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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상에 창녕 3·1 민속문화회/7일 시상식

    ◎제9회 향토문화대상 7명 선정/서울신문사 제정·금성 협찬 서울신문사가 전통문화계승과 지역문화의 창달에 힘써온 숨은 일꾼을 찾기위해 제정한 제9회 향토문화대상수상자가 1일 결정됐다. 전통문화부문과 현대문화부문으로 나눠 전국 시·군의 문화공보실과 문화원,예총등 관련단체에서 추천한 단체및 개인을 대상으로 심사한 결과 영예의 대상에는 경남 창녕의 3·1민속문화향상회(회장 전병우)가 선정됐다. 또 본상중 전통문화부문에서는 ▲김기복씨(64·안성남사당보존회 상쇠) ▲안동문화연구회(회장 권오기) ▲고경재씨(60·양양문화원장)▲양인식씨(51·논산문화원 사무국장)등 4명이 뽑혔다.현대문화부문에서는 ▲정용채씨(67·해남문화원부설 문화학교교장) ▲이종찬씨(71·천안문화원장)등 2명에게 돌아갔다.대상에는 상금 3백만원,본상수상단체및 개인에게는 각각 2백만원씩의 상금이 주어진다. 올해 심사는 구상(시인)·여석기(고려대 명예교수·영문학)·임동권(중앙대 명예교수·민속학)·정영호(한국교원대 교수·역사학)·이중한씨(서울신문사사사편찬위원장)등 5명이 맡았다. 서울신문사 주최,금성 협찬,문화체육부 후원으로 열린 이번 향토문화대상의 시상식은 오는7일 하오3시 한국프레스센터20층 내셔널프레스클럽에서 열린다. ◎대상 「3·1 민속문화회」/경남 창녕·전병우 회장/매년 문화제 열어 민속놀이 재현/영남지역 만세발상지… 61년에 발족/쇠머리대기등 행사통해 전통 계승 『이번 수상을 계기로 3·1민속문화향상회는 더욱 훌륭한 향토문화를 계승하는 구심점이 될 것입니다』 대상 수상단체로 선정된 경남 창녕군 「3·1민속문화향상회」 전병우회장(49)은 수상의 영광을 모든 창녕군민들에게 돌리며 앞으로 향토문화 계승발전에 향도가 되겠다고 말했다. 창녕군 영산지역은 1919년 당시 서울의 3·1독립만세소식이 전해지면서 구중회,장진수,김추은,남경명 등으로 조직된 22인의 결사대를 중심으로 3월13일 영남지역에서는 최초로 만세의 함성이 울렸던 곳이다. 3·1민속문화향상회는 이같이 영남지역 최초의 독립운동 발상지인 창녕군 영산지역의 역사적 의미를 기리고 선조들의 전통민속놀이를 계승하자는 온 군민들의 뜻이 한데 모아지면서 군민 전체를 회원으로 삼아 지난 61년 발족됐다.이같은 취지에 따라 발족된 3·1민속문화향상회는 61년 발족때부터 지금까지 해마다 3월1일을 전후해 창녕군의 문화행사인 3·1민속문화제를 주최하면서 향토문화발전에 크게 기여해 오고있다. 향토문화 전승의 장으로 해마다 개최되는 이 3·1민속문화제의 각종 행사가운데 특히 중요행사로 매년 열리는 무형문화재 제25호 쇠머리대기와 무형문화재 제26호 줄다리기는 창녕 지역의 향토색이 짙게 담긴 고유의 민속놀이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이를 통해 길러진 단결력과 정의감·용감성은 과거 임진왜란의 항쟁을 비롯해 3·1독립항쟁등 조국수호를 위한 희생정신의 밑거름이 되면서 오늘날까지 그 정신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영산쇠머리대기는 영산지방의 마주보고있는 두 산을 힘센 황소로 형상화해 생소나무와 짚줄로 나무소를 만들고 동·서 양군으로 나누어진 수백여명의 장정들이 그쇠머리위에 각각 장군을 태워 메고 함성을 지르면서 부딪치거나 밀치는 가운데 상대편 쇠머리를 땅에 꽂아 승부를 가리는 것으로 이보다 앞서 깃발과 서낭대를 들고 펼치는 진잡이 놀이및 서낭대싸움과 함께 부상자가 생길만큼 박진감 넘치고 실전을 방불케 한다. 벼농사의 풍요를 비는 의례에서 기원된 줄다리기도 남녀노소가 한데 어울려 해마다 계속 이어가고있는 창녕지역 고유의 대규모 민속놀이다.이밖에 논매기와 관련해 노래와 춤과 농악을 엮은 괭이말타기 놀이나,수호신을 숭상하는 뜻의 토속민속놀이 행사인 호장굿,골목줄다리기등도 창녕지역에서만 볼 수있는 향토민속놀이다. 전통문화를 발굴해 계승하고자하는 군민들의 뜻이 모인 3·1민속문화향상회는 이러한 여러가지 지역 특유의 향토민속놀이를 전승해 해마다 재연함으로써 주민들에게 참여와 화합의 정을 다지는 계기를 마련하고 있다. ◎청소년향토사교실 운영/안동문화연구회 권오기회장 지난84년 창립된 이래 매월 문화강좌및 문화유적현지답사를 계속해 왔으며 86년 이후 매년 「안동문화연구」를 발간하는등 안동지역의 향토문화발전을위해 기여했다. 이밖에도 월례회원발표를 통해 수준높은 연구업적을 보였다.88년부터는 중학교3년∼고등학교2년까지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청소년향토사교실을 운영해 오면서 교재로 쓰이는 「안동문화의 이해」를 발간하기도 했다. 또 안동지역에 산재해 있는 각종 현판 1백10여점을 탁본,내년 2월에 전시회를 가질 계획이며 올 9월에는 「향토사연구의 이론과 실제」를 주제로 전국향토사연구회세미나를 안동문화회관에서 가지는등 지역문화단체로는 보기 드문 활동상을 보여온 점을 높이 샀다. ◎현산문화제 정착에 힘써/고경재씨 양양문화원장 양양문화원 설립의 산파역을 맡았다.설립후 초창기부터 16년동안의 사무국장을 거쳐 문화원장으로 재직하면서 향토문화사업을 천직으로 삼고 일하며 지역문화의 파수꾼노릇을 해냈다. 양양군의 유일한 향토축제인 「현산문화제」를 주관,범군민적인 행사로 정착시켰으며 고유의 민속놀이인 패다리놓기,귀애파기놀이,탁장사뽑기등을 발굴했다.또 현산문화제의 인기종목인 양주방어사행차와 신석기인가장행렬등을 발굴·고증·연출하는등 1인3역을 담당한 재주꾼이기도 하다. 향토사연구회,청소년윤리교실,노인회,노인학교등을 조직하거나 구성토록 주선해 문화의 지방활성화를 위해 노력해 왔으며 1천회이상의 각종 행사에 초청강사로 나가 지역문화홍보에도 이바지했다. ◎해남문화유산 발굴 40년/정용채씨 해남문화원 문화학교장 46년 옥천국교 교사에서 시작,지난해 화산국교 교장으로 정년퇴임할때까지 40여년동안 교직에 몸담고 있으면서 해남지역의 문화유산을 발굴,계승하였다. 충무공 이순신의 명랑대첩을 조사해 「울돌목」을 펴냈으며 임진왜란때의 충신 정운장군의 전기인 「구국의 횃불」,해남군 금호도의 자연환경과 미풍양속을 수집한 「금호도」,「내고장 해남」「고산 윤선도」를 발간하는등 해남지방의 묻혀 있던 향토사발견에 앞장섰다. 