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통도사
    2026-06-18
    검색기록 지우기
  • 유적
    2026-06-18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542
  • 밥맛이 극락이구나/함영 지음

    불가(佛家)에서는 육식을 금하고 음식에 파와 마늘, 부추, 달래, 흥거(인도의 향신료) 같은 오신채(五辛菜)를 넣지 않는 것은 다 아는 얘기다. 그런데 수덕사의 선원 격인 정혜사는 오신채를 걸림없이 쓸 수 있었다.‘약한 기력으로는 탐심을 이겨낼 수 없지만, 강한 기력으로는 어떠한 탐심도 이겨낼 수 있다. 오신채든 무엇이든 다 먹고 이겨내야 초월할 수 있는 것이지, 피해서는 초월할 수 없다.’는 것이 노스님의 지론이었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구례 화엄사 구층암의 덕제 스님은 “채식이든 육식이든 내게 오는 인연은 물리치지 않는다.”고 말한다. 먹어야 할 상황이라면 육식도 마다하지 않는다. 육식은 활동성의 기운을 얻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꼭 육식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덩치 큰 코끼리나 소는 풀만 먹고 사는데도 천하장사가 아니냐는 것이다. ‘밥맛이 극락이구나’(함영 지음, 샨티 펴냄)는 스님들의 먹는 이야기이다. 지은이가 발품을 팔아 만난 산중 스님들이 털어놓은 음식 이야기이다.‘먹는 것도 도닦기’라느니 하는 뻔한 잔소리가 아니라 책장을 넘기며 곳곳에서 ‘꼴깍!’하고 침을 삼킬 수밖에 없는 즐거운 음식론이다. 그렇다고 절집의 먹을거리를 놓고 잘 차려진 뷔페 식당의 메뉴를 연상할 수는 없는 노릇. 무슨 ‘사찰음식 전문가’가 아니라 평범하게 수행하는 이들이 산중암자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몇 가지 재료만으로도 ‘극락’에 이를 수 있는 ‘맛’은 물론 ‘마음가짐’까지 살피는 것이 이 책의 미덕이다. 양산 통도사의 광우 스님은 ‘절집의 쇠고기’라는 무시래기에 된장 하나만 있으면 ‘환장할’ 맛을 낼 수 있다고 장담한다. 그러나 그가 늘어놓는 시래기 요리법은 싱겁기 그지없다. 그저 열심히 주물러서 장맛이 넉넉히 배게 한 다음, 달달 볶아주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여기에 물을 조금 붓고 끓이면 시래기찌개요, 물을 넉넉히 붓고 끓이면 시락국(시래기국)이다. 물만 조절하는 것으로 세 가지가 되니 ‘거저먹고 날로 먹는’ 요리법이다. 서울 성북동 법천사의 일수 스님은 무 익는 냄새만 맡아도 입맛이 돈다는 ‘무 마니아’다. 물을 끓이다가 무를 나박나박 썰어 넣고 간장으로 간한 뒤 참기름을 한 방울 떨어뜨린 뭇국이 장기. 뭇국은 시원한 맛이니 다른 재료나 양념을 넣는 것은 금물. 뭇국을 잘 끓이는 비법은 “요리법이 너무 간단하여 서운하더라도 꾹 참는 것”이라고 너털웃음을 짓는다. 광우 스님은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볶는 ‘최신식’이지만, 성남 봉국사의 효림 스님은 나물을 볶을 때 기름을 쓰지 않는다. 쌀뜨물이나 들깨물을 넣고, 그것이 없어도 나물 자체에서 물이 나온다는 것이다.‘볶는다.’는 개념부터가 다르다. 곡성 태안사의 영만 스님은 절집의 아침 메뉴인 죽이 죽 같으면 안 된다고 강조한다. 쌀알이 퍼지지 않고 쫀득쫀득해야 한다는 것이다. ‘죽의 달인’이 되었다는 그의 비법은 전날 밤에 미리 불려둔 쌀을 물이 팔팔 끓을 때 넣고 센불에서 저어주다가 어느 정도 쌀알이 익으면 다시 불을 약하게 하고 정성껏 저어주는 것. 그래서 죽은 ‘정성의 음식’이다. 동자승 그림으로 유명한 원성 스님은 영국 유학 시절 얹혀 살던 불제자의 아이들에게 밥을 지어주던 기억을 회상하면서 ‘먹는 자의 도리’를 설파한다. 아이들이 밥 생각이 없다며 새벽에 일어나 정성껏 차린 아침상을 마다하고 뛰어나갈 때는 눈물이 핑 돌았다. 도시락을 남겨올 때도 마찬가지였다. 어떤 음식 앞에서도 그것을 장만한 사람의 노고에 감사할 줄 아는 마음만으로도 준비한 사람의 고됨은 한순간 기쁨과 보람으로 바뀐다는 것이다.1만 2000원. 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 [서동철 전문기자의 비뚜로 보는 문화재] (65·끝) 불상없는 불전 정암사 적멸궁

