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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 「오로라탐험대」,북극 정복/영하 60도 혹한과 사투 60일

    ◎최종렬·신정섭 두 대원 쾌거/세계서 16번째… 도보론 5번째 【레저루트=서울신문국제전화】 대한의 건아들이 드디어 「북극점」을 정복했다. 한국 북극점 오로라탐험대의 최종렬 대장대행(33)과 신정섭 대원(27)은 7일 하오 4시(현지시간 7일 상오 1시) 죽음을 무릅쓴 60일 동안의 사투 끝에 온통 얼음으로 뒤덮인 북극점에 태극기를 꽂았다. 『나침반의 바늘이 뚝 멈춰섰다. 여기가 바로 지구의 꼭지점 북극점이다.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눈이 흐릿해져…』 두 대원은 이날 북극점에 태극기를 꽂은 뒤 캐나다 레저루트의 베이스 캠프에서 정복소식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던 고정남 단장에게 이와 같은 무전을 보내왔다. 고 단장은 서울신문과의 전화인터뷰에서 『온갖 어려움을 뚫고 우리의 자랑스런 사나이들이 인간의 발길을 꺼리던 미지의 땅 북극점을 정복했다』면서 『이 모두가 적극적으로 밀어준 국민들의 성원 덕택』이라고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모두 8명으로 정복에 나선 오로라탐험대는 지난 3월1일과 2일 1·2진으로 나누어 출국,북위 74도48분,서경 94도59분에 있는 북극권 최북단 마을 레저루트에 베이스캠프를 차렸었다. 허영호 대장(38)과 최종렬·최종인 대원(26) 등 3명의 공격조는 같은 달 8일 캐나다 워드헌트섬을 출발,북극점 공격의 대장정에 올랐으나 허 대장이 북극점을 92.4㎞ 남겨둔 북위 89도9분 지점에서 불의의 부상으로 돌아오는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다. 오로라탐험대는 이에 굴하지 않고 개수면·유빙·빙산 등 대원들의 생명을 위협하는 장해요인과 싸워가며 세계북극탐험사상 가장 빠른 1일 평균 20㎞의 속력으로 1천2백㎞에 이르는 「죽음의 탐험길」을 60일 동안 도보로 행진해 쾌거를 거뒀다. 이번 탐험대의 북극점 정복은 사상 통틀어 16번째이나 도보탐험으로는 5번째이며 우리나라는 9번째 북극 정복국가가 됐다. 이들 탐험대는 오는 11일쯤 레저루트를 철수해 16일 김포공항으로 귀국할 예정이다.
  • “세계적 핫뉴스”… 전국이 뜬눈 밤샘/고르비 제주 묵던 날

    ◎시민들,양국기 흔들며 환영/“개방의 바람 북한까지” 격문/신혼부부들,객실 비워주며 “성공 기원” 【제주=특별취재반】 『혼저옵서예!』(어서오십시오!)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이 제주도에 오던 날 제주도는 온통 환영의 물결로 넘쳤다. 그것은 제주도에서만이 아니었다. 온국민이 우리나라와 소련의 관계가 갈수록 발전하고 있는 데 대해 매우 흐뭇해 했다. 국민들은 19일 저녁 노태우 대통령과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활짝 웃는 얼굴로 만찬을 나누는 모습을 TV 등을 통해 지켜보면서 이번 두 나라의 정상회담이 이미 성공을 거두고 있음을 느꼈다. 이날 세계 뉴스의 초점도 한반도 남쪽의 「제주도」라는 한 작은 섬에 모아져 이 「환상의 섬」의 아름답고 평화로운 진면목을 온인류에게 널리 알렸다. 그리고 그것은 한반도에서의 역사적인 대변화를 예고,한반도에서도 페레스트로이카(개혁)와 글라스노스트(개방)를 통한 통일의 기운이 무르익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제주도민들은 이날 노 대통령과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지나는 길목마다 열렬히 환영했고 특히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단 몇 시간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이틀 동안 머물다 간다는 소식에 기쁨을 더했다. 이날 제주 국제공항에서 중문단지로 통하는 길 양쪽에는 해가 지기 전부터 시민들이 빽빽이 늘어서 사이드카의 선도 아래 헤드라이트를 켠 고르비 일행의 차량행렬이 모습을 드러내자 일제히 환성을 지르며 박수를 보냈다. 공항에서 노형동에 이르는 가로변과 중문단지 입구에서 정상회담장이자 고르비 일행이 묵을 신라호텔 사이에는 1천2백개의 태극기와 소련기가 나란히 걸려 때마침 불어오는 훈훈한 남풍에 귀한 손님을 환영하듯 힘차게 펄럭였다. 또 고르비 일행이 공항을 출발한 지 5분쯤 지나 신광로에 이르자 때마침 활짝 핀 벚꽃이 바람에 흰분홍빛 꽃잎을 날려 차량행렬을 뒤덮었다. 제주도민들의 이날 환영은 그 어느 외국 국가원수의 방한 때보다 정겹고 열렬한 것이었다. 제주3바8109호 택시운전사 고제진씨(34)는 교통통제로 겪고 있는 불편도 아랑곳하지 않고 『소련 대통령이 우리나라를 방문한 것은 우리나라가 소련에 경제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을 만큼 성장한 것을 의미한다』면서 『좀 불편한 것은 흐뭇한 이 기분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라고 말했다. 고르비 일행에 대한 이 같은 뜨거운 환영은 무엇보다도 「제주실향민협의회」가 공항 입구 네 거리에 내건 「페레스트로이카의 바람이 북한에도 불어라」는 플래카드가 상징하듯 통일에 대한 염원이 크기 때문으로 풀이됐다. 이날 상오 고르비 일행이 당초 계획을 바꾸어 제주에서 1박을 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제주 신라호텔측은 한때 당황했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객실 30개를 비워놨으나 소련측에서 50개를 요구해와 20개가 모자라게 된 때문이다. 이렇게 되자 호텔측은 신혼부부가 대부분인 객실예약객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걸어 주변의 다른 호텔을 이용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전화를 받은 20명은 호텔측의 상황설명에 화를 내기는커녕 오히려 『손님들을 잘 모시라』는 부탁을 하며 호텔측이 다시 예약한 주변의 다른 호텔로 기꺼이 옮겨갔다. 이 연락을 맡은 한 호텔 직원은 『노 대통령과 고르비의 정상회담을 제주시민은 물론,전국민이 환영하고 있다는 것을 피부로 느꼈다』면서 『그것은 아마도 통일에 대한 염원일 것』이라고 말했다.
  • “고르비 맞이 새 단장”… 축제의 삼다도

    ◎“제주는 이제 세계의 명소”… 시민들 흐뭇/거리마다 환영 현수막·꽃길 조성/각국 기자 속속 입국,분위기 고조/전화·조명등 회의채비도 완료 역사적인 한소정상회담이 열리게 될 제주는 온통 축제분위기에 휩싸이고 있다. 도당국은 물론,시민들은 한소 양국 정상을 맞이하기 위해 차분한 가운데서도 귀분맞이 막바지 환영준비에 한창이다. 제주공항에서 회담장인 신라호텔에 이르는 거리에는 환영 아치와 현수막 등이 설치된 가운데 17일 소련측의 의전담당관계자들을 비롯한·내외신기자들이 속속 도착,회담을 앞둔 축하분위기를 더욱 돋우었다. 특히 제주도민들은 이번 회담을 계기로 북한이 개방사회로 변모해 통일을 앞당길 수 있게 되기를 바라면서 한편으로는 내방객들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 아름다운 제주도가 세계에 널리 알려지는 기회로 만들자는 다짐 속에 손님맞이에 정성을 쏟고 있다. ▷시민·거리 표정◁ 제주도민들은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의 제주 방문이 소련 최고지도자로서는 처음 있는 일인 데다 향후 아시아·태평양지역 평화와 안정에 크게 기여할 것이라는 기대로 설레고 있다. 한편 제주도내 초·중·고교장단 1백81명은 17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의 제주도 방문을 환영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제주공항◁ 국제공항관리공단 제주지사는 공항 구내 도로변에 자산홍 2천그루와 페튜니아 4천그루를 식재하는 한편,청사 정면에 원형 꽃상자 50개를 설치하는 등 환경정비를 완료했다. 또 환영행사장인 계류장에는 도착시간이 하오인 것을 감안,대형 조명탑 2조와 보조조명시설을 완료했으며 1백50회선의 예비선로를 확보하는 등 의전에 따른 행사준비를 거의 마무리했다. 관리공단측은 19일 상오 7시를 기해 계류장에 고르바초프 대통령 내외의 내도를 환영하는 현판을 달고 공항로 주변 1㎞ 구간에 태극기와 소련기를 교차시킨 가로기 1백20장을 게양할 예정이다. ▷제주항◁ 한소정상회담에 필요한 각종 차량과 장비들이 카페리를 통해 제주항에 속속 들어오고 있어 마치 소규모 병참기지를 방불케 하고 있다. 지난 15일부터 운반되고 있는 이들 장비들은 부산으로부터 온 중대급 경찰병력을 비롯,경호용 경찰 사이드카 38대,대통령 리무진 등 승용차 25대,각 방송사 중계차,한전의 특수비상전력차 등으로 엄중한 보안 속에서 하역중이다. ▷회담장 신라호텔◁ 정상회담장으로 결정된 제주신라호텔은 자체 행사사무국이 중심이 돼 한국통신 제주사업본부와 한국전력 등의 협조 아래 정상회담장 및 만찬장·프레스센터 점검에 전직원이 총력을 집중하고 있다. 한전 제주지사측은 17일까지 신라호텔에 대한 이중전원확보공사를 마친 데 이어 송전선로와 변전설비 및 배전선로설비 점검을 마무리했으며 한국통신측도 호텔내 모든 시외·국제회선을 광전송로로 사용하고 통신두절시 무전송로로 대치키 위한 전송이원화 체계를 완비했다. ▷도당국의 국빈맞이 준비◁ 제주도는 한소정상회담의 성공적 개최를 위해 굴삭기 등 각종 장비 1백28대를 동원,제주시와 서귀포시 일원에 대한 도로 보수와 차선 도색 등 환경정비사업을 대대적으로 추진했다.
  • 48개국 기 펄럭… “축소판” 유엔총회

