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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월의 조각 맞추듯평면위에 ‘나’를 담다

    세월의 조각 맞추듯평면위에 ‘나’를 담다

    캔버스 위에 조각들을 집적시킨 듯한 릴리프 피스(Relief Piece) 연작이 눈에 띈다. 그간 현대산업사회를 소재로 강력한 이미지의 조각을 펼쳐온 대가가 이제 말년의 여유를 만끽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오는 30일까지 서울 종로구 소격동 국제갤러리에서 열리는 조각가 앤서니 카로(87)의 개인전이다. 카로는 영국 출신의 세계적 조각가로 미국에서 시작된 철판 조각을 처음 유럽에 소개한 인물이다. 아이빔 같은 건축자재를 거리낌 없이 써온 작가이기도 하다. 때문에 추상과 구상의 경계는 물론, 건축이나 회화와의 경계에도 별로 개의치 않는 등 지극히 개인적인 스타일을 구축해온 작가로 꼽힌다. 전시도 그의 이런 면모를 부각시키기 때문에 어떤 작품에서는 건축적인 맛이 나는가 하면, 어떤 작품은 지극히 회화적인 맛이 나기도 한다. 철판을 이용한 전형적인 그의 작품도 만날 수 있다. 특히 큰 작품을 즐겨 하지 않는 그가 이례적으로 규모를 키운 ‘사우스 패시지’(South Passage), ‘스타 패시지’(Star Passage)의 육중한 덩치감도 느낄 수 있다. (02)735-8449.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단숨에 휙 그었을 뿐인데 그것이 한국이더라 …

    단숨에 휙 그었을 뿐인데 그것이 한국이더라 …

    #1. ‘We’라 쓰여있다. W자의 한쪽 끝이 끝 모르게 치솟더니 그 위에 사람이 한 명 얹혀 있고, 그 옆에 ‘she’라고 적혀 있다. 한진중공업 사태, 고공크레인 시위, 김진숙 민노총 지도위원이란 키워드를 가진 희망버스 사건을 접하고 그렸다. #2. 미술계에 대한 풍자도 있다. 미술관, 갤러리, 미술경매장을 한 언덕 위에 나란히 그려놨는데 뒤로 갈수록 건물이 더 커진다. 공적인 미술관보다 상업화랑이, 상업화랑보다도 경매로 가격을 뻥튀기하는 데 더 관심 있느냐는 질문이다. #3. 한국인의 일상도 있다. 손에 든 휴대전화에는 주소, 생일, 연락처, 뉴스, 음악, 영화가 다 들어 있는데 정작 사람의 머릿속에는 거의 아무것(almost nothing)도 들어 있지 않다. 쉽고 재미있는 그림체 때문에 비주얼아트나 일러스트레이션 계통에 적지 않은 마니아층을 보유하고 있다는 단 페르조브스키(50). 그의 한국 첫 개인전 ‘뉴스 이후의 뉴스’(The News after the News)가 12월 4일까지 서울 종로구 평창동 토탈미술관에서 열린다. 작가는 북한의 김일성을 모델로 삼았다던 독재자 니콜라에 차우셰스쿠의 나라, 루마니아 출신이다. 그렇다고 ‘자유 루마니아 만세’를 기대할 필요는 없다. 작품을 보면 옛 공산독재를 상징하는 인물이 다른 사람에게 ‘오 자유의 동지여’(OH MY LIBERTY BROTHER)라고 악수를 건네자 반대편 사람은 ‘악! 이 공산주의 악마야’(WOW! COMMUNIST DEVIL!)라고 경악하는 것도 있다. “공산주의에서 민주주의로 바뀐 게 아니라, 공산주의에서 자본주의로 바뀌었을 뿐”이라는 작가의 말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반공주의가 민주주의의 전부라 우기는 한국의 뜬금없는 ‘자유’ 민주주의 바람이 떠올라 설핏 웃음이 나온다. 작가는 10살 때부터 국가의 집중적 교육을 받을 정도로 그림에 천부적 재능을 보였다. 그러나 별 재미는 없었단다.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을 토대로 공부했기 때문에 “기술적으로는 고전주의에서 후기인상파에 이르기까지 모든 화풍을 다 소화해낼 수 있는 재주”를 갖췄지만 흥미를 느낄 요소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시작한 게 드로잉이다. 어릴 적 펜 하나 쥐면 아무렇게나 그리던 아이들이 10살을 넘어가기 시작하면 그리기를 망설인다는 점에 착안했다. 그림은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것인데 제도권 교육이 되레 걸림돌로 작용한다는 얘기다. 천재적인 손재주를 지녔음에도 단순명료한, 만화 같은 드로잉을 그리는 이유다. 1999년 베네치아비엔날레를 통해 세계적 작가로 떠올랐다. 바닥에다 드로잉을 그려뒀는데 포인트는 관람객들이 지나다니다 자연스럽게 지워진다는 것. 작가는 “주어진 공간에서 즉흥적으로 구현되는, 일종의 재즈연주와 같은 것이기에 (내 그림이) 영원히 남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후 2006년 영국의 테이트모던갤러리, 2007년 미국 뉴욕현대미술관 등에서 전시를 열면서 이름을 떨쳤다. 이번 전시에서도 미술관 측이 준비한 것은 깨끗한 빈 벽이다. 전시 두달 전부터 한국에 대한 뉴스를 제공받아 아이디어를 가다듬은 뒤 이를 드로잉북에 미리 그려왔다. 그리곤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빈 벽을 채워나가기 시작했다. 물론 이 작품들도 전시가 마무리되면 깨끗하게 지워진다. 한국에 도착한 뒤 드로잉한 작품도 있다. 직접 관찰한 현대 한국인의 일상들이다. 재치 넘쳐서 깔깔깔 웃게 된다. 전시 중임에도 여전히 돌아다니다 그릴 만한 것을 찾으면 슬쩍 들어와 빈 곳에다 드로잉 작업을 한다. 운 좋으면 작가의 작업광경을 볼 수도 있다. 관객들이 직접 그릴 공간도 마련해놨다. “나도 내 마음에 따라 그리는데, 관람객들에게도 그런 행운을 누리게 해줘야 한다.”는 작가의 제안에 따른 것이다. (02)379-3994.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잘나가던 뮤지컬 제작자, 초짜 미술 사업가로

