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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申英均대우重·崔炳哲극동전선사장 제35회 무역의날 금탑산업훈장수상

    한국무역협회(회장 具平會)는 30일 제35회 무역의 날을 맞아 각종 훈·포장 및 표창 수상자 531명과 수출탑 수상업체 487개사를 선정,29일 발표했다. 영예의 금탑산업훈장에는 申英均 대우중공업 사장과 崔炳哲 극동전선공업 사장 등 2명이 공동 수상자로 선정됐다.申사장은 일본 조선업계와 동등한 가격으로 경쟁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한 공로가,崔사장은 산업용 전선의 일본 진출과 신기술 개발 공로가 높이 평가됐다. 은탑산업훈장 수상자로는 崔旭洛 (주)한화 사장과 朴正仁 현대정공 사장, 李文成 제일엔지니어링 부회장,金載憲 대신통상 사장,宋仁鎬 (주)을화 사장 등 5명이 선정됐다. 올해 제정된 150억불탑은 (주)대우와 삼성물산,현대종합상사 등 3개사가 수상했다.
  • 성공적 구조조정 삼성 ‘표정관리’

    ◎200개 사업 分社 등 성과 점차 가시화/수출 늘고 외화유치로 자금 여유 생겨 삼성이 신났다. 연초부터 추진해 온 구조조정의 성과가 가시화되고 있는데다 거액의 외자유치와 수출 호조가 맞물려 연일 휘파람이다. 업계에서는 삼성이 ‘표정 관리’에 신경쓰고 있다는 말까지 나온다. 최근에는 구조조정을 압박하고 있는 정부로부터 잘하고 있다는 ‘칭찬’도 들었다. 구조조정 사령탑격인 李憲宰 금융감독위원장은 지난 13일 “삼성이 200여 사업부문을 분사화하고 있고,부실계열사 정리와 외자유치에 가장 적극적으로 나서 괄목할만한 성과를 거두고 있다”고 높게 평가했다. 19일에는 삼성자동차가 사원 강제판매에 대해 공정위로부터 2억4,000여만원의 과징금밖에 부과받지 않는 ‘횡재’를 했다. 19억원의 과징금을 부과받은 대우자동차와 대조적이다. 삼성은 올들어 27억8,600만달러의 외자를 유치,이 부문에서 단연 선두다. 5억달러 규모의 부천 반도체공장도 해외매각을 앞두고 있어 올해안에 35억달러 이상의 외자도입이 예상된다. 또 1만명 이상을 정리했고 5대 그룹 사업구조조정을 통해 대산 석유화학단지와 항공기,선박용 엔진부문을 털어냈다. 부담스러운 것이라면 삼성자동차 정도다. 인원정리와 경비절감을 통해서도 올해 15억달러 이상을 절약했다. 주식시장에서도 14개 상장사의 시가총액이 14조5,000억여원으로 전체 상장사의 15.5%. 2위를 3배 가량 앞서는 부동의 1위다. 이때문에 업계에서는 삼성이 머지않아 대대적인 사업확장에 나설 것이라는 전망마저 나온다. 외자유치와 구조조정으로 자금에 여유가 생겼고 특히 기아자동차 인수를 위해 준비했던 자금이 인수포기로 ‘남아돌게’ 됐기 때문이다. 벌써부터 통신사업에 눈독들이고 있다는 얘기가 들린다.
  • 換亂책임 싸고 3黨3色 공방/경제분야 대정부질문

    ◎국민회의­“경제위기 김영삼정부 실정 탓”/자민련­현·구정권 추궁속 등거리 전략/한나라­“조기 대처 실패… 총체적 책임” 16일 경제 분야 대정부질문 첫날은 내달 8일로 예정된 ‘경제청문회’의 전초전을 방불케 했다.IMF 환란(換亂)위기 초래부터 기업·금융구조조정의 난맥상까지 여야의 치열한 공방전이 이어졌다. 국민회의 의원들은 현 경제위기 원인을 金泳三정부의 실정(失政)탓으로 돌리면서 책임 소재를 분명히 했고 한나라당 의원들은 현 정부의 ‘정책혼선’에 초점을 맞추면서 ‘동반책임론’으로 맞불을 놓았다.반면 자민련 의원들은 과거 정부의 각종 경제 실정을 추궁하면서도 현 정부의 구조조정 과정의 문제점을 짚는 등 ‘등거리전략’을 구사,3당3색의 시각차를 노출했다. 한나라당 李相得 의원이 포문을 열었다.그는 “96년 당시 야당이 정리해고제 즉각 도입과 금융감독 통합법안 통과에 초당적 협조를 했다면 외환위기 대처에 많은 도움이 됐을 것”이라고 전제,“현 경제위기는 어느 누구도 벗어날 수 없는 총체적 책임”이라고 공동책임을 강조했다. 이에 국민회의 韓英愛 의원이 즉각 반격에 나섰다.그는 IMF 관리체제 직전 한국개발연구원(KDI)과 한국은행의 ‘외환위기 경고’를 무시한 ‘YS정권’의 무사안일한 대처 능력과 당시 경제사령탑인 姜慶植·金仁浩라인의 ‘허위보고 의혹’을 집중 거론했다. 현 정부의 ‘경제정책’도 도마 위에 올랐다.한나라당 羅午淵·申榮國 의원 등은 재벌간 빅딜,금융·기업구조조정의 혼선을 지적한 뒤 “경제개혁의 마스터 플랜도 없는 현 정권은 즉흥적인 정책 대응으로 경제위기를 가중시키고 있다”며 ‘제2환란 위기’를 경고했다. 국민회의 朴光泰 의원은 “국민의 정부의 힘 있는 개혁으로 경제회생의 기반이 마련됐다”고 한나라당 공세를 일축했다.그는 ▲외환보유고의 지속적인 확충 ▲금리의 지속적인 인하 ▲경상수지 흑자 및 환율 안정 등을 주요 근거로 내세웠다. 답변에 나선 金鍾泌 총리는 “그동안 부도위기의 국가를 인수해 최선을 다한 결과 내년부터 플러스 성장이 기대된다”며 “중·장기적 안목을 갖고 차근차근 경제개혁에 나서고 있는 만큼 멀지않아 가시적 효과가 나타날 것”이라고 밝혔다.
  • 金 대통령 上海 방문 이모저모/韓·中 교역­투자 확대 역설

    ◎‘세일즈 외교’ 강행군 【콸라룸푸르 梁承賢 특파원】 金大中 대통령은 15일 아·태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가 열리는 말레이시아 콸라룸푸르에 도착,16일 마하티르 말레이시아 총리와의 정상회담으로 공식일정을 시작한다. 金대통령은 이에 앞서 14일에는 중국의 ‘미래’로 일컬어지는 상하이(上海) 푸동(浦東)개발지구를 방문하고 경제인 초청 연설을 하는 등 세일즈 외교를 계속했다. ○말聯 도착 APEC 일정 돌입 ▷콸라룸푸르 도착◁ 중국방문을 마친 金대통령은 이날 오후 말레이시아 분가라야 공항에 도착,李炳浩 주말레이시아대사의 기내영접을 받는 것으로 4박5일간의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일정에 들어갔다. 金대통령은 특별기에서 내려 사바루딘 칙 말레이시아문화관광장관의 영접을 받고 李대사의 소개로 崔송식 한인회장 등 환영인사들과 반갑게 악수했다. 金대통령 내외는 공항 국빈실에서 사바루딘장관 내외와 환담한 뒤 숙소인 힐튼호텔로 이동,여장을 풀었다.이어 말레이시아 영자지 뉴스트레이츠타임스와 회견을 가졌다. ○한국 기업 참여 지원 당부 ▷상하이 당서기 주최 만찬◁ 金대통령은 14일 저녁 숙소인 상하이 진지양(新錦江)호텔에서 쉬쾅디(徐匡迪)시장이 주최한 만찬에 참석했다.金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베이징에서 주룽지(朱鎔基)총리로부터 다짐받은 한·중 경제협력사안을 소개하고 상하이 개발과정에 한국기업이 많이 참여할 수 있도록 지원해달라고 요청했다. 金대통령은 만찬에 앞서 쉬 시장과 20여분간 면담한 자리에서도 “한국이 내년이면 외환위기를 극복하고 중국의 거대한 시장에 적극 참여할 것”이라고 중국진출 의지를 밝히고 “한국의 섬 가거도에선 상하이의 닭우는 소리가 들릴 정도”라며 한국과 상하이간 협력의 지리적 이점을 강조했다. 양국 대표팀간의 축구 경기도 화제가 돼 金대통령이 “중국은 예의가 바른 탓에 한국 대통령이 와서 져줬다”고 중국팀의 패배를 위로하자 쉬 시장은 “우리가 한국에 가면 3대0으로 져달라”고 농담을 하기도 했다. ▷푸동지구 시찰◁ 金대통령은 이에 앞서 이날 오후 李姬鎬 여사와 함께 상하이 푸둥지구의명물 동방명주탑에 올라 상하이시 전경을 관람했다. 金대통령 내외는 탑입구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곧바로 263m 높이의 전망대에 도착,황포강과 어우러진 상하이시 빌딩들의 야경을 둘러봤다. 金대통령은 전망대를 돌면서 중국측 안내자에게 “동방명주탑의 위치가 푸동의 어디쯤 되느냐” “대형건물이 몇개쯤 되는가”라고 궁금한 것을 묻는 등 깊은 관심을 표명했다. 이에 중국측 안내자가 “지난 92년 덩샤오핑(鄧小平)지도자가 남방순화를 한뒤 200개가 들어섰다”고 답하자 놀라움을 표시하기도 했다.중국측 안내자는 “시간이 빨랐더라면 한폭의 풍경화를 보셨을 것”이라고 주위가 어두워진데 대해 아쉬움을 토로한뒤 “이 곳 탑에서 바라보면 상하이시가 한 폭의 중국그림 같다”고 설명했다. 金대통령은 전망대에서 상하이시 전경을 둘러본뒤 1층 입구에 마련된 방명록에 ‘축 동방명주’ ‘부국강민(富國强民)’이라고 한자로 쓴뒤 동방명주탑 모형을 방문 선물로 받았다. ○“독립 믿음 줬던곳” 인연 강조 ▷경제인초청 연설회◁ 金대통령은 14일오후 숙소인 진지양 호텔에서 이 지역 한·중 경제인 200여명을 초청,강연회를 갖고 한·중간 교역,투자의 확대 필요성을 강조했다.金대통령은 강연에 앞서 중국 방문을 수행중인 한국의 경제 6단체장을 소개하면서 “해외방문 때 경제단체장들을 수행토록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며,이는 한국이 중국과 상하이를 중시하고 있다는 의미”라고 말해 박수를 받았다. 金대통령은 연설에서 “상하이는 제국주의 시절 우리에게 독립에 대한 희망과 믿음을 안겨주었다”고 인연을 부각하고 “이제 상하이가 양국의 번영된 미래를 약속할 희망의 땅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金대통령은 이어 “세계의 변화 속에서도 끊임없는 개혁과 적극적인 도전만이 번영과 발전을 기약할 수 있다”고 지적하면서 “한·중간 경제협력에 있어서 대담하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적극적인 도전정신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金대통령은 또 “한·중 양국이 아시아 경제의 회생을 위해 중심적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면서 “두 나라 경제협력은 무역과 투자로부터 금융과 환경,에너지와 과학기술 분야로까지 폭을 넓혀야 한다”고 제안했다.
  • 충청 젖줄 금강 오염현장(4대강 上水源 긴급점검:3)

