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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청담스님·함석헌선생·김재준목사 탄생100년

    올해 종교계엔 큰 족적을 남긴 거목들을 추모하는 행사가 잇따를 전망이다.개신교계에선 함석헌·김재준 선생 100주년 추모행사를 대규모로 준비하고 있고 불교계는 청담스님 100주년 기념사업을 추진하고있다. 천주교도 특정인 기념사업은 아니지만 신유박해(1801년) 200돌을 맞아 다채로운 순교자 추모행사를 계획중이다. [불교] 조계종은 불교 정화운동에 앞장섰던 청담 스님 탄생 100주년을 맞아 ‘청담대종사’ 전집과 사상논집을 발간할 예정이다.청담스님이 주석했던 서울 도선사 청담문도회를 중심으로 추진중인 기념사업중엔 청담 스님 유묵 전시·출판,청담어린이집 신축,청담대종사 탑비제막도 들어있다.진각종은 2002년 종조인 손규상 대종사 탄생 100주년을 앞두고 올해 대규모 기념사업을 준비하기로 했다. [개신교] 월간 교양지 '씨알(아래아)의 소리'로 유명한 함석헌 선생과 민중신학의 대부인 김재준 목사 탄생 100주년을 기리는 행사가 다채롭게 열린다. 사단법인 함석헌 기념사업회는 3월13일 함 선생 탄생일을 전후해 서울 대학로 마로니에공원에기념비를 건립하고 선생의삶을 조명하는 강연회를 열기로 했다. 또 지난 93년 출간된 ‘함석헌전집’을 보완,9권의 기념책자 발간도 추진중이다. 한편 김재준목사기념사업회와 모교인 한신대는 11월6일 김 목사의 탄생일을 전후해추모 학술강연회와 논문집 발간을 추진한다.사업회와 한신대는 또 한국인에 의한 신학교육을 처음 시작한 선생의 기념관도 건립할 계획이다. [천주교] 300여명의 순교자를 낸 신유박해(1801년) 200돌을 맞아 순교자 추모행사가 연중 계속된다.‘한국순교자현양위원회’가 주축이돼 2월2일 심포지엄을 시작으로 ▲이달의 순교자 선정과 연구사업(2월∼2002년 1월)▲특별전시회(9월1일∼2002년 2월4일) ▲연간 기도운동 및 시복을 위한 기도운동(9월1일∼2002년2월4일) ▲신앙대회(9월)를 마련한다.특히 신유박해 관련 순교자중 시복(諡福:죽은 뒤 복자품에 올리는 일) 대상자를 선정,이들에 대한 정식 조사를 로마 교황청에 건의할 예정이다. 김성호기자 kimus@
  • 신간 맛보기

    ◆선인들의 지리산 유람록(김종직 등 지음,최석기 등 옮김,돌베개 펴냄)이륙·김종직·남효온·김일손·조식·양대박·박여량·유몽인·성여신 등 조선시대 선비들이 지리산을 유람하고 남긴 수양론적 성찰의 기록.산수와 인간의 조화를 추구한 선조들의 시유와 미의식을 엿볼 수 있다.조선시대 사대부들의 지리산 유람은 대체로 두 가지 목적에 의해 이뤄졌다.하나는 천왕봉에 올라 공자의 ‘등태산소천하(登泰山小天下)의식을 맛보기 위함이요,또 하나는 청학동·삼신동 등의 신선세계를 노닐기 위해서다.이 책에는 부록으로 최치원의 ‘쌍계사 진감선사 대공탑비’ 등이 실려 있다.1만5,000원◆기독교 죄악사(조찬선 지음,평단문화사 펴냄)“나는 예수를 사랑한다.그러나 크리스천은 싫어한다.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를 닮지 않았기때문이다” 간디는 기독교에 대한 뿌리깊은 반감을 이렇게 직접적으로 드러냈다. 이 책은 그런 심경에서 한 목사(전 이화여대 교목실장)가 쓴 기독교 죄악의 역사다.막강한 권력을 형성한 기독교가 인류의인권을 짓밟은 현장을 통시적인관점에서 살폈다.저자는 기독교의 이름으로 자행된 범죄사를 십자군전쟁,유럽에서의 종교재판과 마녀사냥,선교를 가장한 청교도들의 원주민 학살과 재산약탈 등으로 나눠 설명한다.전2권 상권 1만원,하권 8,000원◆노동과 페미니즘(조순경 엮음,이화여대출판부 펴냄)한국사회의 노동문제를 여성주의 시각에서 조명한 글 모음집.시장에서 교환가치를창출하는 활동만을 노동으로 보는 관점,여성은 생계책임자가 아니기때문에 우선 해고대상에 포함된다는 가족 임금 이데올로기 등에 대한비판이 담겼다. 노동에 대한 여성주의적 관점에서의 재개념화도 시도한다.그중 하나가 그동안 ‘여성 적 특질’로만 인식됐던 감정노동(emotion labor)은 이제 어엿한 노동유형으로 평가돼야 한다는 것.기회의 평등에서 나아가 ‘결과의 평등’을 이룰 수 있는 적극적인 조치를 펼 것도 제안한다.1만2,000원◆피어라 풀꽃(이남숙·여성희 지음,다른세상 펴냄)인간과 함께 살아가는 생명체로서 ‘우리’라는 공동체 속의 모습을 담고자 한 시리즈두번째 책. 이화여대에서 식물계통학으로 박사학위를 두 저자는 오랜 세월 함께 산과 들을 누볐다.우리 땅에서 자라는 풀꽃 220종의 생태와 문화적 의미를 쉬운 말로 캐본다.올컬러 사진.풀꽃의 진화,해부도,환경 적응 등을 알아본 뒤 산과 들,고산,연못과 늪,바닷가,건조지등 생장 영역별 그리고 가꾸면서 즐기는 풀꽃,아낌없이 베푸는 풀꽃,우리나라 고유종과 천연기념물,외국에서 들어온 풀꽃 등으로 나눠 더자세히 살펴보고 있다.1만3,000원
  • 한국문화유산답사회 창립 10돌 기념/그림·글씨 등 탁본 한자리에

    한국문화유산답사회가 창립 10주년을 맞아 회원들이 그동안 수집·제작한 결과물들을 일반에게 소개하는 탁본전이 지난 4일부터 서울 종로구 관훈동 학고재화랑(739­4937)에서 열리고 있다. 이번 전시는 답사회 회원중 유홍준 대표와 이재호 전 총무·김효형 총무·흥선 스님·이보란씨·윤용이 원광대 박물관장·이태호 지도위원 등이 소장하고 있는 탁본 50여점을 내놓은 자리.선사시대부터 최근에 걸쳐 아름다운 그림과 귀중한 금석문 탁본이 다양하게 나와 있는게 특징이다.그야말로 청동기시대부터 3국시대·고려·조선·대한민국 등 모든 역사기간에 걸쳐 있는데 그림과 글씨 조각 문양 등이 고르게 전시되고 있다.이 가운데 광개토대왕비·김생 글씨의 낭공대사비·지리산 실상사 ‘범종 비천상’·지광국사 현묘탑비·상주 남산 석각비천상·묘향산 사적비 등은 보기드문 금석유물.순수 탁본과 함께 조선시대 능화판과 목판화 탁본도 함께 나와 있는데 선운사 소장 ‘석씨원류’ 목판은 글씨·그림이 모두 정교한 것으로 유명하고 ‘멋쟁이’ 능화판은 문양의 추상적 변용과 구성에서 뛰어난 조형미를 보여준다.22일까지.
