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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토, 유고공습 어떻게/나토, 공습움직임 이모저모/일지

    ?맏洹誌? AP AFP 연합 ?립づ?(북대서양 조약기구)의 유고슬라비아 공습 명령권자는 하비에르 솔라나 나토 사무총장. 1차 공습의 목표물은 세르비아의 레이더 기지를 포함한 대공방어망,미사일발사대,지휘소등이다.공습명령이 내려지면 군기술진은 즉각 미국 순항미사일의 목표물 입력에 들어간다. 2차 공격은 방공망 파괴보다 훨씬 광범위하게 이뤄진다.유고 전역의 공군기지,부대와 군사시설 밀집지역,병영등이 여기에 포함된다. 공격 명령이 떨어지면 미 해군 순항미사일과 공군 폭격기가 유고 방공망 초토화에 나선다. 미 해군은 토마호크 순항미사일을 탑재한 4척의 군함과 2척의 공격용 잠수함을 아드리아해에 띄워놓고 있으며 순항미사일로 무장한 영국 잠수함 1척도 가세한다. 8대의 B-52공군전폭기는 영국에서 발진 준비를 하고 있다.이탈리아에서 대기중인 F-117A 스텔스 전폭기도 초전에 투입될 계획이다. 적레이더망에 거의 잡히지 않는 B-2스피리트 전폭기도 이번 전투에 처음 투입된다. 나토가 동원할 수 있는 항공기는 미군기 260대를 비롯,총 400대.기종도 F-117스텔스에서부터 B-52장거리 폭격기,F-15,F-16,미라지,재규어,토네이도,각종 정찰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아드리아해엔 미항모 엔터프라이즈,프랑스 항모 포쉬와 수 척의 군함 및 잠수함이 출동해 있다. 여기에 맞서는 유고는 9만명의 보병과 탱크 1,300대,1개 대공포 여단을 운용하고 있다.또 79대의 미그기와 샘 SA-6,SA-3,지대공미사일 8개 포대,2000문 이상의 대포류를 보유하고 있다.해군은 7,500명에 달하며 잠수함과 프리깃함 각 4척을 가지고 있다.대부분 구 소련제 무기로 무장한 유고의 대공방어망은 만만치 않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 나토, 공습움직임 이모저모 ?갰株齪纓쨍? 선포하기 위해 국영 TV에 나온 모미르 불라토비치 유고총리는“나토는 주권국에 직접적인 침략 위협을 하고있다”고 주장.유고가 전국 비상상태를 선포한 것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처음이다. ?개づ娥鞭? 피해를 줄이기 위해 유고정부는 코소보주에 배치된 병력과 자원을 분산 배치. 밀로셰비치 대통령은 일부 군장교들이 쿠데타를 일으킬 것을우려해 23일 알렉산드르 디미트리예비치 장군을 경질하고 파르카스 장군을새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갸섯:湊튿봉? 24일에도 코소보해방군(KLA)에 대한 소탕작전을 계속.윌리웜 워커 코소보파견 미국 대사는 “6개 KLA지역중 2개 정도가 이미 완전 초토화됐다”고 전언. ??23일 공격명령을 내린 하비에르 솔라마 나토 사무총장은 나토가 유고슬라비아 국민들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키는 것이 아님을 누누히 강조.솔라나총장은 “만행을 일으키고 있는 세르비아군과 특수경찰의 공격행위를 분쇄하고무력화시키는 데 목표가 있다”고 밝혔다. ?갯鵑璨坪? 23일 격론끝에 58대 41로 나토공습 지지결의안을 채택했다.결의안은 “인도주의적 요구에 의해 군사적 만행을 저지하기 위한 나토의 행동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건존?마코프 러시아총리는 중간기착지인 아일랜드를 떠난 직후 대서양 상공에서 갑자기 기수를 돌려 귀국한 것으로 알려졌다.귀국 기자회견에서 프리마코프총리는 “주권국인 유고를 공격하는 것은 국제법상 용납할수없는 행위”라고 강경한 어조로 나토를 비난. ?걍薩뭇?유고연방에 대한 군사공격은 국제법 위반이라고 경고.친화순 유엔주재 중국대사는 “코소보 문제는 유고연방 내부문제며 유고연방에 대한 어떠한 군사행동도 유엔헌장과 국제법에 대한 심각한 위반”이라고 경고했다. ?개づ娥鞭응? 임박했다는 불안감이 확산되면서 23일 영국과 독일,프랑스등유럽주가가 일제히 폭락세를 기록. 런던 파이낸셜타임스 100지수가 이날 1.5% 하락한 6,060.5포인트에 장을 마친 것을 비롯해 프랑크푸르트 DAX지수는 3.26%,파리 CAC-40지수도 2.80% 하락했다. ?맏?윤溜捉? 브뤼셀 외신종합 워싱턴 崔哲昊 특파원??- 코소보사태 주요일지??1974년 유고 헌법 수정,코소보주를 세르비아내 자치주로 선언??1989년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대통령 코소보 자치권 박탈??1990년 세르비아계 코소보 자치정부 해산??1991년 코소보 공화국 독립 선언??1996년 코소보해방군 창설??1999년 1월 알바니아계 주민 45명 피살,위기 재발??2월6일 프랑스 랑부예에서 코소보 평화회담 개막??3월20일 유고연방군,알바니아 반군에 대한 총공세 시작??3월23일 나토유고공습 명령
  • [제2공화국과 張勉](8)尹潽善과의 갈등(下)/윤보선과 평가

    1961년 5월16일 새벽2시쯤 張勉은 총리 숙소로 쓰는 반도호텔 809호실에서경호대장의 다급한 목소리에 일어났다.張都暎 육군참모총장이 급한 일로 전화를 했다는 것이었다. 張都暎은 “육군 30사단이 장난질 하려는 것을 막았고,현재 해병과 공수부대일부가 서울로 들어오려는 것을 한강다리에서 막고 있다”고 보고했다. 이어“염려마시고 그저 그런 일이 있다는 것만 아십시오”라고 덧붙였다. 張勉은 와서 직접 보고하라고 지시하고 기다리지만 張都暎은 오래도록 나타나지 않았다.총성이 요란하게 들려오자 張勉은 경호대장 등과 함께 지프를타고 반도호텔을 떠났다.거리가 가까운 미국대사관과 대사관 사택을 찾았지만 문을 열지 않아 들어가지 못했다. 그는 “잠시 몸을 피하려고 아무도 짐작하지 못할 혜화동 수녀원으로 갔다”(회고록 중에서).그리고는 55시간이 지난 18일 낮12시쯤에야 모습을 드러내국무회의를 주재하고 내각 총사퇴를 발표한다. 尹潽善은 새벽 3시30분에서 4시 사이 침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잠을 깼다. 張勉과 마찬가지로 張都暎으로부터 전화가 온 것이었다.張都暎은 “쿠데타가 일어나 헌병을 동원해 한강다리에서 저지하려 했으나 중과부적으로 뚫렸다. 쿠데타군이 시내로 들어왔는데 진압될 것같지 않다”고 우려했다(尹潽善 회고록에서). 尹潽善은 “피신하라는 말처럼 들렸지만 일신의 안전만을 위해 300만 서울시민을 버릴 수 없고” 또 “그들하고 사리를 따져볼 수도 있을 것이요, 설령피살이 된대도 그리 부끄러울 것은 없다고 생각해” 자리를 지킨다. 5·16쿠데타가 발생해 제2공화국이 결국 무너지기까지 국무총리 張勉은 몸을 숨겼고 대통령 尹潽善은 현장에 남아 ‘유일한 헌법기관’으로서 쿠데타세력을 상대한다.쿠데타를 적극적으로 분쇄하지 못하고 자기 한몸 피신하는 데 그쳤던 張勉은 제2공화국 붕괴에 변명할 여지가 없다.그렇다면 尹潽善은 제 할일을 다한 걸까. 16일 낮 쿠데타 주역인 朴正熙소장과 柳原植대령이 청와대로 尹潽善을 찾아왔다.이 자리에는 玄錫虎국방장관과 張都暎 등이 함께 있었다.玄錫虎는 쿠데타 소식을 듣고 반도호텔로 가서 張勉을 만나고 헤어진 뒤 쿠데타군에게 체포된 상태였다. 접견실에서 朴正熙 일행을 만난 尹潽善은 “올 것이 왔구나”라는 말로 입을열었다.이 말은 훗날 두고두고 논란거리가 되었다. 尹潽善을 비난하는 쪽은 “쿠데타를 기다렸다는 투의 이 표현이야말로 그가대통령 직에서 물러나기까지 쿠데타세력과 관련해 보여준 행동을 설명하는키워드”라고 풀이했다.현장에 있던 玄錫虎는 회고록에서,尹潽善이 이 말에이어 “나라를 구하는 길은 이 길밖에 없었다”면서 張勉정부에 비난을 퍼붓고 朴正熙의 거사에 찬사를 보냈다고 밝혔다. 尹潽善의 설명은 물론 다르다.“그들(朴正熙 일행)을 대하는 마음이 서글퍼나도 모르게 이 말이 떨어졌고,당시 사회적·정치적 혼란상을 생각할 때 당장 무슨 일이 터지고야 말 것같아서”였다는 것이다. 어쨌든 尹潽善은 “군인들끼리 피를 흘리는 일이 없도록 잘 수습하라”는 말로 발언을 끝낸다.모두 물러갔다가 朴正熙와 柳原植이 다시 들어왔다.柳原植이 “저희는 이 혁명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라면서과거에도 대통령에게 충성을다했고 앞으로도 변함이 없을 것이라고 다짐했다.마치 張勉내각이 물러나면 권력을 尹潽善에게 넘길 것처럼 들리게끔 하는말이었다. 尹潽善은 이 자리에서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지만 미 국무부 자료를 보면,그는 白樂濬 참의원의장을 쿠데타군쪽에 보내 ‘헌법 69조에 따라 尹대통령이 새 총리를 임명한다면 군부가 권력을 이양하고 철수할 것인가’를 타진한다. 한편 朴正熙 일행에 이어 마셜 그린 주한미대리대사와 매그루더 UN군사령관이 함께 尹潽善을 방문한다.두 사람은 이미 “張勉총리 영도 하의 합헌적인정부를 지지한다”는 성명을 발표한 뒤였다.두 사람은 “서울시내에 들어온쿠데타군은 4,000명이 채 안되므로 4만 병력만 출동시켜 서울을 포위해 들어가면 쿠데타군이 항복할 것”이라며 무력진압을 주장했다. 그러나 尹潽善은 “국군끼리 전투를 벌여 서울이 불바다가 되면 북한 인민군이 기회를 노려 남침한다”는 논리로 끝내 반대한다.그린은 “각하의 이번결정으로 한국에서는 오랫동안 군부통치가 계속될 것”이라는 ‘경고’를 남기고 돌아간다.매그루더는 尹潽善과의 면담후 본국 합참본부에 전문을 보내“尹대통령은 張총리를 몰아내고 싶어 가능한 법적 절차를 찾고 있다”고 보고한다. 尹潽善은 이날 오후 張都暎이 요청한 계엄령을 승인했으며 17일 오후 2시에는 대국민 성명을 발표해 “군사혁명위원회가 정부 기능을 대신한다”고 밝혀 張내각 퇴진을 기정사실로 만들었다.또 쿠데타를 “애국적인 군사혁명”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한편 張勉은 수녀원에서 라디오를 들으며 사태의 전개를 알고 있었고 16일아침 그린 대리대사와 통화도 한다(그린의 증언).그는 내각 총사퇴를 결심한 이유를 “미대사관에서 尹씨의 태도를 연락받았는데 그가 쿠데타 진압을 방지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다 쓰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라고 회고록에서밝혔다.그러나 張勉은 尹潽善에게 직접 연락해 쿠데타 저지를 논의하거나,최소한 그의 뜻이 무엇인지를 직접 알아보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尹潽善은 張勉의 행방을 알지도 못했지만 그와 상관없이 제2공화국을 지키려는 노력을 전혀 기울이지 않는다. 정치적 지향과 인적 구성 등에서 이질적이었던 민주당의 신·구파,그리고 그들의 대표격인 張勉총리와 尹潽善대통령의 갈등과 대립은 갓 피어난 민주주의의 싹을 짓밟히게 하는 크나큰 비극을 초래한다.제2공화국 붕괴의 책임을저울질한다면 張勉과 尹潽善 그 어느쪽으로도 저울추가 결코 기울지는 않을것이다. 이용원- [기고] 張勉과 尹潽善 평가 5·16쿠데타가 일어나 張勉총리의 소재가 밝혀지지 않은 상황에서,尹潽善대통령이 “올 것이 왔다”며 쿠데타를 추인한 것은 두 사람의 비극적 결합을잘 말해준다.우리가 슈뢰더 독일총리는 알아도 대통령 이름은 잘 모르듯 내각책임제 아래 대통령은 명목상 존재에 불과하다.그런데도 尹潽善은 대통령중심제의 대통령처럼 행세하다 막상 단호한 조치가 필요한 때 “올 것이 왔다”며 쿠데타를 추인해 버렸다. 尹潽善에게 쿠데타가 ‘올 것’인 이유는 자신의 파벌이 정권을 장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당시 집권당은 한민당 후신인 구파와,재야 민주화세력인 신파의 연합으로 구성된 민주당이었다.申翼熙·趙炳玉같은 비중 있는 지도자가사망한 뒤 구파를 이끌게 된 尹潽善은 전형적인 과거형 정치가였다. 구파의 전신인 한민당은 우익민족주의 세력과 친일파 세력이 혼재한 정당이었다.UN한국위원단이 ‘보수적 지주정당’이라고 지적했듯이 해방직후 토지개혁에 반대하고 반민족행위처벌법에도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으며,李承晩의단독정부 수립을 지지했다.따라서 한민당이 李承晩과 결별하고 야당의 길을걸은 것은 이념과 정책상의 대립이라기보다 李承晩의 권력독점에 대한 반발때문이었다.한민당은 해방이후 좌익세력의 급진성과 李承晩의 독선이 낳은‘반감(反感)’이란 정치적 공간을 적절히 점유해 생존한 과거형 정당인 것이다. 4월혁명후 ‘대통령=구파,총리=신파’라는 합의 덕에 대통령에 선출된 尹潽善이,자파인 金度演을 총리로 지명한 것은 정치적 합의를 휴지조각으로 여기는 과거형 정치가의 전형적인 모습이다.대통령과 총리를 모두 차지하려던 계획이 실패하자 구파는 결국 민주당을 뛰쳐나가 신민당을 창당한다.尹潽善은대통령으로서 이런 분열적 행위를 제지하기보다는 부추기는듯한 처신을 보였고,정부를 비판하는 담화를 발표해 張勉정부 흔들기에 여념이 없었다.개인과 파벌의 이익을 모든 가치보다 우선시한 행위인 것이다. 반면 신파를 이끈 張勉은 1960년대 한국상황에서는 등장이 너무 빨랐던 미래형 정치가이다.자유민주주의에의 신념과 종교적 경건함이 밴 구도자적(求道者的) 정치가인 張勉은 2000년을 눈앞에 둔 현재에도 시기상조일지 모를 정도로 선진적인 정치가였다.그는 尹潽善이 이끄는 구파의 끝없는 시비를 인내하면서,1960년 10월 제2공화국 경축식에서 말한대로 “정부의 시정목표로서경제제일주의”를 주창한 실질적이고 선각적인 지도자였다. 쿠데타 세력이 마치 자신의 업적인양 내세운 경제개발5개년계획이나 국토건설사업은 모두 張勉정부에서 경제제일주의를 실천하고자 수립한 것들이다.시장경제원리에 입각해 경제의 자율성을 최대한 보장한 張勉정권의 경제개발계획이 실천되었더라면 5·16이후 정경유착으로 성장한 ‘재벌신화’라는 어두운 경제성장사는 ‘국민신화’로 대체되었을 것이다. 5·16후 두 사람의행보도 차이점을 극명하게 보여준다.張勉은 쿠데타를 막지 못한 역사의 죄인이란 죄의식 속에 참회하다가 죽어간 반면,尹潽善은 ‘올 것이 왔다’던 쿠데타세력의 朴正熙 후보와 1963년과 67년 두 차례 대결했으나 패배했다.현실적으로 대통령에 대한 꿈을 접었을 무렵인 1980년대에는 全斗煥 정권에 협력하다가 세상을 떠났다.쿠데타후 두 사람의 삶은 현재우리 정치의 낙후성의 한 원인을 말없이 웅변해준다. [李德 一 역사평론가·문학박사 한가람 역사문화연구소장]
  • [제2공화국과 張勉] (7) 尹潽善과의 갈등/金在淳 前국회의장

