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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리산 산마을 이야기](28)경남 하동 화개 부춘마을

    [지리산 산마을 이야기](28)경남 하동 화개 부춘마을

    길은 부춘 마을 가슴팍을 관통해 해발고도 1000m가 넘는 형제봉 활공장까지 이어진다. 날개를 편 패러글라이더들은 악양 들판 위를 휘휘 돌아 섬진강 백사장에 내려앉지만 활공장으로 올라서려면 화개 부춘 마을 길을 빌려야만 한다. 형제봉 산길은 하동군 악양면과 화개면의 경계이자 지리산 영신봉(1652m)에서 출발한 지맥이 삼신봉(1289m)을 거쳐 섬진강까지 내달린 남부능선의 끝자락이기도 하다. 부춘 마을 동쪽은 이 형제봉 능선이, 북쪽엔 아득히 주능선, 서쪽 역시 700고지 이상의 무명능선, 남쪽으론 발아래 섬진강 그리고 그 건너 거대한 백운산(1215m)을 마주하고 있다. ●2년 전 봄 노선버스 첫 운행 행정지명은 ‘부춘’이지만 마을이 형제봉 산허리에 매달리듯 붙어 있다 해서 ‘부치동’ 또는 고려시대 때 원강사라는 큰절이 있어 ‘부처골’로 부르던 게 변하여 부춘이 됐다고 한다. 예전엔 ‘불출동’으로 부르기도 했는데 이 지명에 관해선 고려사람 한유한과 관련된 이야기가 전한다. 학식은 높지만 벼슬하기를 즐기지 않았던 한유한이 왕의 부름을 받고도 나아가지 않고 이 마을에 숨어 살았으며, 바위에 ‘불출동(不出洞)’이라 쓰고 평생 세상으로 나오지 않고 종국엔 신선이 되어 떠났다는 것.‘화개면지’에 따르면 이곳의 정확한 이름은 ‘부처가 나는 동네’ 즉 불출동(佛出洞)이고, 지금과 같은 부춘이 된 건 1879년 호구단자부터이다. 부춘 마을에 노선버스가 들어온 것은 2년 전 봄.‘토담농가’를 운영하는 공상철(49)씨는 “마을이 생기고 처음으로 들어온 버스여서 기쁨을 주체 못한 어르신들은 미리 아랫마을까지 내려가 버스를 타고 올라 왔다.”고 그때 상황을 설명한다. 호리병처럼 긴 모양새여서 마을 첫집에서 끝집까지 걷기도 버겁던 차에 버스가 들어 왔으니 그도 그럴 것. 운전기사 목에 꽃다발을 걸고 버스 앞에서 고사까지 지냈을 정도란다. 마을에서 시인으로 통하는 공씨는 그날의 기억을 “멋진 버스가 꽃 보란 듯 물도 보란 듯 숨찬 소리를 내며 아침마다 마을길을 오릅니다.”라고 예쁜 시로 적고 있다. 자가용 없는 주민들에겐 아침에 딱 한 대, 장날엔 두 번씩 운행하는 귀한 버스다. ●장아찌 특성화 마을 조성 한창 공상철·양영하(44)씨 부부는 6년 전 부춘으로 들어 왔다. 고향이 하동이기도 하고 시집간 여동생이 이곳에 살고 있기도 해서 몇 번 드나들다 아예 이사해 왔다고. 처음엔 남의 집을 빌려 살다가 3년 만에 지금의 집을 지었고, 그 집을 지은 지 다시 3년이 지났다. 신축 공사에 따른 경제적 어려움이야 말할 것도 없고 하필 또 그 해엔 뭔 비가 그리도 많이 왔는지 미완성된 흙집 위로 천막을 치고 날이 맑기를 기다리는 등 8개월의 적지 않은 기간이 소요됐다. 다행히 주말이면 입소문을 탄 손님들이 꾸준히 찾아와 주는 편이다. 부춘 마을은 전체 약 40여 가구 중 10여 집을 주축으로 ‘지리산 장아찌 마을’ 농가법인을 내놓은 상태다. 지리산에서 채취한 매실과 제피, 비비추, 녹차, 곶감, 머위, 취나물 등을 이용해 다양한 장아찌를 만들고 특성화할 계획이다. 공상철씨는 이 법인의 총무를 맡았다. 이번 주는 공씨를 포함해 마을주민 모두가 분주하다.21일(수요일)부터 시작돼 25일까지 닷새간 열릴 제13회 하동야생차문화축제 기간에 화개와 악양의 10개 마을에서 녹차체험프로그램을 운영하는데, 부춘의 경우 찻잎 따기, 녹차두부 만들기, 형제봉 일출 등의 프로그램을 운영하기 때문. 집집마다 빨갛게 익은 앵두만 느긋이 봄을 즐길 뿐이다. 글 사진 황소영 월간 마운틴 기자 (www.emountain.co.kr) ▶가는 길 서울 서초동 남부터미널과 부산 서부 사상 시외버스터미널 등에서 화개행 버스를 탈 수 있다. 어디서든 구례나 하동까지 간 다음 화개로 이동하는 것이 가능하다. 읍에서 부춘으로 가는 버스는 하루에 한 대뿐이므로 택시를 타는 것이 좋다. 자가용을 이용할 경우 호남고속도로 전주 나들목, 대전∼통영간 고속도로 장수 나들목, 남해고속도로 하동 나들목 등에서 19번 국도를 따른다. 부춘 마을은 화개장터 삼거리에서 하동 방향으로 조금 더 진행한 다음 큰길 쪽으로 좌회전해야 한다. 마을 진입로 입구에 이정표가 다닥다닥 붙어 있다. 녹차체험프로그램에 관심이 있다면 이장 이강주(011-838-6005)씨나 공상철(011-884-3741)씨에게 문의한다.
  • [길섶에서] 후사코(房子) ‘짱’/송한수 국제부 차장

    일본 아가씨가 바다 건너 시집을 왔습니다. 각시에게 홀린 사나이는 사진기자로 뛰는 막내 S군이랍니다. 예식장엔 살랑살랑 사랑이 넘실댔습니다.‘결혼식이 너무 밋밋하잖아.’라고 불쑥불쑥 외친 악동(?)도 있었지만 다들 웃어 넘겼답니다. 큰 인연에, 큰 행복이 가득하길 바라는 맘이란 것을 금세 알아차린 눈길이었습니다. 신랑이 이국의 장인께 넙죽 큰절을 올립니다. 어른은 벌떡 일어나더니 그 팔을 붙들어 말립니다. 우리 예절로는 가장 큰 고마움의 뜻이지만, 다른 나라에선 영 아닐 수도 있거든요. 알록달록 한복을 차려입은 신부가 딱 우리네 누이인 듯합니다. 축하한다며 ‘원샷’ 건넨 술을 들이켜더니 잔을 머리 위에 엎어 보여 줍니다.“단지 남녀 사이도 근원이 달라 서로 알기 힘든데, 나라까지 다르니 더 많은 이해가 절실할 텝니다.”주례 말씀입니다. 국경 너머 사랑을 일궈낸 한 쌍이 금쪽같은 오늘을 곱씹으면서 자랑거리를 쏟아내리라, 어쨌든 미더워진 얼굴이었지요. 송한수 국제부 차장 onekor@seoul.co.kr
  • [병자호란 다시 읽기] (62) 반란자와 귀순자들 Ⅲ

