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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생체 모든 기능 조절경로 규명/노벨의학상 수상 2인의 업적

    ◎세포간 「이온의 흐름」 측정방법 개발/당뇨병·일부 유전병 치료에 새 전기 독일의 세포생리학자 네허와 자크만에게 영광을 안겨준 「세포내 단일이온통로에 관한 연구」업적은 세포내 전체이온통로를 통해 지나가는 이온의 양을 측정,지난 63년 노벨의학상을 받은 영국 케임브리지대학의 홉스킨교수및 헉슬리교수의 연구를 계승,발전시킨 것이다. 홉스킨과 헉슬리는 50년대 「세포내에 이온통로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이 통로들을 통과하는 전체이온양을 측정하는 기법을 개발해 노벨상을 수상한 바 있다.이온통로연구를 한단계 더 진전시킨 네허와 자크만의 수상에 대해 국내 의학계는 『때늦은 감이 있다』는 반응을 보인다. 노벨상위원회는 『많은 병리학적 메커니즘들이 지난 80년대의 이온통로연구로 분명하게 규명됐으며 낭포성 섬유증·간질·몇몇 심장혈관질환·신경근육질환등을 그 예로 들 수 있다』고 말하고 『이들의 과학적 업적은 세포의 기능에 관한 견해와 세포생물학의 교과서 내용을 근본적으로 수정했다』고 덧붙였다. 지난 80년대초반 국내 최초로 이들 두 학자의 이론을 도입한 서울대의대 생리학교실 엄륭의교수는 『네허와 자크만이 정립한 이론의 가장 큰 공적은 인체의 신경흥분·근육수축·호르몬분비등 생체의 모든 기능이 어떻게 이온통로를 통해 조절되는가를 규명해낸데 있다』고 말한다. 엄교수에 의하면 신체내에서 신호를 전달하는 가장 기본적인 방법은 이온이 세포내 단일통로를 통해 세포안팎으로 드나든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발견된 이온통로는 수십개로 나트륨이온·칼륨이온·칼슘이온·염소이온등 각 이온은 자신에게 적합한 통로를 통해서만 세포내외로 출입한다. 만약 세포내 이온통로에 장애가 발생하면 인체에는 각종 질병이 발생한다. 예를 들면 미국의 인디언들이 사용하는 화살촉에 발라져있는 독은 세포내의 이온통로를 차단시킴으로써 호흡정지를 일으켜 사람을 죽이게 된다. 세포내 단일이온통로가 인체에서 행하는 역할에 대해서는 당뇨병의 발생메커니즘,호르몬의 특정수준유지등을 제외하고는 아직 많이 알려져있지 않으나 동물실험에서는 이온통로에서의장애가 각종 질병을 일으킨다는 실험보고서가 속속 나오고 있다. 최근 네허와 자크만이 공동 저술·출판한 책 「단일통로기록법」은 세포내의 단일통로를 통해 흐르는 극미량의 전류를 측정할 수 있는 기법이 자세히 기록돼 있다. 두 과학자는 세포내 단일통로를 통해 흐르는 이온양을 측정하는 방법을 76년부터 독일괴팅겐에 있는 막스프랑크 생물물리화학연구소에서 본격적으로 공동연구해 81년 완성했다. 서울대의대 김전교수(생리학)는 『신경계·근육계등 신체의 모든 활동은 결국 전기적 활동이므로 이를 정밀하게 측정할 수 있게 된 것은 인간연구에 대한 혁명적 업적』이라고 말한다. 국제학술대회등을 통해 네허교수와 자크만교수를 여러차례 만난 엄륭의교수는 『이들이 지금은 독일의 괴팅겐과 하이델베르크에서 각각 떨어져 있지만 80년대초까지 모두 괴팅겐소재 막스프랑크연구소에서 연구를 꽃피웠다』고 전한다. 엄교수에 따르면 혈당이 올라갔을때 췌장에서 인슐린이 분비되지 않는 당뇨병의 메커니즘은 두 과학자의 연구결과 정상인의 경우 칼슘통로가 열리면서 칼슘이온이 세포내로 흘러들어가야 하는데 당뇨병환자는 칼슘이온통로의 이상으로 칼슘이온이 세포내로 이동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또 방광섬유증은 염소이온통로에 이상이 생겨 발생하게 되는 질병으로 유전된다는 것도 밝혀냈다.
  • 외언내언

    언뜻 보면 별것 아닌,또는 별 이상한 연구에 종사하는 학자들이 있다.예컨대 폰 프리슈는 74년 유럽산 쥐바퀴가 헛간에서 어떻게 집을 짓는가를 연구했다.자전거를 보관하는 한 헛간에서 자전거를 세워두는 지주들 때문에 쥐바퀴는 14개의 집을 짓는 혼돈을 일으켰다.작은 지표물을 기준으로 자신의 굴을 설정하는 말벌들도 똑같은 지표물을 여러개 만들어 놓으면 같은 혼란을 일으킨다.◆이런 연구는 오늘날 도시건축을 포괄적으로 보고자하는 관점에 전용된다.거리와 집들은 언제나 사람들에게서 번호같은 것으로 기억되지 않는다.방위찾기나 통로찾기들은 특히 심정적으로 기억된 정서적요소들의 지표에 의해서 찾아진다.곤충이나 동물이나 인간이나 이점에서는 모두 같다.그래서 현대도시의 균일하게 구획된 집짓기와 길내기는 이 획일성 속에서도 구역별로 무엇인가 다르게 만들어내야 한다는 원칙을 갖고 있다.◆이점에서 서울이란 대도시는 대단한 문맹이다.특히 강남 아파트지역은 실제로 멀쩡한 사람이 어느날 자기집 찾아내는데 혼란을 겪을만큼 무미건조하게 획일화 돼 있다.한국사람들은 남향을 좋아해서 모든 아파트들이 남쪽을 향해 일렬로 서 있게 됐다는 문제도 있다.이것은 우리의 문화소산이라고 치자.표준건축비의 규제로 언제나 외관이나 미관같은것은 생각해 볼 겨를도 없었다는 이유도 있다.◆그러나 이 이유는 실상 건축비의 문제는 아니다.감각의 문제이고 감수성의 문제이다.서울시가 4일 아파트 미관심의를 대폭 강화한다는 결정을 했다.외벽에 부조등 조형요소를 도입하는등 다양한 미적시도를 할때 이를 건축심의에서 특별한 평점으로까지 고려해 주겠다는 원칙을 세웠다.아직도 지붕과 문만 있으면 집이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는 시점에서 이런 결정들은 아마도 한가해 보일지 모른다.그러나 집의 문밖환경만 조금 바꾸어도 삶의 정서가 바뀔수 있다는 점에 우리도 눈을 떠야만 한다.인간이야말로 어느 동물보다 환경조건에 예민한 동물이기 때문이다.
  • 「남북경협 공동위」 구성 긴요/21세기위,「한민족」 세미나

    ◎북 UN가입뒤 「중국식개방」 모색 가능성/상호교류 대비… 양측간 공식통로 마련을 21세기위원회(위원장 이 관)는 25일 상오 위원회대회의실에서 「한민족 공동체의 모색」이라는 주제로 전체세미나를 가졌다. 역사적인 남북유엔동시가입 이후 남북관계개선및 통일방안에 대한 재조명이라는 측면에서 주목을 끈 이날 세미나에서는 이상우위원(서강대교수)과 연하청 KDI북한경제연구소장이 각각 「정치통합의 과제」「북한의 개방전망과 남북한 경제협력」이라는 제목으로 주제발표에 나섰다. 연소장의 주제발표 요지는 다음과 같다. 한반도를 둘러싼 주변국의 대한반도 정책변화는 90년대의 새로운 동북아경제권을 형성하는데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이며 동시에 남북한 관계개선을 촉진시킬 것으로 기대된다. 또한 국제정세변화,심각한 경제난,체제내적 모순의 증대등 북한이 처해 있는 대내외적 상황은 북한의 개방을 불가피하게 하고 있다. 남북유엔동시가입을 계기로 다자간 협력이 UNDP,UNIDO등 국제기구를 통한 경제개발계획으로 진행될 전망이며 한국의입장에서는 노동력부족·임금상승등으로 대북경제협력의 필요성이 증대되고 있다. 그러나 북한은 단기적으로는 북한의 체제유지를 위한 소극적자세로 경제·체육·예술등 일부분야 중심의 제한적 교류협력에 국한하려들 가능성이 크다. 중장기적으로는 소련사태이후 개방·개혁속도의 급진전 가능성 증대,중국의 지속적 경제개혁의 추진등으로 북한의 대외개방확대와 대소전략수정에 따라 남북한 교류협력이 증가할 가능성이 크다.물론 북한이라는 극도로 통제된 사회가 개방돼 주민들이 자신들의 저대·상대적 빈곤과 생활수준격차를 인식하게 된다면 동구와 같이 체제붕괴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북한당국은 중국식 개방모델을 모방해 경제부분에 있어 우선적으로 점진적인 개혁·개방을 모색할 것이다. 남북간 초기단계의 경제협력은 분쟁의 요소가 적고 관계개선에 파급효과가 큰 분야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바람직하며 나아가 쌍방이 수용가능한 사업부터 순차적으로 추진해 현행 간접교역에서 직접교역형태로 발전시키고 제3국에의 공동진출,남북한 산업협력측면에서의 간접·직접투자 순으로 단계별 접근이 바람직하다. 금년 4·4분기에 북한이 신축중인 관광호텔등에 들어갈 컬러TV등 3천만달러 상당의 전자제품 반출상담이 현재 진행중이고 직교역계약에 따른 제2차 대북 쌀반출도 금년내에 이뤄질 전망이어서 91년 남북한 교역규모는 2억달러를 넘어설 것으로 보인다.이 경우 한국은 소련·중국·일본과 함께 북한의 4대 교역국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금년들어 한국경제인의 북한경제인 접촉승인은 60건에 이르고 있는데 이 중 절반가량이 남북한 합작생산을 위한 것이어서 조만간 합작투자가 구체화될 것으로 보인다. 아직 기술·자본및 마케팅등에서 대외수출을 크게 기대하기 힘든 북한이 외화문제를 쉽게 풀 수 있는 분야는 풍부한 관광자원이다. 따라서 유엔동시가입을 계기로 남북한 공동관광개발사업추진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경제교류및 협력의 확대는 남북한 당국간에 합의가 체결돼야 하며 이에 필요한 제반사항을 협의하기 위해 남북경제회담 당시 제외됐던 「남북경제협력 공동위원회」의 구성이 필요할 것이다.
  • 귀경길 고속도 큰 혼잡 없었다

