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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인제의원 구속

    대검 중앙수사부(부장 안대희)는 19일 한나라당으로부터 2억 5000만원의 불법 정치자금을 수수한 자민련 이인제 의원을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구속수감했다. 서울중앙지법 이혜광 영장전담 부장판사는 “이 사건의 유력한 증거는 피의자의 공보특보였던 김윤수(구속)씨의 진술인데 사건 초기 김씨를 회유하려 했던 시도가 엿보인다.”면서 “돈 전달에 관여한 사람이 피의자와 가까운 부인이기 때문에 증거인멸의 우려도 있다.”고 영장발부 이유를 설명했다.체포영장 집행에 한동안 불응했던 점도 감안했다고 덧붙였다. 이 의원은 영장이 발부되자 “사건은 완전히 조작된 것이며 진실은 법정에서 밝혀질 것”이라고 말했다. 이 의원은 대선 직전인 지난 2002년 12월초 김윤수씨를 통해 한나라당이 제공한 불법자금 5억원 중 2억 5000만원을 전달받은 혐의를 받고 있다. 앞서 검찰은 이날 오전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이 의원에 대한 영장실질심사에서 “김씨가 한나라당에서 돈을 받은 혐의로 검찰에 구속되자 보좌관 박모씨를 통해 ‘한나라당에서 받은 5억원을 모두 받은 것으로 진술해 달라.’,‘의리를 지켜달라.’고 회유하지 않았느냐.”면서 회유 사실을 주장했다.그러나 이 의원은 “돈 받은 사실이 없는 만큼 회유한 사실도 없으며,더욱이 박씨는 나의 보좌관도 아니다.”라고 부인했다. 이 의원은 신문 도중 “이 수사는 계획된 정치탄압”이라고 주장하고 “차라리 암살이나 당하면 동정이나 받지만 ‘돈을 받아 먹었다’는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지 않으냐.”며 억울함을 호소하다 눈물을 흘렸다.한편 검찰은 21일 대선자금 사건과 관련된 최종 수사결과를 발표,지난해 8월 ‘SK비자금’ 사건부터 시작된 이번 수사를 사실상 마무리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강충식 정은주기자 chungsik@ ˝
  • 아랍권 석유무기화 ‘들먹’

    유가 불안 심리가 범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다.중동 정세의 악화와 세계적 테러의 빈발 등으로 국제유가가 14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한 가운데 석유를 무기화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이슬람권 내에서 제기되면서 제3차 오일 쇼크에 대한 우려도 제기된다. ●“美 탄압에 대항 수단” 마하티르 모하마드 전 말레이시아 총리가 ‘석유의 무기화’를 재차 주장하고 나섰다.지난해 10월 퇴임한 마하티르 전 총리는 9일자 말레이어 일간지 민구안 말레이시아에 실린 인터뷰 기사에서 아랍권에 석유를 무기로 미국의 탄압에 대항하자고 촉구했다. ●사우디 “최소 150만배럴 증산” 10일 뉴욕상업거래소 시간외 전자거래에서 서부텍사스산중질유(WTI) 6월 인도분 가격이 배럴당 40센트 떨어진 39.53달러에 거래되고 있으며 싱가포르에서는 낮 12시 현재 배럴당 39.70달러로 국제유가가 소폭 떨어졌다.이같은 하락세가 지속될 것으로 보는 이는 많지 않다.그러나 유가 급등이 당장 ‘오일쇼크’로 이어지진 않을 것으로 보는 전문가들이 더 많은 편이다.한편 알리 나이미 사우디아라비아 석유장관은 10일 최소한 하루 150만배럴 이상의 증산을 석유수출국기구(OPEC) 회원국들과 논의할 것이라고 밝혔다. 김균미기자 kmkim@
  • 처우개선 요구 택시노련 기사 분신

    7일 오후 4시 35분쯤 서울 광화문 열린시민마당 앞에서 민주택시노동조합연맹이 택시회사에 대한 세무조사 등을 촉구하는 집회를 갖던 중 노조원 조경식(44·정우교통 소속)씨가 온몸에 신나를 뿌리고 분신 자살을 기도,중태에 빠졌다. 조씨는 집회 도중 갑자기 연단에 올라 우유팩에 든 신나를 몸에 붓고 택시운전자 처우개선,정우교통 노조에 대한 사측의 탄압중단 등의 내용을 담은 B5크기의 자필 유인물 10여장을 뿌린 뒤 분신했다.조씨는 온몸에 3도 화상을 입고 강북삼성병원에서 응급치료를 받은 뒤 한강성심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고 있다. 장택동기자 taecks@˝
  • 멕시코, 쿠바대사 추방키로

    |멕시코시티 연합|중남미에서는 유일하게 쿠바와 외교관계를 끊은 적이 없는 멕시코가 쿠바와 외교단절 일보 직전까지 가는 등 양국 관계가 전례없이 급랭하고 있다. 이번 일은 멕시코가 유엔인권위 대 쿠바 결의안에 찬성하자, 멕시코 야당 거물 측근 비리를 둘러싼 이른바 ‘비디오 게이트’는 멕시코 연방정부의 야당 탄압을 위한 ‘조작극’이라는 쿠바 정부의 성명이 나오면서 촉발됐다. 루이스 에르네스토 데르베스 멕시코 외무장관은 2일 오후 기자회견을 통해 쿠바 주재 자국 대사를 소환하는 동시에 자국 주재 쿠바 대사를 멕시코에서 추방키로 결정했다고 전격 발표했다. 데르베스 장관은 또 자국 주재 쿠바 대사관의 정치담당 고문을 ‘기피인물’로 규정했다며 당장 멕시코를 떠나라고 밝혔다. 데르베스 장관은 자국 정부가 쿠바와 외교관계를 완전히 중단하지는 않아도 양국간 관계를 대리대사(공사)급 수준으로 낮추었다면서,양국의 대사들은 48시간 안으로 본국으로 떠나야 한다고 말했다.˝
  • [사설] 반성 필요한 ‘대학생 강제징집’ 협조

    1980년대 운동권 대학생들의 강제징집이 당시 권부의 치밀한 계획아래 조직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조사 결과 밝혀졌다.강제징집은 청와대의 지시아래 문교부(교육부),국방부,중앙정보부,보안사령부,경찰,검찰,그리고 각 대학들이 광범위한 협조체계를 이뤄 실행됐다는 것이다.특히 각 대학이 문교부의 통제와 지시에 따라 운동권 학생들의 동향을 관리했고,제적 등 징계조처를 내리거나 구속,군입대,구류 등 처리결과를 보고했다는 대목은 충격적이다. 대학생 강제징집은 권위주의 시대,학생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동원된 위법한 권력 행사였다.그 시대 학교를 다녔던 사람들은 어느날 갑자기 캠퍼스에서 자취를 감춘 학우와 그 빈자리를 메웠던 음습한 권력의 공포를 기억한다.1981∼1983년에만 강제징집자가 447명,이들중 265명은 입대 후에도 갖은 회유와 협박,구타 등 이른바 ‘녹화사업’에 시달렸다.도중 의문사한 학생도 6명이나 된 것이 대학생 강제징집의 결과다. 이런 부도덕한 일에 행정부와 공권력이 동원된 것만도 비판받을 일인데 하물며 지성과 양심의 요람인 대학당국의 협조 사실은 그냥 지나칠 일이 아니다.깊은 반성이 필요하다고 본다. 물론 감독기관인 문교부의 지시라서 불가피했다는 변명이 있을 수 있다.발표에 나타난 것 같이 이른바 ‘문제학생’ 숫자를 줄이기 위해 학내 정보요원에게 로비를 하는 등 나름대로 노력했다는 해명도 가능하다.그러나 이런 정당화가 일상 속에 정의를 실종시켜 왔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지성의 요람다운 대응을 기대한다.˝
  • ‘제5회 광주인권상’ 아웅산 수치

    제5회 광주인권상 수상자로 미얀마 민주화운동 지도자 아웅산 수치(59) 여사가 선정됐다.5·18기념재단(이사장 박석무)은 27일 “군부독재의 무자비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비폭력으로 민주화운동을 펴고 있는 수치 여사를 올해 광주인권상 수상자로 결정했다.”고 밝혔다.그는 영국 옥스퍼드대학에서 정치학을 공부한 후 88년 귀국해 군부통치에 반대하는 시위를 이끄는 등 민주화운동에 앞장서오면서 수차례 가택연금을 당하기도 했다.1991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시상식은 다음달 18일 오후 5시 5·18기념문화센터 대동홀에서 열리며,1만달러와 금장메달 등을 수여한다.˝
  •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33)여자라는 이름의 논개(下)

