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탄압
    2025-12-30
    검색기록 지우기
  • 제자
    2025-12-30
    검색기록 지우기
  • 자살
    2025-12-30
    검색기록 지우기
  • 러시아
    2025-12-30
    검색기록 지우기
  • 호우
    2025-12-30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8,479
  • 영광의 굴비 굴비의 영광

    영광의 굴비 굴비의 영광

    젓가락질이 쟀다. 석쇠 위 굴비가 노릇노릇 구워지기만을 오매불망 기다렸으니 그럴 만도 했다. 성질 급한 누구는 아예 젓가락을 내던지고 양손으로 머리와 꼬리를 붙들고 수박 먹듯 훑었다. 그 맛있는 게걸스러움에 혹했는지 너도나도 개구쟁이마냥 낄낄대며 따라했다. 굴비 한 두름이래야 순식간이었다. 다른 곳도 아닌 영광에서, 그것도 영광굴비였으니 당연했다. 영광스러운 첫인상이었다.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는 점은 더 영광스러웠다. 굴비만으로 완전한 영광 영광군 문화관광해설사 정애임 선생은 “신령 령, 빛 광, 천년의 빛 영광은 지명 그대로 신령스럽고 정신이 살아 있는 고장”이라고 운을 뗐다. 장단이라도 맞추려는 듯 겨울 끝자락에 보슬비가 눈처럼 흩날렸고 희끄무레한 안개는 풍경을 수묵담채화로 그려냈다. 신령스러운 빛으로 지명과 딱 들어맞는 정감을 연출한 것이다. 아무리 그렇다한들 굴비의 영광, 영광의 굴비만 떠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찌뿌드드한 하늘과 으슬으슬한 날씨 탓도 컸다. 그랬으니, 영광법성포굴비특품사업단에 들러 직접 굴비를 엮고 한 두름씩 들고 나가 석쇠에 구워 먹을 때의 행복감이 컸을 수밖에…. 새참에 이어 저녁에는 보리굴비, 고추장굴비까지 모조리 맛보고, 다음날 아침에는 조기매운탕도 곁들여 굴비구이를 탐했다. 부드럽고 짭조름한 맛이 먹고 또 먹어도 물리지 않았다. 어찌됐든 영광은 굴비다. 구태여 ‘어찌됐든’이라고 토를 단 이유는 영광은 굴비로서 완전한 동시에 굴비만으로는 온전히 표현되지 않아서다. 굴비로서 완전한 영광은 굳이 부연 설명할 필요도 없겠다. 굴비는 조기를 소금에 절여 말린 것이다. 그 명칭의 유래는 고려 16대 국왕 예종(재위 1105~1122년)때까지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딸을 왕비로 들여 권세를 누렸던 이자겸이라는 외척세력가가 있었는데 반란을 모의했다가 적발돼 영광 법성포로 귀양을 오게 된다. 이곳에서 굴비를 맛본 것인데 그 맛이 너무나 기가 막혔다. 왕에게도 진상하고 싶을 정도였는데 자칫 용서를 빌거나 아부하는 뜻으로 비쳐질까 싶었다. 그래서 ‘굽히지 않겠다’는 뜻을 담아 굴비屈非라고 써서 올렸다는 이야기인데,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조기를 말리면 구부러지는데 이 모습을 보고 ‘구비仇非 조기’라고 부르던 게 굴비로 변했다는 설도 있으니 이래저래 사연 많은 굴비다.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1 굴비가 먹여 살린다는 법성포항 풍경 2 영광법성포굴비특품사업단에서는 굴비에 대한 기초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것은 물론 직접 엮는 체험도 할 수 있다. 체험비는 5,000~7,000원 3 노릇노릇 막 구워낸 영광굴비 맛은 가히 일품이다. 식당에서는 굴비정식 메뉴를 4인이 먹을 수 있는 ‘한 상’ 기준으로 팔기도 한다. 식당에 따라 다르지만 굴비백반은 1인당 1만5,000원선, 굴비정식은 2만5,000원에 판매한다 “법성포에는 파리 한 마리 없어요” 단지 그런 연유 때문에 영광굴비가 유명한 것은 아닌가 보다. 예전에야 법성포 앞 칠산바다에서 산란을 위해 북상하던 조기가 엄청 잡혔다지만 지금은 조기들의 이동경로가 바뀌어 그렇지만도 않다. 그래도 영광굴비의 명성에 변함이 없는 이유는, 그만의 맛이 있고 그 맛을 빚어낸 환경이 특별하기 때문인 것 같다. 굴비구이를 사이에 두고 겸상한 정기호 영광군수는 영광굴비 자랑과 영광굴비를 만들어낸 법성포 사랑이 대단했다. “옛날부터 법성포 앞 칠산바다에서 조기가 많이 잡혀서 굴비 만드는 전통과 역사가 깊어요. 그냥 간을 하고 말리는 것도 아닙니다. 영광에서 생산하는 천일염으로 ‘섶간’을 하고 법성포의 천혜의 해풍과 햇빛으로 말려 영광굴비가 탄생하는 것이죠.” 섶간은 영광굴비의 전통적인 염장 방식이다. 다른 곳에서는 염수에 조기를 담가 간을 하지만 영광굴비는 간수를 뺀 천일염으로 한 마리 한 마리 간을 하고 재웠다가 염도가 낮은 염수에 세척한 뒤 엮어 말린다고 한다. 그냥 염수에 간을 한 굴비를 이곳 사람들은 ‘물굴비’라고 하대하는 이유다. 자랑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법성포는 굴비 생산에 지리적으로나 환경적으로도 최적의 자연조건을 갖췄어요. 신기하게도 법성포에는 파리가 한 마리도 없다는 것만 봐도 그렇습니다.” 그물망을 치지 않아도 사시사철 위생적으로 말릴 수 있는 환경이라는 얘기다. 실제로 법성포 굴비거리를 걸어 보니 파리는 전혀 눈에 띄지 않았고, 수백 수천개의 굴비두름은 그대로 바람과 햇살을 맞고 있었다. 겨울이니 그렇겠거니 싶었다. 쉬이 믿겨지지 않는 ‘파리 전무’의 진실은 언젠가 한여름에 찾아가 확인해 볼 요량이다. 1, 2, 3 영광은 신안과 함께 천일염 생산지로 유명하다. 영광굴비는 이곳에서 생산된 소금으로 섶간을 한다 바람과 햇살과 천일염이 만들다 대신 영광의 천일염 생산현장은 직접 확인했다. 영광은 신안과 함께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천일염 생산지다. 16km에 이르는 갯벌과 오뉴월의 따뜻한 햇볕, 4월부터 불어오는 북서풍인 하늬바람이 빚어낸 소금이다. 염산 지역의 영백염전을 비롯해 백서영농조합법인, 황통영농조합법인 등의 대규모 염전이 영광 갯벌 천일염의 명성을 쌓고 있다. 염전 수만 해도 120여 개에 이른다. 도자기판 염전으로 유명한 영백염전에서는 현대화된 시설을 통해 최상의 품질로 태어나는 천일염의 생산과정과 현장을 체험했다. 이 천일염 역시 영광 법성포 굴비의 맛을 빚는 요소 중 하나이니 황금만큼 귀한 소금이다. 비굴해지더라도 먹고 싶고 다시 먹고 싶어서인지 영광굴비는 비싸다. 법성포에서도 한 두름(20마리)에 싸게는 2만원, 비싸게는 100만원을 훌쩍 넘는다. 시세차익을 노린 가짜 영광굴비가 판을 치는 것도 다 높은 몸값 때문이다. 영광굴비는 조기 중에서도 참조기만을 사용하는데 비슷하게 생긴 부세, 보구치, 수조기, 꼬마민어 등으로 만든 가짜 영광굴비에서부터 중국산 조기로 만든 가짜까지 파다하다. 일반적으로 굴비 머리에 다이아몬드 모양이 있으면 진짜라고 알고 있는데, 유사조기들도 마찬가지여서 위험이 따르는 상식이라고 한다. 어디서 잡혔는지는 진실을 알려주지 않으면 사실상 확인할 길이 없다.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가짜에 대처하는 자세 진짜 영광굴비는 어떻게 구별할까? 하도 가짜가 판을 치니 첨단기술까지 동원됐다. 고유인증번호는 물론 생산지와 생산자 정보 등을 담은 QR코드를 부여한 것이다. 대략 10만원 이상의 중고가 제품의 경우 뚜껑을 열면 진품 영광굴비임을 알리는 음성 녹음이 자동으로 흘러나온다. 영광법성포굴비특품사업단이 알려주는 진품 구별법은 이 진품인증태그를 확인하는 것이다. 특품사업단 건물은 굴비 박물관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직접 구매도 할 수 있는 것은 물론 굴비 엮는 체험도 할 수 있으니 ‘영광굴비투어’의 출발지로 삼아도 좋겠다. 여기서 구입하는 것만큼 확실한 방법도 없겠다 싶어 4만원짜리 영광굴비 한 두름을 들고 왔더니 한동안 밥상머리 즐거움이 컸다. 법성포 굴비거리를 걷노라니, 영광 법성포의 바람과 햇볕을 머금고 이곳의 방식대로 탄생한 굴비라면 어디에서 잡혔든, 어떤 조기로 만들어졌든 그 나름의 가치가 있지 않은가 싶었다. 방점은 어디까지나 영광 법성포에 찍혀야 마땅하다는 생각에서였다. 단, 속이지도 속지도 말아야 하겠지만…. ●영광 볼거리 영광에는 굴비 말고도 다양한 매력이 곳곳에 숨어 있다. 우선 문화관광해설사 정애임 선생이 뗀 운에서 실마리를 찾았다. ‘정신이 살아 있는 신령스러운 빛의 고장 영광’이라는 표현 속에는 영광이 품은 종교적 색채가 묻어 있다. 3대 종교가 깃들여져 있는 곳 다시 법성포다. 영광 법성포는 인도의 승려 마라난타가 384년에 백제에 불교를 전파하면서 최초로 발을 디딘 곳이다. 법성포의 법法은 불교를, 성聖은 성인인 마라난타를 뜻한다고 한다. ‘백제불교최초도래지’는 법성포를 통해 백제불교를 전한 마라난타를 기념하기 위해 조성한 거대한 야외 박물관이다. 석가모니의 출생과 고행까지의 과정을 23개의 원석에 간다라 조각기법으로 음각한 부용루를 비롯해 간다라 유물전시관, 탑원, 4면 대불상이 들어서 있다. 부용루를 거쳐 4면 대불상이 있는 정상까지 오르면 호젓한 경치가 펼쳐진다. 마라난타가 제일 처음 지은 사찰이 바로 ‘불갑사’다. 불佛은 불교를, 갑甲은 처음, 으뜸을 뜻하니 절 이름에도 이런 의미가 담겨 있다. 불갑사도 불갑사이지만 이곳에서 9월경에 열리는 상사화(꽃무릇)축제도 유명하다. 상사화의 꽃말은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이다. 잎이 진 뒤에야 꽃이 피니 서로 영원히 만나지 못한 채 사무치게 그리워만 해서다. ‘화엽 불상견 불상초花葉 不相見 相思草’의 한이 서린 꽃이다. 상사화 3대 군락지는 영광 불갑사, 함평 용천사, 고창 선운사인데 이곳의 규모가 가장 크다. 그래서 9월 상사화 꽃이 피면 불갑사 인근은 그야말로 빨간 융단이 깔린다고 한다. 백제불교최초도래지 뒤편으로는 숲쟁이꽃동산이 조성돼 있는데 이곳도 봄이면 꽃이 만발하고 활엽수림이 싱그러워 호젓한 산책을 즐기기에 좋다. 1 칠산바다를 따라 조성된 노을산책로를 따라 걸으면 노을전시관이 있다. 바다를 감상하며 노을의 정취를 느낄 수 있다 2 마라난타가 최초로 세운 절인 불갑사. 불갑사 주변은 국내 최대 상사화 군락지여서 9월에는 빨간 융단이 깔린다 3 원전에서 나온 온배수를 활용해 운영되고 있는 에너지아쿠아리움. 기대보다 규모가 크고 수중생물도 다양하다 원자력에서 노을까지 영광은 원불교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원불교 창시자 박중빈 교조가 깨달음을 얻었다는 영산성지를 비롯해 박중빈의 생가 터, 기도를 올렸던 바위 등이 영광에 남아 있다. 기독교 정신도 깃들여져 있다. 6·25 전쟁 당시 북한군의 교회 탄압에 맞서 신앙을 지키다 순교한 신자들이 염산교회에 77명, 야월교회에 65명이나 된다. ‘기독교인순교지’는 이들 순교자들을 기리고 있다. 이 밖에도 원자력 발전의 원리와 안전성 등을 홍보하는 ‘원전홍보전시관’과 원전 온배수로 꾸민 ‘에너지아쿠아리움’,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 중 9번째로 선정된 바 있는 ‘백수해안도로’, 해변을 따라 조성된 ‘노을산책길’과 ‘노을전시관’, ‘불갑저수지 수변공원’, ‘가마미해수욕장’ 등이 굴비 너머의 다채로운 영광을 채색하고 있다. 모든 관광지가 무료입장이니 이 또한 영광의 매력이다. 여행의 피로는 노을전시관 인근에 있는 ‘영광해수온천랜드’에서 칠산 바다를 조망하며 온천욕으로 풀 일이다. 글·사진 김선주 기자 취재협조 영광군 www.yeonggwang.go.kr travie info 영광법성포굴비특품사업단 법성포 내 400여 개 굴비생산업체들로 구성됐다. 영광법성포굴비의 가공, 보관, 유통, 홍보 활동을 펼치고 있다. 회원업체가 생산하는 제품에 한해 전남품질인증마크가 부착된다. 굴비의 생산과정과 요리법을 홍보하고 있으며 엮기 체험과 구매도 가능하다. 주소 전남 영광군 법성면 진내리 1-2 문의 061-356-1657 백제불교최초도래지┃주소 전남 영광군 법성면 진내리 812 문의 061-350-5999 영광해수온천랜드┃주소 전남 영광군 백수읍 대신리 764 문의 061-353-9988 불갑사┃주소 전남 영광군 불갑면 모악리 8 문의 061-353-8258 에너지 아쿠아리움┃주소 전남 영광군 홍농읍 계마리 514 문의 061-357-2405 영광 노을전시관┃주소 전남 영광군 백수읍 대신리 764 문의 061-350-5600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위 기사는 기사콘텐츠 교류 제휴매체인 여행신문의 기사입니다. 이 기사에 관한 모든 법적인 권한과 책임은 여행신문에 있습니다.
  • [명사가 걸어온 길] 평생을 민중의 아이콘으로 살다 백기완(상)

