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쿠데타
    2026-08-11
    검색기록 지우기
  • 상하이
    2026-08-11
    검색기록 지우기
  • 충북도
    2026-08-11
    검색기록 지우기
  • 이영준
    2026-08-11
    검색기록 지우기
  • 겨울
    2026-08-11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5,657
  • 黃長燁씨 국회 오찬간담/“對北 유연정책 긴요”

    ◎햇볕정책 핵심은 식량지원 지난해 4월 귀순한 黃長燁 전 북한 노동당비서가 25일 6·25 발발 48주년을 맞아 여야 국회의원들과 특별 오찬간담회를 가졌다. 국회 안보·통일정책 연구회 초청으로 국회 귀빈식당에서 열린 간담회는 鄭周永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방북(訪北)과 북한 잠수정 침투 사건이 엇갈린 시점이어서 자못 진지한 분위기였다. 화두는 현 정권의 ‘햇볕정책’이었다. 黃 전비서는 기조발언에서 “궁한 쥐가 고양이를 무는 모험을 시도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며 “남한이 식량지원이라는 형태로 ‘햇볕’을 비추면 북한 동포 스스로 통치자에게 개혁·개방에 나서도록 압력을 가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햇볕정책의 핵심을 식량지원에 둬야 한다”는 논리다. 이어 의원들은 잠수정 침투사건과 군부 쿠데타 시나리오,전쟁 도발 가능성 등을 주제로 黃 전비서와 일문일답을 나눴다. 黃 전비서는 “金正日 정권의 무력 통일 방침에는 변화가 없다”고 전제한 뒤 “그러나 잠수정 침투 사건과 햇볕정책을 지나치게 대치해서 생각할 필요는 없다. 소떼를 100차례 갖다줘도 잠수정 침투 같은 사건이 없어지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유연한 대처를 당부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분단 현실을 무시하고 평화 기분에 사로잡힐 필요는 없다”며 “현재 북한의 도발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경각심을 갖고 대비한다고 나쁠 것은 없다”고 말했다. 黃 전비서는 금강산 관광 사업과 관련,“지난 95년 내가 금강산 관광을 건의했지만 金正日이 반대했다”며 “그러나 이제는 북한 사정이 어려워져 관광을 받아들일 것”이라고 내다봤다.
  • 金 대통령 訪美­클린턴 국빈만찬 환영사·金 대통령 국빈만찬 답사

    ◎클린턴 국빈만찬 환영사 나는 지난 92년 인종폭동 당시 로스앤젤레스 시청에서 金대통령을 처음 만난 때를 기억합니다.대통령이 되어 돌아온 金대통령에게 나는 많은 친구들과 함께 격려의 힘이 되고자 합니다. 金대통령의 삶은 자유가 댓가없이 얻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습니다.한국전쟁때 공산주의자에 의해 처형될 뻔했고,14t이나 되는 트럭이 살해 목적으로 덮치기도 했습니다. 처음 국회의원에 당선되고는 군사쿠데타로 며칠만에 의회가 해산됐으며,80년에는 단 60분의 재판으로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는 지금도 싸움을 계속하고 있습니다.나는 그가 옥중서신에서 쓴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호랑이에 물려가도 살아날 길이 있다’는 말처럼 다시 승리할 것으로 믿습니다. 金대통령은 세계 민주주의의 중심에 서서 민주주의를 더욱 발전시켜 나갈 것입니다. 그는 지금까지 독재와 맞서 싸우며 불가능했던 일을 결국 현실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金 대통령 국빈만찬 답사 내가 대통령에 취임한 후 양자 정상회담을위한 첫번째 방문국가로 미국을 택하게 된 것은 미국이 개인적으로 내 생명의 은인이며,국가적으로 소중한 민주주의의 전우이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무엇보다 각하와 같이 탁월한 지도자와 공동의 관심사를 하루속히 논의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각하께서 미국을 인류 역사상 가장 영향력이 큰 국가로 이끈데 대해서 깊은 존경과 흠모의 뜻을 언제나 가지고 있습니다. 이번 미국 방문을 통해 나와 한국 국민 모두는 한미관계가 종래의 안보와 경제 차원의 협력만이 아니라 한층 더 높은 차원의 동반자 관계로 진입할 것을 바라고 있습니다.그것은 이제 한미 양국의 협력이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한국에서 병행 발전시키는데 사용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이념 아래 한미 두나라의 폭넓은 경제적 유대와 공고한 안보협력이 21세기 아시아·태평양시대를 열어가는 견인차가 되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 심장마비死 나이지리아 독재자 아바차(뉴스의 인물)

    ◎93년 무혈쿠데타로 정권 장악/정적 탄압 등 5년간 철권통치 8일 심장마비로 사망한 나이지리아의 군부 독재자 사니 아바차(54) 잠정통치평의회(PRC) 의장은 93년 무혈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인물. 집권후 수많은 정적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하며 절대권력을 휘둘렀다.그러나 반대파들의 쿠데타를 염려,나라 밖으로 여행도 못한 채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낼 때조차 검은 선글라스로 얼굴을 가리는 폐쇄성을 보였다. 43년 나이지리아 북부 카노주(州)에서 태어나 18세에 입대,영국과 미국 등지에서 정규 군사교육을 받았다.29세때 장성으로 진급,아브라힘 바방기다 전(前) 군사정권에서 국방장관을 지냈다.93년 정부가 내린 선거 무효화 조치로 민심이 동요하자 과도정부를 축출하고 정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그의 철권통치 5년 동안 극에 달한 부패와 탄압으로 경제가 피폐해지고 민주주의 역시 회생불능의 상태로 퇴보하자 최근 국내외적으로 강도 높은 압력을 받아 왔다.오는 8월1일 대통령선거를 통해 민정이양을 약속했던 것 역시 사태의 심각성을 감지하고 내놓은 민심회유책이었다.
  • 白凡 재조명:2­1(정직한 역사 되찾기)

