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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방부 71년 만에 ‘제주 4·3’ 유감 표명 “깊은 유감과 애도”

    국방부 71년 만에 ‘제주 4·3’ 유감 표명 “깊은 유감과 애도”

    군과 경찰의 무력 진압으로 최대 약 3만명의 도민들이 학살당한 ‘제주 4·3’에 대해 국방부가 71년 만에 처음으로 유감을 표명했다. 국방부는 3일 “‘제주 4·3 특별법’의 정신을 존중하며 진압 과정에서 제주도민들이 희생된 것에 대해 깊은 유감과 애도를 표한다”고 밝혔다. 제주 4·3은 1947년 3월 1일 미군정 경찰이 제주도민을 향해 발포한 사건을 시작으로, 좌익 진영 무장대가 1948년 4월 3일 일으킨 소요 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무장대와 군·경 토벌대 간 무력 충돌, 그리고 토벌대의 진압 과정에서 적게는 1만 4000여명, 많게는 약 3만명의 도민들이 학살당한 사건이다. 그동안 국방부는 제주 4·3은 군·경이 투입돼 무장봉기를 진압한 사건이라며 사과나 유감 표명을 하지 않고 있었다. 서주석 국방부 차관은 이날 제주 4·3 행사가 열리는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을 방문해 희생자들에 대한 애도를 표할 예정이다. 민갑룡 경찰청장도 이날 광화문광장 행사에 참석해 희생자들에 대해 애도를 표하며 유감 표명할 것으로 알려졌다. 오세진 기자 5sjin@seoul.co.kr
  • 사망자 1만 4256명… 23%가 아동·청소년, ‘사건’ ‘항쟁’ ‘혁명’ 논쟁에 공식 명칭 없어

    사망자 1만 4256명… 23%가 아동·청소년, ‘사건’ ‘항쟁’ ‘혁명’ 논쟁에 공식 명칭 없어

    ‘고립된 섬’ 제주에서 1948년 4월 3일부터 6년여간 발생한 학살 사건인 ‘제주4·3’은 우리 현대사의 대표적 비극이다. 하지만 ‘전 국민 제주4·3사건 인식조사’(2017) 결과를 보면 광주민주화항쟁(162명 사망), 노근리 양민학살(135명 사망)과 비교해 사망자가 100배(1만 4256명) 많은 데도 국민적 인식도는 가장 낮았다. 2일 4·3 71주년을 맞아 들어는 봤지만 잘 알지는 못하는 이 사건에 대해 정리했다. Q. ‘제주4·3’은 왜 이름이 없을까 A. ‘제주4·3’에는 아직 공식 명칭이 없다. ‘제주4·3 사건’으로 흔히 불리지만 시민사회와 학계에선 이를 ‘사건’으로 볼지, ‘항쟁’으로 볼지, 또는 ‘혁명’으로 볼지 의견이 분분하다. 항쟁 또는 혁명이라고 불러야 한다는 쪽에서는 당시 시위대가 미 군정과 서북청년회의 횡포, 남한만의 단독선거로 인한 분단에 반대했다는 점을 근거로 든다. 반면, 미군의 발포 사건 이후 남로당 제주도당의 활동으로 이 사태가 커졌다는 지점에선 이념 논쟁이 불거진다. 가해자처럼 보이는 경찰·군인의 가족도 여럿 죽거나 다쳤기에 상황이 더욱 복잡하다. 이에 전문가들은 4·3특별법을 통해 모든 조사가 마무리된 뒤 최종적으로 이름을 붙이자는 데 대부분 동의했다. Q. 피해자들이 왜 외국에도 있을까 A. 일제강점기에 일본에서 강제노역, 유학, 항일 운동, 막일 등을 하던 6만여명의 제주도민은 해방 이후 제주로 귀환했다. 그러나 4·3은 갓 돌아온 이들을 다시 고향 밖으로 뛰쳐나가게 했다. 무장대와 토벌대 간 무력 충돌과 토벌대의 진압을 피해 수많은 도민들이 산이나 굴 등으로 피신했다. 해방 뒤 고국으로 돌아왔던 주민들은 학살극을 피해 일본으로 되돌아가는 상황이 발생했다. 끝까지 한국에 오지 못하고 타국에서 사망한 사람도 많다. Q. 미국에 책임을 묻는 이유는 A. 4·3의 발단이 된 경찰 발포 사건은 미 군정기인 1947년 3·1절 행사에서 일어났다. 당시 미군 문건에는 미 군정이 4·3 초기부터 강경 진압을 고수했다는 여러 증거가 남아 있다. 1948년에는 브라운 대령이 군경 토벌대 최고지휘관으로 파견돼 제주를 싹쓸이식으로 진압하는 ‘평정 작전’을 주도했다. 이듬해엔 주한미군사고문단 단장인 로버츠 준장에게 지휘권이 넘어가 군경토벌대의 ‘초토화 작전’을 격려했다는 기록도 있다. Q. 피해가 얼마나 컸나 A. 지난해 말 기준 정부가 인정한 민간인 피해자는 1만 4363명으로 집계됐다. 사망자는 1만 4256명이다. ‘제주4·3사건위원회 신고서’에 따르면 피해자 중 20세 이하 아동·청소년이 23%였다. 60세 이상 고령 피해자는 6%였다. 통계에 잡히지 않는 희생자까지 합하면 피해 규모는 3만~9만명일 것으로 예측된다. 이하영 기자 hiyoung@seoul.co.kr
  • ‘잃어버린 마을’ 찾은 여순사건 유족들

    ‘잃어버린 마을’ 찾은 여순사건 유족들

    제주4·3 71주년을 하루 앞둔 2일 오후 여순사건 민간인 희생자 유족회원들이 제주시 화북1동 곤을동 마을터를 둘러보고 있다. 곤을동 마을은 1949년 1월 불시에 들이닥친 토벌대에 의해 가옥이 전소되고 많은 주민이 희생된 곳이다. 살아남은 주민들은 이후 마을을 떠나 현재 사람이 살았던 흔적만 남아 있다. 제주 연합뉴스
  • [예고] ‘녹두꽃’ 1차 티저 공개, 조정석 강렬 눈빛 “미친 세상, 끝장낸다”

    [예고] ‘녹두꽃’ 1차 티저 공개, 조정석 강렬 눈빛 “미친 세상, 끝장낸다”

    ‘녹두꽃’ 티저가 공개돼 화제다. 오는 4월 26일 첫 방송되는 SBS 새 금토드라마 ‘녹두꽃 사람, 하늘이 되다’(극본 정현민/연출 신경수/제작 (주)씨제스엔터테인먼트/이하 ‘녹두꽃’)은 1894년 동학농민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농민군과 토벌대로 갈라져 싸워야 했던 이복형제의 파란만장한 휴먼스토리다. 동학농민혁명을 본격적으로 그린 드라마이자 민중역사극으로 기념비적 작품의 탄생을 예고하고 있다. ‘녹두꽃’은 ‘정도전’, ‘어셈블리’ 등 촌철살인의 완성도 높은 스토리를 자랑하는 정현민 작가와 ‘뿌리깊은 나무’, ‘육룡이 나르샤’ 등 선 굵은 연출을 자랑하는 신경수PD가 의기투합한 작품이다. 뿐만 아니라 조정석, 윤시윤, 한예리, 최무성, 박혁권, 김상호, 최원영 등 명품 배우들이 대거 출연을 확정하며 2019 상반기 대한민국을 흔들 최고 기대작으로 손꼽힌다. 이런 가운데 29일 SBS 금토드라마 ‘열혈사제’ 방송 직후 ‘녹두꽃’ 첫 번째 티저 영상이 기습 공개됐다. ‘녹두꽃’ 1차티저는 대중의 기대를 충족시키고도 남을 정도로 막강한 임팩트를 선사했다. ‘녹두꽃’ 1차티저는 이글거리는 횃불을 바라보는 조정석(백이강 역)의 눈동자로 시작된다. 이와 함께 “세상을 구제하고 백성을 편안케 할 것이다”, “보시오, 새 세상이오”라는 누군가의 우렁차고 처절한 외침이 들려온다. 이어 화면 속 민중이 든 불타오르는 횃불이 모여 바다가 되고, 민중이 쥔 죽창은 모여 산을 이룬다. 125년 전 이 땅을 뒤흔들었던 민중의 열망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이렇게 도입부에서 민중의 강렬한 열망을 보여준 ‘녹두꽃’ 1차티저는 곧바로 주인공 조정석의 치열한 삶에 집중한다. 목이 묶인 채 공중에 끌려 올려진 채 버둥거리던 조정석이 어느덧 하얀 옷을 입은 채 결의에 찬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한다. 여기에 맞춰 등장하는 “미친 세상. 이제 끝장을 낸다”는 카피는 조정석의 의미심장 눈빛과 맞물려 보는 이의 심장에 강렬하게 꽂힌다. 20초 가량의 짧은 영상임에도 불구하고 ‘녹두꽃’ 1차티저는 민중역사극으로서 묵직한 울림과 메시지를 강렬하게 담아냈다. 125년 전 이 땅에도, 125년이 흐른 2019년 이 땅에도 여전한 민중의 에너지와 힘이 얼마나 막강한 것인지 보여준 것이다. 뿐만 아니라 조정석은 눈빛부터 몸 사리지 않는 열연까지, 그야말로 물오른 연기력과 존재감을 과시하며 ‘녹두꽃’에 대한 기대감을 높였다. 1차티저부터 이토록 강렬한 드라마 ‘녹두꽃’. 극본, 연출, 배우 모든 면에서 최고의 드라마를 예고한 ‘녹두꽃’의 첫 방송이 미치도록 기다려진다. 한편 SBS 새 금토드라마 ‘녹두꽃-사람, 하늘이 되다’는 1894년 이 땅을 뒤흔들었던 ‘동학농민혁명’을 본격적으로 그린 드라마이자 민중역사극으로 오는 2019년 4월 26일 금요일 첫 방송된다. 임효진 기자 3a5a7a6a@seoul.co.kr
  • 국방부 “천안함 폭침 명백한 북한 도발···북측 조치 있어야”

    국방부 “천안함 폭침 명백한 북한 도발···북측 조치 있어야”

    서해수호의 날을 하루 앞둔 21일 국방부가 연평도 포격 도발과 함께 천안함 폭침은 “명백한 북한의 도발”이라면서 북한이 책임 있는 조치를 해야 한다고 밝혔다. 최현수 국방부 대변인은 이날 정례브리핑에서 “천안함 폭침, 연평도 포격 도발에 희생된 전우들을 우리는 잊지 않고 있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어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에 대해 “북한이 책임 있는 조치를 해야 된다는 입장에는 변함이 없다”면서 “이와 같은 사안이 일어나지 않도록, 즉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위협하는 일이 두 번 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대비태세에 만전을 기하도록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앞서 정경두 국방부 장관은 전날 국회에서 열린 외교·통일·안보 분야 대정부질문에서 서해수호의 날이 왜 생겨난 것인지 설명해보라는 백승주 자유한국당 의원의 요구에 “불미스러운 남북 간 충돌, 천안함 이런 것들 포함, 다 합쳐서 추모하는 날”이라고 답했다. 그러자 자유한국당 의원들은 ‘불미스러운 충돌’이라는 표현을 문제 삼았다. 최 대변인은 정 장관의 발언이 “북한의 천안함 폭침, 연평도 포격 등과 같이 국민의 생명과 완전을 위협하는 일이 두 번 다시 발생해서는 안 된다는 취지의 발언이었다”면서 논란을 일축했다. 이어 “서해수호의 날은 서해에서 북한의 도발에 맞서 희생과 헌신으로 나라를 지킨 장병들을 기리고, 그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모든 국민들이 한마음으로 대한민국 수호와 한반도 평화번영을 다짐하는 날”이라고 밝혔다. 최 대변인은 또 ‘국방부 장관이 제주 4·3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과할 계획이 있는지’를 묻는 질문에 “장관의 사과 여부를 현재 검토 중”이라면서도 “아직 결정된 것은 없다”고 답했다. 제주 4·3은 1947년 3월 1일 미군정 경찰이 제주도민을 향해 발포한 사건을 시작으로, 좌익 진영 무장대가 1948년 4월 3일 일으킨 소요 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무장대와 군·경 토벌대 간 무력 충돌, 그리고 토벌대의 진압 과정에서 최대 약 3만명의 도민들이 학살당한 사건이다. 오세진 기자 5sjin@seoul.co.kr
  • [무죄받은 제주 4·3] “재판이 뭐야, 그냥 쏴죽일 땐데… 앞줄 15년, 뒷줄은 무기 이랬지”

