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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경없는 이웃사랑/서울선교회,실직 외국인에 ‘식사제공’

    ◎IMF후 하루 80명 이용/오갈곳 없으면 잠자리도/귀국후 감사편지에 보람 “함께 생활했던 외국인 근로자가 고국으로 돌아가 고맙다는 편지를 보내왔을 때가 가장 기쁩니다” 兪海根 목사(37)가 운영하는 서울 광진구 구의동의 60평 남짓한 서울선교회는 예배당이자 실직한 외국인 근로자들의 식당이다. IMF 체제 이후 불어닥친 실직사태에 외국인 노동자들도 예외가 아니었다.兪 목사는 실직한 수많은 외국인 근로자들을 받아줄 변변한 시설이 없다는 것을 알고 식사라도 제공하기로 결심했다.지금은 하루 80여명의 외국인 근로자들이 이곳에서 점심과 저녁을 먹고 있다. 선교회 옆에는 월세방 2개를 마련해 오갈 데 없는 외국인 노동자와 불우노인 등 10여명에게 잠자리를 제공하고 있다. 兪목사는 지난 93년 서울 구로공단 가릴릭교회에서 외국인 근로자 선교를 담당하면서 ‘한국교회 외국인 노동자 선교협의회’를 만들었다. 늘어나는 외국인 노동자를 위해 무엇을 할까 고민하다 선교회를 세우게 됐다는 설명이다.“고국을 떠나 외롭게 사는 외국인 근로자들을 보살펴 주는 곳이 드물다”면서 “외국인 근로자들도 우리의 이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하루 10만원에 이르는 식비를 조달하기가 버겁다.포도막염을 얻어 오른쪽 눈을 실명하는 시련을 겪었지만 兪목사의 의지를 꺾지는 못했다. 兪목사는 “많이 있을 때 아끼고 적게 있을 때 조금 먹는 게 살아가는 지혜”라면서 “서로 나눠 먹는다는 것 자체가 행복”이라고 말했다. 인근 주민들의 곱지 않은 시선도 부담이다.누추한 차림의 외국인들을 좋게 보지 않기 때문이다. 96년에 한국에 온 몽골인 잉크타반씨(38)는 “兪목사님이 없었다면 굶어죽었을 것”이라면서 “고국이 그리워질 때 항상 목사님께 찾아온다”고 말했다.兪목사는 충남 당진의 폐교가 된 한 초등학교를 인수해 내년초에 ‘생명마을 공동체’를 만들 생각이다.무의탁 노인,장애인,탈북자를 모아 함께 생활하겠다는 것이다.
  • 북한 인권의 허상/張淸洙 논설위원(外言內言)

    북한은 흔히 인권감시의 사각지대로 비유된다. 이런 상황에서 지난 10일 올해 세계인권선언 50돌을 맞아 인류의 진정한 권리보장이 국제적으로 요구되면서 북한인권에 대한 비판도 거론되고 있다. 지난 4월 국제사면위원회가 북한 인권유린 실태를 강도 높게 비판하는 보고서를 발표했고 50차 유엔인권소위원회도 북한 인권개선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미 국무부가 12월15일 발표한 연례보고서도 북한을 전세계에서 인권상황이 가장 나쁜 국가중에 하나라고 지적했다. 특히 북한인들의 자유정도는 이라크,쿠바,수단과 함께 세계최악이며 191개 조사대상국 가운데 기본적 정치적권리,시민자유,자유언론이 존재하지 않고 시민생활이 억압되는 가장 탄압적인 국가로 꼽았다. 그동안 북한의 인권문제는 정권의 폐쇄성 때문에 국제적 관심밖에서 맴돌았고 정확한 실상이 은폐됐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최근들어 식량위기가 심화됨에 따라 북한에 대한 국제사회의 관심이 높아졌고 탈북자들에 의한 북한의 절망적인 인권상황이 고발돼 열악한 북한 인권실태가 공식적으로 밝혀지게 됐다. 북한의 인권실태는 金日成사후 더욱 악화된 가운데 초법적인 살인과 인간 실종이 빈발하고 있으며 고문과 강제수용등 최악의 상태가 계속되고 있다. 북한에는 현재 10여개 정치범 수용소에 약 20만명이 정치적 이유로 갇혀 있으며 사법절차를 거치지 않은 처형과 실종이 잇따르고 있는 것이다. 북한은 유엔회원국이자 국제인권규약 비준국이면서도 87년이래 10년이 넘도록 인권보고서 제출자체를 거부하는 등 국제적 의무를 저버리다가 97년 8월 국제인권규약에서 탈퇴까지했다. 바로 이같은 북한의 열악한 인권수준으로 말미암아 최근들어 북한내부에서 金正日 체제를 비판하거나 반대하는 움직임이 드러나고 있으며 반체제 성향을 고조시키는 요인이 되고 있다. 따라서 현시점에서 중요한 과제는 북한이 사회주의 민주화를 통한 인권문제를 개선,주민들의 자유를 신장시키고 삶의 질을 높이는 것이다. 주민들이 자기가 노력한 만큼 인간적 대우를 받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해 주는 사회주의 민주화가 북녘땅에서 하루속히 실현돼야 함을 강조한다.
  • ‘연해주 대규모 농장 추진’ 관계부처 우려

    ◎새마을협 “3,800만평 빌려 탈북자 고용 농사 짓겠다”/외교부 “한인 구심체… 남북관계 등 외교문제 소지” 연해주에서 새마을운동을? 새마을운동중앙협의회가 현실성이 결여된 대규모 러시아 연해주 영농진출사업을 추진하고 있어 농림부,통일부,외교통상부 등 관련부처 관계자들이 일제히 우려를 표명하고 나섰다. 새마을측은 10일 러시아 연해주에서 3,800만평에 이르는 집단농장을 50년간 임차해 쌀,옥수수,콩 등을 재배해 앞으로 닥칠 식량위기에 대비한다는 의욕에 찬 새해 사업계획을 발표했다. 새마을은 실무협의를 위해 방한한 연해주 호롤군 군수일행과 11일 구체적인 사업계약서를 체결할 예정이다. 새마을은 사업목적으로 ●해외 식량전진기지 확보 ●새마을 운동의 국제화 ●재러 교민사회 및 연해주에 있는 탈북자들의 정신적인 구심체 역할 등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재러 동포문제를 다루는 외교부는 새마을이 재러 교민사회의 구심체 역할을 떠맡겠다는 발상에 대해 “외교적인 문제를 일으킬 소지가 있다”며 우려를 피력했다.러시아당국이소수민족들의 민족의식이 높아지는 데 대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외교부의 한 관계자는 “국가의 지원을 받는 새마을이 진출해 한인들의 구심체 역할을 하겠다는 발상은 외교적으로 위험하다”고 말했다. 통일부의 한 관계자는 “탈북자들을 고용해 영농을 하겠다는 등의 발상은 남북관계의 기본을 무시한 생각”이라고 우려했다. 해외식량 전진기지 확보에 대해서도 농림부는 “식량자급이 이루어진 마당에 해외식량기지 확보에 나서겠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고 전제하고 “새마을이 식량수급과 관련 농림부에 사전협의를 의뢰해온 바가 없다”고 밝혔다.새마을은 생산물의 판로와 관련 “국제입찰을 통해 국내에 들여오거나 북한식량지원,혹은 러시아국내서 소비할 계획”이라고 말해 수요공급에 대한 과학적인 분석에 근거해 사업이 추진되는지 이의가 제기되고 있다. 새마을은 이 사업을 위해 지난 10월 말부터 한달간 전국새마을지도자들을 대상으로 6억여원의 자금을 모금했으나 영농기계 구입,도로,전기 등 기간시설건설에 소요될자금조달계획은 마련하지 못한 상태다.
  • 평통 주최 통일문제 세미나 주제 발표 요지

