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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황교안 “미래한국당과 비례 공천갈등, 강력한 리더십 발휘하겠다”

    황교안 “미래한국당과 비례 공천갈등, 강력한 리더십 발휘하겠다”

    황교안 미래통합당 대표가 20일 자매정당이자 비례대표용 위성정당인 미래한국당과의 비례대표 공천 갈등과 관련해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하겠다”고 밝혔다. 황 대표는 내부 공천 반발에 무소속 출마가 잇따르는데 대해서는 “무소속 출마는 분열과 패배의 결정인 만큼 거둬 달라”고 요청했다.황 대표는 이날 유튜브 채널 ‘황교안 오피셜’의 라이브 방송에서 ‘미래한국당과의 공천 갈등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우왕좌왕할 겨를이 없다”며 이렇게 답했다. 황 대표는 “소탐대실하고 쉽게 신뢰를 저버리는 모습은 우리와 함께 해주신 국민께 실망을 안겨드릴 뿐으로, 공천갈등을 신속히 바로잡겠다”고 강조했다. 한선교 미래한국당 전 대표가 통합당의 영입 인재를 비례대표 당선권에서 배제해 공천 갈등을 빚은 끝에 전날 전격 사퇴한 직후 미래한국당 새 지도부를 꾸린 점 등을 거론한 것으로 읽힌다. 황 대표는 “저에 대해 ‘정치신인이라 미숙하다’, ‘정치적 계산을 하지 않는다’고 하시는 분들도 계시는데 얕은 꾀를 쓰지 않는 게 미숙한 것이라면 그쪽을 택하겠다”면서 “앞으로 총선 승리를 견인해야 할 선거 지휘자로서 강한 리더십을 확실히 보여드리겠다”고 역설했다.원유철 신임 미래한국당 대표, 공병호 공천관리위원장 전격 경질 ‘사퇴’ 한선교, 황교안 향해 “가소로운 부패한 권력”… 黃 “도 넘는 일 없었다” 신임 미래한국당 대표로 추대된 원유철 의원은 이날 비례대표 공천을 놓고 미래통합당과 갈등을 빚은 공병호 공천관리원장과 다른 공관위원들을 전격 경질했다. 새 공관위원장으로는 친황교안계로 분류되는 배규한 백석대 사회복지학부 석좌교수를 인선했다. 배 교수는 황교안 대표 특별보좌역을 맡았고, 미래통합당 당무감사위원장을 지냈다. 미래한국당 공천관리워원회는 앞서 지난 16일 통합당 영입인재 대다수가 당선권(20번)에 배치되지 않은 비례후보 명단을 발표했고, 황 대표나 통합당 내부에서 “천하의 배신”, “한선교의 쿠데타” 등의 반발이 나오자 전날 최고위의 재의 요구 의결을 거쳐 당선권의 4명을 수정·교체했다. 그러나 이마저도 황 대표는 “국민의 열망과 기대와 먼 결과를 보이면서 국민에게 큰 실망과 염려를 안겨드리게 됐다”면서 “단호한 결단이 필요하다”고 불만을 표시했다. 19일 비례대표 순번 찬반 투표에서 부결되자 한 전 대표는 기자회견을 열고 황 대표 측근들을 향해 “가소로운 부패한 권력”이라고 분노를 표출했다. 이어 한 전 대표는 황 대표가 박진·박형준 전 의원의 비례대표 공천을 요구했다고 20일 언론에 밝혔다. 이에 황 대표는 “도를 넘는 일은 없었다”고 일축했다.통합당 공천 반발엔 “다 내려놓고 투명한 공천…친문 공천과는 차별화” 황 대표는 통합당 내 공천잡음과 홍준표 전 자유한국당 대표 등 공천 탈락 인사들의 무소속 출마가 이어지는 데 대해서는 “몇 년 동안 지역구를 닦고도 경선 기회도 못 얻은 원외 당협위원장들과 특별히 억울한 분들께 당 대표로서 깊이 사과드린다”면서도 “무소속 출마는 분열하고 패배하는 결정인 만큼 거둬달라”고 요청했다. 홍 전 대표는 미래통합당 공천에서 배제된 뒤 대구 수성을 무소속 출마를 선언하고 탈당했다. 그는 “저부터 모든 것을 내려놓고 공관위에 권한을 부여하는 투명한 공천을 하고자 했다”면서 “잘못된 부분은 당헌·당규가 의결한 원칙과 민주적 절차에 따라 수정·보완해왔기 때문에 더불어민주당의 ‘친문(친문재인) 공천’과는 차별화하고 있다”고 주장했다.강주리 기자 jurik@seoul.co.kr
  • 한선교 사퇴 하루 만에 미래한국당, 원유철 신임 당대표 추대

    한선교 사퇴 하루 만에 미래한국당, 원유철 신임 당대표 추대

    미래한국당이 20일 한선교 전 대표가 사퇴한 지 하루 만에 원유철 의원을 신임 당대표를 추대했다. 미래한국당은 이날 오전 영등포 당사에서 의원총회를 열어 원 의원을 신임 당대표로 추대했다고 밝혔다. 전날 황교안 미래통합당 대표와 비례대표 공천 갈등을 겪은 뒤 한선교 전 대표 등 지도부가 일괄 사퇴한 지 불과 하루 만이다. 원 신임대표는 비례대표 공천 파동을 수습하는 한편, 비례대표 후보자 명단 작업에도 본격적으로 들어갈 예정이다. 원 신임대표는 언론 인터뷰에서 “후보등록 마감일(26∼27일)까지 시간이 없기 때문에 절차상 문제가 없다면 선거를 빨리 준비해야 한다는 차원에서 최고위 등 당 지도부가 직접 공천 작업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한선교 “황교안, 박진·박형준 공천 요구”…황교안 “도 넘는 일 없었다”한 전 대표는 이날 황교안 대표가 박진·박형준 전 의원의 비례대표 공천을 요구했다고 밝혔다. 한 전 대표는 미래한국당 공병호 공천관리위원장도 이날 MBC 라디오 인터뷰에서 “‘박진·박형준 전 의원에 대해서 (공천을) 요청받았는데 이런저런 조건 때문에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이야기를 한 전 대표로부터 들었다”고 전했다. 그러나 황 대표는 이날 선거대책위원회 출범식 후 기자들과 만나 미래한국당에 비례대표 공천 관련 요구를 했는지에 대해 “도를 넘는 일들은 없었다”고 일축했다. 그는 “여러 인사들에 대해 (미래한국당과) 의견을 주고받을 수 있다. 통합당과 미래한국당은 자매정당”이라고 말했다. 성균관대 물리학과 78학번 한 전 대표는 법학과 77학번인 황 대표의 동문으로 정치권의 대표적인 ‘친황’(친황교안) 인사로 꼽혀왔다. 지난해 2월 말 황 대표 취임 직후 ‘1호 인선’으로 사무총장직을 꿰차며 오른팔로 부상했다. 그러나 총선을 채 치르기도 전 벌어진 이번 공천 순번 사태로 황 대표와 한 대표의 관계는 파국을 맞았다. 황교안 “구태·나쁜 정치와 단절”에 ‘사퇴’ 한선교 “가소롭다”황 대표가 통합당이 추천한 인사가 당선권에 배치되지 않은 데 대해 불만을 표출하면서 전날 미래한국당 선거인단의 비례대표 순번 찬반 투표는 찬성 13표, 반대 47표, 무효 1표로 부결됐다. 한 대표는 부결 직후 눈물의 기자회견을 열고 ‘투표를 이렇게 하라는 사람이 있다’는 연락을 받았다며 “그 가소로운 자들이 그것도 권력이라고 자기 측근을 갖다 박으려는 모습에 저는 물러서기 싫었다”고 통합당 지도부를 비난했다. 한 대표는 황 대표 측근 인사를 겨냥해 “부패한 권력”이라고 일갈하고는 “그것(현 비례명단)까지 바꾼다면 가만있지 않을 것”이라고 비판하며 분노를 표출하기도 했다. 황 대표는 앞서 19일 위성정당 미래한국당의 비례대표 후보 공천과 관련해 “국민의 열망과 기대와 먼 결과를 보이면서 국민에게 큰 실망과 염려를 안겨드리게 됐다”면서 “이번 선거의 의미와 중요성을 생각할 때 대충 넘어갈 수 없다. 단호한 결단이 필요하다”고 밝혔다.황 대표가 밝힌 ‘단호한 결단’은 이날 수정·교체된 비례후보 명단에 대한 미래한국당 선거인단의 반대투표로 인한 부결 혹은 새로운 비례대표용 위성정당 창당을 뜻하는 것으로 풀이됐다. 황 대표는 “구태정치, 나쁜 정치와 단절할 것”이라면서 “빠른 시일 내에 문제를 바로 잡아서 승리의 길로 바로 되돌아갈 것”이라고도 했다. 황 대표는 “현재 정당을 불문하고 비례정당과 관련된 파열음이 정가 전체를 뒤흔들고 있어서 국민들이 몹시 불편해한다”고 강조했다. 미래한국당 공관위는 지난 16일 통합당 영입인재 대다수가 당선권(20번)에 배치되지 않은 비례후보 명단을 발표했고, 황 대표나 통합당 내부에서 “천하의 배신”, “한선교의 쿠데타” 등의 반발이 나오자 전날 최고위의 재의 요구 의결을 거쳐 당선권의 4명을 수정·교체했다. 강주리 기자 jurik@seoul.co.kr
  • 굴곡졌던 어제…혼란스런 오늘…다시 세운 내일

