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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항일투사들의 유택(두만강 7백리:7)

    ◎나철·김교헌·서일 선생 묘 새 단장/강양안 마을마다 혁명열사비 우뚝 솟아/한·중수교후 관심 높아져… 모국이장 한창 연길시 사수에서 북쪽 골짜기로 20리가량 올라가노라면 금불동이라는 마을이 있다.이 마을이 등지고 있는 산기슭을 따라 올라가면 자그마한 소나무숲이 나오는데 그안에 유달리 깨끗이 가꾼 묘소 하나를 만나게 된다. 이 묘지속에 누워 있는 사람의 이름을 모른다.누구도 그가 어디서 태어났으며 어디서 왔으며 부모가 누구인지도 알길이 없다.다만 숨을 거둘 당시 19살이라는 것과 조선족 항일독립군 젊은 전사라는 사실만을 알고 있을 뿐이다. 마을에서 연세가 높은 이상헌(79)노인은 그 무명의 젊은 전사가 꽃다운 나이에 죽어간 정황을 소상히 기억했다. 『꼭 쉰 일곱해전 일입네다.뒷산에서 드문이 총소리가 들려오더니만 일본놈들과 자위단들이 어린애 같이 앳된 새파란 청년을 끌고 마을로 들어왔디요.그 놈들은 마을 사람들을 불러내다 보는 앞에서 청년을 신문합데다.이름을 물으니까 「항일독립군」이라고만 기래요.그 날 왜놈 장교의 군도에 목이 잘려 죽고 말았디요.하도 기막히고 딱해서 유체를 마을 사람들이 묻어주었댔습네다』 ○무명열사 묘지는 쓸쓸 두만강 양안 마을마다 양지 바른 언덕위에는 혁명열사비가 세워졌지만 산 언덕 공동묘지에 임자 없이 쓸쓸히 있는 독립투사들의 묘지는 풍우의 시달림에 자취를 잃었거나 훼손되어 가고 있다.용정시 삼합진 안미대골로 얼마간 들어 가다가 화선 누비골에 있는 묘지앞에는 돌비석 하나가 쓸쓸히 서 있었다고 한다.비석에는 김병덕 지묘라고 씌어있었다.부근 마을 사람들은 독립군 대장의 묘라고 했다.똑같은 항일투사의 묘지이다.하지만 계급투쟁 세월에 그 누군들 감히 돌볼 수가 있었으랴.몇해전 김병덕의 묘지는 파엎어졌고 대리석 비석도 도난을 당했다.오소리가 묘지에 굴을 뚫고 보금자리를 꾸민 것을 발견한 부근의 사람이 묘를 헤치고 오소리를 잡아냈다. 그러나 사회주의 계열 항일열사들의 시신은 일찍 북한으로 이장되었다.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한때 친선을 다졌던 터이라 이장이 쉬워 1950년대말에서 60년대 사이에 시신이라도 두만강을 건넜다.이에 비해 한국에 가까운 연고를 둔 항일열사들은 상대적으로 대접이 소홀했다.특히 문화대혁명 당시 항일유적이나 열사들의 묘소가 큰 수모를 겪었다.한중수교가 이루어지고 광복 50주년을 맞는 오늘날은 사정이 달라져 항일열사들에게 관심을 쏟고 있다. 그 넋이라도 살아서 가장 슬퍼하다가 다시 기뻐했을 열사가 있다면 나철,김교헌,서일 선생일 것이다.한국 대종교의 3종사로,또 항일독립운동가로 추앙받는 이들의 묘소는 화룡시 삼도구 청호촌에 있다.지금은 연변조선족자치주 정부가 항일역사유적지로 지정한데다 한국의 대종교가 묘역을 정화했기 때문에 제법 볼품이 나지만 얼마전까지만 해도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청산리전투를 총지휘 이 묘역은 문화혁명 당시 홍위병 패거리와 추종자들에 의해 쑥대밭이 되는 수난을 겪었다.