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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군·고위직 돌며 막대한 공직치부/유학성씨 사퇴까지 역정

    ◎공개만 58억원… 땅·건물 등 축소·누락/5공초엔 부정축재자 색출 지휘도 가난했던 어린시절을 거쳐 군과 공직에서만 44년을 보낸 유학성국회국방위원장(66)이 불명예스러운 의원직사퇴에까지 이른 것은 현재 그가 보유한 재산과 축재과정때문이다.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재산도 없으면서 또 청렴을 금과옥조로 삼아야할 군과 고위공직·국회의원으로만 평생을 보낸 그가 공개한 재산은 아무리 축소하려고 애썼어도 국민의 상상을 훨씬 초월한 것이다. 평생 공직생활로써 벌어들일수 없는 규모였음은 물론,재산취득 과정마저 공직을 이용한 투기의혹이 짙다. 그가 공개한 일가족의 재산은 본인 9억5천여만원,처 4억7천여만원,장남 18억8천여만원,자부 1억4천여만원,차남 17억2천여만원,삼남 6억1천여만원등 총 58억여원이었다. 그러나 공개재산내역을 하나하나 살펴보면 공시지가축소·신고누락·특혜사례·투기의혹등 어느것 하나 일반인이 납득할만한 것이 없다. 강남구 도곡동 대지 2백56평은 공시지가가 52억9천만원인데도 신고는 11억7천만원으로 되었고,양재동 1백5평(공시지가 16억원)도 2억3천만원,대치동 38평(공시지가 9억2천만원)은 1억3천만원,역삼동 99평(공시지가 12억3천만원)은 3억6천만원,대치동 41평(공시지가 9억6천만원)은 4억6천만원,안양시 건물(거래가 56억원)은 8억7천만원,군포시 1백45평(공시지가 5억9천만원)은 1억2천만원으로 각각 축소신고했다. 이중 대치동 2곳과 양재동등 3곳에는 3∼5층 규모의 빌딩이 있으나 아예 건물분은 신고에 누락시켰다. 제주도 한림읍에 있는 임야외 4필지는 지난 88년 장남명의로 매입한 것으로 투기의혹이 짙다. 차남소유로 신고한 안양의 대지 1백80평은 82년 유의원의 처남 안모씨가 안양시장으로 재직할 당시 체비지를 불하받은 것으로 드러나 특혜의혹을 샀다. 이땅은 이후 91년 아들3명에게 명의를 이전해 지하3층,지상10층의 건물을 지어 현재 사무실로 임대하고 있다. 그는 월남참전·군단장·육군대장등 최고의 군경력,안전기획부장·반공연맹이사장등 최고위공직,3선의원·국회국방위원장등의 최고명예를 누렸다. 그는 3성장군시절 5공출범의 계기가됐던 12·12주도세력으로 가담,군후배인 전두환·노태우두전대통령으로부터 깍듯한 선배대접을 받았다. 79년 전두환합동수사본부측이 정승화육군참모총장을 연행한 12월12일밤 30경비단에 모인 신군부세력의 좌장으로서 구질서를 무너뜨리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87년 대통령선거 당시에는 정승화씨가 당시 김영삼후보진영에 가담,12·12를 쿠데타로 몰아붙이자 당시 민정당의원이었던 그는 기자회견을 자청해 사태의 정당성과 5공의 개혁의지를 강변했던 적도 있다. 그는 5공출범시 안기부장을 맡아 개혁과 사회기강확립의 명분으로 부정축재자를 선정,재산의 사회환원등을 유도한 바 있다.이때 부정축재자로 조사를 받은 정치인으로는 현재 민자당의 김종필대표,최형우사무총장등이 있다. 이번 재산공개때 5억원남짓의 재산을 신고한 최총장은 당시 3천7백만원의 부정축재혐의로 한달 보름간 안기부에서 고문과 조사를 받았다. 이때 중학교에 다니던 최총장의 자녀들은 TV·신문에 아버지가 부정축재자로 발표돼 친구들이 「아버지가 도둑이냐」는 비난을 하자 한달동안 학교에 가지 않았다고 한다. 민자당의 재산공개파문 수습을 진두지휘하고 있는 최총장은 굳이 과거를 들추진 않지만 두사람의 인연은 역사의 아이러니로밖에 볼수 없다. 유의원은 지난 23일,물의의 심각성을 고려해 이미 정계은퇴를 결심했으나 여론에서 조금 빗겨간 26일에 결심을 밝혔다고 말했다. 유의원 자신이 직접 「유종의 미를 거두지 못해 거듭 사과한다」고 말했듯이 유의원의 사퇴는 「군인정신」과 「공직윤리」 「권력의 부패불감증」등 왜곡된 과거를 되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유학성씨 사퇴 발표문 (전문) 본인은 이번 재산등록 과정에서 당과 지역구민,그리고 국민들에게 누를 끼치고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킨데 대하여 죄송스럽게 생각하며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새로운 신한국 건설에 매진할 시점에서 본인의 일로 걸림돌이 되어서는 안되겠다는 판단에서 의원직을 사퇴하고자 합니다. 본인은 지난 총선때 지역구민들과 약속한대로 장학재단 설립을 추진중에 있었던바,그 약속을 지키고 조금이라도 사회 발전에 보탬이 되고자 노력하겠습니다. 지난 40여년간 공직생활에 헌신적으로 도와준 가족과 주위의 많은 도움을 주신분들,특히 고향지역 주민들에게 유종의 미를 거두지 못한 점 거듭 사과드리며 그동안의 배려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 김정일 군통수권 장악 포석/군민일체감 조성운동 전개(오늘의 북한)

    ◎주민·학생들 동원,부대지원·결연/장성급 불만덜려 무더기 승진도/일반사무원·노동자 등 소외계층서 반발… 성과 의문 최근들어 북한이 군민간의 유대강화를 겨냥한 「군민일치운동」을 적극적으로 벌이고 나서 눈길을 끌고 있다. 북한은 김정일이 군최고사령관에 이어 원수로 추대된 지난 4월 이후 군민 일체감 조성을 위해 ▲「군민일치모범군쟁취운동」 ▲「우리 초소­우리 학교운동」 ▲「정성운동」등 3가지 형태의 캠페인을 추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관련,북한 소식통들은 이번 캠페인은 군민간의 관계개선 차원을 넘어서 김정일이 군통수권을 이양받게 됨에따라 제기되고 있는 군내부의 불만을 무마하려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소식통들은 또 김정일의 군장악력을 강화하는 한편 북한주민들 사이에 팽배해 있는 군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불식시켜 보려는 의도 역시 내포된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실지 북한군 내부에서는 김정일이 군최고사령관및 원수 추대후 갖가지 형태의 반발이 이어진 것으로 전해져 이 운동에대한 이같은 분석은 설득력있게 받아들여 지고 있다. 북한에서는 김정일이 군최고사령관에 추대된 직후 군엘리트 장교 10여명이 이에 반발,쿠데타를 기도한 혐의로 체포돼 처형됐다는 설이 지난 1월 유포된 바 있다.또 원수로 추대된 지난 4월 이후에는 김정일의 자질과 관련된 불평·불만이 더욱 노골화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최근 관계당국이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김정일을 『군경력이라고는 김일성대학 재학시 1개월간 군사훈련을 받은 것이 고작인 그가 군사 전략전술을 어떻게 알겠는가』『총 한방 쏴보지 못한 그가 어떻게 군최고사령관에 원수까지 될 수 있는가』등 극단적으로 비하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북한은 김정일의 최고사령관 추대에 따른 군부내의 불만을 희석시키기 위한 1단계 조치로 김정일의 첫 군권행사를 통해 대장 16명,상장 28명,중장 96명,소장 5백24명 등 총 6백64명의 장성과 소위부터 중좌까지 진급 누락자중 80%를 무더기로 승진시킨 바 있다.북한은 이어 2단계 조치로 장교들의 봉급 40%인상을 골자로 한 생활여건 개선 조치를취했다.이같은 관점에서 볼때 이번 운동은 3단계 조치로 군부내의 불만과 불평이 아직도 남아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먼저「군민일치모범군쟁취운동」은 각종 보급품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군부대를 일반 주민들로 하여금 지원및 위문토록 하여 군의 사기를 진작시키려는 것으로 김정일의 지시에 따라 군별로 진행되고 있다.북한은 이 운동을 「3대혁명 붉은기 쟁취운동」등 여타 사회주의노력경쟁운동과 결부시켜 추진할 것을 독려하면서 각 군이 지원대상을 사전에 설정,자체적으로 지원대책을 마련토록 하고 그 실적을 점검하고 있다.이 운동을 통해 주민들이 군부대에 지원하는 것은 돼지고기등 부식류와 기타 생활용품·수예품·위문편지등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우리 초소­우리 학교운동」은 각급 학교와 군부대의 상호관계를 원만히 하기 위해 양자를 자매결연 형태로 결속하는 것.이에따라 각급 학교는 군부대에 위문편지 및 위문품을 보내는 것은 물론 예술소품공연·상봉모임·오락회등 위문공연을 개최하고 군부대에서는 군인들이 만든 동식물의 박제및 표본등 각종 교구·교재품을 해당학교에 전달하는등 상호 보완적으로 추진되고 있다.최근 이 운동은 각급 학교에만 국한되지 않고 군내의 각급 기관·공장·기업소·농장등에까지 확대돼 군당위원회 지도하에 실시되고 있다. 「정성운동」은 앞의 두 경우와 달리 보건부문에서의 혁신운동으로 군부대에 대한 의료지원을 강화키 위한 조치이다. 북한은 최근 『평양의과대학 의료진들이 군부대에 대한 치료사업을 전개,커다란 성과를 거두었다』며 각급 병원들이 정성운동을 통해 군부대와 관계를 맺고 군인들에 대한 치료예방사업을 강화해 나갈 것을 촉구했다. 북한이 이같은 「군민일치운동」을 벌이고 있는 것은 이를 빌미로 군을 자연스럽게 경제건설현장 또는 대민지원사업에 투입함으로써 잘 조직된 군인력을 경제건설에 적극 활용하려는 부수적인 효과도 노리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그러나 북한이 이 운동을 구실삼아 주민들의 군지원사업을 강화함에 따라 상대적으로 소외되고 있는 일반 사무원들이나 노동자들의 반발은 상당히 큰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이 운동이 기본적으로 군내부 불만을 무마하고 사기를 진작시키는데 목적을 두고 있음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다.그러나 그 부담을 일방적으로 져야 하는데 따른 일반주민들의 불만이 터져 나오고 있다는 설명이다. 따라서 군민일체감 조성운동은 군부내에서는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어 김정일의 군장악에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하지만 갖가지 노력경쟁운동과 생활고에 시달리는 일반 주민들로부터는 필연적으로 반발을 살 수 밖에 없어 전반적으로는 득보다 실이 많을 것으로 전망된다.
  • “취약지 파고들기” 뜨거운 주말열변(대선 유세현장 28일)

