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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먹, 그 빛깔의 태생은 같은데 하나는 태평양 건너온 듯 하나는 시간을 되돌린 듯

    먹, 그 빛깔의 태생은 같은데 하나는 태평양 건너온 듯 하나는 시간을 되돌린 듯

    최첨단 철학에서 가져오는 개념작업, 거의 독립영화 수준으로 작업하는 영상작업, 건설공사장 수준의 거대 설치작업, 이런 것들 사이에서 묻혀 버린 장르가 있다. 수묵이다. 그런 수묵의 앞날을 뚫어 보려는 두 개의 전시가 동시에 열리고 있다. 재밌게도 뚫어 보려는 건 같은데, 그 방식은 정반대다. 흥미롭다. 일단 전시제목부터 그렇다. 장재록(34) 작가의 전시명은 ‘가속의 상징’(Memento of Momentum)이다. 김범석(49) 작가의 전시명은 ‘산전수전’이다. ●張, 정교하고 실험적인 붓놀림… 벤츠·철골 구조물 등 현대 기계문명 그려 그리는 대상도 완전히 다르다. 장재록은 최첨단 기계를 다룬다. 벤츠, 아우디 같은 외제 고급 승용차를 그렸다. 최근에는 뉴욕 맨해튼에 있는 다리의 골조 구조를 아래에서 올려다본 장면을 그렸다. 김범석은 8년째 파묻혀 작업하고 있는 경기도 여주 주변 풍경을 담았다. 웅장하고 멋진 풍경은 아니다. 꼭 여주가 아니어도 될 법한, 산 있고 물 있는 그런 풍경이다. 그리는 방식도 대조적이다. 장재록은 정교하게 접근한다. 종이를 덧붙인 면천 위에다 작업하는데 먹물의 농담을 조절해 그린다. 밑그림 단계에서부터 최소 5단계 이상, 보통 6~7단계 정도 먹물의 맑고 어두운 정도를 그려둔다. 그에 맞춰 가장 진한 색을 칠하고, 물을 타서 연하게 한 뒤 다음 단계의 색을 칠하고, 이 과정을 반복해서 완성한다. 반대로 김범석은 아주 자유로운, 어떻게 보자면 제 멋대로 그리는 쪽에 가깝다. 종이를 세운 뒤 그 위에다 바로 붓질을 하는데 작품마다 먹물이 줄줄 흘러내린 자국이 역력하다. 붓질 역시 정교하게 계산을 해서 움직였다기보다 그냥 척척 가져다 찍었다고 하는 쪽에 가깝다. 두껍게 겹치다 보니 먹을 머금을 대로 머금은 종이는 딱딱하게 두껍다. 그래서 전시장 풍경도 다르다. 장재록의 전시장은 깔끔하고 세련됐다. 압도적이고 눈길을 끄는 작품이 몇점 나열되어 있고, 최근에 새롭게 시도한 설치작품도 있다. 전시장 전면에는 지금 작업 중인 재규어 작업도 있다. 정교한 작업을 자랑하려는 듯, 밑그림과 먹물도 갖춰놨다. 전시 기간 동안 작업을 진행할 예정이라니, 운 좋으면 작가의 작업 광경을 확인해볼 수도 있을 것 같다. 김범석의 전시장은 화이트큐브가 무색할 지경이다. 붓놀림을 익히기 위한 엄청난 예비작업량을 자랑하려는 듯, 1층 전시실엔 작가의 작업들이 빨래처럼 촘촘히 널려 있다. 2층에도 200호짜리 대형작업들이 즐비하게 깔려 있을 뿐 아니라 작가의 자유분방한 작업태도를 보여주려는 듯, 작업실에서 종이를 대놓는 큰 나무판자까지 떼어다 작품과 함께 걸어뒀다. 간이작업실 같다. ●金, 거칠면서도 자유분방한 붓놀림… 자연 그대로의 멋·전통 산수풍경화 고집 반응도 다르다. 장재록은 초창기에는 자신의 작품이 논란의 대상이었다고 했다. 첫 전시를 열었을 때 선생님은 물론 선·후배들 사이에서도 이런저런 말들이 나왔다는 걸 나중에서야 들었다고 한다. 아무리 그래도 먹물로 어떻게 저런 걸 그리느냐는 말이 나왔던 모양이다. 김범석은 거꾸로 미련하다는 소리를 들었다. 수묵의 시대가 끝나가는 마당에 웬 전통 수묵 풍경화냐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그런데도 고집스레 전통만 고집했다. 어떤 작품들에는 조개껍질 가루인 호분, 아교처럼 아주 기본적인 재료만 사용한 것도 있다. 아예 작품에서 흙냄새를 풍겨 보겠다는 각오에서다. 어느 쪽이 좋으냐는 취향의 문제겠지만, 오랜만에 접하는 대형 수묵전시라 반갑다. 장재록의 전시는 29일까지 서울 통의동 아트사이드갤러리. (02)725-1020. 김범석의 전시는 12월 16일까지 서울 신문로 성곡미술관 1관. (02)737-7650.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삼베지에 닿은 35만자 경계없는 신앙의 글자

    삼베지에 닿은 35만자 경계없는 신앙의 글자

    20일까지 서울 인사동 한국미술관에서 구당 여원구(80) 선생의 개인전 ‘3교 성서전’(三敎 聖書展)이 열린다. 8년 만에 열리는 개인전에서 구당 선생은 불교, 유교, 기독교 경전 전문을 옮겨둔 작품을 공개했다. 출품된 작품의 글자 수만 헤아려도 35만자에 이르는 분량이다. 가령 유교에서는 ‘논어’ 전문 1만 5937자를 해서체로 10폭 병풍에다 썼다. 불교에서는 7만자에 이르는 ‘법화경’ 전문을 서체만 달리해 두번 연달아 썼다. 기독교에서는 국한문 혼용으로 6폭짜리 병풍에다 마태복음 가운데 산상수훈 대목 4445자를 옮겨 뒀다. 이외에도 각종 경전에서 나오는 좋은 문구를 따내 별도의 소품들도 70여점을 만들었다. 이 소품들은 엄격한 형식에 매이기보다 글자의 뜻을 더 잘 드러낼 수 있는 방향으로 자유롭게 구성하고, 글자 옆에다 나름의 자세한 설명도 달았다. 경전에 조금 더 친숙하게 다가오라는 의미다. 구당 선생은 “세 종교가 바탕에서는 똑같다는 생각에서 기교를 배제한 채 경건하게 써 나갔다.”고 말했다. 또 이번 전시작들은 모두 화선지가 아니라 닥지나 삼베지에다 썼다. 화선지에 비해 먹을 빨아들이는 흡수력이 떨어져 작업하기가 상대적으로 어렵지만, 그만큼 독특한 느낌을 주는 데다 보존성이 뛰어나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02)720-1161~2.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다 좋아질 거라 말하지 마요 하루하루 살아내기도 버거워요

