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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儒林(143)-제2부 周遊列國 제1장 첫 번째 출국

    제2부 周遊列國 제1장 첫 번째 출국 명재상 안영은 단 한번도 자신의 정적들을 죽인 적은 없었다.그러나 교묘한 방법으로 자신의 정적을 제거한 적은 있었던 것이다.중국의 역사상 가장 유명한 정치술로 손꼽히고 있는 이 일화도 안자춘추의 ‘내편간하(內篇諫下)’에 실려 있는데,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춘추시대 제나라의 경공에게는 세 무사가 곁에 있어 호위를 맡아 보고 있었다.그들의 이름은 공손접(公孫接),전개강(田開彊),고야자(古冶子) 등 세 명의 장군이었다.그들의 용맹은 온 나라에 잘 알려져 있었지만 임금의 신임과 아랫사람의 존경에 우쭐해져서 날이 갈수록 안하무인이 되어 제멋대로 행동하고 있었다. 어느 날 안영은 길에서 그들 세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그러나 그들은 매우 오만하여 안영을 쳐다보기만 했을 뿐 인사도 하지 않고 지나쳤다.안영은 경공을 찾아가 말하였다. ‘전하의 측근에 있는 공손접,전개강,고야자 등 세 명의 장군은 자신들의 공만을 믿고 오만방자하게 굴고 있습니다.그들은 나라에 해를 끼칠 화근이오니 일찍이 그들을 제거하는 것이 좋을 것이옵니다.’ 이 말을 들은 경공이 대답하였다. ‘나도 경과 같은 의견을 갖고 있었소.하지만 그들의 무예가 너무 출중하여 밝혀놓고 잡으려 하다가는 난동을 부릴 것이고,몰래 죽일 수도 없으니 이를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이 말을 들은 안영은 경공에게 ‘신이 한번 방법을 생각해 보겠습니다.’라고 대답한 후 궁궐을 물러나왔다.밤새 심사숙고한 안영은 다음날 경공을 만나자 품 속에서 잘 익은 복숭아 두 개를 꺼내 놓으며 말하였다. ‘전하,신이 방법을 생각해 내었습니다.이것으로 세 무사를 제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경공은 안영이 내놓은 두 개의 복숭아를 쳐다본 후 어이없는 표정으로 물어 말하였다. ‘아니 이것은 두 개의 복숭아가 아닌가.이런 것으로 어떻게 그들을 제거할 수 있단 말인가.’ ‘전하.’ 안영은 자신있게 말을 이었다. ‘세 무사에게 이 복숭아 두 개를 하사하십시오.’ ‘무사들은 세 명이 아닌가.그런데 어찌하여 복숭아를 두 개만 하사할 수 있겠는가.’ ‘신이 시키는 대로만 하십시오.복숭아 두 개를 하사하신 후 이렇게 말씀하십시오.세 무사로 하여금 서로 공로의 크기에 따라 복숭아를 나눠 먹으라고 하십시오.그들은 자기의 힘만을 믿지 장유(長幼)의 예의 같은 것은 모르는 자입니다.’ 여전히 의문이 가시지는 않았으나 경공은 안영이 시키는 대로 그들에게 두 개의 복숭아를 하사하고 각자의 공로에 따라 복숭아를 먹으라고 명령하였다.먼저 복숭아를 받은 공손접이 탄식하여 말하였다. ‘안자께오서는 정말 지혜롭군요.그 분께서는 전하로 하여금 이러한 방법으로 세 사람의 공로를 비교해 보시도록 하셨으니 말이오.나의 힘은 멧돼지를 이길 수 있으며,호랑이를 잡을 수 있으니 충분히 복숭아를 먹을 수 있소.’ 공손접이 복숭아를 먹으려 하자 전개강이 복숭아를 낚아채며 말하였다. ‘나는 군대를 이끌고 전쟁터에 나아가 수많은 적들을 물리치고 승리를 거뒀소.그러니 복숭아를 먹을 자격이 있소.’ 고야자는 이미 두 사람이 복숭아를 차지해 버린 것에 몹시 분노하여 말하였다. ‘나는 일찍이 군주를 수행하여 황하를 건넌 적이 있는데,그때 말이 강 속의 큰 거북에게 물려 끌려가 버렸소.나는 곧 물 속으로 뛰어들어 백 걸음을 헤엄치고,다시 아홉 리를 흘러내려가 큰 거북을 죽이고 군주가 타시던 말을 찾아왔소.당시 사람들은 나를 황하의 신이라고 불렀소이다.그러니 공로를 따지자면 복숭아는 마땅히 내가 먼저 먹어야 할 것이오.’ 고야자는 칼을 들고 나머지 두 무사들과 싸우기 시작하였다.”
  • 儒林(143)-제2부 周遊列國 제1장 첫 번째 출국

    儒林(143)-제2부 周遊列國 제1장 첫 번째 출국

    제2부 周遊列國 제1장 첫 번째 출국 명재상 안영은 단 한번도 자신의 정적들을 죽인 적은 없었다.그러나 교묘한 방법으로 자신의 정적을 제거한 적은 있었던 것이다.중국의 역사상 가장 유명한 정치술로 손꼽히고 있는 이 일화도 안자춘추의 ‘내편간하(內篇諫下)’에 실려 있는데,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춘추시대 제나라의 경공에게는 세 무사가 곁에 있어 호위를 맡아 보고 있었다.그들의 이름은 공손접(公孫接),전개강(田開彊),고야자(古冶子) 등 세 명의 장군이었다.그들의 용맹은 온 나라에 잘 알려져 있었지만 임금의 신임과 아랫사람의 존경에 우쭐해져서 날이 갈수록 안하무인이 되어 제멋대로 행동하고 있었다. 어느 날 안영은 길에서 그들 세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그러나 그들은 매우 오만하여 안영을 쳐다보기만 했을 뿐 인사도 하지 않고 지나쳤다.안영은 경공을 찾아가 말하였다. ‘전하의 측근에 있는 공손접,전개강,고야자 등 세 명의 장군은 자신들의 공만을 믿고 오만방자하게 굴고 있습니다.그들은 나라에 해를 끼칠 화근이오니 일찍이 그들을 제거하는 것이 좋을 것이옵니다.’ 이 말을 들은 경공이 대답하였다. ‘나도 경과 같은 의견을 갖고 있었소.하지만 그들의 무예가 너무 출중하여 밝혀놓고 잡으려 하다가는 난동을 부릴 것이고,몰래 죽일 수도 없으니 이를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이 말을 들은 안영은 경공에게 ‘신이 한번 방법을 생각해 보겠습니다.’라고 대답한 후 궁궐을 물러나왔다.밤새 심사숙고한 안영은 다음날 경공을 만나자 품 속에서 잘 익은 복숭아 두 개를 꺼내 놓으며 말하였다. ‘전하,신이 방법을 생각해 내었습니다.이것으로 세 무사를 제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경공은 안영이 내놓은 두 개의 복숭아를 쳐다본 후 어이없는 표정으로 물어 말하였다. ‘아니 이것은 두 개의 복숭아가 아닌가.이런 것으로 어떻게 그들을 제거할 수 있단 말인가.’ ‘전하.’ 안영은 자신있게 말을 이었다. ‘세 무사에게 이 복숭아 두 개를 하사하십시오.’ ‘무사들은 세 명이 아닌가.그런데 어찌하여 복숭아를 두 개만 하사할 수 있겠는가.’ ‘신이 시키는 대로만 하십시오.복숭아 두 개를 하사하신 후 이렇게 말씀하십시오.세 무사로 하여금 서로 공로의 크기에 따라 복숭아를 나눠 먹으라고 하십시오.그들은 자기의 힘만을 믿지 장유(長幼)의 예의 같은 것은 모르는 자입니다.’ 여전히 의문이 가시지는 않았으나 경공은 안영이 시키는 대로 그들에게 두 개의 복숭아를 하사하고 각자의 공로에 따라 복숭아를 먹으라고 명령하였다.먼저 복숭아를 받은 공손접이 탄식하여 말하였다. ‘안자께오서는 정말 지혜롭군요.그 분께서는 전하로 하여금 이러한 방법으로 세 사람의 공로를 비교해 보시도록 하셨으니 말이오.나의 힘은 멧돼지를 이길 수 있으며,호랑이를 잡을 수 있으니 충분히 복숭아를 먹을 수 있소.’ 공손접이 복숭아를 먹으려 하자 전개강이 복숭아를 낚아채며 말하였다. ‘나는 군대를 이끌고 전쟁터에 나아가 수많은 적들을 물리치고 승리를 거뒀소.그러니 복숭아를 먹을 자격이 있소.’ 고야자는 이미 두 사람이 복숭아를 차지해 버린 것에 몹시 분노하여 말하였다. ‘나는 일찍이 군주를 수행하여 황하를 건넌 적이 있는데,그때 말이 강 속의 큰 거북에게 물려 끌려가 버렸소.나는 곧 물 속으로 뛰어들어 백 걸음을 헤엄치고,다시 아홉 리를 흘러내려가 큰 거북을 죽이고 군주가 타시던 말을 찾아왔소.당시 사람들은 나를 황하의 신이라고 불렀소이다.그러니 공로를 따지자면 복숭아는 마땅히 내가 먼저 먹어야 할 것이오.’ 고야자는 칼을 들고 나머지 두 무사들과 싸우기 시작하였다.”
  • [이해인의 기도문] 기도할 수도 없는 슬픔

