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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씨,노씨등과 작당해 군사반란/전씨 구속­주요 혐의 내용

    ◎수차례 회합… 군권 장악계획 음모­반란 모의/총장공관 무력 점거… 정 총장 연행­반란 실행 3일 구속수감된 전두환 전대통령에 대해 검찰이 적용하고 있는 범죄 내용은 그의 「파란만장」한 인생역정 만큼이나 「화려」하다.영장요지를 분석한 전씨의 주요 범죄혐의 내용을 정리한다. ○거사일정 등 논의 ▷반란모의◁ 10·26사건 합수본부장인 전씨는 군장성 진급심사에서 하나회소속 군인들의 진급이 여의치 않게 되고 권한 남용 문제로 정승화 계엄사령관 겸 육군참모총장과 잦은 갈등을 빚어 인사조치당할 우려가 있자 정총장을 김재규 내란사건 관련 혐의로 수사한다는 명목으로 불법 연행해 제거함으로써 군의 실권을 장악할 계획을 세웠다. 79년 11월 중순부터 노태우 9사단장·유학성 국방부 군수차관보·황영시 1군단장·박준병 20사단장 등과 수차례 회합,논의한 끝에 12월12일을 정총장 연행 거사일로 정했다.정총장 연행에 반발,병력을 동원할 가능성이 있는 정병주 특전사령관,장태완 수경사령관 등을 거사 당일 하오 6시30분 만찬초청 명목으로유인하여 부대지휘를 사전에 차단하는 한편 전씨 등은 같은 시각에 보안사와 인근 수경사 30경비단장실에 집결하여 정총장 추종세력이 무력으로 대응할 경우 병력을 동원해 제압하기로 모의했다. ○초병 현장서 살해 ▷반란실행◁ 12일 하오 7시경 허삼수 보안사 인사처장·우경윤 육본 범죄수사단장·최석립 수경사 33헌병대장 등은 보안사 수사관과 헌병을 동원,총장공관을 무력으로 점거하고 총장 수행부관 이재천 소령과 경호장교 김인선 대위 등에게 권총을 난사,제압한 뒤 하오 7시30분경 정총장을 보안사 서빙고분실로 강제 연행했다.하오 9시30분쯤 정동호 대통령경호실장 직무대리·고명승 대통령경호실 작전담당관 등이 경호실 병력을 동원하여 대통령 관저인 총리공관을 장악한 상태에서 전씨 등은 최규하대통령에게 정총장 연행·조사를 재가해 줄 것을 요청했으나 거부당하자 병력을 동원하여 육군 정식 지휘계통을 제압하기로 결의했다. 하오 11시30분경 최세창 3공수여단장·박종규 3공수여단 15대대장은 특전사령관실에 3공수여단 병력을 투입,총격을 가해 특전사령관 비서실장 김오낭 소령을 현장에서 사망하게 하고 정 특전사령관에게 부상을 가한 후 서빙고 분실로 연행했다.박희도 1공수여단장·서수렬 1공수여단 2대대장 등은 13일 0시30분경 1공수여단 병력을 동원하여 육본과 국방부를 점거하고 노재현 국방장관을 보안사로 연행하는 과정에서 국방부 근무초병인 정선엽 병장에게 총격을 가해 현장에서 사망케 했다. 조홍 수경사 헌병단장·신윤희 헌병부단장 등은 김진선 수경사 상황실장의 지원을 받아 수경사사령관실에 진입,하소곤 육본 작전참모부장에게 총격을 가해 부상을 입히고 육본수뇌부의 무장을 해제한 후 윤성민 육군참모차장·장태완 수경사령관,문홍구 합참 대간첩본부장 등을 서빙고 분실로 연행했다. ○전씨 수괴역 담당 ▷혐의내용◁ 전씨는 수괴로서 노태우 등과 작당하여 병기를 탈취,반란을 일으키고 계엄지역에서 지휘관의 권한을 남용하여 부득이한 사유없이 부대를 동원해 중요 지점을 점거하는 등 부대를 진퇴함과 아울러 수소를 이탈했다.또 김오낭을 살해하고 정병주와 하소곤·이재천·김인선 등을 살해하려 했으나 미수에 그쳤다. ◎특별법제정 발표에서 전씨 구속수감까지 ▲11월24일=김영삼 대통령 5·18특별법 연내제정 발표 ▲29일=정동년 등 5·18 고소인 헌법재판소에 제출한 소취하 ▲30일=헌재,「5·18선고」 연기 공식발표 ▲12월1일 하오 6시10분=검찰,전두환씨 2일 하오 3시까지 출두통보 ▲2일 상오 9시=전씨 대국민성명발표후 고향인 합천으로 출발 ▲하오 6시10분=검찰,반란수괴등 6개죄를 적용,사전구속영장 청구 ▲하오 11시23분=법원,구속영장발부 ▲밤 12시=서울지검 수사1과장 등 수사관 9명,전씨가 머무르고 있는 합천 전규명씨 집으로 급파 ▲3일 상오 5시57분=수사관 9명,합천 도착 ▲6시9분=전씨에게 영장제시 ▲6시 34분=전씨,영장집행 완료 ▲6시 37분=전씨 호송차량 합천 출발 ▲10시 37분=안양교도소 도착,수감
  • 전두환 전대통령 구속영장 전문

    피의자는 55년 9월 육군사관학교를 제11기로 졸업하여 육군 소위로 임관한 뒤 육군 제1공수특전단장,제1사단장을 거쳐 79년 3월5일 국군보안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재직중 같은 해 10월26일 소위 「10·26사건」이 발생함에 따라 계엄사령부 소속 「고 박정희대통령 시해사건 합동수사본부」 본부장으로 활동하다가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상임위원장을 거쳐 80년 8월27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제11대 대통령으로 당선,80년 9월1일 제11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뒤 80년 10월27일 제8차 개헌에 의해 실시된 81년 2월25일 제12대 대통령선거에서 다시 대통령으로 당선,81년 3월3일 제12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뒤 88년 2월24일 임기 만료로 대통령직에서 퇴임하여 현재 일정한 직업이 없는 자인 바, 국군보안사령관으로 재직중인 79년 10월26일 박정희대통령 시해사건이 발생하자 유신헌법을 개정해 민주화를 추진해야 한다는 국민적 여망에 따라 국회에서 헌법개정특별위원회를 구성,새로운 헌법질서 창출이 모색되는등 유신체제의 폐지가 기정사실화되고 군 내부에서도 군의 정치적 중립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음에 즈음, 합수부 본부장인 피의자의 권한 남용으로 인해 정승화 계엄사령관겸 육군참모총장과 잦은 갈등을 빚는 한편 군장성 진급심사에서 피의자를 중심으로 한 소위 「하나회」 소속 군인들의 진급이 여의치 않게 될 뿐 아니라 피의자의 여러 가지 월권 등이 문제가 되어 정승화총장이 이를 이유로 인사조치할 기미를 보이자 정승화총장을 김재규내란사건 관련 혐의로 수사한다는 명목으로 불법 연행해 제거함으로써 군의 실권을 장악할 목적으로, 육군 소장으로 제9사단장인 노태우,육군 중장으로 국방부 군수차관보인 유학성,육군 소장으로 제20사단장인 박준병,육군 준장으로 제71방위사단장인 백운택,육군 준장으로 특전사령부 제1공수여단장인 박희도,육군 준장으로 특전사 제3공수여단장인 최세창,육군 준장으로 특전사 제5공수여단장인 장기오,육군 대령으로 수도경비사령부 제30경비단장인 장세동,육군 대령으로 수경사 제33경비단장인 김진영,육군 대령으로 보안사령관 비서실장인 허화평,육군 중령으로 보안사 대공처 대공2과장겸 합수부 수사1국장인 이학봉,육군 대령으로 보안사 인사처장겸 합수부 조정통제국장인 허삼수,육군 대령으로 육본 헌병감실 범죄수사단장겸 합수부 수사2국장인 우경윤,육군 중령으로 수경사 제33헌병대장인 최석립,육군 중령으로 육본 헌병대장인 이종민,육군 준장으로 대통령 경호실장 직무대리인 정동호,육군 대령으로 대통령 경호실 작전담당관인 고명승,육군 대령으로 수경사 헌병단장인 조홍,육군 중령으로 수경사 헌병단 부단장인 신윤희,육군 대령으로 보안사 보안처장인 정도영,육군 소장으로 제30사단장인 박희모,육군 대령으로 제30사단 제90연대장인 송응섭,육군 준장으로 제1군단 제2기갑여단장인 이상규,육군 대령으로 제9사단 참모장인 구창회,육군 대령으로 제9사단 제29연대장인 이필섭,육군 중령으로 제9사단 작전참모인 안병호,육군 중령으로 특전사 제1공수여단 제2대대장인 서수열,육군 중령으로 특전사 제1공수여단 제5대대장인 박덕화,육군 중령으로 특전사 제3공수여단 제15대대장인 박종규,육군 대령으로 보안사 정보처장인 권정달등과 공모하여, 1979년 11월 중순경부터 피의자는 상피의자 노태우및 유학성 황영시 차규헌 박준병 백운택 박희도 최세창 장기오 장세동 김진영 허화평 이학봉 허삼수 등과 수차례 회합하여 정승화 총장 연행·조사 문제등을 논의한 끝에 같은해 12월12일을 거사일로 결정하고 먼저 정승화 총장 연행에 반발하여 병력을 동원할 가능성이 있는 정병주 특전사령관,장태완 수경사령관 등을 거사 당일 18시30분 만찬 초청 명목으로 유인하여 부대 지휘를 사전 차단하고,피의자를 비롯한 위 15명은 거사 당일 같은 시각에 보안사와 인근 수경사 제30경비단장실에 집결하여 정승화 총장 추종세력이 무력으로 대응할 경우 병력을 동원하여 이를 제압하기로 모의하고, 이에따라 피의자는 위 허화평 이학봉 허삼수 우경윤 등에게 지시,정승화 총장 연행 세부계획을 수립하고 연행에 필요한 인원의 차출과 차량,권총,M16소총및 실탄을 준비하게 한후, 같은해 12월12일 18시30분경 위 계획에 따라 위 유학성 황영시 차규헌 노태우 박준병 백운택 박희도 최세창 장기오 장세동 김진영 등은 수경사 제30경비단실에 집결,보안사에 있는 피의자및 위 허화평 허삼수 이학봉 등과 함께 지휘부를 구성하고 위 조홍 등은 피의자 등의 지시에 따라 같은 시각 정병주 특전사령관,장태완 수경사령관,김진기 육본 헌병감 등을 연희동 요정으로 유인하여 놓은뒤, 같은날 19시경 위 허삼수 우경윤 성환옥 최석립 이종민 등은 무장한 보안사 수사관 7명과 수경사 제33헌병대 병력 60여명을 동원하여 한남동 육군 참모총장 공관을 무력으로 점거하고,정승화 총장 수행부관 이재천소령과 경호장교 김인선 대위 등에게 권총을 난사하여 이들을 제압한 다음 같은날 19시30분경 정승화 총장을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강제 연행하고, 피의자와 위 이학봉은 삼청동 총리공관으로 최규하 대통령을 방문하여,『정승화 총장이 10·26사건에 연루된 새로운 혐의사실이 발견되었으므로 연행·조사하겠다』면서 그 재가를 요구하였으나 최규하 대통령이 재가를 거부한 상황에서 정승화 총장 강제연행 사실을 인지한 윤성민 육군 참모차장,장태완 수경사령관,정병주 특전사령관등이 정승화총장을 원상복귀시킬 것을 강력히 요구하고, 같은날 21시30분경 위 정동호 고명승 등이 대통령 경호실 병력을 무단 동원하여 대통령 관저인 총리공관을 장악한 상태에서 피의자및 위 유학성 황영시 차규헌 박희도 백운택 등이 집단으로 최규하 대통령을 방문하여 재차 정승화 총장 연행·조사를 재가해 줄것을 다시 요구하였으나 거절당하자 병력을 동원하여 육군 정식지휘계통을 제압하기로 결의하고, 같은날 23시경 피의자는 위 박희도에게는 육본과 국방부를 점령,국방부장관을 보안사로 연행해 올 것을,위 최세창에게는 정병주 특전사령관의 체포와 휘하 병력의 경복궁 출동을,위 장기오에게는 휘하 병력의 육본 출동을 각 지시하고,상피의자 노태우는 위 구창회에게 휘하 병력의 중앙청 출동을 지시하고,위 황영시는 위 박희도에게 휘하 병력의 고려대학교 진주를 지시하고,위 황영시 백운택은 위 이상규에게 전차부대의 중앙청 출동을 지시하고 위 정도영 등은 위 김정룡 신우식에게 정병주 특전사령관 체포작전 지원을 지시하고 위정도영 허화평 허삼수 권정달 등은 피의자를 비롯한 지휘부에 각 지휘관의 전화도청및 각 부대 보안부대장의 보고를 통한 각 부대 이동상황을 수시로 보고토록 하는 한편,제26사단 제30사단 수도기계화사단 등의 지휘관·참모 및 보안부대장에게 합수부측의 위와 같은 조치에 동조하여 줄 것을 요청하고, 이에따라 같은날 23시30분경 위 최세창 박종규는 특전사령관실에 제3공수여단 병력을 투입,총격을 가하여 특전사령관 비서실장 김오랑 소령을 현장에서 사망하게 하고 정병주 특전사령관에게 부상을 가한 후 그를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연행하는 한편 같은달 13일 2시경 제3공수여단 병력을 경복궁에 진주시키고, 위 박희도 서수열 박덕화 등은 같은 날 0시30분경 제1공수여단 병력을 출동시켜 육본과 국방부를 점령하고 노재현 국방부장관을 보안사로 연행하는 과정에서 국방부 근무 초병인 정선엽 병장에게 총격을 가하여 현장에서 사망하게 하고, 위 장기오는 같은 날 3시경 제5공수여단 병력을 효창운동장으로 진주시키고 위 구창회 이필섭 안병호 등은 같은 날 1시30분경 제9사단 제29연대 병력을 출동시켜 같은 날 3시30분경 중앙청을 점령하고 위 박희모 송응섭은 같은 날 3시30분경 제30사단 제90연대 병력을 고려대학교에 진주시키고 위 이상규는 같은 날 1시30분경 제2기갑여단 제16 전차대대 병력을 출동시켜 같은 날 3시30분경 중앙청을 점령하고, 위 조홍 신윤희는 같은 날 3시40분경 위 김진선의 지원을 받아 수경사 사령관실에 진입,하소곤 육본 작전참모부장에게 총격을 가하고 부상을 입게 한 후 육본 수뇌부의 무장을 해제시키고 윤성민 육군 참모차장,장태완 수경사령관,문흥주 합참 대간첩대책본부장 등을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연행함으로써 피의자는 수괴로서,상 피의자 노태우 등과 작당하여 병기를 탈취,휴대하고 반란하고, 위 노태우 등과 공동하여 계엄지역에서 지휘관의 권한을 남용하여 부득이한 사유 없이 부대를 인솔하여 중요지점을 점령하는 등 부대를 진퇴함과 아울러 수소를 이탈하고, 위 노태우 등과 공동하여 위 김오랑을 살해하고 상관인 위 정병주를 살해하려 하였으나 미수에 그치고, 위 노태우 등과 공동하여 위 하소곤을 살해하려 하였으나 미수에 그치고, 위 노태우 등과 공동하여 위 이재천 김인선을 각 살해하려 하였으나 미수에 그친 자로서 도주 및 증거 인멸의 염려가 있는 자임.
  • 전두환씨 오늘 구속/반란수괴 등 6개죄 적용 영장

