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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해영의 쿠이 보노] 지정학의 귀환?/한신대 교수

    [이해영의 쿠이 보노] 지정학의 귀환?/한신대 교수

    7월 말 미국의 ‘포린어페어’지에 실린 글이 시선을 끌었다. 글쓴이가 전직 주한미군사령관과 한미연합사 부사령관 등이기 때문이다. 한미 양국의 전직 고위 장성 출신이 직접 나서 북한 문제에 대한 구상을 밝혔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히 흥미롭다. 글제 또한 얼마나 도발적이고 신선한가. ‘북한을 동맹으로 만들자.’ 기고자 가운데 임호영 전 연합사 부사령관은 어떤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다. “궁극적으로 북한을 동맹이 주도하는 질서에 끌어들이겠다는 것이다. 이 문제를 놓고 브룩스 사령관과 몇 차례 토의를 했다. 우리가 군인이지만 전쟁하지 않고 중국에 경제적 의존도가 높은 북한이라는 체제를 우리 측으로 끌어들이면 핵 문제와 통일, 북한 동포의 생활 문제 등을 궁극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큰 전략적 목표를 그렇게 잡은 것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단순한 비핵화가 아니라 사실상 통일된 거나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물론 과정이 지난할 것이다.” 2018년 6월 12일 김정은ㆍ트럼프 콤비의 싱가포르선언 직후 나는 공교롭게 이런 논평을 한 적이 있다. “6ㆍ12는 이러한 이른바 아시아 회귀, 전략적 리밸런싱이라는 판을 흔드는 대형 이벤트다. 그래서 주류의 역습도 만만치 않을 거다. 미 주류로선 앞으로 6ㆍ12를 깨거나, 아니면 여기에 적응하는 경로 외에 없어 보인다. 후자의 경우 과거 키신저가 그랬듯 중국을 견제ㆍ봉쇄하기 위해 북과 중을 분리·견인하는 지정학적 신사고도 선택지의 하나다. 미국에게 북한이 간절해지는 데 비례해 한미동맹과 주한미군의 미래가 결정될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 ‘북과 중을 분리’하고 북을 아방(我方)으로 ‘견인하는 지정학적 신사고’라면 저 케케묵은 군사동맹도 미래가 있지 않은가. 여기서 두 가지 역사적 사건의 언급이 필요하다. 첫째, 베트남 통일 이후 미국과 베트남 관계 정상화에는 근 30년이 걸렸다. 1973년 파리 평화협정 이후 베트남이 공산화된 뒤 미국의 베트남 봉쇄는 1995년 클린턴 대통령 때 비로소 해제된다. 양국의 경제관계는 국교 정상화 이후 21세기 들어서야 본격화된다. 양국 관계의 급진전 배경엔 중국의 부상과 미국의 대중 견제 전략으로 베트남의 지정학적ㆍ전략적 가치 상승이 있었다. 베트남이 중국의 남진을 견제하는, 그래서 미ㆍ베트남 사이엔 사실상 유사동맹 관계가 조성된 것이다. 둘째는 미중 관계다. 미중은 한국전쟁의 교전 당사자들이었다. 양국 간 적대 관계는 특히 1960년대 초 중국이 핵개발에 나섰을 때 미국이 선제공격을 검토했을 정도였다. 그런데 세계 외교사에는 ‘닉슨 중국에 가다’ 혹은 ‘닉슨 중국에’(Nixon to China)라는 숙어가 있다. 공화당의 강경우파였던 닉슨이 공산주의 중국과의 관계 정상화에 나섰다는 사실, 즉 이념적으로 아무리 멀다 해도 국익을 위해 적과의 동침도 마다하지 않는 국제 관계의 속성을 이르는 말이다. 그래서 닉슨과 그의 안보보좌관 키신저가 대중 관계 정상화에 나선 데에는 중소 분쟁을 활용, 중소를 분리해 소련을 고립시키고, 또 중국을 지렛대로 베트남과의 휴전협상을 가속화시키기 위한 거시 전략적ㆍ지정학적 계산이 작용하고 있었다. 요컨대 미·베트남 관계의 정상화는 중·베트남 분쟁을 활용하려는, 미중 관계의 정상화는 중소 분쟁을 활용하려는 미국의 전략적 이익과 판단이 가장 중요한 기저 동인 중 하나였다는 말이다. 이이제이책(以夷制夷策)이라고 해도 될 이 공식에 따라 보자면 북중을 이간, 틈을 벌려 이 틈새에 자본을 부어 굳힌 뒤 북을 한미동맹 쪽으로 떼어 붙이자는 방도는 지금까지 별무신통했던 낡은 ‘레짐 체인지’론의 새로운 변주로 볼 여지는 차고 넘친다. 작년 12월 미 초당적 재야·재조 아시아통들이 공동의 연구 성과를 묶어 발표하는 이른바 ‘아미티지-나이 보고서’ 2020년판이 나왔다. 지금까지의 경험에 비추어 이 보고서는 미국의 동아시아 초당 외교의 밑그림이라 볼 만하다. 이번 보고서에서 특히 눈을 끄는 대목은 글로벌 앵글로색슨 군사동맹 네트워크인 ‘파이브 아이스’(Five Eyes: 미, 영, 호주, 뉴질랜드, 캐나다)에 일본을 넣어 ‘식스 아이스’로 재편해 일본 리더십하에 동아시아 반중 질서를 구축하자는 것이다. 이 보고서상 주적은 의연 중국이며, 부적(副敵)은 북이라 할 만하다. 따라서 주부(主副)를 갈라 수단 불문하고 북핵만 제거하면 중의 고립은 따 놓은 당상이라는 발상이 그저 또 하나의 미국몽(夢)으로 끝날지 자못 경계하면서 살필 일이다.
  • ‘미중 데탕트 설계사’ 키신저의 경고 “미중 대화 않으면 전쟁날 수도”

    ‘미중 데탕트 설계사’ 키신저의 경고 “미중 대화 않으면 전쟁날 수도”

    중국을 국제사회로 끌어낸 ‘1등공신’으로 평가받는 헨리 키신전(98) 전 미 국무장관이 “미중이 대화를 하지 않으면 전쟁 등 파국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11일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에 따르면 키신저 전 장관은 지난 9일 중국 정부가 마련한 ‘베이징 비밀 방문’ 50주년 기념식에서 미중 두 나라가 진지한 대화에 나설 것을 촉구했다. 그는 정확히 50년 전인 1971년 7월 9일 극비리에 베이징을 방문해 저우언라이 중국 총리와 회동하고 이듬해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방중을 성사시켰다. 미국에서는 키신저 전 장관의 영향력이 크게 줄었지만 중국은 여전히 그를 ‘미중 화해 설계사’로 여기며 높게 평가한다. 중국 정부는 지난 9일 베이징에서 ‘시진핑의 오른팔’로 불리는 왕치산 국가 부주석의 주재 아래 기념 행사를 가졌다. 미중 각계 인사 300명 이상이 온·오프라인으로 참석했다. 여기서 키신저 전 장관은 화상으로 “1971년 이래 두 나라가 협력해 왔다. 중국의 지정학적 영향력이 더 커진 지금 양국의 협력이 더욱 중요해졌다”며 “미중이 대화를 통해 현재의 긴장국면을 해소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양국 대화의 근본조건은 미국이 대만을 중국의 일부로 간주하는 것에서 출발한다”며 “미국이 대만 독립을 지지하면 안 된다”고 덧붙였다. 이어 “양국이 진지한 대화에 나서지 않으면 전쟁이 발발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왕 부주석도 이날 기념식에서 “미국의 가장 큰 적은 중국이 아니라 미국 자신임을 직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미중 관계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며 “진지한 대화로 갈등을 풀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중국의 발전은 전 세계의 기회이며 중미는 반드시 함께 발전해야 한다”며 “양국은 상호 존중하며 구동존이(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같은 점을 찾는 것)를 통해 상호 주권을 존중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베이징 류지영 특파원 superryu@seoul.co.kr
  • [임병선의 메멘토 모리] 이라크의 위험 과장해 전쟁 몰아간 럼즈펠드

