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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베이징大 대규모 시위

    [베이징 AFP 연합]베이징대학 학생 수천명이 살해당한 동료 여학생의 추도식을 당국이 저지하려 한데 격분,이틀간 항의시위를 벌인뒤 25일 대학구내에집결,충돌이 예상되고 있다. 약 3,000여명의 학생들은 1989년 6월4일 톈안먼(天安門) 민주화 시위 기념일을 앞두고 강간 살해당한 동료 여학생 추칭펑(19)에 대한 추모식을 위해이날 행사장에 속속 모여들었다. 외신들은 사흘간 이어진 이번 시위가 톈안먼 사태이후 최대규모라고 보도했다. 시위는 지난 20일 추양이 베이징 북부 대학 별관 부근 과수원에서 살해된채발견되자 학생들이 복지와 안전에 소홀한 학교측에 격분,이의 개선을 요구하며 불붙었다.당초 학교측은 추도식에 반대했으나 톈안문 11주기를 앞둔 시점에서 학생들의 시위가 겉잡을수 없이 확산되자 25일 이를 허가했다. 그러나 학교정책 변혁을 요구하는 포스터와 전단들이 어느새 공안부장 퇴진요구로까지 비화되고 있어 당국이 불순분자 경계령을 내린채 긴장하고 있다.
  • 광주민중항쟁 취재기 영문판 출간

    [뉴욕 연합] 광주민중항쟁 20주년을 맞아 당시 현장을 취재했던 내외신 기자들의 체험담과 취재기를 모은 책이 미국의 한 출판사에 의해 영문으로 발간됐다. 뉴욕의 M.E.샤프 출판사가 ‘광주봉기(The Kwangju Uprising)’란 제목으로출판한 이 책은 97년 국내에서 발행된 ‘5·18 특파원 리포트’(풀빛刊)의영문 개정증보판 형태를 띤다.부제는 ‘한국판 톈안먼(天安門) 사태에 대한현장 기자들의 얘기’. 5·18 당시 뉴욕타임스 도쿄지국장이었던 헨리 스코트 스톡스와 ‘광주일기’의 저자 이재의(李在義)씨가 편집을 맡았고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이 직접서문을 작성했다. 김 대통령은 서문에서 “외국 특파원과 한국 기자들이 5월의 광주에서 본것을 기술함으로써 희생자들이 영원히 살아 있도록 했다”며 “광주민중항쟁정신은 한국인만의 독점물이 아니며 민주주의와 인권이 존중되는 곳 어디서든 사랑받고 있으며 압제자에 대한 정의의 상징이 되고 있다”고 강조했다.
  • 美, 中에 파룬궁 탄압 중지 촉구

    [워싱턴 최철호특파원] 미국 행정부는 25일 중국 정부에 대해 파룬궁(法輪功) 수련단체에 대한 탄압을 중지하라고 촉구했다. 제임스 루빈 미 국무부 대변인은 이날 브리핑에서 중국 당국이 베이징(北京)의 톈안먼 광장에서 평화적인 시위를 벌이던 파룬궁 수련자들을 구금한 사태는 국제적인 인권에 대한 공약을 위반한 것으로 미국의 심각한 우려를 불러 일으키고 있다고 말했다. 루빈 대변인은 “우리는 중국 정부에 대해 파룬궁에 대한 탄압을 중지하고평화적인 신념 표현 때문에 구금된 모든 관련자를 석방할 것과 시민의 표현의 자유와 양심,결사 및 평화적인 집회의 권리를 보장할 것을 촉구한다”고말했다. 파룬궁 수련자 약 100명은 중국정부의 탄압을 촉발한 대규모 농성 1주년을맞아 이날 톈안먼 광장에서 시위를 벌이다 당국에 연행됐다. 미국 민주당 의원들은 이같은 조치에 항의하며 클린턴 행정부가 추진중인중국에 대한 항구적인 정상교역관계(NTR) 지위부여를 지지하는 대신 중국의인권상황을 감시할 특별위원회 설치할 것을 요구했으며 백악관측은 대(對)중국 NTR부여에 대한 의회의 지지확대방안의 일환으로 이 위원회 설치에 잠정동의했다고 관리들이 전했다. 한편 이날 워싱턴에서는 수십명의 파룬궁 수련자들이 주미 중국대사관 앞에집결,베이징의 시위 탄압에 항의했다. 약 50명의 시위자들은 중국대사관 건물 밖에서 비가 내리는데도 불구하고황색의 대형 현수막을 내건 채 기공 또는 명상을 실시하는 등 평화적인 시위를 벌였다.
  • 中 파룬궁 수련자들 톈안먼서 기습 시위

    [베이징 AFP AP 연합] 불법화된 중국의 기(氣) 수련단체 파룬궁(法輪功) 수련자들은 25일 오전 중난하이(中南海) 시위 1주년을 맞아 베이징 톈안먼광장 일대에서 기습 시위를 벌였다. 파룬궁 수련자들은 외국 귀빈의 행사를 위한 톈안먼 광장의 봉쇄가 해제되자 마자 수십명 단위로 여러 곳에서 뛰쳐나와 파룬궁 지지 깃발을 펼치거나가부좌 자세를 취했다. 광장 인근에서 대기중이던 정·사복 경찰은 즉각 시위대의 해산 및 연행에나서 최소한 95명의 수련자들을 체포했으며 이 과정에서 일부 경찰이 수련자들을 구타하는 모습이 목격됐다. 경찰은 또 외국인 관광객들이 파룬궁 수련자들의 시위 및 경찰 진압과정을촬영하지 못하도록 저지했으며,AP통신과 AP TV뉴스의 프로듀서 등을 비롯해최소한 8명의 외국 언론인을 체포하고 필름을 압수했다. 지난해 7월 파룬궁이 공식적으로 불법화된 이후에도 톈안먼 광장에서는 당국의 탄압과 관영 매체들의 비방 캠페인에 맞서 매일같이 수련자들의 시위가벌어졌으나 이와같은 대규모 시위는 이례적이다. 이날 시위에 나선 수련자들은 남녀노소 여러 계층이 망라돼 파룬궁의 대중적 인기를 반영했다.한 남자 수련자는 경찰 미니 버스에 태워져 연행되면서“파룬의 위대한 길은 선하다”고 외쳤으며 아기를 안은 한 여자는 울부짖기도 했다.
  • [역사를 바꾼 정상회담](3)닉슨 마오쩌둥 회담