    ◎충남북 누비며 “신한국” 역설/김영삼/대구서 대규모 세몰이 시도/김대중/DJ 텃밭서 “양김청산” 호소/정주영/경제정의 5대원칙 제시/이종찬/“젊고 희망찬 나라 만들터”/박찬종 ○금권선거 맹비난 ▷김영삼후보◁ 충청권 표밭갈이에 나서 안정속의 개혁을 통한 「신한국」건설을 캐치프레이즈로 내걸고 천안·조치원·청주·증평·옥천 등 충남북을 종횡으로 누비며 강행군. 김후보와 찬조연설원들은 이 지역에서 국민당측의 물량공세가 만만치않다고 판단한 듯 어느 때보다 강한 톤으로 금권선거의 폐해와 아파트반값공급등 선심공약의 허구성을 신랄히 비판하는 등 국민당측을 집중 겨냥. 천안종합터미널 광장을 가득 메운 가운데 열린 천안유세에서 김후보는 『부정한 방법으로 돈을 벌어 그 돈으로 권력을 사려는 부정한 생각을 가진 사람이 있다』고 국민당 정후보를 직접화법으로 겨냥한 뒤 『나는 질서붕괴·부정 부패 만연 등 한국병을 뿌리뽑아 국민모두의 가슴속에 신바람을 일으키는 대통령이 되기를 원한다』고 지지를 유도. 김후보는 이어 연기군 조치원읍 유세에서 『지난번 연기군 부정선거사건 이후 집권당이 기득권을 모두 포기함으로써 이제 관권선거의 우려는 사라졌다』고 전제,『지난 4대국회의원선거에서 부정선거로 낙선한 경험을 갖고 있는 나는 금권선거등 부정선거를 쿠데타보다 더 나쁘다고 생각한다』고 국민당측을 더욱 강도높게 공격. 김후보는 또 옥산휴게소에서 정일권상임고문과 고속도로 이용객 7명과 오찬을 함께하면서 교통난에 대한 애로사항을 청취한 뒤 도로와 철도등 사회간접자본 투자 확대를 약속. 하오에 열린 청주유세에서는 교육도시라는 특성과 전기대 입시원서접수마감이 이뤄진 시점을 감안한 듯 김후보는 『국제경제전쟁에서 이기려면 먼저 교육전쟁에서 이겨야하며,집권하게 되면 「교육대통령」이 되겠다』고 하는 등 교육개혁의 중요성을 유난히 강조. 민자당은 이날 청주유세에서 후보자만이 연설원고를 투영해볼 수 있도록 하는 「프롬프터」2대를 첫 시험가동,연설기간 조정에 상당한 효과를 얻었다고 보고 앞으로 대도시유세에서 활용키로 결정. 옥천유세에는동양인으로서 최초로 미연방하원의원에 당선된 김창준씨가 박준병의원과 함께 연단에 나란히 모습을 보여 눈길. 김후보는 김창준의원을 소개하며 『마라톤을 제패한 황영조선수가 신한국인이라면 김의원은 미국에서의 신한국인』이라고 설명. ○UR대비책 약속 ▷김대중후보◁ 경북지역을 이틀째 공략,상오에는 경산·영천·경주·포항등지를 유세버스로 순회하며 표밭갈이를 계속했고 하오에는 대구 두류공원에서 이기택공동대표와 합류해 지난 부천집회에 이어 두번째 대규모 세몰이를 시도. 포항에서 대구로 오는동안 김후보는 이웃 10명의 대학생과 유세버스안에서 즉석토론회를 가졌고 이자리에서 김후보는 입시제도개선·대학생활·취직문제등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피력. 특히 대구집회에서는 보안사령관을 지낸 강창성의원이 지원유세에 나와 자신이 사령관시절 김대중 당시 신민당후보를 낙선시키고 박대통령을 3선시키는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으며 박대통령의 특명을 받고 6개월동안 김후보의 사상전력을 샅샅이 조사했었다고 공개. 이에앞서 상오8시40분 항공편으로 대구에 도착한 김후보는 농협 대구태평로공판장을 예고없이 들러 상인·중매인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눴으며 가격·유통과정을 물은 뒤 집권하면 농수산물의 수출과 우루과이라운드개방공세에 철저히 대비하겠다고 약속. 경산·영천유세에서 김후보는 『지방자치·금융실명제는 고사하고 투기를 만연시키고 물가를 올리고 올해만도 4천여개의 중소기업을 무너뜨린 민자당이 무슨 이유로 다시 집권을 하겠느냐』며 상대당의 실정을 맹공. 경주·포항에서는 『3당합당 전까지 우리당은 추곡가 14%·전량수매를 이뤄내고 농협직선제·농기구등의 부가세폐지등 농민을 위해 열심히 일했다』면서 수세·농지세의 폐지,농가부채탕감,실명제,물가3%억제,입시지옥의 해소등을 공약. ▷정주영후보◁ 해남·목포·나주등 전남과 광주지역 순회유세를 벌이며 지역개발공약을 제시하는 한편 시장과 보훈병원·재활원을 잇따라 방문하는등 「DJ 철옹성」공략을 시도. 정후보는 이날 유세에서 양금씨를 구시대의 인물로 치부하며 『청산돼야한다』고 역설했으나 이들지역이 친금대중정서가 강한 곳임을 의식,김 민주당후보에 대해서는 평소의 「씨」대신 「선생님」이라는 존칭을 깍듯이 사용해 눈길. 정후보는 『나의 전재산을 적절한 때 사회단체에 희사하겠다』고 다짐한뒤 『나는 민족을 위해 일생을 살다 끝마칠 것』이라며 자신의 정치투신이 「우국충정의 발로」임을 거듭 강조. 이에앞서 전날 대구에서 1박한 정후보는 이날 상오 대구공항에서 유세차 이곳에 내려온 김대중후보와 만나 서로 반갑게 악수. 정후보는 해남에서 유세에 들어가기전에 해남경찰서를 방문,금품제공등의 혐의로 구속된 김봉옥위원장을 위로한데 이어 이웃 매일시장에 들러 상인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었으며 마지막 유세인 광주행사를 마친뒤엔 광산·대인시장과 행복재활원을 찾아보는등 이지역 바닥표 훑기에 바쁜 일정. 한편 「남총련」소속 대학생 3백여명은 정후보가 유세중인 광주공원에 몰려가 『김권선거 자행하는 정주영는 사퇴하라』등의 구호를 외치며 10분 남짓 시위를 벌이다 자진해산해 한때 어수선한 분위기. ▷이종찬후보◁ 새한국당의 이종찬후보는 28일 충남 연기와 대전에서 유세를 벌이며 중부권에서의 득표활동을 계속. 이후보는 대전유세에서 『대전은 영호남-수도권을 잇는 지리적 요충지로서 대전인심이 곧 전국인심의 척도가 된다고 생각해 이곳에서 개혁구상의 전모를 밝히겠다』고 전제한뒤 청렴 원칙,공정한 경쟁 원칙,경제정의 원칙등 5대원칙을 발표. 이후보는 ▲기술특화를 통한 극일경제체제로의 지향 ▲지연 학연 혈연에 의한 불공정인사배제 ▲소득이 있는 곳에 반드시 응분의 과세등을 밝힌뒤 『나는 이번 대선에서 선거법정비용인 3백67억원에서 한푼도 더 쓰지 않겠다』고 약속. ▷박찬종후보◁ 신정당의 박찬종후보는 28일 대전 조치원 천안에서 기자회견과 유세를 갖고 『정치의 세대교체와 체질개선이 전제된 민주적 국민정부의 실현만이 우리사회의 온갖 모순과 구악을 척결하는 지름길』이라며 『집권하면 희망이 넘치는 젊은 나라를 만들겠다』고 장담. 박후보는 집권하면 ▲젊은 한국,희망의 미래 ▲깨끗한 대통령,정직한 정부 ▲함께 사는 국민경제,비약하는 나라경제 ▲안정된 사회,꿈이있는 미래 ▲앞서가는 한민족,통일조국의 실현등을 이룩하겠다고 약속.
  • 페루 불발쿠테다/대통령 암살기도

    【리마 로이터 AP UPI 연합】 페루의 현역및 예비역 장성들이 이끄는 일단의 군인들이 13일 대통령궁과 군사령부를 장악하고 알베르토 후지모리 대통령의 암살과 정부전복을 위한 쿠데타를 기도했으나 실패로 돌아갔다고 대통령궁 성명이 밝혔다. 이번 쿠데타 기도는 호세 파스터 비바스,하이메 살리나스 세도,루이스 팔로미노 로드리게스등 3명의 예비역 장성이 주도하고 마약밀매 혐의로 조사를 받고 있는 군사령관 마르코스 사라테 로타 장군도 가담했으며 주모자들은 모두 체포되어 곧 재판을 받게될 것이라고 이 성명은 발표했다.
  • 태국/9월총선에 대비 정치인 이합집산

