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탕진
    2026-05-28
    검색기록 지우기
  • 이주민
    2026-05-28
    검색기록 지우기
  • 목수
    2026-05-28
    검색기록 지우기
  • 과천
    2026-05-28
    검색기록 지우기
  • 요리
    2026-05-28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1,374
  • [대한광장] 탈세·낭비는 공동체 해치는 범죄

    사람들이 생명을 유지하고 문화생활을 누리는 과정에서 물질적 정신적 욕구를 충족시키려면 역시 물질적 정신적 생산과 공급이 이루어져야 하며 생산·창조·공급에는 일정한 노동력이 필수적으로 요구된다.그리고 이 노동력은사회공동체의 누군가에 의해 싫든 좋든 반드시 제공되어야 한다.질량불변의법칙에서 보듯이 소비가 있는 곳에 반드시 그 소비량만큼의 생산·창조가 먼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회공동체와 그 성원들의 생산·유지·발전에 절대적으로 필요하고 귀중한 노동은 대부분의 인간들에게는 힘이 들거나 괴롭고 어렵고 고통을주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물질적 여건이 충족되는 순간 가능한 한 기피하려는 것이 본성처럼 되어왔다.이러한 이유 때문에 인류사회에서는 노동을신성한 의무로 교육시켜 오기도 했다. 오늘날 특히 도시 출신 청소년들의 경우 지식쌓기 경쟁에만 심혈을 기울이게 됨으로써 노동과 봉사에 대한 고상한 의무감은 별로 지니지 않게 되는 추세이다.인간의 인간에 대한 수탈과 착취의 역사도 결국 이와 같은 생산의 고통과 노동기피 경향에서 시작된 것이며 피탈과 노동고통으로 인한 반항과 반성이 논란되어온 역사 역시 노동을 해야 할 사람들이 하지 않고 특정 다수의 약자들에게만 계속해서 노동을 맡긴 채 오히려 가진 자들이 다른 사람들의노동 결과물을 합법·비합법적으로 빼앗아 차지해 가는 모순관계의 강화형태로 진전되어 왔다. 한반도 공동체사회의 지난 1,000여년간은 철저히 일하는 다수계층과 놀고먹는 소수의 소유계층으로 분리되어 물질경제적 권익과 자유를 놓고 크고 작은 모순관계에 의한 불평등·착취상태를 계속해왔다.소수계층의 지주와 다수의 농노적 신분이 대결해온 농본적 봉건시대를 지나자 이민족의 총칼에 의한 노예노동 강요시기가 닥쳐왔고 이어서 또 다른 이민족에 의한 해방감도 잠시,불평등하고 모순에 찬 자본 중심의 수탈체제가 그대로 계승됨으로써 호적상의 노예제만 아닐 뿐 생산노동관계에서는 언제나 지배·종속적 관계로 사회구성 체제상의 갈등이 끊이지 않아 왔다. 더구나 해양세력이 주도한 침략적 강요에 의해 분단된 한반도에서는 북은북대로 거대한 군사대국들의 침공위협에 맞서 방어무력 갖추기에 바빠 가난에 허덕이고 있고 남쪽은 남쪽대로 대륙세에로의 눈길을 두려워하는 자본지배세력의 위압에 눌려 생산근로자로서의 권익과 자유 향유에서 치명적인 불평등조건을 감수하면서 자유와 권익 침해자들의 방자한 행동을 통제하지 못하여 왔다. 얼마전에는 한 신문사 사장이 외국의 도박장에서 수십만달러의 돈을 탕진했다는 사실이 거의 확실하게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법적 제재도 없이 소문으로만 사라져버림으로써 ‘무법치사회’의 진면목을 보여주었다.그 뒤 잇따라 어느 신문사 사장이 1,000여개의 가명과 차명계좌를 통해 수십억의탈세를 하였음이 본인 스스로의 자인에 의해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재벌·족벌언론과 보수야당은 악착같이 ‘표적수사’,‘정치보복’,‘언론탄압’운운하는 선제역습으로 국민들의 언론자유에 관한 의식방향을 왜곡시키는 범죄를 저질렀다. 이와 같은 정치적 역습은 서민대중의 권익옹호와 민주화 개혁을 방해하려는 기득권 세력의 음해적폭로전술에 의해 극적인 효과를 내면서 공동체 전역의 생산활동에까지도 지장을 초래하고 있다.그리하여 서민근로대중의 권익을 보장해주기로 다짐했던 ‘국민의 정부’에서조차도 서민대중의 권익을 회복시킬 정치·경제·언론분야 등 일체의 개혁입법을 이뤄내지 못하고 ‘벌떼언론’에 쏘인 채 엉거주춤 반쯤 포기상태에 빠져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민주정부라면 지금이라도 모든 언론사의 정상적인 세무조사를 당당하게 실시하여 의법처리해야 하는 것이 정권담당자의 책무이다.그리고 기득권 세력의 부당한 수탈자산과 점유물을 언제라도 공동체에 환원하도록 해야 하며 최소한 50여년 동안 이루어진 일체의 탈세행위는 시한과 지위에 관계없이 적법조치해야 옳을 것이다. 그리고 자기의 노력봉사 이상의 소비를 하거나 불건전한 소비제품에 과소비하는 부유층의 낭비풍조도 사회공동체에는 막대한 침해행위가 된다는 사실을 누구나 절실히 깨닫도록 법적 제도적 도덕적 장치와 교육이 있어야 할 것이다. [朴智東 광주대교수·언론학]
  • 퇴폐 창업 ‘히로뽕 윤락 알선’

    ‘히로뽕 윤락’을 함께 할 여성을 소개해 준 이벤트회사 대표와 히로뽕 윤락을 한 남자고객 등 10명이 검찰에 적발됐다. 권용필(權容必·35·K대 대학원 휴학)씨는 올 초 생활정보지에 실린 ‘소자본 창업’을 보고 광고를 낸 전모씨를 만났다.이 때 권씨는 전씨로부터 윤락을 원하는 남자고객과 여성의 전화번호가 빼곡이 적힌 수첩을 50만원에 샀다.소자본 창업이란 게 다름아닌 윤락 알선업이었던 것이다. 권씨는 지난 3월 ‘나그네’라는 이벤트 회사를 차린 뒤 윤락 알선업에 뛰어들었다.단순히 윤락을 알선하는 데 그치지 않고 히로뽕을 함께 할 윤락녀도 주선하기 시작했다. 히로뽕 윤락은 보통 20만원선인 단순 윤락과 달리 화대만도 70만원 이상이었다.2∼3일을 함께 지내며 히로뽕 윤락을 할 때는 부르는 게 값으로 많게는 500만원에 흥정되기도 했다는 것이 권씨의 설명이다.주고객은 중견기업 이사,대기업 차장 등 회사원과 자영업자였지만 그 가운데 단골손님은 백순흠(白淳欽·42)씨.백씨는 권씨로부터 소개받은 서영희씨(31·여) 등 여성 4명과서울시내 호텔이나 오피스텔 등지에서 히로뽕을 투약한 채 성관계를 가졌다. 백씨가 히로뽕 윤락으로 탕진한 돈만도 수천만원에 이른다. 권씨는 히로뽕을 함께 할 여성을 소개해 주고 화대의 15%선인 2만∼6만원을송금받는 등 수백회에 걸쳐 2,000만원을 챙겼다. 권씨가 관리한 여성 가운데김모양(19) 등 2명은 히로뽕 투약경험이 전혀 없었지만 고가의 화대를 제시하는 남성고객의 유혹에 못이겨 히로뽕 윤락을 하기도 했다. 결국 이들은 검찰에 적발됐고 서울지검 강력부(文孝男 부장검사)는 19일 권씨와 백씨 등 6명을 향정신성의약품 관리법 위반 등의 혐의로 구속기소하고히로뽕 공급업자 강철성씨(36) 등 4명을 같은 혐의로 수배했다. 강충식기자 chungsik@
  • [대한포럼] 과소비 秋夕 안돼야

