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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미 범인인도조약 올 상반기 가서명

    한국과 미국은 최근 양국간 범죄인인도조약 내용에 합의하고 상반기중 가서명 절차를 밟을 예정이라고 외교통상부가 9일 밝혔다. 정정검 외교통상부 조약국심의관은 이날 “한미 양국은 96년 10월 3차 실무회담에서 21개 조약문안에 합의한후 후속협의를 계속해 왔다”면서 “최근 구체적인 조약내용에 합의하고 후속절차를 마무리한 만큼 상반기중 가서명이 이뤄질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은 그동안 한국의 국가보안법이 인권탄압의 소지가 있다는 이유로 국가보안법 위반사범은 인도대상에서 제외시키는 것을 골자로 한 별도의 문서합의를 요구하다가 최근 이를 철회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미범죄인인도조약이 발효되면 정치범이나 군사범을 제외하고 1년이상 징역이나 금고에 해당하는 모든 형사범을 인도할 수 있게 돼 국내에서 범죄를 저지른 범죄인들이 미국으로 도주할 수 없게 되고,미국에 체류중인 주요 범죄자들을 검거하는 것이 쉬워진다.
  • 국조권 정국 전선 확대 조짐

    ◎야 북풍조사 요구에 여 “경제청문회 해야” 맞불/발동까진 산너머 산… 국회 파행 장기화 가능성 한나라당이 9일 ‘소위 북풍사건 등 김대중정부의 정치보복 진상규명을 위한 국정조사요구서’를 국회에 제출함에 따라 ‘김종필 총리 인준 동의안’ 처리 문제로 비롯된 여야간 긴장 국면이 일파만파로 확산되고 있다.특히 여권도 북풍사건에 대한 국정조사를 피할 이유가 없다는 방침이어서 여야간 공방전이 갈수록 치열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날 한나라당의 국정조사요구서 제출로 ‘북풍사건’에 대한 형식적인 국정조사권은 발동이 된 상태이지만 여야간 국정조사계획서 합의를 통한 실질적 의미의 국정조사권이 발동되기 까지는 상당한 진통이 따를 전망이다.국회법상으로 국정조사계획서는 국회 본회의 참석인원의 과반수 표결로 채택되며 계획서 통과즉시 본격적인 국조권이 행사된다.국회법상으로는 여야 합의가 이뤄지지 않을 경우 국회의장의 부의로 본회의에 상정될 수 있지만 국회 관례상 여야합의가 전제돼 왔다. 여야간 격돌은 국정조사계획서 작성과정에서부터 지리하게 전개될 가능성이 높다.북풍사건을 바라보는 여야간 시각차가 워낙 첨예하기 때문이다.여권은 한나라당 소속 일부 의원들을 북풍사건 조작 배후자로 지목,증인채택을 주장할 것이 뻔하다.그러나 야당은 “북풍사건 자체가 야당 탄압을 위한 정치공작”이라며 역공을 펼칠 태세다. 국정조사의 시기와 기간에 대해서도 여야간 이해관계가 엇갈릴 전망이다.특히 한달도 남지 않은 4개 지역 재·보선과 6월 지방자치단체장 선거를 염두에 둔 여야가 정치공세에 주력할 경우 진실규명을 위한 국정조사는 물건너가고 새정부 초기의 국회파행사태는 장기화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국정조사특위의 여야 위원 배분문제에서도 힘겨루기가 예상된다.이날 한나라당이 ‘여당 9인,야당 11인’의 특위 구성을 요구한데 대해 여권은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 게다가 한나라당이 ‘북풍사건’뿐만 아니라 김대중 대통령과 김종필 총리서리의 비자금 문제까지 향후 국조권 발동의 대상으로 삼기로 당론을 정하고 여권도 4월초 경제청문회를 추진한다는 방침이어서 국조권 정국의 전선은 갈수록 확산될 조짐이다.여권이 비자금 문제에 대해서는 분명한 선을 긋고 있는 반면 한나라당은 여권의 경제청문회 소집 요구에 대해 비자금 문제의 국조권 발동을 전제조건으로 내걸고 있다. 때문에 현재 여야가 겉으로는 북풍사건의 국정조사 실시에 원칙적인 의견일치를 보이고 있긴 하지만 사안의 성격상 정치적 힘겨루기의 양상으로 변질될 가능성이 높아 국정조사가 원만하게 실시될 수 있을지는 쉽사리 예단키 어렵다.
  • “국조땐 표적사정 여부 밝혀질것”/한 국민회의 총무대행 문답

    ◎야에 중진회담 제의… 정국경색 타개 노력 국민회의 한화갑 총무대행은 8일 “국정조사권과 경제청문회는 동시에 실시돼야 한다”며 북풍공작에 대한 야권의 국정조사권 발동요구를전격 수용했다. 한총무대행은 “현재 수사중인 북풍공작 수사는 결코 정치보복이나 표적사정이 아니다”라며 “국정조사를 통해 모든 구여권이 50년간 자행한 북풍의 모든 진실이 밝혀질 것”이라고 강조했다. ­국정조사권을 수용한 이유는. ▲어느 정권이든지 진상규명을 하지 않으면 앞으로 기회가 없어진다.우리당이 북풍에 대한 피해자인 만큼 진실을 밝혀야 하며 나중에 (진상규명을)시도할 경우 정치보복이라는 소리를 듣게된다.야당이 주장하는 표적사정 여부가 밝혀질 것이다. ­경제청문회는 추진하는가. ▲취임후 곧바로 착수한다는 것이 김대중 대통령의 공약사항이었다.야당에서도 필요성을 인정했다.야당도 반대할 명분이 없다. ­앞으로의 대야관계 등 경색정국에 타개방안은. 9일 총무회담에서 중진회담을 제의할 방침이다.각 정당의 대표들이 동수로구성되는것이 바람직하지만 한나라당과 협의해 결정하겠다. ­일부 인사에 대한 정치자금 조사 요구가 나오는데. ▲우리가 감시와 탄압속에서 살아남은 것은 기적이나 같다.50년간 정권을 휘두른 사람들이 깨끗한지 살아남은 사람들이 깨끗한지 밝혀보자.
  • 안기부 고위직도 사법처리/북풍 공작

    ◎간부 5∼6명·야 의원 2∼3명 조사/국민회의,안기부실장 고발… 한나라 “국권 발동” 청와대와 국민회의 등 여권은 지난해 대선은 물론 92년 대선,96년 총선 당시의 ‘북풍 공작’ 관련자의 전모를 이미 파악하고 있으며 이들 대다수가 현재 안기부 간부로 포진하고 있는 점을 감안해 빠른 시일안에 사법적·행정적 책임을 물을 방침인 것으로 알려졌다. 여권은 특히 북풍조작 사건에 한나라당 일부 의원들이 간여했다는 심증을 굳히고 있어 이번 사태가 정치권 사정으로 확산될 조짐을 보이면서 여야 공방도 가열되고 있다. 여권의 고위관계자는 6일 “북풍조작 사건의 재발방지를 위해 진상이 철저히 밝혀지고 지위고하를 막론,엄중한 처리가 있어야 한다”면서 “이미 많은 증거가 확보돼 빠르면 다음주중에는 조치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와 관련,국민회의측은 지난 대선때 야기된 오익제 파문이 권영해 전 안기부장을 포함,안기부 고위간부들에 의해 조직적으로 이뤄졌다는 의혹을 제기하고 나섰다. 국민회의 고위관계자들은 특히P모차장을 북풍조작의 주모자로 지목하고 있어 검찰수사 결과가 사법처리까지 이어질지 주목된다. 국민회의 조세형 총재권한대행은 이날 국회에서 열린 의총에서 “북풍관련수사는 정치탄압이 아니라 위법사실을 밝히려는 것”이라면서 “수사를 통해진상이 규명되어야하며 책임있으면 처벌이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국민회의는 지난해 12월 오익제편지 내용을 발표한 안기부 고성진실장을 통신비밀보호법,안기부법 위반혐의 등으로 검찰에 고발하기로 했다. 이에 대해 한나라당은 북풍수사를 불순한 의도를 가진 대야공세로 간주하고 국회 정보위 소집과 국정조사권을 발동하기로 결정했다. 정형근 의원은 이날 의원총히 신상발언을 통해 지난 대선당시의 ‘북풍사건’과 관련,“검찰에서 강제구인 방침을 통보해 왔으며 강제구인 당할 경우 진실을 밝히겠다”고 밝혔다. 한편 이종찬 안기부장은 이날 북풍사건에 대해 검찰수사와는 별도로 자체 진상규명 활동을 벌여 조속히 결과를 보고하도록 지시했다.
  • 의회정치의 시련(대한민국 50년:9)

