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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외언내언

    괴상한 몸짓으로 관중석을 향하여 포효하는 씨름선수 강호동. 그에겐 「괴동」이니 「악동」이니 「무법자」니 하는 별명이 있다. 하지만 물론 그 표현에 악의가 담긴 것은 아니다. 예쁜 짓을 하는 계집애에게 「여우」라고 하듯이 선의로 지어준 별칭이라 할 것이다. ◆올해 열아홉. 샅바를 잡으면서 싱긋이 웃는 데서는 아직도 소년 티가 느껴진다. 통통한 얼굴이 귀엽기까지 한,사실인즉 「호동」. 그 치기로 해서 「성깔」이 나타나기도 했다. 그 때문에 「무법자」같은 별칭이 붙었을 수도. 그런데 이번 백두급과 천하장사전에서는 달랐다. 출전하면서 감독에게 인사를 하는 등 모래판의 「신사」로 된 것. 두 타이틀을 거머쥔 것보다 그 대목이 더 대견해 보이기도 한다. ◆이 「괴동」이 세상을 놀라게 한 것은 지난해 7월 18세 어린 나이로 백두급 장사로 탄생했을 때. 준결승에서 천하의 이만기선수를 2대0으로 누른 다음 결승전에서 만난 임용제선수를 3대0으로 메쳐버린다. 그러나 11월의 백두급전에서는 결승에서 다시 만난 이만기선수에게 3대0으로 완패.『역시 이만기』란 말이 또한번 나오게 했다. 그런데 이번에 그 이만기의 백두ㆍ천하장사 두 타이틀을 한꺼번에 뺏어낸다. ◆기계를 평하면서 『조훈현을 정말 못끌어내리나』 하는 말들을 한다. 그것은 조기사가 미워서 하는 말은 아니다. 「장기 집권」이 가능케 하는 후진 기사 없음을 안타까워하면서 하는 말일 뿐. 씨름계 역시 그렇다. 『이만기 시대가 언제까지 갈 건가』 하는 말은 씨름계의 군웅할거시대를 기대하면서 나오는 터. 이번 두 대전에서는 이선수의 예술과 같은 들배지기가 강선수에게 먹혀들지 않았다. 강의 성장인가,이의 쇠퇴인가. 이선수는 은퇴선언 번복을 후회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강선수의 두 타이틀 탈취는 90년대 씨름계에 신선한 바람을 불고 온다. 이는 국기로서의 씨름을 더 흥미롭게 하는 일이기도. 만에 하나 교만에 흐르지 않도록 하는 인성지도가 뒤따라야겠다.
  • “중태” 중남미경제 현장 르포:상

    ◎“살인적 인플레”…식량폭동도 유발/아르헨선 자고나면 올라 한해 5천%선/페루서도 심각…하루품삯이 콜라 4병값/환차익 노려 달러 현찰 선호…크레디트카드는 푸대접 중남미를 여행하는 사람들에게는 달러화현찰이 필수적이다. 선진국에서 신용사회의 척도처럼 돼있는 크레디트카드나 TC(여행자수표)는 호텔이나 상점에서 마냥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는다. 크레디트카드나 TC는 선진국에서처럼 대접을 받기는 커녕 현찰에 비해 5∼10%의 웃돈을 줘야만 겨우 써먹을수 있다. 이는 극심한 환율인상에 따른 환차익을 막기위해 정부가 신용카드나 TC의 사용을 사실상 금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용사회의 정착보다는 발등에 떨어진 경제난을 타개하기 위한 극약처방에 따라 자연스럽게 현찰선호사회가 형성된 셈이다. 식당에 가봐도 메뉴의 음식가격이 적힌 난은 연필로 써있기 일쑤다. 하루사이에 돈가치가 뚝뚝떨어지기 때문에 가게마다 매일 물건의 정가표를 바꿔달기 위해서는 지우기 쉬운 연필로 가격을 매기는 것이 훨씬 편리하다는 얘기다. 남미국가들 가운데이처럼 인플레가 가장 심한 곳은 아르헨티나와 페루다. 공식발표된 인플레율은 아르헨티나가 지난해 연4천9백23%로 5천%에 육박했고 페루도 2천7백75%나 된다. 그러나 실제로는 각각 8천%,5천%를 넘고 있다는게 현지경제인들의 설명이다. 우리나라의 지난해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5.1%를 기록했는데도 물가비상으로 법썩을 떨었던 것과 비교하면 이들 남미국가들의 인플레실정이 어느정도인지 쉽게 짐작이 간다. ○화폐는 마치 휴지조각 이같은 하이퍼 인플레이션은 남미제1의 대국인 브라질에서도 마찬가지다. 지난해 1천4백%의 인플레를 기록했던 브라질에서는 현재 모두 네종류나 되는 화폐가 통용되고 있다. 지난 4년동안 총2만%의 인플레가 일어나 그동안 화폐의 명칭을 두번이나 바꿨고 액면가를 크게 줄인 새로운 화폐를 계속 발행했다. 우리나라에서 불과 몇만원정도인 카세트 라디오는 2천4백80만신크루자드이며 몇십만원수준인 뮤직센터 1세트의 값은 무려 1억2천9백만신쿠르자드나 된다. 화폐에 액면가를 더 높여 표시할 자리가 없어 계속 새돈을 찍어내야 할 정도로 화폐는 날로 휴지조각으로 전락하고 있다. 이같은 살인적인 인플레 때문에 통상임금으로는 여유있게 생활하기가 힘들다. 페루에서는 보통근로자의 하루평균임금이 4만인티(3달러)수준이다. 그런데 콜라ㆍ사이다 한병값은 1만인티나 된다. 점심한그릇 먹고 사이다한병 마시면 그날 번돈 모두가 없어질 정도다. 페루의 한달 최저임금이 미화 40달러수준이며 통상 2∼3년을 근무해도 80달러선을 넘지 못한다. 관공서의 국장급이 월1백60달러 정도를 받으며 대우좋은 민간업체도 잘해야 월3백달러에 불과하다. 페루는 중남미국가중 최빈국에 속하지만 한때 세계5대 부국에 들어갔던 아르헨티나의 제조업체근로자 평균임금(기본급)도 지나 2월말 현재 월85∼90달러선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지난해 아르헨티나에서는 전국적으로 식량폭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지금도 일부 지방에서 간헐적으로 식량탈취소식이 들린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먹고살수 있는 것은 고기나 감자,옥수수같은 생필품들이 비교적 싸기 때문이다. ○빵문제도 해결못해 하루가 다르게 치솟는 인플레덕분에 오히려 이득을 보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아이로니한 일이다. 바로 달러생활자들이 그들이다. 달러기준으로 월급을 받는 외국에서 온 외교관,상사주재원들은 오히려 살맛이 난다고 한다. 실질구매력이 인플레에 반비례해서 높아지기 때문이다. 아르헨티나의 수도인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최고급 식당에서는 1인당 10달러만 있으면 최고급 스테이크요리와 와인을 맘대로 즐기면서 귀빈대접을 받는다. 세금을 낼때도 인플레때문에 납부마감일의 납세창구는 상상할수 없을만큼 북새통을 이룬다. 3천2백만명의 아르헨티나인구 가운데 경제불안을 견디다 못해 새로운 생활을 찾아 외국으로 떠나려는 역이민 행렬이 늘어나고 있다. 한때 최고4만명 가까이나됐던 아르헨티나거주 한국인들이 최근 2만5천명선으로 줄어들었다. 하이퍼인플레를 잡기 위해 브라질정부는 정기적으로 모든 상품가격을 수정하는 「물가슬라이드」제도를 시행하는가 하면 수시로 물가ㆍ환율동결을 골자로 하는 긴급경제조치를 단행하고 있다. 그러나 그때마다 실효를 거두지못해 인플레수습을 놓고 하루도 편할 날이 없다. 남미국가들은 인플레 중병은 현단계에서 어떤 명의가 나타나도 쉽게 수술하기가 어려울 정도의 숙환이 되어가고 있는 인상이다. 특히 지난 83년 군부통치를 벗고 민간정부가 들어선 아르헨티나의 경우를 보면 민주화에는 성공했으나 경제는 최악의 실패를 거듭하고 있는 역설적인 사례를 보는 것같다. 세계1,2차대전과 대공황때 유럽의 식량공급원이었던 아르헨티나가 오늘날 빵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모순은 개발도상국들이 그냥 지나치기에는 너무도 값비싼 경험을 제공하고 있는듯 싶다. 지난 40년대까지 세계 5∼6위를 다투던 경제부국 아르헨티나가 오늘날 세계경제 서열 84위(87년말현재)를 기록하고 있는 가장 큰 원인은 역사적으로 잘못된 정치와 그릇된 국민성을 형성해온 때문인듯 하다. 지난해 5월 알폰신 대통령이 이끄는 급진당을 꺾고 페론당의 메넴이 새 대통령으로 당선됐을때만 해도 아르헨티나 국민들은 상당히 들떠 있었다. 페론당이라는 당명이 표방하듯 지난 45년 군사쿠데타를 통해 집권했던 후안 페론 대통령이 구현한 노동자복지 시책이 재현될 것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아프헨티나의 소외계층은 그만큼 노동자 천국을 보장했던 페론주의에의 향수가 강하다. 그래서 지난해 선거 당시 무려 4백만명의 조합원을 가진 노조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어 메넴은 대통령에 무난히 당선됐다. 메넴이 대통령이 되면 페론에 못지않은 노동자들을 위한 복지국가가 될 것으로 노동자들은 기대했었다. ○잦은 정책변경이 원인 그러나 상황은 변했다. 지금 부에노스아이레스 시내 모퉁이에는 「메넴­배신자」라고 쓴 표어가 군데군데 나붙어 있다. 페론대통령시절 노동자들에게 높은 임금을 약속하고 노동조합 활성화의 길을 열어줘 「이틀 일하고 하루 쉬는」 풍조에 익숙해진 아르헨티나 소외계층에게는 정권이 바뀌었어도 오히려 악화되는 경제사정 때문에 비난의 화살은 결국 메넴에게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아르헨티나 경제위기는 자신에 대한 정치적 지지를 끌어내기 위해 모든 소외계층들에게 무상급식과 도에 지나친 복지정책을 실시했던 페론에서부터 시작됐다는 강한 느낌을 지울수 없다. 메넴이 취임직후부터 주요국 공영기업의 사유화 정책과 일련의 경제개혁을 시도했으나 어느 것도 열심히 일하는 것보다 복지 시혜에 길들여진 소외계층의 구미를 만족시키지는 못하고 있다는 해석이다. 그러나 아르헨티나 경제파탄의 책임을 모두 국민들에게만 돌릴수는 없다. 무엇보다는 정부의 일관성없이 오락가락하는 잦은 경제정책변경이 국민들로부터 정부에 대한 신뢰를 얻지못하고 결과적으로 정치와 경제를 표류시키는 요인이 되고 있다는게 현지 경제계의 분석이다. 지난연초 아르헨티나정부는 넘치는 국내통화를 환수하는 방편으로 1백만아우스트랄(당시 미화6백달러)이상의 예금인출을 동결하는 초비상 경제정책인 보넥스(BONEX)조치를 발표했다. 그대신 동결된 예금에 대해서는 외화표시국채로 지급하겠다는 약속을 했다. 이 조치로 메넴대통령정권은 올해 1년간 예산적자예상액인 97억달러 가운데 절반에 가까운 45억달러의 재정을 확보하게 됐다. 강압적인 비상조치로 국내통화량의 60%를 빨아들이고 손쉽게 재정파탄을 벗어날수 있게 된것이다. 그러나 경제계는 난리가 났다. 급격한 인플레로 외화표시 국채가격이 액면가의 불과 27%로 거래되고 있기 때문에 예금을 동결당한 국민들은 국채만기인 10년동안 액면가 차액인 63%의 돈을 고스란히 날리게 된 셈이다. 메넴정부는 긴급경제조치로 재정적자를 메우게 됐으나 기업가의 정부에 대한 신뢰는 땅에 떨어진 것이 요즈음 아르헨티나의 정경관계다. 아르헨티나를 비롯한 중남미국가들의 경제적인 장래에 대해서는 낙관보다 비관론쪽이 좀더 많은 것같다. 아르헨티나에서는 최근 거듭되는 경제정책실패로 메넴정권의 내부에서조차 난국을 수습하기 위해서는 군부가 들어설 수 밖에 없다고 자조하는 소리가 들린다고 한다. 「급진당→페론당→군사정권」의 정권교체등식이 되살아날수 밖에 없을 것이라고 탄식하는 기업가들의 숫자도 적지않다고 한다. 페루에서는 오는 4월로 예정된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기업가들이 정권의 향방에만 신경을 곤두세운채 그때까지 일체의 신규투자나 생산적인 기업활동에 참여할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도 눈에 띈다. 5년전 의욕적으로 출범한 알란 가르시아대통령이 이끄는 좌파정권에 대항해서 우파인물이자 소설가인 마리오 바리가스 로사라는 인물이 대통령에 당선될 공산이 크다는 여론조사결과를 지켜보며 회색빛의 수도 리마는 죽은 도시처럼 생기가 없다. 오늘날 중남미국가들의 경제위기가 정치엘리트집단이 정치를 잘못한 결과로 인식할때 지금 중요한 것은 경제적인 접근보다도 먼저 정치쪽을 바로잡아 국민통합을 이뤄나가야 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 룸살롱살인범 조경수 검거/어제낮 수원서/서울시경팀,은신 셋방 덮쳐

