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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쉬어가기˙˙˙

    ‘알거지’로 전락한 프로복싱 전 헤비급 챔피언 마이크 타이슨(38·미국)이 파산 위기를 모면했다.미국 뉴욕 파산법원의 앨런 그로퍼 판사는 5일 타이슨의 빚 4400만달러(약 506억원)중 1400만달러를 프로모터 돈 킹이 갚고,나머지는 4년 간 청산하겠다는 타이슨측의 채무변제 계획을 승인했다.링에서 2억달러를 번 타이슨은 호랑이를 애완용으로 기르는 등 낭비로 재산을 탕진,지난해 8월 법원에 파산 신청을 냈다.타이슨의 현재 재산은 현금 5553달러(약 639만원)뿐인 것으로 밝혀졌다.
  • 부녀 ‘10억 만들기’ 대박꿈의 종말… 딸 자살

    “소문난 수재였던 딸이 마음먹은 것이라 ‘10억의 꿈’이 금방 이뤄질 것만 같았습니다.” ‘10억 만들기 신드롬’을 좇던 부녀가 재산을 주식과 로또 복권으로 탕진하고 동반 자살을 기도한 끝에 딸이 숨지는 안타까운 사건이 발생했다. 부산에서 14년 동안 9급 세무공무원으로 일하던 염모(57)씨는 지난 1993년 보증을 잘못선 탓에 회사를 그만두고 이혼한 뒤 딸(30)과 함께 상경했다. 부녀는 영등포구 양평동 3층 옥탑방에 자리잡고 재기를 꿈꿨다.초등학교 때부터 줄곧 전교 1등을 놓치지 않던 딸은 가세가 기울자 지방 명문국립대 영문과를 중퇴하고 고졸 학력으로 한 공기업 IT본부에 취업했다. 최연소로 수석 합격해 능력을 인정받았지만,학력이 달려 IT팀장으로 승진하는데는 한계가 있었다. 8년 동안 열심히 일했지만 지난해 5월 승진심사에서 떨어지자 자존심 강한 딸은 미련없이 사표를 던졌다.이어 손에 쥔 퇴직금 5000만원으로 ‘돈불리기’에 나섰다. 아버지는 딸이 “이 돈으로 1년 안에 10억을 못 벌면 나랑 같이 죽어요.”라고 말했다고 경찰에서 진술했다. 딸이 어릴 때부터 무엇이든 해내고 마는 성격이었기 때문에 무작정 믿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딸은 로또 복권에,아버지는 주식에 2500만원씩 투자했다.딸은 복권당첨 확률을 컴퓨터로 분석,400만원과 300만원에 각각 당첨됐다.하지만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고,두사람은 1년 만에 빈털터리가 됐다. 마침내 부녀는 지난달 19일 “저 세상으로 갈 때가 되어 살기 싫어 갑니다.”라는 유서를 썼다. 이어 같은 달 21일 마지막 남은 6만원으로 구입한 로또복권마저 휴지조각이 되자 다음날 오후 딸은 옥탑방에서 아버지를 앞에 두고 목을 맸다.딸의 시신을 수습한 뒤 목을 매려던 아버지는 극심한 고통과 공포를 느껴 포기하고 3층 옥상에서 소주 3병을 마시다 잠이 들었다. 밀린 월세를 받으려 부녀를 찾던 집주인의 신고로 경찰에 붙잡힌 아버지는 “술을 마시고 뛰어내리려 했는데…”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서울 영등포경찰서는 5일 염씨를 자살방조 혐의로 구속했다. 경찰은 “자존심 강한 딸과 이를 믿던 아버지가 일확천금을 꿈꾸다 실패하자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하고 말았다.”며 안타까워 했다. 이재훈기자 nomad@seoul.co.kr
  • 웃어라 캔디 심혜진, 드라마에 복귀

    웃어라 캔디 심혜진, 드라마에 복귀

    영화배우 겸 탤런트 심혜진(37)에게서 우울한 표정은 잘 연상되지 않는다.모델 출신의 세련된 외모에 상큼한 미소,톡톡 튀는 연기로 지적이고 도회적인 이미지로 기억되는 배우.한마디로 톡톡 쏘는 콜라같은 여자다.영화 ‘그들도 우리처럼’(90년),‘초록 물고기’(96년) 등에서 보여준 어둡고 무거운 이미지보다는,아직도 데뷔 시절의 코카콜라 CF와 영화 ‘결혼 이야기’(92년)의 신세대 여성 이미지가 강하게 배어있다.그런 그녀가 오랜만에 안방극장으로 복귀해 당차고 억척스러운 또순이 주부로 변신했다.시트콤 ‘대박가족’이후 2년 만이다. 심혜진은 지난 2일부터 방영되고 있는 SBS 아침 드라마 ‘선택’(월∼토 오전 8시30분,극본 정지우 연출 김경호·장태유)에서 여주인공 오정민 역으로 출연하며 시청자들의 눈길을 끌고 있다.극중에서 그녀는 유복한 가정에서 자랐지만 아버지가 도박으로 재산을 탕진하자 대학을 포기하고 가장 노릇을 해왔다.결혼 후 안정된 삶을 사나 싶더니 남편(김상중)이 사업에 실패하자 고향 여수를 떠나 서울로 와 억척스레 취업전선에 나선다.그 와중에 부모의 반대로 헤어졌던 첫 사랑(이종원)이 나타나 구애를 하자 두 남자 사이에서 방황하게 된다. “괴로워도 슬퍼도 언제나 눈물보다는 웃음으로 넘기며 인내하고 자기를 희생할 줄 아는 아줌마예요.한마디로 ‘늙은 캔디’죠.” 그동안 자기 주장 강하고 이기적인 캐릭터를 많이 맡았는데 이번에야 본래 성격의 역을 맡았단다. 주로 영화에 무게를 둔 그녀가 드라마로,게다가 배우들 사이에 이른바 ‘마이너 리그’로 인식되는 아침 드라마에 출연한 이유는 뭘까.솔직한 대답이 돌아온다.“나이 때문에 어차피 청춘 드라마는 못하는 거고요….동네 헬스클럽에 갔더니 30∼40대 아줌마들 사이에서는 아침 드라마가 최고 인기더라고요.그분들로부터 ‘아침 드라마에 심혜진씨 나오는 것 보게 해달라.’는 부탁도 있었죠.(웃음)”나이가 들면서 실제 생활까지 축 처지게 만드는 칙칙한 작품들은 출연하기가 점점 싫어진다며 미소짓는다. 그녀는 이 드라마를 ‘선택’하면서 영화 출연 제의도 고사했고,5년 가까이 진행한 라디오 프로그램 ‘심혜진의 씨네타운’과 EBS 공연 프로그램의 진행도 그만뒀다.“본래 겹치기 출연을 하지 못하는 성격이에요.두 세가지 연기를 동시에 하다보면 신경이 분열되고 체력적으로도 버텨내지 못하거든요.”라고 말하는 그녀.하지만 “제가 출연해서 아침드라마가 업그레이드될 걸요.”라는 자신감 넘친 말 한마디에서,이번 드라마에 자신의 모든 것을 ‘올인’하겠다는 그녀의 당찬 의지를 엿볼 수 있었다. 상대역인 이종원과는 데뷔시절 CF에서,김상중과는 영화를 통해 호흡을 맞춘 적이 있다.“종원씨는 주로 악역으로 나와서 그렇지 실제로는 착하고 여린 남자예요.상중씨는 ‘마리아와 여인숙’에서 저를 무척이나 괴롭히는 역이었는데,이번에야말로 복수를 하게 됐네요.(웃음)” 극중이 아니라 실제 상황이라면 성공해서 나타난 첫사랑과 대책 없는 남편 가운데 어떤 선택을 할까.“아직 생각은 안해 봤는데…내가 극중 오정민이라면 못난 남편이라도 데리고 살지 않았을까요?호호.” 이혼 후 독신녀로 살아 온 그녀는 현재 사귀는 사람이 있다고 밝힌다.“여자가 (남자에게)집착하는 부분이 한 개 정도는 있어야 엔도르핀이 나오죠.누군지는 말할 수 없지만,지금 엔도르핀을 ‘팍팍’ 제공해 주는 남자가 있답니다.” 그녀는 최근 황신혜가 출시한 몸매 가꾸기 비디오와 같은 촬영 제의가 몇번 들어왔지만 모두 거절했단다.“오랫동안 운동을 해온 것은 사실이지만 비디오 촬영 후 몸매를 계속 유지한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할 수도 있잖아요?무엇보다 제가 언제나 군살 없는 몸매를 원하지는 않는다는 것이지요.내몸이 컴퓨터도 아닌데….”역시 솔직하고 당당한 그녀다. 이영표기자 tomcat@seoul.co.kr
  • [사회플러스] 울산商議회장 39억 횡령혐의 영장

    울산지검 특수부는 4일 공금을 개인적으로 사용한 고원준(61) 울산상공회의소 회장에 대해 횡령혐의로 구속영장을 청구했다.고 회장은 지난해 9월부터 수차례에 걸쳐 울산상의 운영자금 39억여원을 가져가 강원랜드에서 도박자금으로 탕진하는 등 개인적 용도로 사용한 혐의를 받고 있다.고 회장은 지난 97년부터 3대에 걸쳐 현재까지 울산상의 회장을 맡고 있으며,지난 4·15 총선 당시 열린우리당에 입당해 울산·경남 선거대책본부장을 맡기도 했다.
  • 국회 행정수도이전 공방

    13일 국회 경제분야 대정부질문에서도 ‘주요 메뉴’는 역시 행정수도 이전 문제였다.여당 의원들은 행정수도 이전에 따른 국토의 균형발전 등 경제적 효과를 적극 부각시킨 반면,야당 의원들은 수도 이전에 따른 비용부담 등 부정적 요소를 집중 거론했다. 열린우리당 정세균 의원은 “행정수도 건설은 수도권 과밀화 방지와 환경보전,국토 균형발전을 도모함으로써 경제의 양극화 현상 완화와 장기 성장력 배양에 도움이 된다.”고 강조했다. ●與 “경제 성장력 배양 도움” 최철국 의원은 “일부 지방자치단체장들이 행정수도에는 반대하면서도 수도권에서 지방으로 이전할 공공기관들은 서로 자기 지역으로 가져가겠다고 아우성인데,이런 이율배반적 행태를 향후 공공기관 이전계획 수립시 반영해야 한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러나 조일현 의원은 여당 의원이면서도 “당초 과천과 같은 행정도시를 상정했던 국민들이 입법,사법,행정기관을 모두 이전하는 것에 대해 반발하는 것이며,수도 이전 이후의 서울의 위상에 대한 대국민 홍보 부족이 국론분열로 이어졌다.”고 지적했다. 이어 “통일 대비와 안보 문제 등을 고려하면 행정수도가 반드시 충청권일 필요는 없으며,충청권으로 제한하고 있는 특별법의 입지선정 조항을 개정한 뒤 강원도와 경기북부까지 포함시켜 대상지를 다시 선정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野 “국력만 탕진” 반면 한나라당 최경환 의원은 “수도 이전으로 수도권에서 55만명이 충청권으로 이동하면,20년간 경제성장률이 매년 1%씩 떨어져 총 144조원의 경제손실이 발생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특히 유승민 의원은 노무현 대통령을 격하게 비난,잠시 소란이 일기도 했다.유 의원은 “수도이전은 가장 악랄한 형태의 지역주의이자 포퓰리즘이며 분열주의에 불과하다.”며 “동서고금에 이런 얼빠진 초대형 토목공사에 국력을 탕진한 나라치고 잘된 나라가 없었다.”고 일갈했다. 이어 “노 대통령이야말로 악정의 굿판을 거둬들여라.”고 말하는 순간 여당 의석에서 “악정이 뭐야.악정이….”라는 고함이 터졌고,오영식·백원우 의원 등 대여섯명이 항의의 뜻으로 본회의장을 빠져나갔다.하지만 더이상의 소란은 없었다. ●李총리 “150만명 정도 이전 예상” 답변에 나선 이해찬 국무총리는 “공무원과 공공기관을 합쳐 150만명 정도가 옮길 것으로 예상된다.”면서 “그러나 앞으로 수도권에서 매년 30만명이 늘어 10년동안 300만명이 증가할 것으로 예상되므로 (150만명이 이전해도) 수도권 인구는 100만명 이상이 순증할 것”이라고 ‘수도권 공동화론’을 반박했다. 김상연기자 carlos@seoul.co.kr˝
  • [조정래의 세상보기] 민심이 응시하는 것

