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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종철·김석휘씨 집권층 미움사 퇴진

    취임 보름 만에 전격 경질된 김태정(金泰政)법무부장관처럼 역대 법무장관이나 검찰총장 가운데는 조기 낙마(落馬)하거나 풍파에 시달린 이가 적지않다.때로는 외풍으로,때로는 내분 때문에 권력의 중심에 서 있던 법무부와 검찰 사령탑들은 수난을 피하지 못했다. 문민정부 초인 93년 3월 박희태(朴熺太)전법무장관(한나라당 의원)은 딸의부정 특례입학으로 취임 10일 만에 물러났다.박 전장관은 딸이 91년 대학입시에서 한국 국적을 포기하고 외국인 자격으로 이화여대에 정원 외 입학한사실이 드러나 하차했다. 이에 앞서 김석휘(金錫輝)전장관은 85년 ‘삼민투’ 등 학생운동단체의 이적성 여부를 놓고 논란이 일었던 국회에서 “삼민투를 이적단체로 단정할 수 없다”는 답변으로 집권층의 불만을 사 그해 삼민투 피고인들의 법정소란행위에 대한 책임을 덮어쓴 채 물러났다. 82년 6월 정치근(鄭致根)전장관은 ‘이철희·장영자사건’ 당시 민심수습차원에서 취임 한달여 만에 경질됐다.61년 5월 취임했던 이병하(李炳夏)전장관은 5·16쿠데타로 취임 보름 만에 밀려났다. 법무부장관 못지 않게 검찰총장도 수난을 겪었다. 문민정부 초 TK 출신 박종철(朴鍾喆)총장은 당시 구여권이던 TK인사들의 사정을 놓고 권력층과 이견을 보이다 취임 6개월 만인 93년 9월2년 임기가 보장된 총장직을 내놓았다. 82년 김석휘 검찰총장은 전두환(全斗煥)전대통령 지시로 수사 검사들과 함께 TV에 출연,‘이철희·장영자사건’ 수사내용을 직접 해명해야 했다.81년10월 서울지검 특수1부가 수사했던 ‘저질 연탄사건’은 당시 허형구(許亨九)검찰총장을 재임 9개월 만에 중도 하차시켰다.한때 전두환 전대통령이 수사팀을 격려하기도 했으나 업자들이 대통령 인척을 통해 “경제실정을 모르는수사”라며 진정,서울지검장 등이 좌천되고 총장까지 사퇴했다. 김재천기자 patrick@
  • [주한 외국대사에 듣는다]이그나시오 곤살레스 칠레대사

    이그나시오 곤살레스 칠레 대사는 5일 대한매일과의 인터뷰에서 한국과 칠레는 세계경제 무대에서 완벽한 전략적 파트너가 될 수 있다고 밝혔다.곤살레스 대사는 “자유무역협정 체결 협상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면서 칠레는 한국의 남미시장 진출의 관문 역할을 충실히 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한국과 칠레,두나라의 관계를 어떻게 평가하고 계십니까. 1962년 외교관계를 수립한 이후 양국관계는 지금이 황금기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한국에서 국민의 정부가 들어서고 칠레의 민주주의도 안정 단계에 있기때문에 경제협력도 갈수록 활발해 지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양국의 경제협력 현황을 평가해 주십시오. 한국과 칠레의 1997년 무역규모는 18억달러에 달했습니다.이것은 1990년에비해 370%나 늘어난 액수입니다.세계 최대의 구리 수출국인 칠레는 매년 7억달러의 구리를 한국에 수출합니다.칠레는 주요 수출품인 천연자원,연어,포도주를 가지고 한국시장을 넓히려 합니다.한국 또한 칠레에 자동차,가전제품,의류 등 6억 5,000만달러 이상을 수출합니다.칠레는 전품목에 10%의 관세만을 부과하는 세계에서 가장 개방된 시장 가운데 하나입니다. ■지난해 양국은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하기로 결정한 바 있는데 현재의진행상황은 어떻고 언제쯤 협정이 체결되리라고 전망하십니까. 지난해 12월 FTA체결 합의 이후 한국과 칠레는 전문가,정책결정자들로 구성된 3개의 FTA 연구 그룹을 구성했습니다.제1그룹은 무역규칙을,제2그룹은 투자,서비스,지적재산권을,제3그룹은 무역분쟁 조정,법률문제 등을 집중적으로연구했습니다. 오는 6월 말 산티아고에서 열리는 양국 대표회담에서 FTA 체결의 가시적인 밑그림이 제시될 것이며 9월 뉴질랜드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회의에서 양국 대통령이 정상회담을 통해 협정체결에 힘을 실어 줄 것이라고 믿습니다. ■상호보완 관계에 있는 양국이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하면 어떤 이점이 있을까요. 협정이 체결되면 한국과 칠레 사이의 무역규제가 대부분 철폐되기 때문에서로 보완하며 세계경제에 공동으로 대응해 나갈 수 있습니다.칠레와 한국은 각각 아시아와남미 시장의 교두보를 확보하는 셈입니다. ■아시아와 남미가 최근 경제위기로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칠레의 경제상황은. 칠레경제는 라틴아메리카에서 가장 건실하다는 평가를 받습니다.아시아와남미공동시장(메르코수르)국가들은 각각 칠레 무역의 30%와 20%를 차지하기때문에 아시아와 남미의 위기로 연평균 7%를 구가하던 칠레의 경제성장도 올해는 2.5%에 머물 전망입니다.다행히 세계경제가 회복되고 있어 경제전망은밝습니다. ■한국기업은 남미시장에 관심이 많습니다.한국기업의 남미시장 진출에서 칠레의 역할은. 칠레는 한국기업의 남미시장 진출의 관문입니다.칠레는 4,000km 이상의 긴태평양 해안선에 위치해 있으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의 회원일 뿐만 아니라 메르코수르에서도 주도적인 역할을 하며 많은 나라들과 이미 자유뮤역협정을 체결하고 있습니다.칠레의 발달된 금융시장과 통신,항구 등의 사회간접자본을 이용해 한국 기업은 안전하게 남미시장으로 진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칠레는 북한과도 수교를 맺고 있는데 북한과의 관계는. 1973년 칠레의 군사쿠데타로 칠레와 북한은 외교관계를 단절했고 91년에 다시 수교했습니다.칠레는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의 회원으로 북한의 경제난 극복에 도움을 주려고 합니다.이미 북한에 비료를 지원할 것을 공식적으로 밝히기도 했습니다.한편 한국정부가 추진중인 ‘햇볕정책’을 적극 지지합니다.한반도의 평화적 통일은 칠레의 국익에도 도움이 됩니다. ■칠레의 전 대통령 아우구스토 피노체트가 재임기간중 살인,고문 등의 혐의로 스페인 검사에 의해 기소돼 현재 영국에서 구금된 상태입니다.이와 관련칠레 국민의 입장은. 피노체트와 그가 행한 군사통치,경제성장에 긍정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도있고 부정적인 사람도 있습니다.그러나 국민 대다수는 그가 칠레 법정에 서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오는 12월 12일 칠레의 대선 전망은. 칠레는 군사독재를 경험했지만 200년 이상의 민주정치 경험을 가지고 있고1988년 이후 민주정치는 정착단계에 들어 섰습니다.집권당인 칠레 민주연정의 리카르도 라고스 후보가 유력하다는 분석이 있습니다.이창구기자 window2@
  • [제2공화국과 張勉](26)장면의 정치역정·생애(下)

