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쿠데타
    2026-08-09
    검색기록 지우기
  • 고성
    2026-08-09
    검색기록 지우기
  • 저소득
    2026-08-09
    검색기록 지우기
  • 글씨
    2026-08-09
    검색기록 지우기
  • 긴장
    2026-08-09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5,656
  • [기고] 언론인인가 정상배인가

    역사는 지난 61년 5·16 군사 쿠데타 이후 32년간이라는 정치군인의 장기집권을 ‘언론의 탓’이라고 말할 것 같다.권력화한 언론이 정치권력과 유착관계를 유지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말이다.언론이 군사정권의 나팔수를 자임하고 나서 장기집권을 위한 도구 노릇을 했던 것은 사실이다.독재정권의하수인이 되어버린 언론은 시민사회에서 분출하는 민주화 요구를 묵살했고,때로는 매도함으로써 군사정권의 영속화에 기여했던 것이다. 87년 6월의 민주항쟁은 시민사회의 발달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시민사회가 전제적 통치체제에 대항하여 민주체제를 회복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그렇다.국민적 합의에 근거하여 대통령 직선제를 도출함으로써 시민사회를 억압하던 권력체제를 해체하는 분기점을 맞았던 것이다. 그런데 87년 민주항쟁 이후 세차례에 걸쳐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언론의보도행태는 시민사회의 발달과 역행하는 모습을 보여 왔다.사실을 왜곡하거나 변질시키는 편파보도로 특정후보를 지지했다.심지어 여론조사를 왜곡함으로써 가공의 여론을 조성하는 데도 주저하지 않았다.정치권력이 야당으로 이동하는 사태를 막으려는 의도에서 그같은 편파보도를 일삼았을 것이다.그것은 언론이 기존의 정치권력과의 밀착관계를 유지함으로써 그동안 누려온 부당이득과 특권의식을 계속 향유함은 물론,권력창출에 기여한 대가를 노린 정치적 계략에서 나왔을 것이다. 지난 92년 대선에서 어느 연합통신 기자는 ‘기자사회의 성향보고서’를 작성하여 김영삼 후보에게 넘겨줬다.또 97년 대선에서는 중앙일보 기자가 이회창 후보에게 ‘전략보고서’라는 것을 만들어 줬지만 작성자는 신분을 온전히 유지하면서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탈세사건과 관련한 최근 중앙일보 사태는 언론탄압이라는 성격으로 변질되더니 언론대책 문건이라는 것이 돌출됐다.발설자는 작성자가 여권실세라고지목했는데 엉뚱하게도 일선 기자가 그짓을 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그 문건의 내용은 음모적이고 공작적이어서 언론장악을 기도하라는 권고를 담고 있다.그런데 그 뜻을 모를 리 없는 그 기자는 다른 기자들을 모아 놓고 언론개혁을 위해서 그랬다고 말했다. 전달자로 밝혀진 평화방송 기자도 언론상황과 정치현실이 안타까워 그랬다고 말했다.그는 여야의 실력자 사이를 줄타기 하듯이 오가며 한쪽에서는 훔치고 다른쪽에서는 거금 1,000만원을 받고 장물 팔듯이 넘겼다고 한다.여기서 돈을 일찍 받고 늦게 받은 것이 중요한 사안이 될 수 있을까.발설자도 접수자도 우연인지 안기부 고위간부 출신이다.그래서 그런지 낮말과 밤말만 다른 것이 아니라 시간마다 말이 다르다. 이쯤 되면 언론사가 기자를 고용해서 정치권에 출입시키는 것인지,아니면정치권이 기자를 언론사에 파견하는지 알 길이 없다.그래서인지 기자들이 영화에서나 봄직한 2중첩자 노릇을 하는 듯하다.정치기사는 거의 인물중심이고가십성 기사들로 꽉차며 그것도 친소(親疎)에 따라 크기도 달라진다. 언론인인지,정상배인지 알 길이 없다. 그들은 목도했다.70년대 초반의 자유언론실천운동,80년의 대량숙청사태,90년대 초반의 언론노조운동을.언론의 정도를 말하면 고난과 형극의 길밖에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있는 것이다.또 그들은 목도했다.정치권력과 결탁하면장·차관도 되고 청와대에도 진출하고 의사당에서도 사자후를 터뜨릴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어디 기자뿐인가.사주들의 각종 불법·탈법행위도 잇따라 터지고 있다.탈세사건,해외도박사건,폭력적 노동탄압,경영권 전횡 등 말이다.특권의식에 젖은탓인지 이들은 정당한 법집행에마저 저항한다. 그래서 기자들도 물들어 도덕의식이 마비된 듯 부끄러움을 잊은 것 같다. 도둑이 던져준 고깃덩어리에 눈이 멀었는지 파수견들은 짖을 줄 모른다.이제 파수견을 지키는 파수견이 나와야 한다.그것은 시민사회의 몫이다.이제시민사회가 감시자로 나서야 한다.늦었지만 언론도 신뢰의 위기에 봉착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시민사회는 올바른 기자들의 공정보도,진실보도를갈구하고 있다. [김영호 언론개혁시민연대 신문개혁특별위원장]
  • 가요계‘노장들의 쿠데타’가능할까

    10대 가수들이 판치는 가요계에서 진지한 음악세계를 열어가는 노익장을 만날 수는 없을까. 라틴록의 황제로 추앙받으며 70년대를 풍미한 카를로스 산타나가 내놓은 ‘슈퍼 내추럴’음반의 싱글 ‘스무드’가 빌보드차트(10월27일자)1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그의 나이 57세.이밖에도 톰 존스(59),폴 매카트니·제프 벡(57),에릭 클랩튼(54),데이비드 보위(52) 등이 노익장을 발휘하고 있다. 산타나 앨범에 쏟아지는 관심과 기대는 단지 사라진 것으로 치부하던 노장의 컴백에 대한 경의를 뛰어넘는다.그가 현재적 음악경향과 조류에 보여주는대단한 흡수력에 보내는 경의이고 평가이기 때문이다. 화려한 분장으로 환상적인 이미지를 강조하던 70년대 글램록과 80년대 테크노로 세기말을 예감했던 데이비드 보위 등 나이들수록 변화와 진보의 최선두에 서왔던 노력을 평가하는 것이다.그러나 우리의 인기차트에는 30대 가수를 찾아보기조차 힘든 게 현실이다.KBS-2TV의 ‘파워인터뷰’에 출연한 이현우에게 ‘대기실에서 후배들 마주치면 쑥스럽지 않느냐’고 물어볼 정도다. 무엇보다 음악산업의 기형적 구조가 문제로 지적된다.10대 위주로 재편된 시장은 동세대간의 결속력에 반비례해 40·50대는 말할 것도 없고 20·30대를음악시장에서 축출하는 기능을 수행했다.10대들이 열광하는 H.O.T와 조성모가 앨범판매 100만장을 넘어섰지만 다른 뮤지션들은 철저히 시장에서 소외돼있다.오죽하면 2만장 팔리면 대박이라는 평가가 나올까. 컬럼니스트 박준흠은 뮤지션의 확고한 의지 결핍에 책임이 있다고 잘라 말한다.언제까지 시장 탓만 하고 노화를 극복할 노력을 하지 않은 채 세상에 함몰되어 가느냐는 질타이다. 30대가 넘어가면 사업이나 한적한 시골에 내려가 카페나 해볼까 하는 유혹과 방향전환을 권유받는다.물론 독특한 나름의 의미는 있지만 새 세계에 대한갈망을 담기엔 역부족이다. 음반기획사 ‘2clips’의 임기태 실장은 “70년대 초 전세계적으로 일었던플라워 무브먼트가 우리나라에선 박정희정권의 말살정책에 의해 뿌리 뽑혔고 90년대 초 부활 조짐을 보이던 청년문화운동이 서태지를 출발점으로 한 댄스음악의출현으로 명맥이 끊긴 데 원인이 있다”고 지적한다.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음악환경 전체의 문제라는 것이다. 이런 점에 비추어볼 때 ‘겨울비’의 조동진이 헌정음반을 제작 중이고 ‘10대에게 바치는 음반’을 기획 중이라는 소식은 반갑기 그지 없다. 펑크,테크노 등으로 옮겨가며 우리 음악의 나아길 길을 개척하고 있는 달파란(강기영)의 편력도 돋보인다.박준흠은 ‘공무도하가’등으로 다양한 음악적 실험을 선도하는 ‘담다디’의 이상은에 대해서도 주목할 가치가 있다고권한다. 임병선기자 bsnim@
  • 파키스탄 군사정부 공식출범

    [ 이슬라마바드 AFP AP 연합] 파키스탄 군부 지도자 페르베즈 무샤라프 육군참모총장은 25일 쿠데타 이후 국정을 이끌어나갈 7인 국가안보회의 위원과내각 핵심 각료를 임명해 군사정부를 공식 출범시켰다. 무샤라프 총장은 이날 국가안보회의 위원으로 샤리푸딘 피르자다 전 회교회의기구 사무총장,무하메드 야쿠브 파키스탄 중앙은행 총재,아티야 이나야툴라 전 가족계획 자문관(여),고위 관료출신인 임티아즈 샤히브자다 등 4명의민간 전문가를 임명했다.이들은 각각 사법,재정,내정,외교 분야를 담당한다. 이들은 과거 80년대 지아 울 하크가 이끈 군사정부 아래서 중책을 맡았던 사람들로 군부쪽에 기울어져 있는 인사들이다.
  • “박정희기념관 건립 반대”역사학자모임 회견