비석을 모두 내동댕이 쳐서 청호촌 마을 사람들이 가져다 댓돌로 쓸 정도였다.문화혁명이 가시고 뜻있는 사람들이 묘비석을 찾아내 세웠지만 김교헌선생의 묘비는 끝내 못찾았다.그래서 몇해전에 묘비를 새로 만들어 세웠다.대종교는 독립군조직 서로군정서를 만드는데 주역을 담당했고 서안선생은 그 총재로 1920년 청산리전투를 승리로 이끈 지도자였다. 지금은 일본인들까지 유골을 찾으려 두만강변의 연변땅을 방문하고 있다.물론 침략자로 두만강을 건넜다가 목숨을 잃은 사람들이다.얼마전에 한 일본 여인이 용정시 백금향으로 와서 자기의 오빠 묘를 찾았다.묘지 자리를 상세히 그린 지도까지 들고 온 일본 여인을 마을 노인들이 안내했다.묘가 있었다는 장소는 본래 일본 삼림경찰의 묘역이었다.1940년 홍기하 전투에서 겨우 살아남은 일본경찰은 둘 뿐이었다는데 목숨을 살려 평정대 마을까지 이르렀다가 그중 하나가 병으로 죽어 그곳에 묘를 썼던 것이다.그런데 봉분이 사라져서 어방으로 묘자리가 짐작은 가도 딱 짚을 수는 없었다. 독립군 김덕형의사는 웅진,나진 등 두만강 연안의 조선을 다니며 군자금을 모았던 사람이다.1921년 경술년 토벌 때 어느날 저녁 군자금을 가지고 두만강을 건너 북흥에 있는 집으로 들어 왔다가 일본군 토벌대의 포위에 걸려희생되었다.그가 죽은 후 식구들은 군자금을 독립군에 전달할 수 없었다.많은 액수의 군자금은 그 집의 생활을 윤택하게 만들었다.김덕형의 아들 두 형제는 시름없이 공부를 하였다.광복이 나고 1947년 토지개혁을 하게 되자 생활이 유족했던 그 일가는 청산을 당해 러시아제 금장표 재봉틀마저 빼앗겼다.다른 사람의 소유가 되었던 재봉틀은 얼마전에 고장이 나서 고철로 팔아버렸다.그집 큰 아들은 북한에 들어가 죽고 작은 아들 김성록은 지금 한국에 산다.6·26전쟁 때 인민군에게 포로로 잡혀 북한에 온 김성록은 중국의용군으로 참전했던 북흥의 조선족 친구가 만난 일도 있다.그는 한국군 대좌(대령)군함(계급장)을 달고있었다는 것이다. 한국정부 보훈처에서는 연변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 안화춘 선생의 도움으로 중국내 애국선열들의 묘소를 이장하고 있다.안화춘 선생은 갖은 노고를 아끼지 않고 이 땅을 메주 밟듯 하고 다닌다.이번 두만강 답사길에서 연변 도처에서 희생된 선열들의 자취를 잡을 수 있었다.조창렬노인이 들려준 경신년 대토벌 당시 상황도 그 한토막이다. ○선열들 발자취 곳곳에 부암동에서 독립군 한창준과 이씨가 체포되어 불에 타 죽었댔습니다.시체를 감장하려니 누가 누구인지 가릴 수가 없었디요.일제 놈들은 의병대장 최덕균과 남상윤(남풍수로 불림)선생도 모진 고문을 했다고 기래요.눈에다가 고춧물을 부어 넣고 신문을 했으니끼리 죽을 수 밖에….』 선열들의 비장한 최후는 눈물 없이는 들을수 없었고 일제와 주구들의 만행은 의분을 불러 일으켰다. 우리가 흔히 북간도라고 부르는 독립운동의 무대 연변은 이렇듯 많은 항일투쟁의 사연을 안고 있다.나는 옛 용정 대성중학교(현재 용정시 제2중학교)앞에 세워진 윤동주 시비에 새겨진 시 한구절을 머리에 떠올려 보았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무수한 선열들처럼 죽는 그 순간까지 「한 점 부끄러움 없이 산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시련이 아닐 수 없다.