    [무죄받은 제주 4·3] “재판이 뭐야, 그냥 쏴죽일 땐데… 앞줄 15년, 뒷줄은 무기 이랬지”

    제주 4·3사건은 한국 근대사의 ‘대학살극’이다. 2003년 발표된 ‘제주 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에 따른 공식 희생자(사망, 행방불명 등)만 1만 4000여명이다. 추정되는 희생자는 그 두 배가 넘는다. 세상이 이승을 떠난 수많은 넋을 기리는 동안, 억울하게 전과자가 돼 몸을 낮추고 살아야 했던 불법 군사재판의 피해자들은 71년을 더 살아왔다. 이름도 불리지 않고 형량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전국 각지 형무소에 흩어져 청춘을 허망하게 보내버린 18명의 피해자들이다. 육체에 남은 크고 작은 흉터만큼, 이들에게 남겨진 전과기록도 수십 년 동안 끈질기게 몸과 마음을 괴롭혔다. 서울신문은 구순이 다 돼서야 공권력이 찍은 낙인을 떨치게 된 이들의 한 맺힌 삶을 들었다. 인터뷰는 제주 4·3 생존 수형인 18명이 청구한 ‘불법 군사재판 재심’ 선고를 하루 앞둔 지난 16일 피해자들의 자택에서 진행됐다.●“그냥 살았는데 내란죄래… 따지지도 못했어” 4·3이 극으로 치닫던 1948년 10월. 군경 토벌대는 제주도 해안에서 5㎞ 이상 떨어진 중산간 지역에 사는 사람들을 폭도로 간주해 총살하기로 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토벌 작전으로 희생됐다. 미처 해안가로 이주하지 못해 사살된 주민들도 있었고, 뒤늦게 내려온 주민들도 ‘폭도들을 지원했던 것 아니냐’며 무차별적으로 끌려갔다.양근방(86) 할아버지도 군경 작전으로 부모님과 떨어지고 형제도 잃었다. 중산간 마을에 혼자 남아 총살될 위기에 처했던 양 할아버지는 겨울이 되자 산에서 버틸 수 없어 헌병대에 자수했다. 곧바로 군사재판에 넘겨져 징역 7년을 선고받았다. “어디 가는지도 모르고 배에 실려갔더니 인천형무소였어. 마당에 줄줄이 앉혀 놓더니 ‘이 열은 7년, 이 열은 15년, 이 열은 무기(징역)’ 이러더라고….” 6·25 전쟁이 발발해 인민군에 의해 풀려난 양 할아버지는 광주까지 갔다가 다시 붙잡혀 형이 추가됐다. “광주고법에서 재판을 받았는데 ‘넌 북한군이 풀어줬으니 도피자다’라면서 징역 10년을 더 때리더라고. 그땐 10년인 줄도 몰랐어. 최근에 광주형무소에 신원조회해서 알았지.”부원휴(90) 할아버지도 학교에 다니던 19세 때 집에 들이닥친 계엄군에게 체포돼 군사재판을 받았다. 지금도 봉투에 싸서 고이 간직하고 있는 ‘제주공립농업중학교 학생증’을 황급히 내밀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군 막사에 붙잡혀 갔는데 ‘너 삐라 같은 거 안 뿌렸냐. 산사람들한테 쌀 갖다주지 않았느냐’ 하더라고. ‘학생이어서 그럴 시간도 없었다’고 하니까 봉으로 마구 팼어.” 전주형무소로 갔다가 인천형무소로 이감된 부 할아버지는 1948년 12월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이유는 ‘내란죄’라고 했다. 왜 내란죄냐고 미처 따지지도 못했다. “다른 사람들은 7년, 15년 선고받았는데 ‘난 살았다’고 생각했지. 그땐 재판 없이 가두고 쏴 죽이고 아주 무법천지였어.” 형무소 시설이 좁고 수형자 관리가 엉망이어서 부 할아버지가 있던 전주형무소에는 전염병이 돌았다. “세면장에 가면 피고름이 섞인 똥이랑 온갖 이물질이 쌓여 있었어. 제대로 먹질 못해서 이질(설사병)도 걸리고 많이 죽어나갔지.” 1949년 7월 열여섯 살이던 김순화(86) 할머니도 징역 1년을 선고받고 전주형무소에 갇혔다. 변론할 기회도 없었고, 몇 년 형인지도 몰랐다. 당시 상황을 묻는 질문에 김 할머니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나는 아직도 모르겠어, 이유가 뭔지. 재판도 안 받고 붙잡혀 있다가 배 타고 형무소로 갔어. 아무 잘못도 안 했는데…. (토벌대가) 부모님을 왜 죽였는지도 모르겠어.”●“전과자 낙인 찍히니 육지로 돌아다녔지” 형을 마치고 살아 나왔지만 흉터는 진하게 남았다. 김 할머니는 왼쪽 팔에 있는 콩알만 하고 동그란 초록색 문신을 보여 줬다. “형무소에 같이 수감됐던 분이랑 각자 왼팔에 바늘로 이렇게 새겼지. 나중에 만나서 알아보게.” 함께 문신을 새긴 김경인(87) 할머니와는 69년 뒤 같이 재심을 청구하는 동지로 다시 만났다. 작은 문신은 71년 세월을 버텼고, 김 할머니의 아픈 기억도 마찬가지였다. “빨리 다 끝났으면 좋겠어. 피곤해. 그냥 묻어버리고 싶어. 생각만 하면 너무너무 속상해.” 양 할아버지는 “지금까지도 가장 한이 맺힌 일이 있다”며 눈물을 펑펑 쏟았다. 1960년 10월 출소해 고향으로 돌아오자 불과 7개월 전에 부친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1960년 3월에 아버님이 형무소로 면회를 오셨어. 내가 나갈 시한이 정해지지 않았다고 하니까 아버님이 ‘너를 두고 어떻게 제주로 가느냐’ 하시고, 돌아서서 막 눈물을 흘려. (나도) 감옥에 돌아가서 한참 울었어.” 양 할아버지의 부친은 제주로 돌아온 뒤 일주일 만에 숨졌다. 마을 사람들 말로는 면회를 다녀온 뒤 식사를 하지 않고 줄곧 피를 쏟아내더니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고향에 돌아온 양 할아버지는 10년 만에 육지로 발걸음을 돌렸다. 4·3으로 10년 가까운 형을 산 양 할아버지는 경찰의 ‘요시찰 인물’이 돼 있었다. 일을 해 모은 돈으로 밭을 살 때도 조총련과 연통하는 것 아니냐는 의심을 받아야 했다. 결국 연고도 없는 경기도 파주로 거처를 옮겨 목장 일을 하며 20년을 살았다. 그렇다고 정부의 감시망에서 완전히 벗어난 건 아니었다. “전과자가 신고도 안 하고 제주도에서 없어지니까 ‘북한으로 가려는 거 아니냐’면서 제주도로 다시 잡아가더라고. 남의 목장에서 월급 받고 산다고 말해서 하룻밤 조사받고 풀려났어.” 양 할아버지가 다시 제주로 돌아온 건 1990년이었다. 전과기록 탓에 자꾸만 찾아와 감시하는 경찰들 때문에 부 할아버지는 본적도 바꿨다. “원래 본적이 화북리였는데 이도1동으로 옮겼어. 옮겨도 얼마간은 찾아오더라고.” 부 할아버지는 이후 19년간 공직에 몸을 담았지만 전과 기록 때문에 하마터면 운명이 달라질 뻔했다. “공무원도 전과가 있어서 못할 뻔했어. 아는 사람한테 부탁해서 된 거야. 제주 사람들은 4·3으로 억울하게 형무소 갔다 왔다는 걸 다 아니까.” ●“만시지탄… 그래도 새로 태어난 기분” 재심이 시작될 수 있었던 토대가 된 ‘수형인 명부’는 1999년 추미애 당시 새정치국민회의 의원이 처음 발견했다. 이후 진상조사위원회가 꾸려졌고, 진상보고서는 2003년 노무현 전 대통령이 4·3사건에 대해 직접 사과하는 계기가 됐다. 하지만 불법재판의 피해자들이 유죄의 낙인을 지우는 데는 그로부터 15년이 더 걸렸다. 재심 당사자 중 두 번째로 나이가 많은 정기성(97) 할아버지는 치매가 악화돼 재심 개시 결정이 내려진 후부터 공판에 출석하지 못했다. 형사재판은 피고인 출석이 원칙이지만 재판부는 정 할아버지의 상태를 고려해 진단서로 대신하면서 공판을 진행했다. 부 할아버지는 인터뷰 도중 거듭 “만시지탄”이라고 되뇌었다. 소감이 어떠냐는 질문에 양 할아버지는 연방 두 주먹을 불끈 쥐며 목소리를 높였다. “험하고 험한 가시밭길을 걸어 오늘에 왔어. 새로 태어나는 기분이야.” “이제 우는 것도 귀찮다”던 김 할머니도 기뻐했다. 김 할머니는 4·3이 세상에 알려지기 전까지 자식들에게까지 함구한 채 살았다고 한다. “내가 형무소에 갔다 왔다는 기록만 없어졌으면, 아이들에게도 그(형무소에 갔다 왔다는) 기억만 없어졌으면 좋겠어.” 글 사진 제주 유영재 기자 young@seoul.co.kr
  • 불법재판으로 옥살이한 제주 4·3 수형 생존자, 70년 만에 무죄 인정

    불법재판으로 옥살이한 제주 4·3 수형 생존자, 70년 만에 무죄 인정

    부당한 국가폭력으로 억울한 옥살이를 했던 제주 4·3 수형 생존자 18명이 70년 만에 사실상 무죄를 선고받았다. 제주지법 제2형사부(부장 제갈창)는 제주 4·3으로 군사재판에 넘겨져 징역을 지낸 제주 4·3 수형 생존자 18명이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불법 군사재판’ 재심 청구사건 선고공판에서 청구인에 대해 공소기각 판결을 내렸다. ‘공소기각’은 공소제기 절차가 법률에 위반해 무효일 경우 유·무죄 판결에 앞서 소송을 그대로 끝내는 결정 또는 판결을 말한다. 결국 이번 재심 사건에서 공소기각 판결이 나왔다는 것은, 제주 4·3 당시 이뤄진 군사재판이 불법적으로 이뤄져 재판 자체가 무효임을 뜻하는 것이다. 재판부는 “피고인들(제주 4·3 수형 생존자들)에 대한 군법회의는 법률이 정한 절차를 거치지 않은 것으로 판단된다”고 밝혔다. 이번 판결로 재심을 청구한 제주 4·3 수형 생존자들은 사실상 무죄를 인정받았다. 재판부는 “피고인들이 일관되게 ‘어떤 범죄로 재판을 받았는지 모른다’고 진술하고 있는 점, 당시 제주도에 소개령이 내려진 시기 등 제반사정을 종합할 때 단기간에 그 많은 사람들을 군법회의에 넘겨 예심조사나 기소장 전달 등 절차가 제대로 이뤄졌다고 추정하기 어렵다”면서 “피고인들에 대한 공소는 절차를 위반해 무효일 때에 해당한다고 본다”고 설명했다. 즉 제주 4·3 당시 공소제기 절차가 법률의 규정을 위반해 무효인 경우에 해당한다고 판단하고 공소기각 판결을 내린 것이다. 이번 판결은 제주 4·3 당시 계엄령 아래 이뤄진 군사재판이 불법이며, 그로 인해 감옥에 갇힌 수형인들이 무죄임을 인정한 최초의 사법적 판단이다. 앞서 검찰도 지난달 17일 열린 결심공판에서 청구인들에 대한 공소사실이 특정되지 않았다며 ‘공소기각 판결’을 선고할 것을 재판부에 요청했다. ‘제주 4·3’은 1947년 3월 1일 미군정 경찰이 제주도민을 향해 발포한 사건을 시작으로 좌익 진영의 무장대가 1948년 4월 3일 일으킨 소요 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무장대와 군·경 토벌대 간 무력 충돌, 그리고 군·경이 토벌대를 무력 진압하는 과정에서 최대 약 3만명의 도민들이 학살당한 사건을 가리킨다. 이 중 제주 4·3 수형인은 당시 불법 군사재판으로 영문도 모른 채 서대문형무소와 대구·전주·인천형무소 등 전국 각지로 끌려가 수감된 사람들을 말한다. 당시 상황을 기록한 수형인 명부에는 2530명의 명단이 올라 있으며, 상당수가 행방불명되거나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재심을 청구한 수형 생존자 18명은 1948∼1949년 내란죄 등 누명을 쓰고 징역 1년에서 최대 20년 형을 선고받아 복역했다. 이들 외에도 10여명의 수형 생존자가 더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오세진 기자 5sjin@seoul.co.kr
  • 디지털 복원한 임권택 감독 ‘짝코’, 베를린영화제 클래식 부문 초청

