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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리비아 內戰… “사망 1000여명”

    리비아 소요 사태가 반정부 시위대 수천명의 사상자를 내며 내전 위기로 치닫고 있다. 리비아 정부가 전투기와 중화기를 총동원해 시위대를 무차별적으로 공격하자 일부 군 장교와 각국 대사, 정부 인사들이 무아마르 카다피 국가원수의 퇴진을 요구하며 시위대의 주장에 동조하고 있다. 보안군과 친정부 세력은 제2의 도시 벵가지를 비롯해 미스라타, 알자위야 등 8~9개 도시를 장악한 반정부 시위대와 팽팽한 대치를 이어가고 있다. 이에 따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22일 오전(현지시간) 긴급 회의를 열어 리비아 상공에 대한 비행금지구역 설정 문제 등 리비아 상황을 논의했다. 비행금지구역 설정은 이브라힘 다바시 유엔 주재 리비아 부대사가 전투기를 동원한 시위 진압으로부터 자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안보리에 요청했다. 아랍연맹도 회의를 열어 카다피 정권의 강경 진압과 대규모 유혈 사태에 대한 대책을 상의했다. 한때 베네수엘라 망명설이 나돌았던 카다피는 이날 국영 TV에 나와 “나는 베네수엘라가 아니라 트리폴리에 있다.”면서 “언론에 나오는 개(dog)들을 믿지 말라.”고 일축했다. 리비아 보안군은 전날 수도 트리폴리에서 전투기와 군용 헬리콥터, 각종 자동화기 등을 동원,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 사격과 폭격을 퍼부었다. 알자지라 방송과 주요 외신들은 전투기가 시위대의 머리 위에서 저공비행을 했으며, 도심 곳곳에 저격수가 배치됐다고 보도했다. 이슬람권 사이트인 온이슬람넷은 21일까지 리비아 소요 사태로 인한 사망자가 600명을 넘어섰다고 보도했고, 이탈리아 로마 소재 재외 아랍인들의 모임인 아랍월드커뮤니티(COMAI)를 이끌고 있는 포아드 아오디는 공습 등으로 1000명이 사망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군부와 정부 내에서 상당수 인사들이 카다피에게 등을 돌리고 이탈하면서 카다피의 장악력은 갈수록 약해지고 있다. 리비아군 장교 일부는 동료 장병들에게 보내는 성명에서 “국민의 편에서 카다피 제거를 도와야 한다.”며 트리폴리로 진군할 것을 촉구했다. 무스타파 모하메드 아부드 알 젤레일 법무장관은 사표를 냈으며, 유엔본부와 미국, 중국, 인도 등 각국 주재 리비아 대사 및 외교관들은 유혈 탄압을 자행한 카다피의 퇴진을 요구했다. 아부바크르 유니스 자빌 육군 참모총장의 가택 연금설과 군부 쿠데타설도 나오고 있다. 한편 주이집트 대사관은 22일 리비아 주재 한국 중소기업 직원 9명이 육로를 통해 이집트에 도착했다고 밝혔다. 현재 300명의 교민이 남아 있어 전세기 운행을 검토 중이라고 대사관은 덧붙였다. 박찬구·나길회기자 ckpark@seoul.co.kr
  • [격랑의 중동] 초강경 시위 진압 카다피는

    초강경 시위 진압으로 세계를 경악시키고 있는 리비아의 국가원수 무아마르 알 카다피(69)는 현존하는 세계 최장기 독재자로 꼽힌다. 42년째 집권을 이어오고 있는 그 역시 한때는 젊은 혁명 영웅이었다. 부패한 왕과 낡은 전제군주제를 몰아내고 국가의 면모를 일신했던 인물이었다. 1942년 유목민의 아들로 태어난 카다피는 1963년 대학을 졸업한 뒤 군사학교에 들어가 직업군인이 됐다. 당시 이집트 대통령이었던 나세르를 모방해 젊은 장교들로 구성된 ‘자유장교단’을 구성한 카다피는 1969년 쿠데타를 일으켰다. 일개 대위에서 일약 혁명평의회 의장으로 취임해 권력을 장악한 카다피는 국부 유출의 원흉으로 규탄의 대상이던 외국 석유회사들을 추방하고 석유자원을 국유화했다. 미군기지를 철수시키고 비동맹운동에 참가하는 등 독자외교노선을 견지했다. 과거 리비아를 식민지배했던 이탈리아인들을 추방하고 그들의 재산을 몰수하는 등 식민잔재도 철폐했다. 하지만 카다피는 단일 이슬람 국가 건설을 시도하고 엄격한 금욕주의 정책을 시행하는 등 점차 무리수를 두기 시작했다. 괴팍하고 종잡을 수 없는 행동으로 외교무대에서 숱한 물의를 일으키는 행동도 서슴지 않았다. 중동사 전문가 고 앨버트 후라니는 저서 ‘아랍인의 역사’에서 정권을 잡을 당시의 카다피에 대해서는 ‘장교 출신의 탁월한 인물’로 표현한 반면 권력을 장악한 뒤의 그는 ‘예측할 수 없는 인물’로 묘사했다. 카다피는 미군기지를 철수시키는 등 반미노선을 견지했고 그 대가로 리비아는 오랫동안 미국과 군사적 긴장관계를 유지하며 대외적으로 고립을 감수해야 했다. 미국은 1979년 시위대가 리비아 주재 미국 대사관을 방화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1980년 외교관계를 끊었고 이후 리비아를 테러지원국 명단에 올렸다. 미국을 겨냥한 테러사건의 배후라는 이유로 1981년과 1986년 두 차례 리비아를 폭격하기도 했다. 하지만 리비아와 미국은 2003년 12월 핵무기 프로그램 폐기에 전격 합의했고 이후 관계개선을 거쳐 2006년 대사급 외교관계를 수립하며 외교관계를 전면 정상화했다. 강국진기자 betulo@seoul.co.kr
  • 김정은 권력승계 시나리오는

    김정일의 69번째 생일이 지나자 앞으로 후계자 김정은이 언제 어떤 방식으로 공식적인 지도자 자리에 앉을 것인지가 관심거리다. 과거 김정일이 김일성으로부터 권력을 이양받은 과정을 통해 추론해 볼 수 있다. ●시나리오1:국방위 제2인자로 당장 오는 4월 김정은이 최고인민회의에서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에 선출될 가능성이 높다. 이 자리는 국방위의 제2인자 직책으로 김정은을 ‘군사 지도자’뿐 아니라 ‘국가 지도자’로도 내세울 수 있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학 교수는 “김정은의 2단계 권력승계 작업을 4·25 조선인민군 창건일에 맞춰 축제분위기로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제1부위원장 자리를 맡지 않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정성장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김일성 사망 후 김정일이 주석직을 폐지하고 김일성을 ‘공화국의 영원한 주석’으로 내세웠듯, 김정일이 사망하면 국방위원장직을 폐지하고 ‘공화국의 영원한 국방위원장’으로 내세울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시나리오2:김정일 추대 20돌에 등극 김정일은 1991년 말 19차 당중앙위 전원회의에서 인민군 최고사령관에 오르고, 그 다음해에 원수 칭호를 받았다. 김정은이 올 12월 24일 김정일의 최고사령관 추대 20돌에 맞춰 최고사령관에 등극할 경우, 갑작스럽게 김정일의 유고가 발생하더라도 반대세력의 ‘쿠데타’ 가능성을 막을 수 있다. 통일연구원은 최근 ‘2011년 북한 신년공동사설의 의미’라는 보고서를 통해 이 같은 가능성을 언급했다. 그러나 현재 김정일이 원수라는 점, 원수가 되기 위해서는 차수를 거쳐야 하는데 물리적 시간이 부족하다는 점이 걸림돌이다. ●시나리오3:김일성탄생 100돌 맞춰 완결 남성욱 국가안보전략연구소 소장은 최근 “2012년 4·15 김일성 생일에 맞춰 김정은이 총비서직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했다. 2012년 강성대국과 김일성 탄생 100세에 맞춰 김정은을 신격화하기에 최적의 타이밍이다. 그러나 김정일이 총비서직을 받은 것은 1997년으로 김일성이 죽은 뒤였다. 양 교수는 “총비서직을 준다는것은 권력을 완전히 주는 것이다. 김정일이 아직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데 총비서직을 내줄지 의문”이라고 분석했다. 윤설영기자 snow0@seoul.co.kr
  • 김정일 1순위… 카다피·무가베