    논개가 왜장을 죽이고 자신도 투신함으로써 사건은 일단락됐다.그런데 왜장 기다 마코베의 죽음이 있은 뒤 진주성에 주둔하던 왜적들이 스스로 진주를 떠나자 진주사람들은 이를 예사롭게 보지 않았다.논개의 혼이 왜적들을 물리친 것이라고 여기게 된 것이다.그리하여 남강 기슭 맨바닥에 조촐하게 제상을 차리고 고맙다는 인사를 올렸다. 진주 사람들이 보기로는 진주는 물론 조선 모두를 돌아보아도 민중들의 가슴에 응어리져 있는 국가와 유생 관리들에 대한 미움과 원한을 씻어내고 위로해 주는 사람으로 논개만 한 이가 없었다.민중들이 비록 무지하고 빈곤하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어야 할 인정과 의리,사람과 하늘 사이에 있어야 할 생명존중과 함께 사는 이치를 알고 실천하는 것으로 치자면 양반관료들보다 훨씬 나았다.양반관료들은 자기 이익과 편리를 지키기 위해 민중들이 글 배우는 것을 막고,토지를 소유하지 못하게 했으며,끝없는 의무와 복종만을 강요하는 법과 제도를 휘둘러 왔었다. 더욱이 임진왜란이 터진 뒤로 보여 준 양반관료들의 비겁함과 무능은 극치를 이루었고,그런 자들을 믿고 의지하면서 그날까지 살아 온 것을 후회했다.공자 맹자며 유학이며 성리학,향교 서당이며,정승 판서 따위가 그토록 치사하고 졸렬한 것인지를 뼈저리게 느꼈다. 왜적이 쳐들어오자 양반관료들은 우마차에다 금은보배와 첩실까지 챙겨 싣고는 깊은 산중으로 도망쳤다.오도 가도 못하고 남은 민중들은 고스란히 왜적들에게 유린당했다.그때 논개라는 기생이 왜장을 죽이고,놀란 왜적들이 황망히 진주성을 버리고 도망가자 진주는 금방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났다.그 공적은 단연코 논개에게 돌아가는 것이 옳다고 믿었다.그래서 남강 기슭에다 제상을 차려 놓고 울면서 절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이 민중의 마음이었다.솔직하고 진솔한 예절이었다.이런 광경을 서울에서 내려 온 암행어사가 보았다.진주성 전투가 남긴 가장 감동적인 사건이자 양반관료들에 대한 묵시적 항거이기도 한 이 사건은 곧 정부에 전해졌지만 정부에서는 묵살해버렸다.부끄러웠기 때문이리라. ●도망치기 바빴던 양반들 버젓이 공신에… 그 후 진주성 전투에 대한 논공행상이 있었다.그런데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 벌어졌다.진주성 전투에 참여하지 않고 온갖 핑계로 다른 곳에 있던 양반관료들과 도망가서 숨어 있다가 전쟁이 끝난 뒤에 돌아온 양반들이 공신으로 오른 반면,전라도에서 의병으로 와 죽은 이들의 이름은 아예 들먹이지도 않은 것이다.몇 몇 대표급 전라도 의병장들은 전쟁공훈자로 이름이 올랐지만 더 많은 사람들은 모두 제외되었다.게다가 하나같이 남자들뿐이었다. 화려한 직함과 함께 사당에 위패가 모셔지고,봄 가을로 나라에서 장만한 제물을 차려 놓고 제사를 올렸다.어떤 때에는 왕이 손수 지은 축문이 내려지기도 했다.진주사람들이 보기로는 당연히 논개의 이름도 공훈자 반열에 올라야 하고,사당을 짓고 제수도 내려주는 것이 온당한 처사라고 여겼지만 유생들이 장악하고 있는 조정에서는 어느 누구도 논개의 이름을 거론하는 자 없었다.험한 말로 개나 소도 훈장을 받는데 어찌하여 논개를 이렇게 홀대할 수 있느냐는 분노가 일기 시작했다.민중들의 서운함 안에는 그동안 국가로부터 천시당하고 억압받았으며 수탈과 능멸로 고통받아온 자신들의 불만도 들어 있었다. 그때부터 논개가 죽은 날만 되면 진주사람들이 남강가에 모여서 성대한 제사를 올리기 시작했다.그 잘난 남자들은 위패 위에 올라서 사당의 향내를 맡으며 국가가 내린 제물을 받았다.논개는 민중 개개인들이 장만한,소박하지만 진실이 어린 조촐한 제물들을 받았다.제상이 없을 때도 있었다.강가 모래 위에다 거적을 깔고 그 위에다 제물을 진설했다.유교 예절에 따른 제상 배열이 아니라 민중들이 마음대로 차린 제상이었다.향로 대신 모래를 모아서 향을 피웠다.제사에는 수백 명의 제관들이 참여했다.그들 어느 누구도 논개의 형제나 친인척이 되는 이는 없었다.논개를 안다거나 만나본 사람도 없었다.다만 소문으로만 들었을 뿐이다.그런데도 제 부모 형제의 제사보다 훨씬 더 진지하고 엄숙했다.누가 참석하라고 지시한 것도 아니었다.논개의 죽음에 감동한 민중들 스스로가 제관이 된 것이다. ●진주 민중 146년간 탄원… 영조때 사액내려 제사가 끝난 뒤엔 논개의 죽음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아야 한다는 토론이 벌어졌다.대표자가 뽑히고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한 비상대책위원회도 만들어졌다.대표자 중에는 정식(1683∼1746) 같은 선비도 있었다.그를 중심으로 한 비대위에서는 먼저 진주목사와 경상우병사에게 탄원서를 제출했다.이렇게 시작된 탄원서는 그 뒤로 대를 이으면서 계속되었다. 진주목사나 경상우병사로 부임하는 사람은 누구든 이 탄원서로 골머리를 앓았다.참으로 집요하게 계속되는 탄원서 중에는 가끔 비변사나 왕에게까지 전달된 적도 있었다.그러나 묵살로 일관했다.진주사람들도 오기가 있었다.끝까지 가보자며 탄원서를 쉬임없이 올렸고,그때마다 새롭고 놀라운 사실들을 추가시켰다.그러기를 146년 동안이나 계속했다. 결국 조선 정부에서도 더는 논개의 공적을 묵살할 수 없었다.그리하여 1740년(영조16) 정부에서는 ‘의기논개지문(義妓論介之門)’이란 사액(賜額)을 내려 논개의 공적을 공식화했다.죽은 지 146년 만에 사당이 지어지고,위패가 모셔져 눈비 맞으며 강가에서 민중들이 모시던 제사가 소원을 이룬 것이다. 그 후 진주목사 정현석은 논개의 삶이 지닌 역사적 큰 뜻을 기려서 ‘의암별제(義岩別祭)’라는 매우 소중한 제례의식을 창안하여 논개의 삶을 기림과 동시에 진주사람들의 끈질기고 뜨거운 논개 사랑을 예술로 승화시킨 행사를 만들었다. 의암별제는 몇 가지 특징이 있었다.단순한 제사의식이 아니라 조선의 넋과 멋을 모두 담고 있는 악(樂),가(歌),무(舞)를 근간으로 3일 밤낮 계속되는 화려하고 장엄한 대제전으로서 민족예술을 지향했다는 점이다.또한 논개의 죽음이 지닌 자유정신과 혁명성을 담아내기 위해 제사가 끝난 뒤 사흘 밤낮으로 뒤풀이가 벌어지는데,사방에서 몰려든 인파가 남강가에서 축제를 벌였다.이리하여 의암별제는 진주 특유의 풍류가 되었고 문화잔치였으며 전국 최초의 예술행사의 전형이 되기도 했다. ●성계옥 선생 82년 만에 ‘의암별제’ 재현 이렇듯 품격과 재미를 균형있게 구비한 의암별제를 통하여 논개 정신의 불멸성을 민중 속에 심어오던 이 예술행사는 한일병합 이후 총독부로부터 조선민족주의 선전 행사로 지목되어 탄압받다가 끝내 금지되었다.의암별제를 주도했던 진주기생들은 일본 경찰의 감시를 피해 촉석루에 숨어들어 제사를 모시기도 했다.발각당한 기생들은 고문을 받아 의암별제 명맥이 끊어졌다.그 뒤 나이 든 기생들은 해마다 제사 때가 되면 촉석루 대신 의암에 올라 주먹으로 바위를 치면서 절규하기도 했다. 의암별제는 단절된 지 82년 만인 1992년에 성계옥 선생에 의하여 재현되어 다시 볼 수 있게 된,우리나라에서 유일한 형식의 제사의식을 겸한 예술의 한 형식이다. 이렇듯 논개는 진주사람이나 전북 장수인들만의 논개가 아니라 한국인의 가슴 속에서 자라나고 있는 조선의 마음이다.논개의 근대성은 오늘날 한국 여성들의 진취성과 도전정신의 원류이자 성차별의 시대상을 온 몸으로 극복해 낸 한국여성의 전설이다.혼자서 꾸는 꿈은 꿈으로 끝나지만 여럿이서 함께 꾸는 꿈은 현실이 된다.눈 앞의 이익을 좇는 삶은 이웃의 삶까지 더럽힌다는 역사적 교훈을 오늘에 다시 되새기게 한다.‘여성을 바로 보지 못하면 인간의 미래는 어둡다.’는 명제를 우리에게 안겨 준 논개. 올 봄 진주에는 논개를 새롭게 이해하기 위한 축제가 열린다.사랑하는 사람들이여,논개를 만나거든 물어보시라.누가 논개를 죽었다고 하는지.˝
  •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33)여자라는 이름의 논개(下)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33)여자라는 이름의 논개(下)