    [명사가 걸어온 길] 평생을 민중의 아이콘으로 살다 백기완(상)

    백기완(80)은 거리에 있었다. 1973년 유신헌법 개정 투쟁 때도, 1987년 6월 민주화 항쟁 때도 그는 늘 대오의 맨 앞에 서 있었다. 그는 지금도 거리에 있다. 박근혜 대통령 취임 이후 서울 중구청이 대한문 앞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의 분향소를 철거할 때도 백발의 백기완은 새벽같이 나와 천막을 지켰다. “피눈물 흘리는 사람들의 몸부림이 있는 곳이 나의 삶터”라고 말하는 백기완. 스스로 “늙었다”고 말하면서도 세상에 호통치고 노래 부르기를 멈추지 않는 그는 여전히 젊다. 백기완의 삶과 예술을 두 차례에 나눠 싣는다. 백기완을 거리로 이끈 것은 가난과 분단이었다. 1933년 황해도 은율 산자락에서 태어났다. 땅 한 뼘 갖지 못한 아버지는 돈이 없었다. 배가 고팠다. “돼지기름 덩어리 한 조박(조각의 황해도 사투리)을 날로 먹는 것이 어릴 적 꿈이었다”고 회고할 정도다. 일제의 잔학한 수탈이 계속되던 때였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왜놈들이 집에 와서 놋그릇을 뺏어갔어요. 쌀도 뺏고 밥그릇도 뺏고, 나도 울고 엄마도 울고. 그런데 엄마가 그만 울래요. ‘사내 새끼가 자꾸 울면 키가 안 큰다. 어서 커서 엄마 원수를 꼭 갚아 달라’고. 그때부터 민족의식이 싹 텄던 것 같아요.” 1946년 백기완은 아버지를 따라 맨발로 서울에 왔다. 도시는 냉정했다. 설렁탕 집에서 일을 하다가 “식은 밥을 너무 많이 먹는다”는 이유로 쫓겨났다. 그에게 서울은 “주먹으로도 안 되고 참아도 안 되고 울어도 안 되는 곳”이었다. 가진 게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저항심리가 그에게 민중 의식을 심어줬다고 했다. 축구 선수가 되고 싶었지만 하루하루 입에 풀칠하기도 힘들었다. 학교는 꿈도 못 꿨다. 충무로 책방에서 주인 몰래 영어 사전을 외우다 쫓겨나기를 거듭했다. 그의 할아버지(백태주)에게서 항일투쟁 때 도움을 받았던 백범 김구(1876~1949)와 임시정부의 외무부장을 지낸 조소앙(1887~1958) 선생이 학교에 보내겠다고 했지만 아버지는 마다했다. 아버지는 “백범에게 밥을 얻어먹으면 백범 같은 사람밖에 안 된다. 깡패가 되든 거지가 되든 혁명가가 되든 혼자서 크라”고 했다. 1950년 전쟁으로 나라가 찢어졌다. 어머니는 여전히 은율에 있었다. 남쪽에서 참전한 작은형은 “북쪽에 계시는 어머니를 겨냥해서는 단 한 방도 쏠 수가 없다. 그래서 하늘에 대고만 빵빵 쏜다”는 편지를 남기고 전장에서 숨졌다. 형의 유해를 찾으러 강원도에 갔다가 사격을 당해 죽기 살기로 뛰었다. 뛰면서 다짐했다. 언젠가 나라의 허리를 내 손으로 잇겠다고. 전쟁이 끝났다. 국토는 폐허였다. 백기완은 ‘나라가 온통 퇴폐와 이기주의에 빠져 있다’고 여겼다. “우리 생명을 심자”며 젊은 날을 나무심기와 농민운동에 바치기로 했다. 1953년부터 꼬박 7년. 그때는 불덩어리 같았다고 했다. 젊은이들의 주머니를 털어 100만 그루가 넘는 나무를 심었다. 뜨거운 청춘이 되살아나는 듯 백기완은 인터뷰를 멈추고 거친 목소리로 자신이 만든 노래를 불렀다. “바라보라 붉은 산 햇빛에 탄다/ 저 산을 푸르게 마음도 푸르게/ 저 산을 푸르게 조국도 푸르게/ 영치기 영치기 영차차 영치기 영차차/ 영치기 영치기 영차차 영치기 영차차 우리는 선봉이다 자진녹화대” 100만 그루의 나무는 이 땅에 생명이 되었을까.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이승만 독재가 강화되면서 그는 본격적인 싸움을 시작했다. 싸움은 반 세기 넘게 이어졌다. 그는 ‘가대기 형(兄)’ 이야기를 했다. “가대기 형은 서울역에서 막일하던 지게꾼이었어요. 이름도 제대로 모르고 그냥 가대기 형이라고 불렀어요. 싸움을 잘했지만 주먹쟁이는 아니었어요. 내가 가난한 친구들이랑 주먹다짐을 하고 나면 이렇게 얘기했죠. ‘싸움은 있는 놈, 나쁜 놈들이랑 하는 거야. 없는 놈들끼리 싸워봤자 서로 코만 터져’ 그 말이 내 인생의 길라잡이가 됐어요.” 이승만 전 대통령은 백기완에게 ‘나라를 반으로 가른 미국의 앞잡이’였다. 정권을 바꿔가며 30년 넘게 이어진 독재의 시작이기도 했다. 그는 “길이 없으면 길을 찾아가고 그래도 길이 없으면 새 길을 내자”며 4·19 혁명에 참여했다. 이승만 정권은 무너졌다. 그러나 이듬해 5·16 군사 반란이 터졌다. 그가 “독재자의 야욕과 자본주의의 폭악이 결합된 극악한 체제”라고 부르는 ‘박정희 18년’의 시작이었다. 1972년 유신헌법이 나왔다. 1974년 1월에는 긴급조치 1호가 나왔다. 1973년부터 ‘유신헌법 개헌청원 백만인 서명 운동’을 벌이던 백기완과 고 장준하(1918~1975) 선생은 긴급조치 1호 위반으로 15년형을 선고받았다. 2년 뒤 풀려났다. 그는 가장 힘들었던 순간으로 그때를 꼽았다. 유신은 그에게 ‘반통일, 반평화, 반균등, 반자유, 반문화, 반예술, 반역사, 반진보’였다. “유신 타파 운동을 하다 집에 들어와서 잠시 눈을 붙이고 있었어요. 탕탕탕, 누가 현관문을 부수고 구둣발로 들어와 이불을 확 베끼더라고. ‘너희 집 안방에 강도가 구두를 신고 들어와서 이불을 벗기면 좋겠어. 빗자루로 쓸어 이 새끼야’ 그랬더니 나를 짓이기며 질질 끌고 가요. 기가 막혔습니다. 내 생각대로 목숨을 걸고 떳떳하게 살았는데 그렇게 끌고 가면 되겠어요. 온몸이 노여움으로 부들부들 떨렸습니다.” 그는 끌려가면서 아내에게 “여보, 나 기다리지 마. 훗날 내 무덤에 이름 모를 꽃이 피면 그게 해방 통일의 꽃일 거야”라고 외쳤다. “지금 들으면 어쭙잖은 얘기처럼 생각되기도 하는데, 그때는 죽기 살기로 싸울 때였으니 진지했어요. 거의 반 죽어서 감옥에 있는데 아내에게 편지가 왔어요. 새벽녘 추위가 더 매서운 법이니 견디어 내시라고.” 그러나 1975년 기다리던 아침이 오는 대신 믿고 따르던 장준하가 죽었다. 장준하는 그에게 “모든 통일은 좋다. 제국주의와 독점자본주의의 틀을 뒤집는 첫 걸음이 통일이다”고 알려준 스승이었다. 그는 “야비한 학살”이라고 했다. 여섯 달을 내리 울었다. 지난달 26일 장준하 선생 사인 진상조사 공동위원회가 “머리에 둔기를 맞고 숨졌다”는 사인을 발표할 때 백기완은 다시 울었다. 1979년 유신 체제가 끝난 뒤 그 자리를 채운 것은 또 다른 군사 정권이었다. ‘반동분자’ 백기완은 다시 끌려갔다. 모질게 맞았다. 손톱이 뽑혔다. 정신을 잃으면 물바가지가 날아왔다. 독재는 짐승만도 못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죽기 살기로 시를 쓰며 버텼다. 그때 쓴 ‘묏비나리’는 ‘임을 위한 행진곡’으로 작곡돼 대표적인 민중가요가 됐다. 맨 첫발/ 딱 한발띠기에 목숨을 걸어라 (중략)/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싸움은 용감했어도 깃발은 찢어져/ 세월은 흘러가도 구비치는 강물은 안다/ 벗이여 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라/ 갈대마저 일어나 소리치는 끝없는 함성/ 일어나라 일어나라/ 소리치는 피맺힌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산자여 따르라 1987년 6월 민주화 항쟁 이후 백기완은 민중후보로 대통령 후보에 추대됐다. 야권에서는 김영삼, 김대중, 백기완이 단일화를 모색했다. 하지만 민주화는 눈앞의 신기루였다. 백기완이 선거 이틀 전 단일화를 외치며 후보를 포기했지만 ‘양김’은 끝내 각자의 길을 갔다. 노태우 후보가 당선됐다. 그는 “민중을 위해 싸운 100여년을 승리로 매듭지을 기회를 날렸다. 피눈물이 그치지 않았다”고 했다. 1992년 말 다시 민중후보로 대통령 선거에 나섰지만 낙선했다. 1993년 김영삼 정부가 ‘문민’(文民)의 간판을 내걸고 들어선 이후 지금까지 총칼을 앞세운 독재는 사라졌지만 백기완은 싸움을 멈추지 않는다.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 이명박 정부를 거치는 사이 독재의 폭력은 신자유주의로 횡포로 바뀌고 있었다. 노동 현장을 찾아다녔다. 자본의 낯은 겉으로만 번지르르했다. 그는 “이명박 정부는 가장 극악하게 노동을 탄압한 정권”이라고 했다. 정도는 달랐지만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도 사정은 비슷했다. 그는 “사람의 마음까지도 상품으로 만들어 돈으로 환산하는 신자유주의의 폐해를 근본적으로 없애야 한다. 신자유주의에서 민중이 해방되는 것이 역사적 과제”라고 했다. “젊은이들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비바람과 가뭄을 견디지 못하고 여름 한때 없이 떨어지는 가랑잎을 ‘개죽’이라고 합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자본주의의 모순을 깨뜨릴 생각은 않고 그 속에서 출세, 돈벌이, 명예, 행복만 좇다가 개죽이 되어가는 것 같아요. 젊은이들이여, 개죽이 되지는 마시오. 개죽으로 사느니 마음껏 자라다가 거름이라도 되는 게 나아요.” 그가 이번 정부에 가장 우선해 요구하는 것이 노동 문제다. “지난해 한진중공업 노조에서 최강서라는 젊은이가 서른넷에 목숨을 끊었어요. 유서에 ‘가진 자들의 횡포에 졌다. 박근혜가 대통령이 된 5년을 더 기다릴 수 없다. 돈이 전부인 세상에 없어서 더 힘들다’고 적었어요. 사실상 학살이나 다름없었어요. 장례식에 갔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꼬마들이 ‘아빠 왜 안 오냐’면서 사탕을 먹고 있어요. 울었어요. 집으로 돌아오는데 앞이 안 보입디다. 하지만 나는 앞이 안 보인다고 주저앉지는 않아요. 그대로 주저앉는 건 자본주의에 져서 인간성을 포기하는 겁니다.” 백기완은 박근혜 대통령을 두고 ‘유신 잔재’라는 거친 표현도 서슴지 않았다. “유신에 대한 거부와 비판이 한마디도 없다”고도 했다. 그는 다시 ‘장산곶매’ 이야기를 했다. “장산곶매는 일찍이 애미 애비를 잃고 너무나 배가 고팠습니다. 올빼미와 까마귀를 찾아가 밥 한 술을 빌다가 부리와 발톱을 빼앗겼죠. 땅 속으로 가면 쥐들이 쫓아오고, 바깥으로 가면 사람들이 보약이라며 달려들고. 그렇게 벼랑까지 쫓기다 보니 앞에는 끝도 없는 바다, 뒤에는 사람과 쥐새끼예요. 장산곶매는 벼랑 끝에서 넓은 바다와 하늘을 보며 깨친 바가 있어 힘이 약한 짐승은 잡아먹지 않고 일년에 두 번 나쁜 놈 하고만 싸우기로 합니다. 장산곶매가 싸움을 떠나는 날 밤이면 숲에서 ‘딱, 딱’ 하는 소리가 나요. 부리질로 제 둥지를 ‘딱, 딱’ 까부수는 소리. 집에 집착하면 온몸으로 싸울 수가 없어요. 싸움을 할 때는 목숨을 걸어야 돼요.” 2009년 백기완은 “한평생 하는 일들이 죄다 실패였다. 다시 실패의 어두움 속으로 반딧불이를 찾아 뛰어드는 느낌”이라고 했다. 어둠 속에 뛰어드는 그는 싸움을 멈출 생각이 없다. 백기완은 둥지가 없다. 백기완은 여전히 거리에 있다(하편에 계속). 배경헌 기자 baenim@seoul.co.kr ■백기완은 ▲1933년 황해도 은율 출생 ▲1953년 농민운동 시작 ▲1965년 한·일협정 반대 운동 ▲1974년 긴급조치 1호 위반으로 15년형 ▲1979년 YMCA 위장결혼 사건으로 징역형, 1981년 3·1절 특사로 석방 ▲1987년 민중후보로 대선 출마 뒤 단일화 주장하며 사퇴 ▲1988년 통일문제연구소 개소 ▲1992년 민중후보로 다시 대선 출마, 낙선 ▲1999년 계간 ‘노나메기’ 창간 ▲2002년 대한축구협회 요청으로 월드컵대표팀에게 강연, 히딩크 감독과 인연 ■주요 저서 항일 민족론(1986) 장산곶매 이야기(1994) 백기완의 통일이야기(2003) 사랑도 이름도 명예도 남김없이(2009) 시집 이제 때는 왔다(1985), 젊은 날(1990) 극본 대륙(1998)
  • 미·러 ‘블랙리스트’ 전쟁

