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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정받지 못한 난민] “민주화 이룬 한국… 난민문제엔 후진국”

    [인정받지 못한 난민] “민주화 이룬 한국… 난민문제엔 후진국”

    “한국이 선진 민주주의 국가라고 굳게 믿었는데 난민 문제에 있어서는 후진국인 것 같습니다.” 휴일인 지난 24일 오후 서울 대학로.20여명의 미얀마인들이 사진과 그들의 주장이 담긴 게시판을 걸어놓고 고국의 민주화운동을 알리는 전시회를 열고 있었다. 이들은 군사정권의 탄압을 피해 ‘미얀마 민족민주동맹(NLD)’ 한국지부 등에서 활동하는 ‘정치적 난민’들이다. 이들은 “과거 한국처럼 군사독재에 허덕이는 미얀마의 민주화 쟁취를 위해 한국에 망명해 싸우는 우리들의 신분을 인정해달라.”고 호소했다. 한국에 ‘정치적 난민’ 지위를 신청한 미얀마인 9명이 우리 정부로부터 난민 인정 불허와 함께 강제 출국을 통보받은 것은 지난 3월 말. 이들은 강제 출국되면 미얀마에 입국하자마자 군사정권의 비밀경찰에 붙잡힌다며 불안해하고 있다. 하지만 법무부는 “이들은 정치적 난민이라기보다 한국 내 장기체류를 원하는 불법 입국자일 뿐”이라고 일축하고 있다. ●한국정부 “민주화운동 경력 증명하라.” 미얀마인 마웅저(37)는 2000년 5월 난민 지위를 신청한 뒤 5년 동안 한국 정부의 허락을 기다려왔다. 하지만 그는 법무부로부터 “난민협약 제1조(정치적 이유로 자국에서 ‘충분하고 근거있는 공포’를 당하는 경우)의 요건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난민 인정 불허 통지를 받았다. 마웅저는 3개월의 유예기간을 거쳐 오는 7월이면 당장 한국 땅을 떠나야 한다. 미얀마는 아직 군사정권 치하에 놓여 있다.1990년 아웅산 수치 여사의 NLD가 총선에서 압승했지만 군부는 정권을 이양하지 않았다. 마웅저는 고등학생이던 88년 미얀마에 민주화 바람이 불었을 때 ‘전국학생연맹’이라는 지하 학생운동단체에서 일했다. 그는 동료들이 하나 둘 비밀경찰에 붙잡혀가던 94년 10월 한국으로 도망쳐 왔다. 그는 미얀마에 NGO(비정부기구)를 만들어 민주화운동을 이끌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지만 상황은 녹록지 않다. 마웅저는 “출입국관리사무소에 모든 과정을 설명했지만 ‘당신의 민주화운동을 증명할 방법이 없다.’는 답만 돌아왔다.”며 한숨을 쉬었다. 그는 “미얀마와 비슷한 시기에 민주화 운동을 겪었던 한국의 경험을 배우려고 이곳에 왔지만 기대와 달리 난민 인정이 너무 까다롭다.”며 고개를 떨구었다. 모아(31)는 미얀마 학생운동을 이끌었던 ‘투사’였다고 한다. 민주화 항쟁을 탄압하는 군사정권을 피해 94년 8월 브로커를 통해 한국 산업연수생 자격을 얻었다. 모아 역시 “군사독재를 무너뜨린 민주화 경험을 배우기 위해 한국을 택했다.”고 말했다. 그는 99년 NLD 한국지부를 만들어 현재 집행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하지만 모아도 지난 3월 ‘정치적 박해의 사유가 충분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난민 자격을 얻지 못해 7월 마웅저와 함께 추방될 처지에 놓여 있다. 모아는 “미얀마로 쫓겨나면 공항에 대기하고 있는 비밀경찰에 곧바로 붙들려갈 것이 뻔하다.”고 말했다. ●난민 신청자 급증… 인정요건 애매모호 국내 난민 신청자는 최근 급증세를 보이고 있다.1994∼2002년 9년간 166명이었던 난민 신청자가 2003년 83명, 지난해 145명으로 늘었고 올들어서는 넉달도 안돼 100명에 육박하고 있다. 하지만 난민 인정 체계가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은 데다 선정 요건도 애매모호하다는 지적이 많다. 실제 미얀마 난민 신청자들은 지난 5년간 심사과정에서 단 한번도 적절한 통역을 제공받은 적이 없다. 또 직책의 유무를 중시하는 등 적용기준도 들쭉날쭉이다. 마웅저, 모아와 함께 난민 신청을 했던 19명의 미얀마인들 중 NLD 한국지부 간부 3명만 ‘투쟁 주도자’라는 이유로 2003년 난민 지위를 인정받았다. 지난해 12월에는 방글라데시 소수민족 독립을 위해 투쟁하다 한국에 망명한 ‘줌마족’ 12명이 한꺼번에 난민으로 인정받기도 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은 지난해 10월 발간한 국내 외국인 난민 인권실태 조사보고서에서 “법무부가 독립적인 난민인정위원회를 설립하는 등 시스템을 바꾸지 않으면 즉흥적인 심사가 계속될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난민 신청자들을 위해 공익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는 아름다운 재단 황필규 변호사는 “미얀마인들의 난민 지위 인정기준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법무부에 면담 내용 열람을 요청했지만 이마저도 국가안전보장 등에 관한 사항이라는 이유로 거절당했다.”고 말했다. ●법무부 “무조건 인정해주긴 어렵다.” 하지만 정부는 망명 근거가 부족한 외국인의 난민 신청을 무조건 인정할 수는 없다는 입장이다. 서울 출입국관리소 난민실 이인숙 주사는 “이번에 허가받지 못한 미얀마인들은 불법체류 상태로 오랫동안 머무르다 뒤늦게 난민 지위를 신청한 것”이라면서 “이들은 불법체류자로 강제출국될 것이 두려워 난민 자격을 신청했을 뿐 정치적 난민이 아니다.”고 못박았다. 법무부 관계자는 “한국정부가 난민 제도를 악용하는 외국인들까지 보호할 이유는 없지 않겠느냐.”고 설명했다. 글 이재훈기자 nomad@seoul.co.kr ■ “장기체류 수단으로 악용 우려” “난민 지위를 악용하는 사람들까지 모두 난민으로 인정할 수는 없습니다.” 법무부는 국제 난민협약에 기초해 선의의 난민 신청자는 보호해야 하지만 협약을 악용하는 사람들에 대해서까지 온정을 베풀 수 없다고 밝혔다. 법무부 출국관리과 김판준(49) 사무관은 “우리나라 난민 지위 인정은 난민협약 제1조에 명시돼 있는 ‘인종·국적·종교·정치적 견해 또는 특정 사회집단의 구성원이라는 이유로 박해를 받을 우려가 있을 경우’라는 기준에 따라 적용되고 있다.”면서 “단 국내 장기체류의 방편으로 제도를 악용하는 사람들은 철저히 가려낼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 사무관은 미얀마인 9명이 난민으로 인정받지 못한 이유에 대해 “그들은 난민협약의 다섯가지 박해 사유를 충분히 입증하지 못했으며, 대개 한국에 몇년 동안 머물렀던 사람들이라 장기 체류의 수단으로 제도를 악용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2003년 난민지위가 인정된 NLD 한국지부 간부 3명과 이들의 차이는 무엇이냐는 질문에는 “집회나 시위에서도 전체 참여자가 아니라 주동자 일부만 처벌하는 것처럼 한국지부를 주도적으로 이끄는 사람들과 단순 구성원과는 분명 차이가 있지 않으냐.”고 선을 그었다. 하지만 법무부도 올해 난민 신청자가 급증하면서 시민사회단체의 요구를 마냥 무시할 수만은 없다는 반응이다. 법무부는 지난 2월부터 난민법 제·개정 연구위원회를 구성, 향후 방향을 모색 중이다. 김 사무관은 “인권단체 등에서 지속적으로 요구하고 있는 독립적인 난민 지위 인정기구에 대해 법무부도 나름대로 위원회를 만들어 연구를 계속하고 있으니 좀 더 지켜봐달라.”고 덧붙였다. 이재훈기자 nomad@seoul.co.kr ■ “색안경 벗고 우리 처지 이해를” “직책을 맡고 있다는 이유로 간부들만 난민 지위를 인정받은 것 같아 함께 투쟁해온 동료들에게 미안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지난 24일 서울 대학로에서 만난 미얀마 민족민주동맹(NLD) 한국지부 아웅 미엔트 스웨(42) 회장은 “함께 조국의 민주화를 위해 투쟁해온 동료들이 결국 난민 지위를 인정받지 못하고 강제로 출국당하게 돼 너무 가슴이 아프다.”고 애석해했다. 그는 2003년 부회장, 총무 등 2명의 한국지부 간부들과 함께 난민 지위를 인정받았다. 하지만 동료들을 생각하면 회장이라는 직책은 늘 바늘방석이었다. 스웨는 “2000년 5월 난민 지위를 신청한 21명의 동료들은 모두 미얀마의 민주화를 위해 몸을 바쳤던 사람들인데 어떻게 직책의 유무로 민주화 운동의 경중을 따질 수 있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스웨는 한국에 들어온 지 한참이 지나서야 난민 지위를 신청한 이유를 묻자 “입국 초기에는 다들 미얀마의 민주화에만 주목했지 각자의 신분에 대해서는 신경쓰지 못했다.”면서 “1999년 한국지부의 한 간부가 불법체류자로 몰려 강제출국당하고 나서야 신분 확보가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인식하게 됐다.”고 덧붙였다. 그는 “난민 지위를 얻지 못한 동료들이 미얀마에서의 박해 사유를 충분히 입증하지 못했다는 한국정부의 설명을 이해할 수 없다.”면서 “5년간 우리 동료들이 자기 처지를 설명할 수 있었던 기회는 겨우 15∼20분에 걸친 4∼5차례의 면담밖에 없었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스웨는 “미얀마가 민주화되면 우리는 반드시 한국을 떠나 고국으로 돌아갈 것”이라며 “한국인들도 오랜 군사독재를 경험한 만큼 색안경을 끼고 보지 말고 우리의 절박한 처지를 조금이라도 이해해달라.”고 호소했다. 이재훈기자 nomad@seoul.co.kr
  • “외증조부, 일제 한글탄압에 저항 자유를 위한 싸움 멈추지 않을것”

