 계산법에 기초한 대안을 가지고 나올 것이라고 믿고 싶다”고 말했다.  이어 “만일 미국측이 어렵게 열리게 되는 조미실무협상에서 새로운 계산법과 인연이 없는 낡은 각본을 또다시 만지작거린다면 조미 사이의 거래는 그것으로 막을 내리게 될 수도 있다”고 강조했다.  최 부상은 또 “김정은 국무위원회 위원장 동지께서는 지난 4월 역사적인 시정연설에서 미국이 지금의 계산법을 접고 새로운 계산법을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서는 것이 필요하며 올해 말까지 인내심을 갖고 미국의 용단을 기다려볼 것이라는 입장을 천명하시었다”면서 “나는 그사이 미국이 우리와 공유할 수 있는 계산법을 찾기 위한 충분한 시간을 가졌으리라고 본다”고 말했다.  김동엽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는 “한미 연합훈련도 끝났고 북한도 북미 대화를 재개하려는 시점에 이렇게 무언가를 쏘아대면 과연 누가 북한의 진정성을 믿을 수 있을 것인가” 싶다며 “북한을 과대평가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북한도 그 정도는 생각하고 계산하고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북한의 신형 무기 개발이 시기적으로 한미 연합훈련만에 국한된 맞대응이 아니라 우리의 군비 증강에 따른 북한의 무기 현대화이자 자위를 위한 정상적 통치행위이고 최선희 담화에서 밝힌 북미대화 재개와는 무관하게 미국이 만들어 놓은 틀이 아니라 자신의 계획대로 당당히 마이웨이를 간다는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그동안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처럼 미국 본토를 위협하는 미사일이 아니라면 크게 문제 될 게 없다는 반응을 보여왔다. 하지만 북한이 지난 5월부터 아홉 차례에 걸쳐 발사한 단거리 탄도 미사일급 발사체는 모두 신형무기로 추정되고 고체 연료, 이동식발사대(TEL) 등을 기반으로 하고 있어 기동성과 은밀성이 대폭 강화됐다. 사거리도 250∼600㎞로, 평택 주한미군 기지에서 육·해·공군 3군 통합기지인 충남 계룡대, F-35A 스텔스 전투기의 모기지인 청주 공군기지, 경북 성주 사드 기지 등이 모두 타격 범위 안에 들어간다.  임병선 평화연구소 사무국장 bsnim@seoul.co.kr
  • 37년 철권 통치 무가베 전 짐바브웨 대통령, 95세 일기로 사망

    37년 철권 통치 무가베 전 짐바브웨 대통령, 95세 일기로 사망

    37년 동안 독재 권력을 휘둘렀던 로베르트 무가베 짐바브웨 전 대통령이 95세 일기로 눈을 감았다. 무가베 전 대통령 가족들이 그의 죽음을 확인했다고 6일 영국 BBC에 털어놓았다. 파드자이 마헤레 짐바브웨 교육부 장관이 트위터에 “로베르트 무가베여 영원한 안식을”이라고 적었다. 1924년 2월 21일 지금의 로디지아에서 태어난 그는 1964년 로디지아 정부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재판 없이 수감돼 10년 이상 복무했다. 수감 중이던 1973년 짐바브웨 아프리칸 내셔널 유니언(ZANU) 의장으로 선출됐는데 창당 발기인이기도 했다. 그는 독립 이후 처음 치러진 1980년 선거를 통해 총리로 선출됐으나 스스로 총리 직을 없애고 1987년 대통령에 취임했다. 집권 초기에는 흑인들의 건강과 교육 접근권을 넓혀 좋은 평가를 들었다. 하지만 보수적인 토지 개혁 프로그램 때문에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말년에는 권한 남용과 부패로 이름을 더럽혔다. 짐바브웨 독립 후 첫 대통령에 취임했던 그는 지난 2017년 11월에 군사 쿠테타에 의해 쫓겨났다. 무가베는 퇴임하기 얼마 전까지도 여러 나라를 치료 차 찾은 적이 많았으며 최근 두 달 동안은 싱가포르에 머물러왔다. 그의 재임 중 정부 관리들은 그가 눈이 좋지 않아 치료가 필요하며 암에 걸렸다는 소문을 부인했다. 에머슨 음낭가그와(76) 현 대통령은 지난 7월 부정 논란으로 얼룩진 대통령 선거에 당선돼 무가베의 권력을 승계했는데 “지극한 슬픔”을 느낀다며 고인을 “짐바브웨 건국의 아버지”와 “해방의 아이콘”이라고 적었다. 사실 음낭가그와 대통령은 무가베를 축출한 쿠데타 주역이었으며 중국 정부의 후원을 등에 업고 있는 것으로 공공연히 알려져 있다. 무가베의 젊은 부인 그레이스(54)와는 후계자 싸움을 벌였는데 그레이스는 사치벽으로 국민감정이 좋지 않아 밀렸다. 무가베 부부는 지난해 7월 대선 투표소에 나란히 나타나 눈길을 끌기도 했다. 임병선 기자 bsnim@seoul.co.kr
  • 북한 매체, 이영훈 ‘반일종족주의’ 비난… “친일 역적 단호히 징벌해야”

    북한 매체, 이영훈 ‘반일종족주의’ 비난… “친일 역적 단호히 징벌해야”