    다 좋아질 거라 말하지 마요 하루하루 살아내기도 버거워요

    “난 절박해서 말하는 거거든. 너희들은 소중하지 않다고. 그런데 애들은 그냥 웃고 말아. 난 답답해서 그러는 건데.” 머금었던 맥주 한 모금을 뿜을 뻔했습니다. 이상한 선생님 아닙니다. 실력으로 꽤 인기 높은 여고 수학 선생님의 푸념입니다. 대학만 졸업하면 곧장 전문직 여성이 될 것이라 ‘착각’하는 게 안타까워서 하는 말이라 했습니다. 멘토, 힐링, 참 인기였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소중한 너는 뭐든지 할 수 있다, 진정한 너만의 무언가를 찾도록 해라, 참 화려한 말들의 성찬입니다. 그런데 그런 말들이 공허하게 여겨질 때면 몇 년 전에 들었던 ‘너희는 소중하지 않아.’라던 저 수학 선생님의 일갈이 떠오릅니다. 따스한 위로의 말을 시니컬하게 비웃을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수평적 대화를 내세우는 멘토나 힐링을 볼 때면 좀 뜬금없어 보이지만 위르겐 하버마스에 대한 비판이 떠오릅니다. 하버마스는 근대 이성의 수호성인답게 의사소통이론이란 걸 만들었습니다. 이성적으로 대화해서 잘 풀자는 거지요. 비판도 거셉니다. “대화? 좋긴 좋은데 왜 의사진행봉은 당신이 잡고 있는데?”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사장님이 직원들 고충을 직접 듣겠다고 할 때 정말 솔직하게 말하는 사람은 바보입니다. 사단장님이 힘드냐고 묻는데 힘들어 죽겠다고 대답하는 병사는 바보입니다. 서로가 너무 잘 아는 이런 게임 같은 상황이 소통이란 이름으로 벌어지는 까닭은 겉으로만 동등한 척하려 들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위선적이라고 비난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버마스는 근대 이성을 전 세계에 퍼뜨린 사람이 유럽인이니 어떻게 해서든 고쳐 써야 한다고 선언한 사람입니다. 의사소통이론을 두고 순진하다고 비판할 수는 있겠지만 서구 문명에 대한 하버마스의 절박한 책임감까지 부정할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 힐링도 그렇습니다. 멘토들이 내세우는 말은 대부분 ‘기성세대로서의 책임감’입니다. 그 선의와 진정성은 존중받아야겠지요. 다만 형식적인 동등성에 그치는 건 아닌지 고민해 볼 여지가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강상중의 ‘살아야 하는 이유’(송태욱 옮김, 사계절 펴냄) 출간을 계기로 조금 다른 방향에서 힐링을 말하는 책을 꼽아 봤습니다. 빅토르 프랑클의 ‘책에 쓰지 않은 이야기’(박현용 옮김, 책세상 펴냄), 윌리엄 어빈의 ‘직언’(박여진 옮김, 토네이도 펴냄)까지 모두 3권입니다. 이들은 따뜻한 낙관보다 차가운 비관 쪽에 기울어 있습니다. ‘소중한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어!’라고 외치기보다 ‘우리는 소중하지 않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이냐.’에 초점을 맞춥니다. 각자의 색깔도 제각각이어서 매력적입니다. 강상중은 문학에서, 프랑클은 심리학에서, 어빈은 철학에서 답을 찾습니다. 구체적으로 강상중은 나쓰메 소세키, 프랑클은 자신이 정립한 심리학 로고테라피, 어빈은 로마시대 스토아철학을 거론합니다. 더 구체적으로 한 꼭지씩만 뽑아 볼까요. 재일교포로서 정체성 혼란을 겪었고 3·11 대지진으로 2만명의 사람들이 한꺼번에 사라지는 것을 지켜봤고 오랫동안 신경증을 앓던 아들을 마침내 먼저 떠나보낸 강상중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울증에 걸린 사람, 집 안에 틀어박혀 있는 사람, 자살에 실패한 사람 등 어려움에 빠져 있는 사람들을 그저 아무 생각 없이 시대의 병리로 취급하지 않고, 자기 실현에 실패한 평범한 무리로 보지 않고, 정신적으로 약한 사람이라며 잘라 버리지 않고, 그들을 닥치는 대로 자기다움의 탐구로 내모는 현실을 분명히 직시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치의 유대인 박해를 피해 달아날 수 있었으나 부모를 버릴 수 없어 오스트리아에 남았고, 사랑을 버릴 수 없어 나치 당국의 허락 아래 결혼하는 마지막 유대인 커플이 됐고, 결국 여동생과 자신을 제외한 모든 가족을 수용소에서 잃어버렸으나 그 경험을 로고테라피로 승화시킨 프랑클은 이렇게 말합니다. “심리 치료 속의 심리주의와 싸우면서 아픈 것이 절대로 비정상적인 게 아니라는 점을 부각하고 싶었다. 나는 요즈음 이것을 로고이론이라 부르곤 한다. 로고테라피는 모든 것을 병리학적인 것으로 환원시키는 주장과 맞서 싸울 것을 선포한다.” 둘에 비하면 어빈은 굉장히 소박합니다. 행복하고 싶어 한때 선불교에 심취했으나 “너무나 분석적”인 성격 탓에 스토아철학으로 옮겨 갑니다. 대표적인 스토아철학자는 세네카지요. 아시다시피 네로 황제의 스승으로 최고의 명예를 누리다 광폭해진 네로에게 내쳐져 자진하라는 명령을 받고 손목을 긋는데 그게 안 되니 발목 등 다른 곳을 긋고, 그래도 안 되니 증기탕에 들어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입니다. 울부짖는 주변 사람들에게 평온한 얼굴로 “스토이즘을 잊지 말라.”고만 말했습니다. 그런 세네카는 자신의 목표에 대해 “현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매일매일 악덕을 줄여 나가고 실수를 책망하는 삶을 사는 것이며 그렇게만 해도 충분히 발전하는 것”이라 해 뒀습니다. 이런 접근들이 와 닿는 이유는 이들이 섣불리, 그러니까 지식, 지위, 경험을 발판으로 미래를, 희망을, 내일을 얘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먼 미래의 찬란한 삶보다는 오늘 하루하루를 잘 버텨 내는 것이 우리의 삶이고 그것이 삶의 참된 의미라고 조용히 일러 줍니다. 반짝거리는 힐링의 말씀들에 비해 훨씬 더 민주적이고 그 덕에 한층 더 윤리적으로 다가옵니다. 그래서일까요. 이들은 한결같이 종교보다 인간 이성을 앞세우는데도 함부로 행복과 영생을 얘기하는 종교인들보다 훨씬 더 짙은 종교 냄새를 풍깁니다. “이성과 영성은 양립 가능하다.”는 강상중, “삶의 최종적인 의미는 우리의 수용 능력을 넘어서는 것일 수밖에 없다.”는 프랑클, “(스토이즘은) 내세관이 없을 뿐 종교와 다를 바 없다.”던 어빈의 얼굴은 하루하루 버텨 내는 우리의 얼굴과 닮았다고 해야 할까요. 이쯤이면 형식뿐 아니라 실질적으로도 동등해졌다고 해도 될까요.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편지로 풀어쓴 과학과 인간·정치

    ‘행위자연결망이론’ 주창자인 프랑스의 과학기술학자 브뤼노 라투르가 쓴 ‘브뤼노 라투르의 과학인문학 편지’(이세진 옮김, 사월의책 펴냄)는 반가운 편지다. 독일의 한 여대생에게 보내는 6통의 편지이다 보니 따뜻하고 친절하다. 독특한 의견을 내놓는 기괴한 프랑스 사람의 느낌이 없다. 그뿐 아니라 ‘우회’ ‘번역’ ‘시험’ ‘코스모그램’ ‘사물들의 의회’ ‘사실물’과 ‘우려물’ 같은 개념이 어떻게 나왔는지, 이 개념들을 발판으로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홍철기 옮김, 갈무리 펴냄)에서 근대와 탈근대를 모두 비판하면서 비(非)근대로 어떻게 치달아 가는지 확인해 볼 수 있다. 원제가 ‘코기타무스’(cogitamus)라는 점이 상징적이다. 근대인의 출발점은 코기토(cogito), “‘나는’ 생각한다”다. 라투르는 그 복수형 표현인 코기타무스, “‘우리’는 생각한다”로 고쳐 말한다. 여기까지라면 과학자와 과학 연구의 객관성 신화를 부인하는 구성주의 입장의 과학사회학과 비슷해 보인다. 그런데 라투르는 ‘우리는’의 범위를 확 넓혔다. 사람뿐 아니라 각종 실험도구 같은 ‘사물’들은 물론 연구자가 익힌 지식 체계나 익히도록 해 주는 교육 시스템 같은 지식과 제도 같은 요인까지 다 포함시켰다. 이 웬 엉뚱한 소린가 싶은데 라투르는 ‘우회’ 개념으로 돌파해 나간다. 도구, 제도, 지식 모두 출발점에서는 행위자였으나 너무 익숙해지면서 모두 사물화, 추상화됐다고 본다. 그러니까 우회가 우회를 거듭하면서 애초의 모습을 잃어버렸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라투르에게 과학이란 객관적으로 멀어지는 “해방과 근대화”라기보다 주관적으로 다가오는 “밀착과 생태화”다. 안철수의 입을 통해 유명해진 “미래는 이미 와 있다. 단지 널리 퍼져 있지 않을 뿐이다.”라는 사이버펑크 명언은 이 관점의 전환을 겨냥한 말이다. 과학이 발달할수록 인간의 삶 그 자체에 더욱 가까워지기 때문에 과학은 정치의 대상이어야 하고 지난 세월 종교처럼 세속화의 대상이어야 한다. 라투르가 자신의 주장을 ‘정치인식론’ 혹은 ‘과학인문학’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1만 5000원.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국제적 신뢰 관계로 터키출장 불가피… 용서를” 여수시장 또 맹탕 사과

    “국제적 신뢰 관계로 터키출장 불가피… 용서를” 여수시장 또 맹탕 사과

    김충석 여수시장의 ‘말뿐인 사과’가 시민들로부터 비난을 사고 있다. 김 시장은 시 직원의 76억원 공금 횡령사건에 대한 철저한 책임 규명은 뒷전으로 하고 유럽 출장길에 오르는 데 대해 시민들의 비판이 거세지자 지난달 22일에 이어 7일 대시민 사과 기자회견을 열고 재차 용서를 구했다. 김 시장은 이날 “터키 출장에 앞서 시민 여러분께 시정의 최고 책임자로 다시 한번 용서를 구한다.”면서 “회원 도시들과 오래 전부터 약속된 불가피한 출장인 만큼 믿어달라.”고 밝혔다. 또 “공금 횡령사건에 대해 현재 검찰과 감사원에서 조사 중”이라며 “재발방지 대책과 횡령 공금 환수대책, 관련자 문책 등을 추진하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여수시민협 김태성(45) 사무처장은 “김 시장의 사과 기자회견은 터키로 출국하기 위한 변명에 불과하다.”며 “개탄스럽다는 말밖에 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김 시장은 8일부터 3박 5일간의 일정으로 터키에 다녀오겠다는 입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이에 대해 시민단체들은 김 시장이 출국 전날인 이날 오후 3시부터 6시까지 시청 앞에서 ‘해외 출국 반대’를 주장하며 1인 피켓 시위를 벌였다. 시민들은 김 시장이 원론적인 답변만 되풀이하자 지방세 납세 거부운동을 펼치겠다며 반발하고 있다. 한편 여수시는 여수국가산단 연관단지 조성공사 업체로부터 각각 1000만원과 400만원의 뇌물을 받은 혐의를 받고 있는 강모(50·6급)씨와 김모(45·7급)씨를 직위해제했다. 여수 최종필기자 choijp@seoul.co.kr
  • 한때는 사람의 온기로 가득찼을 터 이제는 바래진 기억을 담아봅니다

