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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자금은 공짜돈/분식회계·사기대출 6조대… 前진로회장등 18명 구속

    공적자금비리 특별수사본부(본부장 安大熙 대검 중수부장)는 29일 수천억원대의 분식회계를 통해 다시 수천억원대 자금을 사기대출받은 장진호 전 진로그룹 회장과 엄상호 전 건영그룹 회장,박창호 전 갑을그룹 회장,최진강 전 대산건설 대표 등 18명을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의 배임 등의 혐의로 구속기소했다고 밝혔다.또 장치혁 전 고합그룹 회장 등 16명은 같은 혐의로 불구속 기소했다. 검찰은 이들 6개 부실기업군의 사기대출 금액이 1조 9171억원,부도 등으로 금융기관이 떠안은 부실채무 규모가 4조 1732억원에 이른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검찰은 관련자 79명을 출국금지하고,유용된 공적자금이 구명로비 자금으로 쓰였는지 추적하기로 했다. ●돌려막기와 거짓 외자유치 진로그룹의 장 전 회장은 94∼97년 부실계열사에 6300억원을 지원한 뒤 이를 감추기 위해 분식회계를 감행했고 이를 근거로 5500억원을 사기대출받은 것으로 드러났다.이 가운데 60억원은 진로그룹의 경영권 분쟁을 위한 합의금으로 빼돌렸다.진로그룹은 1200억원대 순이익을 내던 모그룹 진로의 자금력에 의지했다.진로의 결산일은 9월말,다른 계열사들의 결산인은 12월 말로 시차가 있다.계열사들의 결산일이 다가오면 진로가 자금을 대여해 주고 진로 결산일이 다가오면 계열사들이 이 돈을 되갚아 주었다. 진로는 부동산 매각 등을 통해 얻은 자금 가운데 15억여원을 빼돌려 임원들끼리 주식투자나 접대비 등으로 탕진했다.3억원은 임원 22명이 나눠 벤처기업에 투자했으며,특히 부사장 한봉환(55·구속)씨는 5억원을 개인 주식투자금으로 사용하고 수천만원은 아파트 분양청약금 등으로 사용했다. ●회사 쪼개기 고합그룹의 장 전 회장은 재고자산을 과다계상,분식회계한 뒤 6794억원을 사기대출받은 것은 물론 워크아웃으로 채권단의 관리인이 파견되기 직전인 98년 1월 7억 5000만원을 빼돌려 유용했다.고합은 주력업종에서 경쟁력을 잃게 되자 한 회사를 생산공정별로 4개 회사로 분리,이들 회사가 각 단계에서 매출을 올리는 것으로 잡았다.그러나 결국 98년 11월 워크아웃 기업으로 지정됐다. ●금고돈은 쌈짓돈? 열린상호신용금고 손성호전 대표는 동신으로부터 2500만원의 대출사례금을 받고 금고돈을 마구잡이식으로 대출해 주다 아예 동신 부회장으로 자리를 옮겨 사기대출을 주도했다.여기에다 금고 이화영 여신이사는 고객 명의로 5억원을 빌려 가로채는가 하면 대출 사례금 1700만원을 받고 사기대출에 적극 협조하기도 했다.김태호 총무이사 역시 고객명의를 빌려 8억 8000만원을 꺼내 주식투자금 등으로 썼다. ●1100억원을 56억으로 되갚기? 대산건설 최 전 대표는 96∼97년 공사미수금이 있는 것처럼 가장하는 방법으로 285억원을 사기대출받고 회사자금 8억 7000만원을 횡령한 혐의로 각각 기소됐다.한때 ‘잘 나가던’ 대산건설은 경기 침체 끝에 97년 12월 부도를 냈다.당시 대산건설이 지고 있던 각종 채무는 1100억원대.구조조정회사를 통해 대산건설에 대한 부실채권을 관리하고 있던 자산관리공사 등은 이 부실채권을 대산건설에 56억원에 넘겼다.1100억원대의 빚을 단돈 56억원에 갚아버린 것이다. 조태성기자 cho1904@
  • 게으른 사람이 오래산다?/ 게으름에 대한 과학적 변론 잉에 호프만著 ‘오래 살려면‘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산다는 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에너지를 소비하는 과정이라면 죽음은 곧 에너지의 고갈을 의미한다. 특히 사람처럼 빠른 속도로 에너지를 소비하는 유기체는 에너지를 사용하면서 인체라는 기관을 빠르게 마모시킨다.결국 유기체는 에너지를 필요 이상으로 소비하고,그 과정에서 유기체의 마모도가 높아지며,마침내는 감당할 수 없는 피로를 쌓아 죽음에 이르는 병을 부르게 된다는 이 가설은 아직도 유효하고 앞으로도 설득력을 가질 것이다.적어도 인체라는 유기체가 무한정 에너지를 확보할 수 있거나,유기체를 전혀 손상시키지 않고 에너지를 소모할 수 있다는 또다른 가설이 입증되기 전까지는…. 이런 관점에서,생명에너지는 유한한 만큼 가능한 과소비하지 말고 유기체의 훼손을 막아야 하며,그렇게 해서 더 건강하게,더 오래 살 수 있다는 요지를 담은 잉에 호프만의 책 ‘오래 살려면 게으름을 피워라’(이영희 옮김,나무생각,8900원)는 확실히 ‘평범한 비범’을 담고 있다. 과학저널리스트로,이전에도 이미게으름의 효용성을 주창한 바 있는 작자 호프만은 “생물학적 게으름이란 유기체,즉 몸을 조심해서 다루고 도우며,무리한 부담을 주지 않아야 한다.”고 전제하고 이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론으로 “한계에 도달할 때까지 절대로 일하지 말라.”고 주문한다.매사에 너무 쉽게 움직이다가는 긴급 상황을 위해 마련돼 있는 생체에너지가 바닥나 곧 탈진에 이르고 만다는 것이다. 호프만의 ‘게으름론’은 사실,게으름에 대한 선동이라기보다는 너무 바쁘고,너무 빠르고,너무 강한 것에 대한 비판적 경고라는 편이 옳다.그는 “이런 숨막히는 상황에서 인체가 얼마나 더 버틸 수 있겠느냐?”고 반문하고,사회나 직장에서 무슨 과제가 주어졌을 때 “강인한 의지력으로 젖먹던 힘까지 짜내서 일하라.”는 강요야말로 생명의 탈진을 부추기는 악의의 모럴이라고 비판한다. 이 쯤에서 많은 사람들은 의구심을 가질 것이다.“그렇게 살아서야 어떻게 이 심각한 경쟁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라고.그러나 그렇든 말든 그는 진지하고 태평하게 “선택은 당신의 몫”이라며 이렇게 말한다.“현대적인 기술이 당신의 바이오프로그램을 과속으로 운전하도록 방치하지 마라.당신의 삶은 당신 스스로 프로그래밍해야 한다.” 책을 읽고 나면 느끼겠지만,그의 게으름론은 결코 대책없는 선동이 아니다.오히려 차분하고 냉정해 게으름에 특별한 혐오감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면 누구나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생명의 담론’이다.그만큼 과학적이고 구체적이다.예컨대,간을 위한 게으름은 과도한 지방과 알코올의 섭취를 제한하는 것이며,혈관과 근육을 위한 게으름은 운동,인체의 면역체계를 위한 게으름은 유해성분을 피하고 신체를 단련시키는 것이라고 명쾌하게 답안을 제시한다. 이쯤 되면 그가 말하는 게으름이 꼼짝하지 않고 눈만 끔벅이는 부동(不動)자세나 의욕상실의 지경이 아님을 어렵잖게 알 수 있다.오히려 그는 생물학적 이기주의자가 되라고 권고한다.스트레스를 피해 생체에너지의 무의미한 낭비를 차단하되 서두르지 말고 느긋하게 할 일은 다하라는 충고다. 마지막으로 호프만이 우리에게 전해 주는 잠언같은 건강론-“잊지 마라.생명에너지의 탱크는 한번 탕진되면 끝이다.다시는 빈 탱크를 채울 수 없다.” 심재억기자 jeshim@
  • [열린세상] 숫자괴담

    ‘만약에 100만원이 생긴다면’ 이런 노래가 있었다고 한다면 무슨 호랑이 담배 피울 적 이야기냐고 고소를 금치 못할 것이다.세월 따라 돈의 개념은 눈부시게 달라진다.한때 돈 100만원은 사람들의 꿈이었으나 지금은 한낱 푼돈에 불과할 수 있다.그래선지 일확천금으로 대변되는 로또 복권도 수십억원,수백억원이 나와야만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한다. 최근 신문에 보도되는 돈의 액수는 수백억원,또는 1000억원을 헤아리는 천문학적 숫자다.지난 97년 현찰 61억원이 담긴 사과상자가 물의를 일으키더니 이번에는 200억원을 50개가 넘는 서류상자에 꾸역꾸역 담아 봉고와 승용차,밴의 조수석까지 휘어지도록 싣는 거재두량(車載斗量)이 연출되었다.돈의 분량이 100억원 단위나 돼야만 논란을 불러일으킨다는 둔감을 준다. 물론 이런 몇몇의 행적이 우리 사회전체를 반영하는 것은 아니다.우리 주변에는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다.열심히 절약하여 보험금과 주택부금을 붓다가 살기가 어려워져서 보험금을 허는 가정이 늘어난다는 보도도 있다.전기값을 내지 못해 단전이 된 가구가 서울에서만 1만건이 넘고 청년실업률이 날로 증가하는 고달픈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6월말 현재 신용불량자수는 322만여명.특히 10대와 20대 등 젊은 신용불량자들이 눈에 띈다.그들은 여러 종류의 카드를 갖고 돌려막기로 빌린 돈을 막다가 ‘살인 고리채’에 걸려들어 신용불량자가 된 것이다.지난달 세 아이와 함께 자살한 30대 주부,아들의 카드빚을 비관하여 자살한 60대 아버지,카드빚에 쫓기던 30대 무직자가 급기야 살인을 저지르고 말았다. 요즘 초등학생들의 노는 양태를 보자.엊그제 한 방송은 초등학교 학생들이 학교 근처 문방구에 외상장부를 만들고 거기서 돈을 빌려다가 노름하는 장면을 보여주었다.노름 방법은 판때기 위에 동전 100원짜리를 올려놓고 손으로 탁쳐서 돈을 따는 판치기다.한번 동전이 뒤집어지면 기본 판돈 5000원을 잃게 된다.10만원을 잃게 되는 수도 있다고 한다.아이들은 수북이 쌓인 만원 지폐를 쓸어가면서 “한번 시작하면 쉽게 멈출 수 없다.”고 했다.돈불감증이 초등학생 사이에도 만연된 예이다. 그들이 보고 배우는 것은 무엇인가.하루가 멀다 하고 신문 방송을 장식하는 100억,1000억 따위의 가당치 않은 숫자괴담이 어린 소년들을 도박중독에 빠지게 하고 젊은이들로 하여금 돈을 물쓰듯 쓰고 싶은 탕진 충동을 불러일으키고 있다.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몇백억원을 서류상자에 담아 폐품 치우듯이 실어나르는 마당에 나라고 해서 몇십만원쯤 못 쓰랄 법은 없지 않으냐는 자조를 주게 된다.행투(倖偸)에 현혹되어 복권을 사들이는 풍조도 마찬가지다.은행이나 카드회사가 자제력이 부족한 미성년자와 상환능력이 없는 사람들에게 마구잡이로 카드를 발급하는 것도 문제다.그러나 그보다는 번들거리는 양복주머니 속에 현찰을 다발로 묶고,상자로 묶어서 돈의 흐름을 차단시킨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 더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천차만별의 계층이 모여서 하나의 사회를 이룬다.잘 사는 사람도 있고 못 사는 사람도 있다.원도 한도 없이 돈을 쓰고 싶지 않은 사람은 없다.화면에서 돈다발을 흔들 때마다 허탈과 표박,무력과 열패감을 감출 수 없는 것은 사실이다.그러나 젊은이들의 카드빚에 이어 어린이들의 문방구 외상이 또 다른 신용불량자를 길러낼지도 모르는 불상사가 목전에 와 있다. 공짜라면 양잿물도 마신다는 옛말은 공연한 허튼 소리가 아니다.빌린 돈은 공돈이 아니라 결국은 독약이다.100만원은 세월 따라 흘러간 푼돈이지만 그것을 벌기 위해 과연 땀을 흘려봤느냐는 질문에 대답할 수 있을 때 무모한 낭비와 돈에 대한 잘못된 숫자불감증을 고칠 수 있다. 이 세 기 영상물등급위원회 위원 前대한매일 논설위원
  • 후세인 큰아들 우다이 / 사생활 문란 방탕아… 동생에 밀려