    ◎흉기로 대항하다 경찰가스총에 맞아/「미장원 강도」 16건 범행 확인/지난 2일 애인 이양 데리고 상경하다 잠적후 서울 구로구 샛별룸살롱 종업원 집단살인사건의 범인가운데 조경수(24)가 경찰에 붙잡혔다. 서울시경은 5일 하오1시20분쯤 복덕방주인의 제보로 수원시 권선구 세류1동 238 최영렬씨(63)집 사글세방에 숨어있던 조를 붙잡아 서울로 압송하는 한편 공범 김태화(22)를 쫓고 있다. 경찰은 이들이 지난 1월2일 상오1시쯤 광주시 양2동 백양주점에서 종업원 백미옥양(26)을 살해하고 같은달 6일 서울 종로2가 서울 미용실을 비롯,서울지역의 9개 미장원과 안양 1,부천3,수원 1개 미장원 등 모두 16곳도 미장원에서 연쇄강도를 저지른 것으로 밝혀냈다. 조는 세칭 「벌집동네」인 세류1동 최씨 집에 지난달 15일하오 「정규연」이라는 가명으로 보증금 10만원에 월7만원짜리 사글세방을 구해 숨어있었으며 이날 형사들이 덮치자 흉기를 들고 완강히 저항하다 경찰이 쏜 가스총을 맞고 붙잡혔다. 공범 김은 지난달 27일 대전에서 조와 헤어지면서 『3월2일 수원의 사글세방에서 만나자』고 말하고 종적을 감춰 붙잡지 못했다. 이들은 지난 1월29일 상오1시쯤 서울 구로구 구로2동 808 샛별룸살롱에 들어가 남녀종업원 4명을 흉기로 살해한 뒤 같은날 하오8시50분쯤 영등포역에서 기차를 타고 서대전역에 도착,대전시 오류동 190의1 한진씨(52)집에 셋방을 얻어 숨어있었으며 그이후 수원ㆍ서울ㆍ안양ㆍ부천 등지를 오가며 계속 미장원을 대상으로 강도행각을 벌인 것으로 밝혀졌다. 이들은 또 지난달 26일 대전에서 백색스텔라승용차를 훔쳐타고 상경,하오8시30분쯤 구로구 가리봉동 준카페에서 일하고 있는 조의 애인 이모양(21)을 경찰의 감시망을 따돌리고 빼돌려 대전으로 달아난 뒤 4박5일동안 함께 지내기도 했다. 경찰은 지난 2일낮 서울로 돌아온 이양으로부터 조가 건네준 용돈 15만원 가운데 10만원짜리 자기앞수표 1장을 압수,조회한 결과 지난 1월6일 서울미용실에서 손님들이 탈취당한 외환은행 인사동지점 발행 10만원짜리 자기앞수표 5장가운데 1장임을 밝혀내고 이들이 미장원 연쇄강도사건을 벌인것을 확인했다. 조는 지난2일 대전역에서 이양과 함께 기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오다 평택역에서 혼자 내린뒤 곧바로 수원 사글세방에서 공범 김을 기다리고 있다가 연고지 복덕방을 중심으로 탐문수사를 벌인 경찰에 붙잡혔다. 범인 조는 경찰에 붙잡힌 뒤 체념한 듯 비교적 순순히 철야신문에 응했으며 『태화가 의리를 저버리고 혼자달아나는 바람에 붙잡혔다』면서 미장원 강도사건 16건에 대한 날짜 및 시간 등 범행상황을 정확하게 자백했다. 지금까지 경찰조사 결과 범인들은 살인사건 및 미장원 연쇄강도사건 이외에도 지난해 11월23일 하오10시쯤 부산 동래구 온천동에서 데이트하던 20대 남녀를 흉기로 위협,15만원을 빼앗는 등 2건의 범행을 더 저지른 것으로 확인됐다. 한편 경찰은 공범 김이 조가 애인을 만나는 등 행적을 남긴다는 사실때문에 혼자 달아난 것으로 보고 전국에 비상망을 펴 검거에 나섰다.
  • 택시승객 강도 돌변 차량 탈취 도주/룸살롱 범인여부 수사

    24일 하오10시50분쯤 서울 영등포구 신길동 해군본부 뒷길에서 20대청년 2명이 서울2 마6802호 맵시나택시 운전사 박수길씨(41)를 위협,현금 1만원을 빼앗고 운전사 박씨를 끌어내린뒤 차를 몰고 달아났다. 이들은 이날 하오10시30분쯤 구로구 시흥4동 앞길에서 이 택시를 타고 오다가 해군본부 뒷길에 이르자 1명이 운전석뒤에서 박씨의 목을 조르고 나머지 1명은 흉기를 옆구리에 들이내고 비닐테이프로 박씨의 눈과 입을 막은뒤 『돈은 필요없으니 차를 좀 쓰자』면서 택시를 빼앗아 달아났다는 것이다. 경찰은 이들이 서울 구로동 샛별룸살롱 살인사건의 범인들과 인상착의가 유사한 점이 있다고 보고 동일범인지를 집중 수사하고 있다.
  • 대낮 주택가 떼강도 활개/통장 빼앗아 현금인출ㆍ공기총 탈취 도주

    ◎두집 잇따라 들어가 금품 1백만원 강탈 떼강도들이 대낮에 주택가를 무대로 연일 활개를 치고있다. 21일 상오9시30분에서 11시30분사이에 서울 노원구 월계1동 411의17 장성복씨(52)집에 마스크를 한 20대 청년 3명이 들어가 주인 장씨와 부인ㆍ아들 등 일가족 3명을 흉기로 위협,10만원짜리 수표 2장과 현금 등 30여만원,서독제 경기용 공기총 1자루,현금 65만원이든 예금통장을 빼앗아 국민은행 장위동지점에서 인출해 달아났다. 범인들은 1명이 밖에서 망을 보는 사이 다른 2명이 신사복차림으로 들어가 집안에 있던 장씨 가족들을 흉기로 위협,안방으로 몰아넣은뒤 손발을 넥타이와 스타킹으로 묶고 장롱 등을 뒤져 현금과 예금통장을 찾아내고는 건넌방에 있던 공기총을 빼앗았다. 범인중 1명이 계속 가족들을 감시하는 사이에 나머지 1명은 통장을 갖고 은행으로 가 현금 65만원을 인출한뒤 다시 장씨 집으로 돌아와 공범 2명과 함께 미리 대기시켜 놓은 승용차를 타고 달아났다. 또 이날 12시40분쯤 서울 은평구 신사동 283의29 김문자씨(56)집에 20대청년 3명이 들어가 거실에 있던 김씨와 김씨의 딸 화숙씨(32),아들 무경씨(28) 등 3명을 흉기로 위협,안방 장롱에 있던 금반지 5개,금목걸이 3개,비취반지 1개 등 70여만원어치를 털어 달아났다. 김씨는 딸ㆍ아들과 함께 마루 소파에서 얘기를 나누던 중 갑자기 현관문으로 범인들이 들어와 넥타이로 손발을 묶은뒤 패물을 훔쳐 달아났다고 말했다. 이에앞서 이날 낮12시쯤 서울 은평구 증산동 189의24 박창수씨(46ㆍ개인용달업) 집에도 같은 범인으로 보이는 20대 청년 3명이 침입,혼자 집을 보던 박씨의 아들 성준군(19)을 위협해 손발을 묶고 안방을 뒤져 현금 6만5천원,10만원권 가계수표 1장,카메라 1대 등 45만원어치의 금품을 털어 달아났다. 범인들은 이날 박씨집의 열린 문으로 들어가 안방에 있던 성준군을 위협,넥타이로 손발을 묶은뒤 금품을 털어갔다. 경찰은 두사건 범인들의 인상착의가 비슷하고 범행장소가 2㎞쯤 떨어진 점으로 미루어 인근 불량배나 재수생들이 연쇄적으로 범행을 한 것으로 보고 수사중이다.
  • 고속도 트럭 탈취 20대 무기 선고