    “본인은 오늘로써 부통령직을 사퇴한다.3·15부정선거로 인하여 삼천만 동포의 울분은 드디어 절정에 달하고 마침내 민족의 정화인 청소년 남녀들이불법과 불의에 항쟁하다가 총탄에 쓰러져 그 고귀한 피가 이 강산을 물들이게 됨을 볼 때에 하루라도 그 자리에 머무를 수 없는 비통한 심경에 다다른것이다.…이러한 중대위기에 즈음하여 이대통령은 3·15선거의 불법과 무효를 솔직히 시인하고 또 12년간 누적된 비정(秕政)에 대하여 책임을 지고 물러서야 할 것이다.…” 4·19가 일어난 지 나흘만인 1960년 4월23일 장면(張勉)은 기자회견을 갖고 부통령 사임을 발표했다.이틀 뒤에는 순화동 관저를 나와 명륜동 자택으로돌아갔다. 장면은 3·15선거에 부통령으로 출마해 비록 낙선했지만 3대 부통령 임기는 남아 있는 상태였다.따라서 이승만이 물러나고 3·15선거가 무효로 처리되면,대통령 직은 자연히 장면에게로 넘어오게 돼 있었다.그런데 굳이 이를 포기한 까닭은 무엇일까. 장면은 회고록에서 세 가지 이유를 들었는데 그 첫째가 이승만의 하야를 이끌어내기 위해서였다.이승만과 자유당에게 ‘정권을 내놓더라도 장면이 바로 계승하지는 않는다’고 보장해 준 것이다.아울러 부통령으로서 도의적인 책임을 함께 진다는 생각과,이승만의 불행을 틈타 권력을 잡는다는 인상을 국민에게 주기 싫어서이기도 했다. 장면이 부통령을 사직하자 곧바로 이기붕(李起鵬)이 부통령 당선과 국회의장 직을 사퇴했다.나흘 뒤에는 이승만도 국회에 사임서를 제출했다.이승만과 자유당의 퇴진을 무리없이 유도한다는 장면의 의도가 실현된 셈이다. 내각책임제로 개헌이 돼 새 정부가 출범할 즈음 장면은 대통령이냐,총리냐를 놓고 고민하게 된다.공보비서관을 지낸 송원영(宋元英)은 회고록에 “장박사와 그 가족,아주 가까운 몇몇 사람은 차라리 장박사가 실제 행정과는 초연한 대통령 자리에 앉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으로 보이지 않는 운동을 하고 있었다”고 적었다.한 측근이 ▲새 정부가 이승만정권 12년의 비정을 씻을 때 예상치 못한 부작용이 나올 수 있고 ▲부통령을 이미 했으니이제 대통령을 할 차례라고 설득한사실도 소개했다.그랬더니 장면은 “나도 개인적으로는 그렇게 하고 싶지만 그것이 내 뜻대로 되나”라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이 시기 미국도 ‘장면 대통령’을 지지했다.허터 미 국무장관은 60년 6월11일 매카나기 주한 미대사에게 보낸 전문에서 “장면을 대통령으로 선출하는 것이 이상적”이라고 못박았다.“그의 성실·청렴함과 국제정세에 대한 폭넓은 안목을 효과적으로 이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기 때문이다. 장면 자신과 최측근 인사들이 원했고 미국이 은밀히 지원했음에도 불구하고 장면은 대통령 아닌 총리 선출 경쟁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송원영의 표현처럼 “신파에 매인 몸이어서 대통령으로 ‘물러날 자유’가 없었던”것이다. 장면을 존경하는 많은 사람들이 “그때 총리가 아닌 대통령이 됐더라면…”하고 지금도 아쉬워하는 것은 사실이다. 총리에 취임한 뒤 장면은 특유의 근면성과 성실함으로 내각을 이끌어갔다. 아직 총리공관이 마련되지 않은 상태여서 그는 일과후 반도호텔 828호실로옮겨 계속 집무했다.회고록에서 밝혔듯 “새벽 2시 전에 취침하는 날이 별로 없을 정도로 성심껏 무슨 일이든 잘해 보려고”했다. 이성모(李聖模)전 비서관은 “장박사는 점심도시락을 꼭 준비했고 저녁식사도 자택에서 날라왔다”면서 “밤에 반도호텔 집무실에서 보고를 다 받고 나면 보통 10∼11시쯤 됐는데 그때까지도 식사를 못해 식어빠진 저녁상이 그대로 놓여 있곤 했다”고 회상했다. 장면정부는 구파의 분당,소장파의 반발 등 정권 내부의 갈등으로 세차례나개각을 하는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그리고 이런 것들이 장면 개인,또는 그의 내각이 무능하다거나 지도력이 부족하다는 평을 듣는 주요인이 됐다. 그렇지만 쿠데타가 발생한 61년 5월 장면정부는 이미 기틀을 잡고 있었다.4월24일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단일지도체제로 당헌을 개정해 총재 직에 오른장면은 5월4일 3차 개각을 단행한다.당과 정부 양쪽에서 일사불란하게 지도력을 발휘할 구도를 마련한 것이다. 아울러 장면은 7월1일 방미해 케네디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기로 합의하고그 발표시기를 조정하고 있었다.한·일회담 재개도 눈앞에 두었다.미국의 경제원조 규모가 정상회담에서 결정되고 한·일회담에서 배상금문제가 타결되면,지난 3월 시작한 국토건설사업도,작성을 끝낸 경제개발5개년계획도 제 궤도에 오를 터였다.장면정부의 으뜸 목표인 ‘경제제일주의’가 바야흐로 국민의 피부에 와닿을 시점이었다.그런데 쿠데타가 터진 것이다. 지금 생각해도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쉽게 쿠데타군에게 당한 까닭은 무엇일까.김영구(金永求)당시 내무차관의 회고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61년 3월 말,4월 초쯤이었다.반도호텔 장총리 집무실에 총리,매그루더 유엔군사령관,장도영(張都暎)육군참모총장과 나,네 사람이 모였다.쿠데타설이화제에 오르자 매그루더는 ‘내가 한국군의 작전권을 쥐고 있는데 누가 쿠데타를 하느냐.일어나더라도 금세 진압할 수 있다’고 거듭 강조했다.장총리도 전적으로 동의하는 듯했다.사실 많은 사람들이 미군이 있는 한 쿠데타는 불가능하다고 믿었다” 그러나 실제 쿠데타가 발생하자 장면은 진압에 나서지 못한다.휴전한 지 8년,전쟁의 상흔이 아직 짙게 남은 그 시절,쿠데타 진압이 부대간의 총격전으로까지 비화하면 자칫 북한에게 재남침의 빌미를 줄 수 있다는 판단을 했을것이다.6·25발발 직후 주미대사로서 유엔군 파병을 위해 침식을 잊었던 그로서는,만에 하나라도 그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었으리라. 장면의 묘소는 경기도 포천 천보산 기슭의 가톨릭공원묘원에 있다.그 곳에세워져 있는 묘비의 글은 장면의 삶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공(公)은 민주정치를 수립하고 경제제일주의를 표방하여 불철주야 심혈을 경주하던 도중,뜻밖인 5·16사태로 경륜을 펴지 못한 채 정치에서 물러나…깨끗한 교육자요,근엄한 종교인이요,불굴의 정치가의 생애였다”- 5·16쿠데타 직후…가택연금등 수난 5·16후 쿠데타세력은 장면(張勉)정부가 무능하고 부패했다고 대대적으로선전한다.이어 소장파가 폭로한 ‘중석불 사건’을 비롯해 비리 의혹이 제기된 온갖 사건들을 파헤친다. 그러나 몇달 뒤 군사정권이 발표한 ‘장정권 비리’는 당시 김영선(金永善)재무장관이 냉장고 한대를 뇌물로 받았다는 것뿐이었다.김장관과 친했던장경순(張慶淳) 5대 민의원은 그나마 “냉장고가 아니라 아이스박스였다”고증언했다.김장관의 오랜 친구인 부산세관장이 출장길에 들러 선물로 아이스박스 한통을 놓고갔다는 것이다. 군사정권이 쿠데타 명분을 세우려고 갖은 애를 써 증거를 찾았는데도 발표거리가 고작 ‘냉장고 한대’였다는 사실은,역설적으로 장면정부가 얼마나깨끗했는지를 확인해준 것이다. 군사정권은 아울러 각종 혐의를 붙여 장면정부의 장·차관과 민주당 간부들을 구속했다.장면은 가택에 연금당했다.가족 증언에 따르면 군인들이 20∼30명 정도 집 안팎에서 상주하며 출입자를 감시했다.심지어 가정부가 장보러드나들 때도 장바구니를 일일이 뒤졌다.장면은 감시자의 눈길이 싫어 대낮에도 창마다 커튼을 드리웠다. 연금은 1961년 11월10일 해제됐다.장면은 기독교 서적 번역에 몰두하는 한편 화초를 가꾸는 일로 하루를 보냈다.감시가 심해서인가,찾아오는 발길도뜸했다.그가 전도(傳道)한 옛 동료가 영세를 받는다는 연락을 해오면 대부(代父)를 서주느라 문밖을 나설뿐 외출은 거의 하지 않았다. 그렇게 지내던 62년 7월15일 장면은 ‘이주당(二主黨)사건’의 배후자라는혐의를 쓰고 입건된다.이 사건은,민주당 인사들이 일부 군 출신과 짜고 군사정권을 전복하려 했다는 소위 반혁명음모의 하나로 발표됐다. 장면에게 걸린 혐의는 거사 성공 후 총리로 복귀한다는 조건으로 자금 100만환을 제공했다는 것이었다.1심에서 징역 10년을 선고받지만 최종심에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으로 확정되고 결국은 형집행면제 처분을 받는다. 8월28일 법정구속된 장면은 10월15일 보석으로 출감한다.그는 풀려나면서 “제멋대로 잡아넣더니 보석은 무슨…”하면서 개탄했다. 장면이 연루됐다고 해서 떠들썩했던 이 사건을 비중있게 다룬 저작물은 아직도 없다.당시 구속기소된 민주당 인사들도 “그야말로 황당한 조작극이었다”고 입을 모으고,그 중에는 자신이 구속된 사건이 그것이었는지조차 기억 못하는 이가 있을 정도다. ‘이주당 사건’을 마지막으로 장면은 군사정권의 날카로운 칼끝에서 어느정도 벗어난다.66년 1월 말 간질환이 재발해입원한 뒤 그의 건강은 눈에 띄게 나빠졌다.6월4일 장면은 명륜동 자택에서 영면했다.향년 67세였다.부인김옥윤(金玉允)여사는 지난 90년 90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장면은 슬하에 5남2녀를 두었으며 모두 해외유학을 했다.맏아들(張震 서강대 생물학과 명예교수·72)과 셋째아들(張益 가톨릭 춘천교구장·66)만 국내에 있다.수녀인 맏딸(張義淑·69),건축가인 둘째아들(張建·67),정치학 교수인 넷째아들(張純·64·보스턴 리지스대)은 미국에,은행가인 다섯째아들(張興·60·파리은행)은 프랑스에 거주한다.막내딸(張明子)은 80년대 후반 세상을 떠났다. 서울미대 초대학장을 지낸 장발(張勃·98)과 한국 최초의 항공공학자인 장극(86)은 장면의 동생들이다. 이용원기자
  • [특별기고] 前·現職 대통령들께 드리는 충언

    요즘 언론이나 항간에는 전·현직 대통령들에 대해 여러가지 말들이 무성하다.나는 여론에 편승해서가 아니라 진심으로 전·현직 대통령들께 사심 없는 충언을 드리고자 한다. 먼저 최규하 전대통령께. 노후를 평안히 보내고 계시는 최전대통령은 역사와 국민 앞에 진솔한 증언을 통해 당시 하야와 5공 집권과정에 대한 진상을 밝혀야 합니다.회고록을준비하고 계시다니 회고록에라도 명확한 진상을 공개하실 것을 국민은 바랍니다. 전두환 전대통령께. 폐일언하고 5·18의 영령들과 희생자 유가족들에게 그리고 지금도 고통으로 신음하는 부상자들에게 따뜻한 위로와 사과의 말 한마디쯤 해주시는 것이어려운 일인지요.광주시민은 오랫동안 따돌림과 차별을 당해 왔지만 지역감정 해소와 동서화해를 호소하며 국민화합을 위해 마음을 열었습니다.망국지병인 지역감정 해소를 위해 누군가 앞장서 풀어야 하겠기 때문입니다.한을삭이고 통분을 억누르면서 우리는 화해하자,용서하자,지역감정을 해소하자,동서화합을 이루자,구걸하듯이 손길을 내밀며 진정한 화해의악수를 애원해왔습니다.사죄와 사과는 강요할 수 없듯 화해와 용서도 강요할 수 없는 것임을 아린 마음으로 체험했습니다.어렵지만 동서화합 차원에서 마음을 비우고사과하기를 기대합니다. 노태우 전대통령께. 다른 전직 대통령을 당신 생전에 평가하는 발언은 현명하지 못합니다.다른분도 더한 말로 당신을 비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상호비방하면 똑같이 명예만 실추되고 위상만 떨어집니다.국민들은 대통령에 대한 냉소와 당혹과 황당감으로 상처를 받습니다. 김영삼 전대통령께. 당신의 아호처럼 ‘거산(巨山)’ 같은 지도자로 남아 주도록 국민은 기대했습니다.그러나 IMF로 기업인과 국민에게 큰 실망과 고통을 안겨주었습니다. 당신이 남겨놓은 실패의 상처를 회복하기 위해 국민과 현 정부는 안간힘을쏟고 있습니다.지역감정 유발로 힘을 분산시켜서는 안됩니다.당신의 취임사에서 5·18 선상에 놓였다는 문민정부는 5·18 진상과 명예회복과 보상을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공소권 없음’이라던 ‘성공한 쿠데타’도 주모자들을 법적 처리했습니다.그때 당신의 용단을 환영했습니다.그러나 요즈음 당신의 행보는 결코 환영받을 수 없습니다.당신의 현직 대통령에 대한 비방과 독재자 운운하는 발언은 당신에게도 국가사회에도 결코 이롭지 않습니다.선진국의 전직 대통령들처럼 참고서가 될 수 있는 회고록 저술에 전념해 주시기 바랍니다. 김대중 대통령께. 부도 직전의 나라살림을 물려받아 노심초사하신 결과 일년반 만에 위기에서 벗어나 회복세로 접어든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입니다.반DJ세력이 아직도사사건건 과한 비판과 공격을 가하고 퇴임대통령까지 원색적 비난을 마구 퍼붓는데도 의연한 바위처럼 한마디 대꾸도 하지 않는 것은 오히려 존경을 받을 만한 지혜로운 모습입니다. 그러나 공조와 화합의 기치 아래 보수세력,비민주 인사,독재 전과자들,반개혁 기득권세력,반개혁 언론까지 수용하고 아우르는 것은 DJ의 개혁 이미지를 흐리게 하고 여타 정권과의 차별성과 참신성이 희석된다고 우려합니다. 지역감정 해소와 국민화합,용서는 대통령의 평생 소신이요,덕목인 것도 이해합니다.한 신앙인으로서도 사랑과 용서를 한결같이 실행하는 것은 복음정신입니다.그러나 ‘박정희 전대통령 기념관 건립’ 지원을 약속하는 것은 화합과 화해의 차원이 아닌 역사왜곡이라는 비난이 빗발치고 있습니다. 경제개발과 근대화는 정당하게 평가받아야 하겠지요.그러나 그것으로 상쇄할 수는 없습니다.5·16쿠데타,4·19혁명 무효화,비민주 일인 독재 장기집권,지역차별 심화,정의와 인권·자유 탄압에 대한 역사적 반성과 조명없이는국민들에게 가치관의 전도와 선악의 무분별을 가져다 줄 뿐이라고 우려합니다.정치적 역학 관계와 복잡한 복선이 얽힌 현실에서 힘과 지혜를 겨루는 것이 아슬아슬하게 비쳐지는 데 통치의 지혜와 힘을 다수 국민들로부터 얻고모으기 바랍니다.국민들은 국민의정부의 제2건국의 성공을 열망하고 기대에차 있습니다.
  • 나이지리아 민간정부 출범…오바산조 대통령 취임

