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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 권부의 새 얼굴/바라니코프 내무

    ◎옐친 측근… 경찰서 잔뼈 굵어 러시아공화국의 내무장관이었던 옐친 러시아공화국대통령의 측근으로 내무장관에 임명되기 바로전까지 러시아공화국 내무장관으로 있으며 공화국 내무부에 대한 공산당의 통제를 제거하는데 크게 이바지했다. 그는 개혁적인 성향으로 연방정부 내무장관이며 쿠데타 주모자였던 푸고와 불편한 관계를 유지해왔다. 경찰과 지방 내무행정기관에서 승진을 거듭한 후 지난 83년에 소련 연방정부 내무부에 들어왔다.
  • 소,공산독재 막 내렸다(옐친의 소련:1)

    ◎공산당사 폐쇄·레닌동상 철거의 대변혁/쿠데타 꺾은 「시민파워」업고 개혁 줄달음 소련의 공산주의시대가 마침내 「비극적」인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지난 1917년 볼셰비키혁명이후 마르크스­레닌의 공산주의실험이 실패로 끝나고 마르크스­레닌이즘은 역사의 뒷무대로 사라지게 된 것이다.고르바초프 소련대통령은 공산당을 해체할 것이라고 선언했다.소련관영 타스통신도 소련최고회의 당기구는 공산당활동의 종식을 결정했다고 보도했다.지난 70여년간 소련을 지배해온 공산주의체제가 붕괴되고 추악한 역사의 한장이 끝나고 있는 것이다.소련 공산주의체제의 붕괴는 「시민혁명」의 승리이다.고르바초프대통령은 쿠데타가 실패한후 모스크바로 돌아와서 『나는 사회주의자이며 결코 공산당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공언했다.그러나 그는 공산당의 해체를 스스로 선언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소련의 피플파워는 보수파의 상징인 공산당을 거부했다.소련의 피플파워는 옐친시대의 개막을 예고하고 있다.옐친은 강경보수파의 쿠데타를 저지시킨 시민혁명의 구심점이었다.옐친은 이미 공산당을 탈당했었고 러시아공화국내에서의 공산당 활동을 금지시킨바 있다. 고르바초프의 공산당해체선언이전에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는 이미 소련사회에서 소멸해가고 있었다.공산당원들조차도 마르크스­레닌주의 깃발을 휘날리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쿠데타이후 공산주의의 종말을 고하는 2개의 사건이 있었다. 1917년 볼셰비키 혁명이 성공한뒤 지난 74년간 소련공산체제 수호의 선봉을 맡았던 KGB의 창설자 제르진스키의 동상이 끌어 내려졌다.크렘린궁에서 멀지않은 곳에 위치한 KGB본부건물앞 광장에 버티고 서있던 제르진스키의 동상이 끌어 내려지는 동안 KGB직원들은 창문을 통해 속수무책으로 그 장면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공포의 권부였던 KGB건물앞에 동상의 기단만 덩그랗게 남은 광장을 바라보며 모스크바시민들은 말할수 없는 감회에 젖는 모습들이었다. 그러나 이 역사적인 두 장면의 주역은 소련대통령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아니라 러시아공화국 대통령 보리스 옐친이었다. 고르바초프의 비극은 바로 그가 공산주의자라는 데서 시작한다.「페레스트로이카」「글라스노스트」라는 시대의 유행어들을 만들어내며 스탈린주의 통치시대를 끝내고 변화의 물꼬를 튼 그였지만 그 변혁의 파장은 그의 사고한계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그의 희망은 스탈린주의 교조적 마르크스주의를 버리고 진정한 사회주의를 만들어가겠다는 것이지만 소련국민들의 가슴속에서 사회주의에 대한 환상은 이미 깨졌고 공산주의는 조롱거리로 전락돼 있었다.사회주의체제내에서의 개혁을 고집하는 그가 소 국민들의 눈에는 우유부단하고 결단력 없는 지도자로밖에 비쳐지지 않았다. 이번 쿠데타를 물리친 가장 위대한 힘은 바로 모스크바시민들의 성숙한 시민의식과 저항정신이었다.맨손으로 쿠데타군의 탱크에 대항하는 시민들의 모습은 자유에 대한 그들의 욕구가 얼마나 진한가를 보여주었다. 그들은 더이상 공산독재의 노예가 아니었으며 그들이 공산독재 부활기도를 물리친것은 일종의 시민혁명이었다. 옐친은 이러한 성숙한 시민의식의 흐름을 읽고 과감히 그들의 앞장에 섰다는 점에서 위대한 지도자로 비치고 있다. 쿠데타세력은 물러갔지만 돈이 있어도 살 물건이 없는 경제,와해직전에 놓인 연방체제등 이전의 문제들은 여전히 남아있는게 소련의 현실이다.러시아민족주의·반공산주의 히스테리를 경계하는 목소리도 들리고 있다.경제난이 계속되고 민족간의 충돌이 재발되면 시민들은 또다시 불평을 터뜨릴 것이다. 경제적으로는 옐친의 주장대로 시장화 5백일 계획이라는 급진경제개혁안이 채택될 것이란 전망이 유력하다. 동서냉전구도의 청산,동구의 대변혁등 외부에서의 찬사말고도 고르바초프는 분명 암울하던 구시대를 청산하고 소련국민들에게 미래에 대한 희망을 불어넣어준 위대한 지도자였음을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다.그러나 이제 그가 쿠데타의 충격에서 벗어나 이전의 자신에 찬 모습을 다시 보여줄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누구도 뚜렷한 전망을 삼가고 있다.그는 공산주의자임을 헛소리같이 되뇌이고 있지만 어느덧 고르비의 시대는 공산당독재시대와 함께 막을 내리고 있다.소련에서는 이제 옐친시대가 개막되고 있는 것이다.
  • 옐친시대의 개막 예고/유사시 직무대행 합의 의미

    ◎국내외문제 역할분담… 개혁 가속화/정책대립 심화땐 또 한번 혼란 야기 고르바초프 소련대통령과 옐친 러시아공화국대통령간에 23일 ▲연립정부 구성 ▲두 사람중 한명의 유고시 다른 사람에의 자동적인 직무승계에 대해 합의가 이뤄진 것은 소련이 바야흐로 고르바초프와 옐친의 쌍두체제 시대로 접어들게 됐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할수 있다.또 이는 지지부진한 상태에서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는 소련의 개혁을 가장 빠른 시일내에 소생시키기 위한 최선의 선택이라고 할수 있다. 고르바초프는 이번 쿠데타를 통해 정치지도자로서의 이미지에 상당한 타격을 받은 반면 옐친은 이와는 대조적으로 쿠데타에 대한 국민들의 저항을 성공적으로 이끔으로써 국내외의 관심을 한몸에 받게 됐다.또 고르바초프가 이번에 옐친에게 매우 큰 빚을 졌으며 이때문에 앞으로 양자간의 의견대립이 생길 경우 고르바초프가 옐친에게 어느정도 양보하지 않을수 없는 입장에 처해 있다는 점에서 이같은 분석은 상당히 타당하다고 할수 있다. 그러나 고르바초프는 여전히 소련을대표하는 연방대통령이며 앞으로 그 권한이 축소될 가능성이 크긴 하지만 아직도 막강한 권한을 보유하고 있다.또 옐친이 국내의 인기도에서 고르바초프대통령을 크게 앞질러 있고 이번 쿠데타를 통해 국제무대에서의 신뢰도도 상당히 높인게 사실이긴 하지만 국제사회에서 고르바초프를 대체할 인물로서 충분한 신망을 얻고 있다고는 아직 보기 어려운 실정이다. 따라서 23일 발표된 고르바초프와 옐친의 연정구성및 권력승계 합의는 소련에 대한 서방의 경제지원을 끌어들이는 등의 대외문제는 국제무대에서 잘 통할수 있는 고르바초프를 내세워 해결하고 조속한 경제개혁의 추진과 같은 국내문제의 해결은 소련국민들로부터 높은 인기를 얻고 있는 옐친이 나서는 역할분담을 통해 당장 소련이 처한 난국을 수습해 나가는 과도기간을 갖고 이기간중에 옐친이 차기 지도자로서의 수업을 받겠다는 의도를 가진 것으로 받아들일수 있을 것같다. 앞서 지적한 바처럼 언젠가는 고르바초프가 최일선에서 물러나고 옐친이 그 자리를 이어받는게 소련정치의 자연스런 흐름이 될 것으로 보인다.그러나 한가지 주목해야 할 점은 연방체제의 유지와 경제개혁의 추진속도등 소련이 당면하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들에 대한 고르바초프와 옐친의 정책노선이 여전히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이같은 점을 감안할때 고르바초프와 옐친의 협조체제는 피할수 없는 선택으로 이뤄지긴 했지만 처음부터 상당한 불안요인을 안고 시작한다고 할수 있다.따라서 고르바초프와 옐친 쌍두체제의 성패 여부는 두사람이 서로간의 의견차이를 어떻게 극복해 나가느냐에 달려 있다고 할수 있다. 쿠데타 이후의 소련이 과거와는 전혀 다른 대변혁의 길을 걷게 될것은 누구나 쉽게 짐작할수 있다.그 대변혁의 첫단계로서 고르바초프와 옐친이 서로 손을 잡은것은 일단 올바른 방향선택으로 보인다.그러나 고르바초프와 옐친의 쌍두체제 개막이 곧 소련의 경제난 해결을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니다.이런 의미에서 볼때 이번 쌍두체제 시대의 개막은 고르바초프보다는 옐친에게 훨씬 큰 부담을 안게 될것이다.
  • “대소경협 예정대로”/노 대통령,김 대표와 회동