    ◎분산 출발·서둘러 귀환… 예상외 소통 원활/부산∼서울,평일보다 약간 지연/일부선 한꺼번에 몰려 한때 체증/16중 추돌등 윤화 2천8백건… 1백37명 사망 한가위 연휴 마지막날인 23일 전국의 고속도로와 국도 등의 상행선에는 귀성에서 돌아오는 차량들로 줄을 이어 곳곳에서 교통체증을 빚었으나 당초 예상과 같은 큰 혼잡은 없었다. 많은 시민들이 이번 연휴가 3일로 예년보다 짧은데다 지난 4년동안 귀성·귀환길 체증현상이 극심했던 점을 고려한듯 22일 하오부터 서둘러 귀환하거나 24일쯤 돌아오는 추세를 보인 탓이었다. 이날 경부고속도로 청원∼천안∼안성사이 등에서는 차량들이 시속 20㎞ 안팎의 거북이운행을 하기도 했으나 나머지 대부분의 구간에서는 대체로 순조로운 운행속도를 보였다. 이에따라 부산∼서울구간은 대체로 8시간,대구∼서울 5시간30분,속초∼서울 5∼6시간,광주∼서울구간은 5시간정도 걸렸다. ◎광주∼서울 5시간 ▷귀환길◁ 경부·중부고속도로상행선은 22일 9만4천여대의 차량이 올라온데 이어 이날은 모두 11만여대의 차량들이 몰려들었다. 이 때문에 경부고속도로 곳곳에서 차량운행속도가 20∼50㎞에 그쳤다. 그러나 중부고속도로는 비교적 순탄한 운행을 보였다. 다만 중부와 경부,영동과 경부등 중요 고속도로 접속지점에서는 병목현상이 빚어져 큰 체증을 나타냈다. 이들 지역에선 고속도로휴게소등에서 연료를 넣거나 쉬어가는 차량들로 혼잡상이 더 심했으며 끼어들기와 비상통로(노견)운행등 교통위반사례도 잇따라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터미널마다 북새통 ▷승차전쟁◁ 고속버스나 열차편으로 귀환한 귀성객들은 집으로 가는 택시며 버스등을 잡기 위해 또 한차례 곤욕을 치렀다. 강남고속버스터미널과 서울역등지에 도착한 귀성객들은 택시를 타기 위해 50∼1백여m씩 줄을 서야 했으며 밤늦게 온 사람들은 그나마 차가 없어 우왕좌왕했다. 한편 서울시 지하철공사등 교통당국은 심야에 도착한 귀성객수송을 위해 지하철 2·3호선의 운행시간을 2시간 연장,24일 새벽까지 운행했다. ▷귀성객◁ 서울·부산등 전국 5대도시의 추석귀성객은 모두 4백72만2천여명으로 지난해 추석때보다 6.8% 늘어난 것으로 집계됐다. 경찰은 추석 연휴 전날인 지난 20일부터 22일까지 3일동안 서울등 수도권에서 모두 3백25만명이 귀성길에 올라 지난해보다 14.8% 늘어난 것으로 집계했다. ◎망우리에 7만명 ▷성묘◁ 추석날인 22일 망우리공동묘지에는 7만여명의 성묘객이 1만여대의 차량을 타고와 극심한 교통체증이 빚어졌고 경기 용미리에는 5만4천여명,벽제시립묘지에는 1만7천여명이 찾아왔다. ◎부상 3천3백명 지난 20일부터 추석연휴 마지막 날인 23일 정오까지 전국에서 모두 2천7백90건의 교통사고가 발생,1백37명이 숨지고 3천3백65명이 중경상을 입었다.또 전국에서 1천8백60건의 강도·절도사건이 발생,2천7백17명이 검거되고 6백15명이 구속됐다. 【옥천】 22일 하오 9시20분쯤 충북 옥천군 동이면 우산리 경부고속도로 상행선(서울기점 1백79·9㎞)금강휴게소 부근에서 대전1너5467호 콩코드승용차(운전자 이창남·50·대전시 동구 가양동)가 고장난 차를 발견하고 급제동하는 순간 뒤따라 가던 한진고속 소속 경기6바1161호 고속버스(운전사 유성준·35)서울2수2124호 프라이드 승용차(운전자 김진수·31·서울 은평구 녹번동 119)등 16대가 차례로 추돌했다.
  • 미 헤리티지재단 회장 에드윈 퓰너 특별기고(유엔코리아)

    ◎“북한은 체제변화 결단내려야 한다”/유엔시대의 남북관계/한국 북방정책 성공으로 큰 압력/한반도 적화 포기 징후 아직 없어 지난달 소련에서 실패한 쿠데타가 진행중일때 세계 대부분의 국가들은 보수파들의 소요에 반대하는 성명을 냈었다.심지어는 북경이나 아바나까지도 소련개혁파에 대한 보수파들의 공격을 공공연하게 옹호하는것을 꺼렸다. 그러나 몇가지 두드러진 예외가 있었다.이라크의 쿠데타 기도자들에 대한 재빠른 지지쇼는 널리 보도된바 있고 비슷한 예로 북한도 국영언론이 그 즐거움을 감추지 못한 표현으로 소련시민들에게 새로운 쿠데타를 지지하고 그들의 명령에 따를것을 호소했었다. 물론 소련과 동구전역을 개혁의 물결이 휩쓰는 동안 평양측은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었다. 소련의 쿠데타에 대한 북한의 성급한 지지는 하나의 좋은 예로 남아있다.그같은 태도는 강경 공산주의세계에서도 가장 성미급하고 고집스러우며 비이성적이고 예측불가능한 북한의 특성을 두드러지게 나타냈다. 최근 수년간 북한도 언젠가는 그 체제가 개혁이나실용성을 고려하게 될것이라는 기대 속에서도 김일성은 자신의 방식을 고수해왔다.그러나 이따금 한국에 대한 정책에 있어 전술변화를 취하기도 했다.지난 17일 남북한의 유엔동시가입이 한 예가 되고 있다.북한은 별개의 의석으로 가입할것을 세계각국으로부터 강요받았으며 그같은 여론을 따르지 않으면 가뜩이나 궁핍한 이미지가 더욱 손상될것이 분명했다. 비슷한 경우로 지난해 북한이 재개에 응했던 남북총리회담을 들수있다.그러나 세차례의 회합을 거치는 동안 서울측이 제시한 타당성 있는 많은 제안들은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개방하면 실패 인정” 국제환경의 많은 희망적 변화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서울측과의 화해에 대한 기본적인 반대입장은 바뀌지 않았다.그 까닭은 최근의 세계적 사건들이 말해주고 있다.김일성체제와 같은 폐쇄체제의 개혁과 개방은 바로 정치적 실패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지난달 소련에서 벌어진 믿지못할 사건들은 1948년 김일성체제를 탄생시켰던 제도와 이데올로기를 효율적으로 종식시켰다. 공산주의는 이제 더이상국제공동체에서 막강한 힘으로 인식되지 않고 대부분의 옛고객들로부터 버림받아 역사의 쓰레기더미 위에 놓인 신세가 됐다. 이같은 역사의 진행과정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공산주의를 신봉하고 있는 중국·베트남·쿠바·북한등 초창기 그들의 체제를 수립했던 동일한 지배 엘리트들에 의해 아직도 통치되고 있는 이들 네 이단자들이 동일하게 개혁의 보조를 취할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오히려 과거체제의 고수는 개혁구도를 향한 세대간 변화의 중요성을 부각시키는 것이다. 김일성은 세계 어느 다른 지도자보다도 국민들을 강력하게 통제해오고 있다.그가 죽거나 능력을 상실하게 된다면 변화는 급속하게 이뤄질 것이다.정치개혁운동이나 국제조류에의 접촉증대등 이른바 벽에 생긴 균열들은 독일의 통일과 동구전역에 공산주의의 몰락,소련공산당의 해체등을 가져왔다.우리는 아직 북한이라는 기둥에 균열이 생긴것을 발견치 못하고 있다.또 거기에는 바웬사나 옐친 같은 인물도 나타나지 않고 있다.민주주의나 자본주의의 장점에 대한 토론도 없다. 북한에 있어 개혁과 개방은 절박하기 때문에 소련의 상황이 아마도 열쇠가 될것이다.따라서 최근의 사건들은 한국의 북쪽형제들이 결과적으로 그들의 현체제에 대한 바른 판단을 내리고 그것을 버리게 될것이라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북한의 비참한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상황에 익숙한 사람들은 김일성주의는 실패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우리는 공산주의가 본질적으로 인간의 기본심성에 맞지 않는것임을 안다.세계공산주의자들 대부분도 같은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북한국민들에게는 이제 결정할 기회가 주어졌음에 틀림없다. 그들의 정부를 향한 정책적 도전은 그곳 사회의 실체를 드러나게 할것이다. 서울측은 여러 제안들을 통해 남북한간의 사회적 경제적 교류를 증진시키기에 노력해왔다.이것은 바로 고도의 성공을 거둔 노태우대통령의 「북방정책」의 목표이기도 하다.소련·중국등 전통적인 북한의 우방들로부터 서울정부의 합법성을 인정받고 유대관계를 강화시켜 평양측 정부에 한국과의 관계정상화에 노력하도록 압력을 증가시키도록 했다.그리고 미국은 한국의 이같은 노력을 강력히 지원해왔다. ○“핵개발등 포기해야” 결과적으로 이 과정은 군사적 경쟁보다 경제적 정치적 협력을 증진시킴에 의해 남북 양측이 이익을 얻게될 것이다.이 과정의 중심부분이 바로 최근 유엔에서의 성공이다.유엔은 남북이 긴장완화를 추구하도록해 효율적인 새로운 대화통로 역할을 하게될 것이다. 동북아에서의 평화를 보장하기 위해 북한 침공의 억제력으로 4만명의 미군이 한국에 주둔하고 있다.또한 워싱턴이 특히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것은 평양측의 핵무기 개발에 대한 확신이 높아지고 있다는 점이다.즉,김일성은 한반도 전체를 공산주의 지배체제하에 장악하겠다는 자신의 목표를 포기했다는 어떤 징후도 나타내지 않고 있다. 미국은 평양과 공식외교관계가 없기 때문에 부시행정부는 북한외교관들과의 비공식 대화나 평양측에 대한 무역제재조치의 부분적 완화등 몇차례 화해 제스처를 보낸적이 있다. 이제 공은 김일성의 코트로 넘어갔다.워싱턴은 만족할만한 태도변화가 있을때까지는 북한측과 어떤 형태로든 성급한관계개선을 피할 것이다.첫째 평양은 남측과의 대화를 재개해야 하고 자유왕래및 군사력증강에 대한 협정과 같은 구체적으로 진전된 행동을 보여야 한다.또한 평양은 핵시설에 대한 국제사찰에 응하고 개발중인 핵무기들을 포기해야 한다. 워싱턴과 서울간의 밀접한 안보관계유지는 지금이 어느때 보다 중요하다.우리의 다른 우방들과 달리 한국은 그들의 방위 수요에 있어 「무임승차」하지 않고 있다.서울은 이제 더이상 미국의 지원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지 않으며 스스로의 안보를 위해 더욱더 많은 부담을 안고 있다. 동북아지역에 있어서의 평화는 미국이 이지역 세력으로 존재하는 것이 필요하고 거기에는 북한의 침략억제를 위한 적정규모 미군의 한국유지가 포함된다.물론 위험이 감소했다고 판단될때는 미군병력 감축이 고려될 수 있다. 이제 시간은 서울측에 있고 미국이 한반도에서 평화유지를 위해 행해온 중요한 역할은 상당히 감소될 것이다. ◎애윈 퓰너 ■전유럽전략방위문제연구소장 ■워싱턴대 객원교수 역임
  • 일 북방4도 반환/경협­명분 갈등 묘수 찾는 소련