    |시카고 연합|19일 미국 일리노이주 스프링필드의 링컨박물관 개관 행사에서 한인 2세 여고생이 일제시대에 한글사전을 편찬하다 옥고를 치른 외증조부인 고 정인승(鄭寅承) 박사와 자유를 연관시킨 에세이를 낭송,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 등 참가자들로부터 갈채를 받았다. 케이블 방송인 C-SPAN이 링컨박물관 개관 기념 사업의 하나로 주최한 에세이 대회에서 대상을 차지한 메릴랜드주 조지타운 데이스쿨 11학년 이미한(17)양은 ‘새로운 국가, 새로운 세기, 새로운 자유’라는 제목의 에세이를 낭독했다. 이양은 에세이에서 “나의 ‘자유’에 대한 이해는 언어의 이해와 강하게 연결돼 있다.”며 정 박사에 대한 일본의 억압을 거론했다. 이양은 “일본 정부가 한글 사용을 금지했던 1940년대, 최초의 한글사전을 편찬하다 체포돼 옥고를 치른 외증조부께서는 개인의 사상을 형성하고 나누는 매개체인 언어를 금지하고 박해하는 것은 곧 사상을 박해하는 것이라고 믿으셨다.”고 말했다. 이어 이양은 “외증조부께서는 사람들이 자신의 언어로 사상을 나눌 자유를 위해 싸웠고 개개인이 사상을 가질 권리를 지켰다.”고 강조했다. 이양은 “21세기의 자유는 나이와 인종, 성, 지위, 언어 등과 상관 없는 개인의 자유를 의미한다고 믿는다. 자유를 누리되 이를 지키기 위한 싸움은 결코 멈추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다. 정 박사는 전북 장수에서 출생,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한 뒤 1935년 한글학회 이사로 ‘큰사전’ 편찬사업을 주관하다 투옥됐으며 광복후 건국대 교수, 학술원 회원 등을 역임했다. 주미 한국대사관에 따르면 이양은 아버지 이종훈(FDA 병리학자) 박사와 박유미(조지타운대 영문학) 교수의 외동딸로 아버지의 외할아버지가 정 박사이다. 에세이 대회는 링컨 대통령의 게티스버그 연설 길이인 272단어 범위 내에서 ‘링컨과 새로운 자유의 탄생’을 주제로 작성하도록 돼 있다. 에세이 낭송 뒤 부시 대통령은 “자유사회에서의 삶에 대해 그녀의 뜻을 표현해 준 이양에게 특별한 감사의 뜻을 보낸다.”고 말했다. 이 양은 교내 수학팀 팀장 및 아시안 소사이어티 회장, 수영팀 선수로 활약중인 우등생이다.5400여명의 참가자 가운데 대상을 차지한 이양은 상금으로 1500달러를 받았다.
  • 말 많았던 MBC ‘제 5공화국’ 23일 첫전파

    말 많았던 MBC ‘제 5공화국’ 23일 첫전파

    “중앙정보부가 권력을 남용하고 정치 개입과 언론 탄압을 통해 국민들에게 저주와 원한을 사왔다는 것을 시인합니다. 앞으로 국내 정치에는 일체 관여치 않을 것을 약속드리는 바입니다.”13일 오후 서울 소공동 롯데 호텔.MBC 특별기획 드라마 ‘제5공화국’의 촬영이 한창이다. 이날 촬영분은 지난 1979년 10·26 사건 직후 중앙정보부장에 취임한 당시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대국민 거짓(?) 기자회견을 하는 장면. 이덕화가 실제 전두환 전 대통령을 쏙 빼닮은 카랑카랑한 목소리와 눈빛으로 카메라를 응시하며 20년전 대한민국의 모습을 재현하고 있었다. 말 많은 정치드라마 ‘제5공화국’(극본 유정수, 연출 임태우)이 23일 첫 전파를 탄다. 이 드라마는 기존의 ‘공화국 시리즈’와 달리 전두환 전 대통령 등 5공 실존 인물이 실명으로 묘사되고,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 생생한 12·12와 5·18 등 사건을 정면으로 다루고 있어 방영 전부터 기대와 우려를 낳은 작품. 최근엔 5공 인사들의 대본 수정 요구로 각종 논란과 화제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제작진과 연기자를 만나 드라마에 임하는 소감과 각오를 들어봤다. ●“5공 공과, 있는 그대로 다룰 것” 제1∼3공화국을 드라마로 만든 ‘공화국 시리즈’의 대가인 고석만 MBC 제작 본부장은 최근 장세동씨 등 5공 인사들의 외압설 논란과 관련,“시비(是非)에 휘말리는 게 정치드라마의 묘미이자 고통”이라고 담담하게 밝혔다. 그는 “센세이셔널리즘에 기대지 않고 5공화국의 공과를 있는 그대로 모두 담아 객관성과 사실성을 유지할 것”이라면서 “과가 많다면 과를 많이 다룰 것이지만, 공도 놓치지 않겠다.”고 힘주어 말했다. ‘제5공화국’은 다큐멘터리 드라마이기 때문에 드라마속 인물들의 대사와 행동은 ‘작가의 상상력’보다는 ‘정치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구성된다. 고 본부장은 “기록에는 없는 ‘밀담’ 장면의 경우, 언론보도나 성명서 등 사실 자료를 바탕으로 앞뒤 인과관계를 고려해 대사를 만들어내게 되는 ‘정치적 상상력’이 개입되게 된다.”고 설명했다. 신호균 책임프로듀서도 “이미 대법원의 판결이 내려진 사안을 있는 그대로 다룰 것이기 때문에 5공 인사들의 우려와 달리 객관성은 철저하게 유지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사법부의 판결을 뒤집을 만한 새로운 사실이 나타난다면 제작에 적극적으로 반영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지금이 적절한 시기, 쿨하게 그려낼 것” ‘제5공화국’은 10·26 사건부터 시작해 12·12사태, 이철희·장영자 부부 사건,KAL기 피격사건,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등을 거쳐 노태우 정권으로 이양되기까지의 역사적 사건들을 50회 정도에 걸쳐 촘촘하게 다룬다. 특히 제작진은 5공화국을 ‘출발부터 잘못된 정권’으로 규정하고,5·18 광주민주항쟁을 4회에 걸쳐 구체적으로 보여줄 예정이다. 지금껏 광주가 피해자 중심으로 ‘뜨겁게’ 보여졌다면, 이번엔 신군부 입장에서 그들이 광주를 정치적으로 어떻게 이용하는지 ‘쿨(Cool)하게 그려낼 계획이다. 하지만 5공 인물들이 다수 생존해 있어 MBC 내부에서도 방영 시기를 놓고 이견이 많았던 것이 사실. 임태우 프로듀서는 “3년 전부터 기획한 것인데, 대학 86학번으로 당시 상황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나조차 드라마를 만들면서 몰랐던 사실들을 많이 알게 됐다.”면서 “20년밖에 세월이 흐르지 않았지만, 시청자들에게 당시의 역사적 진실을 정리해 보여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다큐 정치드라마’를 표방한 ‘제5공화국’이 역사 왜곡 논란에서 벗어나 설득력을 얻기 위해서는 드라마속에 객관적 사실을 얼마나 담아내는가가 열쇠가 될 듯하다. 이영표기자 tomcat@seoul.co.kr
  • 형소법에 또 막힌 수사권조정

    형소법에 또 막힌 수사권조정

    검찰이 경찰의 수사를 지휘하는 근거 조항인 형사소송법 195,196조를 놓고 검·경이 공청회에서 설전을 벌였으나 합의점을 찾지 못했다.11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검·경 수사권 조정에 관한 공청회’에는 김종빈 검찰총장과 허준영 경찰청장 등 검·경 관계자 500여명이 참석, 불꽃튀는 공방전을 펼쳤다. 공청회장은 주장이 첨예하게 맞서 한때 고성이 오가는 험악한 분위기가 연출되기도 했다. 검사의 수사지휘권을 명시한 형소법 개정 문제는 검·경 수사권 조정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사항이다. 검·경은 그동안 내란과 외환·살인 등 12개 중요범죄와 사회적 이목을 끄는 사건 등은 검찰이, 기타 사건은 경찰이 맡기로 합의했지만 형소법 개정에서만은 양보할 수 없다는 태세다. ●경찰 “일제의 유물 개정은 시대적 요구” 김학배 경찰청 기획수사심의관은 “검·경 관계를 지휘와 복종관계로 규정한 형소법을 그대로 두는 것은 근본 해결책을 회피하는 것”이라면서 “일제의 유물인 형소법을 개정하는 것은 더 미룰 수 없는 시대적 요구”라고 말했다. 경찰측 조정자문위원인 서보학 경희대 교수는 “범죄 수사의 97%를 경찰이 처리함에도 경찰이 검찰에 종속돼 있는 것은 세계적으로 유례없다.”면서 “한 기관이 수사권과 기소권을 독점하는 것은 권력 비대화의 측면에서 득보다 실이 많다.”고 주장했다. ●검찰 “경찰의 편파·청탁수사 감시해야” 그러나 검찰은 관련 조항을 유지해야 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경찰이 절도·강도·살인 등의 수사를 전담하는 대신 인권 침해 등 문제가 발생했을 때 검찰이 개입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주제발표자로 나선 서경대 정웅석 교수는 “‘지존파 사건’이나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은 경찰이 단순 교통·변사사건으로 끝내려던 것을 검찰이 적극적으로 수사, 진실을 밝혀냈다.”고 지적했다. 그는 “수사를 맡는 사법경찰은 전체의 10%인 1만 6000명에 불과하다.”면서 “검사의 수사지휘권을 완전 배제하면 행정 경찰인 간부들이 인사권 등을 빌미로 부당한 압력을 행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김주덕 변호사도 경찰의 수사 오류와 인권침해 문제를 지적했다. 김 변호사는 “2003년 경찰 의견이 검찰에서 바뀐 경우가 8.8%인 16만 9390건이고, 경찰이 피의자를 긴급체포하고도 영장을 청구하지 않은 비율이 33.1%에 이른다.”면서 “검찰이 계속 경찰의 편파 수사를 감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대검 수사정책기획단장 김회재 검사는 “경찰 수사권 독립의 실체는 ‘치안’과 ‘사정’을 독점, 검사를 배제해 사법경찰이 행정경찰을 장악하려는 의도”라면서 “이는 국민을 도외시한 경찰의 이기주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에 맞서 경찰측은 “권력에 기생해 인권을 탄압하는 수사를 한 것은 검찰도 만만찮다.”고 되받아쳤다. 이 과정에서 방청석에서는 고성이 오가기도 했다. ●“합의안 대통령령으로 우선 시행하자” 현실적인 타협점을 마련하자는 의견도 제시됐다. 서울대 조국 교수는 “수사권은 헌법이 아니라 법률상의 문제”라면서 “형소법이 개정되지 않는다면 합의사항을 대통령령으로 시행한 이후 앞으로 형소법을 개정하는 방법이 있다.”고 말했다. 조 교수는 “이미 여러 부분에 합의했는데도 형소법 문제로 시간만 끌고 있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 자문위는 이달 18일 한번 더 회의를 연 뒤 권고안을 마련할 계획이다. 유영규 정은주 이효용기자 whoami@seoul.co.kr
  • MBC ‘PD수첩’ ‘대학내 친일 잔재’ 집중 조명