    ◎49년 무장경찰대,국회반민 특위 습격 폭거/친일파 대거 구속되자 이승만 “특위활동 중지” 지시/‘프락치사건’국회부의장 등 15명 무더기 구속 사태도 이승만 한사람의 고집으로 하룻밤새 의원내각제가 대통령제로 바뀌기는 했어도 대한민국 의정 50년의 문을 연 제헌국회는 정치의 중심무대였다.1948년 5월31일 개원한 제헌국회는 의회민주주의의 이상을 지향했다.필요한 권한이 주어졌고 의사진행은 민주적이었다.의원들간에 횟수경쟁이 벌어질 만큼 발언도 자유로웠다.이승만 대통령도 국회의 건의나 요구가 있을 때마다 국회에 출석,의원들의 질의에 답변하고 주요법안 심의때는 정부의 입장을 직접 설명하는 등 국회를 존중했다. 그러나 이승만이 초대내각 구성에서 원내 최대정파인 한민당을 배제한 것을 계기로 정부와 국회는 불신과 갈등의 관계로 접어들었다.의정 초기 정부와 국회의 대결은 대부분 국회의 승리로 귀결됐다. ○지방자치법 폐기 일방통고 1948년 8월에 시작해 이듬해 4월까지 계속된,지방자치제 실시여부를 둘러싼 힘겨루기에서 국회가승리를 거둔 것은 당시 행정부에 대한 입법부 우위의 정치구도를 상징하는 사건이었다.이때만 해도 정부와 국회의 대결은 권한의 유무나 헌법의 해석 등 입헌주의의 틀 안에서 이루어졌다. 하지만 지방자치 문제에서의 패배를 고비로 정부는 이 틀을 깨려 들었다.정부는 국회가 폐회하기를 기다려 1948년 5월12일 지방자치법 폐기를 일방통고했다.정부의 재재의 요구가 처리되지 않았기 때문에 지방자치법은 계류중인 상태였으며 따라서 국회의 폐회로 자동폐기됐다는 게 정부측이 내세운 어거지 논리였다.이때부터 이승만 정권은 노골적인 국회탄압에 나섰다.갓 싹을 틔운 의회민주주의에 시련이 시작됐다. 제헌국회때 정부와 국회간 대결은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 문제에서 정점을 이루었고 이의 전개와 결말은 이후 대한민국 의정 50년사의 성격을 규정하는 결정적 잣대로 작용했다.일제하의 친일파 및 민족반역자 처벌문제는 농지개혁과 함께 건국이후 떠오른 최대과제중의 하나였다.국회는 헌법제정과 내각구성을 마친 직후인 1948년 8월5일 이를위한 특별법기초위원회를 설치하고 한달만인 9월7일 반민족행위처벌법(반민법)을 통과시켰다.이에 따라 국회내에 특위가 설치되고 법원과 검찰에는 특별재판관,특별검찰관으로 구성된 특별재판부가 구성됐다.특위활동은 이듬해 구체화해 49년 1월8일 친일자본가 박흥식을 필두로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을 속속 체포했다. 반민특위가 활동에 나서자 정부내 친일파세력은 필사적으로 저항했고 저항의 선두에는 행정및 정치적 기반을 이들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이승만이 섰다.이승만은 특위활동이 활발해지자 반민법 개정을 요구하는 특별담화 발표(1월10일),체포된 친일경찰 노덕술에 대한 석방요구(1월24일),반민법 개정안 제출(2월15일),반민특위 활동의 중지 및 특경대 해산 지시(4월16일) 등으로 특위를 계속 압박했다. ○“남로당과 연결” 전격 구속 그럼에도 특위가 6월4일 서울시경 사찰과장 최운하,종로서 사찰주임 조응선을 체포하는등 고삐를 늦추지 않자 이틀뒤 무장경찰대가 반민특위를 습격하기에 이르렀다. 아울러 당시 정부와 국회의 관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건이 국회 프락치사건이다.정부와 국회가 극한대결로 치닫던 5월20일 소장파의원 3명이 국가보아법 위반 혐의로 전격 구속됐다.이유는 이들이 남로당과 연결되어 국회에서 프락치활동을 했다는 것이었다.이어 8월14일 소장파의 좌장격인 국회부의장 김약수 등 의원 12명이 추가구속됐다. 이같은 국회프락치사건은 반민특위의활동 및 이후 정부와 국회의 관계에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 이사건의 정치적 배경은,당시 수사총책인 검찰총장 권승렬이 국회에서“이사건에 물적 증거라는 것은 없습니다마는…,다소는 있습니다마는…,대개 물적 증거가 박약한…서로 연락해서 논의한 사건은 사람의 말에 의해서 판단하는 것밖에 없습니다”(49.5.23 국회속기록)고 한 보고에서 유추해 볼 수있다.그때 미국·영국 등 주요 우방은 반민특위 습격과 국회프락치사건을 ‘이승만의 뜻’으로 보았음이 최근 발굴한 자료에서 밝혀지기도 했다. 어쨌든 국회프락치사건으로 입법부 우위를 떠받쳐온 힘의 원천인 소장파의원들은 몰락하고 소장파가 주도한 반민특위 활동도 마찬가지로 힘을 잃게 됐다.또 이 사건은 정부가 정치적 반대자들을 친공으로 몰아 제거하는길을 트는 출발점이 됐다.국회는 반민족행위의 공소시효를 단축하는 개정안을 7월6일 이승만의 요구대로 통과시켰고 이로써 반민특위 활동은 사실상 전면중지됐다. 소장파가 제거된 이후 국회는 원내 제1세력인 민국당이 중심이 되어 행정부를 견제하기 위한 내각책임제 개헌을 추진했다.하지만 개헌은 1950년 3월14일 국회에서 부결돼,국회의 패배로 결말나고 이를 고비로 국회우위 시대는 종식을 맞았다. ○“행정부 견제” 내각제 추진 제헌국회 2년새 벌어진 일련의 사건은 민주정치의 기반인 국회의 행정부종속을 초래,행정부 만능인 권위주의 통치가 이땅에 뿌리내리는 씨앗이 됐다.그결 과 비상계엄령과 백골단 등에 의한 공포분위기 속에 기립표결로 헌법을 바꾼 2대 국회의 발췌개헌,민의의 대표인 국회의원들을 소수점으로 계산한 3대국회의 사사오입개헌 등 파행이 이어지다 끝내 1961년 5·16 군사쿠데타,72년 유신,80년의 군사쿠데타 등 세 차례 헌정중단의 비극으로까지 연결됐다. 제헌국회는 의회민주주의의 가능성과 시대적 한계를 동시에 드러냈다.다양한 정파로 구성됐지만 친일파와 지방자치 문제의 처리에서 보듯 초정파적 단결력으로 정부를 제압하는 힘을 과시했다.사안에 따라 연합과 대립의 관계를 형성,민의의 대변기구로서 시민사회의 다양한 이해와 갈등을 신축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구조를 갖추었던 셈이다.이런 점에서 제헌국회는 의회민주주의의 가능성을 확인시켜준 소중한 경험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1949년의 일련의 사태는 이러한 가능성을 좌절시킴과 동시에 합법적인 정치활동의 공간,즉 정치민주화의 폭을 크게 제약했다.반세기 가깝게 우리 정치를 옥죄어온 권위주의 체제는 이때 이미 싹튼 것이다. ◎미 “국회 프락치사건 이승만의 뜻”/미군정 사법부근무 프란켈 보고전문서 확인 이승만 대통령은 헌법에 규정된 입법부의 독립에 관해 자기중심적이고 편의주의적인 인식을 가졌다. 미군정 당시 사법부와 경제협조처(ECA)에 근무한 에른스트 프란켈은 국회프락치사건을주의깊게 관찰한 결과를 에버렛 드럼라이트 주한미대사관 참사관에게 전달했다.국회프락치사건 재판이 한창 진행중인 1950년 3월22일 드럼라이트는 미 국무부에 프란켈의 보고를 전문으로 보냈다. 이 보고에서 프란켈은 재판의 공정성과 관련해 “검사는 고문에 따른 자백에 의존하고 판사들은 변호사가 신청한 증인채택을 거부하는 등 재판이 편향되게 진행됐다”고 주장했다.이어 “재판장은 기소된 의원들이 비록 ‘좋은’일을 했더라도 남로당 지시에 따른 것이라면 불법”이며 특히 “미군철수를 요청하고 국군의 북진통일을 반대한 것은 범죄”로 보았음을 밝혔다. 프란켈은 또 이승만을 “자신의 권위와 지도력을 보장하는 한 국회를 구성한 정당과 개인들이 어떤 주장을 제기해도 수용한 반면 분단에 관련한 문제나 체제기반을 침식하는 정치적 반대활동은 결코 용인하지 않았다”고 평가했다.결국 미국은 애초부터 국회프락치사건을 정치적인 것으로 파악했음을 시사해 주는 것이다. 한편 이보다 앞서 반민특위 습격사건이 발생한지 나흘뒤인 49년 6월10일 영국의 서울총영사 C. 홀트는 어네스트 베빈 외무장관에게 보낸 전문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반민특위 본부 습격을 지시했다”고 보고했다. 미·영 양국의 주한 외국관들이 본국에 보고한 이같은 내용들은 그동안 일부에서 제기해온 국회프락치사건의 행정부 작위설을 뒷받침하는 귀중한 자료들이다.
  • 절망과 투혼의 계절/전인영 서울대 교수(서울광장)