    아부자(나이지리아) AFPAP연합 아프리카의 인구대국 나이지리아의 올루세군 오바산조 민선 대통령 당선자(62·사진)가 29일 취임,15년 이상 계속돼온 군부통치를 마감하고 민간 정부를 공식 출범시켰다. 오바산조 대통령은 취임식에서 “ 12개월전 만해도 누구도 군사정권 퇴진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을 예상하지 못했다”며 “ 우리는 실패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지난 60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나이지리아는 66년 첫번째 쿠데타가 발생한 이래 군정이 계속돼 왔으며 민정 기간은 4년에 불과했다.
  • 국방부, 계엄령·긴급명령 아래서만 출동

    국방부는 28일 유사시 군 동원 및 시위진압 작전계획인 상록수계획(옛 충정계획)을 대폭 수정했다고 밝혔다.사회 민주화로 군을 동원할 정도의 대규모소요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판단에 따른 조치다. 이에 따르면 도시 인근의 소요진압 출동부대의 규모가 종전보다 60% 줄었으며 부대장 명령으로 출동이 가능했던 법적 근거도 고쳐 계엄령이나 대통령긴급명령 때만 동원할 수 있도록 했다. 특히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논란이 됐던 총기발사 등 군의 자위권행사도 계엄사령관 포고령이나 대통령 긴급명령,형법의 정당방위 및 긴급피난 범위 내에서만 허용키로 했다. 국방부 관계자는“법적 논란의 여지를 없애기 위해 자위권 개념을 명시했다”면서“자위권 행사도 인명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충분한 경고 과정을 거치도록 했다”고 밝혔다. 군병력 동원도 무장소요나 경찰의 진압이 불가능할 때만 허용하고나머지 경우는 경찰력에 의존토록 했다. 상록수계획은 61년 5·16 쿠데타 이후 군사정권에서 수립한 소요사태 발생시 군 동원 및 진압 시나리오로 당초 충정계획으로 불리다 89년부터 명칭이바뀌었다. 김인철기자 ickim@
  • [제2공화국과 張勉](26) 장면의 정치역정·생애(中)

    초대 주미대사로서 큰 공을 세운 장면(張勉)은 1951년 1월28일 귀국해 2월3일 국무총리에 취임한다.이 무렵 이승만(李承晩)대통령과 국회는 상극이라할 만큼 알력이 심해 장면 총리는 양쪽을 융화·조정하는 데 온힘을 기울였다.아울러 ‘국민방위군 사건’‘거창 양민학살 사건’ 해결에 앞장섰고,그해 11월에는 파리 제6차 유엔총회에 대표단을 이끌고 참석했다. 장면이 이승만 아래에서 총리직을 수행하는 동안 권한을 행사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그렇지만 정치적 위상은 한층 높아져,이승만을 몰아내고 그를대통령으로 옹립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난다. 50년 6월19일 개원한 2대 국회는 다양한 세력으로 구성됐다.자유당 창당 전이라 공인된 여당이 없었고 친(親)이승만 계열 의원은 대한국민당 24명을 비롯해 57명에 불과했다.반면 야당의원은 27명,무소속은 의원 정수의 60%인 126명에 달했다. 2대 국회는 개원 엿새 만에 6·25를 맞아 사망·납치·행방불명된 의원이 35명에 이를 정도로 큰 피해를 입었다.의원 대다수가 이승만의 ‘서울 사수(死守)’ 발언을 믿었다가 큰 곤욕을 치른 데다 이승만의 독재 성향이 이미두드러져 의회에서는 반(反)이승만 기류가 주를 이뤘다. 당시는 국회에서 대통령을 선출하는 간선제였고 이승만의 임기는 52년 7월23일까지였다.국회에서 재선할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하자 이승만은 51년 말두 가지 방안을 추진한다.하나는 여당을 만드는 것이고,또 하나는 대통령직선제로 개헌하는 것이었다. 여당 창당작업은 그러나 두 갈래로 나눠졌다.무소속 의원 중심의 원내자유당과 5개 사회단체를 뼈대로 한 원외자유당이 별도의 정당으로 등록했다.이가운데 원내자유당은 이승만의 뜻과는 달리 내각책임제로의 개헌을 은밀히추진하면서 대통령으로 장면을 추대하기로 야당과 합의한다. 당시 원내자유당을 이끈 오위영(吳緯泳)은 회고록에서 “일부 정치인들이이박사의 영구집권을 위해 활동하기 시작한 실정에서 재야의원들은 대부분강력한 야당을 조직해 다가오는 대통령선거에서 민주적인 지도자를 추대하자는 중론이 대두되고 있었다”고 밝혔다. 국회는 이승만정부가 발의한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을 52년 1월18일 찬성 19,반대 143이라는 압도적인 표차로 부결했다.이어 개헌 정족수에 맞춰의원 123명의 서명을 받아 내각책임제 개헌안을 제출했다.4월 이 무렵 장면도 총리를 사임했다. 국회는 6월2일 제2대 대통령을 뽑기로 계획을 세웠다.그 날이 되면 장면은새 대통령으로 선출되고 내각책임제 개헌도 순조롭게 이루어질 터였다. 하지만 반격이 시작됐다.‘부산정치파동’이 발생한 것이다.이승만이 경남과 전남북에 계엄령을 선포한 다음날인 5월25일 계엄군은 버스로 등원하는의원들을 연행했다.그리고는 경찰이 국회를 포위한 상태에서 대통령직선제개헌안을 강제로 통과시켰다.이때 개정한 헌법이 ‘발췌개헌’이다. 부산정치파동후 장면은 가톨릭계인 경향신문의 고문으로 들어앉아 정치에는 일절 간여하지 않을 듯이 보였다.그러다 55년 9월 통합야당인 민주당이 출범하자 최고위원으로 정계에 복귀했다.오위영을 비롯해 김영선(金永善)·홍익표(洪翼杓)·이상철(李相喆) 등 신파의 핵심세력이 52년 그를 대통령으로추대하려던 원내자유당계였다. 장면은 56년 정·부통령 선거에 부통령으로 출마해 이기붕(李起鵬)을 누르고 당선됐다.국민의 투표로 검증받은 권력서열 2위가 된 것이다.더구나 이승만이 81세의 고령이어서 유고시 대통령 자리를 승계하는 부통령이란 위치는정치적으로 큰 의미를 가졌다. 그러나 부통령 재직 4년은 장면이 회고록에서 ‘죄없는 죄인’이라고 표현할 만큼 험난한 세월이었다.이승만은 강력한 정적으로 떠오른 그를 견제하느라 상식 밖의 행동을 예사로 했다.가령 56년 8월15일 열린 정·부통령 취임식에서 이승만은 내외 귀빈을 전부 소개하면서 정작 그 자리의 공동 주인공인 장면을 무시했다.남산 국회의사당 기공식에서는 다른 초청객의 자리는 준비하고도 부통령 좌석은 마련하지 않아 장면이 그냥 돌아갈 정도였다. 이 시기 장면의 처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두 가지 사건이 있었다.그에대한 암살 기도와 외국 원수와의 만남을 방해한 사례다. 부통령 취임 한달여 만인 9월29일 서울 명동 시공관에서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장면은 김상붕(金相鵬)이 쏜 총에왼손을 맞았다.이 저격사건의 배후는 김종원(金宗元)치안국장이라는 추측이 강하게 나돌았지만 훗날 장면정부 아래서 속개된 재판에서도 관련자는 김상붕,그에게 총을 준비해 준 이덕신(李德信·성동경찰서 사찰계 형사주임),두 사람 사이를 연결해 준 최훈(崔勳) 등 세 사람으로 한정됐다.장면은 사건의 배후를 철저히 파헤치는 대신이들을 감형하는 것으로 사건을 마무리지었다. 고 딘 디엠 베트남대통령이 공식 방한한 날은 57년 9월18일이었다.디엠의맏형은 가톨릭 사이공교구 대주교였고 본인도 독실한 신자였다.게다가 장면과는 미국에서 만나 돈독한 우정을 쌓은 사이였다. 디엠은 장면을 만나려고 했으나 이승만정권은 그의 방한 사실조차 장면에게 알리지 않았다.디엠은 개인적으로 노기남(盧基南)대주교에게 전화해 일요일 첫 미사때 명동성당에 들르겠다며 장부통령을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장면과 디엠은 결국 주교관 2층 노대주교 방에서 몰래 만나 우정을 재확인할수 있었다. 외국원수에 대한 의전마저도 무시할 정도로 장면을 철저히 배제한 이승만의 폭거는 4월혁명으로 쫓겨날 때까지 계속됐다. 장면이 순화동 부통령 공관에서 ‘창살 없는 감옥’ 생활을 하던 그 무렵을 이철승(李哲承)은 “참으로 견디기 힘든 세월이었지만 민주 염원의 상징으로서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고 회상하면서 “장박사가 사실은 남달리 외유내강한 분”이라고 평가했다. 장면은 총리·부통령을 거치면서 국가지도자로서 확고한 위상을 차지했다. 그런 까닭에 4월혁명으로 이승만정권이 물러나자 민심은 당연히 장면에게로쏠리게 됐다. 이용원기자 ywyi@**前비서관 李聖模·李泓烈씨가 본 장면 장면(張勉)에게는 10여년 동안 그림자처럼 수행한 비서관이 두 사람 있다. 이제는 70대가 된 이성모(李聖模·72)씨와 이홍렬(李泓烈·77·미국 거주)씨가 그들이다. 이들은 장면이 주미대사로 활동한 50년대 초부터 66년 타계하기까지 때로는 함께,때로는 엇갈리며 그의 곁을 지켰다.이들이야말로 가족이나 정계의 동료보다도 장면의 모든 것을 더 가깝게,더 오랫동안 지켜본 증인들이다.그들이 밝힌,알려지지 않은 이야기 몇 토막을 소개한다. 이성모씨는 1951년 초 피난지 부산에서 장총리를 만난다.경찰관으로 경호업무를 맡은 그는 인품에 감화해 곧 경찰복을 벗고 비서로 들어간다.그가 직접 본 부산 피난 시절 장면과 어머니 사이의 에피소드다. “장총리는 꼭 집에서 점심을 들었다.하루는 점심을 먹으러 집에 왔다가 모친(黃누시아)이 등 찢어진 삼베옷을 입은 것을 보고 흉하니 갈아입으라고 말씀드렸다.그랬더니 모친이 불같이 화를 내며 ‘자네가 이 나라 총리 맞는가. 지금 피난민이 곳곳에 우글거리는데 잘먹고 편히 있는 내 걱정할 땐가.’장총리는 무릎을 꿇고 한 시간이나 빌었다.모친 지시대로 범일동 고아원에 가아이들을 돌본 다음에야 용서받았다.장총리 부모도 매우 훌륭한 인격자였고,그는 부모 말씀에 절대 복종했다.” 이홍렬씨는 50년 4월 로스앤젤레스총영사관 부영사 때 장면 주미대사를 알게 된다.51년 총리로 내정된 장면의 부름으로 함께 귀국해 총리실 파견근무를 했고 그 인연으로 비서관이 된다. “장총리를 10여년 모셨는데 화내는 모습을 딱 한번보았다.60년 12월이었다.청와대로 전화하라고 해서 윤보선(尹潽善)대통령의 비서실장인 이재항(李載沆)씨를 바꿔주었다.장총리가 통화를 몇분 하더니 화난 표정에 목소리가높아졌다.대통령에게 긴히 할 말이 있는데 이재항씨가 자꾸 핑계를 대며 안바꿔주는 모양이었다.전화를 끊은 장총리는 ‘아주 고약한 사람이로군’하고혼잣말을 했다.그것이 그분이 할 줄 아는 가장 험한 욕이었다.” 이홍렬씨는 장면이 돈 문제에도 담백했다고 밝혔다. “51년 총리 시절 파리에서 열린 제6차 유엔총회에 대표단을 이끌고 가게돼 있었다.떠나기 열흘 전쯤 한국은행 총재가 나를 불렀다.‘외교활동을 하려면 가외비용이 많이 들 것’이라면서 돈가방을 주었다.얼핏 봐도 100달러지폐가 가득 들어 있었다.일단 거절하고 돌아와 말했더니 ‘잘했다’는 한마디뿐 더는 말이 없었다.돈을 챙기는 데는 관심이 전혀 없어 쿠데타후 명륜동자택으로 돌아가서는 생활비가 없을 정도였다.” 이성모·이홍렬 두 비서관은 군사정권 아래서 고된 삶을 살았다.이성모씨는 장면 집안일을 돌보는한편 정치에도 뛰어들었다.민주당 재건에 참여,섭외부장·조사부장을 역임했고 경북 영주·봉화 지구당위원장으로서 6·7대 총선에 출마하지만 거듭 실패했다.이후 사업을 하면서 장면 추모모임인 ‘운석회’의 궂은 일을 도맡아 해왔다. 이홍렬씨도 5·16쿠데타후 장면을 곁에서 모시다가 그의 타계후 정치에는일절 발을 끊고 생활인으로 돌아갔다.지난 88년 도미해 로스앤젤레스에 자리잡은 그는 본지에 ‘제2공화국과 장면’ 연재가 시작되자 일부러 두 차례 귀국해 증언하고 자료를 제공하는 열성을 보였다. 이용
  • [특별기고]‘민추협’15년의 불행