    디지털 복원한 임권택 감독 ‘짝코’, 베를린영화제 클래식 부문 초청

    한국영상자료원이 디지털 복원한 임권택 감독의 ‘짝코’(1980)가 2월 7일 개막하는 제69회 베를린국제영화제 클래식 부문에 공식 초청됐다. 15일 영상자료원에 따르면 ‘짝코’가 초청된 클래식 부문은 최근 디지털 복원된 세계 유수의 고전 영화를 상영하는 섹션으로 덴마크 칼 테오도르 드레이어 감독의 ‘오데트’(1955), 헝가리 마르타 메자로스 감독의 ‘양자’(1975) 등 6편이 상영된다. ‘짝코’는 한국전쟁에서 빨치산과 토벌대장으로 만난 백공산(김희라)과 송기열(최윤석), 두 인물의 30년에 걸친 악연을 추적하면서 한국의 어두운 근현대사를 날카로운 시선으로 포착한 영화다. 50여년에 걸쳐 102편의 장편 극영화를 연출한 임권택 감독 작품 가운데 대표적인 분단 영화이자 리얼리즘 영화로 꼽힌다. ‘짝코’ 복원본은 영상자료원이 1990년에 수집한 35㎜ 오리지널 네거티브 필름을 2K 화질로 디지털 복원했다. 영상자료원은 지난해 7월 복원을 마치고 블루레이로 출시했다. 베를린영화제 상영본은 블루레이 영상의 색을 추가로 보정하고 영문 자막을 넣은 버전으로, 이 영화제를 통해 처음 공개된다. 조희선 기자 hsncho@seoul.co.kr
  • “풀 한 포기에도 4·3은 있었다”

    “풀 한 포기에도 4·3은 있었다”

    세 번째 시집 ‘난 아무 곳에도 가지 않아요’30년 터전 제주 재발견… 일상 시로 노래“슬픈 봄이지만 그래도 새 봄이 오면…”“뚱뚱한 시인은 첨 봐요.” 술 한 잔을 기울인 감독의 첫 마디는 그것이었다. 자고로 시인이란 김수영처럼 마르거나 기형도처럼 날카로운 느낌이 아니었던가. 시인은 가방에서 자기 시집을 꺼내들었다. “게임 좋아하고 식탐 있고, 한 달에 30만원 버는데 시는 한없이 서정적이고…. 캐릭터가 재밌다면서 일주일 만에 시나리오 초고를 써왔더라고요.” 지난해 9월 개봉해 1만 관객을 동원한 김양희 감독의 영화 ‘시인의 사랑’은 이렇게 탄생했다. 김 감독의 말을 빌리자면 ‘뚱뚱한 시인’ 현택훈(44)씨가 세 번째 시집 ‘난 아무 곳에도 가지 않아요’(걷는사람)를 냈다. 전작 ‘남방큰돌고래’(2013)에 이어 또 제주도 얘기다. 시인은 늦깎이로 대학에 들어갔던 20대 중반 이후 십여년을 제외하곤 나고 자란 섬 제주를 떠나지 않았다. “제주 바다와 한라산이 저한테 ‘난 아무 곳에도 가지 않아요’라고 말하는 것 같아요. 사람들은 길어야 백년 살다 가는데, 저 산이나 바다는 아무 데도 가지 않잖아요. 계속 계속 그 자리를 지키면서 우리에게 보여주고….” 17일 그날도 제주에 있어 전화로 만난 시인이 하는 말이다. 천혜의 관광지 제주에서, 그는 시 쓰는 사람이기 이전에 생활인이다. 그의 시는 유명 관광지 대신, 소소하고 사소한 제주의 일상을 환기시킨다. 그의 눈에 제주는 ‘송사리 같은 아이들/슬리퍼 신고 내달리다/한 짝이 벗겨져도 좋은 길’(시 ‘솜반천길’)이 있으며, ‘제대하고 고향에 와서 백수일 때 다니던 회사 거래처 공업사에 나를 취직시켜주며 집에만 있지 말고 일하면서 시 쓰라’(시 ‘성환星渙’)던 친구가 묻힌 곳이다. “잘 알던 감귤 창고도 막상 가보면 낯설 때가 많더라고요. ‘내가 알고 있는 제주도가 다가 아니구나’ 했어요. 숨어 있는 찻집이라든지 극장 있던 자리 같은 소소한 것들이 일종의 사물화가 된 거 같아요. 풍경이 아니고 하나의 도구처럼.” 시집을 구상할 당시에는 ‘4·3 사건’으로 전부를 채우고 싶은 바람이 있었단다. 2013년 시 ‘곤을동’으로 제1회 제주4·3평화문학상을 수상한 것도 그런 책임감에 한몫 했다. 막상 해를 거듭하고, 시집을 묶을 때가 돼서 보니 겉으로 드러나게 ‘4·3’인 시는 많지 않았다. 그러나 제주에서 나무 하나, 풀 한 포기 ‘4·3’과 무관한 게 없다는 게 시인의 설명이다. 낭만적인 프러포즈에나 어울릴 법한 시 ‘조수리의 봄’도 그렇다. ‘날 따뜻해지면 우리 결혼하자/너의 일기장을 훔쳐 읽을 거야/내가 몰랐던 시절의 너를 다 알아낼 거야’ 조수리 하동은 4·3 당시 40여가구가 모여 살다 1948년 12월 토벌대의 방화로 ‘잃어버린 마을’이 됐다. “죽음으로 인해 알지 못하는 이와의 영혼 결혼식 같은 느낌을 바탕으로 했어요. 그것을 슬프게만 그리지 않고 희망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슬픈 봄이지만 그래도 새 봄이 오면….” 다시 만난 고향에서 국수공장에도 다니고, 영화에서처럼 초등학교의 방과후 교사도 하던 시인. 지금은 낮에는 도서관 사서로, 저녁에는 서점 주인장으로 지낸다. 그는 지난해 4월 제주시 아라동에서 시 전문 서점인 ‘시옷서점’을 열었다. “서울에 가보니 시 전문 서점은 있는데 보통 유명한 시인들 책 위주더라고요. 시옷서점에서는 유명 시인 아니어도, 무명이어도 괜찮아요.” 화장실 포함해 10평 정도 되는 공간에 시집 500여권을 보유하고 있다. 동네 시인들의 사랑방 역할도 한다. 아무 데도 안 가는 제주처럼 시인도 정말 아무 곳에도 가지 않는 걸까. 물었더니 의외의 말이 돌아왔다. “저는 시간을 다시 돌린다면, 서울에서 살고 싶은 생각도 많아요. 서울에 잠깐 갔을 때 제일 좋았던 게 ‘익명성’이었어요. 제주도에서는 큰 길가에만 잠깐 서 있어도 아는 사람이 몇 명 지나가거든요. 서울에서는 모든 게 다 낯설고, 다 모르는 사람이고 해서, 그 느낌이 좋았어요. 낯설고 외로워질 때 시가 잘 나와서요.” ‘30년 터전’이 낯설어 시로 노래한 그가 언제 다른 낯선 곳을 찾아 떠나게 될지 궁금해졌다. 이슬기 기자 seulgi@seoul.co.kr
  • [곽병찬의 역사 앞에서 묻다] 전쟁엔 무능·권력엔 교활…유재흥·김종원 등 ‘똥별 뿌리’ 출세가도