    ◎「에스캅」 서울총회 개막식 이모저모/“한국은 경제협력의 교량” 노 대통령 개회사/각국 대표들,국내 기업에 상담·관광 요청도/차기 총회 중국개최면 한·중 외무회담 기대 ○케야르 총장도 메시지 ○…유엔 산하 직속기구로는 사상 처음으로 우리나라에서 열린 제47차 유엔 아태경제사회이사회(ESCAP)총회는 1일 상오 롯데호텔 2층 크리스탈 볼룸에서 블랑카 유엔사무차장이 대독한 페레스 데 케야르 유엔사무총장 축하메시지 및 키브리아 ESCAP 사무총장의 축사에 이어 노태우 대통령의 개회사순으로 40여 분 동안 진행. 이날 개막식은 상오 9시40분쯤 노 대통령을 비롯,키브리아 사무총장·부니보보 피지 통상장관(제46차 총회의장)·블랑카 유엔사무차장 등이 이상옥 외무장관의 안내를 받으면서 입장하는 것으로 시작,각국 대표단의 전원 기립박수 속에서 입장한 노 대통령은 영·중·불·노어로 동시통역된 개회연설에서 『ESCAP은 아시아개발은행·아태개발연구소 등 많은 기구를 설립,운영해 아태협력의 바탕을 다져왔다』며 ESCAP의 역할을 강조. 노대통령은 이어 『한국은 선발개도국으로서 시장경제와 사회주의 경제간의 조화로운 협력을 실현하는 교량으로서 적극적인 역할을 해나갈 것』이라고 말하자 이어폰을 끼고 시종 연설을 경청하던 중국의 유화추 외교부 부부장(차관)은 열심히 메모를 하기도. 이날 개막식장 뒤편에는 하늘색 바탕의 대형 유엔마크가 걸려 있었으며 중앙의 유엔기를 비롯,좌우에 태극기 등 48개 회원국 국기들이 도열해 있어 「축소판 유엔총회」를 방불케 하기도. 한편 개막행사에는 주한 외교사절 30여 명을 비롯,최각규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 등이 참석. ○각료급 대표는 부의장 ○…참가국들은 이어 본회의를 열어 이상옥 외무장관을 만장일치로 의장으로 선출하고 알라타스 인도네시아 외무장관·푸레브도리 몽골 부총리 등 각료급 수석대표를 파견한 19개국을 부의장국으로 선출하는 등 의장단을 구성. 특히 이 장관은 이번 총회에서 차기 총회 개최지가 중국으로 결정될 경우 관례상 전 총회의장 자격으로 북경을 방문하게 돼 있어 92년에는 전기침 중국 외무장관·김영남 북한 외교부장과 자연스럽게 회담을 가질 수 있지 않겠느냐고 외무부 직원들은 기대하는 눈치. 본회의는 준회원국인 남태평양 키리바티의 정회원국 가입 및 마카오의 신규 준회원국 가입을 승인,총 회원국수는 모두 49개국으로 증가. 회의는 이어 「아태지역 산업구조 재조정과 지역협력 강화문제」 등을 정식의제로 채택한 뒤 2개의 전체위를 구성,10일간 협의에 돌입. ○…이날 하오 이 외무장관은 힐튼호텔에서 각국의 총회 참석대표단 및 주한 외교사절을 초청,총회대표단 환영리셉션을 주최. 이날 리셉션장에는 소콜로프 주한 소련 대사는 이 장관과 환담하는 등 적극적인 외교를 펼쳤으나 지난달 31일 서울에 도착한 중국의 유 외교부 부부장은 의식적으로 이 장관과의 「조우」를 피하는 모습을 보여 대조. ○각국에 의전관을 배치 ○…총회 진행 및 지원업무를 총괄하고 있는 외무부는 호텔 6층 및 7층을 ESCAP 방콕사무국 파견 직원들과 함께 사용하며 회의 진행을 준비. 총회 참가국들은 회의참석뿐 아니라 상공부 등 관련부처 관계자와의 면담,국내기업체와의 상담주선,관광 등을 요청해오고 있다고 외무부 한 관계자가 설명. 외무부는 이에 따라 각국 수석대표에게는 입국시부터 의전관 1명씩을 수행케 해 이들의 요청을 즉각 처리하고 있다고.
  • 담요등 널려… 이라크군 침입 흔적/주 쿠웨이트 한국대사관 모습

    ◎“교민 9명 모두 무사” 문앞에 메모 『재쿠웨이트 한국인 9명 모두 무사하오며 매일 오전10시∼오후1시까지 이곳에 모입니다. 28.FEB.91』 2일 하오1시30분쯤 쿠웨이트시티 알 라우다 10번가에 있는 한국대사관을 찾아 갔을때 정문앞 게시판에는 잔류교민들이 자신들의 안부를 알리는 종이쪽지가 기자를 맞이하고 있었다. 지상 4층 지하 1층 규모의 대사관 건물 옥상 국기게양대에는 깨끗한 대형 태극기가 사막바람속에 힘차게 펄럭이고 있었으나 교민들은 이미 자리를 뜨고 없었다. 대사관 직원들이 현재 모두 사우디아라비아나 고국으로 철수하고 텅빈 대사관 건물을 홀로 지키는 이 태극기는 우리 교민들이 게양한 것이 틀림없었다. 만일 교민들이 태극기를 걸어놓지 않았다면 한국대사관을 찾는데 꽤 많은 시간이 걸렸거나 아예 찾지 못했을 뻔했다. 정문 벽기둥에 색이 바랜 태극기가 날리고 있었지만 작아서 눈에 잘 띄지 않았다. 대사관 정문밖에는 블록으로 쌓아올린 높이 1.5m 가량의 경비초소 2개와 깊이 2m,길이 2.5m 가량의 지하참호 3개가 있었으며 초소와 바깥창고에는 이라크군이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담요와 베개·식기·불타다 남은 장작더미·옷가지·칫솔 등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참호는 모두 말끔히 치워져 있었다. 대사관에 바로 이웃해 살고있는 새너씨(30·여·사회복지사업)는 『이라크군 5명이 초소와 참호에서 경계근무를 했으나 대사관 내부에도 들어갔었는지는 잘 모르겠다』며 『이라크 군인들이 대사관안의 한국인 여자 2명으로부터 금반지와 시계 등을 빼앗았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대사관 건물안의 또다른 창고안에도 초소안처럼 담요와 칫솔 등이 흩어져있는 점으로 미뤄 이라크 군인들이 대사관안에 들어왔음을 알 수 있었다. 캐주얼 차림의 새너씨는 『이라크 군인들이 한국대사관 정문에서 20여m 떨어진 개인집을 사령부 건물로 사용했었다』면서 『군인들이 종종 와서 음식을 달하고 한적이 있긴 하지만 협박하거나 강도짓을 일삼지는 않았다』고 덧붙였다. 주차장에는 번호판이 없는 피아트자동차 1대,베이지색 밴 1대,흰색 지프 1대 등 3대가 세워져 있었으나 바퀴와 배터리 등 부품이 떨어져 나가고 없었으며 먼지가 뿌옇게 앉아 있었다.
  • 「독립할아버지」 백매수옹의 「그날」의 감회

    ◎“「3·1의 의기」 통일로 이어졌으면…”/“목터져라 외치던 「함성」 귀에 쟁쟁/일 총리 「파고다사죄」 진심이길…” 올해로 72번째의 3·1절을 맞는 「독립할아버지」 백매수옹(90·서울 성북구 성북2동 58의19). 현재 생존해 있는 독립유공자 열분중 한분인 백옹이 맞는 올해 3·1절은 감회가 남다르다. 증빙자료가 부족해 지난 83년에야 우여곡절끝에 독립유공자로 인정돼 건국공로표창장을 수상한데 이어 지난해 12월26일 마침내 자랑스런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은 뒤 처음 맞게 되는 3·1절이어서이다. 그래서 백옹은 3·1절을 하루앞둔 28일 맏아들 낙선씨(63),증손자 에스라군(7)과 함께 아직도 그날의 함성이 들릴 것만 같은 파고다공원을 찾아 탑석과 손병희선생 동상을 둘러보았다. 해마다 이곳에서 거행되던 3·1절 기념식이 올해는 취소됐다는 소식이 백옹의 마음을 더없이 안타깝게 하는 것이었지만 그래도 지난 1월초에는 일본의 가이후 총리가 이곳에 와서 사죄의 뜻을 표하는 분향을 올린 사실이 생각나 마음 한구석은 흐뭇해진다고 백옹은 말한다. 3·1운동 당시 백옹은 19세로 서울 종로구 연건동에 있던 경신중학교 2학년생이었다. 반장을 하던 백옹은 학교 선배들로부터 비밀리에 3월1일의 거사계획을 전해듣고 학우 40여명과 함께 태극기를 품에 지닌채 파고다공원으로 달려갔다. 백옹은 다음해인 3월1일 전국적으로 다시 일었던 「3·1절 기념시위」를 은율군 장터에서 주도했다. 그날 백옹은 시위를 마치고 귀가길에 일경에 체포대 혹독한 고문을 당한 뒤 황해도 송화지청으로 넘겨져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특사로 풀려날 때까지 1년1개월을 평양구치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그후 32년에는 평양신학교를 졸업,목사가 돼 복음을 전파하는 길을 걷기 시작했다. 『지나간 90평생을 돌이켜 보면 그날들이 바로 엊그제의 일들처럼 떠올라. 하지만 독립을 찾고자했을 때는 일제를 상대로 하나가 되어 싸웠지만 지금은 하나가 둘이되어 오도가도 못하게 되었으니…』 6·25 동란이 터지자 단신 월남한 뒤 다행히 맏아들 낙설씨 등 세자녀들과 상봉하는 기쁨을 얻었으나 고향에 두고온 부인 박초봉씨(90)와 선태씨(65) 등 다섯딸과는 아직도 만나지 못한채 외롭게 살아오고 있다. 『이제는 우리 모두 믿고 사랑하는 식구가 되고 나라 사랑하는 정신으로 뭉쳐 하루빨리 통일이 이루어졌으며 한이 없겠다』는 백옹은 『붉게물든 황해의 일몰과 어릴적 놀던 뒷동산,고향집 안방에서 가족들과 함께 모여있는 꿈을 종종 꾸곤 한다』며 눈시울을 적셨다.
  • “이젠 계파 떠나 힘·지혜 모으자”/민자 창당 기념식 이모저모