    [서동철 전문기자의 비뚜로 보는 문화재] (65·끝) 불상없는 불전 정암사 적멸궁

    강원도 정선 사북에서 만항재를 넘어 영월 상동으로 가는 길은 별빛이 가장 아름다운 드라이브코스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해발 1330m의 만항재는 포장도로가 놓인 고갯길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다고 하지요. 고갯마루에 올라서면 1573m의 함백산과 1567m의 태백산이 손에 잡힐 듯 다가옵니다. 카지노와 스키장이 있는 사북에서 고한을 거쳐 414번 지방도에 접어든 뒤 만항재로 오르다 보면 왼쪽 산기슭에 정암사(淨巖寺)가 나타납니다. 그저 퇴락한 산골의 작은 암자처럼 소박한 모습이지만, 내력을 살피고 나면 오염되지 않은 별빛을 찾아나선 여행이 더욱 뜻깊어질 것입니다. ●진신사리 모신 인근 수마노탑에 예배 드리기 위한 공간 정암사에는 적멸궁(寂滅宮)이 있습니다. 흔히 영취산 통도사와 오대산 중대, 사자산 법흥사, 그리고 태백산 정암사를 4대 적멸보궁(寂滅寶宮)이라고 하지요. 여기에 설악산 봉정암을 더하여 5대 적멸보궁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보배 보(寶)’자로 화려하게 장엄한 다른 적멸보궁과는 달리 정암사 적멸궁은 이름부터 과장이 없습니다. 정암사 적멸궁을 그저 보이는 대로 설명한다면 불상이 없는 절집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일반적인 전각과는 달리 부처님 자리에는 연꽃을 수놓은 붉은 방석이 하나 놓였을 뿐입니다. 대신, 적멸궁의 뒤로 돌계단이 놓여진 가파른 산길을 100m쯤 오르면 7층짜리 수마노탑(水瑪瑙塔)이 나타납니다. 적멸궁은 이 탑에 예배를 드리기 위한 공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수마노란 붉은색, 검은색, 흰색이 곱게 어우러진 석영의 일종이라고 하지요. 신라의 자장법사(590∼658년)가 당나라에서 수도하고 645년 귀국할 때 그의 불도에 감화된 용왕이 건넨 수마노로 탑을 지었다는 이야기가 전합니다. 하지만 지금의 탑은 고려시대에 수마노가 아닌 석회암을 벽돌처럼 다듬어 쌓아올린 모전석탑(摸塼石塔)이지요. 정암사의 옛 이름은 석남원(石南院)입니다. 자장은 석남원을 창건하면서 중국에서 가져온 진신사리를 수마노탑에 봉안했다고 하지요. 진신사리란 부처님의 유골입니다. 부처를 수마노탑에 모셨는데, 부처의 모습을 흉내낸 불상을 적멸궁에 두는 것은 무의미하겠지요. 적멸궁은 우리나라에서 창안되었다고 합니다.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찾아볼 수 없지요.7세기 신라불교가 이미 외래의 교리를 주체적으로 소화하여 새로운 상징체계를 만들어 낼 수 있었을 만큼 성장했다는 증거입니다. ●외래 교리 주체적 소화… 신라불교 성장 증거 적멸(寂滅·Nirvana)은 번뇌의 불꽃을 지혜로 꺼서 일체의 고뇌가 소멸된 상태를 가리킨다고 하지요. 부처가 깨달음을 이룬 보리수 아래는 그래서 적멸도량(寂滅道場)이 됩니다. 적멸도량을 우리 나름대로 건축적으로 구현한 것이 적멸궁입니다. 법왕(法王)이 머무는 곳이니 궁(宮)이지요. 정암사 적멸궁은 불교의 본질이 깨달음이라는 것을 웅변하고 있지만, 그 깨닫는다는 것이 또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도 동시에 일러주고 있습니다. 자장법사는 우리나라 문수신앙의 선구자이기도 하지요. 그가 634년 당나라로 건너갔을 때 가장 먼저 찾아간 곳도 문수보살이 머물고 있다는 오대산이었습니다. 귀국한 뒤에는 오늘날의 평창 일대를 오대산으로 삼아 문수보살의 정토세계를 재현하려 했지요. 문수보살은 지혜를 형상화한 존재라고 합니다. 지혜 없이는 깨달음도 없으니 문수보살은 곧 깨달음을 상징하지요. 그런데 ‘삼국유사’의 ‘자장정률(慈藏定律)’에는 자장이 석남원에서 남루한 도포를 입고 칡으로 만든 삼태기에 죽은 강아지를 담은 문수보살을 알아보지 못하고 내쫓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문수보살은 ‘잘못된 깨달음(我相·아상)을 가진 자가 어떻게 나를 알아 볼 수 있겠느냐.’고 자장을 꾸짖지요. 문수보살이 사라진 뒤 자장이 몸을 던져 죽으니 화장하여 바위구멍(石穴·석혈)속에 모셨다는 줄거리입니다. 바로 정암사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자장이 문수보살을 친견하지 못했다는 것은 결국 깨달음을 얻지 못했음을 뜻하고, 그래서 스스로 목숨을 버릴 수밖에 없었음을 일러줍니다. 깨달음을 말하는 사람은 많지만, 깨달음이란 함부로 입에 올릴 수 있는 단어가 아니라는 사실을 자장과 정암사, 그리고 적멸궁이 일깨워주고 있는 듯합니다. dcsuh@seoul.co.kr
  • 유물로 깨닫는 ‘불법의 세계’

    유물로 깨닫는 ‘불법의 세계’

    불교중앙박물관 개관 1주년 특별전시인 ‘법보(法寶)전’이 29일부터 6월 29일까지 불교중앙박물관 전시실에서 열린다. ‘법보’전은 불교중앙박물관이 기획한 불·법·승 삼보(三寶) 시리즈 가운데 두 번째 행사. 불법을 주제로 한 유물 162건 197점(국보 9점, 보물 25점)이 나오는데 불교전래 이후 조선시대까지 간행된 주요 경전의 전적과 목판·사경, 한국불교의 소의경전인 화엄경·법화경 관련 불교미술, 통일신라시대의 대표적 조탑경인 무구정광다라니경과 대표격 복장유물이 들어 있다. “2007년 개관 특별전의 ‘불’전시가 지혜와 자비로 나투신 부처님의 실재를 깨닫게 하는 전시라면 이번 ‘법’전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해 진리의 세계에 도달한다는 뜻을 담았다.”고 박물관측은 설명한다. 전시는 크게 ‘부처님의 실재’(중앙전시실)와 ‘법의 전래와 법보’(제1전시실),‘경전미술’(제2전시실),‘부처의 몸 안에 내재된 법보와 법의 장엄’(제3전시실)으로 나누어 진행할 예정. 중앙전시실에 전시될 경주 황룡사지 출토 부처님 진신사리와 ‘황룡사 찰주본기’(국립경주박물관),‘초조본대방광불화엄경주본 권제13’(삼성출판박물관)‘초조본아비담비파사론 권16’(호림박물관) 등의 초조대장경, 보협인다라니경인 ‘보광사복장유물’(불교중앙박물관)이 눈길을 끈다. 이 가운데 황룡사지 출토 진신사리는 자장법사가 선덕여왕 12년(643) 중국 오대산에서 가져와 봉안한 사리. 황룡사 구층탑과 태화사탑, 통도사 계단에 나누어 봉안했던 불사리 100과중 일부이다. 황룡사 찰주본기는 벼락을 자주 맞았던 황룡사 구층탑의 두 번째 수리(872∼873년)내역을 담은 기록. 탑 중수 사실과 9세기 후반 신라의 정치적인 상황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자료로 민간에서 전시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황룡사 사리 이운과 고불식 및 사리 친견은 23일 오전 10시 조계사 대웅전에서 있으며 개막식은 28일 오후 3시에 열린다. 김성호 문화전문기자 kimus@seoul.co.kr
  • [서동철 전문기자의 비뚜로 보는 문화재](51)양주 회암사 지공선사 부도