    굴곡졌던 어제…혼란스런 오늘…다시 세운 내일

    ‘세운상가’라고 부르는 7동의 건물들이 멈춰 선 열차와 같이 서울 도심의 한가운데를 가로지르고 있다. 건립 때는 ‘동양 최대’의 복합쇼핑센터로 위용을 자랑했지만, 이내 도시 경관을 해치는 철거 대상 흉물이 됐다가 이제는 노후 지역을 되살리는 도시재생의 핵심이 됐다. 반세기가 넘은 이 건물의 극적인 과거는 곧 수도 서울의 역사였고, 앞으로의 운명은 곧 현대 도시의 미래이기도 하다.●‘불도저 시장’ 시대의 빛과 그림자 세운상가가 위치한 일대는 조선시대에 ‘남촌’이라 하여 중산층들의 한옥이 밀집한 주거지역이었다. 상인과 수공업자의 상점과 주택, 통역이나 의원 같은 전문직들의 터전이었다. 태평양전쟁 막바지인 1945년 3월 미국은 344기 전폭기로 도쿄 대공습을 감행해 도시의 40%를 불태웠다. 일제는 일본 본토는 물론 식민지 경성에도 대대적인 ‘소개공지’를 급히 조성했다. 밀집된 도심 지역을 강제 철거해 화재가 번지지 않도록 대규모 빈터를 만드는 일종의 청야작전이었다. 이때의 많은 소개공지들은 이후 율곡로, 흥인문로, 의주로 등 서울의 간선도로가 됐다. 가장 핵심적인 곳은 종묘 앞부터 필동까지 훗날 세운상가가 서게 된 소개공지다. 마치 두발 가운데를 박박 밀어 버린 것처럼 도심의 희괴한 빈터가 갑자기 생겨났다. 소개공지 조성 두 달 후 일제의 항복으로 전쟁은 끝났고, 해방 후 ‘광로3호선’이라는 소개 도로로 방치됐다. 6·25 이후 혼란기에 피난민들이 몰려들어 소개 도로 위에 무허가 판자촌을 형성했다. 종묘 일대는 ‘종삼’이라 하여 국내 대표적인 집창촌이 됐고, 광로3호선 판자촌까지 그 판도가 확장됐다. 불량과 불결, 성매매와 각종 불법이 횡행하는 최악의 슬럼이 됐다. 1966년 김현옥 당시 서울시장은 부임 일주일 만에 광로3호선 도로 정비에 착수한다. 무허가는 강제 철거하고, 이미 불하했던 민간 토지를 비싼 값에 되사는 무리도 불사했다. 6월에 계획을 세우고 8월에 철거를 마쳐 그에게는 ‘불도저시장’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순식간에 서울시는 폭 50m, 길이 893m, 넓이 4만 4650㎡의 도심 내 거대한 땅을 얻게 됐다. 이 땅의 개발에 대해 당대의 건축가 김수근에게 조언을 구했는데, 주상복합과 공중보행로 등 환상적인 개념들을 제안했고, 곧바로 계획에 착수해 세운상가가 탄생하게 된다. 김 전 시장은 ‘돌격 건설’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수많은 도시정비와 개발 사업을 벌였다. 청계천을 비롯한 곳곳의 무허가촌을 철거하고 경기도 광주(현 성남시)와 양주(현 상계동)에 철거민 이주촌을 조성했다. 도심 고가도로와 강변도로를 건설하고 한강종합개발계획을 세워 여의도와 강남 일대의 대대적인 개발을 시작했다. 4년 남짓 재임 기간 내내 대담한 계획과 무리한 건설을 밀어붙였다. 1971년 6개월 만에 완공한 와우시민아파트가 준공한 지 석 달 만에 붕괴돼 34명의 사망자를 냈고 결국 그 책임으로 사임하게 된다. 세운상가는 김현옥 시대의 공과를 동시에 안고 있는 도시건축 유산으로 남게 됐다.●환상적인 이상과 비루한 실현 도쿄예술대학원생이던 김수근(1931~1986)은 서른 살인 1960년 남산 국회의사당 현상 설계에 1등으로 당선돼 금의환향한다. 비록 5·16쿠데타로 의사당 건립 계획은 무산됐으나, 김종필을 비롯한 쿠데타 주역들과 친분을 쌓게 된다. 30대 약관으로 워커힐호텔, 세계반공연맹(현 남산자유센터), KIST 본관 등 국책 건축들을 도맡게 된 배경이기도 하다. 세운상가 설계를 맡긴 김 전 시장 역시 수송부대장 출신의 군부 실세였다. 김수근은 세운상가를 상가와 사무소, 주택과 호텔, 학교와 우체국 등이 어우러진 ‘도시 속의 도시’로 만들고 싶었다. 종로~청계천~을지로~마른내길~퇴계로 사이에 놓인 4개 블록의 대지 형상을 따라 블록당 2동씩 총 8동의 기다란 건물군을 계획했다. 지면보다 7.5m 높은 곳에 콘크리트 데크를 설치해 인공 대지를 만들고 그 위에 상가 건물을 세운다. 5층부터 아파트를 건설해 주택을 도시 위에 띄운다. 1층 전체를 차도와 주차장으로 조성해 차량과 보행을 수직적으로 분리한다. 인공 데크에 마련된 보행로는 각 블록을 모두 연결해 ‘공중보행길’로 만들었다. 이러한 건축 개념들은 모더니즘의 도시론과 1950년대 팀텐그룹의 건축론에 뿌리를 둔 국제적이고 첨단적인 내용이었다. 1인당 국민소득이 144달러였던 시절 세운상가에 소요되는 건설비는 44억원으로 그해 서울시 예산의 3분의1이었다. 이 막대한 재원을 민간 건설 자본에 떠맡길 수밖에 없었다. 현대건설 등 주요 건설사들이 각 동을 쪼개 맡았다. 건물 이름도 대림상가, 삼풍상가, 진양상가 등 건설사 이름을 따라 붙였다. 민간 자본은 최대 면적 건설과 최대 이윤 추구에 몰두했다. 1층은 분양가가 가장 높은 곳, 양쪽 1차선 차로만 남기고 모두 밀집된 상점들을 배치했다. 상점, 차로, 주차장, 보행로가 혼재된 어둡고 복잡한 곳이 되고 말았다. 에스컬레이터 없는 인공 데크는 오르내리기가 너무 힘들어 보행을 어렵게 했다. 서로 다른 건설사들은 그나마 계획된 연결 육교마저 없애 버렸다. 계획의 핵심인 공중보행길은 애초부터 불구로 태어났다. 계획했던 학교나 우체국은 아예 건설되지 않아 공공성은 사라졌다. 이상적 설계와 현실적 건설 사이의 갭이 너무나도 컸다.●슬럼에서 다시 살아나는 문화 발신 열차로 그래도 준공 후 문을 연 백화점식 상가들은 ‘세계 제1의 쇼핑센터’로 각광을 받았다. 풍전호텔 나이트클럽과 분식센터는 장안 청춘들의 ‘최애’ 유흥장이었다. 한때 아시아 최대의 전자상가로 위용을 떨쳤고, “미사일도 만들 수 있다”는 첨단 기술의 집합소이기도 했다. 아파트는 연예인, 교수, 의사들의 인기를 끌었고, 진양상가에는 95명의 국회의원 사무실도 입주했다. 그러나 1970년대 신세계, 미도파, 롯데 등 백화점들의 명동상권에 고급 시장을 넘겨주고, 1980년대에는 용산전자상가에 전자상권의 주도권도 빼앗겼다. 치명적인 것은 세운상가와 동시에 추진된 강남 개발이었다. 명문 고교들을 이전하는 유인책까지 쓴 강남은 이내 고급 아파트촌이 됐고, 세운상가는 서민 아파트로 전락했다. 두 달 설계와 1년 시공으로 조산한 이 거대 건축군은 태생부터 부실했다. 설상가상으로 서울시의 중구난방식 개발 전략의 피해가 고스란히 세운상가 몫이 됐다. “도시의 흐름을 단절하는 흉물”로 전락한 세운상가는 서울시의 애물단지가 되고 말았다.2008년 오세훈 전 시장이 발표한 세운 재정비 촉진계획은 낡고 추해진 세운상가에 내린 사망 선고였다. 세운상가를 모두 철거하고 주변 지역은 초고층지구로 재개발한다는 계획이었다. 실제로 종묘 앞 현대상가를 철거해 공원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세운상가 건설이 무모했다면 철거 계획은 황당했다. 이미 도시 환경의 일부가 된 건축 유산을 지워 버리는 반문화적 발상이었다. 도심 제조업과 유통업의 싹을 자르는 비경제적 계획이었다. 여러 반대에 부딪혀 철거 작업이 지지부진하면서 세운상가는 더 급속히 슬럼이 됐다. 2014년 박원순 시장은 세운상가를 존치하고 재생시키겠다는 ‘다시-세운 프로젝트’를 발표했고, 현재 2단계 계획을 실현 중이다. 세운상가의 문제는 건축가, 시공자, 시정부 3자가 모두 책임져야 할 업보다. 건축가는 자기 낭만에 홀려서 비현실적 계획을 세웠고, 시공자는 이윤 추구에만 급급해 저급한 욕망 덩이를 낳았다. 가장 큰 책임은 서울시에 있다. 애초부터 즉흥적으로 임신했지만, 그래도 낳았으면 잘 키워야 했다. 그러나 마음은 용산이나 강남으로 떠나 없애야 할 골칫덩어리로 취급했다. 이제 마음을 바꿔 죽어 가는 자식을 돌보기 시작했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소생의 치료법은 가해의 역순이다. 우선 현실적인 재생 계획을 다시 세워야 한다. 공간의 품질과 공공성을 높이도록 투자해야 한다. 그리고 일관된 도시재생의 정책을 지속해야 한다. 세운상가는 대체 불가한 입지를 가지고 있다. 가깝게는 을지로 일대의 도시제조업과 문화산업의 생태계에 속해 있다. 그 너머로 연극의 대학로, 미술의 인사동, 영화의 충무로 등과 닿아 있다. 문화예술과 지식산업이라는 21세기적 발전을 위한 잠재력을 넘치게 가진 곳이다. 이들 잠재력만 활용해도 세운상가는 첨단 문화를 발신하며 도시를 끌고 달리는 중후한 기관차가 될 것이다. 건축학자·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
  • 펠리페 스페인 국왕, 부친에 주어지던 年 배당금 2억 7000만원 박탈

    펠리페 스페인 국왕, 부친에 주어지던 年 배당금 2억 7000만원 박탈

    펠리페 6세(52) 스페인 국왕이 지난 2014년 스캔들에 연루돼 자신에게 왕위를 물려준 후안 카를로스(83) 전 국왕에게 주어지던 왕실 배당금 혜택을 박탈했다. 왕실은 15일(이하 현지시간) 성명을 발표해 매년 전 국왕에게 지급하던 19만 4000 유로(약 2억 6340만원)의 왕실 배당금을 더 이상 지급하지 않기로 했다고 영국 BBC가 전했다. 전 국왕이 고령에도 여전히 사치스러운 생활을 영위한다는 지적이 잇따른 데 따른 조치로 보인다. 39년 왕좌에 앉았던 카를로스 전 국왕은 상당한 재산을 은닉한 혐의로 스위스 금융당국의 조사를 받고 있기도 하다. 현지 언론들은 전 국왕이 사우디아라비아의 페이퍼 컴퍼니 계좌를 통해 1억 달러의 뇌물을 챙긴 것으로 의심된다고 보도했다. 물론 왕실은 이런 의혹 제기에 가타부타 어떤 입장도 내놓지 않고 있다. 스페인 왕실 사정에 정통한 이들은 아들이 국왕이 아버지의 불미스러운 일들에 얽히고 싶지 않아 ‘거리 두기’에 나선 것으로 보고 있다.후안 카를로스 전 국왕은 스페인 내전을 승리한 뒤 파시스트 독재자로 36년을 군림한 프란시스코 프랑코 총통이 1975년 숨지자 이틀 만에 왕위에 올랐다. 프랑코 지지자들은 그가 절대군주제를 지켜줄 것을 바랐지만 입헌 군주제를 받아들여 의회에 권력과 권한을 상당 부분 넘겨주고 자신은 상징적 존재로 물러섰다. 카탈루냐와 바스크 같은 독립하려는 민족들을 다독여 진정시켰고, 1981년 군부 쿠데타를 사전에 와해하는 데도 큰 역할을 했다.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기 몇년 전까지 국민들에게 많은 신망을 얻었으나 2012년 아프리카 보츠와나에서 코끼리 사냥을 즐기는 등 사치를 누렸고, 막내딸 크리스티나 공주와 남편 이나키 우르단가린 부부의 부패 혐의에 연루돼 존경을 잃어 결국 선위를 결심하기에 이르렀다. 임병선 기자 bsnim@seoul.co.kr
  • 조국 아들 입시비리 연루, 최강욱 청와대 비서관 사의