    *72년 美·中정상회담. 1972년 2월21일 아침 중국 베이징(北京) 수두(首都)공항.20여년동안 쌓인적대감을 버리고 2만5,000㎞를 날아 중국 대륙의 땅을 처음 밟는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은 조금 어리둥절했다.황금시간대 생중계되는 미 TV를 통해‘세계 평화의 전도사’로 비쳐지던 자신의 이미지를 높여줄 베이징의 환영인파는 고사하고 환영 플래카드 하나 내걸려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공항에는 저우언라이(周恩來)총리의 환영인사와 의장대의 간단한 의전행사만 있었다.베이징 디아오위타이(釣魚臺) 영빈관을 향해 차량행렬이 지나갈때도 톈안먼(天安門) 광장과 베이징거리는 텅비어 있었다. 이날 오후 닉슨은 중난하이(中南海)로 마오쩌둥(毛澤東)을 만나러 갔다.약간 초췌한 모습의마오는 닉슨을 반갑게 맞았다.“반동집단이 미국과의 공식 접촉을 강력히 반대했다”며 환영에 신중했던 점을 설명한 마오는 “미 대선기간 내내 당신이 투표에서 이기리라고 확신하고 있었다”고 덕담을 건넸다.닉슨은 삭막한 첫 소감을 뒤로 한 채 “한 국가를 움직였고 세계를 변화시켰다”고 마오를 추켜세웠다. 미·중 정상 첫 회담은 이처럼 의례적인 만남에 불과했지만,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을 선포한 이후 처음으로 ‘죽의 장막’을 걷어젖히고 국제무대 복귀를 알리는 신호탄이었다.닉슨이 만리장성 등을 둘러보는 동안 미·중 협상자들은 긴 시간의 비밀회의를 통해 타이완의 지위 등 중요한 외교적 사안을다듬었다.그 결과 2월 28일 미·중은 ‘상하이(上海)공동선언’을 통해 ▲영토와 주권의 상호존중 ▲상호불가침 ▲내정불간섭 ▲평등호혜 ▲평화공존 등 평화 5원칙을 천명한 뒤,관계 정상화 합의의 상징으로 팬더 한쌍과 사향소를 교환했다. 40년대 후반부터 국공내전 및 한국전쟁을 치르면서 적대국이 된 미·중관계가 해빙되기 시작한 것은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날로 커가는 소련의 영향력을 견제해야 한다는 공통의 이익분모를 갖고 있었기 때문.특히 미국은 중국과의 관계개선을 통해 베트남전쟁의 수렁에서 빠져 나오는 돌파구를 찾으려했다.중국은 50년대말 이념갈등과 69년 헤이룽장(黑龍江)성 전바오다오(珍寶島)의 중·소 무력충돌 사건 등으로 대(對)소련관계가 악화되면서 미국과의 관계개선을 소련견제 카드로 활용하고자 했다. 두나라는 이전부터 관계정상화로 가는 수순을 차근차근 밟았다.71년 4월10일 베이징 공항에 도쿄발 루프트한자 비행기에서 낯선 미국인 15명이 내린게 첫 사례로 꼽히고 있다.이들은 중국을 공식 방문한 최초의 미국인들로 미·중관계를 복원 물꼬를 튼 ‘핑퐁외교’의 주역들이다.3월말 일본 나고야에서 열린 세계 탁구선수권대회에 참가중이던 중국 대표팀이 미국 대표팀에 초청할 뜻을 전달하자,두차례 비밀 접촉끝에 전격 이뤄졌다.이후 미국은 20년넘게 지속돼온 대중국 무역금지 조치를 해제,유화적인 제스처를 보내면서 본격 대화에 나섰다.헨리 키신저 미 대통령 안보담당 보좌관이 비밀리에 중국을 방문,저우 총리와 만났고 그해 7월 15일 닉슨이 72년 5월 이전에 중국을방문한다고 발표했다.이어 10월 중국은 유엔총회에서 회원국들의 압도적인지지를 받아 유엔 가입을 실현,타이완(臺灣)은 국제정치 무대에서 축출됐다. 김규환기자 khkim@. *막후협상 두 주역/ 키신저 당시 美안보담당 보좌관. 헨리 키신저 당시 미 대통령 안보담당 보좌관(77)은 데탕트(긴장완화)의 흐름을 주도하며 당대를 풍미한 국제외교가의 스타중 스타.안보담당 보좌관·국가안전보장회의 사무국장·국무장관 등 미 행정부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1923년 독일 퓌르트에서 태어난 그는 38년 미국으로 이주,뉴욕 시립대학 회계학과를 졸업했다.54년 하버드대학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교수로 활약하며 미국 방위연구계획을 입안한 주역이다. 아이젠하워·케네디·존슨 행정부를 거치며 안보문제 고문으로 활약한 키신저는 57년 ‘핵무기와 외교정책’을 출판,미국 전략정책의 최고 권위자로 떠올랐다. 68년 닉슨 대통령에 의해 안보담당 보좌관에 임명된 그는 중국·소련·베트남·중동 등지에서 데탕트 흐름을 추진,외교적 성공을 거두고 ‘전략무기제한협정(SALT)’을 성사시켜 닉슨 행정부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로 부상했다.71년4월 핑퐁외교 이후 비밀리에 중국을 방문,미·중관계 정상화를 이끌어내는막후 주역으로 활약했다.77년 국무장관직에서 물러난 뒤 국제고문·작가·강연자로 활동하고 있다. *周恩來 당시 中총리. 저우언라이(周恩來·1898∼1976) 당시 중국 총리는 외교부장을 겸임하며 20세기 중국의 가장 위대한 협상가로 꼽힌다.세부사항을 파악하는 데 초인적인 힘을 발휘한 그는 실용적이고 친화력과 설득력이 있는 화술로 협상 당사자를 사로잡았다. 장쑤(江蘇)성 화이안(淮安)에서 출생한 저우는 근로 장학생으로 프랑스에유학하는 동안 공산주의 사상에 심취,평생을 공산주의자로 보내겠다고 결심했다. 27년4월 중국 공산당 정치국위원으로 선출된 그는 장정(34년10월∼35년10월)기간동안 당기구 통제권을 장악한 마오쩌둥(毛澤東)의 지도력을 보좌했다. 장정으로 공산당 근거지를 확보한 이후 국공내전 등의 협상테이블에서 우아하고 섬세한 화술로 협상에 임함으로써 탁월한 외교 협상가로서의 입지를 굳혔다.저우는 중화인민공화국 선포 이후
  • “中 괄목할 경제성과 이룩”

