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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불법촬영·스토킹 등 1심 선고 전날 살인… 여성, 또다시 표적됐다

    불법촬영·스토킹 등 1심 선고 전날 살인… 여성, 또다시 표적됐다

    서울 지하철 역사에서 근무 중인 20대 역무원이 동료 직원으로부터 흉기에 찔려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현장서 검거된 가해자는 피해자를 지속해서 스토킹한 혐의 등으로 재판을 받던 중 1심 선고를 하루 앞두고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조사됐다. 최근 5년간 1500건이 넘는 보복범죄가 발생한 가운데 경찰은 보복범죄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보강 수사를 진행한다는 방침이다. 서울 중부경찰서는 14일 오후 9시쯤 중구 지하철 2호선 신당역 여자화장실에서 순찰을 돌던 역무원을 흉기로 찔러 살해한 전모(31)씨에 대해 살인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고 15일 밝혔다. 경찰은 이번 사건이 재판에 따른 앙심에 의해 이뤄졌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특가법상 보복범죄 혐의를 추가로 적용하는 방안도 검토 중이다. 전씨는 흉기를 미리 준비한 뒤 위생모를 머리에 착용한 채 1시간 넘게 범행 장소 인근에서 머물며 기다리다 피해자가 화장실에 들어가자 따라 들어가 범행을 저질렀다. 피해자가 화장실 내 비상벨을 눌러 도움을 요청했고 다른 역무원 2명과 사회복무요원, 시민 등이 전씨를 제압한 뒤 현장에 출동한 경찰에 인계했다. 피해자는 심정지 상태로 병원에 옮겨졌지만 결국 사망했다. 전씨는 경찰 조사에서 오랜 시간 동안 범행을 준비했다는 취지로 진술한 것으로 전해졌다. 숨진 피해자와 서울교통공사 2018년 입사 동기인 전씨는 지난해 10월 불법촬영과 영상물을 이용한 협박 혐의로 피해자로부터 고소당했다. 경찰은 전씨를 긴급체포하고 구속영장을 신청했으나 법원이 ‘주거가 일정하고 증거인멸이나 도주 우려가 없다’며 영장을 기각해 불구속 수사를 진행했다. 이 과정에서 전씨는 “내 인생 망치고 싶냐”라며 합의를 종용하는 문자 메시지를 20~30차례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지난 1월 피해자로부터 스토킹처벌법 위반 혐의로 추가 고소를 당한 전씨는 5개 혐의로 기소돼 징역 9년형을 구형받고 15일 오전 1심 선고를 앞두고 있었다. 재판은 전씨 범행으로 29일로 연기됐다.경찰은 피해자가 지난해 10월 불법촬영 혐의로 전씨를 고소한 이후 1개월간 피해자를 신변보호 대상자로 등록하고 안전조치를 해 왔다. 공사 측은 지난해 10월 전씨를 직위해제했지만 재판 중이라 전씨는 공사 직원 신분을 유지하고 있었다. 전씨는 공사 내부망을 통해 다른 직원의 근무지, 근무 시간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피해자의 큰아버지는 “서울 한복판의 지하철역 안에서 정복을 입은 직원이 근무 중에 살해당했다는 게 말이 되느냐”며 “순찰을 돌 때 2인 1조로 움직여야 한다는 매뉴얼조차 없는데 국가와 서울시, 서울교통공사 측이 나서서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덕수 국무총리는 “여성을 상대로 한 범죄에 효과적이고 단호한 대응방안을 적극 검토하고 관계기관은 범죄 예방과 치안확보 노력에 총력을 기울이라”고 당부했다. 한동훈 법무부 장관은 현장을 찾아 “국가가 피해자를 지켜 주지 못했다”며 “대단히 안타깝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 불법촬영·스토킹 등 1심 선고 전날 살인… 여성, 또다시 표적됐다

    불법촬영·스토킹 등 1심 선고 전날 살인… 여성, 또다시 표적됐다

    서울 지하철 역사에서 근무 중인 20대 역무원이 동료 직원으로부터 흉기에 찔려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현장서 검거된 가해자는 피해자를 지속해서 스토킹한 혐의 등으로 재판을 받던 중 1심 선고를 하루 앞두고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조사됐다. 최근 5년간 1500건이 넘는 보복범죄가 발생한 가운데 경찰은 이 사건도 보복범죄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보강 수사를 진행한다는 방침이다. 서울 중부경찰서는 지난 14일 오후 9시쯤 중구 지하철 2호선 신당역 여자화장실에서 순찰을 돌던 20대 역무원을 흉기로 찔러 살해한 전모(31)씨에 대해 살인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고 15일 밝혔다. 경찰은 이번 사건이 재판에 따른 앙심에 의해 이뤄졌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특가법상 보복범죄 혐의를 추가로 적용하는 방안도 검토 중이다. 전씨는 전날 오후 흉기를 미리 준비한 뒤 위생모를 머리에 착용한 채 1시간 넘게 범행 장소 인근에서 머물며 기다리다 피해자가 화장실에 들어가자 따라 들어가 범행을 저질렀다. 당시 피습을 당한 피해자가 화장실 내 비상벨을 눌러 도움을 요청했고 이후 다른 역무원 2명과 사회복무요원, 시민 등이 전씨를 제압한 뒤 현장에 출동한 경찰에 인계했다. 피해자는 심정지 상태로 병원에 옮겨졌지만 결국 사망했다.전씨는 경찰 조사에서 오랜 시간 동안 범행을 준비했다는 취지로 진술한 것으로 전해졌다. 피해자와 서울교통공사 2018년 입사 동기인 전씨는 3호선 불광역에서 역무원으로 재직하던 지난해 10월 불법촬영과 영상물을 이용한 협박 혐의로 피해자로부터 고소당했다. 경찰은 전씨를 긴급체포하고 구속영장을 신청했으나 법원이 ‘주거가 일정하고 증거인멸이나 도주 우려가 없다’며 영장을 기각해 불구속 수사를 진행했다. 지난 1월 피해자로부터 스토킹처벌법 위반 혐의로 추가 고소를 당한 전씨는 스토킹처벌법 등 위반 혐의로 기소돼 15일 오전 1심 선고를 앞두고 있었다. 재판은 전씨 범행으로 오는 29일로 연기됐다. 경찰은 피해자가 지난해 10월 불법촬영 혐의로 전씨를 고소한 이후 1개월간 피해자를 신변보호 대상자로 등록하고 안전조치를 해 왔다. 다만 피해자가 원치 않아 잠정조치나 스마트워치 지급, 연계순찰 등은 이뤄지지 않았고 이마저 한 달 뒤 종료됐다. 공사 측은 지난해 10월 전씨를 직위해제했지만 재판 중이라 전씨는 공사 직원 신분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전씨는 공사 내부망을 통해 다른 직원의 근무지, 근무 시간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피해자의 큰아버지는 “서울 한복판의 지하철역 안에서 정복을 입은 직원이 근무 중에 살해당했다는 게 말이 되느냐”며 “순찰을 돌 때 2인 1조로 움직여야 한다는 매뉴얼조차 없어 국가와 서울시, 서울교통공사 측이 나서서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덕수 국무총리는 “특히 여성을 상대로 한 범죄에 효과적이고 단호한 대응방안을 적극 검토하고 검경 등 관계기관은 범죄 예방활동과 치안확보 노력에 총력을 기울이라”고 당부했다.
  • 스토킹 고소당하자 흉기 휘둘러… 30대男, 신당역서 순찰 돌던 동기 역무원 살해

    스토킹 고소당하자 흉기 휘둘러… 30대男, 신당역서 순찰 돌던 동기 역무원 살해

    신당역 순찰 돌던 20대 역무원 피습30대 남성, 불법촬영·스토킹 고소당하자1시간여 기다렸다 여자화장실서 범행경찰 구속영장 신청···보복범죄 검토서울 지하철 역사에서 근무 중인 20대 역무원이 동료 직원으로부터 흉기에 찔려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현장서 검거된 가해자는 피해자를 지속해서 스토킹한 혐의 등으로 재판을 받던 중 1심 선고를 하루 앞두고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조사됐다. 최근 5년간 1500건이 넘는 보복범죄가 발생한 가운데 경찰은 이 사건도 보복범죄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보강 수사를 진행한다는 방침이다. 서울 중부경찰서는 14일 오후 9시쯤 중구 지하철 2호선 신당역 여자화장실에서 순찰을 돌던 20대 역무원을 흉기로 찔러 살해한 전모(31)씨에 대해 살인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고 15일 밝혔다. 경찰은 이번 사건이 재판에 따른 앙심에 의해 이뤄졌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특가법상 보복범죄 혐의를 추가로 적용하는 방안도 검토 중이다. 전씨는 전날 오후 흉기를 미리 준비한 뒤 위생모를 머리에 착용한 채 1시간 넘게 범행 장소 인근에서 머물며 기다리다 피해자가 화장실에 들어가자 따라 들어가 범행을 저질렀다. 당시 피습을 당한 피해자가 화장실 내 비상벨을 눌러 도움을 요청했고 이후 다른 역무원 2명과 사회복무요원, 시민 등이 전씨를 제압한 뒤 현장에 출동한 경찰에 인계했다. 피해자는 심정지 상태로 병원에 옮겨졌지만 결국 사망했다. 전씨는 경찰 조사에서 오랜 시간 동안 범행을 준비했다는 취지로 진술한 것으로 전해졌다. 숨진 이씨와 서울교통공사 2018년 입사 동기인 전씨는 3호선 불광역에서 역무원으로 재직하던 지난해 10월 불법촬영과 영상물을 이용한 협박 혐의로 이씨로부터 고소당했다. 경찰은 전씨를 긴급체포하고 구속영장을 신청했으나 법원이 ‘주거가 일정하고 증거인멸이나 도주 우려가 없다’며 영장을 기각해 불구속 수사를 진행했다. 지난 1월 이씨로부터 스토킹처벌법 위반 혐의로 추가 고소를 당한 전씨는 스토킹처벌법 등 위반 혐의로 기소돼 15일 오전 1심 선고를 앞두고 있었다. 재판은 전씨 범행으로 29일로 연기됐다. 경찰은 피해자가 지난해 10월 불법촬영 혐의로 전씨를 고소한 이후 1개월간 피해자를 신변보호 대상자로 등록하고 안전조치를 해왔다. 다만 피해자가 원치 않아 잠정조치나 스마트워치 지급, 연계순찰 등은 이뤄지지 않았고 이마저 한 달 뒤 종료됐다. 공사 측은 지난해 10월 전씨를 직위해제했지만 재판 중이라 전씨는 공사 직원 신분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전씨는 공사 내부망을 통해 다른 직원의 근무지, 근무 시간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피해자의 큰아버지는 “서울 한복판의 지하철역 안에서 정복을 입은 직원이 근무 중에 살해당했다는 게 말이 되느냐”며 “순찰을 돌 때 2인 1조로 움직여야 한다는 매뉴얼조차 없는데 국가와 서울시, 서울교통공사 측이 나서서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덕수 국무총리는 “특히 여성을 상대로 한 범죄에 효과적이고 단호한 대응방안을 적극 검토하고 검경 등 관계기관은 범죄 예방활동과 치안확보 노력에 총력을 기울이라”고 당부했다.
  • “부모 재산 탐내지 마”…25살에 처음 알게된 입양사실

    “부모 재산 탐내지 마”…25살에 처음 알게된 입양사실

    부모 사망 후, 입양된 사실 알게 돼“입양과 상관없이, 상속 1순위” 20대인 A씨는 최근 아버지가 사망한 후에야 자신이 입양아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오래 전 사망한 어머니도 생전 내색을 하지 않았기에, A씨는 거짓말인 줄 알았다. A씨는 12일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 ‘아버지 돌아가시고 내가 처음 입양아라는 걸 알았다’라는 제목의 글을 올렸다. A씨는 “어머니는 내가 중학교 때 사고로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최근에 병으로 돌아가셨다”고 운을 뗐다. 그는 “따로 유언 같은 말은 들은 게 없다. 장례식장에 큰아버지, 작은아버지, 고모가 오셔서 나 보고 ‘너는 입양아고 이 집 자식 아니니까 재산 탐내지 말고 주는 돈이나 받고 살라’고 하시더라”고 설명했다. A씨는 “처음엔 거짓말인 줄 알았다. 아무도 입양아라고 말 안 해줬고 의심해 본 적도 없었다. 확인해 보니 거짓말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특히 A씨는 “25살 인생에 처음 혼자 된 기분인데, 원래 태어났을 때부터 혼자였네”라고 덧붙여 주위를 안타깝게 했다. A씨 친척들의 말대로 A씨는 상속받을 자격이 없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A씨는 부모의 재산을 상속받을 권리가 있다. 입양된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재산 탐내지 말라”⋯상속에 있어 ‘입양차별’ 전혀 없어 법조계에 따르면 A씨의 부모가 합법적으로 입양절차를 거쳤다면, A씨는 당연히 재산을 상속받을 수 있다. 민법은 ‘양자는 입양된 때부터 양부모의 친생자(親生子·부모와 혈연관계가 있는 자녀)와 같은 지위를 가진다’고 규정하고 있다(제882조의2). 상속에 있어 입양한 자녀와 직접 낳은 자녀와 차별은 전혀 없다는 것이다. 민법에 따르면 상속 1순위는 피상속인(상속해주는 사람)의 직계비속(자녀·손주), 2순위는 직계존속(부모·조부모), 그 다음이 형제자매다. 배우자의 경우, 자녀들과 동 순위로 공동상속인이 되는데, A씨 어머니(피상속인 배우자)는 사망한 상태다. 그러므로 A씨가 단독상속인이 된다. 만약 입양절차를 밟지 않고 허위로 친생자 출생신고를 했다면 어떨까. 이 같은 경우도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 1994년 대법원에 따르면 “당사자가 양친자(養親子)관계를 창설할 의사로 친생자출생신고를 하고, 거기에 입양의 실질적 요건이 모두 구비되어 있다면 그 형식에 다소 잘못이 있더라도 입양의 효력이 발생한다”며 “이 경우의 허위의 친생자출생신고는 입양신고의 기능을 발휘하게 된다”고 판시했다(93므119 판결). 이에 A씨는 재산 상속 1순위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입양됐으니 부모 재산을 탐내지 말라’는 친척들의 말에 크게 마음쓰지 않아도 된다.
  • 父 생명보험금까지 헌금…‘아베 총격범’ 母 빗나간 신앙심