    ◎전씨,소환 불응 선언… 합천행/검찰,서울 압송 방침 12·12및 5·18사건 특별수사본부(본부장 이종찬 서울지검 3차장)는 2일 전두환 전 대통령이 검찰소환에 불응함에 따라 전전대통령에 대해 군사형법상 반란수괴 등 혐의로 사전구속영장을 청구,이날 하오 11시23분 발부받았다. 구속영장은 이 사건 주임검사인 김상희 부장검사가 청구했으며 서울지법 형사항소3부 신흥철 판사가 심리,발부했다. 이에 따라 수사본부는 이날 자정쯤 이수만 서울지검 수사1과장을 팀장으로 하는 수사관 9명을 승용차편으로 전씨가 머물고 있는 경남 합천으로 급파했다. 검찰은 전씨에게 영장을 제시한 뒤 신병을 확보하는대로 안양교도소로 압송,수감해 조사하기로 했다. 이종찬 본부장은 『전씨를 검찰청사로 데려 오지 않고 수감 즉시 조사를 실시할 것』이라고 밝혔다. 수사본부는 또 비자금사건과 관련,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뇌물수수혐의로 구속된 노태우 전 대통령에 대해서는 일단 오는 4일 기소한 뒤 군사반란혐의를 추가하기로 했다. 이날 출국금지된 전전대통령에게적용된 죄목은 반란수괴죄를 비롯,상관살해,상관살해미수,초병살해,지휘관계엄지역수소이탈,불법진퇴 등 6가지다. 수사본부는 영장에서 『전전대통령은 수괴로 노태우전대통령 등과 작당해 병기를 탈취,반란을 일으켰으며 계엄지역에서 지휘관의 권한을 남용하여 부득이한 사유 없이 부대를 인솔,중요한 지점을 점령하는 등 부대를 진퇴함과 아울러 수소를 이탈했다』면서 『도주 및 증거인멸의 우려가 있다』고 밝혔다. 전전대통령은 10·26 직후 보안사령관과 합수본부장으로 군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최규하대통령의 재가 없이 공수부대와 20사단 등을 동원,정승화계엄사령관을 강제로 연행하는 한편 특전사령관실에서 총을 발사,특전사령관 비서실장 김오낭소령을 살해하는 등 일련의 과정에서 2명을 숨지게 하고 4명에게 부상을 입혔다는 것이다. 영장에는 피살자로 김소령과 초병인 정선엽병장,살해미수 대상으로는 하소곤 당시 육군작전 참모부장,이재천 육참총장수행부관,경호장교 김인선대위 등이 명시됐다. 최환 서울지검장은 이날 『전전대통령이 성명을 통해 검찰의 소환요구에 협조하지 않겠으며 사법처리를 하려면 이미 제출된 자료에 의거해 진행하라고 밝힌 만큼 소환한다 하더라도 특별한 진술을 받을 수 없다고 판단,12·12에 국한해 영장을 발부받았다』고 설명했다. 수사본부는 전전대통령에 대한 5·18사건 수사를 앞으로 제정될 특별법의 내용에 따라 진행할 계획이며 특별법 제정이 늦어지면 일단 구속기소한 뒤 조사하기로 했다. 수사본부는 또 이날 상오 11시40분쯤 채동욱·임성덕·이재순검사 등 검사 3명을 비롯한 수사팀 8명을 서울구치소에 파견,노태우전대통령을 상대로 12·12 및 5·18사건 때의 구체적인 역할분담 등 사건의 전개과정에 대해 3시간 남짓 집중 조사했다. 수사본부는 이와 함께 최규하전대통령에 대해 참고인 자격으로 직접 조사를 벌인다는 방침 아래 최전대통령의 측근을 통해 조사여부를 협의중이나 『건강상태가 좋지 않다』는 통보를 받았다. ◎문민 도덕성 공격 전두환 전 대통령은 2일 12·12 및 5·18과 관련한 검찰의 소환조사에 응하지 않겠다고 밝혔다.또 현정부의 도덕성과 이념을 공격함으로써 5·18특별법 제정에 대해 강력히 대응하겠다는 입장을 보였다. 전씨는 이날 연희동 자택 앞에서 발표한 성명에서 『이미 종결된 사안에 대한 검찰의 수사재개는 진상규명이 아니라 현정국의 정치적 필요에 따른 것으로 봐 소환요구 등 어떠한 조치에도 협조하지 않을 것』이라며 검찰수사에 대한 전면거부 의사를 밝혔다. 그는 『다만 검찰이 사법처리를 하려한다면 이미 제출한 자료에 의해 진행해주기 바란다』며 『그에 따른 사법부의 어떠한 조치든 수용하고 따를 것』이라고 말했다. 전씨는 검찰소환 불응이유에 대해 『지난 13대국회 청문회와 장기간에 걸친 검찰 수사과정을 통해 12·12,5·17,5·18사건과 관련,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답변을 했으며 검찰도 적법절차를 거쳐 수사를 종결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또 『6년전인 89년12월 당시 노태우 대통령과 김영삼·김대중·김종필 등 3야당총재의 영수회담 결정에 따라 국회 증언대에서 과거문제를 매듭짓게 됐음에도 이문제가 또다시 제기돼 온 나라가 극도의 혼란과 불안에 빠져 있다』고 주장하고 현정부의 통치이념등에 대한 김대통령의 설명을 요구했다. 전씨는 3당합당을 거론하며 『내가 국가헌정질서를 문란케 한 범죄자라면 내란세력과 야합한 김대통령 자신도 응분의 책임을 지는 게 순리』라고 주장했다. 그는 『김대통령이 이승만 정권을 친일정부로,3·5·6공화국을 내란에 의한 범죄집단으로 규정,과거 모든 정권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있는 것은 좌파운동권의 운동방향과 같다』며 『김대통령은 이번 기회에 자신의 역사관을 분명히 해주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전씨는 성명발표 직후 측근들과 함께 동작동 국립묘지를 참배한 뒤 고향인 합천으로 떠났다. 한편 전씨의 핵심측근인 이양우 변호사는 이날 전씨의 대국민성명 발표후 시내 장교동 사무실에서 기자들과 만나 향후 대응방안과 관련,『가능한 한 모든 법적 대응을 해나가겠다』고 밝혔다.또 『이같은 대응은 검찰의 수사방향에 따라 결정될 것』이라며 『현재까지는 정치적 대응은 고려치 않고 있다』고덧붙였다. 이씨는 5공 출범전후를 소재로 한 정치드라마를 방영중인 SBS와 MBC 양TV방송사에 대해 『민사·형사를 모두 포함해 즉각적으로 법적 대응에 나설 것』이라고 말했다.
  • 청산과 충원의 논리(이동화 칼럼)