    ◎생애 재평가/利害­이념 초월… 독립­통일 헌신/애국단 의거·광복군 참전 지휘/상황논리 정치이익과 타협 배격/‘한국의 간디’ 역사성 부여해야 역사는 정직해야 한다.그러나 세계사는 일그러진 역사로 얼룩져 있다.세계사의 많은 갈등과 분쟁은 굴절된 역사의 산물이다.한국의 현대사에도 일그러진 역사가 있다.그중의 하나가 백범 金九 선생에 대한 잘못된 평가다. 백범의 독립운동은 과격한 테러에 의존했고 현실인식도 부족했다는 일부 지적이 있었다.그의 실패한 남북협상은 현실 정치가로서의 한계를 나타낸 것이라는 평가도 있었다.그러한 평가는 그러나 친일세력들의 식민사관과 백범을 죽인 권력집단의 인위적인 ‘평가절하 시나리오’의 한 부분일 뿐이다. 테러리즘 비난은 주로 ‘한인애국단’ 활동 때문이었다.백범은 애국단을 창설하고 애국단의 李奉昌 의사와 尹奉吉 의사의 의거를 지휘했다.그러나 애국단 활동을 테러리즘이라고 비난하는 것은 일제 강점을 합법적 지배구조로 보는 민족 반역적인 친일 세력들의 식민사관에 지나지 않는다. 서울대학의 愼鏞廈 교수는 “애국단 활동은 침체된 독립운동을 부활시킨 독립운동사의 중요한 부분”이라고 강조한다.애국단 활동에 고무된 국내외 동포들은 임시정부의 중요성과 독립운동의 성과를 재인식하고 재정지원 등을 재개했다.그 결과 집세도 제대로 못내던 초라한 임시정부의 활동이 활성화됐다. 대외적으로는 중국의 신뢰와 협조를 다시 얻어 중국에서의 독립운동이 활성화된 결정적 계기가 됐다.1930년대 들어 중국에서의 독립운동은 꺼져 가는 불꽃과 같았다.일제가 조작한 1931년 7월의 ‘만보산사건(萬寶山事件)’으로 한국인에 대한 중국사람들의 증오와 적대행위가 만연되며 독립운동은 거의 불가능했다. 그러나 尹奉吉 의사의 의거는 일본침략군에게 상하이(上海)를 점령당한 중국인들의 울분과 한을 풀어준 통쾌한 일이었다.중국 중앙군 사령관 장제스(蔣介石)는 “중국군 30만명이 해내지 못한 일을 한국청년이 해냈다”고 극찬했다.그후 중국은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에 협조적이었다.애국단의 의거는 특히 국제도시 상하이·도쿄 등에서 일어났기때문에 한국민족의 독립운동을 전세계에 알리는 중요한 역할도 했다. 백범은 국제사회의 냉엄함도 잘 알고 있었다.망명중 제국주의 열강이 중국을 어떻게 수탈하는 지를 체험을 통해 알았다.자주적 독립의 중요성을 절감했다.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광복군의 참전을 서두른 것도 자주적 독립을 위한 전략이었다. 그러나 역사는 보다 빨리 바뀌었다.광복군이 참전하기 전에 일본이 항복한 것이다.그는 백범일지에서 “일본의 항복은 내게 기쁜 소식이라기보다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일이었다.수년간 애써 참전 준비를 한 것도 다 허사다.걱정되는 것은 우리가 이번 전쟁에서 한 일이 없기 때문에 장래 국제간에 발언권이 박약하리라는 점이다”라며 아쉬워했다.프랑스의 드골 장군이 전후 프랑스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연합군에 앞서 파리 입성을 고집했듯이 백범도 국제정세의 흐름을 정확히 읽고 있었다.그는 일본과의 전쟁에 주도적으로 참여해야 자주독립이 보장될 것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백범은 귀국후 독립운동의 연장선상에서 민족통일을 위해 헌신했다.통일한국만이 진정한 민족의 광복이라고 강조했다.일부는 백범의 이러한 통일노력을 공산주의 본질을 잘 몰랐던 현실 정치가로서의 한계라고 매도했다.그러나 그는 독립운동과정에서 이념적 갈등을 경험하면서 공산주의의 실체를 잘 알고 있었다.특히 중국에서 국공(國共)분열이 얼마나 참담한 비극이었는 지를 직접 눈으로 보았다.결국 분단국가가 성립되면 같은 민족간의 갈등과 전쟁을 피할 수 없다고 판단,통일한국의 건설을 위해 남북협상을 강행했다. 그는 정치적 이익과 이념을 초월하여 독립과 통일을 위해 일생을 받쳤다.그의 위대함은 상황이 불리한 줄 알면서도 정치적 이익을 위해 타협하지 않고 민족의 미래를 생각한 점이다. 그의 일생은 애국의 역사였다.그러나 현실정치는 그에게 참된 역사성을 부여하지 않았다.그러한 오류는 고쳐져야 한다.백범은 현대사의 가장 위대한 지도자로 재평가되야 한다.그는 ‘한국의 간디’라 할 수 있다.백범에 대한 올바른 평가는 정직한 역사를 되찾는 일이다.정직한 역사는 민족의 밝은 미래를 보장한다.◎암살의 진상/이승만 정권­軍部 합작품 1949년 6월26일.그날은 비극의 일요일이었다.민족의 위대한 지도자 金九 선생이 암살된 것이다.분노와 애도의 물결 속에 온 겨레는 슬픔에 잠겼다. 백범은 7월5일 온 국민의 애도 속에 효창공원에 안장됐다.그의 죽음에 대한 진상도 함께 묻혀 버렸다.자신의 집무실 경교장(京橋莊)에서 당시 포병소위였던 안두희에게 피살됐으나 그 배후는 베일에 가려져 왔다. 안두희는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그러나 1년도 못되어 석방된 후 육군에 복귀,대위까지 진급했다.후에 국회에서 그 사실이 문제되자 제대했다.그러나 자유당 정권의 비호아래 암살의 ‘정당성’을 주장하기도 했다. 李承晩 정권이 4·19혁명으로 무너지자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민간차원의 운동이 일어났다.그러나 61년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난 후 진상조사활동은 거의 중단됐다.그 이후에도 활발한 활동은 없었다.곽태영·권중희·노송구씨 등에 의한 안두희 추적만 있었을 뿐 국가적 차원의 조사는 없었다. 본격적인 진상조사는 92년 11월5일 ‘백범 김구선생 시해 진상위원회(위원장 이강훈)’가 국회에 청원서를 내면서 시작됐다.국회의 청원심사소위원회(위원장 강신옥 의원)는 95년 12월18일 조사보고서를 발표했다.보고서는 안두희의 우발적 단독범행이 아니라 면밀하게 모의되고 조직적으로 역할 분담된 정권적 차원의 범죄였다고 결론내렸다. 안두희는 거대한 조직과 역할에서 하수인에 지나지 않았다.암살사건은 고급정보 브로커였던 김지웅이 전반적으로 조율했다.그의 지시를 받는 홍종만은 암살 하수인들을 관리했다.이들은 모두 정권적 비호를 받았다. 그러나 암살의 일차적 배후는 군부쪽 이었다.암살명령은 장은산 당시 포병사령관이 내렸다.김창룡 특무대장은 사건후 적극 개입했다.채병덕 총참모장,전봉덕 헌병부사령관,원용덕 재판장,신성모 국방장관 등은 사후 처리를 주도했다. 백범 암살에서 가장 큰 쟁점은 李承晩 전 대통령과 미국의 관련성이다.李 전대통령은 정권적 차원의 범죄라는 차원에서 도덕적 책임이 있다.사건후 개입한 것도 확인됐다.미국도 암살사건의 내막을 알 수 있었을 것으로판단된다. ◎안두희 ‘처단’ 朴琦緖씨/“정의 일깨우고 싶었습니다”/힘겨웠던 독방생활/김구 선생 떠올리며 감내/어려운 사람 잘 사는 세상 왔으면 朴琦緖(49)씨는 버스 운전기사다.보통 사람으로 평범하게 살아가고 있다.그러나 그에게는 또다른 모습이 있다.金九 선생 암살범 安斗熙를 죽인 ‘정의의 사나이.’ 그는 정의라는 말을 좋아한다.安斗熙를 죽인 것도 사회의 정의를 일깨우기 위해서였다고 말한다.“위대한 민족 지도자 金九 선생을 시해한 사람이 제명을 다하는 것은 역사의 정의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1996년 10월23일.安斗熙는 朴씨의 ‘정의의 봉’에 맞아 죽었다.“옳은 일을 했다고 생각했습니다.죄의식은 크게 없었습니다.하지만 고뇌의 시간도 많았습니다.그러나 누군가 이 일을 해야만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3년형의 판결을 받았다.감시 카메라가 있는 독방에서 생활했다.“교도소 생활은 힘들었습니다.추위는 정말 고통스러웠습니다.귀와 발이 동상에 걸렸습니다.그러나 고통의 순간마다 金九 선생의 힘들었던 감옥생활을 생각했습니다.金九 선생과 비교하면 나는 얼마나 편한가라고 위로했습니다.”성당에 다니는 그는 성경과 백범일지,역사책 등을 많이 읽었다고 말했다. 그는 3월13일 사면으로 청주감옥을 나왔다.잠시 중단했던 운전대를 다시 잡았다.부천에 있는 소신여객 사람들은 그를 환영했다.“회사 노조원들의 석방운동이 고마왔습니다.광복회와 백범 김구선생 기념사업협회의 석방운동도 감사했습니다.” 출옥후 그의 집에는 조그만 변화가 나타났다.“아이들(딸 2명 아들 1명)의 보는 눈이 달라졌습니다.그저 평범한 아빠로 보던 그들이 존경의 마음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살인자의 아내’라는 부담을 느끼던 아내도 자랑스런 남편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평범한 운전기사로 남기를 원한다.그는 오늘도 피곤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태우고 김포공항과 월미도 사이를 달린다.“나의 버스를 타는 사람들은 대부분 어려운 사람들입니다.그런 사람들도 잘 살 수 있는 올바른 사회가 실현됐으면 좋겠습니다.”올바른 사회를 만드는 것이 金九 선생의 큰 뜻을 살리는 길이라고 그는 말했다.
  • 曺升玉 육사교수 군대문화 발전적 정립 세미나 주제발표

    ◎직업정신 무장 신뢰받는 軍 돼야 육군사관학교는 5일 본교 화랑대 연구소에서 건군 50주년을 맞아 ‘한국군 군대문화의 회고와 발전적 정립’이란 주제로 군사연구 세미나를 개최했다.曺升玉 육사교수(육군 대령)가 발표한 ‘한국군 군대문화 조형방향’이란 제목의 주제 발표문을 요약·소개한다. 한국군 군대문화는 지금 중대한 전환기를 맞고 있다.건군의 민주 이념을 구현하기 위해 민주 군대상을 정립해야 하고 국민의 신뢰를 회복해 국민주의 이념을 계승해야 한다.직업주의 이념도 정착시켜야 한다. 그러나 지난 반세기를 돌이켜 볼때 우리 군은 본연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일부 군인의 정치적 개입으로 군의 고유한 직업주의가 후퇴되고 국민들로부터 불신을 받게 됐다.이는 그렇게 비판했던 선배 장교들 못지 않게 후배 장교들이 부패의 수렁으로 빠져든 요인이 되기도 했다. 군의 정치적 개입은 장교단을 분열시키고 정치에 물들게 함으로써 장교문화를 천박하게 만들었다. 5·16에 반대했던 李翰林 장군은 “군의 정치개입으로 12·12 사태 등 연이은 쿠데타가 일어나 이 나라 헌정이 32년이란 긴 세월동안 군부 통치하에 있었다는 것은 근대사의 큰 비극”이라고 개탄하면서 “그로부터 군의 생명인 위계질서의 상실 내지는 문란의 출발점이 되었고 가치관의 전도현상으로 우리 국민의 도덕수준을 후진국형으로 퇴보시켰다”고 지적한 바 있다. 물론 우리 군은 박봉과 어려운 여건에도 불구하고 오직 사명감과 강한 정신력으로 모든 난관을 극복하며 군을 지탱하고 나라를 지켜냈다. 직업군인인 장교는 보수가 좋은 곳을 옮겨다니는 용병도 아니고 그렇다고 강한 애국심과 의무감에서 단기적으로 복무하는 의무복무 군인도 아니다.직업군인인 장교는 개인의 이익을 초월해 직무에 헌신해야 한다.이런 군대만이 국민의 신뢰를 받을 수 있다. 군은 앞으로 직업정신이 투철한 군인을 양성하는데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그래서 진정 국방의 임무에만 전념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야 한다. 이제 건군 50주년을 맞아 우리는 한국군 군대문화가 걸어 온 지난 반세기의 발자취를 거울 삼아 자유민주주의 국가체제에 부합한 민주군대로,그리고 직업주의를 신봉하는 장교단이 지휘하는 능률적이고 강한 군대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이를 위해 군대문화의 일대 혁신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 반민특위의 좌절과 개혁세력(金三雄 칼럼)