    父 생명보험금까지 헌금…‘아베 총격범’ 母 빗나간 신앙심

    아베 신조(67) 전 일본 총리를 살해한 전 해상자위대원 야마가미 데쓰야(41)가 특정 종교 단체에 원한을 품은 것은 모친의 빗나간 신앙심 때문이었다. 집안의 모든 재산은 물론, 아버지의 생명보험금까지 헌금을 했다. 집안이 파산하면서 자녀들이 힘겨워했지만 이를 외면하고 주변에 돈을 빌리며 헌금을 이어나갔다. 야마가미의 큰 아버지는 15일 요미우리 신문 등 일본 언론의 취재에 응했다. 야마가미의 모친은 야마가미가 초등학생 때부터 종교활동에 심취했고, 입회와 함께 1억엔(약 10억원)이 넘는 돈을 헌금한 것으로 알려졌다. 야마가미의 모친은 헌금을 내기 위해 1999년 조부로부터 상속받은 토지와 가족 4명이 함께 살던 단독주택을 매각했다. 주택을 매각하기 전과 후에도 이어진 헌금으로 인해 모친은 2002년 파산 선고까지 받았던 것으로 전해졌다. 야마가미의 큰 아버지는 “파산 후에도 헌금을 계속했다”고 진술했다. 야마가미의 모친은 남편과 어머니의 죽음에 충격을 받고 종교활동에 뛰어들게 됐다. 야마가미의 큰 아버지는 헌금 사실을 안 1994년 경제적 지원을 중단했고, 때때로 먹을 것이 없다는 연락을 받고 통조림 등을 보냈다고 말했다. 야마가미는 소방 채용 시험에서 떨어진 후 2002년 해상자위대 임기제 자위관으로 입대했지만 2005년 1월 자살미수 사건을 일으켰다. 해상자위대 내부조사를 받을 때 “통일교로 인생과 가족이 엉망진창이 됐다”고 진술한 것으로 전해졌다. 야마가미가 힘들 때 모친은 종교행사로 아들을 찾지 않았다. 야마가미의 모친은 헌금을 내기 위해 1999년 조부로부터 상속받은 토지와 가족 4명이 함께 살던 단독주택을 매각했다. 주택을 매각하기 전과 후에도 이어진 헌금으로 인해 모친은 2002년 파산 선고까지 받았던 것으로 전해졌다. 여동생은 모친과 함께 사라져 행방을 알 수 없는 상태다.종교단체 향한 분노…아베에게 야마가미는 “어머니가 거액의 기부를 해서 파산했다. 반드시 벌해야 한다고 생각했다”라며 “우리 집을 망친 종교단체를 일본에 초대한 사람이 기시 노부스케 전 총리다. 그래서 그의 손자 아베를 노렸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기시 전 총리는 아베 전 총리의 외할아버지다. 야마가미는 애초 이 종교단체의 지도자를 노렸으나 접근이 어려워지자 “아베가 이 종교를 일본 내에 확산시킨 것”으로 믿고 살해 대상을 아베로 바꿨다. 야마가미의 집에서는 어머니가 활동하던 특정 종교에 대한 원한이 적힌 노트와 총기 5정 등이 추가 발견됐다. 차야마가미는 범행 전날, 자신의 어머니가 빠져 원한을 품었다는 종교단체 건물에 시험발사까지 한 것으로 드러났다. 야마가미 용의자는 지난 8일 나라시에서 가두 연설을 하던 아베 전 총리에게 총격을 가했다. 아베 전 총리는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같은 날 오후 사망했다. 그의 가족장은 지난 12일 치러졌다. 일본 정부는 아베 전 총리의 국장을 올해 가을 치르겠다고 발표했다.종교단체 “헌금 강제한 적 없다”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옛 통일교 일본 교회 다나카 회장은 “헌금은 본인의 신조에 근거한다. 강제성은 없다”고 주장했지만 고액헌금으로 인한 파산이 동기라면 무겁게 받아들인다고 밝혔다. 야마가미 용의자의 어머니에 대해선 98년쯤부터 신자가 됐고 두 달 전 행사에도 참여했다고 밝혔다. 야마가미는 아베 전 총리가 통일교를 설립한 NGO에 보낸 영상 메시지가 종교를 일본에 확산하는 데 일조했다고 생각했다. 아베 전 총리의 외조부인 기시 전 총리는 자민당 내 극우파로, 1970년 통일교를 첫 방문한 후 당내에서 종교를 정치 세력화했으며 선거 때마다 자민당 후보 당선을 위해 조직적으로 통일교를 동원한 것이 드러났다. 야마가미의 모친은 현재 큰아버지 집으로 피신한 상태다. 큰아버지는 “현재 사건에 대해 이야기 하지 않고 있다. 뭔가 생각이 있었다면 이미 탈퇴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 “죽음은 존재방식의 변화” 백상 울린 조현철 부친상

    “죽음은 존재방식의 변화” 백상 울린 조현철 부친상

    “아빠가 지금 보고 있을지 모르겠는데, 아빠가 눈을 조금만 돌리면 마당 창밖으로 빨간 꽃이 보이잖아. 그거 할머니야. 할머니가 거기 있으니까 아빠가 무서워하지 않았으면 좋겠고. 죽음이라는 게 나는 그렇게 생각하는데, 그냥 단순히 존재 양식의 변화인 거잖아.” 죽음을 앞둔 아버지에게 묵직한 수상소감으로 감동을 안긴 배우 조현철(36). 조현철과 래퍼 매드클라운(본명 조동림)의 아버지 조중래(70) 명지대 교통공학과 명예교수가 22일 투병 중 별세했다. 조현철은 제58회 백상예술대상에서 넷플릭스 오리지널 ‘D.P.’로 TV부문 남자 조연상을 받았다. 조현철은 “인생이라는 게 좀 웃기다는 생각이 드는 게, 저희 아버지가 투병 중이시다. 진통제를 맞고 이걸 보고 계실지 모르겠다”라며 “죽음을 앞둔 아버지에게 조금 용기를 드리고자 잠시 시간을 할애하겠다”라며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죽음’을 언급했다. 조현철은 “첫 단편영화였던 ‘너와 나’라는 작품을 찍으면서 분명히 세월호 아이들이 여기에 있다는 거를 느낄 수 있었어”라며  “‘너와 나’를 준비하는 6년이란 시간 동안 내게 아주 중요했던 이름들”이라며 고 박길래 선생, 김용균, 변희수, 이경택 등의 이름을 호명했다. 박길래 선생은 연탄공장 밀집 지역에서 살다 석탄 먼지가 폐에 쌓이는 진폐증 진단을 받고 열네 번의 재판을 받고서야 공해병을 인정받았다. 이 재판을 도운 이가 바로 조현철의 큰아버지인 고 조영래 변호사다. 조현철이 언급한 김군은 2018년 태안화력발전소 사고 때 사망한 비정규직 노동자, 변씨는 지난해 세상을 떠난 성소수자 군인, 이경택 군은 학교폭력에 시달리다 세상을 떠난 학생이었다.조현철은 “외할아버지, 할머니, 외삼촌, 아랑쓰”라며 “나는 이들이 분명히 죽은 뒤에도 여기 있다고 믿어, 그러니까 아빠 무서워하지 말고 마지막 시간 아름답게 잘 보냈으면 좋겠어”라고 수상 소감을 마무리했다. 조현철은 2010년 단편영화 ‘척추측만’으로 데뷔했다. 드라마 ‘호텔 델루나’와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을 통해 이름을 알린 뒤 ‘D.P.’에서 현병대 일병 조석봉 역을 맡아 지속적인 폭행과 괴롭힘으로 무너져 내리는 청년을 묵직하게 연기해 배우로서 조명받았다.
  • 김구라 가족사진 공개…3대가 붕어빵 얼굴

    김구라 가족사진 공개…3대가 붕어빵 얼굴

    김구라의 아들 래퍼 MC그리가 할머니의 생신을 축하했다. 그리는 10일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할머니 생신 축하드려요 건강하세요”라는 글과 함께 사진을 게재했다. 사진에는 그리와 김구라 부자, 큰아버지와 주인공 할머니의 모습이 담겼다. 한 식당에서 생일 파티를 한 가족들의 단란한 모습으로 그리부터 김구라, 큰아버지, 할머니까지 똑닮은 외모를 자랑하는 3대의 모습이 눈길을 끈다. 과거 김구라는 형과 함께 방송에 출연해 외모, 말투, 성격, 예능감까지 쌍둥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똑 닮은 형제의 모습을 공개했다. 김구라는 어머니와 채널A ‘아빠본색’에 출연하기도 했다.
  • 북촌리 너븐숭이 아기무덤의 비극… 이름도 없이 잠들어 있다