    북한 선전매체 우리민족끼리가 6일 이영훈 전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등이 집필한 ‘반일종족주의’를 비난하며 “매국도서를 출판한 친일역적들을 민족의 이름으로 단호히 징벌해야 한다”고 했다. 우리민족끼리는 이날 ‘단호히 징벌해야 할 추악한 친일역적들’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최근 남조선(남한)에서 친일분자들이 일제의 식민지 지배 역사를 날조한 도서 ‘반일종족주의’를 출판한 것이 커다란 물의를 일으키고 있다”며 “지난 7월에 발간된 도서 ‘반일종족주의’는 일제가 강제징용, 성노예, 쇠말뚝 등 우리 민족에게 들씌운 죄악을 전면부정하고 일제의 ‘식민지근대화론’을 정당화한 매국도서”라고 소개했다. 이어 “매국도서출판에 가담한 자들이야말로 섬나라 오랑캐들의 피가 뼈속까지 들어찬 매국노들이 틀림없으며 온 민족의 이름으로 하루빨리 능지처참해버려야 할 추악한 친일역적들”이라며 “과거 일제 식민지 통치 시기 창씨개명하고 친일매문으로 더러운 목숨을 부지한 추악한 민족반역자들의 후예들이 아직까지도 활개치고 있는 것은 남조선 사회의 비극이며 민족의 수치”라고 원색 비난했다. 매체는 “바로 이런 역적 무리들이 길잡이 역할을 놀고 있기에 일본 반동들이 더욱 기고만장하여 남조선에 대한 경제침략을 단행하고 저들의 과거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는 망발을 함부로 내뱉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매체는 “문제는 이러한 친일매국의 독버섯들이 민족의 존엄과 이익을 섬나라 족속들과 같은 외세에 팔아먹으며 재집권 야망을 추구하는 보수세력이라는 썩은 서식지에서 자라고 있는 것”이라며 “친일매국노들이 활보하고 있는 남조선의 현실은 친일매국과 보수는 쌍둥이이며 일본의 만고 죄악에 대한 철저한 사죄와 배상을 받아내기 위해서는 보수패당을 완전히 매장해버려야 한다는 것을 똑똑히 보여주고 있다”고 주장했다. ‘반일종족주의’는 지난 7월 10일 출간됐으며,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가 지난달 페이스북에 “구역질 나는 책”이라고 비난하면서 화제에 올랐다. 이후 ‘반일종족주의’는 교보문고 지난달 2~4주차 베스트셀러 순위에서 3주 연속 1위에 올랐으며, 5주차에는 5위로 하락했다. ‘반일종족주의’ 집필자들은 책 소개에서 “아무런 사실적 근거 없이 거짓말로 쌓아올린 샤머니즘적 세계관의, 친일은 악(惡)이고 반일은 선(善)이며 이웃 나라 중 일본만 악의 종족으로 감각하는 종족주의. 이 반일 종족주의의 기원, 형성, 확산, 맹위의 전 과정을 국민에게 고발하고 그 위험성을 경계하기 위한 바른 역사서”라고 표방했다. 하지만 일제의 강제징용과 식량수탈, 일본군 위안부를 부정하고 한국의 독도 영유권 주장에 대해서도 학술적 근거가 부족하다는 주장을 담아 논란이 됐다. 박기석 기자 kisukpark@seoul.co.kr
  • [사설] 홍콩 송환법 철회, 성숙한 민주주의 거름 되길

    홍콩 행정수반인 캐리 람 행정장관이 그제 송환법 공식 철회를 발표했다. 이 소식에 미국, 유럽의 주요 증시가 상승 마감했고, 미중은 다음달 워싱턴에서 고위급 무역 협상을 재개하기로 어제 합의했다. 2014년 행정장관 직선제를 요구한 78일간의 ‘우산혁명’은 실패했지만, 홍콩 시민들은 이번 ‘제2차 우산혁명’에서는 88일째 시위 만에 기념비적인 결실을 거뒀다. 지난 6월 9일부터 송환법 반대 시위가 계속되면서 중국은 인민해방군 소속 수천명의 무장경찰을 홍콩과 차로 10분 거리인 선전에 배치해 무력 투입을 위협하고 홍콩 주둔군 교체 작업을 통해 긴장감을 조성했다. 미국 등 서방세계는 강경 진압이 이뤄질 경우 제2의 톈안먼 사태가 될 것이라며 중국을 압박했고, 홍콩 시민들은 지난 2일부터 총파업(罷工), 동맹휴업(罷課), 철시(罷市·불매운동) 등 ‘3파 투쟁’으로 맞섰다. 송환법 철회는 시위대의 5대 요구 사항 중 첫 번째 요구 사항에 불과해 앞으로 사태가 끝날 것으로 단언하기는 어렵다. 시위대는 경찰의 강경 진압에 대한 독립적 조사, 시위대 ‘폭도’ 규정 철회, 체포된 시위대의 조건 없는 석방 및 불기소, 행정장관 직선제 실시 등도 촉구하고 있다. 중국은 155년간 영국이 통치하던 홍콩을 1997년 넘겨받으면서 홍콩의 자본주의 경제체제와 민주주의 정치체제를 50년간 유지한다는 일국양제를 약속했다. 일국양제로 홍콩은 여전히 아시아의 금융 중심지로 남아 있고, 이는 중국 경제에도 도움이 된다. 홍콩이 중국 본토와 조화롭게 공존해야 하는 이유다. 홍콩 행정 당국과 중국 정부는 이번 송환법 반대 시위를 성숙한 민주주의를 향한 계기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래야 다음달 1일 시진핑 지도부 집권 2기의 발판이 될 신중국 건국 70주년 행사가 세계의 축하를 받는 자리가 될 것이다.
  • 초심 잃고 녹슬어 버린 ‘홍콩판 철의 여인’

    초심 잃고 녹슬어 버린 ‘홍콩판 철의 여인’

