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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씨줄날줄] 트위터/박정현 논설위원

    인터넷 진화의 속도가 엄청나다. 싸이월드, 미니홈피, 블로그가 유행인가 하더니 이제는 트위터 시대다. 트위터가 새로운 의사소통 수단으로 관심을 모은다. 이명박 대통령이 미국 순방 길에 트위터 가입을 생각해 보려 한다고 말했고, 트위터에 가입한 청와대 비서관도 있다. 피겨 여왕 김연아의 트위터 가입이 국내 트위터 바람에 이미 불을 지폈다. 김연아가 캐나다 전지훈련 도중에 트위터에 가입했다는 소식에 팬들이 가입했고, 김연아의 트위터 친구 개념인 팔로워 가입자가 1만 5000명을 넘어섰다. 트위터는 인터넷 단문 메시지를 통해 의사소통을 하는 일종의 미니 블로그라고 할 수 있다. 미니 홈피와 블로그는 사진과 다양한 글을 올리면서 관리해야 하는 수고를 감수해야 한다. 하지만 트위터는 예를 들어 ‘지금 내가 보는 TV 프로그램이 재미있네’라는 간단한 메시지만 기록하면 된다. 트위터 사이트(twitter.com)에 무료로 가입해 영어 또는 한글로 메시지를 남길 수 있으며, 140자를 넘길 수 없다. ‘cnnbrk’라는 아이디와 친구를 맺기만 하면 CNN 뉴스 속보를 휴대전화로 받아볼 수도 있다. 대통령 선거 불복 시위가 벌어지고 있는 이란에서는 트위터 열풍이 한창이라고 한다. 트위터에는 ‘이란 대선’이란 코너가 신설돼 시위 관련 정보와 의견을 올릴 수 있다. 대선 결과에 항의하는 시위 확산을 막기 위해 신문·방송 등의 언론을 통제하고 있는 이란 정부는 트위터가 빠른 속도로 확산되자 인터넷 접속을 차단해 버렸다. 하지만 네티즌들은 정부의 접속 차단의 벽을 뚫고 우회경로를 통해 트위터에 접속하고 있다. 트위터를 이용하는 이란 사람들은 “트위터가 없다면 세계와 단절된 것 같다.”고 말할 정도로 트위터가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중국 정부도 톈안먼 사태 20주년을 맞아 트위터 등의 사이트를 차단했다. 자고 나면 새로운 성능의 컴퓨터가 나와 하루이틀 미루다 죽을 때까지 컴퓨터를 사지 못했다는 얘기가 있다. 새로운 의사소통 수단이 나오면 다음에는 또 무슨 첨단 방법이 나올지 궁금해진다. 인터넷 진화 속도보다 빠른 부작용이 어떤 형태로 나올지도 걱정스럽다. 박정현 논설위원 jhpark@seoul.co.kr
  • 무사비 “대규모 집회” 반격, 헌법위 “대화하자” 진화나서

    이란 대통령 부정 선거 시비로 촉발된 대규모 시위가 확산되고 있는 가운데 선거에 패배한 미르 호세인 무사비 전 총리가 반격 카드를 뽑아들었다. 그는 17일(현지시간) “민병대의 발포로 숨진 사망자들에 대한 대규모 추모집회를 진행하라.”고 촉구했다. 이에 18일 테헤란 등 주요도시에서는 촛불을 들고 검은옷을 입은 시민들의 추모 물결이 일렁였다. 긴장이 고조되자 헌법수호위원회는 황급히 ‘진화’에 나섰다. 이날 시위 직전 위원회 측은 선거에서 패한 후보 3명을 20일 열릴 회의에 초청했다며 “이들이 제기한 불법투표 사례 646개에 대한 ‘면밀한 조사’에 착수했다.”고 밝혔다. ●시위대, “18~19일 총력전” 이날 집회에는 무사비 후보도 참가했다. AP는 “이슬람 국가인 이란은 목·금요일이 휴일이기 때문에 18일 시위대가 폭발적으로 늘어날 것”이라고 전망했다.따라서 1979년 이슬람혁명 이후 최대 규모를 기록했던 이란의 대규모 시위는 18~19일 중대한 고비를 맞을 전망이다. 전국적으로 시위 인파가 불어난다면 향후 시위 전개 양상이 새로운 동력을 얻을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소강상태로 접어들 수도 있다. 인터내셔널헤럴드트리뷴(IHT)은 “이번 시위는 중국의 톈안먼 사태와 같은 대규모 유혈 사태로 귀결될 수 있다.”면서 “학생만이 주도 세력이 아닌 데다 무사비라는 구심점이 존재하고, 지엽적 이슈가 아닌 대선에 대한 불만이 도화선이 됐기 때문에 과거의 시위와는 차별화된다.”고 시위 확대를 점쳤다. ●정부, “내정 간섭 카드로 난국 타계” 상황이 급박해지자 이란 정부는 국민의 관심을 밖으로 돌리기 위해 부단히 애를 쓰고 있다. 특히 서방 국가들이 ‘내정 간섭’을 하고 있다며 이들과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물론 그 핵심에는 이란의 숙적(?) 미국이 있다. 이란 정부는 이날 이란에서 미국의 이익대표부 역할을 하고 있는 스위스 대사를 불러 항의했다.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을 비롯해 존 바이든 부통령 등이 “이번 사태에 대해 ‘우려’를 갖고 있다.”고 말한 것이 화근이 됐다. 미국은 이에 즉각 반발, “우리는 이번 대선에 대해 판단을 유보하고 있다. 미국은 이란 내정에 결코 간섭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밝혔다. 앞서 이란 외교부는 이번 대선에 대해 우려 발언을 한 EU 순회의장국인 체코와 프랑스, 영국 대사 등을 불러 항의했다. 이란 정부가 서방 국가들을 강하게 공격하고 있는 것은 부정 선거 의혹을 제기하고 있는 국가들에 대한 불만이 가장 큰 이유겠지만 국민들의 반(反) 서구 감정을 이용, 시위에 대한 관심을 밖으로 돌리려는 의도로 해석된다. 특히 로이터통신은 “이란 정부는 이번 시위대를 향해 ‘폭도’로 규정하면서 ‘폭동이 외국인들에 의해 조직됐다.’는 논리를 내세우고 있다.”고 보도했으며, 미국의 CNN 방송도 “이란 정부가 ‘외국 언론들로 인해 시위가 더 격화되고 있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고 전해 ‘서구 책임론’을 부각시키고 있다. 내정 간섭 카드를 통해 난국을 타개하고 보수층을 결집시키겠다는 속내가 작용했다는 분석이다. 하지만 서방 국가와는 달리 주변 아랍 국가들은 입을 열지 않고 있다. AP통신은 레바논 카네기 중동센터의 폴 살렘 소장의 말을 인용, “아랍 국가들은 이란 정부와 맞서 불리한 처지에 놓이는 것을 원치 않는다.”면서 “그들은 이란을 두려워하고 적으로 돌리지 않길 바란다.”고 분석했다. 이경원기자 leekw@seoul.co.kr
  • [특파원 칼럼] 톈안먼 주역들의 안타까운 절규/김균미 워싱턴특파원