    [곽병찬의 역사 앞에서 묻다] 전쟁엔 무능·권력엔 교활…유재흥·김종원 등 ‘똥별 뿌리’ 출세가도

    1차 세계대전 때 프랑스 전시내각을 이끈 조르주 클레망소는 말했다. “전쟁은 군인들에게 맡겨 놓기엔 너무나 중요한 문제다.” 전쟁에는 무능하고 권력에는 교활한 지휘관들에 대해 클레망소가 진저리치며 한 말이었다. 한국의 장군들에게도 흔히 적용되는 경구다. 조갑제씨가 쓴 전기 ‘박정희’에 나오는 이야기다. 여순사건 때 반란군으로 체포되자 남로당원이라며 200여명의 명단을 건네 처형을 면한 뒤 육군본부 정보국에 근무하던 박정희가 1951년 4월 중공군의 공세에 직면한 육군 9사단 참모장으로 있을 때의 일화다.9사단은 3군단(사령관 유재흥 중장)에 배속돼 3사단과 함께 강원 인제군 현리 일대를 관할하고 있었다. 중공군은 서울 점령을 위한 5차 공세(춘계공세)에 실패한 후 중동부 전선으로 병력을 이동시켰다. 현리에서 북쪽으로 12㎞ 떨어진 소양강 건너엔 대규모의 중공군이 집결해 있었다. 4월 27일 9사단 신임 사단장이 부임했다. 일본군 소위 출신으로 불과 5년 만에 장군이 된 최석이었다. 최석은 부임하자마자 심지어 ‘뽀마드’까지 상납을 요구하며 참모들을 들들 볶았다. 참모부는 사단장파와 참모장파로 나뉘어 암투했다. 다음은 정훈부장 이용상의 목격담. “당시 헌병대장 김시진은 최석의 ‘밥’이었다. 어느 날 최석의 입에서 ‘살아 있는 싱싱한 것…’이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김시진은 그제야 무릎을 치며 강릉으로 차를 몰아 싱싱한 생선회 두어 접시와 초장을 푸짐하게 장만해 사단장 막사로 들어갔다. 잠시 후 헌병대장이 얼굴에 초장을 뒤집어쓰고 나왔다. ‘야, 이 새끼야, 내가 살아 있는 생선 먹고 싶다고 했지, 죽은 생선 먹고 싶다고 했나. 눈치도 없는 놈이 헌병 한다고….’ 군대 안에선 유명한 ‘생선 사건’이다.” 며칠 뒤 박정희는 몸이 아프다는 이유로 출근하지 않더니 사단 의무부장으로부터 진단서를 끊어와 대구 집으로 정양을 가겠다고 우겨 9사단을 떠났다. 일촉즉발의 전투부대가 아니라 개그무대의 봉숭아학당이었다. 그로부터 10여일 뒤인 5월 16일 오후 4시 중공군의 총공세가 시작됐다. 오후 5시 30분 소양강을 도하한 중공군 선발대가 오마치(오미재)에 도착하고 대대 병력이 주변을 장악한 것은 17일 새벽 5시였다. 오마치는 상남리, 방내리, 율전, 창촌, 하진부로 이어지는 7군단의 유일한 보급로이자 유사시 퇴각로였다. 군단장 유재흥의 주재로 이날 오후에야 열린 작전회의는 간단히 끝났다. 하진부로 ‘퇴각’. 유재흥은 정작 중요한 오마치 탈환 및 철수 작전은 사단장들에게 맡긴 채 급히 경비행기를 타고 하진부로 ‘탈출’했다. 3군단은 일대 혼란에 빠졌다. 최석은 오마치 탈환을 포기했다. 모든 중화기와 운송장비 등을 파괴하고 방태산 너머로 퇴각했다. 부득이 3사단도 그 뒤를 따랐다. 다음은 9사단 군수참모 김재춘이 회고한 ‘7군단의 패주 장면’. “최석은 아예 제복도 벗어버리고 앞장서 튀었다. 주변에서 총소리만 나면 꽁지 빠진 닭처럼 혼비백산했다.” 장교들도 계급장을 떼거나 겉옷을 벗어버린 채 도망쳤고 사병들은 공용화기는 물론 개인화기, 무전기까지 버렸다. 19일까지 방태산을 넘어 창촌 광원리 을수재를 거쳐 집결지인 하진부에 도착한 병력은 3사단 34%, 9사단 40%에 불과했다. 밴 플리트 미 8군사령관은 25일 7군단을 해체했다. 유재흥에게는 ‘다른 보직을 찾으라’며 전선에서 내쫓았다.해체된 유재흥의 부대는 3군단만이 아니었다. 개전 초 유재흥의 7사단은 덕정, 의정부, 창동 등 서울로 이어지는 축선을 책임지고 있었지만 사흘 만에 북한군에 내주고 궤멸했다. 이승만은 그런 유재흥을 2군단장으로 영전시켰다. 미8군에 배속되어 북진했던 2군단은 미군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무작정 내달려 2연대와 7연대 일부 병력이 압록강변의 벽동, 초산까지 진출했다. 당시 선봉 2연대 연대장은 일본군 지원병 출신으로 제주 4·3사건의 민간인 학살자로 유명한 함병선 준장이었다. 2군단의 허장성세는 딱 거기까지였다. 이미 덕천 영원의 산악지역에 매복해 있던 중공군의 공격을 받아 2연대를 시작으로 7연대, 6사단, 8사단이 차례로 무너졌다. 7군단 전체 병력의 60%가 사망, 실종, 포로가 되었다. 연대장 3명이 생포되고 1명이 전사했다. 군단은 해체됐다. 하지만 유재흥은 육군참모차장 등을 거쳐 1957년엔 합참의장이 됐다. 그의 군 생활은 4·19혁명과 함께 끝나지만, 5·16쿠데타와 함께 그의 인생 2막은 화려하게 펼쳐졌다. 태국·스웨덴·이탈리아 대사, 대통령 특별보좌관을 거쳐 국방부 장관이 되었다. 만주군관학교 예과를 이수하고 일본육군사관학교로 편입한 박정희는 일본육사 3년 선배인 유재흥을 끔찍하게 챙겼다. 이승만은 광복군은 배제하고 일본군 출신을 중용했다. 재임 중 육군참모총장은 모두 일본군 출신이고 백선엽(일제 만주군관학교)과 송요찬(일본군 지원병)을 제외하면 모두 일본 육사 출신이었다. 그러나 역시 모두 비전투병과여서 전장 경험이 없고 전투에는 무능했다. 대표적인 게 참모총장 채병덕이었다. 도발 가능성을 번번이 묵살했던 채병덕은 남침 당일, 새벽 2시까지 술에 절어 있었다. 미국 관리들이 이승만에게 “왜 저렇게 뚱뚱하고 둔한 장군을 총장에 임명했소”라고 물으면 이승만은 “나의 채 장군은 날씬한 장군이 가지지 못한 기민함이 있다오”라고 대답했다. 채병덕은 일본 육사 27기로 일본군 출신 최고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경찰 인사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임명한 치안국장(지금의 경찰청장) 15명은 모두 일제의 검사, 경찰 간부, 일본군 출신이었다. 홍순봉과 문봉제는 간도특설대 출신이고 김종원(오장), 이성우(대위)는 헌병 출신이었다. 1960년 3·15 마산의거 때 ‘배후는 공산당’이라고 발표했던 치안국장 이강학은 일본군 소위 출신이다. 그중 단연 돋보이는 인물이 김종원이었다. 일본군 자원입대자로, 해방 후 조선경비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여순사건 때부터 잔혹한 민간인 도살자로 악명을 떨쳤다. 빨치산 토벌대였던 23연대장 시절 그의 부대가 지나간 자리엔 빨치산이 아니라 민간인의 주검이 널려 있었다. 그런 김종원을 이승만은 총애했고 김종원은 충성을 다했다. 거창양민학살사건 때 그는 예하 부대를 공비로 위장시켜 국회의 합동조사단을 습격하도록 했다. 그가 군법회의에서 3년형을 선고받자 이승만은 특사로 3개월여 만에 석방했다. 이후 경찰로 옮긴 김종원은 전북, 경남, 경북, 전남 경찰국장을 거쳐 1956년 정부통령선거에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치안국장이 되어 ‘장면 부통령 저격사건’을 일으켜 이승만의 은혜에 보답했다. 이승만은 김종원을 이렇게 평가했다. “김종원은 애국 충정이 대단한 사람으로서 충무공 이순신과 견줄 만하다.” 육사 8기생들의 평가도 있다. “학살에는 귀신, 전투에는 등신!”(‘노병들의 증언’ 중에서) 미 군사고문단 보고서는 좀더 구체적이다. “부하에게는 가혹했고 전투에는 비겁했다. 전술적 두뇌가 없었고 부하들로부터 원성이 자자했다.” 전투에선 무능하고 권력에는 교활하던 ‘똥별’들, 그 연면한 전통은 지금도 군사주권 환수엔 반대하며 자주국방은 외면하고, 골방에서 댓글 공작이나 지휘하고, 내란 수준의 계엄령이나 모의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발본해야겠지만 이들은 수구언론, 수구정치권과 함께 여전히 우리 사회의 주류를 이룬다. 날은 어두워지고, 갈 길은 멀다. 논설고문
  • [손성진의 우리가 잘 모르는 독립운동가] 만주로 러시아로 쫓겨난 ‘독립운동 일가’ 후손들은 대한민국 국적 회복 퇴짜 맞아

    [손성진의 우리가 잘 모르는 독립운동가] 만주로 러시아로 쫓겨난 ‘독립운동 일가’ 후손들은 대한민국 국적 회복 퇴짜 맞아

    왕산(旺山) 허위 일가는 선생의 유지를 받들어 만주와 국내에서 독립운동에 몸을 던졌다. 일부는 귀국하기도 했지만 많은 이들이 일제에 쫓겨 이역만리를 전전하다 그곳에 뼈를 묻었다. 후손들은 중국과 러시아,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우크라이나, 북한 등에 뿔뿔이 흩어져 살고 있다.맏형 방산(舫山) 허훈(1836~1907)은 전 재산인 논 3000마지기를 동생들의 의병투쟁과 독립운동을 위해 내놓았다. 왕산은 4남4녀를 두었다. 1913년 선생의 바로 위 형인 성산(性山) 허겸(1851~1940)의 인솔로 허위 일가는 모두 만주 서간도로 떠났다. 왕산 선생의 사촌인 범산(凡山) 허형, 시산(是山) 허필 일가도 1915년 만주로 떠나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허겸은 의병운동을 하다 1912년 만주로 들어가 중어(中語)학원을 세우고 남만주 농민 자치기관인 부민단 단장을 지냈다. 71세의 고령이던 1922년 부하 30여명과 국내에 잠입해 군자금을 모집하다 동대문경찰서에 검거되어 옥고를 치렀다. ●허위 장손녀 국적 회복에 5년 걸려 장자 허학(1887~1940)은 만주에서 동화학교와 동흥학교를 세워 후진 양성에 힘썼다. 1914년 독립의군부 사건의 주모자로 동지 54명과 함께 붙잡혀 옥고를 치렀다. 허학은 아우 허영, 허준, 허국과 함께 일제의 요시찰 인물로 수배를 받았다. 그는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를 당한 뒤 일본인 밀정에게 체포돼 카자흐스탄에서 사망했다고 한다. 허위의 장손녀들인 허학의 두 딸 중 허로자가 2011년 어렵사리 국적을 회복해 현재 서울에서 살고 있다. 정부는 문서상의 미비점 등을 이유로 번번이 국적회복 신청에 퇴짜를 놓았다.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할아버지 나라의 국적을 찾는 데 무려 5년이나 걸렸다. 허위의 둘째아들 허영(1890~?)의 아들이자 허위의 장손인 허경성씨가 대구에서 살고 있다. 허위의 셋째아들 허준(1895~1956)도 중국 동북지방에서 항일운동에 앞장서다 본인과 장남 광배는 북한에서 사망했으며 1남3녀가 북한에 있다. 허준의 둘째아들인 웅배는 우즈베키스탄에서 ‘고려일보’ 발행인과 모스크바대 교수를 지냈다. 한국과 러시아의 국교 수립에 큰 역할을 했다. 허준의 셋째아들 환배는 우크라이나에 살고 있고 한국에 다녀갔다. 허위의 넷째아들 허국(1899~1971)도 맏형 허학과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를 당했다. 5남4녀를 두었고 두 아들 허 게오르기와 허 블라디슬라브는 2006년 조국으로 특별귀화했다. 그러나 블라디슬라브는 2년 정도 살다 다시 키르기스스탄으로 돌아갔다. ●사촌 형의 외손자는 저항시인 이육사 허위의 사촌 형 범산 허형(1843~1922)은 을사늑약 이후 1906년 예순을 넘긴 나이에 오적암살 사건에 연루돼 체포됐다. 허형에게는 3남1녀가 있었다. 허위가 순국하자 허형은 둘째아들 허발과 가솔을 이끌고 만주로 향했다. 허발(1872~1955)은 3·1운동 때 남만주 대표로 국내로 잠입해 1년간 활동했다. 1933년 국내로 들어와 활동하다 체포되기도 했다. 허형의 셋째아들 허규(1884~1957)는 1928년 군자금 모금과 동지 규합을 위해 국내에 잠입했다가 체포돼 5년의 수형생활을 했다. 광복 후 미군정 입법의원을 지냈다. 허형의 외동딸 허길(1876~1942)은 안동 진성 이씨 가문에 출가해 아들 여섯을 낳았다. 둘째아들이 옥사한 저항시인 이육사(본명 이원록)다. 맏형 이원기는 의열단 등 만주 독립운동단체들의 국내 활동을 후원했다. 비밀결사 암살단을 조직하기도 했고 1927년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관여한 혐의로 동생 육사와 원일, 원조와 함께 체포돼 옥고를 치렀다. 범산 허형의 동생 시산 허필(1855~1932)은 한학과 의학에 조예가 있어 만주에서 한약방을 열어 일가를 부양하고 독립운동을 도왔다. 둘째아들 허형식(1909~1942)은 독립운동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1936년 동북항일연군 제3군 제1사 정치부 주임이 되어 일본군과 격전을 벌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 1937년 4월에는 동북항일연군 제3로군 총참모장에 임명되어 1941년까지 제3로군을 지휘하며 독립투쟁을 벌였다. 1942년 8월 만주국 토벌대에 포위되어 장렬하게 전사했다. 논설고문 sonsj@seoul.co.kr
  • [과거사 해결 ‘한 걸음’] 4·3 희생자 유해발굴 8년 만에 재개