    지난 25일 김대중 대통령은 그의 취임사에서 지도층의 잘못으로 죄없는 국민이 엄청난 희생과 고통을 치르게 되었다면서 눈시울을 붉혔다.그는 6·25 이후 최대의 외환위기라는 국난을 맞아 물가는 오르고 실업자가 증대하며 소득이 감소할 것이라고 지적하면서,위기국면 타개를 위해 온 국민이 애국심을 발휘해 달라고 호소했다.국제통화기금(IMF) 사태를 맞아 길고 험난한 고난의 생활을 시작해야 하는 국민에게 취임 초부터 고통감수와 희생을 요구해야 하는 대통령의 마음도 매우 괴롭고 아팠을 것이다. ○국민고통 감수·희생 요구 우리는 정말 어려운 상황을 맞고 있다.요즈음 신문 방송 매체들은 사업실패와 실직 및 생활고 등으로 인한 비극적 사건들을 잇달아 보도하고 있다.IMF 사태는 건전한 기업들을 포함한 수많은 기업들을 도산시키고,충실한 직장인들을 불안과 실직상태로 몰아넣고 있으며,서민들의 경제·사회생활을 크게 위협하고 있다.극소수지만 경제난으로 절망감을 못 이겨 소중한 삶을 포기하는 사람들마저 나타나고 있다.오죽 고통스럽고 절망적인 상황이었으면 귀중한 목숨마저 버려야 했을까를 생각할 때 실로 안타까운 마음 금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 민족의 기막힌 수난사를 돌이켜 볼 때,오늘의 상황이 최악의 절망적 상황이 아님을 알 수 있다.가난하고 외세가 좌우하던이조 말기의 절망적 상황,나라를 잃고 고유의 언어·이름마저 쓸 수 없었던 일제 36년동안의 탄압과 치욕,수 백만의 인명을 앗아간 동족상잔의 한국전쟁과 눈물겨운 피난생활,식량난으로 쓰러져 가는 북녘의 우리 동포들을 생각할 때,오늘날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현실을 가리켜 절망적 상황이라고 말할 수 없다. 우리는 극심한 고통과 절망감에 쉽게 굴하지 말고,또 한번 위기극복을 위한 투혼을 발휘해야 한다.인간의 능력은 무한에 가깝다.절박한 위기상황이나 열악한 환경하에서 인간은 믿기 어려운 강인함과 위대함을 발휘할 수 있다.오늘날 우리가 처한 힘든 상황이 무한히 지속될 리는 없다.최악의 상황을 인내와 노력으로 극복해 나간다면 재기할 수 있는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사업에 실패하여 한때 생을 끊으려 했던 사람이 마음을 고쳐먹고 재기에 성공한 사례들을 우리는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있다.배우자를 잃은 평범했던 주부가 자녀들을 위해 강인한 생활력을 지닌장한 어머니로 변모하는 모습들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인간은 위기와 절망적 상황에서 쇠처럼 강해질 수도 있다.절망적인 사람에게 사랑하는 가족들이 있다면,그 자체만도 큰 축복이요 희망임을 명심하고 시간과 인내와 노력으로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야 한다. ○인내·노력으로 위기 극복 우리는 위기상황을 맞아 굴하지 않고 나라와 민족을 구한 인물 및 민족들의 경험으로부터 용기와 소중한 교훈을 얻을 수 있다.임진왜란 중 이순신장군은 고립무원과 열세의 절박한 상황하에서 왜군의 서해 진출을 끝까지 차단함으로써 일본에게 심각한 타격을 가했다.1950년 6∼7월 기간 한국군은 불의의 기습과 무기·장비의 열세로 인하여 군사적 패배를 거듭하면서도 절망하지 않고 사력을 다해 싸웠었다.그 해 여름 내내 워커 장군은 인민군의 결사적 공격으로 낙동강 방어선 일부가 붕괴되는 절망적 상황을 맞으면서도 인천 상륙이 성공할 때까지 방어선을 끝내 사수했다. ○“우리경제 강화” 단련기로 제2차 세계대전 중 영국의 처칠 수상은 절망적 사태 전개에 굴하지 않고 영국인을 단합시켜 히틀러의 야욕을 꺾었다.레닌그라드와 스탈린그라드를 사수해 소련을 구한 주코프 장군과 그를 믿고 따른 러시아 국민들의 인내와 투혼도 전사에 길이 빛나고 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심각한 외환·재정위기가 우리에게 무한의 인내와 고통 및 희생을 요구하고 있지만,우리가 굴복하지 않는 한 절망은 없다.역사는 전쟁이나 자연재해와 같은 절망적 상황을 극복한 인간의지와 투쟁의 승리사이다.“겨울이 오면 봄이 멀지 않다”는 말은 절망에 빠진 사람에게 새로운 힘과 희망을 주는 진리이다.우리 격언에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했다.사람은 순탄할 때 보다 험난할 때,더욱 강해지고 성숙해 지기 마련이다.현 IMF시대는 우리 국민과 경제를 더욱 강하게 만드는 시련기이며 단련기이다.대통령을 위시한 온 국민이 국난극복을 위해 혼연일치로 단결하고 불굴의 투혼을 발휘한다면 우리는 틀림없이 경제전쟁에서 승리하고 말것이다.
  • 김 차기대통령 대외관계 활성화 기대(해외사설)

    한국의 김대중 차기대통령이 25일 공식 취임한다.취임에 앞서 한일관계 회복과 남북대화 추진 등 화해와 건설의 외교방침을 밝혀 놓고 있다.김영삼 정권에서 꽉 막혔던 대외관계의 타개에 기대를 걸고 싶다. 한국의 국제관계는 한일 관계가 어업협정 파기 등으로 악화됐으며,한미관계도 결코 원활하지 못하다.남북대화는 중단된 채다.왜 한국 외교는 실패했는가.외교의 기본이 인간관계에 있음을 끝까지 이해하지 못했다고 말할 수 밖에 없다.대국에 둘러쌓여 있고 분단돼 있는 국제환경하에서는 좋은 국제관계가 필요불가결하다는 데 대한 인식이 엷었다.김영삼 외교는 너무 오만한 자세를 고치지 않았다는 게 한국내에서의 반성이다.이러한 반성에 입각해 김차기대통령은 대일관계 회복 노력을 천명했다. 일본측에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대통령 취임 직전에 한일어업협정을 파기하는 일본의 대응은 한국측에서 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사태다.한국은 새 정권이 발족하면 조기에 문제를 해결한다고 밝혀 왔기 때문에 체면이 손상됐다고 받아들이는 것도 무리는아니다.협정 파기 때문에 차기대통령의 조기 방일이 어려워진 것도 부정할 수 없다.어업협정 파기를 주장한 일본측 책임자도 국제감각을 결여하고 있다. 그럼에도 김대중 차기대통령은 관계 회복에 노력한다는 자세를 보였다.한국내에서의 지지율은 90%를 넘는다고 한다.국민은 경제의 재건과 국민적인 화해에 커다란 기대를 걸고 있을 터이다.그 배경에는 한국에 뿌리깊은 지역감정 및 노동문제 등 난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은 김차기대통령밖에 없다는 인식이 자리잡고 있다.지금까지 수많은 정치 탄압을 받으면서도 정치보복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해 왔고 그것을 신중하게 실행에 옮기려 하고 있다. 이 자세에 국민이 공감해 박수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김차기대통령의 정치와 외교를 일관하는 것은 화해와 민주주의 발전의 정신이다.김종필씨와의 협력에 대해서도 ‘사람은 용서할 수 있다’고 말한다.이 화해와 민주주의 발전의 이념에 국제사회도 많은 기대를 걸고 있다.
  • 두 거목 등소평과 주은래/북경=정종석(특파원 수첩)

    중국에서는 올 2월과 3월 한달을 사이에 두고 위인추모 열기가 뜨겁다.2월19일이 개혁개방의 총설계사 등소평 사망 1주기였고,3월5일은 60,70년대 냉전시대에 중국을 이끌었던 주은래 탄생 100주년이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소용돌이치는 중국현대사를 이끌어온 장본인이다.사후에 똑같이 중국인들의 존경을 받고 있는 것도 닮은 점이다.다만 등의 1주기가 공식행사 없이 다큐멘터리 방송 등으로 비교적 단순하게 1회성 ‘침묵의 팡파레’로 끝난 반면 주탄생 100주년 기념사업은 그의 고향 강소성에 4.2m짜리 대형동상이 세워지는 등 공개적·조직적인 점이 특징이다. 중국공산당 창당 당시부터 지도적 역할을 담당한 주는 평생을 모택동 밑에서 2인자로 처신하며 살았다.반면 등은 세번이나 숙청당하는 등 삼전사기의 오뚝이 정치역정을 겪으며 중국의 최고지도자로 군림했다.이 과정에서 주가 등을 45년,73년 두번이나 도와 복권시킨 것이 매우 흥미롭다.등은 주사후인 76년 세번째 숙청을 당했으나 모택동 사후 주자파들의 도움으로 화국봉을 실각시키고 78년12월 마침내 실권을 장악한다.등으로서는 주가 평생의 은인인 셈이며,주가 없었다면 오늘날 중국의 개혁개방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주가 모택동의 눈치를 보면서도 두번이나 등을 복권시킨 점에 눈길이 간다.주는 등의 프랑스 유학 선배였다.개인적인 인연이 있었던 것이다.그러나 그보다는 주가 등을 일찍부터 ‘미래의 중국’을 위해 꼭 필요한 인물로 눈여겨 보고 사력을 다해 살려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현재 중국에서 구세주로 칭송받는 등은 빵문제를 해결한 난세출의 지도자로 중국인들에게 각인돼 있다.반면 89년 천안문사태 등 무자비한 정치탄압은 그가 사후에도 여전히 안고가야 할 숙제다.그러나 중국공산당 초기 당내에서 모보다도 더 권위가 있었던 주는 평생 한 여자(등영초)와만 사는 등 인간적이고 서민적인 체취,그리고 당과 국민에 대해 무한한 애정과 충성을 간직한 지도자로서 투영되고 있다. 지금 북경을 비롯한 중국 전역에서 부는 ‘백년은래(주은래 탄생 1백년)’의 열기는 중국국민들이 이제 빵문제를 벗어나 인간적 온기가 느껴지는 지도자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닌지 하는 느낌을 갖게 한다.
  • 선거사범 사면복권 추진 논란