    초하의 6월이 열리면 우리는 6·25한국전쟁과 반독재 6월 민중항쟁을 생각한다. 한국 현대사의 물굽이를 바꾼 큰 사건이다. 그런데 6월이면 잊어서는 아니 될 또 하나의 사건이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앞의 두 사건에 못지 않는 사건이다. 단재 신채호의 필법을 차용하여 ‘한국현대사의 제1대사건’이라면 무엇일까. 해방 건국 분단 전쟁 4월혁명 5·16쿠데타 10월유신 10·26사태 5·17쿠데타 광주항쟁 여야정권교체 등, 안정된 사회라면 1세기에 한번 겪을까말까할 일을 우리는 숨돌릴 틈도 없이 무수히 치렀다. 그 ‘다사다난(多事多難)’중에 정신사적으로나 정치사회적 측면에서 국민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사건의 하나는 이승만 정부의 반민특위 해체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로써 민족을 배반한 반역자들을 하나도 처벌하지 못하고 친일세력이 건국과정과 그 이후 권력의 핵심으로 자리잡으면서 사회정의와 민족정기가 설자리를 잃은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학계에서 ‘6·6사건’으로 불리는 친일경찰의 반민특위 습격사건은 1949년 6월6일 상오에 자행되었다. ‘웃어른(이승만)’의 양해를 받은 무장경찰은 관할인 서울 중부서장 윤기병의 지휘로 반민특위 사무소를 습격하여 요인들을 체포하고 기물을 파괴했다. 시경국장 김태선 내무차관 장경근 종로서장 윤명운 등 일제경찰출신들이 중심이 된 만행이었다. 이날 경찰에 끌려간 특위 직원들은 심한 고문을 당하고 많은 관련 자료가 폐기되었으며 지방의 특위 사무소도 피습되어 업무가 마비되었다. ○청산하지 못함 반민세력 국민적 환호와 기대를 받으면 진행되던 반민특위의 친일파 청산작업은 이렇게 하여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반면 친일파들은 이승만과 결탁하여 뿌리를 내리고 군사정권과 문민정부를 거치는 동안 가지를 쳐서 기득세력권을 형성하게 되었다. 반민특위를 와해시키려는 친일세력의 공작은 집요했다. 이들은 반민특위인사들을 ‘빨갱이집단’이라 음해하면서 정신적 지주인 김구를 살해하고 국회프락치사건을 일으켜 항일독립운동 세력을 제거했다. 친일파들이 독립운동가들을 완벽하게 제거한 6·6사건의 진상은 독재치하에서 묻혀지고, 식민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부끄러운 역사가 반세기 동안 이어지게 된 것이다. 50년만의 정권교체로 집권하게 된 김대중 정부의 책임과 사명은 막중하다. 현실적으로는 경제를 희생시켜 IMF체제에서 해방되는 일이며, 역사적으로는 반민특위의 좌절이래 전도된 가치관과 사회정의를 바로 잡는 일이다. ○개혁, 반민특위 정신으로 친일세력에 뿌리를 둔 수구세력은 그동안 키워온 인적 물적 기반을 바탕으로 여전히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들은 김대중 정부의 개혁을 훼방하고 국가적 위기상황에도 눈을 돌린채 기득권 유지에 연연하면서 사사건건 개혁의 발목을 잡는다. 반민특위의 좌절로 지난 반세기의 역사가 독재와 불의로 점철되었듯이 김대통령의 개혁이 실패하면 역사는 또 얼마나 가혹한 시련을 안겨줄 것인지, 수구세격은 이를 외면하는 것이다. 하루빨리 김대통령의 개혁의지를 뒷받침할 컨트롤 타워로서의 개혁주체(세력)가 형성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청산할 것은 청산하고 개혁할 것은 개혁하여 국난을 극복해야 한다. 뼈저린 반민특위 좌절의 역사는 한번으로도 족하다.
  • 과거 청산과 미래 개척(대한민국 50년:21·끝)

    ◎이데올로기·개발독재 넘어 통일로/反民특위 “실종”… 건국 최초 과거청산 실패/‘제주 4·3’ ‘거창사건’ 아직도 어둠 속에/지역할거 정경유착 파당정치 악습 깨고 군사정권 시대 숱한 의문사도 밝혀내야 1948년 8월15일 신생정부 출범 당시의 대한민국은 그야말로 약소국이었다.한반도 면적 22만1,487㎢ 가운데 3·8선 이남인 9만9,221㎢만 확보했고 인구도 2,002만명(48년 미군정청 추정치)에 불과했다.또 국민 가운데 80%가량이 농업 등 1차산업에 종사했고,그해 수출액이 2,230만달러에 그칠만큼 경제력도 볼품없었다. 정부수립 50돌을 눈앞에 둔 지금 대한민국의 자화상은 어떠한가.97년 말 현재 인구는 4,666만명,수출액은 1,361억6,430만달러,1인당 GNP는 9,511달러에 이른다. ○‘삶의 질’ 향상되지 않아 지난 50년동안 인구는 2.3배,수출규모는 6,106배로 급증했다.1인당 GNP는,가장 이른 통계치인 53년의 67달러에 비교해도 142배나 늘었다.가히 ‘세계사에 유례가 없을 정도의 비약적인 성장’이라는 찬사가 부끄럽지 않은 양적 팽창이었다.그러면 이같은 성장이 우리 사회의 내적(內的) 발전이나 국민의 삶의 질 향상을 그대로 동반한 것일까.여기서 한국에 대한 외국의 시각을 잠깐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미국 의회도서관이 펴낸 책자 ‘South Korea’(92년 간)는 한국의 기본사항을 소개한 데 이어 ‘재벌 중심으로 고도의 경제성장을 이루었으나 독재정권 시대에 고착된 퇴행적인 정치질서에,통제받는 사회구조를 가진 나라’라고 덧붙였다.또 65만의 군대와 한해 100억달러(89년 기준)에 이르는 군사비도 주요항목으로 들었다.다른 나라의 일반적인 한국관을 가늠할 수 있는 대목이다. 미 의회도서관 책자의 표현이 비록 유쾌하지는 않지만,우리 현실을 상당히 정확하게 지적했다는 사실은 부인하기 어렵다.대한민국 성장의 뒤안길에는 필히 청산해야 할 역사적 잔재가 누적돼 있기 때문이다.이는 정치·경제 등 사회 각 분야에서 구조적으로 드러나기도 하고,특정사건의 진상을 은폐·왜곡하는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정치 분야에서의 청산대상은 분단체제에서 파생한 반공이데올로기의 악용과 개발독재 논리이다.해방이후 정치의 흐름을 살펴보자.3년동안의 극심한 좌우대립 끝에 남과 북에는 상호 배타적인 정부가 들어선다.2년이 채 못돼 동족상잔의 비극이 벌어져 분단체제는 더욱 굳어진다.이후 한국에서는 李承晩 정부가 장기집권하고 그에 따른 부정부패가 만연한다. 4·19혁명이 일어나 민주주의가 되살아나는 듯 했지만 곧바로 5·16쿠데타로 무너진다.朴正熙 정권은 개발논리를 앞세워 독재권력을 무소불위로 휘두른다.군사정권은 全斗煥­盧泰愚 시대까지 이어졌지만 80년의 5·18광주민중항쟁,87년의 6월항쟁 등 국민의 극심한 저항에 부딪쳤고 그 결과 93년에 문민정부가,그리고 50주년이 되는 올해 국민의 정부가 탄생한다. 대한민국 50년 정치사를 일별하면,그것은 정치적 억압과 이에 맞서 민주사회를 추구한 국민의 대항으로 요약할 수 있다.그 과정에서 억압적 정권이 양손에 든 무기가 반공이데올로기와 경제개발 논리였다. ○가치관 대혼란 초래 남북이 체제의 존립을 걸고 대립하는데다 6·25라는 비극을 겪은 마당에 반공이데올로기는 필연적인 역사의 부산물이었다고 볼 수도 있다.문제는 권력이 이를 정치적 대항세력을 억누르는 수단으로 악용한 점에 있다. 멀게는 한국전쟁 전의 ‘국회 남로당 프락치 사건’에서 가깝게는 지난 대선의 ‘吳益濟 월북 및 편지사건’‘흑금성 프로젝트’에 이르기까지 집권세력은 늘 ‘용공조작’을 통해 정적을 제거하려고 시도했고 대부분 목적을 달성했다. 朴正熙 정권이 들어서서는 경제성장을 내세운 개발독재 논리가 못잖게 위력을 발휘했다.국민 대다수가 절대빈곤에 시달리는 상태에서 ‘잘 먹고 잘 살려면 민주주의니 인권이니 하는 추상적 가치는 유보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는 쉽게 먹혀들어갔다.시민의식이 어느정도 성숙하기 전까지 ‘중단없는 전진’과 ‘잘 살아 보세’는 국민적 합의처럼 보였다. 이같은 정치적 적폐(積弊)는 지금도 파당정치·지역할거주의·정경유착 등 여러 유형의 악습으로 고착됐을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의 의식 형성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전통을 잇는 문화와 사상은 ‘전근대적’이거나 ‘비효율적’이란 이유로 외면받는 대신 출세지상주의·이기주의가 넘쳐나면서 가치관의 혼란을 가져왔다.재벌의 소유 집중,극심한 빈부격차 등 경제 분야의 해묵은 과제도 해결이 쉽지 않은 부분이다. 정치사의 굴절이 가져온 또다른 폐해는 역사적 진실의 은폐·왜곡이라 할 수 있다.대한민국 최초의 ‘과거청산 실패’사례로는 48∼49년에 걸친 ‘반민특위 사건’이 꼽힌다.일제강점기에 친일과 반민족 행위를 한 자를 처벌하고자 반민족행위처벌법을 제정한 제헌국회는 곧이어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를 설치한다.위원회는 반민족행위자 305명을 검거하지만 참다운 활동을 벌이지 못한 채 흐지부지되고 만다.친일파에 권력기반을 둔 李承晩 행정부의 반발에 부딪쳤기 때문이다. 나쁜 선례는 길이 남게 마련인가.해방정국에서 수차례 벌어진 정치지도자 암살사건,6·25를 전후해 빚어진 ‘제주 4·3’이나 거창사건을 비롯한 양민학살,군사정권에서 발생한 민주인사·학생들의 숱한 의문사와 실종들이 아직껏 그 실상이 밝혀지지 않은 상태로 어둠에 묻혀 있다. 사건 발생 자체가 거의 알려지지 않은 사례도 있다.예컨대 49년 12월24일 경북 문경군에서 일어난 국군의 양민학살 건이다.미국 국립공문서 보존관리청(NARA)에서 최근 발굴한 주한미군 군사고문단 보고서에 나타난 실상은 이렇다. 육군 25연대 7중대 병력이 석달이라는 산간벽지 마을에 들어가 주민들을 모은 다음 빨치산에게 협조했다는 죄목으로 무차별 살해한다.보고서는 “(주민들이) 도발하지도 않았는데 카빈 소총·수류탄·바주카포 등으로 공격해 성인 86명,학생 9명,어린이 3명이 숨졌다.또 집 27채 가운데 23채를 불태웠다”고 밝혔다.이 사건이 세상에는 빨치산의 만행으로 알려졌다. 청산하지 못한 역사는 ‘민족의 성지’국립묘지에도 존재한다.문민정부 출범 초기인 93년 7월 국가보훈처가 金性洙·李甲成·尹致暎·李殷相·徐椿·李鍾郁·尹益善·全協 등 8명에 대한 친일행각을 조사해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이들은 모두 독립유공자로서 각종 훈·포장을 받았고 사회의 지도층인사로 행세했다.이 조사 역시 결말없이 끝났고 뒤이은 문민정부의 ‘역사바로 세우기’도 정치적인 의도라는 오해만 샀을 뿐 결실을 맺지 못했다. ○국민의 정부 특별한 책무 한민족이 빛나는 21세기를 향해 전진하려면 두가지 전제조건이 이뤄져야 한다.하나는 물론 통일이요,또 하나는 역사에 덕지덕지 낀 찌꺼기를 걷어내는 일이다.통일은 북한이라는 상대와 더불어 장기간에 해결해야 할 민족의 숙원이지만 잔재 청산은 우리의 의지만으로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국민의 정부는 우리 현대사를 정화하는 데 앞장서야 하는 특별한 책무를 안고 있다.
  • 경제개발계획(대한민국 50년:20)