    “억울하게 숨진 마지막 한 분의 유해까지 찾아 70년 한을 풀어 줘야 합니다.” 제주4·3 70주년을 계기로 8년 만에 희생자 유해발굴 작업이 오는 10일 본격 재개된다. 양조훈 4·3평화재단 이사장은 4일 “이번 발굴엔 새로운 첨단 장비를 투입할 것”이라면서 “행방불명 유해를 유가족 품으로 돌려드리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발굴은 대표적 암매장 터인 제주국제공항 동쪽 뫼동산, 궤동산, 남북 활주로 서북측, 화물청사 인근 등에서 11월 말까지 실시된다. 이곳에서는 1948년 12월 말부터 이듬해 2월까지 경찰서에 수감돼 있던 제주시 화북동 등 지역 주민 76명이 토벌대에 의해 학살됐다. 같은 해 10월에는 군법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사형수 249명이 총살됐고, 6·25전쟁 직후에도 제주시와 서귀포 지역 예비검속자들에 대한 집단학살이 이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2007년 8월부터 2009년 6월까지 두 차례에 걸쳐 진행된 제주공항 내 1차 유해발굴에서 온전한 유해 54구를 비롯해 일부 유골 1000여점, 유류품 659점이 수습됐다. 2차 발굴에선 한 구덩이에서 완전 유해 259구를 비롯해 유류품 1311점이 나왔다. 양 이사장은 “노무현 정부 때 유해 발굴작업을 시작했지만 이명박·박근혜 정부 땐 국비지원을 끊었다”며 “문재인 정부의 국비지원 등으로 재개돼 다행으로 여겨진다”고 말했다. 이번 작업엔 고주파 전자기파를 방사, 되돌아오는 신호를 분석해 지하 구조를 규명하는 탐사방식(GPR)을 적용한다. 양 이사장은 “특별법 개정안 통과를 위해 정부와 정치권에 관심과 지원을 촉구한다”고 말했다. 지난해 12월 오영훈(더불어민주당 제주시 을) 의원이 대표발의한 개정안엔 희생자 보상금 지급, 트라우마 치유 센터 설치 등 내용을 담았다. 제주 황경근 기자 kkhwang@seoul.co.kr
  • [고전의 향연-옛 선비들의 블로그] 천재적 필력에도… 당나라·신라서 모두 소외당한 ‘한문학의 시조’

    [고전의 향연-옛 선비들의 블로그] 천재적 필력에도… 당나라·신라서 모두 소외당한 ‘한문학의 시조’

    “오직 세상의 사람들만이 모두 너를 죽여 시체를 늘어놓으려고 생각한 것이 아니요, 땅속의 귀신들까지도 이미 암암리에 너를 처단할 논의를 마쳤느니라.”(不唯天下之人, 皆思顯戮 ; 抑亦地中之鬼, 已議陰誅)이 살벌한 표현은 최치원(崔致遠·857∼?)의 문명(文名)을 천하에 떨치게 한 ‘격황소서’(檄黃巢書)의 한 구절이다. 흔히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으로 불린다. 그 논조가 얼마나 준엄했는지 황소는 격문을 읽다 이 구절에 이르자 간담이 서늘해져서 저도 모르게 침상에서 떨어졌다는 전설이 전한다. 이 글이 실린 출전이 바로 최치원의 문집인 ‘계원필경집’(桂苑筆耕集)이다. 중국 당나라 말에 황소라는 장수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최치원은 토벌대장인 고변의 휘하에서 비서 역할을 하는 종사관이었다. 계원필경은 이 기간에 최치원이 지은 수많은 글을 엄선해 편찬한 문집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문집 계원필경은 우리나라 천여 년 문학사에서 현재 전하는 것으로는 가장 오래된 문집이다. 그런 까닭에 최치원은 흔히 한문학의 비조로 불린다. 이에 대해 홍만종은 “최치원은 문체를 크게 구비하여 우리나라 문학의 시조가 되었다”라고 했다. 신위는 “공이 높은 시조로서 처음으로 개창하였다”라고 말했다. 계원필경의 서문을 쓴 홍석주나 서유구 등도 비슷한 평을 남기고 있다. 그러나 최치원의 문학에 대한 평가가 찬양 일변도인 것은 아니다. 이규보는 “최치원은 미개지를 개척한 큰 공이 있으니 우리나라 사람들이 모두 그를 종주로 여긴다”라고 칭찬했다. 그는 격황소서에 대해서도 “귀신을 울리고 바람을 놀라게 하는 솜씨”라고 극찬하면서도 “그러나 그의 시가 대단히 높지는 않으니 아마도 그가 중국에 들어간 때가 만당 이후에 해당하기 때문이 아닐까”라고 했다. 성현도 “지금 그가 지은 것을 보자면 비록 시구에 능하기는 해도 뜻이 정밀하지 못하며, 비록 사륙문에 재주가 있으나 말이 정제되지 못하였다”고 지적했다. 이 밖에 서거정, 허균 등도 부정적인 견해를 보인 바 있다. 계원필경 산문은 대부분 ‘사륙변려문’(四六騈儷文) 위주로 돼 있다. 최치원이 모시던 상사인 고변의 ‘변’(騈)과 그가 쓴 글이 사륙 ‘변’(騈)려문으로 같은 한자를 쓰는 일은 한마디로 ‘기이한 인연’이다. 사륙변려문은 글자 수를 4·6자, 4·6자로 배열하거나 아니면 4·4자, 6·6자 등으로 배열하는 등 대구를 철저하게 지키는 정형성이 특징이다. 변려문은 전체를 대구로 구성하는 데다 특히 어려운 고사를 많이 사용해 글이 매우 까다로운 특징이 있다. 그만큼 번역하기가 어려우며 각주도 일반 산문보다 훨씬 많이 필요하다. 그래서 서거정 같은 대학자도 계원필경에 대해 “이해되지 못하는 곳이 많다”면서 “괴상하고 궁벽하여 족히 천하를 움직이기에 충분하지 않다”라고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는 오히려 그만큼 최치원의 학문 수준이 높았음을 방증한다.최치원이 일부 부정적인 평가를 받은 이면에는 당을 시대로 구분했을 때 가장 낮게 평가되는 만당(晩唐) 때에 해당한다는 사실과 후대에 진실성이 모자랐다고 비판받는 변려문에 치우쳤다는 점이 어느 정도 작용했다. 그러나 후대에도 변려문은 옥책문, 전문, 반교문 등 궁중 의례문에 꾸준히 사용됐다. 또 매우 중요한 실용문인 상량문도 반드시 변려문으로 지어져 그 역할이 지속됐다. 관점에 따라 평가를 달리하기는 하지만, 이규보와 성현의 견해를 잘 비교해 보면 알 수 있듯 그에 관한 평가가 반드시 객관적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계원필경은 최치원의 학문적 역량이나 당시의 시대상 등을 알려 주는 더없이 귀중한 문헌이다.#영원한 이방인, 전설을 넘어 신화가 되다 최치원은 12세에 당나라에 유학 가서 7년 만인 18세의 나이에 유학생을 상대로 한 과거인 빈공과에 합격하고 관직 생활에 들어섰다. 20세의 젊은 나이에 선주의 율수현위가 되어 하급 지방관을 지냈는데, 이때 지은 작품을 모아 ‘중산복궤집’(中山覆集)이라는 문집을 엮었다. 몇 년 뒤 23세 때 황소의 난이 일어나자 고변의 종사관이 돼 약 4년간 군영에서 수많은 문서를 도맡아 저술하였다. 특히 24세 때 서두에 소개한 ‘격황소서’로 온 세상에 이름을 떨쳤다. 28세에 귀국을 결심하고 당나라를 떠나 이듬해 3월 신라로 돌아왔는데, 그의 유학 과정을 단적으로 표현한 말이 유명하다. “무협의 겹겹 봉우리 나이에 베옷으로 중국에 들어갔다가, 은하계 여러 별자리의 나이에 비단옷으로 동국에 돌아오다.”(巫峽重峯之歲, 絲入中原; 銀河列宿之年, 錦還東國) 무협의 봉우리 12개는 유학 갈 때 나이를 나타내며, 하늘의 대표적인 별자리 28개는 중국을 떠날 때 나이를 나타내는 식으로 활용한 것이다. 비단옷으로 돌아왔다는 것은 출세하여 금의환향했다는 의미이지만, 신라에서의 삶은 기대에 충족되는 것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큰 포부를 펴보려고 의욕을 가졌으나 골품제 한계로 좌절을 겪었다. 몰락해 가는 신라 말 정세 탓에 자신의 역량을 발휘할 여건도 마땅치 않았다. 10여년 동안 중앙과 지방의 관직을 전전하다가 40여세 장년의 나이에 관직을 버리고 사방을 소요했다. 경주의 남산, 영주의 빙산, 합천 청량사와 해인사, 지리산 쌍계사, 합포의 월영대 등에 그의 발자취가 남아 있다.마침내 은거를 결심하고 해인사에 들어가 머물렀는데, 그 이후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 마지막 삶에 대해 여러 가지 이야기가 전해진다. 특히 가야산의 신선이 되었다는 설화가 널리 퍼져 마침내 신화가 되었다. 유학 생활한 당나라에서나 고국인 신라에서나 세상에서 소외된 이방인으로서 그의 내면 정서를 잘 드러내 주는 시는 가장 널리 알려진 ‘추야우중‘(秋夜雨中)이다. 秋風唯苦吟 갈바람 속 고심하며 시만 읊나니 世路少知音 이 세상에 진정한 벗 거의 없어라 窓外三更雨 창 밖에는 한밤중에 비 내리는데 燈前萬里心 등불 앞엔 만 리 먼 곳 그리는 마음 이 시에서 ‘만리심’(萬里心)을 신라에서 당나라를 향하는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지만, 그렇게 한정할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오히려 이역만리 당나라에 있을 때 고국을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분명한 근거가 없을 때에는 상식을 따르는 것이 순리이기 때문이다. 김영봉 한국고전번역원 번역위원 ●계원필경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문집… 中 회남시에서 지은 글 모음 최치원의 문집으로, 우리나라에 현전하는 가장 오래된 문집이라는 역사적 의의가 있다. 모두 20권 4책으로 편찬됐는데, 1∼16권은 회남 절도사인 고변의 막부에서 종사관으로서 고변을 대신해 지은 글이다. 따라서 글의 주인공은 최치원이 아니고 고변으로 돼 있다. 17권 이후가 자신에 대한 글이다. 대부분 산문이고 시는 17권에 30수, 20권에 27제(題) 30수가 실려 있다. 국역본 해제를 비롯해 여러 곳에서 그동안 책 이름 중 ‘계원’의 뜻을 ‘문장가들이 모인 곳’이라거나 ‘한림원’ 등으로 잘못 풀이하고 있기에 이 기회에 분명하게 바로잡는다. 계원은 사전적으로는 몇 가지 뜻이 있으나 계원필경의 ‘계원’은 최치원이 글을 지을 때 머물렀던 회남의 별칭이다. 즉 계원필경집은 ‘계원(회남)에서 문필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지은 글 모음’이라는 뜻이다. 지금도 중국 회남시에는 ‘계원촌’(桂苑村)이라는 지명으로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이는 또 다른 저술인 중산복궤집의 작명 원리와 똑같다. 여기에서도 ‘중산’은 글을 지은 곳의 지명을 가리킨다. 최치원의 다른 시문집으로 ‘고운선생문집’(孤雲先生文集·고운집)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동문선(東文選) 등 여러 문헌에 산재한 작품을 수집해 1926년에 간행한 것이어서 문헌적 가치는 높지 않다.
  • 원시림 62.7㎞…걸을수록 솟는 울창한 생명력