    ◎국민회의 “지방선거 출마 돕게 배려 바람직”/법무부 “공명선거 정착에 심각한 장애” 난색 국민회의가 새정부 출범에 맞춰 단행할 특별사면에 선거사범을 포함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서 배경과 규모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국민회의는 16일 상오 간부회의를 열어 ‘편파수사나 표적수사에 의한 선거사범’에 대해 특별사면을 추진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국민회의의 이같은 구상은 당장 오는 6월 지방선거를 겨냥한 포석으로 풀이된다.당의 한 관계자는 “지방선거 출마 희망자를 검토하는 과정에서 적지 않은 인사가 과거 표적수사에 따른 피선거권 제한으로 출마가 어려운 상황”이라고 말했다.국민회의는 그동안 민원실 등을 통해 이처럼 ‘억울한’ 선거사범의 실상이 상당수 파악됐다고 주장한다.이날 간부회의에서 참석자들은 “형식논리로 보면 선거법 위반이나,실제로는 야당탄압인 경우가 많다”면서 “이런 선거사범에 대해서는 정치적 배려가 필요하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회의에서는 또 ‘야당탄압’의 근거로 지난 대선때 국민회의는 구속 12명,입건 3명,수배 12명이었으나,한나라당은 단 한건의 입건도 없었던 점을 꼽았다. 국민회의의 선거사범 사면방침은 그러나 공명선거 정착 분위기를 흐릴 수있다는 점에서 반론도 만만치 않다.당장 법무부측은 이날 “부정선거 척결에 심각한 장애를 준다”며 반발했다.한 관계자는 “선거사범을 사면할 경우 선거법 위반행위가 되풀이 돼 공명선거 정착에 큰 장애가 된다”면서 “이런 이유로 과거 특별사면에서도 선거사범은 대상에서 제외해 온 것이 관례”라고 말했다.사면이 단행될 경우 과거 선거사범 처리가 표적수사였음을 스스로 시인하는 결과가 된다는 점도 법무부를 곤혹스럽게 하고 있다. 국민회의측도 이점을 의식한 듯 “표적수사가 명백한 인사에 한해 극히 제한적으로 사면이 이뤄질 것”이라며 “법무부측과 이를 선별하기 위한 방안을 논의하겠다”고 말했다.
  • 달라이 라마­티베트에서 온 편지

    ◎인류의 미래에 보내는 순수한 영혼의 메시지/티베트 문화·피폐한 현실 등 폭 넓게 다뤄 사회가 고도화할수록 우리는 정신적 세계를 동경하게 된다.최근 티베트 혹은 달라이 라마에 관한 책과 영화가 인기를 끌고 있는 것도 그런 연유에서인지 모른다.‘티베트의 사랑과 마법’(알렉산드라 다윗 닐 지음)·‘티베트에서의 7년’(하인리히 하러 지음) 등의 소설이 잇따라 선보인데 이어 영화 ‘티베트에서의 7년’이 개봉됐고 ‘쿤둔’ 또한 곧 개봉될 예정이다.이러한 흐름에 맞춰 최근 또 한권의 ‘지혜의 서’가 출간됐다.도서출판 혜윰에서 펴낸 ‘달라이 라마­티베트에서 온 편지’(매튜 번슨 지음,김기홍 등 옮김)가 그 것이다.특히 이 책은 역대 달라이 라마의 소사에서부터 오늘의 피폐한 티베트 현실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다루고 있어 관심을 모은다. 달라이는 티베트어의 ‘갸초’에 해당하는 몽골어로 ‘큰 바다’를 의미한다.라마는 티베트어로 ‘무상의 스승’이란 뜻.달라이 라마란 곧 대해와 같이 넓고 큰 덕을 지닌 고승을 말한다.그러나 티베트인들은 정작 달라이 라마라고 부르는 것을 피한다.대신 ‘걀와린포체’ 즉 ‘보석과 같은 승자’라고 부른다.이러한 달라이 라마의 칭호는 3대 종정인 소남 갸초에서부터 사용되기 시작했다.이어 초대와 2대에도 이 칭호가 추증됐다.달라이 라마는 5대에 이르러 구파 불교세력을 몰아내고 티베트 전토를 통일했으며 성속양권을 아울러 지니게 됐다.그 뒤 달라이 라마의 정권이 확립됐지만 정국이 불안정해짐에 따라 달라이 라마는 잇따라 희생됐다. 이 책에서 주로 다루고 있는 것은 현재 14대 달라이 라마의 생애와 영적인 가르침이다.14대 달라이 라마인 텐진 갸초는 1935년 티베트 동북지방의 타크처라는 작은 마을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그는 티베트 불교의 전통에 따라 두살 때 달라이 라마의 화신으로 인정받았고,네살 때 티베트의 수도인 ‘금단의 성시’ 라싸의 포탈라 궁전에 모셔졌다.이때부터 그의 특별한 삶의 여정이 시작된다.그는 장난감이나 시계,영사기 등을 분해하고 조립하는 것을 즐기는 호기심 많은 소년으로 성장했다.하지만 장대한 불교의식에서 영도자의 역할을 다하는 그의 흔들림 없는 모습은 주위 사람들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했다. 달라이 라마 14세는 1951년 중국에 의해 점령당한 티베트의 주권을 되찾기 위해 모택동·주은래 등 중국 지도자들과 협상을 벌이는 등 모든 노력을 다했다.그러나 20세기 초까지 고립된 왕국으로 신의 말씀 안에서 살았던 티베트의 발언권은 극히 적을 수 밖에 없었다.결국 1959년 중국의 식민적 수탈과 정치적 탄압에 맞서 티베트 국민들은 일제히 봉기,3천여개의 불교사원이 파괴됐고 1백20만명의 티베트인들이 학살됐다.그해 달라이 라마는 인도로 망명,망명정부를 세웠다. 남녀합환상 부처 앞에 오체투지의 고행객들이 끊이지 않는 곳,정복되지 않은 숨겨진 대지와 순연한 인간의 미소가 스며있는 땅,먼지 알갱이 하나까지 살아 숨쉬는 듯한 신비의 땅….그러나 이 책은 생경한 티베트 문화의 단면들만을 소개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티베트에 대한 중국의 지속적인 고립화 정책과 인권탄압 등 식민정책의 현주소를 고발하는 데에도 적잖은 지면을 내준다.중국정부는 1966년 티베트어의 사용을 금했으며,계획적인 이민정책의 여파로 티베트 문화는 복구할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됐다.중국은 2020년까지 티베트에 약 6천만명의 중국인을 거주토록 한다는 방침이다.이같은 중국측의 폭압에 맞서 달라이 라마 14세는 일관되게 비폭력 평화주의에 입각한 독립운동을 벌여오고 있다.그는 소년시절부터 마하트마 간디의 ‘아힘사’라는 비폭력주의의 영향을 깊이 받았다.1989년 그는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티베트 사람들은 달라이 라마 14세를 ‘아발로키테시바라’ 곧 ‘자비의 부처님’으로 받아들인다.그들은 또한 존경하는 스승을 특별히 ‘쿤둔’이라고 부른다.티베트어로 ‘쿤둔’은 ‘존재’를 뜻하는 말로,보이지 않는 정신적인 힘과 달라이 라마의 영험함을 동시에 나타낸다.평화와 사랑,종교,동포애,인권 등 인류의 영원한 화두에 관해 영감으로 충만한 메시지를 전하는 달라이 라마.그의 드넓은 지혜의 숲을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 만나게 된다.
  • 국채 콘서트/이세기 사빈 논설위원(외언내언)

    후조처럼 이역을 떠돌던 작곡가 안익태는 바르셀로나에서 조국 하늘을 바라보면서 ‘코리아 환타지’‘강상의 논개’‘흰백합화’ 등 조국에 대한 그리움을 음악으로 만들었다. 그가 ‘애국가’를 작곡한 것은 1935년 부다페스트에서였으나 ‘애국가’를 처음 들은 것은 1950년 6·25 참상을 전하는 뉴욕의 텔레비전 뉴스에서다.그는 당시 그가 지휘하려던 뉴욕 필하모니의 레퍼토리를 ‘애국가’가 들어있는 ‘코리아 환타지’로 바꿔 넣었고 ‘애국가는 하나님의 선물이며 나는 하나님의 영감을 조국에 전했을 뿐’이라는 말을 남겼다. 음악인들의 조국에 대한 사랑은 ‘나의 조국에 태양은 빛난다’의 쇼스타코비치나 쇼팽과 시벨리우스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된다.쇼팽은 러시아군이 조국 폴란드의 혁명운동을 탄압한다는 소식에 ‘혁명 에튀드’를 작곡했고 39세로 파리에서 사망할 때는 바르샤바의 흙을 유해에 뿌렸으며 그의 심장은 이송되어 바르샤바 성십자가교회에 안치되었다.시벨리우스의 교향시 ‘핀란디아’도 러시아 치하에 있던 핀란드가 1919년 독립할 때까지 핀란드 국민을 격려하는 힘이 되어 주었다.음악은 통분과 우울,기쁨과 희망이 교차될 때마다 민중의 마음을 움직여 왔고 예술가들은 ‘조국’의 뿌리가 없이는 어떤 위대한 창작도 탄생될 수 없음을 증명해 왔다. 나라 전체가 경제위기로 움츠러든 마당에 음악인들의 ‘국채 판매 촉진’ 해외콘서트는 여간 반가운 노릇이 아니다.‘조국을 위하여(Salute to Korea)’란 타이틀을 내걸고 2월과 3월 서울을 비롯한 미국·일본 순연에서 정부가 발행한 1백억 규모의 국채 판촉에 앞장 선다는 것이다.국제적으로 명성을 굳힌 정명훈을 필두로 신영옥과 장영주,판소리 명창 안숙선과 가야금 명인 양승희가 협연하여 해외교포들에게 한바탕 ‘조국애’를 분발시키게 된다. 음악은 다른 예술이 할 수 없는 설득력으로 그때마다 민중의 희노애락에 깊이 참여해 왔고 민중을 다스리며 선동하고 용기와 힘을 주었다.민족의 단합과 일체감을 촉구하고 한국인의 강인한 민족정신에 호소하려는 음악인들의 의지에 공감과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
  • 중국군 민간인 학살/신강·위구르 180여명