    1980년대 ‘암흑기’를 살면서 민주주의를 생각해본 사람이면 ‘민추협’으로 더 잘알려진 ‘민주화추진협의회’를 기억할 것이다.한줄기 빛이자 희망이었고 우리들 자존심의 회복이었다. 민주주의가 질식상태에 빠져 있던 전두환정권의 폭정 아래서 ‘5·18 광주민중항쟁’ 4주년이 되는 날 출범했으니 지금으로부터 15년전 일이다. 지금에 와서 불행이란 말을 붙여 15년의 역사를 되돌아보는 건 아픈 부분을들춰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민주세력을 위한 교훈으로 삼기 위해서다. 민추협을 결성한 목적은 민주세력이 대동단결해 ‘군정’을 종식시키자는데 있었다고 할 수 있다.민추협의 정치권내 세력은 이른바 동교동계와 상도동계 양대 인맥으로 이뤄졌으며 민주세력의 단결이란 곧 이 양대 인맥의 단결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주효해 1987년 6월투쟁이 일어났으며 대통령직선제를 받아낼 수 있었다.그러나 그해 실시된 대통령선거에서는 민주세력의 후보 단일화에 실패해 그 결과 직선제로 노태우 군부정권이 성립됐다.민추협의 첫번째 불행이었다고하겠다. 1988년 총선 결과 여소야대 국회가 되었고 이 때문에 노태우정권은 같은 군부정권이면서 ‘5공청산’이란 것을 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전두환 전대통령을 백담사로 귀양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민추협 세력 중 상도동계가 12·12 신군부세력인 전두환·노태우 중심 정당,5·16 구군부세력인 김종필 중심 정당과 합쳐 새로운 정당을 만들어 노태우 군부정권 아래서 여당이 됐으니 민추협의 두번째 불행이었다. 그후 민추협의 상도동계는 우여곡절 끝에 정권을 잡은 뒤 문민정부를 자칭했다.그러나 군부정권을 뒤엎거나 선거로 맞서서 이긴 것이 아니라 그것과의 타협에 의해서 성립된 문민정권이었다. 김영삼 문민정권 5년간의 정치적 업적 여부는 그만두고라도 민추협 세력이이제 상도동계의 여당과 동교동계의 야당으로 완전히 나누어지게 됐으니 세번째 불행이었다고 하겠다. 1997년 대통령선거 결과 상도동계의 문민정부에 이어 어렵사리 동교동계의‘국민의 정부’가 성립됐다.선거에 이겨서 성립되기는 했으나 단독으로 이기진 못하고 5·16구군부 핵심세력이 이끄는 충청도 세력과 연합함으로써성립할 수 있었다. 투쟁대상이었던 군사정권 세력과 상도동계같이 합당을 했건 동교동계처럼연합을 했건 민추협은 두번씩이나 정권을 성립시켰다는 점에서 대단한 정치적 저력을 가진 단체였다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민추협 동교동계 중심 국민의 정부가 성립한 지 1년이 되는 지금 5·16 구군부세력은 정권 핵심부에 건재한 채 다시 내각책임제를 하자며 국민의 정부를 압박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국민의 정부는 5·16 군사쿠데타 정권의 역사성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고,12·12 군사반란후 5·18 광주항쟁을 피로써 탄압해 정권을 잡았던 신군부세력은 국민의 정부가 묵인 내지는 원조한다는 풍문 속에서 정치 현역으로 복귀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민추협 발족 15주년을 기념하는 날 상도동계의 김영삼 전대통령은 민주세력의 재단결을 말하기는 고사하고 동교동계 김대중 대통령의 국민의 정부를 4·19전 이승만정권과 같은 독재정권이라고 비판했다.민추협의 네번째불행이라 하고도 남을 것이다. 민추협이 걸어온 길은 흔히 권력 획득만이 최고 목적이라는 ‘정치판’에서는 예사로운 일일지도 모르겠다.그러나 역사의 눈으로 보면 크게 비판받아야 할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姜萬吉 고려대 명예교수]
  • [김삼웅칼럼] 吳越도 같은배 타는데

    파도가 심할 때는 오월(吳越)도 동주(同舟)하고 산길이 험할 때는 승적(僧賊)도 동행한다. 6·25 이래의 국난기에 국민에게 한없는 고통을 안겨주고 국가위기를 불러온 전직대통령들의 행동거지는 참으로 볼썽사납다. 설혹 은원이 따르고 이해가 갈린다고 하더라도 전직대통령끼리,혹은 전·현직 대통령 사이가 중국 춘추전국시대 오왕(吳王) 부차(夫差)와 월왕(越王)구천(句踐)의 관계에야 비할까. 그들도 풍랑이 거셀 때는 함께 같은 배를탓다고 하지 않던가. 시쳇말로 ‘님’이란 글자에 점하나 찍으면 ‘남’이 되고 ‘나’라는 글자에 점하나 바꾸면 ‘너’가 된다고 하지만 적어도 이 나라에서 쿠데타거나부정선거거나 색맹선거를 통해서 대통령까지 역임했으면 퇴임 후라도 걸맞은 품위를 유지하면서 국민의 고통을 헤아리는 금도를 보이는 것이 본인들에게나 국민에게 좋을 것이다. 전직대통령들은 자신들이 행한 패도와 무능으로 무수한 국민이 희생되고 국가가 IMF 환란에 빠지게 된 죄업을 깨닫는다면 참회하는 심경으로 국난극복에 힘을 보태고 국민통합에 노력하는 자세를 보이는 것이 옳다. 또한 그들과 함께 정권의 요직에 참여했던 인사들도 조신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언론도 이제 전직대통령들의 ‘망언시리즈’를 중단토록 자제해야 한다. 전직끼리 또는 현직대통령에 대해 품격없는 욕설과 독설을 흥미위주로 보도하면서 편싸움을 부추긴다면 정치의 희화화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나라의 체면이 말이 아니다. 솔직히 전두환·노태우·김영삼씨가 대통령직에 오른 데에는 언론·지식인들의 역할이 크게 작용했다. 노태우씨가 김영삼씨를 후계자로 선택한 것은자신과 지도층이 색맹환자였다는 고백은 그런 의미에서 함께 느끼는 바가 많아야 한다. 환란 당시 34억달러이던 외환보유고가 600억달러를 넘어섰고 산업생산·어음부도율 등 각 경제지표가 환란 직전의 수준으로 회복되고 있다. 그야말로위기로부터 간신히 벗어나려는 순간이다. 그러나 아직 지나야 할 터널은 길고 어둡다. 실업자는 여전히 150만명을 넘고 학교를 나와도 취업할 일터를찾지 못한 젊은이들이 거리에 넘친다. 수출증가율도 더디고공장가동률도 힘겹다. 취약한 산업구조도 크게 바뀌지 않았다. 그렇지만 우리는 IMF 경제위기를 극복한 저력이 있고 이를 이끌어온 정통성을 가진 정부가 있다. 우월한 국력을 바탕으로 대북 포용정책을 펴고 이것이 국제적인 지지를 받으면서 금강산 뱃길도 열렸다. 주변 4강의 역학관계도우리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다. 우리가 하기에 따라서는 환란위기를 국가발전의 기회로 활용할 수 있는 내외의 환경인 것이다. 건국 이후 대북관계나 4강관계에 있어서 이보다 더 유리한 시기는 별로 없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러한 기회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 활용은 커녕 IMF 격랑속에서 여야끼리,전직끼리,노정(勞政)끼리 싸우느라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 부차와 구천의 치졸한 싸움이 그칠 줄을 모른다. 이와 같은 한심스런 행태는 대부분 지역주의를 볼모로 한다. 아무리 악과무능으로 국가와 국민에 위해를 끼친 지도자라도 그들을 감싸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이들의 망언과 망설이 계속되는 것이다. 우리 정치의 비극과 정치발전의 한계는 바로 여기에서 근원한다. 악성지역주의의 함정이고 병폐다. 주막 장기는 곧장 마을 장기판이 되기 십상이고 투전판의 개평꾼은 항상 강경파가 된다. 그렇더라도 훈수를 할 사람이 있고 잠자코 있어야 할 사람이따로 있다. 아무나 장기판에 끼어들어 제돈 잃지 않는다고 개평꾼이 함부로부추겨서는 안된다. 어렵사리 격랑을 헤치면서 환란극복과 지역화합에 노력하는 국민에게 더이상 갈등을 증폭시키는 언동을 삼갔으면 한다. 정작 훈수를 하고 싶고 개평을 뜯고 싶거든 마을사람들에게 지은 죄,주막에 진 외상값이라도 갚고 나서 하면 어떨까. 국민의 80% 이상이 전직들의 행보를 바람직하지 않다고 보는 한여론조사를 보더라도 이제 언론이 나서서 개평꾼들의 치졸한 ‘훈수’를 묵살할 차례다. 새 내각도 출범한 시점에서 국민화합을 위해 ‘전직’들의 대오각성을 촉구한다. ●주필 kimsu@
  • [제2공화국과 張勉](25)장면과 가톨릭…정치고비마다 후원자로