    [서동철 전문기자의 비뚜로 보는 문화재](51)양주 회암사 지공선사 부도

    경기도 양주시에 있는 회암사는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걸쳐 이름을 떨친 거찰이었습니다. 태조 이성계가 무학대사를 머물게 하고 불사가 있을 때마다 참례토록 한 것은 물론 상왕으로 물러앉은 다음에는 아예 이곳에서 도를 닦았던 것으로도 유명하지요. 하지만 조선이 성리학을 국교로 삼은 마당에 왕실의 권위를 등에 업고 번성한 회암사는 더더욱 유생들의 집중 견제를 피할 수 없었습니다. 쇠락해가던 회암사는 조선 중기 이후 어느 때인가 폐허가 되고 말았습니다. 회암사터는 1997년부터 발굴조사가 이루어지면서 그 전모가 드러나고 있지요. 발굴 현장에 마련된 전망대에 오르면,262칸에 이르렀다는 전성기 회암사터의 규모에 놀라게 됩니다.14세기의 대(大)여행가로 새롭게 주목받는 지공(持空·1300∼1363)의 부도는 그가 중창한 회암사가 있는 천보산 중턱에 법제자인 나옹과 무학의 부도와 나란히 세워졌습니다. 고려 불교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킨 지공은 본명이 디야나바드라(Dhyanabhadra·提納薄陀)로 인도의 마가다국(摩竭提國) 출신입니다. 그는 히말라야산맥을 넘고 원나라 수도 연경을 거쳐 충숙왕 13년(1326년)에는 고려에 들어와 ‘환생한 부처’로 극진한 환대를 받으며 3년 가까이 머물게 되지요. 지공은 1328년 연경으로 돌아간 뒤에는 고려인들이 세운 법원사(法源寺)에 머물렀습니다. 그러자 나옹과 백운, 무학 등이 다투어 원나라로 건너가 그의 문하에서 수학하게 되지요. 지공의 가르침에는 개혁사상이 담겨 있었던 듯 나옹은 고려 말 개혁정치를 시도한 공민왕의 왕사(王師)가 되고, 무학은 이성계를 도와 조선왕조를 엽니다. 지공은 1361년 11월 겨울 입적하는데,1368년 원나라가 멸망하는 과정의 혼란 속에 그의 유골을 네 사람의 제자가 나누었다고 합니다. 이들 가운데 두 사람이 고려로 가져온 유골이 회암사와 장단 화장사, 묘향산 안심사에 나뉘어 안치된 것입니다. 마가다국에서 고려에 이르는 지공의 행적은 목은색이 지은 지공의 회암사 부도비명 병서에 자세히 전합니다. 지공은 인도의 동북부에서 해안을 따라 남하하여 오늘날의 스리랑카에 이르는 인도의 전역을 여행했습니다. 그럼에도 인도사(史)는 14세기 초에 이르면 인도의 대부분은 이슬람의 영향권에 들었고, 이를 전후한 시기에 힌두교가 성행하기 시작하였던 반면 불교는 거의 사라졌다고 서술하고 있다고 하지요. 하지만 지공의 행적을 보면 적어도 인도의 동부는 당시 불교의 전통이 강하게 존속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공은 처음엔 바닷길로 중국으로 가고자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오늘날의 미얀마와 말레이반도의 초입까지 진출했다가 돌아선 것으로 짐작되고 있지요. 이후 인도 서부의 사막과 히말라야산맥을 넘어 티베트와 운남, 연경을 거쳐 고려에 이르게 됩니다. 그는 고려에서도 개경에만 머물지 않고 금강산과 양산 통도사에서도 설법을 했습니다. 지공은 티베트에서는 주술사가 독약을 타놓은 차를 마셔야 했고, 하성(蝦城)에서는 이교도들로부터 얻어맞아 이가 부러졌으며, 중국의 양자강 상류에 속하는 대독하(大毒河)에서는 도적을 만나서 알몸으로 도망가기도 했습니다. 이렇듯 지공의 발자취를 담은 기록은 당시 아시아 각국의 지리와 민속, 종교를 밝히는 매우 중요한 단서입니다. 지공을 모로코 탕헤르 출신으로 이슬람세계와 중국을 여행한 이븐 바투타(1304∼1368)와 비교되는 대여행가로 주목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또한 회암사에 있는 지공의 부도를 더욱 주목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dcsuh@seoul.co.kr
  • [부고] 원로 비구니 상륜 스님 입적

    [부고] 원로 비구니 상륜 스님 입적

    조계종 원로 비구니 무아당(無我堂) 상륜(相侖) 스님이 28일 오전 8시47분 경기도 용인시 고당리 법륜사에서 입적했다. 법납 60세, 세납 78세. 경남 진주 태생인 상륜 스님은 1946년 통도사에서 경봉 스님을 은사로 사미니계 보살계를 받고 1955년 수덕사 견성암에서 득도했으며,1966년 범어사에서 비구니계를 수지했다. 영결식은 30일 오전 10시 용인 법륜사에서, 다비식은 예산 수덕사 다비장에서 봉행된다.(031)332-0485.
  • [서동철 전문기자의 비뚜로 보는 문화재] (46)익산 왕궁리 오층석탑

    [서동철 전문기자의 비뚜로 보는 문화재] (46)익산 왕궁리 오층석탑

    “내가 왕궁리 오층석탑이 백제 것이라고 생각하는 가장 큰 이유는, 단 한 가지입니다. 그것은 이 탑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토로한 사람은 어느 서정시인이 아니라, 미술사학자인 강우방 전 국립경주박물관장입니다. 그는 지난해 이화여대 초빙교수를 정년퇴직하기에 앞서 미술사학과 학생들을 이끌고 백제 지역을 답사했다고 하지요. 그런데 백제 무왕이 새로운 도읍으로 점찍어 두고 대규모 토목공사를 벌였던 전북 익산의 왕궁리 유적을 둘러보고 나오는 길에 버스 안에서는 갑자기 박수가 터졌다고 합니다. 왕궁리 오층석탑을 중심으로 차창 밖으로 스치는 조형에 모두들 자기도 모르게 박수를 쳤다는 것이지요. 그 박수소리는 미(美)에 대한 찬사였고, 이 탑이 백제 것이라는 가장 강력한 증거라는 것입니다. 국보 제289호로 지정된 왕궁리 오층석탑은 건립 시기를 두고 이론이 적지 않았습니다. 백제시대설과 통일신라 초기설, 그리고 고려시대 초기설이 엇갈렸지요. 그동안에는 ‘옛 백제 영토 안에서 유행하던 백제계 석탑 양식에 신라탑의 형식이 어우러진 고려 전기의 작품’이라는 설명이 대세였습니다. 왕궁리 오층석탑 현장의 안내판에도 ‘이 탑은 전형적인 백제석탑 양식을 따르고 있는데, 높이는 8.5m이다.…통일신라 말기에서 고려 초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고 씌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강 전 관장은 초지일관 백제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이 탑을 처음 본 것이 1986년, 두 번째가 1989년, 세 번째가 1989년이라고 합니다. 언젠가 발표한 글에서 그는 “처음 보았을 때 백제 것임을 의심치 않았고, 두 번째 백제 것임을 재확인하였으며, 세 번째 나의 감각적 파악을 실증하고 싶었다.”고 술회했습니다. 그는 이후 ‘감각적’이 아닌 ‘이성적’으로 왕궁리 오층석탑에 접근해 조목조목 백제석탑으로 추정하는 이유를 제시하게 됩니다. 나아가 이 탑은 나름대로 백제석탑의 완성으로, 통일신라의 감은사탑에 직접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하게 되지요. 그의 주장에 결정적으로 신빙성을 높여준 것은 왕궁리 탑에 모셔져 있던 사리장엄이었습니다.1965년 탑을 해체해 수리하는 과정에서 1층 지붕돌 가운데와 탑의 중심기둥을 받치는 주춧돌에서 사리장치가 발견돼 국보 제123호로 일괄지정되었지요. 그런데 2003년 송일기 전남대 교수는 지붕돌에서 나온 금강경판을 중국과 일본에 있는 모든 금강경사경과 비교검토해 “백제 무왕 때 제작된 것”이라고 결론을 내립니다. 이듬해에는 한정호 통도사 성보박물관 수석학예사가 금제사리합의 내합에 새겨진 구름문양과 연꽃문양이 결합된 연화서운문(蓮花瑞雲紋)이 부여 능산리 고분의 금동산형투각장식과 유사하다는 점 등을 들어 6세기 중반∼7세기 전반 백제시대 것이라고 주장하지요. 무엇보다 왕궁리 유적을 발굴조사하고 있는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는 올해 왕궁리 공방터에서 나온 도가니와 다량으로 출토된 금세공품의 성분과 제작 기법을 분석한 결과를 바탕으로 왕궁리 오층석탑의 사리장엄은 백제의 장인집단이 만들었다는 연구 결과를 내놓았습니다. 왕궁리 탑의 사리함과 금강경판은 각각 동판과 은판에 금으로 도금한 것인데, 금과 수은을 2대8로 섞은 아말감을 쓴 기법이 바로 공방터의 그것과 똑같았다는 것이지요. 이렇듯 우리는 부여 정림사터 오층석탑과 익산 미륵사터 서탑 말고도 백제시대 석탑을 하나 더 갖게 되는 것 같습니다.1400년이 지나, 그것도 젊은이들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박수를 보낼 만큼 아름다운 석탑이 제 나이를 찾아가고 있는 것이 다행스럽습니다. dcsuh@seoul.co.kr
  • 종교건축기행34/김성호 서울신문 문화전문기자