    [병자호란 다시 읽기] (62) 반란자와 귀순자들 Ⅲ

    조명연합군의 필사적인 저지 작전에도 불구하고 공유덕과 경중명은 후금으로 귀순하는 데 성공했다. 비록 중간에 다소의 손실이 있었지만 공경(孔耿)이 끌고 갔던 전함과 수군의 대부분은 후금군으로 넘어갔다. 후금의 홍타이지는 공경이 가져온 전함을 ‘하늘이 내린 선물’이라며 환호했다. 공경의 귀순으로 불안하게 유지되어 왔던 명과 후금의 군사적 균형은 깨졌다. 후금은 기존의 철기(鐵騎)가 지닌 막강한 위력에 더하여 수군까지 확보함으로써 군사력이 배가되었다. ●후금, 공경의 식량을 조선에 요구하다 1633년 4월, 공경이 이끄는 반란군의 선단은 장자도를 거쳐 압록강으로 들어갈 때 후금군의 인도를 받았다. 진강(鎭江) 부근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조명연합군의 저지를 뿌리치는 데 성공한 뒤부터 후금은 전함들을 간수하기 위한 작전에 돌입했다. 그들은 압록강 연안을 파서 물길을 낸 다음 전함들을 진강 근처의 마이산(馬耳山) 부근으로 예인했다. 전함 주변에는 병력을 배치하여 경계를 강화했다. 혹시라도 명군이 몰래 들어와 배들을 태워버리는 사태를 막기 위한 조처였다. 4월28일, 후금 사신 용골대(龍骨大)와 녹지( 只)가 서울로 들어왔다. 용골대 일행은 공경이 귀순한 전말을 설명한 뒤, 그 일행들에게 먹일 식량을 달라고 요구했다. 용골대가 내민 국서에서 홍타이지는 ‘공유덕 등이 명군 신분으로 가도에 머물 때는 식량을 주다가 후금으로 귀순했다는 이유로 주지 않는다면 사리에 맞지 않는다.’며 급량(給糧)을 강하게 요구했다. 공경 일당이 상륙한 지역이 심양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자신들이 식량을 운반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린다는 것도 조선에 손을 내미는 명분으로 제시했다. 난감한 일이었다. 조선은, 공경을 추격해 온 주문욱 일행으로부터 급량을 요구받은 상황에서 후금까지 식량을 요구할 줄은 상상도 못했다. 후금 사신 접대를 맡고 있던 구관소(句管所) 신료들은 용골대에게 ‘공경은 중국의 반장(叛將)이자 유흥치(劉興治)와 함께 조선을 도모하려 했던 원수’임을 내세워 식량을 내어 줄 수 없다고 반박했다. 조선이 요구를 받아들일 기미를 보이지 않자 용골대 등은 다시 ‘형제의 도리’를 들고 나왔다. 그들은 ‘명에 붙으면 식량을 주고, 후금에 붙으면 주지 않는 것은 형제의 도리가 아니다.’라고 조선을 압박했다. 조선은 주문욱 일행에게는 이미 3000석의 양곡을 공급하기로 결정한 상태였다. 뿐만 아니라 임경업 등을 보내, 공경 일행과 합세한 후금군과 전투까지 치른 상황이었다. 이미 확실하게 명 측으로 기우는 태도를 보인 터라 후금의 식량 요구까지 거부할 경우, 어떤 사태가 벌어질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후금의 요구를 거절하면서도 내심 찜찜해하고 있던 5월6일, 명 황제의 칙서가 도착했다. 인조의 아버지 정원군(定遠君)을 원종(元宗)으로, 어머니 구씨(具氏)를 왕비로 각각 추봉(追封)하는 것을 승인한다는 내용이었다. 신료들의 격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오매불망 추진해 온 인조의 ‘숙원 사업’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인조는 고무되었고,‘명의 은혜를 배신할 수 없다.’는 분위기가 번지면서 후금의 급량 요구는 거부되었다. ●홍타이지, 공경을 극진히 예우하다 공유덕과 경중명이 수군과 함선을 이끌고 귀순해 오자 홍타이지는 고무되었다.1633년 5월6일, 홍타이지는 공유덕 등에게 줄 양마(良馬)를 마련하기 위해 고위 관리들에게서 말 100마리를 차출했다. 그 가운데는 자신이 아끼는 내구마(內廐馬)도 포함되어 있었다. 홍타이지는 공유덕 등을 각별히 대우했다. 그들을 바로 심양으로 부르지 않고, 일단 휘하 무리들을 거느리고 요양(遼陽) 근처에 머물도록 배려했다. 공경이 자신의 부하들을 자율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재량권도 주었다. 이윽고 6월3일, 공경이 귀순한 무리들을 이끌고 심양으로 들어왔다. 홍타이지는 백관을 이끌고 궁궐 밖 10리까지 나아가 공경을 맞았다. 홍타이지는 공경과 포견례(抱見禮)를 행했다. 서로 얼싸안는 것이었다. 만주의 신료들은 누구든지 칸에게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를 행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세 번 큰절을 올리고 한 번 절할 때마다 세 번씩 머리를 조아리는 방식이었다. 후금의 신료들은 ‘투항자와 포견례를 행하는 것은 참월하다.’며 홍타이지를 만류했다. 홍타이지는 ‘공경은 등주(登州)를 장악했던 세력가로서 수많은 무리와 전함을 이끌고 귀순했으니 우대하지 않을 수 없다.’며 신료들의 반대를 뿌리쳤다. 공경은 홍타이지의 형 다이샨(代善)과도 포견례를 행했다.6월5일에도 홍타이지는 공경을 다시 불러 옆자리에 앉히고 성대한 잔치를 베풀었다. 과거 조대수(祖大壽)가 투항했을 때보다 더 극진한 대접이었다. 홍타이지는 공유덕을 도원수(都元帥), 경중명을 총병관(總兵官)으로 임명하고 칙인(勅印)을 하사했다. 이윽고 두 사람에게 내린 유시문(諭示文)에서, 공경이 군민(軍民)과 무기, 전함을 갖추고 귀순한 것을 ‘위적풍공(偉績豊功)’이라고 찬양했다. 두 사람에게 ‘부귀(富貴)를 영원히 보장하고 죄를 지어도 전부 사면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파격적인 환대였다. 이 같은 환대가 뒷날 이른바 삼번(三藩)의 난(亂)이 일어나는 ‘씨앗’이 되기도 했지만, 동시에 함선과 수군을 얻게 된 홍타이지의 기쁨이 얼마나 컸는지를 웅변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후금, 명을 자유자재로 ‘요리’하게 되다 공경이 후금으로 귀순한 효과는 곧바로 나타났다.1633년 6월, 후금은 악탁(岳託) 등에게 병력 1만을 주어 명의 여순구(旅順口)를 공략하도록 했다. 공유덕과 경중명도 휘하 병력을 이끌고 이 원정에 동행했다. 공경의 안내를 받은 후금군에 의해 여순은 힘없이 함락되었고, 후금군은 5302명의 포로와 2만냥 이상의 은을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여순의 함락 소식은 당장 가도와 조선에 파장을 미쳤다. 가도를 지키던 부총병(副總兵) 심세괴(沈世魁) 등은 후금군의 공격을 우려하여 가도를 포기하고 본토 쪽으로 도망갈 궁리를 하기에 이르렀다.8월16일, 홍타이지가 보낸 국서가 서울에 도착했다. 그는 먼저 자신들도 전함을 보유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은근히 과시했다. 이어 ‘우리가 배를 띄우면 가도를 차지하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조선이 놀랄까 삼가고 있다.’며 ‘향후 가도를 돕지 말라.’고 경고했다. 가도를 비롯하여 명 본토가 후금 수군의 위협 앞에 노출되자 명 조정의 조바심은 더욱 커졌다. 그들은 혹시라도 조선이 후금에 굴복하여 양자가 연합하게 되는 상황을 우려했다. 그들은 수시로 사람을 보내 조선을 견제하려 했다.10월에는 가도의 부총병 정룡(程龍)이 조선에 들어왔다. 그는 ‘여순이 함락되었다고 두 마음을 품어서는 안 된다.’고 조선을 다잡으려 했다. 그러면서 ‘조선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서도 가도의 명군에게 군량을 공급하라.’고 채근했다. 공경의 귀순 이후 조선은 명과 후금 사이에서 그야말로 절박한 상황으로 내몰렸다. 후금의 ‘협박’과 명의 ‘호소’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조선은 사태의 심각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전함과 수군을 보유하게 된 후금의 ‘변신’에 대처하지 못했다. 다시 언급하겠지만,1637년 1월 조선의 왕실과 중신들이 피란해 있던 강화도는 공유덕이 이끄는 후금군의 상륙작전 앞에 맥없이 무너졌다. 강화도 수비를 책임졌던 조선군 지휘부는 ‘후금이 수군을 갖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요컨대 공경의 귀순은 ‘명의 비극’이자 ‘조선의 비극’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기름띠 제거에 큰 절 올립니다”

    “기름띠 제거에 큰 절 올립니다”

    충남 태안군 주민 200여명은 5일 소원면 만리포해수욕장에서 기름유출 사고 이후 지금까지 군을 다녀간 자원봉사자들에게 고마움을 표시하는 ‘감사 이벤트’를 열었다. 이날 행사는 만리포해수욕장 번영회에서 주관했다. 국응복 번영회장은 “지금까지 태안군을 다녀간 130여만명의 자원봉사자 덕분에 태안이 점차 예전의 모습을 되찾고 있다.”면서 “복구에 최선을 다해 태안을 다시 국내 최고의 휴양지로 만들어 돌려드리겠다.”고 말했다. 소원면 주민 김모(46)씨는 “태안이 생계 지원금 지급문제로 주민간 갈등이 나타나고 있는 중에 이처럼 뜻깊은 행사를 열게 돼 기쁘다.”면서 “오늘 행사를 계기로 군민들이 한마음으로 뭉쳐 단결된 모습을 보여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날 행사는 참석자 모두가 자원봉사자들의 노고에 고마움을 표시하는 뜻으로 큰절을 하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한편 태안군은 설 연휴기간 방제작업을 일시중단한 뒤 오는 11일부터 작업을 재개할 계획이다. 태안 이천열기자 sky@seoul.co.kr
  • [문화마당] 박경리 선생이 그리운 이유/윤대녕 소설가