    공적자금 1조원 횡령! 밥굶는 아이들 30만명! 이것은 어느 삼류국가의 이야기가 아니다.바로 오늘의 대한민국 현실이다.이 믿을 수 없는 사실 앞에서 살맛 떨어지지 않을 국민은 거의 없을 것이다.생활이 궁핍한 사람들일수록 또다시 이민을 떠나고 싶은 배신감과 절망감에 사로잡혔을 것이다. ‘공적자금’이란,6·25 이후의 최대 국난이라 일컬었던 IMF사태를 맞아 부실기업들과 부실금융기관들을 살려내기 위해서 국가가 대준 돈이다.그러나,그건 국가의 돈이 아니라 국가가 국민들에게 떠안긴 빚이었다.그러니까 집권자들이 정치를 잘못하는 바람에 국민들은 난데없이 빚벼락을 맞은 것이 공적자금 투입이다.그 액수는 보통 시민들로서는 상상할 수조차 없는 어마어마한 150조에 이르렀다. 1조란 얼마 만한 돈일까.계산 빠른 사람에게 물어보니 1억이 만 개가 모아진 돈이란다.그리도 무지무지하고 끔찍스럽게 많은 돈을,그 돈을 효과적으로 잘 쓰도록 관리·감독해야 될 공무원들이 탕진하고,먹어치워버렸단다. 거듭 확인하건데,공무원이란 피땀어린 국민세금으로 월급받으며 오로지 국민을 위해 올바로 일해야 하는 존재다.그런데 자질 부족하고 양심 없는 일부 위인들이 끊임없이 세금도둑질을 해오면서 공무원 사회를 먹칠해왔다.그 검은 손이 결국 공적자금에까지 뻗친 것이다. 공무원들이 그 꼴을 하고 있으니 IMF상황이 건강하게 회복될 리 없고,그 여파로 밥굶는 아이들이 30만명으로 늘어난 것이다.IMF 전에는 배곯는 아이들이 8만명쯤이라고 했었다.세상에는 가지가지 슬픔이 많지만 그 중에서 가장 큰 슬픔이 밥굶는 굶주림 아니던가.단 한 명의 배고픈 자가 있어도 그 사회는 병든 사회라고 했다.그런데,어른도 아니고 어린것들이 8만명이나 굶주림에 시달렸던 사회.그것도 모자라 이제는 30만명으로 불어난 사회.썩고 썩은 공무원들이 공적자금을 횡령해 기름진 배를 두드린 것은 바로 30만 어린것들의 먹이를 탈취한 것이었다. 이제 우리 다같이 비겁한 침묵을 버리고 목소리를 합치자.그리고,천둥소리보다 더 크게 외쳐서 묻자.공적자금을 이번에 적발된 자들만 횡령한 것이냐고.우리는 절대로 믿을 수 없으니 공적자금 전체에 대해서 조사하라고. “그동안 국가 발전에 공헌한 점을 참작하여‥….” 우리 귀에 너무나 익은 판결문의 끝부분이다.비리공무원들을 재판할 때마다 판·검사들은 이 문구를 앞세워 국민들을 분하게 만들고,불신을 사왔다.공무원들이 과연 일반 국민들보다 더 국가 발전에 공헌한 것일까.종교와 함께 국가라는 것이 필요악이듯이 그들 또한 필요악이 아닐까. 야당에서는 공적자금에 대한 전면적인 국정감사를 실시해야 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그 일은 어쩌면 17대 국회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의미있는 일일지도 모른다.IMF국난은 무능한 김영삼 정권이 불러왔고,공적자금 투입은 전적으로 김대중 정권에서 이루어졌다.갓난애들에게도 350여만원씩의 빚더미를 선물한 그 돈잔치는 국민들이 납득할 만한 객관적 검증이나 결과보고 없이 김대중 정권이 끝났다.그리고 노무현 정권 2년째에 그 횡령사건이 구체적으로 드러나게 되었다.국민 전체는 그 막대한 돈이 쓰인 전모를 투명하게 알고 싶어한다.그 검증과 조사는 노무현 정권이 수행해야 할 가장 큰 임무 중의 하나인지도 모른다.그러므로 야당의 국정감사 요구에 발맞추어 여당도 국정감사를 하기 위해 적극 나서야 한다.그것이 국가와 국민을 위하는 상생의 정치다. IMF상황에서 유행했던 풍문이 있다.이승만 대통령이 큰 가마솥을 만들었고,박정희 대통령이 거기에 밥을 하나 가득 지었고,전두환이 그 밥을 다 퍼먹었고,노태우가 누룽지까지 다 긁어먹었고,김영삼은 그 솥을 깨버렸고,김대중은 그 조각들마저 외국에 팔아먹으려고 한다.민심이 실린 그 풍문 속에서 ‘대통령’칭호를 받은 사람은 둘 뿐이었다.그 민심은 아직도 살아서 노무현 정권을 응시하고 있다.˝
  • [조정래의 세상보기] 민심이 응시하는 것

    공적자금 1조원 횡령! 밥굶는 아이들 30만명! 이것은 어느 삼류국가의 이야기가 아니다.바로 오늘의 대한민국 현실이다.이 믿을 수 없는 사실 앞에서 살맛 떨어지지 않을 국민은 거의 없을 것이다.생활이 궁핍한 사람들일수록 또다시 이민을 떠나고 싶은 배신감과 절망감에 사로잡혔을 것이다. ‘공적자금’이란,6·25 이후의 최대 국난이라 일컬었던 IMF사태를 맞아 부실기업들과 부실금융기관들을 살려내기 위해서 국가가 대준 돈이다.그러나,그건 국가의 돈이 아니라 국가가 국민들에게 떠안긴 빚이었다.그러니까 집권자들이 정치를 잘못하는 바람에 국민들은 난데없이 빚벼락을 맞은 것이 공적자금 투입이다.그 액수는 보통 시민들로서는 상상할 수조차 없는 어마어마한 150조에 이르렀다. 1조란 얼마 만한 돈일까.계산 빠른 사람에게 물어보니 1억이 만 개가 모아진 돈이란다.그리도 무지무지하고 끔찍스럽게 많은 돈을,그 돈을 효과적으로 잘 쓰도록 관리·감독해야 될 공무원들이 탕진하고,먹어치워버렸단다. 거듭 확인하건데,공무원이란 피땀어린 국민세금으로 월급받으며 오로지 국민을 위해 올바로 일해야 하는 존재다.그런데 자질 부족하고 양심 없는 일부 위인들이 끊임없이 세금도둑질을 해오면서 공무원 사회를 먹칠해왔다.그 검은 손이 결국 공적자금에까지 뻗친 것이다. 공무원들이 그 꼴을 하고 있으니 IMF상황이 건강하게 회복될 리 없고,그 여파로 밥굶는 아이들이 30만명으로 늘어난 것이다.IMF 전에는 배곯는 아이들이 8만명쯤이라고 했었다.세상에는 가지가지 슬픔이 많지만 그 중에서 가장 큰 슬픔이 밥굶는 굶주림 아니던가.단 한 명의 배고픈 자가 있어도 그 사회는 병든 사회라고 했다.그런데,어른도 아니고 어린것들이 8만명이나 굶주림에 시달렸던 사회.그것도 모자라 이제는 30만명으로 불어난 사회.썩고 썩은 공무원들이 공적자금을 횡령해 기름진 배를 두드린 것은 바로 30만 어린것들의 먹이를 탈취한 것이었다. 이제 우리 다같이 비겁한 침묵을 버리고 목소리를 합치자.그리고,천둥소리보다 더 크게 외쳐서 묻자.공적자금을 이번에 적발된 자들만 횡령한 것이냐고.우리는 절대로 믿을 수 없으니 공적자금 전체에 대해서 조사하라고. “그동안 국가 발전에 공헌한 점을 참작하여‥….” 우리 귀에 너무나 익은 판결문의 끝부분이다.비리공무원들을 재판할 때마다 판·검사들은 이 문구를 앞세워 국민들을 분하게 만들고,불신을 사왔다.공무원들이 과연 일반 국민들보다 더 국가 발전에 공헌한 것일까.종교와 함께 국가라는 것이 필요악이듯이 그들 또한 필요악이 아닐까. 야당에서는 공적자금에 대한 전면적인 국정감사를 실시해야 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그 일은 어쩌면 17대 국회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의미있는 일일지도 모른다.IMF국난은 무능한 김영삼 정권이 불러왔고,공적자금 투입은 전적으로 김대중 정권에서 이루어졌다.갓난애들에게도 350여만원씩의 빚더미를 선물한 그 돈잔치는 국민들이 납득할 만한 객관적 검증이나 결과보고 없이 김대중 정권이 끝났다.그리고 노무현 정권 2년째에 그 횡령사건이 구체적으로 드러나게 되었다.국민 전체는 그 막대한 돈이 쓰인 전모를 투명하게 알고 싶어한다.그 검증과 조사는 노무현 정권이 수행해야 할 가장 큰 임무 중의 하나인지도 모른다.그러므로 야당의 국정감사 요구에 발맞추어 여당도 국정감사를 하기 위해 적극 나서야 한다.그것이 국가와 국민을 위하는 상생의 정치다. IMF상황에서 유행했던 풍문이 있다.이승만 대통령이 큰 가마솥을 만들었고,박정희 대통령이 거기에 밥을 하나 가득 지었고,전두환이 그 밥을 다 퍼먹었고,노태우가 누룽지까지 다 긁어먹었고,김영삼은 그 솥을 깨버렸고,김대중은 그 조각들마저 외국에 팔아먹으려고 한다.민심이 실린 그 풍문 속에서 ‘대통령’칭호를 받은 사람은 둘 뿐이었다.그 민심은 아직도 살아서 노무현 정권을 응시하고 있다.
  •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45)김시습과 일본의 차문화(下)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45)김시습과 일본의 차문화(下)