    잘나가던 뮤지컬 제작자, 초짜 미술 사업가로

    “앞으로의 운영 방향이요? 저도 잘 몰라요. 그래도 대관 없이 열심히 기획전만 할 겁니다. 확실한 건 한 4~5년 정도 착실히 하면 잘 되겠지 하는, 기대감 정도? 하하하.” 활동적이고 입심 좋다. “2008년쯤 병원에 입원했었어요. 의사가 일 다 그만두고 쉬라고 하더군요. 사업이란 게 하다 보면 좀 거짓말도 하고 그래야 하잖아요. 그걸 다 놓으라는 말로 들리데요. 그래서 마음 편하게 할 수 있는 걸 찾은 겁니다.” 경기 파주시 법흥리 헤이리아트밸리에 갤러리 ‘화이트블럭’을 연 이수문(63) 대표다. 이 대표의 경력을 보면 미술과 겹치는 부분이 없다. 경기중, 경기고, 서울대 건축공학과를 거쳐 한샘, 현대, 하츠 등 주로 건축 관련 분야에서 오랫동안 일했다. 그래선지 갤러리 건물에 대한 자랑이 대단하다. “6개 전시실과 야외조각공원에다 공연장으로 쓸 수 있는 로비도 갖췄습니다. 1년간 준비해서 지었는데, 미국에서 40대 이하 유망한 건축인 가운데 한명으로 뽑힌 박진희씨가 설계했어요. 건물 외벽을 LED(발광다이오드)로 하려고 했는데 그건 돈이 너무 많이 들어서 포기했습니다. 하하하. 아직 공식 발표가 안 나 조심스럽지만 미국 건축가협회에서 주는 건축상도 탈 겁니다.” 이런 그가 왜 미술을 택했을까. “제가 좀 날라리였어요. 중학교 때 연극에 입문한 뒤 지금까지 연극을 보고 즐기고 그렇게 삽니다. 클라리넷도 좀 하고요.” 빈말이 아닌 게 이 대표는 뮤지컬계에서도 지명도가 있다. 1995년 창작 뮤지컬로서는 가장 화려한 성공을 거둔 ‘명성황후’ 초기 제작 멤버다. ‘아가씨와 건달들’ 같은 유명 작품도 숱하게 제작했다. “공연이란 게 30대를 겨냥해야 하는 일인데, 나이가 들다 보니 어느 순간 ‘아, 내가 30대의 감각을 못 좇아가고 있구나’ 싶더군요. 그래서 ‘에잇 호진아 그냥 니가 해라’라고 해버렸죠.” 여기서 ‘호진이’는 얼마 전 안중근 의사를 다룬 뮤지컬 ‘영웅’을 미국 뉴욕 브로드웨이 무대에 데뷔시킨 윤호진 에이콤 대표를 말한다. 미술은 직접 제작의 부담이 덜하다. “뮤지컬과 달리 갤러리는 제가 직접 제작하는 게 아니라 장을 열어주는 거잖아요. 그런 점에서 한번 도전해 볼 만하다 생각했습니다.” 부인(차명희)이 화가라는 점도 작용했고, 다른 인연도 있다. 만화 ‘먼 나라 이웃 나라’로 널리 알려진, 서울대 건축학과 동문 이원복 동덕여대 교수가 독일 유학 시절 알고 지낸 클라우스 클렘프를 소개해준 것. 클렘프는 프랑크푸르트 응용미술박물관 디렉터로 한국에서도 몇 차례 기획전시를 선보였다. 때문에 이번 개관기념전은 클렘프의 힘을 빌어 ‘독일 현대미술 3인전-사물의 재발견’(Deutsche Dinge)으로 정했다. 에버하르트 하베코스트, 타티아나 돌, 안톤 스탄코프스키 3명 작가의 132점을 전시한다. 클렘프의 기획답게 작품들은 순수예술과 상업디자인 사이에 걸쳐져 있고, 독일 작품답게 묵직한 맛을 풍긴다. “신생 갤러리다 보니 중견 작가분들을 모시기가 어려웠던 점도 있었고요. 또 사업할 때 유럽출장을 많이 나갔는데 독일적인 맛, 느낌이 굉장히 좋았다는 점도 작용했습니다. 일반인들도 즐길 수 있는 공간으로 구성할 테니 가볍게 즐겨줬으면 해요.” 전시는 오는 5일부터 12월 4일까지다. (031)992-4400.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춤’ 가을을 홀리다

    ‘춤’ 가을을 홀리다

    서울 강남구 역삼동 LG아트센터에서 볼 만한 춤판이 잇따라 벌어진다. 동서양, 전통과 현대를 한데 묶어놨다는 평가를 받는 영국 안무가 아크람 칸(37)의 신작 ‘버티컬 로드’(Vertical Road)가 30일, 10월 1일 이틀간 공연된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방글라데시 출신인 칸은 북인도 전통무용 ‘카탁’을 익힌 뒤 발레와 현대무용까지 섭렵한 인물. 때문에 작품을 만들어낼 때마다 독특하고 창의적이라는 평가를 얻어냈다. ‘버티컬 로드’는 지난해 7월 영국 무대에서 초연된 신작이다. 죽음을 대비하기 위해 삶의 기억들을 정리하는 한 여행자의 길을 더듬었다. 기술중심의 현대 사회를 수평적인 길로, 절대자에게 다가가면서 깨우침을 얻는 과정을 수직적인 길로 표현했다. 현대적 감각답게 일렉트로니카 음악이 쉴 새 없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춤이 전개된다. 여기에는 스스로의 다짐도 들어있다. 칸은 혁신적 안무가로 주목받기 시작하면서 2007년 프랑스 발레리나 실비 길렘과 ‘신성한 괴물’을, 2009년 영화배우 쥘리에트 비노슈와 ‘인-아이’(in-I)를 선보였다. ‘버티컬 로드’는 유명스타들과의 협업 대신 순수한 춤 그 자체로 다시 되돌아왔음을 보여준다. 3만~7만원. 10월 6~9일에는 스페인국립플라멩코발레단이 무대에 오른다. 1978년 창단된 발레단의 첫 내한공연이다. 남녀 무용수의 관능적이고 화려한 듀오를 선보이는 ‘두알리아’와 카르멘 아마야(1913~1963)를 기념하는 ‘라 레이엔다’ 두 작품을 선보인다. 바르셀로나 빈민가 출신인 카르멘 아마야는 남자 무용수만의 동작을 여자 무용수들에게도 적용하고, 화려한 드레스 외에도 바지를 입고 추는 춤을 선보였던 인물이다. 플라멩코계에서는 전설로 꼽힌다. 4만~10만원. LG아트센터 (02)2005-0114.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統攝인가 通涉인가… ‘사회생물학 대논쟁’ 통해 본 통섭의 개념

