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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천 경제자유구역 명암] (2) 국제도시 딜레마

    [인천 경제자유구역 명암] (2) 국제도시 딜레마

    인천시는 경제자유구역 지정 이전부터 외국인 학교와 병원 유치에 목을 매고 있다. 어찌 보면 생활환경 인프라에 불과한 이들 시설에 집착하는 데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외국인들은 타국 거주시 자녀 교육을 위한 학교와 의료시설 존재 여부를 최우선적으로 고려한다. 따라서 이들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돈을 쓰게 하려면 이러한 시설들을 갖춰야 한다. 즉 ‘외국인학교·병원=외자유치’라는 등식이 성립할 정도로 이들 시설은 외자유치에 있어 필요충분조건이다. 이 과정에서 ‘뜨거운 감자’로 작용한 것은 외국인학교의 내국인 입학비율. 송도국제도시가 뜬 이유 가운데 하나가 외국인학교에 자녀들을 입학시키려는 서울 부유층이 아파트 청약에 대거 몰렸기 때문이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지난해 5월 제정된 ‘경제자유구역 및 제주국제자유도시의 외국교육기관 특별법’으로 내국인 입학제한은 풀렸다. 하지만 내국인 입학비율이 10% 이내로 제한되자 내심 60%까지 기대했던 인천경제자유구역청과 재정경제부 등은 외국인투자를 유인하기에는 부족한 수치라며 아쉬워했다. 다만 개교 5년까지는 30%까지 허용한다는 예외규정이 위안이 될 뿐이었다. 재정경제부 관계자는 “국회에서 국내 교육기관의 반발을 수용한 결과”라고 말했다. 그동안 한국인 입학비율 때문에 경제자유구역 입성을 놓고 ‘입질’을 계속해온 외국 교육기관 또한 불만을 표시하기는 마찬가지. 이들은 외국인 자녀만으로는 학교 경영이 어렵고, 한국인의 뜨거운 교육열이 원활한 경영을 담보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때문에 외국인학교가 설립되더라도 내국인 입학비율 상향조정 문제가 제기될 전망이다. 어찌됐든 ‘송도국제학교(NSCIS)’는 다음달 8일 송도국제도시 1공구 1만 5000여평에 착공된다. 영국 노드앵글리아교육그룹도 2008년 9월까지 영종지구에 외국인학교를 짓기로 했다. 재경부는 송도경제자유구역내 국제병원 운영 주체로 미국 뉴욕프레스비테리안(NYP)병원을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했다. 미국 컬럼비아대와 코넬대 공동 대학병원인 NYP는 전체 의료진의 10% 이상을 파견한다는 방침 아래, 국내 파트너로 거론되는 서울대·연세대 병원과, 가톨릭의대, 삼성의료원 등과 의료진 구성 문제를 논의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국내 의료계는 외국인병원 설립을 반대해왔기 때문에 협의가 쉽지만은 않을 전망이다. 외국인병원은 2008년 말까지 송도국제도시 1공구 2만 4000여평에 600병상 규모로 세워진다. 외국인병원은 외국인학교와는 달리 제한없이 내국인 이용이 가능하다. 당초 경제자유구역법에는 내국인 이용이 금지됐었지만 지난해 법 개정으로 이 규정이 삭제됐다. 재경부 관계자는 “외국인병원 설립으로 의료서비스의 질이 향상되고 치료를 위해 외국에 나가는 현상이 감소할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인천 김학준기자 kimhj@seoul.co.kr ■ 교육·의료계 개방 반발 심할듯 외국인 학교와 병원에 대한 입지가 확정됐음에도 국내 관련단체들의 반발은 계속되고 있다. 외국인학교에 대해서는 전교조 등이 거부감을 표시하고 있다. 경제자유구역에 설립될 외국인학교는 외국거주 제한이 있는 기존 외국인학교와는 달리 돈만 내면 내국인 입학이 허용돼 ‘귀족학교화’가 우려된다는 것이다. 특히 외국인학교가 경영 정상화 등을 내세워 내국인 학생 비율을 높일 것을 요구할 경우 거부하기 힘들 것이라고 강조한다. 전교조 인천시지부 이미숙 정책국장은 “사교육 문제가 심각한 상황에서 교육청의 통제가 불가능한 외국인학교는 내국인 가운데 특권층의 전유물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했다. 외국인병원에 대해서도 의료인들을 중심으로 볼멘소리가 나온다. 대한의사협회 권용진 대변인은 “우리의 의술이 외국에 뒤지지 않는 상황에서 굳이 내국인 치료를 외국 의료기관에 맡길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이들 단체는 당장 외국인 학교·병원에 반대하는 집단행동을 펼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내국인 관련 부분 등 민감한 사안이 대두될 때마다 목소리를 높이면서 당국 및 외국자본과 첨예한 대결구도를 형성할 것으로 보인다. 인천 김학준기자 kimhj@seoul.co.kr
  • [2006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태광그룹-故 이임용 창업주家

    [2006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태광그룹-故 이임용 창업주家

    태광그룹은 겉의 화려함보다 내실을 추구한다. 재벌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사옥도 초라하기 그지없다. 서울 중구 장충동 옛 동북고등학교 교사(校舍)를 30년여년 동안 그룹 사옥으로 사용하고 있다. 여타 재벌과 달리 초고층 호화 사옥에는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는다. 재계 서열 30위권이면 서울 광화문 한복판이나 강남에 번듯한 빌딩을 사옥으로 가질 수 있다. 하지만 그룹 관계자는 “6층짜리 학교 건물이지만 아직 쓸 만하다.”고 말한다. 겉보다 속을 중시하는 태광의 사풍이 여실히 읽혀진다. 이같은 경영철학은 국내 재벌 가운데 재무구조가 가장 탄탄한 그룹의 반열에 오르게 했다. 이는 창업주인 고(故) 이임용 회장 때부터 관통하는 ‘내실경영’이 면면히 이어진 결과다. ●대쪽 같은 선대 회장의 결혼과 창업, 그리고 성장 창업주인 고 이 회장은 지난 1921년 경북 영일군에서 중농이었던 부친 이우식씨와 모친 정막랑씨 사이의 3남1녀 중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이 창업주는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간조(簡井)실업학교를 졸업한다. 그는 1941년 일본의 진주만 기습 등으로 일본의 정세가 혼란스러워지자 이듬 해인 42년 귀국길에 오른다. 이후 부친의 권유로 당시 22세 청년이던 그는 동네에 사는 이선애씨와 혼례를 올렸다. 신부 이씨는 이 창업주의 부친과 친분이 두터웠던 한동네 유지인 이송산씨의 맏딸이다. 민주당 총재를 지낸 이기택씨와 ‘창업 동지’ 이기화(태광그룹 회장까지 지냄)씨는 이씨의 남동생이다. 이기화씨는 부산고·서울대 화공과를 졸업한 뒤 이 창업주와 오늘의 태광그룹을 일궜다. 이 창업주는 야당 거물이던 이기택씨와 처남매부지간이란 이유로 군사정권 시절 여러차례 세무조사를 받는 등 혹독한 시련을 겪었다. 처남이 유명한 정치인이었던 게 이 창업주에게는 결코 득이 아니었던 셈이다. 그는 “기업은 절대 정치와 연결돼선 안 된다.”며 사업 외에는 한눈을 팔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다. 찍히면 죽던 서슬퍼런 군사정권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도 정경 분리를 평생의 신조로 삼았기 때문이다. 베테랑 세무조사 요원들을 투입, 몇 날 며칠을 털어도 먼지 하나 나오지 않았다는 것은 한국 기업사에 전례없는 일이다. 이씨와 중매 결혼한 이 창업주는 공직(면사무소) 생활을 하며 단란한 가정을 꾸린다. 그러던 그에게 결정적인 전환점이 찾아왔다. 바로 6·25전쟁이다. 1951년 공직을 접은 이 창업주는 전쟁 이듬해인 1954년 부산 문현동에 모직 공장을 차리고 태광산업사를 설립한다. 이 회사가 바로 태광그룹의 모체다. 이후 1961년 전 삼호그룹 조봉구 회장과 동업을 시작했으나 동업은 오래가지 못했다. 이 창업주는 조 회장과 결별한 뒤 부산 가야동에 새로운 공장을 신설하며 태광산업사를 주식회사로 출범시킨다. 초기 태광은 이 창업주와 이선애씨가 함께 일궈냈다고 해도 결코 틀린 말이 아니다. 이선애씨가 부산에서 소규모 직물공장에 손을 댔고 기업이 커지면서 이 창업주는 공무원 생활을 그만두고 기업경영에 합류했다. 이후 태광은 섬유를 기반으로 비약적인 성장을 거듭한다. 박정희 정권이 경제 개발과 수출에 강력한 드라이브를 걸면서 아크릴을 생산하던 태광은 눈부신 호황을 누렸다. 당시 아크릴은 양모 대체품으로 수요가 많았고 경쟁업체가 적어 태광의 고속 질주를 견인했다. 이 창업주는 스판덱스·나일론 등으로 품목을 다양화했다. 섬유 호황기인 1970년대까지 내놓은 제품마다 시장의 돌풍을 일으켜 국내 최대의 섬유업체로 성장했다. 태광은 이 시기에 동양합섬, 고려상호신용금고, 흥국생명, 대한화섬, 천일사 등을 잇달아 인수하며 몸집을 불려 나갔다. 화섬·석유화학에 금융이 붙으면서 태광은 본격적인 성장과 함께 그룹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도약기를 맞은 셈이다. ●휴일에도 은행 이자는 큰다 태광그룹은 은행돈을 거의 안 쓰는 기업으로 유명하다. 타계한 이 창업주의 근검절약과 소탈함은 재계에서도 정평이 나 있다. 타계하기 전까지 이 창업주가 살던 서울 장충동 2층 양옥집은 지금도 부인 이선애(78)씨가 지키고 있다. 이 집에는 30∼40년 된 옛 가구들이 그대로 있다. 회사 관계자는 “현대 정주영 회장에 버금갈 정도로 검소했다.”고 이 창업주를 회고한다. 그는 해외이든 국내이든 출장길에는 새로 지은 고급 호텔을 이용하는 법이 없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수십년 동안 단골로 다닌 낡은 호텔을 고집했다는 것이다. 점심도 설렁탕 한 그릇으로 후다닥 끝낼 정도로 무척 소탈했다. 이 창업주는 “은행돈을 빌리면 토·일요일 등 은행이 쉬는 동안에도 이자는 불어난다.”며 무차입 경영을 추구했다. 돈을 빌려 문어발식으로 확장하지도 않았다. 번 만큼 투자한다는 기조를 유지했다. 매출 규모 1조 3000억원인 모기업 태광산업의 부채 비율이 거의 제로인 것도 이같은 경영철학에서 비롯됐다. 절약 경영과 남의 돈을 빌려 쓰지 않고 수익만큼 투자하는 실속경영은 그룹을 더욱 튼튼하고 알차게 만들었다. 인수한 부실기업도 얼마 지나지 않아 건실한 기업으로 탈바꿈시켰다. 이 창업주는 또 외부에서 전문경영인을 영입하지 않고 공채 출신을 키워 경영진으로 기용했다. 기획력과 업무 추진력을 인정받은 그의 처남 이기화씨는 이 창업주의 사후 태광그룹 회장에까지 올랐다. 또 공채 출신인 류석기·강석명·최운형씨 등이 중용됐다. 그의 이런 원칙적이고 대쪽 같은 성품은 자녀들의 혼사로도 이어진다. ●화려한 혼맥…‘연애결혼은 없다´ 이 창업주는 생전에 모두 6명의 자녀를 뒀다. 그러나 그는 자녀들의 연애결혼을 절대 허용치 않았다. 그는 평소 사대부가의 유교적인 면을 강조해와 전통 관습을 무척 중시했다. 재벌가의 혼사가 연애결혼보다 중매에 무게를 두고 있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3남3녀를 하나같이 중매결혼시켰다는 것은 가풍을 짐작케 한다. 이 창업주는 집안 어른이나 친지들이 지체 있는 가문의 훌륭한 배우자를 찾아내 중매를 넣어 혼사를 성사시키는 방식으로 자녀들의 혼사를 치러왔다. 이처럼 중매 일변도로 자녀 혼사를 치른 것은 중매야말로 좋은 가문의 좋은 배우자를 폭넓게 고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으로 생각했기 때문일 것으로 여겨진다. 때문에 태광그룹 2세들의 혼맥은 서민의 가계에서는 좀처럼 보기 어려울 정도로 격이 높고 화려하다. 태광의 사돈가가 사람들은 당시에 내로라 하는 정·관·재계의 유력 인사다. 하지만 이 창업주는 자녀들 혼사로 정·관·재계의 거물들과 사돈이 되었지만 이들을 경영에 끌어들이는 법은 결코 없었다. 지금도 모기업인 태광산업의 사장은 태광 신입사원 출신인 이화동(62)씨다. 이 창업주는 이선애씨와의 사이에 식진(사망)·영진(사망)·호진(44) 3형제와 경훈(52)·재훈(50)·봉훈(48) 세 자매를 뒀다. 이 창업주의 개혼(開婚)인 식진씨의 혼사는 비교적 평범한 집안과 이뤄졌다. 그러나 이후로는 모두 유력 인사와 사돈을 맺는다. 이 창업주는 고려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태광산업 영업과장으로 있던 장남 식진씨를 1975년 개인사업을 하던 진재홍씨의 맏딸 임순(54)씨와 결혼시켰다. 식진씨는 태광산업 부회장까지 역임했다. 식진씨의 장인 진씨는 면방업체인 경방에서 일하다 독립했다. 서울대 공대 출신으로 공대 동창회장을 맡기도 했다. 식진씨 부부는 정아·성아·원준 등 1남2녀를 뒀다. 장녀 정아(31)씨는 결혼했다. 연세대 상대를 나온 차남 영진씨는 어머니 이선애씨 친구의 중매로 장상준(전 동국제강 회장)가의 4남2녀 중 막내딸인 옥빈(54)씨와 1976년 결혼했다. 태광산업에 입사한 뒤 계열사인 대우파일, 흥국생명, 고려상호신용금고 등에서 중역으로 활동했다. 이들 사이에는 성준·성은 남매가 있다. 현재 그룹 회장을 맡고 있는 호진씨의 부인 신유나(42)씨는 롯데 신격호 회장의 동생인 신선호(71·일본 산사스식품 회장)씨의 맏딸이다. 호진씨는 대원고·서울대 경제학과(81학번)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코넬대 경영학석사(MBA), 뉴욕대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슬하에 현준·현나 남매가 있다. 이 창업주의 세 딸은 모두 재원으로 꼽힌다. 그러나 특이한 것은 세자매 모두 이화여대 선후배이라는 점이다. 이는 유교적 관습을 중시하는 이 창업주의 독특한 자녀 교육관이 스며들어 있다고 봐야 한다. 태광의 혼맥은 이대 출신의 세 딸을 출가시키면서 보다 화려하게 뻗어 나간다. 장녀 경훈씨는 진주의 대지주이자 LG그룹의 창업 멤버인 허만정가의 막내 며느리가 됐다. 경훈씨의 남편은 유통전문기업 GS리테일 대표인 허승조(56)씨다. 이들의 결혼은 경훈씨 친척 할머니의 중매로 이루어졌다. 이임용가에서 허만정가로 이어가면 조홍제-송인상-신덕균가와 만난다. 이연두-박치현-김준성-김우중가와도 연결된다. 경훈씨는 남편 허승조씨와의 사이에 지안·민경 자매를 두고 있다. 이 창업주는 차녀 재훈씨를 양택식 전 서울시장의 장남 원용(56)씨와 결혼시켰다. 원용씨는 현재 경희대 의대 교수로 있다. 이 창업주는 재훈씨를 양택식가로 출가시키면서 정·관계 유력인사와 연결된다. 양택식가를 통해 홍진기-노신영-정주영가로 연이 닿는다. 김한수-김복동가로도 이어진다. 특히 이 창업주는 이 결혼을 통해 업계의 라이벌인 한일합섬의 창업주 김한수가와 한 다리 건너 사돈이 된다. 재훈씨 부부는 서윤·서정·서인·혁준 등 1남3녀를 두고 있다. 3녀 봉훈씨는 한국베링거인겔하임 한광호가의 외아들 태원(49·한국베링거인겔하임 회장)씨와 결혼했다. 이들 사이에는 동우·상우·정우 3형제가 있다. ●뉴미디어·금융으로 21세기를 준비 태광은 1996년 일대 전환기를 맞는다. 그 해 11월 창업주인 이 전 회장이 75세를 일기로 타계하면서 3남 호진씨가 경영 전면에 부상한다. 호진씨는 이 창업주가 그룹의 후계자로 일찍 점찍어 놓은 것으로 알려졌다. 1997년 태광산업 사장에 이어 2004년 태광그룹 회장에 취임한 이호진 회장은 섬유가 주력인 태광의 업종에 메스를 댄다. 추진력에 관한 한 부친 못지않은 ‘신형 엔진’ 이 회장은 ‘조용한 기업’ 태광에 거센 변화의 바람을 불어 넣었다. 변화의 추동 세력은 MSO로 표현되는 종합유선방송과 금융 등 두 갈래다. 이 회장은 미래 태광의 신성장 동력이 여기에 있다고 확신한다. 따라서 1조 5000억원 수준으로 알려진 막강한 현금 동원력을 바탕으로 과감한 인수·합병(M&A)에 나서고 있다. 이는 섬유와 화학 중심에서 뉴미디어와 정보기술(IT), 금융기업으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미디어 기업으로의 급성장이다. 이 회장은 케이블TV 회사인 ‘태광 티브로드’를 세웠다. 티브로드는 태광, 미래, 통신 등의 앞글자 ‘T’와 브로드 캐스팅, 브로드 밴드의 ‘브로드’를 합성해 지은 이름이다. 티브로드는 지역 케이블TV 20개를 거느리고 있다. 가입자 300만명, 시장 점유율 24∼25%로 명실상부한 국내 1위다. 아직까지는 많은 수익을 내고 있진 못하지만 뉴미디어는 태광의 미래를 밝혀줄 한 축임에 틀림없다. 이 회장이 2003년 이후부터 미디어 부문에 집중 투자하는 이유도 이런 이유에서다. 뉴미디어는 진헌진 티브로드 사장과 이상윤 안양방송 및 수원방송 사장이 이끌고 있다. 진 사장은 서울대 상대 출신으로 이 회장의 대학교 동창이다. 2002년 이 회장이 직접 스카우트했을 정도로 신임을 받고 있다. 금융 쪽도 더욱 살을 붙여야겠다는 게 이 회장의 전략이다. 현재 흥국생명, 고려상호저축은행, 태광투자신탁운용으로는 아무래도 무게가 떨어진다고 보고 있다. 이에 따라 쌍용화재와 예가람상호저축은행, 피데스증권 등의 인수작업을 활발히 벌이고 있다. 태광산업은 지난달 쌍용화재와 신주인수계약을 체결했다. 이로써 태광산업은 쌍용화재 지분의 50% 이상을 확보했다.‘흥국생명+쌍용화재’를 통해 시너지 효과를 기대하고 있다. 이의 근거는 생명보험·손해보험 상품의 교차 판매다. 태광은 쌍용화재 인수 열기가 식기가 무섭게 피데스증권 인수에 나섰다. 피데스증권은 현재 주식거래 업무만 하는 중소형 증권사지만 태광은 이 회사를 인수해 종합 증권사로 변신시킬 계획이다. 예가람상호저축은행은 서울·경남에 기반을 둔 저축은행이다. 이들 기업의 인수작업이 순조롭게 매듭지어지면 태광그룹은 생보, 손보, 증권, 투신운용, 저축은행까지 아우르는 종합금융그룹으로 재탄생하게 된다. 금융 쪽은 류석기 흥국생명 부회장과 김성태 흥국생명 사장의 투톱 체제다. 김 사장은 씨티은행 출신으로 LG증권 사장을 지냈다. 태광산업 출신인 오용일 흥국생명 전무도 눈여겨 볼 전문 경영인이다. 이호진호(號)의 태광은 대변신을 꿈꾼다. 현재의 청사진이 조만간 구체화되면 태광그룹은 화섬 석유화학, 금융, 미디어, 레저(태광관광개발), 육영재단(일주학술문화재단, 일주학원)으로 새 틀을 짜게 된다. ykchoi@seoul.co.kr ■ 정도·신의는 기업의 생명 ‘정도’와 ‘신의’.50여년 전 부산의 한 작은 시장에서 출발해 오늘의 태광그룹을 일군 창업주 고 이임용 회장이 금과옥조처럼 여긴 명제다. 이를 지키지 않는 거래처와는 두번 다시 거래를 이어가지 않았을 정도다. 정도와 신의를 기업의 목숨이자 기업의 자격이라고 늘 강조했던 이 전 회장은 한눈 팔지 않고 기업 경영에만 충실했던 기업인이다. 태광은 이 전 회장의 타계 10주년을 맞아 그의 기업·국가관 등을 조명하기 위한 자서전 출간작업을 서두르고 있다. 특히 어록 정리에 신경쓰는 눈치다. 그의 어록에서는 경영관이 그대로 묻어난다. 지난 1973년 단 닷새 만에 흥국생명을 인수한 이 전 회장은 첫 임원회의에서 “보험회사의 재산은 보험가입자의 재산”이라며 “흥국생명의 돈을 태광에서 가져다 쓰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라고 약속했다. 그리고 이 약속은 지켜졌다. 이 전 회장은 ‘오래된 만남’을 중시했다. 태광의 주거래 은행은 조흥은행. 양자의 관계는 50년 가까이 이어지고 있다. 오직 하나의 은행만을 고집한 이 전 회장은 1975년 대한화섬 인수 후 많은 임원들이 복수은행 거래를 건의했지만 “새 친구 열 명을 사귀기 위해 헌 친구 한 명을 안 버린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신용은 이임용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자신의 입으로 말한 약속은 반드시 지켰으며 계약서는 단지 둘 사이에서 오고 간 이야기를 정리해 놓은 종이에 불과했다. 타계 몇해 전 신입사원 특강에서 신용의 중요성을 이렇게 강조했다.“닷새 만에 서는 장에 못가는 사람이 장에 가는 친구에게 무엇 무엇을 사다 달라고 부탁을 한다. 부탁을 받은 사람은 혹 자기 물건 사는 것은 잊어버리더라도 결코 친구의 부탁을 잊어서는 안된다. 만일 그 물건이 제수용품이었다면 남의 집 제사를 망치는 격이 돼 옛날 말로는 사람 같지 않은 꼴이 된다. 그래서 약속은 무서운 것이고 지켜야 하는 것이다.” ykchoi@seoul.co.kr ■ 베일에 싸인 오너一家 재계에서 태광그룹만큼 외부에 노출되는 것을 꺼리는 ‘오너 일가’도 없다. 창업주인 이임용 전 회장은 물론 후계자인 이호진 현 회장 역시 언론에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취재를 위해 이 회장 면담을 요청했으나 ‘불가하다.’는 단호한 한마디였다. 오너 일가가 이처럼 몸을 꽁꽁 숨기는 데에는 격동기를 헤쳐온 태광그룹의 기업사와 유교적 관습이 맞물려 있다. 태광에 있어 정치는 짐이었다. 창업주인 이 전 회장은 야당의 거목인 처남(이기택 전 민주당 총재)을 두면서 박정희·전두환 대통령으로 이어지는 군사정권으로부터 강도 높은 세무사찰을 받았다. 고속성장을 질주한 태광이었지만 그럴수록 기업경영만큼은 살얼음판을 걷듯이 할 수밖에 없었다. 한눈 팔면 죽는다는 것을 절감한 이 전 회장은 정치는 물론이고 언론에도 자연히 몸을 사릴 수밖에 없었다. 유교적 관습을 중시하는 이 전 회장의 짙은 보수성도 중요한 부분이다. 이는 태광 일가의 여성들에게서 쉽게 발견된다. 태광가(家)의 여성들에게서는 다른 재벌가와 달리 우먼파워를 찾아볼 수 없다. 여성으로서 적합한 문화계나 학술계에는 진출해 있을 법도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누구도 외부에 노출되지 않았다. 이 전 회장의 세 딸도 그렇고 며느리도 마찬가지다.3형제 못지않게 똑똑한 것으로 알려진 세 딸 중 남녀공학 대학을 나온 사람은 한 명도 없다. 큰딸 경훈과 둘째 재훈, 막내딸 봉훈씨 모두 이화여대를 졸업했다. 이들 모두 다른 대학은 생각지도 못한 게 아닐까. 경훈·봉훈씨는 남편이 재계의 실력자들이지만 외부활동 대신 살림을 하고 있다. 태광가의 며느리들도 전혀 노출돼 있지 않다. 삼성·현대가 등 재벌들의 며느리들이 문화·재계의 저명인사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것과 극명하게 대비된다.40대 중반인 이 회장도 전경련 활동조차 하지 않을 정도로 외부 노출을 기피하고 있다. 선친 스타일을 빼닮았다는 얘기까지 나온다. 그래서 ‘은둔의 경영자’라는 칭호를 얻었다. 하지만 이 회장은 현장에 매우 충실한 CEO다. 캐주얼 차림으로 불쑥 현장을 찾아 임직원들을 놀라게 한다. 이 회장은 기업경영 못지않게 예술에 조예가 깊다. 서울 광화문 흥국생명 사옥도 사실상 이 회장 작품이다. 바닥재부터 인테리어, 사무실 소품 등에 이르기까지 이 회장의 손때가 묻지 않은 것이 없다. 회사 관계자는 “CEO가 안됐으면 예술가가 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ykchoi@seoul.co.kr ●특별취재반 산업부 박건승 부장(반장) 정기홍·류찬희·최용규 차장 이기철·강충식·주현진·류길상·김경두·서재희 기자
  • 방송+금융 변신하는 ‘보수경영’