    원시림 62.7㎞…걸을수록 솟는 울창한 생명력

    한라산 중산간 6개 구간 중 5곳 연결 ‘동백길’ 제주역사 압축 탐방객 86.9% 찾은 ‘사려니숲길’ 인기치유의 숲 ‘차롱 도시락’ 상생 모델올레와 오름 등 국내 ‘걷는 여행’의 진원지인 제주에 한라산 중턱을 걸을 수 있는 ‘둘레길’이 조성됐다. 지리산에 이어 두 번째로 만들어진 ‘국가 숲길’이다. 마을과 마을을 잇는 지리산 둘레길과 달리 숲을 연결한 숲길이자 제주에 처음 만들어진 장거리 트레킹 길이다. 원시 자연의 한라산을 걸으며 자연의 경이로움과 환상적인 풍광, 제주의 역사를 느낄 수 있다. 한라산은 제주인에겐 삶의 터전이자 신비로움, 인고의 상징이라는 점에서 지역 탐방객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다. 큰 길에서 집 대문으로 이어지는 작은 길 ‘올레’가 촉발한 걷기 열풍이 한라산의 속살을 들여다볼 수 있는 둘레길로 이어지고 있다.●원시림을 잇다, 속살 드러낸 한라산 한라산 둘레길은 한라산 중산간 해발 600~800m 지대 국유림을 연결한 환상 숲길이다. 길을 새로 조성한 게 아니라 일제가 수탈과 전쟁 목적으로 한라산에 만든 머리띠 모양의 ‘병참로’(하치마키 도로)와 임도, 표고버섯 운송로 등을 이었다. 총 6개 구간 80㎞ 중 현재 5개(동백길·돌오름길·천아숲길·사려니숲길·수악길) 구간의 62.7㎞가 이어졌다. 제주시에 인접한 구간(17.3㎞)은 국립공원과 사유림 등을 포함하고 있어 현재 노선을 협의하고 있다. 이른 시일 내 전 구간 개통이 기대된다. 둘레길은 울창한 숲이 햇볕을 막아 시원한 그늘을 걷는 경험과 물이 흐르지 않는 제주의 건천을 만날 수 있다. 파란 이끼로 덮인 나무와 돌, 오랜 세월 자연이 가꾼 숲길은 6월의 강렬한 햇살마저 지면에 닿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동서남북으로 이어진 숲길의 식생과 생태·지질·경관 자원이 서로 달라 전 구간을 둘러보지 않고는 감히 평가할 수 없다. 더욱이 일제시대와 제주 4·3의 아픔, 제주민들의 문화·생활 등을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역사의 현장이다. 혼자 걷거나 지인(들)과 걷는 것도 좋지만 첫 산행이라면 해설사와 동행해 곳곳에 남겨진 문화 유산에 대해 설명을 듣기를 권한다.2011년 무오법정사~시오름 구간(9㎞)을 시작으로 2012년 첫 개통한 ‘동백길’은 둘레길의 시작점이자 제주 역사를 압축해 놓고 있다. 항일운동의 발상지인 법정사에서 돈내코 탐방로까지 13.5㎞에서는 4·3의 아픔을 보여 주는 주둔소와 생활 유적인 숯가마터, 병참로를 비롯해 국내 최대 규모인 20㎞에 이르는 동백나무 군락지, 편백나무 숲 등을 만날 수 있다. 동백길은 제주불교성지 순례길인 ‘정진의 길’과도 동행한다. 제주에서는 깊은 숲속이라도 머들(돌무더기)과 양하(荷), 대나무가 있으면 사람이 살았던 곳이다. 머들은 경계선, 양하는 식용, 대나무는 애기구덕(요람)을 만드는 재료로 사용됐다. 곳곳에 석축이 쌓인 공간이 있는데 4·3 당시 만들어진 토벌대 주둔지이자 피난처였던 주둔소다. 1948년 당시 한라산은 금족령이 내려져 출입이 금지됐고 해안에서 5㎞ 이상 들어간 중산간 지대를 통행하면 폭도로 간주되면서 인적이 끊겼다. 주둔소는 토벌대가 머물던 공간으로 주둔소 설치에 지역 주민이 동원됐다. 1954년 9월 21일 금족령은 해제됐지만 주민들은 더이상 산을 찾지 않았다. 화전 농업도 이 시기를 기점으로 사실상 도태됐다. 법정사 4.5㎞ 지점에서 병참로를 볼 수 있다. 눈으로는 구분이 안 되지만 바닥에 길을 만들기 위해 바위를 굴착했던 착암기 구멍(9개)을 통해 당시 상황을 추론할 수 있다. 한라산 둘레길 조성과 관리를 맡고 있는 한국등산·트레킹지원센터 제주지부 김서영 관리팀장은 8일 “둘레길은 산악인을 포함한 지역민들이 길을 찾아내고 잇는 과정을 거쳐 조성됐다”며 “역사적 의미를 알기에 탐방객의 60%가 제주도민이고 상대적으로 50~70대가 많다”고 소개했다. 둘레길 곳곳에는 숲길을 알리는 노란색 표지와 ‘다나 0488 8066’과 같은 국가지점번호와 전화번호가 적힌 안내판이 설치돼 있다. 눈이나 안개가 많은 구간에는 길을 따라 유도줄이 연결됐는데 편의시설이 없고 순수하고 울창한 숲길이다 보니 길을 이탈하는 탐방객을 고려한 안전 조치다. 지난해 74만 1213명이 둘레길을 찾았다. 이 중 86.9%(64만 4394명)는 사려니숲길 탐방객이다. 준비가 필요한 번거로움과 불편이 크지만 둘레길을 재방문하겠다는 비율이 43.5%나 됐다. 최근 둘레길이 ‘백패킹’을 비롯해 ‘트레킹 러닝’ 대회 장소로 부상하고 있다. 이용석 산림청 산림휴양등산과장은 “숲길은 한라산 정상에 집중된 탐방객 수요를 분산시키고 역사·생태·산림문화를 체험하는 학습의 장으로 역할한다”면서 “훼손과 개입을 최소화한다는 방침이기에 탐방객들은 불편을 감수해야 한다”고 말했다.●한라산 생태계의 보고 예약제 ‘한남연구시험림’ 서귀포시 남원 한남리 산 2-1에 위치한 한남연구시험림은 면적이 1203㏊에 이르는데 한라산 생태계의 ‘보고’다. 사려니숲길 중 상시 개방(10㎞) 구간과 달리 예약 탐방제(6.2㎞)로 운영된다. 개방 시기는 5월 18일부터 10월 31일까지다.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만 출입이 가능하고 월·화요일엔 문을 닫는다. 사려니오름 구간으로 사려니숲길과 다르다. 입구에 심어진 울창한 50~60년생 삼나무의 수려한 경관이 알려지면서 드라마와 영화, 광고 촬영지로 각광받고 있지만 숲길 위에는 국내 최대 규모의 삼나무 전시림(7㏊)이 숨겨져 있다. 1933년 조림한 삼나무 1850그루가 심어졌는데 나무 높이가 평균 28m, 직경이 63㎝에 이른다. 성인 3명이 손을 잡아야 연결할 수 있는 거목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이국적이고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주는 삼나무도 사실은 불행한 과거의 잔재다. 제주도에는 자생 삼나무가 없다. 일제가 산림을 수탈한 이후 빨리 자라는 삼나무를 일본에서 가져와 대량으로 심었다.시험림에선 붉가시나무와 황칠나무를 비롯해 고사리 등 난대상록활엽수와 서어나무·때죽나무 등 온대낙엽활엽수를 동시에 만날 수 있다. 붉가시나무는 상록성 도토리로 제주에서는 나무판 재료로 사용했고, 때죽나무는 밀원 식물(양봉)로 활용됐다. 나무 밑이나 습기가 많은 곳에서는 천남성을 볼 수 있다. 수려한 외형과 달리 뿌리가 ‘사약’ 재료로 썼던 치명적인 식물이다. 오랜 시간 잘 보호되고 인적이 드물기에 숲길을 걷다 보면 한라산 노루와 사육하다 방치돼 자연으로 흘러들어 간 엘크(사슴과) 등 야생 동물을 만난다. 최근 제주에서는 조릿대와 황칠나무가 요주의 식물이 되고 있다. 조릿대는 과거 식용이나 말 먹이로 사용해 개체수가 유지됐지만 수요가 줄면서 생태계 교란 식물로 푸대접을 받고 있다. 황칠나무는 검증되지 않은 효능이 알려지면서 수난을 겪고 있다. 국립산림과학원 난대·아열대산림연구소 현화자 박사는 “토종 식물인 조릿대가 광범위하게 확산되는데 조릿대 주변에는 다른 식물이 자라지 못한다”며 “개체수 조절을 위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고 전했다.●제주의 숲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차롱’의 맛 둘레길인 동백길과 연결되는 서귀포시 호근동 ‘치유의 숲’은 평일에도 관광객을 태운 버스와 자동차로 분주하다. 난대·온대·한대림이 분포하는 다양한 식생에서 경험하는 이색 산림 치유와 제주에서 유일하게 ‘차롱 도시락’을 맛볼 수 있어서다. 치유의 숲 방문객들은 사랑과 평온, 행복으로 대변된다. 시인이기도 한 최병암 산림청 산림복지국장은 2016년 6월 개장식 축시 ‘시오름 연가’에서 “소박한 차롱에 두어 개 담긴 보리 주먹밥이라도 그냥 좋소. 나 그대 옷자락 스치며 오고생이 숲에 나란히 앉으면 저 깊이 감추어 두었던 내 진심 그 맘 그대로…”라고 썼다. 치유의 숲은 주변 마을을 참여시켜 상생을 일궈낸 새로운 모델로 주목받는다. 산림 치유에 대한 높은 관심에도 접근성과 차별화 문제로 활성화에 어려움을 겪는 다른 지역과 달리 유료 프로그램임에도 산림 치유 지도사가 부족해 수요를 맞추지 못하고 있다. ‘차롱’은 대나무로 만들어 사용하던 바구니인데 제주에서 음식을 담기 위해 대나무로 만든 도시락이다. 왕대를 사용하는 담양과 달리 작은 대나무인 ‘이대’로 만드는 것이 특징이다. 인근 마을에 차롱 장인이 거주한다는 점을 활용한 아이디어로 도시락은 제주에서 생산한 로컬 푸드로 주민들이 만들어 제공한다. 유료 프로그램인 숲길 힐링과 산림치유 프로그램 참여자만 사전 예약으로 맛볼 수 있는데 1만 5000원이라는 적지 않은 금액에도 하루 평균 200~300개가 판매되고 있다. 숲길 힐링 프로그램에서도 마을 주민들이 해설사로 활동하고 있다. 제주의 역사와 옛 제주인들의 생활상을 잘 알고 있다는 점에서 시도했는데 자체 교육을 거쳐 15명이 선발됐다. 치유의 숲에는 12개의 숲길이 있는데 노고록(여유 있는), 가멍(가는 길) 오멍(오는 길), 오고생이(있는 그대로)와 같이 제주어로 작명하고 치유 공간을 분리해 탐방객들의 호응을 얻고 있다. 노고록 무장애숲길은 장애우와 노약자만 출입할 수 있도록 설계했다. 제주 박승기 기자 skpark@seoul.co.kr
  • 文대통령 “4·3은 역사적 사실”… 폄훼 용납 않겠다는 의지