    영동고속도로에서 남원주로 빠져 충주 방향으로 10분쯤 가다 보면 연세대학교 원주캠퍼스 건물이 보이고 거기서 5분을 더 가면 ‘토지문화관’이 나온다. 소설가 박경리 선생이 은거하고 계신 곳이다. 1996년 선생의 대하소설 ‘토지’를 기념하기 위해 재단이 설립된 후,3년 뒤인 99년 6월에 원주시 흥업면 매지리에 토지문화관 건물이 세워졌다. 선생의 사저는 문화관 바로 아래 소박하게 위치해 있다. 토지문화관의 설립 목적은 학술·문화 행사의 기획 추진, 연구 및 창작활동 지원, 국제 학술·문화 교류, 문화 운동 및 교육 활동이다. 그중 연구 및 창작활동 지원 분야에 있어서 토지문화관의 역할은 참으로 실속있고 눈부시다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처음엔 본관 건물 일부와 선생의 사저 옆에 있는 ‘매지사’라는 흰 목조건물을 작가들의 집필 공간으로 제공했다. 그러다 2006년 5월에 ‘귀래관’이란 이름의 창작 전용 건물이 다시 문화관 입구에 세워졌다. 집필 공간을 필요로 하는 작가들이 의외로 많다는 것을 아신 선생이 사재까지 털어넣으며 직접 공사를 챙기셨다고 한다.‘귀래’는 근처 마을 이름인 동시에 귀한 사람이 온다는 뜻이리라. 토지문화관은 매년 3월부터 12월까지 작가들에게 집필 공간을 제공한다. 그래서 봄이 되면 저마다 무거운 책보따리를 싸들고 속속 작가들이 찾아든다. 매지사와 귀래관에 수용할 수 있는 인원은 약 15명으로, 문화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신청해서 이용할 수 있다. 필자 또한 귀래관 건물에 한 달씩 세 번을 묵으며 그때마다 소설을 한 편씩 들고 나왔다. 이제나그제나 참으로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작가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선생은 드나드는 작가들의 인사조차 받지 않으신다. 그리고 매일 새벽 3시에 기침해 손수 작가들이 끼니 때 먹을 반찬을 한두 가지씩 만드셔서 식당으로 내려보내신다. 또한 직접 재배하신 고구마, 당근, 옥수수 등속과 선물로 들어온 인절미나 고향 통영에서 올라온 음식들도 대개 작가들 차지다. 사정이 이러하니 새까만 후배 작가들 입장에서는 놀고먹을 수가 없다. 무엇보다도 바로 옆에 선생이 계시니 긴장을 풀 수가 없다. 가끔 식당으로 내려오셔서 반찬은 먹을 만하냐고 물어보시고는 이내 또 사저로 돌아가신다. 언젠가 한번은 선생이 직접 필자가 묵고 있는 귀래관으로 찾아오셔서 글 열심히 쓰라고 격려해 주신 적이 있다. 고혈압 치료 차 병원에 가시던 길이었다. 필자는 소설을 탈고해 마침 귀래관을 떠나오던 날이었다. 그후 다시 귀래관에 소설을 쓰러 들어갔을 때는 선생을 사저로 직접 찾아 뵙고 큰절을 올렸다. 손자뻘되는 소설가에게 선생은 경어를 쓰시면서 또 글 열심히 쓰세요, 라고 따뜻하게 격려를 해주시는 것이었다. 많은 후배 작가들이 박경리 선생을 대모(大母)처럼 생각한다. 선생께서 직접 챙겨주신 음식을 먹고 글을 쓴 경험이 있는 작가라면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박경리 선생과 ‘토지’의 역사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원주시의 후원을 받아 2012년 완공을 목표로 총 사업비 64억원을 들여 4만 7500㎡ 규모의 ‘작가마을’을 토지문화관 인근 회촌마을에 세울 예정이라고 한다. 대규모 역사가 다시 시작되는 것이다. 이는 국민 소설 ‘토지’의 힘이거니와 박경리 선생 개인의 부단한 염원이 아니고서는 결코 불가능한 일이다. 원주시 또한 ‘작가마을’이 완공되면 문학 혹은 문화도시로 이미지가 바뀔 것이다. 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문학의 시대가 가고 있다느니 하는 자조적인 풍문은 이 새로운 역사의 시작 앞에서 한없이 무색해진다. 그나저나 선생께 새해 인사조차 드리지 못했다. 선생님, 늘 산처럼 강녕하시옵고 후배 문인들의 등불로 오래오래 남아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윤대녕 소설가
  • 새해 첫날 명암 엇갈린 전직대통령

    무자년(戊子年) 새해 첫날 세배객을 맞은 김영삼(YS 왼쪽)·김대중(DJ) 전 대통령의 명암이 엇갈렸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상도동 자택에서 이른 아침부터 세배 손님을 맞았다.YS는 “이명박 대통령 시대를 맞아 새롭게 시작하자.”는 덕담을 건네는 등 잔치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한이헌 전 청와대 경제수석은 “문민정부가 환란으로 불명예를 입었지만 국민의 정부 때는 카드 빚으로 민생을 도탄에 빠지게 해 경제문제에서 더 나빴다.”면서 “이명박 정부의 탄생으로 불명예를 씻었다.”고 자평했다. 박관용 전 국회의장을 비롯해 박희태 전 국회부의장, 김덕룡 김무성 이재오 공성진 진수희 유기준 의원 등 한나라당 의원 등으로 문전성시를 이뤘다. 박세일, 이각범 전 청와대 수석 및 전직 장·차관 등도 세배 인사를 했다. 황인성 문민정부 초대 국무총리는 YS에게 큰절을 올렸다. 부인 손명숙 여사와 동갑인 YS는 오는 11일 팔순 잔치를 함께 갖는다. DJ는 동교동 자택에서 오충일 대표와 김효석 원내대표 등 대통합민주신당 지도부에게 “잘 하세요.”라는 말을 4차례나 언급했다. 이어 “위기임에 틀림없다. 제가 정치하는 반세기 동안 이렇게까지 처참하게 진 것은 처음이다. 박정희 정권이 탄압할 때에도 이렇게까지 지지 않았다.”며 질책했다. 통합신당 지도부를 비롯해 박상천 대표 등 민주당 지도부와 권노갑 전 고문, 김상현 설훈 이훈평 김옥두 장재식 전 의원 등 동교동계 인사들도 신년 인사를 했다. 이종락기자 jrlee@seoul.co.kr
  • 마부노호 선원들 귀국 “정부 대응 서운”

    지난 5월 소말리아 해적에게 피랍되었다가 풀려난 마부노호 선원들이 16일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귀국했다. 이송열(47) 기관감독, 조문갑(54) 기관장, 양칠태(55) 기관장과 함께 입국한 한석호(40) 선장은 “피랍 소식을 제일 먼저 접한 정부가 우리의 석방엔 관심이 없었다.”며 “국민여러분의 힘으로 풀려났다.”고 귀국 소감을 밝혔다. 그는 피랍생활에서 가장 힘들었던 점이 “해적들에게 구타를 당하고 배고픔에 시달렸던 것” 이었다며 “그들은 짐승만도 못한 인간들”이라고 말했다. 또한 해적들의 납치 재발 방지를 위해서는 “경비를 데리고 가거나 무기를 싣고 가는 것이 방법”이라며 “배에 총 한자루만 있었어도 그들은 배에 못 올라왔을 것”이라고 말했다. 마부노호 선원들은 피곤에 지친 모습이었지만 국민들의 성원에 큰절로써 감사의 뜻을 전했다. 손진호기자 nasturu@seoul.co.kr @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Seoul In] 21일 자녀와 함께하는 다도 특강

    강북구(구청장 김현풍) 오는 21일 오후 2시 번2동 주민자치센터 3층 강당에서 ‘생활예절 및 다도 특강’을 실시한다. 주민은 물론 부모와 함께 온 어린이도 참여할 수 있다. 강북문화원의 전문 강사로부터 큰절하는 법, 두손을 배꼽에 모으는 공수자세, 전통 차 마시는 법 등을 배우는 시간이다. 어린이들은 경로효친을 배울 수 있는 기회다. 번2동사무소 901-6511.
  • 2차 민심대장정 현직의원 속속 합류

    6개월 전과 비교했을 때 손학규 전 경기도지사 캠프의 가장 큰 변화는 현직 의원의 합류다. 지난달 김동철·김부겸·신학용·안영근·정봉주·조정식·한광원 의원 등 열린우리당 출신 무소속 의원 7명이 공개적으로 지지 선언을 한 뒤 캠프에 합류했다. 정장선 의원도 캠프 합류 시점을 두고 고민 중이다. 2차 민심 대장정에서는 현역 의원들이 함께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전남 화순을 방문했을 때는 민주당 최인기 의원이 함께했다. 전북 김제와 부안을 찾았을 때는 김근태 전 열린우리당 의장계보인 열린우리당 최규성 의원이 하루 종일 수행을 담당했다. 해당 지역 국회의원으로서 예의를 갖추는 것 이상의 제스처를 보였다는 점에서 범여권 내, 특히 호남지역에서 손 전 지사의 위상을 짐작케 했다. 생기마을 촌장인 선진평화연대 정성헌 상임공동대표도 손 전 지사에게는 든든한 버팀목이다. 그가 공동대표를 수락했을 때 손 전 지사가 큰절을 올렸을 정도다. 고려대를 졸업한 정 공동대표는 이명박 전 서울시장을 ‘명박이 형’이라고 부를 정도로 친분이 깊지만 손 전 지사를 선택했다. 그는 손 전 지사에 대해 “사람 됨됨이는 여러 사람 중 제일 나을 것”이라고 평가한다. 청와대 출신들의 캠프 합류도 눈에 띈다.2003년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서 전문위원으로 활동한 뒤 청와대 혁신기획비서관을 지냈던 상명대 전기정 교수가 대표적이다. 윤훈렬 전 행사기획비서관과 나종윤 국가안보보좌관실 행정관도 캠프에서 특보로 활동 중이다. 이외에도 오재록 전 청와대 행사기획비서실 행정관이 캠프 전략기획실에서 일하고 있다. 언론인 출신으로는 조용택 전 조선일보 편집 부국장에 이어 배종호 전 KBS 라디오뉴스제작팀장, 김재목 전 문화일보 논설위원이 최근 추가로 합류했다. 경기도지사 시절 참모·보좌진과 서강대 교수 시절 제자그룹은 한나라당 탈당 전부터 돕고 있다.나길회기자 kkirina@seoul.co.kr
  • 남편을 사고팔고 9년이 흘렀더니