    ◎2천여명,당기 흔들며 “노태우” 연호/시루떡 자르며 “앞으론 멋지게 일하자” ○…민자당 총재인 노태우 대통령은 9일 상오 서울 가락동 당 정치교육원에서 열린 창당 1주년 기념식에 이어 기념다과회에 참석,김영삼대표 김종필·박태준 최고위원과 함께 기념시루떡을 자른뒤 인사말을 통해 당의 결속을 거듭 강조. 노대통령은 『옛말에 조개와 황새가 싸우다가 어부한테 모두 잡혀갔다는 얘기가 있듯이 우리가 싸우면 정권차원을 넘어 체제가 문제된다』면서 『이제부터는 민정계·민주계·공화계라는 말부터 없애야겠다』고 역설. 노대통령은 또 국회 상공위 외유사건,수서지구 사건을 적시해가며 『비리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엄격히 다스릴 것』이라고 결연한 의지를 밝힌뒤 『이를 계기로 우리사회 전반과 지도층 도덕성을 회복하는 전기로 삼아야 할 것』이라고 피력. 이에앞서 김대표는 다과회 인사말에서 『당총재이신 노대통령이 이 나라의 민주주의를 실현하고 남북통일을 앞당긴 대통령으로서 기록될 수 있도록 우리 함께 힘과 지혜를 모아나가자』며 단합을 강조했고 김·박 최고위원은 건배를 제의하면서 각각 『총재각하를 받들고 우리의 책임으러 다하자』 『총재를 정점으로 한번 멋있게 합시다』라고 말해 분위기를 고조시키기도. 한편 노대통령은 기념식치사 말미에 『우리당 아닌 그 어느세력이 오늘의 과제를 해결하고 나라의 밝은 내일을 열어갈 수 있느냐』고 반문한뒤 『이 나라의 인재들은 모두 우리당에 모여있다』며 원고에 없는 말을 추가,당의 사기진작에 신경쓰는 모습. ○…소속의원·당직자 등 2천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50여분간 진행된 이날 기념행사는 대회장 곳곳에 『노태우총재와 함께 세계로 미래로』 『뜻모아 이룬 정당 힘모아 선거승리』 등의 축하플래카드가 나붙었으나 참석자들 대부분은 최근 가중되고 있는 정치불신 분위기 때문인지 다소 풀죽은 모습. 소감을 묻는 질문에 의원들은 한결같이 『지난 1년간 잘한 게 하나도 없는데…』라며 자조섞인 한마디. 이날 기념식이 열린 연수원 입구에서부터 강당에 이르는 주변에는 3백여명의 당원들이 태극기와 당기를 들고 『노태우』를 연호하며 노대통령의 입장을 열렬히 환영했는데 이는 침체된 당분위기 쇄신을 위해 청와대측의 특별당부에 따른 것이라는 후문. 김대표 등 당직자들은 이날 낮 기념식이 끝난뒤 정수창 당재정후원 회장을 비롯한 재정위원 전부를 리베라호텔로 초청,오찬을 함께하며 당에 대한 재정지원에 사의를 표시. 이어 저녁에는 호텔신라에서 창당업무를 맡았던 15인 통합추진 위원들과 만찬모임을 갖고 지난 1년간을 회고.
  • 군 의료단 페만행 안팎/김원홍 사회부차장(오늘의 눈)

    페르시아만의 긴장상태가 날이 갈수록 고조되고 있다. 이라크와 다국적 지원 지상군 1백50여만명이 대치하고 항공모함을 포함한 함정 2백여척,전투기 2천2백대 등 막강한 화력이 집중되고 있다. 군사전문가들은 현대전에서의 살상은 폭력이나 총상에 의한 부상이 아닌,화상이나 화생방전에 의해 파상풍으로 사망하는 율이 80% 이상에 이를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국군은 이번 파병으로 잃는 것보다 얻는 것이 더 많을 것으로 보인다. 북한의 화생방 공격에 대비한 파상풍치료 등 현대전에 필요한 군의료기술을 이번기회에 선진국으로부터 많이 배워올 것으로 기대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14일 사우디아라비아로 출국한 군조사단 26명도 화상치료제와 해독제 방독면 등 화학전대비 응급약품과 장비를 싣고 갔다. 또 지난달 하순 현지답사를 하고 돌아온 군의관에 따르면 병원시설이 최신식 3층 건물인데다 각종 의료기자재와 검사기구 등이 영·불·독의 최고급 고가제품이며 의약품도 최일류제품으로 산적해 있어 월남전때의 낡은 장비로 의료행위를 하던 군의관들에 비하면 호화환경이라는 것이다. 영관급장교가 사용할 개인아파트가 30∼50평 수준이며 사우디아라비아 군참모장은 취사병·당번병·운전병·행정병까지 모두 데리고 와 달라고 사정하는 분위기였다고 전했다. 사우디의 자국 의료진은 적정량의 10∼20% 밖에 되지 않아 국민 대다수가 의료시혜를 받지 못하고 있으며 부호들은 스위스나 영국·프랑스 등 선진국에서 치료를 받고 있어 이번 기회에 우리군의관의 우수성이 입증되면 이 지역에 진출할 민간인 의사 수요도 크게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우리나라는 81년에 15개교에 불과하던 의과대학수가 90년에는 31개교로 2배 이상 늘고 해마다 2천9백여명의 의사가 배출되고 있으나 일부는 군의관으로 수용되지 못하고 무의촌에서 봉사활동을 펴고 있다. 지난 86년에는 의대 졸업생을 중동근로자들이 일하는 곳에 파견,병역의무를 면제해주는 방법도 연구된 적이 있었다. 더욱이 최근 우리 의학계는 심장수술이나 태내수술,시험관 아기,제3세대 항생제개발 등 눈부신 발전을 보여 세계의 주목을한몸에 받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여하튼 2월 초순이면 사우디의 국경도시에 태극기와 적십자기가 게양된 한국야전 병원이 들어서 인도주의적인 차원에서 전상자들을 치료 하게 된다. 41년전 6·25동란때 스웨덴과 덴마크가 병원선을 파견해 준데 대해 우리는 이들을 참전국이라고 부르지 않으면서도 아직까지 고마움을 잊지 못하고 있다. 이때문에 기자는 이번 우리 군의료진 파견이 전후에 민간의사의 해외진출기회로 연결되고 「고마운 한국인」이라는 좋은 인상에 세계인 모두에게 심어지기를 기대해본다.
  • 외언내언

    파고다공원은 곧 탑공원이다. 그 곳에 있는 원각사지 10층 석탑(본래는 13층 석탑)에 연유하는 이름. 이 석탑으로 해서 전에는 이 언저리가 탑골(탑동) 또는 탑사동이라 불렸다. ◆동네 이름·공원 이름이 될 만큼 이 석탑은 정교하고 절묘하여 지금 우리의 국보 제2호. 당나라의 장수가 고구려를 칠 때 세운 것이라느니 고려때 원나라 공주가 중국 공인을 시켜 만들었다느니 하는 전설도 따른다. 하지만 김수온의 원각사비문에 분명히 조선 세조때 원각사 건물과 함께 세워졌다고 적어 놓았다. 더구나 해방후 지상에 있던 최상부 3층을 미군이 기중기로 들어올릴 때 나타난 각자는 건조 연월이 세조 13년 2월임을 알렸던 것. 조각·건조자는 18세의 천재 석공 김석동이었다. ◆본디 고려때는 흥수사가 있던 곳. 조선 태조가 조계종의 본사로 삼았다가 세조때에 원각사를 지었다. 역사가 흘러 1897년(광무원년),당시 총세무사로 있던 영국인 브라운의 건의에 따라 이 곳이 우리나라에서는 맨처음인 현대식 공원으로 된다. 이 공원을 만드는 일을 지휘·감독했던 사람이황성신문 사장을 지낸 무궁화 할아버지 한서 남궁억. 당시의 직책이 내부 토목국장이었다. ◆파고다공원이 3·1운동의 발상지임은 익히 알려진 일이다. 의암 손병희 등 33인이 태화관에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함과 함께 수많은 국민들은 이 곳에 모였다가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서울 거리로 휩쓸고 나갔던 것. 그를 이어 독립만세의 함성은 3천리 방방곡곡으로 메아리져 나간다. 그런 연유로해서 파고다공원에는 손의암의 동상과 독립선언 기념탑이 서 있다. 파고다공원은 독립만세 공원이다. ◆오늘 방한하는 가이후(해부후수) 일본 총리는 이 파고다 공원을 사죄 방문할 예정이라 한다. 그곳이 독립만세의 진원지였다는 것뿐,생각하자면 이 강산 그 어디라하여 「파고다공원」 아닌 곳이 있겠는가. 「상징적 방문」에 뜻이 있다고 치자. 중요한 것은 그 사죄를 행동으로 이어가는 일 아닐까.
  • 윤이상씨에게 「당부」한다/송정숙 본사 논설위원(서울칼럼)

    「적기」가 태극기와 어울려,대한민국 정부청사가 즐비한 태평로 거리를 휘감고 펄럭이는 길을 따라 출근을 했다. 이게 서울이었나 하고 당황할 법한데 오히려 무심하게 지나왔다. 우리 스스로 많이도 변했음을 실감했다. 지난 10일에는 국립극장에서 열린 「통일음악회」를 관람했다. 북쪽 프로그램인 1부가 끝나자 그만 일어나고 싶었다. 그날 듣고 싶었던 것은 북쪽 음악이었으므로 늘 듣던 남쪽 것은 안들어도 그만일 것 같았다. 그러나 떨치고 일어나지는 않았다. 그것은 통일음악회의 구성이 흡사 남북의 민속음악 경연대회처럼 꾸며져 있어서 한쪽만 보고 일어나는 것은 그쪽만을 지지하는 것처럼 느껴지게 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우려가 들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느낌은 별로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그렇게 전체를 다 보고 나니까 저절로 비교가 되어 개인적인 호오의 느낌이 확연히 드러났다. 간들어진 목소리로 애교를 피워가며 1930년대 악극단의 버라이어티쇼처럼 부르는 북쪽의 민요조가 개인적으로는 마음에 안든다는 느낌이었다. 그것은 음악문화의분위기가 우리와 다른데서 오는 이질감일 것 같다. 「신고산타령」의 큰애기 부분을 「바람나서 밤봇짐을 싸는」 것으로 부르는 대신 「큰애기들이 뜨락또르 모는소리」로 바꿔 부른다든가,「우리당의 음덕이로세」를 거듭하며 정치색나게 부르는 따위의 소소한 차이쯤은 얼마든지 수용하겠는데 이상하게 가식적인 그 분위기가 간지럽고 등줄기에 뭔가 기어다니는 벌레가 들어간 듯한 느낌이었다. 악기 또한 「옥쟁반에 구슬구르는 소리같다」는 현이 많은 악기는 어쩐지 서양악기의 하프같아 우리 악기같지가 않고 단소소리 또한 원래의 소리와 좀 이질감이 들었다. 단소에다 작은 부품을 부착하여 플루트에 가까운 소리가 났다. 우리는 하프소리도 자유롭게 듣고 플루트연주도 얼마든지 들을 수 있다. 그러므로 단소소리는 단소소리답게 플루트소리는 플루트소리로 듣는 것이 좋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이런 느낌은 아마도 서로가 가진 남북의 차이일 것이다. 우리쪽의 「고전」을 가지고 평양에서 공연했을때,그쪽 평론가가 쓴 평문이 최근 국내의 주간지에 실렸다. 거기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판소리 가수들에게 고유한 쐐ㄱ소리는 인위적인 목청으로 성대를 무리하게 쓴 결과 나타난 병적 현상이다. 그런 것을 지난날 양반놈들은 술놀이판에서 흥을 내는 제놈들의 더러운 기호와 취미에 맞는다고 해서 명창이니 국창이니 하고 장려해왔다.』 남쪽식의 이른바 정통 국악을 그들은 이토록 지독하게 혐오하는 것이다. 「통일음악회」를 보고 「한핏줄」에 「동질성」의 확인을 했다고 감동에 감동을 거듭하는 찬사가 많았다. 그러나 그 감상주의에 전폭적으로 동의해지지 않는 일면이 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리고 이런 느낌도 매우 소중하다는 말을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한 조상의 후손임이 분명한데 남북에 왜 동질성이 없겠는가. 그것은 처음부터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므로 정작 궁금한 것은 『얼마나 이질화했는가』였다. 언젠가는 통일이 되어 우리 함께 살아야 할 남북이 얼마나 다른 감각을 갖고 있는가를 알아보는 일은 아주 중요한 일이다. 그런데 이번 통일음악회를 전후해서는 우리에게서 아주 미묘한 현상이 하나 있었다. 이런 이질감을 지적하는 일이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통제당하는 느낌이었다. 그저 「뜨거운 감동」에 「참음악」임만을 예찬하도록 강요하는 듯한 이 기묘한 분위기는 어디서부터 오는 것일까. 음악회기간중 돌출한 윤이상씨의 편지도 이런 분위기 연출에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이 편지는 『우리나라에 도움이 되는 내용일 뿐더러 언론기관에 배포해줄 것을 (윤씨가)특별히 당부한』 편지였는데 우리의 정부 공보관계자들이 지레 겁을 먹고 공표조차 안했음을 힐난받았던 바로 그 편지다. 당국이 언론에 전달했다면 우리의 자유롭고 공정한 언론들은 오히려 묵살해 버렸을지도 모를 이 편지는 그런 과정을 거쳐서 아주 잘 「전달」이 되었다. 그 내용의 핵심인즉 『…음악교류는 조금도,어떠한 형태로든지 그 질적 양식적 가치를 가지고 비평하지 않기를』 각 신문들에게 호소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비평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언급조차 하지 않는다는 뜻인지,언급은 하되 긍정적인 찬사만을 쓰라는 뜻인지 이 문맥으로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언론에 나타난 것은 모두 찬미 비슷한 것이었던 것을 보면 그의 말은 그런 방향으로 받아들여진 게 분명하다. 「통일음악회」는 처음부터 「윤씨의 작품」이었다. 비무장지대라고 하는 군사적 공간을 「음악회」로 묵살하자는 기발한 제안을 하여 마치 거절한 쪽에 통일의 의지가 없는 것 같은 효과적인 선전을 해서 공을 세운 그는 여러가지 방법으로 남쪽 음악인을 「선정」해서 북에서의 「통일음악회」를 이루었다. 「통일음악회의 대부」같은 그가 북한에서 누리는 위치는 『제3인자 정도』의 막강한 것이었다는 소문도 있다. 그걸 뒷받침하듯 음악인만이 아니라 「취재기자」를 선정하는 권한까지도 있어보이는 과정을 거쳐 「평양의 통일음악회」를 끝내고 그 화답행사인 서울서의 「송년 통일음악회」에 「사신」을 보낸 것이다. 그 사신에 「각 신문에」 보내는 「당부」가 있었던 것이다. 이 「당부」를 지키지 않는 신문이나 기자는 다음의 「통일음악회」같은 행사가 북에서 열릴 때에는 「선택받을 가능성」을 포기해야 한다는뜻이나 아닌지 모르겠다. 그런 생각 때문에 「지레 겁을 먹을」 남쪽 신문이나 기자는 없겠지만 그의 호소는 결과적으로 상당히 주효한 셈이 되었다. 그러나 지금 우리에게는 「서로 얼마나 다른가」를 아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그래야만 서로 안다칠 수 있고 보호할 수도 있는 것이다. 국가원수를 가지고 「물」이니 「바보」이니 흉도 보고 대로상에서 타도를 외치기도 하는 우리의 눈에는 「수령」의 지난날을 부정적으로 진술한 대목의 남쪽신문을 본 것만으로 『손이 떨려 말이 안나오는』 심경은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면서도 「붉은기가 휘날리는」 태평로거리를 유유히 지나 출근을 하는 것이 우리의 자유로움이다. 서로가 이만큼 다르다는 것을 윤이상씨는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남쪽의 이럴 수 있음에 대해서 북쪽을 이해시키는 일을 우리는 윤씨에게 「당부」한다. 윤씨는 그걸 해줄 수 있으리라고 믿기 때문이다.
  • 노대통령·고르비,반가운 “재회악수”(모스크바 여로)