    우다이(39)는 한마디로 버릇없는 방탕아였다.조울증이 심했던 사디스트로 제멋대로 살인을 저지르고 고문을 즐겼으며,사생활은 질펀하고 문란하기로 유명했다.길을 가다 맘에 드는 여자가 있으면 무조건 끌고와 강간을 일삼았다.자신의 부인과 춤추기를 허락하지 않은 군장교에게 폭력을 휘둘러 숨지게 했고 이혼한 부인과 숙부들에게까지 주먹질을 가하기 일쑤였다. 석유 밀수출 사업으로 쌓은 막대한 부는 사리사욕을 채우는데 탕진했다.바그다드 함락 이후 공개된 그의 집안 곳곳은 나체 여성 사진,최고급 술과 마약에다 정력 강장제,에이즈바이러스 검사 시약까지 나왔다.지하 주차장에서 롤스로이스 자동차 20여대가 발견됐다.칼리굴라 뺨치는 엽기적 행각 때문에 우다이는 ‘늑대’로 불렸다. 지난 1996년 괴한의 총탄세례를 받고 쓰러져 다행히 목숨은 건졌지만 지팡이에 의지하는 불구의 몸이 됐다.페다인 민병대 대장으로 아버지 후세인의 정적 제거 작업을 도왔다.그러나 88년 후세인이 후처를 들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최측근 경호원을 공개 파티석상에서 무참히 살해,부친의 눈밖에 났고 암살 사건을 계기로 후계자의 자리를 동생 쿠사이에게 내줬다.형제 사이는 이 때부터 벌어졌다. 쿠사이가 군부와 정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자 우다이는 자연스럽게 보다 대중적인 역할을 떠맡았다.바빌지,유스TV 등 이라크 언론·방송 기관을 소유한 그는 대중 앞에 나서기를 좋아하고 선동을 주도했다. 그가 이라크 올림픽위원회와 축구협회를 이끌면서 엽기 행각은 국제적으로도 소문이 났다.94년 월드컵축구 본선 진출에 실패한 축구팀 선수들을 모조리 투옥시키고 이들에게 콘크리트로 만든 축구공을 차도록 시켰다.성적이 저조한 육상선수들을 뜨거운 아스팔트 위를 맨 몸으로 기게 한 뒤 피투성이가 된 이들을 하수 탱크에 강제로 집어 넣어 국제올림픽위원회가 진상조사에 나서기도 했다. 박상숙기자
  • 오피니언 중계석/ 문화인의 정치참여 어떻게 봐야하나

    ‘문학수첩’ 여름호 요약 소설가 출신의 영화감독 이창동씨의 문화관광부 장관 입각은 현대사에서 새로운 실험이다.‘문학수첩’ 여름호는 ‘문화인의 정치참여 이래도 좋은가’라는 주제로 문화인의 정치참여가 어떤 명암을 갖는지 조명했다.문학평론가 윤지관씨의 ‘문학과 정치의 이분법을 넘어서’라는 제목의 찬성론과 서울여대 교수 이숭원씨의 ‘문학적 재능과 정치권력’이라는 반대론을 요약한다. ●문학과 정치의 이분법을 넘어서 시민으로서의 일상적인 참여 행위를 제외하면,문화예술인의 정치참여는 정부의 정책결정에 참여하는 것과 시민 또는 민중운동에 가담하는 것으로 나누어진다.이 가운데 후자,즉 창조적인 문화 예술인이 자유와 진리에의 충동을 실현하기 위한 사회운동에 가담하고 이를 주도해 나가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특히 창작 활동 자체를 억압하는 파시즘 체제에서 문화 예술인들의 요구가 적극적인 저항의 형태로 표출된 것은 정치적인 행위이기도 하지만 순수한 문학적 요구에서 발원하는 것이다.그렇다면 창작활동의 기반이 되는 언론의 자유가 보장된 상황에서는 어떤가.기본적으로 질서를 지향하는 권력과 질서 이상의 것을 바라보는 문화 예술이 어깨를 걸고 함께 가는 상황은 일어나기 어렵다.시민사회의 성숙성은 사회의 속물성을 더욱 심화시킬 수 있고 그같은 조건은 문화 예술의 존재에 대한 본원적인 위협이 될 수 있다. 더욱이 문학과 예술의 반체제성은 정치권력뿐 아니라 더욱 공고화되는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것일 것이다.개혁이 국민적 과제라 하더라도 그 개혁이 자본주의 체제의 궁극적인 승리가 아니라 그 지양을 목표하는 것이 되지 않는 한 진정한 창작의 지향과 모순될 것임은 여전하다.체제 안에서 살면서 체제를 넘어서는 활동을 통해서만 그 반체제성을 실현할 수 있는 것이 지금의 문학과 예술의 조건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작가 겸 정치가들의 독특한 기여는,그들이 작가로서 정체성을 견지하고자 하는 한에서는 체제와 반체제의 경계선에서 발휘되는 인문적인 상상력이 발휘될 때 가능해진다.바로 여기에 예술인의 정치 현장에 대한 참여의 의미가 있으며,이 긴장이 흐려지거나 삭감되는 순간,그 의미를 상실하게 될 것이다. ●문학적 재능과 정치권력 문학인이 국회의원이나 장관 같은 정치권력의 중심 직책을 맡는 것이 바람직한가라는 질문에 대한 의견을 밝히는 것으로 한정하고자 한다.문학은 현실에 바탕을 둔 것이다.문학과 현실이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으니 현실 문제에 관심을 가진 문학인들이 현실에 참여하는 것도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역사적으로 전체주의적 정치 체제가 지배했을 때 문학인은 권력의 중심으로부터 소외되고 탄압받았는데,그것은 전체주의 정치철학의 지향하는 획일적 사고와 문학 자체가 안고 있는 다양하고 개방주의적인 사유의 흐름이 충돌하기 때문이다.문학인이 추구하는 자유롭고 기발한 상상의 확대와 정치인이 요구하는 안정되고 균형있는 제도의 정착은,어느 순간 상보적인 관계를 맺다가도 본질적으로는 충돌할 수밖에 없다.그렇게 볼 때 문학인의 정치 현실 참여는 문학적 신념에 의해 선택된 행위다.그 참여적 행동은 정치적 신념보다는 문학인(또는 인간)으로서 양심적 고민의 소산일 가능성이 많다.추구하는 이념 역시 많은 문학인들이 공유하고 있는 인간다운 삶에 대한 열망이라는 큰 테두리에 무리없이 포함될 것이다. 그러나 국회의원이나 장관이 된다는 것은 문학적 감성이 필요한 부분도 있겠지만,사실은 조직을 유지하기 위한 고도의 행정능력이 더 많이 요구된다.그런데 권력이란 것은 억압을 전제로 한다.사회주의 이념도 이념 그 자체로는 이상적이지만,그 이념이 제도화되고 정치권력에 의해 시행되면 인간을 억압하는 기제로 변질되어 버린다.결론적으로 말해 문학적 재능 때문에 공직을 맡게 되면 공무도 충실하게 수행하기 어렵고 문학적 재능마저 탕진하게 된다.문화 예술인은 철저한 장인정신을 가지고 자기의 길을 굳건히 가는 것이 바람직하다.다만 문화 예술 방면에 대한 자문이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기꺼이 응하면 되는 것이다.
  • [녹색공간] 살려야 할 三步一拜 정신

    삼보일배(三步一拜)에 참가한 4명의 성직자들이 경기도 수원을 지나 과천을 향해 엎드려 절하며 ‘기어오고’ 있다.지난 3월28일 전북 부안을 떠난 지 50여 일이 넘었다.일정에 의하면 오는 23일쯤 서울 동작구 사당동을 경유한다.자그마치 305㎞를 문규현신부,수경스님,김경일교무,이희운목사 등 4명이 ‘세 걸음에 한 차례’씩 절을 하며 북상한 것이다.나이 60세를 목전에 둔 신부님은 뼈마디가 쑤셔 밤에 잠을 못 이룬다.출발하자 물이 차오르기 시작한 스님의 한쪽 무릎은 어떤 후유증을 남길지 모른다.교무님의 다리도 성할 리가 없다.목사님은 십자가를 짚기 때문에 손목에 이상이 왔다. 아무리 자발적 고행이라 하지만 이들을 땅바닥으로 내몬 것은 무엇인가.12년 전부터 우리 사회를 망령처럼 휘감고 있는 ‘새만금 소동’이다.새만금이 한국의 환경운동사에서 차지하고 있는 비중은 무겁고도 깊다.세계 4대 갯벌이라는 지구생태적 갯벌가치 외에도,그런 엄청난 자연자원을 국립공원의 산을 파괴하면서까지 메우려는 무모함에서도 그렇고,이미 들인 4조 6570억원이라는 천문학적인 돈의 무모한 탕진에서도 그렇다. 마침 생태경제연구회에서 최근(15일) 발표한 새만금 경제성 분석에 의하면,“지금이라도 새만금 간척공사를 중지할 경후 향후 8조원의 경제적 이익이 기대되지만,강행할 경우 손실액이 4조원에 이른다.”고 한다.수치에 약한 글쟁이라 나는 이 수치를 “이미 들인 돈이 4000원이지만,공사를 중지하면 8000원이 남고,계속 강행하면 4000원을 더 들여야 한다.”라고 고쳐 읽어본다.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런 계산이 나온 만큼 주머니에서 돈을 더 꺼내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새만금은 돈 이야기로 전개될 일이 아니다.새만금은 생명의 담론이고,혹독한 반성과 참회의 담론이기 때문이다.쌀이 부족해 갯벌을 메우겠다는 농림부의 주장도 대통령에 의해 단칼에 부정된 지 벌써 오래다.최첨단 산업공단을 만들겠다고 기염을 토하며 혹세무민하던 도백(道伯)은 ‘다른 부정’이 발각돼 지금 감옥에 있다.그런데도,“새만금사업 빨리 해달라.”고 환경부와 농림부를 항의방문하는 국회의원들과 지방 유지들은누구인가.새만금사업 강행으로 이익을 얻을 사람들이지 그들이 조작한 언로(言路)에 갇혀 뭐가 뭔지 몰라 안타까워하는 전북도민들이 아니다. 삼보일배라는 극한적 고행의 순례길 한쪽에 버스로 몇백명의 고용된 사람들을 풀어놓아 ‘관제 데모’를 시킨 세력들은 누구인가.관제 데모를 지휘하는 자의 옆구리에 ‘농업기반공사’ 봉투가 끼워져 있는 것을 우리는 보았다.새만금사업 강행자들을 혈세 탕진하는 범죄자라 부르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새만금사업은 12년 전부터 이성적 결정이 아니라 망국적 지역주의에 바탕한 정치적 흥정으로 비롯되었으므로,이 해법 또한 최고결정권자가 쥐고 있을 수밖에 없다.그렇지만,대통령과 그를 모시는 사람들은 삼보일배 참회기도가 더 확산되고,그 파장이 더 커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눈치다. 새만금사업의 백지화 발표는 기도순례단 옆에 사람들을 풀어놓은 한 줌도 안 되는 부패한 세력 사이에 벌어질 한판 싸움이 아니다.대통령의 새만금사업 백지화 발표는 잘못된 사업을 바로잡는 개혁의 한 모습이고,지난 시절 잘못꿴 단추를 바로 꿰는 상식의 회복이며,자원과 생명과 혈세를 낭비하는 망령을 걷어내는 당연한 수술이건만,‘변했다.’는 소리를 두려워하지 않는 노무현정권은 실망스럽기 그지없는 우유부단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고통스러운 얼굴로 삼보일배 현장을 다녀간 환경부장관과 문광부장관에게 부탁드린다.대통령이 소신과 용기를 회복하도록 간곡하게 충언하기 바란다.새만금 백지화 발표로 잃는 것보다 얻는 게 필경 더 많을 것이라고 말씀드려주기 바란다.오는 30일 ‘바다의 날’도 있고,6월5일 ‘환경의 날’도 있다. 최 성 각 소설가 풀꽃평화연구소장
  • [길섶에서] 빈대떡 신사

    며칠전 가까운 선배,동료들과 추억에 젖게 하는 신파극 ‘빈대떡 신사’를 관람했다.모처럼 느껴보는 망중한이었다.인기 탤런트들이 펼치는 약간은 과장된,그러면서도 감칠맛 나는 연기는 어떨 땐 웃음을 자아내게 했고,더러는 잔잔한 감동으로 다가왔다. 주인공은 방탕한 생활로 가산을 탕진한 아버지와 광주리 행상을 하는 어머니,고시 공부를 하는 큰아들….계속되는 가족들의 불행에 검사가 된 큰 아들의 배신으로 희망조차 잃어버린 가족들이 나락으로 빠져들 즈음,큰 아들이 다시 가족애를 되찾는 장면이 클라이막스인 그 흔한 신파조다. 이미 예견된 결말이며,머리 쓸 것도 없는 평범한 가족사인데,가족들이 웃음꽃을 되찾는 마지막 장면에서 관객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박수를 쳤다.‘다소 유치한 느낌이 드는 상투적인 대단원인데…’라며 머쓱해 하다 나 역시 손바닥이 아프도록 박수를 쳐댔다.언제부턴가 우리 모두 잊고 지내온 해피엔딩이 그냥 좋아서였다.일상의 해피엔딩이 너무 그립다. 양승현 논설위원
  • 사건 패트롤/ 20대교포 ‘빗나간 복수극’

