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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소뒤 긴장감… 11분간의 탐색전

    한나라당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과 민주통합당 한명숙 대표가 17일 국회에서 회동했다. 한 대표가 취임 인사차 국회 한나라당 비상대책위원장실로 박 위원장을 방문하는 형태로 이뤄진 이날 만남에서 두 대표는 국민의 삶과 공천 개혁 등을 화제로 덕담을 나눴다. 나지막한 목소리, 부드러운 말투로 진행된 11분간의 상견례였지만, 대화는 단 하나의 군더더기나 흐트러짐이 없이 꽉 찬 느낌을 주었다. 시종 미소를 잃지 않으면서도 두 대표는 각자 할 말은 다 하는 모습을 보여 향후 총선에서의 가파른 대치를 예고했다. 위원장실에 먼저 도착해 기다리고 있던 박 위원장은 한 대표가 들어오자마자 “축하드립니다.”라고 인사를 건넸고 이후 두 사람은 두 손을 맞잡고 악수를 했다. 자리에 앉은 뒤 박 위원장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박 위원장 (선출된 뒤) 첫 일성이 국민의 생활을 책임지겠다고 말씀하신 것을 봤습니다. 저도 기대를 많이 하게 됩니다. 구체적인 방법에 있어서는 다를 수 있겠지만 국민의 삶을 우선으로 하는 정치 목표가 같다는 점에서 여야가 국민이 원하는 새로운 정치를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 대표는 밝은 표정으로 말을 받았다. 한 대표 우리나라 정치사상 처음으로 여야 대표에 여성이 됐습니다. 올해 여성들이 앞장서 국민의 삶을 책임지고 후진적인 정치를 한 단계 도약시키는 일을 같이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한 대표 말이 끝나자 기다렸다는 듯 박 위원장은 선거법 개정 필요성을 제기했다. 박 위원장은 “우리 정치가 한 단계 더 발전하려면 공천을 국민들께 돌려드려야 한다.”면서 국민참여경선과 모바일 투표 등을 도입하기 위한 공직선거법 개정에 협력해 달라고 말했다. 그러자 한 대표는 한술 더 떴다. 준비해 온 서류봉투를 꺼내 들고는 “그렇지 않아도 선거법 개정과 관련해 준비해 온 게 있다.”고 말하고는 봉투를 곁에 배석한 권영세 한나라당 사무총장에게 건넸다. 웃음이 이어지는가 싶던 상황에서 한 대표는 돌연 민감한 의제를 꺼내들었다. 얼마 전 BBK사건 허위사실 유포 혐의로 구속 수감된 ‘나꼼수’ 정봉주 전 의원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한 대표는 “지금 정봉주 전 의원이 감옥에 있다. 표현의 자유와 연계된 정치탄압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면서 “국회에 소위 ‘정봉주법’이 발의됐고 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로 넘어갔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2월 국회에서 처리할 것을 촉구했다. 한 대표는 “정 전 의원과 같은 피해가 안 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부탁드리고 싶다.”고 강조했다. 박 위원장은 “정개특위에 있나요?”라며 관심을 보인 뒤 “검토하겠다.”는 답을 내놨다. 총선과 대선을 앞둔 중차대한 시기에 당의 수장이 된 여성 대표들은 서로를 위로하기도 했다. 한 대표는 박 위원장에게 “많이 어려우시죠.”라며 한나라당 비대위 활동을 진두지휘하고 있는 박 위원장의 근황을 물었다. 박 위원장은 “우리가 같은 것 같다. 앞으로 얼마나 바쁘시겠냐.”고 반문했다. 그러자 한 대표는 “(당선의) 기쁨은 한순간이었지만 어려움이 닥치기 때문에 박 위원장은 참 어렵겠다고 생각하면서 왔다.”고 말했다. 박 위원장은 “건강하시고 같이 힘을 합해서 국민의 삶을 더 낫게 하기 위해 좋은 정치가 시작되도록 하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밝혔다. 전당대회 경선 과정에서 박 위원장을 강하게 비판했던 한 대표는 회동을 마친 뒤 “박 위원장이 굉장히 혁신을 해서 국민들에게 다가가고 싶은 심정이 엿보였다.”면서 “그래서 진짜 선의의 경쟁을 통해 여야 여성 대표들이 정치의 품격을 올렸으면 하는 강한 바람이 있다.”고 밝혔다. 강주리·허백윤기자 baikyoon@seoul.co.kr
  • [고전 인물로 다시 읽기] (41)‘검은 피부 하얀 가면’ 프란츠 파농