    統攝인가 通涉인가… ‘사회생물학 대논쟁’ 통해 본 통섭의 개념

    統攝이냐, 通涉이냐. 최재천(57) 이화여대 에코과학부 석좌교수가 지식대통합을 위한 방편으로 제안해 한국사회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용어 ‘통섭’ 얘기다. 거느릴 통에 몰아잡을 섭을 써서 무언가가 중심에 서서 한데 몰아잡아 거느리느냐, 아니면 통할 통에 건널 섭을 써서 서로 대등한 입장에서 자유롭게 건네주고 받느냐다. 쉽게 말해 수직적이고 위계적인 계열화냐, 아니면 수평적이고 대등한 융합이냐다. 통섭이라는 단어가 널리 힘을 발휘하게 된 근원은 후자에 가깝다. 통섭이란 단어가 대개는 분과학문의 벽을 뛰어넘은 소통의 의미로 받아들여지고, 또 대개 그런 의미로 쓰여지고 있다는 점이 이를 뒷받침한다. 하지만 이는 한 가지 의문을 낳는다. 통섭을 그런 의미로 쓸 경우 분과학문의 폐쇄성과 비효율을 비판하면서 등장한 간(間)학문적 태도, 혹은 요즘 유행하는 표현을 빌리자면 트랜스(Trans)적인 태도와 어떤 차이가 있느냐다. 단지 조금 더 멋져 보이는 단어일 뿐인가. 최근 나온 ‘사회생물학 대논쟁’(이음 펴냄)은 이 의문을 둘러싼 논쟁이다. 최 교수 주도로 과학철학, 과학사, 과학사회학 분야 학자들이 2009년 발표한 학술논문들을 담았다. 발표한 지 2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유효한 논거들이다. 명쾌한 결론은 없다. 하지만 통섭이란 용어, 그리고 사회생물학이 어떤 맥락을 갖고 있는지 확인해 볼 수 있어 매력적이다. 통섭이란 단어는 미국의 사회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82)이 썼다. 원어는 ‘콘실리언스’(Concilience)다. 모든 학문에 공통되는 사실을 언급하는 19세기 때 단어를 복구한 것이다. 윌슨의 제자로 이 개념을 번역한 최 교수도 스승의 예를 따라 일반적으로 잘 쓰지 않는 ‘통섭’(統攝)이란 단어를 골랐다. 주목할 점은 윌슨이 ‘Concilience’를 상위개념인 사회생물학이 다른 인문사회과학을 하위 분야로 포괄하는 개념으로 썼다는 사실이다. 때문에 생물학제국주의, 유전자결정론, 우생학으로 연결되면서 인종주의를 정당화한다는 거센 비판에 직면했다. 덕분에 윌슨은 학술대회장에서 마이크를 빼앗기고 물세례를 맞는 수모까지 당했다. 최 교수는 이런 논란에 애매한 태도를 유지한다. 우선 윌슨의 관점을 모두 받아들이지는 않는다고 선을 긋는다. 번역자로서 원저자의 의도에 맞는 단어를 고르다가 ‘統攝’을 선택했을 뿐, 자신의 견해는 通攝(두루 소통하며 쥔다), 혹은 通涉에 가깝다는 말까지 덧붙인다. 그럼에도 인간의 모든 행위를 생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강한 신념을 내보인다. 인간에게는 유전자 수준을 뛰어넘는 창발성(Emergence)이 있다는 반론에 대해 그는 “창발성 자체도 언젠가 분석되고 설명될 개념이라는 내 입장에는 일말의 변화도 없다.”면서 “그 과정에서 자연과학이 가장 크게 기여하리라는 기대에도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못박았다. 앞에선 부인해 놓고 뒤돌아서서는 ‘도로 윌슨’을 외치는 격이다. 이쯤 되면 ‘대논쟁’이란 말이 자가발전적이라는 ‘의심’이 슬쩍 든다. 때문에 시선을 제대로 자극하는 것은 통섭반대론자들의 논거다. 전통적인 문화론 입장에서 통섭을 통한 지식대통합에 부정적인 이정덕 전북대 고고문화인류학과 교수, 통섭이란 개념은 자연과학자와 인문사회학자를 화해시키기보다 오히려 더 대립시키기 때문에 차라리 영국 철학자 앨프리드 화이트헤드의 합생(合生·Concrescence) 개념을 쓰자는 김환석 국민대 사회학과 교수의 제안이 눈에 띈다. 가장 결정적인 비판은 김동광 고려대 과학기술학연구소 연구교수의 주장이다. 김 교수는 한국에서의 통섭 논쟁의 특징은 ▲번역어가 무슨 뜻이냐에만 관심이 쏠렸지, 수직적이냐 수평적이냐 하는 논란은 큰 관심을 끌지 못했으며 ▲따라서 사회생물학 논쟁으로 연결되지 못했고 ▲그러다 보니 정작 생물학자들은 논쟁에 그다지 참여하지 않았다고 진단한다. 여기서 미국과 한국의 차이가 발생한다는 지적이다. 최 교수는 한국에서 다위니즘(진화론)에 대한 깊은 논의가 없다는 점을 한탄하지만, 김 교수가 보기에 한국에서 오히려 부족한 것은 우생학에 대한 논의다. “사회생물학자들은 또 그 이야기인가 하고 손사래를 치겠지만”이란 전제를 깔고 얘기를 시작하는 김 교수는 “서구에서는 오랜 기독교적 전통에 홀로코스트(대학살) 경험이 있기 때문에 과학으로 위장된 정치사회적 주장에 대한 반감이나 견제가 강하다.”고 상기시켰다. 윌슨이 통섭을 주장한 것은 바로 이런 반감을 뚫기 위해서라는 얘기다. 즉, 일반대중이나 인문사회과학도가 아닌, 사회생물학 후예들에게 걱정 말고 앞으로 전진하라는 의도를 담고 있다는 것이다. 반면 우리나라는 ‘황우석 사태’에서 보듯 “과학이 곧 경제성장과 경쟁력 강화라는 말과 동의어로 인식되면서 독특한 국가주의적 성격”이 짙다고 김 교수는 말한다. 때문에 과학에 대한 반감이나 견제보다는 쉽게 열광으로 휘몰아쳐 간다는 것이다. 과학적이라고 말하면 곧 중립적이고 위해가 없으리라는 판단, 그것이 문제의 본질이라는 주장이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전등사 적시는 역사축제

    현존하는 국내 최고(最古) 사찰인 강화도 전등사에서 역사와 전통문화가 어우러진 ‘삼랑성 역사문화축제’가 다음 달 8~16일 열린다. 올해로 꼭 10돌을 맞은 축제는 ‘역사의 울림, 어울림’이라는 주제를 내걸었다. 첫날 오후 7시에는 가수 김종서, 박미경, 박태촌, 김수희, 남성중창단 ‘비바보체’, 퓨전 국악 그룹 ‘헤이야’ 등이 나와 가을음악회를 꾸민다. 9일에는 전등사를 창건한 아도화상 등 전등사 역대 스님을 기리는 ‘다례재’ 등이 열린다. 축제기간 중 인천의 시조(市鳥)인 두루미 사진을 모은 ‘두루미 사진전’, 강화 특산품인 화문석 공예 체험행사, 먹거리 장터 등도 열려 가족과 함께 찾기에 좋다. 축제 조직위원장이자 전등사 주지인 승석 스님은 27일 “온 가족이 즐길 수 있는 축제가 되도록 노력했다.”고 말했다. 전등사는 서기 381년 고구려 소수림왕 때 세워진 천년고찰이다. 몽고군의 침략 등 국난 때마다 최후의 보루 역할을 했던 곳이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문화계 블로그] 국내 최대 미술장터 KIAF 외화내빈 속앓이

    [문화계 블로그] 국내 최대 미술장터 KIAF 외화내빈 속앓이

    한국화랑협회가 서울 강남구 삼성동 코엑스 1층에서 연 국내 최대 미술품 장터 ‘한국국제아트페어’(키아프·KIAF)가 26일 막을 내렸다. 출범 10년째를 맞은 키아프는 한국 미술계의 간판 아트페어로 꼽힌다. 17개국 192개 화랑이 5000여점을 내놓은 규모가 이를 말해 준다. 하지만 화려한 외양 못지않게 비판도 늘 달고 다닌다. ‘허약체질’이라는 것이다. 국내 컬렉터들이 한국 작품보다 외국 작품을 선호하는 경향이 강한 데다, 해외 작가나 컬렉터들도 최근의 중국 미술 열풍 때문에 2008년 시작한 홍콩아트페어에 더 관심을 보이는 데서 비롯된 비판이다. 표미선 화랑협회장이 “점당 5만 달러 이상 작품이 팔릴 정도가 되어야 구매력 있는 시장으로 평가받는데 키아프는 아직 그 수준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라고 자인하는 이유다. 때문에 키아프 측도 올해 변화를 가미했다. 미디어아트, 설치미술, 키네틱 작품들을 모은 ‘아트 플래시’를 마련했다. 전통 회화나 조각에 치중하는 모습에서 벗어나 현대미술까지 한데 묶은 것이다. ‘키즈 인 키아프’ 프로그램도 만들었다. 부모들이 키아프 전시장을 둘러보는 동안 아이들을 따로 맡아 주면서 이들에게 간단한 미술교육을 실시하는 프로그램이다. 미래의 수요자를 창출하기 위한 프로젝트다. 노력은 일정 정도 통했다. 지난해 7만 2000명에 이어 올해 관람객 수는 8만명을 기록했다. 10% 증가한 수치다. 특히 20대 관람객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키아프 관계자는 “20대 관람객이 3만명 수준에서 5만명으로 크게 늘었다.”면서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같은 새로운 매체들을 적극 활용한 덕분”이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참가 화랑들의 표정은 밝지 않다. 전체 작품 판매액은 130억원으로 지난해 125억원에 비해 소폭 증가에 그쳤기 때문이다. 더구나 화랑에 수익을 줄 수 있는 고액 작품 거래는 눈에 띄게 줄어들고 중저가 작품들만 주로 거래됐다. 전반적인 경기침체에다 저축은행 사태 등으로 ‘큰손’들의 타격이 겹친 탓으로 분석된다. 화랑들의 속앓이가 깊어지는 것은 이 대목이다. 하루 관람객 수가 1만명을 넘나드는 장터이니 외면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렇다고 실속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발벗고 나서기도 힘든 노릇이다. 한 갤러리 관계자는 “좋은 작가와 작품을 두루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아트페어를 단순히 손익계산서만 보고 접근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면서도 “판매가 지지부진하니 김이 새는 것은 사실”이라고 털어놓았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격정의 화가’ 프리다 칼로, 춤으로 만나다