    1960년 8월29일 이른 아침 張勉총리를 비롯해 제2공화국 장관들이 서울역으로 모여들었다.이들은 ‘尹潽善대통령이 휴가 겸 민정시찰을 떠나니 모두 나와 전송하라’는 대통령 비서실의 전갈을 받고 나온 참이었다.이윽고 ‘관1호’차를 타고 尹대통령 부처가 등장했다.尹대통령은 張勉내각의 정중한 배웅을 받으며 오전 8시 특별열차 편으로 떠난다. 이 일이 알려지자 정치권에서는 한동안 수군거림이 일었다.“내각책임제인데 대통령이 각료들에게 전송나오라고 ‘지시’하는 짓은 무엇이며,그렇다고이에 군말없이 따르는 張내각은 또 뭐냐”하는 말들이었다.한마디로 “尹潽善은 월권한 것이고 張勉은 제 밥그릇도 못챙긴다”는 평이었다. 張勉정부 출범 닷새 후에 일어난 이 간단한 삽화는 ‘張勉총리와 尹潽善대통령의 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상징성을 갖는다.민주당 신·구파의 대결이라는 큰 구도 말고도 ▒권위주의적인 尹潽善과 다툼을 싫어하는 張勉의대조적인 성격 ▒처음 도입한 내각책임제를 양쪽 다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듯한 미숙함들이 이 삽화에는 들어 있다. 제2공화국은 의회가 정치의 중심인 내각책임제였다.대통령은 의전적인 의미의 국가원수에 불과하며,총리야말로 행정권 담당자인 동시에 국정(國政)에관한 총괄적인 책임자였다.그러므로 尹潽善대통령은 국민과의 접촉을 자제하고,국내 정치에 대해서는 철저히 거리를 두는 게 도리였다. 그런데 尹대통령은 회고록(‘사실의 전부를 기록한다’에 수록)에서 “틈틈이 민정시찰을 하는 것이 즐거웠다”고 밝혔듯이 자주 거리로 나섰다.도로포장이 제대로 되지 않은 시절이라서 그가 지방시찰에 나설 때면 으레 특별열차가 동원되곤 했다. 문제는 대통령과의 잦은 접촉이 국민에게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지느냐에 있었다.정치학자들은 “국가통치의 중심이 총리인지,대통령인지 국민들이 혼동을 일으킨다”면서 “이같은 혼란은 정치안정에 큰 방해요소로 작용한다”고 지적한다.또 “尹대통령이 내각책임제에 상관없이 李承晩대통령이 누린 권위를 자신도 유지하고 싶어한 듯하다”는 풀이도 뒤따른다. 尹대통령은 민주당 구파 정치인들을 청와대로 자주 불러들여 모임을 가졌으며 張勉내각의 정책과 배치되거나,그것을 정면으로 비난하는 성명을 불쑥불쑥 내곤 했다. 60년 10월10일 許政과도정부때 임명된 시도지사를 張정부가 경질하자 尹대통령은 구파의 입장을 반영해 ‘유감’을 표시하는 담화를 발표했다.張내각에서 “왜 정치에 관여하는가”라고 항의하자 그는 “국가적인 큰 잘못에 대해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말했다”고 대응했다.다음해 1월12일 尹대통령은민·참의원 합동회의 치사를 통해 시국을 ‘국가적 위기’라고 규정하고 “정쟁의 휴전을(당파간에) 협정하라”고 촉구했다.그는 “한 개인,한 당파가당면한 난국을 타개할 수 없는 것은 공지의 사실”이라고 전제하고 “당파이익을 위해 이를 부정한다면 우리는 역사의 죄인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張勉내각을 겨냥해 거국내각을 구성하라는 촉구였다. 張내각과 민주당 신파는 당연히 발끈했다.새해 들어 사회가 안정돼 가고 따라서 경제건설에 주력하려는 마당에 ‘국가적 위기’‘난국’ 운운하며 찬물을 끼얹는 까닭이 무엇이냐고 분개했다.朱耀翰·金永善 등 張내각의 핵심 각료들은 尹대통령이 내각을 붕괴시키는 명분을 쌓으려 한다고 의심했다. 張勉과 尹潽善의 갈등은 3월23일 ‘청와대 요인회담’(일명 청와대 4자회담)에 이르러 극점에 다다른다.그 전날 밤 서울에서는 반공법·데모규제법 제정을 반대하는 횃불데모가 있었다.張勉정부 때의 마지막 대규모 시위로,밤에 횃불을 동원한 방식 때문에 적잖은 충격을 주었다. 23일 오후 8시 청와대에는 張勉총리·尹潽善대통령·郭尙勳민의원의장·白樂濬참의원의장이 모였다.張내각의 국방장관인 玄錫虎와 이미 신민당으로 분당한 구파의 金度演 柳珍山 梁一東 趙漢栢 徐範錫도 자리를 같이했다.참석자들이 남긴 회고는 아전인수(我田引水)격이어서 각기 조금씩 다르지만 그 윤곽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먼저 張총리는 ‘반공을 위한 국민운동 전개를 논의하자’는 연락을 받고청와대로 갔다.처음엔 그런 이야기가 화기애애하게 전개되더니 어느결에 ‘정권문제’로 화제가 바뀌었다.이윽고 尹대통령이 “혼란한 정국을 극복할자신이 있느냐”면서 은근히 총리 사임을 종용하더라고 회고했다. 반면 尹대통령은,참석자들이 張총리에게 “거국내각이라도 만들어 비상사태를 선언하고 국민에게 호소해야 한다”고 결단을 촉구했다고 밝혔다.이에 張총리는 “내가 그만두면 나보다 더 잘할 사람이 있겠느냐”고 반문하더라는것.그러나 尹대통령은 모임이 서로를 이해하는 부드러운 분위기 속에서 끝났다고 술회했다. 한편 柳珍山은 “尹대통령이 ‘현상유지책만으로 안된다면(정국을 담당할인물을)한번 바꿔 봐야 할 게 아니오’라고 일격을 가하자 張총리가 얼굴이창백해져 변명을 했다”면서 張총리가 끝내 궁지를 면치 못했다고 기록했다. 참석자들은 밤 11시30분쯤까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결론을 내린 것은없었다.다만 이 모임에서 나온 말들은 일절 발설하지 말자고 합의했다. 그러나 다음날 白樂濬이 회담 내용을 공표하는 바람에 각 신문은 ‘尹대통령이 張총리에게 정권을 내놓으라고 했다’고 대서특필했다.張정부와 신파가 격노한 것은 당연했다.李錫基 민주당 원내총무가 즉각 성명을 발표했다.“야당 대표들만 불러 놓고 張총리에게 정권을 내놓으라고 말한 사실은 언어도단이다.청와대는 음모를 꾸미는 곳이다.尹대통령이 앞으로도 그런 식의 정치간섭을 한다면 우리 민주당도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라는 내용이었다. 張勉과 尹潽善 사이는 이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지경이 됐다.내각책임제에서 반목하고 갈등하는 총리와 대통령의 관계는 ‘정치력 약화’라는 치명적인 부작용을 초래했다.5·16쿠데타가 발생한 뒤 힘을 합쳐 쿠데타를 진압해야 할 두 사람은 최소한의 연락마저도 유지하지 않는다.그만큼 불신의 골이 깊었기 때문이다. - 張내각 외무부 정무차관 金在淳 前국회의장 金在淳전국회의장(76·월간 ‘샘터’ 발행인)은 張勉내각에서 외무부와 재무부의 정무차관을 지냈다.5·16쿠데타 후 ‘혁명검찰’에 의해 ‘반혁명죄’로 구속돼 복역하다 주체세력내 지인의 도움으로 열달 만에 풀려났다.이후 공화당에 참여했고 金泳三정부에서 국회의장직을 사퇴하며 정계를 떠났다. 그때 남긴 ‘토사구팽’(兎死狗烹)이란 유행어는 지금도 인구에 회자된다. 金전의장은 “張勉정부는 탄환 대신 투표용지로 세운 민주정부인데 지키지를 못해 아직도 국민 앞에 죄스럽다”고 말문을 열었다. 그는 “민주당이 비록 신·구파로 나뉘어 있었지만 해공(申翼熙)·유석(趙炳玉)이 계실 때는 張勉박사와의 사이에 조금도 틈바구니가 없었다”고 강조했다.그 예로 1959년 11월 전당대회에서 정·부통령 후보를 뽑을 때도 張勉이 趙炳玉에게 3표차로 석패했지만 아무런 잡음이 없었음을 들었다. “민주당 신·구파가 대통령 후보,당 대표 자리를 놓고 표대결을 벌이지만결과에는 승복하는 것이 전통”이라고 밝힌 金전의장은 “국무총리 인준때해위(尹潽善)가 상산(金度演)을 먼저 지명한 것은 배신”이라고 단정했다. ‘7·29총선’후 대통령은 구파에서,총리는 신파에서 나눠 맡기로 했는데尹潽善을 대통령으로 먼저 뽑고 나니 구파의 마음이 달라졌다는 것이다.그는 “학생·시민이 피 흘린 대가로 정부가 들어섰는데 구파가 민의를 거슬러대통령·총리를 독점하려던 게 배신이 아니면 무엇이냐”고 반문했다. 내각책임제 하에서 尹대통령의 정치 간섭을 제어하지 못한 것이 張총리의리더십 부족이라는 평가에 대해 金전의장은 “그것이 張박사의 성격”이라고 말했다. “해위의 월권을 막으려면 사사건건 따지고 싸워야 하는데 張박사는 누구하고 다투는 분이 아니어서”라는 설명이다.그는 “훗날 되돌아보니 張박사처럼 책임을 맡은 분이 겸양만을 내세우는 게 꼭 옳으냐는 생각도 들었다”고아쉬워했다. 金전의장은 “사실 해위는 張박사와 신파에게 신세를 많이 졌다”면서 몇가지 사례를 소개했다.가령 59년 전당대회때 尹潽善이 최고위원으로 뽑힌 것도 신파에서 “점잖은 분이니 밀어주자”고 뜻을 모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張박사는 나를 평소에 ‘재순군’이라고 부르며 무척 아껴주셨다”고 회고했다.金전의장은 “민주주의는 결국 국민의 정치적 수준이 높아져야이루어지는 것인데 당시는 張박사 같은 분을 제대로 이해하는 상황에 이르지못했다”면서 “정말 아까운 분”이라고 평가했다. 이용원
  • 61년 ‘교원노조’사건“명예회복” 재심청구 준비

    5·16 직후 현직교사 1,500명을 ‘용공분자’로 몰아 교단에서 추방한 ‘교원노조사건’의 진상규명·명예회복을 위해 당시 교원노조총연합회 대표였던 姜基哲씨(74)가 최근 姜信玉 변호사를 통해 재심 청구를 준비중이다. “40년 가까이가 지난 사건으로 법률적 시효는 이미 지났습니다.그러나 새 세기를 앞두고 지난 역사의 ‘매듭’을 짓기 위해서는 ‘교원노조사건’의 진상규명과 그 피해자들의 명예회복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합니다” 1960년 5월 결성된 한국교원노동조합은 최근 합법화된 전교조의 원조격으로 ‘4·19때 희생된 학생들의 피에 보답’한다는 취지로 결성됐다.“자유당시절 교사들이 3·4인씩 조를 짜서 부정선거에 가담한 사례도 있었습니다.학생들의 피로 4·19혁명이 성공하자 교사들은 쥐구멍이라도 찾고싶은 심정이었죠.그래서 교사들이 다시는 비리나 부정을 저지르지 말자는 취지로 결성한 것이 교원노조입니다.” 60년 7월 전국조직을 갗춘 한국교원노조는 한 때 조합원 수가 4만 명에 달했다.당시 초·중·고 교사와 대학교수 등 전체교원 수가 10만명이 채 안됐던 것을 감안하면 대단한 규모였다. 한편 5·16 직후 쿠데타 세력은 교원노조 조합원 1,500명을 ‘용공분자’로 몰아 체포,교단에서 추방하였다.이들중 간부급 54명은 구속돼 서대문형무소에 구금됐는데 이 숫자는 당시 정당·사회단체의 피체자 가운데 가장 많은숫자였다.이들은 혁명재판에 회부돼 모두 징역15∼10년을 선고받았는데 강씨는 이들 가운데 최고형인 징역15을 선고받고 7년 넘게 복역했다.민주당 정권을 전복한 장본인인 쿠데타세력들이 이들에게 갖다 붙인 죄목은 놀랍게도 ‘민주당 정부전복음모’.그러나 조사결과 혐의사실이 발견되지 않자 다시 ‘간첩사건’으로 몰아 붙였다. “당시는 통일문제를 언급하거나 한미경제협정·2대악법 반대투쟁에 나서면 모두 용공단체로 규정했습니다.당시 교원노조는 강령에서 ‘반공’을 명시했었고 한미경협문제는 거론하지도 않았습니다. 단지 2대악법은 노동탄압과 직결된 것이어서 다른 사회·언론단체들과 함께반대운동을 했지요.그런데 그게 ‘이적행위’로 둔갑하더군요” 68년 7년만에 출옥한 그는 정치정화법으로 6년간 묶여 있다가 10월유신 이후에는 보안처분대상자로 분류돼 이후 20년 가까이 사회와 격리된 생활을 하였다.3공시절 3선개헌반대 33인준비위원,민주수호국민협의회 기획운영위원,엠네스티한국위원회 이사 등을 지낸 강씨는 그동안 ‘토인비와 문명’등 역사·문명사 관련 저술과 연구에 몰두해 왔다. 강신옥 변호사는 “상식적으로는 재심의 사유가 충분하나 법 논리상 제한점이 많다”고 전제하고 “그러나 이 사건은 역사적·정치적 차원에서 꼭 해결돼야할 역사적 문제”라고 밝혔다.
  • [제2공화국과 張勉] (6) 尹潽善과의 갈등(上)/장면·윤보선

