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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씨줄날줄] 중국의 수렴청정

    김수환 추기경은 존경받는 원로다.시류에 흔들리지 않고 옳다고 생각하는 길을 걸어오고 있다.그의 훌륭함은 1998년 서울대교구장을 그만둘 때도 잘 나타났다.그는 명동성당에서 있었던 평신도들과의 송별 미사에서 “여러분들의 마음 속에 저는 점점 작아지고 제 뒤에 오시는 분은 점점 더 커지길 기원합니다.”라고 말했다.떠나는 사람이 다음에 올 사람을 위하여 몸을 낮추는 일은 쉽지 않다. 권력의 세계에서는 더욱 그렇다.마지막 순간까지 권력의 끈을 놓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사람들이 많다.‘권력의 단맛’을 경험한 사람들은 그 단맛의 늪에서 빠져나오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그래서 정치에는 늘 권력투쟁이 있다.중국의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이 최근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던 TV사극 ‘주향공화(走向共和)’의 방영을 중단시킨 데에도 권력투쟁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19세기말과 20세기 초 중국의 근·현대사를 배경으로 한 이 드라마는 서태후(西太后)의 수렴청정을 미화했다고 영국의 로이터 통신은 보도했다.마치 후 국가주석에 대한 장쩌민(江澤民)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의 영향력 행사가 정당하다는 인상을 주었다는 것이다.서태후가 어린 광서황제를 수렴청정하는 장면이 장쩌민 주석과 후진타오 주석를 풍자한 듯하다고 로이터 통신은 보도했다.서태후(1835∼1908)는 청조 말 48년동안이나 수렴청정을 했다.권력을 위해 광서황제까지 죽인 권력욕의 화신이었다.후 주석은 이 드라마가 역사를 왜곡했다고 비판한 것으로 알려졌다. 후 주석은 중국의 4세대 지도자로 권력장악을 확대하고 있다.국민들의 지지도 높다. 쑹핑(宋平),완리(萬里) 등 원로들은 장 주석의 퇴진을 요구하고 있다.중앙군사위원회 주석직은 가장 강력한 자리다.덩샤오핑(鄧小平)은 다른 자리를 모두 물려준 후에도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직만으로 중국을 지배했다.그러나 장 주석은 덩샤오핑 같은 카리스마가 없다.그렇지만 후 주석이 드라마의 방영을 중단시켰다고 해서 장 주석에 도전하지는 않을 것이다.아직은 장 주석의 영향력이 막강하다.그러나 장 주석도 언젠가는 권력의 정상에서 내려와야 한다.권력의 산은 오를 때보다 내려올 때 더 조심해야 함은 역사가 증언하고 있다. 이창순 논설위원
  • 이런 책 어때요 / 중체서용의 경세가 증국번

    충샤오룽 지음 양억관 옮김 / 이끌리오 펴냄 내란과 외침으로 멸망 위기를 맞은 19세기 청조 말,위난을 극복하고 나라를 구해낸 경세가 증국번의 삶을 그린 소설.유교 선비 출신인 증국번은 태평천국의 난을 평정하고,서구 열강의 침입에 대한 대책으로 양무운동을 추진,중국근대화의 초석을 놓은 인물.그러나 한인인 증국번은 만주족 왕조 청나라에 충성을 다했고,민중운동인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했다는 점 때문에 한간(漢奸),즉 민족반역자란 비판을 받기도 한다.태평천국의 두 주인공인 홍수전과 양수청,증국번의 제자 이홍장,서태후와 동태후,공친왕 등 격랑 속 인물들을 만날 수 있다.1만 8000원.
  • ‘전쟁 주가’ 570선 회복,투신권 SK사태후 첫 순유입 기록

    ‘전쟁 랠리’가 계속되면서 종합주가지수가 4일째 올라 570선을 회복했다.채권시장도 매수세가 꾸준히 유입돼 국고채 금리는 SK글로벌 충격 이전 수준에 다가섰다.투신권도 펀드로 자금이 새로 들어오면서 SK글로벌 사태 이후 처음으로 순유입으로 돌아섰다. 21일 거래소시장에서 종합주가지수는 전날보다 7.31포인트 오른 575.77로 마감했다.증권 유관기관의 적립식펀드를 통해 1000억원이 유입되고 외국인과 기관의 순매수가 이어지면서 상승세로 돌아섰다.코스닥지수도 전날보다 0.96포인트 오른 40.10으로 장을 마쳤다.한화증권 조덕현 시황분석팀장은 그러나 “북핵문제,금융시장 불안 등이 남아 있어 추가상승 여부는 불투명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채권시장에서 3년 만기 국고채 수익률은 전날보다 0.07%포인트 하락한 4.75%를 기록했다.SK글로벌의 분식회계 사태 이전에는 4.69%였다. 한국투신과 대한투신은 이날 각각 1670억원,470억원의 순유입을 기록했다. 관계자는 “환매사태가 진정되면서 빠져나간 머니마켓펀드(MMF) 자금이 주식펀드 등으로 다시들어와 총 수탁고 유입이 ‘플러스’로 전환됐다.”고 설명했다. 김미경기자 chaplin7@
  • 美, 괌 폭격기 증파 안팎/北核사태후 첫 ‘군사 조치’ 공중급유 없이 北타격 가능

    |워싱턴 백문일특파원|미국이 한반도를 공습 사정거리에 둔 괌 기지에 24대의 폭격기를 배치하기로 한 것은 북핵 사태 이후 평양을 겨냥한 부시 행정부의 첫 ‘군사적 조치’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토머스 파고 미 태평양사령관은 B-1,B-52 폭격기 각 12대 이외에 F-15 전투기 8대와 U-2 정찰기 2대 등으로 편성된 병력 2000명을 한반도 주변지역으로 증강할 것을 요청했으며 U-2 정찰기 2대는 이미 배치된 것으로 전해졌다. 이번에 배치되는 B-1 폭격기는 인공위성으로 유도하는 1t짜리 폭탄 24개를 탑재할 수 있고,B-52 폭격기는 31t 규모 폭탄과 미사일을 적재할 수 있다.이 두 폭격기는 모두 괌에서 중간급유를 하지 않고 바로 북한 상공으로 날아가 작전을 수행할 수 있다. ●“대북 억지력 차원” 해명 미 국방부와 국무부는 4일 폭격기 배치명령과 관련해 ‘공격적인’ 의도가 없으며 북한에 대한 억지력 차원에서 미 전력을 보충하려는 ‘신중한 조치’라고 밝혔다. 제프 데이비스 국방부 동아태담당 대변인은 이번 명령은 다른 지역(이라크)에서 예상되는 군사적 행동에 따른 전략적 공백을 보강하기 위한 것이며 북한 전투기들이 정찰기를 위협하기 하루 전인 1일에 내려졌다는 점을 강조했다. 미국이 한반도에서 긴장을 고조시킨다는 비난을 피하기 위해 폭격기 배치와 북한의 위협은 무관하다는 주장으로 해석되지만 미 언론들은 북한의 잇따른 행동에 대한 부시 행정부의 강력한 ‘경고’로 파악하고 있다. 뉴욕타임스는 북한의 도발적 행동에 대한 부시 행정부의 우려를 직접적으로 반영한 것이라고 5일 분석했다.특히 영변 원자로에 이은 핵 재처리 시설 가동과 장거리 미사일 발사 실험은 어떤 방식으로든 막겠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전했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3일 지역 언론들과의 인터뷰에서 북핵 문제가 외교적으로 해결되지 않으면 군사적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 것으로 백악관은 전했다.물론 ‘여담’ 형식이며 부시 대통령은 외교적 해결을 자신했다고 하지만 미 대통령의 입에서 북한에 대한 ‘군사적 대응’이라는 표현이 나온 것은 처음이다. ●장거리미사일 저지 포석도 리처드 마이어스 합참의장은 “북한 영토에서 상당히 떨어진 공해에 비행거리가 짧은 북한 전투기들을 보낸 것은 미 정찰기에 대한 북한의 위협이 오랜 검토에 의해 계획적으로 이뤄진 것”이라며 “정찰기에 대한 안전과 보안조치를 강화하겠다.”고 말했다. 이는 북한에 미국이 선제 공격할 의도를 갖고 있다는 빌미를 제공할 수 있음에도 미 공군기의 정찰 활동에 전투기를 대동하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미국은 그동안 정찰 활동에 전투기를 대동하지 않았다. 물론 미국은 북한이 여전히 ‘벼랑끝 전술’을 구사한다고 판단하면서도 군사적 옵션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점을 빠뜨리지 않는다.애리 플라이셔 백악관 대변인은 “북한은 지금 도발적이고 무모한 행동을 하고 있다.”며 “평양 정권이 이같은 행동으로 보상을 요구하고 있으나 그같은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mip@
  • 이런책 어때요