    추석(秋夕)을 일주일여 앞두고 거리풍경은 벌써부터 선물을 싣고 나르는 차량물결로 어수선하다. 백화점 부근은 교통이 소통되지 않아 차도가 온통 주차장화하고 있다. 백화점 안도 마찬가지다. 지하 식품매장은 말할것도 없고이층 삼층 옷가게와 스포츠용품 코너에 이르기까지 마치 난리가 난듯이 인파가 넘치고 있다. 아이들을 걸리고 안고 유모차에 태워 아우성치면서 엘리베이터를 오르락내리락하는 그들은 과연 부자들인가. 시장도 아닌 백화점에서이미 포장된 물건을 정가대로 사서 차트렁크에 싣는 것을 보면 아마도 틀림없이 고소득층일 것이다. 백화점 추석선물특선 책자에 보면 50만원대 100만원대 영국산 도자기세트에다 250만원대 골프채, 400만원대 수입의류와 양주, 한약재를 먹여서 키웠다는 한우고기에 자연산 송이세트, 굴비세트는 100만원대에 이른다. 더 놀라운 것은 1,000만원대 초고가 산삼선물세트가 등장하고 있는 사실이다. 추석 전까지 한시적으로 산삼 모형을 진열해놓고 고객의 주문을 받아 확인 검증보증서를 첨부해 판매한다니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상품권도 신세계 백화점의 경우 10만원권이 전체 상품권 판매량의 80%를 차지하고 있으며 50만원 상품권도 0.6%. 지난해보다 30%이상 물가가 오른데다 ‘명품(名品)’ 또는 ‘자체개발품’이라는 이름 아래 자행되는 극도의 과소비는 어디가 끝인지 어리둥절하기만 하다.결과적으로 마치 오늘 하루만을 살 듯이 너무 들뜨고 날뛰면서,너무 사고 너무 쓰고 너무 먹고 인생을 탕진하는 강파른 세태의 반영이 아닐수 없다. 일반 서민이 부담없이 고를수 있는 선물세트나 기획상품은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다. 돈 없는 서민은 아예 오지도 말라는 모양인데 그렇다면 백화점에 넘쳐나는 저 인파가 모두 고소득층이라고 여겨지진 않는다. 필시 백화점이 부추기는 과소비에 놀아나면서 무력증을 확인하는 서민층이 대부분일 것이다. 백화점측의 궁색한 변명은 최근의 경기회복에 따라 부유층이 고가선물을 문의해 오는 바람에 고가품을 마련했으며 저가 위주의 할인점과차별화를 위해서는 고가상품의 개발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물론 썰렁한명절보다는 훈훈하고 넉넉한 추석은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빠듯한 가계(家計)를 이리저리 짜맞추며 올해도 부모를 찾아뵙지 못하는 송구한 마음에 명절이 서러운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다. 고향은커녕 집에도 돌아가지 못하는 실직자들이 거리를 헤매는가 하면 수마와 태풍이 할퀴고 간 상처를 복구하기에 여념이 없는 수재민들, 소년소녀 가장과 고아원이나 양로원에는 아예 발걸음마저 뜸해졌다는 것이다. 여기에다 가정 해체로 인한 결식아동이 전국적으로 17만명이 넘는다는 통계가 나와있다. 우리 주변은 경기회복 조짐 이후 빈익빈 부익부 등 계층간의 위화감이 심화되고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이런 마당에 몇백만원짜리 선물을 기를쓰듯이 광고하고 사들이는 층이 있다면 그들이 바로 물가고와 과소비를 부추기는 주범일 수밖에 없다. 차분하고 검소하게 햇과일과 떡을 나누면서 추석을 추석답게 보내려는 서민들에게 이런 말도 안되는 고가선물을 만들어낸 발상은 따뜻한 인정에 찬물을 끼얹는 놀부 심보다. 그런 선물이 주문이 쇄도해서 모자랄 정도라는 대목에선 그들은 이 나라 사람이 아닌, 하늘에서 뚝 떨어진 사람들인가 하는 의구심마저 든다. 누구나 열심히 일하며 성실하게 살고 있다. 몇몇 백화점의 끝간데없는 탐욕과 무절제에 놀아나지 말고 물가오름을 막기 위해서라도 과소비를 부추기는 풍조를 냉엄하게 외면할 줄 알아야 한다. 남이야 천만원짜리 산삼을 먹든 백만원짜리 고기를 먹든 말든 우리는 재래시장에서 사온 싸고 싱싱한 재료로 음식을 장만해서 조상의 덕을 기리고 어려울수록 이웃과 나누는 사회결속을 보여줘야 한다. 정성과 사랑이 담기지 않은 선물이란 누구에게도 부담을 줄 뿐이며 ‘고가(高價)’를 앞세운선물이란 반드시 냄새나는 ‘뇌물’에 틀림없을 것이다. 이세기 논설위원sgr@
  • 申씨, 부녀자 성폭행

    신창원(申昌源)의 추가 범죄를 수사하고 있는 경찰특별조사팀(팀장 金明洙경기지방경찰청2차장)은 21일 “신이 지난해 청주에서 부녀자를 성폭행했다는 혐의를 잡고 수사하고 있다“고 밝혔다. 경찰은 “신이 지난해 7월3일 새벽 4시쯤 충북 청주시 가경동 가정집에 들어가 잠을 자고 있던 김모씨(31·여·다방종업원)를 흉기로 위협,성폭행한뒤 현금 8만원을 빼앗은 혐의를 받고 있다”고 밝혔다. 피해자 김씨는 “성폭행한 남자의 얼굴을 봤는데 나중에 수배 전단을 보니신의 얼굴과 비슷했다”면서 “이 남자는 ‘소리를 지르려면 질러봐라’고말한 뒤 흉기를 건네주면서 ‘찔러 봐라.나는 어차피 교도소에 가게 된다’고까지 했다”고 말했다. 경찰은 당시 신과 동거했던 박모씨로부터도 “신이 ‘청주에서 성폭행을 했다’는 말을 했다”는 진술을 확보했다고 밝혔다. 신은 그러나 “사건 당시 청주에 내려간 사실조차 없다”면서 성폭행 사실을 부인하며 피해자와 대질신문을 요구하고 있다. 경찰은 또 서울 강남경찰서로부터 강남구 청담동 인질극 피해자김모씨(51)의 피해진술서를 넘겨받아 공범여부에 대한 확인작업에 들어갔다. 김씨는 “신이 지난 5월 말 집에 침입했을 때 휴대폰으로 5∼6차례에 걸쳐누군가와 통화하는 것을 목격했다”고 진술했다. 경찰은 압수수색영장을 발부받아 신이 지녔던 휴대폰의 통화내역을 조사하는 한편 김씨 가족들이 경찰에 신고하지 못하도록 신이 전화를 거는 시늉을했을 가능성도 수사하고 있다. 한편 경찰은 지금까지 확인된 신의 범죄 64건 가운데 서울 청담동,한남동특수강도 2건을 제외한 절도 62건은 500만원 이하의 소액이거나 차량,차량번호판 절도가 대부분이라고 밝혔다. 경찰은 또 지난해 7월 신이 서울 강남구 포이동에서 불심검문을 받고 도주했을 때 차량에 남겨진 미화 8,000달러를 두달 전인 5월 말 서울 광장동에있는 고급 빌라에 침입해 훔쳤다고 진술함에 따라 피해자의 신원 파악에 나섰다. 신은 훔친 달러를 서울 이태원 등지에서 유흥비로 탕진했다고 진술했다. 부산 이기철 김성수 조현석 전영우기자 sskim@
  • 노숙자들 사회복귀 증가…막일해 돈모아 속속자립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 노숙자 수용소 ‘서울 자유의 집’에서 5개월 동안지내다 지난달 말 퇴소한 김모(43)씨는 최근 퀵서비스 회사를 차렸다.김씨는 자유의 집에서 생활하며 택시운전으로 돈을 알뜰히 모아 사업 밑천 600만원을 마련했다.김씨는 자유의 집에 같이 있던 동료 3명을 직원으로 고용했다. 회사가 부도난 뒤 노숙생활을 하다 자유의 집에 들어왔던 김모(38)씨는 지난달 22일 퇴소,춘천의 한 전기업체에서 월 180만원을 받고 일하고 있다.전기기사인 김씨는 수용시설에 있으면서도 공공근로 등을 계속하며 직장을 물색해 오다 일자리를 얻었다. 운영하던 봉제공장이 망해 노숙자가 됐던 또다른 김모(32)씨는 아내,한살배기 딸과 헤어져 지난 2월 입소했다가 지난 5월부터 서울 도봉동의 한 섬유공장에서 일하며 월 150만원을 받고 있다. 이같이 일자리를 얻어 자립하는 노숙자들이 늘고 있다.자립 의지가 있는 노숙자들이 공공근로나 일용직 노동을 하다 경기 회복으로 직장을 찾아 사회로 복귀하고 있는 것이다. 수용시설에 남은 사람들도 일해서 번돈을 한푼 두푼 모아 ‘자립’을 준비하고 있다. 지난 1월4일 자유의 집이 문을 연 직후에는 수용인원이 1,400명을 넘어섰다.그러나 개소 6개월 만에 770여명으로 줄었다.절반이 빠져 나간 것이다.다시 노숙 생활로 돌아간 낙오자도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안정된 직장을 얻어 자립에 성공했다. 200여명은 건설노무자,식당주방장,회사원,공장근로자,농원직원 등으로 변신에 성공했다.취업 사실을 알리지 않고 떠난 사람을 감안하면 노숙 생활을 청산한 사람은 훨씬 많다. 자유의 집쪽에서도 수용자들의 자립을 돕는 일에 발벗고 나서고 있다. 상담원들은 개인통장이 없는 수용자에게 ‘1인1통장 갖기운동’을 독려하고있다.힘들게 일해서 번 돈을 탕진하지 못하도록 통장을 대신 관리해 준다.수십만∼400만원을 모은 수용자도 120여명이나 된다.이들은 조만간 단칸방이라도 얻어 자립할 꿈에 부풀어 있다. 자유의 집 최창호(崔暢鎬·40)상담실장은 “개소할 당시에는 노숙자들의 동사(凍死)를 막는 것이 주 목적이었지만 이제는 수용자 모두 자립할 수 있는길을 찾는 데 힘을 쏟고 있다”고 말했다. 김성수기자 sskim@
  • 달러매입 늘려 원화 적극 지지

    “97년말 원화 값이 급락하고 달러 환율이 뛸 때에는 정부가 개입해도 역부족이었다.그러나 지금은 다르다.시장에서 달러를 사들이는 정책은 정부가 이길 승산이 높다.” 재정경제부 관계자는 23일 최근 급락하는 환율과 관련,정부의 외환수급 대책이나 달러 매입 정책이 상당한 위력을 발휘할 것이라고 밝혔다.정부가 달러를 시장에서 사들일 경우 외환보유고가 쌓여 대외공신력이 높아질 수 있다.달러 매입으로 원화가 많이 풀리면 금리가 떨어져 금융시장이 안정되는 효과도 거둔다는 것이다. 97년말처럼 뛰는 환율을 잡으려고 외환보유고를 탕진,대외신인도 하락을 부채질하던 때와 상황이 정반대라는 설명이다. 재경부는 당초 2·4분기중 달러 공급이 수요를 46억달러 초과할 것으로 보았다.하반기에는 이 규모가 더 커질 전망이다. 정부가 마련중인 하반기 외환수급대책은 ▲외채의 조기 상환 ▲외화 대신원화의 조달 유도 ▲원화 표시 외국환평형기금채권 발행 ▲대외투자 유도 ▲수출지원 등이다.요컨대 국내 기업들이 되도록 달러를 덜 쓰고 밖으로 들고가도록 유도하는 정책을 적극 강구한다는 방침이다.다만 외환시장에서 정부가 과연 어느 정도까지 직접 달러를 매입할 수 있을지,국제통화기금(IMF)이용인할지가 미지수이다.정부는 “용인 범위를 밝힐 수 없다”고 말하지만 시장 흐름을 거스르는 과도한 시장 개입은 없을 것 같다. 이상일기자 bruce@
  • 클릭한번 잘못에 돈탕진-인터넷도박 가정 침투