    1960년 8월19일 오후 1시24분 ‘張勉총리 인준’투표를 막 끝마친 민의원 본회의장에는 긴장과 흥분이 감돌았다.두번째로 총리 지명을 받은 장면이 인준에 성공해 취임할 것인가,아니면 그마저 실패해 정국이 계속 표류할 것인가. 1시37분 郭尙勳 민의원의장이 결과를 발표했다. “총투표수 225,가(可)에 117,부(否)에 107,기권 1.가가 정족수인 과반수이상이므로 가결된 것을 선포합니다.”4·19가 일어난 지 딱 4개월 만에 민주혁명 수행의 대임(大任)이 장면에게맡겨지는 순간이었다.총리가 된 장면은 곧바로 그를 지명해준 尹潽善대통령을 청와대로 찾아가 취임인사를 한다. 장면과 윤보선의 이날 만남은 유쾌해야 마땅한 자리였다.통합야당인 민주당을 창당한 지 5년 만에 ‘李承晩 독재정권’을 무너뜨리고 새 정치의 주역이 된 두 사람이었다.같은 당의 오랜 동지인 총리와 대통령은 ‘4·19정신’을현실정치에 구현하고자 서로를 격려하고 협조를 다짐했을 법했다. 하지만 둘 사이의 분위기는 어색하다 못해 냉랭하기까지 했다.‘총리 지명’을 둘러싸고 치열하게 전개된 민주당 신·구파간 갈등이 앙금으로 짙게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4월혁명으로 자유당정권이 무너진 뒤 정권을 맡을 정치세력으로는 민주당이유일했다.민심도 이를 인정해 7월29일 치른 민의원·참의원(상원)선거에서민주당은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민의원 219개 선거구에서 민주당은 무려 172석(78.5%)을 차지했다. 문제는 민주당 신·구파가 우열을 가리지 못할 정도로 팽팽한 의석 분포를이룬 사실이었다.따라서 신·구파 모두 내각책임제에서 국정을 실질적으로책임지는 국무총리를 차지하려고 암투에 들어갔다. 그즈음 민주당 지도층의 면면을 보면 장면이 단연 으뜸이었다.그는 56년 선거에서 부통령으로 선출됐고,‘3·15선거’에서는 자유당의 부정 탓에 낙선했지만 민주당의 대표주자였다.게다가 59년 11월부터 당수인 대표최고위원을맡아왔다. 반면 구파쪽은 조병옥 서거 후 명확한 리더가 없었다.당시 구파였던 高興門(국회부의장 역임,98년 작고)은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조병옥이 없는 민주당은 곧 신파인 장면의 천하가 될게 분명해 보였다.민주당 내에서 국민적 인기로 보아 그에 맞설 수 있는 인물은 없었다.평소 말이 없는 윤보선과 고집이 센 金度演이 있었으나 장면의 맞수는 아니었다.”국민 여론이나 당내 인식이 이같았는데도 구파는 윤보선을 대통령으로,김도연을 총리로 밀어 두 자리를 독점한다는 전략을 세웠다.그 까닭은 국회 부의장선거에서 표대결로 신파를 누른 적이 있어 자신을 가진 데다 구파 내 세력이 윤보선·김도연으로 양분돼 양쪽을 함께 배려해야 했기 때문이다. 반면 신파는 윤보선을 대통령으로 추대해 구파에게 일단 한 자리를 준 뒤 총리는 자파의 장면이 차지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8월12일 열린 민·참의원 합동회의에서 윤보선은 208표(재석 259명)를 얻어당선된다.이제 관심은 윤대통령이 누구를 총리로 지명할 것인가에 쏠렸다.신파의원들이나 국민 대다수는 ‘설마 구파가 총리까지 차지하겠느냐’는 막연한 기대를 품었고 구파 내에서도 鄭憲柱·閔寬植의원 같은 이들은 정치 도의를 내세워 독점에 반대했다. 8월16일 윤대통령은 김도연을 총리로 지명한다.통보를 받은 민의원의장 곽상훈은 장면을 지명하리라는 믿음이 깨지자 즉시 청와대로 쫓아가 항의한다.윤대통령의 해명을 들은 그는 “아마 김도연씨는 안 될거요” 라고 말하고는물러나와 김도연의 총리 인준을 적극 방해한다(회고록에서 발췌). 김도연은 다음날 총리 인준 투표에서 정족수보다 3표 모자라게 득표해 인준에 실패한다.8월18일 윤대통령은 장면을 총리로 2차 지명했고 장면은 다음날 인준을 받는 데 성공한다. 60년 8월 민주당의 선택은 마땅히 장면이어야 했다.그런데도 당내 파벌의 이익을 앞세워 김도연을 1차로 총리 지명하는 바람에 신·구파의 갈등은 깊어졌다. 그렇다고 신·구파 갈등이 장면총리와 윤보선대통령에게 그대로 옮겨갈 이유는 없었다.내각제 하에서 대통령은 당적(黨籍)을 떠나 국내정치에 초연하게끔 자리매김돼 있었다. 하지만 윤대통령은 이후에도 구파의 지도자처럼 행세하며 장면총리와 팽팽한긴장관계를 유지한다.그리고 그 긴장은 정치불안의 주요소로 작용한다. 이용원- 張勉과 尹潽善 장면과 윤보선은 제2공화국의총리와 대통령으로 만날 때까지 외형상 비슷한 삶을 살아온 듯 보인다.둘 다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일제강점기에 해외유학을 다녀오고 광복 후에는 정치인으로서 차근차근 위상을 높여나간다.그러나 그같은 과정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근본적인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된다. 장면은 인천세관 간부인 張箕彬의 맏아들로 출생해 21살때 카톨릭측의 주선으로 도미,뉴욕 맨해튼대에서 교육학·종교철학 등을 공부한다.귀국해 잠시카톨릭 평양교구 일을 보다 서울 동성상업학교에서 교직을 시작,그 학교 교장으로서 광복을 맞는다. 윤보선은 구한말 중추원 의관을 지낸 尹致昭의 장남으로 충남 아산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성장한다.본인말고도 6촌 이내에 집권당 당의장서리,장관,서울대총장 등 장·차관 이상만 13명이 나온 대표적인 명문가 출신이다.영국 에든버러대에서 고고학을 배웠다. 둘은 1948년 제헌의원 선거에 출마하지만 장면만 당선된다.윤보선은 54년 3대 의원 선거때 비로소 국회에 진출한다. 대한민국이 출범하자 장면은 UN총회 한국수석대표,초대 주미대사,제2대 국무총리를 잇따라 하며 건국의 기초를 닦는 데 큰 공을 세운다.이 기간 윤보선은 4대 서울시장,2대 상공장관을 지내지만 각각 재임기간이 1년도 안돼 물러난다. 두 사람은 55년 출범한 민주당에서 한식구가 된다.장면은 처음부터 최고위원 5명 가운데 하나였고 신파의 지도자였다.56년 부통령으로 당선된 데 이어 59년 전당대회때는 대통령후보 경쟁에서 조병옥에게 지지만 대표최고위원 선출에서는 조병옥을 누른다.윤보선은 이 대회에서 조병옥의 구파 몫을 이어받아 처음으로 최고위원이 된다. 60년 8월 제2공화국이 출범할 때까지 정치적인 경력에서 장면은 단연 윤보선을 앞선다.하지만 본질적인 차이는 다른 데 있다. 장면은 삶의 어느 시점에서 무슨 일을 했건 ‘성실하고 근면했다’는 점에이의를 다는 사람은 없다.반면 윤보선은 달랐다.이는 66년에 발표한 회고록(‘사실의 전부를 기술하다’에 수록)에서 스스로 밝힌 심경을 보면 명확하게 드러난다. 윤보선은 상공장관에 취임해 “업무를 거의 파악한 서너달 후엔 벌써 입맛이 떨어져 버렸다”고밝혔으며,국회에 진출해 원내총무를 맡고는 “사임을 해도 안받아줘 병 난 것을 기화로 부산에 내려가 요양하며 겨우 수리시켰다”고 회상했다.심지어 대통령 시절 청와대를 찾은 민원인들로부터 들은 여러가지 하소연 내용을 설명하고는 “이같이 되풀이되는 고통은 하루빨리 청와대를 떠나야겠다는 생각만 굳혀줄 뿐이었다”고 술회했다. 그러던 그가 5·16쿠데타 후에는 애매모호한 태도로 열달 동안 대통령직을유지한다.청와대를 떠난 뒤 반(反)朴正熙 투쟁의 선봉에 서지만 박정희 사후 또 한차례 변신한다.全斗煥정권을 인정하고 87년 대선에서 盧泰愚를 지지한 것이다. 이같은 윤보선의 정치역정을 두고 학자들은 ‘명사(名士)정치’의 한 행태로 풀이한다.劉載一 대전대 정외과교수는 “명사정치의 특징은 시대적 과제를고민하기 보다 권력 획득,품위유지에 더 집중하는 데 있다”면서 “따라서명사 정치인들은 종종 기회주의적 속성을 보인다”고 설명했다. 비슷한 궤적을 걸은 듯한 장면과 윤보선의 삶에는 이처럼 본질적인 차이가있었다.이는 제2공화국 붕괴의 책임을 재조명할 때 필히 고려해야 할 대목이기도 하다. 이용원
  • [제2공화국과 張勉](5)경제개발 5개년계획(下)/金立三씨