    英통치 상징 건축물 철거 지휘로 中 호감 우산혁명 저지하며 첫 여성 행정장관에 정치 경력서 한 번도 물러선 적 없던 전사 “사퇴하고 싶다” 녹취로 中 신뢰 금간 듯홍콩 정부가 ‘범죄인인도법안’(송환법) 공식 철회를 선언하면서 수백만명이 참가한 홍콩 시위를 촉발시킨 주인공 캐리 람 홍콩 행정장관의 생애와 거취에 관심이 모인다. 4일 블룸버그통신 등에 따르면 1957년생인 람 장관은 중국 저장성에서 이주한 홍콩 완차이의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홍콩대를 졸업하고 1980년 홍콩 행정청에서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다. 2007년 홍콩 개발국장이 된 뒤 영국 식민 통치를 상징하는 건축물 ‘퀸스피어’ 철거 작업을 진두지휘했다. 당시 영국 시절을 그리워하며 철거를 반대하던 시민들의 항의에 단호하게 대처해 ‘전사’로 불렸다. 이때부터 중국 정부의 호감을 얻기 시작했다. 2011년 홍콩 외곽 신카이 지역에 산재한 불법 건축 주택을 정비해 행정 능력을 인정받았다. 2012년 4대 행정장관 렁춘잉은 그를 홍콩 정부의 2인자인 정무사장(정무부총리)으로 발탁했다. 세계 언론에 이름을 드러낸 것은 2014년 홍콩 민주화 시위 때부터다. 시민들은 홍콩 행정장관 후보를 친중국 인사로 제한한 것에 반발해 금융 중심지인 센트럴 지구를 점령하고 ‘우산혁명’을 일으켰다. 그는 강경대응 원칙을 고수해 79일 만에 시위대를 강제 해산했고 행정장관 선출 방식 변경 요구도 거부했다. 중국 정부는 우산혁명 진압 실적을 인정해 그를 차기 홍콩 행정장관으로 낙점했다. 2017년 치러진 5대 홍콩 행정장관 선거에서 전체 1194표 가운데 777표를 얻어 첫 여성 행정장관에 올랐다. 람 장관은 ‘홍콩판 철의 여인’이라는 별명답게 수많은 정치 투쟁에서 단 한 번도 물러나지 않았다. 하지만 행정장관으로서 송환법의 부작용을 두려워하는 홍콩 시민들의 생각을 읽지 못해 사태를 키웠다는 비판을 받았다. 지난달 말 홍콩 시위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지자 그는 기자회견을 통해 “정부는 폭력과 혼란을 멈출 수 있는 모든 법규를 검토할 책임이 있다”며 계엄령에 준하는 긴급조치에 나설 수 있음을 시사했다. 하지만 로이터통신은 람 장관이 최근 홍콩 기업인들과 만나 나눈 대화 내용을 녹음한 파일을 입수해 보도했다. 그는 “행정수반으로서 홍콩에 엄청난 혼란을 초래한 것은 용서할 수 없는 일”이라며 “내게 선택권이 있다면 (홍콩 시민에게) 깊이 사과하고 (직을) 그만두는 것”이라고 말했다. 시위대와 강대강 대치로 맞서던 모습과 반대로 송환법 강행에 대한 부담감을 솔직하게 토로한 것이다. 이후 ‘그가 중국과 거리를 두려고 한다’는 의심이 퍼지면서 베이징과의 신뢰에도 금이 간 것으로 보인다.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 “김정은, 드골 이상 강력한 대통령으로” “김일성도 없던 권한까지”

    “김정은, 드골 이상 강력한 대통령으로” “김일성도 없던 권한까지”