    ‘박정희 기념관 건립 및 국고지원을 반대하는 전국 역사학자 모임’(공동대표 姜吉遠) 소속 10여명은 25일 오전 10시 서울 중구 정동 세실레스토랑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박정희기념관 대신 전직 대통령의 역사자료를 전시하는‘역대대통령 기록관’의 건립을 제안했다. 이들은 “정부가 지난 5월 박정희 기념관 건립 지원 방침을 밝힌 뒤 사회각계 각층으로부터 반대의견이 잇따랐지만 오히려 구체적으로 추진되고 있다”며 이같이 밝혔다.이들은 역사학 관련 교수,교사,강사 등 1,100명의 서명도 공개했다. 이어 오후 1시부터 연세대 동문회관에서 열린 토론회에서 조동걸(趙東杰)국민대 명예교수는 기조연설을 통해 ““아직 박대통령이 죽은 지 20년밖에 되지 않았고 일본군 복무,남로당 프락치 활동,쿠데타 등 기념해선 안될 경력이많다”면서 “기념관 건립의 명분으로 내세우는 산업화도 많은 부작용을 낳고 있는 만큼 기념할 만한 것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장택동기자 taecks@
  • 남미대륙에 ‘신좌파 바람’

    남미대륙에 신좌파 바람이 불고 있다.이른바 ‘제3의 길’.70년대와 80년대초까지 피비린내 나는 좌·우익 대립을 거친 끝에 80년대 중반 미국이 지원하는 우익세력에 정권을 넘겨 줬던 남미에 최근 좌파 집권 도미노가 일고 있다. 24일 치러진 대선에서 사회민주계 라디칼당과 좌파연합체 프레파소당의 야당연합 후보인 페르난도 델 라 루아(62)가 50.3%지지율로 압승한 아르헨티나를비롯, 이달 31일 우루과이,그리고 오는 12월10일의 칠레 대통령 선거에서 좌파 지도자들이 잇따라 집권할 기세다. 지난 73년 온건 사회주의자 살바도르 아옌데의 피살과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의 군부 쿠데타,그리고 뒤이어 학정으로 오명을 날린 칠레에서는 좌파 투사리카르도 라고스가 대권 탈환을 목전에 두고 있다.사회주의당 출신인 그는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의 정통 후계자.소련대사로 부임 중 피노체트 쿠데타가 발생,그대로 망명투쟁을 벌인 대표적 투사로 기독민주당의 10년 집권을무너뜨릴 것이 확실시된다. 우루과이 범좌파전선 대선 후보로 나선 타바레 바스케스 전 몬테비데오 시장도 여론조사에서 줄곧 지지도 1위를 고수하고 있다.지지도가 40%를 훨씬상회,11월 결선투표까지 가지 않을 것이란 전망이 나올 정도로 압도적인 인기를 얻고 있다. 대권을 잡지는 않았지만 베네수엘라 볼리비아 등에서도 좌파세력이 연립정권에 적극적으로 참여,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엘살바도르 등에서는 지방자치단체에서 좌파들의 활약이 눈부시다. 남미대륙에서 좌파세력 부상의 첫번째 원인은 만성적인 경제침체와 20%에육박하는 실업률,만연하는 집권층의 부정 부패,심각한 빈부격차에 국민들이등을 돌린데 있다.더 큰 핵심은 냉전종식 이후 치열한 이념대결 구도가 사라진 배경속에 남미 사회주의 지도자들이 체 게바라나 카스트로식의 교조주의적 혁명투쟁이념에서 탈피해 다원주의를 수용,정치적 대안으로 내세운 결과다. 유럽 사회주의자들이 선택한 ‘제3의 길’과 일맥상통한 이들의 전략은 우익정권 지원을 포기한 미국의 대외정책 변화와 맞물려 유권자들을 파고 들고 있다.라고스 후보도 “투자 저축 경제성장에 영향을 주지않으면서빈부격차를 줄이는 사회를 만들겠다”는 것으로 현실수용적인 사회운동론을 주창하고있다. 마약 밀매 등이 관련된 콜롬비아나 페루 멕시코 등은 상황이 다르지만 이같은 일련의 좌경화는 남미대륙이 하나의 경제권에 묶여 있는 상황에서 잇따라영향을 받을 것이란 전망이 지배적이다. 김수정기자 crystal@
  • [박정희 전대통령 서거 20주년](상) 집권 18년의 功·過