    「5·18특별법」제정 결정을 놓고 그 의미를 평가절하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일부 정치적 대립세력이 정국주도권 상실을 우려해 다소 폄하하려는 시도는 있으나 이역시 본질을 훼손하려는 것은 아니다.오히려 이번 결정을 놓고 문민정부의 새로운 개혁드라이브로 평가하는 사람이 많다.더 나아가 국민적 혁명으로 발전할 전기를 마련했다며 기대하는 사람들도 적지않다. 단순히 불법과 폭력적 방법으로 정권을 탈취하고 부도덕하게 권력을 휘두른 것을 응징한다는 차원을 넘어 과거의 잘못된 정치·경제·사회적 제도와 관행,그리고 의식을 보다 합리적이고 전향적인 것으로 바꾸려는 확고한 의지와 결과가 있어야 진정한 국민혁명으로 승화될수 있다는 인식과 요구도 적지 않다. ○비리 정치인 추방이 과제 그러나 이같은 과업은 일도양단 식으로 단숨에 해결되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의지가 필요하고 실천력이 갖춰져야 하며 시간 역시 많이 소요된다.무엇보다 인적·제도적 개혁이 국민적 합의속에 진행되어야 한다. 인적청산의 계기는 「5·18」특별법제정과 노태우 전직대통령 비리사건으로 충분히 마련되었다.과거 군사반란과 관련된 인물들을 응징하고 노씨 비리로 대표되는 부정·비리인사들을 제거할 기회가 온 것이다.특히 정계로부터 이들을 완전히 가려내 추방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반란관련자는 어느 정도 노출되어 있지만 비리정치인은 대부분 숨어있다.마침 검찰이 비자금과 기업의 돈을 받은 정치인 명단을 파악했다니 우선적으로 수사해야 할 것이고 나아가 『국가와 국민을 위한 정치』를 한다며 치부·축재를 한 인물들도 추가로 가려내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여기에는 여·야의 가림도,성역도 없어야 한다. ○능력있는 개혁세력 필요 청산이 있으면 충원이 뒤따라야 함은 당연하다.「정치꾼」으로 자리가 메워지면 이른바 신악이 구악을 뺨치는 경우를 우리는 많이 보아왔다.거기에 미숙과 시행착오도 손쉽게 볼수 있었다. 상당수는 개혁세력으로 충원되어야 하나 여기에도 함정은 있다.과거 민주화투쟁과 반독재투쟁을 한것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문민시대의 전개에 발맞춰 정치적 소양과 전문적지식,그리고 국가발전의지와 능력을 닦아온 사람이 아니면 21세기 선진국가를 만들어 나가는데 부족하다고하지 않을수 없다. 또 상당한 능력을 가졌다하더라도 그 사고나 행동이 지나치게 과격하거나 일반적으로 좌파적 낙인이 찍히면 표를 얻기 매우 어려운 것이 우리사회의 현실이다.사람을 고르는 일은 무척 어렵지만 그만치 중요하다. ○전직대통령 단죄의 참뜻 제도의 개혁은 사실 더 어렵다.최근에 문제점으로 더욱 부각되고 있는 정경유착의 구조나 돈많이 드는 선거풍토,그리고 지역감정에 얽매인 정치풍토 등은 단시간에 바로잡히기 어려운 명제들이다.그러나 이제는 전직대통령들까지 단죄하며 과거의 잘못과 부정을 청산하려는 마당이다. 그렇기 때문에 흥분과 흥미의 단선적 사고로 이번 단죄를 볼 것이 아니라 이같은 아픔이 나라의 선진화와 미래건설을 위한 하나의 계기이며 토대가 될 수 있다는 역사성을 제대로 보아야 할 것이다.그럼으로써 각자 자기스스로의 잘못도 반성하고 국가발전을 위해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해야하는지를 생각하는 계기가될수 있다. 사실 우리 모두 반성할 것이 많다.최근의 사태로 전직대통령을 욕하지만 그들이 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진 것은 아니다.그런 수치스런 대통령을 가졌던 책임이 우리 모두에게 얼마씩이라도 있다. ○책임있는 국민들의 할일 「5·18」에 대해 정치인들이 하는 말은 상황에 따라 크게 차이가 나는 것을 우리는 경험하고 있다.이같은 기만과 위선을 놓고 정치인들을 비난하지만 그들이 한말의 상당수는 그때그때의 국민정서를 반영했던 것이다.결국 국민정서가 그만큼 오락가락했다는 반증이며 따라서 그 책임이 국민들에게도 있다는 말이다. 지역감정 역시 그책임의 일단이 국민들에게 있기는 마찬가지다.내고장 정치인의 비리는 감싸고 다른 고장사람의 것만 문제삼는다면 이는 도덕과 윤리를 마비시키는 일이 된다.이제는 이런 문제도 자각할 때가 되었다.제2건국이라는 인식과 역사성에 투철하다면 이런 과거의 악습은 국민들이 청산해주어야 한다.
  • 만삭의 백인 임부 죽이고 미 흑인여인,태아 탈취

    ◎현장목격 자녀 2명도 살해 【워싱턴 연합】 갓난애를 갖고 싶은 부부가 평소 알고 지내던 만삭의 임산부를 죽인후 태아를 꺼내간 엽기적인 사건이 최근 시카고 인근에서 발생,미국사회에 충격을 주고 있다. 미언론에 따르면 일리노이주 에디슨에 사는 20대 흑인 부인은 아이를 갖지 못해 고민하던중 자신의 사촌과 한때 동거한 바 있는 만삭의 백인 여인을 죽여 그 몸에서 남아를 꺼낸 혐의로 경찰에 체포됐다. 이 인면수심의 흑인 여인은 남편과 사촌의 도움으로 범죄를 저지르면서 현장에 있던 10살과 8살난 피해자의 백인 아이들까지 죽인 혐의를 받고 있다. 더욱이 한때 병원에서 일했던 경험을 되살려 칼과 가위를 동원,예정대로라면 약 4일후 태어나도록 돼있던 태아를 꺼내 미리 준비한 옷을 입혀 데려가는 악마같은 침착성을 발휘했다는 것이다.
  • 북한식량 내년 3월 바닥날듯/농촌경제연 분석

    ◎올 생산 2백58만t… 5개월 소비량/3백64만t 부족… 최악의 식량난 봉착위기 북한은 내년 3월부터 모든 식량이 바닥나 햇곡이 나오는 9월까지 먹을 것이 없어지는 사상 최악의 식량위기에 직면할 것으로 보인다. 농촌경제연구원(원장 정영일)은 23일 북한의 올해 곡물 총생산량이 2백58만t으로 추정되며 이는 북한 주민의 5개월분 소비량에 불과하다고 밝혔다. 농촌경제 연구원은 이날 「북한의 식량사정과 농업현황」에 관한 세미나에서 「북한의 곡물생산량추정」이란 보고서(발표자 김운근 연구위원)를 통해 『올해 생산된 5개월분의 물량이 내년 3월이면 바닥날 것』이라며 『이는 자체 생산량의 소진시기가 평년의 6월에서 3개월 앞당겨지는 것으로 내년 봄부터는 예년보다 훨씬 심각한 식량위기를 예고하는 것』이라고 말했다.김연구원은 『따라서 북한은 내년에 모자라는 곡물을 확보하기 위해 우리 정부나 서방국가에게 보다 필사적으로 매달릴 것』이라고 내다봤다.예년의 경우 평년작은 4백10만t으로 6월에 바닥이 나지만 9월부터는 감자·옥수수 등 햇곡이 출하되므로 7∼8월 두달간은 식량배급을 줄이는 방법으로 근근이 연명할 수 있었다. 농촌경제연구원에 따르면 올해 북한의 곡물 총생산량은 2백58만t으로 연간소비량 6백22만t에 비해 3백64만t이 모자란다.종류별 생산량은 쌀이 76만t으로 연간소비량 3백만t보다 2백24만t,옥수수는 1백37만t으로 연간소비량 2백3만t보다 66만t,콩은 13만t으로 연간소비량 26만t보다 13만t,감자는 28만t으로 연간소비량 47만t보다 19만t,기타 잡곡이 4만t으로 연간소비량 46만t보다 42만t이 각각 부족할 것으로 전망된다. 농촌경제연구원의 한 북한문제전문가는 『북한에서는 식량사정의 악화로 최근에만 군인이 양곡창고를 습격한 사건이 18회나 발생하는 등 군량미 탈취사건이 잇따르고 있다』며 『이대로 가면 내년에는 기아를 이겨내지 못한 북한 주민이 먹을 것을 찾아 대거 중국 등으로 탈출할 것으로 보여 대규모 난민발생이 예상된다』고 말했다.
  • 서울신문에 미친 사회풍속도 세태 50년:Ⅱ(서울신문50돌 특집)