    장면(張勉)을 정치가로서 해부하건,인간적으로 이해하건 그 출발점은 같은자리에 있다.곧 가톨릭 신앙이다.장면의 정치는 출발부터 마감까지 신앙의테두리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았다. 장면을 정치의 길로 ‘내몬’사람은 노기남(盧基南)대주교다.한국인으로서처음 서울교구장이 되고 주교자리에 오른 그는 해방 당시 한국 가톨릭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다.노주교는 대한민국 출범을 앞두고 정계에도 가톨릭을 대변하는 인물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그가 염두에 둔 인물이 장면이었다. 장면은 노주교보다 나이는 겨우 3살 많았지만 소신학교에서 직접 그를 가르쳤다.게다가 인품·덕망이 뛰어나 노주교를 비롯한 제자들에게서 진정한 스승으로서 대우 받았다.그런 한편으로 신자인 장면에게 노주교는 순명(順命)의 대상이었다. 제헌의회 선거를 앞두고 노주교에게 정계진출을 권유받은 장면은 처음에 펄쩍 뛰며 거부한다.교육자로 남겠다고 했다.그러나 거듭되는 강권에 못이겨출마한다.선거전이 시작되자 노주교가 진두지휘를 했고 가톨릭이 운영하는경향신문·경향잡지가 총동원돼 선거운동을 벌였다. 제헌의원이 된 장면은 첫번째 주요 임무인 ‘유엔에서의 한국 승인’을 받아낼 때도 가톨릭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다.당시 국내에는 친한파인 패트릭번 신부가 교황사절(바티칸이 국교를 맺기 전에 파견한 대사)로 있었다. 장면이 출국인사차 번 신부를 찾아가자 그는 파리주재 교황대사와 유럽·중남미의 가톨릭국가 대표들에게 보내는 소개장 10여장을 건네주었다.이 소개장은 파리에서 큰 효력을 발휘한다.한국을 몰라 냉담하던 이들이 소개장을받고나서는 앞장서서 다른 나라 대표들을 인사시켜줄 정도로 적극 협력했다. 장면은 훗날에도 주위사람들에게 이때 일을 자주 이야기하며 고마워했다. 한편 이승만(李承晩)은 나름대로 장면과 노주교의 관계를 이용했다.이승만은 장면에게 유엔대표단장·주미대사·총리 등 중책을 맡길 때마다 노주교를불러들여 상의하는 형식을 취해,장면으로 하여금 거절하지 못하도록 미리 쐐기를 박았다.이러한 삼각관계는 장면이 52년 4월 총리를 그만둘 때까지 계속된다. 장면이 제헌의원-주미대사-총리-부통령을 단계적으로 밟아 결국 제2공화국정부를 맡은 정치가로 성장한 바탕은 물론 그 자신의 능력과 성실함이다.그러나 가톨릭 세력의 끊임없는 지원이 큰 보탬이 된 것도 사실이다. 장면 자신의 정치형태 또한 신앙인의 자세에서 벗어나지 않았다.장면내각에서 총리 공보비서관이었던 송원영(宋元英)은 “종교인으로서 성실의 원칙을정치에 적용하려 했으며 소위 정치적인 권도(權道)나 거짓말을 이용하는 일을 거의 생리적으로 배척했다”고 회고록에 적었다. 장면의 정치활동도 가톨릭의 테두리 안에서 끝났다.5·16쿠데타가 일어나자그는 수녀원으로 도피,쿠데타가 기정사실로 굳어진 뒤에야 그곳에서 나왔다. 수녀원에 있던 55시간동안 장면은 누구보다도 고뇌했을 것이다. 세월이 어느정도 흐른 어느날 민주당 신파의 장경순(張慶淳)전의원이 수녀원에서 지낸 시간에 관해 조심스레 물었다.장면은 “정치인과 종교인이라는 갈림길에서 정말 고민했다.결국 종교 쪽으로 결정했다.정치를 택했다면 (쿠데타군과 진압군 사이에 전투가 벌어져)서울시민의 희생이 컸을 것이다.권력을빼앗겼다거나 무능한 정치인이었다는 낙인은 감내하기로 했다”고 말했다고한다. 이용원기자
  • [굄돌]-일등 대통령과 꼴찌 대통령

    김대중 대통령이 대구·경북지역 인사들과의 대화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과의 ‘역사적 화해’를 제안한 것이 논란이 되고 있다.지난 유신독재시절 최대의 정적이었고 또 그로 인해 몇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던 김대통령이 박대통령의 업적을 칭송하고 기념관 건립을 제안한 것은 어쩌면 숭고한결단일 수도 있고 혹은 승자의 여유일 수도 있다.그럼에도 이에 대한 논란은 끊이지 않고 있다. 시민들 반론의 요체는 대체로 김대통령의 화해 제의가 ‘인간적’ 차원을넘어 ‘역사적’ 차원에서 언급된 것은 부당하다는 견해인 듯 싶다.박정희씨가 누구인가? 일제시대 일본군 장교를 지냈고,군사쿠데타를 일으켜 집권했으며,선거에 지역감정을 도입해서 분열을 조장했고,유신이라고 하는 독재체제를 굳혀 민중의 숨통을 죄다가 국민적 저항에 부딪쳐 결국 부하의 손에 시해되는 비극을 자초한 이 아닌가? 나는 김대통령의 이번 제안이 실은 ‘죽은’ 박정희 대통령에 있다기보다는 ‘산’ 대구·경북 주민들에 맞춰져 있다고 본다.그리고 그것은 대구·경북 주민들의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크기(?)와 무관하지 않다.부정하고 싶지만 이것은 엄연한 사실이다.나는 그것을 소위 근대화 이데올로기 혹은 경제개발 이데올로기라고 본다. 그런데 이번 김대통령 발언과 관련한 공방에 있어 단연 절정은 김영삼 전대통령의 돌발적인 반박성명과 이에 대한 박근혜 의원의 재반박성명이었다. 여기서 박근혜씨가 반박의 근거로 내세운 것이 역대 대통령들에 대한 평가여론조사 결과이다.그 결과를 보면 대체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일등이고 김영삼 전 대통령이 꼴찌로 나타난다.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나는 박정권 이후의 경제개발 이데올로기가 아직도 많은 사람들의(대구·경북 지역에만 국한되지 않은) 가치관으로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는 현상을 참으로 우려하고 있다.왜냐하면 우리가 IMF 체제를 맞게 된 연원도 그 근본을따져들어가면 멀리는 박정권 때의 근대화 논리가 그 시발점이기 때문이다.따라서 김영삼 전 대통령은 박정권의 종속적 경제 이데올로기를 확장해서 세계화시킨 후계자의 속성에서 결코벗어나지 못하며,그 속성이 결국 꼴찌대통령을 자초한 셈이다. 진정한 일등 대통령은 대승적인 지역감정 해소와 더불어 참된 의미의 경제자립 토대를 구축할 때만이 가능하다. 연극 연출가·판소리꾼 임진택
  • [변혁으로서의 문학과 역사](22)-남정현의 ‘분지’(1)

    작가 남정현은 등단 3년만인 1961년 중편 ‘너는 뭐냐’로 제6회 동인문학상(후보작)을 수상할 정도로 그 풍자적 기법이 뛰어났다.5·16군부쿠데타 이후 한국사회가 당면했던 갈등과 모순을 전통적인 골계적 수법으로 날카롭게비판하던 이 인기작가에게 당시의 잡지들은 앞다투어 원고를 청탁했다.1964년 11월 경 그는 ‘사상계’와 ‘현대문학’ 두 잡지로부터 소설을 청탁받고 우선 한 편의 작품을 쓰기로 결심했다. 그는 “소설이란 우리 인간사에 관한 이야기”란 생각을 가진 작가로서 현실을 관찰하면서 “어찌된 판인지 우리 사회의 요소요소에는 인간의 꿈과 염원을 시중들기 위한 법이며 제도며 그 장치보다는,도리어 인간의 염원을 가로막고 행복을 훼손하려는 장애물이 더 많은 것 같았다“고 느끼게 되었다. 문학적 상상력은 여기서 더 나아가 “국가권력은 이미 나라와 민족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자들의 손에서 아주 멀리멀리 떠나버린 상태”로 보여 “세세연년 민족자주를 열망하는 전민중적인 희원을 한번 소설화해보고 싶었을 뿐”이어서 쓰게 된 것이 ‘분지’였다.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4·19같은 민족적 희망이 왜 5·16같은 폭압으로 압살당해 버렸느냐를 추구하다가 “그 배후에는 아무래도 미국이라는 거대한 외세가 크게 작용하고 있음을 직관적으로 감지하고 그 답답함과 울분을 기초로 ‘분지’를 구상했던 것이다”(한승헌변호사 변론사건 실록 ‘분단시대의 피고들’ 참고). 그의 장기인 풍자적 기법으로 그리 오랜 시간을 끌지 않고도 탈고하게된 이 작품을 작가는 순문학지 ‘현대문학’을 통해 발표했다.1964년 12월 어느날이었다. 소설은 홍길동의 10대손인 홍만수가 어머니의 영전에 하소연하는 형식을 취한 일인칭 독백체로 이뤄져 있다.만수의 아버지는 일제 때 독립운동을 위해나갔으나 해방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았고,그의 어머니는 환영대회에 나갔다가 미군으로부터 성폭행 당한 채 돌아와 정신이상으로 죽는다.고아 남매는외가에서 자라던 중 6.25로 헤어져 만수는 입대했다가 제대했으나 살 길이없는 절망 속에서 스피드상사의 현지처가 된 누이동생 분이를 만나 미군수물자 장사를 하면서 지낸다. 이런 딱한 처지의 만수에게 친구들은 도리어 매부인 스피드상사에게 미국과 통할 수 있는 길을 열어달라고 빽을 써대는 현실을 저주하며 만수는 썩어빠진 정치를 규탄하나 그보다 더 견디기 어려운 것은 누이 분이의 고통이었다. 밤마다 스피드상사는 본국의 본처와 비교하면서 분이의 육체적인 결함을 들어 온갖 욕설을 퍼부어대며 학대해댔기 때문이다.대체 미국 여인들의 육체는 얼마나 황홀하기에 저런가고 고심하던 중 스피드의 본처 비취가 한국으로오자 만수는 그걸 확인하고 싶어졌다. 만수는 한국을 안내해주겠다는 구실로 비취를 향미산으로 데려가 정중하게분이의 처지를 설명하면서 그녀에게 육체를 보여줄 것을 요청하자,그녀는 다짜고짜 만수의 뺨을 후려갈겼다.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만수는 그녀의 배위를 덮치고 앉아 속옷을 찢어 황홀한 육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그러나 만수의 손에서 헤어난 비취는 돌연 “헬프미!”를 외치며 산 아래로 내려가 도움을 청했는데 그 결과는 “향미산의 둘레에는 무려 일만여를 헤아리는각종포문과 미사일,그리고 전미군 중에서도 가장 민첩하고 정학한 기동력을 자랑하는 미 제 엑스 사단의 그 늠름한 장병들이 신이라도 나포할 기세로저(만수)를 향하여 영롱한 눈동자를 빛내고”있다. “이 땅 위에서 만수란 이름의 육체와 그의 혼백까지를 완전히 소탕하기 위해서 뿌려진 금액이 물경 이삼억 불에 달”하는 위기의 상황에서 만수가 어머니의 영전에 하소연하는 형식의 이 소설은 채만식의 풍자를 능가하는 완벽한 알레고리로 김지하 풍자문학에 한 발 앞선 성과였다.“앞으로 단 십 초,그렇군요.이제 곧 저는 태극의 무늬로 아롱진 이 런닝셔츠를 찢어 한 폭의찬란한 깃발을 만들”어,타고 태평양을 건너 미대륙에 닿아 “우유빛 피부의 그 윤이 자르르 흐르는 영니의 배꼽 위에 제가 만든 이 한폭의 황홀한 깃발을 성심껏 꽂아놓을 결심”을 다지는 것으로 이 소설은 끝난다. 林軒永 문학평론가
  • “박정희씨 찬양 용납할수 없는일”-김영삼전대통령 성명 발표

