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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둣빛 봄날 ‘토지의 어머니’ 그리워…

    소설가 고 박경리 선생의 타계 1주기 추모식이 5일 고향인 경남 통영에서 엄숙히 열렸다. 고인의 묘소가 있는 산양읍 신전리 미륵산 자락 박경리 추모공원에서 이날 열린 추모식에는 고인의 외동딸인 김영주 토지문화관 관장과 문인, 전국 각지의 추모객, 이군현 국회의원, 진의장 통영시장 등 300여명이 참석해 문학정신과 삶을 기렸다. 영혼맞이 춤을 시작으로 봉행된 추모제는 추모식 낭독과 추모사, 헌다, 헌화, 봉향 순으로 진행됐다. 진의장 통영시장은 추모사에서 “선생은 삶과 죽음을 예술을 통해 유희처럼 넘나드셨던 분”이라며 “지난해 5월5일은 한국문학계가 모친상을 당한 날로 선생이 없는 빈자리가 여전히 크고 허전하다.”고 애도했다. 김영주 토지문화관장은 어머니 타계 1주기를 맞아 출간된 추모집 ‘봄날은 연두에 물들어’를 영정에 바치고 생전에 즐겨 드시던 산나물과 돔, 전복 등 통영의 해산물로 만든 음식들을 올리고 큰절을 했다. 추모집은 지난해 영결식과 추모식에서 각계 인사들이 읽었던 추모사와 조시 등을 비롯해 타계 후 여러 잡지와 신문에 실렸던 문인, 지인들의 추모글들이 수록됐다. 이어 고인이 평생을 실천한 생명사상을 이어 가기 위해 묘소 주변에 생명의 집(새둥지) 20여개를 달고 행사는 마무리됐다. 통영시는 참가자들에게 박경리 애송시 20선과 어록을 모은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란 소책자를 배부했다. 한편 고인의 타계 1주기를 맞아 4일부터 강구안 문화마당에 설치된 시민분향소에도 시민들과 관광객들의 참배행렬이 이틀째 이어졌다. 통영 강원식기자 kws@seoul.co.kr
  • 정묘·병자호란 전개 과정 한·중·일 관계서 새로 조명

    1637년 1월30일, 인조는 피란처인 남한산성에서 나와 삼전도에서 청 태종 홍타이지에게 세번 큰절을 올리고 항복했다. 척화파와 주화파가 성안에서 대책없는 소모전을 벌이는 동안 청군의 칼날에 목숨을 잃고, 심양으로 끌려간 포로는 수십만을 헤아렸다. 특히 여성 포로의 고통은 처절했다. 만주족 본처에게 끓는 물을 뒤집어쓰는 등 고문을 당했고, 갖은 고생끝에 조선에 돌아와선 가족에게 버림받았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는 최근 펴낸 ‘정묘·병자호란과 동아시아’(푸른역사)에서 “척화파나 주화파 모두 총론에서는 그럴 듯한 사자후를 토해냈지만 전쟁을 피하거나 그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각론을 갖고 있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후금이 1633년 6월에 이미 조선을 언젠가는 정복하되 명나라와 몽골을 복속시키기 전까지는 회유한다는 방침을 정하고 치밀하게 준비한 반면 조선은 1627년 정묘호란을 겪고나서도 속수무책이었다. 2007년 1월부터 2008년 12월까지 서울신문에 총 104회에 걸쳐 연재한 ‘아픈 역사에서 배운다, 병자호란 다시 읽기’를 통해 병자호란의 참상을 세밀하게 짚어냈던 한 교수는 이 책에서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동아시아 국제질서라는 대외관계사의 관점에서 분석한다. 정묘호란과 조선·후금 관계, 병자호란과 조청관계는 물론 정묘호란과 조·일관계의 추이, 병자호란 무렵 조선의 대일 정책과 인식 등 일본으로까지 관계의 그물망을 넓혔다. 조선이 중국과 일본 사이에 끼여있는 지정학적 조건을 고려할 때 어느 한 나라와의 관계 변화는 필연적으로 또 다른 나라와의 관계추이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이를 테면 임진왜란으로 철천지 원수가 됐던 일본은 두차례 호란으로 위기에 처한 조선에 무기 원조를 제안하면서 자신들의 정치· 경제적 이익을 최대한 끌어내려는 약삭빠른 태도를 보였다. 저자는 강국 사이에 끼여있는 상대적인 약소국 조선이 생존하기 위해선 외교적 지혜가 필수적이며, 이와 더불어 약체성을 극복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한반도의 정권들에 요구되는 절실한 과제라는 점을 환기시킨다. 3만 5000원.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 [병자호란 다시 읽기] (104·끝) 조선을 알았던 청, 청을 몰랐던 조선

    [병자호란 다시 읽기] (104·끝) 조선을 알았던 청, 청을 몰랐던 조선

    조선이 병자호란을 맞아 일방적으로 몰리고 항복할 수밖에 없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우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당시 청군이 조선이 상대하기에는 너무 버거운 강적이었다는 점이다.청군은 병력의 수,무기 체계,전략과 전술,사기 등 모든 면에서 조선군을 압도했다.그들은 교전 경험도 풍부했다.1618년 무순성(撫順城)을 점령했던 이래 수많은 공성전(攻城戰) 경험을 갖고 있었다. 남한산성 공성은 1631년 홍타이지가 주도했던 대릉하(大凌河) 공략전과 흡사했다.대릉하전 당시 청군은 성을 물샐 틈 없이 포위하고,산해관 쪽에서 몰려오는 명 지원군의 접근을 차단했다. 남한산성을 고립시키기 위해 판교와 광주 쪽에서 삼남으로 이어지는 길을 차단한 것과 똑같다.외부와의 연결을 끊고 성 내부의 식량이나 연료가 떨어지는 정황을 정확히 파악하면서 수시로 투항을 권유하는 심리전을 폈던 것도 비슷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전쟁을 시작하기 전 청이 이미 조선이 사용할 ‘카드’를 간파하고 있었다는 점이다.그들은 조선 조정이 유사시 강화도로 들어갈 것이라는 점도 1627년 정묘호란의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청군은 그 때문에 서울을 신속히 점령하고 인조를 사로잡는 것을 전략 목표로 삼았고,그것을 달성하기 위해 조선군의 청야견벽 작전을 무시하고 서울로 치달리는 속전속결 전술을 구사했다. 이러한 정황을 고려하면 병자호란 당시 조선이 저지른 실책이 무엇인지는 명확히 드러난다.우선 오랫동안 막대한 물력을 기울여 강화도를 정비했으면서도 정작 청군의 침입이 시작되자 그곳으로 들어가지 못한 것은 명백한 과오였다.만약 인조와 조정이 강화도로 들어갔다면 전쟁의 양상은 확연히 달라졌을 것이다. 우선 해로를 통해 삼남 지방과 연결됨으로써 물자 조달이 훨씬 용이했을 것이다.또 김경징 같은 용렬한 인물에게 섬의 방어를 맡기지도 않았을 것이다.삼남 지역의 수군도 훨씬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당시 청의 배후에는 엄연히 명이 있었다.청은 ‘뒤를 돌아보아야 할(後顧)위험’ 때문에 속전속결 전술을 구사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만일 인조가 강화도로 들어갔다면 조선은 더 많은 시간을 확보할 수 있었고,후금은 초조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그러면 설사 강화(講和)를 맺더라도 훨씬 완화된 조건으로 화약을 체결할 수 있었을 것이다.하지만 역사에서 가정이란 부질없는 것이다.강화도로 들어가지 못하고 남한산성으로 내몰린 것은 결국 인조와 조선 조정의 실책이었다.적은 나를 아는데,나는 적을 모르고 거기에 안일하기까지 했던 정황이 불러온 필연적인 귀결이었다. 1623년 3월 김류가 이끄는 인조반정의 거사군이 창덕궁으로 들이닥쳤을 때 광해군의 부인 유씨는 반문했다.“지금의 거사가 종사(宗社)의 미래를 위한 것인가? 아니면 그대들의 영달을 위한 것인가?” 반정세력은 거사가 성공하던 당일에는 그 뜻을 잘 몰랐을 것이다. 인조반정은 분명 나름대로 명분과 정당성이 있는 정변이었다.그 주도 세력들이 광해군 집권기에 자행된 실정과 난맥상을 바로잡으려는 의지를 갖고 있었던 것도 인정할 수 있다.하지만 거기까지였다.반정공신들을 비롯한 주도 세력들은 집권 이후 ‘자기 관리’에 실패했다.‘광해군대의 부정과 비리’를 소리 높여 질타했으되,자신들 또한 비슷한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는 사실은 깨닫지 못했다. 반정 이후 영달한 공신들 가운데 최명길과 이귀 정도를 빼면 나머지 사람들은 무능하고 문제가 많았다.나아가 공(公)과 사(私)를 제대로 분별하지 않았다.청군의 침략 소식을 제때 보고하지 않고 저항마저 포기함으로써 청군의 신속한 남하를 방조했던 김자점,강화도 검찰사라는 감투를 자기 집안의 식솔과 재산을 보호하는 데 남용했던 김류와 김경징 등의 행적은 그 상징이었다. 인조는 그럼에도 김류와 김자점 등 공신들을 끝까지 편애했다.종묘사직을 도탄에 빠뜨리고,수많은 생령들을 고통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그들을 처벌하려 들지 않았다.청은 달랐다.그들은 전승국임에도 병자호란이 끝나자마자 ‘과거 청산’을 철저히 시도했다.조선의 전장에서 과오를 저지르거나 태만했던 지휘관들을 가차없이 군율로 처벌했다. 사정(私情)에 눈이 멀어 공신들을 끝까지 비호한 결과는 무엇이었던가? 훗날 인조 정권과 효종 정권을 뒤엎으려는 역모를 시도했던 심기원(沈器遠)과 김자점이 모두 공신 출신이었다는 사실은 너무 역설적이다. 1627년의 정묘호란과 1637년의 병자호란을 돌아보면 오늘이 보인다.1627년은 상대하기 버거운 청의 전면 침략을 미봉책으로 잠시 멈춰 놓았던 해였다. 이후 10년은 당연히 ‘외양간을 고쳐야 했던’ 시간들이었다.하지만 조선은 그러지 못했다.‘개돼지만도 못한 오랑캐와 관계를 계속 유지할 수 없다.’는 ‘총론’의 목소리는 높았다.그러나 그들의 침략을 막아낼 방도에 대한 ‘각론’은 존재하지 않았다.그 귀결이 처참한 항복이었고 수많은 환향녀와 ‘안추원’,‘안단 ’ 등을 만들어 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역사에서 제대로 교훈을 얻고 있을까? 1997년 혹심한 외환위기를 겪었음에도 10년 만에 경제가 휘청대는 상황을 다시 맞은 것을 보면 도무지 그런 것 같지 않다. 1627년과 1637년,1997년과 2008년.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이 숫자들을 보면서 생각해야 한다.“역사를 두려워하고,역사 앞에 무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사실을.추위와 굶주림 속에 절망과 슬픔을 곱씹으며 심양으로 끌려가야 했던 수많은 선인들의 고통을 추념(追念)하며 글을 마친다. 한명기 명지대 교수 ■ “지금의 경제위기도 10년 전 IMF 원인 규명 미흡했기 때문” 연재 마치는 한명기 교수의 소회 “병자호란(1636)은 10년 앞서 일어난 정묘호란(1627) 당시 조선에 주어진 과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 뼈아픈 결과입니다.지금의 경제난국도 10년 전 IMF 외환위기 때 책임 소재와 원인에 대한 규명이 부족했기 때문에 되풀이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큽니다.” 한명기(46) 명지대 사학과 교수가 서울신문에 매주 연재한 기획시리즈 ‘아픈 역사에서 배운다-병자호란 다시 읽기’가 31일자로 마침표를 찍었다.2007년 1월11일 첫 회를 시작으로 꼬박 2년간 모두 104회에 걸쳐 철저히 사료에 입각해 병자호란에 얽힌 이야기를 꼼꼼히 풀어낸 한 교수는 “비극의 역사인 병자호란을 되돌아보면서 과거의 잘못을 뿌리 깊이 성찰하지 않으면 위기는 언제든 반복된다는 교훈을 새삼 되새겼다.”고 소회를 밝혔다. 한 교수는 수많은 민초의 죽음과 10만명이 넘는 포로를 발생시킨 병자호란의 원인이 조선 지배층의 무능과 무책임에 있다고 지적한다.정묘호란의 굴욕을 겪고도 이들은 명·청 교체기 급변하는 국제 정세에 신속히 대처할 방법을 강구하기는커녕 책임 회피에만 급급했다.위정자들의 이같은 안이한 태도는 병자호란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인조는 청태종에게 세 번 큰절을 하는 치욕을 겪었지만 잘못된 정책 판단으로 환란을 자초한 정책담당자들에 대한 책임 추궁은 소홀히 했다.일례로 인조반정의 1등 공신인 김류는 아들 김경징의 안일한 처신으로 강화도가 함락돼 비난이 들끓는데도 자리를 보전했다. 반면 백성들의 고통은 극심했다.청으로 끌려갔다 탈출한 포로들은 다시 청으로 끌려가 발뒤꿈치를 잘리는 혹형을 당했다.안추원과 안단은 무려 28년,37년 만에 탈출에 성공했지만 끝내 고국 땅을 밟지 못했다.조선으로 되돌아온 포로 여자들(환향녀)은 가족에게조차 버림받았다. 한 교수는 “청에 항복한 이후에도 오랑캐라고 혐오하기만 했지 왜 당해야 했는지 알려고 하지 않았다.위기의 원인을 찾아 철저히 반성하고,미래를 준비하는 자세가 결여됐던 것이 조선이 동아시아 3국 가운데 근대화가 가장 늦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라고 분석했다.그러면서 “위기가 닥쳤을 때 이를 확실히 극복하는 DNA가 부족한 것 아닌지 자성해볼 필요가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병자호란의 전말을 학술논문이 아닌 대중적인 글로 집대성해서 풀어쓴 사례는 드물다.한 교수는 “조선왕조실록을 기본으로 병자호란에 관한 모든 자료를 취합해서 철저히 사료에 근거해 글을 썼다.”고 밝혔다.‘임진왜란과 한중관계’‘광해군’ 등의 저서를 쓴 한 교수는 앞으로 임진왜란에 관한 대중서를 쓰고 싶다고 말했다.강대국 사이에서 생존의 방법을 모색해야 했던 조선의 운명은 수백년이 지난 지금도 변함이 없다.때문에 현재 병자호란과 임진왜란을 다시 읽는 것은 과거가 아닌 미래를 향한 길이라고 한 교수는 강조했다. 글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사진 이언탁기자 utl@seoul.co.kr
  • KBS연예대상, ‘1박2일’독주 & ‘개콘’공로 인정 (종합)