    북한이 김정은 위원장이 불참한 가운데 지난 29일 최고인민회의 제14기 제2차 회의를 통해 지난 4월 개정한 헌법을 부분적으로 손질했다. 김동엽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는 “(북한 매체들이) 수정 보충했다고 보도했다. 개정이 아니다”라고 강조하고 “북한이 4개월여 만에 최고인민회의를 개최해 헌법을 수정보완한 것은 결국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강력한 권능을 지닌 대통령(?) 만들기의 종결편이라고 얘기할 수 있다”고 정리했다. 김 교수는 국무위원장은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거에 의해 뽑히지 않는다는 것이 첫 번째 골자이고, 국무위원장의 법령 공포권과 대사 임면권을 추가하고 국무위원회의 임무와 권한을 확대한 것이 두 번째 골자라고 지적했다. 국무위원장이 대의원이 되면 최고상임위원장과의 상하 관계에 모순이기도 하고 인민 전체를 대표하는 최고인민회의에서 선거를 통해 선출하는 국무위원장을 일개 선거구 대의원으로 다시 선거한다는 것도 비정상이라고 본 것이다. 또 국무위원회 위원장은 최고인민회의 법령, 국무위원회 중요정령과 결정을 공포한다고 명시하고 있어 행정과 입법 위에 군림하는 국무위원장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하겠다고 김 교수는 지적했다. 기존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가 가지고 있던 대사 임면 권한을 국무위원장이 갖게 돼 국무위원장의 외교 활동의 비중이 더 커질 가능성이 있다. 이번 수정보충은 지난 4월 개정헌법 이후 추가적으로 변경된 것이라기보다 4월 개정 때 빠진 것이나 보충 설명이 필요한 부분을 보완했다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는 지적이다. 김 교수는 나아가 유일 영도체제 강화, 대의원 겸직 금지로 김 위원장은 정상 국가의 정상적인 지도자상, 어쩌면 박정희, 드골과 같은 강력한 대통령 중심제 이상의 지도자 위상을 갖게 됐다고 봐야 할 것 같다고 분석했다. 김정은 통치 체제를 확고히 하는 측면도 있겠지만 지난 하노이 회담 노딜 이후 손상을 입은 통치력을 정상화하고 북미협상을 앞두고 대외적으로 흔들리지 않는 모습과 미국의 의도대로 되지는 않을 것이란 당당함을 드러내 보인 것이라고 확대 해석할 수도 있다고 김 교수는 덧붙였다.이에 반해 정성장 세종연구소 연구기획본부장은 “헌법을 다시 개정했다”면서 지난 3월 10일에 실시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조부 김일성 및 부친 김정일과 다르게 대의원으로 추대되지 않아 북한 정권 수립 이후 최고지도자가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직을 맡지 않은 첫 사례가 된 것을 사후적으로 정당화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봤다. 김정은이 노동당 위원장, 국무위원회 위원장, 인민군 최고사령관 등 당과 국가, 군대의 핵심 직책을 다 누리는 상황에 굳이 명예직 성격이 강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직까지 겸직할 필요가 없다는 판단을 내렸을 것으로 짐작된다고 했다. 또 최룡해가 국무위원회 위원장은 “최고인민회의 법령, 국무위원회 중요 정령과 결정을 공포한다”는 내용과 “다른 나라에 주재하는 외교대표를 임명 또는 소환한다”는 내용을 보충했다고 밝힌 것은 1972년 김일성 시대 공화국 주석의 임무와 권한에 더 가까워진 것으로 보인다고 정 본부장은 지적했다. 북한이 이번에 1972년 헌법도 공화국 주석에게 부여하지 않았던 ‘외교대표(대사와 공사)의 임명 및 소환’ 권한까지 국무위원회 위원장에게 부여한 것은 김정은 위원장이 앞으로 외국에 주재하는 북한 대표의 임명 및 소환까지 직접 챙기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북한이 ‘국무위원회 위원장’과 ‘국무위원회’의 위상 및 권한을 대폭 강화한 것은 외교와 경제, 국방, 교육 등 나랏일을 더욱 적극적으로 챙기겠다는 김 위원장의 의중을 반영하는 것으로 해석된다고 정 본부장은 결론 내렸다. 그런데 김 위원장이 집권 이후 지금까지 당중앙위원회 정치국 회의,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 당중앙군사위원회 회의는 여러 차례 개최했지만 단 한 번도 국무위원회 회의를 개최한 적이 없어서 국무위원회가 앞으로 얼마나 실질적인 정책결정기구 역할을 할지 의문이라면서 역시나 비핵화 협상에 얼마나 적극적으로 나설지도 예측하기 어렵다고 진단했다. 임병선 평화연구소 사무국장 bsnim@seoul.co.kr
  • 이인영 “조국 가족 증인 채택 ‘패륜적 행위’…수용 불가”

    이인영 “조국 가족 증인 채택 ‘패륜적 행위’…수용 불가”

    이인영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는 29일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 딸, 부인 등 가족 인사청문회 증인 채택에 대해 “결코 수용할 수 없다”고 밝혔다. 또 조 후보자에 대해서는 “법무부 장관으로서 비대해진 검찰 권력을 개혁하고 분산하고 민주적 통제 범위로 돌려놓는데 적임자”라고 추켜세웠다. 이 원내대표는 이날 국회에서 열린 정책조정회의와 KBS라디오 인터뷰에서 “조 후보자를 둘러싸고 정서적 괴리감, 박탈감, 상실감이 확산된 것도 사실로 청문회 과정에서 가짜뉴스나 의혹 부풀리기로 이뤄진 부분은 후보 스스로가 설명하고 해명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조 후보자 의혹과 관련한 최근 검찰의 압수수색에 대해 “정치적 중립을 훼손하는 행위가 반복되면 검찰 개혁에 대한 국민적 요구가 거세질 것”이라며 “특히 압수수색 하루 만에 압수 정보가 언론에 흘러나간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이 어렵다”고 비판했다. 그는 자유한국당에서 청문회 보이콧을 거론한 데 대해서는 “21번째 보이콧 시도가 될까 걱정이다. 역대급 수치”라며 “자신들이 고발해놓고 그 수사를 핑계로 청문회를 보이콧한다니 어처구니 없다. 모순이고 비겁한 행위”라고 비판했다. 이어 “어떤 의혹도 확인되지 않았는데 한국당이 특검을 운운하는 것은 청문회를 깨겠다는 의도”라며 “국정조사와 특검을 만병통치약처럼 꺼내는 한국당의 악습을 끝내야 한다. 조속히 청문회를 열어 진실을 밝히라는 것이 국민의 요구”라고 강조했다. 이 원내대표는 특히 조 후보자 가족에 대한 한국당의 청문회 증인 채택 추진에 “패륜적 행위”, “반인륜적 행위”라고 강력 비판하고 “결코 수용할 수 없다”고 못 박았다. 정현용 기자 junghy77@seoul.co.kr
  • [손성진 칼럼] 조국이란 시험대 앞에 선 윤석열