    회사원 박모(32)씨는 최근 한글로 제공되는 한 인터넷 사이트의 도박장에들어갔다가 20여만원을 잃었다. 컴퓨터광인 박씨는 웹사이트를 검색하다 우연히 인터넷 도박장을 발견,카드 번호와 이메일 주소를 적고 카지노 게임에 참가하면 미화 25달러(3만원)를거저 준다는 유혹에 넘어가 낭패를 보았다. 박씨는 밤새도록 슬롯머신과 룰렛,블랙잭 등 게임을 하다가 결국 돈을 잃었고 돈은 한달 뒤 신용카드로 결제됐다. 인터넷을 통한 도박이 안방까지 무차별 침투하고 있다.구체적인 집계는 없지만 피해자와 피해액은 상당수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가상공간을 통하면 아무런 제한 없이 실제 카지노와 똑같은 포커,슬롯머신,블랙잭,룰렛,복권,경마 등 모든 종류의 도박에 참가할 수 있다. 최근에는 도박을 법으로 인정한 호주와 카리브해 연안 일부 국가,남미 국가 등에서 공개적으로 온라인 카지노 사업을 추진,인터넷 이용자들을 유혹하고 있다. 실제로 인터넷 검색엔진에 들어가 ‘카지노’(casino)만 입력하면 쉽게 수백개의 도박 사이트를 찾을 수 있다. 한국인 이용자를 노려 한글로 안내하는 도박장도 상당수에 이른다.이 가운데 ‘C카지노’와 ‘P카지노’는 판돈이 크지 않다는 이유로 인기가 높다. 하지만 인터넷 도박에 대한 법적인 규제 장치는 전무한 실정이다.도박 사이트의 대부분이 국내법의 적용을 받지 않는 외국에 개설됐기 때문이다. 인터넷 도박을 불법으로 규정한 미국의 연방수사국(FBI)은 최근 몇몇 사이트를 추적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올리지 못했다.미국 의회는 날로 폐해가 커가는 인터넷 도박에 대응하기 위해 별도의 법적 장치 마련을 검토중이다. 컴퓨터 통신 유니텔의 한 관계자는 “한국인 이용자의 정확한 집계는 불가능하나 한글 도박 사이트가 계속 늘어나는 추세로 미루어 접속자는 하루에도수천명이 넘을 것으로 보여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 조세형-김강룡씨 비교/훔친 액수많다는 것만 닮아

    80년대의 대도(大盜) 조세형(趙世衡·55)씨와 이번 도둑사건의 용의자 김강룡(金江龍·32)씨는 비슷한 점보다는 다른 점이 훨씬 많다. 둘은 고위층집을 털어 고액의 현금과 각종 보석류를 훔쳤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그러나 조씨가 처음부터 고위공직자 집만을 목표로 한데 비해 김씨는 부잣집을 닥치는 대로 터는 과정에서 고위층집도 턴 것으로 밝혀혔다. 조씨는 체력을 뒷받침으로 담장을 뛰어넘거나 이층을 기어오르는 ‘홍길동’식으로 집 안으로 들어갔다.그러나 김씨는 첨단시대 도둑답게 ‘빠루’ 등으로 순식간에 아파트 현관문을 부수거나 우유투입구에 내시경 등 특수장비를 넣어 문을 여는 첨단기법을 동원했다. 조씨가 주로 장롱과 화장대 등에 숨겨져 있는 돈과 보석을 찾아낸 데 비해김씨는 김치냉장고나 꽃병,심지어는 된장단지 속까지 뒤져 돈을 찾아내는 재주를 발휘했다. 김씨는 덥수룩한 작업복 차림의 조씨와는 달리 양복을 입고 도둑질을 하는등 의심을 받지 않게 신경을 썼으며 경비원에게 용돈까지 줘가며 환심을 사는 교활함까지 보였다. 또한 조씨는 범행과정에서 ‘절대 무기를 사용하지 않고 사람을 해치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킨 반면 김씨는 집에 사람이 있으면 강도로 돌변,흉기로위협하는 등 폭력을 거침없이 사용했다. 특히 훔친 돈을 쓰는 방식은 두 사람의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조씨는 훔친 돈 가운데 상당액을 없는 사람들에게 베프는 등 의적(義賊) 흉내를 내는 측면이 있었다.하지만 김씨는 훔친 돈을 거의 모두 자신의 쾌락을위해 탕진했다. 인천 김학준기자
  • 명퇴 구청장 구청장서 경비원으로…

    퇴직한 서울시 전직 구청장이 생활고때문에 공사장 경비원으로 일하고 있어 시직원들이 안타까워 하고 있다.90년대 구청장을 지낸 K씨(62)는 96년 명예퇴직한 뒤 빚보증을 잘못서 가산을 탕진했다는 게 주위의 얘기.K씨는 IMF사태로 재기의 기회를 잡지 못한 채 극심한 우울증속에 도피생활을 거듭하다일하게 됐다. 이같은 사실은 한 서울시 간부가 건설중인 운동경기장을 방문한 자리에서우연히 인부복 차림의 K씨를 맞닥뜨리면서 시직원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소식을 접한 한 서기관은 “한때 서울시의 주요 과장,국장을 거치며 잘나가던 선배가 명퇴후 어렵게 산다는 소식에 착잡하다”고 말했다.
  • 비리 감추려 직장상사 청부살해

    경북 구미경찰서는 17일 부정대출 사실을 감추기 위해 직장 상사를 청부살해한 구미시 비산 새마을금고 과장 李宰駙씨(32·칠곡군 북삼면 숭오리)를살인교사 등 혐의로,李씨의 부탁을 받고 새마을금고 전무를 살해한 李씨의매형 朴相潤씨(40·구미시 형곡동 112) 등 4명을 살인혐의로 각각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李씨는 비산 새마을금고에서 친인척 명의로 3억1,000만원을 불법대출받아유흥비 등으로 탕진한 사실을 이 금고 전무 여인동씨(42·구미시 도량동 파크맨션)가 눈치채고 정기감사에 들어가자 지난 1월18일 매형 朴씨에게 여씨살해를 부탁한 혐의를 받고 있다.
  • ‘TV수신료 인상 이라니‘시청자 반발

    방송개혁위원회의 KBS TV수신료 인상 방침이 일파만파의 파장을 일으키고있다.시청자와 YMCA등 시민단체는 물론 KBS측과 노조 등도 일제히 반발하고나섰다.시민단체는 인상자체를 반대하는 반면 KBS 등은 인상폭이 부적절하다는 입장이다.방송개혁위는 18일 수신료 인상과 함께 방송위원 구성 방안 등개혁안을 내놓았다. 19일 YMCA의 전화는 불이 붙었다.“지금이 어느 때인데 인상이냐” “아예TV를 안보겠다”는 등 항의전화가 빗발쳤다.KBS노조를 비롯한 전국언론노조연맹,전국방송노조연합 등은 이날 방송개혁위 탈퇴를 전격 선언했다.이들은방송의 정치적 독립성 확보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통합방송위원회가 예산을 관리하면 정부통제력이 강화돼 방송의 정치적 독립이 요원해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우선 시민단체 등에 따르면 시청료는 지난 63년 처음 도입돼 81년4월1일 컬러TV의 경우 2,500원으로 인상됐다.따라서 외형적으로 이번 인상은 18년만이다. 그러나 시민단체는 사실상 5년만의 인상이라고 강조한다.81년에는 징수원이 직접 집을 방문해 수신료를 걷었으나 94년 10월1일부터 TV수신료의 징수가한전에 위탁돼 전기요금과 함께 통합고지됐다.이 결과 81년 40%선이던 징수율이 95%로 껑충 뛰어올랐다.결국 94년 수신료가 2배이상 인상된 셈이라는분석이다. 또 시청료 인상은 KBS의 방만한 경영을 시청자에게 떠넘기는 것이라고 반박한다.97년도 수신료 수익은 3,985억원으로 KBS 예산의 38.4%를 차지했다.지난해는 4,147억원으로 전년보다 오히려 162억원이 늘어나 총 예산의 55%에이르렀다.반면 광고수익은 전년의 5,699억원에서 3,359억원으로 2,340억원줄었다. 올해 KBS 예산은 9,000억원선.이중 수신료는 전년대비 94억원 증가한 4,241억원(48.1%),광고료는 전년대비 557억원 늘어난 3,916억원(44.4%)이다. 따라서 2,500원인 현행 수신료가 5,000원으로 갑절 오르면 수익은 총 8,000억원에 이르러 올해 예산과 거의 맞먹는다. 시민단체는 수신료 수익 8,000억원이면 KBS가 일절 개혁 없이 현수준으로경영할 수 있다고 말한다. 시민단체들은 “KBS가 방만한 경영의 책임을 시청자에게 떠넘기려 한다”면서 “전기는 아끼면 값을 줄일 수 있지만 수신료는 어쩔 수가 없다”고 불합리성을 강조했다. YMCA 시청자시민운동본부 이승정실장은 “흑자시절에 돈을 인건비 등으로탕진한 KBS가 자체 구조조정 등 개혁노력을 기울이지 않은 채 수신료 인상을 요구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분개했다.그는 이어 “수신료인상이 강행되면 통합고지서 납부 거부 및 수신료의 통합고지서 분리 운동을 펼칠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KBS 역시 방송개혁위가 수신료의 4,000∼5,000원선 인상을 검토하는 것으로 전해지자 ‘당혹’스러운 표정이다.KBS는 당초 ▒수신료가 7,500원으로 오를 경우 광고의 전면폐지 ▒5,000원일 경우 광고의 50% 유지 등의 안을 제시했었다.이에 대해 방송개혁위는 현행 KBS 수신료를 달러로 환산하면 37.3달러로 영국 BBC의 115.6달러,일본 NHK의 151.1달러와 비교해 차이가 크지만대폭적인 인상은 어렵다는 입장이다. KBS는 “수신료 면제자가 부쩍 늘어 수신료가 대폭 인상되지 않으면 방송의 독립성이 뒷걸음질칠 우려가 크다”고 말했다. 방송개혁위의 수신료 인상 방침이 수신료를 내는 쪽이나,받는 쪽 모두에게서 불만을 사고 있어 인상폭과 시기가 다음주 어떨게 확정될지 관심을 모은다. 許南周 yukyung@
  • 외언내언-부유층도박