    ◎대북포용정책 지속 필요하다/“한반도 긴장 고조되면 경제 해결 불가능/北 온건파와 협조하고 美와 안보공조하면 북한도 궁극적으로 변할수밖에 없을것”/金一平 포항공대 초빙교수·前 美 코네티컷大 교수 북한의 금창리 지하 핵의혹 시설로 미국 조야에서 대북한 정책을 둘러 싼 강온파간 논쟁이 재연되고 있다.그럼에도 불구하고,한국은 대북 포용정책을 일관성있게 유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주장이 제기됐다.타워호텔에서 열린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주최 국내외 학자·전문가 통일문제 세미나에서 동북아문제 전문가인 金一平 포항공대 초빙교수(전 미국 코네티컷대 교수)는 “한국이 미국의 안보정책과 공조하면서 대북 포용정책을 지속하면 북한도 변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金교수의 주제발표 요지는 다음과 같다. 미국의 강경론자들은 지금이라도 제네바 북·미 합의를 파기하고,북한의 핵의혹시설을 폭파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나아가 북한의 핵의혹 개발시설을 폭파하지 않으면 안된다고까지 보고 있다.이같은 강경파의 발언권이 점점높아지고 있어 클린턴 행정부도 북한에 대한 정책을 재검토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미국내 온건론자들은 북한이 제네바합의서를 준수하고 결국 핵개발을 중단할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다.다만 북한이 금창리의 핵개발 의혹시설을 공개하지 않을 경우 대북 제재가 불가피하다고 보고 있다. 미국이 중국을 승인하고 외교관계를 수립하기까지도 강경론자와 온건론자의 논쟁은 계속됐다.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온건론자가 승리했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국제통화기금(IMF)시대에 한반도에 또다시 긴장이 고조되면 외국인의 대한(對韓) 투자는 어려워질 것이며,한국정부는 경제문제 해결과 북한과의 강경 대치라는 양면작전을 전개하지 않으면 안되는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남북의 강경론자들은 대남 전략과 대북 전략을 세우는데 비슷한 점이 있다.탈냉전시대의 국제문제를 냉전시대의 사고방식으로 해결하려 한다는 점이다.따라서 한국의 대북 포용정책은 남한의 보수강경파 뿐만 아니라 북한 강경세력의 저항도 받고 있다. 북한강경파는 강성대국이라는 목표를 세우고 금창리에 지하핵시설을 건설, 미사일을 개발해 제네바 합의를 파기해도 무방하다고 여기고 있다.남한의 대북 포용정책을 거부하는 셈이다. 그러나 ‘국민의 정부’는 (남한내)강경론자들의 비판을 교훈으로 삼되 포용정책을 일관성있게 유지해 나가며 안보문제는 미국의 대북 정책과 공조를 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요컨대 한국의 안보는 미국의 강경노선에 맡기되 대북 포용정책을 일관성있게 지속하면 북한도 궁극적으로 변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한반도에서 긴장이 고조되고 전쟁가능성이 높아지면 한국이 당면한 경제문제의 해결은 불가능하게 된다.북한의 강경론자들은 한국의 경제위기를 경제 파탄으로 이끄는 교묘한 전술을 작동할 수도 있는 것이다. 북한의 개혁과 개방을 유도하기 위해 북한의 온건파와 협조하고,미국의 대북 정책과 공조해야만 한국이 대북 포용정책을 지속성있게 이끌어나갈 수 있다.그러나 북한이 남한의 대북 포용정책을 수용하지 못하고 강경노선으로 치닫는다면 한국은 북한의 강경정권을 제거하기 위해 중국 러시아 일본 등지에 산재한 탈북자를 조직해 북한의 대체정권을 준비하는 전략도 세워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그럴 경우 북한의 붕괴를 촉진시킬 수 있기 때문에 북한도 정권유지와 안보를 위해 개혁과 개방은 불가피하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될 것이다.
  • IMF경제현안 심층진단·대안제시(서울신문 이렇게바뀌었습니다:中)

    ◎실직·노숙자 등 소외층 목소리 대변/탈북자 애환 시리즈 등 각종 특집기사 큰반향/환경·교육문제 진단/미담·화제기사 발굴도 신문의 사회면은 어떻게 만들어야 바람직스러운가. 몇몇 언론학자들에게 물었다. 상당부분 엇갈리는 견해가 많았다. 사회면의 정체성을 학문적으로 규정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인 듯했다. 사회현상에 대한 진단과 우선순위 설정도 제각각이었다. 한 학자는 이렇게 주문했다. “사회면은 시의성 있는 사건·사고가 중심이 돼야 한다. 하지만 긴장감이 떨어지는 밋밋한 기사가 자주 실린다” 또다른 학자의 의견은 정반대였다. “사건기사가 너무 많다.일반 생활과 상관없는 일이 주요기사로 다루어진다” 학자들의 견해만 다른 것은 아니다. 신문을 만드는 기자들도 마찬가지다. 본인은 톱기사감이라고 흥분하지만 한발짝 거리를 두고 살펴보면 함량미달일 때가 간혹 있다. 기사를 다룬다는 일 자체가 일률적일 수는 없기 때문일 것이다. 신문을 만드는 처지에선 일상의 다양한 현상을 함축적으로 담도록 노력할 수밖에 없다. 사회면을 보면 우리 주변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알아야 한다. 다수의 이해가 걸린 문제는 물론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도 반영해야 한다. 구조적 비리나 부정부패를 감시하기 위해 눈을 부릅떠야 한다. 판단의 기준은 상식과 도덕률 등이다. 그렇다면 서울신문 등 우리의 신문은 이같은 원칙에 충실했는가. 자신있게 ‘그렇다’고 대답하기는 어렵다. 사회에 미치는 영향은 제쳐두고 시류를 따라가는데 급급한 경향이 짙었다. 기이한 현상이나 사건·사고에만 매달리려 한 것도 사실이다. 형평성 측면에서도 문제가 많았다. 이러저러한 지적을 전제로 서울신문 사회면은 그동안 구태의연한 패러다임에서 벗어나도록 하기 위해 나름대로 애를 썼다. 무엇보다 소외계층의 편에서 우리사회의 건강상태를 진단하는데 많은 지면을 할애했다. 실직자나 노숙자 문제의 해결방법을 모색하기 위한 특집이나 심층취재 기사를 여러차례 내보냈다. 탈북자들이 겪는 애환을 시리즈로 소개하기도 했다. 오랜 세월 숨죽이며 살아온 체제의 희생자들의 목소리도 여과없이 게재했다. 우리의미래와 직결된 환경문제도 밀도있게 해부했다. 교육현장의 난맥상도 단순한 사실전달에 그치지 않고 원인과 대책까지 짚어내도록 노력했다. 편안한 마음으로 읽을 만한 화제나 미담기사 발굴에도 힘을 쏟았다. 앞으로는 우리사회가 경험한 잘못을 교훈삼아 구체적인 실천전략이 마련되도록 하는데 역점을 둘 생각이다. 우리사회의 건강지수를 한 단계 높이는 싱싱한 지면을 제공할 것을 거듭 다짐한다. ◎수출·실업 등 대형기획물 실천적 개선안 모색 주력/국가정책에 큰영향 끼쳐/중립적 재벌기사도 강점 ‘대한매일을 읽으면 정부정책이 보인다’­. 대한매일로 재탄생하는 서울신문은 국민의 정부가 출범한 뒤 줄곧 국가 경제정책의 심층보도에 주력해왔다. 지난해 12월 국제통화기금(IMF)체제가 시작된 이래 우리나라의 국운을 경제가 좌우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울신문은 그동안 우리 경제의 최대현안인 수출부진을 타개하기 위한 ‘수출 이렇게 풀자’라는 주제의 특집기사를 연재한 것을 비롯해 ‘실업대란 이렇게 풀자’ ‘주택경기 이렇게 살리자’ ‘자금난 어떻게 해소할까’ ‘외국인투자 이렇게 활성화하자’ ‘내수진작 이렇게 하자’ 등 주요 경제현안을 심층진단하는 대형 기획물들을 잇따라 보도했다. 또 최근에는 ‘긴급 경제현안 점검’이라는 주제로 ▲은행문을 열어라 ▲신3저 이렇게 활용하자 ▲장관들을 뛰게 하라는 내용의 시급한 경제문제들을 차례로 짚었다. 이 가운데 수출특집을 비롯한 여러 기획물들이 청와대와 경제부처들의 정책형성 과정에 큰 영향을 미쳤고,언론계에서는 서울신문의 잇따른 대형 정책기사 특집을 언론사에 새 지평을 열 새로운 기획물로 평가하고 있다. 우리 언론은 전통적으로 질책과 비난에는 익숙하지만 대안을 제시하는 일은 남의 몫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서울신문 경제면은 대안있는 비판과 건설적인 질정을 새로운 제작목표로 삼았다. 단지 문제점 지적에 그치지 않고 다양한 실태르포를 통해 진정한 현장의 목소리를 전했다. 또 전문가들의 지상토론과 인터뷰,기고들을 통해 핵심을 찌르는 지적과 함께 실천적인 개선대안을 제시,올바른 국가 경제정책 형성에 큰 기여를 해왔다고 자부한다. IMF시대를 맞아 경제정의의 실천이 어느 때보다도 강조되는 지금,서울신문이 지닌 최대의 강점 가운데 하나는 재벌기사에 관한 한 누구보다도 ‘가치중립적(value­neutral)’이라는 것이다. 서울신문은 소유형태상 재벌과의 이해관계가 전혀 없다. 따라서 재벌관련 기사를 어느 매체보다도 자유롭고 공정하게 쓰고 비판할 수 있다. 우리 경제를 현재처럼 멍들게 한 상당한 책임이 재벌에 있다는 사실이 증명된 마당에 그들에 대한 건전한 비판과 독려는 서울신문만이 제대로 할 수 있는 독특한 영역인 것이다. 대한매일로 거듭나는 서울신문은 IMF시대를 조기에 극복하고 21세기의 희망찬 조국을 건설하는 책임이 우리의 두 어깨에 달려 있다는 새로운 역사인식과 투철한 사명감으로 앞으로도 ‘대안있는 비판’의 지면제작과 경제파수꾼으로서의 역할을 게을리하지 않을 것이다.
  • 탈북자 대책/張淸洙 논설위원(外言內言)