    남편을 사고팔고 9년이 흘렀더니

    포목 장사로 살림을 꾸려오던 아내가 빚에지쳐 참다못해 남편을 팔았다. 무능이 죄가 되어 팔려가야 했던 남편의 몸값은 일금 1백만원정-. 그로부터 날과 달이 흐르기 9년, 옛 아내는『남편을 돌려 달라』하고, 사간 아내는『못 주겠다』하는데, 남편의 말은『어찌 하오리까』-. 화투하다가 곗돈 독촉에 서방이나 사가란 농담이 61년- 고양이도 졸음을 이기지 못한다는 화사한 봄철인 4월의 어느 날. 영남 포목의 집산지인 대구시 대신동 115 서문시장 포목상가가 유난히 며칠동안 손님이 뜸했다. 이럴때면 으례 그러했던 것처럼 포목부 여주인들은 가까운 이웃 점포끼리 모여 화투놀이로 무료한 시간을 달랬다. 화투놀이가 한참 돌아가다가 그중의 김숙아(金淑亞·가명·당시 34)여인은 왈칵『서방이나 누가 사가면 몰라도…』내뱉듯한 농담끝에 들었던 화투장을 홱 던져버렸다. 그녀는 화투를 치던 친구이며 계주(契主)인 허이옥(許伊玉·가명·당시 35) 곗돈 독촉에 순간 기분이 언짢았던 것이다. 그렇게까지 화를 낼 필요가 뭣이냐는듯 빤히 친구의 얼굴을 바라보던 허여인은 『그래 내가 살꼬마』하고 응수했다. 친구의「히스테리」를 농담으로 얼버무리려고 짐짓 말한 것이다. 그러나『내사 정말이지 백만원만 누가 준다면 남편같은거 주겠다』-이런 김여인의 잇따른 푸념이 여러사람의 운명을 기구하게 만들어 놓을줄이야…. 이때 과부 허여인의『그렇다면-』하는 집념이 결국 그녀들 사이에 돌이킬수 없는 깊은 강을 파놓고 만 것이다. 이로부터 한달 후 박동하(朴東夏·가명·당시 40)란 남자는 진짜로 김여인 아닌 허여인의 남편이 되고마는 운명에 놓이게 되었다. 여인네의 농담때문에 어처구니없게도 사고 팔린 박씨는 물론 전 아내가 이혼 수속을 깨끗이 해주었고, 몸 하나만을 가지고 다시 장가온 셈인 박씨와 허여인은 비록 식은 올리지 못했지만 의젓한 박씨의 호적상의 아내로 뒤바뀌었다. 『아내와 결혼한지 10년동안 돈이라곤 한푼도 벌어보지 못한 주제에 사업을 한답시고 2백만원을 털어먹고 나니 빚에 쫓기는 아내에게 그렇게라도 해주는 것이 내가 위해주는 마지막 길 같았다』고 박씨는 그때를 돌이켜 말했다. 남편팔아 빚갚고 서울로 상경(上京)길 우연히 다시만나 스스로 빚때문에 과부가된 김여인은 빚을 갚고 남은 살림을 정리해 어린 남매를 데리고 한많은 대구를「아듀」- 서울로 터전을 옮겼다. 그 후에도 기구한 박씨의 일과는 전아내와의 생활에서 처럼 집에서 온종일 어린애 보는 일이 고작이었다. 다만 달라진 것은 자기 어린애 아닌 허여인의 전남편 딸 아이라는 것뿐. 이렇게 해서 헤어진 그들은 소식을 서로 끊은채 9년이 흘렀다. 그러나 사람의 운명은 잠재한 감정을 터뜨리게 하는 어떤 계기를 만들어 주고 마는 것일까? 공교롭게도 허여인의 집안어른 상사(喪事)로 박·허 부부가 함께 서울에 올라왔다가 박씨 홀로 시내에 나온 나들이 길에서 옛 아내 김여인과 마주쳤다. 그것은 정말 우연한 일이었다. 지난 겨울인 1월. 숨막힐듯 따분한 초상을 치르고난 박씨는 바깥 바람을 쐬러 나온 길이었다. 남산을 오르내리고나서 서대문을 지나 교남동까지 터벅터벅 걸어온 박씨는 온 얼굴이 얼얼하는 추위를 느꼈다. 문득 고개를 든 그의 눈에 허름한 대중식사 집이 눈에 띄었다. 머뭇거릴 것없이 들어가 뜨끈한 국물을 청하고난 박씨는 식당 주인 여자와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무리 9년의 세월이 흘렀다 치더라도 발자국 소리만 들어도 안다는 아내와 남편의 사이가 아니었던가…. 얼굴을 첫눈에 못 알아볼리가 없다. 어느덧 50대 초로에 들어선 옛남편, 40이 넘어 이마에 잔주름이 더한 옛아내. 그렇다고 어찌 돌아설 수 있으며 어떻게 돌려세울 수 있겠는가. 2백만원 배상하겠다에 그만큼 위자료주겠다고 코흘리개던 남매가 중학생이 되어있었다. 이날밤 아들딸의 큰절을 받고난 박씨는 야위고 거칠어진 옛아내의 손을 감싸쥔채 목이 메었다. 길거리에서의 국수 장수며「리어카」끌기에서 참새구이장수등 애절했던 서울살이 지나간 이야기를 밤새워 들었다. 이제와서 팔았다고 노여워하고 팔려갔다고 섭섭해 한들 한번 터진 봇물이 쉽게 멎을 수 있겠는가. 이들 옛부부는 그로부터 한달이 멀다하고 김여인이 대구로 내려와 밀회를 가졌다. 그러나 어엿한 아내인 허여인이 수상쩍은 남편의 행동을 끝내 모를리가 없었다. 드디어 지난 8월-. 문제의 세사람이 대구에서 자리를 같이했다. 그리고 조용히 해결의 방안을 찾았다. 그러나 협상은 2차 3차 그때마다 깨지고 말았다. 김여인은 남편을 물리기 위해 피맺혀 번돈 원금의 2배(2백만원)를 배상하겠다고 제의했으나 허여인은 오히려 2백만원의 위자료를 줄테니 남편과 손을 끊으라 했다. 박씨와의 사이에서 그간 형제까지 둔 허여인은 그래도 이혼하기 싫어 간통 고소만은 하고 싶지 않다고 말할만큼 현 남편에 대한 집념이 강하다. 김여인 역시 변호사와 의논, 원인무효로 인한 남편반환 및 이혼무효확인 청구소송 같은거라도 해서 남편을 돌려 받을 수 없겠느냐고 눈물짓고 있다. 박씨는 오래전에 포목 장사를 그만 두고서도 살림을 꾸려나가는 아내(허여인)에게 계속 의존해 살고있다.(대구시내당동) 여복(女福)?에 치여 되레 고생이 되고있는 이 남자는『나는 어쩌면 좋겠느냐』고 울부짖는다. [선데이서울 70년 10월 18일호 제3권 42호 통권 제 107호]
  • 15차 이산상봉 1진 오열속 작별

    15차 이산상봉 1진 오열속 작별

    “어머니,100살까지 건강하게 사십시오. 통일이 되면 다시 만납시다.” 제15차 이산가족 1회차 상봉행사에 참여한 남북 가족들은 11일 금강산호텔에서 눈물과 한숨 속에 작별상봉을 하며 2박3일 일정을 마무리했다. 국군포로와 납북자 가족 등 특수 이산가족 4가족을 포함한 남측의 99가족은 북측 가족들과 손을 꼭 잡고 다시 만날 날을 다짐하며 아쉬움을 뒤로한 채 무거운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대성호 납북어부인 김홍균(62)씨를 39년 만에 만난 어머니 이동덕(88)씨는 “홍균이가 나를 보고 싶을 때마다 담배를 피웠다고 하더라. 그래서 막 뭐라고 나무랐다.”며 “다시 만날 때까지 술·담배 끊고 건강하게 있으라고 당부했다.”고 각별한 모정을 표했다. 홍균씨의 동생 강균(54)씨도 “형님이 살아계신 것을 알았으니 한은 풀었다.”고 상봉 소감을 밝혔다. 홍균씨는 담담하게 “어머니, 울지 마세요.100살까지 사십시요. 통일이 되면 다시 만납시다. 통일이 머지않았어요.”라고 말했으나 가족을 태운 버스가 떠나는 순간 돌아서서 눈물을 훔쳤다.6·25전쟁 중 사라진 형 정용진(73)씨 가족을 만난 정혁진(72)씨는 가계도를 그려 보이며 북측 조카들에게 가족의 돌림자 순서를 설명해줬다. 역시 피랍된 형의 뿌리를 찾은 이양우(75)씨는 북녘 조카들에게 “형님 제사 잘 모셔라.”고 당부했다. 남측 최고령자 고면철(98)씨와 만난 북측 자녀들은 100세를 목전에 둔 아버지와의 작별에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 북측 아들 명설(71)·명훈(61)씨와 딸 선자(65)씨는 “통일돼 만날 때까지 건강하세요.”라며 큰절을 올렸다. 남측 가족들은 상봉 종료시간이 다가오자 북측 가족과 주소를 교환하고 재회를 다짐하며 1시간의 짧은 만남을 정리했다. 북측 가족들은 창가에 서서 ‘우리는 하나’ 노래를 부르며 남측 가족들을 싣고 떠나는 버스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남측 상봉단은 오후 속초로 돌아왔으며,12∼14일에는 북측 이산가족 100명이 남측 가족 442명을 금강산에서 만난다. 금강산 공동취재단·김미경기자 chaplin7@seoul.co.kr
  • ‘이산의 벽’