    ◎고르비·옐친 둘다 지원조건으로 반환 원해/국민들에 “돈 받고 팔았다” 인식 안주려 고민/제주도 3배 크기의 전략 요충… 주변은 황금어장 ▷반환 가능성 진단◁ 반세기를 끌어온 일본과 소련간의 북방4개도서 영토문제가 최근의 정세변화와 경제난국등 일련의 소련 국내사정에 의해 협상테이블로 올려질 가능성을 보이고 있다. 일본을 방문중인 루스란 카스블라토프 러시아공화국 최고회의의장서리가 9일 가이후 도시키일본총리를 만나 보리스 옐친 러시아공대통령의 북방4개도서 협상용의를 표명한 친서를 전달한데 이어 같은날 옐친의 경제분야 핵심참모인 게오르기 야블린스키 국민경제관리위부의장이 일본 교도통신과의 서면인터뷰에서 북방4개도서가 일본에 귀속된다고 밝히는등 소련 실력자들이 잇따라 이문제의 협상가능성을 언급하고 나섰다. 옐친은 친서에서 이 영토문제를 앞으로는 러시아공화국이 전담할 것이며 지난해 1월 자신이 일본방문때 밝힌 북방영토문제에 대한 5단계해결책의 단계를 줄여 조기해결할 방침임을 전달했다.또 그같은 방침이연방정부와도 이미 의견조정을 끝냈음을 명백히 하고 있다. 이 친서는 또 앞으로 일본과의 관계에서 2차대전이후 존속해왔던 전승국과 패전국 구분을 없애고 진정으로 국제법상의 평등과 정의에 기초해 어려운 문제들을 해결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옐친의 5단계해결책은 ①소련의 영토문제의 존재 인정 ②4도서의 자유경제지역화 ③4도서의 비군사화 ④평화조약체결 ⑤4도서 귀속문제의 다음세대 해결등으로 4단계까지 15∼20년 소요가 예상됨에 따라 경제원조는 먼저받고 반환은 다음세대로 미룬다는 것으로 간주돼 일본측에는 현실성이 없는것으로 인식돼왔다. 일본은 이같은 최근 소련측 실력자들의 북방도서 협상용의 표명을 일단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으며 소련방의 권한 약화로 이문제 해결에 있어서 사실상의 협상상대인 러시아공화국과의 새로운 관계정립을 모색하고 있다.그 일환으로 가이후총리는 옐친러시아공대통령이 가능한한 빠른 시일내 일본을 방문해줄것을 요청했다.또 나카야마 다로일외상은 10일 러시아공화국측의 전향적 의사표명에 대해환영을 표시하고 협상절차를 앞당길것을 요청했다. 한편 이문제에 임하는 소련측의 태도는 국민감정을 바탕으로한 지도자의 정치적 입지와도 관계가 있기 때문에 대내외적으로 북방도서를 돈을 받고 팔았다는 인상을 주지않기 위해 정경분리를 강력히 주장하고 있다.지난 4월 고르바초프소련대통령의 일본방문때 북방도서 반환을 조건으로 2백80억달러의 경제협력을 요청했을때 반환하면 실각할 것이라는 강한 반발을 받기도 했다.옐친 역시 최근까지도 『미국이 러시아로부터 돈으로 알래스카를 산것처럼 일본이 북방도서를 돈으로 살수는 없을 것』이라고 말한바 있다. 또한 전략적 가치로 볼때 북방도서는 소련함대의 태평양 통로이자 오호츠크해를 내해화시키는 중요한 요충이기 때문에 군부를 비롯한 보수진영에서는 예민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따라서 카스블라토프의장서리가 북방도서문제의 조기해결을 위해서는 러시아공화국내의 여론조성이 필요하다고 밝힌것은 문제해결의 명분을 찾기 위한것으로 분석된다.즉 먼저 경제원조를 받은뒤 점차적으로 북방도서반환문제를 여론화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측은 이문제에 있어서 북방도서반환의 보장을 받지않고는 경협에 응할수 없다는 입장이다.또한 제임스 베이커 미국무장관도 지난주 소련지도부에 일본과 분쟁을 낳고 있는 북방도서문제의 해결을 촉구했다. 이같은 상황에서 양국이 돌파구마련을 위해 1956년 국교정상화 공동선언에서 밝힌바 있는 시코탄 하보마이 2개 도서의 선반환문제로부터 본격적인 대화를 시작할 가능성이 있다는 견해도 제기되고 있다. 이는 일본측이 「4개도서 일괄반환」입장에서 「4개도서 주권인정,2개도서 선반환」입장으로 다소 후퇴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이문제는 일본과 소련 양국의 감정과 명분이 얽혀 있기 때문에 어떤 형태의 대화가 시작된다 하더라도 가시적인 결과를 도출하기 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것으로 보인다. ▷북방4도의 개요◁ 북방영토란 일본 홋카이도북부에 있는 에토로후(택착) 구나시리(국후) 시코탄(색단) 하보마이(치무)군도등 4개의 섬을 말한다.또 하보마이군도는 다라쿠,가이초,시보쓰,유리,아카유리,스이쇼,가이가라등 7개의 조그만 섬들로 이뤄져 있다. 이들 4섬은 총면적 4천9백96㎦(에토로후 3천1백39,구나시리 1천5백,시코탄 2백55,하보마이군도 1백2㎦)로 제주도의 약3배 정도에 달하며 2만4천여명의 러시아인들이 이주해 살고 있다. 이처럼 넓이나 인구수 측면에선 별것 아닌 것처럼 생각되는 이들 4섬은 그러나 경제적·군사적 측면에서 볼땐 대단한 가치를 지닌다.이는 이들 4개섬 주변의 해역에서 난류와 한류가 합쳐져 황금어장을 형성하고 있는데다 에토로후와 구나시리 두개섬엔 소련군및 KGB부대가 배치돼 있어 소련의 아시아·태평양 전략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유권 분쟁 역사◁ 북방4개섬을 소련영토로 편입시킨 것은 1945년 얄타협정.그 이전까지 4개섬은 일본령,사할린은 노일양국민 혼재지역,쿠릴열도는 러시아령으로 분류돼 있었다. 일본이 4개섬을 일본령이라고 주장하는 역사적인 근거는 1855년에 체결된 노일통상수호조약.이 조약에 따라 양국국경은 에토로후섬과 에토로후섬 북쪽에 위치한 우루푸섬의중간지점 사이로 잡혀 4개섬은 일본령에 속해 있었다. 이후 1875년 사할린·쿠릴열도 교환조약을 통해 사할린은 러시아영토가 된 대신 쿠릴열도는 일본령으로 편입됐다.당시 쿠릴열도는 우루푸섬과 시무시르섬에 이르는 18개섬으로 규정됐다.그러나 1905년 노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함에 따라 일본은 사할린 남부를 다시 할양받았다. 소련은 노일전쟁은 일본이 도발한 것이므로 노일전쟁 이전의 조약은 무효라고 주장,2차대전후 사할린남부와 쿠릴열도는 물론 4개 도서까지 소련령에 편입시켰다. 전후 1951년 미국등과 체결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일본은 쿠릴열도·사할린남부를 포기하는 대신 4개섬은 일본령임을 보장받았다.그러나 소련은 이 조약에 서명을 거부,지금껏 반환을 거부해왔다. 일본역사에 북방4개섬이 처음 언급된 것은 1615년의 일로 당시 원주민인 아이누족이 일본정부에 공물을 바친 기록이 있다. 이들 섬에 대한 반환교섭이 본격시작된 것은 1955년 양국국교회복 교섭이 시작되면서부터. 소련은 국교정상화 직후 시코탄·하보마이 2개섬의 반환을 약속했으나 일본이 2개섬만 반환에는 반대했고 소련도 60년 미일안보조약에 반발,일본에서 외국군대의 철수를 2개섬 반환의 전제조건으로 내걸어 이마저 실패로 끝났다. 이후 73년 다나카(전중)전일본총리가 방소,브레즈네프당시소련당서기장과 회담,영토문제를 의제로 삼는데는 성공했으나 소련은 78년부터 4개섬에 병력을 증강배치하는등 강경입장을 고수. ◎북방4개 도서 일지/2차대전 일 패전으로 얄타협정때 소 편입 ▲1856 일로 수호조약에서 4개도서일본령인정 ▲1857 사할린전체는 러시아영,쿠릴열도전체는 일본영으로함 ▲1905 일로전쟁의 일승리로 사할린남부 할양받음 ▲1945 2차대전후 전승국 소련이 사할린남부·쿠릴열도·4개도서 모두 편입 ▲1947 소,4개도서의 일본인 1만7천명 추방 ▲1951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일에 대한 4개도서 영유권보장(소,조인거부) ▲1956 일소국교정상화 공동선언,시코탄·하보마이 2개도서 반환약속(일본국민 반발) ▲1960 미일안보조약개정후 소,영토문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강경입장선회 ▲1973 다나카·브레즈네프 회담,영토문제를 「미해결의 문제」로 인정함 ▲1978 소,4개도서에 군대배치등 방어강화 ▲1988 세바르드나제소외무 일방문,평화조약체결 실무위원회의 주의제로 4개도서문제 제기 ▲1990.1 보리스 옐친(소인민대의원)방일,북방4개도서 5단계해결책 제시 ▲1991.4 고르바초프방일,56년의 양국선언 재확인
  • 운전면허 취소자/2년간 응시 불허/도로교통법 개정안

    ◎현행 1년서 배로 연장/단속경관 폭행·돈 줘도 “취소”/50㏄미만 오토바이도 법적용 대상에/고속도등 노견 운행 「차선위반」 처벌/인도 주차행위도 벌금 강화·견인 조치 음주운전 또는 음주측정거부등으로 운전면허가 취소됐을때 1년만 지나면 다시 면허를 얻을수 있던 것이 앞으로는 2년이내엔 면허시험에 응시할 수 없게 된다. 운전자가 사고를 내고 뺑소니치거나 신고를 하지 않았을 때와 자동차를 이용해 범죄를 저질렀을 때,자동차를 훔치거나 빼앗아 면허가 취소됐을 때도 마찬가지로 2년이내에는 다시 면허를 딸수가 없게 된다. 경찰청은 8일 이같은 내용등을 담은 도로교통법개정안을 마련,이번 정기국회에 제출하기로 했다. 개정안은 운전자가 교통단속 경찰관을 폭행하거나 범칙금납부 고지서를 찢는등 공문서를 손괴했을 때,단속경찰관에게 금품을 줬을 때 운전면허를 취소하거나 1년범위 안에서 면허를 정지시킬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이런 경우에 대해 그동안에는 뚜렷한 행정처벌규정이 없었다. 개정안은 이와 함께 그동안 이 법의 적용을받지않던 50㏄미만의 오토바이도 이 법의 적용을 받도록 했다. 50㏄미만 오토바이는 그동안 이 법의 적용대상이 아니어서 교통단속에 어려움을 주어왔으며 사고를 일으켰을때도 교통사고처리특례법의 적용이 불가능해 운전자와 피해자 모두에게 불편을 끼쳐왔다. 개정안은 또 주정차가 허용된 도로라 하더라도 소방도로를 확보하기위해 차를 세우고 남은 길의 너비가 3m미만일 때는 주정차를 할수 없도록 제한했다. 그동안 명확한 금지규정이 없던 고속도로등의 바깥쪽 비상통로(노견)운행과 인도주차행위에 대해서도 이 법에 처벌조항을 명문화했다. 운전자와 단속경찰 사이에 위법 여부에 대한 시비가 잦던 비상통로운행은 앞으로 시비의 여지가 없는 「차선위반」으로 분명하게 처벌되며 「통행구분위반」이란 가벼운 처벌대상이었던 인도주차행위도 범칙금이 훨씬 많고 견인 조치까지 가능한 「주차위반」으로 처벌되는 것이다. 개정안은 이밖에 그동안 10일이내에 고통범칙금을 내지 않으면 바로 즉심에 넘겨지던 것을 앞으로는 범칙금에 5천원을 더 물면 납부기간이 지난 뒤 20일안까지 낼수 있게 했다.
  • 노점상 1백50명에 자릿세 5억원 갈취/7명 영장