    미국이 인권 탄압 혐의로 제재를 받게 될 러시아인 명단을 발표하자 러시아 정부가 ‘이에는 이, 눈에는 눈’ 식의 대응으로 맞섰다. 러시아 리아노보스티통신 등에 따르면 러시아 외무부는 13일(현지시간) 자국 입국을 금지하는 미국인 18명의 명단과 함께 논평을 발표했다. 외무부는 논평에서 “러시아 혐오증이 있는 미국 의원들의 압력에 의해 양국 관계와 신뢰에 큰 타격이 가해졌다”며 “리스트 전쟁은 우리가 선택한 것은 아니지만 (미국의) 공개적 협박을 무시할 수 없었다”고 밝혔다. 러시아가 발표한 제재 명단에는 테러 용의자를 수감하고 있는 쿠바 관타나모 수용소의 책임자였던 제프리 밀러 소장, 수용소 포로들의 고문과 관련한 정부 자문에 응한 법률 전문가 데이비드 애딩턴 등이 포함됐다. 앞서 전날 미국 재무부는 2009년 모스크바 구치소에서 숨진 러시아인 인권변호사 세르게이 마그니츠키 사건 조사와 재판에 참여했던 판사, 경찰, 구치소 등의 간부 및 직원 16명을 포함한 러시아인 제재 대상 18명의 명단을 발표했다. 미국 정부는 이들의 미국 내 자산을 동결, 몰수하는 한편 입국 비자 발급을 거부할 예정이다. 미국과 러시아의 갈등은 지난해 12월 미 정부가 마그니츠키 피살 사건 관련자들과 그 외의 다른 인권 침해 행위 관련자들에게 제재를 가하는 대러 인권법인 ‘마그니츠키법’을 채택하면서 불거졌다. 영국계 허미티지캐피털의 헤지펀드 전문 변호사였던 마그니츠키는 러시아 고위 공무원들이 세금 환급 자료를 허위로 제출하는 방식으로 2억 3000만 달러(약 2600억원)를 횡령했다고 폭로한 뒤 2008년 교도소에서 고문을 받다가 이듬해 숨졌다. 러시아 의회는 미국의 마그니츠키법 제정에 대해 미국인의 러시아 아이 입양을 금지하는 내용을 포함한 대미 인권법안을 추진하는 등 보복성 조치로 대응했다. 조희선 기자 hsncho@seoul.co.kr
  • [세종로의 아침] 성균관 스캔들/김성호 문화부 선임기자

    [세종로의 아침] 성균관 스캔들/김성호 문화부 선임기자

    ‘한국 유림의 수장’인 최근덕 성균관장이 결국 구속 수감됐다. 오랫동안 종교를 담당해 왔던 기자로서 안타깝기 그지없는 일이다. 이른바 ‘7대 종단’의 현직 수장이 구속되기는 처음이다. 그것도 국고보조금 유용 지시와 공금 유용 혐의다. 어쩌다 이 지경까지 이르렀는지 답답하기 짝이 없다. 지난 2010년 화제의 KBS 드라마 ‘성균관 스캔들’ 타이틀을 놓고 당시 최 관장이 했던 말을 떠올리자니 실소마저 나온다. ‘우리 전통사회 유일한 국립대학이며 국가를 경영한 인재를 양성한 성균관에 왜 스캔들이란 이름을 붙이느냐’고 항의했던 최 관장이다. 최 관장의 구속 사태를 살펴보면 일단 내부 갈등의 소산으로 보인다. 최 관장은 잘 알려졌듯이 최장수 성균관장이다. 지난 1994∼98년 관장직을 맡은 데 이어 2003년 이후 지금까지 관장직을 내려놓은 적이 없다. 잇따른 연임 과정에서 불만을 품은 인사들이 문제 제기를 해왔던 터다. 실제로 지난해 부관장이 자금 유용 사실을 들어 최 관장을 서울 중앙지검에 고발했고 이번 사태도 그 연장선상에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혐의는 법정에서 가리겠지만 최 관장은 어떤 식으로든 대가를 치러야 할 것으로 보인다. 최 관장의 구속으로 사회 일반이 종교계를 보는 시선은 한층 더 삐딱해질 전망이다. 항간에 떠도는 말이 괜한 게 아닐 듯싶다. ‘종교가 세상을 걱정하는 게 아니라 세상이 종교를 걱정한다’는 비아냥조의 쑤군거림 말이다. 개신교 연합단체인 한국기독교총연합회의 내분과 분열만 해도 대표회장 선거 과정에서 이어졌던 금권타락 선거가 원인이다. 그런가 하면 지난해 ‘백양사 승려 도박’사태 이후 이어졌던 불교계의 은처승이며 룸살롱 출입 승려들에 대한 의혹 제기가 여전히 무성하다. 세상에 흠결 없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김수환 추기경만 해도 독재정권을 향해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았지만 도마에 오른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2004년 국가보안법 폐지 논란에 대해 ‘시기상조’라며 부정적 태도를 보여 배신자라는 눈총을 받았고, 서울대교구장 은퇴 후 구설수에 올랐다. ‘가난한 사람을 위한 가난한 교회’를 천명한 프란치스코 교황도 예외는 아니다. 1970∼80년대 군사정권이 정권 반대자들을 탄압해 3만여명이 실종·살해된 이른바 ‘더러운 전쟁’에서 당시 아르헨티나 예수회 총장이던 프란치스코 교황은 군에 끌려가 고문당한 사제들을 방조해 인권단체들로부터 고발당했다. 지금 전국 선방엔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의 기치를 걸고 뼈를 깎는 수행에 매진하는 부처님 제자들이 넘쳐난다. ‘수고하고 짐진 자들아 나를 따르라’고 외쳤던 예수님의 뜻을 따라 청빈한 사목과 나눔의 봉사에 목숨을 거는 목회자와 사제들이 부지기수다. ‘종교는 인류가 가진 최고의 도덕률’이라는 믿음 아래 ‘빛과 소금’이 되려는 일반의 신도도 태반이다. 그래서 종교 지도자들은 더욱 떳떳해야 한다. ‘조고각하’(照顧脚下·머리 숙여 자신의 발밑을 살핀다)라는 좋은 경계도 있지 않은가. 이제 ‘성균관 스캔들’같은 참사가 더 이상 없기를 바란다. kimus@seoul.co.kr
  • 대처 장례식 앞둔 英 초비상…反대처 시위에 테러 위험

     오는 17일(현지시간) 마거릿 대처 전 총리의 장례식을 앞두고 영국 경찰에 비상이 걸렸다. 영국 전역에서 반(反)대처 시위가 예고된 데다 북아일랜드 분리독립운동 세력의 테러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영국 인디펜던트는 경찰들이 대처 전 총리의 장례식 당일 테러나 폭력행위 모의를 적발하기 위해 트위터나 페이스북 같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와 휴대전화 문자 등을 감시하기 시작했다고 9일 보도했다.  대처 전 총리에게 부정적이었던 단체들은 오는 13일 런던 트라팔가 광장 시위를 시작으로 장례식 당일까지 리즈, 브리스톨, 리버풀 등 전국 주요도시에서 ‘반 대처 시위’와 ‘사망 축하 파티’를 열겠다고 밝힌 상태다.  경찰은 또 대처 정부로부터 극심한 탄압을 받았던 북아일랜드 분리주의 세력이 장례식 때 테러를 일으킬 가능성에 대해서도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들이 실제 행동에 나설 경우 런던보다는 북아일랜드를 택할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지만, 경찰로서는 미리 대비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더욱이 왕실의 정치 간섭 배제를 이유로 1965년 윈스턴 처칠 전 총리 이후 장례식 참석을 피해 왔던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남편 필립공과 함께 장례식에 참석하겠다고 밝혀 런던 경찰의 고심은 한층 커졌다.   이에 경찰은 2011년 윌리엄 왕자와 케이트 미들턴의 결혼식 때 시행했던 ‘사전 체포’ 전략을 쓰는 방법을 고민하고 있다. 당시 경찰은 소요를 일으킬 수 있다고 판단되는 사람들을 행사 전에 미리 체포했다. 하지만 이들 중 일부가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는 등 기본권 침해 소지 논란이 커 실제 실행 가능성은 낮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데일리메일은 대처 전 총리가 임종 직전까지 런던 리츠칼튼 호텔방에서 홀로 침대에 앉아 책을 읽다가 평화롭게 숨을 거뒀다고 보도했다. 그는 지난해 연말 방광 종양 제거 수술 이후 줄곧 이 호텔 특실에 머물며 마지막을 준비해 왔었다.  최재헌 기자 goseoul@seoul.co.kr  
  • 대처 장례식 초비상… 反대처 시위·독립세력 테러 우려

    오는 17일(현지시간) 마거릿 대처 전 총리의 장례식을 앞두고 영국 경찰에 비상이 걸렸다. 영국 전역에서 반(反)대처 시위가 예고된 데다 북아일랜드 분리독립운동 세력의 테러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영국 인디펜던트는 경찰들이 대처 전 총리의 장례식 당일 테러나 폭력행위 모의를 적발하기 위해 트위터나 페이스북 같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와 휴대전화 문자 등을 감시하기 시작했다고 9일 보도했다. 대처 전 총리에게 부정적이었던 단체들은 오는 13일 런던 트라팔가 광장 시위를 시작으로 장례식 당일까지 리즈, 브리스톨, 리버풀 등 전국 주요도시에서 ‘반 대처 시위’와 ‘사망 축하 파티’를 열겠다고 밝혔다. 경찰은 또 대처 정부로부터 극심한 탄압을 받았던 북아일랜드 분리주의 세력이 장례식 때 테러를 일으킬 가능성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들이 실제 행동에 나설 경우 런던보다는 북아일랜드를 택할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지만, 경찰로서는 미리 대비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더욱이 왕실의 정치 간섭 배제를 이유로 1965년 윈스턴 처칠 전 총리 이후 장례식 참석을 피해 왔던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남편 필립공과 함께 장례식에 참석하겠다고 밝혀 경찰의 고심은 한층 커졌다. 이에 경찰은 2011년 윌리엄 왕자와 케이트 미들턴의 결혼식 때 시행했던 ‘사전 체포’ 전략을 쓰는 방법을 고민하고 있다. 당시 경찰은 소요를 일으킬 수 있다고 판단되는 사람들을 행사 전에 미리 체포했다. 하지만 기본권 침해 소지 논란이 커 실제 실행 가능성은 낮을 것으로 보인다. 대처 전 총리의 장례비를 둘러싼 논란도 확산되고 있다. 영국 정치권은 보안경비, 외국 조문사절 접대 등 총 장례비용이 1000만 파운드(약 173억원)를 넘을 것으로 추산했다. 이에 대처 전 총리의 반대 진영에서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에 국민 혈세를 쓰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며 반발하고 있다. 한편 데일리메일은 대처 전 총리가 지난해 방광 종양 제거 수술을 받은 이후부터 임종 직전까지 머물렀던 런던 리츠칼튼 호텔방의 침대에 앉아 책을 읽다가 평화롭게 숨을 거뒀다고 보도했다. 최재헌 기자 goseoul@seoul.co.kr
  • 원세훈 조만간 소환… ‘MB정권 비리’ 뇌관될까

    원세훈 조만간 소환… ‘MB정권 비리’ 뇌관될까

    검찰이 국가정보원의 정치 개입과 여론 조작 등을 지시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원세훈(62) 전 국정원장을 출국금지하면서 원 전 원장에 대한 검찰 수사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원 전 원장은 이명박 전 대통령의 핵심 측근 인사로, 수사 내용에 따라서 전 정권 비리 수사로 확대될 여지도 배제할 수 없어서다. 검찰은 25일 원 전 원장에 대한 출국금지 사실 여부조차 공식적으로 확인해 주지 않았다. 그만큼 정보원장에 대한 출금 조치가 갖는 형사적, 정치적 의미를 예사롭지 않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뜻이다. 원 전 원장과 관련해 검찰에 접수된 고소·고발 사건은 모두 5건이다. 고소·고발인 주장의 핵심은 원 전 원장이 국가정보원법을 어기고 국내 정치에 불법 개입했다는 것이다. 진선미 민주통합당 의원은 원 전 원장이 취임한 2009년 2월부터 올 1월까지 국정원 인트라넷에 게시됐던 ‘원장님 지시·강조 말씀’을 담은 내부 문건을 최근 공개했다. 이 문건에는 원 전 원장이 대선 과정에서 종북좌파의 사이버 선전·선동에 적극 대처할 것을 지시하고 4대강 사업, 세종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등 이명박 정부의 주력 사업을 적극적으로 홍보할 것을 주문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또 민주노총과 전국교직원노동조합 등을 ‘종북좌파’로 규정해 적극적으로 대응할 것을 지시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 외에 민주노총과 전교조, 참여연대,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 등이 지난 21일 원 전 원장을 국가정보원법 위반 및 명예훼손 등으로 서울중앙지검에 고소·고발했다. 25일에는 전교조가 “이명박 정부 내내 이어진 전교조 탄압의 배후에 국정원이 있었다”면서 원 전 원장을 직권 남용과 업무 방해 혐의 등으로 추가 고발했다. 이에 앞서 19일 이정희 통합진보당 대표도 “국정원 여직원의 인터넷 댓글 달기는 원 전 원장의 업무 지시에 기초한 행위로 드러났다”며 원 전 원장을 검찰에 고발했다. 검찰로서는 이처럼 원 전 원장에 대한 고소·고발 사건이 무더기로 쏟아지고 원 전 원장의 출국설까지 나돈 상황에서 형식적으로나마 출국금지 조치를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야권에서는 이미 “구속 수사”를 주장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 때문에 검찰로서는 형소법 원칙대로 우선 고소·고발인 조사를 통해 원 전 원장의 혐의에 대한 법리 검토를 마친 뒤 원 전 원장 소환 일정을 조율할 것으로 보인다. 검찰은 제18대 대통령 선거 공소시효가 오는 6월 19일까지인 데다 검찰 정기 인사가 4월 말로 예정돼 있는 만큼 원 전 원장을 조만간 소환할 것으로 보인다. 한편 원 전 원장은 당초 알려진 것과 달리 24일 미국이 아닌 일본으로 출국하려다 포기한 것으로 전해졌다. 박성국 기자 psk@seoul.co.kr
  • [커버스토리-협동조합 석달] 선키스트·제스프리도 협동조합 스페인 몬드라곤은 자산만 53조