지난해 3월부터는 해남문화원 지역문화학교 교장으로 부임,국민학생 43명에게 매주 글짓기지도를 해오는등 퇴직이후에도 후진양성에 힘을 쏟았다. ◎안성남사당 재건에 큰공/김기복씨 안성남사당보존회 17살때 6·25이후 맥이끊길 위기에 처해 있던 이원보남사당패에 들어가 기예를 익힌뒤 82년 남사당의 발상지이자 경기농악의 대명사격인 안성남사당을 재건하는등 남사당의 계승·보존에 기여했다. 86년에는 철도부지였던 안성읍 석정리에 전수장을 건립,88년부터 전승학교로 지정된 서운중학교 학생들에게 남사당풍물놀이를 전수하는등 후진양성에도 정열을 쏟았다. 89년 경남 마산에서 열린 제30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는 영예의 대통령상및 개인연기상을 수상하는등 각종 경연대회에서 안성남사당의 명성을 드높인 공을 인정받았다. ◎구전 「천안삼거리」 소설화/이종찬씨 천안문화원장 천안로터리클럽회장,한국반공연맹천안시·군지부장,선거관리위원,도·시정자문위원,의료보험조합이사장,도체육회부회장등 천안지역의 사회일꾼으로 일해온 인물. 특히 85년부터 천안문화원장을 맡아 39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천안문화원이 22만 천안시민의 문화사랑방으로 자리잡도록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았다.「천안삼거리」로 구전돼 오던 천안의 전설을 책으로 엮어내는 한편 연극으로도만들어 「천안삼거리 능소전」을 국내외에 알렸다. 지난해에는 총25억원의 경비를 들여 2천여평의 부지위에 초현대식 음향시설과 완벽한 공연장·이동벽면·조명이 설치된 전시공간등을 갖춘 전국최대규모의 문화원을 건립하는데 헌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예산향토사 체계적 발간/양인식씨 논산문화원 사무국장 지난84년부터 논산문화원사무국장으로 재직하면서 논산문화의 발굴과 계승 및 발전에 헌신해온 공로.부족한 예산속에서 원고료한푼없이 「놀뫼의 문화­사적지편」등 11권에 달하는 각종 논산문화향토지를 혼자서 자료수집·정리·집필해 발간한 것을 비롯,「내고장소식」「향토연구회지」를 각각 통권43호와 6집까지 펴내는 저력을 보였다.각 1백40페이지짜리 9개읍의 읍면지발간도 그의 작품. 이같은 공로로 지난해에는 전국문화원발간물품평회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한 바 있으며 올해에는 영국 옥스퍼드대학 중앙도서관으로부터 「논산의 민속」「논산지역의 독립운동사」등 2권을 기증해 달라는 의뢰를 받는등 논산문화를 세계에 알리는 역할을 했다.
  • 광개토왕비(온가족이 함께 보는 우리역사:10)

    ◎비문 「내도해 파」해석·날조설로 논란/재일 사학자 이진희씨 “위가 석회 바르고 새글자새겨” 주장/“「후→위」「불공인」→「내도해」로 바꿔치기”/한국/“고구려가 바다건너 위격파” 해독/일본/“위가 백제·신라 지배했다” 억지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기록한 광개토대왕릉비는 고구려가 멸망(668년)한 뒤 1천2백여년동안 세인의 기억속에서 사라졌다.그러나 이 비는 기나긴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일순간에 한국·일본·중국의 사학계를 뒤흔들어 놓고는 1백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신비의 베일을 벗지 않고 있다. 광개토대왕릉비는 왕의 사후 2년인 414년 세워졌다.자연석을 깎아 만든 높이 6.39m의 거대한 비석으로 4면에 모두 1천7백75자의 한자가 새겨져 있다. 이 비가 1880년 무렵 청나라 농부에 의해 발견된 뒤 맨 처음 비문을 연구,발표한 측은 일본 육군참모본부였다.참모본부 소속 사학자들은 비문의 내용중 광개토대왕 5년(396년)의 치적을 새긴 부분,흔히「신묘년기사」라고 부르는 32자를『백잔·신라 구시촉민 유래조공 이위이신묘년래도해파백잔□□□나 이위신민』(□는 해독불능)이라고 해독했다. 그리고 그 내용을「백잔(백제)신라는 옛날부터(우리=고구려의)속민으로서 조공을 해왔다.그런데 왜가 신묘년(391년)에 바다를 건너와 백제·신라등을 격파해 신민으로 삼았다」고 해석했다.즉 일본이 4세기말 한반도에 진출,백제·신라를 지배했다는 주장이었다. 이같은 발표는 당시 한반도및 대륙 진출을 꿈꾸던 일본 사회의 열광적인 호응을 얻었다.이후 부분적인 수정을 거치긴 했지만 일본 학계는 현재까지도 이 학설을 정설로 내세우고 있다. 일본측 주장에 대해 국내 학자의 반론은 상당히 뒤늦게 제기됐다.1930년대 말 정인보가 일본측이 해독한「신묘년기사」32자의 정확성은 인정하되 그 해석을 전혀 달리하는 새 학설을 내놓은 것이다.그는 기사중「내도해 파(바다를 건너 격파하다)」부분에 대해,그 주체를 위라고 해석한 일본측 주장을 일축했다. 그는 『비문의 내용이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적은 것이므로「내도해 파」라는 동사의 주어는 당연히 고구려로 봐야 한다』면서「이위…」부분을「왜가 신묘년에 쳐들어 오자 고구려가 바다를 건너 왜의 본거지를 쳐 백제·신라와 함께 신민으로 삼았다」고 해석했다. 정인보설은 그 뒤로 남북한 학계의 비문 해석에 토대가 되었다. 그러나 한일 양국 사학계를 정작 놀라게 한 폭탄선언은 1972년 일본에서,한국인 학자에 의해 나왔다.재일사학자 이진희가「광개토왕릉비의 연구」라는 저서에서『비문을 처음 탁본한 일본참모본부가 비에 석회를 바르고 일부 글자를 바꿔쓰거나 새 글자를 새기는등 의도적으로 비문을 날조했다』는 주장을 내세운 것이다. 이진희설을 이어받아 이형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는 81년『신묘년기사중「위」자는 비문에 새겨진 다른「위」자와 전혀 모양이 달라「후」를 변조한 것임에 틀림없다』고 발표했다.그는 또「내도해」도「불공 인」을 바꿔치기한 것이라면서 전체내용을「백제·신라가 신묘년부터 조공을 바치지 않자 고구려가 백제·왜구·신라를 격파해 신민으로 삼았다」고 새롭게 해석했다. 한일 양국의 학설이 이처럼 맞서 있는 가운데 중국 학계도 이에 가담,8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비문 연구에 나서고 있다. 광개토대왕릉비가 세상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지 1백여년.그러나 긴 세월의 무심이 섭섭했던지 광개토대왕은 후손들에게 마저 아직 진실을 가르쳐주지 않고 있는 셈이다.