  • 다중시설 대형화재 무방비/서울 소방본부

    ◎서울대 병원·고속터미털·광화문 우체국/“15개건물 소방설비 불량”/비상구조차 없는 건물 11곳/감지장치·스프링클러 작동 안하기도 서울대학병원,구 대법원,경부선고속터미널,한양대학병원,안암동 고려대부속병원,광화문우체국 등 서울시내 15개 다중이용시설물이 소방시설 불량으로 대형화재에 대한 방비가 취약한 것으로 드러났다. 서울시 소방본부는 21일 『지난달 1일부터 27일까지 시내 호텔·병원·시장·백화점 등 9백68개 다중이용시설물을 점검한 결과,1백36개소 건물에서 소화설비 미설치 81건,피난시설 미비 36건,비상구 미확보 11건 등 모두 3백84건의 지적사항이 나왔다』고 밝혔다. 안전점검 결과,종로구 연건동 서울대학병원은 본관동 8∼12층과 치과동 5층,소아과동 4층의 비상구와 복도·소화전 앞에 집기류와 대형금고 등을 쌓아놓아 화재가 일어났을 때 환자들이 신속히 대피하기 어려운 것으로 지적됐다. 성동구 행당동 한양대학병원은 화재발생 지점을 알리는 수신반이 제대로 작동되지 않은 데다 연기를 내보내는 제연설비도 제대로작동되지 않았으며 성북구 안암동 고대부속병원도 수신반이 불량하고 옥탑비상구를 잠가놓은 것으로 드러났다. 서초구 반포동 경부선 고속버스터미널 역사는 스프링클러가 작동되지 않았고 화재감지기도 규정에 맞지않게 설치돼 있었다. 종로구 서린동 광화문우체국은 변전실과 발전실에서 다른 층으로 불길이 번지는 것을 막아주는 자동방화설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지난 19일까지 업무를 본 종로구 서소문동 구대법원은 제1신관 9,10층과 지하층에 옥내소화전이 없었으며 제3신관 지하추자장은 스프링클러가 작동하지 않았다. 이밖에 중구 장충동2가 앰배서더호텔,영등포구 영등포4가 경방필백화점,용산구 한강로2가 신용산시장,구로구 고척동 고척쇼핑센터 등 다중이용시설들도 자동감지장치나 스프링클러가 제대로 작동되지 않았다.
  • 국보급 문화재/관리소홀로 훼손 심각

    ◎현모탑비 균열심해 “붕괴위기”/법주사 팔상전도 지붕서 비새 전국 주요사찰이나 유적지에 있는 국보급 문화재가 당국의 무관심과 관리소홀로 심하게 훼손·방치돼 관리에 허점을 드러내고 있다. 또 탱화 및 불상 도난사건이 해마다 크게 늘고 있다. 특히 지방문화재는 각 시·군 담당공무원이 문화재에 대한 지식이 없는데다 숫자도 고작 2∼3명 정도여서 문화재 보존에 큰 문제가 되고 있다. 29일 조계사 등 불교계에 따르면 강원도 원주군 부론면 법천리 지광국사에 있는 국보 59호 현묘탑비는 몸체 일부가 떨어져 나가고 심한 균열로 붕괴직전에 놓여있다.또 경북 경주군 양북면 감은사지 3층석탑(국보 112호)은 쌍둥이탑중 왼쪽탑의 1층 탑신벽면이 깨지고 불에 검게 그을려 있는 등 심하게 파손되어 있다. 국내 유일의 목탑인 충북 보은의 법주사 팔상전(국보 55호)도 지난해 10월의 폭우로 지붕에서 비가 새고 있다.천불천탑의 전설로 유명한 전남 화순의 운주사 와불도 보호울타리가 형식적으로 설치돼 있어 관광객들의 발에 마구 밟혀 원형을 잃어가고 있다. 조계사의 통계에 따르면 탱화나 불상의 도난사건은 91년 25건,92년 24건,93년 45건,94년 67건으로 매년 증가하고 있지만 당국은 뒷짐만 지고 있는 상태다.지난 4일에도 경북의성 고운사의 고려시대 탱화 2점이 도둑맞았고 지난 9월24일에도 백양사에서 조선시대 탱화 1점과 위패 2개를 도난당했다.더구나 이들 문화재를 소장하고 있는 일부 사찰에서는 징계가 두려워 도난사실을 신고하지 않는 경우도 많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관리소홀로 인한 훼손·분실보다도 더욱 큰 문제는 국가나 지방자치단체로부터 문화재로 지정되고도 관리대상 목록에서 누락돼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충청북도에 따르면 도내에는 문화재가 국보 8점을 포함,3백48점이 있지만 문화재관리국에서 작성하는 문화재대관에는 전체의 63%인 2백20점이 빠져있고 더구나 그중에는 국보도 3점이나 들어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 멸망의 원인(백제를 다시본다:30·끝)

    ◎한강유역 뺏긴뒤 서남부에 고립/의자왕,초기 전승에 자만 실정 거듭/대당외교 실패… 많은 충신 귀향보내/18만 나당연합군 침공때 동원가능 병력은 5천명 부소산성에 올라 금강을 굽어보노라면 잔잔하게 흐르는 물결이 마냥 평화롭게만 느껴진다.1천3백년 전 이곳에서 망국의 통한을 품은 3천 궁녀들이 떨어져 죽었다고 누가 상상할 수 있겠는가.그러나 서기 660년 당의 침략군이 신라와의 사전협약에 따라 서해로부터 금강 하구에 소리없이 진입하여 상륙작전을 개시한 뒤 사비도성을 유린한 것은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다. 백제는 왜 멸망했는가.이 수수께끼를 속시원히 풀어줄 수 있는 단 하나의 열쇠란 없다.백제 멸망원인은 매우 복합적이다.역사적 인과관계에서 볼 때 우리들은 많은 멸망원인을 열거할 수 있으나 이를 대내적인 것과 대외적인 것으로 나누어 생각해 보기로 한다. 삼국항쟁이 격화된 6세기 후반 이래 백제는 경쟁국가인 고구려나 신라에 비해 그 입지랄까 행동반경이랄까가 매우 좁았다.