    세조실록의 일본 승려 준초 등에 관한 기록은 1464년 2월 17일의 일이다.여기서 ‘전년(前年)’이라면 1463년이 된다. 그렇다면 일본 기록에서 1463년 7월 14일 준초 등이 조선을 방문했다는 것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만약 이 두 기록의 내용이 동일한 사건을 적은 것이라면 문제는 보다 쉽게 풀려질 수 있다.즉 일본 사신 준초 등 승려 일행은 1463년 7월 14일에 조선의 세조임금과 대신들을 만났다.며칠 뒤 이들은 세조 임금께 하직 인사를 올리고 일본으로 돌아가기 위해 영등포 나루에서 배를 기다렸는데,마침 계절이 여름인데다 태풍이 불어서 출국이 늦어지게 되었다. ●태풍 때문에 못 떠나게 된 日승려들 이 무렵 일본 외교 사신들이 조선으로 올 때 타는 배는 돛배였다.돛배는 폭풍우나 태풍에는 매우 위험하여 항해가 불가능하다.또한 일본에서 조선으로 오는 뱃길인 현해탄은 평소에도 파도가 거칠기 때문에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항해는 위험했다.돛배에는 비바람이나 추위를 제대로 막아줄 수 있는 별도의 시설이 없어서 추운 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가을부터 늦은 봄 사이에 현해탄을 건너는 일은 거의 없었다. 이런 객관적 사정을 참고해 보면 1463년 여름이 끝나기 전 어느날 일본 사신들은 귀국길에 나섰지만 태풍으로 잠시 머물렀다.그런데 날씨가 계속 좋지 않아 하루 이틀 기다리다 보니 어느새 가을철로 접어 들었고,바다는 이미 차가운 바람이 불어서 항해는 매우 위험했다.그럴 경우 대개는 다음해 늦은 봄까지 조선에 머무는 게 통상적인 일이었다.그렇게 겨울을 조선에서 보낸 그들에게 세조 임금이 위로의 인사를 보낸 것이 1464년 2월 17일이었다.그동안 그들은 어디서 머물렀을까? ●일본사람 많던 웅천왜관서 머물러 일본은 조선의 세 항구에다 왜관(倭館)을 열었다.부산,웅천,울산 등 이른바 삼포(三浦)였다.당시 일본의 외교관 대부분은 승려들이었다.승려들이 무사들을 제치고 외교관으로 선발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문자를 아는 계층들이었기 때문이다.삼포에 왜관이 설치된 1423년 무렵부터 삼포왜관으로 인해 왜관 문제가 새로운 국면을 맞았던 1560년까지 약 137년 동안 일본 승려들이 외교관 신분으로 조선을 방문한 횟수는 140여 차례에 달한다.그들은 10여 명일 때도 있었지만 많을 때는 40여 명이 넘기도 했다. 137년 동안 조선을 방문한 승려들은 약 2500여 명이었는데,그들 대부분은 주로 웅천왜관을 이용하여 드나들거나 머물렀다.웅천에는 여러 대를 이어서 사는 일본인들도 있었고,조선 여자와 결혼하거나 조선에서 무역상을 하거나,돈놀이를 하기도 하고,조선 사기장들을 고용하여 조선 흙으로 그릇을 구워 일본으로 실어가는 자도 많았다.조선말과 풍속에 능통하여 조선옷을 입고 상투를 틀고는 조선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조선의 비밀스러운 것들을 염탐하여 일본에 알려주거나 조선의 우수한 문물을 배워 일본에 전파하는 자들이 매우 많았다.준초 일행이 1463년 가을부터 1464년 늦봄까지 머문 것도 웅천이었다.웅천에는 조선말에 능통한 일본인이 많아서 일본 외교관이나 무역상들은 조선말 잘하는 일본인을 데리고 다니면서 활발하게 행동했다. ●1460년대 일본엔 사치스러운 차문화 유행 1460년 무렵의 일본사회는 사치와 호화스러운 차문화가 커다란 병폐로 자라나 일본을 위기로 몰아 넣고 있었다.가마쿠라 시대부터 시작된 중국 송나라의 차문화인 서원차(書院茶)가 무분별하게 유행하면서 일본 사회의 지도자들과 상업자본가들은 거대한 차실을 금으로 칠해 놓고 일년 내내 호화스러운 차회(茶會)로 시간과 재산을 탕진했다. 금각사라는 건물이 그 당시에 지어진 대표적인 것이다.무로마치 시대는 더욱 더 사치에 몰입했다.사치와 부패는 무사들을 타락시켰고,협잡과 음모로 일본사회는 극도의 분열에 시달렸다.차문화에서 시작된 깊은 병폐를 고치기 위해서는 새로운 차문화가 필요했다. 여전히 일본 사회에서 글자를 아는 유식한 계층인 승려들은 위기에 빠진 일본을 건져내기 위해 규모가 웅장하고 많은 사람들을 한꺼번에 수용하는 서원차를 대신할 수 있는 차문화를 만들기 위해 고심했다.더 이상 중국에서는 배울 것이 없었다.그리하여 관심을 돌린 것이 조선이었다.그 때 조선을 비교적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는 것은 승려들뿐이었다. ●머리 잘린 삼륜대불상에 할 말 잃고… 일본의 불교 지도자들은 조선에 파견되는 승려들에게 비밀 지령을 내렸다.조선의 자연 경관,취락 구조,지식인들의 생활 문화,불교 수행자들의 생활과 철학,특히 서민들이 사는 모습을 눈여겨 보거나 그림으로 그려 올 것을 지시했다.이같은 정세 아래서 조선으로 파견된 준초 등에 대한 일본 기록은 매우 구체적이다. 필자는 삼층석탑에서 가파른 비탈길을 내려가야 하는 삼륜대불상(三輪臺佛像)으로 자리를 옮겼다.이 불상은 원형3층탑 위에 불상을 모신 것이다.삼국유사에서는 이 불상을 미륵불이라 했는데,이것과 비슷한 형식과 구성을 보이는 것이 화순 운주사에도 있다. 정오 가까운 시간이 되자 맞은편 계곡에서 종 치는 소리와 함께 목탁 소리도 들린다.어느 절에선가 사시예불을 올리는 모양이다.원형 3층탑 위의 불상은 목 부분이 잘린 채 머리가 없이 몸체 부분만 남아서 세상을 향하고 있다.조선시대 유생들의 불교 탄압의 가혹한 증거로 보인다.경주 남산 곳곳에는 유생들에 의하여 목이 잘리거나 얼굴에 금이 가고 전신이 파괴괸 불상들이 널려 있다가,경주 박물관 뜨락이나 전시실로 옮겨져 유생들의 종교탄압이 얼마나 잔혹했던지를 침묵으로 증언하고 있기도 하다. ●日 승려들 겨울 나는 동안 김시습 찾았을 것 머리가 잘려나간 불상 앞에서 김시습과 일본 차문화의 관계를 재구성해 보기 위하여 다시 생각에 잠겼다.일본 기록에는 일본 국왕사인 승려 준초,범고 등이 조선에 파견되었는데,그들은 천룡선사(天龍禪寺) 승려들로서 수륙대재(水陸大齋)를 열어 죽은자들의 영혼을 천도하는데 필요한 의식 절차를 묻고,천룡선사 법당을 짓는데 드는 건축 자재를 구하기 위해서였다고 되어 있다.그들은 방문 목적을 다 이룬 뒤 태풍에 막혀 조선에서 겨울을 나는 동안 조선 여러 곳을 여행했으며,이듬해 봄에는 당시 조선사회에서 가장 무성한 소문을 낳고 있는 김시습이란 인물을 만나 보기 위해 통역을 데리고 용장사를 찾아왔던 모양이다. 김시습은 산중까지 그를 찾아온 일본 승려들에게 차를 대접하면서 특유의 질문과 해학으로 마치 오랜 친구 사이처럼 화기애애한 시간을 보냈다.일본 승려들은 이 날의 만남을 계기로 그 후 여러 차례 용장사를 방문하게 되었던 듯하다. 김시습이 쓴 소설 ‘금오신화’ 목판본이 1653년 일본에서 처음 간행되었는데,이것을 다시 간행한 것이 우리나라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을 뿐임을 보면,그의 소설 원본이 일본 승려들에 의하여 일본으로 흘러나간 것으로 보여진다. ●소박한 초암차는 오늘날 일본의 초석 일본 승려들은 김시습의 차생활과 집의 구조,경주 남산의 자연풍광에 깊은 영향을 받은 것이 분명하다.일본 다도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인 방바닥을 파 내고 묻는 화로는 김시습의 방 안에 있던 그 지로(地爐)와 흡사하다. 서원차 문화를 혁파하기 위해 고안해 낸 초암차(草庵茶)는 조선 농민들이 사는 작고 소박한 초가집을 모체로 한 것인데,초암차 문화의 핵심 내용들과 김시습의 차시(茶詩)들은 매우 닮았다.소박함,자연스러움을 잃지 않으려는 초암차의 특징은 서원차가 지닌 병폐를 말끔하게 치유시켜 오늘날 저 일본의 초석이 되어 왔다. 기이한 인물로만 아는 김시습의 천재성과 열린 정신에서 일본의 위기를 극복하는 구체적 대안을 발견해 간 일본 승려들의 지혜는 오늘날의 우리에게 또 한 번의 충격이다.돌아서는 내 눈에 다시 목이 잘려나간 불상이 들어온다.우리는 기껏 불상의 목이나 잘랐을 뿐인가….
  •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45)김시습과 일본의 차문화(下)

    세조실록의 일본 승려 준초 등에 관한 기록은 1464년 2월 17일의 일이다.여기서 ‘전년(前年)’이라면 1463년이 된다. 그렇다면 일본 기록에서 1463년 7월 14일 준초 등이 조선을 방문했다는 것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만약 이 두 기록의 내용이 동일한 사건을 적은 것이라면 문제는 보다 쉽게 풀려질 수 있다.즉 일본 사신 준초 등 승려 일행은 1463년 7월 14일에 조선의 세조임금과 대신들을 만났다.며칠 뒤 이들은 세조 임금께 하직 인사를 올리고 일본으로 돌아가기 위해 영등포 나루에서 배를 기다렸는데,마침 계절이 여름인데다 태풍이 불어서 출국이 늦어지게 되었다. ●태풍 때문에 못 떠나게 된 日승려들 이 무렵 일본 외교 사신들이 조선으로 올 때 타는 배는 돛배였다.돛배는 폭풍우나 태풍에는 매우 위험하여 항해가 불가능하다.또한 일본에서 조선으로 오는 뱃길인 현해탄은 평소에도 파도가 거칠기 때문에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항해는 위험했다.돛배에는 비바람이나 추위를 제대로 막아줄 수 있는 별도의 시설이 없어서 추운 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가을부터 늦은 봄 사이에 현해탄을 건너는 일은 거의 없었다. 이런 객관적 사정을 참고해 보면 1463년 여름이 끝나기 전 어느날 일본 사신들은 귀국길에 나섰지만 태풍으로 잠시 머물렀다.그런데 날씨가 계속 좋지 않아 하루 이틀 기다리다 보니 어느새 가을철로 접어 들었고,바다는 이미 차가운 바람이 불어서 항해는 매우 위험했다.그럴 경우 대개는 다음해 늦은 봄까지 조선에 머무는 게 통상적인 일이었다.그렇게 겨울을 조선에서 보낸 그들에게 세조 임금이 위로의 인사를 보낸 것이 1464년 2월 17일이었다.그동안 그들은 어디서 머물렀을까? ●일본사람 많던 웅천왜관서 머물러 일본은 조선의 세 항구에다 왜관(倭館)을 열었다.부산,웅천,울산 등 이른바 삼포(三浦)였다.당시 일본의 외교관 대부분은 승려들이었다.승려들이 무사들을 제치고 외교관으로 선발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문자를 아는 계층들이었기 때문이다.삼포에 왜관이 설치된 1423년 무렵부터 삼포왜관으로 인해 왜관 문제가 새로운 국면을 맞았던 1560년까지 약 137년 동안 일본 승려들이 외교관 신분으로 조선을 방문한 횟수는 140여 차례에 달한다.그들은 10여 명일 때도 있었지만 많을 때는 40여 명이 넘기도 했다. 137년 동안 조선을 방문한 승려들은 약 2500여 명이었는데,그들 대부분은 주로 웅천왜관을 이용하여 드나들거나 머물렀다.웅천에는 여러 대를 이어서 사는 일본인들도 있었고,조선 여자와 결혼하거나 조선에서 무역상을 하거나,돈놀이를 하기도 하고,조선 사기장들을 고용하여 조선 흙으로 그릇을 구워 일본으로 실어가는 자도 많았다.조선말과 풍속에 능통하여 조선옷을 입고 상투를 틀고는 조선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조선의 비밀스러운 것들을 염탐하여 일본에 알려주거나 조선의 우수한 문물을 배워 일본에 전파하는 자들이 매우 많았다.준초 일행이 1463년 가을부터 1464년 늦봄까지 머문 것도 웅천이었다.웅천에는 조선말에 능통한 일본인이 많아서 일본 외교관이나 무역상들은 조선말 잘하는 일본인을 데리고 다니면서 활발하게 행동했다. ●1460년대 일본엔 사치스러운 차문화 유행 1460년 무렵의 일본사회는 사치와 호화스러운 차문화가 커다란 병폐로 자라나 일본을 위기로 몰아 넣고 있었다.가마쿠라 시대부터 시작된 중국 송나라의 차문화인 서원차(書院茶)가 무분별하게 유행하면서 일본 사회의 지도자들과 상업자본가들은 거대한 차실을 금으로 칠해 놓고 일년 내내 호화스러운 차회(茶會)로 시간과 재산을 탕진했다. 금각사라는 건물이 그 당시에 지어진 대표적인 것이다.무로마치 시대는 더욱 더 사치에 몰입했다.사치와 부패는 무사들을 타락시켰고,협잡과 음모로 일본사회는 극도의 분열에 시달렸다.차문화에서 시작된 깊은 병폐를 고치기 위해서는 새로운 차문화가 필요했다. 여전히 일본 사회에서 글자를 아는 유식한 계층인 승려들은 위기에 빠진 일본을 건져내기 위해 규모가 웅장하고 많은 사람들을 한꺼번에 수용하는 서원차를 대신할 수 있는 차문화를 만들기 위해 고심했다.더 이상 중국에서는 배울 것이 없었다.그리하여 관심을 돌린 것이 조선이었다.그 때 조선을 비교적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는 것은 승려들뿐이었다. ●머리 잘린 삼륜대불상에 할 말 잃고… 일본의 불교 지도자들은 조선에 파견되는 승려들에게 비밀 지령을 내렸다.조선의 자연 경관,취락 구조,지식인들의 생활 문화,불교 수행자들의 생활과 철학,특히 서민들이 사는 모습을 눈여겨 보거나 그림으로 그려 올 것을 지시했다.이같은 정세 아래서 조선으로 파견된 준초 등에 대한 일본 기록은 매우 구체적이다. 필자는 삼층석탑에서 가파른 비탈길을 내려가야 하는 삼륜대불상(三輪臺佛像)으로 자리를 옮겼다.이 불상은 원형3층탑 위에 불상을 모신 것이다.삼국유사에서는 이 불상을 미륵불이라 했는데,이것과 비슷한 형식과 구성을 보이는 것이 화순 운주사에도 있다. 정오 가까운 시간이 되자 맞은편 계곡에서 종 치는 소리와 함께 목탁 소리도 들린다.어느 절에선가 사시예불을 올리는 모양이다.원형 3층탑 위의 불상은 목 부분이 잘린 채 머리가 없이 몸체 부분만 남아서 세상을 향하고 있다.조선시대 유생들의 불교 탄압의 가혹한 증거로 보인다.경주 남산 곳곳에는 유생들에 의하여 목이 잘리거나 얼굴에 금이 가고 전신이 파괴괸 불상들이 널려 있다가,경주 박물관 뜨락이나 전시실로 옮겨져 유생들의 종교탄압이 얼마나 잔혹했던지를 침묵으로 증언하고 있기도 하다. ●日 승려들 겨울 나는 동안 김시습 찾았을 것 머리가 잘려나간 불상 앞에서 김시습과 일본 차문화의 관계를 재구성해 보기 위하여 다시 생각에 잠겼다.일본 기록에는 일본 국왕사인 승려 준초,범고 등이 조선에 파견되었는데,그들은 천룡선사(天龍禪寺) 승려들로서 수륙대재(水陸大齋)를 열어 죽은자들의 영혼을 천도하는데 필요한 의식 절차를 묻고,천룡선사 법당을 짓는데 드는 건축 자재를 구하기 위해서였다고 되어 있다.그들은 방문 목적을 다 이룬 뒤 태풍에 막혀 조선에서 겨울을 나는 동안 조선 여러 곳을 여행했으며,이듬해 봄에는 당시 조선사회에서 가장 무성한 소문을 낳고 있는 김시습이란 인물을 만나 보기 위해 통역을 데리고 용장사를 찾아왔던 모양이다. 김시습은 산중까지 그를 찾아온 일본 승려들에게 차를 대접하면서 특유의 질문과 해학으로 마치 오랜 친구 사이처럼 화기애애한 시간을 보냈다.일본 승려들은 이 날의 만남을 계기로 그 후 여러 차례 용장사를 방문하게 되었던 듯하다. 김시습이 쓴 소설 ‘금오신화’ 목판본이 1653년 일본에서 처음 간행되었는데,이것을 다시 간행한 것이 우리나라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을 뿐임을 보면,그의 소설 원본이 일본 승려들에 의하여 일본으로 흘러나간 것으로 보여진다. ●소박한 초암차는 오늘날 일본의 초석 일본 승려들은 김시습의 차생활과 집의 구조,경주 남산의 자연풍광에 깊은 영향을 받은 것이 분명하다.일본 다도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인 방바닥을 파 내고 묻는 화로는 김시습의 방 안에 있던 그 지로(地爐)와 흡사하다. 서원차 문화를 혁파하기 위해 고안해 낸 초암차(草庵茶)는 조선 농민들이 사는 작고 소박한 초가집을 모체로 한 것인데,초암차 문화의 핵심 내용들과 김시습의 차시(茶詩)들은 매우 닮았다.소박함,자연스러움을 잃지 않으려는 초암차의 특징은 서원차가 지닌 병폐를 말끔하게 치유시켜 오늘날 저 일본의 초석이 되어 왔다. 기이한 인물로만 아는 김시습의 천재성과 열린 정신에서 일본의 위기를 극복하는 구체적 대안을 발견해 간 일본 승려들의 지혜는 오늘날의 우리에게 또 한 번의 충격이다.돌아서는 내 눈에 다시 목이 잘려나간 불상이 들어온다.우리는 기껏 불상의 목이나 잘랐을 뿐인가….˝
  • 건보 ‘본인부담 상한제’ 복지부, 7월부터 시행