    방송+금융 변신하는 ‘보수경영’

    1990년대 초 대한민국 최고의 ‘황제주’였지만 PR나 IR에는 도통 관심이 없던 기업, 돌다리를 몇번씩 두들겨 보고 건너는 보수적인 풍토, 섬유업계의 소문난 ‘크렘린’, 남의 돈은 결코 쓰지 않는다는 무차입 경영, 내부유보율이 무려 2만 6000%나 되는 기업…. 국내 기업 가운데 ‘별종’으로 통하는 태광산업의 특징을 나열하면 대략 이렇다. 이런 기업이 요즘 몰라보게 달라지고 있다. 보수적인 색채를 접은 것은 아니지만 경영만큼은 앞서가고 있다. 변신을 주도하는 이는 2세 경영인 이호진(44) 회장이다. 태광산업 창업주인 고 이임룡 회장의 3남인 이 회장은 2004년 1월 회장에 취임한 이후 ‘확장 경영’을 진두지휘하고 있다. 사양산업인 화섬업종의 돌파구로써 방송과 금융을 성장축으로 삼고, 이를 위해 쌍용화재 인수와 예가람저축은행 인수를 추진하는 등 인수·합병(M&A)시장의 ‘큰 손’으로 나서고 있다. 이 회장은 1985년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코넬대에서 경영학석사(MBA)를 거쳐 뉴욕대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그는 95년 흥국생명 상무를 거쳐 97년 35세의 나이로 태광산업 및 대한화섬 사장에 올라 화제가 됐다. 그는 당시 재계 최고경영자(CEO) 가운데 가장 어렸다.2004년에는 외삼촌인 이기화 전 회장의 사퇴와 맏형인 이식진 전 부회장이 별세함에 따라 40대 초반에 태광산업 회장직을 승계했다. 그러나 이 회장이 자신만의 경영 색깔을 드러내기까지 난관이 적지 않았다.“은행 돈은 일요일과 토요일 오후에도 이자가 붙는다. 백만원 벌기는 힘들어도 백만원은 절약할 수 있다. 홍보가 왜 필요하냐, 우리만 잘하면 그만이지, 괜히 잘난 척할 필요가 없다.”로 대변되는 이임룡 선대 회장의 경영 방침을 극복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회장이 어렵게 사내의 낡은 철제 책상과 구닥다리 컴퓨터를 새 것으로 교체하고, 홍보실도 두는 등 일련의 조치들을 취했지만 외양의 변화가 있었을 뿐 뿌리깊은 기업 문화를 바꾸지 못했다. 특히 한때는 배타적인 ‘나홀로주의’로 동종업종 기업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했으며, 노조와의 관계 악화로 2001년에는 수천억원의 매출 손실을 기록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광산업 임직원들은 서서히 새 경영자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사내에선 이 회장이 취임한 이후 가장 달라진 점으로 정책 결정이 빨라진 점을 꼽는다. 관계자는 “경영진이 젊어진 만큼 내부 결정이 빨라졌다.”면서 스피드경영이 자리잡고 있음을 내비쳤다. 이 회장이 가장 관심을 쏟고 있는 분야는 방송과 금융. 갈수록 위축되는 사세를 키우기 위해 금융과 방송을 차세대 ‘먹을 거리’로 선택하고 막대한 자금을 쏟아붓고 있다. 태광산업의 현금동원 능력은 1조 5000억원 수준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태광산업은 현재 금융계열사로 흥국생명과 태광투자신탁운용을 두고 있다. 또 전국 119개 케이블TV 방송국(SO) 가운데 27개사를 보유해 260만명의 가입자를 확보하고 있다. 최근엔 우리홈쇼핑 지분 19%를 매입해 1대 주주인 경방을 긴장시키기도 했다. 사내에선 이 회장을 다재다능하고 젠틀한 CEO로 평한다. 스포츠 마니아인 데다 음악과 미술 등에도 관심이 많다. 직원들과도 스스럼없이 어울릴 정도로 친화력이 뛰어나다. 이 회장은 롯데그룹 신씨가(家)의 사위다. 신격호 롯데 회장의 동생인 신선호 일본 산사스 회장의 맏딸인 유나씨와 결혼했다. 김경두기자 golders@seoul.co.kr
  • 김은혜 앵커, 3월 변호사와 결혼

    MBC 김은혜(35) 앵커가 3월19일 서울 하얏트 호텔에서 결혼식을 올린다. 신랑은 동갑내기 국제변호사 유형동씨로 미국 버클리대와 코넬대 로스쿨을 졸업하고 현재 김&장 법률사무소에서 국제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 두 사람은 지난해 5월부터 교제를 시작한 지 10개월 만에 결혼식을 올리게 됐다. 김 앵커는 이화여대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하고 93년 MBC에 기자로 입사했다.‘뉴스데스크’ 등을 거쳐 현재 ‘MBC 뉴스투데이’를 진행하고 있다.
  • 유럽 운명 돌린 살라미스해전 10시간

    살라미스 해전은 기원전 480년 페르시아가 1·2차 페르시아 전쟁에 실패한 후 세번째로 그리스를 침공했을 때 벌어진 전투다. 하지만 여기서 패한 후 페르시아제국은 그리스 침공을 단념했고, 이후 그리스로부터 시작된 유럽문명이 번성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불과 10시간 남짓 진행된 살라미스 해전은 그리스문명, 나아가 서구문명 전체를 구해냈다는 역사적 평가를 받는다. 미국 코넬대 역사학 교수인 배리 스트라우스가 저술한 ‘살라미스 해전’(이순호 옮김, 갈라파고스 펴냄)은 동·서양의 유례없는 대격돌, 살라미스 해전을 마치 스포츠 생중계하듯 생생히 재현한 책이다. 고대 그리스사 권위자인 저자는 헤로도토스, 아이스킬로스, 투키디데스, 플루타르코스와 같은 쟁쟁한 고대 작가들의 해설을 곁들여 시시각각 변해 가는 해전의 전개상황을 장소, 날짜, 시간별로 밀도 있게 재구성했다. 특히 동료 그리스인들을 속임수로 해전에 끌어들여 승리의 견인차가 된 테미스토클레스, 전투에 참여하여 훗날 그 경험을 희곡으로 써 불멸의 명성을 얻은 그리스 비극작가 아이스킬로스 등 수많은 인물들의 다채로운 이야기들이 흥미를 자아낸다.1만 7800원. 임창용기자 sdragon@seoul.co.kr
  • ‘좁고 긴 잔’ 택하면 술 적게 마셔

    연말연시를 맞아 과음을 피하려면 술자리에서 ‘좁고 긴 잔’을 선택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미국 코넬대 브라이언 원싱크 교수와 조지아공대 코어트 반 이터섬 조교수는 최근 브리티시 메디컬 저널(BMJ)에 이같은 내용의 ‘음료 소비량과 용기 형태의 관계에 관한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평균 연령 15세의 10대 94명을 대상으로 각각 다른 형태의 잔을 고르도록 한 뒤 이들이 따르는 주스의 양을 측정한 결과, 넓고 얕은 잔을 고른 집단은 좁고 긴 잔을 고른 집단보다 무려 74.4%나 많은 음료를 따른 것으로 나타났다. 길이가 짧고 넓은 잔에 음료를 따르는 사람은 목표량보다 많은 양을 따르는 경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덜 따랐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연구진은 이같은 현상이 ‘긴 것이 크다.’는 착각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했다.장세훈기자 shjang@seoul.co.kr
  • [Doctor & Disease] 경희의료원 이봉암 박사

    [Doctor & Disease] 경희의료원 이봉암 박사

    중년을 넘긴 나이라면 대부분 안면 부위가 마취된 듯 먹먹해지거나 날카로운 통증과 함께 경련을 일으키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러다 병증이 심해져 입이 돌아가거나 얼굴 근육과 함께 눈꺼풀이 발작적으로 떨리는 지경이면 대부분 ‘풍이 왔다.’고 여긴다.‘구안와사’라는 한방 병명도 우리에게는 익숙하다. 그러나 그렇게 예단할 일이 아니다. “흔히 이런 증상을 겪는 사람 대부분이 ‘풍’이라고 생각하고 치료를 받지만 이 질환은 ‘풍’이 아니라 원인이 뚜렷한 뇌신경 기능 이상입니다. 물론 완치도 되지요.” 뇌신경 분야에서 모두가 부러워할 만큼 폭넓은 임상경험을 축적했는가 하면 자신의 성를 딴 ‘이식술(李式術)’을 개발해 안면경련 치료분야의 새 지평을 연 것으로 평가받고 있는 경희대 의무부총장 겸 경희의료원장 이봉암(60) 박사의 진단이다. 이 박사는 “그런데도 이 병을 ‘풍’이라고 믿고 엉뚱한 치료에 매달리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참 답답하지요.” ▶안면경련이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한쪽 얼굴이 일그러지는 질환이다. 과로나 스트레스가 심할 때, 혹은 지나치게 긴장했을 때 한쪽 눈꺼풀과 얼굴이 바르르 떨리는 현상은 누구나 겪는 일이다. 이런 증상이 심해져 초기에는 눈 주위에서 시작해 점차 얼굴과 목까지 확산되다가 방치하면 만성적인 안면수축과 기형을 초래한다. 안면경련은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어렵게 하며, 대인공포증이나 심각한 우울증으로 발전하기도 한다.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안면경련은 7번 안면뇌신경의 비정상적 흥분이 주요 원인이다. 뇌간과 소뇌 사이에 있는 안면신경의 뿌리가 전·후하 소뇌 동맥과 만성적으로 접촉하면 동맥의 맥동압이 신경을 툭툭 치는 자극이 가해지는데, 이 때문에 안면근육이 수축해 생긴다. 안면경련이 중년 이후에 많은 것은 동맥의 노화나 동맥경화로 혈관이 늘어나 신경뿌리를 압박하기 때문이다. ▶질환의 유형은 어떻게 구분하는가. -기준이 따로 정해져 있지는 않지만 일반적으로 특발성과 이차성으로 구분한다. 특발성은 혈관이 신경을 압박해 생기는 것으로 대부분의 원인이 여기에 있다. 이차성은 뇌종양이나 기타 신경계 질환에 의해서 이차적으로 발생하는 유형이다. ▶각 유형별로 보이는 특징적인 증상을 소개해 달라 -처음에는 눈 주위에 일시적으로 가벼운 경련이 나타나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얼굴 전체, 심하면 턱 밑까지 전파된다. 또 발작 회수가 증가하고 강도도 더욱 심해지게 된다. 이 상태에서 방치하면 안면신경의 변성으로 안면마비가 오게 된다. ▶최근의 유병률과 발병추세, 경향상의 특이점을 설명해 달라. -유병률 통계는 없으나 동맥경화 등 성인병 증가 추세와 맞물려 증가하고 있는 것은 틀림없다. ▶성별·연령대별 발병률에 차이가 있는가. -지금까지 2000여 건의 임상사례로 볼 때 남자에 비해 여자가 약 2배정도 많으며, 평균 발병 연령은 49세, 수술 치료를 시도한 평균 연령대는 54세였다. ▶진단은 어떻게 하나. -가장 중요한 근거는 겉으로 드러난 임상 양상이다. 여기에 신경생리학적 검사와 안면근전도를 활용하며, 최근에는 뇌 자기공명영상을 통해 신경근을 압박하는 혈관의 형상이나 이차적 원인인 종양 등도 쉽게 감별할 수 있다. ▶일반적인 증상이나 징후를 통해 자가진단을 할 수도 있는가. -대부분의 안면경련은 안면의 떨림이나 통증으로 시작되는데, 이것이 중요한 자가진단 기준이다. ▶각 유형별 치료법을 소개해 달라. -약물로는 항경련제, 신경안정제, 신경전달차단제 등을 투여하거나 국소적 근육마비제인 보톡스를 주사하는 방법이 있는데, 약물 부작용과 효과가 한시적이라는 문제가 있다. 수술 치료로는 안면신경의 일부 가지를 절단하거나 알코올이나 페놀주사로 신경구조의 일부를 손상시키는 방법, 고주파 응고열로 신경 일부를 응고시키는 방법 등이 있지만 재발되는 단점이 있다. 최근에는 신경근과 혈관을 분리시키는 미세혈관 신경감압술로 85%의 완치율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이 치료법도 신경 전달로의 점화현상을 차단하기에는 부족해 내가 개발한 ‘이식술(李式術)’을 적용했는데, 완치율이 95% 정도로 크게 향상되는 결과를 얻었다. ▶치료 후에 나타날 수 있는 문제나 후유증에 대해서도 설명해 달라. -어지럼증이 대표적인 후유증이며, 수술 부위가 깊어 수술 후 1∼2주 정도는 두통이 있을 수 있다. ▶예방책은 무엇인가. -질환을 악화시키는 스트레스와 음주는 피해야 하며, 장기적으로는 동맥경화 예방에 힘써야 한다. ▶안면 경련과 관련, 현재의 진단시스템에서 개선되어야 할 문제가 있나. -1차 의료, 특히 전통의학을 담당하는 사람들이 환자들에게 바른 길을 제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기고 있다. 이 박사는 특히 이 질환과 ‘풍’과의 혼동이 초래하는 문제를 진지하게 되짚었다.“이런 증상이 보이면 많은 사람들이 ‘풍’을 먼저 떠올리지만 이는 원인이 뚜렷한 뇌신경의 기능성 이상이고, 원인이 확실히 드러난 만큼 완치도 가능합니다. 이걸 ‘와사풍’이라고 믿고 잘못된 치료를 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은데, 환자들이 겪는 정신적·신체적 고통을 생각하면 냉정하게 주의를 환기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글 심재억기자 jeshim@seoul.co.kr 사진 김명국기자 daunso@seoul.co.kr ■ 새 치료법 ‘이식술’ 95%이상 완치 안면경련은 혈관에 눌린 신경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해 발생한다. 따라서 치료의 원칙 역시 이런 신경의 기능을 정상으로 회복시키는 것에 역점을 둔다. 전통적으로 적용해 온 신경압박 해소 수술은 이렇게 발생한 안면경련의 원인을 제거한다는 점에서 나름대로 의미가 있었으나, 수술 후에도 신경이 제자리를 찾지 못해 성공률이 낮았던 것도 사실이다. 이 박사가 개발한 이식술(李式術)은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 기대 이상의 놀라운 효과를 보여 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이식술의 근간은 신경을 감싼 피막에 미세한 상처를 내는 조작을 가해 경화된 피막이 효과적으로 신경을 보호하게 한다는 원리이다. 이렇게 피막을 강화해주면 피막 손상으로 발생한 신경의 합선이 해소되어 신경의 정상적인 기능이 가능하다는 설명이다. “실제로 이 방식을 도입하기 전까지는 신경감압수술 등이 보인 성공률이 85% 수준이었으나 지난 93년부터 이 방법으로 200여명의 환자를 치료한 결과 95% 이상의 성공률을 보였습니다.” 지금까지 국내는 물론 세계적으로도 손꼽히는 기록인 2000여 건의 안면경련 치료 사례를 보유한 그는 이렇게 부연했다.“사실 성공하지 못한 5%도 치료 방법의 문제라기 보다 병증을 10년 이상 방치해 원천적으로 치료가 불가능한 환자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식술의 치료 효과는 기대 이상이라고 봐야지요.” 심재억기자 jeshim@seoul.co.kr ■ 이봉암 박사 ▲부산대의대·중앙대 대학원(박사)▲미국 롱아일랜드대학병원 임상강사▲프랑스 파리 제6대학 부속병원 교환교수▲미국 코넬대 부속병원·뉴욕 마운트 시나이대 부속병원·피츠버그 대학병원·하버드 메스병원 연수▲경희의료원 수술부장, 신경외과 주임교수 및 과장, 동서건진센터 소장▲대한소아신경외과학회장▲대한신경외과학회 이사▲대한 뇌혈관외과학회·대한뇌종양학회·대한뇌기저부학회 운영위원▲미국신경외과학회 정회원▲세계소아신경외과학회 위원▲현, 경희대 의무부총장 겸 의료원장.
  • 암세포 전이과정 규명