    [특파원 칼럼] 톈안먼 주역들의 안타까운 절규/김균미 워싱턴특파원

    “우리가 중국을 떠나 망명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중국에서 잊혀졌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4일 미국 워싱턴 시내에서는 아침부터 톈안먼(天安門) 사태 20주년 행사들이 잇따라 열렸다. 이날 오전 내셔널프레스빌딩에서는 대학생 시위를 주도했던 왕단(王丹) 등 톈안먼 주역 50여명이 기자회견을 갖고 중국 정부와 인권 탄압 및 언론 통제 등을 하는 중국 정부에 ‘침묵’하는 미국 정부를 함께 비판했다. 그런가 하면 의회에서는 ‘톈안먼의 세 영웅들’로 불리는 톈안먼 주역들이 청문회에 출석했다. 루더청(德成), 위즈젠(余志堅), 위둥웨(喩東岳)는 1989년 5월23일 톈안먼 광장에서 중국 공산당의 상징이었던 마오쩌둥(毛澤東) 초상화에 물감 달걀을 투척, 수년간 수감생활을 한 뒤 미국과 캐나다로 망명한 중국 반체제 인사들이다. 미 의사당 앞에서는 중국 반체제 운동가와 미 의원들이 미 정부에 중국의 민주화를 위해 지원을 늘릴 것을 요구했다. 이들은 중국이 놀라운 경제성장을 이루며 국제사회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커졌지만 20년 전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며 외친 정치적 민주화와 개혁은 제자리걸음이라고 지적했다. 또 국제적 경제위기와 기후변화, 북핵 위기 등을 해결하는 데 중국의 역할을 의식해 미국 등 서방 선진국들이 중국에 유화정책을 펴고 있는 것은 잘못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잇따라 열린 톈안먼 20주년 행사들을 지켜보면서 톈안먼 주역들의 정치적 요구나 비판보다 더 오래, 더 깊이 귀에 남아 있는 말이 있다. 바로 “우리가 중국인들에게서 잊혀지고 있다.”는 절규다. 재결합 행사에 참여한 톈안먼 주역들은 자신들이 중국인들, 특히 ‘포스트 톈안먼 세대’인 20대에게 낯선 존재라는 사실을 지적했다. 일부는 경제적·사회적 성공에만 집착하는 20대, 돈만을 좇는 중국의 젊은 세대들의 세태를 안타까워했다. 이들의 지적처럼 중국은 지난 20년간 괄목할 만한 경제적 성장을 이뤘다.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1978년 이후 연평균 9% 이상의 경제성장률을 이어왔다. 1인당 국민소득도 55달러에서 2008년 6000달러로 109배나 급증했다. 이 과정에서 개인주의가 팽배하고 있다. 이 같은 톈안먼 주역들의 안타까움이 묻어 있는 주장들을 들으면서 “중국만의 일은 아닌데…”하는 생각이 스쳤다. 한국에서도 1980년대 민주화를 이끌었던 이른바 ‘386세대’들은 지금 젊은 20대에 대해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다. 미국에서도 1960~70년대 민권운동과 반전시위에 참여했던 세대들은 요즘 젊은 세대들을 보면서 정치적 무관심을 문제로 지적하곤 한다. 하지만 이런 우려들은 기성 세대의 눈으로 젊은 세대를 보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소통방식과 표현양식은 달라졌지만 젊은 세대들의 정치참여는 꾸준히 늘고 있다. 한국이나 미국 모두 대통령 선거에서 젊은 유권자층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더욱이 지난해 미 대통령 선거에서 미 역사상 최초의 흑인 대통령을 탄생시킨 저변에는 젊은 세대의 적극적인 선거 참여가 깔려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런 가운데 기회 있을 때마다 젊은 층의 사회참여를 적극 독려하는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의 행보는 눈여겨볼 만하다. 1960년대 평화봉사단과 1990년대 아메리코에 이어 상대적으로 경쟁력이 떨어지는 교육현장에 젊은 세대의 참여를 요구하고, 이를 정책적으로 지원하는 계획도 밝혔다. 말로만 ‘나’만이 아닌 ‘우리’를 생각하라고 독려할 게 아니라 정책으로 뒷받침하며 사회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기성세대가 할 몫이 아닌가 싶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김균미 워싱턴특파원 kmkim@seoul.co.kr
  • 톈안먼 사태 20주년…중국은 통제하고 홍콩은 촛불들고

    │베이징 박홍환특파원│톈안먼(天安門) 사태 20주년을 맞은 4일 베이징은 삼엄한 경비와 통제 속에 하루를 보냈다. 하지만 중국에서 유일하게 톈안먼 사태를 거론할 수 있는 홍콩에서는 희생자를 추모하고 중국 정부에 진상공개를 촉구하는 사상최대 규모의 집회가 열렸다. 비극적 사건의 현장인 톈안먼 광장에는 평소의 두 배가 넘는 공안(경찰)과 무장경찰이 배치돼 희생자 유족들의 추모 집회 등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 쇠울타리로 둘러쳐진 광장 출입 통제도 한층 강화됐다. 공안들은 X선 보안검색대에서 조금이라도 이상한 물건이 발견되면 신분증을 제시토록 하는 등 바짝 신경이 곤두선 모습이었다. 앞서 베이징대 주변의 유명 서점과 카페 등에는 공안들이 순찰을 돌며 양초 등 촛불시위 용품을 비치하지 말도록 지시하는가 하면 베이징대 등 시내 대학들은 ‘흰옷 착용 금지령’을 내려 추모 분위기 조성을 원천봉쇄하기도 했다. 자식을 잃은 어머니들의 모임인 ‘톈안먼 어머니’ 대표 딩쯔린(丁子霖) 등은 자택에 연금됐고, 자오쯔양(趙紫陽) 전 공산당 총서기의 비서로 그의 회고록 집필을 도운 바오퉁 등은 시 외곽 모처로 옮겨져 연락이 닿지 않았다. 인터넷도 사정은 마찬가지. 논의가 이뤄질 만한 사이트는 모두 폐쇄됐다. 이날 현재 각 대학의 인터넷 게시판 등 6000여개의 사이트가 폐쇄됐다고 홍콩의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가 보도했다. 지난 3월부터 봉쇄됐던 동영상 공유사이트 ‘유튜브’는 물론 단문 메시지 송수신 서비스 ‘트위터’ 등에 대한 접속도 차단됐다. 대륙의 철저한 통제와는 달리 홍콩 등에서는 희생자 추모와 진상규명 요구가 하루종일 이어졌다. 홍콩에서는 이날 밤 빅토리아 공원에서 15만여명이 모여 촛불집회를 열었다. ‘중국의 애국주의적 민주화 운동을 지지하는 홍콩 연대’ 주최로 열린 집회는 희생자 추모, 민주화시위 주역 연설, 자오쯔양 육성 녹음 청취, 청년선언 발표 등의 순으로 진행됐다. 톈안먼 사태 당시 학생지도자들인 슝옌과 왕단(王丹)은 각각 이날 홍콩 집회와 미국 언론을 통해 중국 정부에 진상공개와 재평가를 요구했다. 지난해 취임 이후 중국과 우호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마잉주(馬英九) 타이완 총통 역시 이례적으로 “이 같은 아픈 시기의 역사는 반드시 공개해야 하고, 의도적으로 숨겨서는 안 된다.”며 진상공개를 요구했다.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도 이날 발표한 성명에서 “중국은 톈안먼 시위로 사망했거나 실종된 사람들의 명단을 공개해야 한다.”며 중국을 압박했다. 그러나 중국 정부는 내정간섭을 중단하라며 강력히 반발했다. 친강(秦剛)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4일 정례브리핑에서 “미국의 근거없는 주장은 국제법과 중·미 공동성명 3개항의 합의를 위반한 것일 뿐 아니라 중국의 내정에 간섭하려는 것”이라고 반박했다. stinger@seoul.co.kr
  • 진압 군인, 톈안먼 소재로 작품활동 “사람들과 내 경험 공유”