    KBS연예대상, ‘1박2일’독주 & ‘개콘’공로 인정 (종합)

    올해 ‘2008 KBS 연예대상’은 KBS 2TV ‘해피선데이-1박2일’이 무려 5개 부문을 휩쓸어, ‘1박 2일의 독주’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또 지상파 방송 3사 중 시청률 1위의 공을 세운 ‘개그 콘서트’의 주역들을 독려하는 자리였다. 27일 오후 서울 여의도 KBS별관에서 진행된 ‘2008 KBS 연예대상’은 ‘1박 2일’과 ‘개그 콘서트’가 석권했다. 특히 ‘1박 2일’은 강호동이 대상, 이수근 쇼오락부문 남자 신인상, 이승기 인기상, 이우정 작가 방송작가상, 시청자가 뽑은 최고의 프로그램상 등 5개 부문 상을 싹쓸이 했다. 이날 시상식의 꽃인 ‘KBS 연예대상’의 후보로는 ‘해피투게더-시즌3’의 유재석, ‘미녀들의 수다’의 남희석 등 쟁쟁한 후보들이 거론됐으나 대상의 영예는 강호동에게 돌아갔다. 트로피를 거머쥔 강호동은 큰절을 올린 후 “KBS 연예대상…재석아 이거 내가 받아도 되겠냐?”고 강력한 후보로 지목됐던 유재석에게 미안함 섞인 고마움을 표하며 “이 영광을 동료 유재석과 나누고 싶다.”는 소감을 전했다. ”KBS 스포츠채널 통해 씨름으로 데뷔한 후 20년 만에 타게 된 ‘연예대상’이다.”고 남다른 감회를 밝힌 강호동은 “이 상은 ‘1박2일’ 멤버 모두의 상”이라며 ‘1박 2일’의 멤버 이수근, 김C, MC몽, 은지원, 이승기와 기쁨을 공유했다. 이로써 강호동은 2005년 유재석, 2006년 김제동, 2007년 탁재훈에 이어 올해 ‘KBS 연예 대상’의 주인공으로 이름을 올렸다. 지난해 ‘1박 2일’ 코너의 맏형으로 투입돼 프로그램을 진두지휘해 온 강호동은 동시간대 타 방송 프로그램 ‘일요일 일요일 밤에’와 ‘일요일이 좋다’ 등과의 경쟁에서도 약 20%대의 시청률을 기록, 프로그램의 일등 공신으로 뽑혔다. ’1박 2일’은 ‘시청자가 뽑은 최고 프로그램상’의 현장 집계에서도 1위를 차지, 그 인기를 재검증 받았다. 상을 수상한 연출자 이명한 PD는 “‘1박 2일’은 이상적인 작가와 실력파 후배PD들이 만난 작품”이라며 “밥을 잘 챙기지 못하는 현장에서도 최선을 다해주는 멤버들에게 마음 속 절을 올리고 싶다.”고 고마움을 표했다. ’1박 2일’과 함께 올해 노고를 높이 인정 받은 프로그램은 ‘개그 콘서트’ 였다. ‘개그 콘서트’는 지상파 3사 개그 방송 중 최고의 시청률을 자랑하며 KBS의 위상을 드높혔다. ’코미디 부문 신인 남녀상’에는 각각 박성광과 김경아가 호명 됐으며 ‘최우수 아이디어상’은 ‘달인’ 코너가 차지했다. 특히 ‘달인’을 통해 인기 개그맨 대열에 합류한 김병만은 ‘코미디 남자 최우수상’을 받았다. KBS가 주목하는 ‘차세대 개그우먼’으로는 신봉선과 박지선이 지목됐다. 각각 ‘코미디 부문 여성 최우수상’과 ‘우수상’을 수상한 이들은 이효리와 손담비 춤을 재현하는 등 재기발랄한 무대를 선보여 시상식 분위기를 한껏 띄우기도 했다. 쇼오락 부문 신인 여성 MC상에는 ‘상상플러스’의 새 안방 마님으로 활약한 이지애 아나운서가 낙점됐으며 정은아 아나운서는 ‘비타민’으로 쇼오락부문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한편 이날 전체적인 수상 명단은 당초 언론의 예상과 크게 빗나가지 않은 결과였다. 지난 해부터 ‘해피선데이-1박 2일’이 KBS 예능의 대표 브랜드로 자리잡았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강호동의 공이 헤아려지지 않았던 까닭이다. 반면 프로그램 자체의 ‘기여도 및 인기’에 치중돼 다소 고르지 못하고 편중됐던 시상 내역은 시청자들로 하여금 아쉬움을 자아냈던 부분이었다. ◇ 다음은 2008 KBS 연예대상 수상자 명단 신인상 (코미디 남자) = 박성광(개그콘서트), 신인상 (코미디 여자) = 김경아(개그콘서트), 신인상(쇼오락 남자) = 이수근(1박2일, 상상플러스), 신인상(쇼오락 여자) = 이지애 아나운서 (상상플러스) 방송작가상 코미디 = 강윤미(개그콘서트), 방송작가상 쇼오락 = 이우정 (1박2일), 최고 인기상 = 이승기(1박2일), 최우수 아이디어상 = 달인(개그콘서트), 특별상 = 문금주(KBS홀 음향감독), 공로상=배철수(콘서트 7080) 코미디부문 여자 우수상 = 박지선, 코미디디부문 남자 우수상 = 황현희, 코미디부문 남자 최우수상 = 김병만, 우수 쇼오락부문 =신봉선(샴페인,개그콘서트,해피선데이), 최우수 쇼오락 부문=정은아(비타민), 시청자가 뽑은 최고의 프로그램상=해피선데이(이명한PD), 2008 KBS 연예대상 강호동(1박2일) 서울신문NTN 최정주 기자 joojoo@seoulntn.co.kr / 사진 = 유혜정 기자@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Seoul In] 안동예절학교 전통문화체험 캠프