    ◎70년대/「보릿고개」 넘기자 미니스커트 상륙/비상계엄 후유증 「카더라 통신」 난무 70년대 70년대는 유신체제라는 스펙트럼이 처음부터 끝까지 국민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잣대로 작용했다. 유신체제는 우선 「우리도 한 번 잘살아보세」라는 새마을운동 노래로 국민들의 새벽단잠을 깨우며 다가왔다. 전국 농·어촌에 새마을기가 나부끼기 시작했으며 동남아시아 국가등 해외에서도 새마을 붐을 불러 일으켰다. 서울신문도 71년부터 정부의 본격적인 사업전개에 앞서 새마을가꾸기 선두부락을 소개하는 기획물 「번영을 가꾸는 희망가족 시리즈­의욕의 현지,북돋는 자립,땀흘린 보람의 합창」이란 고정컷으로 본지 최초의 새마을운동 기획물을 72년초까지 50회에 걸쳐 연재함으로써 이 운동의 확산에 큰 몫을 담당했다. 72년 3월24일자 사설에선 이 운동을 「농민들이 스스로 잘살기 위해 자조·자립·협동하는 정신의 계발」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70년 7월7일 경부·호남고속도로 개통에다 71년 3월31일 서울·부산 자동전화 개통은 「일일생활권」이라는신조어를 만들어 냈다. 정부의 이러한 불도저식 경제 최우선 정책으로 국민들의 배고픔도 어느 정도 해결되기 시작해 국민들의 얼굴에 미소가 띠기 시작했다. 환해진 모습은 먼저 옷차림에서 띠였다.67년 가수 윤복희씨가 선보인 미니스커트는 73년에는 무릎위 17㎝위까지 올라갔을 정도로 그 길이가 짧아져 경찰이 경범죄처벌대상에 미니스커트 길이를 포함시켜 자를 들고 다니며 이를 단속하는 진풍경을 빚기도 했다.남자들의 긴 머리도 마찬가지였다. 대학생들을 비롯한 청년들은 청바지를 즐겨 입고 통기타와 생맥주로 이어지는 이른바 「청통맥문화」를 만끽했다.「사랑해」「왜불러」등의 포크송이 거리를 메웠으며 「아침이슬」「고래사냥」등 금지곡도 양산됐다. 72년 7·4 남북공동성명은 통일을 염원해 온 국민들에게 벅찬 감격과 흥분으로 소용돌이쳤다. 이날자 본지는 「피맺힌 4반세기…이제 전쟁은 사라지는가! 3천리에 벼락환성」「대화있는 남·북대결의 시대 열리다」라는 제목으로 당시 시민들의 반응을 실감있게 전하고 있다. 강하면 부러진다고 했던가. 70년 11월 13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며 근로조건개선을 요구하며 평화시장 교복공장에서 재단사로 일하던 전태일씨의 분신자살 사건은 이러한 고도성장 드라이브 정책이 필연적으로 맞을 수 밖에 없는 종착점을 예고한 사건과 다름 없었다. 72년 10월 17일에는 비상계엄선포로 국회가 해산되고 대학이 문을 닫고 신문·통신마저 사전검열을 받으면서 국민들은 「카더라 방송」「유비통신」으로 불리는 소문에 귀를 기울이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졌다. 행정부의 시녀로 전락한 유신국회의원들이 장충체육관에서 「체육관 대통령」을 뽑는 「거수기」로 변한 것이나 비상계엄 아래서도 반체제 인사들의 저항과 민주회복운동,양심선언 등이 계속된 것도 궁극적으로는 하나의 사건을 예고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유신정권은 「그때 그사람」이라는 노랫가락 속에 울린 몇발의 총성과 함께 79년 10월26일 막을 내렸다. 10·26사태 뒤엔 「한다면 합니다」란 말과 5·17후의 떡고물 얘기가 유행했다.부정축재자로 지목된 L씨가 자신은 떡(정치자금)은만졌으나 고물(부스러기돈)만 떨어졌다는 말에서 비롯되었다. 70년대 종반은 79년 12월 12일 신군부의 군사반란에 이어 80년 5·17일 쿠데타로 또 다른 군사정권 시대를 예고하고 있었다. ◎80년대/“금융사기” 장영자에 “큰손” 조롱/테러범 김현희에 구혼 줄잇고/“탁치니 억하고 죽었다”엔 분노 79년 10월26일 독재자 박정희의 죽음을 뒤로 하고 80년대를 앞두고 있을 때만 해도 국민들은 비로소 「서울의 봄」을 맞게 됐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79년 12월12일 이른바 12·12 군사반란으로 정권탈취를 노린 신군부는 압제와 서슬 퍼런 군사독재의 시대로 80년대를 열고 있었다. 80년 5월17일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군권을 장악한 신군부는 18일 군부독재 연장기도에 맞서 광주에서 발생한 항의시위를 공수부대 특전단을 동원해 총검으로 유혈진압하는 비극을 초래했다. 결국 신군부는 그해 9월1일 전두환 정권을 탄생시킨다.그리고 이날부터 TV에는 「땡전뉴스」가 등장하게 된다.9시 뉴스는 어김없이 『전두환 대통령께서는…』으로 시작됐던것이다. 80년 11월12일에는 언론통폐합과 언론기본법 등이 제정돼 기자들은 강제해직을 면치못했고 언론은 통폐합 됐다. 이같은 압제는 학생운동의 흐름에도 영향을 미쳤다.학생운동은 광주항쟁에서의 좌절을 계기로 반미라는 새로운 흐름으로 표출됐고 급기야 82년3월18일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이 발생했다.이는 85년 서울·광주 미문화원 점거로 이어졌다. 82년 5월에는 장영자 금융사기 사건이 발생했다.6천억원대에 달하는 건국후 최대의 금융사기사건으로 이때부터 사람들은 씀씀이가 큰 사람을 「큰손」이라 일컫기도 했다. 분단의 아픔은 80년 대에도 지워지지 않았다.83년 9월1일에는 사할린 부근에서 항로를 이탈한 대한항공 보잉007기를 소련의 전투기가 공격,승객과 승무원 등 탑승자 2백69명 전원이 사망했고 그해 10월9일에는 서남아시아 순방에 나선 전두환 대통령을 수행하던 서석준 부총리 등 고위관리 13명이 미얀마 양곤의 아웅산묘소에서 북한공작원이 설치한 폭탄에 절명,분노를 자아냈다. 그같은 분노는 87년 6월 테러범 김현희가 대한항공 858기에 폭탄을 설치,1백51명의 승객 전원이 사망하는 사고로 절정에 달했다.그러나 압송돼온 김현희의 미모에 반해 결혼하고 싶다는 남성들의 문의가 쇄도했다는 웃지 못할 뒷얘기도 남겼다. 87년 1월14일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도 시대의 아픔을 공유케 했다.「탁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발표는 폭력적인 공권력과 인권침해에 대한 국민적인 저항을 불러 일으켜 6·29선언을 낳게 했다.민주화를 염원하는 국민들의 요구에 굴복해 나온 이 선언은 후에 「죽이구」선언으로 회자되기도 했다. 이처럼 어두운 시대였지만 변화의 물결도 뚜렷했다.80년 컬러TV 시대가 개막됐고 82년에는 통행금지가 해제됐다.또 비디오문화가 새롭게 열리기 시작하면서 외설문화의 범람을 초래하기도 했다. 80년에는 또 대입본고사 폐지,대학정원의 졸업정원제 등을 내용으로 하는교육개혁조치와 함께 과외 전면금지가 단행 됐다.이에 따라 숨어서하는 과외가 성행,수백만원대의 과외풍조가 생겨났으며 「쪽집게과외」 등 돈으로 교육을 사는 세태를 낳기도 했다. 82년 중·고생 두발자율화,83년 교복자유화 등의 조치는 청소년들의 유흥업소 출입 등 많은 문제를 양산하기도 했으며 유니섹스모드의 유행을 가져오기도 했다. ◎90년대/3D기피 현상속 세계화 바람타고 외국어 수강 “붑” 93년 2월25일 제 14대 김영삼 대통령 취임과 함께 「문민정부」가 탄생했다.5·16 이후 30여년만에 민간대통령이 탄생한 만큼 90년대는 사회 모든 분야에 변화의 바람을 몰고 왔다. 안으로는 금융실명제 등을 통해 사회개혁의 기치를 높이 드는 사이 49년간 북한을 통치해온 김일성이 사망하고 김정일체제가 들어서는 등 안팎으로 많은 소용돌이가 있었다. 그러나 진정으로 90년대를 특징짓는 함축적인 표현은 이른바 「X세대 문화」다. 뒤돌아볼 겨를 없이 성장가도를 달려온 부모·선배 세대가 만들어 놓은 과실을 향유하는 신세대들의 시대인 것이다. 그들에게는 개인주의적이고 향락주의적이라는 부정적인 측면과 함께 개성적인 새대라는 의식이 공존 한다.알아들을 수 없는 「랩」을 흥얼거리며 록카페를 드나드는 「오렌지족」인가 하면 마음만 먹으면 배낭하나 덜렁 메고 유럽이고 미국이고 가고 싶은 곳은 어디라도 찾아나서 모험을 즐기기도 하는 세대들인 것이다. 컴퓨터 없이는 아무 것도 할수 없지만 정보화시대를 앞당기며 국제화와 세계화를 이끌 첨병도 바로 그들이다. 젊은이들의 문화가 인간성 상실로 인한 황금만능주의와 개인주의적 대중문화의 병폐를 양산하기도 하지만 그들에게 그것은 컴퓨터나 외국어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하는 30∼50대 「컴맹세대」가 느끼는 세대간의 문화적 격차일 뿐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성수대교 붕괴사고,서울 아현동 가스폭발사고,삼풍백화점 붕괴 등 90년대 들어 빈발하고 있는 대형사고들은 선배세대들의 부정적 부산물일 뿐이며 그점에서 그들은 오히려 피해자인 것이다. 하지만 즐기는 신세대로서의 그들은 3D 기피현상이라는 어두운 한 단면을 90년대에 그려내고 있기도 하다.「고학력 구직난,저학력 구인난」현상과 외국인근로자의 양산도 바로 그들의 시대를 특정짓는 모습들이다.
  • 「12·12」 주동자에 무기징역 선고/충남대 법대서 모의재판

    ◎5·18 작전 참가 군간부들엔 15∼10년형/“유보 사건 법학도로 순수하게 접근” 『정권탈취를 위해 수많은 인명을 살상하고 국헌을 문란케 했으므로 형법 제 88조의 내란목적 살인죄 및 제 87조 1호의 내란죄를 적용,사형을 구형한다』 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자금 파문이 확산되는 가운데 14일 충남대에서 지난 80년 정권을 탈취한 신군부에 대한 모의재판이 열렸다. 충남대 법대가 주최한 모의 재판에는 당시 실세들의 이름을 바꾼 전태우(전두환+노태우) 이허세(이희성 당시 계엄사령관) 정명령(정호용) 왕진압(5·18 작전에 참가한 군 간부들을 통칭하는 이름) 등 4명이 피고석에 세워졌다. 검찰은 논고를 통해 『전태우 피고인 등은 정권찬탈을 목적으로 지난 80년 주요 정치인들을 제거하고 「국보위」라는 초헌법적 기구를 설치했을 뿐 아니라 집권에 반대하는 무고한 시민을 살상하는 등 현대사에 씻을 수 없는 아픔을 남겼다』며 사형을 구형으나 재판부는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이허세 정명령 피고인에는 징역 15년,왕진압 피고인에는 징역 10년이 각각 선고됐다. 모의재판을 준비한 김병호군(22·공법학과 3년)은 『근대사의 가장 중요한 사건이면서도 정의의 저울질이 유보된 사건을 법학도로서 순수하게 접근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 야산 빈집서 접선 순간 「번개작전」/부여 무장간첩 상보

    ◎군경 1천2백명 도주로 봉쇄 24일 하오 충남 부여에 나타난 무장간첩 2명의 소탕작전은 경찰의 5분대기조 등 군경의 신속한 출동과 합동작전으로 이루어졌다.생포된 간첩은 식량난을 겪고 있던 북한에 쌀을 지원하던 지난 8월 남파된 것으로 드러났다. ▷신고◁ 이날 하오2시30분 충남 부여경찰서 상황실의 경비전화 벨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부여군 석성면 정각리 정각사 부근에 거동수상자 2명이 나타났다.빨리 5분대기조를 보내달라.긴급이다.긴급…』 전화에서는 안기부직원이라고 신분을 밝힌 남자가 병력출동을 요청하는 다급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안기부직원들은 이날 상오 거동수상자가 나타났다는 민간인의 신고를 받고 낮 12시30분부터 추적에 나서 하오 정각사 뒷산 폐가에서 접선을 시도하는 간첩을 덮치려다 이들이 낌새를 눈치채고 권총을 쏘며 폐가를 뛰쳐나와 달아나자 군경에 신고를 했다. ▷출동◁ 신고를 받은 부여경찰서는 비상사이렌을 울리며 5분대기조 등 경찰관 1백10여명을 즉시 현장에 출동시켰다.또 인근에서 대침투훈련을하던 군부대에 연락,합동으로 작전을 전개했다.간첩들은 폐가에서 빠져나와 태조봉 정상으로 달아났다. 추적및검거 5백여명으로 편성된 군경합동수색대는 하오3시5분쯤 정각사에 도착,포위망을 압축하다 하오4시부터 태조봉정상 인근 계곡에서 대치했다. 간첩들은 대치중 인근 도로가로 나와 민간인의 승용차를 탈취하려다 경찰이 계속 뒤를 쫓자 산으로 달아났다.이 과정에서 하오4시25분쯤 간첩 김도식(33)이 부여경찰서 황수영 순경(31)이 쏜 M 16총에 대퇴부를 맞고 쓰러져 생포됐다. ▷수사◁ 김은 생포된뒤 우리나라가 수해로 식량난을 겪고 있는 북한에 쌀을 보내던 지난 8월 남파됐으며 달아난 동료는 박광남(31)이라고 말한뒤 침투이후의 활동내용 등에 대해서는 묵비권을 행사하고 있다.달아난 박은 노란색 점퍼에 넥타이를 매고 있으며 키는 1백75㎝가량이다. ▷수색◁ 군경은 총상을 입은 김을 버리고 인근 야산으로 달아난 나머지 1명을 검거하기 위해 포위망을 압축해가며 수색을 벌이고 있다.또 도주로를 차단하기 위해 부여∼논산간 국도와 지방도,방범초소,역,터미널 등에 모두 1천2백명을 배치했다. ◎수훈감 황수영 순경/92년 경찰 투신한 충남 특등사수/50m전방까지 유인 M16 쏴 생포 충남 부여군 석성면 태조봉에 출몰한 무장간첩을 생포한 부여경찰서 황수영 순경(30)은 충남지방경찰청에서 알아주는 특등사수. 부여 토박이인 황순경은 목원대 독문과를 졸업하던 지난 92년 3월 경찰에 입문,줄곧 부여경찰서에서만 근무했다. 탁월한 사격솜씨로 부여경찰서 5분대기조에 편성된 황순경은 이 날 하오 출동 명령을 받고 무장간첩의 도주로를 예상,정각사 부근 청룡저수지에서 동료 경찰관 2명과 함께 잠복했다. 하오 4시25분 쯤 무장간첩 김도식이 저수지 부근으로 나타나자 김을 50m전방까지 유인한 뒤 왼쪽 허벅지에 M16을 발사,생포하는 침착성과 대담성을 보여줬다.
  • 무장간첩 2명 군경과 총격전/어제 부여서/1명 생포·1명 추적중