    서울동대문경찰서는 7일 종로5가 광장시장 경비원인 이흥운씨(42)등 7명을 폭력행위등 처벌에 관한 법률위반혐의(갈취)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이들은 시장안 소방도로인 비상통로와 점포앞등에서 장사를 하는 1백50여명의 노점상인들로부터 자릿세 명목으로 지난5년동안 모두 5억여원을 갈취한 혐의를 받고 있다.
  • 미 싱글로브장군 회고록/위험한 임무:6

    ◎“포플러나무 잘라라”… 폴 버년작전 발동/21일 새벽 특공대 60명 돌진… 전폭기 엄호/“만행응징” 한밤 펜타곤서 작전개시 재가/김일성 “유감”표명… 9월8일 경계태세 「데프콘4」로 완화 8·18만행에 대한 대응방안으로 첫째는 군사적 행동 없이 정전위를 통한 강력한 항의,두번째는 즉각적인 군사보복,세번째는 상징적 경고행위등이 스틸웰사령관에게 보고되었다. 스틸웰사령관은 지하벙커의 월 룸으로 곧바로 와서 참모회의를 열어 작성중인 OPLAN(작전계획)을 점검했다.우선 정전위 차석대표인 마크 푸르덴 해군소장을 불러 다음날 소집키로한 정전위원회에서 자신이 북한의 김일성에게 보내는 강력한 항의서한을 전달토록 지시했다.한편 즉각적 군사보복은 3차대전으로의 확대위험이 있다는 판단하에 상징적 경고행위를 채택키로 했다.그 작전은 유엔사령부의 힘을 명백히 보여주는 동시에 경고를 주기에 충분한 것이어야 했으므로 장소는 판문점 공동경비구역내로 한정키로 했다. ○「상징적 경고」 채택 작전의 주요내용은 문제의 포플라나무를 베어버리는 것이었다.결국 그 나무가 미국 권위의 상징처럼 된 것이다.지난 8월초 유엔군이 처음 그 나무를 베려했을때 북한군의 공갈협박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는데 그것이 바로 북한군에게 약점을 보였다는 판단에서였다.따라서 증강된 무력시위와 함께 공동경비구역 안에 들어가 그 나무를 당당하게 베어버림으로써 북한측에 심리적 위축을 주자는 것이었다. 다음날인 19일 아침 본토의 합동참모본부로부터 미군의 방어태세를 데프콘­3로 격상시키도록 지시가 하달됐다.이는 1953년 휴전협정조인 이래 처음 내려진 조치였다.30분후 한국 국방부장관도 한국군에 비상전투태세를 명령했다.잠시후부터 SR­71초음속정찰기들이 고공으로 발진,DMZ 상공을 가로지르며 북한군의 움직임을 24시간 감시하기 시작했다.또 나이키­허큘리스 장거리미사일도 적의 레이다를 향해 발사준비를 완료했다.RF­4D 정찰기와 와일드 워젤 방공억제기가 일본과 필리핀기지에서 이날 아침 발진,한반도의 오산 군산 대구기지에 도착했다.또 미아이다호의 마운틴 홈 공군기지에서는 핵을 장착한 F­111전략폭격기가 한반도를 향해 출발했다.이로써 북한과의 신경전이 개시됐다. 지상군은 미보병2사단과 한미1군단이 DMZ를 따라 전진배치를 끝냈으며 여러 구경의 재래식 포와 전술핵 미사일등이 발사준비를 완료하고 있었다.수많은 트럭이 병력을 싣고 전방으로 투입됐으며 수송헬기가 계속 전선으로 보급물자를 날랐다.이같은 움직임은 과거어느때도 볼 수없는 규모로 북한측에게 불안한 징조로 받아들여졌음이 틀림없었다. 사건발생 다음날인 8월19일 밤까지 우리는 북한군이 전 전선에 걸쳐 전시태세를 갖추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작전의 이름은 폴 버년(PAULBUNYAN)으로 명명됐다.작전의 목적은 공동경비구역은 물론 DMZ지역 어디서나 미군지휘하에 있는 유엔군이 권리를 침해당했을 경우 반드시 행동으로 응징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작전내용은 포플라나무를 자르고 또 지난 65년부터 북한측이 공동경비구역내 도로상에 불법으로 설치해 놓은 2개의 차량장애물을 제거하는 것이었다.작전개시일은 8월21일 토요일 상오7시 정각이었다.가장 중요한 것은 북한군과 조우하지 않고 신속하게 작전을 수행하고 철수하는 일이었다. ○남침땐 핵 사용 공동경비구역내에서의 실제작업은 빅토르 비에라중령이 이끄는 한미합동으로 편성된 2개소대 60명의 특공대가 맡기로 했다. 20일 새벽 펜타곤으로 보내진 이 작전에 대한 최종 재가는 작전개시를 7시간여 남겨놓은 그날밤 23시45분에 내려졌다. 다음날 새벽까지 나는 이번 작전에 동원된 모든 예하부대 지휘관들로부터 전투준비를 완료하고 출발선에 대기중이라는 보고를 받았다.결전의 시간을 앞두고 나는 월 룸 맨끝에 있는 빈방으로 가서 기도를 올렸다.이번 작전의 전쟁발생 가능성은 반반이었다.만일 전쟁으로 비화된다면 불과 한시간도 못돼 수십만명이 피로 물든 산과 들에서 싸우다 죽어야할 것이었다.북한군의 살인공격은 미국의 강력한 군사적 대응을 부를 것이고 이 대응이 또 북한의 침공으로 이어진다면 대량살상을 피할수는 없을 것이었다.사실 우리는 북한군이 서울을 향해 대규모 공격을 가해온다면 2차대전 이래 최초로 핵무기 사용을 요청할수 밖에 다른 선택은 없었다. 상오6시48분.특공대병력을 실은 대형트럭들이 키티호크기지를 떠나 공동경비구역으로 출발했다.앞에는 미군 소령이 칸보이했다.공동경비구역의 남쪽 통로인 제2초소를 통과, 안으로 들어가기 직전 소령은 인접한 중립국감시위원회 막사로 갔다.그곳에는 스위스대표 클라우드 무브덴소장과 스웨덴대표 라게 베른스테드소장이 있었다.소령은 그들에게 나의 인사장을 내밀고 방금 시작될 우리의 작전을 설명하고 북측의 폴란드와 체코대표단에도 통보해주도록 요청했다.그러자 장군들은 이 계획을 사전에 자신들에게 통보하지 않은데 대해 분통을 터뜨렸다. 공격은 공동경비구역 안으로 특공대트럭이 요란하게 돌진하면서 시작됐다. ○북 경비병들 당황 동시에 20대의 병력수송 헬기가 12대의 AH­1G 코브라건십의 에스콧을 받으며 공동경비구역 남쪽에 엄호병력을 풀었다. 동시에 대전차 F­4팬텀기와 F­111 중거리 전략폭격기들이 발진했으며 서해쪽으로는 괌기지에서 B­52 수개편대가,또 동해상으로는 항공모함 미드웨이호에서 40여대의 전폭기가 발진해 무력시위를 벌였다. 특공대중 1개소대는 포플라나무를 둘러싸고 다른 1개소대는 돌아오지 않는 다리쪽으로 가 북한군의 진입로를 차단했다. 북한경비병들이 놀라 자기네 진영으로 달려가는 모습이 보였다.우리 작업단은 신속하게 나무밑둥을 베어나갔고 다른 작업팀은 적들이 설치해 놓은 차량장애물 쪽으로가 그 구조물을 크레인으로 들어내고 있었다.이때 수십명의 북한경비병들이 달려왔으나 몽둥이와 곡괭이등으로 무장한 건장한 60여명의 경비병이 작업단을 호위하고 있었으며 중무장된 한국군 수색대가 공동경비구역 남쪽에 포진돼 있는등 엄청난 규모에 놀라는듯 했다. 10분쯤후 우리 작업단이 잘라낸 밑둥을 작게 잘라 트럭에 싣고 있을때 버스 한대와 트럭 2대 그리고 덜거덕거리는 동독제 고물 세단 한대로 편성된 북한경비대가 경비구역 안으로 들어왔다. 돌아오지 않는 다리 앞에 멈추더니 AK­47소총으로 무장한 1백50명가량의 병사들이 차에서 내려 제방주위로 포진했다.그러나 그들은 계속 지켜보기만 할뿐 이렇다할 행동은취하지 않았다. 우리 작업단이 경비병들의 호위를 받으며 철수를 시작한 것은 상오7시45분부터 였다.적의 기습을 우려해 조심스럽게 철수가 진행됐으며 모두 키티호크기지로 귀환한 것은 8시30분 이었다.유엔측 경비병들은 정위치로 돌아갔고 북한경비병들은 포플라나무로 와서 잘린 부분을 살펴보고 철거된 장애물들을 돌아봤다. 작전은 무사히 끝났으나 상오10시15분쯤 공동경비구역남쪽을 날며 작전의 마무리를 지휘하던 브래디장군의 헬기가 북한군의 자동화기 사격을 받았다. ○폭력책임 첫 시인 그러나 여섯대의 코브라헬기가 사격자세를 취하며 선회하자 그들의 사격은 멎었다.정오무렵까지 더이상의 총성이 들리지 않았으며 북한측이 정전위원회를 즉각 열자고 제의해 왔다.이 회의에서 북한군측 대표는 그들의 총사령관인 김일성의 메시지를 읽어내려갔다.그는 8·18사건을 「유감」으로 표시했으며 남북 양측이 이같은 불행한 사건의 재발을 막기 위해 함께 노력하자고 주장했다.이는 휴전협정이 조인된지 23년만에 북한이 부분적일 망정 DMZ내에서 폭력의 책임을 시인한 최초의 일이었다. 이후 수일 동안 위성사진에 따르면 북한이 계속 방어적 배치를 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됐다.그들이 서서히 경계를 완화시키는 동안 미군은 그대로 경계태세를 늦추지 않고 있었다.9월8일 북한이 우리들의 요구를 사실상 모두 수용했을때 합동참모본부는 경계태세를 데프콘­3에서 데프콘­4로 완화시켰으며 미드웨이호는 동해를 떠났다. 폴 버년작전은 북한의 오만하고 필사적인 공산지도자들을 힘으로 다스린 예가됐다.김일성이 마침내 물러서게된 유일한 이유는 그가 직면한 위험상태를 우리가 깨닫게 해주었기 때문이었다.미군은 동남아시아에서의 퇴각에도 불구하고 동맹국 한국에 대해서는 강력한 입장을 취했던 것이다.
  • 광복절이 쓸쓸한 독립공원/조명환 사회1부기자(현장)

