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아홉 그 여든 그녀 사랑에 빠지다/박정자 주연 연극 ‘19 그리고 80’
여든살 할머니와 열아홉살 청년이 사랑에 빠질 수 있을까.사랑이 아무리 국경과 나이를 초월한다고 해도 일반적인 시각으로는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 조합이다.하지만 연극 ‘19 그리고 80’을 보노라면 그것이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는 사실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올해초 3개월간 장기공연되며 수많은 관객들의 공감을 이끌어냈던 이들의 아름다운 러브스토리가 1년만에 다시 찾아온다.상식을 뛰어넘는 파격적인 사랑이 추하거나 불쾌하지 않고,가슴을 적시는 유쾌한 감동으로 다가온 데는 작품 자체의 힘 못지않게 80세 할머니 ‘모드’역의 배우 박정자(62)가 내뿜는 매력이 큰 몫을 했다.
●귀여운 할머니와 움울한 청년의 사랑
박정자는 길가의 나무를 뽑아다 공기좋은 곳에 옮겨심고,동물원에서 바다표범을 몰래 데려다 바다에 풀어주는 엉뚱하고,귀여운 할머니 모드 역을 아주 자연스럽게 소화해냈다.높은 나무위를 장난꾸러기 소년처럼 성큼성큼 오르는 박정자의 모습을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누구보다 열정적이고 로맨틱하면서,동시에 연륜이 가져다준삶의 지혜까지 갖춘 모드의 사랑스러움은 박정자로 인해 더욱 빛을 발했다.
그는 지난 공연중에 ‘80세 생일이 될 때까지 매년 이 작품을 하고 싶다.’는 소망을 품었다.그 꿈은 이내 배우로서 이뤄내야 할 삶의 목표가 됐다.내년 1월9일 서울 대학로 설치극장 정미소에서 막올리는 ‘19 그리고 80’공연은 그가 목표 지점을 향해 내딛는 두번째 발걸음인 셈이다.
“모드를 연기하면서 80이란 숫자에 매료됐어요.배우로서 도전해야 할 산처럼 느껴진 거지요.끝까지 오를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예순 넘어서 목표를 갖게 됐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요.”
그는 이 작품을 ‘배우 박정자의 레퍼토리’로 정하면서 한가지 원칙을 세웠다.매년 연출자와 상대 배우,스태프 등을 모두 바꿔 새로운 작품으로 만들겠다는 것.이번 공연에는 여성 연출가 한태숙과 연극배우 김영민이 낙점됐다.
●매년 공연때마다 연출·스태프 바꾸기로
“같은 작품이라도 연출가와 배우에 따라서 분위기가 많이 달라져요.두번째라고 해서 익숙한 것은 하나도 없어요.그래서 늘긴장되지요.” 한태숙 연출가와는 ‘그 자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나’‘에쿠우스’에 이어 세번째 공연.무겁고 진지한 작품을 주로 연출해온 한태숙 연출가가 경쾌한 코믹물에 가까운 이 작품을 어떻게 다듬어낼지 관심거리이다.
상습적으로 자살을 시도하던 음울한 청년에서 모드를 만나 사랑과 삶의 희망을 깨닫는 해럴드역의 김영민은 ‘레이디 맥베스’‘추적’ 등에서 실력을 쌓은 젊은 배우.미소년 이미지의 그가 무대에서 보여줄 새로운 해럴드의 모습도 기대를 모은다.
지난 공연에서 극중 모드와 해럴드의 키스신은 큰 화제가 됐다.박정자는 “주변에서 ‘복도 많다’고 부러워한다.”면서 “매번 젊은 남자배우와 키스하려니 염치는 없지만 행복하다.”고 농담을 했다.그러더니 “이번엔 연출가가 러브신을 보강하겠다고 해서 내심 기대를 하고 있다.”며 짖궂은 미소를 짓는다.
모드는 평소 ‘죽기에 적당한 나이’라고 여겨온 여든번째 생일날,해럴드로부터 청혼을 받지만 이미 결심한 대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그토록 삶에 낙천적이던 모드가 자살하는 대목이 잘 이해되지 않는다고 하자 박정자는 가만히 고개를 젓는다.
“모드에게 죽음은 삶의 일부이자 또다른 세상으로 나가는 변화일 뿐이에요.모드는 자신의 죽음을 통해서 해럴드가 새롭게 태어나고,성숙할 수 있도록 모든 영양분을 원없이 주고 간 것이지요.모드가 해럴드에게 아낌없이 나눠준 사랑과 지혜는 결국 작가가 관객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이기도 하고요.”
●대학로 정미소서 내년 2월말까지
해럴드역의 김영민이 보는 이들의 사랑은 어떤 것일까.“해럴드나 모드 둘다 어떤 면에서 사회로부터 소외된 인물들이에요.세상과 소통하지 못하는 두사람이 서로에게 동화된다면 충분히 사랑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요.” 이전엔 상상도 못해본 상황이지만 연습을 하면서 차츰 해럴드를 이해하게 되더라고 말했다.김영민은 요즘 극중에 삽입될 ‘월광소나타’연주를 위해 색소폰을 배우는 중이다.
‘19 그리고 80’(원제 해럴드와 모드)은 미국 시나리오 작가 콜린 히긴즈의 작품으로,1980년 브로드웨이에 처음 선보인 뒤 프랑스 등 유럽 무대에서 인기를 끌었다.2월29일까지(02)765-5476.
이순녀기자 cora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