    중랑구(구청장 문병권) 신내2동 주민자치센터는 경북 안동시 안동예절학교에서 ‘전통문화 체험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지역의 초·중학생들이 조상의 지혜와 멋을 느끼고 배우며 전통문화를 체험하는 기회를 갖도록 마련했다. 첫날에는 큰절, 평절, 반절 등의 배례법, 한지공예와 종이탈 만들기 등을 배우고, 둘쨋날은 하회마을, 자매결연지 녹전면 등을 방문해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에 참여한다. 신내2동자치센터 3422-3671.
  • [NOW포토] 유재석 “장인ㆍ장모님 큰절 올립니다”

    [NOW포토] 유재석 “장인ㆍ장모님 큰절 올립니다”

    개그맨 유재석이 아나운서 나경은과의 결혼 발표 공식기자회견을 가졌다. 4일 오후 2시 일산 MBC 드림센터에서 열린 기자회견후 유재석이 결혼을 허락해 준 나경은씨 부모님에게 큰절을 올리고 있다. 서울신문NTN 한윤종기자@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지리산 산마을 이야기](28)경남 하동 화개 부춘마을

    [지리산 산마을 이야기](28)경남 하동 화개 부춘마을

    길은 부춘 마을 가슴팍을 관통해 해발고도 1000m가 넘는 형제봉 활공장까지 이어진다. 날개를 편 패러글라이더들은 악양 들판 위를 휘휘 돌아 섬진강 백사장에 내려앉지만 활공장으로 올라서려면 화개 부춘 마을 길을 빌려야만 한다. 형제봉 산길은 하동군 악양면과 화개면의 경계이자 지리산 영신봉(1652m)에서 출발한 지맥이 삼신봉(1289m)을 거쳐 섬진강까지 내달린 남부능선의 끝자락이기도 하다. 부춘 마을 동쪽은 이 형제봉 능선이, 북쪽엔 아득히 주능선, 서쪽 역시 700고지 이상의 무명능선, 남쪽으론 발아래 섬진강 그리고 그 건너 거대한 백운산(1215m)을 마주하고 있다. ●2년 전 봄 노선버스 첫 운행 행정지명은 ‘부춘’이지만 마을이 형제봉 산허리에 매달리듯 붙어 있다 해서 ‘부치동’ 또는 고려시대 때 원강사라는 큰절이 있어 ‘부처골’로 부르던 게 변하여 부춘이 됐다고 한다. 예전엔 ‘불출동’으로 부르기도 했는데 이 지명에 관해선 고려사람 한유한과 관련된 이야기가 전한다. 학식은 높지만 벼슬하기를 즐기지 않았던 한유한이 왕의 부름을 받고도 나아가지 않고 이 마을에 숨어 살았으며, 바위에 ‘불출동(不出洞)’이라 쓰고 평생 세상으로 나오지 않고 종국엔 신선이 되어 떠났다는 것.‘화개면지’에 따르면 이곳의 정확한 이름은 ‘부처가 나는 동네’ 즉 불출동(佛出洞)이고, 지금과 같은 부춘이 된 건 1879년 호구단자부터이다. 부춘 마을에 노선버스가 들어온 것은 2년 전 봄.‘토담농가’를 운영하는 공상철(49)씨는 “마을이 생기고 처음으로 들어온 버스여서 기쁨을 주체 못한 어르신들은 미리 아랫마을까지 내려가 버스를 타고 올라 왔다.”고 그때 상황을 설명한다. 호리병처럼 긴 모양새여서 마을 첫집에서 끝집까지 걷기도 버겁던 차에 버스가 들어 왔으니 그도 그럴 것. 운전기사 목에 꽃다발을 걸고 버스 앞에서 고사까지 지냈을 정도란다. 마을에서 시인으로 통하는 공씨는 그날의 기억을 “멋진 버스가 꽃 보란 듯 물도 보란 듯 숨찬 소리를 내며 아침마다 마을길을 오릅니다.”라고 예쁜 시로 적고 있다. 자가용 없는 주민들에겐 아침에 딱 한 대, 장날엔 두 번씩 운행하는 귀한 버스다. ●장아찌 특성화 마을 조성 한창 공상철·양영하(44)씨 부부는 6년 전 부춘으로 들어 왔다. 고향이 하동이기도 하고 시집간 여동생이 이곳에 살고 있기도 해서 몇 번 드나들다 아예 이사해 왔다고. 처음엔 남의 집을 빌려 살다가 3년 만에 지금의 집을 지었고, 그 집을 지은 지 다시 3년이 지났다. 신축 공사에 따른 경제적 어려움이야 말할 것도 없고 하필 또 그 해엔 뭔 비가 그리도 많이 왔는지 미완성된 흙집 위로 천막을 치고 날이 맑기를 기다리는 등 8개월의 적지 않은 기간이 소요됐다. 다행히 주말이면 입소문을 탄 손님들이 꾸준히 찾아와 주는 편이다. 부춘 마을은 전체 약 40여 가구 중 10여 집을 주축으로 ‘지리산 장아찌 마을’ 농가법인을 내놓은 상태다. 지리산에서 채취한 매실과 제피, 비비추, 녹차, 곶감, 머위, 취나물 등을 이용해 다양한 장아찌를 만들고 특성화할 계획이다. 공상철씨는 이 법인의 총무를 맡았다. 이번 주는 공씨를 포함해 마을주민 모두가 분주하다.21일(수요일)부터 시작돼 25일까지 닷새간 열릴 제13회 하동야생차문화축제 기간에 화개와 악양의 10개 마을에서 녹차체험프로그램을 운영하는데, 부춘의 경우 찻잎 따기, 녹차두부 만들기, 형제봉 일출 등의 프로그램을 운영하기 때문. 집집마다 빨갛게 익은 앵두만 느긋이 봄을 즐길 뿐이다. 글 사진 황소영 월간 마운틴 기자 (www.emountain.co.kr) ▶가는 길 서울 서초동 남부터미널과 부산 서부 사상 시외버스터미널 등에서 화개행 버스를 탈 수 있다. 어디서든 구례나 하동까지 간 다음 화개로 이동하는 것이 가능하다. 읍에서 부춘으로 가는 버스는 하루에 한 대뿐이므로 택시를 타는 것이 좋다. 자가용을 이용할 경우 호남고속도로 전주 나들목, 대전∼통영간 고속도로 장수 나들목, 남해고속도로 하동 나들목 등에서 19번 국도를 따른다. 부춘 마을은 화개장터 삼거리에서 하동 방향으로 조금 더 진행한 다음 큰길 쪽으로 좌회전해야 한다. 마을 진입로 입구에 이정표가 다닥다닥 붙어 있다. 녹차체험프로그램에 관심이 있다면 이장 이강주(011-838-6005)씨나 공상철(011-884-3741)씨에게 문의한다.
  • [길섶에서] 후사코(房子) ‘짱’/송한수 국제부 차장

    일본 아가씨가 바다 건너 시집을 왔습니다. 각시에게 홀린 사나이는 사진기자로 뛰는 막내 S군이랍니다. 예식장엔 살랑살랑 사랑이 넘실댔습니다.‘결혼식이 너무 밋밋하잖아.’라고 불쑥불쑥 외친 악동(?)도 있었지만 다들 웃어 넘겼답니다. 큰 인연에, 큰 행복이 가득하길 바라는 맘이란 것을 금세 알아차린 눈길이었습니다. 신랑이 이국의 장인께 넙죽 큰절을 올립니다. 어른은 벌떡 일어나더니 그 팔을 붙들어 말립니다. 우리 예절로는 가장 큰 고마움의 뜻이지만, 다른 나라에선 영 아닐 수도 있거든요. 알록달록 한복을 차려입은 신부가 딱 우리네 누이인 듯합니다. 축하한다며 ‘원샷’ 건넨 술을 들이켜더니 잔을 머리 위에 엎어 보여 줍니다.“단지 남녀 사이도 근원이 달라 서로 알기 힘든데, 나라까지 다르니 더 많은 이해가 절실할 텝니다.”주례 말씀입니다. 국경 너머 사랑을 일궈낸 한 쌍이 금쪽같은 오늘을 곱씹으면서 자랑거리를 쏟아내리라, 어쨌든 미더워진 얼굴이었지요. 송한수 국제부 차장 onekor@seoul.co.kr
  • [병자호란 다시 읽기] (62) 반란자와 귀순자들 Ⅲ