  • 화엄 변상도/해인사 소장/첫 목판화 도록 출간

    ◎현대 목판화회,발표전도 개최/“판화 역사 고려까지 확대 단서” 판화가 김상구씨가 이끄는 현대목판화회는 최근 해인사 소장 「80 화엄변상도」탁본을 전부 목판화로 만들어 이를 도록으로 출판하는 한편 5일부터 13일까지 서울 삼성동 무역센터 현대백화점미술관(552­22 33)에서 발표전도 갖는다. 약 1천년전 당나라의 80권 화엄경을 목판에 새긴 「80 화엄변상도」는 그동안 논문집등에 부분적으로 소개됐을뿐 전부가 선명하게 인쇄돼 도록으로 출간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80 화엄변상도」는 절에서 화승(판화의 밑그림을 그리는 스님)과 각승(목판에 각을 새기는 스님)들에 의해 화엄경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으로 그동안 조선시대를 중심으로 연구되었던 우리나라 목판화를 고려시대까지 넓히는 주요 단서가 된다. 각 목판화의 크기는 58×23㎝. 성도의 환희에서 오는 초현실적 신비감과 상서로움을 환상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변상도에는 조선시대 목판화에서 보기 힘든 음각법도 더러 사용되는등 판각과 화면구성에서 조선시대와는 큰 차이를 보이고있다. 화면 전체는 부드럽고 신비로우면서도 힘과 섬세함이 교차하는 정교한 솜씨가 구석구석 배어 있으며 부분 부분에서 순수한 고려시대의 회화표현 양식도찾아볼 수 있다. 김상구씨는 『신세대 판화학도들에게 우리의 뿌리를 보고 느껴 판화발전에 도움이 됐으면 하는 의도에서 이번에 80 화엄변상도를 도록으로 출간하게 됐다』고 밝혔다.
  • 매일신보/부록 펴내 민족의식 일깨워/역사연구가 김보영씨 첫 공개

    ◎1983년 6월부터 월1회 8차례 발간/금기인물 이순신장군 소개/광개토대왕비 등 유적 실려 일제하 총독부기관지로서 친일논조의 반민족지 역할만 한것으로 알려진 매일신보가 부록을 통해 민족문화를 소개,자각을 일깨우려 했다는 새로운 사실이 밝혀졌다.이는 역사연구가인 김보영씨(65·서울 중랑구 중화2동 321)가 1938년 6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매월 1회씩 8차례에 걸쳐 발간,배포했던 매일신보 「부록」을 18일 공개함으로써 확인됐다. 부록에는 주로 한국의 역사인물 및 문화유적을 소개하는 내용이 실려있다.이들 부록에는 5∼6인의 저술 및 친필 휘호등을 싣고 그 인물에 대한 자세한 소개를 한문으로 기록했으며 작품의 소장자까지 밝혀놓았다.특히 소개된 인물 가운데는 일제시 한국인들에게 금기시되던 이순신장군이나 광개토대왕등도 포함돼있어 당시의 시대적 상황으로는 획기적인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 부록은 희고 얇은 모조지에 매월 말일자로 발행됐으며 크기는 폭38·5㎝ 길이107·5㎝.그 하단에는 「소화13연 6월30일 매일신보 일만일천칠십오호 부록 발행인 이상협 편집겸인쇄인 김선흠 경성 종로 보진재 인쇄」라고 발행시기 및 지령 인쇄처등을 명백히 밝혀놓았다. 1938년 6월30일에 발행된 첫 부록에는 황해도 해주 광조사에 있는 고려초의 명승 진철대사의 보월승공탑비와 충북 중원군 정토사에 있는 신라말의 명승 법경대사의 자등탑비등 6편의 명승추모탑의 탁본을 싣고 자세한 해설을 곁들였다.그 내용을 보면 『이순신장군은 임진왜란때 전라좌수사로 옥포·당포·한산해전에서 대첩을 거두었으며 정유재란때 재기,통제사가 되었다』고 적었다.또 『전쟁지휘중 날아오는 탄환에 전사했는데 시호는 충무공』이라고 비교적 상세히 설명했다.이 부록에는 그밖에도 이퇴계 양사언 한석봉등 조선시대의 대학자들도 소개하고 있다. 한편 8월31일자로 발행된 세번째 부록은 고구려 광개토대왕비의 탁본등 만주에 흩어져 있는 고구려 유적들을 싣고 고구려와 광개토대왕에 대한 설명을 곁들였다.그밖에 이규보 정몽주 성삼문 안평대군 서거정 김시습 박▦ 정약용 김정희등 역사적 인물들을 자세히 소개했다. 이 자료를 검토한 언론사학자 정진석교수(한국외국어대)는 이 부록이 발간된 시기에 대해 우선 주목했다.1938년 4월 경성신문에 예속돼 있던 매일신보가 최린을 사장,이상협을 부사장으로 한 한국인 경영체제로 바뀌면서 제호도 매일신보에서 매일신보로 바꿔 새로 출발한 직후였기 때문이다.정교수는 『매일신보가 재출범하면서 새로운 기획으로 이 부록을 만들기 시작한것 같다』면서 『이제까지 친일 반민족신문으로 한국언론사연구에서까지 제외되다시피 했던 매일신보의 긍정적 측면을 엿볼수 있는 귀중한 자료』라고 평가했다.
  • 광개토대왕비/무분별한 탁본으로 비 마모

    ◎문화재연,길림성 집안박물관장 보고서 입수… 훼손과정 공개/1880년 발견직후 이끼 제거위해 불/훼손된 자에 엉뚱한 글자 새겨넣기도/일제,역사왜곡위해 두차례나 강탈 시도 광개토대왕비 발견이후 지금까지 훼손 과정 및 보호관리 상황을 종합적으로 담은 연구보고서가 국내 학계에 처음으로 공개됐다.최근 발간된 연간 학술지 「문화재」제25호에 실린 「호태왕비의 보호와 현 상태」란 제목의 이 보고서는 현지전문가인 중국 길림성 집안박물관 경철화부관장이 썼다는 점에서 주목을 끌고 있다. 이 보고서는 문화재연구소가 지난해 말 집안현지에서 고구려문화유적의 보존상태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입수한 것이다.보고서에 따르면 광개토대왕비는 1880년을 전후,그 존재가 세상에 다시 알려지면서 불질러져 치명적인 손상을 입은 것으로 돼있다.이후 무분별한 탁본과 석회를 사용한 잦은 글자 보수로 원형을 크게 잃었는데 발견 당시 표면에 이끼가 두껍게 끼어 있어 탁본을 뜨기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고 전한다.그래서 마분을 비석표면에 두텁게 바르고 말린다음 불을 질렀기 때문에 비면 곳곳이 불에 튀고 들뜨는 큰 피해를 입었다고 밝혔다. 불에 그을려진 시기는 비석과 이웃해 살던 초천부(1847∼1918)라는 사람이 1883년 쯤 처음 탁본을 시도한 직전으로 추정했다.탁본은 초천부의 뒤를 이은 아들 초균덕 등 여러사람에 의한 맹목적이고 무분별하게 장기간 행해진 것으로 알려졌다.그 결과 성근 각력응회암 석질의 비석이 불에 튀어 갈라진데다 자주 두드리는 바람에 글자의 모서리가 갈라지고 부스러져 심지어는 탈락된 것도 있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비문의 판독이 점차 어렵게 되자 탁본을 하려는 사람들은 1900년께부터 해마다 석회를 발라 보수를 해왔다.그 상황을 경부관장은 『문자가 똑똑하지 않은 곳은 석회로 채우고 그려넣어 비문가운데 일부는 필획이 많아지거나 적어졌고 심지어는 거짓글자(위자)를 적어넣은 것도 있다』고 밝혔다.이어 『1905년 일본인 시라도리 히코요시가 이 비석을 일본으로 실어갈 것을 제안한 일도 있다』고 털어 놓은 그는 『1907년 이후에는 일본침략자들이 한술 더 떠서 군함으로 이 비석을 실어가려 했으나 국민들의 격렬한 반대로 실패했다』고 적고있다. 광개토대왕비는 1961년 중국 국무원으로 부터 「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된뒤 부터 본격적으로 보호되었다.1962년 집안현 문물보호관리소는 위험한 상태에 있던 이 비석에 대한 전면적인 현지조사를 실시,그 점검결과에 따라 중국 문화부 문물국은 1964년 「호태왕비 화학보호처리사업소조」를 구성했다는 것이다. 보고서는 1년동안에 걸친 모의실험에서 자신감을 얻은뒤 1965년5월부터 50여일에 걸쳐 보존처리작업을 벌여 성공적인 결과를 얻은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1974년에는 비석의 기초를 튼튼히 하기위해 가로 세로 8미터의 시멘트 명대를 설치했다.또 이 보고서를 통해 비석에 대한 화학약물 재처리와 함께 1979년에는 새로 갈라진 틈을 접착제로 고정시키는 등 보존처리를 해온 사실도 드러났다. 현재의 비각은 1982년에 착공,1983년에 마무리됐는데 1928년도에 처음 세웠던 비각은 몇차례 보수를 거듭했지만 계속 기울어져 헐어버린 것으로 기술됐다.그리고 지금도 걸려있는편액「호태왕비정」은 첫번째 비각을 세울 당시인 1928년 현지사 유천성이 썼다는 것이다.