    북한주민 3명이 또다시 한국에 귀순해왔다.13일 북한군 중좌출신 심신복씨가 북한을 탈출해 제3국을 경유,망명한 뒤를 이어 14일에는 북한군 남자 장교 1명과 여자 하사관 1명이 휴전선 비무장지대를 넘어 함께 귀순했다. 49년 이후 탈북자는 이번 3명을 포함,모두 926명이며 90년 이후 현재까지 319명으로 크게 늘어나는 추세다.지금까지 탈북자의 90% 이상은 ‘자유와 빵’을 찾아 따뜻한 남쪽나라를 찾은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최근 몇년동안에는 지난 50년동안 북한 정치사에서 권력의 핵심역할을 담당했던 고위 엘리트계층까지 잇따라 한국으로 귀순하고 있어 북한정권의 위기를 실감할 수 있다. 주체사상의 철옹성 속에서 일사불란하게만 여겨졌던 북한체제에서 사상적 일탈현상과 민심이반의 심각성을 입증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북한 군대가 총만 쏘지 않는다면 6개월 이내에 북한주민의 4분의 1이 탈출할 수 밖에 없다는 보고서 내용은 북한체제의 앞날이 결코 순탄치만은 못하다는 점에서 북한에 주는 타격은 그만큼 클 수 밖에 없다.북한 주민들의극심한 생활고와 열악한 인권문제가 개선되지 않는 한 앞으로 주민들의 탈북현상은 더욱 늘어날 수밖에 없다는 판단이다. 이에 따라 탈북자 문제는 정부의 중요한 정책과제로 대두되었다.더욱이 현재 탈북자 가운데 234명이 직업이 없이 어렵게 생활하는 것으로 밝혀져 이들에 대한 생활안정 대책이 시급하다. 탈북자의 절반 이상이 한국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으며 심한 갈등 속에서 범법자로 전락하는 경우까지 속출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들에 대한 보호대책은 시급히 마련돼야 한다. 분단상황에서 목숨을 걸고 찾아온 탈북자들이 자유 대한민국에서 인간적 행복권을 향유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그런 맥락에서 정부가 탈북자들에 대한 정착금 지원을 2배로 상향조정하는 것을 비롯한 ‘북한이탈주민보호법’시행령을 연내 개정키로 한 것은 시의 적절한 대책으로 평가된다.탈북자 대책은 정착금 지원이라는 일회성 지원방법보다는 이들이 한국에서 자립할 수 있는 직업훈련이나 사회적응훈련 같은 항구적인 생활안정 대책을 마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리고 탈북자를 위한 정부의 효율적 대책과 함께 국민적 관심,특히 그들이 한국인으로 살수 있도록 따뜻한 사랑과 보살핌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 통일외교통상위(국감 뭘 파헤치나:2)

    ◎‘대북 포용정책’ 최대 쟁점/여 유용성·속도조절 부각,야는 미사일대응 등 추궁/금강산관광·국군포로·어협·일 문화개방도 이슈화 통일외교통상위원회 여야 의원들은 ‘대북 포용정책’등 종합적인 대북정책의 문제점,금강산 관광사업,국군포로 및 납북억류자 귀환대책,대북 경수로 지원 재원부담,통상조직의 효율성,한·일어업협정 문제에 큰 관심을 갖는다. 이 가운데 ‘포용정책’이 단연 도마에 오를 전망이다.李健介 朴哲彦 의원 등 자민련 의원들은 ‘포용정책’의 유용성과 남북교류의 속도조절 문제를 집중 부각시킨다는 방침이다.한나라당 의원들은 북한이 쏘아올린 물체를 미사일이라고 했다가 인공위성이라고 얼버무린 점 등 정부의 ‘허술한’ 대북정책을 따질 태세다.현대의 금강산 관광사업 등 남북민간교류 확대문제도 ‘포용정책’ 추궁의 연장선에서 이슈화될 전망이다.물론 국민회의 의원들은 ‘포용정책’의 방어에 적극 나설 태세다. 통일외교위는 국군포로 및 납북억류자 귀환대책도 철저히 따져나갈 참이다.6·25전쟁때 미송환된 국군포로가 1만9,000여명에 이르고 있는 것을 감안,인도적 차원에서 이들 문제의 해결이 시급하다는 생각이다. 새로 타결된 한·일어업협정상의 문제점,일본문화 단계적 개방원칙도 지적될 예정이다.국민회의측은 21세기를 앞두고 ‘金大中 대통령의 미래지향적인 결단’이었음을 강조하는 반면 한나라당은 어민의 피해예측을 집중 파헤친다는 구상이다. 경수로지원사업은 중유지원 등 이미 약속한 ‘대북지원’을 한국에 떠넘기려는 미국과 일본의 움직임,비싼 이자를 들여서라도 사업을 성사시키려는 당국의 정책이 옳은지에 포커스가 맞춰질 전망이다. 이밖에 국민회의 李榮一 의원은 탈북자에 대한 관심,외교부 산하 통상기관의 효율성,매너리즘에 빠진 전체 외교부 직원들에 대한 ‘사고패러다임의 전환’을 요구할 방침이다.한나라당 李信範 의원은 역사에 파묻혀가는 일제징용자 현황을 추적중이며,국민회의 金翔宇 의원은 남북협력기금 사용의 부당성에 남다른 관심을 보이고 있다.여야 의원들은 또 IMF시대 재외공관의 한국기업수출지원상황,투자유치 실적에대해서도 책임을 묻도록 하겠다는 결의다. ◎柳興洙 위원장 辯/“黨利 떠나 국익 중심으로 논의” 柳興洙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원장(한나라당)은 15일 국감운영 방안을 명쾌하게 정리했다. “당리당략을 떠나 국익을 중심으로 논의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상임위현안이 어느 하나 국익과 관련되지 않은 것이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그는 “야당 위원장이 아니냐”고 지적하자 “야당이지만 정부정책을 무조건 비판하지도,무조건 두둔하지도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실사구시(實事求是)를 추구하는 인상이다. 이번 국감에는 대북 포용정책,금강산 관광사업,대북 경수로지원사업,한·일어업협정,대미 통상문제 등이 주요 쟁점이 될 것이라고 그는 전망했다.통일부와 외교부를 상대로 한 ‘포용정책’을 가장 치열한 공방대상으로 꼽았다.柳위원장은 위원장으로서 직접 질의기회를 갖지 못하면서도 ‘일본의 세계정책’에 대한 정책질의를 별도로 할 참이다.일본이 ‘아·태정책’을 ‘유라시아정책’으로 전환하고 있다는 경고 메시지를 보내기 위해서다. 여야간 행여 있을지 모를 마찰에 대해서도 그는 “경륜이 높은 중진,원로의원들이 많이 계셔 별다른 문제가 없다”면서 “여야간 첨예하게 대립되는 상황에도 심도있는 토론을 통해 정부정책을 올바르게 바로잡을 수 있게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
  • 국내 脫北주민 923명/통일부 국감 자료