    노태우대통령은 24일 상오 청와대에서 민자당의 김영삼대표최고위원으로부터 주례당무보고를 받고 소련쿠데타 실패 이후의 한소협력방안과 국회의원선거법 개정문제를 포함한 정기국회대책등을 협의했다. 노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한소협력을 더욱 강화하고 대소경협을 당초 계획대로 추진해나가야 할 것이라고 말하고 이에 따른 당정간 협조도 긴밀히 해나가라고 당부했다. 노대통령은 특히 새해예산심의와 관련,『지난 수년간 예산을 편성할때 예산규모증가율에 얽매여 항상 다음해 실제 예상세수보다 축소편성하여 과대한 세계잉여금을 발생시킴으로써 국민들에게는 세금을 과도하게 걷는 인상을 주었다』고 지적하고 『올해 2차에 걸쳐 추경을 편성했기 때문에 내년 예산규모증가율은 총계면에서 7%내외 밖에 증가가 되지 않은것』이라고 말했다.
  • 쿠데타 희생자/「소련영웅」선포/모스크바서 장례식

    【모스크바 로이터 연합】 「3일천하」로 끝난 쿠데타 기간중 소련군에 의해 살해된 3명의 희생자들에 대한 장례식이 24일 모스크바의 크렘린궁 바로옆 마네츠 광장에서 수만명의 군중들이 참석한 가운데 엄수됐다. 러시아정교의식으로 진행된 이날 장례식에는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대통령,보리스 옐친 러시아공화국 대통령,가브릴 포포스 모스크바 시장,로버트 스트라우스 주소 미대사등이 참석했다. 쿠데타 실패로 지난 21일 권좌에 복귀한 미하일 고르바초프 대통령은 검은 정장을 입고 나와 러시아 공화국 국기와 희생자들의 초상화를 들고 있는 군중들에게 자신이 쿠데타 기간중 희생된 이들을 「소련 영웅」으로 선포하는 대통령 명령서에 서명을 했다고 말했다.
  • 소 국방 임명 번복 미 입김 작용설

    ◎모이세예프 기용하자 백악관서 강한 불만/부시도 “이제야 우리목표대로 돼가고 있다” 3일만에 연금에서 풀려나 모스크바로 돌아온 뒤 대대적인 인사쇄신을 단행하고 있는 고르바초프 소련대통령이 23일 하룻만에 국방장관등 핵심요직임명을 번복함으로써 여러 추측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특히 미하일 모이세예프의 국방장관서리 임명에 대해 미행정부내에서 요란할 정도로 「적임논란」이 있었기때문에 고르바초프의 조치는 더 주목을 받고 있다. 22일 케네벙크포트에서 소련사태에 관해 배경설명을 한 고위관리는 미국이 소련의 인사조치에 개입하는 것이 상식밖의 처사라는 사실을 망각한 듯 강한 어조로 모이세예프의 임명을 비난했다. 부시의 측근중의 측근인 이 관리는 관례대로 익명으로 진행된 배경설명에서 『나는 그 친구가 컴컴한 홀에서 내 뒤에 서 있는 것을 원치 않을 것』이라고 정면으로 모이세예프에 대한 불신을 토로했다. 부시대통령은 이 얘기를 전해듣고 점잖게 이 관리를 나무란 것으로 알려졌으나 결과적으로 모이세예프가 하룻밤새예브게니 샤포시니코프에 국방장관 자리를 넘겨줌으로써 미국 언론들이 관심을 갖고 이 문제를 캐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게 받아들여 질수 있다. 부시도 23일 기자들에게 『소련에서의 변화가 우리가 원하는 목표를 향해 움직이고 있다』고 만족을 표시했다. 그러나 미국관리들은 고르바초프가 22일 발표한 일련의 인사를 무산시킨 것은 미국의 입김 때문이 아니라 옐친의 강한 주장을 받아들인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소련 국방장관 임명에 불만을 토로한 고위관리는 모이세예프가 쿠데타 기간중에『아무리 잘 봐 준다 하더라도 애매한 태도를 취했다』고 부적격의 이유로 내세웠다. 뿐만 아니라 모이세예프는 쿠데타 기간중의 역할에 관계없이 개혁에 반대해 왔으며 군내부에서 바른말을 하는 장군들을 해임시켰다는 전력을 갖고 있으며 전략무기감축협정(START)때도 외무부의 입장에 반기를 들어 미 행정부를 난처하게 했다는 얘기도 있다. 그러나 미행정부 내에서 모이세예프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고 이번 쿠데타 기간중의 처신에서도문제가 없다는 평가도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당초 고르바초프는 부시에게 모이세예프가 자신의 명령에따라 군대를 원대복귀시켰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일부 정보 보고는 쿠데타가 발생했을 당시 모이세예프는 모스크바를 떠나 휴가중이었던 것으로 전했다. 이같이 미국으로서는 중요한 상대인 소련 국방장관에 대한 행정부내의 엇갈리는 시선이 있자 워싱턴 타임스는 23일 아침 「부시 보좌관들 이견」이란 제목으로 이 문제를 다루기도 했다. 모이세예프 국방장관 임명번복이 미국의 입김과는 관련이 없다하더라도 미국의 영향력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바로 그 생각이 워싱턴에 팽배해 있다면 그것이 앞으로의 미소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증거가 될 것이다.
  • 옐친 연내 방한 추진/소 사태따라 시기 유동적

    ◎박 체육청소년장관 밝혀 박철언 체육청소년부장관은 24일 소련강경보수세력의 쿠데타를 무산시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던 보리스 옐친러시아공화국대통령의 연내 방한을 추진하고 있다고 밝혔다. 박장관은 이날 『옐친대통령이 지난해 9월 북방정책연구소의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할 예정이었으나 당시 여러가지 사정등으로 방한이 이뤄지지 못했다』고 설명하고 『올들어서도 옐친의 방한을 위해 꾸준하게 접촉하고있다』고 말했다. 박장관은 『최근의 소련사태로 그의 방한시기가 다소 유동적일 것으로 생각되나 여하튼 연내 방한을 적극 추진중에 있다』고 말했다. 박방관은 또 『옐친이 연방대통령이 아니라 공화국대통령인만큼 의전상 초청주체는 서울시장이나 국회의장이 될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 외교소식통은 이와관련,『쿠데타실패이후 정치적인 입지가 크게 강화되고있는 옐친의 방한이 이뤄지게 되면 한소관계는 더욱 더 내실화될 수 있는 계기가 될것』이라고 전망했다.
  • 「공산당나팔수」소 언론 “대수술”/옐친의 「언론포고령」무얼 뜻하나