    한때는 사람의 온기로 가득찼을 터 이제는 바래진 기억을 담아봅니다

    요즘 새로 짓는 건물들이야 이런저런 놀이터를 만들어 두지만, 어릴 적 최고의 놀이터는 동네 빈터였다. 그 가운데 최고의 빈터는 공장터였다. 공장이 있던 자리이다 보니 다른 빈터와 달리 반질반질한 바닥이 아주 넓게 펼쳐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 위에서 신나게 뛰놀았던 경험이 한번쯤은 있을 것이다. 12월 26일까지 서울 서소문동 대한항공 1층 일우스페이스에서 열리는 최영만 작가의 개인전 ‘터’(Lot)를 지켜보노라면 이 기억이 떠오른다. 작품에 따라 약간 기이하게 보이는 것도 있지만 작가의 작품은 대개 빈터다. 휑한 기운도 있지만 땅이 가진 두꺼운 질감 때문에 유화물감을 몇번이고 덮어 씌운 느낌이 나기도 한다. 작가의 고민은 한 화면에 시간을 담아내는 것이다. 사진은 순간이다. 찰나다. 맛깔나게 쓰인 단편소설처럼, 그 자체로 끝나지 않고 앞뒤로 연결된 이야기를 상상하게 만든다. 특징은 장점인 동시에 단점이다. 단점을 극복하려는 작품들도 나온다. 어떤 작가는 구석구석 다 찍은 자신을 이어 붙여 입체적으로 만든다. 공간감을 준 게 아니라 사진으로 공간 그 자체를 만든 것이다. 그렇다면 시간은? 흘러가는 시간을 쓱 베어내는 게 아니라 쭉 담아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작가의 출발점이다. 작업방식은 이렇다. 어떤 이야기가 묻어 있을 것만 같은 곳을 대상으로 선정한다. 그리고 해당 지역을 1㎡ 단위로 재단한다. 그 다음은 이 재단한 단위별로 촬영을 진행한다. 이 사진들을 한데 모은 뒤 디지털 작업을 통해 미세하게 이어 붙인다. 그러니까 한 장의 사진이긴 한데 그 한 장의 사진 속에는 또 개별적으로 한 장씩 찍어 나가는 시간의 층위가 있다는 것이다. 사진이라는 매체가 가진 순간성을 해체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눈앞에 보이는 것은 찰나의 평면인데 실제로는 시간이 어긋난 단층이 되는 방식이다. 작가가 이런 작업을 시도한 것은 땅 그 자체만도 아니고 인간 그 자체만도 아니라, 인간과 땅의 관계를 다루고 싶어서다. “어려서부터 건설과 파괴현장이 주요 관심사였어요. 건설과 파괴는 사람과 가장 밀접한 현상인데 이상하게 그런 장소는 사람들 관심에서 벗어나 있고, 가까이 있더라도 관계자 외 출입금지 구역이지요.” 그 속살을 한번 들여다보고 싶었다는 얘기다. 그렇다고 해서 애잔하고 슬픈 것만은 아니다. “관심 있는 것은 애수나 향수 같은 게 아니라 변신이나 변형을 앞두고 축적하고 있는 에너지”라고 말했다. 터라는 제목도 사람과 땅을 매개한다는 취지에서 붙인 것이다. 그래서 작업 대상도 사람의 체온이 짙게 배어 있는 곳으로 고른다. 집이 있었던 곳, 거대한 상가건물이 있었던 곳, 그리고 한때 공장이었다 철거된 곳, 아니면 허물기 직전 건물의 옥상들이다. 인간의 체취가 조금 더 과격하게 남아 있는 곳도 골랐다. 한창 개발 중인 동부산관광단지에 가서 수천 채의 집과 건물이 파괴된 수만평의 땅 위에 섰다. 모든 것이 사라져 버린 그곳 위에서 같은 작업을 반복했다. 말끔하게 밀어버린, 혹은 이런저런 쓰레기가 어지러이 남아 있는 그곳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자글자글한 주름살처럼 남아 있는 균열들이다. 작가는 이걸 두고 “고려청자에 은근히 퍼져 있는 잔금보다 더 아름답다.”고 표현했다. 그게 인간이 땅에 남긴, 터가 지닌 체온이다. 이번 전시는 일우사진상 수상작가 선정 기념 전시다. (02)753-6502.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커리어우먼에게 필요한건 [남자語]다

    카피 한번 끝내준다. “2535 커리어우먼에게 필요한 건 영어가 아니라 비즈니스 공용어다.” 영어보다 더 중요한 비즈니스 공용어? ‘남자어’다. 책 제목도 그렇다. ‘남자어로 말하라’(김범준 지음, 비즈니스북스 펴냄). 여자라도 회사원이라면 회사원답게 조직의 위계질서에 맞춰 말하는 법을 배우라는 것이다. 남자어 입장에서 ‘양성평등’ ‘페미니즘’ 같은 단어는 안드로메다 외계어다. 어머, 이게 뭐야? 가드 올리기도 전에 펀치가 막 쏟아진다. 커피? 까짓 거 팍팍 타줘 버리란다. 아예 ‘영혼을 담아’ 타주란다. 파스타 집에서 와인잔 들고 하는 회식? 우아한 건 네 친구들하고 수다 떨 때나 하란다. 삼겹살과 소주에 온몸을 불살라야 한단다. 숱한 펀치들의 결론은? 까라면 까라다. 그것도 아주 ‘잘’ 까야 한단다. 남자어는 이렇게 구성된다. ‘생존어’ ‘충성어’ ‘접대어’ ‘근태어’ ‘객관어’ ‘인정어’ ‘희생어’. 아이고 난 그런 고리타분한 사람 아니래도, 하면서도 슬그머니 웃는 부장님들의 얼굴과 뻣뻣하게 굳어 버린 채 눈알만 굴리고 있는 여직원들의 얼굴이 눈앞에 교차한다. 물론 저자도 안다. 대한민국의 환경, 남성 중심의 기업 문화, 수량화되지 않는 가사노동의 가치를 평가절하하는 사회를 마음껏 원망하란다. 그런데 원망한 다음엔? 저자의 출발점이다. 차별에 서러워 눈물 흘리는 가련한 피해자 코스프레나 하다 말 건가? 그럴 바에야 사장 자리 차지해서 비즈니스 공용어를 남자어에서 여자어로 바꾸라고 제안한다. 회전의자에 앉아 남자 직원한테서 “이사님, 오늘 회식은 이태원에 있는 벨기에식 홍합 요리 먹으러 가요.”라는 얘기를 들어보란다. 단, 그러기 위해서는 살아남아야 하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남자어를 배워야 한다. 1만 3000원.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男, 남자어를 말하다 대학문 나선 지 10여년째. 자취방에 몰려 앉아 새우깡에 소주 까놓고 첫사랑이 어쩌고 질질 짜던 놈들, 이젠 앞서거니 뒤서거니 ‘초짜’ 관리자의 길로 접어들었다. 책임, 선임, 주니어, 과장, 팀장…. 요즘은 워낙 직급 이름이 다양해서 뭐라 불러야 할지 모를 지경이지만 어쨌든 교복 다시 꺼내 입은 것처럼 어색하던 녀석들이 이젠 양복에 걸맞은 풍채를 하나둘씩 갖춰 가고 있다. 만나서 하는 얘기의 초점은 거의 비슷하다. 높으신 분들 비위 맞춰 가며 아랫사람 다독이며 성과를 내야 하는 데 대한 스트레스다. 뒷담화 좀 세게 하고 시시덕대던 시절은 가 버린 것이다. 스트레스 가운데 하나는 이거다. 여자 선후배들이 와서 말을 건네면 긴장된단다. 떨려서? 그럴 턱은 없다. 이야기는 무척 긴데 정작 알맹이가 없거나 알맹이가 뭔지 잘 이해가 안 될 경우가 많다는 거다. 개인적인 얘기야 뭐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가는데 일 얘기라면 답답해진다. 얘기하면 뭔가 해결되고 정리되는 게 아니라 그래서 뭐 어쩌라고 싶을 때가 더 많단다. 하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이렇게 하라는 건지 저렇게 하라는 건지. 몇 번을 그러고 나서 되물었단다. 그래서 이건 이렇게 하라는 얘기냐, 이러저러하게 해주길 원한다는 뜻이냐고 그때 나오는 반응은 대개 두 가지란다. 하나는 그렇게 길게 말했는데 아직도 못 알아들었어? 다른 하나는 이렇게 친절한 나에게 왜 화를 내? 그래서 결론은 둘 중 하나다. 남자는 바보이거나 좀팽이인 거다. 물론 장점도 있단다. 요즘 여직원들은 똑똑한 데다 승부욕도 있다. 특히 마케팅 분야에서 일하는 친구들은 여성들의 이런 능력을 아주 높이 평가한다. 그런데도 이런 일에 몇 번 부딪치고 나면 파도처럼 밀려드는 궁금증은 어쩔 수 없단다. 나를 간 보는 건가? 아니면 자기는 일 하나 처리하는 데 그렇게 많은 고민을 하는 사람이니까 기특하고 대단하게 여겨 달란 건가? 그것도 아니면 그냥 자기처럼 소중하고 귀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이 이런 쓸데없는 부분까지 신경 쓰니까 불쌍하지 않으냐고 하소연하는 건가? 그런데 우리만 그랬던 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책에 나오는, 유리천장을 뚫은 한 대기업 여성 임원의 얘기다. “여자들은 상황을 A부터 Z까지 설명해 공감을 얻으면 잘 따라오지만 남자에게 그렇게 하면 무능하게 비칠 수 있더라. 남자들은 경상도식으로 용건만 말하는 걸 선호하더라. 책임자 직급에 오르는 여자 후배들은 꼭 불러서 얘기한다. 경상도식으로 말하는 법을 배우라고.” 맞다. 끼리끼리 논다고, ‘경상도 보리문둥이’들끼리 둘러앉아 그간 자책만 하고 살았다. 바보도 좀팽이도 아니었다. 그리고 여자 선후배들도 출발점은 선의였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女, 남자어를 말하다 회사에 갓 들어와서 얻은 별명이 ‘다나까’였다. 무슨 말을 하든 말미는 “~입니다.” 아니면 “~입니까?”로 끝냈다. 여중-여고-여대를 나왔다는 아이가 막 자대 배치를 받은 이등병이나 쓸 법한 말투를 입에 달고 돌아다니니 신기했던 모양이다. 급기야 “쟤는 여대 ROTC 출신”이라는 농담 섞인 루머까지 나돌았다. 6년 전 입에 붙지도 않는 ‘다나까’를 불경처럼 외우고 다녔던 건 여대 출신이라는 꼬리표를 떼어 보려는 절박함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여성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의 총합-나약하다, 이기적이다 등-을 상징하는 ‘여대’와 나를 동일시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야 이 사회에서 인정받을 수 있다는 ‘근거 없는’ 오기가 그때의 나를 지배하고 있었다. 친하게 지내는 대학 동창들 중에는 ‘다나까’가 많다. 당시 학교에서 여대생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뉘었다. 티셔츠에 운동화 신고 다니는 애들과 곱게 화장을 하고 하이힐 신고 등교하던 애들. 페미니스트에게 혼날 만한 이분법이지만 실제로 그랬다. 돌이켜 보면 주로 전자는 ‘남자어’를, 후자는 ‘여자어’를 썼던 것 같다. 과제 때문에 조모임을 할 때면 “어머, 어떡하지? 나 오늘 중요한 약속 있는데…뒷일은 너희한테 맡길게.” 하며 바람처럼 사라지던 친구들은 분명 곱게 화장을 하고 하이힐을 신은 아이들이었다. 그러면 티셔츠에 운동화 신은 아이들이 꾸역꾸역 과제를 마무리하느라 밤을 지새우곤 했다. 바람처럼 사라졌던 그때 ‘하이힐’들은 지금 다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 분명한 건 내 주변의 많고 많은 ‘다나까’들은 지금까지 휴가 한번 제대로 못 가고 꿋꿋하게 회사에 다니고 있다는 점이다. “아잉, 부장님 이건 힘들어서 못 하겠어요.”라는 콧소리가 나오지 않아 속으로 악 소리 내며 미련스럽게 야근을 하는 친구가 부지기수다. 회식 자리에서 “술 못 마셔요.”라고 손사래를 치면 혹시나 폭탄주 건네는 부장님 손이 ‘무안’해질까 봐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꿀꺽꿀꺽 마시고는 2차로 간 술집 화장실에서 기절한 친구도 있었다. 그런데 요즘 이렇게 눈물겹게 버티던 내 주위의 ‘다나까’들은 똑같은 의문을 갖고 있다. 남자 세계에서 남자어를 구사하며 아등바등 버틴다고 뭐가 남지? 여성들이 여성성을 인정받으며 일할 수 있는 사회가 만들어지기는커녕 남자 중심으로 돌아가는 지금 체제만 강화시켜 주는 거 아닌가 하는 질문 말이다. 저자는 “남자어 잘 써서 성공하라.”는데 그렇게 성공해 봤자 지금 체제가 계속된다면 여성을 짓누르는 유리천장은 깨질 리 없는 것 아닌가. 그리고 더 중요한 건, 아무리 남자어로 말하고 남자처럼 행동하려 해도 몇몇 남자들은 여성 동료를 그저 여성으로만 보고 있지 않나? 맞잖아요, 저기저기 여자 부하 직원에게 치근덕대는 김 부장님! 김민희기자 haru@seoul.co.kr
  • 아이와 놀며 가르친 아빠의 수학이야기