즉 한강유역을 송두리째 신라에 빼앗긴 뒤로부터 백제는 줄곧 한반도 서남부지역에 고립되어 있었던 것이다.백제가 기대를 건 잠재적인 동맹세력은 고구려였으나,양국은 다만 해상으로 연락을 취할 수 있을 뿐 이었다.그런 까닭으로 백제는 자신을 ㄱ자 모양으로 포위하고 있는 신라와의 군사경계선을 돌파하기 위해 몸부림쳤다.그것은 한 때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하지만 백제는 결코 신라의 포위망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다. 이처럼 백제가 신라와의 국경전쟁에서 헛되이 국력을 소모하는 동안 내부사정은 차츰 악화되어 갔다.의자왕이 641년 무왕의 뒤를 이어 즉위했을 때만 해도,희망은 아직 남아 있었다.그는 인간적으로 나무랄데 없는 성품이었고,국가중흥의 열망에 불타 있었다.왕태자 시절 지극한 효성으로 해동의 증자라는 평까지 듣던 의자왕이었다. ○신라 포위 못벗어 그가 왕위에 오른 직후에 결행한 신라 침공도 눈부신 성공을 거두었다.마침 642년 평양에서는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켜 군국의 대권을 장악했는데,의자왕은 그와 손잡고 신라에 대한 대규모 공격을 개시했다.백제군은 중국으로 통하는 신라의 서해 관문인 당항성(경기도 화성군)의 목을 죄는 한편 신라의 낙동간 방면 전선사령부가 위치한 대야성(경북 합천군)을 함락하여 경주를 가까이서 위협했다.이같은 전과는 의자왕의 경탄할 만한 기민성과 결단력에 힙입은 바 컸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의자왕의 인간적인 약점이 노출되었다.전투에 잇따라 승리한 의자왕은 어느 덧 자만심에 빠져 만기를 독재하는 통치스타일로 기울어졌다.사태를 더욱 악화시긴 것은 왕비 은고의 지나친 권력욕이었다.백제를 멸망시킨 뒤 당나라 장수 소정방은 부여 정림사탑에 전승을 기념하는 글을 새기도록 했는데,거기에는 멸망 당시 백제의 정치상황을 설명하여 『의자왕이 곧은 신하를 버리고 아낙네(왕비)를 너무 믿어 형벌이 오로지 충양한 사람에게 미쳤다』고 했다.양심적인 재상인 성충이 옥사하고 흥수가 귀양을 간 것도 이같은 난정이 빚어낸 어처구니없는 결과였다.또한 해방 직후 부여에서 우연히 탑비가 발견됨으로 해서 그 실재가 확인된 대좌평 사택지적의 정계은퇴도 이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충신들이 밀려난 자리에는 신라의 간첩망에 포섭된 임자 같은 인물이 도사리고 있었다. ○왕비 권력욕 지나쳐 무엇보다도 의자왕이 범한 큰 과오는 백제를 둘러싼 국제관계의 변화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점이다.당은 신라측의 끈질긴 한반도 개입 요청을 받아들여 백제에 사신을 보내어 신라와 화평관계를 꾀하도록 외교적 압력을 가했다.그러나 의자왕은 이같은 권고를 거듭 묵살했다.652년 이후 백제는 더 이상 사신을 보내지 않음으로써 당과의 관계를 사실상 단절했다.백제를 치기로 한 신라와 당 양국간의 비밀협상이 한창 무르익어가던 절박한 때에 이는 돌이킬 수 없는 외교적 실책이었다.바야흐로 백제 상공에는 잔뜩 먹구름이 닥쳐오고 있었으나,의자왕은 전혀 그 낌새를 눈치채지 못했던 것이다. 서기 660년 여름 신라와 당 연합군의 침공은 백제로서는 그야말로 청천백일하의 날벼락이었다.김유신이 이끄는 신라의 5만 대군이 국경선 깊숙이 나타났을 때 백제가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결사대 5천명이 고작이었다.이 결사대는 사흘동안 황산벌(충남 연산)에서 신라군과 처절하게 싸운 끝에 전원 옥쇄했다.한편 13만명에 달하는 당나라 군대는 금강 동쪽 기슭에 상륙,7월 11일 신라군과 합세했다. 드디어 12일에는 나당연합군이 사비도성 공격에 나섰다.연합군은 도성 동쪽 20여리쯤 떨어진 곳에서 백제군의 소규모 저항을 받았으나 이를 단숨에 격파하고 염창리에서 능산리로 이어지는 나성을 통과,순식간에 도성 안으로 진입했다.적군의 강습에 완전히 전의를 상실한 의자왕은 태자와 함께 북쪽 웅진성(공주)으로 달아났다.이에 왕의 둘째 아들 부여태가 왕권을 대행했으나 혼란을 수습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이윽고 연합군이 시가지를 가로질러 부소산성을 포위하자 절망에 빠진 지배층과 백성들이 떼지어 성에서 내려와 항복했다.그리하여 부소산성 정상에는 나당 연합군 깃발이 나부끼게 되었다. ○부흥운동 무위로 그러나 백제는 그 뒤 3년간 더 살아 꿈틀거렸다.국왕의 항복결정을 거부한 지방주둔 병력이 왕족 복신의 지휘 아래 총집결하여 조직적인 부흥운동을 벌인 것이다.이들은 한때 사비도성을 포위한 일까지 있었다.주류성(서천 한산 혹은 부안으로 짐작됨)과 임존성(예산 대흥)이 당시 부흥운동군의 일대 거점이었다. 663년 가을 백제와 전통적인 우호관계에 있던 일본이 부흥운동군을 돕기 위해 3만대군을 보냈다.그러나 왜군은 백강하구에서 신라·당 연합군에 포착되어 네차례의 접전 끝에 섬멸되고 말았다.당시 불에 탄 왜선 4백척에서 뿜어대는 연기와 불꽃이 하늘을 붉게 하고 바닷물도 빨갛게 물들었다고 한·중 양국 사서는 기록하고 있다.