    ◎기관·권총 난사… 군경 3명 사상/지난 8월 남파 【부여=최용규·이천렬·김성수 기자】 무장간첩 2명이 군경과 총격전을 벌이다 1명이 붙잡혔다.이 과정에서 경찰 1명이 숨지고 경찰 2명과 군인 1명 등 3명이 중상을 입었다. 24일 하오2시40분쯤 충남 부여군 석성면 정각리 정각사뒤 가건물에서 양복과 잠바차림의 30대남자 2명이 접선을 시도하다 안기부직원들에게 발각되자 총을 쏘며 정상부근인 태조봉쪽으로 달아났다. 군경은 신고를 받고 병력 5백여명을 동원,현장으로 출동해 이들과 대치하며 총격전을 벌였다.간첩들은 국도로 나가 승용차를 탈취하려다 병력들이 계속 추적하는 것을 보고 달아나던중 하오4시25분쯤 정각사에서 3백여m 떨어진 청룡저수지에서 간첩 김도식(33)은 부여경찰서 황수영 순경(31)이 쏜 M 16에 맞고 생포됐다.김은 경찰에서 『지난 8월 북한에서 남파됐으며 달아난 동료의 이름은 박광덕』이라고 말했다. 교전과정에서 부여경찰서 장진희 순경(30)이 가슴에 총을 맞고 숨졌으며 부여경찰서 나성주 순경(27)과 송균헌 경장(30) 등 2명은 중상을 입었다.머리에 총을 맞은 나순경은 생명이 위독하다. 군경은 교전중 인근 야산으로 달아난 나머지 1명을 검거하기 위해 헬기를 동원,포위망을 압축하고 있다.하오7시20분쯤에는 대치중인 육군 모부대소속 이상용 이등병(21)이 총상을 입었다. ◎충남 갑호비상령 군경은 이날 충남전역에 갑호비상령을 내리고 공주·강경·청양 등으로 통하는 야산과 도로를 차단했다.또 하오7시부터 25일 상오6시까지 부여군과 논산군 일대에 통행금지령을 내렸다.
  • 「군포 쓰레기」 날로 악화/수거중단 18일째

    ◎시청 앞마당까지 쌓여/주민들 “대책 마련 못하면 집단행동 불사” 【군포=조덕현 기자】 군포시의 「쓰레기대란」이 계속 악화되고 있다.쓰레기수거가 18일째 중단되면서 시청 앞마당에 쓰레기가 쌓이기 시작했고 주민들의 집단반발도 가시화되고 있다. 군포시는 19일 과천∼안산을 잇는 국도 47호선을 비롯한 간선도로변과 적체가 극심한 주택가 등지의 쓰레기를 실어다 시청안 다목적운동장에 임시로 쌓기 시작했다.대로변에 쓰레기가 쌓이며 차량은 물론 주민들의 통행마저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이날 군포시 운동장에 보관한 쓰레기는 모두 2백50t으로 군포시는 다목적운동장에 이어 민원인과 직원주차장에도 차례로 생활쓰레기를 야적키로 했다.다목적운동장에는 최고 5백t을 쌓을 수 있으므로 2∼3일이면 가득 차게 된다. 해충과 악취 등 쓰레기폐해가 심해지자 군포시는 탈취제를 배포하고 방역작업을 강화하고 있지만 주민들의 반발은 거세지고 있다. 18일 낮12시10분쯤 구도시의 박영희씨(48·여·산본1동)는 『더이상 쓰레기를 집에다 보관할 수 없다』며 손수레에 1백50㎏의 쓰레기를 싣고와 산본1동 사무소에 갖다버렸다. 구도시의 금정·당정동 주민들도 쓰레기더미에 파리 등 해충과 쥐가 들끓을 뿐아니라 악취가 풍긴다며 즉각적인 대책이 마련되지 않으면 집단행동에 나서기로 했다.주공아파트 1∼4단지 주민 등 신도시주민들도 대책을 요구하고 나섰다. 한편 수도권매립지 주민대책위(위원장 이균흥)는 20일 정례회의에서 군포시의 쓰레기반입허용문제를 다시 논의한다.
  • 가을 야산 누비는 전쟁놀이/스릴 만점의 「페인트볼 게임」

    ◎착색탄 맞으면 물감터져 즉시 생사 가름/대학생·기업체 단합대회용르로 큰 인기 『좌측 능선을 타고 적의 후방에 침입해 적군을 교란하라』 『적군이 아군의 방어망을 뚫고 진격중이니 진지를 사수하라』 최근 청명한 가을날씨가 이어지면서 절정에 달한 단풍숲 사이를 누비며 모의전쟁으로 스릴을 만끽하는 신종 서바이벌게임인 「페인트볼 게임」이 인기를 끌고 있다. 페인트볼 스포츠는 기존의 「모의전쟁」레저인 서바이벌 게임과 유형은 비슷하다.그러나 서바이벌 게임이 플라스틱 탄알(BB탄) 사용에 따른 「죽었다」「안죽었다」의 판정이 애매한데다 부상의 위험문제가 대두돼 대중화의 어려움을 겪고 있다. 페인트볼 게임은 BB탄 대신 연질캡슐의 착색탄알을 사용함으로써 서바이벌 게임의 문제점을 일거에 해결,동호인과 대학생은 물론 기업체의 사원연수·단합대회·야유회 등에서 널리 성행하고 있다.그러나 BB탄을 이용한 서바이벌 게임을 고집하는 사람도 많다. 페인트볼 게임은 레포츠화된 성인전쟁놀이.화약냄새는 나지 않지만 생사를 넘나드는스릴이 실전 못지않다. 숲이 우거진 야산에서 군용총기를 실물크기로 본뜬 모의총기와 안구보호용 「고글」을 착용하고,뛰고 오르고 포복한다.모의총탄(페인트볼)에 맞아 옷이 얼룩질 때면 전사자처럼 불쾌감에 휩싸이기도 한다.전사자는 안전지대로 격리되며 백병전은 금지된다. 이 게임은 운동량이 상당할 뿐만 아니라 콘크리트 도시생활에서 쌓인 스트레스를 말끔히 가시게 한다.또 치열한 전투상황속에서 팀구성원간의 협동심과 판단력 등을 자연스레 길러준다. 게임의 종류는 팀을 짠 뒤 상대편을 먼저 전멸시키는 쪽이 승리하는 전멸전,상대편의 진지에 쳐들어가 깃발을 빼앗아 귀환하는 깃발탈취전,최후의 한사람이 남을 때까지 계속되는 전투도열방식 등이 있다. 무주리조트(02­597­0965)는 21일부터 다음달 18일까지 열리는 「제1회 전국대학 무주 파워챌린지」대회에서 페인트볼 스포츠(12인 1개팀)행사를 갖는다. 레저연합회(720­9575)와 레저이벤트협회(722­8811)를 통해 페인트볼 게임에 참여할 수 있다.
  • 6억원대 보석탈취 콜롬비아인 셋 검거/김포공항 경찰대

    김포공항 경찰대는 29일 전날 발생한 6억대 보석털이 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된 콜롬비아인에 르난데즈 모야 자이로 올란도(27),에체베리 구티에레즈다리오 알폰소(24),몬살브 알바 릴리아나씨(26·여) 등 3명을 검거했다. 이들은 지난 28일 하오 6시20분쯤 서울 송파구 방이동 H빌라 입구에서 다이아몬드 1백50점,진주반지 50점 등 모두 2백41점(시가 6억원상당)의 보석이 든 가방을 들고 귀가하던 D 보석회사 부사장 배모씨(41)의 가방을 빼앗은뒤 미리 대기시켜둔 렌터카를 타고 달아난 혐의를 받고 있다.
  • 「보」 크로아계 드르바르시 점령/세계 요충지

    ◎크로아군,「보」 세계 공격 임박 【자그레브 AFP 연합】 보스니아 크로아티아계는 수도 사라예보에서 북서쪽으로 불과 1백70㎞ 떨어진 드르바르시를 세르비아계로부터 탈취,점령했다고 크로아티아 자그레브의 한 TV방송이 18일 보도했다. 이 방송은 세르비아계가 이 전투에서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고 주장했다. 한편 크로아티아군은 이번주초 드르바르에 대한 공세를 시작했다. 【자그레브 AFP 로이터 연합】 크로아티아 정부군이 18일 아드리아해 연안의 항구도시 드브로브니크에 당초 추정보다 두배 이상 많은 1만여명의 병력을 집결시켜 놓고있어 이 도시에 산발적인 포격을 가하고 있는 보스니아내 세르비아계에 대한 공세가 임박했다는 우려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AFP 기자는 크로아티아 정부군 병력을 태운버스와 트력 행렬이 몬테네그로 공화국 접경의 두브로브니크지역으로 향하는 것이 목격됐다고 전했다. 자그레브의 한 유엔 관리는 「1만여명에 달하는 크로아티아 정부군 병력이 두브로브니크 북동부 지역에 집결해 있으며 향후 수일내에 세르비아계에 대한 공격이 시작될 수 있다」고 밝혔다.
  • 한신대 교수 27명 5·18관련 성명서

    한신대학교 교수 27명은 4일 성명을 내고 『5·18 관련자들을 불기소하기로 한 검찰의 결정은 역사의 정의를 외면하고 부도덕한 힘의 정치에 타협한 결과』라고 지적하고 『이는 헌법의 기본 뿌리를 훼손시키고 사회에 도덕적 가치관의 혼란을 가져올 것』이라고 비난했다. 교수들은 또 『이번 결정이 적당히 넘어가게 되면 우리사회는 앞으로 어떤 불법행위라도 일단 성공하기만 하면 불문에 부칠 수 밖에 없게 되고 힘이 곧 정의가 되는 무법천지가 될 것』이라며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을 제정하고 특별검사제를 도입할 것 등을 정부에 촉구했다. ◎경북대 교수협도 【대구=한찬규 기자】 경북대 교수협의회 소속 교수 95명은 4일 검찰의 5·18 관련자 불기소 결정에 항의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특별법 제정 등을 촉구했다. 이들은 『검찰의 결정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정권을 탈취한 행위를 눈감아 준 것』이라며 『앞으로 돌출할지 모르는 쿠데타에 대해서도 성공만 하면 괜찮다고 하는 사전 면죄부를 발행해 준 결과』라고 비난했다.
  • 「보」 내전 크로아로 확전조짐/크로아군 비하치서 세계와 대치