    도박꾼의 심보는 ‘남이 하면 도박이요 내가 하면 오락’이다.도박에 빠지면 날새는 줄 모르고 집과 전답은 물론 마누라까지 팔아먹는다는 고사가 있다.도박을 못하게 손가락을 절단하면 발가락을 동원하고 그것도 안되면 입으로 화투패를 뗀다는 식이다.평생을 노름빚에 시달리다 철창신세를 지는 한이 있어도 한번 도박은 영원한 고질병으로 심화될 뿐이다.그래서 임종을 할때도 의사가 ‘내일 아침 8시를 넘기기 힘들 것’이라고 예고하자 영국의 한유명한 도박사는 ‘내가 만약 9시까지 산다면 5기니를 내라’고 내기를 했다는 에피소드도 있다.우리나라에서는 백제의 개로왕때 고구려의 간첩(間諜)중이던 도림(道琳)이 개로왕을 바둑으로 유혹하는 바람에 토목공사로 국고를 축내어 백제가 패전했다는 기록이 있다.도박은 가산탕진과 패가망신 등 끝장을 내고야 만다는 차원에서 파멸이나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미국에서도 지난 80년 정신과 의사들이 정식 질병으로 분류한 바 있다. 연례행사처럼 부유층 도박꾼들이 적발되고 있다.이번에는 단 3시간 만에 1억원에서 하룻밤새 수억원,8억짜리 빌라를 날리거나 17년 동안 술집을 해서번 12억원을 고스란히 잃은 사례도 등장한다.주로 돈이 있는 연예인이나 스포츠감독·중소기업 사장의 부인들이 거액의 재산을 탕진하고 남편과의 불화를 겪은 뒤 이혼한 것으로 되어있다.그러나 그들이 도박판에서 흔들어댄 수억원대의 돈은 하루하루를 성실하게 살아가는 선량한 서민들에게 얼마나 큰낭패감과 허탈감을 안겨주었는지 짐작하지 못할 것이다.대부분의 가정은 아이들의 교육비와 집장만을 위해 월급의 절반을 저축하는가하면 월세,전세를전전하다 10년 만에야 겨우 집장만을 하고 있다.그런 집을 하루아침에 날릴수도 있다는 한탕주의는 모처럼의 값진 성취감에 찬물을 끼얹는 행위나 다름없다.가뜩이나 국제통화기금(IMF)한파로 실업자들이 넘쳐나고 있다.시의를외면한 이러한 도덕불감증은 어떤 세찬 비난과 엄한 벌을 받아도 부족하다는 생각이다. 도박은 정신병이다.사회발전을 저해하는 독버섯이다.남들이 노력하고 힘겹게 살 때 한가롭게 맥을 빼는 망국병은 가차없는 처벌이마땅하다.적발해봤자 보석으로 풀려나와 또다시 도박을 되풀이하기 전에 도박중독증이 주변에어떠한 해를 끼치는지를 알게 하고 자신이 얼마나 부끄러운 존재인가를 속속들이 느낄 수 있게 해줘야 한다.
  • 재미로 시작…가정파탄 불러

    IMF사태라는 전례없는 난국을 맞고서도 일부 부유층 주부들의 도박은 멈출줄 몰랐다.이들은 가산을 탕진한 것은 물론 가정을 파탄시키고 형사처벌을받고서야 참회의 눈물을 흘렸다. 18일 검찰에 적발된 주부 도박사범들은 일부 부유층의 도덕불감증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어느 정도 안정된 지위와 재산을 가진 남편을 둔 이들은 처음에는 친목계를 구성,재미삼아 푼돈내기 ‘고스톱’으로 출발했다.그러다 계원 가운데 한사람이 전문도박꾼인 朴모씨(구속·여)와 연결되면서 본격적으로 도박에 빠져들었다. 이들은 노름에 중독되면서 한알에 1만∼10만원씩인 바둑알 150∼300개 정도를 판돈으로 갖고 화투 두장의 끗발로 승패를 결정짓는 속칭 ‘싸리섰다’를 주로 했다.한판에 최고 1억원이 오가는 등 하루에 3억∼5억원을 잃은 사람도 적지않았다. S환경회사 사장의 부인 金모씨(45)는 91년부터 최근까지 모두 23억원을 날렸다.S단란주점 사장 韓善珠씨(39·여)는 17년 동안 술을 팔아 번돈 12억원을 몽땅 잃었다.인기 구기종목 감독의 부인 C씨는 판돈이 모자라자 8억원대인 집을 담보로 잡힌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대부분 도박 때문에 이혼했거나 별거중인 것으로 드러났다. 도박장 개장자,즉 ‘하우스장’들은 단속 때 증거를 없앨 시간을 벌기 위해 문의 잠금장치가 4∼5개씩 설치된 고층 아파트나 옆집으로 도주가 가능한연립주택 등을 주로 도박장소로 제공했다. ‘하우스장’은 자릿세 명목으로 한 타임(3시간)에 200만∼300만원을 챙겼다.자릿세가 이처럼 높았기 때문에 며칠에 걸친 도박이 끝나고 나면 정작 승자는 하우스장밖에 없는 경우도 허다했다. 검찰의 수사는 郭恩子씨(53·여·구속)의 채무장부가 결정적인 단서가 됐다.郭씨의 장부에는 91∼98년 이 주부들에게 자금으로 빌려준 돈 8억여원이 이름과 함께 빼곡이 기재돼 있었다. 수사를 맡았던 崔運植검사는 “하우스장인 郭씨만 돈을 딴 것으로 드러났다”면서 “郭씨는 91년 다방을 운영하면서 모아둔 5,000만원을 가지고 도박에 끼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 독재자들 말로로 본 국제 인권 조류/세계인권선언 50주년

    ◎반인륜범 단죄는 역사적 필연/‘인권문제는 국제문제’ 인식 확산/아민·뒤발리에·멩기스투 등 전전긍긍 인권 범죄에 대한 단죄가 역사적 대세가 되고 있다.영국이 끝내 칠레의 전 독재자 피노체트의 신병을 스페인에 넘겨주는 절차를 개시함으로써 국제사회의 ‘인권 시계’는 되돌릴 수 없는 방향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반인륜범은 언제 어디서고 처벌된다’는 판례를 남기는 인권사의 새 장을 연 것으로 평가된다. 피노체트가 영국 상원 재판부에서 면책특권 불인정 판결을 받기 전까지만 해도 독재자들이 법정에서 죄값을 치르고 역사밖으로 퇴장당하는 것은 희귀한 경우에 속했다.많은 독재자들이 외교 관례와 집권 당시를 문제삼지 않는 국내정치 불문율의 이중 보호를 받으며 안락한 말년을 보장받았다. ○‘무조건 보호’ 관례 깨져 그러나 영국 정부는 잘못된 국제사회의 관행을 깨뜨렸다.국제사회의 결연한 동참이 확인되면서 전세계 곳곳의 독재자들이 불안감에 휩싸이고 있다.피노체트 판결이 중차대한 영향을 끼칠 것이기 때문이다.이디 아민,장클로드 뒤발리에,멩기스투 등 독재자 리스트 앞머리에 올라있는 인물들이 무엇보다 긴장하고 있다. 아프리카 독재자 가운데서도 악명높기로 첫손 꼽히는 우간다의 아민은 정적을 악어밥으로 던져주는 등 잔학한 수법으로 30만명을 살해한 인물.사우디아라비아로 망명,농사일로 숨어 지내지만 국제인권단체들은 다음 표적 1순위로 지목하고 있다. ○본국 송환될까 안절부절 74년 에티오피아 황제를 전복하고 권력을 장악한 멩기스투.91년 반군에게 축출돼 짐바브웨로 피신한 뒤 권력 재탈환 음모를 꾀하다가 짐바브웨 정부의 골치덩어리로 낙인찍혔다.반인륜 범죄 죄목으로 궐석재판을 받기도 한 그는 요즘 본국으로 송환될까봐 안절부절 못하고 있다. 전 필리핀 독재자 마르코스의 부인 이멜다는 집권기간 중 엄청난 양의 구두를 수집하고 달러를 밀반출 하는 등 부정축재를 일삼다 86년 남편 실각과 함께 하와이로 쫓겨났다.91년 국내 입국,92년 대통령선거에 출마하며 재기를 꿈꾸기도 했지만 93년 금고 18년을 선고받고 상고절차가 진행중인 상태다. 인도네시아의 전 대통령 수하르토도 철권통치 끝에 권좌에서 쫓겨나 단죄를 기다리고 있다.콩고의 카빌라 대통령은 지난달 유럽여행에 나서면서 선발대를 앞세워 체포영장이 나와있지 않나 알아본 뒤에야 길을 나섰다는 후문이다. 반인륜을 저지른 독재자들은 비록 우여곡절 끝에 법정에 서지 않았다 해도 말로가 그리 순탄치만은 않았다.71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아이티 종신대통령으로 취임한 뒤발리에는 학정을 편 끝에 86년 축출돼 프랑스 망명길에 올랐다.한때 유명관광지에서 호화롭게 살았으나 2억달러를 탕진하곤 전화료도 내지 못하는 알거지가 됐다. 중앙아프리카 공화국 황제 보카사는 나라를 철권통치하며 더할 수 없는 권세를 누렸지만 집권 7년만에 권좌에서 내쫓겼다.그 아들들은 파리의 노숙자로,심지어 범죄자로 전락했다. ○인권범죄 처벌 시효 없어 지금까지 일부 독재자들은 범죄행각을 벌이고도 호의호식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지구촌 어디에도 발붙일 곳이 없게 됐다.세계 각국이 앞다투어 외교적 분쟁을 감수하면서도 인권외교를 표방하고있다. 인권수준은 한나라의 정치수준과 비례하며 사회지수로도 통용된다.특히 인권문제가 특정국가,특정지역의 내부 문제가 아니라 국제문제라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반인륜적 인권 파괴자는 끝내 세계의 이름으로 단죄되는 것이 시대적 조류다.인권파괴 행위자의 단죄에는 시효가 없다는 전 지구적 컨센서스가 자리 잡아가고 있다. 독일의 신임 라퐁텐 외무장관은 중국 당국의 불편한 심기에도 불구하고 반체제 인사들과 접촉을 지속하는 등 세계의 새로운 기류를 앞장 서서 실천하고 있다.
  • 다시 조명해본 원인들(IMF체제 1년:1­2)