    “돈이 없으면 대접받지 못하는 한국 사회에 복수하고 싶었습니다.” 2일 오전 서울 강남경찰서 강력반 사무실.해외 교포인 강모(22·무직)씨가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강씨는 폭발물이 설치돼 있다는 협박전화를 하고 수천만원을 훔쳐 유흥비 등으로 탕진하다 쇠고랑을 찼다. 초등학교 4학년 때 교통사고로 부모를 여읜 강씨는 지난 93년 고모를 따라 과테말라로 이민을 갔다.그러나 이민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지난 2월 혼자 귀국했다.처음엔 현지에서 10년 동안 익힌 스페인어 실력으로 학원강사 자리를 얻어 생활하겠다고 마음먹었다.하지만 생활정보지 등에 수십차례 구직광고를 내도 일자리 얻기는 쉽지 않았다.귀국할 때 가져온 미화 1000달러는 한 달도 안돼 바닥이 났다.끼니 걱정을 하게 된 강씨는 지난달 초부터 주유소와 노래방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근근이 생계를 이어갔다. 강씨는 “갈수록 가슴 속에 차오르는 것은 ‘가진 자’만 대접받는 한국사회에 대한 불만과 복수심뿐이었다.”고 말했다.또래의 부유층 자제들이 주유소에 고급 외제차를 몰고와서 반말을 일삼았고,귀국해서 사귄 여자친구는 ‘빈털터리 교포’임을 알고 떠나갔다. 강씨가 일을 저지른 것은 지난달 19일.홧김에 112신고센터에 전화를 걸어 “동대문운동장에 폭발물을 설치하겠다.”고 협박했다.아르바이트를 하던 주유소와 노래방 등에서 현금과 오토바이,승합차 등 2350만원어치의 금품을 훔치기도 했다.강씨는 이 돈을 강남 일대에서 유흥비와 명품 옷을 사는 데 모두 썼다.경찰의 추적으로 붙잡힌 강씨는 “돈이 제일인 한국 사회에서 마음대로 돈을 쓰지 못하는 내 처지가 싫었다.”고 말했다. 이영표기자 tomcat@
  • 사건패트롤 /“강남 친구들과 어울리려 절도” ‘귀족병’ 휴학생 뒤늦은 후회

    “강남 친구들에게 기죽지 않기 위해 외제차와 명품이 필요했어요.” 24일 오전 서울 서초경찰서 강력반 사무실.대학 휴학생 심모(25·S대 경영학과4년)씨가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옆에선 어머니(54)가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심씨는 여자 친구의 집 등에서 상습적으로 6000여만원을 훔쳐 유흥비와 명품 구입 등으로 탕진하다 쇠고랑을 찼다.영관급 장교 출신인 아버지로부터 엄한 가정교육을 받고 제주도 등에서 소박하게 자란 심씨가 이른바 ‘강남 귀족병’에 걸린 것은 지난 95년.서울로 이사와 강남의 한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다. 심씨는 또래의 강남 부유층 자제와 어울려 다니면서 서서히 ‘상류생활’의 단맛에 젖어들었다.이들은 밤만 되면 명품 옷을 걸치고 외제 승용차로 나이트클럽과 술집을 전전하며 하룻밤에 수백만원씩을 탕진했다.대학에 들어가서도 방탕생활은 계속됐다. 그러나 강남 친구들의 수준에 맞추려다 보니 용돈이 궁해졌고,급기야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저지르게 됐다.지난해 3월 강남구 청담동 친구집에 놀러간 심씨는 친구어머니의 신용카드를 훔쳐 210만원짜리 ‘몽블랑’ 시계와 1000만원이 넘는 ‘페라가모’ 의상을 구입했다.석달 뒤에는 여자친구 집에서 3000만원짜리 ‘롤렉스’ 시계와 금목걸이 등을 훔쳤다. 지난 10일에는 서초구 반포동의 한 치과병원 문을 뜯고 들어가 현금과 노트북 등 1120만원어치의 금품을 훔쳐 이 돈으로 운전면허도 없이 일제 승용차를 빌려 몰고 다녔다.지난달에는 집안이 구로구로 이사를 가자 ‘강남구민’임을 보여주고 싶어 한 독서실에서 서초동 주소지가 적힌 김모씨의 주민등록증을 훔쳐 갖고 다니는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도 했다.심씨의 부유층 행세는 훔친 수표를 나이트클럽에서 사용하다 이를 추적한 경찰에 붙잡히면서 막을 내렸다. 심씨는 경찰에서 “잠시나마 친구들처럼 ‘강남 부유층’이 되려 했던 게 후회스럽다.”며 눈물을 글썽였다.어머니 전씨는 “비뚤어진 생각을 바로잡을 수 있도록 처벌해 달라.”고 말했다 이영표기자 tomcat@
  • [공직자 에세이] 세계와 같이 호흡하기

    “질서 잡힌 세계는 질서가 아니다.” 요즘 공직사회에 거세게 불고 있는 이른바 새로운 변화의 바람을 대변하는 말이다. 기존의 질서가 최선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영락없이 뒤처진 사람으로 인식되는 시대이다.정년이 보장되리라는 믿음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고,‘생존’과 ‘도태’라는 냉혹한 단어가 주위에 윙윙거릴 뿐이다. 과거 같으면 공직을 통해 꿈을 키웠지만 이젠 기업체의 샐러리맨과 하등 다를 바 없는 썩 유쾌하지 못한 느낌에다가,얼마나 더 오래 근무할 수 있을까라는 이른바 살아남기 위한 ‘코드 맞추기’에 바쁘다.평소 존경하던 상사들이 핫바지 방귀 새듯 슬그머니 빠져나가는 모습에서 남은 자들의 미래 모습이 그려지기도 한다. 민간기업에선 ‘사오정’(45세 정년)이 일반화된 마당에 공직이 온전하리라는 믿음을 가진 자체가 큰 실수이자 오판인지 모른다.기업들의 상시구조조정 문화 속에서 미래에 대비한 경력관리와 자기계발에 게으르지 않는 근로자들의 이야기가 이제 공직에도 현실로 다가왔음을 느낀다.얼마 전에 읽었던책내용이 생각난다.친한 친구 2명이 강가의 물을 마을까지 길어오는 일을 했다.물동이를 나르는 만큼 돈이 들어오기 때문에 A는 계속 그 일을 했고 돈도 모았다.그렇지만 나이가 들면서 힘이 부치기 시작하고 미래에 대한 불안은 모았던 돈을 술로서 탕진하고 만다. 하지만 B는 물동이를 나르면서 동시에 강과 마을간에 파이프를 잇기 시작했다.물론 두가지 일을 한꺼번에 하기에는 힘이 들고 주위에서 무모한 짓이라고 놀렸지만 늦은 밤까지 믿음을 갖고 계속 진행했다.시간이 지날수록 파이프를 놓은 만큼 물동이를 나르는 거리는 줄어들고 마침내 파이프라인이 완성되었을 때 힘들지 않고 더 많은 돈을 벌게 됐다. 누구나 한가지 능력만을 믿고 제자리에 안주할 경우 결국 A와 같은 신세를 면키 어렵다는 교훈이다. 지지난해 미국의 대만출신 차오 노동부장관이 말한 것을 보면 실감난다.평균 32세의 미국 근로자들을 조사해보니 이미 직장을 9번이나 옮긴 것으로 나타났다.만약 60세까지 이직횟수를 조사한다면 훨씬 많을 것이다.미국의 경우 고용시장이 오픈되어 있어 우리나라와는 취업여건이 다르다고 하지만 우선 횟수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새로운 환경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자기변신이 무엇보다 필요하며,시대변화에 맞추어 자기계발을 위한 학습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함을 역설한다. 59∼90년까지 싱가포르의 번영을 주도한 리콴유 전 총리는 싱가포르 경제발전의 비결에 대해 이같이 답했다.첫째는 “우리는 결코 학습을 멈추지 않았다.”.두번째는 “우리는 세계와 호흡을 같이한다.”였다.과연 공직자들이 세계와 호흡하면서 흐름을 같이하고 있는지 또 새로운 앞선 트렌드에 얼마나 학습하며 준비하고 있는지 되묻는 말이다.앞으로 공직자들에게 평생직장을 보장해주지 못할 바에는,세계의 흐름에 함께할 수 있고 개인의 단가와 생산성을 높을 수 있도록 새로운 학습에 대한 적극적인 투자가 필요하다.또 평균수명의 연장으로 퇴직이후 20년간의 멋진 커리어 인생을 살기 위해서도 중요해졌음은 물론이다. 정 부 효 행자부 상훈담당관실 행정사무관
  • 정권 도덕성·정통성 문제삼는 野 / 한나라, 나라종금 사건 공세

    한나라당이 노무현 대통령을 나라종금 사건에 연계시키는 작업에 본격적으로 나섰다.박종희 대변인은 8일 “이 사건은 노 대통령은 물론 정권의 도덕성과 정통성에 직결된 사건”이라고 규정했다. 그는 “대통령의 최측근들이 연루된 이번 일은 단순한 뇌물사건이 아니라 국민혈세 2조원을 탕진한 부실기업과 파렴치한 권력,부도덕한 386 측근 등이 유착된 국기문란 사건”이라고 주장했다.이어 “당시 노무현 의원은 로비가 진행된 지난 99년 6∼8월 측근들의 비리 사실을 몰랐을 리 없는데도 침묵으로 일관했고,민주당 후보시절에는 거짓말을 했다.”면서 “노 대통령이 취임 이후에야 검찰에 수사를 지시한 것은 권력의 힘으로 최대한 파장을 줄이려는 의도임이 명백하다.”고 압박했다. 김영일 사무총장도 주요당직자회의에서 “청와대 문재인 민정수석이 무혐의 운운한 데 이어 문희상 비서실장이 ‘문제있는 돈이 아니다.’며 면죄부를 주려 하고, 유인태 정무수석은 ‘안희정씨가 받은 돈은 투자금과 맞아떨어진다.’고 자금성격을 예단하고 나섰다.”면서 “청와대 핵심참모가 일제히 나서 사건의 성격을 투자 등으로 규정하며 부당압력을 행사하려고 하는데 더 이상 좌시하지 않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조정제 부대변인은 “안씨와 염씨 모두 로비를 받을 만한 위치에 있지 않았다고 강변했으나,나라종금이 무엇 때문에 퇴출될 위기상황에서 두 사람에게 거액을 건넸겠느냐.”면서 “그들이 당시 집권당의 강력한 차세대 주자로 떠오르던 노 대통령의 최측근이었기 때문”이라고 공격했다. 이지운기자 jj@
  • 이사람/강원랜드 3년차 딜러 김진희씨

    “카지노장이 더 이상 도박장이 아닌 건전한 위락시설로 새롭게 자리잡기를 바랍니다.” 강원도 정선 강원랜드 카지노장에서 3년째 딜러 생활을 해오고 있는 김진희(25)씨는 28일 메인카지노 개장에 거는 기대가 남다르다. 지난 2000년 스몰카지노장 개장과 함께 고한읍 탄광도시에 정착한 김씨는 나름대로 보람도 있었지만 도박장에 근무한다는 따가운 눈총도 받아왔기 때문이다.그동안 카지노장을 찾은 사람들이 가산을 탕진하고 도박중독증후군으로 고생하는 사례가 속속 알려지면서 난감하기도 했다.김씨는 “딜러로 일하면서 카지노장에 대한 부정적인 내용이 언론을 통해 알려질 때마다 서민들의 단란한 가정이 파괴되고 있는 것 같아 자괴감마저 들었다.”고 토로했다. 그렇지만 메인카지노장에는 가족끼리 즐길 수 있는 다양한 테마파크와 수영장이 들어서고 내년부터 골프장과 스키장이 차례로 오픈하면 명실상부한 건전한 위락단지로 자리잡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애교가 많아 카지노장에서 ‘(애교)덩어리’라는 애칭을 갖고 있는 김씨는 카지노장을바라보는 주변의 따가운 눈총속에서도 정선 카지노장에 없어서는 안될 딜러로 자리잡은지 오래다.생글거리는 미소 때문에 정선 카지노장에 근무하는 810여명의 딜러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짱’이다. “낯익은 고객들이 게임 테이블을 찾아 인사를 건네고 돈을 잃고 돌아갈 때도 미소를 머금을 때가 가장 보람있다.”고 김씨는 귀띔했다. 게임 테이블을 리드하며 화려해 보이는 딜러들의 어려움도 만만찮다.밤낮이 바뀌어 하루 8시간씩 3교대로 근무하는 여건도 그렇고 ‘프로’라는 인식으로 한치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 점도 그렇다.김씨는 “하루 8시간씩 서서 다양한 고객들을 상대하다보면 다리가 퉁퉁 붓고 녹초가 되기 십상”이라며 “게임이 잘 풀리지 않는 고객들이 줄담배를 피우며 짜증을 낼 때도 스트레스가 쌓인다.”고 애환을 털어놓았다. 테이블마다 ‘에어 커튼’이 있어 담배연기를 분산시키고는 있지만 담배를 피우지 않는 여자 딜러들에게는 담배연기가 가장 곤혹스럽다.게임 사고를 우려해 사내에서 남자 친구 사귀는 것도 허용하지 않고 고객들과 외부 접촉을 못하게 하는 등 금기사항이 많은 것도 어려움이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카지노장의 딜러는 경마장의 ‘기수’에 비교되기도 한다.딜러 생활을 해오며 고객들의 취향에 따라 울고 웃는 일도 비일비재하다.게임에서 돈을 잃고 삿대질까지 하며 딜러에게 욕을 해대는 고객이 있는가하면 두둑하게 돈을 딴 뒤 쏠쏠찮은 팝콘(팁)을 주는 고객까지 천차만별이다.김씨는 “종종 딜러들의 친절을 오해한 짓궂은 고객들이 ‘한번 만나자.’며 유혹의 눈길을 보내올 때도 있지만 노련하게 거부하는 기술도 터득했다.”고 말한다. “요즘 텔레비전에서 뜨고 있는 드라마 ‘올인’으로 세상사람들이 딜러를 보는 시각도 새로워지고 있다.”고 말한 김씨는 “넉넉한 메인카지노장에서 더욱 친절하게 고객을 모시겠다.”며 끝까지 프로 딜러의 면모를 잃지 않았다. 정선 조한종기자 bell21@
  • [젊은이 광장] 복권 당첨자 수를 늘린다면