    김정일 1순위… 카다피·무가베

    미국 외교전문지 포린 폴리시는 호스니 무바라크에 이어 무너질 가능성이 높은 독재자 5명을 꼽으면서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목록의 맨 위에 올렸다. 최근 포린 폴리시 인터넷판은 “무바라크의 실각으로 전 세계 독재자들이 다음 차례가 누구일지 걱정스럽게 주시하고 있다.”면서 김 위원장을 거명한 뒤 이어 리비아의 무아마르 카다피, 짐바브웨의 로버트 무가베, 쿠바의 카스트로 형제, 벨라루스의 알렉산드르 루카셴코를 지목했다. 포린 폴리시는 1994년부터 집권한 김정일 위원장과 46년 동안 집권한 그의 아버지 김일성이 북한을 세계에서 가장 무시무시한 국가로 만들었다면서 북한에는 약 15만명이 수용소에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전했다. 또 김정일은 시민들이 외부 소식을 접하는 것을 막기 위해 인터넷 사용을 금지하고 외국 방송을 차단하고 있으며 노동 수용소와 구금 시설 등을 이용해 저항을 강력하게 통제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16일 김 위원장의 69회 생일을 앞두고 북한은 김 위원장의 셋째 아들 김정은의 주도 아래 성대한 경축 행사를 준비하는 등 후계 체제 구축에 부심하고 있다고 지난 13일 열린북한방송이 전한 바 있다. 한편 포린 폴리시는 올해 68세인 카다피도 41년 전 쿠데타로 집권한 이래 지금도 권좌를 지키고 있다면서 그의 폭압적인 통치로 주요 기관들이 국민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으며 약 500명이 정치범으로 수감돼 있다고 소개했다. 무가베 대통령은 집권 후 3만명에 이르는 소수민족을 학살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지지자들을 통해 야당 인사까지도 살해하는 등 통치 행태가 점점 더 잔혹하고 대담해지고 있다고 이 잡지는 주장했다. 이 밖에도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와 그의 권력을 물려받은 동생 라울 카스트로도 언론과 인터넷 등을 엄격히 통제하고 있으나 최근 경기 침체로 입지가 약화되고 있다고 전했다. ‘유럽의 마지막 독재자’로 불리는 벨라루스의 루카셴코는 16년 동안 통치하면서 자신의 나라를 정치·경제적으로 황폐하게 만들었다고 이 잡지는 덧붙였다. 이석우기자 jun88@seoul.co.kr
  • 무바라크 두 아들 티격태격

    “네가 친구들 뒤를 봐주면서 이 나라를 망쳤다.” 호스니 무바라크 전 이집트 대통령이 마지막 연설을 준비 중이던 지난 10일(현지시간) 밤 대통령궁에서 장남 알라는 동생 가말을 이같이 다그쳤다. 동생이 2002년 집권 국민민주당에서 서열 3위에 해당하는 정책위원회 의장에 임명된 뒤 주변 친구들에게 온갖 혜택을 줬던 것을 책망한 것이다. 그는 “너는 아버지가 말년을 영예롭게 보내실 수 있도록 하는 대신 이미지를 망쳐 놓았다.”고 하며 언성을 높였다고 로이터통신이 이집트 국영 알아크바르 신문을 인용해 13일 보도했다. 차남 가말은 11년간 뱅크오브아메리카(BoA)에서 근무한 뒤 형 대신 아버지 뒤를 잇기 위해 정계에 입문했다. 가말이 당 요직에 오른 후 그의 측근들은 부는 물론 당과 내각에서 핵심 직을 맡는 등 권력까지 누렸다. 대표적인 인물이 이집트 최대 철강업체인 에즈 스틸의 회장 아메드 에즈다. 그는 시위대 사이에서 ‘국민의 피를 빨아먹는 자’로 지목됐고 현재 출국 금지를 당한 채 비리 혐의로 조사를 받고 있다. 전문가들은 무바라크가 민심을 잃은 주요 원인으로 정치적 억압과 함께 엘리트 계층의 부정부패를 꼽고 있다. 무바라크 대통령이 자진 사퇴가 아닌 사실상 쿠데타와 같은 형태로 쫓기듯 자리에서 물러난 것도 가말이 마지막까지 욕심을 부렸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나길회기자 kkirina@seoul.co.kr
  • 하야 전 24시간 무슨 일이

    호스니 무바라크 이집트 전 대통령이 퇴진하기 전 이집트 군부로부터 강력한 ‘최후통첩’을 받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또 무바라크가 막판까지 사임을 거부한 배경에는 가족과 최측근의 만류가 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워싱턴포스트는 12일(현지시간) “무바라크가 조기 사퇴 거부 연설을 한 지 몇 시간도 되지 않아 이집트 군부가 무바라크에게 ‘자발적으로 퇴진하지 않으면 강제로 내쫓길 것’이라는 최후통첩을 전했다.”고 보도했다. 무바라크가 카이로를 비우고 도망치듯 휴양지 샤름 엘셰이크로 떠난 것도 이 같은 군부의 압력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집트 군부는 계속되는 시위, 노동조합의 파업, 경제 파급 효과 등을 고려해 지난주 중반 무바라크의 즉각적인 권력 이양이 불가피하다고 보고 관련 계획을 세웠다. 이후 미 중앙정보국(CIA) 등은 이집트군의 계획이 ‘협의에 의한 퇴진’과 ‘소프트 쿠데타’ 중간쯤에 해당한다는 것을 파악했다. 리언 파네타 CIA 국장이 지난 10일 하원 청문회에 출석, 무바라크가 당일 중 사임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밝힌 것이나 “전 세계가 이집트에서 펼쳐지고 있는 역사와 변화를 바라보고 있다.”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연설도 이런 정보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이집트 군부의 시나리오는 10일 오후 실행에 옮겨졌다. 군부는 타흐리르 광장에 나가 시민들에게 “여러분의 요구는 받아들여질 것”이라고 말한 뒤 곧바로 대통령이 아닌 무함마드 탄타위 국방장관 주재로 군 최고위원회를 열어 그를 압박했다. 하지만 군이 원하는 연설을 하기로 했던 무바라크는 가족과 최측근들이 “소요사태를 잘 넘길 수 있다.”며 설득하자 방송 몇분 전 마음을 바꿔 조기 사퇴를 거부했다. 특히 후계자였던 아들 가말은 아버지를 설득한 뒤 자신이 직접 성명문을 수정하는 등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AP통신이 전했다. 백악관과 이집트 군부는 발칵 뒤집혔다. 분노가 극에 달한 군부는 몇 시간 뒤인 11일 새벽 “자진 사퇴와 강제 퇴진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무바라크에게 최후통첩을 보냈고 두 번째 군 최고위원회를 소집했다. 무바라크의 최측근인 오마르 술레이만 부통령조차도 하야 발표 전날인 10일 밤부터 군부의 입장에 동조했다고 미 정부 관리는 전했다. 나길회기자 kkirina@seoul.co.kr
  • “중동서 이란 입김 커질 듯… 美 정책기조 수정 불가피”

    “중동서 이란 입김 커질 듯… 美 정책기조 수정 불가피”