    북촌리 너븐숭이 아기무덤의 비극… 이름도 없이 잠들어 있다

    ‘국가 공권력에 의한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인권유린’을 한, 그 날이 다시 돌아왔다. 벌써 74주년. 올해 제주는 특별한 봄을 맞고 있다. 제주4·3특별법 개정으로 올 하반기부터 4·3희생자에게 국가 차원의 피해 보상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며칠 전엔 직권재심과 특별재심으로 억울한 옥살이를 한 희생자 73명이 무죄를 선고받기도 했다. 그러나 억울한 것은, 그 날,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죽어간 어린 영혼들이 있다. 818명. 아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4·3의 비극을 다시 소환한다. #1949년 1월 17일, 북촌리 집단 대학살 지난 29일, 제주도 조천읍 북촌 너븐숭이 4·3 위령성지로 향했다. 함덕해변 옆동네라고 하면 대충 알게 되는 그 해안마을 북촌리는 1949년 1월 17일 대규모 집단학살이 자행된 곳이다. 너븐숭이 4.3위령탑 앞에는 벚나무 3그루가 시리도록 하얀 꽃망울을 터뜨리고, 그 옆에선 토종 동백꽃이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2019년 12월 발간된 ‘제주4.3추가진상조사보고서’에 따르면 북촌리는 세계사적으로도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단일사건으로는 가장 많은 448명(2021년 기준)이 희생된 곳이다. 그 슬픈 역사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위령비 옆 마늘 밭에는 노인네가 코발트빛 푸른바다를 배경 삼아 한가롭게 농삿일을 하고 있었다. 멀리 토벌대를 피해 배를 타고 나가 숨기도 했던 ‘다려도’가 아른거렸다. 그날 아침, 군인들을 태운 트럭이 북촌리를 경유해 함덕 대대본부로 가던 도중, 북촌국민학교 서쪽 고갯길 속칭 ‘마가리 동산’에서 무장대의 습격으로 군인 2명이 사망했다. 주민들이 사망한 군인의 시신을 수습해 함덕국민학교 대대본부로 싣고 갔다. 군인들은 주민들이 보초 경비의 책임을 물어, 시신을 운구해 간 주민 중 경찰 가족 한 명을 제외하고 나머지 8명을 함덕리 고두물로 끌고 가 구타 후 총살했다. 그리고 군인들이 북촌리 마을을 덮쳤다. 오전 11시 전후, 무장 군인들이 마을을 포위하고 집집마다 들이닥쳐 총부리를 겨누며 전부 학교운동장으로 내몰고는 온 마을을 불태웠다. 400여 채의 가옥들이 하루아침에 잿더미로 변했다. 쇠막(외양간)에 있던 소들이 울부짖는 소리에 북촌국민학교 운동장에 모인 1300명의 마을 사람들은 공포에 떨었다. 어린 학생 등을 일으켜 세워 ‘빨갱이 가족’을 찾아내라고 들볶던 군인들은 이 일이 여의치 않자 주민 몇십 명씩 끌고 나가 학교 인근 밭에서 사살하기 시작했다.#강요배 화백의 ‘젖먹이’ 그림은 북촌 학살 비극의 상징 4·3사건으로 할아버지와 큰아버지, 고모를 한꺼번에 잃은 제주4·3희생자유족회 감사인 이상언(59·북촌리 4·3유적지 해설사)씨는 너븐숭이4.3기념관으로 안내하며 마치 그날의 비극이 눈앞에서 펼쳐지듯 설명했다. “강요배 화백이 그린 ‘젖먹이’ 작품은 북촌국민학교운동장에서 실제 있었던 상황이에요. 학교운동장에서도 무장대와 내통한 사람을 찾기 위해 사람들을 협박했어요. 군인들이 기관총을 난사하는 바람에 애기 업은 한 아주머니가 총에 맞아 죽어갔어요. 아주머니 등에 업혀 있던 애기가 쓰러진 엄마 품에서 빠져 나와서 젖을 물고 있는 비참하고 안타까운 그림인데, 정말 그날 엄마는 죽고, 아기는 살았어요.” 이어 그는 “그림 속에 묘사된 여자 아이는 현실 속에서는 네 살 된 한경림이란 남자 아이로 40대에 세상을 떠났다”며 “북촌에는 한씨의 누님 두 분이 살고 있지만, 이 그림을 보면 가족사가 생각나는 듯 한동안 그림을 내려 달라며 눈물을 하염없이 흘린 적이 있다”고 덧붙였다. 4·3사건으로 제주의 아이들은 세상에 나와 빛을 보기도 전에 무참히 살해당했다. 도내 10세 미만의 아이들 818명이 4·3사건때 희생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곳 너븐숭이 애기무덤에는 4·3사건 당시의 아이들 3~8기의 봉분과 함께 4·3사건 이전에 병사한 아이들의 12기 봉분 등 총 20기가 있다. #너븐숭이 아기무덤엔 어린 넋들을 위로하는 바람개비, 동백꽃, 그리고 ‘맛동산’ 이씨는 이곳 너븐숭이에서 영화 ‘폭낭의 아이들’을 촬영한 사유진 감독이 2020년 12월 16일 제주4·3평화공원 내 각명비 174개 중에서 10살 미만의 어린이 희생자 약 818의 이름을 각각 천에 적고 그 이름 적힌 천(이하 ‘위패’)을 인근 ‘평화의 숲’ 폭낭(팽나무)에 열명(列名)하고 그 이름 불러주었던 사연도 전했다. 심지어 제작팀은 제주4·3평화공원에서 북촌 너븐숭이 애기무덤까지 818명의 어린이 희생자 위패를 모시고 5시간을 도보 순례해 북촌리 희생자 유족회 회장 고완순(84)에게 인계했다. 유족회장은 위패 담긴 함을 받아 소나무에 묶어 넋을 위로했고 할머니들이 와서 가마솥에 밥을 해서 제대로 먹지 못해 죽은 아이들을 위해 주먹밥을 동백꽃 모양으로 만들어 위로했다. 우연하게도 취재 현장에 간 날도 때마침, 너븐숭이 아기무덤 앞에선 4·3사건 74주년에 즈음해 추모 영상물을 촬영하고 있었다. 그 때 희생된 아이를 재연하는 예닐곱살된 아이가 흰저고리에 검정치마를 입고 동백꽃을 무덤에 바치고 묵념하는 장면을 찍고 있었다. 너븐숭이의 애기무덤은 이렇다할 조경이나 장식도 없다. 그러나 다크투어를 하는 사람들은 이 곳에 올 때마다 아기무덤에 누군가는 동백꽃을 바치기도 하고, 누군가는 ‘귀천’이란 시를 바치고, 또 누군가는 바람개비를 바치고 추념했다. 이날은 누군가가 ‘맛동산’ 과자들을 모든 무덤에 바치고 갔다. 초라할 지 모르지만 더없이 소중하고, 애달프다 못해 먹먹해지는 추모의 공간이었다. 오는 3일에도 ‘폭낭의 아이들’ 제작팀은 이곳에서 어린영혼들을 위한 추념식을 연다고 했다. 왜 하필 북촌 주민들은 밭일을 하다가 돌아올 때 쉬어가던 ‘너븐숭이’(넓은 언덕)에 어린아이들을 묻었을까. 아마도 소나무로 둘러싸여 있어 농작물을 심어도 자랄 수 없는, 쓸모 없는 땅이었기 때문인지 모른다. #옴팡밭에는 현기영의 소설 ‘순이삼촌’ 비가 죽은 자들을 위로하듯 누워있다 너븐숭이 언덕 뒤엔 옴팡밭이 있다. ‘오목하게 쏙 들어가 있는 밭’이라는 뜻인 이곳도 ‘마치 무를 뽑아 널어 놓은 것 같이’ 시체들이 널브러져 있었다고 한다. 100여명 희생됐다. 고완순 회장의 기억에 따르면 여자들은 하늘을 보고 죽고, 남자는 엎어져서 죽어 있었다. 한겨울이지만, 오후 4시쯤 해가 기울 때 햇빛에 비친 밭이 피가 땅 속으로 흐르다 대지 위로 흘러 나와 핏빛이었다는 것이다. 너븐숭이의 비극은 현기영의 ‘순이삼촌’이라는 소설로 세상에 알려졌다. 옴팡밭은 ‘순이삼촌’의 장면 장면을 돌 위에 비문처럼 새겨 놓았다. 마치 희생자들의 넋을 위로 하듯 누워있다. 북촌사람들은 4·3은 입밖에 낼 수 없는 금기어였다. 왜냐하면 북촌대학살이 있은 지 5년 후인 1954년 1월 23일 세칭 ‘아이고 사건’이 그 발단이 됐다. 이 날 전몰장병인 북촌 출신 김석태의 고별식을 끝내고 4·3 당시 허무하게 죽어간 주민들의 혼을 함께 달래려고 술 한 잔 올리고 ‘아이고’ 통곡한 것이 제주경찰서에 알려져 마을이장 등 많은 사람들이 고초를 당했다. 그 후 사람들은 한날한시 지내는 위령제도 마음대로 지내지 못하고 침묵 속에 살았다. ‘…마당에 하얗게 깔려 있던 것도 싸락눈이었다. 그 시간이면 이집 저집에서 그 청승맞은 곡성이 터지고 거기에 맞춰 개짖는 소리가 밤하늘로 치솟아오르곤 했다. 한날한시에 이집 저집 제사가 시작되는 것이었다.…음력 섣달 열여드렛날.’ 그러나 이 ‘순이삼촌’(1978년) 소설이 나온 뒤 사람들이 용기를 내 그 아픈 사연들을 하나씩 하나씩 꺼내놓기 시작했다. 너븐숭이 4·3기념관에 새겨진 희생된 443명의 명단이 그것이다. 거기엔 네글자 이름도 있다. 아버지 이름 뒤에다 자식 子가 붙어 있었다. 홍영삼자, 고두필자, 김상순자…. 그들은 이름을 부르기도 전에, 이름없이 스러져간 어린 영혼들이었다.
  • 숱한 실패 딛고 ‘기부 먹방’… 위안부 할머니에게 사랑 퍼주다

    숱한 실패 딛고 ‘기부 먹방’… 위안부 할머니에게 사랑 퍼주다

    일상에 균열이 생겨도, 예기치 못한 일로 무너져 내려도 먹어야 삽니다. 시간이 지나 눈물 속에 먹던 음식이 ‘솔푸드’로 기억되기를, 살기 위해 억지로 먹은 밥이 일상을 되찾는 먼 훗날 성장의 밑거름이 되기를 막연히 기대하면서 오늘도 우리는 밥심으로 삽니다. 서울신문 사건팀이 밥심의 현장을 찾아 응원합니다. 올해로 방송 8년 차에 접어든 ‘114만 먹방 유튜버’ 야식이(허민수·42)의 밥상에 함께했습니다. 2015년 5월 아프리카TV에서 처음 먹방을 시작한 그에겐 이름도 없었다. ‘뭐 하는 사람이냐’고 묻는 시청자에게 “낮에는 책을 보고 밤에는 야식을 먹는 학생”이라고 소개했다. “그럼 ‘주독야식’이네요”라는 답이 돌아왔다. ‘주독’을 빼고 활동명을 정했다. 군을 마치고 입학한 늦깎이 대학생, 역사 강사, 임용고시생으로 살던 ‘주독이 대접받는 세상’이란 경로를 그렇게 이탈했다. 그리고 날것의 감성과 시선이 환대받는 ‘야식 잘 먹는 재주가 먹히는 세계’로 진입했다. 고등학교 시절 야식이에게 공부는 뒷전이었다. 친구들과 어울려 놀고 피자집과 족발집에서 배달 알바를 했다. 방황하던 그는 학교에 30일 정도 무단결석을 하기도 했다. 고등학교 졸업 뒤에는 족발집을 차렸다가 3개월 만에 그만두고 어머니가 운영하던 오락실 일을 도왔다. 한참 유행하던 펌프의 인기가 식으면서 오락실이 어려워졌고 가세가 기울었다. 두 달 만에 입대했다 제대하니 오락실은 PC방으로 바뀌어 있었다. 군 제대 후 알바로 돈을 모은 그는 2004년 여름부터 석 달 동안 공부한 끝에 대학수학능력시험을 보고 이듬해 입학했다. 나중엔 대학원까지 진학했다. 특히 수능 사회탐구영역 선택 과목이던 국사와 근현대사를 파고들었다. 그래서 대학교 3학년 때인 2007년부터 7년 동안 학원에서 역사를 가르쳤다. 한국사능력검정시험 수험서를 내기도 했다. 그때 찍은 한국사 강의 영상이 지금도 야식이 채널에 있다. 야식이는 강사인 동시에 수험생이기도 했다. 대학원을 마친 뒤 임용고사를 두 해나 봤다. 임용고사 삼수를 하던 중 먹방 유튜버가 된 2015년엔 영상 찍느라 시험 접수일을 놓쳤다. ‘임용고사 접수 신청 언제 하세요’라는 시청자의 질문을 받고서야 접수일을 놓쳤다는 걸 알게 됐다. 야식이는 “절박하게 시험을 준비하던 중에 놓친 게 아니라 일종의 ‘미필적 고의’였다”고 회상했다. 역사 교사 대신 먹방 유튜버가 됐다고 해서 야식이의 역사 공부가 쓸모없어지진 않았다. 역사를 공부하며 올곧은 사고와 행동을 할 수 있는 힘을 길렀다. 유튜버 초기부터 기부를 이어 간 것도 같은 맥락에서였다. 방송 시작 두 달 만에 학원 강사 시절부터 봉사활동을 해 온 야학에 6만 3250원을 기부한 일을 시작으로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이 사는 나눔의집과 한국백혈병소아암협회, 6·25 참전용사, 결식아동 등 우리 사회의 절대적 빈곤 계층에 꾸준히 기부해 왔다. 그간 누적된 기부 액수만 3억 5000만원에 가깝다. 특히 야식이는 나눔의집 기부금 횡령 의혹이 제기된 이후에도 기부를 이어 갔다. 그는 “아직도 유튜브 댓글을 보면 야식이가 기부한 게 윤미향한테 간다고 우려하시는 분이 많다”면서 “정의기억연대와 나눔의집은 운영 주체가 다르고 저는 나눔의집에만 기부를 했는데 사실관계를 정확히 알지 못하고 걱정하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이어 “기부하면 더 많은 이가 채널을 보며 나눔에 대해 생각하게 되고 저 같은 사람이 기부를 함으로써 먹방 유튜버도 덩달아 좋은 평가를 받는다고 생각한다”면서 “기부할수록 오히려 저에게 좋다”고 겸손하게 말했다. 물론 그의 채널에서 ‘주독’은 도울 뿐 ‘야식’이 주요 콘텐츠다. 초등학교 5학년 때 학교 급식에서 남은 카레를 전부 다 먹으며 대식가 기질을 알게 됐다는 그는 “당시 아프리카TV에서 먹방으로 유명하던 BJ들을 보면서 ‘내가 더 잘 먹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고 방송을 시작하게 됐다”고 말했다.먹방 5년 차인 2019년 한 방송에서 그의 식사 전후 위장을 컴퓨터단층촬영(CT)으로 찍어 분석해 보니 먹방 이후 일반인의 2~3배 크기로 위가 부풀어 올라 있었다고 한다. 당시 야식이의 위를 검사한 소화기내과 전문의는 “위 내부에 근육이 있다. 일반인이 이렇게 먹었다간 위 천공이 생길 정도”라고 분석했다. 타고난 먹방 체질이었던 셈이다. 그럼에도 방송용 과식을 한 뒤 야식이는 몸무게가 70㎏이 될 때까지 헬스장에서 운동하고 불광천에서 양화대교까지 왕복 하루 10㎞ 이상을 뛰기도 했다. 결혼 뒤 방송과 육아를 병행하다 15㎏이 갑자기 쪘을 때는 “배부르고 등 따시니까 초심을 잃어 게을러졌다”고 자책했다. 요즘에도 방송을 안 할 때는 아무것도 먹지 않고 공복을 유지하거나 1000㎉ 이하로 음식 섭취를 제한한다. 그를 만난 지난 23일은 방송 다음날이라 원래 금식일이었는데 인터뷰 사진을 위해 495㎉짜리 라면 한 개를 먹은 것이 전부였다. 야식이 채널의 킬러 콘텐츠는 초저가 맛집 탐방이다. 2017년 7월 1000원짜리 짜장면집을 찾은 일이 도화선이 됐다. 이 영상이 100만 조회수를 기록하면서 100원짜리 떡볶이, 200원짜리 오뎅을 파는 집에 찾아갔다. 그는 “먹방에 몰두하다 보면 모든 게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생각이 든다”면서 “수험생이든 건물주든 누구나 음식을 먹으며 비싼 음식이든 싼 음식이든 음식은 언제나 특별한 의미가 될 수 있지 않느냐”고 되물었다. 그의 초저가 가성비 맛집 탐방은 한동안 먹방 유튜버의 주요 소재가 될 정도로 인기를 끌었고 야식이 채널은 2020년 6월 구독자 100만명을 돌파해 골드 버튼을 받았다. 구독자 10만명까지 3년 5개월이 걸렸지만 이후 100만명까지는 1년 8개월 정도가 걸린 셈이다. 최근에는 대선후보인 김동연 전 경제부총리, 조원진 우리공화당 대표의 요청으로 만나 먹방을 찍으며 한반도 평화 문제에 관한 대화를 나눴다. 김 후보와는 탈북민이 개업한 평양냉면집에서, 조 후보와는 칼국수집에서 만났다. 야식이는 “한반도가 통일이 되면 백두산 천지 물을 길어서 라면 10봉지 먹방을 하겠다”고 약속했다. 사실은 먹는 동안 말을 최대한 적게 하는 게 야식이의 특징이다. 음식점 소개 뒤 “잘 먹겠습니다”라고 인사한 다음 추가 주문해 다 먹고 나서 “잘 먹었습니다”라고 말하는 게 전부다. 그는 “택시를 타면 탈 때부터 내릴 때까지 떠들 정도로 말이 많다”면서도 “스스로 제가 재미가 하나도 없다는 걸 알아서 약간의 리액션 외에는 말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 덕분에 야식이 채널 구독자들에게 ‘사장님 놀라심’은 일종의 ‘밈’(인터넷 유행 콘텐츠)이 됐다. 구독자들은 ‘사장님이 놀라는 것 보려고 들어왔다’는 댓글을 단다. 야식이가 혼자 음식점에 들어가 대량 주문을 하면 처음에는 음식점 사장님이 만류한다. 야식이가 처음에 시킨 음식을 다 먹은 뒤 추가 주문을 하면 사장님이 놀라게 되고, 사장님의 감정 변화가 확연하게 드러나는 콘텐츠를 완성하는 식이다.평소 말이 많은 야식이도 집안에선 꺼내기 조심스러운 얘기가 있다. ‘여수·순천 10·19사건’ 때 그의 큰아버지 허돈이 실종됐다. 큰아버지는 봉기군에 가담했다 진압군에게 학살당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자식을 떠나보낸 조부모부터 그의 부모 대까지 ‘빨갱이 낙인’이 무서워 쉬쉬하던 얘기였다. 삼대째인 야식이는 그의 석사 논문에 큰아버지의 성함을 담았다. 야식이는 “가족 중에 이 문제를 말하는 사람은 조카인 저밖에 없다”면서 “온 가족이 무관심한 큰아버지 문제를 끄집어낸 건 우리의 어두웠던 과거가 다시는 반복되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 英여왕 “찰스 왕위 오르면, 커밀라 왕비로 인정받길”