    ◎前 정권 ‘환상속 외환관리’가 주범/물적·정치적 요구 충족에 골몰 시스템 붕괴/기술개발 없는 量팽창위주 재벌정책 탓도 우리 경제가 IMF(국제통화기금)의 구제금융을 받게 된 근본적 이유는 무엇일까. IMF체제 1년을 맞아 위기의 본질을 새롭게 조명해보고 이를 바탕으로 위기에서의 탈출 방안을 모색한다. ■국민의 물질적·정치적 요구를 충족시키는 데만 급급했다=洪尙和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는 지난 6월 펴낸 ‘IMF의 경제식민지를 경계한다’라는 저서에서 “盧泰愚 정권은 ‘한번 믿어주세요’를 앞세운 유화정책으로 물질적 욕구를,金泳三 정권은 ‘중단없는 사정’을 외치며 정치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 급급해 경제기반의 붕괴와 사회 위계질서의 파탄을 초래했다”고 주장했다. ■기업들이 ‘인플레이션 중독’에 빠졌다=尹源培 금융감독위원회 부위원장(숙명여대 경제학과 교수)은 최근 발간한 ‘우리 경제의 내일을 위해’라는 책에서 “문민정부 초기의 잘못된 수요확대 정책으로 기업들이 ‘인플레이션 중독’에 빠져 기술개발 대신 자산가치의 확대에만 주력했다”고 지적했다. 기업들은 고(高)부가가치 산업으로의 구조조정에 실패했고 금융기관 돈으로 부동산 투기 등을 일삼아 결국 국내·외 경제 여건의 변화에 신축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金泳三 전 대통령이 부잣집 아들이었기 때문이다=한 언론인은 모 월간지에서 “金전대통령이 부잣집 아들로 태어나 26세에 국회의원으로 선출됨으로써 밑바닥 삶을 일찍 졸업했다”며 “대통령이 된 뒤에도 돈의 소중함을 몰라 IMF를 초래한 장본인”이라고 주장했다. 튼튼한 남산 외인아파트를 1,500억원을 들여 폭파한 것이나 2조원을 더 투입해 경부고속철도 대전·대구역을 지하로 내린 점,쌀시장 개방을 막지 못하고 5년간 50조원을 농어촌 개선에 허비한 것은 경제를 망친 대표적 사례라고 했다. ■해외차입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다=裵善永 청와대 경제수석실 서기관은 자신이 펴낸 경제전문서 ‘화폐·이자·주가에 관한 새로운 패러다임’에서 “해외차입이 급격히 늘고 경상수지가 3년 연속 적자를 기록했음에도 외환 당국은 환율 인상을 억제,수출신장과 외채를 줄일 기회를 원천 봉쇄했다”고 분석했다. 결국 지난해 10월 해외차입액이 한국의 대외신인도가 허락하는 차입한도액을 넘었고 외국 금융기관들이 신규 자금 지원을 일거에 중단,위기가 발생했다고 말했다. ■종합금융사는 금융시장의 ‘블랙 홀’이었다=李鎬澈 재정경제부 지역경제과장은 ‘IMF 시대에도 한국은 있다’라는 저서에서 “종금사가 돈을 흡수하지만 배출하지는 못하는 ‘블랙 홀’이 된 게 문제”라고 주장했다. 종금사들은 해외에서 단기자금을 빌려 중·장기로 운용하다 대외신인도 급락으로 해외 채권금융기관이 상환을 재촉했다. 은행에서 빌린 급전으로 달러화를 사자 외환시장은 마비됐고 당국은 외환보유고로 환율 방어에 나섰으나 보유고만 탕진한 채 환율은 치솟았다. ■금융감독 당국은 ‘눈 뜬 장님’이었다=姜玎鎬 재경부 국세심판소 상임심판관은 지난 2월 펴낸 ‘캉드쉬 총재의 웃음’에서 금융감독 당국의 책임론을 제기했다. 종금사 투신사 리스사 등이 해외에서 ‘만기에 관계없이 상환을 요청할 수 있다’는 조건으로 돈을 빌리고 있었다. 그러나 당국은 이 조건으로 말미암아 1개 국내 금융기관의 채무불이행이 국가 전체의 신용도 하락으로 확산할 위험을 내포하고 있었음에도 팔짱만 끼고 있었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식의 재벌 지원이 화근이었다=스티브 마빈 자딘플레민증권 이사는 지난 5월 발간한 ‘죽음의 고통’에서 “정부는 재벌 죽이기와 은행 죽이기의 귀로에서 재벌의 손을 들어줬다”고 지적했다. 재벌들은 기업제국의 확대를 위해 은행돈을 마구 썼고 지난해 동남아지역에서의 통화 혼란으로 수출 증가에 급브레이크가 걸리자 한꺼번에 무너졌다. ◎또다른 원인 ‘국제금융 음모설’/‘달러 패권주의’ 美國 속셈 없었나 “우리 경제가 IMF(국제통화기금)체제로 전락한 배후에 국제 금융시장의 ‘음모(陰謀)’가 있었다” 李贊根 인천시립대 교수는 지난 3월 펴낸 ‘IMF시대의 투기자본과 미국의 패권’이라는 저서에서 “경제위기의 이면(裏面)에는 국제금융의 본질인 국제적 투기자본과 미국의 패권주의가 자리잡고 있다”고 주장했다. 李교수는 투기자본은 실물경제와 동떨어져 움직이며 국제금융의 글로벌한 통합(자본시장 개방)에 따라 국경을 자유롭게 넘나들고 있다고 밝혔다. 이같은 자본은 ‘기러기떼’가 선두만 좇는 ‘군집(群集)심리’를 갖고 있어 불확실한 속성을 지녔다고 덧붙였다. 게다가 통신기술의 발전으로 투기자본의 이동속도는 광속화(光速化),한국은 부수이익을 노리는 투기자본의 ‘희생물’이 됐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미국은 냉전체제가 종식되자 새로운 ‘힘의 행사’를 바랐고 달러화와 자본자유화에서 그 길을 찾았다. 달러화는 더 이상 안정적 통화가 아님에도 미국은 지난 50년간 국제관계를 움직이는 ‘정치적 화폐’로 활용했다. 미국은 IMF 등을 앞세워 자본자유화를 무차별적으로 확산시켰고 투기자본은 이를 틈타 순식간에 개도국을 휩쓸었다. 미국의 ‘전략’은 외환위기 이후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달러화가 국제 상거래를 지배하는 한 개도국은 미국에 지원을 요청할 수밖에 없고 미국은 그 대가로 시장개방 등 자국 산업에 이익이 되는 ‘전리품’을 챙긴다는 것이 그의 논지이다. 李교수는 “미국은 국가 전략적 측면에서 국제금융시장을 교묘히 이용하고 있다”며 “IMF 위기의 단초가 투기자본에 있는 만큼 국제금융도 책임을 분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민주열사 열전:12/‘녹화사업’ 의문사:하(정직한 역사 되찾기)