    논개가 왜장을 죽이고 자신도 투신함으로써 사건은 일단락됐다.그런데 왜장 기다 마코베의 죽음이 있은 뒤 진주성에 주둔하던 왜적들이 스스로 진주를 떠나자 진주사람들은 이를 예사롭게 보지 않았다.논개의 혼이 왜적들을 물리친 것이라고 여기게 된 것이다.그리하여 남강 기슭 맨바닥에 조촐하게 제상을 차리고 고맙다는 인사를 올렸다. 진주 사람들이 보기로는 진주는 물론 조선 모두를 돌아보아도 민중들의 가슴에 응어리져 있는 국가와 유생 관리들에 대한 미움과 원한을 씻어내고 위로해 주는 사람으로 논개만 한 이가 없었다.민중들이 비록 무지하고 빈곤하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어야 할 인정과 의리,사람과 하늘 사이에 있어야 할 생명존중과 함께 사는 이치를 알고 실천하는 것으로 치자면 양반관료들보다 훨씬 나았다.양반관료들은 자기 이익과 편리를 지키기 위해 민중들이 글 배우는 것을 막고,토지를 소유하지 못하게 했으며,끝없는 의무와 복종만을 강요하는 법과 제도를 휘둘러 왔었다. 더욱이 임진왜란이 터진 뒤로 보여 준 양반관료들의 비겁함과 무능은 극치를 이루었고,그런 자들을 믿고 의지하면서 그날까지 살아 온 것을 후회했다.공자 맹자며 유학이며 성리학,향교 서당이며,정승 판서 따위가 그토록 치사하고 졸렬한 것인지를 뼈저리게 느꼈다. 왜적이 쳐들어오자 양반관료들은 우마차에다 금은보배와 첩실까지 챙겨 싣고는 깊은 산중으로 도망쳤다.오도 가도 못하고 남은 민중들은 고스란히 왜적들에게 유린당했다.그때 논개라는 기생이 왜장을 죽이고,놀란 왜적들이 황망히 진주성을 버리고 도망가자 진주는 금방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났다.그 공적은 단연코 논개에게 돌아가는 것이 옳다고 믿었다.그래서 남강 기슭에다 제상을 차려 놓고 울면서 절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이 민중의 마음이었다.솔직하고 진솔한 예절이었다.이런 광경을 서울에서 내려 온 암행어사가 보았다.진주성 전투가 남긴 가장 감동적인 사건이자 양반관료들에 대한 묵시적 항거이기도 한 이 사건은 곧 정부에 전해졌지만 정부에서는 묵살해버렸다.부끄러웠기 때문이리라. ●도망치기 바빴던 양반들 버젓이 공신에… 그 후 진주성 전투에 대한 논공행상이 있었다.그런데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 벌어졌다.진주성 전투에 참여하지 않고 온갖 핑계로 다른 곳에 있던 양반관료들과 도망가서 숨어 있다가 전쟁이 끝난 뒤에 돌아온 양반들이 공신으로 오른 반면,전라도에서 의병으로 와 죽은 이들의 이름은 아예 들먹이지도 않은 것이다.몇 몇 대표급 전라도 의병장들은 전쟁공훈자로 이름이 올랐지만 더 많은 사람들은 모두 제외되었다.게다가 하나같이 남자들뿐이었다. 화려한 직함과 함께 사당에 위패가 모셔지고,봄 가을로 나라에서 장만한 제물을 차려 놓고 제사를 올렸다.어떤 때에는 왕이 손수 지은 축문이 내려지기도 했다.진주사람들이 보기로는 당연히 논개의 이름도 공훈자 반열에 올라야 하고,사당을 짓고 제수도 내려주는 것이 온당한 처사라고 여겼지만 유생들이 장악하고 있는 조정에서는 어느 누구도 논개의 이름을 거론하는 자 없었다.험한 말로 개나 소도 훈장을 받는데 어찌하여 논개를 이렇게 홀대할 수 있느냐는 분노가 일기 시작했다.민중들의 서운함 안에는 그동안 국가로부터 천시당하고 억압받았으며 수탈과 능멸로 고통받아온 자신들의 불만도 들어 있었다. 그때부터 논개가 죽은 날만 되면 진주사람들이 남강가에 모여서 성대한 제사를 올리기 시작했다.그 잘난 남자들은 위패 위에 올라서 사당의 향내를 맡으며 국가가 내린 제물을 받았다.논개는 민중 개개인들이 장만한,소박하지만 진실이 어린 조촐한 제물들을 받았다.제상이 없을 때도 있었다.강가 모래 위에다 거적을 깔고 그 위에다 제물을 진설했다.유교 예절에 따른 제상 배열이 아니라 민중들이 마음대로 차린 제상이었다.향로 대신 모래를 모아서 향을 피웠다.제사에는 수백 명의 제관들이 참여했다.그들 어느 누구도 논개의 형제나 친인척이 되는 이는 없었다.논개를 안다거나 만나본 사람도 없었다.다만 소문으로만 들었을 뿐이다.그런데도 제 부모 형제의 제사보다 훨씬 더 진지하고 엄숙했다.누가 참석하라고 지시한 것도 아니었다.논개의 죽음에 감동한 민중들 스스로가 제관이 된 것이다. ●진주 민중 146년간 탄원… 영조때 사액내려 제사가 끝난 뒤엔 논개의 죽음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아야 한다는 토론이 벌어졌다.대표자가 뽑히고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한 비상대책위원회도 만들어졌다.대표자 중에는 정식(1683∼1746) 같은 선비도 있었다.그를 중심으로 한 비대위에서는 먼저 진주목사와 경상우병사에게 탄원서를 제출했다.이렇게 시작된 탄원서는 그 뒤로 대를 이으면서 계속되었다. 진주목사나 경상우병사로 부임하는 사람은 누구든 이 탄원서로 골머리를 앓았다.참으로 집요하게 계속되는 탄원서 중에는 가끔 비변사나 왕에게까지 전달된 적도 있었다.그러나 묵살로 일관했다.진주사람들도 오기가 있었다.끝까지 가보자며 탄원서를 쉬임없이 올렸고,그때마다 새롭고 놀라운 사실들을 추가시켰다.그러기를 146년 동안이나 계속했다. 결국 조선 정부에서도 더는 논개의 공적을 묵살할 수 없었다.그리하여 1740년(영조16) 정부에서는 ‘의기논개지문(義妓論介之門)’이란 사액(賜額)을 내려 논개의 공적을 공식화했다.죽은 지 146년 만에 사당이 지어지고,위패가 모셔져 눈비 맞으며 강가에서 민중들이 모시던 제사가 소원을 이룬 것이다. 그 후 진주목사 정현석은 논개의 삶이 지닌 역사적 큰 뜻을 기려서 ‘의암별제(義岩別祭)’라는 매우 소중한 제례의식을 창안하여 논개의 삶을 기림과 동시에 진주사람들의 끈질기고 뜨거운 논개 사랑을 예술로 승화시킨 행사를 만들었다. 의암별제는 몇 가지 특징이 있었다.단순한 제사의식이 아니라 조선의 넋과 멋을 모두 담고 있는 악(樂),가(歌),무(舞)를 근간으로 3일 밤낮 계속되는 화려하고 장엄한 대제전으로서 민족예술을 지향했다는 점이다.또한 논개의 죽음이 지닌 자유정신과 혁명성을 담아내기 위해 제사가 끝난 뒤 사흘 밤낮으로 뒤풀이가 벌어지는데,사방에서 몰려든 인파가 남강가에서 축제를 벌였다.이리하여 의암별제는 진주 특유의 풍류가 되었고 문화잔치였으며 전국 최초의 예술행사의 전형이 되기도 했다. ●성계옥 선생 82년 만에 ‘의암별제’ 재현 이렇듯 품격과 재미를 균형있게 구비한 의암별제를 통하여 논개 정신의 불멸성을 민중 속에 심어오던 이 예술행사는 한일병합 이후 총독부로부터 조선민족주의 선전 행사로 지목되어 탄압받다가 끝내 금지되었다.의암별제를 주도했던 진주기생들은 일본 경찰의 감시를 피해 촉석루에 숨어들어 제사를 모시기도 했다.발각당한 기생들은 고문을 받아 의암별제 명맥이 끊어졌다.그 뒤 나이 든 기생들은 해마다 제사 때가 되면 촉석루 대신 의암에 올라 주먹으로 바위를 치면서 절규하기도 했다. 의암별제는 단절된 지 82년 만인 1992년에 성계옥 선생에 의하여 재현되어 다시 볼 수 있게 된,우리나라에서 유일한 형식의 제사의식을 겸한 예술의 한 형식이다. 이렇듯 논개는 진주사람이나 전북 장수인들만의 논개가 아니라 한국인의 가슴 속에서 자라나고 있는 조선의 마음이다.논개의 근대성은 오늘날 한국 여성들의 진취성과 도전정신의 원류이자 성차별의 시대상을 온 몸으로 극복해 낸 한국여성의 전설이다.혼자서 꾸는 꿈은 꿈으로 끝나지만 여럿이서 함께 꾸는 꿈은 현실이 된다.눈 앞의 이익을 좇는 삶은 이웃의 삶까지 더럽힌다는 역사적 교훈을 오늘에 다시 되새기게 한다.‘여성을 바로 보지 못하면 인간의 미래는 어둡다.’는 명제를 우리에게 안겨 준 논개. 올 봄 진주에는 논개를 새롭게 이해하기 위한 축제가 열린다.사랑하는 사람들이여,논개를 만나거든 물어보시라.누가 논개를 죽었다고 하는지.
  • 美 “바트당출신 재기용”

    이라크 민주화를 위한 미국의 이라크 정책 가운데 핵심사항의 하나였던 사담 후세인 전 이라크 대통령의 집권세력인 바트당 출신자들을 임시정부에서 전면 배제한다는 정책이 이들을 다시 재기용하는 쪽으로 일대 선회하면서 논란이 일고 있다. 스콧 매클렐런 미 백악관 대변인은 23일 바트당원 출신이더라도 후세인 체제에서 잔혹한 탄압에 직접 개입하지 않고 이름만 당적에 걸어두었던 사람들이라면 앞으로 유엔과 함께 구성할 이라크 새 정부에 기용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같은 미국의 방향 전환은 ▲바트당 출신자들을 제외하면 이라크 내에서 훈련된 전문인력을 구하기 어려운 데다 새 인력을 훈련시킬 시간도 절대적으로 부족해 이같은 전문인력의 부족이 교육과 의료,행정서비스 같은 사회 전반의 실무 분야에 행정공백을 부르고 있고 ▲바트당원들이 대부분 이라크내 최대 저항세력으로 떠오른 수니파 출신들로 기본적 권리를 박탈당하고 있다는 이들의 불만이 저항을 더욱 격화시키고 있다는 점을 고려한 때문으로 보인다. 실업률이 70% 안팎에 이르는 가운데 지금 이라크 국민들의 최우선 목표는 다름아닌 일자리를 갖는 것이다.이런 가운데 40만명이 넘는 바트당원 출신자들이 단지 바트당에 이름을 올렸다는 이유만으로 일자리를 구할 기회마저 원천적으로 차단당하고 있다.달리 어떻게 해볼 기회조차 없는 이들이 택할 수 있는 길은 결국 자신들을 외딴 절벽으로 몰아넣은 미국에 저항하는 것밖에 없다. 미 연합군의 댄 세너 대변인은 “새로운 이라크에 바트당 이데올로기가 들어설 자리는 없으며 범죄와 잔학행위를 직접 자행한 바트당 간부가 새 정권에 들어올 가능성은 없다.”고 말했다.아무 죄없이 축출된 바트당 전문가들만 재기용될 것이란 얘기다. 그러나 후세인 독재 치하에서 박해받았던 세력들은 즉각 반발하고 나섰다.과도정부에서 ‘탈바트당화’ 작업을 추진해온 아흐마드 찰라비 위원은 “바트당원들을 재기용하는 것은 2차대전 직후 나치당원을 독일 정부에 참여시키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면서 이는 이라크를 민주체제로 전환시키는 데 큰 문제를 야기할 것이며 이라크 새 정부를 위험에 빠뜨려 6월30일 주권 이양 이후 결국 새 정부를 붕괴시킬 것이라고 강력히 경고하고 있다. 유세진기자 yujin@˝
  • [사설] 불법 대선자금 ‘출구조사’ 하라

    대선자금 ‘출구조사’파문이 증폭되고 있다.검찰이 출구조사를 시사한 데 이어 17대 총선에서도 당선된 한나라당 현역 의원들이 지구당에 지원된 대선 자금과 관련,검찰 수사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두 의원은 정치적 라이벌이 고발한 특수한 경우이지만 검찰 수사는 결국 출구조사가 될 것이기 때문에 전국적인 수사로 확대되는 도화선이 되기 십상이다.대선자금에 대한 검찰의 출구조사가 현실로 이뤄질 경우 적지 않은 여야 의원들이 그 대상이 되어 정치권에 일대 회오리를 몰고 올 것이다. 한나라당은 검찰의 행보에 ‘야당 죽이기’라며 반발하고 나섰다.검찰이 출구조사 대상기준으로 1억원을 언급한 것을 문제삼아 형평성 있는 법집행을 요구한 것이다.‘1억원 잣대’는 결국 한나라당을 겨냥하는 현실을 지적한다.대선 당시 227개 지구당에 42억 5000만원을 지원한 노무현 캠프는 출구조사에서 제외되는 반면 606억원을 내려 보낸 한나라당은 대부분 대상에 포함된다.지원된 선거자금을 제대로 쓰지 않았다면 액수에 관계없이 사법적 책임은 동일한데도 검찰이 자의적 기준을 만들어 결과적으로 야당을 탄압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한나라당의 문제제기는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형평성을 잃은 법집행은 갖가지 오해를 불러 올 것이다.그러나 불법 대선자금 출구조사는 이뤄져야 한다.형평성을 이유로 엄정한 법집행이 포기되어선 안 된다.또 문제의 대선자금을 국가에 헌납한다 해서 출구조사의 명분이 없어지는 것 또한 아니다.형평성이 문제된다면 여야의 모든 대선자금에 대해 출구조사를 하면 될 일이다.반사회적인 불법은 어떤 명분으로도 묵인되어선 안 되는 까닭이다.˝
  • [열린세상] 그때 그녀들을 아시나요?/임옥희 여성문화이론연구소 대표