    30년 철권통치를 끝낸 이집트인들의 혁명 열기가 뜨겁다. 호스니 무바라크가 물러난 이집트는 과연 앞으로 어떤 길을 걷게 될 것인가. 튀니지에서 시작돼 이집트의 독재정권마저 무너뜨린 아랍 민주화의 물결은 이제 어디로 향할 것인가. 중동 전문가인 서정민 한국외국어대 국제지역대학원 교수와 황병하 조선대 아랍어과 교수의 긴급 지상대담을 통해 코샤리 혁명 이후의 이집트와 중동의 앞날을 짚어 본다. ●무바라크 퇴진이 갖는 역사적 의미는 뭔가. 서정민 교수 가장 먼저 짚어 봐야 할 대목은 이집트인들이 5000년 역사에서 처음으로 시민혁명을 성공시켰다는 점이다. 이집트가 아랍권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감안한다면 아랍 현대사를 다시 쓰는 전환점이라고 평가하고 싶다. 하지만 이제 시작이다. 상황을 좀 더 지켜봐야 한다. 지난 10일 밤 무바라크가 퇴진을 거부하고 나서 하루 동안 무슨 일이 있었나 봐야 한다. 1952년 쿠데타로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정을 채택했지만 그것이 민주화는 아니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정치와 경제에서 기득권을 누려온 군부가 얼마나 개혁조치를 취할지 의문을 제기하는 시선이 적지 않다. 한마디로 이집트인들은 이제 민주화로 가는 첫걸음을 내디딘 셈이다. ●무바라크 퇴진 이후 군부가 실권을 장악했다. 황병하 교수 이집트 헌법은 대통령이 물러날 경우 국회의장이 권력을 승계하도록 규정하고 있으나 이번 사태에서는 군 최고위원회가 권한을 이어받았다. 군부는 나세르 전 대통령이 주도한 쿠데타 당시부터 이집트 정치에서 핵심 역할을 해 왔다. 역대 대통령이 모두 군부 출신이다. 오마르 술레이만 부통령과 무함마드 탄타위 국방장관도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군부는 지금 적지 않은 불안감을 느낄 것으로 생각된다. 상황이 원하는 대로 흘러온 게 아니기 때문이다. 1952년 나세르 혁명도 군부 고위장교들이 왕정을 지지하며 기득권에 안주할 때 자유장교단을 중심으로 한 하위직 청년 장교들이 나세르 혁명을 이끌었다. 이번 시위에 일부 청년 장교들이 가담했던 점을 감안하면 군부가 실권을 장악한 것은 군부 내부결속을 다지는 것과 함께 무바라크를 옹호하는 쿠데타와 그를 축출하려는 쿠데타 모두를 사전에 차단하려는 조치였다는 의미를 동시에 갖는다. 또 다른 측면에서 접근한다면, 군부가 오랜 이집트 통치 경험을 바탕으로 상당한 자신감을 갖고 있다는 측면도 존재한다. 무바라크가 아들 가말에게 권력을 세습시키려 했지만 술레이만 당시 정보국장과 탄타위 국방장관이 끝까지 반대하는 바람에 결국 뜻을 이루지 못했을 정도다. 군부는 앞으로도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킬 수 있다는 판단을 했기 때문에 무바라크를 퇴진시키기로 한 것이 아닐까 싶다. ●앞으로 이집트 정국을 전망한다면. 서 교수 한국이 1987년 경험했던 6월항쟁과 비슷한 경로로 갈 가능성이 높다. 현 정부가 국민들 요구를 수렴하는 선에서 양보하되 권력을 유지하는 방향으로 가는 모델이 가장 유력할 것이다. 그게 사실 미국 등이 가장 바라는 시나리오이기도 하다. 물론 자유로운 총선과 대선은 보장할 것이다. 다만 당초 계획대로 오는 9월에 대선을 치를 가능성은 많이 낮아졌다. 1년 이상 늦어질 가능성이 있다. 선거 일정에 따라 이집트 정세가 안정으로 갈지 혼란으로 갈지 판가름 날 것이다. 무바라크 측근들을 단죄해야 한다는 요구가 없는 건 아니지만 군부가 권력을 장악한 상황에서 쉽지는 않을 것이다. 향후 정국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집단은 무슬림형제단이다. 가장 큰 득표력을 갖고 있다. 이번 혁명은 민족적·세속적 성격이 강했고 무슬림형제단이 주도한 것도 아니지만 앞으로 의회에서 굉장히 약진할 것이다. 2005년 총선 때 무소속으로 출마했는데도 전체 의석의 20%를 차지한 경험이 있다. 향후 총선에선 최소한 3분의1의 의석 확보가 가능할 것으로 본다. 무슬림형제단은 군부와 대화 채널을 유지하면서 캐스팅보트 역할도 하게 될 것이다. 황 교수 무바라크가 퇴임한 건 상징적인 의미가 크지만 지금부터가 중요하다. 기존의 공동목표를 달성한 이상 이제부터는 각자 소속 정파와 조직 목표에 따라 다양한 요구가 터져나올 것이다. 현재 야권세력은 외형상으로는 크게 4·6청년운동, 변화를 위한 이집트운동(키파야), 무슬림형제단으로 나눌 수 있다. 4·6 청년운동과 키파야 등은 암르 마무드 무사 아랍연맹 사무총장을 지지한다. 변화를 위한 민족연합(NAC)은 모하메드 엘바라데이 전 국제원자력기구 사무총장과 파루크 아흐마드 술탄 대법원장을 지지한다. 무슬림형제단이 대선 후보를 내지 않겠다고 한 것은 여러모로 의미심장하다.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대선 승리가 아니라 의회에서 의석을 최대한 확보해서 이집트 민주화와 선거에서 주도권을 장악하겠다는 전략인 듯하다. 전체 인구의 40%가 하루 2달러가 안 되는 돈으로 생활할 정도로 열악한 상황에서 경제문제는 가장 첨예한 쟁점이다. 무슬림형제단은 빈곤구제 등 사회활동에서 보여준 오랜 경험과 열정으로 서민들의 신뢰를 쌓아 왔다. 앞으로 만만치 않은 영향력을 보여줄 것이다. ●중동에 미칠 영향이 만만치 않을 것 같다. 황 교수 튀니지에서 벌어진 민주화 열기가 이집트로 옮겨 왔지만 이집트와 튀니지를 단순 비교하는 건 무리다. 튀니지는 서구나 다름없는 국가지만 이집트는 관광산업을 빼고는 그동안 철저히 고립된 상황이었다. 그런 면에서 이집트는 말 그대로 혁명을 경험하고 있다. 하지만 이집트 혁명이 곧바로 중동에 영향을 미치기는 쉽지 않다. 만약 이집트에서 이슬람 정당을 허용했다면 지금처럼 급격한 변화를 겪진 않았을 것이란 말도 있지만 요르단만 해도 이슬람 정당을 인정하고 정부에 참여시킴으로써 완충작용을 한다. 예멘이 불안하다고는 하지만 4개 유력부족 대표가 대통령과 협의하면서 운영하는 이 나라에서 이집트식 혁명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페르시아만 인근 산유국들도 막대한 자금력으로 정부에 대한 불만을 흡수할 충분한 여력이 있기 때문에 일부 개혁은 가능하겠지만 이집트식 혁명은 힘들다. 서 교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중동에서 이란의 영향력은 커질 것이고 이스라엘은 어느 정도 어려움에 처할 것이라는 점이다. 이슬람에서 시아파와 수니파 사이에 벌어지는 갈등은 종교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정치적인 성격이 강하다. 사우디아라비아와 함께 수니파의 대표주자였던 이집트가 격랑에 싸였다. 그동안 이란과 국교까지 단절했던 이집트에서 발생한 정치변화는 이란에 대한 단일전선을 흔들게 되고 이는 중동 전체 정치 역학에서 이란 영향력 확대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이는 곧 이스라엘의 입지가 줄어든다는 것을 뜻한다. 사실 그동안 이집트는 중동에서 가장 이스라엘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온 국가였다. ●이번 혁명이 ‘쇠퇴하는 미국 헤게모니’를 다시 한번 보여줬다는 평가도 있다. 서 교수 미국은 중동에 대한 정책기조를 바꿔야 한다. 미국은 그동안 입만 열면 중동 민주화와 인권을 외쳤지만 사실 지역 안정을 가장 중시했다. 그러다 보니 이집트에서 발생한 혁명 국면에서 상황을 주도하지 못했다. 겉보기엔 공개적으로 언급했던 대통령 퇴진을 이끌어냈으니까 외교적 승리라고 할지 모르지만 무바라크가 사임을 거부했다가 번복하는 약 24시간 동안 미국이 별다른 역할을 못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미국은 그동안 중동에 대해 상당한 영향력을 갖고 있다고 자부했지만 무력으로 후세인 정권을 교체하는 건 가능할지 몰라도 국내 정치에 미치는 힘은 제한적이라는 것이 드러났다. 무바라크가 그동안 적극적으로 미국과 보조를 맞춰온 대표적인 친미 인사라는 점도 미국엔 부담이다. 무바라크에 대한 역풍 때문에 이집트가 과거처럼 친미정책을 펼 여지도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무바라크는 앞으로 어떻게 될까. 황 교수 군부가 지켜주는 한 무바라크가 이집트를 떠날 가능성은 낮다. 무바라크가 머물고 있는 샤름 엘셰이크는 이집트 국내에서 무바라크에게 가장 안전한 곳이다. 독재자 단죄에 있어서는 수니파와 시아파의 전통적인 차이를 살펴봐야 한다. 시아파는 지도자가 잘못하면 법적인 책임을 포함해 끝까지 책임을 묻지만 수니파는 역사적으로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는다. 비록 각종 부정부패와 탄압에도 불구하고 일단 사임한 이상 무바라크 쪽에서 볼 때 수니파 정부가 무리한 요구까지 하지는 않을 것으로 본다. 거기다 군부도 자존심이 있기 때문에 무바라크를 마냥 내칠 수 없다. 강국진기자 betulo@seoul.co.kr
  • YS “박정희는 군사쿠데타 원흉” 원색적 비판