  • 화가 장우성씨(이세기의 인물탐구:8)

    ◎시·서·화 도양화삼절의 노인가/인위·조작없는 「무위사상」바탕,독창적 화풍/안으로는 응축된 깊은 사유 은은하게 표출/정많은 성품.부정엔 단호… 「친일논란」때 미술계풍토 비판도 대나무처럼 곧고 차가운 죽색청한과 물빛처럼 영롱하고 푸르른 수광징벽의 한벽원.이는 월전 장우성화백의 개인미술관 이름이다. 경복궁뒤 사간동 화랑가에서 삼청공원으로 이르는 초입에 위치한 한벽원은 서울 한복판(종로구 팔판동 35)이건만 인적없는 산간에 묻힌 선비의 서숙인양 적요속에 묵향이 감도는 분위기다. 눈부시게 흰 화강암건물과 「한벽원」이란 이름만으로도 주인의 기상과 풍도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소나무·대나무·백매와 계수나무 사이사이로 진귀한 옛 석물·석등이 배치되고 뜰한가운데는 일중 김충현의 「한벽원용」,내부벽면은 12지신·광개토대왕 비문·석굴암 관음상에서 탁본해온 석고부조로 장식되어 미술관다운 품위를 한층 높이고 있다. 바로 이곳이 월전의 모든 예술생애가 집약되고 또 앞으로 우리 한국전통미술의 올바른 맥을 보존·육성해나갈 본산이기도 하다. 아다시피 화단의 거봉인 월전은 시를 짓고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리는 시·서·화의 삼절로 동양화 전영역에서 유창탁발의 화업을 이뤄낸 노대가다. 그의 작품은 공자가 그림을 두고 말한 「회사후소」,즉 그림을 그리기에 앞서 마음을 깨끗하게 가다듬는다는 후소정신과 인위와 조작이 없는 무위사싱을 바탕으로 하고있다. 월전의 이런 선비기질은 그의 그림에서 보듯 한점의 허세나 과장이 없이 잔잔한 운율이 유운문처럼 번지고 안으로는 응축된 깊은 사유가 은은하게 표출되어 있다. 그가 즐겨 그리는 학과 백로,화훼와 산수는 모든 기교가 배제된 간결 산뜻한 선묘와 담백한 설채,특히 그만의 묵의 묘취는 그림을 보는 사람들에게 기막힌 환희를 안겨준다. ○담백한 선조 일품 월광을 배경으로한 백매가지에는 방금 물오른 새싹을 틔울듯 팽팽한 긴장감이 돋보이고 흰 눈속을 헤쳐서 꺼낸듯한 꽃의 화관은 보석처럼 눈부신 진주빛을 발한다. 마치 신운이 움직이는듯한 절제의 필치로써 겉으로 드러난 화려함과 장인기질보다는 원로의 정신미를 정밀하게 누리고 펼치는 시기라 할수있다. 1912년 임자생.80의 나이에도 그에게는 「노인」이란 단어가 무색하다. 바르고 건강한 모습에 단정하고 깎듯한 움직임,사물을 꿰뚫는듯한 예지의 눈길은 『글씨나 그림등 예술은 가장 천진한것이 극치』라는 완당의 말대로 그 청정의 눈빛을 지니고 있다.그에게선 어떤 흐트러짐이나 허술한 곳도,만모의 기색도 찾아볼수 없다. 그리고 일상생활에선 다감하고 정이 깊고 상대방을 포용한다.단지 그것이 마음에 들지않으면 추호의 용서나 양해가 없다.늘 옳은자의 편을 들고 자기 주장을 확실히 한다. 주말에는 골프,커피와 담배,두주불사의 애주가로 몇년전까지만해도 양주 한병을 비운 술실력이나 요즘은 친한 친구들과 어울려 순한 청주나 곡주를 즐긴다. 집은 압구정동 현대아파트,그러나 작업실이 있는 한벽원까지 아침 9시반에 출근해서 하오2시부터 작업대 앞에 선채로 3시간에서 4시간씩 작업에 몰두한다. 내년 가을 호암아트홀이 기획한 그의 화력 60년을 총정리하는 신작준비 때문이다.이는88년 일본 세이브미술관 초대 「한국·국화의 거장 장우성전」이후 5년만의 대작전시회여서 그는 모든 정열을 이곳에 쏟고있다. 그의 화적을 새삼 더듬을 필요는 없겠지만 월전은 18세되던 해인 30년 스승인 이당의 낙청헌에 입문,초기에서 10여년은 사실적 시각에 바탕을 둔 감각적 형태의 극세극채색의 치밀한 묘사에 밀착해왔다.그러다가 해방후 서울대미대에 재직하면서 스승의 회화권에서 벗어나 전통동양화인 수묵화에 정진하여 추상이 곁들여진 힘차고 분방한 용필로 활달한 화면을 추구해나갔다. ○18세때 이당에 사사 그는 경기도 여주의 전통적 유교가문에서 2남5녀중 다섯째,부친(장수영씨)의 나이 30세에 얻은 만득자여서 부모의 귀여움을 한몸에 받고 자랐다.「월전」은 어릴때부터 유난히 달을 좋아한 아들을 위해 부친이 손수 지어내린 아호다. 할아버지에게 「동몽선습」「소학」「명심보감」과 「사서삼경」을 배우고 붓글씨를 공부하면서 그림을 시작,그림공부를 위해 상경할 무렵에는 평소 위당 정인보선생과 교분이 두터웠던 부친의 배려로 위당댁에 드나들면서 조선역사를 익혔다. 이당문하에서 운보 김기창,현초 이유태와 나란히 수학한지 2년만인 32년 제11회 선전에서 부서지는 파도와 갈매기를 그린 「해병소견」으로 화단에 등단,41년에 「푸른 전복」으로 총독상,그리고 연이어 최고상인 창덕궁상을 두차례 수상하고 44년 화가로서 최고의 영예인 추천작가가 되었다. 이때 그린 「푸른 전복」은 열정적으로 부채춤을 추고난후 호흡을 가다듬는 무녀의 휴식을 섬세하게 묘사한 것으로 우리미술사를 말할때마다 거론되어지는 대표작중의 하나다. 범접하기 힘든 깨끗한 눈매며 전립의 영모,패영의 구슬은 이슬이 방울진듯,푸르른 구군복과 치마단까지 흘러내린 붉은 끈의 선과 색의 대비,공간을 여백으로 설정한 것등은 훗날 월전 문인화와도 일맥 상통한다. 