    중국의 21세기 발전 전략을 공개하는 제9기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 제3차 회의가 5일 베이징 톈안먼(天安門) 광장의 인민대회당에서 개막됐다. 리펑(李鵬) 전인대 상무위원회 위원장은 이날 오전 9시(현지시각) 개막을공식 선언했다.최고 입법기구인 전인대 개막식에는 장쩌민(江澤民) 국가주석과 주룽지(朱鎔基)총리,리루이환(李瑞環) 인민정치협상회의(정협)주석 등 당·정 고위 간부들과 2,895명의 대의원 등 5,000여명의 중앙 및 지방 관리들이 대거 참석했다. 주 총리는 개막식에 이어 ‘정부공작보고서’를 통해 정부의 경제개혁 성과와 타이완(臺灣) 문제,부패 척결 의지 등을 천명했다. 주 총리가 낭독한 정부공작보고서는 전인대 대의원들에게 배포돼 심의를 거치며 정협 전국위원회 대의원들에게도 제출돼 평가와 의견을 수렴하게 된다. 다음은 정부공작보고서 요지 ◆경제성장 지난해 경제가 질적 성장을 거둬 국내총생산(GDP) 성장 목표를달성했다.경제 구조조정과 기타 경제 실적이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룩했다. 앞으로 경제개발 가속화와 부실 국유기업 개혁,인프라 구축 및 내수진작이필요하며 상대적으로 낙후된 중국 서부 11개 성(省)을 중점 개발하겠다. ◆재정적자 지난 몇년간 재정적자와 국가부채가 늘어났지만 이는 개혁과 발전,안정을 위해서 필요하다.경제가 계속 빨리 성장하고 경제실적이 상당기간 향상될 경우 부채를 갚을 수 있다. ◆타이완(臺灣)문제 타이완이 독립노선을 계속 추구할 경우 방관하지 않을것이다.중국의 주권과 영토적 통합을 해치려는 어떠한 분리주의 행동도 가만히 보고 있지 않을 것이다. ◆부패와의 전쟁 전국 모든 정부 관리들과 특히 지도급 간부들은 정직 청렴해야 하며 친척과 부하 직원들에게도 똑같이 행동하도록 촉구해야 한다.특히부패와의 전쟁은 고위 관리들을 대상으로 삼아야 하며 부패나 비리가 드러날 경우 모든 관련자와 지도급 관리들에게 책임을 물겠다. ◆인민해방군개혁 인민해방군은 최첨단 기술로 무장하고 무기를 개량해 전투력을 강화해야 한다. 김규환기자 khkim@
  • [외언내언] 미국 인권의 잣대

    미국과 중국의 ‘인권 대결’이 한창인 것으로 외신이 전한다.미국은 지난달 25일 발표한 세계 인권보고서를 통해 중국 내의 인권 침해를 신랄히 비난했고,중국 또한 이에 질세라 바로 이틀 뒤 ‘1999년 미국의 인권기록’이란보고서로 정면으로 맞섰다. 이 보고서는 미국에서 연평균 100만건에 이르는 총기 사고,인종 차별,빈부격차 등으로 수없이 많은 인권 침해가 발생한다고 지적했다.이러고서야 어디인권 천국(天國)인 양 남의 나라에 대해 왈가왈부할 수 있겠느냐는 식이다. 미·중 두 나라의 인권 분쟁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며 특히 중국의 개방·개혁 이후 격화됐다고 봐야 할 것 같다.톈안먼(天安門)사태 발생 4개월 전인지난 89년 2월 조지 부시 미 대통령이 베이징을 방문했을 때도 당시 자오쯔양(趙紫陽)당총서기는 중국에 대한 미측의 잦은 인권문제 간섭을 경고했다. 부시 대통령이 만찬에 초대한 중국의 반 체제 인사이며 국제적 물리학자인팡리즈(方勵之)는 중국 경찰의 제지로 만찬 참석을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결국 그는 톈안먼사태 이후 베이징 시내 미 대사관으로 피신했고 1년 뒤 영국으로 출국했다. 톈안먼사건으로 미·중의 인권 대결은 더욱 격렬해졌다.물론 중국은 13억 인구의 평안한 삶과 안정된 국가 발전을위해 내정 불안을 야기하는 사건에 대한 진압이 불가피함을 밝혔다. 그러나 미국 외에도 적잖은 서구 국가들이 시위 군중을 무력으로 해산시킨중국 조치에 항의했는데 그 가운데 영국이 두드러졌다.시위 주도자들이 영국식민지인 홍콩으로 탈출토록 도와 주었다는 보도도 있었다. 당시 미·영 두나라와 중국 당국의 인권 분쟁은 볼 만했다. 또 미·영의 공격에 중국은 한치도 물러섬이 없었다.미국에 대해선 죄 없는인디언 학살의 사실(史實)을 예로 들었고,영국에는 많은 중국 백성을 아편으로 병들고 죽어 가게 한 ‘아편전쟁’을 떠올리며 인권 운운(云云)할 자격이없다는 식으로 들은 채도 안했다. 지난 98년 6월 정상회담때도 클린턴 대통령이 “톈안먼 무력 진압은 잘못”이라고 한데 대해 장쩌민 주석은 “우리는남의 나라 내정 간섭은 않는다” 며 참견할 일과 안할 일을 잘 구별하라는식으로 되받아쳤다. 미국의 세계 인권보고서가 중국만 자극한 건 아닌 것 같다.베트남,인도,아프가니스탄 등도 내정 간섭이라며 반발하는 것으로 외신은 전한다. 우리는 어떤가.가끔씩 벌어지는 미 병사의 위안부 살해사건을 비롯, 국내의 미국인 범죄수사 과정에서 가해자에 비해 한국측 피해자 인권이 무시된 예는 꽤 많은 편이다.인권에도 민족적 차별이 있을 수 있나. 결코 아닐 것이다. 한국측에 불리하게 돼있는 한미행정협정(SOFA)의 시급한 개정은 인권을 중시하는 미국의몫이다. 우홍제 논설주간
  • 성도일보 ‘20세기 中인물20’ 조사/손문 20세기 중 최고

    [홍콩 연합] 중화민국(中華民國)을 1912년 건국해 중국과 대만 국민 모두에게 국부(國父)로 추앙받고 있는 손문(孫中山)이 20세기 중국 최고의 풍운아로 뽑혔다. 홍콩의 성도(星島)일보는 23일 홍콩 역사박물관이 관람객 3만684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20세기 중국 역사풍운(風雲)인물 20인’ 조사(1인당 5표씩 투표)에서 손문이 2만7,831표를 얻어 1위를 차지했다고 전했다. 97년 2월 사망한 덩샤오핑(鄧小平)은 2만 6,632표로 마오쩌둥(毛澤東)전 주석(2만4,146표)을 2,000여표 차이로 제치고 2위에 올랐으며,4위는 ‘영원한총리’로 사후에도 인민의 존경을 받아온 저우언라이(周恩來) 중국 전 총리(1만6,380표)가 차지했다. 장제스(蔣介石) 전 중화민국 총통(1만3,479표)과 서(徐) 태후로 알려진 자희(慈禧)태후(1만74표)가 각각 5,6위에 올랐으며 7,8위는 작가 루쉰(魯迅.9,077표)과 북양군벌 지도자 위앤스카이(袁世凱)에게 돌아갔다. 작품 ‘차부둬(差不多.대충대충 처리하는)선생’으로 유명한 작가 후스(胡適)는 9위에,청조(淸朝) 체제내의 개혁을 추구한양대 변법(變法)파인 양치차오(梁啓超)와 캉유웨이(康有爲.)는 10,11위에 올랐다. 1966∼1976년의 문화대혁명 당시 반우파 투쟁에 희생된 류샤오치(劉少奇)당 부주석은 12위,지난 89년 사망해 6·4 톈안먼(天安門) 사태의 도화선이 된개혁파 총서기 후야오방(胡耀邦)은 13위를 차지했다. ‘공화국 제1원수’ 칭호를 얻었던 주더(朱德) 총사령관은 14위,마오전 주석의 부인이자 4인방의 핵심이었던 장청(江靑)은 15위,장징궈(蔣經國) 전 대만총통은 16위에 올랐다. 1921년 7월 상하이(上海)에서 출범한 중국공산당의 초대 총서기를 지낸 천두슈(陳獨秀)와 린뱌오(林彪) 전 국방장관은 17,18위에,또 베이징(北京)대학 교장(총장)을 지낸 차이위앤페이(蔡元培)와 난징(南京) 정부 당시 일본의꼭두각시 역할을 했던 왕징웨이(汪精衛)는 각각 19위와 20위에 올랐다.
  • 美·中 협상 일지