    1961년 봄은 張勉정부에게 마냥 장밋빛이었다.새해 들어 실업률은 줄고 세수(稅收)와 외환·금 보유고는 늘어나는 추세였다.4월혁명후 ‘부정축재 처리’에 걸려 전전긍긍하던 민간 경제계는 1월10일 ‘경제협의회’를 구성해 경제개발에 적극 동참할 태세를 갖추었다.게다가 각종 시위도 60년 말부터 눈에 띄게 잦아들어 사회는 안정을 되찾아갔다. 張勉정부는 ‘경제제일주의’실현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3월1일에는 전국적으로 국토건설사업이 막을 올렸고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도 확정 단계에들어섰다. 그 3월에 張勉정부의 경제개발계획을 점검하고자 미국에서 찰스 울프박사 일행이 내한한다.세계적인 사회과학 연구기관인 랜드(RAND)연구소 소속의 울프박사는 미 국무부 요청으로 장기계획의 타당성을 조사하러 온 것이다. 당시 5개년계획 작성을 맡은 산업개발위원회에는 朱源위원장(훗날 건설부장관 역임)을 비롯한 쟁쟁한 엘리트들이 모여 있었다.런던정경대학원(LSE)에서 재정학과 경제발전론을 배운 金立三은 개발계획 가운데 재정·조세 부문을담당했고 한국은행에서 파견된 李經植(부총리 역임)은 거시경제 부문을 맡았다.崔珏圭(부총리 역임)도 그때 재무부 수습행정관으로 파견나와 있었다. 울프박사에 대한 브리핑을 金立三이 하게 됐다.그는 5개년계획에서 전력·석탄·비료·시멘트·화학섬유·정유·철강·농업을 중점 육성산업으로 선정했다고 밝혔다.또 연간 목표성장률을 6.1%로 잡았는데,이처럼 목표치를 높인근거로 ▒張勉정부의 경제개발 의지가 확고하며▒한국의 교육열이 이를 뒷받침할 만한 인력을 양성했음을 들었다. 金立三은 “울프박사가 우리의 계획에 전반적으로 찬성했다”면서 “특히 민간 부문의 활기가 두드러져 성장 잠재력이 높다고 평가해 모두들 만족했다”고 회상했다. 張勉정부와 미국은 울프박사의 평가를 토대로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정교하게 다듬는 데 함께 노력한다.양국의 이같은 자세는 최근 발굴한 미 국무부 문서 여러곳에서도 확인된다. 61년 4월11일 문서에는 미국 정부가 장기경제계획에 대한 원조를 발표하자張勉정부가 이를 무척 반겼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또 한국정부가 미국 고문단(울프박사 일행을 의미)과 상의하여 분주하게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도 했다. 이어 4월13일 이임(離任)인사차 張勉총리를 만난 매카나기 주한미대사는 “張총리가 울프박사의 건설적인 충고를 받아들이겠으며,경제개발5개년계획이미래의 열쇠이므로 전력을 다해 실시하리라는 점을 강조했다”고 국무부에보고했다. 경제개발5개년계획은 61년 4월 그 내용이 일부 신문지상에 보도되기도 한다. 그러나 張勉정부는 정식발표를 미루고 있었다.그해 7월 張총리가 미국을 방문,케네디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고 미국의 원조를 확실하게 약속받으려고했기 때문이다. 5월 들어 李漢彬 재무부 예산국장 등 실무진이 먼저 미국에 건너가 정상회담에 앞선 교섭을 하던 중 5·16쿠데타가 터지는 바람에 張勉정부의 경제개발5개년계획은 국민 앞에 선보이지조차 못한 채 역사의 그늘 속으로 묻히고 말았다. 쿠데타 세력은 5월27일 장면정부의 부흥부를 ‘건설부’로 이름을 바꿨으며7월22일에는 ‘건설부’를 폐지하고 다시 경제기획원을 신설하는 등 일련의조치를 취한다.그리고 이날 ‘종합경제재건5개년계획’(1962∼1966년)을 발표한다. 5·16후 두달엿새만에 공개된 이 5개년계획이 순전히 쿠데타세력의 작품일수 있을까.그동안 숱하게 쏟아져 나온 5·16주체들의 증언·회고록과 그들이 집권한 기간에 나온 공식문서들은 한결같이 “張勉정부에게는 참고할 만한경제정책이 없어 모든 걸 백지에서 시작했다”는 투로 주장한다. 그러나 李起鴻(당시 부흥부 기획국장)을 비롯해 張勉정부의 5개년계획에 간여한 이들은 “기존의 계획을 검토하는 데만도 1년은 걸릴 것”이라면서 그들의 주장을 일축한다.계획 수립의 실무 핵심이었던 金立三은 “그들은 張勉정부의 계획을 그대로 가져갔다.방법론은 물론이고 세부항목까지 거의 같은데 달라진 부분은 성장목표를 연 6.1%에서 7.1%로 높인 것뿐”이라고 증언했다. 金立三이 이처럼 자신있게 말하는 까닭은 ‘물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물증’이란 그가 지난 40년 가까이 소중하게 보관한 ‘제1차 5개년경제개발계획’(시안)이란 책자이다. 모두 717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에 등사본으로 제작한 이 책자는 표지에 ‘단기 4294년(1961년)5월 건설부’가 발간한 것으로 돼 있다.이 때의 ‘건설부’란 쿠데타 후인 61년 5월27일부터 7월21일까지만 존재한 부서 명칭이어서 이 책자가 5월 27∼31일 사이에 배포되었음을 입증해 준다. 張勉정부 출범 18일만에 쿠데타 모의를 시작한 세력은 ‘거사’에 성공한 지 10여일만에 앞선 정부의 경제개발계획을 자신의 것으로 둔갑시키는,또한차례의 ‘조급증’을 보인 것이다. 金立三은 “책 내용 가운데 바뀐 부분은 표지와 총론(總論)일부”라고 지적하고,張勉정부가 자유경제체제를 근간으로 한 데 비해 쿠데타 세력은 “한국경제체제는 자유기업제도와 정부에 의한 경제정책의 병존이며 이는 ‘지도받는 자본주의 체제’라고 총론에 못박았다”고 밝혔다. 1961년 5월은 張勉정부가 겨우 집권 8개월째에 접어든 때였다.4월혁명에 뒤따른 정치·사회적 혼란을 극복하고 이제 막 경제발전의 날개를 펴려던 민주정부는 느닷없는 총칼에 유린당했다. 비록 그 꿈을 이루지 못했지만 張勉정부가 기울인 경제개발의 노력,그리고그후의 경제성장에 실질적인 토대를 닦은 사실은 이제 역사의 공정한 평가를받을 시점에 와 있다. - 5개년계획 핵심 역할 金立三 전경련고문 金立三 전경련고문(77)은 미국 미네소타대와 영국 런던정경대학원을 마치고1959년 6월 귀국해 산업개발위원회에 보좌위원으로 들어갔다.張勉정부의 경제개발계획 작성에 핵심 역할을 한 그는 62년 5월 정부기관을 떠나 그뒤로민간경제 부문에서 일해왔다. 金고문은 ‘朴正熙시대의 경제성장 신화’를 직설적으로 비판했다. 먼저 “張勉정부의 경제개발계획과 군사정권의 그것은 외형상 비슷하지만 그 이념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고 밝혔다.張勉정부가 시장경제 원리에 입각해 경제의 자율성을 최대한 보장한 반면 쿠데타세력은 처음부터 ‘지도받는 자본주의’라는 개념을 내세워 정치가 경제에 개입하는 통로를 열어놓았다는 설명이다. 이어 재계가 61년 1월 경제협의회를 구성하면서 張勉정부의 ‘경제제일주의’에 화답하는 ‘윤리제일주의’를 채택했지만 이같은 정신이 빛을 볼 겨를도 없이 쿠데타를 맞았고 이후 정경유착의 악습에 이끌려갔다고 주장했다. “경제면에서 張勉정부의 치적은 가히 역사적”이라고 평가하는 金고문은 “특히 군사정권 초기와 비교하면 더욱 두드러진다”고 말했다. 그는 “경제는 정치와 달리 인과응보 법칙에 따라 정확히 움직이는데 군사정권은 장기개발 계획의 필수전제 요소인 경제안정 개념을 전혀 갖지 못했다”고 지적하고 군사정권의 무모한 개발 추진에 외화는 고갈되고 인플레까지 겹쳐 결과적으로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은 실패하고 말았다고 단정했다. “당시 한국경제는 도약의 호기를 맞았는데 군사정권이 실패하는 바람에 경제성장이 3∼4년 늦어졌다”고 비판한 金고문은 “오늘날 IMF의 간섭까지 받게 된 원인은 이미 이때에 잉태됐다”고 강조했다. 요즘 사회 일각에서 이는 ‘朴正熙 향수’에 대해서는 “실상을 정확히 몰라서인데다 일부 인사들이 부추겨 일어난 현상”이라고 잘라말하면서 “지금 (朴正熙)거품이 잔뜩 끼었는데 사그라진 뒤 국민에게 남을 공허감은 어떻게메우겠는가”라고 우려했다. 金고문은 ‘한강의 기적’의 원류는 張勉정부에 있음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경제전문가들 사이에선 논쟁이 있을 수 있지만 張勉정부가 만든 여러 계획을 보면 평가가 분명히 달라질 것”이라고 자신했다.
  • [특별기고]금강호 선상토론에 다녀와서

    200여명의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원들이 지난달 20일부터 3박4일로 금강산을 다녀왔는데,그 첫날밤에 민족의 화해와 통일을 위한 선상토론회가 열렸다.이미 알려진 것과 같이 ‘민화협’은 지난해 9월 이른바 진보세력과 보수세력을 막론한 민간단체들이 모여 조직한 민간통일운동단체이다. 우리 민간운동단체를 진보적 단체니 보수적 단체니 하고 서슴없이 구분하고 명명할 수 있게 된 일에도 격세지감이 있지만,어쨌든 그 때문에 선상토론장에도 이른바 진보적 인사와 보수적 인사가 자리를 함께하여 옛날에는 감히토론으로는 할 수 없는 말들을 얼굴 하나 붉히지 않고 예사롭게 하게 되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어느 고령의 토론 참가자가 북쪽 김일성주석이 사망했을 때 있던 일을 이렇게 회고했다.회담을 약속했던 상대방 정상이 사망하여 성사되지 못하게 되었으니 ‘유감스럽다’ 정도의 의사표시를 남쪽정부가 해야 한다는 말을 공식적으로 표명했다가 날마다 걸려온 항의전화 때문에 온가족이 신경쇠약에 걸릴 정도였다는 것이었다. 아마 이 토론 참석자는 일반적으로 진보적 인사라는 말을 듣지 않을까 하는데,정작 당사자는 언젠가 필자를 보고 “내가 진보적 인사인가요”하며 자문처럼 물은 적이 있었다. 또 다른 고령의 토론 참가자는 김주석이 사망했을 때 ‘백번 죽어 마땅하다’는 글을 썼는데 얼마나 많은 항의 협박전화를 받았는지 모른다고 했다.이토론 참석자는 6 25전쟁 때의 반공 전사의 한 사람이었다고 알려졌는데,세상에서 흔히 말하는 보수적 인사의 한 사람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민족의 험난했던 근·현대사에 비추어 김주석의 죽음에 유감을 표시해야 한다는 사람도 있을 수 있고,반대로 유감 표시는 천부당만부당할 뿐 아니라 백번 죽어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다. 다만 이들 두 유형의 사람들이 금강산 가는 배를 같이 타고 한자리에 앉아서 얼굴 붉히거나 삿대질하지 않고 자기 생각을 거리낌없이 말할 수 있게 된 시대적 변화,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누가 무어라 해도 시대는 변하고 만다는 사실을실감한 일이라 할 것이다.분단 이후 오랫동안,특히 군사독재시대를 통해 백번 죽어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그러나 민주정권이 정착하면 할수록 유감을 표시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점점 일반화해 가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백번 죽어 마땅하다는 생각은 무력통일론이나 흡수통일론의 소산물이라 할 수 있는데 반해 유감을 표시해야 한다는 생각은 비흡수 평화통일론의 소산물이라 할 수 있으며,세상은 어쩔 수 없이 무력통일·흡수통일 지향의 시대로부터 비흡수 평화통일 지향의 시대로 변해가고 있는 것이다. 역사를 다시 군사독재시대로 되돌려놓지 않는 한 우리 역사는 이제 무력통일·흡수통일 지향시대로 되돌아갈 수는 없다.설령 군사쿠데타 같은 것으로또다시 되돌려놓는다 해도 그것은 잠시 동안일 뿐이며 역사는 결코 영영 되돌아가지는 않는다.이제 무력통일론이 하나의 유물이 된 것처럼 백번 죽어마땅하다는 생각도 유물이 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선상토론의 한쪽 자리에 참가했던 필자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들의 금강산행은 관광여행이 아니라 거대한 비흡수 평화통일 민간운동이다. 7·4공동성명이나 남북합의서 체결 과정에서는 몇사람의 정부쪽 통일교섭 요원이 북쪽을 다녀왔을 뿐이었다.그러나 금강호나 봉래호를 타고 금강산에 가서 북쪽땅을 밟고 그 안내원들과 자연스럽게 만나는 하루 1,000명이 넘는 평범한 남쪽 시민들이야말로 비흡수 평화통일 운동원들이다. 강만길 前고려대 교수·한국사학
  • 학계-시민단체 반응

    여권이 내각제 개헌 논의를 하반기로 미루기로 한 것과 관련,학계와 시민단체의 전문가들은 대체로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하지만 일부는 국민과의 약속위반이라는 견해도 제시했다.또 내각제 개헌에 대한 근본적인 재검토가 필요하다는 의견도 나왔다. 서울대 朴찬郁교수(정치학)는 “당장은 경제위기를 극복,경제 체질을 강화하는 문제가 더 시급하다”면서 개헌 논의를 유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입장을 밝혔다.朴교수는 또 “정부 형태를 변경하는 문제는 사실 민생문제와직결되는 것이 아니다”면서 “이 문제로 정쟁에 휘말리는 것은 바람직하지않다”고 말했다.이어 하반기에도 경제구조에 큰 변화가 없을 것으로 본다며 개헌 논의는 총선 이후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내다봤다. 연세대 文正仁교수(정치외교학)는 “내각제 개헌에 대한 약속은 분명히 지켜져야 한다”고 전제하고 “그러나 시기선택에 신중을 기해야 하는 만큼 개헌논의가 미뤄진 것은 다행”이라고 말했다.文교수는 경제가 어렵고 남북문제도 불투명한 상황에서 개헌 논의를 하게 되면 정국이 혼미하게 된다는 점을 이유로 들었다.특히 “내년 총선을 앞둔 상황에서 내각제 논의로 국민회의와 자민련간에 갈등이 생기면 총선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건국대 崔漢秀교수(정치학)는 “내각제 개헌을 하기 위해서는 물리적 시한이 있는 만큼 이번에 개헌 논의를 미룬 것은 국민에 대한 직무유기”라며 반대 입장을 보였다.崔교수는 “개헌 논의를 하지 않는 것은 지뢰밭을 피해가자는 의도”라며 예측 가능한 정치가 돼야 한다고 지적했다.“경제가 좋지않다는 것과 개헌 논의를 미루는 것은 관계가 없다”고 주장했다.그러나 그는 내각제에 대해 반대 의견을 제시했다.그 이유로 내각제를 위해서는 국민의 투표성향이 정당 중심으로 되고,정당이 안정화돼야 한다고 밝혔다. 단국대 張錫權부총장(법학)은 “지금까지 9번의 헌법 개정은 쿠데타와 정권 연장 의도 등에 의해 이뤄졌다”며 이번에는 정파 이해 관계를 떠나서 헌법 개정문제를 논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張부총장은 “개헌 논의의 시기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면서“개헌을 한다면 정파의 이해관계를 떠나 어느 제도가 과연 자유민주주의 발전에 도움이 되는가”를 검토해야 한다고 밝혔다.張부총장은 또 내각제 개헌문제는 국민회의와 자민련간의 약속을 넘어서 검토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高桂鉉경실련 사무국장은 “내각제 개헌에 앞서 과연 이 제도가 우리의 정치현실에 합당한지,국민적 정서가 어떠한지가 먼저 논의돼야 한다”고 지적했다.공개적 논의없이 金大中대통령과 金鍾泌총리 두 사람이 담판형식으로해결하자는 발상도 국민 여론을 무시한 밀실정치의 전형이라는 설명이다.그는 특히 “자민련에서 ‘DJP 합의’를 이유로 무조건 내각제 합의를 지켜야한다는 주장은 대의정치라는 민주주의 원칙을 외면하는 처사”라고 주장했다.정치구조 논의로 현재의 경제위기가 더욱 가중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기때문이라고 밝혔다.
  • [제2공화국과 張勉] (3) 경제개발 5개년계획(上)