    [고전 인물로 다시 읽기] (41)‘검은 피부 하얀 가면’ 프란츠 파농

    “나는 프랑스인입니다.” 파농이 학교에서 가장 먼저 배운 문장이다. 비록 프랑스 식민지 마르티니크 섬에서 흑인 노예의 후손이었던 아버지와 흑백 혼혈이었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지만 완벽한 불어를 구사하는 중산층 집안에서 전형적인 프랑스식 교육을 받고 자란 파농이 스스로를 프랑스인으로 여기는 것은 당연했다. 1939년 로베르 제독이 이끄는 함대와 1만명의 군대가 마르티니크 섬에 도착한다. 조국 프랑스가 독일의 침공으로 위기에 처해 있지만 위풍당당한 함대는 자랑스러웠다. 다른 친구들처럼 파농도 그 함대와 군인들을 열렬히 환호하고 환영했다. 그러나 군인은 “자랑스러운 우리 프랑스 군인들”이 아니었다. 섬에 상륙한 프랑스 군인들은 호텔에서 창녀촌까지 모든 건물을 몰수했고, 공공시설에 흑백의 인종을 철저히 구분하는 칸막이를 쳤고, 조금이라도 항의를 하는 흑인들을 무지막지하게 두들겨 팼다. 노골적인 점령군의 행태!! 대부분의 마르티니크 흑인 주민들은 모욕을 느끼고 동시에 공포를 느꼈다. ●지배층 교육받은 흑인… 나는 누구인가 하지만 그들은 ‘진정한 프랑스인’이 아닐지도 모른다. 자유, 평등, 박애의 나라, 진정한 프랑스인이라면 인종주의적인 ‘나치즘’에 대항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는 가출을 감행하여 도미니카로 건너가 군사훈련을 받고, 자유프랑스군에 자원한다. 그러나 1944년 출정식 당일, 자부심에 가득찼던 마르티니크의 자원병들은 어떤 환송의식도 없이 밀항자나 나병환자들처럼 한밤중에 전함에 태워진다. 예전의 흑인 노예가 그랬던 것처럼. 배에서 내린 후의 상황은 더 처절했다. ‘자유프랑스군’ 제5대대는 철저히 피부색에 따라 위계화되어 군수품의 배급부터 의복, 야영시설까지 차별을 분명히 했다. 이 피라미드의 맨 위는 유럽의 백인 병사, 맨 아래는 세네갈 원주민 병사였다. 그럼 흑인이면서 프랑스 국적이었던 파농은? 소위 앤틸리스 제도의 의용병은 ‘유럽인’으로 분류되었다. 아프리카 출신 의용병들은 원통형의 모자를 썼지만, 파농은 유럽의 백인 병사와 같은 등급의 베레모를 썼다. 만약 베레모를 쓰지 않고 유럽인 막사를 출입하면 “호되게 엉덩이를 걷어 차였다.” 유럽인이되 늘 ‘모자’로 자신을 증명해야 하는 2등 유럽인, 하지만 아프리카의 흑인들과는 다른 우월한 흑인!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이 상황은 참전 내내 계속되었고 마침내 파농은 처절하게 깨닫는다. 자신은 프랑스인이 아니라는 것을. 당시 파농은 자신의 어머니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쓴다. “우리 아들은 대의를 위해 싸우다 죽었다는 식의 말로 위안을 삼지는 말아주십시오. 어리석은 정치인들의 방패일 뿐인 그런 거짓 이데올로기는 더 이상 우리를 환히 비춰주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여기에 저의 갑작스러운 결정을 정당화해 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전쟁은 끝나고 고향으로 돌아온 파농에게 남은 것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뿐이었다. 완벽한 불어를 구사하지만, 결코 백인이 될 수 없는 ‘검은’ 피부색을 온몸으로 경험했지만, 파농은 ‘검은색은 아름답다.’는 네그리튀드의 사상에도 동의하기 어려웠다. 도대체 온전한 흑인이라는 게 존재할 수 있는 것일까? 아름다운 아프리카 전통이라는 것이 있기나 한 것일까? 전쟁이 끝난 후 고향을 떠나 파리로 온 파농은 “파리에는 흑인이 너무 많아.”라며 파리를 떠나 리옹으로 향한다. 육체적 고향인 마르티니크를 떠나고 정신적 고향인 파리를 떠나면서 백인도 흑인도 될 수 없었던, 아니 되지 않기로 했던 파농의 최종 선택은 정신의학이었다. ●정신분석은 정치적이다 파농이 보기에 식민지배란 단순한 총칼의 지배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유럽의 백인 식민주의자들은 흑인들을 ‘비코’(새끼염소), ‘부뉼’(깜둥이), ‘라통’(쥐새끼), ‘믈롱’(멜론)으로 부른다. 물론 백인들이 흑인들을 우호적으로 대할 때도 있다. 그러나 그 때조차 그들은 “피부색에도 불구하고” 좋아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일상적으로는 흑인은 “피부색 때문에” 경멸당한다. 검은 것은 모두 ‘후진’ 것이다. 어떤 경우라도 ‘피부색’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옴짝달싹도 못하는 처지! 흑인의 무의식을 지배하는 타자는 백인이다. 그러나 백인의 무의식을 지배하는 타자는 결코 흑인이 아니다. 백인의 타자는 백인이다. 흑인의 거울은 백인인데 백인의 거울은 흑인이 아닌 상황. 이런 완벽한 비대칭성에서 흑인은 사라진다. 그는 아무렇게나 던져진 물건에 불과하다. 파농은 마르크스의 ‘소외’와 ‘사물화’를 이런 상황으로 이해했다. 정신착란은 이런 사물화의 한 극한이다. 말을 빼앗기고 삶을 빼앗긴 자들의 유일한 쉼터. 미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자들의 유일한 자유의 공간!! 정신분석은 미친 자를 정상인으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 아니다. 혁명은 단순한 주권의 회복이 아니다. 무의식조차 식민지배자들에게 저당 잡힌 사람들이 스스로 자신이 갇힌 덫에서 빠져나오는 것. 타자들이 서로에게 말을 거는 타자들의 공동체를 회복하는 것. 파농에게 이것은 정신의학의 과제임과 동시에 정치적 과제였다. 1953년 정신의학자가 된 파농은 또 다른 프랑스 식민지, 알제리로 간다. 그곳에서 그는 당시에 지배적이었던 두 가지 정신분석 담론과 대결한다. 하나는 “무의식은 역사가 없다.”는 프로이트의 보편주의 정신분석학이다. 그러나 파농이 몸으로 체득한 바, 프로이트는 틀렸다. “무의식은 역사가 있다.” 흑인들의 무의식은 식민 지배라는 역사와 식민 통치라는 구조 속에서 형성된다. 또 하나는 “정상적인 아프리카인은 전두엽 절제수술을 받은 백인과 같다.”라고 주장하는 인종주의적 정신분석. 그는 새로운 담론을 만들었고 정력적으로 일했다. 그리고 ‘검은 피부, 하얀 가면’, ‘앤틸리스의 아프리카인’ 등 쓰는 글마다 엄청난 논란을 야기했다. 또한 그를 백안시하는 동료 의사, 그를 미심쩍어하는 알제리 간호사들을 설득하여 정신병원-수용소라는 제도 자체를 변혁하는 활동을 전개한다. 다른 좌파 정신분석학자들과 함께 그가 사용한 ‘제도 요법’은 환자들을 좀 더 인간적으로 대우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광기’를 가두는 것이 아니라 ‘광기’를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도록 하는 것, 의사와 간호사, 환자가 함께 협력하여 환자가 광기의 고통에서 벗어나도록 하는 것, 스스로 삶의 준거를 다시 찾게 하는 일. 자기가 자신을 해방시키는 일이었다. ●유럽과 결별하라! 당시 알제리는 민족해방운동이 활활 타오르던 제3세계 민족해방운동의 메카였다. 알제리민족해방전선의 투사들이 식민 통치자들의 악랄한 탄압에 맞서 몸을 숨기기에 정신병원만큼 안성맞춤인 곳이 또 있었을까? 그들의 대의에 동의했을 뿐 아니라 이미 몇몇과는 개인적 친분이 있었던 파농은 자신이 일하는 병원에 그들을 숨겨주기도 하고, 다친 투사들을 치료해주기도 했다. 파농의 병원이 프랑스 당국에 의해 ‘빨치산의 소굴’로 지목받는 건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시시각각 파농에게도 탄압의 손길이 뻗쳐왔다. 그곳을 떠날 때가 되었다. 그러나 알제리의 정신병원을 떠난 것은 단순한 탄압 때문은 아니었다. 파농이 보기에 그의 동료이기도 했던 프랑스의 좌파 정신의학자들에게는 식민지 문제가 부차적이었다. 그들은 식민지 상황과 개인의 광기 사이의 관계에 대해 진정으로 무지했다. 아니 무의식적으로 무시했다. 그 점은 사르트르도 마찬가지였다. 파농은 사르트르가 알제리 혁명과 관련하여 단호한 정치적 결단을 내리지 않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제 프랑스인들과 파농은 결코 같은 길을 갈 수가 없었다. “유럽과 결별하라!” “프랑스인으로서의 ‘나’와 영원히 결별하라!” 파농은 “오늘날 우리는 모든 것을 할 수가 있다. 그러나 조건이 있다. 유럽을 흉내 내고, 유럽을 따라잡겠다는 욕망에 사로잡히지 않겠다는 조건이 그것이다.”라고 선언하면서 알제리를 떠나 튀니지로 가고 그곳에서 알제리 혁명에 본격적으로 뛰어든다. 그는 알제리 민족해방전선의 기관지에서 기사를 쓰기도 하고, 알제리 임시정부의 외교관 자격으로 아프리카 신생 독립국과의 연대투쟁을 조직하려고 애쓰기도 한다. 그러나 투쟁의 과정은 동시에 시련과 갈등의 과정이었다. 그 자신이 프랑스 제국주의자에 의해 테러를 당하는 일은 오히려 부차적이었다. 그는 알제리 민족해방운동 안의 수많은 분파투쟁을 목도했고, 자신이 사랑하던 동지들이 적에 의해서뿐만 아니라 또 다른 동지들에 의해 처형되는 모습을 봐야 했다. 그 투쟁의 한가운데에서, 시련의 한복판에서 파농은 ‘백혈병’ 으로 서른 여덟 해의 짧은 생을 마감한다. 브리태니카 인명사전에 그는 “프랑스의 정신과 의사이자 사회학자”라고 소개되어 있다. 파농이 평생 프랑스인이라는 그 호명에서 벗어나기 위해 투쟁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죽어서 다시 프랑스인이 되어 버렸다는 그 사실은 역사의 어떤 아이러니, 어떤 ‘비극’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의 투쟁은 실패했는가? 그러나 그가 원한 것은 프랑스인이 아닌 다른 무엇이 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 어떤 것이든 자신을 억압하는 모든 것에 저항하는 것.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나는 내가 아니다.”라는 방식으로 살아내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렇게 사는 한 파농의 투쟁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 아닐까? 이희경(문탁네트워크)
  • 시민단체 고발 野 돈봉투도 檢으로

    민주통합당은 고발에 따른 검찰의 ‘민주당 전당대회 돈 봉투 살포 의혹’ 수사 방침에 대해 “협조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면서도 한나라당을 뒤흔들고 있는 돈 봉투 수사의 불똥이 자신들에게로 이어지지 않을까 촉각을 곤두세웠다. 검찰 관계자는 13일 “수사 검사를 충원하기로 했으며 고발인부터 조사할 계획”이라면서 “수사대상은 이번 전당대회”라고 선을 그었다. 앞서 나라사랑실천운동, 종북좌익척결단 등 일부 보수단체는 지난 12일 “한나라당뿐만 아니라 민주당의 돈 봉투 전대 의혹도 수사해야 한다.”며 검찰에 고발장을 냈다. 민주당은 15일 치러지는 전당대회를 앞두고 후보 경선 과정에서 영남권 대의원들에게 돈이 뿌려졌다는 의혹을 받아왔다. 김유정 민주당 원내대변인은 “민주당은 당당히 수사를 받겠다. 그러나 만신창이가 된 한나라당을 위한 물타기나 정치적·정략적으로 악용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민주당은 지도부 경선 후보자의 금품제공 의혹이 보도된 뒤 즉각 진상조사위원회를 꾸리고 자체 조사에 착수했지만 구체적인 진술이나 제보자, 증거 등을 확보하지 못했다. 당권주자들은 돈 봉투 의혹으로 전당대회의 의미가 퇴색될까 우려하는 눈치다. 전날에 이어 이날 합동연설회에서도 돈 봉투 의혹을 입에 올리는 주자들은 많지 않았다. 돈 봉투 의혹 때문에 전당대회 이슈가 묻히거나 모처럼 80만 선거인단이 참여하는 경선의 흥을 깨고 싶지 않은 것으로 판단된다. 강주리·안석기자 jurik@seoul.co.kr
  • [Weekend inside] ‘은둔의 나라’ 미얀마… 화해손짓 보내는 국제사회 왜?

    [Weekend inside] ‘은둔의 나라’ 미얀마… 화해손짓 보내는 국제사회 왜?