    [손성진 칼럼] 조국이란 시험대 앞에 선 윤석열

    검찰이 정의를 포기했다고 생각한 것은 최근의 인사 때문이었다. 살아 있는 권력, 현 정권에 대한 수사를 맡았던 검사들이 여럿 좌천당한 인사다. 1차 인사권자인 윤석열 검찰총장은 ‘합리적인 인사’라고 항변했지만 70명 가까운 검사들의 사표를 부른 이 인사의 정당성을 믿어 줄 사람은 많지 않았다. 비슷해 보여도 인간에게 능력의 차이는 있고 검찰 조직도 마찬가지다. 능력 있는 사람을 잘 가려내서 중용하고 리더로 키워야 조직이 발전하는 것은 공조직이나 사기업이나 다를 수 없다. 여태까지 어느 정권에서든 검찰이 ‘정치 검찰’, ‘정권의 충견(忠犬)’이라는 오명을 벗지 못한 것은 정권의 입맛에 맞는 하명 수사를 하고 코드 인사를 했기 때문이다. 우파나 좌파나 조금도 다를 게 없이 매한가지였다. 정치권력의 검찰인사 개입은 ‘우병우 사단’이란 말에서 보듯 박근혜 정권에서 최고조에 이르렀다. 정의를 최고의 가치로 외치는 문재인 정부에 일말의 기대를 했던 건 전 정권에 대한 실망감이 컸기 때문이기도 했다. 다만 그 기대가 반신반의에 그친 것은 문 정부만큼 정의를 강조한 노무현 정부도 검찰을 통치에 이용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켰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역시나 문 정부도 그 길로 가고 있다. 검사들은 “능력과 실적, 신망에 따라 인사가 이뤄진다는 신뢰가 엷어졌다”는 말을 남기고 검찰을 떠났다. 기업으로 치면 능력, 실력보다 오너와의 돈독한 친분을 중시하는 인사를 하는 기업에 미래를 바라보고 남아 있을 사람은 없다. 유능한 구성원을 그렇게 몰아내는 기업이 성공할 리 만무하다. 일본 도쿄지검 특수부가 세계 검찰 중에서 최고의 명성을 자랑하는 것은 정권과의 야합을 거부하고 명실공히 아무도 건드리지 못하는 독립성을 유지하기 때문이다. 1976년 ‘록히드 사건’에서 뇌물을 받은 다나카 가쿠에이 전 총리를 구속하고 1992년 일본 최대의 정치 스캔들인 ‘리크루트 사건’을 파헤치면서 도쿄지검 특수부는 “거악(巨惡)이 잠들지 못하게 하라”는 자신들의 모토를 실천해 나갔다. 취임 후 ‘총장 1호 지시’가 도쿄지검에서 차용한 ‘특별공판팀’ 설치인 것을 보면 특수통이자 ‘보기 드문 칼잡이’라는 평을 듣는 윤 총장은 도쿄지검 특수부의 강골 정신을 본받겠다는 의지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국정원 댓글 사건’ 수사의 인사 피해자인 윤 총장은 비슷한 과오를 저지르면서 이미 스스로 흠결을 내버린 상태다. 그런 윤석열이 청와대도 놀라게 할 정도로 전광석화처럼 조국을 향해 칼을 빼 들었다. 겉으로는 시퍼런 권력에 대항하는 모양새를 갖췄다. 자신은 권력과 이념에 무관하게 오직 정의만을 생각하며 불법을 파헤치는 검사임을 보여 주겠다고 다짐한 것일까. 하지만 ‘용두사미가 될 것’이라거나 ‘면죄부를 줄 것’이라는 선입견적인 악담이 나돌고 있다. 그래도 또 한번 ‘일말의 기대’가 일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조국에 대한 수사는 문 대통령에게는 속으론 싫더라도 “이것이 정의다”라는 것을 국민 앞에 보여 줄 기회이기도 하고, 윤 총장에게는 ‘검사 윤석열’의 가치를 되찾을 시험대이기도 하다. 이 마당에서도 조국은 자신의 잘잘못에 대한 시인이나 사과 없이 검찰 개혁을 언급하고 있다. 검찰 개혁의 핵심은 ‘정권으로부터의 독립’, ‘불편부당(不偏不黨)한 수사’ 아니던가. 조국은 개인의 과실을 떠나 과도한 정치색을 띰으로써 개혁에 적합한 인물에서 멀어져 버렸다. 청문회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모르지만 문 대통령이 조국의 임명을 강행한들 취임도 하기 전에 개혁의 동력을 반쯤 상실한 채 무슨 개혁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정치권력, 정파적 이해관계와는 결별하고 오직 법률에 의한 수사만을 한다면 설령 어떤 수사 결과가 나오더라도 검사 윤석열의 일생에 지우기 어려운 오점으로 남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섣부른 편견과 여론 재판 또한 경계해야 할 대상이다. 만약 문 대통령이 조국을 법무부 장관에 임명한 후에 윤석열 검찰이 불법 행위를 파헤쳐서 그를 법정에 세우는 일이 벌어진다면 그 자체가 검찰 개혁의 시발점, 검찰의 역사적 전환점이 될 수 있다. 칼잡이 윤석열은 ‘조자룡의 헌 칼’에 머물 것인가, 아니면 ‘관우의 청룡언월도’를 보여 줄 것인가. 살아 있는 권력보다 부릅 뜬 국민의 눈이 더 무서움을 알기 바란다. 이번에도 끝내 명백한 불법, 불의마저 외면한다면 검찰에 대한 희망은 앞으로 영원히 접어야 한다. sonsj@seoul.co.kr
  • 北 오늘 2차 최고인민회의… 김정은, ‘북미 협상’ 메시지 내놓나