    “아버지, 꼭 미국으로 여행을 가야 하나요? 이제라도 자주정신을 갖고 똑바로, 떳떳하게 살아야 해요.” 김응환(91) 할아버지는 28일 화상상봉을 통해 57년 만에 마주한 북녘 딸들로부터 ‘씁쓸한 충고’를 들었다. 이날 서울 남산동 대한적십자사 상봉실에 나온 김 할아버지는 북녘에 두고 온 두 딸 영순(69), 영숙(67)씨를 만났다. ●화상상봉 이틀째… 씁쓸한 부녀간 만남 1950년 북한 인민군으로 참전, 남쪽에서 전쟁포로가 된 김 할아버지는 화면에 두 딸이 보이자 “내가 아버지”라며 반겼고 딸들은 큰절을 올렸다. 그러나 남녘의 동생 가족이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다.”는 소식에 북녘 누나들의 표정이 변했다.“꼭 미국에 가서 공부해야 하나요.” 김 할아버지가 “요즘은 미국이나 유럽으로 여행도 다닌다.”고 하자 딸들은 “미국에 안 나가면 못 사나요. 여행을 거기까지 가야 하나요.”라면서 “조국과 민족을 사랑해야 한다.”고 핀잔을 줬다. 대화 도중 ‘북한’이라는 말이 나오면 “우리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정식 명칭이 있다.”고 했다. 분단이 가져온 남북간 체제 차이를 실감하지 않을 수 없는 순간은 부산에서도 있었다. 부산 상봉장에서 57년 만에 딸의 목소리를 들은 한방서(95)씨의 가슴도 무너져 내렸다. 북한의 막내딸 금녀(61)씨는 “아버지,60년 세월 어디 갔다가 이제 오셨냐.”면서 “어머니는 평생 아버지를 그리워하다 눈도 제대로 감지 못하고 돌아가셨는데 너무 무정하다.”고 쏘아붙였다.1·4후퇴 때 ‘3일만 피신했다가 돌아와야겠다.’며 피란길에 올랐다가 생이별을 하게 된 한씨는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금녀씨는 ‘고향의 봄’을 부르는가 하면 열 번도 넘게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찬양하며 한씨가 귀환하지 않은 것을 다그쳤다. 한씨는 “어린 자식들을 두고 나온 것이 평생의 한이 됐는데…”라며 비통해했다.28일 이틀째 진행된 제5차 이산가족 화상상봉을 통해 남북한 각각 20가족이 스크린으로 만났다. 그러나 체제 장벽을 확인한 이들이 화면으로 어색한 대화를 나누는가 하면 행정 착오로 가족을 보지 못한 안타까운 상황도 벌어졌다. ●동명이인 판명 상봉취소도 28일 대한적십자사 부산지사에서 북한에 있는 동생 재만(77)씨를 화상상봉하기로 예정됐던 김봉조(83·경남 진주시 초장동)씨는 25일 동생이 다른 사람의 가족이며 동명이인으로 판명돼 화상상봉이 취소됐다는 통보를 받았다. 김씨는 “마지막으로 얼굴이라도 보는 줄 알았다.”면서 “이산가족의 마음을 감안하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서재희기자 s123@seoul.co.kr
  • [아픈 역사에서 배운다-병자호란 다시 읽기] 10만 포로의 눈물

    [아픈 역사에서 배운다-병자호란 다시 읽기] 10만 포로의 눈물

    조선은 왜 인조가 삼전도에서 청태종에게 항복하는 비참한 환란을 겪어야 했을까. 한마디로 17세기초 명·청 교체기의 격랑 속에 조선 지배층이 국제정세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2007년은 병자호란이 끝난 지 370년이 되는 해이다. 북핵 문제를 놓고 6자 회담이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듯, 지금 이 순간에도 한반도를 둘러싼 안팎의 정세는 예측불허다. 우리가 과연 북한은 물론 미국과 중국·러시아·일본 등과의 숨가쁜 외교전에서 북핵이나 자유무역협정(FTA) 등의 난제를 슬기롭게 풀어가며, 미래를 당당하게 개척해 나갈 수 있을까. 병자호란을 살피는 것은 단순히 ‘과거의 역사´를 되돌아보자는 것이 아니라, 한반도와 한민족의 운명에 외교가 얼마나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지 되짚어보기 위해서이다. 지대 사학과 한명기 교수의 눈을 통해 ‘병자호란´의 안과 밖을 살펴본다. 역사평설 ‘병자호란´이 매주 목요일 연중기획으로 독자를 찾아간다. 편집자 주 ●준비 없이 전쟁을 선택하다 1636년(인조 14년) 봄. 조선 조정에서는 청나라를 황제국으로 인정하느냐의 여부를 놓고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같은 해 3월, 청의 수도인 선양(瀋陽)에서 누르하치의 여덟째 아들 홍타이지(皇太極)가 황제로 즉위한다는 소식이 조선에 알려졌기 때문이었다. 척화파(斥和派) 신료들은 “개·돼지만도 못한 오랑캐 추장에게 황제 칭호는 가당치도 않다.”며 “정묘년(丁卯年,1627년)에 그들과 맺은 맹약을 파기하고 전쟁도 불사해야 한다.”고 외쳤다. 그들은 이어 ‘황제 운운’하는 내용을 담은 국서를 가져온 청나라 사신 용골대(龍骨大)의 목을 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반면 주화파(主和派) 신료들은 “청이 명을 능멸할 정도로 세력이 강해진 현실을 인정하여 그들의 요구를 무조건 배척하지 말고, 사신을 박대해서도 안된다.”고 맞섰다. 최종 결정권자인 국왕 인조는 양자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결국 척화파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런데 곧 이어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났다. 조정이 청과 맺은 맹약을 파기한다는 사실을 알리고, 장차 발생할지도 모르는 청의 침략에 대비하라는 내용으로 인조가 평안감사에게 보내는 극비교서(敎書)를 가져가던 금군(禁軍) 전령이 용골대 일행에게 교서를 빼앗긴 사건이었다. 자신의 목을 치라는 험악한 분위기에 놀라 황급히 달아나고 있던 용골대 일행에게, 다른 곳도 아닌 조선 영토 안에서 국왕의 밀찰(密札)을 빼앗긴 것이다. 척화냐, 주화냐를 놓고 정쟁만 무성했던 와중에 정작 중앙에서 지방으로 이어지는 정보 전달체계가 부실하기 짝이 없었던 것이다. 1636년 12월6일. 청군은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질풍같이 내달렸다. 병자호란이 시작된 것이다. 모든 병력을 의주에서 서울로 이어지는 대로(大路) 바깥에 위치한 산성들 속으로 집결시켰던 조선군은 청군의 침입 사실을 제때 알아차리지 못했다. 청군이 조선군과의 접전을 피해, 곧장 서울로 진격하는 속전속결의 전략을 취했기 때문이었다. 그 와중에 임진강 이북의 방어를 책임진 도원수 김자점(金自點)은 청군이 침입했다는 최초의 보고를 묵살하고 조정에 제때 알리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적이 다가오자 싸우지도 않고 도주해 버렸다. 청군이 이미 개성을 지나 양철평(良鐵坪-지금의 은평구 녹번동)에 이르렀다는 소식이 전해진 12월14일. 서울 도성은 공황 상태에 빠졌다. 아이들과 노약자들, 부녀자들의 울부짖음속에 피란행렬이 줄을 이었고, 조정 신료들도 어찌할 바를 몰라 허둥거렸다. 인조는 왕실 가족들과 종묘에 모셔져 있던 역대 국왕의 신주(神主)들을 강화도로 먼저 옮기도록 했다. 이어 자신도 강화도로 들어가려 했으나 청군이 이미 김포에서 강화로 이어지는 길을 차단해 버렸다. 인조는 어쩔 수 없이 남대문까지 갔다가 강화도 행을 포기하고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돼지´에게 무릎을 꿇다 1637년(인조 15년) 1월 중순. 준비 없이 들어왔던 남한산성의 상황은 참혹했다. 청군이 산성을 완전히 포위했고, 삼남으로 이어지는 모든 도로를 차단했다. 혹독한 추위 속에서 군량이 점점 바닥을 드러냈다. 청군은 연일 서양식 최신 대포인 홍이포(紅夷砲)를 쏘아대면서 항복하라고 종용했다. 조선 조정이 목이 빠져라 고대하던 지원군은 오지 않았다. 혹독한 추위 때문에 동상에 걸리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성을 지킬 의욕을 잃은 장졸들 가운데는 항복하자고 시위를 벌이는 자들까지 나타났다. 그 와중에도 신료들은 척화와 주화를 놓고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인조는 눈물을 보이며 대책을 호소했지만 뾰족한 방법이 있을 리 없었다. 1월26일. 강화도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청군은 바다에 익숙하지 못하여 수전(水戰)을 치를 수 없을 것이라고 여겼던 강화도 조선군 지휘부의 방심이 불러왔던 결과였다. 청군은 이에 앞선 1월22일, 조선에서 노획한 선박에 홍이포까지 싣고 강화도에 대한 상륙작전을 벌였다. 조선군이 변변한 저항도 해보지 못한 채 강화도는 함락되었고, 피란했던 왕실 가족과 중신들은 전부 포로가 되었다. 강화도의 함락 소식은 남한산성의 사기를 완전히 꺾어 놓았다. 1월30일. 인조는 남한산성의 서문을 나와 현재 서울 송파구 석촌동의 삼전도(三田渡)로 향했다. 이윽고 그는 높다란 수항단(受降壇) 위에 앉은 청 태종에게 무릎을 꿇고 항복의 예를 바쳤다.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 세번 큰절을 올리고, 한번 절할 때마다 세번씩 머리를 바닥으로 조아리는 오랑캐식 항복 예식이었다. 원래 조선의 지식인들은 홍타이지를 포함한 여진족들을 인간이 아닌 ‘금수(禽獸)’로 경멸했다. 일부 인사는 심지어 청 태종을 ‘황태극(皇太極)’ 대신 홍태시(紅泰豕)라고 불렀다.‘붉고 큰 돼지’란 뜻이다. 그런데 인조가 ‘인간’도 아닌 ‘돼지’에게 무릎을 꿇는 치욕을 겪어야 했던 것이다. 청 태종은 인조로부터 항복을 받은 뒤 사로잡은 포로들을 이끌고 철수길에 올랐다. 그러면서 인조에게 또 다른 다짐을 받아냈다. “내가 끌고 가는 조선인 포로들 가운데 압록강을 건너기 전에 도망치는 자는 불문에 부친다. 하지만 압록강을 건너 단 한발짝이라도 청나라 땅을 밟은 뒤에 도망쳐 오는 포로는 조선 조정이 도로 잡아 보내야 한다.” 무시무시한 약조였다. 날이 갈수록 영토는 넓어지는데 인구가 부족했던 청은 조선인 포로들을 보배로 여겼다. 그들은 훌륭한 노동력이자 값을 받고 팔 수 있는 ‘물건’이었기 때문이다. 청은 10만이 훨씬 넘는 조선인 포로들의 탈출을 막기 위해 인조로부터 이같은 다짐을 받아냈던 것이다. 훗날 실제로 청에 끌려갔다가 탈출해 왔던 포로들은 이 ‘약조’ 때문에 청으로 다시 박송(縛送)되었다. 그리고 그 포로들은 청군에 끌려가 발뒤꿈치를 잘리는 혹형에 신음해야 했다. 호란 후에도 인조는 어렵사리 왕위를 유지할 수 있었지만 그 이면에는 수많은 조선인 포로들의 통곡소리가 숨어 있었던 것이다. ●누가 안추원의 비극을 책임질 것인가? 1664년(현종 5년). 항복 후 27년이 지나 한 남자가 청에서 도망쳐왔다. 마흔한살의 안추원(安秋元)이 그였다.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전 개성 부근에서 살았던 열세살의 소년 안추원은 가족과 함께 강화도로 피란했다. 하지만 이듬해 강화도가 함락될 때 그는 청군의 포로가 되었고, 선양으로 끌려갔다. 그는 선양에서 한족 출신 대장장이에게 팔린 신세가 되었다. 호란이 끝난 뒤, 포로로 끌려왔던 조선인 가운데 적지 않은 숫자가 몸값을 치르고 본국으로 송환되었다. 하지만 안추원은 그렇지 못했다.1644년 명이 멸망하자 청은 베이징에 입성한다. 베이징을 새로운 수도로 정한 청 조정은 선양의 거주민들에게 베이징으로 이주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스물한살이 된 안추원은 그의 주인에게 이끌려 베이징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다시 18년이 지난 1662년(현종 3). 서른아홉의 장년이 된 그는 조선으로의 탈출을 결행한다. 산해관(山海關)을 통과하여 만주 벌판을 가로질러야 하는 일생일대의 모험이었다. 하지만 산해관에서 청군에 붙잡히고 말았다. 베이징으로 송환된 그는 이마에 글자가 새겨지는 묵형(墨刑)에 처해졌다. 하지만 고국으로 돌아가겠다는 그의 비원(悲願)은 처절했다. 다시 2년이 지난 1664년, 안추원은 마침내 청을 탈출하는데 성공한다. 정확히 27년 만의 귀향이었다. 그가 사선을 뚫고 조선에 도착했을 때 조정은 고민에 빠졌다. 여전히 조선인 포로들의 탈출을 금지하고 있던 청의 존재 때문이었다. 하지만 27년만에 목숨을 걸고 탈출한 자국 백성을 어찌 차마 돌려 보내겠는가. 청이 알까봐 쉬쉬하는 가운데 안추원은 내륙으로 옮겨졌다. 안추원은 고향을 찾았다. 하지만 고향에는 아무도 없었다. 병자호란으로 그의 가족은 풍비박산 나고 말았다. 목숨을 걸고 다시 찾은 고향이었지만 그는 당장 생계조차 막막했다. 조정은 그를 받아주었을 뿐 생계대책을 마련해 주지는 않았다. 귀향의 감격도 잠시 뿐 배고픈 그에게 아무런 피붙이도 남아 있지 않은 고향은 그저 또 다른 이역이었을 뿐이다. 안추원은 절망 끝에 베이징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청으로의 귀환은 탈출보다 훨씬 위험했다. 1666년(현종 7). 그는 결국 고국을 탈출하려다 체포되었다. 체포된 이후 그가 어찌 되었는지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없다. 아마도 처형되었을 것이다.2번이나 탈출을 시도했던 그가 온전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백성 도탄에 빠뜨렸던 김자점 영의정까지 올라 안추원의 이야기는 한편의 ‘드라마’와도 같다. 하지만 위정자들의 오판에 떠밀려 나락으로 떨어진 그의 비극은 과연 누가 책임져야 할까? 병자호란을 통해 수많은 ‘안추원’들이 생겨났다. 하지만 ‘비극’을 불러왔던 최고책임자인 인조는 왕위를 유지했고, 책임을 져야할 신료들의 상당수도 멀쩡하게 살아남았다. 전쟁 발생 사실을 제대로 보고하지 않고 적과의 싸움마저 회피하여 국왕과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렸던 김자점은 인조 말년 최고위직인 영의정까지 올랐다. 오늘날. 병자호란의 참상을 떠올리면서 현실을 돌아본다. 꼭 10년전 ‘IMF 외환위기’가 불러온 칼바람 속에서 스러져갔던 수많은 민초들. 비극을 초래한 책임자들의 과실 또한 제대로 규명되지 않았다. 수많은 생령들을 도탄에 빠뜨려 놓고도 자신의 과실을 책임지지 않는 정치인들의 ‘무책임’은 시공을 초월하여 유전되는 것일까. 비극의 역사에서 교훈을 얻어내지 못하면 또 다른 비극의 역사가 되풀이된다고 했던가?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가 소용돌이치고 정치권의 난맥상과 민생의 어려움 때문에 걱정이 쌓여가고 있는 오늘, 370년전 병자호란의 비극을 되돌아보는 마음은 여전히 착잡하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교수> ●필자 한명기 교수는 ▲1962년생 ▲1985년 서울대 인문대 국사학과 졸업 ▲1997년 서울대 대학원 국사학과 졸업(문학박사) ▲1998∼2001년 서울대 규장각 특별연구원 ▲현재 명지대 사학과 교수. 계간 ‘역사비평’ 편집위원 ▲논저 ‘임진왜란과 한중관계’(1999),‘광해군’(2000) 외 다수 ●청태종 송덕비(위 사진) 병자호란 이후 청이 조선에 강요해서 세운 청 태종 송덕비. 병자호란의 전말을 적었다. 사진은 일제시대에 촬영된 것으로 당시 경기도 광주군 중대면 송파리 삼전도에 있었다. 현재도 삼전동에 있으며 사적 101호로 지정돼 있다.
  • [씨줄날줄] 원희룡/이목희 논설위원