    【사라예보·자그레브 AP 로이터 연합】 보스니아 북서부 안전지대 비하치를 둘러싸고 치열한 공방전이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보스니아및 크로아티아 세르비아계에 대항해 크로아티아 정부군과 보스니아 크로아티아계가 보스니아 정부군을 도와 전투에 참가함으로써 보스니아 내전이 크로아티아로 확산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1주일 이상 세르비아계의 공격을 받고 있는 보스니아·크로아티아 국경지역의 비하치는 크로아티아내 세르비아계의 주요 보급로인 전략요충으로 크로아티아 세르비아계가 참전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세르비아계를 소탕하기 위해 부심하는 크로아티아 정부군도 보스니아를 지원하고 있어 보스니아 내전이 국제전으로 비화하고 있다. 크로아티아 및 보스니아 세르비아계는 인구 20만명이 거주하고 있는 비하치 고립 지역에 대해 북쪽으로부터 공격을 가해 이미 이 지역 3분의1을 장악했다고 주장한 반면 보스니아 크로아티아계는 27일 보스니아 서부의 글라목과 그라보호등 2개의 마을에 포진한 세르비아계를 압박,1백㎦의 영토를 탈취함으로써 이들과 크로아티아내 세르비아계 사이의 보급선에 위협을 가할 수 있게 됐고 크로아티아 정부군은 보스니아 서남부에 5백명의 병력을 증파했다고 발표했다. 이같은 크로아티아측의 공세가 강화되자 크로아티아 세르비아계는 이날 크닌 주변에 총동원령을 내렸다고 탄유그 통신이 보도했다.
  • 마을금고에 2인조 강도/현금 등 1억대 털어 도주/부산 원광의료원

    【전주=조승용 기자】 21일 하오 6시45분쯤 전북 익산시 신용동 원광의료원내 원광새마을금고에 흉기를 든 20대 청년 2명이 침입,여직원들을 위협한 뒤 현금 1억여원과 수표 등 1억 3천9백여만원이 든 돈가방을 빼앗아 달아났다. 여직원 이윤정양(24)은 『영업을 마치고 익산시 갈산동 본점으로 돈을 옮기기 위해 돈가방에 현금과 수표 등을 넣고 기다리던 중 의사 옷차림의 20대 남자 2명이 가스총과 식칼을 들고 들어 와 「소리치면 죽인다」고 위협한 뒤 돈가방을 빼앗아 정문을 통해 달아났다』고 말했다. 범인들은 새마을금고에서 나온 뒤 대기시켜 둔 검정색 승용차를 타고 익산시내 쪽으로 달아났다. 경찰은 대기시켜 둔 차량으로 달아 난 점과 영업을 마친 뒤 본점으로 돈을 옮기는 시간을 이용한 점 등으로 미뤄 2∼4명 가량의 은행전문털이의 범행으로 보고 있다.또 지난 91년 11월 전주시 덕진구 외한은행 우아동 출장소에서 발생한 거액탈취사건과 수법이 비슷하다고 보고 동일범일 가능성에 대해서도 수사중이다.
  • 5월20일/시위진압때 4명 총격 사망/검찰수사로 재구한「5·18」

    ◎휴교항의 전남대생 18일 공수단과 첫 충돌/21일 무장시민군 도청 접수… 최소 38명 희생/시민군 23일 “무기회수”… 군27일 도청점령 “끝” 상오10시 전남대앞에서 휴교조치에 항의,시위를 벌이던 대학생들과 7공수여단 33대대 병력간에 충돌.하오2시40분쯤 학생·시민들이 금남로로 진출,진압에 실패한 경찰이 군병력 출동을 요청해 7공수 33·35대대가 시위진압에 나섬.이 과정에서 첫사망자 발생.시위대 2천여명으로 불어 시내 중심가에서 산발적 시위.하오5시50분 11공수 61대대 진압에 투입됨. 대검을 착검한 공수부대원들의 강경진압에 분노한 시민·학생들 금남로 일대에서 화염병·투석 시위.상가대부분 철시한 상태에서 11공수 61·62·63대대 학생·시민들을 진압봉으로 무차별 구타,연행함.하오2시 광주지역 기관장회의서 과격진압항의및 연행자 전원석방요구.하오5시 11공수63대대 장교가 M16소총으로 시위대에 첫발포.하오11시 육본이 3공수 5개대대에 추가투입명령. 전남도교위 광주시내 중고교에 임시휴교조치.예비군 무기고에서 카빈17정을 시위대가 탈취.하오4시 금남로일대에 시위군중 2∼3만명 운집하고 택시·버스·트럭 등 차량이 시위에 합세.하오9시45분 진압상황 보도요청을 거부한 광주문화방송국 방화.하오10시30분 진압군에 실탄지급.M60등으로 공포사격.하오11시 전남도청을 제외한 광주전지역을 시위대가 장악.광주역일대 진압과정에서 4명이 총격사망. 20사단 61·62연대 추가투입.시위대들이 광산·영광·함평·화순·나주 등지로 진출,나주경찰서등에서 총기4천9백여정·실탄13만여발·수류탄2백70여발 탈취해 무장.정오 전남대·도청등지에서 수만명의 시위대들이 무장시위 벌임.하오1시30분 공수부대원들이 시위대를 향해 집단발포.하오1시35분 광주 외곽도로망 차단하고 진압군 자위권 발동.하오4시30분 전남도청·도경을 시민군이 접수.최소 38명이 총격사망. 광주외곽지역 총격전으로 수십명 사망.상오9시 지역유지와 학생들을 주축으로 시민수습대책위원회 구성.하오3시 도청분수대 앞에서 시민궐기대회개최. 상오9시35분 수습위 시민군들 상대로 무기회수 시작.상오10시 11공수 62대대 병력이 매복한 주남마을 부엉산아래 광주∼화순간 국도에서 미니버스에 타고있던 여고생등 10여명 총격사망.하오3시 도청앞 광장에 5만시민이 운집해 민주수호시민궐기대회 개최. 상오9시55분 호남고속도로 광주인터체인지 부근에서 전교사 예하 기갑학교 병력이 부대복귀중이던 31사단 96연대 3대대 병력을 시위대로 오인,진압군끼리 총격전을 벌여 사병3명 사망.하오1시55분 효천역 부근에서 전교사보병학교 교도대 병력이 11공수63대대 병력을 시위대로 오인,총격전을 벌여 9명 사망. 강경학생·청년들이 수습위를 대신해 무력대항결의.무기반납도 백지화.상오4시 이희성 계엄사령관이 광주재진입작전계획인 「상무충정작전」수립지시해 작성됨.하오5시30분 최규하 대통령 광주방문,담화문발표. 상오10시30분 소준렬 전교사령관 주재로 진압작전 지휘관회의 개최해 27일 새벽 작전개시키로 결정.하오6시 전남도청에서 최후항쟁 주장하는 강경파 2백여명이외에 시위대 해산함. 상오4시 3공수여단 11대대 1지역대 병력이 전남도청 후문으로 들어가 1시간21분만에 도청점령.7공수33대대 8·9지역대 병력도 상오5시6분 광주공원 점령.11공수61대대 4중대 병력은 상오4시46분 도청주변 주요건물 점령.20·31사단은 상오7시15분쯤 광주시내 진입완료하고 10분만에 모든 작전완료.계엄군의 광주재진입작전과정에서 시위대 16명,계엄군 3명 총격사망. ◎고소·고발인 향후 대응방향/「검찰 결성」 불복땐 어찌될까/항고·재항고 기각땐 헌법소원내야/헌법재판소서도 「결정번복」 힘들듯 1년2개월 가량을 끌어온 「5·18」 고소·고발사건이 검찰의 「공소권 없음」 결정으로 일단 마무리됐지만 고소·고발인들이 검찰의 결정에 불복하고 있어 앞으로 전개될 법률적 대응이 주목된다. 현행법상 고소·고발인들이 취할 수 있는 법률적 대응방안은 3단계로 구분된다. 우선 해당 검찰청인 서울지검을 통해 상급청인 서울고검에 항고하는 것.항고가 기각되면 대검에 재항고를 할 수 있으며 재항고마저 기각될 경우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을 청구하는 길이 열려 있다.그러나 이 사건의 경우 고검이나 대검이 1차 결정 당사자인 서울지검의 결정에 이의를 제기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사전조율결과 도출된 결론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항고·재항고는 헌법소원을 내기 위한 요식절차에 불과하다. 그러나 사건이 헌법재판소로 넘어간다해도 고소·고발인들의 주장이 관철되기는 현실적으로 힘들다. 비록 헌법재판소가 헌법소원을 받아들여 「인용」 결정을 내린다고 하더라도 인용결정이 곧바로 검찰의 기소결정으로 이어지지는 않을 뿐더러 헌법소원을 통해 검찰의 결정을 뒤엎기에는 여러가지 면에서 무리라는 것이다. 우선 검찰은 수사결과 발표를 통해 『사안이 사법판단의 대상이 되지 않기 때문에 공소시효가 언제인지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며 공소시효에 대한 판단자체를 하지 않았다. 따라서 헌재가 검찰의 결정을 번복하려면 공소시효부분에 대한 판단을 먼저 내린 뒤 시효만료일 이전에 재기수사명령을 내려야 하는데 고소·고발인들이 주장하는 내란죄의 공소시효(15년)는 오는 8월15일에 만료돼 27일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이 법조계의 지배적인 견해인 점으로 미루어 시간상 공소시효와 본안에 대한 판단을 함께 내릴 시간적 여유가 없다는 것이다. 더욱이 이번 사건이 헌재에서 다뤄질 경우 검찰이 유보한 「대통령의 통치행위에 대한 사법적 판단」여부에 대해서도 심판해야 하므로 「정치적 부담」을 안게 된다.종래 통치행위는 검찰이나 법원의 사법적 판단의 대상이 되지 않으나 헌재의 헌법판단대상이라는 것이 통례였다. 그러나 헌재의 인적 구성이나 12·12사건 당시 보인 소극적 자세 등을 감안할 경우 헌재가 8월초쯤 헌법소원이 제기되면 공소시효부분에 대한 판단여부로 시간을 끌다가 결국 『소의 실익이 없다』는 이유로 각하결정을 내릴 공산이 크다. 따라서 고소·고발인들의 향후 법적대응은 실익보다는 검찰의 사법적 판단에 대한 「불복」차원에 그칠 것이라는 것이 법조계의 중론이다. ◎장윤석 공안부장 일문일답/“어떤 비판 제기돼도 최선다한 결정”/고소인 주장 입증할 증거 발견못해/양민학살한 계엄군 처벌도 어려워 「5·18」고소·고발사건의 주임검사인 장윤석 서울지검 공안1부장은 18일 하오 수사결과를 발표한 뒤 기자들과 일문일답을 가졌다. ­검찰의 「공소권 없음」 결정에 대해 상당한 국민적 반발과 파장이 예상되는데. ▲시를 쓰는 것은 시인이 해야할 고유의 일이지만 시를 감상하고 비평하는 것은 국민의 몫이다.어떤 비판이 제기되더라도 최선을 다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80년 8월 최규하 전대통령 하야과정과 발포경위 등 민감한 사안에 대해 「입증자료가 없다」고 발표한 것은 검찰수사력의 부족함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 아닌가. ▲충분한 자료수집과 검토를 했지만 고소인들의 주장을 입증할 증거를 발견하지 못했다. ­최전대통령이 정권에서 물러날 시기를 전후해 강압과 불법행위는 정말 없었는가. ▲전두환 전대통령은 답변서를 통해 강압이 없었다고 진술했으며 최전대통령은 서면질의서에 대한 답변을 거부했기 때문에 이를 설명할 자료가 전혀 없었다.또 세간에는 이 과정에서 김정렬 전총리가 깊숙이 개입했다는 것이 정설로 돼있는데 김씨 역시 사망해 강압여부에 대해 확인할 수 없었다. ­80년 4월 권정달·허삼수·허화평씨 등이 모여 국보위 설치 준비를 하는 과정에서 정권찬탈등의 의도가 있었다는데. ▲조사결과 4월 당시 그런 논의가 없었던 것으로 파악됐다. ­80년 8월 최전대통령이 하야하고 간선제를 통해 전전대통령이 되는 과정에서 두사람간에 강압이 없었다는 말인가. ▲최전대통령이 답변서를 제출하지 않아 알 수가 없었으며 전전대통령의 경우 「당시 최대통령이 스스로 결단했을 것」이라는 답변서만을 냈다. ­광주시민등 양민학살 부분의 책임자들에 대한 개별적 처벌은 가능하지 않은가. ▲공수부대가 광주 외곽지역에서 총격을 가해 주민 2명을 사망케 한 일이 있었으나 발포자와 구체적 경위에 대해 특정되지 않는등 행위자를 가리기 어려워 처벌이 어렵다. ­12·12사건 때는 군형법상 반란죄등 혐의를 인정했는데 5·18과 다른 점이 무엇인가. ▲12·12 사건의 경우 소장급 장성이 별넷인 장성을 제거하려 한 것이므로 군형법상 반란죄 인정이 가능했지만 이번 사건은 통치권 찬탈을위한 사전의도가 있었다고 보기 어려웠으며 당시 전씨가 모든 과정에서 부단히 최전대통령의 재가를 받으려고 노력했으므로 전혀 다른 성격이다. ­계엄군에 의한 주민학살만이라도 처벌할 수 없는가. ▲공소시효 5년이 지난 것으로 알고 있다.군형법상 군지휘계통을 들어 책임자를 처벌하기도 어렵다.구체적 행위자등 기본적 사실관계 파악이 어렵기 때문이다. ­집권을 위한 시나리오가 있었다는데 입수했나. ▲입수는 했지만 당시 상황을 수습하기 위한 계획서였을 뿐 정권찬탈 음모는 보이지 않았다고 결론을 내렸다.
  • 시위대가 장갑차 포위하자 장교 첫발표/「5·18」수사 의문점 규명