    ◎야심가들 카멜레온식 색깔바꾸기 한창/군부관련 정당 새당명 작명 고심/신당 우후죽순… 야세력 확산 조짐 오는 9월13일의 총선거를 앞둔 태국정계는 요즘 정당간의 이합집산이 한창인 가운데 거물급 인사들이 후보등록을 서두르고 있다.정치인들이 철새처럼 이리저리 몰려다니며 정당을 바꾸고 신당들이 우후죽순격으로 생겨나는가 하면 종전 군부와 관련을 맺었던 정당들은 이미지 개선을 위해 옛당명을 버리고 새로운 작명에 고심하고 있다. 「카멜레온의 짝짓기 댄스」라고 불리는 정치인들의 이같은 색깔바꾸기 행태는 지난 5월의 방콕 민주화시위를 무차별 유혈진압한 군부세력과 무관함을 내세워 유권자들의 표를 끌어모으기 위한 수단이다.특히 현재 「군부 세탁」작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인사들은 지난 3월22일의 총선후 군부실력자 수친다 크라프라윤을 총리로 지명,결과적으로 유혈시위사태를 유발시킨 친군부 5개정당의 정치인들이 대부분. 이를테면 수친다총리 당시 친군부정당들 가운데 가장 많은 의석을 확보했던 정의단결당은 최근들어 당명을태국자유당으로 개명하고 당의 심벌을 비둘기로 채택했다.한때 수친다에 앞서 총리로 지명됐다가 마약밀매 혐의로 도중하차한 이 당의 나롱 웡안 당수는『신당은 군부세력과의 인연을 완전히 단절했다』고 강조했다.이런 와중에 어느 정파에도 속하지않는 실업인출신 아난 판야라춘씨를 수친다총리의 후임으로 지명,국민들의 인기를 끌고있는 아르티트 우라이라트 전하원의장은 정의단결당을 버리고 정의자유당을 창당한다고 발표,태국정계에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그의 기자회견장에는 7명의 현역의원들이 배석했는데 조만간 10여명의 의원들이 더 가세할 것으로 보여 여권내부에서 핵분열 조짐마저 나타나고 있다. 그런가하면 수친다 전총리의 군부 쿠데타로 실각했던 차티차이 춘하반 전총리도 지난달초 창당한 국가발전당 당수로 취임,권좌 복귀를 노리고있다. 이처럼 정정 불안을 겪고있는 태국정계에서 주요 친군부정당의 붕괴조짐은 그동안 상대적으로 약세를 보이던 반군부성향 정당들의 입지를 넓혀주고 있어 이번 총선을 계기로 군출신들이 정치전면에서크게 후퇴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현지분석가들은 전망하고 있다. 특히 추안 릭파이가 이끄는 민주당과 단식투쟁으로 5월 민주화운동을 주도한 잠롱 스리무앙의「진리의 힘」당의 부상이 예상되고 있다.최근 수친다에 반기를 들었던 연대당과 신여망당의 일부 간부들이 잠롱의 진영에 가세,야권의 세가 크게 확대될 조짐을 보이고있다. 현지분석가들은 야측이 이번 총선에서 승리,집권하게 되면 민주당의 릭파이당수가 총리직을 차지할 것으로 조심스럽게 예상하고 있다.방콕 포스터지가 최근 발표한 여론조사 결과에 의하면 방콕주민들중 49%가 그를 차기 총리감으로 선호하고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이번 선거에서 반군부정당 지도자들 가운데 어느 누가 집권하더라도 정당의 민주성이 확보된다면 군부세력의 퇴조와 함께 태국정치의 문민화도 훨씬 앞당겨 질 것으로 현지관측통들은 분석하고 있다.
  • 독정부,호네커 처리 고심/망명 16개월만에 러시아서 소환

    ◎장벽탈출자 발포혐의등… 중형 불가피/“동독인상처 건드릴라” 공정재판 강조 에리히 호네커전동독공산당서기장이 소련으로 피신한지 16개월만에 베를린으로 송환돼 감옥에 수감됨으로써 또한차례 공산독재자의 말로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8월이면 만 80세가 되는 호네커는 베를린장벽 설계자이며 동구에서 가장 철저한 스탈린주의 신봉자였다는 점에서 통일독일은 어떠한 경우라도 그에 대한 사법처리를 해야만 했다. 우선 그에게는 베를린장벽을 넘다 희생된 49명에 대한 발포명령과 권력남용혐의로 90년 12월 기소돼 있는만큼 이에 대한 재판이 올해안에 시작된다. 그러나 그에 대한 사법처리가 이미 망해버린 동독지도자에 대한 정치적보복이라는 인상을 불식시키기 위해 독일정부는 「깨끗하고 공정한 재판」을 누누히 강조하고 있다. 오는 가을부터 시작돼 올해안에 끝날 것으로 보이는 사법처리에서 호네커는 발포명령뿐만 아니라 집권중 정치적 희생으로 숨진 사람이 3백50명이나 돼 최악의 경우 종신형을 받을수도 있다.그러나 동독체제와 관련,유죄판결을 받은 사람이 없는데다 얼마전 베를린장벽 탈출자에 대한 사살혐의로 기소된 2명의 동독병사가 재판에서 무죄판결을 받은 만큼 호네커에게도 중형이 내리지는 않으리라는 전망이다. 상당수 동독인들은 호네커의 억압적통치와 발포명령등으로 그를 경멸하고 있으나 한편에서는 노쇠한 그를 재판정에 세워 득이될 것이 있느냐는 여론도 무시할 수 없다. 호네커가 송환되는 공항에서 『호네커는 절대 뉘우치지 않을 사람이니 감옥에서 죽게 내버려둬라』고 외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정치보복을 중지하라』는 시위자도 있어 독일인들의 상반된 갈등을 잘 나타냈다. 독일 정부도 호네커를 재판정에 서게 함으로써 동독인들이 안고있는 깊은 상처를 다시 건드리게 됨으로써 야기될 위험성을 우려하고 있으나 일단 법적인 절차를 마무리지어야 한다는 원칙이다.이때문에 독일정부는 모든 처리를 베를린법원에 일임한다는 자세이고 재판부는 호네커가 특정 이데올로기의 대표로 법정에 서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여론재판이라는 일부비판을 일축했다. 호네커는 심장질환병력이 있으며 90년 기소됐을때도 지병때문에 구속 하룻만에 풀려나 소련군병원에서 치료를 받다 91년 3월 모스크바로 탈출했다.그후 쿠데타사건등으로 소련이 혼란기에 처해 모스크바에 머무를수 있었으나 러시아정부가 들어서 그를 송환하려하자 지난해 12월11일 칠레대사관으로 피신,그의 신병처리를 둘러싸고 독일·러시아·칠레사이에 외교문제가 된 가운데 북한과 칠레로의 망명설이 끊임없이 나돌다가 독일탈출 16개월,칠레대사관 피신 2백32일만에 송환됐다.
  • 「6·29선언」 5년의 의의와 과제/교수 정담