    ◎“빈곤의 역사 씻자”… 62년 첫 울산공단 기공/“자립경제 구축” 62년부터 5개년 계획 실시/간접자본 확충·기간산업 육성 효율적 통제/81년까지 연평균 8.3% 성장… 경제규모 4배로 1962년 1월2일 황량한 울산 들판 위로 육군경비행기 ‘비바’가 날았다.그 안에는 朴正熙 국가재건최고회의의장과 金鍾泌·金龍泰 등 5·16 주체세력,李秉喆·李庭林·鄭載頀·南宮鍊·金周仁 등 실업인들이 타고 있었다.李秉喆(삼성) 李庭林(개풍) 鄭載頀(삼호)는 당시 3대 그룹의 총수였고,南宮鍊·金周仁은 한국경제인협회(전경련 전신)의 부회장들이어서 가히 한국 경제계를 대표하는 인물들이라 할 만했다. 울산 벌판을 둘러본 일행은 인근 여관방에서 떡국을 안주로 소주잔을 기울였다.朴의장이 입을 열었다.“거창한 계획을 추진하려면 자본과 기술이 있어야 하는데 걱정이군요.그러나 여러분이 이처럼 의욕을 보여주시니 기필코 성공하리라 믿습니다.” ○공업화 원년으로 기록 그로부터 두달 보름만인 62년 3월16일 울산공업단지 기공식이 열렸다.朴의장은 특유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민족의 숙원인,4천년 빈곤의 역사를 씻고자 이곳 울산에 신생 공업도시를 건설하기로 했다”고 공표했다.훗날 대한민국 경제개발의 시발(始發)이자 ‘공업화의 원년’으로 기록된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 무렵의 풍경화는 경제개발 논리의 당위와 한계를 이미 보여주었다.李秉喆을 비롯한 재력가들은 5·16쿠데타 직후 부정축재자로 지목받은 상태였다.이들은 朴正熙와 만나고자 울산을 향하다가 천안경찰서 관내에서 붙잡혀 한때 구금될 정도였다.하지만 ‘강탈한’권력과 ‘부정한’재력이 만나는 순간 양쪽은 경제개발이라는 명목으로 공생의 길을 찾았다.이후 정경유착은 우리 사회에 지울 수 없는 상처로 남게 된다. 朴正熙 군사정권은 통치의 당위성으로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62∼66년)을 곧바로 발표했다.그 기본목표는 원조의존적인 소비경제를 청산하고 자립경제 기반을 구축하는 것이었다.이에 따라 시책의 중점을 △농업생산력 증대에 의한 농업소득 상승과 국민경제의 구조적 불균형 시정 △전력·석탄 등 에너지원의 확보 △기간산업과 사회간접자본 확충 △유휴자본 활용,특히 고용증대와 국토 보존 및 개발 △수출증대를 주축으로 하는 국제수지 개선 △기술 진흥에 두었다. 이 기간에는 전력·비료·시멘트·정유·PVC 등을 전략산업으로 지정,자금 동원과 배분에서 각종 특혜를 주면서 집중 육성했다.이와 함께 투자재원을 외자에 전적으로 의존하다 보니,그 원리금을 상환하고자 수출을 적극 장려하게 됐다.이후 ‘수출’과 ‘공업화’는 경제개발을 이끄는 두바퀴로 자리잡았다.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67∼71년)은 산업구조 근대화와 자립경제 확산에 중점을 두었다.외형적인 성장은 괄목할 수준이었지만 석유화학 등 일부 분야에서는 이미 과잉투자가 발생해 기업 부실화가 상당한 정도로 진척됐다. 그 후유증은,제3차 계획의 첫해인 1972년 대통령긴급명령권으로 발동된 ‘8·3조치’를 비롯한 일련의 특별조치로 나타났다.그리고 그 당연한 귀결로 국민 희생 위에서 정부가 경제개발에 일방적인 주도권을 행사하는 개발체제는 더욱 심화했다. ○과잉투자 기업 부실화 제4차경제개발 5개년 계획(1977∼81년)은 기업의 시장경쟁원리에 입각,공업화를 간접적으로 유도하고 사회개발은 정부가 추진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아 진행됐다.그에 따라 △투자재원을 스스로 조달하고 △국제수지에서 균형을 이루며 △산업구조를 고도화하고 △과학기술 투자를 확대한다는 시책이 강조됐다.정부는 이 시기에 의료보험·공정거래·환경보전 등의 개념과 제도를 도입해 시행했다. 1962년부터 81년까지 네차례로 나눠 추진한 개발계획의 결과 한국경제는 연평균 8.3%라는 경이로운 성장을 이루었다.이 기간에 경제규모는 4.8배로 커졌고,1인당 국민소득도 82달러에서 1천636달러로 엄청나게 늘어났다. ○정부 주도 성장 ‘한계’ 반면 외자에 기댄 경제성장은 필연적으로 무역의존도를 높여 62년에는 22.6%에 불과하던 것이 81년에는 95%나 됐다.무역적자도 62년에 3억5천5백만달러였으나 20년후 29억8천5백만달러라는 거대한 양으로 늘어났다.만성적인 국제수지 악화를 초래한 것이다. 1980년 한국경제는 -5.2%라는 마이너스 성장을 보이면서 경제개발과정 아래 쌓여온 문제점들을 노정했다.경제규모가 대형화하면서,정부주도형 경제개발이 오히려 낭비와 비능률을 유발한다는 지적이 첫손가락에 꼽혔다.양적(量的) 성장에 치중하다 보니 대기업과 중소기업,조립업체와 부품생산업체,도시와 농촌간의 간극(間隙)이 크게 벌어진 것도 사회에 짐이 되었다. 적정한 성장을 이루지 못하면 물가를 비롯한 경제안정을 얻을 수 없고 신규고용,외채 원리금 상환도 불가능해지는 구조가 고착됐다든지,각종 규제와정책·제도적 요인의 비용부담이 기업의 대외경쟁력을 약화시킨다든지 하는 문제점도 정부주도의 성장논리를 약화시켰다. 이후 91년까지 두차례 더 5개년 경제개발계획을 시행했지만 1∼4차 개발계획 때와는 기본방향이나 영향력이 본질적으로 달랐다. 자본을 축적하지 못한 신생 독립국가가 공업화를 이룩하는 데는 경제통제의 일종인 개발계획 도입이 필수적이었다.그나마 형성된 자본을 누수없이 사회간접시설과 기간산업 육성에 동원해야 하기 때문이다.인허가 업무를 활용,중복투자·자원낭비를 막은 것이나공공요금·생필품값을 규제해 물가안정을 이룬 것,수입규제를 통해 취약한 국내 산업기반을 보호한 것도 초창기 경제개발계획의 긍정적인 측면이었다. 그러나 개발경제 체제에서 굳어진 정부의 경제규제는,경제규모가 커지고 기업경영의 세계화가 진전된 지금 오히려 국민경제의 효율을 저해하는 역기능으로 작용한다.공룡처럼 비대해진 재벌의 갖가지 부정적인 행태,정경유착의 부산물인 정치인·관료의 부패,경제환경 변화에 신속히 대체하는 데 걸림돌로 작용하는 행정절차가 그것들이다. IMF체제로 국가 산업구조를 기본적으로 재조정해야 하는 이 때,우리는 경제개발 계획의 묵은 틀에서 벗어나 진정한 시장경쟁 원리로 재도약해야 하는 시대적 소명을 떠안고 있다. ◎그전의 ‘계획’들/네이산 보고­52년 유엔한국부흥委 작성… 李 대통령 거부/타스카 계획­아이젠하워 특사 3년 對韓 원조 계획 권고/부흥부 계획­산업개발委 입안… 5·16뒤 군사정권 승계 국가가 경제목표를 정하고 그 실현에 필요한 조건들을 조성해 나가는 경제개발계획은,후진국의 경제발전을 위해서는 필연적인 과정이라 할 수 있다.대한민국 출범후 경제개발계획이 등장한 것이 62년 국가재건최고회의 때가 처음은 아니었다. 6·25가 교착상태에 빠진 1952년 12월 ‘네이산 보고서’가 나왔다.UN한국부흥위원회의 위촉으로 네이산자문단이 작성한 ‘한국경제재건 5개년계획’(1953∼57년)은 李承晩 대통령에게 제출됐으나 채택되지 않았다.이어 6개월후에는 아이젠하워 미 대통령의 경제특사인 헨리 타스카가 방한해 ‘타스카 3개년 대한원조계획’을 내놓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네이산 보고서’건 ‘타스카 계획’이건,한국전쟁이후 미국의 대한원조를 어떻게 운용하라는 지침 성격이 강했을 뿐 한국 자체의 경제개발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 정부 스스로 마련한 경제개발계획은 58년 부흥부의 산하기관인 산업개발위원회가 입안,발표한 ‘경제개발 3개년 계획’(1962∼64년)이 최초였다.이 계획은 실현이전에 5·16을 맞는 바람에 빛을 잃었지만 그 핵심내용은 군사정권에 의해 대부분 계승됐다.
  • 수하르토 사임­영욕의 32년/‘개발의 아버지’서 몰락한 독재자로