    한미 훈련 끝나 협상 발표 가능성 커 경제 정책 입법·국방력 선전 전망도 전문가 “북미 합의 상황 새달초 협상” 북미 실무 협상 재개가 지연되는 가운데 29일 평양에서 열리는 북한 최고인민회의(한국의 국회 격) 제14기 2차 회의가 비핵화 대화의 변곡점이 될지 관심이 쏠린다. 이번 회의가 북한이 비핵화 대화 지연의 ‘구실’로 내세웠던 한미연합훈련 직후 열린다는 점에서 북미·남북관계 등 대외정책 방향에 대한 발표가 있을 수 있다는 관측이 조심스럽게 제기된다. 이번 회의는 지난 4월 11~12일 이후 불과 4개월여 만에 다시 열린다. 최고인민회의가 한 해 두 번 소집되는 것은 흔한 일은 아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집권 이후 두 번 열린 것은 2012년과 2014년뿐이었다. 북한은 김 위원장 집권 이후 중요 결정들을 최고인민회의에서 확정·공포했다. 지난 4월 1차 회의에서는 헌법을 개정해 김 위원장을 국무위원장으로 재추대하고 ‘대외적 국가수반’으로 공식화했다. 특히 김 위원장은 시정연설을 통해 북미 대화 시한을 올 연말로 못박았다. 다만 한 해에 두 번이나 최고인민회의를 통해 대외용 메시지를 발표한 전례는 없었다. 고유환 동국대 북한학과 교수는 “시기적으로 중요한 시점이라 의미 있는 발표를 할 가능성도 있다”며 “외무성 부문은 최고인민회의 업무 소관 중 하나이기 때문에 북미 대화와 관련된 이야기도 할 수는 있다”고 설명했다. 헌법·법률 개정, 정책 원칙 수립, 국가기구 인사 등 국내 정치와 관련된 기능을 수행하는 최고인민회의의 특성상 이번 회의도 경제개혁 정책 입법화 등에 초점이 맞춰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2020년 ‘국가경제 발전 5개년 전략’의 종료를 앞두고 ‘자력 갱생에 의한 경제발전 노선’을 완수하기 위한 후속 입법 조치와 함께 최근 신형 미사일 시험 발사 결과를 바탕으로 국방력 강화 성과를 선전할 것으로 예상된다. 지난 4월 거론되지 않았던 대남기구인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추가 인사 가능성도 거론된다. 최근 공개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리선권 위원장의 거취는 대남 대화 조직의 정비 차원에서 주목된다.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결렬 후 통치력 회복에 주력해 온 김 위원장이 최고인민회의 이후 북미 협상에 다시 나설 것이란 관측이 적지 않다. 최고인민회의를 통한 내부 결속은 협상 재개 가능성을 높이는 요인 중 하나라는 것이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 교수는 “북미 양 정상 간 협상 재개에 대해 합의한 상황이기 때문에 최고인민회의를 마친 9월 초에는 협상을 재개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서유미 기자 seoym@seoul.co.kr
  • [사설] 5·18 대리 사죄한 노태우, 발포 진상도 밝혀야

    [사설] 5·18 대리 사죄한 노태우, 발포 진상도 밝혀야

    노태우 전 대통령의 아들 재헌씨가 지난 23일 광주 국립5·18민주묘지를 참배한 사실이 그제 뒤늦게 알려졌다. 재헌씨는 희생자 묘역에 무릎을 꿇고 헌화했으며, 방명록에 “진심으로 희생자와 유족들께 사죄드리며, 5·18민주화운동의 정신을 가슴 깊이 새기겠다”고 적었다. 그의 참배는 투병과 고령으로 칩거 중인 노 전 대통령의 평소 뜻에 따른 것으로 전해졌다. 신군부 핵심 인사가 5·18에 대해 잘못을 인정하고 반성한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재헌씨는 “기회가 되면 희생자 가족들을 만나 사죄하고 싶다”고도 했다. 반면 전두환 전 대통령은 사과와 반성은커녕 자신은 5·18과 무관하다며 뻔뻔한 자세로 일관하고 있다. 심지어 회고록에선 자신이 ‘광주사태 치유를 위한 씻김굿의 제물’이라며 적반하장격 태도를 보이기까지 했다. 지난 3월 광주 재판 출석 때 용서를 구할 마지막 기회가 있었지만 되레 호통치는 모습으로 국민의 분노를 자아냈다. 오랜 세월 헤아릴 수 없는 고통 속에 살아온 희생자 유족과 광주 시민들을 생각한다면 노 전 대통령은 1980년 5월 광주시민에게 발포를 지시한 사람이 누구인지 진실을 공개적으로 증언하는 등 당시 신군부가 광주민주화운동에서 은폐한 진상을 밝혀내는 데 일조해야 한다. 그래야 사죄의 진정성이 한층 빛날 것이다. 지난해 2월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 특별법’이 38년 만에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국가가 주체가 돼 조사위원회를 구성해 진상을 규명하겠다는 것인데, 1년 반이 넘도록 위원회를 꾸리지 못했다. 제1야당인 자유한국당이 5·18 북한군 개입설을 다룬 극우 유튜브 채널 대표를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의 야당 몫 비상임위원으로 추천하는 등 정쟁 수단으로 활용하는 탓이다. 참담한 일이다. 노 전 대통령 아들의 이번 사죄가 5·18 진상 규명에 속도를 내는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
  • [곽병찬의 역사앞에서 묻다] 한일 간 역사·영토문제 ‘日 도발’ 뒤엔 美 묵인·방조 있었다

