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턱이
    2025-12-30
    검색기록 지우기
  • 침수
    2025-12-30
    검색기록 지우기
  • 라이더
    2025-12-30
    검색기록 지우기
  • 오름
    2025-12-30
    검색기록 지우기
  • 2025-12-30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1,848
  • [WHO&WHAT] ‘위대한 유산’ 남긴 간송미술관의 전형필·우피치미술관의 메디치

    [WHO&WHAT] ‘위대한 유산’ 남긴 간송미술관의 전형필·우피치미술관의 메디치

    15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이라는 시간의 흐름. 찬란했던 르네상스의 중심지 이탈리아 피렌체와 일제 강점기 아시아의 소국(小國) 조선이라는 공간과 위상의 차이. 이 시대를 살았던 두 명의 사람이 있었다. ‘위대한 메디치’로 불리며 이탈리아, 아니 중세 유럽을 통틀어 가장 화려했던 가문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로렌조 메디치(오른쪽·1449~1492)와 자국의 역사책에조차 등장하지 않는 간송(澗松) 전형필(왼쪽·1906~1962). 겉으로 보이는 배경으로는 너무나 다르지만 이들에겐 엄청난 ‘돈’과 예술을 알아보는 ‘혜안’(慧眼)을 동시에 갖추고 있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런 공통점은 각각 피렌체 우피치미술관과 서울 성북동 간송미술관의 형태로 오늘날 우리에게 ‘인류의 유산’을 향유할 기회를 남겼다. 만약 그들이 막대한 재산을 흥청망청 쓰는 데만 골몰했다면, 또는 재산을 늘리는 데만 관심을 가졌다면 중세미술사와 한국미술사는 다시 쓰여져야 했을지도 모른다. 가상 인터뷰 ‘후 앤드 왓’(Who&What) 이번 주의 주인공은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표상으로 꼽히는 로렌조 메디치와 전형필이다. 막대한 재산을 문화유산에 아낌없이 쏟아부은 이들의 노력이 어떻게 시작됐으며, 어떤 어려움을 겪었는지, 그 결과로 우리는 어떤 혜택을 누리고 있는지를 살펴본다. 유럽 배낭여행을 다녀온 후 서양미술사에만 관심을 갖다가 지난주 간송미술관을 다녀온 후 한국미술의 전통과 매력에 흠뻑 빠진 직장인 윤정은(33·여)씨가 궁금한 점을 모아 인터뷰에 나섰다. →<윤정은> 두 사람 모두 젊은 나이에 상상을 초월하는 재산을 물려받았다. 도대체 어떤 가문이었고 재산 규모는 얼마나 됐나. -메디치 내 증조할아버지인 토스카나 대공(大公) 코지모는 피렌체인들 사이에서 ‘국부’라는 명예로운 호칭으로 불렸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은행업을 통해 그야말로 돈을 긁어모으다시피 했다. 가문의 수장이 됐을 때 내 나이 고작 20세였다. 당시 피렌체는 르네상스의 중심지였을 뿐 아니라 유럽 전체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였다. 특히 우리 가문은 직물산업의 핵심이었던 ‘백반’(양모 세척제)을 움직였고 메디치 은행의 주요 고객은 유럽 각국의 왕실과 교회였다. 당시 우리가 얼마나 많은 돈을 갖고 있었는지는 말할 필요조차 없다. 그냥 피렌체가 메디치였고, 피렌체의 모든 것은 메디치 가문의 재산이었다고 이해하면 된다. -전형필 일제 강점기에 와세다대 법대를 다니던 중 아버지의 부음을 들었다. 서울 일대는 물론 경기도, 황해도, 충청도를 지나면서 우리 집안 땅을 밟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만석꾼 집안이었다. 미곡상을 했는데 내가 24세에 물려받은 논은 4만 마지기(800만평)에 달했다. 1년에 소작농으로부터 쌀 2만 가마니(1만석)를 거둬들였는데, 이를 당시 기와집 값으로 환산하면 150채 정도였다. 현재 서울 아파트 가격으로 환산하면 매년 450억원이 들어왔다는 얘기다. 논을 몽땅 판다고 가정하면 6000억원 정도였는데, 이건 그냥 단순한 수치 환산이고 당시 논이 가지는 의미를 생각하면 훨씬 더 가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당시 조선총독부 기록에 따르면 1년에 나만큼 버는 조선인은 43명에 불과했다. →<윤정은> 역사적으로 많은 재산이나 권력을 물려받은 사람들은 흥청망청 쓰다 망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오늘날 한국의 재벌 집안만 봐도 그런 사례를 많이 찾을 수 있다. 그런데 두 사람은 실패하지 않았고, 젊은 나이에도 큰 실수를 하지 않았다. -메디치 할아버지 코지모의 영향 때문이라고 봐야 한다. 피렌체에는 당대 최고의 철학자와 예술가들이 모여 있었고, 난 그들과 토론하는 법을 배웠다. 10대 때부터 이미 유럽 각국에서 피렌체를 대표하는 외교관 역할을 수행한 덕에 외국어에도 능통했다. 로마어에 비해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던 그리스어까지 능통하게 구사했을 정도였으니. 내 신분은 공식적으로는 돈이 많은 시민이었지만 피렌체 안팎에서 피렌체를 대표하는 인물로 인식됐고, 그렇게 살았다. 물론 금욕적인 삶을 지향하지는 않았다. 난 바람둥이였고, 수많은 애인이 있었다. 하지만 당시 권력자에게는 그런 게 큰 흠이 되지 않았다. -전형필 난 원래 경성에서 대학을 다니며 조선어문학을 공부하고 싶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변호사가 될 것을 강권하셨고, 그 덕분에 일본에서 대학을 다녔다. 하지만 일본인들이 만든 법을 연구한다는 것에 큰 매력을 느끼지 못했고 가업인 장사에도 별 관심이 없었다. 무엇보다 유산을 물려받았다고 해도 부모의 상을 당한 상황에서 본인이 즐기는 데 그것을 쓰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윤정은> 두 사람 모두 예술을 사랑했는데 특히 수집(蒐集)에 관심이 많았다.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 -메디치 ‘위대한 로렌조’라는 호칭과 달리 난 콤플렉스가 많았다. 심한 주걱턱이었고, 아랫입술이 윗입술을 덮었다. 코도 낮았고 목소리는 거칠었다. 하지만 난 비올라와 류트(당시의 현악기), 승마술, 매사냥까지 섭렵했고 유려한 글솜씨로 소녀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당시 예술에 대한 조예는 못난 겉모습을 덮고도 남을 정도였다. 특히 권력과 돈을 가진 사람들은 예술가를 지원해 그들의 작품이 자신을 찬양하도록 했는데 나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다만 난 할아버지나 아버지, 다른 귀족들과는 좀 달랐다.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 내는 일 이외에 고대 미술품을 수집하고 동양의 예술품에도 관심이 많았다. -전형필 일제 강점기라는 당시 사회상에서 난 무엇을 해야 할지에 관해 끊임없이 고민했다. 무엇보다 휘문고보 시절 은사였던 고희동(1886~1965·서양화가) 선생과 3·1 만세운동 때 민족대표 33인 중 한 분이었던 위창 오세창(1864~1953·서예가) 선생의 영향이 결정적이었다. 두 분은 내가 어릴 때부터 책에 관심이 많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내가 길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왔다. 고 선생은 나에게 “글을 읽으면서 학문을 닦는 선비가 아니라, 조선의 문화를 지키는 선비가 되라.”는 조언을 해 주셨다. 그 결과 나는 왜놈들 손으로 넘어가는 우리 서화와 전적을 지키는 선비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위창 선생은 나에게 ‘간송’이라는 호를 주셨고, 내 수집활동 전반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어떤 작품을 모아야 하는지, 어떤 눈을 갖춰야 진품을 구분할 수 있는지 등에 대해 말이다. →<윤정은> 돈으로 물건을 수집하는 것은 사실 취미로 볼 수도 있는 일이다. 재산을 과시하기 위한 수단일 수도 있는데, 다른 목적은 없었나. -메디치 (웃음) 난 상인이었지만 정치인이기도 했다. 정치인에게 100% 순수한 호의라는 게 존재한다고 생각하나. 1482년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밀라노에 보내고 1488년 안토니오 다 산갈로를 나폴리에 보냈다. 그 공국들에 내가 후원하던 예술가를 보내는 게 좋은 작품을 선물하기 위한 목적이었다고 볼 수 있을까. 호의를 베풀면서 실은 정치를 한 거였다. 솔직히 내가 예술가를 후원한 돈은 대부분 내가 피렌체의 공직을 겸하면서 공금으로 썼다. 내 재산은 오로지 내 수집품을 모으는 데 집중적으로 썼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표상에 대한 환상이 좀 깨지지는 않았나. -전형필 왜 수집에 나섰느냐고 위창 선생이 물었을 때 난 “서화 전적과 골동은 조선의 자존심이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조선이 언젠가 독립될 것이란 믿음이 없었는데도 수집을 계속했을지는 나도 자신이 없지만, 난 반드시 독립될 것으로 믿었다. 1933년 성북동에 터를 구해 미술관을 지은 것도 독립이 됐을 때 후손들에게 우리 문화의 힘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일본으로 팔려 갔던 고려석탑을 다시 사 오면서 난 한번 유출된 문화재가 고국으로 돌아오기가 얼마나 힘든 일인지 뼈저리게 느꼈다. 해방된 후에는 이전처럼 문화재를 수집하지 않았던 것도 그 때문이다. 일제에 더 이상 빼앗길 염려가 없어진 후에는 조선 사람이 모은 것은 모두 조선 것이기에 해방 후에는 문화재를 찾아오는 일에만 전념했다. →<윤정은> 소장품들에 대해 묻겠다. 두 사람의 노력은 우피치와 간송 미술관으로 남았지만 두 사람 모두 박물관의 개관을 직접 보지는 못했다. -메디치 우피치는 영어로 하면 ‘오피스’(사무실)를 뜻한다. 그곳은 내 증조부 코지모의 집무실이다. 물론 내가 가장 주목받기는 하지만 우피치 수집품은 우리 가문 전체의 공이다. 14~16세기 르네상스 화가부터 17~18세기 바로크와 로코코에 이르기까지 소장 규모 자체는 전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다. 조토의 ‘성모자’, 다빈치의 ‘수태고지’,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 등 도록으로도 다 담을 수 없을 정도다. 하지만 우피치를 박물관의 관점에서 본다면 나 이후로 200여년이 지난 후 메디치가 최후의 후손이었던 안나 마리아 루드비카가 가장 큰 공을 세웠다. 그녀는 모든 재산을 토스카나 공국에 기증하면서 단 하나의 조건만을 남겼다. “전 세계 사람들 모두가 피렌체에서 메디치가의 보물을 볼 수 있도록 어느 것도 피렌체 밖으로 나가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전형필 간송미술관에는 ‘훈민정음 해례본’, ‘청자운학문매병’ 등 12점의 국보와 10점의 보물이 있다. 1937년에는 영국 변호사 개스비에게서 청자 20점을 40만원에 사기도 했다. 당시 서울 기와집 400채 값이었다. 난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면 가격을 고려하지 않았다. 그 가치는 후손들에게 돌아가기 때문이고, 그것이 원래 내가 수집을 시작한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잡스러운 그림을 그린다고 폄하됐던 겸재 정선(1676~1759)을 화성(畫聖)의 반열에 올려놓은 것을 내 최대의 성과로 생각한다. 그럼 내가 묻겠다. 지금 간송미술관에서 당신은 어떤 기분을 느끼나. →윤정은 당대 최고의 좋은 자재로 지었다는 미술관이지만 세월의 흔적은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1930년대의 근대식 2층 건물과 창틀에는 현대미술관처럼 멋진 조명도 없고 첨단 잠금장치도 없다. 화장실 냄새도 코를 찌른다. 아이들이 유리에 온갖 손자국을 내며 코를 박고 보는 모습은 유럽 미술관의 풍경과 너무나 달랐다. 하지만 너무 많은 것들을 전시하지 않아서 좋았고, 온전히 우리 것이라는 것이 더 좋았다. 내가 보고 있는 전시품이 엄청난 가치가 있다는 생각보다는 조상의 것이라는 사실이 먼저 느껴졌다. 바티칸이나 루브르에서도 경험하지 못한 것들이었다. 친구들에게 꼭 말해 주고 싶다. 간송미술관에 가면 간송이라는 사람과 그가 남긴 뜻이 마음으로 전해진다고 말이다. 박건형기자 kitsch@seoul.co.kr 그래픽 이혜선기자 okong@seoul.co.kr ■ 참고서적 간송 전형필/이충렬/김영사 조선의 그림수집가들/손영옥/글항아리 간송 선생님이 다시 찾은 우리 문화유산 이야기/최완수·한상남/샘터 조용헌의 명문가/조용헌/랜덤하우스코리아 메디치 머니/팀 팍스·황소연 옮김/청림출판 메디치‘의 음모/피터 왓슨·김미형 옮김/들녘 서울신문은 매주 1회 독특한 포맷의 가상 인터뷰 [WHO&WHAT(후 앤드 왓)]을 1개면에 걸쳐 연재하고 있습니다. 일반 신문기사로는 다루기 힘든 동서고금의 지식과 역사의 정수들을 만남 또는 대담의 형식을 통해 알기 쉽고 재미있게 소개하는 지면입니다. 청소년, 어른 모두에게 즐겁고 색다른 지식의 장이 될 것으로 자부합니다. 특히 입시를 준비하는 학생들에게는 훌륭한 논술교재로도 활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WHO&WHAT] “퀴즈쇼서 인간에 완승한 슈퍼컴 왓슨(Watson)을 만나다” [WHO&WHAT] 무덤에서 불러낸 독재자 4인의 가상만찬 ‘재스민 혁명’을 논하다 [WHO&WHAT] 천재소년 송유근, ‘우주비행 성공 50주년’ 맞아 유리 가가린을 만나다 [WHO&WHAT] ‘슈퍼히어로’ 스파이더맨, 정신과 전문의 김상준 원장과 상담하다 [WHO&WHAT] 지구수비대 지원한 인간형 로봇 ‘마루’ “아톰·태권V처럼 지구 지켜서…” [WHO&WHAT] ‘최악’ 통념 B형 男기자, 혈액형의 아버지 ‘란트슈타이너’에 따지다 [WHO&WHAT] ‘전 세계 여성의 로망’ 버킨백을 만나다 [WHO&WHAT] 선택 따라 전혀 다른 결과…”이렇게 검색하면 진리가 밝혀질까?” [WHO&WHAT] “남느냐, 떠나느냐” 희곡으로 본 어느 서재 도서들의 열띤 논쟁 [WHO&WHAT] ‘위대한 유산’ 남긴 간송미술관의 전형필, 그리고 우피치미술관의 메디치 [WHO&WHAT] 위대한 예술가 미켈란젤로, 그는 왜 라파엘로를 죽이고 싶었을까 [WHO&WHAT] ‘美우주왕복선은 초대형 폭탄이나 마찬가지’ 물리학자 파인먼의 폭로 [WHO&WHAT] 외규장각 도서 귀환으로 본 약탈문화재의 ‘수구초심(首丘初心)’ [WHO&WHAT] “재능만 주고 사랑은 주지 않던 나쁜 부모들” 유명 인사들의 회상기 [WHO&WHAT] 인류역사를 바꾼 ‘억세게 운 좋은 사내들’ 서바이벌 현장…과연 승자는? [WHO&WHAT] 소설 속 영국인 주인공 폴 웨스트 “파리서 1년 살아보니” [WHO&WHAT] 인류 첫 셀레브러티 ‘클레오파트라’… 베일 속의 그녀의 얘기 들어보니 [WHO&WHAT] 유전학의 창시자 수도사 멘델의 고백… “저, 유전학의 아버지 아니에요”
  • “교통망 뚫리면 획기적 발전 가능 39호선 완료땐 서울~양주 30분”

    “교통망 뚫리면 획기적 발전 가능 39호선 완료땐 서울~양주 30분”