    미륵신앙의 본산이자 동학혁명의 발원지였으며, 강증산의 후천개벽 사상을 낳은 우리나라 민중종교운동의 본거지인 전북 김제 모악산 들머리에는 개신교의 순례성지가 하나 자리잡고 있다.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전통 윤리를 교회건축에 그대로 살려낸 금산교회가 그것이다. 유교적 전통이 완강하던 1908년 세워진 금산교회는 ‘ㄱ’자형이다. 합각을 이룬 모서리에 있는 강단을 중심으로 왼쪽에는 여성, 오른쪽에는 남성 신자들이 예배를 봤다. 그런가 하면 경남 양산 통도사의 대웅전에는 불상이 없다. 대웅전의 북쪽에는 부처의 진신사리를 모신 금강계단이 있기 때문이다. 대웅전에서는 북쪽 벽에 난 커다란 창으로 금강계단, 즉 부처를 향하여 참배할 수 있다. 김성호 서울신문 문화전문기자가 쓴 ‘종교건축기행34’(W미디어 펴냄)를 펼쳐들면 한국 종교건축이 언제 이렇게 다양한 전통을 만들었을까 새삼 놀라게 된다. 한국 문화의 저변을 형성한 불교의 절집은 그렇다고 하더라도, 불과 100년이 조금 넘는 건축 역사를 지닌 천주교와 기독교의 예배공간이 이미 우리 문화를 풍요롭게 하는 자산으로 확고히 자리잡았다는 사실을 34곳의 사례는 분명히 일깨워 준다. ‘종교건축기행’은 지난해부터 올해까지 호평을 받으며 서울신문에 실린 연재물. 종교건축의 아름다움에 머물지 않고 정치·사회·종교·문화적 배경으로 시야를 확대한 만큼 한국 종교문화사를 개괄한 입문서로도 손색이 없다. 초창기 백정을 대상으로 목회를 하여 ‘백정 교회’로 불린 서울 인사동의 승동교회와 국내 유일의 정사각형 교회인 봉화 척곡교회 등 개신교회 8곳, 천주교도를 처형한 전주 풍남문의 석재를 주춧돌로 쓴 전주 전동성당과 한옥으로 지은 익산 나바위성당 등 천주교회 11곳을 소개했다.‘한국 불교 1번지’인 서울 조계사와 시인 고은이 출가한 절로 일본 에도(江戶)시대 건축양식으로 지은 군산 동국사 등 절집 10곳도 둘러볼 수 있다. 무엇보다 원불교의 발상지인 영광 영산성지와 증산도의 성소인 대전 태을궁, 천도교의 발상지인 경주 용담정, 한국정교회의 요람 성 니콜라스 서울대성당, 한국 이슬람의 핵인 서울 이슬람중앙사원 등 소수 종교 및 종파의 건축물도 자세히 소개한 것은 이 책의 가치를 높인다.1만 5000원. 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 [서동철 전문기자의 비뚜로 보는 문화재] (34) 관룡사 용선대 석조여래좌상

    [서동철 전문기자의 비뚜로 보는 문화재] (34) 관룡사 용선대 석조여래좌상

    경남 창녕의 관룡사는 억새평원과 진달래군락지로 유명한 화왕산과 이어진 관룡산 중턱에 있습니다. 관룡사에서 산길을 700m쯤 오르다 보면 커다란 바위가 앞을 가로막는데, 바로 용선대(龍船臺)지요. 보물 제295호 용선대 석조여래좌상은 이 바위 위에서 극락으로 가는 뱃길을 살피고 있습니다. 풍만하고 안정감 있는 몸통에 단정한 인상의 양감 있는 얼굴을 가진 용선대 여래좌상은 9세기 통일신라시대 불상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대좌를 포함한 전체 높이가 298㎝에 이르러 매우 당당한 모습이지요. 용선대 여래좌상의 의미는 관룡사 계곡에 자리잡은 한 점의 국가지정문화재라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이 불상의 존재로 하여 관룡사 계곡에 ‘극락세계로 가는 거대한 배’라는 상징성이 부여되었기 때문이지요. 바로 불교에서 말하는 반야용선(般若龍船)입니다. 반야용선은 중생을 태워 고통이 없는 피안의 세계로 인도하는 역할을 합니다. 반야용선에는 지혜를 터득하면 반야, 곧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는 가르침이 담겨 있지요. 하지만 스스로 깨달음을 얻어 피안의 세계에 이를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래서 생전에 덕을 쌓고 부처에 의지하면 반야용선에 올라 서방정토에 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놓았습니다. 경남 양산 통도사의 극락보전에 그려진 ‘반야용선접인도(般若龍船接引圖)’는 반야용선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용처럼 생긴 배의 앞에는 죽은 사람의 영혼을 극락세계로 안내하는 인로왕보살이 합장을 하고 있고, 뒤에는 중생을 지옥의 고통에서 구해주는 지장보살이 고리가 여섯 달린 지팡이인 육환장을 들고 서 있습니다. 배의 가운데는 비구와 아낙, 선비, 노인 등 신분이 모두 다른 사람들이 한결같은 표정으로 극락왕생한다는 기대에 젖어 있지요. 이들을 감싸고 있는 지붕은 마치 인도의 초기 스투파(탑)를 닮았습니다. 스투파란 부처의 사리를 안치한 무덤이니, 곧 그림 속의 지붕은 중생을 보호하는 부처를 상징하고 있다고 해석해도 좋을 것입니다. 고통 없는 세상으로 태워다주는 반야용선이라는 개념은 우리나라의 무속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반야용선 혹은 용선은 거의 전국적으로 망자를 극락으로 떠나보내는 ‘교통수단’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지요. 강릉 단오굿에서 펼쳐지는 뱃노래굿도 바로 용선굿입니다. 용선굿거리에서는 죽은 사람이 편안히 저 세상을 갈 수 있도록 굿당의 천장에 매달아두었던 용선을 내려 무녀들이 노젓는 흉내를 내면서 뱃노래를 부르지요. 통영에서 전승되는 남해안 별신굿에서도 대나무로 화려하게 틀을 만들고 색지를 붙인 용선이 완성되면 망자의 넋을 서방정토로 인도하는 용선춤이 벌어집니다. 용선대 여래좌상은 이렇듯 중생을 가득 태우고 극락세계로 항해하는 배의 선장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용선대 여래좌상은 상징성이 감안되지 않은 채 순수하게 불상 조각 자체의 미술사적 가치만으로 보물로 지정된 듯합니다. 여래좌상 앞에 놓인 안내판조차 ‘땅의 기운을 누르려는 신라 하대의 도참사상이 작용한 듯 하다.’고 불상 조성의 이유를 풍수지리와 연결시키고 있을 정도니까요. 앞으로는 문화재의 가치를 판단하는 기준에 상징성도 반영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용선대 여래좌상이 아무리 훌륭하게 보존된다고해도 훗날 주변 경관이 훼손된다면 반야용선의 상징성 또한 퇴색하고 말겠지요. 자연 경관과 더불어 상징성을 갖는 문화재라면 주변 지역을 사적(史蹟)으로 지정하여 함께 보호하는 방법도 진일보한 문화재 정책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dcsuh@seoul.co.kr
  • [서동철 전문기자의 비뚜로 보는 문화재] 울산 망해사 쌍탑