    ◎“먼 길에 수고 많으셨습니다” 첫인사/급진전 관계 반영하듯 밝은 표정 대화/라이사,김옥숙 여사에 환영의 꽃다발 전달 ○…소련 공식방문길에 오른 노태우 대통령은 13일 하오 5시(현지시간) 약 11시간의 비행 끝에 모스크바 세르메체보공항에 도착,메드베데프 대통령위원회 위원의 영접을 받고 약 20여 분 간에 걸친 공항 환영행사에 참석. 검정색 코트와 중절모 차림으로 트랩을 내려선 노 대통령은 군악대가 애국가와 소련국가를 연주하는 가운데 소련 3군 의장대를 사열. ○메드베데프공항에 노 대통령은 이날 서면으로 대체된 도착성명에서 『오랜 기간 우리 두 나라와 국민을 단절시켜온 것은 식민세력의 침략과 냉전의 대립이었다』고 지적하고 『나의 소련방문은 우리 두 나라 국민과 정부간의 진정한 만남으로 역사의 새로운 장을 펼치는 일이 될 것』이라고 강조. 메드베데프 위원은 환영사에서 『역사적인 노태우 한국 대통령의 소련방문을 진심으로 환영한다』면서 『소련과 소련국민들은 노 대통령의 소련방문을 영광으로 생각하며 이를 계기로양국간의 우호가 더욱 증진되기를 바란다』고 인사. 이어 노 대통령과 부인 김옥숙 여사는 「노태우 대통령 내외의 소련방문을 환영합니다」 등의 각종 플래카드를 들고 환영나온 재소동포와 상사원 약 2백명에게 다가가 일일이 악수를 나누었으며 노 대통령을 맞는 동포들은 큰 소리로 『환영합니다. 고생했습니다』를 외치며 노 대통령을 환영. 노 대통령은 이날 간간이 날리던 눈발이 그치고 하오 5시인데도 이미 어두워진 공항에서 동포 화동들로부터 화환을 증정받고 이들을 얼싸안으며 반가움을 표시. 이날 노 대통령을 맞는 재소동포들은 서투른 한국말로 노 대통령의 손을 잡으며 찬 날씨에 아랑곳하지 않고 밝은 표정으로 맞았는데,일부 동포들은 눈물을 글썽이며 『정말 잘 오셨습니다』고 인사. ○…크렘린궁내의 영빈관에 여장을 푼 노 대통령은 하오 6시15분부터 시작된 크렘린궁 공식 환영식에 참석. 유서깊은 크렘린 대궁전의 화려한 기에르기예프스키홀에 마련된 환영식장에는 홀 중앙에 양국 대형 국기가 나란히 설치. 고르바초프 대통령 내외는 노 대통령 내외가 환영식장에 도착하기 직전에 미리 홀 중앙에 나와 기다렸으며 이어 밝은 표정으로 식장에 들어선 노 대통령 내외를 맞아 마치 오랜 친구를 만난 듯 무척 반가운 표정으로 악수를 교환. 고르바초프 대통령은 『먼 길 오시느라 수고 많았습니다. 반갑습니다』라고 인사했으며 노 대통령은 『고맙습니다』라고 답례했고 고르바초프 대통령 부인 라이사 여사는 꽃다발을 김옥숙 여사에게 증정. ○6개월여 만의 상봉 이어 양국 정상은 각기 부인을 소개하고 사진기자들을 위해 나란히 포즈를 취했는데 고르바초프 대통령은 시종 밝은 표정으로 대화를 나눠 지난 6월 샌프란시스코 한소정상회담 이후 6개월여 만에 급진전된 양국 관계를 그대로 반영. 고르바초프 대통령은 노 대통령을 직접 영빈관 쪽으로 안내하며 환담을 계속했고 이 동안 부인들도 뒤를 따르며 다정한 대화를 나누었는데 고르바초프 대통령의 부인 라이사 여사는 『내일 또 만나서 많은 얘기를 나누자』고 인사. ○…노 대통령은 공식 환영행사가 끝난 뒤 10분 정도 떨어진 옥자브라스카야호텔로 자리를 옮겨 교민들을 위한 다과를 베풀었다. 10월혁명을 기념하기 위해 지어진 공산당 영빈관인 옥자브라스카야호텔은 외국의 수상급 인사들이 묵는 곳으로 민자당 김영삼 대표최고위원이 지난 3월 방소 때 묵었던 곳이기도 하다. 알마아타와 타슈켄트 등 비행기로 4시간 이상 걸리는 곳에서 온 교민들은 노 대통령 내외의 손을 잡고 놓지 않아 대통령과 교민들의 악수시간이 예정보다 훨씬 길어지기도. 노 대통령은 교민들의 손을 일일이 잡아주면서 『이국생활에 얼마나 고생이 많으냐』면서 『이젠 국교가 정상화되고 했으니까 앞으로는 여러분의 생활이 전보다는 나아지지 않겠느냐』고 위로. 교민들은 『고국의 발전상을 잘 알고 있고 한국인으로서 자랑스럽다』고 노 대통령을 치하. 교민들은 이 자리에서 고국말을 모르는 3세 4세들이 늘어나는만큼 정부에서 이에 대한 지원대책을 세워달라고 당부하기도. ○…이날 낮 12시에 서울공항을 출발한 노 대통령은 대한항공 특별기가 이륙하자 기내에 수행중인 비서관·경제인·수행기자들의좌석을 돌며 인사를 나누었는데,노 대통령은 우리나라 국가원수로는 처음으로 소련을 공식방문하는 소감을 피력. ○“멀잖아 중국과 수교” 노 대통령은 『나는 지난 6월초 샌프란시스코회담을 하고 나서 금년중에 방문이 이루어질 줄 알았다』면서 『이번 방문이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게 될 것으로 믿는다』고 설명. 노 대통령은 『우리가 나아가는 방향이 올바른 길이면 끈기와 인내를 갖고 추진하면 반드시 훌륭한 결실을 얻을 수 있다』고 소련방문에 대한 기대를 표명하면서 『북방정책은 이제 중국만을 남기고 있으나 중국도 멀지 않아 관계개선이 이루어질 것으로 믿는다』고 말하고 『사실은 중국이 먼저 관계개선이 이루어질 줄 알았으나 천안문사태 등으로 순서가 바뀌었다』고 웃음. 노 대통령은 재일동포 법적 지위문제 등이 다시 재론되고 있는 점 등이 마음에 걸리는 듯 『독일이 통일이 되고 국제사회에서 인정을 받는 것은 전후에 죄값을 모두 치렀기 때문』이라며 『일본도 역사적 진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여 이웃나라들과 갈등과 불신을 씻어야 할 것』이라고 강조. ○…노 대통령은 13일 상오 서울공항에서 조촐하게 치러진 환송행사에 참석한 뒤 낮 12시5분쯤 대한항공 특별기 편으로 출국. 노 대통령 내외는 이날 상오 11시25분쯤 헬기 편으로 서울공항에 도착,공항청사 현관에서 대기하던 이승윤 부총리와 이연택 총무처 장관의 안내를 받아 청사 2층에 마련된 환송식장에 입장,국방부 군악대의 팡파르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의장대를 사열한 후 태극기를 흔들며 환영하는 출영객들과 악수를 교환. ○…인사를 마친 노 대통령 내외는 화동 최소정양(서울사대부국 4년)과 정왕군(서울사대부국 4년)으로부터 각각 꽃다발을 받은 뒤 환송나온 박준규 국회의장,오는 15일로 임기가 만료되는 이일규 대법원장,민자당의 김영삼 대표최고위원,김종필·박태준 최고위원,그리고 국무위원들과 차례로 악수를 나누며 인사. 노 대통령은 김 대표에게 『잘 다녀오겠습니다. 그 동안 잘 부탁합니다』라고 인사했고 이에 김 대표는 『편안히 다녀오십시오』라고 답했으며 옆에 있던 김 최고위원은 『감기드시지 않도록 잘 다녀오십시오』라고 인사. 한편 노 대통령은 출국에 앞서 평민당 김대중 총재에게 전화를 걸어 출국인사를 나누었으며 최규하 전 대통령은 12일 노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성공적인 소련방문을 기원. 청와대측은 이날 도착 직후 행사인 교민 리셉션에 사용하기 위해 국산 문배주와 소주를 준비했으며 소련의 기후를 감안하여 방한모 등을 미리 준비.
  • 노대통령 맞은 모스크바/김영만 특파원 제4신