    ◎21일 전남도청앞 충돌전 장교위주 실탄분배­발포경위/전교사령관­31사단장 계통밟아 군병력 투입­군지휘권/광주시내 시위대처 급급… 병력운용 여유없어­무기피탈 방치/인명피해·뚜렷한 피탄흔적·파편 등 확인안돼­헬기 기총소사/8명의 사체서 자상 발견… 대검 사용 인정­대검등 사용/정지불응 미니버스에 총격… 10여명 사망­광주외곽 피해/「신원·사망경위 불명」 많아 확정 불가능­사망자수 검찰이 18일 「5·18」사건의 최종 수사결과를 발표,그동안 베일에 가려졌던 의문점들이 밝혀졌다.검찰수사 결과 드러난 발포경위 및 헬기 기총소사 여부,대검과 화염방사기 사용여부,사망자 수,무기피탈 고의방치 여부,광주 파견부대 지휘권의 2원화 여부 등 7가지 의문점을 정리해 본다. ▷발포경위◁ ▲공수부대의 발포는 5월20일 하오11시쯤 광주역 앞에서 시위군중에 발포하면서 계속되었는데 21일 하오1시쯤 도청 앞에서의 집단발포의 형태는 시위대의 차량돌진을 저지하기 위한 자위목적의 우발적 사격이 아니라 사전에 계획된 명령에 따라 이뤄졌다는 주장. ­광주에서의 최초발포는 5월19일 하오5시쯤 광주고부근에서 있었던 바,당시 사직공원을 수색하고 복귀하던 11공수여단 63대대 배속 장갑차가 이 학교 부근에 이르렀을 때 시위대가 장갑차를 포위공격하면서 불붙은 짚단을 던져 불을 붙이려 하자 장갑차에 타고 있던 한 장교가 장갑차 문을 열고 공포를 쏘고 다시 위협사격하는 과정에서 주위에 있던 고등학생 1명이 총격을 받아 부상당했음. 또 20일 하오11시쯤 3공수여단이 광주역일대에서 시위대와 공방을 벌이던 중 트럭·버스 등 시위대의 차량돌진으로 사상자가 발생하는 등 수세에 몰리자 3공수여단장은 경계용 실탄을 예하대대에 전달하고 대대장은 이를 장교 위주로 분배해 자신들을 향해 돌진하는 차량을 향해 발포했으며 광주역으로 실탄을 전달하러 가던 특공지원조가 시위대와 마주쳐 진로가 막히자 위협사격을 하는 한편 21일 다시 전남대 앞에서 장갑차·경찰가스차 등 시위대의 차량돌진공격에 대응해 발포,사상자가 발생한 것으로 이는 광주시민의 공분을 고조시킬 목적으로 사전에 계획된 의도적인 발포였다고는 할 수 없음. 이와 함께 21일 전남도청 앞에서의 발포경위에 대해 그동안 국회 청문회 등에서는 시위대의 1차 장갑차공격후 도청에서 철수하던 31사단 병력으로부터 공수부대가 소량의 실탄을 인수하여 장교들에게 분배한 상태에서 다시 시위대가 차량공격을 해오자 장교들이 자위적 차원에서 발포한 것이라고 주장돼왔으나 이번 수사결과 11공수여단 61·62대대는 도청 앞 금남로에서 시위대로부터 차량공격을 받은 후 시위가 소강상태에 들어간 20일 밤 12시쯤 대대장이 대대장 지프 등에 통합보관하고 있던 경계용 실탄을 대대장의 명령에 따라 위급시에만 사용하라는 지시와 함께 중대장이상 장교에게 15발들이 1탄창씩 분배하고 63대대는 21일 상오10시30분쯤 실탄을 분배함으로써 같은 날 하오1시쯤 시위대의 차량공격이 있기 전에 이미 장교 위주로 실탄이 분배돼 있었음이 확인됐음. 또 당일 하오1시쯤 시위대가 장갑차등으로 공수부대에 돌진,공격해오고 병사 1명이 장갑차에 깔려 사망하자 이에 대응해 첫 발포가 있었으며 다시시위대가 장갑차와 버스 등 차량돌진을 계속하자 공수부대 장교들이 집단적으로 발포했고 이와 비슷한 시점에 7공수여단 35대대도 철수하던 31사단 병력으로부터 실탄을 인계받아 이를 장교들에게 분배하는 한편 돌진하는 차량을 피해 인도와 인근 건물로 산개했던 공수부대원중 일부가 도청 및 주변건물 옥상에 올라가 경계를 하고 있다가 접근하는 시위대를 향해 발포한 사실이 확인됐음. 따라서 이같은 발포는 대대장이나 여단장이상의 상급지휘관이나 별도의 지휘계통에 있는 특정인의 구체적인 발포명령에 따라 행해진 것이거나 광주시민의 공분을 고조시키기 위해 사전에 계획된 의도적인 것으로 인정할 수 없고 현장지휘관인 공수부대 대대장들이 차량돌진 등 위협적인 공격을 해오는 시위대에 대응해 경계용 실탄을 분배함으로써 이를 분배받은 공수부대 장교들이 대대장이나 지역대장의 통제 없이 장갑차 등의 돌진에 대응해 자위목적에서 발포한 것으로 판단됨. 그러나 그 이후 계속된 발포중에는 비록 시위대가 무장을 했다 하더라도 도로에 나와 단순히구호를 외치거나 총상자들을 구호 또는 호송하려 하거나 심지어는 시위현장 부근에서 구경하기 위해 나타난 경우 등 군에 대해 직접적 위협을 가하지 아니한 상태에까지 발포가 이뤄진 사실을 인정할 수 있어 당시 실탄 및 사격통제에 상당한 문제점이 있었음이 확인됐음. ▷군 지휘권◁ ▲광주에 투입된 공수부대는 상급지휘관인 계엄사령관·2군사령관·전교사령관·31사단장의 정상적인 지휘계통하에 있지 아니하고 별도세력의 사전계획에 의해 지휘되고 있었다는 주장. ­7공수여단 2개 대대를 전남대 등 3개 대학에 배치한 것은 소요예방과 진압을 이유로 육본이 전국 92개 대학에 계엄군을 배치하는 조치의 일환으로 취해진 것이므로 이때 이미 군병력의 시위진압투입은 전제돼 있었다고 할 수 있으며 5월18일 하오 7공수여단 2개 대대가 광주시내 시위진압에 나선 것은 계엄확대선포후 전국에서 유일하게 광주시내에서 시위가 벌어졌고 경찰이 군의 투입을 요청하고 있는 상황에서 계엄사령관→2군사령관→전교사령관→31사단장의 계통에서 군병력 투입을 결정한 사실이 인정됨. 11공수여단의 추가투입이 광주시내에서 공수부대원들과 학생들이 충돌하기 전인 18일 하오2시쯤 결정된 것은 사실이나 이는 광주 시위상황을 보고받은 육본에서 군병력의 증원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다만 공수여단중 적절한 파견부대의 결정을 위해 특전사령관의 의견을 들어 11공수여단을 증원하기로 결정한 것임. 또 초기에 7공수여단을 시위진압에 투입한 후 5월18일 야간에 공수부대를 광주시내에 거점배치하고 19일 11공수여단의 추가작전통제에 다라 책임지역을 구분해 시위진압에 투입했으며 20일 3공수여단의 추가투입에 따라 다시 책임지역을 구분,시위진압에 투입하고 21일 공수부대를 시외곽으로 철수시키는 등 일련의 부대운용에 관한 지휘를 실제 31사단장과 전교사령관이 행한 사실이 인정됨. 21일 하오4시 31사단장의 2개 공수여단에 대한 작전지휘권이 전교사령관에게 전환된 후 광주 재진입작전은 전교사령관이 계엄사령관의 지휘를 받아 특전사령관 등의 자문과 조언을 참고해 그의 책임하에 수행한 것이 인정되며 군부대간의 오인사격은 전교사와 공수여단 및 전교사 예하 각 부대간에 상호 상황전파 및 통제의 미숙,단위부대 지휘관들의 상황판단미숙과 침착성 부족 등에 기인해 발생한 것으로 이를 두고 지휘권 이원화의 결과라고 할 수는 없음. 물론 광주에 파견된 3개 공수여단이 전교사령관이나 31사단장의 작전통제하에 있었음에도 31사단 등과는 무전교신체계가 상이한 상태에서 특전사 일부장교가 전교사에서 전용 무선 발수신장치를 설치해 각 공수여단과 별도로 교신하면서 상황을 파악하고 특전사령관이 11공수여단과 3공수여단의 증원결정에 의견을 제시하고 수시로 광주를 방문하면서 공수여단 지휘관들을 격려하고 광주 재진입작전인 상무충정작전을 수행함에 있어 특공부대를 선정하는 데 관여한 사실 등이 인정되나 이를 가지고 당시 공수여단에 대한 지휘권이 이원화됐다고 할 수는 없는 것임. ▷무기피탈 방치◁ ▲사전에 계획된 시나리오에 따라 광주 재진입작전의 여건을 조성하기 위해 시민으로 하여금 무기고를 습격,무장을 하도록 상황을 유도했을 가능성이 높으며 그 근거로 광주시민이 광주 외곽지역에서 무기고를 습격하고 무기를 탈취해 광주로 돌아오는 동안 아무 제지를 받지 않았고 이후 외곽도로가 봉쇄되었다는 주장. ­광주에서 시위대에 의한 무기탈취는 19일 하오3시15분쯤 시위대가 기독교방송국을 점거하는 과정에서 31사단 경계병력으로부터 M16소총 1정을 탈취한 것이 처음으로 이 소총은 곧 회수됐으며 그후 20일 하오11시쯤 광주세무서 방화,점거시 지하실 무기고에서 칼빈 17정을 탈취했고 21일 하오1시쯤 광산 하남파출소에서 카빈 9정이 탈취됐으나 시위대가 본격적으로 무기탈취에 나선 것은 21일 하오1시쯤 전남도청 앞에서 공수부대의 발포가 있은 후로 시위대는 광주 인근지역으로 진출,화순·나주 등 지방의 지·파출소와 화순광업소·한국화약 등 방위산업체 등에서 대량의 무기와 실탄을 탈취했음. 