    ◎「선전선동」기능 배제… 「자유언론」으로/신문서 마르크스심벌 삭제/개혁지향적으로 면모 일신/재산도 국유화… 공산당과 연결 “원천봉쇄” 소련 정부기관지 이즈베스티야는 마르크스와 레닌의 심벌을 발행인란에서 삭제했다.쿠데타 실패 이후 권력구조개편과 함께 소련의 관영언론도 변하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소련 관영언론의 체질 변화는 보리스 옐친 러시아공화국대통령의 언론 포고령으로 더욱 가속화될 것으로 보인다.옐친대통령은 23일 포고령을 통해 6개 공산당기관지를 잠정적으로 정간시키고 자산을 국유화했으며 관영 타스통신과 반관영 노보스티통신사 사장을 전격 해임시켰다. 옐친의 이같은 조치는 언론을 공산당의 영향력으로부터 자유롭게 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쿠데타 실패이후 정치적 힘을 크게 상실한 공산당은 언론에 대한 영향력도 함께 잃을 것임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옐친에 의해 정간된 신문들은 소련 언론의 상징인 프라우다를 비롯,소비에츠카야 로시야·글라스노스트·라보차야 트리부나·모스코브스카야 프라우다·레닌스코예 즈남야지 등이다. 이들 관영언론들은 과거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를 전파하는 주요 매체들이었다.페레스트로이카가 소련사회를 변화시키면서 이들 관영 매체들도 많은 변화를 보여왔다. 그러나 관영언론들은 늘 공산당의 이익을 대변해 왔다.보수적 성향을 견지해온 것이다. 관영 타스통신을 비롯한 공산당기관지들은 이번 쿠데타에서도 쿠데타 주도 세력의 선전매체구실을 했다.이들은 고르바초프의 실정을 비난하고 신지도부의 공식발표들을 충실히 보도했다.어느 쿠데타에서나 마찬가지이지만 이번 쿠데타세력들도 우선 언론을 장악했기 때문에 관영언론들이 이들의 명령을 거부하기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을 것으로 보인다.쿠데타 지도자들은 거사당일인 19일 고르바초프 집권이후 8천5백여개로 늘어난 신문 가운데 9개를 제외한 모든 신문들을 정간시킨바 있다. 옐친대통령은 그러나 「불가항력적」인 상황이 아니라 관영언론들이 쿠데타에 공모했다고 주장한다.그는 타스통신의 레프 스피리도노프사장과 노보스티통신의 알베르트 브라소프사장이 쿠데타세력에 「동조」했다며 이들을 해임시켰다. 옐친은 한 공화국의 대통령이면서도 전국적 기관인 타스통신의 사장을 해임하고 프라우다지를 정간시켰다.이는 옐친의 영향력이 크게 강화되었음을 말해주며 언론도 개혁지향적으로 대수술이 이루어질 것임을 시사한다고 볼 수 있다. 옐친대통령은 러시아공화국공산당이 소유하고있는 수백개의 출판관련 업체들도 국유화시켰다.공산당과 언론과의 연결고리를 끊으려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옐친의 강경 언론정책에 대한 비판도 일고 있다.옐친이 공산당기관지를 정간시키고 통신사사장을 해임시킨 것은 언론의 자유 침해라는 측면에서 쿠데타 주도세력들이 신문을 정간시킨 조치와 마찬가지라는 것이다.프라우라지의 셀레즈네바 부국장은 『소련의 언론이 85년 고르바초프 등장 이전같이 한목소리만을 낸다면 파멸적인 결과가 올 것』이라고 말했다. 고르바초프 등장 이후 소련은 많은 언론의 자유를 누리고 있다.쿠데타의 와중에서도 이즈베스티야 기자들은 옐친의 성명서 게재를 허용하지 않자 신문제작을 거부하기까지 했다.이번 쿠데타 저항에서도 자유언론을 지키려는 소련 언론인들이 큰몫을 했다. 소련 언론인들은 옐친의 언론 대수술로 더욱 많은 언론의 자유를 누릴 것으로 보인다.언론의 자유는 보다 빠른 속도로 소련을 개방적인 민주사회로 전환시킬 것이다.
  • 신임 주소 미대사/고르비에 신임장

    【모스크바 AFP 연합 특약】 로버트 스트라우스 신임 소련주재 미대사는 24일 크렘린궁에서 고르바초프 소련대통령에게 신임장을 제정했다. 고르바초프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쿠데타이후 신속하게 대사를 모스크바에 부임하게 한 미정부의 조치에 대해 만족을 표시했다.
  • 올 대소 수출 8억불 예상/무역진흥공사

    ◎경협자금 수출 재개 힘입어 올해 대소 수출이 지난해보다 54% 늘어난 8억달러에 달할 것으로 전망됐다. 대한무역진흥공사는 소련정부가 이번 쿠데타 실패이후 한소 양국간에 합의된 경협전대차관에 의한 소비재수입을 조기에 집행할 것으로 예상됨에 따라 상대적으로 경쟁력을 갖춘 가전제품을 비롯,섬유 신발 치약등 생필품을 중심으로 수출이 늘어날 것이라고 24일 밝혔다. 무공은 지난 7월말 현재 전대차관에 의한 수출신고액이 2억9천만달러임을 감안할때 올해안에 경협자금에 의한 수출액이 5억달러에 이를 것으로 보이며 여기에다 하반기 일반수출 1억달러와 상반기 수출실적 2억1천4백만달러를 더하면 올해 대소수출은 지난해의 5억1천9백만달러보다 54.1% 늘어난 8억달러에 이를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같은 수출전망치는 당초 수출목표 11억달러에 비해 28%인 3억달러가 미달하는 것이다.
  • 소련공산당의 붕괴(사설)

    소련의 이번 쿠데타사태는 한마디로 소멸위기에 직면한 공산당의 존립과 기득권 옹호를 위한 보수강경파의 마지막 몸부림이라 할수 있는 것이었다.그 몸부림이 삼일천하의 무참한 실패로 끝난 지금 소련 공산당의 몰락·붕괴 내지 결정적 약화는 불가피한 순서라 해야할 것이다.그리고 그 순서가 지금 소련에서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우리는 그 추이와 결과,그리고 그것이 갖는 역사적 의미와 가져올수 있는 또 다른 세계적 파장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소련 공산당은 고르바초프 개혁의 시작과 동시에 소멸이냐 근본적인 개혁의 변신이냐의 양자택일을 해야 할 운명이었다.고르바초프는 개혁을 통한 변신을 모색했으며 옐친을 비롯한 급진개혁파는 공산당 소멸의 새출발을 희망함으로써 갈등의 불씨를 키워온 것이 그동안의 과정이었다.그러나 고르바초프의 근본적 개혁구상이나 옐친의 새출발 희망이나 궁극적인 목표는 동일한 것이라 할수 있는 것이었다.고르바초프는 서구형사회주의 정당을 지향했으며 그것은 정통 공산당의 사실상 소멸을 의미하는 것이었기때문이다.옐친도 서구형 사회주의 정당의 존재까지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당장의 공산당 소멸이라는 급진개혁 추구의 옐친을 용납할 수 없는 것은 물론 서구형 사회주의정당을 모색하는 고르바초프의 점진적 개혁에도 불만이었던 보수 강경파의 반발이 이번 쿠데타였던 것이다.그리고 그 중요한 동기는 1천5백만 공산당원은 물론 공산당과 군부 및 KGB의 간부등 70만 노멘클라투라(붉은 귀족)의 기득권 옹호에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시도는 일단 저지되었으며 당연한 반작용으로 지금 소련에서는 공산당 박멸캠페인이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고르바초프는 아직도 근본적이긴 하나 공산당의 기본틀을 살리는 서구형 사회주의정당화를 모색하고 있지만 급진개혁파의 대세에 압도당하고 있는 것으로 보도되고 있다.현재의 대세로 보아 소련 공산당의 운명은 사실상 끝난것 같으며 획기적인 개혁을 통해서도 집권당으로 살아남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동구 민주화과정에서 우리는 이미 공산당의 몰락과정을 목격한바 있다.공산종주국이며 공산당의 발원지이자 조국인 소련에서는 좀 다를 수도 있을 것이란 생각도 했다.그러나 역시 공산당 중심의 개혁은 한계가 있고 어려울 뿐 아니라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을 이번 쿠데타사태는 보여준 셈이다.그리고 그것은 뒤늦었지만 소련에도 마침내 동구식 개혁의 불길을 댕겨 놓는 결과를 가져오고 있는 것이다.그 불길을 더욱 약화된 고르바초프가 진정시킬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소련 공산당의 붕괴는 원조공산당의 붕괴를 의미한다.그것이 민주화 개혁을 거부하는 아시아공산당에 주게 될 충격 또한 클수 밖에 없을 것이다.북한공산당의 대응이 주목된다.민주사회주의정당으로의 개혁과 변신이야말로 살아남기 위한 유일한 활로일 것이다.북한공산당도 하루속히 개혁과 변신을 통해 통일한국의 새 질서에 적응토록 재출발하는 것이 역사의 요구요 순리일 것이다.
  • “한·소 실질협력 증진”