    ‘아시아의 마지막 금맥을 캐라.’ ‘은둔의 나라’ 미얀마가 요란하게 긴 잠에서 깨면서 세계 각국이 기다렸다는 듯 ‘골드러시’에 나설 채비를 하고 있다. 인권 탄압으로 악명 높던 미얀마 정권이 국가인권위원회를 만들고 정치범 300여명을 풀어주자 미국, 영국 등 국제 사회는 외무장관을 급파해 화해의 손짓을 건넸다. 북한과 함께 ‘가장 수수께끼 같은 나라’로 불리던 미얀마에 무슨 바람이 분 것일까. 또 ‘독재국’이라며 미얀마를 손가락질하던 서방은 왜 미얀마행 비행기에 서둘러 올라 탈까. 그 이면에는 미얀마 정국의 ‘키맨’인 탄 슈웨(79) 국가최고평의회 의장과 테인 세인(67) 대통령, 그리고 민주화의 상징 아웅산 수치(67)가 있다. ●“문제는 경제” 中 성장보며 자유시장에 눈 떠 국제 사회의 비판과 압력에도 꿈쩍 않던 미얀마 정권이 마음을 고쳐먹은 것은 결국 경제 때문이다. 1992년 군정 내부에서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쥔 탄 슈웨는 미국과 그 우방국의 경제 제재에도 이웃국인 중국의 지원에 의존하며 견뎌 왔다. 그러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821달러(약 94만원)에 불과하고 국민 3명 중 1명이 절대빈곤층으로 신음하는 등 더 이상 버티기 어려운 상황에 내몰렸다. 중국의 성장을 보며 자유시장에 대한 욕구도 커졌다. 경제발전을 위해서는 국제적 제재에서 벗어나는 것이 급선무였고 결국 미국 등이 마뜩잖게 보던 정치 현실을 뜯어고쳐야 했다. 전문가들은 탄 슈웨가 미얀마 정치·경제 개혁의 총지휘자라고 분석한다. 2010년 3월 모든 권력을 내놓고 무대 뒤로 퇴장했지만 막후에서 여전히 ‘상왕’ 노릇을 한다는 평가다. 탄 슈웨가 국제 사회의 마음을 얻으려면 우선 서방의 전폭적 지지를 받는 노벨평화상 수상자 수치의 마음을 사야 했다. 미얀마 주재 인도 대사를 지냈던 샨 사란은 타이베이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수치는 미얀마 정권의 정당성을 세계에 보여줄 수 있는 일종의 여권 같은 존재”라고 말했다. 수치의 영향력을 두려워한 탓에 지난 18년 동안 그를 괴롭혔던 탄 슈웨는 2010년 10월 가택연금 중인 수치를 풀어주면서 화해를 시도했다. 수치의 변화도 놀라웠다. 군사 정권의 들러리가 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제도권 진입을 꺼리던 수치는 입장을 바꿔 “오는 4월 보궐선거에 출마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로써 원외투쟁과 게릴라전에 의존하던 미얀마 민주화운동이 원내에서 이뤄질 가능성이 커졌다. 세인 대통령은 탄 슈웨와 수치 사이에서 ‘교각’ 역할을 했다. 군부 출신 중 깨끗하고 중립적인 인물로 평가받는 그는 지난해 3월 의회 투표를 거쳐 대통령이 된 뒤 줄곧 개혁적인 행보를 보였다. 지난 8월 수도 네피도로 수치를 초청한 그는 수치의 아버지인 미얀마 독립영웅 아웅산 장군을 칭송하는 등 극진히 대접했다. 수치는 그를 만난 뒤 “대통령의 개혁 약속을 의심 없이 진짜 받아들일 때가 됐다.”고 평가했다. 국제 사회는 미얀마가 정치 개혁 조짐을 보이자 ‘구애 모드’로 일제히 돌변했다. 파이낸셜타임스는 미얀마의 상황을 금광을 찾아 수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던 미국의 서부개척시대에 비유했다. 이 신문은 “지난 1년간 한국과 러시아, 중국, 일본 사업가들이 미얀마 호텔을 가득 메웠고 같은 기간 여행객 수가 배로 뛰었다.”고 덧붙였다. 정재완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전문연구원은 “무수한 자원과 인구를 가진 미얀마는 아시아의 마지막 황금시장”이라고 설명했다. 천연가스와 납, 아연 등 부존자원이 많고 금과 옥, 진주 등 보석류의 산지이기도 하다. 특히 전 세계 티크 목재의 80%, 루비의 99%가 이곳에서 생산된다. 게다가 인구가 6120만명가량으로, 값싼 노동력이 풍부하다. 중국, 인도 등 노동집약적 산업의 기지 역할을 했던 신흥국의 인건비가 상승하는 마당에 미얀마는 최적의 대체재가 될 수 있다. 일본무역진흥기구에 따르면 미얀마에서 근로자 한 명을 1년간 고용하는 비용은 고작 629달러(약 72만원)에 그친다. 중국과 인도, 동남아시아 국가를 잇는 지정학적 위치 덕에 더욱 주목받고 있다. ●군부 강경파 반발 막는 것이 개혁의 과제 큰 보폭으로 개혁작업을 추진 중인 미얀마를 불안하게 바라보는 시선도 있다. 세인 정권 뒤에 숨어 있는 강경파 군부 인사들이 언제든 개혁에 딴죽을 걸 수 있기 때문이다. 수치도 최근 AP통신과의 인터뷰에서 “민주주의의 겉치장 뒤에 권력을 휘두르는 군부가 개혁에 얼마나 협조할지가 관건”이라고 지적했다. 미얀마에서는 2004년 킨 윤 당시 총리가 수치와 대화를 시도하는 등 개혁 작업을 벌이다 강경파에 밀려 숙청당한 전례가 있다. 정 연구원은 “집권세력과의 충돌을 최소화하는 범위 내에서 소수민족 문제 등 민주화 과제를 빨리 푸는 것이 세인 정부의 숙제”라고 말했다. 유대근기자 dynamic@seoul.co.kr
  • 울산 현대차 직원 분신 중태

    8일 낮 12시쯤 울산 남구 매암동 현대자동차 공작기계사업부에서 이 회사 직원 신모(44)씨가 분신을 시도해 중태에 빠졌다. 과거 노조 대의원을 지낸 신씨는 분신 직후 인근 병원에서 치료를 받다 부산의 화상전문병원으로 옮겨졌으며, 위독한 상태다. 현대차 노조는 이날 성명서를 내고 “신씨가 지난 4일 사측에 엔진품질 문제에 관한 의견서를 보내면서 사측이 현장을 통제했다.”며 “현장탄압 때문에 신씨가 분신했다.”고 주장했다. 울산 박정훈기자 jhp@seoul.co.kr
  • “양곤에 원조 사무실” EU, 미얀마 화해손길

    미국과 중국, 일본이 동남아시아의 군사·경제적 요충지인 미얀마를 둘러싸고 치열한 외교전을 벌이는 가운데 유럽연합(EU)도 화해의 제스처를 보내고 있다. EU 외교·안보 분야 대변인 마이클 만은 5일(현지시간) “미얀마의 옛 수도 양곤에 원조 프로그램을 운영할 사무소를 설치하기로 미얀마 정부와 합의했다.”면서 “사무소는 정치적 역할도 할 것”이라고 밝혔다. ●정치범 석방 등 개혁조치에 ‘훈풍’ EU의 이런 움직임은 미얀마 초대 민간 대통령인 테인 세인 대통령이 지난 3월 취임 이후 일부 정치범 석방, 야당 탄압 완화 등 민주화와 개혁 조치들을 잇따라 시행하고 있는 것과 연관이 있다. EU는 그동안 민주화 운동 지도자인 아웅산 수치 여사의 구금을 비롯한 미얀마 정부의 인권탄압을 이유로 미국과 함께 미얀마에 각종 제재를 가해 왔다. 그러나 지난해 11월 미얀마의 개혁 조치가 경제제재 완화를 정당화할 수 있는지 살펴보겠다고 밝힌 데 이어 이번에 사무소를 설치하기로 함에 따라 미얀마에 대한 EU의 제재가 풀릴 것이라는 관측이 높아지고 있다. ●조만간 EU제재 해제 전망 이런 가운데 영국 외무장관으로는 반세기 만에 처음으로 미얀마를 방문한 윌리엄 헤이그 장관은 이날 미얀마 정부에 개혁과 정치범 석방 등을 촉구했다. 이틀간 일정으로 미얀마를 찾은 헤이그 장관은 테인 세인 대통령과 면담한 뒤 성명을 내고 “영국 정부는 미얀마 국민이 바라는 정치적 자유와 인권 향상에 추가 진전이 있다고 확인되면 긍정적으로 반응할 준비가 돼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고 밝혔다. 그는 앞서 미얀마의 고위 관료들과 회담한 뒤 수치 여사와 만찬을 가졌다. 한편 수치 여사는 헤이그 장관과 회담에 앞서 언론들과 가진 인터뷰에서 “미얀마를 장기간 통치했던 군부는 여전히 막강한 권력을 보유하고 있다.”면서 “미얀마 개혁과 민주화에 가장 중요한 요소는 군부의 협조”라고 밝혔다. 오는 4월 1일로 예정된 보궐 선거 출마 여부에 대해선 “그것이 내가 하고 싶은 일인지에 대해선 아직 말할 수 없다.”며 입장을 유보했다. 수치 여사가 이끄는 민주주의민족동맹(NLD)은 지난해 11월 정당 자격이 박탈됐으나 최근 다시 재등록됐다. 주현진기자 jhj@seoul.co.kr
  • ‘민주주의자 김근태’ 민주화 동지 곁에 잠들다