    ◎담장철거 이해대립… 조성 지연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101 옛 서대문형무소 자리의 「서대문독립공원」조성 공사현장. 광복46주년 기념일인 15일에도 30도를 웃도는 무더위속에서 1백여명의 인부들이 조경·수도공사 등 비지땀을 흘리고 있었지만 일제때 애국지사들이 시달렸던 쇠창살이 쳐진 보안과건물 지하취조실과 감방 등에선 아직도 비명소리가 들리는듯 했다. 정문에 들어서면 맨처음 눈에 띄는 「지하굴」은 일제때 잔혹한 고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꿋꿋 버티던 애국지사들을 수용했던 곳.꽃다운 나이의 유관순열사가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애처로이 숨져간 곳이기도 하다. 또 이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보안과청사는 흰타일로 단장되기는 했어도 그 옛날 특수감방의 자취를 아직도 보여주고 있었으며 보수중인 9∼13사(사)등은 2평남짓한 감방번호와 겨울철에도 찬공기가 스며들었을 환기구가 당시의 을씨년스러웠던 상황을 그대로 전해주고 있었다. 서울시는 이곳에 있던 서울구치소가 지난 87년말 경기도 의왕시로 옮겨가자 각계의 의견에따라 사적공원 및 시민휴식공간으로 쓰일 「독립공원조성사업」에 나섰다.공사는 현재 66%의 진척을 보이고 있으며 연말내에 완공 예정. 시는 2만9천여평의 부지위에 있는 사형장과 나병사·중앙사·9∼13사 등 11개 건물을 보존하고 지난 76년 건물과 함께 철거됐던 사형장 지하통로·중앙사지하·지하 구여사 등을 복원하고 있다. 이밖에 공원전체에 은행나무 등 9만여그루의 나무를 심고 파고다공원에서 철거된 순국선열추념탑도 이곳으로 옮겨 나치의 잔학상을 그대로 보여주는 독일의 「베르겐벨렌 강제수용소」처럼 역사교육장으로 활용할 계획이다. 보존대상시설 및 관계자료 등은 사계의 권위있는 교수들에게 용역을 맡겨 공원면적의 30%를 사적지로 지정했고 망루2개와 전후면 담장 50m씩을 보존할 예정이다.그러나 독립운동유족회측에서 담장원형의 복원을,이웃 주민들은 부동산값과 미관을 들어 전면철거를 주장하며 국회에 2차례나 청원을 내놓는 등 갈등이 빚어져 공사진척에 장애가 되고 있기도 하다. 이에 대해 공원현장조성공사를 맡고 있는 삼환기업 진용상씨(36)는 『역사의 현장을 가꾸기 위해 적자를 무릅쓰고 공사에 최선을 다하고 있으나 담장의 보존과 철거를 주장하는 양쪽의 견해가 좁혀지지 않아 참으로 난처하다』고 말했다.
  • 미 싱글로브장군 회고록/위험한 임무:4

    ◎중공군 대공세… 해리고지 3차례 사수/술주정뱅이 연대장과 불화로 지휘권 뺏겨/전선 교착되자 미 병사들 귀국날만 기다려 「철의 삼각지대」로 불리는 철원 부근의 MLR(MainLineofResistance:유엔사령부 주저항선)에 배치된 15연대 2대대의 대대장 명령을 받은 것은 52년 12월말이었다.정보계통에만 근무해 평소 보병대대장을 원했던 나로서는 매우 만족했으며 의욕에 가득차 있었다. 연대는 중부전선을 맡고 있던 미9군단 산하 3사단에 속해 있었고 대대는 9백여명의 병력으로 완전편성돼 있었다.판문점에서 휴전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전선은 교착상태에 빠졌으며 이때문에 대부분의 병사들은 전투의욕을 잃은채 고국으로 돌아갈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다.이는 미국방부가 실시한 순환근무제의 영향 때문으로 MLR근무의 경우 보병은 한달근무에 4점,포병과 기갑은 3점을 주는데 그 점수가 36점이 되면,즉 9∼12개월만 무사히 넘기면 본국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첫 대대야간훈련을 실시한 것은 부임 3주후였다.밤새 실시된 이 훈련은 실제 야포와 박격포의 사격지원을 받으며 산악에서 이뤄졌음에도 불구하고 큰 사고없이 치러졌다.다만 빙판에서 내 오른쪽 발목이 부러진 것이 사고였다.이동외과병원까지 후송됐으나 깁스만 하고 치료도 끝나기 전에 대대로 돌아와버려 상당기간 애를 먹었으며 병원일지에는 「탈영」으로 기록됐다. 그로부터 2주후 연대는 25사단 35연대와 교대,다시 전선을 맡게됐다.우리 대대는 동쪽으로 배치됐는데 전선을 시찰해보니 벙커보수는 물론 교통호 개수,철조망및 지뢰지대 설치등 손을 봐야할 곳이 너무 많았다.더욱이 MLR에서 동북방으로 2㎞쯤 떨어진 전초진지인 해리포스트가 문제였다. 전선 왼쪽에는 이지중대,오른쪽에는 폭스중대를,중앙의 해리포스트에는 조지중대를 배치한후 각중대에 공병팀을 배속시켜 대대적인 진지보수작업을 펴게했다.건너편의 중공군 진지에서도 부대가 바뀐 것을 눈치챘는지 사흘밤을 82㎜와 1백20㎜ 박격포로 신고를 해왔다.진지를 견고하게 구축하기 위한 많은 자재들의 수송작업은 한국인 근무지원단이 전적으로 맡았는데 사격위험을 무릅쓰고 추위에 험한산길을 무거운 짐을 지고 용감하게 일했다. 그러나 며칠후 나는 해리포스트에 갔다 오던중 길아래로 굴러떨어진 보급트럭을 발견하고 내려갔다가 적의 포격을 받고 오른쪽 팔꿈치에 부상을 입어 다시 후송되는 신세가 됐다. 적과의 큰 교전없이 진지강화에 힘을 쏟고 있는 동안 3월중순 스틸웰연대장이 1군단으로 전출되고 러셀 F 에이커대령이 새로 부임했다.그는 술주정뱅이였다.점심부터 마시기 시작하면 보통 밤까지 계속됐다.나도 술은 좋아했지만 전선에서 술만큼은 치명적이라고 생각,대대로 나오는 맥주 쿼터도 모두 유보시킬만큼 엄격했기 때문에 그와는 부임후 첫회식 때부터 충돌이 일어났다.그는 직접 마티니 칵테일을 만들어서 권했다.커피를 마시겠다고 우겼더니 나중에는 욕을 하며 『명령』이라면서 내밀었다.나는 끝내 마시지 않고 나와버렸다. 첫공세는 4월2일밤 개시됐다.칠흑같이 어두운 밤하늘에 처음에는 60㎜ 박격포 몇발이 해리포스트 위에 떨어지더니 이내 82㎜,1백20㎜ 박격포 세례가 퍼부어졌다.잠시후 천둥소리처럼 큰소리가 나더니 적의 포병사격도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해리포스트는 화산이 폭발하는것 같았다.이따금 섬광에 적 보병부대들이 해리포스트의 등성이로 기어올라가는 것이 보였다.지상공격도 시작된 것이었다.우리 포병의 응사도 곧 개시됐다. 그러나 적들은 주도면밀하게 공격을 가해왔으며 해리포스트는 필사적으로 저항하고 있었으나 대대본부와의 연결통로가 적에 점거된 상태여서 자칫 포위되기 직전의 상태였다.예비대의 반격을 개시할 시점이었다.오른편 전선을 맡고 있는 폭스중대쪽의 능선을 타고 해리포스트의 우측 적을 섬멸시키는 작전을 전개했다.폭스중대와 포병의 엄호사격이 가해지는 가운데 본부예비대를 내가 직접 지휘했다. 해리포스트쪽으로 가기 위해서는 얼마동안 교통호를 따라가다 개활지를 건너야 하는 아주 위험한 이동이었다.적들은 이 반격을 기다렸다는 듯이 교통호를 향해 집중사격을 가해왔다.내가 먼저 개활지의 한쪽으로 올라서 쏜살같이 건너갔다.모두들 아직 교통호속에 올라올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이미 해리포스트 남쪽 통로를 점령하고 있던 적들과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다.해리포스트를 빼앗기느냐 마느냐의 처절한 싸움이었다.치열한 포성이 멎고 우리 예비대가 해리포스트 위에 올라선 것은 동녘이 밝아올 때였다.우리측 사망자는 9명,부상 21명이었으며 우리가 거둔 중공군 시체만 50구에 달했다. 이틀후 나와 애킨슨중위등 17명은 사단장 스마이드소장으로부터 이날의 공으로 은성무공훈장 등을 수여받았다. 중공군들은 끈질기게 공세를 감행,20여일후인 4월24일밤 2차공세가 있었고 또 5월10일밤에는 3차공세를 가해왔지만 해리포스트는 끝까지 사수했다.그러나 나는 3차공세를 잘 막아낸후 에이커연대장과의 불화로 그에 의해 대대장직을 박탈당했다.
  • 자유민주체제의 우월성/“공산국 가서야 새삼 깨달았다”

    ◎“체험의 중국연수”… 단국대 최정식군의 “개안”/“개방진통”… 빵과 이념갈등 확인/빈곤의 평등속 실업 날로 심화/우리기업 진출에 자부심… 백두산선 분단에 비감 『이제 막 시장경제체제에 눈을 뜬 12억 중국인들의 저력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으며 이미 중국 곳곳에 진출한 우리 기업들의 입간판이 눈에 띄는등 국력신장을 새삼 되새기는 계기가 됐습니다』 정부가 대학생을 대상으로 실시하고 있는 하계대학생국외연수계획에 따라 최근 중국에 다녀온 단국대공대 기계공학과 학생회장 최정식군(25)은 「죽의 장막」에 대한 첫 소감을 이렇게 피력했다. 최군은 학과 지도교수의 추천으로 지난달 27일 단국대중국연수단(단장 한정련공대학장)일행 30여명과 함께 배편으로 인천을 떠나 지난 5일까지 9박10일동안 중국을 살피고 돌아왔다. 학과학생회장을 맡으면서 교내시위에도 종종 참가해 왔다는 최군은 『공산권국가를 대상으로 한 연수가 학생들의 의식을 변화시키려는 것만 같아 처음 연수제의를 받고 무척 망설이기도 했으나 실제로 중국공산주의의실상을 체험해 본 결과 자유민주주의체제의 우월성을 인식하게 됐다』고 말했다. 최군은 특히 『연변대 경제학부 박승헌교수의 특강을 통해 중국경제의 변천사와 실상을 다소나마 깨우칠 수 있었다』면서 『중국이 깨어날 수 있는 유일한 통로는 「개혁」밖에 없다고 강조한 박교수의 말을 굳이 인용하지 않더라도 중국의 개방은 이곳 저곳에서 목격됐다』고 덧붙였다. 그는 또 『출퇴근할 때 북경시를 꽉 메운 8백50만대의 자전거와 1인당 3백30달러의 낮은 GNP.시민들의 허름한 옷차람,보잘것 없는 생필품등은 소련과 마찬가지로 중국경제의 낙후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들이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백두산 천지를 둘러본 것은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이었다고 회상했다. 『서울에서 38선과 평양을 지나 백두산에 오를 경우 하루면 될텐데 인천∼위해∼북경∼연길을 경유해서 장백산(중국사람들은 백두산을 이처럼 부름)에 오르다 보니 통일에의 염원이 더욱 강력해지더군요』 최군은 이어 『공산주의는 만인이 평등하고 고루 잘 사는 줄로만 알았으나 이번 중국연수를 통해 그곳에도 빈부의 격차와 실업등 구조적인 사회문제가 점점 심화되고 있다는 사실을 교포학생들로부터 전해 들었다』고 밝혔다. 그는 『중국등 공산권미수교국가와 소련,헝가리,체코슬로바키아등 과거 일당독재와 함께 사회주의를 맹신해 왔던 국가에 대한 연수를 계속 확대시켜 대학생들에게 현장교육의 기회를 늘려나갔으면 좋겠다』고 소박한 바람을 털어 놓았다.
  • 비행기표 다툼… “특권 추태”/박대출 사회2부기자(오늘의 눈)