    서울지법 남부지원 형사합의부(재판장 김권택부장판사)는 16일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화물트럭을 빼앗은뒤 운전사를 감금ㆍ폭행해 강도상해 등 혐의로 구속기소된 안광민피고인(28ㆍ충북 청주시 서문동 94)에 대한 선고공판에서 검찰의 구형량을 그대로 받아들여 법정최고형인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 1백20가마 실은 쌀트럭 탈취/부천서/3인조 강도

    ◎운전사 트렁크에 가둔뒤 빼돌려 【부천=이영희기자】 6일 상오3시쯤 20대청년 3명이 쌀 1백20가마를 트럭에 싣고 경기도 부천시 중구 원미1동 54의18 금강쌀상회 앞길에서 노숙하던 박정근씨(35ㆍ충남 태안군 고남면 장곡리 285)를 흉기로 위협,현금 1백10만원을 빼앗은후 박씨를 미리 대기시킨 승용차의 트렁크에 감금하고 트럭을 몰고 달아났다. 박씨에 따르면 지난5일 하오9시쯤 부천 금강쌀상회에 가마당 9만4천원씩 1백20가마의 쌀을 팔기로 전화로 계약이 돼 태안지방에서 충남7 마9104호 5t트럭에 쌀 1백20가마를 싣고 직접 운전해 6일 상오2시쯤 금강쌀상회에 도착했으나 가게문이 닫혀 있어 날이 새기를 기다리며 가게앞 도로변에 차를 세우고 운전석에서 잠을 자고있던중 이같은 일을 당했다는 것이다. 박씨는 1시간쯤 지나 잠이 들었을때 20대 3명이 운전석문을 열고 흉기로 위협,점퍼 안주머니에 있던 현금 1백10만원과 시계를 빼앗은후 자신을 담요로 덮어 씌우고 40여분동안 어디론가 트럭을 몰고 간뒤 눈에 테이프를 붙이고 손과 발을 묶은채 대기시켜 놓은 것으로 보이는 르망승용차 트렁크에 감금당했다고 말했다. 박씨는 이들이 쌀이 적재된 트럭을 어디론가 몰고 가 쌀을 처분한뒤 1시간30여분후 다시 돌아와 르망승용차 트렁크에 갇혀 있던 자신을 꺼내 트럭 운전석에 앉히고 20여분동안 트럭을 몰고가다 이날 상오6시쯤 트럭과 자신을 서울 구로구 천왕동 61 하천변에 버린채 르망승용차를 타고 사라져 20여분동안 스스로 손발의 포박 등을 푼뒤 이날 상오7시20분쯤 광명경찰서에 신고했다는 것이다.
  • 있을 수 없는 사건들(사설)

    국교상급생 4명이 1년생 어린 후배를 실신할 때까지 뭇매를 때리고 옷까지 벗겨 방치하여 동사에 이르게 한 사건은 우선 기사 자체를 끝까지 읽는 것조차 힘들게 한다. 그런가 하면 한 대학생은 남자 고교생 50여명을 무용수로 고용하고 TV출연료를 가로채는가 하면 역시 수시로 뭇매를 때리며 거느리고 동성연애의 대상으로까지 삼아온 사건도 알려졌다. 두 사건은 각기 그 성격이 다른 것이긴 하나 어느 측면에서도 이해할 수 있는 요소가 하나도 없고 또 전부 미성년들의 사건이란 점에서 다같이 좀처럼 참을 수 없는 반론과 반인간성에의 분노를 느끼게 하고 또 이보다 먼저 이 기괴한 사회행태에 망연자실함과 자괴감을 떨쳐내기 어렵게 한다. 한마디로 이 사건들은 있을 수 없는 일들이고 있어서도 안될 일들이다. 동급생도 아니고 가장 나이어린 학년의 후배를 실신할 때까지의 비명 속에서도 끝내 집단폭행이 가능했다는 가해아들의 문제는 결국 어떻게 이런 병적심성이 길러질 수 있었는가의 문제가 된다. 이것이 가해아 1명의 소행이라면 또 개인적 이상증상으로 미룰 수도 있다. 그러나 4명의 합작이면 우리는 이러한 성향의 배경을 개인적인 환경에서만 찾을 수도 없다. 말하기는 싫지만 사회적으로 너무 자주 눈에 띄고 있는 폭력과 인명경시의 경향이 이제 미성년아들에까지 파급되어 있다는 가정을 해볼 수밖에 없다. 남자 고교생 50여명의 무용수 건만 해도 그저 한 대학생이 출연료를 갈취했다는 사안만은 아니다. 누구나 미성년 학생들을 모아 무용단을 조직할 수 있고 또 이렇게 조직한 팀으로 대충 훈련을 시킨 뒤 TV출연까지도 가능하며 더 나아가 유흥업소 무대까지 진출할 수 있다는 사회적 구조가 더 어이없고 답답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현실이고 이것에 기생하는 젊은이를 구속했다. 구속했으므로 문제를 종결한 것이 아니라 구속을 통해서 우리는 무질서하고 무논리적인 우리 사회의 혼란스런 관리체계를 확인한 것이다. 이런 구조속에서 어떻게 우리는 이 사회의 건전성을 추구해 갈 수 있는가가 너무 막연해 보이는 것이다. 이 두 사건이 무엇보다 명백하게 실증하고 있는 것은 바로 청소년들에 대한 인성교육의 부재현상이다. 인성교육이란 무엇인가. 심심단련ㆍ질서의식ㆍ사회적응력ㆍ협동심ㆍ인간관계의 개선능력들을 가르치는 것이다. 이 어느것도 조금이나마 이루어지고 있다는 믿음이 우리에겐 없고 오히려 청소년들은 점점 더 집단적으로 정신적ㆍ정서적 불건강 상황으로 가고 있다는 증상들만 확인되고 있다. 어제 발표된 한국사회보건연구원 조사에서도 중고생 62%가 자살충동을 느끼는 정서불안정 상태에 있고 또 이로 인해 20%가 음주를,68%가 진통제복용을 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지난 연말 한국형사정책연구원 보고에는 중고생 72%가 돈내기 도박을,20%가 편싸움을,25%가 금품탈취의 경험을 갖고 있었다. 물론 우리는 이들이 모두 이 세태를 극복하며 자라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처럼 교육의 내용도,사회의 환경도 어떤 개선이 없이 그대로 계속되어서는 이 희망은 불가능한 것이다. 청소년대책의 혁명적 접근이 더 급히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 신입생 합격증ㆍ등록금 고지서 학생회 간부들이 3천장 탈취

    ◎인천대,등록금 인상에 반발 【인천=이영희기자】 인천대 총학생회(회장 정순구ㆍ국문과3)간부 30여명은 3일 상오9시30분쯤 학교본관 2층경리과 캐비닛에 보관중이던 90학년도 신입생 합격통지서와 등록금고지서 각 1천5백70장씩을 탈취했다. 이들 학생들은 이어 학생회 사무실에서 등록금인상에 대한 학생회입장을 밝힌 「학부모님께 드리는 글」과 학생회에서 준비한 지난해 수준의 등록금고지서,탈취한 합격통지서를 합격자 및 그 부모들에게 직접 나눠줬다. 인천대는 지난해말부터 지난달 28일까지 학교ㆍ총학생회ㆍ교수ㆍ노조대표 등 각4명씩으로 구성된 등록금심의위원회를 9차례나 열었으나 학교측의 17.8% 인상안과 학생회의 6%인상안이 맞서 타협점을 찾지못한 상태에서 학교측이 일방적으로 15.5%인상한 등록금고지서를 발부하려던 참이었다. 이같은 사건이 발생하자 학교측은 하오1시 긴급교무회의를 열어 학생회측의 탈취행위를 비난한뒤 다시 고지서를 인쇄,신입생 가정에 속달송부하는 한편 학생들을 경찰에 고발 조치했다. 이에따라 2가지 고지서를 받게된 1천5백70명의 합격자들은 납부기간인 5일부터 9일사이 어느쪽 등록금을 납입해야할지 갈팡질팡하는 등 혼란이 예상된다.
  • 동료 사살 탈영병 8시간만에 자수

    【전주=임송학기자】 지난21일 상오1시쯤 전북 부안군 변산면 격포리 해안초소에서 함께 보초근무중이던 윤익환상병(22)을 사살하고 소총ㆍ실탄ㆍ수류탄 등을 탈취한뒤 인근 봉황산으로 달아났던 육군 모부대소속 정영태이병(22)이 탈영 8시간만인 이날 상오9시쯤 중대장의 설득으로 자수했다.
  • 소분규 「반정부 내란」조짐/연방 진압군 발포에 무력항쟁 돌입