    톈안먼 광장에서 일어난 비극의 희생자는 시위 참여자와 그들의 가족만이 아니다. 명령에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었던 군인들에게도 1989년 6월4일 톈안먼의 일은 씻을 수 없는 상처다. 화가를 꿈꿨지만 가난 때문에 나이를 속여가면서 17살 때 군에 입대했다가 시위진압에 투입됐던 첸광. 그가 이제는 그날의 상처를 예술로 표현하고 있다고 뉴욕타임스는 3일(현지시간) 보도했다. 톈안먼 사태 이후 군예술학교에 입학해 미술을 전공, 1995년 제대한 그는 창녀의 모습을 찍거나 자화상을 그리는 등 톈안먼과는 거리가 먼 작품활동을 주로 했다. 하지만 지난해부터는 당시 지휘관의 명령으로 촬영했던 사진들을 바탕으로 작품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그는 “20년간 그날의 사건을 묻어버리려고 노력했지만 나이가 들수록 이런 기억들은 더욱 수면으로 떠오르기 마련”이라며 “이제는 내 경험, 진실을 세상 사람들과 공유해야 할 때가 됐다.”고 말했다. 당시 시위를 진압했던 다른 군인 한 사람이 지난해 봄 AP통신과 인터뷰 후 체포됐다. 같은 해 여름 첸은 전시회를 열고 싶었지만 갤러리들이 거절해 무산됐다. 결국 인터넷에 게재했지만 몇 시간 후 내려야만 했다. 톈안먼 사태를 소재로 한 작품 활동과 언론과의 인터뷰는 톈안먼 사태 20주년을 맞아 잔뜩 긴장한 정부를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그는 “난 잘못한 것이 없다. 난 그저 내 경험을 얘기할 뿐이다.”라고 말했다. 나길회기자 kkirina@seoul.co.kr
  • “中, 유엔의 톈안먼 진상조사 수용해야”

    톈안먼 사태 20주년을 맞아 미국 하원이 중국에 유엔 차원의 진상 조사를 받아들일 것을 촉구하는 내용의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AFP통신은 미 하원이 2일(현지시간) 톈안먼 사태 희생자를 기리고 정치범 석방을 요구하는 등의 내용을 담은 결의안을 찬성 396명, 반대 1명, 기권 37명으로 통과시켰다고 보도했다. 특히 이 결의안은 톈안먼 사태에 대한 전면적이고 독립적인 조사를 유엔 인권고등판무관실과 적십자에 맡길 것을 촉구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또 당시 시위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여전히 수감 생활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수십명의 정치범 석방도 요구하고 있다. 공화당 출신 캘리포니아주 하원의원인 다나 로라바커는 “20년 전 오늘 중국 정부는 전세계에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무장하지 않은 사람들도 기꺼이 죽일 수 있는 범죄 집단임을 확인시켜 줬다.”고 결의안 찬성 이유를 밝혔다. 그동안 중국은 자국의 인권 문제에 다른 국가가 개입하는 것에 대해 늘 불쾌감을 표시해 왔다. 이번 결의안 역시 중국의 반발을 살 것으로 예상된다. 나길회기자 kkirina@seoul.co.kr
  • [4일 20돌 맞는 中 톈안먼 사태]쇠울타리로 광장 봉쇄… ‘톈안먼’ 여전히 금기

    [4일 20돌 맞는 中 톈안먼 사태]쇠울타리로 광장 봉쇄… ‘톈안먼’ 여전히 금기

    │베이징 박홍환특파원│마오쩌둥(毛澤東) 주석은 여전히 엷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양 어깨에는 ‘중화인민공화국 만세’ ‘세계인민 대단결 만세’라는 엄청난 구호를 짊어진 채 그는 여전히 톈안먼(天安門) 광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톈안먼 사태 20년, 지금의 톈안먼에는 20년전 광장을 가득 메웠던 청년학생들의 민주화 열기는 온데간데없고, 중국 전역과 세계 각지에서 몰려든 관광객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톈안먼 사태 20주년 기념일을 나흘 앞둔 지난 31일 오후, ‘혹시나’ 하는 기대와 함께 향했던 톈안먼 광장행은 ‘역시나’로 막을 내렸다. 20년전인 1989년 5월의 마지막날 중국의 청년학생들은 중난하이(中南海·중국 고위관리 집무 지역)를 향해 민주개혁을 요구하는 뜨거운 목소리를 토해 내고 있었다. 하지만 2009년 5월의 마지막날 톈안먼 광장에는 함성은커녕 조용한 목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깃발’을 따라 움직이는 국내외 관광객들은 ‘그날’의 의미를 되새기기보다는 톈안먼에 내걸린 마오쩌둥 초상화를 배경으로 사진찍기에 여념이 없었다. 단오절 연휴를 맞아 후난(湖南)성 창사(長沙)에서 올라왔다는 왕청(王誠·24)은 톈안먼 사태를 지칭하는 ‘6·4’에 대해 물어보자 “들어보긴 했지만 아주 어릴적 일이라 잘 알지 못한다.”며 손사래를 쳤다. 지금 중국에서 ‘톈안먼’은 철저히 봉쇄돼 있다. 광장 전체를 쇠울타리로 둘러치고, 출입자에 대한 삼엄한 소지품 검사를 진행하는가 하면 곳곳에는 공안(경찰)과 무장경찰이 배치돼 눈을 번득이며 수상한 거동자를 찾기에 여념이 없다. 톈안먼 사건은 이미 금기어로 지정돼 있다. 인터넷 검색어로 ‘톈안먼 사건’과 ‘6·4’를 입력하면 “검색 결과 법규와 정책에 맞지 않아 보여줄 수 없다.”는 메시지만 뜬다. 하지만 강요된 침묵은 오래갈 수 없고, 원천봉쇄 역시 있을 수 없는 법이다. 중국의 네티즌들은 ‘6521공정’(건국 60주년, 티베트 봉기 50주년, 톈안먼 사태 20주년, 파룬궁 금지 10주년을 지칭) ‘20주년’ 등의 검색어를 이용해 관련 내용을 찾아볼 수 있고, 진실을 알리려는 배달부들은 그 허점을 파고들고 있다. 지난달 10일 베이징에서는 톈안먼 사태 재평가와 관련된 학술토론회가 비공개로 열렸다. ‘6·4 민주운동 토론회’로 명명된 이날 토론회에는 베이징대와 중국사회과학원 교수, 작가, 유가족 등 수십명이 참석했다. 마침 당일은 중국의 ‘어머니날’이기도 해 참석자들은 토론회 시작에 앞서 모두 일어나 20년전 소중한 아들딸을 잃은 어머니들에 대한 위로의 마음을 담아 3분간 묵념했다. 첫번째 발표자로 나선 베이징대 첸리췬(錢理群) 교수는 “20년전 많은 학생들이 중국 민주화를 위해 목숨을 바칠 때 교수로서 그들을 보호하지 못한 것이 지금까지 큰 한으로 남아 있다.”며 “정치가들은 ‘6·4’를 재평가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학자들이 나서서 ‘6·4’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를 시작해야 한다.”고 말했다. 중국사회과학원의 쉬유위(徐友漁) 연구원은 ‘1989년부터 2009년까지’라는 제목의 발표 논문에서 “당대 중국 역사와 정치, 그리고 사상의 분수령이었다.”고 톈안먼 사태를 평가한 뒤 “비록 중국의 정치제도를 바꾸지는 못했지만 정치제도 변화를 준비하는 사상적 조건에 대해 말한다면 ‘6·4’는 정치제도 변화의 시작점이라고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날 발표된 논문들은 블로그를 통해 비밀스럽게 인터넷상에서 유통되고 있다. 강요된 침묵을 비집고 솟아나오는 이런 ‘반발력’을 중국 정부가 과연 끝까지 통제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 stinger@seoul.co.kr
  • 대부분 망명… 왕단, 英 옥스퍼드대 객원연구원