    북한을 탈출,국내에 입국한 탈북주민은 지난달 15일 현재 모두 923명이며 이중 상당수가 직업이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통일부가 11일 국회에 제출한 ‘북한 이탈주민 생활실태’라는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국내 입국 탈북자의 직업은 무직이 234명으로 가장 많고 군인,공무원,연구원,회사원 등이 200명,자영업(농업·작가 등 포함) 98명,학생 59명,직업훈련자 25명 등이다.
  • “北 미사일 개발 日 기술자 참여”/日紙,탈북자 증언 보도

    【도쿄=黃性淇 특파원】 북한의 미사일개발에 일본 기술자가 관여했다고 일본 산케이(産經)신문이 탈북자 金秀幸씨(41·전 고려전자기술 부사장)의 증언을 인용,20일 서울발로 보도했다. 金씨에 따르면 북한에서 미사일 개발을 담당하고 있는 노동당 기계공업부 소속 비밀기관인 ‘99호 중앙지도소조’의 지시로 90년에만 5명의 일본인 기술자가 북경을 거쳐 비밀리에 평양에 입국했다는 것이다. 전자 특수소재,컴퓨터 통신분야 전문가인 이들 기술자는 기업을 퇴직한 뒤 개인회사를 운영하고 있는 일본인으로 기술수준에 따라 하루 수백∼1000달러씩의 보수를 받았다고 金씨는 전했다. 金씨는 당시 이들 일본 기술자들에게 위조여권을 건네준 역할을 했는데 이들 기술자에게는 전문분야 기술의 지도나 제공이라고 말해 미사일개발과 관련된 것임을 알지 못하도록 했다고 주장했다.
  • 북한의 고위직 출신/미공개 귀순자 90명

    북한을 탈출해 남한에 귀순한 뒤 신원이 공개되지 않은 북한 고위직 출신 미공개 귀순자가 모두 90여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국회 법제예산실은 18일 발간한 ‘98년도 국정감사 자료집’에서 이같이 밝히고 이들은 귀순뒤 몇십년이 지나도록 신원이 공개되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자료집은 또 현재 귀순 가능성을 타진하며 중국,러시아 등을 전전하고 있는 탈북자의 규모가 2,000∼3,000명 정도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 범죄자 된 노숙 탈북자의 눈물/趙炫奭 기자·사회팀(현장)

    “그동안의 남한 생활은 기억조차 하기 싫습니다” 13일 상오 서울 남대문경찰서 형사계. 지난 96년 북한을 탈출한 탈북자 金正勇씨(28·경기 고양시 일산구 장항동)가 초췌한 모습으로 조사를 받고 있었다. 서울역 앞에서 노숙 생활을 하던 金씨는 崔모씨(20·공무원)를 흉기로 찌른 혐의로 경찰에 붙잡혔다. 이날 새벽 육교에서 잠을 자다가 “날씨가 추우니 지하도에 가서 자라”고 권유하던 崔씨를 깡패로 오인해 순간적으로 저지른 범죄였다. 감시와 눈총속에서 살아왔지만 죄를 지으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고개를 떨군 채 조사를 받는 金씨는 노숙자에서 범죄자로 전락한 것이 믿기지 않는 듯했다. 겨우 얻은 자유를 스스로의 잘못으로 놓친 데 대한 자책에 괴로워하고 있었다. “목숨을 걸고 북한을 탈출하면서 이렇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그는 힘들었던 지난 2년간의 남한 생활에 대해 말문을 열었다. 金씨는 북한의 요양소 노동자였다. 자유가 그리워 탈출하기로 마음먹고 두차례의 탈출 시도 끝에 96년 1월 가까스로 자유의 땅을 밟았다. 1,700만원의 정착금과 철도청 정비직을 얻을 때만 해도 장밋빛 꿈으로 가득했다. 하지만 직장 동료들의 따돌림과 곱지않은 시선이 그를 괴롭혔다. 고민을 털어놓을 친구도 없었고 외로움만 밀려왔다. 결국 무작정 직장을 뛰쳐나와 막노동판을 전전하기에 이르렀다. 신용카드빚은 늘어갔고 정착금조차도 술과 경마에 탕진했다. 마지막으로 탈북자 金모씨가 운영하는 식당에서 일하기도 했지만 오래 견디지 못했다. 지난달 그는 노숙자라는 최후의 선택을 하고 말았다. 이날 구속영장이 신청된 金씨는 “잘 살고 있는 탈북자들도 많은데 내가 못난 탓”이라며 회한의 눈물을 흘렸다.
  • 정부 대책/일시적 지원보다 자립능력 육성(탈북 그 이후:7·끝)