    ***왜 사냐면...웃지요 김열규 지음 궁리 펴냄 “만산(滿山) 홍록(紅綠)이 휘두르며 웃는구나.” 우리 옛 시조는 푸른 잎,단풍 잎도 웃는다고 했다.그런가하면 꽃이 떨어지는 걸 보고도 “봄날이 며칠이랴.웃을 대로 웃어라.”라고 노래했다.지는 꽃잎도 바람과 장단 맞춰 흔들흔들 웃는다고 했던 그 살가운 감성,흐드러진 웃음은 어디로 갔을까.우리는 왜 웃음기근 속에 살게 됐을까.한국인의 마음살이를 탁월하게 묘사하고 전달해온 저자가 풀어놓는 한국인의 웃음의 미학은 신선하면서도 걸쭉하다.한국 문화에서 웃음이 어떤 위치를 차지했는가를 민담,소설,판소리 등 다양한 방면에서 살펴본다.1만 2000원. ***이덕일의 여인열전 이덕일 지음 김영사 펴냄 고구려와 백제건국의 숨은 주역 소서노,황제국가를 꿈꾼 고려의 여걸 천추태후,세계를 지배한 대제국 원을 움직인 고려출신 여인 기황후….그동안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던 역사속 여인들의 삶을 엄정한 사료해석을 통해 밝혀냈다.인간중심의 역사서 집필에 몰두해온 저자(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소장)는 이책에서 역사 인물들의 이면에 숨겨진 의미를 살려내는 데 주력한다.한 예로 진덕여왕은 서라벌 출신 진골 정통들의 반발과 당나라의 위협에 맞서 김유신과 김춘추로 대변되는 소외세력을 등용,국가의 패러다임을 바꿨다는 게 저자의 진단이다.1만 7900원. ***농부의 마음으로 경영하라 앨런 힉스 지음 함규진 옮김 / 시대의창 펴냄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원래의 자연은 ‘지속가능한’ 방법으로 그 시스템을 유지한다.예컨대 초목은 가을 결실기가 끝나면 낙엽을 퇴비 삼아 지력 회복을 꾀하고 양분을 축적하기 위해 생산활동을 멈춘다.때론 해걸이를 통해 양분과 소출의 균형을 맞춘다.때문에 대지의 힘을 전혀 고갈시키지 않은 채 생산력을 유지할 수 있다.사람과 조직의 양생원리도 이와 같다.이 책은 유기농법의 방식을 원용,개인과 조직의 지속가능한 경영프로그램을 제시한다.그것은 일할 때 칭찬과 격려 등의 깨끗한 자원으로부터 에너지를 끌어내는 것으로 요약된다.1만 3000원. ***영혼의 정원 스태니슬라우스 케네디 지음 이해인·이진 옮김 / 열림원 펴냄 자연의 고요함과 에너지,아름다움과 너그러움을 일깨워주는 명상록.자연의 사계와 정원의 신비를 우리의 삶과 연관지은 영혼의 일기다.저자는 ‘스탠’이란 애칭으로 불리는 아일랜드 출신의 수녀.인간은 삶이란 작은 정원에서 날마다 생각하는 나무같이,기도하는 잎사귀같이,각자 영혼을 가꿔가야 할 정원사란 메시지를 전한다.글 끝자락마다 짤막한 지혜의 어록도 실렸다.“내 영혼은 지상의 아름다움을 통하지 않고선 천국에 이르는 계단을 찾을 수 없다.”(미켈란젤로)“지혜를 얻고자 한다면 매일 한 가지씩 버려라.”(노자) 등이 그것이다.1만 3500원. ***고전소설 바르바라 지히터만 등 지음 두행숙 옮김 / 해냄 펴냄 알렉산드르 뒤마의 ‘몽테 크리스토 백작’.70명의 직원이 매년 20∼30편씩 소설을 찍어내는 ‘소설공장’에서 만들어진 작품임을 아는 사람들은 별로 없다.가난과 간질,도박벽에 시달리던 도스토예프스키가 짧은 시간 안에 소설을 지어내지 못하면 글쓰는 노예가 될 위기에 처해 쓴 작품이 ‘죄와 벌’이란 사실은 얼마나 경이로운가.이책은 우리가 고전소설에 대해 갖고 있는 선입견과 경외감을 한 순간에 무너뜨린다.세계문학의 원형이라 할 16∼19세기 명작소설 50편의 내용과 창작배경을 다뤘다.1만 5000원 ***존재하는 무0의세계 로버트 카플란 지음 심재관 옮김 / 이끌리오 펴냄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는 달리 0의 개념은 인도문명이 낳은 것이 아니다.그보다 훨씬 이전인 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 문명까지 거슬러 올라갈 뿐 아니라 마야 같은 독자적인 문명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개념이다.따라서 0의 개념은 보편적 성격을 띤다.반면 저자는 인류가 0의 도움 없이 큰 숫자를 계산하는데 얼마나 큰 어려움을 겪었는지도 실감나게 보여준다.수학에 능했다는 그리스인에게도 0이 없었다.0을 주제로 인류 문명사를 거시적으로 그려낸 이 책엔 0이 갖는 인문학적 의미를 다룬 에세이들이 실려 있어 읽는 재미를 더해준다.1만 2000원.
  • 이런책 어때요 300자 서평/ 중국 고건축 기행 1 -유형별로 살핀 중국 고건축

    시대 정신이 녹아 있는 5000년 역사의 중국 고건축을 사묘(寺廟),능묘,원림(園林),단묘(壇廟)등 유형별로 나눠 살폈다.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것 중의 하나가 자금성.자금성은 전형적인 황궁의 기본 배치형식인 전조후침(前朝後寢)에 따라 정무를 처리하는 전당은 앞쪽에,주거부분은 뒤쪽에 놓여 있다.자금성 구석구석에 자리잡은 커다란 순금 도금 물항아리는 화재를 다스리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도 밝힌다.서태후의 이화원,사합원,명13릉,베이징 천단,원명3원 등의 모습도 펼쳐진다.저자는 건축을 인간의 구체적인 삶과 사고의 총체로 본다.2만 5000원. ▲중국 고건축 기행 1 , 러우칭시 지음, 이주노 옮김, 컬처라인 펴냄
  • 일요영화/ 텔 미 썸딩 등

    ▲텔 미 썸딩(SBS 오후11시50분)= 은퇴를 선언한 지 3년이 지나도록 여전히 팬들의 사랑과 관심을 받는 심은하의 마지막 작품.엽기적 살인사건과,사건을 수사하는 형사의 이야기를 그린 하드고어 스릴러다.1999년 서울에서 두 건의 괴이한 연쇄살인이 일어난다.사체는 정교하게 토막나 있는데 첫번째 시체는 팔,두번째 것은 몸통이 사라진 상태.조형사(한석규)는 용의자가 인체 해부에 깊은 지식을 갖춘 인물임을 알아채지만 수사는 오리무중에 빠진다.개봉 당시 은유적인 결말과,실제처럼 생생한 시체 소품 등이 화제가 됐다. ▲황비홍3(KBS1 오후11시20분)= 감독 서극과 배우 이연걸이 호흡을 맞춰 1993년에 만든 황비홍 시리즈의 하나.청나라 말엽 러시아와 영국 등이 중국을 넘보자 태후는 국민 신체가 건강해야 서양 오랑캐에 대항할 수 있다면서 사자놀이 대회를 개최한다.대회에 참가하고자 전국에서 무술 고수들이 몰려든다.우승을 노린 경성의 터줏대감 조천패는 경성에서 발 기술이 제일 뛰어나다는 번개발을 앞세워 비열한 방법으로 황비홍 부친에게 부상을 입히는데…. ▲피아노맨(MBC 밤12시30분)= 이승연이 심리수사에 탁월한 형사로,최민수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빠진 범인으로 등장하는 스릴러.유상욱 감독이 직접시나리오를 쓰고 연출한 1997년 작품으로,대종상 촬영상을 받았다.수사관인 송미란에게 소포가 하나 전달된다.그 안에는 피가 흥건한 심장과 PM라고 적힌 뮤직박스가 들어 있다.그때부터 연쇄살인이 시작되고 송미란은 동료인 양형사와 함께 PM로 불리는 살인마를 추적한다.우여곡절 끝에 살인마를 잡지만 잡힌 사람은 가짜이고,진짜 살인마가 살아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는다. 이송하기자 songha@
  • 유가급등 원유시장 구조 바뀌나

    국제 유가가 심상치 않다. 14일 서부텍사스 중질유(WTI)는 배럴당 28.15달러,북해산 브렌트유는 26.38달러를 기록해 3개월전 수준으로 회복했다.특히 이라크의 무기사찰 거부가알려진 13일 WTI는 전일보다 1.25달러,브렌트유는 93센트나 폭등했다. 여름철 비수기에 이렇듯 유가에 날개를 달아준 것은 수급사정 보다는 중동긴장 등 정치적 요인이 큰 것으로 분석된다.그렇지만 많은 전문가들은 원유시장을 떠받쳐온 시장원리가 변화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검은 황금’의 정치경제학이 바뀌고 있는 것이다. ◇이라크 공격설이 화근- 14일의 유가 급등은 미국석유협회(API)가 지난주 원유 재고를 전 주에 비해 950만배럴 줄어든 2억 9560만배럴로 발표한 데 따른 것이다.미국 등 각국의 전략비축유 확보 노력이 작용한 것은 물론이다.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은 최근 “사담 후세인이 전세계 석유매장량의 10%를 깔고 앉아 막대한 부를 누리고 있다.후세인이 이 석유를 멋대로 처분하도록 놔둔다면 머지않아 핵무기도 손에 넣을 것”이라고 말했다.이라크 공격에 에너지 안보라는 장기적인 지정학적 목표가 있음을 드러낸 것이다. 석유전문가 필립 벨레거는 이라크 공격을 “리스크가 극히 커 자칫 세계 원유 공급망을 파괴할 수 있다.”고 염려했다.이라크의 수출량이 미미해 지난90년 8월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했을 때 배럴당 15달러였던 국제유가가 40달러까지 끌어올려진 일이 재연되지는 않겠지만 후세인이 사우디와 쿠웨이트 유정들을 미사일로 ‘때릴’ 경우,엄청난 파장을 낳게 된다는 분석이다. ◇미국·사우디 불화- 미국의 보수적인 싱크탱크인 랜드연구소는 최근 사우디를 ‘악의 핵’으로 규정한 뒤 사우디가 테러집단과의 관계 청산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미국이 침공해 유전지대를 점령하고 해외자산을 동결해야 한다고 국방부에 건의,사우디정부의 큰 반발을 샀다. 미국은 걸프전 이후 사우디를 떠나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고 5000명을 주둔시켜 이슬람 성지에 이교도 군대를 들여놓았다는 회교 세력의 반발을 불렀다.유가 불안의 여파로 사우디는 올해만 120억달러의 재정적자가 예상되며 실업률은 15∼20%까지 치솟아 심각한 사회불안이 우려되고 있다. 미국이 이라크와 사우디에 대해 이같은 입장을 취하는 배경중 하나는 지난 3월 사우디를 제치고 세계 최대 산유국으로 떠오른 러시아를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에 기대- 소련 붕괴후 경제난으로 석유생산을 줄였던 러시아는 2000년부터 증산에 박차를 가해 지난 3월 하루 728만배럴을 캐내 유가하락에 기여했다.OPEC는 감산으로 맞섰지만 러시아는 되레 이 틈새를 파고들어 시장점유율을 높였다.외화에 혈안이 된 러시아는 석유 올리가르히(과두 독점세력)를 앞세워 미국,영국 등 서방의 자본과 기술을 끌어들여 유정 개발에 힘을 쏟고 있다.뉴욕 타임스는 러시아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동진을 묵인하고 9·11 사태후 ‘뒤뜰’격인 중앙아시아에 미군이 발을 붙이도록 방관한 배경에 석유가 존재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OPEC는 현재 단결력이 현저히 약화돼 예전같은 오일달러의 위력을 행사할수 없게 돼 있다.OPEC 회원국들은 생산쿼터를 위반,7월 한달동안 하루 150만배럴씩 쿼터량보다 더 생산했다.OPEC는 내달 19일 오사카에서 증산량을 결정할 예정이다.회원국간 이견으로 합의에 이를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이런 가운데 국제에너지기구(IEA)는 연말 성수기에 대비하려면 9월 전에 증산체제에 돌입해야 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 연말에 연중 최고를 기록할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임병선기자 bsnim@
  • [제정러시아 외교문서 새 발굴 대한제국 비사] (9)고종-니콜라이2세 특별한 관계