    [커버스토리-협동조합 석달] 선키스트·제스프리도 협동조합 스페인 몬드라곤은 자산만 53조

    오렌지 주스로 유명한 선키스트, 키위 브랜드인 제스프리, 스페인 축구 명문인 FC바르셀로나, 세계 4대 언론 통신사 중 하나인 미국의 AP, 프랑스 대형 은행 크레디 아그리콜 등은 모두 협동조합이다. 국제협동조합연맹(ICA)에는 전 세계 94개국에서 140만개 이상의 협동조합이 등록돼 있다. 최초의 협동조합은 1844년 영국 로치데일의 방직공장 직공들이 생활용품을 싸게 사기 위해 만든 ‘공정개척자조합’이다. 산업혁명 이후 노동자 계급의 빈곤과 열악한 생활환경 개선을 목표로 설립됐다. 로치데일은 이용을 많이 할수록 배당을 많이 받는 원칙(이용배당)을 지켰는데, 출자금에 따른 배당으로 자본가와 노동자의 소득 격차를 더 키우는 자본주의의 대안으로 꼽히는 대목이다. 유럽에서 협동조합 이용이 일상화된 곳은 이탈리아다. “볼로냐에서는 육아부터 식사까지 협동조합으로 가능하다”란 말이 있을 정도다. 이 중세 유적 도시에는 아이를 맡기는 협동조합 라치코냐, 집을 알아봐 주는 협동조합 안살로니, 생활용품을 살 수 있는 협동조합 코프아드리아티카, 급식 협동조합 캄스트 등 협동조합이 400개 있다. 프랑코 정권의 독재를 겪으며 사람들의 자조 모임을 탄압한 탓에 스페인의 협동조합은 2만개(400만명)에 불과하지만, 몬드라곤은 협동조합 최고의 성공 사례로 꼽힌다. 1940년대 바스크 지방 소도시 몬드라곤의 한 신부가 난로와 라디에이터를 만드는 협동조합을 만든 뒤 노동자은행·보험회사·직업학교 등으로 사업을 넓혀 2010년 현재 자산 53조원으로 스페인 7위 기업집단이 됐다. 유럽에서 두 번째, 세계에서 일곱 번째로 큰 협동조합인 스위스의 미그로는 1923년 주식회사로 설립됐다가 1941년 협동조합으로 탈바꿈한 사례다. 스위스의 1위 유통업체이지만 해외시장 진출엔 관심이 없다. 이윤추구보다 조합원의 복리를 최우선으로 하는 협동조합 정신 때문이다. 홍희경 기자 saloo@seoul.co.kr
  • 또 제한상영가 논란… ‘홀리 모터스’ 볼 수 있을까

    또 제한상영가 논란… ‘홀리 모터스’ 볼 수 있을까

    해묵은 영화등급 논란이 재연되고 있다. 지난 12일 영상물등급위원회가 레오 카락스 감독의 ‘홀리 모터스’에 대해 제한상영가 판정을 내린 데서 비롯됐다. ‘홀리 모터스’의 탁월한 작품성 때문에 문제가 더 커졌다. ‘퐁네프의 연인들’ ‘소년, 소녀를 만나다’ ‘나쁜 피’ 등으로 유명한 카락스 감독이 13년 만에 내놓은 ‘홀리 모터스’는 지난해 프랑스 칸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했으며 프랑스 영화 전문지 ‘카이에 뒤 시네마’에 의해 ‘올해(2012)의 영화’ 1위로 뽑혔다. 제한상영가 등급을 받으면 제한상영관으로 등록된 극장에서만 상영과 홍보가 가능하지만, 국내엔 제한상영관이 없다. 영화를 틀지 말라는 얘기다. 수입사 오드(AUD)의 김시내 대표는 “영등위에서 문제 삼은 장면은 뿌옇게 블러 처리를 해 재심의를 요청한 상태”라면서 “새달 4일 극장 개봉을 한다는 계획에는 변함이 없다. 프랑스 제작사 측과 사안에 대한 의견을 공유하고 있다”고 밝혔다. 영등위는 제한상영가 논란에 대해 곤혹스러운 눈치다. ‘영화 ‘홀리 모터스’ 제한상영가 결정 보도 관련 영상물등급위원회 정정보도 요청’이라는 보도자료를 통해 “우리나라의 등급분류 제도는 영화의 예술성이나 작품성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다”면서 “표현에서 주제 및 내용의 이해도, 폭력성, 공포 등의 수위가 높고 특히 선정적 장면 묘사의 수위가 매우 높다. 신체 노출과 관련, ‘성기 등을 구체적·지속적으로 노출하거나 실제 성행위 장면이 있을 경우’ 제한상영가로 결정한다는 등급분류 기준에 따른 것”이라고 반박했다. 영등위는 또한 “문제가 된 장면은 남성의 성기가 발기된 채 지속적으로 노출된 장면으로, 일부 언론에서 이 영화의 성기 노출을 4초, 30초 등으로 보도하고 있으나 실제는 1분 55초로 매우 길게 나타나고 있다”고 설명했다. 영등위는 지난해 11월에도 베니스영화제 퀴어라이온상 수상작인 전규환 감독의 ‘무게’에 제한상영가 판정을 내렸다. 선정성이 과도하다는 이유에서였다. 2011년 베니스영화제 오리종티 부문에 초청된 김경묵 감독의 ‘줄탁동시’ 역시 지난해 성기 노출 장면이 문제가 돼 제한상영가 등급을 받았다. 모자이크 처리한 뒤에야 개봉할 수 있었다. 폭력성을 이유로 제한상영가 판정을 받은 영화도 있다. 김선 감독의 ‘자가당착: 시대정신과 현실참여’는 특정 정치인을 떠올리게 하는 마네킹의 목을 자르는 장면이 문제가 돼 제한상영가 등급을 받았다. 이 영화는 현실 정치를 비판하는 내용을 담고 있어 정치적 탄압 논란마저 일었다. 임일영 기자 argus@seoul.co.kr
  • 檢, 상고심까지 완패… ‘정치검찰’ 꼬리표만

    2009년 12월 서울중앙지검이 전 정권의 국무총리였던 한명숙(69) 당시 노무현재단 이사장에 대한 수사에 착수하자 민주당 등 야당과 일부 시민단체는 이명박 정부의 전형적인 표적수사라며 반발했다. 검찰 수사 과정에서 곽영욱(73) 전 대한통운 사장은 한 전 총리에게 돈을 줬다고 진술하고, 한 전 총리는 돈 봉투의 존재를 전혀 알지 못한다고 맞서면서 “돈을 받은 의자를 기소해야 한다”는 말까지 나왔다. 검찰은 수사 초기부터 1·2심 법원 판결 때까지 유죄 입증을 자신했지만 결국 모두 완패해 ‘정치검찰’ 소리를 듣는 역풍을 맞았다. 재판의 쟁점은 곽 전 사장에 대한 강압 수사 여부와 진술의 진위에 집중됐다. 사건 수사에서 피의자의 자백을 결정적 근거로 삼는 검찰은 자신이 한 전 총장에게 돈을 줬다는 곽 전 사장의 자백을 근거로 한 전 총리의 유죄를 자신했다. 하지만 1심 재판부는 곽 전 사장이 검찰의 강압 수사 탓에 거짓 진술을 했을 가능성을 지적했다. 당시 1심 재판부는 곽 전 사장의 진술이 “자유스러운 상태에서 이뤄지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또 “검사는 곽 전 사장을 압박해 생사의 기로에 섰다는 느낌을 갖도록 했다”고도 지적했다. 뇌물 공여에 대한 진술을 번복해 온 곽 전 사장에 대한 검찰 수사가 뇌물 공여를 부인할 때에는 밤늦게까지 진행되고, 일시적으로 뇌물 공여를 인정한 날에는 조사가 일찍 끝난 점도 재판부는 강압수사의 근거로 들었다. 곽 전 사장 진술의 신빙성 부족은 한 전 총리의 승소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1심 재판부는 곽 전 사장의 진술에 대해 “한 전 총리에게 돈을 줬는지 여부와 액수에 관한 진술이 계속 바뀌고 일관되지 못해 신빙성이 의심스럽다”고 판시했다. 당시 김준규 검찰총장은 1심 판결 직후 대검찰청 간부회의를 소집해 “거짓과 가식으로 진실을 흔들 수는 있어도 진실을 없앨 수는 없다”고 반박했고, 검찰은 항소했지만 2심 재판부의 판단도 1심과 같았다. 검찰은 대법원 상고심에 마지막 자존심을 걸었지만 판결은 뒤집히지 않았다. 이날 대법원의 판결이 나오자 한 전 총리는 보도자료를 내고 “정치탄압으로 억울한 일을 당하는 사람이 더 없기를 바란다”면서 “검찰개혁은 반드시 이뤄져야 하며 새 정부에서는 국민 앞에 당당히 설 수 있고 신뢰받는 검찰이 되기를 국민과 함께 기대한다”고 밝혔다. 이에 반해 검찰은 극도로 말을 아꼈다. 대검 관계자는 “당시 증거와 진술 등을 토대로 기소했지만 사법부에서 무죄 확정 판결을 내린 이상 결과를 겸허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지 않으냐”면서 “현재 서울고법 형사6부에서 진행 중인 한 전 총리의 정치자금법 위반 사건이 어떻게 처리되느냐가 최대 관건”이라고 말했다. 한 전 총리는 한만호 전 한신건영 대표에게서 9억여원을 받은 혐의로 기소돼 2011년 10월 1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고 이에 검찰이 항소를 한 상태다. 박성국 기자 psk@seoul.co.kr
  • “수치, 대통령꿈 때문에 변절”

    “수치, 대통령꿈 때문에 변절”

    지난 10일(현지시간) 미얀마 최대 야당인 민주주의민족동맹(NLD) 의장에 재선된 아웅 산 수치(68) 여사가 대통령이 되려는 마음 때문에 민주화 지도자의 이미지를 잃어가고 있다고 미국 언론들이 잇따라 지적했다. 뉴욕타임스는 이날 “수치 여사가 대통령이 되기 위해 과거 자신을 탄압했던 군부와 협력하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면서 “대중의 눈에 미얀마의 빛나는 스타가 광채를 잃어가고 있다”고 지적했다. 영국인과 결혼해 영국 국적의 두 아들을 둔 수치 여사가 대통령이 되기 위해서는 ‘외국 국적 자녀가 있는 사람은 국가수반이 될 수 없다’는 현행 헌법의 개정이 필수적이고, 이를 위해 의석 25%를 차지하는 군부의 협조를 받아야 한다. 민주화운동에 헌신, 오랫동안 가택연금을 당했던 수치 여사는 지난해 보궐선거를 통해 의회 입성에 성공했다. 그러나 정치인으로 변신한 수치 여사는 대통령이 되기 위해 애쓰는 모습만 보여주고 있다고 신문은 지적했다. 수치 여사는 특히 군부의 소수 민족 탄압에 침묵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미얀마 군부는 자치독립을 요구하는 북부 카친족 등을 유혈 진압했지만 수치 여사는 이에 대해 어떤 얘기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월스트리트저널도 예전의 수치 여사라면 군부를 비판했겠지만 지금은 어느 편도 들지 않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그가 군부와 협력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대통령이 되려는 계산 때문이라고 전했다. 앞서 블룸버그통신도 수치 여사가 헌법을 고쳐 대통령이 되는 데 걸림돌을 없애려고 군부에 구애하고 있다고 보도한 바 있다. 김미경 기자 chaplin7@seoul.co.kr
  • [명사가 걸어온 길] 6. 민주화의 사제(상) 함세웅