    ‘격정의 화가’ 프리다 칼로, 춤으로 만나다

    격정적인 삶을 살다 간 멕시코 화가 프리다 칼로(1907~1954)가 무대 위로 뛰어온다. 오는 29일부터 다음 달 16일까지 서울 시내 곳곳에서 열리는 제14회 ‘서울세계무용축제’(SIDance 20 11)를 통해서다. 개막작이 바로 ‘프리다 칼로의 푸른 집’이다. 독일 자를란트주립발레단과 돈론댄스컴퍼니가 공동 제작한 작품으로, 칼로의 ‘자화상’ 시리즈를 모티프로 삼아 그의 삶과 사랑과 예술을 춤으로 표현해냈다. 칼로는 교통사고로 인해 32번의 대수술을 받았던 화가. 멕시코 벽화주의 운동의 거장 디에고 리베라와의 사랑과 갈등, 그리고 뛰어난 혁명가가 되고자 했던 열망 등을 캔버스에 뿜어냈다. 3명의 무용수가 등장해 칼로의 격정을 표현해 낸다. 멕시코 가수이자 기타리스트인 엑토르 사모라가 연주와 노래로 남편 디에고 리베라를 연기한다. 모스크바 국제무용협회가 주관하는 세계적 권위의 ‘브누아 드 라 당스’ 후보작에 오를 만큼 혁신적인 안무를 선보인 수작이다. 아일랜드 출신 안무가 마거릿 돈론의 최신작이다. 29~30일 신수동 서강대 메리홀. 2만∼6만원. 독일 올덴부르크 무용단의 ‘No.8’도 눈길을 끈다. 인도 힌두교에서 파괴의 신으로 꼽히는 시바의 팔이 왜 8개인지 등 숫자 8에 얽힌 이야기를 무용으로 풀어냈다. 10월 2일 서초동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 3만 5000∼4만원. ‘한국, 독일 힙합의 진화Ⅴ’는 차이콥스키의 고전발레 ‘백조의 호수’를 파핀, 로킹, 그루브, 크림프 등 힙합으로 재구성한 작품이다. 한국과 독일의 3개팀이 꾸미는 합동공연이다. 10월 5일 순화동 호암아트홀. 2만~4만원. 대중에게 한걸음 더 접근하기 위한 시도도 선보인다. ‘커뮤니티 댄스’ 작품이 대표적. 유럽에서 시작해 널리 퍼지기 시작한 커뮤니티 댄스는 공통의 사회적 정체성에 기반을 둔 다양한 사람들이 춤을 통해 삶의 즐거움, 관계 회복, 상처 치유 등의 효과를 얻는 것을 말한다. 춤이 사회적 유대감을 높일 수 있다는 점에 착안했다. 올해 선보이는 작품은 ‘꿈틀! 드림 어 모션’이다. 서울지역 10개 청소년시설의 청소년들이 3개월 동안 춤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는 법을 익혔다. 10월 9일 호암아트홀. 무료. 축제 기간 동안 거리, 공원, 빌딩, 찻집, 전철역 등 일상적인 공간에 아예 프로 무용수들이 잠입해 한바탕 춤판을 벌이는 프로그램도 있다. 이름하여 ‘춤추는 도시’. 장소와 일정은 홈페이지(www.sidance.org)를 통해 그때그때 공지한다. (02)3216-1185.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유목과 칭기즈칸의 나라, 몽골을 가다

    유목과 칭기즈칸의 나라, 몽골을 가다

    EBS 세계테마기행은 26~29일 오후 8시 50분 ‘유목과 바람의 땅, 몽골’을 방영한다. 몽골은 칭기즈칸의 나라, 한국을 무지개나라라 부르며 부러워하는 곳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번엔 10년간 몽골에 살면서 몽골 구석구석을 직접 답사한 한성호 에르뎀 어윤대 한국관광학과 교수를 길잡이 삼아 떠난다. 1부 ‘초원을 달리는 말, 우르항가이’에서는 몽골인의 가장 친근한 벗, 말에 대해 알아본다. 우르항가이는 말의 고향이다. 지금도 어린아이들까지 참가하는 초원 가로지르기 10㎞ 경주대회가 열릴 정도다. 야생말의 조련지로도 유명한 인근 흐근올도 찾아가 본다. 2부 ‘화산이 준 선물, 아르항가이’에서는 화산폭발로 형성된 지대를 찾아간다. 거대한 사화산 지대인 이곳은 불을 뿜어낸 곳이라 몽골인들이 신성시하는 지역이기도 하다. 곳곳에서 찾을 수 있는 돌무더기와 푸른 비단천은 신성의 표시다. 이 지역은 테르킨 차강 노르라는 호수도 끼고 있다. 또 따뜻한 온천수도 만날 수 있다. 덕분에 물이 귀한 초원지대에서 동식물들의 다양한 생태를 접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3부 ‘칭기즈칸의 고향, 헨티’는 칭기즈칸의 군영지였던 이흐 후레로부터 그의 흔적을 더듬어 나간다. 공산주의 시절에 칭기즈칸은 일종의 금기어였다. 그러나 1991년 공산권의 붕괴 이후 몽골은 자신들의 뿌리 찾기 작업에 나섰다. 수도 울란바토르에서 80㎞ 떨어진 에르덴솜 초원에 서 있는 동상, 그가 태어난 다달솜에서 찾아볼 수 있는 기념비와 동상은 뿌리 찾기 작업의 흔적이다. 4부 ‘유목민이 꿈꾸는 미래’는 현대사회 적응 문제를 고민하는 유목민들의 모습을 다뤘다. 유목하는 이들의 가장 큰 문제는 자녀의 교육. 교육을 위해 정착하자니 유목민의 특성이 사라질 것 같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교육과정에 전통 춤과 노래를 포함시킨 것. 몽골인들은 유목 전통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또 이를 지켜나갈 수 있을까.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색실과 만나 평면성 벗다