    대부분 망명… 왕단, 英 옥스퍼드대 객원연구원

    │베이징 박홍환특파원│20년이 흐른 지금, 당시 20대 초중반이었던 시위 주역들은 장년이 돼 중국 밖에서 톈안먼을 거론하고 있고, 당시 60~70대였던 진압 주역들은 대부분 세상을 뜨거나 은퇴했다. 21명의 학생 지도자 가운데 서방에 망명한 인사는 왕단(王丹) 등 11명이며, 중국에 남아 있는 10명 중 3명은 행방이 묘연하다. 톈안먼 사태의 상징적 인물인 왕단은 10년간 중국에서 수감생활을 하다 1998년 미국으로 망명했다. 하버드대학에서 역사학 박사과정을 마친 뒤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객원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 오는 9월부터 타이완 국립정치대에서 조교수로 강의를 시작할 예정이다. 신장(新疆)위구르자치구 출신의 우얼카이시(吾爾開希)는 프랑스와 미국에서 유학한 뒤 ‘해외중국민주전선’을 결성, 민주화운동을 계속하다가 타이완에 정착해 TV 사회자로 활동하고 있다. 여학생 지도자 차이링(柴玲)은 하버드대 경영학 석사과정을 마친 뒤 금융회사에서 일하고 있고, 공산주의청년단(共靑團) 소속이었던 왕쥔타오(王軍濤)는 1991년 체포된 뒤 13년형을 선고받고 수감생활을 하다 1994년 미국으로 건너갔다. 맨 몸으로 4대의 탱크를 막았던 왕웨이린(王維林)은 타이완으로 피신, 타이베이(臺北) 고궁박물관의 고문으로 있다. 1992년 홍콩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 현재 미군 소속 목사로 목회 활동을 하고 있는 슝옌은 홍콩 시민단체의 초청으로 20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최근 17년만에 홍콩을 방문했다. 무력진압의 책임자들은 대부분 사망했다. 최고지도자 덩샤오핑(鄧小平)은 은퇴 후에도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다가 1997년 2월 세상을 떴고, 군부를 움직였던 양상쿤(楊尙昆)과 천윈(陳雲), 리셴녠(李先念) 등 보수파 지도자들 역시 1990년대에 모두 사망했다. 하지만 당시 총리였던 리펑(李鵬)은 1998년 권력 핵심에서 물러난 뒤에도 최근 10권의 책을 쓸 정도로 건강하다고 딸인 리샤오린(李小琳)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 위원이 전했다. stinger@seoul.co.kr
  • 톈안먼 사태 시작과 끝

    │베이징 박홍환특파원│톈안먼 사태는 1989년 6월4일 유혈진압으로 막을 내렸지만 학생들의 시위는 그로부터 한달보름 전쯤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학생들의 시위에 온건하게 대처했다는 이유로 1987년 1월 실각한 후야오방(胡耀邦) 전 공산당 총서기가 1989년 4월15일 사망하자 대학생들은 잇따라 애도 집회를 열어 그의 서거를 아쉬워했다. 베이징대 등 대학가에 후야오방의 개혁주의 치적을 기리는 대자보가 나붙기 시작했고, 급기야 4월18일에는 대학생 1000여명이 최고 권부인 중난하이(中南海)로 몰려가 그의 복권을 요구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장례식이 열린 4월21일에는 대학생과 지식인 등 20만명이 톈안먼 광장에 운집했다. 곳곳에서 소형 마이크를 든 학생들이 ‘언론 및 집회결사의 자유’ 등 대대적인 민주개혁을 거론했다. 정부의 반격은 4월26일자 관영 인민일보 사설로 시작됐다. “반드시 ‘동란’에 반대하는 정치적 태도를 가져야 한다”는 제목의 사설은 학생들의 시위를 반사회주의, 반공산당으로 규정했다. 학생과 지식인들은 자신들의 민주화 요구를 매도한 사설에 더욱 반발했고, 5월13일부터는 대학생 수천명이 톈안먼 광장에서 단식투쟁으로 맞섰다. 시위가 사그라들 기미를 보이지 않자 중국 지도부는 5월17일밤 회의를 열어 베이징 일부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키로 결정했다. 진압 기회를 엿보던 중국 정부는 마침내 6월3일부터 발포를 시작, 4일 대대적인 유혈 진압 작전을 펼쳐 시위를 끝장냈다. 사망자 숫자와 관련해선 아직도 정확한 집계가 나오지 않고 있지만 당시 관영 신화통신의 국내뉴스부 주임이었던 장완수(張萬舒)는 최근 펴낸 ‘역사의 대폭발’이라는 책에서 희생자가 민간인 713명, 군인 14명 등 727명에 달한다고 주장했다. stinger@seoul.co.kr
  • 왕단 “中 근육만 있고 두뇌가 없다”

    │베이징 박홍환특파원│1989년 톈안먼(天安門) 민주화운동 20주년을 앞두고 시위 주역들의 목소리가 중국 본토가 아닌 홍콩에서 잇따라 흘러나오고 있다. 당시 베이징대 역사학과 학생으로 학생시위를 주도한 왕단(王丹)은 31일 홍콩 명보(明報)와의 인터뷰에서 “중국은 강대국이지만 근육만 있고, 두뇌가 없다.”며 경제성장에도 불구하고, 민주화가 뒤처진 중국을 우회적으로 비판했다. 그는 “현재 중국은 날마다 경제발전을 하고 있지만 나는 아직 중국에 대해 자부심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며 “정신문명이나 정치문명이 발전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톈안먼 민주화운동의 실패 여부에 대해서는 “민주화를 추진하라는 학생들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실패했다고 볼 수 있다.”면서도 “공민사회(公民社會) 발전의 계기가 됐다는 측면에서는 실패했다고만 볼 수 없다.”고 말했다. 시민단체 등 각종 민간단체의 부상을 톈안먼 민주화운동의 성과 가운데 하나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왕단은 톈안먼 사태 후 두 차례에 걸쳐 7년 동안 수감생활을 하다 1998년 클린턴 당시 미국 대통령의 중국 방문을 앞두고 석방됐다. 이후 미국으로 망명, 하버드대에서 역사학 박사과정을 마친 뒤 지난해 10월부터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객원연구원으로 재직하고 있다. 오는 9월 타이완 국립정치대 조교수로 임명될 예정이다. 한편 17년 만에 홍콩을 방문한 슝옌도 이날 홍콩 언론들과의 인터뷰에서 “중국인들이 미국인들처럼 자유롭게 살 수 있도록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을 계속할 것”이라고 말했다. 슝옌은 옥고를 치른 뒤 1992년 미국으로 망명, 현재 미군 소속 목사로 재직 중이다. stinger@seoul.co.kr[다른 기사 보러가기] ☞꽃게는 잡지만 7년 전 악몽이 ☞핵우산 명문화 추진 왜 ☞장병은 줄어드는데 ★들은 늘어 ☞”소통이 곧 민주주의” 정부가 솔선해야 ☞유족들 대국민 감사글 전문 ☞민속마을 고택 사들여 술판 ☞뽀송뽀송하게 운전하려면 ☞”분양권 뜬다던데” 큰코 안 다치려면  
  • 방중 펠로시 美하원의장 인권문제에 “…”

    │베이징 박홍환특파원│“펠로시 의장을 환영합니다. 중국의 인권문제에도 관심을 가져주세요.” 25일과 27일 삼엄한 공안(경찰)들의 경계망을 뚫고 베이징 도심에서 두 차례의 기습 시위가 벌어졌다. 지방에서 상경한 민원인들의 이번 기습 시위는 낸시 펠로시 미국 하원의장의 방중 기간에 맞춰 계획됐다. 평소 티베트 문제를 비롯한 중국의 인권상황을 비판해온 펠로시 의장의 방중이 이들에게 큰 기대를 품게 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 펠로시 의장은 초선의원 시절이던 1991년 톈안먼(天安門) 광장에서 ‘중국의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숨진 이들을 추모한다.’라는 내용의 플래카드를 들고 중국 정부의 톈안먼 시위 유혈진압을 규탄하는 등 인권 문제로 중국을 불편하게 했던 대표적인 인물이다. 지난해 티베트 라싸(拉薩) 유혈시위 때는 조지 W 부시 당시 대통령에게 베이징 올림픽 개회식 참석을 취소하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하지만 24일부터 8일간 미 하원의원들과 함께 중국을 방문 중인 펠로시 의장은 일정의 절반이 지난 28일 현재까지 인권문제는 전혀 거론하지 않고 있다. 27일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 우방궈(吳邦國)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 원자바오(溫家寶) 국무원총리 등 중국의 ‘빅3’를 잇따라 만났지만 방중 주요 목적인 기후변화 등 환경문제 협력방안 등 외에 민감한 정치적 이슈는 제기하지 못했다. 오히려 우방궈 위원장은 “타이완이나 티베트 문제는 중·미 관계에서 가장 민감한 문제”라고 운을 뗀 뒤 “두 나라는 역사문화, 사회제도, 발전단계 등이 같지 않기 때문에 여러 문제에서 이견이 존재하는 것은 매우 정상적”이라고 기선을 제압함으로써 펠로시 의장의 말문을 닫아버렸다. 베이징의 한 외교소식통은 “미국으로서는 북핵 등 중국의 협조를 구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며 미국측이 중국의 인권문제를 거론할 수 없는 배경을 설명했다. stinger@seoul.co.kr
  • [정종욱 월드포커스] 톈안먼 사태와 장례식의 정치역학