    ■두帝國 ‘마지막 황제' 친서외교 10여년 고종과 러시아의 니콜라이 2세는 ‘먹고 먹히는’ 약육강식의 제국주의 침탈외교사에서 다소 의외라고 여겨질 만큼 특별한 관계를 유지했다. 고종(1852∼1919)은 1907년 헤이그밀사사건으로 강제로 대한제국의 황제자리를 아들 순종에게 양위했지만 조선왕조의 마지막 군주였다.니콜라이 2세(1868∼1918) 또한 1917년 2월 혁명에 의해 퇴위당한 뒤 유배지에서 처형당한 러시아 로마노프왕조의 마지막 황제였다.두 사람이 조선과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였다는 점에서 동병상련의 정서가 통했다는 분석도 가능하다. 물론 두 사람의 관계가 황제 대 황제의 동격 관계는 아니었다는 점은 분명하다.꺼져가는 국운을 붙잡기 위해 안간힘을 쏟은 고종이 일본을 밀어내기 위해 러시아에 매달리는 입장이었다면 니콜라이 2세는 만주에서의 이익 등 국익에 반하지 않는 수준에서 ‘외교적’으로 고종을 대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밀월관계의 출발은 아관파천(1896년 2월11일∼1897년 2월25일)이었다.초대 서울주재 대리공사로 10년 넘게 서울에 주재하면서 고종과 두터운 친분을 쌓은 베베르가다리를 놓았다.대(大) 러시아제국의 ‘차르’였던 니콜라이 2세에게는 저 멀리 극동에 위치한 작은 나라의 왕이 자국 공사관에 1년이상 몸을 의탁한 채 도움을 요청하자 애처로움과 동시에 흥미를 느꼈을 수도 있다. 이같은 관계의 성립은 니콜라이 2세의 자상한 성격에서 비롯된 측면이 강해 보인다.니콜라이 2세는 전제군주라고 보기에는 어려울 정도로 잔정이 많았다.해외 각국에 파견돼 있는 외교관들의 상주서에 일일이 답하는 것은 물론 건강까지 체크했다. 이번에 발굴된 문서중에는 고종과 니콜라이 2세가 친서를 주고 받은 사실이 30차례 가까이 등장한다.대부분은 고종이 보내고 니콜라이 2세가 받는 형식이었지만 니콜라이 2세도 여러 통의 친서를 보냈다.비공식 친서로는 1895년 7월 고종이 조선군 병참관 권동수(權東壽)를 연해주 지사 운테르베르게르 장군에게 보내 러시아 황제의 후원을 요청한 것이 있다.그러나 고종은 이후 문제가 야기되자 파견사실을 부인했다. 고종이 니콜라이 2세에게 보낸 첫 공식친서는 1896년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민영환(閔泳煥) 특사를 통해 전한 다음 친서이다. 짐의 나라는 관습은 물론 언어와 문자도 고유해 외국과는 판이하게 다르다.…불행하게도 짐 나라의 동쪽 이웃나라가 일본이다.일본은 섬나라이며 관습은 짐의 나라에서 유래됐고 문자와 제도도 짐의 나라에서 가르쳐주었다.…그 때문에 일본은 짐의 나라를 자기의 조상과 주인의 나라로서 섬겼다.…최근에 일본이 서양의 제도를 흉내내고 배워 동양의 맹주가 되려한다.…짐은 폐하가 짐의 나라의 실정을 동정하고 정의를 토대로 세계 열강제국이 짐의 나라에 대한 일본의 불법적인 행위를 꾸짖고 나라의 독립을 침해하지 못하게 모든 조약규정 위반을 즉시 중지하도록 권고하여 주시길 바라고 바란다.끝으로 짐은 눈물로 폐하께 호소하며 만수무강을 기원한다. 고종의 ‘눈물의 편지’를 읽은 니콜라이 2세의 마음이 움직였는지 러시아는 1896년 10월 군사교관단과 재정고문을 파견했다.그리고 1897년 고종이 대한제국으로의 국호변경과 황제 즉위 등 칭제건원(稱帝建元)을 선언하자 열강 중 가장 먼저 이를 승인하고 축하전문을 보내왔다.눈치를 보던 일본,미국,프랑스,영국이 줄줄이 뒤를 따랐다.고종은 혹시 러시아가 거부할 지 몰라 노심초사했으며 “승인을 하지 않더라도 곧바로 거부하지 말고 현재의 호칭(대군주 폐하)으로 대해주기를 바란다.”고 연막을 쳤던 터라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두 사람간의 밀착관계는 1898년 조선이 러시아 군사교관단 및 재정고문 알렉세예프의 본국소환을 요청하자 금이 가는 것처럼 보였다.고종은 “재정고문과 군사교관단의 소환으로 야기된 일련의 사태가 그동안 베푼 황제의 호의에 아무 영향이 없기를 바란다.”고 조심스러워했으나 니콜라이 2세는 “고종황제 개인에게 변함없이 호감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 안심하도록 진정시키라.”는 지시를 내리면서 일단 무마됐다. 니콜라이 2세는 내심 불쾌했지만 복심(腹心)은 드러내지 않았던 것이다. 이후에도 니콜라이 2세는 “고종황제 개인이나 대한제국 정부가 앞으로도 러시아의 지지가 불가피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는지 문의하라.”는 칙령을 내리는 등 고종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다.하지만 고종을 공사관으로 피신시키겠다는 제2,제3의 아관파천 공작을 서울주재 공사관에서 보고하자 “그런 일은 현재의 정치여건 아래서는 지극히 위험한 사태를 몰고올 수도 있다.”면서 발을 빼는 듯한 태도를 취했다. 두 사람의 관계는 1902년 고종의 즉위 40주년 기념식에 니콜라이 2세가 베베르를 특사로 파견키로 하면서 절정에 올랐다.니콜라이는 고종에게 축하친서와 함께 다이아몬드로 장식한 성 안드레이 사도 1급훈장 등 러시아 최고 훈장을 선물로 보냈다.이에 앞서 고종은 대한제국 최고 훈장인 금척대훈장을 니콜라이 2세에게 보낸 바있다.안드레이 1급훈장은 정교회 국가인 러시아 최고의 훈장으로 명예는 물론 당시 가격으로 5000루블을 호가하는 최고의 선물이었다.그러나 기념식이 콜레라 창궐로 연기되는 바람에 수여되지 않았다. 고종이 “기념식은 연기됐지만 베베르를 서울에 체류토록 해달라.”고 요청하자니 콜라이 2세는 “폐하의 요청을 받고 짐은 만약 뜻밖의 어려움만 발생하지 않는다면 폐하의 재위 경축식이 다시 열리는 내년 4월17일까지 베베르의 서울체류에 동의한다.”는 친서를 보내는 등 서로의 돈독함을 공개적으로 내비췄다. 이후 1903년부터 1904년 사이 두 사람은 명헌태후 서거애도 친서,니콜라이 2세의 황태자 득남축하 친서 등을 주고 받았다.고종은 “황제께서 황태자를 생산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서둘러 진심으로 축하를 드리고자 한다.이 기쁜 소식을 듣자마자 즉시 축전을 치는 것이 도리였으나 외부의 방해 때문에 할 수 없이 이제 서한으로 축하를 드리게 됐다.”고 기술했다.니콜라이 2세는 “감사함을 전하라.”고 공사관에 지시했다. 러·일전쟁(1904∼1905)이 일어나자 고종은 “러시아의 승리를 확신하며 대한제국의 독립을 수호해 주기를 바란다.”는 친서를 띄웠고 “러·일전쟁 발발시 중립준수를 요청한다.”는 니콜라이 2세의 친서를 전달받자 곧바로 중립선언문을 작성,일본을 비롯한 열강에 보내 화답했다. 하지만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패배하자 일본은 보란 듯이 강제적으로 을사늑약을 체결했다.이로써 러시아의 힘을 빌려 일본으로부터 벗어나려던 고종의 전략은 한계에 부딪힌다. 러시아는 모든 열강이 대한제국을 독립국으로 승인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무력으로 독립과 불가침권을 침탈한 데 대해 견해를 밝힌 바 있다.러시아 외무부는 일본정부가 고종을 일본으로 이송,미리 준비한 비밀장소에 연금시킨다는 계획을 믿을 만한 소식통으로부터 입수했다.러시아는 천인공노할 일본의 계획에 항의하지 않을 수 없다.(1905년 5월10일 외무부가 해외 러시아 공관에 보낸 회람전문) 니콜라이 2세도 이 전문상단에 “일본의 그런 행위는 어떻게든 예방돼야 한다.”고 지시하는 등 고종의 안위를 지켜주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덕분에 고종의 일본강제 이송 및 연금계획은 무산됐다. 고종 개인에 대해서는 우정을 유지했지만 기울어진 대세는 니콜라이 2세로서도 어쩔 수 없었다.을사늑약체결 직후 고종이 “일본은 미리 작성해 온 조약문에 국새를 강탈해 날인하고 짐의 서명을 강요하였으나 단호히 거절했다.황제께서는 유럽 문명국에 일본의 만행을 알려 대한제국의 독립을 수호해 주시길 거듭 앙망한다.”고호소했으나 니콜라이 2세는 “국내문제로 더 이상 대한제국을 도와줄 수 없다.”고 냉정하게 거절한 것이다. 이후 헤이그밀사파견(1907) 등 고종의 거듭되는 친서와 러시아에로의 정치망명 요청 등에 대해 러시아는 포츠머스강화조약(1905) 준수와 극동질서를 강조하는 등 계속 딴전을 피웠다.1905년 ‘피의 일요일’사건으로 러시아혁명이라는 폭풍앞에 선 니콜라이 2세로서도 동방의 소국에 더이상의 잔정을 줄 여유가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고종황제는 병이 들어 나약하고 병력이 없는 군부대신은 허수아비처럼 서 있고 다른 각부 대신은 일본인에 복종하고 있다.노쇠한 황제는 고통스러운 감금의 나날을 보내고 있으며 대궐안팎은 일본인의 감시와 경비가 삼엄하다. 알현이 제한된 것은 물론 제3자를 통한 연락도 제한을 받고 있다.”는 1908년 12월8일자 소모프 총영사의 고종 및 대한제국에 대한 근황보고서는 두 마지막 황제의 관계가 대한제국의 몰락과 함께 종극(終劇)을 향해 치닫고 있음을 보여준다. 노주석기자 joo@ ■러시아가 본 조선王家 서울에 주재한 제정 러시아의 외교관들은 대한제국의 왕가(王家)에 대해 어떤 생각을 품고 있었을까. 이번에 새로 발굴된 제정 러시아시대의 외교문서를 보면 러시아 외교관들은 고종과 주위의 대신들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다.순종을 비롯해 엄비와 대원군,다음 왕위를 노리는 왕자들을 못마땅해 하는 기색도 역력했다. 오래전에 자주적인 통치력을 상실한 고종은 측근에게조차 권위가 없다.또 우유부단한 상태에서 대한제국 지배계급의 어느 한 집단이나 혹은 끊임없이 교체되는 명칭만 요란한 독립협회,황국협회,만민공동회,친러파,친일파,친미파,친영파 그리고 친독파로 구성되는 대신들에 의지하고 있다.(1901년 파블로프 대리공사) 고종황제 자신은 아주 호감을 주는 인물이나 많이 쇠약해져 있다.황실에서는 고위직과 하위직을 막론하고 음모,뇌물수수,매수가 만연돼 공적과 능력에 따라 관직에 임용되지 않고 뇌물의 액수에 의해서 임용이 결정된다.(1903년 베베르 초대 대리공사) 명성황후의 시해이후 10여년동안 사실상 왕비의 역할을 한 엄비(嚴妃)가 서거하자 “엄비는 평민출신으로 양반들의 지지를 얻지 못하자 자기 목적을 이루기 위해 무당의 굿에 의존했다.(1903년 베베르).”고 힐난한 대목도 나온다. 대원군에 대해서는 실제 이상으로 부정적이다.틈만 나면 고종 암살기도설 등을 정보보고하고 있다.1896년 베베르는 “고종은 부친 대원군을 숙청할 생각을 갖고 있지만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것 같다.러시아가 대원군을 아무르주 혹은 사할린으로 이주시켜 주기를 바라는 고종의 소망을 실현시키는 것이 바람직스러운 일이다.”라고 적고 있다.대원군의 부인이자 고종황제의 친모인 여흥부대부인(驪興府大夫人)민씨가 80세를 일기로 서거하자 “고종은 모친을 몹시 사랑했다.고종은 성품이 선량하고 동정심이 많고 나약한 점이 모친을 닮았다.(1898년 쉬테인)”고 애도하기도 했다. 1898년 대원군이 아무르 동부지역 총독 그로데코프에게 보낸 편지도 흥미롭다.처음으로 공개되는 이 편지에서 대원군은 “세상 어느 곳에서나 부모와 자식간에는 화목하게 산다.그런데 수십년전 4명의 신하가 고종 임금앞에서 늙은 아비를 비방한 일이 있었다.하늘에 맹세코 말하지만 우둔한 자들이 음모를 꾸며 부자지간을 이간시켜 놓음으로써 나는 지금도 아비취급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종은 천성은 선량하나 나쁜 신하들의 영향을 받고 있다.”면서 러시아에 원한을 풀어달라고 요청하고있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에 대한 러시아 외교관들의 차가운 시선에는 애처로움이 느껴질 정도다. 순종의 즉위식이 8월27일 거행됐으나 고종과 세자는 참석하지 않았다.순종은 카키색의 군복을 입고 눈치를 살피면서 말을 꺼렸다.황제의 인상은 침울하고 창백하며 놀란 듯한 두 눈에 얼굴은 병으로 부어 환자처럼 보였다.(1908년 소모프 총영사). 고종황제의 왕위를 이을 후계자에 대해 주목하면서 일일이 인물평을 늘어놓았다. 의화군 이강(李堈·후의 의친왕)을 유럽파견 공사로 임명했다고 조선정부가 통보해왔다.이강은 왕비가 낳은 아들이 아니라 궁인(귀인 장씨)에게서 얻은 왕자로 젊고 유능하며 쾌할한 성격이다.일부 사람들은 그가 앞으로 세자로 책봉될 것이며 좀 우둔한 세자(순종)보다는 덕망이 있을 것이라고 한다.하지만 고종은 세자를 더 사랑한다.(1895년 베베르) 또 1906년 1월1일 고종황제와 황실가족과의 신년 경축 알현식에 참석한 플란손 총영사는 “장자인 황태자는 30세로 명성황후의 적자이며 법통 후계자다.의친왕(李堈))은 17세이며 명성황후 생존시 상궁소생으로 미국과 일본에서 교육을 받았다.삼자 영친왕(李垠)은 9세이며 엄비 소생으로 영특하고 야심만만하다.”라고 평가했다. 노주석기자
  • [러 외교문서로 밝혀진 구한말 비사] (1)초대 대리공사 베베르의 수기