    ◎우리사회 「민주화개혁의 불」 댕기고 보편가치 추구로 국민통합길 열다 6·29 민주화선언은 우리사회를 권위주의체제에서 민주국가로 출발하게 한 역사적 대전환의 동인이었다.지난 5년동안 우리의 정치·경제·사회등 모든 분야는 엄청난 변화를 초래했다.정권의 정통성 시비를 해소하고 평화적인 정권을 창출했으며 북방정책,남북 기본합의서 채택,유엔가입등이 성공리에 추진되고 이뤄졌다.형식적 민주주의에서 실질적인 민주화로 이행되는 기반도 구축했다.6·29의 의의와 성과,과제등을 나종일(경희대 ·정치학)김영섭(한양대·행정학)신의순박사(연세대·경제학)등 3명의 교수들의 좌담을 통해 들어본다. ▷참석자◁ 김영섭교수 한양대 행정문연소장·행정학 나종일교수 경희대 대학원장·정치학 신의순교수 연세대 상경대·경제학 ◎형평분기등 국민욕구 수렴 “큰 뜻”/새 국제질서 대응,예측 가능한 정책 펼쳐야 ▲나종일교수=6·29 선언은 우리사회를 정체된 권위주의체제에서 민주화과정으로 들어서게 한 중요한 계기라고 볼 수 있읍니다.즉 권위주의 정부에서 민주주의 정부로 이전,이것이 6·29의 중요 정신인 것입니다.선언이후 권위주의적인 헌법이 철폐됐고 직선에 의해 대통령이 선출됐습니다. ○권위주의체제 청산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민주화의 정착입니다.라틴아메리카 처럼 혁명과 쿠데타의 악순환이 계속되고 모처럼 조성된 민주화가 왜곡된다면 그것만큼 불행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어쨌든 학문적인 입장에서 접근한다면 6·29의 가장 큰 의의는 정권의 형식적인 정통성을 확립했다는 데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김영섭교수=6·29가 정치·사회발전에 어떤 의미를 갖는가에는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이 상존합니다.긍정적인 측면에서 보면 정권의 정통성이 확립됐다는 것입니다.또 국민 개개인이 가치관에 큰 변화를 가져왔습니다.그동안 권위주의 정치체제에 찌든 국민들의 가치관이 보편주의가 지배하는 가치관으로 전환됐다고 볼 수 있지요.이것이 민주주의의 큰 토양이 됐고 너와 내가 동일하다는 자유의 개념도 늘어났습니다. 그러나 이같은 긍정적인 면도 잘못되면 사회혼란과 무질서의 방향으로 흐를 위험이 있습니다.6·29가 어디까지나 금지됐던 자연적 자유회복에 불과하지 적극적인 사회발전의 규범적 질서는 가져오지 못했다는 견해가 6·29의 부정적인 측면입니다.정치지도 이념의 적극적인 제시가 없었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있습니다. ○경제적 안정이 배경 ▲신의순교수=그동안 학계·언론계·정계 모두 6·29에 대한 고찰을 정치적인 측면에서만 해온 게 사실입니다.물론 당시 상황이 정치·사회적으로 혼란스럽긴 했지만,경제적인 측면에서의 고찰이 전혀 없었던 점은 경제학자로서 아쉬운 대목입니다. 6·29선언을 할 수 있었던 배경은 근본적으로 「3저호황」으로 인한 경제적 안정이었습니다.만약 당시 상황이 경제적으로 어려웠다면 민주화를 요구하는 정치적욕구 분출이 과격하거나 급격히 나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경제적 번영은 정치적 안정을 필요로 합니다.6·29 이후 우리 경제는 오히려 성장추세가 둔화되는 부작용을 낳지않았나 생각됩니다.경제적 안정의 상실을 담보로 정치적 민주화를 가져왔다고 볼 수있죠.경제의 정치적 측면이 크게 부각된 87년의 노사분규와 급격한 임금인상이 그 좋은 예입니다. 그러나 이는 부정적인 측면일 뿐 직종별 임금격차가 줄어들고 생산직·저학력 근로자의 임금이 상승하는등 분배 측면에서 보면 긍정적인 부분이 많습니다.경제의 요체는 효율과 형평인데 형평의 문제가 부각되기 시작했다는 점,이것이 6·29의 또 다른 경제사적 의의로 평가할 수 있을 것입니다. ○노사분규등 부작용 ▲나교수=신교수의 분석에 동감입니다.효율성을 강조하던 지난 30년간의 경제구조하에서 상대적으로 소외된 계층의 「자기몫」이 늘었다는 것은 그만큼 시민사회의 영역이 커졌다는 얘기입니다.이런 점에서 볼 때 6·29는 일견 통치 정예세력이 시민세력에 밀려 양보한 것으로 분석할 수도 있습니다.그러나 6·29는 이렇게 간단히 정의할 수 있는 측면도 있지만 그렇지않은 부분도 있는 복합적인 사건이었지요.사건 자체는 선제 기습적인 면이 많지만 이 선언의 이면에는 통치권 엘리트의 자신감을 엿보게 하는 대목이 있습니다.6·29이전의 정권은 명분이나 정통성은 없었지만 그러나 그동안의 치적이 나쁜 것은 아니었습니다.국민의 요구에 따라 정국주도권을 획득하는 과감한 결단에도 승산이 있다고 판단한 것입니다.이같은 자신감은 6공의 괄목할만한 성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무엇보다도 정권에서 군부의 그림자가 퇴색했다는 점입니다.87년 당시만해도 정치에 군부의 그림자가 있었습니다.그러나 이제 쿠데타의 위험이나 군부의 압력등은 정치적 변수에서 제외된 것이 큰 변화라고 볼 수 있지요. ▲김교수=좋은 지적이라고 생각됩니다.6·29는 언론의 자유,결사의 자유,누구든지 입후보할 수 있는 피선거권 행사의 자유,집단이익을 자유로이 표출할 수 있는 자유등 헌법에 규정된 국민의 자유권에 대한 신장을 가져왔다는 점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우리 민주정치 발전사에 거보를 내디디는 계기가 됐지요. 그러나 진정한 민주화,즉 민주적 발전이란 시민의식의 혁명적 변화가 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타협·양보정신 절실 시민의식의 변화는 위로부터의 변화가 선행되어야 하며,그 중에서도 정치 엘리트와 관료 엘리트의 변화가 창조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유감스럽게도 이 부분이 다소 뒤떨어진 느낌입니다. 단적인 예로 민자당의 대통령 경선과정에서 보인 모후보의 파행적인 자세를 들 수 있습니다.민주적 결정이란 타협과 양보가 전제되어야 하고 자기 희생을 필요로 합니다.민주주의는 종교적 가치와 달리 절대적 선을 추구한다기 보다는 상대적인 선을 추구하는 과정이기 때문이죠. ▲신교수=일본 경제학자인 타이라교수의 「타이라 수수께끼」라는 게 있습니다.정치적으로는 독재국가인데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 국가가 성공한 사실을 얘기한 것이지요.과거 한국·대만·일본등이 독재적 성격이 강한 나라이면서도 자본주의가 성공한 나라로 꼽힙니다.정치의 완전한 민주화 보다는 어느 정도의 통제가 자본주의의 성공을 가져왔다고 보는 것입니다.이런 체제가 5공까지의 우리의 원칙이었습니다.이 원칙이 6·29를 통해 전환기가 마련됐지요.정치가 민주화되고 경제도 시장중심체제로 변화가 이루어졌습니다. ◎평화적 정권창출로 정통성 확보/표현자유등 기본권 신장… 국민자신감 얻게 그이전에는 정부가 자금배분이나 중점사업 육성등 모든 경제 주체에 작용했습니다.6·29 이후 정치민주화와 관련,경제분야에서도 임금인상등 자기몫 찾기가 활발해져 기업운영이 힘들어지기 시작했습니다.언젠가는 겪어야할 과도기이지만 이같은 경제적 전환기에 맞춰 정부의 정책에 일관성이 결여되지않았나 하는 지적들이 있습니다.정책의 일관성과 불확실성의 극소화가 무척 절실히 요청되는 때입니다. ▲나교수=앞서 지적했 듯이 현 시점에서 중요한 것은 민주화정착의 과제입니다.김교수가 지적한 것처럼 언론과 표현의 자유등 기본적 인권이 신장된 것은 사실입니다.또 정치체제도 공개적인 성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법정의의 실현및 개선 부분은 아직 완벽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봅니다.특히 법죄혐의자를 다루는 과정에서 기본적인 인권보장이 완벽하게 실현되지 못하고 있습니다.공포감이나 치욕을 주는 실재가 아직 남아 있는 게 아닌가 여겨집니다.뜻과 법률이 있다고 해서 민주화가 정착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관행이 세워져야 합니다.올드 볼셰비키인 치타아코프스키의 다음과 같은 얘기는 그런 의미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습니다.『혁명은 성공했지만 민주화 실현은 어렵다.범죄자를 다루는 관행이 아직 마련되어 있지않다』 우리의 현실도 아직은 이 부분에 대한 개선이 완벽하게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정부홍보기능 중요 ▲김교수=정치나 행정을 발전 시각에서 보면 수직적 개념과 수평적 개념의 틀을 쌓아가야 하는 것입니다.수직적 개념이란 쉽게 말해 규범적 성격이 강조되는 전략·전술적 차원의 통치행태로 국민통합과 조화가 그 목적입니다.이를 위해선 규범적 차원에서의 정치이념이 먼저 정립되고 정치체제의 「목적지향성」이 갖춰져야 합니다. 수평적 차원에서의 정치발전은 그 사회가 바람직한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가,또는 되어 있는가를 측정하는 겁니다.물론 바람직한 지적구상을 선도해야할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정치지도층입니다.이런 점에서 정부의 홍보기능은 매우 중요하지요.그런데 우리 정부의 홍보기능이 전환기적 상황에 능동적으로 대처해왔는가,이 질문에는 의문이 갑니다. 많은 사회 구성원들이 전략차원의 단기적인 이익에만 급급한 나머지 무질서와 파행적인 부작용을 초래하고 있는데,이를 얼마만큼 단시일에 극복하느냐가 6·29의 남은 과제중 하나라고 봅니다.6·29는 민주화의 시발일뿐 완성이 아닙니다. ▲신교수=6공이 경제적으로 내세우는 가장 큰 치적중의 하나가 경제정의 실현입니다.부의 균배,정경유착의 부조리 척결,대기업의 집중완화 등을 그 주된 이유로 들고 있죠. 그러나 부동산 투기및 주식투자를 통한 이른바 「재테크」의 성행,상속에 의한 경제집중 심화,비생산 분야로의 노동력 이동등의 부작용도 없지 않았습니다.모두 힘들고 어렵고 더러운 일을 기피하고 쉽게 돈버는 방법을 찾기 시작한거죠. ○지역감정 해소 시급 정치적 민주화와 안정은 구분되는 것입니다.과거와 비교할 때 정치적 민주화는 달성됐지만,안정을 이룩했느냐는 믿음에는 부정적입니다.정치적 불안정에서 배태된무질서와 개인주의,지역적 이기주의등이 사회전체에 무관심을 불러 일으켰고 무관심은 곧바로 경제적 부작용으로 나타났습니다.개인적으로는 일하는 것을 싫어하게 되고,국가적으로는 국제경쟁력 약화,무역역조,물가불안등의 현상을 야기시킨 것입니다. 사실 이같은 부작용은 80년대 후반들어 학계에서부터 예견되어 왔습니다.정부가 실기를 한셈이죠.정치민주화와 북방정책,올림픽등에 치중하다보니 그렇게 된 것입니다. 지금의 세계경제는 동구권의 붕괴지역블록화 현상,신보호주의 등장에서도 알 수 있듯이 자국의 경제적 이익을 최우선시하는 추세입니다.정치적 안정과 경제문제에 정부가 보다 더 신경을 쓰는 것이 6·29의 참된 의미를 되살리는 길이라고 생각됩니다. ▲라교수=신교수가 정치민주화와 안정을 구분했는데 저는 이 부분에 대한 견해를 달리합니다.근본적으로 민주화와 안정은 같이 가는 겁니다.권위주의적인 정부와 경제부분의 강력한 리더십은 구별되는 것이지요. 6·29의 성과로 또 지적할 수 있는 것은 비교적 공정한 선거입니다.지난 광역선거때 야당이 참패를 했으나 시비가 전혀없었습니다.참정권이 공정했느냐,물론 이 부분에는 이견이 있을수 있습니다.하향식 공천,금권선거,부재자 투표시비,전국구헌금 공천등은 없어져야 할 관행이기 때문입니다.또 6·29 이후 적나라하게 반영된 지역성 문제는 민주주의 정착을 요원하게 하는 망국적 병폐로 정치지도자들에게 치유의 무거운 책무가 있다고 봅니다. 민의 수렴을 위한 정당구조의 안정및 선출직이 아닌 관료사회에 대한 견제와 균형 회복등도 앞으로 해결해야될 과제중 하나입니다. ▲김교수=국가정책 결정에 인간적인 요소의 도입이 시급하다고 봅니다.「삶의 질」을 높이는 것,이것을 국가정책 결정의 기본으로 삼았으면 합니다.또 우리의 대통령은 국민에게 「정치와 경제보고」만을 하고 있는데,바람직한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사회보고」도 이뤄졌으면 합니다.끝으로 미래사회에 대응하기 위해 장기적인 안목을 가지고 교육제도를 혁신했으면 해요. ○장기적 안목서 대응 ▲신교수=분배측면에서 평등을 확산시키고 주택 2백만호 건설과 토지공개념 정착등으로 어느 정도 경제정의를 실현했습니다.양면성이 있지만 대외 경제의 개방 폭을 넓혀 우리의 기업을 세계경쟁 속으로 편입시키기도 했습니다.즉 경제자유화의 기틀을 마련한 셈이죠.다만 점진적인 경제구조 개편,기술집약능력확보 등이 시급한 과제들입니다.경제부문의 불확실성을 과감히 줄여나가는 노력도 병행되어야 할 문제이지요.
  • 태 정정 갈수록 혼미/친군부세력 나롱 추대에 재야 반발