    색실과 만나 평면성 벗다

    밥 먹을 자리를 잡는데 구석자리로 간다. “이렇게 환대받는 게 처음이라서….” 영 어색한가 보다. 한마디 더 붙인다. “오래 사니 좋네요. 저에게도 이런 자리가 다 마련되고….” 그럴 법도 한 게 천 작업은 예술로 인정받지 못했다. 10월 20일까지 서울 평창동 김종영미술관에서 ‘타피스트리의 거장, 정정희’전을 여는 정정희(81)는 달랐다. ‘거장’이란 호칭에도 ‘타피스트리’(Tapestry)라는 말이 불만이다. 그보다 ‘패브릭 아트’(Fabric Art)로 받아들여지길 바란다고 했다. 천으로 그림을 대신하는 게 아니라, 천 그 자체의 미학에 집중한다는 의미다. 이는 천으로 만든 작품임에도 입체감이 돋보이는 데서 더 명확히 드러난다. 어디 깔고 입히는 쓰임새보다 천 자체의 색깔과 형태가 눈길을 끈다. 촘촘하게 짜서 채우기보다 과감하게 공간도 비워 놓는다. 1949년 서울대 미술학부에 입학, 조각을 공부한 이답다. 그런데 조각 전공 이유가 조금 웃기면서도 다음 행보와 연결된다. “고등학교 때까지 색채감 좋다는 얘길 많이 들었어요. 그래서 당연히 그림이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대학에 입학해 보니 호리호리하고 가냘픈 여학생은 서양화를, 얌전하게 보이는 여학생은 동양화를, 힘 좀 쓰게 생긴 저에게는 조각을 하라시데요. 호호호.” # 천 자체 미학에 집중해온 평생…더 촘촘하게 그렇다고 조각이 싫었단 말은 아니다. 1957년 국전에서 “퍽 건실한 여류 조각가가 나와서 반갑다.”는 평과 함께 특선에 뽑혔을 정도니. 실과의 만남은 ‘한국공예시범소’가 인연이 됐다. 초강대국으로 등장한 미국은 조형 분야에서도 독일의 바우하우스를 뛰어넘고 싶어 했다. 마침 우리나라도 산업개발을 위해 공예가들을 키우길 원했다. 금속 펜던트 작업을 하던 작가는 이렇게 맞아떨어진 양국의 이해관계 덕분에 미국 유학길에 올랐고, 여기서 패브릭 아트의 거장으로 꼽히는 잭 르노어 라르센을 만났다. 정 작가는 “조각과 달리 색을 쓸 수 있어서, 회화와 달리 입체적일 수 있어서” 좋았다고 했다. 회화의 평면성, 조각의 무색성을 벗어버린 것이다. 그의 작품이 추상화 같으면서도 설치 같은 이유다. # 조각과 달리 색을 쓰게 돼 즐거운 그런데 정작 작가 자신은 이를 ‘선택했다.’고 표현하지 않는다. “젊은 세대가 그래서 부러워요. 요즘은 왜 이걸 하는가 고민하고 선택하지만, 전 그냥 하는 거였거든요. 당연히 이래야 하는 줄 알고 하는 것, 그것뿐이었지요.” 미대를 나와 결혼하고 출산하고 살림해야 하는 ‘대한민국 아줌마’로서의 조건을 감내했다는 얘기다. 그래서 남편이 고맙다 했다. 쓰임새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자그마하지도 않은 작품들을 이제껏 끼고 살았는데도 아무 말 없었으니. “바깥양반이 점잖긴 한데 엄청 깔끔한 성격이라 아무 말 없이 참아내는 게 정말 힘들었을 거예요.” 노()작가가 맑게 웃었다. (02)3217-6484.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부고]

    ●홍병규(전 유한양행 사장)씨 별세 춘섭(탑슬 대표)찬섭(비엘씨 〃)씨 부친상 조윤환(마미손 전무)씨 장인상 23일 서울아산병원, 발인 25일 오전 8시 (02)3010-2292 ●김유진(호주 ALS그룹 책임연구원)완진(아산중앙연합의원 원장)씨 모친상 홍순훈(연세대 관재처장)씨 장모상 23일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발인 26일 오전 8시 (02)2227-7580 ●박찬원(성균관대 석좌초빙교수·전 코리아나화장품 대표)씨 모친상 23일 보라매병원, 발인 25일 오전 8시 (02)841-7652 ●양영숙(전 일산서구청장)씨 별세 23일 동국대 일산병원, 발인 25일 오전 5시 30분 (031)961-9401 ●이창호(한화증권 신갈지점 부지점장)씨 모친상 22일 고양 명지병원, 발인 24일 낮 12시 (031)810-5476 ●정병호(전 국민은행 지점장)씨 부인상 춘광(서준실업 대표이사)태성(전 광주MBC 사장)씨 모친상 허태철(대륜E&S 동두천지사장)씨 장모상 23일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발인 26일 오전 6시 (02)2227-7587 ●김영직(프로야구 LG 트윈스 2군 감독)씨 장인상 23일 울산 인산병원, 발인 25일 오전 6시 30분 (052)246-4994
  • [지금&여기] 가을은 가을이다/조태성 문화부 기자

    [지금&여기] 가을은 가을이다/조태성 문화부 기자

    이놈 영악하다. 8개월째 접어든 아들놈 쿠나(태명) 말이다. 누워만 지낼 때는 은근한 살인미소를 보냈다. 이 정도면 살살 녹아서 안을 법도 한데, 라는 신호다. 앉기 시작하면서부터 두 팔 벌리기가 추가됐다. 겨드랑이에 손 집어 넣어 어서 안아 올리지 않고 뭣하느냐는 호통이다. 기어다니기 시작하더니 이젠 무릎 위로 오르려 한다. 이래도 안 안아줄거야, 라는 무력시위다. 이놈 까다롭다. 예전엔 조금만 신기해도 까르르 웃었다. 한여름 쥘부채 펴는 소리에, 멧돼지에 빙의된 아빠의 짐승 콧소리에 숨 넘어가도록 웃어댔다. 그랬던 녀석이 요즘엔 통 무반응이다. 까르르 소리 한번 듣기 위해 재롱은 아기가 아니라 부모가 피워야 한다. 몸치 엄마는 몹쓸 춤사위를 흔들어대느라, 뱃살 두꺼운 아빠는 그네 태워주느라 땀 뻘뻘이다. 왜 이리 신기하고 좋을까 싶었는데 답은 엉뚱하게도 소설 ‘두근두근 내 인생’에서 찾았다. 부모가 아기 모습에 껌뻑 숨 넘어가는 것은, 아기의 모습에서 지금은 기억할 수 없는 자신의 아기 시절을 떠올린다는 대목에 숨이 잠시 멎었다. 부모가 아기의 거울이 아니라, 아기가 부모의 거울이란 소리다. 쿠나 녀석에 폭 빠져지냈던 나에게 그제서야 어머니가 눈에 들어왔다. 손주 녀석 봐준다고 부산에서 오신 어머니. 그러고 보니 계속 안아달라고 영악하게 굴고, 조금 더 자기를 즐겁게 해보라며 콧대가 한없이 높아진 요놈 때문에 언젠가부터 한쪽 다리를 약하게 저셨다. 무거운 놈 들었다 놨다 하다 한순간 다리에서 뭔가 뜨끔하더란다. 소설가 김연수의 글귀 하나 떠오른다. “딴 생각에 빠진 아들 앞에서 평생 말해야만 하는 몫의 이야기를 말하기 위해서 말하는 것처럼 말할 때, 부모님은 외롭게 말하고 있는 중이라고.” 나에게서 자기 자신을 발견했을 어머니를, 난 얼마나 외롭게 했을까. 오늘은 어머니 앞에 앉아 묵묵히 그 얘기를 들어야겠다. 이런 생각이 드는 걸 보니 문득, 가을은 가을이다. cho1904@seoul.co.kr
  • 그 조선 양반 책벌레였다면

    그 조선 양반 책벌레였다면

    책거리 그림은 원래 조선시대 병풍에 많이 쓰였다. 책장에 붓, 필통, 도장, 찻잔 같은 귀한 물건들을 올려 놓은 장면을 그려 넣었다. 정물화가 부르주아 소유욕의 발현이라는 평가가 있는 것처럼, 책거리 그림 역시 조선 양반들의 욕망을 반영한 것이다. 이 책거리 그림을 현대에 되살린 동양화가 정성옥(52) 작가의 개인전 ‘책들의 정원’이 28일부터 다음 달 4일까지 서울 견지동 목인갤러리에서 열린다. 평범한 가정주부였던 작가는 취미 삼아 민화를 배우다 책거리 그림으로까지 발전했다. 2006년 첫 개인전에서 그간 작업해 왔던 책거리 그림을 처음 세상에 공개했다. 전시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은 책거리 그림에 민화적 요소를 결합시켰다는 점이다. 책뿐 아니라 민화에서 찾아볼 수 있는 사슴과 거북이 같은 다양한 동물들을 함께 배치했다. “첫 전시회 때는 있는 그대로의 책거리를 보여 줬다면 이번에는 평면 속에서도 역원근법과 다시점의 방식으로 본 형상들이 한 화면 속에 섞이면서 민화와의 결합을 추구했다.”는 게 작가의 설명이다. 은은한 맛을 깔고 있는 책거리 그림에다 직설적으로 욕망을 표현하는 민화를 ‘동거’시킨 셈이다. 그래서 문자에 높은 가치를 부여하는 고고함, 책과 물건에 대한 남다른 취향의 과시, 장원급제와 출사길을 향한 은근한 욕망이 한데 뒤섞인 모양새다.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책, 공부, 출세 등 현실적 욕망을 얘기하되 한층 부드럽고 여유로운 접근이 눈에 띈다. (02)722-5066.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플라스틱 만나 입체를 걸치다