  • 80여년만에 건국훈장 추서 민효식의병장

    ◎황해도일대서 돌격대장으로 맹활약/“의병궐기” 고종 밀지 전해듣고 거병/6백만명 이끌고 일제 토벌군과 혈전 『뒤늦게 나마 4대 80여년만에 고조할아버지의 항일 의병활동을 발굴,명예를 살리게 돼 후손으로서 감개무량합니다』 15일 제49주년 광복절을 맞아 독립유공자로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는 민효식의병장(1854∼1910)을 대신해 훈장을 친수받는 민의병장의 4대손 민형원덕성여대교수(43·서울 도봉구 방학동 신동아아파트)는 『아버지의 평생소원을 풀어드려 효도를 하게 됐다』면서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민교수는 그러나 독일 프랑크푸르트대에 10여년동안 유학을 하느라 고조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잊고 있던중 92년 7월 아버지 경남씨가 중풍으로 자리에 누으면서 『효자,식자 할아버지의 독립운동활약상을 확인하지 못한 것이 평생의 한』이라는 말을 듣고 본격적으로 국회도서관등을 돌아다니며 사료를 모은 끝에 이번에 국가보훈처에 민효식의병장의 서훈을 신청한 것. 민의병장에 대한 기록을 보면 우선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가 발행한「의병항쟁사」는 『경의선 철도 서쪽의 장연·송화·은율 등지에서 민효식부대가 새로이 기반을 다지게 됐다』고 적고 있으며 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독립운동사는 수십여곳에서 민의병장의 활동상을 밝히고 있다.또 국립도서관에 보존중인 일제의 조선폭도토벌지에도 『황해도 지역에 있는 괴수 민효식을 토벌하기 위해 토벌대를 보낸 결과 약간의 손상은 주었으나 토벌의 효과가 현저하지 못했다』고 본국에 보고한 기록이 적혀 있다. 민의병장은 이런 기록에 근거,한말 일제의 강점에 대항해 일어난 제1차 을미의병 전쟁당시 크게 활약한 것으로 확인됐다. 한말 마지막 진사인 민영태의 장남인 민의병장은 39세 때인 1895년까지는 고향인 황해도 벽성군 일대에서 명망높은 유학자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일제의 명성황후시해·단발령·군대해산 등의 사건을 계기로 항일운동의 분위기가 조성된 가운데 구한말 군부대신 신기선이 『전국 각지에서 의병궐기토록 하라』는 고종의 밀지를 전하자 본격적으로 거병하게 됐다. 민의병장은 이 과정에서 군인을 모집하는 초병의 역할을 맡았다. 민의병장은 이후 1908년 황해도 일대에서 많게는 수백여명의 의병을 이끌고 일제토벌군과 교전을 벌였으며 한일합방이 이루어진 1910년 마침내 혈전 끝에 전사했다. 황해도 지편찬위원회가 펴낸 황해도지에 따르면 민의병장은 의병지휘 돌격대장으로 6백여명의 병력을 이끌고 1910년 해주·옹진·송화로 일군을 도륙하다 전사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민교수의 아버지 경남씨는 병석에 누워 민의병장에 대한 서훈소식을 듣고는 눈시울을 적셨다. 민교수는 『고조할아버지는 순국후 시신마저 찾지 못해 평소 사용하던 물건을 선영에 모셨다고 들었다』면서 민의병장의 유일한 유품인 초상화를 소중하게 쓰다듬었다.