    MBC ‘PD수첩’ ‘대학내 친일 잔재’ 집중 조명

    초대 총장이 친일파라며 그의 동상을 철거하는 등 최근 대학가에서 불고 있는 친일잔재 청산 움직임을 파헤치는 프로그램이 방영될 예정이어서 눈길을 끈다.MBC ‘PD수첩’은 5일 오후 11시5분 ‘친일청산의 무풍지대, 학교’(가제)편에서 국내 대학들의 친일청산 문제를 집중 조명한다. 제작진은 “친일문제를 규명하고 이를 교육해야 할 주체인 대학이 친일행위의 포로”라며, 국내 대학에 남아 있는 친일세력의 문제점과 그것이 제대로 규명되지 않는 이유를 집중 조명한다. 먼저 제작진은 지난 95년 연세대가 2차 대전 후 전범 혐의로 3년간 복역한 사사카와 료이치가 설립한 일본재단으로부터 75억원의 기금을 유치하는 등 국내 유수의 대학들이 일본의 A급 전범들로부터 기금을 받은 사례를 지적한다. 하버드대 등 많은 세계적 대학들이 이 기금을 거부했지만, 연세대 등 식민통치의 직접 당사국인 한국의 일부 대학들이 이를 수용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는 설명이다. 제작진은 또 최근 한승조 전 명예 교수의 친일 망언 등으로 인해 친일잔재 청산의 목소리가 높은 고려대의 친일 문제도 짚는다. 지난 89년 여름 고려대에서는 학생들이 친일 행적이 있는 이 학교 설립자인 인촌 김성수의 동상을 철거하려다 이를 저지하려던 교수들과 대치하고, 경찰병력이 투입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제작진은 고려대 교수들을 대상으로 친일 청산 움직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설문조사를 실시, 그 결과를 공개한다. 제작진은 이 외에도 이화여대의 김활란, 덕성여대의 송금숙, 추계예대의 황신덕 등 대학 총장과 설립자들의 친일행적도 파헤친다. 이 프로그램의 진행자인 최승호 책임 프로듀서는 “대학의 경우 내부 친일세력에 의해 친일문제 연구에 대한 접근이 차단되고 있으며, 접근하려 한다 해도 친일세력의 탄압을 받는 등 친일 청산 작업이 전혀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고 프로그램 제작 취지를 밝혔다. 이영표기자 tomcat@seoul.co.kr
  • 中 자싱에 김구기념물 세운다

    |상하이 연합|중국 저장(浙江)성 자싱(嘉興)에 김구 선생을 기리는 기념물이 들어선다. 저장성 자싱시와 주 상해총영사관은 31일 자싱시 ‘김구선생 피난처’ 인근에 김구 선생이 독립투쟁을 하면서 고향을 그리며 지내던 곳에 ‘김구관조처(金九觀潮處)’ 표지석을 세우기로 했다고 29일 밝혔다. 또 30일에는 자싱에 세워진 ‘중한우의가(中韓友誼街)’에서 양국의 주요 인사들이 참가한 가운데 한중 관광교류 대회도 연다. 자싱은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거 이후 김구 선생이 피신했던 곳이다. 김구 선생은 윤봉길 의거 이후 일본 제국주의의 탄압이 심해지자 상하이(上海)를 떠나 항저우(杭州)로 옮겼으나 거액의 현상금을 걸고 일제가 압박해오자 다시 자싱으로 몸을 숨겼다. 이와 함께 자싱시는 김구 선생 일행이 머물던 곳에 당시 모습을 그대로 복원하고 김구기념관을 세우기로 했다.
  • 짐바브웨에도 민주화 불길

    로버트 무가베(81) 대통령이 25년 동안 장기집권하고 있는 짐바브웨에도 민주화 바람이 불고 있다. 곧 있을 총선을 앞두고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민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어서다. 중앙아시아 국가들에 이어 아프리카에서도 민중봉기가 일어나는 것 아니냐는 관측마저 일고 있다. 짐바브웨의 피우스 은쿠베 대주교는 “오는 31일 실시되는 총선에서 선거부정이 자행될 게 뻔한 만큼 이를 통해 무가베 대통령을 축출할 수는 없다.”면서 우크라이나처럼 비폭력 민중봉기가 필요하다고 말했다고 영국 인디펜던트가 27일(현지시간) 보도했다. 또 이날 짐바브웨의 수도 하라레에서는 야당인 민주변화운동(MDC)의 선거유세장에 2만 5000여명의 시민이 모였다. 영국 더 타임스는 야당 지지자들에 대한 탄압이 공개적으로 이뤄지고 있는 짐바브웨에서 이렇게 많은 군중이 집결한 것은 이례적이라고 전했다. 1980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이후 무가베 대통령이 줄곧 집권하고 있는 짐바브웨는 지난해 물가상승률이 127%에 달하고 실제 실업률이 80%에 가까울 정도로 극심한 경제난을 겪고 있다. 수도 하라레조차 교통, 하수도, 전기 등 기본적인 도시기능이 마비된 상태다.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은 ‘폭정의 전초기지’ 가운데 하나로 짐바브웨를 지목했었다. 시민들의 불만은 날로 커지고 있지만 전문가들은 선거를 통해 개혁이 이뤄지기는 어려울 것으로 전망한다. 총 150석의 의석 가운데 120석은 선거로 선출되고 30석은 무가베가 지명하도록 돼 있다. 때문에 선거에서 야당이 선전하더라도 무가베의 장기집권을 막는데 필요한 의석의 3분의 2를 야당이 차지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따라서 무가베를 대통령직에서 축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시민봉기라는 것이다. 뉴욕타임스는 이날 ‘무가베 정권을 전복시키기 위한 풀뿌리 운동’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짐바브웨의 지하운동 단체 ‘즈바크와나’를 소개했다. 이 단체는 2002년 대선 직후 활동을 시작해 1만여명의 조직원을 갖고 있다. 인디펜던트는 일부 반정부단체들이 총선 결과가 나올 것으로 예상되는 다음달 2일쯤 시민봉기를 일으키는 방안을 계획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장택동기자 taecks@seoul.co.kr
  • [피플 인 포커스] 키르기스스탄 野지도자 쿨로프

    키르기스스탄의 새 내무장관에 25일 임명된 펠릭스 쿨로프(56)는 이날 함께 대통령 권한대행에 임명된 쿠르만베크 바키예프(56) 키르기스스탄 인민행동 대표와 함께 이 나라의 권력 공백을 메울 선두주자로 꼽힌다. 대중적 지지도에 부통령, 보안장관 등을 역임한 경력, 대표적인 야당을 이끌어 온 조직력 등 대권 접수에 유리한 점을 고루 갖췄다는 평이다. 그는 집권 14년 만에 24일 물러난 아스카르 아카예프 전 대통령의 측근으로 부통령 등을 지내며 옛 소련에서 독립한 키르기스스탄을 초장기부터 이끌어 왔다. 아카예프가 장기 집권, 독재로 흐르자 알 나미스(위엄)당을 창건, 그에게 도전했으나 2000년 선거에서 패배했고 그뒤 부패 혐의로 기소돼 수감됐다. 당시 미국은 “정치적 탄압”이라며 그를 옹호했다. 24일 성난 군중들이 수도 비슈케크의 대통령궁과 정부 청사를 장악한 지 3시간여만에 또다른 시위대가 교도소를 습격, 수감 중이던 그를 석방시킨 것도 상징적이다. 그만큼 대중적 인기를 누리고 있다. 이날 밤 긴급 소집된 하원이 질서 회복을 위해 쿨로프를 내무장관에 임명한 것도 그에게 정국을 주도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는 분석이다. 지난 1993년 ‘솜’이라는 화폐단위 출범을 주도했으며 비슈케크 시장을 지내는 등 수도 일대에서 높은 인기를 누려왔다. 그는 이날 시위대에 의해 풀려난 지 1시간 만에 정부 청사 앞에서 아카예프의 하야를 촉구했고 이를 야당이 장악한 국영TV가 생중계했다. 그외 손꼽히는 인물로는 건설부 장관을 지낸 카디르베코프가 있으나 비타협적인 태도가 약점으로 지적받고 있다. 바키예프는 2002년 남부에서 6명의 시위대가 경찰 총격에 희생된 책임을 지고 총리직에서 물러난 것이 전력 시비를 낳을 수 있다. 외신들은 쿨로프와 바키예프 둘 중의 한명이 대권을 거머쥘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두 사람이 적절한 협력관계 구축에 실패할 경우 자칫 남북으로 갈린 내전을 불러올 수 있다는 위기감 또한 커지고 있다. 임병선기자 bsnim@seoul.co.kr
  • 문세광의 자필 일지 최초 공개

    육영수 여사를 저격한 문세광의 자필 일지가 방송을 통해 최초로 공개된다. MBC스페셜 ‘이제는 말할 수 있다’는 27일 밤 11시35분 육영수 여사 저격사건의 진실을 추적한 ‘육영수와 문세광’ 2편 ‘문세광을 이용하라’를 통해 지난 73∼74년 문세광이 자필로 쓴 수첩과 사형 20일 전 그를 면회한 아사히신문 다메나 기자와의 단독 인터뷰 내용을 공개한다. 문세광의 당시 활동 본거지였던 오사카에는 이 사건이 조작됐다고 주장하는 증인들이 있다. 그의 가족과 한국청년동맹 동료, 오사카 중앙정보부 정보원들의 증언은 한국의 수사기록과 판이하게 다르다. 당시 박정희 정권의 인권탄압과 DJ 납치사건 등으로 국제적으로 고립돼 가던 박정희는 육영수 저격사건을 계기로 한·일 관계가 역전되면서 난국을 돌파할 수 있었다. 사형 집행 20일 전에 그를 만난 일본 아사히신문의 다메나 기자는 “문세광은 자신이 사형당한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교도관들과 웃고 이야기하며 면회장으로 들어왔다.”고 밝혔다. 73∼74년 한국청년동맹 이쿠노지부의 활동 내용이 담긴 활동수첩에는 문세광이 참가한 집회 내용과 집회 참가자, 정세에 대한 자신의 생각 등이 상세히 기록돼 있다. 특히 아카후도 병원에 입원할 때 사용한 가명과 주소, 전화번호, 병원 입원과정 등도 기록으로 남아 있다. 1973년 9월7일 문세광은 한청 중앙위원장이었던 김군부에게 편지를 보냈으나, 취재팀과 만난 김군부는 “편지를 받은 일이 없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편지 내용은 1974년 10월9일 민단과 중정에서 재정 지원을 받던 통일일보 지면을 통해 공개됐다. 누군가 편지를 가로챘다는 의혹이 드는 부분이다. 제작진은 “편지는 1년 동안 사라졌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나타났고, 사건 직전까지 문세광과 늘 붙어다니던 인물도 사건 직후 사라졌다.”면서 “취재 결과 누군가 문세광의 소영웅주의를 이용하려 한 것이 아닌가 하는 판단이 선다.”고 말했다. 이영표기자 tomcat@seoul.co.kr
  • 새장편소설 ‘흑산도 하늘길’ 펴낸 한승원 작가