    ●86년 7월 중국 관세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가입 의사 천명 ○87년 중-미 가입 협상 개시 ●89년 톈안먼(天安門) 사건으로 7개월간 협상 중단 ○94년 중,WTO 출범 앞두고 GATT 가입 위해 진력했으나 협상 결렬 ●97년 아시아 금융위기 발발 ○98년 클린턴이 중국 방문.장쩌민 주석과 WTO가입 협상 무산 ●99년4월 주룽지 중국총리 미 방문.상당 수준 양보안 제시에도 불구,미측 거절로 결렬. ○ 〃 5월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의 유고주재 중국대사관 오폭 사건 발생 .다시 협상 중단 ● 〃 7월 중-일 WTO 쌍무협상 완료 ○ 〃 9월 클린턴-장쩌민 뉴질랜드 APEC회담서 협상 재개 ● 〃 11월6일 클린턴 대통령 장 주석에게 전화를 걸어 가입 협상 재개 합 의 ○ 〃 9일 미,바셰프스키 무역대표부 대표,진 스펄링 백악관 경제고문 등 최대규모 대표단 파견.스광성 부장 WTO 가입 낙관론 발표. ● 〃 11일 스광성-바셰프스키 1시간 30분 회담.이틀 일정 하루 연장에 합 의 ○ 〃 13일 바셰프스키 대표 중난하이에서 1시간30분간 주 총리 면담으로 돌파구 마련.● 〃 14일 양국 협상단 3차례 협상 후 “공개할 내용이 없다”는 성명 발 표 ○ 〃 15일 협상 타결 발표
  • 中 오늘 건국50돌 행사

    [베이징 연합] 중국은 1일 건국 50주년을 맞아 베이징(北京)톈안먼(天安門)광장을 중심으로 모두 50여만명이 참석하는 대규모 국경절 기념행사를 벌인다. 주최측은 이번 기념행사를 앞두고 발표한 50가지의 다양한 국경절 구호중에 ‘덩샤오핑(鄧小平) 이론 만세’를 포함시켜 지도사상인 덩샤오핑이론에 처음으로 만세표현을 붙였다. 오전 10시부터 시작되는 기념행사는 약 50만명이 참석한 가운데 ▲경축대회 ▲군사퍼레이드(열병) ▲군중 가두행진으로 약 2시간 동안 걸쳐 진행되고,저녁에는 톈안먼광장 등에서 합동축제가 벌어진다. 장쩌민(江澤民) 국가주석은 경축대회에서 육·해·공 3군 부대 사열에 이어 연설을 통해 21세기 ‘부강대국’ 건설,덩샤오핑노선 견지,개혁·개방 지속등을 천명하고 타이완(臺灣)을 포함한 전민족의 대동단결을 호소한다. 군사퍼레이드에서는 자체 제작된 초음속 ‘페이바오(飛豹)’ FBC-1 전투기,공중급유기,‘젠홍(殲轟)-7’ 폭격기 등 전투기와 전폭기 1백30여대 외에 지상장비 40종 등 그동안 공개되지 않았던 자체 제작새 무기와 장비들이 대거선보인다.
  • 중국 건국50돌…32년간 취재 AP기자가 본 두거목

    [베이징 AP 연합] 지난 30년대 중반 중국 공산당의 대장정(大長征)이 끝난뒤 옌안(延安)에서 7개월 동안 마오쩌둥(毛澤東)과 함께 지내는 등 이후 32년 동안 중국을 취재한 AP통신의 존 로드릭 기자가 중국 건국 50년을 맞아중국을 다시 찾아 마오쩌둥과 덩샤오핑(鄧小平) 두사람을 비교하는 기사를보내왔다. 마오쩌둥과 덩샤오핑은 살아가는 방식은 달랐지만 10월1일 건국 50주년을맞는 공산주의 중국을 상징하는 두 거목이다.지난 76년 타계한 마오가 중화인민공화국의 아버지였다면 97년 서거한 덩은 중국 근대화의 어머니였다.이들은 전우였으나 마오가 수정 자본주의와 제한 민주주의를 통해 중국을 부자로 만들겠다는 약속을 저버리자 적대관계로 돌아섰다. 나는 중국을 취재하면서 두사람 모두 알게 됐다.두사람은 한때 추앙을 받다가 비판을 받은 공통점을 갖고 있다.냉혹하고 계산이 치밀했던 마오는 53세때까지 수많은 전투를 치렀으며 20년 이상 무수한 분쟁에 개입했다.옌안 시민들처럼 평범하게 생활했지만 화려한 황제,황후 의상을 차려입은 베이징 오페라를 좋아했다. 마오는 중국을 근대화 물결에 편승할 수 있도록 만든 장본인이라 할 수 있다.다만 너무 낭만적 몽상가여서 중국을 강력하고 자족이 가능한 고대 중세왕국으로 간주,조공을 받을 순 있지만 외국의 지원이나 유대는 필요없다는식의 사고를 가진 게 문제였다. 반면 덩샤오핑은 철저한 현실주의자였다.마오의 공산주의 관념에서 탈피,각종 유인제도와 정치적 개방성으로 부(富)를 창조할 수 있다고 믿었다.덩은 16세부터 5년 동안 유럽에서 지낸 탓에 경제적 마인드와 세계지향적인 안목을 갖고 있었다. 나는 그를 79년 처음으로 만났다.당시는 덩이 마오의 사망 직후 권력을 장악하고 개혁·개방정책을 거세게 밀어붙일 시점이었다.키가 작고 까다롭고시원한 눈매를 가졌던 덩은 마오와는 체질적으로도 큰 차이가 있었다.유머감각이 뛰어났고 얼버무리는 대화술도 능란했다.마오가 낭만적이고 의심이 많으면서도 아첨을 수용할 줄 아는 편이었다면,덩은 냉정하면서 조심성있고 자신감이 강했다. 덩은 나에게 중국 지도자들은 임기가 있어야 한다고했다.특히 정치 또는행정분야중 하나를 택해야지 모두 차지해서는 안된다고 했다.그는 자신이 도입한 자유시장경제를 사회주의자나 자본주의자 모두에게 ‘정당한 도구’라고 생각했다.덩의 명예에 누를 끼친 게 있다면 그것은 바로 두려움이었다.3번이나 실각하고 다시 살아나 ‘부도옹(不倒翁)’이라는 별명까지 얻은 그였지만 89년 톈안먼(天安門)사태 때 두려움 때문에 군에 발포를 지시했다.이발포 명령은 그의 명예에 큰 오점으로 남아 있다. 하지만 그는 눈을 감기 전까지 자신의 개혁정책 실현을 위해 최선을 다했고 중국을 가장 성공적으로 근대화시킨 20세기 영웅으로 남게 됐다.
  • 10월1일 中건국 50돌 대대적 경축행사