싸늘한 겨울 날씨와 화면을 가득 채운 만월,한천을 가로지르는 기러기떼를 문인화의 무기교와 자연스럽게 절제된 묵선으로 관조한 조형어법은 「종교와도 같은 높은 이념이 함축」되어있다는 평이 뒤따르고 있다. 한치의 흔들림없이 지금도 여전히 화단의 정상을 지키는 월전으로서도 80성상을 돌아보면 흑색반점처럼 지워버리고 싶은 이야기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44년 최고상을 받았을때 총독부의 요청으로 수상자를 대표하여 「답사」한것을 스승과 의논없이 했다는 이유로 수년간 이당의 미움을 받아 소원했던 일,서울대 미대교수시절 「교수자리」를 탐내는 후배의 이간으로 미대 창설동지이며 당시 학장이던 장발씨와의 긴 오해등,어지러운 세속에 휘말려야했던 곤혹과 환멸이 잊을수 없는 얼룩으로 남아있다.물론 시간이 흘러 밝은 대낮처럼 모든 진상이 밝혀졌다곤 하지만 꼿꼿하게 앞만보고 살아온 그에겐 자존심에 먹칠당한 슬픈 추억의 장면장면들이다. 문인사대부의 학문과 역량은 익히 알려진 바이고 그의 그림속에 실린 아름다운 시구외에도 그는 「화맥인맥」등 신문에 자주 글을 발표한 미문으로도 유명하다. ○문장력도 뛰어나 그 한예로 83년봄 한 미술계간지가 다룬 「한국미술의 일제식민잔재를 청산하는 길」이란 특집기사로 인한 「친일 화가파동」때 그는 대단한 문장실력을 발휘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같은해 4월21일자 모 두 일간지 광고를 통해 발표한 「불신과 불화를 조장하는 저의를 묻는다」는 이 성명서는 잡지에 게재한 내용을 조목조목 열거하면서 「일제36년과 해방후 오늘날까지 우리나라의 모든 미술가는 친일파이며 모든 미술작품은 일본의 식민지 잔재인양 매도하고 미술교육도 잘못되어 후진들에게 악영향을 미치게 했다는 기사내용은 실로 어처구니없는 망설」임을 전제,「작고작가와 현역 미술인 대부분을 부관참시식으로 난도질」하면서 과거 민족수난의 불행했던 역사는 외면한채 「민족예술창조라는 허구에찬 궤변」으로 사회여론을 오도,「이 방약무인한 오만을 나무라기전에 그들은 일제 강점하에서 무엇을 하고 살아왔으며 소위미술평론가의 자격은 어디에서 취득했고 누가 인정했던가 묻고싶다」는 실랄한 항변과 규탄의 내용이 그것이다. 이 글을 기초한 사람이 바로 월전으로 이 사건은 화단의 경종이 되어 서로 자숙하고 침착하게 자기 성찰하는 기회로 마무리 되었다. 월전은 이처럼 깐깐하다.굳이그가 나서지 않아도 되지만 「화단의 누」라는 차원에서 가차없이 솔선하고 나섰다.그의 작업실은 그의 성품만큼이나 정갈하고 청결하여 난초의 홍자색은 싱그럽고 고고하기만 하다.호불호를 선명하게 가려 「한다」고 마음먹은 것은 일사불란하게 실천하기를 서슴지 않는다. 이번 미술관도 88년 구상·계획하여 그가 몸담았던 서울대 미대와 홍대미대의 제자·화우들을 주축으로 즉시 월전미술문화재단을 설립,89년 미술관 착공,91년 3월개관 2주일전 부설 동양미술연구소 제1회 수강생 20명을 배출했다. 까다로운 성품과는 달리 각계각층과의 다양한 교분은 수화 김환기,영운 김용진,의재 허백련,소전 손재형과 친형제같은 우의를 다졌고 대한교육보험의 신용호회장과 황수영 유경채 이대원 김원용 특히 일중과의 우정은 난향과도 같다. 가족은 부인 유리정여사(73)와 1남3녀.장녀인 정란씨가 동양미술사를 전공했다.그의 만년의 예술은 「붓가는대로 그린다」는 명경지수의 염과 자연에 돌아가 자유하는 마음으로 우주를 넘나드는 광대무변의 세계를 구사하고 있다. 이제 월전화는 그의 생을 황홀하게 장식하기 위한 무르익은 화경에 접어들어 그 마지막 붓끝까지도 불후의 명작을 그리게 될것을 의심할 사람은 없다. 아산 현충사·정읍 충렬사 봉안 이충무공 영정,세종대왕 기념관 벽화 「집현전학사도」 낙성대봉안 강한찬장군·김경신장군·윤봉길의사·정포은선생·문익참선생·김종직선생·조식선생·정기용박사·유관순열사등 영정 제작.국회의사당 벽화 「백두산천지도(1천호)」,고려대벽화 「군려도」크리스트상화(63빌딩)제작. □연보 ▲1912년6월 경기도 이주출생 ▲30년 이당 김은호 「낙청헌」입문 ▲32’ 제11회 선전 「해병소견」입선이후 계속 출품 ▲33’ 육교 한어학원 졸업 ▲41∼44’ 「푸른 전복」등 연4회 특선·추천작가 ▲46∼61’ 서울대 미대 교수 ▲49’ 로마 국제미전 「성모와 순교복자」3부작 출품(바티칸시 수장) ▲50’ 제1회 개인전(동화백화점 미술관) ▲63’ 도미,미국무성 화랑 개인전 ▲64’ 워싱턴 스퀘어 화랑주최 국제미술제 한국대표초대출품 ▲65’ 워싱턴에 동양예술학교 설립 ▲71’ 홍대 미대 교수 ▲75’ 유럽7개국 미술계시찰 ▲80’ 현대화랑서 도불 기념전 ▲〃 프랑스 정부초대 파리세루뉘시 미술관 개인전 「홍매」「석」등 프랑스문화성소장 ▲81’ 월전화집(지식산업사간) ▲82’ 독일 쾰른 시립미술관 초대 개인전 ▲85’ 국립 현대미술관 원로작가 초대전 ▲88’ 도쿄 아트포럼에서 「한국 국화의 거장 장우성전」개최 ▲〃 동산방화랑서 개인전 ▲92’ 오늘의 작가 11인전(진화랑) 국전심사위원·운영위원역임 현 예술원회원 서울특별시 문화상·예술원상·5·16민주상 수상.