    “낙후된 양주는 물론 경기 북부지역의 발전이 국지도 39호선 확장공사를 계기로 이제 발전을 시작합니다.” 현삼식(63) 양주시장은 경기도와 39호선의 확장에 대한 양해각서(MOU) 교환을 앞두고 10일 “양주는 그동안 잘 보전된 청정지역이기 때문에 교통망만 뚫리면 획기적인 발전을 이룰 것으로 기대한다.”며 떨리는 목소리로 설명했다. ●“화물차 못 다니는 도로 말 되나” 39호선 확장사업은 2000년 양주시 청사를 이전하면서 본격적으로 추진하게 되었다. 양주는 서울을 비롯해 의정부, 고양, 파주, 동두천, 연천, 포천 등 7개 시·군과 인접해 있으면서도 열악한 도로사정 탓에 주민들이 오랫동안 불편을 감수하고 있는 곳이다. 현 시장은 “화물차가 못 지나갈 정도의 도로라니, 도로라는 이름이 어울리지 않을 정도”라면서 “그러니 외지관광객이 방문할 턱이 없고, 또 민간기업도 입주하지 않는 불모지나 다름없다.”고 말했다. 도로가 불편하니 기업들의 공장도 양주시로 이전하기를 꺼렸다. 출·퇴근이 어려워 종업원들이 따라오지 않았기 때문이란다. 39호선 사업은 처음부터 국가 5개년개발계획에 포함되지 않아 손도 못 대다가 지난해 국토해양부가 민자사업 방식으로 검토하면서 희망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예비타당성 조사에서 경제성이 낮은 것으로 평가되면서 다시 어려운 상황에 몰렸다. 현 시장의 고민은 여기서 시작됐다. 그리고 이어서 도로 사업을 신도시 개발사업과 연계해 도움을 받지 않고 자체 민자사업으로 추진하게 된 것이다. 그것도 기존 방식과 달리 이용자들이 통행료조차 내지 않는 민자 고속도로로 건설할 수 있는 방안을 찾은 것이다. 현 시장은 “백석읍 일대에 대한 도시개발사업을 진행하는 조건으로 개발이익금을 먼저 끌어들여 숙원사업을 해결하기로 했다.”면서 “4500억원이 넘는 비용에 대해 선투자를 이뤄낸 것이 포인트였다.”고 말했다. 그는 “2016년에 국지도 39호선 공사만 완료되면 서울에서 30분 안에 양주로 올 수 있다.”고 덧붙였다. ●토지보상비 경기도 지원 차질 우려 하지만 경기도가 1300억원에 이르는 토지보상비를 지원하는 것이 제대로 진행될지가 걱정이다. 광역도로서도 만만치 않은 거액인 데다 지원액이 쪼개져 분할투입된다면 공사 일정에 자칫 차질이 빚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또 토지보상이라는 까다로운 절차도 남은 과제이다. 현 시장은 “지금까지 어려운 과정을 잘 해결해 온 만큼, 서울지하철 7호선의 연장사업도 다각도로 방안을 짜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글 사진 장충식기자 jjang@seoul.co.kr
  • “그래서 오늘도 뜁니다. 같은 엄마의 마음으로”

    “그래서 오늘도 뜁니다. 같은 엄마의 마음으로”

    지난 3년간 집에 있는 두 아들 얼굴보다 전단지 속 실종아동 얼굴을 더 많이 봤다. 경남 양산 지역 무연고 보호시설을 제 집처럼 드나들었다. “우리 엄마는 밖에서만 볼 수 있다.”는 아들 핀잔에 미안해하다가도, 잃어버린 자식을 찾고 온몸으로 흐느끼는 부모를 볼 때면 “이래서 한 명이라도 더 많이, 더 빨리 찾아야 한다.”고 눈시울을 붉힌다. 바로 ‘실종아동의 대모’로 불리는 양산경찰서 유필자(53) 여청계장이다. 3년간 14세 미만 아동 139명 발견, 2008~10년 실종아동 등 보호시설 일제 수색 연속 8회 1위(이 기간만 실종아동 12명 발견). 그는 3년을 그렇게 ‘눈 빠지게’ 사람을 찾으며 살았다. ‘혹시 실종아동이 섞여 있지 않을까.’ 문턱이 닳도록 요양시설을 훑었다. ‘내 자식이라면….’ 하는 엄마의 마음으로 아이들을 찾았다. 그래서 수색 기간 1등도 했고, 칭찬도 들었다. 하지만 그 ‘격려’가 두렵단다. 찾은 아동 숫자를 밝히지 말아 달라는 부탁도 했다. 아직 아이를 못 찾은 부모에게 상처가 될까 봐서다. 날카로운 눈빛, 강단있는 표정과 달리 천생 여자이자 엄마인 그를 4일 양산서 사무실에서 만났다. →실종아동을 잘 찾는 비결이 있나. -수색기간 중에만 중점적으로 보호시설을 찾는 게 아니라 그냥 집처럼 수시로 드나들었다. 관계자 입회하에 아이부터 어른까지 지문 찍고 면봉으로 구강 DNA를 채취해 매일같이 경찰청 과학수사센터 등에 보냈다. 결과가 한 달 정도 걸리니 그게 모이고 쌓여서 실적으로 나온 것뿐이다(유 계장은 14세 미만 아동 139명을 발견한 것에 대해서도 동료들과 직원들이 합심해 찾은 것들이 많아 다 내 공으로 돌릴 수 없다며 공을 팀에 돌렸다). →안타까웠던 사례는 없었나. -26년이나 지난 뒤 실종신고가 들어온 경우가 있었다. 2009년에 접수됐는데 1983년 당시 4세, 2세였던 형제가 없어졌다는 내용이었다. 친어머니는 이혼 뒤 집을 나간 상태였고, 재혼한 아버지는 2009년에 사망했다. 새어머니가 호적 정리 차원에서 신고한 것으로 안다. 아이들을 잃어버렸다는 양산시 원동면 지역 주변의 아동보호시설을 탐문했는데 소득이 없었다. 홀트아동복지회 등 입양기관에 연락했더니 형제가 프랑스로 입양됐다는 기록이 있었다. 알고 보니 아버지가 재혼을 위해 애들을 (고아원이나 입양기관에) 보낸 것이었다. 이후 아이들은 프랑스로 입양됐다. 대사관에 연락해 애들 소식을 들으려 했지만 불가능했다. 프랑스법상 입양아 본인이 원하지 않는 경우엔 정보를 얻을 수 없었다. 나중에라도 아이가 부모를 찾을까 봐 엄마의 DNA를 실종아동 관련 기관에 등록했다. 그때 친어머니가 참 많이도 울더라. 아이들이 아버지와 잘 지내고 있는 줄만 알았다고. 참 나쁜 어미라면서 그리워하더라. 끊으려야 끊을 수 없고 죽을 때까지 못 잊어 가슴 아픈 게 가족이다. →또 기억에 남는 사건이 있다면. -부산에 거주하는 한 할아버지가 1993년 3월 17일에 손자를 찾는다고 실종신고를 했다. 이혼한 어머니는 인천에 살고 있었고, 아버지는 알코올중독으로 입원 치료 중이었다. 지방의 한 고아원에서 엄마와 DNA가 일치하는 아이가 있다고 연락이 왔다. 부산에 사는 조부모에게 연락을 했지만 현실적으로 데려다 키울 수 없는 입장이라 부모의 존재를 알리지 못했다. 결국 할아버지가 먼발치에서 손자 모르게 가끔씩 보고 오는 것으로 알고 있다. →평소엔 어떤 엄마, 어떤 경찰인가. -1979년 순경 공채로 들어와 경찰이 됐다. 지금은 24세, 27세 두 아들을 둔 엄마다. 그래서인지 실종아동이나 가출 청소년들을 찾으면 마음이 더 쓰인다. 특히 여자애들을 찾으면 사무실로 불러 꼭 상담을 한다. 왜 가출을 했는지, 집에서 어떤 점이 불만인지 등을 아이와 엄마를 같이 불러서 듣고 풀어준다. 그때 만났던 애들이 “선생님” 하고 달려와 종종 인사를 한다. 그럴 때 보람을 느낀다. 내 자식 같기도 하고…. →실종신고가 들어오면 수사 과정은 어떻게 되나. -112나 지구대, 182센터로 실종신고가 접수되면 여성청소년계로 보고가 들어온다. 그 즉시 상황을 파악해서 실종 전담팀하고 여청계가 합동으로 현장에 나간다. 수색하면서 여건에 따라 기동대도 부르고 납치가 의심되면 수사 부서도 투입된다. 탐문수사, 전단지 배포, 수배, 보호시설 수색 등으로 이뤄진다. →어린이날을 맞아 아동 실종 예방법을 소개해 달라. -신고가 빨라야 한다. 부모들이 찾다가 신고가 늦어지는 일이 많은데 신속하게 신고되면 기동대 등을 투입해 주변에서 바로 찾을 가능성이 더 높아진다. 또 아이들에게 평소 부모와 헤어지게 되면 ▲제자리에 멈춰서 기다리기 ▲이름·연락처를 암기하기 ▲낯선 사람 따라가지 않기 등을 가르쳐야 한다. 공중전화가 가까운 곳에 있으면 112에 신고하는 법을 알려주는 것도 좋다. 인적사항이 적힌 이름표 등을 소지하게 하는 것도 방법이다. 글 사진 양산 백민경·김진아기자 white@seoul.co.kr
  • [길섶에서] 보이스 피싱/박홍기 논설위원

    휴대전화 벨이 울린다. ‘000-000’ 번호가 찍혀 있다. 굵직한 목소리의 남성이 “○○은행입니다. 어제 ○○백화점에서 구입한 198만원어치 상품의 결제가 오늘 이뤄졌습니다.”라고 하지 않는가. 상당히 구체적이다. 다시 말해 달라고 하자 녹음기를 틀어놓은 듯 같은 말을 반복한다. 순간 당황했다. “백화점에 간 적이 없다.”고 하자 “신용카드를 잃어버린 적이 없으신지요. 아니면 누군가 신용카드를 위조해 쓰고 있나 봅니다. 신고해 드리겠습니다.”라며 한술 더 뜨는 게 아닌가. 하도 사무적으로 말하는 통에 “잠깐만요.”하고 카드를 확인하기에 이르렀다. 그러자 이어지는 말, “카드 번호를…” ‘보이스 피싱’ 너무나 그럴싸해 낚아채이기 직전까지 갔던 것 같다. “연락처를 달라.”고 하니 태연하게 “12번 김○○을 찾아달라.”고 말한다. 연결될 턱이 없다. 남의 일로만 여겼던 보이스 피싱에 잠시나마 자연스럽게 걸려들었다 생각하니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다. 낚였다면, 끔찍하다. 헛똑똑이가 따로 있나 싶다. 박홍기 논설위원 hkpark@seoul.co.kr
  • 턱 변형 환자 수술로 웃음 되찾다

    턱 변형 환자 수술로 웃음 되찾다

    구강악안면외과라고 하면 고개를 갸우뚱하는 이들이 많을 터다. 의료법상 정식 명칭은 구강악안면외과이지만 풀어 쓰면 간단하다. ‘구강(口腔·입)+악(顎·턱)+안면(顔面)’이니 입과 턱과 얼굴 부위의 외과적인 치료를 전문으로 시행하는 과란 뜻이다. 구강악안면외과를 찾는 환자들의 유형은 다양하다. 유전적인 요인도 있고, 성장기의 잘못된 자세·식습관, 턱 골절 방치 등으로 턱뼈가 변형돼 자란 악안면변형증 환자들도 있다. 최근 얼굴이 작아지는 수술이나 예뻐지는 수술로 알려져 관심을 끄는 악교정 수술은 본래 제 위치를 벗어난 턱이 정상적인 기능을 하지 못해 음식을 먹거나 말하는 데 장애를 겪는 환자들의 턱 기능을 회복하는 것이 최우선이다. 치아교정을 해오다 악교정 수술을 받기 위해 병원을 찾은 한 환자가 있다. 선천적으로 위턱과 아래턱이 반대 방향으로 틀어진 안면 비대칭으로 한쪽 어금니가 아예 닿지 않아 30년이 넘게 한쪽으로만 음식을 씹었다. 그 불편과 고통에 마침표를 찍고 환하게 웃을 수 있을까. EBS는 18일 밤 11시 10분 ‘명의: 찡그린 얼굴, 웃음을 찾다-구강악안면외과 전문의 이백수 교수’ 편을 방송한다. 구강악안면외과를 찾는 환자들은 통증이나 턱의 변형 때문에 얼굴을 찡그리고 찾아오는 경우가 많다. 경희의료원 구강악안면외과장인 이 교수는 환자를 만나면 그동안 겪었을 고통을 생각하며 환자 처지에서 생각하려고 노력한다. 치밀한 계획을 통한 치료와 따뜻한 대화로 환자들의 찡그렸던 얼굴은 환한 웃음을 되찾는다. 과거보다 턱뼈가 작아지며 구강 내에서 나올 위치가 좁아진 사랑니들은 이제 애물단지가 됐다. 사랑니가 반듯하게 나고 구강 관리를 할 수 있다면 빼지 않아도 무방하다. 문제는 나올 자리가 없어서 턱뼈에 묻혀 있거나 잘못된 위치, 방향으로 나오면 염증이나 농양이 생길 수 있다는 것. 가능하면 빼는 게 좋다는 얘기다. 모르고 내버려 뒀다가 염증이 목을 통해 폐로 전이되는 등 최악의 경우 사망까지 이를 수 있다. 어떤 경우에 꼭 사랑니를 빼야 하는지 점검해 본다. 치과 치료 가운데 최근 가장 관심을 받는 분야는 임플란트. 대부분 치아가 상실됐을 때 제일 나은 방법으로 여기고 치과를 찾지만, 구강 상태나 턱뼈 상태가 좋지 않은데 무리하게 시술을 받으면 부작용을 일으키기도 한다. 또 시술 이후 환자가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따라 수명이 결정되기 때문에 철저한 관리가 필수적이다. 임플란트에 대한 잘못된 상식들을 바로잡는다. 임일영기자 argus@seoul.co.kr
  • ‘13월 보너스’ 기대한 직장인들 “되레 더 내게 생겼다”

    연말정산에서 ‘13월의 보너스’를 기대하던 직장인들이 울상을 짓고 있다.  소득세율이 인하돼 월급을 받을때 세금을 적게 떼고, 신용카드 공제한도도 200만원 작아졌기 때문이다. 특히 부양가족이 없는 미혼 직장인이나 2인 가구 등은 다산정책 등으로 상대적으로 혜택이 줄었다.  25일 국세청에 따르면 2009년 귀속 연말정산에서 과표 1200만~4600만원 구간의 소득세율이 16%였으나 지난해 15%로 낮아졌고 4600만~8800만원 구간도 25%에서 24%로 인하됐다. 이런 이유로 애초 월급에서 세금을 덜 걷었고 그만큼 원천징수액이 줄어들었다.  또 신용카드 공제 문턱이 높아지고 공제 한도액이 연간 500만원에서 300만원으로 줄어든 것이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올 연말정산에서는 신용카드 사용액이 총급여의 20%를 초과해야 공제를 받던 것에서 25%로 기준이 높아졌다.이 때문에 지난해 연말정산에서 카드 소득공제를 받았던 직장인 중 일부가 이번에는 공제 혜택을 보지 못하게 됐다.  40대 직장인 김모씨는 “지난해 100만원 정도 카드 공제혜택을 봤는데 올해는 아예 대상이 되지 못했다.”고 아쉬워 했다.  미용,성형수술비 같은 의료비 공제도 받을 수 없게 돼 일부 공제 대상이 줄었다.  이에 따라 지난 해까지 ‘13월의 보너스’를 받다가 이번 연말정산에서는 세금을 더 내는 직장인도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인터넷서울신문 event@seoul.co.kr
  • ‘밸런타인데이’ 소개팅-애프터 받는 비법은?

    ‘밸런타인데이’ 소개팅-애프터 받는 비법은?