    【알마티 AP 연합】 중국 인민해방군이 지난 2개월동안 신강·위구르자치구에서 2천100명 이상을 체포했으며 분리·독립운동주의자를 포함해 186명을 살해하는 등 ‘인종학살’을 자행하고 있다고 한 분리주의 운동단체가 26일 주장했다. 카자흐스탄공화국 수도 알마티에 본부를 둔 신강·위구르 독립운동단체인 국민혁명전선연합의 무히크딘 무흘리시 대변인은 “이는 명백한 인종학살”이라며 인민해방군의 잔혹행위를 규탄했다. 무흘리시 대변인은 지난달 1일 ‘몰아내고 파괴하자’라는 구호 아래 인민해방군의 대대적인 탄압작전이 시작됐으며 이달 중순에는 11만명의 병력이 추가로 신강지역에 증파됐다고 말했다.
  • 평범한 목사의 항일운동사/창무극단 ‘황제’27일부터 예술의 전당

    무대를 통해 역사속 민족의 기개찾기 작업을 펼쳐온 서울창무극단이 그 다섯번째 작품으로 뮤지컬 ‘황제’(부제 ‘일사각오’)를 무대에 올린다. 27일부터 1월5일까지 서울 예술의전당 토월극장. 이번 무대에선 동명성왕,광개토대왕 등 유명인물을 그렸던 과거와 달리 일제하에서 민족계몽과 항일운동에 생을 바친 한 평범한 목사의 삶을 황제의 위대함에 비유해 그렸다. 극의 주인공인 ‘황제’는 주기철 목사. 그는 청년기를 민족계몽운동에 바치다 뒤늦게 목사가 돼 부산과 마산·평양 등지에서 선교와 항일운동을 활발히 벌였으며 신사참배를 끝내 거부하다 38년 일경에 체포돼 10년형을 선고받고 복역중 광복 1년을 앞두고 옥사한 인물이다. 이번 공연은 그의 탄생 100주년 기념무대이기도 하다. 극은 일제의 탄압과 회유,그리고 그속에서 개인적으로 느끼는 인간적 고뇌와 갈등 등을 중심으로 주목사의 일대기가 춤과 노래,대사의 뮤지컬로 전개된다. “주권을 침탈당한 100년전 상황과 경제주권의 상실위기에 처한 오늘의 현실이 한세기의 시차에도 불구하고 묘하게 닮았습니다. 주목사의 삶을 바라보면서 우리 모두의 민족애와 조국애가 되살아 났으면 좋겠습니다” 작가겸 연출자 오현주씨는 국가적 위기를 맞은 지금 국민 모두에게 ‘황제’를 보여주고 싶다고 말한다. 청년기와 장년기의 주기철역에 탤런트 한인수와 정선일,부인 오정모역에 탤런트 김민정 등 주역배우들이 호화진영으로 짜였으며 총 45명이나 출연한다. 평일 하오 7시,금·토·일 4시·7시. 525­5100.
  • DJ 용인술 ‘힘의 분산’ 원칙

    ◎큰실수 없으면 한번 믿은사람 끝까지 지원/특정분야 전문가 선호… 말 앞서는 사람 경멸 대선승리 이후 당사 주변은 각종 하마평이 무성하다. 하지만정작 임명권자인 김대중 대통령당선자의 심중은 아무도 모르는 듯하다. 다만 40여년의 정치 역경을 뚫고 온 김당선자의 용인술을 통해 면면을 엿볼수 있을 뿐이다. 그동안 ‘사선’을 함께 헤쳐온 측근들과 비서진들의 말을 종합해보면 김당선자의 용병술 제1 핵심은 “절대로 한 사람에게 힘을 실어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숱한 탄압 속에서 살아남아야 했던 김당선자 특유의 정치환경에다 ‘힘의 분산’을 통해 화합과 단결을 중시하는 스타일도 한몫했다는 지적이다. 예컨대 이번 선거기간 중에도 조세형권한대행과 이종찬,한광옥 부총재에게골고루 힘을 분산시키는 3분체제를 유지한 것도 이 때문이다. 한 측근은 “앞으로 실세를 만들기 보다는 중간 실력자들 간에 경쟁하는 분위기를 만들어최선을 다하도록 독려하게 될 것”이라고 점쳤다. 용인술의 두번째 특징은 ‘신중하게 고르되 끝까지 밀어준다’로요약된다. 16년간 김당선자와 호흡을 함께한 L모씨는 “큰 실수가 없는 한 충분히 능력을 발휘할 시간과 공간을 마련해 주는 것이 특징“이라며 “조그만 실수가 있더라도 주어진 역할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경험담을 털어놓았다. 해당 분야의 전문가를 중시하는 ‘실력주의’ 인사에도 대체로 동의하는 분위기다. P모 비서는 “DJ가 살아 온 역정대로 자신의 분야에서 ‘넘버원’으로 꼽히는 사람을 좋아한다”며 “실력보다 말이 앞서는 사람, 잘난체 하는 사람은 경멸하는 정도”라고 못을 박았다. 이 때문인지 교수출신에 대한 의존도가 과거보다 상당히 떨어질 것이란 관측도 적지 않다. 한 측근은 “DJ 자신이 다방면에 대한 연구가 많이 돼 있는상태라 이론보다는 현장에서 몸으로 뛰는 사람을 선택하게 될 것”이라며 “YS정권에서 일부 교수출신들의 실패 경험도 고려하는 것 같다”고 밝혔다.
  • 미 필라델피아시 인디펜던스 홀(세계 문화유산 순례:55)