  • 송상용 한림대교수 항주 중국과학사 국제학회 참관기

    ◎“중국과학사 국내연구 활성화 절감”/한국학자 발표논문 큰 반향 일으켜/한·중·일 과학용어 통일위한 논의도/북경선 천문기구 복원 협의… 과기교류 확대 기대 지난 8월말 항주에서 열린 중국과학기술사 국제심포지엄은 두가지점에서 뜻깊은 모임이었다.개방이후 중국에서 두번째인 이 회의에 한국은 처음으로 초청을 받았다.7월부터 내몽고·후흐트·북경·항주에서 잇따라 수학사·의학사·과학기술사 회의가 있었는데 의학사회의에는 정우열교수(원광대)등 한의학자들이 참석했고 항주에는 7명이 갔다.20여명을 보내려던 계획은 미수교국이라는 이유로 정부가 규제해 좌절되었다. 회의 전날 한중수교(건교)가 발표되어선지 우리는 각별한 대접을 받았다.항주시장 환영연에서는 나를 시장 옆자리에 앉혔고 일본대표 다음으로 연설하게 했다.절강성 당부서기 초연에서도 고위인사들이 모두 찾아와 축배를 제의했다.닉슨이 묵었다는 서호가의 숙소에서도 최고의 특실이 배정되었다. 개막식에서는 과학사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긴 연설이 이어졌는데 왕영명시장은 생산력을 들먹였고 절강대 노용상교장은 개방을 강조해 대조를 보였다.중국에서는 주요 과학사학자들을 총망라한 1백50명이 참석했으나 외국학자들은 20여명이 왔을 뿐이었다.국제적으로 알려진 학자로는 하병욱(니덤연구소장),전상운(성신여대),교본(일본),황일용(대만),스티븐슨(영국),셸라(프랑스)정도여서 실망이 컸다.한국에서도 박성래·김영식·김기협 등 중국과학사학자들이 못간 것은 유감이었다. 첫날 전체회의에서는 니덤,수내,전보종등 거물 중국과학사학자를 평가하는 논문이 발표되었고 이어 천수,물화지,생농의,기술,종합 5조로 나누어 총 90여편의 논문발표가 진행되었다.한국에서는 남문현교수(건국대)의 「세종 자격루」와 장회익교수(서울대)의 「중국전통사상의 시공개념」이 큰 반향을 일으켜 여러 잡지의 쟁탈전이 벌어지는 소동이 일어났다. 회의진행은 엉성하기 짝이 없었고 중국학자들의 논문수준도 대체로 높은 편은 아니었지만 많은 귀중한 자료와 정보를 얻은 것이 수확이었다.회의도중 중국과학원 자연과학사연구소 진미동소장 일행이 우리를 예방,두나라의 협력을 다짐했다.또한 중국측의 요청으로 한중일 과학기술용어 통일을 위한 협의도 가졌다.그밖에도 우리는 회의 전후해서 북경 고관상대를 찾아 천문기구 복원을 협의했고 소주에 있는 세계에서 제일 오래된 석각천문도 탁본을 사왔다. 60년대에 시작된 일곱번째 중국과학사 국제회의는 내년 8월 일본 교토에서 있을 예정이다.한국이 이 회의를 유치하는 것은 아직 이르지만 우리는 이와 별도로 제5회 한일과학사세미나를 확장한 아시아과학사회의를 후년에 서울서 주최하려는 구상을 하고 있다.이번 회의를 통해 절감한 것은 한국의 중국과학사연구를 크게 활성화 해야겠다는 것이다.그것은 한국과학사연구를 자극하고 돕는 길이기도 하다.
  • 가을문턱 화제의 명작2전

    ◎김정희전/추사예술 연대순 전시/중국회화전/명·청대회화 80점 출품 한중수교에 때맞춰 열리는 수준높은 중국회화전과 예술의 전당이 특별히 마련한 한국근대미술의 대가 추사 김정희 명작전이 초가을화단을 장식한다. 중국미술의 대거 유입이 예상되는 가운데 서장을 장식할 중국회화전은 삼성 미술문화재단 호암미술관이 들여온 「북경 자금성의 보물­명·청 회화전」(9월1∼11월30일 호암갤러리). 호암미술관이 중국의 북경고궁박물원과 3년에 걸친 협의끝에 선보이는 이 특별전에는 고궁박물원 소장의 명·청대회화 80점이 출품된다.중국 역대 황제들이 모아놓은 진품들로 중국최고의 평가로 치는 1급(국보급)작품 8점을 포함한 중국의 전통회화들로서 우리 조선조 회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주요작가들의 작품이 망라된다. 중국회화의 황금기로 일컬어지는 명·청대 거장들의 대표작이면서 이 가운데 50여점은 해외에서는 처음 공개되는 고궁박물원의 비장품들로 알려지고 있다. 주요작가는 조선조회화에 큰 영향을 준 이재,절파학풍의 창시자 대진,명대문인화를 정립시킨 오파의 시조 심주,남북종 화론의 주창자 동기창,청대 정통문인화의 거장 사왕오등이 있다. 호암미술관은 이 전시를 시작으로 고궁박물원측과 앞으로 전시·인적교류를 추진할 방침인데 동양미술의 진수를 확인할 수 있는 최고수준의 「보는 전시회」를 마련키 위해 4억원정도의 경비를 들였다고 밝혔다. 한편 한국근대미술의 최고거장으로 꼽히는 추사 김정희 명작전(9월4∼10월11일 예술의 전당 서예관)은 추사의 예술세계를 편년체계로 처음 제시하는 뜻깊은 전시회다. 이른바 「추사체」를 말하는 사람은 많아도 정작 그것이 어떤 과정과 배경을 통해 형성됐는지 정확히 아는 이들이 드문 현실에서 예술의 전당측은 「추사체」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위한 구체적인 시도로 이 전시회를 꾸민 것. 따라서 이 전시에서는 서체형성과 변모양상을 다양한 작품세계와 광범위한 학서과정을 추적하여 그 이론적 배경이나 양식적 특징을 편년체계로 밝혀낸다. 실제 전시작품은 70여점으로 임창순(문화재위원장)최완수(간송미술관 연구실장)권창륜씨(서예가)가 공동으로 선정한 개인소장가들의 진품으로 대부분 처음 공개되는 것들이다. 작품의 종류는 대련 횡액 종액 서첩류 간찰 난초 수묵산수 선면 탁본 완당인보 등으로 추사의 모든 예술세계가 망라되고 있다.
  • 「일연의 달」 기념행사 풍성/삼국유사 역사적의의 조명·논문집 간행

    문화부는 7월의 문화인물로 고려시대의 고승이자 「삼국유사」의 저자인 일연스님(1206∼1289)을 선정,그의 업적과 사상,그리고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재조명해보는 다양한 사업을 경상북도,문예진흥원과 공동으로 추진한다. 이와함께 불교계도 자체적으로 다양한 기념사업을 준비하고 있다. 일연은 고려 희종2년 경상도 장상군(지금의 경산)에서 아버지 김언필과 어머니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법명은 일연,자는 회연,시호는 보각이다. 1214년 해양(지금의 광주)무양사에 가서 불교에 대한 공부를 시작,14세에 설악산 진전사의 대웅장로 밑에서 승려가 됐다. 1277년(충렬왕3년)에는 왕명에 의해 운문사 주지가 되고 여기서 「삼국유사」를 저술하기 시작했으며 12 83년 국존으로 책봉돼 원경충조의 호를 받았다. 일연은 충렬왕15년 84세를 일기로 인각사에서 일생을 마쳤으며 현재 경상북도 군위군 고로면 화수동 인각사에 불탑과 잔비가 남아 있어 그의 행적의 일단을 알려주고 있다. 문화부주최로 추진될 행사는 ▲삼국유사의 역사적 의의 강연회(11일 하오3시 한국의 집·김상헌 한국교원대교수)▲기념특별강연회(22일 상오10시 경북도청강당·일연의 사상과 삼국유사)▲일연스님 추모봉다식(8월5일 인각사 경내)과 함께 ▲일연스님 성지순례(11 ∼ 12일 인각사·제2석굴암·불국사·거조암)▲일연스님과 불교사상 강연회(25일 불지사 대웅전)등 5건. 한편 조계종 총무원은 「일연의 달 기념사업추진위원회」를 결성하고 7월부터 9월까지 학술행사를 비롯한 일연연구논문집 간행등 자료집 발간,일연추모재등 기념행사를 가질 예정이다. 주제를 「일연스님의 정신을 다시 이 땅에」로 정한 조계종은 먼저 일연스님과 삼국유사를 현대적으로 조명하고 그 의미를 되새기기 위한 교수학술세미나를 7월9일 하오3시 서울 불교방송 공개홀에서 개최한다. 이 세미나에서는 월운스님(중앙승가대),황패강(단국대),김상헌(한국교원대)교수가 발표에 나서며 종범스님(종앙승가대),홍기삼(동국대),허흥식교수(한국정신문화연구원)등이 토론자로 참석한다. 또 9월18일 일연의 생애와 사상」을 주제로 중앙승가대 정진관에서 열리는세미나에는 중앙승가대 학생들이 발표자로 나서는 한편 동국대 대학원생들이 토론에 나선다. 이와 함께 7월4일부터 31일까지 서울 덕수궁 모화발전연구소 자료전시관에서는 「일연과 삼국유사 특별기획전」을 갖게 된다. 이번 전시회에는 삼국유사의 판본과 영인본,번역본을 비롯해 일연스님 관련유적지 사진,연구논문집,일연비 탁본과 비첩,서각과 서화,영정등이 선보인다. 조계종은 이어 삼국유사 연구논문 목록과 일연비 연구논문,비첩사진자료가 담긴 「일연과 삼국유사의 자료집」을 책으로 엮어내게 되며 7월1일 하오2시 조계사에서 일연추모재를 봉행한다.