    [명사가 걸어온 길] 6. 민주화의 사제(상) 함세웅

    맑은 얼굴 맑은 눈/ 비 온 뒤라면 무지개 걸려/ 그러나 독재나 어떤 잔재 따위에는/ 진흙탕 싸움을 사양할 수 없다/ 그 아들은 한국 천주교회의 앞에서/ 지(知)와 신앙으로 집을 지었다/ 그는 도시의 신부다(고은 시인의 ‘만인보’ 중 ‘함세웅’ 편의 일부) ‘민주화의 사제’ 함세웅 아우구스티노. 1970~1980년대 불끈 쥔 주먹으로 독재에 맞서면서도 늘 기품을 잃지 않았던 그를 고은은 ‘도시의 신부’라고 불렀다. 서슬 퍼런 박정희 유신 정국 때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1974년)을 만들어 박종철군 고문 사망(1987년), 삼성 비자금 조성(2007년) 등 묻혀 있던 진실을 세상에 드러내며 질곡의 현대사를 온몸으로 부딪친 그였지만 이름 앞에 ‘명사’(名士)라는 수식어가 붙는 것이 영 어색하다고 했다. 겸허함을 지켜야 할 사제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거북하다고도 했다. 나이 일흔이 넘도록 흔한 회고록 한 권 내지 않은 이유다. 함 신부는 지난해 8월 사제 생활에서 은퇴했다. 하지만 인권의학연구소와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이사장을 맡고 있는 그는 매주 월요일 서울 덕수궁 대한문 앞 시국미사에 참석하는 등 필요한 곳이면 어디든 달려간다. 영원한 현역을 꿈꾸는 함 신부를 지난 8일 서울 마포구 도화동 인권의학연구소에서 만났다. 함 신부는 광복을 3년 앞둔 1942년 6월 서울의 용산구 원효로에서 태어났다. 유교적 가풍 때문에 가족 중에 가톨릭 신자는 없었지만 집 근처에 천주학당(현 성심여고)이 있어 가톨릭과 서양 문화를 자연스레 접했다. 여덟 살 되던 1950년 6·25가 터졌다. 소년 함세웅은 전쟁의 참상을 바라보며 어렴풋하게나마 신앙에 눈을 떴다. “어느날 집 앞에서 놀고 있는데 쾅 하는 굉음이 나는 거예요. 한낮인데 하늘이 시커매. 나중에 들었는데 B29 폭격기들이 한강 임시다리를 폭파하는 소리였대요. 너무 놀라 친구들과 어디로 우르르 몰려갔는데 거기가 성모병원이었어요.” 병원은 아비규환이었다. 피 칠갑을 한 환자들이 신음하고 있었고 수녀들이 그들을 간호하고 있었다. 인간의 탐욕이 빚은 전쟁, 그 속에서 생사의 경계에 섰던 사람들을 지켜본 경험은 그의 첫 종교적 체험이었다. 그때부터 가톨릭 신자가 됐다. “평범한 신자였던 제가 사제가 되기로 결심한 것은 중학교 2학년 때였어요. 성당에서 복사(천주교 미사 때 신부를 돕는 신자)로 활동했는데 그해 11월 2일 위령의 날 신부님과 함께 서울 잠원동, 논현동 일대의 공동묘지를 찾게 됐지요. 너른 터에 빼곡히 들어선 묘지는 정말 충격이었어요. ‘아, 누구나 다 이렇게 묘소에서 끝나는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지요. 6·25와 공동묘지의 체험이 겹쳐 결국 사제가 돼야겠다고 마음먹게 된 셈이지요.” ‘천국에 온 것 같았다’는 회고처럼 신학교 생활은 그에게 더없이 잘 맞았다. 4·19 혁명이 전국을 휩쓴 1960년 가톨릭대에 입학한 그는 2학년을 마치고 육군 일반병으로 입대했다. “훈련소에서 헌병으로 차출됐어요. 이야, 이제부터 폼나게 군대생활 좀 할 수 있겠구나 생각했지요. 하지만 제가 배치된 곳이 부산과 광주(경기)의 남한산성 육군교도소였어요. 그곳에서 군생활을 꼬박 2년간 했지요. 군대는 대한민국 남성으로서 체험한 첫번째 모순의 사회였어요. 불합리한 일상을 겪으면서도 낙오하지 않으려면 숨죽인 채 순종해야 하는 곳이었습니다. 박정희 독재를 겪으며 ‘대한민국 모든 남성이 군에서 모순의 사회를 배우고 길들여졌구나’하는 생각에 마음 아팠지요.” 신학 교수의 꿈을 품은 함 신부는 1965년 가톨릭대학을 졸업하고 곧바로 이탈리아 로마로 유학길에 오른다. 당시는 4년 전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가 대통령으로 취임해 독재와 탄압을 본격화하던 때였다. 햇수로 9년을 로마에 머무는 동안 그의 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 “나라 밖에 있다 보니 3선 개헌, 유신체제 선포, 학생과 민주인사들에 대한 투옥과 고문 등 뉴스를 외려 국내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빨리 접할 수 있었어요. 마음 아프고 부끄러웠어요.” 1973년 귀국해 마주친 조국의 첫인상은 낯설었다. 마포대교 등에는 헌병이 총을 들고 서 있었고 서울역에서는 중·고등학생을 동원한 반공 궐기대회가 수시로 열렸다. 그야말로 병영사회였다. 서울 연희동 성당에서 보좌사제로 있던 그를 세상 밖으로 끌어낸 결정적 사건이 1973년과 1974년 잇달아 터졌다. 김대중(1924~2009) 납치사건과 지학순(1921~1993) 주교의 구속이었다. 특히 1974년 7월 지 주교가 ‘민청학련 사건’과 ‘유신헌법 무효’ 양심선언으로 15년형을 받자 성난 사제들이 성당 밖으로 뛰쳐나왔다. 함 신부는 이 과정에서 젊은 신부들을 중심으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을 결성했다. 당시 사제단에 참여했던 문정현(73) 신부는 함 신부에 대해 “타고난 조율가이자 소통가”라고 평가했다. 문 신부는 “대표가 없는데도 사제단 전체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일 수 있었던 것은 박학하고 판단이 빠른 함 신부 덕이었다”고 말했다. 함 신부는 지 주교의 구속에 대해 “돌이켜보니 은총의 사건이었다”고 말했다. 이 일을 계기로 사제들이 사회 참여를 시작하면서 유신체제의 모순에 대해 눈 떴다는 얘기다. 유신독재 타파를 외치며 정권에 맞서던 그는 1976년 3·1 구국선언에 참여했다가 구속됐다. 첫 투옥은 시련이자 기회였다. 서대문 구치소 등에서 1년여 옥고를 치른 그는 “제2의 신학교 생활 같았다”고 했다. 차디찬 감옥에서 자신의 인간 본성을 엿본 웃지 못할 촌극도 있었다. “중앙정보부에 체포돼 밤늦게 구치소에 갔는데 교도관이 제 방이라며 안내했어요. 근데 완전히 쓰레기통이야. 그래도 내가 살 방이니 의지를 갖고 아침에 청소를 깨끗이 하고 마음을 가다듬었어요. 근데 다 치워놓으니까 교도관이 ‘방 배치를 다시 해야 하니 나오라’는 거예요. 좀 억울하잖아요. 그래서 ‘싫다. 살 준비 다했으니 내 방이다’라고 하니까 교도관이 ‘교도소에 내방 네 방이 어디 있느냐’고 해요. 근데 옮겨 보니 새 방이 너무 깨끗한 거예요. 청소 좀 했다고 교도소 방 옮기기 싫어한 제 모습이 참…. 덧없는 소유욕이 드는구나 하는 생각에 혼자 웃었어요.” 함 신부는 교도소에서 고 김대중 전 대통령 등과 함께 꼬박 1년간 재판을 받으며 기도와 독서로 마음을 달랬다. 함 신부가 그 지긋지긋하고 끔찍했던 유신독재의 종말을 목격한 곳도 교도소였다. 1979년 미사를 집전하면서 농민 오원춘이 정보기관에 납치·감금당한 일에 대해 강론하다가 경찰에 연행돼 영등포 교도소로 끌려갔다. 두번째 옥살이가 시작됐다. 그리고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측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에 암살됐다.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는 “박정희 피살 소식을 접하며 성경에 나오는 이집트 노예 해방의 기적이 바로 이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함 신부는 김재규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유신독재의 핵심을 제거한 일은 높이 평가해야 해요. 그는 1979년 부마항쟁을 현장에서 지켜본 뒤 박 대통령에게 민심을 수습할 정책을 써야 한다고 건의했어요. 그러나 박 대통령은 경호실장 차지철과 나눈 대화에서 ‘그까짓것 100만~200만명쯤 죽여도 문제 없어. 3·15 부정선거 때 경무대 경호책임자인 곽영주가 발포 명령을 내린 죄로 처형당했는데 내가 발포 명령을 한다면 나를 어떻게 할 거야’라고 했다지요. 김재규는 이 말을 듣고 10·26 의거를 결행했다고 재판에서 진술했죠.” 그는 1970~1980년대 민주화 투쟁 과정에서 기적과도 같은 민초들의 힘을 경험했다고 말했다. “제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조사 받을 때 피로를 못이겨 눈 감고 있었더니 혼자서 저를 감시하고 있던 중정 요원이 ‘신부님, 정신 차리세요. 소신껏 답변하셔야 해요’라며 응원하더군요. 힘이 불끈 솟았지요.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의 진실이 세상에 알려질 때 옥중에 있던 이부영 전 의원의 쪽지를 전달한 사람도 이름 없는 양심적인 교도관이었어요. 사도행전을 보면 감옥에서 천사들이 감옥 문을 열어 사도들을 내보내 줬다는 구절이 있잖아요. 그런 기적을 현실에서 체험한 거죠.” 1970년대 함 신부와 함께 군부독재 권력과 싸웠던 이들 중 지금은 뜻을 달리하는 사람들이 적잖이 있다. 이를테면 김지하 시인이나 김동길 전 연세대 교수 같은 사람들이다. “한 사람을 평가할 때는 시기별로 구별해서 봐야 해요. 인간은 원래 쉽게 변할 수 있는 존재니까요. 예컨대 김지하 시인도 1970년대 민주화를 위해 헌신하던 청년 김지하와 1990년대 이후 현실과 야합한 장년 김지하로 나눠 볼 수 있겠죠. 윤리신학적으로 봐도 사실 선과 악, 천사성과 악마성은 종이 한 장 차이에 불과하거든요. 어느 쪽이 마음속 주도권을 잡느냐의 문제죠. 일제시대 때 최남선, 이광수 같은 분도 일면으로는 얼마나 훌륭했나요. 변절한 것은 시대적 한계를 넘지 못한 그들의 한계죠.” 함 신부는 잘못된 사회·정치 제도를 바로잡는 데 교회(종교)가 앞장서야 한다고 줄곧 강조해 왔다. 왜 하필 교회일까. 그는 “불의 없는 사회를 만들어 사람들이 양심껏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종교적 인간 구원의 핵심이기 때문에 종교가 사회 정화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꽤 오래 전의 일화 하나를 끄집어냈다. “1970년대 어느 부활절 때였어요. 자정 가까운 시간인데 국영기업에 다닌다는 한 40대 신도가 성당에 왔어요. 술에 취했는데 고해성사를 보겠대요. 그러면서 ‘신부님, 어차피 오늘 반성해도 내일 저는 똑같은 죄를 지을 수밖에 없어요. 그냥 저와 술 한잔 하시고 용서해주세요’하는 거예요. 또 ‘신부님은 세상을 모릅니다. 부정과 타협 안 하면 살 수가 없어요. 집에 노모까지 5명이 사는데 회사 월급만으로는 버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적당히 뇌물받아 아래, 위와 나눠 가져야 해요’라고 하더군요. 양심적으로 살려면 회사를 그만둬야 하고 그러면 당장 식구들이 굶어 죽는데 어떻게 할 수 있겠느냐고 묻더군요.” 함 신부는 당시 30대의 젊은 사제였다. 그 신자에게 ‘그래도 천주교 신자로서 양심껏 사세요’라고 도저히 말할 수 없었다고 한다. 아무리 좋은 메시지도 그 사람 스스로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이라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는 신자들이 양심껏 살도록 도우려면 결국 옳지 못한 사회 구조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교(政敎) 분리는 사실 폭압자들의 논리예요. 종교의 이름으로 불의에 항거하면 ‘예배당, 불당에 가서 기도나 하세요’하는 식이죠. 성경에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고 했잖아요. 그러려면 세상 한복판에서 세상을 껴안아야 해요.” (하편에서 계속) 유대근 기자 dynamic@seoul.co.kr
  • 원자바오 ‘변명’ 자서전 집필 중… 비밀재산 해명

    퇴임을 앞둔 원자바오(溫家寶) 중국 총리가 자신이 추진했던 정치개혁이 무산된 뒷얘기를 자서전으로 낼 계획이라고 미국에 본부를 둔 중화권 매체 보쉰이 9일 보도했다. 원 총리의 집필 계획은 춘제(春節·설) 연휴 기간 자신의 개인 비서에게 자서전 집필을 위한 자료를 챙겨줄 것을 요구하면서 알려졌다. 원 총리는 권력교체가 마무리되는 양회(兩會·전국인민대표대회,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가 끝나는 대로 곧바로 집필 활동에 들어간다. 그는 자서전에서 그동안 정치개혁을 주장하면서 부딪혔던 반발 등 내막을 폭로하고, 뉴욕타임스에 의해 까발려진 일가의 ‘비밀 재산’ 문제를 해명할 것으로 알려졌다. 보쉰은 원 총리가 온화한 이미지와 달리 일방적이며 고집불통이라고 전했다. 특히 정치개혁 연설은 대부분 비서진과 상의 없이 그가 즉흥적으로 내놓은 것인데, 본토의 언론 사전 검열제 때문에 관련 발언이 국내에서 보도되지 못했던 만큼 개혁을 원하지만 탄압당하는 총리 이미지를 구축할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노회한 그가 자신의 의사를 표시하고자 한다면 누가 압력을 가할 수 있겠느냐며 모든 것이 원 총리의 계산된 연출이라고 지적했다. 자서전 집필 역시 실추된 이미지를 회복하기 위한 승부수라는 것이다. 원 총리는 오는 15일 리커창(李克强) 부총리에게 총리 자리를 내주고 2선으로 물러난다. 베이징 주현진 특파원 jhj@seoul.co.kr
  • 말레이시아의 앨리스