    암세포 전이과정 규명

    암이 처음 발생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옮아가는 과정이 규명돼 암 치료에 새 전기가 마련될 전망이다. 미국 코넬대 데이비드 라이든 박사팀은 영국의 과학잡지 네이처 최신호(8일)에 발표한 논문을 통해 종양에서 떨어져 나온 암세포가 단순히 혈관을 타고 다른 장기로 이동, 또 다른 종양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에 앞서 암의 새 전이장소를 물색하는 ‘특사’를 선발대로 파견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고 로이터통신이 7일(현지시간) 보도했다. 따라서 이 특사의 진로를 방해하거나 차단하는 약물을 개발하면 암의 전이를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대부분 암 치료가 힘든 이유는 암세포가 다른 장기로 퍼져 통제하기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연구팀은 암세포가 정상 골수세포를 전이장소로 먼저 보내 전이에 유리한 환경을 조성한다는 사실을 쥐 실험을 통해 알아냈다. 즉 쥐의 피부에 주입한 폐암세포가 즉각 폐로 가지 않고 이동하기 며칠 전 골수세포를 움직여 기착지의 정지작업을 시킨다는 것을 발견했다. 전이지점의 세포들은 피브로넥틴이라는 접착 성분으로 골수세포를 잡아 가둠으로써 암세포의 보금자리를 만든다. 이러한 사전 정지작업 없이는 암의 전이가 일어나지 않는다고 연구팀은 설명했다. 라이든 박사는 “이 보금자리는 암세포를 심어 기르는 부착인자를 만들어 암세포의 결합뿐 아니라 증식을 유도, 비로소 제2의 종양을 형성시킨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 체내를 돌아다니는 특수한 골수세포의 수를 측정하면 암이 확산될지 여부를 판단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박정경기자 olive@seoul.co.kr
  •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태평양그룹-창업주 故서성환 회장家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태평양그룹-창업주 故서성환 회장家

    태평양그룹 창업주 고 서성환(1924∼2003) 회장은 화장품업계의 신화가 됐다.‘미와 향을 파는 마케팅의 귀재’인 서 창업주는 어려서부터 개성에서 혹독한 경영수업을 받았다. 이후 기업경영에서 개성상인의 맥이 면면히 흘렀다. 서 창업주는 이윤의 사회 환원이라는 기업가의 사회적 책무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태평양이 직접 운영하는 비영리 재단이 3개이며 후원 단체는 셀 수없이 많다. 신용과 근검절약을 가장 큰 밑천으로 삼는 개성상인의 기질, 이윤의 사회 환원이라는 기업윤리는 2세 경영으로 넘어온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가업 태평양은 1945년 9월5일 창립됐지만 연원은 좀 더 거슬러올라간다. 태평양의 역사를 알려면 서성환 회장의 가족사부터 살펴봐야 한다. 서 회장은 1924년 7월 황해도 평산군 적암면에서 부친 서대근(1890∼1973)씨와 모친 윤독정(1891∼1959)씨의 3남3녀 가운데 차남으로 태어났다. 서 창업주 가족은 소학교 시절인 1930년 좀 더 나은 생활을 찾아 개성으로 이사를 했다. 개성에서 서울로 향하는 길목인 동현동에 정착했다.‘상인의 도시’ 개성 생활은 소년 서성환에게 이후 기업 경영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개성에 정착한 가족들의 생계는 어머니 윤 여사가 책임졌다. 전 재산을 털어 조그마한 상점을 열고 잡화를 취급하다가 화장품 제조에 눈을 돌렸다. 윤 여사는 당시 대부분의 여성들처럼 정규교육을 받지 못했으나 비상한 머리를 지녔다. 이웃으로부터 ‘여중군자’라고 불릴 만큼 활동적이고 사교적이었다. 인삼 매매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많은 개성지방은 소득수준이 높아 우수한 품질의 동백기름이 잘 팔린다는 것을 간파한 윤 여사는 직접 동백기름을 짜 만든 머릿기름을 팔았다. 당시 서민들은 피마자 기름을 썼지만 상류층은 고가의 동백기름을 애용했다. 참빗으로 곱게 빗어 쪽진 머리에 머릿기름을 자르르 바른 모습은 아름다운 여인으로 보이도록 하는데 필수적이었다. ●태평양 모체는 어머니의 ‘창성상점’ 동백기름에서 자신을 얻은 윤 여사는 차츰 사업영역을 확대했다.1932년부터 민간에서 전해 내려오던 미안수를 자가 제조법으로 만들어 판매를 시도했다. 또 구리무(크림), 가루분(백분) 등으로 화장품 제조의 종류와 품목을 넓혔다. 소년 서성환도 물건을 도매상에 배달해주는 등 잔심부름을 하며 가업에 참여했다. 당시 제조방식은 물론 가내 수공업이었다. 솥을 걸어놓고 그안에 물과 기름을 섞어 손으로 직접 젓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품질은 우수하다는 평을 얻어 수요를 따르지 못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자신감을 얻은 윤 여사는 ‘창성상점(昌盛商店)’이라는 생산자 명칭을 표기했다. 제품에 대한 자부심이 높아 상품에 ‘창성당제품’‘오리지날’ 등을 표기했다. 가업에 참여한 소년 서성환의 경영 수업은 계속됐다. 보통학교시절부터 소년 서성환은 하루 끼니인 도시락 세개를 자전거에 싣고 해뜨기 전에 개성을 출발, 화장품 제조에 필요한 물건을 사오곤 했다. 중경보통학교를 졸업한 1939년부터 화장품 사업에 본격 뛰어들었다. 거래 도매상에게 물건을 납품하거나 예성강 20리를 따라 형성된 상로(商路)를 따라 직접 팔기도 했다. 자전거로 화장품을 팔러 다니면서 유통에도 눈을 떴다.10대 소년 서성환은 개성에서 자전거를 타고 내려와 서울 남대문시장에서 글리세린과 향료, 빈 병을 사는 일을 도맡았다. 창성상점의 제품은 1941년 개성 최초의 백화점인 3층 양옥의 김재현백화점에도 들어갔다. 백화점에 작은 코너를 개설, 자사의 제품뿐만 아니라 인기가 높던 다른 회사의 제품도 위탁 판매했다. 제조와 판매를 함께 할 뿐만 아니라 다른 회사 제품도 함께 판다는 서성환의 생각은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일이었다. 그러면서 화장품 제조법도 어머니 윤 여사로부터 직접 배웠다. 물과 기름의 혼합비율, 열을 가하는 강약 정도, 가성소다(수산화나트륨)의 비율 등에 따라 화장품의 품질은 천차만별이었다. 화장품 유통에 이어 제조까지 현장 경험을 쌓았지만 스물한살이던 1944년 강제징용되면서 그의 화장품 수업은 중단됐다. ●‘블루오션’ 태평양으로 광복을 맞아 다시 개성으로 돌아온 청년 서성환은 화장품에 집중했다. 어머니가 세운 창성상점을 ‘태평양상회’로 이름을 바꿨다. 태평양만큼이나 큰 기업으로 만들겠다는 웅지와 태평양을 건너 세계로 진출하겠다는 도전의지를 담은 이름이다. 광복정국의 혼란속에서 서성환은 1947년 개성을 떠났다. 서울로 이주, 회현동에 새 터전을 마련했다. 청년 서성환은 당시 누님 한분이 내려오지 못한 이산가족의 한을 평생 간직하고 살아야 했다. 이 즈음 부인 변금주(77) 여사를 만나 결혼했다. 모조품과 위조 화장품이 기승을 부리던 50년대 서성환은 “남보다 월등한 제품을 만들어야 제 값에 팔 수 있다.”며 시종일관 품질을 강조했다. 이때 내놓은 메로디크림은 태평양 1호 제품의 영예를 안았다. 성장의 발판을 마련하는 듯했지만 6·25가 터졌다. 그는 피란길에도 화장품 원료를 싣고 부산으로 내려갈 정도의 집념을 보여줬다. 임시수도 부산에서 1951년 순식물성의 ABC포마드를 시장에 내놓았다. 대단한 인기를 끌며 화장품 시장을 석권했다. 당시 멋쟁이들의 필수품이었다. 서성환 회장이 직접 작명한 ABC포마드는 60년대까지 대히트 브랜드로서 태평양의 성장 기틀이 됐다. 청년 서성환은 환도 이후 1954년 후암동시대를 열면서 기술력에 대한 갈증에서 장업계 최초로 연구실을 만들었다.1953년 처음 열린 미스코리아 선발대회 등을 통해 화장문화가 태동한 것도 성장의 밑거름이 됐다. ●향기나는 밥, 그리고 최초의 연속… 서성환은 후암동 시절 잘 팔리던 화장품을 구해 직원들과 함께 실험을 거듭했다. 생산직 여종업원들과 함께 밥을 지어 먹었다. 가내 수공업에 실험기구가 부족한 것은 당연지사. 향료가 밴 솥과 물바가지를 이용해서 밥을 하면 향내 나는 밥이 되고, 크림을 만들었던 도구를 쓰면 구리무 향밥이 됐다고 한다. 56년 용산으로 이전한 이후 성장가도에 들어섰다. 서성환은 57년부터 해마다 기술자들을 독일과 일본에 유학시켰고,58년엔 동양 최초로 고성능 미분기를 도입했다.59년 주식회사 체제로 출범했고 프랑스 코티사와 기술제휴를 통해 장업사의 새 장을 열었다.60년 장업계 최초의 해외방문,64년 오스카 브랜드로 최초의 화장품 수출, 당시 획기적인 방문판매제와 아모레화장품 개발 등에 힘입어 급신장했다.68년 매출이 14억 2800만원으로 창업 이후 처음 10억원대를 돌파했다. 당시 태평양의 품질은 어느 정도였을까?지난 71년 브뤼셀에서 열린 세계화장품 콘테스트에서 3개의 금상을 수상했다. 화장품 제조 능력을 세계적으로 인정받았다.74년 장업계 최초의 소비자과를 신설, 정부의 소비자 기본법안보다 3년 빨리 소비자 중심을 지향했다. 순항하던 태평양은 90년대 들어 무한경쟁시대를 맞았다. 서 창업주는 창업 50년을 맞은 95년을 ‘세계화의 원년’으로 선포하고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을 다짐했다. ●태평양에 순항중인 2세 경영 서 창업주는 개성상인 특유 기질을 두 아들에게 물려줬다. 서 창업주는 지난 82년 장남 영배(49)씨를,87년 차남 경배(42)씨를 입사시키면서 2세들에게 경영수업을 시작했다. 영배씨는 태평양화학에 입사해 도쿄 및 뉴욕 지사를 거쳐 태평양증권 부사장 태평양종합산업의 회장을 지냈다. 지금은 태평양개발 회장으로 기업의 일가를 이루고 있다. 영배씨는 태평양개발을 연매출 1000억원대의 중견 건설업체로 키웠다. 차남인 경배씨는 재경본부를 시작으로 그룹 기획조정실장을 맡아 과감한 구조조정을 지휘했다. 태평양증권·태평양패션·프로야구단 돌핀스·여자농구단 등 계열사를 정리했다.97년 3월 대표이사 사장으로 취임하면서 태평양에 2세 경영의 배를 띄웠다. 지난해 매출은 1조 1053억원. 후계작업이 부드럽게 진행되던 2003년 1월 장원 서성환 회장은 영면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는 기업가 태평양은 해마다 50억원 가량의 이윤을 사회에 환원하고 있다.‘여성으로부터 받은 사랑을 여성에게 되돌려준다.’는 취지에서 주로 여성의 삶의 질 향상에 집중하고 있다. 이윤의 사회환원은 기업윤리 이전에 창업주 서성환 회장의 소신이라는 게 한 측근의 설명이다. 그는 “창업주는 ‘사회에 기여하면서 돈을 버는 게 바로 우량기업’이라고 자주 언급했다.”고 말했다.‘불쌍한 사람을 보고는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후덕함도 있었다. 그러나 창업주 자신의 일상 생활에서는 개성상인의 ‘짠돌이’가 느껴질 정도였다. 서 창업주는 지난 63년 중앙대학교에서 처음으로 ‘성환 장학금’을 만들었다. 중앙대 최초의 외부장학금이다. 당시의 기업가치고는 사회적 책무를 빨리 깨달은 편이었다. 첫 수혜자는 리대룡(64) 중앙대 광고홍보학과 교수. 이후 75년부터 가정 형편이 어렵지만 학업 성적이 좋은 여고생 9700여명에게 17억원의 장학금을 지급했다. 지난 9월부터 태평양학술문화재단으로 이름을 바꿔 학술연구사업으로 방향을 잡았다. 여성들에게 유방은 모성의 상징이자 여성답게 해주는 상징적인 기관이다. 여성의 건강과 가정의 행복을 지키기 위해 태평양은 2000년 9월 한국유방건강재단을 만들었다. 태평양이 전액 출자한 재단은 국내 최초의 유방암 전문 비영리 공익재단이다. 지금까지 1만 2000여명의 여성들에게 수술비를 지원하거나 무료로 검진받을 수 있도록 했다. 사회 환원은 태평양이 출연한 재단으로 국한되지 않는다. 지난 2003년 6월 서 창업주가 타계한 다음 태평양 주식 7만 4000주와 이익배당금 전액 등 50억원을 아름다운 재단에 전달했다. 지도층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실천은 아들 서경배 사장으로 이어졌다. 서 사장은 선친의 고향이 북한인 것을 감안, 북한 어린이와 여성을 돕기 위해 유니세프에 지난해와 올해 각각 1억원을 기부했다. ■ 오늘의 태평양 일군 3인방 오늘날의 태평양을 일군 데는 창업주 서성환 회장을 그림자처럼 보필한 3인방이 있다. 태평양의 사사에 남을 정도로 혁혁한 공을 세웠다. 이들은 한국 여성의 아름다움을 재인식시키고, 국민 생활양식을 한층 높인 신화 창조의 주역이다. 오원식(69)전 부사장은 40년이 넘게 입에 오르내리는 브랜드 ‘아모레’를 1961년 작명했다. 당시 절정의 인기를 끌었던 이탈리아 가곡 ‘아모레미오(난 당신을 사랑합니다)’에서 따왔다. 상금으로 당시 거금인 1만원(당시 월급 7000원)을 받았다. 오 전 부사장은 1967년부터 한방미용법을 연구, 지난 73년 인삼 사포닌을 이용한 화장품 아모레 진생삼미를 탄생시켰다. 진생삼미는 브랜드 진화를 거듭하다가 가장 한국적인 명품 ‘설화수’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설화수는 단일 브랜드로 매출이 2000년 1000억원을 달성했으며, 지난해에는 국내 최초로 3000억원을 돌파했다. 화장품 사상 유래가 없는 기염을 토했던 브랜드다.82년 대한화장품학회 회장을 지낸 오 부사장은 87년 기술연구소 초대 소장을 맡아 기술개발에 힘썼다. 이후 90년대 초까지 연구부문을 총괄하면서 태평양 40년 연구와 생산 분야의 산증인으로서 화장품 기술의 과학화에 큰 획을 그었다. 그 어렵던 50년대의 태평양 생존 기틀을 닦은 데는 구용섭(81)초대 연구실장의 공을 빠뜨릴 수가 없다. 좋은 원료 확보를 위해 암거래 시장에서 발품을 팔았다. 서울 환도이후 후암동의 가내 수공업 시절의 ‘향기나는 밥’과 ‘구리무밥’을 먹으면서도 제품개발을 진두 지휘했다. 이같은 노력 덕분에 태평양은 독자적인 기술 개발과 화장품에 대해 과학적으로 접근하는 발판을 마련했다.68년 한국화장품 화학자회 창립회장에 취임,80년까지 회장을 지내면서 한국의 화장품 발전에도 공이 크다. 머리를 감을 때 비누에서 샴푸로 바꾸게 한 사람이 김창규(66) 고문이다. 프랑스 파리 이과대학 연구소의 실장으로 재직중 태평양에 스카우트됐다. 그가 73년 개발한 브랜드 ‘타미나’는 70년대를 대표하는 히트 상품이 됐다.78년엔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세계화장품학회 국제회의에서 인삼사포닌이 모발에 미치는 효과에 대한 논문을 발표,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김 고문은 80년대 태평양의 생활용품 사업을 일궜다. 당시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던 리도 푸로틴 샴푸는 시장 점유율 70% 이상을 기록했다. 무엇보다도 비누로 머리를 감던 국민들의 생활양식을 샴푸로 머리를 감게 바꿨다.88년 가정용품을 연구하는 기술연구소장과 92년 태평양중앙연구소 초대 소장을 지냈다.91년부터 대한화장품학회장을 연임하면서 화장품학계 발전을 위해 여전히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다. chuli@seoul.co.kr ●정·관·재계로 연결된 화려한 혼맥 창업주 서성환 회장은 1947년 변금주씨와 결혼했다. 슬하에 2남 4녀, 송숙(58), 혜숙(55), 은숙(52), 영배(49), 미숙(47), 경배(42)를 두고 모두 성혼시켰다. 서 창업주의 사돈가는 한마디로 쟁쟁한 집안들이다. 정·관계를 비롯해 기업인과 언론인으로 인연이 이어진다. 방우영(77) 조선일보 명예회장을 비롯해 신춘호(73) 농심그룹 회장, 최두고(84) 전 국회의원 등의 기업인과 사돈관계를 맺고 있다. 을유문화사 정진숙(93) 회장, 최주호(작고) 전 우성그룹 회장, 박세정(88)대선제분 회장과는 혼맥을 쌓았다가 끊어졌다. 서 창업주는 또 사돈가의 방우영 조선일보 명예회장을 통해 정재문(69) 대양산업 회장(전 의원), 신춘호 농심 회장을 통해 서봉균(79) 전 재무장관과는 ‘사돈의 사돈’으로 간접 혼맥을 이루고 있다. 김치열(84) 에이오에스 회장(전 법무·내무장관)과는 신춘호 농심 회장을 거쳐 박남규(85)조양상선 회장을 통해 연결된다. 서 창업주는 이같은 순환 혼맥을 통해 김일환(작고) 전 내무장관, 정운갑(작고) 전 농림부 장관, 김영생(작고) 전 의원, 김도창(작고) 전 법제처장 등 정·관계 가문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된다. 이같은 현상은 서 창업주 특유의 신중함과 무관하지 않다는 분석이다. 이는 자녀 혼사를 사람됨됨이를 중시하여 중매 형식을 택한 서 창업주의 성격에서도 잘 나타난다. 사돈가의 ‘유명세’와 관련해 정략적이라는 세인의 오해를 받기 쉬우나 태평양측은 이를 극구 부인한다. 정관계의 발판을 만들 필요도 없었거니와 ‘정경유착’의 시선을 받고 싶지도 않았다는 게 서 창업주 측근의 설명이다. 관계(官界)의 집안과는 모두 현직에서 물러난 뒤 맺어졌고, 재계 인사들과는 업무와는 전혀 관계가 없으며 대부분 양쪽 집안 가장들의 친분으로 혼사가 이뤄졌다고 전한다. 혜숙씨는 이화여대 사회생활과 출신으로 김일환씨의 3남인 의광(56)씨와 지난 74년 결혼했다. 김일환씨는 6·25전쟁 당시 국방차관을 역임한 전형적인 무관 출신으로 상공·내무·교통장관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의광씨는 연세대 정외과 출신으로 태평양 계열사의 장원산업 회장으로 활동하다 물러났다.4명의 사위 가운데 유일하게 장인 회사의 경영에 참여했다가 서울 인사동에서 목인갤러리를 운영하고 있다. 이들 부부는 공부하고 있는 근종(29)씨와 LG전자에 다니는 우종(27)씨를 두고 있다. 3녀 은숙씨는 국회 건설위원장을 지낸 최두고씨의 차남인 상용(53)씨와 지난 77년 결혼했다. 상용씨는 고려대 의대를 졸업하고 은숙씨와 결혼, 미국에서 7년간 수련의 생활을 끝내고 귀국해 현재 고려대 의과대학장으로 재직중이다. 부부에겐 ㈜태평양에서 사원으로 근무하는 환석(27)씨와 미국에서 학업중인 양희(23)씨 등 1남1녀가 있다. 서 창업주의 두 아들인 영배씨와 경배씨의 혼사도 많은 관심을 끌었다. 장남인 영배씨는 고려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하기 직전에 이미 그룹경영에 참가했다. 그는 일본 와세다대학 대학원을 수료한 후 증권회사로 자리를 옮겨 90년도 태평양증권 부사장을 거쳐 태평양개발 회장을 맡고있다. 영배씨는 조선일보 방우영 명예회장의 1남3녀 가운데 장녀인 혜성(45)씨와 지난 83년에 결혼했다. 미모와 실력을 겸비한 재원인 혜성씨는 이화여대 영문과를 마친 후 조선일보에 입사, 문화부 기자로 근무하다가 서씨 집안의 맏며느리가 됐다. 혜성씨는 태평양학원(성덕여중·성덕여상)의 상임이사로 활동 중이다. 영배씨 부부는 2남1녀를 두고 있는데 모두 학생이다. 차남인 경배씨는 지난 90년 11월, 농심 신춘호 회장의 막내딸인 윤경(37)씨와 화촉을 밝혔다. 서 창업주와 신춘호씨는 같은 용산구 관내에서 평소 자주 만나 인사를 나누던 사이로 지내고 있었다. 이러한 인연이 훗날 사돈으로 연결된 것. 경배씨는 경성고·연세대 경영학과를 마친 뒤 미국 코넬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수재로 87년 태평양화학 과장으로 그룹에 첫발을 내디뎠다.90년 태평양그룹 기획조정실 실장을 지내는 등 태평양 대표이사 사장 및 대한화장품협회 회장직을 맡고 있다. 경배씨는 학생인 두딸 민정(14), 호정(10)을 두고 있다. chuli@seoul.co.kr ■ 故서성환 회장의 차사랑 “기다리는 시간의 맛도 있고, 잔의 맛도 있고, 차 맛도 있다.” 창업주 고 서성환 회장을 모신 회의에서 손수 차를 우려드렸던 서경배 사장의 회고담이다. 요즘 차는 단순한 기호식품이나 전통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상상력을 뛰어넘는 초스피드 시대에서 여유를 찾아주는 음료이다. 철학이 담긴 고급 문화로 이해된다. 이런 차가 화장품 회사 태평양과 어떻게 이어졌을까? 서 창업주는 60년대 일본 등 외국을 방문할 때마다 그 나라 고유의 차를 대접받았다. 일본 거래처를 찾았을 때 가루차가 늘 나왔다. 하지만 우리가 정작 손님에게 대접하는 것은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커피가 고작이었다. 특히 서 창업주는 일본 거래처 사람들이 고려·조선왕조의 다구(茶具)에 열광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이에 차에 관심을 기울여 70년대 후반부터 녹차사업을 시작했다. “차밭을 조성하되 반드시 불모지를 개간해야 한다.”80년 녹차밭을 구상하면서 서 창업주는 이렇게 마음먹었다. 당시 차밭 개간은 무모한 사업으로 비쳐졌다. 80년대 초 우리나라는 차의 불모지나 다름 없었다. 부족한 전문인력과 제주도 땅의 척박함 등 그 어느 것 하나 녹록지 않았다. 골프장을 짓는다거나 땅투기를 한다는 등의 오해까지 받았다. 축적된 기술과 자료도 없었다. 주위에서는 회사 전체가 어려워질 것이라며 모두 만류했다. 그러나 서 창업주는 뚝심을 발휘해 밀어붙였다. 대한농구협회 회장 시절인 80년 중국을 방문, 공안(公安)을 설득해 황제차로 유명한 용정차(龍井茶)의 고향 항저우를 둘러봤다. 차가 거대한 산업임을 확인했지만 차 박물관은 그저 형식만 갖춰 크게 도움이 되지 못했다. 해결의 실마리는 우연히 풀렸다.90년대 초 사업을 위해 찾았던 그는 미국 하와이의 파인애플농장 안에 있는 돌(Dole)사의 파인애플하우스, 즉 파인애플박물관에 들렀을 때 무릎을 탁 쳤다. 그러나 겨우 손익분기점에 도달할까말까 하던 차사업을 차박물관으로 견인하기에는 너무 힘들었다. 그래서 차박물관은 가슴에 고스란히 묻어두었다. 말년, 몸이 쇠약해진 서 창업주는 휴양을 위해 하와이에 머물면서 파인애플하우스를 가보곤했다. 지난 99년 아들 서경배 사장이 부친 문병을 위해 하와이에 들르자 그는 짐을 풀던 아들을 다짜고짜 차에 태우고 돌사의 파인애플농장으로 데려갔다.“바로 이거야, 이렇게 만들어봐라.”와병중이던 아버지의 말은 그게 전부였다. 이렇게 해서 설록차박물관 오’설록이 탄생했다. 지난 2001년 9월 남제주군 안덕면 서광리에 문을 연 오’설록에는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의 각종 찻잔 등 다구가 잘 진열되어 있다. 차에 관한 명상의 최적 공간으로 소문나면서 연간 30여만명이 찾는다. 장원 서성환의 정성과 숨결이 고스란히 스며있는 곳이다. chuli@seoul.co.kr ●특별취재반 산업부 홍성추 부장 (부국장급·반장) 박건승·정기홍·류찬희 차장 이종락·이기철·주현진·류길상·김경두기자
  •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코오롱그룹-이웅열 회장家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코오롱그룹-이웅열 회장家