    [병자호란 다시 읽기] (62) 반란자와 귀순자들 Ⅲ

    조명연합군의 필사적인 저지 작전에도 불구하고 공유덕과 경중명은 후금으로 귀순하는 데 성공했다. 비록 중간에 다소의 손실이 있었지만 공경(孔耿)이 끌고 갔던 전함과 수군의 대부분은 후금군으로 넘어갔다. 후금의 홍타이지는 공경이 가져온 전함을 ‘하늘이 내린 선물’이라며 환호했다. 공경의 귀순으로 불안하게 유지되어 왔던 명과 후금의 군사적 균형은 깨졌다. 후금은 기존의 철기(鐵騎)가 지닌 막강한 위력에 더하여 수군까지 확보함으로써 군사력이 배가되었다. ●후금, 공경의 식량을 조선에 요구하다 1633년 4월, 공경이 이끄는 반란군의 선단은 장자도를 거쳐 압록강으로 들어갈 때 후금군의 인도를 받았다. 진강(鎭江) 부근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조명연합군의 저지를 뿌리치는 데 성공한 뒤부터 후금은 전함들을 간수하기 위한 작전에 돌입했다. 그들은 압록강 연안을 파서 물길을 낸 다음 전함들을 진강 근처의 마이산(馬耳山) 부근으로 예인했다. 전함 주변에는 병력을 배치하여 경계를 강화했다. 혹시라도 명군이 몰래 들어와 배들을 태워버리는 사태를 막기 위한 조처였다. 4월28일, 후금 사신 용골대(龍骨大)와 녹지( 只)가 서울로 들어왔다. 용골대 일행은 공경이 귀순한 전말을 설명한 뒤, 그 일행들에게 먹일 식량을 달라고 요구했다. 용골대가 내민 국서에서 홍타이지는 ‘공유덕 등이 명군 신분으로 가도에 머물 때는 식량을 주다가 후금으로 귀순했다는 이유로 주지 않는다면 사리에 맞지 않는다.’며 급량(給糧)을 강하게 요구했다. 공경 일당이 상륙한 지역이 심양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자신들이 식량을 운반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린다는 것도 조선에 손을 내미는 명분으로 제시했다. 난감한 일이었다. 조선은, 공경을 추격해 온 주문욱 일행으로부터 급량을 요구받은 상황에서 후금까지 식량을 요구할 줄은 상상도 못했다. 후금 사신 접대를 맡고 있던 구관소(句管所) 신료들은 용골대에게 ‘공경은 중국의 반장(叛將)이자 유흥치(劉興治)와 함께 조선을 도모하려 했던 원수’임을 내세워 식량을 내어 줄 수 없다고 반박했다. 조선이 요구를 받아들일 기미를 보이지 않자 용골대 등은 다시 ‘형제의 도리’를 들고 나왔다. 그들은 ‘명에 붙으면 식량을 주고, 후금에 붙으면 주지 않는 것은 형제의 도리가 아니다.’라고 조선을 압박했다. 조선은 주문욱 일행에게는 이미 3000석의 양곡을 공급하기로 결정한 상태였다. 뿐만 아니라 임경업 등을 보내, 공경 일행과 합세한 후금군과 전투까지 치른 상황이었다. 이미 확실하게 명 측으로 기우는 태도를 보인 터라 후금의 식량 요구까지 거부할 경우, 어떤 사태가 벌어질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후금의 요구를 거절하면서도 내심 찜찜해하고 있던 5월6일, 명 황제의 칙서가 도착했다. 인조의 아버지 정원군(定遠君)을 원종(元宗)으로, 어머니 구씨(具氏)를 왕비로 각각 추봉(追封)하는 것을 승인한다는 내용이었다. 신료들의 격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오매불망 추진해 온 인조의 ‘숙원 사업’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인조는 고무되었고,‘명의 은혜를 배신할 수 없다.’는 분위기가 번지면서 후금의 급량 요구는 거부되었다. ●홍타이지, 공경을 극진히 예우하다 공유덕과 경중명이 수군과 함선을 이끌고 귀순해 오자 홍타이지는 고무되었다.1633년 5월6일, 홍타이지는 공유덕 등에게 줄 양마(良馬)를 마련하기 위해 고위 관리들에게서 말 100마리를 차출했다. 그 가운데는 자신이 아끼는 내구마(內廐馬)도 포함되어 있었다. 홍타이지는 공유덕 등을 각별히 대우했다. 그들을 바로 심양으로 부르지 않고, 일단 휘하 무리들을 거느리고 요양(遼陽) 근처에 머물도록 배려했다. 공경이 자신의 부하들을 자율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재량권도 주었다. 이윽고 6월3일, 공경이 귀순한 무리들을 이끌고 심양으로 들어왔다. 홍타이지는 백관을 이끌고 궁궐 밖 10리까지 나아가 공경을 맞았다. 홍타이지는 공경과 포견례(抱見禮)를 행했다. 서로 얼싸안는 것이었다. 만주의 신료들은 누구든지 칸에게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를 행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세 번 큰절을 올리고 한 번 절할 때마다 세 번씩 머리를 조아리는 방식이었다. 후금의 신료들은 ‘투항자와 포견례를 행하는 것은 참월하다.’며 홍타이지를 만류했다. 홍타이지는 ‘공경은 등주(登州)를 장악했던 세력가로서 수많은 무리와 전함을 이끌고 귀순했으니 우대하지 않을 수 없다.’며 신료들의 반대를 뿌리쳤다. 공경은 홍타이지의 형 다이샨(代善)과도 포견례를 행했다.6월5일에도 홍타이지는 공경을 다시 불러 옆자리에 앉히고 성대한 잔치를 베풀었다. 과거 조대수(祖大壽)가 투항했을 때보다 더 극진한 대접이었다. 홍타이지는 공유덕을 도원수(都元帥), 경중명을 총병관(總兵官)으로 임명하고 칙인(勅印)을 하사했다. 이윽고 두 사람에게 내린 유시문(諭示文)에서, 공경이 군민(軍民)과 무기, 전함을 갖추고 귀순한 것을 ‘위적풍공(偉績豊功)’이라고 찬양했다. 두 사람에게 ‘부귀(富貴)를 영원히 보장하고 죄를 지어도 전부 사면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파격적인 환대였다. 이 같은 환대가 뒷날 이른바 삼번(三藩)의 난(亂)이 일어나는 ‘씨앗’이 되기도 했지만, 동시에 함선과 수군을 얻게 된 홍타이지의 기쁨이 얼마나 컸는지를 웅변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후금, 명을 자유자재로 ‘요리’하게 되다 공경이 후금으로 귀순한 효과는 곧바로 나타났다.1633년 6월, 후금은 악탁(岳託) 등에게 병력 1만을 주어 명의 여순구(旅順口)를 공략하도록 했다. 공유덕과 경중명도 휘하 병력을 이끌고 이 원정에 동행했다. 공경의 안내를 받은 후금군에 의해 여순은 힘없이 함락되었고, 후금군은 5302명의 포로와 2만냥 이상의 은을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여순의 함락 소식은 당장 가도와 조선에 파장을 미쳤다. 가도를 지키던 부총병(副總兵) 심세괴(沈世魁) 등은 후금군의 공격을 우려하여 가도를 포기하고 본토 쪽으로 도망갈 궁리를 하기에 이르렀다.8월16일, 홍타이지가 보낸 국서가 서울에 도착했다. 그는 먼저 자신들도 전함을 보유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은근히 과시했다. 이어 ‘우리가 배를 띄우면 가도를 차지하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조선이 놀랄까 삼가고 있다.’며 ‘향후 가도를 돕지 말라.’고 경고했다. 가도를 비롯하여 명 본토가 후금 수군의 위협 앞에 노출되자 명 조정의 조바심은 더욱 커졌다. 그들은 혹시라도 조선이 후금에 굴복하여 양자가 연합하게 되는 상황을 우려했다. 그들은 수시로 사람을 보내 조선을 견제하려 했다.10월에는 가도의 부총병 정룡(程龍)이 조선에 들어왔다. 그는 ‘여순이 함락되었다고 두 마음을 품어서는 안 된다.’고 조선을 다잡으려 했다. 그러면서 ‘조선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서도 가도의 명군에게 군량을 공급하라.’고 채근했다. 공경의 귀순 이후 조선은 명과 후금 사이에서 그야말로 절박한 상황으로 내몰렸다. 후금의 ‘협박’과 명의 ‘호소’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조선은 사태의 심각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전함과 수군을 보유하게 된 후금의 ‘변신’에 대처하지 못했다. 다시 언급하겠지만,1637년 1월 조선의 왕실과 중신들이 피란해 있던 강화도는 공유덕이 이끄는 후금군의 상륙작전 앞에 맥없이 무너졌다. 강화도 수비를 책임졌던 조선군 지휘부는 ‘후금이 수군을 갖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요컨대 공경의 귀순은 ‘명의 비극’이자 ‘조선의 비극’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기름띠 제거에 큰 절 올립니다”

    “기름띠 제거에 큰 절 올립니다”

    충남 태안군 주민 200여명은 5일 소원면 만리포해수욕장에서 기름유출 사고 이후 지금까지 군을 다녀간 자원봉사자들에게 고마움을 표시하는 ‘감사 이벤트’를 열었다. 이날 행사는 만리포해수욕장 번영회에서 주관했다. 국응복 번영회장은 “지금까지 태안군을 다녀간 130여만명의 자원봉사자 덕분에 태안이 점차 예전의 모습을 되찾고 있다.”면서 “복구에 최선을 다해 태안을 다시 국내 최고의 휴양지로 만들어 돌려드리겠다.”고 말했다. 소원면 주민 김모(46)씨는 “태안이 생계 지원금 지급문제로 주민간 갈등이 나타나고 있는 중에 이처럼 뜻깊은 행사를 열게 돼 기쁘다.”면서 “오늘 행사를 계기로 군민들이 한마음으로 뭉쳐 단결된 모습을 보여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날 행사는 참석자 모두가 자원봉사자들의 노고에 고마움을 표시하는 뜻으로 큰절을 하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한편 태안군은 설 연휴기간 방제작업을 일시중단한 뒤 오는 11일부터 작업을 재개할 계획이다. 태안 이천열기자 sky@seoul.co.kr
  • [문화마당] 박경리 선생이 그리운 이유/윤대녕 소설가