    요즘 본격적인 피서철을 맞은 김포공항을 살펴보면 힘없고 선량한 시민들이 발붙일 틈도 없는 현실에 안타까움을 넘어 분노감마저 든다. 비행기 좌석을 예약해 놓고도 정작 이용하지 않는 예약부도,즉 노쇼(noshow)율이 국내선의 경우 무려 25%에 이를 정도로 무책임한 시민이 많다.사정때문에 비행기를 타지 못하게 됐다는 전화통보도 거의 없음은 물론이다. 더욱이 볼썽사나운 것은 예약부도로 인해 다소 여유가 생긴 빈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아우성치는 모습이다.어디선가 얌체족들이 나타나 온갖 연줄을 동원해 치열한 「끗발싸움」을 벌이는 것이다. 이때문에 항공사 담당직원들은 곳곳에서 들어오는 『표를 구해달라』는 청탁에 진땀을 흘리고 있다. 대한항공의 한 예약담당직원은 『전화벨 소리만 나면 또 무슨 부탁인가라는 생각부터 든다』면서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이라고 털어놓는다. 김포공항은 흔히 「작은 정부」로 일컬어질만큼 22개 정부부처가 산하기관을 상주시키고 있는 곳이다. 또 50여개의 각종 기관및 업체들이 함께 자리하고 있다.이들기관 또는 업체들이 이같은 민원의 주요 통로로 이용되고 있는 곳이다. 물론 이들 기관들의 간부쯤 되거나 웬만한 위치에 있게되면 거절하기 어려운 부탁도 받을 수 있다.이들 기관의 일부 눈치빠른 간부는 외출중이라는 이유를 내세워 직접 전화를 받지않고 비서나 부하직원들에게 일단 맡겨 이같은 청탁을 조금이라도 줄이려고 애쓰고 있지만 전혀 외면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라고 한다. 결국 힘깨나 쓰고 어느정도 배경이 있다는 사람들은 이런 경로를 통해 큰 어려움없이 비행기표를 구해 편안한 바캉스를 다녀온다. 그러나 대합실에서 말없이 줄을 서서 하루종일 기다려봐도 표를 구하지 못하는 선량한 시민들은 아무데도 하소연할 곳이 없다. 교통부는 이같은 폐단이 예약부도가 많다는데 그 원인이 있다고 보고 오는 9월부터 예약한뒤 일정기한앞까지 표를 구입하지 않으면 예약을 취소하는 방안을 강구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같은 제도개선만으로는 항공권 구매에 따른 부조리를 막을 수 없을 것 같다. 이용객 누구나 특권의식을 버리고 차례를 지킬때 비로소 항공권 구매질서가 바로 잡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 미 싱글로브장군 회고록/위험한 임무:1

    ◎한국부문/북한병력,남침 6일전 38선 집결/“개전 임박” CIA보고 극동 사서 무시/6·25 터지자 백악관·의회·군 “책임 논쟁”/휴일 미 보병학교서 야구중계 보다 “전쟁발발” 뉴스 들어 한국에서의 「미군」은 누구인가­.주한미8군참모장을 역임한 존 싱글로브장군(69)이 펴낸 회고록 「위험한 임무」(HazardousDuty)는 한국전쟁발발 및 한반도에서의 미군의 역할과 책임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고 있어 우리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77년 두번째 한국근무중 당시 지미 카터 미대통령의 주한미군철수정책을 정면으로 비판하다 소환되어 강제퇴역 당하는등 소신을 굽힐줄 모르는 강직한 군인의 모습을 보여준 싱글로브장군은 이 회고록에서 6·25는 미 CIA보고에 대한 미국정부의 판단착오 때문에 발생했다고 기술하고 있다.서울신문은 이 회고록을 긴급입수하여 「미군」으로서 체험하고 느낀 주한미군의 한반도에서의 역할과 책임,그리고 공과에 관한 부분을 발췌하여 몇차례에 나누어 소개한다. 1950년 6월 25일 비내리는 일요일 새벽,날이 채밝기도 전에 10만여명의 북한인민군이 38선 전역을 가로질러 침공을 개시했다.남한에서는 이들을 편성도 채 갖추지 못한 3개사단 정도가 맞서고 있었다. 당시 한반도는 1945년 2차대전 후 일본인들의 항복을 접수하기 위하여 남쪽은 미군이,북쪽은 소련군이 나누어 통치를 하고 있었다. 소련은 탱크와 중화기를 지원하는등 북한 인민군의 무력증강에 많은 투자를 했다.1948년 소련의 붉은 군대가 공식적으로 북한땅을 철수한 후에도 수천명의 군사고문단이 잔류,지속적인 군비증강을 꾀했으며 침공을 감행할 무렵에는 13만5천의 병력과 소련사관학교에서 정규교육을 받고 만주에서 중국공산당의 전투를 참관한 유능한 장교단들로 구성된 막강한 전력을 갖추고 있었다. 한국군은 10만명이 채 못되었으며 미 고문단에 의해 훈련을 받고 미군장비를 갖추고 있었다.남한에 주둔하고 있던 미24군단 병력이 공식적으로 철수한 것은 1949년 5월이었으며 군사고문단과 병참요원등 5백여명만이 잔류하고 있었다.한국군에는 탱크는 없고 몇대의 대포만 있을 뿐이었으며 제대로자격을 갖춘 장교도 드물었다.더욱이 소규모 작전의 지휘권까지도 워싱턴에 있었으며 도쿄의 맥아더 극동사령부와는 중계를 통한 무선통신만이 가능할 뿐이었다. 이같은 상황에서 한국군은 바로 첫날 새벽부터 현대전 사상 유래가 없는 패주의 행진을 시작하게 되었던 것이다. 남한의 방어에 미군을 사용한다는 극동사령부의 임시계획은 있었지만 그것은 이같이 38선 전역에 걸쳐서,또 다량의 우수한 최신 소련제 탱크의 공격을 예상한 것이 아니고 고작 북으로부터의 소규모 국경충돌이나 게릴라침투 등을 고려했던 것이다. 그러나 소련의 의도는 다른데 있었다. 내가 한반도에서의 전쟁발발을 안 것은 조지아주 베닝기지에서 였다.그 전날 보병학교에서 대대장교육을 수료한 뒤여서 그날은 숙소에서 짐을 꾸리고 있었다.야구중계방송을 듣고 있었는데 중간에 한국전쟁 소식이 스포트로 전해졌다. 그 소식을 듣자마자 만주에서 여러해동안 정보업무를 맡아왔던 나로서는 우선 몹시 화가났으며 놀라움에서 불평이 튀어나왔다.그 다음에는 강한 의구심이 일었다.『왜 미국의 정보기관들은 이 침공을 예측하지 못했는가?』 봄철 내내 38선 전역에서 북한군에 의한 철저한 준비와 위장이 있었을 것이고 그곳의 높아져가는 긴장감을 분명히 CIA와 윌로그비소장 산하의 극동사령부 정보참모부에서 감지했을 것이다. 나는 CIA의 북한 정보망을 내가 직접 작성했기 때문에 공산주의자들의 침공의도에 관한 정보를 완벽하게 놓치고 있었다는 것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CIA는 1946년부터 48년 사이에 만주로부터 압록강을 건너 잘 훈련된 10여명의 젊은 한국인 정보원들을 북한에 투입했다.극동사령부의 맥아더원수와 윌로그비장군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침략 조기경고의 특수한 임무를 부여해 북한땅에 헌신적인 반공주의자들을 투입시켰던 것이다. 그후 1949년에 미군이 남한에서 철수하자 CIA는 마침내 서울에 지역본부를 설립했다.나는 그때 CIA의 중국담당 책임자였는데 서울본부는 아주 우수하고 믿을만한 장교들로 구성돼 있었다. 그해 중반부터 서울본부에는 북한으로 침투시킨 정보원들로부터 상당히 많은 정보를 입수하고 있었으며 그들이 상당부분 북한의 전쟁준비 움직임에 대한 경고를 해왔을 것임이 틀림없다. 나는 후에 CIA에서 한국에 대한 군사정보 임무를 맡아 다시 일하게 되었을 때 그 당시의 민간및 군사정보 책임자들이 누구였는지 구체적으로 문제를 제기하면서 50년 6월 엄청난 「정보실패」의 미스터리를 풀수 있었다. 그해 봄부터 김일성의 공산당정권은 한국에서의 선거를 비난하고 군사적 도발의 위협을 가하면서 남한에 대한 악랄한 선동공세를 벌여왔다.그러는 가운데 소련지원을 받는 김의 군대는 침공준비를 위해 은밀하게 단계적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그러나 그 당시 북한에 있던 우리 정보원들은 이미 북한의 교통시설은 물론 정부기관이나 군내부에서 영향력 있는 자리에 앉아 임무수행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충분히 그같은 움직임을 감지할 수 있었다. 6월까지 몇몇 정보원들이 북한의 전쟁준비에 대한 특별보고를 해오거나 38선을 실제로 넘어와서 서울에 있는 CIA간부들에게 직접 브리핑을 하기도 했다. 「CIA 서울지역국 보고」라고 명명된 1950년 6월19일자로 된 한 중요한 정보보고를 보면 중장비 등을 수송하기 위한 38선 북측 도로의 확충,1945년이래 소련에 의해 파괴되었던 남측으로의 연결도로에 대한 일제 보수등 광범위한 병력의 움직임을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더욱 불길한 징조는 북한의 민간 교통수단들이 북한의 주요 군사기지에서 38선으로 연결되는 철로변에 집결돼 있다는 것이었다.결론적으로 이 보고서는 북한의 침공이 임박했으며 김일성은 자신이 원할때 언제든지 공격할 수 있도록 병력과 장비를 배치시켜 놓고 있다는 것이다. CIA국장 로스코 힐렌쾨터 해군대장은 북한의 침공이 있기 전 닷새의 시간동안 이 평가서는 백악관과 딘 애치슨 국무장관,루이스 존슨 국방장관,오마 브래들리 합참의장등 트루먼대통령의 군사및 외교정책 핵심참모들에게 전달됐으리라고 확신했다.이 평가서의 요약본은 또한 전통을 통해 도쿄 극동사령부의 맥아더장군과 윌로그비장군에게도 전해졌다는 것이다. 결국 미국 군부및 민간의 핵심 정책입안자들은 남침 이전에 이미 북한의 침공의도에 관한 충분한 증거자료를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물론 이들 증거자료는 잘 훈련된 정보원들의 보고를 토대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필연적인 의문점이 제기될수 있다.왜 미국의 지도자들은 이 정보에 대해 반응을 보이지 않았는가? 왜 어떤 작은 군사적 행위도 강력한 응징을 받을수 있다는 공식적인 주의를 북한에 주지 않았는가? 왜 적어도 미공군의 정찰기들이 북쪽의 뒤엉킨 산들로부터 단지 세개 뿐인 남쪽으로의 통로를 감시하지 않았는가? 당시 태평양지역에서 일했던 CIA 지역책임자들이 후에 나에게 이 문제들의 해답을 자세히 들려주었다. 윌로그비소장의 극동사령부 정보참모부는 그해 봄 서울에서 오는 모든 정보들을 분석평가했는데 그것들은 모두 「F6」정보,즉 「미숙한 정보원이 보낸 신빙성이 불투명한 정보」로 분류돼 거들떠보기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한국에 있어서의 미국의 작전은 맥아더사령관의 관할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정보책임장교는 그 보고들을 심각한 고려의 가치가 없는 것으로 취급해버렸던 것이다.그러한 등급으로는 워싱턴에서 절대로 심각하게 고려되어질 수 없었다. 워싱턴에서 이들 정보를 심각하게 받아들인 사람은 힐렌쾨터 CIA국장 한사람 뿐이었다.그러나 그의 임무는 정책입안자들에게 믿을만한 정보를 제공해 주는 것이었지 그 정보를 바탕으로 정책을 수립하는 일은 그의 일이 아니었다. 어쨌든 무방비상태에서 전쟁은 발발했고 개전 다음날인 26일부터 워싱턴은 한국전쟁발발의 책임문제를 놓고 의회와 백악관,CIA와 극동사령부 정보참모부간에 「정보수집실패」냐 「정보판단실수」냐의 뜨거운 논쟁에 휘말렸다.
  • 노 대통령 평통5기 출범 개회사