    ◎미 합중국 독립선언 산실/1776년 7월4일 토머스 제퍼슨 “인간은 평등과 권리…” 선언/당시의 테이블·의자 등 보존/“모든 인류는 나면서부터 평등하고 조물주는 인간에게 몇가지 남에게 넘겨줄 수 없는 권리를 주었다” 【필라델피아(미국)〓나윤도 특파원】 “모든 인류는 나면서부터 평등하고 조물주는 인간에게 몇가지 남에게 넘겨줄 수 없는 권리를 주었다.그 권리 가운데 생명과 자유와 행복을 추구하는 권리가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진리인 것입니다.이 권리를 확보하기 위하여 인류는 정부를 조직하였으며 정부의 정당한 권력은 통치를 받는 국민의 동의로부터 유래하는 것입니다”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시 인디펜던스 홀(Independence Hall)에는 토머스 제퍼슨의 그런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배어있는 지도 모른다. 지금으로부터 220여년전인 1776년 7월4일 제퍼슨은 이 홀에서 독립선언서를 발표했다.그 독립선언서는 지구상에서 처음 인간의 평등과 권리를 바탕으로 한 자유민주주의 정부의 도래를 의미하는 것이었다.지금도 이 기념관에는 당시의 테이블과 의자와 펜,심지어는 녹색 테이블보까지 보존돼 있다. ○녹색 테이블보도 그대로 미국판 독립기념관인 인디펜던스 홀은 미 합중국 탄생의 요람인 필라델피아의 중심에 위치했다.자유의 종(Liberty Bell)과 같은 기념유물들과 주변건물을 함께 묶어 미 국립역사공원으로 지정받은 이 지역은 미국의 독립정신과 넋을 일깨우는 성지이기도 하다. 인디펜던스 홀은 원래 잉글랜드 퀘이커교도들이 세운 펜실베니아 식민지의 정부청사다. 이 건물은 1800년 포토맥강 언덕에 새 수도를 건설할 때까지 연방정부 청사로 사용했다.그 이웃 어셈블리 룸에서는 제2차 대륙회의의 집회장소로 사용되었다.독립선언의 채택과 함께 1787년 연방 헌법도 여기서 통과되는 등 미 합중국 탄생지로서의 역할을 다했던 건물이다. 홀 투어코스의 첫방인 인디펜던스 홀 왼편 부속건물에는 화가 에드워드 새비지가 그린 독립선언 채택 당시의 회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 벽에 걸려 있다.이 그림에는 제퍼슨과 존 애덤스, 로저 셔만, 로버트 리빙스톤, 벤자민 프랭클린등이 등장한다.5명의 독립선언서 기초위원을 대표한 제퍼슨이 존 행콕 의장에게 초안을 제출하는 동안 각 주 대표들이 상기된 표정을 짓고 있는 장면이 묘사되었다. 이 건물은 1732년 당시 변호사이던 앤드류 해밀턴의 설계로 지었다.18세기 조지안 건축양식의 대표적 건물로 꼽힌다. 붉은 벽돌건물 가운데 하얀 시계탑이 우뚝 솟아 매우 정갈한 인상을 안겨준다.중앙건물을 중심으로 좌우에회랑을 통하여 연결되는 부속건물 하나씩을 세웠다.1956년까지 24년 동안 공을 들여 지었다. 이들 부속건물과 약간 떨어진 좌측에는 시청,우측에는 법원 건물이 들어섰다.그러다 식민시대 청산과 함께 필라델피아가 신생 미국의 수도가 되자 대법원과 연방의회로 사용되었다.본래부터 입법 사법 행정 3권의 중심지로 설계된 셈이다.연방의회로 사용한 콩그레스 홀은 워싱턴 대통령의 2차 임기와 2대 대통령 애덤스의 취임선서를 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그이후 영국군과의 전쟁에서 내부의 가구 및 장식들은 대부분 소실되었다.그러나 독립선언서와 연방헌법에 서명하기 위하여 대표들이 사용했던 일부집기는 아직 남아있다.의장석의 은제 잉크스탠드와 제헌회의에서 의장 조지워싱턴이 앉았던 태양의 상반부만 조각된 ‘라이징 선’의자 등이 그것이다.미국 역사에서 가장 보배로운 유물이 아닌가 한다. 인디펜던스 홀 앞쪽 몰광장 한가운데는 리버티 벨이 유리전시관에 보존돼 있다.미국의 자유를 상징하는 이 종은 1752년 펜실베이니아 식민지 창립 50주년을 기념하여 런던에서 주조된 것이다.“온 나라의 국민에게 자유를 선언하노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이 종은 원래 인디펜던스 홀의 중앙 첨탑에 달려 있었으나 건물의 안전을 고려,독립선언 200주년이 되는 1976년 1월1일 현재의 위치로 내려놓고 일반에 공개하고 있다. ○1,800년까지 연정청사로 자유의 종 말고도 많은 건축물에도 미국 독립의 역사가 어려 있다.영국왕 조지3세의 부당한 탄압에 대처하기 위해 1774년 첫 대륙회의를 열었던 카펜터스 홀,제퍼슨이 머물며 독립선언서 초안을 작성했던 그래프 하우스가 있다. 심지어는 당시 정치인들이 주로 모이던 선술집인 시티태번에서부터 최초의 도서관인 라이브러리 홀,첫 은행인 퍼스트뱅크와 세컨드뱅크, 화폐주조국,교역중심지의 역할을 담당했던 필라델피아 익스체인지까지 모두 유서깊은 건물이다.신생 독립국의 초석이 된 이들 건물은 인디펜던스 홀을 중심으로 잘 보존되고 있다. 조용한 퀘이커들의 도시 필라델피아가 미 합중국 탄생의 요람이자 미 정치사의 중심축으로 성장한 데에는 벤자민 프랭클린의 공이 뒷받침되었다.보스턴 출신이나 일찍 필라델피아로 와서 인쇄공으로 출발한 그는 과학자이자 철학자,언론인으로 또 정치가 외교가로 명성을 떨쳤다.‘필라델피아 가제트’라는 신문사를 운영하면서 최초의 소방서,보험회사,종합병원을 설립했다.그리고 피뢰침을 발명하고 미 철학회도 그의 손에 의해 창립되었다. 그는 미 합중국 독립 당시 워싱턴,애덤스,제퍼슨 등 지도자들보다 한 세대 앞선 원로였다. 2차 대륙회의에 참가,독립선언서 기초위원을 지냈으며 프랑스로 건너가 프랑스와의 동맹설립에 일익을 담당하기도 했다.이같은 그의 활동상은 인디펜던스 홀에서 한블록 떨어진 마켓 스트리트에 위치한 프랭클린코트에 잘 보존돼 있다. 인디펜던스 홀 주위에는 ‘상식’이라는 소책자로 식민지의 독립기운을 부추겼던 인사들이 몰려들었다고 한다.토마스 페인을 비롯해 페트릭 헨리,알렉산더 해밀튼 등 그 면면이 모두 당시 미국의 지성들이다.그들의 열띤 토론은 오늘날 지구상에 자유 민주주의의 가치를 정착시키는 초석이 됐던 것이다. ◎여행 가이드/펜실베니아주 동쪽 끝에 위치 ‘형제애의 도시’라는 의미를 가진 필라델피아는 미 대륙 동부 펜실베이니아주의 동쪽 끝에 위치했다.뉴욕과 워싱턴을 연결하는 95번 고속도로의 중간지점쯤 해당한다.인디펜던스 홀은 필라델피아 시가지의 델라웨어강쪽 마켓스트리트와 월넛 스트리트 사이에 있다. 뉴욕이나 워싱턴에서 자동차로 올경우는 95번 고속도로에서 바로 들어오고 앰트랙 기차를 이용할 경우는 필라델피아 중심역인 30번가 역에서 내린다. 그리고 대중교통 편을 이용하는 것이 좋다.
  • 꺼질듯 다시 타올랐던 ‘민주화 불꽃’(하의도에서 북악까지:상)

    ◎망명·투옥 등 역경의 세월/‘40대 기수론’ 정계 새바람/71년대선 95만표차 석패/신군부에 사형언도 받아/3당합당에 92년 또 패배/‘적과의 동침’ 4수끝 집권 후광 김대중.그의 삶은 꺼질듯 하면서도 이내 다시 타오르는 촛불이자,얼은 눈밭에서도 꽃망울을 터뜨리는 인동초이기도 했다. 그의 40년 정치역정은 영과 욕,환희와 좌절이 교차한 한편의 드라마다.특히 유신의 장막이 드리워진 72년부터 6·29선언이 있은 87년까지는 납치와 망명·투옥·연금으로 점철된 가시밭 길의 연속이었다. 그의 민주화에 대한 헌신과 그에 뒤따른 인고의 세월은 11차례나 노벨평화상 후보에 오르는 것으로 국제사회에서 먼저 인정 받았고,이제 당당히 제15대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국민적인 평가를 받은 셈이다. 정치가로서 김대중의 이력은 해방 직후 몽양 여운형이 주도한 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하는 것으로 시작된다.그는 당초 좌우익이 망라됐던 건준의 주도권이 다툼끝에 좌익으로 넘어가자 탈퇴한다.그러나 평생 ‘색깔론’의 꼬리표가 따라붙는 뼈아픈 경력이 됐다.그가 본격적으로 정치에 눈을 돌린 것은 해운업으로 여유가 생긴 54년이다.정치지망생 김대중은 목포에서 민의원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이어 59년 강원도 인제 보궐선거와 60년 5대 민의원 선거에서도 거푸 쓴잔을 마셨다.그는 4.19혁명으로 다시 치러진 61년 5월 인제보선에서 처음 당선됐다.그러나 금배지는 커녕 사흘만에 5·16쿠데타가 나는 바람에 의원선서도 하지 못하고 의원직을 상실하고 만다.그는 군정 기간 동안 모두 3차례나 투옥되는 등 야당정치인으로 본격적인 고난을 겪기 시작했다.그러나 장면박사를 만나면서 민주당 신파의 맥을 잇는 계기가 된다. 그는 63년 6대 총선에서 훗날 정치적 고향이 된 목포에서 다시 출마해 당선되면서 부터 발군의 지략과 달변으로 각광을 받게 된다.6대 국회 초반 6개월동안 13차례나 본회의 발언을 했고,차관도입과 세제특혜·경제개발계획의 문제점 등을 날카롭게 추궁,야당의 경제통으로 명성을 날렸다. 67년 7대 총선에서 다시 당선된 그는 68년 5월 평생의 정치적 동지이자 라이벌이 된 김영삼과의 첫번째 대결인 원내총무경선에서 패한다.그러나 71년대선을 앞둔 신민당 대선후보 지명경선에서 2차투표 끝에 결국 김영삼을 꺾는 대역전을 엮어냈다.이때 김영삼·이철승과 함께 내걸었던 기치가 바로‘40대 기수론’이다. 김대중 후보는 71년 대통령선거에서 바람을 일으켰으나 공화당 박정희 후보에게 95만표차로 석패하고 만다.‘투표에서 이기고,개표에서 진’ 이 선거는 그러나 혼쭐이 난 박정권이 그에 대한 탄압을 본격화하는 직접적인 계기가된다.이때부터 5년반 동안의 투옥과 3년여의 망명,6년반의 가택연금으로 대표되는 그의 험난한 정치인생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특히 71년말 교통사고로 위장한 살해기도를 간신히 모면했으나,그 후유증으로 오른쪽 다리에 장애를 입었다.도쿄에 체류하던 73년 여름에는 중앙정보부원들에 의해 납치되어 수장당할 위기에 빠지기도 했다. 그는 가택연금중이던 1979년 10·26 박정희 대통령이 피살되면서 사면복권되어 정치일선에 복귀했지만 ‘5·17’을 주도한 전두환의 신군부에 의해 내란음모죄로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언도받는다.그는 국제여론과 미국정부의 압력에 힘입어 사형에서 무기,무기에서 20년형으로 감형되어 82년말 죽음의 그림자에서 또 한번 벗어나지만 그 ‘대가’로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야 했다.그는 그곳에서 2년2개월동안 망명 아닌 망명 생활을 했다. 그는 미국에 있는 동안에도 고국의 민주화운동에 힘을 바쳐 국내에 있던 김영삼과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를 결성한다.또 85년 2.12총선을 앞두고 전격 귀국,신민당의 압승을 끌어내는 견인차가 됐다.그의 계속된 민주화운동은 87년 6월항쟁을 촉발시켰고,마침내 직선제 개헌을 쟁취하는 밑거름이 됐다. 그는 87년 대선을 앞두고 김영삼과 함께 이민우의 신민당을 깨고 나와 통일민주당을 창당했다.그러나 김영삼과의 후보단일화에 실패하자 평민당을 창당해 출마하게 된다.그러나 결과는 노태우·김영삼 후보에 이어 3등이었다.대권 재수가 실패로 돌아간 것이다. 평민당은 88년 4.26총선에서 ‘황색돌풍’에 힘입어 원내 제1야당으로 부상한다.그가 정치적으로 재기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된 셈이다.하지만 90년 전격적인 3당 합당으로 입지가 다시 좁아진 결과 92년 14대 대선에 김영삼 후보에게 패해 세번째 도전 역시 실패로 돌아갔다. ‘오늘로 국회의원직을 사퇴하고,평범한 시민이 되겠다’는 유명한 정계은퇴 선언은 이때 나온 것이다.그는 이후 영국으로 건너가 케임브리지대학에서 연구활동에 정진하다 93년 7월 귀국했다.그는 이후 순수한 연구단체를 표방한 ‘아·태평화재단’을 설립하는 등 정치와는 일정한 거리를 두는 모습을 보여주려 애썼다. 그는 95년 지방자치단체장 선거에서 조순 서울시장 후보의 연설원으로 정치일선에 재등장하면서 7월18일 정계복귀를 선언한다.9월5일에는 이기택 총재의 민주당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새정치국민회를 창당,제1야당 총재로 정계전면에 공식으로 복귀했다. 그러나 96년 4·11총선에서 전국구 14번의 배수진을 치고 내각제 개헌저지선인 100석 확보에 총력을 기울였음에도 불구,79석을 얻는데 그쳤다.‘야권분열의 책임자’라는 비난이 거세게 몰아닥쳤다. 40년 정치역정에서 최대 정적의 한사람이자 이념적 좌표가 다른 김종필이 동지가 된 것은 이때 부터다.그는 15대 국회개원과 함께 김종필이 이끄는 자민련과 공조체제를 구축하여 ‘DJ(김대중) 불가론’으로 대표되는 당내 이상기류를 잠재웠다.15대 대통령선거전이 본격화되자 김종필과는 혈맹의 관계로 발전한다.김대중을 두당의 대통령 단일후보로 하는 이른바 DJP연합이 그것이다. 김대중은 1997년 12월18일 제15대 대통령선거에서 결국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를 꺾었다. □김대중 당선자 연보 ▲생년월일=25년 12월3일 ▲출생지=전남 신안군 하의면 ▲44년=목포상업학교 졸업 ▲48∼50년=목포일보 사장 ▲51년=흥국해운 사장,해상방위대 전남지구 부단장 ▲60년=민주당 대변인 ▲61년=5대 민의원 보궐선거 당선(강원·인제) ▲62년=이희호 여사와 결혼 ▲63년=6대의원(목포) ▲65년=민중당 대변인 ▲68년=신민당 정책위의장 ▲71년=7대 대선출마 ▲76∼78년=3·1민주구국선언사건 등 주도 및 투옥. ▲80년=사면복권(2월),5·18 내란음모 사형언도(9월) ▲81년=무기 감형,미국 망명 ▲85년=민추협 공동의장 ▲87년=평민당 창당,13대 대선출마 ▲91년=신민당 창당 ▲92년=14대 대선출마 및 정계은퇴 ▲93년=영국 출국 ▲94년=아태재단 설립 ▲95년=국민회의 창당 ▲97년=15대 대선출마 및 당선
  • 겉으론 차분… ‘인사태풍’에 촉각/김대중시대­관가 표정