    조국 아들 입시비리 연루, 최강욱 청와대 비서관 사의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자녀 입시 비리에 연루된 혐의로 기소된 최강욱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이 16일 사의를 표명했다. 자녀의 입시 비리와 관련한 조 전 장관의 재판이 이번 주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하자 이에 연루된 자신이 문재인 정부에 부담을 주는 상황을 피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최 비서관은 이날 오전 페이스북에 ‘사직의 변’이라는 제목의 글을 올려 공직기강비서관직에서 물러나겠다는 뜻을 밝혔다. 최 비서관은 “소임을 다하고자 노력했으나 뜻하지 않게 ‘날치기 기소’라는 상황을 만나 형사재판을 앞두게 됐다”며 “문재인 정부의 성공과 대통령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더 이상 대통령에게 부담을 드리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최 비서관은 “촛불시민의 명령을 거스르려는 특정 세력의 준동은 대통령을 포함해 어디까지 비수를 들이댈지 모르는 지경에 이르렀다”면서 “이는 결코 좌시할 수 없는 일”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더구나 역사의 수레바퀴를 어떻게든 되돌리려는 집요한 음모를 마주하고도 뒷전에서 외면할 수는 없다”고 강조했다. 최 비서관은 “고요한 것처럼 보여도 커다랗게 출렁이는 깊은 바다가 있다”며 “그 바다를 포기하지 않는 강물처럼 주저 없이 그 길로 가고, 바위처럼 굳건하게 촛불시민과 문재인 정부의 역사를 지켜내고 싶다”고 적었다.이어 “저는 늘 그래왔듯이 앞으로도 역사와 직면할 것이며 우리 사회의 거침없는 발전과 변화를 위해 어디서든 주어진 소임을 다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최 비서관은 법무법인 청맥 변호사로 일하던 2017년 10월 조 전 장관 아들의 인턴활동 확인서를 허위로 발급해줘 조 전 장관과 함께 대학원 입시 업무를 방해한 혐의로 지난 1월 23일 기소됐다. 조 전 장관의 아들은 이 인턴활동 확인서를 고려대·연세대 대학원 입시에 제출해 모두 합격했으나 검찰은 인턴활동 내역이 허위라고 봤다. 검찰이 자신을 기소하자 최 비서관은 변호인을 통해 “검찰권을 남용한 ‘기소 쿠데타’”라고 강하게 비판한 바 있다. 윤창수 기자 geo@seoul.co.kr
  • 소련은 하루에 무너지지 않았다

    소련은 하루에 무너지지 않았다

    1991/마이클 돕스 지음/허승철 옮김/모던아카이브/672쪽/3만 5000원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본인은 독립국가연합 창설에 관한 정국상황에 따라 소비에트 공화국 연방 대통령으로서의 활동을 마칩니다.”●1980년 티토 사망부터 1991년 소련 해체까지 재해석 1991년 12월 25일 오후 7시 정각,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이 2억 8000만 소련인들에게 했던 소련 해체 공식 선언. 볼셰비키 세력이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겨울 궁전을 습격한 지 74년 만에 공산주의 종주국이 지구상에서 사라졌다.워싱턴포스트 모스크바 지국장 출신 언론인 마이클 돕스는 ‘1991’을 통해 진부한 테마일 수 있는 ‘공산주의의 종언’을 색다르게 파고든다. 소련 해체의 시작과 과정, 종말을 12년에 걸쳐 일어난 굵직한 사건들로 재해석한 역작. 옮긴이의 말대로 ‘소련 붕괴’라는 한 주제를 놓고 수십 대의 카메라가 균열이 벌어진 곳을 찾아가 생생하게 중계하듯이 생동감 있게 풀어나간다. 그동안 소련 붕괴의 신호탄은 여러 각도에서 분석돼왔다. 1986년 소련 체제의 기술적 무능력을 노출한 체르노빌 원전 사고, 1985년 고르바초프의 소련 공산당 서기장 취임, 1953년 스탈린 사망…. 이 책의 특징은 소련의 내부적 요인보다는 동유럽 공산정권의 균열과 동요, 아프간 침공 같은 과도한 팽창이 소련 붕괴의 직접적 원인이었음을 지목하고 풀어낸 점이다. 저자는 반볼셰비키 혁명, 다시 말하면 소련 해체의 시작 지점을 1980년 5월 유고슬라비아 국부, 티토의 사망으로 잡는다. 티토의 사망 말고도 소련 몰락을 설명하는 역사적 사건들은 책에 숱하다. 레닌조선소 파업에 따른 계엄령, 대한항공 007편 격추, 미소 정상회담, 체르노빌 원전 폭발사고, 보리스 옐친 정치국 축출, 조지아 트빌리시 대학살, 베를린 장벽 붕괴, 8월 쿠데타….●“고르바초프는 공산주의를 해체한 공산주의자” 책의 특장은 소련 붕괴와 관련한 역사적 사건과 인물을 맛깔스럽게 버무려 독자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현장의 ‘살아 있는’ 스토리텔링이다. 독재자 브레즈네프의 위상과 관련해선 “집권 16년 차에 들어서면서 신격화된 존재인 동시에 국가적 광대가 되었다”며 “우상화가 지나친 나머지 비웃음을 살 정도에 이르렀다”고 꼬집는다. 폴란드 노조 지도자인 레흐 바웬사와의 만남 대목도 흥미롭다. 왜 기자들을 피하는 다른 지도자들과 달리 기자를 만나주느냐는 질문에 바웬사는 “사람들에게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는 답을 했다고 전한다. 대한항공 007편 격추 상황도 눈길을 끈다. “미사일이 두 비행기 사이의 거리인 약 8㎞를 날아가는 데 대략 30초가 걸렸다. 소련 전투기 조종사 오시포비치가 오른쪽으로 벗어나는 동안 적기가 바다로 곤두박질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오스포비치가 흥분된 목소리로 보고했다. ‘목표 파괴됨’” 그런가 하면 미하일 고르바초프에 대해 저자는 “공산주의를 해체한 공산주의자, 혁명을 시작했지만 결국 자신이 착수한 혁명의 희생자”라 평가한다. 그렇다면 소련 해체에 가장 결정적인 요인은 무엇이었을까. 저자는 “공산주의가 사라지게 한 공에 있어서 어떤 사건이나 인물도 결정적이지는 않았다”고 말한다. 공산주의는 어느 한 개인이나 집단에 패배한 게 아니라 결국 자멸했다는 주장이다. ●“공산주의 유령 여전… 현대사회와 통합이 가장 큰 도전” 많은 전문가들은 20세기 내내 긴 그림자를 드리우다가 실패한 공산주의가 다음 세기까지 파장을 미칠 것으로 보고 있다. 핵 전쟁의 위협이며 환경 재앙, 대규모 전쟁, 마피아 국가의 부상처럼 인류의 미래를 위협할 ‘재앙 시나리오’의 상당수가 과거 공산 세계에서 비롯됐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빅브라더가 죽었을지라도, 공산주의라는 유령은 앞으로 수십년 동안 우리 앞에 출몰할 것”이라 전망한 저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포스트공산주의 사회를 현대세계와 통합하는 일은 오늘날 국제사회가 직면한 가장 큰 도전일 것이다. 이런 난제를 풀기 위해 우선 어떻게 그런 문제가 시작되었는지 이해해야 한다.”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 빈살만 왕위 계승 막으려던 사우디 前왕세자