    건강보험에 대한 ‘본인부담금상한제’가 ‘6개월 300만원 부담’이라는 큰 틀만 살아남아 7월부터 도입된다.6개월 기준 본인부담금 150만∼300만원에 대해서 초과금액의 절반(50%)을 돌려주기로 했던 조항 등은 아예 폐지됐다. 보건복지부는 27일 이같은 내용을 골자로 하는 국민건강보험법 시행령을 개정,29일 입법예고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에 따라 오는 7월부터는 건강보험이 되는 진료비 중에서 환자는 6개월 기준 300만원까지만 본인이 부담하면 된다.만성·중증질환자가 거액의 병원비로 인해 가산을 탕진하는 불행을 막자는 취지에서 도입된 제도다. 하지만 6개월 기준 본인부담금 150만∼300만원인 경우 초과금액의 50%를 돌려주기로 추진했던 조항은 없던 일로 했다. 경증질환자에게도 의도하지 않은 ‘과잉혜택’이 돌아갈 수 있다는 지적 때문이다. 다만 당초 방침을 바꿔 현행 30일 기준 본인부담금 120만원 초과분에 대해서는 건강보험 공단에서 50%를 돌려주는 제도(보상제)는 현행대로 유지하기로 했다. 상한제와 보상제는 별개의 제도로 작동하지만,국민들은 양쪽에서 혜택을 볼 수 있다. 예컨대 첫달에 본인부담금이 400만원,그후 두달간 매월 150만원이 나온 A씨의 경우 지금은 본인부담액 총액 700만원중 530만원을 내야 한다.처음 400만원에서 120만원을 초과하는 280만원의 절반(140만원)을,두 달간 150만원에서 120만원을 넘는 30만원의 절반인 15만원이 2번(30만원) 등 모두 170만원을 환급받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인부담금 상한제가 시행되면 실제 부담금은 210만원으로 준다.6개월 기준 300만원까지만 내면 되고,여기에다 120만원 초과∼300만원에 해당하는 180만원의 절반인 90만원도 보상제에 따라 또 돌려받기 때문이다. 올해 약 5만 5000여명의 환자가 716억원의 이같은 상한제 혜택을 볼 것으로 분석된다. 하지만 보험이 적용되는 진료비가 절반에 그치고 있고 처음 진료비가 많이 나온 경우 등은 큰 혜택을 받지 못할 것이라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김성수기자 sskim@˝
  • 中, 대대적 금융사정

    |베이징 오일만특파원|경제 연착륙에 나선 중국 당국이 국유기업들의 금융부정 비리 조사를 적발하는 등 대대적인 ‘금융사정’에 착수했다.경기과열 억제를 위한 금리인상이 초읽기에 들어간 상황에서 물가인상 억제를 위한 총력전을 펼치고 있다. ●대대적인 금융부정 조사착수 중국의 감사원격인 국가심계서(審計署)는 최근 중국국가전력총공사,중국공상은행,중국인수보험총공사(人壽保險總公司) 등 3개 대형 국유기업을 대상으로 대대적 회계감사를 벌여 대형 금융·회계 부정을 적발했다고 홍콩의 문회보(文匯報)가 10일 보도했다. 심계서는 전력총공사 감사에 올들어 최대 규모인 2000여명의 인력을 투입,800억위안(약 120조원)의 자금거래 내역을 조사,국유자산 탕진 사실을 밝혀냈다.전력총공사는 2000년말 총자산이 1조 2400억위안에 달했고,2001년 미 경제전문 격주간지 포천이 선정한 세계 500대 기업중 77위에 오른 초대형 기업이다. 링후안(令狐安) 심계서 부심계장은 “작년부터 이들 3개 기업에 대해 회계감사를 실시,대형 위법 사례들을 적발했다.”고 발표했지만 구체적인 부정 규모는 공개하지 않았다.또 공상은행은 본점과 21개 지점 회계감사 결과 자금 부정 사용이 30여건에 69억위안(약 1조 350억원)에 달한 것으로 드러났다.인수보험공사는 금융부정이 28건에 4억 8900만위안(700억원)이었고,이중에는 불법 비자금 조성 3179만위안(45억원)이 포함됐다. ●금리인상 초읽기 중국 당국의 다음 긴축정책으로 금리인상이 유력시되고 있다고 아시안 월스트리트 저널(AWSJ)이 10일 보도했다. 중국 중앙은행인 중국인민은행이 지난 1일부터 시작된 5·1노동절 연휴가 끝나는 대로 대출금리를 현재 연 5.31%에서 0.5%포인트 인상하고 은행 수신금리도 1.98%에서 0.25%포인트 올리는 내용의 금융조치를 발표할 것인지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UBS의 조너선 앤더슨 이코노미스트는 중국인민은행이 우선 대출금리를 0.5%포인트 올린 뒤 차후에 금리를 더 인상할 것으로 내다봤다. 중국의 대출금리 인상은 지난 95년 이후 처음이다.중국인민은행은 지난 8년간 8번에 걸쳐 대출금리를 절반 수준으로 인하해 왔다. ●물가상승 상한선 발표 경기 연착륙에 착수한 중국 정부는 이날 물가상승 억제를 위한 본격적인 단속에 나섰다.중국 국가발전개혁위원회는 이날 성명에서 월간 소비자물가 상승 상한선을 1%포인트,연간 4%포인트로 제한한다고 발표했다.지방정부들을 통해 인플레이션을 심화시킬 수 있는 신규사업에 대해서도 3개월간 인가를 동결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정부는 만약 물가상승 억제선이 지켜지지 않을 경우 지역별로 중앙계획경제 시절을 떠올릴 정도의 초강경 물가억제 조치를 실시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oilman@˝
  • 소치는 ‘똥장군’ 강기갑 국회의원 당선자