    1884년 첫 수교,1990년 재수교….한국과 러시아가 외교관계를 맺은지 118년이 지났지만 한·러 관계사는 아직도 많은 부분이 베일에 가려져 있다. 첫 수교 이후 한일합방에 이르기까지 러시아의 대한(對韓)정책은 일본과 더불어 38선 남·북 분할점령,한반도 전역 무력점령 및 보호국화,독립국가 유지안을 중심으로 변화해왔다.남·북 분할점령안은 해방 및 6·25전쟁 이후 현실화됨으로써 한국민들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대한매일은 박종효 전 모스크바대학 교수가 지난 10년 동안 러시아 각지에 흩어져 있는 20여개 한국관련 문서보관소를 샅샅이 뒤져 수집한 3000여건의 외교,정치,군사,경제관계 보고서 중 1884년 수교 이후부터 1910년 한일합방을전후한 시기의 미공개 외교문서 1000여건을 해제해 최초로 공개한다. 100여년만에 햇볕을 본 이 극비문서에는 조선주재 초대러시아 대리공사였던 베베르의 수기를 비롯,1·2차 군사고문단 파견의 실상,고종과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2세가 주고받았던 친서,러시아측의 기획외교로 인한 헤이그밀사 파견 실패 등 국내에 소개된 적이 없는 새로운 내용들로 가득차 있다. 주 2회씩 10회에 걸쳐 계속되는 이번 연재물은 그동안 미흡했던 한·러 관계사의 복원은 물론,우리 근세사에서 잘못 알려진 부분들을 바로 잡는데 크게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러시아문서보관국 서고에 묻혔다가 100년만에 햇볕을 본베베르의 수기 ‘1898년 전후 대한제국’은 러시아의 대한(對韓)정책의 실상과 당시 우리 사회상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사료로 평가된다. 베베르는 수기 전반부에서 자신이 공사로 재임했던 1898년 이전의 대한제국의 실정과 러시아의 극동정책에 관해기술했다.후반부에서는 1903년 고종재위 40년을 맞아 경축 러시아특사로 다시 찾은 대한제국이 일본의 경제식민지로 전락한 상황을 상세하게 기록했다.모두 144쪽 분량으로된 이 수기는 자필로 작성됐지만 이를 보고받은 러시아 외무부가 황제에게 보고하기 위해 타이핑했다. 1895년 10월8일 민왕후가 일본인에 의해 잔인하게 시해된 사실이 알려지자 복수를 위해 전국적으로 봉기가 일어났다.민왕후가 시해당한 후 수개월동안 고종왕은 일본군의감시아래 포로처럼 대궐에 갇혀 있었다. 베베르는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전말을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았다.그는 사건 발생 당시 현장을 목격한 러시아인 건축기사이자 궁궐경비원이었던 사바틴의 증언서와 자신의목격담을 난수표 암호전문 형식으로 러시아 외무부에 잽싸게 보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니콜라이2세 황제는 이 보고서를 읽고 친필로 “천인공노할 사건이니 좀 더 자세히보고하라.”고 지시했다.이어 극동지역에 주둔하던 아무르군관구 사령관에게 비상경계에 들어가도록 지시했다. 민왕후가 시해당한 후 수개월동안 일본군의 감시하에 포로처럼 대궐에 갇혀있던 고종은 1896년 2월11일 아침 7시30분 여인복장으로 변장하고 왕세자와 함께 부인용 가마 두 대에 앉아 공사관으로 피신해오는 데 성공했다.뜻밖의 정변이 발생한 것이다.고종의 탈출소식을 들은 수천명의 군중이 공사관 담벽 아래로 몰려와 국왕의 탈출을 만세로 환호했다.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해온 이후 모든 국사는 러시아제국의 국기가 게양된 러시아공사관에서 경비해군 160명의 호위 아래 행해졌으며,각부 대신들은 공사관건물 안에 병풍을 친 임시 사무실을 사용했고 본인과 협의하라는 왕명을 받으면 어떤 사건이든 대신과 단둘이서 논의할 기회가 주어졌다. 고종이 러시아공사관 옆에 위치한 경운궁(덕수궁)으로 환궁할 때까지 1년동안 자신이 대한제국의 국사를 사실상 좌지우지했음을 드러낸 대목이다.이때부터 러시아는 이전에일본이 누리던 영향력을 대신했다.베베르가 분석했듯이 러시아는 1884년 수교 이후 10여년간 대한제국 문제에 무관심했다.당시 러시아의 주된 관심은 청국이었으며 시베리아의 경제 여건을 호전시키는 데 있었다.따라서 러시아공사관의 임무는 청과 일본이 대한제국을 ‘독식’하지 못하도록 소극적으로 방어하는 데 있었다.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한 1년은 베베르와 러시아에는 더할 나위 없는 호기였지만 고종에게는 암울한 시기였다.당시 러시아공사관 서기였던 쉬테인은[“그는 두개의 방에 왕세자와 각각 따로 앉아공사관 뜰을 무심히 바라보기도 하고 때로는 서서 방안을 이리저리 거닐었다.가끔씩은 두려움에 떨며 이웃 궁궐(경운궁)에 계신 노대비(명헌태후)에게 문안을 드리려고 몰래 세자와 함께 가곤 하셨다.그리고 남은 시간은 방안에 은둔하고 앉아 계셨다.”]고 외무부에 보고했다.고종의 공사관 생활은 수인(囚人)과다를 바 없었다는 증언이다. 청·일전쟁 후 지방세가 서울로 납입되지 않아 국고는 텅 비어 있었다.일본인 재정관리자와 고문관이 떠나버리자국고에 잔액이 얼마 남았으며 어디에 보관되어 있는지 아는 사람이 없었다.…관리들의 월급,특히 군인과 경찰관에게 제때 월급을 지불하기 위해서는 탁지부(재무부)의 재정실정을 밝혀야 했다. 베베르는 영국인 해관총무사 브라운을 재정고문으로 천거해 이 일을 맡겼다고 밝혔다.브라운은 지방에서 올라온 수입을 올바르게 수령,장부에 기입하고 지출을 줄여 관리들에게 월급을 지불할 수 있었으며,이때부터 관리에 대한 통제가 이뤄졌다고 기록했다.1896년말 국고는 1,660만엔의여유가 생겼으며,일본에서 차관으로 들여온 300만엔 중 100만엔을 상환하고 이듬해 가을 또 100만엔을 갚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고종이 환궁한 후 신변안전책으로 단행된 조선군의 개편작업에도 베베르가 깊숙이 개입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고종왕의 요청을 받아들여 시베리아에 주둔하고 있던 러시아군에서 2차에 걸쳐 군사교관단을 초청,대궐시위대 2개 대대를 교육시켰으며 러시아식 군운영체계를 도입했다.여타의 대한제국군들은 러시아교관단이 관리하는 대대로 들어오려고 애를 쓰기도 했다. 베베르는 러시아국가회의 체제로 의정부의 개편,13개 도와 342개 군으로의 행정구역 분할,범법자에 대한 처벌 법규 시행,재정고문 알렉세예프 파견 요청,러시아어학교 개교,러청은행 지점 개설 등 자신의 업적을 열거했다.이 기간동안 서북 석탄광개발과 압록강,두만강변의 벌목이권을러시아가 따낸 사실도 털어놨다. 그는 대표적인 친한파인사로 알려졌지만 고종과 황실인사는 물론,한국과 한국인을 혹평하기도 했다. [대한제국을 떠난 지 5년만에 다시 와보니 거리의 남루한복장은 이전보다 두배나 많았다.…고종황제는 무당을 불러 굿을 하는 엄비(嚴妃)를 따라 미신을 신봉하고 있었다.…정치적인 상황은 더욱 악화되어 있었다.일본인들이 다시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한국인은 러시아,일본 기타 열강의 국제관계 및 그들의 정치적 의도를 제대로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으며 나라가 어떤 처지에 놓였는지제대로 몰랐다.…강대국과 종속관계에 놓여 독립심이 박약하고 의타심이 강하다.…고종은 아주 호감을 주는 인품이지만 많이 쇠약해졌으며,공적과 능력에 따라 관직에 임용되지 않고 뇌물의 액수에 의해 결정됐다. 1903년 다시 서울에 와보니 일본인들은 대한제국의 독립을 보장한다면서도 정치,경제적 예속화를 촉진시키는 데모든 수법을 동원하고 있었다.한국인들은 일본의 속셈을알지 못했고,러시아는 법적으로 그런 정책을 중지시킬 권한을 보유하고 있지 못했다.일본은 은밀하면서도 조직적으로 대한제국의 조정과 국민자산을 잠식하고 있었다.] 그는 일본의 영향력이 확산될 수밖에 없는 7가지 이유를열거하면서 대한제국이 조만간 일본의 정치적 속박을 받게 될 것이라고 예고했다. 대한제국에 거주하는 일본인은 2만명을 넘으며,일본인 1인당 한인 5명이 식모,사무실 서기,잡부,납품상인 등으로고용되다시피 했다.…대한제국 연간 무역액의 72%를 일본이 차지할 정도였다.…1898년 9월 경부선철도 부설권 협정서 중 ‘철도에 필요한 역사,창고 등 대한제국측이 제공하는 부지는 철도회사에 귀속되며 역사는 필요한 곳에 건설하되 역 앞에는 일본인 이외 타민족의 거주를 금한다.’는 불평등 조항 때문에 철도부설과 동시에 대한제국의 철도및 역사주변 땅은 일본의 소유물로 전락했다.…일본은 대한제국과 다른 국가들이 통신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인 서울∼부산∼일본해저 전신선을 통제했다.…개항지마다 일본은행이 개설돼 일본엔화가 시장을 지배하고 있었다. 노주석기자 joo@ ■베베르는 누구 우리나라에 부임했던 역대 외교관 중 초대 러시아 대리공사 겸 총영사였던 베베르만큼 광범위한 영향력을 행사한외교관은 없었다. 베베르는 1885년부터 1897년까지 12년 동안 공사로 재직하면서 고종의 최측근 인사로 통했다.그는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에 머문 1년 동안 친러시아내각을 출범시키는 등 대한제국의 국정을 사실상 좌지우지했다. 고종은 베베르가 멕시코 공사로 발령나자 ‘이임이 유감스럽다.장기간 유임시켜달라.’는 친서를 니콜라이2세에게 보냈다.니콜라이2세는 고종 재위 40주년 경축식(1902년)에 당시 야인이던 베베르를 사절단장으로 특파하기도 했다. 이번에 발굴된 문서 중에도 ‘베베르는 고종과 개인적으로 친분이 두텁고 한국인들에게 지금도 좋은 평가를 받고있다.’‘베베르를 경축사절단장으로 결정한 것은 고종황제에게 가장 기쁜 일이 될 것’이라는 내용이 나온다.고종은 서울에 온 베베르를 자문역으로 붙잡기 위해 니콜라이2세에게 서울체류 연장을 요청하기도 했다. 하지만 베베르에 대한 학계의 연구실적은 전무하다시피하다.그의 출생연도와 학력,수기 등도 이번의 문서 공개를 통해 처음 알려지게 됐다. 베베르는 1841년 6월5일에 태어난 독일계 러시아인.부친은 루터교 선교사였다.페테르부르크 제국대학 동양어학부를 졸업하고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5년동안 중국어 공부를 했으며 이후 톈진영사와 일본 총영사를 거쳐 조선주재초대 대리공사로 부임했다. 베베르는 러시아 외무부와 중국,일본 등 주변국 외교가에서 ‘친한파’로 낙인찍힌 데다 수뢰사실(2만엔)이 외무부에 알려지는 바람에 서울을 떠나게 된 것으로 전해졌다. 노주석기자 ■박종효 前모스크바대 교수 “러 문서국 20곳서 10년간 자료 뒤져” “러시아에 산재한 20여개의 국립문서보관소에는 한국과관련된 방대한 양의 비밀문서가 먼지를 뒤집어쓴 채 방치돼 있습니다.러시아가 한국 근대사와 현대사에 미친 영향을 감안하면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러시아 문서수집 및 번역 부문에서 국내 최고의 권위자로 꼽히는 박종효(朴鐘孝·65) 전 모스크바대학 교수는 지난 90년 한·러 재수교 직후 러시아문서보관소가 외국인에게도 개방되자 가장 먼저 그곳으로 달려갔다.문서보관소는전세계에서 몰려온 학자들로 만원사례를 이뤘지만 한국관계문서를 찾는 학자는 박 전 교수뿐이었다. “문서보관소에 소장된 문서를 조사,열람한 뒤 복사하려면 기록부에 이름을 남기게 되는데 한국 학자들의 이름은본 적이 없어요.” 러시아어와 러시아사,한국사,한·러관계사를 동시에 소화할 수 있는 학자들이 드문 탓도 있었지만 소장된 문서가외교,군사,경제 등 전문 분야의 필사본이어서 웬만한 학자들은 엄두를 내기도 힘들었다.산더미처럼 쌓인 문서보관소의 서고를 뒤져 한국관련 문서를 찾아내기란 숨은 그림찾기나 마찬가지였다.최근에야 러시아어와 역사를 전공하는소장학자 몇명이 한국관련 자료 수집작업에 합류했다. 박 전 교수는 99년부터 2년 동안 국제교류재단으로부터연구비를 지원받아 문서찾기와 번역,해제작업을 해왔으며,조만간 ‘러시아국립문서국 소장 한국관련 문서 요약해제집’이란 책을 펴낼 계획이다. “러시아국립문서보관소에 소장된 비밀문서의 목록을 총망라,문서목록해제집을 간행하는 것은 세계적으로도 드문일입니다.제정러시아 대외정책문서보관소,군사문서보관소,연방문서보관소의 서고에 숨겨져 있던 문서들을 분석해 보면 러시아가 견지해온 한반도정책의 과거는 물론,현재와미래까지 유추할 수 있습니다.” 박 전 교수는 러시아측의 공개 제한조치로 ‘극비문서’들이 소장된 크렘린문서보관소와 KGB문서보관소에 접근할수 없었던 점을 아쉬워했다.그는 한국외국어대 러시아어과를 졸업한 뒤 소련 아카데미 러시아역사연구원에서 박사학위와 교수자격(독토르)을 땄고 모스크바대학 객원교수로대학원생들에게 한·러관계사를 강의했다. 노주석기자
  • 민주경선 파란/ 김근태후보 사퇴 배경