    김영삼(金泳三) 전 대통령은 최근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이 박정희(朴正熙)전 대통령과의 역사적 화해를 선언한 것과 관련,“5·16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국민이 선출한 민주정부를 전복시키고 민주헌정을 중단시킨 독재의 상징인물인 박정희씨를 찬양하는 것은 결코 용납할 수 없으며 국민과 역사를 두려워하지 않는 일”이라고 비난했다. 김 전대통령은 17일 측근인 한나라당 박종웅(朴鍾雄)의원을 통해 퇴임 이후 처음 발표한 성명에서 “박정희 정권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아직 남아 있으며 결코 미화될 때가 아니다”면서 “전임 정권에 대한 평가는 역사가 내릴것”이라고 주장했다. 김 전대통령은 박정희정권을 ‘장기 독재정권’으로 규정한 뒤 “박정권에대한 미화는 기본적으로 지역정치를 바탕으로 하는 현정권의 사고에서 비롯된 술수에 지나지 않는다”면서 “민주주의의 시계를 거꾸로 돌릴 수는 없다”고 강조했다.이에 앞서 김 전 대통령은 오전 수유리 국립묘지를 참배했다. 오풍연기자 poongynn@
  • YS ‘깜짝 성명’ 무얼 겨냥했나

    - “독재정권과 연대”현정권 공격, 총선 대비 입지 넓히기 포석 김영삼(金泳三)전대통령이 17일 수유리 국립묘지를 다녀온 뒤 현정권을 강도높게 비난하는 성명을 내놓아 앞으로의 거취등과 관련,관심을 모으고 있다. 김 전대통령은 성명에서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이 박정희(朴正熙)전대통령과의 ‘역사적 화해’를 선언한데 대해 직격탄을 날렸다.그는 “독재의 상징인 박정희씨를 찬양하는 것은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이며 국민의 역사를 두려워하지 않는 일”이라고 일소에 부쳤다.또 “양민을 학살하고 군사쿠데타로집권한 세력은 용납될 수 없다”며 전두환 (全斗煥)전대통령을 비난했다.성명은 수유리 국립묘지 참배를 수행했던 한나라당 박종웅(朴鍾雄)의원을 통해 발표했다.김전대통령의 이날 행보는 특유의 ‘결기’를 바탕으로 한 다목적용이라는 분석이다. 우선 현정권과 과거 독재정권과의 ‘연대’를 강조,자신의 정치적 입지를확보하겠다는 계산이 깔려있는 듯하다.나아가 내년 총선을 앞두고 부산·경남지역에서의 세력 확보를 염두에 둔 깜짝쇼의 성격도 담겼다는 해석이다.자신의 ‘업적’을 ‘재평가’받겠다는 의지도 담겼다는 지적이다.YS정권 시절 청와대 한 고위관계자는 “김전대통령은 역사 바로세우기 등 일련의 개혁작업등에 대해 훗날 종합적으로 평가받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에대해 여권은 공식 입장을 보이지 않으면서도 극도의 불괘감을 감추지않았다.청와대는 일절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으로 김전대통령의 발언을 ‘무시’하는 태도를 보였다.김종필(金鍾泌)총리는 “김전대통령이 92년 대선 당시 박전대통령의 기념관 설립을 약속했는데 취임 이후 약속을 번복했다”고소개했다. 국민회의 한 당직자는 “경제를 망쳐놓은 김전대통령이 무슨 자격으로 국정 혼란을 부추기느냐”며 공격했다.자민련 이양희(李良熙)대변인은 “지역감정을 부추겨 자신의 입지를 세우려는 망국적 처사”라고 말했다. 최광숙기자 bori@
  • 위기의 러시아 긴급진단-어두운 정치

    내년 7월로 예정된 러시아의 대통령 선거.21세기 러시아 운명을 가름할 한판의 대회전일 것이다.그러나 이의 전초전인 총선을 7개월 앞두고 최근 단행된 보리스 옐친 대통령의 프리마코프 총리 전격 해임과 내각 해산,그리고 의회의 옐친 탄핵안 심의는 러시아의 향후 정치 일정을 한치 앞도 내다볼 수없게 만들고 있다.서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려는 각 정치세력들 간의 정쟁이 극을 달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번 사태의 파장은 결코 심상치 않다. 지난 89년 구 소련 연방이 해체된 이후 러시아 위기의 정점에는 항상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이 서 있다.옐친은 90년 대통령 자리에 오른 이후 위기 상황때 마다 돌발적 정치 곡예를 벌여왔다. 이번에도 의회가 옐친에 대한 탄핵 표결 처리를 강행키로 결의하자 곧 바로 프리마코프 해임 카드를 내세웠다.프라마코프가 총리직에 오른 것은 지난해 말 옐친과 공산당 주도의 의회가 극한적 대립을 하면서 나온 타협의 산물. 이런 점에서 옐친은 의회에 대해 선전포고를 한 것이나 다름없다.게다가 프리마코프는 대국민지지도 70%이상을 얻으며 의회내 개혁파와 보수파를 연결해주는 역할로 의회의 신임을 받아온 인물. 옐친이 프리마코프에 이르기까지 지난 90년부터 10년동안 기용한 총리는 모두 6명.평균 재임기간은 1.67년이다.게다가 현재 코소보 특사로 일하고 있는 체르노미르딘이 재임한 6년과 옐친 자신이 총리직을 겸직한 9개월을 빼면나머지 총리들은 단 몇달씩만 일한 셈이 된다. 그의 잦은 총리 경질의 이유는 제2인자를 곁에 두지 못하는 타고난 정치적독점 생리와 의회 견제용,그리고 이유가 설명되지 않는 ‘러시아적’ 즉흥성이다. 지난해 8월에는 젊은 청년 개혁파의 한사람이었던 38세의 키리옌코 총리를해임시킨 뒤 체르노미르딘 전 총리를 다시 내세워 이를 거부하는 의회와 갈등 끝에 벌여 쿠데타 직전 상황까지 갔다.앞서 93년에는 의회를 탱크로 진압하기도 했다. 러시아 정치혼란의 요인 가운데에는 이같은 옐친의 통치스타일과 함께 그의 건강문제가 항상 따라 붙는다.지난 96년 심장 수술 이후 대통령궁 크렘린보다는 모스크바 교외 휴양저택인 고리키-9에서 머무는 때가 더 많았으며 지난해 11월에는 중국과의 정상회담을 병실에서 하기도 했다.앞서 10월 우즈베키스탄을 방문할 당시 환영행사 도중 중심을 잃고 넘어질 뻔 해 전세계 언론의 초점이 됐다. 국제사회의 관심은 지난해 말 옐친의 악화된 병세와 정치적 무능력으로 ‘포스트 옐친’ 구도에 모아져 왔다.그러나 그는 이번 총리 해임으로 또한번자신의 존재를 과시했다. 그가 직접 내년의 대선에 다시 출마할지,아니면 후계자를 지명할지는 미지수.그러나 어쨋든 모스크바 정국은 불안하게 요동하면서 대선을 향해 돌진하고 있다.매번 대선에서 ‘킹 메이커’역할을 해오다 프리마코프에 의해 CIS(독립국가연합)사무총장 직에서 해임된 러시아 정계 막후 실력자 보리스 베레조프스키가 다시 부각되고 있다.또 유리 류츠코프 모스크바 시장,그리고 국가안보회의 서기 출신의 강력한 카리스마를 자랑하는 알렉산드르 레베드 크라스노야르스크 주지사,의회를 주도하는 공산당의 겐나디 주가노프 당수 등대권 후보자들이 러시아 정국을 일면 이끌고 일면 흔들어대는 인물들이다. 김수정기자 cr
  • 새로운 5·16 감회에 젖은 JP

    - “朴전대통령 기념사업 잘된일”, 민족사 정체성확립 계기 기대 16일 오전 11시45분.국립현충원의 고(故) 박정희(朴正熙)대통령 묘소에 묵념하는 김종필(金鍾泌)국무총리는 이전의 어떤 5·16때보다 깊은 감회를 느낀 것 같다.국민의 정부에서 김총리가 생각하는 방향의 ‘역사 바로세우기’가 이뤄져야 한다는 신념과,또 그렇게 이뤄지고 있다는 안도감이 교차하는듯했다. 김총리는 박대통령 묘소에 참배하기 앞서 라마다 르네상스 호텔에서 열린제34회 5·16민족상 시상식에서 감회의 일단을 표현했다. 김총리는 “이 땅에 누천년의 빈곤을 몰아내고 조국을 근대화한 어른의 위업을 부인하고는 오늘의 우리가 있을 수 없다”고 말하고 “김대중(金大中)대통령께서 대구 방문길에 박정희 전 대통령 기념사업을 정부차원에서 적극지원하겠다고 한 것은 만시지탄이 있지만 매우 잘된 일”이라고 강조했다. 김총리는 특히 “정치적으로 계속 반대입장에 서 있었던 김대통령이 박전대통령 기념사업을 공식 제기하게 돼서 더욱 다행스러운 일”이라면서 “범민족적인 호응속에 기념사업이 진행돼 우리 민족사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고 강조했다. 김총리는 기(起)-승(承)-전(轉)-결(結)의 역사의식을 갖고 있다고 한 측근은 말했다.김총리에게 5·16은 우리나라 근대화 과정에서 ‘기’의 의미를갖는다는 것.그리고 김총리 본인이 ‘결’을 맺고자 소망하는 것으로 알려진다.내각제 개헌 추진도 그런 연장선상에 있다고 한다. 5·16은 박전대통령 통치기간에는 ‘혁명’으로 불렸다.그러나 전두환(全斗煥)·노태우(盧泰愚)전대통령은 5·16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그저 5·16으로 호칭됐다.김영삼(金泳三)전대통령은 “5·16은 쿠데타적 사건”이라고 규정했다.시대에 따라 평가도 달라진 것이다. 김대중대통령은 5·16의 성격에 대해 직접적인 언급을 하지 않았다.그러나김대통령의 박전대통령 평가에 5·16에 대한 평가도 포함돼 있는 것으로 김총리측은 이해하고 있다. 이도운기자 dawn@
  • 총리 전격경질이후 러시아 정국 갈수록 안개속