    [베이징 연합] 중국은 오는 10월1일 건국 50주년을 맞아 베이징(北京) 톈안먼(天安門)광장을 중심으로 모두 50여만명이 참석하는 대규모 국경절(國慶節)기념행사를 펼친다. 현재 수도 베이징 등 전국 각지에서는 문예활동,전시회,보고회,좌담회 등이열리고 있으며 기념화폐와 기념우표도 발행됐다. 베이징 등 주요 도시는 국경절을 맞아 주요 거리를 새로 단장했고 다채로운꽃장식과 조형물로 경축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키고 있다. ?28일 저녁=인민대회당에서 200여명의 국내외 저명 예술가를 포함,2,100명이 출연하는 대형 문화예술공연 ‘조국송(祖國頌)’ 공연. ?30일=주룽지(朱鎔基)총리 주최 홍콩,마카오,타이완 주민들과 해외 화교,주중 외교사절 등이 참석하는 기념리셉션. ?1일=오전 10시 기념행사 시작.경축대회,사상최대의 군사퍼레이드(열병),군중 가두행진 순으로 약2시간 진행.저녁에는 톈안먼광장 등에서 합동축제. 중국은 이같이 일련의 대규모 행사를 통해 나날이 신장되고 있는 국력을 전세계에 최대한 선전하는 한편,국민들에게 자신감을 불어넣고,애국심을 고취하려 하고있다. 경축대회는 장쩌민(江澤民) 당총서기 겸 국가주석이 다른 지도자들을 대동하고성루에 모습을 나타내는 것으로 시작된다.장 주석은 이 자리에서 21세기부강대국(富强大國) 건설, 덩샤오핑(鄧小平)노선견지, 개혁, 개방 지속 등의방침을 밝힐 예정이다.
  • [중국 건국50돌](2)개혁·개방정책 손익계산

    1978년 12월,공산당 제11기 중앙위원회 3차 전체회의(三中全會)에서 덩샤오핑(鄧小平)이 개혁·개방을 선언한지 21년.다음 세기 초강대국으로의 용틀임을 하고 있는 세기말 중국의 개혁·개방 대차대조표를 살펴본다. 사회주의 속의 시장경제라는 중국의 실험은 일단 ‘성공’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물론 개혁·개방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89년 톈안먼(天安門) 사태·97년 덩샤오핑 사망 등의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예상 밖의 성적을 거둔 것이다. 개혁·개방의 성과는 주요 경제지표가 말해주고 있다.78년 당시 422억달러(약 50조원)에 불과하던 국내총생산(GDP)이 98년 9,620억달러로 20배 이상 폭증했다.연평균 9.6%이상의 세계 최고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한 셈이다.세계은행이 발표한 세계발전 보고서에 따르면 중국은 1인당 국민소득(GNP)이 860달러를 넘는 중등 수입국가(786∼3,125달러)대열에 진입,중진국으로 도약했다. 대외 교역량도 급증했다.78년 206억달러에서 98년 3,239억달러로 15배 이상 늘었다.외환보유고는 1억6,700만달러에서 1,450억달러에 이르러 유럽연합(EU)·일본에 이어 세계 3위이다.외국인 투자도 선진국의 개발도상국에 대한투자 가운데 40% 이상을 점유하고 있다. 이같은 고도성장으로 연소득 5만위안(약 750만원) 이상되는 신흥 부자가 3,000만명이나 생겼으며,절대빈곤층 인구는 2억3,000만명에서 4,200만명으로크게 줄었다. 그러나 경제성장의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도농(都農)·계층·지역간의 빈부격차와 환경오염,부정부패 등이 심각한 상황에 이르렀다.사회주의의 주요 강점중의 하나인 평등주의와는 거리가 점점 멀어지고 있다는 얘기다. 78년 도시와 농촌가구의 소득은 각각 342위안(약 42달러)과 133위안이었으나 97년에는 5,010위안과 2,090위안으로 좀처럼 좁혀지지 않고 있다.소수민족 농민들의 경우 연간 수입이 평균 851위안 밖에 안돼 집단 반발 요인으로작용하고 있다. 환경 문제도 개혁·개방의 성과를 깎아내리는 어두운 한 단면이다.환경오염은 중국내는 물론 한국과 일본에까지 심각한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공기가세계에서 가장 나쁜 10대 도시중 9개 도시가 중국에 속해 있고,수질은 사람들이 마실 수 없는 4등급 이상이 무려 77%나 된다. 급격한 산업화로 급증하는 공업폐수로 발해만이 ‘죽음의 바다’로 변한지오래고,중국 동북부 라오닝(遼寧)성의 아황산가스가 황해를 건너와 한국과일본에까지 산성비를 내리게 하고 있다. 특히 물질 만능주의의 팽배로 각종 부정부패가 잇따라 터져 주룽지(朱鎔基)총리가 전쟁을 선포했을 정도다.중국 정부에 따르면 지난 한햇동안 1,600여명의 검찰관이 부패사범으로 몰려 중징계됐고 건설사업과 관련해서는 같은기간동안 1,000억위안이나 낭비됐다. 김규환기자 khkim@ *빛바랜 사회주의 뒤안길 ‘샹첸칸(向錢看)’.돈만 보고 쫓아간다는 뜻으로 개혁·개방 이후 중국에서 새로 생겨난 유행어이다.특히 지난 3월 중국의 의회격인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에서 통과된 헌법개정안이 샹첸칸 바람을 부채질하는 바람에 중국의 사회주의 이념이 퇴색되고 있다. 헌법수정안은 ‘공유제 경제’의 보충적 지위에 머물렀던 개체(個體)경제와사영(私營)경제 등 비(非)공유제 경제를 사회주의 시장경제의 중요 구성부분으로 격상시켰다.사회주의 출범 50년만에 사유제를 헌법에 보장함으로써,그동안 소규모 상점·식당 등을 운영하는 개인 상공업자인 ‘꺼티후(個體戶)’와 개인기업들의 각종 법적·행정적 제약에서 풀렸다. 사회주의의 주요 덕목이던 평생고용을 의미하는 ‘철밥통(鐵飯碗)’의 신화는 이미 깨졌다.만성적자에 허덕이는 국유기업을 개혁하면서 인력을 대폭 감축,실업자를 양산하고 있는 것.중국의 공식 통계로는 2.9%로 돼 있으나,실제로는 16% 정도인 2억명이 실업자이거나 불완전 고용상태인 것으로 추산된다. 국가가 모든 것을 제공해주던 사회주의 복지정책도 예외가 아니다.사실상사문화돼 개인이 능력껏 해결해야 하는 자본주의의 무한 경쟁체제로 접어 들었다.소속 기관이나 회사에서 거의 공짜로 나눠주던 주택 무상분배제도가 지난해 폐지됐고, 정년퇴직하면 퇴직전 최종 월급의 60∼100%를 받던 퇴휴금(退休金)제도도 거의 사라졌다. 의료비도 매월 일정 비율이나 일정액의 의료보조금을 지급하는 방식으로 바뀌었고,무료로 대학교육을 시켜주고 졸업하면 직장을 배치해주는 제도도 지난해 없앴다. 이제 공산당 일당체제를 유지하는 정치 분야를 제외하면 중국에서 사회주의흔적을 찾아보기 힘들게 된 셈이다. [김규환기자]
  • 6·4 天安門사태 10주년(下)-주역들 현황