    ‘수염은 아무나 기르나.’ 토종 농민 강기갑(50·전국농민회총연맹부의장) 국회의원 당선자.그는 수염과 개량한복으로 늘 이목을 끄는 인물이다.국회 진출의 원동력을 ‘한많은 수염의 힘’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그는 현재 젖소 100마리를 키우는 전형적인 축산농군이다.그러면서 30년 가까이 농민운동과 농촌총각 장가보내기 운동에 앞장서고 있다.그의 수염에는 ‘울고넘는 사연’도 많다. 지난 주,진주공항에 내려 택시를 탔다.사천읍내를 지나 시골길로 10여분 달렸더니 야트막한 산과 언덕으로 둘러싸인 장전2리 마을이 나타났다.한 50가구쯤 돼보이는 깡촌 그대로였다.마을 입구에는 ‘축,당선.국회의원 강기갑’이라는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때마침 지나는 아주머니한테 “강기갑씨 집이 어디요?”하고 물었더니 “국회의원?”하면서 되물었다.아주머니는 “저기,저 언덕쪽에 건물 하나 보이죠,높은 거”라며 손짓했다. ●아버지보며 ‘진짜 농군’ 되겠다 결심 밭두렁 길로 5분정도 걸었다.감나무가 심어져 있는 언덕 아래로 1000여평쯤 되는 대지위에 축사(畜舍)가 높게 들어서 있었다.바로 옆에는 2층 가옥이 있었다.축사 가까이 들어서자 황구 3마리가 튀어나와 낯선 사람을 몰아낼 기세로 마구 짖어댔다.축사내 젖소들도 물끄러미 쳐다봤다.젖소 분비물로 냄새가 진동했다. 개짖는 소리에 어린 아이를 등에 업은 40대의 아주머니가 집밖으로 나와 누구냐고 물었다.강 당선자의 집이 맞느냐고 하자 그는 “집사람입니다.”하면서 안으로 들어오란다.늦둥이냐고 했더니 그는 “4월7일이 첫 돌인데 아빠가 워낙 바빠 돌잔치도 못했다.”며 웃었다. 안방으로 들어서자 강 당선자는 누군가와 열심히 전화를 하고 있었다.잠시후 그는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농장으로 나섰다.해질무렵이었지만 경운기에 실려 있는 소먹이용 풀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이었다.때가 잔뜩 묻은 긴 장화와 장갑,구겨진 모자,그리고 삽을 든 모습이 너무나 자연스럽다. “젖소 100마리의 먹이를 매일같이 실어날라야 합니다.저놈들은 먹성도 좋아요.” 이 정도 규모면 부자가 아니냐고 묻자 그는 “기자분들이 농촌현실을 잘 몰라서 되느냐.”고 나무랐다. “7,8년전인가,정부에서 우루과이라운드(UR)에 대비해 농사를 기업화해야 한다고 권유를 했지요.그래서 3억여원을 빌려 농장규모를 늘렸더니 IMF를 얻어맞았습니다.원금은커녕 이자갚기에도 급급한 지경입니다.요즘 농촌의 실정이 다들 그래요.” 특히 우유 가격은 뻔한데 사료가격은 올라가니 답답한 노릇이 아니냐고 했다.그는 한달에 젖소 100마리로부터 약 870㎏의 우유를 뽑아내면 1200만원정도 수입이 생긴다고 했다.그러나 축사 유지비와 사료값으로 800만원정도 지출되고 또 은행이자를 갚고 나면 장인·장모와 처자식 등 일곱 식구의 입에 겨우 풀칠하는 식이라고 설명했다. ●박정희 前 대통령 사망소식에 ‘만세’ 불러 태어나고 자란 곳이 여기냐고 하자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먼 하늘을 잠시 쳐다봤다.그는 1953년 지금의 장전2리에서 태어났다.부친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다고 회고했다. 슬하에 4남4녀를 둔 강 당선자의 부친은 5세때 할머니가 자살하면서 가세가 급격히 기울었다.할아버지가 워낙 놀기 좋아해 밖으로만 돌아다니며 가산을 탕진하자 이를 보다 못한 할머니가 일찍 삶을 포기했던 것이다.때문에 그의 부친은 11세때부터 장전리와 이웃 마을 등 여기저기에서 머슴살이로 전전긍긍했다. 아버지가 결혼한 후에도 머슴같은 삶은 계속됐다.어린 강씨를 지게로 업고 다니며 이웃의 가마니를 짜고 보리타작을 계속 했다.틈틈이 야산을 개간하며 밭을 일구기도 했다.그가 중학교에 들어갈 무렵 정미소를 차리면서 가세가 조금씩 나아졌다. “아버지가 아니었다면 우리 식구 8남매는 뿔뿔이 흩어졌을 겁니다.그런 아버지 때문에 농촌을 벗어날 수 없었지요.” 71년 사천농고를 졸업한 그는 농과대학에 진학하라는 아버지의 뜻을 따르기로 했으나 예비고사에서 떨어지는 바람에 포기했다.아버지는 또 농촌에서 살기 힘드니 공무원 시험을 보라고 권유했다.그때마다 그는 “아버지처럼 훌륭한 농부가 될랍니다.”고 우겼다. 그는 장전리 인근의 야산을 싸게 구입,밭을 일구기 시작했다.바로 옆에 기거할 집도 지었다.우선 밤나무,유실수 등의 묘목을 심었다.퇴비가 마땅하지 않아 사천비행장에 가서 공군장병들이 먹다버린 ‘잔밥’을 얻어왔다.또 남의 집 화장실에서 인분을 실어날랐다.마을 사람들은 그를 ‘똥장군’이라고 놀려대기도 했다.1975년 어머니가 고혈압으로 돌아가시자 큰 좌절을 겪는다.이 무렵 밤나무 농사를 해봐야 별로 경제적인 도움이나 발전성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축산업에 뛰어들었다.처음에는 젖소 5∼6마리로 시작하다가 조금씩 규모를 늘려나갔다. ●농촌총각 장가보내기 운동때 수염길러 그는 76년 한국가톨릭농민회에 가입해 농민운동의 길로 들어섰다.군부독재에 대한 환멸이 그를 움직이게 했다.79년 밥을 먹다가 박정희 대통령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숟가락을 던지며 만세를 불렀을 정도였다. 82년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자 인천의 한 수도원으로 들어가 두문불출 신학공부에 빠졌다.수녀인 누나의 영향도 없지 않았다.이후 5년동안 수도원에서 농사짓고 신학공부에만 전념했다.87년 세상에 나온 그는 91년까지 경남연합회 회장을 맡아 지역 가톨릭농민회를 이끌었다.농사를 짓는다는 이유만으로 40이 넘도록 장가못간 총각이 넘쳐나 사회가 개탄스러웠다.전국 농촌총각 결혼대책위원회를 만들어 농민 총각들을 짝지어주는 일에 앞장섰다.첫 쌍이 생길 때까지 머리와 수염을 깎지 않겠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했다. 90년 6월 드디어 첫 쌍이 탄생했다.경남 거창에 사는 정모씨가 주인공이었다.서울 합정동의 한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다들 울었을 정도로 감회가 깊었다.노무현 대통령(당시 평민당 국회의원)도 이 행사에 참석,축사를 했다.그는 1년 뒤인 91년 5월 사천성당에서 지금의 부인(영세명 엘리사벳)과 결혼했다.‘결혼대책위’가 생긴 이후 21번째였다.‘전농’에 우연히 놀러 왔던 아가씨를 설득해 ‘결혼대책위’의 간사를 맡겼고 결국 결혼까지 했다.하지만 약속과 달리 그는 수염을 깎지 않았다.그의 수염은 농촌총각 결혼추진과 농민운동을 대변하는 ‘공공의 상징’이라고 의미부여를 했기 때문이다. ●“주말엔 농사 짓고 치매 아버지 돌볼 것” 원래 결혼하면 대책위 위원장직을 그만둔다는 규칙에 따라 그는 이후부터 고향으로 내려가 농사일에 몰두했다.한편으로는 전국농민회총연맹 부의장과 경남도연맹 의장을 비롯해 전농 농가부채대책위원장 등을 맡아 언제나 가장 앞줄에서 농민운동을 펼쳐왔다. “걱정이 한두가지가 아닙니다.농민운동도 계속해야 되겠지만 젖소농사를 대신해줄 사람이 없습니다.우선 주말에는 집에 내려와 농사 지을 작정입니다.치매로 투병중인 아버지도 보살펴야 하고요.” 농업은 생명산업이라고 강조하는 그는 “국민의 어머니인 농업과 농민을 살리고 땀흘려 일하는 사람들이 대접받고 살 수 있는 정치를 실현시키는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사천 김문기자 km@seoul.co.kr ■ 그가 걸어온 길 ▲1953년 경남 사천 출생 ▲1976년 한국가톨릭농민회 입회. ▲1987∼1991년 한국가톨릭농민회 경남연합회장 ▲1989∼1991년 전국농촌총각결혼대책위원장 ▲1996년 사천농민회 회장 ▲1998∼1999년 전농 경남도연맹 부의장 ▲1999∼2000년 전농 부의장,농가부채대책위원장 ▲2000∼2003년 전농 경남도연맹 의장 ▲2001∼2003년 사천읍농업협동조합 이,감사 ▲2004년 전농 부의장,17대 국회의원 당선(민노당 비례대표). ˝
  • ‘강남입주권 8000만원’ 분양 사기

    서울 강남 등지의 아파트 입주권을 미끼로 서민들에게 수십억원을 가로챈 부동산 업자 일당이 붙잡혔다. 서울경찰청 기동수사대는 21일 아파트 분양회사인 ㈜코리아랜드개발 대표 박모(31·폭력 등 전과 12범)씨 등 6명에 대해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사기 등의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박씨 등은 지난해 7월말 서울 강남구 삼성동 무역센터에 분양 사무실을 차려 놓고 홈페이지와 부동산 사이트,지역 생활정보지 등에 ‘강남권 특별 분양 아파트 8000만원에 입주권을 팝니다.’라는 허위 광고를 냈다.이들은 이를 보고 찾아온 전모(28)씨 등 84명에게 미아리·상암동 등지의 노후 가옥을 시가 2000만∼3000만원의 3∼4배인 7000만∼8000만원에 팔아 60억여원을 가로챈 혐의를 받고 있다.이들은 노후 가옥의 평수가 3∼8평으로 입주권을 받을 수 없음을 알면서도 피해자들에게 “1년 안에 장지·세곡·문정·발산동 등 강남·강서권 재개발 예정지의 33평형 아파트 입주권을 주겠다.”고 속였다. 박씨는 가로챈 60억여원 중 50억여원을 회사 법인통장이 아닌 자신의 개인계좌로 이체해 횡령했다.박씨는 이 돈을 1억 6000만원 상당의 BMW 승용차와 고가의 외제 명품 양복을 구입하고 유흥비로 탕진해왔다.경찰 관계자는 “박씨는 강남 유명 룸살롱에서 하룻밤에 3800여만원어치의 술값을 지불하고 여종업원 한 명에 200만원씩 팁으로 뿌려 ‘귀공자’로 통해왔다.”면서 “동거중이던 여성 연예인 강모씨와 미국 여행을 다녀오는 등 돈을 물쓰듯 써왔다.”고 말했다. 박씨 등은 지난 2월 중순 이 회사 강모(47) 이사가 “왜 집없는 서민들을 상대로 사기 행각을 벌이느냐.정상적인 영업을 하든지 아니면 중단하자.”고 문제를 제기하자,“조용히 하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고 협박하며 강씨를 강남 룸살롱으로 끌고 다니며 폭행한 혐의도 받고 있다. 경찰은 “재개발 입주권 열기 속에서 강남 아파트 입주권을 미끼로 한 조직 사기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면서 “이번 수사로 강남 지역 분양 사기범들이 앞다투어 인터넷 사이트를 폐쇄했으며 비슷한 피해자가 속출할 것으로 예상돼 수사를 확대하고 있다.”고 밝혔다. 박씨는 연세대·고려대 등 유명 사립대는 물론 해외 유학파 등 고학력자 15명을 영업직원으로 채용했다.경찰은 “이들 대부분이 박씨의 범죄를 모르고 취업한 단순가담자라 처벌하지 않을 방침”이라고 말했다. 채수범기자 lokavid@˝
  • 록펠러가의 사람들/피터콜리어·데이비드 호로 지음

    ●100년간 미국 뒤흔든 재벌 록펠러가문 아버지는 더러운 돈을 벌어들였고,아들은 돈으로 왕조를 이룩했다.‘형제들’은 돈으로 미국을 지배했고,‘사촌들’은 돈이 싫다며 가문의 이름을 거부했다.4대 100년간에 걸쳐 미국을 좌지우지한 재벌 록펠러가,그들은 과연 누구인가.‘록펠러가(家)의 사람들’(피터 콜리어ㆍ데이비드 호로위츠 지음,함규진 옮김,씨앗을 뿌리는 사람 펴냄)은 세계 최고의 재벌가로 한 세기를 풍미한 ‘록펠러 왕조’의 흥망성쇠를 다룬 책이다. ●1대, 정유업 투자… 검은 돈 불려 ‘록펠러 제국’의 건설자 존 데이비드슨 록펠러 1세.고등학교 시절 늘 우울하고 엄숙해 ‘집사님’으로 통했던 그는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조그만 위탁판매 회사에 경리직원으로 들어갔다.종교적인 신성함을 느끼게 할 만큼 일에 몰두했던 록펠러가 막대한 재산을 모으게 된 것은 정유업에 투자하면서부터다.그는 온갖 방법을 동원해 재산을 불렸다.리베이트와 뇌물 증여 등의 편법으로 석유산업의 동맥인 철도를 장악하고 스탠더드 오일을 설립해 전국의 대형 정유회사들을 하나씩 인수했다.기업합동의 원조인 스탠더드 트러스트를 출범시켜 전성기엔 미국 전체 석유 공급량의 95%까지 주무르는 ‘완전’ 독점을 실현했다.이 석유부호는 만년에 들어선 “내 재산은 인류의 복지를 위해 쓰라고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라며 록펠러 의학연구소와 록펠러 재단을 세우는 등 자선 사업가로 변신하기도 했다.하지만 ‘검은 돈’의 오명은 평생 그를 따라다녔다. ●2대, 자선사업으로 인맥 구축 록펠러 1세의 외아들 존 데이비드슨 록펠러 2세는 가업을 이을 황태자로 기대를 모았지만 심약한 성격으로 아버지의 그늘에 가려 살아야 했다.그는 주식투자에 실패하고 온갖 구설수에 오르다 일찌감치 경영일선에서 물러나 자선사업에 몰두했다. 록펠러 2세는 이후 정·재계 및 문화계의 유력인사로 자리잡고 가문의 이미지를 높이는 데 힘썼다.록펠러 재단을 중심으로 콜로니얼 윌리엄스버그·베르사유 궁전 같은 문화유적을 복원했고,옐로스톤 등 각지의 명승지를 국립공원으로 조성했으며,제3세계의 위생 상태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했다.그가 이룩한 거대한 인적 네트워크는 록펠로 가문이 명실상부한 ‘왕조’를 이루는데 결정적인 힘이 됐다. ●3대, 정·재·학계서 왕성한 활동 록펠러 2세의 다섯 아들,이른바 ‘형제들’로 불린 록펠러 3대는 정·재계와 학계에 뛰어들어 왕성한 활동을 벌였다.그러나 이들의 승승장구는 재산의 낭비와 집안의 분열 등 부정적인 결과를 낳기도 했다.특히 욕망의 화신인 둘째 넬슨 올드리치 록펠러는 정계에 뛰어들어 가문의 재산을 탕진했으며,대중에게 록펠러가에 대한 나쁜 인식을 심어줬다.넬슨은 ‘백악관’ 을 목표로 가문의 역량을 총동원했다.닉슨이 공화당 대통령 후보가 되는 데 맞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공화당이야말로 록펠러가의 부속기관 아닙니까.록펠러 재단과 록펠러 대학처럼 말입니다.” ●4대, 대부분 정신병원 드나들어 록펠러 4대는 21명에 이른다.이 ‘사촌들’의 삶은 각양각색이다.이들은 거의 모두 정신과 병원을 들락거렸다.세계 최고의 부잣집 자손으로 태어났지만 가문의 정체성을 부정하고 그로부터 벗어나려 애썼다.저널리스트 출신인 저자들은 100여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록펠러 왕조는 이들 증손자 대에 와서 종말을 맞게 됐다고 말한다.록펠러 1세와 2세가 ‘개같이’ 벌어들인 엄청난 재산을 록펠러 3대가 ‘정승처럼’ 써버렸고 록펠러 4대에 와선 ‘개도 싫고 정승도 싫다.’며 각자의 길로 뿔뿔이 흩어진 형국이라는 것이다. 영국의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은 비스마르크와 함께 록펠러를 ‘현대를 만든 사람’으로 꼽았다.그만큼 록펠러가의 그림자는 넓고 짙다.이 책은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말에 걸친 세계 자본주의의 역사와 미국의 현대사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지금까지 국내에 소개된 록펠러 관련 책들은 록펠러가가 미화되거나 부정적인 예단에 의한 것들이 대부분이었다.그랜트 시걸의 ‘세계 최고의 부자 록펠러’는 록펠러 1세를 위대한 신앙인이자 자선가,사업가로만 묘사한다.또 히로세 다카시의 ‘억만장자는 할리우드를 죽인다.’는 모건가와 록펠러가가 전세계를 주무르는 암흑의 군주라는 전형적인 음모이론에 입각한 책이다.이에 비해 ‘록펠러가(家)의 사람들’은 록펠러가의 흥망사를 비교적 불편부당한 관점에서 다룬다.우리말 번역본으로 900쪽이 넘는 대작이다.3만 3000원. 김종면기자 jmkim@seoul.co.kr˝
  • 우리카드 직원2명 400억 횡령