    기도할 수도 없는 슬픔 - ‘증오살인’에 대한 기도문 봉숭아 백일홍 채송화가 고향의 꽃밭에서 정겹게 미소짓는 여름 매미 쓰르라미가 하루종일 삶의 열정을 노래하는 여름 더위를 식히려는 많은 사람들이 오늘도 바닷가에서 건강한 모습으로 노니는 모습을 봅니다. 장마가 물러선 자리에 들어선 찜통 열기로 간밤 잠이 오질 않았습니다. 아니 더위보다는 들려오는 소식이 하도 끔찍해 잠을 잘 수 없었고 불안과 공포의 옷을 입은 악몽에 시달리며 몹시 괴로웠습니다. “기도할 수도 없는 슬픔만이 나의 기도”라고 힘없이 고백하며 눈물이 났습니다. 아무런 잘못도 없이 어느날 갑자기 무참하게 살해 당한 우리의 가족들이 하도 가엾어서 눈물을 흘립니다. 악을 즐기는 듯 죄짓기를 작정한 듯 멈추지 않고 손에 피를 묻힌 잔인한 한 사람이 너무 밉고도 가엾어서 눈물을 흘립니다. 꽃보다 아름다울 수도 있다는 인간이 인간이기를 포기하면 어찌되는 것일까. 참사랑은 가능한 것일까. 다시 한 번 숙고하며 진리를 의심하고 오늘의 삶에 회의를 느끼는 우리 자신이 가엾어서 눈물을 흘립니다. 진정 큰 사랑은 믿음이고 조건 없는 용서라고 배웠지만 때론 갈피를 못잡고 흔들리는 우리입니다. 어떻에 믿어야 할지 어떻게 용서해야 할지 답답한 마음엔 곰팡이가 피고 눈빛은 실망과 탄식으로 흐려져 맑은 기도가 되질 않습니다. 밖에서는 칼을 든 전쟁으로,안에서는 자신과 이웃과 화해 못한 전쟁으로 어둡고 괴롭고 무거운 우리에게 제대로 싸울 힘을 주십시오. 선으로 악을 이길 힘을 주시고 사랑으로 미움을 녹일 힘을 주십시오. 사실은 내가 잘못하고서도 모든 일에 늘 남의 탓을 하며 습관적으로 변명하며 살았습니다. 옆에서 어려운 일이 생겨도 체면 때문에 모른 척하거나 이기심 때문에 문을 닫아걸고는 한 발짝 더 밖으로 나갈 사랑의 용기가 부족했습니다. 웬만한 일에는 잘 놀라지도 않는 우리의 냉랭함과 무딤을 용서하십시오. 남의 불행과 비극을 곧잘 자신의 흥밋거리로 삼는 우리의 뻔뻔함을 용서하십시오. 이제 죽음의 냄새를 생명의 향기로 바꾸어야겠습니다. 무관심의 차가운 벽을 따뜻한 사랑의 웃음으로 허물어야겠습니다. 그 사람의 죄는 곧 우리의 죄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게 해 주십시오. 남의 죄를 비웃기 전에 우리의 죄와 잘못도 반성하며 울 줄 아는 겸손을 배우게 해 주십시오. 생명을 그리워하는 마음,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기도의 시작임을 다시 알게 해 주십시오. 삶이 절망에 빠질수록 희망만이 생명입니다.사랑만이 살 길입니다. 우리 서로가 서로를 배려하는 이해심과 자비심을 조금씩 더 키우고 가꾸어서 그 누구도 내치는 일이 없게 해 주십시오. 그 누구도 죄의 노예가 되지 않는 기쁨을 허락해 주십시오. “나는 내가 행하겠다는 선을 행하지 않고 안 하겠다고 생각하는 악을 행하고 있습니다(로마7:19)”라고 한 사도 바울로의 고백을 묵상하는 이 순간.나는 내 마음 깊은 곳에 촛불을 켜고 이렇게 기도해 봅니다. “제가 하고 싶지만 해선 안 되는 악을 행하지 아니하고 하기 싫지만 꼭 해야만 되는 선을 실천하는 지혜와 용기로 저의 삶이 깨어 흐르게 하소서.선의 빛 안에서 행복하게 하소서.” 이해인(수녀·시인)
  • ‘캐스팅보트’ 쥔 공명당 공산·사민당 존립위기

    |도쿄 이춘규특파원|지난해 11월 중의원선거에서 시작된 일본 정계의 자민·민주당 ‘양당 구도’가 11일 치러진 참의원선거에서는 더욱 공고해졌다.이에 따라 공명·공산·사민당 등 군소정당들이 급격히 설 땅이 좁아지고 있다.그나마 공명당은 캐스팅보트로서의 위치를 강화하는 반면,공산·사민당의 추락은 끝이 없다. ●자민당, 공명당 의존도 높아져 일본 언론들은 12일 공명당의 존재의미에 대해 “자민당·공명당 의존 심화”라는 표현으로 강조했다.선거에서 패한 자민당이 공명당에 의존하지 않고는 정권유지가 어렵다는 분석이다. 공명당은 800만가구가 신도인 것으로 알려진 창가학회의 절대적인 지지속에 이번 참의원선거에서도 의석을 늘렸다.모두 24석으로 전체 참의원 의석(242석)의 10분의1이다. 공명당은 전국을 6개의 권역으로 나눠 정치성향이 강한 것으로 평가되는 창가학회 회원들이 지인들을 상대로 열렬한 득표활동을 펴도록 했다. 비례대표와 지역구 후보 11명을 당선시키는 견고한 조직력을 과시했다.자민당이 그나마 49석을 얻을 수 있었던 것도 막판 공명당과 창가학회의 협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는 평가다. 이처럼 자민당의 공명당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지면서 “민주당이 다음 선거까지 국민지지를 높여가면 공명당이 자민당을 등진 뒤 민주당과 연립정권을 세울 수도 있다.”는 평도 나온다. 간 자키 공명당 대표는 이날 기자회견을 통해 자민당과의 협력의지를 확인하면서도 “국민연금·이라크파병을 국민에게 자세히 설명할 필요가 있었다.”고 자민당에 점잖게 충고했다. ●공산·사민당 당선자 없어 반면 진보적인 공산당과 사민당은 추락이 끝이 없어 보인다.일본 사회의 급격한 보수우경화 바람을 견뎌내지 못하고 선거구에서 두 당이 단 1명의 후보도 당선시키지 못한 채 존립 자체가 의심받는 초라한 신세가 됐다. 우선 공산당이 지역선거구의 의석을 한 석도 얻지 못한 것은 1959년 이래 처음이다.비례대표에서 4석을 간신히 건졌지만 교체 대상 의석 15석에서 4석으로 대폭 줄었다.야당 공동추천후보인 오키나와 선거구를 제외하는 전 선거구에서 후보자를 냈지만 전멸한 것이다.시이 가즈오 위원장은 11일 양대 정당화 흐름을 바꿀 수 없었다고 탄식하며 “새 흐름을 만드는 것이 나의 책임”이라며 위원장직 유지의사를 밝혔다. 사민당은 더욱 초라하다.1989년 선거때 개선 의석에서 제1당을 차지했던 것은 옛 추억이 됐다.후쿠시마 당수를 포함,비례대표만 2석을 확보했지만,당간부의 표정은 비통했다.앞사 작년 중의원선거 참패로 도이 다카코 당수가 사임하는 진통을 겪었었다. taein@seoul.co.kr˝
  • [오늘의 눈] 덕적도 주민들의 후회/김학준 수도권부 기자

    며칠전 인천시 옹진군 덕적도로 취재를 갔다 왔다.묘하게도 10년전 이슈가 됐던 핵폐기장(원전수거물관리센터) 문제로 섬 사람들이 속삭거리고 있었다.지난날과 같이 공식적이고 격정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술좌석 등에서의 탄식은 섬을 무겁게 만들고 있었다. 1994년 당시 주민들은 정부가 인근 섬 굴업도에 핵폐기장 유치를 추진하자 강력 반대해 무산시켰다.극히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이 일손도 놓은 채 반대운동에 나섰다.마치 핵폐기장이 들어서면 섬이 망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그러나 10년이 지난 지금 상당수 주민들의 상황인식은 정반대였다. 한 촌로는 “그것(핵폐기장)을 잡았어야 마을이 발전할 수 있었는데 일이 이상하게 돼 버렸어.”라고 탄식했다.다른 주민은 “핵폐기장에서 사고나는 것이 멀쩡한 비행기 떨어지는 것보다 어렵다는데 그때는 환경단체들이 핵폐기장이 들어서면 곧 죽을 것 같이 떠들기에….”라고 말끝을 흐렸다.한 주민은 “반대가 직업인 환경단체에 녹았다.”는 말까지 했다. 아쉬움은 장년층에서 두드러진다.대체로 지난날 30대로 반대운동의 선봉에 섰던 사람들이다.이같은 ‘반전’은 섬의 낙후와 무관치 않은 듯하다.어자원 고갈로 어업은 예전만 못하고 관광수익마저 한철에 불과해 주민들의 주머니는 점점 가벼워져 간다.인근 강화군 주문도,볼음도 주민들이 섬발전을 꾀한다며 당국에 핵폐기장 유치를 신청한 것에도 자극을 받았음직하다. 이 와중에 주민투표로 핵폐기장 유치를 무산시킨 전북 부안 주민들이 오버랩되는 것은 왜일까.핵폐기장 문제에 관한 한 과정과 결과가 비슷하기 때문일 것이다.하지만 그곳의 여건은 덕적도와 달라 그들이 10년 후 어떤 판단을 내릴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다만 덕적도라는 ‘거울’에 비춰 앞으로 또다시 근거가 애매한 논리에 의해 국가 전체의 이익도,주민들의 이익도 물거품이 되는 일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김학준 수도권부 기자 kimhj@seoul.co.kr˝
  • [정가카페] 김현미 “일부신문 vs 우리당 구도”