    ◎생명 잃은 비단강… 취수장 주변 악취 진동/낚시꾼 등 행락객 몰려 상류부터 몸살/지천 축산폐수 유입… 곳곳 물고기 떼죽음/하류공단서 검은 물 쏟아내 유유히 바다로 금강(錦江)은 더이상 비단강이 아니다.전북 장수군 장수읍 수분리에서 발원(發源)해 대청호를 거쳐 금강하구둑까지 장장 396㎞를 내달리며 충남과 전북의 젖줄 역할을 해온 금강.대청호 인근의 상류는 비교적 깨끗하지만 곳곳에 오염원이 널브러져 있고 하류는 탁류로 변한지 이미 오래다.대전 갑천,공주와 부여 등 취수지역을 거쳐 흐르는 금강의 오염현장을 상하류로 나눠 심층취재했다. 충청과 전북 일원 300만 주민의 생명수인 금강은 상류인 대청호에서부터 심한 몸살을 앓고 있다. 대청호 상류인 충북 보은군 회남면.평일인데도 수백명의 낚시꾼들이 회남대교 주변을 비롯한 곳곳에서 낚싯대를 드리운채 장사진을 치고 있고 호수 가장자리엔 음식찌꺼기와 빈깡통·비닐 등이 둥둥 떠다니고 있다. 주민 梁承鎬씨(35)는 “휴일에는 낚시꾼들이 상수원보호구역까지 몰려들고 있다”고 말한다.금강유원지 옥천천은 훨씬 심하다.사람들이 뱃놀이를 즐기고 있는 강물 위에는 각종 오물과 쓰레기가 떠다니고 수중보를 가로지르며 차량행렬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하류로 내려가면서 금강의 몸살은 중병으로 바뀐다.생명력은 아예 찾아볼 수 없고 언뜻 보기에 흐린 먹물을 푼 것같다. 백제의 고도(古都) 충남 부여군 부여읍 구드래나루터 앞 금강 본류인 백마강은 거무스름한 물로 넘실거렸다.자세히 들여다 보면 검은 깨같은 모양의 부유물질이 물속을 떠다닌다.물속 50㎝에 있는 물체조차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 탁했으며 비가 오면 황토물로 뒤덮여 20㎝ 물속도 보이지 않는다는게 주민들의 얘기다. 삼천궁녀 나당(羅唐)연합군에 밀려 치마폭을 감싸안고 뛰어 내렸던 낙화암 밑은 옛날의 청정한 물빛을 잃은지 오래다. 낙화암을 구경하고 유람선에서 내려오는 관광객들도 비릿한 냄새에 인상을 찌푸린다. 하류로 더 내려가 백제교에 이르자 하수종말처리장을 거치지 않은 부여읍의 생활하수가 검은 빛을 드러내며 마구 쏟아진다. 구드래나루터 뱃사공張모씨(65)는 “비가 오든 안오든 항상 물이 흐리다”며 “10년 전만 해도 마음놓고 수영을 했는데 요즘엔 헤엄을 치면 금방 피부병이 생긴다”고 말했다.그는 10년 전 여름에는 백사장 앞에 수영장이 마련돼 하루 수백명이 찾았지만 지금은 배를 타고 공주쪽으로 가다보면 분뇨냄새가 코를 찌른다고 말한다. 낙화암에서 200m 위쪽에 있는 부여취수탑은 오염상태가 더 심하다.취수탑 50m쯤 위에서는 생활하수와 밭고랑의 농약 등이 섞인 정동천이 썩은 물을 마구 토해낸다.그 물은 곧바로 금강과 섞이면서 취수탑으로 빨려 들어간다.부여읍 쌍북리 부여취수장 입구에 있는 농지개량조합의 대형 펌프장에는 지푸라기와 비닐 등 각종 쓰레기가 쌓인채 악취를 풍기며 썩고 있다. 충남 부여군·논산시,전북 전주·군산·익산시 등 주민 60만명에게 하루 27만t의 식수를 공급하고 있는 부여취수장.대전과 공주시 등 300여만명이 매일 쏟아내는 생활하수 100만여t과 2,400여 업체가 버리는 12만t의 산업폐수가 흘러든다. 공주시민 5만여명에게 하루 2만8,000t의 물을 공급하는 공주취수장도 마찬가지다.검은 물이 취수탑으로 곧바로 빨려 들어간다. 공주시 반포면 공암리 ‘청벽’에서 충남도산림환경연구소로 가는 비포장도로 옆의 바위틈에는 플래스틱과 종이 등 쓰레기가 볼썽사납게 처박혀 있다.여름철마다 어른 팔뚝만한 붕어 수십마리가 떼죽음당해 창자가 터져나온 배를 허옇게 드러낸채 썩어가던 곳이다. 금강은 대청호를 벗어나면서 대전시민의 생활하수와 산업폐수를 쏟아내는 갑천으로 인해 급격히 더러워진다.대전하수종말처리장이 건설돼 많이 나아졌으나 지난 95년과 96년만 해도 12*을 훨씬 넘었다.하지만 갑천은 하수종말처리장이 들어섰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시커먼 물줄기를 금강으로 뱉아내고 있다. ◎朴鍾奭 금강환경감시대 반장/정화시설 확충안되면 수질개선 절대 불가능 “근본적으로 수질개선을 위해서는 환경기초시설 확충과 주민들의 의식전환이 가장 시급합니다” 환경부 금강환경감시대 朴鍾奭 반장(43)의 수질개선책 진단이다.금강과 지천에 인접한 지자체가 하수종말처리장과 분뇨처리장 등을 제대로 갖추지 않고서는 절대 수질이 개선될 수 없다며 朴반장은 이렇게 강조했다. ­금강 오염의 주요인은 무엇인가. ▲생활하수와 축산폐수다.총 오염 부하량의 52%와 20%를 차지한다.농지에서 흘러내리는 농약 등 농업폐수도 12.5%나 된다.산업폐수는 3.6%로 예상보다는 많지 않다. ­골재 채취는 어떤가.환경에 미치는 영향이 적지 않다는데. ▲웅덩이가 생겨 물 흐름이 늦어지면서 고인 물이 썩게 된다.모래와 자갈이 갖는 특유의 자정력을 잃기 때문이다.현재 금강에는 공주시 9곳,부여군과 연기군 각 6곳 등 충남도내 8개 시·군 35곳에서 골재를 채취하고 있는데 환경영향평가를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다. ­근본적인 수질개선 대책이 있는가. ▲무엇보다 지자체가 오염방지에 앞장서야 한다.하수종말처리장을 설치,생활하수와 산업폐수 등을 정화,방류해야 한다.분뇨처리장도 시급하다.폐수방류에 대한 단속도 강화해야 한다.축산폐수도 문제다.어느것 하나 심각하지않은 게 없다. ­제도적으로 보완돼야할 점은. ▲배출허용 기준을 강화해야 한다.현재 공장에서 하루 2,000t 이상의 폐수를 배출할 때 BOD(생물학적 산소요구량)를 80ppm이하,2,000t 미만일 때는 120ppm이 기준이다.이는 지자체 하수종말처리장과 공단의 공동폐수처리장에서 배출하는 방류수질 기준인 하수 20ppm과 폐수 30ppm에 비해 너무 높다.기업의 경제성을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기준이 강화돼야 한다.
  • 의병활동(다시 태어난 ‘대한매일’:13)