    ◎대소 경협자금 예정대로 집행/이 외무,국회위무·통일위 답변 국회외무통일위는 23일 상오 이상옥외무부장관을 참석시킨 가운데 간담회를 열고 소련사태에 대한 정부측 보고를 들은뒤 이번 사태가 한소관계및 남북관계에 미칠 영향 등에 관해 국회차원의 대책을 논의했다. 이장관은 답변을 통해 『이번 사태에 신중하게 대처한 정부의 태도는 현명했다고 판단한다』고 밝히고 『헌정중단을 기도한 쿠데타세력에 분명한 반대입장을 즉각 표시하지 않았다는 일부의 비판도 있으나 각국의 처한 상황과 입장에 따라 대응책은 달라질 수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이장관은 또 『앞으로 소련내 공산당의 보수강경세력은 크게 퇴조하고 신당창설움직임등 정치적 다원화가 가속화될 것』이라며 『이와함께 소련의 정치권력도 각 공화국으로 더 한층 옮겨갈 것으로 예상된다』고 밝혔다. 이장관은 이어 『한소간 교역·경제과학기술협력·문화교류 등 각 분야의 실질협력을 증진하고 특히 대소경협자금은 소련국내사태추이를 보아가며 정상적으로 집행해 나갈 방침』이라고밝히고 『소·북한관계는 개혁세력의 복권으로 계속 불편해질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했다.
  • 고르비의 치명적 실수/이기동 모스크바특파원(오늘의 눈)

    고르바초프의 비극도 결국 사람을 잘못쓴데 있었다고 할 수 있다.이번 쿠데타를 주도한 8인 모두 고르바초프 자신이 추천,임명한 사람들이고 특히 8인위의 대표격인 겐나디 야나예프같은 이는 지난해 연방최고회의에서 두차례나 비토를 당했음에도 고르비가 우겨,부통령에 앉혔던 사람이다. 쿠데타진압뒤 가진 22일의 첫 기자회견에서도 이 인사문제에 대한 질문들이 많이 쏟아졌다.어쩌면 그렇게 하나같이 개혁이미지와는 거리가 먼 인사들만 골라서 요직에 앉혔느냐는 것이다. 고르비도 이 부분에는 솔직하게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다.야조프 국방장관과 루키아노프 연방최고회의의장 두사람은 솔직히 자신이 믿었던 사람들이지만 나머지 6명은 문제가 있었음을 시인했다. 그리고 이번일을 통해 자신은 크고도 값진 결론을 얻었다는 말을 수차례 되풀이했다. 뉴스위크지의 여기자가 『어떤 교훈을 얻었느냐』고 다시 묻자 그는 야나예프를 무리하게 부통령에 앉힌 것도 후회가 되고 앞으로 개혁세력을 재규합해서 확실한 개혁노선을 걷겠다는 말을 했다. 많은 사람들이 지난해 12월 셰바르드나제가 외무장관직을 사임하면서 『새로운 독재가 다가오고 있다』고 경고했음에도 불구하고 고르비가 보수세력들과손을 잡은 것은 그의 치명적 실수라고 지적한다.그때 셰바르드나제의 경고를 진지하게 받아들여 보수세력들을 과감히 정리했어야 옳았다는 것이다. 개혁파와 보수파사이에 적정하게 자리를 배분하며 상황에 따라 수시로 양자사이를 오락가락한 우유부단한 인사정책이 결국 이번 쿠데타를 자초한 셈이다. 왔다갔다하던 고르비가 최근들어 갑자기 개혁쪽으로 심하게 기울자 당황한 보수세력들이 일을 저질렀다는 설명이다. 고르바초프의 이같은 「때늦은 후회」가 진정한 깨달음에서 나온 것인지 아니면 옐친을 위시한 러시아개혁파들의 위세에 눌려 일시적으로 속마음을 숨긴 것인지는 좀더 두고 볼 일이다. 고르비자신을 위해서도 전자쪽이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 소 정치판도 변화/각국의 진단

    ◎고르비­옐친 「역할분담」갈등/워싱턴포스트 보리스 옐친은 이번의 최대최악의 혼란에서 지도력을 인정받게 됐으며 고조되고 있는 민주화 조류를 상징하게끔 됐다.옐친의 투쟁으로 가장 큰 덕을 본 사람을 미하일 고르바초프이긴 하지만 옐친은 원칙과 적법의 이름으로 이번 쿠데타에 대항하고 승리했다는 사실에 의해 입지가 엄청나게 강화됐다.고르바초프는 복귀되었으나 우선 당장 자신이 시작했으나 아직 종결짓지 못한 혁명적 개혁에 대한 설명을 명확히 하지 않으면 안되는 처지이다.개혁을 발진시키면서 이룩한 과거의 업적으로 고르바초프는 아직도 커다란 위세를 지니고 있으나 앞으로의 개혁추진에 있어 그가 떠맡을 수 있는 역할은 지금부터 새롭게 정립해야만 하는 것이다.즉 그는 창피를 당했고 위신이 대폭 깎인 셈이다. ◎발트3국 「주권독립」필연적/아시안 월스트리트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복귀에도 불구하고 소련방정부는 비틀거리고 있다.그러나 러시아·아르메니아·우크라이나 등 대부분의 소공화국들은 완벽하게 제기능을 발휘하고 있다.쿠데타실패후 소련의 정치구조는 크게 바뀌고 있다.옐친은 그가 소련군대를 장악하고 있다고 발표하기까지 했다.고르비는 앞으로 옐친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협력해 가겠다고 다짐했다. 미국이 이제는 민주선거방식에 의해 조직되어 운영되고 있는 소련 각 공화국들에 대해 정치적 합법성 인정을 공개선언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함께 미국은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등 발트3국의 주권독립을 공식 인정해야 한다. ◎경제회생 「제2의 개혁」시급/조일신문 합법정권의 최고지도자로서 고르바초프씨가 무사히 직무에 복귀한 것을 환영하면서 개혁노력과 신사고에 기초한 대외정책의 추진을 기대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과제는 파국적인 상황에 있는 경제의 개선문제이다.그런 의미에서 소련지도부는 페레스트로이카의 제2막을 맞고있다. 쿠데타뒤 남은 과제는 「연방」과 「공화국」의 관계조정이다.옐친씨의 영향력확대는 그대로 러시아공화국및 다른공화국의 발언권증대로 이어질 것이다.따라서 고르바초프씨와 옐친씨의 「2두마차」가 어떻게 달릴까하는 것이 앞으로 초점이 될 것이다.소련정치의 안정화·민주화의 착실한 전진을 위해서도 「2명의 대통령」의 협조가 중요하다.
  • 고르비,핵비밀 문건 탈취당해/WP지 보도