    초콜릿을 건네며 사랑을 고백하는 날인 밸런타인데이가 얼마 남지 않았다. 솔로들에는 새롭게 사랑을 시작하는 기회가 되기도 하고, 연인들에게는 사랑을 확인할 수 있는 날이기도 하다. 그저 매출을 올리기 위한 업계의 전략적 상술이라 말하기도 하지만, 남녀를 불문하고 마음이 부쩍 설레는 날임은 분명하다. 밸런타인데이와 봄을 맞이하는 2월, 3월이야말로 소개팅의 계절. 소개팅에서 첫 대면 시 가장 중요한 것은 첫인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외모가 그리 뛰어나지 않더라도 상대방에게 좋은 인상을 주고 온다면 애프터신청으로 이어질 확률이 높다. 그렇다면 첫인상에 자신이 없는 사람들이 소개팅 자리에서 호감 남녀가 될 방법에는 무엇이 있을까. ▲어색한 침묵은 NO!, 끊임없이 오가는 대화의 기술은?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끌어가는 것은 상대방의 호감을 얻을 수 있는 좋은 방법의 하나다. 특히 첫인상에 자신이 없는 사람들에게도 충분히 매력적인 사람으로 보일 기회가 될 수 있다. 자연스러운 대화는 공통의 관심분야에서부터 시작한다. 취미, 음식 취향, 감명 깊게 본 영화, 좋아하는 책, 최신 이슈 등 공통점이 많을수록 호감을 얻기에 유리하다. 단답형으로 끝나는 질문은 금물. 대화가 오가려면 이를 이어줄 수 있는 연결고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질문을 던졌다면 그 질문을 바탕으로 대화를 이어나가고, 대화가 끊기는 감이 오면 새로운 질문을 던져 대화를 유도하는 것이 좋다. 이때 화제는 나보다는 상대방이 더 많이 알고 있는 것, 관심 있어 하는 것으로 대화를 이끌어야 호응도가 높다.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으니 바로 호응과 맞장구다. 적절한 호응과 맞장구는 대화 시 상대방의 기분을 북돋아 주기도 하고 내가 대화에 흥미 있어 하는지를 알려줄 수 있다. 이와 같은 대화가 이어진다면 편안하고 호감 가는 인상을 주기에 유리하다. ▲첫 이미지에 승부수를 띄워라, 이성에게 호감 받는 얼굴형은? 외모에서 전체적인 이미지를 결정짓는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부위는 ‘얼굴형’, 즉 안면윤곽이다. 아무리 오목조목하고 귀여운 이목구비를 가졌다 해도 사각턱이나 광대뼈가 심하게 발달한 얼굴이라면 호감을 주는 외모가 되기 쉽지 않다. 반면 작고 갸름한 균형 잡힌 얼굴형을 가지고 있다면 편안하고 친근한 이미지로 보일 수 있다. 사람들이 가장 선호하는 이상적인 얼굴형은 작은 얼굴에 광대나 턱이 두드러지지 않은 갸름한 V라인 얼굴이다. 또한 적당한 볼살과 볼륨감 있는 이마를 가진 입체적인 얼굴이라면 금상첨화. 돌출된 광대뼈나 사각턱으로 콤플렉스가 심한 경우 안면윤곽수술로 교정할 수 있다. 안면윤곽수술은 얼굴의 기본형태인 안면 골격을 교정해 줌으로써 전체적인 얼굴 이미지와 인상을 근본적으로 바꾸어주는 수술이다. 그랜드성형외과 유상욱 원장은 “성형외과를 찾는 환자 중에는 ‘사각턱’이나 ‘주걱턱’ 같은 부정적인 느낌의 안면윤곽 때문에 이성 문제나 취업 등에서 상처를 받고 콤플렉스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많다.”며 “각지고 발달된 사각턱도 ‘V라인 사각턱수술’로 턱 선이 한층 갸름해지고 세련되어지면 호감 가는 인상으로의 변화가 가능하다.”고 조언했다. ▲호감 가는 패션은 따로 있다, 소개팅에 어울리는 패션스타일링은? 옷차림 또한 외모 못지않게 그 사람의 호감도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다. 자신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옷차림이 최선의 선택이겠지만 과도한 옷차림이나 무성의한 옷차림은 상대방에게 불쾌감을 줄 수도 있다. 한 결혼정보업체의 조사에 따르면 소개팅 시 남성들은 여성스러운 분위기의 원피스나 자연스러운 느낌의 세미정장을 갖춰 입은 여성들에게 더욱 호감 간다는 결과가 나왔다. 또한, 여성들의 경우 남성들과 마찬가지로 세련되고 댄디한 느낌이 드는 세미 정장과 재킷 하나만으로도 멋을 낼 수 있는 캐주얼 정장 패션을 선호한다고 한다. 소개팅의 성공 여부는 단순히 외모로만 판가름 되는 것이 아닐 것이다. 상냥한 미소, 매너 있는 행동, 재치 있는 유머로 상대방의 마음을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상대방에게 가장 나다운 모습을 보여주었을 때 본인의 매력을 어필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서울신문 나우뉴스 윤태희 기자 th20022@seoul.co.kr
  • [신용협동기구는 지금] 호가기준 뻥튀기 후순위 주택대출… ‘錢錢긍긍’ 한국경제

    [신용협동기구는 지금] 호가기준 뻥튀기 후순위 주택대출… ‘錢錢긍긍’ 한국경제

    가계빚 위험이 금융권 전체로 확산되는 조짐이다. 은행권과 비은행권 예금기관의 공격적인 대출 경쟁이 금리인상 시기와 겹치면서 한국 경제의 복병으로 등장한 것이다. 이에 따라 금융권의 연쇄적인 부실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금융 당국은 조만간 가계부채 종합대책 마련을 위한 민관합동 태스크포스를 구성해 다음달쯤 대책을 발표할 것으로 알려졌다. 신용협동기구의 가계대출이 급증한 배경엔 제2금융권의 주택담보대출 구조와 관련이 있다. 저소득·저신용계층은 담보로 잡힐 주택이 있더라도 제1금융권인 은행에서 담보인정비율(LTV) 한도만큼 대출을 받지 못한다. 은행들이 상환 능력을 깐깐하게 따지기 때문이다. 나머지 부족분을 상대적으로 문턱이 낮은 신용협동기구와 저축은행 등 제2금융권에서 채울 수밖에 없는 구조다. 문제는 신용협동기구의 경우 대출자가 돈을 갚지 못할 때, 은행 다음으로 담보를 가져가는 ‘후순위 담보대출’로 집값 하락의 리스크(위험)를 떠안게 된다는 점이다. 신용협동기구는 현재 후순위 담보대출 시장을 장악하고 있다. 여기에 새마을금고와 신협 등이 최근 2~3년간 주택담보대출 비중을 경쟁적으로 키운 탓도 크다. 주택 실거래가가 아닌 호가 기준으로 담보가치를 부풀려 평가한 뒤 대출액을 늘려 주거나 공인중개업소에 소개수수료를 주고 대출을 의뢰하는 편법 영업도 이뤄졌던 것으로 업계는 전하고 있다. 이런 부실 대출은 고스란히 연체율 증가로 이어진다. 가계대출 가운데 신용협동기구의 주택담보대출 연체율은 2009년 말 2.56%에서 지난해 9월 현재 3.16%로 0.60% 포인트 증가했다. 은행권과 신용카드에서도 가계빚 위험도가 커지고 있다. 6일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해 11월 중 예금 취급기관의 가계대출은 6조 5774억원 늘어나 2006년 12월(7조원) 이후 4년 만에 가장 큰 폭으로 증가했다. 은행권은 올해도 가계대출을 늘리는 방식으로 영업 전략을 짜고 있다. 시중은행들이 올해 가계대출 규모를 지난해보다 7%가량 늘어난 460조 4000억원(대출총액 기준)으로 잡고 있는 것으로 금융감독원 측은 집계했다. 손쉬운 가계대출로 ‘캐시카우’(현금창출원)를 삼겠다는 전략이지만 자칫 집값 하락과 금리인상이 이어질 경우 은행권 부실로 이어질 수 있다. 카드론 증가 추세도 우려된다. 2009년 1~9월 12조 8000억원에서 지난해 같은 기간 17조 9000억원으로 40.1% 급증했다. 카드사들이 가맹점 수수료율 인하 등으로 신용판매 수익이 줄어들면서 카드론 영업을 강화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전성인 홍익대 경제학과 교수는 “외환위기 때는 가계보다 기업 대출이 대부분이어서 기업들이 직격탄을 맞았다.”면서 “하지만 이후부터 은행영업이 가계신용으로 전환되면서 상황이 달라졌고, 가계 소득 대비 부채 비율이 적지 않다는 게 문제”라고 지적했다. 전효찬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아직까지 가계부채가 큰 문제로 떠오르고 있지 않지만 금리인상과 함께 악재로 나타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한국은행 관계자는 “가계부채의 경우 규모 증가보다 누가 더 많이 빌려 썼느냐가 관건”이라면서 “저소득층의 대출 규모를 예의주시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김경두·홍지민·오달란기자 golders@seoul.co.kr [용어 클릭] ●신용협동기구 농·수협 단위조합의 상호금융과 신용협동조합, 새마을금고 등을 아우르는 제2금융기관이다. 조합원으로부터 받은 출자금과 적금의 수입관리, 조합원에 대한 대출 업무를 한다. 상호저축은행과 은행 신탁, 우체국 예금 등은 제외된다.
  • 우리딸 예쁜 얼굴 라인? 男보다 ‘턱교정’ 빨라야

    우리딸 예쁜 얼굴 라인? 男보다 ‘턱교정’ 빨라야

    ‘우리 애 턱교정 치료는 언제 하지?’ 겨울방학을 맞은 학부모들의 고민이다. 특히 딸을 둔 부모라면 아이의 외모에 남달리 신경이 쓰인다. 이에 대해 교정 전문의들은 “여아의 턱교정은 남아보다 빨라야 한다.”고 충고한다. 연세대치대병원 교정과 백형선 교수는 “일반적으로 여자가 남자보다 사춘기 성장이 2년 정도 빨라 턱교정도 더 빨리 시작해야 한다.”고 말했다. ●교정치료는 언제 교정치료 시기는 환자의 상태에 따라 다르다. 위턱이나 아래턱에 문제가 없고, 단지 치열만 부정교합이라면 12세 전후에 치료를 받는 것이 좋다. 턱 위치나 위아래 턱의 상태가 좋다면 어느 연령에서도 가능하다. 하지만 위턱에 비해 아래턱이 발달한 주걱턱이나 위턱이 돌출된 경우, 아래턱이 무턱처럼 보이거나 얼굴이 비대칭인 부정교합은 성장 조절을 이용한 치료를 해야 해 성장기 어린이만 치료가 가능하다. 특히 주걱턱 중에서도 아랫니가 돌출됐다면 치료를 서둘러야 한다. 이 경우 같은 나이라도 사람마다 턱 성장 상태가 다르므로 전문의와 상의해 치료 시기를 정하는 것이 좋다. 아래턱이 이미 많이 자란 턱은 사춘기가 지나면 교정치료가 어렵다. 심한 경우 턱수술이 불가피한 경우도 많다. 아래턱보다 위턱이 덜 자란 아이라면 성장기 중에도 치료가 가능하지만 치료 효과가 떨어지고 치료기간도 길어진다. 여자의 아래 턱은 20살까지 자라는 남자와 달리 만 16세까지 자라며, 특히 초경 전 1년 동안 가장 많이 자란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턱교정은 조기 치료가 효과적이지만 유전적 소인이 크면 사춘기 이후에 다시 나빠질 수 있어 주기적인 관찰이 필요하다. 특별히 수술이 필요한 경우에는 성장이 마무리된 20세 이후에 하는 것이 좋다. 최근에는 주로 수능이 끝난 후 교정치료를 시작해 1년 후 수술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손가락 빠는 아이 오랫동안 손가락 빠는 습관을 가진 아이는 부정교합을 가져올 수 있어 관심을 갖고 지켜봐야 한다. 만 4세 이전에는 문제가 없지만, 이후에는 치열과 턱뼈 성장에 문제가 생기기 쉽다. 특히 엄지손가락을 빠는 경우에는 입천장이 깊어지면서 위 앞니가 앞으로 뻐드러지고 아래 앞니는 안으로 기울어 아래턱 성장에 영향을 미친다. 이 경우 얼굴이 길어지고, 손가락 때문에 위아래 앞니가 맞물리지 못해 나중에는 앞니로 음식을 끊지 못하게 된다. 최선의 치료는 습관을 고치는 것인데, 간단한 교정장치나 마우스피스 등을 이용하면 효과적이다. 백형선 교수는 “이 밖에 부정교합을 초래하는 손톱 깨물기, 혀 내밀기, 구(口)호흡 등의 습관도 사례에 따라 치료가 필요한 경우가 있다.”고 설명했다. 심재억기자 jeshim@seoul.co.kr
  • [시승기] ‘한달 1만원 OK!’ 저속 전기차 타보니…

    [시승기] ‘한달 1만원 OK!’ 저속 전기차 타보니…

    기름값이 연일 최고치를 돌파하며 운전자들의 연료비 부담을 가중시키고 있다. 연료비를 확 줄인 전기차는 그동안 기업의 기술력을 과시하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지만, 최근에는 대중화 가능성을 시사하는 전기차가 속속 출시되고 있다. 다만 고가의 부품을 사용하다 보니 가격이 문제다. 소형 승용차의 2~3배에 달하는 가격 탓에 고속 전기차보단 비교적 가격이 저렴한 저속 전기차가 현실적인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전기차, 과연 어디까지 진화했을까.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전기차 전문업체인 CT&T의 ‘이존’을 직접 타봤다. ▶ “경차 못지 않네!” 근거리 주행에 최적 이존은 최고 60km/h의 속도를 낼 수 있는 ‘저속 전기차’다. 이 전기차는 2인승의 작은 차체에 배터리와 모터를 장착해 근거리 출퇴근이나 쇼핑용 등 세컨드카 개념의 차량이다. 가볍게 버튼을 누르면 시동이 걸린다. 전기차인 만큼 진동과 소음이 거의 없어 계기판을 통해 시동이 걸렸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추운 날씨에도 히터는 물론 히팅 시트 기능까지 갖춰 운전에 불폄함이 없다. 천천히 핸들을 돌리자 생각보다 무겁게 돌아간다. 장비를 최소화하기 위해 파워 스티어링 기능을 적용하지 않았기 때문. 하지만 운행에는 무리가 없는 수준이다. 본격적인 주행을 위해 도로에 나서자 마치 신기한 장난감을 보듯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된다. 2인승의 앙증맞은 크기에 플라스틱 차체, 전기차임을 나타내는 스티커를 붙여 일반 양산차와는 다른 독특한 모습이다. 가속 페달을 깊게 밟아 출발하니 옆 차선의 승용차 못지않게 제법 잘 치고 나간다. 이존의 최고출력은 28.1마력(2400rpm)이다. 특히 최고속도인 60km/h까지의 가속력과 제동력은 일반 경차에 뒤지지 않는 수준이어서 도심 주행에 적합하다. 다만 둔턱이나 홈이 파인 곳과 같이 도로 사정이 좋지 않은 곳에서는 차체가 흔들려 주행 안정감이 떨어진다. 또 노면에서 올라오는 거친 소음도 적절한 대책이 필요해 보인다. 전기차의 가장 큰 장점은 연료비. 일 평균 20km 주행 시 연료비를 포함한 한 달 유지비가 일반 가솔린 경차의 1/20인 1만원에 불과할 만큼 우수한 경제성과 이산화탄소를 전혀 배출하지 않는 친환경성을 갖췄다. 이존은 전압 76.8V, 용량 138Ah의 리튬배터리를 탑재했다. 1회 충전에 최대 84.2km를 주행할 수 있으며 충전에는 220V 콘센트 기준으로 5~7시간 정도의 시간이 소요된다. 배터리 수명은 7~8년이며 이 기간이 지나더라도 신차 대비 80% 정도의 성능을 발휘한다. ▶ 정부의 지원과 업계의 노력 절실 현재 서울에서 저속 전기차가 주행할 수 있는 곳은 전체 도로 8101km 가운데 제한속도가 60km/h 이하인 7845km이다. CT&T 소광영 부장은 “올해 도로 주행이 허용된 저속 전기차는 일부 고가도로나 외곽순환도로 등을 이용할 수 없다.”며 “가까운 길을 놔두고 먼 길을 돌아가야 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어 “전기차 대중화를 위해서는 더욱 현실적인 도로교통법 개정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가격은 납축전지 차 1529만원, 리튬전지 차 2300만원으로 보조금이 지급된다면 시장에서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정부는 오는 2012년까지 공공부문에 4000대의 전기차를 시범 보급하기 위해 저속전기차와 고속전기차에 각각 750만원과 1500만원의 보조금을 지원키로 방침을 정했다. 이처럼 전기차 대중화를 위해서는 보조금과 함께 도로교통법, 공공용 충전 인프라 등 정부의 지속적인 관심이 필요하다. 전기차 업계 역시 품질과 성능, 완성도를 높이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서울신문 M&M 정치연 자동차전문기자 chiyeon@seoul.co.kr
  • [고전 톡톡 다시 읽기] (50) 빅토르 위고의 ‘파리의 노트르담’

    [고전 톡톡 다시 읽기] (50) 빅토르 위고의 ‘파리의 노트르담’