    英여왕 “찰스 왕위 오르면, 커밀라 왕비로 인정받길”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이 6일(현지시간) 즉위 70주년을 맞았다. 1000년에 이르는 영국 왕실 역사에서 전무후무한 기록이자 현 세계 군주 중에서도 최장수 기록이라고 로이터 등 외신들이 이날 전했다. 격변의 세계사를 일평생 겪은 여왕은 ‘영국인의 혼을 아는 정신적 지주’라는 평가를 받는다. 1926년생으로 올해 95세인 여왕은 1952년 아버지 조지 6세를 이어 왕위를 이어받았다. 아이 둘을 둔 25세 젊은 여왕의 등극에 영국인들은 환호했다. 당초 왕위계승 서열 1위는 큰아버지 에드워드 8세였다. 하지만 그가 미국 평민 출신 이혼녀인 윌리엄 심프슨 부인과 세기의 스캔들을 빚고 왕위 대신 사랑을 택하면서 아이러니하게 왕좌는 그녀에게 돌아갔다. 여왕은 윈스턴 처칠부터 14명의 영국 총리를 겪었고 소련 스탈린, 중국 마오쩌둥 등 세계를 주름잡은 파워맨과도 두루 만났다. 미국 대통령은 해리 트루먼부터 조 바이든까지, 린든 존슨을 제외한 14명을 모두 면담했다. 1997년 홍콩의 중국 반환을 지켜보며 대영 제국의 마지막을 목도했고, 2014년 스코틀랜드 분리 독립 투표 사태,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등도 여왕 재임 중 일어났다. 세계 군주제 역사에서 70년의 통치 기간을 넘긴 인물은 프랑스 ‘태양왕’ 루이 14세, 태국 푸미폰 아둔야뎃 국왕, 리히텐슈타인 요한 2세 대공 정도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여왕은 왕족을 보는 싸늘한 시선 속에서도 영연방을 지탱하는 역할을 해 왔다. 1945년 공주 신분으로 2차 대전에 참전해 트럭 운전병으로 복무하며 타이어를 직접 갈아 끼웠고, 1992년에는 왕실 면세 특권을 포기했다. 지난해 사별한 남편 필립공과는 해로했지만 자식 문제로는 바람 잘 날이 없었다. 아들 찰스 왕세자가 다이애나 왕세자비와 불화 끝에 이혼했고 1997년 다이애나가 불의의 교통사고로 숨졌을 때는 따가운 시선을 견뎌야 했다. 그는 지난 5일 즉위 70주년 기념 성명에서 아들 찰스 왕세자가 왕위에 오르면 그의 부인인 커밀라 파커 볼스도 ‘왕비’(Queen Consort)로 인정받길 바란다고 밝혔다.
  • 엘리자베스 여왕 “찰스가 즉위하면 카밀라 ‘국왕 배우자’ 불렸으면”

    엘리자베스 여왕 “찰스가 즉위하면 카밀라 ‘국왕 배우자’ 불렸으면”

    6일(이하 현지시간) 즉위 70주년(플래티넘 주빌리)을 맞는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이 찰스 왕세자가 왕위를 승계하면 그의 두 번째 아내인 카밀라 파커볼스가 ‘국왕의 배우자’ 칭호를 받기를 바란다고 전날 밝혔다. 카밀라에 대해 ‘왕세자의 배우자’란 칭호도 인색했던 것에 비춰 파격적인 격상으로 현지에서는 받아들이고 있다. 결국에는 ‘왕비’ 칭호가 붙여질 것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하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성명을 통해 “아들 찰스가 왕위에 오르게 되면 (대중들이) 나에게 준 것과 같은 지원을 카밀라에게도 줄 것으로 안다”며 “그때가 되면 카밀라가 국왕의 배우자로서 충성을 다하길 바란다”고 밝혔다. 로이터 통신은 여왕이 카밀라를 왕실의 일원으로 인정하고 있음을 드러낸 것이라고 해석했다. AFP 통신 역시 여왕이 본인의 사망 후 미래를 계획하고 있으며 콘월 공작부인인 카밀라를 높이 평가하고 있음을 보여준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다만 다이애나 왕세자비가 살아 있을 때 버젓이 불륜을 저지른 카밀라를 대중이 온전히 국왕의 배우자로 받아들일지는 미지수라면서도 최근 카밀라가 활발한 왕실 활동으로 대중적 인기가 올라가는 추세라고 진단했다. 오랜 연인 사이였던 찰스 왕세자와 카밀라는 지난 2005년 윈저궁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카밀라도 이혼녀 신분이었다. 다이애나 전 왕세자비는 1995년 공영방송 BBC 인터뷰를 통해 “이 결혼에는 세 사람이 있다”며 남편이 카밀라와 부적절한 관계를 이어오고 있음을 폭로했다. 다이애나는 왕실과 관계가 틀어져 이듬해 찰스 왕세자와 이혼했고, 1997년 프랑스 파리에서 자신과 밀회남을 쫓던 파파라치를 따돌리려다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한편 즉위 70주년을 하루 앞두고 샌드링엄 별장에서 지역 봉사단체 대표들, 연금 생활자. 여성단체 회원 등을 만난 자리에서 축하 케이크를 자리는 등 소박하게 자축했다. 하늘색 원피스 차림에 지팡이를 짚은 여왕은 밝은 표정으로 지역 주민이 만든 케이크를 잘랐다. 케이크의 축하 문구가 여왕이 아니라 사진기자들을 향한 채였지만 여왕은 웃으면서 상관없다고 말했다. 여왕이 비교적 큰 규모의 왕궁 밖 대면 행사에 참석한 것은 석 달 보름 만의 일이다. 지난해 10월 19일 저녁 윈저성에서 주최한 글로벌 투자 정상회의 리셉션에서 1시간가량 지팡이도 없이 서서 존 케리 미국 기후특사, 빌 게이츠 등을 만났다가 다음날 런던 시내 한 병원에 하루 입원한 뒤 공석에 나타나지 않았다. 한 리셉션 참석자는 여왕이 “반짝거리는” 모습이었다고 돌아봤다. AP 통신은 여왕이 최근 건강 우려에도 불구하고 움직임이 자유로웠고 지팡이는 걸을 때보다 서 있을 때 몸을 지탱하는 용도로 쓰이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여왕의 플래티넘 주블리 기념행사는 6월 2∼5일 연휴에 거리 파티, 군 퍼레이드, 팝 콘서트 등 다양한 축하 행사들이 기획돼 있다. 즉위 당일은 여왕의 아버지인 조지 6세의 기일이기도 해서 조용히 지나가고 대신 6월에 떠들썩한 축하 행사를 하는 것이 왕실 관례다. 7일엔 런던 곳곳에서 축포가 쏘아 올려져 축하 행사 시작을 알리게 된다. 여왕은 지난달 말부터 남편 필립공이 즐겨 머물던 샌드링엄에서 지내고 있다. 지난해 4월 필립 공이 세상을 떠난 뒤 처음으로 혼자 즉위 기념행사를 치르게 됐다. 여왕은 1952년 2월 6일 예상보다 일찍 왕관을 썼다. 어린아이 둘을 둔 25세의 젊고 아름다운 여왕의 등장이었다. 태어났을 때는 왕위에 오를 가능성이 미미했지만 큰아버지인 에드워드 8세가 저유명한 심프슨 부인을 선택하는 대신 왕위를 포기하면서 운명이 바뀌었다. 재위 70년을 넘긴 왕은 영국에선 처음이고, 세계적으로도 루이 14세 프랑스와 푸미폰 아둔야뎃 태국 국왕, 요한 2세 리히텐슈타인 대공 등이 앞선 사례일 뿐이다. 현재 재위 군주 중에서는 최장수다. 윈스턴 처칠부터 14명의 총리를 겪었고 스탈린과 마오쩌둥 등을 만났고, 미국 대통령은 해리 트루먼부터 조 바이든까지 14명 가운데 린든 존슨만 빼고 모두 만났다. 킹스 칼리지 런던의 정치학 교수인 버넌 보그대너는 “여왕은 거의 비판할 수 없는 존재인 것 같다”라고 말했다고 로이터통신이 전했다. 필립공과도 70년 가까이 해로했지만 자식들 문제는 늘 골칫거리였다. 최근엔 손자 해리 왕자가 왕실을 떠난 뒤 부인 메건 마클이 왕실로부터 인종차별을 당했다고 주장하고, 아들 앤드루 왕자가 미성년자 성폭행 의혹으로 고소를 당하며 왕실의 입지가 흔들리고 있다. 여왕은 앤드루 왕자의 군 직함을 박탈하고 전하 호칭도 떼는 결정을 내려야 했다. 다른 손자 윌리엄 왕자의 평판은 괜찮지만 찰스 왕세자를 향한 대중의 눈초리가 여전히 싸늘해 불안을 키운다.
  • “우리 엄마 병원 원장인데”…학력·재력 속여 ‘결혼 사기’

    “우리 엄마 병원 원장인데”…학력·재력 속여 ‘결혼 사기’

    만나던 여성에게 자신의 직업과 학력, 재력 및 부모의 직업을 속여 결혼할 것처럼 행세해 1억 8000만원 가량의 ‘결혼 사기’를 벌인 남성이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서울남부지법 형사3단독 박원규 부장판사는 지난달 15일 만나던 여성과 그 가족을 속여 결혼 비용 명목으로 약 1억 8600만원을 편취한(사기) 혐의를 받는 A씨에게 징역 1년 2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고 30일 밝혔다. 법원은 A씨에게 160시간의 사회봉사도 명령했다. A씨는 지인의 소개를 만난 여성 B씨에게 자신이 명문대를 졸업했으며 어머니는 병원 원장, 큰아버지는 기업 임원이라고 속였다. 또 자신의 직업을 서울 양천구 소재의 학원 원장이라고 거짓말했다. A씨는 지난 2020년 11월 B씨에게 청혼하면서 “양천구에 어머니 명의 집이 있으니 이 집을 신혼집으로 하고, 그 명의를 너에게 이전해주겠다. 일단 계좌에 있는 돈을 전부 내 계좌로 보내주면 결혼 비용에 사용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A씨는 B씨에게 소개한 것과 다른 대학을 졸업했으며 학원 원장이 아닌 학원 강사였고, 큰아버지는 일반 회사원이었다. 어머니 역시 병원 원장이 아닌데다가 양천구에 어머니 명의의 집이 있던 것도 거짓이었다. 별다른 재산도 없었던 A씨는 B씨와 결혼할 생각도 아니었다. A씨에게 속은 B씨는 2020년 12월부터 지난해 1월까지 총 7600만원 가량을 송금했다. A씨는 B씨의 부모마저 속여 돈을 갈취했다. A씨는 지난해 2~3월 사이 B씨의 부모에게 전화를 걸어 “큰아버지가 결혼 예단으로 1억 원을 주기로 했는데 명목상 5000만 원을 송금해주면 큰아버지에게 예단비를 받았다는 것만 보여주고 즉시 돌려주겠다”고 거짓말해 부모 각각에게 6000만원과 5000만원을 받았다. A씨는 과거 업무상횡령 혐의로 집행유예 처벌을 받은 적도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 권애임 순천시 여성친화시민참여단 회장 ‘한국인성교육진흥대상’ 수상

    권애임 순천시 여성친화시민참여단 회장 ‘한국인성교육진흥대상’ 수상

    권애임 순천시 여성친화시민참여단 회장이 최근 광주 문화예술회관에서 열린 한국인성교육진흥대상 시상식에서 인성교육의 확산 및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교육 대상’을 수상했다. ‘2021 한국인성교육진흥대상’은 (사)한국문화복지협회와 광주경실련이 주최하고, 한국인성교육진흥원이 주관했다. 한국인성교육진흥원은 지역 주민의 문화복지와 사람과 환경을 살리는 인성교육을 강화하고 있다. ‘너와 나!, 우리!’ 를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문화적 관계망을 넓혀가고 있다. 교육 대상을 수상한 권애임 순천시 여성친화시민참여단 회장은 순천시 애이미외국어 교육학원을 운영중이다. 지역 불우시설에 거주하는 학생들에게 수년째 무료교육을 펼치고 있다. 지난 2006년부터는 자신의 학원에 다닌 학생들중 셋째 아이부터는 수업료를 받지 않고 있다. 지난 2019년부터는 학교 교육이외는 다른 수업을 받지 못하는 순천성신원을 찾아 아이들을 가르치거나 초·중·고생 5명에게 무료 수업을 하고 있다. 고등학생 2명에게는 매월 20만원씩 남몰래 후원하고 있다. 권 회장은 생업에 종사하는 한편 여성친화시민참여단 회원들과 함께 활발한 봉사 활동을 펼치고 있다. 지난 2일 (사)순천시자원봉사센터 주관으로 개최된 제16회 ‘자원봉사자의 날’ 행사에서 지역사회를 위해 헌신한 공적을 인정받아 ‘순천교육장상’을 수상한 바 있다. 순천시 3대 범시민운동에 적극 참여하고 있는 권 회장은 지역의 불편하고 불합리한 사항을 모니터링해 개선 의견을 제안하는 등 여성친화적 지역문화 확산을 위해 힘쓰고 있다. 시와 순천경찰서 합동으로 공중화장실 위생 상태 점검, 불법 카메라 단속 등에 나서기도 했다. 시가 지난 20일 여성가족부로부터 여성친화도시로 재지정받는데 숨은 역할을 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권 회장은 “조부모님과 큰아버지 두분이 이승만 정권의 보도연맹 학살로 돌아가셔서 아버지와 고모가 고아로 힘들게 살아와 누구보다 어렵게 생활하는 학생들의 입장을 잘 안다”며 “지역 인재들이 이런 난관을 극복하고 꿈을 이루는데 더 열정을 쏟겠다”고 말했다.
  • 수필은 곧 사람… 오늘도 글에서 영혼의 무늬를 건져 올린다