    역사적 인물의 평가는 시대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특히 시간이 지나도 영향력이 줄지 않는 지도자 일수록 평가의 스펙트럼은 폭넓고 다양하다.박정희(朴正熙) 전 대통령의 역사적 평가도 현재진행형이다.객관적이고 엄정한 공(功)·과(過)의 분석 토대를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26일 박 전대통령 서거 20주기를 맞아 역사에서 차지하는 그의 위상을 상·하로 나눠 살펴본다. 【 功 】 ‘박정희(朴正熙) 시대’가 우리 현대사에 남긴 긍정적 의미는 ‘한강의 기적’으로 요약된다.‘하면 된다’라는 자신감으로 유례없는 경제성장의 업적을 이룩했다는 평가다.초고속 성장의 잔영으로 사회 곳곳에 부작용을 남겼다는 지적도 있지만 박 전 대통령이 근대화에 기여한 통치자라는 사실에 물음표를 던지는 시각은 드물다.일부 ‘박정희 옹호론자’는 “위로부터의 경제개발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면서 “박 전 대통령이야말로 대한민국의운명을 바꿔 놓은,존경받아 마땅한 통치자”라고 찬사를 보낸다.이른바 ‘개발독재 불가피론’이다.박 전 대통령의 독재적 리더십은 경제 근대화의 동력(動力)을 제공한 ‘필요악’이었다는 시각이다. 특히 62년 시작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전후(戰後) 복구에 치중한 50년대를 극복하고 60년대 성장의 물꼬를 튼 경제개발 모델로 기록된다.이는 가난과 실의에 빠진 국민에게 미래의 희망과 도약의 의지를 심어준 계기였다.국가가 주도한 수출위주 공업화 정책은 이후 여러 개발도상국과 후진국의 발전 모델로 ‘차용’됐다.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 이후 우리 사회에 ‘박정희 붐’이 일고 있는 현상도 ‘박정희 시대’의 ‘경제 신화(神話)’에 기대려는 향수 때문이다. ‘박정희 시대’의 결집된 국가적 에너지는 70년대 새마을운동이란 이름으로 더욱 고조됐다.대중동원식 개발 프로그램은 일제 치하의 1930년대 조선농촌진흥운동이나 일본의 농촌경제갱생운동 등을 비롯,2차세계대전을 전후해사회주의나 자본주의 진영 곳곳에서 전개됐지만 ‘박정희 시대’의 새마을운동이 보기 드문 성공사례로 꼽힌다. 남북관계에서 ‘박정희 시대’는 ‘자주·평화·민족대단결’이라는 조국통일3대원칙에 합의한 72년의 ‘7·4남북공동성명’을 통해 새로운 전기를 만든 것으로 기억된다.‘7·4남북공동성명’은 유신체제를 유도하기 위한 정치 수단으로 활용되는 한계를 드러냈지만 6·25 이후 처음으로 남북한간 공식대화의 단초를 제공했다는 측면에서 분단 이후 통일운동사에서 간과할 수 없는 사건이다. 【 過 】 ‘박정희(朴正熙)정권’이 우리 사회에 드리운 암영(暗影)은 그의 공적(功績)을 무색케 할 정도로 짙고 투박하다.민주주의와 인권,분배 정의 등의 가치를 부정한 폐해가 ‘보릿고개의 극복’과 ‘초가지붕의 개량’이라는 ‘박정희 옹호론’을 일축하는 근거로 제시된다.박 전 대통령과 무원칙한 화해를 시도하면 자칫 민주주의의 가치와 역사의식의 왜곡을 부를 수 있다는 우려도 같은 맥락이다. 헌법을 무시한 쿠데타로 막을 올린 박정권은 영구집권을 위한 3선개헌과 유신체제,연고주의와 지역감정을 조장한 지역패권주의 등으로 우리 정치사에씻기 어려운 오점을 남겼다.경제성장 지상주의로 인한 물질만능 풍토와 정경유착 등 왜곡된경제구조도 박정권이 후세에 남긴 부채(負債)로 꼽힌다. 이를 두고 일부 ‘박정희 비판론자’는 “쿠데타로라도 정권만 잡으면 되고,돈이면 다 되는 관행을 만든 장본인이 박정희”라면서 박정권의 민중억압성과 냉전적 권위주의,비합리적 정치행태 등을 비판한다.최근 ‘박정희기념관건립과 국고지원’문제와 관련,강만길(姜萬吉)고려대·조동걸(趙東杰)국민대 명예교수 등 일부 역사학자가 토론회와 각종 모임을 통해 부당성을 강조하는 등 ‘박정희 비판론’은 우리 사회에 여전히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다.박정권의 국가중심 발전지상주의적 산업화가 90년대 말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의 주요 요인이라는 분석도 만만찮다.선단식 경영 위주의 재벌경제를기본축으로 하는 ‘박정희식(式)’ 권위주의 발전모델이 역사적 한계를 보이면서 한보부도,기아부도 등 IMF 위기를 초래했다는 것이다. 새마을운동도 ‘박정희 비판론자’에게는 비난의 대상이다.농민운동가나 비판적 지식인들은 새마을운동을 전시행정이라고 폄하한다.이들은 “박정권이장기집권체제를꾀하면서 사회적 저항을 희석시키기 위해 새마을운동을 정치적으로 이용했다”고 주장한다.유신독재를 유지하기 위해 정적(政敵)을 무자비하게 처형하거나 의문의 주검으로 몰아 넣은 대목에서는 ‘자연인 박정희’를 옹호하는 주장이 설득력을 잃는다는 지적이다. 박찬구기자 *朴정권 탄압사 ‘제3공화국’은 오랜 통치기간 만큼이나 많은 반체제인사를 만들어냈다.현대사의 한획을 그을 만한 굵직굵직한 ‘사건’과 ‘파동’,‘의혹’이 잇따랐고 그때마다 많은 사람들이 박해와 탄압을 받았다.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은 그 대표적인 표본이다.71년 7대 국회의원 선거를앞두고 의문의 교통사고를 당했고,73년 납치사건을 겪는 등 죽을 고비를 수차례를 넘겼다. 잡지 ‘사상계’를 이끌면서 정권비판에 앞장선 장준하(張俊河)선생도 마찬가지다.한·일회담과 월남파병문제 등 계속되는 비판으로 정권의 미움을 샀다.이로 인해 여러차례 구속됐고 세무사찰로 생활고를 겪어야 했다.75년 장선생은 결국 의문의 추락사로 생을 마감했다.최종길 서울대교수도 비슷한 경우다. 김영삼(金泳三)전 대통령도 ‘유신체제의 위험인물’로 꼽히면서 수난을 겪었다. 72년 유신체제 등장은 이른바 ‘민주인사’를 대량으로 양산하는 계기가 됐다.정계 뿐 아니라 학계,종교계,언론계,문인계 등 사회 각 분야에서 반민주·반독재 항거가 일어났다.74년 ‘긴급조치1호’는 이에 대한 탄압의 신호탄이었다.장준하·백기완씨를 시작으로 함석헌·안병무·문동환·계훈제씨 등수백여명의 재야인사와 교수들이 기소됐다.그해 ‘긴급조치4호’를 발동시킨 ‘민청학련사건’으로는 253명의 민주인사,학생들이 구속됐다.이철,유인태씨 등이 사형선고를 받았고 대부분 무기징역 등 중형을 선고받았다.배후조종자로 김동길교수,박형규목사,지학순주교,김지하시인 등이 기소됐다.75년 긴급조치9호가 선포되기까지 구속자는 수천명이나 됐다. 정치인들은 중앙정보부 지하실에서 혹독한 고문에 시달렸다.이세규·조윤형·조연하·이종남·강근호·최형우·김상현씨 등이 대표적인 피해자들이다. 이지운기자 jj@. [특별기고] 朴正熙 리더십의‘이중성’정치인의 행위나 업적을 평가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시대적 상황에대한 인식이 다를 수 있고 나타난 결과의 중요성을 보는 각도도 다를 수 있는 까닭이다.특히 박정희(朴正熙) 전 대통령 통치를 경험했던 우리 세대는지극히 주관적·감정적으로 그를 평가할 개연성이 높다. 개인을 상황과 연계시켜 구분해볼 때 정치 리더십은 이상주의자,현실주의자,그리고 창조적 지도자로 나누어진다.현실주의 리더십은 목적을 위해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기에 미사여구로 그 사회가 지향하는 목표를 제시할지언정실제 행동은 다분히 이에 부합하지 않는 형을 지칭한다. 반대로 이상주의 리더십은 현실적으로 실현 가능성이 낮은,경우에 따라서는 불가능한 이념에 집착하여 추구하는 목표에 근접하지도 못한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 보통이다.창조적 리더십은 역사의 흐름에 부합하는 목표를 설정하고 현실적 제약을 극복하면서 이를 단계적으로 성취해 가는 유형이다. 이러한 리더십 유형에 비추어 박정희 전 대통령은 현실주의 지도자였음이분명하나 창조적 리더십의 특성도 부분적으로 갖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가 내걸었던 국정목표는 ‘잘 살아보세’라는 구호로 상징화된 조국 근대화였다.경제성장 지상주의 정책은 농업사회에서 산업사회로 이행하는 계기를마련했고 경제의 양적 성장을 이루었다는 점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물론 ‘선(先)성장 후(後)분배’정책에서 나타난 심각한 경제불평등과 재벌에 집중된 자본,그리고 다원화되어 가는 시민사회의 강압적 통제는 문제로지적할 수 있다. 60년대 우리가 처한 상황에서 관 주도의 경제정책과 선성장 후분배정책이최선의 것이었는가는 먼 훗날 역사가 평가할 몫이다. 그의 ‘근대화’정책이 가진 본질적 문제는 정치영역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산업화가 진행될수록 다원적인 사회로 이행되고 좀더 제한적·분권적권력구조가 성립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권위주의 체제로 역행했기 때문이다. 3선개헌은 ‘나 아니면 안된다’는 오만의 상징이다.공작정치는 야권을 회유하거나 분열시켜 정권을 유지하려는 목적으로 자행되었다.시민사회의 자율성 신장에 관한 요구는 공권력을 동원하여 제도적으로,그리고 실질적으로 억압되었다. 권위주의의 제도화를 기도했던 유신체제는 결국 권력 엘리트들의 균열로 비극적 종말을 맞이하고 말았다. 거대한 민주화의 흐름이 70년대 중반 포르투갈을 시발로 나타나기 시작했으나 자유민주주의가 시대의 보편적 흐름이라는 점을 인식하지 못한 그의 정치행보는 잘못된 것이었다.분명히 그는 정치적인 측면에서 정권의 유지와 재창출이라는 목적을 위해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은 현실주의자였다. 그러나 ‘조국근대화’를 경제적 측면에서 국한시켜 볼 때 그는 어느 정도창조적 역할을 했었다.여기서 박정희 리더십의 이중적 성격을 찾아볼 수 있다.나는 그가 만일 3선개헌으로 정권을 연장하고 유신을 통해 권력의 영속화를 시도하지 않았다면 아마 위대한 대통령으로 남았을 것으로 본다. 사회환경이 변화함에 따라 정치도 변해야 하고 역사 흐름에 부응한 현실의변화도 아울러 추구해야 정치가 안정적으로 발전한다는 점을 우리는 박정희통치가 남긴 역사적 교훈으로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柳勝男 국민대교수·정치학]
  • 이슬람, 인니 최대 정치 세력화

    지난 21일 첫 공식업무에 들어간 압둘라흐만 와히드 인도네시아 대통령의접견실을 맨처음 방문한 이들은 이슬람교 원로 지도자들이었다.와히드가 이끌던 이슬람 최대 조직의 축하 사절단이었지만 시사하는 바는 크다. 인도네시아는 2억1,000만명 인구중 88%가 이슬람교를 믿는 세계 최대의 이슬람교 국가.하지만 지금껏 이슬람 세력이 인도네시아 정치 전면에 나선 적은 없다.수하르토 전 대통령의 32년 강압통치 속에서‘정치소외층’으로 배제되어 왔다. 수하르토는 경제권을 쥔 소수 중국계와 기독교도를 우대하는 정책을 실시,이슬람 세력이 정치 전면에 나서는 것을 막았다.그러나 와히드의 대통령 당선으로 분위기는 반전됐다.이슬람 세력은 인도네시아 최대의 정치세력으로급부상,향후 정국방향의 큰 변수로 작용할 수 있게 됐다.3,000만 회원의 최대 이슬람단체의 세습지도자인 와히드 대통령의 당선 자체가 곧 이슬람세력의 정치세력화를 상징한다.그는 정교(政敎)분리를 장담하고 있지만 태생적종교적 색채는 어쩔 수 없을 것이란 지적이다. 여기에 대선과정에서 와히드를 전폭적으로 지지한 6개 이슬람계 정당들 또한 이후 어떤 식으로든 대가를 바랄 것은 자명한 일이다. 친(親)기독교정당인 민주투쟁당(PDIP)의 메가와티 수카르노푸트리 당수가부통령으로 선출됐지만 그녀 역시 이슬람 정당인 국민각성당(PKB)으로부터부통령 추대를 받았다.이경옥기자 ok@ 파키스탄 ‘파키스탄의 앞날은’.지난 12일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페르베즈 무샤라프 군사 정권이 파키스탄의 주요 3개주(州) 주지사에 군장성 출신 3명을 임명하는 등 군부가 정치전면에 나서면서 파키스탄의 민주화 앞날에 대한 우려감이 커지고 있다. 파키스탄 군부는 22일 최대 곡창지대이며 인구밀집 지역인 펀자브주 주지사에 중장 출신의 모하메드 사프다르를,금융 및 상업 중심지인 남부 신드 주지사에 공군 중장 출신의 모하메드 아짐 다우드 포타를,아프카니스탄 접경지역인 북서변경주 주지사에는 역시 퇴역 중장인 모하메드 샤피크를 임명했다. 반면 인구가 적은 발루치스탄 주지사에는 전직 판사인 아미르-울-물크 멩갈을 보내 군출신이 주요 지사를 독식했다.곧 출범할 국가 최고 통치기구 ‘6인 국가안보회의’도 퇴역장성 출신으로 구성될 것으로 보인다. 특히 무샤라프장군은 경제회생을 위해 탈세사범 등 경제위기의 원인 제공자들에게 ‘단호한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천명했다.쿠데타세력의 새판짜기단골메뉴인 이른바 ‘정풍(整風)운동’이다. 그러자 국제사회는 파키스탄 군부가 전형적인 ‘군부 독재’의 길을 걷고있다고 보고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미국과 유럽연합(EU)은 민주화가 안되면 차관을 봉쇄하겠다고 경고했다.영연방 54개국도 민주화 정도를 평가하기위해 4명의 대표단을 이슬라마바드에 파견할 계획이다. 김규환기자 khkim@
  • 인니 특이한 정부통령 선거법

