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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 상륙기동부대,페만이동/전투함 13척으로 편성…베트남전이후 최대

    ◎항모 2척도 곧 다국적군에 합류/영선 예비군 동원령/이라크는 미사일 발사실험 【워싱턴 로이터연합특약】 미국의 항공모함 테오도르 루스벨트호와 아메리카호가 전함 17척을 이끌고 28일 페르시아만을 향해 떠났다고 미 해군당국이 발표했다. 루스벨트호와 아메리카호는 각각 전투기 폭격기 대잠수함 공격항공기 90여대씩을 보유하고 있으며 버지니아주 노포크항에서 발진했다. 미 항공모함 사라토가호와 미드웨이호,존 F 케네디호는 이미 페만에 파견돼 있으며 랜저호는 샌디에이고항을 출발,현재 페만으로 항진중에 있다. 이들은 모두 페만에 도착하는 내년 1월이면 이 지역 배치 미 항모수는 6척으로 늘어나게 된다. 한편 루스벨트호와 아메리카호는 순양함 4척,구축함 3척,프리깃함 3척,보급함 5척을 거느리고 있다. 미 대서양함대 사령부 대변인은 이들 함정에 해군 및 해병대 병력 1만6천명이 타고 있다고 말했다. 【마닐라 노포크UPI AP연합】 페르시아만의 미 해군부대에 합류하기 위해 페르시아만으로 항진중인 전투함 13척으로 편성된 미 해군 상륙기동부대가 27일 필리핀의 수빅만에 기항했다고 미 제7함대가 밝혔다. 미 제7함대 대변인 리 손더스중위는 이 상륙기동부대가 필리핀 수빅만 해군기지에서 병력과 화물·우편물 등을 선적하고 실탄사격훈련 등을 갖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또 2주전 캘리포니아주 샌디에이고를 출발한 이 기동대가 그동안 해상에서 가상 상륙훈련을 실시했으며 이 기동대에는 캘리포니아주 팬들턴 캠프를 출발한 미 해병 제5파견대가 포함돼 있다고 덧붙였다. 이는 지난 65년 베트남전 발발이후 미해안을 떠나 해외에 파견되는 최대 규모의 상륙기동부대이다. 【리야드·카이로·북경AP UPI연합】 요르단이 이스라엘과의 국경지역에 병력을 집결시키고 있는 가운데 사우디아라비아에 파견된 미군 당국은 26일 뉴스 배경설명을 통해 이라크가 이스라엘을 공격할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했으며 이라크측은 미사일 발사실험을 실시하는 등 페만 지역에 전쟁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다. 사담 후세인대통령은 팔레스타인 문제와 페만사태의 연계해결을 거듭 주장하면서 쿠웨이트 철군을 거부하고 미국에 대해 대화를 촉구했으나 미 국무부는 지난 수주간 계속된 이라크와의 대화가 전혀 진전을 보이지 않았다고 상기시켜 이라크와의 대화에 더이상 기대를 걸지 않고 있음을 시사했다. 이와함께 중국을 방문중인 셰이크 사바 알 아메드 알 사바 쿠웨이트 외무장관은 기자회견을 통해 『아랍세계나 제3세계국,또는 초강대국 등 그 어느편의 노력으로도 페만사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기에는 너무 늦었다』면서 『이 모든 것은 이라크의 책임』이라고 말했다. 페르시아만 주둔 미군 중앙사령부는 26일 페만 배치후 처음으로 가진 뉴스 배경설명을 통해 후세인대통령이 전쟁이 불가피하다고 믿게 될 경우 아랍의 오랜 적국인 이스라엘을 공격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런던 AFP연합특약】 영국은 20일 페르시아만에 파견돼 있는 영국군을 지원키 위해 25년만에 처음으로 예비군 의무병력에 대해 강제 동원령을 내렸다. 동원대상 병력은 약 4백명으로 이는 1956년 수에즈운하 위기때 장교 9백명을 비롯해 2만5천명의 예비군을 동원한 이래 최대 규모의 예비군 동원이다. 영국 국방부는 12월초 사우디주둔 영국군 의료병력을 교대하고 또한 야전병원에 배치할 의료병과 예비군 1천5백명이 필요하다고 밝힌 바 있다.
  • “고르비는 「대처의 용단」 본받으라”/소 정치평론가,NYT에 기고

    ◎개혁 도입·독재청산 등 성공적 임무 수행/“위대한 배우는 자신의 은퇴시기 알아야” 소련 정부기관지인 이즈베스티야지의 정치평론가인 멜로 스튜루아는 19일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은 페레스트로이카(개혁)를 도입하고 독재를 청산한 것으로 그의 역할을 마감하고 이제는 정치일선에서 물러나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미 하버드대 존 F 케네디 정치학부 연구원이기도 한 멜로 스튜루아는 이날 미국의 뉴욕 타임스지에 기고한 글을 통해 고르바초프도 마거릿 대처 전 영국총리의 뒤를 따라 권좌에서 물러나는 현명한 결단을 내려야 한다고 말했다. 멜로 스튜루아는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는 그가 없이도 이루어질 수 있다면서 고르바초프의 퇴진을 대처의 퇴진과 연결시켰다. 그는 『고르바초프의 등장을 예언한 대처와 고르바초프는 모든 점에서 의견을 달리했지만 서로의 입장이 비슷했기에 상대방에 동정적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대처와 고르바초프는 집권당내의 내분,인플레이션,사회불안 등에서도 공통점이 있었지만 대처가 지난달 파리에서 열린 유럽안보협력회의(CSCE) 정상회담을 마치고 곧 사임,두 사람의 행보는 큰 차이를 보였다고 분석했다. 스튜루아는 『레닌이 지구의 6분의 1을 문명세계로부터 격리시킨 반면 고르바초프는 이를 복원시키려 한다는 점에서 고르바초프는 레닌보다 위대한 정치인』이라고 전제한 뒤 『그러나 고르바초프의 개혁정책은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그는 고르바초프가 페레스트로이카에 필수적인 인물은 아니라면서 페레스트로이카의 생명력 및 밝은 미래는 창안자 없이도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위대한 배우는 자신의 은퇴시기를 잘 알고 있다』면서 『권력에 오르는 데는 용기가 필요하듯 권력에서 물러나는 데에는 지혜가 필요하다』고 고르바초프의 용퇴를 촉구했다.
  • 공산권무역 대부 미 해머옹 사망

    ◎소에 의약품·식량지원… 레닌 신임 얻어/유전개발로 자수성가… “평화의 해결사” 미국의 석유재벌이며 철의 장막을 넘어 세계평화의 중재자 역할을 했던 아먼드 해머 미 옥시던틀 석유회장이 10일 92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옥시던틀석유사 대변인은 『해머회장이 10일 밤(현지시간) 로스앤젤레스 자택에서 잠시동안 병석에 누워 있은 후 숨을 거뒀다』고 발표했다. 러시아 이민가정에서 태어나 자수성가로 거부가 된 고 해머회장은 막대한 돈을 암퇴치를 비롯한 사회봉사활동에 기부했으며 미술관을 운영하는 등 문화사업에도 헌신했다. 해머회장은 미소가 대립했던 냉전시대에 공산권을 상대로 기업활동을 하며 큰돈을 벌기도 했다. 미국의 대 공산권무역 대부였던 해머씨는 1921년 소련에 많은 의약품과 식량을 지원하면서 레닌의 두터운 신임을 받기 시작했다. 해머씨는 레닌의 신임으로 소련에서 처음으로 기업경영을 허가받은 외국인 자본가가 됐으며 레닌의 지원하에 소련에 많은 상품을 판매했다. 해머씨는 그 이후 스탈린·흐루시초프·브레즈네프·고르바초프 등 소련 지도자와 두터운 개인적 친분을 유지하는 한편 등소평 중국 최고지도자와도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이를 바탕으로 활발한 대 공산권 기업활동을 벌였다. 해머씨는 이같은 대 공산권 무역으로 크렘린으로부터 「가장 사랑받는 자본가」「무역의 키신저」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는 이같은 폭넓은 친교를 바탕으로 공산권 정보에 가장 밝은 사람이 됐는데 고르바초프의 등장과 등소평의 재기를 정확히 예측하기도 했다. 해머씨는 1957년 파산직전의 옥시던틀 석유회사를 인수,의욕적인 유전개발에 성공하며 이 회사를 오늘날의 거대한 석유재벌로 성장시켰다. 해머회장의 활약은 단순히 기업경영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케네디 대통령 이후 역대 미국 대통령의 대 공산권 외교상담역 역할을 맡아 미소 지도자간의 가교역할을 하며 국제정치에도 적지않은 영향력을 행사했다. 지난 88년에는 중국산 석탄의 판매를 위해 한국을 방문,한중 경제교류의 중재자 역할도 했었다.
  • 항모 없는 「팀스피리트」/김원홍 사회부차장(오늘의 눈)

    태평양과 대서양 등 세계에서 가장 큰 바다를 동서에 면하고 있는 미국은 전통적으로 대서양우위의 군사외교정책을 수행해왔다. 2차대전중 미국이 일본에 2개의 원자폭탄을 투하했을 때도 미국이 백인국가에는 도저히 그런 비인간적인 무기를 사용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감정적인 반미론을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었다. 2차대전이 끝난지 45년이 지난 지금에도 미국은 태평양보다는 대서양과 지중해를 더 중요시하는 군사정책을 수행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페르시아만 사태가 발생한 이후 지금까지 미국은 보유하고 있는 전체 항공모함 12척중 6척을 대서양과 지중해ㆍ인도양 등을 통해 중동지역에 배치하고 있다. 팀스피리트훈련에 해마다 동해안에 오던 미드웨이호는 페르시아만에,사라토가호는 홍해에,존 에프 케네디호는 지중해에 포진하고 있으며 핵추진 항모인 루스벨트,엔터프라이즈,칼빈슨호 등도 모두 1백여대의 함재기를 만재하고 중동지역으로 향하고 있다. 내년초에 실시될 예정인 팀스피리트 91훈련에는 아마도 지난 20여년 동안 한국해역에 단골손님으로 오던 미드웨이호나 엔터프라이즈호 등은 현실적으로 올 수 없게 될 전망이다. 중동의 사막에 한판승부를 갖기 위해 40여만명의 병력을 파견하고 있는 미국이 한국에 보낼 항모나 본토의 지원병력에 여유가 없기도 하려니와 단일전장유지의 전략적 원칙에 따라 비록 훈련이나마 본토의 병력을 동서로 나누어 배치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안보가 미국의 세계전략과 직결되어 있고 한국국민이 원하는 한 미군이 계속 주둔할 것이며 한국은 미국의 핵우산 보호아래 있다는 등의 공약도 상황이 변하면 언제든지 바뀔 수 있다는 것을 항상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할 것 같다. 한국의 군사대표단을 맞는 워싱턴의 고위장성들과 국방성 관계자들도 올해 한미 연례안보협의회를 애써 축소하려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고 한 참석자가 밝혔다. 예전과는 달리 회담이 끝난뒤 양국 장관의 공동기자회견도 없어 이번 회의가 아무래도 좋지 않은 시간에 약속과 다른 장소에서 열린게 아닌가 하는 뒷맛이 남는다.
  • “페만 개전 서두르지 말라”(해외논단)