    ◎공동이상의 상징 「크렘린궁 태극기」/「가해자」로서의 악연 청산이/참된 동반 경협의 선결요건 『북한은 6월25일 새벽 소련제 탱크를 앞세우고 38선 전역에서 기습남침을 강행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소련의 이미지는 38선을 넘어오는 탱크에서 시작된다. 그위에 다시 사할린 상공의 KAL기 격추가 겹쳐지고 그것으로 소련에 대한 이미지 형상화는 끝나 버린다. 노태우 대통령의 방문을 맞아 소련의 심장,크렘린궁에 태극기가 게양됐다. 소련땅에 태극기가 걸린 게 물론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유니버시아드대회에서부터 시작해 여러 차례 태극기는 모스크바의 하늘에 있었다. 스포츠경기장의 태극기는 소련과 한국이 스포츠에 있어서 공동이상을 추구함을 의미한다. 따라서 크렘린의 태극기는 두 나라가 정치·경제·사회·문화의 모든 분야에서 공동이상을 갖는,즉 친구가 되었음을 시각적으로 이야기해준다.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는 탱크,조각조각 떨어지는 KAL기의 잔해들은 물론 두 나라가 공동이상을 갖지 않았을 때의 과거의 이야기 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소련이 우리와 맺었던 악연을 생각한다면 두 나라가 진정한 친구가 되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벽,청산해야 할 과거가 너무 많다. 소련이 우리에게 심어준 부정적 이미지는 너무 크고 강렬한 것이기 때문에 크렘린의 태극기에서 느끼는 뿌듯한 감상만으로는 친구라 부르기가 쉽지 않다. 넘어야 할 벽,과거의 청산은 우리가 노력해야 할 부분도 있지만 대부분은 소련측이 노력하고 해결해주어야 할 성질의 것들이다. 노 대통령이 도착한 13일 모스크바의 1TV는 아침 뉴스에서 『노 대통령의 역사적인 방소가 오늘부터 시작된다』고 밝히고 『한국의 대통령이 소련을 방문하는 것은 처음』이라고 보도했다. 제1TV가 「역사적인 방소」라고 표현할 만큼 소련당국은 노 대통령의 방소에 커다란 관심과 비중을 두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관심과 비중이 혹여나 대한제국 때 제정러시아가 가졌던 관심이나,얄타회담에서 스탈린이 한반도문제에 두었던 비중과 같은 성질의 것이어서는 곤란하다. 우리가 소련에 그들이 바라는 경제협력을 할 수 있다면 소련은 우리에게동북아의 안정과 평화를 담보하고 한국의 통일에 적극적으로 기여하겠다는 의지를 가져야 한다. 국교수립을 전후해 소련당국과 언론이 보여준 태도는 한국에서 많은 것을 얻어야 한다고 계산했으나 한국측이 경협확대를 미루고 있어 유감스럽다는 것에 모아지고 있다. 물론 이들이 그러한 그들의 조바심을 공개적으로 표현하지는 않는다. 노 대통령의 방소 관련기사를 다루었던 프라우다나 이즈베스티야의 기사들도 소련당국의 그런 심증을 반영해왔다. 이들 신문들은 노 대통령에 대한 인터뷰 질문에서 한결같이 『왜 경제협력의 확대가 늦어지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이들은 또 한국당국이 기업인들의 소련 투자를 적극적으로 지원하지 않는 데 대한 유감을 간접적으로 표현해왔다. 소련의 국내사정이 어렵다는 점은 모스크바의 어느 곳에서나 느낄 수 있다. 국영상점에서 식료품이 바닥나고 그나마도 모스크바 시민임을 증명하는 카드가 없으면 물품을 구입할 수가 없다. 담배를 사기 위해서는 길게 줄을 서야 하고 달러를 지불하는 호텔식당에서음식물의 가짓수가 줄어들고 질이 떨어지고 있음을 며칠만 같은 호텔에 묵어도 느낄 수 있다. 때문에 여러 가지 면에서 보완적 경제구조를 가진 한국에 소련이 급격한 경협확대를 희망하고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그러한 경협확대와 정보교류의 확대는 상호신뢰의 기반이 구축된 연후에야만 가능하다. 소련제 탱크의 잔영과 사할린 KAL기에 대한 기억의 상처가 치유되어야만 할 것이다. 태극기가 걸려있는 크렘린궁에서 노 대통령과 고르바초프 대통령은 또 한 번 역사적인 한소정상회담을 갖는다. 크렘린궁의 태극기가 시각적으로 두 나라 사이가 친구임을 입증하는 것이라면 이날의 정상회담에서는 실질적으로 마음이 통하는 친구가 되었음이 증명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언제나 가해자이기만 했던 과거에 대한 소련측의 마음 속에서 우러나는 유감표명이 있어야 한다. 유감의 표명이 있어야만 역사 속에서 한국민이 입었던 상처가 부분적으로라도 치유될 수 있을 것이며 그 바탕에서 소련측이 바라는 진정한 친구가 될 수 있을 듯 싶다.
  • 노대통령을 맞는 모스크바서/김영만 특파원 제1신

    ◎“한국과는 「문제」 없다”… 관계개선 낙관/“한국기술·소련자원의 악수/모스크비치들/보다 풍요로운 생활 약속할 여로 됐으면…” 모스크바의 겨울은 춥고 길기로 유명하다. 생필품이 바닥나고 식료품 등의 배급제가 예고되고 있는 올 겨울의 추위는 다른 어느 해의 겨울보다 길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러나 노태우 대통령의 방소를 나흘 남겨놓은 9일 일요일의 모스크바는 이상난동일 만큼 따뜻했다. 낮기온이 0도를 오르내리고 외국관광객들은 털모자 없이도 시내를 활보하고 있다. 국내에서 외신을 통해 듣던 모스크바의 흉흉한 분위기는 감지되지 않는다. 레닌묘 앞에는 여전히 1백m가 넘는 참배행렬이 늘어서 있다. 붉은 광장은 일요일을 즐기러 나온 시민과 지방에서 올라온 관광객들로 북적거렸다. 정치와 경제 모두에서 시한폭탄을 안고가는 모스크바,그러나 여전히 평온한 모스크비치들에게 노태우 대통령의 방소는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가. 부분적으로는 페레스트로이카의 한가지 결실이라고도 할 수 있는 한소 관계개선은 일반시민들에게 어떤방식으로 투영되고 있는 것일까. 붉은 광장에서 장교계급장을 단 군인에게 인터뷰를 요청했다. 두 명의 사병과 함께 있던 올리가(27)라는 스타르쉬 세니어 레이제난토(우리 군제로는 대위와 중위의 중간)는 『한국과 소련의 관계증진을 환영한다』고 말했다. 그는 그러한 관계증진이 유익할 것이라고 말했다. 극동지역에서도 근무한 경험이 있다고 자신을 소개한 올리가씨는 『세계적인 긴장완화와 군축이 이루어지고 있는만큼 과거 적대관계였다 하더라도 한소 관계의 개선은 매우 정상적인 것』이라고 자신의 견해를 밝히면서 『예전과 같은 갈등은 없을 것』이라고 단정적으로 말해준다. 비록 고급장교는 아니지만 여전히 국경부대에서 근무하는 장교의 이같은 발언은 다소 흥미롭기까지 하다. 고르바초프만이 아니라 나라 전체가 변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기에 충분하다. 그는 군장교지만 한국에 대해서 비교적 소상하게 알고 있는 듯했다. 한국으로부터 소련이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던져봤다. 『전자공업이 매우 발달한 것으로 알고 있다. 여러 가지 부문에서 협력할 수 있겠지만 전자공업부문에서의 협력,인민소비품에서의 협력이 있기를 기대한다』. 우리나라 S전자의 카세트를 갖고 있다는 그는 『노태우 대통령의 방소를 진심으로 환영한다』고 말하고 있다. 취재팀은 잠시 후 같은 붉은 광장에서 40대 전후로 보이는 「옷을 잘 입은 신사」에게 인터뷰를 요청했다. 옷을 잘 입은 신사를 고른 것은 일반근로자일 경우 한소 관계를 묻는다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을 것이란 판단 때문이다. 올레그 블리노프(37). 국가 영화촬영위원회 비디오 필림부 매니저. 『한국과의 관계개선은 일본과의 그것보다 더 빠른 속도로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일본과는 정치적인 문제가 남아 있지만 한국과는 그러한 정치적인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지금껏 북한의 종주국 행사를 해온 소련의 국가기관관계자로부터 한국과의 사이에 아무런 정치적인 문제,즉 장애가 없다는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은 다소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아마도 그의 발언은 일본과의 사이에는 북방 4개도서의 문제가있지만 한국과는 그런 현안이 없다는 표현인 듯싶다. ­노태우 대통령의 방소는 두 나라 사이에 어떤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하나. 『샌프란시스코정상회담은 우리 지도부의 정책이 친북한에서 친한국으로 바뀐 전환점이었다. 수교를 거쳐서 노 대통령의 방소를 통한 또 한차례의 정상회담은 모든 분야에서 양국이 협조하는 마지막 세러머니가 될 것으로 생각한다』 그는 어떤 분야에서 양국이 협조할 수 있느냐는 물음에 바로 기술을 이야기했다. 이런 답변은 그 뒤 계속해서 만난 모스크비치의 답변에서 공통적으로 등장하고 있다. 그는 『한국은 기술이 있다. 우리는 반면에 무한정한 지하자원을 갖고 있기 때문에 매우 좋은 협력파트너가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고 답변했다. ○분단국 원수의 방문은 탈냉전 완성 신호/소비재 지원… 생필품난 해소 기대 소련사람들은 한국이 대단히 선진화된 공업국가로 알고 있다. 이들은 한국이 생필품분야에서 뛰어난 기술과 제조능력을 갖추고 있음을 알고 있고 노 대통령의 방소를 통해그러한 기술과 능력이 자신들을 위해 사용될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다. 사실상 모스크비치나 소련사람들이 자신들의 시와 나라를 방문한 외국원수들에게 관심을 쏟을 이유는 없었다. 미국의 대통령이 방문했다 해도 그것은 세계경영의 이야기지 자신들과는 연관이 없다. 1년에 수십 명이 넘게 소련을 방문하는 제3세계 국가원수들 역시 자신들과 무관하기는 마찬가지다. 단지 정치적인 사건일 수밖에 없고 그것은 자신들의 궁핍한 생활을 개선하는 욕구와는 너무 동떨어져 있는 높은 사람들 사이의 「친교」일 뿐이다. 그런 점에서 노 대통령의 방소는 소련국민들에게 하나의 「생활적 정치사건」으로 받아들여지는 것 같다. 취재팀이 만난 시민 모두가 한국의 「선진화된 기술」에 기대감을 표시했고 두 나라 정상의 만남을 통해 실질적인 협력이 진전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국영상점 앞의 줄이 없어져버린 (상품이 없어졌으므로 줄을 설 필요가 없다),내년부터 식량배급이 계획되고 있고 70코페이카 하던 코스모스담배가 갑자기 3루블로 뛰어버린 상황에서 모스크비치들은 외교적 공치사가 아닌 진심으로 노 대통령의 방소를 환영하고 있는 것 같다. 지나치게 큰 기대가 대통령의 방소나 정상회담에서 우리측의 입장을 어렵게 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는 별개의 문제다. 한국어를 잘하는 노비카바 타치아나(여·40)라는 모스크바 국제관계대학 교수와 전화인터뷰를 가졌다. 이 여교수는 구체적으로 한소 관계에서 어떤 협의가 있어야 하는지 혹은 어떤 부분의 협력이 필요한지 정확히 모른다고 답변했다. 그러면서 그는 『우리에게는 원조가 필요하고 한국이 그 대열에 서주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북한에서 유학한 그는 『당연히 두 나라 정상의 만남은 한반도의 평화와 「조선민족」의 통일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영향을 미쳐야 하고 또한 그렇게 될 것으로 믿는다』고 말해주었다. 취재진이 붉은 광장을 찾았을 때 3백여 명의 경찰이 광장 앞 지하도에 대기하고 있었다. 관계자들은 하오에 급진민주개혁 인사들이 광장에서 시위를 할 예정으로 있고 경찰들은 이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지하도 옆에 있는 인투리스트호텔 뒤편에 이미 10여 명의 시위주동자들이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자 공개모집을 진행중이다. 광장의 남쪽에는 지난 봄부터 생긴 천막촌이 보인다. 소련의 2중고를 붉은 광장은 극명하게 보여주는 셈이다. 천막촌으로 상징되는 국민생활의 어려움,시위와 경찰로 대변되는 보·혁의 갈등,인류의 이상향을 꿈꾸며 10월혁명을 만들어 낸 레닌이 살아 있는 모습 그대로 누워 있고 그 70년에 걸친 공산혁명을 결국은 부정한 고르바초프의 집무실이 있는 곳,그곳에 며칠 뒤 태극기가 오른다. 노조드린 우야체솔라프라고 이름을 밝힌 모스크바극장예술대학 감독학부 2학년생은 『노태우 대통령의 방소는 다른 자유국가 원수들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나라를 보다 더 자유롭게 할 수 있다는 기대를 자아낸다』고 밝혔다. 그는 한국이 북한과 여전히 대치하고 있는 나라이기 때문에 오히려 노 대통령의 방소는 자신들을 더욱 자유롭게 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다른 어느 자유진영 나라의 원수보다 냉전체제 종식의 의미가 크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있다. 확실히 분단국가의 원수가 모스크바를 방문한다는 것은 80년대 후반에 시작된 탈냉전이 완성되었음을 알리는 신호다. 모스크비치들은 노 대통령의 방소에 기대를 걸고 있고 그것이 자신들의 생활을 보다 풍요롭고 자유롭게 하는,그래서 그것이 갖는 효과의 크기에 상관없이 환영하는 눈치다. ○노대통령 방소 취재/본사,두 기자 특파 서울신문사는 노태우 대통령의 역사적인 소련방문을 심층보도하기 위해 국제부 김영만 기자와 사진부 왕상관 차장을 모스크바 현지에 지난 8일 특파했다. 두 특파원은 연말까지 소련에 머물면서 노 대통령의 방소(13∼16일)와 그 주변얘기를 중심으로 현지사정을 생생하게 보도한다.
  • 전대협소속 대학생 11명/미대사관 난입 기도