    수필은 곧 사람… 오늘도 글에서 영혼의 무늬를 건져 올린다

    지난 11일 오후 한국수필가협회 창립 50주년 행사가 있었다. 수필계의 종가인 한국수필가협회는 1971년 2월 창립돼 반세기 동안 성숙한 내적 역량을 쌓아 왔는데, 올해 초 임기를 시작한 최원현 이사장의 소회가 남달랐을 것 같다. “한국수필가협회는 범수필문학 단체로 시작했습니다. 수필가라면 누구나 들어와 활동할 수 있지요. 수필문학의 중흥과 대중화를 위해 선배님들이 이루어 온 업적이 너무도 큽니다.” 이러한 업적 위에서 이제 수필은 한국문학의 주변부를 벗어나 자신만의 문학적 위상을 확고하게 확보하면서 미래 문학으로서의 기틀을 만들어 가고 있다. 아닌 게 아니라 현재 문단에는 30종을 훌쩍 넘는 수필 전문지를 비롯해 많은 문예지에서 수필을 싣고 있다. 또한 수필 문단에서는 출신 작가를 중심으로 저마다 문학회를 만들어 폭넓은 활동을 하고 있다. 수필문학의 일대 융흥기라고 할 만하다.●신앙과 문학이라는 두 줄기의 큰 빛 최 이사장은 1951년 전남 나주에서 태어나 돌 무렵에 아버지를, 세 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살아온 전형적인 천애고아의 삶을 고조곤히 들려주었다. “제게 유년 시절은 그냥 그리움일 뿐입니다. 학창 시절은 슬픔과 아픔의 시간이고요.” 늘 추위를 느끼듯 외로움을 탔던 ‘소년 최원현’은 그래서인지 외조부모님 밑에서 자랐던 어린 시절이 가장 행복했다고 기억한다. 외할머니는 어린 소년을 기르시고 신앙으로 이끈 분이셨다. 그 자체로 어머니셨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큰아버지 댁으로 간 소년은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내디딘 삶의 현장에서 누구보다도 열심히 살았다. 후광이라고는 전무했던 그를 감싸준 두 줄기의 큰 빛은 신앙과 문학이었다. “80년대 중반에 우연히 보게 된 신문광고 하나가 저의 인생을 바꾸었습니다. 문학이라는 이름의 평생지기를 만나게 된 거지요.” 그는 문예진흥원 개최 문학 강좌 광고를 보고 찾아가 거기서 수필가 서정범 교수를 만난다. 서 교수에 의해 ‘한국수필’ 초회 추천을 받은 그는 그때부터 수필이 자신의 삶이 됐고 지금까지 30년 넘게 수필가로 살아올 수 있었다고 고백한다. 1987년 초회 추천을 받은 그가 이제는 ‘한국수필’의 발행인이 됐으니, 장강대하처럼 흐른 수필의 시간이 풍요롭기만 하다. “1971년 4월 당시 한국수필가협회 회장이셨던 조경희 선생님께서 ‘수필문예’라는 이름으로 창간하셔서 6호까지 나오다가 1975년 3월 7호부터 계간 ‘한국수필’로 제호를 바꾸어 창간호를 낸 후 2021년 12월호로 통권 322호를 낸 대한민국에서 가장 오래된 전통과 역사의 수필문학 전문 잡지입니다.”●삶의 진실한 이야기를 담아내는 문학 한국문학에서 수필은 어떤 가능성을 가지고 있을까? 우리 수필은 어떤 수준과 위상을 가지고 있을까? 독자들이 많이 궁금해할 것 같다. “시대가 변하면서 빠르고 쉽고 편한 것을 추구하다 보니 문학도 그러한 경향을 추구하지 않을 수 없게 됐습니다. 그러나 문학의 본질이 바뀔 수는 없고 시대의 요구를 수용하면서 문학도 발전해야 할 텐데 수필은 요즘 시대에 형식과 길이와 내용에서 가장 잘 맞는 문학이라고 생각됩니다.” 최 이사장은 다만 수필가들이 양산되는 경향이 있고 수필 전문지가 많다 보니 신인 등단이 쉽게 이루어져 독자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작품을 쓰는 경우가 적지 않아 부끄러울 때가 있다고 일침을 가한다. 좋은 수필가가 많은데 독자들이 그렇지 못한 글을 만나게 돼 전체적으로 수필의 수준을 낮잡아 볼까봐 걱정이라는 것이었다. “수필은 삶의 진실한 이야기를 담아내는 문학입니다. 따라서 수필은 위축되거나 소진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수필가 한 사람 한 사람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라는 마음으로 쓰는 한 편의 수필이 우리 수필의 위상을 높여 주기를 바라는 마음을 간절하게 들려주었다. ‘수필가 최원현’의 작품은 교과서에도 다수 올라 있다. 중학교 1학년 국어 교과서에 ‘햇빛 마시기’, 중학교 2학년 도덕 교과서에 ‘기다림의 꽃’, 그리고 중국 동북3성 중학교 작문 교과서에 ‘행복한 책임감’이 실려 있다. 고전 반열에 오르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그는 개인적으로 범우사에서 출간한 ‘누름돌’에 가장 애정이 간다고 말한다. “감사하고 기쁜 것은 제가 70년대를 전후해 문학의 스승으로 삼았던 범우문고에서 수필집 ‘누름돌’이 나온 것입니다. 범우문고로 수필집이 나온다니 그 기쁨을 억제할 수가 없었습니다.”●수필의 저변과 지경을 넓히는 일 그에게 수필이란 무엇일까? “저는 서양의 에세이 개념과는 다른, 우리 고유의 정서 속에서 싹트고 자라온 ‘SUPIL’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곳에서 펼쳐지는 우리만의 이야기로서의 수필 말입니다. 어쩌면 시조와 함께 수필은 가장 한국적인 문학일 수 있습니다.” 서양의 에세이 개념과 최 이사장이 강조하는 수필 사이의 간극과 차이가 물씬 전해져 온다. 우리만의 특별한 장르로 수필을 세워 갈 의지가 강하게 읽혀졌다. 최 이사장은 자신도 그러한 개념 형성에 일조하기 위해 그동안 서정적 수필을 주로 써 왔는데 그간 이러한 그의 수필 세계에 대해 “세련된 미학적 문장으로 재현하는 데 뛰어난 기량”(윤병로)을 보인다든가 “깊은 사고의 달관을 반짝이는 문장으로 수놓는”(정주환)다든가 “추억의 공간 속에 켜진 활활 타오르는 불꽃을 보게”(서익환) 한다는 비평적 진단이 있었다. 이러한 성취를 이미 이룬 그는 이제 특별한 제재를 중심으로 하는 연작 테마 수필을 써 보고 싶다는 계획을 밝혔다. “그래서 시도했던 것이 간이역 시리즈였습니다. 사라져 버린 간이역들. 저는 사라져 가는 것들에 애착을 가지는가 봅니다.” 이제 다양한 테마 수필로 특성화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최 이사장은 무엇보다 청소년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수필을 쓰고자 한다. 미래 세대에게 중요한 장르로 부상할 것이 틀림없는 수필의 저변과 지경을 넓히는 일에 그의 수필이 큰 역할을 하게 될 것임을 은은하게 암시해 주는 순간이었다.●영혼의 무늬를 보게 하는 맑은 눈 “수필은 영혼의 무늬를 보게 하는 맑은 눈입니다. 따라서 수필은 곧 쓰는 사람 그 자체입니다. 맑고 고고한 사람이 쓰는 글도 그러할 수밖에 없듯이 작가 스스로 자신의 영혼만큼의 글을 쓸 수 있는 것이지요.” 최 이사장은 화려한 것보다는 소소하고 하찮아 보이지만 사실은 소중한 것, 자칫 놓치고 잊히거나 사라져 갈 수 있는 것들에 깊은 애정을 가진 수필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수필가협회 이사장 최원현’의 계획은 무엇일까? “50년 역사와 업적을 정리하는 작업이 최우선입니다. ‘한국수필’ 50년은 우리 한국 수필문단 50년이요 한국 수필문학사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협회가 발전하고 튼실해질 수 있도록 ‘한국수필’ 출신 최 이사장이 임기 내에 그 토대를 단단히 해 놓고 물러날 생각이다. 개인적으로는 속히 이런 책임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싶다고 한다. 그는 지금까지 수필집 열두 권, 수필선집 네 권, 문학평론집 두 권, 인터뷰집 한 권 등 수필 관련 책을 왕성하게 펴냈다. 내년에는 스무 번째 책이 될 작품집을 낼 계획을 가지고 있다. 최 이사장을 만나면서 수필이야말로 가장 친화력 높은 장르가 될 수 있을 것이란 믿음이 생겼다. 그렇게 수필은 독자들에게 충전과 위안을 주는, 공감에 대한 간곡한 요청이요 오랜 경험과 기억을 나누자는 호소인 셈이다. 그러니 수필은 “글이 곧 사람”이라는 명제를 가장 첨예하게 증명하는 장르일 것이다. 최 이사장은 수필이 삶의 주변이나 상실된 것들을 향해 손길과 눈길과 발길을 여는 ‘열린 양식’임을 꾸준히 강조했다. 그러한 수필 사랑의 마음은 두고두고 근원적인 미학적 에너지를 우리 수필문단에 던져 줄 것이다. 최 이사장이 그러한 큰 그림을 그려 갈 것임을 예감케 해준 환한 가을날 오후였다. 문학평론가·한양대 교수
  • [씨줄날줄] ‘먹방’ 속 명란젓/서동철 논설위원

    [씨줄날줄] ‘먹방’ 속 명란젓/서동철 논설위원

    코로나19로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먹방 TV’를 보는 시간도 늘었다. 최근에는 일본의 포장마차에서 명란구이를 먹는 모습이 흥미로웠다. 초등학교 시절 명란젓은 나무로 짠 상자에 담고 일본풍이 뚜렷한 붉은색 포장지에 싸여 있었다. 일본 음식이라고 생각한 이유일 것이다. 국립민속박물관이 최근 펴낸 ‘민속학연구’를 들춰 보다가 명란젓에 대한 여러 가지 궁금증을 한꺼번에 풀어 주는 글을 발견했다. 정연학 학예연구관의 ‘동해의 명태잡이에 대한 한일 갈등과 명태문화의 확산’이라는 논문이다. 결론적으로 일본식 명란젓 멘타이코(明太子)는 광복 이후 한국에서 돌아간 일본인이 소금에 절이는 한국식 대신 자기네 기호에 맞게 조미액으로 짜지 않게 만들면서 재탄생한 음식이었다. 북어(北魚)의 유래도 보인다. 명태는 동해안 추운 지역에서 잡혀 이렇게 불렸다. 그런데 실학자로 농정 개혁가로도 유명한 서유구(1764~1845)는 ‘날것을 명태, 건조한 것을 북어라고 한다’고 했다. 명태와 북어의 개념이 19세기 초반에 이미 정리돼 있었다. 과거 일본에서 명태는 맛없는 생선의 대명사였단다. 그런데 1883년 ‘조일통상조약’으로 일본 어선이 조선 해역에서 고기잡이를 하고, 엄청난 어획고를 올리기 시작하자 명태 부산물의 산업화에 들어갔다. 그렇게 홋카이도 어민들이 조선의 명란젓 만드는 방법을 배워 1911년에는 중국으로 수출을 시작했다. 1914년에는 멘타이코가 일본 신문에도 처음 등장한다. 일본에서는 명란의 역사를 3기로 구분한다고 한다. 제1기는 1905년 이른바 관부연락선이 다니면서 부산의 일본인 상점에서 만든 명란젓이 시모노세키를 중심으로 일본 전국에 확산되는 시기다. 제2기는 1945년 이후 홋카이도 상인과 시모노세키 상인이 경쟁적으로 새로운 명란 제조 기술을 개발한 시기, 제3기는 1978년 이후 명란이 일본 전통 식품으로 정착하는 시기라는 것이다. 일본의 대표 명란젓인 후쿠오카의 가라시멘타이코는 ‘매운 명태의 알’이라는 뜻으로 한국 영향을 받아 고춧가루를 넣고 가다랑어포, 청주, 맛술 등을 첨가한 저염도 젓갈이다. 이런 제조 방식의 명란젓은 한국에서도 지속적으로 만들어져 1970년대까지 중요한 대일 수출품의 하나였다. 1980년대 명란젓 수출이 중단된 것은 짐작처럼 동해안 명태의 씨가 말랐기 때문이다. 1971년 ‘자원보호령’을 개정해 27㎝ 이하 명태 어획을 금지한 규정을 삭제해 2008년에는 공식 어획량이 ‘0’이 됐다. 인현왕후의 큰아버지 민정중(1628~1692)은 “300년 뒤에는 이 고기가 귀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는데, 그 예언이 그대로 맞아떨어졌다.
  • 왜곡된 교과서·영화… 봉오동전투서 사라진 영웅 최진동·최운산

