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러스타」 종점 영 워털루 역사(걸작건축감상:15)
◎아치형 유리지붕… 자연채광의 실내공원/“철도깔린 공항”… 탁트인 개찰구 인상적/최첨단 설계로 역사안팎 시각적 연결/여유롭고 안락한 분위기의 미학적 공간 연출
철도는 1백년 전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등장하여 나름대로 한 시대를 풍미하던 상징물이었다.일제 식민지 경제수탈의 수단이기도 했고,대동아전쟁 때 학도병을 싣고 남방으로 떠나는 이별 장면의 무대이기도 했다.또한 우리는 한국전쟁 당시 흰 연기를 내뿜던 기관차와 화물차에 보따리를 이고 진 피란민들이 기를 쓰고 울라타던 그 처절한 모습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그러다가 1960년대 이후 계속 건설된 고속도로에 밀려 철도는 점차 우리의 관심에서 사라져간다.최근 들어 꽉 막힌 고속도로를 피해 다시 철도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늘고는 있다지만,아직도 철도는 시대에 뒤떨어진 교통수단으로 화물수송에 주로 이용되고 있다.
○영 자존심 건 걸작평가
그러나 21세기 초반 한반도에서 본격 가동될 고속전철은 철도시대의 부활을 예고하고 있다.또한 우리나라 각 도시 중심부에 남아있기는 하되 그동안 그 모습이나 기능이 쇠락한 철도역사 역시 고속전철의 운행에 따라 영광스러운 중흥의 시기를 맞게 될 것이다.
새로 들어서게 될 우리의 고속전철역사,어떻게 지어야 할까? 프랑스보다 한걸음 늦게 고속전철을 도입한 영국 런던의 새로운 역사를 살펴보며 우리네 역사에 대한 궁리를 한번 해보자.
작년 11월,영불해협을 통과하는 해저터널이 개통되었고 파리와 런던을 3시간 내로 연결하는 고속전철이 운행을 시작했다.항공여행의 속도와 철도여행의 안락감을 동시에 줄 수 있는 이 유로스타(Eurostar)라는 국제고속전철은 런던∼파리∼브뤼셀의 세도시를 연결하고 있는데 유럽 통합의 가장 극적인 상징물로 화제거리가 되고 있다.
이 유로스타의 런던 종착역이 바로 워털루 국제고속전철역이다.이 역은 런던의 템스강 남쪽에 위치한 기존의 국내선 철도역 부지의 한쪽 구석에 자투리로 남은 길쭉한 모양의 땅에 새로 지어 넣었다.영원한 앙숙 프랑스가 개발해낸 고속전철을 수입할 수밖에 없었던 영국이 마지막 자존심을 걸고 지엇다는 이 우털루역은 부지의 협소함이라는 제약조건을 멋지게 극복해냈다는 찬사를 받고 있다.
파리의 북역(GareduNord)기존 역사 한부분을 개조한 승강장에서 출발한 유로스타는 시속 2백㎞로 달려 두시간이 채 못되어 도보해협에 도착,여기에서 바다 밑으로 들어간다.잠수함을 탄듯 차창 밖으로 바닷속 경치를 즐길 수 있는 것은 물론 아니다.우리 서울의 지하철과 마찬가지로 열차 내 불빛이 가 닿는 곳에는 그저 콘크리트벽만이 보일 뿐이다.약 20분을 달리면 다시 지상으로 나오는데 차창 밖으로 영어간판이 보이기 시작하니 이제는 영국땅이다.열차의 속도는 눈에 띄게 느려진다.아직 영국에는 고속전철용 철로를 놓지 못했기 때문이다.약 한시간여를 달려 드디어 런던 워털루역에 도착한다.
○안락한 실내 분위기
열차밖으로 내려서면 높고 긴 승강장 공간이 눈에 들어온다.철골 아치를 이어 만든 지붕이 약 5층 정도의 높이에서 승강장 전체길이 4백m를 덮고 있다.사실 이 지붕은 지붕에서 끝이 나는 것이 아니라 벽체로 그대로 연결된다.아치구조이기 때문에 지붕과 벽체가 하나로 되어 있다는 말이다.
이렇게 높고 긴 지붕 밑의 거대한 공간은 19세기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철도역사의 전형적인 모습이다.옛날 증기기관차 시절,흰 증기를 쉽게 흩뜨려버릴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높은 층고가 필요했기 때문이다.물론 비를 피하기 위해서는 기차의 전체길이 만큼 이어진 승강장 위에 지붕이 필요하기 했었다.
워털루 역의 승강장은 완만한 곡선을 이루고 있다.역을 지어야 하는 터의 크기와 모양 때문에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그렇지만 이 역을 설계한 영국인 건축가 니콜러스 그림쇼의 창의력은 이러한 제약조건을 최대한으로 역이용하여 미학적으로 뛰어난 공간을 창출해내고 있다.