    영동고속도로에서 남원주로 빠져 충주 방향으로 10분쯤 가다 보면 연세대학교 원주캠퍼스 건물이 보이고 거기서 5분을 더 가면 ‘토지문화관’이 나온다. 소설가 박경리 선생이 은거하고 계신 곳이다. 1996년 선생의 대하소설 ‘토지’를 기념하기 위해 재단이 설립된 후,3년 뒤인 99년 6월에 원주시 흥업면 매지리에 토지문화관 건물이 세워졌다. 선생의 사저는 문화관 바로 아래 소박하게 위치해 있다. 토지문화관의 설립 목적은 학술·문화 행사의 기획 추진, 연구 및 창작활동 지원, 국제 학술·문화 교류, 문화 운동 및 교육 활동이다. 그중 연구 및 창작활동 지원 분야에 있어서 토지문화관의 역할은 참으로 실속있고 눈부시다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처음엔 본관 건물 일부와 선생의 사저 옆에 있는 ‘매지사’라는 흰 목조건물을 작가들의 집필 공간으로 제공했다. 그러다 2006년 5월에 ‘귀래관’이란 이름의 창작 전용 건물이 다시 문화관 입구에 세워졌다. 집필 공간을 필요로 하는 작가들이 의외로 많다는 것을 아신 선생이 사재까지 털어넣으며 직접 공사를 챙기셨다고 한다.‘귀래’는 근처 마을 이름인 동시에 귀한 사람이 온다는 뜻이리라. 토지문화관은 매년 3월부터 12월까지 작가들에게 집필 공간을 제공한다. 그래서 봄이 되면 저마다 무거운 책보따리를 싸들고 속속 작가들이 찾아든다. 매지사와 귀래관에 수용할 수 있는 인원은 약 15명으로, 문화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신청해서 이용할 수 있다. 필자 또한 귀래관 건물에 한 달씩 세 번을 묵으며 그때마다 소설을 한 편씩 들고 나왔다. 이제나그제나 참으로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작가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선생은 드나드는 작가들의 인사조차 받지 않으신다. 그리고 매일 새벽 3시에 기침해 손수 작가들이 끼니 때 먹을 반찬을 한두 가지씩 만드셔서 식당으로 내려보내신다. 또한 직접 재배하신 고구마, 당근, 옥수수 등속과 선물로 들어온 인절미나 고향 통영에서 올라온 음식들도 대개 작가들 차지다. 사정이 이러하니 새까만 후배 작가들 입장에서는 놀고먹을 수가 없다. 무엇보다도 바로 옆에 선생이 계시니 긴장을 풀 수가 없다. 가끔 식당으로 내려오셔서 반찬은 먹을 만하냐고 물어보시고는 이내 또 사저로 돌아가신다. 언젠가 한번은 선생이 직접 필자가 묵고 있는 귀래관으로 찾아오셔서 글 열심히 쓰라고 격려해 주신 적이 있다. 고혈압 치료 차 병원에 가시던 길이었다. 필자는 소설을 탈고해 마침 귀래관을 떠나오던 날이었다. 그후 다시 귀래관에 소설을 쓰러 들어갔을 때는 선생을 사저로 직접 찾아 뵙고 큰절을 올렸다. 손자뻘되는 소설가에게 선생은 경어를 쓰시면서 또 글 열심히 쓰세요, 라고 따뜻하게 격려를 해주시는 것이었다. 많은 후배 작가들이 박경리 선생을 대모(大母)처럼 생각한다. 선생께서 직접 챙겨주신 음식을 먹고 글을 쓴 경험이 있는 작가라면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박경리 선생과 ‘토지’의 역사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원주시의 후원을 받아 2012년 완공을 목표로 총 사업비 64억원을 들여 4만 7500㎡ 규모의 ‘작가마을’을 토지문화관 인근 회촌마을에 세울 예정이라고 한다. 대규모 역사가 다시 시작되는 것이다. 이는 국민 소설 ‘토지’의 힘이거니와 박경리 선생 개인의 부단한 염원이 아니고서는 결코 불가능한 일이다. 원주시 또한 ‘작가마을’이 완공되면 문학 혹은 문화도시로 이미지가 바뀔 것이다. 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문학의 시대가 가고 있다느니 하는 자조적인 풍문은 이 새로운 역사의 시작 앞에서 한없이 무색해진다. 그나저나 선생께 새해 인사조차 드리지 못했다. 선생님, 늘 산처럼 강녕하시옵고 후배 문인들의 등불로 오래오래 남아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윤대녕 소설가
  • 새해 첫날 명암 엇갈린 전직대통령

    무자년(戊子年) 새해 첫날 세배객을 맞은 김영삼(YS 왼쪽)·김대중(DJ) 전 대통령의 명암이 엇갈렸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상도동 자택에서 이른 아침부터 세배 손님을 맞았다.YS는 “이명박 대통령 시대를 맞아 새롭게 시작하자.”는 덕담을 건네는 등 잔치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한이헌 전 청와대 경제수석은 “문민정부가 환란으로 불명예를 입었지만 국민의 정부 때는 카드 빚으로 민생을 도탄에 빠지게 해 경제문제에서 더 나빴다.”면서 “이명박 정부의 탄생으로 불명예를 씻었다.”고 자평했다. 박관용 전 국회의장을 비롯해 박희태 전 국회부의장, 김덕룡 김무성 이재오 공성진 진수희 유기준 의원 등 한나라당 의원 등으로 문전성시를 이뤘다. 박세일, 이각범 전 청와대 수석 및 전직 장·차관 등도 세배 인사를 했다. 황인성 문민정부 초대 국무총리는 YS에게 큰절을 올렸다. 부인 손명숙 여사와 동갑인 YS는 오는 11일 팔순 잔치를 함께 갖는다. DJ는 동교동 자택에서 오충일 대표와 김효석 원내대표 등 대통합민주신당 지도부에게 “잘 하세요.”라는 말을 4차례나 언급했다. 이어 “위기임에 틀림없다. 제가 정치하는 반세기 동안 이렇게까지 처참하게 진 것은 처음이다. 박정희 정권이 탄압할 때에도 이렇게까지 지지 않았다.”며 질책했다. 통합신당 지도부를 비롯해 박상천 대표 등 민주당 지도부와 권노갑 전 고문, 김상현 설훈 이훈평 김옥두 장재식 전 의원 등 동교동계 인사들도 신년 인사를 했다. 이종락기자 jrlee@seoul.co.kr
  • 마부노호 선원들 귀국 “정부 대응 서운”

    지난 5월 소말리아 해적에게 피랍되었다가 풀려난 마부노호 선원들이 16일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귀국했다. 이송열(47) 기관감독, 조문갑(54) 기관장, 양칠태(55) 기관장과 함께 입국한 한석호(40) 선장은 “피랍 소식을 제일 먼저 접한 정부가 우리의 석방엔 관심이 없었다.”며 “국민여러분의 힘으로 풀려났다.”고 귀국 소감을 밝혔다. 그는 피랍생활에서 가장 힘들었던 점이 “해적들에게 구타를 당하고 배고픔에 시달렸던 것” 이었다며 “그들은 짐승만도 못한 인간들”이라고 말했다. 또한 해적들의 납치 재발 방지를 위해서는 “경비를 데리고 가거나 무기를 싣고 가는 것이 방법”이라며 “배에 총 한자루만 있었어도 그들은 배에 못 올라왔을 것”이라고 말했다. 마부노호 선원들은 피곤에 지친 모습이었지만 국민들의 성원에 큰절로써 감사의 뜻을 전했다. 손진호기자 nasturu@seoul.co.kr @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Seoul In] 21일 자녀와 함께하는 다도 특강

    강북구(구청장 김현풍) 오는 21일 오후 2시 번2동 주민자치센터 3층 강당에서 ‘생활예절 및 다도 특강’을 실시한다. 주민은 물론 부모와 함께 온 어린이도 참여할 수 있다. 강북문화원의 전문 강사로부터 큰절하는 법, 두손을 배꼽에 모으는 공수자세, 전통 차 마시는 법 등을 배우는 시간이다. 어린이들은 경로효친을 배울 수 있는 기회다. 번2동사무소 901-6511.
  • 2차 민심대장정 현직의원 속속 합류

    6개월 전과 비교했을 때 손학규 전 경기도지사 캠프의 가장 큰 변화는 현직 의원의 합류다. 지난달 김동철·김부겸·신학용·안영근·정봉주·조정식·한광원 의원 등 열린우리당 출신 무소속 의원 7명이 공개적으로 지지 선언을 한 뒤 캠프에 합류했다. 정장선 의원도 캠프 합류 시점을 두고 고민 중이다. 2차 민심 대장정에서는 현역 의원들이 함께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전남 화순을 방문했을 때는 민주당 최인기 의원이 함께했다. 전북 김제와 부안을 찾았을 때는 김근태 전 열린우리당 의장계보인 열린우리당 최규성 의원이 하루 종일 수행을 담당했다. 해당 지역 국회의원으로서 예의를 갖추는 것 이상의 제스처를 보였다는 점에서 범여권 내, 특히 호남지역에서 손 전 지사의 위상을 짐작케 했다. 생기마을 촌장인 선진평화연대 정성헌 상임공동대표도 손 전 지사에게는 든든한 버팀목이다. 그가 공동대표를 수락했을 때 손 전 지사가 큰절을 올렸을 정도다. 고려대를 졸업한 정 공동대표는 이명박 전 서울시장을 ‘명박이 형’이라고 부를 정도로 친분이 깊지만 손 전 지사를 선택했다. 그는 손 전 지사에 대해 “사람 됨됨이는 여러 사람 중 제일 나을 것”이라고 평가한다. 청와대 출신들의 캠프 합류도 눈에 띈다.2003년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서 전문위원으로 활동한 뒤 청와대 혁신기획비서관을 지냈던 상명대 전기정 교수가 대표적이다. 윤훈렬 전 행사기획비서관과 나종윤 국가안보보좌관실 행정관도 캠프에서 특보로 활동 중이다. 이외에도 오재록 전 청와대 행사기획비서실 행정관이 캠프 전략기획실에서 일하고 있다. 언론인 출신으로는 조용택 전 조선일보 편집 부국장에 이어 배종호 전 KBS 라디오뉴스제작팀장, 김재목 전 문화일보 논설위원이 최근 추가로 합류했다. 경기도지사 시절 참모·보좌진과 서강대 교수 시절 제자그룹은 한나라당 탈당 전부터 돕고 있다.나길회기자 kkirina@seoul.co.kr
  • 남편을 사고팔고 9년이 흘렀더니