    ◎“을미 거사는 국권회복 명분” 보도/을사조약후 항일 상보/‘비분강개’ 논조 의병 급증/실력 양성 노선 권고 통감부 진압 강력 비판 일제의 병탄 마수에 붙잡힌 대한제국은 날로 허수아비 국가가 되어갔다.주권뿐 아니라 대다수의 신민도 얼이 빠져갔으나 뜨거운 피의 백성들은 의병으로 나섰다.대한매일신보는 민중의 구국 의용군인 의병에 뚜렷한 지지를 표했다. 일제는 한일신협약의 비밀각서에 따라 고종을 퇴위시킨 지 보름도 안된 1907년 8월1일 대한제국의 군대를 해산했다.이때 많은 병사들이 해산을 거부하고 봉기,의병으로 나서 의병항쟁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일제가 민비를 시해한 을미사변(1895년)과 을사늑약 체결 때도 곳곳에서 의병들이 봉기했었다.고종 퇴위,군대 해산을 당해서 일어난 의병은 어느 때보다 규모가 컸고 조직적이었다.1907년에는 300여차례 일본군과 무장충돌했으며 1908년에는 1,400여회나 일본군과 맞붙어 싸웠다. 대한매일은 군대 해산에 반발한 봉기에 대해 군인으로서 무장해제를 당하는 것은 최고의 굴욕이며 이 명령에 복종하지 않은 것은 놀랄 일이 아니라는 논조를 폈다.의병활동 소식을 비교적 상세히 보도하면서 의병의 성격과 원인 및 수습대책 등을 제시해 나갔다. 그러나 초기에는 의병에 대해 보수적이며 비판적이었다.첫 의병이 나온 을미사변으로부터 10년이 흐른 1905년 9월 대한매일은 명칭만 의병이지 그 목적은 마을에 돌입하여 곡식과 돈을 강탈하며 총검을 수탈하는 도적(匪徒)과 같다고 했다.그러다 을사늑약 이후 견해를 달리하면서 다른 신문보다 상세히 의병 소식을 보도한다.군대 해산 이후에는 한층 더 하였다. 대한매일은 1906년 5월 “을미년 거사는 국가의 원수를 갚는 것을 의로 삼았으며 금년 거사는 국권회복을 명분으로 한다”고 말했다.국권회복 방안으로 실력양성 쪽에 무게를 두었던 대한매일로서 무력항쟁인 의병활동 역시 그 목표가 같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에 따라 한말 유생들의 입장을 서술하고 의병들의 활동을 자세하게 기록했던 黃玹은 매천야록 1906년 조에 “각 신문들은 의병을 폭도나 비류라고 불렀으나 유일하게 대한매일만은 의병이라 칭했다.시비를 가리고 논하는 데 조금도 굴함이 없고 일본의 악독함을 낱낱이 폭로하여 사람들이 서로 다퉈 보려고 해 일시에 신문이 귀해졌다”고 썼다. 또 이같은 대한매일의 기사를 읽고 비분강개하여 의병에 가담하고 일본에 저항했다가 체포된 의병들이 진술한 내용을 주한 일본공사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예를 들어 의병장 이강녕의 모집대장인 이중봉은 대한매일을 읽거나 그 기사를 전해듣고 분개하여 의병이 되기로 결심했다고 말했으며 농사 인부로 하와이로 갔다가 귀국한 김현진이란 사람은 대한매일에서 일본이 강제로 황제에게 한일신협약을 조인케 하고 일본인들이 토지를 빼앗는다는 기사에 격분했다고 진술했다는 것이다. 이같이 대한매일은 일제의 침략적 소행을 사실적으로 보도했으며 국민에게 국가의식을 고취하고 항일정신을 심어주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또 대한매일은 1907년 9월 일본이 고종 양위를 강행하고 군대를 일시에 해산시킨 ‘망녕된’ 행동에서 의병이 일어났다고 꼬집고 있다.이어 정치적 이유와는 상관없이 일본에게 억울하게 경제적 피해를 당한 양민들이 유생과 군인을 따라 의병에 가담한다고 지적했다.아울러 통감부가 진압책으로 의병을 도와준 동리뿐 아니라 의병이 머물렀던 마을까지 불을 지르는 바람에 오히려 의병 수가 늘어나고 있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의병들의 활동을 어느 신문보다 자세히 보도한 대한매일이지만 의병의 증가가 대일 항전의 승리를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보았다.그래서 통감부의 과도한 진압책을 비판하는 한편 의병에 대해서도 분노를 가라앉히고 의거만큼이나 각자 교육과 식산에 힘쓰면 자주국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의병들에게 실력양성 노선으로의 전환을 권한 것이다. ◎신랄한 시사만평/“황족귀인… 매국노… 개돼지만도 못한…” 의병의 정반대편에 친일파,특히 이완용 내각이 서 있다.대한매일은 시사만평을 통해 이들을 신랄하게 풍자했다.1907년 기사 중에서 몇개를 골라본다. ▲여보 세계 각국 사람이여 매국노를 다수 수입하려거든 대한으로 건너오시오 황족 귀인과 정부대관이 매국노 아닌사람이 없소 대금도 아주 싸요 그것은 사다가 무엇하게 개 돼지만도 못한 것을 거저주어도 가져가지 않겠네. ▲이른바 황제 선위의 ‘七賊대신’이 비밀 모사와 기이 술책으로 이미 이름을 날린 바 앞으로 무슨 공명을 더 얻을까 일본에 대 공훈을 세워주었으니 일본 내각대신 자리를 얻을지. ▲이번 7조협약은 각 대신이 농공상대신 송병준씨 사가에 모여 의결하였으니 4천년 대한국이 일개 송병준 수중에 엎어질 줄 누가 예측이나 하였으리오. ▲한국 내각을 장차 일본인으로 조직하리라 하니 현 내각 대신들은 추풍낙엽이 될지라 그때를 당하여도 뇌수에 정신이 들지 안들지. ▲일본인 거류지 니현 근처에 대한 관인의 인력거 등불이 야시를 이룬다 하니 한인 자격으로 일인과 한번 교제를 하게 되면 그것이 바로 등용문이겠지. ▲일진회에서 일본인의 앞잡이가 되어 선언서를 한다 기념연을 한다 국채보상을 반대한다 하더니 마침내 이 회 평의장이 농부대신의 지위를 점거했으니 가위 공든 탑이 무너지랴로고. ▲일본서 차관한 1,300만원 중에 100만원은 구문으로 사라졌다니 구문은 누가 간섭하였는지 전국 재정을 주관하는 금고대신(탁지부)은 이 책임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니 인민은 술 끊고 밥 줄여 잔금을 출연하니 털보 대감(민영기)은 어찌 마음이 편할까.
  • 日,한국인 입국심사 대폭 강화

    ◎관광비자로 불법취업 늘자 ‘거부’도 급증/3·4분기만 600여명… 작년보다 7배나 늘어/“가진 현금 적고 호텔예약 안했다” 쫓겨나기도 중소기업 사장 A씨(45)는 지난달 초 일본으로 출장을 갔다가 입국심사에서 쫓겨났다. 호텔을 예약하지 않았고,신용카드를 쓸 요량으로 현금을 충분히 가져가지 않은 게 화근이었다. A씨는 입국심사대에서 “숙소 연락처를 대라”는 직원에게 경비를 아끼기 위해 호텔에 묵지 않을 계획이라고 설명했지만 곧바로 김포공항으로 돌아와야 했다. 입국 목적이 분명하지 않다는 게 이유였다. 올들어 외국 공항의 입국심사를 통과하지 못하고 되돌아오는 사람이 크게 늘고 있다. 90% 이상이 일본으로 가려다 실패한 사람들이다. 일본은 최근 한국인에 대한 입국심사를 강화,방문기간 중 머물 장소가 분명치 않거나 만날 사람에게 연락이 닿지 않으면 입국을 거부하고 있다. IMF체제 이후 관광비자로 일본에 입국한 뒤 취업하려는 사람들을 차단하기 위한 조치로 풀이된다. 특히 입국 거부자의 70% 이상은 20∼30대 젊은 여성들이다.유흥업소에 불법 취업할 우려 때문이다. 지난 3·4분기 중 입국이 거부돼 돌아온 사람은 7월 215명,8월 242명,9월 199명으로 지난해 같은기간에 비해 최고 7배나 늘었다. 이달 들어서도 하루 평균 15명,많을 때는 30여명이 무더기로 돌아오고 있다. 입국이 거부된 사람들 중에는 여권 위·변조범도 있지만 적법절차에 따라 여권과 비자를 받은 사람도 적지 않다. 이들은 왕복 항공비와 시간 등 물질적·정신적으로 큰 피해를 볼 수밖에 없다. 입국심사 강화와 함께 일본비자 발급절차도 까다로워졌다. 관광·방문비자를 받으려면 종전에는 재직증명서만 내면 됐으나 요즘에는 직장에 전화를 걸거나 직접 방문해 확인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여행사들은 이에 따라 일본을 방문하려는 관광객들에 대한 사전 교육을 강화하고 있다. 탑항공사 송출과 鄭芝薰씨(29·여)는 “떠나기 전에 호텔을 예약하고 연고자에게 미리 연락해 두는 것은 물론 돈도 너무 많거나 적게 가져가지 말도록 당부하고 있다”고 말했다. 남편이 도쿄(東京)의 일본인 회사에서 일해 일본을자주 방문한다는 B씨(35·서울 마포구 망원동)는 “일본에 입국하려면 여러가지를 꼬치꼬치 캐묻는 등 최근 심사가 까다로워졌다”면서 “일본에서 한국인의 이미지가 나빠졌음을 피부로 느낄 수 있다”고 전했다. 김포 출입국관리사무소의 한 관계자는 “이유가 있기 때문에 입국을 거부당하겠지만 억울한 피해자도 상당수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 野 공세에 與 맞불 ‘銃風’ 대격돌/국회 정보위