  • 대마도의 수선사(일본속의 한국문화:10)

    ◎“항일의병의 거유” 최익현선생 순국지/영정 지금도 모셔 한국인관광객 잦은 발길/만관운하 개설… 대륙침략의 전진기지 삼아 임진왜란은 대마도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으나 일제침략은 대마도와 무관하지 않다.임진왜란이 끝난 뒤의 국교정상화에도 대마도가 깊이 개입하여 2백년간에 걸친 불안한 평화가 유지되었다는 사실은 앞에서 이미 기술한바 있다.도대체 대마도주가 만든 가짜 침략사죄문서를 가지고 만족해 버린 당시의 조선정부가 잘못이었다.겉으로는 성신교련을 내세웠으나 속으로는 제각기 다른 뜻을 품고 있었으니 결국은 일제재침으로 이어질수밖에 없었다. 대마도에는 일제침략사의 생생한 자리 방캉세토(만관뢰호)라는 인공운하와 이에 항거한 최익현선생의 순국지 수선사가 남아 있다.대마도는 19세기말 20세기초의 청·일전쟁(1894년)과 러·일전쟁(1904년)기에 대한침략의 전진기지로 둔갑하게 되는데 특히 일본해군의 전초기지로 각광을 받게 되었다.그래서 아사마(천이)만에 해군기지가 건설되는데 지금도 해상자위대가 자리잡고 있는 죽부(다케후키)라는 항구가 그것이다.이 항구는 한가지 큰 흠을 갖고 있었으니 한국쪽으로만 바다가 열려있고 일본쪽으로는 육지로 가려있었던 것이다.그래서 그들은 막대한 자금을 들여 인공운하를 파기로 했다.이곳이 바로 대마도가 자랑하는 만관뢰호요 그 위에 걸린 다리가 만관교다.보기에는 매우 아름답다.그러나 그 어두운 과거때문에 우리 눈에는 아름답게만 보이지 않는다.이 운하는 1900년에 개통되고 1905년 일본함대가 러시아극동함대를 격파할때 큰 공을 세웠다. ○1904년에 개통 또 이 운하가 개통됨으로써 일본 구주의 나가사키(장기)와 우리나라 진해를 우회하지 않고 직선으로 잇는 항로가 개설되었다.그러니 이 운하에 얽힌 모든 과거사가 불쾌하기만 하다. 이 운하가 개통된 해가 1905년 을사조약이 늑약된 바로 그해였다.을사조약이 늑약되자 많은 유생들이 이에 항거하여 의병을 일으켰다.그 대표적인 인물이 면암 최익현이었다. 최익현은 호남에서 거사하였는데 관군토벌대가 들이닥치자 동주끼리 싸울수 없다 하여 자진 해산하고 체포되었다.최익현은 그의 한마디로 대원군까지 실각시킨 당대 제일의 거유였기 때문에 일제는 간교하게도 유배지를 대마도로 정하고 이곳 이즈하라(엄원)에 유패시켰다. 최익현이 이곳에서 식음을 전폐한뒤 순국하게 되는데 그가 마시던 우물이 남아 있을뿐 유폐되었던 건물은 철거되어 없다.그대신 그의 시신이 잠깐 머물다가 떠난 수선사라는 작은 절이 남아있고 최근 경내에 그의 후손들이 세운 「대한인최익현선생순국비」가 있어 이곳을 찾는 한국관광객들의 순례지가 되고 있다. 필자는 이 수선사를 두번 가보았다.몇년전 처음 찾아갔을때 이 절의 주지(주지라고 해야 자기 혼자서 지키는 절이다.물론 대처승이다)가 공손히 인사하면서 이 절에 귀중한 보물이 있다고 말했다.보니 아주 작은 청동불상이었다.신라불이라는 것이다.금년 여름에 두번째로 방문했을때에도 역시 그 보물을 내보였다.그래서 그가 필자뿐만 아니라 찾아오는 모든 한국방문객에게 그것을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손바닥에 들 정도로 아주 작은 부처님.확실히 우리나라 것이지만 그것이 어떻게 이 수선사 주지손에 넘어왔는지 아무도 모르며 또 그것을 보여주면서 이 절이 한국과 수천년의 관계를 맺어온것처럼 내색하는 저의 또한 아리송했다.그러나 얼마뒤 그 저의가 무엇인지를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이번의 수선사 방문은 근 50명에 이르는 적지 않은 규모여서 비좁은 수선사 경내가 가득찼다.