    남편을 사고팔고 9년이 흘렀더니

    포목 장사로 살림을 꾸려오던 아내가 빚에지쳐 참다못해 남편을 팔았다. 무능이 죄가 되어 팔려가야 했던 남편의 몸값은 일금 1백만원정-. 그로부터 날과 달이 흐르기 9년, 옛 아내는『남편을 돌려 달라』하고, 사간 아내는『못 주겠다』하는데, 남편의 말은『어찌 하오리까』-. 화투하다가 곗돈 독촉에 서방이나 사가란 농담이 61년- 고양이도 졸음을 이기지 못한다는 화사한 봄철인 4월의 어느 날. 영남 포목의 집산지인 대구시 대신동 115 서문시장 포목상가가 유난히 며칠동안 손님이 뜸했다. 이럴때면 으례 그러했던 것처럼 포목부 여주인들은 가까운 이웃 점포끼리 모여 화투놀이로 무료한 시간을 달랬다. 화투놀이가 한참 돌아가다가 그중의 김숙아(金淑亞·가명·당시 34)여인은 왈칵『서방이나 누가 사가면 몰라도…』내뱉듯한 농담끝에 들었던 화투장을 홱 던져버렸다. 그녀는 화투를 치던 친구이며 계주(契主)인 허이옥(許伊玉·가명·당시 35) 곗돈 독촉에 순간 기분이 언짢았던 것이다. 그렇게까지 화를 낼 필요가 뭣이냐는듯 빤히 친구의 얼굴을 바라보던 허여인은 『그래 내가 살꼬마』하고 응수했다. 친구의「히스테리」를 농담으로 얼버무리려고 짐짓 말한 것이다. 그러나『내사 정말이지 백만원만 누가 준다면 남편같은거 주겠다』-이런 김여인의 잇따른 푸념이 여러사람의 운명을 기구하게 만들어 놓을줄이야…. 이때 과부 허여인의『그렇다면-』하는 집념이 결국 그녀들 사이에 돌이킬수 없는 깊은 강을 파놓고 만 것이다. 이로부터 한달 후 박동하(朴東夏·가명·당시 40)란 남자는 진짜로 김여인 아닌 허여인의 남편이 되고마는 운명에 놓이게 되었다. 여인네의 농담때문에 어처구니없게도 사고 팔린 박씨는 물론 전 아내가 이혼 수속을 깨끗이 해주었고, 몸 하나만을 가지고 다시 장가온 셈인 박씨와 허여인은 비록 식은 올리지 못했지만 의젓한 박씨의 호적상의 아내로 뒤바뀌었다. 『아내와 결혼한지 10년동안 돈이라곤 한푼도 벌어보지 못한 주제에 사업을 한답시고 2백만원을 털어먹고 나니 빚에 쫓기는 아내에게 그렇게라도 해주는 것이 내가 위해주는 마지막 길 같았다』고 박씨는 그때를 돌이켜 말했다. 남편팔아 빚갚고 서울로 상경(上京)길 우연히 다시만나 스스로 빚때문에 과부가된 김여인은 빚을 갚고 남은 살림을 정리해 어린 남매를 데리고 한많은 대구를「아듀」- 서울로 터전을 옮겼다. 그 후에도 기구한 박씨의 일과는 전아내와의 생활에서 처럼 집에서 온종일 어린애 보는 일이 고작이었다. 다만 달라진 것은 자기 어린애 아닌 허여인의 전남편 딸 아이라는 것뿐. 이렇게 해서 헤어진 그들은 소식을 서로 끊은채 9년이 흘렀다. 그러나 사람의 운명은 잠재한 감정을 터뜨리게 하는 어떤 계기를 만들어 주고 마는 것일까? 공교롭게도 허여인의 집안어른 상사(喪事)로 박·허 부부가 함께 서울에 올라왔다가 박씨 홀로 시내에 나온 나들이 길에서 옛 아내 김여인과 마주쳤다. 그것은 정말 우연한 일이었다. 지난 겨울인 1월. 숨막힐듯 따분한 초상을 치르고난 박씨는 바깥 바람을 쐬러 나온 길이었다. 남산을 오르내리고나서 서대문을 지나 교남동까지 터벅터벅 걸어온 박씨는 온 얼굴이 얼얼하는 추위를 느꼈다. 문득 고개를 든 그의 눈에 허름한 대중식사 집이 눈에 띄었다. 머뭇거릴 것없이 들어가 뜨끈한 국물을 청하고난 박씨는 식당 주인 여자와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무리 9년의 세월이 흘렀다 치더라도 발자국 소리만 들어도 안다는 아내와 남편의 사이가 아니었던가…. 얼굴을 첫눈에 못 알아볼리가 없다. 어느덧 50대 초로에 들어선 옛남편, 40이 넘어 이마에 잔주름이 더한 옛아내. 그렇다고 어찌 돌아설 수 있으며 어떻게 돌려세울 수 있겠는가. 2백만원 배상하겠다에 그만큼 위자료주겠다고 코흘리개던 남매가 중학생이 되어있었다. 이날밤 아들딸의 큰절을 받고난 박씨는 야위고 거칠어진 옛아내의 손을 감싸쥔채 목이 메었다. 길거리에서의 국수 장수며「리어카」끌기에서 참새구이장수등 애절했던 서울살이 지나간 이야기를 밤새워 들었다. 이제와서 팔았다고 노여워하고 팔려갔다고 섭섭해 한들 한번 터진 봇물이 쉽게 멎을 수 있겠는가. 이들 옛부부는 그로부터 한달이 멀다하고 김여인이 대구로 내려와 밀회를 가졌다. 그러나 어엿한 아내인 허여인이 수상쩍은 남편의 행동을 끝내 모를리가 없었다. 드디어 지난 8월-. 문제의 세사람이 대구에서 자리를 같이했다. 그리고 조용히 해결의 방안을 찾았다. 그러나 협상은 2차 3차 그때마다 깨지고 말았다. 김여인은 남편을 물리기 위해 피맺혀 번돈 원금의 2배(2백만원)를 배상하겠다고 제의했으나 허여인은 오히려 2백만원의 위자료를 줄테니 남편과 손을 끊으라 했다. 박씨와의 사이에서 그간 형제까지 둔 허여인은 그래도 이혼하기 싫어 간통 고소만은 하고 싶지 않다고 말할만큼 현 남편에 대한 집념이 강하다. 김여인 역시 변호사와 의논, 원인무효로 인한 남편반환 및 이혼무효확인 청구소송 같은거라도 해서 남편을 돌려 받을 수 없겠느냐고 눈물짓고 있다. 박씨는 오래전에 포목 장사를 그만 두고서도 살림을 꾸려나가는 아내(허여인)에게 계속 의존해 살고있다.(대구시내당동) 여복(女福)?에 치여 되레 고생이 되고있는 이 남자는『나는 어쩌면 좋겠느냐』고 울부짖는다. [선데이서울 70년 10월 18일호 제3권 42호 통권 제 107호]
  • 15차 이산상봉 1진 오열속 작별

    15차 이산상봉 1진 오열속 작별

    “어머니,100살까지 건강하게 사십시오. 통일이 되면 다시 만납시다.” 제15차 이산가족 1회차 상봉행사에 참여한 남북 가족들은 11일 금강산호텔에서 눈물과 한숨 속에 작별상봉을 하며 2박3일 일정을 마무리했다. 국군포로와 납북자 가족 등 특수 이산가족 4가족을 포함한 남측의 99가족은 북측 가족들과 손을 꼭 잡고 다시 만날 날을 다짐하며 아쉬움을 뒤로한 채 무거운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대성호 납북어부인 김홍균(62)씨를 39년 만에 만난 어머니 이동덕(88)씨는 “홍균이가 나를 보고 싶을 때마다 담배를 피웠다고 하더라. 그래서 막 뭐라고 나무랐다.”며 “다시 만날 때까지 술·담배 끊고 건강하게 있으라고 당부했다.”고 각별한 모정을 표했다. 홍균씨의 동생 강균(54)씨도 “형님이 살아계신 것을 알았으니 한은 풀었다.”고 상봉 소감을 밝혔다. 홍균씨는 담담하게 “어머니, 울지 마세요.100살까지 사십시요. 통일이 되면 다시 만납시다. 통일이 머지않았어요.”라고 말했으나 가족을 태운 버스가 떠나는 순간 돌아서서 눈물을 훔쳤다.6·25전쟁 중 사라진 형 정용진(73)씨 가족을 만난 정혁진(72)씨는 가계도를 그려 보이며 북측 조카들에게 가족의 돌림자 순서를 설명해줬다. 역시 피랍된 형의 뿌리를 찾은 이양우(75)씨는 북녘 조카들에게 “형님 제사 잘 모셔라.”고 당부했다. 남측 최고령자 고면철(98)씨와 만난 북측 자녀들은 100세를 목전에 둔 아버지와의 작별에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 북측 아들 명설(71)·명훈(61)씨와 딸 선자(65)씨는 “통일돼 만날 때까지 건강하세요.”라며 큰절을 올렸다. 남측 가족들은 상봉 종료시간이 다가오자 북측 가족과 주소를 교환하고 재회를 다짐하며 1시간의 짧은 만남을 정리했다. 북측 가족들은 창가에 서서 ‘우리는 하나’ 노래를 부르며 남측 가족들을 싣고 떠나는 버스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남측 상봉단은 오후 속초로 돌아왔으며,12∼14일에는 북측 이산가족 100명이 남측 가족 442명을 금강산에서 만난다. 금강산 공동취재단·김미경기자 chaplin7@seoul.co.kr
  • ‘이산의 벽’