    신용카드사 직원 2명이 회사자금 400억원을 횡령,선물옵션 투자를 했다가 거액의 손실이 나자 해외로 달아났다. 7일 우리은행에 따르면 지난달 31일 우리은행에 합병된 우리신용카드의 종합기획부 박모 과장과 자금부 오모 대리가 지난해 12월부터 지난달 31일까지 4개월간 회사자금 400억원을 몰래 빼내 선물옵션에 투자하다 손실이 발생하자 지난 6일 해외로 도주했다. 이에 따라 금융감독원은 우리은행의 내부 통제시스템 등에 대한 검사에 착수했다.문제점이 발견되면 관련 임직원을 엄중 징계하기로 했다. 우리은행은 박 과장 등 2명에 대해 횡령 등의 혐의로 서울 강남경찰서에 수사를 의뢰했다.또 자체 특별검사팀을 통해 내부 공모 여부와 정확한 사고 경위,피해 규모를 파악하고 있다. 박씨 등은 몰래 빼돌린 자금을 모 증권사의 계좌를 통해 선물옵션에 투기적인 투자를 하면서 대부분 탕진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지만 현재까지 정확한 피해 규모는 파악되지 않고 있다. 우리은행은 이들 가운데 한 명이 달아나기 직전 가족들의 생계비 명목으로 2억 1000만원을 친척에게 맡기는 과정에서 이를 수상히 여긴 친척이 경찰에 신고하기 전까지 횡령사실을 파악하지 못하는 등 내부통제에 큰 허점을 드러냈다. 김유영기자 carilips@˝
  • [조정래의 세상보기] 분별없는 이기심, 경쟁지옥 만든다

    갈수록 경쟁은 치열해지고,그럴수록 학원에 대한 의존도는 커지고,그러기를 20년 넘게 하다보니 학교 교육은 망가질대로 망가지게 되었다. 텔레비전에서 과외방송을 하면 연간 9조원 이상의 사교육비 절감 효과가 나타나리라고 한다.그게 희소식인가 했더니,뒤따라 나온 것은 학원들의 저항이었다.자기네 사업 망치게 생겼으니 그 방송을 하지 말 것이며,만약 강행하면 좌시하지 않고 집단행동에 나서겠다는 엄포였다.그것은,월평균 천만원 이상 소득자인 의사들이 국민 건강을 담보로 더 배부르게 살겠다고 길바닥에 나앉아 데모하는 것을 볼 때와 다름없이 입맛이 썼다. 사교육비 전체가 아닌 일부분의 절감효과가 9조원을 넘는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고,학원들이 그 수입을 놓치지 않겠다고 정부를 향해 으름장을 놓는 것도 놀랍지 않을 수 없었다.학원이란 원래 학습능력이 부진한 학생들이 도움을 받는 뒤편의 배움터였다.그런데 서로 경쟁이 치열하다 못해 광란상태에 빠지면서 학원은 일류대학을 가기 위한 필수코스처럼 둔갑하고 말았다.그것은 공교육이 무너진 현장이기도 했다. 공교육을 초토화시킨 괴물답게 학원비는 학교 수업료를 비웃으며 하늘 드높이 솟아 있다.주객이 전도되어버린 이런 현실은 어디서 기인한 것인가.학교 선생님들이 무책임하게 놀고 먹어서 그런가? 실력이 없는 무능 교사들이어서 그런가?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그 절대적인 원인은 학부모들에게 있다.‘무슨 수를 써서든 내 자식만은 잘 되어야 한다.’는 물불을 가리지 않는 부모들의 이기심,그 걷잡을 수 없는 탐욕들은 경쟁에서 이기는 수단으로 과외공부를 찾아 미친듯이 치달아갔다.갈수록 경쟁은 치열해지고,그럴수록 학원에 대한 의존도는 커지고,그러기를 20년 넘게 하다보니 학교 교육은 망가질대로 망가지게 되었다.선진국이든 후진국이든간에 세계 그 어떤 나라에도 이런 현상은 없다.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우리의 이기심이 우리 사회를 망치는 독으로 퍼지고,서로서로의 가슴을 찌르는 비수가 되었다. 대입 수험생들의 과외비만 아니라 미성년자들의 영어교육비가 연간 7조원에서 8조원이라고 한다.그 어마어마한 돈을 탕진하는 것도 ‘내 자식은 남보다‘하는 바보스러운 이기심 탓이다.오늘날과 같은 영어공부의 광풍이 몰아닥친 것은 저 김영삼 정권으로 거슬러 올라간다.아름다운 지하자원이란 기상천외한 표현을 구사하고,6·25 이후의 최대 국란으로 일컬어진 IMF사태를 불러온 대통령 김영삼은 제대로 된 공청회 한번 실시하지 않고 초등학교 4학년부터 영어 조기교육을 시키라고 결정내렸다. 그러자 세상은 어찌 되었는가.내 자식을 앞세우고자 하는 부모들의 극성스러운 이기심은 초등학교 3학년 이하를 영어 학원으로 내몰기 시작했다.그 광란의 바람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우리도 질 수 있느냐 하는 이기심이 발동되어 두번째 광란의 바람이 일어났다.그건 유치원생 부모들이 일으킨 바람이다.그리고 세번째 광란의 바람이 뒤를 이었으니,유치원도 못 다니는 유아들의 부모까지 가세한 것이다.몰지각한 이기심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영어를 남들보다 잘하게 하려고 혀를 수술하는 사태까지 벌어지고 있다.수술의자에 묶인 어린아이는 발버둥을 치고,젊은 엄마는 의사 옆에서 흡족하게 웃고 있고,혀밑이 꿰매진 아이의 크게 벌린 입이 텔레비전 화면에 클로즈업되고 있다.혀 짜른 반벙어리가 될지도 모르는데 그런 수술을 시키는 용감무쌍한 모성이 위대하고,돈벌이를 위해 무슨 수술이든 거침없이 감행하는 의사 또한 거룩하다. 1조원이 얼마만한 돈인지 선뜻 계산하기는 쉽지 않다.1조란 억이 1만 개 합해져 이루어진 수다.그럼 억이란 무엇인가? 사람인( )변에,뜻 의(意)자가 합해진 것이 억(億)이다.다시 말하면 억이란 실재하는 수가 아니라 사람의 마음에나 있는 숫자라는 뜻이다.경제 규모가 크지 않았던 그 옛날 원시경제시대에는 정말 그랬을 것이다. 우리의 분별없는 이기심은 우리가 사는 사회를 지옥으로 만들고 있다.영원히 살 수 있는 인간은 단 하나도 없다.그리고,인생살이란 1등을 뽑는 경기가 아니다.자기 능력껏 살며 만족할 줄 아는 것이 가장 아름답고 복된 삶이다.˝
  • [조정래의 세상보기] 분별없는 이기심, 경쟁지옥 만든다

    갈수록 경쟁은 치열해지고,그럴수록 학원에 대한 의존도는 커지고,그러기를 20년 넘게 하다보니 학교 교육은 망가질대로 망가지게 되었다. 텔레비전에서 과외방송을 하면 연간 9조원 이상의 사교육비 절감 효과가 나타나리라고 한다.그게 희소식인가 했더니,뒤따라 나온 것은 학원들의 저항이었다.자기네 사업 망치게 생겼으니 그 방송을 하지 말 것이며,만약 강행하면 좌시하지 않고 집단행동에 나서겠다는 엄포였다.그것은,월평균 천만원 이상 소득자인 의사들이 국민 건강을 담보로 더 배부르게 살겠다고 길바닥에 나앉아 데모하는 것을 볼 때와 다름없이 입맛이 썼다. 사교육비 전체가 아닌 일부분의 절감효과가 9조원을 넘는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고,학원들이 그 수입을 놓치지 않겠다고 정부를 향해 으름장을 놓는 것도 놀랍지 않을 수 없었다.학원이란 원래 학습능력이 부진한 학생들이 도움을 받는 뒤편의 배움터였다.그런데 서로 경쟁이 치열하다 못해 광란상태에 빠지면서 학원은 일류대학을 가기 위한 필수코스처럼 둔갑하고 말았다.그것은 공교육이 무너진 현장이기도 했다. 공교육을 초토화시킨 괴물답게 학원비는 학교 수업료를 비웃으며 하늘 드높이 솟아 있다.주객이 전도되어버린 이런 현실은 어디서 기인한 것인가.학교 선생님들이 무책임하게 놀고 먹어서 그런가? 실력이 없는 무능 교사들이어서 그런가?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그 절대적인 원인은 학부모들에게 있다.‘무슨 수를 써서든 내 자식만은 잘 되어야 한다.’는 물불을 가리지 않는 부모들의 이기심,그 걷잡을 수 없는 탐욕들은 경쟁에서 이기는 수단으로 과외공부를 찾아 미친듯이 치달아갔다.갈수록 경쟁은 치열해지고,그럴수록 학원에 대한 의존도는 커지고,그러기를 20년 넘게 하다보니 학교 교육은 망가질대로 망가지게 되었다.선진국이든 후진국이든간에 세계 그 어떤 나라에도 이런 현상은 없다.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우리의 이기심이 우리 사회를 망치는 독으로 퍼지고,서로서로의 가슴을 찌르는 비수가 되었다. 대입 수험생들의 과외비만 아니라 미성년자들의 영어교육비가 연간 7조원에서 8조원이라고 한다.그 어마어마한 돈을 탕진하는 것도 ‘내 자식은 남보다‘하는 바보스러운 이기심 탓이다.오늘날과 같은 영어공부의 광풍이 몰아닥친 것은 저 김영삼 정권으로 거슬러 올라간다.아름다운 지하자원이란 기상천외한 표현을 구사하고,6·25 이후의 최대 국란으로 일컬어진 IMF사태를 불러온 대통령 김영삼은 제대로 된 공청회 한번 실시하지 않고 초등학교 4학년부터 영어 조기교육을 시키라고 결정내렸다. 그러자 세상은 어찌 되었는가.내 자식을 앞세우고자 하는 부모들의 극성스러운 이기심은 초등학교 3학년 이하를 영어 학원으로 내몰기 시작했다.그 광란의 바람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우리도 질 수 있느냐 하는 이기심이 발동되어 두번째 광란의 바람이 일어났다.그건 유치원생 부모들이 일으킨 바람이다.그리고 세번째 광란의 바람이 뒤를 이었으니,유치원도 못 다니는 유아들의 부모까지 가세한 것이다.몰지각한 이기심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영어를 남들보다 잘하게 하려고 혀를 수술하는 사태까지 벌어지고 있다.수술의자에 묶인 어린아이는 발버둥을 치고,젊은 엄마는 의사 옆에서 흡족하게 웃고 있고,혀밑이 꿰매진 아이의 크게 벌린 입이 텔레비전 화면에 클로즈업되고 있다.혀 짜른 반벙어리가 될지도 모르는데 그런 수술을 시키는 용감무쌍한 모성이 위대하고,돈벌이를 위해 무슨 수술이든 거침없이 감행하는 의사 또한 거룩하다. 1조원이 얼마만한 돈인지 선뜻 계산하기는 쉽지 않다.1조란 억이 1만 개 합해져 이루어진 수다.그럼 억이란 무엇인가? 사람인( )변에,뜻 의(意)자가 합해진 것이 억(億)이다.다시 말하면 억이란 실재하는 수가 아니라 사람의 마음에나 있는 숫자라는 뜻이다.경제 규모가 크지 않았던 그 옛날 원시경제시대에는 정말 그랬을 것이다. 우리의 분별없는 이기심은 우리가 사는 사회를 지옥으로 만들고 있다.영원히 살 수 있는 인간은 단 하나도 없다.그리고,인생살이란 1등을 뽑는 경기가 아니다.자기 능력껏 살며 만족할 줄 아는 것이 가장 아름답고 복된 삶이다.
  •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25)이걸이 저걸이 갓걸이(下)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25)이걸이 저걸이 갓걸이(下)