    왜곡된 교과서·영화… 봉오동전투서 사라진 영웅 최진동·최운산

    “아니, 어찌 이러오? 봉오동 독립전쟁도 청산리전투도 우리 아버지 최운산이 창설한 부대가 치른 전쟁이고, 총사령관은 큰아버지 최진동이지 않소? 어찌 한국에서는 봉오동 전쟁 총사령관은 홍범도라고 하고 청산리 전투 사령관은 김좌진이라고 하오?” 중국에 살던 최운산의 첫째 딸 청옥은 1990년대에 한국을 방문했을 때 TV를 보고 이렇게 흥분했다고 한다. 역사가 왜곡되거나 폄하되는 일은 드물지 않게 일어난다. 독립운동사도 사료 불충분에 정치적인 이유가 더해져 그런 일이 적지 않게 발생했다. 그중에서도 봉오동 전투는 진실과 괴리된 측면이 많다. 홍범도만 영웅이 된 데는 정치적 배경도 있고 잘못된 교과서의 탓도 크다. 극적 효과를 추구한 영화 ‘봉오동 전투’는 왜곡의 정점을 찍었다.●독립운동사 사료 불충분·정치적 이유로 왜곡 청옥의 말처럼 봉오동 전투는 사령관 최진동과 동생인 참모장 최운산이 지휘한 대한북로독군부가 이끈 전투였다. 김좌진과 홍범도는 각각 제1연대장, 제2연대장이었다. 교과서는 홍범도가 사령관으로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고 가르쳤다. 국민의 뇌리에 두 사람만 화석처럼 굳어져 남아 있는 이유다. 봉오동·청산리 전투에서 홍범도와 김좌진의 활약은 분명히 있었지만, 그들만을 영웅화하면서 최진동·최운산은 사라져 버렸다. 굳어진 인식은 바뀌기 어렵지만 그래도 진실을 밝히고자 하는 후손이 있는 경우는 다르다. 최운산의 맏아들 최봉우는 광복 후 평양방송국 아나운서로 일하다 전쟁을 피해 부산으로 내려왔다. 그의 딸 최성주씨가 큰할아버지와 할아버지의 파묻힌 역사를 추적하고 있다. 최씨는 지난해 ‘최운산, 봉오동의 기억’이라는 책을 펴내 진실을 세상에 알렸다. 최씨를 만나 독립운동에 바친 비운의 가족사를 들었다. 최진동 형제의 아버지 최우삼은 함북 온성이 고향으로 1860년에 태어났고 1880년 무렵 만주 옌볜 도태(道台)로 봉직했다. 도태는 조선 말기에 옌볜 지역을 다스리던 관리였다. 일제가 조선을 강점하자 최우삼은 일가를 이끌고 봉오동으로 이주, 한인 마을을 건설했다.최진동은 중국인 부호 밑에서 일해 큰 재산을 물려받았다고 한다. 만주 군벌 장쩌림 부대에 있었던 최운산은 장쩌림의 목숨을 구해 주는 등의 각별한 인연으로 봉오동 일대에 부산 면적의 6배나 되는 땅을 갖고 있었다. 또 국수 공장, 콩기름 공장, 양조장, 성냥 공장, 비누 공장을 운영했다. 대규모 목장도 소유해 러시아 군대에 곡물과 소를 수출하는 등 간도 제일의 거부(巨富)였다. ●홍범도 영웅 묘사한 영화 봉오동전투 ‘정점’ 형제는 1912년 비적들로부터 동포들을 지킬 목적으로 독립군의 모태가 되는 100여명 규모의 자경단을 만들었다. 또 봉오동 사관학교와 사관연성소를 창설해 독립군 지휘관들을 양성했다. 1915년에는 연병장과 막사를 만들고 두께가 1m가 넘는 토성을 건설해 독립군 기지를 구축했다. 3·1만세운동이 일어난 1919년이 되자 최진동 형제는 670명 규모의 대한군무도독부를 창설해 본격적으로 독립전쟁을 시작했다. 임시정부가 출범하고 통합 논의가 일어 1920년 대한군무도독부를 비롯한 북간도 일대의 독립군 부대는 조직을 합쳐 대한북로독군부로 거듭났다. 최진동이 부장(府長·사령관), 둘째 최운산이 참모장, 셋째 최치흥이 참모가 됐다. 막대한 재력을 가진 최운산은 각 부대에 주둔지를 제공하고 식량과 피복을 지급했다. 또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연해주까지 진출했던 체코군의 무기를 사들였다. 독립군들은 신형 무기로 체계화된 군사훈련을 받았다. 독립군들은 1920년 초부터 봉오동 전투가 일어나기 직전인 5월까지 두만강을 건너 일제의 관서를 수십 차례 공격했다. 일제는 대대적인 토벌 작전에 나섰다. 최진동 형제는 보름 전 전투 준비를 완료하고 적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한 달 전부터 주민들도 이주시켰다.대한북로독군부는 참호를 파고 의무부대도 후방에 배치하는 등 만반의 대비를 했다. 1920년 6월 7일 새벽부터 일본군은 봉오동을 습격했지만 그들의 패배는 예고된 것과 마찬가지였다. 157명의 사망자와 300여명의 부상자를 내고 패주했다.총사령관 최진동 등 지휘부는 최고봉인 봉초봉에 자리잡고 전투를 지휘했다. 전체 작전은 사령관 최진동과 참모들이 세웠다. 뒤늦게 합류한 홍범도는 작전을 준비할 위치도 아니었고 시간도 없었다. 홍범도도 격렬히 싸웠지만 어이없는 결정을 내렸다. 갑자기 그가 이끌던 2중대를 퇴각시킨 것이다. 이 바람에 자리를 사수하던 신민단 대원들이 수적 열세로 전사하고 말았다. 일종의 전술일 수 있지만 최진동은 항명이라며 홍범도를 엄벌하려 했고 동생 운산이 말렸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당시 독립군은 영화에서처럼 찢어진 군복을 입고 굶주린 게릴라가 아니라 기관총과 대포로 무장했으며 사격술이 뛰어난 정예군이었다. 전투가 끝난 후 일본군은 “적(독립군)은 전부 러시아식 소총을 갖고 탄약도 상당히 휴대하였으며 사격도 상당히 훈련되어 있다. 거리 측량이 불확실한 700~800m 거리에서도 사격을 하며…”라고 ‘봉오동부근전투상보’에 썼다. 거기에는 최운산의 부인인 김성녀와 봉오동 주민들의 헌신이 있었다. 김성녀는 수천 독립군의 식사를 제공하고 군복을 제조한 병참 책임자였다. 재봉틀 8대로 군복을 만들었다고 한다. 군복 모자에는 태극 견장이 달려 있었고 매화형 금장이 박힌 견장을 단 예복이 있을 정도였다. 최운산은 1930년대에도 무장 세력을 유지하며 우수리강 전투, 대황구 전투, 안산리 전투, 대전자령 전투 등을 이끌며 독립 투쟁을 계속했다. 1945년까지 대황구삼림지역에서 무장독립군을 양성했다. 1937년에는 보천보 전투의 배후로 지목돼 투옥됐다. 광복 직전까지 6번이나 감옥에 갇히고 고문을 받았다. 매번 극심한 고문을 당해 수레에 실려 나오곤 했다고 한다. 최운산은 광복을 한 달 열흘 앞둔 1945년 7월 5일 평양으로 갔던 길에 고문 후유증으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떴다. 최진동은 일제와 싸우는 동안 부인과 맏아들, 맏며느리를 잃는 아픔을 겪다가 1941년 일제의 압박과 감시 속에서 병마로 사망했다. 최진동은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3등급)을 받았다. 공훈에 비해 등급이 낮다. 최운산은 1977년에야 서훈(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5등급)으로 서훈이 올려졌지만 역시 너무 낮다. 홍범도는 2등급인 대통령장, 김좌진은 1등급인 대한민국장을 받았다. 왜 이렇게 최진동 형제는 낮은 서훈을, 그것도 늦게 받고 공적이 파묻혔을까. 최운산의 손녀 최씨는 이렇게 말했다. “1961년 보훈 업무 담당 직원이 최운산에게 서훈을 주는 대가로 뒷돈을 요구하자 격분한 아버지(최봉우)가 주먹을 날렸답니다. 그 바람에 서훈도 취소됐다고 합니다.” ●부인 김성녀, 군복 제조 병참 책임자 활동 또 최운산의 부인 김성녀는 정부에 낸 진정서에서 이렇게 썼다. “독립운동 당시 하급 지휘관 및 졸병으로 생존한 독립인사가 자신의 공적을 과대 선전하기 위하여 허무맹랑한 사실과 왜곡되고 과장된 조작 사실로 인하여 오점을 남겼으며 일생을 독립운동과 조국 광복을 위해 생명과 재산을 총투입하여 투쟁하였으나 공적이 뒤바뀌어져 있기에 독립운동을 하시고 생존해 계시는 분들의 양심에 호소합니다.” 이때가 1969년이다. 하급 지휘관이란 철기 이범석을 지칭한다. 이승만과의 친분으로 광복 후 초대 국무총리와 국방부 장관을 지낸 이범석은 ‘우둥불’이라는 제목의 책에서 자신을 청산리 전투의 영웅으로 과장하고 최진동 형제의 공적을 깔아뭉갰다. 이범석은 당시 20세의 군사학교 교관이었다. 최씨에 따르면 최진동의 자녀가 역사를 소설처럼 써서 왜곡했다며 출판을 말리고 이범석과 다투기도 했다고 한다. 최씨는 “얼굴을 보면 최운산의 서훈을 거절하지 못할 것 같아 엄마(최운산의 며느리)가 당고모(최진동의 딸)와 세 번 찾아갔는데 만나 주지 않았다”고도 했다. 최진동 형제의 공적이 매장된 배후에는 이범석이 있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최진동의 후손들은 중국과 미국에 살고 있다. 일부는 한국으로 들어와 어렵게 살고 있다. 최운산의 자녀들도 만주와 북한으로 흩어졌고 최운산의 부인과 아들 최봉우만 남한으로 내려왔다. 최봉우는 1984년 KBS 이산가족찾기 방송을 통해 만주에 있던 누나, 동생들과 극적으로 상봉했다. 최운산의 딸 계순과 아들 호석은 한중 수교 후 한국으로 들어왔다. 거부였던 최진동 형제가 모든 재산을 독립운동에 쏟아붓고 빈털터리가 되었는데도 중국에 남았던 후손들은 지주의 자식이라는 굴레를 쓰고 핍박을 받으며 힘든 삶을 살았다. 대부분의 독립운동가 후손들처럼. 논설고문 sonsj@seoul.co.kr
  • 험난한 중국 벤처의 산, 이 남자가 먼저 올랐다