    張勉정부의 ‘국토건설사업’은 단군 이래 첫 종합국토개발계획이었고 5·16쿠데타가 발생하기 전까지 큰 성과를 거두었다.하지만 이 사업은 더욱 큰프로젝트의 서막일 뿐이었다.‘경제 제일주의’를 내건 장면정부의 청사진은 ‘경제개발5개년계획’(1962∼1966년)에 집약돼 있다. ‘경제개발5개년계획’이라면 흔히 朴正熙정권의 전유물처럼 여긴다.그 전에는 우리 사회에 경제개발이란 개념조차 없었다거나 있다손치더라도 경제관료들이 이를 구상하고 기획할 만한 능력이 없었다고들 믿는다.이는 쿠데타세력이 5·16 직후 일관되게 이같은 주장을 편 데다 박정희시대 18년 동안 모든공식적인 문서를 저들 뜻대로 조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제개발계획을 박정희 때 처음 만들었다는 주장은 새빨간 거짓말이다.장면정부는 ‘완성된’경제개발5개년계획을 갖고 있었다.다만 발표 직전 쿠데타를 당해 국민에게알릴 기회를 놓쳤을 따름이다. 장면정부의 경제개발5개년계획은 일부 수치만 바뀐 채 골격이 쿠데타 세력에게 넘어갔고,군사정권은 이를 자신의 작품인 양발표한 뒤 그대로 실천했다.따라서 60년대 경제성장의 밑그림은 장면정부가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경제개발계획이 처음 등장한 때는 자유당정권 말기였다.李承晩정권의 강압정치에 실망한 미국은 1957년 중반 金顯哲 부흥부장관에게 장기적인 경제개발계획을 내놓아야 원조를 계속하겠다고 통보했다.마침 국내의 일부 젊은 경제관료들도 장기경제개발계획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다.구미에서 경제·행정 부문 선진이론을 배우고 귀국해 행정부의 실무책임자로서 국가 발전에정열을 불태우던 그룹이다. 劉彰順(미 헤이스팅스대) 李漢彬(미 하버드대 경영대학원) 車均禧(미 위스콘신대 경제학박사)丁渽錫(미 밴더빌트대 경제학과) 崔昌洛(〃대학원 경제학과) 鄭韶永(미 워싱턴주립대 경제학박사) 등이 대표적인 이들로 모두 훗날경제부서 장관을 역임한다. 李起鴻(77·전 월간 ‘코리아 비지니스 월드’발행인)은 당시 부흥부 기획과장이었다.미 컬럼비아대 경제학 석사인 그는 세계적인 석학 넉시 교수에게서 경제개발 이론을 배웠다.넉시는 ‘경제개발’ ‘개발도상국’ 같은 개념을 처음 도입한 학자이다. 미국이 장기적인 경제개발계획을 요구하자 이기홍은 밤샘을 거듭하며 그 개요를 만든다.그러나 이때의 경제개발안은 이승만대통령에 의해 묵살된다.57년11월 경제 4부 장관들이 함께 경무대로 가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필요성을설명하자 이승만은 “그것은 스탈린 사고방식 같은데….불구대천의 원수인공산주의자 방식을 따르자는 것이냐”며 한마디로 거절한다.(이기홍 회고) 이후 宋仁相이 부흥장관으로 취임하면서 경제개발계획은 은밀하지만 활발하게 추진된다.宋장관은 한국은행 부총재 시절 세계은행 부설 경제개발연구소(EDI)에서 연수를 받은 터라 경제개발계획의 필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그는회고록에서 “국민경제의 발전을 위해서는 장기적인 경제발전 목표를 설정하고,그 달성을 위해 나라의 모든 역량을 집중시켜야 한다는 생각이 (그 당시)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었다”고 밝혔다. 宋장관과 이기홍과장은 미 대외원조처(USOM) 간부들과 협의해 장기경제개발계획을 마련할 조직인 산업개발위원회(EDC)를설립했다.세계적으로 경제개발위원회라고 통용되는 기구지만 국내에서는 ‘경제개발’이란 개념이 생소하다는 이유로 산업개발로 이름붙였다. 산업개발위원회(산개위)는 58년 4월1일 부흥부장관 자문기관으로 출범했다. 초기에는 송장관이 위원장을 겸임했다.위원은 22명이었지만 고문과 보좌요원을 두도록 해 당대의 최고 전문가들을 두루 끌어들였다.비용은 전액 미국에서 제공했는데 그 규모가 엄청났다.예컨대 부흥부의 연간 운영예산이 9,600만환인 데 견줘 산개위는 6,000만환이었다.봉급도 높아 연구원 평균 월급이국무위원(4만2,000환)보다 많은 5만환 정도였다. 산개위는 59년 봄 ‘경제개발 3개년계획’(1960∼1962년)을 국무회의에 내놓는다.그러나 정권 유지에만 급급하던 이승만정부는 1년이 지나도록 심의조차 하지 않다가 60년 4월15일에야 승인한다.마산에서 金朱烈군의 시신이 발견돼 2차시위가 일어난 지 나흘 뒤,4·19혁명이 일어나기 나흘 전이었다.아마 흉흉해진 민심을 가라앉히는 수단으로 내세운 듯하다.자유당정권이 이처럼 경제개발에 늑장을 부린 데 대해 이한빈은 그의 논저에서 “한국 사회를위하여 커다란 불행이었고 한 토막의 역사의 풍자”라고 비판했다. 4·19혁명∼許政과도정부∼장면정부 출범이라는 격변 속에서도 산개위는 장기경제개발계획을 마련하는 본연의 임무를 꿋꿋이 수행했다.장면정부는 출범한 지 한달이 채 지나지 않은 60년 9월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정부시책으로 채택한다고 공표했다. 이 경제개발5개년계획은 자유당정권의 ‘3개년계획’을 토대로 하되 근본적인 차이점을 지닌 별개의 것이었다.산개위에서 ‘3개년계획’과 ‘5개년계획’을 작성하는 데 실무자로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 金立三전경련고문(77)의설명은 다음과 같다. “거시적인 면에서 3개년계획은 산업 각 부문을 고루 발전시킨다는 ‘균형성장이론’에 토대를 둔 반면 5개년계획은 특정 부문에 투자를 집중해 전체적인 성장을 이끌어가는 ‘전략 부문 중점투자’이론을 채택했다.작성 방법도 전혀 달라 5개년계획은 노동력은 풍부하면서 자본이 부족한 나라에 적합한 새 모델을 적용했다.” 자유당정권의 계획과 장면정부의 계획이 이처럼 달라진 이유를 金고문은 “선진이론을 꾸준히 연구해 우리 실정에 맞게끔 다듬어 나간 데다 정부의 의지를 높이 샀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산개위가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새로 만드는 동안 장면정부는 경제개발의 성패를 좌우하는 미국의 원조를 얻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60년 9월 장면총리 명의로 크리스천 허터 미국 국무장관에게 보낸 에이드 메모아르(일명 Economic Reform Measures in Korea)는 당시 사정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경제개발 계획 당시 부흥부 기획국장 李起鴻씨 李起鴻씨는 1956년 12월 부흥부 기획과장으로 출발해 장면정부에서는 부흥부 기획국장을 역임했으며 63년 경제기획원 차관보로 공직을 마감했다.그 7년동안 경제개발 계획의 큰 틀을 짜고 방향을 제시하는 주역 노릇을 했다. 61년 5월 기획국장인 그는 李漢彬 재무부 예산국장,金泳祿 재무부 이재국장과 함께 워싱턴에 가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미 정부에 설명하고 지원을 요청하다가 5·16쿠데타 발생 소식을 들었다. 李전차관보는 “그해7월 張勉총리가 미국을 방문해 케네디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하기로 돼 있었다”면서 회담에서 지원을 요청하기에 앞서 미국측 의사를 확인해 보려고 실무교섭단으로 미리 간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미국 관리들이 우리가 가져간 제1차 5개년계획 시안을 보고 ‘구매품목 표’라고 놀리듯 말하긴 했지만 상당한 호의를 갖고 격려해 주었다”고 말했다.그러면서 5개년계획에 필요한 재원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귀띔을해줘 다시 한번 장면정부에 대한 미국의 강력한 지지를 엿볼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李전차관보는 “5개년계획이 어떻게 작성되었으며 집행되었는지 정확한 기록이 아직 없다”고 개탄하면서 朴正熙정권의 왜곡사례를 들었다. 60년대 말 한국개발연구원(KDI)이 미 하버드대의 콜 박사와 합작으로 한국경제발전사를 기술했는데 5개년계획의 작성 배경이나 장면정부의 경제시책등에 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고 62년 1월 군정이 선포한 5개년계획의 구성과 방향만을 논했다는 것이다. 그 후 80년대에 콜 박사를 자주 만나게 돼 “장면정부의 5개년계획을 포함하지 않고서 어찌 공정하고 객관적인 연구라고 할 수 있느냐”고 항의했다고 한다.그러자 콜 박사가 “5개년계획이 장면정부에서 상당히 진척된 것은 알지만 기록이 없으니 어떻게 하느냐”면서 거꾸로 “왜 기록을 남기지 않았느냐”고 공격하더라는 것이다. 李전차관보는 “국가연구기관인 KDI가 집권층인 군 출신들의 눈치를 보지않을 수 없어서 그랬을 테지만 학문적 양심을 저버린 것은 분명하다”고 비판했다.그런 한편으로는 “젊은 사람들이 5개년계획을 박정희정권 때 시작한 것으로 아는 데는 나처럼 직접 관련된 사람들이 기록을 남기지 않은 탓이크다”는 깨달음도 얻었다고 한다. 그 때문에 李전차관보는 경제개발계획,국토건설사업 등 장면정부의 경제정책에 관한 자세한 소개도 곁들인 회고록 원고를 최근 마무리지었다.그 내용은 ‘경제 근대화의 숨은 이야기’(보이스 간)라는 제목으로 이달 안에 출판될 예정이다.李容遠
  • [제2공화국과 張勉](2)-국토건설사업(下)

    張勉정부의 국토건설사업은 국토개발이라는 고유목적 외에도 공공사업을 통한 고용증대,산업활성화,국가 인재충원제도 확립 등 사회 전반에 걸쳐 경제적,제도적 파급효과를 거두었다. 국토건설사업본부(이하 본부)는 중앙청 서남쪽의 목조 2층 건물에 자리잡았다.민(民)과 관(官)이 함께 참여한 이질적인 집단이지만 당대 엘리트를 모은 데다 대우도 좋아 본부는 활기차게 돌아갔다.본부 간사이던 朴敬洙씨(69·작가)는 “월간 ‘사상계’에서 받은 봉급이 일반직장인보다 훨씬 많았는데본부는 그 두배 정도를 주었다”고 회고했다. 본부가 처음 한 일은 국토개발사업을 현장에서 지휘·감독할 일꾼을 뽑는 것이었다.국무원사무처(총무처 격)는 ‘병역을 마친 30세 미만의 대학졸업자’를 대상으로 국토건설추진요원(이하 건설요원)을 공개 모집했다.석달 동안건설현장에서 근무하고 나면 국가공무원 4∼5급이나 지방공무원 3∼4급으로임용한다는 조건이었다.말하자면 공무원을 공채로 뽑은 것인데 이는 해방 후 처음 있는 일이다. 모집공고가 나자 대졸자 ‘1만수천명’(당시 鄭憲柱국무원사무처장 증언)이지원했다.그 무렵 전국에 대학이 63군데,대학생 정원이 9만7,819명임을 감안하면 그야말로 폭발적인 인기였다.합격자는 사무직 1,614명,기술직 452명 등 모두 2,066명이었다.여성도 21명 포함됐다. 건설요원들은 61년 1월9일부터 교육을 받았다.교육장에는 종교인 咸錫憲과朴鍾鴻 서울대 교수 등 당대의 지성들이 나와 그들에게 꿈과 용기를 심어주었다.이들은 2월27일 중앙청광장에서 수료식을 가진 데 이어 각 군(郡)에 15∼17명씩 배치돼 3월1일부터 현장근무에 들어갔다. 국토건설사업은 전국 각지에서 커다란 성과를 불러왔다.건설현장에는 배고픈 국민들이 새벽 5시쯤부터 몰려와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늘어섰다.하루 일을 끝내면 이들은 품삯으로 돈과,쌀·보리·비누·광목 같은 물건을 섞어 받고 만족한 표정으로 귀가했다.품삯에 현물(現物)이 포함된 까닭은 미국의 잉여농산물이 이 사업의 주요 재원이기 때문이다. 장면정부는 잉여농산물을 품삯으로 지급하면서도 다른 산업에 미치는 효과를 계산했다.쌀·보리는 정미소에서 찧었고 면화는 방직공장에 보내 광목으로가공했다.유지(乳脂)는 비누로 만들었다.따라서 건설현장에 나온 국민은 구하기 힘든 생필품을 손에 넣을 수 있었고 정미소나 방직공장·비누공장 등은 가동률을 더욱 높일 수 있었다.그만큼 장면정부의 경제정책은 정교했다고평가해줄 만하다. 국토건설사업은 차근차근 실적을 쌓아나갔다.일부 지역에서 잡음이 없었던것은 아니지만 전반적으로 순조롭게 진행됐다.3월30일 농림부는 25일까지의실적을 공개했다.2만6,089정보에 조림(造林)을 해 계획의 50%를 달성했으며,산·바닷가의 흙·모래가 무너져내리는 것을 막고자 나무를 심거나 돌을 쌓는 사방(砂防)사업도 목표의 51%인 2만8,958정보를 끝마쳤다. 국토건설사업은 이같은 업적말고도 공무원 공채의 초석이 됐다는 점에서 큰의미를 갖는다.당시는 공개 채용 없이 기관장이 발탁해 쓰면 시일이 지남에따라 자동 승진하는 구조였다. 정헌주옹(84)은 “건설요원 선발 이후 공무원사회에 공채제도가 자리잡았다“면서 그 뒤 일반기업체에도 퍼져 나갔다고 회고했다.또 “공채가 공고되자 61년 들어 대학가에서 시위횟수가 크게 주는 등 사회안정에도 큰몫을 했다”고 강조했다. 첫 공무원 공채는 학계에서도 높이 평가받는다.이는 당시 재무부 예산국장이었고 그 뒤 숭전대총장·부총리를 역임한 李漢彬의 논저 ‘사회변동과 행정’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전부총리는 건설요원 채용이 “관료제에 새로운 사회세력,특히 젊은이들을 흡수하는 기본적인 통로로서 활용됐으며 이 젊은이들은 점진적으로 승진해 관료제 전반에 걸쳐 눈에 띄는 활력을 불러일으켰다”고 분석했다. 실제로 ‘공무원 공채 1기’는 5·16쿠데타 후에도 지위를 보장받았으며 우리 사회 정·관계,경제계를 주도하는 인물로 성장했다.鄭寅用전부총리,金泰鎬국회의원(내무장관 역임),崔同燮전건설부장관,金昌甲전교통부차관,朴進球울주군수들이 ‘1기 출신’이다. 그러나 장면정부의 국토건설사업은 5·16쿠데타로 정권을 빼앗기는 바람에끝을 맺지 못했다.사업을 이어받은 쿠데타세력은 61년 말 “연인원 2,500만명을 고용해 계획의 94%를 완수했다”고 공식발표했다.장면정부의 공을 가로챈 것이다. 그 과정은 安京模전교통장관(82)의 증언에서 분명해진다.안옹은 본부 기술부 차장으로 일하다 5·16세력에게 불려가 국토건설사업 계획을 브리핑했다.이후 같은 업무를 계속하다 64년 교통부장관,67년 수자원개발공사사장으로 발탁돼 소양강댐 충주댐 안동댐 대청댐 등을 직접 건설했다. 60년대 국토개발의 주역인 안옹은 “장면정부도 국토건설사업을 완수할 수있었다”고 단언하고 그 근거로▒정부 의지가 굳건했고▒미국이 적극 지원했으며▒사업에 참여한 관료들이 능력을 갖추었음을 들었다.그는 쿠데타세력이 국토개발에 성공한 것도 장면정부의 사업계획을 그대로 실천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張勉총리의 생애▒1899년 8월28일=인천세관에 근무하는 張箕彬과 黃누시아 사이에 장남으로출생.본관 玉山,호는 雲石▒1906년=인천성당 소속 박문학교 입학▒14년=수원농림학교 입학▒16년 5월20일=金商集의 딸 金玉允과 결혼▒17년=수원농림 졸,서울 중앙기독청년학관 영어학과 입학▒20년=청년학관 수석 졸업,도미▒21년=뉴욕 맨해튼가톨릭대 입학▒25년=맨해튼대 졸업(교육학),한국천주교청년회 대표로 로마에서 열린 ‘한국 79위 시복식’에 참석 후 8월 귀국▒29년=천주교 평양교구에서 교회 일에 전념▒31년=동성상업학교 교사 시작▒36년=동성 교장으로 취임(광복 때까지 근무)▒46년=민주의원·입법의원으로 피선▒48년=서울 종로 을구에서 제헌의원 당선,9월 파리에서 열린 제3차 UN총회에 한국수석대표로 참석,12월 맨해튼대에서 명예법학박사 받음▒49년=초대 주미대사 부임▒50년=6·25 발발하자 유엔군 파병에 큰몫▒51년=2월에 제2대 국무총리 취임,11월 제6차 UN총회 한국수석대표▒52년=총리 사임▒55년=申翼熙 趙炳玉 등과 함께 민주당 창당,최고위원 피선▒56년=민주당 후보로 부통령 당선.9월에 피격,경상▒59년=민주당 대표최고위원 피선,▒60년 3월15일=민주당 부통령 후보로 출마,낙선▒4월22일=李承晩 규탄하며 제4대 부통령직 사임▒7월29일=서울 용산 갑구에서 국회의원 당선▒8월19일=국무총리 인준▒8월23일=1차 조각 마치고 내각 출범▒61년 3월1일=국토건설사업 기공▒5월16일=쿠데타로 정권 빼앗김▒이후=신앙생활 몰두하다 66년 6월4일 서거,국민장으로 포천 가톨릭묘지에 안장됨■張勉은 누구인가 한국 현대사에서 張勉이 갖는 위치는 독특하다.그는 4월혁명의 결과로 태어난 제2공화국의 총리였다.尹潽善대통령이 있었지만 내각책임제였기에 제2공화국을 장면정부라고 부른다. 장면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훌륭한 인격자요 민주주의의 이상을 실현하려고 노력했다는 점에는 이론(異論)의 여지가 없다.그러나 “무능하고 나약했다”는 평도 따른다.이는 5·16세력이 조작해 전파한 이미지라 할 수 있다. 장면은 어떤 사람인가.장면은 부모 양쪽 다 가톨릭 신앙을 가진 집안에서 태어났다.세례명 요안인 그는 인천성당 소속인 박문학교에서 정식 교육을 받기 시작해 이후 해방 전까지 신앙인·교육자로서 충실한 삶을 산다[연표 참조].독실한 가톨릭 신자로서의 면모는 5·16이 나자 피신처로 선택한 곳이 수녀원이었다는 사실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그만큼 그의 신앙심은 남다른 측면이 있다. 정치인으로서의 장면은 철저한 민주주의 신봉자였고 온건하고 합리적인 길을 택했다.따라서 그가 이끈 민주당 신파 출신 중에는 기나긴 朴正熙시대에도뜻을 굽히지 않고 민주화투쟁에 앞장선 이들이 유난히 많다.金大中대통령을비롯해 金相敦 鄭一亨 鄭憲柱 金判述 金應柱 吳洪錫 등이 그들이다. 해방 후 장면은 미 군정하의 민주의원으로 정계에 투신한다.건국 직후 열린UN총회에 한국수석대표로 참석,대한민국이 한반도의 유일합법정부라는 법통(法統)을 인정받은 것과 초대 주미대사를 지내면서 6·25때 UN군 파병에 큰몫을 한 것은 그를 전국적인 지도자로 부상케 했다.그 결과 제2대 총리로 취임하지만 이제는 정치적으로 너무 성장한 그를 李承晩이 견제하는 바람에 1년여 만에 총리직을 사퇴한다. 그후 야당지도자로 변신해 55년 창당한 민주당의 최고위 지도자 중 한사람이 됐고 56년에는 부통령에 당선됐다.부통령 시절인 1956년 9월28일 장면은 명동 시공관에서 암살범의 저격에 왼손을 맞았다.그런데도 전혀 당황하지 않고 오히려 주위사람들을 안심시키려고 애썼다.민주당 최고위원인朴順天은 훗날 회고록에서 “그때 지켜본 장박사의 모습은 태연자약했고 너무도 의연했다”면서 거인다운 풍모를 소개했다. 4·19혁명 후 제2공화국을 맡은 장면은 8개월23일 만에 쿠데타를 만나 정권을 빼앗긴다.교과서에 나오는,이상적인 민주주의를 실현하려던 그의 꿈은 좌절되고 그는 “국민 앞에 저지른 잘못을 속죄의 심정으로 사과할 뿐”(회고록 표현)이라며 신앙생활에 몰두하다 66년 6월4일 서울 종로구 명륜동 자택에서 서거한다.李容遠
  • 독립의 봄 찾아 수십년간 피의 투쟁/지구촌 민족·종족 분쟁