    빈살만 왕위 계승 막으려던 사우디 前왕세자

    지난 6일 갑자기 체포된 사우디아라비아 왕족 두 명이 무함마드 빈살만 왕세자의 왕위 계승을 막기 위해 구체적인 논의를 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11일(현지시간) 사우디 왕실 소식통 세 명의 말을 인용한 가디언에 따르면 살만 빈 압둘아지즈 왕의 유일한 동복형제인 아흐메드와 전 왕세자 무함마드 빈나예프에 대한 체포 명령은 두 사람의 은밀한 대화가 궁중에 전해진 직후 내려졌다. 두 사람은 왕실충성위원회를 통해 무함마드 왕세자를 끌어내리려 한 혐의를 받고 있다. 왕실충성위원회는 왕이나 왕세자가 사망할 경우 원활한 권력 이양을 위해 2007년 설립된 기구다. 2017년 당시 왕위계승 서열 1위이자 사실상 국가지도자였던 무함마드 빈나예프를 왕세자 자리에서 끌어내리고 빈살만을 34명 중 31명 찬성으로 현재 왕세자 자리에 올려 놓은 것도 이 위원회다. 위원회 구성원인 아흐메드는 2017년 조카 빈살만 왕세자에게 반대표를 던졌던 3명 중 한 명으로 알려졌다. 가디언 소식통 중 두 명은 고위 왕실 간부들이 아흐메드를 현재 공석인 왕실충성위원회 의장으로 세우려 했다고 전했다. 이를 통해 아흐메드가 왕족과 성직자, 부족 지도자들의 논의를 장악해 새로운 왕위 계승자 후보를 내세울 계획이었다는 얘기다. 두 사람의 체포 직후 갖가지 추측이 나돌았다. 건강이 갑자기 악화된 살만 왕이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기 위한 작업을 시작했다거나, 두 사람이 쿠데타를 모의했다는 주장 등이다. 하지만 모두 근거가 약했다. 이번에 드러난 두 사람의 혐의는 쿠데타엔 미치지 못했으며, 살만 왕은 지난 1주일 동안 서방 측 외교당국자들과 만나 맑은 정신과 집중력을 보여준 것으로 전해졌다. 체포된 두 사람은 이틀 뒤인 8일부터 가택연금에 들어갔다. 아버지 살만 왕이 두 차례에 걸쳐 왕위 계승 서열을 뜯어고친 끝에 왕세자가 된 빈살만은, 2017년 세자 책봉 직후 리야드 리츠칼튼 호텔에 잠재적 왕위 경쟁자들을 억류한 뒤 재산을 압류하고 충성 서약을 받는 등 대대적인 ‘피의 숙청’을 벌인 바 있다. 2018년엔 자신에 비판적이었던 자말 카슈끄지 기자 살해와 시신 훼손을 지시했다. 일련의 사건으로 많은 비판에 직면해 있지만, 이제 그에게서 왕위를 빼앗을 수 없다는 견해가 왕실에 널리 퍼져 있다고 가디언은 전했다. 김민석 기자 shiho@seoul.co.kr
  • 서열 높은 삼촌까지 숙청 작업… 빈살만의 왕위 계승 굳히기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인 무함마드 빈살만이 자신의 왕위 계승에 방해가 될 수 있는 왕족 3명을 체포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왕세자가 왕위를 물려받을 준비를 마무리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7일(현지시간) 가디언, BBC에 따르면 전날 왕국의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3명이 체포됐다. 이들은 살만 빈 압둘아지즈 왕의 동생 아흐메드 빈 압둘아지즈, 조카 무함마드 빈 나예프와 그의 동생 나와프 빈 나예프로, 무함마드 왕세자에겐 삼촌과 사촌 형제들이다. 워싱턴포스트 등 미국 언론은 이들이 체포된 혐의는 반역 모의라고 보도했다. 체포된 3명은 무함마드 왕세자의 왕위 계승에 걸림돌이 될 수 있는 인사들이다. 특히 무함마드 빈 나예프는 무함마드 왕세자보다 왕위 계승 서열에서 우위에 있었다. 2015년 집권한 현 국왕은 왕위 계승 서열을 재차 바꿔 2017년엔 형제 계승 원칙을 깨고 자신의 아들을 왕세자로 책봉했다. 무함마드 왕세자는 책봉된 2017년에 왕실 유력 인사 수십명을 한꺼번에 비리 혐의로 리야드 리츠칼튼 호텔에 연금했다가, 재산 헌납과 충성 서약을 받고 풀어줬다. ‘궁중 쿠데타’로 불리는 당시 사건 이후 많은 유력인사가 힘을 잃고 사실상 숙청됐다. 쿠데타에 앞서 계승 서열 1위와 내무장관직에서 물러났음에도 이 사건 이후 사실상 가택연금 상태였던 무함마드 빈 나예프가 대표적이다. 그는 왕위에 욕심이 없다고 기회가 될 때마다 밝혔지만 이번에 또 체포됐다. 체포는 무함마드 왕세자가 아버지에게 왕위 계승을 촉구하는 신호라는 분석이 있다. 살만 왕의 건강이 급격히 나빠져 왕세자가 삼촌과 사촌 형제들의 쿠데타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선수를 쳤다는 주장도 있다. 왕세자는 2018년 쿠데타를 집요하게 취재한 자말 카슈끄지 기자 살해를 지시했다는 의심을 받고 있으며, 관련 정황을 미 중앙정보국(CIA)이 공개하기도 했다. 이런 왕세자의 잇따른 폭군적 행동으로 세자 자격에 문제를 제기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당시 영국 런던에서 망명 생활을 하던 아흐메드가 왕위 계승자 자격이 있다는 주장이 일자 왕세자는 삼촌을 강제 귀국시켜 감시해 왔다. 살만 왕은 아들이 논란을 일으키고 있음에도 그에게 대규모 국가건설 사업과 이슬람의 구시대적 성차별 제도를 없애는 등의 개혁 작업을 맡기며 힘을 실어 주려 노력해 왔다. 특히 가디언에 따르면 전날 왕세자가 발부한 체포 영장에 직접 서명한 것도 살만 왕이다. 사우디 궁내 음모에 정통한 전직 고위 외교관은 “무함마드의 왕위 계승이 임박했다”면서 “이번 숙청은 이에 따른 이견을 제거하기 위한 체계적인 절차로 보인다”고 말했다. 김민석 기자 shiho@seoul.co.kr
  • 아르헨서 나치 1만 2000명 명단, 유대인 자금 찾을 길 열릴까

    아르헨서 나치 1만 2000명 명단, 유대인 자금 찾을 길 열릴까

    1930년대 남미 아르헨티나로 이주한 독일 나치 1만 2000명의 명단이 공개됐다. 특히 이번 명단에 크레디트스위스의 전신인 스위스 은행으로의 자금 흐름이 다수 발견돼 유대인들이 나치에 빼앗겼던 자금을 환수할 수 있는 길이 열릴지 주목된다. 5일(현지시간) 영국 BBC와 미국의 유대인 인권단체인 시몬 비젠탈 센터에 따르면 최근 아르헨티나 연구자들이 자국 내 나치 명단을 발굴해 센터와 공유했다. 이 문서는 아르헨티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오래된 창고의 한 방에서 발견됐는데 이곳은 이 나라에 이주한 나치 인사들이 본부로 삼았던 건물이다. 아르헨티나에는 1930년부터 1938년까지 친나치 성향의 군사정권이 들어섰는데 본 페페(Von Pepe)란 별명으로 유명했던 호세 펠릭스 우리부루와 후계자 아구스틴 페드로 주스토가 대통령을 역임했다. 친나치 성향 호세 펠릭스 우리부루 정권이 들어선 1930년대 이주한 나치 인사들이 본부로 쓰던 건물이었다. 나치의 2인자이며 홀로코스트를 입안하고 주도한 아돌프 아이히만도 2차 세계대전 와중에 아르헨티나로 달아나 숨었다. 파시즘을 옹호하는 아르헨티나 군사정권은 나치 인사들에게 안전한 도피처로 여겨졌다. 1938년 반나치 로베르토 오티스 정권이 들어선 후 특별위원회가 구성돼 아르헨티나 내 나치 현황을 조사해 이 명단 등을 작성했는데 1943년 군사 쿠데타로 다시 들어선 친나치 정권이 관련 자료들을 폐기했다.그랬는데 당시 파기되지 않았던 명단이 이번에 페드로 필리푸치가 주도하는 조사팀이 발굴한 것인데 크레디트스위스의 전신인 ‘Schweizerische Kreditanstalt’으로의 자금 흐름이 다수 발견됐다고 시몬 비젠탈 센터는 설명했다. 과거 스위스 은행들은 비밀을 엄격히 지켜준다며 유대인의 계좌를 나치로부터 보호했지만 동시에 나치 독일이 약탈한 유대인 재산 가운데 상당수도 스위스 비밀 계좌로 흘러 들어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나치는 1935년 유대인 재산을 빼앗을 수 있도록 법을 만든 뒤 5년 뒤 홀로코스트(유대인 대학살)를 시작하며 엄청난 양의 재산을 약탈했다. 이에 따라 시몬 비젠탈 센터는 크리스티안 쿵 크레디트 스위스 부총재에게 명단 가운데 휴면계좌를 파악해 달라고 요청했다. 센터 측은 은행에 보낸 서한을 통해 “이들 계좌에 유대인 희생자들로부터 빼앗은 자금이 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한다”며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이 모두 세상을 떠나기 전에 은행이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와 관련해 크레디트 스위스는 AFP통신에 보낸 성명을 통해 1997∼1999년 이미 볼커 조사(Volcker inquiry)라 불리는 유대인 휴면계좌 찾기에 협조했다면서도 “다시 들여다보겠다”고 말했다. BBC는 친절하게도 당시 보고서를 링크 걸었다. 아이히만은 1960년까지 잘 숨어 지내다 이스라엘 모사드 요원 등에 의해 납치돼 1961년 예루살렘 법정에 세워져 교수형을 선고받았다. 임병선 기자 bsnim@seoul.co.kr
  • 이집트 30년 철권 통치 무바라크 사망

    이집트 30년 철권 통치 무바라크 사망

    2011년 ‘아랍의 봄’ 민주화 혁명 때 축출 ‘시위대 학살’ 종신형… 91세 지병으로 숨져2011년 ‘아랍의 봄’ 민중봉기 때 축출된 호스니 무바라크 이집트 전 대통령이 25일(현지시간) 사망했다. 91세. AP통신은 이집트 국영TV를 인용해 무바라크 전 대통령이 수도 카이로의 한 병원에서 지병으로 숨졌다고 전했다. 전투기 조종사 출신인 무바라크는 1969년 공군 참모총장에 올라 제3차 중동전쟁(1967)에서 이스라엘에 참패한 이집트 공군을 재건했다. 1973년 제4차 중동전쟁(욤키푸르 전쟁)에서 이스라엘군을 몰아붙여 전쟁영웅으로 떠올랐다. 그는 전쟁에서 얻은 명성에 힘입어 1975년 안와르 사다트 정부에서 부통령으로 임명됐다. 1979년 집권 국민민주당(NDP) 부의장에 선출되면서 사다트의 후계자 자리를 굳혔다. 사다트는 1979년 아랍권 국가 가운데 최초로 이스라엘과 평화협정을 체결했다가 1981년 이슬람 원리주의자에게 암살됐다. 부통령이던 무바라크는 국민투표를 통해 대통령직을 이어받았다. 그는 사다트 시절 탈퇴했던 아랍연맹에 복귀하고 라이벌인 사우디아라비아와 화해하는 등 ‘아랍 회귀’를 추진해 중동의 맹주로 떠올랐다. 유엔 사무총장과 아랍연맹 사무총장,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무총장을 모두 배출해 국제적 위상도 높였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평화협상을 중재해 중동 평화에 일정 부분 역할을 했다. 미국과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반면 국내 정치에서는 억압적이었다. 정보기관을 이용해 철권통치를 펼쳤다. 국영기업이 전체 고용의 절반 이상을 차지할 만큼 경제도 나빠졌다. 이 때문에 무바라크는 ‘현대판 파라오’로 불릴 정도로 무자비한 독재자로 평가받는다. 집권 말기에는 자신의 둘째 아들 가말에게 권력을 세습하려 한다는 분석도 많았다. 그러나 2011년 중동과 북아프리카를 휩쓴 ‘아랍의 봄’을 비켜 가지 못했다. 국내외의 비난 속에서도 그해 2월 당시 집권당이던 민족민주당은 무바라크가 대선에 단독 출마한다고 발표했다. 논란이 커지자 무바라크가 직접 나서 “집권을 연장할 계획은 없다”고 진화에 나섰다. 하지만 튀니지에서 시작된 민주화 혁명이 이집트로도 넘어왔고 시민들이 카이로의 타흐리르(해방) 광장에 모여들었다. 군과 경찰의 무력 진압으로 840여명이 목숨을 잃었다. 무바라크를 지지하던 버락 오바마 미국 행정부가 등을 돌리면서 이집트 국민의 저항이 더욱 거세졌다. 결국 그는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하지만 무바라크는 제대로 처벌받지 않았다. 이집트에서는 무바라크가 축출된 뒤 잠시 이슬람 조직 ‘무슬림형제단’ 정권이 집권했지만 군부 쿠데타로 축출됐다. 그 뒤로 무바라크에게 우호적인 군 장성 출신 압둘팟타흐 시시 대통령이 집권했다. 무바라크는 2011년 4월 두 아들과 함께 부패 및 권력 남용, 군경의 시위대 학살을 막지 못한 혐의 등으로 기소됐다. 2012년 6월 종신징역형을 선고받았지만 이듬해 항소법원이 재심을 명령했다. 2015년 재심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지만 고령과 건강 악화를 이유로 2015년 10월 석방됐다. 2017년 3월 항소법원이 사면을 선고했다. 그 뒤로 지중해 샤름엘셰이크의 자택에서 지내던 그는 대중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다가 지난해 10월 유튜브에 등장해 욤키푸르 전쟁을 회상해 눈길을 끌었다. 무바라크는 집권 당시 북한에 우호적인 지도자로도 유명하다. 무바라크는 북한의 김일성 주석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1980년부터 1990년까지 네 차례나 북한을 방문했다.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 30년 철권 통치 무바라크 이집트 전 대통령 92세 일기로 운명