    후보 교체,사퇴,또 사퇴...20일,21일 인도네시아 정부통령 선거과정을 보면어지럽기 짝이 없다. 이런 혼란은 한마디로 34년간 선거다운 선거를 치르지못해 생긴 경험부족과 선거법 미비에서 나온 것이다. 이번 선거는 대통령선거일 불과 하루 전인 지난 19일 국민협의회(MPR)에서제정한 대통령선거법에 따라 치뤄졌다. 새 선거법에 따라 임기 5년의 정부통령 후보는 MPR의원 70명 이상의 추천을 받거나 11개 정파에서 각자 후보를낼수있다. 1차투표에서 재적의원 3분의 2출석에 출석 과반수의 찬성을 얻으면 당선된다.당선자가 없으면 상위 3명으로 결선투표,그래도 과반 득표자가없으면 2명으로 마지막 투표를 치른다. 40세 이상 인도네시아 국적자면 후보가 될수있지만 지난 65년 공산당 쿠데타 가담자는 자격이 없다.대통령 유고시 부통령이 잔여임기를 승계한다. 정부통령이 같은 당 출신이어야한다는 규정도 없다.그래서 정부통령이 다른정파에서 나올 경우 자연스레 연정형태가 돼 정국안정에 도움이 되는 장점도있다. 이기동기자 yeekd@
  • 파키스탄, 과도내각 주내 발표

    [이슬라마바드 AFP AP 연합] 파키스탄 군사정부는 19일 페르베즈 무샤라프장군이 일주일 이내에 민간인들을 주축으로 한 과도내각을 구성할 것이라고약속하면서 전날 결정된 파키스탄의 영연방 회원 자격정지를 성급한 조치라고 비난했다. 군 대변인 라시드 쿠레시 준장은 무샤라프 장군이 대부분의 각료를 민간인으로 구성키로 결정했으며 일주일 안으로 내각 명단이 발표될 것이라고 말했다. 쿠레시 준장은 그러나 파키스탄의 과도내각이 “실질적인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많은 일을 해야하고 국민들이 당장 선거실시를 원하지 않고 있다며 구체적인 민정이양 일정을 밝히길 거부했다. 앞서 쿠레시 준장은 쿠데타 거행 일주일만에 처음으로 샤리프 총리에 대해언급,“그는 건강하며 좋은 대접을 받고 있다”고 밝혔다.이어 탈세,채무불이행 등 샤리프 총리의 광범위한 혐의에 대한 수사가 진행중이며 “혐의의성격”에 따라 군법회의 회부 여부가 결정될 것이라고 말했다.
  • 인니 오늘 새대통령 선출

    인도네시아의 새 대통령을 선출하기 위한 국민협의회(MPR)의 간접선거가 20일 실시된다. 국회의원과 군부 및 직능대표 700명으로 구성된 MPR의 재적의원 3분의 2이상이 투표에 참가해 이중 과반수 이상을 득표한 후보가 대통령으로 선출된다. 대통령 후보로는 집권 골카르당 후보인 B.J. 하비비 현 대통령과 메가와티수카르노푸트리 인도네시아투쟁민주당(PDIP)당수,압둘라흐만 와히드 국민계몽당(PKB)당수 등 3명이며 여기에 이슬람 종교지도자 누르콜리스 마지드가제 4의 인물로 거명되고 있다. 대중적 지지도는 메가와티 여사가 압도적으로 우세하지만 당선 여부는 여전히 불투명하다.메가와티 당은 지난 6월 DPR 선거에서 35%의 지지로 153석의당선자를 내며 원내 제1당이 됐다. 하비비대통령은 현직 대통령이라는 프리미엄에도 불구하고 정치자금 스캔들과 동티모르 사태 처리 실패 등으로 대중적 지지를 상실했다.무엇보다 철권통치자 수하르토 밑에서 부통령 노릇을 한 경력이 치명적인 약점으로 작용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 군부의 향배.하비비는 군부 지지를 얻기 위해 위란토장군에게 부통령 출마를 제의했지만 위란토는 18일 “안보문제 집중할 생각”이라며 이를 거부했다.이 때문에 MPR내 군부대표가 하비비를 밀어줄지 불투명해졌고 집권당 내부에서는 후보 교체설도 나돌고 있다. 의회내 군부대표(38명),그리고 대통령이 임명하는 지역(135명),직능대표(65명)등 전통적인 친여표가 어디로 향할지 여전히 불투명하다.이런 가운데 학생과 재야세력으로 구성된 메가와티 지지세력들은 연일 반정부 시위를 벌이면서 하비비가 당선될 경우 ‘민중혁명’을 맞게 될 것이라고 경고,선거 결과에 따라 비상상황이 빚어질 가능성을 예고하고 있다. 메가와티가 당선돼도 개혁과 부패청산에 따른 기득권층의 반발과 군부의 쿠데타 가능성까지 점쳐지고 있어 인도네시아 국민들은 문자 그대로 불안한 선거일 아침을 맞고 있다. 박희준기자 pnb@ *인니 대통령 어떻게 뽑나 임기 5년의 인도네시아 대통령은 국정최고기관인 국민협의회(MPR)에서 간접 선출한다. MPR의원 70명 이상의 추천을 받아야만 대통령으로 입후보할 수 있으며 전체정원의 3분의 2가 출석한 가운데 과반수를 득표하면 당선된다. 과반수 득표자가 없을때는 1,2위 결선투표로 당선자를 선출한다. MPR은 의회 462석에 대통령이 지명하는 군부대표(38)와 각 주(州) 및 직능대표(200) 등 총 700명으로 구성된다. 5년마다 소집돼 정,부통령을 선출하는 권한외에 영토확장과 전쟁선포권 등을 가지고 있다.헌법제정 및 국가정책 결정을 위해 필요할 경우 임시회의 소집도 가능하다. 지난해 5월 민주화 시위로 하야한 수하르토 전 대통령은 현행 간접 선거제도를 이용,32년 동안 6차례 집권에 성공했다는 비난을 받아왔다.
  • 무샤라프, 파키스탄 국정운영 계획 발표 안팎

    파키스탄 군부 쿠데타를 주도한 페르베즈 무샤라프 육군참모총장이 쿠데타성공 이후 처음으로 17일 대중 앞에 등장해 향후 국정운영 계획을 밝혔다. 무샤라프 장군은 이날 TV로 생중계된 연설을 통해 가능한 최단시일 내에 파키스탄을 ‘진정한 민주주의’로 복귀시키겠다고 다짐하면서 7개항의 ‘군정공약’을 발표했다. 공약 요지는 과도 군정을 통해 대내외적으로 개혁정책을 수행하며 그후 민간이양을 하되 그 시기는 상당 기간 뒤로 미룰 의사임을 밝힌 것으로 모아진다. 대외적으로는 미국과의 관계지속,수십년 적대국인 인도와의 화해조치등을내놓아 과격 이슬람 원리주의 통치로 갈 것이라는 일부의 우려는 일단 누그려뜨렸다.상대국인 인도의 대응,앞으로의 후속조치들을 지켜봐야 하겠지만인도국경에서의 일방적인 군축선언도 일단 지역안정에 긍정적인 조치로 보인다. 포괄핵실험금지조약(CTBT)준수여부도 구체적으로 언급치는 않았지만 핵확산 방지와 남아시아의 평화를 지킬 것을 다짐,쿠데타로 고조됐던 인도와의 핵충돌 우려도 상당 부분 가라앉혔다. 이번 조치의 핵심은 역시 국내정책 부분이라고 할수있으며 그 중에서도 앞으로 국가운영을 맡을 국가안보회의 설치다.무샤라프가 의장을 맡을 이 기구는 일종의 과도 내각으로 공군 및 육군 참모총장을 비롯해 재정,외교,사법및 내정 전문가들로 구성된다.한마디로 초법적인 국정최고기관이다. 국가안보회의에서는 국내개혁 조치로 부패정치인 청산,불법축재자 재산 몰수,4주내 채무를 변상하지 않는 채무자 엄벌등을 공약으로 내걸었다.이미 부패혐의가 언론등을 통해 폭로되고 있는 전정권 고위 관리들 상당수가 부패,부정축재혐의로 처벌을 면할수없게 됐다.실각한 나와즈 샤리프 전총리도 이범주에서 벗어나기 힘들 것이란 관측이 우세하다. 가장 우려되는 부분은 민정이양의 구체적인 일정이 밝혀지지 않은 점이다. 이 때문에 장기간의 군부통치가 계속될 것이라는 우려들이 나오고 있다. 이기동기자 yeekd@
  • [김삼웅 칼럼]‘양金’ 화해협력 약속지켜라