    [임병선의 메멘토 모리] 이라크의 위험 과장해 전쟁 몰아간 럼즈펠드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 시절 국방장관을 지내며 이라크 전쟁과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이끈 도널드 럼즈펠드가 세상을 등졌다. 향년 88.  AP통신 등 외신에 따르면 유족들은 30일(현지시간) 성명을 내고 럼즈펠드 전 장관이 세상을 떠났다면서 “우리는 그의 아내, 가족과 친구들에 대한 변함없는 사랑, 그가 나라를 위해 헌신한 삶의 진실함을 기억할 것”이라고 밝혔다. 고인은 뉴멕시코주 타오스에 있는 자택에서 눈을 감았다고 영국 BBC는 전했다. 부시 전 대통령은 부음을 접한 뒤 고인이 책임을 회피하지 않으려 했으며 “모범적인 공직자였으며 진짜 좋은 남자였다”고 안타까움을 표했다.  럼즈펠드는 1975~1977년 제럴드 포드 행정부, 2001~2006년 부시 행정부에서 국방부 장관으로 일했다. 2004년 미군의 이라크 수감자 학대가 드러나 사의를 표했지만 부시 전 대통령은 신임했다. 그러다 민주당이 의회를 장악한 2006년 11월 부시는 럼즈펠드의 사의를 받아들였고 다음달 퇴임했다.  미국 국방장관을 두 차례 역임한 것은 그가 유일했다. 첫 재임 때는 43세로 역대 최연소였고, 두 번째 재임 때는 최고령 장관이었다. 1988년 공화당 대통령 후보 지명을 위해 나서기도 했다. 백악관 비서실장, 대통령 고문,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대사, 일리노이주 하원의원, 중동 특사 등 다양한 역할을 다해봤다.  성격이 많이 다른 두 대통령을 무리 없이 보좌하며 워싱턴 정가에서 오래 살아 남았다. 일부에서는 반대파를 속여먹기도 잘하고 더할 나위 없는 워싱턴 인사이더이며 “생존능력 슈퍼 갑”이란 평판을 들었다.  특히 부시 행정부 시절 미국의 이라크 전쟁과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이끌었다. 로이터 통신은 럼즈펠드가 이라크 전쟁의 주요 설계자였다고 전했다.  BBC는 그의 장관 재임 기간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으로 2002년 기자회견장에서의 발언을 꼽았다. 그는 대량살상무기와 사담 후세인을 연결하는 증거가 부족하다는 질문에 “뭔가가 일어나지 않았다는 보고는 항상 내 관심을 끈다”며 “왜냐면 (정보에는) ‘안다는 것을 아는 것’(known knows),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known unknowns), ‘모른다는 것조차 모르는 것’(unknown unknowns)들이 있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9·11 테러로 미국이 준비되지 않은 전쟁으로 끌려들어간 점을 받아들이더라도 아프간 탈레반 정권을 무너뜨린 미국은 9·11과 아무런 상관 없는 이라크로 눈을 돌린 것은 엄청난 실수였다. 2003년 3월 이라크 침공에 앞서 그는 행정부 안에서 가장 앞장 서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가 세계평화에 위험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막상 이라크를 침공한 뒤 보니 그런 살상무기는 존재하지 않았다. 미국이 쓸데없이 이라크전쟁을 벌여 자원과 관심을 낭비하는 동안, 아프간 탈레반 정권은 다시 힘을 추스렸고, 그 결과 미군은 현재 아프간 완전 철수를 눈앞에 두고 있다.  하지만 그가 매파이며 네오콘(신보수주의자)의 ‘얼굴’이었으며 가차 없다고 비판하는 이들조차 마키아벨리 같은 면모, 전쟁 기획 능력 만큼은 높이 샀다.  럼즈펠드는 백악관 비서실장으로 일하던 1974년 포드 대통령을 수행해 방한하고 두 번째 국방장관 임기 중인 2003년과 2005년에도 한국을 찾았다. 퇴임 후 회고록에서 외교적, 경제적 대북 압박을 통해 북한내 군부가 김정일 체제를 전복하도록 나서게 유도하는 방안을 구상했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1932년 7월 9일 시카고에서 태어난 그는 2차 세계대전에 해군으로 자원했으며 부동산 영업사원으로 일한 아버지 밑에서 자라났다. 레슬링을 무척 좋아했으며 이글 스카우트에 가입했다. 프린스턴대학에서 해양학을 전공한 뒤 부친처럼 자원해 1954년부터 1957년까지 항공대 교관으로 일했다. 전역한 뒤 워싱턴 DC로 와처음에는 하원의원 보좌관으로 일하다 1962년 직접 일리노이주 하원의원에 선출됐다.  1969년에 의원 직을 그만 두고 리처드 닉슨이 만든 경제기회청을 이끈 뒤 1973~74년 NATO 미국 대사 등 행정부 내 여러 요직을 경험했다. 닉슨이 워터게이트 파문으로 물러나자 포드 전 대통령의 인수위원장을 맡은 뒤 백악관 비서실장으로 영전했다. 그는 핵잠수함 트라이던트 건조 과정을 총괄했고, 대륙간탄도미사일 피스키퍼 MX 개발을 주도했다,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의 전략무기감축협상(SALT II)을 놓고 옛 소련과 마주했다.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 집권하자 장관 직에서 물러나 일이 있을 때만 행정부 일을 거들었다.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에 의해 중동 특사로 임명되기도 했다. 제약사 GD Searle & Co의 임원을 지낸 뒤 전자업체 제너럴 인스트루먼트의 최고경영자(CEO) 겸 회장을 거쳐 다시 제약사 길리어드 사이언스에 취직했다.  1998년 의회의 초당파 위원회를 이끌어 미국에 닥친 유도미사일 위협을 평가하는 일을 맡았는데 옛 소련 붕괴로 북미 대륙이 직접 위협을 당할 여지가 없다는 빌 클린턴 행정부 정보기관들의 평가와 충돌하는 보고서로 갈등을 빚었다. 이란과 이라크, 북한 등 잠재적인 적국들의 미사일 제조 능력을 5년이면 완전히 파괴할 수 있다고 본 반면 정보기관들은 15년은 족히 걸릴 것이라고 예측했다.  부시 전 대통령이 불러 국방장관을 다시 맡은 그에겐 콜린 파월 국무장관, 딕 체니 부통령이란 만만찮은 인물들이 포진해 있었다. 둘은 민간이 조금 더 펜타곤을 통제해야 한다고 생각한 반면 럼즈펠드는 오히려 군이 더 일사불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9개월도 안돼 9·11 테러가 발생해 논쟁은 무의미해졌다.  그는 그날 아침 하원의원들과 미사일 방어망 예산 지원 방안을 논의하고 있었다. 펜타곤이 항공기 테러의 타깃이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떠나지 않았다. 오히려 항공기 추락 지점을 찾았다. 그가 들것에 누군가를 눕히는 것을 돕는 모습이 CNN 카메라에 잡혔다. 그 뒤 청사 안에 들어가 공동 대응을 지휘했다.  나중에 기밀 해제된 메모에 따르면 벌써 그는 이 무렵에 오사마 빈 라덴 뿐만 아니라 후세인의 이라크를 공습으로 보복하겠다고 생각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한달도 안된 10월 7일 미군은 알카에다와 탈레반 공습에 나섰다. 곧이어 지상 작전이 개시됐다. 그리고 이 전쟁을 채 마무리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갑자기 이라크를 침공했다. 그 역시 당시 메모에 “길고 어려운 진창”이 기다리고 있다고 적었는데 현재 아프간이나 이라크 상황은 그 예감이 틀리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두 차례나 사의를 표했는데도 변함없이 지지하던 부시 전 대통령은 재선된 뒤 아버지 조지 HW 부시 전 대통령이 럼즈펠드를 “버릇없는 녀석”이라고 표현하며 그가 아들의 대통령 직을 망친다고 말하더라며 사의를 받아들였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고인은 2011년 회고록에서 전쟁 관리에 최선을 다했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몇 가지 발언에 문제가 있었으며 이라크에 더 많은 병력을 파병했어야 했다는 점을 실책으로 인정했다.  2013년 아카데미상을 수상한 에롤 모리스가 그를 소재로 다큐멘터리 영화 ‘The Unknown Known’을 만들었다. 모리스는 로버트 S 맥나마라 전 국방장관처럼 냉전의 환상에 찌든 사람으로 생각하고 제작에 임했는데 럼즈펠드와 33시간 인터뷰를 한 결과 이라크전쟁이 왜 일어났는지에 대해 더욱 모르게 됐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루이스 캐럴의 고전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 중에 체셔 캣이란 등장인물을 만난 것처럼 혼란스러웠다고 비유했다.  모리스는 일간 뉴욕 타임스(NYT)에 기고한 글을 통해 “이 할배가 뭔가를 숨기지 않으려 한다는 것이 놀라울 정도로 의심스러웠다. 이 할배는 완전 자기만족에 사로잡혀 있으며 그의 뒤에는 아무것도 없었다”고 갈파했다.
  • 中 공산당 두 얼굴… 경제 기적·인권 탄압, 세계를 놀라게 하다

    中 공산당 두 얼굴… 경제 기적·인권 탄압, 세계를 놀라게 하다

    “나는 공산주의를 위해 평생을 분투하겠습니다. 당을 영원히 배신하지 않겠습니다.” 중국 상하이의 도심 한복판에 자리잡은 공산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 기념관. 중국 공산당 100년의 역사가 시작된 발원지로 ‘혁명성지’다. 공산당 배지를 가슴에 단 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낫과 망치가 새겨진 공산당기 앞에서 상기된 표정으로 입당 선서를 외쳤다. 이들에게 공산당은 종교와도 같아 보였다. 자신을 당원으로 소개한 중년 여성은 “오늘날 신중국(사회주의 중국)의 기적이 여기서 태동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벅차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제국주의 국가들의 조계지였던 상하이가 100년 뒤 ‘아시아 최고 도시’로 번영을 구가한다는 사실에 감동한 ‘환희의 눈물’이다.그러나 같은 시간 홍콩에서는 ‘침묵’을 강요받고 있었다. 연일 베이징의 강압 통치를 비난하던 빈과일보가 국가보안법(홍콩보안법) 시행 1년(7월 1일)을 일주일 앞둔 지난 24일 폐간됐다. 창간 26년 만이다. 마지막 신문을 사려고 줄을 선 일부 시민은 “지금까지 홍콩보안법으로 100명 넘게 체포됐다. 입을 틀어막는다고 마음속 생각까지 변할 것 같으냐”며 흐느꼈다. 중국 공산당이 기어이 홍콩의 민주주의를 끝장냈다는 ‘분노의 눈물’이었다. 홍콩 민주화 운동을 이끌다가 7개월여 징역형을 마친 뒤 지난 12일 풀려난 아그네스 차우(24)도 “지금부터는 푹 쉬겠다”고만 밝히고 침묵을 지키고 있다. 1921년 7월 23일 상하이의 프랑스 조계지에서 13명의 대표가 붉은 깃발을 내걸고 출범한 중국 공산당은 100년이 지난 지금 9200만명의 당원을 가진 세계 최대 집권 정당으로 거듭났다. 한 정당이 명칭도 바꾸지 않고 혁명당에서 집정당(여당)으로 변신해 100년간 성장한 것은 세계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들다. ‘민주주의만이 경제 번영을 이끈다’, ‘경제 성장이 정치 민주화를 견인한다’는 오랜 통념도 깨뜨렸다. 세계 최장수 공산당인 중국 공산당의 일당체제는 서구 학자들의 생각보다 훨씬 공고했다.하지만 자유와 인권을 중시하는 세계의 흐름을 정면으로 거스르며 권위주의를 강화하고 주민 통제를 확대하는 모습을 보며 그간 중국을 친구로 여기던 주요국들이 하나둘 등을 돌리고 있기도 하다. 중국 공산당은 어떤 성과와 문제를 안고 있을까. 중국의 오늘을 만든 공산당 100년의 ‘빛과 그림자’를 살펴봤다. ●세계 최빈국서 최강국 코앞까지 “인류의 4분의1을 차지하는 중국인들이 일어섰다. 다시는 (외세에) 모욕받지 않을 것이다.” 중국 혁명에 성공한 마오쩌둥(1893~1976) 공산당 주석이 1949년 10월 1일 신중국 건국행사에서 던진 말이다. 중국 공산당은 100년의 부침을 견디며 14억명 인구를 사회주의로 무장시켜 중국을 세계 2위 경제대국이자 3위 군사대국으로 이끌었다. ‘외세에 모욕받지 않겠다’던 마오의 바람은 현실이 됐다. 27일 중국 국가통계국에 따르면 건국 직후인 1952년만 해도 중국의 국내총생산(GDP)은 300억 달러(당시 가격 기준)에 불과해 소련의 원조 없이는 생존이 불가능했다. 그러나 지난해 GDP는 14조 7200억 달러(약 1경 6600조원)로 500배 가까이 불어났다. 이 추세면 2028년쯤 중국은 경제 규모에서 미국을 제치고 세계 1위로 올라선다.주민들의 삶도 극적으로 개선됐다. 지난해 1인당 GDP는 1만 504달러로 ‘중진국’ 대열에 합류했다. 베이징과 상하이, 선전, 광저우 등 14개 도시는 2만 달러를 넘어섰다. 이들 지역의 인구는 약 1억 5000만명이다. 중국인 가운데 10% 넘는 이들이 이미 선진국 수준의 생활을 누린다고 볼 수 있다. 과학기술도 세계 최고 수준에 도달했다. 원자폭탄과 인공위성을 직접 만들고 독자적인 위성위치확인시스템(GPS) ‘베이더우’를 안착시켰다. 인류 최초로 달 뒷면에 창어4호를 보내고 화성에 톈원1호도 착륙시켜 미국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신화통신은 “인류의 역사에서 100년은 한순간처럼 짧다. 그럼에도 중국 공산당은 역사적 전환을 실현했고 세계를 놀라게 한 기적을 창조했다”고 자평했다.1990년대부터 서구에서는 ‘주민들의 민주화 요구로 중국 공산당도 곧 무너질 것’, ‘중국 국영기업 부채 거품이 터져 외환 위기에 빠질 것’ 등 다양한 붕괴론이 쏟아졌다. 하지만 중국은 이런 예측을 비웃듯 3조 달러가 넘는 외환 보유고를 과시하며 한발씩 초강대국의 길로 나아가고 있다. 이코노미스트는 전 세계 공산당 가운데 중국이 유일하게 성공한 이유로 ‘이데올로기의 유연성’을 꼽았다. 덩샤오핑(1904~1997)이 극좌 세력의 반발을 물리치고 사회주의 국가 중 처음으로 자본주의를 도입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문일현 중국정법대 교수는 “엘리트들의 치열한 학습과 경쟁, 정책 노선이 정해지면 끝까지 밀어붙이는 추진력이 최빈국이던 중국을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강국으로 끌어올렸다. 중국 공산당의 성과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인권 탄압에 전 세계 ‘반중 정서´ 확산 반면 중국 공산당은 부정부패와 인권 탄압, 감시 강화 등 상당한 문제도 노출하고 있다. 일당 독재가 고착화되면서 인허가를 성사시키려면 공산당원에게 상상을 초월하는 액수의 뇌물을 제공하는 것이 관행이 됐다. 공산당원이 되지 못하면 승진과 출세도 힘들어졌다. ‘모두가 평등해야 할’ 사회주의 국가에서 공산당원은 특권계급이 됐다. 홍콩 명보에 따르면 전 세계가 인터넷으로 하나가 된 지금도 중국 공산당은 강력한 통제로 표현의 자유를 차단한다. 웨이보(중국판 트위터)나 위챗(중국판 카카오톡) 등에 중국 공산당을 비판하는 글이 올라오면 해당 내용은 곧바로 삭제된다. 글쓴이도 경찰에 불려가 조사를 받는다. 알리바바 창업자 마윈의 사례를 봐도 알 수 있듯 누구든 중국 정부의 관행을 비난하려면 장기간 고초를 겪을 각오를 해야 한다.‘중국 공산당은 첨단 정보기술(IT)로 끊임없이 자국민과 이웃 국가를 염탐하고 사생활을 들여다보려고 한다’는 의구심이 퍼지면서 국제사회의 반감도 사상 최고치로 치솟았다. 실제로 올해 3월 여론조사기관 갤럽이 발표한 설문 조사에 따르면 미국인에게 ‘가장 큰 적이 누구냐’고 묻자 45%가 중국을 꼽았다. 1년 만에 두 배나 늘어난 수치다. 지난해 퓨리서치센터가 한국과 영국, 호주 등 14개 선진국 주민을 대상으로 한 여론 조사에서도 모든 나라 응답자의 절반 이상이 ‘중국을 싫어한다’고 답했다. 지난해 코로나19 확산 이후 일부 국가가 ‘중국 책임론’을 거론하자 ‘우리보다 힘이 없으면 도발하지 말라’는 식으로 상대국을 윽박지르는 ‘전랑(늑대전사)외교’가 반중 정서에 기름을 부었다는 평가가 많다. 과거보다 나아졌지만 ‘중국 특색 사회주의’가 여전히 개인의 자유와 인권 등 보편적 가치와는 거리가 멀다는 지적도 상당하다. 블룸버그통신은 “시진핑 주석 집권 이후 얼굴인식 감시 기술까지 동원하는 등 정치적 통제가 심해졌다. 중국이 ‘디지털 전체주의 국가’로 퇴행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중국을 국제사회로 끌어낸 일등공신인 헨리 키신저는 저서 ‘중국 이야기’에서 “예로부터 중국의 정치인은 힘의 대결보다는 (바둑에서처럼) 섬세한 전략으로 수싸움에서 이기는 방식을 선호했다”고 분석했다. 중국 공산당에도 이런 섬세함이 필요하다는 지적을 되새길 필요가 있어 보인다. 베이징 류지영 특파원 superryu@seoul.co.kr
  • 황교안 전 대표, 美에서 백신 외교로 대권 행보 본격화