    새장편소설 ‘흑산도 하늘길’ 펴낸 한승원 작가

    10년 전, 훌훌 털고 노모가 지키는 고향으로 내려가던 길에 작가는 마음밭에 열망의 씨앗 하나를 감췄었다. 한 시공(時空)속에 몸과 마음을 잘 부리고 살다보면 어쩌면 영원을 살 수 있지 싶은, 영원과 소통하는 작품을 일굴 수도 있지 싶은…. ●‘해산토굴’에 스스로 10년을 가뒀죠 고향마을인 전남 장흥 안양 바닷가 ‘해산토굴’이라 이름붙인 글방에 스스로를 “가둔 지” 10년. 중진작가 한승원(66)이 글로써 영원에 닿을 수 있다는 확신을 얻은 시간이다. 작가 자신 “내 삶이 가장 많이 투영된 작품”이라는 새 장편 ‘흑산도 하늘 길’(문이당)에 그 힘센 믿음을 묻었다. 다산 정약용의 둘째형으로, 우리 역사 최고의 어류학 서적인 ‘자산어보’를 남긴 조선 정조 때의 실학자 정약전(1758~1816). 소설은, 독실한 초기 천주교 신자였던 그가 신유박해로 흑산도로 유배돼 그곳에서 삶을 마감하기까지의 일대기를 기둥줄거리로 삼았다. 갇힌 세계에서 끊임없는 저술로 깨달음과 구원을 열망했던 인물에 작가적 삶의 일단이 투사됐음은 물론이다. 작가는 “‘갇힘’에서 ‘놓여나기’의 꿈꾸기”라고 자신의 소설을 압축했다. 책이 찍혀 나온 날 저녁, 인사동에서 그를 만났다.“15년을 쏟아부은 소설이여, 이것이…” 모처럼만에 서울나들이를 한 작가는 새 소설을 향한 애정을 좀체 가라앉히지 못했다.2003년 출간한 ‘초의’보다도 실은 먼저 쓰기 시작한 작품이고, 이번 소설을 쓰느라 ‘사서삼경’을 다시 공부했으며, 정약용·약전 형제의 현학을 이해하기 위해 주역에 빠져야 했다는 등의 이야기가 그렇게 곡진하게 들릴 수가 없다. 왜 정약전이었을까. 삶의 비의(秘意)를 고민한 작가에게 약전의 생애는 ‘정답’ 자체였다.“우리네 삶은 ‘가둬놓기’와 ‘놓여나기’의 길항작용 속에 이뤄지는 게 아닐까 싶어요. 그 길항의 장력이 팽팽해야 긴장된 삶을 살 수 있고, 그래야 좋은 일도 많이 하는 거고.” 33세에 급제해 곧바로 벼슬길에 오른 정약전의 삶은 한참동안 순탄했다. 그러나 소론과 남인 사이에 불거진 당쟁이 신유박해라는 천주교 탄압으로 비화되자 천주교도인 그는 절해고도 흑산도로 쫓겨간다. 소설 속에서 약전은 철저하게 한사람의 인간으로 부활했다. 소흑산도로 향하는 작은 목선에 몸을 싣고 추위와 멀미에 시달리는 모습은 죽음 앞에 작아지는 범인(凡人)의 형상 그것이었다. “정약전에 대한 기록은 정약용이 쓴 묘지명밖에 없다.”는 작가는 “그 속에 소설을 위한 많은 정보들이 있었다.”고 말했다. ●“흑산도 이야기 꼭 쓰고 싶었다” “약전의 저서가 ‘자산어보’로 알려졌지만 실은 ‘현산어보’가 맞아요. 약전의 호가 ‘현산(玆山)’이었고, 동생 정약용도 그를 그렇게 불렀어요.‘현산’은 약전이 유배된 ‘흑산(黑山)’과 같은 의미입니다.” 작가는 ‘현’이란 대명사일 때는 ‘자’로 독음되지만, 검다는 뜻일 때는 ‘현’으로 읽어야 한다고 힘을 실어 말했다.‘검을 현(玄)’ 두개가 합쳐진, 검다는 의미의 호(號)라는 것이다. 작가는 소설의 배경인 흑산도를 수없이 들락거렸다. 약전·약용 형제가 함께 나눈 숱한 현학의 흔적들을 거둬 소설에 담았다. 다산·현산이라는 형제의 호부터 현학의 극치라는 게 그의 해석이다.“다산(茶山)은 차의 향기처럼 현묘한 세계를, 현산(玆山) 또한 그윽하고 신비로운 이상을 염원하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형제가 갇혀살면서 한 일은 저술활동 뿐이었어요. 각각 강진(다산), 흑산도(현산)로 유배됐는데 그런 질곡이 결국 둘을 ‘큰 산’으로 만들었다 싶어요. 형제는 간단없이 글을 썼고, 그걸 증명받고 싶어 서로의 글들을 주거니 받거니 했고. 사면초가 속의 절대고독을 그들은 어떻게 이겨냈을까, 그걸 써보려 했던 거지요.” 노모가 홀로 사는 시골집에서 150m쯤 떨어진 곳에다 글집(해산토굴)을 짓고 붙박힌 것이 지난 96년. 지금은 육지로 이어진 섬 덕도에서 나고자란 탓일까.“유배담이 아니더라도 꼭 한번은 흑산도 이야기를 쓸 요량이었다.”고 그는 말했다.“나를 스스로 가둬놓고 거기서 빠져나오기 위한 몸부림으로 글을 썼으니 그저 역사인물소설이 아니라 ‘내 소설’인 셈”이라고도 했다. ●역사인물소설 아닌 ‘내 소설’ “한승원에게 시간이 있는가, 자문해본 적이 많았어요. 미래를 좀더 확실히 보장받기 위해 장흥으로 내려갔는데.” 알 듯 모를 듯한 말이다 싶은데, 해설을 붙였다.“서울에서 쓴 글들은 새끼들 먹여살리려는 거였고, 내려가서 쓴 것들이야말로 나 자신을 위한 글이란 말이지.” 그가 “동업 중생”이라 부르는 아들 딸 작가(한동림, 한강)에게는 새 소설을 읽혔을까.“그 아이들, 대학간 뒤로는 내 소설 안 읽어요. 아버지 글에 괜스레 감염될까봐 그렇겠지. 집안에서도 소설 얘길랑 꺼내는 법이 없어.” 해산토굴은 절집이나 마찬가지다. 탑도 세워놨고 와불액자도 벽에 걸어뒀단다. 허름하게 숨어앉은 그 집으로 그래도 뜨문뜨문 그가 소설가임을 잊지 않게 해주는 길손들이 찾는다.‘초의’를 쓴 뒤로 차 한잔 달라며 느닷없이 문을 두드리는데,“애프터서비스하는 맘으로 차를 끓여낸다.”는 그다. 그는 이제 바다이야기를 쓸 작정이다.“청년작가들이 공부를 제대로 해서 바다소설을 쓰면 좋을 텐데 내 새끼들도 안할라더라.”며 “어촌·연근해 어업같은 소재의 소설을 천상 내가 써야겠다.”며 웃었다. 황수정기자 sjh@seoul.co.kr 사진 이언탁기자 utl@seoul.co.kr
  • [日 안보리진출 외교공세] 엔화로 阿 ‘포섭’…亞선 과거사 ‘곤혹’