    코오롱의 역사는 한국 섬유산업의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 이 땅에 가장 먼저 나일론을 들여와 의생활에 혁명을 가져왔으며, 한때는 수출 한국을 이끌기도 했다. 그러나 성숙산업에 따른 한계로 인해 코오롱은 재계서열이 점점 밀려났다. 섬유산업의 위상이 갈수록 위축되는 모양새와 별반 다르지 않다. 코오롱의 3세 경영이 닻을 올린지 올해로 10년째. 이웅열(49) 회장은 올해를 그룹경영의 ‘터닝포인트’로 만들기 위해 낮은 곳에서 다시 시작하고 있다. 제2의 도약을 위해 노후화된 주력 사업에 다시 기름을 칠하고, 쪼이고, 닦고 있는 것이다. 혹독한 외환위기를 거치며 체질을 바꾼 코오롱이 재도약을 위한 또 한번의 체질 개선 시험을 치르고 있다. ●풍운아 이원만 창업주 코오롱 창업주인 고 이원만 회장과 이동찬(83) 명예회장은 부자간이면서도 사업 동지이자, 인생의 동반자였다. 이 창업주가 그룹의 외연을 넓히고 사업의 ‘바람막이’가 돼 줬다면, 이 명예회장은 그룹의 안살림을 챙겼다. 부자는 동업자로서 40년 가까이 함께 일하며 코오롱의 기틀을 만들었다. 이 명예회장이 2세이면서 창업 1.5세대로 불렸던 까닭이다. 부자는 사업 파트너로서 환상의 듀엣이었지만 가정적으론 한때 애증의 관계였다. 기업가보다 정치가로서 더 알려진 이 창업주는 워낙 풍류를 즐기는 성격인 데다 이 명예회장이 초등학교 4학년 때 남은 전답마저 처분하고, 사업을 위해 훌쩍 일본으로 떠나버렸기 때문이다. 이 명예회장은 어린 나이에 모친과 누이동생을 돌보며 가장 역할을 해야만 했다. 그러나 선친은 이 명예회장에게 부러움의 대상이기도 했다. 선친의 호방한 성품과 능숙한 화술 등은 당시 정·재계에서 유명했다. 이 창업주는 술을 많이 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술자리에선 재담으로 좌석을 압도했으며, 투박한 경상도 사투리는 ‘문화재’로 불리울 정도였다. 이 창업주는 1930년대 초 일본으로 건너가 사업 기반을 닦았으며, 해방 후에는 국내 최초로 나일론을 들여와 국내 섬유산업을 개척했다.1957년엔 국내 첫 나일론사 제조 공장인 한국나일론(현 ㈜코오롱)을 설립했으며,63년엔 나일론 원사 공장을 지었다. 그는 또 한국산업수출공단 창립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오늘의 구로공단과 구미공단을 조성하는 산파역할을 했다. 이 창업주는 정계에도 발을 들여 대한민국 초대 참의원과 6,7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이를 기반으로 그는 인맥 만들기에 탁월한 수단을 발휘했다. 이 때문에 이 창업주는 1960∼70년대 정·재계의 대표적인 인물로 꼽혔다. ●1.5세대 창업주 이동찬 명예회장 “이 명예회장은 숙박비를 아끼기 위해 항상 비서와 한 방에서 잡니다. 비서들에게 해외 출장은 그야말로 곤욕이었죠. 회장이 바로 옆에서 주무시는데 잠이 편히 옵니까. 출장에서 돌아오면 몸무게가 3∼4㎏은 그냥 빠져요. 그렇다고 1달러가 아쉬운 나라에서 잠자는 곳에 돈낭비를 할 필요가 있느냐는 말씀에 뭐라고 할 수도 없고요.” 코오롱 비서 출신의 한 임원 얘기다. ‘가장의 짐’을 일찍 떠안은 탓에 이 명예회장은 근검 절약이 몸에 배어 있다. 한 번은 이 명예회장이 1947년부터 50여년 이상 신었던 슬리퍼를 비서실에서 새 것으로 바꿨다가 된통 야단을 맞고, 쓰레기통을 뒤져 간신히 찾았던 적도 있다. 또 이 명예회장의 점심 메뉴는 주로 된장찌개와 칼국수, 수제비 등이었으며, 삼복 더위도 부채와 선풍기로 보냈다. 그는 15세 때 경리사원으로 부친의 사업을 도운 지 35년 만인 1977년 코오롱 회장에 올랐다. 그는 등산식, 마라톤식으로 표현되는 꾸준한 내실 경영으로 그룹의 체질을 다져놓은 이후 섬유와 무역에 치우친 사업구조를 건설과 화학으로 확대했다.1980년대는 전자소재와 합성섬유 등 신업종으로 영역을 더욱 넓혔다. 이 명예회장은 과외 활동에도 관심이 많았다. 그는 1974년 한국경영자총협회 부회장직을 맡은 이후 1975년 농구협회 부회장, 전국경제인연합회 이사 등으로 다양한 단체에서 활약했다.1980년에는 대한농구협회 회장을 맡았으며, 대한올림픽위원회 위원으로서 스포츠 외교에도 일익을 담당했다. 경총 회장은 82년부터 무려 14년간이나 했다. 1996년 1월 이 명예회장은 10년 이상 경영수업을 받은 장남인 이웅열 회장에게 그룹 경영권을 물려주고 선친처럼 명예회장으로 물러났다. ●‘3박4일’ 이웅열 회장 이웅열 회장은 5명의 누이들 속에서 컸지만 성격은 대단히 남성스럽다. 특히 스포츠를 좋아해서 축구와 야구, 테니스, 탁구, 당구, 골프 등 종목을 가리지 않는다. 또 시작하면 프로(?)수준이 될 때까지 멈추지 않는다. 그의 별명이 ‘3박4일’로 불린 이유는 무엇이든 한 번 시작하면 끝장을 보는 성격 때문이다. 그의 학창 시절은 남들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그다지 풍족하지 않았다. 부친인 이 명예회장이 박하지 않을 정도의 용돈만 줬기 때문에 친구들로부터 재벌 아들이 ‘짜다’는 소리를 수시로 들었다. 그는 고려대 경영학과를 거쳐 미국 조지워싱턴대 경영학 석사(MBA)를 받았다. 이 회장은 활달하고 사교적이다. 전경련 e비즈니스 위원장을 맡아 재계 2∼3세의 리더로서 활동하기도 했다. 그는 최태원 SK㈜ 회장과 신동빈 롯데 부회장, 류진 풍산 회장, 정몽규 현대산업개발 회장과 가깝게 지낸다. 그의 이같은 사교적인 성격은 조부인 이원만 창업주의 성품과 닮았다. 호방하고 풍류를 즐겼던 이 창업주는 사업가보다 정치인으로 이름이 더 잘 알려졌다. 1989년 그룹 기획조정실장으로 그룹 경영에 참여한 이 회장은 이동통신사업을 직접 진두지휘하면서 그룹의 변화를 이끌었다. 그러나 외환위기 파고로 계열사 매각과 신세기통신(현 SK텔레콤) 지분(1조 700억원어치)을 팔아야하는 아픔을 겪었다. 이 회장은 당시 “우리는 우리의 미래를 위해 미래를 팔았다.”고 표현할 정도로 침통해 했다고 한다. 그러나 코오롱의 어려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화섬산업이 고유가와 중국의 저가 공세로 경쟁력이 갈수록 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회장은 올해를 ‘턴어라운드’의 원년으로 선포하고, 과감한 구조조정과 수익구조 개선을 추진하고 있다. ●경영권 장자 승계 코오롱 가문은 재계에서 보기 드물게 아들이 귀한 집안이다. 창업주인 이원만 회장은 슬하에 2남4녀를 뒀지만 이 명예회장은 1남5녀, 이웅열 회장도 1남2녀다. 그룹 경영은 장남만 참여하고, 딸들과 사돈가의 경영참여는 철저히 배제한다. 장자일계(長子一系)의 경영 형태를 띠고 있는 것이 코오롱가의 특징이다. 다른 그룹들이 사돈을 비롯한 친인척들로 방대한 족벌 경영체제를 이룬 것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이 명예회장과 숙부인 이원천 전 사장간의 경영권 분쟁이 친인척 배제를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 이 창업주가 그룹경영을 맡고 있을 때는 사위들의 경영 참여가 적지 않았지만, 이 명예회장이 경영권을 승계하면서 이같은 장자 승계의 원칙이 정해졌다. 이 명예회장은 그의 자서전 ‘벌기보다 쓰기가 살기보다 죽기가’에서 “우리 집 여자들은 아버지 사업이나 남편이 하는 일에 개입하는 법이 없다. 사위들이 처가 덕을 보고 한자리 하겠다면 득보다 해가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전문경영인에게 방해가 될 뿐 아니라 잘 해내는 경우에도 열등감이 생긴다. 능력이 없다고 ‘백년손님’이라 쫓아낼 수는 없는 일이니 난처해질 것이고, 훗날 내가 일선에서 물러날 땐 조용해지기 어렵다.”고 했을 정도로 철저히 장자일계의 경영구조를 갖춰 경영권에 대한 소모적인 논쟁이나 다툼을 미리 차단했다. ●김종필 전 총재와 한때 사돈 이원만가(家)의 혼맥은 국내 재벌가의 최정점 가운데 하나로 평가될 정도로 화려하다. 이 창업주의 넓은 정계 인맥과 국내 굴지의 섬유그룹인 코오롱을 기반으로 정·관·재계 곳곳에 혈연 관계를 맺었다. 이 창업주와 이위문(작고) 여사는 2남4녀를 뒀다. 이 창업주의 영향력이 정·재계에 미치기 전에는 자녀들을 평범한 집안과 통혼시켰지만, 사업 성공에 이어 정치가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하던 시기엔 국내 내로라하는 집안을 사돈으로 맞았다. 이 때문에 정략 결혼이라는 비판도 적지 않았다. 장남 이동찬 명예회장은 1944년 ‘학병으로 끌려가기 전에 장가부터 들라.’는 부친의 강요로 맞선을 본 지 1주일 만에 평산 신씨가(家)의 무남독녀 덕진(82)씨와 결혼했다. 이 명예회장 부부는 지난해 1월 결혼 60주년을 맞아 회혼례를 올리기도 했다. 장녀 봉필(72)씨는 54년 고향 인근 임병진씨의 아들 승엽(작고)씨와 백년가약을 맺었다. 승엽씨는 삼경물산 사장을 거쳐 그룹 부회장까지 역임했다. 차녀 애란(63)씨는 노영태(63)씨와 혼인을 치렀다. 3녀 미자(61)씨는 포항지주인 박문학가(家)의 장남 성기(66)씨와 결혼했다. 성기씨는 한국바이린 사장을 역임했다. 차남 이동보(56) 전 코오롱TNS 회장과 막내딸 미향(51)씨의 결혼으로 코오롱가는 재계 혼맥도의 핵심으로 올라선다. 이 전 회장은 74년 제3공화국의 2인자였던 김종필 전 총재의 장녀 예리(54)씨와 결혼했다. 이를 통해 코오롱가는 박정희 전 대통령과 한 다리 건너 사돈이 됐으며, 최고 권력가와 혈연의 끈으로 이어졌다. 이들의 결혼은 육영수 여사가 주선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들은 성격 차이로 갈라섰다. 이동보 전 회장은 1988년 코오롱그룹으로부터 분가했지만 부도와 구설수에 휘말려 고초를 겪기도 했다. 막내 미향씨는 삼립식품 창업자인 허창성 집안으로 출가했다. 식품종합그룹인 SPC의 허영인(56) 회장이 그의 남편이다. ●정략결혼과 3세 혼맥 코오롱가의 혼맥은 3세로 내려가면 더욱 빛이 난다. 이 창업주가 자신의 입지와 뜻을 펼치기 위해 손주들을 정략 결혼시킨 경우가 있어서다. 이 명예회장과 신 여사는 슬하에 경숙, 상희, 혜숙, 은주, 웅열, 경주씨 등 1남5녀를 뒀다. 장녀인 경숙(59)씨는 1969년 당시 공화당 의장 서리였던 고 이효상 전 국회의장의 3남 문조(65)씨와 화촉을 밝혔다. 이 전 국회의장은 도쿄대를 나와 경북대 교수로 있다가 1960년 정치에 투신해 5선 의원을 지냈다. 정계에선 대구·경북(TK) 인맥의 대부로 통했다. 국회의장을 비롯해 공화당 총재, 영남학원 이사장 등을 역임했다. 문조씨는 현재 영남대 교수로 재직중이다. 차녀인 상희(56)씨는 국내 대표적 ‘송상(松商)’으로 불렸던 고홍명 한국빠이롯드 회장 집안으로 출가했다.1973년 고 회장의 장남 석진(작고)씨와 결혼했다. 석진씨는 코오롱제약(옛 삼영신약) 사장을 거쳐 빠이롯드전자 회장을 지냈다. 하지만 부도로 인해 고통을 겪다가 98년 별세했다. 3녀인 혜숙(53)씨는 고 이학철 고려해운 창업주의 장남인 동혁(58)씨와 결혼했다. 현재 고려해운 회장인 동혁씨는 서울대 경제학과와 미국 컬럼비아대학 석사 출신이다. 해운선사로서는 처음으로 타이완과 홍콩 등 동남아 항로에 진출해 해운업계의 프런티어 경영인으로 이름이 높다. 4녀인 은주(51)씨는 테니스 인연으로 신병현 전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의 장남 영철(55·의사)씨와 결혼했다. 신 전 부총리는 한국은행 총재와 상공부 장관, 무역협회장, 은행연합회장 등을 지냈다. 이들 부부 결혼식은 신 전 총재가 직접 주례를 맡아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웅열 회장은 큰 누이 경숙씨의 소개로 1983년 황해도 출신인 서병식 동남갈포공업 회장의 장녀 창희(45)씨를 아내로 맞이했다. 서 회장은 1962년 고급벽지의 대명사인 갈포벽지를 만들어 1960∼70년대를 풍미했던 인물이다. 부인 창희씨는 이화여대에서 불문학을 전공했다. 이 회장 부부는 규호(21)와 소윤(18), 소민(16) 등 1남2녀를 두고 있으며, 규호씨는 미국 코넬대에서 호텔경영학을 공부하고 있다. 5녀인 경주(46)씨는 개인사업을 하는 최윤석(46)씨와 결혼했다. ●딸·며느리 모두 이대 동문 장자 경영과 친인척 경영 배제의 원칙 때문인지 코오롱가의 딸과 며느리는 가정이라는 울타리를 잘 벗어나지 않는다. 대외 활동보다 가정주부로서 남편 뒷바라지와 자식 교육에 애쓴다. 이 명예회장의 부인인 신 여사는 지금껏 바깥 사교모임에 한번도 참석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다. 신 여사는 집안에서 살림하는 것이 가장 큰 행복이라고 한다.3세들도 이와 다르지 않다. 이는 이 명예회장의 모친인 고 이위문 여사가 남편인 이 창업주의 호방한 성격과 바깥 활동으로 마음 고생이 매우 심했지만 결코 내색하지 않고, 자식들을 바르게 키운 선례 때문이다. 코오롱가의 딸과 며느리들은 또 모두 이화여대 동문들이다. 장녀 경숙씨가 생활미술과를 나왔으며, 상희씨는 기악과, 혜숙씨는 가정학과, 은주씨는 도서관학과를 나왔다. 이 명예회장은 평소에 딸들을 이렇게 평했다고 한다.“장녀는 걷는 모양부터 급한 성격까지 나를 제일 많이 닮았으며, 둘째는 시댁에서 살림만 하는 편이지만, 항상 밝고 착한 데다 쓸데없이 친정에 오는 일이 없다. 셋째는 공부도 제일 잘했고, 바른 소리도 잘했다. 악바리면서 의리가 강하다. 넷째는 활동적이고 운동을 좋아해서인지 덜렁이라는 별명이 잘 어울린다.” 며느리 창희씨도 코오롱가의 여자답게 대외 활동보다 조용히 집에서 자녀 교육과 남편 내조에 열심인 한국적인 주부다. 사교 모임에 나서기를 싫어하는 창희씨지만 코오롱그룹 간부 부인들로 구성된 ‘코오롱가족사회봉사단’ 활동엔 적극 나서고 있다. golders@seoul.co.kr ■ 코오롱의 ‘李트리오’ 지금의 코오롱그룹 토대를 쌓은 주역 가운데 한 명이 고 이원천 전 한국나일론(현 ㈜코오롱) 사장이다. 창업주인 고 이원만 회장의 동생이며, 이동찬 명예회장에겐 숙부가 된다. 이 전 사장은 일제시대 때부터 일본에서 형님인 이 창업주의 사업을 도왔다.1957년에는 한국나일론 사장직에 추대돼 코오롱의 ‘섬유시대’를 이끌었다. 당시 이원만-이원천-이동찬 3인은 코오롱에서 ‘이 트리오’로 불릴 정도였다. 그러나 이 전 사장은 조카인 이 명예회장과 회사 분할을 놓고 첨예하게 맞서면서 나중엔 경영권 분쟁에 빠졌다. 이 전 사장은 결국 1976년 한국나일론의 경영에서 손을 떼고 자신의 지분을 챙겨 원진레이온이라는 회사를 설립했지만 무리한 사업 확장으로 1년만에 쓰러졌다. 이 창업주는 이후 장남인 이 명예회장에게 경영권을 맡겼고, 회장에 오른 이 명예회장은 동생인 이동보 전 코오롱TNS 회장을 분가시켰으며, 매제들도 계열사 경영에서 손을 떼게 했다. 이 명예회장은 그의 자서전에서 “숙부에 대한 회한이 커지는 요즘에도 회사 분할에 반대한 것은 옳은 일이 아닌가 싶다…. 숙부와의 경영권 분쟁은 결국 조카가 숙부의 세력을 완전히 퇴치해 버린 것 아니냐는 평판이 존재한다는 것을 안다. 그것이 그룹을 살리는 데에 도움이 된 것이라면 나는 굳이 부인하고 싶지 않다.”고 밝혔다. 사업엔 실패했지만 이원천가(家)의 혼맥은 어디에도 빠지지 않을 정도로 화려하다. 형님인 이원만 창업주가 제3공화국의 실력자 김종필 전 총재와 인연을 만들었다면, 이 전 사장은 또다른 실세였던 정일권 전 총리와 혈연관계를 맺었다. 이원천가(家)는 육군참모총장 출신으로 국무총리와 국회의장을 지낸 정일권 집안과 사돈간이다. 고 정 총리의 딸 희경씨가 이 전 사장의 아들과 결혼했다. 또 이원천가(家)와 영풍그룹은 한 다리 건너 사돈간이다. 고 정 총리의 장남인 세훈씨가 장병희 영풍그룹 창업주의 딸 현주씨와 인연을 맺었다. 영풍그룹은 또 60년대 박정희 정권에서 한국은행 총재를 지낸 김세련씨 가문과도 연이 이어진다. golders@seoul.co.kr ■ 코오롱 이끄는 전문경영인들 ‘코오롱호’를 이끄는 대표 최고경영자(CEO)는 누가 있을까. 한광희(56) ㈜코오롱 대표는 코오롱그룹의 간판 CEO다. 그는 요즘 한계사업 정리와 차세대 먹을거리 준비에 분주하다.1976년 코오롱에 입사한 이후 기획관리 등 주요 사업부를 두루 거쳤다. 공인회계사 자격증을 갖고 있는 한 대표는 책상에 앉아 숫자놀이를 하는 것보다 현장 영업을 더 즐기는 실물형 CEO에 속한다. 민경조(62) 코오롱건설 대표는 23년간 건설에서만 근무한 전문경영인으로 위기관리가 뛰어나다는 평이다. 사내에선 따뜻한 집안의 가장 같은 CEO로 불린다. 수시로 사내 메신저를 통해 막내 직원과 대화를 나눌 정도로 상하간 의사소통을 중시한다.“똑똑… 민경조입니다, 야근 힘들죠, 문제되는 게 뭔가요, 오늘 팀원들과 저녁 같이 합시다.”로 유명해 먼저 다가서는 CEO로 통한다. 논어를 1000번 이상 읽을 정도로 고전에 관심이 많다. 제환석(59) FnC코오롱 대표는 현장주의자다.2003년 대표이사에 취임한 이후 800개에 이르는 매장을 서울에서 제주까지 하나하나 찾았다. 지금도 주말을 이용해 매장을 방문하고 있다. 제 대표는 또 CEO 명함 외에 ‘열사모’의 방장 직책을 갖고 있다. 열사모는 제 대표가 만든 모임으로 오프라인의 단체나 장소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열정적인 사원 모두의 마음속에 있는 가상의 모임이다.“스스로 열정적으로 일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원 모두가 열사모의 열사”라고 말하는 제 대표는 열사모 방장의 이름으로 직원들과 곧잘 의견을 교환한다. 배영호(61) 코오롱유화 대표는 엔지니어로서는 드물게 미국 뉴욕지사 근무를 했다. 아무도 도와 주지 않는 해외 영업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죽기살기로 부딪치는 것이라고 강조하는 배 대표는 당시 직원 가운데 한국으로 되돌아온 유일한 사람이라고 한다. 첫 직장에 대한 그의 신의와 열정은 특유의 사업감각과 합쳐져 코오롱유화를 종합화학 회사로 도약시켰다. 김종근(55) 코오롱글로텍 대표는 직원들과의 커뮤니케이션을 중요하게 여긴다. 직원 이름을 기억하고, 애로와 고충을 들어주며, 중요한 정보는 경영에 곧바로 반영한다. 또 직원들에게 책상에 앉아있지 말고 현장을 돌면서 문제와 해결방안을 찾으라고 한다.“사장님은 오늘도 지방사업장을 순회하고 있습니다. 바로 대표와 직원들간의 간담회 때문이죠. 간담회라는 자유로운 형식을 통해 직원들과 허심탄회한 만남을 갖고 있습니다.61개 사업장인데 올해만 해도 벌써 세번째 라운딩입니다. 연초에 전직원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바쁜 일정에도 사업장을 순회하고 계십니다.”한 직원의 이러한 설명에서 올 상반기에 비상장 5개사를 합병, 덩치가 커진 코오롱글로텍을 외형만큼이나 건실하게 키우려는 의지를 엿볼 수 있다. golders@seoul.co.kr ●특별취재반 산업부 홍성추 부장 (부국장급·반장) 박건승·정기홍·류찬희 차장 이종락·이기철·주현진·류길상·김경두기자
  • [우리는 맞수 CEO] 차석용 LG생활건강 사장 vs 안용찬 애경 사장