    [정종욱 월드포커스] 톈안먼 사태와 장례식의 정치역학

    자오쯔양(趙紫陽)의 회고록이 출판되었다. “국사범 - 자오쯔양의 비밀 기록”(Prisoner of the State - Secret Journal of Zhao Ziyang)이 제목이다. 국사범이란 반국가 행위에 해당하는 중죄를 지은 사람이다. ‘국사범’ 자오는 1989년 6월4일 톈안먼 광장에서 벌어진 6·4 사태에 책임을 지고 중국 공산당 총서기 직에서 쫓겨났고 그 후 베이징의 자택에 연금되어 있다가 지난 2005년 1월 폐렴으로 사망했다. 가택연금 상태에서 인생의 마지막 16년을 보낸 그는 틈틈이 톈안먼 사태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육성으로 녹음했고 이것이 해외로 몰래 반출되어 이번에 미국과 홍콩에서 책으로 출판된 것이다. 국사범이 되기 전까지만 해도 자오는 중국 최고의 지도자였다. 진짜 실력자 덩샤오핑(鄧小平)이 수렴청정을 하고 있었지만 그는 공식 직함이 없는 8대 원로 중의 한 명에 불과했다. 뿐만 아니라 자오는 덩이 가장 아끼던 측근이었다. 쓰촨성(四川省) 당서기로 있던 자오를 베이징으로 불러 올려 총리를 거쳐 총서기까지 시킨 것도 덩이었다. 개혁과 개방만이 중국이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 믿었던 덩이 자오가 쓰촨성에서 일궈낸 경제기적에 감동하여 그를 중국 근대화의 상징으로 만들려 했었다. 그런 자오가 하루아침에 국사범이라는 죄명을 쓰고 몰락하고 말았다. 그냥 몰락한 게 아니라 쓰촨성 경제기적의 주인공이 톈안먼 광장에서 민주화의 우상이 되어 몰락하고 만 것이다. 톈안먼 광장은 중국 정치사의 산증인이다. 현대 중국의 크고 작은 사건들이 모두 이곳에서 일어났다. 마오쩌둥이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을 선포한 곳도 이곳이었고 문화혁명 때 그 공화국을 붕괴 직전의 위기로 몰아갔던 홍위병들이 광란의 질주를 벌렸던 곳도 같은 장소였다. 또한 4인방에 맞서 사회 질서를 회복하고 경제를 회생시키기 위해 애쓰다가 끝내 숨지고 만 저우언라이를 추모하는 청명절 행사가 열렸던 곳도, 그 결과 부도옹 덩샤오핑이 또다시 권좌에서 밀려난 것도 톈안먼 광장에서 벌어진 일들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개혁에 저항하는 강경파에 몰려 실각한 후야오방 총서기의 추모행사가 열렸고 자오쯔양을 국사범으로 만들어 버린 사건이 시작된 곳도 모두 이곳 톈안먼 광장이었다. 톈안먼 광장은 장례식이나 추모식을 중국 지도자들의 정치적 무덤으로 바꾼 특이한 역사의 현장이라 할 수 있다. 자오의 실각을 초래했던 6·4 톈안먼 사태는 올해로 건국 60년을 맞는 공산당 집권 이후의 중국 역사에서 가장 민감한 부분이다. 만 30년이 지난 지금도 당시의 기록들은 국가기밀로 분류된 채 공개되지 않고 있다. 공산당의 입장도 전혀 바뀌지 않았다. 톈안먼 사태는 국가체제를 전복시키려는 폭도들이 일으킨 동란(動亂)이다. 톈안먼 사태를 돌이킬 수 없는 비극으로 몰아간 4월26일자 인민일보 사설과 똑같은 입장이다. 중국에서 동란은 단순한 소요사태가 아니다. 그것은 반국가적 음모를 의미한다. 이 동란을 진압하기 위해 계엄령이 선포되었고 군대가 동원되었다. 5월19일 새벽 5시 자오쯔양이 톈안먼 광장에 나타났지만 이미 사태를 평화적으로 수습하기에는 그의 말대로 너무 늦었다. 자오쯔양의 회고록이 톈안먼 사태의 진실을 규명하는 데 얼마나 기여할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자오의 회고록은 개혁과 민주화를 양립시키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를 잘 보여준다. 결국 자오는 개혁과 민주화의 동시 추진을 주장했고 이것이 초래할 사회적 혼란을 우려한 보수파들이 그를 국사범으로 만들었다. 물론 덩샤오핑도 자오의 입장을 지지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개혁의 동지였지 민주화의 동지는 아니었다. 개혁과 민주화는 앞으로 중국이 해결해야 할 최대의 과제이다. 그런 의미에서 자오는 시대를 앞서 간 이상주의자였다. 정종욱 전 서울대 교수ㆍ외교안보 수석
  • 中 난징서 대학생 수천명·경찰 충돌

    │베이징 박홍환특파원│중국 장쑤(江蘇)성 성도 난징(南京)에서 수천명의 대학생들이 시위를 벌이다가 경찰과 충돌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1989년 6·4 톈안먼(天安門) 사태 20주년을 2주일여 앞두고 벌어진 대학생들의 집단 시위에 중국 공안당국은 바짝 긴장하고 있다. 지난 18일 밤 난징 항공항천대학(航空航天大學) 장닝(强寧) 캠퍼스의 대학생 수천여명이 공무원의 동료학생 구타에 항의하며 학교 부근 대로를 점거한 채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학생들은 ‘비폭력, 비협조’ ‘소외계층을 도와 화합사회를 건설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밤 늦게까지 연좌농성 등을 벌이다가 출동한 공안(경찰)과 충돌했다. 특히 평화시위에도 불구하고 학생 3명이 연행되자 공안과 직접 충돌했으며, 이 과정에서 공안 차량들도 파손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날 시위는 학교 부근에서 노점을 차려놓고 장사하던 이 대학 학생들이 단속 공무원에게 물품을 빼앗기고 일부 여학생들이 구타를 당한 데 항의하는 과정에서 발생했다. 인터넷과 문자 메시지 등을 통해 관련 소식이 동료 학생들에게 급속히 전파됐고, 순식간에 수천명의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주변의 시민들까지 합세해 한 때 1만명이 넘는 군중이 부근 도로를 가득 메운 것으로 전해졌다.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 등 홍콩 언론들은 홍콩에 기반을 둔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한 정보센터 소식통을 인용, 20일 이 같은 내용을 일제히 보도했다. 중국 인터넷에도 ‘남항대학 구타사건’ ‘남항사건’ 등의 항목으로 관련 내용과 사진이 급속히 전파되고 있다. 대학생 시위는 다음날 새벽 1시까지 이어졌으며, 30명 정도의 학생들이 부상당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에 앞서 지난 7일에도 저장(浙江)성 성도인 항저우(杭州)에서 대학생 수백명이 동료가 사망한 교통사고에 대한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인 바 있다. 한편 중국이 동영상 공유사이트인 유튜브(You Tube)에 이어 최근 검색 사이트인 구글의 블로그 서비스(Blogger.com)까지 차단했다고 홍콩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가 이날 보도했다. stinger@seoul.co.kr
  • [씨줄날줄] 풍운아 자오쯔양/오일만 논설위원