    황교안 전 대표, 美에서 백신 외교로 대권 행보 본격화

    황교안 전 미래통합당(현 국민의힘) 대표가 미국 워싱턴DC에서 커트 캠벨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인도태평양조정관을 만나 1000만명 분의 코로나19 백신 지원을 요청했다. 정부의 백신 수급이 불안정하다는 판단 하에 야당의 인적 네트워크를 백신 지원에 활용하며 야권 대권주자 행보를 본격화한 것이다. 황 전 대표의 요청에 캠벨 조정관은 “한미동맹에 입각해 최대한 노력을 기울이겠다”고 답했다. 황 전 대표는 지난 5일부터 13일까지 7박 8일 일정으로 워싱턴DC를 방문 중이다. 기관장 및 고위급 면담을 위해 미 국무부, NSC, 연방 의회, 국제전략문제연구소(CSIS), 미 상공회의소 등을 방문하는 것이 주요 일정이다. 황 전 대표 측 관계자는 “한미동맹의 정상화 및 현대화를 통해 쿼드(미·일·호주·인도 4개국 협의체) 동맹 참여 등 북핵 안보문제, 북한 인권 문제를 진단하기 위한 일정”이라면서 “특히 코로나 백신 확보에 노력하기 위한 것”이라고 전했다. 황 전 대표는 특히 미 정·재계 인사들에게 코로나19 백신 지원 요청을 집중적으로 했다고 한다. 주요 백신을 생산하는 글로벌 제약업체 최고위급 임원도 직접 만나 백신 공급을 요청한 것으로 전해졌다. 황 전 대표 측은 “연방의원들로부터 미국 내 주요 업체가 생산한 충분한 여분의 백신이 남아있음을 확인했다”면서 “황 전 대표가 백신 스와핑에 관련해 우리나라의 우수한 생산역량에 대해서도 강조했다”고 밝혔다. 또 황 전 대표는 헨리 키신저 전 국무부 장관 등 국제관계, 한반도 문제에 관한 전문가들도 잇달아 면담했다. 황 전 대표는 미국에서 ‘한미동맹의 정상화 및 현대화’ 구상도 밝혔다. 아울러 북한 인권 이슈와 관련해 인권 단체 관계자 등과도 만났다. 지난해 총선 이후 1년 동안 ‘반성과 성찰의 시간’을 보낸 황 전 대표는 지난달 재보궐선거를 계기로 공개 정치활동을 재개했다. 다음달 전당대회 이후 야권에서도 대권 레이스가 가시화될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정계에 복귀한 것이다. 귀국 후 자가격리가 끝난 뒤 본격적으로 대권 도전 의사와 함께 다듬어온 국가비전을 밝힐 것으로 관측된다. 앞서 황 전 대표는 지난 4일 서울신문 인터뷰에서 “국민과 함께 초일류 정상국가를 만들어가고 싶다”면서 사실상 대권 도전을 암시했다. 강병철 기자 bckang@seoul.co.kr
  • 이민자 초상화 그린 부시… “美, 나와 미셸 우정에 놀랄 만큼 분열”

    이민자 초상화 그린 부시… “美, 나와 미셸 우정에 놀랄 만큼 분열”

    “조지 W 부시와 미셸 오바마가 친구가 되는 것을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미국이 양극화된 것이 문제입니다.” 퇴임 후 초상화 화가로 변신한 조지 W 부시(74) 전 미국 대통령이 18일(현지시간) CBS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조 바이든 대통령의 ‘포용적 이민제도’를 옹호하면서 꺼낸 말이다. 그는 자신의 화집 ‘여럿으로 이루어진 하나: 미국 이민자들의 초상’ 발간을 계기로 텍사스 크로퍼드 목장에 있는 자신의 화실 ‘스튜디오43’에서 인터뷰에 응했다. 부시는 진행자가 2016년 ‘국립 흑인역사문화 박물관’ 개관식에서 미셸 오바마가 자신과 포옹한 것을 언급하자 “빅 허그(큰 포옹)였다. 하지만 (우리 우정이) 더 유명해진 건 존 매케인 의원의 장례식에서 내가 그에게 사탕을 주었을 때”라고 답했다. 이어 “미국은 미셸 오바마와 내가 친구가 될 수 있다는 것에 매우 놀랐다”고 말한 뒤, 이를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미국이 양극화된 게 오히려 문제라고 지적했다. 부시는 의회에 “이민에 대한 가혹한 언급이나 정치적 점수를 따려는 계산은 접어 둬라. 이민자를 존중하는 분위기를 조성하고 (이민) 제도 개혁으로 이어지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그는 2006년 5월 15일 집무실에서 “우리는 이민자의 나라”라고 연설하며 이민법 개정을 주창했으나 이후 변한 것은 없었다. 15년이 지나 바이든은 또다시 불법 체류자에 대한 시민권 부여, ‘불법 체류 청년 추방 유예 제도’(DACA) 강화 등을 추진하고 있다. 부시는 자신의 재임 중에 이민 제도 개혁을 이루지 못한 것을 후회한다며 바이든의 이민 정책을 지지했다. 그의 후임자인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이민자는) 약물과 범죄를 가져온다”며 공포를 부추기는 식으로 반이민 정책을 펼쳤다. 부시는 “이민 문제는 많은 두려움을 일으킬 수 있다”며 “하지만 난민이나 피해를 입거나 겁에 질린 사람들을 기꺼이 수용하는 게 위대한 국가이며, 그게 미국”이라고 했다. 이를 반영하듯 부시의 화폭에는 독일계인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이나 이름 모를 이민자들이 동등한 크기로 담겨 있었다. 부시는 지난 16일 워싱턴포스트 기고에서도 “재능 있는 사람들이 그들의 아이디어와 포부를 가져올 때 미국은 더 번영할 수 있다”며 이민에 대한 과거 미국의 시각을 환기시켰다. 그는 “우리는 항상 공정함과 관대함을 지향해 왔다”며 “그 보상은 자신의 선택으로 이주해 온, 열심히 일하고 자립적이며 애국적인 미국인들”이라고 했다. 워싱턴 이경주 특파원 kdlrudwn@seoul.co.kr
  • 화가로 변한 부시 “나와 미셸의 우정이 이상할만큼 美 분열”

    화가로 변한 부시 “나와 미셸의 우정이 이상할만큼 美 분열”

    이민자 초상화 담은 화집 발간 인터뷰“이민법 개혁 못한 게 가장 큰 후회”“난민들을 받아들여야 위대한 국가”“조지 W 부시와 미셸 오바마가 친구가 되는 것을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양극화된 것이 문제입니다.” 퇴임 이후 초상화 화가로 변신한 조지 W 부시(74) 미국 대통령이 18일(현지시간) CBS와의 인터뷰에서 조 바이든 대통령의 이민제도를 옹호하면서 꺼낸 말이다. 그는 화집 ‘여럿으로 이루어진 하나: 미국 이민자들의 초상’(Out of Many, One:Portraits of America‘s Immigrants) 발간을 계기로 자신의 텍사스 자택에 마련한 자신의 화실 ‘스튜디오43’에서 인터뷰를 했다.부시는 진행자가 2016년 ‘국립 흑인 역사 문화 박물관’ 개관식에서 미셸 오바마가 포옹한 것을 언급하자 “(우리 우정이) 더 유명해 진 건 존 매케인 의원의 장례식 때 내가 그에게 사탕을 주었을 때”라고 답했다. 이어 “미국은 미셸 오바마와 내가 친구가 될 수 있다는 것에 매우 놀랐다”고 말한 뒤, 이런 종류의 우정을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미국이 양극화된 게 오히려 문제라고 지적했다. 또 부시는 재임 당시 이민 제도를 개혁하지 못한 것이 자신의 가장 큰 후회 중 하나라고 전했다. 그는 2006년 5월 15일 자신의 집무실에서 “우리는 이민자의 나라다”라고 연설하며 이민법 개정을 주창했다. 진행자가 “15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이민법 개혁은) 끝나지 않았다”고 하자 부시는 “의회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답했다. 그는 “이민 논쟁의 문제는 많은 두려움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라며 “하지만 난민이나, 피해를 입거나, 겁에 질린 사람들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나라가 위대한 국가이며, 미국은 위대한 국가다“라고 했다. 이를 반영하듯 부시는 화집에 독일계인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부터 멕시코, 르완다 등에서 온 이름 모를 이민자까지 모두를 동등한 크기로 화폭에 담았다. 부시는 자신의 후임인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은 삼갔지만 “우리는 (지난 4년 동안) 겸손함이 부족했다”고 선을 그었다. 이어 자신이 몸담았던 공화당이 아닌 민주당 소속인 바이든 대통령의 포용적인 이민 정책에 대해 지지를 표명했다. 바이든은 불법체류자에 대해 8년 이내에 시민권 취득 자격을 부여하는 법안을 추진 중이다. 부시는 지난 16일 워싱턴포스트(WP) 기고에서도 “(이민 문제에 대한) 초당적 개혁이 가능하다”며 “이민은 문제나 불화의 원천이 아니라 미국의 거대하고 정의로운 자산”이라고 주장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중단했던 ‘불법 체류 청년 추방 유예 제도’(DACA)를 부활시키려는 바이든의 행보에도 찬성했다. 트럼프가 단속 위주로 운영했던 국경 관리에 대해서도 “효과적인 국경 관리는 국경 너머에서 시작된다”며 “우리는 이웃 국가와 협력해 자유와 기회를 만들고, 그곳의 시민들이 가정에서 번창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외 부시는 기고에서 “재능 있는 사람들이 그들의 아이디어와 포부를 이곳으로 가져올 때 미국은 더 번영할 수 있다”며 과거 미국이 이민을 바라보던 시각을 불러왔다. 그는 “우리는 항상 공정함과 관대함을 지향해왔다”며 “그 보상은 선택으로 이곳에 온, 열심히 일하고 자립적이며 애국적인 미국인들”이라고 했다. 워싱턴 이경주 특파원 kdlrudwn@seoul.co.kr
  • [김종대의 한반도 시계] 한계를 넘어야 할 새로운 대북 전략