    사업자·극소수 당첨자만 행운 당첨금 낮춰 많은 이 기쁨 나누길 당첨금 65억원.연초부터 터진 국내 복권 사상 최대 당첨금의 주인공은 경기도 남양주시에 사는 평범한 직장인이라고 한다.휴대전화를 바꾸면서 받은 경품 복권이 1등으로 당첨돼 33억을 받은 주인공도 전셋집에 사는 평범한 직장인이었다. 대박을 터트리는 행운의 주인공들을 보면서 부럽다는 생각을 갖는 것은 인지상정(人之常情)인가 보다.주변 친구들도 마찬가지다.“1억원만 나에게 줬으면 좋겠다.”는 말부터 “왜 나한테는 그런 행운이 없을까?”라는 부질없는 한탄(?)까지…. 그래서 일까.요즘 들어 “나도 한번”이라며 복권을 사는 친구들이 부쩍 늘었다. 일각에서는 이 같은 대박열풍과 이를 부추기는 복권 발행기관,언론의 선정적인 보도 성향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높다.이들은 복권이 ‘확률의 사기’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로또복권에서 1등으로 당첨될 확률은 815만분의1이라고 한다.사람이 1년 동안 벼락맞을 확률이 50만분의1이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로또복권에 당첨되는 것은 1년 내내 매달 한차례 이상 벼락을 맞을 확률과 같다.한마디로 당첨 확률이 0에 가깝다는 얘기다. 당첨자가 나오지 않을 때 당첨금을 다음 회로 이월하는 것도 헛된 사행심을 조장할 수 있다. 엄밀히 말하면 복권은 수백만명 이상의 호주머니를 털어 복권 사업자와 극소수의 당첨자가 몽땅 나눠 갖는 불공정한 게임이다.그 실체를 안다면,일확천금으로 포장된 기대감은 허망하게 무너져 내린다. 하지만 “1억원만 있다면”이라고 씁쓸하게 웃는 소시민들에게 복권은 내칠 수 없는 유혹이라는 점을 부인하기 어렵다.카지노처럼 복권에 목숨을 걸고 거액을 탕진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매주 한차례씩 복권을 구입하는 복학생 선배는 “솔직히 당첨될 것을 확신해서 사는 건 아니야.하지만 당첨되면 부모님께 부담도 덜어드리고 좋잖아.당첨을 기대하며 한번쯤 즐거운 상상을 해보는 거지,뭐.”라고 털어놨다.또 복권이 당첨되면 뭘 하고 싶으냐는 질문에 한 친구는 “취직 걱정하지 않고 맘껏 여행하고 싶어.여유를 가지면서 계속 공부도 하고 싶고….”라며 소박하게 웃었다. 지난달 통계청이 발표한 ‘2002년 한국의 사회지표’에 따르면 우리나라 사람이 결혼 후 내집을 마련하는 데 10.8년이 걸린다고 한다.이를 단 한순간으로 줄여볼 수 없을까 하는 즐거운 상상을 “한탕주의다.”,“요행만 바란다.”고 매몰차게 비난할 수 있을까. 세상살이에 어깨가 무거운 소시민들의 은밀한 꿈을 단순히 일확천금을 노리는 한탕주의로 매도할 수는 없을 것이다.가장 적은 돈으로 즐길 수 있는 인생 역전의 게임,그것이 복권의 매력이 아닌가. 오늘도 평범한 대학생과 직장인은 지하철에서 무수히 많은 복권 광고판을 보고 지나친다.‘당신도 인생역전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라는 광고 문구처럼 나도 하루아침에 돈방석에 앉으면 얼마나 행복할까라는 다소 허황된 생각에 나도 모르게 빠져든다. 한가지 바란다면 복권 당첨의 행운이 극소수에 집중되지 않고,좀더 많은 사람에게 미칠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이다.1등 당첨 금액을 낮추더라도 당첨자를 늘릴 수는 없을까.그러면 주변의 선배나 친구도 작은 기쁨을 나눠가질 수 있을텐데. 서주원
  • 네티즌 마당/로또복권 열풍, 인터넷도 들먹

    “나도 한번 인생역전 이뤄볼까?” 로또복권 10만원어치를 사서 65억원(세후 51억원)의 당첨금을 탄 40대 가장의 ‘대박 스토리’로 인터넷이 연일 떠들썩하다.단순한 화제 정도가 아니라 당첨확률이 높은 번호를 연구한다든지,정보를 공유하자는 커뮤니티까지 우후죽순처럼 쏟아지고 있다.이와 관련,야후(kr.yahoo.com) 등 포털사이트 토론장에 올라오는 네티즌들의 의견은 대부분 “부럽다.”는 것이다.그러나 일부에서는 노력도 없이 일확천금을 노리는 풍조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높다. ●복권은 건전한 레저다? 포털사이트 다음(www.daum.net)에서는 ‘로또복권은 도박인가, 건전한 레저인가’라는 온라인 설문을 진행 중이다.이 설문의 중간집계 결과를 보면 ‘돈을 놓고 돈을 따내는 도박’ 29.3%,‘큰 지출이 따르지 않으면서 희망과 재미를 주는 레저’ 41.5%,‘도박성이 다소 있으나 공익성 강화를 통해 변화해야’가 29.2%로 나타났다. ●“패가망신의 지름길” 토론장에 나타나는 네티즌들의 의견은대체적으로 양분된다.복권의 폐해를 염려하는 이들은 사회전반으로 확산되고 있는 한탕주의를 경계한다.그들은 “한탕심리의 만연은 결국 근로의욕까지 저하시키게 된다.”며 이를 조장하는 정부와 거액 당첨자를 앞다퉈 보도하는 언론을 싸잡아 비판한다. k4568이라는 ID의 네티즌은 “당첨될지 안 될지 불확실한 것에 확실한 현금을 주고 사는 것이 복권”이라며 “일확천금을 얻어보겠다는 사행심은 패가망신을 불러올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또 ID kimdc는 자료를 인용,“복권에 당첨된 사람들은 갑자기 들어온 돈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고 불필요한 사치품을 구입하거나 호화스러운 생활을 유지하는 데 할애한다.”면서 “국내·외의 1등 당첨자들 중 80%는 당첨되기 전보다 인생이 불행해진 것으로 나타났다.”고 주장했다.또 ID가 보배진이라는 네티즌은 “경마·경륜·경정·카지노 등이 이미 성행하고 있는데 무엇이 모자라서 또 거액의 복권타령인지 모르겠다.”며 “점점 황폐화돼가고 있는 국민정신부터 바로잡아야 한다.”고 일침을 가했다. ●“그런 희망이라도 있어야” 복권을 옹호하는 네티즌들의 수는 비난하는 이들보다 훨씬 많다.그들은 “별 희망 없는 서민들에게 그런 작은 꿈이라도 없다면 무슨 맛으로 살겠느냐.”며 “큰돈을 쏟아 붓는 것도 아닌데 사행심 운운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반박한다. yahada라는 ID의 네티즌은 “복권은 잘난 사람이든 못난 사람이든 공평하게 희망을 안겨 주기 때문에, 서민들은 복권 한 장이 주머니에 들어있는 동안 그나마 든든하다.”면서 “그런 희망이라도 있어야 사는 맛이 나지 않겠느냐.”고 주장했다.KARO라는 네티즌은 “복권에 목숨을 걸고 재산을 탕진하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겠느냐.”며 “그런 사람만을 예로 들어 복권이 사회적 악영향을 조장한다고 하는 것은 그야말로 장님 코끼리 만지기”라는 의견을 내기도 했다. ●금액 줄이고 확률 높여라 로또복권의 경우 한 사람에게 거액이 돌아가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하는 사람도 많다.이들은 당첨금액을 줄이고 당첨확률을 높일 것을 요구하고 있다.ID가 Lius인 네티즌은 “로또는 당첨된 단 한사람에게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돈을 주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물을 먹게된다.”면서 “일등에게 6억 정도 주고 나머지 돈은 1억에서 수천,수백만원씩 나눠줌으로써 기쁨을 맛보는 사람 수를 늘리라.”는 의견을 냈다. 이호준기자 sagang@
  • 대한매일 신춘문예 평론 당선작/경악의 얼굴-기형도론/이성혁