    *쿠르드 4,000년간 나라없는 유랑민족 터키정부의 쿠르드인 지도자 압둘라 오잘란의 체포로 쿠르드인 문제가 국제사회의 초점이 되고 있다.4,000여년동안 나라없는 슬픔을 겪고 있는 쿠르드인은 지구촌 최대의 유랑민족.‘중동의 집시’라는 별명에 걸맞게 2,200만명으로 추산되는 이들은 터키(1,200만명)를 비롯,이란(400만명)·이라크(400만명)·시리아(100만명)·아르메니아 등에 흩어져 살고 있다.쿠르드어를 사용하고 있으며,99%가 이슬람교를 신봉하고 있다. 해발 3,000m의 고원·산악지역에 위치한 쿠르드인 집단거주지 ‘쿠르디스탄’의 대부분이 터키 영토에 속하는 탓에 이들의 독립 요구는 터키 정부의 최대 현안이었다.수천년동안 오스만 터키제국 등 이민족의 지배를 받아온 쿠르드인은 1차대전 이후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에 힘입어 독립국가 건설에 대한 희망을 가졌다.1920년 연합국과 오스만제국이 맺은세브르조약에서 쿠르디스탄을 국가로 승인한다고 규정한 탓이다. 그러나 23년 터키가 다시 군사강국으로 부상,이 조약은휴지조각이 돼 악연이 시작됐다.터키는 쿠르드인을 ‘산악 터키인’으로 부르며 쿠르드어 사용을 불법으로 규정하고 주요 도시에서 쿠르드인의 고유의상을 입는 것까지도금지하는 등 철저히 탄압,쿠르드인의 증오심을 키웠다.이 때문에 74년 오잘란을 중심으로 쿠르드노동당(PKK)이 결성돼 반(反)터키 독립투쟁을 벌였다.PKK는 84년 이후 본격 무장투쟁을 전개,이 과정에서 3만명 이상의 희생자와 30만명 이상의 난민이 발생해 유럽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쿠르드인의 끈질긴 추구에도 불구하고 독립국가 건설 전망은 밝지 않다.쿠르드인 내부적으로 분열된 데다 열강들도 자국의 이익에 따라 쿠르드인을 교묘하게 이용할 뿐,독립국가 건설에 미온적이다. *코소보 '분리독립'요구에 학살로 대응 새해 들자마자 신유고 연방의 세르비아 공화국은 남쪽 코소보주에서 분리독립을 외쳐온 알바니아계 주민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했다. 수십명의 무고한 양민이 처참히 살해된 이 사건은 지난해 10월 가까스로 체결됐던 세르비아 정부측과 알바니아계 주민 간의 휴전협정을 일거에 무효화하면서 코소보 ‘피의 역사’가 진행중임을 여실히 입증했다.발칸반도의 새화약고 코소보 민족분쟁은 1389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당시 막강 대국의 오스만 터키 제국은 세르비아 왕국의 근원지인 코소보를 점령,이곳에 이슬람교도인 자국내 알바니아계 주민들을 정착시켜 인구의 90%를 차지하게 했다. 그러나 20세기초 터키 제국의 지배가 끝난 뒤 코소보는 다시 기독교 신앙의세르비아에 편입됐고 이때부터 끊임없이 인종·종교 갈등을 겪게 됐다. 특히 지난 89년 ‘대(大)세르비아’를 주창한 밀로셰비치(현 신유고 대통령) 당시 세르비아 대통령이 코소보의 자치권을 박탈하고 알바니아어 사용까지 금하자 이곳 주민의 분리독립운동도 거세지기 시작했다.96년 알바니아계 무장단체 코소보해방군(KLA)의 등장은 이후 세르비아 정부군과의 유혈충돌을불러오는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국제사회의 ‘무력 중재’로까지 이어진 코소보 사태는 지난 한해에만 2,000여명의 알바니아인들을 희생시켰는가하면 수십만명을 난민으로 떠돌게 하는등 참혹의 도를 더해갔다.방관적이던 국제사회도 프랑스 랑부예로 양측을 불러들여 평화회담을 벌이도록 종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동 티모르,印尼서 내년 1월 독립허용 시사 23년간 인도네시아의 압제에 신음했던 동티모르에 최근 봄 소식이 잇달았다.그러나 독립의 진짜 봄이 올지는 아무도 장담하지 못한다. 지난 10일 인도네시아 정부는 92년 수감했던 동티모르 독립운동 지도자 사나나 구스마오를 석방했다.이어 11일 하비비 인도네시아 대통령은 “2000년1월에는 더 이상 동티모르 문제로 시달리기 싫다”면서 동티모르 독립허용을 시사했다.석방된 구스마오는 가택연금 상태지만 인도네시아 정부와 독립문제를 협상할 수 있게 됐다. 그러나 동티모르가 독립을 달성하기까지는 아직도 넘어야할 산이 많다.인도네시아 내에는 야당지도자 메가와티를 비롯한 강한 정치세력이 동티모르 독립을 반대하고 있어 인도네시아의 정세에 따라 현재의 분위기가 급변할 수있다. 인도네시아 동쪽 끝에 있는 동티모르는 400년 동안 포르투갈 식민지배를 받아오다 1975년 독립했으나 1년도 안돼 인도네시아의 27번째주로 강제 합병됐다. 이때 동티모르인 70만명 중 20만명이 학살당했다.인도네시아 정부의 심한인권유린이 자행되는 가운데 91년 180명이 희생된 ‘산타크루즈 대학살’과같은 독립투쟁이 이어졌다. 지난 96년 인도네시아의 만행을 국제사회에 고발한 카를로스 벨로 주교와호세 라모스 호타의 노벨평화상 수상을 계기로 국제사회는 동티모르에 주목하게 됐으며,지난해 수하르토정권 축출 후 독립운동이 한층 거세졌다. *세계 주요 민족 분쟁 지역 [티벳]90년대부터 중국 자치구에서 분리독립하려는 움직임 표출.클린턴 미 대통령98년 중국방문 중 망명중인 달라이 라마와 대화를 할 것을 장쩌민 주석에게호소. [카슈미르]47년 인도,파키스탄 분리 후 귀속을 둘러싸고 2번 전쟁.89년후 분쟁격화 1만2천명 사망. [스리랑카 내전]인도 남부에서 이주한 힌두교의 타밀족 83년부터 분리독립 무장투쟁.5만명사망. [보스니아]4년간 20만명 사망한 내전이 95년말 협정체결로 종식됐으나 세르비아계 강경파 지도층 득세중. [바스크]이민족 스페인으로부터 분리독립을 요구해온 과격파 ETA(바스크 조국과 자유)가 지난해 말 30년만에 무기한 정전 선언. [체첸]러시아 정부와 분리독립 전쟁으로 3만명 사망.96년말 2001년까지 정전 합의. [나고르노·카라바흐]아제르바이잔 공화국 안에 섬처럼 있는 아르메니아족 거주지역.88년부터 아르메니아 공화국 귀속 투쟁. [키프로스]그리스계 80%,터키계 20%.83년 북부에 터키 승인한 독립국 생긴 후 그리스,터키 긴장고조. [르완다]94년 후투족 50만명 투치족 학살.200만명 난민. [브룬디]93년 이후 다수파 후투족과 소수파 투치족 항쟁 격화.97년 투치족 군사쿠데타 집권.
  • 김시라연출 ‘99걸데타 품바’ 16일부터 공연