    “아버지, 꼭 미국으로 여행을 가야 하나요? 이제라도 자주정신을 갖고 똑바로, 떳떳하게 살아야 해요.” 김응환(91) 할아버지는 28일 화상상봉을 통해 57년 만에 마주한 북녘 딸들로부터 ‘씁쓸한 충고’를 들었다. 이날 서울 남산동 대한적십자사 상봉실에 나온 김 할아버지는 북녘에 두고 온 두 딸 영순(69), 영숙(67)씨를 만났다. ●화상상봉 이틀째… 씁쓸한 부녀간 만남 1950년 북한 인민군으로 참전, 남쪽에서 전쟁포로가 된 김 할아버지는 화면에 두 딸이 보이자 “내가 아버지”라며 반겼고 딸들은 큰절을 올렸다. 그러나 남녘의 동생 가족이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다.”는 소식에 북녘 누나들의 표정이 변했다.“꼭 미국에 가서 공부해야 하나요.” 김 할아버지가 “요즘은 미국이나 유럽으로 여행도 다닌다.”고 하자 딸들은 “미국에 안 나가면 못 사나요. 여행을 거기까지 가야 하나요.”라면서 “조국과 민족을 사랑해야 한다.”고 핀잔을 줬다. 대화 도중 ‘북한’이라는 말이 나오면 “우리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정식 명칭이 있다.”고 했다. 분단이 가져온 남북간 체제 차이를 실감하지 않을 수 없는 순간은 부산에서도 있었다. 부산 상봉장에서 57년 만에 딸의 목소리를 들은 한방서(95)씨의 가슴도 무너져 내렸다. 북한의 막내딸 금녀(61)씨는 “아버지,60년 세월 어디 갔다가 이제 오셨냐.”면서 “어머니는 평생 아버지를 그리워하다 눈도 제대로 감지 못하고 돌아가셨는데 너무 무정하다.”고 쏘아붙였다.1·4후퇴 때 ‘3일만 피신했다가 돌아와야겠다.’며 피란길에 올랐다가 생이별을 하게 된 한씨는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금녀씨는 ‘고향의 봄’을 부르는가 하면 열 번도 넘게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찬양하며 한씨가 귀환하지 않은 것을 다그쳤다. 한씨는 “어린 자식들을 두고 나온 것이 평생의 한이 됐는데…”라며 비통해했다.28일 이틀째 진행된 제5차 이산가족 화상상봉을 통해 남북한 각각 20가족이 스크린으로 만났다. 그러나 체제 장벽을 확인한 이들이 화면으로 어색한 대화를 나누는가 하면 행정 착오로 가족을 보지 못한 안타까운 상황도 벌어졌다. ●동명이인 판명 상봉취소도 28일 대한적십자사 부산지사에서 북한에 있는 동생 재만(77)씨를 화상상봉하기로 예정됐던 김봉조(83·경남 진주시 초장동)씨는 25일 동생이 다른 사람의 가족이며 동명이인으로 판명돼 화상상봉이 취소됐다는 통보를 받았다. 김씨는 “마지막으로 얼굴이라도 보는 줄 알았다.”면서 “이산가족의 마음을 감안하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서재희기자 s123@seoul.co.kr
  • [아픈 역사에서 배운다-병자호란 다시 읽기] 10만 포로의 눈물