    ◎경제부처­조직 개편설 맞물려 대폭 물갈이 걱정/군·검찰­가급적 말 아끼며 오해살 행동 등 자제/청와대­“영호남 갈등해소 계기”… 결과 긍정수용 국민회의 김대중 후보가 대통령당선자로 확정,50년만에 정권교체가 이뤄지자 관가는 앞날의 불투명성으로 술렁이고 있다.그러나 김영삼 대통령은 19일 김후보의 당선을 ‘명예혁명’,‘잘된 일’이라고 평가하면서 청와대 보좌진 등에게 선거결과의 긍정수용을 강조해 눈길을 끌었다. ○…김대통령은 이날 낮 청와대에서 수석비서관들과 오찬을 함께 하면서 “여러분들 마음속으로 지지한 후보가 있을 것”이라면서 “그러나 오늘부터는 생각을 완전히 바꾸어야 한다”고 당부했다.김대통령은 “내가 당선되었을때 국정협조가 잘 안되었다”면서 “나와 당선자와 협력을 통해 우리 국민을 안심시키는 일이 중요하다”고 밝혔다. 김대통령은 이어 “긴 역사로 볼때 김대중 후보의 당선은 잘된 일”이라면서 “암적인 영호남간의 갈등을 씻고 넘어가지 않으면 정치경제 등 모든 것이 제대로 될 수가 없다”고 ‘국민화합’을 역설했다.특히 “김당선자와 나는 40년 가까이 정치를 함께 해왔다”며 ”40대 기수론이 나왔을때는 경쟁자였고 그후로 모진 정치적 탄압을 받던 시절에는 고락을 함께한 동지였다”고 김당선자와의 특별한 관계를 강조했다. ○…사상 첫 정권교체에 겉으로는 차분한 모습이었으나 향후 공직사회가 어떻게 변화할지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모습. 총리실 관계자들은 사상 첫 정권교체로 불어닥칠 ‘인사태풍’에 신경을 쓰면서도 김대중 당선자가 총리실 위상강화를 공약으로 제시했던 만큼 총리실의 위상이 높아질 것을 기대. 총리실의 한 관계자는 “정권교체에 따라 공직사회에 많은 변화가 올 것”이라며 “특히 1급이상 고위공직자들이 불안해 할 것”이라고 나름대로 전망하기도.다른 관계자는 “김당선자가 총리실의 위상강화를 공약으로 내건 만큼 총리실의 위상이 크게 강화되지 않겠느냐”고 기대감을 표시하면서 ‘실세 총리직’을 누가 맡을 지에 촉각. ○…안기부 고위관계자는 이날 “문민정부 들어 안기부는 탈정치를 추구해왔기 때문에누가 대통령에 당선이 되건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이며 특이한 움직임도 없다”고 말했다.그러나 그동안 ‘색깔론’시비를 둘러싼 안기부와 국민회의간 갈등기류를 감안할때 마음이 편하지만은 아닌듯 한 분위기. ○…노동부는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가 첫 기자회견에서 내년도 국정 최우선 과제로 실업대책을 강조함에 따라 현재 마련중인 고용안정 종합대책을 면밀히 재검토하는 한편 노사관계에 비교적 전향적이었던 김대통령당선자가 노동정책을 어떤 방향으로 끌고갈지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웠다. ○…내무부는 김당선자가 공약에서 밝힌대로 ‘지방자치처’로의 전환을 추진할지 여부에 촉각을 곤두세웠다.더욱이 조례제정권을 중앙정부에서 지방자치단체로 이관할 경우 내무부의 기능과 내무관료의 신분에 어떤 변화가 올지 우려하는 모습. ○…군과 검찰 관계자들은 김대중후보의 당선을 ‘순리’로 받아들이면서도 가급적 말을 아끼며,자칫 엉뚱한 오해를 살 가능성을 경계하는 눈치가 역력.군과 검찰 내부에서는 조직의 특성상 과거에김대중 당선자에 대해 비우호적인 분위기가 짙었다는 점 때문에 앞으로 수뇌부 가운데 상당수가 바뀌는 ‘대폭 물갈이’를 점치기도.그러나 화합과 안정이 강조된다면 급작스런 변화는 없을 것이라는 견해도 대두. 국방부는 이번 대선 과정에서 병역시비,현역중령의 시국선언,병무청 직원의 양심선언 등 정치적 사건들이 돌출했음에도 군이 나름대로 정치적 중립을 지켰다고 평가. 군 관계자들은 김당선자가 안정적인 국방비 확보,직업군인 복지문제 등을 대선 공약으로 밝힌데 대해 큰 기대를 하면서 한편으로는 50년만의 첫 정권교체가 군조직에 어떤 영향을 줄 것인지 촉각. 상당수 관계자들은 큰 폭의 수뇌부 교체를 점치고 있지만 일부에서는 김당선자가 집권 후 군의 정치적 중립과 수뇌부의 임기를 보장한다고 밝힌데 대해 기대를 표시. 군 고위관계자는 “19일 상오 김동진 국방부장관 주재로 열린 차관보간담회에서 김장관이 정권인수팀에 대한 원활한 협조를 당부했을 뿐 선거와 관련된 얘기는 전혀 없었다”고 전하고 “군은 정치적 변화에 흔들리지 않고 국가방위에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언급. ○…검찰 관계자들은 지난 8월에 취임,임기를 1년8개월 가량 남겨 둔 김태정 검찰총장 등의 유임 여부를 포함, 수뇌부 인사 문제 등 검찰의 위상 변화 가능성에 대해 큰 관심. 김총장은 검찰의 중립을 위해 도입한 임기제 총장인데다 호남 출신이라는 점에서 도중하차 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견해가 우세.특히 김당선자가 총장의 임기를 보장하겠다고 공언한 사실을 중시. 검찰 관계자는 “야당이 집권했으므로 공안·특수분야 수사의 방향이나 사법처리 기준 등이 상당 부분 달라질 것으로 보이나 경제위기 극복에 총력을 기울인다는 측면에서 현 정부 초기와 같은 강력한 사정은 힘들 것”으로 점치기도. ○…경제부처 관리들도 최초의 야당에 의한 정권교체의 파장을 놓고 술렁이는 표정이 역력하다. 특히 재정경제원의 경우 해체론이 제기되는데다 유달리 경기고 출신과 영남인맥이 많아 긴장도가 다른 부처보다도 훨씬 높다.재경원 관리들이 보통 8시50분쯤 출근하던 것과 달리 19일은 8시30분 이전에 대부분 출근했다.삼삼오오 모여 선거결과를 두고 의견을 나누는 모습도 여기저기서 목격됐다.한 관계자는 “DJ에게 정책보고를 할지는 꿈에도 몰랐다”며 실감나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기도 했다. 금융정책실 분위기는 냉랭하다.겉으로는 “공무원은 시키는대로 할 뿐이다”라며 반응을 자제했으나 “IMF 시대에 잘 할지 걱정된다”고 우려를 표시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관계자는 “2급 이상 실·국장 가운데 호남출신이 단 한명도 없는 것은 인사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라며 “능력이 인사기준의 최우선이 돼야지만 출신지역 때문에 인사에 불이익을 받아서는 안된다”고 반가움을 나타냈다. 며칠동안 1청사로 출근하며 언론과의 접촉을 기피했던 임창열 부총리도 과천청사로 나와 DJ에 대한 보고자료를 챙겼다.1급 이상들은 “그럴 수도 있는 것이지…”라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으나 전전긍긍하는 표정이 눈에 띄었다. 특히 김대중 당선자가 재경원의 비대화를 지적하며 정부조직 개편을 주장한 것에 신경을 쓰고 있다.당장 재경원의 해체 논의가 일것이고 실·국장의 대대적인 물갈이 인사가 불가피할 것이기 때문이다.반면 과장급 이하 관료들은 경직화된 조직에 새바람이 일 것이고 인사에도 숨통이 트일 것이라며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IMF 협상에 참여했던 한 관계자는 “새당선자의 주변에 국내외 금융사정에 밝은 인사들이 없다는게 문제”라고 지적했으며 경제정책국 등 재무부 출신인사 때문에 불이익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몇몇 관계자들은 “차라리 쪼개지는게 낫다”고 말했다.
  • APEC회담 대항 피플스서미트 개최/세계 인권·환경 지도자