    플라스틱 만나 입체를 걸치다

    온도 차가 크다. 지하 1층에 놓여진 전작들 ‘경계’ 시리즈는 도심 풍경을 다뤘다. 해서 복잡하고 요란스럽다. 입체화면이라 한결 더하다. 지상 1, 2층을 채운 최근작 ‘이민자’ 시리즈는 여백이 넘치는 가운데 먹빛 소나무가 줄줄이 늘어서 있다. 화려한 네온사인이 번쩍대는 도심 속 고층빌딩 뒷골목에서 갑자기 시야가 확 트인 들판으로 나온 기분이다. 작품 경향이 바뀐 것 같은데 작가는 “주제의식만큼은 이어진다.”고 강조한다. # LED 비추면 그림이 단번에 일어서 10월 23일까지 서울 안국동 사비나미술관 ‘이산의 꿈’(The Dream of Diaspora)전을 여는 손봉채(44) 작가다. 조각 전공 뒤 설치작업에 집중해 왔고 키네틱아트 1세대로 꼽히는 작가의 최근작은 입체화면이다. 폴리카보네이트 위에 유화로 그린 뒤 3~4개 겹쳐 세워 뒤에서 발광다이오드(LED)로 빛을 준다. 빛이 주어지자 누워 있던 그림이 단번에 일어선다. 마치 CT촬영처럼, 평면으로 잘개 쪼개진 조각인 셈이다. 이 기법은 중학교 미술교과서에도 실렸고, 특허까지 받아뒀다. 시작은 우연이었다. 2000년 대학에서 시험감독을 맡았다. 시험장은 예나 지금이나 최첨단 커닝기법 경연장. 학생들의 무기는 OHP필름이었다. 투명한 재질에 글만 검게 새겨져 있으니 이미 낙서로 충분히 어지러운 책상 위에 올려두면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 그도 시험 시작 30분 만에 겨우 발견해 냈다. 그렇게 압수한 30여장의 OHP필름을 정리하려 책상 위에 탁탁 치다 눈이 번쩍했다. 평면 여러 장이 모여서 입체감이 나온 것. 이걸 해보자 싶었다. 작업은 쉽지 않다. 세밀붓 들고 하루에 10시간씩, 한 달 보름 정도 작업해야 작품 하나가 완성된다. 더구나 컴퓨터 시뮬레이션 작업 없이 “무식하고 우직하게” 하다 보니 겹쳐보고 원했던 결과가 안 나오면 다시 그린다. 물감이 원판에 어느 정도 배기 때문에 덮어 그릴 수도 없다. 작가가 “여백이 많은 동양화풍 작업이 좋다.”고 농담하는 이유다. 한때는 더 정밀하게 하고픈 욕심에 20~30겹 작업도 했다. 그러다 보니 작품 하나의 무게가 280㎏이 넘어 포기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얼마 전부터 국내에서 폴리카보네이트를 생산하기 시작해 제작비가 뚝 떨어진 점. 돈이 너무 많이 들어 설치작업을 양껏 하지 못한 판국에 새로운 기법도 하마터면 그렇게 될 뻔했다. # 우직한 세밀붓질…조경수처럼 길러진 우리 작가는 현대인의 삶에 대해 말하고 싶어 했다. ‘경계’ 시리즈가 직접적이었다면, ‘이민자’ 시리즈는 간접적이다. “한 그루에 몇 천만원, 심지어는 몇 억씩이나 한다는 조경수가 실려 나가는 걸 보면서 스펙을 쌓아 인공적으로 길러진 현대인들이 저렇게 뿌리를 잃고 어디론가 팔려 나가고 있는 건 아닌지 묻고 싶었다.”는 게 작가의 말이다. ‘경계’ 시리즈가 도심을 깊이 들여다봤다면, ‘이민자’ 시리즈는 소나무가 구름을 타고 노니는 이유다. (02)736-4371.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공연리뷰] 미디어 퍼포먼스 ‘이상한… 앨리스’

    [공연리뷰] 미디어 퍼포먼스 ‘이상한… 앨리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둘러싼 해석은 분분하다. 스토리라인이 비선형적이고 기존 시공간이 해체된 데다 등장하는 캐릭터들도 하나같이 독특하고 앞뒤 맥락 없는 행동과 대사를 늘어놓는다. 기술 발전에 힘입어 이런 환상적인 모습을 가장 잘 재현한 작품으로는 조니 뎁이 미치광이 모자장수로 나왔던 팀 버튼 감독의 영화일 것이다. 한국공연예술센터가 미디어 퍼포먼스 작품으로 무대에 올리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연출 김효진, 제작 와이맵·한국공연예술센터)는 바로 이 영화와 견줄 만한 작품이다. 무대 위에는 모두 6개의 패널이 설치됐다. 처음엔 4개의 패널, 나중엔 뒷면 1개의 패널, 중간엔 무대 뒤편 높이가 1m 20㎝에 이르도록 앞으로 경사진 무대바닥이 미디어파사드로 이용된다. 도입부의 화려한 미디어파사드 쇼에 이어 5개의 패널로 구성된 장면에서는 패널의 감각적인 배치와 이를 이용한 무용수들의 역동적인 안무가 돋보인다. ●무용수도 미디어로 간주 오브제화 연출가 김효진씨는 “앨리스가 토끼굴로 빨려 들어가는 것 자체를 극장으로 입장하는 것에 대한 은유로 여겼다.”면서 “벽을 부수고 더 깊은 단계로 점차 전진하는 방식으로 무대를 구성했다.”고 말했다. 미디어 쇼도 상당한 공을 들인 흔적이 역력하다. 다양한 장치를 통해 무대를 통째로 여유 있게 운영한다. ‘앨리스’의 상징이랄 수 있는 트럼프 카드의 놀이적 요소도 재치 넘친다. 영상 자체의 완성도가 대단히 높을 뿐더러 무용수들과 미디어가 함께 작동하는 대목도 상당히 많아 눈길을 끈다. “미디어 퍼포먼스라 해서 기존 무용수를 배제하는 게 아니라 무용수가 가진 인간의 몸 자체도 하나의 미디어로 간주해 오브제화하는 것”(연출가 김효진)이라는 설명이 들어맞는다. 그러나 처음부터 끝까지 최첨단 음악과 영상으로 몰아붙이다 보니 처음엔 탄성이 나오지만 나중엔 거부감이 든다. 최첨단 미디어로 환상 세계를 재현해 주리라는 의욕이 넘쳐서인지 단 한번의 쉴 틈도 주지 않는다. 너무 많은 데이터를 쏟아내니 오히려 몰입도가 떨어진다. 맥박을 떨어뜨리지 않다 보니 이상한 나라가 주는 이상한 환상을 충분히 음미할 여유가 없다. ●의욕 넘쳐 절제 미흡… 몰입도 떨어져 아빠가 아들에게 동화책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읽어 주자 아들이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는 설정은 그 자체로는 나쁘지 않지만 호흡 조절용으로 치자면 대단히 상투적이다. 미디어 퍼포먼스니까 미디어로 관객을 압도하려 하기보다는 오히려 미디어적 요소를 절제하면서 적재적소에 쓰는 게 더 강한 충격을 줄 것 같다. 지금은 극장용이 아니라 광활한 야외 무대용처럼 느껴진다. 오는 25일까지 서울 대학로 아르코예술극장대극장. 2만~5만원. (02)3668-0007.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2012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커미셔너에 김병윤 교수