    열린우리당 김현미 대변인이 9일 행정수도 이전 반대 움직임과 관련,일부 신문을 강도높게 비판했다. 그는 오전 영등포당사에서 확대간부회의를 브리핑한 뒤,“이제부터는 내 얘기”라면서 “우리나라 정치지형은 ‘한나라당 대 민주당’ 또는 ‘한나라당 대 열린우리당’이 아니라,‘일부 신문 대 민주당’ 또는 ‘일부 신문 대 우리당 구도’”라고 규정했다. 김 대변인은 10여분에 걸친 ‘단독회견’ 도중 여러차례 탄식을 쏟아냈으며,회견이 끝난 후엔 감정이 복받쳤는지 눈가에 이슬이 맺힐 정도였다. 박현갑기자 eagleduo@seoul.co.kr˝
  • 儒林(130)-제2부 周遊列國 제1장 첫 번째 출국

    儒林(130)-제2부 周遊列國 제1장 첫 번째 출국

    제2부 周遊列國 제1장 첫 번째 출국 이와 같이 음악을 인간 완성의 마지막 단계인 문채(文彩)로 본 공자의 가르침은 공자와 더불어 세계 성인 중 하나인 석가모니의 가르침과 상반되고 있다. 석가모니는 엄격한 계율을 통해 자신들의 제자인 비구들에게 지켜야 할 비구계(比丘戒)를 직접 내렸는데,석가모니는 비구들이 절대로 ‘춤과 노래’에 빠지지 않을 것을 강조하고 있음에 반해 공자는 음악이야말로 천지의 조화로 보고 있었던 것이다.물론 공자 역시 음란한 음악이나 쾌락적인 가무를 경계하고 있다. 논어의 술이(述而)편에 보면 ‘공자께서는 남과 함께 노래를 부를 때 남이 잘 부르면 반드시 그로 하여금 반복케 하고는 그 뒤에 그와 맞춰 함께 부르셨다.’고 표현하고 있어 공자가 얼마나 음악을 사랑하고 있었는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위령공(衛靈公)편에서는 ‘정(鄭)나라의 노래는 음탕하다.’ 양화(陽貨)편에서는 ‘정나라의 노래가 아악을 어지럽힘을 미워한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보면 공자 역시 단지 귀를 즐겁게 하는 음란한 노래를 얼마나 미워하고 있었던가를 증명하고 있다.심지어 미자(微子)편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오고 있을 정도이다. “제나라 사람들이 여악(女樂)을 보내왔다.노나라의 계환자가 이를 받고 즐기느라 사흘 동안이나 조회를 하지 않았다.공자께서는 이에 노나라를 떠났다.” 시경(詩經)에 의하면 정나라의 노래에는 음란한 연애시가 많이 들어 있었다고 한다.그래서 정풍(鄭風)이란 말은 천박하고 음탕한 음악의 별칭으로 불려지고 있었던 것이다.공자가 천박하고 음란한 노래를 얼마나 혐오하고 있었던가는 자신의 고향인 노나라를 떠날 정도였는데,그러므로 공자의 ‘음악이란 천지의 조화(樂者天地之和也)’란 말은 음악의 본질을 의미하고 있음인 것이다. 사양자에게서 금을 배울 때 공자는 그 곡조나 이치나 뜻에 치우치지 않고 그 노래를 지은 주나라의 창시자 문왕의 마음을 꿰뚫어 보려고 심혈을 기울였다. 공자는 예로써 사람들의 겉모양과 행동을 다스리고,음악으로써 사람들의 마음과 감정을 다스리려 했던 것이다.이러한 공자의 음악관은 ‘악기(樂記)’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기록을 통해서도 명백히 알 수 있는 것이다. “음악은 안으로부터 나오고 예는 밖으로부터 이루어지는 것이다.음악은 안에서부터 나오기 때문에 고요하며,예는 밖에서부터 이루어지기 때문에 문채를 이룬다.위대한 음악은 평이하고,위대한 예는 반드시 간결하다.음악이 주효(奏效)하면 원망이 없게 되고,예가 주효하면 다투지 않게 된다.서로 절하고 양보하면서 천하를 다스린다는 것은 예와 악의 효과를 두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공자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고 있다. “왕자는 공업을 이룩하면 음악을 작곡하고,다스림이 안정되고 예를 제정한다.(王者功成作樂治定制禮)” 그러므로 사양자는 공자에게 곡조와 뜻과 같은 테크닉을 가르치려 했지만 공자는 이를 통해 ‘그 노래를 작곡한 왕’,즉 문왕의 마음을 꿰뚫어 보려 했던 것이다. 평소에 공자는 주나라를 창시한 문왕과 그의 둘째 아들이었던 주공(周公)을 마음속 깊이 존경하고 있었다. 주나라는 어쨌든 춘추전국시대 때의 종주국으로 문왕은 강태공을 발탁하여 주나라를 건국하였으며,그의 아들 주공은 아버지를 도와 왕국의 기초를 확립한 뛰어난 정치가였다. 공자가 주공을 얼마나 존경하였던가는 공자가 죽을 무렵 주공을 두고 다음과 같이 탄식한 것을 통하여 잘 알 수 있다. “심히도 내가 노쇠하였구나.오랫동안 주공을 꿈속에서 보지 못하고 있으니.”
  • 儒林(130)-제2부 周遊列國 제1장 첫 번째 출국

    제2부 周遊列國 제1장 첫 번째 출국 이와 같이 음악을 인간 완성의 마지막 단계인 문채(文彩)로 본 공자의 가르침은 공자와 더불어 세계 성인 중 하나인 석가모니의 가르침과 상반되고 있다. 석가모니는 엄격한 계율을 통해 자신들의 제자인 비구들에게 지켜야 할 비구계(比丘戒)를 직접 내렸는데,석가모니는 비구들이 절대로 ‘춤과 노래’에 빠지지 않을 것을 강조하고 있음에 반해 공자는 음악이야말로 천지의 조화로 보고 있었던 것이다.물론 공자 역시 음란한 음악이나 쾌락적인 가무를 경계하고 있다. 논어의 술이(述而)편에 보면 ‘공자께서는 남과 함께 노래를 부를 때 남이 잘 부르면 반드시 그로 하여금 반복케 하고는 그 뒤에 그와 맞춰 함께 부르셨다.’고 표현하고 있어 공자가 얼마나 음악을 사랑하고 있었는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위령공(衛靈公)편에서는 ‘정(鄭)나라의 노래는 음탕하다.’ 양화(陽貨)편에서는 ‘정나라의 노래가 아악을 어지럽힘을 미워한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보면 공자 역시 단지 귀를 즐겁게 하는 음란한 노래를 얼마나 미워하고 있었던가를 증명하고 있다.심지어 미자(微子)편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오고 있을 정도이다. “제나라 사람들이 여악(女樂)을 보내왔다.노나라의 계환자가 이를 받고 즐기느라 사흘 동안이나 조회를 하지 않았다.공자께서는 이에 노나라를 떠났다.” 시경(詩經)에 의하면 정나라의 노래에는 음란한 연애시가 많이 들어 있었다고 한다.그래서 정풍(鄭風)이란 말은 천박하고 음탕한 음악의 별칭으로 불려지고 있었던 것이다.공자가 천박하고 음란한 노래를 얼마나 혐오하고 있었던가는 자신의 고향인 노나라를 떠날 정도였는데,그러므로 공자의 ‘음악이란 천지의 조화(樂者天地之和也)’란 말은 음악의 본질을 의미하고 있음인 것이다. 사양자에게서 금을 배울 때 공자는 그 곡조나 이치나 뜻에 치우치지 않고 그 노래를 지은 주나라의 창시자 문왕의 마음을 꿰뚫어 보려고 심혈을 기울였다. 공자는 예로써 사람들의 겉모양과 행동을 다스리고,음악으로써 사람들의 마음과 감정을 다스리려 했던 것이다.이러한 공자의 음악관은 ‘악기(樂記)’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기록을 통해서도 명백히 알 수 있는 것이다. “음악은 안으로부터 나오고 예는 밖으로부터 이루어지는 것이다.음악은 안에서부터 나오기 때문에 고요하며,예는 밖에서부터 이루어지기 때문에 문채를 이룬다.위대한 음악은 평이하고,위대한 예는 반드시 간결하다.음악이 주효(奏效)하면 원망이 없게 되고,예가 주효하면 다투지 않게 된다.서로 절하고 양보하면서 천하를 다스린다는 것은 예와 악의 효과를 두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공자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고 있다. “왕자는 공업을 이룩하면 음악을 작곡하고,다스림이 안정되고 예를 제정한다.(王者功成作樂治定制禮)” 그러므로 사양자는 공자에게 곡조와 뜻과 같은 테크닉을 가르치려 했지만 공자는 이를 통해 ‘그 노래를 작곡한 왕’,즉 문왕의 마음을 꿰뚫어 보려 했던 것이다. 평소에 공자는 주나라를 창시한 문왕과 그의 둘째 아들이었던 주공(周公)을 마음속 깊이 존경하고 있었다. 주나라는 어쨌든 춘추전국시대 때의 종주국으로 문왕은 강태공을 발탁하여 주나라를 건국하였으며,그의 아들 주공은 아버지를 도와 왕국의 기초를 확립한 뛰어난 정치가였다. 공자가 주공을 얼마나 존경하였던가는 공자가 죽을 무렵 주공을 두고 다음과 같이 탄식한 것을 통하여 잘 알 수 있다. “심히도 내가 노쇠하였구나.오랫동안 주공을 꿈속에서 보지 못하고 있으니.”˝
  • 儒林(127)-제2부 周遊列國 제1장 첫 번째 출국