    ◎‘염세 자살’로 매도된 의문의 죽음들/이윤성­신검없이 징집… 제대 8일 앞두고 죽어/김두황­운동권 리더… ‘애인변심 자살’ 軍 강변/한영현­늑막염 앓아 軍면제 판정 불구 끌려가/최온순­가족 항의로 재수사해 자살 오명 벗어/한희철­새벽 4시 사망… 녹화사업중 고문 의혹 대학생들의 강제징집과 이들에 대한 정훈교육 계획이었던 녹화사업은 80년대초 연세대생 정성희를 비롯한 여섯명의 죽음과 결부되어 계속 거론되고 있다.대부분 염세 자살이라는 군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인권단체들과 가족들은 강제징집 및 녹화사업의 강제순화·관제프락치 공작활동이 이들 의문사의 직간접적인 원인이라고 주장한다.다섯명의 의문사를 차례로 알아본다.(정성희는 10월15일자 녹화사업 첫회에 보도) ▷이윤성◁ 81년 성균관대 역사철학 계열에 입학한 이윤성은 유복한 가정환경이었지만 사회·역사 전반에 대한 문제의식이 깊었다고 한다.2학년 때 인문과학연구회라는 동아리의 회장직을 맡았다.82년 11월3일 학생의 날 가두시위에 참가, 여러 학생들과 함께 경찰서로 연행됐다.조사 과정에서 동아리 회장이란 것이 밝혀져 11월7일 새벽 신체검사도 없이 군에 끌려갔다. 그는 부친이 60세가 넘은 고령인 3대 독자인데다 시력마저 나빠 상식대로 하자면 현역입대가 불가능한 조건이었다. 83년 1월10일쯤 친구들이 가족과 함께 면회갔을 때 이윤성은 건강한 모습으로 “내가 여기서 짬밥을 제일 잘 먹고 있으니 걱정말라”고 하는 등 어려운 환경에서도 잘 적응해 나가는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뒤늦게 가정환경이 참작돼 5월말 의가사 제대가 결정되었다.제대가 8일밖에 남지 않은 5월4일 이윤성 부모는 아들이 이날 새벽 자살했다는 군당국의 통보를 받았다. 국방부는 88년 국정감사 자료에서 ‘이윤성은 군 수사기관의 조사기간 중에 사망했으나 이 조사는 학원소요와 관련된 것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국감 자료는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설명했다.‘이윤성은 83년 4월19일 소속대 인근에서 북괴가 살포한 월북용 안전보장증 등 불온전단 2매를 습득,본인의 철학개론 책자 속에 보관하다가 4월30일 소속대대 보안담당관 중사에 의해 관물함에서 적발됐다.5월3일 당시 지역 보안부대 대공계장 상사가 월북 용의성 및 전단휴대 경위 등을 조사하고 취침에 들도록 했으나 4일 새벽 2시 반경 용변본다고 밖으로 나가 부대 정구장 심판대에 군화끈 및 요대를 사용해 목매 자살했다.가족 입회 아래 부검을 실시했으며 구타 등의 타살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가족들은 지금도 그의 죽음에 관해 말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84년 국방장관의 국회보고와 마찬가지로 이 국감 자료도 이윤성이 자살할 당시 제대가 8일 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은 언급하지 않았다. ▷김두황◁ 80년 고려대에 입학해 경제학과 과대표와 경제학 동아리 회장을 맡은 김두황은 학내활동의 활성화와 민주화를 주도한 고대 운동권 리더의 한명으로 알려졌다.4학년이 된 83년 3월초 학내 학회,동아리 회장들과 호국단 선거,4·19행사 등을 논의하던 중 성북경찰서에 연행됐다.1주일간 조사를 받고 석방되었으나 곧 부모와 함께 다시 경찰서로 불려온 뒤 어쩔 수 없이 자원입대서에 서명했으며 즉시 군대로 끌려갔다. 3월18일 입대한 김두황은 3개월 뒤인 6월18일 밤11시 30분 자살했다고 가족들에게 통보됐다.그간 외출이 없었기 때문에 그의 군생활에 대해 알려진 것은 거의 없으나 훈련 성적이 우수해 사단장상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시신은 두부가 없어진 참혹한 모습이었다고 한다.군 당국은 가족들에게 “동료 2명과 경계 근무를 서던 중 ‘소변보러 간다’고 한 후 잠시 있다가 총성과 함께 자살했다”고 설명했다.군은 가족들에게 사인에 대한 이의제기를 하지 않는다는 각서와 화장동의서를 받아낸 뒤 부검은 실시하지 않았다고 한다. 84년 국회에 보고할 때 국방부는 김두황의 사망 원인에 대해 ‘내성적인 성격으로 전방부대에 배치된 것에 불만을 표시하고 내무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군복무에 염증을 느껴왔으며 애인으로부터 편지를 받고 고심하다가 자신의 소총으로 자살’했다고 설명했다.그러나 그의 고대 학우들은 김두황의 적극적이고 쾌활한 성격 등과는 전연 어울리지 않는 ‘관제’ 사망원인이라고 반박해 왔다. 같이 강제징집된 뒤 죽음의 공포감이 엄습하는 녹화사업을 겪었던 친구 양창욱씨는 “두황이가 고대 운동권에서 차지했던 비중을 생각하면 나보다 훨씬 심한 녹화사업 대상이었을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한영현◁ 81년 한양대 기계과에 입학한 한영현은 민속문화연구 동아리와 야학활동에 참가하던 중 83년 1월 부천 야학선배의 경찰조사 과정에서 이름이 나와 성동경찰서로 연행됐다.경찰서 조사후 4월1일 수원병무청에서 신체검사를 받았지만 늑막염으로 병종 판결,군대에 갈 수 없는 처지였다.그러나 이튿날 경찰서 출두명령을 받고 나간 뒤 행방불명되었으며 보름 후 그의 옷이 집으로 우송되자 가족들은 비로소 강제로 군에 끌려간 것을 알았다. 그는 입대후 훈련소에 가지 않고 4월10일부터 18일까지 군 수사기관에서 그간의 활동에 대한 조사를 받았다고 뒤에 말했다.6월18일 포상휴가를 나왔는데 그의 팔에 철사로 심하게 맞은 듯한 피멍이 선명했다고 한다.휴가중 그는 “정신력으로 모든 환경을 버틸 수 있다고 생각되나 자신이 없다” “기관의 어느 사람을 만나면 의가사로 10월이면 제대가 가능할 수 있지만 죄책감이 너무 크다”는 등의 말을 했다고 전한다. 귀대한 지 얼마 안되는 7월2일 부대로부터 전보로 자살 소식이 전해졌다. “불침번 근무중에 분대장의 탄입대에서 실탄 1발을 절취한 뒤 2일 아침 9시 경계근무를 서다 M16 소총으로 자살했다”는 것이다.국방부는 84년,88년 관련보고에서 모두 한영현의 ‘불우한 가정환경’을 강조했다.‘한영현은 모친이 부동산투기로 가산을 탕진하여 부친이 사우디 취업중 귀국해 불화 끝에 모친을 토막살해한 죄로 무기형 복역중이고 형도 소아마비인 것을 고민해 세상을 비관했다’는 것이다. 국방부는 마치 그의 아버지 사건이 당시에 일어난 것처럼 발표했지만 실은 3년 전인 고3 때의 일이며 한영현은 이 와중에서도 한대 기계과 장학생으로 입학했다.대학 학우들도 그의 학교생활이 아주 건강했다고 말한다. ▷최온순◁ 83년 동국대 사대 수학교육과 3학년이던 최온순은 시위예비 음모 혐의로 5명의 학우와 함께 경찰에 연행돼 1주일 간 조사를 받은 후 3월29일 강제징집 되었다. 4개월이 조금 지난 8월14일 군에서 급위독이라는 전보를 보내와 가족들이 급히 부대로 가보니 그는 벌써 새벽 4시경 숨을 거둔 뒤였다.헌병대에서 나온 사람이 자살이라고 통보했으나 가족들이 자살할 리가 없다는 확신을 갖고 강력히 항의하고 영안실의 사체를 며칠간 지키면서 재수사 및 진상규명을 요구했다고 한다.이에 군 수사대가 재수사를 하여 그 결과 고참병과 말다툼 끝에 피살되었다는 수정 통보를 얻어내 최온순은 자살이라는 오명을 벗고 대전 국군묘지에 안장되었다. 그러나 공식 군 수사기록은 가족의 항의 사실을 전혀 언급하지 않는 가운데 철책선에서 같이 복초를 서던 고참 상병이 ‘최온순의 자살을 주장했으나 17일 밤부터 18일 새벽까지 추궁하자 그의 우발적 살인 범행을 자백했다’고 기록하고 있다.84년 국회 보고서는 ‘최온순은 복초근무중 잠을 자다가 고참인 상병이 주의를 주자 이에 반항해 소총으로 가해하려다 상병이 소총으로 위협한다는 것이 잘못돼 오발로 사망’했다고 설명했다. 이에 대해 강제징집된 뒤 최온순과 함께 훈련받았던같은 대학의 최석민씨는 “한대 때렸다고 해서 고참에게 총을 겨누기엔 그는 너무 밝은 성격이었다”고 아직도 못믿어 한다. ▷한희철◁ 빈한한 가정에서 79년 철도청 장학생으로 서울대 공대 기계설계학과에 입학했으며 4학년말인 82년 12월1일 군에 자진입대했다.서울대 가톨릭학생회와 성남 대학생연합회에서 지도적 역할을 하는 등 운동권 성향을 보이자 지도교수가 장학금을 주지 않겠다고 해 일단 휴학을 했다는 것이 가족들의 설명이다. 군 생활에 잘 적응해 포상휴가를 두번이나 받았고 83년 10월14일 보름간의 첫 정기휴가를 나왔다.친구들에게 “늦어도 한달 후에는 의가사 제대를 한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귀대한 지 한달 쯤 지난 12월11일 자살했다는 연락이 왔다.84년 국방부 사망원인에 따르면 ‘평소 가정빈곤으로 학업을 계속할 수 없음을 비관했고 입대전 의식화 동아리에 가입했으며 정기휴가 때 학원소요와 관련해 도피중인 친구의 주민등록 갱신을 위해 방위병인 다른 친구에게 용지를 훔칠 것을 부탁한 사실이 적발돼 조사를 받고 훈방된후 평소 불만과 주민등록증 절취모의 탄로로 고민하다 자살했다’는 것이다. 사망 당시 군 당국의 설명에 의혹을 떨구지 못한 부친 한상훈씨가 끈질기게 알아본 결과 한희철은 12월6일 당시 보안사령부로 연행돼 조사를 받고 10일 귀대한 것으로 드러났다.부친은 이때 전기고문이 가해졌고 주민등록증 용지 건뿐 아니라 심한 녹화사업 취조가 행해졌다고 주장하고 있다.그의 11일 새벽4시 사망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 헤이그 특사 파견(秘錄 南柯夢:24)