왜군 격파로 사기가 오른 연합군의 일제 공격으로 주류성은 마침내 함락되고 백제부흥운동은 그 종말을 맞게 되었다. 이처럼 백제는 가고 말았으나 그들이 창조한 문화의 가지는 신라와 일본 등지에 이식되어 그뒤 오랜 세월 생명력을 유지했다.지난해말 세상에 공개된 금동향로는 찬란했던 백제문화의 정화로,그 명성이 헛된 것이 아니었음을 새삼 깨닫게 한다. ◎망국의 군주/의자왕 중국 북망산에 묻힌듯/패망후 당나라에 끌려가 병사 우리가 고대사에서 만날 수 있는 큰 비극을 꼽자면백제패망을 다룬 AD660년의 기사가 그 하나일 것이다.궁녀들이 꽃처럼 떨어졌다는 낙화암 옛 이야기와 더불어 아련히 들려오는 사비도성의 황급스러운 말발굽소리는 백제사가 간직한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이 때에 웅진성(공주)으로 피신했던 의자왕도 결국 나·당연합군에 붙잡혀 2만여 백제유민들과 함께 당나라로 끌려갔다고 역사는 기술하고 있다.그러나 이 망국의 군주는 생몰연대도 전해지지 않고 그저 막연하게 당에서 병사한 것으로만 되어있다.이는 의자왕과 휩쓸려 포로가 된 왕자 부여릉(AD615∼682년)이 당에서 남긴 비교적 소상한 활동기록과는 사뭇 대조를 이루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의자왕은 어떻게 되었을까.이 물음에 해답을 던져줄 가능성은 있다.의자왕의 신하로,또 왕자 부여릉과 백제부흥운동을 통해 생사고락을 함께 했던 흑치상지(AD630∼689년)와 그의 아들 흑치준의 묘지명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중국 하남성 낙양의 북망산에서 1929년에 발굴된 이 묘지명은 현재 남경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이 흑치상지의 묘지명은 왕자 부여융이 주군으로 받들어지고 있음을 표현했다.또 묘지명은 AD677년 부여융이 당으로부터 「웅진도독 대방왕」에 임명되었을 때 흑치상지는 속관의 직명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도 보여준다.다만 41줄 1천6백4글자나 되는 묘지명 새김글씨에 의자왕 기록이 전혀 없다는 아쉬움이 있다. 그러나 사학계는 당나라 왕후장상들의 묘역 북망산을 계속 주시하는 입장이다.북망산에서는 백제유민 흑치상지 부자의 묘지명 말고도 연개소문의 아들이자 고구려유민인 천생의 묘지명이 출토되었다.이로 미루어 의자왕의 무덤도 북망산 묘역 어딘가에 존재할 것으로 확신하고 있다. 백제 최후의 군주 의자왕의 무덤을 찾는 일은 한·중학계의 협력에 따라 성사될 수도 있을 것이다.그래서 학계는 북망산 한쪽에 묻혀있을 의자왕 묘지명을 찾아야할 큰 역사숙제를 안고 있는지도 모른다.
  • 남북국시대(온가족이 함께 읽는 우리역사:25)

    ◎통일신라와 발해 2백여년 공존/발해사 새 평가… 한국사 일부로 자리잡아/북방부각 따라 「3국통일」은 다소 빛잃어 660년 신라와 당의 연합군은 백제의 수도 사비성(현 충남 부여)을 공격해 멸망시켰다.8년이 지난 뒤 나당연합군이 다시 고구려의 수도 평양성을 함락함으로써 3국시대는 종말을 맞았다. 그렇다고 곧 신라의 시대가 된 것은 아니었다.당은 고구려·백제의 옛땅에 일종의 식민통치기구를 두는 한편 신라마저도 집어삼키려 했다. 이에따라 신라는 고구려·백제의 유민과 힘을 합해 당군에 대항,매소성(경기도 양주군으로 추정)전투에서 당병 20만명을,금강하구 기벌포(충남 논산·서천군 일대)전투에서 수군을 각각 섬멸했다.676년 신라는 대동강이남 지역에서 당군을 완전히 몰아내고 3국을 통일했다. 한편 고구려의 유민들은 요동지방에서 당에 대한 저항을 계속했으며 그 지도자인 대조영은 698년 길림성의 돈화현 동모산 일대에서 고구려를 뒤잇는 나라 발해를 세웠다. 이처럼 7세기 후반은 한국사에 큰 획을 그은 변혁의 시대였다. 북중국과만주 일대에 거대한 제국을 건설해 중국세력의 침입을 막았던 민족의 방파제 고구려,일찍부터 해외로 활발히 진출했고 또 화려한 문화의 꽃을 피웠던 백제는 한국의 역사에서 사라졌다. 그러면 신라의「3국통일」은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야 하며 발해가 한국사에서 자리잡아야 할 위상은 무엇일까. 「신라의 3국통일」과 발해사에 대한 평가는 반비례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신라의 3국 통일에 큰 의의를 부여하면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는 한국사에서의 위치가 그만큼 낮아진다.거꾸로 발해사를 강조하다 보면 신라의 통일은 상대적으로 빛을 잃게 된다. 따라서 신라의 통일을 올바로 인식하고 발해를 제대로 평가하는 것은 우리 역사를 이해하는데 있어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신라의 3국통일은 통일신라기는 물론 고려·조선조를 통해 높은 평가를 받아왔다. 신라 신문왕 6년(686)에 세워진 청주운천동사적비에는 「삼한을 통합하니 나라의 땅이 넓어졌다」는 구절이 들어있고 최치원(858∼?)