    [서동철 전문기자의 비뚜로 보는 문화재] 울산 망해사 쌍탑

    부도(浮屠)란 고승의 사리를 안치한 무덤입니다. 부도는 부처를 뜻하는 부다(Buddha)를 한자로 음역한 것이라고 하지요. 처음엔 부처의 사리를 모신 불탑과 승탑(僧塔)을 모두 의미했다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오늘날처럼 승탑으로 한정된 뜻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통일신라는 불국사 석가탑과 다보탑이 조성된 8세기까지 ‘석탑의 나라’였다면 9세기부터는 ‘부도의 나라’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뛰어난 승탑이 집중적으로 조성되었습니다.‘자기의 본성을 깨달으면 곧 부처(見性成佛·견성성불)’라는 종지(宗旨)를 가진 선종이 유행하면서 법맥을 이어받은 선문조사(禪門祖師)는 부처와 다름없는 존재로 받들어졌지요. 부처의 사리를 모시는 석탑을 만드는 것처럼 일생을 마친 선사의 사리를 안치하는 부도를 자연스럽게 조성했을 것입니다. 통일신라의 부도는 예외없이 팔각형의 집 모양입니다. 이런 모양의 부도는 중국에 선례가 있는데,746년 허난(河南) 회선사(會善寺)에 세워진 정장선사탑과 800년을 전후해 조성된 창안(長安) 초당사(草堂寺) 소요원(逍遙院)의 구마라습사리탑이 그렇습니다. 당시에는 탑이나 불전, 누각과 정자 등의 팔각형 집을 매우 고귀한 곳으로 인식한 듯합니다. 아미타부처와 관음보살의 도량도 팔각형이라고 하지요. 하지만 팔각형 집 모양의 탑이라고 해서 모두 부도는 아닐 수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어 흥미롭습니다.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 부도처럼 보이는 울산 망해사 쌍탑이 승탑이 아닌 불탑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입니다. 울산 울주군 문수산 중턱에 있는 망해사(望海寺)는 신라 헌강왕(875∼885년) 때 창건되었다고 합니다. 망해사라는 이름이 왠지 모르게 친숙하다면 ‘삼국유사’에 나타난 처용(處容) 설화의 배경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지금의 망해사는 옛 절터 아래 새로 터를 닦은 작은 절입니다. 신용철 통도사성보박물관 수석학예사는 망해사터가 부도모양의 쌍탑이 동서로 세워지고 북쪽에 건물을 배치한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 쌍탑가람의 형식이라는데 주목했습니다.9세기 승탑은 양양 진전사터의 도의선사 부도처럼 절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조성되다가,10세기에 접어들면서 300보 안팎의 거리에 세워지는 사례가 늘어납니다. 뿐만 아니라, 통일신라시대에 같은 형식의 부도를 같은 장소에 함께 세운 사례는 망해사가 유일하지요. 승탑에는 탑비가 동반되기 마련이지만 망해사 쌍탑에서는 이것도 찾을 수 없습니다. 지붕돌에 풍탁 같은 장식물을 달 수 있도록 구멍을 뚫은 장엄공을 만들어 놓은 것도 불탑의 증거라는 것입니다. 한편으로, 처용 연구가인 김경수 중앙대 국문과 교수는 망해사가 국방상의 이유로 창건된 경주 감은사와 놀라울 만큼 비슷한 구조와 지형을 하고 있다고 설명합니다. 감은사에 동해바다가 한눈에 보이는 이견대(利見臺)가 존재하듯, 망해사에도 옛 절터에서 500m쯤 떨어진 곳에 바다를 통한 외래인의 왕래를 관찰할 수 있는 망해대(望海臺)가 있었다는 것이지요. 망해사 쌍탑이 불탑이 분명하다면,200년 남짓한 시차가 있지만, 문무왕의 뜻을 이어받은 신문왕이 부처의 가피력으로 외적을 물리쳐 나라의 안정을 도모하고자 681년 창건한 감은사의 동서탑과 똑같은 기원이 담겨있다고 해석해도 좋을 것입니다. 망해사 쌍탑은 승탑일 수도, 불탑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불탑이라면 부도 모양으로 조성한 그 배경이 궁금하고, 역사적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는 여지도 넓어질 것 같아 불탑설(說)로 조금 더 마음이 기울게 됩니다. dcsuh@seoul.co.kr
  • [서동철 전문기자의 비뚜로 보는 문화재] (26) 양산 통도사 괘불탱

    [서동철 전문기자의 비뚜로 보는 문화재] (26) 양산 통도사 괘불탱

    우리 문화에서 ‘스케일’이 아쉬웠다면 괘불탱(掛佛幀)은 충분히 위안을 주고도 남습니다. 괘불 또는 괘불탱은 ‘거는 불화’라는 뜻으로 야외 의식에 쓰이는 대형 불화를 말합니다. 경북 영천의 은해사 괘불탱이 높이 15m에 너비 6.07m로 가장 크지요. 충북 보은 법주사와 경남 하동 쌍계사 것도 13m가 넘습니다. 괘불탱은 모두 100여점이 남아 있습니다.1622년 전남 나주 죽림사 괘불탱이 가장 이른 시기의 것입니다. 높이 4m에 너비가 2.4m 정도니 큰법당의 후불탱보다는 조금 큰 수준이지요. 처음에는 야외 의식에서도 법당의 불화를 들고 나와 사용하다가 규모도 커지자 아예 별도로 야외용 불화를 만든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괘불탱은 이렇듯 17세기 초반부터 본격 조성되는데, 불행하게도 1592년 시작된 임진왜란과 1636년의 병자호란이 결정적 계기가 됐습니다. 전쟁이 끝나자, 불교는 죽은 이의 영혼이 극락왕생하기를 비는 천도재(薦度齋)로 국민들의 상처 입은 정서를 치유하는 역할에 나섰습니다. 그런데 인구의 3분의1이 줄어들었으니 온 나라가 초상집인 상황에서 천도재가 열리면 글자 그대로 넓은 마당에 단을 세우고 자리를 만드는 야단법석(野壇法席)을 이룰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많은 군중이 멀리서도 볼 수 있으려면 불화는 커질 수밖에 없었겠지요. 요즘 절에서 괘불탱이 내걸린 모습을 보기는 어렵습니다. 대부분 국보나 보물로 지정돼 큰법당의 뒤편에 모셔진 채 여간해서 바깥 나들이를 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우연히 찾은 절에서 괘불탱을 만났다면 큰 행운입니다. 국립중앙박물관과 통도사성보박물관이 괘불탱을 전시할 수 있는 공간을 특별히 마련해 놓은 것은 다행스럽습니다. 중앙박물관은 지금 경남 양산 통도사의 석가여래괘불탱을 ‘꽃을 든 부처’라는 이름으로 전시하고 있지요. 석가가 영취산에서 설법을 하면서 연꽃을 들어 보이자 가섭이라는 제자만 그 의미를 알고 미소지었다는 ‘염화미소’의 순간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통도사에는 1649년에 만든 괘불탱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1766년 12월8일 부처가 진리를 깨달은 날을 기념하는 성도재(成道齋)를 지내려 대웅전 마당에 괘불탱을 내다 걸었는데, 그만 매서운 겨울바람이 불어닥치는 바람에 찢어졌다고 하지요. 그러자 27세의 젊은 승려 태활(兌活)이 중심이 되어 후원자를 모으고 법주사 괘불탱을 그린 두훈(薰) 등의 화승을 초빙해 1767년 9월 새로운 괘불탱을 완성하게 되지요. 태활은 괘불탱이 완성될 즈음 통도사 큰스님인 희유(希有)에게 글을 부탁했는데, 희유는 노고를 치하하는 말 대신 “석가모니불의 참되고 참된 모습을 어찌 형상으로 나타낼 수 있다는 말인가?” 하고 되묻습니다. 깨달음을 어떻게 그림으로 나타낼 수 있으며, 또 그렇게 그려진 그림이 어떻게 신앙의 대상이 될 수 있겠느냐는 본질적인 의문을 던진 것이었지요. 태활은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석가모니불의 참된 모습에는 그림자에도 미치지 못할 것”이라고 일단 수긍합니다. 그는 “그렇지만 그림자를 통해서 부처의 참된 모습을 찾는 그 흔적을 적을 수는 있지 않겠습니까.” 하고 자기 생각을 펼치지요. 괘불탱 전문가인 정명희 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는 ‘통도사의 괘불을 다시 만든 기록(通度寺改成掛佛記)’에 담겨있는 희유와 태활의 이런 문답이 ‘예수의 모습을 그릴 수 있는가.’라는 기독교 미술의 오랜 논쟁과 일맥상통하는 고민이었다고 설명합니다. 괘불탱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비극에서 비롯됐다지만, 사회가 조금씩 안정되어 통도사 괘불탱이 완성된 영조 43년에 이르면 이처럼 종교와 철학의 본질적인 문제에 대한 깊이 있는 논의의 중심에 서게 됩니다. ‘크기’로 문화의 가치를 비교하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짓인지, 크기로 압도하는 괘불탱이 확인시켜 주고 있는 것도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dcsuh@seoul.co.kr
  • [종교플러스] 조계종 19일 소의경전 편찬세미나