    ‘민주주의자 김근태’ 민주화 동지 곁에 잠들다

    ‘민주화 운동의 대부’ 고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이 3일 유족과 시민들의 애도 속에서 영면했다. 김 고문의 영결미사와 영결식은 오전 8시 30분쯤 서울 중구 명동성당 본당에서 함세웅 신부의 집전으로 엄수됐다. 유족과 각계각층 인사, 시민 등 1000여명이 김 고문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앞서 오전 7시 빈소가 차려진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서는 유족과 장례위원들의 마지막 조문과 발인 예식이 거행됐다. 8시쯤 김 고문의 관이 검은색 리무진에 실려 명동성당으로 향했다. 장례버스 정면에는 ‘근조 민주주의자 김근태’, 옆면에는 ‘참여하는 사람만이 권력을 바꿀 수 있고 세상의 방향을 정할 것이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김 고문이 지난해 10월 블로그에 올린 마지막 글의 내용이다. ●영결식 후 전태일 열사 동상 앞에서 노제 김 고문을 실은 차량은 종로구 연지동 한국기독교회관 앞에서 5분가량 정차했다. 1970~80년대 ‘민주화 운동의 성지’로 불렸던 이곳은 김 고문이 민주화운동 당시 정권의 탄압을 피해 머물렀던 곳이기도 하다. 함 신부는 영결미사에서 “김근태 형제는 불치의 병마와 투쟁하면서도 블로그에서 ‘2012년에 두 번의 기회가 있다’며 참여하라고 당부했다.”면서 “이제 99%의 참여로 평화, 민주의 새 시대를 열겠다는 약속을 하며 이 미사를 봉헌한다.”고 말했다. 1시간쯤 진행된 영결미사 막바지에 김 고문이 애창하던 해바라기의 ‘사랑으로’를 다같이 합창했고, 일부 참석자들은 눈물을 떨구기도 했다. 이어 장영달 장례위원회 집행위원장의 사회로 고인의 영결식이 치러졌다. 지선 스님, 원혜영 민주통합당 공동대표, 이정희 통합진보당 공동대표 등이 조사를 낭독했다. ●조영래 변호사·문익환 목사 등 잠든 곳 영결식이 끝난 뒤 장례위원회와 조문객들은 청계천 전태일다리 옆 전태일 열사 동상 앞으로 자리를 옮겨 노제를 치렀다. 추모의 글 낭독과 묵념이 이뤄지는 가운데 김 고문의 부인 인재근씨는 딸의 부축을 받기도 했다. 오전 11시 30분쯤 운구행렬이 김 고문이 생전에 사용했던 도봉구 쌍문동 사무실에 도착하자 지역주민 500여명이 맞이했다. 이어 장지인 경기 남양주시 마석 모란공원에서 거행된 하관례 및 헌화를 끝으로 김 고문은 민주화를 위해 치열하게 헤쳐 왔던 삶을 뒤로하고 친구인 조영래 변호사, 문익환 목사 등 민주열사 동지들과 함께 영원한 안식에 들어갔다. 신진호기자 sayho@seoul.co.kr
  • ‘조문 밀북’ 황혜로씨 로마행…귀국직후 체포영장 집행예정

    정부 허가 없이 평양에 들어가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을 조문한 ‘자주통일과 민주주의를 위한 코리아연대’ 공동대표 황혜로(35·여)씨가 3일 중국 베이징을 거쳐 이탈리아 로마로 향했다. 황씨는 오전 고려항공 편으로 평양을 출발해 베이징 서우두(首都)공항 2청사에 도착해 3청사로 이동한 뒤 오후 1시 30분(현지시간) 로마행 CA939편에 탑승했다. 그는 취재진에게 입북 경위에 대해 “민족의 화해와 평화, 조국의 통일을 위해 갔던 것이고 순수한 조문을 위한 것으로 다른 이유는 없다.”며 “이를 이유로 국가정보원 또는 검찰이 탄압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한편 공안 당국은 체포영장을 발부받아 귀국 직후 집행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베이징 박홍환특파원 stinger@seoul.co.kr
  • 톈안먼 학생지도자, 다시 징역 9년형

    중국 법원이 톈안먼(天安門) 사태 당시 학생지도자였던 인권운동가 천웨이(陳衛·42)에 대해 ‘국가권력 전복 선동’ 혐의로 징역 9년형을 선고했다. 중국 내 인권단체들은 “올 들어 중국에서 정부를 비판한 인사에게 내려진 가장 무거운 판결”이라며 법원 판결에 반발하고 있다. 25일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 등에 따르면 천웨이는 지난 23일 쓰촨성 수이닝(遂寧)시 중급인민법원에서 이 같은 형을 선고받았다. 천웨이는 지난 2월 ‘재스민 혁명’ 여파가 중국에 몰아치면서 반체제 인사들에 대한 중국 당국의 탄압이 강화될 때 체포됐다. 검찰은 천웨이가 2009년 3월부터 올 1월까지 인터넷 등을 통해 발표한 정부비판 글을 문제삼았다. 천웨이의 변호인은 “법정에서 무죄를 이끌어내기 위해 애썼지만 반론이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천웨이는 법원의 선고가 내려지자 “나는 무죄다.”라고 세번 외쳤으며 “민주주의는 반드시 승리하고, 독재는 망하고야 말 것”이라고 외치며 끌려나갔다고 그의 부인이 전했다. 천웨이는 1989년 톈안먼 사태 당시 학생지도자로 활동했으며 진압작전 이후 검거돼 1년여 복역한 뒤 출소했다. 1992년에도 톈안먼 사태 희생자 추모와 정치조직 건설 등에 관여하다 5년여간 복역한 바 있다. 베이징 박홍환특파원 stinger@seoul.co.kr
  • [고전 인물로 다시 읽기] (39) ‘범신론’ 사상가 스피노자