    민주당 김근태(金槿泰) 고문의 후보 사퇴는 개혁진영 내부의 후보단일화 의지가 결정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김 고문은 사퇴 발표 전날인 11일까지만 해도 세번째 경선지인 광주에서 선거운동을 했을 정도로 ‘의욕’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김 고문은 12일 아침 정동영(鄭東泳) 고문,천정배(千正培) 의원과의 회동에서 개혁후보 단일화의 ‘압박’을 받았고,이어 오후에 열린 선거대책본부 회의에서 이재정(李在禎)·임종석(任鍾晳) 의원 등이 후보사퇴를 촉구했다. 개혁진영은 경선이 초반 노무현(盧武鉉) 고문의 박빙 우세로 전개됨에 따라,노 후보쪽으로 조기에 표를 결집시키면 승산이 충분하다는 데 공감한 것으로 알려졌다.사퇴시점을 이날로 잡은 것은 오는 16일 민주당 텃밭인 광주 투표에서 개혁진영이 똘똘 뭉쳐 선전할 경우 사실상 대세를장악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김 고문은 이날 일부 지지자들의 눈물을 뒤로 하고 “나를 아름다운 꼴찌로 평가해달라.”고 거듭 강조,‘훗날’에 대한 의지를 감추지 않았다.당내 일각에서는 김 고문이 당 지도부 경선이나 서울시장 후보 경선에 출마할 수도있다는 관측이 벌써 나온다. 김상연기자 carlos@
  • 민주경선 파란/ 김근태후보 사퇴- 경선주자 반응

    민주당 대선주자들은 김근태(金槿泰) 후보가 12일 전격사퇴하자 놀라움을 표시하면서도 향후 경선국면에 끼칠 손익계산에 분주한 모습이다. 김 후보의 사퇴에 가장 고무된 캠프는 노무현(盧武鉉) 후보쪽이다.경선 이전부터 개혁후보 단일화를 주창한 노력이 이제야 결실을 거뒀다는 분위기다.노 후보측은 “김 후보의 희생적 결단에 경의를 표한다.”면서 “정치문화를 개혁하려던 김 후보의 노력이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한 것 같아 안타까운 심정이다.”며 향후 연대를 의식,최대한 예의를 갖췄다. 특히 김 후보의 사퇴가 개혁후보 연대 및 단일화의 상징적 효과가 커 광주 판세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임을기대했다. 같은 개혁군인 정동영(鄭東泳) 후보는 “김 후보의 정신을 이어 국민 경선의 지킴이가 되겠다.”며 결연한 의지를 표시했다. 한화갑(韓和甲) 후보도 “김 후보의 사퇴에 안타까움과함께 이 나라의 정치현실에 서글픔을 느낀다.”며 아쉬움을 표시했다. 반면 이인제(李仁濟) 후보는 김 후보의 사퇴를 보고받은직후 “허,참”이라며 놀라움을 표시한 뒤 향후 경선 국면에 미칠 영향에 우려를 표시했다.그러나 이 후보측은 “앞으로 김 후보와 함께 정권 재창출과 대개혁시대를 이끌어나가는 데 중추적 역할을 다하겠다.”며 공식입장을 발표했다. 김중권(金重權) 후보는 “김 후보가 민주화 투쟁에 온갖고난과 고초를 겪은 민주화의 상징인데 안타깝다.”며 아쉬움을 나타냈고,유종근(柳鍾根) 후보는 “김 고문의 용기있는 결단을 통한 발언이 이런 사태까지 오게 한 우리의정치현실에 안타깝다.”며 유감을 표시했다. 이종락기자 jrlee@
  • 김근태후보의 진로/ 골찌 충격…사퇴 가능성 배제못해

    지난 2000년 민주당 최고위원 경선 당시 정치자금에 대한 양심선언으로 주목을 받았던 김근태(金槿泰) 후보가 당내 경선에서는 연이어 최하위를 기록해 중도사퇴 가능성이급속히 제기되고 있다. 김 후보는 9일과 10일 제주와 울산에서 열린 경선에서 각각 16명(2.4%)과 10명(1.0%)의 저조한 득표로 참패를 기록했다. 그는 10일 울산 합동연설회에서 “제주 경선에서 꼴지를해 큰 충격을 받았다.”면서 “군부 독재가 칼날을 휘두를 때보다 더 가슴이 아팠다.”며 선거인단에 감정적 호소를 했다. 그러나 김 고문의 양심선언이 당에 도움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한나라당에 공격의 빌미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선거인단의 반응은 여전히 싸늘했다. 김 고문이 예상 외로 저조하자 노무현(盧武鉉)·정동영(鄭東泳)·한화갑(韓和甲) 후보 등 개혁 후보군에서는 사퇴를 종용하는 등 안팎으로 김 후보를 압박하고 있다.이에김 고문은 울산 경선이 끝난 뒤 “‘김근태식 정치’가 시련에 봉착했다.(경선자금 고백에 따른) 역풍이 한꺼번에불었다.”면서 “그러나 끝까지 간다.서울 경선에서 보자. ”고 중도 하차설을 일축했다. 그러나 당 주변에서는 이번 주말에 치러질 광주·대전 경선에서조차 하위권을 면치 못할 경우 사퇴를 선언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관측이 제기된다. 이종락기자 jrlee@
  • [대한광장] 범국민평화운동을 펴자