    [김종대의 한반도 시계] 한계를 넘어야 할 새로운 대북 전략

    바이든 정부의 새로운 대북 정책이 예고됐다. 지난 19일 토니 블링컨 국무부 장관 지명자는 상원 인준 청문회에서 대북 정책을 “전면적으로 재검토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사흘 후인 22일에는 젠 사키 백악관 대변인도 북한에 대한 “새로운 전략”을 언급했다. 새로운 전략이 무엇인지 구체적인 언급은 없다. 사키 대변인의 발언만 보면 바이든 정부는 트럼프 정부와 마찬가지로 북한의 핵 문제를 최우선의 문제로 인식한다는 점, 북한에 대해 압박과 외교를 병행한다는 점에서는 같다. 그런데도 굳이 새로운 전략이라고 강조한 걸 보면 트럼프처럼 북한과 정상회담을 서두르지 않고 동맹국과 협력해 점진적이고 단계적으로 북핵 문제에 아래로부터 접근하는 방식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여기에는 낙관적 시나리오와 비관적 시나리오가 있다. 먼저 비관적인 시나리오로 일찍이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이 제시한 바 있는 ‘핵 군축의 해법’이다. 최근 월스트리트저널이 전한 바이든 측 인사들의 언급은 “북한에 핵무기를 포기하라고 설득하기에는 이미 늦었다”는 것이다. 이런 인식은 북한 비핵화는 당장 실현 가능성이 없는 장기적인 목표이므로 지금은 북한의 핵을 관리하면서 위협이 더 악화되지만 않도록 관리하자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더 나아가 북한 핵을 동결하거나 북한 핵무기의 상한선을 설정하는 “핵 군축 협상”도 고려해 볼 만하다는 주장도 덧붙여진다. 굳이 북한 비핵화라는 최종 목표만 고집할 필요가 없다면서 중간 목표인 핵 군축을 위해서라면 한미 군사훈련 중지나 전략자산 한반도 반입 금지 등 무엇이든 협상의 카드로 활용할 수 있다고 본다. 반면 핵 군축이 여의치 않다면 미사일방어체계(MD)를 비롯한 첨단 전략자산으로 북한의 핵위협을 억지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런데 핵 군축 구상은 일본이 가장 강력하게 반발할 것이고 한국 역시 선뜻 응하기가 어렵다. 검토는 가능하지만 미 정부가 공식화하기는 당분간 어려울 것이다. 미국이 북한의 핵을 용인하는 굴욕적 상황을 인정하는 시나리오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낙관적인 시나리오를 검토해 볼 만하다. 문재인 대통령은 신년 기자회견에서 “북한의 비핵화 의지는 분명하다”고 밝힌 바 있다. 경제 위기에 처한 북한은 안전만 보장된다면 경제에 전념하는 길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비핵화의 전망은 충분히 낙관적이다. 북한의 젊은 지도자가 명예롭게 비핵화의 길에 나올 수 있도록 경제제재 완화, 북미 연락사무소 개설 등 매력적인 대안을 제시하고, 궁극적으로는 한반도 평화체제를 구축해야 한다는 평화 프로세스가 대안이다. 그렇다면 문재인 정부에서 추진하는 경항공모함 건조, 핵 추진 잠수함 도입, 탄두 중량 무제한의 미사일 개발, 잠수함발사미사일(SLBM) 개발, 한국형 미사일방어체계 구축 등은 도대체 무엇인가. 북한이 이에 반발하며 남한을 표적으로 한 전술 핵미사일 개발을 공언하는 상황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게다가 그 누구도 북한에 대한 경제제재를 말하고 있지 않고, 바이든 정부도 압박은 지속된다고 말하고 있다. 현실이 비관적으로 흐르는 상황에서 바이든 정부는 문재인 대통령의 낙관론에 귀를 기울이겠지만 설득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라고밖에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새로운 전략이란 무엇이어야 하는가. 북한 비핵화라는 편협한 목표를 초월해 동북아시아 전체의 평화와 안정이라는 영역으로 시야를 확장해야 한다. 북한에 대해서는 더 크고 담대하고 적극적인 평화 공세를 전개하면서 한반도 주변 지역을 비핵지대로 전환하는 안전보장 체제, 즉 ‘동북아판 헬싱키 체제’를 설계하면 어떨까? 미국은 중국 견제를 위한 한미일 삼각안보체제를 강화하려는 인도·태평양 전략을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북한 핵 문제 해결을 더욱 어렵게 한다. 미 평화연구소 수석대북전문가 프랭크 아움은 남북미에 중국을 포함한 4자 협의체를 대안으로 제시한다. 단순히 한반도에 갇힌 핵 문제를 넘어 넓은 국제질서에서 갈등을 녹여 버리자는 이 발상은 주목할 만하다. 중견국가 대한민국은 대륙과 해양의 교량 역할을 하는 평화 선도 국가로서 이제는 지역의 평화를 말해야 한다. 평화의 당사자로서 우리는 충분히 그럴 능력과 자격을 갖추었다.
  • 한반도 평화프로세스 재생 나선 투톱… 바이든과 호흡은 과제

    한반도 평화프로세스 재생 나선 투톱… 바이든과 호흡은 과제

    ‘오경화’(5년 내내 강경화)란 말이 회자되던 강경화 외교부 장관이 물러나고, 문재인 정부의 새 외교사령탑에 정의용(75·외시 5회) 전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이 지명됐다. 문 대통령은 또 외교·통일정책을 담당하는 청와대 국가안보실 2차장(차관급)에 ‘미국통’ 김형진(60·외시 17회) 서울시 국제관계대사를 임명했다. 미국의 조 바이든 행정부 출범과 맞물려 외교안보라인을 재편하는 동시에 멈춰 선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를 재개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담은 것으로 풀이된다. 문화체육관광부(황희 의원·54)·중소벤처기업부(권칠승 의원·56) 장관과 함께 발표된 개각에서 가장 눈에 띈 인선은 정 후보자의 발탁이다. 정 후보자는 외교부 통상국장, 주미공사, 주제네바대표부 대사 등을 거친 정통 외무 관료로 문재인 정부 출범과 함께 3년간 국가안보실장으로 외교안보 컨트롤타워를 맡아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에 깊숙하게 관여했다. 특히 2018년 3월 ‘한반도의 봄’ 당시 평양과 워싱턴을 오가며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역사적인 1차 북미 정상회담을 매개해 ‘한국의 키신저’라는 별명을 얻었다. 3차 남북 정상회담을 앞둔 9월에도 평양을 찾아 김 위원장에게 문 대통령의 친서와 함께 트럼프 대통령의 메시지를 전했다. 정 후보자의 지명이 “바이든 정부의 외교정책에서 (북미 대화가) 우선순위를 가질 수 있도록 교류를 강화하겠다”(18일 신년 기자회견)던 문 대통령 발언의 연장선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정 후보자가 두 차례나 특사로 평양을 방문, 북한 최고위층과 소통했던 점을 감안하면 ‘인사’를 통해 북한에 메시지를 보낸 것으로도 읽힌다. 문 대통령은 신년회견에서 “김 위원장의 평화에 대한 의지, 대화에 대한 의지, 비핵화에 대한 의지는 분명히 있다고 생각한다”며 남북 관계 복원 의지를 거듭 피력했다. 정만호 청와대 국민소통수석은 브리핑에서 “정 후보자는 안보실장으로 재임하면서 한미 간 현안을 협의·조율하고 한반도 평화프로세스 실행을 위한 북미 협상, 비핵화 등 주요 정책에 가장 깊숙이 관여했다”고 설명했다. 정 후보자도 “한반도 평화프로세스가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지명 소감을 밝혔다. 정 후보자가 취임하면 지난해 7월 임명된 서훈 국가안보실장과 박지원 국가정보원장에 이어 문재인 정부 후반기 한반도 문제를 담당할 외교안보팀이 완성된다. 특히 정 후보자와 서 실장은 2018년 3월 각각 안보실장과 국가정보원장으로 함께 평양과 워싱턴을 다녀오는 등 호흡을 맞춘 경험이 있어 ‘외교 투톱’으로 시너지가 기대된다. 역대 최고령 외교장관이 될 예정인 정 후보자가 청와대에서 손발을 맞췄던 최종건 1차관과 외교부에서 재회하면서 향후 북핵 외교에서 외교부에 힘이 실릴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물론 트럼프 대통령의 ‘톱다운’ 방식에 비판적인 바이든 정부가 대북 정책의 전면 재검토를 공식화한 데다 북한도 미국의 양보가 선행돼야 한다는 일종의 ‘전략적 인내’를 표방한 터라 정 후보자 앞에 놓인 상황은 녹록지 않다. 한편, 유일한 원년 멤버였던 강경화 장관의 교체에 대해 강민석 청와대 대변인은 “3년 6개월여를 재직한 강 장관이 심신이 지쳤다면서 지난해부터 사의를 표명해왔지만 만류해오다 바이든 신정부 출범에 맞춰 최종적으로 인사를 단행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형진 신임 차장은 1983년 외무고시에 합격한 뒤 북미국 과장, 주미대사관 공사참사관, 북미 국장을 지낸 손꼽히는 ‘미국통’이다. 박근혜 정부 당시 청와대 외교비서관과 외교부 기조실장, 차관보를 지낸 뒤 주유럽연합(EU) 대사로 재직했다. 청와대 핵심관계자는 “(김 신임 차장은) 한미 현안 및 북핵 문제에 정통하고, 미국에 대한 외교 경험과 전문성을 갖추고 있다”면서 “특히 바이든 부통령 시기 북미국장과 청와대 외교비서관, 차관보를 지내 바이든 인맥과의 연결 채널도 보유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바이든 정부 맞춤형’ 인사란 얘기다. 한때 외교부 장관을 희망했던 것으로 알려진 김현종 현 2차장은 대통령 외교안보특별보좌관에 임명된다. 김 차장은 2년 가까이 재직(2019년 3월~)한 데다 새롭게 짜인 외교안보라인의 ‘케미’까지 감안한 교체로 풀이된다. 김 차장은 재직 중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의 개정, 한미 미사일지침 재협상 타결 등 성과도 적지 않았지만, 강 장관이나 최종건 차관(당시 청와대 평화기획비서관) 등과 불화설이 불거지기도 했다. 그동안 외교안보특보를 정의용·임종석 등 실장급(장관급)이 맡았던 점을 감안하면 청와대가 ‘모양새’를 배려한 측면도 있다. 김 차장은 페이스북에 “미국 뉴욕 촌놈이 존경하는 노무현 전 대통령과 문재인 대통령을 모시며 조국을 위해 헌신했다. 저는 참 운이 좋은 사람”이라며 소회를 밝혔다. 임일영 기자 argus@seoul.co.kr
  • 바이든 취임날 돌아온 ‘한반도의 봄’ 설계자… 외교수장 정의용