    [곽병찬의 역사앞에서 묻다] 한일 간 역사·영토문제 ‘日 도발’ 뒤엔 美 묵인·방조 있었다

    8월 최강의 무더위 속에서도 한국민은 ‘열공’ 중이었다.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 신상 문제로 맥이 빠지긴 했지만, 열기가 수그러들지는 않았다. 오히려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지소미아) 종료를 둘러싼 논란으로 열공은 더 깊어졌다. ‘도대체 일본은 우리에게 무엇인가’라는 물음에서, 이제는 ‘미국은 우리에게 무엇인가’로 주제는 확장됐으며 가쓰라·태프트 밀약, 샌프란시스코 조약, 한일협정 그리고 지소미아로 심화됐다. 공교롭게도 일본을 파고들면 들수록 나타나는 게 미국이었다. 한국을 끊임없이 괴롭히는 역사문제, 영토문제를 따져 보아도 미국이 있고, 일제가 조선을 병탄할 수 있게 길을 터준 곳에도 미국이 있었다. 일본이 ‘침략전쟁’을 부인할 수 있게 하고 독도를 분쟁지역으로 만들고, 일제하 강제동원과 인권유린에 대한 배상을 거부할 빌미를 준 데에도 미국이 있었다. 특히 최근 한일 간의 첨예한 마찰 속에서 미국이 보인 태도는 미국으로 눈을 돌리게 한 결정적 계기였다. 일본의 일간지 마이니치신문의 8월 11일자 보도(“‘강제징용 노동자 배상 문제’에 대해 일본을 지지했다”)처럼 미국은 일본의 도발을 묵인 혹은 방조했다.김현종 청와대 국가안보실 2차장은 지난 12일 이런 문답을 했다. “7월 초 미국에서 중재를 요청하지 않았는가?” “(국제 협상에서) 무언가를 도와 달라고 요청하는 순간 글로벌 호구가 된다. (중략) 1905년 고종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려는 일본의 행위를 제지해 달라고 (미국에) 요청했다가 ‘호구’가 되지 않았는가.” 맞다, 한국은 참으로 오랫동안 ‘호구’였다. 1905년 5월 24일 쓰시마해협에서 일본의 연합함대는 러시아의 발틱함대를 대파했다. 양국은 종전협상을 서둘렀다. 7월 27일, 필리핀으로 가던 미국의 육군장관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가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지시로 일본에서 가쓰라 다로 일본 총리를 만났다. “한국은 러일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이자 귀결이다. (중략) 확고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 가쓰라의 말에 태프트는 적극 동의했다. “일본의 동의 없이는 어떤 대외조약도 체결할 수 없을 정도의 (한국에 대한) 보호조치를 확립하는 것이….” 가쓰라가 답례했다. “필리핀은 미국과 같은 나라가 통치하는 것이 일본에 유리하다.” 비망록을 전달받은 루스벨트는 31일 회답했다. “협의 내용은 전적으로 옳다. 내가 확인했다는 사실을 가쓰라에게 전달하시오.” 이 전문은 8월 7일 전달됐다. 고종은 8월 4일에야 이승만을 통해 ‘일본의 주권 침해를 막아 달라’는 밀서를 루스벨트에게 전달하려 했다. 미국 정부는 접수를 거부했다. 한 달 뒤 1905년 9월 5일 포츠머스조약이 체결됐다. 조약에는 태프트와 가쓰라의 비망록에 담긴 ‘일본의 대한제국에 대한 지도 감독 보호의 권리를 인정한다’는 내용이 명시됐다. 일본은 외교권 박탈을 압박했다. 고종은 10월 호머 헐버트를 통해 다시 또 밀서를 보냈다. 미국은 이번에도 접수를 거부했다. 11월 17일 결국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됐고, 대한제국은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했다. 고종은 을사늑약의 불법성을 호소하는 밀서를 헐버트를 통해 보냈지만 문전박대만 당했다. 미국은 오히려 대한제국의 공사관을 퇴거해 달라는 일본의 요구를 가장 먼저 수락했다. 36년 뒤 일본이 미국의 진주만을 침공했고, 미국은 태평양전쟁에 참전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했고, 강화조약 협상에 들어갔다. 미국은 일본을 철저하게 무력화시키려 했다. 이 전쟁에서 미군 15만 6000여명을 잃었으니 당연했다. 그런데 동아시아의 정세가 급변했다. 1949년 6월 중국 공산당은 대륙을 사실상 장악했다. 그해 8월 29일 소련이 원자폭탄을 개발했다. 이듬해 6월 25일 북한이 남침했다. 이제 미국의 위협은 소련과 중국이었다. 미국은 돌연 일본의 무력화 대신 재건 쪽으로 정책을 전환했다. 일본 열도만큼 소련과 중국을 봉쇄할 기지는 없다고 판단했다. 이를 위해 조약에서 미국은 전쟁 피해에 대한 일본의 배상 책임을 면제했다. 침략국으로 규정하지도 않았다. 독도나 ‘북방 4개 섬’ 등 영토문제에 대해서도 일본의 주장을 반영했다. 일본의 재무장도 용인했다. 미국은 대신 미일 안보조약과 행정협정을 통해 일본 열도를 미군기지로 활용할 수 있도록 했다. 1951년 9월 체결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은 그로 말미암아 영토 분쟁과 역사 분쟁 등 동북아시아에 온갖 부정적 유산을 남겨 놓았다. 연합군에게 독도는 애당초 한국령이었다. 연합군은 일본의 행정구역에서 독도를 제외했다. 1946년 6월 공표한 연합군 최고사령관 각서 1033호는 일본 선박의 독도와 그 주변 12해리 이내 출입을 금지했다. 한국의 방공식별구역에 독도를 포함했다. 이 식별구역은 지금까지 유효하다. 미국의 강화조약 1~5차 초안에도 독도는 한국령이었다. 일본령으로 둔갑한 것은 동북아 정세가 바뀐 1949년 말부터였다(6~9차 초안). ‘역사적 이유’와 ‘냉전적 상황’를 거론했는데, 한반도가 공산화될 경우 독도가 한국령이어선 일본의 안보가 위협받을 수 있다는 일본의 주장을 수용한 결과였다. 영국과 호주가 반대하자 미국은 1951년 5월 최종안에서 ‘독도’에 대한 언급을 아예 빼버렸다. 한국의 이승만 정부는 1951년 7월에야 미국에 문의했다. 딘 러스크 국무차관보의 회신은 참담했다. “우리가 아는 정보로는 독도가 한국의 영토로 취급된 적이 없었으며, 한국이 영유권을 주장했다고 볼 수 없다.” 한국과 일본은 역사문제와 영토문제로 티격태격했다. 그러나 미국의 관심사는 아니었다. 미국은 오로지 중국과 소련의 봉쇄에 몰두했다. 한국과 대만, 필리핀 등에 일본과 평화조약을 맺을 것을 압박했다. 한국은 샌프란시스코 조약의 부정적 유산에 걸려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었다. 박정희의 군사쿠데타는 미국에 다행이었다. 박정희는 만주군 하급장교 출신으로 기시 노부스케 전 총리 등 일본과 일본 수뇌부를 깊이 존경했다. 술에 취하면 일본 군가를 부를 정도였다. 게다가 박정희는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다. 박정희는 얼렁뚱땅 한일기본협정을 체결했다. 역사문제나 영토문제에 대해 일본이 멋대로 해석할 수 있도록 했다. 대신 청구권 자금이 아니라 ‘경제협력 및 지원’ 명목으로 무상 원조 3억 달러, 차관 2억 달러를 받았다. 뒷돈으로 정치자금 6600만 달러를 챙겼다. 수지맞는 장사였다. 미국으로서도 만족이었다. 중국과 소련를 봉쇄할 수 있는 체제가 완성됐다. 요즘 미국은 일본과 경제전쟁을 벌이는 한국에 주한미군 주둔비 폭탄 증액을 압박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만의 특별한 행태는 아니다. 저급할 뿐 전형적인 ‘아메리칸 스타일’일 뿐이다. 그는 한국 정부를 이렇게 조롱하기도 했다. “(어린 시절 아버지와 임대료를 수금하러 다닐 때) 브루클린의 임대아파트에서 114.13달러를 받는 것보다 한국에서 10억 달러를 받는 것이 더 쉬웠다.” 그에게도 한국은 최고의 호구였다. 이용 가치가 없는데도 주한미군을 유지할 미국이 아니다. 한국을 전진기지로 활용해서 얻는 미국의 이익은 막대하다. 미국 의회는 주한미군의 철수 시 이를 대체할 항공모함 전단을 운용해야 하는데, 운용비용이 지금의 주한미군 주둔비의 10배에 이른다고 판단했다. 주한미군이 운용하는 특별접근프로그램은 북한 미사일 발사 탐지 시간을 알래스카 기지의 15분에서 7초로 단축한다. 한국이 미국으로부터 사들이는 무기는 덤이다. 2008년부터 2017년까지 10년간 67억 3100만 달러어치에 이른다. 그래서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 같은 이는 장담한다. “미국더러 주한미군을 빼라고 해도 미국은 빼지 않을 것이다.” 지소미아는 미국의 관심사였다. 2012년 이명박 정부는 울며 겨자 먹기로 국민 몰래 체결하려다 들통나 실패했다. 미국은 만만한 박근혜 정부를 채근해 2016년 지소미아를 체결하도록 했다. 지소미아만이 아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나 강제징용 배상 등 역사문제의 담합도 채근했다. 정부는 단돈 10억엔에 위안부 할머니들의 한과 한국민의 자존심을 팔아넘겼고, 강제징용 배상 판결을 막기 위해 사법부를 농단했다. 미국은 정의의 사도도 수호천사도 아니다. 미국은 그저 미국인의 미국일 뿐이다. 김종대 정의당 의원이 지소미아 종료를 ‘한국의 주권 선언’이라고 한 것에 수긍이 가는 까닭이다. 논설고문 kbc@seoul.co.kr
  • [어린이 책] 앵~ 모기 어떡하지…탁! 잡으면 되잖아