    ‘내 아이와 함께 한 수학 일기’(알렉산더 즈본킨 지음, 박병하 옮김, 양철북 펴냄)는 한국 취향이다. 저자도 말해 뒀다. “취학 전 아이들을 위한 수학문제집”으로 읽어도 된다고. 저자는 러시아 모스크바국립대 산하 콜모고로프 수학물리고등학교, 모스크바국립대 수학과를 졸업했다. 우리로 치자면 국립과학수학영재학교를 거쳐 서울대를 졸업한 수재쯤 된다. 그런 그가 아들 지마에게 4년간, 딸 줴냐에게 2년간 직접 문제를 개발해 가며 수학을 가르친 내용이다. 문제, 풀이과정, 저지르기 쉬운 실수, 오답을 바로잡아 주는 아빠의 설명이 상세하다. 그 덕인지 지마는 파리6대학 수학과 교수, 줴냐는 파리8대학 영화학과 부교수가 됐다. 제목, 이야기가 완벽하다. 검증도 충분하다. 아이들을 가르친 경험으로 처음엔 간단한 언론 기고문이나 세미나 자료를 만들었는데 이게 대히트를 쳐 버렸다. 심리학자, 교육학자 등 주변 전문가들이 ‘유아 수학 교육의 고전’이라 격찬했고 책을 내라고 강권했다. 그런데 그 즈음 소련이 붕괴됐고 프랑스 보르도대학 컴퓨터과학과 교수로 자리 잡았다. 이 과정이 정리된 뒤에 낸 책이다. 그다음부터는 입맛 버릴 내용이다. 저자는 ‘선행학습’을 비웃는다. “모든 것은 때가 있는 법이다. 어차피 일어날 것을 미리 추월할 필요가 없다.” 추월해서 가르쳐 봤자 왜 무용지물이 되는지 말 그대로 생생하게 밝혀 뒀다. 스파르타식 교육도 별로다. 아빠가 직접 가르쳤다지만 그 시간은 고작 1주일에 한 번, 그것도 15분에서 1시간 정도다. 이마저도 빼먹은 적이 많다. 수학문제 풀이 과정이란 것도 공식을 적용한 해법보다는 아이들 반응에 대한 아빠의 관찰 일기에 더 가깝다. 이런 태도는 곳곳에서 드러난다. 수학은 싫지만 아이들에게 가르치고는 싶다는 어느 엄마의 편지에 “파이 굽는 것을 좋아하십니까. 그러면 아들과 함께 파이를 구워 보십시오.”라고 답장한다. 아들의 “커다란 지적 성장”이 나올 때는 언제나 “아무것도 하지 않은 시간들”이 있었다고 증언한다. 그러니까 수학자라서 수학공부를 시킨 게 아니라 수학으로 놀아준 거다. 수학책인데도 차가운 파란색 체크 무늬 셔츠보다 재밌는 그림이 그려진 따뜻한 스웨터 같은 느낌을 주는 이유다. 2만 3000원.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술잔 꺾고 해롱대는 나귀, 하는 짓이 꼭 인간일세

    술잔 꺾고 해롱대는 나귀, 하는 짓이 꼭 인간일세

    화가 김영미(51)는 7일부터 12일까지 서울 관훈동 인사아트센터에서 7년 만에 개인전을 연다. 전시 제목은 ‘동물로 담은 실존의 우리들’. 제목에서 짐작하듯 그림의 주된 소재는 동물들이다. 그리고 동물을 통한 인간에 대한 풍자다. 그래서 그의 작품 속 동물들은 동물들이라지만 하는 짓은 사람과 똑같다. 공원 벤치에 오랜만에 오붓하게 앉아 놀기도 하고, 배 타고 물놀이를 즐기거나, 나무 아래서 쉬고 있거나, 술집에 앉아 잔을 꺾느라 여념이 없다. 그러니까 “사람은 못 되더라도 괴물은 되지 말자.”던 영화 대사나, 우리네 정치현실이 꼭 동물들 놀음하고 비슷하지 않으냐던 우화 ‘동물농장’ 같은 얘기다. 작가는 원래 사람을 집중적으로 연구해 왔다. 24년 동안 매주 모델을 작업실에 불러 와 인간에 대한 연구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런 작가가 갑자기 동물로 돌아선 까닭은 풍자 때문이다. “인간에 대한 직설법을 살짝 비틀고” 싶었고 그래서 “인간을 가리고 동물로 변형된, 화면에 그려진 온갖 동물은 말하자면 우리의 모습이고 나이며 타인들”이라는 것이다. 여러 동물이 많이 등장하는데 그중에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나귀. 쫑긋한 귀에 탱글탱글한 얼굴이 마치 돼지 얼굴에 토끼 귀를 달아놓은 것 같은데 작가는 나귀를 의도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 눈, 맑고 밝다기보다 퀭하다. 작가가 나귀에 집중하게 된 것은 풍자의 연장선상에 있다. 그 어느 짐승보다 지구력이 뛰어나지만, 겁이 많아 옴짝달싹 못하는 것을 똥고집이라 오해받는 동물이다. 여기다 못난 외모까지 겹쳤으니 이래저래 희화화되는, 그래서 고생한 만큼 그다지 대접받지 못하는 동물이기도 하다. 작가는 이 모습에서 오늘날 현대인들의 모습을 발견했다고 한다. 니체에게 낙타가 있다면, 작가에겐 나귀가 있는 셈이다. (02)736-1020.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인사동 32곳 갤러리 투어 도장 찍고 판화 받아볼까