    1.기형도 시의 가상성 그의 죽음에서 벗어나 작품속 죽음 의미찾아 이 비평문은, 그러니까 기형도의 텍스트와 텍스트를 이어보고 만져보면서 이 가상적 구성물인 텍스트에 드러나 있는 것을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욕망에 따라 재구성(‘시인'의 세계관이나 무의식을 재구성하는 것이 아닌-)하여 다시 텍스트를 짜내려는 시도이다. 그래서 우선 기형도 시의 ‘가상성'을 부각시키려 한다. 이는 기형도 자신도 원하는 것일 게다. 그의 친구인 원재길은, 별로 주목된 바 없는 글이라 생각되는 10여 년 전의 글에서, “창작자와 시적 자아를 동일시하는 심리주의 비평의 어떤 그릇된 접근 방식은 시인 자신으로부터 이미 거부당하고 있다.”(대화적 울음과 극적 울음)라고 말한 바 있다. 물론, 위에서 거론한 비평가들이 조야한 심리주의 비평에 빠졌다는 것은 아니다. 어쨌든 시와 기형도의 의식의 동형관계에서 벗어나 시를 문학적 텍스트로서 다루어야 한다는 점을 원재길은 이미 지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더 나아가 기형도의 여러 시편들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등장 인물과 간단한 사건과 시간에 순연하는 구성이 있는 극적인 구조를 취한다.”라고 이야기하는데, 그것은 기형도 시가 하나의 독특한 가상적인 구성물임을 말하는 것과 다름 없다. 하지만 그는 이에 대해 깊게 논의를 더 진전시키지 않았고, 그의 지적이 논자들에게도 그다지 주목받지 않았다. 대개의 평문들에선 기형도 시의 등장 인물들-낯선 ‘그'로 자주 등장하는-은 대상화된 ‘나'로 취급되어 기형도의 자아를 반영하는 인물이 되어 버리곤 한다. 즉 기형도 시가 ‘극적 구조', 하나의 가상적 구성물임을 주목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1)유리창 너머 한 사내가 보였다/그 춥고 큰 방에서 書記는 혼자 울고 있었다!/눈은 퍼부었고 내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침묵을 달아나지 못하게 하느라 나는 거의 고통스러웠다 - 부분 2)김은 중얼거린다, 누군가 나를 망가뜨렸으면 좋겠네, 그는 중얼거린다/나는 어디론가 나가게 될 것이다, 이 도시 어디서든/나는 당황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당황할 것이다/그가 김을 바라본다. 김이 그를 바라본다/한번 꽂히면 김도, 어떤 생각도, 그도 이 도시를 빠져나가지 못한다/김은, 그는 천천히 눈을 감는다, 나는 블라인드를 튼튼히 내렸었다/또다시 어리석은 시간이 온다. 김은 갑자기 눈을 뜬다, 갑자기/그가 울음을 터뜨린다, 갑자기 모든 것이 엉망이다, 예정된 모든 무너짐은 얼마나 질서 정연한가/김은 얼굴이 이그러진다 - 부분 1)에 등장하는 서기나 ‘김'을 대상화된 기형도 자신으로 파악하는 것은 한편으론 옳고 한편으론 그르다. 옳다는 점은 플로베르가 “마담 보바리는 나”라고 발언한 것과 같은 의미에서, 모든 허구적 인물들은 작가의 분신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특히 시 같은 서정적 장르에서는 그 분신의 농도가 더 짙으리라. 하지만 그 등장 인물이 시인으로 환원될 수 없다는 점에서 그 파악은 그르다. 시에서도 소설과 마찬가지로, 그 등장 인물은 시 텍스트의 공간 내에서 자기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서정시의 ‘나'는 시인의 자아에서 벗어나게 된 텍스트 속의 ‘나'이다.시인의 자아에서 벗어나 새로운 생명을 받은 ‘나'를 구축하는 것, 그것이 서정시인일 것이다. 위의 시에서 서기는 시인의 대리일 뿐 아니라 카프카적 의미에서의 서기, 관료 사회에서 자신의 삶을 무의미한 일에 탕진하고 있는 우리네 삶의 형식의 상징으로서의 서기이다. 유리창은 그 서기를 바라보고 있는 ‘나'와 서기를 갈라놓는다. 이 유리창 때문에 ‘나'는 울고 있는 서기에게 가서 위로의 말 한마디 건네줄 수 없다. 하지만 유리창 덕분으로 ‘혼자 울고' 있는 서기를 발견할 수 있다. 유리창은 타자와 소통할 수 없게 하는 칸막이면서도 또한 ‘혼자' 각각 서로를 바라보며 소통할 수 있게 한다. ‘나'와 ‘그'를 동일시하여 각자 홀로 있는 ‘나'와 ‘그'의 어긋나 있는 대위 구조를 보지 않는다면 이 시가 뿜어내고 있는 의미를 붙잡기 힘들다. 원재길의 ‘극적 구조'를 넓게 본다면 이 장면 역시 그 구조에 포함시킬 수 있으리라. 침묵의 극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을까. 1)의 서기의 울음을 조명하여 해명해주는 텍스트로 볼 수 있는 2) 역시, 독백의 극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등장하는 ‘그'와 ‘김'은 동일 인물의 분신들이다. 1)에서 시적 화자가 ‘나'라는 인물로 등장하는 것과 달리, 이 인물들을 바라보고 있는 시적 화자가 담론 배후에 있고 시 표면에 등장한 ‘나'가 독백하는 형식으로 ‘김'의 중얼거림이 나타나 있다. 홀로 있는 ‘김' 옆에서 ‘김'을 ‘바라보는' ‘그'는 사물화된 김의 삶을 바라보는 또 다른 김이라 할 수 있는데, 성으로만 표시되어 개성을 잃어버렸음을 표시하는 ‘김'보다 더 몰개성적인 무엇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건물 밖으로 나가려고 하는 ‘김'이 울음을 터뜨리는 순간, 그와 김, 그리고 흐물흐물한 대명사가 되어 버린 ‘나', 또 이를 바라보는 화자의 시선이 극적으로 어울리게 된다. 그런데 1)에서 서기의 울음을 볼 수 있는 순간은 바로 홀로 있음의 순간, 침묵의 순간이었다. 침묵이 깨지면, 이 순간은 깨지고 말 것이다. 세계를 토막내는 언어의 세계가 침묵할 때 순수한 존재 자체가 떠오르지 않겠는가. ‘두 시', 삶이 무의미에 무너져 내리고 있는 순간을 깨달을 때의 침묵의 시간, 그 직후터뜨리는 울음의 순간에 배치되는 사물과 인간을 이 시들은 포착하려고 한다. 그렇다면 극적 구성은 플롯을 시에 도입하는 방식으로가 아니라 바로 이 순간에 배치된 장면을 응축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사용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그런데, 이 일상을 갑자기 전복시키는 시간이 정지된 순간은 기형도 시에서 중요한 모티브로 작동된다. 그는 (어느 푸른 저녁)의 시작 메모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가끔씩 어떤 ‘순간들'을 만난다. 그 ‘순간들'은 아주 낯선 것들이고 그 ‘낯섬'은 아주 익숙한 것 들이다. 그것들은 대개 어떤 흐름의 불연속선들이 접하는 지점에서 이루어진다. 어느 방향으로 튕겨나갈지 모르는, 불안과 가능성의 세계가 그때 뛰어들어온다. 그 ‘순간들'은 위험하고 동시 에 위대하다. 위험하기 때문에 감각들의 심판을 받으며 위대하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다. … 우리가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은 거의 필연적이며 이러한 불행한 쾌락 들이 끊임없이 시를 괴롭힌다. 이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형식이 기형도의 가상적 구성물-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어떤 순간을 포착하여 보여준다. 그 순간은 시간이 끊어졌다가 다시 이어지는 ‘어떤 흐름의 불연속선들이 접하는 지점'이다. 그래서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말한다는 것은 어떤 연속선상을 타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텅 빈 그 순간, 침묵의 순간을 말하기 위해선 우회로를 빙빙 돌아 그 순간을 간접적으로 말할 수밖에 없다. 즉 가상적 공간, 더 나아가 환상적 공간을 구성하여 그 순간을 암시할 수밖에 없다.(어느 푸른 저녁)에서는 그 순간을 “어느새 처음 보는 푸른 저녁”이라고 말한다. 이 저녁엔 ‘검고 마른 나무들' 아래에서 사람들은 “가벼운 구름같이/서로를 통과해”가는 순간이 온다. 이 환상적인 순간은 어떤 예감을 통해 감지하게 된다고 시적 화자는 말한다. 나는 그것을 예감이라고 부른다. 모든 움직임은 홀연히 정지/하고, 거리는 일순간 정적에 휩싸이는 것이다/보이지 않는 거대한 숨구멍 속으로 빨려들어가듯/그런 때를 조심해야 한다. 진공 속에서 진자는/곧,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검은 외투를 입은 그 사람들은 다시 저 아래로 태연히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조금씩 흔들리는/것은 무방하지 않은가/나는 그것을 본다/모랫더미 위에 몇몇 사내가/앉아 있다, 한 사내가 조심스럽게 얼굴을 쓰다듬어본다/공기는 푸른 유리병, 그러나/어둠이 내리면 곧 투명해질 것이다, 대기는/그 속에 둥글고 빈 통로를 얼마나 무수히 감추고 있는가!/누군가 천천히 속삭인다, 여보게/우리의 생활이란 얼마나 보잘것없는 것인가/세상은 얼마나 많은 법칙을 숨기고 있는가/나는 그를 향해 고개를 돌린다, 그러나 느낌은 구체적으로/언제나 뒤늦게 온다, 아무리 빠른 예감이라도/이미 늦은 것이다 이미 그곳에는 아무도 없다. “모든 움직임이 홀연히 정지”한 상태, 이 상태는 환상 속에서 구성될 수밖에 없다. 실제 상황의 묘사로는 이 상태를 그려낼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상태는 볼 수 없는, 예감으로서만 감지할 수 있는 상태이면서, 예감했다고 알아차린 순간 없어지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빠른 예감이라도/이미 늦은 것이다”라고 시는 말하고 있지 아니한가. 이 순간은 그러니까 현실 묘사가 아니라 환상 속에서 구성될 수 있는 것이다. 이 환상은 의미의 블랙 홀과 같은 상태다. “보이지 않은 숨구멍 속으로 빨려들어가듯” 의미는 사라지고 언어도 사라진다. 시인은 또 “이 순간 정적에 휩싸이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 순간은 역시 순간일 뿐이다. ‘검은 외투'-죽음의 외투-를 입은 사람들은 여전히, “태연히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 순간을 애써 외면한다. 그리고 그들의 딱딱하고 무미한 삶을 이어간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본다”고 시인은 말한다.(여기서도 시적 화자는 보는 사람이며, 증언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블랙 홀과 같은 어떤 순간을 느낀 순간, 나에게 ‘그'가 다가온다. ‘그'는 ‘나'의 분신이라고 할 수도 있으며 동시에 메피스토펠레스적인 악마라고 볼 수도 있다. 그 악마는 말을 걸어온다. 그럼으로써 지금까지의 인생의 의미를 모두 무화시킨다. “우리의 생활이란 얼마나 보잘것없는 것인가/세상은 얼마나 많은 법칙들을 숨기고 있는가”라고 그 악마는 속삭인다.다시 말해 모든 것이 무의미의 검은 구멍으로 사라지는 그 순간을 예감할 때 그 악마는 등장한다. 그리고 세상의 법칙, 아마도 죽음으로 가는 삶의 법칙을 가만히 상기시킨다. 기형도 자신이 말한 ‘가능성'과 ‘불안'은 그 ‘순간'이 이 악마적인 것의 출현을 가져오기 때문일 것이다. 이 악마적인 것이 죽음을 지시한다는 점에서 ‘위험'한 것이라고 하지만, 그러나 시를 탄생시킨다는 점에서, 그리하여 새로운 삶,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는 점에서 ‘가능성'을 주며 ‘위대'하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무의 지경에 다다른 이때 투명하고 푸른 공기가 나타나는 것이다. 그리고 이때 감추어진 ‘둥글고 빈 통로'가 열린다. 그래서 악마적인 ‘그'가 말한 숨겨져 있는 ‘법칙'은 다만 죽음의 법칙만이 아니라 환상 속의 다른 통로를 말하기도 한다. 그래서 기형도 시의 환상은 양면적이다. 일상적 삶의 흐름 속에서 순간을 포착하기 위한 방법론으로 채택되는 그의 환상은 우리의 삶을 무화시키는 블랙 홀의 역할을 하면서도 동시에 다시 신비롭게감추어진 희망을 떠오르게 하기도 한다. 어쩌면 이 시는 시의 탄생과 그 탄생이 가져오는 양면성에 대한 알레고리일지도 모른다. 2.기형도 시의 이중성 파우스트가 “순간이여 멈추어라, 너 참 아름답구나.”라고 외치는 순간, 메피스토펠레스는 그를 지옥으로 데려간다. 이때 아름다움의 순간은 죽음과 맞닿아 있다. 아름다움은 일상의 권태로운 세계를 무화시킨다. 인간은 권태의 세월보다 죽음을 무릅쓴 아름다움의 세계에 닿고자 하지 않겠는가?(그래서 아름다움은 치명적인 유혹이라 할 것이다.) 그러하기에 아름다움은 죽음의 세계에 맞닿아 있으면서도, 일상적 삶이 도리어 죽음과 같은 삶이라는 것을 드러내어 삶을 희망하게 하고 움직이게 한다. 파우스트의 드라마가 시작되는 것도 늙은 파우스트가 아름다움의 순간을 찾아 나서는 데서부터이다. 물론 그는 끊임없는 생성을 젊음이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순간이여 ‘멈추어라'라고 만약 자신이 말한다면 자신을 지옥에 데려가도 좋다고 메피스토펠레스에게 말했다. 그러나 결국 파우스트는 자신이 매립제에건설한 도시(악마의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 가상의 세계라고 할 수 있다)를 바라보며 “순간이여 멈추어라, 너 참 아름답구나”라는 죽음의 말을 토해내며 쓰러진다. 즉 파우스트가 산 젊음은 이 아름다운 가상에 대한 외침에 도착함으로써 끝난다. 그의 젊음과 행위는 결국 아름다움에 도달하기 위한 과정이었으며, 아이로니컬하게도 그 ‘아름다움의 순간'이란 착지에서 그의 젊음과 힘은 지옥으로 넘겨진다./기형도 시가 포착하려던 그 “위험하고 동시에 위대하다”는 ‘순간'의 이중성도 아름다움에 대한 《파우스트》적 아이러니와 같은 맥락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기형도의 시가 드러내는 아이러니는 순간이 가져오는 이 이중성에 대해 팽팽한 긴장을 풀지 않음으로써 이끌려 나온다는데 그 특징이 있다. 시작 노트와 을 다시 상기해보자. ‘아주 낯선 것들'이면서 ‘아주 익숙한 것들'이라는, 순간들의 이중성에 대한 긴장을 시인은 계속 놓치지 않는다. 아니 순간들의 이중성의 포착은 이 대상에 대한 긴장에 찬 예민성의 끈을 풀지 않기 때문에 가능하다. 아주 낯선 것들로의 ‘둥글고 빈 통로'를 마련하는 어떤 순간은 우리가 언제나 부딪히는 일상에서의 어떤 순간이다. 그래서 ‘아주 익숙'하기도 하다. 그 순간이 벌려내는 환상은 우리 삶의 현장인 일상의 삶을 무화시키면서도 어떤 다른 세계로의 통로, 다른 삶의 세계를 열어 놓는다. 이 이중적인 통로의 발견을 기록하는 데서 기형도의 시는 드러나기 시작한다. 통로의 이중성은 ‘둥글고 빈'이라는 수식어에서 이미지화되어 있다. ‘둥근 것'은 아날로지의 세계를 상기시킨다. 아날로지는 모든 개체가 전체를 비추고 전체가 개체들을 끌어안는 조화의 세계 아닌가./그 세계는 둥글다. 하지만 또한 그것이 비어 있다는 진술에서 ‘둥근 것'의 아날로지 세계는 아이러니의 상태로 변화된다./‘둥글고 빈' 통로는 아름다움에로의 통로이기도 하지만 無에로의 통로이기도 하다. 이 둥글고 텅 빈 통로를 통과하여 다다른 어떤 다른 세계, 아름다움의 세계는 그래서 다음과 같이 공기 방울의 세계이다. 저녁 노을이 지면/神들의商店엔 하나둘 불이 켜지고/농부들은 작은 당나귀들과 함께/城 안으로 사라지는 것이었다/성벽은 울창한 숲으로 된 것이어서/누구나 寺院을 통과하는 구름 혹은 조용한 공기들이 되지 않으면/한걸음도 들어갈 수 없는 아름답고/신비로운 그 城///어느 골동품 商人이 그 숲을 찾아와/몇 개 큰 나무들을 잘라내고 들어갔다/그곳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가 본 것은/쓰러진 나무들뿐, 잠시 후/그는 그 공터를 떠났다/농부들은 아직도 그 평화로운 성에 살고 있다///물론 그 작은 당나귀들 역시 - 성 안은 “아름답고/신비”한 세계이다. ‘시작 메모'에서 말한 ‘위대한 순간'이 형상화된 세계일 수도 있다. 하지만 역시 ‘위대하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말이 이 세계에도 해당된다. ‘존재'가 차안의 세계에만 해당된다는 개념이라면 말이다. 이 세계는 신들이 사는 세계이지 않은가. 이 세계는 신들과 농부들과 작은 당나귀는 이 성 안에서 평화롭게 공존하며 어느 하나도 빠지면 성립되지 않는 세계이다. 즉 아날로지의 세계다.시인도 ‘역시' 작은 당나귀들도 평화로운 그 성에 농부들과 살고 있다고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성은 공기와 같은 세계라서 “구름 혹은/조용한 공기들이 되지 않으면” 다가갈 수 없다. 갑자기 시간이 멈추어지고 세계가 낯설어지며 감각이 착란될 때의 순간이 열어놓는 어떤 ‘푸른 저녁'같을 때, 사람들이 “가벼운 구름같이/서로를 통과해”갈 수 있었다. 이 ‘순간'에만 바로 ‘둥글고 텅 빈' 통로를 따라 이 성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이 성 안의 세계는 바로 그렇게 공기 방울, 구름이 된 사람들이 어우러져 이룬 세계이다. 그런데 이 공기 방울의 세계는 차안의 공간에 있진 않지만, 차안과 동떨어진 피안의 공간에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세계는 차안의 공기 안에 있다. 우리가 언제나 대하는 일상의 시간 속에서, 언뜻 벌려진 공기와 공기 사이의 블랙 홀을 공기가 되어 통과하면 만날 수 있는 세계이다.그러니까 이 성 안은 우리 머리 위에 떠 있는 저 하늘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뒤-옆-앞에 있다. 그래서 이 세계에 들어가려는 골동품 상인-아마 차안의 세계의 속성인, 살해를 자행하는 폭력성을 보여주는 등장 인물이라 할-이 몇 개 큰 나무들을 잘라내고 들어가 보았자 헛수고가 될 수밖에 없다. 골동품 상인은 차안의 세계 뒤에 있는 세계를 알지 못한다. 그는 숲만 자르면 성에 도달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삼차원적 세계 인식에 머물러 있다. 그가 차안에서 아무리 폭력과 파괴를 행한다 해도 이 숲으로 된 성벽 안은 의연히 평화로운 마을로 남을 것이다. 하지만 이 세계는 그만큼 불안하다. 우리가 이 세계에 도달할 수 있는 방도는 앞에서 보았듯이 기화되는 길밖에 없다. 통로가 ‘빈' 통로여서 들어가려는 이는 빈 존재가 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이루어진 공기 세계는 어떤 무게 있는 물질성을 가지지 않는다. 그래서 가볍게 둥둥 떠다닌다. 공중에 투사된 영상처럼 흩어졌다 모여지는 그런 세계다. 우리가 손으로 만질라치면 그 세계는 손가락 사이로 빠져 나가버릴 것이다. 이 아날로지의 세계는 그래서 희망의 저편에 있을 뿐이다. 그래서 이 세계에 도달하고자 하는 희망은 품을 수 있으나 어느전도와 착란의 순간이 아니면 도달할 수 없다. 즉 우리가 사는 이 차안에선 이루어낼 수 없을 세계이다. 기형도가 희망에 대해 ‘어둡고 텅' 비어 있다라는 표현/을 쓰는 것은 ‘숲으로 된 성벽' 자체가 비어 있고, 그 비어있는 곳에 도달하고자 하는 희망도 빈 희망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제는 침묵의 목책 속에 갇힌 먼 땅/다시 돌아갈 수 없으리, 흘러간다/어디로 흘러가느냐, 마음 한 자락 어느 곳 걸어두는 법 없이/희망을 포기하려면 죽음을 각오해야 하리, 흘러간다 어느 곳이든 기척 없이 - (植木祭) 중에서 기형도 시에서의 ‘죽음'은 시인의 우울한 세계관이나 유년의 기억 때문이라기보다는, 시적 화자가 희망의 포기와 선택을 통해 ‘각오'한 것이다./ 이 죽음의 각오는 ‘둥글고 빈 통로'에 들어갈 때부터 이미 예정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 통로에 들어간다는 일은 다른 삶의 세계에 들어간다는 의미와 죽음의 세계로 들어간다는 의미를 동시에 가지고 있음을 앞에서 본 바 있었다. 통로 저 편에 있을 숲으로 된 성벽에 갈 수있으리란 희망은 절망으로 전화될 소지가 있었던 것이다. 둥글고 빈 통로를 걸어 도달할 수 있는 희망이란 빈 희망이기에 그러하기도 하고, 숲으로 된 성벽이 아름답다고 외친 순간 그 아름다움의 덧없음이 부각되면서 죽음이 드러나기 때문에, 즉 아름다움에 대한 희망은 어두운 희망이라 말할 수 있기에 그러하기도 하다. 그 성벽은 “침묵의 목책 속에 갇힌 먼 땅”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착란과 환상을 통해 대기에 구멍이 나는 순간을 파악하려는 기형도 시는, 아름다움에 대한 희망을 포기했을 때의 죽음으로 가는 구멍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푸른 유리병' 같은 공기가 점차 탁해지면서 ‘안개'로 오염되기 시작한다. 이 읍에 처음 와본 사람은 누구나/거대한 안개의 강을 거쳐야 한다./앞서간 일행들이 천천히 지워질 때까지 /쓸쓸한 가축들처럼 그들은/그 긴 방죽 위에 서 있어야 한다./문득 저 홀로 안개의 빈 구멍 속에/갇혀 있음을 느끼고 경악할 때까지. - (안개) 중에서 푸른 대기 속의 둥글고 빈 통로는 ‘안개의 빈 구멍'으로 전화한다. 다른 삶으로 가는 ‘순간의 통로'가 안개에 의해 막혀버리고 순간이 가지는 죽음의 성질만이 드러난다. 이 순간은 안개로 뒤덮인 환상적인 마을을 구성함으로써 나타나고, 그 죽음의 성질은 다시 일상이란 것이 얼마나 죽은 상태와 같은가를 간접적으로 포착하게 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차안의 세계에 대한 네거티브 필름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 네거티브 필름 같은 가상적 세계는, 흐리멍덩한 색깔인 안개의 색깔로 대상의 윤곽만 드러내면서, 생명 없고 답답한 무엇으로 현상한다. 이 시를 더 읽어보자. 죽음의 공기인 ‘안개'의 빈 구멍은 사람들을 빨아들여 그 속에 가두어 놓는다. ‘이 읍' 사람들의 삶은 ‘쓸쓸한 가축들'처럼 무리지어 있지만, 안개의 형식으로 존재하는 세계 앞에서 무력하고 서로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는 존재들이다. 그 읍은 “몇 가지 사소한 사건”이 일어나는 곳인데, 그것은 “한 밤중에 여직공 하나가 겁탈당”하기도 하고, “방죽 위에 醉客 하나가 얼어 죽”지만 “바로 곁을 지난 삼륜차는/그것이 쓰레기더미인 줄 알았다고”(같은 시에서)하기도 하는 사건이다. 겁탈당한 여직공과 얼어죽은 취객은, 윤곽밖에 보이지 않는 이 읍 안 사람들에겐 파괴당한 삶을 흐릿하게 바라보고는 쓸쓸하게 고개를 숙여보게 하는 사건 정도의 의미만 가질 뿐이다. 그들 눈앞에서 타인들은 안개 속으로 ‘지워지고' 그들은 제각기 “홀로 안개의 빈 구멍 속에 갇혀” 있게 된다. 안개는 사람들의 삶을 변화 없게 만드는 세계의 이미지라 할 수 있다. 또는 그렇게 변화 없이 사는 사람들의 삶을 이미지화한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변화 없는 지속이 기억의 지속을 가져오진 않는다. 그 반대이다. 이 읍에선, “상처 입은 몇몇 사내들”이 “이 폐수의 고장을 떠나갔지만/재빨리 사람들의 기억에서 밀려”나 버린다. 그러므로 이런 지속의 시간성은 텅 빈 시간성이다. 기억이 없이 사는 것은 텅 빈 삶이다. 그것은 현재와 과거와의 상호적인 울림이 없는 시간이고, 그래서 미래조차 가능하지 않은 시간이다. 왜냐하면 현재가 끊임없이 과거로 되어야만 미래가 있을 수 있어서, 과거가 존재하지 않으면 미래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안개는 “한 발자국도 이동하지 않는” 존재이다. 움직이지 않는 존재는 죽은 존재이다. 죽은 존재인 안개에 의해 살아가는 사람들 역시 죽은 존재이다. 안개는 독과 같다. 그러나 그 읍 사람들은 안개를 마약처럼 마신다. 안개를 편하게 느낀다./ 안개가 끼지 않으면 그들은 자신의 얼굴을 내보여야만 해서 “방죽 위의 얼굴들은 모두 낯설”어지고 “서로를 경계하며/바쁘게 지나가”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 읍은 ‘안개의 聖域'이 된다. 안개 속의 삶이 정상적인 삶이 된다. “누구나 조금씩은 안개의 주식을 갖고 있”게 되기도 한다. 이 세계 속에서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라 모두들 공장으로 가”게 된다. 이 반어적 표현에는, 안개가 ‘무럭무럭' 키우는 아이들의 삶이란 그들 모두 검은 굴뚝과 폐수와 겁탈의 위험이 있는 공장으로 쓸쓸히 끌려가는 가축과 같은 삶임을 암시한다. 3.작품속 죽음의 포착 (안개)를 읽으면서, 시적 화자가 희망의 포기를 선택했을 때 기형도 시가 발 딛고 있던 ‘순간'은 무서운 죽음의 세계-안개로 뒤덮인 읍과 같은-를 입벌려 드러낸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죽음의 세계-지옥에서의 형벌-는 ‘느릿느릿 새어나'와 계속 ‘미친 듯이 흘러다'((안개)중에서)녀야 한다. 앞에서 본 (식목제)의 “마음 한 자락 어느 곳 걸어두는 법 없이”, “어느 곳이든 기척 없이”라는 구절에서와 같이 이 형벌은 정착이란 있을 수 없게 만든다. 기억도 없이, 미래도, 삶도 없이 흘러다녀야 한다. 오직 흘러다님의 지속만 있을 뿐이다. (안개) 속의 읍내 사람들은 명계(冥界)에 정착하지 못하고 이승을 떠돌아다니는 유령과 같은 존재였다. 삶을 잃어버린 이 유령의 떠돌아다니는 모습이 일군의 기형도 시의 한 주제를 이룬다. 내 희망을 감시해 온 불안의 짐짝들에게 나는 쓴다/이 누추한 육체 속에 얼마든지 머물러 가시라고/모든 길들이 흘러 온다, 나는 이미 늙은 것이다 - (정거장에서의 충고) 중에서 기형도는 죽음을 무릅쓰고 희망을 포기했다. 그리하여 현실의 이면에 있는 죽음의 안개를 포착할 수 있었다. 이와 동일하게 안개에 중독된 유령들을 포착하기 위해선 희망을 억눌러야 한다. 시적 화자는 자신의 육체를 ‘희망을 감시해 온 불안'들이 머무는 정거장으로 쓰려고 한다. 불안이 죽음을 예감할 때 느끼는 감정이라면, 불안을 머물게 한다는 말은 죽음들의 예감을 머물게 한다는 말이 된다. 그러기 위해선 죽음들이 방문을 할 수 있도록 길이 자신에게 흘러들어 죽음이 그 길을 통해 올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런데 길이 흘러드는 정거장으로 자신의 육체를 사용하려면 자신의 육체 자체가 걸어다녀야 한다. 길이 걸어올 수는 없는 법이니까 말이다. 길이 흘러 온다는 말은 자신이 걸어다니면서 만나는 길을 흡수한다는 말이다. 걸으면서 길을 흡수하고 흡수한 길을 통해 불안-유령을 만나고 그 유령의 세계를 구성하는 환상으로 시가 구성되게 된다. 이 유령과의 대면을 보여주는 대목들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白夜)에선 “빛과 어둠을 분간할 수 없는/팡팡 빛나는 이 무서운 白夜” 속에서 “무슨 農具처럼 굽은 손가락들, 어디선가 빠뜨려버린/몇 병의 취기를 기억해내며” “천천히 걷고 있”는 한 사내를 보여준다. “휘적휘적 사내는 어디로 가는”지는 모르지만, 사내는 “문닫힌 商會 앞에서 마지막 담배와 헤어”진다. 그의 등에 “軍用 파커 속에서 칭얼거리는 어린 아들을 업은 채” 말이다. 담배 살 돈이 없을 이 사내는 아마 어린 아들과 함께 길에 쓰러져 쓸쓸히 얼어죽을 것이다. (가는 비 온다)에서는, 어느 가는 비 오는 날, “나는 어디론가 가기 위해 걷”지 않는다는 시적 화자가 발길이 닿는 대로 걸으면서 전개하는 여러 상념들을 보여준다. 그 상념들은 “이런 날 동네에서는 한 소년이 죽기도 한다.”나 “언젠가 이곳에 인질극이 있었다/범인은 (휴일)이라는 노래를 틀고 큰 소리로 따라 부르면/자신의 목을 긴 유리조각으로 그었다”와 같은 죽음의 여러 모습이다. 주검을 직접 보여주는 시도 있다. 가령, “구름으로 가득찬 더러운 창문 밑에/한 사내가 쓰러져 있다, 마룻바닥 위에/그의 손은 장난감처럼 뒤집혀져 있다”((죽은 구름))와 같은 구절이 그것이다. 여기서 주검은 감정이 절제된 상태로 서늘하게 즉물화되어 있다. 시적 화자가 우울하게 가고 있는 거리엔 주검들과 죽음에 대한 상념을 유인하는 ‘낡은 간판'들이 널려 있으며 기후마저도 그러한 상념을 피워 올리게 한다. 그의 눈에 포착되는 사람들은 좀 있으면 죽을 운명이거나 죽어버린 이다. 또는 삶의 의미를 상실한 사람들이다. 유령들이다. 이들은 회한과 외로움에 말라죽어 가는, 행복과 거리가 먼 이들이다. 플랫폼에서 본 청년들은 “톱밥같이 쓸쓸해 보이”고((鳥致院)), 어느 카페에서 본 사내는 “그것으로 탁자를 파내”면서 “나는 인생을 증오한다”((장밋빛 인생))라고 새겨 넣는다. 삶을 박탈당한 유령들의 포착은 시적 화자 자신이 유령처럼 ‘흘러다'니는 존재이기에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시적 화자가 포착하는 대상의 대부분인 흘러 다니는 사람들은 시적 화자 자신의 삶을 회고하는 촉매로 작용하게 된다. 그 사람들의 삶이 시적 화자의 삶과 다름없다는 점이 드러나면서 다시 시적 화자의 내면 독백은 떠도는 자의 내면을 드러내게 된다. 내린다, 진눈깨비, 놀랄 것 없다, 변덕이 심한 다리여/이런 귀가길은 어떤 소설에선가 읽은 적이 있다/구두 밑창으로 여러 번 불러 낸 추억들이 밟히고/어두운 골목길엔 불켜진 빈 트럭이 정거해 있다/취한 사내들이 쓰러진다. 생각난다 진눈깨비 뿌리던 날/하루종일 버스를 탔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낡고 흰 담벼락 근처에 모여 사람들이 눈을 턴다 - (진눈깨비) 중에서 진눈깨비 뿌리던 날, 시적 화자는 그날도 역시 거리를 걷는다./ 거리에서 그는 ‘취한 사내들이 쓰러'지는 것을 보고 정거해 있는 ‘빈 트럭'도 본다. 그리고 ‘구두 밑창'으로 ‘추억들이 밟히'는 소리를 듣는다. ‘하루종일 버스를 탔던 어린 시절'이 밟히는 소리도 듣는다. 외로운 빈 트럭과 쓸쓸하게 쓰러지는 취한 사내들에 대한 묘사와 시적 화자의 어린 시절들을 불러오는 회상이 절묘하게 어우러진다. 시적 화자가 주체가 되어 추억들을 불러온다기보다는 저 진눈깨비와 거리의 외롭고 쓸쓸한 모습이 기억들을 불러온다. 그 기억은 “찬밥처럼 방에 담겨/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엄마 안오”시기에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엄마걱정) 중에서)의 기억을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그가 거리에서 보고 있는 사람들은 엄마가 없어 빈방에 혼자 훌쩍거린 기억을 감추고 있을 사람들이며, 역시 집에 들어가면(집이 있다면) 빈방에 홀로 앉아 있을 사람들일 게다. 죽어가는 이 유령들은 그런 기억을 깊이 품고 살아갈 것이며, 이는 다시 역으로 시적 화자 자신도 그 기억을 품고 쓸쓸히 죽어 가는 유령들 중의 한 사람이라는 점을 드러낸다. 그래서 ‘죽음'을 발견하는 ‘흘러 다니기'는 점점 시적 화자 자신 안의 죽음의 흔적을 찾는 여행이 되어버리게 된다. 시적 화자는 “곧 무너질 것만 그리워했”((길 위에서 중얼거리다))다고 말한다. 무너지는 것들이 결국 그의 삶이 되기 때문이다. 죽음을 증언하는 시적 화자 자신이 유령과 같이 떠돈다. 그는 “낡아빠진 구두에 쑤셔박힌, 길쭉하고 가늘은/자신의 다리를 보고 동물처럼 울부짖는다. 그렇다면 또 어디로 간단 말인가!”((여행자) 중에서)라고 울부짖는 여행자와 같은, 떠돎을 그만둘 수 없는 유령이다. 환상적 공간의 열린 순간을 통해드러난 죽음의 세계, 그리고 그 안을 떠돌아다니는 유령적 삶의 포착은, 이렇게 자신도 유령이라고 인식하는, 안개의 구멍을 바라보고 있는 자신도 안개에 중독되어 버렸다는 점을 인식하는 시적 화자의 등장을 통해 완성된다고 할 것이다. 이를 통해 죽음의 공간은 더욱 전일화되고 가공할 것으로 드러낸다. 유령의 세계를 증언하는 자신도 유령이 되어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의 그 경악의 순간은, 바로 메두사가 페루세우스의 방패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았을 때의 그 놀람과 두려움의 순간과 같을 것이다. 그런데, 서두에서 언급했듯이, 기형도의 시는 바로 그 경악의 순간을 포착한 카르파치오의 (메두사)란 ‘그림'과 같은 것일 터, 시 텍스트는 그 경악의 순간 자체, 또는 그 순간의 재현이라기보다는 경악의 순간을 구성하여 현현하게 한다고 할 수 있다./ 시-예술 텍스트가 구성되기 이전엔 그 경악의 순간을 우리는 ‘맞서게 되지' 못한다. 환상을 사용하여 순간을 포착하는 시-예술이 그 경악의 얼굴을 객관화할 때 비로소 경악의 순간은 우리 앞에 나타난다. (입 속의 검은 잎)은 바로 자신의 얼굴을 본 메두사가 경악하는 순간을 객관화하는 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장례식은 거센 비바람으로 온통 번들거렸다/죽은 그를 실은 차는 참을 수 없이 느릿느릿 나아갔다/사람들은 장례식 행렬에 악착같이 매달렸고/백색의 차량 가득 검은 잎들은 나부꼈다/나의 혀는 천천히 굳어갔다.그의 어린 아들은/잎들의 포위를 견디다 못해 울음을 터뜨렸다/그 해 여름 많은 사람들이 무더기로 없어졌고/놀란 자의 침묵 앞에 불쑥불쑥 나타났다/망자의 혀가 거리에 흘러넘쳤다/택시 운전사는 이따금 뒤를 돌아다본다/나는 저 운전사를 믿지 못한다, 공포에 질려/나는 더듬거린다, 그는 죽은 사람이다/그 때문에 얼마나 많은 장례식들이 숨죽여야 했던가/그렇다면 그는 누구인가, 내가 가는 곳은 어디인가/나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디서/그 일이 터질지 모른다, 어디든지/가까운 지방으로 나는 가야 하는 것이다/이곳은 처음 지나는 벌판과 황혼,/내 입 속에 악착같이 매달린 검은 잎이 나는 두렵다-(입 속의 검은 잎) 중에서 이 시에서 등장하는 진술과 사건들이 현실의 어떤 대응물을 지시한다고 본다면 곧바로 해석의 난점이 생길 것이다. 운전기사, 장례식, 망자의 혀, 없어진 사람들, 죽은 사람, 검은 잎, 그리고 이를 바라보는 ‘나' 등, 이들이 실제로 존재하는 대상이었다고 하더라도 이 시 텍스트 안에 배치되었을 땐 이 단어들은 그 대상들을 지시하지 않게 된다. 하나의 극적 공간 속으로 이 존재들은 새로 의미를 얻으며 움직인다. 이 움직임은 공포의 분위기에 맞추어진다. 어떤 가공할 권력에 의해 살육된 자들이라 상상할 수 있는 ‘무더기'의 실종된 자들-망자들-의 말하지 못하는 혀-잘린 혀일까?-는 유령처럼 이 세상을 돌아다닌다. 그 유령들은 벌써 장례식 행렬에 ‘악착같이 매달'린 사람들 몸에 들어가 있을 것이다. 그 혀들은 이제 ‘거리에 흘러넘'친다. 장례식은 살육당한 자들 중 한 명의 장례식일까? 그 죽은 이의 잘린 혀 역시 거리에 흘러 다닌다. 물론 그 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잘 들어보면 잘린 혀들이 내는어떤 철버덕거리는 소리, 성대가 잘려나간 채 바람만 빠지는 쇳소리를 내는, 꿈틀대는 소리들을, 원한들을, 슬픔들을, 저주들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이 환청 속에서 시적 화자는 자신의 혀가 ‘천천히 굳어'감을 자각한다. 그것은 시신을 실은 ‘백색의 차량 가득' 나부끼는 검은 잎 때문이다. 살육이 자행되는 세계에서 살해당한 자들의 유령이 검은 잎일까? 그 유령들-검은 잎이 입 속에 악착같이 매달릴 때 혀는 굳어져오며, 이윽고 죽은 자의 혀가 된다. 그리하여 시는 죽은 자의 혀로 쓰여지게 된다. 그리하여 시인은 지옥에 가 있는 이들이 지옥에서 겪는 고통을 무당처럼 대신 말해주는 이가 된다. 정리하자면, 시적 화자가 온통 죽은 사람들의 세계에 와 있음을, 그리고 자신이 바로 그 세계의 일원이 되어가고 있음을, 더 나아가 ‘죽은 사람'인 운전기사가 어딘가로 그를 데려가서 이 유령들이 시적 화자의 혀를 통해 죽음의 이 세계를 증언할 수 있도록 시적 화자에게 내리는 신들림을, 언제 살육될지 몰라 두려워하는(‘그 일이 언제 터질지 아무도 모른다.') 이의 음산한 어조로 이 시는 보여주고 있다. 아득한 공포의 순간/을 객관화시키는 이 장면에서 우리는 어떤 수수께끼를 동반한 순간적 전율을 느끼게 된다. 기형도의 시가 도달한 한 극점은 바로 여기다. 앞에서 보아온, 환상적 공간이 뚫어 놓은 순간의 구멍을 통해 나타나, 죽음을 퍼뜨리는 세계와 그 속에서 떠도는 유령들이, 이 시에선 하나의 전율케 하는 장면으로 종합되어 갑작스레, 충격적으로 우리에게 현현하기 때문이다. 이 경악의 세계는 물론 가상의 세계이고 현실 세계로 치환되지 않는다. 하지만 기형도 시의 세계가 현실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말은 아니다. 향유 대상으로서의 단순한 가상과는 달리, 시어가 움직이는 과정 속에서 뿜어내는(메두사를 본 메두사), 자기 파열이 가져오는 전율을 우리에게 이 가상 세계는 던져주는데, 그 객관화된 전율과 맞서는 독자는 충격 속에서 새로운 현실에 부딪히며 일상적 시간의 지속이 파열되는 ‘순간'을 얻을 수 있다. 그리고 그 가상적 순간의 충격 속에서 일상적 시간 안에 감추어진 안개와같은 죽음의 습기를 감지하게 된다. 그런데 이 공포의 세계는 기형도 시가 열어 놓은 ‘순간의 통로'를 통해 드러날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입 속의 검은 잎)의 세계는 그 반대 극점이라 할 수 있는 (숲으로 된 성벽)의 세계와 연결될 수 있다고 희망할 순 없을까. ‘순간의 통로'는 다시 저 유토피아적인 미의 세계로, 숲으로 된 아날로지의 세계, 공기 방울 같은 환상의 세계로 길을 열어 놓기도 하지 않았는가. 물론 아날로지의 세계가 급전하여 유령들의 세계, 경악의 세계가 현현하는 것을 우리는 앞에서 보아 왔다. 그러나 반대로, 경악의 세계가 급전하여 다시 저 아날로지 세계로 들어가는 통로가 열릴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 않는가. 그리고 이 두 극점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되어 있어서 경악의 세계는 다시 희미하게 ‘숲으로 된 성벽'으로 가는 길을 비출 수 있지 않을까. 유토피아적 세계는 부정성을 통해서만 희미하게 빛날 수 있다면 말이다./그렇다면 기형도의 시는 일상적 삶과 사회에 대한 비판과 부정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이를 통해세계와의 화해의 열망을 담아 놓을 수 있는 용기도 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이를 보여주기 위해 두 세계의 연결 지점을 찾아내야 할 것이고, 이 작업은 상당한 분석과 해석을 요하는 일일 것이다. 글을 마치는 이 시점에서도 비평적 재구성은 완성되지 않았다. 아니 결코 완성될 수 없을 것이다. 여전히 기형도 시 텍스트는 우리의 손길을 기다리며 몸을 벌리고 있다. (끝) ◆당선소감 영광이다.기쁘다.하지만 마음이 무거워진다.과연 좋은 글을 내가 계속 써나갈 수 있을지,두렵기조차 하다. 당선 통보를 받고 비평이란 무엇인가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좋은 비평을 하기 위해선 어떤 자세가 필요할까.잘 정리가 되지 않는다.큰일이다. 지금은 문학의 정치성에 대해 생각해 보고 있다.문학이 다시 정치에 복무해야 한다는 식의 생각이 아니라 문학 자체의 정치성에 대해서,그리고 더욱 정치성이 짙은 비평에 대해서. 선거 행위만이 정치의 범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면 정치는 윤리의 문제로서 생각해야 한다. 또한 윤리가 단순한 도덕의 차원이 아니라면 삶에서의 권력과 활력 문제로서 윤리를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문학은 권력 망을 드러내고,비판하며 그것에서 삶이 벗어날 수 있는 실마리를 줄 수 있고,삶의 활력을 북돋을 수 있지 않은가.그렇다면 문학의 윤리-정치성은 더욱 증폭되어야 하지 않을까. 문학 그리고 비평이 정치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고 새로운 인간 관계의 가능성을 드러낼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나에게 사랑과 기쁨을 전해 준 사람들에게,그리고 상처를 준 사람들에게도,빈 말이 아닌 ‘고맙습니다.’란 말을 전하고 싶다. 이성혁 ●약력 67년 서울생, 한국외국어대 일어과 동 대학원(국문학), 외대강사, 99년 ‘문학과 창작' 평론부문 신인상 수상 ◆심사평 김용하의 ‘미적인 것의 정치성과 정치적인 것의 윤리성’,오홍진의 ‘관념으로 빚은 소설의 성채’,이성혁의 ‘경악의 얼굴-기형도론’,이은식의 ‘사물과 하나가 되기까지의 여정’,장사흠의 ‘풍경의 미학과 권력의 탐색’이 주목을 받았다. ‘미적인 것…’은 미학적 범주들과 시적 언어 사이의 조응 양상을꼼꼼히 살핀 글이지만,미적 개념들을 상호 연관시켜 긴밀한 인테리어를 꾸미는 데는 실패하였다.‘관념으로…’는 짐승의 세계와 신성의 세계 사이에서 요동하는 정찬 소설의 권력의 역학을 집요하게 추적하였으나 스스로 논리를 감당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하고 말았다.‘사물과…’는 다양한 철학적 개념들을 갈아타며 정현종의 시적 여정을 차분히 밟아간 글이었으나 새로운 관점을 보여주지는 못하였다. ‘풍경의 미학…’과 ‘경악의 얼굴…’이 마지막까지 남았는데,‘풍경의…’는 최인훈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서 개진된 권력의 내면화와 그에 대한 문학적 응전의 과정을,핵심 의미체들을 길어내며 흥미진진하게 추적한 글이고,‘경악의…’는 시인의 심리학에 치중한 종래의 평문들을 단김에 뛰어넘어 극적 구성의 관점에서 기형도의 시 세계를 새롭게 조명한 글이다. 그러나‘풍경의…’는 기계적인 구성과 엉뚱한 결말이 글쓴이의 설익은 문학관을 엿보게 하였으며,‘경악의…’는 미학에서 사회학으로 넘어가는 대목에서 지리멸렬해지더니 급기야 막다른 길로 뛰어들고 말아,심사자들을 경악케 하였다.하지만 패기만만한 도전과 그 패기가 창안해 낸 새로운 해석 세계는 썩 강렬한 인상을 남겨 마지막 선택의 근거가 되었다.이성혁씨의 당선을 축하하며 끈기 있게 정진하기를 당부한다. 정과리 김인환
  • 정선서 배워 해외카지노 원정