    ‘품바’가 돌아왔다.아니 새로 태어났다.주인공이 바뀐 것 뿐 아니라 전체 틀이나 주제가 완전히 달라졌다. 우선 모노 드라마가 아니라 총체극이다.1명의 품바가 아닌 20명의 ‘떼거지’가 등장한다.개인의 눈에 비친 사회 비꼬기가 아니라 집단의 잣대로 민족의 현대사를 조명한다. “지난 88년 미국 순회공연 때 어느 미국교수가 ‘1인극을 고집말고 집단뮤지컬로 만들면 캐츠 버금가는 유명한 상품이 될텐데’라고 제안했어요.문화국제주의 흐름에도 맞아떨어져 적극 수용하기로 했습니다.본격적인 변신은공연 20돌이 되는 내년에 시도하게 되며 이번엔 실험적인 총체극으로 보면됩니다”(연출가 김시라) 일본·독일의 관광객이 주로 찾는 작품이고 지난 해 4,000회 공연을 돌파한 저력을 감안하면 무리한 욕심만은 아니다. 형식만이 아니라 주제도 달라졌다.가진 것 없는 이들의 ‘잘난 것들 비꼬기’에서 ‘분단의 애환’을 넘어 ‘통일 염원’의 큰 바다로 나아갔다.천두령(최종원·박철민 드블캐스팅)의 애인인 여자 품바 ‘수제비’(이영숙)를 내세운 것은 이런 배경에서이다. 일제의 정신대 차출을 피하고 판소리도 배울겸 해서 남한으로 왔다가 미군에게 겁탈당하고 6·25전쟁의 와중에 북으로 돌아간다.선죽교에서 만나자던약속은 냉혹한 휴전선에 가로막혀 이룰 수 없게 됐다. 처음과 끝장면의 대사는 통일 염원을 담고 있다.“내 땅 내가 오가는데 어떤 놈이 막느냐.그 놈이 바로 분단 고착주의자다” 이것 저것 따지지 말고 품바의 빈 깡통처럼 아무 조건없이 만나자는 외침이다.그래서 제목도 ‘99걸데타(걸인들의 쿠데타) 품바’로 정했다.남한 품바들이 38선으로 모이자 ‘검은 그림자’가 물러나는 상황 설정도 예사롭지 않다.내년엔 4시간물로 남북한 품바가 38선에서 총집결하는 감동적 장면을 연출할 예정이다. 12대 품바로 최종원이 가세한 것도 큰 힘이 됐다.81년 초연 때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그에게 이번 무대는 뜻깊다.지난 10일 마무리 연습에 한창이던최종원은 “정규수(1대)나 정승호(3대)처럼 힘은 없지만 연륜이 쌓인 연기로 승부하겠습니다.재간이 아닌 인생의 진득한 맛을 우려내면서 ‘저만의 품바’를 그려볼 예정입니다”라고 의욕을 비친다.연극을 ‘연륜의 예술’로 보는 그에겐 품바가 지닌 특유의 익살과 해학미를 녹여낼 삶의 부피가 전혀 버거워 보이지 않는다.소리와 춤을 동시에 소화하느라 몸이 부대끼기도 하지만 역 자체가 흥겨워 힘든줄 모른고 말한다. 거듭난 품바는 민족의 명절인 설날(16일)에서 구국정신이 깃든 3·1절까지종로5가 연강홀에서 만날 수 있다.평일 오후 4시·7시30분,토·일·공 오후3시·6시30분.(02)747-4322李鍾壽 vielee@
  • ‘사극 왕과 비 역사왜곡 논란’ 기사에 공감

    3일자 16면 ‘사극 왕과 비 역사왜곡 논란’ 기사는 평소 수양대군의 이미지와는 너무나 다르게 묘사되는 극의 진행에 의구심을 가진 시청자로서 상당히 공감이 갔다. ‘왕과 비’가 수양대군을 권력욕에 불타는 매몰찬 인간이 아닌 한없이 고민하는 사람으로 그리고 있어 논란 대상이 되고 있다는 내용이다.월간지 ‘신동아’에서는 사관과 사료 해석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고 작가와 제작진의 한계를 꼬집었고 이에 대해 작가 정하연씨는 국사편찬위원회의 해석에 기초하고 있다고 반박했다고 한다. 그러나 일반시청자가 느끼기에도 수양대군에 대한 묘사가 일반적인 역사해석의 범주에서 너무 벗어나 있다.물론 역사드라마가 역사 교과서일 필요는없지만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역사해석이 전제돼야 할 것이다.수양의 집권은쿠데타인 것이 정설인데 이를 미화함은 일반인에게 그릇된 역사관을 심어줄수 있다는 지적에 찬성한다.다만 일반시청자들의 의견과 반응도 살펴보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박경순[모니터·주부]
  • 金三雄 칼럼-장면박사 출생100년

    “자기의 명성이 자기의 진실보다 더 빛나지 않는 자는 축복이다”―인도시인 타고르의 말을 올해 출생 100주년을 맞는 제2공화국 張勉총리에게 드리는 헌사로 삼으면 어떨까. 격동의 현대사에서 장면박사처럼 잘못 평가된 정치지도자도 흔치 않다. 그가 이끈 야당과 시민 학생에 의해 타도된 독재자나 합법정부를 쿠데타로 전복한 군사독재자가 ‘존경받는 인물’의 상위를 차지하는 반면 인격적이고도덕적인 품성과 자질로써 ‘단군 이래의 자유’와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동시적으로 추진하다 좌절한 민주지도자는 망각되고 있다. 이것은 5·16이래 거듭된 군사쿠데타와 그 아류 정권에 의한 ‘승자의 기록’의 결과이지만, 진실을 탐구하고 가르치는 학자·교사·언론인들에게는 수치스러운 일이다. 한국역사상 최초로 성공한 4월 시민혁명으로 출범한 장면정권은, 프랑스대혁명이 입헌군주주의자와 시민계급, 온건파와 과격파싸움으로 나폴레옹쿠데타를 불러오고, 독일 바이마르 공화정이 ‘지구상에서 가장 자유로운’사회를 구현한다면서 극좌·극우싸움의 혼돈끝에 히틀러 나치스를 맞았듯이, 집권8개월만에 박정희쿠데타로 붕괴되었다. [인간 장면의 인품] 역사상 대부분의 시민혁명이나 개혁이 쿠데타나 반동세력에 의해 좌절된 것처럼 장면정권 역시 5·16쿠데타를 겪게 되고, 이런 과정에서 그는 무능과부패의 상징으로 낙인찍혔으며, 독재자들이 역사인물로 격상되는 가치전도현상이 나타났다. 우리 현대사나 국민정신면에서 대단히 부끄러운 모습이다. 장면박사는 인격적으로 매우 훌륭한 분으로 평가된다. 한없이 온후하고 어진 분으로서 인자하면서도 강직하며 사려깊은 분이었다. 외유내강의 독실한신앙인이고 지식인이었다. 그는 ‘각하’의 호칭보다 ‘장박사’로 불리기를 원했으며 집권 8개월 동안‘단군 이래의 자유’로 불릴만큼 민주주의를 허용했다. 물론 무질서와 정치사회적 혼란이 따르기도 했지만 오랜 억압구조에서 시달리던 국민에게 과도기적 현상이었다. 반민주행위자와 부정축재자의 처단등 4·19혁명과업을 수행하는 데 너무 미온적이었다는 비판도 따른다. 그러나 독재정권에 대한 안티테제로 등장한 정권으로서의 시대적 한계와, 민주정치 제도에서 가장 운영이 어렵고 높은 민도와 양식있는 국회의원들을 전제로 하는 의원내각제에 발이 묶여서 과단성있는 정책을 추진하지 못한 제도적 한계도 따랐다. 여기에 야당의 사사건건 발목잡기와 이상주의적 조급성에 기운 혁신계와 일부 지식인·학생들의 급진적 통일론도 장면정권 좌절의 요인으로 지적된다. [재평가와 교훈찾아야] 장면은 비록 군인들에게 탈권당한 비운의 정치인이지만 그가 한국현대사에남긴 족적은 너무 크다. 무엇보다 제3차 유엔총회 한국수석대표로서 대한민국정부가 한반도 합법정부로 유엔의 승인을 받는데 기여한 일이다. 또 6·25전란 당시 주미대사로서 유엔군 참전을 위해 발휘한 역량도 큰 업적이다. 특히 민주당을 결성하여 이승만정권으로부터 암살 저격까지 받으면서 끝까지 반독재투쟁을 벌인 것이나, 집권기 혼란속에서도 일관되게 민주주의 원칙을 지키고 경제개발계획을 착실히 마련한 것등은 큰 업적이다. 그러나 교과서적 민주주의나 미온적인 시국 대처는 프랑스혁명기와 독일 바이마르공화정 시기처럼 반동세력에게 기회를 주게 되고 결국 역사를 후퇴시킨 행위로서오늘의 김대중정부에도 교훈으로 남는다. 곧 시작될 대한매일의 ‘제2공화국과 장면’연재는 장면박사의 재평가를 통해 왜곡된 현대사를 바로잡고 제2공화국 좌절의 역사를 반면교사로 삼자는데 있다.
  • 사극 ‘왕과 비’ 역사왜곡 논란

    역사드라마는 역사인가,드라마인가. “역사를 왜곡해선 안된다”는 역사가들의 지적과 “작가적 상상력이 필요하다”는 작가들의 견해는 늘 첨예하게 맞서왔다. KBS1TV 대하드라마 ‘왕과 비’의 역사왜곡 여부가 논란이 되고있다.역사평론가 이덕일씨는 월간지 ‘신동아’에 2회에 걸쳐 이 드라마의 역사왜곡을신랄하게 비판했다.거듭된 비판에 작가 정하연씨의 대응도 만만치 않아 언론중재위에 정정보도를 신청하는 한편 20여억원의 명예훼손에 의한 손해배상청구소송까지 준비중인 것으로 알려졌다.이런 상황이 불거지면서 시청자와 여론의 논란도 점점 더 뜨거워 지고 있다. ‘왕과 비’는 조선 초기,단종부터 세조시대를 담고있는 정치드라마이다.여기서 가장 문제가 되고 있는 부분은 수양대군의 왕위찬탈 과정에서 일어난계유정난을 어떻게 해석하느냐 하는 것이다.드라마는 수양대군을 조카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빼앗은 인물이 아니라 왕권과 신권(臣權) 사이에서 흔들리는 권력의 구심점을 왕권으로 지켜 내기 위해 고뇌를 한 왕족으로 그리고 있다.수양대군을 권력욕에 불타 단종을 폐위시킨 매몰찬 권력지향형 인물로 그리기 보다는 고민하고 갈등하는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 ‘수양을 미화한다’는 비판과 함께 계유정난을 옹호하고 있다는 지적이 뒤따르고 있는 것이다. 또 김종서와 황보인이 안평대군과 역모를 꾸몄다는 ‘왕과 비’의 묘사에대해서도 이의가 뒤따르고 있다.만고의 충신으로 알려진 김종서가 왕권에 도전한 적이 없음에도 수양대군에게 ‘당위성을 주기위해’ 충신을 억지로 역적으로 만들었다는 지적이다. ‘왕과 비’의 비판은 지난해 8월,‘신동아’에 역사평론가 이덕일씨가 ‘수양대군·전두환 그 닮은꼴 쿠데타’란 글을 발표하면서 본격 제기됐다.이씨는 올 2월호엔 비판 강도를 더욱 높여 ‘왕과 비,걷어치워라’는 글로 ‘사관과 사료해석에 문제있다’는 지적을 되풀이했다.그는 ‘단종실록’을 중심으로 드라마가 전개되고 있는만큼 당연히 세조의 입장에서 전개될 수 밖에 없지만 “잘못된 사료의 문제점을 밝힐 줄 모르는 작가와 제작진의 한계가보인다”고 꼬집었다.또 “사육신을 권력욕의 화신으로 난도질했다”고 비판했다.이에대해 작가 정하연씨는 “아직 드라마에 등장하지도 않은 사육신을잘못 그렸다고 비난하는 것은 개인적인 인신공격이자 명예훼손임에 분명하다”고 반박하고 있다. 정하연씨는 “현재로서는 국사편찬위원회의 역사해석에 기초해 드라마를 쓸 수 밖에 없으며 그렇게 하고 있다”며 “역사드라마를 일방적으로 매도하는 비난은 이번 기회에 아예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TV드라마의 빗나간 역사관이 시청자에게 그릇된 역사의식을 심어줄 수 있다는 지적도 많다. 국사편찬위원회 편찬위원인 경희대 김태영교수는 “계유정난에 대해선 복합적인 평가가 있지만 수양의 집권은 쿠데타이며,이는 미화되어선 안된다”고 드라마의 객관적이고,중립적인 역사관을 강조했다. 정사와 야사의 균형을 맞춰 오늘의 정치에 하나의 교훈을 줬다는 평가를 받았던 ‘용의 눈물’도 한편에서는 태종의 공신숙청을 개인적인 배신으로 그려 역사적인 의미를 훼손했다는 비난이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왕과 비’가 받고있는 비판역시 특별한 것이 아닐 수 있다.그러나 법적대응으로 맞선 최초의 역사드라마 ‘왕과 비’로 인해 역사와 드라마의 분명한 기준이 서게될 지 두고볼 일이다.許南周yukyung@.
  • 기고-TV사극 무엇이 문제인가

    최근 KBS의 사극 ‘왕과 비’를 놓고 논란이 되고 있다.외견상 논란의 핵심은 ‘왕과 비’가 역사적 사실을 잘못 묘사하고 있는가 아닌가에 모아진다.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픽션으로서의 사극에서 작가의 상상력이 발휘될 수있는 범위가 어디까지인가의 문제와 관련되며,나아가서는 권력의 정통성과정당성을 어떻게 볼 것인가를 비롯한 역사 해석 문제에까지 이어진다. ‘왕과 비’에서 묘사된 내용이 ‘단종실록’ 등의 기록에서 별로 벗어나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역사 기록에 나타나지 않는 공백 부분은 작가가 상상력으로 메워야 할 몫이므로,당시의 역사와 달리 묘사되지 않는 한 문제가 되지 않는다.문제는 ‘단종실록’ 등의 기록이 역사적 진실을 올바로 담고 있는가에 있다.역사적 진실을 가려내기 위해서는 단순한 고증이 아니라 사료 비판이 필요하며,이 작업은 전문 역사학자의 영역에 속한다.사극 제작진이 계유정난이 쿠데타인가 아닌가 등 역사적 사실에 대한 해석까지 책임지려고 나서는 것은 과욕이다. 그동안 TV에서 방영된 사극은 꽤 많으나,같은소재가 몇 차례 다루어지기도 했다.장희빈,연산군과 함께 수양대군과 한명회도 단골 소재였다.이러한 현상은 사극이 대개 역사소설을 저본으로 하는 데서 발생한다.굳이 이를 탓할필요는 없겠으나,작가가 저본으로 삼은 역사소설의 문제의식과 역사적 상상력에서 얼마나 벗어났는 가가 중요할 수 있다. 단종과 수양대군을 다룬 역사소설로는 일제시대에 이광수가 쓴 ‘단종애사’와 김동인이 쓴 ‘대 수양’이 있는데,실제로 현재까지의 ‘왕과 비’는‘대 수양’과 비슷한 측면이 많다.그러나 김동인이 수양대군을 국난 극복을 이룬 영웅으로 잡은 것은 잘못된 선택이었다.세조는 권력의 정당성과 정통성에 큰 결함이 있었기 때문에 갖은 정치적 술수를 동원하여야 했고,거대한공신세력으로 울타리를 삼은 결과 정치 발전은 물론이고 사회경제적 발전에도 많은 문제를 초래했기 때문이다.앞으로 세조 통치를 묘사할 때 기존의 흐름에서 바뀌지 못할까 우려된다. ‘왕과 비’와 비교가 되는 것이 얼마 전에 역시 KBS에서 방영한 ‘용의 눈물’이다.이 사극은 종래의여인네들 치마폭에 휩싸여 진행되는 궁궐 내부의 암투를 그렸던 사극과 달리 커다란 정치적 사회적 변동을 역동적으로 그림으로써 남성 시청자들의 이목을 집중시킬 수 있었다는 평가를 받았는데,저본인 박종화의 ‘세종대왕’과는 다른 각도에서 작가의 상상력이 발휘되었다는 점에도 주목해야 한다.극중에서 거대한 역사적 변동이 전개되는 가운데 초점은 태종 이방원이 권력을 장악하고 강화시켜 가는 과정에서 겪은 인간으로서의 고뇌에 맞춰졌다.‘왕과 비’가 정치적 변화를 역동적으로 그리려는 의도는 ‘용의 눈물’과 흡사하나,새로운 내용의 역사적 상상력은 뚜렷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이 점에서 ‘왕과 비’의 분발이 요구된다. 과거의 사극 가운데에는 대중에게 역사를 가르치겠다는 의도가 드러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사극이 의도와 무관하게 시청자들의 역사인식에 영향을 미침으로써 역사 교육의 수단으로 기능하는 것은 분명하다.그러나 사극이 의도적으로 역사를 가르치겠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발상이다.정당성과 정통성이결여된 강력한 권력의성립을 역사 발전의 한 단면으로 가르치려 한다는 것이 기우였으면 하는 바람이다.
  • 뉴스 인사이드-아랍권‘권력지도’바뀐다