    文대통령 “4·3은 역사적 사실”… 폄훼 용납 않겠다는 의지

    국가권력에 의한 양민학살 규정 “평화는 진실 위에서만 설 수 있어” 명예회복·유해발굴·배상 등 약속 보수·진보에 낡은 이념 탈피 촉구 “이젠 정의·공정으로 평가받아야”“이 땅에 봄은 있느냐? 여러분은 70년 동안 물었습니다.” “여러분, 제주에 봄이 오고 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의 제주 4·3 사건 제70주년 추념사는 ‘제주도의 봄’이 시작과 끝을 장식했다. 문 대통령은 3일 제주 4·3 평화공원에서 열린 추념식에서 4·3 사건의 ‘완전한 해결 의지’를 공식 천명하고 살아남고자 70년간 상처와 아픔을 묻고 살아온 제주 도민들에게 진정한 봄을 약속했다. 추념사를 관통한 핵심 메시지는 ‘진실’이다. 문 대통령은 “평화와 상생은 이념이 아닌 오직 진실 위에서만 바로 설 수 있다”고 강조했다. 4·3 사건을 단지 불행한 과거사로만 치부하지도 않았다. “4·3의 진실을 기억하고 드러내는 일이 민주주의와 평화, 인권의 길을 열어 가는 과정”이라고 했다. 4·3 사건의 명예회복 없인 미래도 없다는 의미다. 김대중 정부는 2000년 4·3 진상규명특별법을 제정해 진실 규명과 피해 보상의 길을 열었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2003년 10월 제주를 찾아 국정을 책임지는 대통령으로서 제주 도민들에게 4·3 사건을 공식 사과했다. 그러나 두 번의 보수 정부를 거치면서 정부 사과의 진정성은 후퇴했다. 문 대통령의 4·3 추념식 참석은 4·3 사건을 바로 세우고, 진상 규명과 명예회복에 대한 국가 책임을 명확히 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4·3 흔들기’를 더는 용납지 않겠다는 것이다. 문 대통령은 우선 4·3 사건의 성격을 ‘국가 권력에 의한 양민학살’로 규정했다. 추념사에 나타난 제주 4·3은 이렇다. 1947년부터 1954년까지 남로당 무장대와 토벌대 간 무력충돌과 유혈 진압으로 당시 제주 인구의 10분의1인 3만여명의 양민들이 희생당했다. 좌우 양쪽에 의해 무차별한 학살이 이뤄져 가해자가 어느 쪽인지도 명확지 않다. 역사적 평가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4·3은 아직 이름이 없다. 정부는 국가 폭력의 진상을 밝히고, 명예회복, 유해발굴 사업, 유족과 생존 희생자들의 상처 치유, 배상과 보상, 국가트라우마센터 건립도 약속했다. 보수 진영 일부는 4·3 사건을 ‘친북·좌파 세력의 무장폭동’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문 대통령은 70년 전 제주 도민의 삶과 죽음 갈랐던, 지금도 대한민국을 가르는 낡은 이념을 벗어 던지자고 했다. 문 대통령은 “좌와 우의 극렬한 대립이 참혹한 역사의 비극을 낳았지만, 4·3 희생자들과 제주 도민들은 이념이 만든 불신과 증오를 뛰어넘었다”고 했다. 구체적인 사례도 들었다. “고(故) 오창기님은 4·3 당시 군경에게 총상을 입었지만,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해병대 3기’로 자원 입대해 인천상륙작전에 참전했다, 아내와 부모, 장모와 처제를 모두 잃었던 고(故) 김태생님은 애국의 혈서를 쓰고 군대에 지원했다. 4·3에서 ‘빨갱이’로 몰렸던 청년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조국을 지켰다. 이념은 단지 학살을 정당화하는 명분에 불과했다.” 이념이 있던 곳에 자리할 새로운 시대적 가치로 ‘정의’와 ‘공정’을 제시했다. 문 대통령은 “이제 대한민국은 정의로운 보수와 정의로운 진보가 ‘정의’로 경쟁하는 나라가 되어야 한다. 공정한 보수와 공정한 진보가 ‘공정’으로 평가받는 시대여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정의롭지 않고 공정하지 않다면 보수든, 진보든, 어떤 깃발이든 국민을 위한 것이 될 수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문 대통령은 이 대목에 특히 공을 들인 것으로 전해졌다. 탈(脫)이념으로 적대적 그늘을 걷어 내고 화해와 상생, 평화와 인권이란 보편적 가치를 지향하는 나라로 발돋움하려면 제주 4·3 사건에 대한 깊은 성찰을 통해 새로운 역사의 출발점을 모색해야 한다는 의미를 담았다. 문 대통령은 추념식 직후 제주도 한 호텔에서 유족·희생자들과 오찬하면서 “앞으로는 누구도 4·3을 부정하거나 폄훼하거나 모욕하는 일이 없도록 4·3의 진실이 똑바로 서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며 진실규명을 강조했다. 또 “4·3의 완전한 해결을 위해 우리가 똑바로 가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가고 있다는 희망을 유족들과 희생자들이 가질 수 있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며 “문재인 정부가 책임 있게 해 나가겠다, 만약 우리 정부가 다 해내지 못한다면 다음 정부가 이어 갈 것”이라고 약속했다. 홍성수 제주 4·3실무위원회 부위원장은 “국회가 4·3특별법 개정안 처리에 더욱 힘을 실어 줄 것”을 간곡히 부탁했다. 이현정 기자 hjlee@seoul.co.kr 서유미 기자 seoym@seoul.co.kr
  • “두 번 다시 우리 같은 비극 없어야”···제주 4·3 피해자의 눈물

    “두 번 다시 우리 같은 비극 없어야”···제주 4·3 피해자의 눈물

    “군인도 민간인 죽이고, 경찰도 민간인 죽이고, 거기에 누구하고 누구하고 할 것 없이 그냥 다 잡아 죽여버리고···. 하다못해 집에 들어가서 가족들 있는데 다 죽이고, 불 붙여 버리고···.”‘제주 4·3 사건’(이하 제주 4·3)의 참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증언입니다. 올해로 제주 4·3 70주년을 맞아 특별전, 역사기행, 학술대회, 문화제 등 이 사건을 추념하는 다양한 행사들이 마련됐습니다. 또 2009년 이후로 중단됐던 희생자 유해 발굴 작업이 재개됐습니다. 제주 4·3은 비단 1948년 4월 3일에 제주에서 있었던 일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1947년 3월 1일 미국 군사정부(미군정) 경찰이 제주도민들을 향해 발포한 사건을 시작으로, 좌익 진영의 무장대가 1948년 4월 3일 일으킨 소요 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이어진 무장대와 군·경 토벌대 간 무력 충돌, 그리고 토벌대의 진압 과정에서 최대 약 3만명의 도민들이 희생된 사건입니다. 한국 현대사에서 6·25 전쟁 다음으로 인명 피해가 극심했던 사건이기도 합니다. 제주 4·3은 분단을 우려해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한 무장대의 봉기가 있기 전에, 광복 직후 미국과 소련의 한반도 통치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주 독립과 통일된 나라를 요구한 제주도민들의 열망이 스며 있습니다.김용선(73)씨의 아버지는 제주 4·3 이후 행방불명됐습니다. 지금의 제주 조천읍 조천리에 살던 할아버지가 지병으로 1948년 2월 21일 사망하자 부산에 살던 김씨 가족은 장례를 치르기 위해 제주도로 내려갔습니다. 하지만 당시 어수선한 분위기 때문에 뱃길이 막혀 부산으로 돌아갈 수 없었던 김씨 가족은 같은 해 4월 3일 이후 큰 시련을 겪습니다. 그 상처는 지금도 아물지 않았습니다. 김씨의 증언을 통해 제주 4·3 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제주 4·3이 생존 피해자들에게 어떤 상처를 남겼는지를 돌아보고 오랜 기간 우리 사회가 ‘덮어두었던’ 제주 4·3을 어떤 역사로 기억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져 보고자 합니다. 기획·제작 오세진 기자·이승아 PD촬영 곽재순·이승아 PD
  • 설민석, 제주 4.3 사건 증언 소개하다 눈물 “어떻게 잊을까”

    설민석, 제주 4.3 사건 증언 소개하다 눈물 “어떻게 잊을까”

    설민석이 3일 KBS1 특별방송을 통해 ‘제주 4.3 70주년 – 당신이 몰랐던 제주 이야기’ 특강을 맡아 진행하던 중 눈물을 흘렸다.제주 4·3 사건은 1947년 3월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해 1948년 4월3일 발생한 봉기로부터 1954년 9월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 충돌과 진압과정에서 민간인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다. 설민석은 이날 제주 4·3 사건을 겪은 안인행씨의 증언을 소개했다. “(당시) 총소리가 요란하게 나자 바로 옆에 나란히 묶인 어머니가 나를 덮치며 쓰러졌다. 총에 맞은 어머니의 몸이 요동치자 내 몸은 온통 어머니의 피로 범벅이 됐다. 경찰들이 ‘총에 덜 맞은 놈이 있을지 모른다’면서 일일이 대검으로 찔렀으나 그 때도 난 어머니의 밑에 깔려 무사했다. 만일 영화나 연극으로 만든다면 난 그날의 모습들을 똑같이 재연할 수 있을 정도로 눈에 선하다.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느냐.” 설민석은 “한 할머니는 (제주 4·3 사건 당시) 총탄에 맞아 턱 없이 평생을 제대로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고 살았다. 항상 위장병에 시달렸다. 그러나 음식물을 소화하지 못하는 것보다 그날의 참상을 말하지 못하고 사는 아픔이 더 크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며 눈물을 흘렸다. 또 설민석은 “이 자리에 사료로 가지고 나오지 못한 끔찍한 증언이 많다. 하나만 더 말하면 제주도 빌레못이라고 있다. 선사시대 유적인데 그곳에 숨어 있던 사람들이 토벌대에게 들키게 됐다. 3세 어린이의 두 다리를 잡고 바위에 패대기 쳐 죽였다고 한다. 제게도 아들이 있다. 이제 세살이다. 뛰어 놀아야 할 아이가 무슨 죄가 있다고 잔인한 죽음을 당해야 하나. 당시 이 모습을 지켜본 가족의 심정은 어떻겠는가”라며 묻혀져야 했던, 그러나 잊지 않아야 할 역사의 아픔에 울먹였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백지연의 생각의 창] 4·3 항쟁, 존엄한 삶의 기록

    [백지연의 생각의 창] 4·3 항쟁, 존엄한 삶의 기록

    얼마 전 학생들과 함께 수업시간에 4·3 항쟁과 관련된 작품으로 현기영의 ‘마지막 테우리’(1994)를 읽고 토론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십대 청년들에게 4·3의 이야기가 어떻게 읽힐까 내심 궁금했는데 다채롭고 깊이 있는 논의들이 많이 나와서 보람을 느꼈다. 4·3 항쟁에 대한 역사적 환기뿐만 아니라 문명 비판적 상상력, 인간과 동물의 관계에 대한 성찰, 애도와 속죄의 문제 등 다양한 해석들이 등장해 귀를 기울이고 들었다.그동안 현기영의 대표작으로는 4·3을 처음으로 소설화한 ‘순이 삼촌’(1978)이 대중적으로 잘 알려져 있다. ‘마지막 테우리’는 ‘순이 삼촌’에서 시작된 4·3의 서사적 기록이 도달한 문학적 현재화의 성과를 보여 주는 명작이라고 할 수 있다. 제주도의 평화로운 목장이 배경이 되는 이 소설의 주인공은 테우리(목동) 고순만 노인이다. 드넓은 초원에서 소를 키우고 보살펴 왔던 고순만은 4·3의 참극을 온몸으로 겪은 증인이다. 친구 현태문과 함께 유일하게 살아남은 그는 남들에게 차마 말하지 못한 비밀을 갖고 있다. 4·3 때 토벌대에 협박당해 뜻하지 않게 한 가족을 죽음으로 몰아넣게 된 그는 이후 지울 수 없는 죄책감 속에서 살아왔다. 초원에서 소를 돌보며 살아온 그에게 4·3의 참극은 애지중지했던 소들과의 관계에도 깊은 상처를 남겼다. “적어도 이만의 인간과 이만의 마소가 비명에 죽어 초원의 풀 밑으로 돌아간” 야만의 시간은 초원이 품고 있는 4·3의 고통스러운 역사였다. 지난 시대의 역사를 뒤로한 초원은 포클레인과 골프 잔디로 뒤덮이기 시작한 개발 과정 속에서 또 다른 풍파를 겪는 자연의 모습을 보여 준다. 그것은 “오름마다 봉화가 오르고 투쟁이 있었던” 해방 공간의 의미와 더불어 평화와 생태의 공간을 열어 가야 할 4·3의 현재적 의미를 일깨운다.올해 4·3 항쟁 70주년을 맞아 해방과 상생의 역사적 맥락을 조명하려는 노력들이 다양하게 전개되고 있다. ‘마지막 테우리’에서도 항쟁의 현재적 의미가 심도 있게 다뤄지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4·3을 특정 지역에서 벌어진 희생의 기록으로 한정하지 않으려는 역사적 관점이다. 한 예로 재일 시인 김시종은 자신의 디아스포라적 삶을 통해 4ㆍ3의 현재적 의미를 되묻고 있다. ‘경건히 뒤돌아보지 말라’(‘창작과비평’ 2018년 봄호)에서 그는 4·3 항쟁이 남긴 희생과 참극, 역사적 민중봉기의 의미를 찬찬히 떠올린다. 항쟁 당시 무장봉기의 중간연락원으로 돌아다녔던 그는 도망치는 과정에서 자신을 숨겨 준 친척의 죽음과 수많은 사람의 참사를 겪었다. 그에게 4·3 은 오랜 시간 동안 쉽게 말할 수 없었던, 자신의 생존과 관련된 고통스러운 과거였다. 김시종 시인은 아직도 4·3 관련 희생자 규모가 온전히 밝혀지지 않은 시점에서 “희생자를 경건한 기분만으로 추모하는 것은 희생자들의 풀지 못한 원한을 더욱 응고시키는 행위”라고 절박하게 호소한다. 살아 있는 역사는 박제된 기념비로 결코 존재할 수 없다. 그의 말대로 진상이 규명되지 않은 기록 속의 희생자들은 단정하거나 신성한 형태로 재현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썩을 대로 썩어서 다가갈 수 없을 정도로 추악한 육체를 드러내고 목숨이 끊어진, 성불 못할 원한을 가진 시체”는 현재적으로 되물어야 할 4·3의 의미를 거듭 환기한다. ‘마지막 테우리’에서 고순만 노인의 지난 시절이 울림을 주는 이유 역시 그가 기억을 잊지 못해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여 주기 때문만이 아니다. 그에게 초원은 고통의 기억만이 아닌, 한때 마소와 사람들이 어울려 흥청거리며 변화를 꿈꾸던 해방 공간이었다. 어느덧 황혼을 향해 기울어 가는 자연의 처연한 풍경 앞에서 그는 ‘행복이라는 것도 인간이란 것도 믿지 않았던’ 지난날을 돌아본다. 그러나 순식간에 불어온 강풍과 구름, 휘몰아치는 눈보라 앞에서 그는 자연의 변화무쌍함, 목숨의 소중함을 생생하게 실감한다. 살기 위해 마른 소똥을 주워 모닥불을 피우고 몸을 녹이는 그의 모습은 ‘살아 있음’이라는 존엄한 현실 앞에서 겸허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모습으로 깊은 감동을 남긴다. 그것은 고통의 기록을 관통해 소설이 새롭게 만나게 하는 역사의 현재적 모습이다.
  • 헌정시 펴낸 시인들 ‘순이 삼촌’은 재공연