    [고전 인물로 다시 읽기] (39) ‘범신론’ 사상가 스피노자

    1677년 네덜란드 헤이그. 판 데르 스픽은 자신의 집에 하숙했던 친구의 책상을 조심스레 포장하기 시작했다. 방금 전 그는 시신도 없는 텅 빈 관(棺)으로 친구의 장례식을 치르고 돌아온 참이었다. 친구의 시신은 교회에 안치되어 있던 중 도난당했다. ‘신을 모독한 불경스러운 자’라는 꼬리표가 시신 역시 편치 못하게 한 게 틀림없었다. 그 친구는 몇 주 전, 자신이 죽으면 책상을 암스테르담의 한 출판사에 보내 달라고 부탁했다. 포장재에는 어떤 것도 적지 말고 세관에 내용물을 신고하지도 말아달라는 당부와 함께. 조심성 많은 친구의 도움 덕에 책상은 무사히 출판사에 도착했다. 그리고 얼마 후 ‘에티카’라는 한 권의 책이 출간되었다. 하지만 그 책은 곧 금서로 지정돼 압수되었다. 비록 익명으로 출간되었지만, 사람들은 그 글의 주인이 누군지 바로 알아보았던 것. 그 책의 저자는 ‘베네딕투스 스피노자’였다. 베네딕투스가 불경한 자로 낙인 찍힌 것은 1656년, 그의 나이 겨우 24세가 되던 해였다. 그는 종교재판을 피해 에스파냐에서 포르투갈로, 그리고 다시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한 유대인 상인 집안에서 1632년에 태어났다.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아버지가 아들에게 준 이름은 ‘바뤼흐’. 이 말은 히브리어로 ‘축복받은 자’라는 뜻이었다. ●불경한 자에게 저주가 있으리니 당시 신생 공화국이었던 네덜란드는 유대인 상인들을 받아들여 번영을 이루고자 했다. 하지만 이 공화국은 종교와 인종에 관용적이었던 만큼 한계 또한 분명히 규정하고 있었다. 유대인들은 기존의 신앙 이외에 이단적 교리를 만들면 안 된다는 것. 그런데 바뤼흐 스피노자는 이 금지의 선을 넘어버렸다. “낮에도 그에게 저주가 있을 것이고, 밤에도 그에게 저주가 있을지어다. 그가 앉아 있을 때에도 저주가 있을 것이고, 그가 일어서 있을 때에도 저주가 있을지어다. 그가 밖에 나가도…그가 안에 있어도 저주가 있을지어다. 신은 그를 용서치 않을 것이며…모든 천계의 저주를 통해 그를 전체 이스라엘 부족으로부터 격리시킬 것이다.” 스피노자가 신성모독의 발언들을 하고 다닌다는 소문이 파다해지자, 유대인 공동체는 그의 파문을 결정했다. 하지만 스피노자가 태어난 이후 발생한 14건의 파문 중 이와 같은 분노의 파문서는 없었다. 그것은 공식적인 책이나 가르침을 퍼뜨린 적 없는 청년이 받기에는 너무나 가혹한 저주였다. 대개의 경우 사람들은 파문을 전후해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이 상례였다. 요컨대 파문은 일종의 경고였던 셈. 그러나 스피노자는 ‘회개’하지 않았다. 돈을 주겠다는 회유도, 격리시키겠다는 협박도, 암살 기도의 공포도 그를 움직이지 못했다. 스피노자는 부모님의 침대를 제외한 모든 상속을 거부했고, 유대인의 흔적을 없애려고 라틴어 ‘베네딕투스’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리고 평생토록 이 파문 사건에 대해 어떤 억울한 심정도, 항변도 토로하지 않았다. 스피노자는 그저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나에게 열려 있는 길로 기쁜 마음으로 들어서련다.” 신성모독죄에도 불구하고, 스피노자는 자신을 그 누구보다 신을 사랑하는 자라 여겼다. 그는 신의 뜻에 따라 살기를 원했다. 신이란 말 그대로 무한하고 절대적이고 완전한 존재다. 그런 존재는 외부의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는 완전한 자유 속에서 자족적인 삶을 영위할 것이다. 요컨대 신이란 스스로 그러한 존재인 자연 그 자체며, 세상 만물 속에 깃들어 있다. 인간이 성취해야 할 것은 신의 본성에 따라 사는 것, 즉 자유로운 삶이었다. 스피노자에게 자유로운 삶을 일구는 것이야말로 구원이었다. 하지만 기존 교회 속의 신은 복종을 원했다. 스피노자가 보기에 그러한 신은 인간을 자유가 아닌 예속 상태에 두기 위한 상상의 작품이었다. 교회는 응답하고, 심판하고, 처벌하는 신, 즉 인간화된 신을 꾸며냈다. 스피노자에게 공화국이란 종교의 예속과 반대되는 자유를 의미했다. 전제군주와 결탁한 교회의 종교적 핍박을 피해 유대인들이 정착했던 자유의 국가. 바로 이곳 네덜란드가 그러한 공화국이었다. 하지만 그 공화국은 1669년 스피노자의 친구인 쿠르바흐에 대한 종교적 탄압에 협조하는 모습을 보였다. 스피노자의 ‘신학정치론’은 이 믿을 수 없는 현실에 대한 응답이었다. “전제주의 최고의 비결이자 그것을 떠받치는 큰 기둥은 사람들을 계속 기만의 상태에 처해 있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억압될 수밖에 없게끔 공포를 조장하고 그것을 종교라는 허울 좋은 이름으로 포장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마치 그것이 구원인 양 오히려 자신들의 예속을 위해서 싸우게 될 것이다.” 전제주의를 이끄는 원리가 공포라면, 공화국의 존립 근거는 무엇보다도 자유에 있었다. 그렇다면 쿠르바흐에 대한 탄압을 공모한 공화국은 스스로 자기의 존재 근거를 무너뜨려버린 셈이었다. 자유에 대한 억압, 그것은 곧 공화국의 종말을 의미했다. 스피노자의 이러한 우려는 2년 후 현실로 드러난다. ●자유인, 그 불온한 자 1672년 프랑스의 침공에 네덜란드는 가까스로 나라를 지켰다. 하지만 전쟁은 사람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었다. 죽음과 기근이 만연했다. 이 절망의 틈새를 군주제를 원했던 오란예 집안이 파고들었다. 그들은 위기의 원인을 공화국의 탓으로 돌렸다. 폭도로 변한 군중은 공화국의 지도자인 데 비트 형제를 거리로 끌어내 처참하게 살해하고, 살점은 구워 먹거나 기념품으로 팔았다. 비통함에 빠진 스피노자는 ‘극한의 야만인들’이란 격문을 들고 거리로 나서려 했지만 하숙집 주인이자 친구는 방문을 걸어 잠그고 완강히 스피노자를 막아 세웠다. 왜 군중은 자신들의 자유를 보장해 주는 공화국을 거부하고 전제주의라는 예속을 향해 달려가는가. 스피노자는 공화국이 무너지는 것을 보며 알았다. 자유는 국가가 ‘보장’한다고 생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각자가 자신의 삶에서 자유를 ‘구성’하지 않는 한, 어떤 국가 체제도 소용없다는 사실을. 스피노자는 자신의 생각을 ‘에티카’에 적어내려 간다. ‘에티카’는 수학책을 방불케 하는 공리와 정의, 증명들로 가득하다. 이 건조한 윤리학의 주제는 우리의 감정이다. 스피노자에게 자유인의 열쇠는 감정에 있었다. 감정이란 우리 신체에 일어나는 변용에 대한 표현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감정에 휘둘리며 산다. 요컨대, 우연적인 외적 원인에 끌려다니는 수동적 상태다. 그렇기에 “더 나은 길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더 나쁜 길을 따라”간다. 자유인이 된다는 것은 이 수동적 신체를 능동적이게 만드는 것이었다. 권력은 오로지 수동적 신체를 통해서만 작동할 수 있었다. 그들은 돈과 명예, 신의 이름으로 쾌락과 절망, 희망과 공포를 조장함으로써 우리에게 복종을 이끌어냈다. 지배자들에게 두려운 것이 있다면 그것은 외부의 적이 아니라, 자신들이 작동할 수 없는 능동적 신체를 가진 자유인이었다. ‘에티카’는 단지 자유인이라는 자기 구원을 위해 능동적 신체를 구성하는 길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 길이야말로 지배자들에게는 불온한 것이었다. ●자유를 생산하는 앎과 삶 스피노자는 1676년 하이델베르크의 교수직 제안을 거절한다. 그에게 대학이란 기존의 법과 종교의 계율 위에서 작동하는 공간일 뿐이었다. 대학은 철학함의 자유를 제한할 뿐 아니라, 자유의 철학을 생산하기에도 부적합한 곳이었다. 대학교수직을 거절한 스피노자는 하숙집 책상 위를 자기의 공부 현장으로 삼았다. 지인들과 주고받는 편지와 만남은 그 자체로 배움의 과정이었다. 그는 대학 강당 대신 헤이그의 하숙집에서 조용히, 하지만 뜨거운 열정으로 자유인의 삶을 만드는 공부를 멈추지 않았다. 스피노자는 말한다. “자신이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동안, 사실은 그것을 하기 싫다고 다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실행되지 않는 것이다.” 그는 국가나 돈, 명예나 신, 그 무언가에 의해 미래에 찾아올 자유를 꿈꾸지 않았다. 미래로 유예된 자유란 존재하지 않으며, 그런 자유란 자신의 게으름에 대한 변명일 뿐이었다. 시신마저 사라진 뒤 스피노자의 이름으로 남은 것은 바지 두 벌, 셔츠 일곱 장, 손수건 다섯 장뿐이었다. 예속에 대한 단호함과 자기 구원의 열정. 그리고 자유인의 소박하지만 정갈했던 삶. 바로 이것이 혁명을 외친 적 없었던 스피노자를 역사상 가장 위험한 철학자의 한 사람으로 남게 했다. 남산 강학원 연구원 신근영
  • 김정일 사망 이후…美 공화대선주자들 반응

    2주 앞으로 임박한 대선후보 경선을 앞두고 표밭을 누비느라 분주한 미국 공화당 대선주자들도 19일(현지시간)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 사망에 대한 입장을 저마다 밝혔다. 밋 롬니 전 매사추세츠 주지사는 성명을 통해 “북한 주민들은 길고 잔인했던 국가적 악몽 속에서 고통을 받고 있다.”면서 “김정일의 죽음이 이를 종식시키는 것을 앞당기길 희망한다.”고 밝혔다. 그는 “김정일은 북한 주민들은 굶주리는데 자신은 호화로운 생활을 한 무자비한 독재자였다.”면서 “결코 그립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뉴트 깅리치 전 하원의장은 아이오와에서 한 연설에서 “김정일의 후계자가 어떨지, 핵으로 무장한 북한이 어떤 위협이 될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고 밝힌 뒤 “우리는 강력한 국방력과 총사령관의 의미를 이해하는 대통령이 필요하다.”며 지지를 호소했다. 릭 페리 텍사스 주지사는 성명에서 “앞으로 상황을 효과적으로 관리하면 김정일의 사망은 한반도 통일의 기회가 될 수 있다.”며 “후계자인 김정은이 권력을 유지하지 못할 수도 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만약 북한에서 내전이 발생한다면 핵무기가 악한들에게 넘어갈 수도 있다.”며 “미국은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동맹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동시에 중국과도 대화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존 헌츠먼 전 유타 주지사는 “김정일은 비양심적 독재자였다.”면서 “그의 죽음은 북한 주민들의 비극적인 장을 종식시키는 것인 동시에 좀 더 자유롭고 개방적인 사회와 정치개혁을 향한 길을 갈 수 있는 최고의 기회를 북한 주민들에게 제공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2008년 공화당 대선후보였던 존 매케인 상원의원은 “김정일이 카다피, 빈라덴, 스탈린과 함께 지옥에 떨어져 자리를 함께한다는 사실이 만족스럽다.”며 “김정일의 사망은 북한 주민들의 오랜 고통을 끝낼 역사적 기회”라고 했다. 일리애나 로스레티넌 하원 외교위원장은 “김정일은 역사상 최악의 인권탄압 독재자로 기록될 것”이라고 말했다. 워싱턴 김상연특파원 carlos@seoul.co.kr
  • [부고] 체코 민주화 큰별 지다