    바이든 취임날 돌아온 ‘한반도의 봄’ 설계자… 외교수장 정의용

    ‘오경화’(5년 내내 강경화)란 말이 회자되던 강경화 외교부 장관이 물러나고, 문재인 정부의 새 외교사령탑에 정의용(75·외시 5회) 전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이 지명됐다. 문 대통령은 또 외교·통일정책을 담당하는 청와대 국가안보실 2차장(차관급)에 ‘미국통’ 김형진(60·외시 17회) 서울시 국제관계대사를 임명했다. 미국의 조 바이든 행정부 출범과 맞물려 외교안보라인을 재편하는 동시에 멈춰 선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를 재개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담은 것으로 풀이된다. 문화체육관광부(황희 의원·54)·중소벤처기업부(권칠승 의원·56) 장관과 함께 발표된 개각에서 가장 눈에 띈 인선은 정 후보자의 발탁이다. 정 후보자는 외교부 통상국장, 주미공사, 주제네바대표부 대사 등을 거친 정통 외무 관료로 문재인 정부 출범과 함께 3년간 국가안보실장으로 외교안보 컨트롤타워를 맡아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에 깊숙하게 관여했다. 특히 2018년 3월 ‘한반도의 봄’ 당시 평양과 워싱턴을 오가며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역사적인 1차 북미 정상회담을 매개해 ‘한국의 키신저’라는 별명을 얻었다. 3차 남북 정상회담을 앞둔 9월에도 평양을 찾아 김 위원장에게 문 대통령의 친서와 함께 트럼프 대통령의 메시지를 전했다. 정 후보자의 지명이 “바이든 정부의 외교정책에서 (북미 대화가) 우선순위를 가질 수 있도록 교류를 강화하겠다”(18일 신년 기자회견)던 문 대통령 발언의 연장선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정 후보자가 두 차례나 특사로 평양을 방문, 북한 최고위층과 소통했던 점을 감안하면 ‘인사’를 통해 북한에 메시지를 보낸 것으로도 읽힌다. 문 대통령은 신년회견에서 “김 위원장의 평화에 대한 의지, 대화에 대한 의지, 비핵화에 대한 의지는 분명히 있다고 생각한다”며 남북 관계 복원 의지를 거듭 피력했다. 정만호 청와대 국민소통수석은 브리핑에서 “정 후보자는 안보실장으로 재임하면서 한미 간 현안을 협의·조율하고 한반도 평화프로세스 실행을 위한 북미 협상, 비핵화 등 주요 정책에 가장 깊숙이 관여했다”고 설명했다. 정 후보자도 “한반도 평화프로세스가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지명 소감을 밝혔다. 정 후보자가 취임하면 지난해 7월 임명된 서훈 국가안보실장과 박지원 국가정보원장에 이어 문재인 정부 후반기 한반도 문제를 담당할 외교안보팀이 완성된다. 특히 정 후보자와 서 실장은 2018년 3월 각각 안보실장과 국가정보원장으로 함께 평양과 워싱턴을 다녀오는 등 호흡을 맞춘 경험이 있어 ‘외교 투톱’으로 시너지가 기대된다. 역대 최고령 외교장관이 될 예정인 정 후보자가 청와대에서 손발을 맞췄던 최종건 1차관과 외교부에서 재회하면서 향후 북핵 외교에서 외교부에 힘이 실릴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물론 트럼프 대통령의 ‘톱다운’ 방식에 비판적인 바이든 정부가 대북 정책의 전면 재검토를 공식화한 데다 북한도 미국의 양보가 선행돼야 한다는 일종의 ‘전략적 인내’를 표방한 터라 정 후보자 앞에 놓인 상황은 녹록지 않다. 한편, 유일한 원년 멤버였던 강경화 장관의 교체에 대해 강민석 청와대 대변인은 “3년 6개월여를 재직한 강 장관이 심신이 지쳤다면서 지난해부터 사의를 표명해왔지만 만류해오다 바이든 신정부 출범에 맞춰 최종적으로 인사를 단행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형진 신임 차장은 1983년 외무고시에 합격한 뒤 북미국 과장, 주미대사관 공사참사관, 북미 국장을 지낸 손꼽히는 ‘미국통’이다. 박근혜 정부 당시 청와대 외교비서관과 외교부 기조실장, 차관보를 지낸 뒤 주유럽연합(EU) 대사로 재직했다. 청와대 핵심관계자는 “(김 신임 차장은) 한미 현안 및 북핵 문제에 정통하고, 미국에 대한 외교 경험과 전문성을 갖추고 있다”면서 “특히 바이든 부통령 시기 북미국장과 청와대 외교비서관, 차관보를 지내 바이든 인맥과의 연결 채널도 보유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바이든 정부 맞춤형’ 인사란 얘기다. 한때 외교부 장관을 희망했던 것으로 알려진 김현종 현 2차장은 대통령 외교안보특별보좌관에 임명된다. 김 차장은 2년 가까이 재직(2019년 3월~)한 데다 새롭게 짜인 외교안보라인의 ‘케미’까지 감안한 교체로 풀이된다. 김 차장은 재직 중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의 개정, 한미 미사일지침 재협상 타결 등 성과도 적지 않았지만, 강 장관이나 최종건 차관(당시 청와대 평화기획비서관) 등과 불화설이 불거지기도 했다. 그동안 외교안보특보를 정의용·임종석 등 실장급(장관급)이 맡았던 점을 감안하면 청와대가 ‘모양새’를 배려한 측면도 있다. 김 차장은 페이스북에 “미국 뉴욕 촌놈이 존경하는 노무현 전 대통령과 문재인 대통령을 모시며 조국을 위해 헌신했다. 저는 참 운이 좋은 사람”이라며 소회를 밝혔다. 임일영 기자 argus@seoul.co.kr
  • [뉴스분석]文대통령, ‘오경화’ 대신 ‘한국의 키신저’ 발탁한 까닭?

    [뉴스분석]文대통령, ‘오경화’ 대신 ‘한국의 키신저’ 발탁한 까닭?

    참여정부 출신 ‘친문’ 황희·권칠승 문화·중기부 발탁 내각 중 현역의원 ⅓… 임기말 국정동력 확보 포석 여성장관 16.7%로 하락… ‘30% 공약’ 숙제로 남아 ‘오경화’(5년 내내 강경화)란 말이 회자되던 강경화 외교부 장관이 물러나고, 문재인 정부의 새 외교사령탑에 정의용(75) 전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이 지명됐다. 문 대통령은 또 문화체육관광부와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에 참여정부 당시 청와대에 몸담았던 더불어민주당의 황희(54)·권칠승(56) 의원을 지명했다. 국정 철학에 대한 이해가 깊은 친문(친문재인) 인사들을 전진배치해 임기 말 느슨해지기 쉬운 관료 분위기를 다잡고 국정 장악력을 강화하겠다는 의도가 엿보인다. 지난달 두 차례에 걸쳐 6명을 교체한 데 이어 추가 개각으로 전체 부처(18곳)의 절반이 바뀐 집권 5년차 진용을 갖추게 됐다. 다만 여성(후보자 포함)이 3명(16.7%)에 그쳐 ‘여성 장관 30%’ 공약을 무색하게 한 점은 숙제로 남게 됐다. 가장 눈에 띈 인선은 정 후보자의 발탁이다. 미국 바이든 행정부 출범에 맞춰 외교라인을 재정비하는 한편 멈춰 선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를 되살리겠다는 의지가 담겼다. 지난 18일 신년회견에서 “바이든 정부의 외교정책에서 (북미 대화가) 우선순위를 가질 수 있도록 교류를 강화하겠다”던 문 대통령 발언의 연장선이다. 두 차례나 특사로 평양을 방문했던 점을 감안하면 대북 메시지 성격도 있다. 외시 5회 출신인 정 후보자는 정통 외무 관료로 문재인 정부에서 3년간 안보실장으로 외교안보 컨트롤타워를 맡아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에 깊숙하게 관여했다. 특히 2018년 ‘한반도의 봄’ 당시 평양과 워싱턴을 오가며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역사적인 북미 정상회담을 매개해 ‘한국의 키신저’라는 별명을 얻었다. 정만호 국민소통수석은 브리핑에서 “안보실장으로 재임하면서 한미 간 현안을 협의·조율하고 한반도 평화프로세스 실행을 위한 북미협상, 비핵화 등 주요 정책에 가장 깊숙이 관여했다”고 설명했다. 정 후보자도 “한반도 평화프로세스가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그가 취임하면 역대 최고령 외교 장관이 된다. 유일한 원년멤버였던 강 장관의 교체에 대해 청와대 고위관계자는 “3년 이상 했고 바이든 행정부 출범, 주요국의 변화에 맞춰 외교라인에 활력을 넣고 전열을 정비하는 취지”라고 밝혔다. 친문 의원들의 입각도 주목된다. 황 후보자는 문화체육 분야와 접점이 없다는 점에서 문화계 일부에서 반발하고 있지만, 정부조직법(35조)상 문체부 장관이 국정 홍보를 관장하는 ‘정부 대변인’ 역할을 하게 돼 있다는 점을 청와대가 주목한 것으로 알려졌다. 임기 말 국정 성과를 알리기 위한 소통·기획 능력에 방점을 뒀다는 의미다. 친문 인사들이 집결했던 ‘부엉이모임’ 간사를 맡는 등 친문 핵심으로 꼽히는 황 후보자는 참여정부 청와대 정무·소통수석실에 몸담았고, 민주당 홍보위원장을 지냈다. 기업에 몸담고 노동운동을 하다가 청와대와 지방의회를 거친 권 후보자는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 위원과 당 중소기업특별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고 지역구(경기 화성)에 중소기업들이 밀집해 정책과 현장에 두루 밝다는 평가를 듣는다. 코로나19 대응과 맞물려 박영선 장관 시절 한껏 위상이 높아진 중기부에 추진력과 정무적 능력이 있는 현역 의원이 적합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최근 세 차례 개각으로 발탁된 인사들을 포함하면 각료 18명(후보자 포함) 중 현역 의원이 무려 6명(이인영 통일, 전해철 행안, 박범계 법무, 한정애 환경 포함)에 이르러 의원내각제를 방불케 한다. 특히 이 장관을 제외하면 모두 친문이다. 임기 말 당정청 소통을 강화하는 한편 관료사회에 대한 그립을 강화해 성과를 내겠다는 의도다. ‘1주택자’ 등 검증 기준이 강화된 데다 인사청문회의 문턱이 높아진 현실도 반영됐다. 청와대는 “정의용·권칠승 후보자는 1주택이고 황희 후보자는 무주택”이라고 설명했다. 관료들이 임기 말 개각에서 장관을 선호하지 않아 선택지가 좁아진 측면도 있다. 다만 현역 의원의 대거 입각이 대통령제의 삼권분립 취지와 맞지 않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준한 인천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정치인 입각이 늘어나면 행정부와 코드를 맞추기엔 용이하지만 대정부 질의 등 입법부의 견제 기능이 약화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아울러 이번에도 ‘우리 사람만 쓴다’는 비판을 피해 가기는 어려워 보인다. 현역 의원 5명뿐 아니라 정 후보자 역시 친문이라고 봐야 한다. 청와대 고위관계자는 “도덕성, 전문성, 리더십 등 누가 적임자냐 하는 인선 기준에 따라서 선정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임일영 기자 argus@seoul.co.kr
  • ‘오경화’라던 강경화 전격교체… 새 외교사령탑에 정의용

    ‘오경화’라던 강경화 전격교체… 새 외교사령탑에 정의용

    ‘오경화(5년 내내 강경화)’란 말이 회자될만큼 문재인 대통령의 임기를 함께할 것이란 전망이 우세했던 강경화 외교부 장관이 20일 전격 교체되고, 새 외교사령탑에 정의용(75) 전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이 내정됐다. 문 대통령은 또한 문화체육관광부 장관과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에 더불어민주당의 재선 황희(54)·권칠승(56) 의원을 내정했다. 정만호 청와대 국민소통수석은 춘추관 브리핑에서 이와 같은 3개 부처 개각 인사를 발표했다. 지난달 두 차례의 개각에 이어 이날 3명의 장관이 교체되면서 전체부처(18곳)의 절반이 바뀐 집권 5년차의 진용을 갖추게 됐다. 하지만 내각 내 여성장관의 비율은 곧 물러날 추미애 법무부 장관을 제외하면 17%에 그쳐 ‘여성장관 30%’ 공약을 무색케 했다. 정의용 후보자는 외시 5회 출신의 정통외교관료로 문재인 정부 출범과 함께 3년간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으로서 외교안보 콘트롤타워로 한반도 평화프로세스 진전에 깊숙하게 관여했다. 특히 2018년 ‘한반도의 봄’ 당시 평양과 워싱턴을 오가며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가교역할을 하면서 ‘한국의 키신저’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정 수석은 “안보실장으로 3년간 재임하면서 한미 간 모든 현안을 협의·조율하고 한반도 평화프로세스 실행을 위한 북미협상, 한반도 비핵화 등 주요 정책에 가장 깊숙이 관여했다”면서 “외교 전문성과 식견, 정책에 대한 이해와 통찰을 바탕으로 미국 바이든 행정부 출범을 맞아 한미동맹을 강화하고 중국·일본·러시아·EU 등 주요국과의 관계도 원만히 해결해 나갈 것”이라고 인선배경을 설명했다. 강 장관의 전격교체는 바이든 행정부의 출범과 맞물려 외교안보라인을 개편하는 동시에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를 복원하겠다는 문 대통령의 의지가 담긴 것으로 풀이된다. 청와대 고위관계자는 “강 장관이 3년 이상 재임했고 바이든 행정부의 출범 등 주요국의 (리더십에) 변화가 있었다”면서 “새로운 활력 불어넣고 외교 재정비하는 차원으로 이해해 달라”고 말했다.참여정부 청와대에서 나란히 근무했던 친문 재선 의원의 입각도 눈에 띈다. 친문 핵심으로 꼽히는 황희 후보자는 민주당 홍보위원장과 원내부대표 등을 지냈다. 언뜻 황 후보자는 문화체육 분야와 접점이 없어보이지만, 정부조직법상 문화부 장관이 국정에 대한 홍보를 관장하는 정부 대변인 역할을 해야한다는 점을 청와대는 주목한 것으로 보인다. 권칠승 후보자는 경기도의회 의원을 거쳐 20·21대 총선에서 내리 당선됐다. 민주당 중소기업특별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지역구인 화성에 중소벤처기업들이 밀집해 현안에 대한 이해가 밝다는 평가다. 중기부 장관 교체는 박영선 장관이 4월 서울시장 보궐선거 출마를 결심한 데 따른 것이다. 박 장관은 이날 오전 사의를 표명했다. 임일영 기자 argus@seoul.co.kr
  • [2030 세대] 10년 전 아랍 봉기의 교훈/임명묵 서울대 아시아언어문명학부 재학생