    톈안먼(天安門)사태의 주역들은 무엇을 하고 있나.89년 봄 톈안먼 광장에서 7주동안의 짧은 ‘베이징의 봄’을 연출했던 주요 학생지도자들은 대부분해외로 탈출,당시 열기가 무색하게 소시민과 다를 바 없이 평범하게 살고 있다. 활기를 띠고 있는 해외의 중국 민주화운동 조직들도 대개 이들의 선배세대가 이끌고 있다. 유혈 진압을 둘러싸고 갈라섰던 지도자들은 영욕(榮辱)을 달리하며 서로 화해할 수 없는 적으로 나뉘었다.강경 진압을 주도했던 지도자들은 리펑(李鵬·72)전인대 상무위원장처럼 권력 핵심에 남아있거나 수명을 다해 사망했다. 반면 유혈진압을 반대했던 지도인사들은 여전히 고난의 길을 가고 있다.시위학생들을 만나 눈물 흘리며 해산을 호소했던 총서기 자오즈양(趙紫陽·80).유혈진압직전 실각된뒤 제한된 외부 접촉만 허용받고 있다. 자오즈양의 비서였던 바오퉁(67)정치국 비서.‘반체제들과의 내통’을 이유로 7년 복역끝에 지난해 5월 클린턴 미대통령의 방문을 앞두고 풀려날 수있었다.후야오방(胡耀邦)과 자오즈양에 가까웠던 자유주의적 색채의 지도층인사들이 함께 정리된 것은 물론이다.차세대를 이끌것으로 확실시됐던 후치리(胡啓立·70) 정치국 상무위원의 실각도 한 예다. 당시 ‘수배 1호’였던 베이징대 사학과생 왕단(王丹·34).6년5개월간의 수감생활을 하다 미국의 도움으로 지난해 4월 풀려난뒤 미 하버드대 학생으로지내고 있다.주요 학생지도자 우얼카이시(吾爾開希·31)는 타이완(臺灣)에서 영주권을 얻어 방송사회자로 생활중이다. 애띤 용모의 여학생 지도자 차이링(柴玲·32).미국에서 인터넷관련 작은 소프트회사를 경영하고 있다.최근 “우리 세대는 톈안먼의 비극을 극복하고 있다”며 미래를 낙관했다. 사태직후 1년여동안 베이징 미대사관에 숨어있던 민주화운동의 정신적 지주 팡리즈(方勵之·63) 허베이 과기대 교수.92년부터 미 애리조나대학에서 물리학을 가르치고 있다. 대부분의 민주화세력들은 아직 지리멸렬한채 통일된 목소리를 갖고 있지 못하다.중국내 반체제 세력과의 연계성도 이뤄내지 못한 상태다. ‘베이징의 봄’과 유혈 탄압 주역들의 모습은 중국정부의 사태의 재평가나 중국내 민주화가 쉽지 않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지표란 점에서 중국의 미래에 대한 우려를 떨칠 수가 없다. 이석우기자 swlee@
  • 6·4 天安門사태 10주년(上)-중국의 시각

    4일은 ‘톈안먼(天安門)사태’ 10주년.탱크를 앞세운 톈안먼광장에서의 무력진압으로 전국에 확산됐던 시위는 수습됐지만 시위대의 요구와 피의 값은 시간이 지날수록 역사의 무게를 더하며 중국 지도부를 내려누르고 있다.두차례에 걸쳐 톈안먼사태의 유산과 주역들의 현황을 알아본다. 톈안먼 사태 10주년을 맞는 베이징(北京)은 겉으론 별다름없이 평온한 모습이라고 외신들은 전한다. 시위와 학살 현장이던 톈안먼 광장.공교롭게 차단막이 둘러쳐진채 대대적인공사중이어서 일반인들이 다가갈 수 없다.올 10월1일 중화인민공화국 수립50주년 기념행사를 위한 공사가 한창이다. 베이징 등 주요도시엔 군·경의 경계령이 내려졌다.티벳,신장 지역에선 다른지역의 군병력까지 증원돼 만일의 사태를 대비중이다.대학엔 외부인 출입이 전면 금지됐고 사복경찰들의 학내 감시가 삼엄해 졌다. 중국정부는 “당시 시위는 반혁명적인 폭란(暴亂)”이란 입장에서 조금도물러서지 않고 있다.사태 발생후 중국공산당은 정치적 자유주의 성향의 지도자들을 몰아냈다.경제 개방을 확대하면서도 ‘이념 단속’을 강화하는 정책을 고수했다.언론 통제와 체제 도전에 대한 탄압강화가 이어졌다. 학생주장에 동정적이던 총서기 자오즈양(趙紫陽)이 실각하면서 전임 총서기후야오방(胡耀邦)으로부터 이어지던 정치적 자유주의 세력이 완전히 맥을 끊겼다.반면 총리로서 진압을 명령했던 리펑(李鵬)은 전인대 위원장으로서 권력핵심에 남아있는 등 가해자들은 건재하다. 이 가운데 10년동안 중국에선 변변한 희생자 추모행사 하나 공개적으로 열릴수 없었다.오히려 올초 장쩌민(江澤民) 총서기는 “사회안정을 최우선 정책과제로 삼고 불안정 요인들을 뿌리뽑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탄압속에서도 시위사태 피해자 가족을 중심으로 진상을 규명해 달라는 ‘탄원성’ 활동도 끊이지 않고 있다.당시 중국정부가 발표한 학생 등 민간인 사망자는 300명선.인권단체들은 1,000∼2,000명이 학살됐다고 주장한다.당시시위대는 부패척결,민주화 확대,물가고 시정 등을 요구했었다. 활동이 원천 봉쇄된 중국내에 비해 홍콩과 해외의 톈안먼 사태 추모활동은활발하다.중국의 특별행정구 홍콩에선 지난달 30일 3,000여명의 시위대가 중국 정부의 사태 재평가를 요구하며 가두행진을 벌였다. 중국인권단체들은 리펑 등 당시 시위진압과 관련된 중국 지도자들을 국제재판소에 제소할 계획이라고 밝히기도 했다.톈안먼 사태의 불꽃이 아직 완전히꺼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석우기자 swlee@
  • 美의회, 對中 제재조치 착수