    ◎쿠데타후 장기집권… 경제 급성장 견인/족벌정치 부패 만연… 피플파워에 굴복 지난 32년간 인도네시아의 독재자로 군림해온 수하르토는 65년 반공 쿠데타로 첫 권력을 장악한 뒤 68년에는 인도네시아의 초대대통령인 수카르노에 이어 정식으로 대통령에 선출됐다. 지지기반인 군부세력을 등에 업고 그동안 7선을 역임해온 수하르토는 지난해 통화위기가 촉발되기 전까지는 연평균 7%의 높은 경제성장을 이룩해오며 인도네시아 ‘개발의 아버지’로 추앙받았다. 그러나 장기집권 속에서 빚어진 그의 지나친 족벌정치와 그에 따른 부패상은 대학생들에게는 정치개혁을,일반국민들에게는 경제개혁을 요구하는 빌미를 주게 됐다. 실제로 그의 자녀들 6명은 자동차와 석유화학,은행 등 국가의 기간산업을 모두 장악한 재벌들로 급성장한데다 정치권력까지 장악하려 해 끊임없는 부정·부패 시비를 일으켜왔다. 그리고 이같은 부정부패는 결국 지난해 7월 루피아화의 폭락과 그로 인한 물가폭등으로 이어졌으며 IMF로부터 긴급구제금융을 지원받는 사태까지 초래하고야 말았다. 더욱이 구제금융의 대가로 IMF와 약속한 경제개혁이 그의 보호 아래 온갖 부를 축적해온 자녀들과 친족·친지들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쳐 제대로 착수조차 못하게 되자 마침내 학생들과 재야세력들이 일제히 그의 하야를 요구하게 되었다. 수하르토의 주요연보는 다음과 같다. △1921년 6월8일=자바섬 족자카르타 근처 케무수 아르고물료 마을에서 출생. △1940년 6월1일=초등교육 마친 후 군 입대.1949년 네덜란드가 인도네시아의 독립을 공식인정했을 때 중령까지 진급. △1965년 10월1일=쿠데타를 진압하고 수카르노 대통령의 ‘교조 민주주의’정치체계를 해체. △1968년 3월27일=최고입법기구인 국민협의회에 의해 대통령으로 선출. △1973년=대통령 재선후 1998년 3월10일까지 모두 7선까지 거침. △1998년 5월21일=대통령직 사퇴 발표.
  • 망명·처형… 독재자들의 말로

    ◎마르코스­족벌정치·축재… 고국땅 못밟아/차우셰스쿠­24년 철권통치끝에 총살 당해 인도네시아 수하트로 대통령이 21일 하야함으로써 또하나의‘철권 독재자’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게 됐다. 독재자들은 대부분은 말년을 처형이나 망명생활를 하면서 비참한 종말을 맞았던 터.수하르토와 함께 세인들의 관심을 끌었던 필리핀의 페르디난도 마르코스는 끝내 미국 망명길에 올랐었다. 마르코스도 족벌정치에 의한 경제력 장악,철권통치에 비롯된 부패 등이라는 점에서 수하르토와 비슷했다. 세기의 철권 독재자라면 루마니아의 니콜라에 차우세스쿠도 세계 현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다. 24년간 루마니아를 강압 통치해왔던 차우세스쿠는 89년 혁명의 소용돌이속에서 부부가 함께 시민들에게 붙잡혀 총살형을 당했다.처형장면이 TV화면과 사진으로 전세계에 전달돼 독재자의 비참한 최후를 극명하게 보여줬다. 아프리카 우간다의 이디 아민은 ‘도살자’라는 별명이 붙었다.대부분 독재자들이 종교나 민족,이념을 내세웠던 것과는 달리 어떤 명분도 갖지 못한채 ‘학살의 독재자’였다. 결국 8년간 50만명을 고문하고 학살하는 만행을 저지르다 쿠데타로 고달픈 망명길에 올라야 했다. 이밖에 옛 소련의 요시프 스탈린,독일의 아돌프 히틀러,스페인의 프란시스코 프랑코,아이티의 장 클로드 뒤발리에,포르투갈의 안토니우 살라자르,이란의 무하마드 팔레비 그리고 94년 사망한 북한의 金日成도 세계 역사에 기록된 악명 높은 독재자들로 꼽힌다.
  • 수하르토 사임­印尼 어디로/무력한 하비비… 당분간 ‘힘의 공백’