    [2030 세대] 10년 전 아랍 봉기의 교훈/임명묵 서울대 아시아언어문명학부 재학생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인 2010년 12월, 한 튀니지 청년의 분신이 아랍 세계 전역을 뒤흔들었다. 청년의 이름은 무함마드 부아지지로, 그의 이름은 곧이어 아랍이라는 거대한 들판을 전부 태운 하나의 불씨로 기억된다. 부아지지의 분신은 튀니지에서 혁명을 촉발했고, 그 물결은 국경을 넘어 리비아, 이집트, 예멘, 시리아 등지로 번졌다. 그리하여 중동 등에서 수십 년을 이어 온 독재정권이 전복되거나 막대한 위협을 받게 된 것이다. 그러나 아랍 봉기는 결코 사람들이 기대했던 ‘아랍의 봄’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시위대는 독재를 몰아낼 수는 있었지만 새로운 질서를 세울 수는 없었다. 혁명세력은 인구폭발로 인한 농촌 경제의 파탄과 도시의 과밀화를 해결할 수도 없었고, 고도성장을 이어 가는 아시아 태평양 경제와 달리 깊게 침체돼 있는 아랍 경제를 성장 궤도에 올리는 방법도 알지 못했다. 대신 그들은 미래를 향한 고민을 시작하기 전부터 독재 정권이 억압했던 ‘과거’와 싸워야만 했다. 농촌 경제의 악화와 수자원 위기는 종래의 부족, 종파 갈등을 심화시켰고, 도시의 과밀화는 빈민들로 하여금 급진적인 정치적 이슬람주의를 신봉하도록 만들었다. 시리아에서는 이런 모든 갈등이 폭발하면서 10년을 이어 갈 내전이 시작됐다. 이집트 혁명 당시 등장한, 인터넷과 소셜미디어를 통한 시민들의 수평적 연대가 세상 모든 독재를 몰아낼 것이라는 장밋빛 전망이 무색하게도, 시리아에서 정보기술은 전투를 선동하고 과격분자들을 끌어들이는 매개체가 돼 주었다. 따라서 아랍 봉기 10년의 교훈은 낙관적인 교훈보다는 비관적인 교훈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아랍 봉기는 민주주의의 약속된 승리보다는, ‘정의와 무질서보다는 불의와 질서가 낫다’는 키신저의 교훈이 옳았음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불의로 질서를 유지하는 수많은 국가가 언제든지 작은 불씨 하나로 송두리째 타버릴 수 있음을 보여 준 것은 아랍 봉기의 두 번째 교훈이었다. 게다가 지난 10년은 아랍 봉기를 낳은 여러 문제, 즉 도시와 농촌의 인구학적 위기, 도시와 지방 사이의 문화적 이질성, 국경을 횡단하는 극단주의의 확산이 세계적으로 더 심화된 시기이기도 했다. 아랍 봉기의 교훈을 다른 독재자들이 잘 받아들였기 때문인지 그런 붕괴가 다시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몇몇 국가에서 시한폭탄은 착실히 돌아가는 셈이다. 대대적 반정부 시위를 맞닥뜨린 이란, 독재자를 몰아낸 뒤에도 여전히 불안정한 수단, 얼마 전 민족 갈등으로 군사적 충돌이 이어지는 에티오피아 같은 예시는 무수히 많다. 그런 의미에서 코로나19의 진짜 파괴력은, 이미 한계 상황에 몰려 있던 국가들의 질서를 요동치게 해 언제든지 부아지지의 불꽃이 등장해도 이상하지 않은 환경을 조성한 것일 수 있다. 그러니 10년 전의 아랍 봉기와 지금의 팬데믹은, 일상을 상실한 군중의 분노가 촉발하는 혼란의 연쇄를 막는 것이 다음 10년의 화두가 돼야 한다고 말하고자 한다.
  • WSJ 기고문 ‘질 바이든, 박사 호칭 떼라’에 “웬 가부장제 망발”

    WSJ 기고문 ‘질 바이든, 박사 호칭 떼라’에 “웬 가부장제 망발”

    미국 일간 월스트리트 저널(WSJ)의 오피니언면 필자가 차기 대통령 영부인이 될 질 바이든 여사 스스로가 ‘닥터’란 호칭을 쓰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언급했다가 거센 후폭풍을 맞고 있다. 대학교수를 그만 두고 일간지에 기고하는 조지프 엡스타인(83)은 질 여사가 딴 교육학 박사학위가 명예 학위에 불과하다며 “‘질 박사’란 호칭은 웃기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사기처럼 들리고 느껴진다”면서 그녀를 “어이(kiddo)”라고 불렀다. 기고문 제목은 ‘백악관에 박사가 있나? 의학박사가 아니라면’이다. 그는 “현명한 남자들은 한때 아이를 분만하지 않는 한 누구도 스스로를 닥터라고 불러선 안된다고 말했다”면서 “질 박사, 생각해보시고 닥터란 호칭을 포기해 보시라”고 조언했다. 이어 “질 박사로 불리는 일에 약간의 스릴을 느끼는 것을 잊어라. 그러면 질 바이든 영부인으로서 세상에서 가장 나은 공공 가정(백악관?)에서 앞으로 4년 동안 사는 더 커다란 스릴을 느낄 것”이라고 결론내렸다. 질 여사는 평소 2007년 델라웨어 대학에서 딴 박사학위와 두 개의 석사학위를 매우 자랑스럽게 여기며 남편이 조 바이든 당선인이 내년 1월 20일 취임한 뒤에도 가장 교육수준이 높은 영부인이란 영예를 누리면서 대학 강단에 서는 일을 병행하겠다고 공언했다. 그런데 80대 학자 겸 기고가가 그냥 백악관 안살림에만 안주하라고 일간지 기고문을 통해 강권한 것에 다름 없다. 그는 자신이 1950년대 군 복무 중 학교에 가지 않고도 명예박사 학위를 땄고, 이 때문에 남들이 자신을 박사라고 부르는 것을 꺼린다는 점을 강조했다. 질 여사가 50대에 딴 교육학 박사 학위도 이와 다르지 않다는 식으로 비교했다. 또 자신의 친구 중에는 명예박사 학위를 63개나 딴 사람도 있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소셜미디어에서는 학문을 열심히 닦은 여성을 대놓고 무시하는 성차별적 태도라고 거센 비판이 쏟아졌다. 민권 운동가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막내딸 버니스는 트위터에 “우리 아버지도 의학박사는 아니지만 그의 업적은 인류에게 엄청난 도움을 줬다. 당신의 박사학위도 그렇다”고 적어 질 여사를 변함없이 지지하겠다고 밝혔다.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 당선인의 남편 더그 엠호프도 “바이든 박사가 딴 학위는 열심히 노력하고 진정 피땀을 모아 이룬 것이다. 그녀는 나와 그녀의 제자들에게, 나라 전체의 미국인에게 영감을 선사한다. 남성이라면 이런 식으로 쓰여지지 않을 것”이라고 개탄했다. 고 존 매케인 상원의원의 딸 메건은 바이든 박사처럼 성취를 이루고 교육받았으며 성공한 여성들이 가부장제에 찌든 남자들로부터 미디어에서조차 이런 취급을 받는 것에 넌더리가 난다. 이건 넌더리 이상”이라고 적었다. 물론 WSJ가 이런 가부장제 기고문을 방치한 데 대해 부끄러워해야 하며 사과해야 한다고 촉구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엡스타인이 2002년까지 강단에 섰던 노스웨스턴 대학은 “그의 가부장적인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사실 역대 미국 행정부 안에서도 의학박사 학위가 아닌데도 박사로 불린 위정자들이 적지 않았다. 예를 들어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 세바스티안 고르카 트럼프 대통령 전 보좌관 등이다. 여성의 학문적 타이틀을 놓고 논란이 빚어진 것도 처음이 아니다. 2018년 영국 역사학자 페른 리델은 스스로 박사라고 언급했다가 엄청난 비난 댓글이 쏟아지자 해시태그 #뻔뻔한여자들(ImmodestWomen)을 달아 일종의 자학 퍼포먼스를 했다. 영국 BBC는 이 소식을 전한 뒤 자사의 가이드라인은 적절한 때만 의학이나 과학 박사, 박사학위를 갖고 있는 교회 성직자들에만 박사란 타이틀을 부여한다고 소개했다. 임병선 평화연구소 사무국장 bsnim@seoul.co.kr
  • 미중 新 데탕트 맞으려면…“저우언라이 돌아봐야”

    미중 新 데탕트 맞으려면…“저우언라이 돌아봐야”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이 최근 블룸버그가 진행한 신경제포럼 개막식에서 “세계 1차 대전에 비견할 수 있는 재앙 상황이 발생할 것”이라며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당선인에게 미중 갈등의 봉합을 주문했다. 그는 1971년 전격적으로 중국을 방문하며 시작한 ‘미중 데탕트’(긴장완화) 주역으로 꼽히는데, 이를 지휘한 인물은 당시 중국 총리 저우언라이(1898~1976)였다. 최근 ‘저우언라이 평전’(민음사)을 출간하고 미국에 있는 정종욱 전 중국대사는 서울신문과의 이메일 인터뷰에서 “바로 지금, 저우를 돌아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저자는 “미국과 배타적으로 경쟁하는 중국의 모습은 저우언라이가 말한 ‘부강한 중국’이 아니었다”면서 “그런 의미에서 지금 시진핑 주석의 꿈은 저우(저우언라이)가 아니라 마오(마오쩌둥)의 꿈에 가깝다”고 했다. 우리에겐 마오의 뒤에 있던 ‘공산당 2인자’ 정도로 알려졌지만, 청년 시절부터 혁명에 투신한 저우는 중국 공산당의 역사이기도 하다. 저우는 현대 중국의 내실을 다진 행정가이자 외교가로, 중국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도 꼽힌다. 저자는 “원칙과 현실을 함께 고려하면서 최대의 공감대를 만들어 내는 데에는 저우를 따를 사람이 없었다”고 설명했다. “중국인들은 저우에 관해 국가에 대한 무한한 공인정신과 인민을 위한 철저한 헌신과 희생으로 기억합니다. 마오의 광기와 폭정으로부터 중국을 구해 냄으로써 오늘날의 중국 근대화가 가능하게 했던 사람이 저우였습니다. 저자는 1990년대 초반 김영삼 당시 대통령 외교안보수석비서관으로 일했고, 후반에는 중국대사로 근무했다. 대통령 안보수석으로 근무할 때 북한 핵 문제가 터졌고, 많은 중국 외교 관리들을 만났다. “저우가 중국 외교에 남긴 발자취를 새삼 인식하는 계기가 됐다”고 한 저자는 이때부터 저우를 연구했다. 가장 중요한 자료인 ‘저우 연보’를 바탕으로 해 개별 취재를 더했다. 2017년 저우가 태어난 장쑤성을 비롯해 그가 활동했던 텐진과 베이징을 방문했고, 키신저와 저우가 협상을 벌였을 때 통역을 담당했던 지차오주와 저우 조카인 저우빙더도 만나 책을 완성했다. 저자는 마오와의 대비를 통해 저우의 장점을 부각한다. 마오는 혁명가였지만 국가 건설의 지도자는 아니었다. 타고난 고집불통의 반항아이기도 했다. 기존 질서를 타파하는 데에도 뛰어난 재능과 역량을 발휘했지만, 새로운 질서를 창조할 능력이나 의지는 없었다. 저우는 부수는 일보다 만드는 일에 뛰어났다는 게 저자의 평가다. 1976년 1월 8일 저우언라이가 사망하자 그를 추모하는 중국 국민의 자발적인 움직임이 거셌다. 문화혁명을 주도한 사인방이 저우언라이에 대한 추모를 방해하자, 이에 항의하는 중국 국민의 운동이 제1차 톈안먼 사건으로 이어졌다. 이런 큰 추모의 물결은 마오쩌둥이나 덩샤오핑 사망 당시에도 찾아볼 수 없다. 저자는 “저우언라이가 중국인들의 가슴속에 얼마나 크게 자리 잡았는지 보여주는 사례”라며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리더십으로 공존과 평화의 국제 관계를 이끌었던 저우를 오늘날 다시 소환하는 이유일 것”이라고 했다. “50년대 말의 대약진과 60년대 후반의 문화혁명에서 이런 저우의 희생이 없었다면 오늘의 중국은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주장에 대해 많은 중국인이 공감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우는 현대 중국의 마지막 ‘스예’(師爺), 마지막 선비였습니다.” 김기중 기자 gjkim@seoul.co.kr
  • “미중 갈등 지속되면 1차 대전 수준 재앙 닥칠 수도”