    ◎與­피의자들에 회합죄 적용 이유 추궁/野­“고문·野 지도부와 연계 의혹 밝혀라” 21일 열린 국회 정보위원회에서 여야의원들은 ‘판문점 총격요청사건’의 실체와 고문의혹 등을 추궁했다. 여야의원들은 관련 피의자들에게 외환유치죄가 아닌 단순회합죄를 적용한 이유,한나라당 李會昌 총재 등 지도부의 연루여부,수사과정에서의 고문의혹 등을 집요하게 파헤쳤다. 야당의원들은 특히 張錫重씨 등 이른바 ‘총풍3인방’에 대한 수사과정에서의 고문조작 의혹,한나라당 지도부와의 연계의혹을 물고 늘어졌다.이에 대해 李鍾贊 안기부장은 “선친이 고문피의자여서 내가 재임하고 있는 동안만큼은 고문이 절대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고 일축했다. 한나라당 지도부와의 연계여부에 대해서는 “조사과정에서 일부 의혹이 있어 조사하고 있는 것일뿐 연계에 염두를 두고 조사한 것은 아니라”라고 밝혔다.朴寬用 의원의 연루여부에 대해서는 “조사해보았으나 사실 무근이다”라고 누명을 벗겨주었다. 한나라당 의원들은 또 87년 KAL기 폭파사건과 관련,최근 안기부가 자료를 통해 의혹을 제기한 배경을 따졌다.李부장은 “과거 안기부가 증폭한 사실을 강조한 것일뿐 안기부의 진의는 아니었다”고 해명했다. 야당의 공세가 날카롭게 전개되자 공동여당 원내사령탑인 국민회의 韓和甲,자민련 具天書 의원 등도 나서 “판문점총격요청사건은 국기를 문란케 한 중대범죄”라고 거들었다.‘총풍사건’피의자들에게 외환유치죄가 아닌 회합죄를 적용한 이유에 대해 안기부측은 “피의자에게 유리한 법적용을 한 것일뿐”이라고 설명했다. 여야의원들은 국가보안법의 인권침해부분 개정여부,감청공포 불식방안 등에 대해서도 캐물었다.국감 증인채택과 관련,여당측은 관행상 안기부장만 증인으로 채택하자는 반면 야당의원들은 실무국장급이상 전 간부와 ‘총풍’수사담당자들도 세워야한다고 해 뚜렷한 결론을 내지 못했다.
  • 어떤 신문이었나(다시 태어난 ‘대한매일’:1)

    ◎日帝 총칼에 맞선 ‘자유언론 표상’/애국지사 논객 총결집/日 침략­관료 무능 질타/국채보상운동 등 이끌어/항일투쟁·국권수호 선봉 ‘不允’(불윤).1905년 11월18일 아침.러일전쟁의 포연이 가시지 않은 서울 장안 거리의 화두는 “허락지 않으심”을 의미하는 이 한 마디였다. “韓皇陛下게옵셔 韓國獨立을 重念하시와 正大한 義理로 拒絶하신즉 伊藤 대사가 再三强請하되 强경 하신 勅語로 不允하셨다더라”(한국황제폐하께서는 한국의 독립을 중요하게 생각하시어 정대한 도리로서 거절하시자,이토 대사가 재삼 강청하였으나 강경한 말씀으로 허락지 않으셨다 한다) 이날자 대한매일신보에 보도된 ‘勅語嚴正’(칙어엄정) 제목하의 잡보(보도기사) 첫 기사 중에 있는 이 말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고 국민들은 일제 앞에서 “No”라고 당당히 말한 황제에 박수를 보냈다.전날 이토 일본대사가 고종 황제를 알현,소위 을사조약으로 알려진 외교권 박탈을 요청한 4가지 내용을 보도하고 이에 대한 황제의 강력한 반대를 전한 것이었다. 이는 일제의 총칼이번득이는 상황하에서 상상할 수 없는 것으로 당시 신문중 대한매일신보만 유일하게 보도했다.특히 본문활자로 된 기사내용에서 유독 ‘不允’ 두 글자만 가장 큰 2호활자로 두드러지게 인쇄한 것은 고종의 반대 강도에 대한 표현이자 대한매일 입장의 대외적 천명이기도 했다. 1904년 7월18일 영국인 배설(裵說)을 발행인으로 내세워 총무 양기탁(梁起鐸)등 우국지사들이 모여 창간한 대한매일신보는 동아시아의 새로운 세력으로 부상하던 일본의 한반도 침략 야욕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던 상황에서 자유언론을 통한 항일투쟁으로 조국의 국권수호를 위해 태어났다. 이후 한일합방 다음날인 1910년 8월29일 종간될 때까지 6년 1개월여간 대한매일신보는 우리민족의 국운이 백척간두에 선 역사상 가장 위급한 시기에 굳건한 자세로 항일의지를 불태웠고 국민의 든든한 동반자로서의 역할을 했다. 대한매일신보가 이같이 민족정론지로서의 소임을 다할 수 있었던 것은 발행인이 영국인 배설로 돼있어 치외법권적이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총무 양기탁과 주필 박은식을 비롯,필진 신채호 장도빈 안창호 등의 투철한 애국심과 자주의식에 따른 것이었다.그들은 일제 침략과정의 부당성을 낱낱이 공개하고 당시 무능한 대신 및 관리들의 실정과 부패상을 질타했다. 반대로 전국 방방곡곡에서 벌어지고 있던 의인들의 애국적 활동상에 대해서는 대서특필을 아끼지 않았다.국채 1,300만원을 갚기 위해 분연히 일어섰던 국채보상운동 캠페인을 주관했고,그 활동상 소개와 함께 매일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참가자 명단을 2∼3개 면에 걸쳐 상세히 게재함으로써 전국적인 참여의 불을 지폈다. 또 을사조약과 고종 퇴위 및 군대 해산 직후에 전국적으로 일어났던 의병활동을 적극적으로 보도,항일 투쟁의식을 고취해 나갔다.산발적인 보도가 아니고 ‘처처의병’ 등 고정란을 만들어 매일 소개했고 13도 창의군의 서울진격 때는 격문을 게재,의병지원자가 구름같이 모이게 하기도 했다. 또한 ‘한국의 실업’‘동양척식회사 설립문제’등 논설로 일제의 경제적 침투 반대와 우리민족의 자주적 산업 건설의 필요성을 일깨우기도 했다.교육의 중요성을 강조,민족교육자들의 학교설립취지서를 적극 지면에 게재,1907년 말 공사립 보통학교가 전국에 4,000개에 달하게 하는 등 교육운동에도 적극적이었다. 그밖에도 대한매일신보가 순한글판 발행을 통한 국어 발전,연재소설 게재를 통한 국문학 발전,또 여성교육 필요성 제기로 여권 신장 등에 미친 영향은 이루 헤아릴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능한 정부와 역적무리들의 매국은 대한매일신보의 노력을 미완(未完)에 그치게 하고 말았다.그러나 그 불굴의 자유언론 정신과 국난극복의 의지는 우리 언론사에 금자탑으로 남아있다.그리고 이제 그 숭고한 정신과 의지의 완성을 위해 ‘대한매일’의 첫걸음이 다시 시작되는 것이다. ◎대한매일신보 연표 ▲1904년 7월18일 창간.(영문판 4면,국문판 2면) ▲1905년 8월11일 영문판(The Korea Daily News) 분리 발행. ▲ 〃 11월18일 을사조약 다음날.고종의 조약거부 기사 ‘칙어엄정’게재. ▲1907년 1월16일 을사조약이 무효임을 선언하는 고종의 칙서공개.(영문판에도 번역 게재) ▲ 〃 2월21일 국채 1,300만원 보상운동 제창. ▲ 〃 5월23일 국문판 대한매일신보 별도 발간. ▲ 〃 11월말 전국 지사수 32곳. ▲1908년 3월6일 관보 전재 폐지. ▲ 〃 4월29일 신문지법 개정.외국인 발행 신문도 발매 금지 및 압수 가능. ▲ 〃 5월27일 발행인 만함(Alfred W. Marnham)으로 변경. ▲ 〃 5월말 현재 부수 1만3,400부. ▲ 〃 7월12일 통감부, 양기탁을 국채보상의연금 횡령으로 몰아 구속케 함 ▲1909년 5월 1일 배설 사망.영문판 중단. ▲1910년 5월21일 통감부,만함에게 7,000엔(700파운드) 주고 대한매일신보사 인수. ▲ 〃 8월29일 한일합방으로 대한매일신보 종간. (국한문판 1,461호,국문판 938호)
  • 검찰 銃風 수사 이모저모/진로 張震浩 회장 이틀째 참고인 조사