    儒林(127)-제2부 周遊列國 제1장 첫 번째 출국

    제2부 周遊列國 제1장 첫 번째 출국 이 말을 들은 문지기는 입장이 난처해졌다.임금의 명령대로 개구멍을 통해 안영을 들어오게 한다면 초나라는 개나라가 될 것이며,그렇다고 성문을 열어준다면 어명을 거스르는 것이 되므로 하는 수 없이 영왕에게 안영의 말을 전하고 하회를 기다렸다.이 말을 전해들은 영왕은 어쩔 수 없이 성문을 열어줄 것을 명령한다.이에 안영은 당당하게 초나라 도성의 성문을 통해 정식으로 입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그러나 영왕은 이것으로 그치지 않았다.안영을 접견하자 대뜸 다음과 같이 묻는다. “제나라에는 인재가 그토록 없는가.어찌하여 그대와 같이 작은 사람을 초나라의 사신으로 보냈는가.” 이에 안영은 대답하였다. “대왕마마,저희 제나라에는 사람들이 많습니다.수도 임치는 인구가 100만이나 되는데,사람들이 한꺼번에 숨을 내쉬면 그 입김으로 구름을 만들 수 있고,사람들이 한꺼번에 땀을 흘려 그 땀을 훔치면 마치 비가 오는 듯하며,행인들이 끊임없이 지나다녀 어깨를 부딪치지 않고서는 오갈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그러니 어찌 인재가 없을 수 있겠습니까.다만 저희 나라에는 한 가지 규칙이 있습니다.사신을 파견할 때에 현자(賢者)는 현명한 나라에 파견하고,불현자는 현명하지 못한 나라에 파견하며,대인은 대국에 파견하고,소인은 소국에 파견합니다.지금 저는 무능하고 부덕하면서 또한 가장 현명하지 못하기 때문에 초나라로 파견될 수밖에 없었으니,대왕께서는 이를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초나라의 영왕은 이 말을 듣고 할 말을 잃었다.그로서는 두 번이나 안영에게 당한 셈이었다.그러나 만만하게 물러설 영왕이 아니었다.잠시 후 안영을 반격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가 찾아왔다.마침 두 명의 무사가 죄인 한 사람을 포승줄로 묶어 압송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는데,이를 본 영왕이 무사에게 물었다. “그 죄수는 무슨 죄를 지었느냐.” 무사가 대답하였다. “남의 물건을 훔쳤습니다.” “어느 나라 사람인가.” 무사는 다시 대답하였다. “제나라 사람입니다.” 이 말을 들은 영왕의 얼굴이 의기양양해졌다.마침내 안영을 공격할 수 있는 세 번째의 기회가 절묘한 타이밍으로 찾아옴을 안 영왕은 안영을 쳐다보며 빈정대며 말하였다. “제나라 사람들은 모두 물건을 훔치는 버릇이 있소.” 안영은 영왕이 조금 전에 당한 수치를 만회하기 위해서 그런 식의 질문을 던진 것을 알고 있었기에 부드럽게 대답하였다.이때 답한 안영의 말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뛰어난 외교관으로서 보여준 탁월한 명언으로 손꼽히고 있다. “소신이 듣기에 귤을 회수(淮水) 이남에 심으면 그것은 귤이 되어 달콤하기 이를 데 없지만 만약 그것을 회수 이북에 심으면 작고,시면서 떫고,써서 먹을 수가 없게 됩니다.이렇게 완전히 상반된 상황이 된 까닭은 바로 기후,풍토의 토질 때문입니다.지금의 죄수는 제나라에 있을 때는 도적이 아니라 양민이었는데,어찌하여 초나라로 온 이후에는 도적이 되었겠습니까.이것은 초나라가 그를 이렇게 변하도록 만든 것입니다.제나라 사람이 초나라에 있는 것은 마치 귤이 회수 이북에 있는 것과 같으니,이것이 제나라와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이십니까.” 초나라의 영왕은 한참 동안 무안해서 묵묵히 앉아 있다가 탄식하여 말하였다. “과인은 본래 그대에게 창피를 주려 하였으나 오히려 내가 조롱거리가 될 줄 미처 생각지 못하였소.이는 모두 과인의 잘못이니 그대는 나를 너그러이 용서해 주시기 바라오.” 그후 초나라의 영왕은 안영을 극진히 접대하게 되었으며,안영은 임무를 원만하게 마치고 제나라로 돌아올 수가 있었던 것이다.
  • 儒林(127)-제2부 周遊列國 제1장 첫 번째 출국

    제2부 周遊列國 제1장 첫 번째 출국 이 말을 들은 문지기는 입장이 난처해졌다.임금의 명령대로 개구멍을 통해 안영을 들어오게 한다면 초나라는 개나라가 될 것이며,그렇다고 성문을 열어준다면 어명을 거스르는 것이 되므로 하는 수 없이 영왕에게 안영의 말을 전하고 하회를 기다렸다.이 말을 전해들은 영왕은 어쩔 수 없이 성문을 열어줄 것을 명령한다.이에 안영은 당당하게 초나라 도성의 성문을 통해 정식으로 입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그러나 영왕은 이것으로 그치지 않았다.안영을 접견하자 대뜸 다음과 같이 묻는다. “제나라에는 인재가 그토록 없는가.어찌하여 그대와 같이 작은 사람을 초나라의 사신으로 보냈는가.” 이에 안영은 대답하였다. “대왕마마,저희 제나라에는 사람들이 많습니다.수도 임치는 인구가 100만이나 되는데,사람들이 한꺼번에 숨을 내쉬면 그 입김으로 구름을 만들 수 있고,사람들이 한꺼번에 땀을 흘려 그 땀을 훔치면 마치 비가 오는 듯하며,행인들이 끊임없이 지나다녀 어깨를 부딪치지 않고서는 오갈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그러니 어찌 인재가 없을 수 있겠습니까.다만 저희 나라에는 한 가지 규칙이 있습니다.사신을 파견할 때에 현자(賢者)는 현명한 나라에 파견하고,불현자는 현명하지 못한 나라에 파견하며,대인은 대국에 파견하고,소인은 소국에 파견합니다.지금 저는 무능하고 부덕하면서 또한 가장 현명하지 못하기 때문에 초나라로 파견될 수밖에 없었으니,대왕께서는 이를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초나라의 영왕은 이 말을 듣고 할 말을 잃었다.그로서는 두 번이나 안영에게 당한 셈이었다.그러나 만만하게 물러설 영왕이 아니었다.잠시 후 안영을 반격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가 찾아왔다.마침 두 명의 무사가 죄인 한 사람을 포승줄로 묶어 압송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는데,이를 본 영왕이 무사에게 물었다. “그 죄수는 무슨 죄를 지었느냐.” 무사가 대답하였다. “남의 물건을 훔쳤습니다.” “어느 나라 사람인가.” 무사는 다시 대답하였다. “제나라 사람입니다.” 이 말을 들은 영왕의 얼굴이 의기양양해졌다.마침내 안영을 공격할 수 있는 세 번째의 기회가 절묘한 타이밍으로 찾아옴을 안 영왕은 안영을 쳐다보며 빈정대며 말하였다. “제나라 사람들은 모두 물건을 훔치는 버릇이 있소.” 안영은 영왕이 조금 전에 당한 수치를 만회하기 위해서 그런 식의 질문을 던진 것을 알고 있었기에 부드럽게 대답하였다.이때 답한 안영의 말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뛰어난 외교관으로서 보여준 탁월한 명언으로 손꼽히고 있다. “소신이 듣기에 귤을 회수(淮水) 이남에 심으면 그것은 귤이 되어 달콤하기 이를 데 없지만 만약 그것을 회수 이북에 심으면 작고,시면서 떫고,써서 먹을 수가 없게 됩니다.이렇게 완전히 상반된 상황이 된 까닭은 바로 기후,풍토의 토질 때문입니다.지금의 죄수는 제나라에 있을 때는 도적이 아니라 양민이었는데,어찌하여 초나라로 온 이후에는 도적이 되었겠습니까.이것은 초나라가 그를 이렇게 변하도록 만든 것입니다.제나라 사람이 초나라에 있는 것은 마치 귤이 회수 이북에 있는 것과 같으니,이것이 제나라와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이십니까.” 초나라의 영왕은 한참 동안 무안해서 묵묵히 앉아 있다가 탄식하여 말하였다. “과인은 본래 그대에게 창피를 주려 하였으나 오히려 내가 조롱거리가 될 줄 미처 생각지 못하였소.이는 모두 과인의 잘못이니 그대는 나를 너그러이 용서해 주시기 바라오.” 그후 초나라의 영왕은 안영을 극진히 접대하게 되었으며,안영은 임무를 원만하게 마치고 제나라로 돌아올 수가 있었던 것이다.˝
  • [공연리뷰] 미샤 마이스키 내한 연주회