사실 우리나라 사람으로서는 이렇게 일본땅에 순국비를 세우도록 허락해준 것만으로도 고맙기 짝이 없는 일이어서 모두 법당에 들어가서 절을 하게 된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언제 갖다 놓았는지 최익현선생 영정이 놓여져 있었다.예전에는 미처 못보던 것이다.일행은 한층 더 감동해서 영정앞에 절을 하고 성금을 거두어 바쳤다.그리고 모두가 이 절을 두고 떠나는 것을 아쉬워하였다.그날은 마침 배를 타고 귀국하는 날이었다. ○겉과 속다른 일본인 3박4일의 짧은 여정이었으나 대마도의 이모저모를 보고 떠나는 기분이 상쾌하였다.그렇게도 가까운 거리에 있으면서도 그렇게도 멀게만 느껴졌던 대마도의 베일을 벗긴 기분.거기다 우리의 순국선열을 고이모시고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고 있는듯한 대마도 사람들의 마음가짐이 떠나는 우리를 더없이 기쁘게 해주었다. 그런데 배를 타기직전 일행중의 한 학생이 수선사에 두고 온 물건이 있다고 해서 급히 달려갔다가 헐떡거리면서 돌아왔다.그러면서 들려주는 말은 갑자기 우리의 들뜬 가슴에 찬물을 끼얹는 것이었다. 『수선사 법당에 내어 놓았던 최익현선생의 영정이 어느새 말끔히 치워져서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 소리를 들은 모든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듯이 『역시 그랬구나!』고 탄식하였다. 『겉과 속이 달라야 훌륭한 일본인』이라는 말의 참뜻을 배운 셈이 된 것이다. 필자는 젊은 학생들이 대마도에서 본 다른 모든 것을 합쳐도 이보다 더 귀한 교훈은 없었다고 생각했다.착잡한 생각과 그동안 정성을 갖고 안내에 힘써주신 영창구혜선생,그리고 아비창덕생씨에게 드리는 감사의 마음이 뒤엉키는 것을 느끼며 대마도를 떠났다.대마도는 다시 가까이 우리에게 다가서고 있다.이 시점에서 과거의 잘잘못을 따질일은 아니나 깊이 새겨서 밝고 명랑한 미래사에 비출 필요는 있을 것이다.
  • 소설 「무당」펴낸 전라도 무당 정강우씨(저자와의 대화)

    ◎“무속 원형 보존위해 글쓰기 시작”/생업인 무업 팽개치고 전국굿판 순례/군산 무녀통해 무당의 인생·수난 전달/본인이 부른 열림굿 등 테이프로도 제작 그의 이야기는 신명나는 한판 굿거리장단이다.죽어있는 문장과 말의 조합,나열이 아니라 잊혀져 가는 우리의 소리를 찾기위해 안간힘을 쏟아 붓는 살풀이 한마당이다. 정강우무당은 요즘 굿을 하지 않는다.세상에 굿안하는 무당도 다있나 하겠지만 목하 「무당」(현암사)이라는 제목의 무당이 쓴 무당이야기를 책으로 펴내 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그에게 전화를 걸면 『녜,군산사는 전라도 무당 정강우입니다』라는 걸쭉한 전라도사투리를 오리지널사운드트랙으로 듣는다.9살때 할아버지신이 내려 점치고 굿하면서 살아온 마흔다서햇동안 국민학교졸업장 한장 학력에 번듯한 책이라고는 제대로 읽어 본적도 없다.그런 사람이 웬 책을 지었느냐,의문이 앞서겠지만 본인에겐 그리 대수로운 일이 아니었다.수도꼭지처럼 틀기만 하면 이틀밤낮을 쉼없이 떠들어 댈 수 있는 수 많은 소리가 머릿속에 입력되어 있기 때문이다. 『소리와 글이 다 같은 이치아닙니까요.군대다닐때 부모님께 편지쓰기가 싫어서 휴가가서 문안드리려고 참았다가 부모님 애간장을 다 녹였어요.글과는 담쌓은 인생이지만 막상 쓰려고 마음먹으니까 한달에 책한권 분량씩의 원고가 쌓이더라고요』 이 정도면 자기가 글 쓰는일에 뛰어든 설명으로 충분하다는게 입심좋고 재기 넘치는 이 무당의 생각이다.사실 그가 무구를 팽개치고 펜을 든데는 더 급한 이유가 있었다.세상무당들이 돈벌이에 매달려 우리의 전통소리인 「굿소리」전승이 뒷전으로 밀려나는 현실이 너무 안타까워서였다.