    ◎마약밀매 혐의… 임명땐 미와도 마찰 태국의 친군부 5개 정당들이 지난 22일 실시된 총선에서 제1당으로 부상한 사마키탐당의 나롱 웡완당수를 신임총리로 추대키로 합의했으나 민주세력뿐 아니라 군부마저 그의 총리임명에 강력히 반발하고 있어 태국정국이 혼미를 거듭하고 있다.더욱이 나롱당수가 마약거래에 연루된 혐의로 미국의 블랙리스트 명단에 올라있어 그의 총리임명은 외교문제로까지 비화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정치인·학생·지식인들은 국민들에게 인기가 없고 군부세력에 밀착돼 있는 그의 총리옹립은 현위정자들의 영구집권 음모라고 주장하고 있다.또 군 내부에선 13개월전 이 나라의 고질병인 부정·부패를 추방하려고 거사를 했던 만큼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기 위해 군부실력자인 수친다 크라프라윤장군이 전면에 나서기를 촉구하고 있다.그러나 민주세력측은 이번 하원의원총선에 입후보하지 않은 사람은 총리가 될 자격이 없다며 한사코 그의 집권을 반대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가하면 연 수십억달러상당에 이르는 마약밀매혐의를 받고있는 나롱은 총리로서 해외방문을 하려할 경우 미국은 물론 서방국가들과 심각한 외교적 마찰을 빚을 것으로 보인다.미국무부는 지난해 7월 그의 입국사증 발급을 거부한 바 있다. 나롱의 총리임명 발표직후 방콕의 서방외교관들은 『그가 총리자격으로 미국을 방문하려할 경우 심각한 문제를 야기시키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군부가 주도하고 있는 국가평화유지위원회(NPKC)측도 『나롱 당수의 차기총리 임명은 현재로서는 시기상조』라며 거부반응을 보이고 있다. 따라서 이번 총선에서 80석을 차지해 제1당의 당수인 나롱은 2주후로 다가온 국회개원을 앞두고 여론의 압력에 밀려 결국 물러날 것으로 보이지만 태국의 정정불안은 쉽게 수그러들 것 같지 않다. 지난 32년이후 17차례의 군부쿠데타가 발생한 태국의 민주화는 그만큼 험난하기만 하다.잠롱과 같은 「깨끗한 정치인」의 영향력이 『찻잔속의 폭풍』으로만 머물고 있어 더욱 그렇다.
  • 반후세인 세력/1백56명 처형/이라크 당국

    【아테네 UPI 연합】 이라크 당국은 사담 후세인 대통령을 권좌에서 몰아내기 위해 쿠데타를 모의한 혐의로 최소한 80명의 군장교들을 처형한 것으로 보인다고 이란관영 통신 IRNA가 7일 보도했다. 이 통신은 「이라크 이슬람혁명 최고회의(SAIRI)」에 정통한 소식통을 인용,이라크 당국은 이밖에도 시아파 회교도 성지인 카르발라시에서 있었던 반후세인 시위에 가담한 혐의로 76명의 사람들을 처형했다고 전했다. SAIRI는 이란에 근거지를 둔 이라크 반군단체의 연합조직으로 이번 처형 보도는 이라크 반정세력 지도자들이 SAIRI의 초청으로 다마스커스에서 만나 후세인 축출 계획을 논의했다고 IRNA가 전한지 약 2주만에 나온 것이다.
  • 소,KGB해체 결정/정보기구 3개 새로 창설

    ◎국가평의회/경제협정 초안도 승인 【모스크바 AFP AP 연합】 소련 과도기 최고 통치기구인 국가평의회는 11일 국가보안위원회(KGB)를 해체하기로 결정했다고 비관영 인테르팍스통신이 보도했다. 독립적인 논조를 견지해온 인테르팍스는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 대통령 주재로 10개 공화국 지도자와 주요 연방 각료 등이 참석한 가운데 이날 개막된 국가평의회가 이같이 표결했다고 전하면서 첩보 및 국경수비 등 안보업무를 관장할 새로운 기구들을 창설하기로 의견이 모아졌다고 덧붙였다. 이와 함께 소 연방 과도기 내각을 이끌고 있는 이반 실라예프 러시아공화국 총리는 이날 소련의 장래를 결정할 경제협정이 오는 15일 서명된다고 밝힘으로써 「새로운 소련」이 곧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낼 것임을 예고했다. 인테르팍스도 이와 관련,국가평의회가 경제협정 초안을 승인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소 연방조약과 함께 향후 소련을 이끌어갈 근간이 될 경제협정 체결과 관련,일부 공화국이 금융 등 주요 부문에 대한 중앙의 통제에 불만을 품고 이를 받아들일 수없다는 태도를 견지하는 등 마찰이 적지않아 서명에 앞서 상당부분 손실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인테르팍스는 또 국가평의회가 KGB를 해체하고 이 기구가 그동안 관장해온 첩보 및 국경수비 업무를 관장할 독립적인 성격의 3개의 중앙정보기구와 공화국간의 문제를 담당할 위원회 등이 설치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날 회의에는 이미 독립한 발트3개 공화국을 제외한 나머지 12개 공화국중 그루지야 및 몰도바(구 몰다비아)를 제외한 10개 공화국 지도자와 실라예프 총리,가브릴 포포프 모스크바 시장,예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 전 외무장관 및 경제협정 초안작성을 주도해온 급진 경제학자 그리고리 야블린스키 등이 참석했다. 한편 보리스 옐친 러시아공화국 대통령은 협정안을 지지한다고 밝히면서 그러나 공화국들에 대한 중앙은행의 통제와 외채분담문제 등 장애요인이 『조속히 제거돼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한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 카자흐공화국 최고회의 의장(대통령)도 이날 국가평의회 회동후 기자들에게 경제협정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관측통들은 러시아공이 앞서 협정내용이 중앙의 통제 강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서명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위협해 왔음을 상기시키면서 옐친의 「태도 변화」등이 경제협정 실현에 부심해온 고르바초프의 「승리」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숙청·암살·테러… 「공포의 권부」/해체되는 KGB 「어둠의 역사」/레닌이 반혁명분자 제거위해 창설/스탈린시대엔 2천만명 숙청… 악명 떨쳐/케네디·지아 대통령 암살등 연루 혐의 볼셰비키혁명 이래 「공포의 권부」로서 소련국민은 물론 전세계를 무대로 테러,암살,음모 등 온갖 악행을 저질러온 KGB(소련국가안보위원회)가 마침내 그 오욕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었다.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이끄는 국가평의회는 11일 KGB의 해체를 공식 결정하고 독립적인 성격의 중앙정보기구와 첩보 및 공화국간 국경문제 등을 담당할 위원회를 새로 설치해 그간 KGB가 맡아온 업무 일부를 맡길 것으로 알려졌다. KGB의 해체는 공산당의 해체와 공산주의의 몰락,그리고 소 연방의 해체 등에 따른 당연한 귀결이라고 할 수 있다. KGB의 가장 큰 임무가 바로 공산당으로 대변되는 구체제 가치를 수호하는데 있었고 이제 더 이상 지킬 가치가 없게 됐기 때문이다. 고르바초프 대통령은 쿠데타가 실패로 끝난 직후인 8월28일 KGB의 최고기구인 간부협의회를 해체하고 KGB의 주력부대인 국경수비대 20여만명을 국방부로 이관하는 등 KGB를 사실상 해체하기 위한 첫 조치를 취했었다. 그보다 이틀전인 26일 소련 국민들은 KGB본부앞 광장에 서있던 KGB 창설자 제르진스키 장군의 동상을 끌어내려 이 기구에 대한 소련국민들의 증오심이 얼마나 깊은가를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레닌은 볼셰비키혁명 직후인 1917년 12일 반혁명 음모에 대항한다는 목적으로 KGB 전신인 체카를 창설했다. 당시 체카는 「반혁명」분자들을 재판에 회부하지 않고 처형할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을 가졌다. 그리고 1919년말까지 1년 남짓 혁명수호라는 미명하에 1백만명 이상의 소련국민들이 정식재판 없이 처형됐다. KGB가 소련국민들에게 진짜 공포의 대상으로 등장한 것은 스탈린의 철권통치를 거치면서부터이다. 스탈린은 자신의 독재권력을 구축하는 과정에서 이 조직을 이용,내외국민에서 정적에 이르기까지 상대를 가리지 않고 테러를 자행했다. 1935년부터 3년여 동안 합동국가정치보안부(OGPU)라는 이름하에 KGB는 악명높은 베리야의 지휘아래 전국민을 대상으로 피의 숙청을 단행했다. 이렇게 숙청된 사람이 2천만명. 당간부만 해도 수십만명이 숙청당했다. 지금도 KGB의 규모는 국내 사찰요원 4만명,해외 공작요원 2만명,국경수비대 20여만명,기타병력을 합쳐 약 60만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불과 얼마전까지 이들은 소련국민들을 대상으로 철저한 사찰활동을 벌이는 외에 국제무대에서 쿠데타,요인암살 등 공포의 막후역할을 맡아왔다. 멀리는 스탈린의 정적 트로츠키 암살,케네디 암살,81년 교황암살기도,가까이는 88년 8월 파키스탄의 지아 대통령 암살사건에 이르기까지 숱한 국제적 음모사건에는 항상 KGB의 「검은 손」이 연루혐의를 받았다. 8월 쿠데타에 크류츠코프 KGB의장이 주모자로 가담한 것은 수년간 계속된 페레스트로이카정책에도 불구하고 이들 조직이 얼마나 뿌리깊게 구습에 젖어있었는가를 보여준 좋은 예였다. 국가평의회가 밝힌 새 정보조직이 과연 어느 정도 과거 KGB와 다른 모습을 보일지는 아직 미지수이다. 하지만 KGB의 해체는 소련의 국가권력이 미행,음모,테러 등으로 대변되는 어두운 과거와 진정으로 결별하는 또 하나의 전환점으로 기록될 것이 분명하다.
  • 급속 개혁따른 군부 불만이 도화선/아이티의 군쿠데타 배경