    2002 월드컵 제전이 열리는 희망찬 새해가 열린 지 열흘이 지났다.한반도에 살고 있는 우리 모두의 가장 큰 새해소망은 첫째도 평화,둘째도 평화이다. 그런데 지금 이 한반도의 평화는 불안하기 그지없다.그것의 원천도 우리의 의지와 전혀 관계없이 우리의 우방이고혈맹인 미국에 의해서 야기되었다고 한다.미국 부시 대통령은 지난해 12월 중순에 “2002년은 전쟁의 해”라고 선포함으로써 전세계의 평화를 위협하고 있다.이 발언은 한반도는 물론이고 전세계에 일파만파 파장을 일으켜 국제적으로 전쟁분위기가 나날이 고조돼 가고 있다. 9·11테러 사태후 아프간 탈레반 정권을 붕괴시킨 후에더욱 자신감을 얻은 미국은 오만에 가까운 ‘전쟁확전’발언을 서슴지 않아 왔다.그리고 다음 확전 대상에는 이라크,이란 그리고 북한도 포함될 것이라는 추측이다.그의 경솔한 발언에 힘입은 국내외의 전쟁광,극우보수세력 그리고 미국 군수사업가는 이러한 전쟁분위기를 더욱 부추겨 가속화시키고 있다. 그 일례로 일본의 우익정당과 정권도 일본 평화헌법 제9조를 무시하고 자위대 해외파병을 합법화하는 국내입법을완료함으로써 미국의 9·11 테러진압을 빙자하여 해외파병을 정당화하려 하고 있다.진정으로 미국이 세계 지도국가가 되려면 9·11 테러사태의 표면적인 현상만을 문제삼을것이 아니라 그 근본 원인을 철저하게 분석하고 그 예방적·구체적 처방을 제도적으로 내놓아야 할 것이다.그래서 9·11 테러사태 공포로부터 전세계인을 해방시키고,평화와안정 그리고 반테러리즘 국제협력체제를 완성시켜야 할 것이다. 그런데 오히려 미국은 9·11 테러사태를 빌미로 국제법과 유엔헌장의 기본 정신을 무시하고 있으니 정말 안타깝기짝이 없다.더구나 기후협약을 파기하고 세계환경을 오염시키겠다고 해도,ABM 협정을 깨뜨리고 미사일 방어망을 구축하겠다고 해도 이러한 미국의 서슬에 세계 유명 언론,유엔을 포함한 주요 국제기구,하물며 서방 선진국 누구 하나미국의 눈치만 살피는데 급급하지 용감하게 미국의 잘못을 정면으로 반박하지 못하고 있다. 더구나 미국내 USA 투데이와 CNN 그리고 갤럽의 공동 여론조사(2001.12.27)에서 부시 대통령이 1948년 이후 가장존경받는 인물로 지명되었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미국인에게 묻고 싶다.9·11 테러로 인한 미국과 미국인의 참상에 대해서는 진심으로 애도의 뜻을 표하지만,그것을 빌미로 미국 일방주의·미국 최고주의·미국 단일문화의 편파적 지향을 전세계에 강요한다면 미국이 표방하는 다원주의·자유민주주의와 인권존중 그리고 국제평화라는 미국정신과는 거리가 멀지 않은가? 게다가 9·11 테러사태를 빌미로 비민주적 권위주의국가들은 국내적으로 반대정권과 민주화운동을 탄압하는 데 테러방지법을 악용하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9·11 테러사태 이후 한반도에는 힘들게 이룬 6·15 남북공동선언 실천의 중단으로 화해와 평화의 열기가 냉각되면서 새로운 냉전이 시작되고 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한반도의 평화와 동북아의 안정을미국의 양심과 도덕성에만 의존하기에는 많은 무리가 있다고 본다.우리는 국내적으로 보수혁신과 여야정파를 초월하여 평화를 사랑하는 이 땅의 모든 국민과 함께 한반도에전쟁의참화를 막아야 하겠다는 평화운동을 힘차게 벌여야 할 것이다.그래서 남남의 평화세력,남북의 평화세력,동북아의 평화세력,국제적 평화운동의 세력이 하나로 연대해서우리의 평화를 우리 스스로가 지켜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시민단체들이여,이제 과감히 일어나 다시는 한반도에 전쟁발발은 안된다는 ‘평화운동’의 기치 아래 힘있게 단결하여 ‘범국민 평화운동’을 시작하자. ◆이장희 외국어대교수 평화통일시민연대 상임공동대표
  • 2200년의 침묵깬 진시황릉 비밀

    지난 74년 봄 중국 춘추전국시대 때 진나라 땅이던 진천에서 가뭄이 극심해 주민들이 우물을 파고 있었다.간절히 바라던 물 대신 사람 크기의 인물상(俑·용)등이 나타나자,주민들은 이를 마구 부수며 우물을 파내려 갔다.마침 신화사의기자가 고향인 이 곳에 들렀다가 부서진 용에 관한 기사를써,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 등 중국지도부의 관심을 모았다. 이로써 2,200여년만에 진시황릉 1호갱(坑)이 발굴된 것이다. 진시황릉은 이 ‘사건’ 말고도 과거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1644년 이자성의 난 때 난민들이 역시 우물을 파다가,병사모양 흙인형인 토용(土傭)을 보고는 “귀신”이라며 놀라기절하는 일이 발생,한동안 이 곳에서는 땅을 파지 않기도했다. 진시황릉에 관해 그동안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를 담은 책이 나왔다.‘부활하는 군단’(일빛).‘마왕퇴의 귀부인’‘구룡배의 전설’등으로 국내에서도 꽤 알려진 웨난(岳南)의 새 책이다. 책은 여불위와 진시황의 어머니 조태후·노애 등의 얽히고설킨 스토리 등 읽을거리를 중간중간에 넣어 흥미를 배가시킨다.예컨대 출토된 청동검에 대해 설명하면서 기원전 222년 자객 형가가 진시황을 암살하려 할 때의 고사를 인용한다. 또 진시황릉 기원전 247년,진시황제가 13세 때 공사가 시작돼 무려 39년동안 지어졌다고 사실을 덧붙인다.아울러 진시황릉을 지을 때 동원된 사람들은 법가사상을 따른 진나라의혹독한 법령 때문에 양산된 범죄자들이었으며,그들은 죽기전에는 노역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고 적어,당시 사회상을 엿보려는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켜 준다. 발굴 때 벌어진 주민과의 갈등,발굴 이후의 도난사건 등도빼놓지 않아,책을 읽다보면 어느새 진시황릉의 과거와 현재를 절로 알게 된다.곳곳에 화보 도표 등을 충실히 넣은 점도 눈길을 끈다. 진시황릉에서 발굴된 갱은 모두 4곳.길이 230m,너비 62m의1호갱에는 전차 40여대와 인물 및 말 조각품 등 6,000여개의 유물이 고스란히 간직돼 있다.이 곳에서 20m 가량 떨어진 2호갱에서는 전차 89대와 말 70여개,병사모양의 토용 900여개가 발견됐다.잇달아 3·4호갱이 모습을 드러냈고,4호갱은 공사가 미완성인 상태였다.이는 진시황 사후 일어난 진승·오광의 난 때문에 공사를 더이상 하지 못한 탓으로 보인다.이들 4개 갱에서 출토된 유물은 무려 8,000여점에 이른다. 책 자체만으로는 저자 특유의 사실적인 묘사와 폭넓은 고전에 대한 이해가 돋보이는 수작이라 할 수 있다.그러나 “중국의 것이 최고”라는 식의 중화주의적 태도가 여러곳에서드러나 거부감을 주는 게 흠이다.2권은 1권에 비해 고대사를 들여다보는 즐거움이 다소 떨어진다.1·2권 각 1만2,800원. 박재범기자 jaebum@
  • 전남 장흥 천관산·회진항

    봄의 교향악이 우렁차다. 남녘에 아지랑이가 일기 시작했다.지난 11일 낮 전남 장흥보리밭을 거닐다 아지랑이를 발견하고 어찌나 반갑던 지.지난 겨울 삭바람도 남동풍에 이제 물러가고 봄볕이 틀어 앉았다. 봄볕 이는 장흥의 천관산과 남도문학의 산실,회진항을 찾았다.태조 이성계가 방방곡곡 사찰을 돌며 건국의 야심을 지필 때 ‘그건 쿠데타’라고 반기를 들었던 산이 지리와 이곳천관 뿐이었단다.그래서 붙은 이름이 ‘아태조 불복산’. 우리 시대 걸출한 글발의 작가 이청준과 한승원,송기숙을배출한 고향으로도 장흥은 이름높다.장흥의 가장 남쪽,회진포구를 사이에 두고 이청준의 고향 진목리와 한승원의 고향대리 방산마을이 마주보고 있다.특히 진목리에는 청보리밭이 유명하다.이청준의 단편 ‘눈길’에서 집을 팔았다는 사실을 끝내 숨긴 채 광주에서 학교 다니는 아들과 따스한 하룻밤을 보내고 차부가 있는 읍내까지 시오리길을 바래다 주었던 그 길.오늘 그자리에 눈은 없지만 대신 청보리가 바람결에 봄소식을 속살거린다. ◆결기 찬 천관산=천관산은 태조에 불복한 죄로 이웃 고흥군으로 ‘유배’를 당해 한때 고흥군에 속하기도 했었다.산은그 기개를 뽐내기라도 하듯 결나 있다.한군데도 두루뭉수리한 구석이 없고 하늘에라도 올라 앉을 듯 오만하다.정상인연대봉 오르는 길에 만나는 기암괴석들,하나같이 ‘저잘났다’. 그러나 연대봉쪽으로 40분쯤 숨을 헉헉거리며 오르자 바다가 살가운 손짓을 보내온다.우선 눈과 귀에 들어오는 것은수십만평 간척지를 아로새기는 청보리들의 푸릇한 함성.산마루에 선 이들은 탄성을 토해낸다. 섬과 방조제 등에 가로막혀 잔잔하기 이를 데 없는 바다물결.바람이 산마루를 지나 풍덩 바다에 뛰어들자 해무로 흐릿했던 시야가 일순 맑아진다.기암들 뒤로 새파란 하늘이 가을처럼 또아리를 튼다. 건너편 만장대(萬藏臺)는 마치 책갈피를 포개놓은 책장을연상시킬 만큼 기기묘묘한 바위들이 이어진다.암릉지대가 끝나자 억새가 무릎까지 차오른 능선길이 시작된다.1.5㎞ 정도의 능선이 끝나는 지점에 정상 연대봉(723m)이 있다.누구는이 오르막 능선을 ‘흰빛 비늘 퍼득이는물고기같다’고 했다. 천관산이 왜 호남 5대명산에 끼는 지 그제야 고개가 끄덕여진다.왼편으로 고흥 녹동과 소록도,멀리는 지리산 영봉도 고개를 내민단다.정면으로는 제주 한라산 마루와 여서도 등이차오르고 오른편으로는 완도,신지도,해남 땅끝마을,두륜산등이 손에 잡힐 듯 가깝다. 연대봉에서 만장대까지 1.8㎞,폭 300여m의 억새밭이 장관이다.가을엔 사람 키 두배는 너끈히 넘어 온산을 뒤덮는 억새가 오늘은 무릎아래 잠겨 겨울을 이겨냈노라고 귀엣말을 건넨다. 한 사내가 탑돌을 쌓고 있다.회진포구에서 일한다는 박해종씨.나이 마흔을 훌쩍 넘겨 보이는 그는 아직 가정을 꾸리지못해 주말마다 텐트를 짊어지고 올라온단다.“이 산에 쓰잘데 없는 돌도 많고 하릴 없어” 탑돌을 쌓고 있단다.사람 키 두배는 됨직한 탑돌을 벌써 다섯기 정도 이루어냈다. 박씨는 달이 만장대에 걸치는 장관을 꼭 일독하라고 권한다.그러나 그의 얼굴에 왠지 수심이 그득하다.“억새풀밭에 몇년전부터 외래풀이 날아와 번식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러다 몇년 뒤에는억새가 사라지지 않을까 걱정된다고 했다. 억새풀을 헤친 뒤 만나는 암릉지대가 환희대.이름이 그럴듯하다.환희가 가슴에 벅차오르고 산을 내려오는 데 자꾸 고개가 산마루쪽으로 돌아간다. ◆그림같은 회진포구=말이 포구이지 여느 항구처럼 떠들썩한 활기는 찾기 어렵다.이곳 풍광은 정물화.그럼에도 사람들이 회진에 반하는 건 어인 연유일까.갯벌을 끼고 살아온 이 들녘 사람들의 검박하면서도 질긴 삶이 캔버스에 번진 유화처럼 그려지기 때문이다.호수처럼 잔잔한 포구에는 오늘도 고단한 삶의 그림자가 깊게 닻을 내리고 있다. 회진항 왼쪽 대리 방산마을에는 한승원 생가와 함께 그의 문학을 기리는 헌정비가 바닷가에 세워져 있다.이 갯벌에서 나고 자란 작가의 작품 ‘폐선’‘아제아제 바라아제’에서 그려졌던 바다가 그가 나고 자란 이 바다다. 회진에서 오른편 고갯길로 1시간 정도 걸으면 이청준의 고향,진목리 표지판이 보인다.보리밭의 향연이다.다랑논(좁고층층으로 된 작은 논배미)에 보리가 일렁거리며 햇볕을 많이 받는 쪽은 벌써 누런 때깔을비치기 시작했다. 작가의 어린 시절엔 저멀리 마량포구까지 이어진 이 갯벌이 좀더 안쪽에 자리잡았을 것이다.갯벌이 멀어진 만큼 이 들녘을 가득 채우는 봄 향기는 더욱 진한 향수를 부채질한다. 장흥 글 임병선기자 bsnim@. *여행 가이드. ◆가는 길=호남고속도로 광산나들목으로 나와 13번국도를 따라 나주로 간 다음 23번국도로 장흥을 지나 관산읍에 닿는다.계속 남하하면 회진항.회진에서 진목리가는 버스는 드물어발품을 팔거나 지나가는 자동차를 얻어 탄다.푸근한 남도 인심은 ‘덤’이다. 서울 강남터미널에서 고속버스가 하루 4회(8:45 10:15 15:40 16:50)장흥까지 운행한다.장흥에서 관산,회진 가는 버스는수시로 있다. ◆들를 곳=장흥이란 지명은 고려 인종의 공예태후 임씨에서연유한다.왕비를 끔찍히 아낀 왕은 ‘길이 번성하라’는 뜻에서 지명을 하사했다.그를 기리는 사당이 관산읍 옥당리에있다. 천관산를 내려와 장천재에 들르자.풍류를 아는 이 동네 선량들이 시를 읊던 곳이다.H자형 전통 가옥과 홍예,태고송 등이 어우러진 게 멋지다. 춘백과 동백이 담을 넘어오는 위씨 성택도 들여다보자.앞의연못에 두개의 작은 섬도 있어 운치가 그만이다.호남 실학파의 태두,위백규 서가에 앉으면 두팔괴고 천관산의 사계를 만끽할 수 있다.장흥읍에서 가까운 제암산에는 5월이면 철쭉으로 장관이 연출된다. ◆먹거리=장흥읍 건산리 군청옆 한정식집 신녹원관은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인 산해진미 50가지가 나온다.이곳 특산키조개가 별미.2인상 3만원.(061)863-6622회진포구의 산호횟집(867-5502)과 관산읍의 회무침 전문집오대양해물탕(867-0933)도 괜찮다.
  • ‘부활한 과거‘ 찬란한 유물 한눈에…동양문명 기획전