    ◎권력투쟁→혼란→쿠데타 가능성/경제난 변수… 美 입김 작용할듯 인도네시아가 수하르토의 하야로 역사적 전기를 마련했다.철혈정치를 펴면서 권력과 부를 거머쥐었던 수하르토 대통령이 국민의 저항에 굴복,하야함으로써 1945년 독립 이래 최대의 국가전환기를 맞은 것이다. 그러나 수하르토없는 인도네시아는 한번도 예상 못했던 일이다.인도네시아국민들로서는 ‘어느날 갑자기’ 권력 공백을 맞은 것이다.그만큼 수하르토의 하야는 확률이 적은 경우였다.지금까지 정치·경제에 있어서 수하르토와 그 일가족이 차지하던 부분이 컸었기 때문에 이제 그 공백을 채울 때까지 혼란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일단 헌법에 따라 하비비 부통령이 새로운 국민협의회를 구성,새 대통령을 선출할 때까지 권한을 유지하기로 돼있지만 변수는 많다. 현재까지는 그 어떤 행동도 안정을 전제로 한 것으로 보인다.최대변수인 군부가 즉각 하비비 부통령에 지지를 선언한 것도 안정을 유지해야 한다는 명분 때문이다. 그러나 수하르토의 심복이며 국방장관 겸 군총사령관인 위란토가 언제까지 하비비를 지지할 것인지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자신의 권력욕도 변수이거니와 이번 폭동사태 때 보여진 군 내부에서도 알력이 드러났던 만큼 분열 가능성이 잠복해 있다.군부의 행동은 곧 피를 부르는 것이고 그만큼 인도네시아에서의 유혈사태 발생 위험은 잠재돼 있는 셈이다. 또 당장은 인도네시아 국민들이 수하르토의 하야 소식에 도취됐지만 이들이 언제 어떤 세력을 쫓아 분산될지 모른다.이슬람 세력을 이끄는 아미엔 라이스나 민주주의 운동에 촉매역할을 해왔던 메가와티 수카르노푸트리 여사 등 어느쪽에 국민이 쏠려갈지에 따라 방향이 크게 달라질 수 있다. 폭동발발에서 하야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인명이 희생당한 것을 본 인도네시아 국민들은 일단 선거 때까지는 상황의 추이를 지켜볼 것으로 많은 전문가들은 진단한다.그러나 선거 때부터는 문제가 불거질 공산이 크다.선거전의 세력판도와 혼탁도에 따라 국민들이 이합집산(離合集散)하거나 충돌할 수 있으며,이런 혼란 뒤 군부가 다시 나서는 최악의 경우도 상정될 수 있다. 그러나 폭동의 전제가 뼈저리는 생필품값 인상이었던 만큼 현재 국제통화기금(IMF)관리체제 아래 있는 인도네시아에서는 민생고에 허덕이는 국민들을 어떻게 치유하느냐가 정치세력 안정에 척도가 될 것은 분명하다.이런 점에서 돈줄을 쥔 IMF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미국이 어느 세력을 선택할 것인지도 인도네시아 정국 앞날에 주요 변수로 작용할 것이다.
  • 수하르토 下野의 교훈/具本永 국제팀 차장급(오늘의 눈)

    인도네시아 수하르토 대통령의 하야는 세기의 대사건답게 우리에게도 가르침을 남겼다.수하르토의 하야를 불러온 직접적인 원인을 벌이는 논쟁이 좋은 교재다.반체제세력들은 당연히 수하르토 32년 장기집권과 필연적으로 파생된 부패구조와 경제정책 실패 등을 지목한다. 수하르토에 동정적인 인사들은 당장 반박하고 나선다.대규모 항의시위를 촉발시킨 물가폭등은 국제통화기금(IMF)이 무모하게 요구한 개혁프로그램 때문이라고 진단한다.65년 쿠데타로 집권한 이래 연평균 7%의 경제성장률을 이룩해온 공적을 치켜 세운다. 반체제인사들도 이 대목만은 인정한다.수하르토 체제를 앞장서서 비판해온 회교지도자 아미엔 라이스도 “국가통합과 경제발전이 빛이라면 족벌정치와 부패는 그늘이었다”라고 양비론을 폈다. 이웃인 말레이시아의 마하티르 총리도 수하르토에 동정적이다.“IMF가 경제적 구조조정의 사회적 비용에 대해 무감각했다”며 인도네시아 정부에 기름값과 전기료에 대한 보조금을 줄이도록 강요한 IMF를 비난했다.가난한 상태에서 보조금 삭감은 민중봉기를 유발하게 된다는 진단이다. 얼핏 혼란스럽기 짝이 없는 논란이다.그러나 모든 사회문제는 복잡한 가정보다 건전한 상식에 의거해 판단해 보면 쉽게 명쾌한 해답이 나온다.중세의 영국 철학자 이름을 딴 ‘오컴의 면도날 법칙’의 골자이기도 하다. 인도네시아호(號)를 IMF 늪으로 빠뜨린 수하르토 정권의 책임을 누구도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일련의 유혈 소요와 수하르토의 하야 결심이 바로 이를 뒷받침한다. 한국에서도 최근 IMF 위기의 원인에 대한 논쟁이 한창이다.혹자는 불투명한 금융제도와 정경유착 및 재벌의 상호지급보증 등 불합리한 관행과 경쟁력 상실을 주범으로 꼽는다. 다른 한편에서는 미국이 중심이 되어 ‘아시아권 길들이기’에 나선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대 정권들의 경제운용 실패 책임은 분명한 것 같다.IMF 위기의 이면에 국제자본의 전략이 숨어 있다 하더라도 개혁과 세계화를 통해 이를 막지 못한 책임마저 면책될 수는 없는 탓이다.오컴의 법칙은 한국의 경제위기 책임논쟁에도 적용해야할 듯 싶다.
  • 러 크라스노야르스크州知事 당선 레베드(뉴스의 인물)

    ◎2년여 정치공백 깨고 재기/차차기 대선 노리는 골수 민족주의자 17일 실시된 시베리아 크라스노야르스크주의 주지사 결선투표에서 당선된알렉산드르 레베드 전 국가안보위원회 서기(48)는 차차기 러시아 대선을 바라보는 야심찬 인물.그는 크라스노야르스크주의 2백80만 유권자중 65%가 참여한 이번 선거에서 57.22%를 득표,38.27%에 그친 발레리 주보프 현 주지사를 큰 차이로 물리치고 압승했다. 몰도바주둔 14군 사령관 출신인 그는 평소 드골이나 피노체트같은 강력한 군출신 지도자들을 존경하는 러시아 민족주의자로 정평이 나있다.‘강한 러시아’란 민족주의적 기치 아래 96년 대선에 출마했던 그는 당시 1차 투표서 3위(15%의 득표)를 차지,새로운 킹 메이커로 떠오르기도 했다. 실제 보리스 옐친 대통령은 그때 레베드를 영입함으로써 호각지세를 이루던 겐나디 주가노프 공산당수와의 대결에서 승리했다.그러나 96년 8월,레베드가 2년을 끌어오던 체첸전쟁의 협상대표로 평화협정을 순조롭게 이끌어내며 인기가 치솟자 옐친은 그해 10월 ‘쿠데타 음모설’을 빌미로 그를 토사구팽의 제물로 삼아버렸다.한편에서는 그가 지나친 야심과 부족한 팀워크로 인해 옐친 측근들로부터 밀려났다는 설도 나돌았었다. 이후 정치권에서 완전 소외됐던 레베드는 아무 연고도 없는 중부 시베리아의 크라스노야르스크를 재기의 발판으로 선택했고 마침내 2년여의 정치적 공백을 깨고 러시아 대권까지 노릴 수 있는 자리를 차지하게 됐다.러시아인들에게 ‘기회, 또는 유배’의 상징으로 알려진 시베리아가 그에겐 바로 기회의 땅이 되었던 것이다.
  • 조선국왕 이야기/임용한 지음(화제의 책)

    ◎태조∼예종 인간적 삶의 모습 조선을 건국한 태조에서부터 8대 예종에 이르는 역대 조선 국왕의 일대기.단순히 일화를 나열하거나 단편적인 기록에 의존하지 않고 당대의 시대상과 시대적 과제 등을 종합적으로 분석,봉건시대를 살아간 한 인간으로서의 삶을 복원해냈다. 그런 만큼 독자들은 지금까지 소설이나 드라마 등을 통해 친숙해진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왕들을 만나게 된다.태종은 두뇌회전과 상황판단이 빨랐지만 술수와 계략을 지나치게 좋아하는 인물이었다.목적을 위해서라면 일가친척이나 심복을 희생시키는 일도 주저하지 않았다. 세종은 장점이 많았지만 그 장점이 지나쳐 단점이 되었던 인물.세종은 후기에는 상당히 자기중심적이고 독선적인 경향조차 보여준다. 문종은 부드럽고 몸이 약한 선비와 같은 왕으로 알려져 있지만 세종 못지않은 뚝심과 야망을 지녔다는 것.단종은 당돌하고 오기가 강한 소년이었으며,세조는 추진력 있는 왕이었지만 거칠고 단선적이며 자기도취가 심했다.예종은 부드럽고 온화한 이미지를 풍기지만 실제로는 세조보다결코 덜하지 않았던 전제지향적인 군주였다는 것이다. 이 책은 단순히 국왕 개인의 성격과 일생을 소개하는데 그치지 않는다.태조부터 예종까지의 시기는 조선을 건국하고 국가와 사회제도 전반을 새로 만들어 가야했던 시기로 개혁의 목소리와 정치세력도 다양했다.여러 개성을 지닌 국왕들은 제각기 독특한 방법과 이상을 품고 조선의 역사를 만들어 갔다. 요동정벌론,태종의 쿠데타,태조와 태종의 대립,양녕대군 폐위와 민씨 일가의 숙청,세종의 개혁,문종의 숨겨진 야심,세조의 쿠데타,이시애의 난….이책은 국왕을 정점으로 숨가쁘게 벌어졌던 수많은 정치적 사건들을 당대의 정치적·사회적 구조와 연관지어 입체적으로 살핀다.맛깔스런 문체가 읽는 재미를 더해준다.혜안 9천원.
  • 팽팽한 긴장… ‘제2 폭동’ 예고/印尼사태 이모저모