○안락한 실내 분위기
승강장의 곡선은 바로 위 아치지붕의 곡선과 잘 어울린다.그뿐이랴,철골 아치구조에 덧붙여진 수천개의 대형 유리패널을 통해 하늘빛이 투과되어 승강장 내부를 환히 비추어진다.흔히 있는 일은 아니지만 런던 하늘이 맑게 개기라도 하는 날에는 햇빛에 의해 생기는 아치구조의 그림자가 승강장에 드리워져 가뜩이나 기하학적 무늬로 가득한 이 공간을 더욱 드라마틱하게 만들어준다.밤이 되면 승강장 곳곳에 조명이 비추어지고 이 빛은 어두운 밤하늘로 뻗어나간다.
투명벽체,투명지붕의 효과는 건물밖에서 더 잘 드러난다.밖에서 워털루역 내부가 잘 들여다보이기 때문이다.밤에는 역사밖이 어두우니 그럴 테지만 런던의 그 많은 흐린 날,안개낀 날 덕택에 역사내부는 항시 조명이 켜져 있기 때문에 낮에도 그렇다.
여행은 어쨌거나 즐거운 것.파리에서 갓 도착한 승객들의 모습이 밖에서 들여다보인다.크고 작은 트렁크를 들고 끌고 밀며 이들이 움직인다.승장장에서 한층을 내려온 대합실의 커피숍도 다 들여다보인다.푸르고 잿빛 주조의 건물내부 색상에 대비되는 빨간 의자에 앉아 있는 승객들의 여유로움이 역사밖 대도시 런던의 번잡한 도시생활에 그대로 전달된다.
워털루 고속전철역은 누군가 말한대로 철도가 깔린 공항이다.국제역사이다보니 탑승수속 카운터에 출입국심사대까지 갖추어 건물내부만 보자면 영락없는 공항건물이다.그렇지만 이 고속전철역은 여느 국제공항과는 다르다.
우선 입지조건이 공항보다 훨씬 좋다.공항은 활주로와 광활한 이착륙공간이 있어야 하고 소음이 크기 때문에 도심에 자리잡을 수가 없다.공항이용객은 별 수 없이 도심에서 공항까지 교통체증에 시달리거나 지하철(결국 철도를 이용한다)를 타야 한다.워털루역사는 고층건물이 즐비한 도심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다.그 유명한 트라팔가광장에서 여기까지는 걸어서도 10분밖에 걸리지 않는다.그뿐이랴 택시에서 내리면 바로 15m 앞에 티켓 카운터가 있다.
○모든 역사 장점살려
비행기 탑승수속절차가 수화물을 체크인해야 하고 보안검색도 거쳐야 하는 등 아주 복잡한 것에 비해 워털루역의 탑승절차는 간단하다.도심에서 10분 걸려 역사에 도착,수분내로 모든 수속이 끝나고 승객은 열차 출발시간까지 좀더 자유롭고 한가한 분위기를 만끽할 수 있다.결국 워털루역사는 국제도시간 연결마디임과 동시에 도시 한복판의 실내 휴식광장의 역할을 겸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고속전철역사의 장점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고속전철은 환경순화적이다.비행기의 소음도,자동차의 매연도 없다.게다가 수천명의 승객을 한꺼번에 실어나를 수 있다.비행기는 고작 3백∼4백명,승용차는 한번에 5명이 아닌가.
워털루역은 이 모든 고속전철역사의 장점을 최대한으로 살리고 있다.역사의 여유롭고 안락한 분위기를 살려 도시내 실내 대중공원화하기 위해서 외부의 자연광을 최대한 끌어들이고 동시에 역사 안팎을 시각적으로 연결하고 있기 때문이다.그래서 고속전철이라는 최첨단기술이 가미된 런던의 랜드마크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수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우리의 미래 고속전철역을 잠깐 생각해보자.우리의 역도 워털루역과 같이 도시의 랜드마크가 되어야 하며 시민에게 환하고 쾌적하고도 여유로운 휴식의 공간을 줄 수 있어야 한다.역건물을 지상에 놓고 건물자체는 투명한 재료를 쓰면 그렇게 할 수 있다.그런데 얼마전 대구 시민이 고속전철의 지상통과를 반대했다는 소식을 들었다.첨단기술의 상징이요,풍요롭고 쾌적한 21세기의 생활을 담는 고속전철역은 어둡고 환기가 잘 안되는 도시지하철과는 달라야 한다.이것을 지하에 가두어놓고 그 위로는 돈벌이가 될 만한 고층의 백화점·호텔을 올려놓지는 않을까 걱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