    ◎자본주의 이해부족 정착금 탕진 잦아/생활양식 적응못해 말한마디에 상처/다양한 적응훈련 프로그램개발 절실 “탈북자들은 우리와 이념과 체제가 다른 곳에서 생활했고 특히 다양한 계층 출신이어서 보호와 관리,정착 지원에 애로가 많습니다” 탈북자 보호·관리를 맡고 있는 한 당국자의 말이다. 귀순한 탈북자들은 일정 기간 통일부 안기부 군 경찰 등의 합동심문 과정을 거친 뒤 통일부에 넘겨져 적응교육을 받고 우리사회의 일원으로 편입된다. 겉으로 보기에는 일반 시민과 똑같이 생활하게 된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제약은 있다. 주변의 호기심 어린 시선과 한동안 이들의 안전을 돌봐야 하는 당국의 감시(?)가 바로 그것이다. 95년 귀순한 金모씨는 “강릉 무장간첩 사건 때 한 직장동료가 ‘친구가 왔는데 만나러 가지 않느냐’고 하더군요. 그 친구는 농담 삼아 말했지만 엄청난 좌절감을 느꼈다”고 말했다. 감시를 당한다는 불만을 터뜨리기도 한다. 적절한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불만도 있다. 또다른 귀순자 金모씨는 “북한에서 잘 살던사람이 남한에서도 대우를 잘 받고 있다”면서 “북한의 고위층은 다 북한 주민들을 착취한 사람들인데 그들에 대한 남한 정부의 대우가 훨씬 좋다”고 지적했다. 이같은 탈북자들의 불만은 뒤집어 보면 바로 이들의 보호 및 정착 지원을 맡은 당국의 고민이다. 탈북자들을 일정기간 보호·관리하는 ‘보호경찰관’ 임무를 맡고 있는 朴모경사는 “자본주의에 대한 이해부족과 사고방식의 차이로 무리한 요구를 하는 탈북자들을 이해시키는 일이 가장 어렵다”고 털어놨다. 그는 또 ‘이한영씨 피살 사건과 동해 잠수정 사건 등이 터지면 탈북자들에 대한 테러위협 때문에 특별보호 지시가 떨어진다”면서 “몇 달씩 집에 들어가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고 말했다. 통일부의 한 관계자는 “일부 탈북자들은 2∼3차례씩 정부에서 직업을 알선해줘도 쉽게 그만둬 애를 먹고 있다”면서 “가끔 능력에 맞지 않는 대우를 요구해 곤란할 때도 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탈북자 대부분이 3D업종을 기피해 직업 알선이 특히 어렵다”면서 “최근에는 북한음식점이 잘된다고 하자 너도 나도 식당을 열려고 해 애로사항이 많다”고 말했다. 당국의 고민은 동전의 앞 뒷면과 같다. 정착지원금과 후원금 이외의 경제적인 도움을 주지 못하는 당국. 사생활을 보호받고 싶어하는 탈북자들과 무엇보다 이들의 안전을 걱정해야 하는 당국. 직장 알선 등 탈북자들이 원하는 직업을 제 때에 알선해주지 못하는 애로사항 등. 현재 당국의 대책은 이들에 대한 일시적 지원보다는 다양한 적응 프로그램 개발 및 종합지원센터 설치 등 자립 자활 능력을 키우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들에 대한 사회의 따뜻한 관심이라고 정부 관계자들은 강조한다.
  • 겉도는 사람들/주위 무관심에 사회적응 어려워(탈북 그 이후:6)

    ◎천신만고끝 밟은 자유의 땅 생각보다 냉랭/막노동 전전하다 한때 밀입북 기도까지 金亨德. 25세. 연세대 경영학부 2년 휴학중. 학년에 비해 나이가 좀 많다싶은 것 빼고는 특이할 것 없는 대한민국 보통 젊은이의 신상명세다. 그러나 이 짤막한 문구 뒤에 감춰진 金씨의 이력(履歷)은 평범한 젊은이들로서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드라마틱하다. ‘남한사회에 적응하지 못해 재입북하려다 적발된 비운의 탈북자’. 한동안 金씨의 이름앞에는 이같은 수식어가 붙어다녔다. 지금도 드러내놓고 아는 체하지는 않지만 이 때문에 金씨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다. “그때(밀입북 시도 당시)는 그럴 수 밖에 없었어요. 임대주택과 직장 등 물질적으로는 훨씬 나아졌지만 남한역시 이상적인 민주사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면서 회의가 오더군요. 애써 외면했던 가족들에 대한 그리움도 그만큼 더 커졌구요” 金씨는 자신의 밀입북 기도로 탈북자들에 대한 사회 인식이 나빠진데 대해 후회하면서도 당시 언론이 일방적으로 자신을 ‘남북한 어디에도 적응하지 못한 떠돌이’로 몰아붙인 것에 대해서는 섭섭함을 나타냈다. 金씨가 밀입북 혐의로 체포된 것은 96년 2월. 인천에 정박중이던 중국 배에 몰래 숨어들어 밀항을 시도하다 적발됐다. 중국 베트남을 거쳐 목숨을 걸고 귀순한지 17개월만이었다. 당시 재판부는 金씨가 우리 사회에 적응하지 못했다는 점을 참작해 이례적으로 징역 8월에 집행유예 2년이라는 가벼운 형량을 내렸다. “그일 이후 생각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원래 성격이 낙관적인 편이지만 세상을 좀더 밝은 쪽으로 보기로 작심했지요. 지금은 남한사람보다 더 남한사람 답다고 자부합니다” 74년 북한에서도 살기어렵다는 자강도 희천시에서 출생한 金씨는 평남 속도전 청년돌격대에서 물건을 훔치다 적발돼 노동교양소로 압송됐다. 혹독한 구타와 짐승같은 대우에 시달리다 93년 10월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탈출한 金씨는 북경의 한국대사관에 망명을 신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이듬해 베트남으로 향했다. 이곳에서도 귀순이 거절된 金씨는 다시 중국으로 돌아와 홍콩을 거쳐 마침내 한국땅에 발을 디뎠다. 이 과정에서 두번이나 중국 베트남 보안당국에 붙잡혔다가 탈출했다. 그야말로 천신만고끝에 자유의 땅에 닿은 것이다. “탈출하면서 여러번 죽을 고비를 넘긴 탓에 남들보다 빨리 남한사회에 적응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나름대로 노력도 많이 했구요. 그런데 정작 주위에서는 아무도 안 알아주는 거예요. 정말 미치겠더군요” 경제적인 어려움도 그를 실망시켰다. 정착금 1,400만원으로 경기도 부천에 방 하나를 얻어 남한 생활을 시작했으나 제대로 된 직장을 가질 수가 없었다. 신문배달,막노동,주유소 기름배달원 등을 전전해야 했다. “삶에서 진짜 중요한 것은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기는 것이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어떤 환경이든 자기 삶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지금은 이 목표를 위해 최선을 다할 생각입니다”. 다음 학기에는 복학도 하고 아르바이트도 열심히 할 계획이라는 金씨의 얼굴에서는 2년반전에 볼 수 없었던 자신감이 흘러넘쳤다.
  • 귀순자들의 대화/北의 가족 그리움에 애간장(탈북 그 이후:5)

    ◎“세월이 약이겠지” 무덤덤하게 시름 달래/각종 모임서 ‘두고온 가족’ 얘기가 큰 위안 “이제 와서 얘기하면 뭐 합네까,가슴속에 묻어둔 아픈 사연들이 되살아날까 두려울 뿐이야요” 탈북자들은 북에 두고 온 가족과 친지들에 대한 그리움이 무엇보다 견디기 어려운 점이라고 털어놓는다. 그러면서도 대개는 ‘세월이 약이겠지’라며 애써 무덤덤하게 받아들인다. 탈북 7년째인 金모씨(32·여)는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혈육의 정에 애간장을 태울 때가 한두번이 아니지만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게 솔직한 심정”이라며 말끝을 흐렸다. 고향 얘기로 상처받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金씨는 “대다수의 탈북자들은 하루빨리 이곳 생활에 익숙해지는 게 죄책감과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다잡았던 마음도 명절이나 부모의 생일 때가 되면 여지없이 허물어지고 만다. 향수병이 도지는 탓이다. 이내 눈시울이 촉촉히 젖는다. 감정에 복받쳐 종일 울 때도 있다고 한다. 지난 95년에 탈북한 崔모씨(46·사업)는 “부모님의 생일이 되면 통일전망대로 가 ‘불효자의 한’을 달랜다”면서 “북녘하늘을 쳐다볼 때마다 남겨 두고 온 가족들의 얼굴이 아른거려 일손이 잡히지 않는다”고 안타까워했다. “올 연말 착한 색시를 만나 결혼할 예정”이라는 柳모씨(31·평양외국어대학 출신)은 “누구에게도 기쁜 소식을 전해 줄 수 없는 현실이 그저 야속할 뿐”이라면서 “지난 번 꿈속에서 부모님께 결혼 날짜를 알려드렸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그나마 이들에겐 ‘탈북자들의 모임’이 큰 위안이다. 숭의동지회,통일연구회 등을 통해 ‘우리들만의 대화’시간을 갖는다. 지난 연말에는 자유총연맹 주최로 ‘귀순자 망년회’를 처음 갖기도 했다.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끼리 자체적으로 만든 ‘미니모임’이 더 활발하다. 탈북자 불교모임을 주도해 온 金명철씨(36·전 남순지장회 회장)는 “정신적·문화적 갈등으로 빚어지는 어려움을 서로 이해하고 북돋워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그러나 IMF한파 등으로 먹고 살기에 바빠 최근에는 잘 만나지 못한다고 했다. 구소련동구유학생모임의 회장인 金지일씨(35·우크라이나 하리코프 종합대학 출신·컴퓨터소프트웨어개발회사 대표)는 “탈북 8년째에 접어들었지만 정신적 고통은 아직도 가시지 않고 있다”면서 “탈북 유학생들끼리 유대관계를 갖고 물심양면으로 도와주는 게 큰 보탬이 된다”고 말했다. 사회 적응과 이산의 아픔이라는 이중적인 고통을 받고 있는 탈북자들. “같은 말을 하고 같은 일을 하고 있는데 무슨 큰 문제가 되겠느냐”고 반문하면서도 얼굴 한켠에는 감춰지지 않는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그러나 대다수는 ‘되새기고 싶지 않은 고향의 사연’을 뒤로 한채 남북이 통일돼 부모 형제를 만날 수 있는 그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새 삶을 가꿔나가고 있다.
  • 귀순자 자립 지원/의무고용제로 직장 보장을(탈북 그 이후:4)