    [日 안보리진출 외교공세] 엔화로 阿 ‘포섭’…亞선 과거사 ‘곤혹’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이 안전보장이사회 개편을 골자로 한 ‘유엔개혁보고서’를 통해 오는 9월까지 유엔 창설 이래 최대의 개혁을 권고하자 일본이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 행보를 본격화하고 있다. 반면 국제사회의 논란도 뜨거워지고 있다. 특히 한국과 중국, 러시아 등 주변국들과 영토 및 과거사 분쟁을 진행중인 일본이 국제사회 공헌 의무 조항을 어떻게 돌파해갈지 주목된다. ■ 日 외교전 어디까지 |도쿄 이춘규특파원|일본 정부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진출에 본격 시동을 걸었다고 언론들이 22일 일제히 전했다. 일본은 이미 지난해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가 상임이사국 진출 의지를 천명했었다. 일본 정부는 아난 유엔 사무총장의 유엔 개혁안에 대해 공식적으로 환영입장을 밝혔다. 상임이사국 진출을 위한 국제적인 환경조성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獨·印·브라질 공동외교전 호소다 히로유키 관방장관은 22일 아난 사무총장의 발표에 대해 “환영하고 지지한다.”면서 “(이후)외교적 노력을 더욱 경주하고 싶다.”고 적극적인 입장을 밝혔다. 아울러 일본·독일·인도·브라질 등 4개국이 협력, 상임이사국 확대와 새로운 상임이사국의 투표에 의한 선출 등을 규정한 결의안을 6월 공동 제출하는 노력을 기울이기로 했다. 다음주부터는 4개국이 유엔 회원국들에 공동외교전도 펼친다.4개국은 결의안을 통해 새로운 상임이사국 후보의 국명은 적지 않되 유엔 회원국의 투표방식으로 선출한다는 것을 명시하기로 했다. 또 투표를 실시한 뒤 새로운 상임이사국 후보의 국명을 넣어 연내 유엔헌장 개정결의안을 제출한다는 2단계 전략이다. 현재 유엔헌장을 개정하기 위해서는 191개 회원국 3분의 2 이상의 찬성과 5개 상임이사국을 포함, 회원국 3분의 2의 비준을 얻어야 한다. 상임이사국은 미국·영국·프랑스·러시아·중국 등 5개국이다. 이에 따라 일본 정부는 회원국의 30%를 차지하는 아프리카 53개국과 14개 카리브해공동체 회원국 등 ‘표밭’ 다지기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고이즈미 총리는 다음달 아시아·아프리카회의에 출석, 아프리카지역에 대한 지원강화를 밝힐 예정이다. 25일 개막될 아이치 만국박람회 때는 카리브해공동체 회원국 지도자들을 비용 일부를 부담하면서 초청, 일본측의 입장을 설명하는 ‘만국박람회 외교’를 펼칠 방침이라고 언론들이 전했다. ●영유권 갈등… ‘분쟁국’ 이미지 불거져 아난 사무총장이 선진국들에 2015년까지 정부개발원조(ODA)를 국내총생산(GDP) 대비 0.7%가 되도록 요구한 것이 일본 정부에는 큰 부담이 될 전망이다. 일본은 재정악화 등의 이유로 6년 연속 ODA 규모를 줄여왔다. 마치무라 노부다카 외상이 전날 ODA 확대입장을 표명했으나 전망은 그다지 낙관적이지 않다고 언론들이 지적했다. 한국과 중국, 러시아 등 주변국과의 외교갈등도 ‘자격시비’를 야기할 전망이다. 동중국해 가스전 분쟁 및 고이즈미 총리의 야스쿠니신사 참배에 따른 중국과의 외교 갈등, 러시아와의 영유권 분쟁에 이어 독도 문제로 한국과의 관계가 최악이다. 국제사회의 지도국가는커녕 분쟁국가의 이미지만 부각돼 있는 형국이다. 근본적으로는 거부권을 갖고 있는 상임이사국 5개국의 이해관계가 문제다. 일본에 대해서는 미·영·프 등 3개국은 지지하지만 중국은 부정적이고 러시아는 어정쩡하다. 따라서 일본에서는 1992년부터 5년간이나 논의됐다가 좌절된 유엔개혁이 ‘총론-찬성, 각론-이견’ 때문에 다시 표류할 수도 있다고 우려한다. taein@seoul.co.kr ■ ‘상임이사국 日’ 가능할까 일본이 갈망하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진출의 열쇠는 현 상임이사국인 5개국의 손에 있다. 미국·중국·영국·프랑스·러시아 가운데 한 나라라도 반대하면 목표를 달성할 수 없어서다. 특히 중국의 입장이 관건이다. 미·영·프 등 3개국이 일본의 진출에 적극 지지 입장을 보이고 있고, 러시아도 대세를 따를 것임을 시사하고 있다. 중국은 일본이 안보리 상임이사국이 되기 위해 넘어야 할 마지막 문턱인 셈이다. 그러나 현재 중·일 관계는 유례없이 긴장돼 있다. 역사교과서 왜곡과 야스쿠니신사 참배 등 과거사 문제, 동중국해 주변의 영토 분쟁 등 껄끄러운 문제가 한 둘이 아니다. 게다가 중국은 미국이 일본을 안보리 상임이사국으로 적극 밀고 있는 것을 ‘중국봉쇄’ 전략의 일환으로 의심하고 있다. 미국이 동북아시아와 유엔이란 국제무대에서 일본을 대리인으로 내세워 중국을 견제하려 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중국은 안보리 확대에는 반대하지 않지만 일본의 상임이사국 진출에 대해선 부정적인 입장을 숨기지 않고 있다. 일본이 과거사 등에 대해 책임있는 입장을 보여주고 주변국들의 불신을 씻어줘야 한다는 자세다. 그렇다고 중국이 절대 반대는 아닌 것 같다. 지금까지 이 문제를 대일 교섭의 지렛대로 활용해온 탓이다. 미국 등 다른 상임이사국은 물론 유엔 회원국들의 움직임과 흐름을 주시하겠다는 측면이 엿보인다. 이석우기자 swlee@seoul.co.kr ■ 유엔개혁, 우리 뜻과 반대로 간다 유엔 안보리가 재편된다면, 그 방향은 정부가 원하는 것과는 다른 쪽이 될 가능성이 많다. 정부는 유엔 내의 중견 국가 모임인 ‘커피클럽(Coffee Club)’을 통해 사실상 상임이사국 확대 반대편에 섰으나 유엔에서는 비주류 의견이다. 현재까지는 일본·독일 등이 원하는 거부권 없는 상임이사국의 확대가 대세인 상황이다. 게다가 지난 95년 유엔에서의 결의에 따라 유엔헌장 53조,107조 등에 거론된 ‘적국(敵國) 조항’도 올 가을 총회에 삭제될 여지가 많다. 일본과 독일에 채워졌던 전범 국가의 족쇄가 공식적으로 풀리는 것이다. 당시 표결에서 삭제 찬성 122개국, 기권 6개국으로 반대표는 하나도 없었다. 또한 상임이사국이 늘어나면 아프리카에도 새로 2석이 배정되는 등 제3세계의 이해에 부합되는 측면도 많다. 그럼에도 우리나라가 ‘선출직 이사국’ 증설을 지지한 것은, 이렇게 돼야 우리도 이사국 그룹에 진출할 여지가 생기기 때문이다. 상임이사국은 ‘유엔에서의 높은 재정·군사·외교적 기여도’ 조건을 충족해야 하므로 우리의 진입 가능성은 낮은 편이다. 예로 일본의 유엔 재정 기여도가 전체 예산의 19.5%, 독일은 8.7%인 반면 우리는 1.8%에 불과하다. 설령 일본·독일·인도·브라질 등 상임이사국 신규 진출 희망국들의 2단계 전략대로 1차적으로 상임이사국이 확대되더라도 막상 2단계인 유엔헌장 개정은, 또 다른 이해관계로 그리 쉽지만은 않다. 독일의 진출은 이탈리아나 스페인이 못마땅하고 브라질은 멕시코와 아르헨티나가, 인도는 파키스탄과 중국이, 일본에는 중국과 한국 등이 거부감을 드러내고 있다. 한편 정동영 통일부 장관은 “일본이 국제적 지도국이 되려면 최근린 이웃으로부터 신뢰받는 게 필수조건”이라면서 “일본이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에 진출하는 과정에서 진정한 평화 애호국인지 의심받을 수 있는 상황”이라고 반대 의견을 피력했다. 이지운 구혜영기자 jj@seoul.co.kr ■ 아난총장 유엔개혁안 21일(현지시간) 뉴욕 유엔본부에서 열린 유엔총회에서 코피 아난 사무총장이 유엔 개혁안을 보고했다. 이번 개혁안은 오는 9월 유엔총회에서 안건으로 논의될 예정이다. 안전보장이사회 확대 등을 뼈대로 한 개혁안은 ‘사안별 이해 관계를 떠나 한 묶음으로 통과시켜 달라.’는 아난 총장의 요청에도 불구, 회원국간 이해관계가 엇갈려 난항이 예상된다. 우선 안보리 확대와 관련, 아난 총장은 지난해 11월 자문위원회가 내놓은 권고안에 포함된 두가지 방안 중에서 선택해 달라며 9월 총회까지는 결론을 내려줄 것을 촉구했다. 거부권을 가진 상임이사국 5개국과 비상임이사국 10개국 등 현재 15개국인 안보리 이사국을 24개국으로 늘리는 것이 핵심이다. 거부권이 없는 상임이사국 6개국과 비상임이사국 3개국을 추가하는 안과,4년 임기에 거부권이 없는 준상임이사국 8개국을 새로 추가하고 비상임이사국 1개국을 늘리는 방안이 맞서고 있다. 일본 등은 상임이사국 진출을 노리지만 준상임이사국 확대를 지지하는 국가들도 적지 않다. 인권이사회 신설은 53개국으로 구성된 기존 인권위를 없애고 회원국 3분의 2 찬성으로 소수 국가들을 선출해 인권 업무를 전담하게 한다는 취지다. 기존 인권위가 지역별로 회원국을 선출하는 바람에 쿠바, 리비아, 수단 등 ‘인권탄압 국가’들이 회원이 되는 경우를 막겠다는 뜻도 있다. 예방적 차원의 선제공격 기준을 규정한 부분에 대해선 미국이 반발하고 있다. 미국은 “예방적 선제공격은 주권국가의 고유한 권리”라며 이라크 침공을 정당화하고 있다. 황장석기자 surono@seoul.co.kr
  • ‘영혼의 고백’ 녹아든 색채추상

    무릇 예술은 자기고백의 산물이다. 예술작품에는 어떤 형식이든 작가의 삶의 흔적이 서려 있다. 서양화가 정경자(66)의 작품은 그 두드러진 예다. 정경자 그림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의 개인사부터 들여다봐야 한다. 한국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아버지가 일제 때 독립운동을 하고 광복 후 김구 계열이었다는 이유로 탄압을 받으면서 집안이 기우는 아픔을 겪었다. 고향에서 뿌리내리지 못한 가족은 일본으로 건너갔고, 화가가 꿈이었던 그는 일본여자미술대학에 들어가 그림공부를 한다. 그러나 한국과 일본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한 그는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다. 그런 ‘경계인’의 입장으로부터 얼마간 자유로워진 것은 프랑스로 건너가면서부터다.1970년 아카데미 드 라 그랑드 쇼미에르에 입학하면서 그는 예술에 자신을 온전히 내맡긴다. 마침내 고국으로 돌아온 90년대 중반.50대에 뒤늦게 인권변호사 이흥록과 결혼한 그는 지금 경기도 양평에 정착해 작품활동에 몰두하고 있다. 원로 여성화가 정경자가 10년 만에 개인전을 열었다. 서울 관훈동 학고재아트센터에 마련된 ‘봄의 소리’전은 국내 화단에는 아직 낯선 이름인 그의 화풍과 인생 내력을 가늠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출품작은 50여점. 작가의 어린시절 정신적 외상은 초기의 인형그림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 사실적으로 그려진 인형들은 한결같이 복잡한 창살이나 견고한 성벽에 갇혀 있다. 하지만 파리시절로 들어서면 작품은 한층 밝고 환상적인 색채의 신(新)구상화풍을 띤다. 이번에 선보인 ‘몽마르트의 봄’‘골목에서’ 등은 멀리 사크르 쾨르 성당이 보이는 파리의 거리 풍경을 원색으로 그려낸 대표작들이다. 작가의 ‘양평시대’ 그림은 어떤 모습일까. 파리시절의 자유분방한 원색은 이제 온화하고 부드러운 파스텔조로 바뀌었다. 도회감각의 경쾌한 선들도 점차 사라져 자연의 색채추상에 녹아들었다. 작가는 오랜 외국생활에서 잊고 지내던 고국의 풀 한 포기, 바람 한 점도 허투루 보아 넘기지 않는다. 그같은 마음자리에서 탄생한 것이 바로 ‘바람·물’‘호반’‘어스름’‘봄의 소리’ 같은 작품들이다. 오로지 색의 농담을 통해 자연의 서정을 풀어낸 이 작품들은 더없이 따뜻하고 경쾌하고 투명하다. 그것은 곧 작가의 영혼의 표백이다.29일까지 (02)739-4937. 김종면기자 jmkim@seoul.co.kr
  • 조작된 공포/폴 토드·조너선 블로흐 지음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정보기관들의 부정적 이미지 가운데 가장 큰 것이 바로 ‘조작과 공포’다. 이들은 정보를 왜곡하고, 적대국의 경제적 위협이나 테러 같은 ‘표적’을 과장함으로써 공포심을 조장해왔다. 그러나 냉전이 사그러지면서 예산이 축소되고 권한도 크게 약화돼 쇠퇴의 길을 걷는가 하더니 다시 그 위력을 떨치고 있다. 분기점은 9·11테러다.9·11 이후 정보기관들은 그야말로 ‘르네상스’를 맞고 있다. 새로 제정된 테러리즘 관련 법안들을 토대로 정보기관들은 시민운동과 환경운동, 반세계화운동까지 감시하기에 이른다. ●시민운동·환경운동까지 감시 ‘조작된 공포’(폴 토드·조너선 블로흐 지음, 이주영 옮김, 창비 펴냄)는 냉전 종식, 그리고 9·11 이후 세계 정보기관들의 역할 모델에 주목하고, 첨단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인한 정보활동의 변화양태를 날카롭게 분석한 책이다. 미국을 중심으로 각국 정보기관의 어두운 과거를 고발하면서 공포와 조작의 대상으로 남아 있는 정보기관의 민주적 통제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미국·영국·프랑스·러시아·이스라엘 등 전통적으로 강력한 정보기관을 갖고 있던 나라들은 물론, 아직까지 생소할 수도 있는 시리아·파키스탄·미얀마·남아프리카공화국 등 제3세계 국가의 정보기관까지 총망라해 정보기관들의 활동과 조직규모, 예산 등 객관적 사실들과 서로 협력과 경쟁, 반목해온 각국 정보기관들의 비사도 서술했다. 책에 따르면 9·11 이후 미국에선 국토안보부가 신설되고, 연방재난관리국이 확대 개편되었으며, 애국법·반테러법이 제정되었다. 유럽연합에선 ‘반테러 로드맵’이 한층 진전되었고, 이스라엘은 슬그머니 팔레스타인과 테러조직 사이의 연계설을 쟁점화하여 목소리를 높였다. 러시아는 ‘테러와의 전쟁’을 체첸 분리주의자 탄압의 명분으로 삼았다. 결국 9·11은 냉전 종식으로 엄청난 감량을 감당해야 했던 이들 정보기관들에 돌파구를 마련해준 셈이었다. 미국 국가안보기록연구소 연구원을 역임한 폴 토드, 그리고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정치활동에 참여했으며 현재 영국 런던 지역의회 의원으로 있는 조너선 블로흐가 공동 집필했다. 저자들은 지금을 ‘감시의 시대’로 명명하면서, 전지구적 차원의 위성감시 시스템인 에셜론(Echelon)에서부터 첨단 정보통신기술을 활용한 최신 감시기법들에 이르기까지 과학기술의 발달로 감시능력이 더욱 강화된 정보기관의 모습을 살펴본다. ●첨단 정보시스템 무기로 기업과 개인까지 표적 책에 따르면 미 국가안보국(NSA)이 기획·조정하는 전 지구적 감시시스템인 에셜론의 위력은 가공할 만하다. 주로 국제 전자통신네트워크상의 암호화되지 않는 이메일, 팩스, 전화를 감시·도청하는 데 이용된다. 개인 관련 키워드를 검색어로 해서 수백만개의 메시지를 검색하고, 다양한 분류단계를 거쳐 데이터베이스화한다. 에셜론이 이전의 첩보시스템과 다른 점은 비군사적 표적, 이를 테면 정부나 단체, 기업과 개인이 표적이 된다는 것이다. 이같은 정보를 토대로 미국 언론들은 에어버스가 사우디아라비아 정부관리에게 뇌물을 준 사실을 폭로했고, 사우디아라비아는 에어버스사와의 계약을 파기했다. 그 계약은 이후 미국 기업 보잉사와 맥도널더글러스사의 차지가 됐다. 미국 항공기회사 레이시온이 톰슨-CSF 컨소시엄을 제치고 아마존 유역의 감시시스템 구축 사업체로 선정된 것도 역시 NSA의 작품이었다. 각국 정보기관은 국내의 사회운동, 반정부운동을 통제하기 위해 악행을 마다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제3세계의 정치와 경제에도 깊숙이 개입했다. 아프리카 지역의 끔찍한 학살전쟁 배후에는 아프리카의 광물과 석유자원 등 경제적 이권과 정치적 영향력 확대를 꾀한 미국·프랑스 등 서방 강대국의 정보기관이 있었다. 라틴아메리카의 군부 독재정권을 지원하고 훈련케 한 것도 미국 정보기관이었다. 책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이스라엘 정보기관들에 의한 표적 암살도 고발한다. 아울러 산업과 경제정보가 정보기관의 중요한 활동 영역으로 자리잡으면서 정보기관들이 거대기업들과 손을 잡고 상호이익을 추구하는 추악한 모습도 폭로한다. 그리고 권력의 사유물이 되어버린 시리아·이라크·파키스탄·미얀마의 정보기관들의 음모 등도 상세히 파헤쳤다. ●정보 오용과 왜곡의 결과는 끔찍한 참극 저자들은 한국어판 서문에서 ‘우리는 거짓으로 판명된 정보 때문에 큰 전쟁이 개시되는 것을 목격했다.’며 정보기관의 왜곡된 정보가 얼마나 끔찍한 결과를 초래하는지 환기시킨다. 당시 문제는 이라크가 대량살상무기를 보유하고 있느냐였다. 하지만 공식주장은 ‘대량살상무기가 존재한다’에서 ‘무기개발 계획이 존재한다’로, 이어 ‘무기개발과 관련된 움직임이 있다’로 후퇴를 거듭했다. 정보기관은 단순한 말바꿈으로 끝날 지 모르지만 그 과정에서 수십만명의 목숨이 희생되는 참극이 초래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정책결정자들에게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는, 본래부터 애매모호한 절차가 오용될 때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극명하게 보여준다.1만 2000원. 임창용기자 sdragon@seoul.co.kr
  • [기고] 한·일 역사교과서 부교재 출간 환영/김정훈 전남과학대 일문학 교수