    2012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커미셔너에 김병윤 교수

    한국문화예술위원회는 2012년 베니스 비엔날레 제13회 국제 건축전 한국관 커미셔너로 김병윤(59) 대전대 건축학과 교수를 선정했다고 22일 밝혔다. 김 교수는 한국건축가협회 명예이사, 건축대전 초대작가, 건축가학교(SAKIA) 총괄교수 등으로 활동 중이다. 주요 작품으로는 국제현상공모 당선작인 파주출판도시 아시아출판문화정보센터 및 연수지원센터, 정릉동 성당 등이 있다. 문화예술위는 1995년부터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을 운영하고 있으며, 홀수 연도에 미술전, 짝수 연도에 건축전을 열고 있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제작비 30억’ 토종 뱀파이어드라마 첫선

    ‘제작비 30억’ 토종 뱀파이어드라마 첫선

    사라 미셸 갤러를 단박에 톱스타 대열에 올려놓은 ‘버피: 더 뱀파이어 슬레이어’(1997~2003)를 시작으로 외전 격인 ‘엔젤’은 물론, ‘트루블러드’ ‘뱀파이어다이어리’ 등 미국 드라마(미드)에서 뱀파이어는 늘 인기였다. 남성 뱀파이어가 여배우의 흰 목덜미에 송곳니를 꽂아넣는 고전적인 성적 코드는 한물 간 지 오래. 다양한 장르와 결합하면서 신세대 시청자를 TV 앞으로 불러 모았다. 선한 뱀파이어와 짝패를 이뤄 사악한 흡혈귀를 퇴치하는 10대 소녀를 전면에 내세우거나(버피·엔젤), 더는 피를 빨지 않고 인간과의 공존을 원하는데도 노골적인 차별을 받는 뱀파어어를 통해 흑인, 동성애자의 인권을 슬쩍 거론(트루블러드)하기도 한다. 태생적인 캐릭터의 매력을 지닌 뱀파이어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수사 드라마가 국내에서도 첫선을 보인다. 케이블채널 OCN이 새달 2일 밤 11시에 첫 방송하는 12부작 ‘뱀파이어 검사’는 총 제작비만 30억원에 이른다. 편당 제작비는 ‘소녀K’(5억원)에 못 미치지만, 전체 제작비는 역대 케이블 드라마 최고 수준이라는 게 OCN의 설명이다. 어느 날 유조차 사고현장에서 낯선 사내에게 물려 뱀파이어가 된 검사가 자신의 정체를 숨긴 채, 뱀파이어의 능력을 이용해 사회악을 뿌리 뽑는다는 게 드라마의 뼈대다. 미드의 슈퍼히어로 주인공처럼 월등한 육체적 능력을 발휘하는 건 아니다. 대신 죽은 자의 피를 맛보면 피해자의 눈으로 사고 당시 상황을 꿰뚫어 보는 능력을 얻는다. 제작진 면면은 기대치를 높인다. 숱한 마니아들을 만들었던 케이블 드라마 ‘별순검’ 시즌 1의 김병수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다. 700만 관객에 육박하면서 여름 극장가를 평정한 ‘최종병기 활’의 김태성 촬영감독팀과 ‘우아한 세계’ ‘바람의 파이터’의 이홍표 무술감독팀도 합류했다. 국내 드라마 최초로 팬텀 고속카메라를 사용하는데 4~5대의 디지털일안반사식(DSLR) 카메라로 현란하고 역동적인 영상을 선보일 예정이다. 캐스팅도 제법 탄탄하다. 연정훈은 악인을 응징하는 검사의 소명과 인간의 피를 탐할 수밖에 없는 뱀파이어의 욕망 사이에서 갈등하는 검사 민태연 역을 맡았다. ‘제빵왕 김탁구’ 등에서 주로 깜찍 발랄한 역할을 했던 이영아는 강인한 여검사 유정인 역을 맡아 변신을 시도한다. ‘무사 백동수’에서 악역으로 인기몰이 중인 이원종은 강력반 꼴통 형사 황순범 역을 맡아 무게감과 활력을 불어넣는다. 연정훈과 사사건건 대립하게 되는 부장검사 장철오 역은 연극무대에서 다진 탄탄한 연기력으로 TV와 영화의 경계를 넘나드는 연기파 배우 장현성이 맡았다. 임일영기자 argus@seoul.co.kr
  • “50여년 집권 日자민당 몰락 이유, 한국의 보수주의자들도 주목해야”

    “50여년 집권 日자민당 몰락 이유, 한국의 보수주의자들도 주목해야”

    결국 ‘포괄정당’과 ‘국회대책정치’다. 서구식 용어를 쓴다면 국민정당과 합의 정치다. 박철희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가 써낸 ‘자민당 정권과 전후 체제의 변용’(서울대출판문화원 펴냄)의 결론이다. 일본 하면 한국 사람들이 반사적으로 떠올리는 말들이 있다. ‘보수우경화’, ‘우익의 발흥’, ‘군국주의화’, ‘군사대국화’ 같은 단어들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존재가 50년 넘게 집권한 자민당이다. ‘일제’라는 이미지 때문에, 과거사 문제 때문에 일본을, 자민당을, 그 자민당을 줄곧 지지해온 일본 국민을 한 덩어리로 파악하는 게 보통 한국 사람들의 시선이다. 그런데 박 교수는 이런 ‘일본 일원론’, ‘일본 불변론’이 사실과 다르다고 강조한다. 전후 일본, 그것도 자민당 내 파벌 싸움을 들여다보면 일원적이고 불변적이지 않다는 얘기다. 출발점은 요시다 시게루(1878~1967)다. 한국에서 요시다란 인물은 전후 총리 자리를 차고 앉아 일본 보수주의를 만들어 낸 인물이다. 그러나 요시다는 보수에 뿌리박되 군국주의로 치닫으려 한 급진 보수를 경계한 인물이다. 가장 강력한 증거는 전후 일본의 재무장을 막아냈다는 점이다. 미·소 대립 격화, 중국 공산화, 한국전쟁 발발 등의 악재가 연달아 터지면서 미국은 자유진영의 전진기지로서 일본을 재무장시키려 들었다. 일본 보수주의 진영 내부에서도 ‘이참에 재무장해서 한국전에 참전하자.’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 안팎의 공세를 거부한 사람이 요시다 총리다. 평화주의의 토대 위에 경제성장에 매진하자는 것이 요시다의 논리였다. 이후 일본 보수주의 정치, 자민당 정치는 요시다 노선을 어떻게 할 것이냐에서 판가름난다. 박 교수는 몇 차례 위기 혹은 도전은 있었지만 궁극적으로 아무도 이를 뒤집지 못했다고 보는 쪽이다. 이는 역설적으로 자민당이 허약해서다. 안으로는 파벌경쟁, 밖으로는 사회당과 공산당의 거센 도전에 직면했다. 그 와중에 자민당이라는 틀을 유지하고 그 안에서 경쟁력을 갖기 위해서는 인기 있는 정책을 가져다 써야 했고, 그러다 보니 사회당·공산당이 주장하는 진보적 정책까지 흡수해 버린 것이다. 때로는 자기 파괴적으로 분열된 것이 자민당의 파벌이었지만 “확대지향적 경쟁을 벌임으로써 야당의 입지마저 빼앗아 가는 권력 지향성을 보여 줬다.”고 평가하는 대목이다. 이 영향은 혁신계의 위축으로도 나타났다. “자신의 무기를 빼앗긴 혁신계는 사회경제 정책에 대한 비판 대신 외교·안보 노선에 대한 비판에만 집중했고, 이런 경향이 지속되다 보니 사실상 자민당에 대한 견제자 역할에 자족하는 양상”까지 나타났다는 것이다. 이렇게 압도적이던 자민당이 왜 2009년 민주당에 정권을 내줘야 했을까. 박 교수는 성공 요인을 뒤집어 보면 알 수 있다고 본다. 냉전 붕괴 뒤 사회당·공산당이 몰락했고, 자민당이 요시다 노선으로 대표되는 온건보수 대신 급진보수 쪽으로 기울어 버렸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는 생존에 대한 강한 갈증을 희석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박 교수는 “예전 자민당 위기 때 이뤄진 지도부 교체는 파벌을 바꿔 유사정권 교체와 같은 효과를 극대화하는 방식이었던 데 반해, 2000년대 들어 이뤄진 지도부 교체는 주류파 내부에서 국민적 인기에 편승해 정해지는 방식이 됐다.”고 진단한다. 헌법개정, 집단적 자위권, 교육기본법 등 국민생활과 별 관련 없는 국가정체성 문제에만 매몰돼 버렸고, 결국 유권자들이 등을 돌렸다는 해석이다. 한국의 보수주의자들도 참고할 만한 대목이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금관가야, 그 찬란한 문화의 자취 따라