    미샤 마이스키의 이번 내한 연주회는 무척 드라마틱했다.지난 26일 토요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린 독주회에서 마이스키는 독일 음악사를 관통하는 전통 클래식 첼로 레퍼토리들만으로 승부수를 띄웠다.이틀 전 같은 장소에서 열린 요요마의 실크로드 프로젝트가 보여준 방대한 음악적 넓이와는 달리 레퍼토리를 세세히 좁히고 한정지은 프로그램이었다. 공연은 마이스키의 인기를 입증하듯 거의 전석 매진에 가까웠다.그동안 마이스키가 많은 내한 공연을 통해 함께 했던 다리아 오보라 대신 한국을 대표하는 피아니스트 중 한 명인 백혜선을 반주자로 택한 것도 음악적으로 신선했다.베토벤의 ‘모차르트 오페라 마술피리 주제에 의한 12개의 변주곡’과 브람스 ‘첼로 소나타 2번 작품 99’를 연주한 1부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마이스키의 잦은 음정 불안이 깊이 있는 브람스 곡의 감상을 방해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2부는 달랐다.한층 안정된 운궁을 들려준 마이스키의 슈만 환상곡에서는 그의 연륜과 낭만성이 표출되기 시작했고,그의 첼로는 위대한 성악가의 노래처럼 청중의 귀를 파고 들었다.베베른이 16살에 작곡한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두개의 작품과,새로운 음악적 방향성을 설정한 후에 작곡한 세개의 작품에서는 하모닉스를 비롯해 자신의 탁월한 기예를 과시해주었다.프로그램 끝곡이었던 드뷔시 첼로 소나타는 마이스키와,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원숙미를 들려주고 있는 백혜선의 낭만성과 열정 그리고 정확성이 함께 빛을 발한 곡이었다. 마이스키는 여세를 몰아 앙코르를 들려주었다.그런데 앙코르를 연주하러 나온 마이스키의 표정은 비장했고,의상은 검은 블라우스로 바뀌어져 있었다.“오늘은 한국인들에게 몹시 슬픈 토요일”이라며 김선일씨의 운구가 인천공항에 도착한 것을 슬퍼한 마이스키는 “이 세상의 모든 테러에 반대한다.”면서 파블로 카잘스가 카탈루냐 민요를 주제로 작곡한 ’새의 노래‘를 들려주었다.객석은 숙연해졌고 처연한 슬픔에 잠겼다.소련에서 공권력에 의해 강제수용소에 2년간이나 갇혀 있었던 자신의 뼈저린 경험이 녹아 있는 연주는 지금까지 들었던 어떤 ‘새의 노래’보다 구슬펐다. 마이스키는 최영섭의 ‘그리운 금강산’,라흐마니노프의 ‘보칼리스’를 짙은 비브라토의 음영이 담긴 탄식으로 노래했다.조금은 불완전하게 시작되었지만 안정과 낭만,열정의 시간을 거쳐 영탄과 탄식의 시간까지 들려준 그의 음악회는 드라마틱한 한편의 드라마 같았다.고베 대지진 추모음악회에 이어 다시 한번 진정한 코스모폴리탄으로서,평화의 사도로서의 모습을 보여준 마이스키에게 청중은 기립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장일범(음악평론가)˝
  • “한국관객 내 플라멩코에 빠질것”

    “집시의 열정과 탄식이 빚어낸 스페인 전통 춤 플라멩코를 한국 관객들에게 소개하게 돼 매우 기쁩니다.” ‘21세기형 플라멩코의 창시자’ ‘안토니오 반데라스 이후 최고의 섹스 아이콘’으로 불리는 스페인 플라멩코 무용수 호아킨 코르테스(35)가 23일 내한 공연차 서울에 왔다.열정적인 춤 솜씨 못지않게 강렬한 카리스마로 패션모델,배우로도 활동 중인 그는 짙은 선글라스에 핑크색 정장 차림으로 인터뷰 장소에 나타나 멋진 패션 감각을 뽐냈다. 플라멩코의 고향인 스페인 코르도바에서 태어난 그는 전문 플라멩코 댄서였던 삼촌의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춤을 췄다.열다섯살 때 스페인국립발레단에 들어가 플라멩코 외에 모든 종류의 춤을 섭렵한 그는 92년 자신의 이름을 딴 무용단을 창단하면서 전통 플라멩코에 자신만의 독창적인 스타일을 가미한 퓨전 양식으로 전세계 관객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기타로만 연주되는 전통 공연과 달리 그의 무대에는 퍼커션,바이올린 등 다양한 악기를 사용해 클래식과 재즈,라틴 음악까지 모든 리듬과 선율이 뒤섞인다.전세계 어디에나 통용되는 음악과 감각적인 의상 등은 그의 공연을 대중적으로 사랑받게 하는 중요한 요소이다.그는 “무대에서 단지 춤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춤을 통해 관객과 대화한다.”고 말했다. 조르지오 아르마니가 가장 아끼는 패션모델,스페인 감독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배우,그리고 슈퍼모델 나오미 캠벨과의 염문설 등 그를 따라다니는 엔터테이너로서의 이미지가 부담스럽지는 않을까.그는 “유명인들과 일하면서 깨달은 많은 것들이 내 춤 속에 녹아 있다.”고 긍정적으로 대답했다.이번에 선보일 대표작 ‘라이브’에서 그는 17명의 뮤지션이 연주하는 라이브 음악에 맞춰 2시간 내내 혼자서 춤을 춘다.그는 “한국 관객들이 내 춤을 좋아할 것으로 자신한다.”면서 “내년에 신작을 들고 다시 방문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24∼28일 세종문화회관대극장 (02)3446-6418.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 儒林(120)-제2부 周遊列國 제1장 첫 번째 출국

    제2부 주유열국 제1장 첫 번째 출국 여인은 깜짝 놀라 고개를 쳐들었다.흰 상복을 입은 여인은 자로와 저만치 서 있는 공자일행을 본 후 별로 자신을 해칠 사람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한 듯 손으로 눈물을 훔치면서 이렇게 대답하였다. “이곳은 호랑이의 피해가 아주 심한 무서운 곳입니다.” 여인은 손가락을 들어 세 무덤을 차례차례 가리키면서 대답하였다. “따라서 몇 년 전에는 시아버님이 호환(虎患)을 당하시고,작년에는 남편이 당해서 이곳에 묻혔습니다.그런데 이번에는.” 여인은 가장 앞쪽에 있는 아직 떼도 입히지 못한 흙무덤을 가리키면서 말하였다. “그만 아들까지도 호랑이에게 잡아먹혔습니다.내 신세가 처량하고 슬퍼서 울고 있는 것입니다.” 여인은 다시 통곡하기 시작하였다.여인의 모습을 먼발치에서 바라보던 공자가 천천히 여인에게 가까이 다가가 물었다. “그런데도 부인께서는 왜 이곳을 떠나지 않습니까.” 공자가 묻자 여인은 세 무덤을 물끄러미 쳐다본 후 한숨을 쉬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이곳은 비록 호랑이들이 사람을 해치는 무서운 곳이기는 하지만 세금을 혹독하게 물리거나 못난 벼슬아치들이 백성들에게 함부로 노역을 시키거나 재물을 빼앗는 일이 없답니다.그래서 감히 이곳을 떠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인의 사연을 들은 공자일행은 다시 여정을 떠났는데,한참을 가던 공자는 갑자기 수레를 멈추게 하고 제자들에게 탄식하여 말하였다. “잘 명심해 두어라.여인에게서 들어 잘 알겠지만 가혹한 정치는 호랑이보다 무섭다는 것을.” ‘가혹한 정치는 호랑이보다 무섭다(苛政猛於虎).’는 공자의 유명한 말은 공자가 노나라에서 제나라로 첫 번째 출국을 단행하던 도중에서 나온 제일성이었던 것이다. 이 말은 그 무렵 공자의 심정을 절묘하게 나타내 보인 증언이기도 했다.공자는 바로 자신이 호랑이보다 무서운 가혹한 정치로 어지러운 노나라를 빠져나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무렵 노나라는 한마디로 난세 중의 난세였다.노나라의 임금은 소공이었으나 정치권력은 삼환(三桓)씨 손아귀에 완전히 놀아나고 있어 임금은 허수아비에 불과하였다.노나라의 군대도 완전히 이 세 집안의 사병으로 되었고,경제적으로는 이들 세 집안이 서로 자기네 채읍을 넓혀 많은 가신을 두고 재물을 쌓아 노나라는 재정이 바닥나 있었던 것이다.그 중에서도 계(季)씨의 세력이 가장 컸는데,심지어는 소공이 자기 아버지 양공(襄公)을 제사지내는 날,계씨의 집에서도 제사가 있었는데,춤추는 악공 중 양공의 묘당으로 가서 춤을 춘 사람은 단 두 명뿐이었고,나머지 악공들은 모두 계씨의 사묘로 가서 춤을 추었던 것이다. 이에 공자는 계씨 집안의 우두머리였던 계평자(季平子)의 참상(僭上)행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분노하였다고 논어는 기록하고 있다. “공자는 계씨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팔일무(八佾舞)를 자기 묘정에서 추게 하다니,이것을 참고 보아 넘길 수 있다면 그 무엇을 참고 보아 넘길 수가 없겠느냐.’” 팔일무란 64명의 악공들이 여덟 줄로 늘어서서 추는 춤으로 규정에 의하면 천자의 묘정에서나 출 수 있는 것이었다.계씨는 대부의 신분으로 감히 천자나 할 수 있는 의식을 거행했던 것이다. 그 때문에 한참 나이에 공자는 ‘이런 비례를 어떻게 그대로 보고만 있겠는가.’하면서 격분을 참지 못했던 것이다.논어에서 공자는 이렇게 분노하고 있다. “삼환씨 집안에서 옹(雍)을 노래하며 제기를 거두었는데 공자는 말씀하셨다.‘시경 옹편에 제후들이 제사를 돕고 천자의 거동이 우아하시다라고 하였거늘 어찌 감히 세 집안의 묘당에서 이것을 노래할 수 있겠는가.’” 공자가 말한 옹은 ‘옹철(雍徹)’의 준말로 ‘천자가 종묘제사를 지내고 물러설 때 시경을 읊던 일’을 말함인데,여기서도 알 수 있듯이 옹은 천자만이 제사를 지낼 때 쓸 수 있는 노래였던 것이다.˝
  • 儒林(120)-제2부 周遊列國 제1장 첫 번째 출국