    ◎“이준 열사 피뿌리며 救國자결” 소문/4,000년 역사­500년 조선 당당히 알리지만 열강들은 쳐다보기만/약소국 울분 누르며 ‘오냐 이한목숨 죽어…’/일제,施政改善 핑계로 덕수궁 관리들 모두 쫓아내고/고종은 ‘행여 國運 도움될까’ 누각동 移居 준비하는데… 고종은 을사오조약을 끝까지 인정하지 않았다.국왕이 날인하지도 수결(手決)도 하지 않은 조약을 어찌 유효라고 할 수 있는가.더욱이 저들이 국새를 훔쳐 찍었으니 절대 국가간 조약이라 할 수 없었다.그것은 협박이요 강압에 의한 국권 탈취였다.그래서 고종의 분노는 이만 저만한 것이 아니었는데 돌이켜보면 재위 43년 동안에 외우내환의 대다수가 일제침략자 때문에 일어난 것이었다. 황상께서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씀하시기를 “짐이 보위에 오른지 40여년이지만 본시 박덕한 사람이라서 왕위에 올랐으나 한번도 편안한 해가 없었다.1866년 병인양요를 겪은 뒤 10년만에 병자왜란(1876년 강화조약)이 있었고 그 뒤 6년만인 1882년에는 임오군란이 일어났으니 이는 역대 성조(聖朝)에 없었던 일이다. 그후 2년만에 일본 유학생들이 갑신정변(1844)을 일으켜 몰래 창덕궁에 들어와 충신과 양민을 살해해 한사람도 남기지 않았다.그 뿐인가.1892년 임진년과 이듬해 계사(癸巳)년에는 동학당 무리들이 또 얼마나 시끄럽게 굴었는지 조선 전국이 공포에 쌓여 바람소리 학울음 소리에도 놀라 자빠지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뒤 갑오년(1894)에는 갑신년에 망명했던 개화당들이 외국인을 데리고 와서 귀국한 뒤 무수한 변란을 일으켰다.이어 을미년(1895)에는 왜적이 중궁(中宮=명성황후)을 시해하였다.병신년(1896)에는 의병이 일어나 민심을 요동시켰으니 무슨 이런 세월이 있었겠는가.그 뒤 무술년(1898)에 독립협회가 난리를 일으키고 갑진(1904)년에는 러일전쟁,1905년 을사5조약이 성립되었으니 어찌 참을 수 있는 일인가 을사조약이 체결된 뒤 7개월만인 1906년 6월 어느날 한 통의 외교문서가 고종에게 전달되었다.이것은 러시아황제 니콜라이 2세가 보내온 초청장이었다.화란의 헤이그에서 제2차 만국평화회의가 열리는데 참석해달라는 것이었다.이 얼마나반가운 소식인가. 니콜라이황제가 고종황제의 뜻을 알아서 보낸 것이었을까.고종은 즉시 극비리에 외교사절을 임명하였다.이상설(李相卨)을 정사로 하고 이준(李儁),이위종(李瑋鍾)을 부사로 하는 외교사절단을 조직해 위임장을 써 이준에게 전달했다. 어느날 밤 고종황제는 이준에게 직접 돈2만원을 하사하시었다.물론 덕수궁 함녕전 동반침(東半寢)에서 있었던 일이다.이준은 사은숙배(謝恩肅拜)한뒤 물러나 곧바로 인천항으로 향하였다.인천에서 화륜선을 탄 이준은 주야로 달려서 목적지인 해아(海牙=헤이그)에 도착하였다.해아에서는 각국 대표들이 엄숙하게 모여 회의를 하고 있었다. 이준이 눈을 들어 바라보니 그 의관과 문화는 우리와 달랐고 그 위의(威儀)는 산과 바다와 같았으니 마치 신왕(神王) 신제(神帝)가 노는 것 같아서 이것이 하늘인가 땅인가 했다.모두가 후한 봉급을 받고 고관복을 입었으며 가슴에는 은빛 훈장을 달고 어깨와 팔뚝에는 금줄로 누볐다.또 얼굴에는 금테안경을 쓰고 한결같이 남만격설(야만인의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을 하니마치 까마귀떼가 모인 것과 같았다. 이런 곳에 멀리 조선의 일개 백면서생이 참가하기란 좀처럼 쉬운 일도 아니요,받아주기도 어려운 일이었다.그러나 이준의 사람됨이 8척이나 되는 키에 위엄이 당당하여 그를 무시하지 못했다.그래서 각국 대표들이 한마디 말도 없이 서로 쳐다보고만 있었는데…(중략).이때 이준이 4천년 역사와 조선왕조 5백년의 내력을 한가지도 빼놓지 않고 자세히 진술하였다.그러나 가부간 결정이 나지 않았으니 모사는 사람이 하고 성사는 하늘에 달려 있다(謀事在人 成事在天)는 것인가. 본래 서양사람들은 성질이 느리고 의심해 결정하지 못하고 우유부단하다. 평생 하는 짓거리가 바위아래 노불(老佛)같고 구멍속의 긴 뱀과도 같으니 무슨 의리로 남의 나라를 구해 주겠는가.이에 이준은 한번 죽어 국가에 보답하는 것(一死報國)이 낫다고 생각,칼을 빼 스스로 목을 찔러 각국의 대표들의 의관에 뜨거운 피를 뿌리고 죽었다.이날 해가 빛을 잃고 푸른 하늘이 캄캄했다. 서양사람들은 비록 의리를 알지 못하였으나 입에서 입으로 이 소식이 전해져 이준의 충렬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위대하고 장하도다.이상은 내가 이준과 가까운 사람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를 적은 것이다. 이준열사가 헤이그에서 울분끝에 순국한 것은 1907년 7월14일의 일이었다.비록 일제의 방해와 열강의 우유부단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으나 이준열사의 죽음으로 온 국민이 항일독립의지을 굳게 다졌다. 한편 일제는 남산에 통감부를 설치하고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통감으로 앉아 시정개선(施政改善)이란 명분을 걸고 덕수궁의 고종에게 수발을 들었던 모든 궁중 관리들을 밖으로 쫓아냈다.정환덕도 쫓겨나 고종과는 서신으로 통신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이때 일본군사령부가 명령하기를 덕수궁안에 기거하는 모든 시종들은 궁밖으로 나가라고 하여 나도 대궐을 물러나 다시는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폐하께서는 서상궁을 통해 극비리에 봉서(封書)를 보내셨으니 나는 3일이 멀다고 봉서를 받아 보았다. 폐하께서 정환덕에게 분부하시기를 “지난 10년동안 궁 안의 대소사를 너와 더불어 상의해왔는데 조물주가 시기하여 너를 만나 보지 못하게 하는 구나.저들이 차마 못할 짓을 하는 것이니 우린들 무슨 일을 못하겠느냐.서상궁으로 하여금 통신하게 할 것이니 경은 시골로 내려가지 말고 서울에서 대기토록 하라”고 하시었다. 정환덕이 그래서 서대문 자택에서 대기하고 있었는데 하루는 청국인 왕대유(王大有)가 찾아와서 고종의 이거(移居) 문제를 거론하는 것이 아닌가. 청국인 왕대유는 본시 풍수지리에 밝기로 유명하였다.하루는 나를 찾아와 말하기를 “고종황제께서 지금 어거(御居)하고 계신 덕수궁 함녕전 터를 보면 북악산이 조금 멀어 정기가 미치지 못하고 남산은 너무 가까이 압박하고 있으니 이런 형상으로 인하여 외국의 간섭을 받게 되었으며 정년(丁年 1907)에 수(數)가 다하고 경년(庚年 1910)에 국토를 잃게 되고 무년(戊年 1918)에 식록(食祿)이 없어질 것입니다.그러니 지금 당장 경복궁으로 폐하의 어거를 옮겨야 할 것입니다.그렇지 못하면 화변(禍變)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고 하였다. 그렇지 않아도 경술년 7월 이화(李花)가 떨어진다느니 방부과인구혹다화(方夫戈人口或多禾=國移라는 뜻)라는 말이 떠돌고 있어 불안한 판이라 주상에게 이 말을 전할 수 밖에 없었다.황상께서 말씀하시기를 “지금 국고가 탕진되어 창졸간에 경복궁을 수리해 이거할 수가 없다.그러니 차차 형편을 보고 시행하기로 하자”고 하시었다. 이 말에 이거를 결심하였던가.하루는 고종이 정환덕에게 은거할 집을 구하라는 명을 내렸다.상감께서 봉서하시었는데 꼼꼼하게 풀칠한 봉투를 뜯어보니 내용은 이러했다.“지금 시국이 막다른 데에 이르렀다고 하겠다.만일 사태가 끝나지 않는다면 나도 잠시 피신할까 생각하고 있다.길성(吉星)이 비추는 곳에 몇 칸의 집을 구입해 준비하여 두라”하시었다.그래서 명을 받들어 팔문생사방(八門生死方)에 따라 누각동(樓角洞) 가장 한적한 곳에 50여칸의 집을 사서 미리 준비했다. 고종이 몰래 집을 지금의 적선동 근처 누상동에 은신처를 구해두었다는 사실은 필자도 금시초문이다.물론 이 50칸 집이 현존하지는 않겠지만 통감부가 자리잡았던 남산이 일제 침략을 의미하였다는 사실,그리고 북한산이 침략을 막아주는 큰 기둥이었던 사실을 여기서 짐작할 수 있다. □바로 잡습니다 지난 9월16일자 ‘南柯夢’23회 글 앞부분에 “1905년 1월17일 을사오조약”이라 한 것은 “1905년 11월17일 을사오조약”의 오기(誤記)로 바로 잡습니다.
  • 범죄자 된 노숙 탈북자의 눈물/趙炫奭 기자·사회팀(현장)