    [우리는 맞수 CEO] 차석용 LG생활건강 사장 vs 안용찬 애경 사장

    비누·치약을 안쓰는 사람은 없다.10명 중 최소한 6명 이상은 하루에도 몇차례씩 LG생활건강이나 애경의 제품을 쓴다. 칫솔과 샴푸, 화장품, 세제도 빠지지 않는다. 이 생활용품들은 우리의 생활 수준을 현저하게 끌어올린 제품들이다. 국내 대표적 생활용품업체인 LG생활건강과 애경의 최고경영자(CEO)가 최근 부쩍 주목받고 있다. 한국P&G와 해태제과 등에서 사장만 3차례 지낸 차석용(52) LG생활건강 사장은 전문 경영인으로, 오너가의 안용찬(46) 애경 사장은 10년째 흑자행진을 이어오는 CEO로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두 사람은 닮은 점이 많다. 미국 대학에서 MBA를 받았으며 외국기업, 그것도 생활용품회사에서 첫 사회생활을 시작한 것도 같다. ●외국 기업에서 출발한 글로벌 경영인 차 사장은 지난 83년 미국 코넬대에서 MBA를 받았으며,85년 미국의 생활용품회사 P&G에 입사했다. 애경의 안 사장은 85년 펜실베니아의 명문 와튼스쿨에서 MBA를 받았으며 역시 생활용품회사 치즈브로폰즈에서 사회의 첫발을 내디뎠다. 이들은 사원으로 출발해 생활용품 전문회사의 최고 경영인에 올랐다. 차 사장은 P&G에서 잔뼈가 굵었다. 외국기업의 평사원으로 입사해 전문경영인으로 성장,99년 한국P&G의 사장에 올랐다가 해태제과를 거쳐 지난 1월 LG생활건강의 CEO 자리에 앉았다. 반면 안 사장은 87년 현재 애경의 전신인 애경산업으로 자리를 옮겨 95년 대표이사 사장에 올랐다. 시간관리에 철저한 것도 서로 닮았다. 차 사장은 기존 주1회에 걸쳐 반나절 이상 걸리던 임원회의를 격주로,1시간내로 끝냈다. 간결한 회의문화 분위기를 확산시켰다. 불필요한 회의에 시간을 빼앗기는 대신 차라리 ‘고객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고민하자는 것이다. 안 사장 역시 평소 철처한 시간관리를 강조한다. 애경 사령탑에 앉은 지 10년째인 그는 결재를 받기 위해 사장실 밖에서 기다리는 것조차 시간낭비라고 생각한다. 그 결과 부서를 돌아다니면서 직접 결재하는 사례도 많다. 출·퇴근 때의 자투리 시간에는 책을 읽는다. ●치어리더 vs 산책경영 두 CEO의 경영 스타일은 좀 다르다. 지난 1월 LG생활건강 출근 첫 날 차 사장은 “치어리더로서 직원들과 같이 호흡하겠다.”며 개방적인 경영 스타일을 밝혔다.‘나를 따르라.’는 식이 아니라 ‘내가 도와주겠다.’게 그의 경영철학이다. 차 사장이 가장 중시하는 것은 신뢰.“나이 마흔이 됐을 때 돈은 한 푼도 벌어놓지 않아도 되지만 돈을 빌릴 수 없다면 실패한 인생이다.”개성 상인이었던 부친의 가르침이란다. 반면 애경의 안 사장은 산책경영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매일 점심 식사후 파트너를 바꿔가며 회사 주위를 1시간가량 걷는다. 산책 파트너는 주로 임직원. 회사의 주요 사안에 대해 의견을 교환하고 건강도 관리하는 실속을 챙길 수 있단다. 안 사장은 직원 교육을 부쩍 강조한다.“사원들의 교육에 회사의 미래가 달려 있다.”는 지론을 갖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 여파나 최근의 불경기에도 불구하고 사원 교육비를 꾸준히 늘리고 있다. ●1등은 양보 못해 LG의 차 사장은 프리미엄 시장 1위를 위한 전략을 강화하고 있다. 경쟁력이 떨어지는 브랜드는 모두 퇴출시켰다. 또 단순 제조업체가 아니라 ‘소비자 마케팅회사’로 거듭나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다. 그는 “마케팅이란 차별화되고, 경쟁우위를 지닌 제품·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고객과 특별한 관계를 맺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안 사장은 ‘선택과 집중’이란 카드를 꺼내들었다.‘똘똘한 1등 브랜드’작전이다. 또 디자인에 집중하는 것은 업계에 잘 알려진 전략이다. 지난 90년 2명이던 디자이너를 25명까지 늘려 디자인센터를 만들었다. 연구개발 투자에도 끊임이 없다. 지난 2001년 대전시에 애경종합기술원을 개원, 해마다 매출액의 4%를 R&D에 투자하고 있다. 두 회사의 치열한 1위 다툼이 계속될수록 수혜자는 생활수준이 한층 업그레이드되는 소비자가 될 것이다. 이기철기자 chuli@seoul.co.kr
  • ‘주만지 프로젝트’ 논란

    미국 네브래스카주의 옥수수밭에 사자떼가 나타나고 콜로라도 고원(高原)에서 코끼리들이 행진하며 서부 텍사스의 덤불에서 치타가 어슬렁거리는, 영화 ‘주만지’의 한 장면과 같은 상황이 연출될 수 있을까. 1만 3000년 전 대형 포유동물들이 멸종한 북아메리카 대평원에 아프리카 코끼리와 사자, 치타, 몽골산 야생마 등을 이주시켜 생태계 균형을 회복하자는 생태학자들의 다소 황당하면서도 급진적인 제안이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고 AP통신이 18일 보도했다. 코넬대학을 비롯한 10개 대학 및 연구기관의 학자들은 이날 발매된 과학 잡지 네이처에 게재된 ‘미국 생태역사공원 계획’이 멸종 위기에 처한 아프리카와 아시아 대형 야생동물들에게 안전한 서식처를 제공하는 한편 날로 황폐해지는 대평원을 관광지로 변모시키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둘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학자들은 첫 단계로 아시아의 당나귀와 몽골산 야생마 등 동물원 거주 동물들을 북미에 정착시키고 두 번째 단계로 울타리를 친 대규모 사설 공원 안에 치타와 사자·코끼리들을 풀어 놓을 것을 제안했다. 이들은 북미 평원을 지금처럼 방치할 경우 다른 작은 동물들도 멸종하게 되고 잡초와 쥐만 판치는 황무지로 전락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현재 시베리아에서도 5000년 전 사라진 토종 물소 대신 캐나다로부터 물소를 들여와 서식시키는 홍적세(洪積世) 공원 프로젝트가 진행 중이다. 테드 터너 CNN 전 회장도 뉴멕시코주의 평원 지대에 거북이 생태공원 조성을 추진하고 있다. 그러나 외래종을 잘못 이주시킨 결과 토끼와 맹독 두꺼비들이 너무 많아진 호주의 예를 들어 이 계획이 참담한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반대하는 목소리도 만만치 않다고 통신은 덧붙였다.임병선기자 bsnim@seoul.co.kr
  • 벤야민의 ‘미완성 프로젝트’ 마무리

    벤야민의 ‘미완성 프로젝트’ 마무리

    발터 벤야민.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일원, 흉내낼 수 없는 고고한 분위기를 뜻하는 ‘아우라’ 예술이론을 만들어낸 문예비평가로 유명한 인물이다. 그러나 많은 전문가들은 벤야민을 비평가보다 일급 문화사학자로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이런 차이는 벤야민이 생전에 제대로 된 저작물은 남기지 못한 데서 온다. 문화작품 등에 대한 단편적인 글만 남아 있다 보니 ‘비평가’로서만 비춰졌던 것. 그러나 벤야민의 진면목은 문화를 보는 시선을 넘어, 그 시선 자체에 대한 분석을 통해 역사에 대한 통찰을 남겼다는 데 있다. 그 기획이 바로 ‘파사젠 베르크(Passagen Werk)’. 파사젠은 회랑을 뜻하는 불어 파사주에서 온 단어다. 영어로는 ‘아케이드’다. 그러나 벤야민은 끝내 이 프로젝트를 마무리짓지 못했다. 유태계 독일인에게 2차대전은 너무도 버거운 짐이었고 그는 독일을 탈출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남긴 것은 프로젝트의 완성을 꿈꾸며 남긴 메모 뭉치들뿐이었다. ●아케이드와 쇼윈도-‘몽타주’로써의 역사 1층에는 화장실이 없다, 창문이나 시계를 달아놓지 않는다, 카트 바퀴가 너무 잘 굴러가서는 안 된다 등등. 백화점이나 할인마트들이 매상을 올리기 위해 짜낸 갖가지 묘안들에 대해 듣다보면 깜짝깜짝 놀랄 때가 있다. 자본주의는 저 산 너머 대형공장에 있는 게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의 발밑에 깔려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벤야민은 자본주의의 원형을 19세기 중엽 프랑스 파리의 파사주에서 찾았다. 벤야민이 살던 20세기 초만 해도 이미 파사주는 백화점에 밀려 한 물 간 곳. 그럼에도 둥근 유리천장 아래 복도를 거닐며 양 옆에 늘어선 가게들에 진열된 상품을 쇼윈도를 통해 두루두루 둘러볼 수 있었던 파사주는 소비자를 유혹하는 자본주의 시대의 원체험, 그 자체였다고 봤다. 그래서 상품과 유흥과 요리와 매춘부 등이 넘쳐나는 파사주의 전성기,19세기 중엽의 파사주가 남긴 기억의 편린들을 집요하게 모은다. 그런데 완성된 원고가 아니라 메모의 모음이다보니 내용이 굉장히 파편적이다. 이런 저런 얘기가 단락별로 불쑥불쑥 튀어나오는가 하면, 상관이 있는지 없는지 모를 얘기들과 인용문이 줄줄이 나열되어 있다. 영화에서 말하는 일종의 ‘몽타주 기법’이다. 내가 아니라 사물 그 자체로서 말하게 한다. ●과거를 구성하고 이해하는 방식으로서의 역사 몽타주 기법은 벤야민을 문화사가로 자리매김하는 중요한 포인트다. 자본주의를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 쇼 윈도에 전시된 제각각의 상품들이 모두 한데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이미지 그 자체가 이미 자본주의라는 것. 어떤 목적이나 계획으로 역사를 설정하고 설명하는게 아니라 있는 그대로를 늘어놓고, 있는 그대로를 봐달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벤야민은 역사를 다음의 두 가지 측면에서 구분했기에 이런 접근을 했다. 사실 그대로의 역사와 받아들여지고 이해하는 역사. 벤야민은 사실 그대로가 아니라 받아들여지고 이해하는 역사가 더 중요하다고 봤다. 그것은 인과관계로 묶은 사건의 나열이나 흐름을 풀어헤친 뒤 모든 것을 아무렇게나 던져 놓는 수법이었다. 어찌보면 ‘진보’의 역사관으로 너무나도 충실했던 파시즘 시대에, 벤야민 같은 이들이 생각해낼 수 있는 저항방법 중 하나가 아니었을까라는 평가도 가능하다. ●부활하는 벤야민 벤야민은 그동안 다른 학자들에 비해 가려져 있었다. 파사젠 베르크는 1980년대 들어서야 출간됐다. 그러나 이런 파편적이되 정밀한 서술 때문에 외려 문화사의 한 표준으로 올라설 수 있는 역설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지난해 문학동네에서 ‘발터 벤야민과 아케이드 프로젝트’라는 책을 선보였다.‘파사젠 베르크’를 프랑크푸르트학파 연구자인 미 코넬대 수전 모스 교수가 자신의 방식대로 정리해서 풀어냈다. 이로서 벤야민에 다가갈 수 있는 한 다리가 놓여진 것이다. 원본 그대로를 번역해 놓은 ‘아케이드 프로젝트-발터 벤야민’(새물결 펴냄)의 출간은 이런 디딤돌 덕분이기도 하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신나는 과학이야기] 사랑도 화학반응이다

    한국판 ‘브리짓 존스의 일기’인 ‘내 이름은 김삼순’이 화제다. 나이 서른의 노처녀에다 뚱뚱하고 입까지 건 삼순이와 이기적이고 버릇없는 귀공자 진헌의 사랑싸움이 대리만족과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한다. 최근 방영된 내용중 삼순이 떠나간 옛 남자의 배신을 떠올리며 우울해하자 ‘삼식이’ 진헌이 사랑의 종말을 호르몬의 변화로 풀이해준다. 진헌이 삼순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는 예전에 자신의 첫사랑이며 의대생인 희진이 했던 표현이다. 진헌:“남녀가 처음 서로를 갈망할 때는 성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과 에스트로겐이 분비돼요. 사랑에 빠지는 단계가 되면 도파민과 세로토닌이 나오고요. 세로토닌은 사랑에서 가장 중요한 화학물질인데 사람을 일시적으로 미치게 만들어요. 다음 단계가 되면 남녀는 관계가 지속돼 더욱 밀착되기를 원하고 섹스나 결혼으로 발전하죠. 이때 옥시토신과 바소프레신이 분비돼요.” 희진:“옥시토신은 남녀가 애정행각을 부릴 때 외에도 어미가 아기한테 수유를 할 때도 나와. 여성에게 모성과 사랑은 똑같다는 연구도 나왔고. 더 재밌는 건 세로토닌이야. 세로토닌은 상대방의 결점을 인식하지 못하게 해서 사람을 눈멀게 하거든. 방금 얘기한 호르몬들의 농도가 높게 유지되는 건 2년 정도거든. 길어야 3∼4년.” 사랑이 떠난 이유가 화학반응이 끝나 호르몬이 분비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대사에는 과학적인 근거가 있다. 사랑에 빠진 연인들의 뇌 활동을 연구한 미국 럿거스대 헬렌 피셔 교수는 사랑은 갈망→끌림→애착의 3단계를 거치며, 단계마다 뇌에서 분비되는 화학물질이 달라 다른 감정을 느끼게 되며 호르몬이 유지되는 기간은 2년이라고 분석했다. 코넬대 신디아 하잔 교수도 ‘가슴 뛰는 사랑은 길어야 30개월’이라는 논문을 내놓기도 했다. 피셔 교수에 따르면 사랑의 첫 단계에서는 도파민이 분비된다. 도파민은 뇌에서 분비되는 신경전달물질로 뇌세포와 뇌세포 사이의 신호를 전달한다. 도파민은 사랑의 기쁨이나 흥분과도 관계가 있어 진헌에게 삼순이의 환청이 들리고 거리 간판 속 섹시한 모델이 삼순이로 보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눈에 콩깍지가 씌는’ 현상은 또 다른 신경전달물질인 세로토닌의 분비로 설명된다. 세로토닌이 부족하면 우울증과 불안감에 시달릴 수 있다. 다음 단계에서는 페닐에틸아민이 분비된다. 이 물질은 삼순이가 보고 싶어 밤늦게 삼순이의 집 앞으로 달려가고 한라산까지 쫓아가는 진헌의 행동을 설명해준다. 초콜릿에도 포함된 페닐에틸아민은 사랑의 행복감을 느끼게 한다. 마지막 단계는 스킨십을 하고자 하는 단계로 이때 뇌하수체후엽에서 분비되는 호르몬인 옥시토신이 분비된다. 상대에 대한 애착을 느껴 관계를 끈끈하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 영어단어 ‘Chemistry’에는 ‘화학’이라는 뜻 외에도 ‘이성 간의 끌림’이라는 의미도 있다. 두 사람이 서로 끌리고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두 사람 사이에 chemistry가 있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사랑은 정말 30개월이면 끝나버릴까. 산화반응에는 폭발처럼 격렬하면서 몇 초만에 끝나는 반응이 있는 반면 ‘녹스는 현상’처럼 수백년간 서서히 진행되는 반응도 있다. 같은 반응도 반응조건에 따라 속도가 달라진다. 복잡다단한 마음을 가진 인간에게서 일어나는 화학반응의 기간을 단정하는 것은 무리다. 한문정 숙명여고 교사
  •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한진그룹 (2)-2세 경영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한진그룹 (2)-2세 경영