    ◎사제폭탄ㆍ화염병등 67점압수 「전대협」소속 대학생 11명은 18일 상오8시30분쯤 우루과이라운드 협상반대를 위해 서울 종로구 세종로 주한미대사관 건물 담을 넘어 들어가려다 경찰에 모두 붙잡혔다. 우루과이라운드협상 결사저지와 조국의 평화통일을 위한 「반미구국결사대」라고 밝힌 학생들은 이날 렌터카 회사에서 빌린 대전5 허5809호 12인승 소형버스에 화염병과 사제폭발물 쇠파이프 등 시위용품을 싣고 대사관후문쪽에 있는 영사처건물앞 담밑에 도착,차 지붕을 타고 담안으로 넘어가려다가 경비중이던 경찰 50여명과 격투끝에 10여분만에 연행됐다. 이 과정에서 오웅렬군(22ㆍ한양대 경영학과3년)과 전경 정순기일경(21)이 부상했다. 경찰은 이들로부터 성조기 1장ㆍ태극기 10장ㆍ대형플래카드 2장ㆍ화염병 21개ㆍ쇠파이프 7개ㆍ사제폭발물 6개 등 시위용품 12종류 67점을 압수했다. 연행자는 ▲서상현(22ㆍ한양대 사학과3년) ▲지재욱(21ㆍ계명대 무역학과4년) ▲성윤제(23ㆍ경북대 교육학과4년) ▲안승대(22ㆍ영남대 교육학과4년) ▲박규승(22ㆍ전남대 독문과4년) ▲김진영(22ㆍ건국대 정외과4년) ▲김주완(22ㆍ한양대 사학과4년) ▲장기천(23ㆍ고려대 금속공학과4년 휴학) ▲이순실(29ㆍ서울여대 체육과2년) ▲강미라(20ㆍ부산경성대 유아교육과2년) ▲오웅렬
  • 남북선수 손잡고 입장… “화합함성” 7분

    ◎통일축구 열리던 날의 경기장/공차다 넘어지면 내남없이 부축… 관중 박수/「5ㆍ1경기장」 15만석 꽉채워… 단일깃발로 응원 ○전광판엔 「민족 대단결」 ○…홍백의 남북 축구선수단은 하오 3시5분 서로 손을 잡고 5ㆍ1경기장 트랙에 모습을 나타냈다. 15만 관중은 남북 선수가 2열로 손을 잡고 들어오자 함성을 지르며 일제히 일어나 손뼉을 쳤다. 선수들이 손을 흔들며 천천히 운동장을 반바퀴 돌아 경기장 중앙에 서서 인사를 하자 장내는 함성과 함께 딱딱이 소리가 진동했다. 밴드는 「우리의 소원」을 연주했고 이때 전광판은 「민족 대단결」을 새겼다. 관중들의 함성과 박수는 7분 동안 잠시도 쉬지 않았다. ○태극기ㆍ인공기없이 진행 ○…경기장 전광판은 「북」 「남」이라고 출전팀을 소개했고 태극기와 인공기는 보이지 않았다. 또 맞은편 쪽 전광판에는 『남측 축구선수단을 열렬히 환영한다』 『조국은 하나다』는 구호가 번갈아 나왔다. ○외신기자들,감독인터뷰 ○…이날 남북통일축구경기장에는 대회비중을 감안한 탓인지 남북기자들 외에도 타스통신 신화사통신 등 평양 주재 외신가자들이 대거 몰려들어 눈길. 외신기자들은 특히 한국 북한 감독들에게 집중 인터뷰공세를 펴는 등 남북축구에 비상한 관심을 표명. ○“소원은 통일” 메아리 ○…관중들은 관중석 30여군데에 배치된 악대리듬에 맞춰 「우리의 소원은 통일」 「고향의 봄」을 목이 터져라 부르고 또 불렀다. 15만명이 한꺼번에 쏟아낸 함성과 딱딱이 소리가 원형지붕에 메아리쳤다. 엄청난 응원열기에 한국측 인사들도 매우 상기된 표정. 북한측은 이날 흰 바탕에 하늘색 지도가 그려진 북경아시안게임 단일팀 깃발을 들고 나왔다. ○…남북통일축구대회가 열린 5ㆍ1경기장은 경기가 벌어지기 3시간 전인 12시부터 15만 좌석을 모두 채운 채 단일팀 깃발을 흔들며 뜨거운 분위기를 연출했다. 스탠드 하단에 자리잡은 대규모 악단(2백여명)이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연주하자 관중 모두 따라부르며 흥을 돋웠다. 관중들은 북한 당국에서 각 기관별 직장별로 배분한 무료 초대권을 갖고 입장했고 질서정연하게 응원전을 펼쳤다. ○“아주대회보다 큰 감명” ○…평양설계전문학교 3년생인 정해진 씨(20)와 김용순씨(20)는 『중앙 TV로 생중계되지만 통일염원의 현장을 직접 보고 싶어서 나왔다』며 남쪽 선수들이 운동장에 모습을 나타내자 환호성. 국토사업소에 근무한다는 송도일 씨(34)는 『체육 부문에서 처음으로 통일의 분위기가 무르익었다』면서 『지난 아시아경기대회에서 함께 응원하는 모습을 보고 크게 감명받았는데 이번 통일축구대회는 그것보다 더 큰 감동을 느낀다』고 말했다. ○홍ㆍ백 유니폼 입고 나와 ○…국기없는 홍백의 유니폼을 입은 남과 북의 선수들은 공을 빼앗긴 후 되찾기 위해 태클을 하다가도 상대가 다칠세라 나가던 발을 거둬들였다. 공을 놓고 다투다 넘어지면 모두가 달려가 부축했다. 관중들도 너나 할 것없이 격려의 박수를 보냈다. 평양TV의 중계아나운서도 양팀을 「남측」 「북측」으로 중계했다. 본부석에는 정동성 체육부 장관과 김유순 북한국가올림픽위원회 위원장이 나란히 앉아 파인플레이가 펼쳐질 때마다 박수를 치며 서로가 『이겨라』라고응원했다. 전반 25분 김주성이 첫골을 넣자 관중들의 함성이 스탠드를 흔들었다. 골을 넣으면 습관적으로 펄쩍 펄쩍 뛰던 김주성도 멈칫 서서 관중들에게 깍듯한 인사를 보냈다. ○서로 격려하며 재회약속 ○…5시17분 통일염원을 안고 남북이 함께 뛴 평양통일축구전이 끝났다. 종료 직전 PK성공으로 북측이 역전승을 거뒀으나 전광판의 시계가 멈춘 후 주심의 호각소리가 길게 울려퍼지자 선수들은 누구를 가릴 것 없이 서로의 등을 토닥거렸다. 땀으로 범벅된 윗옷을 바꿔입은 선수들은 다시 장래를 진동하는 박수소리에 보답하는 깊은 인사를 했다. 한국선수들은 바꾼 옷을 입고 관중들에게 축구공을 던져주었다. 23일 서울서 다시 만나 한바탕 놀아주기를 기약하면서. 이날 경기심판(주심 장석진,부심 전천익 리광호)은 모두 북한이 맡았다.
  • 소아마비 딛고「카약3관왕」우뚝/아시아정상에 선 천인식의“금빛투혼”