    30년 철권 통치 무바라크 이집트 전 대통령 92세 일기로 운명

    30년 동안 철권 통치를 휘두르다 2011년 군부 쿠데타로 쫓겨났던 호스니 무바라크 전 이집트 대통령이 카이로에서 92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다. 지난달 늦게 수술대에 올랐고 회복 중 손자와 함께 찍은 사진이 공개됐는데 25일 아침(이하 현지시간) 군 병원에서 사망했다고 알와탄 웹사이트가 가장 먼저 보도했다. 나중에 국영 매체들도 그의 죽음을 확인했다고 영국 BBC가 전했다. 앞서 아들 알라는 아버지가 지난 11일 응급실에서 투병 중이라고 밝혔다. 1928년에 태어난 그는 10대 시절 공군에 들어가 1973년 아랍-이스라엘 전쟁 과정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10년도 안돼 안와르 사다트 전 대통령이 암살되자 대통령에 올라 이스라엘-팔레스타인 평화과정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의 재직 시 군부에 엄청난 돈이 지원됐지만 실업률, 빈곤, 부패는 늘어만 갔다. 2011년 1월 이웃 나라 튀니지 대통령이 민중 봉기에 실각하자 이집트 국민들도 봉기에 나섰고, 단 18일 만에 그는 물러났다. 그 뒤 1년여 만에 무슬림 정치인 모하메드 모르시가 이집트에서 처음 치러진 민주 선거로 대통령에 올랐다. 하지만 모르시 역시 1년도 안돼 또다시 군부에 의해 축출됐고, 지난해 감옥에서 사망했다. 고인은 아랍의 봄 때 900여명의 시위대원들을 살해하라고 보안군에 지시를 내렸다는 이유로 유죄 판결을 받았지만 나중에 무죄로 번복돼 2017년 3월에 석방됐다. 한편 북한은 1973년 제4차 중동전쟁 때 이집트에 전투기와 조종사를 지원했고 당시 공군참모총장이었던 무바라크는 이를 계기로 북한과 각별한 관계를 구축한 것으로 알려졌다. 무바라크는 김일성 북한 주석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1980년부터 1990년까지 네 차례나 북한을 방문했다. 임병선 기자 bsnim@seoul.co.kr
  • 코로나19 이전 우한이 매일 1면에 나오던 시절

    코로나19 이전 우한이 매일 1면에 나오던 시절

    중국 후베이성 우한은 코로나19(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확산의 진원지로 주목을 받기 전까지 세계에 잘 알려지지 않은 도시였다. 하지만 2세기 전 주요 공업도시로 이름을 떨쳤고, 1911년 중국 혁명의 요람으로도 서구에 잘 알려졌었다. 22일(현지시간) CNN에 따르면 우한은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중반까지 정기적으로 국제 언론에 등장하는 도시였다. 특히 차와 비단 등 거래 중심지로, 서양 사람들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러다 2차 세계대전 뒤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나 단단한 ‘대나무 장막’이 쳐졌다. 국제 무역이 중단되고 외국 회사는 우한을 떠났다. 우한은 우창, 한커우, 한양 등 3개 지역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각각 당시 세계 최대 도시였던 영국 런던의 절반 크기였다. 우한은 1850년 당시 이미 인구 100만의 대도시였다. 2차 아편전쟁 이후인 1860년대부터 외국인들이 몰려들었다. 우한은 본질적으로 산업도시였다. 1900년 미국 잡지 콜리어 기사에서 신흥도시 우한은 ‘중국의 시카고’라고 불렸다. 주요 산업의 중심으로 철과 철강, 비단과 면화, 차, 식품 통조림 등을 생산했기 때문이다. 1911년 중국의 마지막 황조를 전복시킨 공화주의 혁명은 우연이지만 우한에서 촉발됐다. 한커우에서 공화주의 혁명가가 실수로 일으킨 폭발로 경찰이 조사하던 중 혁명 계획이 발각되고 벼랑 끝에 몰린 반군이 우창 봉기를 시작으로 서둘러 계획을 실행했다. 이로 인해 신해혁명이 일어나 267년 청나라 왕조가 끝났다.1927년 유나이티드프레스의 상하이 특파원이었던 랜들 굴드는 당시 후베이성의 정치적 혼란에 대한 기사를 쓰며 이 용어를 다시 사용했다. 이후 ‘중국의 시카고’라는 말은 전세계 신문에 수백번 등장하는데 이유는 우한이 약 15년 만에 다시 혁명의 소용돌이 한가운데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당시 쿠데타를 일으킨 장제스의 잔인한 탄압으로 중국 공산당은 거의 궤멸하다시피 했다. 이에 반대하는 왕징웨이는 우한에 별도 정부를 세웠지만 군사력의 열세로 정권은 6개월 만에 붕괴됐다. CNN에 따르면 당시 우한은 서구 언론의 1면에 계속 등장했다. 우한은 서구 선진 제조업 기술과 시설을 받아들여 산업도시로 번성했다. 하지만 이런 장점은 1930년대 후반 일본 제국주의의 표적이 됐다. 1937년 일본은 중국 동부를 침략해 상하이를 폭격하고 난징에서 끔찍한 학살과 강간을 자행했다. 장제스 정부는 우한으로 후퇴해 임시정부를 세웠다. 하지만 1938년 우한은 일본에 함락됐다. 일본은 우한의 산업을 해체해 전시 중공업 중추였던 충칭으로 운반했다. 그럼에도 사통팔달이었던 우한은 산업 중심지, 내륙 항구의 입지를 유지했고 1950년대 주요 철도 노선을 연결하는 종점이 됐다. 하지만 외국 기업들이 빠져나오면서 세계의 주목을 받지 못하게 됐다. 1980년대 혼다, 시트로앵, 제너럴모터스(GM) 등이 우한에 투자하면서 도시가 다시 번창했다. CNN은 “그럼에도 우한은 (코로나19 발병 전까지) 좀처럼 1면엔 오르지 못했다”고 썼다. 김민석 기자 shiho@seoul.co.kr
  • 진중권 “檢개혁 물 건너갔다…‘권력의 애완견’ 전락”

    진중권 “檢개혁 물 건너갔다…‘권력의 애완견’ 전락”

    “‘민주적 통제’가 ‘민주당 통제’로 전락”“산 권력엔 무딘 칼조차 대지 못하는 檢”“조국, 검찰개혁 자신의 형상대로 만들어”추미애 법무부 장관이 지난 11일 취임 후 첫 기자간담회에서 검찰의 수사와 기소 주체를 분리하는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밝힌 가운데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가 “검찰 개혁은 이미 물 건너갔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진 전 교수는 12일 페이스북에 추 장관과 관련해 장문의 글을 올려 “어용검사를 동원해 기를 쓰고 정권실세에 대한 기소를 막고, 공소장 공개를 막다가 실패했다”며 “그래서 부랴부랴 마지막 카드로 꺼내든 것이 수사검사와 기소검사의 분리”라고 지적했다. 이어 “이 경우 수사검사가 열심히 수사를 해도 기소검사가 그냥 기소를 안 해 버릴 가능성이 생긴다”고 비판했다. 그는 “검찰개혁은 이미 물 건너갔다”며 “검찰개혁의 취지는 원래 검찰을 권력의 영향을 받지 않는 독립적인 기구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 취지를 한 마디로 요약한 것이 ‘살아있는 권력에도 칼을 대라’는 윤석열 검찰총장 취임사에서 대통령이 한 말씀”이라고 밝혔다. “기소검사가 기소 안 해버릴 가능성” 진 전 교수는 “(추 전 장관은) 초법적인 조치로 검찰의 칼날이 살아있는 권력을 향하지 못하도록 막고 있다”며 “‘민주적 통제’라는 허울 좋은 명분으로 검찰을 권력의 애완견으로 만들기 위해 기를 쓰고 있다. ‘민주적 통제’가 ‘민주당 통제’로 전락했다”고 주장했다. 또 “본인도 이게 무리수라는 것을 알 거다. 그러니 ‘정치적 책임을 지겠다’라고 한 것”이라며 “나중에 법적 책임을 져야 할지도 모른다. 그가 무리수를 두는 것은 당연히 정치적 야심 때문일 것”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죽은 권력엔 날카로운 칼날, 산 권력엔 무딘 칼날을 들이대 온 검찰을 바꾸는 게 그들이 추진하고, 또 많은 국민이 지지했던 ‘개혁’의 방향이었을 것”이라며 “그 개혁의 결과는 죽은 권력엔 날카로운 칼날을 대면서도 산 권력엔 무딘 칼조차도 들이대지 못하는 검찰로 귀결됐다”고 지적했다.진 전 교수는 “개혁은 이뤄졌는데 실은 아무 개혁도 이루어지지 않은 거다. 외려 상황은 악화됐다”며 “공수처(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도 마찬가지다. 막강한 권력을 가졌다는 검찰도 저렇게 흔들리는데, 그 조그만 기구가 저 막강한 권력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라고 반문했다. 아울러 “검찰개혁이 ‘진정성’을 인정받으려면 산 권력에 대한 수사나 기소는 막지 말았어야 한다”며 “‘피의자 인권’ 타령은 그 칼날이 죽은 권력을 향했을 때에 나왔어야 한다. 검찰의 ‘무리한 수사’에 대한 비난은 헌법연구관, 박찬주 대장, 쿠데타 문건 연루자들, 최경환, 권성동, 김성태 의원 등이 줄줄이 무죄판결 받았을 때부터 나왔어야 한다”고 말했다. “권력에 대한 안전장치 악용 가능성” 그는 “수사검사와 기소검사의 분리는 애초의 취지는 가상했을지 모르나, 실제로는 권력에 대한 기소를 가로막는 마지막 안전장치로 악용될 가능성이 있다”며 “이 분들이 그 동안 검찰의 소환을 거부하고, 소환돼서는 조사를 거부하고, 조사 후에는 기소를 거부해 왔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 우려는 더욱 더 커진다”고 밝혔다. 끝으로 그는 “이게 그 많은 사회적 비용을 들여 이룩한 검찰개혁의 실상”이라며 “성서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대로 인간을 만드셨다고 한다. 결국 조국도 검찰개혁을 자신의 형상대로 만든 것이다. 검찰개혁은 곧 조국이다”라고 말했다. 정현용 기자 junghy77@seoul.co.kr
  • “CIA의 후안무치한 암호해독기 장사, 한국 등 120개국 당해”