    ◎북측인사 접촉 녹음테이프 확보 시사 검찰은 9일 ‘판문점 총격요청 사건’으로 구속된 韓成基씨 등이 총격요청설을 전면 부인하는 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진로그룹 張震浩 회장을 8일에 이어 이틀째 참고인 조사를 하는 등 수사에 박차를 가했다. 검찰은 총격요청 사실을 입증할 제3의 인물과 북측 인사,접촉 당시의 녹음테이프 등 결정적인 물증을 확보했음을 시사하는 등 자신감을 나타냈다. ○…8일 소환된 張회장은 언론에 노출되는 것을 꺼려 밤샘조사를 자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 고위관계자는 “기왕 불렀으니 의문난 사항은 모두 조사하고 있다”면서 조사가 광범위하게 진행되고 있음을 암시했다. 張회장에 대한 조사가 길어지자 한때 피의자로서 조사받는 것이 아니냐는 관측이 제기됐으나 검찰은 “어디까지나 참고인 신분”이라고 일축했다. ○…공안1부 검사들에게는 기자는 물론 외부인과의 접촉을 피하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또 신문의 보도를 보면 의혹부분에 치우칠 가능성이 있다는 판단에 따라 신문도 되도록이면 보지 못하도록 했다.검찰은 이에 따라 신문 스크랩을 전담,분석하는 검사를 지정해 언론의 보도내용을 점검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 고위관계자는 “만약 수사기밀이 검사들로부터 새어나간 사실이 드러나면 문책하겠다는 경고도 주지시켰다”고 강조했다. 이밖에 수사의 사령탑인 朴舜用 서울지검장에게 보고할 때도 보안을 의식,서면 보고가 아닌 구두 보고로 대체하도록 했다. ○…검찰이 야당의 고문조작 주장과 피의자들의 진술 번복에도 불구하고 여유있는 모습을 보이자 검찰이 확보한 ‘결정적인 물증’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물증이란 韓씨와 吳靜恩씨,그리고 한나라당 李會昌 총재의 동생 會晟씨간에 오간 전화통화 감청 자료라는 게 일반적인 관측이다. 이들이 대선 직후 사건을 은폐·축소하기 위해 말을 맞추는 전화 통화내용을 증거자료로 확보했다는 것이다. 이를 증거로 제시하면 구속된 吳씨 등이 부인하더라도 실체적 진실을 규명할 수 있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안기부가 확보한 통화 감청내용은 영장없이 불법으로 수집된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 ‘품바’ 제작·연출 김시라(금지문화금지인생 이제야 말한다:10)

    ◎따끔한 풍자 뜨끔한 군정 따가운 ‘압력’/‘광주’ 작품부터 당국서 험한 눈길/통일타령 ‘남바’ 막조차 못 올려/해외무대도 숱한 훼방 시련/‘18년간 4,000회’ 최다공연 금자탑 “어허 품바 잘도 헌다/어허 품바 잘도 헌다/일자나 한장 들고나 보니/일각이 여삼춘디/40분단이 웬말이냐/두이 이자를 들고나 보니/이화 도화는 만발헌디/이산민족이 슬피운다/…중략…/장하도다 우리민족/평화통일을 기다린다/어허 품바가 잘도 헌다/어허 품바가 잘도 헌다”(金詩羅작·연출 품바중 통일품바타령) 지난 81년 첫 선을 보인 뒤 18년간 꾸준히 무대에 오르고 있는 1인극 ‘품바’.전남 무안에서 시작돼 광주를 거쳐 서울과 해외까지 진출,공연회수 4,000회로 국내 최다 공연작이 됐다. 무안 거지촌인 ‘천사촌’의 거지대장이던 천장근의 일생을 연극화한 ‘품바’는 소외되고 억울한 사람들의 애환과 한을 통해 베품의 철학을 강조한 순 ‘우리 연극’.무대와 객석의 분리를 보이는 서양연극과 달리 관객과 배우가 하나가 되는 우리의 전통 연희(演戱)형식을 띠면서 비극을 희극으로 승화시키는 묘한 정서를 갖고 있다.광주 민중항쟁에서 억울하게 희생된 이들의 넋을 달래기 위해 만든만큼 그 기본정서는 틀림없이 ‘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품바’는 시대가 변하면서 노동자들의 외침을,때로는 의문사의 규명을,그리고 통일에의 꿈을 사설과 타령으로 절실하게 풀어내는 상황극으로 자리잡아갔던 것이다. ‘품바’의 성격이 그랬던만큼 이 작품을 처음 만들고 유지해 오고 있는 시인 겸 연출자인 金詩羅씨(53)의 삶도 평탄치가 않다.그는 25세때 서울서 대학생활을 하다 귀향해 대학생을 중심으로 ‘인의예술회’를 만들어 연극제를 열기 시작했다.해마다 연극제를 열던중 광주항쟁의 참상을 듣고 81년 3회 연극제때 무안군 일로면 공회당서 마을 사람들을 대상으로 무대에 올린 게 바로 ‘품바’다. 소문이 나면서 광주로 진출해 가진 소극장과 상공회의소 공연에서부터 공연장에 경찰과 정보원들이 들이닥쳤고 이후 적지않은 사연들을 겪게 된다.고향 문인들의 주선으로 서울 말뚝이소극장에서 공연을 갖던 84년 당시 재야민권운동가 咸錫憲씨(1989년 작고)를 만난뒤 큰 변화를 맞았다.공연장을 찾은 咸씨로부터 “이것이 우리 연극이다.자네가 우리 연극을 살렸네”라는 격려와 함께 ‘한쪽에 치우치지 말고 살라’는 당부의 말을 들었다.咸씨와 교류하면서부터 공연장에 ‘정체모를 사람들’의 출입이 더해갔다. 그리고 2년뒤인 86년 마침내 공연금지의 어려운 상황을 맞게 됐다.85년부터 일본과 미국 교포들의 공연 초빙이 잇따랐지만 공연내용을 문제삼은 당국의 방해로 번번이 좌절돼 고민하고 있던 참이었다.86년 4월 방언연극제에 출품할 ‘남바’ 공연에 앞서 공연윤리위원회(공륜)에 심사를 신청해 놓고 막바지 연습에 몰두하고 있었다.‘남바’는 우리 민족의 주체적인 통일운동을 남도사투리로 풀어내는 ‘품바’의 변형으로 金씨의 기대가 각별했었다. 공연을 1주일 앞둔 어느 날 괴 전화가 걸려왔다.‘남바’의 내용을 꼬치꼬치 물으면서 “아직 때가 아니다”라는 말을 남겼다.다음날 신원을 알 수 없는 두 사람이 극장에 들이닥쳐 “겁이 없다”며 욕설을 퍼붓고는사라졌다. 그리고 다음날 공륜으로부터 ‘전면 공연금지’ 판정을 받았다. 그리고 그 다음해 여름 서독공연이 좌절됐다.재독 교수클럽과 한인회가 주선한 초청공연이었다.현지에선 포스터가 나붙고 방송에서까지 예고방송이 나온 상태였다.출국 이틀전 느닷없이 기획자로부터 출국을 못하게 됐다는 말을 들었다.‘품바’ 공연을 놓고 주독 한국대사와 영사의 말다툼이 있었고 결국 공연이 좌절됐다는 말만을 나중에 전해들었을 뿐이었다.결국 ‘품바’ 대신 여류 무용가 金三眞씨가 현지 교민들을 위로하는 공연으로 대체됐다. 87년 12월부터 그 이듬해 2월까지 열렸던 미주공연에서 또 한번 씁쓸한 실망감을 가져야만 했다.미주 한인회의 주선으로 마련된 로스엔젤레스·뉴욕·하와이·샌프란시스코 등 9개 도시 순회공연이었다.기대감에 부풀어 서울을 떠나 LA공항에 도착했는데 입국 심사대에서 입국을 막는 것이었다.나중에 알고보니 한국 영사관의 조치가 있었다는 것이었다.결국 모 언론사 현지 총국장의 노력으로 통과는 됐지만 공연내내 허무한 마음을 달랠수가 없었다.계속되는 정보 요원들의 감시도 견디기가 힘든 것이었다. 金씨가 ‘품바’를 위해 만든 극단 이름은 ‘가가’.이 극단 명칭에 얽힌 사연도 복잡하다.86년 서울시청에 극단 창설에 따른 신청을 수차례 냈으나 번번이 거부당했다.요주의 인물로 낙인된 극단주의 이름 ‘金詩羅’가 문제였다.결국 정보 관련 기관에서 일했던 선배의 도움으로 해결됐다.내놓는 이름마다 퇴짜를 맞자 될대로 되라는 식으로 낸 명칭 ‘가가대소’의 줄임말이 바로 ‘가가’다. 18년간 공연 4,000회란 기록을 남긴 모노 드라마 ‘품바’.등장하는 각설이 품바도 1대 丁奎秀씨부터 시작해 지금은 11대 품바가 대를 이어 무대에 오르고 있다.세월의 변화에 따라 예리한 풍자와 걸죽한 입담으로 관객들을 울리고 웃겼던 ‘품바’ 연출자 金詩羅씨는 요즘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그동안 써놓은 시 180편을 시집으로 엮어냈고 내년 공연을 목표로 33명이 출연하는 대형 품바 놀이굿판을 구상하고 있다. “품바는 일제 식민지 시대부터 자유당 말기까지 살았던 실존인물 각설이대장의 일대기를 뼈대로 하고 있지만 억압받는 민중의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모습을 담아내려 애썼습니다.공연 과정에서 어려움이 많았지만 날카로운 비판이 담겼기에 장수하게 됐다고도 생각합니다.이제부터는 민중과의 일체감을 통일과 환경문제로 발전시킬 계획입니다” ◎그의 길 ▲1945년 전남 무안 출생. ▲64년 목포고 졸업. ▲69년 하나님의교회신학대 졸업. ▲81년 무안 일로 공회당서 ‘품바’ 초연. ▲82년 광주 소극장·상공회의소 공연. ▲83년 서울 말뚝이소극장 공연. ▲86년 ‘남바’ 공연 연습중 금지.극단 가가 창단. ▲87년말∼88년초 미국 9개도시 순회공연. ▲88년 한국백상예술대상 특별감독상 수상. ▲92년 품바전용극장 ‘왕과 시’ 마련. ▲93년 강강술래 소극장 개관. ▲98년 호암아트홀서 ‘품바’ 4,000회 기념공연.시집 ‘방언시집’‘상황시집’‘시민시집’ 출간.
  • 장외투쟁 언제까지…