    ◎자격증 등 인정 못받아 단순 직종으로/절반이상이 월수입 100만원 못미쳐/적응교육 강화… 안정된 삶 부축 시급 지난 95년 북한을 탈출한 朴모씨(36)는 하루하루가 힘겹다. 목숨을 걸고 자유를 찾았지만 낯선 남한 생활에 후두암까지 겹쳐 또다른 죽음의 고비를 맞고 있다. 朴씨는 “한달에 40만∼50만원에 달하는 항암치료비는 고사하고 30만원이 넘는 아파트 임대료와 관리비조차 마련할 길이 막막하다”면서 “처음 귀순할 때의 환영 분위기와 달리 시간이 지나면서 냉담해지는 주변의 시선에 야속한 마음이 들 때가 많다”고 남한 생활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러시아 벌목장을 탈출해 94년 귀순한 韓모씨(38)도 버거웠던 지난 4년간의 남한 생활을 털어놨다. 韓씨는 “한의사 자격증을 가지고 있어 개인 한방병원에 취직했지만 ‘북한자격증을 어디에 쓰느냐’고 면박을 주며 잔심부름만 시켜 그만 두었다”면서 “죄인이나 무능력자 취급받는게 가장 견디기 힘들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韓씨는 “한의학 서적을 출간해주겠다고 찾아 온 남자에게 산삼 두 뿌리를 사기당한 적도 있고 한 독지가가 귀순자들에게 전달하라고 준 돈을 중간에서 가로 챈 사람도 보았다”면서 “남한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에 맞지 않으면 상대하지도 않고 때로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을 마구 이용하기도 한다”고 지적했다. 자유를 찾아 북한을 탈출한 사람들이 이념과 체제가 다른 사회에서 꾸려가는 제2의 인생은 순탄하지 않다. 이들은 우리사회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겪는 가장 큰 어려움으로 직장 문제와 생활고를 꼽았다. 아무런 기술도 없고 북한에서의 경력마저 인정받지 못하는 이들은 주변의 부정적인 시각과 지적 열등감,언어의 차이,외로움 등으로 수시로 좌절감을 느낀다. 이들은 97년 제정된 ‘북한 이탈주민 보호·정착지원법’에 따라 귀순 후 통상 6개월간의 관계기관 합동심문과 사회적응 교육절차 등을 거친 뒤 귀순전 북한에서의 지위 등에 따라 3등급으로 나뉘어 정착금 및 주택,보조금 등을 받는다. 가족이나 지위가 없는 경우 받는 지원금은 평균 1,400만원 정도. 하지만 주택 임대보증금과 가재도구 구입비로 거의 다 쓴다. 정부기관의 주선으로 공무원이나 회사원 등으로 직장 생활을 시작하지만 전문직 보다는 단순 노무직으로 밀려나기 일쑤다. 올 초 통일부 조사에 따르면 국내에서 생활하고 있는 탈북자 700여명 가운데 매월 100만원 이상을 버는 사람은 절반에도 못미치는 314명에 불과하다. 월 50만원 이하로 생계를 이끌어 나가는 사람도 86명이나 되며 병약자나 노약자 등 생계곤란자도 40여명이 넘는다. 또 절반이상이 정부에서 알선한 직장에서 나와 막노동을 하고 있다. 탈북자들의 생활안정과 자립을 도와주기 위해 지난해 9월 설립된 북한이탈주민후원회 金熙辰 사무국장은 “탈북자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생계유지를 위해 지속적으로 돈을 벌 수 있는 직장을 보장받는 것”이라면서 “탈북자들이 남한 사회가 요구하는 취업능력을 갖출 수 있도록 지원해주는 적응교육과정 및 법정 의무고용제도 등이 마련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 외로움에 시달리는 귀순자(탈북 그 이후:3)

    ◎평범한 시민으로 살고 싶어요/초등학생 자녀 따돌림 심해 기죽어/냉대·소외감 못견뎌 술로 허송세월/“결혼은 귀순보다 큰 모험” 하소연도 96년 중풍에 걸린 남편 金慶鎬씨(63)와 만삭인 막내딸 명순씨(28)등 일가족 16명을 이끌고 북한을 탈출,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던 崔현실씨(59·여). 일요일인 지난 9일 서울의 한 교회에 간증차 나온 崔씨에게서는 ‘북한 출신’의 티가 거의 나지 않았다. 약간 남아 있는 북쪽 특유의 억양만이 崔씨가 1년9개월전 사선을 넘어왔다는 사실을 일깨워주었다. “가족이 다 와서 그런지 탈북자들이 흔히 느끼는 외로움이나 죄책감은 덜한 편입니다. 이웃 주민들과도 허물 없이 지내지요. 시장에 가면 아주머니들이 야채를 더 얹어주거나 옷을 그냥 가져가라고 해 오히려 난처할 때가 많아요” 누구보다 빠르게 남한생활에 적응한 崔씨이지만 한동안은 초등학교에 다니는 손자들 때문에 속이 많이 상했다. 평소에는 잘 어울려 놀던 같은 반 아이들이 싸움이 벌어지면 ‘북한에서 온 주제에…’라면서 따돌리는 바람에 손자들이기가 죽어 학교에 가기 싫어했다는 것. 崔씨는 “딸과 함께 선생님을 찾아뵙고,몇차례 학교에서 강연을 하고 난 이후에는 그런 일이 많이 줄었다”면서 “철모르는 아이들끼리의 일이지만 섭섭한 감정은 어쩔 수 없었다”고 털어놓았다. 700여명이 넘는 탈북자 가운데 崔씨처럼 일가족이 함께 내려와 의지하며 사는 사람은 드물다. 대다수 탈북자들은 부모 형제를 등지고 혈혈단신 귀순한 탓에 극심한 죄책감과 외로움에 시달리며 지낸다. 탈북자 후원단체인 북한인권시민연합의 尹玄 대표는 “가족을 버렸다는 자책감에서 벗어나도록 하기 위해 결혼을 적극 권유하지만 쉽지 않다”고 말했다. 북한 출신이라는데 대한 거부감과 선입견이 심한데다 일부는 정착금을 노려 계획적으로 접근하기도 해 자칫 돈 잃고 마음만 상하기 쉽다는 것이다. 성공한 탈북자로 알려진 金勇씨(38·연예인)도 “열렬한 연애가 아닌 바에야 귀순자에게 결혼은 귀순보다 더 큰 모험”이라고 토로했다. 주변의 냉대와 소외감을 견디다 못해 술로 허송세월하거나 잘못된 길로 빠지는 탈북자들도 상당수에 이른다. 지난해 5월 6개월된 딸과 함께 자살한 탈북자 아내 崔율리아씨(당시 26세)가 그런 예. 러시아교포 3세인 그녀는 러시아 벌목공으로 일하다 94년 5월 귀순한 남편 崔모씨(40)를 따라 이듬해 한국에 왔으나 주위와 어울리지 못한데 따른 우울증에 시달리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러시아 벌목공 출신인 K씨는 “남한 사람들은 북한 사람들에 대해 판에 박힌 시각을 갖고 있다”면서 “그들은 귀순자들을 저개발 국가에서 온 사람들이라고 생각할 뿐 동족으로서의 애정은 없다”고 비판했다. 남한사회에 대한 좌절과 열등감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도 많다. 죽을 고비를 몇번이나 넘기면서 찾아온 남한 땅에서 자신이 할 일이 막노동밖에 없다는 현실이 자포자기상태로 몰아가는 것이다. 탈북동기나 경로는 서로 다르지만 탈북자들의 목표는 똑같다. 자유의 땅 대한민국에서 평범한 시민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 잘 나가는 귀순자/지명도 활용 자립 꿈 결실(탈북 그 이후:2)