    빅토르 위고의 장편소설 ‘파리의 노트르담’(Notre-Dame de Paris)은 국내에 ‘노틀담의 꼽추’라는 제목으로 익히 알려진 이야기다. 영화로도 유명한 이 작품은 곱사등이 종지기 카지모도와 아름다운 집시 에스메랄다의 러브 스토리 정도로 알려져 있지만, 원작에서 이는 주제를 떠받치는 다양한 소재 중의 하나일 뿐이다. 19세기 프랑스에서 자유와 낭만을 외치던 스물아홉의 위고는 15세기로 거슬러 가 복잡하게 얽힌 하나의 세계를 구축하게 된다. 그곳에는 아름답고 정교한 노트르담 대성당이 있고, 성당의 닫힌 문을 두드리는 이교도들이 있으며, 광장 한가운데 서 있는 교수대와 지하 감옥이 있다. 인간들은 그곳에서 나고, 자라고, 죽고, 미친다. 위고는 15세기 노트르담 아래에서 일어나는 이 모든 일을 조감하듯 그려냄으로써 자신의 세기의 진통을 고찰하고자 했던 것이다. 작품 첫 장은 1482년의 ‘광인절’ 묘사에 할애된다. 그레브 광장에서는 광인들의 교황을 선출하는 일이 한창이고, 파리 재판소에서는 한 판 풍자극이 벌어진다. 이런 날이면 학생들과 장사꾼, 거지들이 한마음이 되어 귀족과 성직자들을 조롱하기에 여념이 없다. “타도하라, 앙드리 나리를, 교회지기들과 서기들을, 신학자들을, 의사와 교회법 박사들을, 소송대리인들을, 선거인들과 총장을!” 이 소리에 불쾌해진 대학 서적상이 말한다. “이 시대의 빌어먹을 발명품들이 모든 걸 망쳐놓고 있다 이겁니다. 대포며 세르팡틴 포며, 구포, 그리고 특히 저 독일에서 온 또 하나의 가증스러운 발명품인 인쇄술 같은 것 말이지요. 이젠 수사본도 없어지고 서적도 없어졌소! 인쇄술이 서점을 죽이고 있어요. 말세가 왔어요, 말세가.” ●‘마녀사냥’ 유행한 15세기 프랑스 배경 1450년 구텐베르크가 인쇄술을 세상에 내놓은 이래 이렇게 ‘말세’가 왔다고 누군가는 말했다. 그러나 또 한편에서는 이렇게 외치는 이들도 있었다. 혁명이 왔다, 해방이 왔다! 위고는 거리의 시인 그랭구아르, 곱사등이 카지모도, 거지들의 왕초 클로팽 등을 통해 노트르담 뒤편에서 꿈틀거리는 이 기운을 포착해낸다. 신에게 바치는 숭배의 표현이었던 노트르담 대성당은, 실은 신에게 보일 수 없는 많은 것들을 등 뒤에 가리고 있었다. 미로처럼 얽힌 골목길 끝에 ‘기적궁’이라는, 이름과 맞지 않는 거지들의 아지트도 수많은 은폐물 중 하나다. 도시에 더럽게 얹혀 사는 이들이야말로 광인절에 가장 적합한 주인공들이며, 아름다운 도시와 성당을 의도치 않게 위협하는 세력이었을 것이다. 15세기에 사람들은 이들을 광인, 이교도라 불렀다. 프랑스 대혁명과 7월 혁명을 거친 뒤 프롤레타리아트 계급을 이루게 되는 것 역시 그들이다. 그곳은 예외지대로, 국가의 통치권은 결코 거기까지 닿지 못한다. 헝가리, 스페인, 이탈리아 등지에서 온 인간들은 프랑스 국민도, 파리의 시민도, 성당의 신도도 아니다. 영토 안에 있지만 사실상 외부에 존재하는 그들은 모두 집시이고, 일종의 디아스포라(Diaspora, 離散)이며, 현대식으로 말하자면 불법체류자들이다. 그런데 작품 초반 비럭질과 사기를 일삼는 존재들에 불과했던 이들의 양상이 후반부에 이르러 바뀌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들은 에스메랄다를 구출하고 동시에 못마땅했던 성당을 노략질하기 위해 기적궁을 나선다. 그리고 진입 시도 중 나이 어린 학생 하나가 무참히 살해당하자, 그 분노에 힘입어 미친 듯 전진하기 시작한다. 광인절에 광장 위를 시궁창처럼 흐르던 이들이 바야흐로 거센 급류가 된 것이다. 이것이 ‘파리의 노트르담’의 시작이고 어쩌면 모든 것이다. 위고는 어떤 문이 아주 잠깐 열리려는 바로 그 순간을 그려냈다. ●개인의 욕망이 모두의 혁명으로 이어진다 잠재되어 있던 것들이 어떤 촉발에 의해 느닷없이 발현될 때가 있다. 결과가 어찌되었든 그때 혁명계수는 최대치가 된다. 아름다운 여성을 욕망하면서 이루어진 카지모도의 변신을 보자. 그는 눈물과 슬픔을 알게 되고, 난생 처음으로 자신이 인간임을 느낀다. 그런데 이때의 변신은 그 자신만이 아니라 주변까지 변화시킨다. 희희낙락 교수형을 구경하던 군중들은, 교수형에 처해지기 직전 에스메랄다를 구출한 뒤 노트르담을 오르는 카지모도에게 환호와 박수갈채를 보낸다. 이 순간 카지모도는 왕과 사법에 저항하는 민중 영웅이 되고, 구경꾼들은 그에게 동조함으로써 평범했던 어느 날을 광인절로 되돌려버린다. 귀족과 성직자를 흉내내며 한껏 비웃는 불경한 날로. 이렇듯 혁명은 다른 삶과 다른 나를 욕망하기 시작한 누군가가 다른 이들의 잠들어 있던 욕망을 깨어나게 하는 순간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혁명의 지속성은 누구도 보장할 수 없다. 혁명이 모든 사람들을 영원히 안락하고 행복하게 해준다는 것도 허상이다. 잠시 왕을 위협하는 세력이었던 거지들은 이내 흩어지고, 카지모도는 무지 속에서 아군인 기적궁 거지들을 죽인다. 잠시 일어났던 소요로 성당이 무너지거나 파리가 함락될 턱이 없다. 위고가 보여주는 건 여기까지다. 작품은 교수형 당한 에스메랄다의 시신을 껴안은 채 아사한 카지모도의 백골을 보여주는 것으로 막을 내린다. 어쩌면 작품 전체는 서문에서 언급된 ‘숙명’(ANAΓKH)이라는 단어에 대한 긴 주석일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위고는 숙명 안에서 펼쳐지는 인간들의 헛된 시도와 미망을 보여주기 위해 펜을 들었던 게 아니다. 기적궁 거지들과 카지모도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생명이 본능적으로 만드는 혁명의 기운 그 자체다. ●존재의 생사·존재의 변신 모두 숙명 존재의 생사가 숙명이라면, 존재들의 변신 또한 숙명 아니겠는가. 사랑이 본능인 한 혁명은 언제까지고 그와 함께한다. 마구잡이식으로 마녀사냥을 하던 15세기, 혁명과 반혁명이 이어지는 어지러운 19세기에도 사람들은 그렇게 살고 싸웠다. 1789년의 프랑스 대혁명, 박애사상의 대두, 그러나 곧바로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 1830년 7월 혁명과 영광의 3일, 다시금 왕의 부활…. 구체제와 혁명의 끊임없는 갈등과 긴장관계, 그 한복판에서 위고는 무지하고 추한 인간들을 대거 등장시킨 이 작품을 집필했던 것이다. 그에게는 쓰는 행위가 곧 싸움이고 숙명이었던 셈이다. 오늘도 시궁창은 도시를 가로지르고 호텔과 백화점들 뒤에는 기적궁이 엎드려 있다. 하지만 거기에도 사랑이 있고, 하루하루 만들어지는 삶이 존재한다. 21세기에도 화려한 빌딩숲 뒤에 사는 수많은 존재들이 언제 어디서 더 나은 생을 위해 성문을 부수려 할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그 순간이 오면, 사랑과 혁명의 에너지가 폭발하듯 솟구칠 것임은 물론이다. 안명희 수유+너머 남산 연구원 서울신문 · 수유+너머 공동기획
  • 연소득 3000만원이하 6개월이상 무주택자 국민주택기금 활용을

    연소득 3000만원이하 6개월이상 무주택자 국민주택기금 활용을

    전셋값이 크게 오르면서 세입자들의 부담이 커지고 있다. 여윳돈이 없는 사람들이 앞다퉈 두드리는 은행 문은 지난해에 비해 다소 문턱이 낮아진 상태다. 9일 금융업계에 따르면 최근 시장금리가 내려 연 4~6% 수준의 금리로 전세자금을 대출받을 수 있다. 국토해양부가 운영하는 국민주택기금의 전세자금대출은 평균 4%, 은행 재원으로 운영하는 전세자금대출은 평균 6% 수준이다. 시중은행의 전세자금 대출금리는 비슷하다. 코픽스연동형 상품을 기준으로 국민은행의 전세자금 대출은 연 4.29~5.69%, 신한은행의 신한전세보증대출은 연 4.3~5.6%, 우리은행의 우리전세론은 연 4.6~5.3%의 금리를 받는다. 세입자 입장에선 월세로 살기보다 대출을 받아 전세를 유지하는 게 이익이다. 은행에서 빌린 전세자금은 연말정산에서 혜택도 받는다. 원리금 상환액의 40%(300만원)까지 소득공제가 된다. 아울러 은행 전세자금 대출에 필요한 주택금융공사의 보증 요건도 완화됐다. 담보가 필요 없는 대신 주택금융공사에 일정 금액의 보증료를 내야 한다. 보증료는 보증금액의 연 0.2~0.6% 사이다. 만 20살 미만의 자녀가 3명 이상인 가구, 혼인기간 5년 이내인 신혼부부는 보증료를 0.1%포인트 할인받는다. 조건만 된다면 국토부의 국민주택기금을 재원으로 하는 전세대출을 이용하는 게 가장 유리하다. 연소득 3000만원 이하이고, 6개월 이상 무주택자이면 된다. 연 4.5% 금리로 최대 6000만원(3자녀 이상 가구는 8000만원)까지 대출이 가능하다. 전용면적 85㎡ 이하인 주택을 전세로 얻을 때에만 해당한다. 오상도기자 sdoh@seoul.co.kr
  • 급전 땐 은행보다 지인!

    저소득층일수록 대출이 필요할 때 은행보다는 지인 등을 찾는 것으로 나타났다. 신용이 낮은 저소득층에게는 여전히 은행 문턱이 높다는 방증이다. 통계청이 지난해 소득 5분위별 신용대출 현황을 분석한 결과, 소득 1분위(하위 20%)의 기관별 신용대출 금액 비중은 개인이 33.2%로 가장 높았다고 5일 밝혔다. 은행이 32.5%로 2위, 비은행 금융기관(농·수협, 신협, 새마을금고, 우체국 등)이 24.5%로 3위를 차지했다. 이어 보험 2.0%, 저축은행 0.2% 순이었다. 소득 2분위 계층에서는 개인에 의지하는 비중이 25.1%에 달했다. 은행(37.9%), 비은행 금융기관(25.5%)에 이어 3위다. 반면 소득 5분위(상위 20%)에서는 은행대출 비중이 67.3%로 가장 많았다. 비은행 금융기관도 18.1%로 조사됐지만, 개인은 5.5%에 그쳤다. 가구주 직업이 임시일용직 근로자일 때 역시 개인에게 빌린 금액이 36.1%로 은행 신용대출(36.5%)과 거의 같은 수준을 보였다. 유영규기자 whoami@seoul.co.kr
  • [서울신문 2011 신춘문예-소설 당선작] 미치가 미치(이)고 싶은/차현지