    ◎전직관료들 “개각보다 퇴진” 반기/언론도 반정부기사 잇달아 게재/삼성·SK 등 주재원 가족들 철수 시작 【자카르타 외신 종합】 인도네시아 소요사태는 15일을 고비로 다소 소강상태에 접어들었으나 이는 ‘폭풍전의 고요’일 뿐 수하르토의 퇴진을 둘러싼 대립은 여전히 내부적으로 팽팽한 긴장을 키워나가고 있다.따라서 인도네시아 사태는 결국 대규모 유혈충돌에 따른 ‘피플파워’의 승리나 또는 군부에 의한 ‘궁정쿠데타’의 둘중 하나로 끝날 것같다. ○…수하르토에 충성하던 전직 관료들에게서도 수하르토의 시대는 끝났다며 그의 하야를 촉구하는 발언이 잇따르고 있다.쿠즈마트마자 전 환경장관은 17일 “수하르토 대통령이 자신의 이익에만 집착,대통령직에 계속 머문다면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인도네시아의 문제는 바로 대통령 자신에게 있기 때문이다”고 말했다.또 수브로토 전에너지장관은 “대통령은 개각을 얘기하고 있지만 개각으로는 충분치 않다.국민이 원하는 것은 새 각료가 아니라 ‘새대통령’이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퇴역장성 15명 개혁 촉구 ○…인도네시아 군부 원로로 추앙받고 있는 케말 이드리스 육군중장을 비롯한 퇴역장성 15명도 수하르토를 퇴진시킨 후 후임 대통령을 선출키 위한 ‘국민자문위원회’ 비상회의 소집을 촉구.49년 독립 이후 군부를 이끌어온 이들은 학생들의 요구사항인 정치개혁 이행조처를 지지한다고 발표. ○…수하르토에 반대하는 기사를 싣는데 소극적이던 언론들도 최근엔 서슴없이 수하르토를 비난하는 기사들을 크게 다루고 있는데 이는 공개석상에서 수하르토를 비난하는 발언을 했다간 국가원수 모독으로 체포·구금되던 과거의 양상에 비춰볼 때 상상도 할 수 없던 일. ○…인도네시아 민간 방송채널들은 자체 제작한 뉴스 대신 정부가 공급하는 뉴스만을 내보내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자카르타 포스트지가 17일 보도.이에 따라 인도네시아의 5개 민간방송 채널에서는 격렬한 폭력사태나 폭동에 관련한 뉴스들은 일체 자제한 채 사태수습과 함께 안정을 되찾아가고 있는 모습들만 전파를 타고 있다. ○공항 외국인들로 북새통 ○…수카르노­하타공항이 인도네시아를 빠져 나가려는 외국인들로 연일 북새통을 이루고 있는 가운데 한국 교민들도 16일 밤 350여명이 대한항공편으로 서울로 떠난 데 이어 17일 하오 9시40분쯤 400여명이 서울행 비행기에 올랐다. 삼성,SK,현대,한국석유개발공사,한국중공업 등 현지 진출 한국기업들도 20일 상오까지 직원 가족들을 먼저 귀국시킬 계획이며,상황 악화에 대비,잠정휴업하는 방안도 검토중이다. 자카르타시 가토트 수브로토 지역에 있는 한국대사관 비상대책반에는 출국절차 등을 묻는 교민들의 전화가 폭주,인도네시아 사태에 대한 교민들의 불안감을 실감케 했다. ○일 자위대가 파견 준비 착수 ○…일본 정부는 인도네시아 사태와 관련,17일 인도네시아에 체재중인 일본인들에게 ‘퇴피(退避)권고령’을 내렸다. 일본 정부는 이와 함께 자위대수송기 파견을 위한 구체적 준비 작업에 들어갔다. 이날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 외상은 방위청에 자위대 파견 준비를 의뢰했으며 방위청은 오부치 외상의 의뢰에 따라 C130 수송기 파견을 위한 부대편성 등 준비 작업에착수했다.
  • 위란토·라이스/역사의 주사위는 어디로/印尼 ‘포스트 수하르토’

    ◎위란토­軍 사령관… 군부·학생 평판 좋아/라이스­反政 리더… 회교세력 절대 지지 수하르토 정권의 퇴진이 불가피한 것으로 예상되면서 다음 단계엔 어떤 상황이 전개될 것인가에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인도네시아 정국 향방에 최대변수로 작용하는 군부와 미국의 태도가 변화의 모습을 보이기 시작,이런 관심은 더욱 증폭되고 있다. 첫번째로 떠올릴 수 있는 상황은 수하르토가 시위가 격화된 상황에서 한발물러나 수렴첨정(垂簾聽政)을 한다는 것.현재로선 불가피한 시나리오다. 이 경우 그가 가장 믿을 수 있는 후계자로는 역시 자녀나 친인척일 수 밖에 없다.이 그룹에서는 장녀 시티 하르디얀디와 사위인 프라보우 전략예비군사령관이 유력하나 바로 수하르토와의 관계 때문에 시위세력으로부터 동의를 얻어내지 못할 것이 확실하다. 그렇다면 가장 유력한 후계자는 위란토 군총사령관이다.수하르토 부관 출신인 그는 학생들 사이에서도 합리적이란 평가를 받고 있고 개혁성향도 가진 인물로 알려져 있다.그는 현재 반정부인사와 접촉을 하며 개혁을 위한 특별팀을 운영하고 있다는 소식도 들린다.수하르토 일가로서도 인도네시아 곳곳에 움켜진 부를 지키는데 위란토의 도움이 절대 필요하기 때문에 이를 적극 추진하려 할 것으로 보인다. 하비비 부통령도 후계자의 유력한 후보로 꼽을 수 있다.과학기술장관을 지낼 정도의 테크노크라트로 수하르토가 부통령으로 지목한 하비비는 합리적이란 평가를 받고 지식도 풍부하나 수하르토 측근으로 알려진 것이 걸림돌이 될 수 있다.그러나 수하르토가 의도하지 않은 인물이 전면으로 부상할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방송국이 시위대에 점령되는 마당에 돌아선 민심을 되돌리기 위해 군부가 2천4백만 회교도 절대다수의 지지를 받는 회교지도자 아미엔 라이스를 내세운다는 것도 예상된다. 라이스는 일찍부터 수하르토의 하야를 요구하는 등 학생운동세력들로부터 지지를 받아왔다.그가 전면에 등장한다는 것은 수하르토일가의 완전퇴진을 뜻하기 때문에 상당한 혼란이 뒤따를 수 있다.그러나 라이스는 반면 막강한 힘을 자랑하는 군부와의 제휴를 통해 수하르토집권세력을 몰아내는데 따른 혼란을 최소화시키면서 군부와 권력을 잠시 분점하게 될 것 같다.수카르노 전 대통령의 딸이자 가장 인기있는 재야지도자로 부상한 수카르노푸트리 여사는 그러나 어느 경우에도 상징적 인물로 남을 가능성이 커보인다.최대변수인 군부가 그녀는 절대 용인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인도네시아 연표 ▲45년 8월=독립선언.수카르노,초대 대통령에 취임 ▲65년 9월=쿠데타 미수사건 발생. ▲10월=수하르토,육군장관겸 군사령관 취임 ▲68년 3월=수하르토,2대 대통령에 취임 ▲97년 7월=동남아 금융위기 발생 ▲10월 31일=IMF와의 교섭에서 경제구조개혁안 합의 ▲98년1 월9일=자카르타 대학생들,수하르토 퇴진 요구 시위 ▲3월10일=수하르토 7선 당선 ▲3월12일=수라바야 시위에서 경찰과 학생들 첫 충돌 ▲4월8일=경제구조개혁안 IMF와 최종합의 ▲5월4일=공공요금 대폭인상 발표.곳곳에서 폭동 발생 ▲5월6일=메단서 경찰 발포로 사망자 발생 ▲5월12일=자카르타 시위서 경찰 발포로 학생 6명 사망 ▲5월14일=수하르토 사임 용의 발표
  • 65년 쿠데타로 권력 장악뒤 30여년 집권/수하르토 누구인가

    【방콕 연합】 수하르토 대통령은 30여년간의 장기집권으로 인도네시아를 이끌어온 인물.지난 3월10일 국민협의회(PCA) 대회에서 7선 대통령으로 선출돼 경제난의 풍랑에 허우적거리는 ‘인도네시아호(號)’를 조타해왔다. 군부의 강력한 지지를 기반으로 재집권했으나,취임을 전후해 계속돼온 소요와 폭동으로 곤욕을 겪어 왔다. 오는 6월로 77세가 되는 그는 65년 반공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했다.그후 석유와 가스산업의 수익을 이용해 지난해 통화위기가 촉발되기 전까지만해도 연평균 7%의 높은 경제성장을 이룩해왔다.이런 경제실적 덕분에 ‘개발의 아버지’로 국민들의 추앙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6명의 자녀들이 자동차와 석유화학,은행 등 국가의 기간산업을 장악한 재벌로 급성장한데다 정치권력까지 장악하려 해 끊임없는 부정·부패 시비를 일으켜 왔다. 이같은 부정부패는 결국 지난해 7월 루피아화 폭락과 그로 인한 물가폭등으로 이어졌으며,IMF로부터 긴급수혈을 받아야 하는 사태를 초래하고야 말았다.경제가 엉망이 되자 폭동과 소요사태가 끊이지 않는 가운데 학생과 재야세력들은 수하르토 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하게 됐다.
  • 印尼軍 “개혁요구 수용 모색”/위란토 참모총장,시위중단 촉구