    워싱턴 최철호특파원 중국이 미국 첨단군사 기술을 절취해왔다는 내용을 상세히 기술한 이른바 콕스보고서가 25일 발표되면서 미국과 중국관계는 한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울 정도로 악화되고 있다. 사안을 정리해 상세히 기술한 보고서를 좋아하는 미 의회가 콕스보고서의공개를 시점으로 클린턴 행정부에 대한 공세를 시작하는 한편 보고서 내용을근거로한 대 중국 조치를 취하기 시작한 것이다. 의회는 행정부의 안보관련조치 미흡을 이유로 샌디 버거 백악관 안보담당보좌관과 빌 리처드슨 에너지부 장관의 문책을 강력히 요구했다. 이들은 핵기술보안과 관련 적절한 조치를 내리지 않은데 대한 책임을 물은것이나 두 사람에 대한 책임론 보다도 민주당과 클린턴행정부의 대중국 정책이 잘못됐음을 지적하는 정치적 공세측면의 의미도 포함됐다고 보인다. 의회는 또 보고서 공개 직후 즉각 중국 톈안먼사태 10주기와 관련,특별보고서를 채택했는데 내용은 지난 89년 6월4일 민주화를 요구한 시위자들을 군대가 유혈진압한 것을 조사할 것과 중국 사법당국이 내린 제재조치를 재심할것,그리고 중국내 인권상황을 더욱 개선할 것 등을 요구하고 있다. 다분히 중국에 대한 압력을 가하는 것임과 동시에 앞으로 중국 관련 의회행보를 가늠하게 해주는 조치이다.의회가 조만간 중국을 상대로 취할 또다른조치는 바로 중국의 세계무역기구(WTO)가입문제와 최혜국대우 연장문제로 예상된다. 이와 관련 윌리엄 데일리 상무장관은 “의회내 중국 비판론자들이 미중교역관계를 안보문제와 연계시키려한다”며 공개적으로 우려하고 나섰으며,미국이 일방적으로 베푸는 최혜국대우는 제재가 가해질 수 있을지 모른다고 미언론들은 우려했다. 이 와중에 오는 6월초 중국방문을 계획했던 코언 국방장관의 일정도 연기돼 유고주재 중국대사관 오폭 이후 관계개선을 모색하던 행정부로서는 움직임을 정지해야만 하는 상황을 그대로 보여줬다. 게다가 지난 96년 대선당시 민주당에 불법선거자금을 지원한 혐으로 기소됐던 민주당 선거자금 모금책 존 황이 이날 유죄를 인정함으로써 민주당과 백악관은 더욱 곤혹스럽게 됐다.중국으로부터의선거자금유입과 중국의 기술절취에 대한 행정부의 느슨한 조치가 자연스럽게 연계됐기 때문이다.아직 중국은 이렇다할 대응은 하지 않고 있으나 어떤 형태든 대응조치가 나올 경우 미중관계에서 더욱 큰 소리가 나올 공산이 크다. hay@
  • 反美시위 中지도부 타격…공산보수파·軍입지 강화

    - 뉴욕타임즈 경고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의 유고 주재 중국대사관 오폭에 대한 항의 시위가확산될 경우 장쩌민(江澤民) 국가주석과 주롱지(朱鎔基)총리등 중국의 개혁지도부가 타격을 입을 수 있다고 뉴욕타임스가 10일 보도했다. 타임스는 중국에서 벌어지는 반미·반나토 시위를 분석한 베이징발 기사에서 “이번 시위를 바라보는 중국 당국의 입장을 명확하게 판단할 수는 없지만 시위에서 분출하는 반미감정과 민족주의는 중국의 개혁노선을 위험한 방향으로 몰고 갈지 모른다”고 경고했다. 신문은 시위대의 과격한 감정은 리펑(李鵬) 전국인민대표대회(全人大)의장을 비롯한 공산당내 보수 강경파와 군수뇌부의 입지를 강화시켜 줄 수 있다고 강조했다. 신문은 “시위자들이 외친 ‘미제국주의 반대’‘마오쩌둥(毛澤東) 만세’와 같은 반외세,민족주의적 구호는 경제개혁 이후 20년 동안 들을 수 없었던 것”이라면서 대미 관계개선 정책의 이면에 잠재했던 중국인들의 또 다른정신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분석했다.타임스는 또 “마오(毛)주석 시절에는중국이 미국에 당당히 맞섰지만 지금의 지도자들은 겨우 미국의 사과 한마디에 기뻐할 뿐이다”라고 말한 한 중국인 교사를 인용하며 일과성 반응이기는 하나 시위가 장기화될 경우 장주석과 주총리에게는 큰 압력으로 작용할지모른다고 분석했다.한편 신문은 다음달 4일 톈안먼 민주화시위 10주년을 앞두고 정국불안을 피하기 위해 당국이 민족주의 정서를 부추기며 시위를 조장한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고 밝혔다.
  • 中 개혁·개방 20돌 현주소