    한진 조씨가(家)의 2세들이 창업주 고 조중훈 회장의 그늘에서 벗어난 지 3년.4형제의 ‘홀로서기’가 정착된 가운데 이제는 선친이 다져놓은 반석에서 세계 일류 수송기업을 향해 달리고 있다. 지난 3년간 2세들의 경영 성적표는 ‘기업은 물려 받는 것이 아니라 가꾸어 나간다는 것’임을 증명해준다. 조양호 대한항공 회장도 “전문경영인으로서 자립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 것이 선친으로부터 물려받은 가장 큰 유산”이라고 말한다. ●조중훈 회장의 자식 교육 고 조 회장은 자식들에게 인성에서는 검소와 성실을, 일에서는 프로를 강조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자식들을 엄격하게 교육 시켰지만, 때론 애틋한 부정을 내비치기도 했다. 또 선진 지식을 습득하도록 조기 유학을 보내 자식들에게 전문가의 길을 걷도록 했다. “미국 유학 시절 때입니다. 부친은 틈틈이 자신의 육성이 담긴 테이프를 저에게 보내 격려를 했었습니다. 힘들 때마다 부친의 자식 사랑을 확인하면서 큰 힘을 얻은 거죠. 그리고 저도 1주일에 한번씩 아버지께 편지를 썼죠. 부친은 ‘훌륭한 경영자가 되기 이전에 훌륭한 인간이 되어라.’,‘현재의 조건에서 행복을 찾아라. 행복은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찾는 것이다.’를 가르치곤 했었습니다.”(조양호 회장) 조양호 회장과 부친과의 일화 한 토막. 조 회장이 유럽여행을 떠날 때 부친은 궁색하지 않도록 3000달러를 경비로 줬다. 조 회장이 여행을 끝내고 홍콩에서 부친을 만났을 때, 그는 부친이 건네준 돈의 절반인 1500달러을 돌려드렸다. 그는 돈을 절약하기 위해 기차를 타고 다니며 1∼2달러짜리 값싼 여인숙에서 잠을 잤다고 한다. 이후 부친은 조 회장의 검소한 생활과 관리 능력을 신뢰하게 되었단다. 말은 안 했지만 장남의 됨됨이와 장차 그룹의 후계자로서 자질을 테스트했던 것이다. ●4형제의 소그룹 독립경영 “4형제 모두 대한항공에서 경영수업을 시작했지만, 선친(고 조중훈 회장)께서는 자식들의 전공과 성격 등을 감안해 주요 계열사를 맡기신 것 같습니다. 항공은 그룹의 주력 업종이고, 전문 기술의 이해가 필요한 만큼 공대 출신인 제가 맡게 됐고, 둘째(조남호 한진중공업 회장)는 국내에서 대학을 졸업한 데다 성격도 걸걸해서 건설·중공업에 적합하다고 판단하셨죠. 또 국제 비즈니스 마인드가 필요한 해운쪽은 사교적인 셋째가 적성에 맞을 것으로 보셨고, 막내는 금융분야 공부를 죽 해왔으니 그룹의 금융을 책임지도록 하셨습니다. 선친은 이미 1990년대 초부터 이같은 밑그림을 그려놓고, 자식들을 관련 계열사에서 꾸준히 트레이닝을 시켰다는 생각이 듭니다.”조양호 대한항공 회장은 4형제가 각각 항공과 중공업, 해운, 금융을 맡게된 배경을 이렇게 설명했다. 한진그룹은 2002년 조중훈 회장의 별세 이후 4형제간 ‘독립 경영’을 정착시켰다. 그룹 후계구도를 일찌감치 ‘교통 정리’한 데다 확실한 계열 분리를 위해서는 독립경영이 선결돼야 한다는 4형제간의 합의에 따른 것이다. 그로부터 3년 후 한진 주요 계열사의 ‘성적표’는 독립경영의 성과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대한항공은 지난해 세계적인 항공사 독일 루프트한자의 19년 아성을 깨고, 화물수송 부문에서 1위를 차지했다. 한진중공업은 국내 조선업체들이 적자에 허덕이던 지난해 367억원의 흑자를 기록했으며, 한진해운은 지난해 사상 최대의 경영성과를 올렸다. 메리츠증권은 동양화재의 금융지주회사 전환을 통해 제2의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한진은 올해 창립 60돌을 맞아 계열사간 지분 정리를 마무리짓고, 확실한 ‘홀로서기’에 나설 전망이다. 한진중공업은 사실상 그룹으로부터 계열 분리가 마무리됐으며, 금융(동양화재)은 지난 3월 계열 분리를 끝냈다. 4형제의 독립 경영이 자리잡으면서 계열사간 의존 관계도 시나브로 엷어지고 있다. 대한항공과 한진해운은 주보험 거래처를 조정호 회장이 수장인 동양화재에서 다른 대형 보험사로 옮겼으며, 조남호 한진중공업 회장이 이끄는 한일레저는 한일 컨트리클럽내에 있던 대한항공 광고판을 철수시켰다. 또 금융계열사인 한불종합금융은 사무실을 서울 중구 해운센터에서 인근 파이낸스센터로 옮겼다. ●항공 전문가 조양호 회장 “회장님의 ‘러브레터’ 받았습니까.”,“이번주에는 두번이나 받았습니다.”대한항공 임원 사이에 오가는 아침 대화 가운데 하나다. 한 임원의 설명이다.“조 회장께서 해외 출장이 잦다 보니 업무를 주로 온라인으로 처리하는데, 좀 부족하거나 따로 지시할 내용이 있으면 담당 임원에게 이메일을 보내요. 임원들은 이를 회장님의 ‘러브레터’라고 부릅니다. 조 회장께서 워낙 전문가이다 보니 내용이 아플 때가 많죠.”이어 “모언론사 기자가 국내 그룹 회장들의 인터넷 실력을 확인하기 위해 늦은 밤에 질문서를 보낸 적이 있었습니다. 조 회장은 본인 메일을 확인한 뒤,‘이런 질문은 홍보실에 문의하십시오.’라고 메시지를 보낸 모양이에요. 그 기자가 회장들로부터 되받은 유일한 메일이었고,30분만에 답장이 왔다고 하더라고요.” 조양호(56) 대한항공 회장은 늦은 밤에도 노트북을 열어 회사 현황을 파악하고, 결재도 한다. 의문 나는 사항은 담당 임원에게 이메일을 보내거나, 전화로 질문을 한다. 직원들도 이제는 회장이 밤중에 결재한 서류를 보아도 더 이상 놀라지 않는다. 조 회장은 국제 항공업계에서 알아주는 거물급 인사다.2000년 출범한 세계적 항공동맹체 ‘스카이팀’ 결성 과정에서 잘 드러난다. 그가 미국 델타항공의 레오뮬린 회장과 의기 투합해 결성키로 한 ‘스카이팀’은 당시 참여항공사 문제로 난관에 부딪쳤다. 조 회장은 평소 친분이 두터운 에어프랑스와 알리탈리아의 최고경영자(CEO)를 집요하게 설득, 결국 ‘스카이팀’에 참여토록 했다. 그가 일궈놓은 스카이팀은 이제 국제 항공동맹체의 핵심으로 자리잡았다. 그는 또 30년간 대한한공에서 잔뼈가 굵은 항공 전문경영인이다. 영업·정비·전산·자재·인사·총무 등 항공사 경영에 필수적인 분야를 두루 섭렵했다. 그의 설명은 이렇다.“전문경영인에게 권한과 책임을 부여하되, 경영의 잘잘못을 지적하는 경영인이 되어야 합니다. 특히 항공사 경영은 제조업과 달라 전문적인 경영 능력없이 권위만을 앞세워 경영권을 행사할 수 없는 특수한 업종입니다. 저는 조종사들과 전문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경비행기를 직접 조종할 수 있는 훈련도 받았습니다.” 조 회장이 2003년 그룹 회장에 취임하면서 임직원에게 던진 첫 일성은 ‘세계 최고의 종합 물류기업’이었다. 이를 위해 2010년까지 항공 여객운송 세계 10위, 항공 화물운송 세계 1위, 해상운송 세계 3위, 국내 육운 1위라는 목표를 제시했다. 그는 인하대 공대를 거쳐 미국 남가주대 경영대학원 경영학 석사, 인하대 경영학 박사 출신이다. ●선 굵은 조남호 회장 조남호(54) 한진중공업 회장은 4형제 가운데 가장 선이 굵은 경영스타일을 보여준다. 직원에게 많은 권한을 위임하지만 그에 따른 책임도 철저히 따진다. 경영진이 일일히 챙기다 보면 실무 책임자의 활동 폭이 좁아지고, 책임감있는 결정을 내리기가 쉽지 않다는 판단에서다. 1995년 인천 영종도의 남측방조제 건설 에피소드는 그의 스타일을 엿볼 수 있다. 한진은 당시 최대의 국책사업이었던 인천국제공항 공사에 남측방조제를 맡았다. 서해안은 조수간만의 차가 크고, 유속이 빨라 물막이공사 진행이 지지부진했다. 급히 대안을 찾아야 할 상황이었다. 또 북측방조제 공사는 경험많은 국내 굴지의 건설사가 맡은 터라 서로 자존심을 걸고 공기단축에 매달렸다. 이 때 조 회장(당시 부회장)은 현장 책임자를 직접 방문,“현장을 말아 먹든 말든 모든 권한은 당신에게 있다. 당신을 믿으니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꼭 해내리라 믿는다.”며 전권을 위임했다. 그 결과 여러 개의 바위로 5t이상의 돌망태를 만들어 쌓아나가는 획기적인 아이디어로 공사를 조속히 끝냈다. 더구나 경쟁사의 북측방조제 완공보다 간발의 차이로 일찍 끝내 업계에 화제가 되기도 했다. 준공식 날 헬기를 타고 현장에 도착한 조 부회장은 현장 책임자와 만나자마자 뜨거운 포옹을 하며, 눈시울을 붉혔다고 한다. 조 회장은 국내에서 경복고와 고려대 경영학과를 졸업했지만 해외 근무경험은 풍부하다. 선친에게도 필요하면 바른 말을 했고, 부하 직원을 포용하는 스타일이다. 조 회장은 1971년 입사, 네덜란드와 중동, 동남아 등에서 근무하며 해외 건설사업의 개척자 역할을 담당했다. ●‘국제통’ 조수호 회장 조수호(51) 회장은 해운업계의 ‘국제통’으로 통한다.1991년 우리나라가 국제해사기구(IMO)의 상임이사국 가입을 위해 발벗고 나설 때, 정부가 그를 로비스트(?)로 낙점할 정도였다.1년 중 절반 이상을 해외에서 보내며, 세계 곳곳에 지인들을 심어 놓은 조 회장이 적격 인물로 판단됐기 때문이다. 조 회장은 각국 대표를 일일이 찾아 다니며 협력을 요청, 결국 이사국 선임을 이뤄냈으며,93년에는 IMO이사국 연임에 공헌하기도 했다. 그는 딸만 둘이다. 딸들을 위해 주방에서 요리할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대놓고 말한다. 그래서일까. 조 회장은 해운업계의 ‘페미니스트’로 불린다. 여성은 배에 태우지 않는다는 해운업계의 금기를 깨고, 한진해운은 1995년 국내 최초로 12명의 여성 해기사(항해사, 기관사)를 선발했다. 또 1997년에는 여성주재원을 파견했으며,2000년에는 최초의 여성 일등항해사를 배출했다. 특히 대졸 신입사원 가운데 여성 비율이 절반에 육박한다. 조 회장은 미국 남가주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뒤 1979년 대한항공에 입사했다.85년 한진해운 상무를 시작으로 10년만인 94년 사장으로 취임했으며,2003년 7월 회장직에 올랐다. 그는 20년간 해운업 ‘한 우물’만 판 전문경영인이다. 한진해운은 컨테이너선과 LNG선 등 150여척의 선박과 전세계 53개의 항로를 운영, 연간 1억t 이상의 화물을 수송하는 국내 최대의 선사다. 지난해 매출액 6조 2000억원, 순이익 6457억원을 기록했다. ●금융그룹 시동 건 조정호 회장 98년 한진투자증권(현 메리츠증권)의 재무구조는 최악이었다.900억원의 적자를 기록했으며, 자기자본은 411억원으로 퇴출 위기에 몰렸다. 이를 반전시킨 주인공이 조정호(47) 메리츠증권 회장이다. 당시 조 회장은 푸르덴셜증권 자회사인 PAMA(푸르덴셜에셋매니즈먼트아시아)로부터 510억원의 외자 유치에 성공한 뒤, 강력한 리더십으로 이듬해에 순이익 753억원, 자기자본 2156억원으로 불려놓았다. 외자 유치에는 평소 친분이 있었던 PAMA 코리아 대표인 김한 사장의 도움이 컸다. 이 인연으로 김 사장은 2003년 메리츠증권 부회장으로 스카우트된다. 김 부회장은 “메리츠증권과 PAMA를 결혼시킨 중매쟁이로서 맡은 역할을 다하기 위해 메리츠증권에 오게 됐다.”고 말했다. 조 회장은 나서기를 꺼려한다. 그러나 발동이 걸리면 끝장을 보는 스타일. 지난해 ‘우수영업직원 격려행사’에 참석했던 조 회장은 직원들에게 직접 만든 ‘드라큐라주(포도주 폭탄주)’를 돌리며 분위기를 화기애애하게 이끌었다. 또 무대에 나가 자신의 18번곡을 멋지게 부르기도 했다. 조 회장은 최근 PAMA의 메리츠증권 지분 인수를 진두지휘하며,‘금융그룹’을 향한 시동을 걸고 있다. 지분 인수에 성공하면 동양화재를 정점으로 메리츠증권과 기존 한불종합금융을 아우르는 자산규모 3조원대의 중견 금융그룹을 이끌게 된다. 조 회장은 남가주대에서 경제학을 전공했으며, 스위스 IMD 경영학 석사 출신이다. 영어와 불어에 능통하다. ●조씨가 3세는 ‘공부중’ 조씨가 3세들은 이제 결혼 적령기에 접어든 이들이 많다. 유독 중매 결혼이 많았던 조씨가에서 3세 결혼은 어떻게 될까. 조양호 대한항공 회장 얘기다. “부모가 하라고 해서 요즘 젊은 애들이 그대로 따릅니까. 중매든, 연애든 사람만 좋으면 저는 반대할 생각 없습니다. 시대도 옛날하고 많이 달라지지 않았습니까.” 조 회장과 이명희(56)씨는 장녀 현아(31)씨와 장남 원태(29)씨, 차녀 현민(22)씨 등 1남2녀를 두고 있다. 현아씨는 99년 미국 코넬대학에서 호텔경영학과를 졸업한 뒤 현재 대한항공의 호텔기판사업본부 기내판매팀장을 맡고 있다. 활달한 성격에 국제적 감각이 뛰어나며, 항공업무 전반에 대해 해박하다는 평이다. 원태씨는 대한항공 경영전략본부 부팀장(차장)으로 일하다가 지난달 미국 남가주대 MBA(경영학 석사)를 밟기 위해 출국했다. 본격적인 경영수업에 앞서 능력을 더 키우는 것이 낫겠다는 조 회장의 판단에서다. 조 회장은 “능력과 관심이 있다면 모를까, 자식이라는 이유로 경영에 참여시키지는 않겠다.”면서 “전문가적인 자질을 지녀야 한다.”고 밝혔다. 인하대 경영학과 출신인 조 차장은 합리적 사고에 일에 대한 책임감이 강하다. 막내 현민씨는 미국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다. 형제 가운데 유일하게 연애 결혼한 조남호 한진중공업 회장과 김영혜(54)씨는 1남1녀를 두고 있다. 장남 원국(29)씨와 장녀 민희(25)씨는 현재 미국 유학 중이다. 조수호 한진해운 회장의 2세들은 현재 일본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다. 조 회장의 부인인 최은영(43)씨가 롯데가 출신으로 일본에 적지 않은 일가 친척이 있기 때문이다. 장녀 유경(19)씨와 차녀 유홍(17)씨 등이 있다. 조정호 메리츠증권 회장과 구명진(41)씨는 1남2녀를 두고 있다. 장녀 효재(16)양은 국내에서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으며, 원기(13)군은 미국으로 조기 유학을 떠났다. 막내 효리(4)양이 있다. ●한진그룹의 대표 CEO 이종희(63) 대한항공 총괄 사장은 전형적인 외유내강형 CEO다. 경상도 사투리가 무뚝뚝하기보다 사근사근할 정도다. 그러나 78년 항공사에서 가장 바쁜 자리인 영업스케줄 과장 시절에는 5년간 단 하루도 쉬지 않고, 일을 할 정도로 독종 기질이 다분하다. 이 사장은 대한항공 공채 1기 출신으로 정비·자재·기획·영업 등을 두루 거쳤다. 겉보기에는 소탈한 전문경영인으로 보이지만 업무만큼은 빈틈이 없다는 평이다. 매달 책 3권 이상을 읽을 정도로 독서파이기도 하다. 대구 출신으로 대구상고와 단국대 경영학과, 연세대 경영대학원을 나왔다. 김정웅(63) 한진중공업 건설부문 사장은 실무형 리더로 1993년부터 국가 최대의 국책사업인 인천국제공항 건설 현장소장과 총괄본부장을 맡아 성공적으로 공사를 마쳤다. 인하대 토목과를 졸업했다. 홍순익(59) 한진중공업 조선부문 사장은 국내 조선 1번지에서 출발한 한진중공업을 세계 조선기술 센터로 발전시켜 나갈 수 있는 적임자라는 평이다. 홍 사장은 서울고를 거쳐 서울대 조선공학과를 나왔다.70년 대한조선공사(현 한진중공업)에 입사한 뒤, 외국계 회사에서 수석 엔지니어와 동종 대형업체의 조선소장, 미국선급협회(ABS) 부사장을 역임했으며,2001년 다시 조선 현장에 복귀한 정통 조선맨이다. 박정원(60) 한진해운 사장의 집무실 문은 언제나 열려 있다. 직원들 중 누구라도 할 이야기가 있으면 언제든 올라오라는 뜻에서다. 그는 평사원 출신 CEO로서 포용력과 리더십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직원들의 생각을 직접 듣기 위해 평사원 및 특정 부서와 호프타임을 자주 갖는다. 서울 출신으로 중동고와 한양대 화학공학과를 졸업했다. 김한(51) 메리츠증권 부회장은 글로벌 마인드와 감각을 갖춘 CEO다. 서울대와 미국 예일대 MBA 출신이다. golders@seoul.co.kr ■ 조씨 부자의 ‘사진 사랑’ 항공사의 수장으로서 숱한 해외 여행 때문일까. 고 조중훈 회장과 조양호 대한항공 회장의 취미는 똑같이 사진 촬영이다. 솜씨도 아마추어 수준을 넘어선 프로급이다. 일만큼이나 취미도 극성스러운 것이 부자간 닮은 꼴이다. 고 조 전 회장은 공식 업무에서 벗어나면 카메라를 메고 낯선 땅 이곳저곳을 두루 돌아다니며, 이국의 풍물과 사람사는 모습 등을 카메라에 담았다고 한다. 그는 그렇게 찍은 사진들을 1985년 ‘이집트 고대문화 사진 전시회’에 내놓았다. 또 그의 사진 작품이 수만 점에 달해 한때는 개인 사진전을 준비하기도 했다. 고 조 회장은 사진 취미에 대해 이렇게 밝힌 적이 있다.“유별난 호기심에서 비롯된 것도 있지만 자주 해외에 나가는 사업 특성과도 무관치 않습니다. 여기에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남은 그 많은 감동과 경이를 많은 분들과 나누고 싶은 마음도 있었습니다.” 장남인 조 회장의 사진 실력도 이미 재계에서 유명하다. 그는 해외 출장에서 찍은 작품으로 달력을 제작,4년째 지인들에게 선물로 주고 있다. 취미 활동을 비즈니스로도 활용하는 조 회장이 처음 사진을 찍게 된 계기는 중학교 때 부친으로부터 카메라를 선물로 받으면서다. 조 회장은 부친을 따라 여행을 자주 다녔는데, 부친이 항상 카메라를 갖고 다니며 사진 촬영을 하는 것을 보면서 사진에 대한 꿈을 키웠다고 한다. 그는 지금도 해외 출장 때면 디지털카메라와 캠코더를 분신처럼 꼭 챙긴다. 그리고 노트북에 작품을 담아 놓은 뒤 기념으로 촬영한 사진들을 지인들에게 직접 메일로 보내준다. 그가 사진 촬영에 이렇게 빠지는 데는 자신이 원하는 모습을 의지대로 잘 표현할 수 있고, 간직할 수 있다는 점과 기계는 거짓말을 하지 않고, 넓은 세상을 작은 렌즈에 담아 낸다는 점을 꼽았다. 그도 부친만큼이나 취미에 열성적이다. 평소 국내외 사진 전문잡지를 보면서 마음에 드는 것은 스크랩을 해뒀다가, 작품 활동에 참고한다. 또 사진 전문가와 만날 기회가 있으면 미진한 부분을 곧잘 묻기도 한다. 바쁜 해외 출장 중에도 차량으로 이동하다 차창 밖의 멋진 풍광이 눈에 들어오면 그냥 지나치지 않고, 차를 세워 촬영을 할 정도다. 조 회장은 “해외에 예정된 행사보다 하루나 이틀 정도 일찍 출발해 사진을 찍기 위해 도시 주변을 돌아다닌다.”면서 “사진은 잠시 잊었던 삶의 소중한 순간과 기억을 되살려주는 신비한 힘이 있다.”고 말했다. golders@seoul.co.kr ■ 대한항공의 ‘화물 수송사’ “국제항공운송협회(IATA)로부터 어제 연락이 왔는데, 대한항공이 지난해 항공화물 수송 부문에서 세계 1위를 차지했다고 해요. 이번주에 공식 발표가 있을 것으로 보이는데…. 동북아 물류중심기지 건설에 대한항공이 일조를 했다는 점에서 뿌듯합니다.” 지난달 29일 서울 서소문 KAL빌딩에서 만난 조양호 대한항공 회장은 상기된 표정으로 이같이 밝혔다. 당시에는 아직 공식 발표된 내용이 아니라서 그런지,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지만 대한항공 창사 36년만에 세계 항공사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다는 자부심은 도드라져 보였다. 그러나 대한항공이 세계 항공화물 수송 분야에서 톱이 되기까지 우여곡절과 애환도 적지 않았다. 대한항공이 화물사업을 시작한 것은 민영화 2년 후인 1971년 4월. 서울∼일본 도쿄∼미국 LA를 잇는 태평양 노선에 화물기를 처음으로 취항하게 된 것. 한·미 항공협정을 개정할 정도로 어렵게 노선을 취득했지만 막상 실어나를 화물이 없는 상황이 터졌다. 시도도 못하고 주저앉을 수 없다는 심정에서 당시 대미 수출품의 대부분이 가발인 점을 착안, 직원들에게 가발 수출업체를 찾아 나서라는 특명을 내렸다. 그러나 가발업체 대부분이 소규모 중소기업으로 찾는 것조차 힘들었다. 다행히 수출조합을 방문해 주소를 얻고, 복덕방에서 위치를 알아냈지만 또 다른 걸림돌이 있었다. 이제 막 출발한 대한항공에 대한 불신이 적지 않았던 것. 결국 애국심에 호소하며 설득전까지 치러가며 겨우 승낙을 받았다. 또 당시 해외 비즈니스맨들이 주로 이용하던 조선호텔 프런트를 찾아 숙박부를 뒤져가며, 접촉에 나서기도 했다. 이런 고생끝에 대한항공의 첫 화물기는 휴항없이 태평양을 건너게 됐다. 대한항공의 항공화물 변천사는 우리나라의 산업 발달사와 맥을 같이 한다.1970년대 초반에는 가발과 스웨터 등이 화물의 주종을 이뤘으며,70년대 중반부터 80년대에는 모피류와 전자제품,1990년대에는 전자제품과 의류 등이 시장을 주도했다. 최근에는 반도체와 휴대전화,LCD 등 고가의 IT제품이 주종을 이루고 있으며, 휴대전화만을 위한 전세기가 인도에 운항한 적도 있다. 대한항공은 또 별난 특수화물을 수송한 경험도 많다.1983년 11월에는 B747화물기로 서울대공원에 수용될 동물 418마리(54t)를 미국 댈러스에서 서울까지 수송,‘현대판 노아의 방주’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또 핵연료와 탱크, 헬리콥터 등 다른 항공사들이 좀처럼 수송할 수 없는 특수화물을 실어나른 경험도 쌓았다.94년에는 89마리의 미국산 말을 제주로 수송한 것을 시작으로 매년 경주마들을 실어 나르고 있으며, 무역전시장(COEX)내에 개장된 아쿠아리움(대형수족관)에 전시될 상어 35마리 등 희귀 어류들을 호주로부터 운송한 적도 있다. 또 운송이 까다롭기로 유명한 악어 72마리를 성공적으로 수송하기도 했다. golders@seoul.co.kr ●특별취재반 산업부 홍성추 부장 (부국장급·반장) 박건승·정기홍·류찬희·김성곤차장 안미현·주현진·류길상·김경두기자
  • ‘국내 국제고 1호’ 부산 국제고 르포