    동양문명의 찬란한 역사를 한 눈에 살펴볼 수 있는 대규모 기획전이열린다. ‘고대 메소포타미아문명전’(19일∼내년 2월13일,서울 예술의전당 미술관)과 ‘중국황제유물전’(22일∼내년 3월4일,63빌딩 특별전시관)이 화제의 전시다.교과서 도면이나 외국 유명 박물관에서나접하던 유물들을 직접 대할 수 있는 자리다. ‘고대 메소포타미아문명전’은 인류 문명의 발상지 가운데 가장 오래된 메소포타미아(현재 이라크의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 사이)의 고대 유물 720여점을 보여준다.메소포타미아는 수메르,바빌로니아,앗시리아,신바빌로니아 등 4개 왕조에 걸쳐 4,500년간 지속됐다. 이번 전시에서는 특히 수메르 시대에 초점을 맞췄다.수메르문명은 기원전 31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전시품 중에는 의자에 앉아 있는 뱀신이 새겨진 원통형 인장,함무라비 대왕의 업적을 기록한 흙벽돌,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전설적인 영웅 길가메쉬의 상징으로 사용된 황소부적,경제활동 문서로 쓰인 수메르어 점토판,눈 신상,점토못 등이 포함돼 있다.또 도시 한가운데 높이쌓아 만든 ‘지구라트’는 모형으로 보여준다.지구라트는 성서에 나오는 바벨탑을 일컫는 것으로,탑꼭대기에는 신방이 있어 통치자와 여사제가 해마다 성혼례를 치뤘다. 이번 전시는 수메르시대 조각의 특성을 고스란히 보여준다.수메르조각은 원통형의 환조가 주를 이루지만 봉납석판은 당시 조각으로는드문 부조양식이다.인장조각술이 발달한 점도 주목할 만한 대목.수메르인들은 단단한 부싯돌이나 구리도구를 사용해 최초로 원통형 인장을 만들었다.그들은 점토판에 상거래를 명시하고 원통형 인장을 굴려경제활동을 기록으로 남겼다. 미술자문을 맡은 중앙대 예술대 신현중교수는 “조그만 원통형 돌에 현대 기술로도 표현하기 어려운 미세한음각을 해 넣은 것을 보면 수메르시대 조각술이 얼마나 발달했는가를알 수 있다”며 “원통형 인장은 사유재산권의 존재를 말해주는 중요한 사료”라고 말했다. 예술의전당과 한국미술협회가 주최한 이번 전시는 스위스 제네바 HM컬렉션측과의 계약에 의해 이뤄졌다.98년 ‘다윗의 도시와 성서의 세계’전을 진행한 안성림씨(고대근동박물관 건립위원회 상임위원)가큐레이터로 나섰고,근동학을 전공한 조철수교수(서강대 신학대학원)가 학술자문을 맡았다.관람료는 어른 5,00원,초중고생 3,000원.(02)587-0311. ‘중국황제유물전’에서는 5,000년 중국 황실의 역사와 문화를 그대로 호흡할 수 있다.이번 전시는 중국 황실유물 해외전으로는 최대의규모.선양(瀋陽)고궁박물관,톈진(天津)예술박물관 등 중국의 5대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역대 황실의 대표적 유물 151점이 출품된다.전시장은 ‘정사관’‘전쟁관’‘생활관’‘서화관’‘이벤트관’등 5개의 주제관으로 구성된다.정사관에서는 명(明)13릉에서 출토된 황제금관과 황후의 보석장식 봉관(鳳冠) 등이 전시되며, 서화관에서는 길이가 20m나 되는 건륭제 황제행렬도 ‘만호조천도’,명 선종의 ‘소행낙권도’,서태후와 마지막 황제 부의의 글 등을 볼 수 있다.전쟁관에서는 황제의 금갑옷과 장마안(仗馬鞍·말안장),보검,팔기군 갑옷등이 전시된다.생활관에서는 황실 의상,상아부채 등이 소개된다. ‘중국황실유물전’은 전시에곁들여 중국 전통 예인들이 직접 참여하는 다양한 이벤트도 마련했다.경극 특유의 화려한 분장술과 무대의상을 가까이서 감상할 있는 선양경극원의 ‘패왕별희’공연,밀가루 반죽으로 삼라만상을 빚어내는 ’면소공예’,풀잎과 짚으로 각종 동물과 곤충을 만들어내는 ‘초편공예’등 전통공예품 제작시연 등이 대표적인 프로그램.손으로 문지르면 분수처럼 물이 튀어 오르는 황실용세수대야 분수동분(噴水銅盆)’도 눈길을 끌 만하다. 입장료는 어른 8,000원,중고생 6,000원,유치원·초등생 5,000원.인터넷(www.63city.co.kr)에서도 볼 수 있다.(02)789-5663-5김종면기자 jmkim@
  • 민주 최고위원 경선…중진‘엎치락 뒤치락’