    儒林(120)-제2부 周遊列國 제1장 첫 번째 출국

    제2부 주유열국 제1장 첫 번째 출국 여인은 깜짝 놀라 고개를 쳐들었다.흰 상복을 입은 여인은 자로와 저만치 서 있는 공자일행을 본 후 별로 자신을 해칠 사람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한 듯 손으로 눈물을 훔치면서 이렇게 대답하였다. “이곳은 호랑이의 피해가 아주 심한 무서운 곳입니다.” 여인은 손가락을 들어 세 무덤을 차례차례 가리키면서 대답하였다. “따라서 몇 년 전에는 시아버님이 호환(虎患)을 당하시고,작년에는 남편이 당해서 이곳에 묻혔습니다.그런데 이번에는.” 여인은 가장 앞쪽에 있는 아직 떼도 입히지 못한 흙무덤을 가리키면서 말하였다. “그만 아들까지도 호랑이에게 잡아먹혔습니다.내 신세가 처량하고 슬퍼서 울고 있는 것입니다.” 여인은 다시 통곡하기 시작하였다.여인의 모습을 먼발치에서 바라보던 공자가 천천히 여인에게 가까이 다가가 물었다. “그런데도 부인께서는 왜 이곳을 떠나지 않습니까.” 공자가 묻자 여인은 세 무덤을 물끄러미 쳐다본 후 한숨을 쉬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이곳은 비록 호랑이들이 사람을 해치는 무서운 곳이기는 하지만 세금을 혹독하게 물리거나 못난 벼슬아치들이 백성들에게 함부로 노역을 시키거나 재물을 빼앗는 일이 없답니다.그래서 감히 이곳을 떠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인의 사연을 들은 공자일행은 다시 여정을 떠났는데,한참을 가던 공자는 갑자기 수레를 멈추게 하고 제자들에게 탄식하여 말하였다. “잘 명심해 두어라.여인에게서 들어 잘 알겠지만 가혹한 정치는 호랑이보다 무섭다는 것을.” ‘가혹한 정치는 호랑이보다 무섭다(苛政猛於虎).’는 공자의 유명한 말은 공자가 노나라에서 제나라로 첫 번째 출국을 단행하던 도중에서 나온 제일성이었던 것이다. 이 말은 그 무렵 공자의 심정을 절묘하게 나타내 보인 증언이기도 했다.공자는 바로 자신이 호랑이보다 무서운 가혹한 정치로 어지러운 노나라를 빠져나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무렵 노나라는 한마디로 난세 중의 난세였다.노나라의 임금은 소공이었으나 정치권력은 삼환(三桓)씨 손아귀에 완전히 놀아나고 있어 임금은 허수아비에 불과하였다.노나라의 군대도 완전히 이 세 집안의 사병으로 되었고,경제적으로는 이들 세 집안이 서로 자기네 채읍을 넓혀 많은 가신을 두고 재물을 쌓아 노나라는 재정이 바닥나 있었던 것이다.그 중에서도 계(季)씨의 세력이 가장 컸는데,심지어는 소공이 자기 아버지 양공(襄公)을 제사지내는 날,계씨의 집에서도 제사가 있었는데,춤추는 악공 중 양공의 묘당으로 가서 춤을 춘 사람은 단 두 명뿐이었고,나머지 악공들은 모두 계씨의 사묘로 가서 춤을 추었던 것이다. 이에 공자는 계씨 집안의 우두머리였던 계평자(季平子)의 참상(僭上)행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분노하였다고 논어는 기록하고 있다. “공자는 계씨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팔일무(八佾舞)를 자기 묘정에서 추게 하다니,이것을 참고 보아 넘길 수 있다면 그 무엇을 참고 보아 넘길 수가 없겠느냐.’” 팔일무란 64명의 악공들이 여덟 줄로 늘어서서 추는 춤으로 규정에 의하면 천자의 묘정에서나 출 수 있는 것이었다.계씨는 대부의 신분으로 감히 천자나 할 수 있는 의식을 거행했던 것이다. 그 때문에 한참 나이에 공자는 ‘이런 비례를 어떻게 그대로 보고만 있겠는가.’하면서 격분을 참지 못했던 것이다.논어에서 공자는 이렇게 분노하고 있다. “삼환씨 집안에서 옹(雍)을 노래하며 제기를 거두었는데 공자는 말씀하셨다.‘시경 옹편에 제후들이 제사를 돕고 천자의 거동이 우아하시다라고 하였거늘 어찌 감히 세 집안의 묘당에서 이것을 노래할 수 있겠는가.’” 공자가 말한 옹은 ‘옹철(雍徹)’의 준말로 ‘천자가 종묘제사를 지내고 물러설 때 시경을 읊던 일’을 말함인데,여기서도 알 수 있듯이 옹은 천자만이 제사를 지낼 때 쓸 수 있는 노래였던 것이다.
  • [문화마당] 알 수 없는 일들/황주리 화가

    신문이나 잡지에 글을 쓰다 보면 뜻하지 않은 오해를 받을 때가 종종 있다.아니 ‘아’다르고 ‘어’ 다르다고 편집자 측에서 글의 제목을 바꾸거나 토씨 하나 바꿈으로써 글의 취지가 달라지기도 한다.그 글을 읽고 글 쓴 이의 본 마음과 상관없이 맘에 들지 않는 글귀 하나를 붙들고 늘어지는 까다로운 독자의 반박 글을 인터넷에서 만날 때가 종종 있다. 가족끼리도 말 한번 잘못해서 다투곤 하는데,생판 모르는 남의 마음을 풀어줄 길은 정말 막연하다.하지만 어떤 식으로든 누군가 내 글을 읽고 반응한다는 사실은 아무런 메아리가 없는 것보다는 덜 외로운 일일지 모른다.대화란 타인이 나의 행동에 대해 반응하는 그 장소에서 시작된다.어쩌면 내가 쓴 글에 대해 적개심을 가졌던 적이 있었던 당신은 나와의 대화를 통해 마음이 짐짓 누그러질지도 모른다.잘못 된 단어 사용이나 그 단어에 대한 상호 개념이 다를 때,당신과 나는 화해를 위한 대화가 필요하다.어쩌면 대통령을 좋아하는 사람이나 싫어하는 사람들,그의 말을 꼬투리 잡고 늘어지는 사람들,공약을 지키기 위해 수도 이전을 해야 한다는 사람들과 그 많은 돈을 들여서 수도 이전을 하기엔 그보다 급한 나랏일이 태산이라고 탄식을 쏟아놓는 사람들,도대체 말이 통하지 않는 이 세상의 모든 아내들과 남편들,시어머니와 며느리들,우리 모두에게는 대화가 필요하다. 하지만 그 아무도 ‘그래 맞아.저 사람은 아마 이런 뜻에서 그런 말을 했을 거야.’라고 너그럽게 이해하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촉각을 세우고 남의 말과 행동을 헐뜯느라 혈안이 되어있는 것이다.어쩌면 요즘 툭하면 자살하는 사람들은 너무 외로운 까닭인지 모른다.적어도 그를 이해하는 단 한 사람만 이 세상에 존재해도 그는 죽지 않을지도 모른다. 한강 일대의 다리에서 하룻밤에 다섯 명이 투신자살을 한다고 한다.그 중에는 애인과 말다툼을 하다가 자살한 30대 남자,생활고에 시달리는 40대 가장,중국어를 못해 속상하다는 중문과 여대생도 있다고 한다.죽어야 할 동기와 명분이 옛날 같으면 상상도 못할 일이다.물론 요새처럼 살기 힘든 세상에 한강 다리에서 투신자살하고 싶은 그 마음이야 왜 모르겠는가? 오늘도 자살을 꿈꾸는 빚 많고 사연 많은 수없는 사람들이 우리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오늘도 그 무거운 목숨을 버리지 못했지만 내일은 또 모를 일이다.죽는 일보다 어려운 게 사는 일이 아니던가? 요즘 제주의 어느 중학생들 사이에서 기절놀이라는 것이 유행하여 어른들에게 충격을 주었다.목을 조르거나 가슴을 강하게 눌러 숨을 제대로 못 쉬어 뇌에 산소 공급을 차단해 저산소증으로 일시적으로 실신하게 하는 놀이라고 한다.실신하기 전 일종의 환각현상에 의해 쾌감을 느낀다는 것이다.이렇게 무서운 놀이에 단련된 아이들이 어른이 되면 한강 다리에서 투신자살하는 것쯤은 아주 간단한 일이 될 것이다. 몸과 마음과 꿈속에서까지 부채를 잔뜩 짊어지고 살아가는 절벽에 서있는 사람들에게 자살은 옳지 않다고 아무리 외쳐봤자 소귀에 경 읽기인지 모른다.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까짓 한강 다리에서 한 번 떨어지면 그만인 죽음의 유혹 앞에서 그리운 어머니의 얼굴을 한 번만이라도 떠올리라고 말해본다. 인터넷을 켜면 세상은 아직 살 만하다고,20대여 꿈을 가지라고,국민 모두 부자 되라고 말한다.반짝이는 희망의 메시지들과 조우하며 오늘도 우리 같이 살아남자고 부탁을 해본다. 황주리 화가˝
  • [마니아]서울시장배 생활체육야구