    ◎아리스티드의 「민주화실험」 위기에 중미의 조그마한 섬나라 아이티에서 30일 군부쿠데타가 발생,장 베르트란드 아리스티드 대통령(38)이 축출됨으로써 「민주화의 실험」이 큰 위기를 맞고 있다. 이번에 군부쿠데타가 발생한 것은 90년12월 최초의 자유 민주선거에서 당선된 신부출신 아리스티드대통령이 지난 2월 취임직후부터 군장성들을 강제퇴역시키는 한편 과거정권에 빌붙어 살아온 세력들을 제거하는등 의욕적인 개혁을 단행하면서 군부로부터 미움을 샀기 때문이다. 그동안 아리스티드대통령은 뒤발리에 장클로드정권의 추종세력인 비밀경찰의 쿠데타기도에 법정최고형을 선고하는등 독재체제의 유산을 청산하는데 힘써왔다.또 헌법이 부여한 비상대권에 따라 지난 6개월동안 4만5천명에 이르는 정부기관 종사자들 가운데 부정부패와 뒤발리에 정권에 적극적으로 협력해온 혐의를 받고있는 8천여명을 해고시키기도 했다. 이번 쿠데타와 관련,군관계자들은 아리스티드대통령이 취임후 군부의 부정을 들춰내는등 군내부문제에 간섭하는것에 대해 군의 불만이 팽배했다고 지적함으로써 그동안 누적된 군부의 불만이 이번 쿠데타의 도화선이 됐음을 시사했다. 한편 이번 쿠데타에 대해 미측은 군부 반란을 비난하면서 정당하게 구성된 현정부를 강력히 지지한다고 선언했다.또 유엔안보리는 아이티 정부의 위기를 논의하기 위해 비상회의를 소집해 놓고 있어 앞으로 아이티의 정정불안은 당분간 계속 될 것으로 전망된다. 아이티는 지난 89년 국내총생산(GDP)24억달러,1인당 국민소득 3백80달러로 서반구에서 가장 가난한 국가로 독재와 쿠데타로 점철된 역사를 가지고 있다. 71년 부친 프랑수아 뒤발리에로부터 대통령직을 승계받은 장 클로드 뒤발리에는 세습독재체제를 유지하다 86년 국민들의 사임압력에 못이겨 프랑스로 망명길에 올랐으나 그후 5년간 잔존세력들간의 갈등은 계속 끊이질 않았다. 아리스티드대통령이 집권 8개월만에 발생한 이번 군부 쿠데타로 아이티의 민주화는 멀고도 험난한 역정을 겪게될 것같다.
  • 소,쿠데타진상조사위 설치/최고회의 폐막/관련자 신문·소추권등 부여

    ◎“반동세력 재결집 가능성”/레닌그라드 시장 【모스크바=이기동특파원】 소련연방최고회의는 31일 고르바초프대통령의 축출을 기도한 쿠데타의 「원인과 상황전개」를 파악하기 위한 진상조사위원회를 설치키로 결의하고 6일간의 회의를 모두 끝내고 해산했다. 최고회의는 이날 고르바초프대통령이 불참한 가운데 개최된 최종일 회의에서 15인으로 구성된 쿠데타 진상조사위원회 설치안을 찬성 3백63표,반대1표의 압도적 다수로 가결했다. 진상조사위는 91년 8월18일부터 21일까지 소련에서 발생한 쿠데타의 상황을 조사 분석하고 이번 사건에 대한 정치적 평가를 내리는 것을 주목적으로 하고 있다. 진상조사위는 이같은 목적을 위해 최고회의 의원들은 물론 공산당을 포함한 「국가기관및 사회기관의 지도자」들과 면담할수 있는 권리를 부여받았으며 쿠데타에 관련된 혐의자들에 대한 형사소추권도 갖게된다. 소련 최고 상설입법기구인 최고회의는 이날 회의를 끝으로 해산됐으며 2일 소집되는 인민대표대회 특별회의에서 대의원들을 선출,최고회의를 새로이구성할 예정이다. 한편 이날 회의 폐막에 앞서 아나톨리 소브차크 레닌그라드시장은 실패한 쿠데타이후 「반동세력」의 재결집 가능성에 대해 경고했다. 소브차크시장은 이날 『최고회의와 국가전역에 반동세력들이 결집할 것을 우려하고 있다』면서 2일 인민대표대회 특별회의에서 선거를 통해 구성될 최고회의에의 보수파 회귀 가능성을 점쳤다. 소브차크시장의 발언은 쿠데타와 연관있는 것으로 지목받아 결정적으로 입지가 약화된 많은 공산당강경파들이 쿠데타 이후 불법적인 각종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고 호소하면서 자신들의 권리가 존중받을 것을 주장한지 하룻만에 나온 것이다. 이같은 분위기는 이날 보수파 공산주의자로 잘 알려진 발렌틴 팔린전서독주재 대사가 최고회의에서 자신의 모스크바자택과 시골별장이 수색당했다며 『나의 권리는 어디 있는가』라는 불만에 찬 질문에서도 나타났다. ◎우즈베크등 2개공 또 독립선언 한편 소련 중앙아시아지역에 위치한 우즈베크와 키르기스공화국이 31일 잇따라 독립을 선언했다고 인테르팍스통신이 보도했다. 이로써 전체 15개공화국 가운데 탈소독립을 선언한 공화국은 쿠데타 이전의 2개를 포함,모두 10개로 늘어났다. 우즈베크공 최고회의는 이날 독립선언을 결정하면서 9월1일을 독립일로 선포했고 키르기스공 최고회의는 오는 10월12일 공화국대통령 직선을 실시키로 했다. 카리모프 우즈베크공대통령은 이날 최고회의 연설을 통해 『러시아가 다른 공화국들위에 군림할 이유가 없다』고 비난했다.
  • “독재의 기둥” KGB 수술대에 오른다