    ◎“시간 흐르면 이라크 봉쇄효과 가시화/고통 커질수록 정적늘어 후세인 자멸” 지난해 은퇴한 미국의 저명한 칼럼니스트 제임스 레스턴이 오랜만에 붓을 들어 부시 행정부의 페르시아만 정책에 비판을 가했다. 「비상번호 911을 돌리기는 너무 이르다」는 제목으로 뉴욕 타임스지에 기고한 이 글에서 그는 페르시아만전은 아직 때가 아니다라고 주장하면서 부시 대통령의 신중하고 현명한 판단을 촉구했다. 다음은 기고문의 요약. 부시 대통령은 사담 후세인을 히틀러보다 더 나쁜 사람이라며 그에 대해 점점 더 참기 힘들어지고 있다는 말을 되풀이하고 있다. 그의 이러한 자세는 전쟁이 불가피하다는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다. 그의 감정을 이해할 수는 있지만 역사는 참을성 없는 전사의 편이 아니었다. 한국전에서 참을성을 잃은 트루먼은 38선을 넘어가 중국군과 부딪쳤고 피델 카스트로에 참을성을 잃은 케네디는 피그만사건을 저질렀다. 베트남전의 교착상태를 참지 못한 존슨과 닉슨은 마침내 월남에서 도망나와야 했다. 후세인이 지금 처해 있는 곤경도쿠웨이트에 대한 불만을 협상을 통해 해결하려는 인내심을 잃고 무력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후세인을 중부유럽의 초강대국이었던 독일의 히틀러에 비교하는 것은 우스꽝스런 일이다. 페르시아만에서 전쟁이 불가피하다고 강조하는 것은 좋게 말해서 시기상조이고 나쁘게 말하면 위험한 짓이다. 대 이라크봉쇄는 이제 효과를 나타내기 시작하고 있으며 이라크가 겪는 고통이 크면 클수록 후세인은 국내에서 더 많은 정적들을 갖게 될 것이다. 누가 후세인을 몰아낼 수 있을지 미국은 모르더라도 이라크에 수백명의 고문관을 두고 있는 소련은 알 것이다. 이라크는 파나마가 아니며 후세인은 노리에가가 아니다. 더욱이 부시 대통령이 전쟁이냐 아니냐를 결정해야 할 시점도 아니다. 이라크가 당장 핵무기를 보유하는 것도 아니다. 또 전쟁이 일어나면 이스라엘도 무시하지는 못할 것이다. 페르시아만에 파견된 「아이들」을 성탄절 전에 데려오기 위해 속전속결해야 한다고 외치는 미국인들은 많지 않다. 오히려 대통령이 점프하기 전에 심사숙고하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더 많다. 부시가 비상전화 다이얼 911을 돌리기에는 아직 시간이 이르다. 부시는 한국에서 휴전을 이루어내고 베트남에서 비극을 피했으며 전쟁에 관하여는 뭔가를 아는 아이젠하워의 분별력을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지난 55년 기자회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전쟁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의외성과 불가측성을 갖고 있다. 따라서 앞을 잘 내다볼줄 안다고 생각하면서 서두르는 사람은 전쟁에 대한 무지를 나타내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나는 기다려야만 한다고 생각하며 그러한 기다림은 언젠가 어느 대통령이 간절한 기도후에 내리게 될 결정이 될지 모른다』 50년대 프랑스정부가 베트남의 디엔 비엔푸에 갇힌 자국의 수비대를 구출키 위해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미국 폭격기의 지원을 요청했을 때 그는 당시 닉슨 부통령,덜레스 국무장관,합참의장 등과 협의했다. 측근 모두가 전쟁개입을 지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젠하워는 ▲미 의회가 승인하고 ▲프랑스가 종전후의 베트남 독립을 약속하고 ▲영국이 참전한다는 조건이충족되면 개입을 고려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이들 조건 가운데 어느 것도 충족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나는 페르시아만에서 전쟁이 불가피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사우디는 미국의 어떠한 대 이라크 군사작전도 승인한다고 밝히고 있지만 사우디가 다른 아랍국의 파멸을 승인할 것으로는 믿지 않는다. 부시 행정부는 유엔안보리로부터 무력사용에 대한 사전승인을 받고 싶어하지만 소련 중국 영국 프랑스 등 상임이사국이 거부권을 행사할 가능성이 높다. 만일 다른 방법이 실패하고 또 그들 자신은 전쟁에 끼어들지 않아도 된다고 한다면 미국의 군사행동을 승인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상황전개를 미국인들은 바라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 부시의 딜레마가 놓여 있다. 또 하나의 딜레마는 대 이라크 연합세력의 결속이 그가 자랑하는 것처럼 견고하지 못하다는 점과 그렇다고 미국 단독으로 행동하는 것은 가장 인기없는 대안이 될 것이라는 점이다. 한편 이번 사태는 대통령과 의견을 달리 하기를 원치 않는 미국인들도 난처하게 만들고 있다. 이번 경우에서 『나의 대통령이 옳든 그르든 간에…』라고 말하는 것은 『내 운전사가 술에 취했건 아니건 간에…』라고 말하는 것과 다소 비슷하다. 그런 차를 오래 타고 가려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 새 「역사의 장」여는 통독의 현장에서/이기백특파원

    ◎“이제 독일은 하나”… 거리마다 샴페인 축제/“우리는 자랑스런 독일인”… 얼싸안고 환호/통일 알리는 종소리에 목메어 국가합창/동ㆍ서베를린 잇는 마라톤엔 2만5천명 참가 그것은 새 역사의 장을 여는 감격적인 축제였다. 성당과 교회의 종이 일제히 울려 퍼지면서 거리를 메운 시민들은 저마다 「아인하이트 아인하이트」(통일)를 외쳐대며 민족재결합의 기쁨을 만끽했다. 분단의 상징이었던 브란덴부르크 문 주변에 몰려든 시민들은 손에 손을 잡고 자유ㆍ평화ㆍ정의를 강조하는 국가를 목이 터져라고 불렀으며 통일을 축복하는 폭죽이 밤하늘을 현란하게 수놓았다. 이제 독일은 하나,통일축제가 시작되는 2일 자정부터 4일까지 베를린 시내에서는 기념행사가 다채롭게 펼쳐지며 금세기들어 3번째 세워지는 새 독일의 탄생을 축복하고 밝은 미래를 기원했다. ○…통일축제의 서막을 알리는 성당과 교회의 종소리가 2일 0시 일제히 울려퍼지자 축제행사가 중점적으로 진행되는 운텐 덴린덴거리와 6월17일 거리에 나와 있던 시민들은 주먹을 공중으로 치켜올리며 환호했으며 각 가정에서는 샴페인을 터뜨려 이 순간을 축복했다. 운텐 덴 린덴 거리에 부인ㆍ여동생과 함께 나온 지그마 캡슐씨(35)는 『통일이 이같이 빨리 이뤄질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습니다. 감격스럽고 독일인이라는 것이 자랑스럽다』며 가족들과 얼싸안고 기뻐했다. 동베를린에 산다는 에버린 쾨러양(22)은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하늘을 수놓은 폭죽의 섬광처럼 우리는 빛을 발할 것입니다』며 감격스러워했다. 10월3일이 「통일의 날」로 국경일이 됨에 따라 독일국민들은 매년 이날 휴무하게 되며 지금까지 동서독이 별도로 통일을 기원하던 기념일은 폐지된다. 동독은 지금까지 건국일인 10월7일을,서독측은 동독에서 공산정권에 항거해 시민들이 일제히 궐기했던 6월17일을 기념해 공휴일로 지정했었다. ○인산인해 교통마비 ○…베를린은 역사적인 백림마라톤대회가 때마침 통일축제 직전인 30일 열려 축제분위기를 더욱 돋웠다. 60여개국에서 2만5천여명의 선수가 참가한 이번 대회의 코스는 독일통일을 기념하는 의미에서 서베를린 샤로텐부르크문을 출발,6월17일 거리를 지나 동베를린지역인 칼 막스거리를 거쳐 브란덴부르크 문과 통일전 체크 포인트였던 찰리 검문소를 통과하는 등 반세기만에 전 베를린 시가지를 질주해 시민들을 열광시켰다. 이 때문에 독일각지에서 몰려든 사람들과 각국의 취재기자ㆍ외국관광객으로 숙박난ㆍ교통난을 가중시켰으며 도심은 거리를 나다니기조차 힘들정도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호텔과 여관이 초만원을 이루자 베를린시당국은 TV방송을 통해 시민들에게 민박을 강조하는 계몽을 펼치고 있으며 축제기간중 지하철을 24시간 운행하는 한편 역주변과 광장등에서 노숙하는 행위를 당분간 단속하지 않기로 해 텐트족의 천국을 이루기도. ○…통일축제의 절정은 몸퍼 서베를린 시장이 2일 상오 9시 시의회에서의 통합을 선언하는 행사. 몸퍼시장은 이 자리에서 독일과 독일인은 영원히 하나이며 세계평화에 기여할 것임을 다짐. 이어 몸퍼시장은 연합군 사령관들에게 베를린의 자유수호에 기여한 노고를 치하하고 연합군 사령관의 고별사에 이어 곰을 상징하는 베를린기가 시장에게 되돌려 진다. 이에 앞서 독일분단 이후 베를린 시정을 담당했던 연합군 사령관 레이먼드 하드도크(미국),로버트 콜베트(영국),프랑세스 샹(프랑스)장군 등은 1일밤 마지막으로 브라보검문소에서 간단한 철수기념식을 갖고 장병들을 위문. ○일부선 통일반대 시위 ○…통일축제가 시작되고 있는 가운데 브란덴 부르크문 광장에서는 「우리는 통일 반대한다」는 플래카드를 든 3백여명의 전동독 노동자들이 시위를 벌여 눈길. 이들은 통일이 된 뒤 사회주의 국가에서 누려온 정부 복지시책의 혜택을 받지 못하게 된다는 「불이익」과 불확실한 통일후의 생활을 우려해 연일 이곳에서 통일반대시위를 벌여왔는데 이날도 축제가 시작되기 전부터 광장의 한 귀퉁이에서 시위를 강행. 그러나 통일을 환영하는 군중들의 환호에 이들의 주장은 더욱 초라하게 보였으며 1일로 독일 경찰에 편입된 전동독경찰관들이 이들의 데모를 보호. ○「통일의 횃불」기념촬영 ○…역사적인 통일이 이루어짐에 따라 지난 40여년동안 독일 통일의 열망을 불태우던 테오도르 호이스 광장의 횃불도 꺼지게 된다. 서독 초대대통령 테오도르 호이스(Theodor Heuss)가 취임하면서 독일국민의 통일염원을 북돋우기 위해 광장 한가운데 마련됐던 통일횃불은 냉전시대의 파란만장했던 베를린의 과거를 지켜보며 베를린 시민들에게 꿈과 희망을 일깨워온 명소. 「Freiheit(자유)ㆍRechts(정의)ㆍFrieden(평화)」라고 새겨진 대리석 받침대 위에서 꺼질 줄 모르고 타오르던 희망의 횃불이 꺼지는 것을 아쉬워하는 베를린시민들은 연일 이곳에 몰려들어 헌화를 하고 기념사진을 찍기도. 1일 가족과 함께 통일횃불을 배경으로 가족들과 사진을 찍던 헬무트 센켄씨(52)는 『호이스의 염원은 드디어 성취돼 우리에게 기쁨을 안겨주었으나 횃불이 소멸되는 것은 슬픈 일』이라며 통일의 횃불은 독일인들 마음속에 영원히 남아 있을 것이라고 아쉬움을 표시. ○동독군복등 기념판매 ○…독일의 신문들과 방송들은 대부분 차분한 자세로 베를린의 분단에서 통일에 이르는 과거를 재음미하며 통일행사와 관련한 프로그램을 시민들에게 소개. TV는특히 통일이후의 국내ㆍ세계정세를 논의하는 좌담회를 방영하는 가운데 ARDㆍZDF 등 전국적인 방송망을 갖고 있는 TV는 60년대초 케네디 전 미국대통령이 베를린을 방문,『이히빈 베를리너(나는 베를린시민)』이라고 연설하며 소련과 동독의 봉쇄로 고난을 겪고 있던 베를린시민들에게 용기를 북돋웠던 기념비적인 장면을 보여줘 감회를 새롭게 하기도. 또 통일축제기간동안 재빠른 상업주의가 극성을 부려 2차대전때 파괴된 상흔을 간직한채 도심 한가운데 을씨년한 모습을 하고 서 있는 카이저 빌헬름교회 주변 광장에는 상인들이 전 동독군인의 모자와 제복,계급장을 기념품으로 팔고 있는가 하면 베를린의 한 회사는 베를린 봉쇄때 시민들의 생필품을 공수했던 C46수송기를 임대해 축제기간동안 프랑크푸르트에서 베를린 템펠로프 공항까지 기념비행을 광고하면서 손님들을 끌기도. ○교민무용단 공연도 ○…이번 행사에는 우리나라 교민여자 무용단인 「아리랑무용단」이 참가,2일 하오 11시부터 동베를린 오페라하우스 앞 베벨프라츠에서 공연을 할 예정이어서눈길. 무용단 관계자들에 따르면 베를린시 당국에서 축제참가 초청장을 보내와 2차대전으로 인한 마지막 분단국인 한국이 참가하는 것이 큰 의의를 가질 것이라는 결론을 내려 참가를 결정했다는 것. 20여명으로 구성된 한국무용단은 이날 공연에서 한복으로 차려입고 30여분동안 우리나라 전통춤을 공연할 예정인데 통일의 현장에서 「통일기원춤판」이 한바탕 벌어질 것으로 보여 관심이 집중. ○…통일축제는 승전 4대국 수뇌들이 참석하지 않게됨으로써 당초 계획과는 달리 순수한 독일인 자체의 축하행사로 진행될 전망. 통일축제의 공식행사는 2일 하오 5시 동서베를린시 의회가 개최됨으로써 시작되며 4일 상오 9시 베를린에 있는 라이흐스탁(국회)에서 동서독 합동의회가 열림으로써 끝을 맺으나 기념공연 등 각종 행사는 시내 곳곳에서 잇따라 열린다. 축제의 절정은 3일의 동서베를린 경계선에서 펼쳐질 시민잔치와 국회건물의 통일독일기 게양식. 국회에 통일독일기가 게양되는 것과 동시에 동서베를린의 모든 공공건물과 대형건물,차량들에도 독일기가 게양되거나 꽂혀진다.
  • 지상군 10만·전함 60척 한국전이래 최대 규모