    험난한 중국 벤처의 산, 이 남자가 먼저 올랐다

    흔히 ‘스타트업 창업’이라고 하면 부유한 재벌 2~3세나 이들의 후원을 받는 외골수 천재들이 떠오르곤 한다. 그들이 주고받는 수십억~수백억원의 투자금 논의는 그저 ‘남의 나라 이야기’로만 들린다. 하지만 우리나라도 아닌 중국에서 ‘북경한반도과기유한공사’라는 스타트업을 일군 김준범(28) 총경리(대표)는 27일 기자를 만나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이 회사는 중국 정부의 지원을 받아 한국인이 만든 첫 번째 벤처기업이다. “창업의 문을 두드리고 또 두드려 어렵사리 회사를 차렸어요. 돈이 넉넉지 않아 정말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쉽지 않았지만 그래도 계속해서 부딪치니 마침내 새로운 길이 열리더라고요.” ‘초짜 사업가’인 김 대표가 정글 같은 중국의 벤처 생태계에서 살아남을지 장담하기 어렵다. ‘베이징의 마윈’이 돼 금의환향할 수도, 처절한 실패를 맛보고 외롭게 귀국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젊음을 걸고 세상을 바꾸고자 출사표를 던진 결단만큼은 박수받기에 충분하다. 지금 이 시간에도 공무원이 되고자 1평 남짓 고시원 방에서 수험서를 외우고 또 외우는 대한민국의 젊은이들에게 그의 이야기가 신선한 자극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1993년 서울에서 태어난 그는 사업가인 아버지를 따라 전국 방방곡곡을 누볐다. 새로운 세상을 볼 때마다 가슴이 뛰었다. 원래 꿈은 의사였다. 큰아버지와 작은아버지, 사촌형 등이 모두 의사여서 자연스레 ‘장래희망’이 됐다. 하지만 하늘의 뜻이었을까. 고3 때인 2010년 11월에 치른 대입 수학능력 시험 결과가 참담했다. 재수를 고민하던 그에게 가족의 조언이 자극제가 됐다. “의사가 넘쳐나는 집안에서 굳이 너까지 의대에 가야 할 필요가 있을까. 어릴 적 네가 좋아했듯 새로운 세상을 찾아 떠나보는 것은 어때.” ●새로운 세상 찾아 베이징으로 중국이 눈에 들어왔다. ‘니하오’(안녕하세요)밖에 몰랐지만 미국과 함께 양대강국(G2)이 된 이 나라에 인생을 걸고 싶다는 열망이 피어났다. ‘일단 저지르고 보자’는 생각으로 한 달 뒤 베이징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대학 입시 준비를 위해 코피를 쏟아가며 2년 넘게 고군분투했다. 죽기 살기로 공부에 매달려 2013년 9월 중국에서 가장 들어가기 어렵다는 베이징대 광화관리학원(경영학과)에 입학했다. 중국 공유자전거 개척자로 불리는 ‘오포’의 창업자 따이웨이(30)가 4년 선배, 최태원 SK그룹 회장의 차녀로 해군 청해부대에서 근무한 최민정(30)씨가 3년 선배다. 온 세상이 내 것 같았다. 그러나 대학 생활이 순탄하진 않았다. 가장 큰 난관은 언어였다. 2년 넘게 중국어를 익혔지만, 첫 수업부터 이해가 되지 않았다. 사례 위주로 소개하는 경영학 강의 특성상 뜻을 모르는 신조어가 쏟아져 공부가 갑절로 힘들었다. 몇 주 만에 수업을 포기하고 학교 밖으로 맴돌았다. 밤마다 중국 친구들을 만나 술을 마시며 허송세월했다. 베이징에 첫발을 디딜 때 가졌던 ‘초심’도 이렇게 사라지는 듯했다.●학사경고 받자 ‘무너질 수 없다’ 마음 바꿔 그의 방황은 2학년 1학기 말 학사경고장을 받아 든 뒤에야 끝이 났다. ‘힘들게 베이징까지 왔는데 이렇게 무너질 수는 없다’고 스스로 채찍질했다. 이해가 되지 않아도 수업에 100% 출석하기로 마음먹고 이를 악물었다. 그런데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라고 했던가. 신기하게도 교수들의 강의가 들리기 시작했다. 중국 친구들과 밤새 놀며 인생을 논한(?) 덕분에 자신도 모르게 귀가 트인 것이다. 수업이 들리니 공부에 재미가 붙었다. 늘 맨 앞자리에 앉아 서툰 중국어로 질문 세례를 퍼부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성적도 좋아졌다. 한국인 유학생들 사이에서 ‘특이한 케이스’라고 입소문이 났다. 애초 그는 베이징에 올 때부터 취업에 관심이 없었다. ‘경영학을 전공하니 어떻게든 창업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만 갖고 있었다. 졸업이 다가오자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이때 ‘한국과 중국의 첨단 정보기술(IT) 기업들을 연계해 시너지를 내는 플랫폼을 만들면 대박을 치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하지만 ‘외국인이 어떻게 회사를 만들고 창업비자를 받을지’ 알려주는 이가 없었다. 무일푼인 그에게 막대한 창업 비용도 걸림돌이었다. 동아줄을 잡는 심정으로 대학 내 취업지원센터인 ‘직업발전중심’을 찾았다. 직원들이 그를 보고 신기해했다. 유학생이 창업을 문의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단다. ‘1호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에 가슴이 뛰었다. 30번 넘게 찾아가 묻고 또 물었다. 학교가 그의 노력에 백기를 들었다. 직업발전중심에서 연락이 왔다. “너 같은 학생은 처음이다. 너를 위해 정부 인사들을 모아 특별 강연회를 열기로 했으니 꼭 참석하라”고. 앞서 중국 국무원은 2017년 7월 외국인 유학생 창업비자 발급 제도를 개시했다. 중국 경제를 안정적으로 성장시키려면 ‘두뇌의 국적을 따져서는 안 된다’고 본 것이다. ‘중국판 실리콘밸리’로 불리는 베이징 중관촌의 대표적 지원기관인 ‘하이디앤 창업원’이 사업을 주도했다. 하지만 이런 내용이 잘 알려지지 않아 성과가 미미했다. 강연회를 통해 새 제도를 접한 그는 곧바로 창업원을 찾아가 매달렸다. 마침내 대학 졸업 한 달 전인 2019년 7월 북경한반도과기유한공사를 만들 수 있었다. 중국 국가급 창업원에 입주해 외국인 무자본 창업 제도로 태동한 최초의 외자기업이 태어났다.●한중 연계 플랫폼 키워 유니콘 목표로 북경한반도과기유한공사는 김 대표를 포함해서 전 직원이 4명뿐인 초미니 벤처다. 그럼에도 회사는 중국 정부로부터 고신기술기업(첨단기술벤처기업), 1호 집군주책기업(혁신기업 클러스터), 베이징 신4판(과학기술기업 전용 거래소) 상장기업에 선정될 만큼 기술적 가치를 인정받았다. 지난해에는 엔젤 투자도 유치해 사업을 확장할 발판을 마련했다. 그가 실현하려는 아이디어는 한중 두 나라의 기술·자본 협업을 이끌 모든 종류의 지원 사업이다. 이미 양국 정부에서 마이스(전시·컨벤션 등) 관련 프로젝트 16개를 수주받아 진행했다. 김 대표는 중국 정부로부터 ‘국제인재창업기업 대표’로 선정돼 현지 언론에 여러 차례 소개된 유명인사다. 그래도 시간을 쪼개 유튜브 채널 ‘김준범 총경리’에서 중국 경제 현황을 소개하고 위챗(중국판 카카오톡) ‘한중 창업·청년 교류방’에서 유학생 창업 정보도 제공한다. 자신을 ‘퍼스트 펭귄’(위험한 상황에서 가장 먼저 뛰어드는 선발자)으로 여기는 후배들의 ‘대륙 도전’을 돕기 위해서다. ●창업 원하면 가슴 뛰는 삶 추구하라 요즘 그는 왕훙(인플루언서) 발굴이라는 신사업을 개척 중이다. 중국 문화를 정확히 이해하는 한국인 왕훙을 대거 육성해 ‘21세기 수출 역군’으로 키우려는 취지다. 북경한반도과기유한공사를 베이징을 대표하는 유니콘(기업가치 1조원 이상)으로 성장시켜 청년 일자리를 늘리고 국부도 증진하는 데 기여하고 싶단다. 끝으로 그는 창업을 희망하는 젊은이들에게 ‘가슴 뛰는 삶’을 추구하라고 조언했다. “아직도 중국의 잠재력을 모르고 중관촌 창업거리에서 기념사진만 찍고 돌아가는 한국인들이 많아 아쉬움이 커요. 인정하기 힘들겠지만 4차 산업혁명 분야에서는 이미 중국이 우리를 앞서 가고 있습니다. 한국의 금융·기술 인재들이 이곳의 창업가들과 교류하며 선의의 경쟁을 펼치는 것이 대한민국을 살리는 신성장동력이라고 확신합니다.” 글 사진 베이징 류지영 특파원 superryu@seoul.co.kr
  • 조선 최고 무신 가문 출신으로 ‘노블레스 오블리주’ 실천한 참군인

    조선 최고 무신 가문 출신으로 ‘노블레스 오블리주’ 실천한 참군인

    김좌진, 홍범도, 지청천, 양세봉, 김경천…. 일제강점기에 만주에서 활약한 독립군 사령관들이다. 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 인물로 동천(東川) 신팔균 선생을 빼놓을 수 없다. 선생은 조선 후기 최고의 무신 가문 출신으로서 편안한 삶을 버리고 만주 벌판에서 싸우다 끝내 스러져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몸소 실천했다. 선생은 1882년 5월 19일(음력) 서울 정동, 지금의 영국 대사관 자리에서 태어났다. 선조가 대대로 살아온 고향은 충북 진천군 이월면 노원리다. 선생의 조부 신헌은 삼도수군통제사, 병조판서를 지낸 무신이었다. 신헌은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미국과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할 때 조선 측 대표를 맡아 개항에 핵심적 역할을 한 외교관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큰아버지 정희는 형조판서와 금위대장을, 아버지 석희는 병마절도사, 포도대장을 거쳐 한성부 판윤을 역임했다. 이런 집안에서 출생한 그가 무관의 길을 걸은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선생은 1900년 10월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보병과에 제2기생으로서 입학, 1903년 9월 졸업했다. 병서(兵書)에 능통하면서 유학(儒學)과 문장에도 비범해 문무를 겸비한 강직한 군인으로 칭송을 받았다고 한다. 1907년 7월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됐다. 그러나 선생은 바로 해임되지 않았다. 황실을 지키는 근위보병대 등에서 근무했고 이렇게 쌓은 경력은 나중에 항일투쟁을 하는 바탕이 됐다. 1909년 7월 보병 정위(正尉)로 승진한 선생은 더이상 울분을 견디지 못하고 군복을 벗어버렸다. 바로 고향 진천으로 낙향해 보명학교(현 이월초등학교)를 세우고 안희제·김동삼·남형우 등과 대동청년단을 설립해 계몽운동과 항일운동을 시작했다. ●조부 신헌, 삼도수군통제사·병조판서 지내 1910년 나라를 일제에 빼앗기자 선생은 중국으로 망명해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망명 시점은 정확히 전해지지 않지만 1914년 이전으로 추정되고 있다. 선생은 조부가 지은 진천 고가를 저당 잡히고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했다. 고향을 떠나기 전 선조의 묘 앞에 엎드리고는 선충후효(先忠後孝·먼저 나라에 충성을 바치고 효도하겠다는 뜻) 하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선생은 베이징과 만주, 연해주를 오가며 동지들을 규합하고 투쟁 방략을 모색했다. 3·1운동이 일어나기 직전에는 동삼성(東三省) 민족지도자 38인 중 1인으로 무오독립선언을 발표했다. 1911년 이상룡, 김동삼, 이회영 등 만주 서간도로 망명한 우국지사들은 유하현 추가가에 터를 잡고 경학사라는 독립운동 단체를 조직하면서 산하에 신흥무관학교의 전신인 교육기관으로 신흥강습소를 설립했다. 이듬해 추가가 동남쪽 통화현 합니하로 옮겨가 신흥무관학교 건물 낙성식을 열었다. 비로소 서간도에 모두가 염원하던 독립운동기지를 마련한 것이다. 선생은 지청천, 김경천, 이범석 등과 교관으로 활동하며 수많은 독립군 전사들을 키워 냈다. 지청천, 김경천과 함께 ‘남만주 삼천’이라 불릴 정도로 명망이 높았다. 졸업생 대부분은 서로군정서를 비롯한 독립군 부대에 들어가 항일투쟁에 참가하는 등 독립운동에서 중추적 역할을 했다. 일제는 신흥무관학교의 명성이 높아지자 1920년부터 애국지사와 가족을 살해하며 탄압하기 시작했다. 그해 6월 봉오동에서 홍범도 부대는 일본군을 대패시켰고 지청천·김동삼이 이끄는 400여명의 교성대(신흥무관학교 졸업생 무장부대)는 청산리 전투에 참전, 일군을 무찔렀다. 일제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양민을 학살하고 독립군 기지를 초토화하는 경신참변을 일으켰다. 신흥무관학교는 폐교를 피할 수 없었다. 독립군들은 일제의 토벌을 피해 남북만주와 연해주로 이동했다. 선생은 부하들을 인솔하고 흥경현으로 옮겨 재기를 준비했다. ●동삼성 민족지도자 38인 무오독립선언 발표 선생은 중국 본토에서도 활동했다. 독립운동 통합을 위해 열린 국민대표대회에서는 임시정부를 새로 구성하자는 창조파 쪽에 섰다. 베이징에서는 군인구락부, 한교교육회, 중한호조사 등을 주도적으로 조직했다. 한교교육회는 일제의 간도학살 때 발생한 한인 고아를 교육한 단체였다. 선생은 베이징 한인 사회를 이끈 중요 인물이었다. 무장투쟁주의였던 창조파는 1923년 6월 임시 헌법을 제정하고 국민위원회를 조직했는데 선생은 위원으로 선임됐다. 코민테른의 지원 약속을 받은 국민위원회는 그해 8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이동해 고려공산당 중앙집행부와 합쳤고 선생은 군무위원장에 선출됐다. 한편 1922년 8월 남만주에서 활동하던 8단 9회(八團九會)의 독립단체는 통합을 시도한 끝에 대한통의부를 발족시키고 의용군을 편성했다. 그러나 대한통의부는 왕정복고를 둘러싸고 대립이 극심했다. 이런 상황에서 1924년 4월 선생은 통의부 추대를 받고 군사위원장 겸 의용군 사령관에 취임했다. 선생은 의용군을 5개 중대로 재편했다. 또 ‘사관학원’을 세우고 자질이 부족한 군인은 직접 훈련시켰다. 의용군의 전투력은 점차 강해져 독립단 최고가 됐다. 그러나 선생은 겨우 석 달 만에 최후를 맞는다. 그것도 일본군이 아닌 중국군에 의한 어이없는 죽음이었다. 1924년 7월 2일 이른 아침부터 선생은 흥경현 이도구의 산악지대에서 훈련을 지휘하고 있었다. 그런데 오후 1시쯤 중국군이 공격해와 약 3시간 동안 전투를 벌였다. 이른바 ‘흥경사변’ 또는 ‘이도구사변’이다. 독립군은 황급히 전열을 갖추어 교전했지만 선두에서 지휘하던 선생이 총탄에 맞아 쓰러졌다. 중대장 김하석이 선생을 등에 업고 포위망을 탈출했지만 끝내 운명하고 말았다. 겨우 42세였다. 선생은 “일제와 싸우다가 죽으려고 하였더니 무관한 중국 사람과 싸우다가 죽는구나” 하며 통분했다고 한다. ●1924년 의용군사령관 취임 석 달 만에 운명 전투는 일제가 중국군에게 독립군을 공격하라고 사주해서 발생했다. 선생의 일생을 연구해 온 충북대 박걸순 교수는 지난해 세미나에서 동변도윤(東邊道尹) 병극장(克莊)의 비밀 연락을 받고 만나려 하던 중 중국 군대와 충돌해 전사한 것이라고 규정했다. 병극장은 선생과 절친한 사이였으니 일제와 중국군에 속은 셈이다. 중국군은 군인이라기보다 마적(馬賊) 집단에 가까웠다. 박 교수는 “신팔균의 전사는 사이토 총독 저격 의거에 대한 일제의 보복이었다”고 했다. 부인 임수명과 자식들의 최후는 더 비극적이다. 임수명은 1912년 서울의 한 병원에서 간호원으로 일할 때 일경에 쫓겨 환자로 위장해 입원하고 있던 선생을 만나 1914년 결혼했다. 선생이 중국으로 망명하자 선생을 도와 비밀문서 전달, 군자금 모금, 독립군 후원 등의 활동을 했다. 1921년에는 밀명을 띠고 입국한 선생을 따라 만주로 가서 독립운동을 도왔다. ●“일제, 사이토 총독 저격 의거에 대한 보복” 선생이 순국할 당시 임수명은 베이징에서 어렵게 연명하고 있었다. 더욱이 만삭의 몸이었다. 동지들은 대한통의부장으로 장례를 치른 후 부인에게 남편의 죽음을 알리지 않고 귀국을 주선했다. 임수명은 1924년 9월 서울로 돌아와 사직동에서 셋방 한 칸을 얻어 근근이 살다 유복녀를 출산했다. 다른 자녀들도 데리고 있었다. 임수명은 남편의 죽음을 알고 꼭 넉 달 후인 11월 2일 갓난 딸과 함께 자결했다. 박 교수는 “신팔균 전사 후 같은 해에 임수명과 두 자녀가 죽었고 1930년 맏아들 신현충이 자결해 명가 일문 5인이 독립운동으로 비명에 스러졌다. 신팔균 가족과 같은 애잔한 사례는 찾기 어렵다”고 말했다. 정부는 1963년 선생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부인에게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선생 부부는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됐다. 논설고문 sonsj@seoul.co.kr
  • 필립공의 피 한 방울, 러시아 마지막 차르 일가의 최후 규명에 도움