    제주 4·3 사건 70주년을 계기로 여전히 치유되지 못한 4·3의 상처를 조명한 예술 작품들이 때맞춰 나와 눈길을 끈다. ●시인 90명의 헌시 ‘검은 돌 숨비소리’ 먼저 4·3의 아픔을 기리고 평화를 기원하는 시집, 그림책 등 문학 작품이 잇따라 나왔다. ‘검은 돌 숨비소리’(걷는사람)는 한국작가회의 소속 90명 시인의 시를 모은 4·3 70주년 기념 시집이다. 김수열·이종현·홍경희 등 제주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시인과 신경림·정희성·이시영 등 원로 시인, 안현민·장이지·김성규 등 젊은 시인들이 각각 신작시 1편을 발표했다. 4·3을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한 이산하 시인의 ‘한라산’(노마드북스)도 이번에 복간됐다. 1987년 ‘녹두서평’ 창간호에 소개된 이후 암암리에 필사되며 많은 이들에게 전달돼 읽혔다. 2003년 6월 시집으로 출판됐다가 절판돼 구하기 어려웠으나 이번에 이 시인의 제자들이 페이스북 온라인 펀딩을 통해 마련한 비용으로 다시 나왔다. ●‘무명천 할머니’ 출간 ‘나무 도장’ 전시 제주를 아름다운 휴양의 섬으로만 알고 있는 어린이들에게 섬에 깃든 아픈 역사에 대해 알려줄 그림책도 출간됐다. ‘무명천 할머니’(스콜라)는 마을에 들이닥친 토벌대의 무차별한 총격에 턱을 맞은 진아영 할머니의 실제 이야기를 바탕으로 했다. 간신히 목숨은 건졌지만 평생을 약 없이는 견딜 수 없는 고통 속에 살아야만 했던 할머니의 고통을 통해 현대사의 비극을 되짚는다. 학살의 현장에서 살아남은 한 소녀의 이야기를 그린 권윤덕 작가의 그림책 ‘나무 도장’(2016)의 감동을 전시로 만나 볼 기회도 마련된다. 오는 29일까지 서울 종로구 낙원상가 417호에서 ‘나무 도장’의 원화와 책에 담지 못한 회화 작품이 전시되며, 그에 앞서 7일 광화문광장에서는 권 작가와의 만남도 진행된다. ●4·3 알린 ‘순이 삼촌’ 6월 연극 무대에 4·3을 알린 대표적인 소설인 ‘순이 삼촌’을 원작으로 한 동명의 연극도 5년 만에 다시 무대에 오른다. 이 작품은 4·3 65주년인 2013년, 양희경·백성현 주연으로 공연된 바 있다. 현재 제작사는 오는 6월 공연을 예정으로 캐스팅 작업을 진행 중이다. 제주 출신 소설가 현기영이 쓴 ‘순이 삼촌’(1978)은 학살 현장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순이 삼촌이 환청과 신경쇠약에 시달리다 끝내 목숨을 끊는 비극을 그린다. 최근 4·3 70주년을 캠페인 광고 영상에 내레이션을 맡기도 한 현 작가는 오는 6일 오후 7시 광화문광장에 마련된 분향소에서 4·3을 소재로 한 소설 ‘까마귀의 죽음’, ‘화산도’를 쓴 재일교포 작가 김석범과 함께 ‘4·3에 살다’를 주제로 대화를 나눌 예정이다. ●영화 ‘레드 헌트’ ‘지슬 2’ ‘비념’ 등 상영 영화계에서도 4·3 사건을 다룬 작품들로 기획전을 꾸려 현대사의 비극을 되새기는 자리를 마련했다. 독립영화전용관 인디스페이스는 3~4일 ‘제주 4·3 제70주년 특별상영: 끝나지 않은 세월’을 통해 6편의 영화를 선보인다. 영화 ‘레드 헌트’(조성봉 감독)를 비롯해 김경률 감독의 ‘끝나지 않은 세월’, 오멸 감독의 ‘이어도’, ‘지슬: 끝나지 않은 세월2’, 임흥순 감독의 ‘비념’, 이상목 감독의 로드 다큐 ‘백년의 노래’가 상영된다. 서울 성북구 아리랑시네센터에서는 6~8일 ‘제주를 넘어, 4·3 영화 특별전’ 등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관객들을 만난다. 9편의 작품을 소개하는 특별전은 ‘오멸 감독의 제주, 끝나지 않은 역사’, ‘다큐, 기록과 기억 사이’, ‘장르, 비극적 역사의 재구성’ 등 3개 섹션으로 구성돼 4·3 사건을 다양한 관점에서 바라보게 한다. 조희선 기자 hsncho@seoul.co.kr
  • 빨갱이로 몰아 학살, 그 불명예… 제주의 봄은 여전히 시리다

    빨갱이로 몰아 학살, 그 불명예… 제주의 봄은 여전히 시리다

    1949년 1월 17일 제주 조천 북촌마을. 한 무리의 군인들이 마을을 덮쳤다. 집집이 총구를 겨누며 남녀노소 주민들을 끌어내 북촌초등학교 운동장으로 내몰았다. 어린 학생들에게 빨갱이 가족을 찾아내라고 채근하던 군인들은 주민 수십명씩을 인근 너븐숭이로 차례로 끌고 가 400여명을 학살했다. 가옥은 모두 불태웠다. 이날 북촌마을을 지나던 군인들이 무장대의 기습 공격으로 2명이 사망하자 보복한 것이다. 북촌리 양민 집단학살 사건은 4·3 최대의 참극이었다.제주 4·3이 3일 70주년을 맞는다. 70년 전 해방정국의 좌우 이념 혼란기, 제주에서는 수만명의 주민이 무자비한 폭력에 희생당했다. 4·3은 서슬 퍼런 독재 권력에 눌려 오랜 세월 금기였으며 진실은 은폐되고 왜곡됐다. 발단은 1947년 3·1절 기념행사에서 발생한 경찰의 발포 사건이다. 기마 경찰의 말발굽에 어린아이가 다쳤지만 경찰이 그냥 지나쳤다. 군중이 돌멩이를 던지며 항의하자 경찰이 발포, 민간인 6명이 사망했다. 제주도민들은 같은 달 10일 민관 총파업으로 항의했고, 미군정은 파업 참여자를 잡아 가두는 등 탄압에 나섰다.급기야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 350여명이 ‘남한 단독정부 수립 반대’ 등을 외치며 경찰지서 12곳을 습격하는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전국에서 유일하게 5·10 총선거가 무산됐고, 11월 17일에는 제주 전역에 계엄령이 선포됐다. 이후 토벌대와 무장대의 무력 충돌로 7년간 학살극이 벌어졌다. 토벌대는 무장대에 협조한다며 양민들을 학살했고, 무장대도 협조하지 않은 마을 주민들을 살해했다. 1950년 한국전쟁 발발 뒤로는 보도연맹 가입자나 입산자 가족 등을 잡아들인 뒤 집단 수장하거나 총살, 암매장하는 일이 잇따랐다.4·3의 광기는 멈췄지만 연좌제가 도민들의 숨통을 조였다. 침묵의 금기는 1978년 소설가 현기영이 북촌리 학살 사건을 다룬 소설 ‘순이 삼촌’을 발표하면서 깨졌다. 4·3의 참혹함이 드러나자 제주에서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정부 차원의 진상 규명은 1990년대 말부터 시작됐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취임한 후 1999년 12월 ‘제주 4·3 사건 진상 규명 및 희생자 명예 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2003년 10월 4·3 진상보고서가 확정되자 노무현 전 대통령은 국가원수로서 처음 사과했다. 이명박·박근혜 정권 9년여간은 달랐다. 이명박 정부는 4·3 진상조사보고서 수정 등을 시도했고 2011년부터 국비 지원을 끊어 유해 발굴 사업을 중단시켰다. 박근혜 정부는 4·3 추념일을 국가기념일로 제정했지만 보수단체 등의 반발에 2015년 희생자 재심사에 나서기도 했다. 두 전직 대통령은 추념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문재인 정부는 ‘제주 4·3의 완전한 해결’을 100대 국정과제로 선정했다. 희생자와 유족 추가 신고가 지난 1월 시작됐고, 유해 발굴 작업도 다음달부터 학살 현장이었던 제주공항 등에서 재개된다. 원희룡 제주지사는 지난달 28일 대국민 담화에서 “4·3은 분단과 정부 수립 과정에서 수많은 제주도민이 무고하게 희생당한 대한민국의 아픈 역사”라며 “화해와 상생의 정신으로 과거사 아픔을 치유하고, 제주가 세계 평화와 인권의 중심으로 거듭나는 4·3의 역사적 행보에 국민들이 함께해 주시기 바란다”고 말했다. 4·3의 완전 해결을 위한 우선 과제는 4·3 특별법 개정이다. 유족과 제주도 등은 개정안의 조속한 국회 통과를 요구한다. 개정안에는 ▲공권력에 의한 억울한 희생에 대한 배상과 보상 ▲정당한 절차를 밟지 않은 군사재판의 무효화 ▲수형인에 대한 명예 회복 ▲트라우마 치유센터 건립 등이 담겼다. 제주도는 3일 제주시 봉개동 4·3 평화공원에서 열리는 70주년 추념식에서 4·3의 고통을 노래한 ‘잠들지 않는 남도’를 합창한다고 2일 밝혔다. 2016년과 지난해 정부 측 요구로 추모 합창곡에서 제외됐었다. 오전 10시 도 전역에 1분간 추모 묵념 사이렌이 처음 울린다. 도는 추념일을 지방공휴일로 지정했다. 현재 4·3 공식 희생자는 1만 4232명(사망자 1만 244명, 행방불명자 3576명, 후유장애자 164명, 수형자 248명)이며 유족은 5만 9426명이다. 2003년 발간된 정부의 4·3 진상보고서는 “인구 동향 등의 자료를 고려하면 4·3으로 인한 인명 피해는 총 2만 5000~3만명이 될 것”이라고 추정했다. 4·3은 7년간 당시 제주도 인구의 10%가량이 희생된 현대사의 비극이었다. 제주 황경근 기자 kkhwang@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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