    ◎페만 다국적군 전력 점검/“다중 공격” 미 신형미사일 첫 배치/아랍연합군은 사막전 취약 미군을 보완/탱크의존 이라크,제공권 약해 타격 클 듯 세계 각국의 육·해·공군이 페르시아만으로 속속 몰려들고 있다. 유사시 최대 25만 병력까지 현지파견이 가능하다고 공언한 미국은 15일 페르시아만에 파견된 미군을 총지휘할 중부사령부를 플로리다주 맥딜공군기지에서 사우디아라비아로 이동시키는등 전투태세를 끝내놓고 있다. 이번 각국의 파병규모는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2차대전이나 한국전 또는 월남전이후 최대규모가 될 게 틀림없다.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 14일째인 16일 현재 페르시아만에 집결한 전투력은 5개국의 아랍연합군을 포함,총 14개국 소속의 지상군 10만여명,각종 전투기 2백여대,항공모함 5척 등 60여척의 전함이다. 육군보유 항공기나 항공모함 적재분까지 합치면 항공기수는 6백여대에 이른다. 이중 미군은 항공모함 4척등 전함 40여척,전투기 1백80여대,지상군 4만5천명 등 전체 다국적군 전투력의 80%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미국의 지난해 파나마 침공당시 1만2천명의 현지주둔 병력에 1만명 정도가 추가투입돼 삽시간에 작전을 성공리에 끝냈고 지난 50년 한국전쟁 발발당시 초기에 투입된 미 군사력은 전투기 1백여대,순양함 2척,구축함 12척,지상군 주둔병력 1만2천여명 수준이었다. 월남전 당시에도 항공모함 2척이 교대로 상륙했던 것과 비교하면 이번에 페르시아만에 집결된 군사력이 어느 정도 수준인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외형적인 단순비교로는 실제 파괴력을 가늠하기 쉽지 않다. 5인치 함포가 고작이었던 6·25나 월남전 당시에 비해 초현대화된 전투기및 미사일등의 파괴력은 가히 가공할 만한 것이다. 우선 제공권 장악여부의 관건이 되는 공군력을 보면 스텔스기는 이라크의 레이더를 피해 목표에 접근할 수 있는 확률이 높아 화학무기생산공장및 저장소,핵병기 연구시설 등 현대식 대공미사일로 보호되는 주요 시설물을 어렵지 않게 무너뜨릴 수 있다. A­10 근접지원기는 6개의 발사구를 가진 30㎜ 대전차포를 장착,그야말로 전차킬러로서 5천6백여대의 이라크탱크를 무력화시킬 수 있다. B­52폭격기의 대형폭단은 떨어진 곳마다 직경 15m 크기의 반구형 구덩이를 만들어낼 정도로 파괴력이 강력하다. 5대의 AWACS기(조기경보기)는 이라크의 군사력이동을 손바닥에 놓고 보듯이 포착할 수가 있어 공중전에 결정적인 우위를 제공한다. 인디펜던스호(아라비아해) 아이젠아워호(홍해) 사라토가호(동지중해) 케네디호(지중해) 등 4척의 항공모함에도 각각 60대씩의 전투기가 적재돼 있다. 특히 전함 위스콘신호에는 토마호크 크루즈미사일이 장착돼 있어 주목받고 있다. 명중률이 높아 주요전략시설 폭파에 적합한 것으로 이번에 최초로 실전 배치됐다. 지상군도 파나마침공에 투입된 82공정사단 101공정사단 24기계화보병사단 등 최정예부대이다. 낙하산부대인 82공정대는 대전차 토미사일 20기씩을 갖추고 있고 101공정사단은 AH­64 아파치헬리콥터 36대와 AH­1 코브라 대전차 헬리콥터 36대를 보유하고 있다. 24기계화보병사단은 탱크 1백74대와 1백55㎜ 자주포,다연발 로켓시스템 등을 갖추고 있다. 사정거리 95㎞로 동시에 여러목표물을 파괴할 수 있는 패트리어트 지대공미사일이 처음으로 실전 배치됐고 중거리 호크미사일,스팅어대공미사일 등도 갖추고 있다. 이집트 시리아 모로코 등 아랍연합군으로 파견된 지상군은 사막전에 익숙치 않은 미 지상군의 단점을 보완할 수 있을 것이다. 이같은 다국적군의 최신예전력에 비해 모두 합해 5백여대의 항공기와 5천6백여대의 탱크에 의존하고 있는 이라크군이 열세인 것만은 분명하다. 공중전에는 경험이 별로 없어 당장 제공권을 넘겨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이라크의 주력무기인 탱크는 위력을 발휘하기가 힘든 실정이다.〈김주혁기자〉 □페르시아만 집결 다국적군〈파병준비분 포함〉 ●미국 해군:항공모함 4척,항공기 2백50대,순양함,프리깃함,소해정 등 전함 40여척(약 3만명) 지상군:101공정사단,24보병기계화사단,82공정대,해병 제4·7기동여단 등(6만명) 공군:F­15,F­16전투기 각 48대,F­111폭격기 14대,A­10대 전차공격기 72대,B­52폭격기,조기경보기,공중급유기 등 다수 ●영국 해군:구축함 1척,프리깃함 2척,소해정3척(1천명) 공군:토네이도전투기,재규어 각 12대,해양순찰기 3대 ●프랑스 해군:항공모함 1척,순양함,보급함 등 4척(2천6백명) ●호주 해군:프리깃함 2척 ●캐나다 해군:순양함 2척(8백명) ●네덜란드 해군:프리깃함 2척 ●벨기에 해군:소해정 1척,초계정 2척 ●서독 해군:소해정 5척 ●소련 해군:구축함 2척 ●아랍연합 지상군 이집트:3만명 시리아:2개 사단 모로코:5천명 파키스탄:5천명 방글라데시:5천명
  • 이라크,“철군협상 용의”/후세인성명 미군 페만철수등 3개안건 제시

    ◎미선 해상봉쇄 채비/3개 안건/①사우디 미군 아랍군 교체 ②대이라크 경제제재 해제 ③이스라엘 점령지서 철수 【니코시아 AP 로이터 연합 특약】 이라크는 12일 쿠웨이트로부터의 자국군 철수를 이스라엘군의 점령지 철수와 미군및 여타국 병력의 페르시아만 지역에서의 철수및 이라크에 대한 경제제재조치 해제와 연계시켰다. 후세인 이라크대통령은 쿠웨이트 침공 11일 만에 바그다드 라디오및 TV를 통해 발표한 이날 성명을 통해 이라크군의 쿠웨이트 철수를 ▲이스라엘 서부와 가자지구로부터의 이스라엘 철수 ▲레바논으로부터의 시리아군 철수에 똑같은 원칙과 지침아래 연계시킬 것을 제의했다. 후세인은 또 페르시아만 위기를 해소하기 위한 1단계 조치로서 사우디 주둔 미군을 아랍군으로 교체할 것을 제의했다. 그는 외국군이 유엔 안보리 이름아래 사우디에 주둔하되 주둔국의 선택은 이라크와 사우디가 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후세인은 아랍군의 규모와 배치는 유엔 안보리와 케야르 유엔사무총장간의 합의에 의해 결정돼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후세인은 『만일 미국및 그 동맹국들이 이같은 제안을 거부할 경우 우리는 무력으로 저항할 것이며 신의 도움을 받아 승리할 것』이라고 덧붙였다.〈관련기사2·3면〉 【워싱턴 UPI 연합 특약】 베이커 미국무장관은 12일 ABC 방송회견을 통해 미국은 쿠웨이트 망명정부의 요청에 따라 유엔에서 결의된 금수조치를 실행에 옮기기 위해 이라크로부터의 원유선적을 봉쇄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베이커장관은 해상봉쇄 일정은 밝히지 않았다. 【뉴욕·워싱턴·리야드 AP AFP 로이터 연합】 미국은 4번째 항공모함 함대를 중동에 파견키로 한 데 이어 아직 실전에서 시험된 적이 없는 패트리어트 지대공미사일을 사우디아라비아에 투입된 미군에 배치했다고 미국 신문들이 12일 보도했다. 뉴욕타임스지는 이날 익명의 미 국방부 관리들의 말을 인용,항공모함 존 F 케네디호와 지원선단이 다음주 지중해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고 전했다. 워싱턴 포스트지는 이날 사우디 주둔 미군은 사정거리가 95㎞로 동시에 여러 목표물을 파괴할 수 있는 패트리어트미사일을 중거리 호크미사일,스팅어 대공미사일 등과 함께 갖추고 있다고 전했다. 한편 미국 영국 등의 전함들이 이라크의 사우디아라비아 침공에 대비해 페르시아만에 집결하고 있는 가운데 영국 전투기및 이집트 병력,아랍연합군 1진 1만여명이 11일 사우디에 도착했다.
  • 로즈여사 100회 생일잔치(세계의 사회면)

    ◎“미국의 왕조”케네디가의 산 증인/영광ㆍ슬픔속 가문의 정신적 지주로/미 의회,7월22일을 「감사의 날」선포/“모든 부문서 1등이 되라”열성적인 자녀교육 「미국의 왕조」라고 불리는 케네디가의 산증인인 로즈 피츠제럴드 케네디여사가 영광과 슬픔으로 점철된 한세기를 보내고 22일 가족들의 축하속에 1백회 생일을 맞았다. 한편 미의회는 이날을 「로즈 피츠제럴드 케네디가에 대한 감사의 날」로 선포,3대에 걸쳐 케네디가를 미국의 최고 명문가로 키워낸 로즈여사의 공로를 기렸다. 고케네디 대통령으로부터 「가족들을 응집시키는 아교풀」과 같은 존재로 추앙받았던 로즈여사는 4남5녀 가운데 둘째아들인 존 F 케네디를 대통령으로,셋째 넷째아들인 로버트,에드워드 케네디를 상원의원으로 키워내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운 여장부. 그러나 로즈여사의 삶이 행복으로만 가득찼던 것은 물론 아니었다. 그녀는 1944년 첫째 아들인 조2세의 전사,1948년 둘째딸 캐슬린의 비행기 추락사와 1963년 존 F 케네디 대통령과 1968년 대통령 선거유세중 로버트를 암살로 잃는 아픔을 겪었다. 그러나 로즈여사는 슬픔을 가슴으로 삭이며 이를 극복한 초연함과 용기를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다. 극에서 극으로 모든 행ㆍ불행을 겪어왔던 로즈여사는 1890년 보스턴의 정치인인 존 F 피츠제럴드의 6남매중 장녀로 태어났다. 그녀의 집안 역시 케네디가와 마찬가지로 지난 19세기 중엽 아일랜드를 휩쓴 대기근을 피해 미국으로 건너온 이민가정이었다. 그녀의 부친은 1895∼1901년 하원의원을 역임했으며,1906년에는 보스턴시장을 지내기도 했다. 따라서 허니 피츠라는 애칭을 갖고 있는 로즈여사는 여유있는 환경속에서 자유분방하게 성장할 수 있었으며 가정적인 조용한 성격의 어머니를 대신해 일찍부터 안주인 역할을 맡아했다. 여행을 좋아하는 그녀는 명문여대인 웨슬리대 진학을 희망했지만 존 F 피츠제럴드는 그녀를 여동생인 아그네스와 함께 네덜란드의 「성심수녀원」으로 유학시켰다. 로즈여사는 성심수녀원에서의 생활을 통해 침착성과 신앙심을 키울 수 있었으며 이때 체득한 그녀의 독실한 종교관에 입각,그뒤 자신의 딸들을 수녀학교에 진학시키는 열의를 보였다. 로즈여사는 1914년 주영대사를 역임한 백만장자인 조셉 P 케네디와 결혼,케네디가를 세인들의 주목을 받는 가문으로 키워내는데 중요한 몫을 했다. 조셉 케네디부부는 『첫째가 되어야 한다』는 가훈을 바탕으로 자녀들을 강하고 훌륭히 키웠다. 모든 부문에서 2등을 용납치 않은 조셉은 자녀들에게 인습을 무시하고 자신의 규칙대로 살 것을 가르쳤으며 로즈는 경건ㆍ신앙ㆍ엄격함을 가르쳤다. 그녀는 자녀들의 식단ㆍ운동량ㆍ질병을 기록한 신상카드를 늘 지니고 있을 정도로 자녀교육에 남다른 애정을 쏟았을 뿐만 아니라 식사시간에 토론을 자주 갖기도 했다. 평소 뛰어난 정치적 감각의 소유자였던 로즈여사는 존 F 케네디가 46년 하원의원에 출마했을 때 선거운동원으로서 유감없이 실력을 발휘했으며 존 F 케네디가 60년 대통령에 출마했을 때는 14개 주를 돌면서 무려 46회에 걸쳐 지원연설을 하는 투혼을 보였다. 로즈여사는 평소 『나는 어떤 것에 의해서도 정복되지 않기로 마음 먹었다. 내가 무너지면 다른 가족들에게 엄청난 불행을 줄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하곤 했다. 이처럼 정신력 뿐 아니라 10년전까지 수영과 조깅을 즐겼던 강한 체력의 소유자인 로즈여사도 나이는 어쩔 수 없어 요즘은 휠체어에 의지한 채 간호사들의 도움을 받으며 손자들과 보내는 시간을 낙으로 삼으며 지내고 있다. 그녀는 자서전을 통해 『후손들은 역경ㆍ실망ㆍ슬픔을 이겨낼 수 있는 인내력을 가져야 할 것』이라면서 『신은 우리들이 견디지 못하는 십자가를 지우지 않는다』고 기술,케네디가의 정신적 지주로서의 흔들림 없는 강인한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곽태헌기자〉
  • 중국의 대 서방「미소작전」 시동/상해시장 주용기일행 방미 안팎