소리를 제대로 배운 세습무는 차츰 사라지는 반면 강신무만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이 그것이다.그의 표현처럼 『점치고 사기쳐서 소쿠리에 넘칠만큼 지전을 끌어 모으는 무당이 득실대는』것이 오늘날 우리 무속의 현실인지도 모른다. 소설「무당」은 전3부로 펼쳐진다.현재 제1권이 서점가에 화제를 던지며 매기가 승승장구하는 중이다.일제말기서부터 제3공화국에 이르는 시기를 배경으로 무당이 받아온 수난의 역사를 그려내고 있다.항구도시 군산을 무대로 전개되는 이 소설은 순녀라는 무당의 생애를 빗대어 이 땅의 한무당이 살아가는 과정과 그를 둘러싼 우리 민족문화의 수난을 생생하게 표현했다. 그러나 소설「무당」이 뜻한바는 소리꾼의 글쓰기에 있지 않다.테이프2개에 육성으로 녹음돼 있는 「소리」에 있다.책의 절반가량이 소리로 채워져 있는 이 소설은 차라리 소리다.「소리소설」이라고 하는 것도 그때문 인듯하다.테이프속에는 열림굿,성조풀이,전라도육자배기,사설칠성풀이,사설장자풀이 같은 귀한 소리들이 담겨 있다.지리산 피아골에서 혼신의 힘을 다해 녹음한 이 소리를 듣다보면 무당과 굿에 대한 우리의 고정관념이 깨어짐을 느끼게 된다.무당이란 우리 전래문화의 전승자요 굿 또한 전승민요와 다를 바가 없다. 『용한 무당으로 소문이 나고 매스컴도 타면서 한때 돈방석에 앉을뻔 했어요.하지만 이 땅에서 가장 오래된 토속종교인 무속이 미신으로 버림받는 현실이 참을 수 없었죠.무업에서 손을 놓고 무속의 맥과 원형을 찾아 전국방방곡곡을 떠돌면서넋을 달래는 상여소리,장돌뱅이의 흥타령,남사당패의 소리를 채록하기 시작했습니다.편하게 사는 길을 마다하고 고생을 자청한 셈이지요』 80년대들어 그의 노력이 세상에 알려졌다.군산용왕굿을 원형대로 복원해 보유자로 지정받았다.대학가를 드나들며 우리것에 대한 대학생들의 관심을 부추겼다.89년에는 지리산 달궁에서 갑오동학혁명전사자와 지리산토벌대,빨치산들의 넋을 기리는 씻김굿판을 벌였다.지금은 황토현문화연구회자문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무당」제2부를 이제야 탈고했습니다.좀쉬고 3부에 들어가야겠지요.어떻게 끝맺음을 해야할지,그림은 다 그려 놓았어요.한동안 여행이나 다니면서 머리도 식히고 채록작업도 계속해 나갈 생각이에요』
  • 새전기「세기와 더불어」허동찬씨의 분석(신고 김일성자서전연구:39)

    ◎소년시절:20/무송의 「새날소년동맹」/“모임 결성했다” 주장하는 26년 12월/무송지역에 김일성 간적조차 없어/마적단의 잦은 약탈 전기에 언급안해 북한에서는 김일성이 화성의숙을 중퇴한 후 길림으로 가기 위한 준비로 모친 강반석이 있는 무송에 돌아 갔고 거기서 26년 12월15일 「새날소년동맹」을 조직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그는 이 해 가을쯤부터 사실은 봉천(심양)의 평단중학교에 재학하고 있었다.당시 중국 동북의 중학교들에서는 8월24일부터 12월20일까지가 제1학기 전기수업기간이었다.따라서 북한의 주장을 따르면 평단중학교에서도 그는 1학년 1학기 도중에 학업을 버리고 있는 것으로 된다. ○봉천 평단중 재학 그러나 그는 무송에서 「새날소년동맹」을 결성한 일은 전혀 없었다. 26년의 안도·무송지방은 아래에 든 예와 같이 마적의 발호가 극심하였다. 전인의군과 마적 2백명이 무송·안도지방을 약탈하고 돌아다녔다. 함경북도의 경관 11명이 월경하여 안도까지 마적을 추격하였다. 봉길연합토벌대가 무송·화전방면으로부터 마적단을 공격하여 그들을 안도의 수림지대에로 압박하였다. 안도의 십오리지방에서 대두목 왕홍태가 중국군과 교전하여 사망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두목 양광이하 1백50명의 마적이 안도현 양강구를 습격했다. 두목 점구주와 마적 80명이 안도현 고동하를 습격했다. 