도 924년에 세운 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비문에서「삼국이 이제서야 장하게도 한 집안이 되었구나」라고 썼다. 당시 신라인들이 고구려·백제와 동족의식을 갖고 있었고 신라가 3국을 통일한 것에 자부심을 가졌음을 알게 하는 대목이다. 이후 고려 때 편찬된 「삼국사기」,조선조의 「삼국사절요」「동국통감」등의 사서에도 신라의 3국통일은 찬양 일변도로 기록됐다. 그러나 최근에는 신라의 3국통일에 한계성이 있다는 전제아래 통일이후 고려이전까지를 「통일신라」기로 시대구분하는 대신 통일신라와 발해가 공존했다는 의미에서 「남북국시대」로 규정한다. 현행 고교 국사교과서는 『통일신라는 확대된 영토와 함께 왕권의 전제화가 이루어지면서 전성기를 맞이하였다.한편 만주의 동북지역을 거점으로 건국된 발해는 고구려의 전통을 계승함으로써 통일신라와 함께 남북국시대를 이루게 되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 대한매일신보에서 서울신문까지(겨레의 맥박으로 본 89년:14)

    ◎「매신」의 8차례 부록 발간/충무공 등 소개… 암흑기 민족의식 고취/광개토대왕의 기개·정몽주충절 상세히/이퇴계·정약용·김정희 등 석학·명필 망라 한일합방 이후 일제가 총독부 기관지로 새로 창간한 경성일보(일문판)에 흡수되어 국문판 자매지 성격으로 명맥을 유지해오던 매일신보는 1938년 4월16일 경영체제의 독립이라는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다.이는 1936년 중일전쟁을 시발로 내선일체를 더욱 강조해가던 일제가 한국인들의 민심계도를 위해 보다 강력한 한글신문의 필요를 느꼈기 때문 이었다. 이에따라 사장 최린,부사장 이상협등 새경영진이 선임되고 편집국장에 김형원 논설부장 유광렬등이 새로 임명되었다.이들은 제호부터 신자를 신으로 고쳐,매일신보로 바꾸고 경영독립을 기념으로 대대적인 지면혁신및 기념사업을 추진하게 되었다. 당시 매일신보의 지면혁신 내용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부록판 발행.독립경영 2개월후인 6월30일자에 첫번째호를 발간했다.「역대명가유필진적」이라는 제목하에 한국의 역사적 인물들에 대한 필적을 소개한 이 부록판은 비록 이듬해 1월31일까지 매월 말일자로 여덟번 발간된후 중단됐으나 36년8월 동아의 일장기말소사건 이후 언론탄압이 극에 달했던 당시의 시대적 상황으로 볼때 획기적인 것이었다. ○당시론 획기적 기획 그 내용을 면밀히 살펴보면 이 부록판은 표면적으로는 선현들의 「글씨」소개를 내세우고 있지만 이를 통해 한국 역사인물과 역대왕조의 소개등이 자연스레 이뤄졌다는 사실에 주목하게 된다.일제하에서 역사를 빼앗긴채 「일본신민」으로 살고 있던 한국인들에게 높은 기상을 자랑하던 고구려와 광개토대왕을 알리고 고려말 충신들을 소개했다.또 이순신장군의 대첩,충절을 최고의 덕목으로 삼았던 조선조 유명한 선비들에 대해 소개했다.이는 민족의식을 일깨우고 민족문화의 중요성과 그 보존을 강조한 것이 틀림없다. 이 부록판 발간에 대해 매일신보는 첫호가 나가기 전날인 1938년 6월29일자 1면에 사고를 내고 『본사경영독립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조선서도의 금자탑인 역대명가의 유필진적을 애독자 제위에게 무료증정하게 되었다』고 대대적으로 알렸다.또 소개되는 작품들에 대해서는 『본사가 그동안 막대한 노력과 시일을 들여 수집망라한 것으로 글씨 한개마다 전문 사학가의 해설을 곁들였음』을 밝혔다.인쇄및 장정에 대해서는 『본사 특선의 고급당지에 석판이도쇄로 미려정교하게 인쇄,병풍을 만들어 영구히 보존할수 있도록 고급전아하게 만들었다』고 설명했다.사고는 또 이 부록판 발간을 『조선신문 초유의 희생적 사업』이라고 정의하고 『반드시 독자제위의 열광적 환영이 있을 것으로 믿고 있다』고 자신했다. 38년 6월30일자로 발간된 첫번째 부록판은 황해도 해주군 광조사지의 진철대사보월승공탑비등 고려전기의 탑비 6편을 수록했다.해설의 예를 보면 진철대사비의 경우 고려 태조 20년에 세운 것으로 작자는 최언위 필자는 이환상으로 구양순체임을 밝히고 있다. 7월31자로 발간된 두번째 부록판은 고려때 최고의 왕사였던 석탄연의 문수원비를 비롯,오늘날 지극히 귀한 것으로 알려진 이규보의 유묵과 안향 정몽주 문공유등 고려시대 석학들의 필적을 실었다.특히 포은 정몽주는고려말 절개를 지킨 굴지의 학자이자 정치가로 기술했다. 특히 세번째 부록판(8월31일자)은 광개토대왕비등 만주 안동성 집안현 일대에 있는 고구려시대의 비문들로 꾸며졌다.특히 광개토대왕비에 관해서는 『동양인이 쓰고 세운 비석 가운데 최고 최대의 비석』이라는 설명과 함께 자세하게 대왕의 업적을 소개했다.『고구려의 19대왕으로 아버지는 고국원왕,아들은 장수왕이며 18세에 즉위했다.왕은 천자영매하고 용병의 귀신이었으며 공격하면 반드시 점령하고 싸우면 반드시 이겼다.64개의 성과 1천4백개소의 촌락을 공략하여 국경을 넓혔다.이르되 호태왕이라 한다.…』 ○신라때 비석도 게재 네번째 부록판(9월30일자)은 함경남도 함흥군 하기천면소재 황초령 진흥왕순수비와 낭공대사탑비,신행선사비등 주로 신라시대 인물들의 탑비를 싣고 있다.진흥왕순수비는 한반도내 광개토대왕비에 버금가는 최고,신라 제일의 비로 소개했다. 