    1989년 5월19일,새벽 비가 흩날리는 베이징 톈안먼 광장에 한 노신사가 나타났다.“학생 제군은 아직 젊다. 반드시 살아 남아 중국 4대 근대화가 실현되는 날을 지켜 봐야 한다.” 톈안먼을 가득 메운 학생 시위대를 향해 메가폰을 쥔 자오쯔양(趙紫陽) 당 총서기는 눈물을 흘리며 설득했다. 이것이 그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자오는 이후 2005년 1월17일 사망하기까지 16년 가까이 베이징 자택에서 연금을 당한다. 최고 지도자 덩샤오핑의 ‘톈안먼 사태’ 무력 진압에 맞서 평화적 해결을 모색했던 그에게 주어진 죄목은 반당(反黨)·분열 분자였다. 자오쯔양은 실각→복권→출세→실각이 반복되며 중국 현대사의 굴곡이 그대로 투영된 인물이다.허난(河南)성 화셴(滑縣) 출신으로 중학 중퇴의 학력에도 최고 권좌에 올랐다가 하루아침에 실각되는 운명을 맞았다. 75년 쓰촨(四川)성 당서기 시절 ‘식량을 원하면 자오쯔양을 찾아 가라.’는 유행어가 나돌 정도로 실용주의 노선의 선구자였다. 평소 덩은 “하늘이 무너져도 자오쯔양이 있기에 안심할 수 있다.”는 말로 각별한 신임을 표시했지만 막판에 궁지에 몰린 덩샤오핑은 오른팔인 그를 버렸다. 권력의 비정함이다. 자오쯔양의 연금 시절,그의 친구들이 몰래 녹음한 육성 테이프를 토대로 ‘국가의 죄수’라는 회고록이 최근 출간됐다. ‘개혁역정(改革歷程)’이라는 중국어판도 나온다. 물론 중국 본토에서는 금서가 될 운명이다. 자오는 회고록에서 “가장 활기 있는 제도는 서구식 민주주의이며 우리가 이 목표로 나아가지 않으면 중국 시장경제의 비정상적인 상태를 해결할 수 없다.”고 진단한다. 참으로 미래를 내다 보는 혜안이다. 다음달 4일 톈안먼 사태 20주년을 맞는다. 그간 홍콩은 물론 중국 내부에서도 역사적 재평가 요구가 거셌다. 그러나 후진타오(胡錦濤) 주석 등 4세대 지도부는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시기에 발생한 정치풍파(春夏之交的一場正治風波)’라는 시각을 버리지 않는다. 그래도 ‘반혁명 폭란(暴亂)’이라는 보수파들의 평가에서 진일보했다. 자오가 ‘국가의 죄수’라는 멍에에서 벗어나는 날, 중국은 또 어떻게 달라져 있을까. 오일만 논설위원 oilman@seoul.co.kr
  • 자오 회고록 e세상 전파

    │베이징 박홍환특파원│자오쯔양(趙紫陽·2005년 사망) 전 중국 공산당 총서기의 육성 회고록 ‘국가의 죄수’(Prisoner of the State)가 중국을 제외한 중화권과 서방세계에서 연일 화제다. 홍콩에서는 초판 발매본이 하루 만에 매진됐다.회고록에서 자오는 톈안먼(天安門) 사태 당시 베이징시에 계엄령이 선포된 과정 등과 관련, 지금까지 알려졌던 내용과는 다른 증언을 하고 있어 주목된다. 자오에 따르면 1989년 5월17일 시위사태 대응책을 논의하기 위해 최고지도자 덩샤오핑(鄧小平)의 집에서 자신과 리펑(李鵬) 총리, 야오이린(姚依林)·차오스(喬石) 부총리, 후치리(胡啓立) 중앙서기처 서기 등 정치국 상무위원 5명(현재는 9명으로 확대)이 모임을 가졌다. 자오는 회고록에서 계엄령 선포 안건에 대해 2대2대1로 의견이 엇갈렸다고 주장했다. 자신과 후치리가 반대, 리펑과 야오이린이 찬성, 차오스가 의견 표명없이 중립을 지켰다 하지만 이 모임에는 두 명이 더 참석했다. 덩샤오핑과 양상쿤(楊尙昆) 중앙군사위 부주석이다. 자오는 “덩과 양을 포함하면 강경대처 세력이 다수였다.”면서도 “분명한 것은 그날 정치국 상무위원회는 공식적인 표결을 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지금까지 중국 내에서 자오는 이날 열린 정치국 상무위 회의에서 ‘베이징시에 대한 계엄령 선포’와 ‘시위진압’으로 모아진 다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왔다. 그는 “당시 모든 중요 현안에 대해 정치국 회의는 열리지 않았고, 상무위는 어떤 결정도 하지 않았다.”며 “법적 절차는 철저히 무시됐다.”고 강조했다.한편 중국 언론들의 침묵 속에 일부 블로거를 통해 회고록 내용이 조심스럽게 중국 인터넷을 파고들고 있다. 당국은 관련 내용이 올라 오면 즉각 해당 사이트를 폐쇄조치하고 있지만 완벽한 차단이 이뤄질지는 불투명하다.stinger@seoul.co.kr
  • “덩샤오핑=독재자” 자오쯔양 회고록 후폭풍 예고

    │베이징 박홍환특파원│톈안먼(天安門) 사태 20주년(6월4일)을 앞두고 15일 출간된 자오쯔양(趙紫陽·2005년 사망) 전 중국 공산당 총서기의 회고록 ‘국가의 죄수’(Prisoner of the State)가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가운데 곧 중국어판까지 출간될 예정이어서 후폭풍 여부가 주목된다. 아직 중국 내에서는 회고록 출간 사실조차 보도되지 않고 있지만 홍콩 등 외곽에서부터 톈안먼 사태 재평가 논란은 이미 시작됐다. 홍콩의 행정수반인 도널드 창 행정장관이 14일 “경제발전이라는 측면에서 톈안먼 사태를 평가해야 한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가 “경제를 위해서는 시민들이 희생돼도 괜찮다는 것이냐.”는 비난에 직면했다. 자오의 비서였던 바오퉁은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회고록 출간으로 중국 공산당이 분열할 것이냐는 질문에는 “불가능한 일”이라면서도 “공산당(간부들)은 많은 생각을 하게 될”이라고 전망했다. 실제 회고록은 리펑(李鵬) 전 총리와 야오이린(姚依林) 전 부총리 등 중국 공산당내 강경보수주의자들을 학생시위의 격화를 몰고 온 장본인들로 지목하고, 중국의 오늘을 있게 한 지도자로 추앙받는 덩샤오핑(鄧小平)을 ‘독재자’로 비난하는 등 충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자오는 톈안먼 학생시위에 온건하게 대처했다는 이유로 실각, 죽을 때까지 베이징에서 가택연금 상태로 있었다. 자오는 회고록에서 톈안먼 사태 당시 학생들의 민주화 시위에 대한 무력진압 결정은 리 전 총리 등 골수 보수파의 음모와 권력 상실에 대한 덩의 우려가 만들어낸 합작품이라고 주장했다. 평화적으로 진행되던 학생시위가 격화된 것은 1989년 4월26일 공산당 기관지인 인민일보가 사설을 통해 학생시위를 ‘반공산당, 반사회주의’라고 매도한 것에서 비롯됐는데, 리 전 총리가 덩의 허락 없이 전날 내부모임에서 나온 얘기를 토대로 인민일보에 사설을 게재토록 했다는 것이다. 그는 또 “덩샤오핑은 민주주의가 안정을 저해 한다고 믿었다.”며 톈안먼 사태의 최종 책임이 덩에게 있다고 주장했다. 당시 상하이 당서기였던 장쩌민(江澤民) 전 주석이 시위대에 압도돼 도움을 요청했다는 사실 등 알려지지 않았던 공산당 내부 움직임도 전했다. 회고록은 음악 테이프로 위장돼 비밀리에 반출된 30시간 분량의 자오 육성 녹음을 토대로 출간됐다. stinger@seoul.co.kr
  • [특파원 칼럼] 中정부가 두려워하는 지진의 진실/박홍환 베이징특파원