    7일부터 13일까지 서울 인사동 거리에서 인사미술축제가 열린다. 문화특구로서 인사동을 보존, 발전시키자는 취지에서 2007년 시작된 행사다. 올해 주제는 ‘힐링 인사 - 마음의 여유를 주는 그림전’을 내걸었고 인사동 일대 화랑 31곳이 참여, 작가 204명이 만든 960여점의 작품들을 선보인다. 최근 인사동에 문을 연 아라아트갤러리에서는 미대생과 미대 대학원생을 대상으로 진행한 공모전에서 선발된 예비작가 100명의 작품을 선보이는 ‘굿 초이스 - 미래의 작가전’이 열린다. 관람객을 위한 특별 이벤트도 마련됐다. 축제 기간 동안 참가 갤러리 31곳과 특별전이 열리는 아라아트갤러리까지 둘러보고 32곳에서 관람 확인 도장을 받아 오면 매일 선착순으로 30명에게 프린트 버전이 아니라 판화로 제작된 그림들을 제공한다. 축제 참여화랑이나 인사동 홍보관에 들르면 참가할 수 있는 리플릿을 받을 수 있다. 또 축제가 끝나는 14일 오후 2시에는 달을 주 소재로 토속적 추상화를 즐겨 그렸던 고 권옥연 화백의 판화 5점을 추첨으로 나눠준다. 응모는 축제 기간 동안 인사동 홍보관에서 할 수 있다. 이번 행사 주최를 맡은 윤용철 인사전통문화보존회 회장은 “관광이 중요하다 하더라도 문화를 앞세운 관광이어야 하고 문화를 앞세우면 자연스레 관광은 뒤따라오게 되어 있다.”면서 “이를 위해 내년부터는 미술축제를 인사동 지역축제로 확대개편하고, 그림에 이어 골동품, 공예품 아트페어 같은 행사도 만들어 나가겠다.”고 말했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여수시민단체 “시장 물러나라”

    “허술한 재무관리 시스템이 어처구니없는 대형 국고 손실을 초래했습니다.” 광주지검 순천지청이 지난 29일 76억원을 횡령한 김석대(47)씨를 특가법위반(국고손실) 등의 혐의로 구속기소하면서 전남 여수시의 부주의한 행정처리를 지적한 말이다. 지역민들은 이러한 총체적인 회계부실이 드러나면서 여수시가 지난 22일 대시민 사과문을 발표한 이후에도 10일 넘게 뚜렷한 해결 방안을 내놓지 못하자 크게 분노하고 있다. 시민들은 “여수시를 비리 도시로 만들었으면서도 누구 하나 책임지겠다는 사람 없이 시간만 축내고 있다.”고 반발하고 있다. 더구나 김충석 시장이 “‘회계과에 엄청난 비리가 있으니 잡아내라’는 꿈을 통해 비리사건에 대한 암시를 받았고, 이번 일은 김충석이 시장이기 때문에 밝혀졌다.”고 말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시민들의 감정을 더욱 자극시켰다. 급기야 여수시민협, 여수환경운동연합, 여수YMCA·YWCA, 여수일과복지연대, 여수사랑청년회 등 여수지역 6개 시민단체들이 31일 김씨의 공금횡령 사건에 대해 ‘시장 사퇴’를 언급하는 성명서를 발표하는 등 시의 책임 있는 대책을 요구하고 나섰다. 여수시민협 김태성(45) 사무처장은 “민선 5기 여수시는 청렴 행정을 강조했지만 이번 사건으로 회계 및 감사제도의 허술함, 관리부실 등의 문제점들이 드러났다.”며 “시가 조금만 관심을 기울였어도 이번 비리를 막을 수 있었다.”고 지적했다. 한편 광주지검 순천지청은 이날 김씨의 아내에게 돈을 빌려준 사채업자 김모(45)씨에 대해 대부업 등의 등록 및 금융이용자 보호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구속영장을 청구하는 등 수사를 확대하고 있다. 최종필기자 choijp@seoul.co.kr
  • 항일운동 투신 영국인 조지 루이스 쇼

    항일운동 투신 영국인 조지 루이스 쇼

    다음 달 1일 밤 10시 KBS 1TV 역사스페셜은 ‘50년 만에 찾은 훈장’을 방영한다. 일제강점기 때 한국 독립을 위해 투신한 영국인 조지 루이스 쇼의 자취를 따라 3년간 중국, 일본, 영국 3개국을 누볐다. 아일랜드계 영국인인 조지 루이스 쇼는 중국 단둥에서 ‘이륭양행’이라는 무역회사 겸 운수회사를 운영했던 사장님. 그런 그에게 붙은 별명은 ‘얼굴 없는 테러리스트’다. 왜 이런 별명이 붙었을까. 1919년 상하이 임시정부가 세워졌을 때 이륭양행 2층 사무실을 임시정부 비밀정보국에 제공해서다. 김구, 김가진 등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의 비밀 활동을 도왔을 뿐 아니라 독립운동에 필요한 무기를 운반하고 군자금을 전달했으며 독립운동가의 출입국을 돕고 국내 및 임시정부와 연락하는 등 중요한 창구 역할을 했다. 독립운동가 김산을 복원한 미국 작가 님 웨일스의 ‘아리랑’에는 김산의 목소리를 빌려 “그는 일본인을 거의 영국인만큼이나 싫어했다. 그래서 큰 위험을 무릅쓰고 한국의 독립운동을 열렬히 지원해 주었다.”고 쓴 대목이 있다. 보다 못한 일제가 영국과의 외교 마찰을 감수하면서 그를 내란죄로 체포했을 정도였다. 이 때문에 우리나라도 1963년 그에게 ‘건국공로훈장단장’을 추서했지만 전달할 방법이 묘연했다. 후손을 찾아 헤맨 끝에 올해 8월 16일 손녀에게 훈장을 전달할 수 있었다. 제작진은 석방 이후 그의 행적을 쫓았다. 영국 정부가 강력히 항의해 석방된 조지 루이스 쇼는 다시 독립운동 지원에 나섰다. 일제가 가만둘 리 없었다. 일본 외무성 외교사료관 문서에서는 일제가 그의 독립운동 지원을 막기 위해 별도의 해운회사를 세워 경쟁시키는 등 갖은 탄압에 나섰던 정황 등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런데 묘한 인연이 있다. 그의 아내는 일본인이었고 여지껏 중국인으로 알려졌던 그의 어머니도 일본인이었던 것이다. 그의 아들 역시 일본인 여성과 결혼했다.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극도의 혐오감을 드러내면서 한평생을 항일운동에 바쳤던 인물이었는데도 3대가 일본인 여성과 결혼했다. 제작진은 조지 루이스 쇼의 부인이 일본인이었음에도 항일운동을 적극적으로 도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또 하나 재밌는 것은 임시정부의 비밀 아지트였던 이륭양행의 위치다. 중국 지린성 당안관(국가기록보관소)을 찾은 제작진은 이제껏 알려진 이륭양행의 위치가 잘못된 게 아니냐는 질문을 제기한다. 이와 함께 이륭양행과 이륭양행 창고, 조지 루이스 쇼의 집 위치와 공간 구성 등을 새롭게 정리했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서울광장] 朴·文·安의 녹색 경쟁/이도운 논설위원

    [서울광장] 朴·文·安의 녹색 경쟁/이도운 논설위원

    지난 금요일 서울 정동의 프란치스코회관에서 박근혜·문재인·안철수 후보의 환경·에너지 정책 토론회가 열렸다. 아마도 세 후보의 캠프가 모두 참석해 특정 분야의 정책에 대해 토론회를 가진 것은 처음일 것이다. 시간에 맞춰 갔지만, 행사장은 이미 방청객들로 가득 차 있었다. 환경과 에너지로 대표되는 ‘녹색 정책’에 대한 관심이 점점 커져가고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세 후보 캠프의 차이는 발표자들의 정책 발표 과정에서 고스란히 나타났다. 박근혜 캠프의 윤성규 지속가능국가추진단장은 정책을 발표하지 않았다. 모든 정책은 박 후보가 최종 결정하고, 박 후보가 직접 발표해야 한다는 이유였다. 윤 단장은 토론회 주최 측에 사전에 양해를 구했다고 했지만, 토론장은 잠시 술렁거렸다. 윤 단장은 패널들과의 질의답변을 통해 캠프의 녹색 정책 방향을 어느 정도 설명했다. 문재인 후보 측의 김좌관 시민캠프 공동대표는 현 정부의 정책에 대한 비판, 특히 4대강 사업에 대한 비판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김 공동대표는 4대강 사업이 “단군 이래 최대 부실공사”라고 비난하고, 4대강에 대한 국정조사와 특검을 거쳐 구상권을 청구하고 관련 비리 연루자들은 사법처리하겠다고 밝혔다. 솔직히 안철수 후보 측의 녹색 정책에 대해서는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사람도 몇 명 되지 않는 무소속 후보의 캠프에서 제대로 된 정책이 나올까 하는 편견이 있었다. 그러나 안병옥 환경에너지포럼 대표가 준비해온 정책 자료는 가장 정리가 잘 돼 있었다. 특히 ‘통일시대를 대비한 남북 환경·에너지 협력 확대’라는 정책 공약은 다른 캠프의 정책발표에서는 들을 수 없는 내용이었다. 토론회 패널로 참석한 경기개발연구원의 고재경 연구위원이 내가 묻고 싶었던 질문을 던졌다. “현 정부의 녹색성장 정책을 어떻게 평가하느냐.”는 것이었다. 세 후보 캠프의 평가는 다소 엇갈렸다. 박·문 후보 측은 비판 일색이었다. 윤성규 단장은 “녹색성장에서 제시된 지표들은 유엔 등 국제사회의 지표들과 맞지 않는다.”면서 “지속가능발전과 거리가 멀기 때문에 앞으로 바로잡아 나가겠다.”고 말했다. 김좌관 공동대표는 “현 정부가 국제사회에서 합의된 지속가능발전의 개념을 왜곡시켰다.”면서 ‘녹색성장’을 대체하는 ‘생태성장’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그에 비해 안 캠프의 평가는 오히려 중립적이었다. 안병옥 대표는 “녹색성장은 지속가능한 발전의 세 요소 가운데 사회를 배제하고 경제와 환경의 관계에만 주목했다.”고 비판했지만 “성과가 있다면 발전적으로 계승하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세후보 캠프의 정책 발표를 들으며 세 가지를 느꼈다. 우선, 대선 후보들이 환경과 함께 에너지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는 것은 다행스럽다. 포천(Fortune)이 매년 발표하는 글로벌 500대 기업의 순위를 보면, 에너지 기업들이 상위를 독점하고 있다. 전략 물자인 에너지에 대해 우리나라는 너무나 오랫동안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둘 째, 원자력과 신재생에너지에 대한 더 현실적인 평가가 필요하다. 문 캠프와 안 캠프는 원전 신규 건설을 중단하고 가동 중인 원전의 수명 연장을 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현재와 같은 고유가·기후변화 시대에 장기적인 에너지 수급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지 우려된다. 또 문 캠프는 2030년까지 20%, 안 캠프는 2030년까지 30%라는 신재생에너지 발전 비중 정책도 제시했다. 그러나 3년 앞을 내다보기도 어려운 에너지 시장에서 2030년을 공약하는 것은 공허한 일이다. 다만 안 캠프가 임기 중에 신재생에너지 발전 비중을 6%로 늘리겠다고 밝힌 것은 다소 야심차지만 추진해볼 만한 목표다. 셋째, 세 캠프는 모두 집권하면 녹색성장이라는 용어를 바꾸려 할 것 같다. 꼭 그래야 한다면, 녹색성장보다 훨씬 나은 용어를 제시하기 바란다. ‘생태성장’이나 ‘지속가능발전’ 같은 용어에는 뭔가 세상을 변화시킬만한 힘이 부족해 보인다. 더 나은 용어가 없다면, 그냥 놔두는 것도 방법이다. dawn@seoul.co.kr
  • 눈두덩이까지 움푹 파이고 굴곡진 노인들 얼굴에 살아 온 세상을 담다