    말레이시아의 앨리스

    말레이시아의 앨리스 영하 10℃를 밑도는 서울의 한파를 등지고 도착한 말레이시아는 그 온도차만큼이나 다른 세계였다. 어떤 끌림이 있었는지, 회중시계를 손에 든 흰 토끼를 따라 알지도 못하는 굴 속으로 졸래졸래 따라간 앨리스처럼, 낯선 듯 평화롭고, 평범한 듯 해맑은 ‘말레이시아’를 만났다. 겨울날에 도착한 여름나라 앞으로 여섯 시간 후 나는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에 발을 내딛는다. 여느 때와 달리 떠오르는 혹은 기대하게 되는 그림이 불분명했다. ‘말레이시아, 말레이시아, 말레이시아’ 속으로 옹알옹알. 입에 익긴 한데 막상 고개가 갸웃한다. 출근길에 바쁜 사람들을 지나쳐 공항으로 향하는 동안 본능적으로 옷깃을 여미게 되는 겨울날의 여행. 머릿속은 온통 어떻게 하면 영하 10℃를 밑도는 겨울날과 영상 30℃를 웃도는 여름나라를 동시에 견뎌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뿐이었다. 해가 떴는데도 바닥이 젖어 있다. 이 나라에서는 매일 오후 네다섯 시 즈음엔 어김없이 비가 쏟아진다고 했다. 오늘도 방금 전까지 비가 내렸다고. 공항을 나서니 바깥 공기가 그리 습하지 않았고, 쿠알라룸푸르Kuala Lumpur까지 가는 차 안에서도 에어컨 바람이 시원했기에 아직 서울에서의 차림 그대로다. 하나둘 옷을 허물처럼 벗어낸 것은 공항과 쿠알라룸푸르 중간 즈음에 위치한 신행정도시 푸트르자야Putrajaya의 풍경이 차창에 가까워졌을 때였다. 레고 블록으로 만든 모형처럼 군더더기 없는 도시를 울울창창한 야자수 정글이 포위하고 있었다. 서울과 쿠알라룸푸르 사이 한 시간의 시차를 거슬러 오른 나는 그제야 여름나라에 들어온 것을 실감했다. 호텔방에 대충 짐을 밀어 넣고 낯선 거리로 나섰다. 하늘은 어둑하게 물들어 가지만 쿠알라룸푸르에서 가장 번화한, 서울로 치면 명동에 비견되는 부킷빈탕Bukit Bintang 거리와 그 지척에 노천 음식점이 즐비한 잘란알로Jalan Alor는 낮보다 더 환하고, 더더욱 북적였다. 여행 첫날의 긴장과 피로는 서울과 다르지 않은 도심풍경 때문에 잔잔해졌지만 그 속에 빠져드는 것이 아직 부담스러운 이방인은 두 거리 사이, 트렌디한 펍과 레스토랑이 늘어선 잘란창캇Jalan Changkat으로 살짝 발을 들여 놓았다. 거리가 한 눈에 들어오는, 상대적으로 조용한 펍 2층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뜨거운 공기, 낯선 도시, 차가운 맥주, 관망적 자세. 취取하거나 취醉하거나. ▶travie info 잘란알로alan Alor와 잘란창캇Jalan Changkat | 잘란알로에서는 말레이시아에서 가장 대중적인 요리 사테Satay를 추천. 얇게 썬 고기를 양념해 대나무 꼬챙이에 꽂아 구운 꼬치요리이다. 달큼하고 고소한 땅콩소스에 찍어 먹는 맛이 일품이다. 잘란창캇에서는 부러 핫한 곳을 찾기보다는 거리가 훤히 내다보이는 2층 테라스가 있는 공간에 자리를 잡는 것이 더욱 매력적이다. 위치 부킷빈탕 거리에서 모노레일이 가로지르는 대로 변 오른쪽 방향(도보 5~10분). 영업시간 늦은 오후부터 새벽녘 국립 모스크National Mosque, Masjid Negara┃주소 Jalan Perdana, 50480 Kuala Lumpur 방문객 입장시간 오전 9시~정오, 오후 3시~4시, 오후 5시30분~6시30분(단, 금요일은 오전 입장 불가) 입장료 무료 센트럴 마켓Central Market┃주소 Jalan Hang Kasturi, 50050 Kuala Lumpur 영업시간 오전 10시~오후 9시30분(건물 밖 노점은 오전 11시~밤 11시) 홈페이지 www.centralmarket.com.my 차이나타운China Town┃위치 Jalan Petaling, Kuala Lumpur 영업시간 오전에 문을 여는 곳도 있지만 대체로 점심 무렵부터 밤 10시까지 One for All, All for One 아무리 피곤해도 늦잠은 아까운 여행자의 아침, 좀 걷자. 걷다 멈춘 곳이 목적지가 된다. 우리나라로 치면 한여름의 날씨인지라 자연스럽게 차도르Chador를 두른 여인들에게 눈길이 간다. 말레이시아는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고 있지만 여전히 이슬람을 국교로 삼고 있는 나라다. 무슬림으로 살아가는 그들에겐 당연한 것이겠지만 “안 덥나?” 결국 입 밖으로 뱉고 만다. 모스크에 가봐야겠다. 무슬림들의 기도 시간을 피해 택시를 탔다. 국립 모스크National Mosque, Masjid Negara에 가자고 했다. 안내에 따라 신발을 벗고 보라색 가운과 히잡Hijab을 둘렀다. 아무도 없는 기도실 앞에 서자 안내원인 듯한 할아버지 한 분이 어디서 왔는지 물었다. 대답을 듣자 지긋한 눈빛으로 <본성(피뜨라)과의 만남>이라는 한국어 책자를 건네 준다. 천장까지 닿은, 수십 개의 흰색 기둥으로 빼곡한 기도실 앞 대리석 바닥에 앉아 책자를 폈다. 맨 첫 장과 마지막 장은 같은 문구로 시작해 같은 문구로 맺어지고 있었다. “타인의 말에 귀 기울이려 하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말에 귀 기울이기를 바랄 수 있을 것인가?” 따라 읽는 사이 작지만 야무진 아이 모모가 떠올랐다. 누군가의 시간을 훔쳐야만 살아갈 수 있는 회색 신사들에게 홀려 잿빛이 된 모습으로 내 말만 하는 어른이 돼 버린 내 앞에.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빛을 보기 위해 눈이 있고, 소리를 듣기 위해 귀가 있듯이, 너희들은 시간을 느끼기 위해 가슴을 갖고 있단다. 가슴으로 느끼지 않은 시간은 모두 없어져 버리지. 장님에게 무지개의 고운 빛깔이 보이지 않고, 귀머거리에게 아름다운 새의 노랫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과 같지. 허나 슬프게도 이 세상에는 쿵쿵 뛰고 있는데도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눈멀고 귀 먹은 가슴들이 수두룩하단다. (중략) 화도 내지 않고, 뜨겁게 열광하는 법도 없어. 기뻐하지도 않고, 슬퍼하지도 않아. 웃음과 눈물을 잊는 게야. 그러면 그 사람은 차디차게 변해서, 그 어떤 것도, 그 어떤 사람도 사랑할 수 없게 된단다. 그 지경까지 이르면 그 병은 고칠 수가 없어. 회복할 길이 없는 게야. 그 사람은 공허한 잿빛 얼굴을 하고 바삐 돌아다니게 되지. 회색 신사와 똑같아진단다. 그래, 그들 중의 하나가 되지. -미하엘 엔더의 <모모> 中 지난밤 잘란창캇의 펍에서 마셔 버린 시큰둥했던 첫날밤이 뜨끔했다. 그럼에도 선뜻 털고 일어나 기도실을 나서지 않고 조금 더 게으름을 피우다 못 이기는 척 다시 길을 나섰다. 그러다 뒤를 돌아봤다. 수채화 물감을 풀어놓은 듯 맑고 파란 하늘과 그 아래 새하얀 모스크. 종교와 교리를 떠나 그곳에 잿빛을 걷어낸 나의 뽀얀 마음 한 조각을 묻어두었다. 그리곤 천천히 초록 잔디가 카펫처럼 펼쳐진 메르데카 광장Merdeka Square까지 걸었다. 딱히 구경거리가 없는 고가도로변인데도 길이 참 싱그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메르데카는 말레이어로 독립이라는 뜻이다. 말레이시아는 1957년 8월31일 이 광장 국기게양대에 걸려 있던 영국 국기를 걷어내고 말레이시아 국기를 내걸면서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선포했다. 광장 너머로 우뚝 솟아오른 초고층 빌딩과 함께 광장 주위를 에워싸고 있는 영국 식민지 시절의 고건축물들이 독특한 도시경관을 그려낸다. 식민지 역사의 흔적을 상당수 지워낸 우리와 달리 쿠알라룸푸르는 도심 가운데 이를 그대로 남겨두고 오늘날까지 이용하고 있다. 광장 북측, 1894년에 지은 세인트메리 성당을 시작으로 유럽과 이슬람식 건축양식이 조화를 이룬 구 시청사, 술탄압둘사마드 빌딩, 구 중앙우체국, 국립섬유박물관, 구 차터드은행 등이 시계방향으로 광장을 둘러싸고 있다. 사람들이 말했다. 말레이시아는 오랜 세월 다양한 인종이 각기 다른 언어와 신을 믿는 가운데 함께 어울려 살아왔기에 관용의 미덕이 배어 있다고. 다름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다름을 존중하는 문화. ‘1 Malaysia, truly Asia’라는 말레이시아의 캐치프레이즈를 형상화한 조형물 앞에 서 있자니 이번엔 달타냥과 삼총사가 떠올라 그들의 구호를 외친다. “One for All, All for One” 메르데카 광장에서 켈랑강Kelang이 흐르는 다리를 건너면 센트럴 마켓Central Market과 차이나타운China Town까지 다다르는데, 이곳에서 ‘1 Malaysia, truly Asia’가 허언이 아님을 체감했다. 역시나 건물 자체가 100여 년이 넘은 마켓 안에는 말레이, 차이니즈, 인디아 구역이 사이좋게 이웃하고 있었고, 역사문화도시 말라카와 페낭을 모티브로 한 거리까지, 말레이시아의 다양한 문화를 느낄 수 있는 요소들이 오밀조밀하다. 아시아 각국의 음식을 맛볼 수 있는 마켓 2층의 푸드코트와 마켓 바깥 골목에 위치한 예술가의 거리도 시장구경의 재미를 더해 준다. 중국계가 중심이 되어 상점가를 형성하고 있는 차이나타운China Town 언저리에서도 불교 사찰과 식민지 건축물, 힌두교 사원이 자연스레 한 컷에 담긴다. 순간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아 나도 모르게 사진기를 들었다놨다 한다. 여행의 순간은 눈에만 담아두기 참 아쉬울 때가 많다. 찍고 싶은데 면박을 당하지 않을까 겁이 나기도 하고, 그렇다고 몰래 찍는 것도 내키지 않는. 옆에서 누군가 이야기한다. “그냥 사진 좀 찍어도 되냐고 하면 완전 좋아하면서 반가워할 거예요.” 새삼 놀라운 ‘참말’이다. 무표정하게 있다가도 사진기를 보이며 눈인사를 할 때마다 꽃보다 환하게 피어나는 그들의 얼굴빛. 차도르를 두른 여인들마저 꽃 같은 포즈를 취해 주는데 그 덕에 내 잿빛 마음이 부끄럼을 타며 조금씩 희석된다. 1 메르데카 광장에서 센트럴 마켓으로 가는 길에 만난 동화 같은 거리. 초고층 빌딩숲 아래 파스텔톤의 유럽식 건축물이 독특한 도심경관을 만든다 2 쿠알라룸푸르에 대한 모든 것을 미리보기 할 수 있는 곳, 쿠알라룸푸르 시티갤러리에 가면 말레이시아 여행이 더욱 촘촘해진다 3 강요하는 사람 없지만 열대 기후에서도 히잡을 벗지 않는 여인들. 그러나 색색 고운 히잡을 보며 여인의 마음을 짐작한다 빨간 구두 신고 램프의 요정을 따라서 쿠알라룸푸르가 다민족이 내뿜는 전통적인 색채로만 가득한 것은 아니다. 질릴 틈 없이 신상품으로 넘쳐나는 도심의 빼곡한 쇼핑몰이야말로 쿠알라룸푸르의 현재다. 마음이 풀어지고 나니 알라딘의 요술램프가 마술을 부린 듯 새롭고 반짝이는 것들에 현혹되기 시작했다. 쿠알라룸푸르 쇼핑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부킷빈탕 거리의 파빌리온에서 도시의 새로운 랜드마크 페트로나스 트윈 타워와 수리아 쇼핑몰이 위치한 KLCC까지 구름다리 형식의 통로KLCC-Bukit Bintang Pedestrian Wailkway가 연결되어 있어 주요 쇼핑 스폿을 쾌적하고도 수월하게 오갈 수 있다. 정유회사 페트로나스의 사옥이자 세계에서 가장 높은 88층의 쌍둥이 빌딩인 페트로나스 트윈 타워Petronas Twin Tower에 올랐다. 쌍둥이 빌딩 한쪽 타워에서 보이는 맞은편 타워는 ‘천공의 성 라퓨타’처럼 솟아 있었다. 멀고도 높다. 물리적인 거리와 높이만큼 일상으로부터 떨어져 있는 것 같았다. 돌아갈 수 있을까. 우선 내려가자. 호텔 방에 들어와 가방에서 가장 예쁜 옷을 꺼내 갈아입고 스타힐 갤러리Starhill Gallery와 파빌리온Pavilion의 명품 매장 사이를 모델처럼 걷기 시작했다. 명품 매장에서 나오는 차도르 두른 여인들에게 익숙해지기까지 촌스럽게도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말레이시아와 우리나라의 쇼퍼들은 선호하는 디자인과 색감이 확연히 다르다. 그래서 한국에서 구하기 힘든 아이템을 찾아 최근 말레이시아를 찾는 쇼퍼들이 늘고 있다고 한다. 주머니 가벼운 까막눈도 마냥 즐거운 윈도우 쇼핑. 걷다가 힘이 들면 쇼핑몰 곳곳의 카페와 레스토랑에서 식도락을 즐기기도 하고, 쇼핑몰 안팎에서 진행되는 버스킹 공연에 시선을 돌리기도 한다. 안데르센의 동화 <빨간 구두>에 나오는 아가씨처럼 춤추듯 걷자니 지치기는 했지만 시간은 지겨울 틈 없이 흘러갔다. 램프의 요정을 따라 말레이시아의 머리 쿠알라룸푸르에서 말레이반도 최남단으로, 싱가포르와 맞닿은 도시 조호바루Johor Baharu에 도착했다. 말레이어로 조호바루는 ‘새로운 보석’이라는 뜻. 그곳에 앨리스도 혹할 만한 새로운 보석이 있었다. 정말이지 비현실적인 동화풍 색채의 레고 랜드LEGO LAND에 제대로 빨려 들어갔다. 오전 10시, 오픈시간이 가까워지면 레고 랜드 사람들이 나와 오매불망 가지런히 줄서 있는 아이들과 함께 카운트다운을 외친다. “10, 9, 8……3, 2, 1” 문이 열림과 동시에 모두 환호성을 지르며 레고 랜드 안으로 돌진. 레고 랜드를 둘러싼 자연과 그 속에서 부지런히 움직이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레고 블록이 빚어낸 세상이다. 아이들의 쨍한 웃음이 화수분처럼 솟아난다. 아이들을 핑계 삼아 어른들 역시 수북 쌓인 레고 블록 조립에 시간 가는 줄을 모른다. 시간이 흐를수록 시간이 모자랐다. 조호바루에도 쿠알라룸푸르 못지않게 쇼핑을 즐길 수 있는 아웃렛과 쇼핑몰이 즐비하지만 얼마 남지 않은 여행자의 시간은 좀더 색다르고도 익숙한 풍경을 더듬는다. KSL 리조트 앞으로 펼쳐진 난전은 우리나라의 오일장을 떠올리게 했다. 땅의 기운을 머금고 고운 색을 발하는 식재료와 튀기거나 굽거나 볶아낸 군침 도는 먹을거리에 자꾸만 손이 간다. 여기저기 “한국에서 왔어요?” 말하며 아는 체하는 현지인들이 우리네 시장 사람들의 인심과 다르지 않았다. 싱싱하고 건강한 어투. 그들 손으로 기르고 거둔 곡물로 만든 주전부리를 오물거리며 시장 한 바퀴를 어슬렁댄다. 부디 12시를 알리는 신데렐라의 종이 울리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이런 걸까. 천천히 빨간 구두를 벗고, 램프의 요정과도 안녕을 고했다. 한 시간만 뒤로 돌리면 말레이시아의 앨리스는 사라지고 나는 다시 영하를 밑도는 나의 현실세계, 서울 땅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러나 나의 말레이시아는 물거품이 되어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이것은 나만의 이야기일 뿐.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1 페트로나스 트윈타워 전망대에 오르면 반대편 타워와 함께 쿠알라룸푸르 도심 전경을 360도 파노라마로 즐길 수 있다 2 쿠알라룸푸르 도심의 주요 쇼핑 스폿 간의 이동을 더욱 편리하게 해주는 페데스트리안 워크웨이 3 레고 왕국에 들어서자 순식간 동화 속 인물이 되고 만다 4 최고급 명품은 물론 독특한 디자인과 색감을 내세운 쇼룸에 이르기까지 쇼윈도 하나하나가 발걸음을 늦춘다 에디터 트래비 글·사진 Travie writer 서진영 취재협조 말레이시아 관광청 www.mtpb.co.kr ▶travie info 말레이시아 항공 하늘 위에서부터 말레이시아의 환대Malaysian Hospitality를 경험할 수 있는 말레이시아의 국적기 말레이시아 항공을 이용하면 매일매일 인천과 쿠알라룸푸르 사이를 쾌적하게 오갈 수 있다. 특히, 오전 11시 출발이라는 스케줄은 출발과 도착에 있어 허둥대거나 허비할 수 있는 있는 여행 시작 당일의 일정을 여유롭게 해준다. 여행 후 도착 시간 역시 오전 7시 전으로 도착한 당일 바로 일상에 복귀할 수 있는 최상의 스케줄을 제공하고 있다. 특히, 2012년 7월 30일부터 에어버스사의 신규 A333 항공기가 인천-쿠알라룸푸르 노선에 도입되어 여유 있는 좌석 공간과 전원 공급 장치, 개인 스마트 스크린, 한국 영화와 음악을 포함한 다양한 엔터테인먼트 프로그램 등 한국 여행객들에게 보다 개선된 기내 시설을 제공하고 있다. 또한 대한항공을 비롯한 타 항공사와 코드쉐어를 통해 다양한 노선에 공동 운항을 하고 있어 다양한 국가로 보다 편리한 여행이 가능하다. 2013년 2월부터는 One World Alliance 회원국의 일원으로 등록되어 보다 다양한 항공사와의 협력을 통해 더욱 스마트한 여행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게 되었다. 02-777-7761 www.malaysiaairlines.com 페트로나스 트윈 타워Petronas Twin Tower 스카이 브릿지 투어┃위치 Jalan Ampang 영업시간 오전 9시~오후 7시(화~일, 월요일 휴무) 입장료 성인 RM80, 어린이 RM30 홈페이지 www.petronas.com.my 파빌리온Pavilion┃위치 168 Jalan Bukit Bintang 영업시간 오전 10시~밤 10시(파빌리온 옆 카페거리는 새벽까지 운영) 홈페이지 www.pavilion-kl.com 스타힐 갤러리Starhill Gallery ┃위치 Jalan Bukit Bintang 영업시간 오전 10시~밤 10시 홈페이지 www.starhillgallery.com 레고 랜드LEGO LAND┃위치 Gelang Patah, Johor 영업시간 오전 10시~오후 6시(주말과 국경일은 밤 20시까지) 입장료 성인 RM140, 3~11세 어린이와 60세 이상 RM110 홈페이지 www.legoland.com.my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위 기사는 기사콘텐츠 교류 제휴매체인 여행신문의 기사입니다. 이 기사에 관한 모든 법적인 권한과 책임은 여행신문에 있습니다.
  • [사설] 대기업의 잇단 정규직화 대세로 굳히려면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물꼬가 크게 터졌다. 신세계 이마트는 엊그제 하도급 인력 1만여명을 정규직으로 채용한다고 발표했다. 이에 따라 전국 146개 매장에서 상품진열을 담당해온 파견 직원들도 다음 달 1일부터 정년(55세)까지 근무할 수 있게 되고 정규직과 똑같이 상여금과 성과급 등을 받게 돼 연간 임금도 27%가량 오르게 됐다. 앞서 한화그룹도 1900여명을 정규직으로 전환했다. 정부는 대기업의 정규직 전환 행렬이 이어질 수 있도록 제도적으로 뒷받침해야 할 것이다. 신세계 이마트의 정규직 전환은 사상 최대 규모인 만큼 반길 만한 일이지만 최근의 사회분위기에 떠밀려 이뤄진 측면도 없지 않다. 신세계는 최근 고용노동부의 특별근로감독에서 이마트 매장 24곳에서 1978명의 판매도급 사원을 불법파견한 사실이 적발돼 이를 시정하지 않으면 매달 197억여원의 과태료를 물게 될 지경이었다. 또 2세 경영진인 정용진 신세계 그룹 부회장이 계열사 빵집 부당지원 및 노조탄압 혐의로 검찰에 불려가거나 이마트가 압수수색을 받으면서 따가운 시선을 모으기도 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비정규직 문제 해결에 최선을 다하겠다는 뜻을 피력한 것도 적잖은 압박요인이 됐을 것이다. 회장이 2심 재판을 받고 있는 한화도 이런 전후사정과 무관하다고 할 수 없다. 파견근로는 유통업 외에도 자동차, 조선 등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당장 직격탄을 맞게 된 유통업계만 해도 대형마트와 백화점의 하도급 인력이 3만명 이상으로 추산된다. 이 때문에 일부 직군을 도급 형태로 편법 운영하고 있는 업체들은 이마트와 같은 제재를 받을 것을 걱정하면서도 정규직 채용으로 기업의 부담이 커지면 오히려 일자리가 줄어드는 부작용이 나타날 수도 있다고 우려한다. 방하남 고용노동부 장관 후보자는 엊그제 청문회에서 유통업체의 불법 파견에 대해 전수조사하겠다고 밝힘에 따라 유통업체의 불법 파견근로는 상당부분 시정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로 인해 신규채용이 줄어드는 등 고용이 위축되는 것은 대학생 등 예비취업자나 국가경제를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다. 고용부는 관련법령을 정비해 사내 하도급에 대한 명확하고 객관적인 기준을 설정해 불법 파견 시비의 소지를 줄여주어야 한다. 또 공청회 등을 열어 파견근로의 허용범위를 확대해 기업의 부담도 덜어주어야 할 것이다. 나아가 새로운 고용형태를 개발하는 것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 [DB를 열다] 1964년 신문팔이 소년