    김영삼 전 대통령이 “박정희는 군사쿠데타 원흉”이라며 원색적 비판을 퍼부었다. 호스니 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의 퇴진에 대한 논평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유탄은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에게 날린 셈이이다.  13일 김 전 대통령은 이날 성명을 통해 “독재정권은 반드시 붕괴되고야 만다는 역사의 진리를 거듭 확인하고 있다.”면서 “이집트 시민혁명의 승리를 민주주의와 자유를 사랑하는 세계인들과 함께 환영한다”며 이같이 밝혔다.  그는 이어 “우리나라는 이승만 대통령을 하야시킨 4.19 민주혁명,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을 붕괴시킨 부마민주항쟁,전두환 독재에 저항한 5.18민주화운동과 1987년 6월 민주항쟁 등 자랑스러운 민주주의 투쟁사를 갖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사랑하는 조국에 군사쿠데타라는 죄악의 씨를 뿌린 원흉이 바로 박정희 육군 소장”이라며 “이후 일제 치하 36년에 버금갈 만한 32년 동안 군사정권이 이 나라를 지배했고, 독재자 박정희는 18년간 장기 집권하며 국민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했다.”고 지적했다.  김 전 대통령은 “북한의 김정일 세습 독재정권도 그리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며 “이 나라 민주주의가 꽃을 피우고 크게 번영해 세계사의 주역이 되기 바란다.”고 말했다.  인터넷서울신문 event@seoul.co.kr  
  • 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 하야

    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 하야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이 11일 대통령직 사퇴를 선언했다. 무바라크 대통령은 이날 수도 카이로를 떠나 홍해 연안 휴양도시인 샤름 엘셰이크로 거처를 옮긴 뒤 대통령직 사퇴의사를 밝혔다고 CNN등 외신들이 12일 새벽 긴급 보도했다. 무바라크 대통령의 사퇴 선언 소식이 전해지자 카이로 타흐리르 광장에 모여 무바라크의 퇴진을 외치던 100만명의 시민들은 일제히 ‘이집트 자유’를 외치며 환호했다. 이로써 지난달 25일부터 본격화한 이집트 반정부 시위는 18일만에 무바라크의 퇴진으로 한 매듭을 짓게 됐다. 1981년부터 시작된 무바라크의 30년 독재 정치도 이날로 막을 내리게 됐다. 오마르 술레이만 부통령은 11일 저녁(현지시간) 긴급 기자회견을 갖고 무바라크 대통령이 이날 저녁 권력을 군에게 넘겨주고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고 밝혔다. 이날 오전까지만 해도 9월 대통령 선거 때까지 퇴진하지 않겠다며 시민들의 퇴진 요구를 강력히 거부하던 무바라크가 전격적으로 사퇴한 데는 이집트 군부의 압력이 결정적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앞서 무바라크 대통령은 이날 오마르 술레이만 부통령에게 권력을 이양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한 뒤 헬기편으로 샤름 엘셰이크의 대통령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와 관련, 알아라비야 방송은 정치분석가들의 말을 인용해 이집트 군부의 쿠데타가 시작된 것이라는 분석을 내놓았다. 알아라바야 방송은 “군부가 무바라크를 물러앉힌 뒤 새로운 권력 창출 작업에 나섰음을 뜻하는 것으로, 이미 내각도 임명해 놓은 상태”라는 한 정치분석가의 말을 보도했다. 실제로 이날 무바라크의 엘셰이크 행에는 사미 하페즈 에난 합참의장이 동행, 군부 쿠데타 가능성을 내비쳤다. 무바라크 대통령이 전격 사퇴함에 따라 이집트 정국은 앞으로 이집트 군부의 주도 아래 오마르 술레이만 부통령과 야권 지도부간의 정치개혁 협상을 통해 과도정부 구성작업이 추진될 전망이다. CNN은 이집트 군 최고위원회가 무바라크의 권력을 승계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무바라크의 퇴진 소식이 전해지자 카이로 타흐리르 광장에 모여 있던 100만명의 시민들은 저마다 이집트 국기를 흔들며 환호했다. 한 시민은 “시민의 힘으로 무바라크의 장기 독재를 끝냈다.”면서 “오늘은 이집트 시민 혁명의 날”이라고 기뻐했다. 강국진·나길회기자 betulo@seoul.co.kr
  • [무바라크 대통령 하야] 무바라크 권력공백… ‘포스트 무바라크’ 안갯속

    호스니 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이 시위대와의 힘겨루기에서 밀려 결국 권좌에서 물러나면서 정국의 키를 쥐었던 군부가 권력을 물려받게 됐다. 군부가 11일과 12일(현지시간) 무바라크와 시위대 사이에서 교묘한 줄타기를 벌이다 결국 시민의 손을 들어준 것으로 풀이된다. 30년간 집권한 독재자의 퇴진을 바라는 민심을 거스르지 않고 혼란을 막는 방향으로 군의 최종 입장이 정해지면서 18일간 계속된 반정부 시위는 종지부를 찍게 됐다. 이집트 군부는 12일 오전까지만 해도 무바라크 대통령의 편에 서는 듯했다. 군은 11일 ‘코뮈니케 2’로 이름 붙여진 성명을 통해 무바라크 대통령이 오마르 술레이만 부통령에게 권력을 이양하는 방안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하반기에 치러질 대선이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가 되도록 약속하겠다는 뜻도 제시했다. 10일 밤 무바라크 대통령이 TV 연설을 통해 밝힌 정치개혁 일정을 뒷받침하겠다는 의사를 밝히는 모양새였다. 이로써 군이 갖가지 시나리오 가운데 하나로 거론됐던 ‘시위대와의 조속한 공조를 통한 무바라크 퇴진 압박’이라는 카드를 버리는 듯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군이 무바라크 대통령의 굳건한 버팀목으로 계속 남아 있을 가능성이 별로 높지 않다고 분석했다. 이집트 군부는 ‘코뮈니케 2’ 성명 발표에 앞서 무바라크 대통령의 연설을 앞두고 내놓은 ‘코뮈니케 1’ 성명에서는 “군은 시민의 정당한 요구를 지지한다.”는 입장을 내놓았었다. 군부를 장악하고 있는 무함마드 탄타위 국방장관이 군통수권자인 무바라크 대통령을 배제한 채 군 최고회의를 소집하고 내놓은 성명인 만큼 일정부분 무바라크 대통령과도 거리를 둬 나갈 가능성을 내비친 것으로 풀이됐다. 결국 군은 11일 재개된 반정부 시위에서 시민들의 저항이 더욱 거세지자 무바라크를 밀어내고 정권을 교체하는 쪽으로 방향을 정했다. 이와 관련, 미국의 이집트 전문가인 마이클 루빈은 “군은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시민을 지지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우선 무바라크 대통령이 군 출신이 아닌 아들 가말에게 권력을 넘겨주려 하면서 군부를 압박해 반감을 샀기 때문이다. 군에 중요한 것은 ‘무바라크 정권의 수호’가 아니라 ‘군사 우위 체제의 유지’이기 때문에 굳이 대세를 거스를 이유는 없다는 분석이다. 또 이집트군이 징병제를 택하고 있어 젊은 군인들이 거리에 나선 친구와 이웃을 향해 발포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집트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킬 가능성은 꾸준히 제기돼 왔다. 군부가 무바라크 대통령과 오마르 술레이만 부통령을 배제한 채 군 최고회의를 연 것을 두고 AP통신 등 외신들은 군사 쿠데타로 해석할 여지가 있다고 분석했다. 또 로즈마리 홀리스 런던시립대 교수는 “군 내부가 아미 둘로 쪼개진 것 같다.”고 말했다. 시위가 격화되면서 무바라크 대통령과 친밀한 군 고위부와 시위대를 지지하는 소장파 간 사이가 벌어졌거나 계급과 관계없이 강경파와 온건파 간 분열이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는 분석이다. 실제로 11일 반정부 시위에는 대위에서 중령에 이르는 중간급 간부 상당수가 합류한 것으로 알려졌다. 유대근기자 dynamic@seoul.co.kr
  • 시위대 “100만 항의” vs 정부 “軍 강경진압”