    ◎경제인등 앞세워 유화제스처/고립 탈피땐 한­중관계에도 “플러스 효과” 중국이 지난해 「6ㆍ4 천안문사건」으로 비롯된 국제무대에서의 정치ㆍ경제적 고립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급피치를 올리며 적극적인 외교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중국당국은 늦어도 오는 9월 북경에서 열리는 아시안게임 때까지는 지금까지 겪어온 역경의 세월에 종지부를 찍겠다는 목표를 세워 놓고 특히 서방세계를 겨냥,온힘을 기울여 설득작전에 나서고 있다. 지난 7일(현지시간) 뉴욕에 도착한 중국시장 방문단은 이러한 중국의 외교적 노력을 극명하게 대변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상해시장이며 서방언론들이 중국의 고르바초프라고 부르는 개혁파인사인 주용기를 단장으로 한 이 대표단 일행 11명은 20일동안 미국에 머무르면서 워싱턴 시카고 미네아폴리스 샌프란시스코 로스앤젤레스 등 주요도시를 순방한다. 이들은 미국정부관리와 금융ㆍ실업계 인사들을 만나 중국의 지속적인 개방 개혁의지를 강조하고 자국에 대한 미측의 경제ㆍ외교적 제재조치를 풀도록 설득할 계획이다.주는 뉴욕 케네디공항에서 가진 기자회견을 통해 『이번 방문은 미ㆍ중양국관계 개선을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 물론 이번 중국시장대표단은 외형상으론 미정부 초청을 받지 않은 것으로 돼 있으며 친중민간단체인 미중관계전국위원회(회장 데이비드 램튼)가 방문을 알선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부시 미대통령이 이미 지난 5월 중국에 대한 최혜국대우조치를 1년 연장하겠다고 밝힌 점이나 북경당국이 얼마전 미대사관에 피신중이던 반체제 물리학자 방려지부부의 출국을 허용함에 따라 양국관계개선의 조짐이 나타나고 있는 사실 등을 감안하면 이번 방문이 미정부의 호의적인 뒷받침에 의해 이뤄졌다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또 이번 대표단은 6ㆍ4사건이후 미국을 방문하는 중국의 최고위급 인사들이며 규모도 가장 큰 것이어서 주목을 끌고 있다. 상해이외에 무한ㆍ중경ㆍ태원ㆍ합비ㆍ영파 등 5개 공업도시 시장과 외교부직원들로 구성돼 있으며 이들은 사실상의 특명 전권대사로서 미 자본 및 기술유치 등을 비롯,양국간 관계회복을 위한 돌파구를 마련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단장인 주용기는 차기 총리설이 강력히 나도는 비중이 매우 큰 인물이기도 하다. 시기적으로도 9일부터 텍사스주 휴스턴에서 서방선진 7개국(G­7) 정상회담이 열리고 있기 때문에 이들 대표단이 보이고 있는 미소작전과 시위효과는 서방지도자들이 대중관계 정상화 여부를 결정하는데 적잖이 긍정적인 작용을 할 것 같다. 그렇지 않아도 일본의 가이후(해부)총리는 정상회담이 시작되기 전에 부시 미대통령과 만나 일본의 독자적인 대중 차관공여재개를 통보했고 부시도 이에 반대치 않음으로써 중국은 외교전략의 성과를 거두기 시작한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중국은 이미 지난달 30일 국무위원 이철영을 일본에 보내 그와 친분이 두터운 가이후 총리가 G­7정상회담에서 중국의 편에 서주도록 강력한 로비활동을 벌였었다. 또 강택민당총서기는 최근 들어 일본의 아키히토(명인)왕이 중국을방문하길 희망한다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이처럼 중국이 서방국가들 가운데서도 특별히 미국과 일본을 겨냥,유화적인 제스처를 쓰고 있는 이유는 두말할 것도 없이 이들 두나라의 풍부한 자본과 첨단기술이 중국경제발전에 불가결한 요소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중국은 주변국가들에 대한 접근도 계속 강화,지난 3일에는 인도네시아와 23년간 단절됐던 국교를 회복키로 합의했고 연말에는 싱가포르와 수교를 하게 될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특히 중국은 아시안게임 개최기간에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ㆍ태평양지역의 중진공업국을 포함,될 수 있는 한 많은 국가의 지도자들이나 고위인사가 참관해 주길 열렬히 바라고 있다는게 전문가들의 일치된 지적이다. 이는 중국이 외교적 고립을 완전히 극복했음을 공인받을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란 것이다. 어쨌든 이번 중국시장 대표단의 방미를 비롯해서 북경당국이 서방자유주의국가에 대해 보여주고 있는 외교적 접근노력은 한중 관계개선을 촉진시키는 큰 파급효과도 아울러 가져올 것으로 어렵잖게 예측할 수 있을 것 같다.
  • 닉슨기념관 “개관 준비 끝”(세계의 사회면)

    ◎출생지 가주에 1만평 규모/전시관 등 꾸며 19일 문열어/생가 복원,집념어린 정치역정 생동감 있게 비디오로 재현도 워터게이트 스캔들의 상처 속에 대통령직을 도중하차한 리처드 닉슨 전 미국대통령의 기념관이 개관을 약 2주 남짓 앞두고 요즘 마지막 손질이 한창이다. 대통령직을 도중 하차한 유일한 제37대 미국대통령인 닉슨. 그는 이 기념관으로 불명예를 씻어보려는 듯 마지막 열정을 쏟고 있다. 닉슨기념관이 세워지는 곳은 그의 출생지인 캘리포니아주 오렌지 카운티의 요바린다시. 닉슨은 1913년 이곳에서 태어나 9살까지 살다가 이웃 위티어로 이사했다. 앞으로 관광명소의 하나가 될 이 닉슨기념관은 10만 한국교포가 모여사는 캘리포니아내 제2의 코리아타운에서 불과 10여분 거리에 위치해 있다. 약 9에이커(1만1천여평)의 대지위에 2천만달러의 비용을 들여 세워지는 닉슨기념관은 그의 생애를 보여주는 기록전시관과 도서관으로 이뤄진다. 특히 그의 성장과정을 엄격한 고증을 거쳐 복원한 생가에서 볼 수 있도록 설계돼 있다. 기념관이 개관되는 오는 19일 요바린다시는 몰려드는 관광객(약 2만5천명으로 추산)으로 일대 혼잡을 이룰 것으로 예상,그 대책수립에 부심하고 있다. 특히 이날 개관기념식에서는 조지 부시 현 대통령을 비롯,제럴드 포드,로널드 레이건,장본인인 닉슨 등 4명의 전ㆍ현직 대통령들이 만나게 돼있어 관심을 모으고 있다. 시 관계자들은 이날의 큰 교통혼잡에 대비,일대의 주요 거리를 차단해 아예 주차장으로 사용하면서 셔틀버스로 관람객들을 수송할 계획을 세워놓고 있다. 고인이 된 닉슨 전 대통령의 부모가 되살아난다면 대통령이 된 아들 어린 리처드를 키우던 바로 그 옛집으로 영낙없이 착각할 만큼 그의 생가가 옛모습 그대로 복원됐다는 게 그의 계수 클라라 닉슨 여사(70)의 말이다. 이 생가에는 닉슨이 태어났던 바로 그 침대와 그의 형제들과 함께 사용했던 침대들,소년시절의 그의 손때가 묻은 피아노ㆍ책상ㆍ등 높은 의자 등이 그대로 진열된다. 그의 방 침대 머리맡에는 그의 어머니가 걸어주었던 「엄마의 기도」라는 시구가 액자에 담겨 결린다. 벽에 새겨진 닉슨의 동상을 보며 들어가도록 설계된 이 기념관에는 그가 5년반동안 대통령 재임시에 받은 약 3만여점의 각종 선물도 전시된다. 그의 젊은 정치가 시절을 보여주는 전시품 가운데서는 그가 미연방 상원의원에 당선돼 워싱턴의 정가로 출정케하는데 기여한 49년도형 포드사의 머큐리 승용차가 눈길을 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 밑에서의 부통령,케네디 대통령과의 대결에서 패배,특히 케네디 대통령과의 네차례에 걸친 정치대토론회의 비디오 테이프가 기념관 내에 설치된 TV세트를 통해 방영되도록 설계돼 있어 그의 집념어린 정치역정을 생동감 있게 재현해 주고 있다. 이 기념관 전시품중의 「하이라이트」는 닉슨이 가장 좋아하는 10인의 세계 정치지도자의 방. 실물크기의 석고상에 그린색 수지가 입혀진 이 「지도자들의 방」에는 윈스턴 처칠,샤를 드골,니키타 흐루시초프,레오니드 브레즈네프 등 내노라 하는 10명의 세계 지도자들이 한 칵테일 파티장에서 담소하는 실물크기의 모습으로 꾸며져 있다. 이 기념관의 끝 출구 근처에서는 닉슨을 백악관에서 물러나게 한 소위 워터게이트사건의 육성이 담긴 테이프가 관람객들에게 직접 당시의 상황을 들려주고 있어 역시 미국다운 일면을 보여준다. 이 밖에도 이 닉슨기념관에는 대통령 재직시의 4천4백만 페이지의 각종 기록들이 전시된다. 집념어린 정치역정 못지 않게 올해 77세의 닉슨은 대통령 도중하차 후에도 8권의 베스트 셀러를 저술하는 저력을 보이면서 「외교전문가」로서 국가에 기여하려 노력하고 있다.
  • 경부고속전철ㆍ새 공항건설 계획 점검