    [DB를 열다] 1964년 신문팔이 소년

    <“동아일보요, 서울신문이요, 중앙일보요, 민국일보요…….” 저녁 아홉시가 지나서 좌석버스로 서대문을 지나는 사람들은 누구나 녀석을 만날 수 있었다. 버스가 정류소로 들어서면 제일 먼저 출입구로 비집고 올라오는 친구가 그 잠바소년이었다.> 이청준의 ‘건방진 신문팔이’라는 소설의 앞부분이다. 민국일보가 언론탄압으로 폐간되자 신문팔이를 그만두었다는 생각 있는 소년의 이야기다. 사진은 1964년 2월 24일,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신문을 옆구리에 끼고 팔러 나가는 모습이다. 신문팔이는 껌팔이와 함께 고학을 하는 불우 청소년들에게는 학비를 벌 수 있는 좋은 아르바이트였다. 신문이 세상의 정보를 얻는 몇 안 되는 수단이었을 때다. 공짜 신문들이 밀고 들어오면서 독특한 억양으로 “시인문 있어, 시인문~” 하고 외치면서 길거리나 버스 안에서 신문을 팔던 소년들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신문팔이와 관련된 재미있는 유머가 있다. <신문팔이 소년이 소리치며 뛰어다니면서 신문을 팔았다. “50명이 사기를 당했어요! 50명이.” 그러자 한 신사가 호기심에 가득 찬 표정으로 소년에게서 신문을 샀다. 신사는 신문을 빠르게 훑어보고는 말했다. “얘야. 50명이 사기당한 기사가 어디 있느냐. 아무리 찾아도 안 보이는데.” 소년은 다시 뛰기 시작하면서 소리쳤다. “51명이 사기를 당했어요! 51명이.”> 손성진 국장 sonsj@seoul.co.kr
  • 전교조 “정부 시정명령 거부”… 법외노조 위기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 해직 교사를 조합원으로 인정하는 현행 조합 규약을 개정하라는 고용노동부의 시정 명령에 대해 거부 방침을 고수하기로 결정했다. 고용부가 지난 22일 규약을 개정하지 않으면 전교조의 법적 지위를 박탈하겠다고 밝힌 터여서 전교조는 1999년 합법화 이후 14년 만에 다시 ‘법외노조’가 될 가능성이 커졌다. 전교조는 23일 오후 대전 유성구 레전드호텔에서 제65차 전국대의원대회를 열어 “고용부의 시정 명령은 노조의 자주성을 침해하는 탄압”이라면서 “전국공무원노조와 공동으로 시정명령 저지를 위해 총력 투쟁을 전개하겠다”는 내용의 대응 투쟁 계획안을 결의했다고 24일 밝혔다. 앞서 전교조는 2010년 8월 임시 대의원회의를 열어 “조합 활동으로 해고된 교사도 안고 가겠다”고 결정한 이후 2010년, 2012년 두 차례에 걸친 고용부의 시정 명령 이행을 거부해 왔다. 전교조가 해직자들을 조합원으로 인정하는 규약을 유지하기로 한 것은 해직자 포용이 조직의 사활과 관련 깊다는 인식 때문이다. 2010년 정진후 당시 전교조 위원장은 “일제고사 거부와 시국선언으로 해직된 조합원들의 복직이 시정 명령보다 선행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병수 전교조 대변인은 이번 조치에 대해 “전교조 규약보다는 교원노조법 시행령 개정이 우선돼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고용부는 전교조 규약이 현행법을 위반해 행정 조치를 내릴 수밖에 없다는 입장이다.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 조정법상 ‘근로자가 아닌 자의 가입을 허용하면 노조로 보지 않는다’와 교원노조법의 ‘교원노조 조합원은 현직 교원이어야 한다’는 조항이 근거다. 고용부 고위 관계자는 “일부 보수 단체들이 고용부 장관을 상대로 전교조를 불법 노조로 규정하지 않는다고 고발한 상황이라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는 상황”이라고 귀띔했다. 고용부는 법적 지위 상실 조치를 내리는 것 자체에 대해서는 부담스러운 눈치다. 박근혜 정부 출범에 맞춰 ‘코드 맞추기가 아니냐’는 시선을 의식해서다. 이미 ‘노동조합 불법 사찰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고 있는 신세계 이마트에 대해서는 노사 우수 기업 특혜를 지원하면서 전교조에 대해서는 엄격한 법 적용을 강조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일각에서는 고용부의 강경 대응이 해법은 아니라는 지적도 많다. 해고자들이 전교조를 좌지우지하지 않는다면 법 적용을 유연하게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현재 전교조 조합원 6만여명 중 해고자는 20여명에 불과하다. 박영기 한국공인노무사회 부회장은 “현행 법률상 과거 공무원 노조 불법화 사례처럼 해고자의 조합원 지위 유지를 둘러싼 정부와 노동계의 분쟁이 계속될 수밖에 없는 만큼 국회에서 법률 개정 등으로 이를 조정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용어 클릭] ■법외노조(法外組) 노동조합법이 요구하는 조건을 갖추지 못해 법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노조. 노동조합이라는 명칭을 공식적으로 쓰지 못하며 단체협약 교섭권, 노조전임자 파견권 등을 행사할 수 없다. 교원단체 자격으로 지원받고 있는 전교조 사무실 임대료도 받지 못하며 조합비를 조합원 급여에서 원천적으로 걷는 편의도 인정받지 못한다. 이두걸 기자 douzirl@seoul.co.kr 윤샘이나 기자 sam@seoul.co.kr
  • “족쇄 채워 거꾸로 매달아 군화로 얼굴 마구 걷어차”

    “발목에 족쇄를 채워 철창에 거꾸로 매달아 놓고 얼굴과 몸통을 군화로 여러 번 걷어찼습니다. 목숨을 끊으려고 쇠못을 먹었다가 실패하자 벌이라며 몽둥이로 피가 날 때까지 머리를 내리쳤습니다.” 북한의 종교 탄압을 주장하는 구체적인 증언이 나왔다. 북한이탈주민 안인옥(47·여)씨는 22일 오전 국가인권위원회 ‘북한인권사랑방’ 모임에서 “북한의 지하종교 탄압이 극에 달했다”고 주장했다. 함북 회령 출신인 안씨는 ‘고난의 행군’ 시대인 1997년 처음 기독교를 접하게 됐다. 보위부 국경순찰대장으로 일하는 남편의 도움을 받은 한 남성이 성경책을 가져왔다. 중국 국경에서 활동하던 선교사들의 식량 보급 등을 받으며 조금씩 지하교회를 접하던 안씨는 2000년 1월 보위부에 적발돼 6개월간 모진 고문을 당했다. 보위부는 “조선노동당 역사에 없는 가장 간악하고 악랄한 종교간첩단 사건”이라고 했다. 혁명열사 집안 출신인 점 등을 인정받아 사형은 면했지만 그해 7월부터 2년 3개월간 함남 함흥 제9교화소에 수감됐다. 안씨는 “천장 높이가 1.5m도 안 되는 반토굴에 100여명이 수감된 데다 변소가 감방 안에 있어 끔찍했다”면서 “45㎏이었던 몸무게가 28㎏으로 줄어들 만큼 강제 노동과 구타가 이루 말할 수 없이 자행됐다”고 전했다. 2002년 돈과 TV 등을 뇌물로 주고 보석으로 풀려났다는 안씨는 2003년 탈북해 2005년 1월 국내에 입국했다. 안씨는 “2008년 미 상원 청문회에서 북한의 종교 탄압을 증언하려고 했지만 그때는 아들의 생사가 확인이 안 돼 나서지 못했다”고 말했다. 안씨는 이 같은 내용을 국민인권위원회 북한인권침해신고소와 유엔 북한인권조사위원회에 신고하기로 했다. 배경헌 기자 baenim@seoul.co.kr
  • 미야기 72시간 ①아주 차밍한 워밍업