    12일 예브게니 프리마코프총리의 전격 경질로 러시아정국이 극도의 혼미상태로 빠져들고 있다.여기다 국가 두마(하원)가 13일 보리스 옐친대통령에 대한 탄핵 심의를 시작함에 따라 러정국은 일촉즉발의 위기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옐친대통령은 현재 두마,행정부,군부내에 믿을만한 지지세력이 거의 전무하다.고립무원의 상태에서 탄핵정국을 맞고 있는 것이다. 총리경질은 옐친대통령이 탄핵위기에 내몰리며 의회와 크렘린내 정적들에대해 쓸 수 있는 유일한 카드였다는 게 크렘린 관측통들의 분석이다. 옐친의 인기는 현재 바닥권.그러나 특유의 용병술로 크렘린안에는 ‘예스맨’들로 가득하다.옐친 용병술의 가장 큰 특징은 절대로 2인자를 용납치 않는다는 것.프리마코프총리도 한때 옐친의 절대적인 신임을 누렸으나 결국은전임 총리들과 같은 운명을 겪었다. 크렘린내 옐친 측근들은 하나 같이 독자적인 정치색이 없다. 두마(의회)로 가면 사정은 달라진다.원내 제1당은 450명의 의석 중 공산당,자유민주당,농민당 등 좌익계 의석수를 합하면 3분의 2선에육박한다.겐나디 셀레즈뇨프(공산당)두마의장과 겐나디 주가노프 공산당 당수,블라디미르 지리노프스키 자유민주당 당수 등이 탄핵을 주도하는 반옐친 선봉장들이다. 야블로코당의 그리고리 야블린스키는 비교적 합리적인 시장경제주의자이지만 그렇다고 옐친의 우군도 아니다.차기에 대한 야심 때문이다. 장외에서 옐친의 가장 강력한 지원세력은 유리 루슈코프 모스크바 시장.하지만 그 역시 차기 욕심 때문에 옐친과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려고 한다.안보회의 서기로 옐친의 오른팔 노릇을 하다가 경질된 뒤 반옐친으로 돌아선알렉산드르 레베드 크라스노야르스크 주지사도 옐친의 장외 주적 중 한명. 현재 옐친대통령에게 남은 것은 헌법에 명시된 대통령의 막강한 권한뿐.의회가 탄핵을 결정할 경우와 총리인준을 3번 거부할 경우 여기에 맞서 의회를 해산할 수 있는 권한이 보장돼 있다. 따라서 양자가 정면대결로 치달을 경우 헌정중단으로 인한 극도의 혼란이초래될 것이고 결국은 91년 여름의 쿠데타같은 파국을 피할 수 없다는 데 사태의 심각성이 있다. 김수정기자 crystal@
  • [제2공화국과 張勉](23)-지지부진한 혁명과업(下)

    장면(張勉)정부에게 부정축재자 처벌은 정치비리 사건 처리보다 더욱 어려운 일이었다.국민감정을 만족시키려면 ‘부정축재’범위를 넓혀 주요 기업인들을 대부분 구속하고 그들의 재산을 국고에 환수하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경제활동을 크게 위축시켜 가뜩이나 어려운 국민생활에 악영향을 끼칠 것은 불보듯 뻔한 사실이었다.더욱이 국정지표의 으뜸으로 ‘경제제일주의’를 내건 장면정부로서는 민간경제를 파국으로 몰고갈 수도 있는 정책을 섣불리 시행하기가 어려웠다. ‘국민감정을 따른다’는 명분과 ‘경제건설의 토대를 망칠 수 없다’는 당위 사이에서 그 수위를 어떻게 조절할 것인가가 장면정부의 고민이었다.그고민은,장면이 총리로 등극해 처음 민의원에서 밝힌 시정방침에도 그대로 드러나 있다. 장면은 우선 “구정권 하에서 부정·불법 축재한 자를 처단할 것은 물론이나 사업과 경제를 마비시키지 아니하는 적절한 한도는 있어야 한다”고 전제했다.이어 과도정부가 조세범처벌법에 따라 적발한 46개사,23명을 계속 수사하는 한편 추가조사도 벌이겠다면서 “증거를 포착하기 곤란한 만큼 국민의 협조가 있기를 바란다”고 당부했다. 부정축재자에 대한 국민의 분노는 정치비리 관련자에 대한 것 못지않았다.이승만(李承晩)이 하야한 지 10여일만인 1960년 5월10일 서울 파고다공원에서“부정축재자의 재산을 환수하라”는 데모가 일어날 정도였다. 반면 부정축재의 범위를 정하고 범죄를 입증할 증거를 확보하기는 정치사건에 비해 훨씬 힘들었다.게다가 허정(許政)과도정부가 부정축재자 처리를 ▲징역형보다는 재산형(財産刑)으로 ▲그것도 현금이 아니라 주식으로 헌납하도록 테두리를 정한 터여서 운신의 폭은 좁았다. 장면정부가 출범한 나흘 뒤인 8월27일 참의원(상원)은 ‘부정축재자 조사특별위원회 설치에 관한 결의안’을 통과시켰다.31일에는 정부가 부정축재한 46개 업체에 벌과금 87억환,추징금 109억환을 통고했다. 장면정부는 정부대로,국회는 국회대로 추진하던 부정축재자 처벌은 정치비리 관련자 처리와 맞물려 소급입법 대상으로 넘어간다.개정헌법을 바탕으로 부정선거관련자 처벌법,반민주행위자 공민권제한법,특별재판소 및 특별검찰청조직법은 60년 말에 속속 제정되지만 부정축재 특별처리법만은 해를 넘긴다. ‘부정축재처벌법’제정이 늦어진 까닭은 장면정부의 경제진흥책과 깊은 관련이 있었다.61년 봄 국토건설사업을 시작해야 했고 경제개발5개년계획(1962∼66년)을 거의 성안(成案)한 입장에서 민간경제계를 ‘죽일지도 모르는’모험을 감행할 수는 없었다.더욱이 장면정부는 60년 12월5일부터 닷새동안 ‘종합경제회의’를 열어 경제개발을 해나가는 데 민간경제계와 보조를 맞추기로 합의한 상태였다. ‘부정축재처벌법’안은 61년 2월9일 민의원을 통과한다.60년 4월26일을 기준으로 그 5∼8년전까지를 조사대상 기간으로 정해 ▲지위 또는 권력을 이용해 부정한 방법으로 축재한 자 ▲‘3·15부정선거’에 1천만환 이상 정치자금을 제공한 자 ▲지난 5년간 연 1천만환 이상 탈세한 자를 처벌대상으로 삼았다.경쟁입찰에서 담합했거나 재산을 해외도피한 자,뇌물수수로 연 600만환 이상 이득을 취한 공무원도 부정축재자에 포함시켰다.경제계는 예상을 뛰어넘는 엄격한 기준에 큰 충격을 받았다.법안대로라면 처벌받을 사람이 5만7,000여명이나 되는 것으로 추산됐다.61년 초 결성된 한국경제협의회(전경련의 전신)는 대한상의·무역협회·방직협회·건설협회와 뜻을 모아 법안에 반대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기로 했다. 3월4일 몇몇 일간지에 발표한 경제 5단체 성명서의 뼈대는 다음과 같다.“이 법안이 그대로 참의원을 통과하면 사회에 일대 혼란을 불러들여 기업인의손발을 묶을 것이다.기업활동을 가로막고 민족자본을 흐트러뜨리며 나아가분열을 조장하는 이 법안을 제정하지 않기를 충심으로 진언한다.”이 성명서는 사회에 큰 파문을 불러일으켰다.그 안에 “북괴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 남한의 경제 번영이라면,이 법안은 북괴에게 일석이조의 효과를 약속하는 것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는 구절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민의원이 곧바로 특별조사위원회를 구성해 경제협의회 대표를 출석시키는 등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성명서 해프닝’은 경제5단체가 해명서를 신문에 싣는 것으로 결말짓지만 그 과정에서 정치권은 “중소상공인 5만여명이 피의자로 묶인다면 경제진흥에 결정적인 악영향을 줄 것”이라는 경제계 주장을 어느정도 받아들였다. 그 결과는 참의원에서의 법안 심의에 반영됐다.민의원에서 통과된 법안 내용을 참의원이 대폭 완화한 것이다.수정안은 처벌대상을 ▲3·15선거에서 자유당에 자진해서 3,000만환 이상을 제공한 자 ▲공무원 및 정당인으로서 부정하게 재산상 이득을 취한 자로 제한했다.피의자는 5만7,000여명에서 600여명으로 크게 줄었다. 참의원의 수정안은 4월12일 민의원에서 그대로 통과됐다.재석 163석 가운데찬성 138표,반대 25표였다.장면총리는 각료를 모두 대동하고 표결 현장에 참석해 재계를 지원했다. 국민감정을 만족시키느냐,아니면 경제진흥을 위해 정치에 연루된 경제인들을 용서하느냐 라는 갈림길에서 장면정부는 후자를 택했다.경제발전이야말로시대적인 사명이라고 인식했기 때문이다.법에 따른 부정축재처리위원회(위원장 沈宗錫 참의원 의원)는 5월4일 가동됐다.위원회는 처벌 대상자에게 5월16일까지 자진신고하라고 공표했는데 그 마감일에 쿠데타가 터졌다. 군사정권은 61년 12월20일 기업체 30개사에 494억여환,공무원 32명에 75억환의 부정축재분을 환수한다고 최종 통보했다.이어 62년 1월23일 백인엽(白仁燁)예비역 육군중장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하는 등 부정축재자 12명에게 실형을 선고했다. *張총리“소급입법 위헌”첫 지적 장경순(張慶淳·73)씨는 민주당 신파 출신으로 5대 국회에 진출,재경분과위원회에서 활약했다.김영선(金永善)재무장관의 추천으로 중앙정계에 데뷔한그는 장면(張勉)정부의 경제관련 정책을 가까이서,두루 지켜보았다. “부정축재자 처리를 민의원에서는 재경분과위에서 맡았습니다.민주당 신파건 구파건 구분없이 엄중 처벌해야 한다는 데는 뜻이 같았지요.하지만 장면총리는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장 전의원은,민의원이 ‘부정축재자 처벌법’제정을 놓고 갑론을박하던 어느날 밤 장총리가 신파 간부 15명을 중앙청으로 불러 회의를 열었다고 했다.한명씩 돌아가며 발언한 뒤 장총리는 “특별법을 만드는 것은 좋다.그러나 제정 후에 위헌 판정을 받으면 어쩌겠느냐”고 되물었다고 한다. 그때만 해도 ‘소급입법은 위헌이므로 개헌을 거쳐야 가능하다’는 생각들을 못했기 때문에 장총리의 말에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는 것.그는 “장총리는 특별법 제정에 끝까지 신중을 기했지만,여론의 압력이 거센데다 윤보선(尹潽善)대통령마저 10월10일 특별담화를 발표해 독촉하는 바람에 소급법을추진할 수밖에 없었다”고 밝혔다. 장 전의원은 부정축재자 처벌과 관련해 민주당이 정치자금을 받았다는 말들이 나돌았으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고 해명했다.만약 정치자금을 불법으로 챙겼다면 5·16쿠데타 후에 무사했겠느냐는 설명이다. 다만 몇몇 의원이 개인적으로 욕심을 낸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가령 민주당 이(李)모 의원이 나서 기업인들을 위협하는 발언을 하면 주위에서 “또낙전지변(落錢之辯=돈 달라는 말)이군”하며 혀를 차곤 했다고 기억했다. 장 전의원은 “장면정부가 몇년만 계속했어도 우리 경제가 훨씬 빨리,그리고 정경유착·빈부격차와 같은 부작용 없이 발전했을 것”이라며여러가지 근거를 들었다. 먼저 장총리를 비롯해 경제각료들이 모두 열의에 차 있었음을 꼽았다.“김영선장관 집으로 전화할 때는 새벽 5시 전에 해야 했다.그 시각이 지나면 이미 출근하고 없었다.참 부지런하고 청빈한 분들이었다”고 아쉬워했다. 국회 분위기도 마찬가지여서,의원 대부분은 새로 태어나야 한다는 각오 아래 소장층은 건설복을 입고다니며 새생활운동을 실천했다고 회고했다.또 국정감사를 앞두고는 의원들이 “일체의 향응에 응하지 않겠다”는 결의도 했다는 것. “서민생활 안정에 주력해 세법도 많이 개정했다”고 밝힌 장 전의원은 자신이 발의해 근로소득세 면세점을 1만6,500환에서 3만환으로 높였다고 공개했다.“하루벌이가 1달러(당시 달러당 1,300환)도 안되는 근로자에게서 소득세를 받는 것은 말도 안된다”고 주장해 통과시켰다고 한다. 그는 5·16쿠데타후 민주당 재건에 참여,6대 국회에 출마했지만 낙선했다.이후에도 “당복(黨福)이 없어(당을 잘못 선택했다는 뜻)” 낙선을 거듭하다“가족을 먹여살리려고” 정치를 포기하고 사업가로 돌아섰다.지금은 여권전직의원들의 모임인 ‘일오회(一五會)’회장으로 있다. “장면정부를 무능·부패하다고 하지만 그것은 악선전일 뿐”이라고 잘라말한 장 전의원은 “장면정부때 데모하다가 죽거나 다친 사람 있느냐”“그때경제비리가 무엇이 있었냐”고 거듭 반문하면서 “데모가 전투처럼 변한 거나 대형 경제사건이 터진 것도 모두 박정희(朴正熙)정권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강조했다.이용원 기자
  • [사설] 국가중요시설 보안 강화해야