    ◎한나라 내일 부산 집회 “당분간 강공 드라이브”/내주말 서울·경기지역 집회… 청중 동원 고민 17일 의원직 총사퇴를 결의한 한나라당이 장외(場外)투쟁을 언제까지 계속할까. 이번 주부터 본격적인 장외투쟁에 들어간 한나라당은 여권의 태도에 변화가 없는 한 ‘金大中정권 야당파괴 규탄대회’를 계속 연다는 계획이다. 지난 15일 대구에서 처음으로 옥외집회를 가진 데 이어 19일 하오 2시 부산역 광장에서 대규모 규탄대회를 열기로 했다. 당초 18일 하오 울산에서 규탄대회를 갖고,부산·경남지역은 22∼23일쯤 열 계획이었으나 이 고장 출신인 李基澤 전 총재권한대행이 검찰조사를 받게 됨으로써 일정을 갑자기 변경했다는 후문이다. 부산대회에는 李전대행 뿐만 아니라 李會昌 총재 등 당지도부가 대거 참석, 金大中 대통령과 여권을 겨냥해 목소리를 높일 것으로 알려졌다.1,000만 서명운동도 부산역을 시발로 대대적으로 전개할 예정이다. 서울·경기지역은 오는 25∼26일쯤 규탄대회를 열 계획이다.최소한 다음 주말까지는 대여 강공(强攻) 드라이브를 걸겠다는 속셈에서다. 그렇다고 고민이 없는 것은 아니다.무엇보다도 규탄대회 사령탑격인 李富榮 야당파괴저지투쟁위원장이 검찰에 소환될 위기에 처해 있고,부산·경남지역을 제외한 다른 대도시 지역에서의 청중 동원은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 스위스機 대서양 추락/탑승 229명 모두 사망

    ◎이륙직후 연기… 비상착륙 시도하다 참사 【블랜드포드(캐나다)·취리히(스위스) AFP 연합】 승객과 승무원 229명을 태운 스위스항공 소속 MD­11 여객기가 2일밤(현지 시간) 캐나다 노바 스코샤주 핼리팩스 인근 대서양에 추락,탑승자 전원이 사망했다. 필립 브루기서 스위스 에어그룹 사장은 3일 취리히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승객 215명·승무원 14명 등 모두 229명을 태운 채 추락한 스위스 항공 SR111편의 생존자는 없다고 밝혔다. 탑승객들의 국적은미국 136명,프랑스 30명,스위스 28명,영국 6명,독일과 이탈리아 각각 3명,그리스 2명,사우디아라비아·유고슬라비아·아프가니스탄·이란·스페인·러시아 각각 1명 등인 것으로 밝혀졌다고 전했다. 스위스 항공에 따르면 사고기는 이날 하오 8시18분(한국시간 3일 상오 9시18분) 뉴욕의 JFK공항을 이륙,제네바로 향하던 중 10시20분쯤 대서양상에 추락했다.사고기는 이륙 직후 조종실에서 연기가 났으며 즉시 핼리팩스 공항에 비상착륙을 시도하려 했으나 잠시 후 레이더 스크린에서 사라졌다. 한편 캐나다경찰은 사고 해역에는 사고기의 잔해와 구명장비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으며 3일 상오 현재 36구의 시체가 현지 구조대원들과 어부들에 의해 인양됐다고 밝혔다.
  • 제주서 항공기 사고훈련/공포의 순간 번개구조 60분

    ◎“랜딩기어 고장… 활주로 벗어났다”/소방차 9대 출동… 10분여만에 진화/200명 비상탈출… 중상자 헬기 후송 승객 200여명을 태우고 서울을 출발한 가칭 태평양항공 소속 국내선 A300기가 제주공항에 착륙하던중 우측 랜딩기어 고장으로 활주로를 이탈하면서 화재가 발생했다. 관제탑으로부터 소방차 출동지시가 떨어지자 공항공단 소방차 6대와 해군항공대 소방차 1대가 사고현장으로 즉시 출동했다. 제주소방서 소방차 2대도 화재진압에 합류했다. 실제상황이 아니다. 18일 하오 3시부터 4시까지 한시간 동안 제주공항 계류장에서 실시된 항공기 사고처리 훈련 장면이다. 훈련은 가상 사고기에 연막탄이 터뜨려지면서 시작됐다. 붉은 연기에 휩싸였던 사고 항공기는 9대의 소방차가 분당 4만5,000ℓ의 물을 일제히 뿜어대자 10여분만에 제 모습을 드러냈다. 탑승객들은 승무원 지시에 따라 비상 탈출구를 통해 긴급히 빠져나왔고 기내에 남아있던 20여명의 사상자들은 인명 구조원들에 의해 응급처치장까지 옮겨졌다. 중상자 2명은 해경 구조헬기에 의해 지정병원으로 후송됐다. 사망자는 임시 영현안치소에 안치돼 가족들에게 통보됐다. 훈련에는 한국공항공단 제주지사,공항경찰대,제주해경,제주소방서,해군항공대,한국병원,제주시보건소,대한항공 등 관련기관이 참여했다.
  • 국내선 항공 이용객 작년보다 26% 줄어

    국제통화기금(IMF)한파로 국내선 항공 이용객이 크게 줄었다. 18일 건설교통부에 따르면 올들어 7월까지의 국내선 이용객은 모두 1,102만7,000명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1,491만8,000명)보다 26.1%나 줄었다. 외환위기가 본격화된 지난해 12월부터 줄어들기 시작한 이용객수는 지난 1월에 지난해 동기대비 17.1% 줄어든 이후 매월 25∼32%의 급격히 감소했다. 탑승률은 지난해 1∼7월의 78.1%에서 올해 1∼7월에는 61.6%로 16.5% 낮아졌고 지난 7월의 탑승률은 59.4%까지 떨어졌다.
  • 문학/‘시대의 자화상’ 펜으로 대변(한국문화 50년:4)

    ◎54년 ‘자유부인’ 기존의 성윤리에 도전장/70년대 김지하 ‘오적’ 재벌·군부에 직격탄/94년 박경리씨 ‘토지’ 완간 문학사 금자탑 1948년 정부수립 이후 ‘순수’ 이념에 입각한 우익측의 문학이념이 대세로 굳어졌다.그러나 그 후에도 문학적 방법에 관한 논의는 계속됐다.49년 한국문학가협회가 출발할 무렵까지도 백철·염상섭 등의 중간파적인 시각이 여전히 존재했다.좌우 이념대립의 매듭을 짓게 한 것은 한국전쟁.50년대 문학은 ‘전후문학’에 의해 대표된다.당시의 시대상을 상징적으로 잘 드러낸 작품은 이범선의 단편 ‘오발탄’이다.한편 정비석은 54년 소설 ‘자유부인’을 발표,기존의 성윤리에 도전하며 사회적인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55년에는 한국 최장수 문예지인 ‘현대문학’이 창간됐다. 50년대가 전쟁의 상처를 개인적 시각에서 극복하고자 한 시기라면,60년대는 이같은 상처를 딛고 민중적 삶의 실체를 보고자 했던 시기다.70년대의 민중적 리얼리즘이 가능했던 것도 정치적 격변을 치뤄내야 했던 60년대 문학의 공로다.특히 4·19와5·16은 국민의 자유의식을 고양시켰으며,이는 문학작품에도 그대로 투영됐다.최인훈의 ‘광장’ 역시 4·19라는 시대상황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유신정권이 수립되고 산업화로 인한 노동문제가 표면화된 70년대는 문학사적으로도 격변기였다.황석영은 ‘객지’로 기층민을 역사의 중심에 세웠고,김지하는 담시 ‘오적’으로 재벌과 군부에 직격탄을 날려 사형선고를 받았다.고은·신경림 등은 74년 자유실천문인협의회를 발족시켰다.자유실천문인협의회의 정신은 80년대로 이어져 민족문학작가회의를 탄생하게 했다. 80년대에는 호흡이 긴 작품들이 잇따라 선보여 성공을 거뒀다.황석영의 ‘장길산’,김주영의 ‘객주’,송기숙의 ‘녹두장군’,조정래의 ‘태백산맥’등이 그 대표적인 예다.또 이문열은 폭넓은 인문 교양을 바탕으로 한 관념적 소설로 문단에 새 지평을 열었다. 탈이데올로기로 설명되는 90년대 소설의 한 갈래로 이른바 ‘소설가 소설’을 들 수 있다.구효서 양귀자 최수철 최윤 윤대녕 등 작가들은 유행처럼 소설가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을써냈다.80년대의 연장선에서 광주문제,노동문제,통일문제 등을 다룬 작품들이 많이 나온 것도 특기할 만한 일이다.94년에는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가 집필 25년만에 완간됐다.
  • “당내혼란 수습에 최선”/趙 총재·李 대행 회견