    [어린이 책] 앵~ 모기 어떡하지…탁! 잡으면 되잖아

    “으앙!” 고요한 밤을 찢는 아이의 울음소리. 아이의 눈두덩이 울긋불긋, 아빠·엄마의 팔다리도 울긋불긋하다. 밤사이 모기의 대공습이 일어났던 것. 난리 법석을 떨며 모기 퇴치에 나서지만 허공을 가르는 모기의 비행은 엄마·아빠의 손짓을 앞지른다. 한밤중 대소동에 놀란 이웃들도 하나둘 모여든다. 아랫집 할아버지와 이웃집 과학자, 태권도 관장 등이다. 그림책 ‘모기 잡는 책’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상황에 대한 뛰어난 은유다. 어찌 보면 하찮은 모기 한 마리지만, 이 가족에게는 단잠을 방해하는 몹쓸 훼방꾼이다.모여든 이웃들이 저마다의 해법을 제시하지만 영 신통치 않아 보인다. 함께 활극에 뛰어든 할아버지의 몸짓, 모기의 비행 궤도와 습성 등을 포괄하는 과학자의 지식, ‘모기는 재빠르게 힘으로 때려잡는 것’이라는 태권도 관장의 유려한 발차기는 모두 무용하다. 모두가 지쳐 나자빠져 있을 무렵 ‘탁’, 들려오는 경쾌한 마찰음. 이 모기 전쟁의 승자는 누구였을까. 답은 짐작대로다. 가볍게 생각했던 작은 문제가 쉽게 풀리지 않고 상황이 더 복잡해질 때 느낄 수 있는 감정들을 모기 잡는 사람들을 통해 재밌게 그려 냈다. 우리는 가끔 이 책에 나오는 어른들처럼 이유의 이유, 방법의 방법들을 찾느라 서로 다투고 오히려 본질과는 멀리 떨어진 새로운 문제들만 만들어 내곤 한다. 과연 가끔일까? 그런 것 같지도 않다. 생각이 생각을 낳아 마음의 여유를 잃어버린 어른들에게도 권한다. 이슬기 기자 seulgi@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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