    미야기 72시간 ①아주 차밍한 워밍업

    센다이 공항에 진입하는 항공기는 새파란 바다를 한 바퀴 뱅그르르 돌았다. 추운 날씨에 새파란 바다는 더 파래 보였다. 미야기에서 보낼 산뜻하고, 쾌청한 72시간. 이곳에서 시작한다. ●1st Day 아주 차밍한 워밍업 13:00 센다이 공항 도착 한겨울 미야기를 찾는 여행자 대부분이 윈터 스포츠 마니아라고 봐도 무방하다. 볕이 좋은 봄·가을, 중년의 골퍼들로 붐볐던 땅은 스키와 보드를 한 짐 짊어진 젊은이들로 말끔하게 세대교체를 한다. 한시라도 빨리 슬로프로 향하고 싶은 마음은 잠시 누르고 첫날은 주변을 돌아본다. 리프트 대기 시간이 제로에 가까운 일본 스키장에서는 하루가 이틀 같고, 사흘 같을 테니 첫날은 워밍업만 해두자. 센다이 근교의 다도해 마쓰시마松島에서 오후 시간을 보낸 후 스키장으로 이동한다. move to 마쓰시마 유람선 선착장 option1 센다이 공항→(JR 액세스 철도, 24분)→센다이 역→(JR 도호쿠혼센, 25분)→마쓰시마 역→(걸어서 5분)→마쓰시마 유람선 선착장 option2 센다이 공항→(차로 1시간)→마쓰시마 유람선 선착장 15:00 마쓰시마 유람선 투어 비행기에서 봤던 그 바다의 생생한 내음까지 맡을 수 있는 군도를 탐험한다. 마쓰시마松島는 센다이 시내에서 열차로 30분이면 닿을 수 있어 이 지역 사람들도 즐겨 찾는 명승지다. 푸른 소나무로 뒤덮인 크고 작은 섬들이 계통 없이 떠 있다. 군데군데 자리한 민머리 섬마저 훌륭한 풍경을 만들어낸다. 이렇게 점점이 떠 있는 섬들이 방파제 역할을 해준 덕에 마쓰시마는 2011년 일본대지진 때 피해가 그나마 적은 지역이었다고 한다. 260개가 넘는 섬이 만들어내는 장관을 만끽하는 가장 현명한 방법은 유람선 투어. 마쓰시마 주변을 한 바퀴 도는 노선과 건너편 시오가마항에서 내려 주는 두 가지 노선 중 선택할 수 있다. 배를 타는 동안 한국어 안내방송이 나와 섬의 이름, 유래, 역사를 알 수 있어 더욱 흥미롭다. 배에서는 반드시 새우깡을 판매하는데, 갈매기가 그 이유를 제일 잘 안다. 갈매기 먹이 주기가 유람선 투어의 빼놓을 수 없는 재미라는 것. 엄지와 검지로 과자를 쥔 채 손을 배 바깥으로 쭉 뻗으면 갈매기 한 무리가 어느새 사뿐하게 날아와 날렵한 부리로 과자를 채 간다. 바다에 둥둥 떠 있는 굴 양식장(미야기현은 일본에서 두 번째로 굴 어획량이 많은 대표 산지다), 김 양식장의 방대한 규모에 놀라고, 어느 것 하나 같은 모습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개성 넘치는 소나무 섬을 구경하고, 갈매기 먹이 주기까지 체험하다 보니 30분은 짧기만 하다. move to 엔츠인 마쓰시마 유람선 선착장→(걸어서 3분)→즈이간지→(걸어서 5분)→엔츠인 1 신선한 먹거리가 미야기 여행의 즐거움을 더한다. 아삭한 채소, 보드라운 쇠고기를 1인용 솥에 넣어 먹는 미야기자오코겐호텔의 샤브샤브 요리 2 즈이간지 입구 기념품 가게에서 생굴을 구워 판다. 그만큼 굴로 유명한 마쓰시마 3 노을이 번지는 마쓰시마 유람선 선착장 4 엔츠인으로 향하는 길에 아기자기한 선물가게가 서너 곳 있다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센다이 별미 센다이가 원조인 별미, 규탄牛タン, 소 혀을 맛보자. 소의 혀를 구워 먹는다? 눈을 질끈 감고 일단 입에 넣어 보면, 언제 께름칙한 기분이 들었느냐는 듯 존득한 식감에 두 눈이 번쩍 뜨인다. 2차 세계대전 후 먹을 게 부족하던 시절 미군이 안 먹고 버린 부위를 구워 먹기 시작했다지만 지금은 없어서 못 먹는 고급 요리로 탈바꿈했다. 별다른 양념 없이 숯불에 굽는 게 기본 레시피라고. 그만큼 식재료 본연의 특별함이 최고의 맛을 낸다는 뜻이다. 또한 차진 쌀로 유명한 미야기 현은 바다와도 맞닿아 있으니 질 좋은 스시가 어딜 가나 여행자를 기다리고 있다. 큼지막하고 두툼한 회가 윤기나는 밥을 폭 덮고 있는 모양새만 봐도, 침이 꿀꺽. 16:00 엔츠인에서 호젓한 힐링 엔츠인円通院은 국보급 사찰인 즈이간지瑞巌寺와 한자리에 있다. 현재 즈이간지 본당 내부는 수리 중이라 관람할 수 없다. 그런데 본당보다 더 인기 있는 곳은 따로 있었다. 본당으로 향하는 삼나무길 참배로는 ‘웅장함’이라는 수사가 정확히 맞아떨어지는, 짧지만 인상적인 길이다. 입구를 등지고 바라봤을 때 왼쪽 가로수는 다소 헐거운데 대지진 피해의 흔적이다. 반면 오른쪽은 둥치의 규모나 잎이 우거진 정도가 대단하여 탄성이 터져 나온다. 웅장함 속의 고요함. 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이 길을 걸어 엔츠인으로 향한다. 엔츠인은 일본 정원의 원형을 볼 수 있는 곳이다. 물이 없는 마른 정원이지만 물이 주는 생동감을 놓치지 않았다. 큼지막한 돌과 자잘한 자갈, 아담한 나무가 어우러진 세키테이石庭가 입구에서부터 눈길을 끈다. 일본에 왔구나, 실감하게끔 하는 가장 일본적인 풍경이다. 산책로를 따라 걷다 보면 미츠무네와 신하 일곱 명을 모신 사당 산케이덴三慧殿에 닿는다. 미츠무네는 도쿠가와 막부의 촉망받던 인재였는데, 19세에 요절했다. 그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지은 사당으로 350년이 넘도록 공개되지 않았다. 궁전형 사당을 촘촘히 메우고 있는 하트, 클로버, 스페이드, 다이아몬드 등 서양식 문양 때문이다. 기독교 탄압이 심했던 시대적 배경을 살피면 이해가 가는 대목이다. 현대에 들어 빛을 본 이 사당은, 그래서 더욱 아름답다. 원형에 가깝게 잘 보존된 데다가 다른 사당에선 이토록 화려하고 독특한 문양을 볼 수 없다. 활처럼 유려하게 휜 지붕의 곡선, 그 위를 수놓은 서양식 문양. 묘하게 조화로운 이 모습은 오래도록 머릿속에 남을 것이다. move to 스미카와 스노파크 option1 엔츠인→(걸어서 10분)→마쓰시마 역→(JR 도호쿠혼센 25분)→센다이 역→근처에서 1박, 센다이 역→(오전 8시30분 출발하는 스키장 셔틀버스로 2시간)→스미카와 스노파크 option2 엔츠인→(차로 2시간)→스미카와 스노파크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1 엔츠인에는 연인과의 행복을 기원하는 의미의 코케시가 목제 선반 가득 놓여 있다 2 마쓰시마 고다이도五大堂 사당 한 켠에 매달아 놓은 오미쿠지おみくじ, 길흉을 점치는 종이 3 즈이간지 본당으로 향하는 삼나무길 17:00 도시에서 고원으로 미야기현과 야마가타현에 걸쳐 위치한 자오국정공원蔵王國定公園은스키 휴양지로 유명하다. 일본 스키는 홋카이도가 제일이라는 편견은 잠시 접어 두자. 홋카이도에 비해 맑은 날이 많고, 도전정신을 자극하는 험난한 코스부터 초보자를 위한 완만한 슬로프까지 두루 갖추고 있어 가족 단위 혹은 초보자라면 오히려 자오를 추천한다. 센다이를 기점으로 서쪽은 야마가타 자오, 동쪽은 미야기 자오로 구분한다. 미야기 자오에는 모두 다섯 개의 스노파크가 있다. 그중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스미카와すみかわ 스노파크로 향한다. 높은 지대라 충분한 적설량을 기대할 수 있는 데다 특별한 볼거리가 기다리고 있다. 가격도 빼놓을 수 없는 장점(왕복 버스와 1일 리프트권 패키지 가격이 4,800엔). ▶추울 땐 모 양말 여성들에게 강력 추천하는 일본 쇼핑 아이템은 단연 양말과 스타킹 류. 일단, 개성 넘친다. 게다가 품질까지 좋다! 모 100% 양말을 (나름) 싼값에 살 수 있다. 사진의 양말은 이온몰 나토리에서 구매한 것으로, 세 켤레에 1,000엔. ▶한국보다 싸다니! 식료품 쇼핑은 일본에서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이다. 요즘은 한남동만 나가도 웬만한 건 다 구할 수 있는 시절이라지만, 그래도 가격이 참 착하니 절로 장바구니에 담게 된다. 한국 슈퍼마켓 가격의 반값도 안 되는 참깨 소스, 대용량 고형 카레, 생 모차렐라부터 브리치즈까지 각종 치즈류를 추천한다. ▶이유 있는 명품 과자 빼빼로와 똑 닮은 프란. 관광청 관계자의 강력 추천으로 맛보게 된 과자다. 하나에 2,500원이 넘으니 만만찮은 가격인데, 먹어 보니 그만한 이유가 있더라. 두툼하게 초콜릿 옷을 입힌 데다가 속에 든 쿠키가 아주 보드랍다. 다음에 또 집어 들게 될 것 같다. 감자 맛 스낵에 초콜릿을 입힌 쟈가키じゃがッキー역시 로컬(스키장 관계자)이 추천해 준 독특한 과자. 감자와 초콜릿, 뜻밖에 매력적인 조합이다.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위 기사는 기사콘텐츠 교류 제휴매체인 여행신문의 기사입니다. 이 기사에 관한 모든 법적인 권한과 책임은 여행신문에 있습니다.
  • [피플 인 포커스] 라파엘 코레아 대통령

    라파엘 코레아(49) 에콰도르 대통령이 17일(현지시간) 치러진 대선에서 압승을 거두며 3선에 성공했다.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 에보 모랄레스 볼리비아 대통령과 더불어 남미 강경 좌파 지도자 3인으로 꼽히는 코레아 대통령의 승리로 남미 좌파 블록은 더욱 힘을 받게 됐다. 에콰도르 선거관리위원회(CNE)에 따르면 개표 결과 코레아 대통령이 57%를 얻어 2위 후보인 우파 성향의 전직 은행가 기예르모 라소가 얻은 24%를 크게 앞서며 승리를 확정지었다고 로이터통신 등이 보도했다. 코레아는 이번 선거에서 과반 이상 득표를 확보해 2009년 대선에 이어 두번 연속 결선투표를 거치지 않고 연임에 성공했다. 임기는 2017년까지이다. 1963년 에콰도르 항만도시 과야킬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난 코레아는 과야킬 지역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고, 벨기에와 미국에서 각각 경제학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은 경제통이다. 2005년 알프레도 팔라시오 정부 시절 4개월간 재무장관을 맡았고, 이듬해 대통령 선거에 무소속 좌파 후보로 출마해 대권을 처음 거머쥐었다. 2007년 취임한 코레아는 대선 공약대로 제헌의회 구성에 나서 임기 4년의 대통령직을 연임할 수 있는 내용의 신헌법을 통과시켰다. 그는 2008년 신헌법을 국민투표에 부쳐 신임을 받아냈고, 이에 기초해 치러진 2009년 4월 대선에서 재선에 성공했다. 코레아는 집권 기간 ‘오일달러’를 활용해 사회 인프라를 확대하는 정책으로 빈민층과 저소득층의 절대적 지지를 이끌어냈다.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과 유사한 노선으로 인해 ‘제2의 차베스’로 꼽힌다. 실제 친분도 깊어 지난해 12월 쿠바 수도 아바나로 건너가 암수술을 앞두고 있는 차베스를 면회하기도 했다. 대중적 지지 속에 3선을 달성한 코레아지만 독불장군식 권위주의적 태도에 대한 비난도 적지않게 제기되고 있다. 2008년 전임 정부 시절 차관도입 과정에 문제가 있었다며 채무불이행을 선언했고, 국내에 진출한 외국 기업들에 보다 많은 개발이익을 받아내기 위해 새로운 계약을 맺도록 거세게 압박한 바 있다. 또한 정부에 비판적 보도를 하는 언론인을 상대로 거액의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하는 등 언론 탄압도 서슴지 않고 있다. 이순녀 기자 coral@seoul.co.kr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