    [아픈 역사에서 배운다-병자호란 다시 읽기] 10만 포로의 눈물

    조선은 왜 인조가 삼전도에서 청태종에게 항복하는 비참한 환란을 겪어야 했을까. 한마디로 17세기초 명·청 교체기의 격랑 속에 조선 지배층이 국제정세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2007년은 병자호란이 끝난 지 370년이 되는 해이다. 북핵 문제를 놓고 6자 회담이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듯, 지금 이 순간에도 한반도를 둘러싼 안팎의 정세는 예측불허다. 우리가 과연 북한은 물론 미국과 중국·러시아·일본 등과의 숨가쁜 외교전에서 북핵이나 자유무역협정(FTA) 등의 난제를 슬기롭게 풀어가며, 미래를 당당하게 개척해 나갈 수 있을까. 병자호란을 살피는 것은 단순히 ‘과거의 역사´를 되돌아보자는 것이 아니라, 한반도와 한민족의 운명에 외교가 얼마나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지 되짚어보기 위해서이다. 지대 사학과 한명기 교수의 눈을 통해 ‘병자호란´의 안과 밖을 살펴본다. 역사평설 ‘병자호란´이 매주 목요일 연중기획으로 독자를 찾아간다. 편집자 주 ●준비 없이 전쟁을 선택하다 1636년(인조 14년) 봄. 조선 조정에서는 청나라를 황제국으로 인정하느냐의 여부를 놓고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같은 해 3월, 청의 수도인 선양(瀋陽)에서 누르하치의 여덟째 아들 홍타이지(皇太極)가 황제로 즉위한다는 소식이 조선에 알려졌기 때문이었다. 척화파(斥和派) 신료들은 “개·돼지만도 못한 오랑캐 추장에게 황제 칭호는 가당치도 않다.”며 “정묘년(丁卯年,1627년)에 그들과 맺은 맹약을 파기하고 전쟁도 불사해야 한다.”고 외쳤다. 그들은 이어 ‘황제 운운’하는 내용을 담은 국서를 가져온 청나라 사신 용골대(龍骨大)의 목을 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반면 주화파(主和派) 신료들은 “청이 명을 능멸할 정도로 세력이 강해진 현실을 인정하여 그들의 요구를 무조건 배척하지 말고, 사신을 박대해서도 안된다.”고 맞섰다. 최종 결정권자인 국왕 인조는 양자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결국 척화파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런데 곧 이어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났다. 조정이 청과 맺은 맹약을 파기한다는 사실을 알리고, 장차 발생할지도 모르는 청의 침략에 대비하라는 내용으로 인조가 평안감사에게 보내는 극비교서(敎書)를 가져가던 금군(禁軍) 전령이 용골대 일행에게 교서를 빼앗긴 사건이었다. 자신의 목을 치라는 험악한 분위기에 놀라 황급히 달아나고 있던 용골대 일행에게, 다른 곳도 아닌 조선 영토 안에서 국왕의 밀찰(密札)을 빼앗긴 것이다. 척화냐, 주화냐를 놓고 정쟁만 무성했던 와중에 정작 중앙에서 지방으로 이어지는 정보 전달체계가 부실하기 짝이 없었던 것이다. 1636년 12월6일. 청군은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질풍같이 내달렸다. 병자호란이 시작된 것이다. 모든 병력을 의주에서 서울로 이어지는 대로(大路) 바깥에 위치한 산성들 속으로 집결시켰던 조선군은 청군의 침입 사실을 제때 알아차리지 못했다. 청군이 조선군과의 접전을 피해, 곧장 서울로 진격하는 속전속결의 전략을 취했기 때문이었다. 그 와중에 임진강 이북의 방어를 책임진 도원수 김자점(金自點)은 청군이 침입했다는 최초의 보고를 묵살하고 조정에 제때 알리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적이 다가오자 싸우지도 않고 도주해 버렸다. 청군이 이미 개성을 지나 양철평(良鐵坪-지금의 은평구 녹번동)에 이르렀다는 소식이 전해진 12월14일. 서울 도성은 공황 상태에 빠졌다. 아이들과 노약자들, 부녀자들의 울부짖음속에 피란행렬이 줄을 이었고, 조정 신료들도 어찌할 바를 몰라 허둥거렸다. 인조는 왕실 가족들과 종묘에 모셔져 있던 역대 국왕의 신주(神主)들을 강화도로 먼저 옮기도록 했다. 이어 자신도 강화도로 들어가려 했으나 청군이 이미 김포에서 강화로 이어지는 길을 차단해 버렸다. 인조는 어쩔 수 없이 남대문까지 갔다가 강화도 행을 포기하고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돼지´에게 무릎을 꿇다 1637년(인조 15년) 1월 중순. 준비 없이 들어왔던 남한산성의 상황은 참혹했다. 청군이 산성을 완전히 포위했고, 삼남으로 이어지는 모든 도로를 차단했다. 혹독한 추위 속에서 군량이 점점 바닥을 드러냈다. 청군은 연일 서양식 최신 대포인 홍이포(紅夷砲)를 쏘아대면서 항복하라고 종용했다. 조선 조정이 목이 빠져라 고대하던 지원군은 오지 않았다. 혹독한 추위 때문에 동상에 걸리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성을 지킬 의욕을 잃은 장졸들 가운데는 항복하자고 시위를 벌이는 자들까지 나타났다. 그 와중에도 신료들은 척화와 주화를 놓고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인조는 눈물을 보이며 대책을 호소했지만 뾰족한 방법이 있을 리 없었다. 1월26일. 강화도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청군은 바다에 익숙하지 못하여 수전(水戰)을 치를 수 없을 것이라고 여겼던 강화도 조선군 지휘부의 방심이 불러왔던 결과였다. 청군은 이에 앞선 1월22일, 조선에서 노획한 선박에 홍이포까지 싣고 강화도에 대한 상륙작전을 벌였다. 조선군이 변변한 저항도 해보지 못한 채 강화도는 함락되었고, 피란했던 왕실 가족과 중신들은 전부 포로가 되었다. 강화도의 함락 소식은 남한산성의 사기를 완전히 꺾어 놓았다. 1월30일. 인조는 남한산성의 서문을 나와 현재 서울 송파구 석촌동의 삼전도(三田渡)로 향했다. 이윽고 그는 높다란 수항단(受降壇) 위에 앉은 청 태종에게 무릎을 꿇고 항복의 예를 바쳤다.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 세번 큰절을 올리고, 한번 절할 때마다 세번씩 머리를 바닥으로 조아리는 오랑캐식 항복 예식이었다. 원래 조선의 지식인들은 홍타이지를 포함한 여진족들을 인간이 아닌 ‘금수(禽獸)’로 경멸했다. 일부 인사는 심지어 청 태종을 ‘황태극(皇太極)’ 대신 홍태시(紅泰豕)라고 불렀다.‘붉고 큰 돼지’란 뜻이다. 그런데 인조가 ‘인간’도 아닌 ‘돼지’에게 무릎을 꿇는 치욕을 겪어야 했던 것이다. 청 태종은 인조로부터 항복을 받은 뒤 사로잡은 포로들을 이끌고 철수길에 올랐다. 그러면서 인조에게 또 다른 다짐을 받아냈다. “내가 끌고 가는 조선인 포로들 가운데 압록강을 건너기 전에 도망치는 자는 불문에 부친다. 하지만 압록강을 건너 단 한발짝이라도 청나라 땅을 밟은 뒤에 도망쳐 오는 포로는 조선 조정이 도로 잡아 보내야 한다.” 무시무시한 약조였다. 날이 갈수록 영토는 넓어지는데 인구가 부족했던 청은 조선인 포로들을 보배로 여겼다. 그들은 훌륭한 노동력이자 값을 받고 팔 수 있는 ‘물건’이었기 때문이다. 청은 10만이 훨씬 넘는 조선인 포로들의 탈출을 막기 위해 인조로부터 이같은 다짐을 받아냈던 것이다. 훗날 실제로 청에 끌려갔다가 탈출해 왔던 포로들은 이 ‘약조’ 때문에 청으로 다시 박송(縛送)되었다. 그리고 그 포로들은 청군에 끌려가 발뒤꿈치를 잘리는 혹형에 신음해야 했다. 호란 후에도 인조는 어렵사리 왕위를 유지할 수 있었지만 그 이면에는 수많은 조선인 포로들의 통곡소리가 숨어 있었던 것이다. ●누가 안추원의 비극을 책임질 것인가? 1664년(현종 5년). 항복 후 27년이 지나 한 남자가 청에서 도망쳐왔다. 마흔한살의 안추원(安秋元)이 그였다.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전 개성 부근에서 살았던 열세살의 소년 안추원은 가족과 함께 강화도로 피란했다. 하지만 이듬해 강화도가 함락될 때 그는 청군의 포로가 되었고, 선양으로 끌려갔다. 그는 선양에서 한족 출신 대장장이에게 팔린 신세가 되었다. 호란이 끝난 뒤, 포로로 끌려왔던 조선인 가운데 적지 않은 숫자가 몸값을 치르고 본국으로 송환되었다. 하지만 안추원은 그렇지 못했다.1644년 명이 멸망하자 청은 베이징에 입성한다. 베이징을 새로운 수도로 정한 청 조정은 선양의 거주민들에게 베이징으로 이주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스물한살이 된 안추원은 그의 주인에게 이끌려 베이징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다시 18년이 지난 1662년(현종 3). 서른아홉의 장년이 된 그는 조선으로의 탈출을 결행한다. 산해관(山海關)을 통과하여 만주 벌판을 가로질러야 하는 일생일대의 모험이었다. 하지만 산해관에서 청군에 붙잡히고 말았다. 베이징으로 송환된 그는 이마에 글자가 새겨지는 묵형(墨刑)에 처해졌다. 하지만 고국으로 돌아가겠다는 그의 비원(悲願)은 처절했다. 다시 2년이 지난 1664년, 안추원은 마침내 청을 탈출하는데 성공한다. 정확히 27년 만의 귀향이었다. 그가 사선을 뚫고 조선에 도착했을 때 조정은 고민에 빠졌다. 여전히 조선인 포로들의 탈출을 금지하고 있던 청의 존재 때문이었다. 하지만 27년만에 목숨을 걸고 탈출한 자국 백성을 어찌 차마 돌려 보내겠는가. 청이 알까봐 쉬쉬하는 가운데 안추원은 내륙으로 옮겨졌다. 안추원은 고향을 찾았다. 하지만 고향에는 아무도 없었다. 병자호란으로 그의 가족은 풍비박산 나고 말았다. 목숨을 걸고 다시 찾은 고향이었지만 그는 당장 생계조차 막막했다. 조정은 그를 받아주었을 뿐 생계대책을 마련해 주지는 않았다. 귀향의 감격도 잠시 뿐 배고픈 그에게 아무런 피붙이도 남아 있지 않은 고향은 그저 또 다른 이역이었을 뿐이다. 안추원은 절망 끝에 베이징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청으로의 귀환은 탈출보다 훨씬 위험했다. 1666년(현종 7). 그는 결국 고국을 탈출하려다 체포되었다. 체포된 이후 그가 어찌 되었는지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없다. 아마도 처형되었을 것이다.2번이나 탈출을 시도했던 그가 온전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백성 도탄에 빠뜨렸던 김자점 영의정까지 올라 안추원의 이야기는 한편의 ‘드라마’와도 같다. 하지만 위정자들의 오판에 떠밀려 나락으로 떨어진 그의 비극은 과연 누가 책임져야 할까? 병자호란을 통해 수많은 ‘안추원’들이 생겨났다. 하지만 ‘비극’을 불러왔던 최고책임자인 인조는 왕위를 유지했고, 책임을 져야할 신료들의 상당수도 멀쩡하게 살아남았다. 전쟁 발생 사실을 제대로 보고하지 않고 적과의 싸움마저 회피하여 국왕과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렸던 김자점은 인조 말년 최고위직인 영의정까지 올랐다. 오늘날. 병자호란의 참상을 떠올리면서 현실을 돌아본다. 꼭 10년전 ‘IMF 외환위기’가 불러온 칼바람 속에서 스러져갔던 수많은 민초들. 비극을 초래한 책임자들의 과실 또한 제대로 규명되지 않았다. 수많은 생령들을 도탄에 빠뜨려 놓고도 자신의 과실을 책임지지 않는 정치인들의 ‘무책임’은 시공을 초월하여 유전되는 것일까. 비극의 역사에서 교훈을 얻어내지 못하면 또 다른 비극의 역사가 되풀이된다고 했던가?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가 소용돌이치고 정치권의 난맥상과 민생의 어려움 때문에 걱정이 쌓여가고 있는 오늘, 370년전 병자호란의 비극을 되돌아보는 마음은 여전히 착잡하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교수> ●필자 한명기 교수는 ▲1962년생 ▲1985년 서울대 인문대 국사학과 졸업 ▲1997년 서울대 대학원 국사학과 졸업(문학박사) ▲1998∼2001년 서울대 규장각 특별연구원 ▲현재 명지대 사학과 교수. 계간 ‘역사비평’ 편집위원 ▲논저 ‘임진왜란과 한중관계’(1999),‘광해군’(2000) 외 다수 ●청태종 송덕비(위 사진) 병자호란 이후 청이 조선에 강요해서 세운 청 태종 송덕비. 병자호란의 전말을 적었다. 사진은 일제시대에 촬영된 것으로 당시 경기도 광주군 중대면 송파리 삼전도에 있었다. 현재도 삼전동에 있으며 사적 101호로 지정돼 있다.
  • [씨줄날줄] 원희룡/이목희 논설위원

    지금처럼 여론조사가 활발하지 않았던 시절, 정치권에 떠도는 속설이 있었다.“나쁜 기사라도 언론에 이름이 등장하는 쪽이 낫다.” 정치가십난에 한 줄이라도 걸치려고 치명적이지 않은 범위에서 일부러 잡음을 일으키는 정치인들이 꽤 있었다. 유권자들이 보도 내용은 잊어버리고 결국 이름만 기억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인지도를 높여야 선거에 유리하다는 사실을 체험으로 알았던 듯싶다. 한나라당 원희룡 의원이 비슷한 사고를 쳤다. 전두환 전 대통령을 찾아가 넙죽 큰절을 한 것이다. 소장파 대선주자로 개혁이미지를 가꿔가던 그로서는 파격적인 행동이었다. 지지층의 비난이 들끓자 원 의원은 “전 전 대통령에게 면죄부를 주려는 게 아니었다.”고 사과했다. 용서와 화합의 모습을 보여주려 했을 뿐이라는 설명이었다. 원 의원은 이명박·박근혜씨에 비해 인지도가 크게 낮다. 그들과 함께 다른 전직 대통령에게 세배를 갔다면 언론은 원 의원을 무시했을 것이다. 쇼킹한 행동으로 주의를 끈 뒤 사과하면 이중으로 언론의 관심을 모으게 된다. 원 의원이 원래부터 어떤 속셈을 갖고 움직였는지 알 수 없으나 결과적으로 그렇게 비치고 있다. 인터넷 시대를 맞아 옛 정치인들의 속설은 맞지 않는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네티즌 여론이 즉각 확산되는 데다 이름만 치면 수년간의 자료가 쏟아지기에 언행을 함부로 하기가 두렵다. 인지도를 좀 높이려다가 이미지가 바닥으로 떨어지면 재기불능이라고 여기는 정치인들이 이제는 다수다. 하지만 이 또한 과학으로 증명된 사실은 아니다. 장기적 영향에 대한 심층연구를 본 적이 없다. 노무현 대통령이 후보시절에 김영삼 전 대통령을 찾아 ‘03시계’를 자랑한 것이 대선 결과에 불리하게 작용했을까. 처음에는 지지도를 떨어뜨렸을지라도 막판에 부산·경남 표를 결집시키는데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출렁이는 표심을 계량의 잣대로 어설프게 분석하지 않아도 경험에서 우러난 감(感)이 들어맞는 사례가 아직도 상당하다. 차차기 대권까지 염두에 둔 원 의원의 앞날에 ‘전두환 세배’ 파문이 끼칠 영향을 긴 안목에서 탐구할 만하다고 본다. 이목희 논설위원 mhlee@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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