    ◎조 총재­심기일전 필요… 부총재단 사표/이 대행­국회정상화 최대공약수 찾겠다 한나라당 趙淳 총재와 총재 권한대행에 지명된 李基澤 부총재는 5일 당사에서 공동기자회견을 갖고 “국회의장 선거패배에 따른 당내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한시적이지만 막강한 권한이 부여된 李대행은 “표류하고 있는 국회가 되지 않도록 양단간에 결단을 내리겠다”고 밝혀 지도체제가 정비되는 대로 대여(對與)협상에 나설 것임을 시사했다.趙총재와 李대행은 총재경선 출마와 관련해서는 “좀더 생각해 보겠다”며 여운을 남겼다. ▷趙淳 총재◁ ­의원총회에서 趙총재가 전당대회까지 총재직을 유지,당을 수습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는데 李부총재를 대행에 지명한 이유는. ▲상당수 의견이 있었지만 당이 심기일전하는 모습을 보이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당3역 등 당직자 인선은. ▲당직 인선은 전적으로 총재권한 대행이 할 것이다.부총재 4명이 사의를 표명,간곡하게 철회를 요청했으나 도리상 안된다고 해 사임된 상태다. ­부총재들은 법적·정치적으로 완전히 사표가 수리됐는가. ▲완전히 수리된 상태다. ­총재경선에 나설 의향은. ▲시일이 많이 남아있다.좀더 상황을 지켜 본 뒤 결정하겠다. ▷李基澤 총재권한대행◁ ­총재권한대행에 지명된 소감은 ▲국회문제 등 현안들이 산적해 있어 어깨가 무겁지만 야당의 소임을 다하는 데 미력을 더하겠다.또 전당대회에서 한나라당이 새로운 정당으로 태어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 ­국회파행에 대한 여론이 따가운데. ▲국회문제는 워낙 미묘하다.당내의견을 수렴,빠른 시간내에 최대공약수를 찾아내겠다.표류하는 국회가 되지 않도록 양단간 결단을 내리겠다. ­당3역 인선은. ▲정치 도의상 총재와 원내사령탑인 총무가 책임을 지는 것은 이해가 간다.그러나 부총재와 당3역이 모두 사임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徐淸源 사무총장과 李祥羲 정책위의장은 총재권한대행으로서 오늘 재임명하겠다.원내총무는 의총에서 선출해야 하지만 당내 비상대책기구를 만들어 협상창구로 하자는 의견도 검토하고 있다. ­전당대회까지 중립적인 입장을 취할 것인가. ▲공식적으로 당권에 도전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힌 적이 없다.대행이라고 해서 중립적인 위치에만 있어야 한다는 교과서적인 구절은 없는 것으로 안다.
  • 개표일 각당 표정

    7·21 재·보궐선거 개표가 진행되면서 여야 모두 당초 예상과 다른 결과가 나오자 긴장감을 감추지 않으면서 사태추이를 예의 주시했다. ◎국민회의/수원팔달 패색… 상황실 침묵 개표초반 선거사령탑인 鄭均桓 사무총장,韓和甲 총무,韓光玉 부총재가 “구도대로 잘 갈 것”이라며 비교적 느긋한 표정으로 TV 개표상황을 지켜봤다. 하지만 개표가 진전되면서 수원 팔달 등 후보를 낸 3곳 모든 지역이 상대후보와 근소한 차이로 접전을 계속하자 “안도할 수 없다”며 초조한 기색을 띠기도 했다. 특히 당초 무난히 당선될 것으로 예상됐된 수원 팔달의 朴旺植 후보가 한나라당 南景弼 후보에게 끌려가자 3층 기자실에 임시로 마련된 상황실은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鄭총장은 측근에게 “수원 팔달을 연결해보라”고 지시했고 수원 팔달 선거본부측으로부터 “개표되지 않은 지역은 대부분 친여(親與)지역” “승리할 것이 확실시된다”고 하자 비로소 안도하는 모습이었다. ◎자민련/“1승 목표 달성” 분위기 들떠 투표자 출구조사 결과에 이어 개표 초반부터후보를 낸 3곳에서 ‘1승 이상’ 목표가 현실화되자 분위기가 들뜨기 시작했다. 朴泰俊 총재는 하오 6시 투표 종료에 맞춰 朴浚圭 최고고문,金龍煥 수석부총재 등과 중앙당 상황실에서 TV3사의 출구조사 결과보도를 시청하며 후보별 예상 득표율을 점검했다. 특히 부산 해운대·기장을에서 金東周 후보가 1위를 달리자 고무된 표정이었다. 한 당직자는 “아스팔트에 씨앗을 심어 열매를 거뒀다”며 승리를 기정사실화했다. 서울 서초갑에서는 朴俊炳 후보가 한나라당 朴源弘 후보와 엎치락 뒷치락하는 것으로 집계되자 애간장을 태우며 개표 추이를 지켜봤다. 특히 하오 8시30분쯤 朴俊炳 후보가 朴源弘 후보를 한때 앞지르자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한나라당/‘텃밭 패배’ 예상 방송에 허탈 방송3사 투표자 출구조사 결과 선거 패배가 예상되자 여의도 당사는 침통한 분위기에 휩싸였다. 李漢東 총재권한대행과 徐淸源 사무총장 등 당 지도부는 당사 2층에 마련된 종합상황실에 들러 무거운 표정으로 방송을 지켜봤다. 특히 지도부는 당초 기대를 모았던 경기광명을과 수원 팔달에서 완패(完敗)하고 ‘텃밭’인 부산의 해운대·기장을도 여당 후보에게 빼앗기는 것으로 나타나자 허탈감을 감추지 못했다. 무난한 승리를 예상했던 서울 서초갑마저 朴源弘 후보가 근소한 표차로 고전하는 것으로 드러나자 충격이 더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서초갑 朴源弘 후보가 자민련 朴俊炳 후보와의 표차를 벌리고 수원 팔달 南景弼 후보가 선두로 치고 올라가자 당초 목표치인 4승을 건질 수 있다는 분위기가 확산되기도 했다.
  • 制憲 50돌을 돌아본다:2(정직한 역사 되찾기)