    주말 드라마 ‘발리에서 생긴 일’이 젊은층의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던 적이 있었다. 그 드라마에서 도시빈민 미혼모의 아들인 인욱은 재벌 2세인 재민에게 끌리고 있는 고아출신 수정에게 안토니오 그람시의 ‘옥중수고’를 빌려준다. 수정은 그람시를 알 턱 없는 친구 미희에게 그람시를 아느냐고 묻는다.미희는 “그람시는 모르겠고,그람시 난 고만 갈란다.”라고 말함으로써 그람시를 일시에 농담으로 만들어버린다. 그 날 이후 ‘옥중수고’는 한동안 인터넷 검색어 1순위에 올랐고,교보문고에서 불티나게 팔렸다는 소문이 파다했다.인터넷 세대들이 과연 안토니오 그람시를 알아서 그랬을까? 모르긴 몰라도 자신이 좋아하는 드라마에서 좋아하는 주인공이 그람시를 언급했기 때문에 그람시를 소비했을 터였다.드라마에 등장하는 패션과 명품뿐만 아니라 ‘붉은’ 책도 이미지로 소비되다니,과연 이미지 시대임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탈리아 공산당 지도자이자 장애인이었던 그람시가 절절히 원했던 것 중 하나가 ‘유기적 지식인’이었다. 유기적 지식인은 프롤레타리아트 출신이기 때문에 온몸으로 자기계급을 대변할 수 있는 지식인/활동가를 뜻한다.외부로부터 수입된 부르주아 출신 지식인들은 애써 노동자를 ‘위하여’라고 말하지만 유기적 지식인은 그럴 필요가 없는 사람들이다.자신의 이해관계와 자기 계급의 이해관계가 일치하기 때문이다. 민노당 비례대표로 17대 국회의원에 선출된 최순영씨야말로 그람시가 말했던 유기적 지식인이다.그녀는 1975년 당시 섬유노련 YH노조 지부장이었다.1979년의 YH사건 이후로도 좌절하지도 지치지도 않고 현장에서 활동해온 인물이다. 그래서 2004년 4월15일은 한국 역사상 기념비적인 날이었다.노동자,농민,여성들이 자기계급 출신의 대표자를 처음으로 뽑았기 때문이었다. 1979년 YH 여성노동자 200명은 신민당사를 농성장소로 택했다. 이들의 시위는 살인적인 진압에 의해 23분만에 끝났다.유신독재 시절 노동자 파업은 빨갱이들의 사주를 받은 반국가적 행위에 해당했으므로 가혹한 탄압의 대상이었다.하지만 YH 여성노동자 김경숙씨의 죽음은 결국 유신체제를 종식시키는 기폭제가 되었다. YH 여성노동자들이 오물을 뒤집어 쓴 채 참혹하게 끌려나왔던 그 때,그 시절,지금의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는 품위있게 영부인 역할을 대행하고 있었다. 총선을 치르는 과정에서 한나라당과 민노당은 정책에서뿐만 아니라 복장에서부터 자기 계급을 보여주었다.박근혜 대표가 입고 있는 한땀,한땀,스티치를 넣은 정교한 수제품 의상은 아무데서나 구입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박근혜 대표가 입었던 옷을 구하지 못해서 애태우는 ‘귀부인’들이 많다면,젊은 세대들만이 그람시를 이미지로 소비한다고 타박할 수는 없을 것이다.이번 선거에서 보수층 유권자들이 소비한 것은 박근혜 대표의 이미지이지 않았을까 싶다. 가난한 민노당 의원들의 복장은 ‘정치적으로 올바른 옷입기’라고 해두자.이들의 옷차림이 세련되어지는 순간,지금의 김문수,이재오 한나라당 국회의원들처럼 될까? 민노당의 전신이었던 민중당 시절 그들도 한때는 노동자 대오를 ‘위하여’라고 외치던 열혈 청년들이었다. 이제 국회의원 최순영씨에게 바라고 싶다.우리시대의 수많은 사회적 약자를 대변해 달라고 말이다. 혹자는 판갈이가 아니라 물갈이 국회에서 그녀 역시 3급수로 전락하지 않으면 그나마 다행이라고 말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녀의 등원은 일제 시대 을밀대에 올라가 최초로 고공 농성을 주도했던 강주룡을 비롯하여 무수한 여성노동자들의 땀과 꿈과 심지어 죽음이 함께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 사실을 그녀가 어떻게 망각할 수 있을까? 임옥희 여성문화이론연구소 대표˝
  • [여대야소 정국] 국회로 가는 ‘노동운동 대부’

    “아직도 실감이 안 나요.국회의원 됐다고 특별히 달라질 것도 없고….” 민주노동당 비례대표 2번으로 국회에 들어가는 단병호 당선자는 자타가 공인하는 ‘노동운동의 대부(代父)’다.16일 서울 여의도 당사에서 그를 만나 앞으로 의정활동 방향 등을 들어봤다. ●멋대로 상상하지 말라 총선 결과를 지켜본 당 바깥의 사람들은 단 당선자에게 흔히 묻는다.“민주노총 위원장 출신이 국회의원이 됐고,노동자들이 제도권에 들어왔으니 이제 노동계의 투쟁 방식도 바뀌겠죠?” 그는 예의 그 신중하고 조용한 음성으로,하지만 단호하게 대답했다. “노사·노정 문제는 철저하게 상대적인 것입니다.민주노총의 투쟁 방식이 바뀌는 것은 정부나 사측의 변화 의지,변화 방향과 맞물려서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단 당선자는 “당과 민주노총의 관계는 대단히 긴밀하게 유지될 것”이라면서 노동운동의 틀이 바뀌리라는 주위의 ‘기대섞인 전망’을 일축했다.민주노총의 일방적인 변화를 기대하는 사측과 정부에 “당신들이 진심으로 노동자들을 동등한 상대로 인정하는 변화를 보여주면 우리도 변화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단 당선자는 당이 민주노총,전농,전국연합과 ‘지금처럼’ 긴밀하게 협력하고 논의하는 관계를 유지하면서 정책을 생산하며 의정활동을 펼 것이라고 자신있게 말한다. “민주노동당은 노동자·농민·서민들의 당입니다.그들의 목소리가 국회에서 울려퍼지고,그들의 이익이 법으로,제도로 보호되도록 할 것입니다.” ●말썽꾸러기가 국회의원으로 단 당선자는 학창시절 결코 ‘모범생’이 아니었다.친구들과 놀러다니며 학교 빼먹기를 즐겨했던,요즘 기준으로 보면 ‘불량학생’에 가까웠다. 그는 “공부보다 친구들과 어울려 놀러다니는 것이 더 좋았다.가정형편도 안 좋고 해서 학교도 그만뒀는데,이것이 두고두고 어머니 가슴에 못을 박았고 지금까지 가장 죄스럽게 생각하는 부분이다.”라면서 그 시절을 돌이켰다.67년 포항 동지상고를 중퇴한 이후 택시기사,행상 등을 전전하다 83년 그나마 ‘번듯한’ 직장을 가졌다.하지만 노동조건은 최악이었다. 시멘트 먼지를 마셔가며 12시간 맞교대로 일한 한 달 노동의 대가는 10만원.‘늦깎이 노동운동가’로 다시 태어나는 계기였다.이후 87년 동아건설 창동공장 노조위원장이 됐고,8년여 동안 전노협·금속연맹·민주노총 위원장 등을 맡아 그의 직책은 늘 ‘단 위원장’이었다. ●섬세한 인간 단병호 잇몸을 드러내며 수줍어하는 듯 허허로운 단 당선자의 웃음은 그를 그저 평범한 중년 노동자로만 보이게 한다.여기에 빼빼한 체구의 껑충하게 큰 키(181㎝)와 얼굴 가득한 주름,듬성듬성한 머리카락은 그를 실제 나이(54)보다 족히 10년은 더 들어보이게 한다.노동운동 18년중 8년 반의 구속·수배 생활을 포함한,30년 노동자 인생의 ‘훈장’인 셈이다. 지난 세월 동안 집회 단상 위에서 ‘빨간 머리띠’를 묶고 수만명의 군중 앞에서 사자후를 토하는 모습만 기억하는 이들과 이처럼 푸근한 외모를 직접 대하며 만나 얘기를 나눠본 사람들의 느낌은 완전히 딴판일 수 있다. 민주노총 손낙구 정책국장은 “대단히 열악하고 탄압받는 노동계 현실에서 10여년을 노동운동의 수장으로서 무한 책임을 요구받다 보니 그가 ‘강성 이미지’로 비쳐졌을 수도 있다.”면서 “사실은 대단히 섬세하고 진솔한 성격을 지닌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의정활동은 어떻게 ‘대한민국 대표 노동자’는 환경노동위에서 일하고 싶다.노동자를 위해 평생을 일해 왔고,그 연장선상에서 국회에 들어간 그가 해야 할 ‘당연한’ 선택이다. 그는 “현재 노사문제를 규정하는 노동관계법 전반의 재정비가 필요하다고 본다.”면서 “올바른 노사관계를 설정하고,노동자의 지위향상을 위한 법체계를 점검하는 데 의정활동의 역점을 두고 싶다.”고 말했다. 하지만 가장 시급한 문제는 최근 숨진 현대 비정규직 노동자 박일수씨 문제처럼 역시 비정규직 문제.박씨의 죽음은 언론 등 사회의 관심으로부터 철저히 냉대를 받았기 때문에 이런 점을 바꿔야 하고,바꿀 수 있다고 그는 강조한다. 단 당선자는 “지금 정부가 준비하는 비정규직보호입법은 오히려 비정규직을 확대하고 차별을 늘리는 법”이라면서 “이 법안을 폐기하고 새롭게 ‘비정규직차별금지법안’을 만들어 이를 통해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주말 진보·보수집회 충돌없이 끝나

    주말인 10일 공무원·교사의 정치참여 보장을 촉구하는 결의대회와 기독교·보수단체의 부활절 구국기도회가 서울 광화문 일대에서 동시에 열렸으나,별다른 충돌이나 불상사 없이 마무리됐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과 전국공무원노조,민중연대,민주노총 등 68개 단체는 10일 오후 3시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350여명(경찰 추산)이 참석한 가운데 ‘공무원·교사에 대한 공안탄압 분쇄와 정치활동 자유보장 촉구 결의대회’를 가졌다. 비슷한 시각 광화문 동화면세점 앞에서는 중앙선관위의 중지 요청에도 불구하고 안보와 경제살리기 국민운동본부 소속 보수단체 회원 등 1300여명이 부활절 구국기도회를 열었다. 양쪽 집회 장소에서는 선관위 직원들이 선거법 위반 여부를 가리기 위해 비디오 카메라로 녹화채증 작업을 했으나 별다른 충돌은 없었다. 채수범기자 lokavid@˝
  •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29)인간이 평등할 수 있을까?-백정해방운동 (下)