    “이제 우리 두 사람은 국민에게 말씀드리고자 합니다.지금 권력자들에 의하여 우리를 서로 이간 분열시키려 하는 의도가 곳곳에서 전개되고 있음을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그러나 우리는 유신체제 아래서 서로 협력하여 18년의 박정희정권을 종식시켰듯이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상호협력하여 나라의 민주화를 마침내 이룩하는 데 헌신할 것입니다.우리는 언젠가‘두 사람은 조국의 민주화를 위하여 헌신적으로 협력하였다’는 국민과 역사의 평가를듣는 것을 최대의 영광으로 삼고,더불어 함께 싸워나가고자 합니다.따라서우리는 이 시간부터 우리에 대한 분열적 표현과 구별을 거부합니다.”1985년 3월1일 김대중·김영삼 공동의장(민추협)은‘3·1절메시지’를 통해 3·1정신으로 군사독재와 싸우자는 궐기의 내용을 담으면서 상호협력을 다짐했다. 두 사람은 민주화투쟁 과정에서 기회있을 때마다‘민주화 이후’까지도 합심협력하겠다고 국민과 역사 앞에 약속하고 다짐했었다. 프랑스‘르 몽시(Le Moncie)’는 양김이 분열하여 각각 대통령후보에 나섰을 때인 1987년 12월16일자에 이를 비판 풍자하는 만화를 실었다.거대한 강물 위에 놓인 다리가 두 쪽으로 동강난 사이에 한 쪽은 DEMO라 쓰인 피켓을들고 다른 한 쪽은 CRATIE라 쓰인 피켓을 든 체 추종자들과 끊어진 교각을향해 걷고 있는 내용이었다. 약속,헌신짝 버리듯해서야“남북통일 등 한민족 화합의 시대로 들어가는 마당에 지역차별 의식이 아직도 온존하는 것은 시대착오적 현상이다.망국적 지역색 타파를 위해 함께 노력하겠다”(김대중),“언제부터인가 우리들 의식 속에는 배타적 지역감정이심화돼 분열과 대립이라는 우려할 만한 상황에까지 이르렀다.지역갈등을 과거사로 돌리고 번영과 화합의 발길을 내딛기 위해 함께 협력하겠다.”(김영삼) 91년 4월1일 양김은 대구의‘나라를 위한 기도회’에 참석,지역갈등 해소를 위해 함께 노력할 것을 약속했던 것이다.여기서‘함께’란 양김 스스로를말한다. 양김은 협력하여 군정을 종식시키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대통령에 당선되어한 분은‘현직’,한 분은‘전직’에 있다.그러나‘민주화 이후’까지도 협력하겠다던 약속은 깨진 지 오래이고 지금은 분열과 갈등이 심화된 상태이다. 지난 16일 김대중 대통령과 김영삼 전 대통령은 부마민주항쟁 20돌을 맞아부산 민주공원 개막식에 나란히 참석하여 치사와 축사를 했다.외형적으로는지극히 정상적인 이 행사가 실제로는 양김의 갈등과 적대라는 일그러진 모습으로 비쳐 많은 국민을 속상하게 만들었다. YS는 행사에 앞서 삼성자동차 공장과 모교 방문 등 지지들에게‘역적’‘유신 망령’ 등 극한 용어를 사용하며 DJ를 공격했다.얼마 전에는‘독재자’란 표현도 서슴지 않는 등 적대감을 보여왔다.DJ의 계속되는 화해 제스처에도YS는 공격을 멈추지 않고 있다. 양김의‘사랑과 미움’의 관계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그렇지만‘민주화’공로의 상당 부분을 양김에게 돌리는 데 인색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그런데 지금 왜 저런 관계가 되었을까.YS의 최근 언행은 신중하지 못하다는 것이 많은 국민의 생각이다.자신의 정부가 망쳐놓은 국가경제를 살리는‘동지’에 대한 지원과 격려는커녕 삼성자동차문제를 지역감정으로연계시키려 한점 그리고 민주주의와 인권신장에 기여한 공로로‘자유메달’을 받는 DJ에게‘독재자’란 표현,지역갈등을 자극하는 발언 등은 양김관계 이전에‘전직’으로서 어른답지 못한 언행이란 평가다. 지역갈등 해소에 협력을정부 또한 YS정부의 하나회 청산과 쿠데타세력 단죄 등 업적을 평가하면서화해협력을 모색해야 한다.무엇보다 양김은 지역갈등 해소의 약속을 지켜야한다.영·호남 지역주의는 박정희정권의 산물이지만 양김 또한 피해자인 동시에 수혜자인 것도 사실이다.그렇다면 현직과 전직이 힘을 모아 지역갈등을 해결하는 노력을 보여야 하지 않겠는가.‘정치적 국경선’처럼 깊어가는 동서갈등을 풀어야 하지 않겠는가. 또한 양김의 협력이 중요한 것은‘민간정부’의 실패는 과거 군사정부에 명분을 주게 된다는 점이다.그리되면 민주화운동의 명분을 잃게 된다.양김이역사와 국민을 의식하면서 화해와 협력의 대국민 약속을 지켜야 할 소이연이기도 하다. 김삼웅 주필
  • 파키스탄 비상선포 계엄통치

    [이슬라마바드 AFP AP 연합] 페르베즈 무샤라프 파키스탄 육군참모총장은무혈쿠데타로 전권을 장악한지 3일만인 15일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행정권을장악하는 등 사실상의 계엄통치를 선언했다. 무샤라프 참모총장은 이날 새벽 1시쯤 관영 APP 통신을 통해 발표한 성명에서 전국에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헌법을 정지시켰다. 이날 선포된 비상사태는 이와 함께 내각 각료 전체의 직권을 정지시키고 상하원,지방의회의 활동도 중단토록 했다. 이에 따라 상하 양원과 지방의회의 의장,부의장 및 4개 지방정부 주지사와지방장관,보좌관 등도 직무정지 조치를 당했다.다만 무하메드 라피크 타라르 대통령은 그대로 현직에 남을 것이라고 성명은 밝혔다. 성명은 “육군 총참모부와 파키스탄 군 사령부의 결정에 따라 페르베즈 무샤라프 육군참모총장 겸 합참의장은 파키스탄 전역에 비상사태를 선언하며행정부 수반의 역할을 맡는다”고 밝혔다. 성명은 또 “파키스탄 전체는 파키스탄 군의 통제하에 놓여야 한다”고 강조했다.그러나 이날 성명은 기본권을 제한하는 조치를 취하지 않았으며 사법부도 종전처럼 기능을 유지할 것이라고 밝혔다. 파키스탄 군부는 군총사령부에서 지난 이틀 동안 여러 정치인 및 헌법전문가들과 잇따라 만나 쿠데타 이후 내놓을 조치에 대해 숙의한 뒤 비상사태를선포했다. 파키스탄 중앙은행은 이날 쿠데타로 축출된 나와즈 샤리프 총리와 정부 고위 관리,의원 및 보좌관,그 가족들의 은행 계좌를 모두 동결했다고 정부 소식통이 말했다. 이 조치는 무샤라프 육군 참모총장이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한 후 몇 시간만에 취해진 것이다. 이에 앞서 군 병력은 쿠데타 발발 이전에 소집돼 있던 국회가 당초 예정대로 15일 열리는 것을 막기 위해 14일부터 국회의사당에 병력을 증강배치,입구를 철저히 봉쇄했다.
  • 파키스탄군부 17시간만에‘무혈 집권’