    “CIA의 후안무치한 암호해독기 장사, 한국 등 120개국 당해”

    미국 중앙정보국(CIA)과 옛 서독 정보기관 BND가 긴밀히 협력해 수십년 동안 120개국 정부에 암호장비를 팔아 이를 통해 기밀로 분류된 각국 정부 문서들을 살펴봤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암호장비 제작과 판매에서 독보적인 위상을 자랑한 스위스 회사 ‘크립토 AG’가 두 정보기관이 사실상 공동 소유하고 있었다. 한국 정부도 이 기업의 우수한 고객 중 하나였다. 미국 일간 워싱턴 포스트(WP)는 11일(현지시간) 독일 ZDF 방송, 스위스 방송 SRF와 함께 기밀인 CIA 작전자료를 입수해 크립토 AG가 2차 대전 당시 미군과 첫 계약을 맺은 이후 각국 정부에 암호 장비를 판매해 왔는데 이 장비에 미리 장치를 심어둬 자국의 첩보요원 및 외교관, 군과 각국 정부가 어떻게 연락을 하는지 손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고 폭로했다. 암호 장비를 구입한 정부는 120개국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번에 62개국이 확인됐다. WP가 입수한 문서는 CIA 내부 기관인 정보연구센터가 2004년 완성한 96쪽짜리 작전 문건과 2008년 독일 정보당국이 구술을 모아 정리한 편집본들이다. CIA와 BND는 코멘트 요청을 거절했으나 문건의 진위를 따지진 않았다고 WP는 전했다. 또 문건 제공자가 발췌본만 공개할 수 있다는 입장을 고수했다며 일부 발췌본만 지면과 홈페이지에 실었다. CIA와 BND는 미리 프로그램을 조작해 이 장비를 통해 오가는 각국의 기밀정보를 ‘가만 앉아’ 취득하면서 장비 판매 대금으로 수백만 달러를 챙기는 ‘도랑도 치고 가재도 잡는’ 격이었다. 한국과 일본, 인도와 파키스탄, 미국과 이란, 사우디아라비아, 바티칸 교황청도 고객이었다. 1980년대 이 회사의 ‘우수 고객’은 세계 분쟁지역의 리스트나 다를 것이 없었다. 1981년을 기준으로 사우디가 가장 큰 고객이었으며 이란과 이탈리아, 인도네시아, 이라크, 리비아, 요르단에 이어 한국이 뒤를 이었다고 WP는 전했다.입수 문건에는 미국과 동맹국이 다른 나라들을 오랫동안 이용해 장비 판매대금으로 돈도 받고 기밀도 빼낸 내역이 들어 있으며 자칫 작전을 망치게 할 뻔한 내부갈등도 들어있다고 한다. 이 장비를 통해 1979년 이란에서 발생한 미국인 인질 사태 당시 CIA는 이란의 이슬람율법학자들을 감시할 수 있었고, 포틀랜드 전쟁 당시엔 아르헨티나군의 정보를 빼내 영국에 넘길 수 있었다. 남아프리카공화국 독재자들의 암살 과정과 1986년 리비아 당국자들이 베를린 나이트클럽에서 폭탄테러가 발생하자 자축하는 과정도 고스란히 들었다. 이 작전에는 애초 ‘유의어사전’이라는 뜻의 ‘Thesaurus’라는 암호명이 붙었다가 나중에 ‘루비콘’으로 변경됐다. WP는 CIA 역사상 가장 대담한 작전이라고 평가했다. CIA 작전사에도 “세기의 첩보 쿠데타”라는 표현이 등장한다고 한다. 1980년대 미국 정보기관들이 입수한 해외 첩보의 40% 정도가 이 경로를 통해 취득한 것이었다. 그러나 미국의 주된 타깃이었던 옛 소련과 중국은 이 장비를 절대 쓰지 않았다. 그들은 이 회사가 서방과 연계돼 있다고 의심했던 것이다. 하지만 CIA는 다른 나라들이 옛 소련이나 러시아 정부와 연락, 소통하는 과정을 추적해 상당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WP는 설명했다. 1990년대 초에 들어서 BND는 발각의 위험이 너무 크다고 보고 작전에서 발을 뺐다. 반면 CIA는 독일이 갖고 있던 지분을 사들여 계속 작전을 이어가다가 2018년이 돼서야 물러섰다. 이즈음 국제 보안시장에서 온라인 암호 기술이 확산돼 크립토 AG의 효용 가치가 떨어진 탓이었다. 2018년 한 투자자가 일부 지분을 사들여 스웨덴 기업 크립토 인터내셔널로 바뀌었는데 이 회사는 “CIA나 BND와 아무런 연관이 없다”며 이런 보도 때문에 힘들다고 토로했다. 스위스 정부는 지난해 11월 이 사건에 대해 인지했다며 은퇴한 연방법원 판사로 하여금 조사하도록 임명했다. BBC의 제네바 특파원 이모겐 풀크스는 스위스 전역에 분노가 들끓고 있다고 전했다. 한 정치부 기자는 ‘우리 나라의 명성이 산산조각 났다’고 탄식했고, 어떤 이는 “중립성이란 우리 모토가 위선 투성이로 드러났다”고 개탄했다.원래 이 장비는 러시아 발명가 보리스 하겔린이 개발한 휴대용 암호장비로 1940년대 나치의 노르웨이 점령 때 미국으로 망명하며 가져온 것이다. 대전이 종전되자 그는 스위스로 이주했다. 그의 기술이 너무 앞서 있어 미국 정부는 그걸 다른 나라에 팔아치우지 않을까 걱정했다. 해서 미국의 암호해독가 윌리엄 프리드먼이 하겔린을 설득해 미국이 승인한 나라들에만 판매하도록 했다. 그런데 이미 더 오래된 기계들은 다른 나라 정부에 판매된 뒤였다. 1970년대 미국과 옛 서독은 이 회사를 사들여 직원을 고용하고 기술을 디자인하고 판매를 관장하는 등 거의 모든 면에서 통제했다. 이렇게 이들 장치에 정보 은닉 프로그램을 설치해 정보를 빼낸다는 억측은 오래 전부터 있어왔지만 이렇게 입증된 적은 처음이라고 BBC는 전했다. 이번 폭로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중국 통신업체 화웨이가 은밀하게 통신장비에 접근해 정보를 볼 수 있다며 압박 수위를 높여온 것과 맞물려 더욱 주목 받고 있다. 적국은 물론 동맹국 정보까지 빼낸 미국이 화웨이에 이런 주장을 늘어놓을 자격이 있느냐는 시비로 이어질 수 있어서다. 임병선 기자 bsnim@seoul.co.kr
  • 무장 군경 앞세워 국회 점거한 엘살바도르 대통령

    무장 군경 앞세워 국회 점거한 엘살바도르 대통령

    엘살바도르에서 대통령이 무장 군경을 대동하고 국회에 진입하는 초유의 일이 벌어졌다. 10일(현지시간)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나이브 부켈레 엘살바도르 대통령과 대동한 무장 군인과 경찰이 한때 수도 산살바도르에 있는 국회를 점거했다. 군인과 경찰이 국회를 둘러싼 가운데 부켈레 대통령은 의장석에 앉아 두 손을 모으고 기도를 하기도 했다. 이 나라에서 무장 군경이 국회에 들어간 것은 1991년 내전 종식 뒤 처음 있는 일이다. 대통령과 의회 갈등은 치안 예산을 위한 정부의 차입(대출) 계획을 둘러싸고 일어났다. 대통령은 군경 장비 개선을 위한 1억 900만 달러(약 1294억원) 차입 계획을 승인해 달라고 국회에 요구했다. 하지만 84석 중 여당은 11명뿐인 여소야대 국회가 차입 승인에 미온적이자 부켈레 대통령은 “이럴 경우 국민이 반란을 일으킬 권리가 헌법으로 보장돼 있다”면서 지지자들을 향해 “거리로 나와 국회를 압박하자”는 메시지를 보냈다. 지난 9일 임시국회를 열어 이 문제를 처리하자는 대통령의 주장을 군경 수장이 지지했지만, 야당 의원들은 표결 전 더 구체적인 내용을 알아야 한다며 이날 국회를 열지 않았다. 그러자 부켈레가 군경과 함께 의회에 쳐들어간 것이다. 야당 의원들은 부켈레의 행동을 강하게 비난했다. 보수 성향 국민연합당(PCN) 소속 마리오 폰세 국회의장은 “쿠데타 시도”였다고 비판하며 “머리에 총이 겨눠진 채로는 응답할 수 없다”고 말했다. 엘살바도르는 세계에서 살인율이 가장 높은 나라 중 하나로, 부켈레 대통령 취임 직전인 지난해 5월 하루 평균 9.2명이 살해당했다. 지난달엔 3.8명으로 감소했다. 김민석 기자 shiho@seoul.co.kr
  • [곽병찬의 역사앞에서 묻다] 초강대국 틈에 끼여 있는 한반도… 선택지는 ‘화친’뿐, ‘척화’란 없다