    진주농민항쟁이 일어난 19세기 후반을 ‘민중의 시대’라고 부른다.진주지방농민들이 일으킨 항쟁은 ‘민중의 시대’를 알리는 서곡이었다.1862년 2월18일의 진주농민항쟁을 시작으로 하여 1894년 동학농민혁명에 이르는 32년 동안 조선전역에 걸쳐 70여 차례의 농민항쟁이 들불처럼 타올랐었다. 그래서 진주농민항쟁을 동학혁명의 씨앗이라고도 하며,성리학 이념에 봉사한 유생들의 허망한 정치실패를 입증한 피와 박해의 증거라고도 부른다. ‘이걸이 저걸이 갓걸이’라는 류계춘 원작의 이 노래는 농민항쟁이 일어난 지역마다의 중요한 쟁점에 따라 약간씩 노랫말이 바뀌는데,그것은 그 지역 농민들에게 공통된 분노와 모순을 첨예하게 드러냄으로써 농민들의 결집을 강화시키고 투쟁력을 높이기 위한 전략이기도 했다.류계춘 선생의 세상을 읽어내는 통찰력이 또 한번 돋보이는 부분이기도 하다. 아무튼 19세기 후반은 풍양 조씨와 안동김씨 세도정치로 인한 사회 질서의 문란이 극점에서 폭발하기 직전이었다.여기에다 조선왕조의 조세제도 핵심인 삼정(三政)의 실패가 겹쳐 조선은 국가로서의 통제력을 상실하여 가난한 민중의 삶은 참담했다. ●민중 오랜 착취와 압박에 신음 순조,헌종,철종년간 조선사회의 모순은 이미 깊어져 있었고,봉건제도 붕괴 과정에서 민중은 오랜 착취와 압박으로 신음했다.지옥같은 학정의 세월 한 가운데서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횃불이 맨 먼저 진주에서 타올랐다. 그 혁명의 전주곡인 나팔소리를 맨 처음 낸 나팔수가 류계춘 선생이었던 것이다.왜 그는 혁명의 나팔소리인 ‘이걸이 저걸이 갓걸이’라는 노래를 지어 퍼뜨렸을까? 조선왕조 조세제도인 삼정(三政)은 전정(田政),군정(軍政),환곡(還穀)을 말한다. 전정은 토지세,군정은 병역의무와 관련된 세금,환곡은 봄철의 식량부족과 파종기 종자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국가에서 곡식을 빌려주었다가 가을 수확 때 이자를 붙여 되돌려 받는 제도였음은 일반 상식이다. 이 같은 국가 조세제도의 골격인 삼정제도가 오랜 모순으로 폐단이 커지자 이에 따른 구체적인 폐해는 농민들의 부담으로 귀결되었다. 국가가 필요로 하는 노동력과 세금은 결국 가장 낮은 계층인 농민들의 육신과 농사 지은 곡식,베틀로 짠 포목이기 때문이다.양반 사대부는 병역의 의무도 없었고,부역 등 노동력을 바쳐야 할 필요도 없었으며,아무리 재산이 많더라도 세금 낼 까닭이 없었기 때문에 국가가 어려울수록 항상 고통받는 것은 농민들뿐이었다.끊임없이 늘어만가는 삼정폐해에 따른 부담은 농민들을 살아갈 수 없도록 만들고 있었다. 전정 즉 토지세 모순은 전 국토를 쑥대밭으로 만든 임진왜란,정묘 병자호란으로 더욱 심각해졌다.오랜 전쟁 때문에 많은 토지가 황폐해진데다 양반,관리,토호들이 고의적으로 토지대장에 등록하지 않고 숨겨둔 토지와,세금을 안내는 면제토지가 늘어나자 국가의 조세수입은 그만큼 줄어들었다. 그렇게 줄어든 세금을 모두 농민들에게 부담시켰으니 농민들의 삶은 고통뿐이었다.여기에다 관청에 근무하는 관리들이 개인적으로 탕진해버린 공금을 채워넣기 위하여 도결(都結)이라는 이름의 세금을 만들어 마음대로 부과하여 거둬들였다. ●일부 농민들 세도가에 붙어 병역기피 군정,즉 병역의무와 관련된 세금은 군포(軍布)라는 이름의 베를 징수하는 것이다.그런데 양반,아전,관노(官奴)는 병역이 면제된데다 정치기강이 문란해지자 일부 농민들도 세도있는 양반가문에 붙어서 병역을 기피하는 폐단이 생겼다. 환곡제도는 앞의 두 제도보다 더 심했다.아예 고리대(高利貸)로 변질되어 지방관청 관리들의 탐욕을 키우는 가장 악질적인 농민수탈 방법이었다.처음부터 월급이 없는 아전들은 농민을 착취하고 공금과 관청곡식을 횡령착복하는 협잡을 하도록 되어 있었다. 얼마만큼의 부정부패를 국가가 공식적으로 묵인해 주고 있었던 것이다.이 얄궂은 제도는 오늘날 공무원들의 부정부패를 심판할 때 일정액수 이하의 금액을 뇌물로 받거나 횡령했을 때 이른바 ‘통상적인 떡값 또는 관례’라 하여 면죄부를 주는 원류가 되었다. 이같은 모순이 계속되다 보니 탐관오리의 간악한 작폐로 인하여 농민의 생활은 눈뜨고 볼 수 없는 참상으로 변했고,고통에 허덕일 수밖에 없었다. 국가의 재정은 고갈되고,착취를 견디다 못한 농민들은 고향을 버리고 도망하여 유민이 되기도 했다.유민들 중에는 장길산처럼 도둑떼로 변질되기도 했고,깊은 산중 절간에 찾아가서 절 머슴이나 승려가 되기도 했다.살아남기 위하여 긴급피난한 농민들이 사찰로 몰려들어 승려가 되는 것은 한 때 커다란 유행이었다.실제로 한때 승려 숫자가 조선 인민의 10분의 1이 된적이 있었을 정도였다. ●한때 조선인민 10분의1 승려 되기도 아무튼 참을 수 없는 정도까지 불만이 쌓이자 농민들은 필연적으로 정부에 항거하는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이래도 죽고,저래도 죽을 바엔 할말이나 해보고 죽자는 공감대가 조선의 모든 농민들 가슴에 자리잡기 시작한 것이다. 이같은 전 국가적 모순에 저항의 횃불을 맨 처음 쳐든 것이 진주지방 농민들이었다.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은 조선 어느 지방보다 진주지방의 모순이 더 크고,착취가 심했기 때문이었다. 진주는 진주목사가 다스리는 행정관청 외에 경상우도 병마절도사가 다스리는 군사기관인 병영까지 있어서 관리와 아전의 숫자가 그만큼 많았다.아전 숫자가 많다는 것은 곧 농민들을 수탈하는 정도가 그만큼 극심하다는 뜻이다. 또한 향교와 서당이 많아서 향교의 교생(校生),서원의 원생(院生)은 모든 의무에서 면제되는데,그 면제액만큼 농민들의 부담은 늘어났다. ●농민들 존재 양반의 ‘갓걸이’ 에 비유 ‘이걸이 저걸이 갓걸이’에서 모든 힘없는 농민들 숫자는 곧 양반들의 갓을 걸어두는 ‘걸이’,즉 양반을 위해 존재하는 목숨없는 말뚝이나 갓 걸어두는 도구에 불과하다는 지독하고도 절묘한 은유인 것이다. 1862년 이전 류계춘 선생은 이 같은 진주목과 병영아전들의 혹독한 수탈에 대하여 여러해 동안 문제제기를 했었다.해당 관청에 진정서를 내거나 고발장을 접수시키기도 하면서 폐단을 고쳐달라고 애원했다. 그러자 아전들은 류계춘선생을 온갖 방법으로 박해하고 괴롭혔다.구속시켜 매질을 하기도 했다.이런 선생을 지켜보던 진주지방 농민들은 자신들의 억울함을 대변하는 선생에게 직·간접적인 지지를 보내면서 격려해주었다. 그러는 사이에 농민수탈은 더욱 심해졌다.농민들은 최후의 방법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류계춘 선생이 농민의 대표자로 뽑혔다.그때부터 선생은 최후의 결전을 준비해 나갔다.먼저 농민들을 결속시키고 투쟁력을 높이기 위해서 노래를 만들어 퍼뜨렸다. 그런 다음 몇 가지 방법을 고안하여 농민들을 결속시키는 일에 착수했다. 농민들에게 가장 악랄한 아전으로 알려진 자와 양반으로서 가장 탐학과 착취가 심한 자들을 선정하여 그들의 구체적인 비리내용과 이름을 적은 일종의 전단을 만들어 사방에다 붙이고 뿌렸다.모두 한글로 적었기 때문에 이를 언방(諺榜)이라 했다.농민들이 더 이상 참기만해서는 안되는 이유,구체적으로 어떤 인물이 왜 농민의 적이 될 수밖에 없는지를 소상하게 적어서 비밀리에 돌려 읽히는 회문(回文),거사 날짜가 정해지면 각자의 임무를 차질없이 수행하겠다는 맹세를 하는 통문(通文)등 방법으로 농민들과 조직 책임자를 정하고 준비했다. 마침내 1862년 2월 18일 이른 아침부터 농민들은 미리 정해진 시간과 장소에서 봉기를 시작하여 약속된 장터나 공공 집회장소로 집결했다. 머리에 흰 수건을 두르고 손에는 몽둥이와 농기구를 들고,‘이걸이 저걸이 갓걸이’를 소리높여 부르면서 농민시위대를 만들어 갔고 시위대의 규모가 순식간에 홍수처럼 불어났다.겁을 먹고 숨어있던 자,반대하던 자,피신해있던 자들까지도 농민시위대의 함성과 노랫소리에 이끌려 합류했다. 이렇게 결집된 농민들은 진주성문을 열고 들어가 우병사 백낙신,진주목사 홍병원으로부터 항복을 받고,악질 관리로 손꼽히던 권준범,김희순을 불태워 죽였다. 그리고 자진해산하기까지의 4일동안 농민들의 원성을 산 토호들과 양반,부패관리들을 응징하고 끝났다.누구의 강압이나 회유에 의해서가 아니라 농민들 스스로 정한 목적에 따라 자진해산한 것이다. 그리고 류계춘 선생과 동지들 또한 스스로 관청에 나가 진실을 밝히면서 잘못된 제도를 폐지할 것을 요구했다.그러나 그 대답은 반역죄에 따른 참수형이었다.그들이 죽은 뒤 조선의 농민들은 32년간의 긴 기간에 걸쳐 정부에 책임을 물었고,동학농민혁명으로 승화되었다. 선생이 떠난지 140여년이 지난 오늘날 한국의 농민과 농업은 여전히 고난에 처해있다.선생의 초라한 무덤이 자꾸 오늘날 한국 농업의 상징처럼 다가온다.
  •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25)이걸이 저걸이 갓걸이(下)