  • 음악평론가 박용구의 풍기(명사의 고향:23)

    ◎죽령 넘어서면 눈아래 확투인 들판/할아버지대에 십자거리에 터잡아/희방사 스님졸라 훈민정음 탁본도/구한말 이강년·신돌석등 의병의 본거지… 척박했던 땅이 이젠 인삼·능금의 명산지로 나의 고향 풍기를 가려면 죽령고개를 넘어야 한다. 하기야 남으로 봉현고개,동으로 단산고개,북으로 잠뱅이고개를 넘어갈 수도 있지만 서울과 직통하는 국도나 중앙선이 모두 죽령고개를 넘게 마련이다. 해발 1천3백14m의 도솔봉과 희방사를 품에 안은 비로봉,그리고 풍기군수시절의 이퇴계가 나라일을 근심해서 축지법(축지법)으로 한달음에 올랐었다는 1천4백21m의 거봉­그래서 이름이 국망봉인 웅장한 소백산줄기 중에서 그나마 서산에 지는 해를 안고 넘을 수 있는 길이 죽령고개다. 옛날 삼국시대에는 고구려와 신라의 접경이어서 고구려의 『평강공주와 바보온달의 설화로 유명한 온달장군은 한강이남의 고구려땅을 수복하겠다고 죽령을 묵표로 진격하다가 아단성에서 전사했다고 삼국사기 온달조에 있다. 죽령고개를 38선으로 고구려와 신라가 대치해서 밀고 당기던 국경마을,그 시절에는 기목진으로 불리던 풍기만이 고구려에 저항해서 신라의 국경을 지켰다고 전한다. 동국여지승람은 풍기사람들을 평해서 이 고장은 기질이 강하고 사납다고 기록했다. 어쩌면 풍기사람의 억센 기질은 삼국시대부터 비롯된 저항정신의 전통일는지 모른다. 무엇이고 해내는 억센 기질,청량리의 왕초도 풍기사람이라지 않는가. ○억센 저항의 고장 이왕조의 실정으로 나라가 기울고 군대마저 침략국의 강요로 해산 당하자 전국에서 의병들의 무장투쟁이 전개 되었을 때 소백산의 깊은 골짜기들을 근거지로 삼아 풍기 사람의 저항정신에는 또다시 불이 붙는다. 영주 순흥 봉화 등 인근 고을과 힘을 모아 게릴라전을 군대해산에서 망국까지 3년동안이나 전개했던 것이다. 일본제국의 조선군 사령부가 1913년 3월에 발행한 비밀문서 「조선폭도토벌지」에는 1907년 8월부터 1910년 12월까지의 전황을 비교적 상세하게 지도를 곁들여 기록하고 있다(우리 의병을 폭도로 지칭한 것으로 보면 된다). 「토벌지」는 1907년 8월27일 약3백명의 우리게릴라부대가 경찰지서를 습격,일경 1명을 참살하고 29일에는 순흥,31일에는 봉화의 경찰지서를 습격,불태워 승리의 개가를 올리는데서 시작한다. 그 게릴라부대의 리더­즉,의병장은 이강년,신돌석. 그러나 그 세력은 해를 거듭할수록 줄어들지만 그들의 무장봉기는 소백산을 근거지로 3년을 견디어 매국노들이 나라를 팔아먹고 일본의 학정이 시작된 1910년 일인이 임명한 조선인 군수들의 행위로 종말을 맞는다. 「토벌지」에 기록된 게릴라대장의 이름을 「열사」로 모시기 위해 기록해보면 최성천 한명만 김상태 정경태 윤국범 문성조 김성운 유시영.그 중에서 조선인 군수들의 밀고로 4월에는 최성천 한명만이 체포,처형되고 12월에는 윤국범 문성조가 역시 잡혀서 처형당했다. 다행히 이 무렵까지 저항운동을 계속한 이강년 신돌석의 체포기록은 없다.아마 그뒤 만주로 건너가서 독립운동의 선봉장이 되지 않았을는지. 「조선 폭도 토벌지」는 경상북도의 부장봉기에 대해서(비밀문서인 탓일까) 이런 결론을 내리고 있다. 『안동에는 약 50명의 진위대가있었으나 군기가 해이하여 거의 토벌의 임무를 못했음』 ○국립천문대 위치 서울에서 경기·강원·충청의 3도를 지나 죽령재마루에 오르면 질펀한 들판이 확 트여 경상도의 첫 고을은 우선 시원스럽다. 그러나 여기서 곧바로 산을 내려가기에는 그 경관이 너무 아깝다. 오른편으로는 우리나라의 유일한 국립천문대가 있고,왼편으로는 희방사와 희방폭포가 있기 때문이다. 이 고장이 낳은 인물로 세종때의 김담은 일영대라는 그당시 천문대의 대장을 지낸바 있으니 천문학과는 일찍부터 인연이 깊다 하겠고 주위의 아늑함이 속세를 잠시 잊게 하는 희방폭포와 희방사는 1568년에 개판된 훈민정음과 월인석보의 판본 2백개가 있던 곳이어서 더구나 잊을 길없는 곳이다. 일본이 패망하던해 7월,나는 병요양을 위해 이 절에 머물면서 사고에 판목을 발견하고 주지를 설득해서 「훈민정음」과 「월인천강지곡」만의 탁본을 했었는데 6·25가 터진 이듬해 1월13일,유엔군이 작전상의 이유로 휘발유를 뿌려 이 절을 불태워 버리는 바람에 귀중한 문화재는 재가 되고 말았다고 한다. 가곡 「성불사의 밤」의 노래말처럼 노승은 어디로 갔더란 말인고! 글깨나 하는 늙은이라면 예언서로 믿었던 「정감록」에는 삼재­즉,흉년 악질 병화가 없는 십승지지의 첫째로 「풍기」를 꼽았건만,동족끼리 살륙전을 벌인 6·25는 깊은 산속의 문화재마저 불태웠으니 그 황당무계를 알만하다. ○6·25 동란중 소실 그러나 죽령재에서 구곡량장의 고갯길을 내려오면 밋밋한 언덕에는 능금밭,그 자락에는 인삼밭들이 타관사람의 눈을 끌게 마련이다. 뚜렷한 4계절과 낮과 밤의 기온격차,그리고 적당한 습도를 유지하는 토질탓으로 예부터 풍기인삼은 개성인삼과 쌍벽을 이루었다. 38선으로 「개성인삼」을 맛볼수 없게된 오늘,「풍기인삼」은 6연근의 홍삼재배구역으로 지정되고 해마다 9월에 5년근을 채취하는 유일한 명산지가 된 셈이다. 아마도 6·25의 실향 월남민으로 개발이 시작된 능금재배는 66년의 7만그루가 76년에는 1백75만그루를 기록했으니 「풍기능금」의 시장점유율을 짐작할만하다. 내가 어렸을 적에는 풍다 석다 황다의 「삼다」로 황폐했던 풍기가 지금엔 산나물 인삼 능금의 「삼다」로 넉넉하고 윤기가 흐르는 고을이 되었으니 그 까닭은 어디서 찾을수 있을까. 그 황폐했던 「삼다」로부터 풍기를 탈바꿈시킨 힘은 아이러니컬하게도 황당한 「정감록」에 있었다. 나라가 망하고 세상이 뒤숭숭할 무렵,『풍기읍내 십자거리에 5분만 서있으면 조선팔도의 사투리를 들을수 있다』는 속담이 유행했다. 「십자거리 박약국」으로 알려졌던 우리집도 사실은 월남민이요,나는 3세인 셈이다. 삼국시대부터 내려오는 억센 저항기질과 월남민들의 실향의식이 오늘의 풍기를 있게한 것이 아닐까. 죽령을 요람으로 자란 내게 반골정신같은 것이 바닥에 있다면 아마도 「자랑스러운 풍기사람의 기질」탓이리라. ▷약력◁ ▲1914년7월2일 경북풍기출생 ▲1946년 중앙방송국 음악계장 ▲1950년 동경소목발레단 문예부장 ▲1966∼70년 예그린 악단장 ▲1981년 예술평론가 협의회장 ▲1986년 88올림픽개폐회식 기획단장 ▲1989년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