    ◎연금중 쿠데타 주동자들에 【워싱턴 UPI AFP 연합】 고르바초프 소련대통령은 자신을 크림반도휴양지에 연금했던 쿠데타 주동자들이 소련핵무기 작동에 필요한 암호가 들어있는 자신의 브리프케이스를 탈취했다고 말했다고 워싱턴포스트지가 23일 보도했다. 포스트지는 지난 21일 크림반도에서 석방된 고르바초프를 마중나간 블라디미르 리센코 러시아공화국 최고회의 대의원의 말을 인용,고르바초프가 쿠데타붕괴 이후 모스크바로 돌아와 대통령직을 회복한 후 그의 측근들에게 쿠데타주모자들이 소련핵무기 암호가 들어있는 자신의 가방을 탈취했다고 말했다고 밝혔다.
  • 고르비가 밝힌 「연금3일」/이기동특파원

    ◎“권력이양 하느니 자살하려 했다”/핫라인 불통… 급조라디오로 서방방송 들어/“반쿠데타”메모 건강진단서로 속여 내보내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대통령은 22일 쿠데타군들에게 붙잡혀있다 풀려난뒤 가진 첫기자회견에서 자신이 처음 구금될 당시 상황과 구금 3일간및 8인비상위 위원들에 대한 체포명령 상황등을 비교적 소상히 설명했다. 모스크바시 루봅스키가에 위치한 프레스 빌딩에서 3백여명의 내외신 기자들이 회견장을 메운 가운데 가진 기자회견에서 고르바초프대통령은 갑자기 찾아온 쿠데타세력이 권력을 이양하라고 강압했으나 이를 단호히 거절했다고 밝히고 『굴복하느니 차라리 자살하려 했다』고 술회했다. 다음은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밝힌 당시 상황이다. 18일 하오4시50분경 경호실장이 들어와 몇몇 사람이 만나기를 원한다고 전했다. 나는 당시 휴가중이어서 아무도 초청하지 않았으며 누가 올 것으로도 기대하지않았다.또 나에게 방문하겠다고 통지한 사람도 없었다. 누가 불렀느냐고 물었더니 경호실장은 아무도 부른 사람이 없다고대답했다.경호실장은 국가안보책임자인 플레하노프가 일행중에 끼여 있다고 했다.나는 그들을 보낸 사람이 누구인지를 확인하고자 했다. 내가 있는 곳은 일반전화는 물론 정부및 전략사령부와의 비상연락망이 있고 인공위성을 통해 어디와도 통할 수 있는 모든 통신시설이 완비되어 있다.내가 그중 하나를 드니 불통이었다.두번째 세번째도 모두가 두절된 것을 알고 일반적 상황이 아님을 알아 차렸다. 그들은 나를 어디론가 끌고가려 했다.나는 부인과 딸,사위등 가족에게 무슨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알리고 아내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다면 끝까지 버틸 것이라고 굳게 다짐했다. 이런 조치를 취한 후 그들을 만났다.그들은 불쑥 모든 권한을 부통령에게 넘기라고 최후통첩을 하면서 국가상황이 재난이기 때문에 물러나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그들에게 『무지막지한 놈들아! 지옥으로 꺼져라』고 고함을 치면서 누가 보냈는가고 물었다.그들은 무슨 위원회에서 왔다고 했고,내가 최고회의냐 어디냐고 다그치자 대답은 않고 포고령이 발표됐다면서 다시 권한 이양을요구했다. 나는 국가적 재난이 야기될 것이라고 설명하고 정치적 반대는 좋지만 힘으로 해결하려면 수백만명이 죽는 유혈사태가 올 것이라고 경고했다. 월요일 아침 세바스토폴에서 온 병력이 KGB 요원으로 대체되고 6척의 함정이 해상을 봉쇄했으며 한대의 헬기가 숙소 상공을 비행했던 것으로 인근 주민들에게서 들었다. 나는 당시 그들에게 굴복하기보다 자살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경호원들이 안테나를 연결한 라디오를 통해 영국 BBC방송,「미국의 소리」를 청취했다.나에 관한 보도가 많이 있었다.이 자리를 빌려 당시 사태를 정확히 알린 외국기자에게 감사한다.그리고 러시아공화국과 정부및 옐친의 탁월한 노력에 감사하며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 시민들에게 감사를 표한다. 나는 내가 처한 상황을 모스크바에 알리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했다.집에 있던 3개의 작은 두루말이 테이프를 이용,「쿠데타에 반대한다」「나는 아프지 않다」는 등의 글을 타이프로 치고 또 하나는 직접 손으로 써서 건강진단서라고 속이고 주치의를 통해 밖으로 보냈다. 72시간이 지난후 주도자들이 내가 있는 곳으로 온다는 얘기를 들었다.그들이 왔을 때 나는 아무 얘기도 하지 않았으며 야조프 국방장관을 체포하라고 명령했다.그들은 모두 체포됐다. 통신선이 바로 회복됐고 국민과 옐친 등에게 하고 싶은 얘기를 했다.그리고 모스크바에 돌아온후 쿠데타 협력자들을 아무도 크렘린에 오지 못하도록 조치했다.
  • 새 권력구조 어떻게 짜여질까(크렘린 대지진:5)