    진주농민항쟁이 일어난 19세기 후반을 ‘민중의 시대’라고 부른다.진주지방농민들이 일으킨 항쟁은 ‘민중의 시대’를 알리는 서곡이었다.1862년 2월18일의 진주농민항쟁을 시작으로 하여 1894년 동학농민혁명에 이르는 32년 동안 조선전역에 걸쳐 70여 차례의 농민항쟁이 들불처럼 타올랐었다. 그래서 진주농민항쟁을 동학혁명의 씨앗이라고도 하며,성리학 이념에 봉사한 유생들의 허망한 정치실패를 입증한 피와 박해의 증거라고도 부른다. ‘이걸이 저걸이 갓걸이’라는 류계춘 원작의 이 노래는 농민항쟁이 일어난 지역마다의 중요한 쟁점에 따라 약간씩 노랫말이 바뀌는데,그것은 그 지역 농민들에게 공통된 분노와 모순을 첨예하게 드러냄으로써 농민들의 결집을 강화시키고 투쟁력을 높이기 위한 전략이기도 했다.류계춘 선생의 세상을 읽어내는 통찰력이 또 한번 돋보이는 부분이기도 하다. 아무튼 19세기 후반은 풍양 조씨와 안동김씨 세도정치로 인한 사회 질서의 문란이 극점에서 폭발하기 직전이었다.여기에다 조선왕조의 조세제도 핵심인 삼정(三政)의 실패가 겹쳐 조선은 국가로서의 통제력을 상실하여 가난한 민중의 삶은 참담했다. ●민중 오랜 착취와 압박에 신음 순조,헌종,철종년간 조선사회의 모순은 이미 깊어져 있었고,봉건제도 붕괴 과정에서 민중은 오랜 착취와 압박으로 신음했다.지옥같은 학정의 세월 한 가운데서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횃불이 맨 먼저 진주에서 타올랐다. 그 혁명의 전주곡인 나팔소리를 맨 처음 낸 나팔수가 류계춘 선생이었던 것이다.왜 그는 혁명의 나팔소리인 ‘이걸이 저걸이 갓걸이’라는 노래를 지어 퍼뜨렸을까? 조선왕조 조세제도인 삼정(三政)은 전정(田政),군정(軍政),환곡(還穀)을 말한다. 전정은 토지세,군정은 병역의무와 관련된 세금,환곡은 봄철의 식량부족과 파종기 종자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국가에서 곡식을 빌려주었다가 가을 수확 때 이자를 붙여 되돌려 받는 제도였음은 일반 상식이다. 이 같은 국가 조세제도의 골격인 삼정제도가 오랜 모순으로 폐단이 커지자 이에 따른 구체적인 폐해는 농민들의 부담으로 귀결되었다. 국가가 필요로 하는 노동력과 세금은 결국 가장 낮은 계층인 농민들의 육신과 농사 지은 곡식,베틀로 짠 포목이기 때문이다.양반 사대부는 병역의 의무도 없었고,부역 등 노동력을 바쳐야 할 필요도 없었으며,아무리 재산이 많더라도 세금 낼 까닭이 없었기 때문에 국가가 어려울수록 항상 고통받는 것은 농민들뿐이었다.끊임없이 늘어만가는 삼정폐해에 따른 부담은 농민들을 살아갈 수 없도록 만들고 있었다. 전정 즉 토지세 모순은 전 국토를 쑥대밭으로 만든 임진왜란,정묘 병자호란으로 더욱 심각해졌다.오랜 전쟁 때문에 많은 토지가 황폐해진데다 양반,관리,토호들이 고의적으로 토지대장에 등록하지 않고 숨겨둔 토지와,세금을 안내는 면제토지가 늘어나자 국가의 조세수입은 그만큼 줄어들었다. 그렇게 줄어든 세금을 모두 농민들에게 부담시켰으니 농민들의 삶은 고통뿐이었다.여기에다 관청에 근무하는 관리들이 개인적으로 탕진해버린 공금을 채워넣기 위하여 도결(都結)이라는 이름의 세금을 만들어 마음대로 부과하여 거둬들였다. ●일부 농민들 세도가에 붙어 병역기피 군정,즉 병역의무와 관련된 세금은 군포(軍布)라는 이름의 베를 징수하는 것이다.그런데 양반,아전,관노(官奴)는 병역이 면제된데다 정치기강이 문란해지자 일부 농민들도 세도있는 양반가문에 붙어서 병역을 기피하는 폐단이 생겼다. 환곡제도는 앞의 두 제도보다 더 심했다.아예 고리대(高利貸)로 변질되어 지방관청 관리들의 탐욕을 키우는 가장 악질적인 농민수탈 방법이었다.처음부터 월급이 없는 아전들은 농민을 착취하고 공금과 관청곡식을 횡령착복하는 협잡을 하도록 되어 있었다. 얼마만큼의 부정부패를 국가가 공식적으로 묵인해 주고 있었던 것이다.이 얄궂은 제도는 오늘날 공무원들의 부정부패를 심판할 때 일정액수 이하의 금액을 뇌물로 받거나 횡령했을 때 이른바 ‘통상적인 떡값 또는 관례’라 하여 면죄부를 주는 원류가 되었다. 이같은 모순이 계속되다 보니 탐관오리의 간악한 작폐로 인하여 농민의 생활은 눈뜨고 볼 수 없는 참상으로 변했고,고통에 허덕일 수밖에 없었다. 국가의 재정은 고갈되고,착취를 견디다 못한 농민들은 고향을 버리고 도망하여 유민이 되기도 했다.유민들 중에는 장길산처럼 도둑떼로 변질되기도 했고,깊은 산중 절간에 찾아가서 절 머슴이나 승려가 되기도 했다.살아남기 위하여 긴급피난한 농민들이 사찰로 몰려들어 승려가 되는 것은 한 때 커다란 유행이었다.실제로 한때 승려 숫자가 조선 인민의 10분의 1이 된적이 있었을 정도였다. ●한때 조선인민 10분의1 승려 되기도 아무튼 참을 수 없는 정도까지 불만이 쌓이자 농민들은 필연적으로 정부에 항거하는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이래도 죽고,저래도 죽을 바엔 할말이나 해보고 죽자는 공감대가 조선의 모든 농민들 가슴에 자리잡기 시작한 것이다. 이같은 전 국가적 모순에 저항의 횃불을 맨 처음 쳐든 것이 진주지방 농민들이었다.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은 조선 어느 지방보다 진주지방의 모순이 더 크고,착취가 심했기 때문이었다. 진주는 진주목사가 다스리는 행정관청 외에 경상우도 병마절도사가 다스리는 군사기관인 병영까지 있어서 관리와 아전의 숫자가 그만큼 많았다.아전 숫자가 많다는 것은 곧 농민들을 수탈하는 정도가 그만큼 극심하다는 뜻이다. 또한 향교와 서당이 많아서 향교의 교생(校生),서원의 원생(院生)은 모든 의무에서 면제되는데,그 면제액만큼 농민들의 부담은 늘어났다. ●농민들 존재 양반의 ‘갓걸이’ 에 비유 ‘이걸이 저걸이 갓걸이’에서 모든 힘없는 농민들 숫자는 곧 양반들의 갓을 걸어두는 ‘걸이’,즉 양반을 위해 존재하는 목숨없는 말뚝이나 갓 걸어두는 도구에 불과하다는 지독하고도 절묘한 은유인 것이다. 1862년 이전 류계춘 선생은 이 같은 진주목과 병영아전들의 혹독한 수탈에 대하여 여러해 동안 문제제기를 했었다.해당 관청에 진정서를 내거나 고발장을 접수시키기도 하면서 폐단을 고쳐달라고 애원했다. 그러자 아전들은 류계춘선생을 온갖 방법으로 박해하고 괴롭혔다.구속시켜 매질을 하기도 했다.이런 선생을 지켜보던 진주지방 농민들은 자신들의 억울함을 대변하는 선생에게 직·간접적인 지지를 보내면서 격려해주었다. 그러는 사이에 농민수탈은 더욱 심해졌다.농민들은 최후의 방법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류계춘 선생이 농민의 대표자로 뽑혔다.그때부터 선생은 최후의 결전을 준비해 나갔다.먼저 농민들을 결속시키고 투쟁력을 높이기 위해서 노래를 만들어 퍼뜨렸다. 그런 다음 몇 가지 방법을 고안하여 농민들을 결속시키는 일에 착수했다. 농민들에게 가장 악랄한 아전으로 알려진 자와 양반으로서 가장 탐학과 착취가 심한 자들을 선정하여 그들의 구체적인 비리내용과 이름을 적은 일종의 전단을 만들어 사방에다 붙이고 뿌렸다.모두 한글로 적었기 때문에 이를 언방(諺榜)이라 했다.농민들이 더 이상 참기만해서는 안되는 이유,구체적으로 어떤 인물이 왜 농민의 적이 될 수밖에 없는지를 소상하게 적어서 비밀리에 돌려 읽히는 회문(回文),거사 날짜가 정해지면 각자의 임무를 차질없이 수행하겠다는 맹세를 하는 통문(通文)등 방법으로 농민들과 조직 책임자를 정하고 준비했다. 마침내 1862년 2월 18일 이른 아침부터 농민들은 미리 정해진 시간과 장소에서 봉기를 시작하여 약속된 장터나 공공 집회장소로 집결했다. 머리에 흰 수건을 두르고 손에는 몽둥이와 농기구를 들고,‘이걸이 저걸이 갓걸이’를 소리높여 부르면서 농민시위대를 만들어 갔고 시위대의 규모가 순식간에 홍수처럼 불어났다.겁을 먹고 숨어있던 자,반대하던 자,피신해있던 자들까지도 농민시위대의 함성과 노랫소리에 이끌려 합류했다. 이렇게 결집된 농민들은 진주성문을 열고 들어가 우병사 백낙신,진주목사 홍병원으로부터 항복을 받고,악질 관리로 손꼽히던 권준범,김희순을 불태워 죽였다. 그리고 자진해산하기까지의 4일동안 농민들의 원성을 산 토호들과 양반,부패관리들을 응징하고 끝났다.누구의 강압이나 회유에 의해서가 아니라 농민들 스스로 정한 목적에 따라 자진해산한 것이다. 그리고 류계춘 선생과 동지들 또한 스스로 관청에 나가 진실을 밝히면서 잘못된 제도를 폐지할 것을 요구했다.그러나 그 대답은 반역죄에 따른 참수형이었다.그들이 죽은 뒤 조선의 농민들은 32년간의 긴 기간에 걸쳐 정부에 책임을 물었고,동학농민혁명으로 승화되었다. 선생이 떠난지 140여년이 지난 오늘날 한국의 농민과 농업은 여전히 고난에 처해있다.선생의 초라한 무덤이 자꾸 오늘날 한국 농업의 상징처럼 다가온다.˝
  • [책꽂이]

    ●사람은 누구나 꽃이다(도종환 지음,좋은생각 펴냄) 지병으로 교육현장을 떠나 속리산 기슭에서 작품활동에 몰두해온 시인의 산문집.숲·벌레·나무 등 1년 동안 벗삼아 온 대상을 보면서 느낀 어머니와 자연의 소중함을 진솔하게 담고 있다.9000원. ●상상의 초가교실(차오원쉬안 지음,전수정 옮김,새움 펴냄) 올해 안데르센 문학상 후보에 오른 중국작가의 장편.시골 작은 초등학교 친구들의 이야기와 주위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통해 삶의 희로애락을 감동적으로 들려준다.1만원. ●이 달콤한 감각(배용제 지음,문학과지성사 펴냄) 97년 등단하고 낸 첫 시집 ‘삼류극장에서의 한때’에서 자본주의의 폐해를 노래한 시인이 이번엔 지옥 같은 세상의 풍경을 그린다.소모와 탕진의 운명을 지닌 시적 자아가 최선의 삶을 찾는 과정을 그렸다.6000원. ●이름 뒤에 숨은 사랑(줌파 라히리 지음,박상미 옮김,마음산책 펴냄) 200년 퓰리처상 수상 작가의 장편.인도계 미국인 1.5세대인 주인공이 이름을 바꾸며 미국에 적응하려다 그것의 무의미함을 깨달아 가는 과정을 다룬다.9000원. ●사랑을 주세요(쓰지 히토나리 지음,양윤옥 옮김,북하우스 펴냄) 아쿠다가와상 수상 작가의 최신작.육아원에서 불우하게 성장한 뒤 세상을 버리려는 한 여자와 세상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한 남자의 이야기를 편지 형식으로 섬세하게 풀어간다.8500원. ●사랑의 끝에서 나를 만나다(포셔 넬슨 지음,신현림 옮김,시아출판사 펴냄) 작가·뮤지컬배우·화가 등으로 활동하며 미국 문화계의 ‘르네상스 우먼’이라 불리는 저자의 시적 자서전.사진작가이자 시인인 역자가 대화를 나누듯 풀이글을 달았다.8000원. ●동그라미 세계(윤영지 지음,시문학사 펴냄) 85년 미국으로 이주,장애인학교에서 근무하는 시인의 첫 시집.정신지체아에 대한 애정을 담은 표제시를 비롯,장애아 교육의 경험과 교민사회에 대한 애정이 담긴 작품집.7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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