다섯번째 부록판(10월31일자)은 박연 성삼문 서거정 김시습 안평대군 정란종 최흥효등 조선 전기 각분야에서 특출난 인물들을 소개했다.박연은 세종때 처음으로 아악을 연구 시행한 음악가로 이조판서와 대제악을 역임했으며 성삼문은 조선의 세종과 문종 그리고 단종 세임금을 섬겼으나 세조를 거부한 사육신의 한사람으로 세종대왕을 도와 훈민정음 창제에 공이 크다고 설명했다.또 김시습은 단종폐위사건에 반발하여 일평생 방랑생활을 했던 신동으로 일시적으로 금오산에 우거,금오신화를 남겼고 이율곡이 그를 백세지사로 극찬하였음을 소개했다. 여섯번째 부록판(11월30일자)은 일제가 가장 주목하는 인물인 이순신을 비롯,이황 양사언 한석봉 김구 등 조선중기 대가들의 유필을 수록했다.특히 임진왜란때 일제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던 이순신장군에 대해서는 그의 난중일기 일부를 소개하며 거북선 건조,옥포 당포 한산도 해전에서의 대첩등 큰 전공을 세운 내용들을 상세히 기록했다. 일곱번째 부록판(12월31일)은 허목 이광사 이숙 윤순거 송준길등 조선 중기 석학들에 대한 필적과 업적을 소개했다. 마지막회가된 39년 1월31일자 부록판은 김정희 조광진 정약용 이삼만 권돈인강세황등 조선말기의 명필 석학들의 글씨를 두루 실었다.특히 초서 해서 전서 예서에 통달,조선 최고의 명필인 추사 김정희를 자세히 소개했으며 남쪽의 김정희에 필적할만한 북쪽의 명필로 조광진을 내세웠다.또한 다산 정약용에 대해서는 뛰어난 학문과 저작을 칭송하고 그의 형 정약전 정약종과 함께 이들 형제의 천주교 귀의와 순교내용을 상세히 기술했다. ○「매신」 실체규명 계기 이같이 한국의 대표적 역사인물들을 두루 소개한 매일신보 부록판은 39년 1월 별다른 설명없이 중단되었다.그러나 이 부록판은 민족자각의 의도성 여부를 떠나 결과적으로 한국인들에게 잃어버렸던 역사를 되살리게 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따라서 이같은 매일신보의 새로운 측면은 그동안 친일 반민족 신문으로만 평가되어 한국언론사연구에서 제외되다시피 했던 매일신보의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운 역할을 규명할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 매일신보/부록 펴내 민족의식 일깨워/역사연구가 김보영씨 첫 공개

    ◎1983년 6월부터 월1회 8차례 발간/금기인물 이순신장군 소개/광개토대왕비 등 유적 실려 일제하 총독부기관지로서 친일논조의 반민족지 역할만 한것으로 알려진 매일신보가 부록을 통해 민족문화를 소개,자각을 일깨우려 했다는 새로운 사실이 밝혀졌다.이는 역사연구가인 김보영씨(65·서울 중랑구 중화2동 321)가 1938년 6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매월 1회씩 8차례에 걸쳐 발간,배포했던 매일신보 「부록」을 18일 공개함으로써 확인됐다. 부록에는 주로 한국의 역사인물 및 문화유적을 소개하는 내용이 실려있다.이들 부록에는 5∼6인의 저술 및 친필 휘호등을 싣고 그 인물에 대한 자세한 소개를 한문으로 기록했으며 작품의 소장자까지 밝혀놓았다.특히 소개된 인물 가운데는 일제시 한국인들에게 금기시되던 이순신장군이나 광개토대왕등도 포함돼있어 당시의 시대적 상황으로는 획기적인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 부록은 희고 얇은 모조지에 매월 말일자로 발행됐으며 크기는 폭38·5㎝ 길이107·5㎝.그 하단에는 「소화13연 6월30일 매일신보 일만일천칠십오호 부록 발행인 이상협 편집겸인쇄인 김선흠 경성 종로 보진재 인쇄」라고 발행시기 및 지령 인쇄처등을 명백히 밝혀놓았다. 1938년 6월30일에 발행된 첫 부록에는 황해도 해주 광조사에 있는 고려초의 명승 진철대사의 보월승공탑비와 충북 중원군 정토사에 있는 신라말의 명승 법경대사의 자등탑비등 6편의 명승추모탑의 탁본을 싣고 자세한 해설을 곁들였다.그 내용을 보면 『이순신장군은 임진왜란때 전라좌수사로 옥포·당포·한산해전에서 대첩을 거두었으며 정유재란때 재기,통제사가 되었다』고 적었다.또 『전쟁지휘중 날아오는 탄환에 전사했는데 시호는 충무공』이라고 비교적 상세히 설명했다.이 부록에는 그밖에도 이퇴계 양사언 한석봉등 조선시대의 대학자들도 소개하고 있다. 한편 8월31일자로 발행된 세번째 부록은 고구려 광개토대왕비의 탁본등 만주에 흩어져 있는 고구려 유적들을 싣고 고구려와 광개토대왕에 대한 설명을 곁들였다.그밖에 이규보 정몽주 성삼문 안평대군 서거정 김시습 박▦ 정약용 김정희등 역사적 인물들을 자세히 소개했다. 이 자료를 검토한 언론사학자 정진석교수(한국외국어대)는 이 부록이 발간된 시기에 대해 우선 주목했다.1938년 4월 경성신문에 예속돼 있던 매일신보가 최린을 사장,이상협을 부사장으로 한 한국인 경영체제로 바뀌면서 제호도 매일신보에서 매일신보로 바꿔 새로 출발한 직후였기 때문이다.정교수는 『매일신보가 재출범하면서 새로운 기획으로 이 부록을 만들기 시작한것 같다』면서 『이제까지 친일 반민족신문으로 한국언론사연구에서까지 제외되다시피 했던 매일신보의 긍정적 측면을 엿볼수 있는 귀중한 자료』라고 평가했다.