김일성은 이렇게 치안이 억망이고 살벌하기 짝이 없는 무송·안도지방에서 하필이면 「공산주의」소년조직을 만들었다고 선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이러한 「소년동맹」의 결성날짜를 12월15일이라고 주장하는 바람에 그것이 완전한 날조라는 것이 객관적으로 드러나고 말았다. ○이틀간 대규모 습격 안도·화전 현계지방에 분산행동중인 마적두목 양광,협해,점구주,상산호,남협등 연합마적단 약 1백50명과 유하,몽강 양현지방에서 행동중인 철뢰,사해,흑용,천순,신호산,양래호,점동 등이 거느리는 약 2백명의 마적단은 12월18일 하오5시쯤 돌연히 무송현성을 습격하여 방화를 했다.그리고 성내 경비군·경은 패퇴하여 보위단·경찰측의 사자 약 40명,관민의 사상자 약70명,가옥소실 약1백채에 달하고 또 경찰서장,학교생도 40명,성내 상인 20명이 납치됐다. 마적단은 19일 하오2시쯤 차마를 징발하여 약탈품을 탑제하고 무송현 서북 몽강현 방면으로 퇴거했다.」 이 기록은 북간도 연길현의 일본 경찰관이 안도현 지사로부터 들은 말이다.여기서는 연합마적단의 합계가 3백50명으로 되고 있지만 후에 정리한 바에 의하면 그 총수는 약 5백명이었다.또 이때 무송현지사는 호위병을 데리고 성외에 도피하였고 성내의 관공서,상가의 3분의1이 소실되었다. 무송현성 인구는 당시 이 지방을 여행한 일본 지리학자 야마다(산전구태낭)에 의하면 호구 7백,인구 2천8백정도였다 한다. 그런데 26년 12월에 5백명이나 되는 대규모 마적단이 7백호정도 밖에 집이 없었던 이 무송현성을 습격하였다.이 습격에 대항해야 할 군경은 수십명의 사상자를 낸 후는 현성 밖으로 달아나 버렸다.마적단은 18일 상오 5시부터 현성에 있었을 뿐 아니라 하루 밤을 거기에서 지내고 다음날 하오2시에 모든 약탈품을 수레에 싣고 유유히 퇴각하였다. 이것은 마적의 소굴이었던 당시의 무송·안도지방에서도 미증유의 약탈이었다.곳곳에서 일어난 화재는 이 도읍을 생지옥으로 만들었고 마적들이 겁탈과 약탈을 감행하는 와중에서 당하는 사람들의 아비규환이 주민들의 폐부를 찔렀다.7백호 중에서 재물이 있는 집을 가령 2백호 정도라고 하면 어느 집이나 2∼3명의 마적들이 총을 들고 밤새도록 털고 털었던 것이다. 그런데 김일성이 12월15일에 결성했다는 「새날소년동맹」이야기에는 「결성」된지 불과 3일 후에 있었던 이 참사가 「없었던 것으로」되어있다.이 이야기를 아무리 읽어 보아도 마적의 「마자」도 나오지 않는 것이다. 그것이 민족주의 단체의 것이건 공산주의 단체이건 간에 소년단이란 조직이 무송현성에서 결성되었다면 그후 3일만에 터진 마적단의 무송 습격에 대하여 김일성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그리고 그러한 소년단이 있었다면 그들은 모든 힘을 다하여 불타다 남은 집을 치우고 주민을 돕고 하다못해 피난가는 사람들의 짐 하나라도 들어주어야 할 것이다.그러나 김일성의 모든 전기에는 그런 일을 했다는 서술은 단 한 줄도 없다. ○당시 정황과 불일치 따라서 이런 전기들은 거꾸로 김일성이 무송에 있었다고 하는 주장 자체를 부정하고 있다.그는 26년 12월 중순에는 무송지방에는 없었다. 당시 김현직이 사망하여 강반석과 김형권 그리고 김일성의 두 아우 밖에 없었던 무송의 약방도 마적단의 호개의 겁략 대상이었을 것이다.그러나 늙어서 잊어버린 탓인지 김일성은 자기 집이 이때 노략당했다는 것도 회상하지 못하고 있다.그만큼 당시의 무송지방에 대한 그의 기억은 희미한 것이다. ①평전 94면 ②평전 95면 ③만몽도읍전지 참조,평전 9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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