    흔히 진주를 한국 인권의 고향이라 말한다.1862년 류계춘과 그의 동지들이 주도했고 한국 최초의 농민 생존권 투쟁이 된 ‘임술년 농민항쟁’과 1923년 ‘형평사 운동’이 진주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2003년은 형평운동 80주년이었고,지난 1993년에는 해방 후 처음으로 진주에서 형평운동 70주년 기념사업회가 결성되었다.백정해방운동을 백정이라는 특수 신분의 해방 운동으로 기념하는 데 그치지 말고,보다 폭넓은 인간의 불평등 문제를 바로 잡기 위한 계기로 삼자는 뜻이었다.인권문제에 애정을 가진 이들이 모여서 형평기념탑을 세우고,인권 문제에 관한 국제 회의도 열어 70년 전 일제 때에 시작된 형평운동 정신을 새롭게 하는 일을 논의하였다.일본에서는 일본의 백정에 해당하는 부락민(部落民) 다수와 부락민의 인권과 차별문제를 연구하는 학자들,부락민의 생존권을 돕고 일본사회의 차별문제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부락해방인권연구소 관계자들이 참가하기도 하였다. 그때 처음으로 강상호와 장지필의 이름과 생애가 공식적으로 거론되었다.그 이전에는 국내의 극히 적은 연구자들에 의해 간신히 이름과 생애가 이야기되고 있었을 뿐이었다.다행스럽게도 강상호는 진주를 대표하는 부자이며 명문가 출신인데다 후손들이 진주 지역에 살아 있었기에 그에 대한 연구 자료는 풍부한 편이었다.그러나 장지필의 경우에는 그의 후손들이 살아있는지조차 제대로 파악되지 않았다. ●한국의 후예들은 공식참배 안해 형평운동 70주년 국제 행사 이후 한 해에 두 차례씩 일본 부락민들이 강상호의 무덤을 참배하는 행사가 계속되고 있다.일본 부락민들의 강상호 무덤 참배 때마다 안내자로 참석해온 필자는 올봄 그의 아들 강인수씨와 둘이서만 참배를 했다.참배할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한국 최초의 인권해방운동 선구자는 차도 옆에 누워서 자동차 굉음과 흙먼지,행인들이 내던지는 오물,그 보다 더 심한 무관심 속에서 초라하게 삭아가고 있었다.아들은 여유없는 그의 노년을 부끄러워할 뿐 말이 없었다.한국의 백정 후예들이 강상호 무덤을 공식적으로 참배했다는 이야기도 아직 듣지 못하였는데,이 역시 안타깝다. 형평사 운동이 시작되던 1923년 당시 한국에는 40여만 명의 백정들이 살고 있었는데,백정의 원류는 고구려의 영토 확장 때 생겨난 전쟁 포로나 귀순자들이라고 한다.그들은 고구려로 온 뒤 주로 변방에서만 살았는데,‘삼국사기’는 이들이 모여 살았던 곳을 부락(部落)이라 불렀음을 적고 있다.‘280년(서천왕11)에는 숙신을 공격하여 주민 600호를 옮기고 항복한 부락 예닐곱 곳을 부용으로 삼았다’는 것이다.원래 부락은 흉노족이 사막지대에서 떼를 지어(部) 천막을 치고 정착한 곳(落)을 의미했다.고려 때는 고구려에 복속당한 북방 유목민들의 후예인 수척(水尺),양수척(揚水尺),화척(火尺)들이 살던 곳을 부락이라 불렀다.이런 예를 두고 볼 때 부락은 원주민과 다른 족속이 집단을 이루고 사는 곳을 말하는 것이었다 하겠다. 일제 식민지 이후 총독부는 한국 민속을 파괴하고 마을이나 산의 지명을 바꾸는 것으로 정체성을 소멸시키려 하였다.그 과정에서 한국 고유어인 ‘동네,마을’ 대신 ‘부락’을 쓰게 하였는데,일본의 부락과 부락민이 일본인들로부터 차별 멸시당하듯이 한국인 전체를 부락,부락민으로 취급함으로써 식민지배의 우월성을 강조했던 것으로 보인다.그러나 백정들의 거주지를 부락이라 불렀던 것과 일본의 부락민들이 사는 곳을 부락이라 한 것은 우연이라 할 수 있겠다. ●일반인들의 생활언어도 사용못해 당시에 백정들은 갓 대신 패랭이를 써야 했고,상투머리엔 반드시 검은 띠를 둘러 백정임을 표시해야 했다.백정 여자들은 언제나 검정색 물들인 치마를 입어야 했고,비단옷이나 양반들이 입는 두루마기며 도포를 입어서는 안되었다.기와집에 살 수 없었으며 세 칸 이상의 넓은 집은 갖지 못했다.또,백정들끼리만 결혼할 수 있었고,혼인할 때 신부는 가마를 타지 못하고 신랑은 말을 탈 수 없었다.서당이나 향교에서 일반인들과 함께 글을 배워서도 안되었다.죽은 뒤에도 상여에 관을 얹지 못하며,거적대기에 말아 매장하되 일반인 무덤보다 높은 곳에는 봉분을 짓지 못했다.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일반인 소년이나 아이에게 백정은 존댓말을 써야 했고 공공장소를 지날 때는 허리를 숙인 채 빠르게 뜀박질하여 지나가야 했다.이러한 법이나 관습을 어길 경우에는 때와 장소와 상관없이 일반인으로부터 처벌받아야 하고,같은 죄를 다시 범한 백정은 중형에 처해졌다.심지어 일반인들의 생활 언어를 사용하는 것까지 금했다.백정들의 삶은 온갖 금지와 차별의 울타리 안에 구금되어 있었다. 그리고 백정마을은 전국 주요 행정관청이 있는 곳에 만들어졌는데,각 지방관아와 병영에서 필요로 하는 육류와 피혁을 손쉽게 얻기 위해서였다.특히 향교가 있는 지역에서는 봄·가을에 있는 공자와 유교 선현들께 올리는 제사 음식 중에 반드시 필요로 하는 육류와 육류를 가공하여 만든 제수를 공급받기 위해 백정을 꼭 필요로 했다.따라서 숙종 연간만 하더라도 백정은 일종의 관노비였다.그 후 조선사회 신분제도와 경제토대의 붕괴로 지방 토호들이 백정을 사노비화하면서 백정들의 사회 진출이 시작되었다.그러나 대부분의 백정들은 철저한 문맹과 궁핍으로 최하층민의 가련한 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백정들에게는 무거운 의무만 있고 사람답게 살 권리가 없었다. 강상호는 백정들의 생활을 개선시키지 않고 한 인간으로 사는 것이 위선임을 절감했다.그리고 식민지 상황에서 조선인들끼리 차별하고 탄압하는 것은 결국 일본의 식민통치를 돕는 어리석은 일이라고 질타하였다.인간은 평등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갖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 사는 삶이야말로 고귀하다고 외쳤다.인간을 차별하는 것은 과거에 집착하기 때문이며,미래를 위해 인간 평등을 지향해야 한다고 굳건히 믿었다. 1923년 봄 진주에서는 역사상 최초의 인권해방운동이 시작되었다.이 운동에는 백정 출신들과 함께 일반 지식인들도 참여함으로써 신분차별의 철폐가 민족해방보다 먼저 이뤄져야 한다는 새로운 생각을 낳았다.형평운동이 시작되자 전국의 백정들은 일제히 환영하면서 대대적인 집회를 열었다.전국적인 사회 문화 운동의 출발지가 서울이 아닌 진주라는 작은 도시라는 점과 운동본부 및 핵심 지도부 인물 대부분이 지역인들이라는 점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백정자식 양자로 들여 취학시켜 강상호·장지필 등 본부 임원들은 각각 순회 지역을 나누어 돌면서 각 지역에서 벌어지는 백정들의 군중 집회에 참석,축사를 하거나 앞으로의 진행방향에 대하여 토론을 벌였다.백정들은 수백년 동안 억눌러온 감정을 폭발시켰지만 폭력 사태로는 나아가지 않았다.철저한 온건 노선을 지키면서 모든 조선인들의 양심에 호소하는 눈물 겨운 장면을 만들어냈다.민족 해방을 부르짖는 것도 아니고,어떤 사회적 쟁점을 논의하기 위한 집회도 아닌 오직 천한 신분 백정도 똑같은 인간임을 인정해달라는 선언과 맹세의 집회다보니 일본 경찰도 적극 단속할 수는 없었다. 형평운동이 본 궤도에 올라 백정들의 생활 개선과 교육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가장 먼저 나타난 차별의 벽은 백정들이 일반인 학교에 입학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만약 백정들이 학교에 입학하면 일반인들이 모두 동맹 휴학을 하겠다는 선언을 했다.강상호는 그때 두 명의 백정 자식을 양자로 들여 직접 아이들 손을 잡고 학교까지 데려다 주는 등 일반 지식인들이 먼저 백정 차별을 극복할 것을 주장했다. 이렇듯 들불처럼 확산되는 형평운동은 그때 막 한국사회에 상륙한 사회주의 노선과 다른 몇몇 사상단체들의 관심을 끌었다.그러면서 점점 예기치 못한 혼란 속으로 빨려 들었다.강상호는 장지필과의 계속되는 갈등에도 불구하고 백정도 떳떳한 조선인으로 대우받는 것이 어쩌면 민족해방보다 값진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형평운동에 자신과 전 재산을 아낌없이 던져 넣었다.국가나 사회보다 인간이 소중하다는 그의 사상을 그는 의심하지 않았다.해방과 한국 전쟁 이후 그는 심한 가난과 외로움 속에서 죽었다. 굳이 형평운동이 아니더라도 인간평등을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진주 촉석공원 앞 그의 작고 외로운 무덤 앞에 술 한 잔을 올리고 강상호란 이름을 불러 보면 어떨까.˝
  •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29)인간이 평등할 수 있을까?-백정해방운동 (下)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29)인간이 평등할 수 있을까?-백정해방운동 (下)