    ◎예비군 총동원령… 비상확대도 검토 【모스크바 AP AFP 로이터 연합】 소련 남부의 유혈 소요사태는 현지에 급파된 진압병력에 대해 마침내 자위목적의 발포명령이 17일 공식하달된 가운데 크렘린의 무력개입에 반발한 현지인들이 『내정에 간섭하지 말라』며 탱크 및 헬기등 중무기까지 탈취,극렬 무력항쟁에 들어감으로써 당초 민족분규의 성격에서 점차 벗어나 소 중앙지도부를 상대로한 본격적인 내란으로 비화되기 시작했다. 소정부는 사태 진정을 위해 필요할 경우 이미 파견된 2만1천명의 정규군 및 내무부 산하 보안병력 외에 추가 파병할 것임을 경고하고 있으나 현지에서 무력항쟁과는 별도로 인간사슬까지 형성돼 진압군 탱크가 저지당하는 등 반소 감정이 극에 달하고 있는데다 인근 그루지야 공화국에서도 총파업을 병행한 탈소 시위가 가열되는 등 사태가 악화 일로로 치닫고 있는 실정이다. 관측통들은 진압군이 공화국 수도 바쿠 등지에서 그동안 무기고를 습격하는 현지인들을 격퇴시키기 위해 이미 수차례 공포를 발사했음을 상기시키면서 진압군 지휘관들이 『상황이 본격적인 내란으로 비화됐으며 진압병력도 살상됐다』고 상황의 심각성을 시인한 가운데 발포명령이 공식하달된 점을 주목했다. 소요가 극심한 바쿠의 경우 아제르바이잔 민족전선 요원들이 아르메니아인의 탈출을 저지하기 위해 역 및 공항등을 봉쇄한 가운데 이곳 거주 아르메니아인 30만명중 수천명만 남기고 대부분 테러를 피해 인근지역으로 대피한 것으로 전해졌다. 【모스크바 로이터 연합 특약】 소련정부는 내전의 양상을 보이며 극도로 악화되고 있는 아제르바이잔인과 아르메니아인 간의 무력충돌 상황을 종식시키기 위해 분규가 일고 있는 여러 지역의 예비군에 대해 총동원령을 내렸다. 한편 소련의 한 고위관리는 17일 아르메니아인들에 대한 무차별 공격이 이루어지고 있는 아제르바이잔의 수도 바쿠시에도 비상조치 선포가 확대될 것이라고 시사했다.
  • 아제르바이잔 내전 격화/소,1만여병력 현지 급파

    ◎무장충돌 확산… 사망 76명으로 늘어/아르메니아인 5천명 인접 공화국 탈출 【모스크바 외신 종합 특약】 소련정부가 아제르바이잔인과 아르메니아인간의 인종분규종식을 위해 1만1천여명의 정규군과 보안군을 현지에 급파한 가운데 양측의 충돌로 17일(현지시간) 사망자는 76명이 발생,더욱 격화되고 있다. 소련 언론들은 현지의 상태가 한치앞을 바라볼 수 없는 급박한 상황이라고 보도하면서 파견된 정부군은 아직 질서유지를 못하고 있다고 밝혔다. 아제르바이잔인들이 소련군의 진입을 막기위해 자동차 등으로 바리케이드를 치고 있어 정부군의 바쿠시 투입이 이루어지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또한 공항과 철도역을 봉쇄하고 있으며 아르메니아인들의 탈출을 막기위한 봉쇄를 계속하고 있다고 소련관영언론들이 보도했다. 한편 바쿠시의 5천여 아르메니아인들이 지난 13일의 인종분규 이후 계속 탈출,투르크멘공화국과 러시아공화국으로 대피했다고 타스통신이 밝혔다. 아르메니아인들과 아제르바이잔인들은 무기고와 경찰서 등을 습격하는등 위기가 고조되고 있으며 아제르바이잔에 파견된 군인들이 무장병력차를 탈취하려는 군중들을 향해 발포를 시작했다고 모스크바의 관리가 밝혔다. 이즈베스티야지는 3천여명의 군중이 아르메니아의 아르타시지역의 경찰서를 습격,1백6정의 자동소총을 비롯,각종 무기를 탈취했다고 밝혔다. 한편 아르메니아공화국은 분쟁지역인 샤우미얀과 게타셴 등으로 급파할 의용군의 모집을 위한 위원회를 구성한 것으로 알려졌다. 관영 타스통신은 바쿠에서만 56명이 숨졌다고 보도했으며 소련관영 이즈베스티야지는 나고르노 카라바흐지역에서도 20명이 살해됐다고 보도했다. 타스통신은 또 「나고르노 카라바흐지역의 국경에서 병력을 수송중이던 트럭 3백여대가 저지를 당했으며 철도의 봉쇄로 보급물자의 수송도 중단된 상태」라고 보도했다. 보안군의 유리 사탈린사령관은 『매우 긴장된 상황』이라면서 『우리가 입수한 정보에 의하면 마치 전선에서 들어오고 있는것과 같다』고 현지의 급박한 모습을 전했다. 아르메니아의 한 소식통은 『바쿠시에 남아있는 아르메니아인들은 수천명에 불과하다』면서 『수십만의 난민들이 아르메니아공화국 등으로 대피했다』고 밝혔다.
  • 아제르바이잔­아르메니아 “내전”현장

    ◎처형… 보복살해… 피의 악순환 거듭/장갑차ㆍ헬기무장… 곳곳서 교전 계속/양공화국 수도선 수만시민 동원령 발동 요구 ○…나고르노 카라바흐지역 사령관인 유리 코솔라코프 장군은 16일 청년 기관지 콤소몰스카야 프라우다와의 회견에서 『이 지역 상황은 현재 내전 상태』라고 밝힘으로써 사태의 심각성을 시사했다. 양민족간의 충돌로 수십명이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 가운데 눈덮인 나고르노 카라바흐 북쪽의 양공화국 마을에서는 상호공격이 계속되고 있으며 아르메니아공화국 수도 예레반과 아제르바이잔 공화국 수도 바쿠에서는 수만명의 시민들이 거리로 몰려나와 각자의 지역을 지키기 위해 동원령을 요구하고 있다. ○…아르만콤소몰스카야 프라우다는 나고르노 카라바흐 북쪽 샤우미안 지역에서 극단주의자들이 군으로부터 장갑차를 탈취,아르메니아공화국의 아자드 마을을 공격해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고 보도했다. 이 신문은 한 방위군 대위와 그의 부하 3명이 이 마을에서 사살됐으며 이들이 탄 차는 장갑차에 깔려 뭉개졌다고 말하고 곧이어 아드지키엔트에서 공격용 헬기가 동원돼 장갑차중 한대를 파괴했다고 전했다. ○국방장관 방불 취소 ○…소비에트스카야 로시아지는 아르메니아 접경지역의 몇몇 아제르바이잔 마을들이 헬리콥터로 이곳에 도착한 제복착용의 사람들의 공격을 받았다고 말하고 이중 한 마을에서 최소한 4명이 숨지고 수명이 부상했다고 전했다. 한편 한 서방 군사소식통은 코카서스지역 분쟁상황 악화에 따라 지난주 초경계태세에 들어갔으며 드미트리 야조프 소련국방장관은 내달초로 예정됐던 프랑스방문을 취소했다고 전했다. 또 아르메니아공화국과 아제르바이잔공화국 민족주의자들은 나고르노 카라바흐지역에 대한 비상사태선포는 사태해결에 도움을 주지못할 것이라며 이를 비난하고 나섰다. ○연방병력 현지 급파 ○…유혈종족 분규가 발생한 소련 아제르바이잔 나키체반지역에서는 15일 3천여명의 아르메니아 민병대가 아제르바인잔인 마을을 공격했다고 현지 관리들이 16일 말했다. 현지서는 아르메니아인들이 아제르바이잔인들과의 전투에 대비,장벽을 구축하는 한편 헬기로 아제르바이잔인 마을에 총격을 가하기도 했으며 아제르바이잔인측도 탈취한 군용 총기류와 심지어는 무장병력수송 장갑자 등으로 중무장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한편 소련 TV는 이날 내무부소속 병력들이 분규지역에 진입,공중에 자동소총을 난사하며 군중해산작전을 벌이는 모습과 장갑차가 기관총을 쏘며 마을을 통과하는 모습 등을 방영하면서 『가는 곳마다 양측 종족들로부터 총격을 받고있다』는 한 지휘관의 말을 보도했다. ○마을 곳곳 대피참호 ○…타스통신은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 두 종족간에 유혈충돌이 계속되고 있는 나고르노 카라바흐지역 일대는 『흡사 전쟁터 같다』고 전하면서 『주민들이 마을곳곳에 참호를 파고 있으며 대피소도 강화되고 있다』고 보도. 이 통신은 또 아르메니아인 전투 요원들이 기안드차시에서 다수의 아제르바이잔인들을 납치했다고 전언. 한편 소련정부 기관지인 이즈베스티야지는 소속 불명의 사람들이 이곳 지방 농업연구소에 침입,학생들의 군사훈련용 기관총 2정과 80정의 자동화기,박격포 1문,대검27자루 등을 탈취해갔다고 보도. ○…크렘린당국은 치안유지를 위해 남부지역에 육ㆍ해군 및 KGB(보안위원회) 소속부대를 파견한 외에 아제르바이잔공화국 수도인 바쿠시에 정치국 후보위원인 예브게니 M프리마코프를,아르메니아공화국의 수도 예레반시에는 사회경제정책담당정치국원인 니콜라이 N슬륜코프를 급파하는등 사태수습에 안간힘을 쏟고 있는데 소련외무부는 모스크바 주재기자들의 사고지역 여행을 15일부터 금지한다고 발표. ○내전비화 저지 선언 ○…소련 최고회의간부회가 아제르바이잔공화국 일원에 15일 선포한 비상사태는 지난 1917년 러시아에서 볼셰비키혁명과 함께 발발한 내전이후 가장 강경한 내용을 담고 있다고. 이날 발표된 비상사태포고령은 분쟁지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무장충돌사태를 단순한 민족분규로만 보지않고 무력으로 소비에트권력을 전복시키려는 기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규정,연방정부의 군사력을 동원하여 현 사태가 내전으로 비화되지 않도록 강력 저지하겠다고 선언. 한편 소련내무부는 15일 아제르바이잔공화국에 거주하고 있던 아르메니아인 아녀자들이 배편으로 바쿠를 빠져 나와 안전한 곳으로 대피했다고 발표. ○…소련관영 타스통신은 15일 아제르바이잔공화국의 수도 바쿠발 긴급기사를 통해 최근의 무력충돌사태에 따른 참상을 보도. 타스통신의 현지특파원은 『한 경찰관서로부터 20m도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새까맣게 타버린 2구의 시체가 마치 검정색 인형처럼 쓰레기더미 위에 던져져있으며 기차역광장에서도 시체들이 불에 타고 있다』고 전했다. 이 특파원은 『사람들이 산채로 불태워지는 목불인견의 참상이 벌어지고 있다』면서 『다시 무고한 사람들의 피가 흘러 넘치고 있다』고 개탄.
  • 외언내언