    아랍권에 세대교체 바람이 불고 있다.수십년간 장기집권을 하면서 중동정세에 큰 영향력을 행사해온 간판급 인물들이 21세기를 전후해 새 얼굴로 바뀔전망이다. 임파선암을 앓고 있는 요르단의 후세인 국왕(63)은 최근 동생 하산(51)의왕세자 자리를 폐하고 장남 압둘라 이븐 왕자(37)를 새로 앉혔다.26일 후세인이 병세악화로 미국으로 다시 떠난 뒤 공식적인 압둘라 왕자의 섭정이 시작됐다. 또 사우디아라비아·시리아·팔레스타인자치정부·아랍에미리트(UAE) 등도세대교체를 준비하고 있다.이 국가들의 수반들은 하나같이 고령이며 병마와싸우고 있기 때문이다. 사우디의 파드 국왕(79)은 95년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 담낭염까지 겹쳤다.82년 일찌감치 이복 동생 압둘라(77·부총리)를 왕세자로 지목했다.이후 95년부터 압둘라 왕세자가 섭정하고 있으나 그 역시 나이가 많아 요르단처럼왕세자 교체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68년 쿠데타 이후 31년째 집권하고 있는 시리아의 하페즈 알 아사드 대통령(70)은 심장병과 당뇨를 앓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차남 바샤르(33)를 후계자로 키우고 있다. 파킨슨씨병을 앓고 있는 야세르 아라파트(70)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의후계자는 마무드 아바스(63) PLO집행위 사무총장.시리아 다마스쿠스대학 정치학 박사로 온건파다.28년간 집권한 자이드(80) 아랍에미리트 대통령은 심장병을 앓고 있으며 후계자는 칼리화 왕자란 설이 강하다.
  • 올해의 인물(7회)-美국무부 첫 한국계 인권차관보 高洪柱씨

    지난달 21일 청와대 한·미 정상회담장 옆 수행원 대기실.미국측 수행원들 사이로 낯익은 동양계 인물이 눈에 띄었다.미국명 해럴드 고(Harold kho),한 국명 高洪柱(44).미국 행정부에서 한국계로는 최고위직에 오른 인물이다. 예일대 법대 교수였던 高씨는 지난 9월 미 국무부의 인권담당차관보로 전격 지명됐다.이어 상원 외교위 인사청문회를 만장일치로 통과한 뒤 10월 초 차 관보직에 공식 취임했다. 예일대 법대 부설 국제인권센터소장으로 그동안 보스니아와 아이티,과테말 라,중국,쿠바 난민들의 미국 내 인권옹호에 앞장섰던 그의 소신이 빛을 발하 는 순간이었다.매들린 올브라이트 미 국무장관의 인권자문위원으로 활동해온 高씨는 클린턴정부의 인권정책에 반대하는 경우가 많아 그의 기용은 워싱턴 정가에서 다소 의외로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高씨는 이전에도 이미 교포사회에서 ‘아메리칸 드림’의 표상이었다.75년 하버드대를 최우등(Summa cum laude)으로 졸업한 데 이어 영국 옥스퍼드대와 하버드 법과대학원을 졸업했다. 이후 맬컴 윌키 연방고등법원 법관과 해리 블랙먼 대법관 사서,법무부 법률 자문관 등 미국 법대 졸업생이 선망하는 최고 엘리트 코스를 줄줄이 밟아나 갔다.85년에는 한국계로는 최초로 예일대의 정교수가 됨으로써 화제를 뿌렸 다. 그의 성공은 철저한 가정교육이 뒷받침했다.부친 고(故) 高光林박사는 서울 대 법대 교수를 거쳐 주미공사 재직 중 5·16쿠데타가 발생하자 망명,89년 작고할 때까지 코네티컷주립대 정치학 교수를 지냈다.모친 全惠星씨(69)는 보스턴대에서 사회학·인류학 박사학위를 받고 현재 일본 국립민족학박물관 객원교수로 재직중이다. 高씨의 부친은 4남2녀의 독서기록을 일일이 챙기는 등 남다른 교육열을 보 였다.그 결과 형제자매 모두 하버드와 예일,MIT 등 미국 명문대를 졸업했으 며 박사학위만도 모두 12개에 달해 미 교육부에 의해‘연구대상 가족)으로 선정되기도 했다.특히 高씨의 형 京柱씨도 보스턴 의대 교수로 재직 중 매사 추세츠주 보건장관으로 발탁됐다. [秋承鎬 chu@daehanmaeil.com] **끝** (대 한 매 일 구 독 신 청 721-5544)
  • 潘炳律 외국어대 교수 ‘誠齋일대기’ 펴내

    ◎독립운동사의 거인 李東輝 ‘제모습 찾기’/신민회 활동·상해臨政 초대총리 활약/사회주의 접목 독립운동 새바람 꾀해/이념의 족쇄벗고 균형잡힌 재평가 시도 한 시대나 인물에 대한 역사의 평가가 제때,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경우가 적지 않다. 또 시대가 바뀌면서 역사의 평가가 엇갈리는 경우도 있다. 영웅이 쿠데타의 주역으로,또 반대로 반역자가 시대의 선각자로 등등. 남의 나라 얘기가 아니다. 우리 근현대사에서도 그런 예는 허다하다. 최근 한국외국어대 潘炳律 교수(한국사)가 출간한 ‘성재 이동휘 일대기’(범우사)는 이같은 ‘역사의 평가’를 다시 한번 되새기게 한다. 반 교수는 한·일·중·러·미 등에 산재한 관련자료를 수집,이동휘 선생의 ‘제모습찾기’를 본격적으로 시도한 것으로 평가된다. 성재(誠齋) 李東輝(1873∼1935) 선생은 한국독립운동사에서 결코 홀대할 수 없는 큰 별이다. 더러 백범 金九,우남 李承晩,도산 安昌浩 반열에 놓기도 한다. 구한국 정부에서 강화도 진위대장(鎭衛隊長)을 지낸 선생은 ‘을사조약’이 체결되자을사오적 처단후 자결할 것을 결심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일제에 의해 군대가 해산되자 신민회 핵심멤버로 활동하다가 나라가 망하자 1913년 만주로 망명,북간도와 러시아령(領) 연해주에서 독립운동을 지도하였다. 3·1만세의거 후 상하이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초대 국무총리에 취임했다. 한편 이 무렵 선생은 당시 풍미하던 사회·공산주의 사상을 한국독립운동 선상에 접목시키는 한편,선생 자신이 ‘고려공산당’을 창당하여 독립운동 진영에 새바람을 불러일으키고자 했다. 그러나 선생의 이같은 사회주의 혁명노선은 선생을 해방후 반세기 동안이나 ‘이념의 창고’에 가둬두는 족쇄로 작용하였다. 한동안 학계에서조차 선생의 이름을 거명하는 자체가 금기시되던 시절이 있었다. 반공이데올로기가 지배하던 시절 역대 남한정권은 선생의 사상성향을 이유로 독립운동 공적마저 덮어버렸다. 극도의 왜곡과 폄하 그 자체였다. 정부는 1962년부터 독립운동가에 대해 포상을 실시해왔는데 ‘광복50주년’인 95년에야 겨우 선생에게 훈장을 추서하였다. 친일경력자·가짜독립운동가 목에도 훈장을 걸어준 우리 정부가 진짜 독립운동가인 선생 앞에서는 ‘이념타령’만한 셈이다. 반 교수는 선생을 두고 “독립운동 공적은 물론,조국광복을 향한 사심없는 열정·희생정신·혁명성을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매력적인 인물”이라며 ‘이동휘 예찬론’을 편다. 전기출판과 때맞춰 지난 21일 학계·종교계 인사 500여명을 주축으로 ‘이동휘기념사업회’가 조직됐다. 뒤늦었지만 선생에 대한 재평가 작업과 기념사업이 본격 시작될 모양이다. 선생의 자료집 ‘성재 이동휘 전서’(전2권·독립기념관 간행)을 곧 출간예정인 인하대 尹炳奭 명예교수(한국사)는 “민족운동사의 거인 이동휘를 균형잡힌 시각에서 새롭게 조명,이해해야한다”고 밝혔다. 만주·연해주 일대를 제집 앞마당처럼 내달리며 항일운동을 하던 선생. 1917년 러시아 볼셰비키혁명 후 레닌정부가 약소민족 독립운동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자 멀리 인도양·지중해·알프스산맥을 넘어 모스크바로 레닌을 찾아가 만나기도 했던 선생. 저자의 서문 가운데한 귀절이 가슴을 친다. “‘2∼3년 내로 광복군을 이끌고 되돌아오겠다’며 압록강을 건넌 후 한시도 쉬지않고 뜨겁고 진실하게 살다간 선생의 삶과 꿈에 조금의 티라도 남기지 않았는지 죄책감마저 든다”. 어디 저자만의 ‘죄책감’일까. 선생 가신 후 60년이 지나도록 아직 유해조차 찾지 못한 우리 후손들인 것을. 범우사 20,000원.
  • 민족일보 조용수(金三雄 칼럼)

    기원전 399년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국가가 인정하는 신들을 믿지 않고,새로운 다이모니온을 끌어들여 청년들을 부패 타락케 한 혐의로 아테네 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리고 독배를 들기에 앞서 최후진술에서 “클리톤이여,아스크레피오스 신에게 닭 한마리 빚진 것을 갚아다오”라는 유언을 남긴채 권력의 제물로 사라졌다. 2,000여년이 지난후 한 청년이 비슷한 유언을 남기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으니,“민족을 위해서 할 일을 못하고 가는게 억울하다. 정규조(친구이며 민족일보상무) 동지에게 돈을 꾸어다 신문 만드는데 썼는데,갚아주지 못하고 가게돼 미안하다”는,민족일보 조용수사장의 유언이 그것이다. 1961년 12월21일 오후 서대문형무소 사형집행장에서 조용수는 32세의 짧은 생애를 접으면서 민족을 위해서 할 일을 못하고 가는 ‘억울함’과 친구에게 돈을 꾸고 갚지 못한 ‘미안함’을 유언으로 남겼다. 건국 이래 수 많은 언론인이 정치적 수난을 겪었지만 순수한 언론활동을 이유로 극형을 당한 사람은 조용수 사장이 처음이다. ○박정권의 이념적 희생양 친일언론인 출신으로 해방후 평화일보·국제신문 편집국장을 지내다가 1949년 1월 반민특위에서 재판을 받고 석방되어 동양통신 편집국장을 지낸 정국은은 재일 조총련계의 국제공산당원이었다는 죄목으로 54년 2월 사형이 집행되었다. 그리고 월간 ‘청맥’과 관련한 김질락의 경우 간첩혐의로 박정희정권에 의해 72년 7월 처형되었다. 정국은과 김질락의 처형에 대해 이의를 다는 사람은 거의 없다. 간첩이란 이유 때문이다. 그런데 조용수 사장의 경우는 크게 다르다. 친일과 공산주의 경력을 가진 박정희 대통령이 자신의 사상적 콤플렉스에서 ‘민족일보’를 희생양으로 삼고 마침내 유망한 젊은 언론인의 생명을 앗아갔다. 조사장은 61년 2월 4월혁명 공간에서 민족의 진로를 가리키고,부정부패를 고발하며,노동대중의 권익을 옹호하고,양단된 조국의 비원을 호소한다는 사시 아래 민족일보를 창간하여 진보세력을 대변하다가 5·16 쿠데타로 구속되어 이른바 ‘혁명재판’에서 사형이 선고되고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의 확인절차로 형이 집행되었다. 군사정부는 국제펜클럽과 국제신문인협회 등의 항의와 구명운동에도 불구하고 한 젊은 언론인을 처형하는 잔인성을 보였다. 민족일보의 자금이 조총련에서 나왔다는 혐의와 북한정권이 주장하는 평화통일론을 보도·선동하여 반국가 행위를 했다는 죄목이었다. 그러나 어디에서도 조총련계 자금유입의 흔적은 나타나지 않았으며,평화통일론이 극형의 죄목이 될 수는 없는 것이었다. 당시 검찰과 재판부가 유일한 ‘물증’으로 내세운 이영근씨는 민단계통의 인물이었으며,노태우정부는 1990년 그가 일본에서 사망하자 국가에 기여한 공적을 이유로 국민훈장을 추서하여 간첩이 아님이 입증됐다. 또 당시 이 사건에 연루되었던 많은 인사들이 역대 정권의 요직에서 활동하고 더러는 정부가 훈장을 줌으로써 이 사건은 이미 정치적으로 사면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문제는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이다.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조사장의 37주기에 즈음하여 지난 20일 낮 남한산성에 있는 묘소에서 추도식과 민족일보사건 진상규명위 발족식이 있었다. 참석자들은 그동안 검찰이 자료공개를 거부해온 민족일보 재판관련 자료를 찾아 진상을 밝히고,국회에서 특별법(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이 제정되면 재심을 청구하며,기념사업을 통해 평화통일의 유지를 잇는 것으로 뜻이 모아졌다. 조용수 사장을 죽음으로 몰아간 당시 검찰,재판관 등 생존자들은 증언을 통해 진실을 밝혀야 한다. 언론계도 건국 이래 최초의 필화사건으로 생명을 잃은 한 언론지도자의 억울함을 밝히고 신원(伸寃)하는데 뜻을 모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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