    ◎전국 「반나절생활권 시대」 열린다/시속 3백50km… 직행ㆍ「격역정차」로 운용 경부고속/7조원 투입… 미래 아태항공 중심지로 새 공항 정부가 15일 확정발표한 경부고속전철과 수도권의 새 국제공항 건설계획은 포화상태에 이른 국토종단 기간철도 수송능력과 기하급수적으로 수요가 늘고 있는 국제항공 수송능력을 혁신적으로 개선할 대역사로 평가되고 있다. 경부고속전철은 전국을 반나절 생활권으로 묶으려는 2000년대 전국고속전철망의 첫번째 기간노선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 영종도의 새 국제공항 또한 오는 98년쯤부터 실용화될 대륙간 극초 음속 여객기를 수용하는 아시아ㆍ태평양지역의 중심축 공항으로 부상한다는 점에서 세계적인 시선을 모으고 있다. 이들 두 공사에 투입되는 자금만 해도 약 7조원에 이르러 가히 기록적이다. ▷경부고속전철◁ 좁은 국토의 여건때문에 고속도로의 확충에 어려움을 느낀 데다 기존철도를 개량하는 데도 한계가 있어 새로운 고속전철망의 건설이 불가피해졌다. 지난 83년부터 이같은 방안이 검토되기시작,86년 제6차 5개년계획에 경부선 신설을 위한 조사가 포함됐다. 지난해 7월 고속전철 건설추진위원회가 구성되면서 사업계획이 구체화되기 시작했고 10월에는 국제심포지엄을 가졌으며 지난 4월에는 개략적인 계획이 마련됐다. 15일 최종확정된 건설계획에 따르면 서울에서 천안 대전 대구 경주를 거쳐 부산에 이르는 4백9km의 S자형 노선으로 매일 52만8천명을 수송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열차의 운행속도는 최고시속 3백50km로 서울에서 부산까지 직행편은 1시간30분이 걸린다. 4개 중간역가운데 대전과 경주,또는 천안과 대구만을 거치는 경우 1시간41분으로 잡고 있다. 운행간격은 개통초기에는 12∼10분,수요에 따라서는 4분까지 단축운행이 가능하다. 당초에는 보다 직선적인 대구∼삼랑진∼부산 노선도 검토됐으나 국내최대의 역사ㆍ문화유적지인 경주와 울산ㆍ포항 등 공업지역의 교통편의를 제고시켜야 한다는 점이 고려돼 경주쪽 노선을 택했다. 그것도 울산쪽으로 조금더 도는 방안이 검토됐으나 산악지등 지형조건이 맞지않아 경주에서울산 이웃을 지나 부산에 이르는 선에서 낙착됐다. 또 중부지방에선 청주를 거치는 방안도 제시됐으나 노선이 지나치게 곡선화된다는 점에서 오히려 공주쪽을 지나게 됐다. 대신 천안과 청주사이의 기존철도를 전철화해 경부고속전철에 연결시킴으로써 사실상 이 고속전철망에 포함된 것이나 다름없게 했다. 경부고속전철은 앞으로 계속 건설될 호남고속전철 동서고속전철 동해고속전철 경전고속전철망과 연계돼 2000년대 초까지 전국을 일자형 고속전철망으로 연결하게 된다. 전국 고속전철망이 완성되면 모든 국민은 반나절 생활권안에 살게되며 고속전철로 중요도시에 간뒤 기존 철로나 육로를 이용해 이웃도시로 가는 교통체계가 형성될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같은 이점 말고도 경부고속전철은 다가오는 통일시대에는 만주나 시베리아를 거쳐 유럽대륙까지 잇는 유러시아대륙간 고속전철망의 중요한 한 부분이 될 것 또한 틀림없는 사실이다. 이 때문에 고속전철 선진국이라 할 수 있는 프랑스와 일본ㆍ서독 등은 서로 자기네 방식으로 이 선이 건설되기를 바라고 수주활동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정부는 프랑스의 TGV와 일본의 신간선,서독의 ICE 등에 오는 9월까지 공사 및 기술이전 조건등을 명시한 제의서를 제출하도록 통보,우리에게 가장 유리한 방식을 연내에 채택할 방침이다. 신간선은 세계에서 가장 안락한 고속열차라는 장점을 지니고 있으나 운행속도가 3백km이하인 데다 건설비와 차량가격이 매우 비싼 단점을 갖고 있다. ICE도 앞선 기술을 자랑하나 실용화에 따른 문제점 및 엄청난 소요경비가 단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영종도국제공항◁ 영종도와 용유도사이를 매립하는 등으로 모두 1천7백만평의 부지를 확보하게 되나 우선 1차공사는 3백80만평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1차공사만 준공돼도 연간 16만대가 운항하는 김포공항의 1.5배가 넘는 연간 24만대의 여객기가 운항하고 여객 4천만명및 화물 3억3천만t을 처리할 수 있게 된다. 새 공항은 음속의 5∼25배에 이를 극초음속항공기까지 넉넉히 수용,뉴욕이나 로스앤젤레스까지 20∼30분만에 날아가는 2000년대 꿈의 여행시대에 대비한다. 유럽이나 미주대륙쪽에서 한시간 정도에 온 극초음속여객기에서 내린 손님을 재래식 여객기로 북경이나 도쿄 방콕 홍콩 등지로 보내는 아시아의 교통중심축 공항(HUB)역을 자임할 계획이다. 세계에 4∼6개쯤 등장할 중심축 공항을 계획하고 있는 아시아 국가는 일본 중국 싱가포르 등으로 꼽히고 있으나 지정학적으로 우리쪽이 가장 유리하다는 것이 일반적 견해이기 때문에 우리가 다른 나라에 비해 한발 앞서 구체적인 건설에 나선 것이다. 그러나 영종도는 서울에서 52km나 떨어졌다는 단점도 지니고 있다. 김포공항이 20km이고 프랑스의 샤르르드골공항이 파리에서 25km,영국의 히드루는 런던에서 24km,미국의 케네디는 뉴욕에서 24km인데 비하면 꽤 먼 거리인 것이다. 영종도는 이처럼 거리가 조금 멀기는 하지만 김포공항보다 휴전선에서 8km나 남쪽에 자리잡고 있는 작은섬이어서 항공기의 안전운항과 소음피해를 줄일 수 있는 등의 이점이 있어 새 공항예정지로 선택됐다.
  • 「21세기의 세계」 미ㆍ소 두 석학 강연 요지

    20세기의 마지막 10년을 앞두고 세계는 동구와 소련의 변혁으로 새로운 전기를 맞고 있다. 과연 동구의 격변은 앞으로의 국제질서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이같은 문제를 점검해 보기 위한 강연회가 「21세기의 세계」라는 주제로 1일 하오 서울 프레스센터 국제회의장에서 열렸다. 이날 강연회에는 최근 「강대국의 흥망」이라는 저서에서 미국의 몰락을 예언,세계적인 논란을 불러 일으켰던 미 예일대의 역사학자인 폴 케네디교수와 소련의 저명한 역사학자이자 개혁파 정치인이기도 한 유리 아파나셰프 모스크바 국립 역사자료대학총장이 강연했다. 다음은 이들 두학자의 강연요지이다.(편집자주) ◎미래사회 3요소는 「민주ㆍ도덕ㆍ생산성」/통신혁명으로 「북한 폐쇄」 지탱 힘들어/폴 케네디교수 우리들은 혁명적인 변화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그동안 역사를 통해 볼때 단일사건이 엄청난 변화와 불안을 야기시킨 경우가 많이 있다. 동구와 다른 곳에서 일어난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런 맥락에서 그 배경을 살펴봐야 한다.우리들은 헝가리에서 다당제가 실시되고 차우셰스쿠 전 루마니아 독재자가 처형되고 베를린장벽이 붕괴된 단일사건에 대해 알고있지만 이러한 것이 있게된 장기적인 요인은 무엇인지에 대해 얘기하겠다. 먼저 경제적인 요인을 들수 있겠다. 이것은 마르크스경제와 서구의 자유시장 경제사이에 경제성장 및 생활수준 등에서 격차가 더욱 커졌다는 사실을 보여줬다. 80년대의 세계는 놀랄만한 경제성장을 했지만 선진국과 후진국의 격차는 심해졌다.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사회주의(마르크스) 국가들은 쇠퇴했으며 그밖의 지역은 성장을 기록했다. 마르크스주의는 아이로니컬하게도 과학적 사회주의가 노동자 시민들에게 높은 생활수준을 약속했지만 이것이 실패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통신의 혁명도 간과할 수 없는 요인이다. 70∼80년대는 마르크스국가에서 많은 사람들이 스탈린시대와 비교해서 많이 해외로 여행을 하게 되었다. 학생 기업인 등은 세계의 여러나라를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소련인들은 영국의 BBC와 미국의 소리방송 등을 통해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지난 80년대초 동독정부는 일부 관료를 드레스덴으로 이주시키려고 했지만 이들의 반대에 봉착하였는데 이는 이 지역에서는 서독 미국의 TV방송을 시청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동독 폴란드인들은 서방의 방송을 통해 자국이 후퇴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으며 서구에서 누리고 있는 부를 그들이 누리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고르바초프의 개혁정책은 성공을 거둘것인지 아니면 인종분규 보수파의 반발 등으로 실패,동구에 악영향을 미칠것인지 주목되고 있지만 어떤 사태가 일어나더라도 마르크스사회는 결코 89년이전의 상황으로 돌아갈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런 변화는 세계적인 현상이며 성공한 사회와 실패한 사회가 공존하고 있다는 것과 통신의 혁명등 2가지 기본요소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이 요소는 상호작용을 하고 있으며 변화가 평화적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등은 평화적이었지만 중국은 지난해 천안문 사건에서 보듯 개혁운동을 물리적으로 탄압했다. 그러나 물리적인 탄압은 변화의 속도를 늦출뿐 개혁과 자유를 바라는 국민들의 욕구를 말살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변화물결을 초래한 통신혁명은 북한에도 영향을 미쳐 김일성체제는 오래갈 수 없게 될 것이다. 현대 사회는 다음과 같은 도전을 받고 잇다. 첫째,놀랄만큼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는 기술발전 둘째,산업의 자동화로 인한 직업의 안정문제 셋째,생명공학의 발달에 따른 농민들의 생존위협 넷째,전세계적인 기온상승 다섯째,선후진국간의 인구변동 등이다. 이런 도전들은 상호 상충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오늘날은 통신기술이 발달되고 로봇과 산업자동화의 발달로 많은 국민의 실직사태를 초래할 수도 있다. 이같은 문제에 무관심한 정부는 경제적 문제뿐 아니라 정치적ㆍ이념적으로 큰 도전을 받게 된다. 그 예는 동구와 중남미사태에서 잘 보아왔다. 마지막으로 21세기초 성공적인 사회가 되자면 효과적인 제조업 생산기반을 갖춰야 한다. 민주주의만으로는 성공적인 사회를 충분히 갖출 수 없다. 자립할 수 있고 생활수준을 높일 수 있는 상품생산기반이 반드시 수반되어야 하는 것이다. 일부에서는 제조업 능력이 부족해도 의료업 호텔업등 서비스업으로 이를 커버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나는 이같은 견해에 반대한다. 결론적으로 미래의 성공적인 사회는 건전한 도덕적 윤리적 기반과 함께 굳건한 산업생산기반을 갖춰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89년의 동구사태는 도덕적인 면과 경제적인 면 모두에서 파산됐을 때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가를 세계 여러 나라에 보여준 좋은 경종이었다. 동시에 물질적 풍요와 도덕적 기반이 잘 갖추어진 사회는 미래에 대한 걱정이 없다는 교훈도 주고 있는 것이다. ◎사회주의 유토피아건설 완전 포기/소련의 동ㆍ서양결합의 중계자역할 기대/유리 아파나셰프 공산권국가에 대한 세계의 이목집중은 이제 우연한 일이 아니다. 체르노빌원전 사고,원자력잠수함화재 및 핵무기ㆍ화학무기 등은 결코 한 국가만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소련의 질낮은 생활수준ㆍ국경선폐쇄ㆍ소련공화국들의 탈소움직임도 그 대상이 되고 있음은 물론이다. 이러한 변화는 현존 세력균형 질서를 붕괴시키고 새로운 세계질서를 탄생시킬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현재 소련과 동유럽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으며 이 변화가 세계의 미래에 어떤 영향을 줄것인지 얘기하고 싶다. 변화는 상호연관이 있다고 하지만 현재 이들 국가에서 발생하고 있는 각종 변혁들은 시작과 종결을 동시에 의미한다. 지금까지의 인류역사상 가장 거대하고 지속적인 대규모의 사회실험이 끝나고 있다. 마르크스ㆍ레닌이즘이 종결됨과 동시에 현대판 거대 러시아제국이 종말을 맞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양적 공업화에 대한 종결인지도 모른다. 결국 이같은 현상들은 전후 2개의 진영으로 갈라놓은 얄타체제의 붕괴를 의미한다. 최근 소련의 각계에서는 소련사회를 어떤 방향으로 건설할 것인가에 대해 수많은 논의를 해왔다. 사회주의ㆍ비사회주의ㆍ반사회주의ㆍ스탈린주의등 뿐아니라 정의를 내리기 어려운 수많은 단어들이 난무하고 있는 것도 우리의 고민을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여하튼 이런 논란들은 의식적으로 계획된 행위의 결과다. 소련의 현체제는 볼셰비즘 혁명 이후 72년간 지속된 사회주의,정통 마르크시즘의 부산물이다.물론 이 사회주의 실험이 수많은 희생자를 내지 않았거나 외국에 피해를 주지도 않았더라면 긍정적으로 볼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사회주의 유토피아 건설을 완전히 포기했다. 소련 사회조직의 기본요소는 경제적으로는 국유생산,시장경제폐지,상품경제 청산,중앙집중화된 계획경제,사유재산 몰수였다. 사회적으로는 정부권력이 인간생활의 모든 영역에 간섭을 해 국민들에게 무력감을 심화시켰다. 즉 생산에 대한 관심보다 소비ㆍ분배문제에 우선을 두었다. 그리고 사회계층도 노멘클라투라(특권층)와 「분배를 받을 권한이 있는 사람」으로 양분됐다. 소련사회의 국유화는 칼 마르크스의 견해와는 달리 사유재산제도의 「극복」이 아니라 「폐지」에 문제가 있다. 또한 권력과 정보에 대한 당의 독점,노동의 결과에 대한 당의 독점,다당제부재,허울좋은 헌법제도,형식적인 선거제도 등도 소련사회가 안고 있는 고민거리다. 인간화ㆍ민주화를 부정하는 이같은 제반 요소들은 정통마르크시즘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인위적ㆍ작위적 사회주의의 결과요 부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사회주의의 이상실현은 최근 10년간 크게 왜곡돼 그릇된 방향으로 치닫게 됐다. 소련의 양적 경제발전은 한계점에 이르러 뒤로 후퇴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같은 위기상황은 자연환경파괴도 마찬가지다. 지난 85년 고르바초프 등장이후 추진되고 있는 페레스트로이카(개혁)도 소련사회의 난치병을 치유하지 못하고 부정적인 측면을 가속화시키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페레스트로이카가 전혀 불필요하다는 것은 아니다. 현재 소련의 모든 불행과 재난에는 페레스트로이카에도 상당한 책임이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소련국내에서는 요즘 페레스트로이카에 대한 찬ㆍ반 논의가 분분한데 1천9백만명의 소련 공산당원중 9백만명가량이 고르바초프의 개혁정책에 반대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같은 사실로 미뤄 소련사회의 개혁은 급진적ㆍ과격한 방법으로 추진되지 않으면 안된다. 고르바초프는 집권초기에는 개혁방향을 제대로 잡았으나 최근엔 이를 번복,대외정책 뿐아니라 「인간적 가치」에 대한 생각도 많이 바뀐 느낌이다. 특히 현재 경제ㆍ문화ㆍ윤리 등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잇는 소련에서 가장 난제는 민족문제 만큼 중요한 것도 없다. 따라서 현재 소련사회에서 표출되고 있는 제반현상들이 21세기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예측하기는 어렵다. 다만 사학자로서 소련이 어떤 방향으로 가서는 안된다고는 말할 수 있겠다. 즉 21세기에는 제국주의 국가로서 소련이 차지할 자리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양의 동서에 정신적ㆍ문화적 바탕을 공유하고 있는 소련은 향후 동서양을 결합시키는 좋은 중계자 역할은 할 것으로 본다.
  • 외언내언