    의사와 변호사 등 전문직 및 중산층이 대거 총파업에 가담하며 거리 시위에 속속 합류하는 데다 버스 운전사, 운하 근로자 등 노동자들의 총파업 및 시위 참여도 확산돼 이집트 민주화 시위가 다시 급류를 타고 있다. 시위대가 11일 금요 예배 후 ‘100만명 항의 집회’를 강행하겠다고 예고하자 정부는 군 개입을 경고하는 등 양측의 양보 없는 대치가 점점 더 일촉즉발의 위기로 치닫고 있는 것이다. 시위대와 정부 사이의 긴장감이 고조되는 가운데 이집트 외교부가 10일 미국의 계엄령 즉각 해제 요구를 비판하면서 미국과 이집트 관계도 삐걱대는 등 그동안 유혈 충돌을 막아왔던 안전판들이 흔들리고 있다. 알자지라 방송은 10일 “수천여명의 의사들이 이날 파업에 참여해 수도 카이로 중심부에 있는 타흐리르(해방) 광장에서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의 즉각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고 전했다. 방송은 “변호사 3000여명도 변호사 회관에서부터 타흐리르 광장까지 시위를 벌였으며 상당수가 시위대에 합류했다.”고 전했다. AP는 노동조합들의 총파업 호소가 있은 지 이틀째인 이날 전국에서 6만여명의 운전사 등이 파업에 참가했으며 수만명의 공장 노동자도 이에 참여했다고 전했다. 노동자들은 무바라크 대통령의 퇴진과 함께 근로 조건 개선을 요구했다. 그동안 수도 카이로의 타흐리르 광장을 중심으로 전개되던 무바라크 퇴진 운동은 시위 16일째인 9일(현지시간) 광장 바깥으로 퍼져 나갔다. 카이로의 시위대는 의회와 정부 건물 주변에서 의회 해산을 촉구하며 목소리를 높였고 다른 지역 곳곳에서도 수백명에서 수천명 단위의 시위가 산발적으로 일어났다. 특히 수에즈 운하 근로자 6000명이 파업하는 등 그동안 관망하던 노동조합까지 동참했다. 오마르 술레이만 부통령과 야권 대표들 간 대화 이후 진정 국면으로 접어들던 시위 분위기가 11일로 예정된 100만명 항의 시위를 앞두고 재점화하는 양상이다. 이에 정부는 군 개입 가능성을 언급하며 시위대를 강하게 압박하기 시작했다. 전날 술레이만 부통령이 무바라크의 즉각적인 퇴진은 군 쿠데타를 가져올 수 있다고 발언한 데 이어 이날엔 아메드 아불게이트 외무장관이 미 공영 PBS와의 인터뷰에서 군 개입 가능성을 언급한 뒤 “군이 들어오면 매우 위험한 상황이 초래될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달 28일 금요 시위 때는 군이 “시위대에 발포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면서 최악의 사태를 면했지만, 이번 시위는 ‘피의 금요일’로 얼룩질 가능성이 제기된 것이다. 이런 가운데 개헌위원회는 대통령 출마 자격 요건을 극도로 제한한 76조와 대통령의 연임 제한을 두지 않은 78조를 삭제하는 등 헌법 조항 6곳을 손질하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위원회는 인권단체와 미국이 즉각적인 폐지를 주장하고 있는 긴급조치법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이집트와 미국의 관계도 심상치 않다. 그동안 시위대와 정부 사이에서 줄타기를 해온 미국이 이집트 정부에 대한 압박 강도를 높이자 이집트 정부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지원을 등에 업고 반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전날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술레이만 부통령에게 직접 전화해 야권 인사와의 대화를 포함한 미국의 네 가지 요구 사항을 전달하자 게이트 외무장관은 “미국의 뜻을 강요하지 말라.”며 ‘발끈’했다. 이에 백악관은 게이트 장관 발언 직후 “이집트 정부는 국민이 보고 싶어 하는 조치들을 취하지 않고 있다.”고 몰아세웠다. 로버트 기브스 백악관 대변인은 “이집트 정부의 자제와 개혁 수준이 (원조 문제를) 결정하게 될 것”이라며 ‘원조 삭감 카드’를 다시 꺼내들기도 했다. 나길회기자 kkirina@seoul.co.kr
  • “개헌委 구성” 무바라크, 개혁요구 처음 실행

    궁지에 몰린 호스니 무바라크 정권이 ‘당근과 채찍’을 함께 빼들며 정국 수습에 나섰다. 개헌위원회를 구성하며 시민들의 개혁요구를 일부 수용하면서 동시에 “시위에 대한 인내심이 바닥나 간다.”며 압박 강도를 높이고 있는 것이다. 오마르 술레이만 부통령은 8일(현지시간) 국영TV를 통해 “무바라크 대통령이 개헌 문제를 검토할 위원회와 정치 개혁 과정을 검토할 독립위원회 등 2개의 기관 구성을 지시했다.”고 밝혔다. 두 위원회의 설치는 지난 6일 정부와 야권이 합의한 사안으로 무바라크 정권이 정치개혁 약속을 실행에 옮긴 것은 처음이다. 개헌위원회는 상소법원장을 위원장으로 10명의 수석 판사 및 헌법 전문가들로 구성할 예정이다. 또 오는 9월 치러질 대통령선거의 입후보 자격 완화와 대통령 연임 제한 규정의 신설 등을 논의할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 공무원 임금인상 등 유화책을 잇달아 내놓은 정부가 실질적인 개혁 절차를 하나씩 밟아가며 민심 달래기에 속도를 붙이려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5일째 반정부 시위의 열기가 사그라지지 않자 정부는 그동안 참아 왔던 강경 발언을 쏟아내며 시위대에 대한 불편한 심기도 드러냈다. 술레이만 부통령은 이날 이집트 민·관영 언론사 책임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타흐리르 광장에서 연일 계속되는 시위를 참고 견디기가 어렵다.”면서 “시위가 조속히 끝나야만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술레이만 부통령이 자극적인 표현까지 써 가며 시위대를 압박한 것을 두고 AP통신은 정부의 조바심이 반영된 발언이라고 풀이했다. 간담회에서 민주화 세력과의 대화 의지를 재차 강조한 술레이만 부통령은 “(시민들과) 대화하지 않으면 쿠데타가 일어날 것”이라면서 “(쿠데타는) 계산되지 않은 경솔한 단계이며 많은 부조리를 낳을 것”이라고 언급했다. 그는 언론사 대표들이 발언 취지에 대해 묻자 군사 쿠데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면서 “집권 준비가 되지 않은 세력이 국가 기관을 전복할 수 있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술레이만 부통령은 “현재 타흐리르 광장에 있는 시위대와 몇몇 위성방송들이 이집트를 모욕하고 비하해 시민들이 직장으로 돌아가는 것을 주저하게 만든다.”고 불쾌해하면서 “시민 불복종 행위는 사회를 매우 위험하게 만들기 때문에 이 문제에 대해서 참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는 또 “체제의 종말은 없을 것이며 무바라크 대통령이 즉각 떠나는 일도 없을 것”이라고도 덧붙였다. 유대근기자 dynamic@seoul.co.kr
  • [혼돈의 이집트] 이집트 개혁 ‘총감독’ 군부… 경제도 좌우 ‘막강파워’

    [혼돈의 이집트] 이집트 개혁 ‘총감독’ 군부… 경제도 좌우 ‘막강파워’