    ◎「공포의 위상」 어떻게 바뀌나/개혁물결 반영,권한축소 불가피/휘하 30만 병력 국방부 배속 방침/총원 70만명에 한해 예산 49억 루블 소요 소련 공산독재정권의 「칼과 방패」로 무자비한 철권을 휘둘렀던 「비밀경찰」KGB가 역으로 철퇴를 얻어맞고 있다. 고르바초프 소련대통령은 쿠데타실패 직후 국가보안위원회(KGB)의장에 개혁파 인물인 바딤 바카틴 전내무장관을 임명,KGB에 개혁바람을 예고했다.고르바초프는 28일 KGB 최고지휘부인 콜레기움(협의회)의 해체를 명령하고 KGB 휘하의 30만 국경경비대 병력을 국방부 통제하에 두도록 지시했다. 실무국장단과 부의장 7명이 포함된 협의회를 없애 개혁파 바카틴의장이 전적인 지휘권을 갖도록 했으며 본연의 정보활동외에 월권의 근거였던 군사조직을 또한 없애버린 것이다.거기다 진보적인 인사들로 조사단을 구성,KGB 고위층의 지난 쿠데타 개입여부 뿐만 아니라 「국민들을 공포로 몰아넣었던」KGB 활동 전반에 대한 감사를 실시하도록 한 것이다. 조사단은 오는 10월 중순까지 이 악명높은 「비밀경찰」의 실상을 적기하면서 새롭게 정립해야 할 국가보안위로서의 역할을 제시할 예정이나 KGB의 권위실추와 권한축소는 자명해보인다. 바카틴 신임의장은 『지금까지의 KGB는 거대한 독점 그 자체로서 일대 절단의 수술이 필수적이다』는 의견을 공공연히 피력하고 있다. KGB는 총 소속인원이 70만명으로 추정되고 공식적인 예산만도 49억루블(한화 약22조원)이다.이 기관의 활동영역을 미국과 대비시켜 보면 CIA의 해외정보활동,FBI의 국내중요범죄 수사,정부기관 동향파악,관세및 국경수비 그리고 일반시민에 대한 사찰권을 포괄 보유해왔다. 군·공산당과 함께 소련독재의 3대 기둥의 하나인 KGB는 지난 1917년 볼셰비키 혁명 직후 창설된 「체카」를 원조로 삼고 있다.혁명정부를 주도하고 있던 레닌은 국내외로부터의 반혁명 음모에 대처하기 위한 비상기구로 체카를 설치,그해 12월 출범시켰다.「바퀴를 조이는 나사못」이란 뜻의 체카는 처음 23명으로 구성되었는데 첫 책임자는 테러 예찬론자로 폴란드태생인 펠릭스 제르진스키였다. 체카는 출범한지 1년이 채안된 1918년 8월 레닌에 대한 저격사건을 계기로 반혁명분자들을 정식재판에 회부하지 않고 처형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게 됐다.그후 1919년 말까지 「혁명의 수비대」라는 기치아래 1백만명을 반혁명분자로 몰아 재판없이 처형했다. 소련은 신경제정책을 추진하면서 미국 차관을 얻기 위해 1922년 2월 체카를 폐지하고 내무인민위원부(NKVD)소속으로 국가정치보안부(GPU)를 설치한다.GPU의 책임자는 제르진스키가 그대로 맡았고 기구도 그대로였으며 23년 소련 헌법이 채택되자 GPU는 합동국가정치보안부로 바뀌지만 실체는 변동없이 똑같았다. 이 기구는 스탈린의 폭압정치를 거치면서 엄청나게 강화된 권한을 부여받고 무자비한 피의 숙청을 도맡았다.스탈린 시대의 이 기구 총책인 베리야가 53년 총살당한 뒤 54년 KGB로 개칭돼 오늘에 이르렀다. 85년 고르바초프가 집권하면서 KGB의 변화가 시작되었으나 89년 동구의 민주혁명 때까지만 해도 위성국 정보망의 상부조직으로서 공산독재체제의 유지에 전력을 기울여왔다.국내사찰요원 4만명,해외공작요원 2만명으로 추산되는 민간요원들은 동구민주화 이후에는 외국의 군사비밀과 경제기술분야 스파이활동에 중점을 두어오면서 서방원조식량의 소련내 배급을 감독하는 기능을 담당했다. KGB는 90년 5월 합법성을 원칙으로 하고 인권및 자유를 존중한다고 선언했으나 크류치코프 전임 의장은 「서방의 소련전복 기도」를 여러번 경고하는 등 보수적 성향을 드러내보인 뒤 이번 쿠데타에 주도자로서 참가했다.쿠데타 주도혐의로 기소된 13명 가운데는 크류치코프 의장 외에 3명의 KGB 고위인사가 더 연루되어 있다. KGB 일부에서는 이번 쿠데타에의 참여도 및 연루자들은 이 기구 전체로 보아 소수파에 지나지 않는다고 항변하고 있으나 쿠데타와 상관없이 KGB의 권한축소를 통한 위상재정립은 피할 수 없어 보인다. 민주화와 「비밀경찰」은 결코 양립할 수 없는 것이다.
  • 루키야노프 전 의장/면책특권 박탈결정/소 최고회의

    【모스크바 로이터 연합】 소련 최고회의는 29일 아나톨리 루키야노프 전최고회의 의장에 대한 의원면책특권을 박탈하기로 결정했다. 최고회의는 이날 니콜라이 트루빈 연방 검찰총장이 무산된 쿠데타에 연루된 루키야노프를 반역혐의로 체포할 수 있는 충분한 증거를 확보하고 있다고 밝힌데 따라 표결에 부쳐 이를 결정했다. 트루빈 검찰총장은 『수사기간중 국가비상사태위원회 위원들과 함께 루키야노프가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쿠데타 음모에 가담했다는 매우 중대한 증거를 확보했다』고 말했다.
  • 고르비,옐친에 연방법 준수 촉구

    ◎“비상포고령 이젠 부적… 누구의 독단도 불용”/쿠데타 당시 내각 불신임안 가결/우크라이나에 연방잔류 독려단/최고회의 【모스크바=이기동특파원】 고르바초프소련대통령은 28일 쿠데타 당시의 내각을 해산시키고 KGB의 중추기구인 보안협의회를 해체시키는 등 쿠데타 후유증을 해소하고 재발을 방지하기 위한 대대적인 권력개편작업에 착수했다. 3일째 속개된 이날 소연방최고회의는 고르바초프대통령이 요청한 쿠데타 당시 내각에 대한 불신임안을 찬성 4백2,반대 16의 압도적인 표차로 가결시켰다.소연방내각은 70명의 각료들로 구성돼있다. 고르바초프대통령은 『정부 각료들과 최고회의가 쿠데타 발발 당시 음모자들에게 맞서 대항했어야 했으나 그렇지 못했다』고 지적하고 『나는 이내각에 대해 어떠한 신뢰도 가질 수 없다』며 내각해산을 요청했다. 고르바초프대통령은 또 KGB내의 KGB로 알려진 국가보안위원협의회의 해체령을 내리고 KGB협의회의 통제하에 있던 수십만명의 군병력에 대해 국방부로의 전속명령을 내렸다.국가보안위원협의회는 KGB의장과 부의장 및 각부서의 책임자들로 구성된 중추기구다. 스테펜코프러시아공검찰총장은 쿠데타와 관련된 7인비상대책위원을 포함,볼딘대통령비서실장·바레니코프국방차관·그루시코KGB부의장·플레카노프 KGB경호국장 등 13명을 대역죄 혐의로 기소했다고 밝혔다. 한편 고르바초프대통령이 최소한의 연방제가 유지되지 않을 경우 연방대통령직을 사임하겠다고 압력을 넣고있는 가운데 소연방최고회의는 이날 탈소독립을 선언한 우크라이나공화국에 소브차크레닌그라드시장을 단장으로 하는 대표단을 파견키로 결정함으로써 연방체제 유지를 위한 본격적인 작업에 나섰다. 한편 고르바초프대통령은 러시아공화국에 대해 연방 사법권을 침해하지 말고 연방법을 준수하라고 경고했다. 그는 옐친의 포고령이 비상시국 아래서는 적절했지만 이제 평화시에는 독단이 누구에게도 용납될 수 없는 일이라고 지적했다.
  • 재기의 칼가는 후세인

    ◎쿠르드족 자치허용… 불만 무마 전력/국제적 입지 만회 노려 핵개발 강행 사담 후세인 그는 불사조인가. 쿠웨이트를 집어 심키려다 국제사회로부터 몰매를 맞아 빈사지경에 처했던 후세인 이라크대통령은 걸프전에서의 참담한 패배에도 불구하고 중동 맹주국지도자로서의 야심을 버리지 않고 와신상담,재기의 칼을 갈고 있다. 국내에서의 입지강화는 물론,국제적으로는 「핵무기보유」라는 카드로 서방세계를 또다시 긴장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는 군부내에서의 폭동을 염려,쿠데타 음모혐의로 군고위장교 18명을 처형하고 그자리에 사위·사촌 등을 기용해 자신의 군부내 입지를 강화했으며,정규군의 장비와 병력을 빼내 친위대라 할 수 있는 11개사단 규모의 「공화국 수비대」의 전력을 다시 강화시켰다. 국민들에게는 다당제,자유선거실시 등 민주화조치로써 「전쟁의 패배자」라는 이미지 탈피에 힘쓰고 있으며,반사담투쟁을 해온 쿠르드족들에게는 자치권을 허용하는 포용력을 보이기도 했다. 국제적으로는 유엔의 경제봉쇄정책은 쿠웨이트 철수를 위한것이었으므로 이제는 해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인도적인 손길을 촉구하기도 했다. 후세인은 그러나 이러한 주장과는 달리 유엔과의 휴전협정을 무시하고 1천9백명에 달하는 쿠웨이트 인질을 잡고 있으며 쿠웨이트로부터 빼앗은 전투기들과 고대유물을 아직 돌려주지 않고 있다. 더욱이 걸프전쟁 이후에도 계속 핵무기개발을 추진하고 있으며 약4만6천에 달하는 화학무기를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 서방세계를 긴장시키고 있다. 걸프전당시 3개의 대통령궁에 가해진 다국적군의 폭격에도 운좋게 살아남은 후세인은 유엔의 핵사찰요구를 2번씩이나 거절하는 등 국제사회에서 당당히 자기주장을 펴고 있어 중동평화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 에티오피아 반군 대공세/수도 인근 육박/평화회담 앞두고 입성자제

    【아디스아바바 로이터 연합 특약】 에티오피아 반군들은 24일 수도인근 30㎞ 지점에까지 진격했으나 3일 안으로 시작될 정부와의 평화회담을 앞두고 수도진입은 보류하고 있다. 에티오피아 인민혁명민주전선(EPRDF)은 새 정부의 휴전제안을 거부했으나 외교관들은 수도를 포위하고 있는 반군들이 사기가 저하된 정부군을 격파할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더이상 수도안으로의 진격을 중단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는 27일 미국의 중개로 런던에서 열리는 평화회담에서 반군측이 최상의 협상입장을 확보하려는 목적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고 이들 외교관들은 분석했다. 한편 반군의 공세에 쫓기고 있는 에티오피아정부는 23일 화합조치의 일환으로 멩기스투에 대한 쿠데타기도 혐의로 투옥된 7명의 장성이 포함된 1백87명의 정치범을 석방하고 마르크스주의의 과거를 청산하는 조치를 취했다. 런던을 방문중인 로버트무가베 짐바브웨 대통령은 만일 멩기스투 전 대통령이 정치적 망명을 요구했다면 『흔쾌히 허용』할 것이라고 말했다.
  • 태 과도정부 총리에 아난 파냐라춘 임명