    고르바초프 페레스토로이카의 배경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필요」와 「이익」이다. 팽배한 관료주의의 지배아래 창의력과 성취력을 잃은 그 상태로 둔다면 소련은 21세기를 향해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할수 없을뿐더러 끝내는 2류 공업국으로 전락하고 말리라는 절대절명의 위기감의 소산이라 해도 좋다. ◆일반적으로 소련인은 정치는 「힘」이라는 신념을 갖고 있다. 국내정치도 국가관계도 최종적으로는 힘에 의해 결판난다는 신념이다. 이데올로기나 체제의 역할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소련인은 그런 것도 주먹 앞에서는 결국은 부차적인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러시아인은 힘이 없는 동지보다도 강력한 적을 내심으로는 훨씬 존경하는 쪽이다. 과거 쿠바 사건에서의 소련의 굴욕은 미국의 압도적인 군사력과 강한 결의 앞에 무릎을 꿇었던 사건이다. 그때까지는 케네디대통령을 연약한 풋나기 정도로 얕보고 있었던 소련인도 이사건 뒤에는 그를 아주 존경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쿠바의 굴욕은 소련의 군비확장의 큰 동기가 되었다. 그 소련이 지금 왜 군축에 앞장 서는가. 그들의 짐이 너무 무겁기 때문이다. ◆쿠바사건의 소련측 당사자는 흐루시초프였다. 따지고 보면 오늘의 동서화해나 군축추세 또는 페레스토로이카의 연원을 거슬러 찾자면 흐루시초프에 이를지 모른다. 그가 은퇴한 뒤 써낸 회고록에서는 6ㆍ25 한국전쟁의 배후에 소련이 있음을 명확히 했다. 『김일성이 모스크바를 두차례나 찾아와 스탈린에게 남침계획을 보고했고 미군의 개입이 없을 것이라는 다짐을 받은 스탈린이 마침내 동의했다』 ◆최근들어 6ㆍ25에 관해서는 「남침」이었다는 전통주의가 북침설 또는 남침유도설 따위 수정주의에 의해 도전받고 있다. 그러나 역사는 「실재의 과거」이다. 사실은 수정되지 않는다. 드디어 소련은 6ㆍ25기간중 7만명의 공군병력을 동원,북한을 지원했고 지상군을 투입시킬 계획을 세웠었다고 참전을 시인했다. 그것도 관영 모스크바 방송이다. 지금은 아주 가까워진 소련이다. 그러나 역사는 남고 현재는 흐르는 것이다.
  • 마약퇴치에 남ㆍ북미 “공동전선”/미ㆍ페루등 4국 정상회담의 의미

    ◎조직 분쇄ㆍ수송로 차단 협력 합의/“남미3국 경제 부축”… 부시의 노력이 변수 미국 콜롬비아 페루 볼리비아 4개국 대통령이 15일(현지시각)콜롬비아의 휴양도시 카르타헤나에서 정상회담을 갖고 마약퇴치를 위한 국제적인 협력방안을 논의했다. 사상 최초의 「마약퇴치정상회담」이 열린 콜롬비아는 지난해 8월 대통령후보로서 마약공급 밀매조직의 강력한 단속을 주장하던 루이스 카를로스 갈란상원의원 피살이후 마약소탕작전을 계속하고 있는 나라여서 4개국의 마약퇴치의지가 한층 돋보이고 있다. 이번 정상회담에서 4개국 정상들은 마약조직의 분쇄 마약밀매 루트의 차단 등 마약퇴치노력을 한층 강화키 위해 국제적인 협력을 해 나가기로 합의했다. 미국은 이미 70년대 초 마약이 커다란 사회문제로 떠오르자 마약전쟁을 선포한 바 있으며 80년대 들어 코카인의 일종인 크랙이 크게 번지면서 본격적인 마약퇴치에 나서고 있다. 미국은 국내 마약문제가 공급루트 차단 등의 선행조치없이는 다스리기 어렵다고 판단,지난해 세계 최대의 코카인생산국인 콜롬비아에서 마약전쟁이 나자 대규모 지원을 콜롬비아정부에 약속했었다. 또 22억달러의 자금으로 마약퇴치 5개년계획을 세워 추진중인 미국은 지난 1월 중순에는 공급루트차단을 위해 항모 케네디호를 증파,콜롬비아의 해안선봉쇄를 기도했었으나 콜롬비아 국민들의 거센 항의에 부딪혀 계획자체를 보류한 바 있다. 이번 회담에서 미국은 마약밀매범 소탕과 밀매루트차단을 지원하기 위해 해안감시 레이더망 구축을 제안했는데 이는 직접 군사력을 사용하기보다는 레이더망을 통해 수집한 정보를 콜롬비아에 제공,마약퇴치에 실효를 거두겠다는 포석으로 보인다. 현재 콜롬비아 페루 볼리비아는 마약봉쇄 전면전에 나선 미국에 대한 협력의 대가로 코카재배 대체를 위한 경제적 지원을 요구하고 있다. 이들 세 나라는 페루가 60만t,볼리비아가 12만t의 코카원료를 생산,콜롬비아에서의 정제과정을 거쳐 미국코카인수요의 80% 이상을 공급하고 있다. 연간 마약관련 수입은 볼리비아가 6억달러,페루ㆍ콜롬비아는 30억달러를 웃돌고 있다. 따라서 코카재배와 코카인 밀매가 봉쇄되려면 대부분 빈농인 페루의 20만,볼리비아의 30만명의 코카재배농가가 이러한 수익에 필적할 대체 작물을 재배할 수 있어야 하며 미국의 경제지원이 요청되는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특히 콜롬비아는 지난해 마약전쟁 이후 미국으로부터 콜롬비아산 수입품에 대한 관세인하,군사장비 및 경제원조제공을 약속받았으나 군사장비 지원외에는 약속이행이 미미한 실정이어서 자국산 꽃ㆍ커피등 대미수출품 관세인하와 경제원조를 강력하게 요청하고 있다. 코카인을 비롯한 마약의 심각성이 인식된지는 이미 오래지만 이번 정상회담은 지난해 6월 파리에서 이뤄진 미ㆍ일ㆍ불ㆍ영등 G7정상의 마약자금추적 협력과 함께 마약퇴치를 위한 국제적 협력에 새기록를 남기게 됐다. 전문가들은 국제적 규모로 성장한 마약조직을 소탕하기 위해서는 관련당사국의 부분적인 「희생」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고 있으며 콜롬비아가 이번에 미군 레이더망의 구축에 동의함으로써 「주권침해」보다는 마약퇴치를 위한 국제적 협력을 우선시킨 것은 마약문제의 심각성을 다시한번 일깨워준 것이다. 다만 파나마침공 동구개혁등으로 인해 파나마와 동구등지에 막대한 원조자금을 풀어야 하는 미국의 형편과 대체작물로의 전환,경제활성화의 가능성이 높지 않은 이들 남미3개국의 사정을 고려할 때 카르타헤나정상회담에서 천명된 마약퇴치의지가 실효를 거두기까지에는 상당한 어려움이 따를 것으로 보인다.
  • 외언내언

    『인종 차별은 우리나라 인적 자원의 고도한 개발과 이용을 방해하면서 경제성장의 장해로 되고 있다. 그것은 우리 나라의 세계적 지도력을 약화시킨다. 그것은 이 나라를 위대하게 했던 계급 없는 사회로서의 분위기를 망친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부정이다….』 ◆공민권법을 제정함으로써 흑인의 지위를 현저하게 향상시킨 미국 케네디 대통령이 외쳤었던 말. 케네디대통령의 가장 큰 업적은 흑인에 대한 차별대우를 철폐한 영단이라 말하여 진다. 그것은 링컨대통령 이후 그때까지의 역대 대통령이 손을 대지 않았던 대목. 미국뿐 아니라 지구상의 흑인들은 그래서 그를 「제2의 링컨」으로서 지금도 추모한다. ◆그같은 지구촌의 흐름과는 달리 법으로 인종차별을 규정하고 있는 유일한 나라가 남아프리카공화국. 인종 차별 철폐를 규정한 유엔 헌장을 무색케 한다. 그때문에 이 나라에서의 인종 차별 분규는 끊이지 않는다. 시원을 따지자면 보어 전쟁에 승리한 영국의 식민지 통치가 물린 유산. 그러니 1백년 가까운 응어리가 엉켜 있다. 더도 말고 지난해 9월의 총선거만 해도 그렇다. 전인구의 75% 흑인유권자를 배제한 채 치르면서 그에 반발하는 시위ㆍ파업에 무자비한 탄압을 가함으로써 세계의 규탄을 받지 않았던가. ◆그 선거에서 대통령으로 당선된 데 클레르크는 임기 5년안에 「백인의 지배」를 종식시키겠다면서 정치ㆍ사회ㆍ경제의 개혁을 추진하고 있다. 그는 취임식에서 「유색인에게도 참정권」을 주는 새 헌법제정을 약속하기도. 그러나 여기에는 당연히 보수 백인세력의 반발이 따른다. 하지만 세계의 여론이 그의 편. 눈가림 아닌 실질적 결과를 보여 줄 수 있어야 겠다. ◆27년 동안이나 옥에 갇혀 있던 「흑인 인권」의 상징 넬슨 만델라가 석방되었다. 데 클레르크대통령과 나란히 서있는 석방직전의 사진이 시대의 흐름을 말해 준다고 할까. 사진의 의미와 같이 흑백 갈등 해소의 전기로 삼을 수 있을지 주목거리다.
  • 지구촌 재앙… 3백명 사망/태풍 유럽 강타… 뉴욕선 보잉기 추락