    ◎“혈육마저 오갈수 없다면 통일은 공허한 외침” 「민주평통」은 온 국민의 지지와 신뢰위에서 겨레의 통일 역량을 결집하여 평화통일을 실현하는 구심체가 될 것입니다. 지난 2∼3년새 세계는 이 세기를 매듭짓는 혁명적인 변화를 거듭했습니다. 우리 겨레와 국토의 분단을 가져온 냉전체제가 그 바탕으로부터 무너졌습니다. 세계를 바꾸고 있는 이 대변혁의 불길은 이제 우리가 사는 동북아시아와 한반도에도 밀려오고 있습니다. 냉전체제 자체가 붕괴된 상황에서 남북한이 여전히 상대방을 전복의 대상으로 보고 적대적 행동을 계속할 수는 없습니다. 남북은 단절과 대결의 비극을 종식시켜야 합니다. 남북한은 비정상적인 관계를 하루속히 청산하고 대화를 통해 서로가 서로를 돕고 신뢰하고 화해하는 길로 함께 나아가야 합니다. 한반도 문제는 이제 남북한이 스스로 해결의 길을 찾고 이를 실천해 나가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남북고위급회담과 여러 통로의 회담과 대화가 지체없이 재개되어야 합니다. 남과 북이 만나 대화를 통해 해결하지 못할문제는 없습니다. 남북동포간의 인도적문제,남북간의 교류협력은 물론 정치군사문제의 해결도 남북간의 협의를 통해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는 남북동포간에 분단의 고통을 덜고 이땅의 평화와 통일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북한측과 논의하고 전진적인 조처를 취할 태세를 갖추고 있습니다. 나는 남북한이 공존공영의 관계를 이루어 평화통일의 여건을 우리 스스로가 성숙시켜 나가기 위해 다음과 같은 일을 하루빨리 실천해 나가야 한다고 믿습니다. 첫째,남과 북은 한겨레로서 민족적 동질성을 회복하기 위한 일들을 가능한 것부터 추진해나가야 합니다. 나는 북한측이 주장해온 것처럼 남북의 동포와 젊은이들이 참가하여 광복절 경축행사를 함께 치르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며 올 8월15일을 기하여 그것이 실천되기를 바랍니다. 남북한 공동주관으로 판문점에서 남북한동포가 다함께 모여 공동 경축행사를 개최하고 통일문화축전을 갖는 것은 우리 겨레의 한결같은 통일의지를 스스로 확인함은 물론 이를 온 세계인의 가슴에 심어줄 것입니다. 광복절의 뜻을 기리기 위해 남북의 젊은이들이 백두산에서 한라산까지 통일대행진을 실시하고 남북의 각계 대표들이 서울과 평량에서 통일대토론회를 갖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 될 것입니다. 남과 북이 40년이 넘는 오랜 단절속에 생활양식과 사고마저 달라지고 있는 가슴아픈 현실에 비추어 민족공동체를 회복하는 구체적인 노력을 이제 본격적으로 해나가야 합니다. 남과 북의 학자와 전문가가 민족문화유산을 공동으로 조사·연구하고 언어의 이질화현상을 해소해가는 일 등을 추진하기 위해 「민족문화공동위원회」를 구성하는 것도 바람직한 일일 것입니다. 둘째,남과 북은 서로에게 절실하고 당장 실천할 수 있는 가능한 일로부터 교류협력을 추진하고 이를 지속적으로 확대해 나가야 합니다. 남북으로 갈라진 부모형제마저 오갈 수도,만날 수도 없는 상태에서 불신의 벽을 허물 수 없으며 이러한 현실을 그대로 두고 통일은 공허한 외침일 수 밖에 없습니다. 남과 북은 무엇보다 나이든 이산가주부터라도 생전에 고향을 찾고 혈육을 만나볼 수 있도록 해야합니다. 남북간의 인적교류는 모든 분야에 걸쳐 이루어지고 촉진되어야 합니다. 나는 남과 북의 동포들이 서로를 올바로 보고 이해하도록 텔레비전 라디오 방송부터 우선 상호교류하고 개방해 나갈 것을 촉구합니다. 서로 다른 송출방식의 문제는 남북한이 비무장지대안에 공동전환시설을 설치운영함으로써 해결될 수 있습니다. 남북간의 교역과 경제협력,과학기술분야의 폭넓은 교류는 남북한 모두 반대할 이유가 없으며 남북동포 모두에게 혜택을 주는 일입니다. 셋째,남북한간의 정치·군사적 개결을 지양하여 한반도에 긴장의 시대를 종결하고 평화를 정착시켜야 합니다. 우리는 남북한이 오는 9월 유엔에 함께 가입하는 것을 계기로 국제사회에서 남북이 한반도와 국제적 문제에 협조협력하는 관계를 적극적으로 모색할 것입니다. 한반도에 평화를 확고히 정착시키기 위해서는 실효성있는 불가침 선언을 채택하고 현재의 휴전체제를 평화체제로 전환해야할 것입니다. 새로운 평화체제는 남북한이 당사자가 되어야 하며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에 관련이 있는국가들도 필요한 협조와 공동의 노력으로 이를 확인하고 보장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제 통일은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우리의주도적 노력으로 이루어야 합니다. 분단의 시대는 이 세기안에 막을 내릴 것입니다. 화해와 협력의 물결이 서로를 가르는 모든 장벽을 허물고 있는 이 세계에서 자유와 번영을 이루고 동북아시아와 한반도에 새로운 질서를 이끌고 있는 우리의 역량이 통일의 여건을 성숙시키고 있는 이제 한반도만이 냉전으로 얼어붙은 분단된 땅으로 남아 있을 수 없습니다. 세계의 변혁속에 맞고 있는 이 통일의 기회를 살리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절대절명의 소명입니다. 지금은 통일에 들 비용과 노력,통일과정에서 맞게될 도전에 대비하고 통일한국의 위상을 생각할 때입니다.
  • 개혁바람에 고심하는 중국공산당/창당 70돌… 오늘의 위상

    ◎경제비능률 심화·제도적 부패등 만연/체제고수 속 “정치개혁” 국민욕구 외면 7월1일로 창당 70주년을 맞은 중국공산당이 나라 안팎에서 불어오는 심한 역풍에 시달리고 있다. 밖에서는 소련·동구의 탈공산주의 바람이 5천만 당원들의 사기를 꺾고 있는 데다 안에서도 6·4 천안문사태의 망령 때문에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고희를 기념하는 학술대회나 각종 집회에서 예외없이 「당의 위대함」을 애써 강조하고 있으나 뜨거운 호응은 거의 없는 것 같다. 오히려 차가운 시선을 보내거나 아니면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게 일반 주민들의 표정이다. 중국공산당이 오늘날 이처럼 사면초가에 빠진 것은 물론 마르크스·레닌주의 사상의 비현실성에서 찾을 수 있다. 볼셰비키혁명 이래 지금까지 세계 수십개국에서 실험해본 결과 이 사상은 인간의 자유를 억압할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경제의 비능률이 가장 큰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등소평을 정점으로 한 현 집권층이 경제에 관한 한 개혁·개방정책을 추진하면서도 정치개혁에는 극구 반대하고 있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등은 지난 79년부터 이른바 4개의 현대화(농업·공업·국방·과학기술)를 캐치플레이즈로 내세운 후 경제분야의 개혁·개방에 박차를 가해왔다. 그래서 지난 10년간 1인당 국민소득을 2배로 끌어올려 이제는 먹는 문제와 입는 문제는 거의 해결했다고 자랑하고 있다. 이붕 총리도 최근 중국은 최빈곤상태는 벗어났다고 주장했다. 문제는 정치개혁이다. 정치에 관한 한 4개 항의 원칙(사회주의·프롤레타리아 독재·공산당지도·마르크스 레닌주의와 모택동 사상 견지)을 굳게 고수,전혀 양보의 기색이 없다. 동구에서처럼 다당제를 채택,서로 다른 이념을 가진 정당 중에서 주민들이 원하는 정당을 고를 수 있는 선택의 자유란 현재로선 상상할 수도 없다. 그보다는 강도가 훨씬 낮은 공산당내의 개혁을 촉구할 권한도 없다. 고위 당관료가 어떤 부정부패를 저지르든 이를 제지하고 규탄할 통로가 마련돼 있지 않다. 그래서 옳든 그르든 당의 지시에 순종할 수밖에 없다. 지난 89년의 6·4 천안문사태도 이같은 정치제도의개혁욕구 때문에 발생했었다. 당시 학생과 시민들은 좀더 많은 자유와 민주주의 그리고 보다 성숙된 시장경제체제를 요구했던 것이다. 이 당시 좌절을 맛보았던 세력은 이제 지하에서 숨을 죽인 채 등소평 사후를 기다리고 있다. 또 다른 욕구분출을 기다리는 휴화산인 셈이다. 이같은 휴화산이 활화산으로 폭발하는 걸 막기 위해서는 정치분야의 개혁이 필요할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동구와 같은 다당제까지는 못 가더라도 최소한 당관리의 부정부패나 과오 정도는 인민의 힘으로 시정해 나갈 수 있는 하의상달의 의사전달체계가 마련돼야 할 것이라는 지적이다. 이같은 개혁 역시 현정치체제를 그대로 유지할 수 있는 한도내에서만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다만 등의 사후 급진개혁파가 집권했을 경우 좀더 달라질 수는 있을 것이다. 1949년 공산당 집권 이후 통치형태는 누가 실권을 장악하느냐에 따라 크게 달라져 왔다. 모택동을 비롯한 주은래 임표 등을 거쳐 양상곤 진운 이붕에 이르기까지 이념 중시의 정파가 집권했을 경우와 유소기 등소평 호요방 조자양등 실용주의자들이 집권했을 경우 통치양상은 크게 달랐다. 이념파 집권시대는 대약진운동(58∼60년)으로 수백만 명의 아사자가 발생했고 문화대혁명(66∼70년) 때에는 실용주의파의 대거숙청은 물론 1천6백만명에 달하는 청년 학생과 지식인들을 시골로 내려보내(상산하향운동) 대학기능을 마비시키기도 했었다. 그러나 관용주의자들이 집권해서는 착실한 경제성장을 통해 인민의 생활을 안정시키고 보다 많은 자유를 허용해왔다. 그러나 실용주의자일지라도 자기들이 권좌에서 쫓겨날지도 모르는 동구와 같은 혁명적 사태는 원치 않고 있다. 동구화의 단계에 접어들기 위해서는 주민들의 의식이 좀더 깨우쳐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기 위해서는 좀더 기다리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중국 공산당은 1921년 7월 어느날 50여 명의 당원들이 모여 창당했으며 정확한 날짜를 몰라 7월1일을 창당일로 정해 기념해오고 있다.
  • 경부고속도로 수원∼청원 100㎞/2∼4차선 확장 기공