    “그동안의 남한 생활은 기억조차 하기 싫습니다” 13일 상오 서울 남대문경찰서 형사계. 지난 96년 북한을 탈출한 탈북자 金正勇씨(28·경기 고양시 일산구 장항동)가 초췌한 모습으로 조사를 받고 있었다. 서울역 앞에서 노숙 생활을 하던 金씨는 崔모씨(20·공무원)를 흉기로 찌른 혐의로 경찰에 붙잡혔다. 이날 새벽 육교에서 잠을 자다가 “날씨가 추우니 지하도에 가서 자라”고 권유하던 崔씨를 깡패로 오인해 순간적으로 저지른 범죄였다. 감시와 눈총속에서 살아왔지만 죄를 지으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고개를 떨군 채 조사를 받는 金씨는 노숙자에서 범죄자로 전락한 것이 믿기지 않는 듯했다. 겨우 얻은 자유를 스스로의 잘못으로 놓친 데 대한 자책에 괴로워하고 있었다. “목숨을 걸고 북한을 탈출하면서 이렇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그는 힘들었던 지난 2년간의 남한 생활에 대해 말문을 열었다. 金씨는 북한의 요양소 노동자였다. 자유가 그리워 탈출하기로 마음먹고 두차례의 탈출 시도 끝에 96년 1월 가까스로 자유의 땅을 밟았다. 1,700만원의 정착금과 철도청 정비직을 얻을 때만 해도 장밋빛 꿈으로 가득했다. 하지만 직장 동료들의 따돌림과 곱지않은 시선이 그를 괴롭혔다. 고민을 털어놓을 친구도 없었고 외로움만 밀려왔다. 결국 무작정 직장을 뛰쳐나와 막노동판을 전전하기에 이르렀다. 신용카드빚은 늘어갔고 정착금조차도 술과 경마에 탕진했다. 마지막으로 탈북자 金모씨가 운영하는 식당에서 일하기도 했지만 오래 견디지 못했다. 지난달 그는 노숙자라는 최후의 선택을 하고 말았다. 이날 구속영장이 신청된 金씨는 “잘 살고 있는 탈북자들도 많은데 내가 못난 탓”이라며 회한의 눈물을 흘렸다.
  • 정부 대책/일시적 지원보다 자립능력 육성(탈북 그 이후:7·끝)

    ◎자본주의 이해부족 정착금 탕진 잦아/생활양식 적응못해 말한마디에 상처/다양한 적응훈련 프로그램개발 절실 “탈북자들은 우리와 이념과 체제가 다른 곳에서 생활했고 특히 다양한 계층 출신이어서 보호와 관리,정착 지원에 애로가 많습니다” 탈북자 보호·관리를 맡고 있는 한 당국자의 말이다. 귀순한 탈북자들은 일정 기간 통일부 안기부 군 경찰 등의 합동심문 과정을 거친 뒤 통일부에 넘겨져 적응교육을 받고 우리사회의 일원으로 편입된다. 겉으로 보기에는 일반 시민과 똑같이 생활하게 된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제약은 있다. 주변의 호기심 어린 시선과 한동안 이들의 안전을 돌봐야 하는 당국의 감시(?)가 바로 그것이다. 95년 귀순한 金모씨는 “강릉 무장간첩 사건 때 한 직장동료가 ‘친구가 왔는데 만나러 가지 않느냐’고 하더군요. 그 친구는 농담 삼아 말했지만 엄청난 좌절감을 느꼈다”고 말했다. 감시를 당한다는 불만을 터뜨리기도 한다. 적절한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불만도 있다. 또다른 귀순자 金모씨는 “북한에서 잘 살던사람이 남한에서도 대우를 잘 받고 있다”면서 “북한의 고위층은 다 북한 주민들을 착취한 사람들인데 그들에 대한 남한 정부의 대우가 훨씬 좋다”고 지적했다. 이같은 탈북자들의 불만은 뒤집어 보면 바로 이들의 보호 및 정착 지원을 맡은 당국의 고민이다. 탈북자들을 일정기간 보호·관리하는 ‘보호경찰관’ 임무를 맡고 있는 朴모경사는 “자본주의에 대한 이해부족과 사고방식의 차이로 무리한 요구를 하는 탈북자들을 이해시키는 일이 가장 어렵다”고 털어놨다. 그는 또 ‘이한영씨 피살 사건과 동해 잠수정 사건 등이 터지면 탈북자들에 대한 테러위협 때문에 특별보호 지시가 떨어진다”면서 “몇 달씩 집에 들어가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고 말했다. 통일부의 한 관계자는 “일부 탈북자들은 2∼3차례씩 정부에서 직업을 알선해줘도 쉽게 그만둬 애를 먹고 있다”면서 “가끔 능력에 맞지 않는 대우를 요구해 곤란할 때도 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탈북자 대부분이 3D업종을 기피해 직업 알선이 특히 어렵다”면서 “최근에는 북한음식점이 잘된다고 하자 너도 나도 식당을 열려고 해 애로사항이 많다”고 말했다. 당국의 고민은 동전의 앞 뒷면과 같다. 정착지원금과 후원금 이외의 경제적인 도움을 주지 못하는 당국. 사생활을 보호받고 싶어하는 탈북자들과 무엇보다 이들의 안전을 걱정해야 하는 당국. 직장 알선 등 탈북자들이 원하는 직업을 제 때에 알선해주지 못하는 애로사항 등. 현재 당국의 대책은 이들에 대한 일시적 지원보다는 다양한 적응 프로그램 개발 및 종합지원센터 설치 등 자립 자활 능력을 키우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들에 대한 사회의 따뜻한 관심이라고 정부 관계자들은 강조한다.
  • 쉽지 않은 남녘생활(탈북 그 이후:1)

    ◎자본주의 적응못해 탈선 빈번/법·제도 등 잘몰라 자신도 모르게 범법/소외감 달래려 술·도박… 정착금 탕진도/부적응자 재교육·취업알선 등 대책 절실 오는 15일은 대한민국 건국 50주년, 분단 53주년이 되는 날. 지난 50여년 동안 이념과 체제가 다른 북한에서 살다 남한으로 탈주한 북한 이탈주민(탈북자)들은 700여명에 이른다. 직업이나 탈출동기가 제각각이듯 남한에서의 삶도 다양하다. 상당수는 우리사회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해 사선을 넘을 때 기대했던 것 만큼 순탄하게 살지 못하고 있다. 평범한 시민이 되고 싶다는 희망,두고온 가족에 대한 그리움, 사회로부터의 소외감 등 탈북자들이 겪는 明과 暗을 시리즈로 짚어본다. “남한 생활이 이렇게 어려울 줄은 몰랐습니다” 지난 6일 상오 서울 강남경찰서 유치장. 100만원짜리 고액 위조수표 사건과 관련,구속된 탈북자 鄭龍씨(28·서울 강남구 일원동)는 이렇게 입을 열었다. 하룻동안의 유치장 생활로 얼굴이 몹시 상기된 鄭씨는 남한 생활 1년도 채 안된 상태에서 유치장 신세를 진다는 것이믿기지 않는 듯 담배를 계속 빼물며 고개를 떨구었다. “조금만 남한 생활에 익숙했고 법을 알았더라면 이런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을텐데…” 鄭씨는 지난해 9월 먼저 북한을 탈출한 형 鄭연씨(33)의 도움을 받아 어머니와 여동생,남동생 등 가족 3명과 함께 북한을 탈출,화제가 됐던 인물. 鄭씨는 “평양에서 비행군관학교를 다니다 92년 유학중 남한으로 귀순한 형 때문에 함북 온성군 탄광지역으로 쫓겨나 종이공장에서 일하던 시절이 생각난다”면서 “새로운 생활에 적응하기도 전에 또다시 먼 곳으로 숙청된 느낌”이라고 말했다. 한때 경찰을 잔뜩 긴장시켰던 100만원짜리 위조수표 사건은 말 그대로 남한 물정에 어두웠던 한 탈북자의 어처구니없는 범죄였다. 지난 6월 鄭씨는 사회적응 훈련을 마치고 형 친구이자 89년 귀순해 냉면 체인점 사업을 하는 全모씨(31)의 회사에 일자리를 얻었다. 월급은 불과 50만원이었지만 국가에서 아파트를 제공받아 다른 탈북자에 비해 쉽게 출발했다. 그러나 지난달 31일 회사 동료 金모씨의 컴퓨터 가방에 들어 있던100만원짜리 위조수표를 몰래 꺼내 은행에 입금하려다 은행원의 신고로 경찰에 붙잡혔다. 수표는 金씨 등 3명이 회사 사무실에서 컴퓨터 스캐너로 위조한 것이었다. 鄭씨는 “친한 동료의 수표가 사무실에 돌아다니고 있어 입금하려 했을 뿐 범행 의도는 전혀 없었다”고 항변했지만 부정수표단속법 위반 및 절도 혐의로 구속됐다. “나중에 알았지만 뒷면에 인쇄조차 안된 조잡한 수표를 알고도 입금시킨 뒤 신고한 은행원이 야속하다”고 말했다. 90년대 이후 탈북 귀순자가 늘어나면서 남한 사회에 정착한 이들의 삶도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귀순,주변의 지원 속에 풍요롭게 살아가는 이들도 있다. 전문직업인 연예인 신앙인 등으로 변신,북에서의 삶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인생을 꾸려 나가는 이들도 많다. 그러나 鄭씨처럼 적응에 실패해 범죄의 유혹에 빠지거나 정착금을 탕진해 생활고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시베리아 벌목공 출신인 金모씨(35)는 “솔직히 문화적 차이와 소외감 때문에 생활에자신이 없다”면서 “적응을 하지 못해 술과 도박으로 소일했던 적이 있다”고 말했다. 귀순자 朴모씨(42)는 “취직을 해도 북한에서 왔다는 이유로 따돌림을 받는 것이 싫어 그만두는 탈북자들이 많다”고 전했다. 탈북자 모임인 ‘숭의동지회’ 관계자는 “북한 사회에서 오랫동안 생활한 탈북자들은 남한사회에 적응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면서 “상당수가 개인능력 위주의 자본주의 사회에 정착하는 데 어려움을 느끼고 있으므로 정부는 부적응자들의 재교육 및 취업,장래문제에 신경을 써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