  • “미스터리 표석”… 금석학자 임창순씨가 규명

    ◎청와대 경내 「천하…」 암각은 남송의 오거 글씨/중국명승 금산사 「제일강산」 현관과 동일 추정/풍화정도 미뤄 1백50년전 탁본해와 새긴 듯 청와대 경내에 새로 신축된 대통령관저 부근에서 지난 2월 발견돼 화제를 모았던 「천하제일 복지」라는 암각(본보 2월23일자 보도)의 미스터리가 풀리고 있다. 발견 당시 이 암각(암벽에 글을 새겨 놓은 것)은 지금부터 3백∼4백년 전에 새겨진 것으로 추정되었을 뿐 그 정확한 연대나 글씨를 쓴 「연릉 오거」에 대한 의문이 규명되지 않았었다. 그러나 이 암각을 자세히 살펴보았던 우리나라 금석학의 대가 청명 임창순 옹은 최근 글을 새긴 연대는 지금부터 1백50년 정도밖에 안되었고 오거는 지금부터 8백년 전인 12세기 중국 남송시대의 명필이라고 밝혔다. 임 옹은 『비록 암각이 경사면에 지면과 수직으로 있어 정면으로 노출된 것보다는 풍화가 덜 된다 하더라도 화강암에 음각한 획의 풍화 정도가 깨끗하다고 할 만큼 매우 낮다』고 말하고 『화강암의 석질이 본래 비바람에 약한 점을 고려할 때 1850년 전후 연대로 추정된다』고 설명했다. 이는 암각의 제작연대를 1백50년 전 이상으로 더 거슬러 올라가기는 어려우며 우리의 고려후기와 같은 시대사람인 남송의 오거가 6백50년 뒤에 조선에 와서 글을 썼을 리는 없다는 말이다. 결국 조선조 말기인 1850년 전후 누군가 중국에 가서 오거의 글씨를 탁본해와 이 자리에 새긴 것으로 추측된다. 오거가 쓴 글씨 가운데 「천하제일 복지」라고 쓴 것은 없지만 「천하제일 강산」이라고 쓴 대형횡액은 지금 중국 남경부근 명승지 진강 어귀에 있는 금산사에 남아 있다. 지난 25일 준공된 대통령관저 별채 뒤편으로 30여m 떨어진 비탈진 언덕에 있는 「천하제일 복지」 암각의 크기는 가로 2m50㎝,세로 1m20㎝이고 글씨 한자의 크기는 가로 세로 50㎝,획의 굵기는 9㎝이며 글씨체는 해서와 행서의 중간서체이다. 「천하제일」이라는 네 글자는 금산사의 이 글씨와 동일한 것으로 보인다. 지난 3월 기자가 중국에 갔을 때 상해에서 우리 일행을 안내했던 상해∼남경 일대 전문관광 가이드 왕대쇄 씨(54ㆍ상해시 해구국제여행사 관광통역사)는 『금산사에는 여러번 가보았는 데 「천하제일 강산」이라고 쓴 글씨는 매우 유명하다. 글자 한자가 승용차 문짝만하고 획의 굵기는 손바닥만 하다. 글씨크기 등에 비추어 한국에 새겨져 있는 것과 같은 글씨로 생각된다』고 말했다. 왕씨의 설명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복」자와 「지」자는 어디에서 나왔는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이 점에 대해 임창순 옹은 『오거가 남겨 놓은 서첩이나 비문글씨 등에서 두 글자를 찾아내 집자(필요한 글자를 모아 사용하는 것)하여 글씨를 새긴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이 경우 과연 같은 크기의 오거 글씨를 착기가 쉽지 않을 것 아니냐는 의문이 있을 수도 있다. 만약 「복」자와 「지」자가 오거의 글씨가 아니라면 바위에 글을 새길 당시 조선의 서예가가 두 글자만 오거의 서체로 모사해 끼워넣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천하제일복지」라고 쓴 왼편 아래 낙관자리에는 작은 글씨로 「연릉 오거」라고 씌어있는데 연릉은 오거의 아호가 아니라 오거의 본관이 중국의 연릉 오씨이기 때문이며 옛 중국에서는 흔히 자신의 출신본관을 이름 앞에 썼다는 것이다. 상해박물관이 지난 88년 처음 펴낸 중국서적대관 제6권 오거편에 보면 그의 호는 운학이며 생졸년은 미상이나 남송의 소흥(고종)에서 경원(영종)간에 살았던 사람으로 돼 있다. 오거의 글씨는 「험하고 가파르고 갑자기 꺾어지는」 형세를 보이면서도 「글씨의 맺음이 정교하고 원숙해 보는 사람을 감동시킨다」고 평가되고 있다. 「1백50년전」 추정의 오차를 20∼30년으로 본다면 1860년대까지도 생각해볼 수 있다. 이 시기는 대원군이 경복궁 중건에 착수하여 완공을 한 시기와 일치한다. 대원군은 당시 피폐한 재정사정에 비추어 경복궁 중건이라는 대역사를 일으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비판을 무마하기 위해 여러 가지 상징조작을 했다. 그중 하나는 경회루 주춧돌 아래에 「왕궁조영 국조무궁」이라는 글자를 새긴 옥반을 묻어두었다가 우연히 발견해낸 것처럼 하여 경복궁 중건이 선인들의 뜻이라는 식으로 합리화시키려 하기도 했다. 지금의 청와대 주변 터는 본래 경복궁의 후원이었고 암각의새겨진 시기가 경복궁 중건시기와 엇비슷 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천하제일 복지」를 새긴 것은 대원군의 작풍이 아닌가 하고 추측해 봄직하다. 지난 25일 준공식이 있던 날 다과회석상에서 노태우 대통령은 『신축공사를 하기 전에는 이 주변이 바위와 계곡으로 돼 있어 과연 집터가 나오겠느냐고 생각했는데 다 짓고 보니 집터가 훌륭하다』면서 『「천하제일복지」라고 새겨져 있는 바위가 발견될 때만 해도 집터로서 정말 모양이 갖춰지겠느냐고 의아해 했다』고 술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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