    불과 닷새 전 아끼는 친구를 저 세상으로 떠나 보낸 슬픔도….프로야구판에서 훨훨 날아보려던 꿈을,날아든 볼에 맞아 한 쪽 눈을 잃는 바람에 문턱에서 물거품으로 돌려보낸 어이없는 과거도….아리도록 가슴을 파고 들곤 하던 모든 아픔들이 ‘따앙∼’ 알루미늄 방망이 소리 속에서 홈런볼처럼 하늘로 멀리멀리 사라져만 갔다. 서울시장배 국민생활체육야구대회가 지난 6일 오전 10시 도봉산 자락이 손에 잡힐 듯한 도봉2동 성균관대 야구장에서 열렸다. ●‘선출’ 마니아를 잡아라 선수신분을 확인하느라 플레이볼 시간이 조금 늦어진 오전 10시10분쯤 땅딸막(?)한 체구를 한 선수가 엉덩이를 뒤로 빼며 타석에 들어섰다.“선수 23명이 하나같이 둥글둥글하게 생겨 무슨 야구단이냐,씨름단이지?”라는 소리를 듣는다는 백상(白象) 자이언츠의 재간둥이 이상윤(24)이었다. 백상은 무리지어 생활하는 코끼리처럼 “야구라는 이름을 걸고 있는 한 똘똘 뭉쳐서 화끈하게 해보자.”는 뜻으로 붙여졌다.상대는 2부 리그에서 갓 올라와 처녀출전한 유니리더스다. 야구 동지들은 이상윤을 ‘선출’이라고 귀띔했다.한때 다이아몬드를 누볐던 선수 출신을 줄여 말한 것이다. 선출은 역시 셌다.인천 동산고를 나온 이상윤은 유니리더스 선발 천준태(30)로부터 3구째를 받아쳐 그림같은 중전안타를 뽑아냈다.이어 1사 1·3루에서는 또 다른 선출인 ‘하구라’ 하성진(23·유신고 졸)의 우익수 플라이 때 홈으로 내달아 첫 득점까지 올리며 기쁨을 두배로 늘렸다. 유니리더스 또한 선출 힘으로 금방 따라잡았다.1회말 공격에서 김희성(25·대구고-동의대)이 볼을 골라내 걸어나간 뒤 2루를 훔쳤다.메이저리거 서재응(뉴욕 메츠)의 고교·대학 동기생 박현철(27·광주일고-인하대)이 중견수 앞에 떨어지는 안타를 엮어내 김희성을 안방으로 불러들였다. ●비선출 “우리도 있다” 그러나 백상은 3,4회에 각각 3점씩 보태 추격에 찬물을 끼얹었다.이번엔 학창시절 선수 유니폼을 입어보지 못한 비선출들의 몫이 컸다. 3회 첫 타자 임선묵(24)이 왼쪽 발목에 맞는 볼로 절룩거리면서도 디딤돌을 놓았다는 자부심 때문인지 웃음지으며 1루로 뛰어갔다.그는 1사에서 ‘하구라’의 우익수 앞 안타에 힘입어 2루를 밟았다. 이 때만 해도 덕아웃을 지키던 동료들의 입에서는 “3회까지 한 점 밖에 못 뽑았다.”는 탄식이 간간이 터져나왔다.하지만 주장 장승현(29)이 마침 ‘완장 값’을 했다.좌익수 앞 2루타로 루상의 주자를 모두 불러들여 스코어를 3-1로 만들었다.장승현도 뒤이은 이민기(25)의 우익수 앞 땅볼 안타 때 4점째를 뽑아냈다. 승부에 쐐기를 박는 타점도 비선출 임선묵에게서 나왔다.4회 선두타자 김만영(26)이 우익수 왼쪽 안타로 신호탄을 쐈다.이에 보답하듯 이상윤은 중견수 왼쪽으로 빠지는 결승 3루타로 거들었다.뒤이어 5-1에서 이날의 히어로 임선묵은 유니리더스 천준태의 직구를 노려 오른쪽 담장을 넘어가는 2점짜리 홈런으로 기세를 한껏 높였다. ●고른 실력이 승부 가르다 유니리더스는 1-7로 6점이나 뒤진 5회 상황이 심상찮다는 코칭스태프의 판단에 따라 타자로 돌아선 천준태의 3루타와 김희성,민윤기(28)의 안타를 묶어 2점을 따라갔다. 그러나 6회에 다시 백상의 임선묵과 선출 이용주(25·배명고 졸),하성진에게 잇따라 ‘안타 뭇매’를 맞아 힘겹게 얻은 2점을 도로 헌납한 셈이 됐다.3-9로 뒤따라가기엔 이미 늦어버린 유니리더스는 이어진 공격에서 1점을 낚아 체면치레를 했다. 백상은 마지막 공격에서 5점차 리드에도 마음을 놓지 못한 듯 공세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첫 타자 한양수(23)가 몸에 맞는 볼,1사에서 이용주가 천준태를 구원등판한 정승모(35)의 공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진 끝에 볼넷을 만들어 기회를 엿봤다.곧장 폭발한 하성진,유영동의 연속 안타는 ‘코끼리’들에게 승리를 자축하는 선물이 됐다.12-4,8점차의 대승이었다. 짜릿한 승리를 맛본 백상 손준환(40) 감독은 “선출 몇몇 보다는 골고루 플레이를 잘 하는 게 전력에는 필수적”이라면서 “우린 최소한 주2회 이상 실전을 통해 이런 팀을 일구기 위해 힘쓰고 있다.”고 말했다. 송한수기자 onekor@seoul.co.kr
  • 儒林(112)-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나는 천천히 술을 아껴 마시며 성영우의 시를 다시 한 번 읊어보았다. “찾아온 손님들은 저문 날을 근심하고 문밖의 정가에는 갈림길도 많구나.” 조광조의 무덤을 찾아온 손님인 나,역시 이곳에 앉아 저문 날을 근심하고 있다.아아,한 발짝만 나가도 문밖의 정가(政街)에는 찢어지고 갈라진 수많은 갈림길만 무성할 뿐이다. 일모도궁(日暮途窮). 문자 그대로 날은 저물고 갈 길은 막혀 있구나. 일찍이 초나라의 평왕 때 오사(伍奢)는 태자 건(建)의 태부(太傅)였다.이때 간신 비무기(費無忌)는 태부의 다음 벼슬인 소부로 있었는데,태자비로 간택된 진에서 데려온 미녀를 태자대신 평왕에게 권하고 아첨하여 왕의 신임을 얻는다.아들의 부인이 될 여자를 가로챈 평왕은 여자에게 빠져버렸는데,이 사실을 알게 된 비무기는 태자의 보복이 두려워지자 참소하여 태자를 국경으로 쫓아버린다. 또 평왕이 태자가 반기를 든다는 비무기의 말을 듣고 오사를 꾸짖자 오사는 도리어 왕의 그릇됨을 간하였다.이 때문에 오사는 유폐되고,태자는 송나라로 도망친다.이번에는 오사의 두 아들의 보복이 두려워진 비무기가 태자의 음모를 두 아들의 조종 때문이라고 참언하였다.그래서 오사와 맏아들은 잡혀 죽고 둘째아들 오자서(伍子胥)는 오나라로 도망치는 것이다. 역사상 가장 유명한 복수의 화신이었던 오자서.하룻밤 사이에 백발이 되어 버린 오자서는 그 후 초나라를 정복하고 평왕의 묘를 파헤친 후 시체에 300번의 매질을 가함으로써 아버지와 형의 원한을 푼다. 이 처사가 지나치게 가혹하다고 사람들이 비난하자 오자서는 말하였다. “날은 저물고 갈 길은 막혀 있다.” 이 말은 ‘나이가 들었어도 할 일은 많이 있다.’는 뜻으로 비록 늙고 쇠약하여 살 날이 많지 않다 하더라도 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아 있다는 뜻인 것이다. 오자서의 탄식처럼 날은 저물고 갈 길은 막혀 있어 가야 할 길은 먼 것이다.도대체 유사 이래 나라가 이처럼 어지러웠던 적이 있었던가.왕조는 멸망하였고 하루아침에 일본에 나라를 빼앗겨 능욕당한 이래 간신히 독립을 하였지만 우리와는 상관없는 이데올로기에 의해 나라는 두 동강이 나고 말았다. 일찍이 고구려,백제,신라시대 때에도 볼 수 없는 동족간의 상잔으로 600만명의 양들이 학살당하였다.그 전쟁은 아버지가 아들을 죽이고,동생이 형을 찌르고,누이를 겁탈하는 ‘더러운 전쟁(Dirty War)’이었다.그 전쟁은 우리 민족과 전혀 상관없는 공산주의와 민주주의의 이데올로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그 체제의 하수인이 되어 대리전을 벌여 오늘날,전 세계에 남은 단 하나의 분단국이 되었다. 그뿐인가.시민혁명도 일어나고,쿠데타도 일어나고,젊은 장교들도 일어나 정권을 자기 밥그릇처럼 독차지하였다.정권을 사사로운 욕심으로 채우려는 더러운 야망으로 군인들도 양들을 학살하고 송두리째 껍질을 벗겨내었다.그리하여 수천 개의 갈림길이 생겨났다. 전라도에 경상도,충청도로 갈라진 지역의 갈림길이 생겨나는가 하면,가진 자와 갖지 못한 자와의 계층별 갈림길도 생겨났다.젊은이와 나이든 사람들의 세대별 갈림길이 생겨나는가 하면,기업과 노동자간의 갈림길도 생겨났다.진보와 보수의 편 가르기 갈림길도 생겨났으며,배운 자와 배우지 못한 자의 학력별 갈림길도 생겨났다. 증오와 전쟁과 복수와 대립과 갈등의 감정적 갈림길이 생겨났는가 하면,물질과 소유와 섹스의 쾌락적 갈림길도 생겨났다.˝
  • 儒林(112)-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儒林(112)-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나는 천천히 술을 아껴 마시며 성영우의 시를 다시 한 번 읊어보았다. “찾아온 손님들은 저문 날을 근심하고 문밖의 정가에는 갈림길도 많구나.” 조광조의 무덤을 찾아온 손님인 나,역시 이곳에 앉아 저문 날을 근심하고 있다.아아,한 발짝만 나가도 문밖의 정가(政街)에는 찢어지고 갈라진 수많은 갈림길만 무성할 뿐이다. 일모도궁(日暮途窮). 문자 그대로 날은 저물고 갈 길은 막혀 있구나. 일찍이 초나라의 평왕 때 오사(伍奢)는 태자 건(建)의 태부(太傅)였다.이때 간신 비무기(費無忌)는 태부의 다음 벼슬인 소부로 있었는데,태자비로 간택된 진에서 데려온 미녀를 태자대신 평왕에게 권하고 아첨하여 왕의 신임을 얻는다.아들의 부인이 될 여자를 가로챈 평왕은 여자에게 빠져버렸는데,이 사실을 알게 된 비무기는 태자의 보복이 두려워지자 참소하여 태자를 국경으로 쫓아버린다. 또 평왕이 태자가 반기를 든다는 비무기의 말을 듣고 오사를 꾸짖자 오사는 도리어 왕의 그릇됨을 간하였다.이 때문에 오사는 유폐되고,태자는 송나라로 도망친다.이번에는 오사의 두 아들의 보복이 두려워진 비무기가 태자의 음모를 두 아들의 조종 때문이라고 참언하였다.그래서 오사와 맏아들은 잡혀 죽고 둘째아들 오자서(伍子胥)는 오나라로 도망치는 것이다. 역사상 가장 유명한 복수의 화신이었던 오자서.하룻밤 사이에 백발이 되어 버린 오자서는 그 후 초나라를 정복하고 평왕의 묘를 파헤친 후 시체에 300번의 매질을 가함으로써 아버지와 형의 원한을 푼다. 이 처사가 지나치게 가혹하다고 사람들이 비난하자 오자서는 말하였다. “날은 저물고 갈 길은 막혀 있다.” 이 말은 ‘나이가 들었어도 할 일은 많이 있다.’는 뜻으로 비록 늙고 쇠약하여 살 날이 많지 않다 하더라도 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아 있다는 뜻인 것이다. 오자서의 탄식처럼 날은 저물고 갈 길은 막혀 있어 가야 할 길은 먼 것이다.도대체 유사 이래 나라가 이처럼 어지러웠던 적이 있었던가.왕조는 멸망하였고 하루아침에 일본에 나라를 빼앗겨 능욕당한 이래 간신히 독립을 하였지만 우리와는 상관없는 이데올로기에 의해 나라는 두 동강이 나고 말았다. 일찍이 고구려,백제,신라시대 때에도 볼 수 없는 동족간의 상잔으로 600만명의 양들이 학살당하였다.그 전쟁은 아버지가 아들을 죽이고,동생이 형을 찌르고,누이를 겁탈하는 ‘더러운 전쟁(Dirty War)’이었다.그 전쟁은 우리 민족과 전혀 상관없는 공산주의와 민주주의의 이데올로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그 체제의 하수인이 되어 대리전을 벌여 오늘날,전 세계에 남은 단 하나의 분단국이 되었다. 그뿐인가.시민혁명도 일어나고,쿠데타도 일어나고,젊은 장교들도 일어나 정권을 자기 밥그릇처럼 독차지하였다.정권을 사사로운 욕심으로 채우려는 더러운 야망으로 군인들도 양들을 학살하고 송두리째 껍질을 벗겨내었다.그리하여 수천 개의 갈림길이 생겨났다. 전라도에 경상도,충청도로 갈라진 지역의 갈림길이 생겨나는가 하면,가진 자와 갖지 못한 자와의 계층별 갈림길도 생겨났다.젊은이와 나이든 사람들의 세대별 갈림길이 생겨나는가 하면,기업과 노동자간의 갈림길도 생겨났다.진보와 보수의 편 가르기 갈림길도 생겨났으며,배운 자와 배우지 못한 자의 학력별 갈림길도 생겨났다. 증오와 전쟁과 복수와 대립과 갈등의 감정적 갈림길이 생겨났는가 하면,물질과 소유와 섹스의 쾌락적 갈림길도 생겨났다.
  • 儒林(111)-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儒林(111)-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다기망양(多岐亡羊). ‘여러 갈래 길에 이르러 양을 잃었다.’는 뜻으로 달아난 양을 찾으려는 데 길이 여러 갈래로 갈라져 있는 바람에 정작 양은 놓치고 말았다는 얘기다.이는 열자(列子)의 설부(說符)편에 나오는 고사로 다음과 같은 유래가 있다. “전국시대의 사상가로 양주(楊朱)가 있었다.당시에는 천하의 혼란을 다스리기 위해 ‘모두가 서로 사랑하라(兼相愛).’를 부르짖는 묵자(墨子)의 사상이 대유행을 보이고 있었다.묵자는 ‘남을 사랑하기를 자기 자신을 사랑하듯 하라.’하면서 ‘겸상애’야말로 ‘돌아가면서 서로를 이롭게 하는 교상리(交相利)’의 유일한 방법이라고 주장하고 있었는데,이와는 달리 양주는 극단적인 개인주의,혹은 이기주의를 표방하고 있었다. 양주의 개인주의는 ‘내 몸의 터럭 한 개를 가지고 세상을 구할 수 있다 하더라도 나는 터럭 하나도 뽑을 수 없다.’고 말함으로써 묵적,혹은 묵자의 겸애설(兼愛說)과 대비를 보여 ‘양주묵적’이라고 통칭되던 바로 그 사람인 것이다. 어느 날 양주의 이웃집 양 한 마리가 달아났다.그래서 그 집 사람은 물론 양주의 집 사람까지 동원되어 양을 찾으러 나서느라고 안팎이 매우 분주하였다.이 모습을 본 양주가 물었다. “양 한 마리를 찾는다면서 왜 그리 많은 사람이 나서느냐.” 그러자 하인이 대답하였다. “예,양이 달아난 쪽에는 갈림길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얼마 후 모두들 지쳐서 돌아왔는데,양은 찾지 못했다고 했다.갈림길마다 사람들이 찾아 나섰지만 갈림길에 또 다른 갈림길이 있어서 양이 어디로 달아났는지 통 알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 말을 들은 양주는 갑자기 우울해져서 하루 종일 말도 하지 않았다.제자들이 그 까닭을 물어도 대답조차 없었다.그래서 맹손양(孟孫陽)이란 제자가 선배인 심도자(心都子)를 찾아가 앞서 있던 일을 말하고 스승인 양주가 입을 다문 이유를 물었다.이에 심도자는 이렇게 대답하여 주었다. “그것은 선생님이 이렇게 생각했기 때문이라네.곧 ‘큰 길에 갈림길이 많기 때문에 양을 잃어버리듯이 학문하는 사람들은 다방면으로 배우기 때문에 본성을 잃는다.학문이란 원래 근본이 하나인데,그 말단에 와서 이와 같이 달라지고 만 것이다.그러므로 하나의 근본으로 돌아간다면 얻는 것도 잃는 것도 없다.’고 생각하시고는 현실이 그렇지 못함을 안타까워하면서 입을 다무신 것이라네.” 여기서부터 ‘다기망양’은 학문의 길이 너무 여러 갈래로 나뉘어서 다방면에 걸쳐 지나치거나 지엽적인 것에 얽매이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는 비유로 쓰이게 되었는데,오늘날에도 선택할 대상이 너무 여러 가지가 있어,어느 것을 택할지 곤혹스러운 경우에도 이 말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찔끔찔끔 술을 마시면서 생각하였다. 양주가 걱정하였던 대로 갈림길이 많기 때문에 양을 잃어버린 것처럼 오늘날 문밖에는 갈림길이 많이 있어 정치가 실종되어 버린 것이 아닐까. 기독교에서 예수가 자신을 따르는 사람을 양이라 표현한 것처럼 양은 백성을 의미하는 비유일 것이다.정치란 양을 편안히 하고 정치가는 양을 풀밭으로 이끄는 목자(牧者)일 것이다. 양을 풀밭으로 이끄는 길이 정치의 근원이므로 이 길은 복잡하지 않고 오히려 단순할 것이다.그러나 수많은 이데올로기와 정쟁과 편가르기에 의해서 정치의 길은 수많은 갈림길로 갈라져 있는 것이다.따라서 오히려 이 수많은 갈림길 때문에 막상 우리가 찾아야 할 잃어버린 양은 찾을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성영우의 탄식대로 오늘날 문밖 정가에는 갈림길이 많기도 하여 백성들은 저문 날을 근심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 [길섶에서] 책장 비우기/우득정 논설위원