    [서울신문 2011 신춘문예-소설 당선작] 미치가 미치(이)고 싶은/차현지

    아저씨의 아내가 임신을 했다. 아이는 5개월짜리. 5개월 전에 아저씨의 정액이 아내의 질을 파고들어 거센 산성반응에도 끝끝내 굴복하지 않고 수정란을 착상시켰다. 5개월 전이라면 아저씨와 내가 종로 3가 나이스 모텔 205호에서 새벽 내내 서로의 배꼽 속에 손을 넣었던 때다. 나와 만나기 전날이거나 혹은 다음날에 아저씨는 아내와 같이 잠자리에 들었고 기계적인 성교를 했을 것이다. 아저씨의 아내는 궁색한 가짜 신음소리 내기에 바쁜 여자니까. 아저씨는 여자의 신음소리에 민감하다. 신음소리의 진위 여부를 따지는 것에 편집증 환자처럼 집착한다. 그런 아저씨가 나를 좋아하는 까닭은 단 하나. 나는 가짜 신음소리 따윈 내지 않는다. 오로지 진심. 나는 진짜에게만 연다. 그것이 성대든 밑구멍이든 간에. 오늘 만나. 삐리릭. 교실 한구석에서 체육복을 베개 삼아 누워 있던 나는 문자를 확인하고 곧장 가방을 싼다. 든 것도 없는 가방을 메고 나는 교실 밖으로 향한다. 교문을 빠져나오는 도중에 아저씨에게 한 번 더 문자가 온다. 우리가 만나는 시간과 장소가 적힌, 매우 절약적인 문자. 럭셔리 라운지 모텔 507호. 아홉 시. 아홉 시까지, 아홉 시간이나 남았다. 그날도 여지없이 바람이 불었다. 아저씨와 만나는 날은 어쩐지 모르게 세찬 바람이 분다. 한반도가 원래 이렇게 바람이 많이 부는 곳이었나? 아저씨는 이쑤시개로 이를 쑤시며 말했다. 그러게요. 치마 밑단이 바람에 너풀거렸다. 얘, 허벅지 다 보인다. 아저씨가 말했다. 알아요. 그냥 내버려 두는 거예요. 넌 참 미쳤구나. 그래서 이름이 미치인가 보구나. 아저씨와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갔더니 장례를 다 마친 식구들이 둘러앉아 할아버지에 대한 추억을 하나 둘씩 꺼내고 있었다. 넌 그새 또 어디 갔다 왔니. 그냥 잠깐. 나는 대충 둘러대고 방으로 들어갈 셈이었다. 그런데 할머니. 할머니가 안 보였다. 엄마, 할머니는? 하고 물어보려던 찰나, 내 방 문 틈새로 할머니의 굽은 등이 보였다. 굽은 등은 서서히 몸을 웅크리며 일정한 리듬에 맞춰 떨었다. 할머니는 울고 있었다. 나는 다음날도 아저씨를 만났다. 삼성동 명아장 모텔 313호. 시간은 오후 아홉 시. 나는 근처 화장실에서 교복 와이셔츠를 벗고 보라색 민무늬 원피스를 입었다. 바람이 찼다. 나는 여덟시 오십 오 분에 모텔에 도착했다. 내가 313호의 문을 열었을 때는 이미 아저씨가 다 벗은 몸으로 누워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이. 아저씨가 인사했다. 방에서는 이상할 정도로 쾌적한 향내가 풍겼다. 오히려 첫 번째 갔던 곳이 적당히 촌스러우면서 마음이 편했다. 옷을 못 벗겠어요. 내가 말했다. 아저씨는 보라색 민무늬 원피스를 아래에서부터 위로 벗겨냈다. 그리고는 내 몸 이곳저곳을 꾹꾹 누르듯이 만져댔다.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지만 그냥 참았다. 나는 아저씨가 하라는 대로 몸을 열고 젖히고 오므리고 뒹굴었다. 두툼한 손가락처럼 두툼한 아저씨의 뱃살이 출렁거리며 내 피부에 닿았다. 남의 살을 맞대는 것이 기분이 나빴다. 아저씨의 거죽에 파묻혀 질식할 것 같았다. 물론 아저씨가 그렇게 뚱뚱하지는 않지만 그냥 남의 살결, 살 틈으로 새어나오는 냄새 같은 것이 어쩐지 두려웠다. 한 차례 사정이 끝나고 난 뒤에 아저씨는 모로 누워 담배를 피웠다. 그때까지 나는 아저씨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다. 얘, 너 이름이 뭐라고 했더라? 아저씨가 슬쩍 내게 말을 건넸다. 미치. 미치예요. 아아, 그래. 그래서 내가 너에게 미쳤다고 말을 했었지. 네에. 근데 전 미치진 않았어요. 그냥 미치일 뿐이에요. 음, 그래. 하지만 좀 특별한 이름이구나. 네에. 미카엘 같은 거랑 연관된 건 아니에요. 음, 그렇구나. 그렇다면 미치는 무슨 뜻이니? 미치는 그냥 미치인데요. 별 뜻은 없어요. 음, 그렇구나. 아저씨는 다시 담배에 불을 붙이고 대화를 끝내겠단 듯 자세를 고쳤다. 등 돌린 아저씨의 넓은 등짝이 우스워 보였다. 나는 아저씨의 담배를 빌려 등짝에 무어라 쓰고 싶었다. 등신이라고. 그때 아저씨 이름을 물어보면 좋았을 걸. 아직도 나는 아저씨 이름을 모른다. 장씨, 김씨, 윤씨, 최씨. 개중에 하나겠지. 여하튼 내가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성씨일 거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아저씨의 두툼한 손가락과, 출렁이는 뱃살, 수염자국이 난 얼굴피부뿐이다. 정수리 근처가 조금 휑한 거나 금이빨로 된 어금니가 하나 있다는 것, 배꼽부터 무성한 털이 하반신 전체를 뒤덮고 있다는 것과 생각보다 발이 아담한 것, 그리고 오른쪽 팔뚝에 개에 물린 자국 같은 게 있다는 것까지. 아저씨의 흉터는 곧 아저씨의 이름이었다. 아저씨와는 일주일에 두어 번 정도 만났다. 만나는 장소는 서울 전역. 아저씨는 최대한 겹치지 않도록 고심하여 장소를 물색하는 것 같았다. 한 번도 같은 동네, 같은 모텔을 반복해서 간 적이 없었다. 생각보다 서울은 넓었다. 구석구석 늘어선 골목과 로터리가 답답할 정도로 복잡했다. 위로 세우고 벙커를 만들고, 한정된 공간의 쪽수를 넓히거나 한 칸짜리 공간을 좁히거나 하는 식으로 자꾸만 넓어져 가는 서울. 뚝딱뚝딱 완공이 끝나면 어디에선가 증축이 시작되고, 어딘가가 매끈해지면 다시 어딘가가 더럽혀졌다. 더럽혀진 부분을 메우는 동안 또 어딘가가 파괴되고 무너져 갔다. 할아버지는 폭설이 내리던 날, 보도블록에서 미끄러져 죽었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은 채 병원으로 후송된 지 십 칠 분 만에 사망선고를 받았다. 가족들은 오래 살다 가셨으니 여한 없으시리라 판단, 호상이라 여기며 잔칫집처럼 장례를 치렀다. 여기저기서 웃고 떠들고 화투 패를 돌리고 거나하게 취해 노래를 불러대고. 삼일 중 이따금씩 곡소리가 들렸으나 그것도 매우 형식적이었다. 하하호호 웃다가 누군가 곡소릴 내면 얼마간 따라 울어주고, 딸꾹질 멈추듯 뚝 그치면 다시 하하호호하며 서로의 안부를 물었다. 처음 보는 광경에 놀란 내가 밖으로 빠져나와 교복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낸 순간, 아버지가 홀연히 담배를 물며 밤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서울에서 보는 별은 참 폼이 안 나. 아빠는 소주가 담긴 종이컵을 조심스레 한 모금씩 마셨다. 아빠의 왼손에 달린 담배가 빨간 불씨를 태우며 양복바지를 위협했다. 그거 탈 거 같은데. 내가 말했지만 아빠는 듣지 못했다. 염병할 양반. 보도블록에서 고꾸라지기는. 아빠는 색색의 벽돌이 지그재그로 놓인 보도블록을 얼마간 쳐다보다가 가래침을 뱉었다. 카악, 퉤. 아직 녹지 않은 눈에 가닿은 가래침은 희부연 노란빛을 풍겼다. 아빠는 다 태우지도 않은 담배와 함께 종이컵을 집어 던졌다. 소주가 바닥을 치고 튀었다. 아빠는 불콰해진 얼굴을 하고 다시 식장 안으로 돌아가는 듯했다. 나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는 아저씨에게 문자를 넣었다. 아저씨 뭐해요. 그러나 답장은 오질 않았다. 실은 한 번도 먼저 연락해 본적이 없었다. 뭐하냐고. 역시 묵묵부답. 차라리 보내지 말 걸, 두 번씩이나 씹혔다. 쪽팔리게.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문자가 도착했다. 미친이구나. 오늘 만날까? 미친이라니, 내가 분명 미치지 않았다고 했을 텐데. 미친 아저씨. 나는 눈에 젖은 운동화 끈을 고쳐 매고 곧장 아저씨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내가 병원 앞에서 택시를 잡으려고 서성이는 동안 아빠는 병원 건물 귀퉁이 어딘가에서 토를 하고 있었다. 아빠는 대충 토하는 것을 마치고는 보도블록에 그대로 고꾸라졌다. 얼굴 표면이 토사물 범벅이었다. 아빠의 긴 속눈썹에 연주황색으로 변한 실파가 붙어 있었다. 더럽게시리. 나는 다시 대로변으로 눈길을 돌렸다. 택시는 쉽게 잡히지 않았고 나는 얼마간 더 병원 앞에 서 있어야 했다. 한쪽 손을 기계처럼 흔들면서 무심코 하늘을 바라보았다. 아빠 말대로 별 몇 개가 우스운 크기로 떠 있었다. 저게 무슨 별이야. 그러는 사이에 택시가 잡혔다. 어디 가십니까? 하고 물어오는 택시 아저씨에게 별 보러요, 라고 말할 뻔했다. 할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는 삼일 내내 나는 아저씨를 만났다. 만나서 하는 일이라곤 섹스가 전부였고, 섹스가 끝나고 치르는 비릿하고 울적한 냄새들을 소멸시키는 일에 신경 쓰느라 내 가방 속에 구겨져 있을 교복 같은 건 생각하지 않았다. * 아저씨의 아내가 임신을 했다는 말을 듣고 나는 손가락으로 시트자락을 빙글빙글 말았다가 풀었다가를 반복하면서 어떻게 대꾸를 해야 될까 하는 생각보다는 어떻게 하면 아저씨에게서 아내 얘기를 그만 들을 수 있을까에 대해서 고민했다. 왜 애를 가졌어요? 내가 아저씨 배꼽에 손을 집어넣고 꼼지락거리며 물었다. 아저씨는 간지러웠는지 실실 웃으며 좌우로 몸을 배배 꼬았다. 내가 가진 건 아니고 아내가 가진 거지. 아저씨는 말했다. 그렇지만 아저씨 꺼가 필요하잖아요. 음, 그렇긴 하지만 뭐 그거랑 그거랑 같은 일로 봐서는 좀 그렇지. 그거랑 그거랑 원래 같은 거 아니에요? 그걸 해야지 그걸 할 수 있잖아요. 에이, 하지만 언제나 그걸 하려고 그거 하는 거 아니잖아. 아아, 하긴. 우리도 그거 하려고 그거 하는 거 아닌 것처럼요? 으응, 그래 맞아. 골치가 아픈 일이지, 그거는. 우리는 너무나 많은 그거를 사용했고, 나중에 가서는 굳이 그거를 사용하지 않아도 되는 부분에서까지 그거 타령을 했다. 그러다가 대화의 종반부에서는 그거가 무엇을 뜻하는지, 어디에서부터 그거를 그거로 불렀는지, 그거가 그거가 아닌 다른 그거인 건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부랴부랴 대화를 마치고 다시 등을 돌려 누웠을 때, 아저씨의 등과 내 등이 맞닿았다. 나는 차갑고 아저씨는 뜨겁다. 섹스를 하고 나면 아저씨가 차가워지고 내가 뜨거워진다. 척추를 나란히 두고 우리는 열과 냉을 반복적으로 옮겼다. 열탕과 냉탕을 번갈아 가는 기분이었다. 아저씨도 참 후졌다. 내가 말했다. 아저씨의 등줄기가 움찔했다. 글쎄 내가 만든 게 아니고 아내가 만든 거라니까. 아저씨가 발로 내 종아리를 간질였다. 굳은살이며 티눈이 박인 피부 표면이 까끌까끌했다. 어떻게 하면 애를 낳을 생각을 해요? 너무 구려. 너무 너무 구려. 지금 시대가 어떤 시대인데. 어떤 시대기는, 잘 먹고 잘사는 시대지. 너무 구려. 태어나는 일 자체가 구린 시대예요, 지금 이 시대는. 미치. 너는 너무 어린데, 너무 많은 걸 봤어. 그러니까 지금 이러고 있잖아요. 씨발. 나는 울먹였다. 아저씨가 발로 장난치는 것을 멈추었다. 다시 몸이 차가워지는 것 같았다. 그 애 낳으면 나 꼭 보게 해줘요. 음, 그래. 그럴 수 있다면 뭐, 그렇게 해보지. 아저씨는 말을 이으며 침대를 빠져나갔다. 어디가요? 똥 누러. 아저씬 왜 만날 그렇게 똥을 싸요? 모르겠어. 난 너만 보면 똥이 마려워. 아내 앞에서는요? 집이건 회사건 똥 싸는 일이 고역인데, 난 너만 보면 똥구멍이 빠져버릴 거 같아. 나는 킥킥대며 웃었다. 똥을 싸고 싶어 재빠르게 화장실로 가는 아저씨의 뒷모습이 사랑스러웠다. 나만 보면 똥이 마렵다는 아저씨. 나는 또 한번 아저씨에 관한 흉터를 진하게 새겼다. 똥냄새를 풍기며 침대로 돌아온 아저씨와 뒹굴다가 말고 문득 할머니 생각이 났다. 여든 여덟의 할아버지와 함께 육십 년을 살아온 할머니. 할머니는 일흔 일곱. 열한 살 연상의 남편을 마주 대하며 겪었을 무수한 고통을 유순한 고집과 무지한 강직함으로 이겨낸 할머니.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삼 년 전에 서울로 올라왔다. 평생 동안 밭을 일구고 소를 키우며 지냈던 고향을 저버린 것은 할머니의 류머티즘 관절염이 심해진 탓이었다. 밭을 안 일구면 되지 않냐, 그냥 일 안 하고 시골에 계속 계시면 안 되냐, 하고 심술을 툴툴 부린 내게 엄마는 꿀밤을 먹였다. 네가 시골에 가서 한 번도 살아보질 못해 이러는구나. 시골에 산다는 것 자체가 일이다. 일을 안 하고 살 수 있다는 개념 자체가 없는 곳이야. 등불이 없는 동굴 같은 곳이라고. 그렇지만 친하지도 않은 어른들과 함께 부대껴 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걱정 마. 따로 모실 거니까. 따로 사는 데엔 나보다 엄마 몫이 더 컸다. 아빠는 미적지근하게 그러지 뭐, 하며 우리 집 근처에 값이 싼 아파트를 골라 전세계약을 했다. 십육 평형 아파트는 지은 지 이십 년이 넘었다. 군데군데 갈라진 틈새며 월마다 꼬박꼬박 작동 점검을 하는 엘리베이터가 기괴하게 느껴졌다. 나는 그것 때문에라도 할머니 집에 잘 가지 않았다. 가끔 식용유나 세제 같은 걸 사들고 가는 아빠에게 거기 귀신 나올 것처럼 음산해, 라고 말하면 아빠는 내 콧잔등을 쿡 치면서 노인네들 잠자리 뒤숭숭하게 함부로 말 놀리지 말라고 대답했다. 그깟 귀신, 어차피 동년배들 아니겠어? 속으로 나는 생각했다. 할머니 집 전세계약이 얼마 안 있어 끝날 참이었다. 재계약 여부에 대해 곰곰이 따지고 있던 엄마는 되레 계약기간 전에 죽어버린 할아버지를 조금은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또 조금 원망하기도 했다. 엄마는 짐들이 가득 들어찬 다용도실을 대충 비워내고 할머니가 덮을 이불을 마련했다. 할머니는 풀지 않은 짐짝처럼 더욱 몸을 웅크리며 집으로 들어왔다. 때때로 자정에 가까운 시간, 내가 비릿한 정액 냄새를 풍기며 집으로 들어오면 건넌방에 있던 할머니가 빠끔히 문을 열고 나를 들여다봤다. 내가 왜요? 라는 기색으로 노려보면 이내 주춤거리는가 싶게 눈을 피하다가는 언제 왔는지 모르게 다시금 내 쪽을 살폈다. 내가 한 번 더 뭘 봐요? 라는 표정으로 찌릿, 눈빛을 쏴주면 그제야 다 알겠다는 듯 체념한 얼굴로 방문을 닫았다. 기분 나빠. 내가 닫힌 방문 틈새로 들릴 만큼 크게 말했다. 그럼 방문 너머로 할머니가 쪼그라든 풍선처럼 한숨을 쉬는 것이 느껴졌다. 그럴 때마다 장례식장에서 보았던 별 몇 개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옹졸하게 쪼그라든 것이 언젠가는 점점 작게, 그보다 더 작게, 그래서 결코 보이지 않을 것처럼 아득해질 것만 같았던 별들. 마치 할머니의 쪼그라든 유방처럼. 너네 엄마니까 네가 알아서 해. 안방에서 언성 높이는 소리가 들렸다. 구질구질한 부부싸움이 또 시작됐다. 카악, 퉤. 아빠의 가래침 뱉는 소리가 들렸다. 이게 어디서 뱉어 진짜? 엄마가 이전보다 한 톤 높게 소릴 질렀다. 카악, 퉤. 카악, 퉤. 의식적으로 가래를 뱉다가 사래 걸린 아빠가 연신 밭은기침을 토했다. 조금 과장이다 싶게. 나는 방밖으로 나가볼까 하다가 귀찮아져서 그냥 침대에 누웠다. 모텔과는 다른 차원의 이불을 손끝으로 매만지다가 말고 할머니가 궁금해졌다. 엄마 아빠는 아무래도 버려진 짐짝처럼 놓인 할머니 따위는 신경 안 쓰는 것 같다. 미친 엄마 아빠. 나는 방문을 열고 건넌방에 있는 할머니를 살핀다. 방문이 미세하게 열려 있다. 아마도 할머니가 직접 살짝 문을 열어 놓았을 터. 문과 문턱이 아귀가 딱 맞게 붙어 있지 않고 약간 틈을 벌리고 있다. 그 미세한 틈처럼 할머니는 숨을 쉬고 있는지 몰랐다. 사방이 막힌 곳에서, 끝없이 유입되는 물세례에 허덕이듯이. 할머니 서럽겠다. 짝이 없으니 얼마나 비참하겠어. 네 아저씨는요? 아저씨의 귓불을 빨면서 내가 물었다. 그건 여자에게만 국한된 일이야. 남자는 상대적으로 자유로워. 아예 머릿속에 그런 게 없어. 이 사람 없으면 죽겠다 싶은 그런 게. 결혼 왜 했어요? 내가 묻자 아저씨는 뜸을 들였다. 글쎄, 돈을 모아야 하니까. 그리고 어쨌든 옆에 사람이 있어야 좋지 않겠어? 남자란 게 그래. 챙겨주고 입혀줄 사람이 꼭 필요하지. 좆나 후졌네, 남자들이란. 내가 말을 마치자 아저씨가 깔깔 웃었다. 뭐가 웃긴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기분이 나빴다. 미친 아저씨. 뭐 이런 게 다 있지? 덜 말린 해초처럼 무성한 아저씨의 풀숲을 헤치다 말고 나는 입을 뗐다. 입술에 빳빳한 음모가 달라붙었다. 에이, 좀더 해주지 그래. 아저씨가 눈을 감은 채 말했지만 나는 그냥 일어났다. 반투명한 유리 칸막이로 된 화장실로 들어가 온몸을 빡빡 문질러대며 샤워를 했다. 아저씨가 따라 들어왔다. 에이, 미치. 섭섭하게 왜 그래. 아저씨가 내 팔뚝에 묻은 거품을 닦으면서 품에 안으려 했다. 나는 반사적으로 샤워기를 아저씨 방향으로 틀었다. 뜨거운 물줄기가 아저씨 살갗에 닿았다. 앗 뜨거워. 아저씨는 반사적으로 몸을 움직였다. 오늘은 안 할래요, 피곤해요. 저리 가요. 이제 만지지 마요. 아저씨는 몸에 묻은 물기를 털고 아쉬운 표정으로 나갔다. 내가 샤워를 마치자 아저씨는 침대에 걸터앉아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미치. 앞으로 삼주 정도 못 봐. 나는 왜냐고 물어보려다 그냥 말았다. 아내랑 여행을 갈지도 모르겠어. 아무래도 애 낳기 전에 좀 돌아다녀야 될 것 같아서. 애가 나오면 피곤해지잖아. 나는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매만지며 물기를 닦았다. 외국을 다녀올까 해. 연차랑 휴가 당겨쓰니까 삼주 정도 여유가 생기더군. 나는 대충 로션을 찍어 바르고 옷을 챙겨 입었다. 가방 속에 든 교복을 입을까 하다가 그냥 관두었다. 아내가 더블린에 가고 싶다네. 난 애초에 더블린이 어디 박혀 있는 덴지도 몰랐다니까. 그냥 동남아 일대나 둘러보고 올 것이지, 무슨. 대충 스타킹까지 신었다. 주머니를 쑤셔 담배를 찾았다. 아저씨가 담배를 건넸지만 무시했다. 삼주 뒤엔 웃으며 보자. 내가 널 좋아하는 건 명랑해서야. …… …… 삼주 동안 똥 못 싸서 어떡해요? 그러게. 그걸 생각 못 했네. 아저씨는 정말 진지한 표정으로 고민했다. 그 모습에 어이가 없어 픽 웃었더니 아저씨가 갑자기 나를 들어 침대 중앙으로 눕혔다. 아직 화 안 풀렸거든요? 내가 말해도 묵묵부답. 아저씨가 좋아하는 보라색 원피스가 내 몸에서 멀어졌다, 부득이하게. 아저씨는 이전보다 더 맹렬하게 내 몸 이곳저곳을 들쑤셨다. 그때 처음으로, 진짜 신음소리라는 게 뭔지 알 것 같았다. 다음날 일어나보니 엉덩이에 푸른 멍이 흉터처럼 들어 있었다. 언제고 지워질 것이 빤한 흉터가. * 아저씨는 정말 삼주 넘게 연락을 하지 않았다. 나는 오랜만에 학교엘 갔다. 책상에 엎드려 잘까 하다가 그냥 수업을 들었다. 의자에 등을 펴고 앉아 있었지만 역시 좀이 쑤셨다. 쉬는 시간이 끝나고 수업 종이 쳤다. 삼삼오오 모여 있던 애들이 자리로 가 책상을 정돈했다. 아직 선생이 오질 않았다. 틈을 타 가방을 몰래 들고 빠져 나왔다. 이제 어디든 갈 곳을 찾아야 했다. 버스정류장에 서 있는데 갑자기 누가 말을 걸었다. 쎄미였다. 나도 데려가. 미친년. 귀찮게시리. 우리는 시내로 나가는 버스를 탔다. 어디 갈 건데? 몰라. 뭐야, 시시하게. 그럼 나 따라와. 그러든지. 우리는 번화가 로터리에서 내렸다. 쎄미는 지하철역으로 나를 데려가더니 역사 안 물품보관함에서 옷을 꺼냈다. 초록색 미니 원피스였다. 넌 갈아입을 거 없어? 나는 가방 안에 든 보라색 민무늬 원피스를 꺼내 보였다. 우리는 쌍방울자매처럼 원피스를 맞춰 입었다. 쎄미가 아이라이너와 립스틱을 주었다. 나는 어설프게 아이라인을 그리고 립스틱을 발랐다. 우리는 피시방으로 갔다. 모니터 한 대를 앞에 두고 나는 쎄미가 게임하는 걸 지켜보다가 졸았다. 얼마 안 있어 쎄미가 내 어깨를 툭툭 쳤다. 이제 나가자. 시계를 보니 일곱 시였다. 번화가 로터리는 반짝이고 있었다. 온갖 조명 세례에 비둘기들은 나뭇가지 위로 종적을 감췄다. 보도블록은 연이어 뱉은 껌들과 담배꽁초로 넘쳐났다. 쎄미는 로터리 변방에 있는 건물로 나를 인도했다. 색이 누런 간판에 조명도 시원찮은 것이 딱 학생들이 숨어 술 마시기 좋은 곳이었다. 우리가 안으로 들어가자 짜리몽땅한 할머니가 의자에서 일어나지도 않고 손짓으로 인사를 했다. 쎄미가 샐쭉이 웃어 보이며 익숙하게 소주 두 병과 부대찌개를 시켰다. 할머니는 그제야 태연히 일어서 부엌으로 들어갔다. 나는 가방 안에 있던 담배를 올려놓고 주변을 살폈다. 태반이 고등학생들처럼 보였다. 잘 하지도 못 하는 술을 마시며 저들끼리 신나게 놀고 있었다. 쎄미는 재떨이를 제 앞에 가져다 놓고 그새 담배를 두 대나 피웠다. 나도 라이터를 꺼내 담뱃불을 붙이려는데 어디선가 쎄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쎄미, 오랜만이다. 쎄미가 남자애 둘에게 알은 체를 하며 나를 쳐다봤다. 옳다구나, 같이 놀자는 소리로군. 나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키가 큰 자식이 쎄미의 옆자리로 가 앉았다. 뒤이어 눈썹이 숯덩이처럼 진한 남자애가 내 옆자리에 비집고 들어왔다. 그새 할머니가 전골냄비가 올라간 부르스타를 들고 와서는 퉁명스레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쎄미와 그 옆에 앉은 꺽다리가 계속해서 술잔을 기울였다. 취하려고 작정을 한 것 같았다. 나는 수저를 가지런히 정리하는 숯덩이 눈썹에게 인사를 하고는 다시 담배를 피웠다. 자박한 국물에 퐁당퐁당 빠져 있는 햄 조각과 두부, 콩나물과 양파. 찌개는 어쩐지 팔팔 끓여도 맛있을 것 같진 않았다. 앞에 두 사람이 기어이 취한 척을 하며 서로 부둥켜안을 때쯤 나는 수저를 들어 국물을 맛보았다. 그랬더니 옆의 숯덩이도 냄비에 제 수저를 꽂았다. 나는 맥주에 콜라와 소주를 조금씩 섞어 숯덩이에게 주었다. 숯덩이가 고마워하며 답례로 자신도 타주겠다고 했다. 각자 서로가 타준 폭탄주를 마셨다. 어쩐지 머리가 핑 도는 기분이었다. 쎄미와 꺽다리는 팔짱은 물론 어깨동무며 심지어는 서로에게 입술까지 드밀며 야단이었다. 소주를 일곱 병쯤 마셨던가. 그 와중에도 쎄미가 자리를 뜰까봐 손을 꼭 부여잡으면서 집에 바래다주겠다는 꺽다리가 숯덩이에게 눈질을 보냈다. 무언의 암시 같은. 이곳에 들어오기 전에 거행된 약속이 있었던 듯싶다. 쎄미는 비에 젖은 이불처럼 꺽다리의 팔뚝에 안긴 채 실려 나갔다. 이윽고 숯덩이와 나만 남았다. 숯덩이가 머리를 긁적이며 쭈뼛거렸다. 우리도 일어나지 뭐. 벌써 가게? 그럼 더 있으려고? 시간 별로 없어. 밤은 못 새. 숯덩이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을 끔벅였다. 유치한 반응. 어디로 갈 건지는 정했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숯덩이. 아, 이래서 어린애들은 귀찮다. 다 정한 거 알고 있거든. 모텔로 갈 거 아니야? 일 치르곤 만나 해장할 거 아니었어? …… 그리곤 쎄미랑 나랑 누구 가슴이 더 컸는지 낄낄거리겠지, 뭐. 안 봐도 빤해. …… 빨리 계산하고 나와. 너구리굴처럼 피어오르는 담배연기 속을 헤집고 나와 건물 앞에서 숯덩이를 기다렸다. 숯덩이는 쭈뼛거리며 나왔지만 안절부절 갈피를 못 잡았다. 앞장 서. 내가 말했다. 그래도 돼? 어, 원래 이러려고 했잖아. 내가 인상을 쓰자 숯덩이가 이내 내 손을 잡았다. 손은 잡지 마. 숯덩이가 걸음을 멈추었다. 그냥 말자. 숯덩이가 말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가장 가까운 영화관에 들어갔다. 심야시간대에 하는 할리우드 영화를 보다가 잠시 졸았다. 조는 내내 숯덩이가 내 손목을 만지작거렸다. 박력 없기는. 영화를 다 보고 나와 숯덩이가 팝콘봉지를 쓰레기통에 버릴 쯤에 나는 숯덩이의 팔목을 거세게 붙잡고는 그를 이끌었다. 어디 가려고? 심심한데 그냥 DVD방이나 가든지. 우리는 영화관에서 가장 가까운 DVD방으로 들어섰다. 프런트에서 계산을 하는 숯덩이 몰래 아저씨에게 문자를 보냈다. 그러나 숯덩이와 몸을 섞고 난 뒤에도 아저씨에게선 답문이 없었다. 정말이지 짜증나. 나는 검은 소파에 누워 말했다. 숯덩이가 휴지를 찾아 두리번거리다 말고 멈칫했다. 그리곤 내 쪽을 쳐다보며 눈을 흘긋거렸다. 화면에는 에메랄드빛 바닷물이 출렁거리는 게 비쳤다. 나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러닝타임이 긴 시리즈물을 선택한 것이 후회가 됐다. 숯덩이가 슬금슬금 내 옆에 드러누웠다. 너 이만 가봐. 싫은데. 그럼 걍 닥치고 가만히 있든지. 어차피 나도 뺑이 치는 거야. 오전 아르바이트하러 가야 되거든. 학교는 안 다니니? 너야말로 학교 다니는 년이 이러고 다니냐? 등신. 너만큼 구린 애 아니거든, 나. 웃기고 있네. 됐다. 그만 말해, 입만 아파. 딱 봐도 사이즈 나와. 나는 뭐 누나들이랑 안 놀아본 줄 아냐. 뭐라고? 나는 울컥 화가 났다. 나는 대충 윗옷을 걸쳐 입고 DVD방을 나왔다. 숯덩이는 자는 건지 자는 척을 하는 건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새벽 다섯 시였다. 거리는 아직 깜깜했다. 추위 탓인지 사람은 별로 없었다. 드문드문 건물 앞 계단에 누워 토사물을 흘리며 잠을 자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으나 거리는 한적했다. 나는 터벅터벅 지하철 역 안으로 들어갔다. 지하철은 아직 운행을 하지 않았다. 나는 내려진 셔터에 기대고 앉아 핸드폰을 꺼냈다. 어쩐지 발가벗은 느낌이 들었다. 숯덩이는 내 몸 이곳저곳을 꾹꾹 눌러주던 아저씨의 손길을 느낀 것일까. 내 몸에 남겨진 아저씨의 냄새를 맡은 것일까. 쪽팔리게, 정말 후지게 자꾸만 눈물이 비어져 나왔다. 아저씨를 만난 건 레코드 가게에서였다. 아담했지만 역사가 오래된 레코드 가게는 마니아들 사이에서는 꽤 유명했다. 섹션별로 잘 나눠진 음반들은 가게 주인의 손을 거쳐 가지런히 정리되었고 새로운 주인에게로 입양됐다. 주인은 내가 오면 리패키지 앨범이나 베스트 앨범, 내가 모르는 희귀 앨범을 꺼내 들려주곤 했다. 그곳에서 나는 아저씨를 보았다. 존 레넌의 사망주기 30년을 맞아 아저씨는 비틀스의 앨범을 사러 왔다고 했다. 주인은 LP로 된 비틀스의 마지막 앨범을 꺼내주었다. 아저씨는 보물 다루듯 LP를 매만졌다. 그거 복사본 같은데. 내가 다가가 이 말을 전하기 전까지는. 아저씨는 내 쪽을 살피며 무슨 상관이냐는 듯 쳐다보았다. 제가 아는데요. 20년 전에 들어온 건 정식판 거의 없어요. 다 해적판이지. 그리고 진퉁이라 쳐도 몇 억 넘을 걸요? 그냥 작년에 나온 리마스터 앨범 사세요. 저 같으면 그거 안 사요. 내가 말을 마치자 아저씨는 피식 웃으며 LP를 들고 계산대로 향했다. 계산을 마친 아저씨는 앨범을 구경하고 있는 내게 다가와 말했다. 이봐, 진퉁. 같이 나가지? 그리고 우리는 곧장 모텔로 향했다. 미치. 론리하츠클럽이란 밴드 아니? 비틀스 노래 제목이잖아요. 후추상사의 밴드. 물론 한국에 그 제목을 딴 인디밴드가 있단 건 알아요. 아니. 론리하츠클럽이란 밴드가 낸 책이 있어. 그 책에 수록된 단편들은 모두 비틀스의 노래 제목으로 이루어져 있지. 그 속에 든 여자주인공 이름도 역시 비틀스의 노래에서 따온 거야. 루시나 리타 같이. 그런데 정말 신기한 건 이 밴드가 남아프리카 출신들이란 거야. 그래서 번역본을 구하긴 힘들어. 그 튼실한 내용의 책은 읽은 사람들마다 모두 엄지를 치켜든다고 해. 더 신기한 건 뭔 줄 아니? 소속된 밴드 팀원이 단 한 명이란 거야. 뭐야. 나머지는 다 세션이에요? 그 밴드는 공연 안 해요? 응. 그 밴드는 단 한 번도 공연을 한 적이 없어. 그 밴드의 업적이라곤 책 낸 게 끝이야. 그게 뭐가 밴드예요. 그냥 작가지. 그러게. 하지만 그 사람이 우기면 밴드겠지. 마치 네 이름이 미치가 아닌데도, 네가 줄곧 미치라고 우기는 것처럼 말이야. * 아침 7시가 다 돼서야 집에 도착했다. 현관문을 열고 몰래 방 안으로 들어오려는데 어쩐지 고요했다. 방문을 열고 둘러보니 집엔 아무도 없었다. 꺼놨던 핸드폰의 전원을 켜니 아니나 다를까 엄마의 문자가 잔뜩 와 있었다. [미친년. 집에 들어오기만 해.], [네 방에 있는 CD 다 갖다 버리기로 결단 내렸다.], [평생 네 멋대로 하다가 죽어. 여한 없이 그렇게 살아라. 부럽다.], [엄마아빠 오늘 등산 가니까 네가 할머니 밥 좀 챙겨드려. 것까지 안 하면 넌 정말 죽는다.] 나는 할머니 방의 방문을 열어보았다. 할머니는 축 늘어진 미역처럼 장롱에 몸을 기대고 앉아 있었다. 기척도 못 느끼셨는지 내 쪽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내가 큰 소리로 두어 차례 할머니를 부르자 그제야 어깨를 움찔하는 할머니. 저 왔어요. 밥 드셔야죠. 할머니는 나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아차. 원피스를 교복으로 갈아입는다는 걸 깜빡했다. 생각해 보니 허접한 실력으로 그린 아이라인도 엄청 번져 있을 것이었다. 밥 챙겨드릴게요. 좀만 기다리세요, 하고 방문을 닫으려는데 할머니가 허공에 손짓하는 것이 보였다. 오라는 눈치인가 싶어 나는 대충 눈 밑에 번진 아이라인을 손으로 닦고 할머니 앞으로 다가갔다. 가까이서 보니 할머니의 주름이 징그러울 정도로 많았다. 내 어깨보다 한 뼘은 더 작아 보이는 할머니의 어깨는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았다. 할머니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내 손을 잡았다. 할머니의 손은 사람의 피부라기엔 어색할 정도로 꺼끌꺼끌했다. 뭐 해드릴까요? 정적을 깨고자 몇 차례 여쭈어도 할머니는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몇 달 전 백내장 수술을 한 할머니의 눈동자는 부옇게 흐려 보였다. 나는 질문하는 걸 포기했다. 할머니는 다시 장롱에 머리를 기대었다. 할머니는 조만간 부서질 박제나비 같았다. 할머니의 눈가와 손, 입술에 자글자글한 주름이 생각보다 더 깊었다. 할아버지와 함께 계실 때도 이렇게 주름이 많으셨나. 이곳에 와 있는 것이 가뭄처럼 답답하고 숨 가쁠 할머니. 할머니는 아침마다 이렇게 장롱에 머릴 기대고 무슨 생각을 하실까. 살아 있긴 한 걸까. 살아가고 있는 걸까, 살아지고 있는 것일까. 희정아. 할머니가 내 이름을 불렀다. 잘 지내야 된다. 단디 몸 챙기고. 매사 조심하고. 매사 감사하고. 알제. 어쩐 일인지 눈꺼풀이 시큰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방으로 돌아오니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도대체 왜 우는 걸까? 이해가 안 됐으나 눈물은 더 솟구쳤다. 접을 수 있다면 잠깐 시간을 접어놓고 싶다. 정말 구리고 후지다. 나는 집전화기로 아저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누가 받아도 상관없다. 어떻게든 끝을 내야 한다. 아저씨의 아내가 받는다면 나는 다 폭로할 것이다. 아저씨와 나는 비틀스를 공유한 사이라고요. 론리하츠클럽이란 밴드 아세요? 남아프리카에 있는 원맨밴드를 아시냐고요. 그런 것도 모르면서 임신은 왜 해요? 그렇게 안정적인 게 좋으면 차라리 소파랑 결혼을 하셨어야지. 아저씨는 그런 남자가 아니라고요. 신호가 계속 가는 동안 나는 쉴 새 없이 중얼거렸다. 아저씨가 받는다면 이제 아저씨와는 정말 끝이라고 말해야지. 아저씨의 똥배를 참아주는 것도 한계가 있어요, 라고. 아저씨도 똑같아. 부인 앞에선 똥도 못 눈다면서 여행은 왜 같이 가요? 왜 나한텐 아저씨 이름도 안 알려줘요? 치사하게 산다. 치사 빤쓰다, 정말…… 그리고 달칵. 수화기 너머 누군가가 전화를 받았다. 네, 한창길입니다. 아저씨 목소리다. 한창길이라는 이름은 어색하지만 이건 분명 아저씨의 목소리다. 내가 수없이 핥았던 목에서 나는 그 소리 맞다. 허나 나는 한창길이란 이름을 모른다. 그런 이름일랑 들어본 적도 없다. 말씀하세요, 누구시죠? 그러니까. 저는. 저는요, 아저씨. 저예요, 미치…… 그러나 나는 대답할 수가 없었다. 나는 전화를 끊었다. 그리곤 아저씨의 번호를 지웠다. 아마 얼마 안 있어 아저씨에게 연락이 올 것이다. 내게 시간과 장소를 문자로 보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아저씨의 번호를 지웠다. 아뿔싸. 이렇게 깔끔할 수가. 잠을 자는 동안 모든 걸 지워야지. 아저씨의 배꼽이 따뜻했다는 것 정도만 남겨두고. 다른 건 다 열여덟이라는 전투의 군사기밀이라 생각하고 블랙박스에 가두어 사장시켜야지. 나는 보라색 원피스를 입은 그대로 침대에 누웠다. 이윽고 집전화가 요란스레 울리기 시작했다, 한참동안이나. 짜증나게. <끝〉
  • 페루에서 잉카문명 ‘개 미라’ 무더기 발견