    ◎대만선 구정 당일 대 화재… 26명 숨져 【런던ㆍ뉴욕ㆍ도쿄ㆍ자카르타ㆍ수비크 미해군기지 AP AFP 로이터 연합】 구정을 전후한 사흘간 유럽을 휩쓴 폭풍과 지구촌 곳곳에서 발생한 각종 항공기와 선박ㆍ화재사고로 3백여명의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영국 경찰은 폭우를 동반한 최고시속 1백95㎞나 되는 태풍이 25일 영국을 비롯한 북유럽을 강타,최소한 74명이 사망했다고 밝혔다. 경찰은 이번 태풍이 영국 기상대가 생긴이래 가장 큰 피해를 냈던 지난 87년 10월 태풍보다 인명피해는 더 커 영국에서만 39명이 사망했고 네덜란드에서 17명,벨기에에서 9명,프랑스 북부지방과 서독에서 각각 6명,3명이 숨졌다고 전했다. 뉴욕에서는 승객과 승무원 1백60여명을 태우고 콜롬비아의 수도 보고타를 출발,뉴욕의 케네디공항으로 향하던 콜롬비아 아비앙카 항공사소속 보잉 707기 여객기가 26일 상오 뉴욕 동부의 코브 넥에 추락,최소한 73명이 사망하고 수십명이 부상했다고 현지 의사들이 말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승객과 승무원 19명을 태운 민간 전세여객기 HS­748기가 25일 악천후에 휘말려 휴양지인 발리섬 인근 해상에서 실종됐다고 현지 언론들이 26일 보도했다. 이날 또 목재를 싣고 말레이시아 사라와크를 출발,일본으로 향하던 파나마 국적화물선이 남중국해상에서 침몰,6명의 중국인 선원들이 익사하고 14명이 미전함 레이크 채플린호에 의해 구조됐다. 또 인도네시아 자바지역에 최근 20년래 최악의 홍수가 나 사망자수가 1백33명선에 육박하고 있다. 한편 구정 당일 대만에서는 극장과 슈퍼마켓 등이 들어있는 대북 남쪽 타오유안시 소재 7층빌딩에서 발생한 화재로 26명이 사망했다고 타오유안 경찰당국이 28일 밝혔다.
  • 콜롬비아 마약밀매 봉쇄/미,항모2척 급파

    【보고타(콜롬비아) AP UPI 연합】 미국은 마약거래를 봉쇄하기 위해 존 F 케네디호를 포함한 항모 2척을 콜롬비아 인근수역에 파견키로 결정했으며 이와 때를 같이하여 콜롬비아에서는 대통령 보좌관과 시장을 비롯,6명이 6일 살해됐다고 현지 경찰이 밝혔다. 미 국방부 관계자들은 이에 앞서 같은 날 항모 케네디호와 순양함 버지니아호가 대서양에서 정기훈련 항해에 들어갔다고 밝히면서 이 훈련후 콜롬비아 연안에서 콜롬비아와 합동으로 밀반출 마약단속 작전을 벌이기로 했다고 밝혔다. 콜롬비아 언론들도 2척의 미 군함이 마약밀매 루트를 봉쇄하기 위해 콜롬비아 인근수역의 공해상에서 공중 및 해상 봉쇄망을 구축할 계획이라고 보도하고 「미 함정들 카리브해로 접근중」 등의 제목을 단 기사들로 1면에 대서특필했다.
  • 전두환 전 대통령 국회증언 속기록