    [방콕 연합] 파키스탄 군부는 12일 거사를 단행한지 17시간만에 무혈쿠데타를 성공시켰다. 영국 BBC방송에 따르면 페르베즈 무샤라프 육군 참모총장이 쿠데타를 계획한 것은 이날 오전 10시.스리랑카를 방문중이던 무샤라프 참모총장은 샤리프 총리가 자신을 해임하고 후임으로 지아우딘 부투 군정보국국장을 임명하려한다는 첩보를 접했다. 그는 즉각 거사를 결심,오후 3시 45분 카라치행 비행기에 올랐다.추종세력들에게 이미 병력 동원명령을 내렸다.앞서 3시 40분,샤리프 총리는 예정대로 지아우딘을 육군참모총장에 임명하고 오후 4시 무샤라프의 해임을 공식발표 했지만 거사에 가담한 제10군단 소속 보병들이 이슬라마바드와 카라치로 입성중이었다. 무샤라프 참모총장이 탄 비행기는 연료가 거의 바닥난 상태에서 오후 6시 30분 카라치 공항에 접근.지아우딘장군측 지시를 받은 관제탑 요원은 비행기의 착륙을 불허한 채 무샤라프 장군을 체포할 병력이 포진하고 있는 다른 공항으로 회항을 요구했다. 무샤라프 장관은 조종사에게 공항주변을 계속 선회하도록 요구했으며 결국관제요원을 위협해 7시 47분 착륙에 성공했다.거사 개시 17시간만에 쿠데타군은 총리를 감금하고 정권을 장악했다.
  • 군부, 총리측근 장성3명 체포

    [이슬라마바드 교도 연합] 파키스탄 쿠데타를 주도한 군부는 나와즈 샤리프총리의 측근 장성 3명을 체포했으며,이들을 군에 대한 음모를 꾸민 혐의로곧 재판할 것이라고 현지 언론이 15일 군소식통의 말을 인용해 보도했다. 라발핀디의 일간지 ‘장’은 국방부 소식통의 말을 인용, 군정보기관의 사령관인 지아 우딘 중장과 퀘타의 전 군단 사령관인 타리크 페르바이즈 중장,총리의 군사담당 보좌관인 자베드 말리크 준장 등 3명이 체포돼 군사법원 재판에 회부됐다고 전했다.
  • [지구촌 밀레니엄 준비] 장동철 주베네수엘라대사

    베네수엘라는 중남미 제국 중에서 유일하게 40여년간 민주정치의 전통을 이어왔으면서도 동시에 부정부패가 극심한 모순의 나라다. 국민사고의 저변엔 한건주의와 정실주의,그리고 쉽게 돈을 벌 수 있다는 안일한 의식이 자리잡고 있다는 평가다.이 때문에 베네수엘라 경제는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지난 20년간 국내총생산(GDP) 20% 하락,1984년 이후 135배에이르는 화폐의 평가절하,1980년 이후 600%의 물가상승,극심한 부의 편중 및외채 규모를 능가하는 자본 유출 등의 몸살을 앓고 있다. 이러한 상황의 베네수엘라에 새 천년의 의미는 각별하다. 92년 실패한 쿠데타 주역이었던 공수부대 중령 출신의 우고 차베스의 등장은 급격한 변화의 바람을 몰고왔다. 낡은 정치체제의 타파와 빈곤·부패의 추방을 기치로 내세워 지난 98년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된 그는 쿠데타를 통해 실현코자 했던 그의 이상을 평화적 방법으로 실현시키고자 노력하고 있다.실패한 쿠데타 주역이 민선 대통령에 뽑힌 사례는 세계 정치사에 유례가 없다. 그는 민주주의와 인권을 존중하면서도 신자유주의의 무오류성을 배격하는정책을 표방하고 있다.빈곤 서민층을 배려하고 고용창출을 위한 국가의 적극적인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영국 총리 토니 블레어의 ‘제3의 길’과도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대다수 국민은 그를 새 천년을 맞아 수십년간 이어온 빈곤과 부패로부터 베네수엘라를 구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으로 보고 절대적 지지를 보내고 있다. 베네수엘라 정부는 신국가 건설의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 열악한 교육환경과 질적 저하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교육 기회에 큰 장애가 되고 있는 빈곤층의 경제적 여건을 개선하여 보다 많은 청소년들이 교육을 받을 수있도록 하루 수업시간을 4∼5시간에서 8시간으로 늘리는 정책을 실시하고 있다. 경제적 측면에서의 개혁조치들도 만성적인 재정적자 해소와 실물경제 활성화,그리고 빈곤문제 개선 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아울러 석유산업 일변도의 국가경제를 다변화하는 방안도 모색중이다.21세기 정보화시대를 맞아 정보통신 분야의 확대·개방정책을 추진,정보통신산업의 대국민서비스 향상과 경쟁력 강화를 도모하고 있다.최근 단행된 정부조직 개편에서 21세기에 대비한 과학기술부를 신설했다.과학기술 중흥을 위한 토대를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21세기를 향한 또 하나의 준비는 야심적인 국토개발이다.석유 부문에 편중된 산업의 다변화를 꾀하고 경제 및 인구의 90%가 북부 카리브해안지역에 집중되어 있는 점을 극복하기 위해 남부 오리노코강과 서부 아푸레강 유역을중심으로 국토개발을 추진중이다.이 계획은 한반도의 2배가 되는 약 40만㎢의 미개발 남·서부지역의 산업화를 통해 지역발전을 도모하면서 북부 해안지역과의 경제적 통합을 꾀하고 내륙 자원의 수출증진을 추구하는 야심찬 프로젝트다. 베네수엘라는 새로운 국가로의 탄생을 위해 정치·경제·사회 각 분야에서혁명적인 변혁 과정을 겪고 있다.이러한 물결은 인권과 민주주의,그리고 대화에 기초하고 있으며 온국민이 이에 적극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외형적인축제나 상업주의적 행사가 아닌 국가발전과 국민의 복지향상을 위한 진정한의미의 새 천년을 맞이할준비를 하고 있다.
  • 파키스탄 쿠데타 배경과 전망

    지난 7월 카슈미르 지역에서의 군 철수 이후 군부의 불만축적과 야당의 반대 및 잇따른 시위 등으로 파키스탄 군부의 쿠데타 가능성은 사실 수주 전부터 광범위하게 나돌았다. 샤리프 총리가 무샤라프 육군참모총장을 해임한 것이 직접적인 도화선이 됐으나 더 근본적인 원인은 군부의 누적된 불만과 샤리프 총리와 무샤라프 장군간의 불화로 지적된다. 파키스탄 군부는 파키스탄 공화국 역사 52년중 25년간 통치했다.‘위기’가생기면 군부가 언제든지 개입할 것이라는 게 상식처럼 됐다. 과거 파키스탄의 정치 지도자들은 카슈미르 분쟁 등 주요 사안을 막강한 군부와 미리 상의함으로써 군부와 타협했다.그러나 샤리프 총리는 달랐다.그는2년반 전 총선을 통해 집권한 뒤 권력강화를 추진했다.지난해 참모총장을 경질한 뒤 이번에도 내년 4월까지 임기가 보장된 무샤라프 장군을 해임하려다역으로 쿠데타를 당했다. 대외정책에서 샤리프 총리가 보여준 ‘온건노선’은 군부는 물론 일반 국민들까지 그의 반대세력이 되게 했다.샤리프 총리는 지난 7월 인도령 카슈미르를 침공한 파키스탄군의 철수를 지시했다.핵무기 보유국인 인도와 파키스탄의 전면전을 우려한 미국 등 국제사회의 압력 때문에 받아들인 조치였다. 그러나 이슬람근본주의가 득세하고 있는 군부는 이를 외세에 대한 ‘굴복’으로 받아들였다.카슈미르 침공을 주도했던 무샤라프 장군은 “끝까지 싸우겠다”며 반발한 것으로 알려졌다. 경제실패는 불에 기름을 부은 꼴이었다.지난해 5월 인도의 핵실험에 맞서실시한 핵실험으로 국제사회의 경제제재가 계속되면서 외국인 투자가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 경제는 활력을 잃었다.10%대의 실업률과 인플레는 국민들을‘폭발’ 직전까지 몰고 갔다. 무샤라프는 곧 과도정부를 수립할 것으로 예상된다.그의 강경노선을 감안할때 카슈미르 분쟁과 핵실험 등에 있어 인도와의 긴장이 고조될 전망이다. 미국과 일본 등 파키스탄 원조국들은 ‘헌정질서’ 준수를 촉구하고 있어어떻게 나올지 관심거리다.15억6,000만달러의 구제금융 3차분을 제공할 국제통화기금(IMF) 등 서구 금융기관들이 유심히 지켜보고 있어 파키스탄 군부의후속 대응이 주목된다. 박희준기자 pnb@
  • [문명자 회고록] 비화3共의 실세들(9)陸여사와의 만남