    ◎개혁파가 권부 전면에 등장한다/의회등 요직에 신진학자등 대거 등용/군부·KGB의 권한 대폭 제한할듯 실패로 끝난 쿠데타의 여파로 대규모 숙청과 함께 소련 권력구조의 대대적인 개편이 불가피하게됐다.쿠데타 주도세력인 연방총리와 KGB의장 및 국방·내무장관의 해임은 엄청난 개편작업의 신호탄에 불과하다. 이 권력구조개편은 KGB와 군부 등 과거 냉전시대에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했던 핵심기구의 입지를 약화시키고 파블로프전총리를 중심으로 했던 경제팀도 시장경제로의 신속한 전환을 주장했던 학자와 관료들로 교체되는 등 신진 개혁파인사들을 대거 등용하는 방향으로 진행될 수 밖에 없다.공산당의 위상에도 커다란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이러한 개편과정에서 옐친 러시아공화국대통령을 비롯한 각공화국들의 입김이 크게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고르바초프대통령은 집무복귀 직후 쿠데타 주도세력인 3개부서의 책임자를 해임,잠정적인 후임자를 임명했다.그러나 하루만에 또다시 이들 3개부처의 책임자를 온건개혁파로 교체하면서 옐친의 의견을 따랐다.무소불위의 힘을 행사했던 KGB와 군부의 권한과 역할을 법률에 의해 명백히 제한하는 입법도 추진될 것으로 보인다. 고르바초프는 후임자 인선과정에서 옐친러시아공화국대통령과 상의한 것으로 알려졌다.옐친은 고르바초프와 23일 회담을 갖고 KGB의장과 국방장관 등 요직의 정식인선문제를 논의했다.옐친은 이자리에서 「연정」을 제의,쿠데타 저지에 공로가 큰 러시아공화국의 인사들을 연방정부에 많이 참여시켜줄 것을 요구,고르바초프의 수락을 얻어냈다. 요직인선의 주도권을 잡기위해 밀고 당기는 과정에서 고르바초프연방대통령과 옐친을 비롯한 각공화국 지도자들간에 어느정도 갈등이 예상됐으나 의외로 수월하게 해결됐다.오히려 연방과 공화국간의 위상정립과정에 더 큰 마찰요인이 도사리고있다.지난 20일 조인할 예정이었던 신연방조약이 조만간 정식으로 조인되면 그렇지않아도 공화국들의 권한이 강화되는 상황에서 옐친이 독자적인 러시아공화국 군대를 창설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있기 때문에 연방정부가 그야말로 껍데기만 남게되는데 대해고르바초프의 반발이 예상된다. 어쨌든 물갈이는 대폭이 될 수 밖에 없다.루키아노프최고회의의장이 이번 쿠데타의 배후인물로 지목됨에 따라 인사태풍은 연방정부에 국한되지않고 의회를 포함한 전역으로 확산될 것으로 보인다. 개편의 바람은 공산당에도 밀어닥칠 수 밖에 없다.이번 쿠데타에 동조한 인사들이 상당수 숙청되고 온건 개혁파 인사들이 대거 요직에 기용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공산당의 향후 위상정립방향은 아직도 불확실한 상황이다.대부분의 소련국민들은 공산당이 이번 쿠데타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의심하며 격분하고있고 일부에서는 공산당 폐기론까지 제기하고 있는 상황이어서 공산당의 입지가 약화될 것만은 분명하다.그러나 공산당이 개혁정당으로 변모할지 아니면 개혁파 인사들이 모두 빠져나가 버리는 가운데 유명무실한 3류정당으로 전락하게 될지는 알 수 없다. 개혁신당 합류 가능성이 반반으로 예측돼오던 고르바초프는 복귀직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제1의 과제는 보수반동세력을 제거하는 것』이라고 밝혔으나 『나는 아직도 공산주의자이며 공산당은 앞으로 페레스트로이카의 중추적인 역할을 맡아야한다』고 말해 혁신적인 메스를 가하면서 공산당과 운명을 같이 할 것임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셰바르드나제전외무장관과 야코블레프전보좌관 등 개혁파 핵심인사들이 이미 상당수 공산당을 떠나 민주적인 개혁신당창당작업에 열을 올리고있는 가운데 이들에 대한 국민들의 인기가 앞으로 더해갈 것으로 보여 공산당이 환골탈태를 거쳐 국민정당으로 변모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이번 사태를 거치면서 나자르바예프 카자흐공화국대통령도 겸직하고있던 공화국공산당 제1서기직을 포기하는 등 연방전역에 걸쳐 반공산당 분위기는 확산일로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르바초프가 공산당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데는 그럴만한 사정이 있다.공산당이 아직도 상당한 영향력을 갖고있는데다 그의 유일한 지지기반이며 이제와서 공산당을 버리고 민주신당으로 당적을 옮길 경우 남들이 차려놓은 잔치에 손님으로 끼어드는 결과밖에 안돼 결국 스스로 정치생명의 목줄을 끊는 셈이된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이번에 대대적인 권력구조개편이 이뤄진다 하더라도 과거 70여년간 권력주변에서 맴돌던 보수파들을 완전히 거세시키기는 어렵다.극심한 경제난이 지속될 경우에는 또다시 극적인 상황변화가 이뤄질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결국 소련은 이제 본격적인 다원화사회로 접어드는 셈이다.새로운 다원화시대로 전환하는 혁명은 아직도 진행중이며 최후의 승자가 누가 될지를 단정짓기에는 아직도 이른 시점이다.
  • 미 국방 정보국이 분석한 「3일정변」

    ◎“쿠데타 D데이는 원래 20일이었다”/고르비가 눈치채자 하루 앞당겨 단행/군부 이견 극심… 옐친 체포·거점장악 지연/야조프등 일부는 작전스케줄 몰라 소련강경파들의 쿠데타는 사전에 치밀한 준비없이 다급하게 진행된데다 정보가 미리 새나가 예정시간을 하루 앞당겨 진행케 됨에 따라 주동자들간에 손발이 맞지 않아 실패했다고 미국방정보국(DIA)은 분석하고 있다. 미외교정책위원회의 피터 슈바이저연구위원은 22일 뉴욕타임스에의 기고문에서 소련 쿠데타의 실패원인을 두명의 DIA 고위소식통을 인용,이같이 밝혔다. DIA의 분석에 따르면 이 쿠데타는 적어도 초기단계에서는 성공이 틀림없었다는 것이다.소련 내무부와 KGB·군부등 쿠데타 주동세력들은 원래 하루 늦은 20일로 거사일을 계획했으며 만일 그들이 자신들의 시간계획을 변경하도록 강요당하지 않았다면 그 결과는 상당히 다르게 나타났으리라는 것이다. 슈바이저는 이들의 거사과정에서 있었던 의문점들을 다음과 같이 열거했다.왜 군인들이 19일 고르바초프 구금후 4시간이 지나도록까지모스크바로 향하지 않았는가.왜 쿠데타세력에 심각한 위협이된 옐친을 체포하지 않았는가.왜 모스크바 주요지역에 쿠데타세력에 충성하는 부대 대신에 옐친에게 동정심을 가진 지휘관들의 부대가 동원됐는가.왜 쿠데타지도부가 그렇게 빠르게 와해됐는가. DIA의 분석은 고르바초프가 아마도 크리미아에 있는 동안 쿠데타를 경고받았으며 그 사태를 막기위해 원래 역사적인 신연방조약을 체결키로한 20일까지는 크렘린으로 돌아갈 계획이 없던 그가 19일 갑자기 모스크바로 가려고 했기 때문에 부득이 거사날이 하루 당겨지게 됐다는 것이다. 쿠데타 공모자들은 이때문에 서둘러 거사를 일으킬 수밖에 없었으며 따라서 옐친 추종자들에 의해 지휘되는 것으로 알려진 모스크바 인근 주둔부대들을 러시아공화국 건물을 경비케하는등 주요작전에 투입시키는 실수를 저지르게 된것이다. 이사실은 또 고르바초프의 구금과 모스크바에서의 첫군사작전 사이에 왜 4시간의 갭이 있었는가에 대한 설명도 될것이다.내무부와 KGB에 소속된 충성스러운 정예부대들이 출동하는데는그로부터도 10시간이 더 걸렸다. 주동자들의 결속은 쿠데타가 계획보다 빨리 시작되면서 와해되기 시작했다. 드미트리 야조프 국방장관을 비롯한 다른 군지휘관들은 아마 이미 작전이 개시된 후까지도 앞당겨진 시간계획을 알지 못했던것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야조프 국방장관은 자신이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이미 쿠데타가 시작된것을 알고는 몹시 화를 냈는데 이는 그가 국가비상사태위의 위원으로 참여하고 있으면서도 고르바초프대통령의 축출을 발표한 20일의 기자회견에 나타나지 않았던 것과 이어서 그가 건강상의 이유로 비상위 위원직을 사퇴했다는 발표에 대한 설명이 될것이다. 그러나 고르바초프대통령에게 거사계획을 미리 귀띔해준 사람이 바로 주동 핵심인 야조프장관이라는 추측도 제기되고 있다.고르바초프대통령이 모스크바로 돌아가려고 시도하기 불과 몇시간 전에 크리미아에서 두사람이 만났다는 것이다. 또 주동자들의 군사작전이 제멋대로 진행됐다는 사실도 지적되고 있다.군대들은 고르바초프 구금 이후 7시간이 지나도록까지 러시아공화국의사당 주변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하여 옐친이 자유롭게 지지자들을 규합하고 용기를 불어넣을수 있도록 했던 것이다. 더욱이 옐친의 행동을 억제하기 위해 파견된 군부대 가운데 그의 추종자들에 의해 지휘되는 부대들이 있었다는 사실은 쿠데타 주동자들이 얼마나 치밀하지 못했는가를 알수 있다.막상 옐친을 구금할수 있는 군대들은 10시간이 넘어서야 도착했고 그들이 도착했을때는 이미 의사당빌딩이 수천명의 옐친 지지시민들에 둘러싸여 손을 쓸수가 없었다. 얼마전부터 쿠데타가 임박했다는 경고가 과거 고르바초프의 오른팔이었던 전외무장관 셰바르드나제와 전보좌관 야코블레프에 의해 제기된 바 있다.KGB와 내무부·군부의 합동훈련이 실시되고 있다는 명백한 근거를 토대로한 것이었다.그러나 그 부대중 이번 쿠데타에 참여한 부대는 거의 없었으며 그들이 참여치 못한 것은 분명 계획된 것이 아니고 주동자들의 혼선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번 소련의 쿠데타는 사전에 잘 계획된 거사가 아니고 성급하게 급조된 것이었으며 진행과정에서 주동자들의 결속이 와해,실패하게 됐다는 것이다.
  • 독일/고르비 지원 확대/미국/「2원정책」을 추진