    외화유출을 막고 폐광지역의 경제활성화를 위해 설립된 강원랜드가 해외 원정도박의 ‘기지’로 변질되고 있어 충격을 주고 있다. 정선의 카지노에서 도박을 배운 중소기업주,가정주부 등이 필리핀 등지로원정 도박에 나섰다가 외국환거래법 위반과 상습도박 등 혐의로 대거 검찰에 붙잡혔다. 서울지검 남부지청 형사5부(부장 李重勳)는 25일 필리핀,마카오 등 해외 카지노에서 거액의 도박판을 벌인 해외원정 도박사범 91명을 적발,이 가운데도박금액이 15만달러가 넘는 17명을 외국환거래법 위반 등으로 구속하고 다른 24명을 출국금지 또는 지명수배했다고 밝혔다.나머지 50명은 불구속 수사 중이다. 유명개그맨 J씨 등 남자연예인 3∼4명도 수사를 받고 있으며,이 중 2명은출국금지됐다. ◆해외 원정도박 실태 검찰은 지난달 차용금 사기 고소사건을 수사하던중 고소인 임모(42·여)씨가 돈을 필리핀 마닐라 H호텔 카지노의 도박자금으로 빌려 준 사실을 밝혀내고 임씨를 상습도박 및 외국환거래법 위반 혐의로 구속했다.검찰은 이 과정에서 한국에 체류중이던H호텔 영업부장 장모(35)씨를 구속,그의 전자수첩등에서 일부 부유층을 포함한 한국인 고객 명단을 입수했다. 구속된 임씨는 강남의 여성사우나에서 부유층 여성들에게 해외 원정도박을권유한 것으로 밝혀졌다.건설회사를 경영하는 남편을 둔 주부 박모(31)씨는압구정동 사우나에서 임씨의 꾐에 빠져 4만달러를 갖고 필리핀에서 도박을했다가 이혼을 당했다.이후 박씨는 카지노의 고객 모집책으로 나섰다. 미국의 명문 N대를 졸업한 벤처사업가 허모(32)씨는 지난해 12월 휴식차 강원랜드에 갔다가 도박중독증에 빠져 법의 심판대에 섰다.지난해 1월 W 소프트웨어업체를 설립한 허씨는 회사어음으로 마련한 공금 1000만원을 강원랜드에서 순식간에 날린 뒤 ‘강원랜드보다 승률이 높아 돈을 따기 쉽다.’는 필리핀 카지노 고객 모집책의 유혹에 빠져 올 1월 해외도박에 나섰다가 수십억원을 탕진했다. 신경정신과 치료까지 받은 허씨는 검찰에 상습도박 혐의로 기소됐다. ◆문제점 강원랜드 주변에는 해외 카지노의 한국인 대리인과 연계된 모집책들이 상주하면서한국인 고객을 유인하고 있다고 검찰은 밝혔다.특히 동남아 소재 카지노는 거액을 뿌리고 다니는 한국인들을 선호,무료 숙식과 단독 VIP룸까지제공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검찰 관계자는 “카지노측이 한국인 대리인과 모집책 등에게 한국인 고객의 도박금중 1.5% 정도를 수수료로 지급하는 등 ‘손큰’ 한국인을 경쟁적으로 유치하고 있다.”고 말했다. 현지에서 돈을 잃은 한국인들은 호텔 관계자나 한국인 대리인 등에게 도박자금을 빌려 막대한 빚을 진다. 현재 지명수배중인 필리핀 H호텔의 지배인 윤모(58)씨는 한국인 고객에게 빌려준 도박자금을 회수하기 위해 조직폭력배까지 동원했다. 검찰은 “적발된 도박금이 8128만달러(한화 1000억원)에 이르며 도박사범이 사회 각층에 퍼져 있어 해외원정 도박의 심각성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윤창수기자 geo@
  • 김홍업씨 징역6년 구형