    페루에서 잉카문명 ‘개 미라’ 무더기 발견

    남미 페루에서 잉카문명 때의 것으로 보이는 사람과 동물의 미라가 무더기로 발견됐다. 페루 파차카마크 지방에서 어린이 미라 4개와 개 미라 6개가 발견됐다고 현지 언론이 10일(현지시간) 보도했다. 미라는 보름 전 발견됐지만 이날 뒤늦게 알려졌다. 미라가 발견된 곳은 수도 리마로부터 약 25Km 떨어진 곳으로 7번 피라미드와 연결되는 통행로 지역이다. 어린이와 개는 모두 천에 곱게 싸인 채 발견됐다. 개는 보존상태가 뛰어나 털과 이빨이 그대로 남아 있다. 미라 발굴작업에 참여한 한 관계자는 “개의 털, 이빨, 턱이 완벽하게 보존돼 있다.”면서 “천이 감겨 있는 형태로 볼 때 동물들이 어린이들과 함께 제물로 바쳐진 듯하다.”고 말했다. “중요한 인물이 사망한 뒤 제물로 바쳐진 것인지를 가려내기 위해선 보다 연구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개는 특히 관심을 모으고 있지만 아직 종조차 확인되지 않고 있다. 현지 언론은 페루 고고학 전문가 말을 인용해 “강한 턱뼈를 가진 것으로 보여 당시 집에서 기르던 사냥개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도했다. 페루에선 1993년 이후 1000년 이상 된 개의 화석이나 무덤이 자주 발견되고 있다. 지금까지 900~1350년 사이의 것으로 보이는 개의 무덤 82개가 발견됐다. 사진=코메르시오 서울신문 나우뉴스 남미통신원 임석훈 juanlimmx@naver.com
  • 조선창건의 始原, 그 장엄한 역사를 걷다