    “미중 갈등 지속되면 1차 대전 수준 재앙 닥칠 수도”

    1978년 미중 수교를 성사시켜 ‘데탕트(화해) 설계사’로 평가받는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이 “미중 관계가 개선되지 않으면 1차 세계대전(1914~1918)에 버금가는 재앙이 닥칠 수 있다”고 경고했다. 키신저 전 장관은 16일(현지시간) 블룸버그통신 신경제포럼에서 “조 바이든 차기 행정부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훼손한 중국과의 소통 채널을 하루빨리 복구해야 한다”며 이같이 밝혔다. 그는 “두 나라가 점점 대결을 향해 치닫고 있다. 외교 역시 대립적인 방식으로 이뤄진다”면서 “이대로 두면 말싸움이 아니라 진짜 군사 충돌이 벌어질 수 있다”고 했다. 바이든 당선인은 트럼프 대통령의 정책을 모두 뒤집는 ‘ABT’(Anything But Trump·트럼프와 반대로)에 나설 것으로 보이지만, 중국 문제만큼은 전임자와 궤를 같이할 것으로 예상된다. 실제로 그는 동맹국 정상들과의 통화에서 ‘민주주의 강화’를 내세워 중국을 압박하는 듯한 행보를 보이고 있다. 이에 대해 키신저 전 장관은 “상황에 따라 위험을 막기 위한 공조가 필요하기는 하다”면서도 “그렇다고 해도 지금 특정 국가(중국)를 겨냥한 연대를 꾸리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 특히 그는 “(신장 위구르·티베트 등) 인권 문제를 두고 두 나라의 의견이 다르다. 상대방이 민감해하는 부분은 양해할 필요가 있다”면서 “중국 인권 문제를 ‘이번에 반드시 해결하겠다’고 벼르지 말고 상대방이 수용 가능한 수준에서 완화해 가는 편이 낫다”고 밝혔다. 키신저 전 장관은 “미국에서 새 행정부가 들어서면 가장 먼저 ‘코로나19 협력’을 명분 삼아 중국과 손을 잡아야 한다”고 조언한 뒤 바이든 당선인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모두에게 “어떤 갈등이 생겨도 군사적 해법에 의존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 당부했다. ‘미국 외교의 거두’로 불리는 키신저 전 장관은 “중국의 패권 추구는 역사의 필연이기에 미국은 (내키지 않더라도) 이를 받아들이고 최대한 협력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대표적 ‘상하이 학파’다. 그는 미중 무역전쟁 초기부터 “두 나라가 서둘러 화해하고 갈등을 봉합해야 한다”고 말했다. 베이징 류지영 특파원 superryu@seoul.co.kr
  • [열린세상] 헨리 키신저와 중국/김경민 한양대 정치외교학과 특별공훈교수

    [열린세상] 헨리 키신저와 중국/김경민 한양대 정치외교학과 특별공훈교수

    중국이 주요 2개국(G2)에서 미국을 능가하는 나라가 되고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일대일로로 대변되는 중국의 야망은 유럽 대륙으로 손을 뻗고, 바다로는 남중국해와 스리랑카 넘어 유럽까지 거점을 만들고 있다. 일본 언론은 중국의 해병대가 본래의 모습을 숨긴 채 거점국가 최전선에서 활동하고 있다고 보도하고 있다. 이 같은 일을 상세하게 잘 아는 미국은 중국의 욕망을 무너뜨리려고 총력전을 기울이고 있지만 힘이 약한 나라들은 중국이 투자하는 돈의 매력에 벗어날 수 없어 땅을 내어주고 중국은 거점을 확대하고 있다. 중국이 이처럼 미국을 상대로 싸울 만큼 경제력이 커진 배후에는 미국 국무장관을 지냈던 헨리 키신저가 그 토대를 마련했다고 할 수 있는데 중국을 세상 밖으로 나오게 한 미중 국교정상화를 키신저가 만들었기 때문이다. 일본 도쿄도지사를 지냈던 이시하라 신타로는 세계적 베스트 셀러가 되었던 그의 저서 ‘NO라고 말할 수 있는 일본’이라는 책에서 미국과 중국이 국교정상화에 이르게 된 외교 비사를 상세하게 적어 놓았다. 물론 이 내용은 지금도 살아 있는 키신저의 회고록에도 똑같이 설명되어 있다. 1949년 마오쩌둥이 건국한 중화인민공화국을 어떻게든 국제체제에 편입시키고 경제를 발전시키면 중국 내의 자유와 민주, 인권이 신장될 것이라는 신념 때문이었다. 국교정상화의 대화가 진전을 이루지 못하자 키신저가 중국에 직접 날아가 몇 장의 첩보위성 사진을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에게 내어 놓자 중국은 아연실색 놀라고 만다. 그 사진들은 구소련과 중국의 우수리강 국경 분쟁 당시 사진인데 중국의 군인들이 안개가 자욱히 낀 날에 구소련이 모를 줄 알고 우수리강 가운데 있던 조그만 젠바오섬을 점령하고자 들어갔다가 구소련의 공격을 받고 수많은 군인이 목숨을 잃었다. 키신저는 그 당시의 첩보위성 사진을 보여주며 국교정상화가 이루어지면 중국이 원하는 인공위성 사진을 제공하겠다고 했고 우주에서 지구를 들여다보는 능력이 없었던 중국은 즉각적으로 국교정상화에 동의를 하며 개혁개방정책에 추진해 세계의 공장 노릇을 하게 된다. 그 이후 일당독재체제인 중국은 신속한 결정으로 경제에서 엄청난 돈을 벌어들여 미국에 맞설 수있는 능력을 갖게 되었고 미국의 첩보위성에 놀란 중국은 우주 개발에 국력을 쏟아 자체 GPS인 베이더우를 구축하는 등 미국과 어깨를 겨누는 우주 선진국이 되었다. 큰돈을 벌어 동중국해와 남중국해의 제해권을 확보하기 위해 요녕함을 시작으로 순국산 항공모함을 계속 건조하는 목표를 설정하고 있다. 이렇게 되고 보니 중국은 미국에 정치·경제적으로 큰 부담이 되는 국가가 되었고 아시아·태평양 영역에서 미국의 영향력이 줄어들 것 같은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미국 내에서는 중국을 왜 저렇게 키워 놓아서 미국의 골칫덩어리가 되게 만들었는가라는 비판이 나오게 되고 키신저의 대중 외교전략이 과연 옳았는가라는 의견이 분분하다. 트럼프 대통령은 집권하자마자 중국 때리기에 나섰다. 자신만이 중국의 힘을 뺄 수 있다고 믿고 앞으로는 그 어느 대통령도 중국의 힘을 뺄 수 없다는 각오로 대중국 정책 펼쳤다. 중국은 시진핑 국가주석의 장기집권이 가능해짐에 따라 미국의 의도대로 패권적 중국에서 밀려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쓸 것이다. 미군을 주둔시키고 있는 한국은 미국과 함께 행동할 수밖에 없으나 중국은 미국과 한국관계를 벌려 놓으려고 정치·경제적 압박을 계속 이어오고 있다. 중국이냐 미국이냐 선택을 강요받는다면 선택의 절대적 준거는 주한미군의 존재다. 미군을 한국에 주둔시키는 한국으로서는 미국과의 관계를 절대적으로 온존하려면, 중국에 유화책 정도를 쓸 수밖에 없다. 외교 책략의 한계가 상존한다. 이런 한계에 직면했을 때는 올바른 판단을 위해 역사를 회고하는 것이 지혜로울 수 있다. 지난 100년의 역사를 회고할 때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배를 당했고 한국 전쟁에는 중공군의 공격을 받았다. 1945년 이후 미국과 함께 평화와 번영을 일구었고, 세계 10대 무역국이 되었다. 키신저 즉, 미국이 중국을 국제사회로 나오게 했던 국교정상화가 옳았는지에 대한 해답은 먼 훗날 역사가 말해 줄 것이다.
  • “백인 남성 싹쓸이 그만”… 노벨상 새 역사 쓴 ‘여풍’

    “백인 남성 싹쓸이 그만”… 노벨상 새 역사 쓴 ‘여풍’