    ◎폭동확산속 6명 사망 【자카르타·메단 외신 종합】 인도네시아 폭동사태가 악화일로를 치닫고 있는 가운데 7일 인도네시아의 위란토 군참모총장이 “군대는 학생과 시민들의 개혁요구를 수용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중이다”며 군부가 개혁전면에 나설 것임을 밝혀 인도네시아 사태는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위란토 참모총장은 이날 자카르타에서 군관계자 대책회의를 가진 뒤 이같이 밝히고 “개혁문제를 추가로 논의해 가까운 장래에 개혁에 관한 몇가지 원칙적 생각을 종합할 것이므로 학생들은 시위를 중단해 줄 것”을 촉구했다. 그는 또 “군은 개혁이행 문제를 논의할 준비가 돼있으나 이는 점진적이고 헌법에 의거해 이행돼야 한다”고 말해 군이 전면에 나서되 쿠데타에 의한 방법은 아닐 것임을 암시했다. 이날 인도네시아에서는 수도 자카르타와 북수마트라의 주도(州都)메단시(市) 등지에서 6일 시위로 6명이 숨지고 80명이 부상했으나 7일에는 무장군인의 배치로 긴장된 평온을 유지했다. 동(東)자바주(州) 수라바야에서도 고교생200여명이 교복차림으로 가도시위를 벌였다.
  • 야권 움직임/參院선거전후 “野 연대” 물밑작전

    ◎민주당­중의원 선거 野 단일후보 추진/자유당­자민당 비주류서 ‘러브콜’ 기대/신당 평화­자민과 정책별 부분연합 모색 【도쿄=姜錫珍 특파원】 하시모토 류타로(橋本龍太郞)정권의 구심력이 저하되면서 야당들의 내각 퇴진론이 거세지고 있다.이들은 또 참의원 선거를 전후 정국 주도권을 잡기 위해 다각적인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민주당◁ 지난달 27일 새로 출범한 최대 야당민주당은 하시모토 총리가 경제정책 실패에 대한 책임을 지고 물러나라는 요구를 제기하고 있다.6월10일까지 열리는 국회 회기동안 내각불신임안을 제출하기 위해 다른 야당들과의제휴를 적극 모색하고 있다. 간 나오토(菅直人) 대표는 5일 방문지인 미국의 한 강연회에서 “다음 중의원 선거에서는 야당이 단일 총리 후보를 내세워 싸운다면 정권 교대가 불가능하다고만 말할 수는 없을 것”이라면서 민주당을 중심으로 한 야당 전열정비를 호소했다.참의원 선거후 집권은 기대하지 않는 분위기다. 민주당은 간 대표의 인기에 의존하고 있다.간대표가 후생상 시절 혈액감염에이즈환자들의 요구를 수용,관료의 벽을 부순 점이 높이 평가되고 있다. 하지만 고민도 적지 않다.옛 민주당,민정당등 4개 정당이 합당했지만 여전히 한 지붕 네 가족 살림이다.노선과 이해의 차이는 물론 예산 집행마저 따로따로다.또 지방 조직들은 더 흩어져 있다.7월로 다가온 참의원 선거는 물론 중의원 선거를 치를 대비태세가 부족하다.자민당이 중의원 선거를 시사하면 대응이 고민스럽다. ▷자유당◁ 멀쩡한 신진당을 깨고 오자와 이치로 당수가 추종자만을 거느리고 세운 정당이다.정국 주도권을 민주당에 뺏긴 채 자민당 비주류가 쿠데타를 일으켜 손을 내밀어 주기를 기대하고 있다.정치 능동태가 아니라 수동태가 돼 있다.자민당내에는 그에 대한 공포감 거부감이 여전하다. ▷옛 공명당 계열◁ 옛 공명당 계열인 신당 평화와 공명은 내각이 퇴진 중·참의원 동시선거가 실시되는 것이 제일 바람직하지 못하다.지지기반인 창가학회가 두 선거를 동시에 치를 만큼 역량이 충분치 못하기 때문이다.자민당으로부터 최근 정책별 부분 연합이라는 ‘러브콜’을 받고 야당 제휴보다는 자민당과의 제휴에 기우는 듯한 자세를 보이고 있다.일거양득이기 때문이다. ▷공산당◁ 공산당은 국회 해산,총선거 실시를 주장하고 있다.의석수의 대폭확대가 기대되고 있다.국민들의 신뢰감이 서서히 상승하고 있다.
  • 5월의 역사적 의미/姜萬吉 고려대 교수·한국사(특별기고)

    민족사니 세계사니 하는 것도 결국 인간들의 일상 생활 하나 하나가 쌓여서 이루어지는 것이지만,그 속에는 크고 작은 마디가 있게 마련이며,역사가(歷史家)란 사람들은 또 이 마디에다 나름대로 의미를 부여하게 마련이다.우리 역사 가르치는 일을 업으로 삼고 사는 사람들에게는,지금도 5월만 되면 역사의 마디가 가지는 엄숙성 같은 것을 생각하게 된다. 李承晩정권이 권력 연장을 위한 개헌(改憲)을 했다가 망해 간 역사를 보고,다시는 3선 개헌하는 어리석은 통치자가 나오지 않으리라 생각했다가 朴正熙정권의 3선 개헌을 겪었다.10·26 궁정동사건에서 ‘유신’대통령 朴正熙의 최후를 보면서 쿠데타 일으키는 어리석은 군인이 다시는 안 나오리라 생각했다가 12·12 ‘군사쿠데타적 사건’과 ‘광주 학살’을 겪었다.이 참에 역사선생 영영 그만두는 것이 옳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광주사태’가 ‘민주화운동’으로 또 ‘민중항쟁(民衆抗爭)’으로 이름 바뀌는 과정을 겪었고,희생자들의 명예가 회복되고 그 묘소가 성지가 되는 한편,‘군사쿠데타적 사건’을 주동해서 권력의 정상에 올랐던 사람들이 감옥에 가는 것을 보면서,역사선생 그래도 할 만하다고 자위했던 일이 기억된다. ○역사의 엄숙성 또다시 절감 금년에는 또 ‘광주사태’때의 ‘내란음모사건’주모자가 대통령이 되어 다시 그 5월을 맞게 되었다.이렇게 되면 역사선생 할 만하다는 정도를 넘어서,역사의 마디들이 가지는 엄숙성(嚴肅性)과 정직성(正直性)을 다시 한번 절감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왜 ‘광주사태’가 ‘민주화운동’으로 또 ‘민중항쟁’으로 되고,‘폭도(暴徒)’가 ‘영예로운 전사’나 ‘민주열사‘가 되며,‘폭도’를 처치하고 대통령이 되었던 사람들이 감옥에 가고,‘내란음모 주동자’요 사형수였던 사람이 대통령이 되는가 하고 묻는다면,그것에 대답해야 할 짐은 결국 역사선생이 지게 마련인 것이다. 이런 질문에 대한 여러가지 답이 있을 수 있겠지만,그리고 좀 막연(漠然)한 표현이 될지 모르지만,그것은 인간의 역사가 기어이 가고 마는 길이나 방향 같은 것이 있기 때문이라 하는 것도 대답의 하나가 될수 있지 않을까 한다. ○‘광주항쟁’ 영예로운 전사로 어떤 사람들이 그 역사의 길이나 방향에 맞게 섰다면,설령 한 때는 역사왜곡으로 ‘폭도’가 되었다가도 결국 그리고 기어이 ‘영예로운 전사’나 ‘민주열사’가 되게 마련인 것이다.반대로 그 역사의 길이나 방향에 역행했다면 설령 한 때 권력의 정상(頂上)에 섰다 해도,그 권력이 끝나고 역사가 제길로 들어서게 되면 실정법적(實定法的) 판결뿐만 아니라,역사의 심판에서도 기어이 죄인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역사의 길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하고 묻게 될 것이다.만고불변(萬古不變)한 역사의 길은 한 마디로 말해서 이 세상 사람들이 정치적으로 더 자유로워지는 길,경제적으로 더 고루 풍부하게 되는 길,사회적으로 만민평등이 되는 길,문화적으로 생각하고 말하는 자유가 더 넓어지는 길이라 할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저 처절했던 광주항쟁이 있은 5월이 우리에게 주는 역사적 의미는 무엇인가.앞에서 든 네가지 길에 섰던 ‘폭도’가 ‘영예로운 전사’요 ‘민주열사’가 되고,‘내란음모 주동자’사형수가 대통령이 되는 반면,그 길에 역행했던 ‘쿠데타적 사건’의 주동자들이 기어이 감옥으로 가고 또 역사의 죄인이 되고만다는 진리를 가르쳐 주는데 있다고 할 것이다.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