    조선창건의 始原, 그 장엄한 역사를 걷다

    ■태조 이성계의 전설 품은 두 봉우리 “마이산은 알아도 진안은 당최 처음 들어보네예.” 부산에서 마이산을 찾아왔다는 한 여행자에게 들은 말이다. 예전엔 ‘무·진·장’이라 했다. 전북의 대표적 오지로 꼽혔던 무주와 장수, 그리고 진안의 앞글자를 따 오지의 대명사처럼 썼다. 고속도로가 사통팔달로 이어진 요즘이지만, 여전히 외지인들에게 진안은 생소한 땅이다. 말이 귀를 쫑긋 세운 것처럼 암마이봉(686m)과 수마이봉(680m)이 봉긋하게 서 있는 마이산은 진안 최고의 볼거리다. 내나라 안에서 가장 다양한 표정을 가진 산이기도 하다. 봄에는 안개를 뚫고 나온 두 봉우리가 쌍돛배 같다고 해 ‘돛대봉’, 여름에는 울창한 수목 사이로 솟은 용의 뿔을 닮았다 해서 ‘용각봉’으로 불린다. 겨울에는 설경 가운데 먹물을 찍은 붓끝처럼 보여 ‘문필봉’이라고도 한다. 물론 정식 명칭은 가을을 일컫는 마이산이며, 나머지는 ‘스토리 텔링’에 힘입은 이름들이다. 마이산에는 조선 태조 이성계와 얽힌 전설이 많다. 대표적인 게 1만원권 지폐 밑그림인 일월오봉도다. 다섯개의 봉우리와 해, 달이 그려진 일월오봉도는 왕이 앉던 어좌 뒤 병풍 그림으로 쓰이는 등 조선 왕조의 표상으로 통했다. 이 일월오봉도가 마이산과 주변 산군들을 가리키는 것이란 게 현지인들의 믿음이다. 박광식 문화관광해설사에 따르면 고려 말 남원 운봉에서 왜구를 물리친 이성계가 꿈에서 국가를 잘 경영하라는 계시와 함께 금척(금으로 된 잣대)을 받는데, 그가 꿈을 꾼 곳이 바로 마이산이다. 조선시대 궁중에서 경사스러운 잔치가 있을 때마다 추던 몽금척(夢尺)이란 춤도 태조가 마이산에서 금척을 받은 내용이 소재다. 수마이봉 아래 600년 된 청실배나무(천연기념물 제386호) 또한 이성계가 심었다고 전해진다. 아울러 ‘마이산’이란 이름도 태종 이방원이 아버지가 꿈을 꾼 것을 기념해 지었다는 것. 마이산은 진안 어디서 보건 풍경의 주인이 된다. 멀리서 보는 마이산 풍경이 외려 더 낫다는 평가가 있는 것도 그런 까닭. 쉬 보기 어려운 독특한 산세가 주변의 넉넉한 전원 풍경과 잘 어우러지기 때문이다. 일교차가 큰 요즘엔 산허리가 안개에 휩싸인 마이산을 감상하기 딱 좋다. 첫손 꼽히는 곳이 부귀산 등산로다. 산 중턱까지 승용차로 간 뒤, 10분 남짓 산을 오르면 너른 공터가 나온다. 해마다 이맘때면 근동의 내로라하는 사진작가들이 진을 치는 곳이다. 새하얀 안개 속에 두개의 봉우리가 우뚝 솟았는데, 꼭 바다 위에 떠 있는 절해고도처럼 보인다. 부귀산은 반드시 해가 뜰 무렵 찾아야 한다. 햇살이 퍼지기 시작하면 덩달아 안개도 사라지곤 한다. 진안 읍내에서 월평교 방향으로 가다 외후사마을로 좌회전한 다음, 산길을 따라 곧장 간다. 길은 잘 닦여 있는 편. 다만 도로 주변 관목들의 잔가지 때문에 차에 흠집이 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진안군청 옆의 성산정도 좋은 포인트다. ‘진안고원’(鎭安高原)이란 표현에 걸맞게 경사진 언덕 400m 높이에 터를 잡았다. 성산정에서 굽어 보면 마이산 봉우리와 인근 전경이 한눈에 담긴다. 익산~포항간 고속도로 개통 이후에는 진안휴게소 전망대가 오가는 길손들에게 최고의 전망 포인트로 인기를 얻고 있다. 마이산이 코앞에서 펼쳐진다. 상·하행 휴게소 양쪽에 다 있다. ■죽도에서 만난 비운의 선비, 정여립 이 계절, 진안에서 만날 수 있는 풍경의 보고를 꼽으라면 단연 용담호와 죽도다. 별 기대 없이 두곳을 둘러본 여행자라면 뜻밖의 소득에 득의양양할 법하다. 용담호는 2001년 용담댐 완공과 함께 조성된 인공호수다. 호수가 생기기 전 산중턱이었던 곳에 호반도로를 놓았다. 산허리를 끼고 이리저리 달리는데, 그 길이가 60㎞를 넘는다. 물이 들어차면서 야트막한 산 정상은 섬으로 변해 여기저기 흩어졌다. 여느 대형 인공호수보다 서정적이란 느낌이 드는 것도 그런 까닭일 게다. 언덕배기마다 호수를 굽어볼 수 있도록 망향정과 전망대도 서 있다. 죽도(竹島)는 용담호 상류, 장수군 장계면과의 경계 어름에 있다. 진안이란 지명조차 귀에 선데, 하물며 진안에서도 덜 알려진 죽도야 더 말할 게 없다. 죽도는 현지에서 ‘고원 속의 섬’이라 불린다. 장수 쪽에서 내려오는 가막천과 무주 쪽에서 흘러드는 구량천이 죽도 양 옆을 스치며 아래쪽에서 합수머리를 이루기 때문이다. 상전면 주민센터 관계자에 따르면 원래 구량천은 죽도 위편에서 가막천과 몸을 섞었다. 그러다 농업용수를 원활하게 공급할 요량으로 죽도의 산자락을 뭉텅 잘라낸 뒤 그 사이로 구량천 물길을 돌렸다. 두개의 하천이 뭍과 죽도를 유리시킨 덕에 그처럼 고운 별명을 얻게 됐다. 죽도는 조선시대 선비 1000여명이 화를 입었던 ‘기축옥사’의 주인공, 정여립이 꿈을 키우고, 또 접어야 했던 곳이다. ‘천하는 공물인데 어찌 일정한 주인이 있으랴. 임금 한 사람이 주인이 될 수는 없으며, 누구든 섬기면 임금이 아니겠는가.’라며 혁신적인 사상을 설파한 비운의 정치가이자 사상가다. 중앙 정치에서 물러난 정여립은 맨 먼저 죽도를 찾아 서실을 지었다. 생전 그가 ‘죽도선생’이라 불린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이때부터 차별 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대동계를 조직하는 등, 꿈을 키우던 정여립은 1589년 역모의 주동자로 몰리면서 죽도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하지만 그가 자결한 게 아니라 정적이 보낸 자객에게 목숨을 잃었다거나, 그가 역모를 꾸민 게 아니라 정치적 음모에 희생됐다는 주장이 나오는 등 그에 대한 평가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죽도로 가는 길은 험하다. 실패한 역사를 기억하기 싫어서일까, 이정표 하나 찾을 수 없다. 가운데가 뭉텅 잘려나간 죽도의 절벽은 칼날처럼 날카롭다. 그 날선 절벽 사이사이 붉은 단풍이 선연하다. 죽도마을에서 1㎞쯤 직진하다 장전마을 버스정류장 못미쳐 오른쪽 아래로 난 길을 따르면 죽도에 닿는다. 차를 적당한 곳에 세워두고 느린 걸음으로 걸어도 좋겠다. 무자치와 장끼가 스스럼 없이 오가는, 시원(始原) 같은 길이 줄곧 이어진다. ■단풍보다 빛난 전설… 전북 진안 마이산 사실, 전북 진안의 마이산을 찾은 까닭은 참 단순했습니다. 기암과 어우러진 단풍이 빼어나다는 주변의 말에 혹했던 거지요. ‘팔랑귀’ 벌렁대며 찾은 진안에서는 그러나, 정작 단풍보다 풍경 속에 남아 있는, 어쩌면 풍경 자체가 된 역사와 전설에 더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마이산이 그랬고, 죽도 또한 못지않았습니다. 단풍만 보자면 진안을 들고 나는 길, 그러니까 진안에서 전주로 나가던 옛길 모래재나, 장수와 연결되는 서구이재 등을 찾는 게 낫겠습니다. ‘구절양장’ 구부러진 도로 주변으로 단풍이 절정의 자태를 뽐내고 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역사와 전설이 풍경 속에 머무는 장면과 마주하려면 우선 마이산에 들러 조선 왕조를 일군 태조 이성계의 자취를 돌아봐야 합니다. 그 뒤, 조선시대 기축옥사의 도화선이었던 정여립(1546~1589)과 시종을 함께한 죽도를 찾는 것이 순서일 겁니다. 특히 죽도는 ‘뭍 속의 섬’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데, 맑은 물과 기암절벽에 매달린 단풍이 어우러지며 제법 장한 모습을 하고 있지요. 글 사진 진안 손원천기자 angler@seoul.co.kr ■여행수첩(지역번호 063) ▲가는 길 수도권에서 승용차로 갈 경우 호남고속도로→익산 분기점→익산~포항간고속도로→진안 나들목 순으로 간다. 마이산은 북부와 남부로 나뉜다. 탑사는 남부 쪽에 있다. 마이산 관리사무소 430-2560. 진안 시외버스터미널 433-2508. ▲맛집 애저가 유명하다. 원래 애저는 태어날 때 죽은 새끼돼지를 통째 고아 만들지만, 요즘은 새끼돼지를 쓴다. 진안관(433-2629)과 금복회관(432-0651)이 애저요리 전문점이다. 도시인의 입맛에는 맞지 않을 수 있다. 토지(432-5566), 용쏘나루터(432-9973) 등은 붕어찜, 쏘가리회 등으로 유명하다. 북부 마이산 입구 그린원(433-4248)은 ‘깜도야’라 불리는 흑돼지삼겹살을 잘한다. ▲주변 볼거리 학동마을은 씨 없는 곶감 생산지로 유명한 곳. 요즘 감말리기가 한창이다. 정천면에 있다. 운일암반일암, 섬진강 발원지인 데미샘, 운장산휴양림, 구봉산 등도 돌아볼 만하다. 진안군청 문화관광과 430-2228. ▲잘 곳 북부 마이산 초입의 진안홍삼스파는 군에서 직접 운영하는 휴양시설이다. 스파 어른 3만 9000원, 어린이 3만원. 숙박 8만~10만원. 1588-7597. 읍내에서는 마이장모텔(433-0771)이 깨끗하다. 3만원.
  • ‘인터넷 신문고’ 두손 든 경찰

    ‘인터넷 신문고’ 두손 든 경찰

    인터넷에 오른 글 한 줄이 ‘막말 수사’에 대한 경찰서장의 사과와 함께 상급 기관의 재수사를 이끌어 냈다. 서울 종암경찰서는 지난 3일 강력1반의 한 경찰관이 성추행 고소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피해자 A(61·여)씨를 비하했다는 의혹이 제기돼 서울지방경찰청 수사과에 수사의뢰했다고 8일 밝혔다. 경찰에 따르면 A씨는 3개월 동안 자신이 일했던 양복 공장에서 관리자 B(46)씨로부터 성추행당했다며 지난 2일 B씨를 고소했다. 다음날 담당 경찰은 A씨를 불러 B씨와 대질 신문을 했다. 이 과정에서 경찰관은 A씨에게 “그깟 엉덩이 한번 대주면 어떠냐.”는 등의 ‘막말’을 했다는 의혹이 불거졌다. A씨의 딸은 6일 오전 1시쯤 인터넷 ‘다음 아고라’에 이 같은 내용의 글을 올렸다. 그녀는 “피해자를 두 번 죽이는 일이다. 엄마가 너무 어이없어서 바들바들 떨더라.”면서 “우리같이 힘없는 사람들은 어디에 의지해야 하나.”라고 덧붙였다. 이 글은 8일 오후 조회 수가 ‘다음 아고라’에서 10만건, ‘네이트 판’에서는 52만건을 넘어서면서 네티즌들의 관심이 집중됐다. 이에 종암서장은 7일 오후 A씨와 면담했다. 이어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사실 관계를 명백히 밝히기 위해 서울청 수사과가 직접 수사에 착수했다.”는 내용의 글을 아고라에 직접 올렸다. 서울청 청문감사관실은 이날 밤 A씨와 담당 경찰관 등 3명을 불러 조사했다. 전문가들은 인터넷 토론 커뮤니티·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가 ‘문턱이 낮은 신문고’ 역할을 한 것으로 분석했다. 정대화 상명대 교수는 “국민들은 정부기관이 자신의 목소리를 귀담아듣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보다 문턱이 낮은 인터넷과 소셜네트워크 등을 ‘신문고’처럼 찾게 됐다.”고 말했다. 김양진기자 ky0295@seoul.co.kr
  • 방글라데시서 인술 펴는 ‘꼬레안 닥터’

    방글라데시서 인술 펴는 ‘꼬레안 닥터’

    이런 병원이 있다. 진료비는 무조건 10%만 받는다. 환자의 경제적 사정에 따라 무료 진료와 무료 수술도 가능하다. 가령 전신 화상 치료를 받은 5살 여자아이는 치료비로 200원을 내놨다. 비싼 병원비에 질린 사람들에게는 솔깃한 이야기. 29일 오후 9시 50분 EBS ‘명의’는 방글라데시에서 이 같은 활동을 벌이고 있는 한국 의사들을 조명하는 ‘특집-꼬람똘라 병원의 꼬레안 닥터’를 방영한다. 뛰어난 업적이나 기술을 가진 사람보다 낮은 곳에서 어려운 사람들을 성심성의껏 진료하는 이런 사람들이야말로 명의가 아니냐고 말한다. 꼬람똘라 병원은 방글라데시 수도 다카의 외곽에 위치한 병원. 저개발국이 으레 그렇듯 방글라데시 사람들도 웬만큼 아픈 것은 다 참고 산다. 그러나 이 병원만큼은 문턱이 닳도록 드나든다. 친절한 한국 의사들 때문이다. 한국에서 여유로운 생활을 즐길 수 있을 한국 의사들이 왜 이곳에까지 날아왔을까. 이석로 전 원장과 박무열 현 원장, 두 의사를 통해 얘기를 들어본다. 이 전 원장은 17년째, 박 원장은 8년째 봉사 중이다. 그런데 이 전 원장은 ‘봉사’라는 말 자체를 끔찍이 싫어한다. 더 가진 것을 나누고 덜 가진 것을 채워줄 뿐인데 그걸 남에게 뭘 해주는 것처럼 하는 게 싫다는 뜻이다. 그러다 보니 이 전 원장은 치료와 진료 못지않게 비중을 두는 게 따로 있다. 어르고 달래고 충고하고 따끔하게 혼내고, 주민들과 부대끼며 인생 상담까지 하는 것이다. 가끔 나는 왜 아직도 방글라데시에 머무는가 하고 의문이 들지만. 박 원장은 처음부터 거창한 뜻을 품었던 것은 아니다. 우연히 방글라데시에 들렀다가 어떻게 하다 보니 의사로 눌러앉아 버렸다고 말한다. 봉사가 좋아서? 아니다. 박 원장은 없는 가운데서도 서로 의지하면서 만족해할 줄 아는 이곳 사람들에게 반했다. 그래서 박 원장은 자신이 봉사하는 게 아니라, 이곳 사람들에게서 오히려 자신이 배우고 있다고 말한다. 두 의사는 가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기도 한다. 나는 왜 방글라데시를 떠나지 못하는가. 의사가 진정으로 필요한 곳에 머무는 것, 그게 의사의 당연한 책임이 아니냐는 대답이 나온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치솟는 전셋값… 은행들 “난 몰라”