    박정희가 5·16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자격으로 케네디를 만나기 위해처음으로 미국을 방문한 것은 1961년 11월 13일의 일이다.워싱턴 내셔널 공항에 도착한 박정희는 검은 색 선글라스를 낀 깡마르고 까무잡잡한 모습이었다.당시 박정희는 바지선도 세우지 않은 후줄근한 차림으로 마치 서울에 처음 올라온 촌사람처럼 잔뜩 경직된 모습이었다.주미대사관에서 열린 리셉션에서 처음으로 그와 악수를 나누면서 내가 말했다. “박 의장님 반갑습니다.그런데…”하니까 옆에 있던 정일권 주미대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문명자 입에서 무슨독설이 나오는가 싶어서였을 것이다.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계속 했다. “색안경을 끼고 다른 나라 국가원수를 만난 것은 큰 실례인데요.자신감이없어 그렇게 한 것 아닙니까?” 정일권 대사가 아연실색해 도중에 내 말을 막으려 했으나 소용 없었다.박정희가 내게 되물었다. “문명자 기자님이라고 그러셨죠? 고맙습니다.제가 깜빡했습니다.그렇게 실례가 됩니까?” “미국에서는 그렇습니다.내일부터는 벗으십시오”.박정희는정일권에게 물었다.“문 기자는 경상도분입니까?” 내가 대답했다.“네,대구입니다” 65년 5월 박정희는 존슨의 초청으로 세번째로 미국을 방문했을 때 육영수여사를 처음으로 동반하고 왔다.그때 주미대사관에서 뷔페형식으로 점심식사가 있었는데 육 여사의 통역관겸 비서인 나은실이 나를 찾아왔다. “육 여사께서 문 기자님을 뵙고싶어 하십니다.잠시 같이 가실까요?” 그것이 나와 육 여사와의 첫 만남이었다.육 여사는 듣던 대로 아주 조신한인상의 여성이었다. “말씀 듣던 거와는 다르네요” “어떻게 다릅니까?” “여성이 기자직에 있는데다 더구나 정치기사를 쓰신다고 해서 저는 ‘문명자기자’ 하면 아주 험상궂고 무서운 분이라고 상상했어요” 쿠데타 직후부터 그 때까지 그의 남편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나의 기사를 봤다면 그 편에서 그렇게 상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겠다 싶었다.육 여사가 또 물었다. “결혼하셨어요?” “네.”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다 육 여사의 방을 나왔다.그런데 나은실이 뒤쫓아와 나에게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열어보니 200달러가 들어 있었다.당시 특파원들의 체재비 포함 한달 월급이 200 달러였으니 당시로선 큰 돈이었다.나는다시 육 여사에게 갔다. “저,이 돈 못 받습니다” “이러시면 안되는데….200달러 밖에 안되는 걸요.아이들 선물이라도…” “안되는 건 바로 접니다” 나는 육 여사에게 돈 봉투를 돌려주고 방을 나왔다.이 작은 ‘사건’이 육여사에게 나에 대한 강한 인상을 남긴 듯 했다. 66년 존슨 대통령이 방한했을 때 나는 수행기자로 서울에 갔다.그 때 나는돈암동 언니집에 묵었는데 육 여사의 비서 나은실로부터 전화가 왔다.육 여사가 나를 만나고 싶다는 것이었다.그러나 취재일정이 바빠 못가겠다고 했더니 나은실이 물러서지 않았다.그녀가 계속 강권하기에 내가 쏘아붙였다.“내가 그 분 보좌관이요?”.안되겠다 싶었던지 나은실이 “잠시 기다리라”고했다.잠시후 육 여사가 직접 전화기에 나왔다. “문 기자님,좋아하시는 근대된장국을 끓여 놓을테니 오세요,우리 같이 점심 먹어요” 하는 수 없이 나는 취재일정을 마치고 청와대로 갔다.가서 보니 육 여사의접견실은 온통 핑크색이었다. “이 방이 원래 온통 핑크색입니까?” “아니예요,미세스 존슨이 핑크색을 좋아한다고 해서 이번에 핑크룸으로 바꾸었어요” ‘참 세심한 여성이구나’ 싶었다.그러면서도 한 마디 찔러 보았다.“청와대에 오래 계실랍니까?” 육 여사는 정색을 하고 말했다. “이게 어디 우리집입니까? 대통령직에 있는 동안만 거처하는 곳이지 이곳은 영원한 우리집이 아닙니다” 그 때 나는 그의 말이 진심이라고 느껴졌다. 육 여사는 내가 일어서려고만 하면 버튼을 눌러 “차 좀 가져오세요”,“수박 좀 가져오세요”해가면서 시간을 끌었다. 그러다보니 이날 저녁 나는 박정희 가족과 저녁식사를 함께 하게 되었다.나는 식탁에서 듬뿍장을 발견하고 반가워서 “어머,딩기장이 있네요?”하자 육 여사가 내게 물었다. “딩기장이라니요?” “햇보리로 만든 듬뿍장을 우리 고향에서는 딩기장이라고 부릅니다” 그러자 박정희가 불쑥 말했다.“경상도 사람 아니면 그 맛 모르지” 육 여사가 웃으며 말했다.“두 분은 통하시네요” 이날식사초대에서 나는 박정희에게 ‘대통령각하’라는 말은 한번도 하지않았다.박정희를 부를 때는 주로 경상도에서 친근한 사람을 부를 때 사용하는 ‘보이소’ 또는 ‘으요,으요’를 사용했다.그랬더니 박정희가 말했다. “거,수십년만에 으요!,으요! 소리듣네”.그러자 이를 듣고 있던 육 여사가 의아해 하며 남편에게 물었다.“으요!,으요!가 뭐예요?” “경상도 사람이 아니면 이해 못하지”.수줍음을 타는 성격이면서도 대중앞에 서면 박정희의 목소리는 우렁우렁했다.내성적이면서도 더할 나위 없는 독종.이것이 내가 관찰한 ‘인간 박정희’의 면모였다. 74년 8·15,육 여사가 피격,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나는 그 가엾은 여인의 죽음을 진심으로 애도하고 박정희의 독재를 다시한번경고하는 뜻에서 박정희에게 영문으로 된 애도전보를 보냈다.“육 여사에 대한 나의 애도를 받아주십시오.생전에 육 여사가 내게 얘기한 ‘청와대는 우리의 영원한 집이 아닙니다’라는 말이 아직도 내 귀에 쟁쟁합니다.지금이야말로 귀하는 대한민국을,국민을 위해 사임할 때입니다.문(Moon)”정리 정운현기자 jwh59@
  • 파키스탄 쿠데타 이모저모

    파키스탄 수도 이슬라마바드 동요없이 조용 [워싱턴 베를린 이슬라마바드 외신종합] 12일밤의 군부 쿠데타는 나와즈 샤리프총리측과 쿠데타측의 무력충돌 없이 전격적으로 이루어져 날이 밝은 13일 수도 이슬라마바드 시내는 큰 동요없이 조용한 분위기를 보였다. ●목격자들은 군부가 총리 관저 및 주요 정부 청사,국영 TV방송 등을 완전히장악한 뒤 군부대의 대부분을 철수시켜 주요 건물 청사 주위에 몇 명의 무장한 경비병들만 경비 활동을 벌이고 있다고 전언. ●쿠데타를 이끈 페르베즈 무샤라프 육군 참모총장은 나와즈 샤리프 총리가자신을 국외로 축출하기 위해 항공기 착륙을 거부하는 바람에 입국하지 못할뻔 했다고 주장.그는 13일 행한 국민연설을 통해 스리랑카에서 귀국하던 그를 막으려는 음모가 있었다고 주장. ●영국에 망명중인 베나지르 부토 파키스탄 전 총리는 축출된 샤리프 총리를 ‘파시스트’라고 목청을 높이며 비난.부토 전 총리는 13일 CNN 과의 회견에서 “샤리프 총리가 모든 민주적 기관들을 해체,국민들의 지지를 잃었다”고 주장.●군부의 한 소식통은 샤리프 총리와 그의 동생 펀자브주 행정책임자인 샤바즈 샤리프가 현재 총리 관저에서 군에 의해 보호 감금돼 있다고 전언. ●미국은 12일 샤리프 총리의 실각과 관련,파키스탄 군 당국에 헌법을 준수하라고 촉구.제임스 루빈 국무부 대변인은 “파키스탄 헌법은 문구로서 뿐만아니라 그 정신 면에서도 존중돼야 한다”고 말했다. ●인도는 ‘심각한 우려’를 갖고 사태 추이를 예의주시하고 있다고 아탈 비하리 바지파이 총리실 대변인이 말했다.바지파이 총리도 12일 국가안보위원회 회의를 긴급 주재한데 이어 13일 취임식을 마친 뒤 곧바로 내각안보회의를 주재. ●일본 정부는 13일 파키스탄의 군사 쿠데타에 깊은 우려를 표명.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 총리는 이날 오전 “파키스탄 국내의 사태진전을 우려하고있다”고 말했다.고노 요헤이(河野洋平)외상은 성명을 통해 “일본은 민주적헌법절차에 따라 조속히 사태가 수습되기를 강하게 기대하며 사태의 진전에대해 중대한 관심을 갖고 주시하고 있다”고 밝혔다. [포커스 투데이] 쿠데타 주도 무샤라프 육참총장 파키스탄 군부 쿠데타를 일으킨 페르베즈 무샤라프(58)육군 참모총장 겸 합동참모위원회(JCSC) 위원장은 최근 인도와의 카슈미르 분쟁과 관련,대(對)언론 브리핑을 주도하면서 국내외에 얼굴을 내밀기 시작했다. 지난 98년 10월 자항기르 카라마트 장군의 뒤를 이어 육군의 12대 참모총장이 됐을 때만해도 알려진 것이 거의 없었던 인물이었다.정책결정에서의 군부의 실권을 요구한 뒤 샤리프 총리에 의해 해임된 카라마트와 마찬가지로 그역시 총리측과 계속 불화를 빚어왔다.특히 카슈미르 분쟁과 관련,외교적으로해결하려는 샤리프측과 항상 대립관계를 유지해 왔다. 그러나 그는 군부내에서 카라마트처럼 개혁지향적이며 서구화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샤리프에 대한 군부의 불만이 최고조로 올라가 있는 상황에서 12일 총리가자신을 해임하자 곧바로 ‘거사’를 단행했다는 설이 유력하다.그는 BBC등외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는 샤리프의 외교적 해결 노력을 지지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카라치 출신으로 64년 파키스탄 발루치스탄의 퀘타에 있는 명문 지휘참모대학을 졸업한 그는 포대,보병사단,육군 특수부대 등을 두루 거치면서 다양한지휘관 경험을 쌓았다. 샤리프 총리는 최근 무샤라프의 임기를 2001년까지 연기,군부와의 갈등을없애려는 듯 보였으나 태도가 돌변,무샤라프가 스리랑카를 방문한 틈을 타 12일 그를 해임했다.그러나 무샤라프는 재빨리 귀국,육군에 총리 관저를 포위할 것을 명령하고 방송과 공항 등 주요 시설을 장악했다. 김수정기자 crystal@ *쿠데타로 점철된 파키스탄 현대사 ●47년 영국으로부터 인도와 분리독립●58년 첫 군부 구데타.총리로 임명된 아유브 칸 참모총장이 미르자 대통령축출하고 대통령에 취임(69년까지 재임)●69년 아유브 대통령 총사령관인 야히야 칸 장군에게 권력 이양.야히야 장군 계엄령 선포 후 대통령에 취임. ●71년 동파키스탄이었던 동벵골 지역 방글라데시로 독립.야햐 칸 대통령 줄피카 알리 부토에게 권력 이양. ●73년 내각제 민주헌법 개헌.부토 대통령 총리 취임. ●77년 지아 울 하크 육군 참모총장 쿠데타로 정권 장악. ●88년 지아 대통령,비행기 사고로 사망.알리 부토 전 총리의 딸인 베나지르부토 총선승리 총리에 취임. ●90년 부토 총리 이스하크 칸 대통령에 의해 해임.회교민주동맹(IDA)당수나와즈 샤리프 총리 취임. ●93년 부토 총선 승리 재집권. ●96년 레가리 대통령 부토 총리 해임. ●97년 나와즈 샤리프 총선 승리 총리 재취임.
  • [문명자 회고록] 비화 3공의 실세들 (6)반대자들의 변신