    지금처럼 여론조사가 활발하지 않았던 시절, 정치권에 떠도는 속설이 있었다.“나쁜 기사라도 언론에 이름이 등장하는 쪽이 낫다.” 정치가십난에 한 줄이라도 걸치려고 치명적이지 않은 범위에서 일부러 잡음을 일으키는 정치인들이 꽤 있었다. 유권자들이 보도 내용은 잊어버리고 결국 이름만 기억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인지도를 높여야 선거에 유리하다는 사실을 체험으로 알았던 듯싶다. 한나라당 원희룡 의원이 비슷한 사고를 쳤다. 전두환 전 대통령을 찾아가 넙죽 큰절을 한 것이다. 소장파 대선주자로 개혁이미지를 가꿔가던 그로서는 파격적인 행동이었다. 지지층의 비난이 들끓자 원 의원은 “전 전 대통령에게 면죄부를 주려는 게 아니었다.”고 사과했다. 용서와 화합의 모습을 보여주려 했을 뿐이라는 설명이었다. 원 의원은 이명박·박근혜씨에 비해 인지도가 크게 낮다. 그들과 함께 다른 전직 대통령에게 세배를 갔다면 언론은 원 의원을 무시했을 것이다. 쇼킹한 행동으로 주의를 끈 뒤 사과하면 이중으로 언론의 관심을 모으게 된다. 원 의원이 원래부터 어떤 속셈을 갖고 움직였는지 알 수 없으나 결과적으로 그렇게 비치고 있다. 인터넷 시대를 맞아 옛 정치인들의 속설은 맞지 않는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네티즌 여론이 즉각 확산되는 데다 이름만 치면 수년간의 자료가 쏟아지기에 언행을 함부로 하기가 두렵다. 인지도를 좀 높이려다가 이미지가 바닥으로 떨어지면 재기불능이라고 여기는 정치인들이 이제는 다수다. 하지만 이 또한 과학으로 증명된 사실은 아니다. 장기적 영향에 대한 심층연구를 본 적이 없다. 노무현 대통령이 후보시절에 김영삼 전 대통령을 찾아 ‘03시계’를 자랑한 것이 대선 결과에 불리하게 작용했을까. 처음에는 지지도를 떨어뜨렸을지라도 막판에 부산·경남 표를 결집시키는데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출렁이는 표심을 계량의 잣대로 어설프게 분석하지 않아도 경험에서 우러난 감(感)이 들어맞는 사례가 아직도 상당하다. 차차기 대권까지 염두에 둔 원 의원의 앞날에 ‘전두환 세배’ 파문이 끼칠 영향을 긴 안목에서 탐구할 만하다고 본다. 이목희 논설위원 mhlee@seoul.co.kr
  • 생존한 대원군 맏며느리 李씨마마