    호스니 무바라크 정부와 야권이 헌법개혁위원회 구성 등에 합의해 소요 사태 2주일 만에 대화 국면을 형성하면서 오마르 술레이만 부통령과 막후의 군부가 집중적인 조명을 받기 시작했다. 뉴욕타임스가 6일(현지시간) “9월 선거 이후 누가 새 대통령이 되더라도 부유하고 비밀스러운 군부가 이집트 통치의 열쇠를 쥐게 될 것”이라고 보도한 데에서 보듯 ‘포스트 무바라크 시대’의 열쇠는 결국 술레이만과 군부가 쥐고 있다는 분석이다. 이집트 정치 개혁 논의의 ‘주연’이 술레이만이라면, 군부는 이를 연출하는 ‘총감독’으로 자리매김해 가는 형국이다. ●현대 이집트 권력의 원천 사실 이집트의 현대정치는 군부를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다. 1953년 ‘자유장교단’ 쿠데타로 왕정을 무너뜨린 뒤 초대 대통령이 된 무함마드 나깁부터 가말 압델 나세르, 안와르 사다트는 물론이고 무바라크 현 대통령까지 역대 모든 최고 권력자가 군부를 기반으로 권력을 잡았다. 이집트 군부는 무바라크 대통령이 30년이나 장기 집권할 수 있는 원동력이 돼 왔다. 상대적인 청렴성과 우수한 인재들로 구성된 덕에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대조차 군대와 별다른 충돌이 없을 정도로 국민들의 신뢰까지 얻고 있다. 이스라엘을 빼고는 중동과 아프리카를 통틀어 최강 전력이자 세계 10위 군사력을 자랑하는 이집트군은 약 47만명에 이르는 현역에 예비군도 48만명이나 된다. 고졸자까지는 3년, 대학생 이상은 1년간 의무복무를 해야 하는 징병제를 유지하고 있다. 단 기독교의 한 분파인 콥트교 신자는 병역을 면제한다. 군부는 막강한 경제력도 갖고 있다. 국방예산도 2009년도 기준 58억 5000만 달러로 국내총생산(GDP) 1891억 달러의 3%나 된다. 군부는 무기뿐 아니라 도로와 주택건설, 소비재, 리조트 경영 등 사업에도 관여한다. 대통령에게만 보고할 뿐 구체적인 국방예산 내역 등 대다수 군 관련 정보는 공개하지 않는 등 상당한 독립성과 특권을 누리고 있다. 뉴욕타임스는 6일 “최근 군 장교들의 임금이 사기업 직원들에 비해 떨어지면서 군의 인기가 시들해지긴 했지만 이집트군은 전자제품이나 의류, 심지어 식품 생산에도 직접 개입하고 있다.”며 막강한 군부의 부와 영향력을 전하기도 했다. ●미국·이스라엘과 밀월 관계 유지 이집트군이 국민들에게 인정받는 배경 중 하나로 이스라엘과 벌였던 전쟁을 빼놓을 수 없다. 1948년 제1차 중동전쟁에서 겪은 치욕적인 패배가 쿠데타로 이어졌고 1973년 제4차 중동전쟁 승리는 아랍권의 자존심을 세우며 위상을 높였다. 특히 당시 공군을 이끌었던 무바라크가 이 전쟁에서 국민적 영웅으로 부상하면서 이후 대통령에 오르는 배경이 됐다. 이집트군은 1979년 사다트 전 대통령이 미국에서 이스라엘과 평화협정을 체결한 뒤 미국으로부터 해마다 막대한 군사 지원을 받고 있다. 2009년 지원액도 13억 달러에 이른다. 덕분에 미국제 F16은 이집트 공군의 주력 전투기가 됐고, 미국제 M1A1 에이브럼스 탱크는 이집트 육군을 이스라엘에 이어 중동에서 두 번째로 많은 차세대 전차를 보유한 군대로 만들었다. 이스라엘과 전쟁을 거치며 성장한 이집트 군부가 1979년 이후로는 미국·이스라엘과의 밀월 관계를 통해 기득권을 유지해 온 셈이다. ●무함마드 탄타위 국방 등 주목할 인사 이집트 정세가 요동치면서 군부를 움직이는 핵심 인사들의 면면에 전 세계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특히 가장 눈에 띄는 인사는 술레이만 부통령이다. 육군 중장 출신으로 무바라크 대통령의 오른팔로 꼽히는 그는 1993년부터 2011년까지 정보국장에 재직했다. 그의 잠재적인 경쟁자로 꼽히는 무함마드 탄타위 국방장관은 군 안팎에서 전쟁 영웅으로 명성이 높다. 군 원수 출신이며 전형적인 야전 군인이다. 1956년 이스라엘과의 수에즈 전쟁에서부터 1991년 미국의 이라크전 때까지 중동에서 벌어진 전투에 빠짐 없이 참전했다. 위키리크스가 폭로한 카이로 주재 미국 대사관 외교전문에 따르면 일부 군 장교들은 탄타위 국방장관을 ‘무능력한 무바라크의 딸랑이’로 묘사했다. 해외에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사미 에난 참모총장도 주목해야 할 인물로 꼽힌다. 그는 미국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고 부정부패에 연루되지 않은 깨끗한 이미지로 국민의 신임을 받고 있다. 사실상 최대 야당인 무슬림형제단도 그를 긍정적으로 평가할 정도다. 강국진기자 betulo@seoul.co.kr
  • 튀니지 ‘재스민 혁명’ SNS의 힘

    튀니지 ‘재스민 혁명’ SNS의 힘

    지난해 12월 17일. 튀니지 중부에 있는 인구 4만명의 소도시 ‘시디 부 지드’가 지구촌에 조용히, 그러나 빠른 속도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이곳에서 노점상을 하던 26세 청년 모하메드 부아지지의 분신 소식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인 트위터와 페이스북을 타고 퍼져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로부터 한달이 채 안 된 지난 14일(현지시간). 끝날 것 같지 않았던 튀니지의 23년 독재 체제는 한순간에 무너졌다. ●인구의 18%가 페이스북 가입자 대학에서 컴퓨터 공학을 전공한 부아지지는 독재정부가 망쳐 놓은 경제난 탓에 일자리를 찾지 못하고 과일 노점상으로 겨우 생계를 꾸렸다. 노점 단속에 나선 경찰이 그의 뺨을 때리고 과일 수레를 부순 뒤 외상으로 구입한 과일 200달러어치를 압수했다. 시청을 찾아가 사정했지만 소용없었다. 자기만 바라보는 가족과 아직 갚지 못한 빚, 암울한 내일…. 부아지지에게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주정부 청사 앞에서 머리에 기름을 붓고 불을 댕겼다. 그의 희생은 그러나 헛되지 않았다. 살인적 실업률에 신음하던 튀니지 국민들은 부아지지의 분신 소식에 들고 일어났다. 튀니지의 공식 실업률은 14%. 하지만 이 숫자를 믿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튀니지 경제는 바닥을 헤매고 있다. 특히 15~29세 청년 실업률은 30%에 이른다. ●위키리크스도 혁명 성공 한몫 혁명 성공의 또 다른 열쇠는 내부고발 사이트 위키리크스가 제공했다. 대통령 일가의 과도한 재산 축적과 부패상을 적나라하게 담은 외교 문서들이 튀니지 민주화 운동가들이 만든 ‘튀니리크스’(Tunileaks)를 통해 확산되면서 혁명에 대한 국민들의 열망을 더욱 북돋았다. 시위가 열흘 넘게 계속되자 독재자 제인 엘아비디네 벤 알리 대통령은 뒤늦게 병원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사경을 헤매던 부아지지는 지난 4일 끝내 세상을 떠났다. 성난 민심은 더욱 달아올랐고 더 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나섰다. 경찰의 진압과정에서 사망자가 잇따라 발생하자 항의 시위는 트위터와 페이스북을 매개로 한 정권 퇴진 운동으로 전개되기 시작했다. 1987년 무혈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뒤로 인권 탄압과 부정부패 등 독재의 전형을 보여 온 벤 알리는 결국 사우디아라비아로 달아났고, 철옹정권은 무너졌다. 전 세계 언론은 튀니지의 민중 봉기를 ‘SNS가 꽃피운 재스민 혁명’이라 불렀다. 튀니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재스민처럼 평범한 민초들이 SNS를 통해 하나로 뭉쳐 거둔 승리라고 평가했다. 튀니지는 인구의 60%가 25세가 채 안 되는 ‘젊은 국가’다. 이 때문에 페이스북 가입자가 18%에 이를 만큼 SNS 이용률이 높다. 튀니지 독재를 무너뜨린 SNS는 이제 이웃 중동과 아프리카, 남미의 독재국들을 겨냥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청년층 비율이 높고 경제 사정이 열악한 예멘(70%), 알제리(75%)가 다음 타깃이 될 가능성에 주목한다. 나길회기자 kkirina@seoul.co.kr
  • ‘쫓겨난 독재자’ 벤 알리는 누구

    ‘쫓겨난 독재자’ 벤 알리는 누구

    1881년부터 75년간 프랑스령이었던 튀니지는 1956년 3월 독립한 뒤로 단 두명의 국가 지도자만이 존재해 왔다. 독립 운동을 이끌었던 하비브 부르기바 초대 대통령이 30년간 권좌를 지켜온 튀니지는 1987년 당시 총리이던 제인 엘아비디네 벤 알리(74) 현 대통령의 무혈 쿠데타로 정권 교체를 이뤘다. 국민의 환영 속에 막을 올린 새 정권도 오래 지나지 않아 민주주의를 도입하겠다던 약속을 저버렸다. 종신 대통령 직함을 없애고 최대 3선까지만 허용하도록 했지만 2002년 4선 도전을 위해 다시 개헌했다. 지난 2009년 5선 연임에 성공, 23년 넘게 튀니지의 독재자로 군림했다. 임기 초기를 제외하면 정권 유지에 ‘올인’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야당 인사들을 끊임없이 탄압하고 국민들의 인권을 제약했다. 튀니지는 다른 아프리카 국가에 비해 상대적으로 정국이 안정돼 있지만 1058만명의 국민들은 언론의 자유를 포함한 많은 부분을 포기하고 살아야 했던 것이다. 심지어 다른 독재국들과 달리 경제적 풍요라는 ‘당근’을 주지도 못했다. 지난해 1인당 국내총생산(GDP) 추정치는 9500달러로, 1만달러가 안 된다. 실업률은 1990년부터 지금까지 12~16%를 유지했고 최근에는 물가, 특히 식품 가격이 치솟았다. 석유가 나오지만 하루에 수백만 배럴을 생산하는 인근 산유국과는 달리 일일 산유량이 고작 9만 7600배럴 정도에 불과하다. 빼어난 자연경관과 함께 페니키아, 로마, 비잔틴, 이슬람 등 다채로운 인류문명의 유적지를 지니고 있는 튀니지는 GDP의 54.8%가 관광업을 비롯한 서비스업에 의존하고 있다. 여기에 세계 제2위의 올리브 수출 국가이긴 하지만 농업이 GDP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10%를 조금 넘는 수준이다. 인구의 98%는 수니파 무슬림이며, 1%는 기독교인이다. 아랍권 국가 중에서는 비교적 많은 1000명가량의 유대인 인구도 살고 있다. 공식 언어는 아랍어이며, 무역 등에서는 프랑스어도 통용된다. 나길회기자 kkirina@seoul.co.kr
  • [열린세상] 추기경의 성탄절 메시지와 사제단의 ‘쿠데타’ /김진 울산대 철학 교수