  • 조각가 최종태씨(이세기의 인물탐구:15)

    ◎영혼 깃들인 조형세계 표출에 온힘/내면적 깊이서 「참예술」 찾는 미의 탐구자/「착한 사람」 형상화 일념… 순수 소녀상 집착/중3때 충남학생 미전서 수상계기로 예술의 길 걸어 오늘은 뭔가 될듯하다.뭔가 할 수 있을것 같다고 느낀다.그래서 손을 놓을 수가 없다.되는듯 싶다고 생각될 때 되지않으면 왠지 「암담」해진다.되고있는 「하루」를 얻기위해 그는 오늘도 지하실 작업장으로 내려간다. 처음부터 그랬고 지금도 집요하게 소녀상에 집착하고 있는 조각가 최종태씨.슬픔이나 미움이 묻어있지않은 얼굴속에서 그는 「좋은 사람」「착한 사람」을 끌어내고 싶다.그리고 그가 성취하고자하는 얼굴을 위해 끊임없이 그리고 끝없이 그리고자 한다.그는 실재하는 얼굴을 그리려할뿐 실재하는 얼굴의 외형을 원치는 않는다.이에 충실하면 할수록 그가 접근하려는 얼굴로부터 점점더 멀어지는 안타까움은 어쩔 수 없다. 부피가 느껴지지않는 식물성의 체구에 때묻지않은 시선,때묻지않은 표정,그러나 날카로운 예술가의 초상에는 고고함과 고통이 동시에 담겨져있다.만일 시인이 조각가보다 한수 위라면 그는 단순한 조각가아닌,「미의 탐구자같은 시인」이라 부르고 싶다. 그는 만사에 꾸밈도 변명도 없다.술수도 책략도 타협도 없다.오로지 「순수무결한 소녀」에 집착하는 해맑은 심성은 우리가 살고있는 오염된 현실에서 한줄기 다이아몬드 빛처럼 인간의 영혼을 정화시키려는 정령과도 같다. 프랑스의 파트리스 브로크 로랑 프상티는 그의 작품은 「극동의 지혜와 준엄함이 깃든 예술」,정병관은 「세계미술사적인 수준에서도 그는 독보적인 인물조각가로 불려 마땅하다」고 평한다. 아마도 동시대를 사는 생존작가중에서 최종태만큼이나 평자들의 사랑을 받는 작가도 드물거라는 생각이다. 가장 높이 나르는 새가 가장 먼데를 보듯 그의 내면에 무한한 공간을 구성해놓고 작가의 마음속 먼데까지 높이 올라 늘 전체를 관망하려는 자세때문인지도 모른다.예술이 예술을 넘어선 경지,그는 조형의 단계를 지나 이미 초월을 꿈꾸는 위치인 것이다. 그러니까 그는 하마터면 소설가가 될뻔도 했다.서예가 또는 작곡가가됐을지도 모른다.그만큼 그는 다양한 재능을 타고났다.그러나 중학교 3학년때 야외사생이 충남학생미전에서 2등상을 탄 것이 계기가 되어 선택의 여지없이 화가의 길을 정했던것 같다. ○보수적 집안서 자라 대대로 농사를 지어온 보수적인 집안에서 아버지는 아들이 법대에 가기만을 완강히 우겼다.별로 좌절이라든가 타격을 받는 타입이 아니지만 이때만은 「큰 충격」이었음을 그는 여러 글에서 밝히고 있다. 대전사범 졸업후 미대에 진학,그는 『내가 왜 서도의 길을 내던지고 그림의 길을 갔는가,그림의 길을 내던지고 조각의 길을 갔는가 하는것 등은 내가 선택했다기 보다 수동적으로 그때마다 그렇게 조건이 지어졌다는 편이 옳다』고 말한다. 중학교때는 화가 이동훈씨가,대학교 1학년때는 장욱진씨,조각으로 돈것은 김종엽씨의 영향때문이다. 그는 스승인 김종엽씨를 부모처럼 따르고 존경해왔다.그러나 졸업할무렵 스승이 추상형태를 추구하자 스승의 모든 것을 받아들였음에도 형태에 관한한은 자신의 길을 곧게 지켰다. 당시 서구 현대미술사의 한편에는 모딜리아니가 있고 루오와 자코메티,자드킨이 있고 또 현실을 살아가는 아픔과 거기 실존주의 철학과 동양철학이 있었다. 60년대초반의 그는 아르프와같은 유동하는 추상포름을 딱 한번 만들었고 후반에는 미니멀쪽에 빠지기도 했으나 그는 『「예속이나 편승」에서는 자유로울 수 없음을 판단,「예술가의 삶은 참삶을 찾는것이며 따라서 형태의 선택은 자신의 진실이 우선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외진 길이라도 그의 길을 고수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는 단 한번도 모델을 쓰지않은 작가로도 유명하다.조각은 물론 그림에서도 「모델」은 그에게 중요하지 않다.그저 본대로 느낀대로 형태를 다루고 있다. 그는 최근 「소리를 듣는 사람」을 만들었다.손을 귀에다 대고 어디선가 들려오는 까마득한 소리를 놓치지 않으려는 자세다.이는 70년대이후 두번째 시도다. ○모델 쓰지않는 작가 그무렵 사는것이 너무 힘든 절화의 상황에서 형태를 어떻게 다룰지몰라 고심하고 있을때 어디선가 끊임없이 그를 감전시키는 어떤 힘,바로 그의 「어머니의 목소리」였다.어머니의 소리를,어떤 천상의 소리를,들릴듯 들리지 않는 소리를 내면에서 확인키위해 그는 이와 비슷한 작품을 만든적이 있다. 『재산이라곤 쌀밖에 없었던 우리집,할머니와 어머니가 아버지 몰래 쌀을 팔아서 물감·종이를 사주었다』아끼고 아껴도 1주일에 한곽씩 물감을 써야하는 그였기에 지금도 눈물없이는 「어머니」를 말할 수가 없다고 돌아본다.「소리를 들으려는 사람」은 어머니가 그에게 준 또하나의 구원의 선물이 된 셈이다. 그는 수많은 책을 읽었지만 그중에서도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을 잊지못한다. 「인생의 문제는 무엇인가/싸우는 것이다.다음의 문제는 누엇인가/이기는 것이다.그 다음의 문제는 무엇인가/죽는 것이다」이 짤막한 서시는 「바로 레미제라블을 그대로 요약하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인생과 예술의 전쟁에서 싸워 이긴 자코메티를 부러워하고 있다.