    눈두덩이까지 움푹 파이고 굴곡진 노인들 얼굴에 살아 온 세상을 담다

    바짝 붙어 그림을 뜯어보면 험준한 산악 지형이다. 물감들이 들러붙어 있는 모양새부터 그렇다. 궁둥이가 펑퍼짐해지게 눌러 퍼져 앉아 있다기보다 날을 세운 채 결에 따라 일렬로 쭉쭉 엉겨붙어있다. 멀찌감치서 보면 탁한 느낌인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빨강, 노랑처럼 화려한 원색도 아낌없이 쓰여있다. 전체적으로 단단한 덩어리감, 그러면서도 세부적으로는 삐죽빼죽 날선 느낌, 부분적으로 화려할 수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탁한 느낌이 영락없이 화강암 덩어리 분위기다. ●“‘큰 바위 얼굴’ 우리 식으로 그려보고 싶었죠” 그러니까 장비 제대로 안 갖추고 함부로 걸어다니다 도가니가 거덜날 수 있다는, ‘악!’ 소리난다는 우리나라 악산(嶽山) 느낌이 물씬 풍겨온다. 더구나 그림 사이즈는 200호를 넘나드는 대작들. 벽에다 걸어놓지 않고 바닥에 깔아놨다면 산악지대 축소 모형, 요즘으로 치자면 구글어스 캡처 사진이라 해도 이상하지 않을 분위기다. 갤러리를 한 바퀴 다 돌고나면 왠지 산을 오르내린 뒤 숨이 가빠지는 듯한 느낌이다. “그렇게 봤다면 잘 본 겁니다. 얼굴을 그리되 우리 식으로 해석한 나다니엘 호손의 ‘큰 바위 얼굴’ 같은 걸 그려보고 싶었어요.” 11월 13일까지 서울 견지동 아라아트 갤러리에서 개인전 ‘넋, 뼈와 살’을 여는 권순철(68) 작가. 작가가 그리는 얼굴의 주인공들은 평범한 사람들이다. 아니 약간 부족한 사람들이라 해야 할른지 모르겠다. 편안한 노후 생활을 위해 은퇴 이후 몇년 살 것인가 계획 세워 재테크와 연금저축에 힘쓴 사람들의 얼굴이 아니다. 젊은 시절 열심히 살아서 강남에 집 한 채 있는 게 전부인데 웬 세금 폭탄이냐고 치를 떠는 사람들의 얼굴이 아니다. 실버타운 광고에 나오는 아들, 손주, 며느리에게 존경받는 윤기 나는 노인도 아니다. 조국 근대화의 길에 나서 한 평생 뼈빠지게 일했건만 여전히 돈 필요하면 직접 일해 벌어 쓰라 내몰리는 얼굴들, 그래서 국가 재정을 위태롭게 만들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의심받는 얼굴들, 얼마 되지도 않는 돈을 복지라며 생색내면서 쥐어주다가도 그마저도 떼먹는 게 아니냐고 의심받아가며 살아가는 얼굴들이다. ●서울역전·탑골공원·시골장터 찾아 다니며 그려 작가는 왜 이런 얼굴들을 골랐을까. 답은 간단했다. “우리가 살아온 게 그렇잖아요.” 해방, 분단, 전쟁, 냉전, 이념, 개발, 독재 같은 단어들이 줄지어 머릿속을 지나간다. 작가가 저런 얼굴을 구하기 위해 돌아다니는 곳도 그렇다. “서울역전이나, 탑골공원, 시골장터 같은 곳을 많이 찾았지요. 물론 기분 나빠 하실 수 있어서 좀 멀찌감치서 그렸지요.” 작가는 그런 곳에서 만난 사람들의 얼굴들에서 “어떤 신성성” 같은 것을 느꼈다고 했다. ●추상적인 느낌 강한 ‘넋’ 시리즈도 눈길 그래서 배경은 가끔 회색이나 짙은 푸른색이 비칠 뿐 거의 대부분이 검은색이다. “조금 밝은 색이나 하얀 캔버스 바탕을 고스란히 남겨도 보고 싶었지만 그건 우리가 살아왔던 세상이 아닌 것 같아서” 그렇게 하지 못했다 한다. 그러고 보니 작가가 그린 얼굴들 가운데 눈을 제대로 뜨고 있는 인물도 없다. 눈두덩이까지 움푹 패어버렸으니 이미 세상과의 끈조차 놓아버린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이런 얼굴들을 뭐라 불러야 할까. 누군가는 세상 흐름에 운때가 맞아떨어져 불멸의 업적을 이룩하는 사람들을 일러 ‘세계사적 개인’이란 멋드러진 표현을 썼다. 그러나 세계사의 변방에서, 중심부에서 미친 듯 밀려드는 격랑을 온몸으로 다 받아내야 했던 이들 노인들에게 ‘세계사적 개인’이라는 말은 너무도 낭만적인 사치일 뿐이다. 작가가 정치인, 재벌 회장님이 아니라 이 노인들의 얼굴로 한국의 큰 바위 얼굴을 만들고 싶었던 것도 그 때문이 아니었을까. 훨씬 추상적인 느낌이 강한 ‘넋’ 시리즈와 오랜 유럽 체류 경험을 살려 그린 ‘홀로코스트’ 작품들도 눈에 띈다. (02)743-1643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뇌가 당신의 운명을 좌우한다… 거짓말이다