    ◎인터체인지 7곳 확충… 93년 완공 경부고속도로 수원∼청원(1백㎞)간 확장공사 기공식이 24일 충남 천안군 목천면 현장에서 정원식 국무총리·이진설 건설부 장관 등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대전 엑스포에 대비하고 경부고속도로의 교통지체 현상을 해소하기 위해 오는 93년 7월 준공을 목표로 한 이 공사는 도로공사 주관으로 총사업비 5천9백40억원이 투입돼 수원∼천안간 51.5㎞는 4차선에서 8차선으로,천안∼남이간 40.3㎞는 4차선에서 6차선으로,남이∼청원간 8.3㎞는 6차선에서 8차선으로 각각 확장된다. 이와 함께 기흥 오산 안성 등 7곳의 인터체인지가 개량되고 지하통로 56곳이 신설 또는 확장되며 기존 고속도로선형도 41곳(73㎞)이 개량된다. 도로공사는 이 공사를 마무리하면 교통용량이 하루 4만2천대에서 7만2천∼10만7천대 수준으로 늘어날 것으로 전망했다. 도로공사는 이 공사의 진행을 빠르게 하기 위해 올해 총공사비 중 2천1백억원을 집중 투입할 계획이다.
  • 품질개량 무늬강판/포철,국내공급 확대

    포철이 지난달부터 무늬강판의 품질을 개선,국내공급을 확대하고 있다. 14일 포철과 철강업계에 따르면 무늬강판의 수요는 지난해 5만5천t이었으나 올해에는 6만t으로 크게 늘어나 포철이 그 동안 건설용 건자재로만 생산했던 무늬강판을 지난달부터 월 3천t 이상 국내시장에 공급,올 한햇동안 약 9백만달러 이상,내년부터는 연간 2천1백만달러 이상의 수입대체효과가 기대되고 있다. 무늬강판이란 가로 27㎜,세로 5.1㎜,높이 2.1㎜의 다이아몬드 모양의 무늬를 5㎜ 간격으로 표면에 새긴 열연강판이다. 주로 지하철공사장의 복강판과 공장,건물의 안전통로,그리고 주차시설의 미끄럼방지용 바닥재로 사용되며 최근 건설경기의 활황으로 그 수요가 급증하고 있다. 특히 무늬강판의 수입제품은 그 동안 모양 및 규격차이 등의 품질 불안과 시황에 따른 공급 불안정으로 국내 수요가들의 불만이 매우 높았다.
  • 진충국,한국기자와 일문일답

    ◎“북한은 핵무기 생산능력도 의사도 없다/핵사찰과 유엔가입 문제는 별개의 차원” 국제원자력기구(IAEA)이사회에 참석중인 북한의 진충국 순회대사는 11일 빈의 원자력기구 건물에서 한국기자들과 만나 북한은 오는 9월 핵확산금지조약(NPT)에 따른 안전협정를 체결할 것이며 이 문제와 관련해 서방세계의 별도 압력이 있을 경우에는 협정을 거부하겠다골 밝혔다. ­한스 블릭스 IAEA 사무총장을 만났는가. ▲총국장(사무총장을 지칭)과 만나 우리의 입장을 정확히 전달했다. 우리도 다음달 전문대표단이 이 기구의 담보문(협정문)대로 최종문안을 확정해 9월 총회에서 동의한다는 데 총국장과 합의했다. ­동의한다는 말은 서명을 의미하는 것인가. ▲우리는 동의한다는 것을 서명과 구별시키려는 것에 대해 이해가 안간다. 우리는 모든 절차에 따라 담보문을 지키는 것을 말한다. ­그러면 북한은 협정문을 협의에서 어떤 문구를 조정하려는 것인가. ▲문구는 정확해야 한다. 이렇게도 저렇게도 해석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담보문 자체에 손을 댈 수는 없기 때문에 우리는 담보문에 규정되어 있는 대로 지킬 것이다 ­그러면 북한이 핵재처리시설·핵무기보유 여부에 대해서도 사찰에 응한다는 말인가. ▲우리는 핵처리시설을 운영하지도 않으며 핵무기를 생산할 능력도,생산할 의사도 없다. 우리가 동의를 하면 담보문에 있는 대로 모든 사찰에 응한다는 말이다. ­협상과정에서 미군의 핵무기 철수문제와 연관시키려는 것은 아닌지. ▲우리의 남조선에서의 미군철수 요구와 핵철수 요구는 정당한 것이다. 기자선생도 우리의 생존을 위해 이 문제의 실현을 이루는 방향으로 노력해야 할 것이다. ­미국 대표와 만난 적이 있는가. ▲우리는 미국과 계속 접촉을 갖기를 원하며 지금까지 여러 통로를 통해 미국이 한반도에서 핵철수를 할 의사를 갖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우리가 담보문에 서명하면 미국도 핵무기를 철수할 것으로 알고 있다. ­핵사찰 수용문제와 유엔가입 문제를 연계시킬 의도는. ▲핵사찰과 유엔가입 문제는 별개의 것이다. ­일부 이사국이 북한의 핵사찰수용촉구결의안을 이사회에서채택하려고 하고 있는데. ▲우리가 괘씸하게 생각하는 것은 미국과 남조선이 우리에게 압력을 가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만약 결의안이 채택되면 우리의 협상전문가가 다음달 이곳에 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모든 것이 달라졌기 때문에 결의문을 채택하지는 않을 것으로 안다. ­남한 대표를 만날 용의는. ▲항상 만날 용의가 있다. 나는 남조선 대표가 요청해 오면 만나 이 문제를 기꺼이 상의하겠다.
  • 노 대통령,9월 유엔총회 참석/“한반도 냉전종식” 선언

    ◎동북아 화해 기조연설 통해 제창/유엔 남북대표부 협의기구 상설 추진 정부는 오는 9월17일 개막되는 올 유엔총회에서 남북한이 유엔에 가입하는 것을 계기로 노태우 대통령이 9월 하순 유엔을 방문,기조연설을 통해 한반도에서의 냉전종식,동북아의 새로운 화해질서 구축을 제창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는 유엔가입 당사국으로서 가입수락연설은 이상옥 외무부 장관이 하도록 하고 북한측이 수락 및 기조연설을 위해 김영남 외교부장을 파견할 경우 유엔본부를 무대로 남북외무장관회담을 추진할 방침인 것으로 전해졌다. 정부는 이와 함께 남북한의 유엔가입이 실현되는 대로 남북한이 이해를 같이 하는 국제문제에 공동대처하고 유엔에서 「한목소리」를 내는 방안을 강구하기 위해 유엔주재 남북한 대표간에 정례협의기구를 상설화하는 방안도 아울러 추진할 방침이다. 정부의 이 같은 구상은 지난 27일 노창훈 유엔대사가 북한의 박길연 유엔대표부대사를 만나 이미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의 한 고위소식통은 29일 노 대통령의 유엔방문 및 기조연설문제와 관련,『가입수락연설은 외무장관이,총회기조연설은 노 대통령이 직접 한다는 내부방침을 이미 세웠다』고 전하고 『기조연설은 한반도에서의 냉전종식선언은 물론 동북아에서의 화해질서 구축을 위한 남북한 및 주변 관련국의 적극적인 역할을 제창하는 내용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소식통은 노 대통령이 지난 88년 10월18일 유엔총회에서 「한반도에 화해와 통일을 여는 길」이란 제목의 연설을 한 사실을 상기시킨 뒤 『휴전선 비무장지대에 평화시를 건설하고 남북한간의 획기적인 관계개선을 위한 남북정상회담의 조속한 개최를 다시 한 번 촉구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소식통은 북한의 김일성 주석이나 김정일 당서기 등 최고위급이 유엔가입에 따른 연설을 위해 유엔에 올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지적하고 『북한측이 유엔에 누굴 보내든 관계없이 우리는 정부수립 43년 만에 이뤄진 유엔가입을 계기로 세계평화에 적극 기여하는 의연한 자세로 우리의 화해의지를 다시 한 번 과시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북한의 이번 유엔가입신청은 우리의 연내유엔가입방침에 따른 외교적 고립을 탈피하기 위한 수동적 결정이기 때문에 수락 및 기조연설은 오히려 격을 낮춰 강석주 외교부 부부장이나 박길연 유엔대사로 할 가능성이 없지 않은 것으로 외교소식통들은 전망하고 있다. 정부의 한 당국자는 북한의 유엔가입신청결정을 계기로 한 남북고위급회담의 조속한 재개촉구문제에 대해 『북한은 지금 엄청난 대외관계의 충격감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라고 지적하고 『남북고위급회담을 지속하는 북측의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가 우리의 유엔가입을 지연시키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당장 회담이 재개될 것으로는 보지 않는다』면서 『정부도 성급하게 회담재개를 재촉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다른 소식통은 유엔주재 남북한대표간의 협의기구 설치문제에 대해 『양측이 유엔에 가입한 후 이에 대한 의사를 북한 대표부에 타진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그 같은 기구는 남북한간의 대화통로 확대와 신뢰구축기반조성에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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