    올해로 제정 119주년을 맞은 노벨상 수상자 발표가 12일 경제학상을 끝으로 마무리됐다. 한 세기가 넘는 동안 노벨상은 학문의 금자탑을 쌓은 이들에게 수여되는 최고 영예로 여겨졌지만 최근 몇 년 새 수상 자격 및 수상자 행적 논란, 명단 유출 등으로 얼룩졌다. 서구 백인 남성의 전유물이라는 오명도 있었지만 올해는 여성 수상자가 4명으로 전체 수상자 11명 중 절반 가까이를 차지하며 노벨상 개시 이래 여풍이 가장 센 해로 기록될 것으로 보인다. 스웨덴 발명가인 알프레드 노벨의 유언에 따라 1901년 시상이 시작된 노벨상은 물리학상과 화학상, 생리의학상, 문학상, 평화상, 경제학상 등 6개 분야에 주어진다. 지난해까지 총 919명의 개인과 24개 단체(복수 수상 제외)에 수여됐다. 상금은 올해 기준 1000만 스웨덴크로나(약 13억 510만원)다. 특출한 학문적 성과 이외에 따라붙는 조건들도 있고, 추천자와 후보 명단은 50년간 공개되지 않는 관행으로 노벨상 선정 과정에는 매년 관심이 집중돼 왔다. 한 분야 최대 3명까지만 수상이 가능하고, 발표 당시 생존해 있어야 한다. 다만 평화상은 단체에 수여되기도 하고, 기준에 들어맞는 후보가 없을 시 건너뛰고 다음해로 넘어가기도 한다. 최종 결정은 번복되지 않으며 자진 추천도 불가능하다.노벨은 유언장에 “국적에 관계없이”라고 남겼지만 역대 수상자들이 실제 학문에 기여한 비중보다 과도하게 서구 백인 남성에게 집중돼 여성, 아시아·아프리카계에 문호가 좁고, 주류 연구 분야가 아니면 외면받는다는 지적도 제기돼 왔다. 이른바 학문적 헤게모니에 대한 비판이다. 국가 발전 수준이 학문적 척도와 비례 관계에 있긴 하지만 정도가 과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국가별 수상자를 보면 미국이 383명(2019년 기준)으로 압도적인 1위에 올라 있고 영국(132명), 독일(107명), 프랑스(70명), 스웨덴(33명), 러시아(31명) 순이다. 일본이 28명으로 그 뒤를 잇는다. CNN은 10일(현지시간) “역대 노벨상 수상자 중 여성은 57명으로 전체의 6%에 불과하고, 흑인은 16명으로 2%가 채 안 된다”고 지적했다. 특히 과학 부문에선 흑인 수상자가 배출된 적이 없다. 마크 지머 코네티컷대 교수는 “인종 다양성 부족의 근본 원인은 노벨상이 아니라 사회 체계에 있다고 본다”고 꼬집었다. 핵분열을 발견한 여성 유대인 과학자 리제 마이트너는 여러 차례 화학상 후보로 추천됐지만 공동 연구자였던 독일 과학자 오토 한만 1944년 수상해 학계에서 두고두고 논란이 됐다. 인도의 민족운동 지도자로 비폭력운동을 주창한 마하트마 간디는 1937~1939년 3년 연속, 1947년 평화상 후보자로 추천됐지만 서구 열강에 반대하는 식민지 출신을 불편하게 여긴 당시 유럽 분위기 탓에 수상하지 못했다. 천체 물리학 분야가 입자물리에 비해 상대적으로 수상자가 적은 점, 신고전주의 주류 경제학자에게 경제학상이 쏠린 점 등도 마찬가지다. 문학상 분야의 ‘언어 헤게모니’도 지적된다. 역대 수상자의 언어를 보면 영어 30명, 프랑스어 15명, 독일어 14명, 스페인어 11명, 스웨덴어 7명, 중국어 2명, 일본어 2명으로 영어권이 월등하다. 다행히 21세기 들어 수상자 중 여성 비중은 오름세다. 올해는 앤드리아 게즈(물리학), 에마뉘엘 샤르팡티에·제니퍼 다우드나(화학), 루이즈 글릭(문학) 등 4명이 호명됐으며 특히 과학 분야에서 여성이 공동 수상한 것은 최초다. 최근 몇 년간은 후보 명단 유출 의혹, ‘미투’ 폭로까지 겹쳐 한바탕 시끄러웠다. 2010년을 전후해 도박 사이트에서 특정 후보자의 베팅 금액이 급증하기도 했고, 2018년엔 선정 기관인 스웨덴 한림원 종신위원인 카타리나 프로스텐손이 명단을 사전 유출한 혐의가 확인되기도 했다. 공교롭게도 같은 해 프로스텐손의 남편이 여성 18명을 성폭행했다는 주장까지 불거지며 결국 문학상 수상자가 발표되지 못하고 이듬해로 미뤄졌다. 수상자들의 자격이나 전후 행적이 구설에 휩싸이기도 했다. 지난해에는 문학상 수상자인 작가 페터 한트케의 유고 전범 지지 행적이 도마 위에 올랐고, 앞서 2016년엔 반전 음유시인 가수 밥 딜런의 문학상 수상을 놓고 “과연 노랫말이 문학의 범주에 들 수 있느냐”는 찬반 논란이 일었다. 2009년 평화상을 받은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경우 집권 1년도 안 된 시점이라 ‘구체적으로 세계 평화에 기여한 바가 무엇인지’ 의아해하는 사람이 많았다. 1949년 생리의학상 수상자인 안토니우 에가스 모니스는 정신병 치료 명목으로 뇌 일부를 잘라 내는 수술을 고안했지만 곧 폐기됐다. 독일 화학자 프리츠 하버는 암모니아 합성법을 발명, 화학비료로 식량 생산 증대에 기여한 공로로 1918년 화학상을 받았지만 1차 세계대전 당시 화학무기 개발·사용을 주장해 ‘화학무기의 아버지’라는 오명을 남겼다. 노벨 평화상은 세계 정치인들이 욕심을 내기 마련이지만 유대인 학살 장본인인 아돌프 히틀러(1939), 이오시프 스탈린 소련 공산당 서기장(1945·1948), 전두환 전 대통령(1988)이 후보로 올랐던 사실은 역사의 아이러니로 남아 있다. 평화상에 대놓고 관심을 드러내고 있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조 바이든 민주당 대선 후보와 나란히 내년도 후보로 추천돼 관심이 쏠린다. 앞서 2018년에는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공동 수상 가능성이 각종 도박 사이트에서 점쳐지기도 했다. 현직 대통령 신분으로 평화상을 받은 이로는 시어도어 루스벨트(1906)·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1919), 안와르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1978), 김대중 대통령(2000)이 꼽힌다. 반면 소신에 따라 수상을 거부한 이는 2명뿐이다. 1964년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작가 장 폴 사르트르는 “제도권에 편입되고 싶지 않아 모든 공식적 영예를 거부한다”고 밝혀 온 발언을 그대로 따라 상을 반납했다. 또 다른 한 명은 1973년 헨리 키신저 미 국무장관과 함께 평화상에 지명된 레득토 베트남 총리다. 노벨위원회는 베트남전 종결을 이끈 공로로 두 사람을 호명했지만, 레득토 총리는 “내 조국엔 아직 평화가 오지 않았고, 나는 전시 지도자이지 평화의 사도가 아니다”라며 상을 거부했다. 여기에 키신저 장관은 휴전 협상 중 하노이 폭격을 명령해 당시 심사위원 2명이 항의 의미로 사퇴하는 등 상의 의미가 바래기도 했다.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수상 거절을 강요당한 이들은 7명이나 된다. 대표적 사례가 소설 ‘닥터 지바고’로 1958년 문학상을 받은 러시아 작가 보리스 파스테르나크다. 그는 작품에서 러시아 혁명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러시아 정부는 물론 모국의 작가 동맹에서도 압력을 받으며 생전 수상이 불발됐고, 사후에야 아들이 대리 수상했다. 중국 인권 운동가 류샤오보는 2010년 노벨상 수상자로 호명됐지만 징역 11년형을 받고 수감 중이어서 시상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학계에 충분히 족적을 남겼지만 노벨상과 인연이 없는 인물도 많았다. 정신분석학의 창시자 지크문트 프로이트를 비롯해 작가 제임스 조이스, 레프 톨스토이, 마르셀 프루스트, 조지 오웰, 마크 트웨인 등은 생전에 노벨 메달을 목에 걸지 못했다. 우리나라에선 올해 과학 분야 최초 수상 여부를 놓고 현택환 서울대 석좌교수에게 관심이 집중됐지만 고질적인 기초과학 투자 외면 속에 결국 무산됐다. 코로나 대유행으로 인해 노벨 기일인 12월 10일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열리는 시상식은 수상자들이 자국에서 상을 받는 TV 중계로 대체되고, 오슬로에서 평화상 시상식만 개최된다. 이재연 기자 oscal@seoul.co.kr
  • [열린세상] 해방 75주년을 맞이하며/김경민 한양대 정치외교학과 특별공훈교수

    [열린세상] 해방 75주년을 맞이하며/김경민 한양대 정치외교학과 특별공훈교수

    일제 식민지로부터 해방된 지 75주년을 맞이했다. 75년 동안 동북아 관련 국가들은 어떤 변화를 겪었는지 회고해 보자. 대한민국은 1950년 6·25 전쟁을 치르며 나라 전체가 잿더미가 됐지만, 온 국민이 합심 단결해 세계 10대 무역강국이 됐고 정치 분야는 독재정치를 청산하고 귀중한 민주주의를 이루어 냈다. 미국이 G11 후보국에 거론할 정도니 역사 이래 가장 강성한 나라가 됐다. 북한은 김일성ㆍ김정일의 통치가 끝나고 3대째 세습되는 공산국가이며, 경제적으로는 피폐하지만 핵무기를 개발하고 대륙간탄도탄을 보유할 정도로 위협적인 국가가 돼 있다. 중국은 어떤가? 1949년 마오쩌둥이 오늘날의 공산주의 국가를 설립하고 정치적으로는 안정됐으나,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 헨리 키신저의 핑퐁외교로 미중 국교 정상화를 이룬 뒤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경제정책이 성공하며 돈을 엄청나게 벌기 시작해 이제는 미국과 어깨를 겨누는 G2가 됐다. 막강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군사력 증강에 국력을 쏟아부어 일본과 한국을 압도하는 군사력을 갖게 됐고, 심지어는 미국도 경계해야 하는 나라로 변화했다. 역사는 지금도 전개되는 과정에 있다. 중국이 오늘날과 같은 경제력을 갖고 미국을 위협할 정도가 됐으니 과연 헨리 키신저의 판단이 옳았는가라는 물음은 먼 훗날의 역사가 말해 줄 것이다. 일본은 어떤가?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해 미국 맥아더 장군으로부터 평화헌법을 부여받고 비무장 나라가 됐으나 1950년 한국전쟁으로 1954년 자위대가 발족해 군사력을 또다시 보유하는 국가가 됐다. 군사력을 갖되 외국으로부터 공격을 당했을 경우에만 군사력을 사용할 수 있는 이른바 전수방위(專守防衛) 족쇄에 묶여 있으나, 1998년 북한의 대포동 미사일이 일본 열도를 넘어 태평양에 낙하하면서 일본 열도가 발칵 뒤집혔고 자위대는 군사력을 급속히 증강할 발판을 마련했다.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무참히 패배하고 핵폭탄 공격까지 받으면서 수백만명이 죽는 쓰라린 경험을 했기 때문에 과거와 같이 군국주의를 앞세운 전쟁 국가가 되는 것을 국민들은 바라지 않는다. 그러나 강력한 군사력 보유를 은근슬쩍 찬성하는 이유는 북한과 중국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일본은 군사용 인공위성도 지구 자원 관측위성이라고 평화적인 이미지를 내세웠다. 그러나 북한 미사일을 계기로 이제는 아예 드러내 놓고 정보 수집 위성 10기 보유를 선언했으며 2025년이면 완성된다. 거기에다 공격형 무기인 항공모함도 2척 보유하기로 선언했으니 실로 동북아 관련 국가들은 치열한 군비경쟁에 돌입해 있는 상태다. 러시아도 냉전체제가 종식되면서 경제력이 취약한 국가로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었으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집권하고 풍부한 석유와 천연가스를 수출하면서 경제력을 크게 회복했으며, 미국과 대항할 국력을 키우고 있다. 우려되는 건 중국의 시진핑과 러시아의 푸틴이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고자 패권주의를 지향한다는 것이다. 지정학적으로 그 틈새에 있는 한국은 미래에 대한 걱정이 커져만 간다. 시진핑과 푸틴은 장기 집권을 하기 때문에 패권적 세력을 증강시키는 데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미국은 어떠한가?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동북아에 미국의 영향력을 증대하는 정책에는 변함이 없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주한미군을 감축하지 않을까 하는 점에서 국가의 고민이 크고, 과도한 방위비 상승 압력으로 한국 정부로서는 안보 부담이 큰 상태다. 크게 보면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국ㆍ미국ㆍ일본이 한 축을 형성하고, 중국ㆍ북한ㆍ러시아가 한 축을 형성해 대립하는 구도인데, 한국과 일본은 과거사 문제로 관계가 최악의 상태이고, 미국은 미국 우선주의로 가겠다는 트럼프 대통령의 생각으로 3국 간 동맹이 흔들릴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질까봐 우려되는 상황이다. 해방 75주년을 맞은 지금 한국은 해방될 때보다 강성한 국력을 갖게 된 것은 분명하나 동북아의 세력 구도가 변화하고 있는 점을 주시하며 미래를 대비할 필요가 있다. 진정한 의미의 해방은 국력을 더욱 키워야 주변국들이 얕보지 않고 평화와 번영을 유지할 수 있다는 생각을 되새기는 것이다.
  • 냉전시대 이끈 美 외교 현인… 북핵 타격론 제기도

    냉전시대 이끈 美 외교 현인… 북핵 타격론 제기도

    제럴드 포드 전 미국 대통령과 조지 HW 부시 행정부에서 유일하게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을 두 번 지낸 브렌트 스코크로프트가 지난 6일(현지시간) 버지니아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 95세. 스코크로프트는 1991년 소비에트 연방 해체 이후 미국 외교정책의 뼈대를 만들었고,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전 국가안보보좌관과 함께 미국의 3대 외교 거물로 꼽힌다. ‘냉전시대 미국을 이끈 현인’으로도 불린다. 공군 장성 출신인 스코크로프트는 리처드 닉슨 행정부에서 국가안보보좌관을 지냈고 이후 40년 가까이 외교무대에 섰다. 1989년부터 4년간 국가안전보장회의에서 스코크로프트와 함께했던 리처드 하스 미국외교협회(CFR) 회장은 8일 워싱턴포스트 칼럼에서 “그는 무엇보다 현실주의자였다. 자신의 명성에 대해 걱정하지 않았다”며 “자신의 견해를 확고하게 표현했지만 차이는 그저 차이일 뿐 적을 만들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실제 스코크로프트는 논란이 될 만한 입장을 피력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1989년 중국 톈안먼 광장 대학살 이후 대중 관계를 유지하자며 스스로 베이징 특사로 파견돼 덩샤오핑 당시 주석을 만났다. 1991년 걸프전 때는 연합군을 구축했지만 ‘사막의 폭풍’ 작전 이후 바그다드 진격에는 반대했다. 또 2003년 이라크 침공에도 “전략적 실수”라며 반발했다. 1993년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를 선언한 뒤 1차 북핵 위기가 조성됐을 때는 “북한의 핵무기 개발은 막기 힘들다”며 북핵시설에 대한 제한적 타격론을 제기했다. 반면 그는 국가안보보좌관으로서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기보다 소통통로가 돼야 한다고 믿었고, 후임들이 이를 ‘롤모델’로 삼으면서 소위 ‘스코크로프트 모델’이 만들어졌다. 정치분야 저술가인 제임스 만은 8일 뉴욕타임스 칼럼에서 “스코크로프트 모델에 따르면 국가안보보좌관은 국무부, 국방부, 중앙정보국(CIA) 등의 다양하고 충돌하는 입장을 수렴해 공정하고 균형 있게 대통령에게 전달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워싱턴 이경주 특파원 kdlrudwn@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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