    뇌가 당신의 운명을 좌우한다… 거짓말이다

    자, 영어 공부를 몇 살부터 시켜야 원어민처럼, 아니 네이티브 스피커처럼, 아니 더 정확하게는 영국식·남미식·인도식에 물들지 않은 순도 100%의 정통 아메리칸 스타일의 영어를 우리 아이가 구사할 수 있을까. 핵심은 시기다. 아주 어릴 적 영어를 배우면 모국어처럼 자연스럽게 젖어들어 습득할 수 있는데, 나이 들어 영어를 배우면 제2외국어처럼 억지로 외우는 학습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모국어와 제2외국어가 갈리는 시점은 지금껏 알려지기로 대략 12살. 그러니까 12살 이전에는 아이가 얼마나 자연스럽게 (실은 부모, 학교, 학원 등의 부자연스러운 연출에 따라) 영어를 접하느냐가 문제라는 것이다. 그래서 조기교육에다 몰입교육 광풍이 한때 휘몰아쳤다. 이 주장의 뿌리는 어디일까. 추적해보니까 이렇다. 두개골을 열어 뇌를 확인해볼 수 없었던 시절엔 흥미로운 관찰 결과가 있었다. 여러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들 가운데 실어증에 걸렸다 회복되는 사람들을 관찰해 보니 증세가 악화될 때는 특정 언어만 더 크게 저하되더니 회복될 때에도 각 언어별 회복속도가 달랐다는 것이다. 전기자극실험에서도 비슷한 결과가 나왔다. 결국 언어별로 담당하는 뇌의 부위가 다른 게 아니냐는 추론이 나왔다. 이후 fMRI(functional Magnetic Resonance Imaging·기능성 자기공명장치) 기술이 발달하자 과학자들은 검증작업에 들어갔다. fMRI는 신경활동의 변화에 따라 해당 뇌 부위의 혈류량이 달라진다는 점에 착안해 혈류량별로 색을 달리해 뇌의 활성화 정도를 시각적으로 도드라지게 보여주는 기법이다. 흔히 뇌 촬영 영상이라며 대중매체들이 보여주는 게 이것이다. 이 fMRI 장비를 이용한 가장 영향력 있는 연구결과는 1997년 발표된 미국 과학자들의 논문이다. 모국어에 비해 제2외국어는 더 많은 뇌의 활성화를 요구했다. 그러니까 의식적으로 더 많이 노력해야 겨우 익힐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후속 연구에서는 이 결과를 부정하는 경우도 많다. 실험조건에 따라 다른 결론이 나온다, 경우에 따라서는 제2외국어를 배우는 연령과 뇌부위가 무관하다는 정반대의 결론이 나오기도 한다는 정도의 반론은 기본이다. 가장 근본적인 비판은 뇌의 작동이라는 것 자체가 어떤 특정 부위에 1대1로 대응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광범위한 네크워킹 효과이기 때문에 시각적으로 분명히 확인해볼 수 있다는 이유로 fMRI 자료에만 의존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과학적 연구결과보다 한층 더 중요한 것은 fMRI 자료의 ‘산업적 활용 가능성’이다. 영어조기교육시장에 한 줄기 서광으로 작용한 것이다. 그 다음에 어떤 현상이 일어났을까. 앞선 1997년 논문은 제2외국어 습득시기를 11.2세로 잡았다. 그렇게 잡은 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게 아니다. 과학적 실험이라면 아마 다들 동감할 것이다. 11.2세란, 다른 조건이 영향을 끼치는 것을 막기 위한 실험의 통제조건이다. 그런데 이것이 12살 넘어가면 제2외국어를 배우기 어렵다는 결론으로 둔갑해 버린 것이다. 더구나 fMRI 촬영영상은 기본적으로 혈류량의 차이, 그러니까 정도의 차이를 드러내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12살 이전에 배우는 언어와 12살 이후에 배우는 언어가 각기 다른 ‘폴더’에 저장되는 것으로 해석됐다. 혈류량은 더 이상 흐르는 것이 아니라 한 곳에 고여 있는 것으로 해석되어 버렸다. 여기에다 임신 16주부터 청각기관이 형성된다는 ‘사운드 코딩 이론’에 3세 이전에 모국어 습득이 끝난다는 ‘결정적 시기 가설’까지 합쳐지면서, 임신 때부터 시작해 12살까지 영어 폭탄을 쏟아부어야 한다는 결론이 도출된 것이다. 뇌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뇌 결정론, 신경 결정론에서 벗어나기 위해 등장한 것이 뇌와 환경과의 상호작용을 강조하는 ‘뇌 가소성’이라는 특징이다. 그런데 이 특징이 오히려 “영어 능력 향상을 위해 뇌를 변화시켜야 하다는 식의 담론을 형성하는 데 기여”해버렸고, 결과적으로 “영어 실력은 영어 뇌라는 물리적 실체로부터 나온다는 담론이 확산”되면서 “뇌 결정론 또는 신경 결정론이 강화”되는, 의도와는 전혀 다른 희한한 결과를 낳게 됐다는 것이다. ‘뇌과학, 경계를 넘다’(신경인문학연구회 지음, 바다출판사 펴냄)에는 법학, 과학철학, 철학, 심리학 전공자들의 글 16편이 실려 있다. 그래서 이 책의 미덕은 두 가지다. 하나는 글 쓴 사람들의 전공에서 이미 드러나듯, 또 이들의 연구 모임 이름이 신경‘과학’연구회가 아니라 신경‘인문학’연구회라는 점에서 보듯 뇌과학을 과대포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휴머니즘 가치를 앞세운 최첨단 과학 서적에서 흔히 저지르는 장밋빛 미래에 대한 전망보다 엄밀한 균형감각을 택했다. 가령 기계가 뇌파를 읽어내 뇌만 살아 있는 사람의 지령을 받아 움직일 수 있을 것이라는 BMI(Brain-Machine Interface·뇌기계접속장치) 기술, 인간 간의 블루투스(근거리 무선연결) 기능을 통해 뇌기능 장애 환자의 뇌파를 정상적인 뇌가 읽어서 전달해줄 수 있는 가능성 등에 대해 현재 기술 수준과 문제점, 한계를 명확히 짚고 있다. 다른 하나는 대중의 눈높이에 맞춘 서술이다. 어려운 과학적 개념이나 실험원리에 대한 설명보다는 우리 일상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궁금증에다 연결시켜놨다. 앞서 살펴본 영어 조기 교육 사례뿐 아니라 ▲머리가 크면 머리가 좋은가 ▲남자와 여자의 뇌구조도는 얼마나 신빙성이 있는가 ▲수험생들이 집중력 향상을 위해 뇌에 강한 자극을 주는 음료를 마시는 것과 공부할 동안 몸의 컨디션을 좋게 하기 위해 비타민을 먹는 것은 같은 수준의 문제인가 다른 수준의 문제인가 등 흥미로운 논의들이 담겼다. 1만 9800원.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깊고, 곱고, 매끈

    깊고, 곱고, 매끈

    미술관이란 공간 자체, 그러니까 하얀 벽에다 작품 내걸어 시선을 고정시키도록 유도하는 화이트큐브 자체가 남자에게는 불편할 수 있다. 이리저리 힐끗대는 사냥꾼 습성이 짙게 밴 남자에게 ‘닥치고 작품!’을 외치는 꼴인데, 이건 변기에 앉아서 소변 보라는 마누라의 지청구처럼 느껴질 수 있다. 내년 1월 27일까지 서울 한남동 삼성미술관 리움에서 열리는 아니쉬 카푸어(58)의 전시장은 여기다 하나를 더했다. 리움의 거대한 화이트큐브만도 벅찬데, 이번에 전시된 작품을 보고 있노라면 딱 한단어 밖에 생각 안 난다. ‘여근곡’(女根谷). 그 왜, 백제군 때려잡았다는 선덕여왕의 일화 말이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이번에 선보이는 그의 작품의 특징을 뽑아보자면 깊은 공간감, 고운 색감, 미끈한 표면이다. 관객을 맞이하는 첫 작품은 지름만 8m에다 무게는 15t에 이르는 작품 ‘동굴’(Cave)이다. 2~3개 연대 병력 한끼 식사 정도는 거뜬히 해결해줄 수 있을 듯한 거대한 밥솥을 위태롭게 엎어놓은 듯한 이 작품을 두고 작가는 그 앞에 서서 그 안을, 무한한 공간을 들여다보라고 제안했다. 실제 그리 해보면, 그 어두컴컴한 공간이 점차 다가선다. 그 외 작품들, 작가의 명성을 널리 퍼뜨렸던 보이드(Void)시리즈들도 비슷하다. 아주 곱디 고운 원색으로 벽이나 바닥을 뒤로, 아래로 깊이 뚫어놓은 작품들이 여럿이다. 이 깊은 공간감이 폐허와 상실이 아니라 긍정적 생산의 공간임을 주장하는 작품은 벽을 볼록하게 솟아오르게 한 ‘내가 임신했을 때’(When I am pregnant), 20t의 거대한 붉은 왁스 덩어리를 1시간에 한 바퀴 도는 시계형태의 운동으로 정리해나가는 ‘나의 붉은 모국’(My Red Homeland)이다. 임신한 상태, 붉은 이미지라는 것은 어떤 생성을 드러내지만, 거대한 순환고리라는 점에서 그것이 꼭 ‘진보’라 단정할 필요는 없다. 으스스한 몸을 진정시키기 위해 눈을 돌린 곳은 야외 전시장. 그동안 리움미술관을 상징했던 루이스 부르주아의 거대한 거미 ‘마망’을 수장고로 밀어넣은, 카푸아의 설치작품들이 있어서다. 잘 닦인 스테인리스 스틸로 제작한 작품들이니 야외에서 작렬하는 빛을 받아 번쩍번쩍한다. 아, 드디어 양기 넘치는 작품들인가. 그런데 나가봤더니 젠장, 볼록 거울이 아니라 오목거울이다. 그러니까 구멍을 안 뚫었다 뿐이지 깊이 빨아들이는 공간감은 매한가지란 뜻이다. 작가 스스로도 여성 작가의 작품처럼 보인다는 평이 좋다 하니 말 다 했다. 1990년 베니스 비엔날레 영국관 작가, 1991년 영국 터너상 수상에 이어 지난 런던올림픽 상징조형물 ‘궤도’를 선보인 카푸어는 영국이 내세우는 대표 작가로 이번 전시는 동아시아 최초의 개인전이다. 일반 8000원. 초중고생 5000원. (02)2014-6900.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거센 파도 헤치고 대하잡이 나선 사람들

    거센 파도 헤치고 대하잡이 나선 사람들

    EBS ‘극한직업’은 24~25일 오후 10시 45분에 ‘영광 대하잡이’를 방영한다. 가을은 무엇보다 풍요로운 계절이다. 산해진미가 넘쳐난다. 가을의 대표 제철음식은 전어, 송이, 꽃게 같은 것들이다. 여기서 빠질 수 없는 것이 대하다. 가을 대표 별미로 꼽히는 대하는 9월 말부터 10월 중순까지 잡힌다. 요즘 워낙 양식 기술이 발달하다 보니 살이 통통하게 오른 자연산 대하는 찾아보기 쉽지 않다. 그러나 거센 풍랑을 헤치고 대하를 잡으러 나선 이들이 있다. 제작진은 전남 영광의 한 어촌을 찾았다. 새벽 2시인데도 항월항에는 배 한 척이 출어를 서두른다. 가을을 맞아 5년 만에 영광으로 돌아온 대하를 잡기 위해 동신호가 출항하기 때문이다. 영광 앞바다에서 3시간 정도 배를 타고 나가 도착한 안마도 근해에서 본격적인 투망이 이뤄진다. ‘그물 놓자.’는 선장의 신호에 맞춰 20m 길이에 이르는 그물 200여개가 던져진다. 투망 장소는 조류의 차가 큰 곳으로 정해진다. 투망 작업이 끝나기 무섭게 망을 걷어올리는 양망 작업이 이뤄진다. 자연산 대하가 귀하다 보니 한두 마리씩 걸려 올라오는 대하를 보는 선원들의 얼굴에는 피곤함이 가신다. 그러나 끌어올려 보니 아무래도 대하보다는 잡어가 많다. 힘 빠지고 어려워지는 상황.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먹구름이 몰려들고 기상상황은 악화된다. 며칠째 대하를 많이 못잡다 보니 모두들 신경도 예민해졌다. 선장은 기상악화에도 불구하고 조업을 감행한다. 파도가 몰아치지만 몇 번의 투망 끝에 마침내 조금씩 대하가 올라오기 시작한다. 이날 항해에는 선장의 아들도 배에 올랐다. 아들에게는 뱃일을 물려주고 싶지 않다는 선장의 말에 30년 동안 바다에서 지내온 삶의 무게가 느껴진다. 대하를 싣고 항구로 되돌아오자 항구는 바빠진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노벨 경제학자의 한국경제 카운슬링