    “나처럼 조용한 사람이 모험적인 삶을 산 것은 삶이 믿을 수 없는 기적이기 때문이다.” 체코 국민들에게 ‘민주화’와 ‘소련으로부터의 독립’이라는 기적을 안겨준 바츨라프 하벨 전 체코 대통령이 18일(현지시간) 숨을 거뒀다. 75세. 하벨 전 대통령의 대변인인 사비나 단체보바는 “그는 장기간 투병 끝에 새벽에 사망했다.”고 이날 밝혔다. 1996년 폐암 수술을 받았던 하벨은 순환기 질환으로 치료를 받아 왔으며 체코 국영TV는 그가 지병으로 인한 합병증으로 숨졌다고 보도했다. 1936년 수도 프라하에서 영화제작사와 부동산을 소유한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1960년대 초 발표한 희곡 ‘가든 파티’와 ‘비망록’ 등으로 “유럽에서 가장 촉망받는 극작가”라는 찬사를 얻었다. 하지만 운명은 그를 순수한 문인으로 놓아두지 않았다. 1968년 ‘프라하의 봄’으로 알려진 체코 민주화 운동을 이끌었으나 소련군의 무력 개입으로 좌절되자 정치에 본격 투신했다. 1977년 인권의 중요성을 알린 ‘77헌장’의 공동발기인으로 국제사회의 주목을 받았다. 반체제 운동으로 1979년부터 1983년까지 4년간 끊임없는 고문과 옥고를 치러야 했다. 그의 작품들은 20년간 체코에서 출판·공연이 금지되는 수모를 겪었다. 지속된 탄압에도 불구하고 1989년 반체제연합 ‘시민포럼’을 조직, 공산당의 권력 독점 폐지 등을 요구하는 ‘벨벳혁명’(무혈혁명)을 주도해 공산정권을 40여년 만에 붕괴시켰다. 벨벳혁명의 성공으로 야권의 스타로 떠오른 그는 1989~1992년 체코슬로바키아의 마지막 대통령을 지낸 데 이어, 슬로바키아 분리 독립 뒤인 1993~2003년에는 민주 선거를 통해 체코 공화국 대통령을 연임했다. 재임 시에는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1999년), 유럽연합(EU·2004년) 가입 등을 이끌며 체코를 민주주의 국가, 자유시장경제로 전환시켰다.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뒤에도 국제무대에서 인권운동가로 활발한 활동을 폈다. 쿠바와 중국의 야권 인사들을 지원하는가 하면, 미얀마 군부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총리의 탄압을 받는 반대세력의 투쟁도 지지했다. 첫 번째 부인 올가의 이름을 딴 올가 하벨 재단을 통해 장애인을 지원하기도 했다. 이런 다채로운 공로로 노벨평화상 후보에 수차례 올랐으며, 2003년에는 미국 대통령자유메달을 수상했다. 2004년에는 제7회 서울평화상을 받았다. 정서린기자 rin@seoul.co.kr
  • 中, 인권변호사 통제 고삐

    중국이 자국 내 인권변호사에 대한 통제 고삐를 바짝 조이고 있다. 인권단체 앰네스티 인터내셔널 등이 최근 중국에서 인권변호사가 심각하게 탄압받고 있다고 지적했지만 이 같은 국제적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는 눈치다. 베이징시 제1중급인민법원은 16일 성명을 통해 “(인권 변호사) 가오즈성(47·高智晟)에 대한 보호관찰 결정을 철회하고 재수감했다.”고 밝혔다고 신화통신이 전했다. 가오즈성은 노동운동가와 토지를 강탈당한 농민, 파룬궁 수련자, 지하교회 신도 등 사회적 약자의 인권보호에 앞장서 온 인물로 2008년 노벨평화상 후보에도 올랐다. 그는 2006년 12월 법원으로부터 국가전복 선동죄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다. 당시 법원은 형 집행을 유예하는 대신 보호관찰 5년과 정치권리 박탈 1년을 부과했다. 가오 변호사는 2009년 2월 베이징 자택에서 공안원에 끌려간 뒤 비공식적으로 구금돼 있다가 지난해 3월 말 석방됐지만 지난해 4월부터 최근까지 또다시 가족과의 연락이 끊겼었다. 한편 영화 ‘배트맨’의 주연으로 유명한 할리우드 배우 크리스천 베일(37)이 가택연금 중인 중국의 시각장애인 인권변호사 천광청(陳光誠·39)을 방문했다가 공안의 거친 제재를 받았다고 CNN이 전했다. 최근 일본의 난징 대학살을 고발하는 중국 영화 ‘진링의 13소녀’(The Flowers of War)에 출연한 그는 영화 홍보차 중국을 방문했다가 산둥성에 있는 천광청의 집을 찾았다. 베일은 가택 앞을 지키던 공안에 “천광청을 만날 수 없느냐.”고 물었으나 공안은 베일의 소형 카메라를 빼앗고 그를 밀치며 주먹을 휘두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유대근기자 dynamic@seoul.co.kr
  • 日구로다, 이번에는 “대마도가 한국땅이냐?” 공격

    日구로다, 이번에는 “대마도가 한국땅이냐?” 공격

    일본의 대표적인 우익 언론인인 구로다 가쓰히로 산케이신문 서울 특파원이 난데없이 대마도를 앞세워 한국의 독립기념관을 비난해 빈축을 사고 있다. 구로다 특파원은 자사 신문에 연재하는 ‘서울에서 여보세요’라는 외신칼럼 10일자에서 ‘대마도는 이미 한국 영토?’라는 제목으로 글을 썼다. 그는 이 글에서 충남 천안의 독립기념관을 ‘한국 어린이들의 학습의 장’이라면서 “넓은 부지에 많은 전시관이 있고, 과거 일본 제국주의의 지배와 탄압에 대한 항일 독립운동의 역사가 전시돼 있다.”고 소개했다. 그는 “일본 수학 여행단도 잘 다녀가는 곳으로 일본어 팸플릿도 제작돼 있는데, 서두에 독일인 철학자의 말을 인용해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아우슈비츠는 독일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써놓아 일본의 한반도 지배가 나치 독일의 유대인 말살 만행과 같은 것처럼 이미지화했다.”고 사실상 불만을 드러냈다. 이어 그는 최근 한국에 사는 일본인이 말도 안되는 일이 있다고 해서 팸플릿을 자세히 살펴보니 지도에 대마도를 한국 땅으로 표기하고 있어 깜짝 놀랐다고 전했다. 그는 “이렇게 해놓은 것을 보면 기념관의 전시 수준까지 의심된다.”고 비난했다. 하지만 이에 대해 독립기념관 측은 일본어 안내책자에 한국,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 지도가 실려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단순히 각 나라와 제주도, 독도, 대마도 등을 표기한 것이지 그것이 어느 나라 땅인지에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다.”고 밝혔다. 독립기념관 관계자는 “마치 한국이 일부러 사실을 왜곡하려고 한 것처럼 자사 국민들에게 전하는 것은 두 나라 모두에 결코 도움되지 않는 일”이라고 말했다. 인터넷서울신문 event@seoul.co.kr 1) 데이트 강간을 위한 ‘악마의 술잔’ 한모금에 블랙아웃…24시간내 검사 못하면 미제사건 2) 죽음의 性도착증 ‘자기 색정사’ 혼절직전의 성적 쾌감 탐닉…‘질식에 중독되다’ 3) 친구와 함께 차안에서 아내에 몹쓸짓 한 남편 …사고로 위장한 최악의 선택 4) 살해당한 아내의 눈속에 담긴 죽음의 비밀… 흔해서 더 잔인한 위장 살인의 실체는 5) 강간 후 살해된 여성, 그리고 부검의 반전 죽을 때까지 여성이고 싶었던 여성의 사연 6) 천안 母女살인범, 현장에서 대변만 보지 않았더라도… ‘미세증거물’ 속에 숨은 사건의 진상 7) 정자가 수상한 정액…씨없는 발바리’ 과학수사 얕봤다가 정관수술까지 한 연쇄 성폭행범 8) 변태성욕 30대 살인마의 아주 특별한 핏자국 혈흔속 性염색체의 오묘한 비밀 9) “그날 조폭은 왜 하필 남진의 허벅지를 찔렀나?”… 칼잡이는 당신의 ‘치명적 급소’를 노린다 10) 소변 참으며 물 마시던 20대女, 갑자기 몸을 뒤틀며… 생명을 앗아가는 ‘죽음의 물’ 11) 자살한 40대 노래방 여주인, 살인범은 알고 있었다 생활반응이 알려준 사건의 진실 12) 불탄 시신의 마지막 호흡이 범인을 지목하다 화재사망 속 숨어있는 타살흔적 증거는 13) 車 운전석에서 질식해 숨진 그녀의 주먹쥔 양팔 14) 백골로 발견된 미모의 20대女, 성형수술만 안 했어도… 가련한 여성의 한 풀어준 그것 15) 무참히 살해된 20대女…6년만에 살인범 잡고보니… 274만개의 눈이 잡은 연쇄살인범의 정체 16) 이태원 옷집 주인 살인사건…20대 여성이 지목한 범인은? 찢어진 장부의 증언 17) 물속에서 떠오른 그녀의 흰손…토막살인범 잡고보니 바다에서 건진 시신 신원찾기 18) 헤어드라이어로 조강지처 살해한 50대의 계략… 몸에 남은 ‘전류반’은 못 숨겼네 19) 자살이라 보기엔 너무 폭력적인 죽음…왜? 가해자·피해자는 하나였다 20) 아파트 침대 밑 女 시신 2구…잔인한 ‘진실게임’ 결과는? 누명 벗겨준 거짓말 탐지기 21) 자다가 갑자기 세상을 뜨는 젊은 남자들…누구의 저주인가? 청장년 급사증후군의 비밀 22) 70% 부패한 시신 유일한 증거는 ‘어금니’ 억울한 죽음 단서 된 치아 23) 살인현장에 남은 별무늬 운동화 자국의 비밀 60대 노인의 치밀한 트릭 24) 택시 안에서 숨진 20대 직장女 살인범은 과연… 돈 버리고 납치한 이상한 택시 강도 25) 그녀가 남긴 담배꽁초 감식결과 놀라운 사실이 살인 현장에 남은 립스틱의 반전 26) 목졸리고 훼손된 60대 시신… 그것은 범인의 속임수였다 ‘파란 옷’ 입었던 살인마 27) 40대 여인 유일 목격자 경비 최면 걸자 법최면이 일러준 범인의 얼굴 28) 소리없이 사라진 30대 새댁, 알고보니 들짐승이… 부러진 다리뼈가 범인을 지목하다 29) 살인자가 남기고 간 화장품 향기, 그것은 ‘트릭’이었다 강릉 40대女 살인사건의 전말 30) 동거女 잔혹하게 살해한 30대, 시신이 물속에서 떠오르자… 살인후 물속으로 던진 사건 그후 31) 최악의 女연쇄살인범 김선자, 5명 독살과 비참한 최후 청산염으로 가족, 친구 무차별 살해 32) 살해된 20대女의 수표에 ‘검은 악마’의 정체가 담기다 완전범죄를 꿈꾸던 엽기 살인마 33) 억울한 10대 소녀의 죽음…두줄 상처의 비밀 추락에 의한 자살? 몸을 통해 타살 증언하다
  • “反푸틴” 소련 붕괴후 최대 시위… 러시아의 ‘봄’ 이끄나