    [열린세상] 추기경의 성탄절 메시지와 사제단의 ‘쿠데타’ /김진 울산대 철학 교수

    정진석 추기경(서울대교구장)의 성탄절 메시지가 정의구현사제단에 의하여 철저하게 유린되었다. 이는 천주교의 전통적 권위 체계를 부정한 것으로서, 한마디로 ‘사제들의 쿠데타’나 다름없다. 그것은 북한의 ‘연평도 포격’과도 닮은꼴이었다. 추기경은 지난 12월 8일, 마흔아홉 번째 책 “하느님의 길, 인간의 길”을 펴내는 자리에서, ‘성탄’은 오셨던 구세주를 기념하고 오실 구세주를 기다리면서 차별 없는 세상을 이루려는 마음 속에 있다고 했다. 추기경은 민심을 굴절하거나 조작하지 않고서 국민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 지도자의 덕목이라고도 밝혔다. 그리고 종교 갈등에 대해서도 마음을 열었다. 진리와 영원한 생명을 지향하는 종교인들이 신앙의 문제로 갈등하는 것은 모순이라는 것이다. 추기경은 연평도 포격이 북한 지도자들의 그릇된 욕망에서 나왔으며, 1949년 이후 동료 사제들의 행방에 대해서 북한이 침묵해 온 사실을 지적했다. 주교회의가 4대강 사업 반대를 천명한 것이 아니라 자연 환경의 ‘파괴’를 우려한 것이며, ‘개발’이 ‘발전’인가 ‘파괴’인가의 문제는 종교인보다는 해당 전문가들의 일이라고 정리하기도 했다. 그러자 정의구현사제단은 12월 10일, 추기경의 4대강 발언을 ‘거짓 예언’ 또는 ‘궤변’이라고 비난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리고 13일에는 25명의 진보적 원로 사제들이 추기경의 4대강 발언은 주교단의 의사에 반하는 그릇된 해석이라고 주장하면서 서울대교구장의 사퇴를 촉구했다. 추기경이 주교회의의 결정을 잘못 해석했다면 당연히 주교회의가 그 진의를 확인했어야 할 일이다. 그런데 왜 천주교의 공식기구가 아닌 정의구현사제단이 ‘추기경 죽이기’에 나섰던 것일까? 그 이유는 너무나 분명하다. 지난 3월 10일, 5명의 주교와 1104명의 사제가 서명했던 ‘4대강 사업 저지를 위한 천주교연대’의 성명서 사건의 실질적 주체가 바로 그들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4대강 반대에 서명한 5명의 주교 가운데 주교회의 소속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이용훈 주교가 있다는 사실이다. 5명의 주교와 정의구현사제단의 결속이 4대강 문제를 신앙의 차원으로 끌어들인 것이다. 실제로 지난 3월 12일의 미사에서 강우일 주교회의 의장은 4대강 사업 반대가 ‘교회의 가르침’이라고 일방 선언함으로써 천주교 신자들을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이들의 세몰이는 결국 “생명지킴과 4대강 살리기 성명서”를 주교회의의 이름으로 발표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22명의 주교가 승인한 3월 12일의 주교회의 성명서는 이용훈 주교 등 5명의 주교가 서명한 3월 10일자 천주교 연대의 4대강 개발 반대 성명서와는 내용이 다르다. 이 성명서는 현재 동시 다발적으로 진행되는 4대강 사업이 우리나라 전역의 자연 환경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힐 수 있다는 우려를 표명하고 있을 뿐, 교회가 4대강 개발에 반대한다는 직접적인 표현을 담고 있지 않다. 추기경은 주교회의가 4대강 개발 반대를 천명한 것은 아니라고 본 것이다. 정의구현사제단과 그 후원세력들이 반발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들은 추기경을 ‘골수 반공주의자’라고 매도하면서, 교회 분열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윽박질렀다.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장 이용훈 주교도 12월 16일, 4대강 사업 반대가 세상을 복음화하고 올바른 인간의 길을 제시해야 할 교회 본연의 사명에 해당한다고 재천명하면서 추기경과 대립각을 세웠다. 어떤 개인이나 사제이든지 간에 4대강 사업을 찬성하거나 반대하는 것은 자유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복음이 아닌 정치 문제를 교회가 신봉해야 할 진리로 세우고자 할 때 교회 안팎에서 심각한 부작용을 초래하게 된다. 설사 그들이 정치적 이슈를 천주교회의 일치된 의견으로 포장하더라도 결코 신앙적 구속력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주장하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시기 위하여 오셨다. 사제들이라면 마땅히 따르고 본받아야 할 가르침이다.
  • 승자독식 대한민국 실업탈출 아직 멀었다

    ‘영혼이라도 팔아 취직하고 싶다’(강준만 지음, 개마고원 펴냄)는 한동안 한국 사회문제 전반에 대한 비판적 글쓰기로 유명했던 강준만 전북대 신방과 교수의 ‘한국 생활사’ 작업이다. 강 교수의 ‘한국 생활사’는 전화, 커피, 축구, 입시, 어머니 등 일상을 주제별로 나눈 통시적 저술 작업으로 이번 주제는 제목 그대로 실업이다. ‘한국 생활사’는 전 18권인 강 교수의 ‘한국 현대사 산책’이나 전 17권인 ‘미국사 산책’보다 더 많은 40여권의 책을 예정하고 있다. ‘영혼이라도’는 해방정국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국 실업의 역사와 슬픈 구직 수난사를 살펴 실업 문제 해결이 단순히 ‘방법’이 아니라 ‘철학’과 ‘자세’에 있음을 제시한다. 왜 구직에 철학이 등장할까. 우리나라는 ‘1등만 기억하는’, 한 번 나락으로 떨어지면 끝장이라는 식의 승자독식 문화가 강고하다는 게 저자의 진단이다. 이런 문화에서 정규직-비정규직 문제나 기업형 슈퍼마켓, 이마트 피자, 롯데마트 치킨 논란에서 보듯 누군가 제아무리 ‘기막힌 방법’을 마련해도 이해당사자 모두를 만족하게 하는 해결책은 내놓기 어렵다. 따라서 저자는 실업 문제를 넓고 깊게 보기를 권한다. 실업 문제는 그 어떤 이념도 뛰어넘는 한국 사회의 근본적인 운영과 작동방식의 문제란 것이다. 기존의 좌우 이념의 틀을 벗어나 승자독식 문화의 의식과 관행을 바꾸고 공존공생의 자세를 찾지 않으면 영원히 실업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는 것이 저자의 진단이다. 일본의 식민 지배에서 벗어난 1945년 8월 15일 이후 해방정국에서 우익 청년·학생 단체가 엄청나게 많이 생겨났다. 이는 당시의 대규모 실업과 심각한 경제난 때문이란 게 강 교수의 설명이다. 청년단의 폭력 행사는 배고픔을 해결하려는 방편이었다는 것이다. 1960년대 폭발적으로 늘어난 대학생과 30%가 넘는 실업률은 4·19 혁명을 촉발시킨 요인이었다. 5·16 쿠데타 역시 주동자들의 실업 문제가 큰 원인이었다. 강 교수는 정치란 ‘그 주체들이 고급 일자리를 얻기 위한 투쟁일 뿐’이라고 단언한다. 아무리 정교한 법과 제도라도 공기업과 정부 산하단체의 보은성 ‘낙하산 인사’를 차단하기 어렵다는 게 그의 지적이다. 결국 실업을 경제적 문제로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원수와도 같이 살자’는 자세를 갖춰야 “영혼이라도 팔아 취직하고 싶다!”는 절규를 해소하는 길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 책의 결론이다. 1만 2000원. 윤창수기자 geo@seoul.co.kr
  • “中, 北 급변시 親中성향 정부수립 지지”