    ◎인권·노동·환경문제 등 APEC에 영향력 목적/가 정부 회의비용 부담 【밴쿠버 AP 연합】 내주초 시작되는 APEC(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체) 정상회담에 대항하기 위한 세계 인권 및 환경운동 지도자들의 회의가 APEC 정상회담 개최장소인 캐나다 벤쿠버에서 21일 개최됐다. 이른바 ‘대항정상회담’ 또는 ‘민간정상회담’이라고 불리는 이 ‘피플스 서미트’에는 세계 민간운동 지도자 수백명이 모여 인권침해와 세계화 추세가 고용과 생태계에 미치는 영향,APEC 의제로 다뤄지지 않는 다른 문제들을 집중 다뤘다. ‘피플스 서미트’에는 인권,환경 단체 외에 ‘APEC 반대’,‘APEC 경계’ 등 기구들이 참석하고 있는데 APEC 출범 이후 가장 큰 규모로 열린 이번 회담 조직자들은 18개국 APEC 정상회담에 반대하기 보다는 그들에게 영향력을 미치는데 목적을 두고 있다고 주장했다. 캐나다노동대회의 로버트 화이트 회장,인도네시아 여성인권단체 솔리다리타스 페렘푸안의 타티 크리스나와티 회장,말레이시아 여성단체 테나가니타의 이레네 페르난데스씨 등이패널로 참석,인도네시아의 노조탄압 등 아시아지역의 인권문제와 산업구조 조정에 따른 실직문제 등을 논의했으며 각국 정부지도자들의 노동자 권익을 침해하고 환경을 훼손하는 정책을 추구하고 있다고 입을 모았다.이 회의의 경비는 약 19만5천캐나다달러(미화 약 14만달러)로 역시 APEC회담 주최국인 캐나다정부가 주로 부담하고 있다.
  • 대통령 특별담화와 대선정국(사설)

    김영삼 대통령의 8일 대국민 특별담화는 지금 사실상 진행되고 있는 이번 대통령선거전이 얼마나 혼탁양상을 보이고 있는가에 대한 국정책임자로서의 심대한 우려를 잘 반영하고 있다. 대통령은 이번 선거전 양상을 ‘국가적 위기’로 규정했을뿐 아니라 대통령이 항용 쓰기 조심스러운 초강경 용어들을 총동원해 이의 광정을 다짐하고 있다.우리는 김대통령의 진단에 전적으로 동감하고 매우 적당한 때에 내놓은 적절한 결의로 판단한다. 김대통령은 ‘구국의 차원’에서 이런 혼탁상을 바로잡기위해 국가 공권력을 총동원 하겠다고 약속하고있다.대통령의 이러한 결단이 또다른 정치적 판단에 따라 흔들리는 일없이 확실히 지켜지기를 바랄 뿐이다. 최근 각당이 벌여온 일련의 폭로전과상호비방은 이미 민주국가의 건전한 선거전 양태를 일탈해 있다는 것은 국민 대다수가 공감하고 있는 일이다.납득할만 증거도 없이 ‘카더라’수준의 비방이 마구 쏟아져 나오고 있고 이런 맹랑한 주장들이 언론에 여과없이 보도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대통령이 정치권의그릇된 정쟁을 감시하고 국민에게 올바른 진상을 전달해야할 안내자가 돼주길 바란다는 언론에 대한 특별한 주문은 이 부분과 관련해 언론에 대해서도 불만이 적지않음을 보여주고 있다.언론이 정치권의 주장을 일일이 확인해 보도할 계제에 있지 않다고 해도 언론도 이점 자성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대통령의 담화가 얼마나 실효성을 가질 것이냐 하는데 의문을 갖는 시각도 없지 않다.이미 신한국당이 고발한 ‘김대중 후보 비자금 의혹’에 대한 수사를 검찰이 유보한 일이 있고 나아가 특정후보에 대한 수사가 정치적 탄압이라는 인상을 주어 선거전을 오히려 왜곡할 소지도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법집행에 진심으로 사심이 없다면 그런 염려는 할 필요가 없다고 믿는다.공명정대한 선거관리는 결국 국민의 지지를 받게 될 것이고 법은 지켜져야 하는 것이다.김대통령의 ‘개혁’은 이번 대선을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따라 그 평가가 크게 달라질 수도 있을 것이다. 대통령의 이러한 의지 이전에라도 이번 선거전은 지금까지의 선거와는 다르다는점을 각당은 바로 인식해야 할 것이다.이제 우리정치도 ‘정치적 사안’이라는 해법이 더이상 통하지 않는 단계에 접근해 있다. 이런 변화는 당선이 되더라도 적법하지 못했을 경우 대통령으로서의 직무수행에 결정적인 영향을 받게될 것임을 말해주고 있다.이런 점에서 각당이나 후보들도 각종 선거관련법을 스스로 지키는 노력을 다해야 할 것이다.
  • 사면할 양심수가 누구인가(사설)

    국민회의 김대중 총재가 광주지역 TV토론에서 “집권하면 공산주의자가 아니면서,조국을 사랑했다는 이유로 구속된 사람들을 석방,사면하겠다”고 밝혀 파문이 일고 있다. 김총재는 사면 대상 양심수를 “공산주의자가 아니고 조국을 사랑하는 방법에 차이가 있는 사람”이라고 언급한 것으로 알려졌다.‘양심수’란 국제사면위원회 정의에 따르면 ‘폭력을 사용하거나 옹호하지 않음에도 신념·피부색·인종·언어·종교등의 이유로 구금된 사람’을 뜻한다.이런 양심수는 문민정부 출범후 단 한명도 없다는 것이 정부의 공식 입장이다.그렇다면 김총재는 우선 자신이 언급한 양심수가 누구이며 어떤 혐의로 복역중인 사람들인지를 구체적으로 밝혀야 하리라고 본다. 과거 집권과정에 하자가 있는 권위주의정권 아래서는 민주화 투쟁이 시국·공안사범이란 이름아래 공권력의 탄압 대상이었다.김총재는 물론 김영삼 대통령도 이런 부당한 정치적 탄압의 대상이었으며 아울러 양심수도 적잖이 있었던게 사실이다.그러나 분명 현재의 상황은 그때와는 다르다.한 예로양심수의 대표격이던 김근태씨는 지금 국민회의 부총재로 있으며 복역했던 다른 민주·인권·노동운동가들도 정부,여·야당에서 중책을 맡고있다. 사면 대상으로 지칭한 ‘애국 방법에 차이가 있는 양심수’라든가 ‘공산주의자가 아닌 양심수’라는 것도 위험한 분류방법이다.검거된 고정간첩조차 자신은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민족주의자이며 조국을 사랑하기 때문에 한 행동이라고 간첩행위를 강변하는 것이 현실이다.또 실정법에 어긋난 방법으로 ‘애국’을 했다면 정상참작은 될지언정 법적용은 면할수 없다.한총련 가입을 탄압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한 발언 역시 문제다.이적단체만 단속하고 그 구성원은 놔두라는 주장과 다름 없으니 말이다. 책임있는 정치인 입장에서 김총재는 국가보안법이나 집시법 위반사범을 지칭한 것으로 보이는 ‘양심수’를 거론할 것이 아니라 근본적 문제로 이들 법에 대한 입장이나 좌익사범 처리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당당히 밝히고 국민의 심판을 받는 것이 옳으리라고 본다.북한의 대남적화노선에 전혀 변화의 조짐이 전혀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제기된 ‘양심수 사면’발언이 많은 국민의 불안감을 촉발하지 않았는지 김총재는 심사숙고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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