    대검 중수부(부장 金鍾彬)는 21일 기업체 등으로부터 각종 이권 청탁과 함께 돈을 받은 혐의 등으로 구속기소된 대통령의 차남 김홍업(金弘業) 피고인에게 징역 6년에 벌금 10억원 및 추징금 5억6000만원을 구형했다.또 같은 혐의로 구속기소된 측근 3인방인 김성환(金盛煥) 피고인에게 징역 8년에 추징금 18억 7000만원을,유진걸(柳進杰)피고인에게 징역 4년에 추징금 5억 5000만원,이거성(李巨聖) 피고인에게는 징역 4년에 추징금 12억원을 각각 구형했다. 검찰은 논고문에서 “우리 사회에서 권력과 권위의 상징인 대통령의 아들로서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막대한 금품을 챙겨 유흥비로 탕진했다는 점에서 국민들은 분노와 허탈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면서 “김 피고인이 진정한 반성없이 부인으로 일관하는 만큼 치욕의 역사가 다시 되풀이되지 않도록 엄히 처벌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서울지법 형사합의22부(부장 金庠均) 심리로 열린 결심공판에서 김홍업 피고인은 “사회적 물의를 일으켜 죄송하며 어떤 처벌도 달게 받겠다.”고 말했다. 안동환기자 sunstory@
  • 편집자에게/ ‘도박중독 치유’ 정부가 나서야