    흔히 진주를 한국 인권의 고향이라 말한다.1862년 류계춘과 그의 동지들이 주도했고 한국 최초의 농민 생존권 투쟁이 된 ‘임술년 농민항쟁’과 1923년 ‘형평사 운동’이 진주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2003년은 형평운동 80주년이었고,지난 1993년에는 해방 후 처음으로 진주에서 형평운동 70주년 기념사업회가 결성되었다.백정해방운동을 백정이라는 특수 신분의 해방 운동으로 기념하는 데 그치지 말고,보다 폭넓은 인간의 불평등 문제를 바로 잡기 위한 계기로 삼자는 뜻이었다.인권문제에 애정을 가진 이들이 모여서 형평기념탑을 세우고,인권 문제에 관한 국제 회의도 열어 70년 전 일제 때에 시작된 형평운동 정신을 새롭게 하는 일을 논의하였다.일본에서는 일본의 백정에 해당하는 부락민(部落民) 다수와 부락민의 인권과 차별문제를 연구하는 학자들,부락민의 생존권을 돕고 일본사회의 차별문제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부락해방인권연구소 관계자들이 참가하기도 하였다. 그때 처음으로 강상호와 장지필의 이름과 생애가 공식적으로 거론되었다.그 이전에는 국내의 극히 적은 연구자들에 의해 간신히 이름과 생애가 이야기되고 있었을 뿐이었다.다행스럽게도 강상호는 진주를 대표하는 부자이며 명문가 출신인데다 후손들이 진주 지역에 살아 있었기에 그에 대한 연구 자료는 풍부한 편이었다.그러나 장지필의 경우에는 그의 후손들이 살아있는지조차 제대로 파악되지 않았다. ●한국의 후예들은 공식참배 안해 형평운동 70주년 국제 행사 이후 한 해에 두 차례씩 일본 부락민들이 강상호의 무덤을 참배하는 행사가 계속되고 있다.일본 부락민들의 강상호 무덤 참배 때마다 안내자로 참석해온 필자는 올봄 그의 아들 강인수씨와 둘이서만 참배를 했다.참배할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한국 최초의 인권해방운동 선구자는 차도 옆에 누워서 자동차 굉음과 흙먼지,행인들이 내던지는 오물,그 보다 더 심한 무관심 속에서 초라하게 삭아가고 있었다.아들은 여유없는 그의 노년을 부끄러워할 뿐 말이 없었다.한국의 백정 후예들이 강상호 무덤을 공식적으로 참배했다는 이야기도 아직 듣지 못하였는데,이 역시 안타깝다. 형평사 운동이 시작되던 1923년 당시 한국에는 40여만 명의 백정들이 살고 있었는데,백정의 원류는 고구려의 영토 확장 때 생겨난 전쟁 포로나 귀순자들이라고 한다.그들은 고구려로 온 뒤 주로 변방에서만 살았는데,‘삼국사기’는 이들이 모여 살았던 곳을 부락(部落)이라 불렀음을 적고 있다.‘280년(서천왕11)에는 숙신을 공격하여 주민 600호를 옮기고 항복한 부락 예닐곱 곳을 부용으로 삼았다’는 것이다.원래 부락은 흉노족이 사막지대에서 떼를 지어(部) 천막을 치고 정착한 곳(落)을 의미했다.고려 때는 고구려에 복속당한 북방 유목민들의 후예인 수척(水尺),양수척(揚水尺),화척(火尺)들이 살던 곳을 부락이라 불렀다.이런 예를 두고 볼 때 부락은 원주민과 다른 족속이 집단을 이루고 사는 곳을 말하는 것이었다 하겠다. 일제 식민지 이후 총독부는 한국 민속을 파괴하고 마을이나 산의 지명을 바꾸는 것으로 정체성을 소멸시키려 하였다.그 과정에서 한국 고유어인 ‘동네,마을’ 대신 ‘부락’을 쓰게 하였는데,일본의 부락과 부락민이 일본인들로부터 차별 멸시당하듯이 한국인 전체를 부락,부락민으로 취급함으로써 식민지배의 우월성을 강조했던 것으로 보인다.그러나 백정들의 거주지를 부락이라 불렀던 것과 일본의 부락민들이 사는 곳을 부락이라 한 것은 우연이라 할 수 있겠다. ●일반인들의 생활언어도 사용못해 당시에 백정들은 갓 대신 패랭이를 써야 했고,상투머리엔 반드시 검은 띠를 둘러 백정임을 표시해야 했다.백정 여자들은 언제나 검정색 물들인 치마를 입어야 했고,비단옷이나 양반들이 입는 두루마기며 도포를 입어서는 안되었다.기와집에 살 수 없었으며 세 칸 이상의 넓은 집은 갖지 못했다.또,백정들끼리만 결혼할 수 있었고,혼인할 때 신부는 가마를 타지 못하고 신랑은 말을 탈 수 없었다.서당이나 향교에서 일반인들과 함께 글을 배워서도 안되었다.죽은 뒤에도 상여에 관을 얹지 못하며,거적대기에 말아 매장하되 일반인 무덤보다 높은 곳에는 봉분을 짓지 못했다.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일반인 소년이나 아이에게 백정은 존댓말을 써야 했고 공공장소를 지날 때는 허리를 숙인 채 빠르게 뜀박질하여 지나가야 했다.이러한 법이나 관습을 어길 경우에는 때와 장소와 상관없이 일반인으로부터 처벌받아야 하고,같은 죄를 다시 범한 백정은 중형에 처해졌다.심지어 일반인들의 생활 언어를 사용하는 것까지 금했다.백정들의 삶은 온갖 금지와 차별의 울타리 안에 구금되어 있었다. 그리고 백정마을은 전국 주요 행정관청이 있는 곳에 만들어졌는데,각 지방관아와 병영에서 필요로 하는 육류와 피혁을 손쉽게 얻기 위해서였다.특히 향교가 있는 지역에서는 봄·가을에 있는 공자와 유교 선현들께 올리는 제사 음식 중에 반드시 필요로 하는 육류와 육류를 가공하여 만든 제수를 공급받기 위해 백정을 꼭 필요로 했다.따라서 숙종 연간만 하더라도 백정은 일종의 관노비였다.그 후 조선사회 신분제도와 경제토대의 붕괴로 지방 토호들이 백정을 사노비화하면서 백정들의 사회 진출이 시작되었다.그러나 대부분의 백정들은 철저한 문맹과 궁핍으로 최하층민의 가련한 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백정들에게는 무거운 의무만 있고 사람답게 살 권리가 없었다. 강상호는 백정들의 생활을 개선시키지 않고 한 인간으로 사는 것이 위선임을 절감했다.그리고 식민지 상황에서 조선인들끼리 차별하고 탄압하는 것은 결국 일본의 식민통치를 돕는 어리석은 일이라고 질타하였다.인간은 평등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갖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 사는 삶이야말로 고귀하다고 외쳤다.인간을 차별하는 것은 과거에 집착하기 때문이며,미래를 위해 인간 평등을 지향해야 한다고 굳건히 믿었다. 1923년 봄 진주에서는 역사상 최초의 인권해방운동이 시작되었다.이 운동에는 백정 출신들과 함께 일반 지식인들도 참여함으로써 신분차별의 철폐가 민족해방보다 먼저 이뤄져야 한다는 새로운 생각을 낳았다.형평운동이 시작되자 전국의 백정들은 일제히 환영하면서 대대적인 집회를 열었다.전국적인 사회 문화 운동의 출발지가 서울이 아닌 진주라는 작은 도시라는 점과 운동본부 및 핵심 지도부 인물 대부분이 지역인들이라는 점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백정자식 양자로 들여 취학시켜 강상호·장지필 등 본부 임원들은 각각 순회 지역을 나누어 돌면서 각 지역에서 벌어지는 백정들의 군중 집회에 참석,축사를 하거나 앞으로의 진행방향에 대하여 토론을 벌였다.백정들은 수백년 동안 억눌러온 감정을 폭발시켰지만 폭력 사태로는 나아가지 않았다.철저한 온건 노선을 지키면서 모든 조선인들의 양심에 호소하는 눈물 겨운 장면을 만들어냈다.민족 해방을 부르짖는 것도 아니고,어떤 사회적 쟁점을 논의하기 위한 집회도 아닌 오직 천한 신분 백정도 똑같은 인간임을 인정해달라는 선언과 맹세의 집회다보니 일본 경찰도 적극 단속할 수는 없었다. 형평운동이 본 궤도에 올라 백정들의 생활 개선과 교육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가장 먼저 나타난 차별의 벽은 백정들이 일반인 학교에 입학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만약 백정들이 학교에 입학하면 일반인들이 모두 동맹 휴학을 하겠다는 선언을 했다.강상호는 그때 두 명의 백정 자식을 양자로 들여 직접 아이들 손을 잡고 학교까지 데려다 주는 등 일반 지식인들이 먼저 백정 차별을 극복할 것을 주장했다. 이렇듯 들불처럼 확산되는 형평운동은 그때 막 한국사회에 상륙한 사회주의 노선과 다른 몇몇 사상단체들의 관심을 끌었다.그러면서 점점 예기치 못한 혼란 속으로 빨려 들었다.강상호는 장지필과의 계속되는 갈등에도 불구하고 백정도 떳떳한 조선인으로 대우받는 것이 어쩌면 민족해방보다 값진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형평운동에 자신과 전 재산을 아낌없이 던져 넣었다.국가나 사회보다 인간이 소중하다는 그의 사상을 그는 의심하지 않았다.해방과 한국 전쟁 이후 그는 심한 가난과 외로움 속에서 죽었다. 굳이 형평운동이 아니더라도 인간평등을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진주 촉석공원 앞 그의 작고 외로운 무덤 앞에 술 한 잔을 올리고 강상호란 이름을 불러 보면 어떨까.
  • [총선D-6] 비방·독설 얼룩진 TV토론회

    총선을 꼭 1주일 앞둔 8일 각당 후보들은 TV 토론회를 통해 지역정책 대결을 벌이면서 차별화에 안간힘을 썼다.설전을 벌이면서 때로는 독설을 내뿜기도 했다.하지만 유권자를 접할 기회가 많지 않은데다 TV토론회 참석도 봉쇄된 무소속 일부 후보들은 자해소동까지 벌이면서 크게 반발했다. ●광주 북을 TV토론회에서 후보들은 칭찬이나 사과의 발언을 한 뒤 독설을 퍼붓는 양상을 보였다.민주노동당 안영돈 후보는 열린우리당 김태홍 후보에게 “홍보물에 사용한 ‘김술꾼’이라는 용어가 특정인을 지칭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었다.”고 사과한 뒤 “열린우리당은 모든 것에 열려 있어 철새·비리 정치인들이 모여 있는데 ‘열린철새당’으로 당명을 바꿔야 하지 않느냐.”고 비꼬았다. ●충주 TV토론회에서 한나라당 한창희 후보와 열린우리당 이시종 후보는 다목적 체육관 문제를 놓고 2차 설전을 벌였다.한 후보는 “이 후보가 시장 재직 당시 다목적 체육관을 설계변경을 통해 수의계약한 문제에 대해 토론회가 끝난 뒤 검찰에 가서 비리 의혹 조사를 받으라.”고 요구했다.이 후보는 이에 “체육관 건립 과정에서 1원 한 푼 받은 사실이 없으며 비리가 있다면 정계를 떠나겠다.”고 반박했다.두 후보는 지난 6일 TV토론회에서도 같은 문제를 놓고 설전을 벌인 바 있다. ●대구 북을 금호케이블방송 스튜디오에서 CBS라디오 등의 공동주관으로 열린 각당 후보 TV토론회에 무소속 조시대(41·첨단도시개혁연구소 소장) 후보가 30여분 동안 자해를 시도하는 소동이 빚어졌다.그는 “거대 야당인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이 기득권만 챙기기 위해 무소속을 탄압하고 있다.”며 무소속 후보를 토론회에서 배제시킨 데 비난을 퍼부었다.이어 방송국 앞으로 나가 대기중이던 자신의 선거참모로부터 흉기가 든 가방을 전달받으려 했으나 미리 대기하고 있던 경찰로부터 가방을 빼앗겼다. ●전북 정읍 TV 합동토론회 출연대상에서 제외된 무소속 김정기 후보가 재방송 금지 가처분신청과 관련 선거법 규정의 참정권 제한여부에 대한 위헌심판 청구를 하겠다며 반발했다. ●울산 남구갑 열린우리당의 정병문 후보와 민주노동당의 윤인섭 후보의 후보단일화가 추진되고 있어 관심.정 후보측 관계자는 “윤 후보 측이 경선 전과 지난 6일 TV토론회 등에서 후보단일화를 요구해와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성남 경기도 성남 지역 모 정당 A후보의 학력을 놓고 논란.A후보는 선관위 예비후보 등록 때 충남 J고를 졸업한 것으로 기재했으나 개정선거법에 따라 이달초 후보등록 때 최종학력증명서 제출이 의무화되자 학력란에 독학으로 기록.시의원과 도의원을 지낸 A후보는 지난 7일 TV합동토론회에서 고교 졸업증명서를 들어 보였으나,선관위 홈페이지에는 여전히 독학으로 돼 있어 학력을 놓고 의문은 증폭. ●광주 민주당 조순형 대표가 지난 2일 대구 선대본부 발대식에서 “총선 이후 다른 당과 연합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말한 것으로 보도된 것이 광주에서는 논쟁거리로 부상. 열린우리당 광주·전남권 후보자들은 공동기자회견을 갖고 “총선결과에 따라 영·호남 화합 차원이라는 강변으로 인위적 정계개편을 통해 정치생명을 연장하려는 밀실음모를 즉각 중단하라.”고 발끈했으나 민주당측은 “발언의 진의가 잘못 보도됐다.”고 반박. 정당팀˝
  • 전공노등 10일 정치활동 쟁취 집회