    ◎워싱턴의 새 대소 전략은/연방통제권 약화… 공화국과 밀착 시도/“발트 3국 조기독립 바람직” 조심스런 변화 시사 모스크바에서 강경파의 쿠데타가 실패하고 미하일 고르바초프대통령이 권좌에 복귀했음에도 워싱턴의 정책 입안자들은 소련내 상황이 아직 유동적이라는 이유를 들어 미국의 대소정책 변화에 관한 언급을 피하고 있다. 그러나 3일 천하로 끝난 소련의 불발 쿠데타가 워싱턴에 대해 정책 재검토를 촉구한 것은 분명하다. 워싱턴의 대소정책에 변화를 재촉하고 있는 주요 동인은 소련내 세력균형의 변화다.그동안 미국은 소련에서 중앙정부의 미하일 고르바초프대통령만을 유일하게 지지했지만 앞으론 크렘린과 각 공화국을 동시 상대하는 2원정책으로 나갈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전망했다. 크렘린으로 복귀한 고르바초프가 쿠데타 주동자들이 무산을 기도했던 새 연방조약을 어떻게 처리할지는 아직 불확실한 것으로 알려졌다.소련내 16개 공화국 가운데 9개공화국과 고르바초프간에 기본합의가 이뤄져 이른바 「9+1」연방조약이라고 불리는 이 조약은 각 공화국에 보다 큰 자치권을 부여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지금까지 부시 미행정부는 소련권력의 중심이 고르바초프로부터 러시아공화국 대통령 보리스 옐친과 같은 독립지향적인 공화국 지도자들에게 옮겨지고 있다는 뚜렷한 조짐과 정보보고에도 불구하고 2원접근 정책의 채택을 회피했다.그러나 이젠 크렘린이 각 공화국에 대한 통제력을 잃어가고 있기 때문에 미국으로서도 정책전환이 불가피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워싱턴의 대소정책 변화는 발틱 3국문제에서 먼저 나타났다. 조지 부시 미대통령은 22일 『라트비아,에스토니아,리투아니아 등 발트 3국의 독립이 조속히 실현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밝혔다.그는 『최근의 소련 사태가 발틱 3국의 독립을 앞당기게 할 것』이라고 전망하고 이를 위한 『대화의 분위기가 충분히 조성된 것으로 믿는다』고 말했다. 부시의 이 발언은 발틱 3국 독립에 대한 미국의 최초의 적극적인 지지표명으로서,소련의 쿠데타 실패와 새 연방조약이 발틱 3국의 탈소 독립운동을 가열시켜 결국 이들에게 독립을 가져다줄것이라는 새로운 상황 판단과 이에 따른 정책 변화를 나타낸 것이다.발틱3국 독립문제에 대해 지금까지 미국은 소련의 발틱3국 병합을 인정한 일이 없다는 식의 미온적인 태도를 취해 왔으며,부시는 만일 이 3나라가 평화적인 연방이탈 협상을 통해 독립을 할 경우 이를 인정하겠다고 약속한바 있다. ○대규모 식량원조설 이날 부시대통령은 쿠데타 발생과 더불어 소련에 대해 취했던 경제지원 중단조치를 해제했다.또한 부시 행정부의 한 고위관리는 『고르바초프가 보다 확실한 개혁 정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지 않는 한 미국의 대소지원정책은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소극적인 수준에 머물을 수밖에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워싱턴은 고르바초프에게 경제개혁 추진에 박차를 가하도록 압력을 가할 것으로 보인다.그동안 부시 행정부는 고르바초프가 강경파와 개혁파 사이에서 협공을 당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고르바초프에게 압력을 가하는 문제에 신중을 기해왔다. 그러나 이젠 개혁을 가로막았던 강경파들이 내각에서 사라진 이상 고르바초프의 개혁추진이훨씬 수월해졌으며,따라서 이번 쿠데타는 워싱턴이 모스크바에 대해 돈줄을 푸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일부 전문가들은 주장했다. 로스앤젤레스 타임스지는 21일 정부 관계자의 말을 인용,부시 행정부가 고르바초프 정권에 대한 지지를 보여주기 위해 소련에 대규모 식량원조 등을 계획하고 있다고 보도했다.전문가들은 미국이 경제지원을 통해 고르바초프의 국내 문제 해결을 도와주는 대신 국제 무대에서 소련의 보조적인 역할을 정립하는 쪽으로 양국 관계가 발전할 가능성이 있다고 관측했다. ○고르비 포기는 안해 부시는 소련내 공화국에 대한 지지강도를 둘러싸고 의회와 실랑이를 벌이게 될지 모른다.미의회에선 『고르바초프의 시대가 끝나고 옐친과 소련 국민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소리가 높지만 부시는 고르바초프를 포기하지 않을 것같다. 부시행정부의 한 고위관리는 고르바초프가 쿠데타로 약화되긴 했지만 그는 여전히 소련의 군사외교를 통제하고 중앙정부를 이끌어나갈 지도자라고 말했다.고르바초프는 여전히 미국의 공식적인 대소 협상창구라는 것이다. 쿠데타에 과감히 도전,강경파를 패퇴시키고 영웅으로 부상한 옐친은 정치적 기반을 더욱 강화,확대해 나갈 것으로 보인다.지금 모스크바의 선두주자가 옐친이라는 것은 세계가 인정하는 사실이기 때문에 워싱턴은 싫든 좋든 옐친을 상대하지 않으면 안된다.따라서 옐친이나 다른 공화국지도자에 대한 미국의 공개적 지지가 고르바초프를 모독하는 것이 아니냐는 문제에 대해선 예민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될 것이라고 워싱턴은 믿고 있다. 부시와 미 의회는 옐친을 비롯한 소련내 공화국 지도자들이 그들의 중앙통제경제를 시장경제로 전환시키려는 노력을 고무하면서 이들과 새로운 협조 관계를 모색해 나갈 것으로 보인다. ◎베를린의 「정변이후」대응/“쿠데타는 경제난 때문에 비롯” 판단/식품수출 확대… EC등과 추가경원 적극 추진 독일정부와 각 정파는 소련의 쿠데타기도가 진정된뒤 소련에서 확고한 위치를 되찾은 개혁파들을 집중적이고도 다양하게 지원해야한다고 강조했다. 독일은 특히 고르바초프 소련대통령이 쿠데타기도이후 강력한 개혁정책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서구국들로부터의 재정적인 지원이 강화되어야 하며 그동안 대소지원에 소극적이었던 서구국들에게 대소지원을 강화할 것을 촉구하기로 했다. 겐셔외무장관은 22일 의회에서 서구가 소련과의 협력관계를 강화해야 하며 그동안 대소재정지원에 소극적이었던 서구국들에게 적극적인 지원을 하도록 촉구하겠다고 말했다.수상실의 루돌프 자이터스장관은 독일은 그동안 소련에 대한 지원에 가장 적극적이었으나 독일로서는 더이상의 재정지원을 할 여력이 없다고 말했다.자이터스장관은 서구국들은 이제 소련에 대한 「최대한의 지원」을 해야한다고 말했으며 겐셔외무장관은 『독일은 능력의 극한점에 이르기 까지 소련을 지원하겠다』고 다짐했다. 자이터스장관은 본정부가 89년이래 소련에 60억마르크(40억달러)를 지원했다고 밝히고 이같은 액수는 독일이 소련을 도울수 있는 상한선임을 회상시키고 이제는 미국·일본 등 런던 G7정상회담에서 소극적인 대소지원 자세를 보였던 국가들이 독일과 함께 경제지원에앞장서야 한다고 주장했다.사회당의 볼프강 로츠는 쿠데타기도이후 소련에 대한 국제적인 재정지원의 강화를 유도하기위해 콜총리가 미국·일본을 방문할 것을 요구했다. 독일은 고르바초프 소련대통령의 지원으로 통일을 이룬뒤 대소지원에 가장 협조적이었으며 이번의 소련쿠데타사건은 소련의 어려운 국내경제상황에 반발하고 있는 보수파가 일으킨만큼 경제지원이 가장 절실하다고 판단하고 있다.소련의 쿠데타기도이후 본과 파리·로마 등 유럽국가들은 대소경제지원의 강화가 필요하다는 공감대를 이루고 있으나 미국·일본·영국 등은 아직도 소련의 개혁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판단이다. 독일은 소련의 안정이 유럽의 안보에 가장 중요한 요인이며 민주화를 추진하고 있는 구동구권국가들의 안정에도 필수적인 요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이때문에 독일은 소련에서 쿠데타가 일어나자 소련이 기존의 국제조약을 지킬 것을 강조하며 독일주둔 소련군이 예정대로 철수할 것인가에 대해 신경을 곤두세웠으며 EC·NATO관계장관회담에서도 소련에서 보수세력이 집권해 고르바초프대통령의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으로 모처럼 맞이한 「유럽의 봄」이 다시 냉전시대로 돌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경고했다.소련의 쿠데타가 실패로 끝나자 독일은 이번 사건이 소련의 경제적인 딜레마로 야기된 것이라는 분석을 하고 소련에 대한 재정지원을 강화하겠다는 방침이나 독일 단독만으로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EC·NATO 등 회원국들과의 협조강화에 노력한다는 방침이다.독일은 이와함께 소련사태이후 가장 불안감을 느끼고 있는 폴란드·체코·헝가리 등 동구권 국가들이 빠른 시기에 시장경제의 틀을 확립해 소련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EC가 약속한 경제적 지원을 예정대로 하며 정세가 불안한 리투아니아 등 발트공화국들에 대한 지원방안도 검토하고 있다.독일은 의회의 토론결과를 바탕으로 대소지원책을 추가로 마련,소련상품의 수입을 확대하고 소련에 대한 투자를 강화하며 식료품수출을 늘리기로 했으며 국제적인 대소지원의 필요성 분위기가 조성됨에 따라 조만간 EC정상회담을 열어 소련지원의 구체적인 방안을 촉구할 방침이다.
  • 소 반전드라마와 북한 대응