    치솟는 전셋값… 은행들 “난 몰라”

    무섭게 치솟는 전세가격에도 불구하고 시중은행의 가구당 평균 전세대출액은 지난 2년간 거의 변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이유로 은행권보다 완화된 조건을 제시하는 제2금융권에서 전세대출을 받는 가계가 늘고 있다. 은행들이 대출 문턱을 낮춰 서민들의 전세보증금 부담을 덜어줘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26일 국민·우리·하나·기업은행·농협 등 시중 5개 은행의 신규 전세대출 실적(국민주택기금 제외)을 살펴본 결과, 지난달 건당 평균 대출액이 4700만원으로 지난해 1월(4400만원)보다 300만원(6.8%) 증가하는 데 그쳤다. 같은 기간 국민은행이 조사한 서울시의 3.3㎡(1평)당 전세 시세는 590만원에서 678만원으로 14.9% 증가했다. 서울에 85㎡(25평) 크기의 전셋집을 구할 경우 1억 7670만원, 60㎡(18평)의 경우 1억 2473만원이 필요한데 은행에서는 각각 필요자금의 26.6%, 37.7% 정도만 빌릴 수 있다는 뜻이다. 은행별 차이는 컸다. 지난해 1월부터 지난달까지 하나은행은 평균적으로 건당 6100만원을 대출한 반면 국민은행은 3200만원을 대출했다. 우리은행이 5000만원, 농협 4900만원, 기업은행 4300만원 순이었다. 전세자금대출의 최대 한도가 2억원인 점을 감안할 때, 국민은행의 경우 총 한도의 6분의1 정도만 빌려주는 셈이다. 대출액이 전세가격 오름폭을 반영하지 못하고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 이유는 은행들이 리스크 관리 차원에서 상환능력이 높은 고객을 골라 돈을 빌려주기 때문이다. A은행 관계자는 “보통 전세보증금의 최소 50% 이상을 자기 자금으로 내야 은행권 전세자금대출을 받을 수 있다.”면서 “1억원짜리 전셋집을 구할 때 8000만원을 대출로 충당해야 하는 고객은 은행 입장에서 위험 부담이 높기 때문에 대출을 거절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대출 절차가 까다로워 이용이 많지 않은 점도 꼽힌다. 전세대출을 받으려면 임대인(집주인)의 동의서를 비롯해 주택금융신용보증서 등 준비할 서류가 많다. B은행 관계자는 “이런 이유로 전문직, 공무원, 대기업 직원 등 우량고객의 경우 필요자금의 70~80%를 신용대출로 충당한 뒤 나머지 부족금만 전세대출로 채운다.”고 설명했다. 신용대출은 재직 및 소득 증명서만 확인되면 즉시 대출이 가능하다. 이에 따라 목돈 마련이 어려운 저소득자들은 대출 문턱이 낮은 제2금융권의 전세대출에 관심을 돌리고 있다. HK저축은행의 전세자금대출은 연 6~12%의 금리로 최대 5억원을 빌려준다. 현대캐피탈의 전세보증금 담보대출은 집주인의 동의절차를 대행해주는 서비스로 인기를 얻고 있다. 금리는 연 5~12%로 시중은행권(4.5~6%)과 비슷하거나 높다. 오달란기자 dallan@seoul.co.kr
  • [세대공감] 생애 최고의 생일 선물

    [세대공감] 생애 최고의 생일 선물

    내가 다른 누구의, 또는 누군가가 내 생일을 기억한다는 것은 내 출생의 의미를 되새기고, 타인과는 다른 나의 정체성과 고유성을 인식한다는 증표이기도 하다. 명절이나 공휴일처럼 모두가 즐기는 날이 아니라 나와 관계한 가족·친구와 즐기는 날이 바로 생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군가 내 생일을 챙긴다는 것은 세상 풍파 속에서도 굳건하게 견디며 스스로의 존재감을 알리는 나에 대한 칭찬이거나 애정의 표시로 삼을 수도 있고, 스스로를 돌아보며 내일을 더 의미 있게 살아갈 수 있도록 마음을 다잡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세대가 달라지면서 이런 생일에 대한 기대와 세태도 덩달아 달라졌다. 하지만 생일에서 느끼는 감동의 원천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느꼈을 때다. 아무리 큰돈을 들인 선물로도 이런 감동을 완전히 전달할 수 없는 것은 이 때문이다. 때론 치킨 한 마리만 뎅그렇게 놓인 때늦은 생일상일지라도 가족이나 연인 등 사랑하는 사람들과 마음을 나누는 자리라면 의미가 남다를 수 있다. 김양진·윤샘이나기자 ky0295@seoul.co.kr 그래픽 이혜선기자 okong@seoul.co.kr ■ 자정에 맞은 눈물의 파티 서울 구로동에 사는 고교 1학년 김중호(가명·16)군은 올 6월 13일 생일을 잊을 수 없다. 밤 12시, 생일이 막 지난 시간. 엄마, 중학교 2학년 남동생과 셋이서 식탁에 앉아 배달시킨 프라이드치킨 한 마리와 콜라를 놓고 함께 생일축하 노래를 불렀다. 조촐한 파티였지만 엄마도, 아들도 하루종일 속이 새까맣게 타도록 속을 태운 특별한 파티였다. 세 식구는 서로 부둥켜안고 왈칵 눈물까지 쏟았다. 이날 아침, 파출부 일을 하시는 어머니는 김군의 생일을 기억하지 못한 채 그냥 일을 나가셨다. 김군은 “솔직히 섭섭한 마음도 들었지만 동생이랑 저랑 둘을 혼자 힘들게 키우시는 엄마한테 그런 걸 말할 형편이 아니었다.”고 돌이켰다. 학교에서는 친한 친구 몇몇이 작은 생일 케이크를 가져다가 생일을 축하해 줬지만, 가족들이 자신의 생일을 잊어버렸다는 생각에 쓸쓸한 마음을 지우기 어려웠다. 사실 지난해까지 김군은 아버지와도 함께 살았다. 해마다 생일날엔 많지 않지만 용돈도 받았다. 하지만 김군은 “(아버지가) 차라리 용돈을 안 줘도 좋으니 때리지나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결국 엄마는 술에 빠져 살며 걸핏하면 아이들을 때리는 남편과 이혼, 아이 둘을 데리고 따로 살림을 차렸다. 이번 생일은 김군이 엄마, 동생과 따로 산 뒤 처음 맞는 생일이었다. 김군의 어머니는 “그날 온종일 마음이 쓰여 실수도 많이 했다.”면서 “정말 미안했다.”고 말했다. 이에 김군도 “엄마가 고생하는 거 다 아는데 밤늦게 내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치킨까지 사주셔서 정말 감사했다.”고 울먹였다. ■ 쌀 팔아 코티분 사준 아버지 “아버지가 귀한 쌀을 돈바꿔 사다 주신 ‘코티분’을 잊을 수 없죠.” 서울 발산동에 사는 송정근(60·여)씨는 1971년 스물셋 생일날 받은 코티분을 일생일대 최고의 선물로 꼽는다. 흔히 코티분으로 불리는 이 화장 파우더는 본래 이름이 ‘코티 에어스펀 파우더’로, 퍼프형 파운데이션의 한 종류였다. 당시 여성들은 이 ‘요술분’을 얼굴에 바른 날이면 저절로 턱이 치켜올라가고 발걸음이 도도해졌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을 정도로 귀한 화장품이 코티분이었다. 지금 보기에는 좀 크고 투박한 이 원통형 화장품이 당시 젊은 여성들에게는 최고의 인기 상품이었다. 송씨는 1968년 충북 청주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의 한 봉제공장에서 일을 했다. 맏딸이어서 번 돈으로 중·고등학생이었던 동생들의 학비를 댔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을 했기 때문에 멋 내고 싶고 가꾸고 싶은 평범한 생각은 아예 접고 살아야 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이런 맏딸을 늘 안타깝게 생각했다. 1971년 겨울 어느 날, 아버지는 도정한 쌀 몇 말을 직접 읍내로 가져가 돈을 바꾼 뒤 그 돈으로 귀한 코티분을 샀고, 서울로 찾아와 그걸 딸 손에 건넸다. 평생 농사만 지은 탓에 나무껍질처럼 거칠어진 손에 쥐고 계신 코티분을 보고 윤씨는 죄송한 마음에 손사래부터 쳤다. 하지만 아버지가 다녀가신 뒤 손에 들려 있는 코티분을 보면서 껑충껑충 뛰기까지 했다고 돌이켰다. 송씨는 코티분을 장롱 속에 숨겨 두고 중요한 날에만 조금씩 얼굴에 발랐다. 일을 할 때나 집에 있을 때는 절대 바르지 않았다. 그는 “코티분 덕분에 남자친구도 생겼고, 시집도 잘 갈 수 있게 된 것 같다.”고 말하며 수줍게 웃었다. 그러면서 “요즘은 중·고생들도 아무렇지 않게 비싼 화장품을 사서 마구 쓰는 걸 보면 세상 참 많이 변했다는 생각이 든다.”고 덧붙였다. ■ 손빨래 고생 날려준 세탁기 경기도 파주에 사는 주부 이경순(54·여)씨는 세탁기를 두 대나 가지고 있다. 최신형 드럼세탁기와 26년 된 12㎏짜리 구식 통돌이 세탁기. 새 아파트의 멋진 실내장식과 어우러지는 붙박이 드럼세탁기보다 빛바랜 아이보리색 촌스러운 이 구식 세탁기를 버리지 못하는 것은 28년 전 결혼하고 처음으로 맞는 생일날 남편에게 받은 선물이기 때문이다. 1981년 결혼해 서울 상수동 단칸방에서 사글세부터 시작한 이씨 부부의 신혼살림은 넉 자짜리 장롱·이불·브라운관 흑백 텔레비전·다이얼 전화기가 전부였다. 단둘이 사는데 무슨 필요가 있느냐며 세탁기는 혼수에서 제외했다. 이씨는 찬 겨울에도 세탁물을 손으로 빨았다. 얼음물에 손빨래를 하면서도 동(冬)장군 탓은 했어도 삶을 불평하지는 않았다. 이씨에게 세탁기가 선물로 들어온 것은 결혼한 지 3년이 지난 1984년 8월, 이씨의 생일날이었다. 말은 안 해도 매일 마당에 쪼그려 앉아 빨래하는 아내에게 못내 미안한 마음이 들었던 남편이었다. 남편은 아내의 생일에 맞춰 깜짝 선물로 세탁기를 집으로 배달시켰고, 이를 맞이한 이씨는 너무 기쁜 나머지 펑펑 울었다. 곧이어 남편의 사무실로 전화를 걸었다. “당신….” 그는 한참을 말을 잊지 못했고 끝내 “고마워요.”라는 말 한마디만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그는 “사실 지금 사는 큰 아파트엔 구식 세탁기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걸 알아요. 하지만 남편 사랑이 고스란히 담긴 세탁기를 버릴 수 없었어요.”라고 말했다. ■ 계좌이체로 용돈선물 경기 분당에 사는 고교 2학년 최영민(가명·17)군은 올 7월 생일날 출장을 간 아버지·어머니로부터 용돈 10만원씩을 계좌이체해 받았다. 두 분이 국내에 안 계시기 때문이다. 엔지니어링 회사에서 일하는 최군의 아버지는 국내·외 출장을 자주 다닌다. 최군의 생일날도 일본으로 출장을 갔다. 어머니는 외국계 회사에 다니며, 최군의 생일날 마침 유럽으로 연수를 나가 계셨다. 최군은 중학교에 진학하고 나서 줄곧 생일선물로 용돈을 받아왔다. 학교도 늦게 끝나고, 학원도 다녀야 해 따로 생일파티를 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일찍 출근하시는 부모님 때문에 아침에 머리맡에 용돈 봉투를 놓고 가더라도 생일 축하만은 빠뜨리지 않았다. 하지만 계좌이체는 이번이 처음이다. 아버지는 미안한 마음에 전화를 걸어 내년 생일엔 꼭 유럽 배낭여행을 하자고 약속까지 했다. 하지만 최군의 서운한 마음을 달래지는 못했다. 그는 “다른 친구들도 요즘은 다 용돈을 받아요. 어차피 선물을 사줘 봐야 마음에 안 들 수 있으니까 부모님들이 돈으로 주는 거죠. 애들도 더 좋아하고요.”라면서 “그래도 계좌이체라는 말에 친구들이 “너 진짜 짱이다.”라고 하던 걸요.”라고 하면서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 딸이 사준 렌즈로 담은 가족 전남 장흥의 한 고등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는 우지수(29)씨의 아버지 우인식(58)씨는 가장 인상깊었던 생일선물이 뭐냐고 묻자, 조용히 카메라 가방에서 렌즈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는 “딸이 교사가 돼 첫 월급으로 사준 이 표준 줌렌즈가 내겐 최고의 선물이었다.”고 말했다. 1997년 한국사진작가협회에 입회해 작가 자격을 얻은 우씨의 요즘 사진 주제는 ‘가족’이다. 그동안 수많은 렌즈를 다뤘고 다양한 주제의 사진을 찍었지만 가족이라는 주제는 딸이 사준 렌즈로 찍겠다고 다짐했다. 딸이 퇴근할 때 몰래 숨어 논두렁을 따라 걷는 딸의 모습을 담은 사진을 액자로 만들어 선물하기도 했다. 자신의 사랑이 딸에게 고스란히 전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그는 “아버지와 딸이 소통하기가 쉽지 않아요. 제 또래 친구들도 대개 자식들과의 소통이 안 돼 고민을 많이 하는 편이고요.”라면서 “그래도 우리 딸은 제가 찍어준 사진들을 보면 마음이 편해지는 것을 느낀대요. 렌즈라는 생일선물과 그 렌즈로 작업하는 제가 나눌 수 있는 소통의 한 사례가 아닐까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또 “예전에는 몰랐는데 요즘에는 딸을 보면 시간이 지남을 느껴요.”라면서 “아무것도 모르던 소녀가 이제 제법 숙녀 향기를 풍기니 기분은 좋은데 언젠가는 저를 떠날 거라는 생각이 들어 서운하기도 하고요. 그런 게 인생이겠지요.”라고 덧붙였다. ■ 나만의 ‘사랑해’ 프로그램 김은경(23·여)씨는 지난해 5월 남자친구로부터 특별한 생일선물을 받았다. 전공이 컴퓨터학인 김씨는 같은 과 남자친구와 함께 프로그램을 만드는 수업을 듣고 있었다. 명령어를 입력하면 답이 나오게 하는 그런 프로그램이었다. 수업이 끝나고 남자친구는 생일선물이라며 수업시간에 만든 프로그램을 김씨에게 건넸다. “나는 은경이를”이라고 입력하면 “사랑해.”라는 답이 나오는 프로그램이었다. 주변 친구들이 모두 “염장 지른다.”면서 펄쩍 뛰었다. 하지만 김씨는 “학과 특성을 살린 선물이었어요. 그 프로그램을 받고 한참 동안 웃었어요.”라고 말했다. 그해 생일 며칠 전, 김씨는 사소한 일로 남자친구와 말다툼을 했었다. 무뚝뚝한 경상도 출신 남자친구는 사과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속 깊은 남자였다. 사과의 마음을 직접 전하지는 못했지만 장난기 섞인 프로그램 선물로 김씨의 마음을 달랬던 것이다. 김씨는 “남자친구는 그저 표현이 서툰 것뿐이었어요.”라면서 “그래서 더 좋아요.”라며 팔꿈치로 남자친구의 옆구리를 툭, 쳤다. 둘은 서로 장난을 걸며 웃느라 정신이 없었다.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