    “反푸틴” 소련 붕괴후 최대 시위… 러시아의 ‘봄’ 이끄나

    지난 4일 실시된 하원 총선을 둘러싼 각종 부정 의혹에 대한 러시아 국민들의 분노가 10일(현지시간) 절정에 달했다. 러시아 국민들의 확고한 지지를 자신했던 블라디미르 푸틴 총리가 거센 역풍을 맞고 있다. 이날 모스크바에서만 경찰 추산 3만명, 시위대 추산 4만~10만명이 결집해 “푸틴 없는 러시아” “통합러시아당은 도둑·사기 당” 등의 구호를 외치며 부정 선거를 규탄했다. 이 같은 시위대 규모는 1991년 소비에트연방 붕괴 이후 최대라고 AP, AFP 등 외신들이 전했다. 야권 지지자들과 시민단체 등이 주축이 된 시위대는 오후 2시 30분부터 약 3시간 동안 크렘린궁 인근 광장에서 항의집회를 열었다. 다양한 연령대의 시민들은 선거 결과 취소, 부정 선거 수사 및 책임자 처벌, 공정한 선거 재실시 등을 요구했다. 집회 참가자 수를 최대 300명으로 제한해 왔던 모스크바 시당국은 이날 이례적으로 대규모 집회를 허용했다. 경찰은 집회장 입구에 금속탐지기를 설치한 뒤 시위 참가자들을 입장시켰으며, 시위대가 정부 건물에 접근하는 것을 차단할 뿐 별다른 통제를 하지 않아 물리적 충돌은 없었다. 이날 모스크바 외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7000여명이 참석한 집회가 열린 것을 비롯해 전국 60여개 도시에서 항의 시위가 잇따라 열렸다. 야당 당수인 일리야 야신 등 시위 참가자들을 무차별 체포했던 경찰의 이 같은 태도 변화는 강경 진압이 시위대를 오히려 자극할 수 있으며, 시간이 지나면 시위대의 기세가 약화될 것이라는 기대에 따른 것으로 풀이된다. 야당을 무시하거나 폄하해 온 국영 TV가 모스크바를 비롯한 6~7개 도시의 시위 상황을 이례적으로 방송한 점도 같은 맥락이다. 푸틴 총리의 언론담당 비서인 드미트리 페스코프는 오후 늦게 성명을 내고 “우리는 시위대의 주장을 존중한다. 그들의 주장을 듣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 들을 것”이라며 유화 제스처를 취했다. 이날 시위는 사상 최대 규모일 뿐 아니라 자유주의자에서 공산주의자, 극우민족주의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의 정치세력을 끌어 모았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민족주의 지도자 콘스탄틴 크릴로프는 “통합러시아당이 우리 모두를 단합하게 하는 기적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야당은 2주 뒤인 오는 24일 한 번 더 대규모 항의 집회를 열겠다고 밝혔다. 이 기간 동안 시위대의 사기가 가라앉지 않도록 야당이 추동력을 유지할 수 있을지, 또 푸틴 정부가 시위 확산에 큰 역할을 한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대한 탄압을 어느 정도 가할지 등이 향후 사태의 변수로 꼽힌다. 야권 활동가로 변신한 블라디미르 밀로프 전 에너지장관은 “시위대의 에너지를 지속시킬 전략이 없으면 시민들은 지칠 것”이라고 우려했다. 한편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은 11일 부정선거설에 대한 조사를 지시했다고 밝혔다. 메드베데프 대통령은 이날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부정선거 규탄과 블라디미르 푸틴 총리 퇴진 요구 시위에 동조할 수 없다며 정부에 모든 투표 조작설을 조사하라고 지시했다고 말했다.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 [기고] 국가보안법의 실상/양동안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기고] 국가보안법의 실상/양동안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내년 선거를 앞두고 일부 세력이 국가보안법 폐지라는 해묵은 쟁점을 다시 들고 나와서 군중 동원 캠페인을 전개하고 있다. 그들은 국가보안법이 국민의 인권을 침해하고, 민주주의 발전을 저해하며, 남북한 간의 평화를 방해한다고 비판하면서 폐지를 주장하고 있다. 국보법 비판은 이론 및 실제와 들어맞지 않는다. 먼저 현행 국보법은 국민의 인권을 침해하는 조문을 내포하고 있지 않다. 과거의 국보법에는 부당한 인권 탄압에 악용될 소지가 있는 조항들이 있었으나 1991년 개정을 통해 부당한 인권 탄압에 악용될 소지가 있는 조항들이 정리되었다.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유지를 위해서는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보호하는 법률이 필요하다. 국보법은 우리나라의 형사법들 가운데 자유민주주의체제 보호를 위해 효율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법률이다. 또 국보법은 민주주의 발전을 저해하는 요소를 내포하지 않고 있으며, 오히려 우리나라의 자유민주주의 발전을 위해 필요한 법률이다. 국보법 폐지론자들은 국보법이 정권유지를 위해 민주화운동을 탄압하는 수단으로 악용되고, 국민의 사상·양심·표현의 자유를 억압하고 있다고 비판하지만, 현행 국보법에는 민주저해적 요소가 없다. 국보법에는 양심의 자유를 억압하는 조항은 없고,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규제하는 조항은 있다. 국보법이 규제하는 사상과 표현의 자유는 ‘국가의 존립·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정도의 사상·표현의 자유 규제는 자유민주주의 발전을 본질적으로 저해하지 않는다. 어떤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도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완전히 규제하지 않는 경우는 없다. 국보법에 내포된 미약한 정도의 사상·표현의 자유 규제조차 하지 않는다면, 우리나라의 자유민주주의체제는 조만간 와해될 것이다. 국보법은 남북한 간의 평화를 방해하는 법률이 아니며, 오히려 남북한 간의 올바른 평화를 위해 필요한 법률이다. 우리나라에는 남북교류협력법이 제정되어 있어서 남북한 간의 평화를 위한 남북 공무원과 민간인들의 교류와 협력은 국보법 때문에 지장을 받지 않는다. 국보법은 겉으로 남북평화를 위한 교류·협력을 내걸고 내면적으로는 북한정권과 야합하여 대한민국의 국가안전과 자유민주주의체제에 위해를 가하는 활동을 하는 것만 단속할 뿐이다. 국보법은 또 내부의 적을 억제하기 위한 법률이기 때문에 북한 정권에는 아무런 직접적 피해를 주지 않는다. 남북한 간에 진정한 평화가 이루어지려면 상호불가침과 내정 불간섭이라는 평화의 기본원칙이 지켜져야 하며, 남북한이 내정 불간섭의 원칙을 준수한다면 대한민국의 국보법이나 북한의 형법은 남북한 간 평화의 실현에 지장을 주지 않는다. 국보법은 그러한 목적이 실현되는 남북한 간의 올바른 평화를 정착하기 위해서 필요불가결한 법률이 된다. 남북한 간의 올바른 평화를 정착시키려면, 평화가 추진되는 동안 평화 분위기를 악용하여 북한 정권과 내통하는 내부의 적이 자유민주주의를 흔들지 못하게 해야 한다. 우리의 정치체제가 흔들리게 되면, 북한 정권은 대한민국과의 평화를 외면하고 자유민주주의체제가 붕괴된 후 남한을 흡수통일하려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북한이 이런 기대를 하면 남북한의 올바른 평화는 정착될 수 없다.
  • “북과 군사협력 단절하라” 클린턴, 미얀마에 요구