    ◎“강경진압ㆍ과격시위가 광주사태 도화선”/합수부 설치 보안사령관 취임 직후 계획/정 총장,「김재규 관련조서」 4차례 고쳐/광주특위 ▷6ㆍ29선언◁ 어느 시대,어느 정치사회를 막론하고 이면사는 있기 마련이지만 그때 그때 속속들이 알려지는 사례는 거의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6ㆍ29선언은 그것이 담고 있는 내용이 그동안 어떻게 실현되었으며 또 지금 어떻게 추진되어 정치발전과 국가이익에 기여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하지,그 경위나 배경을 새삼스럽게 들추어내는 일은 결코 바람직스러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정치이면의 얘기들은 현실정치에 민감한 영향을 주지 않게 될 것이라는 확신이 서는 훗날 회고록 등을 통하여 국민 여러분에게 소상히 밝힐 것을 약속하는 것으로 국민 여러분의 양해를 간곡히 당부드리는 바입니다. ▷간첩조작사건등◁ 선두에서도 말씀드렸지만 한 나라의 대통령은 무한책임을 지게 마련입니다. 실무진에 의해 이뤄진 일인 경우 대통령에게 보고될 수도 안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전임대통령으로서 답변할 수있는 부분을 총괄적으로 얘기한 것입니다. 간첩조작사건 등은 실무진들이 조작했는지 않았는지 제가 답변할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또 물리적으로 답변준비시간이 짧아서 거기에 대한 자료를 구할 수가 없으므로 답변하지 못한 점을 양해바랍니다. ▷10ㆍ26에서 12ㆍ12까지◁ 1979년 국내 정국은 유신체제에 대한 국민적 저항과 반발로 정치ㆍ사회적으로 매우 어수선하고 경제도 여러가지 난관에 봉착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어난 박 대통령시해사건으로 18년간이나 지속되어온 절대권력이 일시에 무너져 국가가 큰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정치적 공백상태와 행정체제의 마비는 국민들의 충격과 정치ㆍ사회적 혼란을 가중시켰습니다. 더구나 대통령시해사건이 권력의 핵심적 위치에 있었던 중앙정보부장에 의해 지절러졌다는 점에서 상황은 매우 복잡하고 심각한 양상을 띠게 되었습니다 사건 직후 정부는 비상국무회의를 소집하여 10월27일 04시를 기해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 일원에 비상계엄을 선포하였으며,예상되는 북한의 군사적 책동에 대비하여 전군이 비상경계태세에 돌입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비상계엄선포와 동시에 계엄지역내에서의 수사업무를 일원화하고 그 효율성을 높이기 위하여 구 계엄법 제11조와 비상계엄업무의 구체적인 시행지침인 「육군계엄시행계획」과 계엄공고 제5호에 따라 계엄사령관 직속하에 「계엄사 합동수사본부」를 설치 운용하게 되었습니다. ▷합수부설치 배경◁ 본인은 1979년 3월 국군 보안사령관이 된 뒤 을지연습을 실시해본 결과 전쟁 발발시의 보안사령부의 역할 및 임무수행과 관련,여러가지 미비점이 발견되어 보완책의 강구를 각급 참모에게 지시한 바 있습니다. 다시 말해 전시 전국계엄상황하에서는 정부의 모든 조직이 실제상 군의 통제하에 들어오게 되는 바,이러한 상황을 가정하여 각급 정보수사기관을 조정 통제해야 할 비상계획수립이 필요하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비상계획의 일부로서 합수부안이 평소에 마련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10ㆍ26사건 직후 실시된 계엄은 지역계엄이었으므로 정부조직은 군의 통제하에 있지는 않았으나 당시 중앙정보부장이 대통령 시해범으로 체포되고 주요 간부들도 조사를 받게 되어 중앙정보부의 기능은 거의 마비된 상태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본인이 보안사령관 취임 직후 준비했던 합수부계획이 비상계엄선포와 함께 계엄사령관을 경유하여 국방장관에 의해 결정된 것입니다. 합동수사본부는 기존의 수사기관과 전혀 별개의 새로운 기구로 구성한 것이 아니고,당시에 군과 검찰 그리고 경찰로 나누어져 있던 수사업무를 조정 통제하여 계엄하에서 수사기능과 활동의 효율적인 운영을 기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와 비슷한 전례는 과거에도 있었습니다. 1962 당시 김재춘방첩부대장이 합동수사본부장으로 임명되어 공화당 사전조직 및 4대 의혹사건 등 중요한 사건들을 조사한 바 있습니다. ▷김재규 체포 경위◁ 대통령시해사건 발생 직후 국방부에 국무위원 및 군수뇌들이 모인 자리에서 당시 청와대비서실장이며 사건현장을 목격한 김계원씨가 먼저 노재현국방장관과 정승화참모총장에게 김재규가 범인이라는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노 국방장관은 곧 저를불러서 김재규를 체포하라는 지시를 하며 정승화총장을 만나 세부사항에 대한 지침을 받으라고 지시를 했습니다. 정 총장실에 가보니 정승화총장은 본인에게 『김재규를 보안사 안가에 보호하라』는 지시를 했습니다. 나는 당시 헌병감 김진기장군과 협의하여 김 장군으로 하여금 김재규를 국방장관실로부터 참모총장실로 유인해 나오도록 하여 그곳에서 보안사수사관을 시켜 김재규를 체포토록 하여 보안사 안가로 이송,보호 조치케 했습니다. 그때가 바로 10월26일 24시경이었습니다. 얼마 후 안가의 수사관들로부터 김재규가 틀림없는 범인이라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안가에 보호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고 김재규를 보안사 수사분실로 이송하여 수사하라고 지시했습니다. 그때가 27일 새벽 02시30분경이었습니다. 그 당시 김재규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몇가지 중요한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김재규의 진술에 의하면 『정승화는 내가 육군참모총장을 시킨 사람이다. 당시 국방장관은 3군사령관을 참모총장으로 밀고 있었으나 내가 1군사령관인 정 장군을박 대통령께 강력히 추천해서 총장이 되었다. 그래서 그는 내가 지시하는 대로 하게 되어 있다』고 말하고 김재규 자신의 지시에 따라 정승화총장을 범행장소에서 36m 떨어져 있는 궁정동 안가에 대기시켰다는 것입니다. 김재규의 계획은 박 대통령을 암살하고 비상계엄을 선포케 한 다음 군사혁명으로 유도해 정 총장을 비롯해 군고위층을 조종하여 정권을 탈취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김재규의 진술에 의거하여 수사관들은 정승화총장이 김재규의 공범 내지 방조범 아니면 배후의 인물이라는 심증을 굳히고 10월27일 11시께 본인에게 정 총장을 연행 수사해야겠다는 건의를 해왔습니다. 만일 이 시기를 놓치면 증거를 인멸시켜 버릴 우려가 있고,수사 진행을 방해하도록 상황을 만들어 버릴 염려마저 있다는 주장이었습니다. 사실 수사관들로서는 정승화에 대해 많은 의혹을 가지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수사통제ㆍ조정 필요◁ 어째서 하필이면 육군참모총장이 할일없이 김재규가 대통령을 시해하는 현장 근처에 두시간 가량이나 머물러 있었느냐는 것이고,근접한 위치에서 수십발의 총성이 들려왔는데도 대통령이 근처에 있는 줄 알면서 당장 진상을 알아보려고 안한 것은 30여년 군에 복무하여 군의 최고직위까지 오른 사람의 습성으로 보아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는 것이고 피묻은 셔츠바람에 맨발로 달려온 김재규를 목격했으면서도 경위도 알아보기도 전에 같은 자동차를 탔다는 것,김재규는 여섯발을 장전한 권총으로 다섯발을 쏘고 한발이 남은 권총을 허리춤에 꽂고 있었으니 김재규의 몸에서 화약냄새가 났을 것임에도 알아보려고도 하지 않았고,차 안에서 김재규가 수행원의 상의와 구두를 빌려 입고 신고하는 동작이 있었는데도 그냥 넘겨버렸고,육군본부에 도착하고서도 별다른 조치없이 김재규가 하자는 대로 군 이동을 한 것 등으로 하여 그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는 수사관들의 의견이었고 당시 저 자신의 의견이기도 합니다. 본인은 처음엔 수사관들의 건의에 구두승인을 내렸다가 나라의 전반적 정세에 생각이 미쳐 그 승인을 일단 보류하기로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당분간은 계엄령의 질서하에 국내 치안확립이 시급한 일이었고,북한 남침의 위협에 대처하는 것이 급선무인데,계엄사령관에 임명된 지 일곱시간밖에 안된 정 총장을 연행하는 사태가 생기면 혼란을 더욱 격화시키게 될지 모른다는 판단이었습니다. 도피의 우려도 희박하고 증거인멸을 한다 해도 그 범위는 뻔할 것이니 정세가 안정된 후에 수사를 전개해도 무방하리라는 생각도 있어 그대로 수사관을 타일렀던 것입니다. 그런데 외신보도와 국내언론을 통해 시해사건에 정 총장이 관련되지 않았는가 하는 설이 나돌게 되자 정 총장은 자신이 스스로 조사를 받겠다고 간청했습니다. 그 자청에 따라 10월29일부터 11월1일까지 4일간 합수부 조사관들이 육군참모총장실에 출두하여 매일 두시간 정도 정 총장을 참고인으로 조사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수산관들은 계엄사령관으로서의 직위를 이용하여 위압감을 조성함으로써 순리적인 조사가 불가능하게 되었다고 보고한 바가 있습니다. 그런데다 정 총장은 수사관들이 작성한 조서내용이 사실과 다르다 하여 전후 4차례에 걸쳐 수정시키기도 했습니다.심지어 그는 조서를 총장실로 가져오라고 해서 자신이 조서내용을 직접 고치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정승화총장의 10ㆍ26시해사건관련 의혹이 짙어만 갔습니다. 많은 억측이 유언비어가 되어 항간에 범람했습니다. ▷10ㆍ26,쿠데타로 판단◁ 이런 상황에서 저는 수사의 총책임자로서 중대한 결심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합수본부장으로서 대통령시해사건이야말로 중대한 사건인 만큼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수사에 성역이 없다는 신념하에 정확한 전모를 신명을 걸고 밝혀야 한다는 강한 사명감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때 남은 작업은 정 총장의 혐의를 조사하여 그 의혹을 말끔히 없애는 일이었습니다. 만일 이에 대한 흑백이 가려지지 않는다면 군에 대한 국민의 신뢰는 물론 군 자체의 기강이 흔들리는 동시 마침내는 군이 분열될 수도 있다는 우려까지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11월께 본인은 모든 상황을 노 국방장관에게 보고하고 정승화총장의 연행조사를 건의하였더니 「좀 더 두고보자」고 했고 그후 최 대통령에게 건의드렸더니 『국방장관과 상의하라』고 말씀하셔 본인으로서는 더욱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정 총장은 당시 육군참모총장이며 계엄사령관으로 막강한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군내부에 강력한 지지세력을 구축해 놓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그를 조사한다는 것은 달걀로 바위를 치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무모한 노릇이었습니다. 목숨을 걸어도 가능성이 희박한 일이었으며 그야말로 구국적인 소신없이는 불가능했던 일입니다. 평상시 본인은 미국의 케네디대통령 암살사건이 영원한 미궁에 빠져버린 것을 미국의 수치라고 생각해왔습니다. 본인이 운명적으로 시해사건수사의 최고책임자가 되었을 때에 저 개인의 신상에 어떤 일이 닥치더라도 기필코 이 사건의 전모를 국민 앞에 밝히고 말겠다고 굳게 다짐하였던 것입니다. 본인은 김재규의 수사과정에서의 진술이 미국이 개입되었다는 통설,군부의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육군참모총장이 범행현장 근처에 있었다는 사실 등을 취합해서 쿠데타가 아니면 쿠데타에 준하는 사건이라고 당시로서는 판단할수밖에는 없었습니다. 정 총장 자신의 말대로 오비이락격으로 그가 시해 현장 근처에 있었던 것이라면 그건 그분의 불운이라면 불운일 것입니다. 불운이라 해서 수사의 객관성과 냉정성을 포기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중요한 용의자를 제외하고 수사를 마무리지었다간 의혹은 의혹대로 영원히 남을 것이며 그 결과는 결국 수사책임자의 직무태만이란 원성으로 될 것이 확실합니다. 그러나 본인은 직무태만이란 비난이 겁나서가 아니라 정 총장에 대한 완벽한 조사가 국민의 의혹을 해소시키는 동시,정 총장 개인의 명예를 위해서도 필요불가결한 조치라는 것을 확신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뜻에서 본인은 정 총장을 수사할 적기를 포착하기 위해 정국의 추이를 주시하는 한편 군부내의 여론을 수집하였습니다. 11월 중순경부터 중진 장성들과 접촉을 계속하였는데 그 가운데 정 총장과 개인적으로 친밀한 장군도 끼여있었습니다. 당시 황영시 1군단장,차규헌수도군단장,유학성국방부군수차관보,노태우9사단장 등을 한분한분 찾아 의견을 물었습니다. 그런데그분들은 하나같이 10ㆍ26사태의 진상을 밝히기 위해선 어떤 고위층도 예외일 수 없으며 빨리 흑백을 가릴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육군 최고책임자의 관련혐의는 군의 단결과 신뢰회복을 위해서는 하루속히 결판을 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인은 본인의 신념과 군전체의 총화가 일치된 것으로 느끼고,12월 초순 대통령선거가 끝나고 내각이 새로 발족한 후 김재규재판과의 관련으로 보아 정 총장에 대한 수사를 연기할 수가 없다고 판단하여 12월12일 임무를 결행하기로 했던 것입니다. 12월12일로 날짜를 잡은 것은 그날이 토요일이어서 휴일 동안 수사를 하고 조용히 마무리지을 작정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날 본인은 총리공관으로 최규하대통령을 찾아뵙고 정승화총장을 연행하여 조사하겠다고 보고를 드린 바 있습니다. 그 이유는 혐의만으로도 정총장이 계엄사령관과 참모총장직에 부당하다는 것을 설명드리고 정 총장을 조사한 결과 그가 계엄사령관 및 참모총장직에서 물러나게 될 경우,그 공백을 대통령께서 처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때 시해사건에 대한 수사권은 대통령의 사전결재를 받지 않아도 되는 합수부장의 포괄적인 고유권한이었습니다. 그날 저녁 본인은 합수부 수사요원을 총장공관으로 보내 정 총장에게 수사에 협조하도록 전한 후 모셔오도록 지시했습니다. 그런데 정 총장이 이를 거부함으로써 강제연행을 하게 되었고 정 총장이 총장공관을 경비하고 있던 헌병에게 발포명령을 내림으로써 수사요원이 희생되고 총격전이 벌어지는 불상사가 야기되었던 것입니다. 한편 본인은 그날 밤 18시30분 경복궁에 있는 30단으로 평소 정 총장과 가까운 관계인 군의 중진 장성들과 그밖의 몇몇 장성들을 초청해 놓고 있었습니다. 정 총장이 시해사건과 고의이건 아니건 관련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니 군내부의 분위기를 쇄신하는 뜻으로 군 지휘계통에서 물러나는 용단을 내리도록 허심탄회하게 건의토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수사결과 예편 정도로 사건을 마무리지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30단에 모인 장성들이 총장공관에까지 따라가서 조용히 예편하도록 권유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렇게 신중을 기한 것은 정 총장이 일단 예편하기로 결심하였다가 혹시 울컥하는 감정으로 군을 동원하여 보안사를 공격하고 수사요원을 체포하여 하극상 사건으로 몰아 오히려 죄를 뒤집어씌우려들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러한 사전조치를 취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장소를 보안사가 아닌 30단으로 정한 것은 본인이 정 총장의 감시하에 있다는 정보보고에 따라 보안 유지를 위해 저의 사무실이 아닌 바로 인접한 30단의 단장실을 택한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 예상했던 대로 연행과 관련된 무력충돌 직후 전군에 비상이 발령되면서 수도권의 병력을 장악하고 있던 정 총장 측근의 수경사령관과 특전사령관 등이 탱크를 포함한 중무장부대를 동원하여 청와대 지역을 포위하려는 움직임을 보였습니다. 합수부는 수사기관으로서 전투병력이 없는 상태이고 부대간에 충돌이 발생하면 국가적으로 심각한 위기에 봉착될 것이므로 주요부대 지휘관들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자제를 당부하는 등 충돌을 피하도록 적극 설득했습니다. 그런데도 정 총장측근에서 계속 위협을 가해왔기 때문에 안보상 필요한 조치를 취한 가운데 제한된 규모의 예비병력을 동원하여 사태를 수습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불가피한 상황이었지만 이것은 긴급대응의 조치로서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사회일각에서 또는 미국측에서 이 사태를 계획적인 거사가 아니었느냐 하는 의견이 있었습니다만 이것은 당시 상황에 대한 시각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사태는 돌발적이었습니다. 당시 30단에 모였던 장성들이 병력을 출동시킬 계획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사태를 수습하는 데 시간이 걸린 것입니다. 또한 본인에게 대한 전보발령설이 이 사건과 관련이 있지 않는가 하는 의문도 있는 모양이지만,본인은 그 당시에는 일체 그와 같은 일은 들안 바가 없습니다. 본인은 명예를 걸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12ㆍ12사태는 시해사건의 수사도중에 발생한 우발적인 사건이었을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사전에 준비된 병력출동 계획도 없는 쿠데타가 어디 있겠으며 만약 쿠데타였다면 왜 본인이 그 직후 바로 권력을장악하지 않았겠습니까? 본인은 그 당시로서는 정치에 뜻을 두지 않았습니다. 저는 과거 고 박대통령으로부터 정치입문 권유를 몇차례 받은 바 있었으나 굳이 사양하고 군인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12ㆍ12사태는 당시 시해사건에 대한 최고 수사책임자인 본인이 주도한 것이며 따라서 그로 인해 야기된 사건의 모든 책임은 전적으로 본인에게 있는 것입니다. ▷광주사태 발생◁ 광주사태는 10ㆍ26 이후 지속된 극심한 사회혼란의 연장선상에서 발생한 지극히 불행한 사태였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사태발생 당시 정보의 총체적 책임자로서 초기 단계에는 쌍방간에 경미한 충돌이 있었으며 상황이 점차 악화되어 계엄사령부에서 무력진압을 계획중이라는 정보보고를 들은 바 있었으나 이처럼 엄청난 비극으로 확대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읍니다. ▷광주참극 상상 못해◁ 당시 광주 일대는 중앙정보부 보안사 경찰 등의 정보기관들이 모두 시외곽으로 철수하고 있는 상황이었으므로 정보책임자였던 본인도 필요한 정보를 충분히 갖지 못하였고 현지 주둔부대인 광주계엄분소에서 계엄사에 보내는 보고를 통해 파악할 수밖에 없었던 극히 혼미한 상황이었습니다. 이러한 정보부재의 상황을 보완하기 위해 보안사에서는 서울에 있던 광주출신의 한 장교가 자진해서 현지에 잠입,단편적 정보를 계엄사를 통해 보내오기도 하고 또 당시 보안사의 간부를 현지로 실정 파악을 위해 파견하기도 하였으나 여러가지로 정확한 상황판단에는 미흡한 점이 많았습니다. 이처럼 제한된 정보에 기초하여 본인은 무력진압에는 신중을 기하는 것이 좋겠으며,시민을 상대로 한 사태수습을 군 작전개념으로 한다는 것은 현명하지 않다는 정보책임자로서의 의견을 계엄사의 지휘관들에게 전달한 바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커다란 인명피해를 낸 이 비극적 사태의 원인에 대하여 본인은 무어라 한두마디로 단정지어 말씀드리기는 매우 어려운 문제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당시 계엄하에서 광주사태 이전에 서울 등지에서도 각종의 시위가 있었으나 평온을 되찾은 반면 유독 광주에서만 그러한 비극이 발생했던 이유는 정확한 분석이 어렵다고 생각합니다.다만 본인은 당시의 정보책임자로서 이 사태가 초동 진압단계에 있어서의 계엄군의 강경진압과 일부 출처를 알 수 없는 악의에 찬 유언비어에 자극받은 일부 시민들의 과격시위가 그 직접적인 원인이 된 것이 아닌가 하는 판단을 하고 있습니다. ▷군부대 파견ㆍ작전◁ 당시 광주사태와 관련된 계엄업무는 전국적인 계엄업무의 일환으로서 계엄사령관이 주재하는 계엄관계관 일일회의에서 보고되고 논의되어 추진된 것으로 알고 있으며 중앙정보부장서리인 본인은 그 회의에는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그 어떤 군지휘계통상의 간섭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은 본인은 군의 배치이동 등 작전문제에 대해 관여한 사실이 없으며 당시의 계엄사령관 이희성장군은 그분의 강직한 개인적 성품으로 보아도 지휘선상에 있지 않은 본인이 군작전에 개입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당시에 본인이 파악한 바로는 공수부대는 5ㆍ18계엄확대조치의 일환으로서 광주뿐만 아니라 서울 대전 전주 지역에도 파견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즉 전북 익산군 금마면에주둔하고 있던 제7공수여단병력을 광주 전주 대전에 각각 3백여명 규모의 일개 대대씩 파견하였고 서울지역 8개 대학에도 6개 여단병력 9천6백여명을 배치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계엄군의 증강은 광주지역에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며 광주지역에 특별한 상황을 예상하여 투입된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왜 현지 지휘관의 요청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부대를 파견 배속했느냐 하는 의문에 대해서는 기본적으로 군지휘의 이해부족에서 제기된 의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또한 당시 지휘체제가 이원화되지 않았나 하는 의문이 제기된 것으로 압니다만 이 또한 일반적 군의 상식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어떠한 부대라 하더라도 일단 타부대에 작전 배속이되면 그 배속을 받은 지휘관은 즉각적으로 그 부대를 장악해서 지휘할 책임이 있으며 그 이후의 모든 작전상 승패에 대해서도 책임을 져야 하는 것입니다. 비록 당시의 현지 지휘관이 군 경력상 특수부대에 대한 지휘경험이 전무하여 원활한 작전수행에는 차질이 있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점에는 이해가 갑니다만 배속된 부대가 현지 지휘관의 지휘통제에 불응했다는 주장은 군문에서 오랜 세월을 보낸 본인으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자위권행사문제◁ 자위권의 행사문제는 초기에는 군인 복무규율에 따라 불가피한 상황하에서 행사된 것으로 판단이 되며 현지상황이 더욱 악화됨에 따라 5월22일 자위권 발동도 가능하다는 계엄사령부의 작전지침이 지휘계통을 통해 하달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자위권의 발동은 최악의 상황에서만 현지 지휘관의 사태판단에 따라 제한적으로 발동할 수 있는 것이며 당시 위급한 상황에 처한 현지 지휘관들이 자위권 행사의 불가피성을 강조했으나 상급사령부나 계엄사령부 등의 군 고위층에서는 신중론이 우세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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