    ◎잘못된 법 적용/간첩누명 복역수 가족 비탄의 나날/새법 재정 재구금… 가정 풍비박산/정권안보차원 범죄 날조 처형/김 대통령 한때 사형선고 받아/고문조작으로 10여년째 구금도/심장병·신경질환 등 후유증 심각 비가 오는 가운데 초췌한 모습의 한 남자가 푸른 수의를 입고 탑골공원 정문 앞에 앉아 있다.그는 옆에 서 있는 건장한 사내에게 연신 무죄를 호소한다.그러나 전기스위치가 올려지고,그의 코에 물주전자의 물이 거듭 부어진다.그는 눈동자가 풀어진 채 옆의 사내가 불러주는 대로 횡설수설 따라 읊는다. “북한의 우순학이 제 처입니다”“저는 30년간 북한의 공작원이었습니다”. 탑골공원을 무대로 지난 9일(목요일) 상연된 연극의 한 장면이다.건장한 사내는 고문기술자 李根安이고 초췌한 남자는 16년째 간첩죄로 복역중인 咸珠明씨다.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는 매주 목요일 탑골공원에서 집회를 갖는다.이날 집회의 주제는 ‘고문조작 간첩사건 피해자의 석방’.이 자리에는 군사정권 아래서 고문에 의해 간첩으로 조작돼 복역하고있는 14명의 가족들과 민가협 회원 등 50여명이 참가해 새정부의 조속한 석방조치와 진상규명을 요구했다. 법과 동일시되는 것이 정의라고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악법 논란’은 지난 50년간 끊일 날이 없었다.대부분이 아는 것과 틀리게 일찌기 소크라테스는 ‘악법도 법이다’란 말을 한 적이 없다.플라톤이 ‘소크라테스의 변명’에서 전하고자 한 것은 ‘법에 대한 사전 합의와 동의의 중요성’이었다. 지난 61년의 국가재건최고회의나 유신시절의 비상국무회의,80년의 국가보위입법회의 등은 국회가 아닌 비정통적인 대의기구들이다.비상사태가 선포된 상태에서 이런 기구가 쏟아낸 법률들이 사전동의나 합의의 절차를 충실히 거쳤다고 하기는 어렵다.또한 본인의 자백 외에는 증거가 없는,고문에 의한 조작 논란이 많았던 사건들도 정당하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71년 통일사회당 위원장 金哲씨는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과 ‘북괴를 북한으로 불러야한다’는 발언을 해 반공법 위반혐의로 구속 기소됐다.당시 혐의는 반국가단체를 이롭게 했다는 것인데 이조항은 국가보안법 7조에 그대로 편입됐다.그러나 남북한 동시가입은 수년후에 이뤄졌고,지금 북한을 공식적으로 북괴라고 호칭하는 사람이나 단체는 찾아보기 힘들다.반공법과 국가보안법은 시대와 환경에 따라 자의적으로 적용돼왔다는 논란 속에 숱한 인권침해와 위헌시비를 일으켰다. 이종·최남규·김중종씨 등은 50∼60년대 남파돼 체포된 뒤 10여년간 복역을 마쳤으나,75년 사회안전법 제정으로 재구금됐다가 89년 이 법의 폐지로 다시 석방된 이들이다.출소후 단란한 가정을 꾸미고 살다가 새 법이 제정돼 느닷없이 다시 갇히는 사람들의 황당함은 어떤 것일까. 정권안보차원에서의 범죄의 날조·조작은 법 자체 문제보다 더 심각했다. 李承晩 정권은 야당당수였던 曺奉岩 진보당위원장을 간첩으로 몰아 처형했고,金大中 대통령도 80년 신군부로부터 내란음모 혐의로 사형선고가지 받았었다. 고문조작 의혹을 받고 있는 사건으로 수십년째 갇혀 있는 사람들도 많다. 함주명·이장형씨 처럼 고문기술자 李根安으로부터 취조를 받은 사람들도 있다.함씨는 남파된 뒤 즉시 자수했으나 30년후 재구금되어 20년형을 선고받고 16년째 복역중이다. 이씨는 무기형을 선고받고 14년째 구금돼 있는 상태다. 함씨의 누나 함주옥씨(73)는 “너무 억울하다.지금이라도 진상규명이 이뤄져야 한다.하루빨리 재심절차가 있기를 바란다”며 눈물을 떨구었다. 고문 후유증으로 인한 고통을 호소하는 사람도 많다. 74년 일본 유학때 조총련계 인사를 접촉한 것이 빌미가 돼 23년간 복역하다가 올 3월 특사때 나온 유정식씨. 南奎先 민가협 총무는 “현재 유씨는 심장병과 신경질환 등 극심한 고문후유증으로 사람을 만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고 전했다. 또 “함께 나온 재일동포 손유형씨도 후두암 당뇨병 등으로 고생하다가 현재 일본으로 건너가 살고 있다”고 전했다. ◎張俊河·白基玩씨 악법철폐 앞장/학생들 민주화투쟁 전위대 역할… 3·4·9차개헌 견인/80년대 후반 민가협 등 수백개 민주단체서 주도 ‘대한민국 헌법을 부정·반대·왜곡 또는 비방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1974년 1월에 발표된 대통령긴급조치 제1호는 이렇게 시작된다.朴正熙 대통령은 당시 유신헌법에 대한 저항이 거세지자 긴급조치를 발동했다.정권유지를 위한 강경책이었다.과거 군사정권은 자신들의 집권을 정당화하기 위해 헌법과 법을 고치고 그를 정권유지에 이용했다.그러나 온갖 탄압과 불이익에도 불구하고 잘못된 법과 헌법에 대한 저항과 투쟁도 끊이지 않았다. 대통령긴급조치가 발표되자 張俊河·白基玩씨 등은 ‘반유신 백만인서명운동’을 벌였다.그러나 서명운동은 심한 탄압을 받았다.두 사람은 구속되어 징역 15년을 선고받았다.긴급조치의 첫 희생자가 된 것이다.당시 판결은 구형과 판결이 일치하는 이른바 ‘정찰제 판결’로,이후 많은 공안사건의 판결 기준이 됐다. 그러나 정의를 위한 투쟁은 계속됐다.그들은 민주화운동과 악법철폐운동에 앞장섰다. 일부 판·검사들의 ‘정의 투쟁’도 있었다.지난 64년 1차 인민혁명당사건에서 이용춘·장원찬·김병리검사는 중앙정보부에서 넘어온 공안사건이 증거가 부족하다며 기소를 거부하고 사표를 냈다.지난 96년 유원석 판사는 보안법 위반으로 기소된 박충렬·허인회씨에게 잇따라 무죄판결을 내려 공안사건에서도 ‘증거재판주의’원칙에 충실했다는 평가를 받았다.그는 지난해 2월 석연치 않은 이유로 법복을 벗어 많은 사람들의 아쉬움을 샀다. 그러나 누구보다 앞장서서 법의 타락에 맞서 싸운 주체는 학생들이었다.그들은 왜곡된 헌법과 법을 바로 잡도록 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지난 60년 이루어진 3·4차 개헌과 87년 민주항쟁에 의해 얻어진 9차개헌도 사실 학생들이 이룬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그들은 법의 감시자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제도권에 몸담은 기성세대들이 하기 어려웠던 민주주의 투쟁을 위한 ‘전위대’ 역할도 담당했다. 80년대 후반부터 이러한 역할의 중심으로 등장한 것이 수백여개에 달하는 민주시민단체와 비영리전문단체들이다.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 및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인권운동사랑방 등이 대표적 단체. 민가협은 양심수 석방운동과 악법철폐운동을 꾸준히 펼치고 있으며,매주 목요일 주제를 정해 정기모임을 갖고 있다.민변 또한 지난10여년 동안 文益煥 목사 방북사건,姜基勳씨 유서대필사건 등 굵직굵직한 시국사건의 진상조사 및 변론을 맡았고,국가보안법 개정·폐지운동에도 앞장서 왔다. 인권운동사랑방은 ‘인권하루소식’지를 통해 법 집행과정에서의 인권침해 사례를 찾아내 공론화하는데 앞장서고 있다. ◎간첩 불고지혐의 무죄판결 받은 咸雲炅씨/“명예실추·정신적 피해 상상 초월 보안법 자의적 적용 빨리 고쳐야” “무죄판결은 받았지만 실추된 명예와 정신적·금전적 피해는 어떻게 보상받습니까.” 간첩을 신고하지 않은 혐의로 기소됐다가 무죄판결을 받은 전 서울대 삼민투위원장 咸雲炅씨(34).“재판중에는 모든 피고인이 무죄로 추정돼야 하나 이것이 지켜지지 않아 당하는 피해가 심각하다”고 지적했다. 咸씨는 지난 95년 ‘남파간첩 김동식 사건’과 관련해 불고지 혐의로 1심에서 징역 8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으나,지난 12일 열린 항소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았다.그러나 무죄판결을 받을 때까지 겪은 정신적 고통과 이미지 실추로 인한 피해는 상상 이상으로 컸다.“남북분단 상황에서 일단 간첩사건에 관련돼 체포됐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사회생활에는 족쇄가 채워집니다.그 점 때문에 역대 정권에서 이를 정치적으로 악용해 왔지요.” 지난 96년 총선에 무소속으로 출마했던 咸씨는 “선거를 불과 몇개월 앞두고 이 간첩사건에 관련돼 조사를 받았다.그리고 그것은 선거에 치명타를 가했다.”고 말했다. 咸씨는 대법원에서 최종 판결이 나면 일부 언론사와 국방부를 명예훼손 혐의로 고발하고 피해보상도 요구할 방침이다.언론사에는 재판중인 사건임에도 자신을 완전히 범죄자로 기정사실화해 보도한 책임을,국방부에는 자신의 이름과 사진 등을 사병들의 정신교육 자료에 사용한 책임을 묻겠다는 것이다. 그는 국가보안법이 수년전보다는 많이 완화돼 과거의 ‘막걸리 보안법’수준은 벗어났다는 점은 인정했다.그러나 여전히 독소조항이 많다고 지적했다. 특히 친척까지도 신고해야하는 불고지죄는 반인륜적이라고 비판했다.유교적 윤리가 중시되는 우리 사회에서 어떻게 친척과 친구를 신고할 수 있느냐고 반문했다.이적단체 찬양고무죄나 이적표현물 제작 및 소지죄 등도 자의적 해석이 가능한 문제의 조항이라고 했다.그는 “새정부 들어서도 여전히 자의적 해석에 의해 보안법이 적용되고 있다”면서 수사기관에 시정을 촉구했다. □특별취재반 ▲특집기획팀=李昌淳 팀장·李穆熙 차장,金聖昊·任昌龍 기자
  • 국군포로 송환 촉구/어제 ‘6·25’48주년/전국서 행사 잇따라

    6·25 48돌인 25일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에는 비가 내리는 가운데 5,000여명의 유가족들과 참배객들의 찾아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의 숭고한 넋을 기렸다. 대한재향군인회(회장 張泰玩) 소속 참전용사 2,000여명은 현충원 현충탑에 참배하고 호국종을 48번 울렸다.재향군인회는 이어 서울 올림픽공원에서 金鍾泌 총리서리 등 6,0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국군포로 송환촉구 범국민대회’도 열었다. 300여명의 원불교 신도들도 현충원 무명용사탑에서 합동위령제를 가졌다. 전국연합(상임의장 李昌馥)은 서울 명동 가톨릭회관에서 4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민족의 화해와 평화통일 기원제’를 개최하고 명동성당까지 촛불을 들고 행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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