    ◎연평균 9.8% 성장 GDP 20배 늘어/교역액 매년 15.6% 급신장 세계 10위권/홍콩환수로 외환보유액 2,400억弗 세계 1위/都·農 소득격차 확대­실업 급증 등 ‘어두운 그림자’ ‘찬란한 20년(輝煌的 二十年)’. 중국이 18일 경제 개혁·개방노선을 표방한지 20주년을 맞아 그동안의 경제발전 성과를 함축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1978년 12월18일 부도옹(不倒翁) 덩샤오핑(鄧小平)의 권력무대로의 복귀와 함께 중국은 사회주의체제 아래에서 자본주의 요소를 도입하는 전인미답의 개혁·개방노선을 추구해왔다. 그후 20년이 지난 오늘 중국의 위상은 89년 톈안먼(天安門)사태,지난해 2월 덩샤오핑 사망 등 크고 작은 난관에도 흔들리지 않고 ‘세계 유일의 강국’ 미국의 견제를 받을 만큼 높아졌다. 시장경제를 목표로 한 실사구시의 노선에 따라 수행된 중국의 경제발전은 한마디로 괄목할 만하다. 지난 78년 3,624억위안(元)에 불과하던 국내총생산(GDP)은 97년 7조4,772억위안(약 9,020억달러)으로 거의 20배 증가했다. 연평균 9.8%라는 경이적인 성장세를 보인셈이다. 세계은행(IBRD)에 따르면 지난해 GDP규모는 미국 일본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에 이어 세계 7위. 특히 중국의 지난해 1인당GDP는 860달러에 불과하지만 구매력 기준 3,000달러로 분석했다. 그 덕분에 중국은 석탄생산량에서 세계 1위를 지켰고 곡물 목화 유채씨 돼지 소 말 강철 시멘트 TV 등도 세계 10위권에서 1위로 도약했다. 화학비료 생산 2위,발전량 4위,원유 생산 5위로 각각 뛰어올랐다. 대외무역의 성장도 눈이 부실 정도다. 78년 206억달러였던 교역액은 연평균 15.6% 성장하며 97년 3,250억달러로 급증,세계 10위로 발돋움했다. 특히 외환보유고는 1억6,700만달러에서 지난해 말 1,399억달러로 2위로 올라섰다. 반환된 홍콩까지 포함하면 2,500억달러를 웃돌아 일본을 제치고 사실상 세계 1위이다. 반면 경제발전의 성과 못지않게 어두운 그림자도 드리우고 있다. 도시와 농촌간의 소득격차와 국유기업의 개혁으로 생기는 실업자 양산이 그것이다. 개혁의 시발점이던 농촌의 가구당 순수입은 2,090위안으로 도시가구의 수입 5,160위안의 절반에도못미친다. 31개 성·시 가운데 광둥(廣東)성 등 ‘부자’ 지방은 8,562위안인 데 비해 간쑤(甘肅)성은 3,500위안에 머무르고 있다. 국유기업의 개혁으로 ‘철밥통’이 깨지며 실업률은 2,000만명을 넘어서며 9%선으로 급증한 점도 중국이 우려하는 그림자이다. □중국 개혁·개방 일지 ◇1978년 ·공산당 11기 3중전회, 개혁개방 채택 ·덩샤오핑(鄧小平) 집권 ◇1979년 ·광동성 주하이·선전에 경제특구 ◇1984년 ·11기 3중전회, 계획상품경제 인정 ◇1987년 ·1월:후야오방(胡耀陽) ·10월:자오쯔양(趙紫陽), 사회주의 초급단계론 제시 ◇1989년 ·천안문 사태, 자오쯔양(趙紫陽) 실각 ◇1992년 ·1월:덩사오핑 개혁개방 가속화 촉구한 난순장화에 나섬 ·10월:사회주의 시장경제 당 목표로 확정 ◇1997년 ·2월:덩샤오핑(鄧小平) 사망 ·9월:사유제의 실제인정, 소유제의 다양화 ◇1998년 ·10월:15기 3중전회, 제2의 농촌개혁 선언
  • 서명 없는 ‘中·日 공동선언’ 파문/‘과거사’ 갈등의 불씨 내연

    ◎21세기 동반자관계 ‘삐끗’ 【도쿄 黃性淇 특파원】 도쿄(東京)에서 26일 있은 중국과 일본의 정상회담 이후 발표된 ‘중일 공동선언’에 양국 정상의 서명이 빠져있어 파문을 낳고 있다. 일본측은 “당초부터 서명은 하지 않기로 했다”고 밝히고 있지만 일본측의 미흡한 과거사 사죄에 장쩌민(江澤民) 주석이 불만을 느꼈기 때문이라는게 대체적인 관측이다. 중국측은 지난 10월 金大中 대통령의 방일 때 한·일 정상이 발표한 공동선언에서 일본측이 ‘통절(痛切)한 반성과 사죄’를 명기한 점을 들어 중·일 공동선언도 같은 수준이 돼야 한다는 점을 강력히 요구해왔다. 일본측은 그러나 72년 중·일 공동성명과 78년 우호조약 등 공식문서에 침략의 과거사를 사과했기 때문에 새삼스럽게 사죄 명기는 곤란하다고 거부했다. 타이완(臺灣) 문제나 경제협력 등 대부분의 외교현안에 합의해 놓았던 두나라는 장주석의 방일 하루 전인 24일에서야 외무장관 회담을 통해 “정상회담에서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 총리가 구두로 사죄를 표명하되 선언에는 ‘중국침략’과 ‘반성’만을 명기키로 가까스로 절충했다. 일본 정부가 과거사 문제에 대해 이처럼 소극적인 것은 자민당 내 보수세력의 반발 때문인 것으로 전해진다. 일본의 한 외교소식통은 “자유당과 연립정권을 수립키로 한 이후 자민당의 보수화가 두드러지고 있다”면서 “이들은 ‘언제까지 사죄를 해야 하느냐’고 반발하고 있다”고 전해졌다. 그러나 중·일 공동선언에 두 나라 정상의 서명이 없다고 이 선언의 효력이 없는 것은 아니다. 선언에서 합의한 일본의 3,900억엔 엔차관 공여나 중국 내륙개발에 대한 일본정부와 민간기업의 지원 등은 선언발표와 함께 효력이 발생한다. 중국 국가주석으로는 처음으로 장쩌민(江澤民) 주석을 불러들여 급격히 가까워지는 미국과 중국관계에 제동을 걸려고 했던 일본으로선 과거사 문제로 용을 그려놓고 마지막으로 눈알을 그려넣는 화룡점정(畵龍點睛)에는 실패한 셈이다. ◎중·일 관계 일지 ▲72년 9월=중·일 공동성명 조인 ▲78년 8월=중·일 평화우호조약 조인 ▲88년 5월=오쿠노(奧野) 국토청장관 “중국에 대한 침략의 의도는 없었다”고 망언. 오쿠노 장관 사임 ▲89년 6월=톈안먼(天安門)사건으로 일본 제3차 엔차관 및 각료급 접촉 동결 ▲91년 8월=가이후 도시키(海部俊樹) 총리 방중 ▲92년 4월=장쩌민(江澤民) 총서기 방일 ▲95년 8월=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 총리 전후 50년 담화발표,중국 핵실험 ▲97년 9월=하시모토 류타로(橋本龍太郞) 일본총리 방중 ▲97년 11월=리펑(李鵬) 중국총리 방일 ▲98년 4월=후진타오(胡錦濤) 중국 국가부주석 방일
  • 楊尙昆 前 中 국가주석 사망

    ◎天安門 시위 무력진압 장본인… 92년 실각 【베이징 AFP 연합】 중국 공산혁명의 원로인 양상쿤(楊尙昆) 전 중국 국가주석이 14일 향년 92세로 숨졌다고 신화(新華) 통신이 보도했다. 양 전 주석은 베이징(北京)에서 질병으로 사망했다고 통신은 전했으나 구체적인 병명은 밝히지 않았다. 중국 건국에 공이 큰 8명의 원로중 한명인 양 전 주석은 지난 88년 국가주석직에 취임한 뒤 다음해 톈안먼(天安門) 민주화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했으며 92년 권력투쟁에서 밀려 실각했다. 지난 1907년 쓰촨(四川)성에서 태어난 양 전 주석은 25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했으며 3년간의 모스크바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34∼35년의 대장정에도 참가했다. 양 전 주석은 지난 49년 중국 건국 이후 요직을 거쳤으나 66년 문화대혁명 기간중 반혁명 공상주의자로 몰려 숙청돼 12년간 권력에서 축출됐다가 덩샤오핑(鄧小平)이 권력을 장악한 이후 경제개혁을 추진하면서 78년 복권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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