    ◎최세웅 부부·김용씨 북한음식점 성업중/황장업씨 집필·강연 김신조씨 목회 전념 지난 95년 귀순한 崔세웅씨(38·전 북한 대외무역회사 대성총국 유럽지사장)와 만수대 무용단 출신인 申영희씨(38) 부부는 요즘 눈코뜰새없이 바쁘다. 지난 4월 일산 신도시에 북한 냉면집 ‘진달래각’을 개업하면서부터다. 6월에 평창동에,7월에 광주에 분점을 냈다. 전국에 분점을 차릴 꿈에 부풀어 있다. 자유의 품에 안긴지 2년 남짓된 ‘애숭이’지만 누구보다 적응력이 빠르다는 말을 듣고 있다. 냉면집 카운터에서 “어서 오세요”라며 기자를 반갑게 맞이한 崔씨 부부의 얼굴에는 자신감이 깔려 있었다. “IMF잖아요. 더 열심히 일해야 해요. 그래야 통일 뒤에 부모님과 친척을 만나도 떳떳하게 얘기할 수 있잖아요” 이렇듯 탈북자의 상당수는 崔씨 부부처럼 생소한 여건속에서도 꿋꿋하게 생활하고 있다. 기반을 잡은 사람도 꽤 된다. 가수로 활동했던 金勇씨(35)는 고양시 근처에 북한냉면집을,93년 귀순한 요리사 출신 강봉학씨는 경기도 용인에 북한전문요리집을 차렸다. 崔씨 부부는 “특별한 직업이 없는 사람들은 대부분 식당을 운영하고 있다”고 말했다. 북한 시절,전문직종의 경험을 살려 성공한 예도 많다. 노동당 국제담당 비서였던 黃長燁씨(75)는 당국의 신변안전실에서 기거하며 집필이나 외부강연 등으로 소일하고 있다. 외교관 출신인 高英煥씨(콩고주재 1등서기관)와 玄成一씨(잠비아주재 3등서기관)도 북한문제조사연구소에서 일하고 있다. 지난 2월 유엔식량농업기구(FAO)에 근무하다 망명한 金동수씨도 마찬가지다. 신앙인으로 변신한 사람도 있다. 68년 1·21 청와대 기습사건의 金신조씨(56)는 지난해 1월 목사안수를 받은 뒤 충남 예천에서 농촌목회활동을 하고 있다. 87년 일가족 10명과 함께 한국에 온 金萬鐵씨는 남해에 기도원을 세웠고,모스크바대학 유학중 망명한 金명세씨는 침례교신학대학원을 졸업한 뒤 남북나눔운동연구위원회에서 봉사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87년 KAL기 폭파사건의 金현희씨(36)는 지난해 말 경주 출신의 사업가와 극비리에 결혼했다. 자신의 수기 ‘나도 여자가 되고 싶어요’의 희망처럼 지방에서 평범하게 살고 있다. 군 출신들도 사정은 비슷하다. 83년 망명한 李웅평 공군대령(45·공군대학 교수)은 간경변으로 입원했다가 최근 퇴원해 요양중이다. 96년 미그19기를 몰고 온 李철수대위와 같은 해 강릉무장공비 사건때 생포된 李광수씨(33)는 각각 공군과 해군본부에서 교관으로 자리잡았다.
  • 쉽지 않은 남녘생활(탈북 그 이후:1)

    ◎자본주의 적응못해 탈선 빈번/법·제도 등 잘몰라 자신도 모르게 범법/소외감 달래려 술·도박… 정착금 탕진도/부적응자 재교육·취업알선 등 대책 절실 오는 15일은 대한민국 건국 50주년, 분단 53주년이 되는 날. 지난 50여년 동안 이념과 체제가 다른 북한에서 살다 남한으로 탈주한 북한 이탈주민(탈북자)들은 700여명에 이른다. 직업이나 탈출동기가 제각각이듯 남한에서의 삶도 다양하다. 상당수는 우리사회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해 사선을 넘을 때 기대했던 것 만큼 순탄하게 살지 못하고 있다. 평범한 시민이 되고 싶다는 희망,두고온 가족에 대한 그리움, 사회로부터의 소외감 등 탈북자들이 겪는 明과 暗을 시리즈로 짚어본다. “남한 생활이 이렇게 어려울 줄은 몰랐습니다” 지난 6일 상오 서울 강남경찰서 유치장. 100만원짜리 고액 위조수표 사건과 관련,구속된 탈북자 鄭龍씨(28·서울 강남구 일원동)는 이렇게 입을 열었다. 하룻동안의 유치장 생활로 얼굴이 몹시 상기된 鄭씨는 남한 생활 1년도 채 안된 상태에서 유치장 신세를 진다는 것이믿기지 않는 듯 담배를 계속 빼물며 고개를 떨구었다. “조금만 남한 생활에 익숙했고 법을 알았더라면 이런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을텐데…” 鄭씨는 지난해 9월 먼저 북한을 탈출한 형 鄭연씨(33)의 도움을 받아 어머니와 여동생,남동생 등 가족 3명과 함께 북한을 탈출,화제가 됐던 인물. 鄭씨는 “평양에서 비행군관학교를 다니다 92년 유학중 남한으로 귀순한 형 때문에 함북 온성군 탄광지역으로 쫓겨나 종이공장에서 일하던 시절이 생각난다”면서 “새로운 생활에 적응하기도 전에 또다시 먼 곳으로 숙청된 느낌”이라고 말했다. 한때 경찰을 잔뜩 긴장시켰던 100만원짜리 위조수표 사건은 말 그대로 남한 물정에 어두웠던 한 탈북자의 어처구니없는 범죄였다. 지난 6월 鄭씨는 사회적응 훈련을 마치고 형 친구이자 89년 귀순해 냉면 체인점 사업을 하는 全모씨(31)의 회사에 일자리를 얻었다. 월급은 불과 50만원이었지만 국가에서 아파트를 제공받아 다른 탈북자에 비해 쉽게 출발했다. 그러나 지난달 31일 회사 동료 金모씨의 컴퓨터 가방에 들어 있던100만원짜리 위조수표를 몰래 꺼내 은행에 입금하려다 은행원의 신고로 경찰에 붙잡혔다. 수표는 金씨 등 3명이 회사 사무실에서 컴퓨터 스캐너로 위조한 것이었다. 鄭씨는 “친한 동료의 수표가 사무실에 돌아다니고 있어 입금하려 했을 뿐 범행 의도는 전혀 없었다”고 항변했지만 부정수표단속법 위반 및 절도 혐의로 구속됐다. “나중에 알았지만 뒷면에 인쇄조차 안된 조잡한 수표를 알고도 입금시킨 뒤 신고한 은행원이 야속하다”고 말했다. 90년대 이후 탈북 귀순자가 늘어나면서 남한 사회에 정착한 이들의 삶도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귀순,주변의 지원 속에 풍요롭게 살아가는 이들도 있다. 전문직업인 연예인 신앙인 등으로 변신,북에서의 삶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인생을 꾸려 나가는 이들도 많다. 그러나 鄭씨처럼 적응에 실패해 범죄의 유혹에 빠지거나 정착금을 탕진해 생활고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시베리아 벌목공 출신인 金모씨(35)는 “솔직히 문화적 차이와 소외감 때문에 생활에자신이 없다”면서 “적응을 하지 못해 술과 도박으로 소일했던 적이 있다”고 말했다. 귀순자 朴모씨(42)는 “취직을 해도 북한에서 왔다는 이유로 따돌림을 받는 것이 싫어 그만두는 탈북자들이 많다”고 전했다. 탈북자 모임인 ‘숭의동지회’ 관계자는 “북한 사회에서 오랫동안 생활한 탈북자들은 남한사회에 적응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면서 “상당수가 개인능력 위주의 자본주의 사회에 정착하는 데 어려움을 느끼고 있으므로 정부는 부적응자들의 재교육 및 취업,장래문제에 신경을 써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 강제 송환 위기 40대 탈북자/日에 난민인정 거부 취소訴