    미얀마를 방문 중인 힐러리 클린턴 미국 국무장관은 지난 1일(현지시간) 테인 세인 대통령과의 면담에서 관계 개선의 조건으로 북한과의 군사적 협력 단절을 필두로 한 각종 요구사항들을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클린턴 장관을 수행중인 국무부 고위당국자는 이날 현지에서 브리핑을 통해 “클린턴 장관은 다섯 가지 요구사항을 밝혔고, 이 분야에서 진전이 이뤄질 경우 미국은 관계개선을 위한 추가조치를 취할 수 있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고 전했다. 그는 “다섯 가지 요구 중 첫 번째는 북한과의 군사적 협력에 대한 우려, 핵 우려 해소였다.”며 “클린턴 장관은 북한과의 군사적 연대를 완전히 단절할 것을 촉구했다.”고 밝혔다. 이 당국자는 나머지 요구사항들로 ▲모든 정당의 선거참여 등 정치개혁 조치 ▲소수민족 인권탄압 중지 ▲정치범 석방 ▲집회·결사의 자유, 언론자유 등 법치주의 개혁 등을 밝혔다. 그는 “클린턴 장관의 설명은 매우 상세하고 구체적이었다.”며 “미국은 행동 대 행동, 조치 대 조치의 원칙으로 호응할 것이라는 입장을 재확인했다.”고 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클린턴 장관을 통해 세인 대통령에게 전한 메시지에서 “미국은 민주주의로 이양하고 인권보호를 촉진하려는 당신의 노력을 어떻게 진전시킬 수 있을지 모색하길 원한다.”고 밝혔다. 미얀마는 그동안 북한과 핵·미사일 분야에서 긴밀한 협력을 유지해온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워싱턴 김상연특파원 carlos@seoul.co.kr
  • “美·英, 빅브러더 시스템 중동 등 野 탄압에 사용”

    폭로전문사이트 위키리크스가 ‘빅브러더 사회’를 만드는 데 일조한 국가와 기업을 폭로했다. 위키리크스는 미국, 영국 등 주요 서방국이 휴대전화, 컴퓨터 등을 도청해 국민을 감시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전 세계에 팔아넘기고 있다고 1일(현지시간) 고발했다. 이 발표와 동시에 위키리크스의 프랑스 협력업체는 방산업체 아메시스가 무아마르 카다피 정권을 도와 영국에 망명한 리비아 야권 인사들을 감시했다는 기존 의혹에 대해 증거를 제시했다. 공개된 내용은 아메시스가 리비아 정부에 건네준 인터넷 감시 시스템인 ‘이글 시스템’을 작동할 수 있는 매뉴얼과 야권 인사들의 이메일 주소, 닉네임 등이다. 리비아 정부는 그동안 첩보원을 보내 해외에 망명 중인 반대파를 살해하거나 공격했다는 의혹을 받아 왔다. 이런 감시 프로그램은 올해 초 중동 시민혁명 당시 정부의 탄압 수단으로 쓰인 것으로 알려졌다. 제이콥 아펠바움 위키리크스 전 대변인은 “서방국이 판매한 이 감시 시스템들은 시리아나 리비아, 튀니지, 이집트 같은 나라에서 사람을 추적하고 살해하는 데 사용됐다.”고 밝혔다. 위키리크스 설립자 줄리언 어산지는 이날 휴대전화, 이메일 계정, 인터넷 검색 기록 등을 통해 개인을 감시, 추적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한 25개국 160개 기업에 대한 파일 287개를 공개했다. 어산지는 “이 기업들은 전 인류를 감시하기 위해 독재 국가뿐 아니라 민주주의 국가에도 관련 장비들을 팔고 있다.”면서 “이런 ‘스파이 시스템’을 개발한 국가로는 미국, 영국, 호주, 캐나다, 남아프리카공화국 등이 있다.”고 밝혔다. 정서린기자 rin@seoul.co.kr
  • ‘청계피복’ 故 이소선여사 30년만에 국가배상 판결

    1970년대 대표적 노조탄압 사례인 ‘청계피복 사건’의 피해자인 전태일 열사 어머니 고(故) 이소선 여사 등이 30여년 만에 국가로부터 배상을 받게 됐다. 서울중앙지법 민사25단독 이원중 판사는 29일 이 여사 등 청계피복 노조 조합원 7명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원고 일부 승소 판결했다. 재판부는 “국가는 망인인 이 여사에게 1000만원을, 조합원 임모씨와 이모씨에게는 1500만원을, 민모씨 등 3명에게는 1000만원을, 또 다른 이모씨에게 500만원을 각각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청계피복 노동조합은 우리나라 최초의 민주적인 노조로, 1970년대 결성돼 노동 민주화운동에 앞장섰다. 그러던 중 1980년 8월 당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는 ‘노동계 정화조치’를 발표하며 대표적 민주노조로 꼽힌 원풍모방, 청계피복, 반도상사 등의 임원들을 해임조치했다. 국보위는 노조 간부들을 불법구금하고 폭행하는 불법행위를 저질렀다. 2006년 청계피복과 원풍모방, 동일방직 등 11개 사업장 해고자들은 노조탄압 사건에 대해 진실규명 신청을 했고, 진실화해위원회는 이를 받아들여 국가의 사과와 명예회복 조치를 권고했다. 앞서 같은 법원은 지난 6월과 10월 원풍모방과 동일방직 사건 피해자들이 낸 소송에서도 국가 배상책임을 인정했다. 이민영기자 min@seoul.co.kr
  • 거지·악사… 중세 비주류의 삶

    중세(500~1500년) 유럽의 도시에는 길에서 사는 사람들이 있었다. 도시 인구의 반을 차지했던 비주류 인생은 거리의 악사, 거지, 사형집행인, 동물 가죽 벗기는 사람, 목욕치료사, 매춘부, 유대인, 똥 푸는 사람, (있지도 않은 가상의) 마녀 같은 이들이었다. ‘중세의 뒷골목 풍경’(양태자 지음, 이랑 펴냄)은 독일에서 22년간 산 비교종교학 박사인 저자가 여러 차례의 답사와 자료 조사를 통해 완성했다. 특히 관심을 끄는 부분은 5만~6만명의 여성이 억울하게 불타 죽거나, 물에 빠져 죽거나, 바퀴에 매달려 돌려진 채 죽은 ‘마녀 사냥’이다. 중세 유럽에서 마녀는 갑자기 툭 튀어나온 것이 아니라고 저자는 설명한다. 마녀의 유래를 거슬러 올라가면 유럽의 토속 종교가 그 속에 꿈틀거리고 있다는 것. 그리스도교가 들어오기 전 유럽에는 자연 종교이자 신비 종교인 ‘비카’ 같은 종교가 있었다. 토속 종교는 당연히 그리스도교 교리와 충돌했는데, 그리스도교 수장들은 무조건 자기들 교리에 어긋나는 행동과 말을 하면 마녀로 몰아붙여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처음에는 종교적인 숙청으로 시작한 마녀사냥이 나중에는 가족, 친척, 이웃끼리 조금만 화가 나도 상대를 고발하는 무기로 이용됐다. 관청에서는 눈물 시험, 바늘 시험, 불 시험, 물 시험 등으로 마녀인지 아닌지를 판단했다. 마녀 혐의자를 꽁꽁 묶어 물에 넣고는 몸이 둥둥 뜨면 마녀로 몰아 화형에 처했다. 책은 마녀 사냥뿐 아니라 동성애를 단속한 밤의 관청, 사교의 중심지 목욕탕, 다산의 여왕, 여교황 요한나, 34년간 철가면을 쓴 사나이 등 중세의 각종 사건·사고를 오늘로 되살린다. 저자는 한국의 중요무형문화재인 김금화 만신에게 신내림을 받았다는 안드레아 칼프라는 독일 여인이 억울하게 죽어 간 중세의 마녀들을 위해 한국의 지노귀굿(씻김굿)을 올려 주기를 희망했다. 그리고 책을 통해 중세 유럽을 냉철하게 비판할 수 있는 안목과 소양을 넓힐 수 있기를 바랐다. 1만 5000원. 윤창수기자 ge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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