    [특파원 칼럼] 中정부가 두려워하는 지진의 진실/박홍환 베이징특파원

    그녀는 결국 오열했다. 인터뷰를 시작한 지 5분 만이다. 손에는 15년간 애지중지 키워온 딸의 사진과 딸애가 아꼈던 토끼귀 모양의 장신구가 들려 있었다. 꼭 일 주일 전의 일이다. 대지진으로 희생된 아이들이 5335명이라고 중국 정부가 처음으로 학생 피해자 숫자를 공개한 지 하루 뒤였다. 학부모 우쿤췬(吳坤群)을 매우 힘겹게 만났다. 공안(경찰)의 눈은 곳곳에서 번득였다. 한 달 전 그녀는 머리에서 피가 흐를 정도로 두들겨 맞았다. 청명절(한식)을 맞아 아이가 숨진 학교를 찾아갔을 때였다. 함께 간 다른 두 명의 피해학생 학부모는 연행됐다. 그녀는 울면서 반문했다. “도대체 (정부는) 무엇을 두려워하는 겁니까?” 그녀의 딸이 죽은 학교를 찾았다. 중국 정부가 지정해준 공식 취재장소가 아니다. 철조망이 둘러쳐진 학교는 폐허였다. 운동장에는 잡초만 무성하고 무너진 건물 잔해가 곳곳에 방치돼 있었다. 한데 주변의 주택들은 멀쩡했다. 갑자기 빨간 완장을 두른 남녀가 나타나 ‘취재불가’를 외치며 막아섰다. 곧바로 공안차가 달려오고 현장취재는 무산됐다. 동료 외신기자는 이 학교에서 취재를 하다 끌려가 폭행까지 당했다고 했다. 중국 정부는 진짜 무엇을 두려워하는 것일까. 그렇게 쓰촨(四川) 대지진의 여진은 계속되고 있었다. 쓰촨 대지진 1주년 공식 추모행사에서 후진타오(胡錦濤) 주석은 희생된 사람들보다는 살아남은 사람들을 더 챙겼다. 추모사는 이렇게 끝을 맺었다. “일치단결해 곤경을 뚫고 신중국 건국 60주년을 맞이하자.” 하지만 하루 전 그가 1400여명의 학생과 교사들이 희생당한 옛 베이촨(北川)중학을 방문했을 때 그를 맞이한 건 분노한 피해 학부모들의 목소리였다. “학교 부실공사 책임자를 처벌하라.” 때마침 관영방송인 중국중앙텔레비전(CCTV)은 지진피해 지역에서 유명 연예인들을 동원해 ‘재건 축하’ 버라이어티쇼를 열었다. 카메라는 피해지역 주민들이 환하게 웃는 표정을 잡기에 여념이 없다. 멀리 새 아파트를 짓는 크레인이 우뚝 솟아 있다. 출연자들은 공산당과 국가의 ‘은혜’를 노래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그들이 거주하는 한 칸짜리 임시주택 문을 나설 때 우쿤췬과 그녀의 팔순된 친정아버지는 울면서 소맷자락을 붙들고 하소연했다. “제발 진실을 세상에 알려주세요.” 중국 언론들도 수십 차례 그들을 취재해 갔지만 사연은 한 군데서도 나오지 않았다. 중국에서 학교 부실공사에 대한 의혹은 ‘재건’과 ‘단결’이라는 명분 아래 그렇게 묻혀져 가고 있다. 하지만 감춰진 진실은 언젠가는 드러나게 마련이다. 광주항쟁의 진실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온 천하가 다 알게 됐다. 중국 정부가 그토록 금기시해온 톈안먼(天安門) 사태의 진실도 ‘첩보전’을 방불하는 과정을 거쳐 출간된 자오쯔양(趙紫陽) 전 총서기의 회고록으로 다시 주목받고 있다. 진실은 그 자체가 생명력이 있어서 아무리 감추려 해도 때가 되면 태양처럼 솟아오른다. 치유되지 않은 상처는 곪아터지게 돼 있다. 당장의 소란이 꺼림칙해 학교 부실공사에 대한 조사 결과 공개를 미루는 것이라면 큰 오산이다. 빠른 속도로 올라가는 지진피해 지역 신축 아파트 뒤편에는 폭삭 무너진 주택 잔해들이 방치돼 있었다. 대지진 1년, 중국은 잔해를 치우고 상처를 치유하기보다는 재건을 과시하고, 잡음을 틀어막는 데 열중하는 것처럼 보인다. 중국 정부의 표현처럼 진도8의 ‘특대지진’이 몰고온 불가항력적인 자연재해라 해도 희생자 가족들의 목소리까지 묻어서는 안 된다. 현장에서 만난 희생자 가족들의 울음소리가 일주일째 귓가를 울리고 있다. 박홍환 베이징특파원 stinger@seoul.co.kr
  • 美·中 이번엔 인권충돌

    중국 당국이 톈안먼(天安門) 사태 당시 주동자인 중국 출신 미국 영주권자를 체포하자 미국 국무부와 인권단체가 반발하고 있다. 남중국해와 티베트 문제 등 중·미 관계에 악재가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또 다른 변수가 생겨났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작년 9월 홍콩통해 입국하다 체포 13일 AP통신 등 외신에 따르면 1989년 톈안먼 사태 당시 베이징 학생자율조합을 이끌었던 저우융쥔(周勇軍·41)은 지난해 고향인 쓰촨성 쑤이닝(遂寧)시 공안(경찰)에 사기 혐의로 체포됐다. 통신은 미국에 있는 그의 가족들의 말을 인용, “저우가 병든 아버지를 만나려고 지난해 9월 홍콩을 통해 중국 입국을 시도하다 공안에 체포된 뒤 최근 쑤이닝시의 구치소로 옮겨졌다.”고 밝혔다. 저우는 7개월 이상 공안 당국에 감금되다 이날에야 가족들에게 정식으로 통보된 것으로 알려졌다. 저우는 톈안먼 사태 당시 시위주도 혐의로 체포됐다가 1993년 미국으로 건너가 영주권을 획득했다. 1998년 중국 입국을 시도하다 적발돼 중국 법원으로부터 3년의 노역형을 선고 받은 뒤 2002년 미국으로 되돌아갔다. 통신은 수잔 스티븐슨 주중 미국 대사관 대변인의 말을 인용, “미국 영주권자의 범죄 혐의가 적발되면 관례상 미 외교 당국에 세부사항을 통보하고 있다.”면서도 “의무 사항이 아닌 만큼 이번의 경우 어떻게 될지 경과를 두고 봐야 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선박대치 등 사사건건 갈등 특히 저우의 체포가 미국과 중국의 관계에 영향을 미칠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미국은 최근 중국과 사안별로 갈등을 빚어 왔다. 군사적으로는 남중국해 선박 대치 문제가, 경제적으로 중국의 달러 제치기와 위안화 절상 압력 등이 첨예한 이슈로 떠올랐다. 따라서 중국내 인권이 두 나라 관계의 핫이슈로 부상할 가능성도 점쳐진다. 그간 오바마 행정부는 글로벌 금융위기와 같은 주요 현안 탓에 중국 내 인권 문제에 발언을 자제해 왔지만 자국 영주권자가 개입된 문제에 대해 묵과할 수만은 없는 까닭이다. 일단 미 국무부가 목소리를 높였다. 이언 켈리 국무부 대변인은 이날 정례 브리핑에서 “저우 가족이 오늘에서야 공식 통보를 받은 것은 중국의 법적 절차에도 반하는 일”이라면서 “모든 법적 결정이 투명하고 일관되게 이뤄져야 한다고 촉구한다.”고 말했다. 인권단체들도 반발하고 나섰다. AFP통신에 따르면 미국의 중국 인권단체인 중국후원네트워크(CSN)의 존 쿠수미 회장은 “중국 정부가 톈안먼 사태와 관련된 새로운 논쟁을 만드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이라고 밝혔다. 뉴욕의 인권단체 휴먼라이트워치(HRW)도 “중국은 역사를 검열하고 비판자를 숙청하는 행동을 당장 끝내야 한다.”고 비난했다. 이경원기자 leekw@seoul.co.kr
  • 아프리카를 거머쥔 중국의 야망 그의 러브콜은 ‘빵’만으로 충분했다