    생존한 대원군 맏며느리 李씨마마

    무엇이 비운(悲運)인가? 파란 많은 근세사(近世史)속의 이왕가(李王家)와 함께 「마지막 전하(殿下)」가 창덕궁 낙선재에서 종지부를 찍어버렸을때, 옛 왕가의 제일 높은 마마 노락당(老樂堂) 李씨(87·대원군(大院君)의 맏며느리=완흥군(完興君)부인)는 「만사가 귀찮다…」고 손을 저으며 자리에 누워버렸다.「뉴스」의 유궁(幽宮)처럼 언제나 육중한 문을 굳게 닫아버린 운현궁, 그 안방 노락당에 잠입, 처음 공개하는 이 모습. 만인지상(萬人之上)이던 이왕가, 그중에도 옛 왕족들의 「안방」에서는 왜 늘 「뉴스」의 촉각을 피해왔을까? 관심을 둔 기자들이 해방 이후부터 줄곧 사양의 「안방마마」들에게 신경을 썼지만 사진 한 장 제대로 찍어낸 일이 없었다. 더욱이 이은(李垠) -> 이구(李玖)씨의 낙선재 신관(新舘)쪽 현대파(現代派)보다 고종(高宗)황제의 생가(生家)이며 대원위 대감이 팔도강산을 호령했던 운현궁(蕓峴宮)쪽은 너무 깊숙해서 안방잠입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대원위 대감의 맏며느리가 지금까지 살아 있어? 「감춰진 사실」이 아니라 「알려지지 않은 사실」에 그때마다 말못할 감회를 느끼지 않을수가 없었다. 5월2일 하오 2시. 신문사 취재차에 고종황제의 손자며느리 한 분을 태우고 운현궁 옆 여도 골목에 멀찌감치 차를 세웠다. 운현궁에서 신문사차가 세워져 있는 것이 보이면 대문간서부터 「출입(出入)사절」을 당할것이란 생각에서였다. 차 안에 앉은 채 기회를 노리기 1시간 30분. 대원군이 거처하던 사랑채 노안당을 거쳐 뒤채의 이노당(二老堂 -여기엔 대원군의 애손(愛孫) 이준용(李俊容)공의 부인 이씨가 기거했음), 이씨마마가 계시는 노락당에 들어갈때까지 좀처럼 집안에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나선재에서는 한참 영친왕(英親王)의 빈소가 벌어져 붐비는데 유궁(幽宮)같은 운현궁 안은 쓸쓸하고 조용할 뿐이다. 노락당 이씨는 마지막 전하 이은씨의 부음을 듣고 슬픔에 잠겨 두꺼운 요 위에 누워 계셨다. 방안은 약 5평. 잉어가 그려진 두폭짜리 병풍 하나와 조그만 의자가 몰락한 왕가의 현실을 말없이 대변하고 있을뿐, 덩그맣게 큰 집안에 가난이 엿보인다. 무조건 이씨 마마에게 큰절부터 올리고 방 가운데 무릎을 꿇고 앉았다. 이동안 이씨 마마를 위로하기 위해 80객 노부인 2,3명이 소복을 하고 찾아왔다가 돌아갔지만 이분들이 누군지는 알 길이 없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운현궁 이씨마마는 당신에게 출입하는 사람이나 친구의 이름이 외부에 알려지는 것을 극히 싫어하신다고 한다. -마마, 기념으로 사진 한 장만… 『이제껏 내 사진을 밖에 찍어 내보낸 일이 없소. 안 찍겠소』 -그러나 이왕가 에서는 어제 마지막 전하까지 가셨습니다. 마마의 모습을 보고 싶어하는 많은 사람들을 위해 한 장만… 『내 늙은 얼굴을 찍고 싶지 않소』 그러나 대원군의 맏며느리이며 고종황제의 형수가 되는 이씨 마마가 「70년대 서울」의 공기를 오늘날까지 우리와 함께 호흡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느모로 따지든 「기록」이 될만 하다고 몇 번이나 간청했다. 뒷날을 위해서 당신의 모습을 한번만 「카메라」에 담자고 해도 거절. 나중에는 조카 며느리와 죽기전에 기념사진 한 장 찍어둔다는 전제밑에 반승낙을 한다. (이 때 모시고 있던 부인들이 사진을 찍으면 안된다고 이씨마마에게 귀띔했지만) 이씨마마는 영친왕의 죽음, 자신의 앞일등 알 수 없는 노후를 생각했음인지 심경변화를 일으켜 「사진만 찍는다」 고 일어나 앉아 머리에 빗질을하고 나더니 하얀 광목저고리를 위에 입는다. 「플래시」를 눌러 사진을 찍었다. -요즘 무슨 음식을 즐겨 잡수십니까? 『미음』 한마디 하고서는 다시 요 위에 몸을 뉘며 『기사는 절대 쓰지말라』고 입을 봉해 버린다. -대원군이 살아 계셨을 때 운현궁에 시집을 오셨죠? 『……』 -요즘 나도는 시아버님 대원군의 모습이나 민비(閔妃)의 모습은 틀린 데라도 혹시 없읍니까? 『……』 묻는 기자를 물끄러미 누워서 쳐다볼 뿐 모두들 묵묵부답(黙黙不答). -저희들이 누군줄 아십니까? 『처음보는 얼굴들인걸』 -영친왕 이은 전하를 마마가 처음 보신 것은? 『여섯살 때 내가 무릎 위에 안고 있었소』 -오늘의 느낌은? 『만사가 귀찮소!』 벌써 이동안에 기자(記者) 잠입을 눈치채고 바깥채에 누가 연락했는지 방안으로 불쑥 들어와 「카메라」를 노려 보는 사랑채 남자일꾼(?)은 사뭇 시빗조다. 『누구냐?』 『무슨일로 여기까지 들어왔냐?』 잠입 불과 7분. 할수없이 뜰안으로 이씨 마마에게는 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뛰어 나왔다. 이렇게 운현궁을 비롯한 왕족 주변이 미묘하게 「차가운」데는 몇가지 소문이 나돌고 있다. 의친왕(議親王) 이강(李剛)공의 아들간에는 무슨 일에선지 「차가움」이 감돌고 운현궁 쪽에서는 억대가 넘는 재산관리를 놓고 왕족간에 뒷공론이 벌어지고 있는 듯하다. 영휘원(永徽園)의 엄비(嚴妃) 무덤에서는 몇 년째 시제(時祭) 한번 못올리고 있으며, 어느 고종황제의 손자는 방 한칸조차 없어서 사당(祀堂) 「시멘트」 바닥 위로 쫓겨나서 잠을 자고 있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기도 하다. 날아가는 새를 쳐다보기만 해도 죽지를 떨었다는 운현궁의 10년세도. 오늘날은 방한칸 없이 내쫓겨 비운의 몰락을 울고 있는 왕족들. 마마 이씨의 심정은 지금 어떨까? 산하(山河)가 함께 울 만한 슬픔이, 이야기가, 목격담이, 이면사(裏面史)가 이뤄진 뜰안에 살면서도 입을 열지 않으니 어쩌랴. [선데이서울 70년 5월 10일호 제3권 19호 통권 제 84호]
  • “동학 유족에 진심으로 사과”

    조선 말 전북 고부군수를 지낸 조병갑(趙秉甲)의 증손녀란 사실이 공개돼 문제가 됐던 조기숙(趙己淑) 전 청와대 홍보수석이 동학농민혁명군 유족에게 사과했다. 조 전 수석의 진심어린 사과에 유족들은 박수로 화답했다.. 조 전 수석은 9일 충남 공주유스호스텔에서 동학농민혁명군 유족과 시민단체 회원 등 3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동학농민혁명 112주년 기념 유족의 밤’ 행사에 참석,“조상을 대신해 늦게나마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지난해 9월 청와대 홍보수석으로 재직할 때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이사장 이이화)으로부터 초청을 받았는데 ‘제가 조병갑의 증손녀’란 신분을 밝히지 않고 참석하는 것은 유족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해 적절한 시기에 정식으로 사과하려 했으나 미뤄오다 오늘 기회를 갖게 됐다.”며 “저를 초청해줘서 고맙게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그는 “당사자인 조상이 유족에게 사과를 하고, 용서를 구해야 하나 많은 세월이 흘렀다.”면서 “늦었지만 동학혁명군들이 명예를 회복하고 애국자로 대접받는 게 너무 기쁘다.”고 말했다. 그는 또 “동학농민혁명군의 영혼을 위로하고 유족들의 아픔을 위로하는 차원에서 최근 몇달 동안 매일 아침 108배를 하고 있다.”면서 “여러분의 한이 풀릴 때까지 (108배를) 계속할 생각”이라고 다짐했다. 그러면서 “(제가 조병갑의 증손녀란 사실이) 신문에 보도되기 전에 유족들에게 공개적으로 사과하려고 했는데 진작에 찾아뵙지 못해 진심으로 죄송하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그는 이어 “오늘은 처음 만난 날이다 보니 많은 얘기를 못해 죄송하다. 앞으로 기회가 닿는 대로 여러분을 부모님 모시듯 따뜻하게 모실 수 있는 기회를 갖고 싶다.”고 말한 뒤 이에 대한 약속의 의미로 유족들에게 큰절을 올려 박수를 받았다. 조 전 수석은 행사장을 빠져나가면서 동학의 태인 대접주였던 김개남(金開男) 장군의 손자인 김상주(59·전북 정읍시)씨 등 유족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며 사과의 뜻을 표시했다. 한편 정남기 동학농민혁명유족회장은 인사말에서 “오늘 행사는 화해와 용서의 자리”라며 “동학농민혁명군의 후손은 바로 동학정신을 이어받은 사람이며, 동학혁명군의 후손이라도 나쁜 일을 하는 사람은 우리의 적”이라고 강조했다.대전 이천열기자 sky@seoul.co.kr
  • [22일 TV 하이라이트]

    ●사이언스+(바코드)(YTN 오후 1시20분) 대형할인점이나 백화점에서 상품을 구입할 때, 모든 물건에 바코드가 표시되어 있다. 이는 사람이 태어나서 출생신고를 하면 주민등록번호를 갖게 되는 것처럼 바코드는 모든 물건들이 갖고 태어나는 고유 번호다. 우리 생활 속에서 다양하게 활용되고 있는 바코드의 모든 것을 알아본다.   ●다큐 여자(EBS 오후 9시30분) 하루 종일 아이디어를 짜고, 밤낮 연기 연습을 해도 항상 만년 조연인 김민지. 몇 번이나 좌절의 순간을 겪어야만 했던 그녀. 하지만 이대로 포기할 수 없다. 나만의 무대를 찾기 위해 새로운 각오로 방송국을 찾는다. 과연 그녀는 개그계의 떠오르는 스타가 될 수 있을까? 김민지, 그녀의 도전은 이제 시작된다.   ●신동엽의 있다!없다?(SBS 오후 7시5분) 동남아시아를 강타한 대재앙 쓰나미. 거대한 쓰나미 해일의 위력 앞에서 도망치면서도 웃는 사람들이 있다. 이 미스터리한 사진의 비밀은? 강아지 전용 우산이 있는지 없는지, 우리나라에 시어머니 섬이 있는지 없는지, 또 살이 빠지는 거울이 있는지 없는지도 알아본다.   ●꼭 한번 만나고 싶다(MBC 오후 7시20분) 일곱 살 어린나이에 어머니와 헤어진 조세훈씨. 그 후 아버지와 함께 살아가면서 아버지의 폭력 속에 하루도 편할 날 없이 지내게 된다. 힘들 때마다 어머니가 남겨주신 놀이동산의 행복한 기억만을 떠올렸다는 세훈씨. 오늘 그는 어머니를 만나 소원대로 큰절을 올리고 입대할 수 있을까?   ●사랑과 전쟁(KBS2 오후 11시5분) 임신 6개월의 몸으로 극장에서 갑자기 사라진 아내. 처갓집이고 경찰서고 다 전화를 해보지만 찾을 수 없다. 며칠 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나타난 아내는 아이를 낳을 때까지만 친정에 가있겠다고 한다. 출산하고 얼마 후 아내는 또 가출을 하고, 남편은 아내의 친구를 통해서 그 이유를 알게 되는데….   ●열아홉 순정(KBS1 오후 8시25분) 윤후가 빈 몸으로 집을 나온 후, 모든 사람들이 국화에게 윤후의 행방을 따져 물으며 비난한다. 옥금은 혜숙을 찾아가 홍영감과의 결혼 결심을 바꾸려고 애쓴다. 기획실 일을 배우려고 애쓰는 윤정이 기특한 우경은 야식을 사들고 가지만 맞선남인 진수가 이미 윤정을 챙기고 있다.
  • 김일성종합대학 컴퓨터학과 재학