    전국교직원노동조합 대구지부와 일본교직원조합 히로시마지부가 3년 전부터 공동으로 개발해온 역사교과서 부교재가 3월 초 양국에서 동시에 출간된다고 한다. 양국 정부에서 역사교과서의 공동연구를 한다고 하지만 양국의 이해관계가 맞물려 있어 그 합일점을 찾기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이때 보수수구 세력을 견제해 오던 양국의 교원단체가 연대해 민중의 관점에서 기술한 부교재를 선보인다고 하니 참으로 고무적인 일이다. 사실 일본 정부는 역사교과서 문제를 ‘국가주의’의 관점에서 접근하려는 의도가 역력하다. 현 고이즈미 내각의 행보에 맞추어 나카야마 나리아키 현 문부과학상이 일본 역사교과서에 자학적인 내용이 많다고 연이어 망언을 하는 현실은 그 사실을 여실히 뒷받침해 주고 있다. 그런데 일본의 ‘국가주의’는 결코 ‘상호주의’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제국주의’와 맥락이 맞닿아 있는 데에 문제의 심각성이 도사리고 있다. 더욱이 그것은 일반 민중의 개성을 말살하고서라도 관철시켜온 그들의 독특한 이데올로기 논리에 기인하고 있다는 사실도 직시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메이지유신 후 제국주의 행보를 가속화하던 일본은 국가와 왕에 대한 절대복종을 강요했음은 물론 그를 위해 일반 민중의 사상과 자유를 철저히 억압했다. 오로지 팽창주의로 일관하며 동아시아의 패권을 장악하기 위해 치른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자 그들은 혹독하게 민중을 탄압했던 것이다. 한반도 지배, 국가주의, 일왕 절대화의 일본 정부정책에 반기를 들고 일왕 암살을 기도하려 한 고토쿠 슈스이 등 12명을 ‘대역 사건’이라며 즉시 처형한 점으로 보아도 당시의 상황을 짐작해볼 수 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개인의 자유와 존엄성은 오로지 일왕 절대화와 ‘국가주의’를 위해 극도로 제한되며 언론과 사상활동도 탄압의 대상이 된다. 한반도의 식민지화가 일본 내의 이런 일련의 사건과 동시에 진행되었거니와 ‘국가주의’를 내세워 일본 내 양심세력과 민중을 탄압한 데에서 출발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국가주의’를 일본과의 관계에서 경계의 대상으로 인식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러·일전쟁 당시 한때 방관적인 태도를 보이던 일본 근대의 문호 나쓰메 소세키도 오죽하면 강연을 통해 ‘국가주의’를 비판하고 ‘개인주의’를 강조하며 “어떤 사람은 지금의 일본은 꼭 국가주의가 아니면 자립할 수 없는 것처럼 선전하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또한 개인주의 요소를 유린하지 않으면 국가가 망할 것처럼 주창하는 자도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런 터무니없는 일은 결코 있을 리가 없습니다.”라고 설파하였겠는가. 어쩌면 역사교과서 문제는 ‘국가주의’를 강조하며 끊임없이 보수로 회귀하고 있는 현 고이즈미 정권과 자민당 체제하 정부 차원에서의 타결을 기대하기는 어려울지도 모른다. 한·일 관계에 있어서 ‘국가주의’를 강조하는 시점을 지닌 현안만큼 풀어헤치기 어려운 난제는 없기 때문이다. 한·일협정 관련 문서 공개 건이나 군위안부 및 원폭피해자 배상문제만 보더라도 한·일 관계를 정부 입장에서 해결하는 것이 얼마나 난관에 봉착하는 일인지 새삼 강조할 필요도 없겠다. 이러한 상황에서 양국 지성을 대표하는 민간 교원단체가 연대해 개가를 올린 만큼 진심으로 찬사를 보내고 싶다. 현재 일본 내에는 ‘9조(條)의 회’‘어린이와 교과서 전국네트워크 21’‘시민의 교과서 연구소’를 비롯한 여러 양심세력이 한국의 여러 단체와 연대를 모색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역사교과서, 헌법개정과 자위대 파견, 이라크전쟁 문제에 공동대처하고 있다.‘국가주의’ 체제하에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를 놓고 권력과 투쟁하며 그들의 주장을 줄기차게 펼치고 있는 것이다. 이번 역사교과서 부교재 출간을 계기로 양국간의 민간단체가 다시 연대해 산적한 현안의 활로를 개척해 나가기를 간절히 기대한다. 김정훈 전남과학대 일문학 교수
  • 美·中 인권전쟁

    |베이징 오일만특파원| 미국과 중국간의 ‘인권 전쟁’이 시작됐다. 지난달 28일 미국 국무부가 발표한 ‘2004년 연례 인권보고서’에 맞서 중국은 3일 ‘2004년 미국 인권기록’을 발표키로 했다고 관영 신화사가 2일 보도했다. 미 국무부는 인권보고서에서 중국의 전반적인 인권 상황이 열악하다고 종합적으로 규정했다. 중국 내에서 성행하는 탈북여성 인신매매와 반체제 인사 탄압, 탈북자 강제북송 등 중국 당국의 비인도적인 태도를 지적한 것이다. 이에 대해 중국은 ‘미국 인권기록’을 통해 상세하고 객관적인 사실을 토대로 미국의 ‘위선’을 만천하에 알리겠다는 태세다. 주요 내용은 미국의 외국 침략과 수감자 학대 및 생명ㆍ자유ㆍ신체의 안전, 정치권리와 자유, 경제ㆍ사회ㆍ문화적 권리, 인종차별, 부녀와 아동상황 등 다양한 인권침해 사례 등이다. 베이징 외교가의 한 소식통은 “올해로 다섯번째인 중국의 미국 인권침해 사례 발표는 미국의 인권외교에 대한 중국의 뿌리깊은 불신감을 반영한다.”고 밝혔다. 중국측은 미국이 인권을 앞세워 내정에 간섭하기 위한 도구로 활용하고 있다고 판단, 장기적으로 미국의 인권외교 무력화를 위해 공세적으로 대처할 것으로 보인다. 이런 맥락에서 미국의 인권보고서에 대한 중국의 반응은 강력하다. 류젠차오(劉建超)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1일 정례 브리핑을 통해 “미국이 중국 인권의 부단한 발전과 개선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런 내용을 발표하는 데 대해 중국은 강력한 불만을 표시한다.”고 항의했다. 이어 “미국은 스스로 다른 나라의 인권을 침해하고 있는 것에 대해 되돌아 봐야 한다.”고 강도높게 비난했다. 또 중국 인권연구회 둥윈후(董云虎) 부회장은 “지난해 자행된 미군의 이라크 포로 학대가 미국의 이중적 인권 잣대를 방증하는 대표적인 사례”라며 “미국의 인권 ‘거울’엔 왜 자신들의 얼굴이 보이지 않느냐.”고 비아냥댔다. oilman@seoul.co.kr
  • 부시가 기가막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미 CBS 뉴스 애청자?’ 미 시사주간지 타임 온라인판은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지난달 24일 푸틴 대통령과의 단독정상회담에서 뜻밖의 공격을 당해 어안이 벙벙해졌다고 전했다. 러시아의 민주 개혁을 거론하면 푸틴을 궁지에 몰아넣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다. 부시 대통령이 크렘린의 언론매체 탄압 사례를 들며 민주주의와 자유 언론의 관계에 대해 장황한 설명을 늘어놓자 푸틴 대통령은 “미국 언론이 그렇게 자유롭다면 왜 CBS 기자들이 해고됐느냐.”고 역습을 가했다. 부시 대통령은 입만 떡 벌리고 있었을 따름이었다고 한 관계자가 전했다. 이 관계자는 “푸틴 대통령은 우리(정부)가 앵커인 댄 래더를 해고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더라.”며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에나 나올 법한 얘기 아니냐.”고 덧붙였다. 정상회담 후 공동 기자회견에서도 한 러시아 기자가 래더의 해고 건을 부시 대통령에게 질문했다. 백악관측은 러시아측이 사전에 조율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런 일이 처음 있는 일은 아니다.3년 전 슬로베니아의 류블랴나에서 두 정상이 회동했을 때도 푸틴 대통령은 “미국의 닭고기 업체들이 (미)국내에 공급하는 것보다 질 낮은 제품을 러시아 등에 수출한다는데 사실이냐.”고 따져 부시 대통령을 황당하게 했다. /***백악관은 크렘린 참모들이 푸틴 대통령에게 미국에 대해 잘못된 정보를 주입해 이같은 촌극이 빚어지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고 타임은 전했다. /***/ 임병선기자 bsnim@seoul.co.kr
  • 美, 中·사우디 인권상황 맹비난

    |워싱턴 AFP 외신|미국이 시리아와 이란 뿐 아니라 러시아와 중국, 사우디의 인권상황도 거칠게 비난했다. 미 국무부는 28일(현지시간) 발표한 2004년 연례 인권보고서에서 크렘린에 권력이 집중되고 있음을 지적한 뒤 러시아 당국에 의한 언론 탄압과 사법부에 대한 정치적 압력이 거세지고 있다고 비난했다. 보고서는 또 중국에서의 인권개선은 ‘실망스러운’ 것이라며 중국 당국이 체체 비판세력을 계속 체포하고 있다고 밝혔다. 중국이 대테러 전쟁을 위구르 분리주의자에 대한 탄압에 활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특히 사우디에서는 수감자에 대한 고문과 학대, 독방 연금과 체포 등이 계속된다는 증거가 있다고 맹비난했다. 일부 민주주의적 진전이 있었으나 내·외국인을 가리지 않고 협박과 학대행위가 이뤄지고 있다고 덧붙였다. 시리아와 이란의 열악한 인권상황도 지적했다. 한편 보고서는 북한의 인권상황과 관련해 심각한 우려를 표시한 뒤 “광범위한 인권학대가 자행되고 있다.”고 지난 수년간 써온 똑같은 표현을 반복했다.
  • 무장日軍 학교 난입… 무차별 고문…