특히 싸르트르가 자코메티에게 한말,「그는 매일 아니라고 하지만 그는 늘 승리하고 있다」는 예술가에 대한 최대의 찬사가 아니겠느냐고. 이제 나이 60이 넘어 「죽음」을 한번쯤 떠올려볼 시점에 서서 그는 「무궁한 세월의 흐름속에서 유한한 인간존재와도 같은 풀 한포기 나무 한그루에도 문득 애틋함」을 느끼게 되었고 그가 사는 하루 하루가 매일같이 새로운 날이기를 기원하기도 한다.그리고 세상에서 처음보는 풀,처음보는 나무,아침에 눈을 뜨고 바라보는 신천지의 경이로운 광휘를 최초로 그리고 싶은 것이다. 「삶과 죽음사이에 그 이름할 수 없는 빈공간에서 파르르 떨고있는 풀잎처럼 나의 그림은 그렇게 존재한다」는 그는 이제 관조의 강가에 서서 그가 건너온 피안의 언덕을 중용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의 작품은 그것이 서있는 인물이건 얼굴상이건 한결같이 거룩하게 우뚝 솟아 정면을 향하고 있는것이 특징이다.늘 똑바로 서서 무엇인가를 계시하는 얼굴은 범속을 떠났으나 대지의 슬픔이 깃들어 있다.어느때는 절망과 칠흑같은 어둠속에서 도끼같은 얼굴을 내밀고 자유의 저편을 내다본다. 물론 최소한의 필요만 남기고 곁가지는 가차없이 생략되어 어느경우든 입체감의 거부를 강렬하게 강조하고 있다.그러나 직선의 작가이면서 자칫 단조로움에 빠질 위험에서 벗어나 얼굴상 조각은 매끄러운 곡면이 연출되고 측면의 선도 보일듯말듯한 곡선의 변화를 부여하고 있다. ○부인 헌신에 늘 감사 그는 대전에서의 교사시절 같은 학교 영어교사이던 부인 김절자씨와의 사이에 지영(이대대학원) 범락(서울대4)남매. 그는 조각일을 할뿐.부인은 예술가 남편에게 아무것도 주문하지 않는다.작품을 파는 일도 싫어하고 작품흥정을 소름끼치게 거부하는 남편을 헌신적으로 뒷바라지 해온 부인에게 그는 어느 글에선가 「아내여 미안하다」고 쓰고있다. 술은 주사가 있을만큼 폭음.특히 시인 박용래를 좋아한다.그러나 이젠 나이먹고 실수할 것이 두려워 시인 소월처럼 「마누라를 건너편에 앉혀놓고」집에서 술마신다.끝없는 줄담배.대신 어디서든지 「글써달라」는 부탁만은 거절하지 않는다. 그는 이대뒤 노고산동 하꼬방,신촌역 전세집에 살다가 80년에 연남동에 정착하여 지난해 처음 작업실이 있는 집을 지었다.뭔지 부자가 된듯하지만 마당에다 천막을 치고 흙을 바르고돌을 쪼던 때가 진짜 작품을 하던 시기가 아닌가 생각된다.그러나 이런 일에는 이미 초연하여 여전히 「착한 사람」「훌륭한 사람」만드는 일념에 사로잡혀 있다. 그의 「착한 사람」이 과연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나 그의 작품들은 어딘가 그의 모습을 비슷비슷 닮아있는 것처럼 보인다.웅변보다는 침묵,발언보다는 경청하는,행동보다는 사변하는 모습등이 그렇다. 그리고 정연하게 늘어선 수많은 그의 소녀들을 바라보는 순간,그들이 하나같이 살아움직이는듯한,루크 브젱이 그에게 했던대로 「청동·목재·화강암으로 된 모습들에서 문득 심장뛰는 소리가 들림」을 실감할 수 있다. 그는 결국 그가 집요하게 추구한대로 어쩌면 정신세계를 가진 인체를 지금 이시간에 성취하고 있는 바로 그 순간인지도 모른다. □연보 ▲1932연12월 충남 대덕군 회덕면 출생 최명교씨와 임용자씨의 4남1여중 장남 ▲1952연 대전사범졸업(화가 이동훈씨에게 그림지도) ▲58연 서울대 미대 졸업(공주고­천안여고­숙명여중­천안고­대전 대성고에서 교사)▲59연 국전 입선 ▲60연 조각 「서있는 여인」으로 문교부 장관상에 이어 「어머니와 아들」「앉아있는 여인」으로 연3회 특선,국전 추천작가 ▲64연 대전 문화원서 제1회 조각 개인전 ▲65연 시인 임강빈 시화전 ▲66연 공주사대 교수 ▲67연 이대 미대 교수,서울대 미대 동문 이남규·이민회·이지휘·조영동과 5인작가전(서울신문회관) ▲68연 현대 공간회 창립(이후 15년간 해마다 클럽전) ▲70연∼현재 서울대 미대교수 ▲71연 유럽지역여행(이탈리아 조각가 파치니와 교류) ▲75연 조각개인전(미국 문화원) ▲76연 파스텔화·소묘·조각·목판·릴리프전시회(문헌화랑) ▲77연 조각과 목판화전(신세계 화랑) ▲81연 조각개인전(신세계 미술관)구미지역여행 ▲84연 파스텔 그림전(가람화랑) ▲85연 FIAC(국제견본시 현대 미술)85 조각·파스텔화·목판화 출품,조각개인전(가나화랑),FIAC86에 조각·파스텔화·목판화 출품 ▲87연 가나화랑주관 파리 샹프륄리 아틀리에서 오리지널 판화제작 서울대 연구교수 ▲88연 일본 광륭사 반가사유상·법륭사 백제관음상 감상 조각개인전(호암갤러리) ▲90연 조각·파스텔화 개인전(가나화랑) ▲91연 FIAC91 출품(부부가 유럽여행) ▲92연 파스텔화·테라코타·조각·연필화·먹그림 개인전(가나화랑),그외 「순교자를 위한 기념상」(서울양화진성당)「김대건신부상」(한강성당)「성모상」「콜롬바와 아그네스 자매상」「예수성심상」「십자가의길」(명동성당)장욱진 탑비(충남 연기)제작 충남문화상·국전추천작가상,서울시문화상 수필집 「예술가와 역사의식」「현장을 찾아서」「나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을 만들고 싶다」열화당간 「최종태 화집」,가남아트간 「최종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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