    ‘국내 국제고 1호’ 부산 국제고 르포

    오는 2008년 서울 종로에서 문을 열 공립 서울국제고등학교에 학부모들이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서울의 첫 국제고로 특목고보다 한 차원 높은 외국어 교육을 할 것으로 기대되기 때문이다. 국제·통상 분야의 인재를 키울 서울국제고의 설립 모델은 지난 98년 문을 연 부산국제고등학교다. 서울시교육청은 국내 첫 국제고인 부산국제고의 교과과정과 운영을 참고, 서울의 실정에 맞는 커리큘럼을 마련해 운영할 계획이다.‘국내 국제고 1호’인 부산국제고의 수업 방법과 교육 내용을 살펴본다. ●국제 계열 전문 교과목 학생들을 국제인으로 키우기 위해 ‘국제’를 특화시킨 교과목. 외고에는 없다. 국제정치와 국제경제, 국제법, 국제문제, 비교문화와 올바른 국제적 감각을 갖추기 위해 한국의 전통문화와 현대사회 등 한국 관련 수업도 일부 포함된다. 예·체능 실습 수업에는 태권도와 판소리, 태껸 등을 배운다. 교재는 대학 교재나 시사잡지, 논문 등을 활용한다. ●영어인증제 학년마다 일정 기준 이상의 토익(TOEIC) 점수를 따야 한다. 기준은 1·2·3학년 각 500점,600점,700점. 매년 두 차례 정기적으로 시험을 치르지만 기준을 넘지 못하면 매월 치러야 한다. 점수는 수행평가에 반영된다. ●교내 영어말하기대회 매년 5월 초 전교생을 대상으로 실시한다. 예선을 거친 본선에서는 자신이 발표한 내용에 대해 원어민 교사와 질문과 답변을 하는 방식으로 실력을 평가한다. 국내파와 해외파를 나눠 시상한다. ●EOZ(English Only Zone) 영어만 쓸 수 있는 학교 안 공간. 점심시간과 수업이 없는 수요일 오후 시간에 자유롭게 드나들며 영어를 사용한다. 원어민 교사나 영어 교사들이 항상 함께 참여한다. ●국제문화의 날 격주로 수요일에 국제 경험이 많은 외부 인사를 초청해 강연을 듣는다. 주제는 국제 사회와 자신의 삶. 학생들은 강연을 듣고 소감문을 쓴다. ●CCAP(Cross Cultural Awareness Program) 이른바 세계 문화 체험 프로그램. 매년 한 차례 부산 연지동 미군부대 내 국제학교 학생들과 10일 동안 공동수업을 받는다. 유네스코의 문화 자원활동가들이 학기마다 서너차례 학교를 찾아 각국의 문화를 소개한다. ●세계체험관(Gate To The World) 세계 문화를 경험하는 곳이다. 중국의 시안(西安) 외국어학교와 미국 실러 국제대, 일본 와세다대, 터키 오잘투르트 재단 등 자매 결연을 맺은 세계 30여곳 학생들과 화상 채팅을 통해 문화를 교류한다. 세계 각국의 위성방송을 시청할 수 있는 시설도 갖춰져 있다. ●자매결연 학교와 문화교류 매년 한 차례 중국 시안 외국어학교와 상호 방문행사를 열고 있다. 두 학교 학생들이 사물놀이와 태권도, 경극 등 문화를 나누고 이메일이나 화상채팅으로 교류를 이어간다. 부산 박지윤기자 jypark@seoul.co.kr 지난 21일 오전 부산 당감동 부산국제고등학교 멀티미디어실. 학생 30여명이 온라인 채팅에 열중하고 있었다. 한창 수업을 받아야 할 시간에 뚱딴지같이 채팅을 하느냐고 할 수 있겠지만 이는 엄연한 수업이다. 이른바 ‘영어작문 멀티미디어 수업’.2학년에서 이 수업을 신청한 30여명이 옹기종기 컴퓨터 앞에 앉아 열심히 자판을 두드렸다. 컴퓨터 화면에는 학생들의 분주한 손놀림만큼이나 빠르게 영어 문장들이 채워졌다. 이날 주제는 ‘한국인의 노령화’다. 학생들은 7개조로 나뉘어 이정주 교사의 커뮤니티 채팅방에 올라온 주제를 놓고 온라인 영어토론을 벌였다. 이날 수업의 과제는 ‘국가경쟁력을 약화시킬 수 있는 노령화에 대한 해결 방안을 찾으라.’는 것이다. ●7개 지정과목은 필수·다양한 선택 과목 이지은(17)양은 “중장년층은 육체적 노동을 하기에는 힘이 부치기 때문에 정부가 이들을 교육시켜 정보업종 등의 인력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반면 이수지양은 “그렇게 되면 젊은이의 실업률이 증가할 것”이라며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김사무엘양은 “일자리가 줄어든 만큼 젊은이의 수도 줄었다.”며 또 다른 진단을 내놓았다. 한 시간 동안의 난상토론. 결론은 나지 않았지만 다양한 생각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수업이 공부에 큰 도움이 된다는 김지현양은 “머릿속 생각을 영어 문장으로 표현하면 영어 실력이 향상됨은 물론 사고의 깊이도 넓어지는 것 같다.”고 했다. 이날 오후 2학년 4반에서는 국제정치 수업이 한창이었다. 일반 고등학교에서는 볼 수 없는 전문 교과목 수업이다. 이 학교에는 국제외교, 국제정치, 국제경제, 국제법, 비교문화, 지역이해, 한국의 전통문화 등 7개의 지정과목을 비롯해 다양한 선택과목이 개설돼 있다. 학생들은 7개 지정과목은 반드시 배워야 하고, 선택과목은 자유롭게 골라 배울 수 있다. 이날 주제는 최근 논란이 일고 있는 ‘프랑스와 네덜란드의 유럽연합(EU) 통합헌법 부결’ 문제다. 백영선 교사는 신문과 잡지, 관련 서적 등 준비해 온 자료를 보여주며 유럽연합 통합에 대한 경과와 진행 상황을 설명했다. 권주애(17)양이 부결 이유에 대해 “EU 가입국들이 헝가리와 폴란드 등 상대적으로 경제력이 약한 국가의 값싼 인력이 프랑스 등 선진국에 유입돼 일자리가 줄고 임금이 하락하기 때문”이라며 나름대로의 분석을 내놓자 이에 따른 학생들의 질문이 이어졌다. ●원어민 영어수업은 교사 대신 학생이 진행 2학년 1반 원어민 영어 수업에서는 교사 대신 학생들이 직접 영어로 수업을 진행했다. 이로운(17)양이 맡은 이날의 발표 주제는 ‘다이어트 팔 운동’. 이양은 그림까지 그려가며 “아령 등으로 팔운동을 하면 이두박근이 커지고 상체를 45도 숙여 팔을 앞뒤로 굽혔다 펴면 삼두박근의 모양이 잘 잡힌다.”면서 “이는 팔의 살을 빼는 데도 효과적”이라고 설명했다. 다음 발표자인 이은경(17)양은 손금을 보는 법에 대해 영어로 강의했다. 이 곳에서는 학생은 물론 교사들도 공부를 한다. 영어 교사의 경우 매주 두 차례, 모두 4시간 동안 원어민 강사와 토론수업을 한다. 이날 오후에도 원어민 강사인 제프 립시와 수업이 없는 교사 4명이 빈 교실에 모여 ‘김일병 총기난사 사건의 사회적 원인’에 대한 토론을 벌였다. 교과과정 부장인 최준권 교사는 교사들의 토론수업에 대해 “교사 스스로 토론 문화를 익혀 수업에 적용하고, 교사의 비판력과 사고력을 높이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일부 원어민 교사 심층분석력 부족 아쉬움 학생과 교사 모두 학교운영에 만족하고 있지만 더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영어를 맡은 주세혁 교사는 “원어민 교사들이 회화는 잘 가르치지만 특정 주제에 대해 깊이있게 다루는 능력은 부족하다.”면서 “학생들은 고학년으로 올라갈수록 깊이 있는 내용을 원어로 배우기를 바라지만 충족시켜주지 못하고 있다.”면서 “유학반의 미국 대학수학능력시험(SAT) 수업의 경우 원어민 교사들의 수업 능력이 일부 떨어지는 것도 해결해야 할 과제”라고 지적했다.2학년의 한 학생은 “원어민 교사 대부분이 유학반 수업에 매달리고 있어 일반 학생들이 원어민 교사를 만날 기회가 적다.”고 아쉬워했다. 글 부산 박지윤기자 jypark@seoul.co.kr ● 외국 대학 올해 11명 합격 국내 유명대학 대거 진학 부산국제고 졸업생들은 국내는 물론 해외 대학에 활발하게 진학하고 있다. 올해 초 졸업생 가운데 11명은 미국과 중국, 일본 유명 대학에 합격했다. 이재원(19)군은 시카고대·워싱턴대 등 7개 대학에서, 김동은(19)양은 브라운대·코넬대 등 4개 대학에서 동시에 입학허가를 받았다. 왕웅규(19)군도 일본 도쿄대·와세다대·교토대에 동시 합격했다. 국내 대학에는 재학생과 재수생을 합쳐 서울대 8명, 고려대 26명, 연세대 25명, 서강대에 10명, 이화여대에 11명 등 모두 125명이 합격했다. 분야별로는 법학계열 32명, 상경계열에 37명, 사회계열 30명, 어문계열 11명 등이다. 최근 인기가 높은 교육 계열에는 교대 21명을 포함해 모두 36명이 합격했다. 의학·한의학 계열에도 20명이 진학했다. 부산 박지윤기자 jypark@seoul.co.kr ■ 전현경 교장이 밝힌 학교 특징 ‘국제고 1호’인 부산국제고 정현경(62) 교장은 “사립학교인 특목고와는 달리 국제고는 공립이기 때문에 학비가 싸 모든 학생들에게 기회가 열려 있다.”고 말했다. 가정형편 때문에 진학을 포기하는 일은 부산 국제고에서는 없다는 것이다. 정 교장은 “국제 수준에 뒤처지지 않는 교육을 통해 외국 문화와 생활습관을 자연스럽게 익혀 바로 해외에 진출하더라도 잘 적응할 수 있는 국제적 인재를 길러내는 것이 목표”라면서 “우수한 교육시설과 교사진에 부산시의 전폭적인 지원까지 받고 있다.”고 말했다. 정 교장은 부산국제고의 특징을 “외국어 교육, 국제 계열 전공교육, 해외 교류 등 세 가지”라고 했다. 해외 귀국자 전형을 통해 토플 만점자, 해외에서 오래 머물렀던 학생 등을 뽑기 때문에 학생들의 언어와 세계문화에 대한 이해도가 높다고 소개했다. 외국 학생들과 함께 공부하는 점도 매력으로 현재 러시아 학생 5명, 일본 학생 1명이 재학 중이라고 정 교장은 밝혔다. 국제화에 열중하다가 학생들이 우리 문화에 소홀할 수 있다는 우려에 대해서는 “우리 것과 다른 나라의 것을 균형 있게 배울 수 있도록 다양한 우리 문화를 익히는 프로그램을 별도로 마련해 운영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부산 박지윤기자 jypark@seoul.co.kr
  •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 (69)활어·선어·싱싱회, 진실과 오류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 (69)활어·선어·싱싱회, 진실과 오류

    먹을거리만큼 살아가는 데 소중한 게 또 있을까. 그런데 열심히 먹기만 하지 밥상의 안전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이 없는 게 우리의 세태다. 회(膾)만 해도 먹는 데는 열심이지만 그에 상응한 정확한 인식이 부족해 ‘비싼 값 지불하고 값싸게 먹기’ 일쑤다. 우리들의 회 문화에 관한 상식을 점검할 필요성을 느낀 것은 이런 까닭에서다. 회가 이렇게 대중화된 건 단군 이래 처음이다. 바다나 강에서 회를 뜨기는 했어도 운반이나 저장문제 때문에 예전에는 제한적으로만 즐겼을 뿐이다. 물론 소 돼지 닭 같은 육식도 제한적 선택만 가능했다.1970∼1980년대가 동물성 단백질 섭취량이 엄청(?) 늘어난 시기였다면, 경제적 부가 일정하게 축적된 90년대부터는 해산물 소비가 급증한다. 이른바 웰빙 슬로건이 내걸리면서 건강식인 해산물이 보다 각광을 받게 된 것이다. 그런데 회에 관한 일반의 상식은 여전히 ‘바닥’이다. ●전치10주 중상 입은 생선 먹는 꼴 회의 문화적 우성은 역시 일본의 ‘사시미’다. 해양선진국 중에도 회를 사양하는 민족이 많은 반면, 일본은 오랜 역사와 전통을 기반으로 이를 정교하게 발달시켜 세계화에 성공하고 있다. 김치 없는 우리 식탁이 뭔가 빠진 듯하다면 횟감 없는 일본식탁도 쓸쓸한 풍경이리라. 일본인에게 회는 ‘라면’같이 일상적인 것이며, 이제 ‘사시미’와 ‘스시’는 만국공통어로 통용되고 있지 않은가. 서양인은 본디 회를 즐기지 않았다. 회 문화가 진출했다지만 아직도 제한적이다. 그러나 미국 동부의 코넬대학 같은 시골 대학촌에도 초밥집이 진출해 있으니 샌프란시스코 같은 해변은 두말 할 것도 없다. 그런데 유심히 보면 초밥집은 있는데 수조는 보이지 않는다. 중국 광저우 같은 유수의 해양도시를 가보아도 수조를 두고 횟감을 파는 음식점은 없다. 일본 시모노세키에 있는 최대 규모의 어시장을 누비고 다녀도 수조는 없다. 의문이 풀린다. 펄떡거리는 활어를 그 자리에서 회 쳐 먹는 사례는 전 세계적으로 드물다는 점이다. 회는 살아있는 활어와 일단 죽여서 숙성시킨 선어로 구별한다. 한국 사람들은 자기 눈으로 ‘확인 사살’해 그 자리에서 쳐낸 활어만을 굳게 신뢰한다. 그러나 먼 바닷가에서 시장이나 음식점으로 실려오면서 온갖 사투를 벌이고, 중간 유통업자를 거쳐 최종 소비처로 팔려가는 과정을 생각하면 우스갯소리로 전치 10주 정도의 뇌진탕에 골절상을 입은 소위 ‘중병 걸린 생선’을 먹게 되는 꼴이다. 바닷가에서 곧바로 옮겨온 물고기는 그대로 먹는 법이 아니다. 물고기도 스트레스를 받기 마련이므로 2∼3일쯤 지난 다음에 잡아야 제격인데, 사람들은 바로 도착한 놈이 좋다고 그저 믿어 버린다. 그래서 횟집에는 반드시 수조가 있어야 하지만,‘사시미의 나라’ 일본에도 살아있는 물고기만이 싱싱하다는 믿음은 없다. 회 문화는 일본에서 들여왔으면서도 이것만은 우리식을 포기하지 않는 것을 보면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일본인들은 ‘씹히는 맛’보다 미각 선호 한국인은 쫄깃한 횟감을 선호한다. 한마디로 ‘씹히는 맛’을 즐긴다. 그래서 갓 잡아 올린 놈을 즐긴다. 반면에 일본인들은 씹히는 맛보다 미각을 택한다. 생선회 전문가인 부경대 조영제 박사는 이를 양국의 식문화 차이로 설명한다. 우리는 넙치·우럭·농어 같이 육질이 단단하여 씹힘성 좋은 흰살 생선을, 일본은 방어·참치·전갱이 같이 육질은 연하지만 혀로 느끼는 맛이 좋은 붉은살 생선을 선호한다. 또 초밥과 횟감 비율이 8대2나 돼 ‘초밥을 먹기 위해 회를 먹는다.’는 말이 생길 만큼 초밥을 즐긴다. 반면에 우리는 2대8로 회 선호도가 높다. 따라서 초밥 즐기는 일본인이 활어보다 선어를 선택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선어는 갓 잡은 활어보다 씹힘성은 떨어지지만 잡은 뒤 10∼15시간이 지나면 육질부의 이노신산이 많아져 맛이 극대화된다. ●선어·활어 장점 두루 살린 싱싱회 그렇다면 선어와 활어의 장단점을 두루 취할 방도는 없을까. 그래서 등장한 것이 이른바 싱싱회. 싱싱회란 선어의 일종으로, 갓잡아서 위생적으로 손질한 뒤 냉동이 아닌 냉장 상태로 소비처에 공급하는 횟감을 뜻한다. 해양수산부 수산정책국 이인수 박사는 “해양수산부나 수협 등 전문가들의 노력에 비하면 세간의 인식이 전혀 바뀌지 않아 이런 시도가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싱싱회로 가야 하는 행로는 분명한데 인식의 문제이지요.” 눈 앞에서 퍼덕이는 놈만을 싱싱하다고 믿는 우리의 음식관을 일조일석에 바꿀 수 없어 엄청난 고비용을 치르는 중이다. 활어 운송비가 들고, 음식점에도 수조를 설치해야 하며, 물갈이 등 관리비용도 많이 든다. 당연히 유통 중의 폐사율도 높다. 또 내장이나 뼈, 머리 같은 부산물이 50%나 되니 불필요한 운반이 되고 말아 원가가 비쌀 수밖에 없는 활어문화에 단단히 발목이 잡혀 있는 셈이다. 횟집촌을 가다 보면 ‘마리당 9900원’ 식으로 적어 내건 가격표를 자주 보게 된다.500g 정도의 미숙어를 이렇게 파는데, 그걸 모르는 사람들은 이를 ‘싼 게 비지떡’인 줄도 모르고 선호한다. 성장한 1㎏ 이상 크기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양식장 출하 때도 500g짜리 미숙어는 비싸게 팔리는 반면 오래 키워 맛이 있는 놈은 싸구려로 팔리는 엉뚱한 문제가 발생한다. 사실,1㎏짜리를 시켜도 정량을 주는 경우는 거의 없다. 소비자만 ‘봉’이 되고 있으니 우리 수산물도 정량화·규격화 단계로 들어서야 하지 않을까. 우리나라 최대의 싱싱회 공장인 포항의 한국빙온을 찾았다. 횟집을 연상하면 안된다. 어엿한 공장이다.1일 5∼10t을 생산할 수 있는 설비를 갖추고 있다. 수조에서 건진 회는 즉살해 얼음물에 씻는다. 내장을 바르고, 탈피기로 껍질을 벗긴 뒤 다시 얼음물에 채운다. 살균한 타월로 말아서 탈수하고, 적절하게 다듬어 진공포장해 얼음을 재워 냉장 상태로 유통시킨다. 직원들은 위생복을 입고, 소독을 해가면서 공정에 임한다. 바닷가에서 갓 잡아 퍼덕거리는 횟감을 그대로 위생처리, 일사불란하게 유통시키는 시스템이다. 이곳 장석원 대표는 “위생적으로 처리되기 때문에 식품이 절대 안전하고, 싸게 공급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이런 방식으로 회를 먹을 경우 최고 30∼40%선에서 절반까지 가격을 낮출 수 있다. 술집 분위기인 횟집에 주부가 아이들을 데리고 가기 쑥스러운 경우도 많다. 저변 확산을 위해 가정에까지 회가 공급되려면 현재의 횟집이나 횟감 판매구조로는 어림없다. 아무리 싱싱하다 해도 직접 회를 뜰 수 있는 기술은 아무나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선어 공급은 소비자들에게 돌아가는 이점이 크다. 또 연간 한국인의 횟감 소비액이 6조∼7조원에 달한다고 볼 때 엄청난 이득이 창출될 것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여전히 눈앞에서 퍼덕거리는 횟감만을 좋아할까. ●자연산 선호는 반환경적 습속 한번 잘못 길들여진 문화는 쉽게 고쳐지지 않는다. 창해를 누비는 싱싱한 바닷고기에 관한 ‘상상의 공동체’가 우리의 뇌리에 흡사 꿈처럼 박혀있기 때문이다. 현실은 이렇다. 창해를 누비는 싱싱한 물고기는 거의 없다. 횟감의 90% 이상은 양식이다. 자연산은 잡히더라도 소량일 뿐더러 자연산을 마구잡이로 훑어내는 소형 기선저인망(일명 고테구리)은 어족보호 차원에서 금지시켜야 하기 때문에 자연산 선호 자체가 반환경적인 습속이기도 하다. 어차피 이제는 양식어류를 먹고 살아야 한다. 자원이 절대적으로 줄어든 탓도 있지만 한국인들의 횟감 선호도가 급등한 데다 늘어난 외식문화의 수요까지 감당하려면 자연산으로는 어림도 없다. 따라서 과학적·합리적으로 양식업을 확충해야 하며, 소비와 유통도 코페르니쿠스적으로 전환해야 할 시점에 와있다. ●바닷가 횟집의 엄청난 생태오염 혹 바닷가에 즐비한 횟집이 야기하는 엄청난 생태오염을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환경운동단체 어느 누구도 이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 민중이 먹고 사는 문제라는 단 한가지 이유로 횟집에서 배출하는 엄청난 부산물과 박테리아로 오염된 수조의 물, 쓰레기 분리수거 등에 대해 너무나 무관심하다. 더 이상 이런 바닷가 횟집들이 낭만의 대상이어서는 안된다. 전세계 어디에도 이만한 물량으로 수조가 즐비한 바닷가 풍경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문제가 한국이 회 문화의 세계적 선진국이라서 용인되는 것인가! 무를 당근으로 알고, 쑥갓을 상추로 알고 먹는 소비자는 없다. 그런데 ‘모둠회’라는, 내용물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회를 먹는 소비자들이 의외로 많다. 횟집 주인은 소비자에게 무슨 회인지를 분명히 설명해 줄 의무가 있다. 횟감의 생산자 실명제가 이뤄지지 않아 항생제에 찌든 값싼 중국산이 슬쩍 끼어든다. 어디에서 누가 잡았는지, 어느 양식장에서 누가 길렀는지도 모른 채 소비자들은 그저 먹고 값만 치른다. 지난 4월22일, 국회에서는 이영호 의원이 주도하고 바다포럼과 한국수산회 등이 주최한 ‘비브리오패혈증을 법정전염병에서 제외시키자.’는 요지의 입법공청회가 열렸다. 여름철만 되면 비브리오경계령이 발동되어 전국의 횟집들은 문을 닫는다. 비브리오는 노약자 등 신체가 약한 사람에게만 나타나는 식중독일 뿐 법정전염병으로 지정할 병증이 아닌데도 언론 등의 과장 보도 때문에 국민들이 ‘공포의 전염병’으로 잘못 알게 됐다는 것이다. 물론 익히지 않은 횟감을 불결한 곳에서 조리해 판다면, 비브리오패혈증 등의 병이 생길 것은 자명하다. 조리해 먹는 육고기와 달리 횟감은 말 그대로 ‘날것’이다. 열악한 음식점에서 비위생적으로 조리해 내다 보면 식품안전은 누구도 장담할 수 없게 된다. 더러운 그릇, 씻지 않은 도마, 병균이 들끓는 행주 등을 누가 다 감시하랴. 이제 원산지 표기가 분명하고, 정량을 지키고, 세무서에서 세수를 분명히 파악할 수 있고, 소비자는 위생적인 양질의 회를 눅은 가격에 먹고, 양어장은 안정적 판로를 확보하고, 비브리오 파동 같은 위험부담에서도 벗어나는 ‘윈윈 전략’을 선택해야 할 시점이다. 거제도에서 대형 양식장을 경영하면서 싱싱회를 맨 처음 시작해 일본으로 수출하고, 한때 도쿄 스즈키 수산시장의 최대판매량까지 올렸던 일운수산 김산세 회장의 지적을 아프게 들어야 한다.“회를 어디 배 채우려고 먹습니까? 맛으로 승부해야죠. 수산양식도 미래 전략산업으로 거듭나야 하고 활어만 선호하는 소비자도 이제는 생각을 고칠 때가 됐다고 봅니다.” 급격한 변화의 요구는 이제 우리의 식탁까지 당도해 있다.
  • “동남아 개혁실패는 화교 후손 때문”