    아프리카를 거머쥔 중국의 야망 그의 러브콜은 ‘빵’만으로 충분했다

    “식민지 시절, 프랑스의 시녀였던 아프리카는 해방 후 프랑스의 첩으로 승격하며 둘 사이는 관계 개선이 되는 듯 보였다. 그러나 프랑스는 점차 부패하고 나태하며 폭력적으로 돼가는 아프리카의 행실에 당황하며, 덜 혼란스럽고 얌전한 아시아에 눈길을 돌렸다. 프랑스가 외도하는 사이 중국이 아프리카에 추파를 던지며 정략결혼을 제안했다. 아프리카는 중국의 한결같은 성의 표시와 경제력, 미래에 대한 낙관적인 전망에 마음을 빼앗겨 둘 관계에 애정전선이 싹트게 됐다.” ●佛 외도하는 사이 中·阿 정략결혼 프랑스 일간지 ‘르몽드’의 세르주 미셸 서아프리카 특파원과 스위스 시사주간지 ‘레브도’의 미셸 뵈레 외신부장이 남녀관계에 빗대 그린 프랑스-아프리카-중국의 ‘삼각관계’이다. 우리가 떠올리는 일반적인 아프리카의 이미지는 ‘프랑스의 식민지’, 수많은 부족들의 분쟁, 기아와 부패하고 불안정한 정치 등이다. 미셸과 뵈레는 여기에 ‘중국’이라는 단어를 추가하고, 아프리카를 새로운 식민지로 만들어가고 있는 중국인들의 모습에 주목했다. 각종 통계자료에 따르면 1980~2005년 중국과 아프리카간 양자 무역은 50배가 늘었고, 무역량은 2000년 100억달러에서 2006년 550억달러로 다섯 배 증가했다. 속도는 더욱 빨라져 2008년에 1000억달러를 넘겼다. 중국기업 900개가 이미 아프리카에 진출했고, 50만명의 중국인이 살고 있다(2007년 중국무역보 통계). 확실히 국제관계의 균형을 뒤흔들고 지각변동을 일으키고 있다. ●15개국 돌며 中 세력확장 모습담아 이런 중국의 역할은 계속될 것인가. 과연 아프리카에서 서구를 몰아내고, 자리를 꿰차게 될까. 중국은 아프리카의 운명을 손에 거머쥘 수 있을까. 미셸과 뵈레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1년간 알제리, 니제르, 나이지리아, 콩고, 앙골라, 수단 등 아프리카 15개국을 돌며 세력을 확장하고 있는 중국의 모습을 좇아갔다. 중국과 아프리카의 합성어를 제목으로 한 ‘차이나프리카’(파올로 우즈 사진, 이희정 옮김, 에코리브르 펴냄)는 그 결과물이다. 저자들은 식민지 경험을 한 아프리카가 급속도로 세력을 확장하는 중국에 쉽게 마음을 연 데에는 프랑스와 중국의 태도 차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진 중국-아프리카 양측의 이해관계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양측 관계는 톈안먼 사건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외교적으로 고립될 처지에 놓였던 중국은 아프리카의 도움을 원했고, 자국의 민주화 운동이 두려웠던 아프리카의 정치 엘리트들 역시 중국을 환영했다. 서구 국가들은 인도주의와 인권을 강조하며 훈수를 두려 할 때 중국은 오직 ‘비즈니스’만 하며 경제 발전을 견인해 지도자들의 환심을 샀다. 아직까지 중국이 아프리카에서 완전한 성공을 거둔 것은 아니라고 저자들은 말한다. 중국의 저질 상품에 대한 불신, ‘중국 근로자들은 모두 죄수’라는 헛소문 등 중국의 이미지를 깎아내리려는 시도가 끊임없다. ●중국의 경쟁국으로 한국 주시 저자들은 ‘적어도 중국이 성공한 점’은 아프리카에 대한 관심을 끌어올린 것이라고 판단한다. 중국의 경쟁국으로 한국을 주시한 것이 흥미롭다. 노무현 정부부터 진행한 한국과 아프리카 경쟁 관계를 자세히 소개하면서 “세계 11위의 경제 강국인 ‘조용한 아침의 나라’는 기술과 노하우를 전달하는 데 주력하면서 아프리카에서 조심조심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평가했다. 저자들은 확실한 것은 아프리카에는 자원을 비롯해 분명 ‘뭔가’가 있으며, 아프리카 진출은 이제부터가 시작이라고 주장한다. 1만 6000원. 최여경기자 kid@seoul.co.kr
  • “톈안먼 아닌 농촌으로 가라”

    │베이징 박홍환특파원│중국 현대사의 기념비적 사건인 ‘5·4운동’ 90번째 기념일인 4일 베이징 톈안먼(天安門) 광장에는 당시 울려퍼졌던 학생들의 함성은 들리지 않았다. 대신 ‘우이제(5·1節) 휴가’를 맞아 중국 각지에서 올라온 관광객들만이 광장을 가득 메웠다. 광장 주변에는 베이징시 공안(경찰)의 삼엄한 경계가 여전했다. 이 같은 ‘풍경’은 10월1일 중국 건국 60주년 기념일까지 계속될 전망이다. 중국의 양대 지도자인 후진타오(胡錦濤) 주석과 원자바오(溫家寶) 총리는 ‘5·4운동’ 기념일을 앞두고 각각 베이징 시내 대학을 찾아 학생들을 만났다. 후 주석은 2일 중국농업대학, 원 총리는 3일 칭화(淸華)대를 방문, 5·4운동의 주역인 대학생들의 역할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들이 건넨 대화의 요지는 “톈안먼이 아닌 농촌과 변방을 파고들어 이상을 키우라.”는 것. 후 주석 등은 ‘톈안먼’을 직접 거론하지는 않았지만 21세기 중국이 젊은 대학생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애국주의’이며 애국의 뿌리를 키우기 위해서는 ‘농촌과 변방’에서의 경험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원 총리는 곧 농촌과 서부 변경지역 등으로 떠날 칭화대 졸업생들에게 “조국의 서부와 기층민중에 뿌리내리는 견실한 씨앗이 되길 진심으로 바란다.”며 “그것이 (지금의 대학생들이) 국가에 봉사하는 가장 중요한 역할”이라고 말했다. 후 주석도 학생들에게 “애국심을 갖고 근면하게 일해 조국의 부흥에 기여하라.”며 “자발적으로 기층조직에서 일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중국의 두 지도자가 5·4운동 기념일에 대학을 찾아 농촌과 기층, 변경 등을 거론한 것은 매우 의미심장한 대목으로 해석된다. 한 달 뒤(6월4일)로 다가온 톈안먼 사태 20주년과 무관치 않아 보이기 때문이다. 실제 5·4운동이나 톈안먼 사태나 모두 대학생들의 톈안먼광장 시위로 시작됐다. 5·4운동은 반제국주의, 반일, 반군벌의 기치를 내세운 반면 톈안먼 사태는 중국 공산당 개혁이 테마였다. 비록 목적과 주장이 달랐지만 70년 시차로 발생한 중국내 양대 학생운동의 동기는 같았다. 베이징의 한 외교소식통은 “중국 정부는 5·4운동을 기점으로 하는 중국 학생운동이 더 이상 반정부 시위로 번지지 않길 바라고 있다.”며 “서부와 농촌 진출을 독려하는 것도 애국주의 고취와 함께 이런 희망을 담고 있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stinger@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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