    【도쿄 연합】 북한 탈출을 주장하며 한국을 거쳐 일본에 밀항한 뒤 난민을 신청했다 거부돼 중국으로 강제송환될 처지에 놓인 金龍華씨(45)는 27일 난민 인정을 거부한 법무상의 처분 취소를 요구하는 소송을 후쿠오카(福岡)지법에 제기했다. 대리인인 야노 세이고(矢野正剛) 변호사에 따르면 金씨는 소장에서 지난 88년 북한에서 중국으로 탈출했음을 주장하면서 일 법무상이 “국적을 중국으로 인정한 것은 중대한 잘못”이라고 주장했다.
  • 솔라즈 前 美 하원외교위 亞太소위원장(인터뷰)

    ◎“햇볕론은 한차원 높은 외교”/金 대통령 취임 20세기 가장 감격적인 드라마/DJ 제거 음모 저지위해 모든 노력 다했었다 미국 의회의 인권단체 ‘민주주의를 위한 전국재단(NED)’ 이사장인 스티븐 솔라즈 전(前) 미 하원 외교위원회 아시아·태평양 소위원회 위원장(58)이 최근 한국을 방문했다. 솔라즈 이사장은 75년부터 92년까지 9선의 하원 의원을 지낸 관록있는 정치가.임기중 내내 아·태 소위원회에서 일하며 한국의 암울한 군사독재시절엔 민주화와 인권을,북한의 위협에 대응해서는 미국의 한국에 대한 지원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대표적인 지한파(知韓派)이기도 하다. 한때 주한 미국 대사의 물망에도 올랐던 그는 지난 2월 金大中 대통령의 취임식 때에 이어 올들어 두번째 한국을 방문했다.5일 출국에 앞서 솔라즈 이사장을 만나 ‘햇볕정책’ 등 한국에 대한 견해를 들어 보았다. ­이번 한국 방문의 목적은. ▲북한의 인권 상황을 자세히 알아 보기 위해서다.4일 탈북자 5명을 직접 만나 북한의 인권상황과 경험 등을 자세히 들었다.불법체포및 구금,수용소 생활과 고문 등 북한에서의 인권상황을 폭넓게 조사해 ‘민주주의를 위한 전국재단’에 보고서를 제출하고 전국재단은 이를 종합해 계간 소식지 ‘민주주의 저널’에 특집기사로 게재할 것이다. ­80년과 91년 등 북한을 두번이나 방문했다.특히 첫방문을 두고 일부에서는 정치적 입지확보를 노린 방북이라고 지적했었는데. ▲처음 북한을 방문한 시기는 어느때보다도 한반도에서 전쟁을 상정한 긴장이 고조됐을 때이다.북한이 어떤 생각과 자세를 가지고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는 판단에서 방북했다.물론 북한의 초청에 응해 선전에 이용됐다는 비난도 있었다.그러나 방북 이후 변화없는 북한의 태도와 실질적인 대남위협을 눈으로 목격했다.그점이 중요하다고 본다. ­金日成이 사라지면 북한이 개혁개방의 자세로 나올 것이라고 전망한바 있는데 상황은 별로 나아지지 않고 있다.金大中 대통령이 천명하고 있는 ‘햇볕정책’이 주효할 것으로 보는지. ▲당연히 효과가 있을 것이다.‘햇볕정책’은 현재 한반도문제에서 취할 수 있는 대안중가장 효과적인 방안이라고 본다.그것은 북한이 취하는 호전적인 자세를 수용하면서 채찍보다는 당근을 주는 한단계 높은 외교술이라고 하겠다. ­지난 2월 金大中 대통령의 취임식에 맞춰 한국을 방문했다.한국 현대사를 소상히 아는 사람으로 金 대통령의 취임식에서 느낀 점도 많았을 것으로 보이는데. ▲金 대통령의 취임식은 20세기에서 가장 감격적인 한편의 정치 드라마였다.아마도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어떤 작품보다도 감동적인 장면이었다고 본다.내 인생에서도 의미가 깊었다.그것은 진정한 한국 민주주의의 도래를 상징하는 것이었다.또 인간 金大中씨의 인생역정 가운데 한 정점일 뿐만 아니라 한국민들이 이룩한 민주승리의 순간이었다.그를 살해하려던 전직 대통령들을 모두 불러 함께 앉은 장면은 믿기 어려운 의미있는 모습이었고 한국내 민주주의 신장을 보여준 한 단면이었다. ­金 대통령과는 언제부터 교분을 쌓아 왔나. ▲70년대말 처음 金 대통령을 만나 많은 대화를 나누어 왔다.미국에서 망명생활을 할 당시 집으로 초청해 저녁을 함께한 적도 있다.나는 당시 한국 민주주의의 신장이 한국은 물론 미국을 위해서도 도움이 된다며 이를 미 행정부 차원에서 정책적으로 반영되도록 했다.金大中씨를 제거하려는 것을 한국 민주주의에 대한 중대한 위협으로 간주해 이를 저지하고자 할 수 있는 노력을 다했다. ­한국의 반민주화나 인권상황을 강력히 지적하면서 비판적이었던 입장이 77년 한국방문 이후 크게 태도가 바뀌었다는 지적이 많은데. ▲당시 미국 정부는 한국의 민주주의를 후퇴시킨 朴正熙 전 대통령과 가까운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그점을 지적하면서 자연히 인권상황을 비판했고 그뒤에도 변화가 없었다.그러나 77년 한국을 방문해 북한의 조직적인 위협을 직시하게 됐다.그점이 한국 정치상황에 영향을 줘 인권상황도 안좋은 방향으로 몰고 간다는 것을 알았다.그후 군사력이 월등한 북한의 위협을 저지할 수 있도록 한국에 대한 군사지원과 미군의 주둔을 행정부에 강력히 요구했었다.그래서 내가 태도를 바꾼 것으로 비쳐졌을 것이다. ­한국 현대사에는 두번의 쿠데타가 있었다.특히 80년 全斗煥씨의 군사행동은 법원의 심판을 받아 쿠데타로 규정됐는데. ▲全斗煥씨의 군사행동은 광주학살을 초래하는 등 지극히 유감스럽고 비극적인 사건이었다.그의 행동을 심판한 법원의 판결은 이성적이고 이유있는 당연한 판결이라고 생각한다.내가 이전에 한국내 인권을 지적한 것도 이 사건에 유감을 표한 차원이기도 했다. ­한국은 지금 국제통화기금(IMF)지원 체제하에 놓여 있다.경제위기가 닥친 원인을 지적한다면. ▲일차적인 책임은 금융기관들의 무분별한 차관도입과 신용없는 대기업 대출일 것이다.그러나 투명성 없는 금융기관의 행동에는 정치권과 행정부 인사들의 은행업무 개입이 동기가 된 부분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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