    “동남아시아 민주주의와 개혁 시도가 실패한 것은 중산층 화인(華人·ethnic Chinese)들이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민족주의와 동남아연구의 세계적 석학 베네딕트 앤더슨(69) 박사가 한국을 방문했다. 사단법인 한국동남아연구소와 서강대 동아연구소 초청으로 내한한 앤더슨 박사는 26일 서강대 김대건관에서 동남아의 민주주의에 대해 강연했다. 이날 특강에서 박사는 1960∼70년대 동남아를 휩쓴 민주주의와 개혁 열풍이 사그라든 이유를 화인의 역할을 중심으로 분석했다.‘화인’은 19세기 동남아로 이주한 중국인 선조를 의미하는 화교(華橋)와 구분해 해당 국가에서 태어나 자란 후손을 가리킨다. 그는 동남아 각국의 화인들이 경제적 기반을 닦아 성공하며 사회 중산층으로 성장했지만 정치·사회적 개혁에는 참여하지 않은 점에 주목했다. 그는 교육의 예를 들어 “인도네시아의 경우 교육시설이 여전히 형편없는 것은 경제력 있는 화인들이 국내 교육시설을 개선하기보다 외국 유학을 보내는 방식을 선호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앤더슨 박사는 군부독재 정권 하에서는 화인들이 정치 엘리트들에게 뇌물을 주는 대가로 경제적인 이권을 챙겼다고 지적했다. 정치 엘리트 역시 화인들의 정치 참여를 배제하는 통치 방식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앤더슨 박사는 국내에선 ‘상상의 공동체:민족주의의 기원과 전파(윤형숙 옮김·나남·2002)’란 제목으로 번역·출간된 책으로 널리 알려졌다. 민족이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발전과 단일 언어의 사용을 통해서 만들어진 허구의 개념이라는 ‘상상의 공동체’ 개념은 학계뿐 아니라 문화계에서도 널리 쓰이고 있다. 1936년 아일랜드계 미국 이민자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앤더슨은 미국 코넬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하다가 3년 전 은퇴한 뒤 방콕과 미국을 오가며 동남아 자본가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다. 황장석기자 surono@seoul.co.kr
  • 美명문대 진학 3인이 말하는 공부법

    美명문대 진학 3인이 말하는 공부법

    하버드 대학에 입학하는 미국 고교생들의 SAT(Scholastic Aptitude Test) 평균 점수는 1500점대. 영어와 수학 점수를 합해 1600점 만점으로 계산하는 SAT는 미국 대학에 입학하려면 반드시 치러야 하는 시험이다. 미국 고교생들도 어려워하는 SAT시험에서 고득점을 올리고 명문대에 당당히 합격한 한국 고교 졸업생 3인을 만나 그들의 합격 비결은 무엇인지 들어봤다. 목표를 뚜렷하게 세워라. 자신의 적성과 흥미를 파악해라. 내가 좋아하는 것은 확실하게 즐겨라. 나만의 시각을 가져라. 자신을 표현하되 포장하지 마라. 미국 명문대학에 진학한 3인이 공통적으로 말하는 명문대 합격 비법이다. 힘든 유학 준비 과정을 이겨낼 수 있도록 스스로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NYU stern과정에 입학하는 김형석군은 오로지 농구가 좋아서 유학을 결심했다. 영어로 된 농구 잡지를 읽는 것은 공부가 아니라 취미생활이었다. 미국에 가서 스포츠 에이전시로 활약하겠다는 목표는 힘든 고교생활을 견디게 하는 힘이었다. 코넬대에 합격한 하현우군은 영어를 공부하면서 자신이 언어를 배우는 감각이 남들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원어민의 발음을 그대로 따라하는데 소질이 있다는 자신감을 갖고 즐겁게 영어를 공부했다. 예일대에 진학하는 전지혜양은 고3 생활에도 TV드라마를 즐겨봤다. 쉬는 시간에는 확실하게 스트레스를 풀어야 한다는 것이 전양의 생각이다. 김형석군도 매일 2∼3시간씩 농구를 즐겼다. 미국 대학들은 지원자의 SAT 점수뿐만 아니라 이 학생이 어떤 사람인지 꼼꼼하게 살펴보기 때문에 에세이를 통해 자신의 생각과 삶의 방법을 진솔하게 표현하는 것도 중요시한다. 하현우군은 고교 재학시절 한 여성 국회의원 사무실에서 인턴으로 근무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한국사회가 아직도 가부장적이고 여성의 사회진출이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내용을 에세이에 담았다. 미국의 인기 가수 조시 그로반의 히트곡을 직접 부른 CD도 제작해 원서와 함께 보냈다. 전지혜양은 중학교 재학시절 교회에서 주일학교 보조교사로 봉사하며 가르치는 기쁨이 무엇인지 알게 돼 교수가 될 것을 결심했다는 포부를 에세이에 밝혔다. 김형석군 역시 지금까지 살아온 삶과 미래의 삶을 주제로 A3용지 15페이지 분량으로 포트폴리오를 제작해 원서와 함께 제출했다. 이효연기자 belle@seoul.co.kr ●코넬대 합격 하현우군 미국 아이비리그 중 하나인 코넬대에 입학하는 하현우(19)군은 불굴의 의지와 성실함으로 자신과의 싸움을 이겨낸 ‘바른생활 청년’이다. 하군이 미국 대학 진학을 결심한 것은 고교 2학년 6월. 더 큰 세상에서 공부해보지 않겠느냐는 아버지의 권유 때문이었다. 하군은 명덕외고 동기생들보다 유학 준비를 늦게 시작했다는 부담감이 컸다. 학교 수업이 끝나면 독서실로 달려가 오후 6시부터 새벽 2시까지 공부했다. 하루에 영어단어 60개 이상을 암기한다는 목표를 세우고 공부량을 채우지 못하면 저녁을 굶었다. 여기서 물러나면 한국 대학도 미국 대학도 진학할 수 없다는 절박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하루 취침 시간은 5시간. 집에서는 4시간만 자고 나머지 1시간은 쉬는 시간, 점심 시간을 쪼개서 잤다. 하군은 유학을 준비하는 동안 체중이 무려 7㎏이나 빠졌다고 한다. SAT 시험을 앞두고는 학원에 다녔다. 과목별 시험 1∼2개월 전에 특강 형태로 수업을 들었다.SAT 시험에서 실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도록 시험에 적응하기 위해서였다. 한국 학생들에게 가장 부담이 적은 SATⅡ 수학시험을 2학년 말에 마쳤다.3학년 1월에는 SATⅠ을,5월에는 SATⅡ 화학을,10월에는 SATⅡ 쓰기(writing)를 마쳤다. 하군은 SATⅠ에서 1430점,SATⅡ 수학에서 750점, 화학은 760점, 쓰기(writing)는 660점을 받았다. 하군은 진실하게 쓴 에세이 두편이 합격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하고 있다. 고교 2학년 겨울, 사촌 누나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겪으며 느낀 바를 솔직하게 기록했다. 다발성경화증을 7년간 앓다가 시력을 잃은 누나에게 클래식 기타를 배워 바흐의 곡을 연주해주겠다고 약속했는데 결국 지키지 못했다. 하군은 지금 하지 않으면 평생 이룰 수 없는 일들이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내용을 에세이에 담았다. 하군은 또 다른 에세이에서도 자신의 평소 생각을 진솔하게 담아냈다. 한국전쟁을 예로 들어 한국인들은 이를 남한과 북한만의 전쟁으로 알고 있지만 더 넓은 시각에서 보면 열강들의 이데올로기 싸움에 휘말렸던 비극이었다고 기술했다. 대학 입학 후에는 역사와 사회현상을 거시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시각을 갖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하군은 “SAT 시험은 공부한 만큼 점수를 낼 수 있는 요령이 통하지 않는 시험”이라면서 “스스로와의 지독한 싸움을 이겨내겠다는 굳은 의지로 유학을 준비했다.”고 말했다. 하군은 대학에 진학하면 국제관계학을 전공할 예정이다. 이효연기자 belle@seoul.co.kr ●예일대 합격 전지혜양 낙천적인 성격과 매사에 긍정적인 자세로 고교 3년을 지낸 전지혜(19)양은 올해 예일대에 입학한다. 더 넓은 세상에서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을 마음 속에 간직하고 중·고교 시절을 보낸 전양에게 유학은 꿈만 같은 이야기였다. 성재중학교 재학 시절 내신성적이 상위 3∼5%였던 전양은 이화외고에 진학한 후 보통 학생들과 같이 수능 시험을 준비했다. 미국 대학에 진학해야겠다고 결심한 것은 2학년 말. 외고 입학과 동시에 유학 준비를 시작하는 다른 학생들에 비하면 늦은 결정이었다. 전양은 “부모님이 워낙 걱정을 많이 하셔서 망설였지만 늦었다고 생각하고 유학을 포기하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아서 결심했다.”고 말했다. 유학을 준비해 온 동기생들보다 훨씬 늦었지만 친구들과 자신의 위치를 비교하거나 결코 서두르지 않았다. 막상 SAT 공부를 시작하고 보니 눈앞이 깜깜했다. 영어권 국가 체류 경험도 없었고 영어로 쓰인 전문 서적을 이해할 정도로 실력을 끌어올려야 했기 때문이다. 시중에 나와있는 유명 SAT 관련 문제집을 구입해 단어부터 외웠다.1년간 공부한 영어 문제집을 차곡 쌓으면 1m가 넘을 정도의 분량이었다. 전양은 SATⅠ에 주력하면서 SATⅡ의 3과목을 3∼4개월 단위로 나누어 시험을 치른다는 계획을 세웠다. 한국 학생들에게 가장 수월하다는 SATⅡ의 수학을 먼저 2학년 말에 마쳤다.3학년 5월에는 화학을,10월에는 쓰기(writing)를 끝냈다. 정규 수업이 끝나면 학교 유학반에 합류해 밤 10시까지 공부했다. 유학 준비는 늦었지만 고교 내신 성적은 꾸준히 관리해왔기 때문에 1·2학년까지 내신 성적으로 학생을 선발하는 한국 대학 수시 1학기도 동시에 노렸다. 전양은 연세대 인문학부 수시 1학기 모집에도 합격했다. 전양은 SATⅠ에서 1470점,SATⅡ 수학에서 800점 만점을, 화학은 790점, 쓰기는 710점을 받아 예일대 수시 모집에 합격했다. 고3 여름방학 2주 동안 인도 뭄바이 지역의 농아학교에서 봉사활동을 했던 경험도 합격에 중요한 요인이었다. 전 양은 인도의 독특한 분위기에 매료됐지만 한편으론 한국에서 보았던 빈부 격차가 인도에서도 역시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고 느꼈다. 빈민과 부유층이 한 마을에서 살아가는 인도의 도시를 묘사하면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봉사할 수 있는 기회를 얻고 싶다는 뜻을 에세이에 담았다. 전양은 “SATⅡ 화학 시험을 준비하면서 자연과학에 깊은 흥미를 느꼈다.”면서 대학에 진학하면 생화학을 공부하겠다고 말했다. 이효연기자 belle@seoul.co.kr ●NYU stern합격 김형석군 “마이클 조던이 농구공 하나로 미국을 제패했다면 나는 조던의 어깨에 제트 엔진을 달아 날려주겠다.” 올해 서울외고를 졸업하고 미국 NYU stern 정시 모집에 합격한 김형석(18)군이 유학을 결정한 것은 농구 때문이다.NYU stern은 뉴욕대 비즈니스 스쿨로 미국 대학 중 경영학으로는 최상위권이다. 중학교 시절 미국 프로 농구 선수 크리스 웨버의 열렬한 팬이었던 김군은 어느 날 톰 크루즈 주연의 영화 ‘제리 맥과이어’를 보고 스포츠 에이전시가 되겠다고 결심했다. 스포츠 에이전시는 스포츠 스타들의 연봉 협상과 훈련 일정, 체력 관리, 사생활 등 스타의 모든 것을 조언하고 이끌어주는 전문가다. 그 뒤 김군은 스포츠 에이전시가 되려면 어떤 학교에 진학해서 무엇을 공부해야 하는지 스스로 알아보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에는 보편적인 직업이 아니기 때문에 미국 대학에 진학해 경영학을 공부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김군은 고교 진학과 함께 SAT 공부에 매진했다. 정규 수업이 끝난 오후 4시부터 SAT와 토플 공부를 시작했다. 일주일에 두번은 학교 유학반에서 공부하고 두번은 SAT의 기본을 다지기 위해 학원에 다녔다.1학년부터 2학년 중반까지는 주로 문법과 SAT 단어를 익혔다. 집에 와서는 1∼2시간 복습하고 밤 12시에서 새벽 1시 사이에 잠자리에 들었다.2학년 여름방학부터는 본격적으로 SATⅡ의 화학과 수학 시험을 준비했다. 수학은 우리나라 고1정도의 문제풀이만 하면 되기 때문에 화학과 수학의 공부 비중을 8대 2로 잡았다.3학년 초까지 SATⅠ·Ⅱ시험을 마쳤고 3학년 10월에 SATⅠ시험을 한번 더 보았다. 김군은 SATⅠ에서 1570점,SATⅡ 화학은 770점, 수학 760점, 쓰기(writing)는 720점을 받았다. 공부하면서 힘들 때면 농구를 벗삼았다. 가까운 교회 운동장에 들러 틈틈이 농구를 즐겼다. 미국 프로농구 전문잡지 ‘슬램’도 정독했다. 역동적인 표현법과 생동감 넘치는 문장을 익히는데 큰 도움을 받았다. 김군은 “자신의 미래를 가상으로 꾸민 포트폴리오와 서울외고 농구부 활동 역시 합격에 중요한 요소였다.”고 말한다. 지금까지 살아온 자신의 모습과 스포츠 에이전시 전문 기업의 CEO가 된 20년 후의 모습을 상상해 회사 운영 계획서와 함께 입학원서에 첨부했다. 고교 재학시절에는 농구팀의 주장을 맡을 정도로 농구를 사랑하는 소년이었다고 스스로를 소개했다. 김군은 “대학에 진학하면 대학 아마추어 농구팀에서 활약하는 것이 꿈”이라면서 “미국 NBA 선수들을 움직이는 한국 최초의 스포츠 에이전시가 되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이효연기자 belle@seoul.co.kr
  • 파나마협정 공신 리노위츠 사망

    |워싱턴 연합|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 시절 중동평화협상과 파나마운하협정에서 핵심 역할을 했던 외교관이자 법률가, 기업인인 솔 리노위츠가 18일(현지시간) 사망했다.91세. 리노위츠는 존슨 대통령 시절 미주국가기구 대사를 지냈고,1977년에는 파나마운하를 미국 정부가 파나마에 이양하기로 하는 역사적인 협정에 관여했다. 리노위츠는 또 카터 대통령을 대신해 1978년 캠프데이비드협정을 이끌어낸 중동평화협상에서 핵심 역할을 했다. 카터 전 대통령은 “리노위츠는 정치적 용기, 외교문제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뛰어난 외교술을 겸비한 헌신적인 관료였다.”면서 “파나마운하협정 체결 당시 파나마인의 권리와 미국의 장기적인 이해 사이에서 성공적으로 균형을 맞췄다.”고 고인을 추모했다. 코넬대 법대 출신인 리노위츠는 1969∼94년 국제적인 법률회사인 쿠데르 브러더스의 수석 변호사로 일했고,79년에 미국과 개도국의 교육·건강·경제적 기회를 증진하기 위해 활동하는 비영리단체인 교육개발아카데미위원회에 합류했다. 한때 제록스 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유족으로 부인과 딸 4명을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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