    조계종 교육원 불학연구소는 종단의 소의경전(所依經典·근본 경전으로 의지하는 경전)인 ‘금강경’의 한글·한문본 편찬을 위한 세미나를 19일 오후 2시 조계사내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국제회의장에서 연다. 지안 스님(은해사 승가대학원장)의 기조강연과 김선근 동국대 교수, 김호귀 동국대 강사, 통도사 강주 우진스님, 실상사 화엄학림 강사 각묵 스님 등이 주제발표와 논평에 나선다.(02)2011-1812.
  • 山寺체험

    山寺체험

    ‘휴가철 산사 체험도 맞춤시대’ 여름 휴가철을 맞아 전국의 산사들이 다채로운 수련과 체험 프로그램을 마련, 손님 맞을 채비를 하고 있다. 산사들은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전통적인 수련회 형식으로 신행 차원에서 신도들을 맞았으나 일반인들의 발길이 늘면서 다양한 프로그램을 앞다투어 개발해 내놓고 있다. 기존의 수련회를 바탕으로 템플스테이, 단기 출가, 참선 명상, 다도에 이어 한문 학당, 심지어는 영어 캠프까지 그야말로 천차만별이다. 올 여름 휴가기간에도 1박2일, 혹은 2박3일 일정의 가족용 주말 프로그램부터 7박8일간의 단기 출가가 전국 사찰에서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우선 구례 화엄사, 순천 송광사, 장성 백양사, 양산 통도사, 합천 해인사, 부산 범어사 등 대규모 사찰들에선 전통적인 수행 중심의 템플스테이가 어김없이 진행된다. 가장 흔한 프로그램은 전통사찰에서 한국불교의 전통을 느끼고 체험하는 템플스테이. 그 내용도 종전과는 사뭇 달라졌다. 부안 내소사는 매주 주말 트레킹을 겸한 생태체험 행사를 진행하며, 보성 대원사와 서산 부석사는 매주 주말 휴식형 템플스테이를 이어간다. 경주 골굴사의 ‘선무도 주말 템플스테이’를 비롯해 김천 직지사, 경주 기림사, 동해 삼화사 프로그램도 언제나 참여할 수 있는 휴식형 템플스테이다. 도심과 도시 인근 사찰들이 마련하는 선(禪) 수련회나 템플스테이 프로그램도 늘고 있다. 서울 길상사가 매월 넷째 주말에 운영하는 ‘선수련회’, 고양 흥국사가 매월 첫째·셋째 토요일에 진행하는 주말 템플스테이가 대표적인 예. 서울 조계사가 매월 마지막주 토요일 운영하는 ‘템플라이프’와 서울 묘각사의 ‘내마음 내려놓기 템플스테이’처럼 외국인들을 위한 프로그램도 적잖이 눈에 띈다. 연령층과 대상을 살피거나 사찰의 특성을 살린 프로그램도 인기를 더하고 있다. 인천 강화국제연등선원의 ‘청소년 영어 캠프’와 강화도 전등사의 ‘전통문화체험 템플스테이’, 선기공과 선무도를 체험할 수 있는 경주 골굴사의 ‘청소년 화랑 수련회’가 그 대표적인 예. 여기에 공주 마곡사의 ‘소년소녀가장을 위한 템플스테이’나 공주 영평사의 ‘해외 입양인 100명 초청 템플스테이’처럼 소외계층을 배려한 특별 행사도 생겨나고 있다. 지리산 산행프로그램과 함께 진행되는 실상사의 ‘지리산의 아침’이나 실상사 화림원에서 진행되는 ‘단식 좌선’, 해남 대흥사의 ‘초의선사 다도 아카데미’, 평창 월정사의 ‘박물관 어린이 수련법회’ 등도 눈길을 끄는 것들이다. 단기 추가 수행 프로그램으로는 해남 미황사의 ‘참사람의 향기’를 비롯해 평창 월정사의 ‘단기 출가학교’가 여전히 인기를 끌고 있다. 주요 사찰 템플스테이 일정은 한국불교문화사업단 홈페이지(www.templestay.com) 참조. 김성호 문화전문기자 kimus@seoul.co.kr
  • 李 민심잡기 朴 당심잡기