    【방콕AFP연합】 최근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태국 군부는 2일 직업외교관 출신의 사업가 아난 파냐라춘씨(59)를 아둘랴뎃 푸미볼 국왕의 승인을 거쳐 과도 정부의 총리로 임명했다. 지난 2월23일 무혈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국가평화 유지위원회(NPC)는 아난 총리에게 독자적으로 내각을 구성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다고 밝혔다. NPC가 이에 앞서 지난 1일 채택한 임시헌법에 따르면 아난 총리 내각은 올해 말 혹은 내년초로 일정이 잡혀있는 총선때까지 나라를 통치한다. 아난 신임총리는 주미,유엔 대사를 역임했으며 좌익 학생들에게 정부의 기밀을 넘겨 주었다는 혐의로 고초를 당하다가 지난 79년 25년간의 외교관 생활을 마감하고 사업가로 변신했다. 그는 사업가로도 성공해 사하 유니온 섬유사의 사장과 태국 산업연맹의 회장으로 일하고 있다.
  • 부토 전 총리,“명예회복”건 일전/파키스탄 총선의 향방 어디로

    ◎부패누명 벗으려 칸대통령과 대결/동정론 힘입어 인기 백중세 파키스탄은 24일 2백17석의 의회를 구성하는 총선을 치렀다. 이 가운데 소수 종파를 위해 따로 유보돼 있는 10석을 제외한 2백7명의 의원이 총선에서 선출된다. 지난 8월6일 군부의 헌정쿠데타로 굴람 이샤크 칸 대통령에 의해 부토 총리가 해임된지 80여일만에 치러진 이번 선거는 거의 전적으로 부토 전총리에 대한 신임을 묻는 성격으로 치러지고 있다. 당시 칸 대통령은 부토 총리에 대해 부패와 독직혐의를 들어 해임했다. 부토 정권은 부진한 민주화과정과 친인척 비리 그리고 어려운 경제현실을 타개치 못하는 무능함 등으로 인기를 크게 잃은 상태였다. 때문에 칸 대통령이 이끄는 이슬람민주동맹(IDA)은 가급적 빨리 총선을 치르고자 했다. 또 칸 대통령에 의해 임명된 굴람 무스타파 자토이 과도정부 총리는 특별법원을 설치,부토 전총리와 그녀의 각료 및 부토 총리의 남편 아시프 알리 자르다리를 부패와 독직혐의로 기소했다. 그러나 부토 총리가 이끄는 파키스탄인민당(PPP)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다. 우선 부토 총리는 자신의 해임이 헌정쿠데타라고 공격하는 한편 IDA가 승리하면 그 정권은 6개월도 못 버틸 것이라고 주장했다. 파키스탄내의 여론도 부토 총리와 그녀의 남편이 기소되고 구속당하면서 점차 부토 총리에 대한 기소를 정치적 박해로 여기는 동정론이 고개를 들게 됐다. 여기에 과도정부 수립후 5억7천3백만달러에 달하는 차관제공을 동결시키고 부토 정권 이전의 부패혐의도 조사해야 될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주장한 미국의 움직임도 부토에게는 큰 힘이 됐다. 3주전에 실시된 한 여론조사에서 파키스탄인민당에 비해 약 10%의 우세를 보이던 이슬람민주동맹이 총선에 임박해서 백중세를 보일 만큼 고전함에 따라 이슬람민주동맹이 주도하는 18개 정파로 이루어진 반부토 연합전선의 전열도 흐뜨러지고 있다. 여론재판을 기대했던 정부쪽의 계산이 빗나가자 「반 부토」이외에는 공통점이 거의 없었던 이들은 정부의 결정이 섣부른 행동이었다는 비판론이 고개를 들면서 적전분열을 보이게 된 것이다. 하지만 부토쪽 사정도 여의치는 않다. 그녀의 집권 초기 1백명을 넘었던 PPP의원이 하나 둘 그녀의 곁을 떠나 이제는 불과 수십명에 불과한 실정. 또 법원으로부터 유죄판결을 받을 경우 의원직 상실은 물론 7년간 정치활동이 금지되므로 총선에 승리한다 해도 오는 11월 하순 의회가 개원될 때까지는 마음을 놓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다. 지금까지의 선거예측은 PPP든 IDA든 어느 쪽도 과반수를 장악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고 있다. PPP는 전 선거구에 1백82명의 후보를 내놓고 있고 IDA는 1백47명을 내세웠다. 물론 이들은 각각 군소정당과 제휴하고 있지만 과반수를 장악하는 정당이 나오지 않는 한 파키스탄은 선거결과에 상관없이 계속 정정불안을 겪을 것으로 예상된다. 1억1천만 파키스탄 국민의 대부분이 문맹자이고 1인당 국민소득이 4백달러를 밑돌고 있으며 경제발전에 대한 희망이 거의 없는 현실에도 불구하고 지아 울하크 전대통령의 세력이었던 칸 대통령의 IDA와 부토의 PPP는 치열한 권력다툼을 벌일 가능성이 높다. 부토를 실각시킨 군부 또한 파키스탄의 민주화에 커다란영향력을 미칠 것이다. 선거를 앞두고 후보들이 잇따라 피살되거나 테러를 당한 사실은 파키스탄의 정치가 폭력에 의해 짙게 오염됐음을 다시 한번 보여주는 비극으로 향후 파키스탄의 정치가 겪을 어려움을 짐작케 해준다.
  • 미얀마 군정종식 “산너머 산”(세계의 사회면)

    ◎군사정부의 영구집권기도와 실상을 보면/30년만의 총선서 야당 압승 허사/민정이양 회피… 의회 개원도 봉쇄/국민들은 침묵ㆍ절망감속 저항마저 포기 30년만의 자유총선이 치러진지 5개월이 지나도록 미얀마(구버마)에는 아무런 변화의 조짐도 보이지 않고 있다. 집권 군사혁명 정부는 총선에서 압승을 거둔 야당측에 정권을 이양할 준비를 하기는 커녕 의회개원 마저 허용하지 않으면서 오히려 야당지도자들을 붙잡아 들이고 있다. 야당측도 군사정부를 향해 거듭 대화를 촉구할 뿐 이렇다할 대응책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고 대다수 국민들도 민정이양 지연에 대한 불만을 마음속에만 담아둔 채 침묵을 지키고 있는 형편이다. 다만 극소수 학생과 승려들만이 이따금씩 산발적인 민정이양 촉구시위를 벌이다 무자비하게 진압당할 뿐이다. 지난 8월초에는 북구 만달레이시에서 1백여명의 시위대를 향해 진압군이 발포하는 바람에 4명이 사망한 것으로 보도되기도 했다. 선거이전이나 지금이나 거리 곳곳에 무장군인들이 즐비하게 깔려 있기는 마찬가지다. 미얀마의 민주화는 아직도 요원하기만 한 것이다. 한 양곤(구랑군) 주재 외교관은 『미얀마 국민들 사이에는 절망감과 숙명론이 팽배해 있다. 30년간의 군사통치에 시달린 나머지 이제는 변화를 확신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현지 분위기를 전했다. 지난 88년 9월 전국을 휩쓴 민주화요구시위가 군의 총칼에 의해 무참히 진압되면서 수천명이 학살되는 광경을 지켜봐야 했던 쓰라린 경험을 갖고 있는 미얀마 국민들에게서 또다른 유혈사태로 이어질 적극적인 저항을 기대하긴 어렵다는 주장이다. 지난 5월27일 실시된 자유총선에서 야당인 민주국민연맹(NLD)이 4백85개 전체의석 가운데 80%가 넘는 3백96석을 휩쓸어 미얀마에 민주화가 찾아들 것이라는 희망을 불러 일으켰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실현 불가능한 꿈으로 변질되고 있다. 집권 군사정부는 최소한 과반수의석을 차지하는 거대야당이 출현하지 않고 군소정당이 의석을 나눠가질 것으로 예상한 나머지 『선거결과에 승복하지 않을 바에야 뭐하려고 선거를 실시하겠느냐』고 큰소리 쳤으나 예상밖의 선거결과가 나오자 태도를 돌변,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정권이양의 의사가 없음을 노골화 했다. 군사정부는 ▲언제 끝날지는 모르지만 선거부정에 관한 조사가 마무리 되기전에는 의회를 개원할 수 없으며 ▲의석수에 관계없이 모든 정당이 모여 헌법초안에 만장일치로 합의한 뒤 이 초안을 국민투표에 붙여 찬성을 얻어야만 정권이양이 가능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최소한 2년 이상의 기간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대해 NLD측은 지난 62년 네윈의 쿠데타가 일어나기 전에 있었던 구버마 헌법을 다소 수정해 우선 민간정부를 출범시켜야 하며 2년 이상 민정이양을 늦출 수는 없다는 입장이다. NLD측은 지난 7월29일 의원당선자 총회를 갖고 늦어도 9월말까지 의회를 개원하고 정치범을 석방하며 NLD측과 대화를 가지도록 군사정부에 촉구하는 결의문을 채택했으나 아무런 반응을 얻지 못한 채 거듭 대화를 촉구하고 있다. 군사정부는 오히려 9월초 우 키 마웅 의장직무대행 등 NLD 지도자 6명을 기밀누설혐의로 연행,기소할 움직임이다. 지난 7월19일로 1년 예정의 가택연금시한이 만료된 카리스마적 지도자인 아웅산 수키여사(NLD 사무총장)에 대해서도 가택연금을 해제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집권국가법질서회복평의회(SLORC) 의장인 사우 마웅장군은 최근 일본 자민당의원과 면담한 자리에서 수키여사가 해외추방을 감수하기 전에는 가택연금을 해제할 의사가 없음을 분명히 했다. 지난 30년간 군사정권의 지배를 받는 동안 미얀마는 인권말살은 말할 것도 없고 경제적으로도 아시아 최빈국으로 전락했다. 이제 남은 문제는 미얀마 국민들이 이같은 여건에서 얼마나 더 저항없이 오래 버틸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불행하게도 아직까지는 국민들을 침묵하도록 억압하는 군사정권의 기술이 먹혀들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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