    민주당 8·30 전당대회를 일주일 앞두고 최고위원 경선 후보들의 우열이 드러나고 있다.절반을 넘긴 합동연설회가 변수가 되고 있다.일부 소장파들이 강세를 보이면서 중진들과 긴장관계가 조성되고 있다. [선두다툼과 연대논쟁] 한화갑(韓和甲)후보와 이인제(李仁濟)후보가대의원 지지율 60%대에서 불을 뿜는 1위 경쟁을 하고 있다는 관측이다.당초 한후보의 낙승이 기대됐으나 이후보의 추격세가 맹렬하다. 한후보측은 아직도 이후보를 안정적으로 앞서고 있다고 주장한다.지금까지 각종 여론조사에서 한번도 1위를 빼앗긴 적이 없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후보측에서는 한후보와 오차범위내에서 추격전을 펼치고 있으며역전도 가능하다고 보고 있다.양진영의 신경전도 치열하다.한후보측은 “당 핵심인사(權魯甲상임고문)의 이후보지원이 지나치다”며 불만을 나타냈다.이후보측에서는 “영남지역에서 김중권(金重權)·김기재(金杞載)후보와 한화갑 3자연대는 불행한 사태를 가져 올 수 있다”고 비난했다. [중상위권 다툼과 연설효과] 김중권 김근태(金槿泰) 박상천(朴相千)후보의 3자 구도에 40대 기수론을 주창하고 있는 정동영(鄭東泳)후보가 가세,4파전 양상을 보이고 있다.당안팎에서는 이들이 30∼40%대의지지를 얻고 있는 것으로 보고있다. 김중권 후보는 설득력있는 연설로 대의원들의 호감을 얻고 있다.영남권을 대표하는 후보라는 점도 강점이어서 상대후보의 견제를 받고있다. 정동영후보는 합동연설회의 덕을 가장 많이 본 후보로 꼽힌다.지지율이 거품이라는 지적도 있지만 정후보측은 선거혁명을 기대하고 있다.최근 한 여론조사에서는 3위에 올랐다. 김근태후보는 후보연설회에서 득보다는 실이 많은 것으로 보고있다. 그러나 솔직하고,연설 내용이 좋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개혁성향의 원내외 위원장 등 조직력이 발판이 되고 있다. [7위 혼전] 당선권 마지막 턱걸이 한자리를 놓고 혼전양상을 보이고있는 느낌이다.김민석(金民錫)·추미애(秋美愛)후보와 김기재 정대철(鄭大哲)이협(李協)후보가 대의원 지지율이 15∼25%대에서 경쟁하고있는 것으로 관측된다.경쟁이 치열해 우세를 점치기가 어렵다.‘소장파 강세’에 역점을 두는 측에서는 김민석·추미애후보의 당선 가능성을 높게보고 있다.그러나 영남권후보인 김기재후보의 선전을 꼽는인사들도 많다. 당 중진들은 그러나 “정대철후보를 눈여겨 보라”고 주문한다.합동연설회에서 목소리는 크지 않지만 가장 인상에 남는 연설을 하고 있다는 지적이다.이협후보도 마찬가지다.이밖에 조순형(趙舜衡)김태식(金台植)안동선(安東善)김희선(金希宣)후보 도 7위 안착을 나름대로자신하고 있다. 강동형기자 yunbin@. * 민주 경선 충청 합동연설회. 23일 열린 민주당 최고위원 경선 충북지역 합동연설회에서 상위권후보들은 ‘강한 여당’과 ‘정권재창출’을 거듭 강조한 반면,중하위권 후보들은 ‘경륜’‘동지’ 등을 내세운 구애 전략을 펼쳤다.특히 일부 후보들은 이번 전당대회를 자민련과 결별하는 계기로 삼자고목청을 높이기도 했다. 김중권(金重權)한화갑(韓和甲)후보는 김대중(金大中)대통령과의 대화록과 인연을 소개하며 자신이 진정한 ‘대통령의 적자(嫡子)’임을강조했다. 이인제(李仁濟)후보는 “여론조사에서 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총재와 일대일로 붙으면 압도적으로 승리하는 것으로 나온다”면서 “충청도에서도 탁월한 지도자가 나오면 대통령이 될 수 있다”고 ‘충청도 대통령론’을 역설했다. 정대철(鄭大哲) 후보는 “DJP연합에 너무 의존해 당이 정체성을 잃었다”며 “JP와의 작별 의식을 예비하는 전당대회가 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의원들의 표심(票心)을 잡기 위한 눈물겨운 호소도 이어졌다.“대권을 겨냥한 사람들은 대선후보전에 나가지 왜 여기 나와서 중도 약세 후보들을 울리느냐”(李協 후보),“전북출신 세 후보 가운데 가장고생 많이 하고 빨리 죽을 맏아들인 내가 먼저 당선되는 게 도리”(金台植 후보),“개혁파니 여성파니 하며 별 사람이 다 나오는데 여당은 뿌리가 튼튼해야 한다”(安東善 후보),“나처럼 항상 지도부에 직언하는 사람이 돼야 한다”(趙舜衡 후보)는 등 다양했다. 추미애(秋美愛) 후보는 “한나라당 부총재 경선에서 2등을 한 박근혜(朴槿惠)의원은 엄밀히 말해 1.5선”이라고 전제,여성의원 가운데여야 통틀어 재선의원은 자신뿐이라며 민주당의 대표적 여성 기수로뽑아달라고 호소했다. 청주 주현진기자 jhj@. *민주 정당사상 첫 전자투표. 민주당 8·30 전당대회 최고위원 경선에서 정당 사상 처음 도입되는전자투표는 어떤 방식으로 진행될까. 민주당은 23일 많은 이들의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여의도 당사에서 공개시연회를 열었다. 이에 따르면 전국 대의원 9,484명은 신원 확인절차를 거쳐 전자투표권을 지급받는다.이어 대의원들은 기표소에 들어가 전자투표 단말기에서 자기가 선택한 후보 4명의 사진에 터치버튼 형식으로 투표를 하게 된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전자투표권을 단말기에 넣는다→후보자15명의 이름과 사진이 나타난다→후보 4명을 선택하고 이를 확인한다→전자투표권 회수 및 투표 완료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자연히 기존의 수기형 투표방식보다 투표시간이 크게 단축된다. 투표와 동시에 개표가 진행된다는 점도 주목할 부분.투표 종료 즉시개표결과가 집계됨으로써 투·개표시간의 대폭 단축과 함께 선거비용및 선거 관리인력의 감축 효과도 기대된다. 또 종전처럼 투표를 위한 대기행렬을 크게 줄일 수 있어 대의원들의투표참여 분위기가 고조될 것으로 보인다. 개표화면은 최고위원 당선자,순위별 득표현황,막대그래프를 이용한 후보자별 득표현황 등 3가지로 구성된다. 이처럼 전자투표는 공개적이고 투명한 투·개표현황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다는 점에서 디지털 선거문화의 커다란 전기가 될 전망이다. 디지털 선거문화는 궁극적으로 전자국민투표와 연결된다. 한종태기자 jthan@
  • 최고위원 출마 선언 잇따라

    민주당 8·30 전당대회를 20일 앞둔 10일 한화갑(韓和甲)김근태(金槿泰)김중권(金重權) 지도위원과 이협(李協) 의원이 차례로 경선 출마를 선언하는등 최고위원 경선 출마 예상자들이 잇따라 출마를 선언,경선전이 뜨겁게 달아 오르고 있다. ◆경선 출마 선언=출마를 선언한 후보는 이날 4명을 포함,조순형(趙舜衡)정대철(鄭大哲)안동선(安東善)김민석(金民錫)김기재(金杞載)이인제(李仁濟)추미애(秋美愛)정동영(鄭東泳)의원 등 모두 12명이다.공식 선언을 하지 않은박상천(朴相千)김태식(金台植)김희선(金希宣) 의원 등 3명도 11일 오전 출마를 선언할 예정이다.15명의 경선주자가 모두 출사표를 던지게 되는 셈이다. 이에 따라 7명을 선출하는 민주당 최고위원 경선 경쟁률은 2대 1을 넘을 전망이다. ◆후보간 연대=후보별 연대는 선거전이 본격화되면서 오히려 약화되는 분위기다.짝짓기를 해도 실익이 없다는 판단이다.의무적인 ‘4인 연기명제’의투표방식으로 지구당 위원장의 영향력이 크게 약화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보들이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범위내에서 활발하게 짝짓기를 하고 있다.편가르식 연대라기 보다는 비슷한 성향을 지닌 후보들끼리 이뤄지는 부분 연대의 형식이다.특정인이 한 캠프만 돕는 것이 아니라 2∼3후보를 중복해서 돕기 때문에 나타나는 자연스런 현상으로 해석된다. ◆향후 일정=16,17일 후보등록을 하게 되면 후보들은 눈코뜰새 없는 일정을소화해야 한다.18일 합동 토론회,그리고 19일부터 28일 까지 12개 권역별로합동 연설회가 예정돼 있다.그러나 다음 연설회 장소를 가능한 한 멀리 잡아 한 곳에 오래 머물 수 있는 시간이 거의 없다.후보들은 이에 대해 “이렇게까지 해야만 되느냐”고 볼멘 소리를 하고 있다. ◆연설회 준비=후보들은 연설회 준비에 여념이 없다.연설회가 자신을 알릴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기 때문이다. 대중 연설에 일가견이 있는 한화갑·이인제·정대철·정동영·김민석후보가상대적으로 유리할 것으로 보고 있다.논리에 강하지만 대중연설에는 약한 박상천·김중권·김근태후보는 연설 내용에 무게를 두고 있다. 강동형기자 yunbin@
  • 중국학 전문가 강효백박사 ‘12가지 이유’ 제기

    진흙을 빚어 실물 크기로 만든 병사와 말 인형 6,000여점.얼굴 모습과 표정,체격이 제각각이어서 하나씩 모델을 잡아 만든 것으로 보이는 이 병마용(兵馬俑)은 중국의 자랑이자 인류 공동의 문화유산이다. 1974년 3월 병마용이 중국 산시(陝西)성 시안(西安)시 교외 진시황릉 인근에서 발견된 뒤 학계는 이를 당연히 ‘진시황릉 병마용’이라고 불렀다.그러나병마용이 진시황과는 관계없다는 주장이 최근 한국인 중국학자에게서 나왔다. 의문을 제기한 이는 중국 베이징에 있는 한중교류연구센터의 강효백박사.대만 국립정치대 동아연구소에서 중국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중국?중국,중국!’(예전사 간,1995년)등의 저서를 낸 중국통이다. 강박사는 12가지 이유를 들어 병마용이 진시황릉의 부장품일 수 없다고 강조했다.다음은 그가 내세운 논거의 일부다. 첫째는 병사들이 전차를 중심으로 사열한 병마용 군진(軍陣)이 진시황 당시와는 전혀 다르다.‘사기’‘문헌통고’등 중국사료에는 진시황이 기동력 강한 기병을 활용해 천하를 통일했다고 기록해 이같은 차전(車戰)형태는 시대상과 맞지 않는다. 둘째는 병마용의 옷 색깔이 국가색과 다르다.진시황은 검은색을 국가 색깔로정해 의복 깃발 휘장 등을 모두 검은색으로 통일했는데 병마용 병사들은 진한 빨간색·녹색 도포와 파란색·보라색·흰색 등의 바지를 입었다.진시황스스로 규정을 어겼겠는가. 셋째,당시 진나라 장례 풍습으로는 왕이 죽으면 사람과 가축을 옹관에 넣어순장했다.더구나 진시황은 ‘분서갱유’를 일으켰으며 능을 건설한 노역자수만명을 산채로 파묻은 위인이다.그런 그가 굳이 순장을 피하고 그토록 많은 병마용을 만들었을까?사실 강박사와 같은 주장이 처음 나온 것은 아니다.시안대 고고학과 주임교수 천징웬(陳景元)은 학술잡지 ‘大自然探索(대자연탐색)’1984년 겨울호에“병마용 주인은 진시황이 아니다”라고 쓴 논문 ‘秦俑新探(진용신탐)’을발표한 바 있다.그는 이 논문에서 “실제 주인은 진시황의 고조할머니인 진선(秦宣)태후이며 이 병마용은 진선태후 유해를 그녀의 고향인 초나라 땅으로 운구하는 장의행렬”이라고 추정했다. 진한(秦漢)시대를 연구하는 사학자 린젠밍(林劍鳴)도 학술지 ‘文博(문박)’1985년 제1기에 ‘秦俑之迷(진용지미=병마용의 미스터리)’란 논문을 발표,“병마용이 진시황릉의 일부임을 증명하는 결정적 자료는 아직 없다”“병마용에서 출토된 병기는 대부분 청동기인데 철제무기를 보편적으로 사용한 진시황 때의 야금기술 수준과는 맞지 않는다”고 밝혔다. 이같은 의문제기는 그러나 곧 자취를 감추었고 이후 중국학계는 병마용에 관해 침묵으로 일관해왔다. 강박사는 그 까닭을 ▲중국당국이 75년에 이미 진시황 부장품이라 발표했고▲그동안 각국 원수·귀빈을 포함한 무수한 외국관광객들이 관람해 뒤집기가쉽지 않아서일 것이라고 추측했다. 아울러 진시황릉은 절대 발굴하지 않는다는 중국당국의 방침에 따라 병마용을 진시황의 상징물로 삼으려고 할 수도있다고 보았다. 강박사의 주장을 담은 글 ‘병마용 주인이 진시황이 아닌 12가지 이유’는오는 8월 한길사에서 출간할 예정인 그의 저서 ‘차이니즈 나이트’(가제)에실려 세상에 공개된다. 필리핀의 전 대통령부인이멜다가 보자마자 “믿을 수가 없어”라고 소리치며 졸도했다는 병마용,자크 시라크 프랑스대통령에게서는 “세계 7대 불가사의에 이은 8번째”라고 극찬을 들은 이 문명의 기적은 2,200여년전 과연 누구를 위해 만들어졌을까. 이용원기자 ywy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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