    중고생의 「방학범죄」「방학강절도」라는 표현이 지면에 등장했다. 겨울방학을 맞아 중고생들의 강도ㆍ절도ㆍ강간 사건들이 눈에 띄게 늘어나는 현상을 지칭하는 말이다. 이 표현을 보는 느낌은 암담하다. 중고생이라 함은 현재 학교 울타리 안에 있는 가장 건전한 청소년 그룹을 뜻하기 때문이다. 이들마저 비행과 범죄의 영역을 쉽사리 들락거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우리의 청소년 문제가 얼마나 심각해져 있는가를 단적으로 실증한다. ◆사실상 어쩌다 기사로 보도되는 것은 지극히 적은 단면이다. 지난해 연말 한국형사정책연구원 세미나에서 보고된 대규모 청소년비행 조사자료는 보다 놀라운 현실을 보여줬다. 6대도시 고교생 2천8백명 샘플에서 72.4%가 돈내기 도박을,74.4%가 음란서적 소지를,67.4%가 음란비디오 관람을 했다고 대답했다. 뿐만 아니라 36.5%가 5천원 이하 절도를,13.7%가 5천원이상 절도를 한 바 있고 25.4%가 금품을 탈취해본 경험을 갖고 있다. 한걸음 더 나아가 39.7%가 여성추행을 해보았고 18.5%가 이성과의 혼숙을 했다는 응답도 하고 있다. ◆우리에게 지금 청소년의 실상에 접근하는 사회과학적 노력은 대단히 빈약하다. 범죄부분에 있어서도 이미 저질러지고 밝혀진 사건들에 대해서만 그저 계량적 걱정을 하고 있다. 그러나 청소년 현상을 자세히 보기 위해서는 「숨은 비행」 현상을 보아야 하고,그러한 비행의 경향이 사회환경과 어떻게 연계되어 있는가를 추적해가야 한다. ◆하기는 굳이 사회 과학적 태도가 아니더라도 알 수는 있다. 도시의 주거지들은 유흥업소와 함께 엉켜 있고,문방구에서마저 음란서적을 빌릴 수 있을 뿐 아니라 국민학생들에게도 음란 비디오를 내주는 업자들이 있는 상황이니까 실은 더 따져볼 일도 없다. 모든 사회단체가 청소년 프로그램을 풀가동했을 때 수용할 수 있는 인원이 12만명에 불과하다는 통계가 있다. 그리고 청소년 인구는 1천3백만명이다. 건전청소년이 「건전방학」을 유지하기가 어렵게 돼 있다. 과연 어떻게 할 것인가.
  • 전 전대통령 특위제출 서면 답변내용