    한나라당 이명박 대선경선 후보는 4일 울산과 부산을 차례로 방문하며 영남권 민심잡기에 나섰다. 박근혜 후보는 당 행사인 ‘국회의원 및 당원협의회운영위원장 연석회의’에 참가했다. 새벽 항공기로 경북 지역에 도착한 이 후보가 가장 먼저 찾은 곳은 양산 통도사. 주호영 비서실장 등 수행 의원들과 함께 대웅전 등 곳곳을 둘러본 뒤 주지 정우 스님과 차담을 나눴다. 정우 스님은 “용수철이 탄력받으면 오히려 벌떡 서지만, 큰 무게로 누르면 못 일어난다. 웬만하면 (검증 공세에) 대응하지 마시라.”고 조언했다. 스님은 또 “불교에 ‘도고마성(道高魔盛)’이라는 말이 있는데 ‘깨치기 전에 어려움이 더 많아진다.’는 뜻”이라며 이 후보를 위로했다. 이 후보는 “세상사 이런 것 저런 것 다 겪으면 도가 트인다.”고 답했다. 통도사에 이어 울산 선대위 발대식에 참석한 이 후보는 “60년대 20대 때 고향인 포항보다 울산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고 했다. 이 후보는 “세계에 자랑할 만한 기업이 매년 노조 파업으로 울산 시민들뿐만 아니라 국민들의 가슴을 졸이게 하고 있다”며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반대시위를 비판했다. 4차 정책토론회가 끝난 뒤 대구, 경주, 인천, 청주에서 당심잡기에 나섰던 박 후보는 이날 당 연석회의에 참가하는 것으로 공식 일정을 갈음했다. 박 후보는 인사말을 통해 “한나라당 지지율이 추락해 파란 유니폼을 입고 거리에 나서지 못하던 때도 있었지만 천막당사에서부터 다시 시작해 국민의 마음을 얻었다.”고 회상했다. 그는 이어 “국민의 마음을 얻는 길은 어떤 정치공학이나 요령이 아니라 정직임을 가르쳐준 시간이었다.”라며 경선에 큰 영향력을 발휘할 국회의원들과 당협위원장 300여명 앞에서 당을 구한 대표 시절 이미지를 부각시켰다. 한편 이날 현대건설 사장 출신인 심옥진 한국플랜트정보기술협회장과 이 협회 임원단이 박 후보 지지를 선언했다.홍희경기자 saloo@seoul.co.kr
  • [종교플러스] 12일 통도사 정우스님 진산식

    조계종 통도사는 최근 제27대 주지에 임명된 정우(구룡사 주지) 스님의 진산식(취임식)을 12일 오전 10시30분 통도사 대웅전에서 거행한다. 오전 10시부터는 통도사 적멸보궁에서 헌다례(獻茶禮)가 열린다.(055)382-7182.
  • ‘일반신도 다비장’ 길 튼 통도사

    지난 22일 경남 양산 통도사에서는 이례적인 다비(茶毘)의식이 열려 눈길을 끌었다. 다름아닌 지난 18일 77세를 일기로 별세한 사기장(沙器匠) 장여 신정희 선생의 장례가 이 통도사 연화대에서 열렸던 것. 우리 삼보사찰 중 불보(佛寶) 사찰이라는 천년고찰 통도사에서 일반 재가신자들에게 다비를 허용하기는 처음으로 불교계에서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통도사가 일반 신자에게 다비장을 내준 데는 주지 정우 스님의 역할이 컸다. 정우 스님은 이번 신정희 선생의 다비에 앞서 지난 2002년 하운청 덕성여대 중문과 교수의 장례 때도 사찰 다비장을 쓰도록 한 전례를 남긴 스님이다. 고(故) 하운청 교수가 남긴 유고시집 ‘산으로 가는 마음’을 들여다 보면 정우 스님이 인도와 네팔을 순례하며 찍은 사진이 여럿 들어 있다. 정우 스님과는 아주 개인적인 친분이 두터웠던 것이다. 물론 신정희 선생의 통도사 경내 다비 허용은 통도사의 대중회의를 통해 결정한 일이다. 그런 과정에서 주지 정우 스님의 목소리가 강하게 작용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신정희 선생은 일본 이도다완의 원형인 조선 황도사발을 500년 만에 재현해 내는데 성공, 도예계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 통도사에 ‘신정희요(窯)’를 차려 놓고 작품 활동을 해온 만큼 통도사와는 인연이 아주 깊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래서 산중회의 때도 정우 스님의 주장이 무리없이 수렴됐을 것이다. 통도사측은 일반인의 경내 다비허용과 관련해 아직 공식적인 입장은 내지 않고 있다. 하지만 앞으로 통도사와 인연이 깊고 사회적 공로가 많은 신자들에게는 지속적으로 경내 다비를 허용할 것으로 알려졌다. 주지 정우 스님도 다비장 개방에 긍정적인 입장을 밝혔다고 한다. 불교계에서는 통도사의 일반인에 대한 다비장 개방을 놓고 “본래의 다비 의미를 희석시키고 오남용될 위험성이 크다.”는 의견과 “다비에서 스님과 재가신도를 구분하는 것은 시대착오로 다른 사찰들도 개방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엇갈리고 있다. 이와 관련해 조계종 총무원의 한 관계자는 “일반 신도가 원하고 순수한 의미의 장례로 치러진다면 종단에서도 굳이 반대할 이유가 없다.”며 “그러나 사찰들이 사찰 훼손과 불교의 정서를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 신중하게 접근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김성호 문화전문기자 kimus@seoul.co.kr
  • 정우스님 등 불교방송 새 이사에

    불교방송은 19일 서울 마포 가든호텔에서 제62차 재단이사회를 열어 통도사 주지 정우 스님, 총지종 통리원장 원송 정사, 김규칠 전 불교방송 사장을 신임 이사로 각각 선출했다. 배홍규 감사의 임기는 2년 연장됐다. 이사장 선임 문제는 7월에 열리는 차기 이사회로 넘겼다.
  • 사기장 신정희씨 별세

    이도다완의 원형인 황도사발을 재현해 내는데 성공한 사기장 신정희씨가 18일 오후7시 부산 침례병원에서 별세했다. 향년 77세. 젊었을 때 작은 계기로 도자기에 매료돼 외길만 걸어온 신씨는 경남 양산 통도사 경내에 신정희요를 차렸다. 아들 네명도 각자의 요를 차리고 사기장의 길을 걷고 있다.발인은 22일 오전 9시, 장지는 경남 양산 통도사 다비장.(051)583-8906
  • 문화재위원회 자매 위원 탄생[신임위원 명단]