    필립공의 피 한 방울, 러시아 마지막 차르 일가의 최후 규명에 도움

    지난 9일(이하 현지시간) 세상을 떠난 영국 에딘버러 공작인 필립공의 DNA가 러시아 혁명 와중에 잔인하게 처형된 마지막 차르인 니콜라이 2세 일가의 최후를 규명하는 데 도움이 됐다고 영국 일간 텔레그래프가 10일(이하 현지시간) 전했다. 로마노프 왕조의 비극적인 최후는 많은 호사가들의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소재였는데 1991년 7월 시베리아 예카테린부르크에서 주인 없는 무덤들이 발견되면서 수면 위로 다시 떠올랐다. 전문가들은 니콜라이 2세의 부인 차리나와 그녀의 자녀들, 수행원들의 무덤인 것으로 의심했다. 그런데 1918년 7월 17일 볼세비키 군에 의해 처형됐다고 알려진 인물은 모두 11명이었는데 이곳에 묻힌 유해는 아홉 구 뿐이어서 이상한 일이었다. 차르 니콜라이 2세와 황후인 차리나 알렉산드라, 황태자 알렉세이, 올가와 타티아나, 마리아, 아나스타샤 등 네 공주, 주치의, 간호사, 두 시종이었다. 나머지 두 구의 유해는 어디로 사라진 것인지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 사라진 두 구의 유해는 누구일지 규명해야 했다. 필립공은 1921년 6월 10일 그리스 고르푸 섬에서 태어났다. 그리스 왕자이자 덴마크 왕자였던 안드레아스와 바텐베르크 가문의 앨리스 공주를 부모로 태어났다. 그리스 왕위계승 서열 6위. 아버지 안드레아스 왕자는 그리스 게오르기오스 1세의 4남이었고, 게오르기오스 암살 후 필립공의 큰아버지인 콘스탄티노스가 왕위를 계승한 상태였다. 할머니는 러시아 혁명 때 처형된 차리나 알렉산드라의 맏언니 빅토리아 마운트배튼이었다. 할아버지는 덴마크 왕 크리스티안 9세다. 콘스탄티노스가 전권을 장악하자 필리포스(필립공의 그리스 이름) 가족은 망명해야 했다. 어머니 앨리스 왕자비는 자신의 어머니 헤센의 공녀 빅토리아의 외가인 영국 국왕 조지 5세에게 도움을 청했다. 빅토리아 여왕의 손자인 조지 5세는 빅토리아 여왕의 외손녀이자 자신의 고종사촌 여동생 알릭스의 시가인 니콜라이 2세 일가가 영국으로 망명 의사를 타진한 것을 의회 눈치를 보느라 미적거리다 그들을 죽게 만든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그리스에서 철수하는 영국 군함에 필립공 가족을 피신할 수 있게 했다. 생후 18개월의 필립 공은 상자에 들어간 채로 탈출했다.필립공은 1993년 5㎤의 혈액 샘플을 제공해 차리나와 네 공주의 미토콘트리아 DNA와 일치한다는 사실을 규명하는 데 도움을 줬다. 미토콘트리아 DNA는 모계 혈통으로 유전되는데 할머니 친척 가운데 필립공이 가장 가까운 생존 친척이었다. ‘포렌식 사이언스 서비스’를 이끌던 피터 길 박사가 혈액 샘플을 제공했으면 좋겠다고 하자 평소 소탈하고 격식 없는 발언으로 유명한 공은 러시아를 한 번쯤 가보고 싶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고 “러시아에 엄청 가보고 싶다. 그 개XX들이 우리 가족의 절반을 도륙했지만”이라고 답한 것으로 보도됐다.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과 결혼했을 때도 신랑 측 가족이 거의 없었던 그는 가족들의 사연을 무척 알고 싶어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사라진 두 구의 주인이 알렉세이 황태자와 아나스타샤 공주임을 밝혀내는 데도 그의 혈액 샘플은 큰 도움이 됐다. 소련 붕괴 후 공개된 볼세비키 군인들의 기록에 두 사람의 주검은 곧바로 화장해 유골로 흩뿌렸다는 것과도 일치했다. 1998년 러시아 정교회는 로마노프 왕실 가족의 최후에 관한 과학적 증거를 인정하지 않았지만 이들의 장례식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베드로와 바오로 성당에서 성대하게 치렀고, 보리스 옐친 대통령 등이 추모했다. 그리고 20년 뒤인 2018년 영국 과학미술관은 처형 100주기를 맞아 이런 내용을 소개하는 전시회 ‘마지막 차르-피와 혁명’를 열었다. 그 전까지 과학자들끼리만 알고 있던 내용을 처음으로 일반 대중에 상세하게 소개했는데 처형 당시 주치의의 틀니, 황후 차리나의 다이아몬드 귀걸이 한쪽, 총탄 구멍이 난 인형, 왕가 자녀들의 영국인 가정교사 사진 앨범, 왕가의 개인 일기들, 차르가 황후에게 선물한 ‘파브레제의 달걀’ 보석 등이 함께 전시됐다. 임병선 평화연구소 사무국장 bsnim@seoul.co.kr 기사 작성에 도움이 된 블로그 글 https://blog.naver.com/ayasofya/130002066556
  • 데뷔 첫해 태백·금강 오른 장사… 새바람 씨름판 ‘신바람’

    데뷔 첫해 태백·금강 오른 장사… 새바람 씨름판 ‘신바람’

    대학 모래판 평정한 후 실업팀 데뷔장기전서 공격적 씨름 스타일 바꿔4개 대회 연속 장사 타이틀 따내 기염태백급 최강 윤필재 꺾었을 때 ‘짜릿’씨름선수 동생 모래판서 맞붙었으면“전체급 그랜드슬램 달성하고 싶어요”“전 씨름 천재 아니에요. 얼마나 아등바등 훈련하는데요. 노력하다 보면 언젠가 민속씨름 그랜드슬램에 도전하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노범수(22·울산 동구청)는 지난해 여름부터 서서히 인기를 되찾아 가는 민속씨름 모래판에 새바람을 일으킨 ‘뉴 제너레이션’이다. 울산대 3학년이었던 지난해 8관왕에 오르며 대학 모래판을 평정했다. 태백(80㎏ 이하), 금강(90㎏ 이하) 경량급 중심으로 내로라하는 씨름 달인이 총출동한 스포츠 리얼리티 방송 프로그램 ‘씨름의 희열’에도 얼굴을 비쳤다.●‘씨름 천재’ 아닌 노력하는 씨름꾼 또 올해 울산 동구청 샅바를 매고 민속씨름 무대에 뛰어들었다. 설날, 단오, 추석 등 명절 대회에서는 이렇다 할 성적을 내지 못했지만 지난 8월 영월 대회부터 이달 평창 평화대회까지 민속씨름리그 1~4차 4개 대회 연속 장사 타이틀을 따내며 모래판을 뒤흔들었다. 이 가운데 2차 안산 김홍도대회 때는 체중 조절 문제로 원래 체급인 태백급에서 한 체급 올려 도전한 금강급에서도 타이틀을 거머쥐는 기염을 토했다. 데뷔 첫해 두 체급 석권은 유례가 없는 일이다. 이 정도면 천재 소리를 들어도 어색하지 않을 듯한데 최근 서울신문과 만난 노범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장사를 하고 나서 인터넷에서 기사를 찾아보니 천재라는 수식어가 붙기도 했던데 저는 저 자신을 단 한 번도 천재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고교 2학년 때까지는 4강에 들어 본 적도 없는걸요. 저는 노력파예요. 노력하는 씨름꾼으로 기억되고 싶습니다. 요즘 성적은 운이 따랐을 뿐이죠.” 노범수가 샅바를 처음 잡은 것은 대구 매천초등학교 4학년 때다. 운동이 너무 힘들어서 그만뒀다가 5학년 때부터 다시 시작했다. 그런 그에게 씨름의 재미를 선물한 것은 큰아버지였다. 시골에 놀러 갈 때마다 용돈을 걸고 사촌 형제끼리 씨름을 붙였다. 노범수는 용돈 타는 재미가 쏠쏠해 샅바를 놓지 않았다고 웃었다. 그러나 좀처럼 대회 성적이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아무리 운동을 열심히 해도 결과가 나오지 않고 뒤처지자 남들 모르게 체육관 뒤에 가서 울고, 눈물이 마른 뒤에 돌아오는 일도 잦았다. “공고에 진학해 기술을 배울까 고민도 했어요. 그런데 중3 때 키가 크면서 고교 때도 씨름을 하게 됐죠. 그래도 동기 중에서 제일 못했어요. 그때는 기숙사 생활을 했는데 친구들이 외출할 때도 저는 밧줄을 타고 고무줄을 당기며 이를 악물고 악바리처럼 훈련만 했어요. 그렇게 조금씩 따라잡다가 처음 우승한 게 고2 여름 때 시도대항 대회였어요. 열심히 하면 대학도 가고 실업팀도 가서 끝까지 씨름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한번 우승을 맛보니 지는 게 더더욱 싫어졌다. 대학에 진학해서는 일주일에 엿새 반나절은 운동에 매진했다. 주특기인 들어 잡채기 위주로 경기를 풀어 가던 고교 때 스타일에서 벗어나 다양한 씨름을 연구해 기술을 늘렸다. 고교 때는 하지 못하던 들배지기도 장착했다. 40판을 연습하면 들배지기로 10판 정도는 이길 수 있을 때까지 노력한 결과다. 손기술, 발기술도 두루 익혔다. 그렇게 1학년 때 5관왕에 오르는 등 적수를 찾기가 어려울 정도가 됐다. 올해 초 민속씨름에 입문하고서 다시 슬럼프가 왔다. 경기할 때 먼저 방어를 하다가 장기전으로 끌고 가 승부를 거는 스타일이었는데 보다 공격적으로 전환했다. 그런데 같은 팀 선배들을 이기기가 쉽지 않았다. 낙담은 커지고 조바심은 하늘을 찔렀다. 오래가지는 않았다. “어떤 기술에 걸려도 빠져나갈 수 있는 너의 코어를 믿으라”는 이대진 울산 동구청 감독과 선배들의 격려에 자신감을 되찾아 루키로서 최고의 해를 보내고 있다.●‘거대한 산’ 넘어 태백장사 올라 개인적으로 그는 올해 11월 16일을 잊을 수 없다. 태백급 최강자 윤필재(26·의성군청)를 꺾고 정상에 오른 날이다. 대학 때 지근거리의 울산 동구청 선수들과 연습을 많이 했다. 당시 이 팀 소속이던 윤필재와도 자주 마주했다. 윤필재가 대충 장난치며 받아 주면 한 판 이길까 말까 할 정도로 실력 차이가 났다. 거대한 벽처럼 느껴졌던 선배를 이번에 기어코 넘어선 것이다. “첫 장사 했을 때보다 더 기분이 좋았어요. 처음엔 이길 것 같다는 생각조차 없었는데 첫 판을 따냈더니 기합이 들어 갔죠. 그러다가 둘째, 셋째 판을 게임도 안 되게 져 버려서 부담이 오히려 없어졌어요. 잃을 게 없다는 생각으로 즐기려 했더니 결과가 좋았습니다. 숙소에서 필재 형을 만났는데 다음에 다시 한번 (샅바를) 땡기자고 이야기해 주더라고요.” ● 동생도 형 따라 씨름판으로 노범수는 민속씨름에서 흔치 않은 형제 대결도 꿈꾸고 있다. 세 살 아래 동생 민수도 씨름 선수다. 울산대 1학년에 재학 중이다. 씨름부에 다니는 형을 쫓아 씨름을 시작했다. 타고난 재능은 동생이 더 낫다고 한다. 동생은 씨름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소년체전에서 금메달을 딸 정도였다. 씨름이 안 맞는 것 같다며 잠시 다른 길을 고민하던 동생이 요즘은 마음을 다잡은 것 같아 형 입장에서 흐뭇하다고 노범수는 말했다. “요즘도 올산대가 동구청으로 많이 연습을 오는데 5판 정도 잡아 주고 그중 두 판은 진검 승부를 해요. 체중 차이가 있어서 아직은 제가 쉽게 이기죠. 그럴 때면 동생이 자기한테 져 달라고 할 때가 있을 거라고, 조금만 기다리라고 하는데 호랑이를 키우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지요. 동생이 민속씨름 무대에 서게 되면 결승에서 붙고 싶어요. 정말 감정이 북받칠 것 같은데 봐줄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기어를 잔뜩 끌어올렸던 탓일까. 엊그제 막을 내린 5차 문경대회에서는 8강전에서 미끄러졌다. 벌써 훌훌 털고 다시 시작이다. 벌크업을 통해 체격을 키우고 힘도 늘리는 게 과제라는 노범수에게 올해 남은 대회는 오는 8일 전북 정읍에서 개막하는 천하장사 씨름 대축제와 곧바로 이어지는 민속씨름리그 최강전이다. 노범수는 다시 금강급으로 도전에 나선다. ‘금강불괴’ 임태혁(수원시청)도 부상에서 돌아올 예정이라 자신의 롤모델과 격돌할 가능성도 있다. 노범수는 더 먼 곳을 향해 눈을 빛냈다. “지금은 선배들에게 장난삼아 이야기하곤 하는데 이진형 코치님이 가진 태백장사 8회 우승 기록을 깨면 금강급에 본격 도전하고 싶어요. 성과를 내면 한라급(105㎏ 이하)에서도 경기를 해 보고 싶습니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백두급(140㎏ 이하)까지 그랜드슬램에 도전해 보고 싶기도 해요. 마음만 앞서는 이야기라는 건 잘 알고 있어요. 그만큼 씨름에서 해 보고 싶은 게 정말 많습니다.” 글 사진 홍지민 기자 icarus@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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