    [곽병찬의 역사앞에서 묻다] 초강대국 틈에 끼여 있는 한반도… 선택지는 ‘화친’뿐, ‘척화’란 없다

    오늘은 음력 1월 17일이다. 1637년 오늘 청태종은 이런 조서를 보냈다. 엿새 전 조선의 인조가 보낸 상서에 대한 답이었다. “운명이 아침저녁에 달려 있는데도 오히려 부끄러운 줄을 모르고 헛소리만 하니 무엇이 유익하겠는가.” “이제 네가 살고자 하느냐. 마땅히 빨리 성에서 나와 항복하라. 아니면 싸우고자 하느냐. 그러면 빨리 나와서 한 번 싸워 보자.” 이 치욕적인 내용 앞에서 인조는 그저 안절부절, 목숨 부지에 골몰했다. “(너희는) 왕왕 우리 군사를 오랑캐 도적이라 하지 않았느냐. …어찌하여 나를 잡지 아니하고, 내버려두느냐.” “양의 바탕에 호랑이 껍질이라는 속담이 참으로 너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니더냐.” 청태종의 지적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청을 오랑캐라고 욕하고, 정묘조약을 파기하고, 오랑캐 정벌을 공언한 것도 척화파가 장악한 조정이었고 인조였다. 이튿날(음력 1월 18일) 인조는 항복의 뜻을 밝히되 다만 ‘출성 요구를 거두어 달라’고 애걸하는 내용의 국서를 쓰도록 했다. 출성은 곧 포로라고 여긴 인조는 두려웠다. 이조판서 최명길이 국서를 쓰자, 예조판서 김상헌이 찢었고, 최명길은 다시 붙였다. 그 모습을 본 병조판서 이성구는 분노했다. “화의를 배척하여 나랏일을 이 지경에 이르게 했으니 대감이 적에게 가시오.” 김상헌은 울면서 뛰쳐나갔다. 그해 2월(음력 1월)은 조선 역사상 가장 참혹했다. 남한산성에선 병사와 백성은 추위와 굶주림에 죽어갔고 성 밖에선 수십만 백성이 죽임을 당하거나 노예로 끌려갔다. 조선은 삶은 닭 털 뽑히듯 산 채로 벗겨지고 있었다. 1637년 2월 24일(음력 1월 30일·산성 도피 47일째) 인조가 땅바닥에 엎드려 항복의식을 한 뒤 도성으로 갈 때였다. 포로가 된 1만여 백성이 울부짖었다. “임금이시여, 우리를 버리고 가십니까?” 절규를 외면한 채 돌아온 한양 도성은 “시체가 길거리에 이리저리 널려 있”(인조실록 음력 1637년 2월 1일 자)는 거대한 무덤이었다.“경성에 사는 백성이 가장 혹독하게 화를 당해 남아 있는 자라고는 단지 10세 미만의 어린이와 나이 70이 넘은 사람들뿐인데, 대부분 굶주리고 얼어서 거의 죽게 되었습니다.” 2월 3일 호조의 보고였다. 한성부는 이렇게 요청했다. “백골(白骨)을 묻어 주는 일이야말로 왕정(王政)의 급선무입니다. 적에게 죽은 도성 백성들이 길가에 버려져 있는데, 참혹해서 차마 볼 수가 없습니다. …남정(男丁)을 징발해서 시체를 매장하게 하소서.” 병자호란의 참화는 미물조차 일찍이 예감했던 것이었다. 2월 인조 비인 인열왕후 상에 조문 사절로 찾아온 청의 사신을 사실상 내쫓고, 오랑캐 토벌을 공식화한 뒤였다. 당시 사헌부 장령 홍익한은 “황제를 참칭한 청의 사신을 참수하고 문서를 불살라 버리라”고 요구하고, 청과의 화친을 주장한 “최명길 등의 목을 베라”고 상소했다. 그 서슬에 마부태와 용골대 등 청 사신은 말을 훔쳐 타고 야반도주했다. 청은 이를 갈았다. “…부평 안산의 돌이 옮겨져 놓이고, 영남과 관서지방에서는 물오리가 서로 싸우고, 대구에서는 황새가 진을 치고, 죽령에서는 두꺼비가 행렬을 지어 나가고, 예안의 강물이 끊어졌다. 능에 벼락이 떨어지고, 서울의 땅이 붉게 변했으며, 하루 스물일곱 곳이 벼락을 맞았고, 큰물이 들이닥쳐 동대문이 막혔다. 무지개가 해를 꿰뚫고, 별이 변괴를 일으켰다.” 인조는 불안했다. 그래도 ‘전쟁 불사’를 외치던 자존심은 남아, 직급 낮은 역관을 청에 보내 분위기를 탐색했다. 청태종이 그를 통해 보내온 것은 최후통첩. “지금 척화를 주장하는 자들은 모두 유학자들인데 그들의 붓끝이 어찌 나의 군사를 막을 수 있다는 말인가.” “11월 25일(음력)까지 왕자와 대신을 보내 화의를 요청하지 않으면 조선을 칠 것이다.”청태종은 병자년 11월 말 환구단에 고한 뒤 군사를 이끌고 남진했다. 마부태가 이끄는 선발대가 압록강을 건넌 것은 12월 9일(양력 1637년 1월 4일)이었다. 불과 나흘 뒤 선발대는 한양 초입인 홍제원까지 밀고 내려왔다. 조선 조정은 14일(양력 1637년 1월 9일) 강화도로 피하려다 길이 차단된 걸 알고 허겁지겁 남한산성으로 도주했다. 산성에 갇혀서도 ‘척화파’는 연일 ‘화친’을 죽이려 했다. 남한산성 도피 5일째였다. “한 사람의 목을 베어 화의를 끊고, 백성에게 사과를 해야 합니다.”(심광길) “그게 누구냐.”(인조) “최명길입니다.” 21일째 인조실록은 이렇게 시작한다. “오늘도 김상헌은 화친에 대해 불만을 제기했다!” 김상헌을 따르는 사간 이명웅, 교리 윤집, 정언 김중일, 수찬 이상형 등이 상소했다. “최명길의 죄를 다스려 군사들의 마음을 진정시키소서.” 윤집은 “최명길이 화친을 주장하여 나라를 그르친 죄는 머리털을 뽑아 세어도 속죄하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남한산성의 조정은 독 안에 든 쥐였다. 11일째 겨울비가 내리고 기온이 뚝 떨어져 병사들이 얼어 죽었다. 왕은 대전 뜰에서 헤픈 눈물을 뿌렸다. “죄를 주려거든 병사들이 아니라 저에게 주십시오.” 17일째였다. 왕의 수라상에 닭다리 하나가 올라왔다. “처음 산성엔 새벽닭 우는 소리가 제법 들렸는데, 요즘 닭 우는 소리가 들리지 않더니 이게 마지막인가.” 정약용은 훗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에서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전했다. “먹을 것도 땔감도 떨어져 곤궁하기 이를 데 없다. 남은 소와 말도 굶주림이 심해 서로 꼬리를 물어뜯어 먹을 지경이었다.” “장수와 군사들이 추위에 얼어붙어 얼굴빛이 푸르고 검어 사람 같지가 않았다. 살갗이 찢어지고 동상에 걸린 손가락이 떨어져 나가 그 참혹함이 이루 말할 수 없다.” 당시 조정은 식량 배급량을 병졸 하루 3홉으로 줄였다. 맥주컵 한 잔 분량이다. 입으로만 결사항전을 하던 대신들에게는 5홉이 배급됐다.35일째 사실상 항복을 결정하고도 청이 요구한 척화 주동자 압송 문제로 조정은 뭉그적거렸다. 40일째 참다못한 병사들이 무장한 채 행궁 앞에서 시위했다. 그래도 주저하자 43일째 대전 앞까지 밀고 들어왔다. 쿠데타로 권력을 찬탈했던 자들은 등골이 서늘했다. 서둘러 ‘주동자의 자수’를 받았다. 김상헌·정온 등 우두머리는 빠지고 자청한 윤집(36), 오달제(28)가 선택됐다. 47일째(양력 1637년 2월 24일) 인조는 곤룡포를 벗고 신하의 복장인 남색 옷을 입고, 죄인이 드나드는 서문을 빠져나와 삼전도의 수항단으로 향했다. 인조는 훗날 김상헌과 척화파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세상을 속이고 명예를 훔치기란 쉽다.” 그러나 오늘의 사서는 그들의 충절을 한결같이 칭송한다. 불과 40여년 전 임진왜란의 참화도 망각하고, 9년 전 정묘호란의 치욕도 잊고, 대책은 없이 대륙의 패자에 대한 정벌을 부르짖다가 사직의 유린을 자초했다. 참극은 예견됐고, 피해자는 백성이었다. 호란 이후 그들은 ‘숭명’(존주대의)과 ‘복수설치’를 이념화했다. 자신의 무능과 죄과를 숨기고 권력을 유지하며, 착취구조를 온존하려는 것이었다. 승객을 죽인 만취운전자의 만용과 무지를 용기요 절의라 칭송할 순 없는 일이다. 통상 2월이면 한반도는 긴장 속으로 빠진다. 2월 말부터 한미연합훈련이 시작되면서, 북한은 미사일과 핵실험으로 맞섰다. 북미와 남북은 경쟁적으로 비난하며 군사적 대치를 강화했다. 이런 악순환은 불과 2년 전에야 잠복했다. 통일연구원은 그런 한반도 리스크가 올해 재현될 가능성이 크다고 경고했다. 북핵 문제를 순전히 선거용으로 이용한 미국 트럼프 행정부가 앞으로 대선 판세에 따라 어떤 돌출 카드를 내밀지 알 수 없다. 국내에서도 4월 총선을 앞두고 다시 ‘척화’의 목소리가 기승을 부린다. 심지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사태에 기대, ‘친북’의 외연을 ‘친중’으로 확대하고 여론을 ‘친미인가, 친중인가’의 택일로 끌고 가려 한다. 오로지 선거 승리를 위해 곤경에 처한 이웃을 조롱하고 배척하는 부도덕과 파렴치가 놀랍다. 저 참혹했던 ‘겨울 전쟁’의 기억까지 지우는 만용은 더 놀랍다. 경쟁하는 초강대국 틈에 끼여 있는 우리에게 선택지란 없다. ‘화친’뿐이다. ‘척화’란 없다. 미국과도 중국과도, 북한과도 러시아, 일본과도 화친해야 한다. 논설고문 kbc@seoul.co.kr
  • 우리공화당 “종로에 후보 낸다…한국당과 통합 안 해”

    우리공화당 “종로에 후보 낸다…한국당과 통합 안 해”

    “우리공화당, 유승민과 손 잡는 한국당과 통합 안해”조원진 우리공화당 대표가 오는 4·15 총선에서 서울 종로에 후보를 내겠다면서 유승민 새로운보수당 의원과 손을 잡는 자유한국당과 통합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조원진 대표는 10일 낸 보도자료에서 “우리공화당은 유승민 의원과 통합하는 한국당과 통합하지 않을 것이며, 4·15 총선에서 탄핵 세력에 대해 심판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유승민 의원의 총선 불출마 선언에 대해 “보수통합하겠다는 사람이 불출마한다는 것은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이 잘못됐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잘못된 탄핵이었다고 국민께 석고대죄하는 것이 맞다”면서 “책임을 통감하고 정치를 떠나겠다고 하는 것이 그들이 가져야 할 스탠스”라고 지적했다. 황교안 한국당 대표의 종로 출마에 대해서는 “종로는 거짓 촛불이 쿠데타를 일으킨 곳으로 자유우파 국민이 태극기로 지킨 태극기 광장”이라며 “우리공화당의 성지인 종로에 반드시 후보를 내서 진실과 정의를 찾겠다”고 강조했다. 조원진 대표는 대구 달서병(3선), 유승민 의원은 대구 동구을(4선)로 모두 대구에 지역구를 둔 정치인이다. 유승민 의원은 9일 자유한국당과의 ‘신설 합당’을 추진한다면서 자신의 총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신진호 기자 sayho@seoul.co.kr
  • 전설의 용병 ‘매드 마이크’ 100세로 사망