    문화재청은 25일 문화재 보존ㆍ관리와 활용에 관한 사항을 조사ㆍ심의하는 문화재위원회의 임기가 끝남에 따라 120명의 문화재위원과 200명의 문화재전문위원을 새로 위촉했다. 기존 문화재위원의 62.5%는 유임됐으며 37.5%는 출석률과 활동실적,건강 등을 고려해 교체됐다. 자매인 김리나(사진 왼쪽) 홍익대 교수와 김영나(사진 오른쪽) 서울대 교수는 각각 동산문화재분과위원과 근대문화재분과위원으로 위촉됐다.아버지는 김재원 초대 중앙박물관장이다. 최고령인 임동권(81) 중앙대 명예교수는 문화재위원 가운데 유일하게 1962년 초대 문화재위원을 지냈다. 안휘준 위원장이 유임된 가운데 문화재위원회는 기존의 9개 분과에서 11개 분과로 확대됐다. 무형문화재분과가 무형문화재 예능분과와 무형문화재 공예분과로 분리됐고,문화재 형상변경을 심의할 경관심의분과가 신설됐다.제도분과는 폐지됐으며 기능을 대신할 문화재청 제도ㆍ법률자문위원회가 별도로 설치됐다. 분과별 위원장에는 ▲박언곤 건축문화재분과위원장 ▲안휘준 동산문화재분과위원장 ▲한영우 사적분과위원장 ▲김명자 무형문화재예능분과위원장 ▲박대순 무형문화재공예분과위원장 ▲이인규 천연기념물분과위원장 ▲정징원 매장문화재분과위원장 ▲이만열 근대문화재분과위원장 ▲김광언 민속문화재분과위원장 ▲정재훈 문화재경관분과위원장이 선출됐다. 국보지정분과는 김홍남 국립중앙박물관장,유영렬 국사편찬위원회장과 10개 분과 위원장으로 구성됐다.임기는 2009년 4월25일 끝난다. 다음은 25일 위촉된 문화재위원회 위원 명단 건축문화재분과△위원장 박언곤(홍익대) △김봉렬(한국예술종합학교) △김창준(전 문화재청) △이상해(성균관대) △김동욱(경기대) △김동현(전 국립문화재연구소) △윤홍로(전 문화재전문위원) △장경호(전 국립문화재연구소) △장석하(경일대) △조성룡(건축가) △소재구(국립고궁박물관) △천득염(전남대) △최성은(덕성여대) 동산문화재분과 △위원장 안휘준(서울대) △조선미(성균관대) △윤용이(명지대) △최건(조선관요박물관) △김리나(홍익대) △범하(통도사성보박물관) △정우택(동국대) △박상국(전 국립문화재연구소) △이영훈(국립경주박물관) △박성래(전 한국외대) △신승운(성균관대) △최승희(서울대) △이광호(연세대) △이오희(한국전통문화학교) 사적분과△위원장 한영우(한림대) △김원(건축환경연구소 광장) △김성구(국립중앙박물관) △손영식(전통건축연구소) △장헌덕(한국전통문화학교) △최기수(서울시립대) △주보돈(경북대) △고혜령(국사편찬위원회) △전형택(전남대) △안병욱(가톨릭대) △정영화(영남대) △지건길(전 국립중앙박물관) △배기동(한양대) △이형구(선문대) △최광식(고려대) 무형문화재예능분과 △위원장 김명자(안동대) △강등학(강릉대) △최태현(중앙대) △김철호(국립국악원) △임동권(중앙대) △황루시(관동대) △임돈희(동국대) △이필영(한남대) △조흥동(국민대) △채희완(부산대) △이종철(한국전통문화학교) 무형문화재공예분과△위원장 박대순(서울약령시한의약박물관) △추원교(한양대) △정해조(배재대) △윤근(중앙대) △백영자(한국방송통신대) △박성실(단국대) △윤열수(가회박물관) △흥선(직지사성보박물관) △이태호(명지대) △윤용이(명지대) 천연기념물분과 △위원장 이인규(서울대) △박규택(강원대) △이은복(한서대) △박상진(경북대) △김익수(전북대) △손인석(제주도동굴연구소) △김학범(한경대) △구태회(경희대) △이광춘(상지대) △김정률(한국교원대) △이창복(서울대) △이흥식(서울대) △조도순(가톨릭대) △김덕현(경상대) △양보경(성신여대) △오경섭(한국교원대) △홍순민(명지대) 매장문화재분과 △위원장 정징원(전 부산대) △이인숙(부산박물관) △김세기(대구한의대) △박영철(연세대) △최병현(숭실대) △이강승(충남대) △이건무(전 국립중앙박물관) △이청규(영남대) △안승모(원광대) △조영제(경상대) △나선화(생명과평화의길) △박강철(조선대) 근대문화재분과 △위원장 이만열(전 국사편찬위원회) △남문현(건국대) △이재(전 육군사관학교) △김영나(서울대) △윤범모(경원대) △박현수(영남대) △이용관(중앙대) △최원식(인하대) △김용수(경북대) △서중석(성균관대) △백운선(호남대) △김정동(목원대) △김정신(단국대) △김영태(영남대) 민속문화재분과 △위원장 김광언(인하대 △이종철(한국전통문화학교) △임재해(안동대) △조유전(토지박물관) △김홍식(명지대) △문영빈(전 문화재전문위원) △장석하(경일대) △김봉렬(한국예술종합학교) △박강철(조선대) △신승운(성균관대) △박성실(단국대) △이태호(명지대) △박대순(전 서울역사박물관) 문화재경관분과 △위원장 정재훈(전 문화재청) △김봉건(국립문화재연구소) △민현식(예술종합학교) △정기용(건축가) △채미옥(국토연구원) △이시재(가톨릭대) △조옥라(서강대) △이해준(공주대) △윤홍로(전 문화재전문위원) △김동욱(경기대) △장헌덕(한국전통문화학교) △정영화(영남대) △김학범(한경대) △김덕현(경상대) 국보지정분과 △김홍남 국립중앙박물관장 △유영렬 국사편찬위원장 △박언곤 건축문화재분과위원장 △안휘준 동산문화재분과위원장 △한영우 사적분과위원장 △김명자 무형문화재예능분과위원장 △박대순 무형문화재공예분과위원장 △이인규 천연기념물분과위원장 3정징원 매장문화재분과위원장 △이만열 근대문화재분과위원장 △김광언 민속문화재분과위원장 △정재훈 문화재경관분과위원장. 이상 11개 분과 120명(겸임 25명). 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 ‘한국의 불화’ 3156점 집대성

    ‘한국의 불화’ 3156점 집대성

    재단법인 성보문화재연구원(원장 범하 스님)의 ‘한국의 불화’ 출판 사업이 20년 만에 마무리됐다. 조계종 24개 본사의 전국 476개 사찰과 국·공립박물관, 대학박물관, 사립박물관 등이 소장하고 있는 불화 3156점을 40권에 담았다. 1989년 범하 스님을 중심으로 불화조사단이 출범한 뒤 1996년 통도사 본사편 상·하와 직지사 본·말사편 상·하를 시작으로 2000년까지 해마다 4권씩 발간했고, 이후 20권을 추가해 한국 불화를 집대성했다. 원색도판으로 제작된 ‘한국의 불화’는 불화의 유형에 따라 존상 뒤에 봉안하는 후불탱과 대형 걸개그림인 괘불, 보살탱과 신중탱·여러 폭으로 나뉜 각부탱과 각 단에 봉안한 각단탱, 초상인 진영, 전각을 장식하는 도량장엄 순으로 편찬되어 있다. 각 불화는 전도와 부분도를 실은 뒤 해설과 관련논문, 해당 사찰의 약사를 덧붙였다. 불화의 명칭과 조성연대, 조성불사에 참여한 사람, 작품 재료와 비용을 보시한 시주자도 밝혔다. 성보문화재연구원 구미래 기획연구실장은 “정부 지원이 채 2억원에 미치지 못하는 상황에서 민간단체가 20년에 걸쳐 50억원 가량을 투입해 완성했다는 점에서 대장경 판각에 비유할 만한 일로 자부한다.”고 말했다. 한편 ‘한국의 불화’ 사업을 발원하고 비용을 마련하는 화주(化主)를 맡은 석정 스님은 21∼27일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에서 완간기념회를 겸해 선서화(禪書畵) 300점으로 ‘석정연묵전(石鼎硏墨展)’을 갖는다. 중요무형문화재 단청장(丹靑匠)인 석정 스님은 1996년에는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평생 그려 모아두었던 작품으로 생애 첫 개인전을 세종문화회관에서 열기도 했다. 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 통도사 범종 ‘세대교체’

    해인사 송광사와 함께 ‘3보 사찰´인 통도사의 범종이 ‘세대교체´된다.13일 경남 양산시와 통도사에 따르면 321년의 역사를 지닌 통도사 내 범종각의 동종(銅鐘 ·보물 제11의6호)이 통도사 성보박물관에 영구보존되고 동종이 있던 범종각에는 복제된 동종이 설치된다. 통도사는 오는 19일 오전 11시30분 타종식을 갖고 진품 동종의 ‘퇴임’과 새로운 동종의 ‘취임’을 알린다. 울산 강원식기자 kws@seoul.co.kr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