당시 조기진압의지와는 달리 시위가 급격히 확산됨으로써 경찰과 군병력이 광주시내 시위에 대처하는 데만도 급급한 상태였고 지방경찰 병력도 대부분 광주시내로 차출돼 인근지방으로까지 진출해 무기를 탈취하는 시위대를 사전에 막기는 어려웠던 상황이었으며 특히 21일에는 전남대에서 3공수여단이,전남도청 앞에는 7공수여단과 11공수여단이 시위대와의 치열한 공방전 끝에 결국은 전남도청 등을 포기하고 시외곽으로 철수하는 형편이었으므로 군이나 경찰이 병력운용에 여유가 있는 상태에서 의도적으로 무기고 습격을 방치하였다고 보기는 어려움. ▷헬기 기총소사◁ ▲광주에서 무장헬기의 공중사격으로 많은 인명피해가 야기됐다는 주장. ­군관계 자료상으로는 21일 2군사령부가 전교사에 수송용 헬기인 UH­1H 10대,무장헬기 AH­1J(코브라) 4대를 지원하고 사태기간중 헬기가 모두 48시간동안 무력시위를 했다는 기록외에 실제공중사격 실시여부에 대해서는 아무 기록을 발견할 수 없었음. 조비오신부가 헬기사격의 피해자라고 지목한 홍란은 검찰조사에서 부근 건물옥상에 있던 계엄군의 소총사격에 의해 다쳤다고 진술했으며 정낙평은 21일 하오2시쯤 광주경찰서 상공에서 기종미상의 헬기가 기관총 사격하는 것을 목격했으며 부근 진주다방의 종업원이 옥상에서 헬기가 쏜 기관총을 맞고 죽었다는 말을 들었다고 진술했으나 진주다방 종업원인 심동선씨(30)에 대한 검시조서에 의하면 사인이 M16소총에 의한 관통총상이고 당시 빌딩옥상에 있던 공수부대원의 사격에 의한 피격이라는 취지의 증언이 있음. 아놀드 피터슨목사는 헬기가 선회하고 상공에서 총소리가 들려 헬기에서 기총사격을 한 것으로 믿고 있으나 헬기사격 자체를 목격하지는 않았다는 것이고 피터슨목사가 사격장면을 촬영한 것을 검찰에 제출한 사진상의 헬기 하단 불빛은 기관총사격시 발생되는 섬광이 아니라 헬기에 부착된 충돌방지등 불빛임이 확인됐음. 이와 함께 광주시내 적십자병원·기독병원·전남대병원의 당시 진료기록부와 응급실 관계자들의 진술을 검토해도 그 당시 각 병원에 헬기총격에 의한 피해자가 들어왔거나 입원·치료를 받은 사실을 확인할 수 없었고 광주시위 관련 사망자 1백65명에 대한 광주지검 사체 검시기록에서도 특별히 헬기기총사격에 의한 사망이라고 인정할 수 있는 근거를 발견할 수 없었음. 또한 AH­1J헬기의 장착무기인 토미사일,2.75인치 로켓,20㎜ 발칸포(1분당7백50발 발사),500MD헬기의 장착무기인 2.75인치 로켓,7.62㎜ 6열 기관총(1분당2천∼4천발 발사)에 의한 표적사격의 경우 나타나는 대규모 인명피해와 뚜렷한 피탄흔적·파편 등이 확인되지 않았음. ▷대검등 사용◁ ▲계엄군이 시위진압과정에서 대검과 화염방사기를 사용했다는 주장 ­당시 광주일원에 투입된 계엄군은 착검상태에서 트럭을 타고 위력시위를 하다가 시위대로부터 투석공격 등을 받으면 착검상태로 하차해 시위대를 추적,체포한 사실이 인정되므로 그 과정에서 대검으로 인한 피해가 발생했을 가능성이 있음. 실제로 사망자 손옥례·권근립씨등 8명의 사체에서 자상이 발견됐고 부상자 하헌남·최승기씨 등이 자상을 입은 점 등을 종합할 때 당시 시위진압현장에서 지휘관의 의사와 상관없이 공수부대원에 의해 대검이 사용된 사실이 인정됨. 군관계자들은 화염방사기가 토치카 또는 장갑차 공격용이므로 인체에 화염방사기를 직접 사용할 경우 전신 중화상으로 대부분 사망했을 것이라는 점 등을 들어 당시 광주에서 화염방사기가 사용되지 않았고 다만 소용진압용 작용제(CS분말)나 소요군중 식별용 유색수를 살포하는 데 화염방사기를 이용했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계엄군이 화염방사기로 화염을 방사했거나 화염방사기에 의한 화상사망사실을 인정할 만한 자료를 발견치 못했음. 5월21일 광주시청 앞에서 시위대의 장갑차를 몰고가다 화염방사기 공격으로 화상을 입은 것으로 광주민중항쟁사료전집에 기록된 최강식씨(87년 사망)의 보상금지급 관련서류를 조사한 결과 최씨는 당시 광주시 중흥동의 한 건축현장에서 계엄군에 체포돼 전남대·광주교도소·상무대로 이동하면서 전신을 구타당하고 화상을 입은 것으로 파악됐음. 또 같은 날 전남대 앞 시위에서 계엄군의 화염방사로 안면화상을 입은 것으로 기록돼 있는 최병옥씨(당시 21)의 경우 당시 계엄군에 쫓겨 전남대부근 가정집의 화장실에 숨어 있던 중 화장실 환기창문으로 불꽃이 들어와 얼굴에 화상을 입었으나 그것이 화염방사기에 의한 화염인지는 목격하지 못했다고 검찰조사에서 진술하는 등 다른 피해사례나 목격담에 대한 조사에서도 화염방사기 사용사실을 확인하지 못했음. ▷광주외곽 피해◁ ▲5월21일 공수부대가 전남대와 전남도청 앞에서 광주시 외곽으로 철수하여 5월27일 재진입작전을 할 때까지 시외곽 봉쇄 및 도로차단 등과 관련해 여러 건의 민간인 피해사례가 있었다는 주장. ­이같은 주장 가운데 3공수여단 5개 대대는 5월21일 광주교도소로 철수하는 과정에서 시위대 수십명을 천막등으로 덮은 트럭에 실어 호송하면서 더운 날씨에도 불구,과다한 인원을 탑승시킨 상태에서 최류탄을 터뜨려 화상환자를 발생시켰고 교도소 도착당시 트럭에는 질식 등으로 인해 5∼6명이 사망한 것으로 확인됐음. 3공수여단은 또 같은 달 22일 하오10시쯤 광주교도소부근을 통과하던 김성수씨일가를 시위대로 오인,총격을 가해 가족 3명에 총상을 입히고 그중 김씨의 처 김춘아씨가 후유증으로 사망케 하는 등 24일까지 광주교도소를 방호하는 과정에서 무장시위대와 수차례 교전을 했고 이같은 교전및 부상자치료,철수과정에서 사망한사체 12구를 교도소부근에 가매장한 사실이 확인됐음. 광주∼목포간 도로를 차단하기 위해 효천역부근에 배치됐던 20사단 61연대 병력은 5월22일 상오5시40분과 9시쯤 2차례에 걸쳐 시위대로 오인하고 민간인에 총격을 가해 왕태경 등 2명이 사망하고 5명이 부상했음. 5월22일 하오5시쯤에는 20사단 62연대 2대대가 광주통합병원을 확보하기 위해 민가를 사이에 두고 무장시위대와 교전하는 과정에서 인근주민 이매실·함광수씨 등이 총상을 입고 사망 또는 부상했고 23일에는 해남에 주둔하고 있던 31사단 93연대 2대대와 시위대간의 2차례 교전과정에서 박영철씨 등 민간인 2명이 사망했음. 11공수여단 62대대가 매복하고 있던 주남마을 앞 광주∼화순간 국도에서는 23일 상오10시쯤 정지신호를 무시하고 달리던 미니버스에 총격을 가해 박현숙씨 등 10여명이 사망했고 남자 중상자 2명이 후송도중 다시 총격에 의해 사망했음. 24일 하오1시30분쯤에는 주남마을에서 송정리비행장으로 이동하던 11공수여단 병력과 시위대 10여명이 송암동부근에서 총격전을 벌이던 중 공수부대의 난사로 전재수 등 어린이 2명이 사망했고 또 전교사 보병학교 교도대 병력의 오인사격을 받고 격분한 63대대 병력이 피격지점부근를 수색해 시위대를 체포하는 과정에서 무장시위대원 1명과 권근립씨 등 주민 4명이 총격을 받고 사망했음. ▷사망자수◁ 정부 관련 자료에 근거한 광주시위 관련 사망자수는 군인 23명,경찰 4명,민간인 1백66명등 모두 1백93이고 이에 광주시위 관련 행방불명자로 인정돼 보상금이 지급된 사람이 47명임. 그러나 광주시위기간에 발생한 사체 가운데 신원및 사망경위가 명확하지 않은 경우가 많고,목격자 진술 등에 의해 사망자가 확인된 경우에도 당시 사체가 발견돼 확인됐는지 여부와 신원불상 사체와의 동일성 여부 등에 대한 판단이 현재로서는 곤란해 광주시위 관련 사망자수를 확정짓는 것은 불가능함.
  • 경관폭행 권총탈취/범인 3명 구속

    【수원=김병철 기자】 경기지방경찰청은 28일 유봉상(23·경기도 용인군 기흥읍 고매리),김영수(24),박종국씨(23) 등 3명을 경기도 광주 경찰관 총기탈취 사건의 범인으로 붙잡아 범행일체를 자백받고 강도상해 등 혐의로 긴급구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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