    5·16 직후 워싱턴에 있던 한국학생·지식인·예비역 장성 가운데 5·16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백악관앞에서 연일 ‘5·16 반대시위’를 벌였다.이는 미국정부가 5·16을 인정하지 않도록 압력을 넣기 위한 것이었는데 이 일을 처음 시작한 사람은 5·16후 ‘한국인 정치망명 1호’를 기록한 내 남편 최동현(崔潼鉉)이었다. 5·16 반대시위에 열성적으로 참여한 사람들로는 당시 주미대사였던 장리욱(張利郁·작고)박사,주미대사관 참사관 신병현(申秉鉉)전 부총리,최경록(崔慶祿)·강문봉(姜文奉·작고)·김웅수(金雄洙)장군과 국회의원 양일동(梁一東·작고)씨 등이었다.강영훈(姜英勳)전 국무총리는 5·16직후 시골에 있어시위에 참가하지는 못했지만 워싱턴으로 온 뒤부터는 이 모임에 항상 참여했다. 5·16 당시 강씨는 육사 교장이었는데 쿠데타세력이 요구한 육사 생도들의5·16지지 시가행진을 거부했다.강씨와 처남 매부간인 김웅수 장군(전6군단장),장면(張勉) 정권에서 육참총장을 지낸 최경록씨도 5·16을 반대했다.당시 2군사령관이던 최씨는 자기밑에부사령관으로 있던 박정희(朴正熙)가 쿠데타를 일으켰으니 하극상 사태를 당한 셈이었다.최씨는 조선일보 등에 “군은 절대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글을 발표하는 등 5·16을 반대했다.이 세사람은 5·16이 기정사실화된 후 미국측 배려로 미 국방부 장학생으로 미국에 왔다. 백악관앞 시위에는 워싱턴 조지타운대학에 재학중이던 한국유학생도 많이참여했다.당시 열심이던 학생으로는 오세응(吳世應·전 국회부의장)씨와 한광년이 기억에 남는다.그때 오씨는 워싱턴지역 한국학생회 회장이자 ‘한국인 택시운전사 1호’였다.한광년은 초지일관하지 못하고 70년대 들어 중앙정보부의 공작에 넘어가고 말았다. 5·16 직후 박정희는 민주당 정권이 임명한 주미 대사관 공관원들을 모두해임시켜버리고 그 자리를 온통 자신의 수족들로 채웠다.그가 특히 신경을썼던 주미대사 자리에는 당시 하버드대학 청강생으로 있던 정일권(丁一權)을 ‘미국통’이라고 해서 앉혔다. 정일권이 주미대사로 앉게 되자 백악관앞 5·16 반대시위 참여자 중 여러사람이 입장이 난처하게 되었다.남편 최동현부터 정일권의 하버드시절 그의 영어가정교사를 했던 사람이었다.영어선생과 학생이 데모대장과 진압대장으로만난 셈이었다.또 강문봉 장군은 정일권과 같은 함경도출신으로 현역때부터형님,동생 해온 사이였다.그런 그가 백악관앞에서 반(反) 5·16 시위를 하니 정일권이 닦달할만도 하였다.그때마다 그는 “골프치러 가려고 운동화 신고 나서는데 최경록이가 와 같이 가자고 해서 할 수 없이 따라갔어요”하는 식의 변명으로 모면하곤 했다. 한편 백악관 앞에서 5·16 반대시위를 벌인 사람들의 그후 행적을 살펴보면 여러가지 생각되는 바가 많다.박정희는 이들을 한 사람씩 회유해 한국으로불러들였다.민주당정권때 주미대사관 경제담당 참사관으로 있던 신병현씨는5·16이 나자 이에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했으며 백악관앞 시위에는 그의 부인까지도 참여했던 것으로 기억된다.이후 미국에서 세계은행 이사로 있던 신씨는 그의 후배 김정렴(金正濂)이 박정희의 비서실장이 된 후 회유공작에 넘어가 귀국,청와대 경제특별보좌관을 거쳐한국은행 총재를 지냈다.최경록장군도 “선배님,그러실 것 없이 한국에 와서 손잡고 일합시다”하는 박정희의 간청에 결국 귀국해 주영대사,교통부장관 등을 지냈다. ‘백악관앞 시위동지’들 중 가장 부끄럽게 처신한 사람은 강영훈이라 하겠다.강영훈도 초기에는 깨끗하고 꿋꿋하게 살았다.그의 부인은 미장원에서 일했는데 독한 파마액때문에 손가락이 모두 헐 지경이었다.그런 생활고 때문이었던지 70년대 들어 강씨는 결국 중앙정보부의 돈으로 ‘한국문제연구소’라는 것을 설립,미국 언론계·학계에 친박정희세력을 심는 역할을 담당했다. 백악관 앞 시위에 참가하지는 않았지만 5·16을 반대한다고 떠들던 사람들의 행적도 기억해둘 만하다.장면 정권하에서 민주당 원내총무를 지낸 이석기(李錫基·작고)씨와 나중에 야당 당수를 지낸 이철승(李哲承)씨가 그들이다. 이석기는 주미대사관 국정감사를 위해 워싱턴에 왔다가 5·16소식을 듣고는장리욱 대사 방에 달려와서 와이셔츠 소매를 걷어붙이고 “대사님,미군을 동원시켜야 합니다”하면서 열을 올렸다.그런데 5·16이 기정사실화되고 미 CIA부장 매쿤의 초청으로 당시 김종필(金鍾泌·현 국무총리) 중앙정보부장이처음 미국에 왔을 때의 일이다. 주미 대사관 중앙정보부 공사 김동환의 집에서 김종필 부장 환영파티가 열려 다른 특파원들과 함께 갔더니 뜻밖에도 이석기와 이철승씨의 모습이 보였다.나는 이석기에게 대뜸 물었다.“이의원,와이셔츠 걷어붙이고 미군 동원시키라던 분이 웬일이세요? 번지수를 잘못 알고 오신 것 아닙니까?” 이석기는 당황한 표정으로 변명했다.“김 부장하고 나는 한 고향 출신이라 옛날부터잘 아는 사이입니다.게다가 김 부장의 춘부장도 제가 잘 알고,김 부장의 형님도 내가 은행에 취직시킨 처지라 먼길 오셨는데 몰라라 할 수도 없고….” 뒷날 김종필이 정계에 진출할때 이석기는 자신의 지역구인 부여를 주고 자신은 서울로 옮겨갔다.그 점에선 이철승도 마찬가지다.그토록 열렬히 5·16을 반대한다던 그가 왜 그자리에 왔었겠는가.정리 정운현기자 jwh59@kdaily. com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