    금관가야, 그 찬란한 문화의 자취 따라

    19~22일 오후 9시 30분에 방영되는 EBS 한국기행은 경남 김해를 찾아간다. 낙동강 하구에 자리 잡은 김해는 2000년 전 금관가야의 찬란한 문화가 꽃피었던 곳이다. 그래서 도시 전체가 박물관이라는 표현이 어색하지 않다. 단순히 오래된 것만은 아니다. 1990년 대성동 고분군 발굴을 통해 가야가 가장 철을 잘 다룬 국가였음이 드러나기도 했다. 또 김해의 흙과 낙동강의 물이 만나 가야토기를 낳았고, 이 전통은 조선시대 민요(民窯)로 이어졌다. 1부 ‘가야, 전설을 깨우다’에서는 김해 도자기 문화의 중심이랄 수 있는 진례면을 찾는다. 20여년 전부터 젊은 도예인들이 하나둘 모여들어 130여개의 공방이 생겼다. 가야의 명성을 알고 있던 일본인들이 1970년대에 공방을 만들면서 조성된 도예촌은 다완, 물잔, 생활도자기처럼 일상에서 쓸 수 있는 분청사기를 주로 만든다. 이곳에서 대를 이어 그릇을 만드는 이들의 얘기를 전해준다. 2부 ‘이천년의 향기 장군차’에서는 지역특산물인 장군차를 조명한다. 장군차는 가야국의 시조 김수로왕에게 시집온 인도 공주 허황옥이 혼수로 가져온 씨앗에서 유래했다는 얘기가 내려온다. 이것이 장군차란 이름을 얻게 된 것은 고려 충렬왕 때다. 왜구 정벌을 위해 남해안 쪽으로 내려왔다가 이 차를 맛보고는 차 가운데 으뜸이라 해서 장군차라 불렀다는 것이다. 지금은 동상동이 행정구역 명칭이지만 원래는 다전동, 그러니까 차밭이 있었던 곳이다. 지금 살아가는 사람들의 얘기도 빼놓을 수 없다. 3부 ‘와글와글 동상동 재래시장’에서는 100년의 역사를 가진 재래시장을 찾았다. 재래시장의 부흥에 걸맞은 곳이다. 자체 방송을 통해 상인들과 상품에 대한 정보와 얘깃거리들을 전하고 몇십년 전통의 음식점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모습을 소개한다. 4부 ‘화포 메기국의 추억’에서는 아름다운 하천 100선에 꼽히는 화포천과 이 화포천을 끼고 있는 모정마을을 찾았다. 민물과 바닷물이 섞이는 지점이어서 이 곳에서는 메기가 많이 잡힌다. 사시사철 밥상에 오르는 메기 음식. 무슨 맛일까.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유럽의 세계 제패는 우연일 뿐”

    “유럽의 세계 제패는 우연일 뿐”

    유럽이 지금처럼 강해진 것은 19세기 중반, 혹은 일러야 18세기쯤이라는 주장이 나왔다. 유럽의 배가 전 세계 바다를 누비기 시작한 15세기 대항해 때부터라는 기존의 ‘상식’에 대한 도전이다. 오랜 역사적 배경을 바탕으로 500년 넘게 유럽의 우월성이 이어진 게 아니라 기껏해야 100~200년 남짓된 일이라는 주장이기도 하다. 그것도 우연한 기회에 거머쥔 성공이라고 잘라 말한다. 여기에는 두 가지 뜻이 숨겨져 있다. 하나는 유럽이 우월한 이유가 “세계 다른 지역 혹은 문명보다 더 낫다는 일반적인 우월성에 기초한 것이 아니다.”라는 의미다. 다른 하나는 “서양의 등장은 상대적으로 단기적이고 일시적 현상으로 끝날 수도 있다.”는 의미다. 곧 패권이 다시 아시아로 넘어갈 것이라는 얘기다. 이런 목소리를 처음 낸 이들은 좌파 학자들이었다. 1950년대 스탈린에게 실망한 서구 좌파들이 마오쩌둥에게 열광했듯 미 제국주의에 염증이 나 중국 제국주의를 대안으로 꼽으려는 움직임과 같은 맥락이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보유한 국채를 팔아서 미국 중심의 경제 체제를 끝장내라고 은근히 중국을 부추기기까지 한다. ‘왜 유럽인가’(서해문집 펴냄)는 이 같은 주장에 동의하는 ‘캘리포니아 학파’ 가운데 한 명인 잭 골드스톤 미국 조지메이슨대 교수의 책이다. 중국더러 보유 국채를 이용해 미국을 굴복시키라는 대목에서는 엇갈리지만 유럽이 짧은 성공에 도취돼 ‘왕자병’에 걸렸다는 대목에는 견해를 같이한다. 골드스톤 교수는 왕자병의 한 예로 바스코 다가마를 든다. 유럽 사람들은 “바스코 다가마가 아프리카 최남단 희망봉을 돌아 인도 진출길을 찾아냈으며, 덕분에 대항해 시대가 열렸다.”고 주장한다. 우리도 대부분 그렇게 알고 있다. 하지만 그가 찾았다는 항로는 이미 현지 상인들이 수없이 다닌 길을 물어물어 찾아간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골드스톤 교수는 꼬집는다. 전인미답의 길을 홀로 개척한 게 아니라는 지적이다. 심지어 바스코 다가마 일행은 고생 끝에 도착한 곳에서 금세 쫓겨났다고 덧붙인다. 유럽이 워낙 낙후된 지역이다 보니 내놓을 만한 장사꺼리가 마땅찮아서였다. 쫓겨난 그들이 선택한 다음 카드는 군인들을 이끌고 와 무역선을 강탈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유럽은 군사력만큼은 막강했던 것일까. 골드스톤 교수는 “다가마로서는 대단히 훌륭한 성과였겠으나” 아시아 입장에서 이런 일은 “변방 오지에서 일어난 이상한 사건 가운데 하나”였을 뿐이라고 본다. 그만큼 존재감이 없었다는 얘기다. 다시 말해 15세기 대항해 시대에 시작됐다는 유럽의 급격한 번영은 포장된 이미지일 뿐이라는 주장이다. 좀 더 정확한 진실은 “아시아를 중심으로 이미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던 대양무역 네트워크에 유럽이 서쪽 끝에서 참여하게 되었다는 표지” 정도에 불과했다는 게 책의 결론이다. 유럽이 내세우는 과학문명에 대해서도 저자는 “16~17세기 유럽의 과학은 9~15세기 이슬람 과학을 물려받은 것”이라면서 “근대과학의 뿌리는 본질적으로 유럽적이 아니라 전 지구적”이라고 지적한다. 골드스톤 교수는 “유럽이 세계의 대세를 잡기 시작한 것은 어쩌다 그렇게 된 우연일 뿐”이라고 단언한다. 몇 번의 우연이 겹치다 보니 필연으로 작동하게 되고, 그 필연 몇 가지가 모여 19세기 중반 급기야 유럽이 아시아를 따라잡고 ‘역전’에 성공할 수 있었다는 설명이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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