    영화 ‘쉬리’에서는 북한 특수공작원들이 우리 국가 안보상 중요한 시설에 깊숙이 침투한다.11일 발생한 MBC TV 방송 중단사태는 영화에서나 일어날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던 그런 일이 실제로도 가능하리라는 두려움을 일깨운다.무장도 하지 않은 민간인들에 의해 방송의 심장부인 주조정실이 너무도쉽게 점거당하는 어이없는 사태가 벌어졌기 때문이다. 전쟁이나 쿠데타가 일어났을 때 상대편의 방송사를 점령하는 쪽이 그 싸움에서 결정적인 우위를 차지하게 된다.따라서 어느 나라에서나 방송사는 우선적인 시설 보호 대상이 된다.MBC도 대통령 훈령 28호에 따라 400여개의 국가 중요시설 가운데 하나로 분류돼 있다.국가 중요시설은 나름대로 보안규정과 경비체제를 갖추게 돼 있음에도 MBC 사태의 경우 그런 것들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방송사 자체 보안도 허술했고 경찰도 너무 안이하게 대처했다. 주조정실 출입문의 2중 차단장치 설치,출입자 신원확인 등을 제대로 하지않은 방송사도 문제지만 이번 사건에서 보여준 경찰의 대처능력은 실망스러움을 넘어 분노를 느끼게 한다.방송 시작 전 이미 만민중앙교회 신도들의 항의시위가 있을 것 같다는 자체 정보보고와 방송사의 경찰배치 요청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사전조치를 취하지 않은데다 난입 신고를 받고도 늑장 출동해 초동 수습에 실패한 것은 중대한 직무유기다. 물론 방송사나 경찰이나 방송중단 사고까지 나리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설마가 사람 잡은 것이다.그러나 만일 간첩이나 불순세력의 방송장악 기도였다면 어떤 결과가 벌어졌을지를 생각해 보면 그런 자세가 얼마나 무책임한 것인지 명백해진다. 다시는 이런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방송중단 경위를 철저히 조사하고보안체계와 관련,책임을 다하지 못한 관계자들을 엄중문책해야 한다.아울러모든 국가 중요시설에 대한 총체적인 보안점검을 다시 한번 실시하고 경각심을 높여야 할 것이다.이번 사태는 우리 사회 전체의 기강이 흔들리고 있다는 한 신호로 볼 수도 있다. 사실 지난해 국회 국정감사에서 공항·항만·연구소 등 국가 중요시설에 대한 경비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 바 있고 지난달부터이달까지 정부 산하 기관에 대한 국가 보안관리체제 일제점검이 실시되기도했다.국회의 경고가 무시되지 않고 정부 합동 점검이 형식적으로 진행되지않았다면 MBC 방송 중단사태는 미연에 방지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더 이상실책이 되풀이돼서는 안된다.
  • [제2공화국과 張勉](21)對日외교 전략

    장면(張勉)정부가 넘겨받은 해묵은 숙제 가운데 하나가 일본과의 국교정상화이다.앞서 집권한 이승만(李承晩)은 국시인 ‘반공’ 못잖게 ‘배일(排日)’을 강조했고 국민감정도 일본에는 아직 적대적이었다. 이승만정권 때 한·일회담은 모두 4차례 열렸다.1951년 10월20일 도쿄에서1차회담을 가진 것을 비롯해 53년 4월과 10월 2·3차 회담이 이어졌다.그러나 3차회담에서 일본대표 구보타(久保田)가 “일본의 지배는 한국측에도 유익했다”는 망언을 해 결렬된다.이후 4년여 동안 중단됐다가 58년 4월 4차회담에 들어가지만 일본이 59년 2월 재일교포 북송을 시작하는 바람에 다시 흐지부지된다. 이같은 상태에서 장면정부는 한·일 국교정상화에 적극적으로 임했다.장 총리는 민의원 첫 시정연설에서 한·일관계를 정상화하기 위해 ▲양국 회담을재개하고 ▲재일교포에의 경제적 지원,교육지도를 강화하며 ▲교포 자본을국내에 도입하는 길을 열겠다는 방침을 천명했다.이어 정일형(鄭一亨)외무장관은 “외교관계 정상화에 필요하다면 총리 또는 외무장관 회담을열 수 있다”고 공표했다. 일본도 즉시 반응을 보였다.장면내각이 출범한 지 열흘 남짓한 60년 9월6일 고사카(小坂)외무장관 일행을 친선사절단으로 파견했다.일본 고위 관리가정식으로 한국땅을 밟기는 일제가 쫓겨간 뒤 처음이었다. 고사카가 방한한 날 오후 양국 외무장관은 회담을 가져 하루빨리 한·일회담을 열기로 합의한다.고사카 일행은 불과 22시간 머물고 돌아갔지만 양국정부가 ‘선린우호’ 방침을 서로 확인하기에는 충분했다. 이 시기에 한·일회담이 주요 이슈로 떠오른 까닭은 한국·일본 그리고 미국의 이해가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당시 국제정세를 보면 일본은 55∼56년역사상 최고의 고도성장을 이룩한 뒤 상품 및 자본의 해외진출을 노릴 때였다. 미국도 60년 1월 미·일 안보조약을 개정,일본에 동북아 반공망 구축에 한몫을 맡기려 했으므로 한·일 국교정상화를 줄곧 유도했다.이승만정권 때인60년 3월 허터 미 국무장관은 양유찬(梁裕燦)주미대사를 만나 한·일관계에우려를 표명하는 등 직접 관계개선을 촉구할 정도였다. 장면정부도양국 국교정상화가 꼭 필요했다.‘경제 제일주의’를 추진할 돈이 없었기 때문이다.일본과 국교를 맺어 식민통치에 따른 청구권을 해결하고 국교 수립 이후로 미룬 민간자본 유치도 실현해야 했다.남북이 대치한 상태에서 등 뒤에 있는 일본을 자유우방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사정도 있었다. 양국은 외무장관 회담에서 결정한 5차 회의의 예비회담을 60년 10월25일 도쿄에서 시작했다.한국측 수석대표는 1차회담에도 참석한 유진오(兪鎭午)전고려대총장이 맡았고 엄요섭(嚴堯燮)주일공사,유창순(劉彰順)한국은행부총재 등이 대표단에 동참했다. 한국은 청구권문제에 초점을 맞춰 ‘청구권 8개 항목’을 내놓았다.하지만일본은 장면정부를 애태우려는 듯 개막 다음날 ‘교포 북송’문제를 핑계로북한과 별도의 회담을 시작했다.12월19일에는 이케다(池田)총리가 “한국에정부가 둘 있다는 인식 아래 한·일회담에 임한다”고 국회에서 공표했다. 일본이 ‘북한카드’를 갖고 지연작전을 쓴 탓에 회담은 지지부진할 수밖에 없었다.한편 일본은 ‘장면정부는 아직안정되지 않았다’고 판단해 회담진행을 의도적으로 늦춘 면도 있다. 61년 초 일본이 경제사절단을 보내겠다고 통보하자 장면정부는 환영위원회를 구성하기로 한다.그러나 이는 엄청난 반발을 불러온다.정부·여당 연석회의가 ‘국교정상화가 되기 전에라도 일본의 민간차관과 재일교포 재산의 반입을 허용한다’고 결정한 1월22일 밖에서는 ‘반일투쟁위원회’(위원장 劉錫鉉)가 결성된다. 김병로(金炳魯) 변영태(卞榮泰) 등 60여명이 참여한 이 위원회는 “국교수립 전에 경제교류를 하는 것과 일본 경제사절단의 내한을 반대한다”면서 실력저지를 선언한다.신민당(민주당 구파)도 다음날 “장면정부의 대일 외교에 반대하는 범국민운동도 불사하겠다”고 성명을 발표한다.환영위원회는 취소되고 일본 경제사절단의 내한도 무산됐다. 4월26일 정일형 외무장관이 위싱턴에서 러스크 미 국무장관과 회담하고 “한·일 국교정상화는 양국에 이익일 뿐아니라 아시아의 평화와 안전을 도모한다”는 내용을 포함한 공동성명을 발표한다.이어 5월6일 일본에서 노다(野田)를 단장으로 하고 외무부 아시아국장이 수행한 일본 의원단이 방한한다. 사절단이 일본으로 돌아가 정계·사회에 “장면정부는 매우 안정돼 있다”고 보고하고 다닐 무렵 ‘5·16쿠데타’가 발생한다. 박정희(朴正熙)정권은 4년 후인 65년 6월22일 한·일기본조약을 조인한다. 주 관심사인 청구권 금액은 ‘무상 3억,정부차관 2억,민간차관 3억달러’로결정났다.64년의 ‘6·3사태’라는 치열한 국민 저항을 억누르고 얻은 결과였다.박정권의 논리 또한 ‘경제건설을 위한 재원을 확보하려면 국교정상화가 시급하다’는 것이었다. 장면정부에서 일한 인사들 누구나가 아쉬워하는 대목이 청구권문제다.장면정부는 한·일회담 성공을 눈앞에 두었고 그때 타결됐더라면 최소한 청구권금액만큼은 훨씬 늘어났으리라는 믿음 때문이다.박정희의 한·일회담 강행을 반대해 의원직을 사퇴한 정일형의 회고록 중 한 부분이다. “외무장관 당시 우리가 12억달러를 요구하고 일본이 8억달러를 주장해 타결을 못보았는데,이제 3억달러에 낙착됐다.이 하나만으로도 박정권이 얼마나 한·일회담을 졸속·저자세로 진행했는가를 단적으로 알 수 있다.” 장면정부는 한·일 국교를 이뤄 청구권을 해결하고 이를 바탕으로 경제개발5개년계획,국토건설사업을 완수하려고 했다.시간이 조금 더 있었다면 그들의 주장대로 민주화와 경제개발을 동시에 이루었을지도 모른다.이러한 가정을무시하더라도 장면정부가 최소한 ‘6·3사태’와 같은 폭압을 국민에게 저지르지 않았음은 평가받아야 마땅하다./이용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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