    ◎“기대만큼 허탈”… 희비 엇갈린 평양/총리회담등 대남정책 거듭 번복/「내키지 않는 남북대좌」 자인한셈/당분간 「문단속」강화… 「조정기」 거칠듯 고르바초프의 대통령직 복귀로 마무리된 소련의 정변은 엉뚱하게 한반도에 그 여파를 미쳐 남북고위급회담의 연기라는 불똥을 남기었다. 소련 군부강경파의 쿠데타 시도가 있었던 지난 19일부터 23일까지 북한은 사태추이에 따라 희비가 엇갈린 반응을 보였으나 결과적으로 남북대화에 임하는 기본자세가 자발적인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밀려서」라는 사실만을 확인시켜주고 말았다. 이는 곧 고위급회담이 재개된다해도 생산적인 대화가 어려울 것임을 시사하는 것으로 지나치게 회담전망을 낙관하고 있는 일부 정책담당자들에게는 더없이 귀중한 교훈이 되고있다. 북한은 지난 19일 「고르비 실각」사실이 외신에 입전된지 불과 6시간여만인 하오 7시이를 중앙방송의 비정규뉴스를 통해 이례적으로 신속히 보도함으로써 개혁과 개방을 앞세워 김일성주석을 궁지에 몰아넣고 있는 고르비의 축출에 대해 고무된 감정을 솔직히 표출했다. 이어 같은날 하오 9시 방송을 통해 콜레라발생국가 주민의 입북을 제한할 것이라는 보건부대변인의 담화를 보도,일종의 복선을 깔았다. 북한은 소쿠데타 발생 하루뒤인 20일 로동신문을 통해 『사회주의 승리는 역사적 필연』이라며 『그 누구든지 역사발전법칙에 따를 때는 승리하지만 이 흐름에 역행할때는 파멸을 면치 못한다』고 호언했다. 북한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이날 상오10시 판문점에서 있은 제4차 고위급회담 남북책임연락관 접촉에서 「남쪽에서의 콜레라발생」이라는 절묘한 이유를 내세워 27일로 다가온 평양회담을 판문점에서 개최하자고 주장했다. 소사태에 고무된 북한으로 볼때 열악해진 국제적 입지를 반전시킬 수 있는 호기를 맞고 있는 상태에서 탐탁지 않은 남북대화에 임하기보다 좀더 사태가 명료해질 때까지 시간을 끌자는 입장이 분명해진 것이다.북한은 그러나 21일 쿠데타발생 3일이 지나면서 소련전역에서 수십만명의 국민들이 반쿠데타시위를 벌이는등 사태가 역전될 조짐을 보이고 있음에도 이에 대해 일체 언급을 회피한채 국가비상사태위원회가 발표한 「정령」과 모스크바위수사령관의 통금령만을 전하는등 쿠데타주도세력에 대한 기대를 떨치지 못했다. 이런 가운데 21일과 22일 판문점에서 두차례의 고위급회담 남북책임연락관접촉이 있었으나 북측은 20일 내놓은 「판문점개최」만을 거듭 주장할뿐 제4차 평양회담의 개최반대인지,연기요구인지에 대해 명확한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 21일밤 소쿠데타가 실패로 끝났고 이 사실이 전세계에 알려졌으나 북한이 이를 보도한 것은 하룻밤이 지난 22일 낮12시 뉴스에서였다.쿠데타 실패라는 직접적인 표현을 쓰지않은채 고르바초프대통령이 성명을 발표,정상적인 대통령의 직무에 복귀하겠다고 밝힌 사실만을 짤막하게 5번째 뉴스로 보도했다. 쿠데타실패뉴스를 접한 김일성주석이 기대만큼이나 큰 허탈감에 빠져 있으리라는 일반적 예측과 달리 예상보다 빠른 반응이었다. 곧이어 김영남부총리겸 외교부장이 22일 평양주재 소련대사를 만나 고르바초프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다.이 역시 이례적으로발빠른 행보였다. 더 나아가 북한은 23일 열린 남북판문점 책임연락관 접촉에서 「판문점개최」를 주장해 온 제4차고위급회담을 오는 10월 평양에서 개최하자고 제의,남북합의를 이끌어냈다. 김일성주석이 지난달 24일 조·일우호촉진의원연맹대표단과 대좌한 자리에서 밝혔듯 북한이 다시 『세계조류에 맞춰 현실적인(대외)정책』을 취할 수 밖에 없음을 자인한 셈이다. 김주석은 그러나 소련의 격변이 「주체사상」과 같은 위대한 사상이 없는데서 비롯됐다는 말을 내세워 대내적인 결속의 고삐만은 늦추지않을 것으로 보인다. □북한의 소 사태 보도태도 일 자 보 도 내 용 19일 고르비 실각,비정규 뉴스로 신속보도. 콜레라 발생국가 주민 입북제한 발표 20일 제4차 남북고위급회담 판문점개최 주장 21일 소 국가비상사태위 「정령」만 보도 22일 고르비 직무복귀 간단히 보도 김영남외교부장,고르비지지 표명 23일 제4차 남북고위급회담 10월 평양개최 제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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