    북한의 급변사태 발생 시 중국은 남북통일을 지지하기보다는 북한 내 친중 성향의 정부 수립을 지지할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신범철 국방연구원 연구위원은 15일 서울 신라호텔에서 열린 동아시아연구원 주최 한·미동맹 콘퍼런스에서 이같이 밝히고 “한·미 간 급변사태 대비, 논의 과정에 중국을 참여시켜 설득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신 연구위원은 또 “미국과 경쟁 관계에 있는 중국은 미국에 적대적인 북한을 지지함으로써 동북아에서 전략적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며 “현실적으로 북한 급변사태에 대한 대응 과정에서 이런 중국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북한에서 쿠데타나 내란이 발생할 경우 중국은 친중국 성향의 세력을 지지할 것”이라며 “급변사태 발생 시 중국은 미국에 앞서 대량살상무기(WMD)를 확보하고 미국의 개입에 반대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는 또 중국을 설득하는 수단으로 국제법과 민주주의, 인권, 국제사회 공조 등을 제시하며 “탈북자들을 난민으로 인정하고 강제송환을 자제하도록 함으로써 인도적 지원 측면에서 중국의 부정적인 역할을 예방해야 한다.”고 말했다. 앞서 빅터 차 미국 조지타운대 교수는 ‘중국의 부상’이라는 주제발표를 통해 “북한을 압박해 긴장을 완화하는 노력에 중국이 동참하지 않는 이유는 자국의 대북 압박이 북한의 붕괴를 초래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라고 밝혔다. 그는 “중국은 북한의 유일한 후원국인 자국이 압박을 가하기 시작하면 북한이 붕괴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김미경기자 chaplin7@seoul.co.kr
  • “美가 가장 아끼는 외교관 잃었다”

    “美가 가장 아끼는 외교관 잃었다”

    미국 외교사에 큰 족적을 남긴 리처드 홀브룩 아프가니스탄·파키스탄 특사가 지난 13일(현지시간) 별세했다. 69세. 지난 10일 대동맥 파열로 쓰러져 수술을 받았던 홀브룩이 숨지자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을 비롯해 각계 각층이 조의를 표했다. ●대동맥 파열로 쓰러져 오바마 대통령은 홀브룩 임종 직전 유족들과 만난 자리에서 “홀브룩은 미국은 물론 전 세계인들의 존경을 받는 지치지 않는 공직자였다.”며 “그는 진정한 거인”이라고 평가했다. 힐러리 장관은 성명을 통해 “오늘은 나에게, 미 국무부에, 미국에 슬픈 날”이라면서 “동남아시아에서 냉전체제 이후 유럽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는 그의 공헌으로 인해 평화로운 미래를 가질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미 상원 외교관계위원장 존 케리 의원은 그를 “완강하고 결코 멈추지 않는 외교관”으로 묘사했다. 아네르스 포그 라스무센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사무총장도 “홀브룩의 외교술과 전략적 비전, 전설적 결의에 경의를 표한다.”고 말하는 등 국제사회 역시 고인의 죽음을 애도했다. 홀브룩은 불도저란 별명이 붙을 만큼 저돌적이고 급한 성격으로 유명했다. 미국 시사주간 타임은 생전의 그를 ‘미국 정부가 아끼는 최후의 외교관’, ‘미국에서 가장 거친 외교책사’로 평가했다. ●카터 행정부 때 35세 차관보 올라 홀브룩은 케네디 행정부부터 오바마 행정부까지 역대 모든 민주당 정부에서 고위 외교관으로 재직하는 기록을 남겼다. 1941년생인 홀브룩은 1962년 존 F 케네디 대통령 시절 베트남에서 외교관으로 첫발을 뗀 뒤 지미 카터 행정부에서 35세라는 젊은 나이에 차관보에 올랐다. 빌 클린턴 행정부에선 유럽 담당 차관보로 보스니아 전쟁을 끝내는 외교협상을 이끌었다. 그는 한국 현대사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기도 했다. 홀브룩은 1977~1981년 국무부 동아태차관보로서 10·26 직후 최규하 권한대행 체제에서 진행되는 정치일정에 깊숙이 관여했다. 12·12쿠데타 직후에는 윌리엄 글라이스틴 당시 주한 미대사에게 신군부의 권력 강화 움직임을 견제하는 입장을 취하게 하기도 했다. 강국진기자 betulo@seoul.co.kr
  • 여·야 지도부는 ‘육탄’ 독려… 질서유지권도 안 통한 국회

    여·야 지도부는 ‘육탄’ 독려… 질서유지권도 안 통한 국회

    “이것이 정의다.”(한나라당 김무성 원내대표) “3년 연속 날치기하는 이명박 정권을 국민이 반드시 심판해 주기 바란다.”(민주당 박지원 원내대표) 한나라당이 민주당 등 야당 측과 치열한 몸싸움 속에 8일 새해 예산안을 강행 처리했다. 전날부터 국회 의장석을 점거한 민주당 여성의원들과 이를 저지하려는 한나라당 의원들 간 충돌 끝에 오후 4시 20분쯤 한나라당 김소남 의원이 국회의장석을 뺏었다. 25분 뒤쯤 정의화 국회 부의장이 본회의 개회를 선언, 일사천리로 방망이를 두드렸다. 새해 예산안이 상정되고 이주영 예결위원장의 ‘간단한’ 심사 보고가 이어지는 동안 야당 의원들은 “내려와, 내려와”를 연호했다. 310조원에 이르는 새해 예산안은 순식간에 여야 합의 없이 국회를 통과했다. 오랜 시간 국회 본회의장 안은 탄식과 환호가 교차했다. 전날 1차 ‘예산 대전’으로 긴장감에 휩싸인 국회는 이날 오전부터 벌어진 여야의 2차 예산 대전으로 위기감이 최고조에 이르렀다. 한나라당 예결위원들은 오전 10시부터 속속 국회 245호실로 집결하며 단독 처리 수순에 돌입했다. 문을 걸어 잠그고 4분여만에 예산안을 본회의로 넘겼다. 허를 찔린 민주당과 민주노동당 등 야당은 오전 10시 30분쯤부터 본회의장 출입구를 막아섰다. 본회의장 로텐더홀에서 꼬박 밤을 새운 손학규 대표와 이인영·김영춘 최고위원은 눈을 감은 채 곧 닥쳐올 상황을 그리는 듯했다. 손 대표는 앞서 로텐더홀에서 가진 최고위원회의에서 “이명박 독재” “이성을 잃은 폭거, 쿠데타”라며 강도 높은 발언을 쏟아냈다. 한나라당의 단독 의결로 예산안이 예결위를 통과됐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야당 보좌진들과 당직자들은 스크럼을 짜며 본회의장 주변에 늘어섰다. 오후 1시 40분쯤 한나라당 홍준표·원희룡 의원이 앞장서서 본회의장 입구로 들어서자 야당 보좌진들이 몰려들면서 대치가 시작됐다. “날치기 반대” 구호가 로텐더홀을 뒤흔들었다. 진입을 시도하는 한나라당과 결사적으로 막아서는 민주당의 격렬한 밀고 당기기가 계속됐다. 여성 당직자가 실신했고 곳곳에서 고함 소리가 터져 나오는 등 본회의장 입구는 아비규환을 방불케 했다. 한나라당 이인기 의원은 양복이 갈갈이 찢어졌다. 민주당 강기정 의원은 한나라당 김성회 의원에게 주먹으로 얼굴을 맞아 많은 피를 흘렸다. 김 의원도 주변에서 수차례 얼굴을 가격당했다. 10여분 뒤 박희태 국회의장이 질서유지권을 발동했다. 사회를 보기 위해 본회의장으로 들어가려던 박 의장은 결국 민주당 측에 막혀 정의화 국회 부의장에게 사회권을 위임했다. 뒤늦게 본회의장에 들어가려던 한나라당 안상수 대표는 야당 측 관계자들에게서 “보온병, 보온병” 소리를 듣는 곤욕을 당했다. 오후 2시 30분쯤 본회의장 안에서 “의결 정족수가 됐다.”는 말이 타전됐다. 한나라당 160여명, 민주당 60여명의 의원들은 국회의장석 주변에서 충돌을 반복했다. 그동안 대화와 타협을 강조하던 두 당의 원내 사령탑들은 끝내 등을 돌렸다. 구혜영·강주리·김정은기자 koohy@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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