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승원 토굴살이] 시인과 농부
‘시인과 농부’를 가끔 듣는다. 이 곡은 익살과 기지가 넘치는 데다 경쾌한 춤곡풍이어서 그윽하고 아름답고 즐겁다. 작곡자 주페는 크로아티아의 달마티아에서 태어나 빈에서 극장 전속 작곡가와 지휘자로 살아온 사람이다. 그의 음악에는 빈이라는 멋스러운 도시의 분위기와 이탈리아풍의 아름다운 정서가 서려 있다.‘시인과 농부’는 오페라의 서곡인데 그것을 감상함에 있어서는 시인과 농부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 명쾌한 곡이므로 즐겁게 감상하면 된다.
그런데 젊었을 적에 이 곡을 처음 들으면서, 농사일로 늙어온 농부와 감수성 예민한 늙은 시인을 떠올렸다. 그리고 나 나름의 치기어린 사유(관념)를 대입하면서 들어 버릇했다.
…푸른 들판 논두렁에서 한 시인과 한 달관한 늙수그레한 농부가 마주앉아 농주 잔을 나누며 자연과 세상살이의 희로애락을 이야기한다. 농부는 시와 철학을 공부한 적이 없지만, 농사짓고 살아오면서 하늘의 뜻과 땅의 질서와,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가장 잘 살아가는 것인가 하는 것들을 자기도 모른 사이에 터득한 것이다. 그러므로 농부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는 시이고 철학이다. 농부의 햇볕에 그을린 거무튀튀한 얼굴과 힘든 작업으로 인한 마디 굵은 나무껍질 같은 손은, 그 자체가 시이고 철학이다. 시인은 그것들을 가슴으로 느끼고 환희를 맛보며 농부와 탄성어린 소리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다. 이 때 시인은 말 아닌 몸으로 시를 쓰는 것이다….
내가 이 음악을 이렇게 감상해 버릇한 것은, 그 곡에 붙어 있는 ‘시인과 농부’라는 표제 때문이다. 한번 그 표제에 걸려 속아 넘어가고 나자, 속았음을 알아차린 뒤에도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 같은 방법으로 그것을 즐겨 듣곤 한다. 물론 나는 지금 그것이 크게 잘못되었음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세상 사람들은 대개, 어떤 사물의 진짜 아닌 가짜 얼굴(가면)과 그것에게 붙여진 이름에 걸려서, 자기 나름의 상상을 하고 순수하게 꿈꾸고 즐거워하며 살아간다. 인간은 최면에 잘 걸리는 동물이다. 모든 얼굴과 그에 따른 이름은 고정관념을 가지게 한다. 사람들이 자기나 자기 아들딸의 이름을 소문난 작명가들에게 지어달라고 맡기고, 기업체들이 상호와 상품의 이름과 상표(brand) 치레를 하고 열심히 광고하는 것은 소비자들에게 멋들어진 환상(고정관념 혹은 착각)을 심어주려는 것이다.
더러운 정치가들은 깨끗한 얼굴 만들기, 그럴 듯한 자기선전 표어 만들기에 광적으로 심혈을 기울이고 돈을 퍼붓는다.
그의 참모들은 그의 아름다운 가면(이미지)을 만들기 위하여, 그로 하여금 방송에 나가서 서정시 한 편을 정감 있게 암송하게 하고, 고전적인 노래 하나를 애창곡이라고 하면서 애처롭게 부르게 하고, 거부감 없는 색깔의 양복과 거기 알맞은 넥타이를 매게 하고, 위호주머니에 흰 수건을 찌르게 하고, 머리 스타일을 부드럽게 바꾸게 하고, 늘 생긋 미소 짓게 하고, 강한 말씨와 호소하는 말씨를 적당히 섞어 쓰게 하고, 그윽한 사랑의 눈빛을 가지게 한다.
그 가면으로 인해 인기가 상승하면, 이익단체들과 대중이 얼싸안고 얼씨구절씨구 광기어린 춤을 추며 부르짖는다.
굴원의 어부사에 이런 대목이 있다.‘무리(군중)가 다 취해 있을지라도 나 홀로 깨어 있어야 한다(衆人皆醉我獨醒)’
예로부터 개인은 영리하지만, 무리는 어리석었다. 그리하여 중국에서 애초에 그 ‘무리’라는 뜻의 글자를 만든 사람은, 그것을 아주 재미있게 표현해 놓았다.
‘여기저기를 저돌적으로 돌진하면서 늘 들이받은 까닭으로, 머리에 피(血)를 묻히고 있는 돼지(豕)들이 무리(衆)’라고.呵呵呵.
한승원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