    ◎항해사 꿈꾸던 국교1학년때 역경에/끝없는 도전 시도… 고3때 대표로/부르튼 손 달래며 역주… 금셋의 기적 이뤄 첫번째 금메달을 땄을때 눈물을 흘렸다. 세번째 금메달이 확정될땐 선수단 모두가 환호성을 터뜨렸다. 5일 제11회 아시안게임 카누경기가 열리고있는 베이징북동쪽 진하이경기장. 우리나라 첫 3관왕 천인식(22ㆍ한국체육대 4년)은 불편한 걸음걸이로 세번씩이나 시상대에 올라 펄럭이는 태극기와 울려퍼지는 애국가의 주인공이 됐다. 천형이나 다름없는 소아마비를 딛고 일어선 인간승리의 날이었다. 천선수는 이날 상오10시20분 카약1인승 1천m결승에서 레이스초반부터 인도네시아 아니시,중국의 마푸량을 따돌리고 독주를 거듭,아시아 최강자의 자리에 올랐다. 1시간뒤 천선수는 동료 박차근선수(22ㆍ상무)와 한조를 이뤄 출전한 카약2인승 1천m결승에서 또 중국팀을 따돌리고 우승했다. 박선수역시 테니스선수이던 고교시절 부상을 당해 카누로 종목을 바꾼끝에 금메달을 딴 또다른 인간승리의 주인공이었다. 천선수는 이날하오 다시 박선수와 카약2인승 5백m에 출전,마침내 한국선수단 최초의 3관왕에 올랐다. 같은시간 충무항에서 한시간거리인 경남 통영군의 작은섬 만지도 천선수집에서는 반가운 금메달소식이 TV로 전해지자 어머니 김경숙씨(63)는 한동안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 다리가 불편한 천선수가 금메달을 땄다는 것은 곧 보통사람이 몇배이상의 고통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천선수의 어린시절꿈은 원양어선의 항해사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고향마을 조양국민교 1학년때 왼쪽다리에 소아마비증세가 나타났다. 불구를 이기기위해 틈틈이 배구를 해보았지만 다리에 힘이 없어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불편한 다리에도 불구하고 항해사의 꿈은 그를 부산해양고로 이끌었고 그곳에서 우연히 카누부 문병섭코치와 마주친것이 인생항로를 바꾸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천선수는 처음 무거운 패들(노)을 잡는것이 전혀 내키지않았으나 「인생은 끝없는 도전」이라며 끈질기게 설득하고 격려하는 문코치를 뿌리칠 수 없어 조정을 시작했다. 그러나 하체의 힘이 중요한 조정이 천선수에게 맞지않는 것을 안 문코치는 천선수에게 카누를 권했다. 카누를 시작한지 1년반의 눈물겨운 노력끝에 고3때인 지난86년 처음으로 국가대표에 뽑혔다. 다음해 한국체육대에 들어가면서 천선수는 국내 카약의 제1인자가 됐고 마침내 아시아 제1인자의 자리에 우뚝 서게 된 것이다. 어린시절부터 아버지 천용범씨(65)의 1.5t짜리 고기잡이배에서 항해사의 꿈을 키웠던 천선수는 이제 한국카누계를 이끌 확실한 항해사로 성장했다. 카누연맹은 이번 대회에서 우승하는 선수에게 승용차를 선물하기로 약속해 천선수는 귀국하면 승용차를 갖게된다.
  • 민ㆍ군 손잡고 “통일기원 대행진”

    ◎건군 42돌… 탈춤ㆍ농악등 「한마음축제」/20만 연도시민 색종이 뿌리며 환호/한강선 거북선취항식ㆍ항공시범도 「국민과 함께 국군과 함께」 「하나되어 통일로」라는 주제로 열린 건군 제42주년 국군의 날 행사가 1일상오 여의도 광장에서 거행됐다. 특전사 장병들의 고공 낙하와 태권도 시범으로 시작된 이날 행사는 육ㆍ해ㆍ공군 장병들의 분열과 88탱크 등 한국형 각종 신예장비 등이 위용을 자랑했고 F16기 등의 편대 비행 등 2시간에 걸쳐 진행됐다. 여의도 기념행사가 끝난뒤 도보부대와 기계화부대장병들은 이날 하오3시 남대문과 시청앞 광화문에 이르는 시가행진을 벌였다. 시가행진을 하는동안 20여만명의 시민들이 연도에 나와 태극기를 흔들며 장병들을 격려했고 프레스 센터 등 고층빌딩에서는 오색종이를 날려 축하해 주었다. ▷기념식◁ 오색찬란한 육ㆍ해ㆍ공군 각급 부대기와 경축 애드벌룬이 펄럭이는 가운데 시작된 기념식은 노태우대통령이 이상훈국방부장관과 정인균제병지휘관의 안내로 육ㆍ해ㆍ공군ㆍ예비군ㆍ학군단ㆍ기계화부대를 차례로 사열하면서 시작됐다. 사열을 마친 노태우대통령은 정호근합참의장에게 이날 창설된 새로운 합참본부기를 수여했다. 1천여명의 특전사장병들이 태권도시범과 격파묘기를 보이자 기념식에 참석했던 10만여 시민들이 박수갈채를 보내며 환호했다. 이어 육군항공대의 헬리콥터 선도비행,도보부대 및 기계화부대 분열,공군 E5E팬텀,F16의 편대비행에 이어 민ㆍ군 합창단의 「아! 대한민국」합창으로 기념식에 모두 끝났다. 기념식과 분열이 끝이 난 다음 벌어진 식후행사에는 올림픽부대장병 1천여명이 벌인 올림픽개막식때 규모의 고놀이를 시작으로 남사당놀이와 평택농악,북청사자놀이,양주별산대놀이,봉산ㆍ강령탈춤 등을 추어 축제분위기를 자아냈다. ▷시가행진◁ 도보부대는 하오3시 50여대의 헌병사이드카부대를 앞세우고 남대문을 출발,시청앞을 거쳐 세종로 네거리까지 1.2㎞를,기계화부대는 남대문∼시청앞∼세종로∼종로∼동대문까지 4㎞를 행진했다. 기계화부대뒤에는 9t트럭 6대를 민ㆍ군화합,민족자존,자유체제수호 등 각종 상징조형물로 꾸며 각계 각층의 보통사람 54명과 장병 38명 등 92명을 태운 호국대행렬이 뒤따랐다. 시청앞에 마련된 사열대에는 정호근합참의장과 이진삼육군,김종호해군,한주석공군참모총장 등 군지휘부와 소년소녀가장ㆍ우체부ㆍ청소부ㆍ어머니회원ㆍ노인회원 등 보통사람 5백여명이 자리잡고 박수를 보내며 늠름한 국군장병들의 행진을 지켜봤다. ▷한강축제◁ 이날 한강변선착장과 고수부지 등 4곳에서는 공군과 해군주관으로 4개 행사가 있었다. 낮12시부터는 동부이촌동 고수부지에서 해군이 제작한 거북선취항식이 거행됐으며 하오3시부터 5시30분까지는 여의도 고수부지에서 공군주관으로 동력행글라이딩시범ㆍ무선모형항공기시범ㆍ조종사생환구조시범 등 한강 공중축제가 있었다. 잠원동 선착장에서는 해군의 특전대시범과 LVT시범이 있었고 잠원수영장에서도 상오9시부터 모형함선만들기와 모형함선 속도경주 등이 벌어졌다.
  • 남북 경제교류 당분간은 제한적(평양의 변화 이렇게 본다:3)