    러시아 혁명 이후 연해주에 진주한 일본군이 당초 출병목적은 외면한 채 한인의 독립운동을 짓밟는 데 혈안이 됐었다는 내용을 담은 미군의 정보문서가 처음으로 공개됐다. 일본군은 1918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볼셰비키 혁명군인 적군(赤軍)과 차르의 백군(白軍) 사이에 내전이 벌어지자 ‘국제간섭군’이라는 명분으로 미국, 프랑스와 함께 출병했다. 국사편찬위원회는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서 최근 입수한 ‘미국 시베리아 원정군 정보장교 문서’를 27일 공개했다. 이 문서는 1919년 3·1운동을 전후한 시기 시베리아와 연해주에서 한인 항일독립운동을 일제가 어떻게 탄압했는지를 담고 있다. ‘일본이 시베리아의 한국인들에게 가한 야만적 가혹행위’라는 부제를 단 보고서에 따르면 일본군은 1918년 10월부터 1919년 8월까지 에브게네프카, 하바로프스크, 니코리스크, 베리노 등에서 활동하던 한인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일본군은 한인 독립운동가들을 무차별 체포해 감금과 고문을 일삼았으며, 한인 학교에 무장한 채로 들어가 교과서를 불태우거나 책상 등의 집기를 부수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1919년 3월15일 하바로프스크에서는 미군 병사들에게 영문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던 한인 2명을 체포해 사슬로 묶은 뒤 감옥에 2주 동안 감금하며 고문을 자행하기도 했다. 일본군은 또 항일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한국인을 매수해 동료들을 고발케 하거나 러시아 경찰에게 금품을 대가로 조선인 탄압에 앞장서도록 하기도 했다고 문서는 전하고 있다. 국사편찬위 이상일 박사는 “이번에 공개된 문서는 러시아나 일본의 기록에 의존하던 3·1운동 전후 연해주 지역 독립운동사 연구에 큰 도움을 줄 것”이라면서 “일반인들에게도 일제의 만행에 대한 경각심과 독립 운동에 목숨을 바친 선열의 뜻을 되새기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박지윤기자 jypark@seoul.co.kr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7) 계룡산과 신종교들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7) 계룡산과 신종교들