    전설의 용병 ‘매드 마이크’ 100세로 사망

    1960년대 아프리카에서 가장 악명이 높았던 전설의 용병 ‘매드’ 마이크 호어가 지난 2일(현지시간) 남아프리카공화국 더반에서 100세 나이로 사망했다. 3일 가디언에 따르면 호어는 1964년 콩고 분쟁 때 정부 측에 고용돼 단 300여명의 용병과 함께 공산주의 심바 반군을 몰아내고, 사실상 콩고에 억류됐던 유럽인 수천명을 구출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당시 “내 부하들과 나는 콩고에서 20개월간 반군 5000~1만명을 죽였다”면서 “하지만 그것 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콩고인은 2000만명 중 절반은 한때 반란군이었던 걸로 추측한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부하들을 ‘와일드 기즈’(야생 기러기들)라고 불렀으며 이는 1978년 이들의 콩고 활약을 소재로 각색된 영화 제목이 됐다. 악랄한 반공주의자이기도 했던 그는 “공산주의자를 죽이는 것은 해충을 죽이는 것과 같고, 아프리카 민족주의자를 죽이는 것은 동물을 죽이는 것과 같다”고 말한 적이 있다. ‘매드 마이크’라는 별명은 공산권이었던 동독 라디오에서 그를 “미친 블러드하운드(사냥개 일종) 마이크”라고 부른 데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졌다. 호어와 부하들은 1976년 남아공에서 독립한 세이셸에서 친서방 제임스 만참 전 대통령을 복귀시키고 사회주의 대통령을 제거하기 위한 쿠데타에 참여하기 위해 공항에 내렸다가, 부하 한 명이 조사관에게 무기를 들키는 바람에 교전 끝에 탈출했다. 그 뒤 호어는 체포돼 유죄 판결을 받고 20년형을 선고받았지만, 약 3년 뒤 사면됐다.1919년 인도에서 태어난 아일랜드인으로 2차 세계대전에서 영국군 소령까지 복무했다. 그는 제대 직후 공인회계사 자격을 취득해 일하던 중 자신을 고용한 사업가 모이즈 촘베와 연을 맺게 되고, 3년 뒤 총리가 된 촘베가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그를 찾으면서 용병으로서 삶이 시작됐다. 아들 크리스는 “아버지는 100년 넘게 살았지만 그보다 위험 속에 살면 더 많은 것을 얻게 된다는 철학으로 평생을 살았다는 게 더 놀랍다”고 말했다. 김민석 기자 shiho@seoul.co.kr
  • [임병선의 메멘토 모리] 용병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 마이클 호어

    [임병선의 메멘토 모리] 용병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 마이클 호어

    옛적 로마에서는 승리를 거두고 개선하는 장군이 시가 행진을 할때 노예를 시켜 행렬 뒤에서 큰소리로 “메멘토 모리!”라고 외치게 했다. 라틴어로 ‘죽음을 기억하라’는 뜻인데,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너무 우쭐대지 말라. 오늘은 개선 장군이지만, 너도 언젠가는 죽는다. 그러니 겸손하게 행동하라’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아메리카 인디언 나바호족에게도 “네가 세상에 태어날 때 넌 울었지만 세상은 기뻐했으니, 네가 죽을 때 세상은 울어도 너는 기뻐할 수 있는 그런 삶을 살라”는 가르침이 전해진다. 죽음이 곧 삶이다. 의미있는 삶을 마치고 죽음을 통해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이들의 자취를 좇는다.용병이라면 한낱 돈에 팔려 이 나라 저 나라 떠돌며 아무에게나 총부리를 겨누는 무뢰한으로 여기기 쉽다. 그런데 그런 허접한 생각을 바꾸게 한 용병이 있었다. 보통 ‘미치광이 마이크’란 별명으로 유명했던 마이클 호어가 남아공 더반의 요양원에서 10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는 아들 크리스의 성명을 영국 BBC가 3일 대신 전했다. 아들은 “마이클 호어는 위험하게 유지되는 삶으로부터 많은 것을 얻어내겠다는 철학을 갖고 살아왔다. 그게 100년 넘게 산 것보다 훨씬 돋보이는 대목”이라고 기렸다.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용병이었던 그는 말년을 남아공에서 지내며 세 권의 회고록 ‘용병’ ‘칼라마타로 가는 길’ ‘세이셸 사건’을 집필했다. 대관절 그가 누구인데, 한다면 로저 무어, 리처드 해리스, 하디 크루거 등과 공연한 1978년 전쟁영화 ‘지옥의 특전대(The Wild Geese)’에 앨런 포크너 대령으로 열연한 리처드 버튼을 떠올리면 된다. 포크너 대령이 바로 호어의 회고록 ‘용병’을 토대로 창조한 캐릭터였다. 2차 세계대전에 영국군으로 복무한 뒤 대위 계급까지 달고 전후 회계원으로 일하기 시작했고 나중에 남아공으로 건너가 작은 기업을 운영했다. 1961년 콩고의 정치인 겸 기업인 모아제 촘베와 안면을 텄는데 3년 뒤 콩고 총리에 취임한 촘베가 공산당이 뒤를 봐주는 심바 반군을 진압하기 위해 호어를 고용했다. 임무를 18개월 만에 마치자 호어와 그의 부대원들은 ‘기러기’란 별명으로 국제적 명성을 떨쳤다.공산당이라면 치를 떠는 그의 신념 때문에 여러 나라들에서 좋지 않은 말을 들었다. 사실상 콩고에 억류됐던 유럽인 수천명을 구출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당시 “부하들과 난 콩고에서 20개월간 반군 5000~1만명을 죽였다”면서도 “그것 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콩고인 2000만명 중 절반은 한때 반란군이었던 걸로 짐작한다”고 말했다. 옛 동독 라디오에서는 그를 ‘미친 블러드하운드(냄새로 추적하는 사냥개의 원조 종) 호어’라고 불렀는데 고인은 생전에 이 별명을 무척 마음에 들어했다. 1960년대 콩고 전쟁에서 명성을 떨쳤으나 그 뒤 쌓은 명성을 모두 한꺼번에 무너뜨렸다. 1980년대 초 군 경력을 끝내고 은퇴한 듯 보였으나 갑자기 1981년 세이셸 제도의 쿠데타 시도에 몸 담아 주위를 놀라게 했다. 그의 경력은 황당하게 막을 내렸다. 그는 세이셸 제도를 잘 안다고 믿었지만 알베르 르네 대통령 치하의 사회당 정부를 끔찍하게 증오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남아공과 케냐 정부가 지원하겠다고 하자 호아는 쿠데타 계획을 짰다. 1981년 10월 그는 숨어 지내던 남아공의 한 방갈로에 무기들을 보내달라고 하고 46명의 남성을 선발해 전직 럭비 선수로 뛰다가 지금은 은퇴해 술이나 마셔대며 기부하는 클럽으로 변장시켜 무기들을 들고 비행기에 올랐다. 마헤 공항 세관을 통과한 뒤 한 부하가 엉뚱한 줄 뒤에 서 있다가 세관원과 말다툼을 벌이는 바람에 가방을 뒤지게 만들었는데 분해한 AK 47 소총 등이 적발됐다. 그 바보 같은 부하는 너무 놀라 밖에는 더 많은 무기들이 있다고 고변했다. 호어는 근처에 계류해 있던 에어 인디아 여객기를 탈취해 남아공까지 달아났다. 공항 도착 후 엿새 동안 구금됐다. 그리고 “패키지 휴가로 벌인 쿠데타”란 각국 언론의 비아냥을 들어야 했다. 일년 뒤 그들은 에어 인디아를 공중 납치하려 한 혐의로 재판을 받아 그는 20년 징역형에 10년 유예 판결을 받았다가 나중에 33개월만 복역하고 석방된 뒤 남아공으로 건너가 조용히 말년을 보냈다. 임병선 기자 bsnim@seoul.co.kr
  • 볼턴 입 막은 트럼프…이번주 탄핵 올가미 벗는다

    핵심 증인 등 채택 무산… 사실상 부결 사과·반성 없이 재선운동 본격화할 듯 이틀 뒤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그동안 발목을 잡았던 탄핵 정국에서 완전히 벗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단 2표 차로 존 볼턴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의 상원 탄핵심리 증인 채택이 무산되면서 ‘탄핵 드라마’는 싱겁게 막을 내리게 됐다. 상원은 오는 5일(현지시간) 오후 4시 트럼프 대통령의 탄핵에 대한 최종 표결을 하기로 했다. 우크라이나 스캔들 관련 ‘볼턴의 폭탄 증언’이라는 뇌관이 사라진 만큼 공화당이 장악한 상원에서 이변이 없는 한 트럼프 탄핵안에 대한 부결이 확실시된다. 탄핵안이 가결되려면 상원의원 3분의2인 67명 이상의 찬성이 필요하지만 53석을 차지한 공화당 소속 의원 가운데 유죄 판결에 가담하겠다는 의원이 없는 상황이다. 앞서 볼턴 전 보좌관의 증인 채택안도 51대49로 부결됐다. 2012년 대선 후보로 나섰던 밋 롬니 의원과 수전 콜린스 의원이 공화당과는 달리 민주당에 가세해 볼턴 소환에 찬성표를 던졌지만 결국 무산됐다. 상원은 이날 논의 끝에 새로운 증인과 증거는 채택하지 않기로 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탄핵 면죄부를 받더라도 자신의 행위에 대해 사과하거나 반성하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고 CNN이 트럼프 대통령 측근의 말을 인용해 1일 보도했다. 그동안 자신의 잘못을 부인하며, 민주당에 대해 “쿠데타 기도”라고 비난했던 것의 연장선이다. 반면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은 상원에서 사면받은 직후 “매우 유감”이라며 국민에게 사과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탄핵 표결에 앞서 4일 밤 취임 후 세 번째 신년 국정연설에 나선다. 탄핵 무죄선고 뒤 상하원 합동 연설이라는 시나리오는 무산됐다. 트럼프 대통령은 연설에서 재집권 청사진을 밝히겠지만, 국내외 여러 현안에 대해 내놓을 메시지에 관심이 집중된다. 또 “완전한 무죄”를 주장할 것으로 예상한다. 탄핵 정국에서 벗어난 트럼프 대통령은 오는 11월 3일을 향한 재선 운동을 본격화할 것으로 보인다. 워싱턴포스트는 탄핵 절차가 종결되더라도 ‘우크라이나 스캔들’을 둘러싼 의혹은 선거운동 공간으로 그 무대를 옮겨 계속 제기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이기철 선임기자 chuli@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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