    ◎대규모 교류 땐 김일성체제 불신증폭 우려 지난해말 이래로 사회주의 국가들은 급격하게 기존체제를 해체하고 시장경제체계로 이행하고 있으며,그 과정에서 민족주의 정신이 고조됨과 아울러 분단국들의 통일이 속속 이루어지고 있다. 다민족­1연방국가인 소련과 유고슬라비아가 연방해체의 위기를 맞고 있는 반면,민족분단국인 남ㆍ북예멘은 금년 5월22일 통일을 선언하고 한 나라가 되었고,동ㆍ서독 역시 금년 7월2일에 경제 및 사회통합을 이루고 10월3일에는 정치적 통일을 달성하게 되었다. 지금 북경아시아경기대회에서 화합을 다지고 있는 중국과 대만도 쌍방이 경제교류를 확대키로 함으로써 1997년 홍콩이 중국에 반환되는 시기를 전후하여 경제통합을 이룰 가능성을 보이고 있다. 제2차대전 후 굳어질 대로 굳어진 동서대립의 냉전구조 속에서 살아온 사람들로서 어느 누가 이런 일들이 현실화되리라고 감히 상상이나 했겠는가. 지금까지 우리가 가지고 있던 기존사고의 틀을 완전히 깨뜨려버리는 이러한 놀라운 역사적 대변혁의 분위기 속에서 우리는지난 6월5일 한소정상회담을 보았고 그것이 수교로 이어지는 역사적 순간을 맞고 있다. 이러한 국제적 상황의 전개와 더불어 최근 남북총리회담이 열리고 북경아시아경기대회에서 남북이 함께 어울려 태극기와 인공기가 교차하는 가운데 서로간의 체육교류를 협의하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의 관심은 다시금 통일 문제로 쏠리고 있다. 우리도 남ㆍ북예멘이나 동ㆍ서독처럼 분단의 벽을 허물고 통일을 이룰 수 있을 것인가. 이에 대한 제1차적 대답은 과연 북한이 지금 전개되고 있는 역사의 흐름에 진정으로 순응할 것이냐 하는 데서 찾아야 할 것이다. 북한체제 변화의 시나리오는 크게 ①김일성­김정일로 이어지는 세습체제 아래서 부분적인 개혁ㆍ개방이 추진되는 경우 ②현 북한 집권층이 변화의 불가피성을 인정하고 과감한 개혁노선을 취하는 경우 ③쿠데타나 민중봉기와 같은 돌발적 사건이 발생하여 김일성과 김정일이 실각되고 새로운 지도자가 집권하여 체제변혁의 길을 택하게 되는 세가지의 경우를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단계에서 첫번째 시나리오를 제외한 나머지는 기대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두번째 시나리오의 실현 가능성이 약한 까닭은 김일성­김정일의 부자정권세습을 합리화시키기 위하여 주창해온 주체사상을 바탕으로 하여 세워진 체제와 그것을 유지시키기 위해서 추진되어 온 기존의 정책노선을 일시에 바꾸는 개혁이 정치적 변혁없이 도저히 가능할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세번째 시나리오의 가능성을 뒷받침해주는 것으로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이 금년 6ㆍ25에 관한 기사에서 김일성의 권력승계 후에 쿠데타가능성이 있다고 보도하고,「뉴욕타임스」는 북한에 민주화운동 세력이 조직되어 있는 것으로 보도한 바 있다. 그러나 북한의 상황은 동유럽과 여러 면에서 많이 다르다는 점에서 세번째 시나리오의 실현 가능성은 크지 않다고 판단된다. 북한의 변화가 첫번째 시나리오와 같이 서서히 이루어진다고 할 때 그것을 통일의 단계에까지 발전시킬 수 있는 요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다름이 아닌 남북 경제교류이다. 남북 경제교류의 의의는 그것이 갖는 경제적 이익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것보다는 오히려 남ㆍ북한이 여러 형태의 물적 교류와 그를 위한 인적 교류의 확대를 통해서 상호이해를 증진시키고 상호불신에서 야기되는 긴장을 완화시킴으로써 궁극적인 통일을 이루고자 하는 데 더 큰 의의가 있다. 다른 분야에 비해서 특히 경제분야에서의 교류의 의의가 큰 것은 그것을 통해서 쌍방에 서로의 물적 이익의 거점이 마련됨으로써 교류의 영속성이 보장되기 때문이다. 남ㆍ북예멘은 단일민족이기는 하지만 통일국가의 경험이 전혀 없었다. 그러면서도 극적인 통일을 이루게 된 동기는 민족분단 극복의 욕구보다는 세계 최빈국으로부터의 탈피라는 경제적 필요성이 더 크게 작용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동ㆍ서독의 통일 역시 동독의 서독에 대한 경제적 의존도의 심화가 동독을 서독에 흡수통합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게 한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남북한의 경제교류는 통일의 전제가 되는 북한의 체제변화를 가져다 줄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북한은 1985년에 한ㆍ미 팀스피리트훈련을 이유로 경제회담을 무기한 연기하여 사실상 중단시켰던 것과 같이 최근에는 현대그룹이 북한에 제공하겠다는 장비의 무상지원을 국가체면 손상이라는 이유로 거부하는 한편 금강산개발 등 모든 공동 프로젝트의 추진까지 무효화한다고 발표하여 남북 경제교류의 길을 트는 데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더욱이 이번 북경아시아경기대회중에 북경당국이 제공하는 차량이 한국산이라는 이유로 사용을 거부했다는 소식까지 들린다. 현재 남북한 경제교류의 명맥은 우리 기업들이 홍콩,싱가포르,스위스 등의 무역상을 통해서 북한의 철강재,아연과,무연탄,전기동,한약재,생사 등을 반입하는 간접교역으로 유지되고 있다. 「7ㆍ7선언」으로 남북 경제교류가 허용된 뒤인 1988년 10월부터 금년 8월까지 북한상품의 반입 규모는 3천3백85만6천달러였으나 북한에 대한 우리 상품반출 규모는 반입액의 0.5%도 채 안되는 16만2천달러에 불과하다. 이러한 사실은 북한의 한국제품 기피현상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남북한 경제교류는 세계에서 가장 경직된 체제를 가지고 있는 북한을 상대로 하기 때문에 한국이 아무리 북한에 대해서 문호를 개방하고 유연한 자세를 취한다고 하더라도 단기적으로 성과를 기대하기는 매우 어렵다. 북한의 김일성 정권은 분단 이후 지금까지 일관되게 북한체제의 우월성과 남조선 해방을 북한 내부에 주입시켜 왔다. 그러한 상황에서 남북 경제교류가 이루어짐으로써 남한의 실상이 북한 내부에 알려지게 된다면 그것은 분명히 북한 내부에 하나의 큰 충격이 될 것이며 김일성 체제에 대한 북한 주민들의 불신을 증폭시킬 가능성이 크다. 그러므로 북한의 현 체제가 유지되는 단기적 관점에서 본다면 남북한간의 경제교류는 극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남ㆍ북한이 동ㆍ서독과 같은 경제통합에까지 이른다는 것은 북한체제의 변혁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남북한의 경제통합을 위한 목표와 전략은 중ㆍ장기적 시각에서 모색되고 추진되어야 하며 경제통합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정부나 기업의 대내외적 과시나 선전효과를 지양하고 북한의 변화를 가속화시키는 분위기 조성과 더불어거기에 대응할 수 있는 우리의 내적 충실을 다져나가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 외언내언

    40년 전의 여름. 물밀듯이 남으로 내려오는 소련제 탱크 위에서 펄럭이던 깃발을 우리는 기억한다. 「인민공화국」기. 중앙청에서 혹은 도청ㆍ군청ㆍ면사무소 옥상에서 공포를 흩날리던 깃발이었다. ◆태극기와는 어디서나 대치관계에 있어 왔던 기가 인공기. 그 깃발 아래서 서로가 총을 쏘고 포를 쏘고 피를 흘렸다. 두 깃발을 앞에 두고 마주앉은 대표들이 설전을 벌여오기는 또 그 얼마였던가. 서로가 그 깃발에 영예를 안기고자 혈투를 벌일 때 태극기와 인공기는 적의를 내뿜었다. 한겨레의 비원과 통한을 상징해 온 두 깃발. 생각하자면 맺힌 응어리는 깊다. ◆그 두 깃발이 베이징 하늘 아래서 함께 함성을 안으면서 물결쳤다. 겨레의 노래 「아리랑」의 합창이 경기장으로,하늘로 울려 퍼지는 가운데. 김기림이 「인민평론」(1946년7월)에 쓴 「한 기ㅅ발 받들고」의 「한깃발」은 아니었다. 「찢어져 퍼덕이던 기빨」도 아닌,「두깃발」이었지만 「한깃발」되었던 태극기와 인공기. 『상황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사람이다』(네덜란드의 지휘자 안세르메).변화한 상황에 부여된 새로운 의미가 이것인가. ◆외국의 언론도 『국기는 두개이나 민족은 하나』였다고 평한 남북 화합의 장이 베이징 하늘 아래 펼쳐졌다. 한 핏줄임을 확인하면서 목놓아 감격한 응원석. 경기 외적인 성과임에는 틀림이 없다. 하지만 매양 우리가 경계해야 할 일은 지나친 흥분. 이런 자리에서까지 「림수경」을 들먹이는 그들의 계산된 생리를 바로 보면서 마음을 풀줄은 알아야겠다. 「서울­평양축구 교환」만 해도 지나친 흥분이 낳은 오발탄. 「침착한 흥분」이어야겠다는 뜻에서의 말이다. ◆지금의 「오발탄」도 언젠가는 「정발탄」이 될 수는 있다. 그런 날을 보다 앞당기기 위해서도 신중하고 침착한 우리의 자세는 요청되는 것. 「두 기ㅅ발」은 「한 깃발」이 되어야 한다. 두 깃발이 섞여 휘날린 이번 대회는 그 날로 한걸음 다가섰음에 다름 아니다.
  • 남북응원단 어울려 한마음 합창/북경게임 첫대결 경기장서 화합한마당

    ◎45년의 응어리 푼 “응원통일”/상대방 응원석 찾아가 동포애다져/어깨동무하고 「아리랑」 목놓아 불러/서먹했던 분위기 눈녹듯… 감격의 눈물도 【북경=특별취재반】 남과 북의 동포들이 높푸른 북경의 가을 하늘아래 목소리를 모아 함께 어우러졌다. 비록 승부를 갈라야 하는 경기였지만 남북한 응원단은 한 마음 한 목소리로 선수들의 사기를 북돋우며 통일을 향한 강렬한 소망을 불태웠다. 북경아시안게임의 첫 경기이자 남북한간의 첫 「대결」이 벌어진 23일상오 북경의 펭타이(풍태)스포츠센터 소프트볼 구장에서는 남북한 선수들이 승패를 떠나 페어플레이를 펼쳐 한껏 뜨거운 동포애를 다졌다. 양측응원단은 2시간여동안 태극기와 인공기를 흔들고 「아리랑」 「우리의 소원은 통일」 등의 노래를 목이 터져라 부르며 선수들을 열렬히 응원,45년동안 남북한 사이에 맺힌 응어리를 풀었다. 이날의 화기넘치는 분위기는 상오8시30분 경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한국팀 주장 오현주선수(23)와 북한팀 주장 한영애선수(22)가 서로 손을 맞잡고 『승부에 집착하지말고 서로 잘 겨루어보자』고 다짐하면서 움트기 시작했다. 두팀 선수들은 응원석 앞경기장에 나란히 도열,서로 악수를 나누고 등을 두드리며 기념페넌트를 교환한뒤 경기에 들어갔다. 먼저 경기장에 나와 오른쪽 관중석에 자리잡고 있던 북한측응원단 3백여명이 딱딱이를 두드리거나 3ㆍ3ㆍ7박수를 치며 응원을 시작했다. 남한응원단 1백여명도 30분뒤 경기장에 도착,왼쪽 스탠드에 자리를 잡고 태극기를 흔들며 선수들을 격려했다. 양측응원단은 처음 10여분동안 제각기 떨어진채 응원전을 펼쳐 다소 서먹한 분위기였으나 연예인 응원단장인 코미디언 이주일씨가 태극기를 들고 북한응원단쪽으로 찾아가면서부터 딱딱한 분위기는 눈녹듯 풀리기 시작했다. 곧이어 북한응원단의 농악대 5∼6명이 인공기를 들고 남한응원단을 찾아와 서로 섞여 앉은 가운데 남북선수들을 함께 응원했으며 우리쪽의 이상룡응원단장도 응원단원 10여명과 함께 북한응원단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때부터 남북한 양측 응원단석에 화기가 넘치면서 태극기와 인공기가 한데 뒤섞여물결을 이뤘다. 응원단은 서로 어깨동무을 하고 「아리랑」 「우리의 소원은 통일」 「쾌지나칭칭」 등의 노래를 부르며 선수들을 응원,관중석은 한핏줄의 뜨거운 정이 넘쳐흘렀다. 남한응원단석에서 꽹과리를 치며 열렬히 응원하던 북한응원단장 전육성씨(59)는 『이렇게 함께 응원을 하니 너무나 감격스럽다』면서 흥분을 감추지 못했고 평양무용대학 교수 이영길씨(45)는 『남의 땅에 와서 이렇게 어우러지는 것보다 우리 강토에서 만나 뜨거운 정을 나눌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느냐』면서 남한 응원단원의 어깨를 감싸고 있던 팔을 풀지 않았다. 또 남한 응원단원인 동국대 김혜진양(21)은 『북한동포들과 한마음으로 뭉쳐 응원을 하면서 우리모두가 한핏줄을 타고난 배달겨레이구나 하는 생각에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며 상기된 표정이었다. 남한팀이 1­0으로 이긴 가운데 경기가 끝나자 북한 선수들은 다소 풀죽은 모습으로 실망하는 빛을 보였으나 두팀선수들은 곧 서로 손을 잡고 『잘 싸웠다』고 격려한뒤 양쪽 응원석을 번갈아 찾아가 함께 인사하고손을 흔들어 뜨거운 응원을 해준 고마움에 답했다. 북한응원단은 모두 1천3백여명으로 지난19일과 20일 비행기와 열차편으로 북경에 도착했었다. 북한응원단의 한성국씨(46)는 『응원단을 뽑을때 신청자가 너무 많아 연령순ㆍ외국여행경험이 적은 순 등으로 각 단위사업장에서 고르게 선발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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