    “경제학자는 어려운 사람이 있어도 시원하게 돕자는 말을 할 수 없다. 우물쭈물하다가 경제학자가 주로 내놓는 대답은 ‘돕는 데 얼마나 돈이 들까?’라든지 ‘정말 도움이 필요할 정도로 어렵나?’ 하는 식이다. 상황이 이러니 일반인에게는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들로 비칠 수 있다.” 그러니까 형식 논리에 치우친 법학의 ‘리걸 마인드’처럼 ‘경제학 프레임’이란 것도 좀 재수 없게 보이겠지만 이해해 달라는 것이다. ‘대한민국이 묻고, 노벨경제학자가 답하다’(한순구 지음, 교보문고 펴냄)는 경제학 프레임에 대한 이해를 높이기 위해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경제이론을 끌어왔다. 보기에 따라 가벼운 입문서랄 수도 있지만, 우리 현실을 능숙하게 가져다 대는 저자의 솜씨 때문에 흥미롭게 읽힌다. 가령 요즘 한창 말들이 많은 경제민주화 이슈의 쟁점 가운데 하나는 중소기업에 대한 대기업의 착취 문제다. 저자는 이 문제를 2009년 수상자 올리버 윌리엄슨 캘리포니아대 교수의 ‘홀드업’ 개념, 1991년 수상자인 로널드 코스 시카고대 교수의 ‘거래비용’으로 설명한다. 중소기업 업종에 대기업이 진출하고 착취적 계약 관계를 맺는 것을 두고 거래비용을 줄이고 홀드 업을 피하기 위한 합리적 선택이라고 설명하는 쪽이다. 문어발식 확장과 사업 다각화의 기준이 될 법하다. 또 최근 유럽 재정 위기를 이미 1961년 이론적으로 예언해 1999년에 상을 받은 로버트 먼델 컬럼비아대 교수의 이야기도 흥미롭다. 널리 알려졌듯 통화만 통일하고 재정을 분리해 놓은 것이 위기의 원인이다. 저자는 이를 우리 상황으로 가져온다. 지방자치정부의 재정난 문제다. 유럽 위기 해법이 재정통합이듯 저자는 “(지방자치정부의) 재정 정책도 중앙정부의 규제를 받을 수 있도록 조정”해야 한다고 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때문에 FTA의 실효성을 두고 말들이 많았다. 이 문제는 비교우위를 새로운 각도에서 조망한 2008년 수상자 폴 크루그먼 프린스턴대 교수의 주장을 찾아보면 된다. “인구가 적고 경제 규모도 작은 국가가 자유무역을 할 때는 자칫 다른 국가와 경제적 격차가 커질 수 있는 위험”이 있다는 우울한 결론이 나온다. 올해 노벨경제학상은 게임이론에 돌아갔다. 마침 저자도 게임이론 전공자다. ‘내시균형’, ‘메커니즘 디자인’, ‘비협조적 게임 이론’ 등 게임이론에 대한 설명도 풍부하다. 1만 4000원.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정조·박지원·이옥 3인의 관계를 풀다

    ‘문체반정 나는 이렇게 본다’(김용심 지음, 보리 펴냄)는 문장론에 오롯이 집중한다. 정치적 맥락을 짚다보니 문장론도 나오는게 아니라, 문장론을 거론하려다보니 정치적 배경이 슬쩍 나오는 식이다. 결론부에 가서 “얼음 갑옷을 입은 반듯한 정조”, “누더기를 걸친 채 햇살을 즐기는 자유로운 박지원”, “허름한 홑겹 옷 사이로 빛나는 비단옷을 내비치는 멋진 이옥”으로 정리한 부분이 인상적이다. 각양각색의 문장론을 3명의 인물로 캐릭터화해둔 것이다. 왜 얼음갑옷 정조인가. 왜 문체반정을 했느냐는 질문이다. 하나는 공부를 멀리했던 아버지 사도세자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정조 스스로가 더 교조적 입장을 취했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반정’이라면 옛일을 다 들춰내 일족을 멸해도 시원찮을 판인데 반성문만 써내면 다 용서해줬던 이유다. 더구나 정조어찰집에서 드러나듯 정조 스스로가 자유분방한 글을 구사했다. 시대의 햇볕에 녹아버릴 것임을 알지만, 그래도 군왕이기에 차디찬 갑옷을 껴입었다는 것이다. 왜 누더기 박지원인가. 혹독하진 않았다 해도 어쨌든 임금의 명이다. 모두들 열심히 반성문을 지어다 바쳤다. 박지원도 썼는데 교묘하다. 너무 큰 죄를 지어 반성한다고 될 것 같지 않다는 투로 써버린다. 더 재밌는 건 정조의 반응이다. 별 말 없다가 만날 기회가 생기자 이 참에 ‘이방익 사건을 적은 글’을 지어올리라 명한다. 이방익이라는 젊은 무인의 표류기인데 박지원 보고 쓰라한 것은 ‘열하일기’처럼 써보란 뜻이다. ‘열하일기‘ 때문에 반성문 쓰라 해놓고는 ‘열하일기’처럼 써보라 한 것이다. 누더기의 자유다. 왜 비단옷 이옥인가. 성균관 유생이었던 이옥은 끝끝내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니 점점 더 가혹해졌다. 문체 문제로 3번이나 고치라 명 받더니 심지어 장원급제한 이옥의 답안지를 보고 정조가 급제를 취소해버리고 꼴찌 처리해버릴 정도였다. 그럼에도 이옥은 버텼다. 한술 더 떠 자신의 호를 경금자(絅錦子)라 지었다. 경은 얇고 허름한 겉옷, 금은 비단 옷이다. 얇고 허름한 겉옷 보고 비웃어라, 그런데 내 옷은 비단옷이란다, 고 일갈한 셈이다. 글에 관심있다면 한번 봐둘 만하다. 1만 5000원.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파리 시절의 반 고흐를 만나다

    파리 시절의 반 고흐를 만나다

    11월 8일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디자인미술관에서 막을 올리는 ‘반 고흐 인 파리’전은 1886~1888년에 이르는, 짧지만 강렬했던 반 고흐(1853~1890)의 파리 체류 시절을 다룬다. 오늘날 고흐 하면 ‘별이 빛나는 밤’, ‘해바라기’, ‘사이프러스 나무가 있는 풍경’ 같은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는 얇고도 밝은 붓 터치를 이용한 독특한 그림체를 떠올린다. 그런데 처음부터 그렇게 그린 건 아니다. 37살에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한 고흐가 화가로 활발히 활동한 기간은 불과 생애 마지막 10여년. 그 가운데 네덜란드에 머물러 있던 전반부 6년 동안에는 아주 두껍고 어두운 필체를 구사했다. 가난하고 소외된 농부들의 삶을 있는 그대로 그렸다. 화풍의 변화는 동생 테오의 후원 등으로 파리로 오면서 일어난다. 큰 문화적 충격과 함께 인상파, 신인상파의 영향을 받으면서 어떻게 하면 나만의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 모색해 나가는 시기가 파리 시기다. 리얼리즘에서 모더니즘으로 넘어가는 시기다. 그래서 전문가들은 이때 고흐가 색채, 양식, 구도를 두고 어떤 걱정과 고민을 하고 있었을까 추적하기 시작했고, 7년간의 추적 결과를 모아 지난해 봄 네덜란드에서 전시를 진행했다. 이번 전시는 바로 이것을 가져온 것이다. 작품은 파리 시기를 중심으로 한 55점의 유화. 파리에서 고흐에게 물감을 제공했던 미술상인을 그린 ‘탕귀 영감’ 같은 작품은 프랑스 로댕박물관 소장작품인데 프랑스 이외 지역으로 반출되는 것은 처음이다. 전시작품들의 보험평가액은 깎고 깎아서 5500억원대에 이른다. 여기에다 그림에 숨겨진 비밀을 밝혀내기 위해 진행했던 X선 촬영 사진 등 연구 자료들을 함께 전시했다. 또 눈길을 끄는 대목은 9점에 이르는 자화상들. 고흐는 평생 36점의 자화상을 남겼는데 이 가운데 27점을 파리 시기에 그렸다. 이유는 간단했다. 연구를 위해서는 직접 그려 봐야 하는데 돈이 없어 모델을 쓸 수 없으니 자기 얼굴을 가지고 이렇게 저렇게 표현해 본 것이다. 이 가운데 9점의 자화상이 전시된다. 전시 총감독을 맡은 서순주 박사는 “마침 네덜란드 쪽에서 대대적인 미술관 개보수 작업이 이뤄져 이번 같은 전시가 가능해졌다.”면서 “2007년 80만명의 관람객들이 다녀간 고흐전이 대표작을 모은 일종의 회고전이라면, 이번 전시는 고흐의 천재적 화풍이 어떻게 나왔는지를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아주 교육적인 전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전시는 내년 3월 24일까지. 성인 1만 5000원. 청소년 1만원. 1588-2618.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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