    전국공무원노동조합과 전국교직원노동조합,민주노총,민중연대,민주노동당 등 5개 단체는 6일 ‘공무원과 교사에 대한 공안탄압 분쇄 및 정치활동 쟁취 결의대회’를 오는 10일 갖기로 했다. 5개 단체는 7일 오전 서울 세종로 정부중앙청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구체적인 집회 장소와 규모 등을 밝힐 계획이다.현인덕 전공노 연대사업국장은 “파장을 불러일으킬 만한 대규모 장외 집회는 계획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당초 전교조는 이날 경찰의 전교조 지도부 강제 연행을 규탄하고 교사의 정치참여 보장을 촉구하는 집회를 정부중앙청사 주변에서 열 예정이었으나 지도부 석방으로 외부 집회는 자제하기로 한 것으로 전해졌다. 장택동기자 taecks@˝
  • [사설] 비상 구국기도회 재고하라

    대통령 탄핵을 지지하는 단체가 후원하는 ‘부활절 비상 구국기도회’ 준비위원회가 오는 10일 서울 광화문에서 대규모 집회를 강행할 계획이어서 논란이 일고 있다고 한다.준비위측은 순수하게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에서 부활절 행사를 가지려는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선거법에 어긋난 집회라는 게 선관위와 경찰의 판단이다.준비위측은 ‘종교 탄압’을 내세워 집회를 강행할 게 아니라 선관위와 경찰의 요구대로 집회를 중단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우리는 탄핵반대 시민단체 등이 주도했던 ‘촛불집회’가 ‘문화 행사’를 표방했음에도 선거법 위반으로 결론내린 선관위와 정부의 유권해석을 상기시키고자 한다.지난달 말 촛불 집회 주동자에 대한 체포영장이 기각되기는 했으나 법원도 위법성을 부인하지는 않았던 것이다.그럼에도 자신들의 정치적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용서하고 화합해야 할 부활절의 정신을 이용하려는 것은 크게 잘못됐다.법을 무시하고 강행하는 집회에서 용서와 화합이 싹틀 수 없는 것이다.도리어 탄핵 반대 단체들이 맞불작전으로 들고 일어날 빌미만 줄 뿐이다. 이번 총선은 개정된 선거법에 따라 전례없이 조용한 가운데 진행되고 있다.선거일까지 이대로 지속된다면 새로운 선거문화가 정착될 수도 있다.유권자들도 이러한 선거 풍토 변화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이런 상황에서 특정 정당에 유·불리한 것으로 해석되는 대규모 집회를 강행하겠다는 것은 정치 발전과 유권자 표심을 얻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게다가 집회 예정일 다음 날인 11일에는 월드컵 경기장에서 부활절 연합집회가 예정돼 있지 않은가.거듭 자제를 촉구한다.
  •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28)인간이 평등할 수 있을까?-백정해방운동 (上)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28)인간이 평등할 수 있을까?-백정해방운동 (上)

    20세기 세계를 움직인 100대 사건 중 하나는 1923년 진주에서 일어난 형평사운동이었다.여러 세기에 걸쳐 인간 이하의 천민으로 분류되어 수탈과 탄압,능멸과 죽임의 공포 속에서 살아온 백정(白丁)들도 인간이라는 백정해방운동을 형평사운동이라 불렀다.일본의 부락민(部落民),유대인 차별 정책인 게토,인도의 최하층민 수드라,노예시장의 매매물건인 아프리카 흑인들과 같이,1923년 이전 한국의 백정들도 인간이 어찌 평등할 수 있느냐는 조선시대 정치이념의 제물로 희생된 우리의 이웃이었다. 형평사운동을 계획하고 탄생시켰으며,그후 십여년 동안 한국사회에서 억압받는 사람들의 인권문제를 줄기차게 제의했던 사람들 중에서 강상호(姜相鎬)와 장지필(張志弼) 두 사람을 꼽을 수 있다. ●진주 형평사운동은 ‘백정해방운동’ 장지필은 대물림한 백정 집안 후손이었다.그의 부친 장덕찬(張德贊)은 경남 의령의 백정인데 상당한 재력가였다.백정의 주된 사업인 도살업,육류판매,피혁의 건조와 가공,쇠기름(牛脂)의 생산 판매,소피(牛血)를 이용한 식품의 제조와 판매,가축의 내장과 뼈의 판매,이를 이용한 음식점의 독점적 운영은 오랫동안 백정 계급만의 전용물이었다. 이 사업은 이윤이 많이 남기로 유명한 데다 국가로부터 세금 징수의 대상도 아니었기 때문에 일찍부터 생각이 깊었던 이들은 큰 재산을 모을 수도 있었다.19세기 후반 이후 서울과 지방의 토호들은 백정들의 전유물이었던 도축장 경영권을 빼앗는 농간을 부렸다.많은 백정들은 토호들의 자본에 흡수되어 신분의 억압 외에 다시 경제적 수탈 대상이 되었고,이중의 인권유린에 시달렸다. 장덕찬은 대구의 김경삼,부산의 이성순,마산의 이상윤과 박유선,진주의 이학찬 등과 함께 대한제국을 대표하는 백정출신 부호였다.당시에는 재력가라 하여도 백정신분으로 서당이나 향교 같은 교육기관에 나가 공부할 수 없었다.백정들은 평민들과 같은 자리에 머무는 것은 물론이고 공공장소에 얼씬거리는 것도 금지되었으며,교회 설립 초기에는 일반인과 백정이 함께 예배보는 것도 문제가 되었다.장덕찬은 집에 독선생을 초빙해 자식들에게 공부를 시켰는데,장덕찬의 아들 장지필은 요즘식 가정교사 밑에서 공부하여 일본 메이지대학까지 유학하였다.행운아였던 셈이다. ●‘장지필’은 백정 출신의 부호 장덕찬은 평생토록 백정 해방을 꿈꾸며 투쟁하였다.그는 1887년 무렵 경상도 관찰사에게 백정도 패랭이를 벗고 망건을 쓸 수 있게 해 줄 것을 요구하며 경상도 71개 군에 있던 백정공동체인 도중(都中)들을 모아 시위를 벌였다.그 과정에서 곤장을 맞고 고문도 당했지만 요구를 끝까지 외쳐 경상도 백정들에게 큰 용기를 불어넣었다.장덕찬에게 곤장을 가하며 백정들의 요구를 거부했던 경상도 관찰사는 이호준(李鎬俊·1821∼1901)인데 그의 아들이 한일합방을 주도한 이완용이다. 관찰사와 담판을 벌였을 만큼 재력과 식견을 갖추었던 장덕찬은 아들에게 백정 해방을 위한 투쟁정신을 물려주었다.아버지의 뜻을 잇는 장지필은 세상의 두터운 차별의식과 싸우기 위해서는 재력과 신학문을 동시에 갖추어야 한다고 믿어 동경유학을 감행했고,귀국하여 백정해방 운동에 전력을 다한 백정 해방 이론가이자 실천가였다. ●‘강상호’ 양반신분으로 독립운동 헌신 반면 강상호는 당시 진주사회의 대표적인 지성인 중 한 사람으로 양반신분이며 부유한 집안의 큰아들이었다.일제 식민지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모든 국민이 문맹에서 눈을 떠야 한다며 학교 세우기와 신식교육을 장려했고,직접 기미년 만세시위운동에 참여하여 옥고를 치르기도 한 행동하는 지성이었다.애국계몽운동의 하나로서 동아일보 창간 주주로 참여했고,신간회활동 등 일제에 문화적으로 항거했던 인물이다. 따라서 장지필과 강상호가 지향하는 백정해방운동의 목표는 서로 달랐다.강상호는 민족운동과 사회주의운동이 미분화된 상태에서 순진하다 할 수 있는 민족운동노선을 따른 데 반하여,장지필은 백정 고유의 산업에 일반인들이 진출하지 못하게 하여 백정계급의 경제적 토대를 지키고 장차 백정들의 삶을 향상시키고자 하였다.관념적인 백정해방운동은 성공할 수 없으며,중요한 것은 한국 사회에서 가장 천한 신분인 백정들이 경제적으로 자립하는 것뿐이라고 믿었다.경제적 자신감이 있어야만 백정해방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이처럼 두 사람이 믿는 바는 달랐지만,1923년이라는 시대상황은 한국역사상 최초의 인권해방운동이라는 이름으로 장지필과 강상호가 함께 움직일 수 있게 하였다. 1919년 기미만세운동 이후 조선총독부는 문화통치를 표방하였다.민중 활동이 비교적 자유로워진 것이다.국내에는 다양한 사회운동 조직이 생겨났고,각 조직은 민족해방운동의 뜻을 폈다.겉으로는 조직 회원들이나 민중의 계몽을 표방했으나 궁극적으로는 민족해방을 바란 것이다. 민족해방운동은 크게 세 가지 갈래로 나뉘었는데,첫째는 일본에 무장 투쟁하여 국권을 회복하고자 한 민족독립운동으로 만주와 중국을 중심으로 일어났으며,애국주의 이상을 행동으로 옮기는 데 치중했다.두 번째는 대종교,보천교 등의 종교단체를 중심으로 한 운동이었고,세 번째는 3·1운동을 이끈 세력이 주도한 문화 계몽 운동이었다. 강상호가 문화 계몽 운동에 매진하고 있던 중에 진주의 대표적인 부자 백정 이학찬이 새집을 장만하여 강상호의 이웃으로 이사하였다.강상호는 이학찬의 이사를 계기로 백정들과의 교류를 시작하게 된다. 원래 진주 지방에는 여느 행정 관청이 있는 주요 지방 도시와 마찬가지로 관청 관할 아래에 백정들의 거주지가 정해져 있었다.이른바 백정마을 혹은 백정놈 동네였다. 경국대전에서 규정한 백정단취(白丁團聚) 조항에 따라 거주이전이 금지되었고 죽는 날까지 한 곳에 머물러 살았다.혹 거주지를 이탈하면 엄하게 처벌받았는데,마을 밖으로 여행하기 위해서는 관청에서 발행한 통행 증명서가 필요했다.통행증명서에는 목적지와 여행 기간이 적혀 있어서 이를 어길 때에도 무거운 처벌이 내려졌다. ●개도살 요구 거절한 백정, 매질당해 죽어 그러나 1863년 고종임금이 즉위하면서 실시한 특별사면으로 백정마을에서 살던 백정들은 거주이전의 자유를 얻게 된다.거주이전 금지 규정이 해제되자 전국의 백정들은 숙명 같았던 옛 거주지를 벗어나 일반인들이 사는 마을 가까이로 옮겨가기 시작했고,재력 있는 백정은 마을 안으로 옮겨가기도 했다. 백정들과의 교류를 통해 그들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 강상호는 기미 독립만세 시위 이후 어느날 충격적인 사건을 목격하였다.진주공원에서 청년들에 의해 백정이 죽임을 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청년들은 백정마을에 사는 백정을 강제로 데려와 개를 잡으라고 강요하였다. 그러나 그 백정은 청년들의 요구를 완강하게 거절하였고,결국 매질을 견디지 못해 죽었다.이후 백정들이 청년들을 고소하였지만 죽은 백정은 호적이 없으므로 그를 죽인 청년들에게 살인죄를 적용할 수 없다는 일본 경찰의 판결이 내려졌다.살인죄가 성립하려면 죽은 자의 신원이 확인되어야 하는데 아무런 법률적 증거가 없으므로 산짐승이나 벌레를 죽인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이었다.이 사건은 강상호가 백정해방운동에 적극 관여하는 계기가 되었다.
  •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28)인간이 평등할 수 있을까?-백정해방운동 (上)