    ●정감록, 대항 이데올로기, 신종교, 주체적 근대화운동은 함수관계 ‘정감록’과 나의 만남은 조선의 지배 이데올로기인 성리학을 꺾기 위한 대항 이데올로기가 과연 존재했느냐 하는 화두에서 비롯됐다. 이 문제를 풀려고 나는 서양의 종교사, 중국의 태평천국, 백련교 등에 관한 책을 읽으며 암중모색을 하던 중 ‘정감록’, 대항 이데올로기, 신종교 그리고 주체적 근대화운동 사이에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고 믿게 됐다.“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원불교, 다양한 농촌운동을 전개한 천도교의 경우에서 보듯 신종교는 근대화운동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많았다. 뭉뚱그려 말하면, 조선 후기 평민 지식인들이 생산·보급한 ‘정감록’은 동학·증산교 및 원불교 등 한국의 대표적인 신종교들을 낳았다는 것이다. 이들 신종교는 성리학에 대항한 새 이데올로기일 뿐만 아니라 근대화를 위한 대안의 구실도 할 만했다.19세기 말부터 이들 신종교는 민중의 입장에서 ‘제생의세’(생명을 살리고 병든 세상을 치료)와 ‘해원상생’(원한을 풀어 서로를 살림) 운동을 전개했다. 이것은 평민 지식인들이 주도한 운동이란 점에서 한국사상사의 큰 결실이었다. 그러나 이런 신종교들이 기성 이데올로기를 대체하기 전에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한국 사회는 조선 후기 평민 지식인들이 애써 창안한 대항 이데올로기를 외면한 채 기독교, 자본주의, 사회주의 등을 수입하는 처지가 됐다. 새 이데올로기를 도입한 사회세력들은 신종교를 일괄 매도하는 경향이 심했다. 그들은 신종교를 ‘유사종교’라든가 ‘사이비종교’라며 무시하고 억압했다. 비유컨대, 수입상품을 팔아먹으려고 토산품에 대해 흑색선전을 펴는 격이었다. 간혹 일부 신종교 단체들이 물의를 일으켰다 해도, 그것으로 신종교 전체를 매도해서 될 일인가. 참고로 말하면 일제시기 신종교 단체들의 인기는 대단했다. 오늘날의 기독교나 천주교보다 수십 배 신도 수가 많았다. 우리는 더 이상 냉혹한 비판자의 편향된 시각에서 신종교 단체들을 홀대할 이유가 없다고 본다. 수십년 전 수백만 민중의 지지를 받던 신종교는 ‘정감록’에서 영감을 얻었거나, 사상적 영향을 받았다. 그런 점 때문에 ‘정감록’을 이야기하다 보면 자연히 신종교를 말하게 되고, 신종교를 논의하면 당연히 정감록 이야기를 빠뜨릴 수 없다. 정감록이 신종교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끼친 부분은 ‘때가 되면 진인이 나와서 계룡산에 도읍한다.’는 대목이다. 이것을 어떻게 해석하느냐는 신종교마다 일치하지 않아 여러 형태로 구별된다. 나는 편의상 그 형태를 청림교형·보천교형·원불교형 등 3가지로 구분해 부르겠다. 이들의 차이점을 자세히 살펴보는 것은 정감록, 대항 이데올로기, 신종교 그리고 자주적 근대화운동의 상관관계라는 큰 주제에 접근하는 내 나름의 방법이다. ●전통적 정감록 신앙에 근접한 청림교형 신종교 단체들 가운데 조선 후기의 전통적인 정감록 신앙에 가장 가까운 형태를 띠는 것을 나는 청림교(靑林敎)형이라 한다. 엄밀히 말해, 청림교가 늘 그랬다는 뜻은 결코 아니며, 단지 1932년에 발생한 이른바 청림교 사건에서 드러난 그 교단의 모습에서 정감록 신앙의 원초적 형태를 재발견했다는 것이다. 지금은 자취 없이 사라진 청림교지만 본래 1920년 동학에서 갈라져 나올 때만 해도 그 세가 만만치 않았다. 교당이 만주와 지린에까지 세워져 한때 신도 수가 30만명을 오르내릴 정도였다. 청림교는 항일운동에도 열심이어서 일제가 눈엣가시처럼 여겼다고 하는데 마침 1932년 2월 말에 터진 청림교 사건이 결정적인 탄압의 구실이 됐다. 당시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상상하던 정감록과 신종교의 관계를 구체적으로 알아보기 위해 사건의 내용을 개관해 보자. 이 사건을 통해 우리는 ‘정감록’을 빙자해 ‘어리석은 백성’을 현혹하는 신종교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물론 언론에 밝혀진 사건의 상당 부분은 일제가 조작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면서 봐야 한다. ●자하도 진인이 보내온 만병통치약 1932년 2월27일자 경성일보에 따르면 일본 경찰은 청림교주 태두섭을 비롯한 30명을 긴급체포했다. 전국 각지에서 농민들에게 금품을 갈취해 사복을 채운 혐의로 붙들려온 이 교단의 간부 11명에게는 결국 실형이 선고됐다. 청림교측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고 한다. “바야흐로 계룡산에 신국가 건설사업이 착착 진행되고 있다.‘정감록’에 약속된 대로 곧 진인이 나와 국권을 손에 쥘 것이다. 진인은 이미 청림교 간부들과 수시로 연락을 주고받는 단계에 있는데 남해 자하도라는 무인도에 숨어 있는 칠성관이 바로 정감록에 예언된 진인이다. 누구든지 청림교를 제대로 믿기만 하면 이 다음에 크게 벼슬한다. 몸에 병이 있는 사람도 아무 걱정하지 마라. 청림교에는 자하도에서 몰래 가져온 신약이 있다. 이 약만 복용하면 만병이 통치되고 불로장생한다.” 청림교에서 말한 자하도와 칠성관은 물론 가공의 섬, 가공의 인물이었다. 다만 ‘정감록’에 남해의 어느 섬에서 진인이 나와 계룡산에 도읍한다고 돼 있는 것만은 사실이라서 많은 정감록 신봉자들은 그 말에 귀를 기울였다고 본다. 청림교측은 진인의 실체를 칠성관으로 파악하고 있던 데다가 진인이 머무는 남해의 섬을 자하도로 정확히(?) 밝혔고, 또 그 진인과 이미 왕래를 하고 있다는 주장까지 하는 바람에 그럴싸하게 들렸던 것이다. 또한 청림교측은 진인이 직접 조제했다는 선약(仙藥)을 시판하기도 했다.‘정감록’에는 진인이 약을 만든다는 말이 전혀 없다. 그렇긴 해도 사람들은 세상을 구하러 나올 진인이라면 그 정도 능력쯤이야 있을 법하다고 믿었다. 진인이란 용어가 본래 도교적인 데다 도교는 장생술(長生術)을 추구하므로 진인과 선약의 관계는 누구에게나 밀접해 보였을 것이다. 이런 사정으로 미뤄 볼 때 불치병에 시달리던 사람들이 청림교측이 파는 선약에 관심을 가진 것은 무리가 아니었다. 만일 식민지 경찰의 수사 결과가 사실이었다면, 청림교 간부들은 이런 ‘황당한’ 거짓말로 ‘어리석은’ 농민들을 속여 사기행각을 거듭했던 셈이다. 거듭 말하지만 나는 일제가 발표한 청림교 사건을 액면 그대로 믿지 않는다. 이 사건은 청림교를 탄압하기 위해 일어난 것이었고, 수사 과정에 혹독한 고문이 있었다. 따라서 사건에 관한 보도 가운데도 일경의 왜곡과 조작이 섞여 있을 수가 있다. ●정감록 신앙의 원초적 형태 어쨌거나 청림교 간부들의 언동에는 조선 후기에 널리 퍼져 있던 정감록 신앙의 원초적인 모습이 재발견된다. 계룡산 천도설의 주인공인 진인의 능력을 빌미로 신도를 끌어들이고 조직의 운영에 필요한 자금을 확보하는 방법 말이다. 비슷한 일이 18세기 정조 때도 있었다. 그때 어떤 사람들은 진인이 해도에서 몰래 군대를 기르고 있다며 군인들이 입을 군복을 마련한다는 빌미로 금품을 거둔 사례가 있었다. 또 어떤 이들은 해도에 있는 진인에게 물어 미래의 운세를 봐주겠다며 의뢰인에게서 복채를 챙기기도 했다. 묘향산 등지에 머무는 진인에게 부탁해 액막이를 하겠다며 제수용품조로 거금을 제공받은 이도 있었다. 청림교 사건에 투영된 신종교의 모습은 대강 이렇다. 이 단계의 신종교는 아직 기성 이데올로기에 대항할 만큼 뚜렷이 정제된 이념을 갖지 못했다. 그 단체의 수장은 스스로를 진인이나 새 세상을 건설할 주역으로 제시하지도 못하는 가운데 정감록에 언급된 진인을 내세워 교단의 조직을 보강하고 운용자금을 거두는 정도다. 이들 신종교는 그저 ‘정감록’을 시세에 맞춰 풀이해 현세적 이익을 도모하는 정감록 신앙에 지나지 않았다. 사실 일제시기 계룡산에 난립해 있던 신종교 단체는 대체로 그 수준이었다. 각지로부터 계룡산에 이주해온 정감록 신봉자들 중에는 일인교단(一人敎團)에 머문 경우도 많았다. 계룡산을 처음 찾았던 1980년대 후반에도 나는 이런 형태의 정감록 신자들을 많이 보았다. ●국가적 차원에서 천지개벽을 바라본 보천교형 그와 다른 차원에서 정감록의 계룡천도설을 수용한 신종교 단체들도 있었다. 정연한 교리체계를 갖추고 국가나 민족의 입장을 내세운 경우인데, 그 대표적인 사례로 나는 보천교(普天敎)를 손꼽는다. 지금은 그 존재가 희미해졌지만 일제시기 보천교는 위세당당한 신종교였다. 보천교는 1911년 증산교에서 독립됐다. 창립자는 차경석(車京石·본명은 輪洪)으로 그는 증산교와 동학의 교리를 녹여내 나름대로 새 세상을 준비했다. 인의(仁義)의 실천을 기본교리로 정했고 경천(敬天)·명덕(明德)·정륜(正倫)·애인(愛人)을 4대강령으로 삼아 상생(相生)·대동(大同)을 강조했다. 한데 이 신종교의 가장 큰 특색이라면 교주 차경석이 ‘정감록’을 적극 원용한 점이다. 그는 천지운도(天地運度·새 세상)를 열 사람은 자기뿐이라며 진인을 자처했다. 새날이 오면 한국은 세계 종주국가가 된다던 차경석의 주장은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 1920년대 말 보천교는 동아시아가 한세상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일제의 대동아공영권에 동조하는 듯한 인상을 주기도 하였지만, 보천교의 본래 모습은 그렇게 친일적인 것이 아니었다. 보천교 신도들은 일본 상품을 철저히 배격했고 토산품 자급자족운동을 했다.1919년 독립만세운동이 끝난 뒤 허탈감에 빠져 있던 민중은 이런 보천교의 민족적인 성격에 호응해 교세가 급속히 팽창했다.1920년대 중반은 보천교의 전성기로 간부 수가 55만명을 헤아렸고 신도는 6백만명을 넘었다고 한다. 곧이듣기는 어렵지만 1920년 당시 조선총독부가 조사한 기독교 신자 총수 32만 3574명과 비교해 볼 때 보천교의 교세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가늠해 볼 수 있다. 보천교는 기독교의 20배쯤 되는 신도 수를 자랑했던 것이다. 그들은 ‘정감록’을 인용해 대한독립이 임박했다고 주장했으므로 일제는 보천교의 일거수일투족에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교세가 워낙 큰 데다 교주 차경석의 카리스마가 절대적이어서 감히 교단 해체를 명령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비유하면 당시 보천교는 구한말 동학이 누렸던 민중종교의 위상을 가졌던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식민지 당국이 보천교의 활동을 방치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일설에 따르면 일경에 체포돼 곤욕을 치른 보천교 신도가 3만명 이상이었다고 한다. 조선총독부는 보천교를 반국가적 ‘음모단체’로 규정해 놓고 사사건건 트집을 잡았다. 보천교의 ‘음모’는 대한독립을 목적으로 삼은 것이었고 그 핵심이 ‘정감록’의 계룡산 도읍설이었다.‘정감록’에 “계룡산의 돌이 하얗게 되고, 초포에 배가 다닐 때 세상일을 알 수 있다(鷄龍白石 草浦行舟 世事可知).”는 구절이 항상 문제였다.‘세상일을 알’ 거란 문구를 보천교측은 교주 차경석의 등극으로 풀이했다. 그런데 마침 1924년은 육십갑자가 새로 시작되는 갑자년이라 보천교 신도들은 그 해를 신국가 출범 시기로 보았다. 이른바 지상낙원인 후천세계(後天世界)가 시작될 갑자 원년으로 간주했던 것이다. 종교적 카리스마가 막강했던 차경석은 일반인들 사이에도 인기가 높아서 사람들은 동양을 지배할 권력자라는 의미로 그를 차천자(車天子)라고 불렀다 한다. 물론 비웃음을 담아 그렇게 부른 경우도 적지 않았을 테지만. 1929년 낙성된 보천교의 본부 건물 십일전(十一殿)은 보천교의 교세를 반영한다. 전북 정읍에 건립된 이 건물은 지붕을 덮은 기와가 황금빛을 뿜었으며, 경복궁 근정전보다 무려 2배나 컸다.1924년 등극설이 무위로 끝났기 때문에 보천교측에선 바로 그 십일전에서 기사년(己巳年·1929년) 기사월(己巳月) 기사일(己巳日)에 교주 차경석이 천자로 즉위한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기(己)와 사(巳)는 글자의 생김이 서로 비슷한데, 두 글자는 10간과 12지의 중간으로 최상의 양기를 상징한다. 특히 뱀을 뜻하는 巳는 용(辰)과 더불어 성인(聖人) 즉 임금을 가리킨다. 따라서 “기사년 기사월 기사일”이라면 보통 임금이 아니라 전 세계를 뒤흔들 만큼 지도력이 강한 왕이 등장할 시점으로 해석된다. 이 소문으로 수백만 보천교도들은 대한독립의 임박을 믿었고, 그러자 식민지 당국자들은 행여 큰 소요라도 일어날까 봐 전전긍긍했다. 하지만 차경석은 왕이 되지 못한 채 1936년 병으로 죽었다. 조선총독부는 그 소식을 환영했고 보천교 분쇄공작에 나섰다. 졸지에 지도자를 잃은 보천교는 사분오열돼 사양길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차경석이 죽은 뒤에도 보천교 신도의 상당 수는 여전히 ‘정감록’의 계룡산 도읍설에 건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신왕조의 수도로 예언된 계룡산에는 후천개벽의 기운이 넘친다. 머지않아 계룡산 신도안에 도읍할 정진인은 차경석의 손자 정동영이 틀림없다.” 일부 신도들은 이런 말을 퍼뜨리며, 차경석의 어머니가 이웃의 정모라는 사람에게 성폭행을 당해 차경석을 낳았기 때문에, 그의 실제 성은 정씨라는 터무니없는 주장을 폈다. 1930년대 후반 총독부 관변 민속학자 무라야마 지준이 쓴 조사보고서를 읽어 보면, 당시 차경석의 손자는 행방불명이 되고 없었다. 그 점에 대해 신도들의 설명은 달랐다.“차천자의 손자 정동영은 깊은 산속에 숨어 밤낮으로 심신을 수련하고 있다. 이제 정동영이 다시 나타난다. 새 세상에선 정동영을 받드는 사람들이 신양반이 돼 요직을 차지한다.” 성폭행설까지 조작해 자기네 교주의 성까지 바꾼 것은 억지스럽고, 교주가 ‘천자’에 즉위한다고 했던 점은 시대착오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천교의 주장엔 긍정적으로 평가될 부분이 있다. 그들은 정감록 신앙을 대한독립, 지상천국인 후천세계의 관념과 결부시킴으로써 일제에 저항할 원동력을 제공했고, 단순히 항간에 떠도는 예언이 아니라 식민지 지배체제에 대한 대안으로 탈바꿈시켰다. 비록 엉성하긴 했지만 큰 변화였다. 한편 원불교에선 계룡산을 무엇으로 이해했는가 하는 문제는 따로 살펴보겠다.(푸른역사연구소장)
  • [발언대] 3·1운동 정신을 생각하며/원태섭 동학농민혁명 명예회복 심의위원회 행정사무관

    일제 강점에서 벗어나기 위해 온민족이 전개한 독립운동 정신을 기리는 3·1절이 1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비무장 저항운동은 일제의 총칼에 짓밟혔지만 그 고귀한 정신은 오늘까지 생생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역사적 과정을 살펴볼 때,3·1운동의 정신의 본류는 동학농민혁명의 정신이라 할 수 있다. 동학농민혁명군은 1894년(갑오년) 음력 3월, 일본의 경제수탈과 연결된 지방 관속들의 부정부패를 척결하기 위해 1차 봉기했다. 이어 일본이 같은해 음력 5월, 군사력으로 경복궁을 강제점령하는 등 침략을 노골화하자 음력 9월에 2차 활동을 전개했다. 당시 조선정부는 일제의 강압으로 100여만명이 참여한 동학농민군을 반란군으로 규정하고 탄압해 30만∼40만명의 희생자가 발생하였다. 농민군들은 참살을 모면하기 위해 국내외로 흩어져 이름과 성을 바꾸고 살아갔으며, 참여자와 유족은 사실을 감추기에 급급했다.111년이 지난 지금, 동학농민혁명운동 전개 당시의 구체적인 참여자의 명단과 활동과정을 규명하기 위한 우리 모두의 노력이 필요하다. 동학농민혁명은 농민(시민)의 사회개혁을 위한 시민운동의 역사이며, 나라를 지키기 위한 독립운동의 역사다. 외세 침략을 물리치고 자주국가를 이루려는 애국애족정신과 봉건사회의 폐정을 혁신하여 평등·대동 세상을 구현하고자 했던 개혁(혁신)정신은 항일의병활동,3·1운동,4·19혁명,5·18광주민주화운동으로 이어졌다. 그동안 우리는 동학농민혁명군의 정신이 일제하의 항일독립군, 민주사회의 시민운동가들의 정신적 본령이라고 차마 말하지 못했다. 그러나 명예회복을 위한 특별법이 제정됨으로써 ‘반란’이 이제는 떳떳한 ‘혁명’으로 명예회복이 되었다. 정부에서는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의 애국애족정신을 기리고 민족정기를 선양하고자 유족등록사업과 기념사업, 명예회복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이제는 3·1운동 정신과 함께 이들의 정신을 올곧게 계승하여야 한다. 원태섭 동학농민혁명 명예회복 심의위원회 행정사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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