    ◎“「광주」발포 당시엔 보고 못받았다”/미 정부도 「5ㆍ17」 불가피성 이해했다/사북사태ㆍ학원소요가 계엄확대 원인 ▷다음은 전두환 전대통령이 서면으로 특위에 제출한 답변내용이다.◁ 본인이 당시 도청 앞 상황과 관련한 발포 건의를 받은 적이 있느냐 하는 문제는 국회의 청문회에서 증언한 바 있는 이희성계엄사령관,윤흥정 전교사령관 등이 「발포 사실조차도 상황이 진행될 때에는 보고받지 못했다」라는 증언내용에 비추어볼 때 당시 지휘계통에 있지도 않았던 본인의 입장에서는 더더욱 건의를 받을 만한 위치에 있지도 않았다는 사실이 분명해지리라고 생각합니다. 도청 앞에서의 이러한 발포사태는 상황이 종료된 이후 통상적인 정보보고를 통해 본인에게 보고되었던 것으로 기억되며 당시 본인은 즉각 이를 최규하대통령에게 보고하려 했으나 이미 계엄사령부를 통해 보고되었다고 하기에 중단한 바 있습니다. ▷미 정부역할◁ 광주사태를 전후하여 주한 미대사관을 포함한 미국 정부관리들은 한국의 제반상황에 대하여 우리측과는 어느 정도의 인식차이가 있었다고 보며 이러한 차이는 북한의 도발가능성에 대해 제3자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예민해 있는 우리의 현실로 보아 불가피한 것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최근에 미국무성이 보내온 광주사태에 대한 석명서를 보면 당시의 한국 안보에는 특별한 문제가 없었던 것처럼 묘사가 되어 있으나 이는 당시 미 정부가 광주사태를 계기로 취한 일련의 군사 외교적 조치들과는 모순된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해 5월22일 미 국무성은 「불안한 사태가 계속되어 폭력사태가 과열된다면 외부세력이 위험한 오판을 할 위험성이 있다」고 북한의 도발책동을 우려하며 「한국사태를 방위조약에 따라 강력히 대응할 것」이라고 북한에 대해 경고한 바 있습니다. 또한 같은날 국무장관 주재로 한국사태에 대한 고위정책조정회의를 열어 항공모함을 위시한 기동함대와 조기경보기를 한국에 파견키로 하는 등 북한의 위협에 대비한 일련의 군사적 조치를 취했으며 당시 미 정부는 북한이 남침해 올 경우 미국은 즉각적으로 대응하겠다는 경고를 제3의 외교경로를 통해 북한측에 통보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또한 5월26일을 전후하여 우리나라의 여야 정치인들과 만난 자리에서 글라이스틴대사는 『광주사태가 오래 계속된다면 배고픈 호랑이같은 북한이 이를 이용할 가능성이 없지 않으며 미국은 5ㆍ17조치의 배경과 불가피성에 대해 긍정적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고 본인은 기억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당시의 미 정부의 입장과 이번의 미 국무성의 석명서에 나타나 있는 입장은 상황 및 시대의 변화에 따라 그 기본 입장에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국내의 일각에서는 광주사태가 특별한 의도에 의해 촉발되었다는 주장이 있는 것으로 압니다만,이는 전적으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본인은 말할 것도 없고 어느 누구라도 정권을 위한 치밀한 사전계획을 세웠다면 광주사태와 같은 커다란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기를 오히려 바랐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 불행한 사태의 경위가 어떻게 되었든 그 구체적인 책임소재가 누구에게 귀속되건간에 본인은 당시 정부와 군의요직에 있었던 사람으로서 그 책임의 일부를 통감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대통령재임기간중에는 『상처는 아물기 전에 건드리면 다시 커져 치유가 어려워진다』라는 단순한 생각으로 이 문제가 남긴 상처를 근원적으로 치유,해결하지 못한 점에 대해 깊은 반성과 자책을 느끼고 있습니다. ▷비상계엄 확대조치◁ 79년 10ㆍ26사태의 충격이란 절대권력의 돌연한 붕괴가 가져온 충격이었습니다. 이 충격에서 깨어나는 80년의 봄이 되면서 우리 사회에는 권력과 권위의 공동현상이 확실히 드러났고 거기에 발호하기 시작한 것이 혼란과 무질서였습니다. 빈발하는 학원소요와 노사분규는 그 일부에 불과했습니다. 4월의 사북사태는 며칠 동안이나마 그 지역에 관한 한 국가기능이 정지된 상태에 도달했고 5월 중순에 학원가두소요는 전국 곳곳에 넘쳐 지역계엄령하인데도 치안 마비상태에 도달하였습니다. 5월13일에서 15일에 걸쳐 절정을 이루었던 서울소요에서는 3일째 되는 15일 서울역에서 시청광장에 이르는 도심에 대학생을 중심으로 10만의 군중이집결되었고 경찰과의 충돌과정에서 당시로서는 예가 드물게 경찰차가 방화 당하고 경찰관 1명이 사망하고 1백13명이 부상을 당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같은 혼란을 틈타 각종 범죄가 난무한 것은 물론,외국바이어들이 다투어 철수하고 조업에 지장을 일으키는 등 경제생활 전반에도 심각한 타격을 주게되자 국민들의 불안심리는 절정에 달했습니다. 한편 10ㆍ26 이후 적화통일의 결정적 기회를 노리고 있던 북한은 이 시점이 되면서 대규모 기동훈련,전쟁물자 점검,전투태세 강화 등 심상치 않은 동향이 첩보사항으로 파악되고 있었습니다. 참으로 국가 존망지추를 당했던 것입니다. 이같은 상황이 일일이 매스컴에 의해 알려지지 않았던 것은 그나마 일반 국민의 동요를 막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같은 위기상황에서는 그 당사자가 누구이든,국가는 국가 스스로의 자위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같은 국가의 자위조치의 당연한 귀결이 비상계엄의 전국확대였습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지역비상계엄에서는 국방장관이 계엄업무를 지휘감독하고 전국 비상계엄하에서는 대통령이 직접 지휘감독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전국비상계엄확대의 문제는 특정지역에 소요나 문제가 있다 없다의 기준을 넘어서게 되는 것입니다. 위에서 설명한 위기상황에 처하여 5월15일 신현확총리는 시위사태에 대한 우려와 함께 자제를 촉구하는 특별담화를 발표했고 그때에 진행중이던 제2차 석유파동속에서 원유 확보를 위하여 중동을 방문중이던 최규하대통령도 국내 사태의 급보를 받고 일정을 하루 앞당겨 5월16일 귀국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최 대통령 귀국 직후 국무총리 내무 국방장관 계엄사령관 그리고 본인 등이 참석한 시국대책회의에서 총리는 국내상황을 종합적으로 보고하였고 주영복국방장관은 이 자리에서 비상시국에 임한 군의 대책마련을 위해 다음날 전군주요지휘관회의를 개최할 예정이라고 보고한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돌이켜 보면 10ㆍ26 이후 우리 사회의 각부면의 권력과 권위가 퇴화,공동화되는 속에서 군만은 국가기능을 온전히 수행할 수 있는 최후의 보루로서 사회와 국민의 막연하고도 암묵적인 기대가 있었던 것이 아닌가 여겨지기도 합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5월17일 개최된 전문지휘관회의에 참석한 지휘관들은 당시 사태의 심각성과 이에 대한 획기적 대책의 필요성에 의견을 같이하고 이를 위해 전국 비상계엄으로의 확대건의를 결의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당시 사회일각에는 학생소요를 옹호하며 전국 주요도시에서 대규모 군중궐기집회를 준비중인 세력도 있었고 5월16일에는 55개 대학 총학생회장단이 모여 5월22일을 시한으로 계엄의 즉각 해제와 정치일정단축 등의 요구를 내걸고 전면 투쟁태세를 굳히는 등 사태는 더욱 악화될 형세였습니다. 이같은 상황 속에서 전국 비상계엄확대 건의안은 결의되었고 국방장관과 계엄사령관은 이를 신현확총리에게 보고하여 동의를 받고 최 대통령에게 보고하여 재가받았으며 이날 저녁으로 임시국무회의에서 의결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지금와서 당시 한국의 안보상황에 대해 미국의 인식이 어떻다고 말이 있습니다만 물론 한국의 안보에 대해 한국과 미국이 완전한 인식일치가 있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그렇다해도 당시 한국의 현존하는 안보위협에 대한 미국측의 인식과 대응의지를 과시하는 일환으로 5월13일과 14일 양일간 한미 합동군사훈련이 실시된 바 있음을 상기하기 바랍니다. 계엄확대를 전후한 5월14일부터 18일에 걸쳐 전국 주요시설과 방송국들에 경계경비를 위해 인근병력이 배치된 것으로 알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국회가 개회중인데도 의원들의 동원이 저지된 것으로 압니다.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5ㆍ17비상계엄확대조치가 12ㆍ12를 주도한 이른바 신 군부세력의 쿠데타였다는 주장이 있습니다만 쿠데타가 국권을 탈취하기 위해 어떤 집단이나 개인이 국가를 치는 거사라 한다면 거기에 합당한 현상이 5ㆍ17시점에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분명히 지적해두고자 합니다. 다만,오늘의 시점에서 5ㆍ17을 본다면 신 군부세력이라고 일컬어지는 무인들이 명확하고도 주관적인 의지는 결한 채로 시대적 상황과 국가의 요청에 밀려 덧없는 정치의 수렁으로 말려드는 계기가 되지 않았는가 하는 감회가 있습니다. ▷국보위 설치경위◁ 국가보위 비상대책위원회는 전국 비상계엄하에서 대통령의 계엄업무에 대한 지휘감독을 보좌하기 위하여 계엄당국과 행정부간에 긴밀한 업무협조를 가능케 하여 조속하게 사회 안정기반을 구축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여 대통령 직속하에 한시적인 자문보좌기관으로 설치된 것입니다. 80년 4,5월의 상황이 얼마나 위기상황이 되고 있었는지는 이미 말씀드렸습니다만,한편으로는 혼란과 비례하여 소위 말하는 「정부의 영이 서지 않는」상황이 되어가고 있기도 했던 것입니다. 그무렵 눈앞에 전개되고 있는 비상한 상황이 통상적인 방법으로는 극복될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을 뜻있는 국민이라면 누구나 헤아릴 수 있는 그런 상황이 되어 있었고,당시 「정부의 영」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리라고 국민들도 믿지 않았기 때문에 불안해했던 것입니다. 나라를 벼랑으로까지 몰고 간 위기상황은 전국비상계엄을 불러왔고 전국비상계엄은 무엇보다도 먼저 위기관리와 난국타개를 위해 정부기능을 보완적으로 강화할 수단을 찾지 않을 수 없었으며 그 결과가 국보위설치로써 나타난 것으로 알고있습니다. 행정부의 기능을 계엄적으로 강화하는 매개 역할,이것이 국보위 기능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만일 군으로 구성된 계엄당국에게만 당시의 문제해결이 맡겨졌다면 국가가 그렇게 단기간에 위기탈출을 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국보위에는 계엄당국과의 매개역을 위해 군의 전문요원들도 차출되었으나 대부분은 행정부 요원ㆍ학자 및 각계 인사들로 구성되었던 것입니다. 상황이 긴박해지면서 나름대로의 비상대책안이 은연중에 우리 사회 여기저기에 거론되고 있었고 이같은 안들은 합수본부였던 보안사의 정보수렴과정에서 취합되고 있었으며 전국계엄으로 확대되는 것과 동시에 본인은 그동안의 정보보고를 상기하여 대책안의 구체적인 검토를 보안사 참모진에게 지시하였습니다. 그리해서 국보위는 설치되었고 그 책임상 본인이 상임위원장직을 맡았던 것입니다.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라는 용어가 누구의 착상인지에 대해서는 기억이 분명치 않습니다. 비상기구의 연구검토초기에는 대통령의 긴급조치권 발동을 전제하여 기구를 설치하자는 의견도 있었으나 보다 합헌적이고 합법적인 근거를 가져야 제대로 작용될 수 있다는 결론에 따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국보위는 정부조직법 제5조와 계엄법 제9조 및 제11조 등에 근거를 두고 조직되었으며 그 설치안은 5월27일 최규하대통령께 보고되었습니다. 같은 날 국보위 설치령이 국무회의에 제안되어 의결을 거친 후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 5월31일 발족되었던 것입니다. 국보위가 발족됨으로써 군은 관련분야인 국방임무와 치안유지에만 전념하게 되었고 계엄업무의 일환으로서 군이 당연히 맡도록 되어 있는 행정ㆍ사법 사무에 대한 기획조정업무는 국보위가 맡게되어 대통령이 전국계엄을 효과적으로 지도감독할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국보위설치의 당위성을 인식시키기 위하여 광주사태가 조작되고 유도된 것이 아닌가 하는 시각이 있는 모양입니다만,이같은 역사인식이야말로 날조되고 왜곡된,사실에 입각하지 않은 역사인식이요 본말전도도 유만부동입니다. 어떤 유능한 신이 있어서 광주사태의 전말을 연출할 수 있다는 얘기입니까? 계엄확대에 의한 업무추진 과정에서 필요에 의해 국보위는 설치되었던 것입니다. 국보위가 추진한 과외금지조치나 공직사회정화 등 일련의 충격적인 조치는 오늘날 시각으로 보면 납득이 가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 당시로서는 국민들의 갈채를 받았고,그 때의 국가사회가 위기상황을 탈출하고 혼란과 무질서의 늪에서 벗어나는 데는 효과가 있었던 것을 여러분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국보위가 비상한 상황에서 의욕이 앞선 나머지 때로 무리한 수단을 동원하여 물의를 빚은 점은 아쉽고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1980년 8월 최규하대통령이 하야하게된 진정한 동기가 무엇이냐 라는 질문이 있습니다만 본인으로서는 최 대통령께서 하야하시면서 발표하신 성명의 내용에 비추어 헤아려볼 수 있을 뿐 그 이상의 다른 동기가 있었는지에 관해 저의 주관대로 추측해서 말씀드리기는 어렵다는 점을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 전두환 전 대통령 국회증언 속기록