    20세기 세계를 움직인 100대 사건 중 하나는 1923년 진주에서 일어난 형평사운동이었다.여러 세기에 걸쳐 인간 이하의 천민으로 분류되어 수탈과 탄압,능멸과 죽임의 공포 속에서 살아온 백정(白丁)들도 인간이라는 백정해방운동을 형평사운동이라 불렀다.일본의 부락민(部落民),유대인 차별 정책인 게토,인도의 최하층민 수드라,노예시장의 매매물건인 아프리카 흑인들과 같이,1923년 이전 한국의 백정들도 인간이 어찌 평등할 수 있느냐는 조선시대 정치이념의 제물로 희생된 우리의 이웃이었다. 형평사운동을 계획하고 탄생시켰으며,그후 십여년 동안 한국사회에서 억압받는 사람들의 인권문제를 줄기차게 제의했던 사람들 중에서 강상호(姜相鎬)와 장지필(張志弼) 두 사람을 꼽을 수 있다. ●진주 형평사운동은 ‘백정해방운동’ 장지필은 대물림한 백정 집안 후손이었다.그의 부친 장덕찬(張德贊)은 경남 의령의 백정인데 상당한 재력가였다.백정의 주된 사업인 도살업,육류판매,피혁의 건조와 가공,쇠기름(牛脂)의 생산 판매,소피(牛血)를 이용한 식품의 제조와 판매,가축의 내장과 뼈의 판매,이를 이용한 음식점의 독점적 운영은 오랫동안 백정 계급만의 전용물이었다. 이 사업은 이윤이 많이 남기로 유명한 데다 국가로부터 세금 징수의 대상도 아니었기 때문에 일찍부터 생각이 깊었던 이들은 큰 재산을 모을 수도 있었다.19세기 후반 이후 서울과 지방의 토호들은 백정들의 전유물이었던 도축장 경영권을 빼앗는 농간을 부렸다.많은 백정들은 토호들의 자본에 흡수되어 신분의 억압 외에 다시 경제적 수탈 대상이 되었고,이중의 인권유린에 시달렸다. 장덕찬은 대구의 김경삼,부산의 이성순,마산의 이상윤과 박유선,진주의 이학찬 등과 함께 대한제국을 대표하는 백정출신 부호였다.당시에는 재력가라 하여도 백정신분으로 서당이나 향교 같은 교육기관에 나가 공부할 수 없었다.백정들은 평민들과 같은 자리에 머무는 것은 물론이고 공공장소에 얼씬거리는 것도 금지되었으며,교회 설립 초기에는 일반인과 백정이 함께 예배보는 것도 문제가 되었다.장덕찬은 집에 독선생을 초빙해 자식들에게 공부를 시켰는데,장덕찬의 아들 장지필은 요즘식 가정교사 밑에서 공부하여 일본 메이지대학까지 유학하였다.행운아였던 셈이다. ●‘장지필’은 백정 출신의 부호 장덕찬은 평생토록 백정 해방을 꿈꾸며 투쟁하였다.그는 1887년 무렵 경상도 관찰사에게 백정도 패랭이를 벗고 망건을 쓸 수 있게 해 줄 것을 요구하며 경상도 71개 군에 있던 백정공동체인 도중(都中)들을 모아 시위를 벌였다.그 과정에서 곤장을 맞고 고문도 당했지만 요구를 끝까지 외쳐 경상도 백정들에게 큰 용기를 불어넣었다.장덕찬에게 곤장을 가하며 백정들의 요구를 거부했던 경상도 관찰사는 이호준(李鎬俊·1821∼1901)인데 그의 아들이 한일합방을 주도한 이완용이다. 관찰사와 담판을 벌였을 만큼 재력과 식견을 갖추었던 장덕찬은 아들에게 백정 해방을 위한 투쟁정신을 물려주었다.아버지의 뜻을 잇는 장지필은 세상의 두터운 차별의식과 싸우기 위해서는 재력과 신학문을 동시에 갖추어야 한다고 믿어 동경유학을 감행했고,귀국하여 백정해방 운동에 전력을 다한 백정 해방 이론가이자 실천가였다. ●‘강상호’ 양반신분으로 독립운동 헌신 반면 강상호는 당시 진주사회의 대표적인 지성인 중 한 사람으로 양반신분이며 부유한 집안의 큰아들이었다.일제 식민지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모든 국민이 문맹에서 눈을 떠야 한다며 학교 세우기와 신식교육을 장려했고,직접 기미년 만세시위운동에 참여하여 옥고를 치르기도 한 행동하는 지성이었다.애국계몽운동의 하나로서 동아일보 창간 주주로 참여했고,신간회활동 등 일제에 문화적으로 항거했던 인물이다. 따라서 장지필과 강상호가 지향하는 백정해방운동의 목표는 서로 달랐다.강상호는 민족운동과 사회주의운동이 미분화된 상태에서 순진하다 할 수 있는 민족운동노선을 따른 데 반하여,장지필은 백정 고유의 산업에 일반인들이 진출하지 못하게 하여 백정계급의 경제적 토대를 지키고 장차 백정들의 삶을 향상시키고자 하였다.관념적인 백정해방운동은 성공할 수 없으며,중요한 것은 한국 사회에서 가장 천한 신분인 백정들이 경제적으로 자립하는 것뿐이라고 믿었다.경제적 자신감이 있어야만 백정해방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이처럼 두 사람이 믿는 바는 달랐지만,1923년이라는 시대상황은 한국역사상 최초의 인권해방운동이라는 이름으로 장지필과 강상호가 함께 움직일 수 있게 하였다. 1919년 기미만세운동 이후 조선총독부는 문화통치를 표방하였다.민중 활동이 비교적 자유로워진 것이다.국내에는 다양한 사회운동 조직이 생겨났고,각 조직은 민족해방운동의 뜻을 폈다.겉으로는 조직 회원들이나 민중의 계몽을 표방했으나 궁극적으로는 민족해방을 바란 것이다. 민족해방운동은 크게 세 가지 갈래로 나뉘었는데,첫째는 일본에 무장 투쟁하여 국권을 회복하고자 한 민족독립운동으로 만주와 중국을 중심으로 일어났으며,애국주의 이상을 행동으로 옮기는 데 치중했다.두 번째는 대종교,보천교 등의 종교단체를 중심으로 한 운동이었고,세 번째는 3·1운동을 이끈 세력이 주도한 문화 계몽 운동이었다. 강상호가 문화 계몽 운동에 매진하고 있던 중에 진주의 대표적인 부자 백정 이학찬이 새집을 장만하여 강상호의 이웃으로 이사하였다.강상호는 이학찬의 이사를 계기로 백정들과의 교류를 시작하게 된다. 원래 진주 지방에는 여느 행정 관청이 있는 주요 지방 도시와 마찬가지로 관청 관할 아래에 백정들의 거주지가 정해져 있었다.이른바 백정마을 혹은 백정놈 동네였다. 경국대전에서 규정한 백정단취(白丁團聚) 조항에 따라 거주이전이 금지되었고 죽는 날까지 한 곳에 머물러 살았다.혹 거주지를 이탈하면 엄하게 처벌받았는데,마을 밖으로 여행하기 위해서는 관청에서 발행한 통행 증명서가 필요했다.통행증명서에는 목적지와 여행 기간이 적혀 있어서 이를 어길 때에도 무거운 처벌이 내려졌다. ●개도살 요구 거절한 백정, 매질당해 죽어 그러나 1863년 고종임금이 즉위하면서 실시한 특별사면으로 백정마을에서 살던 백정들은 거주이전의 자유를 얻게 된다.거주이전 금지 규정이 해제되자 전국의 백정들은 숙명 같았던 옛 거주지를 벗어나 일반인들이 사는 마을 가까이로 옮겨가기 시작했고,재력 있는 백정은 마을 안으로 옮겨가기도 했다. 백정들과의 교류를 통해 그들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 강상호는 기미 독립만세 시위 이후 어느날 충격적인 사건을 목격하였다.진주공원에서 청년들에 의해 백정이 죽임을 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청년들은 백정마을에 사는 백정을 강제로 데려와 개를 잡으라고 강요하였다. 그러나 그 백정은 청년들의 요구를 완강하게 거절하였고,결국 매질을 견디지 못해 죽었다.이후 백정들이 청년들을 고소하였지만 죽은 백정은 호적이 없으므로 그를 죽인 청년들에게 살인죄를 적용할 수 없다는 일본 경찰의 판결이 내려졌다.살인죄가 성립하려면 죽은 자의 신원이 확인되어야 하는데 아무런 법률적 증거가 없으므로 산짐승이나 벌레를 죽인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이었다.이 사건은 강상호가 백정해방운동에 적극 관여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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