    주말을 맞아 책장 정리에 나섰다.책장을 채우고 있는 책 가운데 잡지류와 반짝성 유행을 담은 책들이 1차 정리 대상이다.책장을 계속 차지하고 있기엔 시대에 뒤졌다는 것이 나름의 정리 기준이다.하지만 매년 한두 차례 되풀이되는 정리 과정에서 언젠가는 꼭 읽어봐야지 하는 마음으로 ‘존재’의 이유를 붙였던 책들도 적잖게 눈에 띈다.‘읽을 날이 올까.’하며 끄집어 냈다가도 다시 손길을 거둔다. 대학시절 은사 한 분은 연구실 사방을 메운 수천권의 책 가운데 건성으로 읽었거나 서문만 훑어본 책이 절반 가까이나 된다며 탄식하곤 했다.스스로 구입한 책도 다 읽지 못했음에도 학문의 한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양 평가를 받을 때면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 수 없다고 했다.그러곤 이러한 부끄러움이 자신을 끊임없이 채찍하는 촉매제 역할을 한다고 했다. 책을 정리하던 손길을 멈추고 책 제목들을 보니 내용의 일부라도 기억에 남은 책은 10%도 채 되지 않은 것 같다.대학자인 은사와 대비한다는 것 자체가 외람되기는 하지만 책장 앞에서 그 시절을 기억해내고 부끄러움을 느꼈다는 것은 소득이 아닐까. 우득정 논설위원 djwootk@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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