    28일 남의 노모 최계월씨와 북의 아들 김영남씨가 28년만에 얼굴을 마주하자 은경(19·일명 혜경)양은 손수건으로 연신 눈물을 훔쳤다.“할머니 절 받으시라요.” 그리곤 금강산호텔에서 열린 ‘이산가족 상봉장’에서 생면부지인 친할머니에게 처음으로 큰절을 올렸다. 동생인 철봉(7)군도 함께 큰절을 올렸다. 혜경양은 영남씨와 요코다 메구미씨의 딸. 남한에서 납북된 아버지와 일본에서 납북된 어머니를 둔 기구한 운명으로 태어났다. 그나마 그 어머니마저 북한에선 사망한 것으로 주장하고, 일본은 사망을 인정치 않아 또다른 아픔을 겪고 있는 주인공이다. 남한의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지만 동그스럼한 얼굴에 북한에서 자라고 북한 여성 옷차림을 한 탓인지 여느 ‘북녀(北女)’와 별 다름이 없었다. 키는 160㎝도 되지 않을 정도로 작았고 나이에 비해 앳된 모습이었다. 혜경양은 왼쪽 가슴에 김일성 배지와 함께 김일성종합대학 배지도 달고 있었다. 이름표에는 남측에 홍보한 대로 ‘김은경’으로 돼 있었다. 그동안 남측에선 혜경으로 알려져 있었다. 혜경양의 고모 김영자(48)씨는 “표정이 무척 밝았고 또랑또랑한 눈매였다.”며 “아버지와 할머니가 어릴 적 얘기를 하면 고개를 끄덕이며 환하게 웃었다.”고 전했다. 이어 “공부를 잘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하니 컴퓨터학과에 다닌다고 답하더라.”면서 “경황이 없어 왜 이름이 혜경이로 알려졌던 것과 달리 은경인지 물어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금강산 공동취재단·박정현기자 jhpark@seoul.co.kr
  • “엄마 나 막내 맞아, 이젠 효도할게”

    “엄마 나 막내 맞아, 이젠 효도할게”

    까까머리 고등학교 1학년이던 아들은 28년만에 머리가 벗겨진 중년의 모습으로 팔순 노모의 품에 안겼다. 28일 금강산호텔의 이산가족 상봉장에서 남측의 어머니 최계월(82)씨는 아들 김영남(45)씨의 손을 잡고 놓을 줄 몰랐다. 최씨는 “아유, 우리 아들. 아유, 우리 아들”하면서 흐느끼기만 했다. 영남씨는 어머니를 만난 게 믿기지 않는 듯 “이 좋은 날 왜 울어요.”라고 웃으면서 어머니를 다독거렸다. 최씨는 휠체어에 앉아 아들의 머리에 손을 올려놓고 영남씨를 부둥켜안고 “이제 죽어도 한이 없다.”고 말했다. 영남씨는 북한 사투리가 약간 섞인 말투로 “오래오래 사셔야지. 막내아들이 이제 효도 좀 할게.”라고 말했다. 한참을 부둥켜안고 운 뒤에 영남씨는 일어나 “막내아들 걱정 많이 했을텐데, 불효막심한 아들이 절 드리겠다. 인사드리겠다.”면서 큰절을 올렸다. 양복 차림의 영남씨가 사망한 납북 일본인 요코다 메구미에 이어 재혼한 둘째 부인 박춘화(31)씨를 소개했으며, 한복 차림의 박춘화씨는 “평양 며느리 절 받으세요.”라면서 큰절을 했다. 이어 박씨와 사이에 낳은 아들 철봉(7)군이 최씨에게 다가가 “할머니, 김철봉입니다.”라고 또박또박 인사를 하자 최씨는 “영락없이 아빠구나.”라며 손자를 껴안았다. 또 메구미와의 사이에 낳은 손녀 혜경(18)양이 “절 받아주세요.”라면서 할머니에게 큰절을 했다. 흰 저고리에 검은색 치마차림인 혜경양은 모자 상봉을 지켜보면서 연신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쳤고, 며느리 박씨와 철봉군도 울음을 그치지 못했다. 최씨가 “어디 보자.”라면서 아들의 얼굴을 확인하려 하자 영남씨는 “엄마, 나 맞아. 막내 맞아.”라고 말했다. 영남씨는 “아버지 언제 돌아가셨어.”라면서 가족상황을 물었고, 최씨는 “막내아들 때문에…”라면서 말문을 닫았다. 영남씨는 “형님은? 다 살아 있으니 다 만나자.”고 말했고 최씨는 “딸 이쁘고, 막내도 착하고, 마누라도 이쁘고, 다 잘 얻었다.”고 말했다. 누나 영자(48)씨는 동생을 부둥켜안으면서 “딸도 이쁘고 다 이쁘다.”면서 영남씨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영남씨가 “건강하신 모습을 보니 좋구만. 기쁘구만.”이라고 말하자 누나는 “어릴 때와 너무 똑같아. 머리카락도, 목소리도…”라면서 눈물을 흘렸다. 영남씨는 누나를 껴안으면서 “누나 보고싶었어.”라고 응석을 부리듯 인사도 했고. 영자씨는 혜경양에게는 “텔레비전으로 많이 봤다.”고 했고, 철봉군에게는 “너는 너네 아버지 어릴 때 두상하고 똑같다.”고 말했다. 이날 모자 상봉은 다른 이산가족들과 별도로 마련된 방에서 진행됐다. 김씨는 이날 자신의 납북 경위, 일본인 전처 요코다 메구미 관련 얘기를 비롯한 민감한 문제는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고 한다. 영남씨는 29일 30여분 동안 별도의 기자회견을 갖고 자신을 둘러싼 각종 의혹에 대한 입장을 밝힐 예정이다. 북측은 회견을 통해 납북 여부 및 경위, 메구미씨의 사망 경위, 등에 대한 입장을 밝힐 것으로 보인다. 금강산 공동취재단·박정현기자 jhpark@seoul.co.kr
  • 北, 납치문제 털기 등 다목적 포석

    북한이 28일 금강산에서 열린 김영남-최계월 모자 상봉을 통해 ‘통큰 결단’의 모습을 보여주려 하고 있다. 북·일간 핵심 외교문제로 비화돼 있는 납북 일본 여학생 요코다 메구미와 김영남씨 사이의 딸 혜경양을 상봉행사 전면에 내세운 것은 물론, 다른 이산가족 상봉행사와는 별도의 장소에서 김­최 모자 상봉을 주선했다. 남측 방송에 생중계까지 허용했고,29일엔 김영남씨의 기자회견까지 준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납북자’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았던 북한의 이같은 행보는 ‘김영남 카드’를 통해 그동안 대북 압박용으로 이용돼온 납치문제를 털어내려는 등 다목적 계산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선 납북자 문제의 이산가족화다. 이산가족 상봉틀 내로 납북자 상봉을 흡수, 적극적으로 해소하겠다는 의지를 보임으로써 남측과 일본 등 국제사회의 대북 정치공세를 차단하겠다는 것이다. 한·일 납북자 시민단체간 연대 고리를 끊으려는 셈법도 읽힌다. 28년 만에 여유있는 모습으로 어머니 앞에 큰절을 올린 김영남씨는 기자회견에서 “자진 월북했으며, 북측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할 가능성이 높다. 김씨의 전처로, 북·일간 유골 진위 공방을 벌이고 있는 메구미씨에 대한 사망 사실도 당당하게 밝히며 유골도 진짜라고 일본측 공세를 일축할 것으로 관측된다. 실제로 북측이 이번 14차 이산상봉 행사에 앞서 김영남 카드를 전격 제시한 이후 일본 정부·시민단체와 연대활동을 펴왔던 한국의 납북자 가족모임(대표 최성용) 등은 납치문제의 정치화에 나서는 일본과의 결별을 선언했다.‘이산가족’이라는 틀에서라도 북측이 문제해결을 하고자 한다면 정치적 공세가 아닌 인도주의적 관점에서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남측은 김영남 상봉 이후 북측의 결단에도 상당한 기대를 걸고 있다. 최성용 대표는 “김씨 가족 상봉은 북한이 자진해서 주선하고 학생 납북을 인정한 (남북간) 합의 상봉”이라며 “향후 특별법 제정, 생사확인, 송환 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돼야 한다.”고 밝혔다. 정부도 문제를 푸는 것이 중요하며, 정치적으로 접근하면 판이 깨진다는 입장이다. 일각에선 이산가족상봉 틀 내에서의 납북자 문제해결이 북측에 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는 송환 요구 명분을 스스로 없애버린다는 우려도 있다.김수정기자 crystal@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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