    -‘대낮부터 대박 혈안 하루 2500여명 출근’(10월18일자 31면)을 읽고 강원도 정선군 내국인 카지노장이 안고 있는 가장 큰 문제는 역시 도박중독일 것이다.도박중독 때문에 가산탕진과 패가망신이 속출하고 심지어 카지노 노숙자,카지노 거지까지 등장하는 판국이다.여기서 파생되는 범죄행위 또한 많을 수밖에 없어 구체적이고 근본적인 대책이 절실하다.우리나라는 미국 등 다른 나라와 비교해 도박중독자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을 것으로 추정된다.미국의 경우 전국민의 2∼3%가 도박중독에 걸려 있다고 보는데 비해 우리는 3∼4%로 다소 높게 추정하고 있다. 강원랜드가 처음부터 카지노장만이 아닌 종합적인 레저시설을 갖추고 개장했다면 도박중독 문제가 덜 부각되었을 것이다.하지만 카지노장 하나만으로 우선 개장했기 때문에 찾아오는 사람들의 상당수가 게임을 즐기기보다는 대박을 꿈꾸며 도박하러 오는 사람들이어서 도박중독을 부추기는 것이다. 강원랜드가 도박중독문제의 심각성에 대처하기 위해 설립한 한국도박중독센터에는 카지노에 와서 도박중독에 걸렸다고 호소하는 경우도 있지만,불법도박이나 경마와 경륜 등으로 도박중독에 걸렸다고 호소하는 상담자가 대부분이다.카지노와 관련한 상담은 29%이며 고스톱과 포커 관련 상담자가 54%에 달한다.기타 경마와 경륜이 12%로 분류되었다. 이러한 상담 현황으로 미루어 짐작해 보면 도박중독은 이미 우리 사회 전반에 폭넓게 자리잡은 사회현상이며 단순히 카지노만의 문제는 아니다.따라서 강원랜드가 센터를 운영하고 도박중독 예방과 치유 프로그램 개발을 위한 연구작업을 관련 학회에 맡겨 개발에 나섰다고는 하지만 반드시 범정부 차원에서 우리 사회의 도박중독 문제에 적극 대처해나가야 한다고 본다. 원기준/ 광산지역사회문제연구소장
  • 대정부 질문/ 공적자금 공방

    14일 국회 경제분야 대정부 질문에서 한나라당과 민주당 의원들은 공적자금 운용 및 비리 문제를 놓고 공방을 벌였다.한나라당은 특검제 도입을 주로 요구한 반면,민주당은 한나라당의 정략적인 태도를 문제삼긴 했으나 회수 극대화 대책을 따지는 등 격돌 강도는 종전보다 다소 약해진 듯했다. 한나라당 하순봉(河舜鳳) 의원은 “현 정부들어 157조원의 천문학적 공적자금이 투입돼 앞으로 20∼30년간 우리경제의 가장 큰 멍에가 될 것인데도 민주당은 과거탓,야당탓으로만 돌리는 작태를 반복하고 있다.”며 공적자금 특검제 도입을 요구했다.같은 당 이방호(李方鎬) 의원은 “공적자금에 대한 정책판단 오류로 32조원이 과다투입됐고,부실기업주들이 7조원이나 되는 엄청난 자금을 빼돌리는 등 도덕적 해이가 극치에 달하고 있다.”며 “총리는 대통령에게 특검제 도입을 건의하고,부실책임자 처벌을 위해 ‘공적자금 부실책임자 및 자금회수특별법’을 제정하라.”고 요구했다. 이에 대해 현 정부에서 재정경제부장관을 지낸 민주당 강봉균(康奉均) 의원은 “경제사정이 좋지 않을 때 구조조정을 하려면 공적자금이 투입될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그는 “야당 지도자들은 현 정부가 157조원의 공적자금을 쌈짓돈처럼 탕진해버린 것처럼 주장하고 있다.”면서 “이렇게 선거전략으로 끌고가는 것은 앞으로 국가경제를 운영하는 데 심각한 암적 요인이 될 것”이라고 한나라당을 공격했다. 같은 당 김영환(金榮煥) 의원은 “공적자금 운용상 부실은 철저히 가려져야 하며,특히 수백억원의 공적자금 손실을 초래한 기양건설의 비자금 조성경위와 사용내역을 밝히라.”고 한나라당을 겨냥했다. 곽태헌기자 tiger@
  • 北지원설 즉각 규명 촉구

    한나라당 서청원(徐淸源) 대표는 8일 ‘북한에 대한 4억 달러 비밀지원 의혹’과 관련,“더 이상 나라를 혼란의 구렁텅이에 빠뜨리지 말고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이 직접 국민에게 진상을 밝히고,즉각 계좌추적을 실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서 대표는 이날 국회 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4억 달러 지원의혹 ▲공적자금 탕진 ▲현대그룹과의 정경유착 ▲서해도발 가능성 정보 묵살 ▲국가기관의 정치공작 동원을 ‘5대 국기(國基) 문란사건’으로 규정했다.그는 “김대통령은 다음 정부가 진정한 화해와 도약의 시대를 열어갈 수 있도록 임기중에 벌어진 잘못을 스스로 청산해야 한다.”면서 “5대 국기문란 사건을 비롯한 숱한 의혹과 현안들을 다음 정부로 넘겨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서 대표는 “한나라당은 역사상 가장 깨끗한 정부를 만들겠다.”면서 “부패방지위원회에 실질적인 조사권한을 주고 그 산하에 대통령 친인척과 비리를 감찰할 별도의 기구를 두겠다.”고 말했다. 이어 “검찰·감사원·국가정보원·경찰·국세청·금융감독위원회·공정거래위원회·부방위 등 8대 국가기관의 정치적 중립을 보장하겠다.”면서 “고위직과 선출직 부패사범에 대해서는 공소시효 연장과 대통령 사면권을 제한하겠다.”고 밝혔다. 청와대와 민주당은 서 대표의 주장에 대해 즉각 반박하고 나섰다.박선숙(朴仙淑) 청와대 대변인은 “원내 제1당 대표로서 국정에 대한 책임있고 균형있는 상황인식이 결여된 연설”이라며 “대표연설에서까지 근거없는 폭로성 주장을 반복하고,정치공세로 일관한 것은 무책임한 자세”라고 비판했다.이낙연(李洛淵) 민주당 대변인도 “의혹을 증폭시키기 위한 서 대표의 연설은 대단히 무책임하고 위험한 작태”라고 꼬집었다. 곽태헌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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