    ◎“강경진압ㆍ과격시위가 광주사태 도화선”/합수부 설치 보안사령관 취임 직후 계획/정 총장,「김재규 관련조서」 4차례 고쳐/광주특위 ▷6ㆍ29선언◁ 어느 시대,어느 정치사회를 막론하고 이면사는 있기 마련이지만 그때 그때 속속들이 알려지는 사례는 거의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6ㆍ29선언은 그것이 담고 있는 내용이 그동안 어떻게 실현되었으며 또 지금 어떻게 추진되어 정치발전과 국가이익에 기여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하지,그 경위나 배경을 새삼스럽게 들추어내는 일은 결코 바람직스러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정치이면의 얘기들은 현실정치에 민감한 영향을 주지 않게 될 것이라는 확신이 서는 훗날 회고록 등을 통하여 국민 여러분에게 소상히 밝힐 것을 약속하는 것으로 국민 여러분의 양해를 간곡히 당부드리는 바입니다. ▷간첩조작사건등◁ 선두에서도 말씀드렸지만 한 나라의 대통령은 무한책임을 지게 마련입니다. 실무진에 의해 이뤄진 일인 경우 대통령에게 보고될 수도 안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전임대통령으로서 답변할 수있는 부분을 총괄적으로 얘기한 것입니다. 간첩조작사건 등은 실무진들이 조작했는지 않았는지 제가 답변할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또 물리적으로 답변준비시간이 짧아서 거기에 대한 자료를 구할 수가 없으므로 답변하지 못한 점을 양해바랍니다. ▷10ㆍ26에서 12ㆍ12까지◁ 1979년 국내 정국은 유신체제에 대한 국민적 저항과 반발로 정치ㆍ사회적으로 매우 어수선하고 경제도 여러가지 난관에 봉착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어난 박 대통령시해사건으로 18년간이나 지속되어온 절대권력이 일시에 무너져 국가가 큰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정치적 공백상태와 행정체제의 마비는 국민들의 충격과 정치ㆍ사회적 혼란을 가중시켰습니다. 더구나 대통령시해사건이 권력의 핵심적 위치에 있었던 중앙정보부장에 의해 지절러졌다는 점에서 상황은 매우 복잡하고 심각한 양상을 띠게 되었습니다 사건 직후 정부는 비상국무회의를 소집하여 10월27일 04시를 기해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 일원에 비상계엄을 선포하였으며,예상되는 북한의 군사적 책동에 대비하여 전군이 비상경계태세에 돌입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비상계엄선포와 동시에 계엄지역내에서의 수사업무를 일원화하고 그 효율성을 높이기 위하여 구 계엄법 제11조와 비상계엄업무의 구체적인 시행지침인 「육군계엄시행계획」과 계엄공고 제5호에 따라 계엄사령관 직속하에 「계엄사 합동수사본부」를 설치 운용하게 되었습니다. ▷합수부설치 배경◁ 본인은 1979년 3월 국군 보안사령관이 된 뒤 을지연습을 실시해본 결과 전쟁 발발시의 보안사령부의 역할 및 임무수행과 관련,여러가지 미비점이 발견되어 보완책의 강구를 각급 참모에게 지시한 바 있습니다. 다시 말해 전시 전국계엄상황하에서는 정부의 모든 조직이 실제상 군의 통제하에 들어오게 되는 바,이러한 상황을 가정하여 각급 정보수사기관을 조정 통제해야 할 비상계획수립이 필요하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비상계획의 일부로서 합수부안이 평소에 마련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10ㆍ26사건 직후 실시된 계엄은 지역계엄이었으므로 정부조직은 군의 통제하에 있지는 않았으나 당시 중앙정보부장이 대통령 시해범으로 체포되고 주요 간부들도 조사를 받게 되어 중앙정보부의 기능은 거의 마비된 상태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본인이 보안사령관 취임 직후 준비했던 합수부계획이 비상계엄선포와 함께 계엄사령관을 경유하여 국방장관에 의해 결정된 것입니다. 합동수사본부는 기존의 수사기관과 전혀 별개의 새로운 기구로 구성한 것이 아니고,당시에 군과 검찰 그리고 경찰로 나누어져 있던 수사업무를 조정 통제하여 계엄하에서 수사기능과 활동의 효율적인 운영을 기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와 비슷한 전례는 과거에도 있었습니다. 1962 당시 김재춘방첩부대장이 합동수사본부장으로 임명되어 공화당 사전조직 및 4대 의혹사건 등 중요한 사건들을 조사한 바 있습니다. ▷김재규 체포 경위◁ 대통령시해사건 발생 직후 국방부에 국무위원 및 군수뇌들이 모인 자리에서 당시 청와대비서실장이며 사건현장을 목격한 김계원씨가 먼저 노재현국방장관과 정승화참모총장에게 김재규가 범인이라는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노 국방장관은 곧 저를불러서 김재규를 체포하라는 지시를 하며 정승화총장을 만나 세부사항에 대한 지침을 받으라고 지시를 했습니다. 정 총장실에 가보니 정승화총장은 본인에게 『김재규를 보안사 안가에 보호하라』는 지시를 했습니다. 나는 당시 헌병감 김진기장군과 협의하여 김 장군으로 하여금 김재규를 국방장관실로부터 참모총장실로 유인해 나오도록 하여 그곳에서 보안사수사관을 시켜 김재규를 체포토록 하여 보안사 안가로 이송,보호 조치케 했습니다. 그때가 바로 10월26일 24시경이었습니다. 얼마 후 안가의 수사관들로부터 김재규가 틀림없는 범인이라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안가에 보호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고 김재규를 보안사 수사분실로 이송하여 수사하라고 지시했습니다. 그때가 27일 새벽 02시30분경이었습니다. 그 당시 김재규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몇가지 중요한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김재규의 진술에 의하면 『정승화는 내가 육군참모총장을 시킨 사람이다. 당시 국방장관은 3군사령관을 참모총장으로 밀고 있었으나 내가 1군사령관인 정 장군을박 대통령께 강력히 추천해서 총장이 되었다. 그래서 그는 내가 지시하는 대로 하게 되어 있다』고 말하고 김재규 자신의 지시에 따라 정승화총장을 범행장소에서 36m 떨어져 있는 궁정동 안가에 대기시켰다는 것입니다. 김재규의 계획은 박 대통령을 암살하고 비상계엄을 선포케 한 다음 군사혁명으로 유도해 정 총장을 비롯해 군고위층을 조종하여 정권을 탈취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김재규의 진술에 의거하여 수사관들은 정승화총장이 김재규의 공범 내지 방조범 아니면 배후의 인물이라는 심증을 굳히고 10월27일 11시께 본인에게 정 총장을 연행 수사해야겠다는 건의를 해왔습니다. 만일 이 시기를 놓치면 증거를 인멸시켜 버릴 우려가 있고,수사 진행을 방해하도록 상황을 만들어 버릴 염려마저 있다는 주장이었습니다. 사실 수사관들로서는 정승화에 대해 많은 의혹을 가지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수사통제ㆍ조정 필요◁ 어째서 하필이면 육군참모총장이 할일없이 김재규가 대통령을 시해하는 현장 근처에 두시간 가량이나 머물러 있었느냐는 것이고,근접한 위치에서 수십발의 총성이 들려왔는데도 대통령이 근처에 있는 줄 알면서 당장 진상을 알아보려고 안한 것은 30여년 군에 복무하여 군의 최고직위까지 오른 사람의 습성으로 보아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는 것이고 피묻은 셔츠바람에 맨발로 달려온 김재규를 목격했으면서도 경위도 알아보기도 전에 같은 자동차를 탔다는 것,김재규는 여섯발을 장전한 권총으로 다섯발을 쏘고 한발이 남은 권총을 허리춤에 꽂고 있었으니 김재규의 몸에서 화약냄새가 났을 것임에도 알아보려고도 하지 않았고,차 안에서 김재규가 수행원의 상의와 구두를 빌려 입고 신고하는 동작이 있었는데도 그냥 넘겨버렸고,육군본부에 도착하고서도 별다른 조치없이 김재규가 하자는 대로 군 이동을 한 것 등으로 하여 그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는 수사관들의 의견이었고 당시 저 자신의 의견이기도 합니다. 본인은 처음엔 수사관들의 건의에 구두승인을 내렸다가 나라의 전반적 정세에 생각이 미쳐 그 승인을 일단 보류하기로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당분간은 계엄령의 질서하에 국내 치안확립이 시급한 일이었고,북한 남침의 위협에 대처하는 것이 급선무인데,계엄사령관에 임명된 지 일곱시간밖에 안된 정 총장을 연행하는 사태가 생기면 혼란을 더욱 격화시키게 될지 모른다는 판단이었습니다. 도피의 우려도 희박하고 증거인멸을 한다 해도 그 범위는 뻔할 것이니 정세가 안정된 후에 수사를 전개해도 무방하리라는 생각도 있어 그대로 수사관을 타일렀던 것입니다. 그런데 외신보도와 국내언론을 통해 시해사건에 정 총장이 관련되지 않았는가 하는 설이 나돌게 되자 정 총장은 자신이 스스로 조사를 받겠다고 간청했습니다. 그 자청에 따라 10월29일부터 11월1일까지 4일간 합수부 조사관들이 육군참모총장실에 출두하여 매일 두시간 정도 정 총장을 참고인으로 조사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수산관들은 계엄사령관으로서의 직위를 이용하여 위압감을 조성함으로써 순리적인 조사가 불가능하게 되었다고 보고한 바가 있습니다. 그런데다 정 총장은 수사관들이 작성한 조서내용이 사실과 다르다 하여 전후 4차례에 걸쳐 수정시키기도 했습니다.심지어 그는 조서를 총장실로 가져오라고 해서 자신이 조서내용을 직접 고치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정승화총장의 10ㆍ26시해사건관련 의혹이 짙어만 갔습니다. 많은 억측이 유언비어가 되어 항간에 범람했습니다. ▷10ㆍ26,쿠데타로 판단◁ 이런 상황에서 저는 수사의 총책임자로서 중대한 결심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합수본부장으로서 대통령시해사건이야말로 중대한 사건인 만큼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수사에 성역이 없다는 신념하에 정확한 전모를 신명을 걸고 밝혀야 한다는 강한 사명감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때 남은 작업은 정 총장의 혐의를 조사하여 그 의혹을 말끔히 없애는 일이었습니다. 만일 이에 대한 흑백이 가려지지 않는다면 군에 대한 국민의 신뢰는 물론 군 자체의 기강이 흔들리는 동시 마침내는 군이 분열될 수도 있다는 우려까지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11월께 본인은 모든 상황을 노 국방장관에게 보고하고 정승화총장의 연행조사를 건의하였더니 「좀 더 두고보자」고 했고 그후 최 대통령에게 건의드렸더니 『국방장관과 상의하라』고 말씀하셔 본인으로서는 더욱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정 총장은 당시 육군참모총장이며 계엄사령관으로 막강한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군내부에 강력한 지지세력을 구축해 놓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그를 조사한다는 것은 달걀로 바위를 치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무모한 노릇이었습니다. 목숨을 걸어도 가능성이 희박한 일이었으며 그야말로 구국적인 소신없이는 불가능했던 일입니다. 평상시 본인은 미국의 케네디대통령 암살사건이 영원한 미궁에 빠져버린 것을 미국의 수치라고 생각해왔습니다. 본인이 운명적으로 시해사건수사의 최고책임자가 되었을 때에 저 개인의 신상에 어떤 일이 닥치더라도 기필코 이 사건의 전모를 국민 앞에 밝히고 말겠다고 굳게 다짐하였던 것입니다. 본인은 김재규의 수사과정에서의 진술이 미국이 개입되었다는 통설,군부의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육군참모총장이 범행현장 근처에 있었다는 사실 등을 취합해서 쿠데타가 아니면 쿠데타에 준하는 사건이라고 당시로서는 판단할수밖에는 없었습니다. 정 총장 자신의 말대로 오비이락격으로 그가 시해 현장 근처에 있었던 것이라면 그건 그분의 불운이라면 불운일 것입니다. 불운이라 해서 수사의 객관성과 냉정성을 포기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중요한 용의자를 제외하고 수사를 마무리지었다간 의혹은 의혹대로 영원히 남을 것이며 그 결과는 결국 수사책임자의 직무태만이란 원성으로 될 것이 확실합니다. 그러나 본인은 직무태만이란 비난이 겁나서가 아니라 정 총장에 대한 완벽한 조사가 국민의 의혹을 해소시키는 동시,정 총장 개인의 명예를 위해서도 필요불가결한 조치라는 것을 확신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뜻에서 본인은 정 총장을 수사할 적기를 포착하기 위해 정국의 추이를 주시하는 한편 군부내의 여론을 수집하였습니다. 11월 중순경부터 중진 장성들과 접촉을 계속하였는데 그 가운데 정 총장과 개인적으로 친밀한 장군도 끼여있었습니다. 당시 황영시 1군단장,차규헌수도군단장,유학성국방부군수차관보,노태우9사단장 등을 한분한분 찾아 의견을 물었습니다. 그런데그분들은 하나같이 10ㆍ26사태의 진상을 밝히기 위해선 어떤 고위층도 예외일 수 없으며 빨리 흑백을 가릴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육군 최고책임자의 관련혐의는 군의 단결과 신뢰회복을 위해서는 하루속히 결판을 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인은 본인의 신념과 군전체의 총화가 일치된 것으로 느끼고,12월 초순 대통령선거가 끝나고 내각이 새로 발족한 후 김재규재판과의 관련으로 보아 정 총장에 대한 수사를 연기할 수가 없다고 판단하여 12월12일 임무를 결행하기로 했던 것입니다. 12월12일로 날짜를 잡은 것은 그날이 토요일이어서 휴일 동안 수사를 하고 조용히 마무리지을 작정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날 본인은 총리공관으로 최규하대통령을 찾아뵙고 정승화총장을 연행하여 조사하겠다고 보고를 드린 바 있습니다. 그 이유는 혐의만으로도 정총장이 계엄사령관과 참모총장직에 부당하다는 것을 설명드리고 정 총장을 조사한 결과 그가 계엄사령관 및 참모총장직에서 물러나게 될 경우,그 공백을 대통령께서 처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때 시해사건에 대한 수사권은 대통령의 사전결재를 받지 않아도 되는 합수부장의 포괄적인 고유권한이었습니다. 그날 저녁 본인은 합수부 수사요원을 총장공관으로 보내 정 총장에게 수사에 협조하도록 전한 후 모셔오도록 지시했습니다. 그런데 정 총장이 이를 거부함으로써 강제연행을 하게 되었고 정 총장이 총장공관을 경비하고 있던 헌병에게 발포명령을 내림으로써 수사요원이 희생되고 총격전이 벌어지는 불상사가 야기되었던 것입니다. 한편 본인은 그날 밤 18시30분 경복궁에 있는 30단으로 평소 정 총장과 가까운 관계인 군의 중진 장성들과 그밖의 몇몇 장성들을 초청해 놓고 있었습니다. 정 총장이 시해사건과 고의이건 아니건 관련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니 군내부의 분위기를 쇄신하는 뜻으로 군 지휘계통에서 물러나는 용단을 내리도록 허심탄회하게 건의토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수사결과 예편 정도로 사건을 마무리지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30단에 모인 장성들이 총장공관에까지 따라가서 조용히 예편하도록 권유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렇게 신중을 기한 것은 정 총장이 일단 예편하기로 결심하였다가 혹시 울컥하는 감정으로 군을 동원하여 보안사를 공격하고 수사요원을 체포하여 하극상 사건으로 몰아 오히려 죄를 뒤집어씌우려들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러한 사전조치를 취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장소를 보안사가 아닌 30단으로 정한 것은 본인이 정 총장의 감시하에 있다는 정보보고에 따라 보안 유지를 위해 저의 사무실이 아닌 바로 인접한 30단의 단장실을 택한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 예상했던 대로 연행과 관련된 무력충돌 직후 전군에 비상이 발령되면서 수도권의 병력을 장악하고 있던 정 총장 측근의 수경사령관과 특전사령관 등이 탱크를 포함한 중무장부대를 동원하여 청와대 지역을 포위하려는 움직임을 보였습니다. 합수부는 수사기관으로서 전투병력이 없는 상태이고 부대간에 충돌이 발생하면 국가적으로 심각한 위기에 봉착될 것이므로 주요부대 지휘관들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자제를 당부하는 등 충돌을 피하도록 적극 설득했습니다. 그런데도 정 총장측근에서 계속 위협을 가해왔기 때문에 안보상 필요한 조치를 취한 가운데 제한된 규모의 예비병력을 동원하여 사태를 수습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불가피한 상황이었지만 이것은 긴급대응의 조치로서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사회일각에서 또는 미국측에서 이 사태를 계획적인 거사가 아니었느냐 하는 의견이 있었습니다만 이것은 당시 상황에 대한 시각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사태는 돌발적이었습니다. 당시 30단에 모였던 장성들이 병력을 출동시킬 계획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사태를 수습하는 데 시간이 걸린 것입니다. 또한 본인에게 대한 전보발령설이 이 사건과 관련이 있지 않는가 하는 의문도 있는 모양이지만,본인은 그 당시에는 일체 그와 같은 일은 들안 바가 없습니다. 본인은 명예를 걸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12ㆍ12사태는 시해사건의 수사도중에 발생한 우발적인 사건이었을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사전에 준비된 병력출동 계획도 없는 쿠데타가 어디 있겠으며 만약 쿠데타였다면 왜 본인이 그 직후 바로 권력을장악하지 않았겠습니까? 본인은 그 당시로서는 정치에 뜻을 두지 않았습니다. 저는 과거 고 박대통령으로부터 정치입문 권유를 몇차례 받은 바 있었으나 굳이 사양하고 군인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12ㆍ12사태는 당시 시해사건에 대한 최고 수사책임자인 본인이 주도한 것이며 따라서 그로 인해 야기된 사건의 모든 책임은 전적으로 본인에게 있는 것입니다. ▷광주사태 발생◁ 광주사태는 10ㆍ26 이후 지속된 극심한 사회혼란의 연장선상에서 발생한 지극히 불행한 사태였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사태발생 당시 정보의 총체적 책임자로서 초기 단계에는 쌍방간에 경미한 충돌이 있었으며 상황이 점차 악화되어 계엄사령부에서 무력진압을 계획중이라는 정보보고를 들은 바 있었으나 이처럼 엄청난 비극으로 확대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읍니다. ▷광주참극 상상 못해◁ 당시 광주 일대는 중앙정보부 보안사 경찰 등의 정보기관들이 모두 시외곽으로 철수하고 있는 상황이었으므로 정보책임자였던 본인도 필요한 정보를 충분히 갖지 못하였고 현지 주둔부대인 광주계엄분소에서 계엄사에 보내는 보고를 통해 파악할 수밖에 없었던 극히 혼미한 상황이었습니다. 이러한 정보부재의 상황을 보완하기 위해 보안사에서는 서울에 있던 광주출신의 한 장교가 자진해서 현지에 잠입,단편적 정보를 계엄사를 통해 보내오기도 하고 또 당시 보안사의 간부를 현지로 실정 파악을 위해 파견하기도 하였으나 여러가지로 정확한 상황판단에는 미흡한 점이 많았습니다. 이처럼 제한된 정보에 기초하여 본인은 무력진압에는 신중을 기하는 것이 좋겠으며,시민을 상대로 한 사태수습을 군 작전개념으로 한다는 것은 현명하지 않다는 정보책임자로서의 의견을 계엄사의 지휘관들에게 전달한 바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커다란 인명피해를 낸 이 비극적 사태의 원인에 대하여 본인은 무어라 한두마디로 단정지어 말씀드리기는 매우 어려운 문제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당시 계엄하에서 광주사태 이전에 서울 등지에서도 각종의 시위가 있었으나 평온을 되찾은 반면 유독 광주에서만 그러한 비극이 발생했던 이유는 정확한 분석이 어렵다고 생각합니다.다만 본인은 당시의 정보책임자로서 이 사태가 초동 진압단계에 있어서의 계엄군의 강경진압과 일부 출처를 알 수 없는 악의에 찬 유언비어에 자극받은 일부 시민들의 과격시위가 그 직접적인 원인이 된 것이 아닌가 하는 판단을 하고 있습니다. ▷군부대 파견ㆍ작전◁ 당시 광주사태와 관련된 계엄업무는 전국적인 계엄업무의 일환으로서 계엄사령관이 주재하는 계엄관계관 일일회의에서 보고되고 논의되어 추진된 것으로 알고 있으며 중앙정보부장서리인 본인은 그 회의에는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그 어떤 군지휘계통상의 간섭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은 본인은 군의 배치이동 등 작전문제에 대해 관여한 사실이 없으며 당시의 계엄사령관 이희성장군은 그분의 강직한 개인적 성품으로 보아도 지휘선상에 있지 않은 본인이 군작전에 개입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당시에 본인이 파악한 바로는 공수부대는 5ㆍ18계엄확대조치의 일환으로서 광주뿐만 아니라 서울 대전 전주 지역에도 파견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즉 전북 익산군 금마면에주둔하고 있던 제7공수여단병력을 광주 전주 대전에 각각 3백여명 규모의 일개 대대씩 파견하였고 서울지역 8개 대학에도 6개 여단병력 9천6백여명을 배치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계엄군의 증강은 광주지역에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며 광주지역에 특별한 상황을 예상하여 투입된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왜 현지 지휘관의 요청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부대를 파견 배속했느냐 하는 의문에 대해서는 기본적으로 군지휘의 이해부족에서 제기된 의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또한 당시 지휘체제가 이원화되지 않았나 하는 의문이 제기된 것으로 압니다만 이 또한 일반적 군의 상식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어떠한 부대라 하더라도 일단 타부대에 작전 배속이되면 그 배속을 받은 지휘관은 즉각적으로 그 부대를 장악해서 지휘할 책임이 있으며 그 이후의 모든 작전상 승패에 대해서도 책임을 져야 하는 것입니다. 비록 당시의 현지 지휘관이 군 경력상 특수부대에 대한 지휘경험이 전무하여 원활한 작전수행에는 차질이 있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점에는 이해가 갑니다만 배속된 부대가 현지 지휘관의 지휘통제에 불응했다는 주장은 군문에서 오랜 세월을 보낸 본인으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자위권행사문제◁ 자위권의 행사문제는 초기에는 군인 복무규율에 따라 불가피한 상황하에서 행사된 것으로 판단이 되며 현지상황이 더욱 악화됨에 따라 5월22일 자위권 발동도 가능하다는 계엄사령부의 작전지침이 지휘계통을 통해 하달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자위권의 발동은 최악의 상황에서만 현지 지휘관의 사태판단에 따라 제한적으로 발동할 수 있는 것이며 당시 위급한 상황에 처한 현지 지휘관들이 자위권 행사의 불가피성을 강조했으나 상급사령부나 계엄사령부 등의 군 고위층에서는 신중론이 우세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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